인생을 낭비한 죄(2)

2012. 1. 5. 12:25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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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을 낭비한 죄(2)

제3부 세상 모두가 스승이다


■ 탐진치가 참 나더라  - 법전 스님


사문은 무심을 얻은 사람이다.

출가 사문을 두고 한 말 가운데, 나는 이 표현이 가장 마음에 든다.

그토록 우리가 버리기 어려운 사랑과 미움으로 인한 분별, 무엇이 옳다 그르다. 좋다 나쁘다. 귀하다 천하다. 잘났다 못났다. 잘한다 못한다는 이 모든 이분법적 분별을 여의고 무심에 도달한 사람이 곧 사문이라는 뜻 같기 때이다.

해인사 퇴설당에 계시는 법전 스님을 뵈면, 분별을 여읜 무심의 실체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열세 살까지 속가에 있으면서 천자문에서부터 사서삼경, 통감을 읽으며 서당에서 공부하다가, 열네 살 때, 단명하리라는 팔자를 면하려고 절에 들어오셔서는, 거의 강산이 일곱 번 쯤 바뀐 뒤, 조계종 최고의 어른인 종정에 오르신 수행자. 고초당초보다 매운 행자시절을 마치고 열일곱 살에 사미계를 받고 스물네 살에 당대의 선지식인 성철 스님을 법사로 모시고 평생을 참선수행으로 일관하신 선승이시다.

스승인 성철 선사를 만나던 첫날. ‘아, 이분은 확실히 도를 깨치신 분이구나’라는 믿음과 함께 전적으로 의지해 버렸고,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부처가 되는 가장 수승한 길이라는 가르침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받아들여 실천한 우직한 수행자.


스님께서 서른두 살에 대승사 묘적암에서 공부하신 이야기를 들어 보면, 목숨을 내놓고 공부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무엇인지, 공부에 집착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하게 한다.

‘이렇게 공부하고도 마음에 변화가 오지 않으면 내발로 걸어 나오지 않고 죽으리라’ 결심했다는 스님은, 공부에 진척이 없는 것은 죽음 보다 더한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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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으로 느껴져 여러 번을 통곡하셨다고 한다.

스님은 묘적암에서 공부하신 다음 파계사 성전암에 머물던 스승 곁에서 공부를 점검 받은 뒤, 삼십대 중반에 태백산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십 년, 그리고 김천 수도암에 머물며 선원을 짓고 후학들과 정진하면서 십오 년을 보내고 육십이 넘어 스승 곁인 해인사로 돌아오셨다.

스님을 만나 뵈면 전설 같은 이야기를 무수히 남겨 놓고 열반하신 스승 성철 스님의 이야기가 나오게 마련이다. 퇴설당으로 스님을 찾아뵌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백련암 노장이 워낙 별나셨거든요. 일반인들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을 많이 해요. 수좌들이 찾아오면 공부 안 하고 쓸데없이 돌아다닌다고 어떤 때는 장삼을 벗겨 태우기도 하고, 몽둥이로 사정없이 패기도 하셨어요. 옆에 오면 긴장이 되어서 두렵기도 하고 해서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노장님은 화가 나면 정독도 깨고, 온 집안을 수라장을 만드셔서 늘 집안이 시끄러웠어요.”

스님께선 1950년대 초,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스승과 단 둘이 지내시던 일을 추억하시면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장독대를 다 부숴버리면 장이 없어 어떻게 해요?”

“곁에 있는 사람들이 수발하려면 힘들 때가 많아요.”

그렇게 괴팍한 스승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스승을 시봉하시는 동안 꾸중을 들은 기억이 별로 없다고 한다.


“스님 저는 잠이 안 오다가도 좌선만 하면 졸음이 오는데, 왜 그렇습니까?”

“화두를 열심히 챙겨서 잠이 스스로 물러가도록 해야지 억지로 잠을 안 자

려고 하면 그건 병이에요. 못써요. 사람마다 소질이 각기 다릅니다. ‘한산시’

에 보면 ‘쥐를 잡는 데는 가장 빠르다는 천리마보다 다리를 저는 고양이가

더 낫다’라는 말이 있어요. 참선 한다고 다 견성 하는 것이 아니고, 소질이

천성적으로 있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서 스님께서는 공부하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해주셨다.

“화두일념이 되는 사람은 스물네 시간 잡념이 없어요. 잡념이 없게 되면 차 

원이 달라져버려요. 낮에 활동을 할 때에도, 꿈에서도, 잠을 자면서도 화두가

되어야 해요. 젊어서 화두를 할 때 보면 낮에 화두를 열심히 하면 꿈에서도

화두를 해요. 어느 날은 자고 나서 그 이튿날 깨보면 화두를 하고 있는 거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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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우린 성격이 굉장히 단순하고 순박했어요. 잡생각을 모르고 일을 꾀하

는 것은 전연 몰라요. 누가 무엇을 하라고 하면 그것만 하는 사람이지요. 스

물네 시간 활동할 때 화두가 안 떠나고 꿈에도 똑같이 화두를 하고 잠이 푹

들었을 때 화두가 안 되면 영겁 생사를 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성

철 노장께서 말씀하신 삼분단(三分段) 법문입니다. 누구든 공부를 하려면 거

기에 목표를 두고 해야 해요. ‘경계가 났다. 무엇이 보인다’ 하는 것은 다 쓸

데없는 소리죠.”

목숨을 내건 정진이 있고 나서 스승이 권했던 ‘증도가’나 ‘신심명’, ‘육조단

경’ 등 조사어록을 비로소 마음으로 읽었다는 스님께선 조사들의 삶을 이해

하고 존경하면서 바라보고 계신 것 같았다.


삶에서 누구를 좋아하고 따르느냐가 그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을 가르지 않

나 싶다. 그릇이 크고 사람을 소중하게 다룬 중국 조사들을 좋아하신다는 스

님을 뵈면, 사람은 결국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닮는 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결국, 끌린다는 것, 좋아한다는 것은 유사한 기질, 같은 업을 가지고 있

기 때문일 것이다. 종정으로 계시던 스승이 열반한 지 십여 년 후에 종정 자

리에 오르신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젊어서 공부할 때 내 심정은 이런 방장이나 종정 같은 것은 할 생각이 없

었어요. 초야에 묻혀 농사나 짓고 조용히 사는 것이었지요. 종단에서 밥을

많이 얻어먹었으니 이 자리에 있는 것이지, 나한테는 맞지 않아요.“

그래서인지 스님에게 권위의식 같은 것은 정말이지 한 점도 찾아볼 수 없

다. ‘무위자연(無位自然)’ 그대로의 모습이다. 자신이 옛 도인들의 말씀을 신

이 나서 하셨던 것처럼, 훗날 공부 열심히 하는 후학들에 의해서 ‘가야산의

눈 밝은 선지식으로 회자되어질 수행자! 눈을 떠보니, 탐진치 삼독이 바로

‘참나’더라고. 탐진치를 가지고 있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자신의 분신이더라

고 하셨던 수행자! ‘진정한 종교혁명은 어떤 형식이나 제도에 있는 것이 아

니고 선지식 하나가 참말로 자신과 같은 눈 밝은 사람 하나 만들어내는 것’

이라고 하셨던 종정스님!              

돌아오는 길에 다시 본 홍류동 청매화 한 그루가 한층 더 푸른 빛, 매운 향

기를 뿜어내는 듯했다.


■ 자, 내 놓아 보라  - 혜춘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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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 스님에게 제일 많이 맞은 분이 종정이신 법전 스님과 혜춘 스님이었

다.     

당시 법전 스님은 성철 스님을 시봉하고 있었고, 혜춘 스님은 삼십 대에 자

식 넷을 두고 출가한 분으로 당시 막 출가해서 정진을 하고 있던 때였다.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도지사 부인으로 대접만 받고 살던 그분이 예기치

않게 남편을 잃은 후, 인생의 무상을 느끼고 성철 스님께 화두를 받고 공부

하다가 출가 하겠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성철 스님은 허락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도 출가를 고집하자 성철 스님은 백장청규를 실현하면서 결사를 하고

있던 비구니 도량의 수장인 인홍 스님에게 “도량엔 받아들이되 선방에는 들

여 놓지 마시오”라고 일렀다고 한다. 혜춘 스님은 속인인 상태로 마산 성주

사 법당 뒤 한데에서 거적을 깔아 놓고 여름 한 철을 지내면서 정진했다. 세

속에서의 화려했던 생활을 완전히 끊고 하심하고 인욕할 수 있도록 공부를

시킨 것이다.               

*백장청규 : 육조 혜능 이후 기라성 같은 스님들이 배출되던 무렵에 활동하던 백장 스님이 선불교에서 지켜야 할 실천적이고 개혁적인 규칙.

예를 들면 一日不作  一日不食 등, 당시만 해도 모든 승려들은 무소유와 탁발에 의지하고 있던 때여서 일을 해서 먹을 것을 구하는 일을 파격적인 개혁이었음


“혜춘 스님을 많이  내리치셨던 것은 자식을 떼어 놓고 왔으면서 매서운 정진을 하지 않는다는 무언의 경책이셨죠. 한 번은 혜춘 스님을 마당에서 내리치는데 손가락이 터져서 피는 철철 나고, 정말이지 겁이 나더라고요. 어린 소견에 누군가 말리지 않나 싶었는데 ………. 그게 말리고 할 일이 아니잖습니까?”

현각 스님은 20세 때 본 일을 담담하게 얘기 했다.

“분한 마음을 내서 공부하라고 경책하신 거지요. 혜춘 스님은 공부하려고 무진 애를 쓰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그분만큼 열심히 정진하신 분도 드물어요. 돌아가셨는데 자식들 인연으로 들어온 영결식장의 화환이 절 마당이 다 찰 정도였어요. 시댁에 두고 온 자식들이 훌륭하게 성장해서 사회 각층에서 활동하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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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전 어느 산중에서 만난 선객 스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화두요? 안 하면 죽게 생겼으니까 하는 거지요. 우리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 생각이 복이다  - 인홍 스님


흔히 해인사에 주석하셨던 성철 큰스님을 ‘가야산 호랑이’라고 부른다. 선방에서 졸고 앉아 있거나 지대방에 등이라도 기대고 있는 수좌들이 눈에 띄면 ‘이놈들아 밥값 내놓아라’ 하시며 몽둥이 찜질을 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고전이 된 유명한 일화다.

비구니스님 중에 기상과 기질이 성철 큰스님과 흡사한 한 분이 있다. 성철 스님과 비슷한 연배이고 울산 석남사에 주석하다 열반하신 인홍 스님이 그분이다. 평소 성철 스님을 존경하며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실천 수행했던  그분은 생전에 ‘가지산 호랑이’라고 불렸다.

규칙에 어긋나는 일이 조금이라도 눈에 띄면 몽둥이를 들고 뛰어 나왔기 때문에, 멀리서 그런 인홍 스님을 보게 되면 대중들이 이리 저리 숨느라 난리가 났다고 한다.


비구니계의 대모로 불렸던 인홍 스님은 비구니의 존재와 위상이 미미했던 시대에 비구니승가의 출가정진을 회복시키는 데 앞장섰던 분이다. 지금으로부터 반세기 전, 울산 석남사 주지로 취임하면서 선원을 열어 대중과 함께 수행정진하면서 퇴락한 가람을 일으켜 세우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던 비구니계의 걸출한 지도자였다. 스님 생전의 사십여 년 동안 석남사 회상을 거쳐 간 운수납자가 이천여 명이 넘었고 삼백여 명이 넘는 은(恩)제자를 길러냈다고 하는데, 저렇듯 후학들을 엄격하게 가르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훌륭한 지도자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함께 가는 사람을 위해 철저히 헌신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준 분이었다.

도혜 스님에게 “스님은 인홍 노스님께 혼난 적 없으세요?” 하고 여쭈었다. 그랬더니 “왜 혼이 안 났겠어요” 한다.

“그렇게 착실히 사셨는데도 혼이 나셨어요?”

“이마도 노스님께 멱살을 안 잡힌 대중은 없었을 거예요.”

도혜 스님이 열여섯 살 때 새벽 예불이 끝나고 선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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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졸았는데 노스님이 화장실에서 나오시다가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당장 밖으로 끌어내시더니 나가라는 것이었다.

“노스님께서 나가라고 하시는 것은 산문 밖으로 쫓겨나는 것을 의미하죠. 그런데 나가라고 한다고 나갈 수는 없잖습니까? 해서 뜰 앞에 서 있었더니 다시 멱살을 잡고 나가라고 밀어내시더군요. 행자가 감히 공부하다가 책상에 얼굴을 대고 잠을 잔다는 것은 당시 석남사 규칙상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석남사 다리까지 쫓겨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후 일주인 동안 먹는 것 잠자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참회하며 보내야 했다.


“그렇게 엄했던 노스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 가운데 기억나는 것이 있으세요?”

“‘생각이 복이다’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죠. 생각을 늘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쪽으로 하라고 하셨어요. 그런 생각을 해야 복이 된다는 거죠. 자신에게 닥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말씀이셨는데, 제가 살아보니 노스님 말씀이 참 맞는 말씀이셨어요. 뭔가 잘되는 사람들은 생각이 밝고 긍정적이에요. 밝은 생각으로 스스로 복을 짓는 거죠. 그런데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가르쳐줘도 복 짓는 생각을 못해요.”

가지산 호랑이가 포효했던 조계종 유일의 비구니 종립선원 석남사에 가보면 도량이 티 하나 없이 깨끗하다. 강원을 두지 않고 선원만 있는 석남사에서 스님들을 뵈면, 그 반듯한 위의와 고요한 모습에 그만 옷깃을 여미게 된다. 가지산 호랑이를 곁에서 평생 모셨다는 일흔 일곱의 선원장 스님의 모습은 그대로 관세음보살이다.              

          

■ 큰 스승 만나기를 서원하라  - 백졸 스님


부산의 한 사범학교에 다니던 열일곱 소녀 하나가 어머니를 따라서 몸이 편찮아 병원에 다니러 온 성철 큰스님을 만나 뵈었다. 소녀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도인 스님에게 묻는다.

“스님 산에 가면 조용하지요?”

“산에 가면? 안 조용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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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소리 바람소리, 시끄럽다.”

이것저것 물어대는 소녀를 바라보면서 스님은 등가의 원리에 에너지와 질량의 관계를 대입시켜 불교를 설명해 주었다. 질량은 유의 세계이며 에너지는 무의 세계인데, 이것이 같아질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소녀는, ‘마음이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다 현실이 될 수 있겠구나! 참 멋있겠구나!’하고 감탄했다.

“스님?”

“와 또 부르노?”

“그래서 공부가 다 되면 어떤데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궁금한 것을 죄다 묻는 소녀를 바라보면서 도인이 대답한다.

“니 그게 궁금하노? 그건 말이다. 눈을 감고 자도 백 촉짜리 전등 켜놓은 것처럼 환하다.”    

그리고 소녀에게 평생 지울 수 없는 말씀 하나를 던진다.

“얘야, 참 좋은 것이 있단다. 한 길만 가면 말이다.”

집으로 돌아온 소녀는 책을 펴고 앉아 있어도 광채로 환하던 눈빛 그리고 그 말씀이 자꾸 생각났다.

“얘야 참 좋은 게 있다. 한 길만 가면. 한 길만 가면.”

호기심으로 가득했던 열일곱 소녀가 일흔 살의 노승이 되어 그때를 이렇게 추억한다.

“입도 크시고 윤곽이 분명하니까 참 좋은 게 있다고 하실 때 너무 실감이 났어요. 참 좋은 것이 있다고 하시는데. 스님이 그렇게 좋다는 데가 어딘고? 자꾸만 그것이 내 마음에 뭉클대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 참 환하다는 말씀도 너무 좋았어요.”


사범학교에 다니는 동안 성철 스님이 계신 곳을 찾아가 공부하는 법을 물으면서‘화두를 풀면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겠다’는 결론을 내린 소녀는 졸업을 하자마자 집을 나온다. 공부를 더 해서 의사가 되고도 싶었고, 교육자의 길을 걷고도 싶었고, 또 시인이 되고도 싶었던 유복한 집안의 꿈 많은 소녀는 ‘이 길이 정말 행복하고 싶은 사람에겐 적격이다’ 싶어서, 집에다가는 ‘한 일주일 산사에 가서 공부를 좀 하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을 나섰다.

그리곤 마음이 잘 맞는 동무 한 사람과 함께 “우리 본격적으로 공부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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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자!” 하고는 해인사 근처 청량사로 들어갔다.

“화두를 놓치면 살아 있으면서도 송장과 같다.”

도인 스님이 일러주신 이 말씀 하나 품고 머리를 기른 채 산사로 들어간 것이다.

이 절 저 절 공부하러 다닌 지 삼 년이 지나자 비로소 출가를 결심했다. 미적분을 푸는 것보다 단순하게 보였던, 그래서 금방 풀릴 것 같았던 화두는 삼 년이 되어서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고, 사람들은 이제 그만 삭발하고 은사를 정하라고 성화를 했다.

여자라는 행색조차 벗어나고 싶어서 남자 와이셔츠를 줄여 입고 머리를 커트한 채 삼 년의 시간을 보내면서 눕지도 자지도 않고 그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자리. 참 좋은 자리, 죽어도 살아 있는 자리, 그 한길을 가고자 삭발을 하고 어느새 반 백 년의 세월이 흘러 일흔 살의 노스님이 된 백졸 스님이다.


“공부하실 때 성철 큰스님께 그렇게들 혼이 나셨다면서요?”

“파계사 성전암에 계실 때와 그 이전 시절엔 우리에게 밥도 한 번 안 주셨어요. 시자들이 우리들에게 밥을 주면 밥상이 날아갔죠. 철조망을 쳐놓고 우리에게 기왓장을 던지면서 내쫓으셨어요. 그때 나는 ‘참, 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쫓아내고 나는 왜 이렇게 쫓겨다니며 설움을 당해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말씀을 하면서 스님은 눈시울을 붉혔다.

“분한 마음에 더 공부가 되었겠네요?”

“바로 그거예요. 돌아가면 더 분심을 내서 공부를 했죠. 다음에 갈 때는 당당하게 스님께 공부한 것을 말씀드리도록 해야지 하고는 삼 개월 동안 죽기 살기로 공부하는 겁니다. 그랬는데, 세월이 흘러 큰스님께서 해인사로 오셨어요. 그때부터는 밥을 주시는 거예요.”

이불을 떠날 리(離) 자, 부처 불(佛) 자. 그러니까 우리가 밤새 따뜻하게 덮고 자는 이불을 ‘부처를 떠나는 자리’라고 생각하고 평생 사신 스님께 “그럼 스님은 이불 없이 사셨겠네요?” 하고 여쭈었더니 웃으면서 대답하셨다.

“추우면 덮고 여름에 모기 오면 덮는 아이들 포대기 같은 이불이 하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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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화두 하나에만 힘을 쏟았는데도 공부가 모자라 삼매에 드는 정도가 일 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노스님의 마지막 말씀이 채찍이 되어 남아 있다. 

“사람들이 ‘스님은 고민 없지요?’ 그럽니다. 그러면 내가 ‘제일 고민 많습니다. 너무 많습니다.’ 그래요. 수행자가 공부를 성취하지 못한 것  말고 더 큰 고민이 어디 있겠어요?” 

출가하고 오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어쩌면 그렇게 한결같이 간절하고 힘있게, 확신을 가지고 수행에 임할 수 있는지, 백졸 스님을 뵙고 돌아오면서 다음과 같은 시 한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나이를 더해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 자신을 수희찬탄 하라  - 혜윤 스님


* 수희(隨喜) - 남의 좋은 일을 보고 자신의 일처럼 기쁘게 생각함

* 찬탄(讚嘆 ) - 칭찬하고 감탄함


인도의 어느 들판에서였다. 함께 걷던 비구니스님께서 그러셨다.

“어렸을 때 노스님들께서 이런 말씀을 자주 하셨어요. ‘하늘을 덮을 만한 복이 있어야 출가 수행자의 길을 가는 것이란다’라고 말이죠. 처음엔 힘들어하는 우리들을 위로해주려고 그러시나 보다 하고 대수롭지 않게 들었는데, 세월이 가면서 그 말씀이 참으로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부처님께서 걸으셨던 이 길들을 오늘 내가 이렇게 걸을 수 있다는 것, 부처님께서 앉으셨던 자리에서 예불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하늘을 덮을 만한 복이라. 들판을 달려가는 가을바람처럼, 신선하게 들렸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인도순례에서 처음 만난 혜윤 스님은 늘 말씀이 없으셨다. 작은 몸집에 수수한 옷차림, 언제나 고무신 속의 발은 맨발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함께 온 속가의 여동생분과 함께 다니셨다. 달리는 차 안에서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는 옆모습을 보면서, ‘참, 단아하시구나’ 생각했다. 예순둘의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깨끗하고 순수한 소녀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문경의 한 작은 절에서 오셨다는 것.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동진출가를 하셨다는 것. 이번 인도순례가 세 번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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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신을 수희찬탄하라!’

나에게도 그 말씀은 아주 인상적으로 들렸다. 자신을 수희찬탄할 때 자기긍정도, 감사도, 믿음도 생기는 것일 텐데. 자신을 긍정하고 믿는 것만큼 자신감을 주는 것은 없겠다 싶다. 자신에 대한 긍정과 믿음이 넘칠 때 성불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큰 희망은 자신을 믿는 것이다’라고 했던 어느 한 서양 철학자의 말도 그런 뜻이 아닐까.

“달라이 라마 스님께서 인도 남부의 한 티베트사원 낙성식에 오셔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대요. ‘시설을 화려하게 하고 절을 크게 짓는 것이 불법을 흥하게 하는 것이 아니다. 수행을 잘하고 진실하게 중생교화를 하는 것이 불법을 잘 전하는 것이다’라고 말이지요. 나는 이 말씀을 티베트의 한 노스님께 들었는데, 내게는 무엇보다 그 말씀이 가슴에 깊이 와 닿았어요.  우리나라 스님들께도 이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스님께서는 인도에서 정진하는 동안 달라이 라마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고 한다. 예의 그 온화한 미소와 이제는 연세가 드셔서 구부정한 자세로 법문을 하시는 자비로운 모습에서 환희심을 느꼈다. 우연히. 달라이 라마 스님의 운전기사를 오 년 동안 하신 분이 스님의 여행버스 운전을 했는데. 그분에게 ‘달라이 라마 스님은 항상 차 안에서도 기도, 진언, 염불을 멈추지 않았으며, 항상 조금 드시고 한없이 겸손하셨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 한다. 또 법문을 하기 전 항상 삼십 분에서 한 시간 전에 도착해서 법문을 준비하고, 보시금을 전액 공개하고 학교 운영 등 나라 살림에 쓴다는 이야기며, 달라이 라마 스님 개인에게 공양을 하면  시자들이 받아 기록해 놓는데, 달라이 라마 스님은 아무리 바빠도 그 기록을 빠뜨리지 않고 보고는 밖에서 들어오면 그들을 위해 반드시 기도했다고 한다.


“자기 자신에게 수희찬탄하라!”

스님의 행자시절을 정리하고 나서 제목을 이렇게 뽑았다. 반백년을 출가 수행자로 살아오신 스님께 들은 이야기 가운데 가장 감동 깊게 다가왔던 법문이었고, 현재 자신의 삶을 수희찬탄하고 계신 자세가 참으로 아름다워 보였기 때문이다.

간절히 기원한다. 인생의 순경계에서뿐만 아니라 어떠한 역경계에서도 자신을 수희찬탄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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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불을 포기하게 한 스승  - 대천 스님


출가한 뒤 거의 이십여 년 동안 스승이신 청화 큰스님 곁을 떠나지 못했다는 대천 스님의 말씀을 빌면, 큰스님께선 너무 완벽하셔서 상좌분들께 절망(?)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대천 스님은 은사이신 청화 큰스님의 말씀을 곧 부처님 말씀으로 여기고 따랐는데, 모시고 살면서 때로는 인간적으로 가까워지고 싶어서 그런 눈치라도 보이면 찬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한 번은 한 상좌가 스승의 옷을 빨아서 잘 손질해놓았더니 다시 물속에 넣어버리셨다는 것이다. 기력이 있을 때까지 손수 청소하고 빨래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던 큰스님이셨으니, 아무리 가까운 상좌라도 당신이 정한 원칙에서 벗어나는 일은 용납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디를 다니시거나 생활 중에 항상 선정에 들어 계신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뭐 인간적인 게 있고, 따뜻할 게 있겠어요.”


스승을 바라보면서 인간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알았고, 왜 극락세계를 십만의 국토 밖에 있다고 설정해놓았는지는 알았다는 대천 스님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나도 공부해서 은사스님처럼 신도분들께 법문도 하고 존경도 받으며 여법하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그런 마음이 어느 때 무너졌어요. 모시고 살면서 흐트러진 스님의 모습을 한 번도 볼 수 없었습니다. 사람이 일주일이나 한 달 정도는 고고하게 살 수 있지만 그렇게 일평생 한결같은 모습을 보면서 도저히 스승처럼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한때 마음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은사스님을 보면서 이번 생에 성불을 포기했죠.”

스승을 통해 ‘아하, 우리도 성불할 수 있구나’를 느꼈지만, 한편으론 일평생 언제 어디서나 언행이 한결같은 스승을 보면서 성불을 포기하고 말았다는 대천 스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람은 언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달라진다고 한다. 이십 대 초반에 출가를 결정하고 여기저기 문을 두드리다가 태안사에 계신 큰스님을 뵙는 순간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는 대천 스님이다.

큰 스승 곁에 머물면서 영원한 생명의 고향을 향해 매진하셨을 대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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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스승을 이십여 년간 시봉하셨기 때문인지 언제 뵈어도  겸손하고 순수한 모습이다. 스승이 해 놓으신 그대로 광륜사를 지키기 위해 못 하나 박는 것도 조심스러워 했다고 들었다.     

광륜사를 떠나면서 ‘이제, 큰스님 말씀 그대로 하루 일종식하면서 제대로 정진해보고 싶다’고 하셨다는 대천 스님, 큰 공부를 이루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런 저런 말씀을 듣다가 스님께 여쭈어 보았다.

“출가의 길은 어떤 것입니까?”

“더 공부해야죠. 저는 아직 얘기해줄 입장은 아니고 들을 입장입니다. 처음 출가 했을 때는 ‘누구나 부처고 다 성불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도를 깨치는 게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하는데 실제로 하다 보면 너무나 어려운 길이죠. 물론 방편이지만, 극락세계를 멀리 십만억 국토를 지나서 있다고 한 것은 마음속에 있는 번뇌(남을 좋아하고 미워하는)로 인해 고향 자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죠. 떠나온 그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수행인 것 같아요. 멀어진 만큼 돌아가야죠.”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청화 큰스님께서 ‘고향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우리 모두는 실향민입니다’라고 하셨던 말씀을 떠올렸다.

태산보다 큰 스승을 가까이 모시면서 도저히 그분처럼 불가능함을 깨닫고 이번 생에는 성불을 포기했다고 말씀은 하셨지만, 아마도 대천 스님은 이번 안거를 마지막 정진이라 생각하고 고향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하고 계시리라 믿는다. 


■ 현법낙주, 현재의 상황을 즐기라  - 도현스님


유월 초, 지리산 쌍계사에서 좀 떨어진 연암(蓮庵) 토굴에 다녀왔다. 지리산 연암의 주인은 쌍계사 선덕(禪德)이셨던 도현 스님. 선원에서 선덕이라 함은 조실 스님 다음 자리인, 말 그대로 덕을 지닌 선원의 어른이라는 뜻이다.

“토굴에 살면 이런 재미가 있어요. 사람이 안 찾아오는 날엔 나무나 새들, 짐승들하고 교감이 생겨요. 돌 위에 쌀이나 라면 쪼가리를 올려놓으면 그들이 찾아옵니다. 제일 먼저 찾아오는 놈이 쥐란 놈입니다. 한 번 왔다 가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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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을 내서 함께 오죠. 그런 그들과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 말씀 끝에 스님은 ‘뭐든 줘야 옵니다. 주지 않으면 오지 않는 게 진리라요’라고 했는데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세상이 나와 관계된 사람이 마음을 열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준 것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을 돌아보게 했다.

작은 오두막집 담장에 쌓아둔 정갈한 장작더미가 스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듯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어릴 때 출가해서 농사를 지으면서 ‘일은 해야 줄어 든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무슨 일이든 피하지 말고 정면 돌파를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스님께선 어려서부터 일하는 과정을 즐길 줄 알았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일도 하다 보면 줄어들더라고 하시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네 사는 것도, 어떤 슬픔이라든가 고통도 돌파하다 보면 하나씩 줄어들겠다 싶었다. 

“네 삶의 철학은 과정을 목적시 하는 겁니다. 지금 이렇게 중노릇을 해도 ‘깨치는’ 것은 생각 안 합니다. ‘견성성불’은 잡으려 하면 잡히지 않는 거예요. 한 순간 한 순간 깨치는 생활을 해야죠. 나는 ‘찰나열반’이라는 말을 잘 써요. 한 순간 한 순간 내가 깨어 있을 때가 찰나열반이에요. 미몽에 깨어 있고, 자기 자신에게 깨어 있는 그 상태가 찰나열반입니다. 찰나 열반의 상태를 오늘은 오 분에서 내일은 육 분으로 조금씩 늘려가는 것이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과정을 목적시하면 중노릇이 즐거워요.”


법정 스님과 불일암에서 함께 사셨다는 스님께 여쭈었다.

“까다롭기로 소문난 법정 스님과는 어떻게 사셨어요?”

“한 철 겨울을 같이 살았죠.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스님은 멋쟁이고 인격자이시죠. 내 중노릇의 본분사를 알려주신 분은 전강 스님(인천 용화사 조실)이셨고, 법정 스님은 재미있게 중노릇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분이죠. 홀로 사시면서도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셨어요.”

법정 스님은 일흔여섯, 도현 스님은 쉰여덟이셨다.

스님과 사는 것이 편치 않다고 하는 스님들도 더러 있으나, 나는 스님과 코드가 잘 맞아 참 편하게 살았어요. 아침에 빵을 먹고 내가 그릇을 치우는 사이 스님은 방으로 올라가tu서 차를 끓여놓으시곤 올라오라는 신호를 목탁으로 세 번 치시곤 했죠. 불일암에 살면서 스님 덕분에 책을 많이 읽었어요. 법정 스님이 좋아하시는 크리슈나무르티에 관한 책과 ‘임제록’ ‘정법안장’등을 유익하게 읽었죠. 법정 스님께선 ‘임제록’의 ‘수처작주 입처개진 (隨處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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主  立處皆眞)’이라는 말씀을 좋아하셨는데 저도 그 말을 제일 좋아합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수처작주의 삶입니까?”

“언제 어디서나 주인 되는 것이죠. 삶에서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정토죠. ‘수처작주 입처개진’을 네 글자로 줄인 것이 현법낙주(現法樂住)예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사자성어입니다. 현법낙주는 현재의 상황에서 즐겁게 머문다는 뜻이죠. 현재의 상황을 즐기는 거예요.”

“현법이라는 것은 우리 앞에 다가온 현재의 상황이고, 그것에 즐겁게 주해야 해요. 그렇게 주하려면 항상 자기를 돌아보는 조고각하(照顧脚下)가 있어야 하죠. 절에 가면 요사채 앞 뜨락에 신발을 벗고 올라가는 곳에 조고각하라고 써 놓았죠. 아무 생각 없이 덜렁 들어가면 신이 가지런하지 못해요. 뒤를 돌아보는 사람만 가지런할 수 있죠. 그렇게 자기를 돌아봐야 가지런하기 때문에 현법낙주가 가능한 거예요. 조고각하는 자기를 늘 관조하는 것이죠.”


어느덧 지리산의 푸근한 햇살이 자그마한 마당에서 사라질 무렵이 되었다. 일행은 마당으로 나와 스님께서 펴 놓은 자리에 앉아 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스님의 일과를 여쭈었다.

“신체 리듬을 따를 뿐이에요. 일어나고 자는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고, 피곤하면 자고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납니다. 예불하는 일 없어도 꿀리는 일 없으면 그게 진정한 예불입니다. 시간에 메이면 그것에 집착되어요. 집착이 되면 안 됩니다. 집을 수도 있고 놓을 수도 있는 것을 여탈자재(與奪自在)라고 해요. 줄 수도 있고 빼앗을 수도 있어야 해요. 문 닫아 놓고 다시 열지 않으면 그것은 벽이지 문이 아닙니다.”

“내 배역을 충실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단역을 충실히 하면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조연 역할을 백 퍼센트 잘하면 주연이 됩니다. 누구하고 비교하면서 살지 말고 자기 분수를 알아서 자기 역할에 백 퍼센트 열성을 다하고 즐거움을 느껴야 해요. 그러면 부러운 것이 하나도 없어요.”


흘러가는 구름과 찔레꽃 향기에 취해 사시는 스님께 여쭈었다.

“세속의 저희들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겁니까?”    

“첫째,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모든 사물은 빛을 향하는 향일성이 있습니다. 생각과 말, 모두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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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떤 경우에도 삶에서 최악의 경우를 설정해 놓고 살면 현재에 만족할 수 있습니다.”  


제4부 결국 답은 자신이 내리는 것이다


■ 인생의 시나리오를 다시 써라   - 무여 스님


몇 년 전 이라크와 미국이 싸울 때 이라크에 종군기자로 가 있던 일간지 여기자가 한 말이 생각난다.

“아! 선택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 괴롭다.”

죽음이 코앞에 있는 전쟁터인지라 언제든 철수하고 돌아와도 되는 상황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전쟁터에 남아 기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느냐 마느냐로 고민하던 기자의, 선택할 수 없어서 괴로운 게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괴롭다는 저 말이 인상 깊게 남아 있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금강카페 정진회에 가는 일은 어느 일보다 즐겁다. 그래서 나는 저 기자와는 반대로 길을 떠날 때마다 외치고 싶은 것이다.

“아! 수행하는 일을 선택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가!”


축서사 무여 스님께서는 몇 년 전 행자 시절 취재로 만나 뵈었을 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자부심을 가지고 인간답게 살려면 정신적인 수행은 필수입니다. ‘나’를 찾는 정신적인 수행 없이는 외형적인 성과가 있다 하더라도 결국엔 대단찮고 허망한 일임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수행이 배제된 삶은 남의 집 머슴살이하듯 살아가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십여 년간 축서사에 머물면서 중생교화를 하고 계신 무여 스님은 자비와 겸손이 그대로 느껴지는 분이다. 스님은 승가에선 보기 드물게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직장에 다니다가 출가하셨다.

직장을 그만두고 한 일주일 쯤 수양 차 해인사 암자로 들어갔다가 자연스럽게 출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송광사와 몇 군데를 거쳐 깊이 들어간 곳이 오대산 상원사였다. 그곳에서 한 해 조금 넘게 행자 생활을 하면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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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돌아봐도 잘 살았다고 생각되는 시절을 보냈다. 예닐곱 분의 수좌스님들이 머물며 공부를 했던 상원사에서의 생활은 오롯이 공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 주변의 어떠한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내가 누구인가’하는 의문만을 가졌고,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 뭣고’의 화두가 되었다. ‘초발심자경문’ 하나만 읽었을 뿐, 출가 후 한 칠 년 동안은 책을 전혀 보지 않고 참선만 했다. 그래서 출가 후에도 한참 동안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외우지 못하는 수행자로 살았다.

언제나 화두만을 생각하면서 ‘아, 이것이로구나. 내가 참 좋은 길에 들었구나’하는 생각에 젖곤 했다. 행자시절 이후 ‘이 길뿐이다’하여 한 이십년 정도 선방에만 다녔다. 본디 말이 많지 않았지만 참선한다고 애쓰다 보니 자연스레 말이 끊겨 거의 묵언하다시피 했다. 눈은 늘 앞 삼 미터 앞에 고정되어 있었고 가급적 옆을 쳐다보지 않고 지냈다. 행자시절 이후로도 선방 이외에 꼭 필요한 일 아닌 경우에는 어딜 다니지 않았고 웬만하면 사중 내에서도 다니질 않고 지냈다. 그래서 선방에 한 철 내내 있어도 선방스님들 얼굴이나 알지 후원의 공양주가 누군지 행자님들이 누군지 모르고 산 적이 많았다.

‘눈은 늘 앞 삼 미터 앞에 고정되어 있었다.’

‘답답할 정도로 그렇게 삼십여 년을 살았다.’


스님의 아침 법문이 시작되었다.

“지금까지 인간이 발견한 최상의 진리가 불교입니다. 수행을 잘해서 몽중에서도, 깊은 잠에서도 여여한 상태가 되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미묘함이 느껴집니다. ‘천수경’에도 있지 않습니까? 무상심심미묘법이라고. 여러분은 지금 가장 좋은 길을 가고 있습니다. 수행 잘해서 맑고 향기롭게 사십시오. 수행의 극치에 이르면 맑고 향기롭게 살 수 있습니다. ‘맑다’는 것은 티 없이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수행이 잘되어서 여법하고 계행 청정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깨끗하다는 것은 투명한 것입니다. 수행이 잘 되어서 안팎이 훤히 보이는 상태입니다. 부처님은 아주 맑은 분이셨습니다. 천재성을 지닌, 맑고 초롱초롱한 지혜를 가진 분이셨습니다.”

        < 중   략 >  

“내가 주변 승려들에게 강조하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승려 노릇 깨끗하고 여법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계행이 없으면 정(定)으로 들어갈 수 없고 지혜가 나오지 못합니다. 요즘 출가자들은 계율에 별 관심이 없어요. 그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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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계율정신이 많이 해이해졌습니다. 계행이 청정해서 여법하게 살아야 내면도 갖춰지고 지혜가 나타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 ‘늘 화두를 놓지 마라' 하는 것이니 자신이 하는 수행에 푹 빠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늘 자비하라'는 것입니다. 수행자가 냉랭하면 안 됩니다. 자비가 뚝뚝 흘러야 합니다.”          

저 세 가지가 어찌 수행자에게만 해당하겠는가. 불자인 우리도 반드시 지켜야 할 덕목일 것이다.


‘수행자는 자비가 뚝뚝 흘러야 한다!’

스님께서 바로 그런 분이셨다. 법문이 끝나고 처소로 잠깐 스님을 찾아뵈었다. 작지만 정갈한 방과 검소한 생활 모습이 변함 없으셨다. 스님께 인사드리고 나오면서 한평생을 티없이 맑고 청정하게 사신 선지식이 상주하는 도량이어서 축서사가 더 고풍스럽고 아름답지 않은가 행각해 보았다.


■ 염불은 청정한 자성을 지키는 것  - 환성 스님


전 조계종 종정 혜암 스님께서 일갈하신 바 있다.

“천 년 된 고찰이요. 아무리 큰 절이라도 제대로 수행하는 자가 없으면 그곳은 술도가요, 도살장이라도 정진하는 사람이 있는 곳은 큰 절이다.”

참 수행자가 있는 곳은 생동감 있고 편안하다. 공주 영평사가 그런 절이다. 여러 해 전 중국의 백마사를 참배한 적이 있다. 백마사는 중국이 불교를 처음 받아들인 후 최초로 지어진 고찰이다. 고찰이요 대찰임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너무 삭막하게 느껴졌다. 공부하는 수행자가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중국의 여러 절을 순례하면서 생각했다.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는 수행자들이 있고 신도들과 함께 호흡하는 스님들이 주석해 생동감 넘치는 절이 무수한 한국 땅의 불자여서 너무 다행이라고. 중국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 다니던 절에 가서 부처님 앞에 감사함으로 엎드렸던 일이 생각난다. 햇살이 가득한 법당의 부처님이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울산 석남사에서 작은아이를 돌보아주었던 무위 스님이 잠시 영평사에 머물면서, ‘영평사 달빛 아래 구절초 향이 참 좋습니다’라고 전해 주어서 작은아이와 함께 내려갔다. 작은아이는 중학교 삼 학년 여름방학 때 석남사에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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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동안 있으면서 하루 천팔십배를 하고 마지막 날 삼천배를 해서 모두 일만배 회향을 했다.


환성 스님은 이십여 년 전 이곳에 걸망을 풀고 영평사를 창건하면서 ‘수행과 일과 포교’를 삼 대 슬로건으로 내걸었다고 한다.

출가해서 이십 년 동안 선방에서 공부하고 난 후, 신도들에게 기대지 않고 자급자족하면서 홀로 공부하려고 들어온 곳이 이곳 장군산 자락이었다. 한 해 정도 홀로 잘 공부하고 있는데 절 곁에 사는 분들이 와서는 ‘진짜 스님을 보았다’고 하면서 불교를 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수행자가 되어 살고 있으니 부처님 은혜도 갚을 겸 그분들에게 불법을 가르치다 보니 청소년 포교가 시급하고 중대한 불사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자급자족의 범위가 더 넓어져 죽염을 만들고, 순수한 우리 농산물로 만든 된장, 고추장, 간장 그리고 구절초 추출액 등을 생산 판매하게 되었다. 물론 이익금은 청소년 포교, 불우 이웃돕기 등 세상에 회향된다.


열다섯 살에 처음 출가를 결심했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아홉에 뒤도 안 돌아보고 안면도 간월암으로 출가하셨다는 환성 스님은 인터뷰 중간에 내게 물으셨다.

“수행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대답했다.

“본성을 회복하는 거겠죠.”

그리고 덧붙였다.

“최근에 혜암 스님 법문집에서 ‘불법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아는 것이다.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을 잊는 것이다. 자신을 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심을 증득하는 것이다. 무심을 증득해야 비로소 대자유인이 될 수 있고 불교를 철견(徹見)한 것이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불법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무심을 증득한다는 것은 분별하지 않는다는 거겠지요. 선이다 악이다. 옳다 그르다. 길다 짧다. 살면서 우리는 한 순간도 이런 분별을 멈추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 분별 때문에 삶이 괴로운 것이겠고요. 이 분별을 멈추고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무심일 텐데. 본성의 회복은무심이 증득되어야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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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평사는 신흥 사찰이면서도 각종 수련 프로그램을 운영한 노하우로 진작에 템플스테이 사찰로 지정되었다.

한 골짜기에 있으면 그 골짜기만 아는 고지식한 사람이라 해제가 되어도 남들처럼 어디를 만행하지도 않은 채, 붙박이처럼 그곳에 머물며 밭 갈고 도량을 가꾸던 선승이 수행과 일과 포교를 슬로건으로 내 걸고 세간 사람들을 껴안고 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님은 자신의 단점이 자비가 결코 아닌 잔정이 많은 거라고 했지만, 스님을 알고 있는 분들은 한결같이 스님을 이렇게 표현한다.

“자신에겐 서릿발보다 더 차갑지만 이웃에게는 따뜻하고 자비로운 분입니다.”

스님은 후학에게 인정 많고 자비스러운 분다운 말씀을 해주셨다.

“후배들에게 부모 형제에게도 ‘자비스러워라. 세속적인 효도도 하라’ 그렇게 권합니다. 나는 출가해서 이십오 년 동안 집과 담을 쌓았어요. 공부를 마치기 전엔 당연히 그래야 된다는 생각이었죠. 위장병으로 자주 고생하시던 어머니는 내가 출가하자 병이 나셔서 그길로 돌아가셨는데, 슬하에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걱정을 안 끼치다가 출가하면서 그런 큰 불효를 한 거죠 나이 들어 생각하니, 혈연에게 그렇게 매정하게 굴었던 것은 자신이 없고 보리심이 박약한 부끄러운 증거일 뿐이었어요. 그렇지 않았다면 일반 단월(檀越 :절이나 스님에게 물건 따위를 시봉하는 일)들 만나듯이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을 거예요. 모두 평상심으로 만났어야 했죠. 부모님에게도, 스승에게도 최선을 다해 시봉도 하고 형제와 우애를 나누면서 자연스레 불법을 전하는 것이 공부인의 진정한 자세라고 봐요. 규제 아닌 청규가 필요한 거죠.”


영평사(永平寺), 불멸의 행복이라는 뜻의 이름을 직접 지었다는 스님께 여쭈어 보았다.

“불멸의 행복은 무엇이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선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겁니까?”

“마음을 맑혀, 본성을 회복한 것이 불멸의 행복 아니겠어요? 그리고 불멸의 행복을 얻은 다음의 삶은 모든 생명과 공존하는, 함께 조화롭게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실천하는 거죠.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무아도, 본성 회복도 그것 때문이죠.”

아침 일곱 시에 시작된 인터뷰가 어느덧 열두 시를 가까이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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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그림을 그리면서 살 것인가를 구상해야겠지만, 자기가 현재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삶의 매순간, 자신의 모습에 분명히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었다.

“매사에 최고의 정성을 다해라. 그리고 염불하라.”

오랜 시간 정성을 다해 말씀해 주신 스님의 마지막 말씀이다.

그리고 중간에 이런 말씀도 하셨다.

“몸 바쳐서 기도해보라. 분명히 업장이 녹는다.”


■ 인생을 낭비한 죄


“석종사로 정진하러 갑시다. 안거 중이지만 와서 정진해도 좋다는 혜국 스님의 허락을 받았어요.”

지난 해 이맘 때쯤 제주도 약천사에서 삼천배 정진을 한 도반들이 다시 모이기로 한 것이다. 온 나라가 장마권에 든 가운데 장대비가 쏟아지는 서울을 떠나 충주 석종사로 갔다.

새벽녘 빗속의 석종사 모습은 장엄했다. 신라 때 창건된 대가람이었으나 수십 년 전 혜국 스님이 부모를 잃은 다섯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왔을 때는 무너진 탑만 남아 있었다는 절이다. 그 뒤 세월이 흐르고 또 오륙 년 전부터 적극적인 불사를 시작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새 드러난 가람의 위용은 웅장했다.


열세 살에 출가해 오십대 후반이 된 혜국 스님의 밝은 모습에서 범접할 수 없는 큰 힘이 느껴졌다. 살아온 법랍 사십여 년의 족적과 닮은 듯 짙은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묵언 중이시라고 들어서 내려간 김에 취재를 요청할까 하다가 그만 두었는데, 스님께서 말문을 여셨다.

“내가 스물두 살에 성철 스님과 여러 가지 얘기 끝에 하루 오천배 씩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어서 절을 했죠. 그때 이런 생각이 듭디다. ‘이렇게 절을 여러번 한다고 되려나? 한 번 하더라도 참절을 해야 할 텐데………’하고 말입니다. 그랬는데 하루 오천배씩 하면서 십칠팔 일이 지났을 때였어요. 아주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하던 감정이나 번뇌를 가진 나는 거의 없고 절하는 놈만 남아 있는 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한 번의 참절을 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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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번의 헛 절을 해야 했던 거죠. 만 번의 헛 절을 하지 않으면 한 번의 참절을 못하는 겁니다. 붓글씨도, 가만히 앉아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명필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연습을 많이 해야 명필이 되는 게 세상사 진리입니다.”                 

말씀을 듣던 중 일행에게 대접하기 위해 차를 달이는 스님을 바라보다가 무심히 눈길이 손에 닿았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성지를 찾아다니며 수행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혼자 해 보면 안 돼요. 처음 시작은 잘 해도 나중엔 게을러져서 못해요. 대중을 이끌어주는 사람이 있으니까 하지요. 절하는 데 더웠지요? 여기가 시원한 곳인데. 지금은 더울 때예요. 그래도 그 더위 덕택에 사과가 익어가고 벼가 영글어가니까. 오히려 고맙구나 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스님께서 살인을 저지르지 않은 빠삐용이 억울하게 사형 선고를 받고 무죄임을 주장하며 탈옥을 시도하다가 꿈속에서 ‘인생을 낭비한 죄가 있다’는 재판관의 말에 비로소 자신이 유죄임을 인정하는 대목을 실감나게 들려주시곤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 대목이 그렇게 절실히 다가왔어요. 불교에서 금하는 살생을 저지른 죄보다도 인생을 낭비한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해요. 인생의 낭비라는 것은 곧 시간의 낭비거든요.”

살생의 죄보다 더 큰 시간의 낭비. 인생의 낭비라. 그 말씀을 들으면서, 시간을 낭비한 것만큼 삶이 무겁고 힘들거라는 생각을 했다.

전국 각지에   다니면서 법문을 멈추지 않고 선방에 앉아 정진을 하면서 그토록 큰 불사를 했어도. ‘수행하는 것만큼 남는 게 없다’라는 혜국 스님의 말씀은 깊은 여운을 남겼다. 언젠가 수락산 자락 한 자그마한 절에서 들은 혜국 스님의 수행에 대한 말씀이 떠오른다.

“무명을 없애는 길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감사하며 즐겁게 최선을 다하는 것, 그리고 하나는 마음 농사, 즉 참선을 해서 욕망을 순수 에너지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게 진정한 수행입니다.”


“그릇에 담겨 있는 물은 어디에 놓아도 마릅니다. 이 컵에 담겨 있는 물은 며칠이면 말라버리고, 아무리 큰 그릇에 담겨 있어도 언젠가는 말라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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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처님 말씀에 ‘바다에 떨어진 물방울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수행을 하는 시간은 마음 바다에서 내 물방울을 던지는 시간이에요. 참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염불하면서 진리의; 바다에 자기를 던지는 것은 참, 귀한 일입니다. 열심히 정진하세요.” 


빗속을 뚫고 서울로 돌아오고 다시 한 주가 흘렀다. 여전히 인생을, 시간을 낭비한 채 한 주를 보냈다는 자책이 든다. 그래서 다시 시도한다. 진리에 자신을 던지는 시간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시간을 만들어 보는 일을 말이다.


         

■ 후기


평소 잠언처럼 가슴에 새겨둔, 청화 큰스님께서 수행자 한 분에게 보내셨던 편지 한 구절을 되뇌면서 후기를 맺는다.


“생명보다 귀중한 시일을 미루고 미루다.

   온갖 황혼의 마수에 걸려든 산승을 거울삼으시어.

   진정 찰나도 자아성불을 떠나는 생활을 말으시길 바라나이다.

   아직도 해는 지고 갈 길은 먼 형국이오나 남은 여생이나마

   위선이 없는 불자, 임종에 당하여 후회없는 수행자가 되고자

   애타게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현재 산승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과 정정과 독서뿐입니다.

   그 무엇 때문에도 남은 생명을 낭비할 수 없습니다.“



                        2012년 1월 1일 다 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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