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2. 23. 18:27ㆍ독서후기
인생을 낭비한 죄
■ 박원자
0 숙명여대 중문학 전공, 23세에 불교에 관심
0 동국대 역경원 역경위원 역임
0 월간 ‘해인’에 많은 수행자들과 만난 수행기 기고
0 스님들의 행자 시절을 엮은 ‘나의 행자시절’ ‘길 찾아 길 떠나다’ ‘대원 장경호 거사’ 등의 저서
0 인터넷 사이버 도량 금강 카페 운영
■ 글쓴이의 말
나는 삶이 무엇인지 이제 알았는가? 선지식들에게 그토록 잘 사는 방법을 물었는데 그것을 안 것일까?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아직 인생이 무엇인지 모르겠다. 내가 누구인지는 더더욱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깨달은 사실이 있다. 이제 그 질문을 나에게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돌아보니 선지식들께선 한결같이 스스로에게 그 질문을 하라고. 그래야 답을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 많은 시간 선지식들을 찾아다니며 물었던 것은 그것 하나를 깨닫기 위한 여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나 자신의 길을 나답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묻는 분들에게 이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제1부 자신에게 속지마라
■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사는 법에 대하여 - 혜국스님
프랑스의 실존인물이었던 빠삐용은 십 수 년간의 수용소 생활을 하면서 여덟 번의 탈옥을 시도할 만큼 끊임없이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 그러던 어느 날 비몽사몽 빠삐용이 사막 한가운데로 걸어가는데 맞은편에 재판관과 배심원들이 앉아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결백을 주장하며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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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부짖는다. 그러자 재판관이 이렇게 말하면 유죄를 선고한다.
“너에게는 분명 죄가 있다. 네 죄는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죄다. 그것은 인생을 낭비한 죄다.”
그토록 무죄임을 주장하던 그가 재판관의 말에 자신의 죄를 시인하는 장면은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에게 지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강한 메시지를 남겼다. 몇 년 전 석종사에서 도반들과 삼천배 정진을 할 때, 혜국 스님께서 법문 중 실감나게 영화를 거론하시면서 한 말씀이 있다.
나는 불교에서 금하는 살생을 저지른 죄보다 인생을 낭비한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나에게 이 말씀은 영화에서보다 더 강한 울림으로 다가와 내 삶을 돌아보게 했다.
혜국 스님은 말합니다.
“대부분 희망을 밖에서 찾기 때문에 좌절하고 힘들어 하는 겁니다. 희망은 내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좌절 쪽보다는 희망이라는 마음 밭에 양식을 준다면 어떠한 악조건 속에서도 일어설 수 있죠. 누가 지금까지 나와 있는 책 중에 한 권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나는 두말 않고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을 추천하겠습니다. 중풍으로 쓰러져 꼼짝할 수 없는 사람이 왼쪽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만으로 쓴 책입니다. 동료가 알파벳을 순서대로 불러주면 원하는 알파벳이 나올 때 눈꺼풀을 깜빡이는 식으로 한 단어를 완성하고, 문장을 완성하여 마침내 책 한 권을 썼다고 해요. 한 단어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눈을 깜박였겠습니까?
희망이란 어떤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본인이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좌절이 없기를 바라는 속에서는 영원히 희망을 찾지 못합니다.“
스님께선 정진하는 중에 하도 잠이 와서 성철 큰스님을 찾아 가기도 했다고 한다. 해결을 하고 넘어가야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 달음에 백련암으로 달려가 산책을 하고 계시던 큰스님 앞에 엎드려 절을 하고 여쭈었다고 한다.
“스님께서 성전암에서 지내시던 십 년 동안 장좌불와를 하셨다고 들었는데 졸지 않으셨습니까?”
“야 이놈아, 내가 목석이가? 안 졸게?”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아, 큰스님께서도 졸기도 하시면서 힘든 과정을 이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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냈구나’ 하면서 희망을 가졌다는 말씀을 하셨다.
“좌절은 희망의 양식이 됩니다. 딛고 일어서기만 하면 반드시 희망은 따라오기 마련이죠. 자연의 이치가 그렇습니다. 겨울을 이겨낸 매화 향기가 진하잖아요. 사시사철 꽃을 피우는 꽃들을 보세요 향기가 있습니까? ‘뼛속에 스치는 추위를 겪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화 향기를 뿜을 수 있겠는가’하는 황벽 스님의 말씀도 이를 대변해 줍니다.”
“태백산 도솔암에 들어간 게 스물두 살 때였죠.”
“열세 살에 절에 들어와서 사는데, 동상에 걸려 다리가 떨어져 나갈 것 같은데도 노스님들께서는 ‘스스로 이겨내라!’고 하셨고 우린 마땅히 그 말씀에 따랐습니다. 어려서부터 스스로 자신의 일을 해결해 버릇했기 때문에, 스물두 살은 그렇게 어린 나이가 아니었죠. 당연히 내가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가 다 알아서 해주니 역경을 이겨내는 힘이 부족할 수밖에 없어요. 부모에게 문제가 많죠. 정신을 제대로 차려야 합니다.”
“ 저는 성철스님과 은사이신 일타스님 그리고 송광사 방장이셨던 구산스닙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세 분은 내게 각각 독특한 스승의 역할을 하셨습니다. 성철 스님은 문제만 딱 제기하고 네가 풀어라 하는 스타일이셨어요.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카리스마를 품고 계신 분이었죠. 일타스님은 그와 반대로 아주 자상하게 대하시더군요. 마치 어머니가 사랑하는 자식을 대하는 것처럼 자애로우셨어요. 구산 스님께선 도저히 공부를 하지 않고는 베길 수 없게 행동으로 보이셨어요. 어느 해 구산 스님 밑에서 안거를 날 때인데 공부하려고 애쓰는 것이 보였던지 절 부르시더니, ‘잠을 줄이고 하루에 세 시간만 자고 공부하라’고 하세요. 대중들보다 한 시간 늦게 열한 시에 눈을 부쳤다가 두 시에 일어나서 혼자 정진하다 보니 졸지 않을 수 없었죠. 그런데 스님께서 열두 시만 되면 선방 앞에 오셔서는 마루를 똑똑 두드리고 인삼 다린 물을 놓고 가셨어요. 그때 내가 졸고 앉아 있으면 쏟아버리고 빈 그릇을 마루에 놓아두고 가셨죠. 다음날 아침에 빈 그릇을 보고 정신을 차리게 하신 거죠.”
“큰스님이라고 다른 대접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것은 인생의 큰 낭비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수행이란 익은 것은 설게 하고 선 것은 익게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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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것입니다. 눕고 싶고 편하고 싶고 게으른 것은 푹 익은 습관이기 때문에 설게 만들어야죠. 새벽 두 시 반에 일어나서 예불하는 것, 아무리 자고 싶어도 정진 시간을 정확히 지키는 것, 또는 어떤 사람이 와서 정말 짜증나게 하더라도 잘 들어 주는 것은 선 습관이니까 익도록 만드는 게 수행이에요. 수행이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자리를 지킨다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한정 없이 퇴보하는 사람입니다. 쉼 없이 헤엄을 칠 때 제자리를 지키거나 더 나아가거나 수원지로 가죠. 자전거 타는 것과 똑 같아요. 쉼 없이 바퀴를 돌릴 때 앞으로 가지 놓으면 쓰러지게 마련입니다. 함께 사는 대중들은 나를 게으르게 하지 않고 나아가게 하는 스승이자 도반입니다. 저이들도 내가 사는 모습을 보고 신심을 낸다고 하니 서로에게 스승인 거죠.“
“나는 늘 ‘스승을 만나고 싶으면 자연을 살펴보라’고 말합니다. 저녁에 마루에 앉아서 겨울 하늘을 울면서 날아가는 새들을 보면 자유에 따르는 의무와 고통을 사유하지 않을 수 없어요. 언젠가 다른 종교의 성직자 한 사람이 출가하려고 왔길래 ‘왜 그 좋은 성직자의 자리를 놓아두고 왔는가’하고 물었더니 다른 것은 전혀 부럽지 않은데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이리저리 맘껏 떠날 수 있는 불가의 자유가 부럽다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새장 안에 있는 새는 겨울의 추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이 밤을 어디서 나야 하는가 하고 물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자유로운 새는 반드시 자신이 겨울을 날 수 있는 노하우를 익혀야 하고 저녁마다 잘 수 있는 집을 선택해야 합니다’ 라고 말해준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뵌 목적을 담아 질문을 드렸다.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잘 사는 방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꼭 집어서 말씀해달라고 요구하는 내게 즉각 스님의 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어제는 지나간 오늘이요. 내일은 돌아오는 오늘이기 때문에 영원히 하루밖에 없는 인생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할 일을 못 하고 사는 사람은 인생을 낭비하고 사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오늘 듣는 이 빗소리, 오늘 만나고 있는 내 앞의 보살님, 오늘 해야 할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 그 사람을 만나면서 하는 말, 오늘 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야 할 것은 인류사에서 단 한 번 밖에 없는 일입니다. 어제는 지나갔고 어제를 살았던 사람도 이미 죽어버렸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새롭게 마지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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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사는 인생을 살라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그래서 나는 13세기 페르시아의 시인 루미의 ‘손님’이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스님께서 가을비 소리를 배경음악으로 들려주신 한 편의 시는 그날 인터뷰 내용 전부를 대변하는 듯했다.
이 존재 인간은 여인숙이라
아침마다 새로운 손님이 당도한다
한 번은 기쁨, 한 번은 좌절, 한 번은 야비함.
거기에 약간의 찰나적 깨달음이 뜻밖의 손님처럼 찾아오기도 한다.
그들을 맞아 즐거이 모시라
그것이 그대의 집안을 장롱 하나 없이 남김없이 휩쓸어가는
한 무리의 슬픔일지라도
한 분 한 분 정성껏 모시라
그 손님은 뭔가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 내면을 비워주려는 것인지도 모르는 것
암울한 생각, 부끄러움, 울분.
이 모든 것을 웃음으로 맞아 안으로 모셔 들이라.
그 누가 찾아오시든 감사하라
그 모두가 그대를 인도하러 저 너머에서 오신 분들이니.
이 시를 들으면서 나는 ‘네가 세상을 대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상도
너를 대한다’는 키플링의 시 한 구절을 떠 올렸다. 긍정이 세상을 구원한다
는 말과 함께.
스님을 뵙고 돌아와 이 글을 쓸 때. 인류의 라이프 스타일을 바꾼 IT계의
황제 스티브 잡스가 사망했다. 인류의 역사를 새로 쓰며 57세를 일기로 세
상을 떠난 그의 인생은 크게 세 번 변했다고 하는데, 열일곱 살 때 그는 다
음과 같은 일생일대의 문장을 만났다고 한다.
“매일을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어느 날 매우 분명하게 올
바른 길에 서 있는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이후 세상에 작별을 고할 때까지 삽십구 년간 매일 아침마다 거울을
보며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지금부터 하려는 바로 이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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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할 것인가” 라고 물었다고 한다.
최선의 삶을 추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통찰
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천재와 범인의 차이가 저 죽음에 대한 통찰에 있다던
가.
스님과의 인터뷰를 끝내고 석종사의 그 환하고 너른 법당에서 절을 했다.
신심에 북받쳐 부처님께 천팔십 배 공양을 올리고 나오는데 보니 스님께서
마루 의자에 앉아 밖을 바라보고 계신 것이 보였다. 자연이 곧 스승이라던
스님께선 그날 가을비 소리를 들으면서 또 어떤 깨달음을 얻으셨을까.
스님을 뵙고 있으면서 선지식들은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누가 찾아오든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내가 맞이하는 마지막 사
람인 것처럼 정성을 다해 모셔라.’ 스님께선 그날 그것을 철저히 실천하면서
내게 인생을 낭비하지 않고 사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 밥값 - 성철 스님
“ 니 도둑놈이제!”
백련암 성철 스님의 방에 군불을 넣고 있던 열일곱 살의 행자는 갑자기 나
타나 밑도 끝도 없이 그렇게 묻는 성철 스님의 물음 앞에 가슴이 철렁했다.
‘도둑놈이라고? 내가 뭘 훔쳤더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절 물건을 훔친 게 없어 항변을 하려고 하는데 이미 큰
스님은 문을 휙 닫고 나가버린 후였다.
큰스님의 ‘니 도둑놈이제?’라는 물음은 그 후로도 계속되었다. 공양 준비를
하고 있을 때도 불쑥, 해인사 본절 강원에 내려가 공부를 하고 저녁 공양을
지으려고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으면 입구에 서 계시다가도 불쑥, 그렇게 묻
는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행자는 억울해서 항변했다.
“큰스님, 제가 뭘 훔쳤다고 그러세요? 억울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행자는 자신만 도둑이라는 누명을 쓴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었다. 자신보다 훨씬 먼저 출가해서 선방에 앉아 정진하는 스님들에게도 똑같이 말씀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말씀에 항변하는 스님이 없다는 거다. 그제야 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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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안심을 한다. ‘아, 큰스님이 나만 의심하는 것이 아니구나’ 하고…….
그러던 어느 날, 행자시절이 끝나갈 무렵 행자님은 ‘도둑놈’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성철 스님께서 선방 문을 드르륵 열어젖히고 벽력같이 소리를 지른 것이다.
“야! 이놈들아! 밥값 내놔라! 시주물로 살아가면서 밤낮 이렇게 졸기나 하고 공부를 제대로 안 하는 네놈들이 도둑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당장 밥값 내놔라 이 도둑놈들아!” 그리곤 몽둥이를 휘둘렀다.
군종감을 끝으로 제대하고 산사로 돌아오신 원오 스님에게 들은 이야기다. 저 행자시절로부터 사십 여 년이 흐른 지금, 당시를 회상하면서 원오 스님은 이렇게 얘기했다.
“신도들의 피같은 시주물로 살아가면서 수행자가 밥값을 하지 않으면 모두 도둑이라는 말씀이었어요. 출가자라면 간담이 서늘해지는 말씀이죠.”
성철 스님께서도 단 한 번 ‘밥값 했다’라는 말씀을 하셨다는데, 역대 조사들의 어록을 발췌 번역한 ‘선문정로(禪門正路)’를 내고 나서였다고 한다.
원오 스님을 뵙고 돌아와 ‘밥값’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 부모님께 받은 하해와 같은 은혜, 이웃과 세상이 준 무한한 은혜, 부처님께 받은 은혜에 얼마나 보답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말이다.
■ 빈 배 - 청화 스님
어느 보살이 자식을 키우면서 겪는 갈등을 스님께 말씀드렸더니 “장자의 ‘빈 배 이야기’ 아시지요?”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강을 건너다가 빈 배와 부딪치면 아무리 성질이 나쁜 사람이라도 화를 내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 배는 빈 배이니까. 그러나 배 안에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사람에게 피하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래도 듣지 못하면 그는 다시 소리칠 것이고 마침내는 욕을 하기 시작할 거예요. 이 모든 일은 그 배 안에 누군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거죠. 그러나 배가 비어 있다면 그는 소리치지 않을 것이고 화내지 않을 겁니다. 세상의 강을 건너는 나 자신의 배를 빈 배로 만들 수 있다면 아무도 나와 맞서거나 상처를 입히려 하지 않을 거예요. 그냥 빈 배가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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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분별을 내려놓고 텅 비어 있을 때 자유롭다는 말씀이었다. 아, 그런데 다 내려놓고 비우기가 왜 그렇게 어렵단 말인가.
■ 사람노릇 - 한암 스님
오대산 월정사에 다녀왔다. 상원사와 적멸보궁을 참배하고 내려와 저녁에 지장암에서 정안 스님을 만나 뵙고 전나무처럼 푸르고 곧은 오대산 수행자분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날 오대산을 그냥 나오기 아쉬워 다시 올라간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의 말씀을 만났다.
“참선이란 군중을 놀라게 하고 대중을 동요시키는 별별 이상한 일이 아니라 다만 자기의 현전일념에서 흘러나오는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그 근원을 명백하게 요달하여 다시 바깥 경계를 대함에 부동함은 태산 반석과 같고, 청정하며 관대함은 태허공과 같아서 모든 인연법을 따르되 막힘도 걸림도 없어 종일 담소하되 담소하지 아니하고 종일 거래하되 거래하지 않아야 한다.”
- 한암 선사(1876-1951)
눈에 번쩍 뜨여 상원사 입구 게시판에 적혀 있던 글을 수첩에 적어가지고 와서 수시로 보고 있다.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냈고 월정사 조실로 있으면서 열반에 드실 때까지 이십칠 년 동안 오대산 동구 밖을 나오지 않았던 한암 스님은 수행과 대중외호에 철저했던 오대산의 한 마리 학과 같았던 수행자다. 대중들에 대한 그분의 자비심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인구에 회자될 만큼 대단했던 것 같다.
한암 스님에 대한 여러 일화를 들어 보면 사람에게는 물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평등하게 대한다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제의 압제 속에서도 도에 대한 푸른 열정을 잃지 않고 승속을 가리지 않고 사부대중을 모아 상원사 좁은 방에서 칼잠을 자게하며 정진을 독려하셨던 수행자 한암 스님.
수행자라면 참선 외에 염불과 간경과 의식과 가람수호에도 철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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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수시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게 하고 해제철에는 직접 ‘금강경’을 설하였으며, 수행자가 의식을 집전하지 못하면 위의를 지닐 수 없다며 어산(범패)에 능한 스님을 모셔와 의식을 익히게 했던 선사셨다.
월정사 회주 현해 스님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다. 상원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민가 두 채가 있었는데 곡주를 팔았던 모양이다. 하루는 상원사 선방에서 공부하던 한암 스님의 상좌 두 사람이 그곳에서 곡주를 좀 마시고는 상원사로 올라왔는데, 한암 스님께서는 회초리 한 다발이 다 부러질 때까지 두 사람을 내리쳤다.
“이 나쁜 놈들아! 평생을 공부해도 깨칠까 말까 한데 술 마시고 들어오는 이것이 중노릇이더냐?”
현해 스님으로부터 “최근 한암 노스님께서 쓰신 글을 하나 새로 찾아냈습니다. 당신의 일생을 손수 쓰신 내용인데 제목이 ‘일생패궐(一生敗闕)’이었어요. ‘내 일생의 실패작’이란 뜻입니다.
일평생 산문 밖을 나오지 않고 그렇듯 엄하게 계율을 지니고 철저하게 수행을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일생을 실패했노라’는 글을 남긴 대선사 한암 스님의 삶 앞에서 숙연함을 넘어서 비감한 마음이 든다.
명색이 불자요, ‘수행자’라고 무수히 부르짖으면서도 곁에 있는 인연조차 사랑으로 보듬지 못하고 분멸을 일삼아 상처를 입히고, 정진에 대한 절박함을 잊은 채 적당히 세월을 보내며, 매사에 정밀하지 못한 채 탐진치 굴레 속을 끝없이 윤회하고 있는 내게 한암 스님께서 이렇게 꾸짖는 듯하다.
“평생을 공부해도 깨칠까 말까 한데 그렇게 사는 것이 사람 노릇이더냐?”
■ 내 일은 그에게 주는 것 뿐 - 숭산 스님
1950년대 수덕사 견성암에서의 안거 중에 일어난 일이다.
밤이면 선방에 놓여 있던 향로가 사라졌다. 당시 방사가 부족해서 선방 대중스님 모두가 큰방(선방)에서 몇 십 명씩 함께 잠을 잤는데, 잠을 자고 일어나 보면 향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선방 스님들이 향로를 찾으러 나가보면 선방 앞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대중들은 술렁거렸다.
“이게 무슨 일이냐? 신장님이 노하셨나보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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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이 분분한 끝에 내린 결론은 ‘향로를 나무에 묶어 놓은 솜씨를 보면 분명 사람이 한 일이다. 그를 잡아라.’
선방 스님들은 조를 짜서 며칠 잠을 자지 않고 번갈아가며 지켜보기로 했다. 드디어 선방 스님들이 소등을 하고 잠자리에 들었는데, 잠시 후 큰절(수덕사)에서 젊은 스님 한 사람이 견성암으로 올라왔다. 뚜벅뚜벅 거침없이 올라와서는 선방문을 열고 향로를 들고 마당에 나가 향로를 엎어 재를 탁탁 털고는 나무에 매달아 놓는 것이었다. 그리곤 산길을 내려가는데 걸음이 비호처럼 빨라서 따라갈 수가 없었다.
며칠 후 드디어 향로를 나무에 매달아 놓은 스님이 잡혔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
어른 스님의 추상같은 꾸짖음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젊은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다.
“왜 공부를 하지 않고 잠을 잡니까? 허구한 날 자는 게 잠 아닙니까?”
출가한 지 얼마 안 되는 젊은 스님의 일갈에 선방스님들이 얼굴을 들지 못했음은 불문가지의 일이다.
화계사 조실이셨던 숭산 스님의 20대 때 일화다.
1976년 숭산 스님을 뵙고 나서 출가하게 된 뉴욕 조계사의 묘지 스님은 숭산 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스님께 너무 감사합니다. 어떻게 하면 그 빚을 갚을 수 있을까요?”
좋은 선배와 스승을 만난 것으로 인해 평범한 삶에 종지부를 찍고 인생을 바꾼 스님이었기에 그런 질문이 가능했을 것이다. 유복한 가정을 뒤로 하고 이민 온 미국 땅에서 출가를 결행한 묘지 스님의 질문에 숭산 스님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복이 많아 돈이 많다. 어떤 사람은 복이 많아 말을 잘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복이 많아 글을 잘 쓴다. 너는 이 공부를 해내는 거다 그게 빚을 갚는 거다.”
‘끝까지 해내는 거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온 세상이 환해진 것 같은 느낌과 함께, ‘내가 공부를 하면, 나로 인해 또 다른 세상이 열리고 또 다른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묘지 스님은 그로부터 삼십 년이 흐른 후 어느 지면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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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를 끝까지 해낸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끈기와 인내가 필요하다. 끝없이 자신과 싸우는 과정이다. 그 자리에서 사생결단을 낼 마음으로 들러붙어야 한다. 끝까지 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으나 그래도 해야 한다. 무조건 해야 한다. 다른 변명이 필요하지 않다.”
세계 4대 생불(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캄보디아의 마하 고사난다, 베트남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틱낫한, 그리고 한국의 숭산 스님)로 존경 받았던 숭산 스님의 세계적인 저력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대단했던 것 같다.
숭산 스님은 폴란드, 구소련, 일본 등 전 세계를 누비며 불법을 전하다가 사십 대 중반 혈혈단신으로 1972년에 생면부지의 미국으로 건너갔다. 진정한 행복이 물질보다 정신적인 것에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미국 젊은이들을 보면서 ‘불교는 필요한 곳에 있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몇 년간 세탁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영어를 익혔다는 일화는 널리 일려진 일이다. 삼십여 년 동안 한국 불교를 포교하면서 현각, 무량, 무상 스님 등 수많은 외국인 제자들을 길러냈다.
광옥 스님은 숭산 스님에 대해 ‘부지런함’과 ‘신심’과 ‘원력’으로 설명한다.
“숭산 큰스님의 근면함은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대단하셨어요. 큰스님께서 미주, 캐나다, 유럽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있는 선원을 순회하실 때 곁에서 모신 적이 많았죠. 큰스님께선 그 전날 아무리 늦게 주무셔도 늘 새벽 한 시면 일어나셨어요. 그리곤 구백 배를 하시는 게 하루 일과의 첫 시작이었죠.”
천팔십 배가 아니고 왜 구백 배였을까.
“평생 하루 천팔십 배를 하셨는데, 나머지 백팔 배는 새벽 예불 때 대중들과 함께 하셨죠. 아마 평생 한 번도 거르신 적이 없을 거예요.
돌아가시기 얼마 전, 문병을 간 자리에서 광옥 스님이 숭산 스님께 여쭈었다고 한다.
“스님, 요즘에도 천팔십 배를 하십니까?”
“흠, 몸이 좀 아파서 그렇게 못해. 삼백 배만 한다내.”
“신심과 원력이 원대하지 않으면 그럴 수가 없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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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상 스님의 성품이라든가 인간적인 면이 궁굼했다.
“큰스님은 모든 신심을 다 바치신 분이었죠. 미국에 오셔서 크게 인간적인 배신을 당한 적이 있으셨어요. 포교를 위해 미국에 오셔서 고생하면서 이룬 모든 것을 한 사람으로 인해 잃어버리셨죠. 어렵게 다시 시작하셨는데 당신을 배신하고 모든 것을 가져간 그 사람에게 여전히 무얼 주시는 거예요. 불러서, 때로는 방문해서 무언가를 주시곤 했죠. 저희들이 기가 막혀 ‘스님은 그러고 싶으세요?’ 라고 여쭈었는데 큰스님의 대답이 너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job 이고 내 job은 그에게 주는 것. 그것뿐이라네’ 라고 하셨죠.”
“오직 모를 뿐.”
“오직 할 뿐.”
숭산 스님께서 세상에 던진 저 깊고 절실한 화두가 어디에서 왔는지 비로소 실감되었다.
■ 니, 죽고 싶나? 살고 싶나? - 현각 스님
강릉 대성사에 계신 현각 스님은 열네 살에 스님이었던 이모님의 손을 잡고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으로 입산해서 올해 일흔두 살이 되셨다. 연세가 믿기지 않을 만큼 아직도 소녀처럼 곱고 순수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스님의 한 평생 살아오신 말씀을 들으면서 생사해탈이라는 대과제를 지닌 채 출가자로 한 생을 살면서 부처님과 스승을 믿는다는 의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숨을 바쳐 기도를 한다’는 게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다.
겨울 초입, 수행승의 푸른 기상처럼 전나무 숲이 아름다웠던 월정사 지장암에 들렀다가 강릉으로 스님을 찾아뵈었을 때 노스님의 첫 말씀이 이랬다.
“나는 누구한테 선뜻 기도하라는 소리를 못해요. 목숨바쳐 죽어라고 했으니까 기도를 하려면 그렇게 해야지, 어설프게 해서는 안 돼요.”
삼십 대 중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처절하게 부처님께 기도해서 목숨을 건진 스님다운 말씀이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아프기 시작했으나 참고 견디며 살던 중, 은사 스님을 따라 울산 석남사에 살 때였다.
“어른들이 공부한다고 워낙 한 점 빈틈없이 사시니까 아프다는 표를 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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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없고, 아픈 자체가 부끄럽다는 생각으로 살았죠. 대중들에게 미안하고, 내가 하도 오래 앓으니까, ‘아픈 중, 아픈 중’ 그렇게 소문이 났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외국인 수녀 한 분이 석남사에 놀러 왔던 인연으로 몸이 좋지 않았던 몇몇 스님들과 함께 병원에 들러 진찰을 받았을 때, 병원의 외국인 의사가 엑스레이 사진을 보고 나더니 깜짝 놀라면서 말했다.
“아니! 이런 상태로 어떻게 견뎠단 말입니까? 당장 입원해서 수술을 받아야 합니다.”
병명은 복막 결핵, 복막염을 너무 오래 방치해 두어서 균이 결핵으로 옮겨 갔는데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목숨에 지장이 있다고 했다.
스님은 기가 막혔다. 공부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속인 옷을 입고 앉아서 수술을 기다리자니 비로소 정신이 번쩍 났다.
“속인 옷을 입고 앉아 병원에서 이렇게 죽을 순 없다!”
더군다나 음식이라곤 아무 것도 먹을 수거 없었다. 물은 수도 냄새가 나서 못 먹겠고 음식을 잘 먹어야 한다면서 고기에 파, 마늘이 들어간 반찬들을 내 오니 한 술도 뜰 수가 없었다. 간신히 환자복을 입혀 놓고 석남사로 돌아갔던 노스님이 삼 일 만에 다시 오셨다.
“오셨는데 죽어도 절 마당에 들어서서 죽어야지 여기서는 못 죽겠다고 퇴원시켜 달라고 막 졸랐어요. 그러는 나를 못 당하시곤 노스님은 나를 데리고 석남사로 들어가셨습니다. 수술을 마다하고 병원을 나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지만 죽어도 절에 가서 죽을 생각이었어요.
석남사 구석방, 태백산의 한 암자 그리고 해인사 극락전으로 옮겨가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사숙되는 스님 한 분이 찾아 왔다. 어린 아들 둘에게 새어머니를 얻어주고 출가해서 누구보다 혹독하게 공부하던 스님이었다.
“현각! 이왕에 죽을 건데 성전암에 계신 성철 큰스님에게 인사나 드리고 죽자.”
그 소리에 스님은 정신이 번쩍 났다. ‘그래, 어떻게 내가 화두를 받았던가? 큰스님과 어떤 약속을 했던가. 인사도 드리지 않고 죽어서야 되겠는가?’ 화두를 가지고 공부하면서 경계가 들려서 찾는 것도 아니고는 큰스님께 가는 것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으나, ‘그래, 죽기 전에 가서 인사나 드리고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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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철조망을 뚫고라도 들어가서 만나 뵙자’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당시 성철 스님은 파계사 성전암에 철조망을 두르고 공부하시면서 세상에 나오지 않을 때였다. 드디어 선배 스님 세 사람이 아파서 몸도 가누지 못하는 스님을 데리고 길을 나섰다. 허리에 장삼 끈을 메고 두 스님이 앞에서 끌고 한 분은 뒤에서 밀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갔다. 열이 나서 콧물이 줄줄 흐르고 정신을 거의 잃을 지경인 스님은 가다가 드러눕고 가다가 쓰러지고 하면서 몇 시간을 걸어 성전암으로 올라갔다.
미리 사정을 전해 놓았던 터라 굳게 닫혔던 문이 열렸고 간신히 성철 스님이 계신 문지방을 넘는데 날벼락이 떨어졌다.
“니 왜 왔노?”
미리 스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던 성철 스님은 노발대발하셨다.
‘살 길이 있는데 신심 없이 물러서 있다가 왜, 다 죽어서야 왔느냐’는 안타까운 마음이 섞인 꾸중이었다. 본디 딴 말씀 없이 일언지하 본론으로 들어가는 성격의 성철 큰스님은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간신히 삼배를 올리고 쓰러질 듯 앉아 있는 스님에게 물었다.
“니, 죽고 싶나? 살고 싶나?”
“대답을 못하고 있는데 내 앞으로 오셨다가 물러났다 하시면서 ‘니, 죽고 싶나? 살고 싶나?’를 계속 물으시는데 어쩔 도리가 없더라고요 ‘살고 싶습니다’라고 했죠.” “그래, 살고 싶제? 살고 싶제?”
큰스님은 몇 번이고 확인하더니 이윽고 이렇게 해결책을 내놓으셨다.
“그래 그러면 기도해라. 너거(너희) 스님 삼천배하고 있제? 니도 따라 해라. 알겠제?”
그러나 스님은 대답을 못했다. 서너 번만 절을 하면 피를 토하고 죽을 건데. 하는 생각에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이다. 걸음도 걷지 못하는데 절을, 그것도 삼천배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끝까지 대답을 못하고 성전암을 나왔으나 해인사 극락전으로 돌아와 정신을 차리고 큰스님 말씀을 떠올렸다.
“네가 부처님 밥을 먹은 세월이 얼만데 그냥 죽을 수야 없지 않나? 부처님 멱살이라도 한 번 잡아보고 죽어야 하지 않겠나?”
스님은 곰곰이 생각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죽는 건 마찬가진데, 단 한 번 하다가 죽어도 이 몸뚱이는 부처님께 바치자. 내 영혼은 성철 큰스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스님은 그러한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하루에 한 번 꼭 목욕을 하고 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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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가는 옷과 신발을 따로 하면서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하기 시작했다. 아침 여덟시에 들어가 법당 중앙에서 절을 하는 은사 스님을 따라 절을 하는데, 천장이 땅이 되고 땅이 천장이 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첫 날 도저히 할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삼천배를 해내고,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참회의 눈물을 흘리면서 절을 했다. 몸도 가누지 못했는데 첫날 삼천배를 하고 이틀 연속 삼천배를 하자 놀란 것은 은사 스님이었다.
그런데 부처님께서 내리신 가피는 곧 나타났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눈물을 흘리면서 절을 하는데 사흘 되던 날 아침, 그간 힘이 없어서 산을 하나 매달아 놓은 것처럼 무거웠던 엉덩이가 누군가 들어주는 것처럼 가뿐하게 올라가는 것이었다. 절이 빨라지기 시작하자 은사 스님이 그랬다.
“니는 무슨 절을 그리 빨리 하노?”
스님은 그동안 자신에게 속은 것이 괘씸해서 ‘먹던 약을 다 끊고 사십구 일 동안 기도해라. 칠 일 하고 나서 칠 일 쉬고 그렇게 사십구 일 동안 절을 해라’하고 과제를 주셨던 성철 스님의 말씀을 어기고, 사십구 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삼천배를 했다. 그동안 무릎은 다 벗겨지고 피가 흘렀지만 몸은 점점 가벼워졌고 정신 또한 명료해지고 있었다.
드디어 스님은 사십구 일 기도를 무사히 마치고 성전암으로 올라갔다. 누구의 부축 없이 혼자 거뜬하게 올라온 스님에게 성철 스님이 한마디 하시더란다.
“니, 안 죽었네? 죽으라고 시켰더니만 안 죽었네?”
그리곤 또다시 과제를 내주었다.
“사십구 일 더 해라.”
두 번째, 세 번째, 다음엔 백일기도를 마치고 가니 큰스님께서 ‘진단서를 받아가지고 오너라’ 그러시더군요. 대구 동산병원에 가니까, 의사가 내 상처를 보고는 ‘고생했네요’ 소리를 몇 번이나 해요. 그리곤 ‘아무 이상 없습니다’ 그러는데 믿기지 않아서 내가 또 물어봤는데. 정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진단서를 하나 떼어서 큰스님께 갔더니. ‘조금 더 있다가 기도하는 보살들이 나오거든 보고 내려가거라’ 그러세요. 서울과 부산 신도들이 와서 기도할 때거든요. 그래서 내가 ‘왜요?’ 하고 여쭈었죠. 그러자 큰스님이 부탁하셨다고 한다.
“네가 처음 병원에 입원할 때 따라갔던 보살들이 네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믿지 않는다. ‘죽어서 저세상 사람이 된 지 오래되었다’고 하더구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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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니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가거라.
잠시 후 기도 시간이 끝나자 사람들이 들어와서는 스님을 붙들고 ‘아이구, 스님 정말 살아 계셨네요’ 하고 울었다.
“ 그렇게 내가 살아 있습니다. 거의 일 년을 기도한 셈이지요.”
이 이야기를 성철 스님은 그 뒤 성전암을 나오셔서 해인사에 머물며 법문을 하실 때 대중스님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보라! 이렇게 마음의 힘은 무한한 것이다.”
■ 내 인생 마지막 기도처럼 - 원만 스님
인상이 말할 수 없이 순박해 보이는 김천 수도암의 원만 스님은 서른 아홉에 출가했다. 그야말로 늦깎이 스님이다. 수계무렵, 나이가 너무 많아 아무도 상좌를 삼으려 하지 않았는데 당시 해인사 주지이셨던 법전 스님을 은사로 계를 받아서 정말 다행이었다고 말씀했다. 그런데 그렇게 늦게 출가한 스님의 출가 사연이 참으로 소박했다.
“그렇게 기도하고 싶더라고요. 그냥 기도해서 신도님들께 불교를 알려주고 싶었죠. 그런데 기도도 열심히 못했어요.”
그런 인연 때문일까? 스님은 오로지 이십여 분의 수도암 선방 스님네들이 수행정진을 여법하게 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을 수행으로 삼고 있다.
스님의 은사이신 지금 해인사 방장이자 조계종 종정이신 법전 스님께서 늦깎이 상좌인 스님을 두고 그러셨다고 한다.
‘그 아(아이)는 화주도 못하고 신도 관리도 못하는데 공심(公心)은 있다’고.
“은사스님께서 늘 강조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너희들이 출가해서 머리 깎고 먹물 옷을 입었으면 참선, 포교, 대중외호 이 세 가지 중 하나는 해야 밥값하는 것이다. ’가끔 신도분들이, 이렇게 매일 다른 스님들 뒷바라지만 하면 스님 공부는 언제 하느냐고 하지만 나는 스님들이 참선 잘하시고 신도님들 기도 잘하게 외호하며 사는 게 좋아요. 새벽 예불과 사시(오전 열 시)마지 기도에 안 빠지고 들어가고, 나한전에 참배하고, 그렇게 살아요.”
출가 전 동국대에서 인도철학을 공부했다는 스님은 자신이 매우 능력이 없는 주지라고 몇 차례나 말씀 하셨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다. 다실 겸, 문이 열려 있는 스님의 방을 들여다보고 정말 감탄했다. 앉은뱅이 조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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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책상 하나와 전화기 한 대가 전부였다. 흔한 책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풀을 먹일 줄 몰라 무명옷이나 삼베옷을 안 입어요. 그냥 기지옷 입다가 빨아서 저녁에 방에 깔아 놓으면 말라요. 그러면 그것을 입고 지내죠.”
스님 처소엔 일체 먹는 것을 들이지 않는다. 시장하면 부엌에 들러 찬밥에 물 말아 먹거나 죽 한 그릇 먹는다. 종정 법전 스님의 일대기를 정리하면서 수도암에 여러 번 가서 머물렀는데, 그때마다 부엌에 서서 음식을 드시는 스님을 보았다. 보기가 좀 민망해서 ‘스님, 식탁에 앉아 드시지요’ 하면 고개를 흔들었다. 공양주보살님도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스님의 성격을 알아서인지 그릇을 들고 서서 음식을 드셔도 신경 쓰는 기색이 없다.
돌아오는 날 점심을 먹고 선방 곁에 있는 조사전을 참배했다. 조사전에는 수도암을 창건한 신라시대 도선 국사와 선종의 초조로 불리는 달마 스님의 영정이 걸려 있었다. 삼십여 년 전 법당에 발도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 퇴락한 수도암을 중수한 법전 스님의 조그만 사진도 벽면 한 쪽에 걸려 있었다. 법전 스님께서 일 년에 한두 차례 머무신다는 조사전을 나오면서 나를 안내해준 종무소 사무장에게 말했다.
“출가해서 한평생 공부를 했으면 저 조사전에 영정 하나는 걸려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몇 세기에 한 분도 오르기 어려운 것이 조사전 영정 아닌가. 그만큼 열심히 공부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뜻으로 말한 것인데,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성철 스님께서 생전에 ‘도인엔 상급, 중급 하급 이렇게 세 종류의 도인이 있는데, 나는 중급이다. 하급 도인은 나를 찾아와 달라고 먼저 나서서 말하는 사람, 중급 도인은 법문하지 않고 산속에만 있어도 신도들이 찾아오는 사람, 상급 도인은 곁에 있어도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라고 하셨답니다. 진짜 도인은 상이 없어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다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그에게 한 방 먹고 비로소 깨달았다. 신라시대부터 지금까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왜 수도암 조사전에 두 분의 영정만이 걸려 있었는지, 그리고 원만 스님의 대중외호가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그리고 또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에 고정관념을 갖고 있었는지, 또 그것에 걸려 얼마나 많이 자유롭지 못한지를.
정말 도처에 선지식이 머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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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 일수 스님
구월 초, 서울 성북동 법천사에서 만나 뵌 일수 스님은, ‘삼십오 년쯤 공부하니까 마음이 열리고 조사어록이 보이더라’고 하셨다. 스님은 백양사 고불총림 운문선원장을 지냈다.
“선방에선 책을 보는 것을 금하잖아요. 해서 나도 책을 보지 않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가만히 앉아 있는데 글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참선 공부로 인해 마음이 열린거죠.”
‘마음이 열리다!’ 어디에도 걸림 없이 자유롭다는 말 같아서 언제 들어도 참 부러운 말이다.
“스님 마음이 열리면 어떻습니까?”
여쭤보기 어려운 질문을 해봤다. 대답하기도 어렵거니와 마음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들어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게 수행자분들의 말씀 아닌가. 스님께서는 간단히 대답했다.
“깨어 있는 상태가 되는 거죠.”
세상 만물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사실에 깨어 있고, 자신의 언행에 깨어 있고,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에 깨어 있게 된다는 것이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상황에 성성적적 깨어 있게 된다는 말씀으로 이해했다. 삶에서 그 깨어 있음이 얼마만큼 실현되느냐가 깨달음의 정도가 아닐까.
“제가 참 지독한 에고이스트였어요. 성격이 급하고 단순하고 고집이 세었죠. 내 공부한다고 원칙만 고집하고 꼬장꼬장 융통성 없이 굴고 마음이 좁아서 도반들, 부모형제들, 신도님들 등 나와 반연된 모든 인연들에게 상처를 많이 주었어요. 이제 비로소 그게 보여요. 이제부터라도 따뜻하게 대하려고 해요.”
서른일곱 살부터 거의 밤잠을 자지 않고 십오 년 동안 가행정진을 하셨다는 스님께 여쭈어보았다.
“수행의 효능은 무엇입니까?”
“나를 편안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편할 때 주변 사람들이 편해지고, 수행을 통해 안심(安心)을 얻어야 참사람이 됩니다. 너와 내가 따로 없이 한 자리인 사람이 참사람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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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셋, 젊음의 몸살로 방황하다가 우연히 들른 해남 대흥사에서 잿빛 승복을 보고 아련한 그리움을 일으켜 삭발해버리고 말았다는 스님의 인생에 대한 해석이 궁금했다.
“바람 따라 구름 따라 사는 것. 그냥 자연스레 인연에 따라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고통스러움이 오면 그 속에서 공부하고 편안함이 오면 그 속에서 또 공부하는 것입니다. 어느 것에 치우치지 말고, 순간순간 다가오는 경계를 타고 넘으면서 공부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공부죠.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거예요. 정진하지 않으면 결코 고향에 이를 수 없어요. 공부하고 정진하는 사람이 참사람입니다. 안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고향에서 미끄러져 가는 데.”
■ 끊지 말고 풀라 - 탄성 스님
생전에 금오 큰스님은 우편물이 오면 물건을 묶은 끈을 툭 잘라내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어쩌다 누군가 무심코 툭 끊어버리면 날벼락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끊지 말고 풀어라. 맺힌 것은 끊지 말고 풀어야 한다.”
한낱 물건도 그렇게 끊어 버릇하면 모든 일에 있어서도 그렇게 된다고 경계한 말씀이었다.
몇 년 전에 돌아가신 탄성 스님께 들은 이야기다. 탄성 스님께선 스승의 가르침대로 행자시절 이후 살아오시면서 무엇을 툭 끊어버린 적이 없다고 하셨다. 우편물을 부칠 때도 그쪽에서 풀기 쉽게 꼭 고를 내놓으셨다고 한다.
끊지 말고 풀라. 탄성 스님께 들은 이후로 이 말씀은 하나의 좌우명처럼 자리하고 있다. 연기법이 삶을 관통하는 법칙이고 보면 우리에게 닥친 세상의 모든 일은 다만 풀어야 할 일일 뿐 끊어버린 것은 단 하나도 없지 싶다. 그런데 그게 수월하게 안 된다. 그래서 부단한 수행이 필요한 것이겠다.
* 1994년 조계종 사태로 종단이 시끄럽던 때 스님은 개혁회의 의장으로 선 출되어 총무원에서 근무함
돌아오는 차 안에서 신도분들에게 들은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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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선 절대로 신도들이 차로 공림사에 모셔다 드리는 것을 마다하십니다. 꼭 하루에 네 번 들어오고 나가는 버스를 이용하시죠. 한 번은 법문을 마치고 버스 타는 데까지만 모셔다 드리기로 하고 스님께서 승용차를 타셨어요. 그러다가 운전하는 이가 ‘스님 타신 김에 그냥 공림사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하고 버스정류장을 지나쳤어요. 그러자 스님께서 차를 세우라고 하시면서 달리는 차문을 여셨어요. 결국 스님께선 승용차에서 내리시곤 버스를 타고 가셨죠.”
공림사에 다녀오고 나서 삼 년 뒤 스님께서 열반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벽에 걸려 있던 가사장삼 한 벌과 조그마한 책상 말고는 그 흔한 찻상이나 다구 하나 없이 정갈하고 조촐했던 공림사 작은 방에서……. 인터뷰 말미에 조용하게 토로하셨던 탄성 스님의 말씀 하나가 마음속에 남아 있다.
“수행자의 삶은 참, 고독합니다.”
고독! 수행자가 천형처럼 받아들여야 할 절대고독을 말씀하신 것이리라.
책을 엮을 때 스님의 행자시절 원고 내용 마지막에 이 말을 새로 썼다.
‘고로청향(古爐淸香) 옛 화로에 맑은 향기.’
탄성 스님은 바로 그런 수행자이셨다는 생각이 든다.
■ 인생을 잘 사는 비결 - 설정 스님
“스님 인생은 정말 뭘까요. 삶 속에 있으면서도 삶을 모르겠습니다. 알 것 같기도 하다가 다시 깜깜해집니다. 잘 사는 방법은 뭘까요?”
서울에서 수덕사까지 두 시간 만에 달려가 삼배를 올리고 다짜고짜 드린 질문에 수덕사 덕숭총림의 방장이신 설정 스님께선 빙그레 미소부터 지으신다. 스님의 푸근한 미소에 마음이 편해진다.
“인생이 무엇이냐고 의문을 갖는 자체가 인생이지. 의문을 갖지 않는 인생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죠. 어떠한 노력을 하며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묻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한 과정이겠죠.”
“알 것 같아 안심이 되기도 하다가 어느 날 보면 다시 아무 것도 모르겠는 원점에 와 있습니다.”
“부처님을 비롯해 모든 역대 선지식들의 출가는 인생에 대한 큰 의문, 즉 과연 삶이란 무엇인가. 대체 나는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하는 물음에서부터 출발한 것입니다. 그것을 확실히 아는 사람을 부처라 하고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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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이라 합니다. 모르는 사람을 어리석은 중생이라고 하는데 그걸 모르면 인생을 헤맬 수밖에 없죠. 중생의 입장에서는 삶과 죽음이 분명히 다른데 선사들은 둘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둘이 아닌 것을 깨달은 사람은 모든 것을 해결한 사람이죠. 이를 생사를 초월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오욕이라고 하는 소위, 자신의 욕망을 충족하기 위해서 살아가죠. 돈이나 명예나 이성 등을 추구하는 안일한 삶을 가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에 매달려 있는데 실제 그 오욕으로 나의 생을 채우려고 해봐도 채워지지 않잖아요. 돈이나 명예가 있다고 행복한 것도 아니고요. 물론 기본적으로 먹고 살아야죠. 그러나 많이 먹고 편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에요.
“잃어버린 자기를 바로 보는 것이 공부예요. 나라는 존재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것을 바로 보고 있다 보면 나라는 것도 없어져요. 나라고 의식하는 그놈마저도 없어질 때 자기의 본 모습이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그런데 중생들은 오히려 ‘나’라고 하는 것이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불교에서 최고 목표로 하는 것이 안심입명(安心立命)입니다. 마음이 편안해서 자기의 생명이 바로 된 상태를 말하죠. 중생의 생명은 어느 곳에 부딪쳐 없어질지 몰라 항상 위태위태해요. 돈, 명예, 이성을 쫓아가다가 부셔지곤 하죠. 모든 생각이 쉬어져서 가장 편안한 마음을 안심이라고 하죠. 어디를 가도 즐겁고 편안합니다. 그 경계를 법열이라고 하고 대우주와 내가 혼연일치된 상태라고 합니다. 그 상태야말로 어떤 상태에서도 걸림이 없는 자유자재한 경지죠. 원효 선사는 이를 ‘일체무애인’이라고 하셨어요.”
‘발심수행장’에 나오는 원효 스님의 말씀입니다.
오늘도 그지없이 나쁜 짓은 많이 해도
내일 내일 미루면서 착한 일은 얼마 없네
금년 일 년 미루면서 번뇌 속에 한량 없네
내년 후년 미루면서도 도 닦는 일 못하누나
찰나 찰나 잠깐 흘러 낮과 밤이 금방 가고
하루하루 번개처럼 보름 한 달 훌쩍 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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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두 달 쉬지 않고 홀연 일 년 지나가서
한 해 두 해 거듭하여 문득 죽음 닥쳐오네
깨진 수레는 가지 못하고늙은 몸은 닦지 못한다
누워 게으름 앉아 혼미 망상만이 어지럽네
얼마나 살겠기에 낮과 밤을 헛되이 보내며
살날이 얼마라고 평생토록 닦지 않나
이 몸은 반드시 죽음이 있으니 다음 생을 어찌 하나
생각하면 급하구나 생각할수록 급하도다
원효 스님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해 쓰셨다는 저 말씀을 들으면서 설화 한 토막을 떠올린다. 히말라야 설산에 한고조(寒苦鳥)라는 새가 산다. 그는 둥지를 틀지 않고 살기 때문에 밤만 되면 사나운 눈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온몸이 얼어붙는 괴로움을 겪는다. 그래서 그는 ‘날이 밝으면 꼭 아늑한 둥지를 지으리라’ 하고 다짐한다. 그러나 날이 밝으면 따스한 햇살과 설산의 화려한 풍광에 눈이 팔려 집을 짓겠다는 다짐을 잊어버린다. 그리곤 또다시 밤이 되면 똑같은 다짐을 하며 추위에 떨다가 일생을 마감한다. 중요한 문제를 차일피일 미루고 어리석음과 게으름 속에서 윤회하는 우리의 삶도 저와 무엇이 다를까?
“스님 저는 게으른 편인데요. 게을러서 어떡하죠?”
“아침저녁으로 백팔 배 하면서 참회하세요. 마음속으로 ‘과거 전생에 잘못한 모든 중생에게 참회합니다. 나로 인해서 억울함을 당했던 모든 생명에게 참회합니다. 나태와 방일로 세상을 살았던 것을 참회합니다.’ 이렇게 참회하면서 정진하세요.”
제2부 공부하다 죽어라
■ 하루에 단 오 분만이라도 부처님처럼 - 성수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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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갈 무렵 지리산 자락의 산청에 계신 성수 노스님을 찾아뵈었다. 스님을 찾아뵙는 것이 벌써 몇 번째인데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을 하신다. 신분을 밝히고는 언제언제 찾아뵈었는데, 못 알아보시냐고 좀 억울한 얼굴을 했더니 “나는 미인 얼굴만 기억하거든”하고 퉁을 주신다. ‘차라리 가만이나 있을 걸’하고 후회했다.
조계종 원로회의 의원이신 성수 스님이 주석하시는 해동선원의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예불은 특별했다. 원효 선사를 존경하는 성수 스님의 뜻으로 짐작되는데, 해동 선원의 법당엔 부처님을 모시는 대신 원효 선사를 모셨다. 그곳의 조석 예불은 죽비소리에 맞춰 삼배를 올리는 것이 전부다.
그런데 예불을 올리시는 노스님의 모습이 어찌나 장엄하고 간절해 보이던지, ‘절 한 자락을 하더라도 정성을 다해서 하라’ 시던 노스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스님 인생이 재미있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그냥 배우려고 하나? 회초리 석 단 지고 와서 한 삼 년을 하루 천대씩 맞으면서 배워야지.”
말씀은 짐짓 그렇게 해도 스님께선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사람은 복으로 사는 거거든. 복을 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복은 비는 게 아니고 짓는 겁니다.”
노스님께서 회초리 석 단 없이 자비심으로 내 놓은 ‘복 짓는 방법 다섯 가지’는 이랬다.
“첫째, 화를 내지 마라. 한 번 내는 화로 인해 쌓아 놓은 복을 다 까먹는다는 것을 명심하라.
둘째, 낭비하지 마라. 재물을 헛되게 쓰지 않는 것이 복을 아끼는 것이다.
셋째, 아침에 해 뜨고 나서 해가 질 때까지 눈을 붙이지 마라.
넷째, 물질보다는 마음 보시를 많이 하라.
다섯째, 지혜를 쓰는 게 복이다. 복 중의 제일이 ‘지혜복’ 임을 잊지 마라.”
지혜를 잘 쓰는 것이 복을 짓는 첫 번째라는 말씀이 긴 여운으로 남는다.
“스님, 생업이 있는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선방에 와서 지낼 순 없잖습니까? 일상생활에서 도를 실청할 수 있는 방법을 좀 일러 주세요.”
“세 가지만 말해 주지요. 우선, 매일 아침, 처음 하는 말을 좋은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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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세요. 남의 속을 푹 찌르는 ‘송곳 말’을 하지 말고, 머리를 내리치는 ‘도끼 말’을 하지 말고, 남을 때리는 ‘작대기 말’은 하지 마세요. 첫 말 한 마디라도 선하고 푸근하게 하면 복이 찾아올 겁니다. 덕이 쌓이고 득이 되는 말을 하세요.
그리고 두 번째, 매일 첫 번째 내딛는 걸음 한 자리라도 무게 있게 걸어 보세요.
마지막으로 세 번째, 하루 스물 네 시간 중에 단 오 분이라도 부처님처럼 단정한 자세를 가져보십시오.
밤이 되자 문 닫은 초등학교를 개량해 만든 선원 운동장 앞마당으로 별빛이 쏟아졌다. 하루에 단 오 분만이라도 부처님처럼 단정한 자세로 걸어보고 부처님처럼 말하고 생각하며 부처님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해보리라 생각하며 별빛, 달빛으로 물든 운동장을 거닐었다.
인생에서 가장 정직한 보답을 부르는 것이 지속적인 연습이 아니던가.
■ 공부하다 죽어라 - 혜암 스님
70대 중반이셨던 스님을 뵌 것은 1990년대 초반, 그리고 인연이 성숙하지 않았음인지 스님에 대한 글은 불발로 끝났고 2001년 마지막 날, 스님은 세연을 다 하셨다.
입적하시고 몇 년 뒤 스님의 법문집을 만드는 과정에 가지런히 정돈된 단정한 필체의 원고를 만났다.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성격만큼이나 꼿꼿한 필체를 보면서 옛날 사람들이 신언서판(身言書判)으로 사람을 평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람이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선택한 길에서 한 점 남김없이 자신의 능력을 다 쓰고 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스님의 말씀을 읽었다.
고향 전남 장성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마을 서당에 다니면서 한학을 익혔던 혜암 스님이 일본으로 간 것은 17세, 일본에서 직장에 다니면서 고학을 했다. 책을 많이 읽었는데 특히 동화책과 위인전을 좋아했다. 그것이 평생의 재산이 되었다. 먼저 살다간 위대한 사람들에게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고 그 가르침을 마음에 담았다. 수많은 책을 읽다가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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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조물주라면 눈도 귀처럼 두 군데로 나누어 뒤에도 붙였을 텐데.’
수많은 책을 뒤적였으나 답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한 스님을 찾아갔다.
그때 처음 “범소유상 개시허망 약견제상비상 즉견여래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라는 말을 들었다. 무릇 모양 있는 것은 다 비어 있고 거짓된 것이다. 이를 아는 것이 부처를 아는 것이다. 가슴으로 스윽 그 말이 들어왔다. 그날 ‘금강경’ 한 권을 얻어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불교를 만났다.
일본에서 출가하려고 했으나 수행하기에 일본보다는 한국이 낫다는 선배 스님들의 조언을 듣고 백양사 운문암에 주석하고 있던 인곡 스님을 찾았다. 1940년대 중반, 스물다섯 살 때였다. 탈속한 분위기의 인곡 스님은 삼십 대에 선방 조실로 추대될 만큼 선지가 깊은 당대의 선지식, 인곡 스님이 하이칼라에 양복을 입고 찾아온 젊은이에게 일언지하에 물었다.
“우리 집 소가 여물을 많아 먹었는데 이웃집 말이 배탈이 났다. 그래서 천하의 명의를 불러 고쳐달라고 했더니. 아랫집 돼지 엉덩이에다가 침을 놓았다. 이런 이치를 알겠는가?”
젊은이는 주먹을 불끈 쥐어 내밀어 보였다. 침묵한 채. 인곡 스님이 다시 물었다.
“고향이 어딘가?”
젊은이는 방바닥을 한 번 쳤다.
“이름이 무엇인가?”
일원상(一圓相)을 그려보였다.
그날 인곡 스님은 젊은이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제자로 삼았다.
혜암 스님은 훗날 후학들을 향해 이렇게 경책했다.
“언제나 내 공부를 잘하고 내 일을 잘하는 것이 남을 도와주는 것이다. 자신에게 속지 말고 각자 하는 일들을 잘하되 밖으로 인연 따라 남을 도와주며, 가난하고 고행하는 것부터 배우라.”
가난과 고행.
혜암 스님이 경책한 가르침이 너무나 그리운 요즘이다. 승속을 막론하고 불자라고 하는 우리는 이 두 가지를 잃어버렸거나 팽개쳐버렸다. 요즘 스님들, 저 인곡 스님의 말씀을 귀담아 들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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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발한 머리를 만져보고, 법의를 돌아보고, 대중처를 떠나지 마라”고 하셨건만 요즘엔 왠일인지 홀로 사는 스님의 토굴이 너무 많다. 대중처를 떠나는 것을 비상처럼 여기라고 가르쳤던 옛 스님들의 진의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스승인 인곡 스님은 혜암 스님의 그릇을 알아보고 제자로 맞이했으나 해인사에서는 앞가르마를 가르고 양복을 잘 차려입은 청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저 모양을 하고 무슨 공부를 하겠다고, 며칠 만에 돌아갈 위인 아닌가. 말은 안 해도 그런 분위기였다.
그러나 한 번 마음먹으면 성취하기 전에는 뒤로 물러서지 않는 성격의 스님은 몇 날 며칠을 몰래 후원으로 들어가 허드렛일을 도맡아했다. ‘허락도 없이 어디를 들어오는가’하고는 대중들이 끌어내면 다시 몰래 들어와 일을 하면서 실랑이를 벌인지 일주일.
드디어 해인사에선 고집 센 젊은이에게 손을 들었고 반세기 후, 이 청년은 해인사의 방장에 오르고 한국불교의 상징인 종정이 되었다.
공부하다가 죽으리라는 생각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시간을 자신의 눈동자보다 더 아꼈으며, 먹고 잠자는 것에서 자유로워지고자 생식을 일삼고평생 눕지 않은 뒤였다.
출가해서 공부하는 것이 너무 기뻐서 잠을 자지 못했다는 혜암 스님.
삼 일 혹은 일주일이면 견성한다는 책 속의 말을 믿고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자리에 눕지 않다 보니 어느 새 수십 년이 흘러갔다. 스님은 출가해서 하루에 한 끼씩만 드셨다.
스님은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먹는 것을 최대로 줄여야 한다는 것을, 많이 먹으면 절대로 공부가 안 된다는 것을, 배가 고파야 공부가 제대로 된다는 것을 생래적으로 아셨을 것이다.
‘전까지 밥 도둑놈들(몸뚱이)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오늘부터는 네 말을 듣지 않겠다. 여태껏 줄 것 다 주었으니까 더 이상 먹을 것을 달라고 하지 마라’고 몸뚱이에게 일렀다고 한다.
“공부하는 데 가장 방해가 되는 잠도 알고 보면 먹는 것 때문에도 일어나는 것이거든요. 항상 ‘사람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바른 법을 만나기 어려운지라 뜬 목숨이 호흡하는 사이에 있거늘 이 몸을 금생에 제도하지 못하면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 이 몸을 제도하리요’ 하는 정신으로 나 자신을 경책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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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일깨웠어요.”
마음이 급해서 등을 바닥에 붙일 수 없었고 잠을 잘 수 없었던 것이다.
후학이 훗날 칠십이 넘은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평생 일종식(一種食)과 장좌불와(長坐不臥) 정진을 해오셨습니다. 이런 투철한 정진력은 어디서 나왔습니까?”
“육 개월을 앉지도 않고 서서 밥을 먹고 잠을 자지 않아도 끄떡없었습니다. 백 년을 자지 않아도 일이 없는 겁니다. 잠귀신이 자는 것이지 눈이 자는 것이 아닙니다. 잠귀신에게 항복 받으면 됩니다. 산에 가서 풀을 뜯어 먹고 물만 먹어도 죽지 않습니다. 일체유심조. 마음입니다. 장좌불와라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는 없지요 옛날 조사 어록 등에 보니까 이르면 사흘이나 일주일에도 돈오견성을 한다는 이야기가 있기에 급한 마음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게 어느새 오십 년이나 계속됐어요. 이제는 때론 몸이 안 좋아 누우려고 해도 십 분만 누워 있으면 가슴이 답답해 못 견뎌요. 견성하겠다고 앉은뱅이 잠만자다가 끝나는 게 아닌가 싶군요.”
“선(禪)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 말씀으로 결코 선과 교는 둘이 아닙니다. 다만 실천하기 위한 이론이 교일 뿐이지, 사실 마강법약(魔强法弱)한 말세에는 교가 살아야 선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말세라서 글을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위에 선지식이 없기 때문이에요. 바로 가는 방법을 알기 위해서 글을 배우는 것이지요.”
그러고 보면 글이 참, 큰 스승이다. ‘교리는 눈이요, 수행은 발’이라 하지 않는가. 실천도 올바른 이론이 있을 때 가능하고, 이론이 아무리 뛰어나도 실천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정혜쌍수 아닌가.
* 정혜쌍수 : 禪定과 智慧 즉 敎學을 함께 닦는 불교 수행법으로 고려 보조 국사 지눌이 주장
그리고 스님은 좋아하는 조사어록 몇 권을 말씀했다.
“좋은 어록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육조단경(六祖檀經), 돈오요문(頓悟要門), 전심법요(傳心法要), 임제록(臨濟錄)등을 좋아합니다.”
공부하다가 죽으리라. 스님은 그러한 원력을 세우고 일찍부터 용맹정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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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입했다. 1950년대 초, 삼십 대 초반일 때 고성 안정사 토굴에서 성철 스님과 단 둘이 정진할 때는 신도들이 오지 못하도록 인법당 구들장을 파버렸다. 그리고 삼동 한 철 동안 좌복 하나만 가지고 불도 때지 않은 방에서 정진했다. 스님이 밥을 짓고 설거지는 성철 스님과 함께 했다. 성철 스님은 자신보다 십여 년 아래인 후학에게 일렀다고 한다.
“부모를 죽이고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을 만큼 공부해야 하네.”
그 말씀을 가슴으로 듣고 그 후 스님의 발걸음은 오대산, 태백산, 지리산 등으로 옮겨졌다. 오대산 한 암자에서 겨울을 났다. 불이 난 암자에 얼기설기 지어놓은 홑집을 발견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양식도 땔 나무도 없이 나무토막을 하나 가져다 놓고 정진했다. 잣잎과 하루에 콩 열 개씩만 먹었다. 월정사에서 대중들이 쌀을 가지고 왔으나 먹지 않고 새와 쥐들에게 주었다. 오 개월 후, 심신이 일여가 됨을 느꼈다. 큰 구렁이와 멧돼지들이 친구가 되었다. 봄에 감자를 신었다. 멧돼지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 밭 근처만을 샅샅이 뒤질 뿐, 친구가 심은 감자는 그대로 두었다.
원칙에 철저했던 스님도 자신과의 약속을 어긴 게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평생 숨어서 정진하리라. 상좌를 들이지 않으리라. 절을 맡지 않으리라.’
스님은 후학들에게 이를 지키지 못한 변을 이렇게 토로했다.
“사실 방장스님(성철 스님)을 보필하다 보니 뜻에 없는 중노릇을 세 가지 하게 되었지. 토굴 같은 데 숨어서 평생 정진하면서 살고 싶었는데 그러지를 못했고, 상좌를 안 들이려고 했는데 큰 절에서 살다보니 안 받을 수도 없었고, 절을 안 맡으려고 했는데 방장스님과 사중에서 원당암을 맡으라고 해서 할 수 없이 맡게 되었지. ‘일파잠동만파수(一波暫動萬波水)라고, 하나가 잘못되니 자꾸 가지가 생겨나 내 뜻과는 달리 이렇게 된 것이 조금 아쉽기도 하고.”
홀로 살 운명이 아니었는지 스님은 해인사에서 대중과 함께 살았고 방장과 종정을 지냈다. 총림의 가장 큰 어른인 방장으로 있으면서 스님은 재가대중들과 함께 정진했다.
누군가 혜암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께서 입적하고 난 먼 후일 어떤 사람이 ‘혜암의 철학’이 무엇이었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을 할까요?”
“밥 먹고 잠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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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물건도 취하지 말고, 한 물건도 버리지 말라 - 철산 스님
“‘금강경’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금강경’ 전체의 핵심은 세상 살아가는 데 한 물건도 취하지 말고, 한 물건도 버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좋다고 해서 취하지 말고 나쁘다고 해서 버리지 말라는 것이죠. 세상을 살아가면서 살림살이하고, 밥 먹고, 마당 쓸고, 직장에 다니고, 가족 거느리고 사는 것, 그 모든 게 다 도입니다. 좋다고 집착하고 나쁘다고 버리려고 하면 그 순간, 어긋나 버리는 겁니다. 오면 오는 대로, 가면 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 그게 무소유고 평상심입니다.
스님은 관세음보살도 그냥 읽으면 송(誦)이지 염(念)이 아니라고 하셨다.
“‘나’라는 존재는 ‘텅 빈 곳간처럼 비었구나’라는 통찰은 매우 중요한 겁니다. 도둑들이 곳간에 보물이 가득하다고 잔뜩 기대하고 멀리서부터 파고들어 갔는데 텅 비어 있다면 어떻겠습니까? 허망하기 짝이 없겠죠. 그러나 한 생각 돌이켜 ‘저 집은 휘황찬란하게 보이지만 실은 아무 것도 없다’라는 것을 안다면 모든 욕망과 탐욕심을 놓아버리게 되죠. 그래서 ‘비어 있다’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반야심경’의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정신과 물질이 모두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보고 일체의 고통을 건너다)’의 참 뜻을 알아야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죠. 인연법으로 얽혀 있는 것이지 본래 나의 본질은 뿌리 없이 공한 겁니다. 공한 줄 알아서 마음만 놓아버리면 본래 청정해서 때가 붙을 수 없는 것입니다.
주위에서 나이 스물다섯의 성실하고 선한 청년에게 ‘장가들라’고 그렇게 야단이었는데, ‘장가는 무슨’ 하고는, 모든 것을 다 알게 하는 그 깊이와 크기를 알 수 없는 ‘지혜’를 성취하기 위해 절에 들어오셨다는 스님께 마지막으로 여쭈었다.
“스님 인생이 뭡니까? ‘인생은 나그네길’ 일까요?”
스님도 우리 일행도 웃었지만. 오십이 넘은 나는 아직 인생이 무엇인 줄 모르겠어서 선지식들께 꼭 이 질문을 빼놓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인생은 苦라고 하셨잖아요. ‘인생은 고’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때 벗어나는 길을 찾게 됩니다. 苦 임을 철저히 깨닫고 벗어나는 길을 찾는 것, 그것이 불교예요. 본래 없는 苦를 즐겨 받으면서 苦인줄 모르고 살아가는 게 우리 중생들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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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 깰 것 - 월암 스님
월암 스님의 출가 동기는 이렇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시험을 치를 무렵, 담임선생님이 아버지를 찾아왔다. 학교에서 늘 급장을 하면서 공부도 잘하고 책도 많이 읽는 아이가 가정형편이 어려워 중학교 입시를 치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정방문을 한 것이다.
“염려마세요. 아드님이 공부를 잘하니까 장학금을 받아 공부시키면 됩니다.” 드디어 경주에서 수십 리 떨어진 벽지의 시골 소년은 경주로 대망의 유학을 가게 되었다.
초등학교 오 학년 때 학교문고 출납을 담당하면서 도서실에 꽂혀 있던 책을 거의 다 섭렵했다. 그 중에서도 왜 그렇게 부처님의 일대기나 원효 대사 전기가 사무쳐 마음속으로 들어왔던지 읽고 또 읽었다.
열다섯 살 되던 해, 날짜도 잊을 수 없는 그날, 음력 팔월 오 일, 양력 구월 오 일, 소년은 학교 근처 분황사로 가서 훗날 은사가 된 지도법사스님께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출가를 해버리고 만다.
중학교에 다니면서도 방과 후면 도서실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철학이며 문학, 불교 책에 빠져 있을 무렵이었고, 불교에 대한 생각이 조금 더 정리되고 차원이 높아져 있어 ‘정말 출가해서 제대로 된 수행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즈음이었으니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절로 들어가 버린 것이었다. “그날 은사의 게송은 출가에 대한 나의 마음을 격발시키기에 충분했죠. 그 게송이 얼마나 마음으로 사무쳐 들어왔는지 그 흥분을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스님은 그때를 그대로 재현하듯 눈을 지긋하기 감고 게송을 읊었다. 스님의 운명을 결정지은 게송은 이렇다.
“나는 무엇을 생각할까. 도를 생각하리라. 나는 무엇을 말할까. 도를 말하리라. 나는 무엇을 행할까. 도를 행하리라. 도를 생각하는 마음 잠깐인들 잊으리까.”
열다섯 살의 소년은 그 게송을 듣고 생각했다.
“맞다! 대장부가 이 세상에 태어나 도를 생각하고 말하고 행한다면 그 이상 무엇이 있겠는가. 바로 이 길이다.”
경주불교학생회 회장과 영남불교학생회 회장을 지내면서 ‘위대한 신라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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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중흥, 재현하리라’는 원력으로 꽉 차 있던 스님은 ‘그 시절 비록 나이는 어렸으나 왜 출가를 했는지, 무엇 때문에 중노릇을 하는지에 대한 답이 뚜렷했으며 수행자에 대한 자기 정립이 누구보다 확고부동 했다’고 했다.
절에 있으면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포교 일선에서 활동하다가 군대에 다녀오고 삼십 대 중반에 북경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십여 년 동안 공부와 포교를 병행하면서 선학(禪學)으로 박사 학위를 받은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다.
“그런데 기대를 걸었던 아드님이 중학교 때 출가를 해버렸으니 부모님이 상심하시지 않으셨나요?”
“말도 마세요.”
공부 잘하고 매사 똘똘하던 큰아들이 지방의 명문인 경주중학교에 들어가자 부모님은 조금 있던 논밭을 팔아 경주 시내로 이사왔다.
‘내 아들이 좋은 학교에 다니니 공부 잘해서 판검사가 되어 출세하리라’는 굳건한 믿음으로 도회지로 나온 아버지는, 아들이 절로 들어가자 망연자실했다. 그리곤 급기야 집을 나가셨다. ‘저 집 공부 잘하는 아이가 출세해서 부모를 먹여 살릴 줄 알았더니 절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더라’란 소문에 비감했던 아버지가 화를 이기지 못하고 가출을 한 것이다.
스님은 지금까지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었다.
군대에 다녀와 지리산 쌍계사 칠불암에서 재발심을 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하고 어머니께 인사를 드리려고 잠시 집엘 들렀다. 홀로 동생을 키우면서 고생을 하시던 어머닌 큰아들을 보자 무척 기뻐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나이에 절집에 들어갔다가 이젠 철들어 당신 곁에서 살려는가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잘 해 주었다. 하룻밤만 자고 가려던 계획은 이제까지 보지 못한 화색 만면한 어머니의 얼굴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중학교 이 학년 때 출가의 길을 선택했던 모진 아들은 정확히 한 주 후 걸망을 짊어진 채 집을 나서면서 한 마디만 했다.
“어머니 저 갑니다.”
사립문에 기대어 무정한 아들에게 어머니가 내 뱉은 한마디도.
“마, 가나?”
스님은 지금도 ‘그렇게 꼭 가야만 하는가’ 하시던 어머니의 그 한마디와 다시 절로 떠나는 큰아들을 망연히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한 자식 출가 해 구족이 승천한다’고 했으나 출가해서 자신의 몸 하나 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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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서글픈 심정이라고 했다.
“불교는 ‘꿈을 깨라!’는 것을 가르치는 종교입니다. 악몽도 길몽도 꿀 수 있는 게 우리 인생입니다. 간밤의 꿈은 소몽(小夢)이고 인생은 대몽(大夢)이죠. 우린 지금 칠팔십 년에서 백 년 정도 큰 꿈을 꾸고 있는 겁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악몽이든 길몽이든 꿈인 것이니 ”꿈 깨라!“하신 겁니다. 팔만대장경 법문이 그 하나죠. 그런데 한국불교는 악몽을 꾸지 말고 길몽을 꾸라고 일러주고 있어요. 스님들은 신도들에게 그걸 말해 주고 있고 신도들도 그런 이야길 좋아하죠. 중생은 꿈에 젖어 있어서 꿈을 깨면 죽는 줄 알아요. 그리곤 늘 길몽 꾸는 방법을 묻습니다.
스님의 법문을 부끄럽게 듣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디 가서 신수 묻기를 좋아합니다. 말이 좋아 가피이고 영험이죠. 내가 관세음보살을 몇 번 부르고 삼천 배를 몇 번 했으니 우리 집에 편안함이 오겠지. 건강하겠지 하는 것은 결국 꿈속의 일로 길몽 꾸는 것을 가르치는 거예요. 설사 방편으로 했다고 하더라도 핵심이 아닙니다. 그래서 ‘꿈 깨!’라고 하는 겁니다. 꿈을 깨고 나면 산해진미를 먹은 자나 굶은 자나 똑같습니다. 꿈에선 부자를 매우 부러워하지만 꿈을 깨고 나면 똑같습니다. 도를 깨쳐 바른 눈이 열리면 원수니 친한 이니 하는 경계는 다 꿈속의 일입니다.”
스님의 법문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좋은 일만 일어나고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기 원하는 것은 올바른 불교가 아닙니다. ’칠불통게‘에서도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 자정기의(自情其意)‘라고 했습니다. 모든 악을 짓지 말고 모든 선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으나 그것에만 머물면 불교가 아닙니다. 자정기의, 스스로 그 마음(뜻)을 깨끗이 하라, 곧 자각기심(自覺其心), 그 마음을 깨달으라’를 행했을 때 앞의 것도 동시에 살아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상대적인 것이 아니고 그 전체를 다 보듬어서 중도로 회통될 때, 그러니까 세 번째 것을 깨우쳤을 때 선악이 올바른 것입니다. 역대 조사들께서 이런 말을 다 하셨어요. 요즘 신행 차원을 보면, 신도들은 스승을 찾아 공부할 생각은 안 하고 간절하지 않습니다. 이젠 재가불자들이 스님들에게 화엄의 경계, 본래면목의 도리를 물어야 합니다.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무저선(無底船)의 의미를 새겼다. ‘그렇구나!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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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는 것은 밑이 없는 배를 탄 채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과 같구나. 쉼없이 젓지 않으면 죽음인데 이렇듯 게으르구나’하고.
몇 년 전 울산의 한 신도 집에 볼일이 있어 갔다가 건물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오는데 누가 불렀다.
“아저씨!”
‘설마 나에게?’하고 돌아보니 한 아주머니가 도끼눈을 하고 째려보면서. “차를 왜 여기에다 세워놔요?” 하고 따지듯 물었다. 생전 처음 듣는 아저씨라는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하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물었다.
“아주머니 방금 저를 뭐라고 부르셨습니까?”
“아저씨요!”
“내가 아저씨로 보입니까?”
“아저씨를 아저씨라고 하지 뭐라고 그래요?”
“절 집에 들어와 삼십여 년 동안 합장의 숲에서 너무나 편안하게 살아왔더라고요. 돌아보니 한 번도 합장의 울타리를 넘어간 적이 없었어요. 기독교인과 부딪쳐본 적도, 이슬람인과도 만난 적이 없었어요. 불자 아닌 사람들을 만나 포교를 하거나 그들의 고충을 이해하려 했던 적이 없더군요. 다시 말하면 소록도에 한 번 가본 일 없었던 거죠. 수행자라는 명목 아래 이 회색 옷을 입은 채 대접만 받아왔어요. 신도들이 가져오는 것을 받기만 했지 한 번도 몸 바쳐 희생과 봉사로 이웃을 도운 적이 없었어요. 말로도 보시해준 적이 없었어요.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빵떡 하나 준 적 없고 아픈 사람에게 약 한 번 사준 적 없었습니다.”
그날 이후 열여덟 살에 처음 밥상에 앉아 법문을 시작해서 오늘날 까지 이찬여 회의 법문을 토해내면서 불교중흥에의 원력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 스님은 자신을 아저씨로 부르는 사람에게 어떻게 불법을 전하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진지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스님의 저 고민은 불자인 우리들의 고민과 다르지 않음을 돌아보게 했다.
■ 절대 고독 속으로 - 현종 스님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소년이 어머니께 말씀드린다.
“절에 가서 공부 좀 하고 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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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네에 있는 버섯공장에서 한 달 동안 일해서 번 돈으로 책 몇 권을 마련, 한 해 더 공부해서 장학금을 주는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든지 아니면 공무원 시험을 볼 생각이었다.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공부를 잘하는 아들에게 기대를 걸었던 분이어서 쉽게 허락하실 줄 알았는데 어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안 된다.”
지아비가 세상을 떠난 후 홀로 농사를 지으면서 자식들을 키우던 어머니는 신산한 세상살이를 이겨내려는 듯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셨다. 그날도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담배 연기를 길게 뿜어냈다.
아들은 어머니의 반대가 의아하게 느껴졌다. 누구보다 신심이 깊었던 어머니는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자주 절에 다녔다.
이삼 일을 허락하지 않고 있던 어머니는 아들의 지속적인 요구에 드디어 속내를 드러냈다.
“너는 가면 중이 될 것이다.”
염불수행을 많이 했던 어머니는 아들이 절에 들어가면 세간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감한 것이다. 집안을 좀 일으켜주었으면 했던 아들이었기에 더욱 절에 들어가는 것을 만류했을 것이다.
겨우 두 달을 허락받고 절에 갔던 아들은 행정학 경제학 책을 뒤로하고 조사어록 등 불교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해 오월 그는 출가했다.
스님은 출가 후 동국대와 일본에서 공부를 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등 후학 교육을 담당하다가 불학연구소 소장과 삼성암 주지 소임을 함께하고 있었다.
스님의 출가 동기와 행자시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삼십삼 년 전, 마음이라는 그 주인공을 찾으러 떠났던 청년에게, 아니 이미 오십 대의 중진 스님이 된 현종 스님께 단도직입적으로 여쭈었다.
“어떤 것이 제대로 하는 중노릇입니까?”
어떤 원력을 가지고 어떤 방법으로 가야 하는가에 대해 함께 여쭤 보았는데 사실, 중노릇이란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사람노릇’과 같지 않겠는가.
“어떤 계기로 출가했든 일주문 안에 들어오면 어떻게 살면 한 생의 삶을 잘 살 수 있을까. 깊이 궁구할 수밖에 없습니다. 늘 물음을 갖게 되면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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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가 하는 인생관과 삶을 사는 데 가장 문제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그런 사유를 거쳐야 합니다. 자신에게 끊임없이 그것을 물었을 때 자연스럽게 답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시대가 변화해도 인생의 근본문제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일어나는 괴로움은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출가란 무엇입니까? 미친 듯이 죽도록 절대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출가입니까?”
“출가는 인간의 본래 밝고 맑고 따뜻한 조건 없는 마음을 찾아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는 나그네의 길이죠. 미친 듯이 죽도록 절대고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출가해서 지향해야 할 방법론이고요.”
“그렇다면 세속에 있으면서도 절대고독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남쪽에 심으면 유자가 되고 북쪽에 심으면 탱자가 된다고 하듯이 환경적으로 높은 확률로 가는 것이죠.”
“수행이라는 것은 순금을 제련하기 위해 용광로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세속의 우리는 일주일 혹은 이십일 일, 백 일, 삼 년 정도 수행 기간을 정해놓고 용광로에 들어갑니다. 스님들의 출가는 전 생애 동안 용광로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해봤는데요. 맞습니까?”
“물론이죠. 그런 목표와 이상을 가지고 가는 것이 출가죠.”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삼성암에선 곧 백 일 동안 철야정진에 들어간다. 백 일 동안 매일 밤 아홉 시부터 새벽 네 시 반까지 신묘장구대다라니 삼백 번을 송한다고 하는데, 백 일 동안이면 삼만 번을 염송하게 된다. 33응신에 대비해 재가불자 33명과 함께 절대고독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모기장을 짜야 한다는 스님께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
“그런데 스님, 잠은 언제 자지요?”
■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기도하라 - 영운 스님
은해사 백흥암 선원장 영운 스님의 미소는 오월의 모란처럼 화사하다. 저 여유롭고 행복해 보이는 웃음은 수행자로 살아온 기쁨에서 우러난 것일까, 하고 있는데, 그 의문이 풀리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앉자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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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에게 하신 스님의 첫 말씀이 ‘감사함’이었다.
“출가한 절에서 주지 소임을 마치고 이제 막, 선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에 입승을 살다가 갔는데 육 년 만에 돌아오니 마치 공부를 다 해 마친듯 이리 한적할 수가 없네요. 이 한가로움이 너무 감사해서 지나가는 바람에도 흘러가는 물에도 절을 합니다.”
역시 행복의 밑그림은 감사한 마음이다.
“머리에 복잡한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마음 닦는다는 것이 시간에 쫓겨서 공부하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구나. 마음 하나 돌려 이렇게 감사함으로 모든 것이 다가올 때 공부가 아니겠나 싶습니다. 지금도 법당에 가서 기도하고 있노라면 부처님과 하나 되는 그런 마음이 됩니다. ‘마음 하나 먹는 데서 모든 것이 이뤄진다’는 진리가 가슴 깊이 체험으로 올라옴을 느껴요.”
열아홉에 출가해서 사십여 년이 지난 세월 앞에서 어떻게 살았기에 그렇듯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
“스님께선 어머니가 그렇게 출가의 길을 축복해 주셨다면서요?”
“네, 그랬습니다. 어머니는 사바의 세계가 너무 고해라는 걸 잘 아셨지요. 속가 언니의 출산을 돕고 오셔서는 ‘사바세계는 이렇게 고해니까, 사바세계에는 뜻도 두지 마시고 그렇게 귀히 출가하셨으니 해탈의 길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하고 장문의 편지를 두 장 빡빡하게 써 보내실 만큼 출가의 길을 격려해 주셨죠.”
스님은 석남사에서 공양주로 살면서 매일 천팔십 배를 했는데 큰스님께서 천일기도를 숙제로 주시면서 ‘사람은 살면서 항시 업을 짓기 때문에 항상 참회의 절을 해야 한다’고 하셔서, 스물네 살인 제가 여쭈었죠. ‘매일 업을 짓는데 절은 해서 뭣합니까?’ 하고요. 그랬더니 큰스님께서, ‘낙엽 떨어진 가을날에 마당을 쓰는 것과 쓸지 않는 것은 천지 차이다. 쓸다 보면 어느 날엔가는 깨끗해지는 날이 온다. 그러니 끊임없이 참회기도를 해야 한다’고 하시더군요.
기쁜 마음으로 스님께 삼배를 드리고 방을 나서서 백련암 앞마당을 지날 즈음, 마루문이 열리면서 성철 큰스님께서 스님을 부르셨다고 한다.
“영운아!”
돌아보고 합장을 하니 큰스님께서 그러시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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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 열심히 하거라.”
“그러고는 바로 문이 닫혔는데, 저는 사십여 년이 지난 아직도 스님의 그 음성 그 모습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한 말씀이 수행의 길에 얼마나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일이 엊그제 같은데 그 생각만 나면 눈물이 나옵니다.”
스승에게 받은 은혜를 이야기하시면서 스님은 눈시울을 붉혔다. 삼 년 동안 그 일 많은 공양주를 하면서 어찌나 신심 내어 참선공부하고 천팔십 배 정진을 열심히 했는지 법당에서 절을 하고 있노라면 노스님들이 살며시 다가와 알사탕 몇 알, 삶은 감자 몇 알을 놓고 가기도 했다. 자식 넷을 두고 늦게 출가한 혜춘 스님은 착실한 후배스님에게 ‘스님, 부디 졸지 말고 정진 열심히 하세요’하면서 삼 년 동안 사탕을 줄곧 댔다고 한다.
‘잠자는 방에선 남보다 먼저 눕지 않고, 정진하는 방에선 남보다 먼저 일어나지 않겠으며, 낮에 눕지 않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몸부림쳤다는 스님은 그 후 무사히 삼 년 기도를 잘 마쳤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십팔 년 후 그 출가 절로 주지 소임을 살러 갔다. 입산 해서 삼 일째 되던 날, 주지스님과의 면담을 기다리면서 이 절에서 받아 주지 않으면 손을 물어뜯어 혈서라도 써야지 하고 이를 앙다물었던, 석남사엔 여성들만 있는 곳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지 않고 오로지 신선들만이 사는 곳이라고 믿었던, 티 한 점 없이 순진하기만 했던 열아홉 소녀가 오십대 중반이 되어 입산했던 절로 들어간 것이다.
영운 스님의 말씀은 때로는 그 순수한 지난날에 박장대소하게 했고, 끊임없는 용맹정진엔 신심이 일어나게 했으며, 환희심으로 걸은 출가의 길을 부럽게 바라보게 하셨다. 다음 날까지 이어진 자리에서 스님의 마지막 말씀은 이러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환희로운 마음을 낼 수 있고, 내가 중생을 위해서 마지막까지라도 어떤 힘이 될 수 있는 수행자가 되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마지막 원입니다. 그러면 불제자로서 밥값은 하고 가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세속에 사는 저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고통은 집착에서 오는 것 아닙니까? ‘나’에 대한 집착, 자식에 대한 집착, 배우자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고, 항시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나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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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일 어떻게 생활하고 있나. 어디에 시간을 많아 할애하고 있는가’를 살피면서 ‘참나’를 찾는 길로 가야 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은 ‘나’를 찾는 일이거든요. 참나를 찾는 일에 깨어 있으면서 익혀가다 보면 진정한 ‘나’와 가까이 하게 돼요. 찾으려고 노력한 만큼 이뤄지는 겁니다.“
■ 독종 수행자 한 사람 -원중 스님
그 스님에 대한 말들이 전설처럼 들려왔다.
출가한 지 반 오십 년 동안 ‘증도가’를 외우며 새벽도량석을 돈 것 말고는 소임 한 번 맡지 않고 참선정진의 한 길로 매진했다고 했다. 서울대 사회과학대를 다녔고 고시공부를 하다가 출가했다고 했다. ‘능엄경’을 전부 외우고 나서 불에 태워버리고 수행에 돌입했다고 했다.
추운 겨울 한 철을 김천 수도암과 청암사 사이 한데에 비닐 천막을 치고 주먹밥으로 요기를 하면서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고 했다. 불령산 낭떠러지 위에 좌복 하나 가져다 놓고 삼 년 결사를 나기도 했단다.
수행하는 데 있어 팔십 평생 누구보다 철저했던 스승 다음으로 독종이며, 사는 모습이 스승의 모습과 근접하다고 사형사제들은 입을 모았다. 출가한 지 이십오 년이 넘도록 결제와 해제철이 따로 없이 살고 있다고 했다.
지난 주 일요일, 그래서 원중 스님을 만나러 가는 길은 다른 때보다 설레었다.
스님이 수행하고 있는 금신 태고사에 도착해서 방선시간에 바로 전설 속의 주인공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에 무엇을 물을 수 있었겠는가? 그날 다시 선방으로 들어간 그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돌아와 한 주가 지났는데 스님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고 큰 키와 훌쭉하고 누런 얼굴색, 마른 몸의 시니컬한 이미지만 남아 있다. 스님의 존재가 아무 무게 없이 스쳐 지나간 한 줄기 바람처럼 느껴진다. 스님이 그토록 고행을 해서 얻은 것은 저 가벼움이 아니었을까. 모든 분별이 사라진 사람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경쾌함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온전한 무심이 아니었을까.
마음이 급해서 이름도 밝히지 않고 용건부터 말한 나에게 스님이 이름과 나이를 물었다. 그렇다! 오십여 년 동안 박 아무개로 살아온 나는 누구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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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한 비구니스님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결제에 들기 전 도반들과 함께 독종 스님 뵈러 갑니다.”
바로 답을 보냈다.
“스님! 그 스님 지금 거기 안 계세요. 다른 곳으로 가셨을 텐데요.”
“알아요. 직접 뵙는다는 게 아니고 PC방에 가서 독종 스님에 대해 쓴 보살님 글 보여준다는 뜻이에요. 도반들이 보면 신심 낼 것 같아서요.”
2011. 12. 20 - 끝 -
* 임진왜란 이후 일곱 번째 오는 임진년이 눈앞에 있습니다.
제3부 세상 모두가 스승이다.
제4부 결국 답은 자신이 내리는 것이다.
새해에 다시 만나겠습니다. 지난 일 년 감사했습니다.
미초 이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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