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2. 11:42ㆍ독서후기
최인호의 인 생 (2)
- 生은 神이 우리에게 내린 命令, 그래서 生命 -
2.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
■ 새봄이 일어서고 있다
요즘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은 건강에 관한 문안인사다 간단하게 “몸이 어떠세요?”부터 시작해서 “많이 회복되셨나요?” “기도하고 있습니다.” 등등 나를 환자 취급하는 내용들이 대부분이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지난 6개월간 내가 어쩔 수 없이 환자 노릇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2008년 6월 13일, 태어나서 처음으로 큰 수술을 받았다. 아침 8시에 수술실에 들어가서 오후 7시에 나오는 열 시간이 넘는 대수술이었다.
수술 후 상처를 치료하는 약물과 방사선으로 그 무더운 더위를 어떻게 견뎌냈을까 했을 정도로 병치레를 했고, 아직까지도 완전하지 못해 하루하루 환자 노릇을 톡톡히 치르고 있다.
지금까지, 1994년 교통사고로 한 보름 간 병원에 누워 있을 때를 빼놓으면 병원에 입원했던 적도 없었다. 지병인 당뇨병을 처방받으러 석 달에 한 번 정도 병원에 들러 담당 의사를 만나는 것이 고작일 뿐 그처럼 많은 검사를 하고 그처럼 자주 병원에 드나든 것도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경험이었다.
많은 환자들은 처음에 의사로부터 중병을 선고받으면 어떻게 내게 이런 불행이 닥쳐왔을까 하고 회의하면서 자신의 병을 부정한다고 하는데, 나는 처음 의사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좋아하는 선가(仙家)의 말 중에 ‘살아도 온 몸으로 살고 죽어도 온 몸으로 죽어라.’ 라는 말이 있다. 나는 병원에서 환자복으로 갈아입는 순간부터 병을 받아들이고 온몸으로 환자로 살겠다고 마음의 준비를 했다. 일체 사람을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환자로서의 장전(章典)을 선포했다. 아내와 아들 내외를 빼놓고는 형과 누나, 심지어 딸아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몇몇 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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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병원을 찾아왔을 뿐 그 이외에는 일체 알리지 않도록 신신 당부했다.
나는 병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죽이는 것은 오직 죽음일 뿐, 병은 죽음으로 가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의 그 유명한 ‘죽음에 이르는 병’처럼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순간부터 죽음이 이르는 병을 앓기 시작하는 환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환자 스스로 자기 병에 대해 일체 연민의 정을 느낄 필요도 없으며, 주위 사람들도 환자에게 용기와 위로를 주면 그만이지 지나친 호기심을 갖거나 쓸데없는 호사가적 참견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병원에 오니까 참 아픈 사람이 많지요?”
나는 지금까지 병원에 갈 때마다 병원은 자주 갈 데가 못 되는 재수 없는 곳, 운이 나쁜 사람들이나 가는 저주받은 곳, 전염병에 걸린 사람들이 격리된 감옥과 같은 수용소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내가 막상 환자로서 병원을 출입하게 되니 세상에는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왜 그렇게 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은 것일까. 이제야 알겠으니, 어째서 2천 오백 년 전 부처가 인간의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 인생의 허무를 깨닫고 왕궁을 버리고 출가를 단행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아, 나는 글쟁이로서 지금까지 뭔가 아는 척 떠들고 글을 쓰고 도통한 척 폼을 잡았지만 한갓 공염불을 외우는 앵무새에 불과했구나. 한 발자국만 거리로 나서면 우상의 광장, 온갖 물질과 성과 광기와 쾌락이 범람하는 사육재의 광장, 그 한 곁에서 환자들은 격리되어 신음하며 고통과 싸우며 어떨 때는 치료비가 없어서 절망하며 저처럼 울부짖고 있구나.
병을 통해 인간은 우리들의 욕망, 그 끝 간 데를 모르는 무자비한 욕망의 한계를 깨닫게 된다. 또한 이 지상의 그 어떤 공포도 죽음 이상의 것은 아니라는 한계를 가르쳐 준다.
그리스도 신앙을 기반으로 하는 위대한 사상가였던 C. 힐터는 ‘행복론’에서 말하고 있다.
“강의 범람이 흙을 파서 밭을 갈듯이 병은 모든 사람의 마음을 파서 갈아준다. 병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견디는 사람은 보다 깊게 보다 강하게 보다 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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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 범람하여 홍수가 나지 않으면 대지는 황폐해진다. 기름지고 비옥한 땅이 되기 위해서는 강의 홍수로 땅이 뒤집혀야 하는 것이다. 태풍이 바닷물을 엎어버리지 않으면 플랑크톤은 사라지고 물고기들의 먹이사슬은 끊어진다. 바다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태풍이 몰아쳐야 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인간다워지기 위해서는 병의 홍수와 태풍을 견디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의 이러한 은밀한 병과의 밀회가 그만 발각이 나고 말았다. 신문에, TV에, 뉴스 시간에 내가 병에 걸렸다는 사실이 덜컥 보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나는 그냥 나만의 병이라는 토굴 속에 틀어박혀 혼자만의 독존(獨存)으로 때로는 병과 싸우며, 병과 벗하며, 병을 통해 배우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환자 노릇을 수행해나가리라 결심하고 있었는데 그만 동네방네 소문이 나버린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바에야 사립문을 더욱더 걸어 잠그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는 내가 쓴 ‘길 없는 길’의 주인공 경허(鏡虛)를 사숙한다. 어째서 경허가 생의 말년에 중의 자리도 박차고 함경도의 삼수갑산(三水甲山)에 가서 이름 없는 훈장 노릇을 하다가 죽었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경허는 제3의 출가를 단행한 것이다. 나도 경허처럼 이제 삼수갑산으로 떠나야 한다. 이 기회를 주기 위해서 하느님께서 나에게 병의 은총을 내려주신 것이다.
수술을 박은 이후에 나는 휘파람을 불 수 없었다. 입술이 마비되어 밥을 먹으면 밥알을 흘릴 정도였다.
“이 --소리를 내보세요.”
“자꾸자꾸 거울을 보면서 연습해야 합니다. 그래야 마비가 풀리고 휘파람도 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뭇가지에 앉은 새에게 말을 걸고 싶어 무심코 휘파람을 불었는데 “휘이~~ ” 소리가 나왔다.
이른 봄 작은 언덕 쌓인 눈을 저어마소
제아무리 차다기로 돋은 움을 어이하리
봄옷을 새로 지어 가신 님께 보내고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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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이른 봄(早春)’이라는 시처럼 눈 쌓인 작은 언덕에 봄, 봄, 봄이 오고 있다. 굳이 쌓인 눈을 치울 필요는 없다. 저처럼 매운 눈바람에도 매화는 어김없이 봉오리를 맺고 있나니, 눈 쌓인 언덕에 봄이 오듯 내 입술도 어느 덧 마비가 풀려 새봄의 휘파람을 불고 있구나.
■ 태양이, 바람이 내게 속삭이던 말
요즘처럼 생활이 단순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1980년대 후반 가톨릭에 입교하여 영세 받고 한 2년간 붓을 놓았던 적이 있다. 경허의 선시(禪詩) 중 ‘일 없음이 오히려 내가 할 일(無事猶成事)’ 이란 구절에서 한 방망이 후려 맞고 불교에 심취했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요즘은 그때보다 더 단순하다. 붓을 놓았을 뿐 아니라 마음도 놓아버렸으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어느 날 느닷없이 밀어 닥친 병 때문이다. 병의 폭풍이 건강과 바쁜 세상의 일상사까지 쓰나미처럼 쓸어가고 초토화 시켜버렸다.
요즘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산에 오르는 일이다. 원래도 산을 좋아하여 청계산에는 거의 12년째 오르고 있다., 스스로를 청계산의 주지라고 자처할 정도로 청계산을 사랑하고 있다. 그러나 병에 걸리고 보니 청계산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수술하고 며칠 성모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나는 다행스럽게도 병원 뒤편에 작은 동산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환자복을 입고 그곳에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몰래 병실을 빠져나와 그 동산을 걸었다. 청계산에 비하면 그 동산은 한 바퀴 도는 데 15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은 얕은 언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숨이 가쁘고 다리에 힘이 없어 나는 서너 번을 쉬면서 간신히 돌 수 있었다. 수술이 사람의 체력을 빼앗아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불과 며칠 만에 사람을 그처럼 쇠잔하게 하다니.
다행인 것은 지난해 봄 한남동 편집실 뒤편에서 작은 동산 하나를 발견해 두었다는 점이었다. 평소에도 한남동 고개를 넘어올 때 아파트 너머로 숲이 보이고 그 꼭대기에 정자 하나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늘 궁금했다. 그러던 어는 날 우연치 않게 그 정자 끝까지 답사를 하게 됐다. 지금 생각하면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왜냐하면 수술 후부터 그 산은 내게 제2의 청계산이 되었으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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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아니, 이 산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산은 내게 있어 재활센터이자 요양원이자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이 “산들은 모두 천연의 대사원”이라고 말했듯 사원이자 성지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5분 이상 계속해서 걸을 수가 없었다. 5분 걷고 물을 마시고, 5분 쉬고 그렇게 해서 소나무가 있는 벤치까지 간신히 걸어가 30분 정도 앉아 있다 돌아오곤 했다. 내가 그 벤치를 1차 목표로 정했던 것은 모든 냄새에 시달리고 있을 때도 숲 냄새가 좋았고, 특히 솔 냄새가 그렇게 향기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도 무리한 운동은 삼가라고 했지만 난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제1차 목표인 소나무 벤치까지 사무실에서 30분 걸리던 것이 차츰차츰 줄어들어 25분, 20분이 되었다. 그러나 청계산의 유격훈련으로 이미 공비(共匪)수준이 된 몸으로서는 성이 차지 않는 운동량이었다.
두 달에 걸친 치료가 끝나자 정자에 오르는 시간이 점점 더 단축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산을 하나의 과일로 보았다. 우리가 사과를 깎을 때 과도로 밑 부분에서부터 껍질을 조금씩 벗겨나가면 모든 표피가 벗겨나가듯 이 동산도 사과처럼 돌려서 서서히 벗어나가면 마침내 꼭지 부분인 정자에 도착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내 예감은 적중했다. 등산로가 20분에서 30분으로, 30분에서 40분으로 연장되었다. 새로운 미지의 길을 개척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숨이 가쁜 것이 사라지고 마른 다리에 힘이 붙기 시작했다. 단풍이 물들 가을 무렵 나의 성지순례는 완성되었다.
그리고 봄이 왔다.
며칠 전에는 산길을 돌아가자 흐드러지게 핀 산수유나무 아래서 나이 든 여인 서너 명이 모여 앉아 나물 캐는 모습을 보았다. 가만히 보았더니 쑥을 캐고 있었다. 그 모습들이 새 풀옷을 입은 봄 처녀처럼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문득 어릴 때 불렀던 동요가 떠올랐다.
“동무들아 오너라 봄맞이 가자 / 나물 캐러 바구니 옆에 끼고서 / 달래 냉이 꽃다지 모두 캐보자 / 종다리도 봄이라 노래하잔다.”
산이 깊지 않아 종달새는 노래하지 않지만 나의 동산에는 지천이 쑥이고 봄나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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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정자 부근에서 눈부신 벚꽃이 필 것이다. 요즘엔 벚꽃의 볼이 연지곤지를 찍은 듯 발그레 상기돼 있다. 느낌으로 보아 벚꽃이 피면 내 동산은 와사등(瓦斯燈)을 켠 것처럼 휘황하게 꽃 대궐을 이룰 것이다. 그러면 보고 싶은 동무들아, 내 동산으로 놀러 오너라.
■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 이 글의 제목은 ‘1코린 15, 51’의 말씀에서 따온 것이다. -
고통스런 항암치료를 하면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위로는 오전 10시 30분에 성모병원 성당에서 열리는 미사 참례와 거의 매일 병실로 찾아와 거행해 주시는 신부님과 수녀님들의 영성체(領聖體)였다.
어느 날 주사바늘을 꽂은 채 기진하여 간신히 미사에 참석했을 때, 젊은 신부님이 했던 말이 가슴에 와 닿았다. 그 내용은 잊었지만 한 마디의 말은 뇌리에 화살처럼 박혔다.
“머지않아 그분의 뜻이 드러날 것입니다.”
나는 순간 그 말을 주님께서 내게 주신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주님께서 내게 암을 허락하신 것은 그분의 섭리에 따른 숨은 뜻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주시겠느냐?”(마태 7,11)고 말씀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내게 주신 청천벽력의 암은 나에게는 불행의 재앙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담은 ‘치워질 수 없는 잔’이며, 더 좋은 것, 즉 성령‘(루카 11,12)을 주시려는 은총이 아니겠는가.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내가 태어나서 맞이한 제일 큰 고통, 벼랑 끝의 이 병이야말로 주님께서 주신 ‘제 십자가’가 아닐 것인가. 지금까지 명색이 주님을 따른다는 가톨릭 신자로서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 적이 있었던가. 지금껏 내가 따른 주님이야말로 ‘십자가 없는 예수’가 아니었던가.
1987년 여름 나는 영세를 받고 가톨릭에 귀의했다. 그 직후 불교에 심취하여 3년 동안 한 신문에 ‘길 없는 길’이란 소살을 집필하였고, 1993년 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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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짜리 장편소설로 펴낸 적이 있었다. 내가 불교에 깊은 관심을 갖고 집중할 수 있었던 것도 가톨릭에 입문한 뒤 느꼈던 충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 속에는 주인공 햄릿이 자신의 친구 인 호레이쇼에게 이렇게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호레이쇼야, 이 세상에는 네가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이 있단다.”
가톨릭에 귀의했을 때 비로소 나는 내가 지금껏 믿어왔던 진리라고 부르는 진리가 실은 진리가 아니고 속임수였으며 바로 이것이야말로 진리임을 깨달았다. 내가 실재한다고 믿었던 눈에 보이는 세상은 바오로의 말처럼 ‘사라져가는 형체’(1코린 7,31)이며 사람이면 누구나 추구하는 돈과 명예와 권력의 영광은 악마가 소유한 ‘내가 받은 것’(루카 4,6), 즉 흉측한 우상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 놀라운 충격은 불교에 대한 관심으로 확대되어 3년 동안 운수승처럼 전국의 사찰을 행각(行脚)하며 ‘길 없는 길’을 집필했는데, 그때 공부했던 불교 중에 지금도 선명히 기억되는 공안(公案)이 있다.
당나라 때 향엄(香嚴)이란 선사가 있었다. 등주(鄧州)사람으로 법명은 지한(智閑)이었다. 키는 7척이나 되고, 학문에 조예가 깊어 아는 것이 많고, 말재주가 능하여 당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스승 위산영우(潙山靈祐)를 찾아가 불법에 대해 묻자 위산은 이렇게 답하였다.
“그대가 터득한 지식은 전부 남에게서 보고 들었거나 부처께서 말씀하신 삼장십이부경(三藏十二部經)의 뜻을 의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그것을 묻지 않겠다. 나는 그대에게 묻겠다. 아직 어머니의 배 안에서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本來面目)에 대해서 한 마디 일러 보아라. 그것으로 그대의 공부를 가늠하겠노라.”
향엄은 여러 가지로 대답했으나 위산은 인정해 주지 않았다. 위산에게 가르침을 간청하자 스승은 “나의 말을 나의 견해일 뿐 그대 스스로의 안목으로 일러야 그대의 안목이 아니겠느냐.” 하고 거절한다. 이에 향엄은 자기가 읽던 모든 책을 불살라버린 후 “이번 생에는 불법을 깨닫지 못했다. 오늘까지 나를 당할 사람이 없다고 느꼈는데, 스승에게 한 방망이 맞고 보니 그 생각이 깨끗이 없어졌다. 이제부터 나는 그저 밥이나 먹고 살아가는 중이 되겠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스승과 작별하고 암자에 들어가 수행을 하였다.
하루는 마당의 풀을 베면서 무심코 던진 기왓장 한 조각이 대나무에 부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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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며 난 ‘딱’ 소리를 듣고 순간 크게 깨달았다. 이 장면을 향엄격죽(香嚴擊竹)이라고 부른다. 향엄은 스승에게 돌아가 깨달음을 인정받고 오도송을 읊었다.
작년 가난은 가난이 아니오. 去年貧 來是貧
금년 가난이 비로소 가난이로다. 今年貧 始是貧
작년에는 송곳 꽂을 땅이 없더니 去年無卓錐(송곳 추)之地
금년에는 송곳조차 없더라. 今年 錐也無
이 선화에서 나온 것이 그 유명한 화두, 즉 ‘그대가 아직 어머니 배에서 태어나기 전의 본래 얼굴’(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란 공안인 것이다.
내가 성경을 처음 접한 것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피난길 부산의 바닷가 교회에서였다. 성경 첫머리의 내용이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지루한 족보였다. 그래서 어린 우리들은 성경을 ‘나코(낳고)복음’ 이라고 불렀고, 예배당에 갔더니 잠자리채를 내놓고 돈만 걷어간다고 비아냥거리며 낄낄거리고 다녔다.
신약성서의 첫 장은 어릴 때의 기억대로 ‘나코복음’이다. 아브라함에서부터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때까지 42대의 족보를 상세하게 적어놓은 기록이다. 아마도 이는 예수가 유대민족의 조상이자 하느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적손(嫡孫)임을 증거하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의도이며,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약속된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창세 22,18)라는 맹세처럼 아브라함의 후손인 예수야말로 세상 만민을 구할 구세주, 즉 그리스도임을 만천하에 공포하려는 선언문이다.
그 목적이야 어떻든 예수 역시 아버지인 요셉과, 요셉은 그의 아버지인 야곱, 야곱은 그의 아버지인 마딴을 통해 왔으며, 다윗 왕과 아브라함을 거쳐 결국 부모들이 태어나기 전, 즉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의 한처음에서부터 온 것임은 움직일 수 없는 진리다. 물론 예수는 우리 사람들처럼 죄 중에 태어나신 것이 아니라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힘이 감싸주시는 성령의 잉태’로 하느님의 아들에서 ‘사람의 아들’로 인류 속에 뛰어드셨다. 이는 바오로의 말처럼 ‘일찍이 하느님께서 당신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약속하신 구세주를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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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사회에 구현시킨 것’이며, 이는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요한 3,16)기 때문이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는 어린아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마태 18, 3-4) 라고 말씀하시고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라고 분명히 못 박고 계신다.
사람은 누구나 한때 부끄러움을 모르고, 선과 악을 모르고, 시비도 모르고 두려움도 모르고, 탐욕도 모르던 어린아이, 즉 천진(天眞)의 ‘참나’가 있었다. 만약 인간이 이 천진의 ‘참나’, 즉 부모가 태어나기 전의 본래면목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추방된 유배지에서 생명의 나무에 이르는 길목을 지키는 불칼을 뛰어 넘어 영원한 생명의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아들’로 육화(肉化)되어 오셨다면 우리는 ‘사람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영적으로 거듭나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오직 ‘자기’(自我)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길이며 생명이 지닌 전인적 존재로서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가치이자 부활의 참 의미가 아닐 것인가.
* 육화(肉化)
- 추상적인 것을 구체적인 모습으로 뚜렷이 나타나게 함
-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가 사람으로서 이 땅에 태어남
철학자 스피노자는 말했다.
“지금 이 순간을 영원의 눈에서 바라보십시오.”
심학규는 공양미 삼백석이 있어야만 눈을 뜨는 줄 알았다. 그러나 심봉사의 눈을 뜨게 한 것은 바로 눈앞에 있는 자신을 위해 죽었던 심청이를 보고 싶다는 참사랑의 열망 때문이었다. 스피노자의 말처럼 지금 이 순간을 시작도 끝도 없는 ‘이제와 항상 영원한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우리는 우리를 위하
며 치마를 뒤집어쓰고 임당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심청이의 본래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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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을 볼 수 있을 것이며 나의 참모습을 견성할 수 있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 내가 나의 이름을 부를 때
오래전 신문에 ‘불새’라는 소설을 연재하고 있었을 때이니 아마도 30년 전쯤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출판박물관장으로 계신 K씨가 당시 출판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나를 만나자 자신이 열렬한 애독자라고 말한 다음 소설의 주인공이 혼잣말을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실제로 내게 혼잣말을 하는 버릇이 있느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우연한 질문이었지만 그 이후부터 나는 나도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K씨의 지적처럼 내가 혼잣말을 하는 습관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연극에서 배우가 상대방 없이 혼자 하는 대사를 독백(獨白)이라고 하고, 한 사람의 배우가 모든 역을 혼자 맡아 하는 것을 모노드라마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나는 혼잣말을 하는 일인극의 배우처럼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혼잣말을 많이 하는 경우는 어느 한 순간 낯 뜨거운 과거의 장면이 떠오르거나 기억조차 하기 싫은 비굴하고 옹졸한 내 자신의 치부를 떠올릴 때다. 그럴 때면 나는 나 자신도 모르게 “아이고 미친놈.” “망할 자식!”하고 욕설을 중얼거린다. 그 욕설은 내가 또 하나의 나를 향해 던지는 일종의 여유다.
젊은 시절 나는 거의 매일 밤마다 술을 마시고 귀가했다. 새벽에 술이 깨어 정신이 말짱해지면 술 취해 객기를 부리던 지난밤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가래침을 뱉듯 자신을 향해 저주의 혼잣말을 던지곤 했다.
“야 이 새끼야. 정신 차려. 이 미친놈아, 이 사기꾼아. 나가 죽어.”
그러나 모든 혼잣말이 이렇듯 나 자신을 혐오하는 비하성 욕설만은 아니다.
1994년 초여름 중앙고속도로에서 달려오는 미군 차와 정면으로 부딪친 순간 문을 열고 뜨거운 아스팔트 위로 몸을 굴려 탈출했을 때.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괜찮아. 너무 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 무서워하지 마.”
자세히 살펴보면 자신을 비난하는 욕설보다 오히려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혼잣말이 더 많이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쓸데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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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에 휩싸이며 알 수 없는 불안에 시달린다. 크고 작은 난관이 우리를 괴롭히고 걱정거리가 우리를 찌른다. 그럴 때면 나는 중얼거린다.
“미리 불안해할 필요는 없어. 모든 게 잘될 거야.”
간혹 절체절명의 궁지에 빠질 때도 있다.
1990년대 말, 백두산에 촬영을 갔다가 촬영 팀과 더불어 깎아지른 수직 벽을 무모하게 내려갔던 적이 있었다. 무거운 장비를 지고 미끄러운 경사면을 내려가는데 자칫하다가는 추락사할 것 같은 본능적인 공포가 엄습했다. 그 순간 나는 주문처럼 혼잣말을 했다. 특히 급할 때는 내 자신의 이름을 직접 부른다.
“인호야, 정신 차려. 조심해. 괜찮아. 인호야, 두려워하지 마.”
남들이 보면 나를 미쳤다고 할 것이다. 상대방 없이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은 해리(解離) 현상으로 분열증의 중요한 증상이다. 그러나 절박한 순간 그냥 단순하게 “괜찮아, 걱정 마.”라고 용기를 주기보다 출석부 부르는 선생님처럼 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스스로를 격려하면 기적과 같은 용기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낀다.
이때에 나는 내가 아니라 ‘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신 절대의 나, 즉 하느님일지도 모르고 이때의 최인호는 가면 쓴 가짜의 최인호가 아니라 내 인생의 연극무대에서 주인공으로 실재하는 진짜의 최인호, 즉 참나일지도 모른다.
나는 느낀다.
내가 진실한 마음으로 내 이름을 부르면 김춘수의 시 ‘꽃’처럼 나는 나에게로 와서 잊혀지지 않는 꽃이 되는 것을 그리고 신비하게도 힘과 용기가 분수처럼 솟아오르고 따뜻한 위로와 더불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것을.
운동처방학을 전공하는 윤기운 교수는 운동선수들에게 세 가지 종류의 혼잣말 훈련을 실험하고 그 결과를 지켜본 후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혼잣말의 종류에는 ‘지도적 혼잣말’과 ‘동기적 혼잣말’ ‘긍정적 혼잣말’ 등이 있는데 지도적 혼잣말은 ‘천천히’ 혹은 ‘침착하게’ 같은 교훈적인 것이며, 동기적 혼잣말은 ‘이번이야말로 최고의 기회야’ ‘드디어 때가 왔어’ 같은 심리적인 동기부여를 가리키며, 긍정적 혼잣말은 ‘좋아, 할 수 있어.’ ‘난 내 자신을 믿어’와 같은 말인데 마음속으로 외우기보다는 실제로 입 밖으로 드러내어 혼잣말을 하는 실험대상이 그렇지 않은 상대보다 월등히 실제 행동과 학습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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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나는 요즈음 내 속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나를 믿는다.
나는 이제 내 인생의 주인공인 오직 나만을 위해 글을 쓰고 싶다. 단 한 사람의 독자면 충분하다. 그 독자로부터 인정받는 그런 작가가 되고 싶다.
웰만은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벗은 나 자신이며, 세상에서 가장 나쁜 벗도 나 자신이다 나를 구할 수 있는 가장 큰 힘도 나 자신 속에 있으며 나를 해치는 무서운 칼날도 나 자신 속에 있다. 이 두 개의 나 자신 중의 어느 나를 좇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된다.”
요즘엔 혼잣말이 부쩍 늘었다. 나는 다정스럽게 내 이름을 부른다.
“인호야,”
소리 내어 나는 대답한다.
“왜 불러.”
“나와 노올자.”
“그으래.”
나는 요즘 어깨동무를 하고 날마다 함께 산에 간다. 나는 내 친구가 너무 좋다. 우리의 우정은 천지가 갈라지기 전부터 시작되었으며 부모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어왔고 죽음도 우리의 우정을 갈라놓지는 못할 것이다. 나는 씨동무인 나를 사랑한다.
■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그 사람
요즘엔 어쩔 수 없이 병원에 자주 가게 된다. 그럴 때마다 느끼는 것은 왜 그렇게 아픈 사람들이 많을까 하는 의문이다. 인구도 많이 증가했고 사람들의 평균 수명도 길어졌으며 각종 오염된 환경과 공해로 인한 외부적 환경 탓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점점 거대해지는 종합병원과 환자들로 넘쳐나는 모습을 마주하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메곤 한다.
특히 병원 복도에서 병에 걸린 어린 아이들의 모습을 보게 되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저렇게 천진한 아이들이 어째서 병에 걸리는 것일까. 예부터 사람들은 막연히 질병이나 신체적 장애를 죄에 대한 결과로 생각하고 있어 으레 그런 불행은 죄에 따른 형벌이라는 식으로 인식해왔다. 성경에도 그런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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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을 암시하는 내용이 나오고 있다. 태어나면서부터 눈먼 소경을 향해 제자들은 예수께 묻는다.
“선생님, 저 사람이 소경으로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입니까? 자기의 죄입니까. 아니면 부모의 죄입니까?”
제자들의 질문에는 눈먼 소경의 신체적 불행을 죄에 대한 업보로 인식하는 고정관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병든 모든 사람은 죄 때문에 벌을 받기 위해서 앓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아직 죄에 물들지 않은 아이들은 무슨 이유로 저처럼 처참하게 앓고 있는 것일까.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고 시치미를 떼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아직 ‘발각되지 않은 죄인’일 뿐 가슴에 주홍글씨를 낙인찍고 있는 미결수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유마힐은 불교에 등장하는 유명한 인물로, 출가한 사문은 아니고 재가의 신도였다. 세속에 살고 있던 거사라 할지라도 ‘사문의 청정한 계를 받들어 행하고 삼계에 집착하지 않으며, 중생들의 마음을 꿰뚫어보는 데 통달했던 장자’라고. 그가 설법한 내용을 집대성한 ‘유마경’은 기록하고 있다.
그런 유마힐이 어느 날 병에 걸려 병석에 눕는다. 이 소문을 들은 부처는 제자들에게 ‘바이샤일리’성으로 찾아가 유마힐을 문병하도록 권유한다.
이에 문수사리가 문병을 가서 유마힐에게 묻는다.
“거사님, 병은 참을 만하십니까? 치료를 잘못하여 악화된 것은 아닙니까? 세존께서는 간절하게 물으셨습니다. 이 병은 무슨 일로 무엇으로 인해 일어났습니까? 어떻게 하시면 나을 수 있습니까?”
질문을 받은 유마힐은 불경 사상 가장 유명한 대답을 한다.
“일체중생 누구나 다 병에 걸려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약 모든 중생들이 병에 걸리지 않고 있을 수 있다면 그때 나의 병도 없어질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장자에게 외아들이 있어 그 아들이 병들면 그 부모도 병들고, 만약 아들의 병이 나으면 부모의 병도 낫는 것과 같습니다. 중생이 병을 앓으면 보살도 병을 앓으며,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도 낫습니다.”
유마힐의 대답은 이천오백 년이 지난 지금도 진리다. 유마힐이 병에 걸린 것은 중생들의 고통과 함께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지금 배부른 사람은 가난한 유마힐을 잊어서는 안 되며, 지금 건강한 사람은 병든 유마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 웃고 있는 사람은 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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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사람을 잊어서는 안 되며, 지금 칭찬받는 사람들은 욕을 먹고 누명을 쓴 사람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대신해서 굶주리고, 앓고, 슬퍼하며, 비난을 받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눈먼 소경을 위해 “자기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 탓도 아니다. 다만 저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놀라운 일을 드러내기 위함이다.”라고 대답하면서 눈을 뜨게 한 기적을 베풀었던 예수가 이 지상의 가치관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산상수훈’을 내린 것은 이런 놀라운 하늘나라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함이다.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들은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르게 될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
요즘 날마다 산에 올라 황홀한 야생화들을 보면서 나는 릴케의 ‘엄숙한 시간’이란 시를 떠올린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한밤중에 어디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
한밤중에 까닭 없이 웃고 있는 사람은 나를 위해 웃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걸어가고 있다.
까닭 없이 갈아가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향해 오는 것이다.
지금 세상 어디선가 누군가 죽어가고 있다.
세상 속에서 까닭 없이 죽어가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만나고 싶다. 나를 위해 울고 있는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 울고 있는 그 사람의 젖은 얼굴을 감싸 안고 위로하며 함께 울고 싶다. 나를 두고 웃고 있는 그 사람을 만나서 그에게 웃는 이유를 묻고 함께 웃고 싶다.
나는 만나고 싶다.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그 사람, 죽어가는 순간에도 나를 뚜렷이 응시하면서 숨을 거두고 있는 그 까닭 없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왜냐하면 그와 나는 둘이 아닌 하나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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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보다 아름다운 인생을 노래하라
어렸을 때의 일이다.
엄마는 유난히 꽃을 좋아하셨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것은 오후 늦게 영천시장에 엄마와 둘이서 나들이를 할 때면 언덕길을 오르다 말고 갑자기 남의 집 대문 앞에서 발을 멈추고 열린 문틈으로 정원을 들여다보곤 했던 일이다.
정원의 꽃밭에는 꽃들이 만발했다. 엄마는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그 집 안으로 들어가 이렇게 말하곤 했다.
“꽃구경 좀 하고 갈게요.”
대부분 주인들은 “그렇게 하세요.”라고 허락했다. 그러면 엄마는 쭈그리고 앉아서 꽃밭의 꽃들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감탄하곤 했다.
“아이고 썩어 죽을 놈의 꽃, 무슨 꽃들이 이리도 고운지 몰라.”
어린 나이였음에도 나는 그런 엄마의 호사 취미가 싫었다. 엄마는 아름다운 꽃과는 거리가 먼 할망구였다. 조금 있으면 영천시장에서 콩나물값 갂아 달라고 악다구니하며 싸울 노친네가 아닌가. 내가 그토록 먹고 싶어하는 순대 한 조각도 돈이 없다 냉정하게 거절하는 팥쥐 엄마가 아닌가. 그런 구식 엄마가 무슨 꽃타령이란 말인가. 나는 꽃구경에 넋이 나간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며 떼를 쓰곤 했다.
꽃을 좋아하던 엄마는 봄이면 한옥집 콘크리트 정원 한 곁에 꽃씨를 뿌렸다. 채송화도 피고 여름이면 샐비어가 붉게 피었다. 과꽃도 피었다. 엄마는 샐비어를 ‘깨꽃’이라 불렀다. 나는 지금도 샐비어를 보면 ‘깨꽃’이라 부르고 있다.
샐비어의 꽃말은 그 정열적인 붉은 빛깔로 인하여 ‘불타는 사랑’이다. 유난히 샐비어를 좋아했던 엄마에게도 불타는 사랑이 있었던 것을 개달은 것은 요즘의 일이다. 엄마의 불타는 사랑 대상은 오직 아빠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 남자에게 열 명의 아이를 낳고 그중에서 여섯 명을 무사히 키워낼 수 있었을 것인가.
아아, 가엾은 엄마는 47세에 과부가 되었고, 한 여인으로서 자신이 사랑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샐비어라는 것을 모르고 초라한 이름의 깨꽃으로 한평생을 살다가 아름 없는 들꽃으로 죽었다.
내 핏속에 꽃을 좋아하는 엄마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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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이었던가. KBS와 ‘제4의 제국’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던 중 기마민족의 뿌리를 찾아 내몽골의 오르도스 대평원을 찾은 적이 있다. 나는 그곳에서 지평선을 처음 보았다. 그 끝 간 데를 모르는 평원 위에서도 작은 들꽃이 피어 있었다. 그 이름 모를 들꽃에도 개미처럼 작은 벌들이 쉴 새 없이 찾아와 문안인사를 하고, 나비들이 가정방문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벌들은 어디서 날아온 것일까. 아인슈타인이 말했던가.
“인류의 멸망은 벌과 나비가 사라지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벌과 나비가 사라지면 이 들꽃들은 씨를 맺지 못하고 멸종되어버릴 것이다. 이 자연의 신비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대평원 한구석에 피어난 보잘것없는 들꽃 하나에도 날개 달린 벌들이 찾아오고 저처럼 나비들이 날아와 꽃가루를 배달하고 있으니, 하느님은 저 들꽃 하나도 잊지 않으시고 각자에게 고유한 우편번호를 붙이고 보살피고 있지 아니한가.
“들꽃이 어떻게 자라는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온갖 영화를 누리는 솔로몬도 이 꽃 한 송이만큼 화려하게 차려입지 못하였다.”
예수의 말처럼 저 들꽃 한 송이도 솔로몬의 영광을 능가하고 있다.
나는 요즘 그 옛날의 엄마처럼 남의 집 정원에 핀 꽃밭에 주저앉아서 꽃들을 바라보느라 여념이 없다.
피어난 꽃들은 피어나서 예쁘고, 저버린 꽃들은 저버린 대로 대견하다. 아직 피어나지 못한 꽃들은 그 줄기와 잎만으로는 잘 구별되지 않아 이름을 외우기가 힘들지만 각자 자기만의 때가 있어 피어날 것이므로 어떤 빛깔과 어떤 모습의 꽃을 피워 올릴까, 기다림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한용운은 노래했다.
당신은 나의 꽃밭으로 오셔요. 나의 꽃밭에는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을 쫓아오던 사람이 있으면 당신은 꽃 속으로 들어가서 숨으십시오.
나는 나비가 되어서 당신 숨은 꽃 위에 가서 앉겠습니다.
그러면 쫓아오는 사람이 당신을 찾을 수는 없습니다.
‘인생은 아름답다고 죽도록 말해주고 싶어요. 하고 말하며 꽃이 죽는다.’라고 노래했던 플로베르의 시처럼 꽃보다 아름다운 그대들이여. 꽃보다 아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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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인생을 노래하라. 그리고 마음껏 춤춰라.
■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2010년 1월, 나는 성모병원 21충 107호실에 입원해 있었다. 4차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위해서였다.
복도를 거닐던 중 바로 옆 병실 문 앞에 ‘절대 안정’이라고 쓴 팻말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한 신부님이 입원하고 계시다는 것이었다. 간호사의 표정이 어두운 것으로 보아 상태가 좋지 않은 환자임이 분명했다.
그러나 뜻밖이었다. 햇볕 잘 드는 휴게실 소파에 앉아 항상 그러하듯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팔에 링거를 꽂은 키 큰 사람이 나타났다. 나와 같은 환자복을 입고 있었지만 한눈에 옆 병실의 신부님임을 알아보았다. 쾌활하고 밝은 표정이었다.
내가 일어나 먼저 인사를 드렸다. 소설 쓰는 아무개입니다. 그리고 4차 항암치료를 받으려고 입원중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신부님은 웃으며 “걱정 마세요. 나는 스무 번도 넘게 항암치료를 받았습니다.” 라고 위로했다. 환자복 바깥으로 체내의 분비물을 뽑아내기 위한 작은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다.
잠시 후 신부님은 자신이 쓴 책을 들고 다시 나타나 내게 주었다.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라는 책이었다. 나는 휴게실에 앉아 단숨에 다 읽었다. 그제야 신부님이 어디선가 읽었던,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활동과 봉사를 하던 화제의 주인공임을 알 수 있었다.
입원하고 2~3일 후였던가. 어느 날 휴게실에 나갔다가 신부님이 창가에 앉아 포터블 음악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인기척에도 눈을 뜨지 않을 만큼 음악에 몰두하고 있었고, 나 역시 깊은 침묵을 깨뜨릴 수 없었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신부님이 듣고 있는 음악이 그의 정서적 고향인 아프리카의 전통음악임을 알 수 있었다.
신부님은 간절하게 눈을 감고 그 음악을 듣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청소년 시절에 배운 흑인 영가가 떠올랐다.
내 고향으로 날 보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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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곡백과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다리 높이 떠 지저귀는 곳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
내 고향으로 말 보내주.
이 몸이 다 늙어 떠나기까지 그 호숫가에서 놀게 하여주.
거기서 내 몸을 마치리로다.
미사와 마사는 어디로 갔나.
찬란한 동산에 먼저 가셨나.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곳에 나 어서 가서 쉬 만나리로다.
신부님은 자신의 청춘을 바친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로 가고 싶어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오곡백과가 만발하게 피지 않고 종달새 높이 떠 지저귀지 않는 황폐한 전란의 폐허 속에서 신부님이 일궈낸 지상의 천국에 가고 싶어 하고 있구나. 신부님의 육신은 병들어 비록 병원 휴게실에 초라한 걸레처럼 놓여 있으나, 영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곳에 벌써 가 계시니.
그날 밤, 나는 집으로 돌아가 며칠 더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입원하여 4차 항암치료를 시작하자는 의사의 말을 듣고 일단 퇴원했다.
일주일 뒤 나는 다시 입원했다. 무심코 옆 병실을 보았다. 신부님의 이름이 적힌 환자 명패는 보이지 않았다. 간호사에게 불어보니 며칠 전에 선종했다는 전언이었다.
나는 햇살이 가득한 휴게실에 앉았다. 간호사가 와서 피를 뽑았다.
신부님의 육신은 허물을 벗고 자유와 기쁨이 충만한 그곳으로 가셨다.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죄인인 우리를 위해 대신 빌어주시는 성모 마리아님의 품에 안겨서 천상의 호숫가로 떠나셨다.
신부님, 나의 이태석 신부님, 이 가엾은 죄인을 위해 우리 주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그날 오후 피검사 결과가 나왔다. 백혈구 수치가 정상이었다. 다시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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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3월 중순, 나는 함 군을 부추겨 한낮에 성북동에 있는 길상사를 찾았다. 나에게는 무리한 외출이었다. 2009년 10월부터 시작한 항암치료가 이미 5차에 걸쳐 시행되었고, 내 몸과 마음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총 6차에 걸쳐 하나의 사이클을 이루는 치료는 어느 덧 막바지에 이르러 한 차례만 남기고 있었지만 나는 이 끝간데를 모르는 투병생활에서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는 절박한 벼랑 끝에 선 심정이었다.
내가 길상사를 찾으려 했던 것은 법정 스님 때문이었다. 성모병원 병상에 누워 있을 때 나는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들었다. 뉴스를 전해들은 순간,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을 뿐 마음은 담담했다. 오래전부터 나는 스님이 폐암을 앓고 있다는 은밀한 소문을 전해 듣고 있었다. 미국의 저명한 병원에서 수술을 했다는 소문과 함께 날이 갈수록 병세가 악화되어 제주도로, 지방으로 요양 중이라는 소문도 귀에서 귀로 전해 듣고 있어 스님을 걱정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워낙 강인하고 올곧은 분이라 병마쯤이야 거뜬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허무하게도 입적하셨다는 뉴스를 입원실 텔레비전을 통해 본 순간 언젠가 보았던 사진작가 주명덕 씨가 찍었던 법정 스님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온다 간다는 문안인사나 작별인사도 없이 훌쩍 소매를 떨치고 빈자리만 남기고 사라지던 밀짚모자를 쓴 법정 스님의 뒷모습, 그는 지금 그 뒷모습으로 긴 그림자를 떨치며 이승의 생애에서 피안(彼岸)의 바라밀다로 떠나가고 있는 것이다.
법정(法頂), 평생 동안 무소유를 소유하려 하였던 서슬 퍼런 수행자.
스님의 첫 번째 저서가 ‘무소유(無所有)’로, 이 책이 스테디셀러가 됨으로써 법정 스님은 무소유의 대명사로 불리게 되었으며, 무소유를 시작으로 수십 권의 주옥같은 베스트셀러들을 펴내게 되었던 것이다.
법정 스님과 생전에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김수환 추기경도 부처의 가르침을 철저히 지켜나가는 수행 태도를 본받아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내가 한 가지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바로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소유하고 싶다.”
공교롭게도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 오늘을 사는 우리의 졍신적 지주였던 두 거인은 1년이라는 시차를 두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다정스럽게 손을 잡고 우리의 곁을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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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소식을 뉴스로 본 순간, 나는 퇴원하면 곧바로 길상사로 찾아가 문상하리라 생각했다. 함 군은 내가 법정 스님을 문상하겠다고 말하자 두 가지 이유를 들어 이를 만류했다. 하나는 내가 곧바로 퇴원했으므로 아직 외출을 할 만큼 몸이 회복되지 않았고, 또 한 가지 이유는 그 무렵의 특수한 사정 때문이었다.
새해를 맞자마자 느닷없이 신문을 비롯한 각종 메스컴에서 나에 관한 기사와 뉴스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곧 세상을 떠날 만큼 위독하며 그때 마침 나온 신간 ‘인연’이라는 책이 나의 마지막 유작이라는 것이었다. 덕분에 책은 잘 팔릴 줄은 몰라도 정말 견딜 수 없는 헛소문들이었다.
마침내 KBS의 7시, 9시 두 뉴스 시간에 동시에 세상을 떠나기에 앞서 책을 낸 작가 최인호가 ‘다시 한 번 일어서고 싶다고 절규하였다.’는 감상적인 내용을 보도함으로써 우리 집 전화기는 갑자기 불이 붙기 시작했다.
상하이의 딸아이는 울면서 전화를 걸어왔다. 직접 한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마지막 유작’이라는 내용을 인터넷에서 삭제해줄 것을 요구했다고 했다. 딸아이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질러대며 울부짖고 있었다.
나는 결코 투병 사실이 보도될 만큼 유명한 사람도 아니고 화제의 인물도 아니다. 그런데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언론에서 내가 암에 걸렸던 사실을 마치 생중계하듯 보도하고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물론 유명인사의 투병 사실이 사람들에게 대리 만족을 준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다. 쯧쯧쯧 안됐군. 하는 연민의 대상을 주위에서 발견하는 것은 지친 소시민들에게 심리적 위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막상 그러한 집중 폭격을 맞는 당사자는 물론 특히 그 가족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털모자를 눌러쓰고 운전대를 잡은 함군에게 호되게 말했다.
“가보자구. 돌아오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가보자구.”
과연 함 군의 말대로 길상사 입구에는 방송국의 촬영 탐들이 경내의 이곳저곳을 스케치하고 있었고, 문상객들이 길상사 입구 쪽에 새로 지은 건물 앞에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길상사에 올 때마다 나는 격세지감을 느끼고 있었다. 법정 스님에 의해서 사찰이 세워지기 전 이곳은 대표적인 고급 요릿집이었다. 이름이 대원각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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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릿집 이전에는 유명한 요정, 깔깔대던 웃음소리와 기생의 분냄새가 요란하던 유곽이 아니었던가. 술과 춤과 노래와 육체의 쾌락이 난무하던 화류항(花柳巷)이 부처님이 안치된 절집으로 변하였구나.
경허(鏡虛)는 깨닫고 나서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남긴다.
“세속과 청산은 어느 것이 옳으냐. 봄볕 비추는 곳에 꽃피지 않는 곳이 없구나.” (세여청산하자시 世與靑山何者是, 춘광무처불개화 春光無處不開花)
길상사를 둘러싼 언덕길을 올라가면서 봄볕(춘광)을 가득히 받아들이니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경허의 선시가 가슴을 찔렀다.
그래, 맞았어. 세속과 청산을 따져서 무엇 하겠는가. 길상사건 대원각이건 구지 어느 쪽이 옳은가 따져 무엇 하겠는가. 봄볕이 비추면 꽃이 피지 않는 곳이 없지 않은가. 꽃피는 곳마다 부처 역시 살아나고 있는 것, 봄볕이 비추는 곳을 찾아갈 일이지 굳이 세속과 청산을 구분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무소유라니 스님은 도대체 뭐가 그리 남긴 것이 많아? 도마뱀처럼 꼬리를 남기고 돌아가셨으니 저처럼 난리들이지. 왜, 그렇지 않은가? 도마뱀이 사라져도 꼬리는 계속해서 꿈틀대고 있지 않느냐 말이야.’
허기야 경허는 말년에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함경도의 삼수갑산으로 무애 행을 떠나면서 의미심장한 칠언절(七言絶)을 남긴다.
안다는 것 얕은 소견 이름만 높아가고
세상은 위태롭고 어지럽기만 하구나.
모를 일이여, 어느 곳에 가서 몸을 감출 것인가.
어촌이나 술집 그 어느 곳에 처소가 없겠냐마는
이름을 감출수록 이름이 더욱 새로워질까.
다만 그를 두려워하노라.
경허의 시는 절대 진리다.
경허의 노래처럼 숨으면 숨을수록 진신(眞身)은 드러나고 ‘감추면 감출수록 이름은 더욱 새로워지는 것( 닉명익신 匿名益身)’인 것이다. * 匿 숨을 닉
법정 스님은 무소유를 그처럼 철저히 수계해나갔으므로 오히려 그가 남긴발자취의 그림자는 저처럼 더욱더 새로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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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법정 스님의 유골이 안치된 건물 앞으로 다가가 줄지어 선 문상객 뒤에 따라셨다. 다행히 나를 알아보거나 주시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차례가 되어 신발을 벗고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널찍한 법당 구석구석에 방석을 갈고 앉아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쪽 벽면에는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었고 생전에 대중을 향해 설법을 하던 스님의 모습이 방영되고 있었다.
나는 차례를 기다리며 중앙에 안치된 법정 스님의 영정을 바라보았다. 스님 특유의 표정을 본 순간 나는 문득 낯이 설었다.
차라리 영정 사진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을. 스님에게 영정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깨끗하게 무(無)자체로 돌아가고 싶다.’ 법정의 유언 앞에 저 꼴불견의 사진은 무엇인가.
일찍이 만공(滿空) 스님은 입적을 앞두고 시자들에게 물을 떠오라 이른다. 시자들이 목욕물을 떠오자, 스스로 평생토록 입던 육신의 옷을 씻어 내린 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그러곤 거울을 가져오라 이른다. 시자가 거울을 가져오자 만공은 물끄러미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껄껄 웃으며 말하였다.
“자네와 내가 이별할 인연이 되었나 보구려. 그럼 잘 있게. 그동안 고마웠네.”
그렇다.
죽은 영정의 사진은 법정 스님이 평생 동안 빌려 쓴 가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 가면의 얼굴이 스님의 진면목은 아닌 것이다. 법정이란 이름도 진아(眞我)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 또한 허명에 불과한 것이다.
불교 최고의 고불(古佛)이자 법정 스님이 존경하던 조주 스님은 일찍이 죽은 사람을 좇아가는 장례행렬을 보며 한탄하지 않았던가.
“ 한 사람의 산 사람을 수많은 죽은 사람이 쫓아가고 있구나.”
조주 스님의 말대로 법정 스님은 과연 죽었는가. 아니다. 조주 스님의 말이 옳다면 법정은 죽어서 산 사람이 되었다.
마침내 차례가 되어서 나는 배를 올리며 마음속으로 기원하였다.
“어쨌든 안녕히 가십시오. 스님과의 인연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언제였던가. 가족들을 데리고 남도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때마침 불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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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었던지 고속도로의 휴게소에서 석간신문을 한 장 샀는데 신문에는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성철 스님이 내린 법어가 실려 있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이며 하늘과 땅이 무너진다 해도 자기는 항상 변함이 없습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유형무형 할 것 없이 모든 삼라만상이 모두 자기입니다.
반짝이는 별, 춤추는 나비들이 모두 자기입니다.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영원함으로 종말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르는 사람은 종말을 걱정하여 두려워하며 헤매고 있습니다.
(…)
자기를 바로 봅시다.
부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 원래 구원되어 있음을 가르쳐주러 온 것입니다. 이렇듯 크나큰 진리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행복합니다.
성철 스님의 법문 내용이 내 가슴에 얼마만큼 큰 파문을 일으켰던지 여행에서 돌아온 즉시 나는 어느 여성잡지에 실린 성철스님의 사진을 잘라서 내 서제 앞 벽면에 붙여 놓고 매일같이 서슬 퍼런 눈빛을 감탄하며 쳐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법정 스님과 깊은 교감을 느낀 것은 1990년대 초였다.
나는 불교에 심취하여 전국의 절을 돌아다니며 경허 스님의 일대기인 ‘길 없는 길’을 중앙일보에 연재하고 있었다. 그 무렵 실제로 도반이었던 무법(無法) 스님의 승복을 걸치고 밀짚모자를 쓴 채 압구정동의 밤거리를 활보했던 적도 있었다. 승복으로 갈아입자 세상과 절연하고 무소의 뿔처럼 유아독존이 되어 홀로 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 느낌이 어디 출가에만 있겠는가. 사랑하는 ‘가족’들 역시 부처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부처는 바로 집안에 있다.’(불가재중 佛家在中)는 유명한 말이 있지 않은가.
아내와 아이들이 살아 잇는 부처님인데 이제 와서 어디 가서 청산(靑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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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을 것이며 부처를 따로 구할 것인가.
‘길 없는 길’을 연재하던 1990년대 초 광화문에 있는 법련사로 정찬주 군과 더불어 상경하고 있던 법정 스님을 만나러 간 적이 있었다. 계절은 정확히 떠오르지 않고 비가 치적치적 흩뿌리던 초저녁이었다. 내게 불교의 길잡이 노릇을 하던 정찬주 군이 아마도 법정 스님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어 찾아갈 때 내가 우연히 동행한 것 간다.
작은 쪽방에서 법정 스님은 내게 손수 차를 끓여 따라주셨다. 법정 스님은 연재 중인 ‘길 없는 길’을 읽고 계셨던 듯 그 전과는 달리 내게 부드럽고 따듯한 눈길을 주면서 도대체 언제 불교에 대해서 공부를 했느냐고 넌지시 물으셨다. 그날 저녁 우리는 몇 마디 나누지는 않았지만 지금까지의 스님과는 달리 나를 마치 수행자로 대해주는 듯한 강한 느낌을 받았다.
헤어질 무렵 스님은 손수 우산을 쓰고 나를 거리까지 바래다주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것은 스님의 우산 끝에서 빗물이 가랑가랑 떨어지고 있던 모습이다. 느닷없이 갑자기 다정한 형님 같은 생각이 들어 나는 불쑥 스님을 껴안고 볼에 뽀뽀라도 하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며칠 전 승복을 빌려 입고 밤거리를 걸었습니다.”
“그래 기분이 어떻던가요?”
법정 스님이 웃으며 내게 물었다.
“스님께서 효봉 스님으로부터 출가를 허락 받을 때 느끼셨다던 그 환희심을 느꼈습니다.”
“그럼 이 기회에 머리 깎고 출가하시지요.”
“저야 저의 가정이 바로 산문(山門)이지요. 아내가 바로 저의 효봉 스님이고, 저야 늦깎이 햇중이지요. 그러니 머리는 이미 깎은 셈이지요.”
“헛허허, 허기야 최 선생은 이미 세속거사(世俗居士)이시니까.”
스님이 웃고 나도 따라 웃었다. 그날 밤 나는 스님의 법제자가 된 기분이었다.
7년 전이었던가 2003년 봄, 잡지 ‘샘터’가 지령 400호를 맞이하여 법정 스님과 나는 ‘산다는 것은 나누는 것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세 시간 이상 걸린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날 무렵 내가 “스님, 어느 책에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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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하셨는데, 정말 무섭지 않습니까?”라고 묻자 법정 스님이 이렇게 대답했던 것이 기억난다.
“실제로 죽음이 닥치면 어떨진 모르지만 지금 생각으로는 무섭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죽음은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확고해지면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가 있어요. 죽음을 받아들이면 사람의 삶의 폭이 훨씬 커집니다. 사물을 보는 눈도 훨씬 깊어집니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한다면 지금까지의 삶이 소홀했던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나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정확히 7년 전인 2003년 4월, 법정 스님과 나는 7년 후 자신이 입적할 사실을 모르고 있었고 나 또한 병과는 거리가 먼 호시절의 봄날이었다. 그런데 정확히 7년 후에야 법정 스님은 자신의 말대로 새로운 삶의 시작을 위해 육신의 껍질을 벗었다. 그리고 나는 병과의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세상, 그것이 우리의 일상사인 것이다.
1980년대 초반 스님을 샘터에서 처음 뵈었을 때 앞으로 뭘 쓰겠느냐고 내게 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대답했었지.
“불교에 관한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그땐 겁도 없었다. 막연히 불교에 대한 초발심적 관심을 시작하였던 초창기였지. 아직 가톨릭에 귀의하기도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도 스님은 이렇게 말하며 내게 용기를 주지 않았던가.
“쓰고 싶어 하면 언젠가는 쓰게 되겠지요. 업이란 것이 그런 것입니다. 말과 행동이 업이 되어서 결과를 이루게 됩니다.”
그렇다.
법정 스님은 그때 내게 화두를 점지해 주셨다. 그 화두는 ‘길 없는 길’ 내가 그 소설을 쓰게 된 최초의 원동력은 법정 스님이 뿌려준 화두의 씨앗 때문이 아닐 것인가. 순간 나는 법정 스님과의 인연은 전생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숙세(宿世)의 것임을 깨달았다. 법정 스님과 나는 둘이 아니다.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다. 우리는 하나다. 태어나되 태어남이 없고, 죽되 죽음이 없으며, 있지 아니하되 있고, 없지 아니하되 없는 유일무이한 하나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법정 스님은 근대 불교계의 큰 어르신이셨던 효봉(1888-1966)의 애제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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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봉은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졌던 법기로, 우리나라 최초로 법관이 되었다. 36세가 되던 어느 날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된 조선인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후 삶에 대해 큰 회의와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나와 엿장수를 하며 3년간 방랑 생활을 하다가 비교적 늦은 나이인 38세에 불문에 귀의하셨던 늦깎이셨다. 법정 스님이 출가를 결정하고 여부를 묻자 효봉 스님은 생년월일을 묻고 간지를 짚어본 후에야 이를 허락하였으며, 훗날 새로 출가한 법정 사미만을 데리고 지리산 쌍계사 탑전에 가서 수행에 몰입할 만큼 법정을 각별히 아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때의 일화 중에 한 토막.
어느 날 아침 공양 후 우물가에서 설거지를 마치고 돌아오자 효봉 스님이 법정 사미를 부르며 빈 그릇하고 젓가락을 가져 오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법정 사미가 그릇과 젓가락을 가지고 우물가로 가자 효봉 스님은 설거지를 하다가 버린 밥알과 시래기 줄기를 주워 담은 후 법정 사미가 보는 앞에서 그것을 물로 씻은 후 훌쩍 한 입에 들이마셨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이렇게 말하였다고 한다.
“출가해서 수도하는 사람이 무슨 일이든 아끼고 절약해서 시주한 사람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부자 살림이고 되도록 몸에 지니지 않는 무소유야말로 참으로 전부를 갖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효봉 스님의 가르침은 가톨릭의 뛰어난 영성가중의 한 사람인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마라.
모든 것을 얻기에 이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마라.
모든 것이 되기에 이르려면 아무것이 되려고 하지 마라.
모든 것을 알기에 이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마라.
맛보지 못한 것에 이르려면 맛없는 그곳을 거쳐서 가라.
모르는 그곳에 이르려면 모르는 그곳을 거쳐서 가라.
가지지 못한 곳에 이르려면 가지지 않는 곳을 거쳐서 가라.
그대 있지 않는 곳에 이르려면 그대 있지 않는 곳을 거쳐서 가라.
아직 다다르지 않는 곳에 다다르려면 도중 아무 곳에도 발을 멈추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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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언덕길을 내려오던 함 군이 손가락으로 담장 너머로 우거진 덤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꽃이 피었네요.”
과연 함 군의 손끝에는 작고 노란 꽃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술만 방긋거리듯 수줍게 피어 있었다.
“이 꽃 이름이 뭔지 아세요?” 함 군이 말했다.
“노란 꽃 빛깔 때문에 금으로 만든 허리띠, 즉 금요대(金腰帶)라고 부르는데 보통은 영춘화(迎春化)라고 불러요.”
영춘화라…….
순간 내 머릿속으로 성 프란시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금언이 떠올랐다.
“꽃잎은 떨어지지만 꽃은 지지 않는다.”
아가야. 그렇다. 꽃잎은 해마다 피고지고 떨어지지만 꽃은 영원히 지지 않는다. 법정이란 이름의 그대는 꽃잎처럼 떨어졌지만 하늘과 땅이 갈라질 때부터 있었던 본지풍광(本地風光)과 부모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던 그대의 진면목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잘 가십쇼. 큰형님. 법정이란 허수아비의 허물은 벗어버리고 지지 않는 꽃으로 성불하십시오.
법정 스님은 30대 말에 쓴 ‘미리 쓰는 유서’에서 이렇게 유언을 남기고 있다.
“육신을 버린 후에는 훨훨 날아서 가고 싶은 곳이 있다. 어린왕자가 사는 별나라 같은 곳이다. 의자의 위치만 옮겨놓으면 하루에도 해지는 광경을 몇 번이나 볼 수 있다는 아주 조그만 그런 별나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안 왕자가 지금쯤 장미와 사이좋게 지내고 있을까. 그런 나라에는 귀찮은 입국사증 같은 것도 필요 없을 것이므로 한 번 가보고 싶다.”
우리 곁에 왔었던 법정, 인간 박재철은 오두막집에 자기 손으로 만든 빠삐용 의자를 갖다놓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의자를 바꿔가며 해지는 광경을 보던 어린왕자의 환생이 아니었을까.
어린왕자 법정은 이제 고향인 별나라로 돌아가고 모든 별들이 녹슨 도르래 달린 우물이 되어 퍼 올리는 생명수를 마시고 태생부터 갖고 있던 억겁의 갈증을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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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틀거리며 봄빛이 가득한 언덕길을 올라갔다. 어쨌든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헛맹세에 어느 날 봄날은 오고, 그리고 봄날은 언젠가 가게 될 것이다.
2013. 3. 31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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