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자본이다(2)

2014. 2. 3. 16:20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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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자본이다(2)

■ 이어령 지음

5. 금, 찬란한 어둠

한자로 써 봅니다.

나무 하나면 목木 나무 둘이면 림林 셋이면 삼森

사람 하나면 인人 사람 둘이면 좇을 종從( ) 사람 셋이면 무리 중衆( )

금이 하나면 금金 금이 둘이면 금鍂 금이 셋이면 기쁠 흠鑫

금덩이를 세 개나 포개놓은 것이 금집이고 금의 피라밋입니다.

그 뜻은 기쁘다 흠입니다.

흠흠흠 鑫鑫鑫 기쁘십니까. 보시면 좋고 웃음이 나오십니까.

그러나 잊지 마세요.

마이더스 왕의 딸 제오 - 생명이라는 뜻이지요.

그 딸을 만졌더니 사랑하는 딸은 금덩이가 되어 생명을 잃었습니다.

기쁘십니까

* 컴퓨터에 좆을 종 과 무리 중의 고 古字 즉 사람 인이 두 개. 세 개가 포 개진 글자가 없어서 ( )로 비워놓았습니다. 옥편을 찾아보세요.

01 황금비와 다나에

■ 금붕어의 이름

금붕어의 이름은 나랏말이 달라도 그 뜻은 다 같다. 그 발상지인 중국에서는 찐위라 하고 일본에서는 깅교라고 해 발음은 제각기이지만 한자로 쓰면 모두 金魚가 된다. 영어의 골드피시 gold fish 역시 마찬가지이다. 서양의 금붕어는 18세기 때 중국에서 건너간 것이라고 하니 그때 이름도 함께 따라 갔을 것이다. 프랑스어로는 시프렝 도레 cyprin dore 라고 하는데, 이는 ‘금 dore 잉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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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금붕어라는 이름 때문에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색맹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황금빛 노란 금붕어를 본 적은 거의 없지 않은가. 우리가 상식으로 알고 있는 붕어는 빨간색이다. 나도 어린 시절 금붕어를 그릴 때 서슴지 않고 붉은 크레용 칠을 했던 기억이 난다. 원래 갓 태어난 금붕어는 까맣다고 했다. 성장하면서 차차 검은 색소가 결핍되어 붉은 빛으로 변한다. 그래서 금붕어하면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붉은색과 흰색 그리고 검은 색이다. 결국 금붕어는 이름 따로 빛 따로인 셈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빨간색 붕어를 금붕어라 부르는 것일까?

한 개의 나무는 나무 木이고 두 개를 쓰면 나무들이 모인 수풀 林이 된다. 여기에 또 하나의 나무를 더해 세 개가 되면 수풀 森자가 되는 것이 한자다.

그런데 쇠 금金을 나란히 겹쳐 금 금鍂자를 만들었다. 돈을 많이 벌라는 뜻인가 보다. 그런데 다시 금자 세 개를 피라미트처럼 쌓아올리면 그 뜻이 참으로 놀랍다. 금이 세 개나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랴 그래서 ‘기쁠 흠鑫’이라고 읽는다.

금붕어라는 이름은 귀한 것이면 무조건 金자를 붙이기 좋아하는 인간의 습성에서 나온 이름일 것이다. 김치가 비싸지면 ‘금치’라고 하고 품귀로 부르는 것이 값이 되는 경우에는 ‘금값’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해 ‘金’은 몸체의 색이 아니라 그만큼 귀하고 비싸다는 의미로 붙인 수식어일 것이다. 중국에서는 왕후 귀족들이 아니면 금붕어를 기르지 못했다고 하니 이해가 간다. 쇠로 만든 다리를 금문교 golden gate Bridge라고 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명실상부 금붕어는 금=돈으로 변한 물고기가 된 것이다. 어쨌든 살아있는 생물에 금자를 붙인 것은 금붕어뿐이라는 기묘한 생각이 들면서 자연히 나의 관심 역시 ‘금’으로 쏠리게 된다.

■ 클림트의 금붕어

‘금붕어’ (1902년 작)이라는 표제가 붙은 클림트 Klimt의 ‘입맞춤’이라는 그림은 거의 양식화한 금붕어 모습을 금세공의 장식물처럼 그린 것으로 금붕어의 색깔은 역시 황금색이 아닌 붉은 색이었다.

이 작품에는 뒷소문이 있다. 자신을 비방한 평론가들에 대한 불만과 항변을 드러낸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교육부의 의뢰로 빈 대학 대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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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천정화를 그리게 되었을 때의 일이라 했다. ‘철학, 의학, 법학’의 세 상징물을 그려 달라는 것이었는데 그는 거기에 여자의 나신을 그려 넣었고 그것이 권위를 먹고 사는 비평가들의 비위를 건드리게 된 것이다. 학생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포르노라는 비방이었던 것이다. 클림트는 그 때문에 벽화를 중단하게 된다. 받은 돈을 되돌려주고 자신의 작품을 찾아온다. 그리고 원래보다 더 관능적인 여인의 나체를 그리고 ‘비평가들에게’라는 화제를 붙여 전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가 주위의 만류로 ‘금붕어’로 제목을 바꿔 전시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클림트가 생각하는 그 건조한 철학과 법, 그리고 생명을 다루면서도 생명과는 늘 거리가 있는 의학의 시스템, 그것을 해체하고 복원하려면 여인의 알몸 속에 담긴 생명력 밖에 없다. 그러나 비평가들은 금붕어 품종을 자신의 미적 기준에 맞춰서 주조해 내듯이 클림트의 그림을 그렇게 난도질한다. 그러니까 금붕어는 바로 자신이 그린 벽화를 보고 비난한 비평가들이며 동시에 자신일 수도 있다. 금붕어는 바로 감상의 대상이며 동시에 사육되고 길들여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 금붕어를 ‘인간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미술 공예 생물’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그 같은 이미지는 우리가 화려한 황금색, 금가루로 칠해진 그의 모든 그림에서 엿볼 수 있다. 금붕어의 ‘금’과 ‘물’의 두 속성을 융합한 인간의 욕정, 특히 근대인의 장식화 된 모습이 ‘황금 시기’라고 불리는 클림트의 거의 모든 작품 속에 나타나 있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입맛춤 Kiss’이 그렇게도 많은 대중들을 끌어당기는 힘도 바로 거기에 있다.

노벨상 수상자 에릭 캔델 Eric Richard Kandel 은 2012년에 펴 낸 ‘통찰력의 시대’에서 신경생리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우리가 미술 작품을 어떻게 인식하게 되는지를 분석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것은 황금색에 대한 신경생리학적 반응이다. 사람은 황금색을 보면 뇌에서 도파민이 나온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서 알아냈다. 클림트의 작품들도 그렇지만 2006년 역대 가장 비싼 가격에 거래된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 역시 황금빛이 화면 전체를 채우고 있다. 클림트의 작품들에 대한 매혹은 우리가 흔히 황금을 쫓는 경제적, 시장적인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뇌에서 흘러나오는 황금비 같은 황홀한 희열감, 참을 수 없는 생명의 영원한 기쁨을 주는 도파민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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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림트의 그림이 그렇듯이 금은 신화문학 그리고 신경 생리학에 이르기까지 삶의 정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다. 어느 각도에서 봐도 그것은, 금의 광채는 영원히 변치 않는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런데 그것이 ‘시장’에 나오면 경제적 교환가치나 보존 가치로 포장될 때 인간의 삶에 놀라운 변화를 일으킨다. ‘찬란한 어둠’이 패러독스가 탄생하는 것이다. 태양빛처럼 눈이 너무 부셔 눈을 멀게 하는 그 모순 말이다.

02 금, 약탈과 멸망의 역사

■ 금의 비극

금은 금속 중에서 가장 화학변화를 일으키기 힘든 물질이다. 쉬운 말로 모든 것은 시간 속에서 녹이 스는 화학변화를 일으키는데 금만은 불변의 빛을 지니고 천년만년 간다. 그러면서도 금의 속성은 너무 부드러워 반드시 합금을 해야 한다. 금은 부드럽고 유연하지만 실용적이지는 않다. 인간에게 있어 금의 이 같은 속성은 숙명적으로 사치스러운 금속, 문화적인 금속이며 동시에 교환가치가 최고인 말 그대로 귀금속인 것이다.

금의 경제적 가치를 한층 더 높이는 것은 무엇보다 그 희소성이다. 그 매장량만 따져 보아도 그것이 얼마나 희소한 금속인지를 알 수 있다. 인류가 지금까지 파 낸 금의 총량은 14만~15만 톤 정도라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 파 낼 수 있는 금의 지하 매장량은 겨우 6~7만 톤에 불과하다고 한다.

1톤의 금광석에서 채취할 수 있는 금의 양은 겨우 5g밖에 되지 않으며, 해수에도 금이 있지만 톤당 해수가 포함하는 금은 0.1~0.2mg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공급량을 연간2500~3000톤으로 계산할 때, 인간이 오매불망 찾아다니던 금은 앞으로 20년에서 25년이면 동이 난다.

인간은 모두 부를 구하고 금전을 사랑한다. 어느 나라를 가든지 다 잘 살려고 하고 ‘금=돈’을 좋아하는 마음은 똑같다. 그러나 이득을 구하는 방법은 나라와 그 국민성에 의해서 달라진다. 그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스페인과 포르투갈이다.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 신대륙에 처음 들어간 스페인이 부를 획득하는 방법은 완전히 폭력에 의한 것이었고, 그저 금과 은만 가지고 오면 된다는 것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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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사용가치를 지닌 물건을 만드는 것보다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교환가치가 높은 ‘금’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이 배를 타고 해외로 나간 목적은 금을 얻겠다는 단순한 동기가 아니었다. 그들은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무역을 행하려고 했다. 약탈이냐 무역이냐. 부를 획득하는 방법의 차이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차이였다.

스페인 지도자들이 본국과 식민지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매우 명확했다. 한마디로 금만 가져오면 되는 것이다. 현지가 어떻게 되든지 본국으로 금을 가져오는 것이 단 하나의 목표였다. 그래서 황금의 유혹에 눈 먼 백인들의 잔인한 대학살이 일어난 것이다. 이렇게 정부가 국가의 목표와 국민들의 지향점을 창조적인 쪽을 돌리지 못했기 때문에 스페인은 몰락의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좋은 조건과 재력, 광대한 식민지를 갖고 있음에도 스페인에서는 오히려 탄압에서 벗어나 스페인 밖으로 도망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

그래서 식민지를 관리하는 군인들은 금을 발견해도 본국으로 보내지 않았다. 선박도 낡고 상공업이 쇠퇴하니 대부분의 생활필수품을 네덜란드에 의지하게 되고 그 대금도 지불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무역으로 부를 일으켰던 포르투갈 역시 금에 욕심을 가지면서 점점 붕괴의 조짐을 보인다. 신대륙을 발견하면서 그곳에 매장되어 있는 막대한 양의 금, 그것에 집중하게 된다. 결국 포르투갈도 농업, 공업을 뒤로한 채 금의 유혹에 빠져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입는 옷, 먹는 생선, 심지어 곡물까지 모두 영국에 의지하게 되었고, 그 대금의 지불로 금이 전부 영국으로 들어간 것이다.

여기서 진실한 부가 무엇이고 허구의 부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광산에서 캐낸 금, 그것은 허구의 부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무역하고 공업을 일으키면 그 부는 진실한 부가 된다. 브라질의 광산은 포르투갈을 몰락시켰고, 멕시코와 페루의 광산은 스페인을 몰락시킨 것이다.

마이더스 왕은 그의 소원대로 만지면 무엇이든 황금으로 변하는 손을 얻는다. 하지만 그의 기쁨과 쾌락은 사랑하는 딸을 손으로 만질 때까지의 순간이다. 황금덩어리가 된 딸, 생명을 잃은 그 딸을 더 이상 그는 사랑할 수 없다. 아니다. 사랑을 받을 수 없게 된다. 그 많은 음식들이 금덩어리가 되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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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다. 수천 년 전부터 전해 오는 마이더스의 신화를 들었으면서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딸을 사랑할 수 없는 돌덩어리로 만드는 그 금을 얻기 위해 애쓴다. 오늘도 시장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부력의 공식을 발견하여 천년을 가도 변치 않는 원리를 구축한 아르키메데스도 금과 떼어낼 수 없다. 아르키메데스의 임무는 헤론의 왕관이 순금인지 아닌지를 밝히는데 있었다. 기록에는 없지만 금에 눈이 멀었던 금세공 장인의 생명이 아르키메데스의 발견으로 인해 사라졌을 것이다. 어째서 금은 늘 귀한 목숨을 빼앗는 불행을 연출하는 것일까.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라는 외침은 순수한 지적 발견을 기뻐하는 환희의 소리였는데 말이다.

03 돈 놓고 돈 먹기

■ 쇠도끼만 못한 금도끼

금은 물질 중에서는 최고의 금속이다. 그러나 생명에 있어서는 최하위 위치에 속한다. 촛불로 밥을 지었다는 중국고사의 부자 석순의 이야기는 들었어도 아직 어떤 재벌도 금 밥을 먹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그런데 왜 먹을 수도 없는 금을 그렇게 좋아할까. 그것은 바로 그것이 먹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은 비생명적인 것의 상징이다. 죽지 않고, 변하지 않고, 희귀하다. 이 교환가치 때문에 경제에서는 황금이 무엇보다도 위에 선다.

어렸을 때 들은 ‘정직한 나무꾼’ 이야기를 생각해보자.

나무꾼이 나무를 하다가 도끼를 못에 빠뜨린다. 잠시 후 신령이 금도끼를 들고 나와, “이게 네 도끼냐?” - < 중 략 > -

산신령은 “너는 정직한 사람이다”라고 칭찬을 하며 상으로 금도끼 은도끼를 모두 준다.

나무꾼이 알고 있는 것은 당장 나무를 하는데 필요한 평소 자기가 길들여 써 온 쇠도끼다. 금, 은의 가치가 널리 퍼지게 된 것은 시장이라는 교환가치 시스템이 생기고 난 뒤의 일이다. 이 이야기에서는 산신령까지도 시장지향적인 자본주의자다.

나무꾼이 금도끼, 은도끼를 가져가 자기 것 같은 쇠도끼를 천 개, 만 개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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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미 그는 나무꾼이 아니다. 나무를 하려고 하

기 보다는 금과 은을 구하러 다니는 시장 꾼으로 바뀌어 버리게 될 것이다.

돈이 인간을 어떻게 바꾸는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 지역에서 사는 쿵 kung 족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종족이었다. 4만 년 동안 돌, 나무, 뼈로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는 방식은 거의 변한 적이 없었다. 막사의 배치구조 역시 항상 중앙을 향하고 있어 반대쪽 막사에서 일어나는 일들까지도 다 알 수 있었다. 또한 음식 준비는 막사 밖에서 했기에 누가 음식을 만들면 함께 나누고 즐길 수 있었다. 큰 짐승을 사냥하면 자기 식구만이 아니라 모든 이웃들이 함께 잔치를 벌였다.

그런데 쿵 족에게 시장경제가 도입되어 돈을 쓰기 시작한지 10년도 채 안 되어 이 모든 것이 변한다. 물건을 사서 상자에 보관하고 자물쇠를 채우기 시작했고, 막사는 서로 등지는 방향으로 구조가 바뀌었다. 뿐만 아니라 음식 준비도 막사 안에서 하게 되었다. 돈이 쿵 족의 사회에 들어오자마자, 울타리 없이 모두가 어울려 지내던 정다운 시절이 마감되고 서로를 경쟁상대로 여기는 시대가 열리고 만 것이다.

■ 모모와 성냥팔이 소녀

동화에 대한 내 기대를 제일 먼저 무너뜨린 것이 ‘성냥팔이 소녀’를 쓴 크리스찬 안데르센이며 마지막 그것을 확인 사살한 것이 미하엘 엔데의 바로 그 ‘모모’였다.

금을 알게 된 나, 경제가 무엇인지 관심을 품게 된 나는 더 이상 동화로 읽지 못한다. 길에서 얼어 죽은 그 불쌍한 소녀는 왜 하필 성냥팔이인가? 프로메테우스가 훔쳐다 주었던 불. 시집 온 색시가 불씨를 꺼트리면 소박을 맞았던 불씨와는 다르다.

‘모모’와 ‘성냥팔이 소녀’에는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이 어린아이를 죽이는 처절한 또 하나의 얼굴이 숨어 있다. 연말 추운 거리에서 팔리지 않는 성냥을 벽에 긋고 그 빛에서 환상과 따뜻한 사랑을 느끼는 소녀, 다음날 아침 사람들이 소녀를 발견했을 때 비참하게 얼어 죽은 소녀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라 있다.

소녀는 집의 반대인 ‘거리’, 바깥 공간의 ‘한寒데’서 얼어 죽었다. 집이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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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도 아닌데, 왜 추워서 얼어 죽도록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성냥팔이 소녀를 제대로 읽지 않아 단순히 성냥이 안 팔려서 얼어 죽은 걸로 알고 사회의 비정함을 규탄하지만, 사실 그 이야기의 근본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소녀가 돈을 벌어가지 못하면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한다. 소녀는 그 힘이 무서워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 추위보다도 아버지의 매질이 더 무섭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아버지는 술주정뱅이이거나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결국은 이 소녀는 ‘Home’이 아닌 ‘House’에서 살았던 것이다. 성냥불의 빛과 따스함은 생명을 상징하고 그 생명은 바로 가정 Home에 있다.

소녀는 촛불을 켜면서 할머니의 사랑이 있는 행복한 방을 생각한다. 그것은 항상 남의 집 벽 너머에 있는 빛이고 사랑이었다. 성냥 빛은 그 벽을 무너뜨리고 환상을 통해 벽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준다. 소녀는 환상 속에서 할머니의 손을 잡고 하늘로 간다.

나는 미하엘 엔데의 ‘모모’를 처음 읽었을 때 그 환상적인 허구에 빠졌었지만 사실은 금융시스템 자체를 고발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모모’에서 시간 도둑은 바로 은행원이고, 그들이 시간을 거래하는 것은 이자이다. 원래 살아 있는 것만이 새끼를 치는데 가축도 아닌 돈이 어떻게 새끼를 치는 것인가. 살아 있는 생명의 화폐, 2000년 전 요셉이 갖고 있던 달란트에 이자가 붙어 현대까지 왔다면 그 금의 양은 지구를 넘어 태양의 크기가 된다고 한다. 그 원금은 겨우 막대기 하나 살 수 있는 정도의 가치였는데 말이다.

결국 돈은 자신의 지능으로 열심히 살아가려는 사람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는다. 금융 시스템이 시장 시스템을 좌우하는 오늘의 상황을 한국 사람은 옛날부터 한 마디 말로 정확히 표현했다. 돈 놓고 돈 먹는다는 말로 카지노 자본주의의 특성을 말했던 것이다.

04 지판구와 신라

■ 와꾸와꾸의 나라

마르코 폴로의 ‘동방 견문록’에는 황금의 나라 지판구 Zipangu에 대한 글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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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은 인도의 땅을 설명하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우선 지판구의 큰 섬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고자 한다. 동방에 있는 이 섬은 Mangy의 해안에서 1500마일 떨어진 큰 바다 속에 있다. 그래서 아주 큰 섬이다. 주민은 얼굴이 희고 키도 적당하다. 그리고 우상 숭배자들이며 그들 자신의 국왕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나라의 왕에 종속되지 않는다. 막대한 금이 있는데 국왕은 황금을 섬 바깥으로 가지고 나가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그 섬의 국왕은 대 궁전을 소유하고 있는데 우리의 교회가 납으로 씌어져 있듯이, 모든 것이 순금으로 덮여 있다. 궁전의 창은 금세공이 되어 있다. 그리고 사람이 모이는 마루와, 많은 방들의 바닥은 전부 황금으로 깔려져 있다. 그 두께는 거의 손가락 두 개 정도이다. 그리고 작은 진주들이 풍부해서 동그랗고 붉은 색을 띠고 있는 것으로 흰 진주보다도 더 비싸다. 그밖에도 대량의 진주나 보석이 있다. 지판구 섬은 아주 놀랄 만큼 풍요하다.”

이 글에 나오는 환상적인 지판구라는 금의 나라가 오늘의 일본이다. Japan이라는 이름도 바로 지판구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런데 마르코 폴로의 지판구보다 400년이나 앞선 9세기에 이미 와꾸와꾸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일본이 금의 나라라는 것이 소개된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은 지금 이란인 바그다드의 당시 체신장관이었던 이븐 후르다드베 Ibn Khurda'dhbeh가 쓴 ‘모든 도로와 모든 나라의 글’ 에 등장한 글이었다.

여기서 ‘와꾸와꾸’는 무엇인가. 일본어로 자기나라를 옛날에 와고쿠라고 했는데 중국 동쪽의 와꾸와꾸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일본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실제로 일본이 금이 많은 나라인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가령 산에서 금광석을 캐내서 그것에서 금을 얻는 기술은 일본의 전국시대에 일반화된 것으로 그전까지 금을 생산 한다는 것은 냇물 바닥에 침전되어 있는 사금을 캐는 정도였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제일 크다는 동대사 대불을 만들게 된 계기도 그렇다 일본은 대불에 씌울 금도 없었고 기술도 없었다. 당시의 기록을 보면 리코쿠라고 하는 지방에 금을 생산할 수 있는 금맥이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749년 리코쿠 지역의 왕에게 백제의 경복왕이 사금 900냥을 헌납했다. 이때부터 일본은 금이 나오는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와꾸와꾸는 한국이지 일본이 아니었다. 부처님의 위강(위엄과 강함)을 알리려는 금을 일본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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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일본에 많은 문화를 주었는데, 심지어 금까지도 한국에서 넘어갔을 것이라는 가정이 가능하다. 스키타이 황금 문화가 꽃피운 곳이 신라가 아닌가. 불교가 한국에 들어와서 결국 대불까지 만들어졌고 한국은 금의 나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금 문화가 발달한 신라는 금 만능 사상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금을 무턱대고 좋아하지 않았다. 금의 양가가치(금 가치의 양면성)를 안 것이리라. 그리고 금은 인간을 파괴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가난했지만 귀중한 생명가치에 보다 더 무게를 둔 문화를 만들어 냈던 것 같다.

04 묻어라, 금

■ 포도밭의 보물

대학시절 양주동 선생이 곧잘 들려주던 이야기가 있다. 제나라 사람이 시장에서 금덩이를 훔쳤다가 잡혔다. 재판하던 원님이 기가 막혀 물었다. “이 어리석은 놈아, 어쩌자고 그 많은 사람이 보고 있는 대낮에 금덩이를 훔쳤느냐? 그러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그러자 도둑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사또님,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제 눈에는 오직 금덩이만 보였거든요.”

나중에 출전을 봤더니 전국책 戰國策에 나오는 ‘불견인도견금 不見人徒見金’이라는 일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화 ‘포도밭의 보물’도 마찬가지다. 임종을 앞 둔 노인이 아들들을 불러, 포도밭에 큰 보물(금)이 숨겨져 있으니 그것을 파내서 가지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들들은 열심히 포도밭을 파보지만, 끝내 금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가을이 오자 포도밭에는 많은 포도들이 열리게 되고, 그것을 본 아들들은 비로소 아버지가 유언을 통해 아들들에게 ‘경험’을 선물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즉 경험을 통해 “축복은 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실함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지식을 얻는 과정에서도 똑같다. 독서해라. 책 속에 길이 있다. 독서 캠페인마다 나오는 이 말은 먹히지 않는다. 그런데 옛날 어떤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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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가 아들에게 “이 많은 책의 어느 것엔가 책갈피마다 너는 위해 고액 화폐를 숨겨 두었다.”고 말했다. 아들은 돈이 탐나서 계속 책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독서에 취미를 붙이고 모든 책을 읽게 된다. 결국 그는 아버지가 숨겨 둔 것은 진짜 지폐가 아니라 책 속에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제 인간은 금을 읽을 줄 알아도 인간을 읽을 줄 모르는 문맹자가 되어버린 것이다.

■ 마음속의 정금

이런 외국의 이야기와는 달리 한국인은 금이 눈을 멀게 하는 불상지물 不祥之物 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사실 한국에는 예로부터 금이 풍부했다. 흔히 알고 있는 서동요의 내용만 봐도 한국에 얼마나 많은 금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서동에게 시집간 선화공주는 크게 놀라고 만다. 서동이 마를 캐던 땅에 금이 흙과 같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경주 박물관에 가서 보면 알 수 있지만 현존하는 뛰어난 금세공 제품들이 증명하듯 한국은 스키타이 계통의 금 문화권으로서 아주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왜 한국은 금의 나라로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이유야 여러 가지겠지만 조선 실록에 나오는 한 일화를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조선조에 해안가의 나무를 모두 베었다. 숲이 있으면 그곳에 사람이 살 것이라고 생각해 바다의 침략자들이 약탈하러 올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살지 않는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다. 또한 금이나 은이 나오면 다 묻으라는 지침도 있다. 무장한 세력들이 빼앗으러 올지 모르니 미리 화를 피하자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금이나 은을 가지면 그것을 약탈대상이 되고 결국 불행을 가져 온다고 생각했다. 금이라는 것이 항상 나라를 망쳤다는 역사를 우리 조상들께서는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런 지혜는 한국 역사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형제 투금 설화를 보자. 한국인 두 형제가 길을 가다 금덩이를 주웠다. 횡재를 한 형제는 사이좋게 금을 나눈 다음 나룻배에 올랐다. 배가 강 가운데에 이르렀을 때였다. 아우가 갑자기 금덩이를 물속에 던져버리는 것이었다. “뭐하는 거야?” 형이 놀라 소리치자 동생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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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 금덩이를 보자 제 마음이 달라졌어요. ‘형님이 없었다면 나 혼자 금덩이를 차지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떠나지 않아 버린 것입니다.”

위 이야기에도 나오지만 한국인은 금을 불상지물로 보았다.

모든 경제의 가장 기본에는 황금의 욕망이 존재하는데 한국만이 다르다. 단순히 선비가 지배한 유교 나라라는 것 때문이 아니다. 물질에 대한 욕망이 가져오는 부정적인 결과, 물질이 오히려 화를 가져 온다는 독특한 황금기피 사상이 한국에서 싹텄다고 볼 수 있다.

구한말에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윌리암 뉴트 블레이어 목사는 그의 저서 ‘정금 같은 신앙’에서 “한국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기름진 나라들 가운데 하나”라고 말했다. “지하자원 특별히 석탄, 철, 그리고 13도 어디에나 금이 풍부한 나라”라고 기술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이 이웃나라들이 한국을 탐내는 이유”이고 “1910년에 일본이 강제로 한국을 병탄한 실제적인 이유도 과잉 인구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때문이다.”라고 풀이한다. 종교인으로서는 드물게 한국과 금의 관계를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런데 그 선교사가 진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다른 데 있다. 금에 대한 기술은 갑자기 방향을 틀면서 놀라운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데 한국의 가장 좋은 금은 산이나 모래흙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 60여 년 이상 기독교 선교사들은 이 금을 찾았고, 놀랄 만한 양과 질의 금, 곧 겸손한 마음과 기꺼이 복음을 받아들이는 그 금을 발견하였다.”고 적고 있다. 국권의 상실과 계속되는 억압과 가난, 그 시련에서 오는 고통의 불꽃은 한국의 금을 더욱 정화하고 재련하여 한층 더 순결하고 강해졌다고 이야기 한다. 외국인의 눈에 보였던 그 금, 우리 조상들이 가꿔 온 금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조상들은 땅 속에 금의 자원을 남긴 것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생명의 자원을 우리에게 주었다. 그래서 나는 강연이 있을 때마다 늘 말한다. “땅 파지 마라. 가슴과 머리를 파라.” 가슴에 우리의 보물이 있다.

6. 금붕어에도 배꼽이 있는가

01 금붕어형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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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예품이 된 생명체

일본인들은 금붕어형 문화가 중국 남부의 일부와 일본에만 있다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는다. 개, 말, 원숭이, 새와 같은 동물들을 애완용으로 기르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흔한 일이다. 그러나 물고기를 페트로 삼는 민족은 아주 특이하다. 왜냐하면 금붕어는 새처럼 즐겁게 지저귀지도 않으며 개처럼 사람을 반기며 꼬리를 치거나 짖는 일도 없다. 다만 말없이 물위에 떠서 헤엄쳐 다닐 뿐이다. 그런데도 일본 사람들은 금붕어의 원조인 중국의 제치고 생활 속에 깊이 금붕어 문화를 끌어 들였다.

일본인들은 비싸고 진귀한 것을 좋아하는 호기심과 큰 돈을 기대하고 품종개량에 손을 대면서 수천 종의 품종을 만들어 대중사회로 퍼지게 했다.

머리에 울퉁불퉁한 혹을 가진 녀석, 등에 지느러미가 없는 난수, 꼬리가 꽃처럼 복잡하게 분할되어 있는 도사깅 같은 것. 이런 금붕어의 모습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기 좋은 방향으로 발전된 것이다. 그러니까 생명이라는 가치로 봤을 때는 기형적 비생명, 그야말로 움직이는 보석으로 태어난 샘이다.

우리나라 역시 금붕어의 발상지는 중국으로 되어 있다. 중국에 사신으로 간 사대부들의 기록을 보면 금붕어를 보고 그 진귀함에 놀라움을 적은 것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홍대용의 청나라 기행문 ‘을병연행록’에서는 길거리에 금붕어를 파는 가게가 여러 군데 있다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금붕어가 선비들의 관심 대상이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의 선비들은 정원에 연못을 만든 후 금붕어와 잉어를 기르며 감상하는 취미가 있었다. 다산 정약용은 선비의 거처가 어떠해야 하는지 묻는 제자 황상의 질문에 뜰 앞에 석류, 치자, 백목련, 국화 등을 길러야 한다고 대답했다. 또한 산림경제 제2권 목양 牧養, 물고기 기르기 養魚 편을 보면 금붕어 사육에 대한 자세한 기술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중국, 일본에서 그토록 번창한 금붕어 문화가 한반도에서만은 정착하지 않았다.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이나 본격적으로 비교 연구해 보려는 학자들도 거의 없다. 환관과 율령제도 그리고 과거제도를 빼면 대체로 일본문화는 한국에서 건너간 것들이라고 여겨왔다. 그런데 금붕어만은 중국에서 일본으로 직수입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양국은 품종개량의 정보 등을 교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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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붕어의 배꼽

이미 지적한 대로 금붕어를 중국의 명칭대로 따랐다면 금어 金魚라고 해야 한다. 일본은 물론이고 영어권에서도 골드 피쉬 Gold fish다. 그런데 한국만은 그냥 물고기에 금을 붙인 것이 아니라 그 이름에 붕어라는 종류명 그대로 남겼다. 일본에서는 붕어를 후나라고 하고, 붕어 종류 중에 붉은 색이 있는 종의 이름을 히부나라고 하는 말이 엄연히 있다. 그것이 금붕어의 원조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중국식으로 그냥 물고기 어 魚자에 금을 붙여서 깅교 金魚라고 부른다.

이것이 뭐 대수로운 것이냐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현재 자연생 금붕어라고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양자강 하류에서 발견되었다는 돌연변이의 그 금붕어 말고는, 자연생인 금붕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도 가끔 혼돈하고 있지만 잉어와 붕어는 머리에 수염이 있느냐 없느냐로 구분한다. 잉어는 반드시 입 언저리에 수염이 있다. 이 차이와 크기, 생태를 보면 붕어는 원래 잉어과이지만 다른 종류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는 모두 금어, 금물고기라고 하는데 왜 우리만이 금붕어의 먼 조상, 할아버지의 이름인 ‘붕어’를 남겨 금붕어라고 했을까? 작은 것 같지만 이 차이에서 문화문명에 대한 끝없는 탐구가 시작된다. 유레카라는 그 짧은 한 마디가 희랍어에서 내가 2,3천년 전 희랍문화를 찾아갈 수 있는 것처럼 금붕어에 남아 있는 ‘붕어’란 이름을 통해서 방안의 어항과 연결된 변형되기 이전 양자강 넓은 하류의 물속에서 놀던 붕어들의 자유로운 유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붕어는 유라시아의 냇물에 가장 널리 번식하고 있는 물고기종으로 생명력이 강하여 오랫동안 인간 가까이의 개천에서 살아온 물고기다. 바로 그 붕어가 인간에게 잡혀와 천 년 가까이 다른 모습으로 사육되어 오면서 고향을 잃고 자연 아닌 인간의 문명 문화 속에서 생명을 유지해 온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는 배꼽이 있다. 이 배꼽은 쓸모가 없는데도 우리 몸 한복판에 있다. 배의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배복’이라고 불렀던 것이 음운도치 현상으로 ‘ㅂ’이 ‘ㄱ’으로 바뀌어 ‘배곱’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배꼽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블랙홀처럼 한복판에 있는데 비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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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지만 배꼽을 통해서만 그 생명의 원천을 되돌아 볼 수 있다.

나는 금붕어를 볼 때 금붕어의 배꼽을 본다. 남들은 포유류도 아닌 금붕어에 무슨 놈의 배꼽이 있느냐고 할지 모르나 분명히 있다. 나는 그 배꼽을 통해서 금붕어가 잃어버린 고향, 어느 때는 흙탕물이기도 하고 맑은 물이기도 한 양자강 하류에 도도히 흐르는 그 물을 보는 것이다. 인공적인 댐에 갇히지 않고 원 자연의 모습과 함께 존재했던 그 붕어의 모습을 생각한다. 수돗물이 아니라 골짜기에서 흘러내려온, 흔히 옥수라고 부르는 그 파란 물, 생명의 물이었다.

내가 ‘흙속에 저 바람속에서’를 쓸 때 ‘황토흙’이라고 해놓으면 으레 편집 교정원들은 흙자를 뺀다. ‘무너진 황토흙’이라고 써 놓으면 ‘무너진 황토’라고 말한다. 하다 만 것처럼, 어떤 다른 나라의 말이라 하더라도, 아마도 우주인이 와서 우주의 말을 쓰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그 배꼽을 남긴다. 그러니까 동해라 하지 않고 ‘동해바다’라 하고 처가라고 하지 않고,‘처갓집’이라 하고, 역전이라고 하지 않고 ‘역전앞’이라 한다.

어머니의 젖을 먹고 지금까지 자라고 살아온 내가 먹었던 모든 음식물, 그런 것에 의해서 만들어진 이 육체 속에 깊이 박혀있는 지도가 있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저자 마이클 스코필드가 자기 몸에 탈출통로 지도를 문신으로 새긴 것처럼, 우리에게 새겨진 문신들이 있는 것이다. 세포 하나하나에 찍힌 지도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영어가 들어오면 캔에 통을 붙여 깡통이라고 부른다. 라인선상이라는 말도 쓴다. 라인 line은 무엇이고 선 線은 무엇인가. 일본말이 들어오면 모찌떡, 서양말이 들어오면 빵떡, 이것은 개그맨들의 개그가 아니다. 사실이다. 빵하고 떡은 닮지도 않은 것이다. 엄격하게 따지면 하나는 찐 것이고 하나는 구운 것이다. 하나는 물이고 하나는 물이다. 그래도 빵이 들어오면 떡이라고 번역했다.

나는 그럴듯한 글을 쓰려고 많은 문헌을 섭렵했다. 그 자료의 반의 반도 여기에 반영이 안 되었다. 일본의 금붕어 이야기, 금붕어 연구, 금붕어의 문양, 수많은 자료를 보았지만 다 버렸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한국은 금붕어라는 말 속에 붕어라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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름을 살렸다. 세계 사람들이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았는데, 한국만 금붕어 조상의 흔적을 남긴다. 마치 서양의 빵이라는 말에 떡이라는 말을 붙였듯이. 이것이 금붕어 이름의 발견이다.

02 돌아갈 수 없는 생명

■ 가축화된 생물 누에

인간의 눈에 보기 좋도록 아름답게 모양을 바꾼 금붕어는 자연의 냇물에서

는 살지 못한다. 장점이던 보석처럼 빛나는 빨간 비늘이 천적들의 눈에 띄기

쉬운 약점이 되어 쉽게 공격을 당하기 때문이다. 또 부챗살처럼 퍼져 있는

그 꼬리는 강물에서 헤엄치기에는 너무나 약해 오히려 방해물이 된다. 그래

서 금붕어는 자연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인간 환경, 문화 환경, 인간의 거

주 공간속 수조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품종 개량의 산물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점은 가축, 애완용과 같이 인간과 더불어 사는 모든 종에서 공통적으

로 드러난다. 가령 누에를 보자. 누에는 가축화된 생물 가운데 그 여가가 가

장 오래된 것 중에 하나다. 금붕어와 마찬가지로 야생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불능화 된 곤충이라 할 수 있다. 먹이가 없어도 도망가지 않을 만큼 인

간에 의한 관리 없이는 스스로 살아갈 수가 없다. 자연의 뽕나무 밭에 누에

를 두면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떨어진다. 잎 위에 붙어 있을 수 있는 다리가

이미 퇴화되었기 때문이다. 성충도 날개가 있기는 하나 몸집이 커서 날기에

필요한 근육이 퇴화했기 때문에 날지 못한다. 인간에게 비단을 주는 대신 그

는 스스로 살아가는 생존권을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거꾸로 이야기하

면 사람이 누에를 치는 것이 아니라 누에가 사람을 침으로서 살아가는 생존

방식을 획득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자본의 시대가 오면 누에는 인간의 노예가 아니라 인간의 교사

로 바뀐다. 누에는 오랫동안 인간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인체환경과 비슷

하다. 때문에 생체에 직접 실험할 수 없는 병균들을 누에에게 주입해 그것이

인간에게 이로운지 해로운지를 알아 볼 수 있다. 일종의 ‘생명의 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에가 이제는 인간의 생명의 은인이다. 인간의 생

명에 위해를 가하는 것을 덜어내는 새로운 실험물로써 이용되고 있는 것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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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동충하초의 경우처럼 누에의 특별한 병리, 생리 현상을 이용해

인간의 의학에 이용하거나 또는 인간의 보양식 역할을 한다. 즉 의식주의 의

를 대표하던 누에가 이제는 식과 관련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자연과 나와의 관계를 바꾸면 누에가 보다 누에답고 사과나무가 보

다 사과나무답게 변한다. 인간과 비슷한 것으로 바꾸기 보다는 인간과 관계

없이 저 스스로 독립할 수 있도록 되는 것이다. 생명체의 특성 그 자체가 인

간과의 관계를 맺게 되는 새판을 짜는 것이다.

■ 개량된 사과나무

인간의 손에 의해 개량되어 다시는 자연으로 돌아갈 수 없는 금붕어와 누

에, 그것이 식물로 대치된다면 그것은 아마 사과나무일 것이다. 사과는 인류

의 역사와 거의 맞먹는 긴 세월 동안 인간과 관계를 맺고 있다.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사과를 재배했다. 로마제구에서도, 희랍의 도시국가에서도, 고대 이

집트 에서도 사과는 잘 알려진 열매다. 그런데 사실 야생종 사과나무는 사람

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그 열매가 쓰고 시다.

농담 삼아서 이브가 사과를 먹었을 때 그 맛이 너무나도 써서 뱉었을 것이

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금붕어, 나팔꽃의 품종 개량을 이야기한 것처럼 사과 역시도 인간이

먹기 좋도록 품종 개량을 해서 오늘의 사과가 된 것이다. 사과 자체가 스스

로의 생명을 존속시키기 위해서 노력해 자기 삶에 필요한 열매와 잎을 맺어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의 입장에서 더 크고 달콤해지도록 품종을 바꿔왔다.

사람이 사과나무를 관리하고 지배함으로써 전혀 다른 종류의 사과를 만들었

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과나무만이 아니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자연 그대로의 숲으로 돌아가 타

잔이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특히 과보호된 도시아이들은 도시에서 살 수 있

는 형태의 인간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시골 아이들보다 야생력이나 생명력이

부족하다. 생각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개량된 사과나무가 농약

없이는 자랄 수 없듯이 도시의 아이들은 문명의 여러 가지 편의시설, 특히

병원의 의술에 의해서 보호받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오늘날의 문명인들은 하

루라도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는 제 몸을 추스를 수 없다. 자연적으로 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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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던 면역력이나 생명력은 사라졌다.

여기서 과수원의 나무는 산의 나무와 달라진다. 과수원은 자연 생태계에 떨

어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인공적 자연공간이다. 현재 우

리들이 먹고 있는 사과들은 전부 농약이 사용되고 난 후의 품종들이다. 맛과

크기에 중점을 두다보니 농약을 치지 않고서는 자라지 못하는 사과들만 남

게 되었다. 품종 개량이 아니라 품종 개악의 결과를 낳게 된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할 수는 있어도 보호할 수는 없다. 또 자연이 인간을 지

금까지 보호해 주었지 인간이 자연을 보호해 준 것이 아니다. 사과나무를 지

키고자 했던 인간의 마음이 결국 불구의 나무를 만들지 않았던가. 우리는 잘

해봤자 자연의 수호자이지 자연의 보호자는 아니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다른 생물, 다른 자연물들을 수십 억 년 지

켜온 그 생명의 질서와 생명의 질서 속에서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금붕어는 식물화한 사과나무이다.

■ 있는 그대로의 한국인

금붕어는 어느 의미에서 보면 이미 생명을 가진 물고기가 아니라 인간의

의도에 의해서 창작된 미술 공예 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못에 넣고 기를

때는 위에서 내려다봄으로 그 품종 개량은 퍼진 지느러미나 꼬리에 집중되

고 유리 어항이 생기면 측면에서 감상하기 때문에 옆모습 특히 눈 부위가

새롭게 개량된다. 특히 중국이나 일본의 상가에는 금붕어를 매달기도 해서

아래서 위로 쳐다볼 때의 하복부까지도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다. 금붕어의

품종 개량은 일본인들이 자랑하는 나팔꽃처럼 다양한 변화를 겪어 오늘에

이르렀지만 한마디로 그것은 금붕어 자신이 아니라 감상하는 인간들의 기호

와 취미에 의해서 진화되어 왔다.

자연도태가 아니라 문화적인 인공 도태가 되어 사라지는 금붕어들이 있고

거꾸로 유행을 타서 몸값과 그 존재가 급부상하는 것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금붕어는 인간이 자연에 대해 해 온 모든 욕망, 변조, 파괴의 과정을 한 눈

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금붕어는 아름답다. 금처럼 찬란하다. 이 귀엽고 아름다운 금붕어 뒤에는

섬뜩한 인간의 문명에 대한 고발이 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내 스스로가 금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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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와 똑같이 그 문명의 희생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

금붕어를 학교로 옮겨오면, 수능시험이나 학교의 커리큘럼 같은 것에 의해

바뀌는 학생들이 된다. 스스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모이를 주는 사람들(선

생이나 부모)의 손에 의해 변화한다. 학교 시설이 금붕어의 어항이라고 한다

면 학교 전체의 방침, 교육부, 국가의 발향에 의해서 주입식교육과 훈련을

받은 학생은 금붕어와 같다.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그들이 원하는 모습

으로 바뀌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는 중국이나 일본에서와 달리, 금붕어의 개량도, 나

팔꽃의 개량도 인기를 끌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금붕어도, 개량된 나팔

꽃도 키우지 않았다. 일본의 무사들과 달리, 한국의 선비들은 인위적으로 생

명을 조작하는 것에 흥미를 가지지 않았을 뿐더러 오히려 금기시했기 때문

이다. 중국에는 낙타사라고 해서 직업적으로 나무를 전정하는 사람들이 있었

고 일본 역시 그랬다. 심지어 중국의 전족, 일본의 흑치 등, 중국과 일본에는

신체를 인위적으로 변형하는 치장법이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정원이나 화

초를 가꾸는 데 있어서도 있는 그대로의 것을 존중했지 품종개량은 하지

않았다. 인체의 변형을 가해 인공적인 미를 추구하는 모습도 한국에서는 찾

아볼 수 없다. 생명에 무언가 인위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 이것을 바로 문화

물질이라고 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문화적인 인위성이 위력을 떨칠

때에도 한국에서만은 그것을 금기시한 것이다.

그래서 상업도 발달하지 못하고, 산업화도 늦어진 것인지 모른다.

03 뉴턴의 사과

■ 중력과 은총, 두 개의 힘

보아라, 같은 과학자라고 해도 아르키메데스가 발견한 것은 중력이 아니라

부력의 원리였다. 가라앉는 힘이 아니라 뜨는 힘이다. 무거워서 떨어지는 사

과가 아니다. 무거운 것을 가볍게 떠올리는 목욕탕 물, 쇳덩어리의 배도 뜨

게 하는 부력의 마법이다. 그 감동이 얼마나 컸으면 옷 입는 것도 잊고 발가

벗고 소리쳤을까. 에우레카 에우레카. 그날 시라쿠사의 나무들은 웅성거렸고

백주의 태양 빛은 술에 취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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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는 뉴턴보다 훨씬 이전에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를 통해 말하

지 않았는가. “내 사랑의 강력한 밑바탕과 그 위에 지어진 집은 지구의 중

심, 바로 그곳에 있으며 모든 것들을 그 중심으로 끌어당긴다.”고 지구의 인

력에 대해 증언하고 있다. 시인의 손이 물리학자의 손보다 먼저 땅을 짚었

다.

우리에게는 조금 낯선 사람이지만 헝가리의 수학자이자 시인인 파르카시

볼리아이 Farkas Wolfgang Bolyai 는, 인간의 지적 활동을 설명하기 위해

사과를 상징물로 내세우고 있다. 첫째는 아담과 이브의 사과이고, 둘째는 파

리스의 사과, 그리고 세 번째는 뉴턴의 사과이다. 이 세 가지 사과는 생성,

창조, 형성 그리고 영역별로 보면 종교, 철학, 과학이라고 하는 인류 문화를

구성하고 있는 세 가지 요소를 대표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볼리아이는 아담의 사과와 파리스의 사과는 세계를 원죄와 투쟁이

지배하는 지옥으로 만들었지만 뉴턴의 사과는 과학의 세계, 근대라고 하는

인간의 새로운 이성이 지배하는 세계를 분명히 발견하고 구축한 사과라고

칭찬한다. 아담과 이브가 선 善이고 파리스의 사과가 미 美라면, 진 眞을 낳

은 것은 뉴턴의 사과라고 말해 왔다.

* 파리스의 사과

트로이의 젊은 왕자 파리스에게 제우스 신은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던진

황금 사과의 주인을, 서로 자기가 주인이라고 주장하는(가장 아름답다고 주

장하는)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 중에서 심판하게 했다. 파리스는

권력이나 명예보다도 여색에 이끌려 아프로디테가 약속한 스파르타 왕비를

납치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그 유명한 트로이 전쟁이 시작됐다. 황금 사과는

가치 판단을 둘러싼 싸움의 상징이 되었다.

거기에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지구를 비롯한 모든 천체를 보편적으로 지배

하는 질서와 원리의 힘을 발견한 것이 소위 중력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뉴턴은 위대한 과학자였지만 또한 사랑을 모르는 인물이기도 했다. 볼테르

에 따르면 뉴턴은 죽을 때까지 동정이었다고 한다. 그는 비단 여자와의 신체

적 관계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그에겐 마음을 터놓고 지

낼 만한 친구들이 거의 없었고, 조금이라도 가까이 온 자들은 적으로 돌려

세우기 일쑤였다. 그가 평생 동안 미워한 인물들의 명단과 그 내용을 작성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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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면 한참이나 걸릴 것이다. 뉴턴의 삶에 우정이 깃들 틈은 없었다. 뉴턴이

웃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비서의 증언은 사실이었나 보다.

■ 엠페도클레스의 사랑과 증오

이 세상이 물, 불, 공기, 흙의 시원소로 이루어졌음을 주장한 최초의 철학자

인 엠페도클레스 Empedocles는 “이 세상은 물질로 되어 있는데 서로 끌어

당기는 힘과 내뱉는 힘이 있다. 그로써 움직인다. 그것이 먼지의 자유, 인력

과 척력이다. 이때 인력이 사랑이며, 척력이 곧 증오다”라고 말한 바 있다.

끌어당기는 힘(인력)은 가까이 있고 싶은 감정, 사랑이며 이와 반대되는 멀

어지려고 하는 힘(척력)은 증오라는 것이다. 세계를 물질로 파악한 궁극의

유물론자가 이 세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힘으로 사랑을 거론하고 있는 것이

다.

엠페도클레스는 이 세상은 모두가 물질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 물질이라고 하는 것은 단순히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원리와 증

오의 원리에 의해서 끝없이 변화하고 순환하면서 영원회귀 한다고 생각했다.

즉, 사랑에 의해서 결합하고 증오에 의해서 분리되는 끝없는 순환 속에서 우

주는 거대한 순환 고리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네 원소(아르케)들도

사랑에 의해서 결합하고 미움에 의해서 흩어지는데 이것이 꼭 우리의 음양

이론 같다.

■ 프리에의 사과사기

푸리에 Charles Fourier는 파리에서 파는 사과 하나의 가격이 그의 고향

브장송에서는 사과 백 개의 값에 해당하는 것을 발견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

는 어떻게 해서 그러한 가격차가 생겨나는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것

이 바로 사회의 부조리 때문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때 푸리에는 이러

한 사과의 법칙 즉, 한 개의 사과 값이 백 개의 사과 값에 해당하는 사회의

왜곡을 하나의 이론으로 만들자고 했으며 실재로 그것을 실현했다.

온 우주에 질서를 주는 만유인력처럼 인간의 사회나 집단에 질서를 부여하

는 것은 바로 인간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정념의 인력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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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끌어당기는 힘,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따라서 사과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 보다 사람들 사이의 끌어당기거나 배척하는 정념의 인

력을 발견한 푸리에가 더 위대한 발견을 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지구는 벌써 식어서 죽었어야 했을 텐데 생명이 점점 불어 간다. 그런데

도 사람들은 낙하하는 사과만 보았지 계속해서 사과 씨에 싹이 움트는 것은

보지 못했다. 물고기들에게는 역류하는 성질이 있다. 죽은 고기는 물과 함께

떠내려가지만 등용문의 고사처럼 잉어는 급류를 타고 용문을 넘어 간다. 생

명은 이렇게 거슬러 오르려는 역엔트로피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우연

성과 도전성을 함유한 것이 곧 생명의 법칙, 사랑의 본성이다. 바람과 물의

힘, 중력의 힘을 이용한 다음엔 언젠가는 우리가 사랑의 힘을 이용할 때가

올 것이다. 그날은 우리 인류가 세계사에서 두 번째로 불을 발명하는 날이

될 것이다.

■ 떨어지지 않는 사과

일본에서 태풍이 불었을 때 과수원의 사과가 90% 가량 떨어졌다. 일 년 농

사는 그것으로 끝난 것이다. 떨어진 사과는 상품적 가치가 없어 팔 수 없다.

잼으로 만들어 팔거나 싸게 처분하거나 폐기하는 방법 밖에는 없는데, 이렇

게 해서는 생산비도 나오지 않는다.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대책회의를 하던 중 다른 사람들은 다 떨어진 사과

만을 보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아직 떨어지지 않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사과에서 희망을 찾는다. 다른 사과와 달리 끝까지 떨어지지 않았던 사

과의 정신력에 주목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태풍 속에서도 떨어지지 않은 저 사과들을 ‘떨어지지 않는 사

과’로 팔면 보통 사과의 10배 가격으로 팔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낸다. 떨어

지지 않는 사과를 인간에 비유하여 어떤 역경 속에서도 버티는 정신력을 상

징화한 것이다. 이렇게 문화적인 상징성을 부여 했을 때 거기서는 또 다른

문화적 가치, 정신적 가치가 창출된다. 태풍 속에서도 살아남은 그 사과의

의지를 상품으로 만들었고 이 사과는 불패의 상징으로 수험생들에게 큰 인

기를 끌었다.

이렇게 생명자본주의의 관점에서 상품을 바라보면 그 시장도 판매 양식도,

상품 가치도 모든 것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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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에 호소하는 마음의 인력, 상품에 문화적

가치, 고정가치, 생명가치를 부여함으로써 새로운 경제생활 양식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예인 것이다.

7. 묻히다. 살다. 날다.

적을 뜻하는 영어의 에너미 enemy는 무시무시한 말이 아니다. 꼭 죽여야

만 내가 사는 대상이 아니다. 어원으로 보면 단지 사랑이 없는 남, 친구가

아니라는 뜻밖에 없다. 그러니까 적을 사랑하면 친구가 될 수 있다.

01 금붕어의 매장

■ 레이건이 만든 나무 십자가

내가 키우던 금붕어는 결국은 얼마 못가 죽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은 잘 생

각나지 않지만 죽은 금붕어를 원고지에 싸서 묻을 곳을 찾아 다녔던 희미한

기억이 난다. 길은 다 아스팔트로 깔려 있고 조금 빈터가 있다 싶으면 연탄

재와 쓰레기로 덮여 있다. 금붕어를 묻어줄 한 뼘의 공지, 한 줌의 흙이 없

다는 것을 발견하고 도시의 비정에 분노했거나 아니면 금붕어를 묻으러 다

니는 내 행동에 스스로 회의를 느꼈을지 모른다. 살아 있는 인간에게도 한

뼘 설 자리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도시인데 하물며 죽은 미물을 위해 내어

줄 땅이 어디 있겠는가. 철없는 사치일 것이다.

금붕어를 묻던 희미한 기억이 되살아난 것은 레이건 대통령의 장례식에 대

한 기사를 읽었을 때이다. 아버지를 증오하고 평생 등지고 살아온 딸 패티

Patty가 모든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아버지 로날드 레이건의 장례식에 나타

난 것이다. 그 어머니 낸시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빼닮은 패티는 아버지가 가

족을 사랑할 줄 모르는 냉혈한 이라고 비난하면서, 물려받은 성 姓도 거부하

고 어머니를 따라서 ‘패티 데이비스’로 살아왔다.

그녀는 한 때 마약에 빠졌고, 부모님에 대한 반항심으로 플레이보이

Playboy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이후 반전 ‧ 반핵 운동에 참여하며 평생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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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를 미워했던 그녀이다. 기자들이 모여들어 인터뷰를 청했고 핵심질문은

어떻게 아버지와 화해하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그때 패티는 참으로 충격적인

이야기를 한다. 어렸을 때 자기가 사랑하던 금붕어가 죽었을 때가 생각났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때 슬퍼하는 자기를 위해 아버지는 금붕어의

무덤을 만들어주셨다. 그리고 나뭇가지로 십자가를 만들어 그 무덤위에 꽂아

줬던 기억이 되살아났다고 했다. 그러한 추억이 아버지가 자신을 사랑해 주

었다는 것을 믿게 만들고 금붕어가 죽었을 때의 어린 시절의 그 슬픔이 아

버지의 죽음으로 이어지게 된다.

금붕어의 죽음과 그 슬픔을 통해 아버지와 딸은 하나가 되고 그 생애에서

가장 따뜻한 사랑과 화해를 나누게 되었을 것이다.

릴케였던가. 과일 안에 씨가 들어있는 것처럼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그

생명 속에 죽음이 들어 있다고 한 것이다. 내 기억이 맞다면 릴케는 중대한

실수를 한 것이다. 아름답지만 잘못된 비유이다. 식물들에게 있어서 열매는

곧 죽음이고 그 안에 들어있는 씨앗은 생명이다. 산에 참나무가 많은 이유는

다람쥐가 도토리를 따서 묻어두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람쥐가 잊은 도토리처럼 죽은 자를 흙에 묻는다 해서 무슨 변화가 일어

나겠는가. 그런데도 왜 열심히 씨앗을 뿌리듯이 우리는 생명을 땅 속에 묻어

두려 하는가. 사랑하는 것이 생명을 잃었을 때 우리는 그 주검을 향해 흙을

뿌린다. 기억에서도 사라진 금붕어의 매장이었지만 나는 그 회상을 통해 레

이건을 생각했고 더 오래전에 아주 오래전 빅토리아 왕조 때 죽은 존 러스

킨의 생각을 했다.

존 러스킨 John Ruskin. 1819년에 태어나 1900년에 죽은 예술가, 철학자,

경제학자 그리고 무엇보다 ‘무네라(한 줌) 풀베리스(티끌)’의 저자이다.

이 책에는 피타고라스 파의 철학자, 수학자, 장군, 정치가, 박애주의자 그리

고 교육자로 명성이 높은 아르키타스 Archytas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일설

에는 그가 로봇을 처음 만든 발명가로 기록되기도 하며, 플라톤의 저서에서

도 이상적인 철인 정치의 모델로 다루어져 있다.

그렇게 위대한 인물이 아도리아 해에서 난파하여 익사하고 말았다. 그 시체

는 매장되지 못한 채로 한동안 물위에 떠다니다가 뱃사람에게 발견되어 그

의 자비심으로 뿌려진 한줌의 티끌(모래 흙)에 의해 비로소 흙에 덮일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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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한 번도 전쟁에서 패한 적이 없었던 용맹한 장군이며 철학자인 그

도 마지막에 받은 위로와 호사는 한 줌의 흙으로 족했던 것이다.

부 富란 무엇인가. 인간에게 부를 주는 경제학이란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

변이 바로 ‘무네라 풀베리스’이다. 러스킨은 “도대체 부라는 개념이 무엇인

가. 경제학이란 또 무엇인가” 하고 물었다. 그러면서 “생명 없는 부란 없다.

There is no wealth, but life.” 라고 단호히 대답한다.

내가 지금 무수히 생명, 생명이라고 동어 반복을 하고 있지만 영어의 라이

프 life에 적함한 번역어가 없다. 한국말로는 Life와 Living을 구별 할 수 있

는 말이 없기 때문이다. 리빙은 생의 수단인 의식주에 속하는 개념이고 라이

프는 진선미처럼 삶 그 자체의 목적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우리말로는 양자를 모두 합친 “살다”에서 나온 “살음” “삶”이다.

당시에 명성이 높았던 러스킨은 문학, 예술비평 그리고 경제에서도 막강한

영향을 끼쳤지만 점차 같은 해에 태어났던 마르크스의 영향 때문인가. 점점

그의 이름은 세상에서 멀어지면서 잊혀지고 만다. 그런데 다시 사회주의가

붕괴하고 자본주의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러스킨의 이름은 21세기의 구원

투수로 등장한다. 나의 생명자본주의의 근원도 러스킨의 한줌의 티끌을 일부

모델로 삼은 것이다.

그렇다 아르키타스와는 무관한 그리고 그의 학문이나 용맹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어부가 그의 시신을 덮어준 한 줌의 티끌 그 의미는 ‘생명애’일 것이

다. 내가 금붕어에 흙을 묻어주려고 한 것 역시 그런 고정가치에서 나온 행

위일 것이고, 레이건이 딸 패티의 금붕어에 나무 십자가를 만들어 꽂아 준

것도 같은 마음에서 였을것이다.

금붕어의 매장과 정 반대가 금붕어 죽이기이다. 중국의 문화대혁명

1966-1976 때는 예술이나 개인의 취향과 관계된 것들을 사치품으로 규정

하여 불태우고 금지시켰다. 도자기를 만드는 경덕진과 금붕어 사육장이 구

舊문화로 지목되어 가차 없는 비난과 공격, 파괴의 대상이 되었고, 생산 ‧ 유

통 ‧ 사육의 전분야가 괴멸 상태에 빠졌다. 절강성의 양어장은 모두 파괴되

고 귀중한 계통의 씨금붕어까지 소멸되어 양식 수단이나 기술을 거의 상실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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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주장하고 표현하려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은 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것은 정의가 된다. 프랑스혁명 때도 볼셰비키 혁명,

히틀러의 나치도 그의 추종자들이 많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승리한다. 그런

데 왜 패망하고 마는가. 거기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많은 생명을 죽였

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줄이면 생명애 生命愛가 결핍되어 있었던 탓이다. 이

는 금붕어를 먹거나 죽이는 폭행으로 나타난다.

반대로 무기도 추종하는 군중도 적었는데 어째서 종교적 지도자는 과학이

발달하고 인지가 개발된 오늘날에도 수천 년을 두고 그 힘을 지속하고 있

는가. 그 힘은 그들이 가지고 있지 않는 사랑이다. 인간만이 아니라 생명 있

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의 탄생이다. 그 모델은 금붕어 기르기. 먹을 수 있

는 것을 먹지 않고 거꾸로 그것들에 모이와 물을 갈아 주는 힘이다.

* FORT (없다) - DA (있다) : 프로이트가 외상신경증 아이의 독특한 행동

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말로 FORT 는 어머니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부재하

는 불안한 상태, DA는 그것들이 자기에게 돌아온 현존감을 나타낸 말

발표 당시 시끄러웠던 기따하라 하큐 슈가 쓴 동시이다.

“엄마야 엄마야 어디로 갔나 / 빨간 금붕어 하고 놀아야지 / 엄마는 왜 안

오나 쓸쓸하구나 / 금붕어 한 마리를 찔러 죽인다.”

엄마를 기다리다 못해 쓸쓸하고 화나고 배 고픈 분풀이를 금붕어에게 한다.

한 마리 두 마리 금붕어를 죽여 간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뻔득이는 금붕어의

눈을 보고 소리친다.

“눈물이 진다 / 해가 진다 / 빨간 금붕어도 죽고 죽는다 // 엄마, 나 무서워

/ 눈이 번뜩여 / 번뜩 번뜩 금붕어의 눈이 번뜩여”

어머니가 없는 빈 방에서 함께 지내야 할 것은 금붕어다. 그러나 기다려

도 오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분노와 절망은 금붕어를 죽이는 것으로 풀 수

밖에 없다. 책상을 부수고 종이를 찢는 것으로는 안 될 것이다. 그것들에는

생명이 없다.

방에 금붕어가 없던 그 시절의 한국 아이들은 어떠했는가. 우리가 잘 아는

동요에는 그것이 고추와 담배로 나타나 있다.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아주

오래된 전래 동요로 이상하게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아버지는 나귀타

고~” 라는 노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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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귀 타고 장에 가시고 / 어머니는 건넛마을 아저씨 댁에 / 고

추 먹고 맴맴 / 담배 먹고 맴맴”

아파트의 ‘빈 둥지 증후군’은 나귀 타고 다니던 꽤 먼 시절부터 있어왔던

것 같다. 나귀를 타고 가는 거라면 결코 가까운 장터는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한 사흘 장 본다는 핑계로 집을 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또 어머니

는 왜 이웃마을도 아닌 건넛마을로 그것도 아주머니 할머니댁이 아닌 아저

씨댁으로 간 것일까. 이 대목이 수상해서인지 요즘 부르는 노랫말에는 ‘어머

니’가 ‘할머니’로, ‘담배’가 ‘달래’로 바뀐 것 같다.

일본의 금붕어 죽이기는 가학적 신경질환의 징후라면 한국의 고추 먹고 맴

맴은 자학 自虐에 가까운 이상심리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02 마주보는 눈 맞춤

■ 토리노의 말

1889년 1월 3일 토리노.

카를로 알베르토 거리 6번지의 집에서 외출을 나선 프리드리히 니체는 6번

문 밖으로 나선다. 산책을 가거나 우편물을 가지러 갈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한 마부가 말 때문에 애를 먹고 있었다. 아무리 어르고 달

래도 말은 움직일 줄 몰랐다. 마부는 참다못해 채찍을 휘두르고 만다.

니체는 인파로 다가가서 분노로 미처 날뛰는 마부의 잔인한 행동을 말리려

고 한다. 건장한 체구의 니체가 갑자기 마차로 뛰어 들어 말을 목에 팔을 두

르더니 흐느낀다.

이웃 사람이 그를 집으로 데려갔고 그는 침대에서 이틀을 꼬박 조용히 누

워 있다가 비로소 몇 마디 마지막 말을 웅얼거린다.

“어머니 나는 바보였어요.”

그 뒤 10년 동안 니체의 의식은 영영 인간의 세계로 돌아오지 못한 채 세

상을 떠났다. - ‘토리노의 말’ 서두의 내레이션 -

이 날의 사건은 이후 10년간 이어질 긴 투병의 시작점이었다. 그에겐 이미

예전부터 광기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으나, 병세가 니체를 본격적으로 잠

식하게 된 것이다. 그날 니체의 마음속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우

리는 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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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뒤 이러한 의문을 해소하고자 한 영화감독이 있었다. ‘런던에서

온 사나이’라는 영화로 유명한 베라 타르는 그의 최후의 작품으로 ‘토리노의

말’이라는 영화를 제작한다.

그 영화에서는 서두의 내레이션을 통해 간단한 일화만 전했을 뿐 니체에

대한 것은 단 한 구절도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영화의 도처에서

발광한 니체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말은 니체가 되고 니체는 말이 된다. 즉

사람과 말이 관계는 광야의 공간, 인간 세상을 떠난 바람부는 공간속에서 널

어놓은 빨래처럼 나부낀다.

내가 이 영화에서 기억하는 것은 사람과 말이 서로 마주보는 눈이다. 니체

최후의 이미지가 사람과 말의 눈을 통해서 내 마음을 적신다. 그리고 말의

눈은 내가 그때 얼음 속에 박혀있던 금붕어의 눈이었음을 다시 발견한다.

03 생명을 구한 미소

■ 어느 인질에의 편지

생텍쥐페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 사랑은 바람의 변화나 기상

의 불확실성 이상으로 애매하고 복잡한, 선으로 잡기 힘든 그 정신의 자본을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바로 생텍쥐페리의 글이다.

생텍쥐페리는 물리적인 만유인력의 힘이 아니라 생명 속에서 서로 끌어당

기는 인력, 그 생명의 법칙에 대해서 꾸준히 생각하고 행동해 온 작가다. 그

는 그것을 자석을 끌어당기는 극지, 자극 磁極 pole이라고 불렀다. 이것을

잃으면 인간은 생명을 잃는다. 우리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 마치 자석이

나를 잡아당기는 듯이 끌리는 곳으로 우리의 삶이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래

서 이 자극을 갖고 있는 한, 사람은 도망자일 수가 없다.

유럽이 나치에 짓밟히고 있을 때 그는 유럽에 친구를 두고 혼자 미국으로

떠났다. 그가 미국에서 집필한 ‘어느 인질에의 편지’는 나치의 지배하에 있는

사람들을 인질로 보고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그

가 미국으로 망명한 뒤 프랑스에 남아 있는 친구 레옹 베르트(원래는 프랑스

인이면서도 유대인인)에게 보내는 글이다. 하지만 물론 이것은 한 사람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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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모든 레지스탕스, 독일군과 싸우고 있는 사람, 또 거기에서 생존해서

하루하루를 힘들게 사는 사람들을 향해서 쓴 글이다.

그 글 가운데 나는 아주 아름다운 구절 하나를 발견한다. “그것이 관습이

든, 한 가족의 자취이든, 추억의 집이든 좋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은 돌아올 것을 지향하면서 떠난다는 것이다.” 이 돌아올 곳, 끝없이 우리를

잡아당기는 극지는 우리가 다른 곳으로 망명을 하든 이민을 가든, 또는 지금

은 헤어져 있더라도 끝없이 마음이 끌리는 하나의 가치가 있는 곳이다. 마음

속 자석의 법칙으로 끌려 돌아간다는 것을 항상 생각하며 앞으로 나아가면

서 사는 것, 이것이 생텍쥐페리가 말하는 생명의 법칙이고 행동이 법칙이다.

종군 기자로서 스페인 내전을 취재하게 된 생텍쥐페리는 어느 날 밤, 무모

한 잠입취재 와중에 항구에서 혁명군에게 사로잡히고 만다.

당시 정신적 사치품으로 지정되어 금지되었던 넥타이를 버젓이 맨 이 낯선

사람을 보고서 이방의 낯선 사람들은 말없이 묵직한 총부리를 들이댄다.

모골이 송연해지고 밀려오는 체념 속에서 순간 죽음을 각오한다.

“곧 나는 그들을 따라 초소로 바뀐 어떤 지하실 안으로 깊숙이 내려갔다.

(…) 나는 스페인어로 몇 차례 항의를 시도했다. 그러나 내 말들은 공허하게

땅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이 운명의 순간, 그는 살아 있음을 느끼기 위해

무슨 말이든 외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런데 그 순간에 기적이 일어났다. 오! 그것은 거의 눈에 띄지 않게

일어났다. 내게는 담배가 없었다. 내 간수 중 한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는

데, 나는 그에게 손짓으로 한 대 달라고 부탁한 다음 희미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는 우선 기지개를 켠 다음, 한 손을 이마로 가져갔다. 이어서 그

는 눈을 들어 더 이상 내 넥타이가 아니라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너

무 놀랍게도, 그도 어렴풋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은 해가 떠오르는 순간

과도 같았다.”

이제 인간성의 온기는 적이나 포로라는 의미의 단위를 뛰어넘어 생명이란

이름으로 그들이 마주한 장소를 감싸 안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 전까지의 원시 생물

보다 더 먼 존재로 보였던 그들이 내게 친근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났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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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살아 있다는 놀라운 감정을 경험했다. 정말로, 살아 있다는 감정 그것이

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유대감을 느꼈다.”

“내게 미소를 지었던 청년은 조금 전까지 단순한 기계나 도구, 흉측한 곤충

같은 존재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약간 어색해 하는 모습을, 수줍어

하는 모습을, 경이롭다고까지 할 수 있는 수줍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

다. 그것은 테러리스트가 다른 테러리스트들보다 덜 잔인하기 때문이 아니었

다. 그의 내면에 나타난 인간에 의해 그의 연약한 측면이 그렇게 투명하게

나타난 것이다. 우리들은 대개 우쭐해한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 주저, 의

심, 슬픔이 있다는 것을 안다.

계속 아무도 말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그 민병대원은 내

게 담배를 내밀었고, 나는 고맙다는 뜻으로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렇게 차갑던 얼음이 한 번 해빙되자, 다른 민병대원들도 다시 인간

이 되었다. 나는 자유롭고 새로운 나라로 가듯, 그들 모두의 미소 속으로 들

어갔다.”

사랑하면 운다. 또한 사랑하면 웃는다. 사랑은 덮어주고 끌어안으며 또한

한 걸음 뒤에서 바라봐준다. 사랑은 내 것을 주고도 기뻐하며, 종과 유와 모

든 울타리를 뛰어 넘을 뿐 아니라 그 경계를 단숨에 지워버린다. 때로 적으

로 만날지라도 사랑은 식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적을 뜻하는 영어의 에너미 enemy는 무시무시한 말이 아니다. 꼭 죽여야

만 내가 사는 대상이 아니다. 어원적으로 보면 단지 사랑이 없는 남, 친구가

아니라는 뜻밖에 없다. 그러니까 적을 사랑하면 친구가 될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 사랑은 쟁취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생명의 한 본성으로

써 우리에게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랑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사랑은 늘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므로, 또한 남을 살리고 나를 살리

는 원동력이므로, 사랑이란 나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유레카인 것이다.

04 생명애라는 것

■ 오기장군의 라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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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애 愛자가 붙으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달라진다. ‘식食용’이아니라 ‘애

愛완용’이 된다. 그래서 다른 물고기는 먹이로 잡아먹지만, 금붕어에게만은

먹이를 주게 된다. 나무든, 물고기든, 네 발 달린 짐승이든, 우리가 사랑을

주게 되면 그것은 먹잇감에서 아름답고 즐거움을 주는 사랑의 대상으로 변

한다. 그리고 사랑을 하게 되고 교감이 이루어지게 되면 먹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양에게 이름을 붙이고 만 소년’이라는 일본 책이 있다. 식용으로 출하하는

양을 기르다가 양에게 정을 주고 이름을 붙여버리고 만 소년, 에이지의 이야

기다. 에이지가 그 새끼 양에게 사람처럼 이름을 달아 준 순간 그 양은 가축

이 아닌 생명을 나누는 동등한 친구가 된다. 거기서 생명과 생명끼리의 교감

이 이루어지고 애정이 생긴다. 바로 여기서 사랑 love은 좋아하는 것 like과

구분된다. 좋아하는 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이다. 고양이가 쥐를 좋아하는 것

은 라이크다. 잡아먹으면 맛있고 배가 부르니 탐내는 것이다. 그러나 러브

라고 한다면 펫 pet이 된다. 먹지 않고 키우며 아껴주게 되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재산과 집안을 보고 결혼했다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라이크의 감정이다. 그러나 눈앞의 가난을 들여다보면

서도 결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하면 거꾸로 나의 것을 내주

게 된다.

중국의 오기 장군 일화를 보면 라이크와 러브의 경계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오기는 위나라의 장군으로 중산 中山국과의 전쟁에 참전 중이었다. 그때 그

의 군대에는 종기로 고생을 하는 병사가 있었다. 괴로워하는 병사를 본 오기

는 무릎을 꿇고 그 병사의 고름을 입으로 직접 빨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병

사의 어머니는 갑자기 통곡을 하며 울었다. 주변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장군

님이 당신의 아들에게 그런 일을 해주셨는데 왜 우는가?”라고 물었다. 그러

자 어머니는 대답했다. “오기 장군님께서 그 아이 아버지의 고름도 빨아주셨

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은혜에 감사하며 목숨을 다해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이제 이 아이도 자기 아버지와 똑같이 오기 장군님을 위해 싸우다 죽을 것

입니다. 그것이 슬픕니다.”라고 말했다.

오기 장군은 그들을 정말 사랑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군사전략으로, 계산된

지도력으로 그들을 죽게 만들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부하를 사랑해서 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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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행동을 했다면 그 장군은 참으로 훌륭하다. 그러나 오기 장군의 행동은

순전히 전략적으로 군대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한 짓이다. 자신에게 이익

이 있는 것이라면 등창을 빠는 일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이해관계가 선행

되는 행동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 남이섬의 메타세쿼이아

생물권에서 무기물에서 직접 영향을 얻고 스스로 독립적으로 생겨날 수 있

는 풀과 나무들이 없었더라면 이 세상에는 어떤 동물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

이다. 그 원초적인 생명, 모든 동물들을 기를 수 있는 생명권의 주체라 할

수 있는 그 나무를 인간들은 쇠도끼 하나로 전부 쓰러뜨렸다.

그러나 한 가지 인간이 모르고 있는 것이 있다. 나무 밖에서 나무를 자르는

것은 용이한 일이지만 자기가 쓰러뜨리고 있는 그 나뭇가지 위에 올라가 있

을 경우, 나무를 베면 나무도 인간도 함께 쓰러진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자

연의 밖에 있지 않다. 사실상 인간은 나무 위에서 나무를 베고 있는 존재다.

자연 안이 있기 때문에 자연을 지배하고 파괴한다. 자신이 나무 밖에 숲밖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연의 나무들이 쓰러질 때 인간들도 함께 쓰러진

다는 극히 상식적인 일을 잊고 있는 것이다.

경제에서는 어떤가. 무기 제조로부터 생겨난 대량 생산체제는 경제에 큰 부

를 가져다주었다. 지금껏 경제학자들이 무슨 말을 해왔던 간에 현재의 경제

원동력, 부의 원천이 만들어지는 기술은 전쟁과 떼려야 뗄 수가 없다. 전쟁

이란 사람을 죽이는 것이니, 그러한 경제란 당연히 죽이는 기술, 죽이는 방

법과 직결된다. 말하자면 죽음을 밑거름 삼은 성장이다.

그런데 전쟁과 직결되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어떤 경제 활동을 할 때는 반

드시 상대를 죽여야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양이다. 양을 건강한 목초

지로 데려가 풀을 뜯게 하고 깨끗한 물을 마시게 하는 것은 살리기 위함이

다.

살려야 경제가 되는 것과 죽여야 경제가 되는 것은 다르다 살려야 경제가

되는 것은 생 生에서 경제적 효과가 창출되는 ‘생명 경제’이고, 죽여야 되는

것은 반생명적으로 목숨을 끊어야 경제적 효율이 나온다. 아주 간단한 발상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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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의 이런 양면성은 다양한 사례를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외국 사람들이

한국에 오면 가장 가보고 싶어 하는 곳 중의 하나가 남이섬이라고 한다.

2004년 일본 국영 방송인 NHK에서 한국 TV드라마 ‘겨울 연가’가 인기리에

방영된 이후 남이섬에는 외국인 관광객들, 그 중에서도 특히 일본인 관광객

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2004년 한 해 동안 26만여 명의 외국인 관광객이

이곳을 방문하여 약 100억원 이상의 지역 경제 효과로 이어졌다고 한다.

2011년에는 남이섬 관광객 수가 내외국인을 합쳐 230만 명에 달했다.

남이섬의 관광 명소로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은 꼽을 수 있다. 메타세쿼이

아가 줄지어 행렬을 이루며 장대하게 펼쳐져 있는 모습은 인간의 영혼을 잡

아 끄는 힘이 있다. 또 메타세쿼이아는 꼿꼿하다. 어디에 심어도 구부러지지

않고 하늘을 향해 뻗어나간다. 높이 솟아 하늘과 맞닿아 있는 메타세쿼이아

를 보면 하늘 너머까지 오를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한다.

나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 더 돈이 되는 것, 나무를 키워서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고 감동을 주는 것이 더 큰 부가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나무를 잘라 목재로 사용할 때, 우리는 거기에서 물질적인 편의성이

라는 실용적 가치를 얻게 되지만, 그 나무가 자라서 우리에게 어떤 풍광을

만들어 줄 때, 우리는 거기에서 많은 스토리와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이다.

물질적인 기능성보다, 어떤 풍경이 우리의 마음에 갖는 호소력, 우리의 마

음을 위로해주고 병든 마음을 고쳐주는 힐링의 힘이 자본이 되는 것이다. 생

명을 살리는 것이 또 하나의 문화가 된 것이다. 메타세쿼이아 숲은 드라마를

촬영하는 장소가 되었고, 그 장소에는 드라마나 영화의 스토리가 머무는 곳,

그곳은 이제 인간과 더불어 생존하는 장소가 된 것이다.

■ 등산가와 광산업자

생명을 자본으로 한다고 하는 경제 패러다임을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체험할 수 있는 산을 놓고 보기로 하자. 산을 아끼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

는데, 그 하나는 등산가의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금광업자의 마음이다. 등산

가는 산이 거기 있으므로 오르며 산에게 작은 그늘과 쉴만한 물가와 눈을

즐겁게 해주는 몇 송이 들꽃만을 바란다. 그는 나무에 영근 새 잎사귀에 마

음 설레어 하며, 계절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숲을 거닐며 세월을 읽는다. 이

렇게 다만 산을 그리며 아끼는 마음, 그것이 바로 러브 love, 사랑이다. 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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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광업자는 산을 좋아함에도 산 자체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그 속에 감춰

진 금광과 돈이 될 만한 바위들을 탐낸다. 산이 그에게 돈으로 돌아오기에

산을 찾는다. 이것은 라이크 like, 즉 좋아하는 것이다.

일본에는 최연소 등반기록을 가진 야마다 준이라는 등산가가 있는데 그는

2002년 세계 7대륙의 최고봉을 2년 반 만에 제압한 등반 기록을 갖고 있다.

그는 산을 생명자원으로써 바라보면 경제적 측면에서 새로운 비즈니스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일본의 등산 인구는 약 1200만 명으로, 인구가 일본의 반도 안 되는 한국

의 등산 인구가 1200만 명인 것을 생각하면 적은 인구다. 일본은 산이 국토

의 7할을 점하고 있고 세계 자연유산에 4개나 등록되어 있는 나라인데 그것

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

그것을 걱정하던 그는 맥킨지에서 경영학을 배운 뒤 ‘field and mountain’

이라는 등산용품 렌탈 회사를 열어 가장 효율적으로 산을 살리는 방법은 인

간과 산의 관계를 바꾸는 것이라는 생각에 산을 생활 속으로 끌어 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36억 년 동안의 전 지구 문화와 역사를 다 털어내고 남는 단 하나의 단어.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바로 이 사랑 덕분에 우리가 36억 년을 살아남았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윈의 진화론이든 신의 천지창조든, 노아의 방주든,

생명이 꿰뚫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생명의 바다 속에 있기 때

문에 생명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 다만 잠자코 그 언저리를 가늠할 뿐

이다. 지금 ‘나’는 무엇에 마음을 품었는가? 돈인가? 물건인가? 무엇이든 그

를 향한 마음이 반 反 생명적인 사랑, 라이크라면 안 된다. 생명과 사랑은

붙어 다닌다. 즉 러브로 향해야 하는 것이다.

05 사람 사랑

■ □ 속에서 살아가다

당장 주머니에 든 것들을 꺼내보자, 스마트폰, 가죽지갑, 담뱃갑, 때로 알약

케이스 등 여러 변형이 있지만 네모가 그 기본이다. 텔레비전이나 컴퓨터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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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터도 네모나고, 명화의 그림틀이나 사진 액자도 네모나다.

건축도 마찬가지다. 요즘 포스트모던 건축이라고 해서 변형된 것들이 더러

있지만, 그 기본은 성냥갑 형이고 창문도 네모난 것이 대부분이다. 우리가

늘 쓰는 A4용지, 사무용지도 전부가 규격화된 네모꼴이지 않은가. 어머니들

이 쓰는 반짇고리에서부터 반닫이 농장까지, 집안의 가구도 전부 네모다. 네

모난 방 속에 네모난 천장에 네모난 한국 마당도 그렇다.

영어로 스퀘어 square 라고 하면 융통성도 없고 아주 꽉 막힌 규격그대로

인 것을 뜻하는데, 정말로 규격품이라는 것은 어김없이 네모에 맞춘다. 그

많은 책들만 하더라도 그렇다. 동서고금의 책들 모두가 네모로 되어 있어 정

리하기가 쉽고 쌓아두기가 쉬우며 운반하기도 쉽다.

인간이 네모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동그란 지구의 地球儀보

다는 네모진 지도를 봐야 이해가 빠르도록 인간이 뇌는 구조화 되어 있다.

사람들의 공간 개념이 동그란 것보다는 ‘상하’ ‘좌우’ ‘위아래’ 처럼 둘씩 짝

지은 이분법에 기초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선이 생기고 사각형이 생겨난다.

전문용어로는 이것을 ‘분절’이라고 한다.

이 네모의 감각 곧 사분별 quadrant이 인간의 기본 사상이다. 그런데 이

‘사각 四角 사고’의 기반은 바로 이분법이다. 선악 善惡, 주야 晝夜 등을 나

누는 그 이분법, 이분법이 배가 되면 사분법으로 바뀌고, 이 사각형의 울타

리 속에 인간은 스스로를 가두는 것이다. 말하자면 일종의 감옥이다.

그러나 지구의처럼 둥근 것은 다르다. 시작도 끝도 없고, 그 한계도 없으며,

각도 져 있지 않다. 둥글한 원의 사상은 순환한다. 기승전결에 상관치 않고

끝없이 돌아간다. 또한 돌고 도니까 동서남북도 뚜렷치가 않다. 이렇게 원의

사상과 사각형의 사상은 상반된다.

그런데 잘 들여다보면 사각형과 원이 반드시 대립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사

실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에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사각형을 나누면 팔각

형이 된다. 그다음 또 한 번 나누어 16각하고 그런 식으로 8☓8=64까지 나

아가 64각 정도 되면 꽤나 둥글어진다. 실제로 64각형을 그려보면 거의 원

에 가까운 형태이다.

우리의 생각도 마찬가지다. 사각형의 생각을 다양하게 더 섬세하게 만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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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이 되는 것이다. 이를 두고서 “원방각” 이라고 한다. 원은 하늘, 땅은 사

각, 사람은 팔각 또는 삼각이란 의미다 이렇게 끝없이 원에 가까워지고 끝

없이 네모에 가까워지는 그러한 움직이는 도형을 생각해 보면 ‘ 아! 사람이

란!’ 하고 불현듯 깨닫게 된다. 원형의 땅에 각을 내어 사각의 집터를 만들면

서도 그 속에서 둥근 물레를 돌리고 장독의 뚜껑을 닦는 마음! 우물 같이 깊

은 눈동자 속에서는 이분에서 사분을 오가는 사람의 생각이란 것이 또한 판

단의 날카로움을 갈고 닦는 것이다. 그렇다 사람이란 원과 사각을 오가며 끊

임없이 생성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이 인간의 특성이요 한계이면서 또한

강점이다. 깊이 철학을 모르더라도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다.

결국 직선과 곡선, 다각형과 원형의 비밀을 두고서 옛 선조들은 일찍이

천원지방 天圓地方 이라고 했던 것이다. 다각형이 철저히 인공적인 인간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하늘이 주신 것, 자연이 주신 것은 동그라미다. 엽전 모

양도 여기서 생겨났다. 둥근 데 네모난 구멍을 판, 즉 하늘과 땅을 어우르는

꼴을 가지지 않던가.

인간이 자연의 마음을 품고 하늘의 마음을 품을 때, 네모꼴은 동그라미로

변해서 사람은 사랑, 사랑으로 바뀐다. 네모꼴을 동그라미로 바꾸는 그것 하

나만으로 사람이 지닌 모든 조건은 변한다.

■ 되어가는 사람

우리말 ‘사람’은 ‘살다’라는 동사에 명사형 조사 ‘암’ ‘옴’이 붙어서 된 것이

다. ‘얼다’가 ‘얼음’이 되고, ‘밝다’가 ‘밝음’이 되고 ‘뛰다’의 ‘뜀’이 되듯이

‘ㅁ’의 음소 音素를 집어넣어 명사형으로 고쳤다. 여러 어원설이 있지만 그중

가장 타당하지 않나 한다.

이렇게 ‘사람’은 인간과 동물과 식물, 다른 생물체와 언어상으로 뚜렷이 구

별되지 않는다. 살아 있는 것은 전부 사람이다. 다시 말해, 모든 생명 존재가

곧 사람이 되는 것이다. 또한 생명화 될 수 있는 것 전부가 사람이다. 바로

여기서 서양의 인문주의, 신과 동물 사이에서 엄격하게 구별되는 사람의 위

치가 대단히 애매해진다.

심지어 ‘살다’와 ‘죽다’라는 말조차도 적용 대상에 의미의 한계가 없다.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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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체가 아니더라도 기능하거나 작용하면 다 살아 있다고 본 것이다. 가령 옛

날 태엽 감는 시계들은 가끔씩 멈추는데 그럴 때마다 어른들은 “시계 죽었

다. 밥 줘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이 그림의 선이 살아 있다”. “불씨가 죽

었으니 부채질을 해서 살려야지”라는 말도 곧잘 쓴다. 이렇게 사물을 의인화

한 것은 물활론 物活論, 애니미즘 Animism 이다. 원시 시대의 흔적이 고스

란히 남아 있는.

한편 생명체라도 움직이지 않으면 죽은 것으로 간주한다. “그 사람, 영 기

가 죽었어”라고 하지 않는가. 그 마음과 행동에 생기가 있으면 산 것이고 그

렇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이렇게 생사 生死라는 말은 생물학적인 생사의 한

계를 넘어선다.

우리말 ‘사람’이 ‘모든 살아 있는 것’을 두루 가리킨다면, 한자의 ‘人’은 두

사람, 곧 나와 타자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혼자서는 올바로 서지 못하는 비

스듬한 두 존재가 서로 만나 서로 의지할 때 비로소 사람의 구실을 한다는

것이다. ‘人’의 두 선 중 어느 하나를 빼면 반드시 쓰러진다. 단, 이 해석은

속설이지 근거 있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인간을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로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人’은 걸어가는 인간의 옆모습을 형상화한 것

이라고 한다.

그런데 걷는다는 것은 그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특정한 곳을 향

하게 된다. 즉, 어떤 목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인간이 되었다, 못 되었다”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

터 사람인 것이 아니라, 끝없이 사람이 되어가는 존재라는 것이다. 한 발 한

발 걸어가는 그 모습 人은 바로 사람이라는 이 목표, 이상적인 인간상을 향

해서 가는 형상이다. 그래서 겉만 사람, 생물학적으로만 사람이라고는 지정

하지 않는다. 인간은 완성체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되어가는 과정의 존재,

즉 ‘Being’인 것만이 아니라 ‘Becoming(생성)’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미완 상태의 불안한 존재라는 점은 우리의 일상 어법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가령, “너도 사람이냐?” 라고 할 때는 반어법이다. 사람이 아

니라는 말이다. 모양만 사람이지 사람이 갖춰야 할 인격, 품성을 가지고 있

지 않다는 것이다. 이 경우 사람은 짐승에 가깝다.

또 실수를 저질렀을 때는 “나도 사람이야!” 라고 버럭 소리친다. 이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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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과실을 할 수 있는 중간적 존재로서의 인간’을 나타낸다. 즉, 절대

적인 능력과 불사의 神格 그리고 동물과 같이 하위의 존재 그 사이에 인간

이 존재 한다고 보는 것이다.

옛날 서당에서는 어떠했던가. 아이들이 ‘人’자를 4개 써 놓고 이렇게 풀이

했다.

“人人人人 : 사람이면, 다 사람이냐. 사람이어야 사람이지.”

그냥 사람 네 명이 아니다. 서당 아이들은 이러한 한자 놀이를 통해서 외형

적인 한 부류의 인간과, 수양 ‧ 수신을 거쳐 ‘되어가는 사람’을 엄격히 구별

하는 식으로 ‘人’자를 깨쳤던 것이다.

사람들은 속된 말로 ‘황금’을 만능이라고 부른다. 온 인류가 황금을 향해서

뛰어간다. 그런데 이런 황금의 힘이 사랑 앞에선 멈춰버린다. 모두가 문화,

돈, 물질을 아까워하고 독점하려 하지만, 순수한 사랑을 발견하는 순간 그

무엇도 아깝지가 않다. 물질을 버릴 수가 있다. 왕관을 버릴 수도 있다. 윈저

공과 심슨 부인의 이야기처럼 말이다. 세속적 삶을 노래하는 대중소설, 대중

가요라고 할지라도 그 주테마인 사랑의 노래, 사랑의 로망스 속에서는 물질

의 승리라는 것이 거의 없다. 아무리 황금만능이라고 할지라도 돈을 노래한

노래, 돈이 긍정적으로 그려진 소설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즉, 돈은 사랑의

대립적 가치로서 그려지는 것이다.

동그라미가 네모가 되고 자연의 질서 속에서 살던 인간들이 점차 독자적인

자기문화, 인공적인 환경 속에서 살아가게 된 과정을 이처럼, 동그라미가 네

모로 바뀌는 그 과정처럼 화폐처럼 선명하게 보여주는 예도 드물다. 사랑이

왜 동글한 것인지. 사람에게 왜 네모의 것이 붙어 있는지, 우연의 장난이지

만 그 속에는 역사를 보고 화폐의 기원을 보고 사랑의 힘이 무엇인지를 깨

닫게 하는 중요한 모양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네모꼴을 일으켜 세우고 죽은 것을 다시 되살리는 것이 바로 사랑의 동

그라미이며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역동적인 삶의 생기를 죽이는 것이 네모

꼴이라는 점,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이 사고를 상징적으로 시각화하는 것이

바로 사람의 ‘ㅁ’ 자와 사랑의 ‘ㅇ’자인 것이다.

06 바퀴벌레에는 바퀴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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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오미미크리

에머리 시몬즈 등이 행한 1999년의 조사결과, 미국의 중산층 가족 네 식구

가 일 년간 살기 위해서는 연간 약 1800 톤의 자원을 채취하여 가공처리해

야 한다고 한다. 하루의 양을 계산해 보면 표준적인 인간의 체중 약 20배에

달하는 자연자원을 소비해야 하는 셈이다. 이 막대한 물자의 유통량 가운데

실제로 최종 제품이 되는 것은 겨우 7%에 지나지 않고 그 가운데 내구성

제품은 1%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중 재생 또는 재이용되는 것은 겨우

0.2% 밖에 되지 않는다. 선진국들의 자원 유통의 99.98%가 폐기물로 버려

지는 셈이다.

이렇게 산업 금융주의는 ‘자연계의 모든 물질은 유한한 것인데 돈만은 무

한’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끝내 승복할 수 없었듯

이 돈은 생물이 아닌데도 이자를 통해서 자기 증식을 한다. 그래서 금융자본

주의는 세계에서 유통하는 실태 없는 300조불이라는 돈이 불어나게 했다.

모든 나라의 실제 GDP는 합계 30조 달라 밖에 되지 않는다. 이 갭을 매우

기 위해서 끝없이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다.

여기에 비해서 자연의 생물들은 일체 자원을 낭비하는 일이 없다. 어떤 종

의 배설물은 다른 종의 식량이 된다. 모든 자원의 재 이용율은 100%이다.

리사이클이나 에너지의 적절한 배분으로 폐기물을 발생 시키는 일이 없다.

바이오미미크리 Biomimicry 의 기술은 전대미문의 ‘자연자본주의’라는 신

개념이 사회문화 경제의 도화선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인간이 자연을 바

라보는 눈이 착취의 대상에서 배움의 대상으로 바뀐 것이다. 전혀 다른 창조

성이다. 생명자본주의시대에서 기술은 산업기술을 넘어서는 자연과 생물이

기술에서 배우는 바이오미미크리로부터 시작된다.

* 바이오 미미크리 Biomimicry

- 자연에 의해 개발되는 기술

-일본에서는 모기의 침을 이용해서 아픔 없이 주사를 놓을 수 있는 주사바

늘을 개발

- 거미줄에서 방탄조끼나 외과 수술용 실을 만들어냄

- 도마뱀 발바닥 모양을 분석하여 강력 접착 테이프 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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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개미의 집을 이용하여 냉방 장치가 필요 없는 빌딩 설계. 흰개미 집은

열대 사반나에서 섭씨 30도의 기온을 유지하고 있음

- 연잎의 자연원리에서 방수벽돌 만들기

- 부엉이 날개깃을 본 따서 소음 없는 풍차 만들기

바퀴벌레는 이름부터가 이상하다. 어디를 봐도 바퀴가 없는데도 바퀴벌레이

다. 수채에서 나온 녀석들이 어떤 신사의 구두보다도 반짝거린다. 어떤 구두

닦이가 이렇게도 신비한 광택을 낼 수 있다는 말인가.

바퀴벌레는 인간보다 훨씬 오래, 공룡보다도 오래인 3억 년 전에 이 지구상

에 나타나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도 거의 바뀌지 않은 채로 살아왔다.

완벽하게 지구의 환경에 적응해서 사는 곤충이다. 인간의 지혜보다도 오랜

지구속의 풍상을 겪어온 바퀴벌레들은 인간과의 경쟁에서 언제나 트로피를

따는 쪽이다. 왜냐하면 어떤 과학 기술로도 바퀴벌레를 박멸할 수 있는 그런

기술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바퀴벌레를 죽이기 위해 단 것을 좋아하는 그

성질을 이용해 살충제를 만들었을 때 그것들은 그 단 것을 쓴 것으로 바꿔

버리는 놀라운 능력을 가진 것이다.

바퀴벌레는 인간에게는 까다롭고 흉측한 것으로 보이나 지구환경에는 참

으로 친하다. 3억년 동안 이 지구에서 바퀴벌레는 오줌을 배설하지 않고 생

체 속의 미생물을 이용해서 몸 안에서 아미노산을 만들어 재생해왔다. 몸 안

의 절묘한 회로장치 브랏타 박테리움을 이용하여 요산을 몸이 필요로 하는

아미노산으로 바꿔버리기 때문에 극미량의 배설밖에는 하지 않는다. ‘네이처

Nature’지에 소개된 회로장치를 보면 반도체가 이길 수 없는 놀라운 정밀성

을 보여준다. 3억 년을 이렇게 살아온 대 선배다. 하루에 자기 몸의 20배에

달하는 폐기물을 배출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 부끄러운 것이다.

이것만 생각해 봐도 우리의 기술, 200년도 안된 산업 기술이란 얼마나 하

찮은 것인지.

폐기물을 배출하는 미숙한 산업기술을 배설물을 배출하지 않는 바퀴벌레의

생체기술을 모방한 바이오미미크리로 바꾸면 생명의 순환과 생식을 이용하

여 자연에 재투자가 가능한 생명자본주의 시스템을 창조 할 수 있다. 지금

세계가 경쟁하고 있는 그린 테크놀리지나 한국이 주도하고 있는 그린 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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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 Green Growth가 바로 그러한 전환의 한 보기가 될 것이다.

경제에서는 숫자로 계산할 수 있는 것만 GNP에 둔다. 그 외의 계산할 수

없는 것은 GNP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GNP가 올라가면서 생기는 부작

용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얻으면 ‘트레이드 오프’ 반드시 무

언가를 잃는다. 공장이 이익을 얻으면 공기는 오염되기 마련이다.

1968년 봄 미국 캔자스 대학에서 한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문으로 이를 마

무리하고자 한다.

“국가의 목표나 개인적 만족을 단순히 경제적 성장에서 찾을 수 없다.

GNP는 삼나무 숲의 파괴와 호수의 죽음, 네이팜 탄과 미사일과 핵무기의

생산으로 증가한다. GNP는 가족의 건강, 교육의 질, 놀이의 즐거움을 포함

하지 않는다.

시의 아름다움이나 결혼의 가치, 우리의 유머나 용기, 지혜와 가르침, 자비

나 헌신을 측정하지 않는다. GNP는 삶을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들을 제

외한 모든 것들을 측정한다.”

■ 생명에서 배운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라.

생명에서 출발하지 않은 것들이 있는가?

이제껏 사람들이 살아온 것도 보이지 않는 생명의 힘이며 사랑이었다. 소중

히 지켜온 생명이 이제는 우리의 미래를 이끌어 갈 창조적 자본이 될 것이

다.

옛날에 우리는 생물을 죽이고 꿀벌에게서 꿀을 훔쳤지만, 이제는 벌집에서

육각형의 지혜를 배운다. 여름에는 원수 같은 모기들, 하지만 모기가 물면

아프지 않을 것을 응용해 찔러도 안 아픈 주삿바늘이 나온다. 타조는 시속

100Km로 달려도 심장이 타지 않는 타조 몸의 매커니즘을 연구해, 자동자

엔진에 적용하려고 한다. 그들의 슬기와 생명의 지혜를 배운다. 우리들의 최

종적인 사랑은 교감하고 배우는 것이다. 지구의 시민으로써 자연에서 배우고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다.

8. 생명의 매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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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날자, 살자

■ 어항 그리고 실화의 방

이상 李箱의 소설 ‘실화 失花’에도 금붕어가 나온다. ‘실화’는 문자 그대로

꽃을 잃은 이야기이다. C양이 준 백국 한 송이를 옷깃에 꽂고 밤거리를 헤

메다가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실제로 소설 끝 장면에 등장하고 있

다. 사물의 차원에서 그것은 백국을 잃은 실화 失花이고, 사랑의 층위에서

보면 연이, C양, 나미코 등 여성의 순수한 사랑을 잃은 실연 失戀의 뜻이 되

며, 공간의 층위에서 읽으면 동경 생활의 외로움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고

향을 잃은 실향 失鄕의 의미가 된다. 존재론적 층위에서는 타자와의 단절 즉

존재와 존재의 소통을 상실한 실존의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실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연이의 부정을 알게 된 ‘나’는 그녀와 반년

을 함께 살던 방을 떠나면서 그곳을 둘러보는데, 이때 금붕어가 등장한다.

그 금붕어는 부재의 형태로 등장한다. ‘나’와 연이의 방에는 금붕어 한 마

리, 국화 한 송이 없다. 금붕어를 하나 사다놓겠다고 속으로 벼르기만 하

다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연이와 헤어지게 된 것이다.

살림을 잘 한다는 것은 죽어 있는 것들에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여성들

은 생명을 낳는 것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반짇고리, 방안에 있는 것, 그리

고 옛날 농경시대 같으면 논밭에 나가서도 모든 것을 살렸다. 여기에 우리나

라의 살림이 있는 것이다. 요즘에는 그것을 경영학이라고 해서 회사를 살리

는 것이 경영학인데, 내 어머니, 누이들은 가족에서부터 사회에 이르기까지

여자들의 생산이란 바로 이 살리는 일이었고 이것을 우리는 살림이라고 불

렀다. 그렇게 살려놓은 것들을 우리는 살림살이 라고 부른다.

살림살이는 가재도구이기 때문에 생명은 존재하지 않지만, 풍요한 여성의

손끝에 닿으면 우리들의 살림살이들은 금붕어의 지느러미처럼 비늘들을 반

짝이면서 헤엄친다. 그것이 살림살이, 시장에서는 한낮 상품에 불과하지만

사랑의 손길이 닿아서 그것이 일상생활에서 우리들의 삶의 일부가 되었을

때 그것은 가재도구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우리의 손때가 묻고 우리의

입김이 서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야말로 살림, 살이, 살림과 살이, 살

림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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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 李箱의 방

드디어 나는 대학생 시절로 회귀한다. 내가 처음 문리대 학보에 발표한 논

문 ‘이상론 李箱論’을 쓰던 때로 돌아온다. 나는 이상을 한국의 문학에 복귀

시키기 위해 애를 많이 썼다. 우상 파괴자가 새로운 우상을 만드는 위험을

무릅쓰고 말이다. 이상 문학상을 만들고 그의 미발표작과 사진 앨범 모두를

내 자신의 힘으로 발굴하여 ‘문학사상’에 발표하게 된 것이다. 내 자신이 창

간한 문학사상 표지화도 구본웅이 그린 이상의 초상화를 발굴한 것이다. 그

런데도 내가 쓴 이상론은 금붕어 유레카가 있기 전으로 문단 데뷔 직전이거

나 그 무렵에 쓴 것들이다. 그때에는 금붕어와 이상의 문학이 그처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몰랐다.

비평가들은 그 유명한 이상의 ‘날개’와 금붕어와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말

한 적이 없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상의 삶의 태도를 바꾸고 아내와의 관계

를 새롭게 결의하려는 순간 “날자, 날자, 또다시 한번만 날아보자꾸나”의 그

유명한 대사가 어항속의 금붕어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지 보이지 않는 그

끈을 찾아내지 못했다. 책의 내용으로 돌아가자.

‘날자’라고 외치기 전에 주인공은 미츠비시 백화점의 옥상에서 금붕어의 어

항을 들여다본다.

“도시와 어항,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느적거리는 어항에 갇힌 거리의 사람

들....” 을 보며 그 유명한 마지막 대목, 날개가 돋아나는 환상과 함께 “날자!

날자!”라고 외치는 생의 절창이 타져 나온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이 말소된 페이

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

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물 속을 우아하게 유영하는 금붕어의 지느러미가 날개가 되고 어항은 하늘

이 되어 비상하는 환상으로 변한다. 생명력, 생명감 - 살아 있다는 그 느

낌을 되찾는 것이다. 박제가 되어 생명을 잃은 자가 변신하여 맹금류인 매이

거나 독수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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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토박이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도 우리의 생명 가장 큰 자본이

다. 자본이라는 때 묻은 말도 토박이말로 하면 밑천이다. 농사 밑천 자식 밑

천 살아 있는 것이 모두 우리의 찬란한 밑천이 된다. 어항 속 금붕어를 보고

외친 이상의 ‘날개’ 마지막 구절을 다시 한 번 읽어본다.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여기의 “ㄴ”자를 ㅅ 으로 바꾸면 ‘살자. 살자. 한 번만 더 살자꾸나.’라는

말로 변한다.

‘자살’까지도 뒤집어 읽으면 ‘살자’란 말로 급회전하는 것이 한국말의 생명

력이다.

우리를 주눅들게 하고 왜소하게 하는 이코노미라는 말, 경제란 말도 이제는

‘살림살이’라는 말로 바꾸자. 살리고 사는 살림살이 그것은 모두가 살아있는

삶, 살다에서 나온 말이다.

나의 셋방이 수직으로 일어서고 어항 속의 금붕어들이 붕어가 되어 양자강

물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번에는 바닷고기가 되리라.

어항은 아무리 작아도 축소된 대하 大河, 응축된 대해 大海이다

어느 날 몰래 어항을 깨고 용처럼 승천하려는 금붕어들의 자유로운 비상을

위하여, 생명 자본주의가 삶의 활력소가 되어야 한다.

- 2014 년 2월의 첫날 다 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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