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 24. 13:28ㆍ독서후기
생명이 자본이다
■ 이어령 지음
0 1934년 1월 충남 아산
0 문학평론가, 언론인, 시인, 소설가, 에세이스트, 대학 교수, 전 문화부 장관
0 24세에 ‘우상의 파괴’로 등단
0 20대 때 쓴 ‘흙속에 저 바람 속에’는 7개 국어로 번역 50년간 스테디셀러
0 88 서울 올림픽 개막식 기획 - 굴렁쇠 퍼포먼스 등
0 50대에 발표한 ‘축소 지향의 일본인’ 히트
0 넘치는 창조력, 상상력, 호기심에서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정서의 만남, 비빔밥 예찬 등으로 융합의 개념을 강조
0 지성에서 영성으로, 생각의 탄생, 너 정말 우리들 아니, 세계 지성과의 대화, 지성의 오솔길, 오늘보다 긴 이야기, 저항의 문학, 노래여 천년의 노래여, 진리는 나그네, 차 한 잔의 사상, 신화 속의 한국정신, 시와 함께 살다 등 수 십 권의 저서
■ 프롤로그
이제 80입니다. 8자를 눕히면 무한대의 기호가 되고 뫼비우스의 띠로 변한다고 내 나이에 덧칠을 해보지만 이제 글쓰기도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아침마다 기억은 저만치 도망치고 내가 길들여 온 ‘말’들은 흰 머리카락처럼 빠져 사방에 흩어집니다. 내 삶 전체가 쓰레받기에 담기는 것 같아 마음이 아파집니다.
조금 일찍 쓸 걸 그랬나 봅니다. 구술도 해보고 메모한 것을 완성하기 위해 젊은 대필자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남이 내 목숨을 대신해 줄 수 없듯이 글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지내보고야 알았습니다. 글을 쓰다가 병원 수술대에 눕기도 했습니다. 번져가는 저녁노을을 수술대 위의 마취된 환자로 비유한 T.S 엘리엇의 시가 나에게는 현실 환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준 유용한 낱말은 시인이 아니라 뜻밖에도 경제 인류학자 칼 폴라니 Kal polanyi의 ‘Resignation(레지그네이션 : 사퇴, 사임, 체념) ’이었습니다. 그의 저서 ‘대전환’끝부분에 나오는 키워드입니다. 흔히들 ‘체념’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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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번역하고 있지만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적극적으로 혹은 전략적으로 받아들이는 ‘감수 甘受’가 옳을 것 같습니다. 한자 뜻대로 ‘쓴 것을 달게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감수한다는 것은 언제나 인간의 힘과 새로운 희망이 원천이었다. 인간은 죽음의 현실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육체적 생명의 의미도 알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잃어서는 안 될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잃는 것은 육체적인 죽음보다도 한층 더 두려운 것이라는 진실을 감수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나의 자유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 시대의 인간은 자유의 종언을 뜻하는 현실의 진실을 감수해야하며 그럴 경우라 해도 여전히 생명은 그 감수하는 것에 의해 태어난다.”
불과 350자도 안 되는 글 가운데 ‘감수 resignation’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등장 합니다. 나 역시 그 말을 병실에서도 서재에서도 자동차 속에서도 되풀이 했습니다. 그가 자유와 평등은 문화에 의해서 대립이 아니라 융합될 수 있다는 것을 말 할 때에도 ‘경쟁자본주의’가 노쇠기에 들어서 황혼을 맞이하게 되었음을 선언할 때에도 내가 감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생각했습니다.
작별의 시간입니다. 우리가 최종적으로 감수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가 제기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황혼이 어떻게 오고 있는 것인지 생각하는 시간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생을 무력화하는 분업 分業, 생활의 표준화, 생명체 보다 우위에 있는 기계들 그리고 자발성에 대한 조직의 우위”입니다.
우리가 지난 백 년 동안 열광적으로 받아들인 산업문명, 기계문명이 이런 얼굴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것이 이제 불안과 공포의 모습으로 내 자식과 손자손녀들이 살게 될 내 집 담을 넘겨보고 있습니다.
2014. 1 이어령
1. 생명의 시작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부력의 원리를 찾았고, 뉴턴은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을 발견했다고 한다.
모두가 지어낸 전설이라고 하면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싶어 한다.
진부眞否에 관계없이 그런 이야기가 몇 백 년, 몇 천 년을 두고 전해오는 까닭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항상 생각의 시작, 유레카의 놀라움이 움트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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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금붕어 유레카
■ 금붕어의 아침
아무래도 50여 년 전 그 겨울밤의 기억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될 것 같다. 전쟁과 피난살이의 상처가 아직 여물지 않을 무렵, 나는 단칸 셋방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웠고 이따금 아궁이의 연탄불이 꺼져 잉크병이 어는 일도 있었다.
그날은 더욱 그랬다. 아침에 눈을 떠보니 방안은 얼음장이었고 어항까지 얼어 있었다. 어제만 해도 곧잘 헤엄치던 금붕어들이 살얼음 속에 화석처럼 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다.
신혼부부가 살기에는 너무도 썰렁한 방이기에 궁리 끝에 사온 금붕어였다. 수정구 모양의 작은 어항이었지만 그래도 용궁 속 다른 세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아 조금은 위안이 되고 여유와 사치조차 느낄 수 있어 좋았다.
그런데 그 어항이 언 것이다. 얼음의 돋보기 효과 때문이었는가. 유난히도 큰 금붕어의 눈과 마주쳤을 때 나는 어떻게 해서든 살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같은 생각이었던지 주전자에 물을 끓여왔고 나는 급히 그러나 아주 조심스럽게 어항 속에 물을 쏟아 부었다.
입김 같은 수증기가 올라오면서 어항이 숨 쉬는 소리를 냈다. 그때 살얼음 사이에서 금붕어의 지느러미가 조금 움직이는 것 같았다. 헛본 것이 아니었다. 혹시나 했던 것인데 정말 금붕어들은 꿈틀거리더니 헤엄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빨간 비늘이 반짝이는 광채를 내며 부챗살 모양의 꼬리로 퍼져간다. 그 가느다란 생명의 동선을 숨죽여 따라가던 아내와 나는 손뼉을 치며 소리쳤다. “아이고! 살았다. 살아났구나!” 어쩌면 이것은 금붕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향해 외치고 있는 소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갑자기 온 세상이 금붕어의 지느러미처럼 반짝이며 헤엄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책장에 꽂힌 책들이 언 잉크병이, 아내의 화장대와 방바닥에 벗어놓은 양말 일상의 얼룩과 먼지들까지도 일제히 수면으로 떠올라 금붕어처럼 숨을 쉰다.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죽음과 생이 이마받이를 하는 전율의 순간, 추위를 밀어내면서 잠시 아주 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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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동안 나는 어항인지 모태 母胎 인지 모를 조용한 공간 속에 있었다. 그리고 조금은 슬프기까지 한 그곳은 이미 10제곱미터의 단칸 셋방이 아니었다. 금붕어의 어항이 그것들이 태어난 강물과 바다로 이어지면서 지구 크기의 생명권으로 번져 나간다.
아! 살아있다. 살아있었구나. 전쟁과 피난살이 속에서 젊은이들이 겨우 매달려 산, 시 한 구절이 있다. “바람이 이는구나. 아, 살아야만 한다.”그러나 이번에는 분명 남의 말로 된 시 한 구절이 아니었다. ‘자살’이라는 말도 거꾸로 읽으면 ‘살자’가 된다는 강렬한 모국의 언어로 감지한 목숨, 그때까지 숨기고 살아온 내 굳은 생명의 살점을 만져보는 순간, 음표와 음표 사이에서 침묵하던 목청이 트인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도 모르게 하얀 입김과 함께 튀어나온 말이 유레카였다.
유레카!
어두운 방에서 갑자기 밖으로 나왔을 때의 느낌처럼 너무 눈부셔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그 찬란한 암흑, 그건 시라쿠사의 대낮 목욕탕에서 발가벗고 거리로 뛰쳐나온 아르키메데스의 목소리가 아닌가.
02 생명의 언어 감탄사
■ 아이고와 유레카
유레카! 유레카는 오래된 그리스말의 감탄사라 했다. 모르던 것을 알아내거나 잃어버린 것을 찾아냈을 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기쁨의 소리다. 그러나 유레카는 영어의 발음으로 표기했을 때의 발음이고 원래의 그리스 고어로는 ‘에우레카’ 혹은 ‘헤우레카’라고 부른다고 한다. 발음도 확실치 않은 이방의 말 한마디가 어떻게 이천 수백 년의 시간을 넘어, 그것도 그들의 동쪽 땅끝이라 부르는 한반도에 ‘아이고’라는 토박이말처럼 튀어 나왔을까. 첫 번째의 유레카가 바로 그것이다.
감탄사는 그냥 말과는 다르다. 신음소리나 한숨처럼 언어 이전에 몸에서 저절로 나오는 생리적인 소리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참새가 짹짹거리는 소리와는 다르다. 주어 술어 없이 단독을 사용되는 엄연한 하나의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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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가르쳐 주었거나 학교에서 배우는 말이 아니다. 탯줄이 끊기면서 제일 먼저 외친 생명의 소리에 가까운 말이 감탄사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한 민족의 문화적 유전자가 손가락 지문처럼 찍혀있다.
“몇 년 전 미국 뉴욕에서의 일이었다. 거리는 매우 미끄러웠다. 나는 어느 빌딩의 모퉁이를 돌다가 그만 뒤로 넘어졌다. 그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입에서는 ‘아이쿠!’ 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옆 사람들이 이상하다고 쳐다보았다. 미끄러져 넘어지는 순간에도 ‘아우치 Ouch!’나 ‘웁스 Oops’라고 하지 않고 ‘아이쿠’라고 했다. 한국의 생활과 정서가 뼛속까지 배어 있었다는 증거다.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쓰는 감탄사가 바로 ‘아이고’와 ‘아이쿠’다. 그날 아침 내가 그랬을 것이다. ‘아이고 추워’라는 말과 함께 눈을 떴을 것이고 연탄불이 꺼진 것을 알고 ‘아이고 내 정신’ 이라고 자신을 탓했을 것이다. 그리고 방안을 둘러보다가 어항에 언 것을 보고 놀라서 외친 말도 틀림없이 ‘아이쿠’였을 것이다.
슬픔이나 고통의 경우만이 아니다. 정반대로 기쁘거나 반가울 때에도 역시 ‘이이고’라고 한다. 얼음이 녹으면서 금붕어들이 꼬리를 흔들 때 나와 내 아내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 역시 아이고였다. “아이고 살았구나.”
‘아이고’는 생사 어느 쪽에도 붙는 말이다. 우리가 입버릇처럼 써온 말이 “아이고 죽겠다”이고 더러는 “아이고 살겠다”다.
희로애락의 그 어떤 감정도 나타내는 아이고 소리지만 우리의 생활과 역사 탓인지 아이고는 기쁨보다는 슬픔, 즐거움 보다는 고통을 뜻하는 말로 많이써왔던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아이고를 반복하면 초상집 곡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아이고, 아이고”하고 우는 한국의 곡소리 말이다.
우리가 IMF 환란을 당했을 때 회자된 말이 있다. “아이고(I), 미치고(M), 환장(F) 하겠네”. 역시 우리가 ‘아이고 문화권’에서 살고 있음을 실감케 하는 절묘한 표현이다.
■ 와우 WOW 의 경제학
감탄사는 무의식적으로 외치는 말이기 때문에 세계 어느 나라나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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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나라에 따라 ‘오!’, ‘아!’처럼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아이고’라고 할 때 중국 사람들은 ‘아이야’라고 하고 일본인은 ‘앗’이라고 한다. 어느 나라나 즐거운 일보다는 궂은 일이, 편안한 것보다는 고통스러운 것이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감탄 感歎 보다는 영탄 詠歎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아메리칸 드림이 남아 있는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감탄사는 ‘와우 WOW’다.
와우 WOW는 놀라움, 경탄을 뜻하는 말이다. 미국 기업에 새 창조경영의 바람을 일으킨 톰 피터스의 핵심 키워드가 바로 ‘와우’였다. 그의 저서 ‘와우 프로젝트’에는 어떤 상품이든 성공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따질 필요 없이 그것을 본 첫 순간에 소비자의 입에서 “WOW”소리가 터져 나와야 된다고 했다.
스티브 잡스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남긴 말도 마로 ‘와우’였다고 한다. 그의 여동생이자 소설가인 모나 심슨이 타임지에 기고한 글을 보면 그는 그의 아내와 딸 그리고 자신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Oh, WOW. Oh, WOW. Oh, WOW”를 세 번 되풀이 했다는 것이다.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한 그가 임종 시에 남긴 그 말은 과연 무슨 뜻이었을까? 해석은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어쨌든 WOW는 스티브 잡스와 미국인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감탄사라는 사실에는 의의가 없다. 공교롭게도 영어의 ‘와우’를 거꾸로 읽으면 한국말의 ‘우와’가 된다. 우리에게도 그런 멋지고 빛나는 세계를 향해 외치는 새로운 문화가 생겨나고 있다. 한국의 어느 벤처기업인이 자신을 아이스크림 장사라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진짜로 아이스크림을 팔아서가 아니다. 그가 말한 아이스크림은 ‘I(아이) Scream(스크림 : 비명, 절규, 환호)’이라는 뜻이다.
벤처란 악 소리, 스크림이 나는 기업이기 때문이다. 왕창 무너지든지 아니면 왕창 대박이 터지든지 누구도 가보지 못한 모험의 바다로 가는 항해인 거다. 그리고 그 위험 속에는 감동이 있고 가슴이 두근대는 놀라움이 생긴다.
셰익스피어의 그 유명한 ‘베니스의 상인’ 첫머리에 ‘벤처’라는 말이 여러 번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벤처는 모험의 뜻이 아니라 배에 실은 상품 화물을 뜻하는 말이다. 배가 무사히 돌아오면 경탄의 ‘악’이고 배가 침몰하면 비명의 ‘악’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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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처 venture : 모험이 필요하나 높은 수익이 예상되는 참신한 사업이나 투자의 대상. 모험. 내걸다. 투기적 사업
그런데 유독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탕에서 뛰어나와 외쳤다는 유레카만은 유별난 것이다. 그것은 감탄사이면서도 ‘아이고’도 ‘우와’도 그것을 뒤집은 ‘와우’도 아니다. 보통 낱말처럼 뚜렷한 의미 작용을 내뿜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말로는 ‘찾았다’를 영어로 하면 “I have founded it”의 어엿한 문장이다. 단순한 감각이나 느낌의 생리적 반응과는 다르다. 남들이 그냥 ‘아이고’니 ‘우와’니 할 때 유레카라고 외친 그리스인들이기에 철학, 과학, 그리고 민주주의 같은 제도를 만들어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고 추워“같은 생리적 조건반사의 단순한 감탄사를 가지고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오묘한 뜻이 숨어있었기 때문인가? 고통이 희열로, 감각이 이성으로, 그리고 감성이 영성으로 바뀌는 그 서구적인 역동성을 표현하기에는 너무나도 우리 토박이말이 무력했다는 말인가?
03 유레카의 유래
■ 토박이 말
내가 유레카를 처음 만난 것은 초등학교를 ‘국민학교’로, 학교 아이들을 소국민 小國民 이라고 부르던 식민지 시대의 교실에서였다. 선생님은 도장이 찍힌 딱지를 나눠주면서 말했다. “고쿠고 조오요(국어 상용)를 위해서 오늘부터 재미난 뺏기 시합을 하겠다.” 그때의 국어는 한국말이아니라 일본말을 의미한다. 일본어를 국어라 하는 식민지 교실에서 진짜 내나라 말을 쓰면 ‘조셍고’라고 하여 표를 빼앗고 빼앗기는 경주를 하게 된 것이다.
표를 많이 빼앗은 아이는 상을 받고 많이 빼앗긴 아이는 벌을 선다. 그날부터 아이들은 영문도 모르고 먹고 먹히는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어떻게 해서든지 표를 빼앗으려고 별별 궁리를 다했다. 그 방법의 하나가 변소간 뒤에 숨어 있다가 갑자기 놀래키는 방법이다. 그러면 놀란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아이쿠”, “아이쿠머니”라는 말을 외치게 되고 동시에 “후따!”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조셍고’를 썼으니 표를 내놓으라는 거였다. ‘아이쿠머니’가 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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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말이냐고 항의하면 선생님은 아이쿠머니는 ‘아이구 어머니’의 준말로 일본 말로 하면 ‘옷까상!’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상해 보라. ‘아이고!’, ‘아이구머니!’와 같은 한국 토박이 감탄사조차도 조선말이라 금지되었던 시절에 나는 유레카라고 하는 그 이상한 그리스 말과 만나게 된다. 솔뿌리를 캐는 근로동원과 군사훈련으로 거의 수업이라는 것을 받지 못하던 때 ‘유레카’는 밤하늘의 섬광과도 같은 것이었다.
유레카는 금제(禁制 : 어떤 일이나 행위를 하지 못하게 통제함)된 조셍고도 영어도 아니다. 누구도 표를 빼앗지 못하는 말, 그것은 일본말도 하이 히틀러나 무솔리니의 말도 감히 이르지 못하는 지극히 멀고 높은 곳에 있었다. 구름 위에서 번개를 치는 제우스의 말, 태양마차를 몰고 다니는 아폴로의 말, 옥수가 쏟아지는 올림푸스의 골짜기에서 술 취한 디오니소스가 깔깔거리며 웃는 그런 신들의 언어와 가장 가까운 말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유레카의 감탄사는 아직 단단한 알 속에 갇혀 있었다.
줄탁동시 啐啄同時 - 생각은 알 속에서 자란다. 그러다가 어느 날 껍질을 깨고 나온다. 알속에 갇힌 새끼가 그 연약한 부리로 껍질을 두드린다. 하지 만 혼자의 힘만으로는 두꺼운 껍질을 깰 수는 없다. 에미 새가 동시에 밖에서 쪼아준다. 새끼가 쪼는 ‘줄’과 에미가 쪼는 ‘탁’이 만나 이윽고 생각이, 생명이 병아리 소리를 내며 탄생한다. 삐약삐약. 작지만 우주의 생명이 태어나는 천둥번개의 소리이다.
그것을 그리스말로 하면 유레카이다. 뭔가 우연이라고 부르는 더 큰 바깥의 힘이 견고한 껍데기를 쪼아 균열을 일으키는 것, 그 순간을 심리학자들은 유레카 모멘트 혹은 ‘아하 체험’이라고 부른다. 만화책에는 ‘알’ 대신 ‘전기따마’(그때 아이들은 전구를 한국말에 일본말을 섞어서 그렇게 불렀다)에 불이 켜지는 순간이다.
이 세상엔 놀랍고 궁금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나는 쪼고 또 쪼아야 한다. 내 머리와 가슴은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지만 그 대신 얻은 별명이 ‘겐까도리’였다. 그것은 투계 鬪鷄 의 일본말로 샤모같은 싸움닭을 뜻하는 말이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꼬치꼬치 캐묻고 납득이 가지 않으면 끝까지 덤빈다. 그런 버릇이 아이들이나 어른들에게는 쪼아대기 좋아하는 싸움닭처럼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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였던 모양이다. 최초로 싹트기 시작한 나의 지적 호기심과 유레카의 꿈은 그 출발점부터 수난을 치룬다.
시골 아이들은 학교에 가기 전 서당을 다닌다. 서당에서 맨 처음 배우는 것이 천자문의 천지현황 天地玄黃 이다. 아이들이 큰 소리로 따라 외운다. 나는 하늘이 까맣다고 하는 말에 멈칫하고 글방 선생님에게 물었다.
“왜 하늘이 파란데 검다고 하나요?”
( 중 략 )
“쬐그만 녀석이 토를 단다”고 불호령이 떨어진다. 내 유레카의 알은 늘 그렇게 끝난다.
병아리가 껍질을 깨려고 쪼는 것을 어른들은 토를 단다고 한다. 아이가 쬐그만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큰 아이란 없지 않는가. 잘못은 파란 하늘을 까맣다고 하는 천자문과 서당에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그냥 따라 외우는 아이들이다. 천 년 가까이 아무 의심도 하지 않고 아이들을 그렇게 되풀이해서 외우지 않았는가.
학교에 들어가서도 사정은 매일반이다. 첫날부터 만신창이다. 똑같이 글을 배우러 다니는 곳인데 왜 저곳은 서당이라고 하고 왜 이것은 학교라고 하지. 의문은 꼬리에서 꼬리를 문다. 서당에 가면 하늘이 검다고 하고 학교에 가면 해가 뜨는 것이 아니라 땅이 돈다고 한다. 이쯤 되면 도는 것은 해도 땅도 아니고 내 머리다. 내 눈으로 보면 의심할 것도 없이 해가 동산에 뜨고 서산에 지는데도 그게 틀렸다는 거다. 하늘이 까맣다고 해도 그대로 따라하는 아이들이 이번에는 땅이 움직인다고 하는데도 끄덕도 하지 않는다.
그뿐인가. 선생님이 말하신다. “갈릴레오가 재판정을 나오면서 혼잣말을 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말야.”
쪼지 않으면 싸움닭이 아니다.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라고 쪼을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임금님은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 임금님이 쓰는 왕관을 속이는 사람이 있다니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보다도 더 이상한 것은 포도청 관원을 시켜 잡아다 이실직고하렸다 곤장 몇 대면 끝나는 것을 무엇 때문에 아르키메데스의 원리까지 발명해 겨우 금관의 진가를 밝혀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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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칠리아 섬에는 공룡들이 산다
아르키메데스가 살았던 시시리 섬이 시칠리아의 일본식 발음이라는 것, 지중해의 관문에 위치한 자리 때문에 동에는 아테네, 서쪽은 카르타고 그리고 북쪽에는 로마가 있어 항상 눈치를 보아야 한다. 때로는 전쟁이 소용돌이에 말려 끝내는 로마의 속주(식민지)가 되어야 했다. 시라쿠사(아르키메데스의 고향, 시시리 섬의 남쪽 끝)의 그런 비극을 어찌 알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대륙과 해양 사이에 낀 한국의 운명과도 같았다는 것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아르키메데스는 수학과 물리학 지식을 이용하여 신무기를 만들었다. 집채만 한 돌을 던지는 거대한 투석기와 배를 통째로 끌어 올리는 기중기, 그리고 반사경을 이용하여 햇빛을 모아 로마 군단을 태워버린 화경, 로마의 검이라고 불린 마르케루스 장군의 간담을 빼놓은 아르키메데스지만 끝내 성벽을 넘어온 로마 군사의 한 병졸의 창에 찔려 세상을 마친다.
공지의 바닥에 도형을 그려 놓고 문제 풀기에 골몰해 있던 아르키메데스에게 로마의 한 병사가 다가온다. 군화로 그의 도면을 밟으려고 하자 아르키메데스는 소리친다. “야, 이놈! 밟지 마라. 내 그림을 지우지마라.” 병사의 칼이 그를 찌른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외침 소리는 유레카가 아니었다. 그건 죽음의 비명이었을 것이다. 전쟁이 그의 도형을 지우고 유레카의 설레는 마음을 묻었다.
아르키메데스가 유레카라고 소리쳤던 것은 순수한 과학적 발견에 대한 환희였다. 왕관의 진위를 밝히는 방법을 알아내서 기뻤던 것이 아니다. 그 왕관에 얽혀 있는 권력자의 정치적 욕망, 물질적 욕망은 아르키메데스의 관심과는 동떨어져 있었다.
시인 필로크세노스를 노예들이 일하는 채석장에 가두고 플라톤을 납치해 노예로 팔려고 했던 디오니시오스, 아르키메데스에게 금관의 감정을 의뢰했던 히에론 2세도 그들과 다름없는 용병대 출신의 참주였다. 참주라면 영어로는 폭군의 타이런 tyrant, 그리스 말로는 티라누스 tyrannos, 공룡의 왕 티라노사우루스의 이름도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시라쿠사에는 이런 공포의 공룡들이 살고 그 섬 시칠리아는 오늘날 마피아가 사는 곳임을 유레카만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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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게 외쳐대던 초딩이 어찌 알겠는가. 그러면서도 그 아이는 시칠리아의 멍든 엉덩이 자국(장화 모양의 이탈리아 반도에 차인 위치에 있는 시칠리아 섬, 그 엉덩이 부분에 위치한 아르키메데스의 고향 시라쿠사를 말함)을 보면서 자신의 몽고반점을 생각했을까. 물론 아니다. 그러나 모든 비밀을 몰랐던 아이, 그런데도 장화에 채인 시칠리아 섬을 보면서 가슴 아파하던 그때. 그 아이의 알에는 유레카의 작은 금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쪼면 혼나는 세상에서 내 생각은 좀처럼 유레카를 외칠 기회를 만나지 못한 채 어른이 되어간 거다. 그랬다. 어차피 나는 계유생 닭띠가 아닌가. 싸움닭의 별병을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장화에 채인 시칠리아 섬을 보면서 가슴 아파 하던 그때, 그 아이의 알에는 유레카의 작은 금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금붕어가 얼어 죽을 뻔했던 겨울 그날 셋방에서 처음으로 유레카의 말이 터져 나온다. 모처럼 참으로 오랜만에 내 머리의 전구에 불이 깜박였다.
그것이 금붕어의 어항이 아니라 잉크병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기억은 흔적도 없이 내 삶 속에서 지워지고 말았을 것이다. 아닌 말로 어항 안에서 언 금붕어를 냉동고의 언 생선과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면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면 될 문제다. 그런데 아내는 왜 황급히 물을 끓여오고 나는 그것을 왜 어항에다 그렇게 숨죽이며 부었을까. 그리고 그러한 예기치 않던 행동들이 금붕어를 살려냈다. 모두가 알고 한 일이 아니다. 따지고 생각하고 한 행동이 아니다. 어느 책에서도 읽지 못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다.
위급했을 때 자기도 모르게 무언가 생각이 떠오르는 것, 책에서 배운 지식이 아니라 급한 상황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행동하는 것, 놀랍게도 인간에게는 그런 예지가 있다는 것이다.
레베카 코스타는 그녀의 저서 ‘지금 경계선’에서 유레카 모멘트에 대해 기막힌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미국 몬타나 만 협곡에서 큰 불이 났을 때 왜그 닷지 대장이 이끄는 삼림 소방대원들이 진화 업무에 나섰다. 하지만 순식간에 바람의 방향이 소방관들 쪽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닷지는 대원들에게 당장 장비를 버리고 뛰라고 명령했지만 불길을 피하기는 불가능 했다. 순간 뭔가를 결심한 닷지는 불길이 오는 방향으로 달려가며 재빨리 불을 놓았고, 불 놓은 곳에 엎드리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상상도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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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그들이 엎드린 곳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도망간 대원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
닷지는 위급한 순간에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떠오른 영감으로 맞불을 붙이면 안전지대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무도 몰랐던, 그 어떤 소방법에도 없는 신기한 아이디어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과학자들은 그런 사례를 분석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였다. ‘아하 체험’ 또는 ‘유레카 모멘트 Eureka moment’ 라는 것이다.
04 사소한 것들의 힘
■ 작은 것들을 위하여
대동아 공영권을 추진하던 당시 징병되어간 군인의 목숨 값은 단지 엽서 한 장 값, 2전 5리에 불과했다. 병사는 그 값으로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반면에 전쟁에 동원되었던 말이나 자동차 등의 병참, 병기들은 이보다 수십, 수백 배의 값을 갖고 있었다. 소총이나 군마를 구입하는 가격은 약 500원으로 군인 몸값의 2만 배에 달했다. 인명보다 관급품이나 군마를 더 존중했던 시대이다.
그뿐인가. 6‧25 전쟁 때의 통계 숫자를 보면 한국전쟁에서 죽은 우리 군인의 공식 전사자수는 13만 7899명이다. 여기에 실종자와 경찰, 피난민 그리고 민간의 피해까지 합치면 모두 99만 968명이 된다. 이 통계 숫자에서마저 누락된 사망자는 또 얼마나 되겠는가. 한마디로 백만 명 단위로 계산해야 하는 ‘메가 데드’의 시대, 역사상 네 번째 안에 드는 큰 전쟁으로 많은 젊은이들을 잃었다.
같은 통계 숫자라 할지라도 전사자나, 탱크, 비행기, 대포 등의 무기에 대한 것이 아니라 군수품화한 사소한 일상용품의 통계가 전쟁의 절실함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를테면 제2차 세계대전 중 미 육군은 5억 1천 9백만 켤레의 양말, 2억 천 구백만 개 이상의 바지를 주문했고, 독일 군부는 4,400만 개의 가위, 군의 사무소에서 찍는 도장 625만개를 주문했다. 생활 용품을 통해 보는 전쟁의 뒤안길은 전쟁을 더 실감나게 하기도 한다.
사소한 체험에서 온 것은 나를 그 이야기와 더욱 가깝게 만들어 준다.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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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레마르크의 말처럼 생명은 항상 보편화하거나 시스템화하거나 통계 숫자화 하면 사라진다. 둘이 먹다 하나 죽어도 모른다는 말이 있지만 실제로 네 사람이 먹다 하나 죽으면 모를 때가 있는 것이다.
■ 프삼메니투스의 눈물
이야기 story 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나오는 아주 짧고 하찮은 한 대목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뒤 포로가 된 이집트 왕 프삼메니투스에 대한 것이다.
승전한 페르시아의 캄비세스 왕은 그에게 모욕을 주기 위하여 성 밑 길거리에 왕과 이집트 사람들을 모아 놓았다. 그리고는 노예 옷을 입고 물을 길러 나온 딸, 공주의 모습을 보게 한다. 이집트의 많은 사람들이 그 광경을 보고 슬퍼했지만 왕은 입을 다문 채 땅 밑은 쳐다보며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또 왕자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서도 그는 여전히 묵묵히 눈을 아래로 뜨고 울지 않았다. 그러나 끌려가는 포로들 사이에서 늙고 병든 자신의 시종을 보았을 때 비로소 그는 주먹으로 머리를 치며 슬프게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었다. 그 광경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한 페르시아 왕은 전령을 보내 물었다.
“왕자와 공주의 모습을 보고도 울지 않던 당신이 어째서 한낱 미천한 노비의 불행에 대해서는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가?”
그 말을 들은 프삼메니투스 왕은 “종의 불행은 눈물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지만 딸과 아들의 경우는 그 마음을 표현할 한계를 넘어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했다.
■ 고속도로 위의 야생화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작은 것의 힘 그리고 하찮은 것 속에 담긴 소중한 의미, 숲속에서 우는 작은 벌레 소리는 들을 수 있어도 지구가 회전하는 거대한 굉음은 누구도 듣지 못한다. 이 괴이한 현상, 생명이나 죽음에게도 소리가 있다면 아마 그럴 것이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사람이 숨졌을지도 모를 교통사고 현장을 보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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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냥 질주한다. 충격을 받는다 해도 그것은 생명에 대한 깊은 사려는 아닐 것이다. 더더구나 사자 死者에 대한 애도는 아니다.
하지만 어떤가. 금이 간 고속도로의 아스팔트 틈 사이에서 문득 풀 한 포기가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을 보았다면 그냥 못 본 체 지나칠 것인가. 생명이란 무언지 저리도 모질고 아름다운지에 대해 가슴이 뜨거워질 것이다. 소란스럽고 척박한 길바닥 그 많은 바퀴의 위협 속에서도 용케 비집고 나온 생명 그 아슬아슬한 모험 앞에서 당신의 질주는 잠시 멈출지 모른다. 마음속에서라도 말이다. 인간보다 식물을 더 사랑해서가 아니다. 하잘 것 없는 야생화가 그동안 내 굳은 살 속의 생명을 만질 수 있게 한 것이다. 언제 떨어졌는지도 몰랐던 단추 자국처럼 흔적만 남은 우리들 생명으로 눈이 간다.
백만의 죽음을 낳은 6‧25 전쟁과 내 손이 시려 미처 생각지 못한 난민들의 동상 자국을 나는 그날 아침 느꼈다. 빙점하의 비통한 삶을 내 아내와 금붕어가 얼어 죽어가는 그 방에서 공유했다.
나에게 있어서 이 어항은 아르키메데스의 욕탕이고 금붕어의 그 지느러미는 뉴턴의 사과다. 하루하루 보면서도 무심히 간과했던 것들이 갑자기 새로운 의미를 띄고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딱지가 앉아 더 이상 만져볼 수 없었던 생명의 생채기다. 쑥스러워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한 우리들 사랑의 속살이 노출된 것이다. 한 마디로 금붕어를 통한 나의 발견, 문명의 발견, 생명의 발견이다.
50년도 더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금붕어 이야기에 집착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그 물음을 멈출 수가 없다. 진실을 뜻하는 희랍어 아레테이어 Aletheia는 망각의 여신 레티아 lethia에 부정을 나타내는 아a가 합쳐진 말로 망각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레티아는 인간이 죽으면 건너간다는 망각의 강 레테와 같은 말이다. 희랍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말을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비망각 非忘却, 비은폐 非隱蔽로서의 진실을 자기 철학의 중심언어로 삼았다. 내가 금붕어 이야기를 망각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과학자들은 운율로 글을 쓸 줄 모른다. 아니다. 언어로 글을 쓰지 않고 숫자로 부호로 글을 쓴다. 이야기가 사라지고 운율이 사라지고 말과 글이 사라졌다. 생명력을 잃은 것이다. 오늘 어떤 과학자가, 어떤 정치가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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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시를 쓰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유레카라고 절규하며 그렇게 뛰어나갈 수가 있는가. 어느 청명한 날 내려 쪼이는 눈부신 햇살 속에서 알몸으로 뛰면서 유레카라고 외쳤던 아르키메데스처럼.
어느 나라의 말이라도 좋다. 무엇인가를 발견하는 순간 이미 있었던 것.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 할지라도 어디엔가 묻혀있고, 잊혀지고 먼지가 쌓인 것들, 그것이 눈 부비며 일어서는 생명의 소리, 그것을 우리는 잃었다. 그것이 시대의 비극인 것이다.
- 生命의 詩 / 빈 운동장의 경주
어머니 운동회 날입니다.
줄마다 만국기가 휘날리고 있는 하얀
운동장을 달렸습니다. 햇빛이 너무 부셔
모자 차양을 세우고 달렸습니다.
숨이 차고 발이 떨어지지 않아도
심장이 터지라고 뛰었습니다.
상장이 탐나고 박수를 받고 싶어
그렇게 뛴 게 아닙니다.
마치 먹이를 좇는 사자처럼
혹은 사자에 쫓기는 가젤처럼
옆에 아이도 보지 않고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오늘에서야 압니다. 어머니. 운동회가 끝났는데도
운동모자와 런닝셔츠를 벗었는데도 나는
지금도 뛰어야 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누가 호루라기를 불어서가 아닙니다.
목숨이 있어서 바람이 불어서 숨차냐라고
어머니가 물으셔도
나는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생명의 나무들과
함께 경주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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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추위의 발견
살아 있는 것들은 추위를 싫어한다.
북극곰처럼 털을 갖지 못한 인간이 더욱 그렇다.
예수님은 더운 땅 마구간에서 태어나셨는데, 어째서 우리의 크리스마스카 드에는 언제나 눈이 내리고 썰매를 타고 전나무 가지와 지붕에는 흰 눈이 반짝이는가.
사랑은 체온처럼 추위를 통해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겨울을 함께 추워하는 사람들에게는 ‘타자 他者’란 없다.
01 타자 他者 란 없다
■ 어느 지식인의 옥중기
금붕어와의 만남 50년 뒤, 나는 컴퓨터 앞에서 구글을 검색하고 있다. 오늘의 젊은이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유레카의 감동은 없다. 아무리 난해한 문제라도 검색창에 키워드를 넣고 엔터키를 치면 봇물이 터진 것같이 정보가 쏟아져 나온다. 시험 삼아 구글에서 ‘생명’의 검색어를 쳐보라. 0.38초 만에 1억 4백만 개의 데이터가 터질 것이다. 영어로 ‘life’라고 치면 어떻게 될까. 한글 건수의 60배인 59억 천만 개나 된다. GDP의 차이도 이보다는 크지 않다. 물론 그 많은 정보속에서 입맛에 꼭 맞는 메뉴를 찾아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지금 나는 검색 창에 ‘레비나스’ ‘추위’ ‘타자 他者’란 말을 쳐 넣고 복합 검색을 한다. 어느 글에선가 읽은 기억이 나는 레비나스의 한 예화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구하라. 그러면 주실 것이다.” 무신론자도 성경의 이 말은 믿는다. 정말 유레카나 세렌디피티(운 좋은 발견, 재수 좋게 찾아낸 것, 우연히 잘 찾아내는 능력)의 행운은 있다. 여러 나라 말로 검색하던 과정에서 나는 우연히도 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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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적인 데이터를 얻게 된 것이다. 영문으로 된 글이었는데도 뜻밖에 그것은 유신시절 옥고를 치룬 어느 한국 지식인의 수기였다. 그는 감방의 독방 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음악을 들을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한 여름의 다양한 소낙비 소리의 변화에서 자연이 연주하는 음악을 감상할 수 있었다고 술회한다. 그런데 “겨울의 감옥은 참으로 무서운 추위”였으며 “거기에는 스토브도 다른 난방 기구도 없었다.”라는 대목이 이르자 내 입에서는 “아이고”와 “유레카”의 탄성이 한꺼번에 튀어 나왔다. 신혼의 단칸방이 그 글에는 감방으로 되어 있었고 얼음이 언 어항 속의 금붕어는 추위에 떨고 서 있는 겨울 나목들이었다. 상황도 다르고 그 의미 내용도 전연 다르다. 그런데도 50년 전 금붕어와 함께 치룬 내 추위가 되살아난 것이다.
그 글은 이렇게 이어지고 있었다.
“한공에 만월이 떠 있을 때는 달빛이 독방의 작은 창을 통해서 옥사 가운데 넘쳐 흐릅니다. 반대편 벽에는 큰 바다의 푸른 파도를 그려냅니다. 나는 벌떡 일어나 까치발을 하고 뜰의 나무들을 바라봅니다.”
그는 거기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참으로 기막힌 장면이 펼쳐진다.
“달빛에 어리는 나무들은 기쁨과 한기에 차서 떨고 있지요. 나도 그렇습니다. 야! 하고 나직한 말로 그들을 부릅니다. 그러면 야! 라고 그들 역시 멋쩍은 듯 몸을 비틀며 응답을 해 옵니다. 그렇게 나는 아주 긴 시간 동안 마음을 위로 받으며 수다를 떨었던 것이지요.”
■ 겨울 나무의 행복
기뻐서 떠는 것과 추워서 떠는 것은 극과 극인데, 그의 눈에 차가운 달빛 아래 나목들은 분명 그렇게 떨고 있었나보다 사람들은 겨울의 나무에서 떨고 있는 추위밖에는 볼 줄 모른다. 하지만 그 좁은 감방의 극한적 추위 속에서 똑같이 떨고 있는 그 사람은 그 나목들이 한기에 떨고 있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의 기쁨 때문에 떤다고 한 것이다.
생의 그 참을 수 없는 전율은 열대의 느끼한 초록색, 과잉의 생명에서 오는 기쁨과는 다른 것이다. 겨울 나무들에는 마른 이파리조차 없지만 분명 죽은 고목이 아니다. 나목들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참을 수 없는 생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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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기쁨 때문에 떨고 있다. “야”하고 부르면 그것들도 “야”하고 응답한다. 조금은 낯설음에 대한 수줍음으로 -.
이 소름끼치는 생명의 소통을 어찌 그 감방의 추위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감방의 외로움과 추위가 아니었던들 나무와 인간이 그렇게 서로 부를 수 있겠는가. ‘야-’하는 부름 소리에 응답할 수 있겠는가. 생물학자들이 엄격한 이성으로 종, 속, 과, 목과 같은 분류의 벽 안에 모든 지상의 생명을 분류하고 가둔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감옥 같은 두꺼운 의식의 벽이 생긴다. 하지만 서로가 ‘야-’하고 부르고 인사를 나누는 순간,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하나의 생명권 안에서 아주 쉽게 그 벽을 넘어선다. 그리고 손을 내민다. 이것이 겨울의 추위가 만들어낸 프리즌 브레이크(억울한 누명을 쓴 형을 구하기 위한 동생의 구출 과정을 그린 미국 드라마)의 드라마다. 추위의 관심에서 얻은 생각의 시작이 바이오 필리아(生命愛)에 당도하는 그 숨고르기이다.
02 영하 50도의 사랑
■ 동면, 개구리의 꿈
두 번째 내 금붕어 유레카는 추위의 발견으로 시작된다. 내 방과 그 어항을 얼렸던 추위는 나와 남(他者)의 관계를 생명의 끈으로 이어준다. 내가 한 여자와 결혼한 이유, 그리고 얼마 안 되는 원고료를 받아들고 금붕어를 사가지고 왔던 이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더 이상 혼자 추위를 견디지 못할 때 결혼을 한다. 그리고 먹는 물고기만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없을 때 금붕어를 사오는 것 같은 낭비를 한다.
바람을 막는 바람벽은 있어도 추위를 막는 추위벽은 없다. 추위는 우리의 이빨 사이와 뼈마디 깊숙이 파고든다. 그것은 일체의 수사학을 허락하지 않고 60조 兆 개의 세포 하나하나에 직접 전달된다.
추위는 바람처럼 한 방향에서 오는 것도 아니며 마녀처럼 망토를 휘날리며 다가오는 것도 아니다. 어떤 칼이나 창으로도 맞설 수 없다. 한란계의 숫자로 계측하는 추위만을 추위라고 부르지 않는다. 가난을 한 寒자를 붙여 빈한 貧寒이라고 하고 벼슬 못한 가난한 선비를 왜 한사 寒士라고 하는가, 딱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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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된 마음을 한심 寒心이라고 하고 포화 없는 이념 전쟁을 냉전 冷戰이라고 했는지, 경기가 나쁘면 한파 寒波라고 하듯 부정적인 상황에는 모두 추위를 나타내는 한 寒자가 붙어 다닌다. 하지만 사람들은 방한 防寒이나 피한 避寒이라는 말에 의지하려고 한다. 단지 추위를 막거나 피하는 대상으로 밖에는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 모든 생물들에게 실재하는 추위는 결코 잔인하거나 적대적인 관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들이 잘 쓰는 ‘위기는 기회’라는 말처럼 추위 속에서도 떨고 있는 겨울나무들처럼 추위는 축복의 기회일 수도 있다. 나무만이 아니라 겨울잠을 자는 짐승들에게도 말이다.
피가 차가운 파충류들은 아예 순순히 추위를 맞아들인다. 그들은 겨울이 오면 저마다 따로 땅속으로 들어가 동면을 한다. 혼자서 깊은 구멍을 팔 힘이 없는 작은 개구리들은 돌 밑이나 나뭇잎 아래에 숨을 수밖에 없다. 영하의 날씨에 동면을 하기 위해 개구리들이 몸에 익힌 기술은 아예 자신의 몸을 얼리는 것이다. 송장개구리나 청개구리의 일종은 체내 수분의 65%를 얼려 단단하게 만들고, 심장을 정지시켜 말 그대로 얼음덩이가 되어 겨울을 난다.
동면은 작은 죽음이다. 모든 것을 수용하는 것, 복종하는 것이다. 추위를 맞는 모든 방법은 자연과 생명에 대한 믿음에서 오는 것이다. 앙드레지드도 말했다. 아프리카 열대 지방 꽃들은 꽃이 아니라고, 겨울의 구근 속에 잠들어 있다가 봄이 되어 꽃을 피울 때 비로소 그것은 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꽃이 피거나 철새가 울거나 풀이 자라고 시드는 계절의 변화가 자연의 달력이다. 하지만 눈 내리는 발판은 아무 숫자도 써 있지 않은 하얀 달력이다. 시간이 정지되어 있다. 그래서 아메리칸 인디언들은 사냥한 버펄로의 자궁을 잘라 그 속에 든 태아들을 꺼내 본다. 그 생명이 얼마나 자랐는가를 보고 봄이 얼마큼 왔는지를 읽는다.
생명의 계절은 여름의 소낙비 속에서 왕성하게 초복들이 자라는 여름 벌판에 있지 않다. 우리의 상식을 비웃고 정말 대지가 살아있는 때는 눈 덮인 겨울철이다. 그때야말로 대지 전체가 생명을 키우는 은밀한 버펄로의 자궁이 되는 게다.
■ 쉬엄쉬엄하는 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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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짓는 사람들이 한파를 두려워하듯이 장사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불경기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불경기를 뜻하는 영어의 리세션 recession은 원래는 그렇게 나쁜 의미가 아니었다. 리세션은 리세스 recess라는 라틴어로 ‘멈춤’과 ‘쉼’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잠시 성장과 전진을 멈추고 휴식한다는 의미이며 이것이 바로 밤과 겨울의 ‘멈춤’을 수용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특성이기도 하다.
경제활동이 과잉되고 더 이상 그 시장이 지탱할 수 없는 번영의 극에 이르면 여름과 가을철이 지나 겨울이 오는 것처럼 산업 경제에도 동면의 철이 다가온다. 그렇다. 긴 안목으로 보면 생물들의 동면처럼 불황의 엄동설한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의 하나일 뿐이다. 생각해보라. 겨울이 없었다면 저 쉼표 없는 무한 경쟁과 노동의 정글에서 살아야 한다.
배에서 노를 저을 때 우리는 ‘어기여차’라고 한다. ‘어기여’라고 할 때에는 힘을 빼고 멈추었다가 ‘차’라고 할 때 한꺼번에 힘을 준다. 삶은 노를 젓듯이 힘을 빼는 휴식의 멈춤과 힘을 한데 쏟아 붓는 강약의 리듬으로 전개된다. 멈추는 ‘어기여’가 힘을 쏟는 ‘차’보다 언제나 더 길고 비중도 커진다. 그래서 세계 어느 나라에서든지 한껏 힘을 주는 순간의 사이사이에 보다 긴 준비시간이 삽입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들이 200년 걸려서 쌓아온 산업화를 불과 20년 만에 해치운 한국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어기여차’의 그 잃어버린 호흡이다. ‘어기여’를 뺀 ‘차, 차, 차’ 만 가지고는 숨이 차다 그러고 보니 한 때 노랫말에도 그런 것이 있었던 것 같다. 쉬엄쉬엄 일한다는 한국의 일하는 양식을 살리면서도 도리어 생산성을 올리는 지혜를 찾아라. 그것이 우리가 살길로 향하는 숨고르기다.
■ 허들링, 아버지의 눈물
남극에 10월이 오면 모든 생물들이 떠난다. 영하50도의 극한의 추위 때문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추위를 찾아 이동하는 이상한 생물들이 있다. 펭귄-해안에서 100Km나 떨어진 서식지 콜로니를 향하는 황제펭귄이다. 시속 0.5Km의 기우뚱 거리는 걸음으로, 때로는 배를 깔고 미끄러져 가는 토보강으로 20일 동안의 강행진이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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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해서 다다른 곳은 어느 생물도 존재하지 않는 오아모크 빙산이다. 오로지 추위와 얼음 그리고 차가운 극지방의 바람밖에는 없다. 그런데도 여기를 빙원의 오아시스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맞다. 그것이야말로 어떤 천적도 살 수 없기에 그들만이 마음 놓고 사랑의 짝짓기를 하고 알을 낳아 기를 수 있는 생명의 수호지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혹독한 그 추위가 펭귄들에게는 생명을 번식하는 가장 축복의 땅이다.
암컷은 알을 낳아 수컷의 발 위에 올려 준다. 추위가 만들어낸 부부 사랑의 협동이다. 발등의 털로 알을 품은 수컷들은 몇 초만 드러나도 얼음이 되어버릴 알을 지키기 위해서 부동자세를 취한다. 알이 부화하고 먹이를 구하기 위해 먼 바다로 떠난 암컷이 돌아올 때까지 아무 것도 먹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몸무게가 15Kg까지 줄어드는 굶주림과 긴 기다림의 부성애이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새끼가 부화를 해도 먹이를 구하러 간 에미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펭귄 아버지는 비상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굶주린 자신의 위벽이나 식도의 점막을 녹여 토해낸다. 이것이 바로 ‘펭귄밀크’라 부르는 아버지의 젖이다.
대개 동물세계에서는 짝짓기를 하고 나면 수컷은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만다. 암컷 혼자서 새끼를 낳아서 기르는 것이다. 그래서 부성애는 인간 사회 특유의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착각일 것이다. 대체 어떤 아버지가 펭귄처럼 자신의 살점을 저미는 사랑으로 자식을 키우는가 그것은 오직 영하 50도의 추위가 아니면 만들어 낼 수 없는 사랑의 기적이다.
황제 펭귄들의 놀라운 사랑과 협동력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일부일처의 부부애는 무리 전체의 동동체로 확산된다. 그것은 개체의 털과 지방 피질만으로 도저히 몰아치는 블리자드 blizzard(남극 특유의 눈보라)를 견뎌낼 수 없을 때 발휘된다. 환상적인 그리고 믿을 수 없는 펭귄들의 허들링 전략이 시작되는 것이다. 경기장의 운동선수들이 어깨동무로 밀집하여 원을 만들고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그것을 ‘허들 huddle’, 허들링이라고 부른다.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 발에 알을 품은 수컷들은 몸을 맞대어 밀집된 커다란 똬리를 튼다. 먼저 몸으로 방풍벽을 친 펭귄들은 서로의 체온을 모아 바깥보다 10도나 높은 따뜻한 내부의 공간을 만든다. 하나하나의 체열로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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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낸 동료애 필리아의 생명의 공간이다. 하지만 바깥 외벽을 친 펭귄들은 영하 50도의 추위에 노출되어 있다. 어떤 펭귄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 얼어 죽게 될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밖에 있던 펭귄이 안으로, 안에 있던 펭귄이 밖으로 조금씩 무리 전체가 소용돌이처럼 돌면서 교대하기 때문이다.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자발적 공동체, 희랍 때부터 인간들이 희구해 온 공동선이란 게 바로 이런 거다.
관중이 지켜보는 경기장에서 운동선수들이 펼치는 폼나는 허들링과는 다르다. 남극의 블리자드. 그 냉혹한 추위가 오히려 서로의 생명을 부축하고 공감하고 포용하는 삶의 양식을 만들어 준 것이다. 밖의 주변에서 일생동안 떨다 죽는 인간사회와는 다르다. 남극의 빙산에는 너와 나가 없어도 공평한 필리아(생명애)의 질서 속에서 살아간다.
■ 쓰리도그나잇
송장개구리와 황제펭귄. 그런데 인간은 어떠한가. 내 추위의 추적은 강연을 하기 위해 딱 한번 방문한 적밖에는 없는 호주로. 구석기 시대부터 수렵, 채집을 해오던 호주의 선주민 애버리지니 Aborigine다. 그들은 추운 겨울이면 개들을 끌어안고 잔다. 개의 온기로 추위를 견디는 것이다. 사람과 개가 하나가 되는 아주 오래전의 풍습이라고 한다. 한 마리의 개로 추위를 견딜 수 없으면 두 마리로, 그거로도 모자라는 아주 추운 밤에는 세 마리의 개를 데리고 잔다. 그래서 그들은 가장 추운 밤을 ‘쓰리도그나잇 Three dog night’이라 부른다. 개의 마리 수가 한란계 노릇을 하는 것이다.
추위에는 개의 추위도 없고 미개인과 문명인의 추위도 없다. 만물을 평등케 하는 하나의 추위에는 타자가 없다. 오직 살아 있는 것들의 체온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추위가 주는 생명애의 역설이다.
그래서 동사자들은 대개가 다 혼자이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그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혼자 얼어 죽는다. 동사자들의 죽음은 추위 때문이 아니라 외로워서, 곁에 사람이 없어서, 결국은 사랑이 없어 죽는 게다.
에스키모인들도 에버리지니와 똑같은 ‘쓰리도그나잇’의 풍속이 있다고 한다. 눈이 내려 설원을 덮으면 온통 세계가 하얀 생 일색이 되어 버린다. 눈에 띄는 조형물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에스키모인들은 겨우내 얼음으로 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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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이글루에서 조각을 하는 것이다. 눈에 덮여버린 여름의 추억과 형태들-그들이 사냥한 짐승과 물고기 새 그리고 함께 뛰고 놀던 머슴애와 계집애의 얼굴- 그런 것들을 하나하나 나무를 깎아 형태를 만들어 간다.
팔거나 장식하고 감상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조각을 하는 순간 단조한 겨울의 눈벌판에 생명의 조형물이 하나 둘 생겨나는 즐거움을 위해서이다. 추위는 이길 수 있다. 얼음 위에서 자도 동상이 걸리지 않는 그들이지만 눈발 속에서 사라진 형태에 대한 배고픔의 허기는 견디지 못한다.
에스키모의 추위가 세 마리 개의 체온보다 더 따뜻한 생명의 소통물, 아름다운 조각품들을 만들어 냈다. 백인들은 더 이상 에스키모인들을 이글루의 미개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설원의 미켈란젤로’. 이것이 오만하고 잘난 체하는 백인들이 에스키모인들에게 붙여준 오마주이다.
* 오마주 hommage : 다른 작가나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특정 대사나 장면을 인용하는 일. 찬가. 찬사
03 바이칼 호의 유전자
■ 세한삼우 歲寒三友
가장 추운 날을 우리 조상들은 ‘세한’이라 불렀다. 설날을 전후해서 일 년의 해가 바뀔 때의 추위다. 물리적으로도 한 해 가운데 제일 추운 날들이다. 그때 그 추위 속에 나타나는 삼우, 세 친구가 있다. 추위에도 푸른 빛을 잃지 않는 소나무와 대나무 그리고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설중매의 그 매화나무이다.
공자님의 말씀대로 ‘가장 추운 날을 겪고서야 비로소 변치 않는 그 속마음을 알 수 있다는 송백 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시들 조)’의 친구가 있는 한 어떤 추위도 두려워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선비들은 소나무 가지를 흔드는 겨울의 찬바람 소리도 비명이 아니라 청아하고 아름다운 거문고 타는 소리로 듣는다. 그래서 소나무를 송금 松琴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삭풍에 떠는 소나무가 오래 묵은 명품 악기로 변신하는 것이다.
대나무 역시 눈이 내릴 때 더욱 포근하다. 물의 차가움이 극에 이른 것을 설죽 雪竹이라고 했다. 오랜 세월을 차가운 눈발과 겨울을 견뎌 온 설죽의 흔적이 문인화의 통죽이 되면 대나무는 겉은 차고 안은 따뜻한 선비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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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방불하다. 문인화의 설죽도는 유난히 가는 대나무 가지 위의 큰 댓잎마다 눈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푸른 댓잎과 하얀 눈발이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세한삼우 중에서도 매화는 더 이를 데가 없다. 선비들의 문인화만이 아니라 서민들에게 있어서도 매화는 반가운 겨울의 동행자다. 옛 풍속에 따르면 동짓날이 되면 사람들은 구구 팔십 일, 여든 한 개의 흰 매화를 그려 창문을 봉한다. 그리고 매일 한 송이씩 붉은 칠을 하여 홍매화를 만들어 간다. 이윽고 마지막 한 개의 매화에 붉은 칠을 하게 되면 그 구구소한도 九九消寒圖를 찟고 창을 연다. 거짓말처럼 거기 진짜 매화가 피고 봄의 향기가 어느 새 뜰 안에 서 있다. 구구소한도로 추운 겨울을 나던 옛날 한국인들은 세 마리의 개가 아니라 하루에 한 송이의 붉은 매화와 함께 잠들며 봄꿈을 꾼다.
서양의 장미를 노래하기 위해서는 대낮 여름 태양이 있어야 하지만 동양의 매화를 그리거나 감상할 때에는 그와는 정반대로 겨울의 추위와 으스름한 저녁 어둠을 기다려야 한다. 아직 잔설이 남아 있는 뜰에 달이 뜨면, 영창에 매화의 실루엣이 비친다. 향기조차도 있는 듯 없는 듯 암향부동 暗香浮動 한다.
■ 신新 몽골로이드의 얼굴
6,000년 전이라고 했던가. 우리는 그 추운 바이칼 호를 지나 한반도까지 왔다. 빙벽에 발자국을 남긴 신 몽골로이드의 얼굴과 내 얼굴이 왜 그렇게 닮았는지를 설명해준다.
우리는 영하 50도까지 내려가는 극한의 빙하기를 거쳤기 때문에 추위에 적응하도록 피하지방이 두꺼워지고 눈을 보호하기 위해 쌍꺼풀이 없어지고 눈두덩이 두툼해졌다.
또한 얼굴이 입체적이면 추위에 약해져 동상에 걸리기 쉽기 때문에 얼굴이 평평해지고 입술이 얇아졌다. 거기다 눈썹이나 머리카락이 많으면 털이 얼기 때문에 털도 비교적 적은 편이다. 이들이 바이칼을 중심으로 생활하다 몽골리안 루트를 통해 동아시아로 이동해 한국, 일본, 남중국, 대만 등지에 정착했다. 사시사철 여름 태양빛으로 까맣게 탄 아프리카의 니그로이드, 색안경을 쓰지 않으면 눈부신 빛을 보지 못하는 눈이 파랗고 피부색이 하얀 코카소이드, 그들과 다른 내 얼굴 모양을 생각해 본다. 납작한 코에 튀어나온 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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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뼈, 그리고 두꺼운 지방층의 밋밋한 눈꺼풀은 모두가 시베리아의 추위, 바이칼호의 추위가 만들어낸 고통의 조각이요, 그것을 극복한 승리의 흔적일 것이다. 쌍꺼풀 수술을 하지마라. 그 몽골로이드의 투박한 얼굴이야말로 영하 50도의 추위를 이긴 상장이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날 때 엉덩이의 몽고반점은 바로 그 상장에 찍힌 푸른 도장 자국인 것이다.
실연을 하면 유럽의 젊은이들은 남쪽 땅으로 가고, 아시아 사람들은 북쪽 땅으로 간다. 배용준의 ‘겨울연가’가 일본의 한류 붐을 일으키게 한 것도 신 몽골로이드 증후군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겨울의 추위가 차가운 자비요 은총이라고 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많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 만약 겨울이 없었다면 동물들은 겨울잠을 잘 수 없고 논밭의 농부들의 고된 땀은 식을 때가 없을 것이다. 마치 밤이 없다면 대낮 속에서 그 많은 노동으로 쉴 수가 없듯이, 생명은 뜨겁다. 끝없이 타오르는 욕망은 잠시도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오죽하면 짐승들을 동물 動物, 움직이는 것이라고 이름 지었겠는가.
식물도 바람이 불면 말갈기처럼 이파리들이 나부낀다. 꽃이 피고 지는 것, 나이테가 느는 것 등 잠시도 쉬지 않고 성장한다. 또 예민한 청각이 있다면 보이지 않는 뿌리들의 숨어 있는 노동, 소낙비와 햇빛 속에서 엽록소들이 부지런히 양분을 만들어 나르는 수액의 소리가 들릴 것이다. 우리는 삭풍을 악마가 내쉬는 숨소리처럼 듣고 있지만 이 추위가 없었다면 끝 모르는 욕망을 누가 잠재울 수 있으며 종신형의 중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인가.
이렇게 겨울의 사랑과 은총은 영하 50도의 추위로 표현된다. 그래서 송장개구리들은 스스로 제 몸을 얼음으로 만들고 펭귄들은 시속 0.5km의 느린 걸음도 마다하고 가장 추운 빙벽의 콜로니를 찾아간다. 금욕의 땅처럼 초목도 먹이도 없지만 동시에 천적도 없는 생명의 땅이다. 반가운 매화를 찾아 나선 우리 선비들의 탐매, 험한 골짜기를 마다하고 지팡이 하나 들고 찾아가는 한사 寒士 들도 그와 같지 않는가. 세 마리의 개가 아니라 세한삼우를 그리고 노래한 우리 조상들의 청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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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살아 있는 물
01 생명으로 흐르는 물
■ 금붕어야 너마저도
금붕어를 사 오던 날, 내가 제일 걱정했던 것이 바로 물이었다. 비록 농사꾼의 후예라 할지라도 지금까지 물에 대한 관심을 가져본 적은 거의 없다. 그때만 해도 지천으로 흔한 것이 물이어서 돈을 물쓰듯한다는 관용어가 자연스럽게 들리던 때이다. 그런 나에게 물 걱정을 시킨 것이 바로 금붕어였다. 금붕어도 인간처럼 수돗물을 마시고 살 수 있을 까하는 걱정을 한 탓이다. 다행히도 금붕어는 인간의 환경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 온 탓으로 도시의 수돗물로도 기를 수 있다고 한다. 한 이틀 재워두어 염소가 희석되기만 하면 오히려 오염된 냇물이나 우물물보다 더 안전하다는 것이다. 잘됐다 싶었는데도 “아, 금붕어야 너마저도”라는 배신감이 든다.
아르키메데스처럼 유레카라고 외쳤던 그날 아침에도 무엇인지 목에 가시 같은 것이 걸린 느낌을 받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유레카라고 하면 부력의 원리보다 먼저 생각나는 것이 목욕탕이다. 2,300년이나 뒤늦게 도시의 욕조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나, 그리고 발견한 것이 있다면 때밖에 없는 내 초라한 모습이다.
그렇다 농담으로 들릴지 모르나 일찍이 우리에게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과학자가 탄생하지 못한 것은 단지 그 목욕탕 시설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다. 억지소리가 아니다. 그리스 로마의 폴리스 문명을 상징하는 것이 그 목욕문화요, 그 수도시설이었다.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것도 스포츠를 하고 난 학생들이 땀을 씻는 욕탕시설이었다.(플라톤이 레슬링 선수였다는 것을 생각해 주기 바란다) 아테네의 도시국가는 철학과 스포츠의 발상지이면서 동시에 목욕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했다.
그리스에서 수입되어 아우구스투스 대왕 때 처음 만들어졌다는 로마의 대욕장 ‘데르마에’는 서기 1세기 때만 해도 이미 그 수도망의 총 길이가
400Km에 달했다고 한다. 이 수로의 네트워크는 전부가 아홉 갈레로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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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고 로마시민들은 하루에 75만kl의 물을 공급받았다고 한다. 1600명이
한꺼번에 들어가 목욕할 수 있는 카라카라제의 대욕장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비록 아르키메데스가 목욕을 한 시라쿠사가 그리스의 식민도시의 변두리 왕국이라고 해도 먼 곳에서 수돗물을 끌어다 공중욕탕을 만들 수 있는 수도 인프라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기술을 갖추자면 기하학, 유체역학 등이 필요하다. 그런 과학 지식의 기반이 있었기에 욕탕 안에서 부력의 원리를 찾아낸 아이디어가 떠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 섭씨 4℃의 비밀
금붕어의 원조, 야생의 붕어들은 어떻게 난방장치도 없는 겨울의 언 강물에도 살 수 있는가. 이것은 ‘물은 섭씨 4℃일 때 가장 무겁다’는 초등학교 때 배운 지식만 있으면 간단히 풀 수 있다. 물의 비중은 다른 물질에 비해 아주 신비하고 불가사의한 것이어서 4℃보다 다 차갑거나 더운 것들은 그보다 모두 가벼워서 위로 올라간다. 0℃의 얼음도 100℃의 끓는 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강물이 얼어도 맨 밑바닥에는 자연히 4℃의 물이 흐르게 되어 있다. 그 덕분에 물고기들은 동태가 되지 않고 언 강물에서도 아랫목을 차지하고 살 수 있다. 이것이 물의 관심에서 생긴 금붕어 유레카의 하나이다.
겨울 강물에서도 물고기가 살아나려면 섭씨 4℃보다 더 더워도 더 차가워도 안 된다. 4℃의 차가운 물은 동결되기 직전의 온도로써 물고기의 모든 활동을 둔화시켜 사가상태로 살게 하는 임계점이다. 그래서 물고기들도 개구리처럼 동면상태로 겨울을 나게 된다. 먹잇감을 구하기 위해서 헤엄쳐 다니느라고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가 없다. 쉴 새 없이 지느러미를 움직여야만 살 수 있었던 물고기들은 비로소 노동으로부터 놓여난다. 얼음장 밑 4℃ 물의 신비한 비중이 베푼 고요한 휴식이요 평화요 그 생명의 은총이다.
요즘에 교활한 인간들이 물의 그 불가사의한 비중을 이용하여 덕을 본다. 물고기를 냉동시키지 않고 4℃의 냉각수에 담으면 오랫동안 먹이를 주지 않고서도 산 채로 장시간 수송할 수 있다. 가장 선도가 높은 물고기가 도시인의 식탁에 오를 수 있게 된 거다.
■ 노자의 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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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이 녹으면 무엇이 되는가’라는 초등학교 과학 문제가 있다. 정답은 ‘물’이다. 그런데 간혹 얼음이 녹으면 ‘봄’이 온다고 말하는 아이가 있다. 학교에서는 문제아로 쫓겨날지 모르지만 그런 아이 뒤를 좇아가면 까막소(靑牛)를 타고 함곡관을 나오는 노자나 그 동자를 만날지 모른다. 우리는 거기에서 물의 물리적 원리가 아니라 물을 통한 도의 원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접근법은 달라도 만물의 근원(아르케)이 물이라고 한 탈레스와 똑같은 태일생수 太一生水의 말을 얻게 된다. 만물에서 제일 먼저 생기는 것이 물이라는 뜻이다. 노자는 번번이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데 무엇보다도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패러독스가 그렇다. ‘천하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이 없지만 굳세고 강한 것을 공략하는 데는 그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것으로 강한 것을 이긴다는 이유극강 以柔克剛 은 노자의 중심 사상을 이루는 패러독스 paradox 이다.
노자 8장에 나오는 상선여수 上善如水, ‘세상에서 으뜸가는 善은 물과 같은 것’이라고 한 대목을 보면 안다. 물은 만물의 성장을 도와 이롭게 하면서도 남과 다투는 법이 없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낮은 곳으로 흘러 거처한다. 그리고는 끝으로 결정적인 이야기를 한다. 처음엔 물이 가장 으뜸가는 선이라 말해 놓고 마지막 마무리는 그러한 물이 도에 가까운 존재라고 밝힌다. 베일에 싸인 것 같은 노자의 ‘도’가 손으로 만지고 혀로 감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로 변하는 마술이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에게 가장 가깝고 흔한 물질 속에서 가장 심오하고 불가사의에 쌓였던 최고의 선, 도가 담겨 있었다는 이야기다.
‘백조는 매일 씻지 않아도 희고 까마귀는 매일 검은 칠을 안해도 검다’는 노자의 말은 세 살 먹은 아이도 다 알고 있는 당연한 말이다. 우리가 모르고 있었던 것을 겉으로 드러낸 것 뿐이다. 자연과학이 하는 것과 똑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그 대상이 물질 원리이냐, 정신 즉 생의 원리냐로 구분된다. 과학자들은 “아이들은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다”라고 말한 노자처럼 자연의 팩트 fact(사실, 정보)를 말해 우리를 놀라게 한 적이 없다. 그동안 우리는 물의 반쪽 얼굴만 보아온 셈이다. 자연 속에 숨은 과학적 원리와 도의 원리가 합쳐지는 곳에 물의 온전한 얼굴이 나타난다. 그것이 물에 대한 나의 관심이요 그 생명 사랑을 찾아가는 생각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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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어항이 마르기 전에
■ 다이아몬드와 물
과학, 철학, 종교, 분야는 다르지만 물은 만물의 아르케(뿌리)요 생명의 원천이라는 생각은 다 같다. 4대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강으로 되어 있는 것도 일반인이 알고 있는 상식이다. 사람의 몸은 70%가 물이다. 2%만 잃어도 통증을 느끼고, 5%를 잃으면 환각증상이 나타나고 12%를 잃으면 죽음에 이른다. 인간은 물 없이는 나흘도 견디지 못한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 식물 등 생명 있는 것은 반드시 물을 필요로 한다. 특히 개구리는 80%, 토마토는 95%가 물이라고 한다. 이렇게 지구상의 생물은 예외 없이 물로 되어 있다는 사실만큼 확실한 것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생명가치를 지닌 물이 일단 경제학의 영역으로 들어오면 형편없는 것이 된다. 그것은 노자와는 다른 경제학자들이 다루는 ‘다이아몬드와 물의 패러독스’이다.
물은 생명에 꼭 필요한 물질이지만 값은 거의 없다. 그런데 다이아몬드는 사는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값은 그와 비교할 수 없이 비싸다. 애덤 스미스나 마르크스 같은 경제학자들은 그것을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차이로 설명한다. 물은 다이아몬드에 비해 사용가치는 높지만 교환가치는 없고 다이아몬드는 사용가치는 없어도 교환가치(시장가치)는 비교할 수 없이 높다.
여기에 데이빗 리카드의 노동가치설까지 합세하면 물의 가치는 더욱 망신을 당한다. 다이아몬드는 광맥을 발견하고 가동하는데 큰 노력과 노동력이 들지만 하늘에서 내린 비는 인간이 노력하지 않아도 거저 얻을 수가 있다. 그래서 다이아몬드의 시장가격은 높고 물의 가격은 낮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노동가치설은 피카소의 출현만으로도 간단히 깨진다. 이 유명 화가는 2차 세계대전 때 줄곧 자기 짚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그런데 그 음식점 주인은 식사 값 대신 그림을 원했다. 그는 앉은 자리에서 스프 같은 것을 냅킨에 튀겨 간단히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사인을 해줬다. 그가 노동에 걸린 시간은 일분도 채 걸리지 않았고 그림의 자료도 모두 식당 것을 이용했다. 그런 그 그림은 그 자리에서 경매가 붙었으며 그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의 노동에 비해 100배 1000배로 팔려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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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자연은 생물들이 사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누구나 자유롭게 쓸 수 있도록 윤택하게 만들어졌다. 숨 쉬는 공기와 하늘의 태양빛, 땅위의 물이 그렇다. 그래서 어떤 권력과 재력으로도 독점할 수 없다. 어떤 가혹한 폭군도 햇볕을 쪼이고 물을 마시는데 세금을 물리지는 못한다. 인심 사나운 사람이라도 대동강 물을 판 봉이 김선달을 흉내내려 하지 않는다. 거짓말인지 맹물을 주고 돈 받는 다방이 있는지 찾아보라. 엄연히 수도료 물고 냉장고에서 나온 생수인데도 말이다.
사막지대를 제외하면 물은 어디를 파도 나온다. 그런데 정반대로 석유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나 바다 밑에서 나온다. 막대한 경비를 들여 시추를 해야 어쩌다 카지노의 잭팟처럼 터져 나오는 것이 석유다 산업화 이후의 사회와 그 경제 시스템은 생명의 물이 아니라 마실 수 없는 석유에 의존한 것이다.
그런데 물을 마실 때에도 알고 보면 석유를 마시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가령 플로리다의 오랜지 주스 1리터에는 1000리터의 물만이 아니라 2리터의 휘발유가 필요하다고 한다. 오랜지를 재배하기 위해서 뿌린 비료와 살포한 농약들은 모두가 석유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을 포장한 종이 팩, 라벨을 인쇄한 잉크, 제품을 넣는 상자를 만드는 데도 석유가 든다. 마지막으로 완성된 제품이 공장에서 소비자에게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도 석유가 있어야 한다. 유류로 움직이는 그 트럭 말이다.
옛날 농사는 물로 지었지만 오늘의 농사는 석유로 짓는다. 농약과 비료, 밭은 가는 트랙터는 모두가 석유의 피를 이어받은 그 아들이요 손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한다 디오게네스가 통 속에서 살 때 알렉산더 대왕이 찾아와 물었다. “왜 이 통 속에서 사느냐? 나는 당신에게 한 왕국을 줄 수도 있다.” 그 말을 들은 디오게네스는 햇빛을 쪼일 수 있게 몇 발짝 뒤로 물러서 달라고 한다. 그것이 디오게네스의 부탁이다.
디오게네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왕국의 빛과 태양빛의 차이다. 햇빛은 만인에 주어진 것이고 누구나 평등하게 받을 수 있는 하늘의 혜택이다. 알렉산더 대왕의 힘으로도 디오게네스가 쪼이고 있는 햇빛을 막을 권리는 없다. 그것은 지상의 권력에 속해 잇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햇빛을 물로 바꿔 생각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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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름길 묻길래 대답했지요.
물 한 모금 달라기에 샘물 떠 주고.
그러고는 인사하기에 웃고 받았지요.
평양성에 해 안 뜬데도
난 모르오.
웃은 죄밖에.
김동환의 ‘웃은 죄’라는 시다. 물 한 모금이나 웃음이나 사랑은 우물터에서 이루어진다. 모두가 평양성의 시장에서 매매되는 것이 아니다. 햇빛처럼 모든 사람에게 내려 쬐는 생명자본이다. 물과 함께, 생명과 함께 미소로 전달되는 사랑이다.
주역 周易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왕성은 옮길 수 있어도 우물은 옮길 수 없다’는 그 말뜻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을 누가 모를까. 그런데 시장이 그것을 잃었다. 왕성 안에서 살고 있는 우리가 그것을 잊었다.
■ 장독대 물독대
중화문명의 젖줄이었던 황하가 바다로 이르기 전에 말라 없어진다. 황하의 단류 현상을 알고 충격을 받았던 것은 이미 1970년대의 일이지만 발해만의 생태계에 큰 혼란이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은 최근의 연구조사의 논문을 통해서 알게 된 일이다. 바닷물의 질소 성분은 증가하고 인 燐이나 실리카 계통의 성분은 내려가고 있다. 바닷고기들이 먹고사는 플랑크톤의 증식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말이다.
이스라엘에서 농수로 쓰고 있는 지하수가 고갈 되는 것은 시간문제라 했고 호수가 통째로 사라지는 일도 벌어진다. 카스피 해의 동쪽 아랄해, 세계 제4위의 호수라고 일컫던 곳이 자금은 온데간데없이 맨땅으로 바뀐 것이다. 상전벽해다. 금붕어 어항이 마르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걱정 말라. 아직 시간이 있다. 너의 마음에는 한국의 물독대가 있지 않느냐는 작은 위안의 소리도 들려온다.
“물독대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장독대는 알아도 물독대는 모른다. 사전을 찾아봐도 없다.” 그렇게 말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솔직히 신문 칼럼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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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검색을 하기 전까지 나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사실이다.
“한양 북촌에서 행세하고 사는 집에는 장독대 말고 물독대라는 것이 따로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장독대 말고 ‘물독대’라는 게 있었다.”
윗글은 이규태 칼럼이고 그 아래 글은 조법종 교수의 글이다. 같은 냇물이라도 동서남북의 방향에 따라 다른 독에 담고 같은 빗물이라도 절기에 따라 입춘수, 입추수를 따로 받아 물독에 저장한다. 그리고 그 상징성과 용도에 따라 쓰임도 달랐다는 것이다.
인왕산에서 흐르는 물을 백호수라 하고 삼청동 뒷산에서 흐르는 물을 청룡수, 남산에서 흐르는 물을 주작수라고 하여 각기 다른 수질을 가려 그 물독대에 저장해 둔다. 그리고 장을 담그는 데는 청룡수, 약 달이는 데는 백호수, 머리 감는 데는 주작수 하는 식으로 동서남북의 방위별로 용도를 달리해 썼다. 따라서 그 물을 길어다 파는 물도가도 달랐고 물값도 달랐으며 그 물을 받아 두고 쓰는 물독도 자연히 달라져야 했다.
그리고 입춘 날 받은 입춘수는 아이를 갖고 싶은 부부가 잠들기 직전에 마시고 입동 후 소설 전에 내린 빗물을 액우수라 하여 그 물로 약을 달이면 곱절의 효력이 난다고 했다.
우리 조상들은 그리스 로마 그리고 중국인들만큼의 별스러운 유산을 물려준 적이 없지만 큰 나라들이 줄 수 없었던 생명자원을 우리에게 물려주셨다. 집집이 장독대와 물독대가 있는 ‘대’의 주거 문화부터가 그런 유선의 하나다. 장독, 물독 하는 독의 용기 문화 그리고 그것에 사방위, 사계절의 우주와 융합한 물 문화는 세계 어디를 가도 찾기 어려운 것들이다.
03 마지막 물, 눈물
■ 사랑과 우애의 눈물
모든 것이 다 오염되고 고갈되어도 우리에게는 최종의 물이 남아 있다. 눈물이라는 자원이다. 어머니의 눈물, 영하 50도의 황제펭귄 같은 아버지의 눈물, 누군가 날 위해 흘린 사랑과 우애의 눈물이다. 그런 물을 받는 물독대가 우리의 마음속에 있다. 하늘에는 비가 내려야 아름다운 무지개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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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없던 시절에 나는 ‘흙 속에 저 바람 속에’의 에세이에서 한국말의 눈물에 대해 비판을 한 적이 있다. 영어의 티어 tear, 불어의 라르므 larme는 독립된 낱말인데 비해 한국의 눈물만은 ‘눈’에다 ‘물’을 보탠 복합어다. 영어로 옮기면 ‘아이스 워터 eye's water’다. 정말로 직설적이고 산문적인 물기 없는 말이다. 코에서 나온 물이 콧물이듯이 눈에서 나온 물이 눈물이라는 거다. 중국어로도 눈물을 말할 때 물수 水 를 쓰는 경우가 있지만 눈물방울이라고 할 때는 물 대신 꽃 화 花자를 쓴다.
그러나 물이라는 말이 과학적으로나 문학적으로나 생명 그 자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눈물에 물자가 들어간 그 직설적인 표현에서 오히려 시를 느끼고 철학과 과학을 느낀다. 과장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다에 있는 물이 바닷물이고 내에서 흐르는 물이 냇물이라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물을 빗물이라고 하듯이 영혼의 창이라고 말하는 눈에서 흐르는 물을 눈물 아니고 뭐라 하겠는가.
그 유명한 ‘파라디의 법칙’을 발견한 파라디는 학생들에게 액체가 묻은 천을 나누어 주고 분석해 보라고 했다. 학생들은 약간의 물과 염분을 발견했을 뿐 이렇다 할 물질 성분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때 파라디는 학생들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액체는 자기 아들을 걱정하고 찾아온 어머니가 흘리고 간 눈물이다. 여러분들이 배우려고 하는 과학의 힘으로는 그 눈물이 함유하고 있는 어머니의 애정을 분석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눈물의 이등분 그리고 옴소르
인간이 생산하는 삼대 액체로 꼽고 있는 것이 땀, 피, 그리고 눈물이다. 공통적인 것은 모두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바닷물과 성분이 같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것이 만들어 내는 역사는 각기 다르다. 일본 식민지의 암흑 문화에서 벗어난 한국인들이 만들어 낸 역사와 그 문화는 어떤 것인가. 그것을 압축시킨 말이 ‘땀으로 이룬 산업화, 피로 세운 민주화’다. 지금까지 그 역사의 자국마다 고인 땀과 피는 번영과 함께 고통과 갈등의 앙금을 남기고 있다. 어떻게 풀랴. 산업화의 땀과 민주화의 피를 어우르고 정화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위로의 눈물, 공감의 눈물 그리고 감동의 눈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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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야 무지개가 뜬다고 했다. 영혼의 무지개는 눈물 속에서 뜬다. 다양한 색깔로 그리고 일곱 색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그 어렴풋한 혼색이 중간색까지 포함하는 것. 거기에서 산업화 시대 민주화 시대를 접목하는 생명화 시대가 창조될 것이다. 그래, 주장하고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내 생명의 길, 어항 속의 금붕어까지 포용하는 그 생명에 대한 자원, 우리에게 남은 최종의 물의 자원, 눈물 말이다.
중학교 시절 크리스천도 아닌 내가 감동적으로 읽었던 소설 한 편이 있다. 가가와 도요히꼬의 ‘사선을 넘어서’라는 소설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생명 자본주의’의 발생에 불쏘시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그의 시 ‘눈물의 이등분’이었다.
일본에서는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없거나 아이들이 많아서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을 경우 낳은 자식을 죽이는 무서운 풍습이 있다. 그것을 마비끼(밭에서 밀집한 곡식을 솎는다는 뜻)나 고가에시(아이를 다시 하늘로 반품 한다는 뜻)라고 불렀다.
가가와의 시대에 오면 그런 풍습이 ‘받아온 애 죽이기’로 변한다. 사생아처럼 원치 않는 아이, 양육할 수 없는 애가 태어나면 일정한 양육비를 주고 남에게 맡긴다. 그런 아이를 받아온 사람들은 대개 다 양육비를 노리는 업자들로, 받아 오는 즉시 죽이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 않으면 양육비 일부를 떼고 하청업자에게 넘긴다. 이렇게 아래로 아래로 넘겨진 아이가 마지막으로 가는 곳이 빈민굴이다.
몇 푼 안 되는 아이 우유값으로 온 식구가 살아야 하기 때문에 막상 아이는 굶주려야 한다. 가가와는 빈민굴에서 그렇게 맡겨졌던 아사 직전의 ‘오이시’라는 아이를 데려다 기른다. 하지만 결국 영양실조로 죽고 만다. 세상에 나와 굶주림 밖에 모르고 전전하다 짧은 생을 마친 오이시를 끌어안고 그는 눈물을 쏟는다. 그 눈물방울이 아이 얼굴에 떨어지고 굳게 닫은 눈에서도 눈물이 흐른다. 자신의 눈물이지만 그것은 죽은 오이시가 흘리는 눈물이기도 하다.
가가와는 그것을 ‘눈물의 이등분’이라고 표현했다. 사랑은 눈에 보이지만 눈물은 보통 물과 마찬가지로 물질로 감각할 수 있다. 그래서 수학적인 언어로 ‘눈물의 이등분’이라는 쿨한 어휘를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 눈물의 이등분으로 오이시가 살던 빈민가에 협동조함을 만들어 모라이꼬(받은 아이)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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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을 구조하는 운동을 벌인다. 기독교의 일곱 가지 ‘생명가치’ 위에 세운 생활 협동조합이다. 그리고 100년 뒤인 2009년에 그를 기념하는 국제 공개 포럼이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다. 이 자리에서 소개된 것이 슬픔을 나누는 스웨덴의 옴소르 omsorg 그리고 한국의 생명자본주의 Vita Capitalism 다.
4. 생명을 먹다
가족을 식구라고 한다. 먹는 입이라는 뜻이다. 가슴으로 생각하고 머리로 헤아리는 것이 가정인데 어째서 우리는 먹는 입으로 아버지 어머니 형님 동생을 계산하는가. 도시 전체에서 사는 사람, 전체의 국민들도 사람의 입 인구 人口라고 한다. 호구 戶口 조사라고 한다.
그러나 그 이유를 아는가. 가축 가운데 소 牛만을 생구 生口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자. 먹고 자기만 하는 돼지나 개는 생구라고 하지 않는다. 땀으로 함께 일하고 정으로 한 솥의 밥을 먹는 것, 먹는 것은 물질이 아니다. 경제가 아니다. 생리가 아니다.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고 했는데 먹는 것으로 지고한 하늘의 뜻을 배우고 산다.
01 붕어의 맛, 금붕어의 멋
■ 양미리의 추억
식민지 아이로 태어나 일본 강점기에 살았던 역사도 그때 길들여진 ‘이와시(정어리)’ 맛을 통해 재생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비료로 사용할 만큼 흔한 것이라 했는데 해방과 함께 사라진 바람의 미각이다.
이와시를 빼면 꽁치, 갈치, ‘치’자 돌림의 물고기가 주류를 이루었고, 6,70년대 원양어업의 시대가 열리면 ‘참치’맛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막상 금붕어의 이야기가 시작된 50년대 말은 어떤가. 물론 그 시대에도 치자 돌림의 며루치가 있었다. 전쟁을 치루고 피난길에서 먹던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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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모두가 말린 것이라야 한다. 미숫가루, 건빵처럼 물고기도 마른 건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빈자의 상에 매일같이 올랐던 것은 단연 ‘양미리’ 였다. 무작정 상경한 가출 소녀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양미리는 그 몸도 말라비틀어져 양분이 없다. 맛도 꼭 연필 토막을 씹는 것 같았다. 50년대 말 우리의 경제 형편이나 과도기의 사회분위기가 꼭 그랬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완전하지 않다.
이미 말한 대로 나에게는 양미리에 덧씌운 또 하나의 물고기가 있다. 못 먹는 금붕어다. 먹어본 적이 없으니 그 맛도 모른다. 하지만 그 궁핍의 시대에 왜 나는 금붕어를 사다 길렀을까. 그에 대해서 내 자신이 납득할 만한 해답을 연구해야만 그 시대적 상황의 의미를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같은 물고기인데 어째서 붕어는 먹고 금붕어는 먹지 못하는가에 대해서도 궁리해 보아야 한다.
붕어는 ‘맛’ 있고 금붕어는 ‘멋’이 있다. 맛과 멋의 모음 하나 차이로 같은 어족의 운명이 그렇게 갈라질 수 있는가. 그리고 붕어에 금 金자 한 글자가 더 붙는 순간 ‘먹거리’가 ‘볼거리’로 변하는 놀라움을 맛본다. 전쟁으로부터 그리고 가난으로부터 벗어나 막 살아 숨 쉬는 생명감을 되찾는 순간의 느낌이 어떤 것인지. 한국인의 부석부석한 얼굴에 기름기가 돌기 시작하고 식곤증 속에서 아물아물하던 죽은 내 이웃의 이름이 기억나기 시작하는 그 무렵의 연대기가 바로 양미리의 맛이요 금붕어의 멋이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다 먹는다. 바퀴벌레 수준의 잡식 동물이다. 물고기란 말부터 그렇다. 물고기는 물水 속에 잇는 고기肉라는 의미다. 그런 발상이라면 하늘을 나는 새는 ‘하늘고기’, 들판에 사는 짐승들은 ‘들고기’래야 맞다. 그리고 산에서 사는 짐승은 무조건 다 ‘산고기’라야 한다. 돼지고기, 쇠고기 그리고 닭고기는 원래 그 고기를 먹기 위해 기르는 가축이라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자연의 냇물 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고 있는 야생의 어류들을 싸잡아 물고기라고 하는 것은 우습다. 자연의 모든 생물들이 자신의 먹거리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인간 중심의 해석이다.
한국말의 물고기는 그래도 낫다. 최소한 살아있는 물고기와 구별하여 어물전 물고기는 생선이라고 한다. 그런데 물고기를 날 것으로 먹는 일본인들은 냇물 속 물고기나 요리상의 물고기나 다같이 ‘사까나’라고 부른다. ‘사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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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말로 술을 뜻하는 ‘사께 酒’이고 ‘나 菜’는 채소를 의미하는 것으로 술에 따라 나오는 반찬이다. 그러니까 ‘사까나’는 바로 ‘술안주 酒菜’라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냇물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는 물고기를 향해 “사까나! 사까나(내 술안주! 내 술안주!)”라고 부르는 일본인들을 보면 왠지 남의 나라를 술안주로 삼은 그들의 침략주의가 연상되어 쓴웃음이 나온다.
02 먹는 것이 하늘인가
■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중국에는 ‘민이식위천 民以食爲天’ 이라는 말이 잇다.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이야기다. 마오(毛澤東) 주석이 한 말로 알고 있지만 실은 맹자의 말이다. 그러니까 원래는 사회주의가 아니라 봉건주의의 통치술에서 발생한 사상이다. 아무리 강력한 제왕이라고 해도 백성이 배고프면 따르지 않고 난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민이식위천에 이어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 곧 음식을 챙기는 것 則治民卽是治肴(肴 안주 효)’이라는 말이 나온다. 지금으로 치면 “It's the economy, stupid. 문제는 경제다 바보야”라고 한 클린턴 진영의 선거 슬로건과 같은 말이다. 걸프전에 대승하고 우쭐해 하는 조지 부시를 단칼에 벤 짐 카빌의 카피야말로 미국판 ‘민이식위천’의 위력을 보인 것이다.
재상의 ‘재宰’는 본래 요리를 관장하는 사람, 그리고 ‘상相’은 손님을 맞고 그 음식을 나눠 주는 일을 맡은 사람을 일컫는다. ‘일인지하만인지상’이라는 재상이 요리하는 주방장이요. 손님에게 음식을 나르는 웨이터라면 누가 곧이듣겠는가. 하지만 진편陳平의 고사를 보면 짐작이 간다. 그가 마을 제사의 행사를 맡게 되었을 때 뒷말 없이 그 제육 祭肉을 마을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고루 나눠주는 능력을 발휘했다. 한 사람도 불평하는 이가 없이 모두 칭송하는 소리가 높았다. 그러자 진평은 “나에게 나라의 정사를 맡겨주면 천하를 이렇게 다스릴 수 있을 터인데”라고 탄식했다. 정말 진평은 그 뒤에 유방 劉邦의 명 참모로 발탁되자 큰 공을 세우고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음식을 요리하는 솜씨로 직접 비유한 것이 노자의 도덕경 60장에 나오는 ‘큰 나라를 다스리려면 작은 물고기를 찌는 것처럼 하라 則治民卽是治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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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말이 좋게만 들리는 말은 아니다. 등 따습고 배부리기만 하면 그 이상 바랄 것이 없는 것이 ‘민’이라면 자연히 그 생의 존재감은 박탈되고 만다. 경우에 따라서는 민을 비하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다. ‘먹는 것이 하늘’이라는 것은 바로 먹는 게 종교요, 철학이요, 과학이란 뜻이다. 그 말대로라면 중국, 더 나아가서 아시아의 민民에는 종교도 철학도 과학도 필요 없다는 말이 된다. 동양은 정신, 서양은 물질이라고 믿어 왔던 사람들에게는 하늘과 땅이 무너지는 소리다.
하지만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종교’, ‘철학’, ‘과학’이란 단어는 모두가 일본인들이 개화기 때 서양에서 들여온 외래어들을 한자로 뜯어 맞춘 번역어이다. 그러니까 개화기 이전에는 중국은 물론 한국이나 일본에도 존재하지 않던 용어다.
‘민이식위천’이 고대 로마로 가면 ‘빵과 서커스’라는 말과 맞먹는 것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다. 위정자들이 공짜로 제공하는 빵(먹거리)과 서커스(구경거리)에만 정신을 팔고 있는 당시의 로마 민중을 야유한 것이다.
황제나 대귀족들은 통치수단으로 곡물을 무상으로 나눠줌으로써 은총을 베풀어 시민을 무력화시켰다. 시민은 시민대로 일하려는 의욕을 완전히 버리고 정치에 대한 참여나 불만을 원형투기장, 경마장, 경기장의 오락으로 풀어버린다. 즉 끓는 주전자의 뚜껑을 열어주어 김을 빼버리는 것이다. 실제로 네로는 처형한 부유시민의 몰수재산을, 그리고 칼리귤라라는 금화를 민중에 뿌려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 로마는 점점 타락하고 빵과 서커스는 몰락의 원인이 되는데, 그것을 에베르제티즘이라고 한다. 요즘 말하는 포퓰리즘 같은 것으로 공짜만 바라고 모든 것을 먹여주고 길러주는 공짜의 생활에 익숙한 풍조를 뜻한다.
■ 오이코스
이코노미 economy 라는 영어는 그리스말로 집, ‘오이코스 oikos’에서 나온 말로 여기에 법을 뜻하는 ‘노모스 nomos’를 합치면 가사 家事를 뜻한다. 표면 그대로는 아니지만 아테네의 시민들은 이 가사의 영역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노예와 아녀자가 하는 일(노동)로 생각했다. 먹는 것을 위해서 노동을 하는 ‘의식주’의 일상성에 매달려 사는 사람은 바로 그 오이코노미아(가사경영)를 맡은 노예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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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이 들으면 민이식위천의 민은 노예거나 일상적 욕망만을 위해 살아가는 ‘데모스 demos (시민, 민중, 대중)’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더구나 한자의 민이 바늘로 찔러 눈을 멀게 하여 평생 연자방아를 돌려야 하는 노예를 의미하는 글자였다는 사실을 알면 더욱 그럴 것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영화를 감동적으로 감상하다가도 문득 묻는다. 부채를 대신하는 선풍기, 바느질을 대신해 주는 싱거 미싱, 마차를 대신하는 자동차, 그리고 전기세탁기, 진공청소기, 냉난방기..... 끝도 없는 가전제품들이 하는 일을 스칼렛 오하라의 미국 남부 저택으로 옮기면 흑인 노예들 몇 명이 일하는 것과 맞먹을까. 호사가들은 벌써 추산하여 1000명 안팎의 노예들 수를 계산해 낸다. 우리의 노동을 대신해 주는 1000명의 노예 덕분에 우리는 지금 플라톤과 같은 타우메제인(대단함, 놀라움, 경이로움), 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를 외치고 있는 걸까.
몸을 담그고 금붕어처럼 떠 있는 욕조 속의 조용함, 일상생활과 노동에서 비켜설 수 있는 한가로움, 이제 아르키메데스의 욕실과 금붕어의 어항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우리가 스쿨이라고 부르는 학교 역시 파도도 천적도 굶주림도 없는 어항과도 같은 곳이다. 그러고 보니 스쿨 school이라는 말 역시 한가로운 여가를 뜻하는 그리스 말의 스콜레에서 온 것이다. 깊고 고요한 지적 공간은 채석장에서 돌을 캐는 노예들의 노동공간과 링크된다. 당시의 노예들은 발가벗고 일을 했다. 지적 경이로움 때문이 아니라 그들은 애초부터 옷이 없었고 알몸으로 노역을 하는 것이 관례였다. 아르키메데스의 가장 행복한 유레카의 나체는 가장 불행한 노예의 나체와 오버랩된다. 이 놀랍고 슬픈 모순! 릴케의 무덤에 쓰인 글귀라고 했던가.
‘오 장미 그 순수한 모순!’
이러한 모순을 프랑스의 여류 철학자 시몬 베유는 그의 저서 ‘노동일지’에서 단지 두서너 행의 글로 나타내고 있다.
“플라톤은 선구자일 뿐이다. 그리스인들은 예술이나 스포츠를 잘 알았지만 노동은 알지 못했다. 노예가 주인을 만들어 낸다는 의미에서 주인은 노예의 노예이다.”
03 식구, 인구, 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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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은 생명의 문
한국은 가족을 식구 食口라고 한다. 직역하면 먹는 입이다. 어른들은 나에게 묻는다. “너의 집 식구가 몇이냐” 그러면 나는 우리 집 식구 수를 손꼽아 대답한다. 하지만 조금 나이를 먹으면서 식구란 말이 자꾸 목에 걸린다. 사랑하는 가족을 밥 먹는 입으로 계산하는 어른들이 밉다. 한중일 삼국의 한자문화권에서 똑같이 사용하는 인구 人口란 말에 대해서도 콤플렉스를 느꼈다. 인간을 상징하는 제유 提喩가 머릿수가 아니라 먹는 입이라는 것이 내 어깨를 좁게 한다. 생각하는 머리보다 먹는 입이 인간의 신체기관을 대표한다는 것이 어쩐지 반문화적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 提喩 : 수사법의 한 가지. Ex 빵 = 식량. 인구 (먹는 입) = 머릿수
하지만 사람을 셀 때 뇌가 있는 머릿수로 계산하여 한 마리頭, 두 마리, 세 마리라고 해 보라. 야단이 난다. 그러나 한 입, 두 입이라고 하면 어색은 해도 누가 뭐라고 하지는 않는다.
한자문화권에서는 역시 먹는 것이 하늘이어서 포로나 노비 그리고 소와 같은 가축이라고 해도 식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입으로 수를 따졌다. 그것이 생구 生口다. 광개토대왕비에는 396년 백제가 고구려에 대패해 생구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리고 고려사에 의하면 고려로 돌아온 김방경 등이 일본인의 자녀를 포로로 하여 고려왕에게 생구로 헌상했다고 기술하는 대목이 있다.
백 가지 예보다도 예수님의 최후 만찬 장면을 보면 실감할 수 있다. 빵을 자신의 살, 포도주를 그의 피로 상징한다. 그것을 함께 나눔으로써 예수님과 제자들은 하나로 결합된 몸과 영혼이 된다. 이미 식사는 매슬로우의 욕망 단계의 제일 아래에 있는 생리적 욕망이 아니다. 매슬로우는 서양학자들 대부분이 범하는 형식론적 분류와 그 계층관계의 함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최후 만찬은 배고픔의 생리적 욕망의 해결인가, 제자들과 헤어지는 사랑의 나눔인가. 아니면 유월절 전날이니 자신이 양이 되는 종교적 자기실현의 단계인가. 최후 만찬은 이 모든 것이 혼유된 총체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한국인에게 있어서 과연 ‘식구’라고 할 때의 ‘식’이 바로 그것과 통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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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먹는 입은 육체이고 마음이고 혼이다. 단군신화에서 먹는 이야기가 중요한 테마를 이루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이라는 국호는 조 朝의 아침보다 선 鮮에 더 큰 의미가 실려 있다. 선은 물고기 魚와 양 羊을 합자한 것이다. 곱다, 맑다, 신선하다는 뜻을 갖고 있는 그것은 부패하지 않는 생명, 가장 싱싱한 먹거리를 의미한다. 역시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속담을 만든 한국인은 중국인과 같은 ‘민이식위천’의 문화를 공유하고 살아온 것이다.
경제가 단순히 먹는 물질과 관련될 때 더 이상은 경제 구실도 못한다. 그러니까 먹거리는 형이하에서 보이지 않는 형이상의 가치로까지 확산되고 고양될 때 그 진정한 힘을 발휘하게 된다. 먹거리가 볼거리가 되고, 볼거리가 생각거리와 사랑거리로 변해 마지막에는 초월적인 신과 소통하고 결합하는 종교단계의 ‘예배거리’로까지 업그레이드된다.
신은 양이나 돼지머리와 같은 먹거리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신은 제물로 인간이 생명과도 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것을 바칠 때 기뻐하신다. 그러기 때문에 종교의 역사를 보면 대체로 우리의 상식과는 반대로 처음에는 짐승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사람의 생명을 직접 바치는 인주 人柱로 바뀌어 갔다.
봉덕사의 신종을 울리기 위해 딸자식을 바친 에밀레의 전설, 백 살에 얻은 독자 이삭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이 그랬다. 독생자를 십자가의 제물이 되게 한 예수의 죽음도 마찬가지다.
인당수의 제물이 된 심청. 인당수 수신이 원하는 것은 쌀과 같은 물질이 아니라 아비를 사랑하는 심청이의 효심 그 순수한 사랑과 영혼을 받는 것을 더 기뻐하고 있다는 증거다.
먹는 세계와 정신의 세계는 음양이 상보하는 융합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특히 한국에는 중국, 일본에도 없는 수저 개념이 있다. 숟가락과 젓가락은 전연 기능이 다른 것인데도 한국에서는 두 개를 한 짝으로 생각하고 동일체로 본다. 즉 숟가락 젓가락 하는 말을 합쳐서 수저라고 한다. 떠먹는 국물의 액체와 건더기 음식이 한 그릇 속에서 융합병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콩 세 알의 농심農心
할아버지와 손자가 밭에서 콩을 심고 있었다. 손자가 흙에 구멍을 내면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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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콩 세 알을 넣고 흙을 덮었다. 손자가 이상해서 물었다.
“할아버지 구멍 하나에 콩 한 알만 심으면 되지 왜 세 알씩 넣으세요?”
할아버지는 구슬땀을 씻으며 허허 웃으신다.
“ 그래야, 하늘에 나는 새가 한 알 먹고 땅에서 사는 벌레가 한 알 먹고 나머지 한 알이 자라면 사람이 먹는 거란다.”
맞다. 그렇게 굶주리고 배가 고픈데도 감 하나를 따지 않고 남겨두는 까치밥, 밭에서 일하던 농부들이 곁두리(농부들이 끼니 외에 먹는 참)를 먹기 전에 음식을 던지는 고수레의 풍습, 콩 세 알을 뿌리는 이 마음을 옛 조상들은 삼재사상 三才思想이라고 부른다.
천天, 지地, 인人. 하늘, 땅, 사람의 힘이 한데 어울려 사는 세상.
조선시대의 실학자인 이규경 李圭景은 이런 말을 남겼다. “천지인 天地人을 알지 못하면 농사를 짓지 못한다.” 하늘의 힘은 농사철의 계절 변화를 일으키고 햇빛과 바람 그리고 단비를 내려 농산물을 자라게 한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 땅이 있어야 한다. 흙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자갈밭 모래밭에서는 아무리 볕과 비가 고루 내려도 곡물은 자라지 못한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의 힘만 있으면 될까? 아니다. 사람의 손이 가지 않으면 농산물은 생길 수 없다. 한자로 쌀미 米자를 보라 열 십十자에 팔八자가 두 개, 여든여덟 번八十八 사람의 손이가야 우리는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거다.
곡식 한 알에는 天 地 人 삼재의 힘, 우주 전체의 그 힘이 들어 있다. 그래서 옛날 우리 조상님들은 농업을 천하지대본이라고 말했다. 공산품은 자연을 파괴해서 얻는 것이지만 농산물은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어 만들어 낸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는 말은 단순히 먹는 것을 유물적인 것으로 본 것이 아니다. 마치 노동을 노예의 것으로만 보지 않는 것과 같다. 농업은 천지인의 콩 세 알의 조화였던 것이다. 농업은 ‘생명자본’의 교과서였다.
04 먹는 것에서 먹히는 것으로
■ 사신사호 捨身飼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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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애로 시선을 돌리면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경쟁, 적자생존이나 막시스트,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착취, 갈등이라는 말이 달라진다. 석가모니의 전세 前世에서의 환몽의 체험담 중 굶주린 어미 호랑이와 그 새끼들을 보고 이를 불쌍히 여겨 자신의 몸을 먹이로 내어주었다는 사신사호 捨身飼虎가 그렇다.
세 왕자가 길을 가는데 큰 형이 숲의 호랑이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러자 둘째 왕자가 저건 병든 호랑이니 걱정할 게 없다고 말한다. 정말로 굶주린 호랑이는 기력이 다해 있었고 나오지도 않는 젖을 새끼들이 빨고 있었다. 이를 본 셋째 왕자가 형님들은 먼저 가라고 말한다. 저 호랑이가 계속 굶주리게 되면 새끼들도 살아남지 못한다. 그러니 측은하여 내 몸이 저 호랑이의 밥이 되리라. 이것이 석가모니 전생의 설화다.
극단적인 예라고 할 지 모른다. 혹은 불교에서만 통하는 자비요 특수한 보살행이라고 할 지 모른다. 출가자라면 몰라도 호랑이처럼 자신에게도 자식이 딸린 사람이 그런 사신공양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석가모니가 입적한지 2500년 동안 그런 자비심으로 남을 위해 그것도 호랑이 같은 맹수에게 스스로 자신의 목숨을 던진 사람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런 비현실이 현실원리로 통할 수 있을 것인가.
비슷한 이야기는 중국에도 있다 제나라 제후 환후공이 모기장 밖에서 가냘피 우는 모기의 소리를 듣고 모기들이 먹을 것이 없어 죽을까봐 자기 몸을 내놓고 모기에게 뜯긴다는 얘기다.
사신사호의 이야기나 환공이 자기 몸을 모기에게 뜯기는 그러한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시대착오적인 이야기이고 아이들의 만화보다도 현실성이 없는 이야기 같다. 사람들은 이이야기만 들어도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생명의 시스템이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산품은 생산 生産한다고 하지만 생명은 생식 生殖이라고 한다. 모든 것의 생산의 원초적인 것은 생식이었다. 아름다움으로 벌과 나비를 유인해 꿀을 제공하는 것은 생식을 위한 꽃의 전략이다. 이렇게 스스로 먹힘으로써 자기의 생명을 유지하고 번식시킨다. 반대로 벌이나 나비는 일종의 고용된 머슴들이다. 생명에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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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식물들이 열매를 맺으면 처음에는 아무도 먹지 못하게 떫은 맛을 내 그 열매를 지킨다. 그러나 가을이 되고 열매들이 탐스럽게 자라면 열매들이 이제는 먹히기 위해서 아름다운 색채와 당분을 갖는다. 이렇게 해서 새들이 와서 쪼아 먹고 사람들이 따서 먹는다. 그것을 먹은 동물들은 멀리 멀리로 씨앗을 퍼뜨려 준다. 이처럼 나무들은 동물들에게 먹힘으로써 자기 종족을 널리 퍼뜨린다.
먹히지 않으면 죽는다. 겉으로 보기에는 잡아먹는 쪽이 훨씬 좋아 보이지만 풀을 뜯어 먹고 평화롭게 사는 것보다, 날카로운 이빨을 가지고 날쌘 동작으로 남을 공격하는 것이 훨씬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고 사는 것도 힘들다. 먹히는 쪽이 먹는 쪽보다 훨씬 살기 편하고 생존율도 높다. 강한 것은 잡아먹는 늑대나 사자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먹히는 쪽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먹히는 쪽의 종족의 개체수를 보면 항상 위에 있고, 먹히는 개체에게는 불행이지만 그렇게 되어야만 전체의 종족을 유지한다.
사자와 영양들의 경주가 아니라도 우리나라 말에 보면 ‘먹힌다’는 말이 참 많다. 우리는 “말이 안 먹히네”, “아이디어가 안 먹히네”라는 말을 쓴다. 소통은 대개 먹히는 것이다. 먹혀야 소통이 된다. 내 말이, 내 마음이 상방 마음에 먹혀야 통하는 것이다. 안 받아주면 나는 말을 하나마나이다. 사기꾼들이 사기치다가 실패하면 “이거 여간해서 안 먹히던데?” 라고 말한다. 상대방이 마음을 딱 닫고 소통하지 않으면 안 먹히는 것이다.
이 생명의 소통이 생명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한국말처럼 정확하게 우리의 느낌을 전달하는 것은 없다. 내 말이 먹혀야 생명의 교환이 이루어지고 소통이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육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먹는 쪽이 유리하지만 정신이나 영혼으로 보면 먹히는 쪽이 위이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로마인들에게 처형을 당한다. 율법이나 바리새인들에게 희생된 것이다. 양처럼 먹힌 것이다. 만약 처형이 안 먹혔더라면 부활도 없고 기독교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예수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는 것은 ‘먹힌 것’이다. 유대 율법주의자들, 형식주의자들, 배타적인 이러한 사람들, 같은 유대인들에게 먹힘으로써 기독교는 부활한다. 그러니까 이 종교의 세계로 들어가면 사신사호 捨身飼虎, 몸을 던져서 호랑이를 살리는 것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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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금붕어를 키우는 것이나 똑같다. 먹히는 것이다. 기독교는 로마에 먹힘으로써 로마를 먹었다.
먹는 것은 모든 생명으로 통한다. 바다, 하늘, 들판 그리고 태양. 먹힌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면 먹는 것이 곧 자본임을 안다. 돌과 흙은 못 먹는다. 최초의 우리가 먹은 어머니의 젖으로부터, 우유로부터 시작해 우리는 살아있는 생명을 먹었다. 일생동안 얼마나 많은 생명을 먹어야 하는가? 만 마리의 물고기, 천 마리의 소, 수억의 쌀과 푸성귀, 나의 생명의 무게는 그동안 내가 먹어온 모든 것의 생명을 합친 생명이다.
2014년 1월 22일
*다음에 5~8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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