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2. 17. 13:01ㆍ독서후기
또 다른 도전
- 이건희 개혁 20년 -
■ 조일훈 지음
- 경남 사천 출생, 대구 대건고, 서울대 정치학과
- 한국 경제신문 사회부, 경제부, 산업부 기자
- IT모바일 부장 거쳐 경제부장
- 저서로 ‘대우, 자살인가 타살인가’ ‘CEO열전, 나의 꿈 나의 청춘’ ‘삼성공화국은 없다’ ‘넷 브레이킹’등
■ 서문
2006년 11월 8일, 늦가을 햇살이 따사롭던 서울 태릉 선수촌, 카타르 도하 아시안 게임을 앞두고 이건희 삼성 회장이 선수단을 격려하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정현숙 선수단장과 이에리사 총 감독이 이 회장 일행을 맞이해 20여 분 동안 대회 준비상황을 설명했다. 몇 가지 차트가 동원되고 실무자들의 부연 설명이 잇따랐다. 이 회장은 그저 듣고만 있었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질 만하면 옆에 앉은 부인 홍라희 여사가 부지런히 덕담을 건네며 관심을 표명했다.
이 회장의 표정은 본관 건물을 나서자 밝아지기 시작했다. 선수촌을 돌며 국가대표 선수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였다. 말문도 터졌다. “불편한 점은 없는가?”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등의 이야기였다. 역도대표 장미란 선수를 만나서는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오랫동안 손을 잡고 격려했다. 짧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이렇게 대조적인 한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뜻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앞서 왜 그렇게 침묵을 지켰는지.
직설과 은유, 눌변과 열변, 은둔과 활보, 온유와 격정….
한 사람의 인생을 몇 마디의 단어로 축약하기는 어렵지만, 이 모순적 단어의 조합을 다 끌어안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건희 삼성 회장이다. 회사를 월급쟁이 천국으로 만들겠다며 7‧4제를 시행하고, 임직원들에게 세계 1등을 엄숙하게 외치면서도 가족들에게는 잘해 주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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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건희 회장에 대해 갖고 있는 기억은 늘 파편화 되어 있다. 본인에게는 그저 크고 작은 일상의 연속이겠지만, 그의 생각과 발언은 어느 날 불쑥 우리의 생활을 깨고 비집으면서 들어온다. 공항을 드나들 때, 가끔 회사에 나가거나 행사장에 나타날 때가 그렇다. 그렇다고 대중이 그에게 열광하는 것도 아니다.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은 자연인이 아닌 기업인 이건희에 대해 갖고 있는 우리 모두의 기억들을 정리하고 종합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차츰 잊혀져 가고 있는 기업가정신, 오늘날 대한민국이 일궈낸 그 모든 것들을 설명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시대정신을 다시 일깨워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사람은 말과 행동으로 산다. 이건희 회장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냈고 많은 것들을 실행에 옮겼다. 끊임없이 꿈꾸고 도전하고 결국 이루어 냈다. 도중에 힘이 부친다고 꿈의 크기를 줄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기회와 위기가 교차하는 비즈니스의 정글 속에서 새로운 꿈꾸기를 멈추지 않았다. 비상과 추락, 번영과 쇠퇴가 한순간에 결정되는 현대사회의 단절성과 광폭성을 결사적으로 헤쳐 왔다.
이 모든 장면을 정태적 결과가 아닌 과정의 역동성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면, 그리하여 김연아와 싸이의 글로벌 성공을 능가하는 감성적 소구력(광고가 시청자나 수요자의 사고에 미치는 힘)과 대중적 호응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이 책은 의미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쏘아올린 신경영은 오래 전에 ‘흘러간 옛 노래’일 수도 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는 슬로건도 이제는 너무 흔해져서 구호로서의 생명력이 약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을 넘어 지구촌 곳곳에 뿌려 놓은 도전과 혁신의 신경영 정신만은 그 전진을 멈추지 않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발화-불꽃-폭발-화염의 단계를 반복하며 무수한 성공과 실패의 스토리를 써 내려가고 있는 응축된 하나의 힘이요.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시장을 뒤덮는 창의성과 역동성으로 무한 팽창을 거듭하고 있는 에너지의 원천이기도 하다.
물론 이 회장은 아직 현역이다. 누군가는 잘못된 기억을 말하고 누군가는 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이 존재한다. 그가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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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걸고 싸웠다는 점. 숱한 긴장과 불면의 시간을 보냈다는 점. 기적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을 빛나는 성과들을 길어 올렸다는 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도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점.
그것은 바로 “기업은 결코 저절로 성공하지 않는다”는 진실이다. 간절히 원하지 않는데도 제 발로 찾아오는 성공은 없다. 기업과 기업인들의 숱한 성취를 어느 순간부터 물처럼, 공기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의 안일과 둔감을 경계하지 않으면 지금껏 일궈 놓은 많은 것들조차 물거품으로 사라질 수 있다.
- 2013년 5월 조일훈
■ 프롤로그 “다시 하라면 못하겠지”
미국의 실리콘밸리는 원래 사과나무와 살구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던 과수원의 고장이었다. 샌프란시스코 만을 따라 형성된 구릉지에 몇몇 자연부락들이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었다. 이곳에 모험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창조적 기업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시기는 1970년대 초였다. 반도체를 뜻하는 ‘실리콘’과 현재 이 지역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있는 산타클라라 계곡의 ‘밸리’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도 이즈음이었다.
애플의 창업자인 고 故 스티브 잡스도 이곳 과수원에서 막일을 하면서 꿈을 키웠던 청년이다. 그는 1976년 4월, 동업자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차고에서 애플1, 애플2를 잇따라 만들어 내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비슷한 시기에 마이크로프로세서를 만든 인텔의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무어의 법칙’에 따라 컴퓨터 칩의 속도를 무서운 기세로 늘려가고 있었다. 단돈 1200달러를 갖고 오라클을 창립한 래리 앨리슨도 한쪽 모서리에서 사무실을 차렸다.
◉ “여러분이 불쌍하다”
미국 젊은이들이 꿈을 이루기 위해 밤낮없이 연구실과 개발 현장의 불을 밝혔던 이 시절, 동양의 젊은 기업가 이건희 삼성 회장도 실리콘 밸리를 드나들고 있었다. 반도제 기술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이 회장은 1974년 말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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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를 털어 파산 상태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터였다.
삼성 중역들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한국반도체 인수를 강행한 이 회장에 게는 ‘화살’, 다시 말해 기술 확보가 그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였다. 그는 수십여 차례의 실리콘밸리 방문을 비롯해 미국 전역의 대학 강의실을 뒤져가며 전문 인력들을 찾았다. 그렇게 확보한 인재들을 월 500만 원의 급여(당시 삼성전자 사장 월급은 100만 원)에 아파트까지 제공하는 파격적 조건으로 영입했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삼성의 공식 후계자도 아닌 포지션이었지만 창업주인 이병철 선대회장도 선뜻 아들을 제지하지 못했다.
이건희 삼성회장.
그가 처음 사령탑을 맡았던 1987년의 삼성전자는 글로벌 경영무대에서는 맨주먹밖에 없는 상태와 같았다. 자본과 기술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고 브랜드는 전혀 존재감을 갖지 못했다. 이 회장은 그런 회사를 최고의 전자 회사로 키웠다. 삼성전자는 도시바 NEC, 히타치, 소니, 파나소닉, 필립스, 샤프, 에릭슨, 모토로라, 애플 등 수많은 강자들이 명멸해 갔던 정글에서 전자부품과 세트 사업을 동시에 석권하는 이정표를 달성했다.
삼성의 대전환을 이끈 카이로스 Kairos (기회, 적절한 때)는 1993년 6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선언이었다. 과거와 완전히 다른 생각과 판단, 실행능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혁명적 발상이자 타이밍의 전략적 설계였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슬로건 속에는 변화와 혁신에 대한 강력한 요구가 꿈틀거리고 있다.
바로 그 절박감이 1987년 회장 취임 이후 은둔과 경청으로 일관해 오던 이 회장을 광장으로 밀어냈다. 그는 하루아침에 갑자기 변한 사람처럼 여섯 달 동안 임직원들을 대상으로 하루 최장 16시간 열변을 토했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조직에 대한 울분, 선진기업들과의 격차에 따른 한탄, 새로운 지평을 향한 열망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그는 1993년 7월 17일, 일본 오사카 삼성 주재원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개혁(신경영)의 배경이 무엇이냐?”는 직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여러분이 불쌍해서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아서다. 나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다. 나는 내 재산의 ‘이자의 이자’만 갖고도 3~5대까지 먹고 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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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미국 LA 전자 사장단 회의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내 재산을 늘리기 위해 이렇게 떠드는 것이 아니다. 재산이 10배 더 늘어봐야 내게는 별 의미가 없다. 여러분이 잘되게, 여러분의 자손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다... 한 나라의 경제가 기울면 그 나라의 통화 가치뿐만 아니라 사람값도 떨어지게 마련이다. 우리나라는 과학 기술에 대한 몽매 때문에 역사의 낙오자로 수모를 받아왔다. 삼성이 주체적 기업의식, 주인의식, 민족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오사카 회의에서도 비슷한 내용의 주문은 계속 이어졌다.
“모든 것이 양에서 질로 가고 있다. 경영이 그렇다. 장래에 대한 물질적 ‧ 정신적 보상, 가족과 자식의 미래보장, 삶의 질을 올리기 위해서는 바꿔야 한다. 삼성의 질 만이 아니다. 여러분 개개인의 인격, 상식, 자식의 질도 생각하자. 생활의 질, 지식 교육의 질도 생각하자. 앞으로는 자율적이고 유연한 사고를 가진 사람이 출세할 것이다. 그렇지만 질서와 도덕을 지키라. 선배를 섬기고 후배를 키워라.....”
◉ 20년의 기다림
이건희 회장은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 아래서 20여 년간 경영수업을 했다. 그가 경영 일선에 모습을 드러낸 시기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1966년 동양방송에 입사하면서였다. 그 후 중앙일보, 동아방송의 이사와 삼성물산 부회장을 거쳐 1979년 2월부터 삼성 부회장직을 맡았다. 호암은 이때부터 경영 일선에 항상 이건희 회장을 동반해 현장 감각을 익히도록 배려했다. 또한 아들에게 경청 傾聽이라는 휘호를 직접 써주고 목계 木鷄(44쪽 참고)를 물려주어, 경영자는 남의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끝없이 자기 자신을 일깨우고 경계해야한다는 교훈을 전수했다. 기업 유지 遺志의 엄중함을 실감하는 동시에 2인자의 어려움을 절감하던 시기였다. 이건희 회장은 취임 이후 다시 5년의 실전기를 보냈다. 오랜 기간을 참으며 수없이 가다듬었던 개혁구상들이 일거에 분출된 시점이 바로 1993년이었다.
이 회장은 수백 명의 중역들을 미국, 유럽, 일본으로 몇 달씩 데리고 다니면서 삼성의 현주소를 확인시켰다. 내로라하는 선진기업 제품들과 나란히 놓인 삼성 제품들은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현지 최고급 호텔에서 잠을 자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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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중역들은 입을 닫았다. 당시 이 회장은 사장단과 중역들에게 “집에 있는 TV가 어느 회사 제품인가?”라고 묻고는 삼성 제품이라는 대답이 나오면 칭찬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심하게 나무랐다. “내 것을 안 쓰면 죄악인 줄 아는 옹졸한 주인의식일 뿐이다. 다른 회사 제품도 사용하고 비교 해봐야 우리 것이 더 발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보면 아무렇지도 않은 말 같지만 당시 기업 총수가 한 이야기치고는 꽤나 충격적이었다.
이 회장은 1993년 내내 더 이상 시간이 없다며 임직원들을 독려하고 질타하고 때로는 호소했다. 새로운 세기를 앞두고 생존을 위해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7년일 뿐이라고 경고했다. 절박함이 삼성 전체를 휘감던 시기였다.
그렇게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삼성은 상전벽해를 이뤘다. 삼성의 브랜드 파워는 지구촌의 축제 올림픽과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아프리카 오지의 봉사단 깃발에 이르기까지 세계 전역을 휘감고 있다.
2012년 브랜드컨설팅그룹 인터브랜드는 삼선전자의 브랜드 가치를 세계 9위(234억 달러)로 매겼다. 일본의 도요타, 독일의 메르세데스 벤츠와 BMW, 프랑스의 루이비통도 삼성 뒤로 밀렸다. 1993년에는 인터브랜드 평가 명단에도 끼지 못한 삼성이었다.
삼성 반도체의 세계 1위 품목은 D램, 낸드플래시, 모바일AP, DDI 등 메모리반도체와 시스템LSI를 아울러 10여 대에 이른다. 꿈같은 일이 현실로 이뤄진 분야는 TV와 휴대폰이다. TV는 2006년, 휴대폰은 2012년에 각각 세계 1위에 올랐다.
수많은 위기와 부침 속에서 한국 전자산업을 세계의 중심으로 끌어 올렸다. 그런데도 이 회장은 도무지 멈출 줄 모른다. 승리를 자축하는 파티도 없다. 오히려 그 대신 “5년, 10년 후에는 지금 삼성을 떠받치고 있는 모든 사업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가득한 경고를 내놓고 있다.
2012년 11월 30일, 취임 25주년 행사가 열렸던 호암아트홀, 총 550여 명의 임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 사진전과 함께 그동안의 경영 성과를 정리한 영상물이 상영되었다. 선진기업들과의 그 한숨 나던 격차를 따라잡기 위해 미국 실리콘밸리와 일본 엔지니어들을 찾아 다녔던 ‘젊은 이건희’의 힘겨운 여정이 화면 속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행사장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던 이 회장은 주변에 들릴 듯 말듯 나직이 말했다.
“지금 다시 하라면 어떨까… 아마 못하겠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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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위기의 승부사 이건희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그래야 비서실이 변하고 계열사 사장과 임원이 바뀐다. 과장급 이상 3,000명이 바뀌어야 그룹이 바뀔 수 있다. 그 시기는 나도 모른다. 1년, 2년, 3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 5년간 이런 식으로 개혁드라이브를 걸겠다. 그래도 바뀌지 않으면 그만 두겠다. 10년을 해도 안 된다면 영원히 안 되는 것이다.
1. 출근경영에 담긴 비밀
2011년 4월 21일 오전 6시, 이 건희 삼성 회장이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에 들어섰다. 이례적인 출근, ‘출근 경영’의 신호탄이었다.
삼성타운에 서서히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협력업체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은 계열사 임직원들이 줄줄이 회사를 떠났고, 최고경영자도 옷을 벗었다. 삼성의 컨트롤타워인 미래전략실의 인사팀장과 경영진단팀장도 전격 교체되었다. 계열사라는 한 조직이 부정에 물든 것은 그룹의 책임이 크다는 엄중한 메시지였다. 긴장과 전율이 삼성 전체를 휘감았다.
한 두 번 나오고 말 줄 알았던 이 회장의 출근은 주 2회씩 정례화되었다. 평소 “내가 회사에 나오면 사장들이 눈치를 보느라 엉뚱한 일에 정신을 팔고 임직원들도 경직된다”는 이유로 좀처럼 회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였다.
이건희 회장은 1987년 회장 취임 이후 권한을 하부에 대폭 위임했다. 본인은 큰 방향을 잡고 비서실이 세부 전략을 마련하고 각 계열사가 이를 실천하는 이른바 3각 편대 구도였다.
이건희 회장은 당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선대회장은 경영권의 80%를 쥐고 비서실이 10%, 각 계열사 사장이 10%를 나눠 행사하도록 했다. 그러나 나는 앞으로는 회장이 20%, 비서실이 40%, 각 계열사 사장이 40%를 행사하는 식으로 바꾸겠다”고 밝히면서 자율경영을 독려해 왔다. 1991년 200명이 넘던 비서실을 130명으로 축소한 것도 그런 취지였다.
■ 다시 위기에 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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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그의 경영 방정식은 삼성 최대 위기였던 IMF 시절에도 수정되지 않았다. 자율경영은 이 회장의 ‘트레이드마크’였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은 더욱 의아해 했다. 도대체 왜? 지금 이 시점에?
2010년 삼성전자 경영실적은 반도체 경기 악화에도 불구하고 매출 154조 6,000억 원에 영업이익 17조 3,000억 원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4년 전인 2007년에 비해 매출액은 57%, 영업 이익은 93%나 늘어났다. 순수 전자회사 단위로 매출액은 세계 최고였다. HP, IBM, 소니, 델도 적수가 되지 못했다. 바야흐로 전 세계가 삼성을 주목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궤멸 위기에 놓인 일본 전자업계는 삼성을 쳐다보며 자신들의 느린 의사결정과 혁신능력 쇠퇴를 자탄하고 있었다.
이 회장의 출근 배경은 곧 드러났다. “삼성이 다시 한 번 변해야 한다”는 위기론 의 재점화였다. 당시 미래전략실 커뮤니케이션팀장을 맡고 있던 장충기 사장은 “회장님이 갑자기 정례 출근을 하시겠다고 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아, 회장님은 지금을 또 다른 위기감으로 진단하시고 있구나’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외견상 모든 지표들이 괜찮았지만 이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다시 모바일로, 숨 돌릴 틈 없이 패러다임을 옮겨갈 세계 전자업계에서 삼성은 매번 목숨을 건 전쟁을 벌여왔다. 성과도 있었지만 위기요인 또한 엄존했다. 포연은 아직 걷히지 않았고 모든 것이 불확실한 전장이었다.
■ 영원한 동지는 없다
문제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애플과 구글로 대변되는 새로운 경쟁사의 출현이었다. 창발적 소프트웨어와 네트워크를 앞세워 모바일 생태계를 거머쥔 애플과 구글은 하드웨어의 최강자 삼성을 완전히 새로운 경쟁 환경으로 몰아 넣고 있었다. 이미 애플은 이 회장이 출근 경영을 단행하기 엿새 전인 4월 15일, 삼성전자가 자사 디자인을 베꼈다는 이유로 첫 특허 소송을 제기한 상태였다. 반도체 등의 부품 분야에서 삼성의 최대 고객사이기도 한 애플의 공세 전환은 향후 양사의 경쟁이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대혼전으로 치닫게 될 것이라는 예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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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랬다. 애플은 이후로 전 세계 14개국에서 특허소송을 내며 전방위로 삼성을 압박했다.
삼성과 협력해 갤럭시 S 출시를 지원한 구글도 속을 알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2011년 8월, 구글이 한 때 삼성의 휴대폰 경쟁사였던 모토로라를 인수하면서 더욱 실감나게 다가왔다. 삼성과 구글의 협력관계는 지금도 지속되고 있지만 애플과의 관계가 그랬듯이 언제 경쟁관계로 전환할지는 아무도 속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건희 회장은 호황과 불황이 교차하는 시장에서 경제흐름을 나름대로 예측하며 의사 판단을 하는 기업들의 행위가 얼마나 위험천만한 변화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다. 상호작용을 하는 수십, 수백만 가지 경제행위들이 몰고 오는 미지의 세계에 전율을 느끼면서 그 흐름이 일정 수준의 변곡점에 도달했을 때 주저 없이 선택과 결정, 실행을 한다. 출근 경영은 그동안 이 회장이 당도했던 수많은 선택지 중의 하나였다.
사실 이건희 회장이 출근 경영을 통해 임직원들에게 전파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2011년 신년사에도 잘 드러나 있다.
“지금부터 10년은 미래 100년을 향해 나아가는 새로운 도전의 시기가 될 것입니다. 21세기를 주도하며 흔들림 없이 성장하는 기업, 안심하고 일에 전념하는 기업을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사업구조가 선순환 되어야 하며 지금 삼성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사업과 제품은 10년 안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로운 사업과 제품이 들어서야 합니다.”
이 회장이 회사에 나가야겠다고 결심한 또 하나의 이유는 내부의 자만이었다. 안주와 자만은 파멸의 신호라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한 때의 성과에 취해 변화와 혁신을 게을리 하다가는 한 순간에 뒤처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상대적으로 느슨해진 조직 기강과 안일함에 젖어 있는 임직원들의 행태를 바로 잡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동시에 자율경영에도 새로운 규율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 근본적 배경에는 ‘삼성=일류’라는 자만의식을 타파하겠다는 의지와 질타가 담겨 있었다. 최지성 미래전략실장은 이렇게 말했다.
“변화와 혁신은 지난 신경영 20년간 회장님의 트레이드마크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회장님은 좀처럼 만족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의 고비를 넘고 나면 바로 다음을 생각하지요. 그래서 누구보다도 걱정이 많고 고민이 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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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어떻게 보면 ‘미래는 불확실하다. 그래서 지금이 위기다’는 식의 사고가 체질화되어 있는 분입니다.
출근 경영은 신경영과 20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같은 길을 추구하는 혁신으로 손을 맞잡았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길항(拮抗 비슷한 힘으로 서로 버티어 대항 함. 서로 반대되는 두 가지 요인이 동시에 작용하여 그 효과를 서로 상쇄시키는 일)이 삼성의 또 다른 전진, 단절 없는 혁신을 밀어 올리는 선순환의 고리를 만들어 낼 것이다.
■ 부정부패는 조직의 암
삼성은 깨끗한 조직문화를 지향한다. 임직원들의 부정과 부패는 그 어떤 것이라도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 창업주 이병철 선대회장 시절부터 내려오는 기업문화이다.
이병철 선대회장은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비서실장에게 쪽지 두 장을 건네줬다고 한다. 본인이 개인적으로 쓸 돈과 조직을 위해 써야 할 돈의 액수였다. 개인 용도의 돈은 개인 계좌에서, 조직을 위해 써야 할 돈은 회사 계좌에서 찾도록 했다고 한다. 중간에 용도나 액수가 바뀌면 쪽지를 새로 썼다.
오랫동안 삼성 자문교수로 일했던 이창우 전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윗물이 맑지 않으면 아랫물이 더러워진다고 여겼던 창업주는 오너였음에도 본인과 회사의 영역을 이처럼 엄격하게 구분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조직 관리의 엄정함은 이건희 회장 시대에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이 회장은 ‘자율경영’과 ‘인간존중’의 경영철학을 강조하면서 감사의 기능을 과거 네거티브 방식에서 포지티브 방식으로 바꿨다. 즉 부정이나 지리를 적발하던 종전 감사의 기능과 역할을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 주는 ‘경영지도’와 모범사례를 찾아 파격적 포상을 해주는 ‘발탁감사’로 확대한 것이다. 그 수혜자들 가운데는 스타급 경영자들도 적지 않다.
오동진 전 삼성 감사팀장은 “삼성 감사가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기능은 인재를 발굴하고 육성하는 일이었습니다. 개별 단위 조직에서 잘 드러나지 않지만, 묵묵히 일하며 전체 조직의 중추적 역할을 하는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발탁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입체적 감사 시스템에도 임직원들의 비리나 불합리한 관행이 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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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근절되지는 않았다. 이건희 회장이 출근경영을 하게 된 배경 중에는 조직이 커지고 때로는 자율이 방만으로 흐르면서 일부 부정부패 사례들이 포착되고 있다는 보고도 작용했다. 특히 이 회장은 2011년 일부 계열사 경영진들의 비리 내용을 파악한 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그해 6월 삼성 경영진단팀 임원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큰 구상을 위해 7~8년 회사에 나오지 않는 동안 정말 많이 썩었다. 가만히 놔두면 불이 그룹 전체로 번질 것이다. 부정부패에는 향응도 있고 뇌물도 있지만 제일 나쁜 것이 부하직원을 닦달해서 부정한 일을 시키는 것이다. 자기 혼자 부정을 저지르는 것도 문제인데 부하까지 끌고 들어가면 부하는 나중에 저절로 부정에 입학하게 된다.”
2. 필생의 화두, 위기의식
돌이켜 보면 공식, 비공식 석상을 가릴 것 없이 이건희 회장이 일관되게 강조해온 것은 바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10년’은 중간 키워드였다. 생각의 크기, 상상의 수준을 알게 하는 기간이다. 경영복귀를 선언했던 2010년 3월 24일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삼성도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해야 한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
이 유서 깊은 ‘10년 위기론’의 장면을 2002년 6월, 이 회장이 용인 삼성인력개발원에 소집한 그룹 사장단 회의로 돌려보자.
■ 샌드위치 위기론
이날 회의의 백미는 “5년 후 또는 10년 후에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난다”는 이건희 회장의 발언이었다. 그는 “5~10년 뒤 무엇으로 세계 1위를 할 것인지에 대한 중장기 전략과 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위해 첨단기술과 최고 인재를 조기에 확보할 것”을 주문했다. 특히 온갖 기술이 융합되는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를 맞아 사업부 간의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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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은 삼성전자 시가총액이 일본의 소니를 추월한 기념비적인 해였지만, 그런 이정표 따위는 전혀 그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오히려 국내 언론에 삼성이 소니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보도가 연이어 나오자 “누가 이런 얘기를 언론에 떠들고 다니는가? 우리가 소니를 따라 잡으려면 한참 멀었다”고 역정을 냈다.
경영자들에게 ‘미래’는 철학적이고 사변적 의미의 시간이 아니라 구체적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스마트모바일 시대의 개척자인 스티브잡스는 생전에 “미래는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참으로 도전적이고 당돌한 이 말을 정말 미래를 창조하겠다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시간과 공간이 얽어 놓은 변화의 복잡성, 미래의 불확실성을 돌파하겠다는 의지로 이해해야 한다.
이건희 회장의 위기의식은 당대 우리 경제의 현실을 정확하게 짚어 낼 때가 많았다. 그래서 더 호소력이 있었고 짧은 한 마디에도 많은 이들이 공감을 표했다. 대표적인 것이 ‘샌드위치론’이었다.
이 회장은 2007년 1월 25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중국은 쫓아오고 일본은 앞서가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는 샌드위치 신세다. 이를 극복하지 않으면 고생을 해야 하는 위치”라고 경고했다. 다음달 9일에는 서울 효창동 백범 기념관에서 열린 ‘투명사회협약 대국민 보고대회’ 행사장에서 기자들에게 “삼성뿐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가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5~6년 뒤에는 큰 혼란을 맞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글로벌 시장의 급격한 판도 변화가 한국 산업의 경쟁력 전반을 위협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샌드위치론’으로 표출된 것이기도 하다. 당시 상황은
- 우리나라 설비 투자율은 10년 전 수준이었음에도 규제와 반기업 정서가 투자를 위축시키고 있었으며
- 중국과의 기술격차도 축소 : MP3 플레리어 2005년 한국 추월, 조선업은 2007년 세계 선박 수주량의 절반으로 한국 추월, 휴대폰 및 LCD 철강 등도 한국을 맹추격
■ 더 깊게 보고 연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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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은 늘 기회와 위기 요인을 예민하게 포착하며 앞날을 설계하고 준비해 왔다. 그것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는 고독한 싸움이기도 했다. 노키아를 두려워하면서도 휴대폰 사업에 승부를 걸었다. 소니와 도시바의 힘을 알면서도 디지털TV와 낸드플래시 메모리 사업을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샌드위치 위기론’에서도 볼 수 있듯, 그는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중압감을 견뎌왔다. 어떻게 보면 이 회장은 생래적으로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새로운 사업을 시작해 대규모 인력을 뽑을 때마다 그가 입버릇처럼 되뇌는 말은 듣기에도 힘겨운 것이었다. “이 사람들은 나 그리고 삼성을 믿고 온 것이 아닌가. 우리가 이 사람들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였다.
2013년 4월 6일 김포공항, 87일간의 해외 일정을 마치고 기자들을 만난 이건희 회장의 소감에도 신경영 20년을 관통하고 있는 위기감과 도전의식이 압축되어 있다.
“이제 20년이 되었다고 안심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인간은 항상 위기의식을 갖고 더 열심히 뛰고 더 사물을 깊게 보고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이건희와 토플러
앨빈 토를러는 1998년 4월 정부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그의 저서 ‘제3의 물결’은 당시 국내외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미래쇼크’ ‘권력이동’등의 저서를 통해 관료조직 붕괴를 예언하고, 권력이 물리적 힘에서 경제력으로 그리고 지식과 정보력으로 이동한다고 역설했다. 그 때 이 회장과의 만남도 이루어졌다.
이 회장은 토플러를 정중히 접대하면서 ‘미래’에 대한 생각들을 주고 받았다. 토플러는 한국이 IMF 체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미래는 밝다고 하면서 희망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두 사람은 산업사회의 미래는 정보의 중요성이 부각될 것이며 변화가 초고속으로 이뤄질 것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 했다. 다만 토플러는 변화의 원동력을 ‘정보’라고 보는데 반해 이건희 회장은 ‘기술의 진보’라고 생각했다. 토플러는 산업사회의 동질화 대중화 현상이 미래사회에서는 이질화, 개성화로 흘러갈 것이라고 내다본 반면 이 회장은 ‘소프트화’에 더 주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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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정부 역할의 감소, 국제화 추세 등에 있어서 두 사람의 견해는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다. 토플러는 특히 주요 경제주체의 변화속도를 분석했는데 기업이 ‘시속 100마일’로 가장 앞서가면서 다른 사회 부문의 변혁을 주도하고 그 다음으로는 시민단체 90마일, 가족 60마일, 노조 30마일, 정부조직 25마일, 학교 10마일, 국제기구 5마일로 변화 속도의 순서를 매겼다. 이건희 회장이 기업은 이류, 행정은 삼류, 정치는 사류라고 진단하면서 정부와 기업 시민이 같은 방향 같은 속도로 변화해야 선진국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견해와 맥을 같이하는 대목이다.
한편 토플러는 “젓가락질을 하는 민족이 21세기 정보화 시대를 지배한다”고 말해 한국이 정보산업 강국이 될 것을 예견하기도 했다. 이 역시 이건희 회장이 반도체 사업을 하는데 우리 젓가락문화의 섬세함이 적합하다고 진단했던 것과 비슷한 대목이다.
3, 개혁의 상징, 프랑크푸르트 선언
■ 켐핀스키 호텔에서의 첫날 밤
1993년 6월 초, 도쿄에서 프랑크푸르트로 향하는 루프트한자에는 삼성 최고 수뇌부 7~8명이 나란히 앉았다. 이건희 회장이 맨 앞줄에 앉았고 안민수 수행비서, 이창렬 비서팀장 ⃨, 얼마 후 이 회장은 수행 이원들을 자신의 자리로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모여든 측근들에게 삼성전자의 문제점을 낱낱이 지적했다.
“일본 고문이 올린 보고서에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삼성 사람들은 공장에서 콘센트가 발에 걸리적거려도 제자리에 정리할 생각을 하지 않고 무심히 지나친다. 이런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 이런 문제점에 대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서 이 회장이 언급한 보고서는 당시 삼성전자 오디오 부문 고분이었던 기보 마사오가 작성한 보고서이다.
후쿠다 타미오, 기보 마사오 고문은 삼성에서 근무하면서 느낀 바를 솔직하게 적어서 이 회장에게 전달했다. 후쿠다 보고서는 주로 디자인에 관련된 내용이며 기보 보고서는 삼성 사업장의 정리정돈 및 청결상태 등 기본에 관한 사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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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다 보고서의 골자는 이렇다.
“경영진과 디자인 부서가 서로를 모른다. 정보가 공유되지 않고 타 부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보니, 업무의 비효율성이 눈에 띈다. 디자인에 관한 프로세스 개선과 사고방식의 혁신이 필요하다.”
이 회장은 “5 WHY에 입각해서 토론해 보세요”라고 의견을 제시했고 관계자들은 열띤 토론을 벌였다. 목적지인 켐핀스키 호텔에 도착하고 난 뒤에도 이 회장은 임원들을 자신의 방으로 다시 불렀다. 독일 역사의 정취가 물씬 배어 있는 프랑크푸르트의 특급 호텔이었지만 일행들은 도시의 전통과 정취를 온전히 느낄 틈이 없었다. 관광은커녕 정신없이 몰아치는 회장의 호출에 얼이 빠질 지경이었다.
임원들이 모인 시각이 오후 3시 30분쯤이었는데, 이 회장의 강연은 어느덧 다음날 새벽 2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식사는 룸서비스로 대신했다. 새벽까지 토론이 이어지자 잠자코 옆에 있던 부인 홍라희 관장이 나섰다. “사람들도 피곤하니 이제 답을 알려드리세요. 그래야 내일 또 일을 할 수 있죠.”
켐핀스키 호텔의 첫날은 앞으로 한 달간 이어지게 될 고된 여정의 예고편이었다. 문제의 비디오테이프 때문이었다. 일본에서 독일행 비행기를 타기 직전 하네다 공항을 떠나려는 이 회장에게 삼성사내 방송팀이 제작한 30분짜리 비디오테이프가 전달됐고, 그것이 켐핀스키 호텔에서 공개된 것이다.
■ 격노 그리고 세기말의 고민
그 테이프에는 세탁기 제조 과정에서 불량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었다. 세탁기 뚜껑이 규격에 맞지 않아 직원들이 칼로 깎아 내는 장면도 생생하게 나왔다. 입술을 지그시 깨문 이 회장은 서울로 전화를 걸어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지금부터 내 말을 녹음하세요. 내가 질 경영을 그렇게 강조했는데 이게 그 결과입니까? 수년간 그렇게도 강조했는데도 변한 게 고작 이겁니까? 나는 지금껏 속아 왔습니다. 사장들과 임원들 전부 프랑크푸르트로 집합시키세요. 이제부터 내가 직접 나설 겁니다.”
사장단은 이 회장의 ‘격노’가 담긴 녹음테이프를 들었다. 삼성 핵심 경영진 200여명은 허겁지겁 서울발 프랑크푸르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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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나 또는 앞으로도 없을 진귀한 풍경이었다.
6월 7일, 비장한 표정의 이건희 회장이 호텔 내에 마련된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날 그의 육성은 절규에 가까운 것이었다.
“세탁기만 이런 게 아닙니다. VCR 불량은 내가 몇 번이나 경험했습니다. 아끼는 테이프를 다 갉아 먹으니 울화통이 터집디다. TV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 퓨즈가 나가요. 당연히 고객들이 회사를 욕합니다. 불량이 나오면 100명중 50명은 다시는 사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회사 제품은 엉터리라고 떠들고 다닙니다. 이런 게 바로 암입니다.
내가 회장에 취임하고 5년 동안 ‘불량은 안 된다. 양이 아니라 질로 향해 가라’고 했는데 아직 양을 외치고 있습니다. 비서실장, 사장 전자팀장이 모두 양을 지향합니다. 어처구니없는 발상, 썩어빠진 정신입니다!”
격앙된 회장의 질타에 좌중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날 참석자들은 “회장님이 그렇게 화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고 전했다.
“뛸 사람은 뛰어라. 바삐 걸을 사람은 걸어라. 말리지 않는다. 걷기 싫으면 놀아라. 안 내쫓는다. 그러나 남의 발목은 잡지 말고 가만히 있어라. 왜 앞으로 가려는 사람을 옆으로 돌려 놓는가?”
이른바 질 경영을 위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그렇게 터져 나왔다. 이 선언이 훗날 삼성과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반향을 일으켰는지 뒤에 설명할 것이다.
이건희 회장은 “우리나라가 처한 환경이 러시아, 중국, 일본 등 열강에 둘러싸여 있던 100년 전과 아주 비슷하다. 우리가 경제전쟁에서 패하고 일류 진입에 실패하면 우리스스로 제2의 이완용이 될 수밖에 없다” 는 비장한 각성을 하기에 이르렀다. 세기말 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은 마침내 삼성 내부에 대한 성찰로 이어졌다.
■ LA에서 목격한 삼성의 현주소
그렇다면 당시 삼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1990년대 초 삼상전자는 국내에서조차 명실상부한 1등이 아니었다. 삼성 제품은 외국에서도 싸구려 취급을 받았다. 어느 누구도 삼성을 주목하지 않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건희 회장은 자신이 영입한 일본인 고문들이 제출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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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서를 읽으며 말할 수 없는 자괴감을 느꼈다. 결국 전면적 대수술이 불가피했다. 그는 한동안 허탈감에 빠졌다. 199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길고 긴 불면의 날들이 시작되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전체가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입맛도 잃었다. 하루에 밥 한 공기를 겨우 먹을 정도였다. 체중은 10Kg 이상 줄었다.
1992년 12월 1일 취임 5주년 기념식에서 이건희 회장은 다섯 가지의 경영화두를 던졌다. 기회선점, 경영 인프라 확장, 자율경영 체제, 질 위주의 경영, 초일류 구현이었다. 그때만 해도 사장단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1993년 새해가 밝자마자 수백 명의 중역들을 대동하는 해외 시장 순방 프로그램을 가동했다. 2월 LA, 3월 도쿄, 6월 프랑크푸르트와 런던, 7월 도쿄와 오사카, 후쿠오카로 이어지는 대장정이었다. 6개월에 걸쳐 1,800여 명을 대상으로 회의와 교육을 실시했다. 이 회장이 임원들과 나눈 대화는 350 시간에 달했다. 이를 풀어쓰면 A4 용지 8,500매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LA에서 목격한 삼성제품의 실상은 참혹했다. 삼성제품들은 매장 구석에 잔뜩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소니 등의 일본제품은 진열대 잘 보이는 곳에 정돈되어 있었다. 이건희 회장은 김광호 삼성전자 사장 등 7~8명의 사장단을 불러 모아 던진 첫 질문은 이랬다. “느낀 점이 무엇입니까?”
그는 연회장에 삼성전자 제품과 일본 선진기업 제품을 비교해 전시하고 참석한 임직원들을 질타했다.
“삼성이라는 이름을 반환해야 한다. 먼지 구덩이에 처박힌 것에다가 왜 삼성이라는 이름을 쓰는가? 전시대에 놓여 있는 제품 중에도 뚜껑이 깨져 잇거나 작동이 안 되는 것도 있다. 이는 주주, 종업원, 국민, 나라를 기만하는 행위이다.”라고 통탄했다. 이회장의 질타는 계속되었다.
“정말 위기입니다. 위기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대로 가면 안 된다고 했을 때부터라도 움직였으면 훨씬 여유를 가지고 할 수 있었는데, 이제 7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시간 내에 완전히 배수의 진을 치고 일해야 하는데, 40조가 넘는 이 큰 덩치를 갖고 왜 이렇게 위험한 모험을 하게 만듭니까? 종업원을 몇 만 명씩을 거느리면서 자동화 시설 등 엄청난 투자를 하고서도 400 ~ 500억 원밖에 이익을 내지 못하고 있으니 삼성전자는 망한 회사나 다름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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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에서도 특히 “7년 밖에 남지 않았다”고 언급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의 신경영 선언이 세기말적 대전환을 겨냥했다는 점에서다. 그는 삼성 제품이 이류라는 점, 그것도 그대로 있으면 삼류, 사류로 전락해 결국 망할지도 모른다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전 임직원이 공감하고 대변화에 나서기를 바랐다.
그것은 양 量이냐 질 質이냐의 선택이었고, 20세기의 패러다임이냐 21세기의 패러다임이냐의 선택이었으며, 국내 제일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세계시장으로 나아가 초일류로 도약할 것인가의 승부수였다.
■ 삼성이 바뀌지 않으면 내가 그만 두겠다
이 회장의 화두는 한마디로 “나부터 변해야 한다” 였다. 비싼 돈을 들여가며 외국에서 회의를 가진 것 자체가 국내라는 우물을 벗어나 넓은 세계 일류를 경험해 보라는 뜻이었다. 아울러 개인과 조직의 이기주의, 타율과 획일, 불량품을 만들면서도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하는 도덕 불감증에 걸린 현실을 질타하고, 인간미와 도덕성을 회복하자는 호소였다. 그리하여 경영의 모든 부문에서 하루라도 빨리 질 위주로 전환해야만 세기말 대변화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는 메시지였다.
이건희 회장의 스타일도 그야말로 파격이었다. 평소 남 앞에서 말하기보다 듣는 편이었던 그가 직접 나서서 열변을 토하자 임직원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대기업 총수가 임직원들을 대거 해외로 불러 모아서 직접 강의를 하고, 개혁을 호소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다.
이건희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강연의 하이라이트는 이렇다.
“결국 내가 변해야 한다. 바꾸려면 철저히 바꿔야 한다. 극단적으로 얘기해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야 한다. 그래야 비서실이 변하고 계열사 사장과 임원이 바뀐다. 과장급 이상 3,000명이 바뀌어야 그룹이 바뀔 수 있다. 그 시기는 나도 모른다. 1년, 2년, 3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 5년간 이런 식으로 개혁 드라이브를 걸겠다. 그래도 바뀌지 않으면 그만 두겠다. 10년 (회장 취임 후 5년, 앞으로 5년)을 해도 안 되면 영원히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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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율과 긴장의 7 ‧ 4제
■ 4시, 퇴근 종이 울리다
1993년 6월 말, 런던에서 일정을 마친 이건희 회장은 서울에 잠시 들렀다가 일본을 방문했다. 하네다 공항에 내린 그는 서울로 전화를 걸어 ‘7 ‧ 4제’를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7시 출근 4시 퇴근으로 임직원들의 근무 시간을 전면 재조정하라는 것이었다. 삶의 질을 중시하는 ‘스마트 워킹’을 강조하고 유연, 탄력 근무제를 시행하는 요즘 시각으로도 가히 혁명적 발상이었다.
7 ‧ 4제 실시는 18만 삼성인뿐 아니라 ‘출근 시간은 9시, 퇴근 시간은 6시’라는 고정관념에 빠져 있던 모든 기업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7월 7일 오전 7시, 삼성 사장단들이 태평로 사옥에 모였다. 그 자리에서 7 ‧ 4제를 지시한 이 회장의 육성 테이프가 공개 되었다.
“아침 7시 내지 7시 30분에 시작해서 오후 4~5시에 일과를 끝내 보세요. 이번 기회에! 그래서 귀가하기 전에 어느 곳을 들러서 운동을 하던지 친구를 만나든지, 어학 등 공부를 하든지 하고 6시 30분에 집에 들어가라는 겁니다. 가끔 가족들과 외식도 하는 등 완전히 습관화 시켜 보세요. 스케줄을 그렇게 만들어 주면 자연히 가정적인 사람이 되고, 친구 안 만나면 가족을 불러내서 저녁 먹게 되고, 그런 것이 일주일에 최소한 두 번을 될 겁니다. 과장에서 부장까지는 5시까지는 정리하고 모두 사무실을 나가세요. 이것은 명령입니다. ‘윗사람이 퇴근해야 하는데…’라는 발상, 이제는 더 이상 안 됩니다. 안 나가는 사람이 나쁜 사람입니다.”
7 ‧ 4제 시행은 삼성의 체질을 질 경영으로 전면 전환하기 위한 이건희 회장의 승부수였다. ‘변화’에 대한 절박감을 임직원들이 온몸으로 느끼게 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던 것이다. 오랜 습관으로 굳어진 시스템의 관성을 극복하려는 본격적 변화의 신호탄이었다.
7 ‧ 4제의 취지는 업무의 양은 줄이되 질은 높이자는 것이었다. 과거에는 초과근무로 일의 양을 늘렸지만 이제는 일의 질을 높여서 종래 10시간 걸려서 하던 일을 8시간에 마치자는 것이었다. 또한 업무의 질을 높여서 얻게 되는 여유 시간을 자기 계발에 활용하면 결국 개인의 득이요 나아가 국가의 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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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는 것이 근본 취지였다. 점차 임직원들이 이 회장의 이런 뜻을 이해하게 되면서 새로운 근무 시스탬은 자리를 잡아갔다.
“18만 명이 출퇴근 시간에 하루 한 시간씩 득을 보면 이것이 결국 국가 전체에도 득이 된다. 지금부터 30년 동안 하루 한 시간만 퇴근 시간 이후에 뭔가를 하면 그 방면에서 전문가가 될 것이다. 한 가지를 천 번 하면 박사가 된다. 정보가 상식이 되고, 상식이 모여 지식이 되며 결국 지혜로 통한다. 이런 식으로 전무까지 쭉 올라오면 이것이 진정 평생직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는 아직 없는 월급쟁이 천국을 만들어 보겠다는 새로운 도전이다.”
7 ‧ 4제는 점차 삼성인들을 각성시켜 나갔다.
당시 비서실 인사담당 임원이었던 김인 삼성라이온스 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오후 4시 퇴근이 정착되면서 임직원들의 생각과 행동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어요. 외국어를 공부하고 야간 대학원에 진학하는가 하면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는 등 삶의 질을 생각하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정착되기 시작했습니다. 회사 차원에서도 임직원 개개인의 변화 및 조직문화 혁신을 위한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 1993 삼성레포츠센터 : 수영장, 헬스장, 볼링장 실내 골프 연습장 등
- 1994 삼성생활문화센터 : 교육, 의료, 문화, 탁아 등의 시설을 무료 이용
삼성 신경영과 7 ‧ 4제는 외부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건희 신드롬’이라는 용어가 등장할 정도로 사회 일반의 관심이 높아졌다. 1994년 당시 집권당인 민자당 사무처 당직자 390명이 경기도 용인 삼성인력개발원에서 “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주제로 교육 받은 것을 비롯해 교육부, 내무부, 서울시경찰청 등의 정부기관들도 삼성인력개발원을 찾았다. 신경영 선언 이후 일 년 사이에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교육을 받은 외부 인원은 총 6,800명에 달했다. 삼성에서 시작된 공무원 경제교육은 1994년에 붐을 이루어 많은 대기업들도 그와 비슷한 과정을 실시했다. 삼성이 시행한 구체적 개혁 조치들도 외부로 널리 확산되었다. 특히 조기 출퇴근제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기업으로까지 널리 확산되어 나갔다.
5. 창조적 파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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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관을 긍정으로 바꾸는 마법
‘잘나갈 때가 위기’리는 위기의식으로 무장한 이건희 회장은 기본적으로 비관의 경영자이다. 실제로 그는 1993년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기업가란 항상 비관적이다. 모든 것을 비관적 바탕위에 놓고 긍정적 결과를 바라는 것이 기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위기감이 부려 놓은 비관이야말로 이 회장에게는 창조적 파괴의 원천이었다. 그는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변화와 혁신을 위해 끊임없이 부수고 파괴한 뒤 재건하는 일을 반복했다. 신경영을 전후로 진행했던 라인스톱제, 과거 청산, 무선전화기 화형식에 이어 2003년 브라운관 TV 생산중단 등이 그 대표적 사례였다.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 선언과 7 ‧ 4제의 전격 시행 이후 숨 돌릴 틈 없이 내부 개혁에 착수했다. ‘다 바꾸라’는 기치를 내걸었던 만큼 실로 파괴적이고 파격적인 행보를 이어갔다. 기존 관행과 가치, 시스템을 전면 부정했다. 단호하면서도 거침이 없었다. 신경영은 그렇게 창조적 파괴를 먹고 자기 증식을 해나갔다.
- 라인스톱제 : “품질을 위해서라면 라인을 세우라.” 당시 삼성 칼러TV 불량률 6~8%. VCR은 8%. 냉장고, 전자레인지, 세탁기 등도 마찬가지.
- “30,000명이 만들고 6,000명이 수리하는 삼성전자는 망한 회사나 다름없다.” “불량은 암이다.”
- 전자회사 라인에서 한 곳에 결함이 발생해 전체 라인을 세울 경우 매출과 생산성 손실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이 제도를 전격 시행했다. 근본적으로 불량률을 낮추지 않으면 세계 시장에서 승부가 불가능 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질을 위해서는 한 달이고 두 달이고 무조건 공장 가동을 멈추라. 목표대비 110% 생산은 더 이상 하지마라. 90%도 좋고 80% 20%도 괜찮다”고 강조했다.
■ 불량을 불사르다
이건희 회장에게 있어 양과 질은 처음부터 비교 대상이 아니었다. 하나를 포기하고 하나를 얻겠다는 식이 아니었다. 라인스톱제는 단기 시장 점유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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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출을 포기하고서라도 품질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완벽하게 이루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라인스톱제는 금융과 서비스 부문에도 적용되었다.
- 서비스 라인스톱제 : 서비스의 수준이 미달하면 업무중지 및 특별교육
- 삼성화재 : 1994년 6회의 라인스톱
- 삼성카드 : 불량 가맹점 등록 취소 또는 개선 후 재개정
- 삼성물산 : 1994년 6개의 의류대리점에 라인스톱 조치
- 삼성건설 : 공사중단권 발동제 시행
- 삼성에버랜드 : 1995년 불친절, 불결, 시설불량 매장에 영업중단 및 재교육 실시 등
그 다음은 주요 계열사와 사업부들을 대상으로 한 ‘과거청산’이었다. 이 회장은 7월 5일, 도쿄회의에서 “일체의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지금까지 저질렀던 실수나 비리, 덮어두었던 문제점 등 모든 것을 끄집어내라”고 지시했다. 끝까지 감췄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관련자들을 엄중히 문책하겠다고도 했다. 그러자 과거 양 위주의 경영에서 비롯된 부실자산, 불용자재, 악성재고 등 누적된 부실과 문제점들이 줄줄이 보고되었다. 이건희 회장은 문제점들을 고쳐나갔다. 아울러 부실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과거 부실 사례를 정리하여 임직원들에게 교육시킴으로써 경각심을 고취시켰다.
이 회장의 창조적 파괴는 1995년 ‘불량제품 화형식’에서 절정에 달했다. 1994년 삼성전자 무선사업부는 무리하게 제품 출시를 서두르다 불량률이 11.8%까지 치솟았다. 때마침 회사에서 추석 선물로 임직원들에게 제공한 무선전화기에서 불량이 발견되어 직원들의 불만이 터져 나왔다.
이 회장은 “신경영 이후에도 이런 나쁜 물건을 만들고, 엉터리 물건을 파는 정신은 무엇인가? 적자 내고, 고객으로부터 인심 잃고, 악평을 받으면서 이런 사업을 왜 하는가? 수준 미달의 제품을 만드는 것은 죄악이다. 회사 문을 닫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며 문제의 심각성을 강하게 질타했다.
뒤이어 15만 대의 전화기가 구미사업장 운동장에 쌓였다. 2,000여 명의 임직원이 지켜보는 앞에서 해머를 든 여남은 명이 전화기 더미를 내리쳤고, 산산조각이 난 전화기들이 불구덩이에 던져졌다. 엄청난 충격요법이었다. 이기태 당시 무선사업부 이사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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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품이 불타는 것을 보니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그런데 불도저가 잿더미를 밀고 갈 때쯤 이상하게도 갑자기 각오랄까. 결연함이 생겨났습니다. 다들 주먹을 불끈 쥐었어요. 우리 모두에게 그 불길은 과거와의 단절로 다다왔습니다.”
1994년 4위에 그쳤던 삼성 무선전화기의 국내 점유율은 1995년 19%로 1위에 올랐다. 이러한 가시적 조치와 노력을 통해 ‘불량은 곧 암’이라는 인식이 삼성인들 가슴속에 자리를 잡아갔고, 현장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부실 요인을 찾아 고치는 풍토가 삼성 전체로 확산 되었다.
■ 품질은 화장실에서부터
“용변의 욕구도 해결해 주지 못하면서 어찌 품질을 바라겠는가?”
이건희 회장이 1980년대부터 공장을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점검하는 곳이 있다. 직원식당과 화장실이다. 직원 식당이야 이해가 가지만 왜 하필 화장실일까?
부회장 시절 이 회장은 수원 공장을 방문해 화장실을 둘러봤다. 화장실 곳곳에 신문지가 널브러져 있는 등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회장은 그 자리에서 “용변은 인간의 가장 기본 욕구인데, 이를 제대로 해결해 주지도 못하면서 어찌 품질을 바라겠는가?”라고 경영진을 강력하게 질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건희 회장이 화장실 청결을 강조하는 배경에는 회사가 종업원의 인간적인 삶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철학과 품질에 대한 강한 의지도 녹아 있다.
이 회장은 반도체 업의 특성을 ‘양심산업’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공정을 책임지고 있는 종업원 한 사람 한 사람의 양심이 불량하면 수율이 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직원들의 양심 배가 운동이 꼭 필요한데 화장실이나 직원 식당 같은 기본 복지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고 직원들의 편의를 돌봐 주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직원들의 양심을 기대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삼성은 이 회장의 이런 철학을 실천하기 위해 1990년대 중반부터 전 계열사 사업장의 화장실을 고급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오쿠라 호텔 수준으로 만들라는 것이 그의 지시 내용이었다. 비데가 흔치 않았던 1990년대 후반부터 사업장별로 비데가 설치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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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통찰력의 산물, 업의 개념
전문가와 비전문가를 가르는 기준은 모호하다. 과학적이고 계량적인 분석과 진단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서 모두 전문가라는 칭호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아주 초보적 개념의 전문가로 변호사, 회계사 컴퓨터프로그래머, 기상학자, 통계학자, 지질학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대개 자격과 자질을 측정하는 시험을 통과하거나 일정 학습 프로그램을 이수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로 과거를 연구하며 경험과 학습 역량의 범위 내에서 주어진 문제에 대한 해결을 시도한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예측, 미래를 다루는 분야에는 또 다른 능력이 필요하다. 바로 직관과 입체적 사고이다. 우리가 흔히 최고의 전문가로 일컫는 사람들은 분석과 지식 습득 외에 매일 쏟아져 들어오는 무수한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지적 역량과 선견력을 갖고 있다. 물론 세칭 ‘최고 전문가’들도 사후적으로 많이 틀린다. 최고의 싱크탱크들이 내 놓은 경제 성장률 전망치가 불과 몇 개월도 안 되어 수정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 카드업은 외상 관리가 핵심
하지만 경제학자들과 달리 실수를 저지른 경영자들은 엄중한 추궁을 받는다. 경영자의 실패는 해당 기업의 주주나 종업원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이다. 소비자들은 제품과 서비스의 실수를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이건희 회장이 신경영을 선언한 1993년, 임직원들을 상대로 350시간의 마라톤 강연을 펼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강연의 요체는 크게 두 가지 였다. 초일류 기업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전대미문의 변화와 혁신이 불가피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결코 맹목적으로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초일류 기업 건설이라는 분명한 지향점이 있었지만, 최고 경영자가 경영이념과 비전을 제시하는 것만으로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든 흐름을 정교하게 예측해서 방향성을 제시할 수는 없지만, 사업장 곳곳에 혁신이 필요한 사례들을 집대성해서 세세하게 알려 줄 수는 없지만, 모든 임직원이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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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할 수 있는 보다 실질적 지침과 전략적 사고를 전파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업의 개념’이다.
2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당시 이 회장이 설파한 업의 개념은 지금도 삼성 내부에서 ‘선견력의 결정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업의 본질과 특성을 깨닫는 것이 경영의 출발이요. 모든 판단의 잣대라는 지침은 그저 “제품 잘 만들어 잘 팔면 되는 것 아니냐”는 고정관념에 머물고 있던 전문경영인들에게는 꽤나 자극적이고 충격적이었다.
1994년 1월 이 회장은 금융계열사 사장단과의 회의에서 불쑥 물었다. “신용카드업의 개념이 무엇인지 압니까?” 누구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이 회장은 “카드업은 외상관리가 핵심”이라고 말했다. 한마디로 외상을 잘 받아야 한다. 실적을 마구 올린다고 마구잡이로 회원을 모집하면 당장 경쟁사와의 외형 경쟁에서는 앞서 나갈지 몰라도 종국에는 연체와 부실채권 양산으로 낭패를 겪게 된다.
이 회장의 이런 지적은 2002년 한국 경제를 또 한 차례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카드대란’ 때 그대로 현실화 되었다. 수많은 신용카드사들이 도산 위기에 직면해 매물로 나왔고, 부실이 그나마 적었던 삼성카드 역시 삼성전자의 증자를 받아야 했다.
■ 해답은 업의 개념
생산의 개념
- 제조업 : 기계로 하는 일이 생산
- 보험업 : 사람을 모집하는 것이 생산
- 증권업 : 상담을 하는 것이 생산이다.
- 생명보험 : 라이프 사이클에 따라 요구되는 보장금융, 복지 서비스 제공을 통해 풍요롭고 윤택한 미래를 실현하는 생활보장 사업
- 삼성화재 : 고객의 위험 인수 관리로 고객의 경제적, 심리적 안전을 제공하는 종합 안심 서비스업
- 경비용역회사인 에스원 : 직원들의 사기와 단결력이 업의 본질
- 반도체업 : 박사에서 사원까지 수천 명이 300여개의 공정에서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합심해서 일하는 양심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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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이 제시한 업의 개념은 임직원들이 더욱 입체적이고 종합적인 시각에서 사업을 입안 할 수 있는 기본 설계도의 역할을 했으며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업의 본질과 고객의 가치를 삼성전반에 내재화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돌이켜 보면 이 회장의 선견력은 일류 제품과 서비스를 앞세워 시장을 선점하려는 경영자로서의 욕구와 맞닿아 있으며 철저하게 현실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그는 비즈니스의 달인처럼 도처에서 핵심을 찔러 나갔지만 그런 경지에 도달하기까지 부단히 자신을 단련하고 가슴을 치던 시간들이 있었을 것이다. 다른 분야라면 몰라도 경영에 천재가 있을 수 있겠는가.
■ 무한탐구 정신, 5 Why
“경영이 무엇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라고 답하면서 경영이든 일상사든 문제가 생기면 최소한 다섯 번 정도는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원인을 분석한 후 대화로 풀어야 한다고 덧붙인다.”
1997년 이건희 회장이 펴낸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의 한 구절로 이른바 ‘5 Why’론으로 알려진 이 회장 식 사고의 요체이기도 하다.
이 회장의 ‘5 Why’론은 모든 것을 원점에서 생각하자는 뜻과도 일맥상통한다. 모든 사물과 일을 대할 때 과거의 타성을 버리고 원점에서 다시 보면 새로운 시각과 처방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7. 사상 초유의 외환위기 극복기
1697년 호주에서 ‘검은 백조(블랙 스완)가 발견되자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백조는 모두 하얗다고 생각하던 시절이었다. 이후 ’블랙 스완‘은 가능성이 희박해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을 몰고 오는 사건을 의미하는 단어로 잘 잡았다.
기존의 패러다임과 사고방식이 완전히 폐기되고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질 때까지, 사회와 조직구성원은 많은 혼란과 고통을 겪게 된다. 하지만 무척 드물게 나타난다는 블랙 스완은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맞물려 의외로 자주 출몰하고 있다. 미국의 9 ‧ 11 테러, 서프라임 모기지 사태, 일본 동북부 대지진 등이 대표적 사례로 지목된다. 우리나라에는 1997년 11월 발발한 외환위기가 꼭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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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몽의 시간들
정부 정책의 실패였는지 방만한 기업 경영이 원인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누군가는 금융, 외환 시장과 노동시장 개혁을 제때 해내지 못한 정부의 실책이라고 했고 어떤 이들은 실력도 없이 부채를 짊어지고 세계 시장으로 내달았던 기업들을 탓했다.
이 논쟁은 지금도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모든 사람이 달러당 800원의 마약에 취해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막 먹고 살 만해져 해외여행을 즐기게 된 국민들도 그랬지만 기업이나 금융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기업들은 엄청난 투자를 싼값에 즐겼다. 고평가된 원화 가치를 활용해 거리낌 없이 달러 빚을 끌어다 썼다. 저환율이 영원히 지속되리라는 그릇된 믿음에 따른 것이었다.
1995년 80억 달러였던 경상수지 적자는 1996년 230억 달러로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건국 이후 최대 위기라는 ‘IMF 사태’는 태국이 무너진 지 불과 넉달만에 우리를 덮쳤다. 1995년 350%였던 30대 기업의 평균 부채율은 1996년 400%로 높아졌다. 달러당 800원대라는 저환율 시대에 해외여행에 대한 규제가 풀리면서 여행수지 적자폭이 확대되었고, 단기 호황에 편승해 소비재 수입도 증가했다.
이건희 회장은 위기를 직감했다. 그는 1996년 신년사를 통해 “우리가 지난해 달성한 계수적 성과는 우리 스스로의 힘과 실력으로 얻은 것이라기보다 세계적 호황과 엔고라는 외부환경에 기인된 바가 큽니다. 현실이 이런데도 조직 내에서는 자만과 방심, 착각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이어지는 그의 말은 아래와 같았다.
“‘싱글 삼성’이라고 하지만 싱글로 나아가기에는 각 계열사별로 차이가 너무 큰 것이 현실입니다. 모든 것을 완벽히 결정해서 없앨 것은 없애고, 줄일 것은 줄이며, 합병할 것은 합병하고 그리고 남는 힘으로 앞을 내다보면서 모든 신경, 모든 자금, 모든 힘을 미래 사업을 위해 집중해야 합니다. 지난 3년의 신경영 성과는 대체로 긍정적이지만 아직도 변화의 속도는 느리고, 물리적 변화에 비해 소프트적 변화가 미흡하며 변화의 부작용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다들 정신 차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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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일 년여 뒤에 다가올 외환위기를 예견이라도 한 듯 실로 예민한 촉각이었다.
■ 운명의 IMF
그리고 1997년 11월, 외환위기가 터졌다. 필연이었지만 느닷없는 재앙이기도 했다. 금리가 30% 대로 치솟고 외국계 자금들은 썰물처럼 한국을 빠져 나갔다. 무디스 등 신용평가 기관들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을 낮추기 시작했고, 일부 국책은행을 제외한 국내 금융기관들은 해외 단기 채무의 만기 연장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국가부도 위기에서 우리나라는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는 대가로 한국 경제의 강점이었던 대기업의 선단식경영을 해체해야 하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
한국 사회는 엄청난 충격에 빠졌다. 대규모 구조조정으로 회사에서 쫓겨난 실업자들이 길거리를 뒤덮었다. 은행뿐만 아니라 수많은 기업들이 파산의 대열에 내몰렸다. 삼성의 신경영도 쓰나미처럼 밀려온 외환위기의 충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게다가 몇 년간 캐시카우(cash cow 시장 점유율이 높아 꾸준한 수익을 가져다주지만 시장의 성장 가능성은 낮은 제품) 역할을 했던 반도체도 세계경기 악화로 가격이 폭락하고 있었다. 이건희 회장이 야심차게 추진한 자동차 사업도 내수시장 위축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997년 12월, 이 회장은 한남동 승지원에서 존 코자인 골드만삭스 회장을 만났다. “삼성전자와 전자 핵심계열사, 삼성생명을 제외하고 그 어떤 회사를 처분해도 좋습니다.” 이건희 회장의 이 말에 코자인 회장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어디까지입니까?”라고 되물었다. 이 회장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우리 회사를 분석하고 값을 매겨서 원매자를 찾아서 처분까지 해 주십시오. 모든 것을 위임하겠습니다.”
그만큼 상황이 절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듬해인 1998년, 삼성은 창립 60주년을 맞았지만 분위기는 침울했다. 그는 신년사에서 “지금 우리는 사상 초유의 위기적 경영여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IMF로 비롯된 신질서 형성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업에게는 생존 그 자체가 절박한 과제입니다. 고금리와 저성장의 경제 틀 안에서 우리가 감내해야 할 경영 압박과 고통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비장한 기념사를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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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조정 서류만 8톤 트럭 한 대
삼성은 비서실을 해체한 뒤 신설한 구조조정본부를 중심으로 성역없는 구조조정에 나섰다. 적자사업, 한계사업은 물론이고 유동성 확보를 위해 수익사업까지 매각했다. 수많은 기업들이 너도 나도 매물을 내 놓다보니 M&A 시장은 ‘땡처리 시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협상 주도권을 거머쥔 외국자본은 가격을 후려치기 일쑤였다. 삼성은 그 틈을 비집고 고강도 구조조정과 경영합리화에 나섰다. 1997년 말 삼성의 차입금 규모는 47조 원, 부채비율은 366%에 달했다. 주력 계열사들을 중심으로 눈물을 머금은 감원이 시작되었다. 삼성전자에서만 30,000명이 정든 직장을 떠나야 했다.
삼성은 대대적 자산매각과 인력감축, 경영 합리화 조치 등을 전방위로 진행했다. 이 과정에서 삼성 구조조정본부에 쌓인 관련 서류만도 8톤 트럭 분량에 달할 정도였다.
심상은 또 삼성자동차의 부실 문제에 대해 책임론이 대두되자, 이 회장의 사재 출연을 통해 이를 해결했다. 사재 출연은 주식회사제도의 유한책임론, 다시 말해 지분만큼 경영에 책임을 진다는 원리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삼성의 총수로서 무한책임을 진다는 자세로 본인이 보유하고 있던 사제 삼성주식 350만 주를 채권단에 내놓았다. 그의 용단 덕분에 자동차 부실은 다른 계열사뿐만 아니라 금융권의 부실로도 번져 나가지 않았다.
삼성은 오너의 결단과 임직원들의 고통 분담으로 국내 대기업 가운데 가장 먼저 IMF의 긴 터널을 빠져 나왔다. 삼성의 재무구조는 빠르게 개선되었다. 1996년부터 선제적 구조조정에 들어간 덕분에 놀라운 속도로 외환위기의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999년 삼상전자의 해외법인이 흑자를 달성하면서 1978년 첫 해외법인 설립 이후 처음으로 본사에 1억 달러의 배당금과 기술사용료를 지급하는 개가를 올렸다. 1999년 말 약 17조원에 달했던 삼성의 순차입금 규모는 2003년 말에는 3,000억 원으로 대폭 줄어들었다. 한때 360%를 부채비율도 2002년에는 90%로 떨어졌다.
■ 경제주권 상실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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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은 그렇게 서서히 위기를 벗어나고 있었지만 모두가 안전지대로 대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30대 기업 가운데 절반 정도가 IMF 쓰나미에 휩쓸려 나갔다. 파산 법정관리에 이어 이름도 생소하던 워크아웃을 통해 속속 주인들이 바뀌고 공장들이 문을 닫았다. 구조조정의 여진은 계속되었고 생산과 고용은 여전히 불투명했다. 국민들을 또 한 차례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은 재계 서열 2위 대우의 공중분해였다.
외환위기에 이은 대우그룹 패망은 국민 경제에 또 하나의 깊은 상처를 안겨 주었다. 고금리와 고환율 엄습으로 ‘금단의 지옥’에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던 사람들에게도 대우 패망이 몰고 온 충격파는 컸다. ‘샐러리맨의 신화’ 김우중의 몰락은 경제개발의 종언을 알리는 또 다른 신호탄이었다.
파국이 오자 IMF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가차 없는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강요했다. 역사상 외환위기를 당한 어느 나라도 한국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른 곳은 없었다. 위기를 막기 위한 대응책도 없었지만 위기를 맞이하는 준비도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남의 돈을 제 나라 국민의 복지에 흥청망청 퍼부어 남유럽 재정위기의 진원지가 된 최근의 그리스조차 IMF로부터 우리만큼의 혹독한 구조조정을 당하지는 않았다.
IMF사태는 경제력이 허약한 국가는 언제든지 경제주권을 저당 잡힐 수밖에 없다는 냉엄한 현실을 일깨워 주었다. 동시에 정부 기업 국민이 힘을 합쳐 끊임없이 경쟁력을 키워 내는 일만이 우리 공동체의 건강과 안녕을 지탱할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 “권한도 책임도 여러분의 몫”
이건희 회장은 자율경영의 신봉자이다. 이는 1987년 회장 취임 이후 줄곧 주창해 온 구호이기도 하다. 삼성전자의 최고 경영자들은 수천억 원이 들어가는 투자도 이 회장의 승인 없이 집행한다. 많은 사람들이 믿기 어렵다고 말하지만 삼성 내에서는 이것이 진실이다. 이 회장과 일 년에 한차례 정도 중장기 사업계획과 비전에 대한 토의가 끝나면 개별단위 사업의 투자와 집행은 사장들이 전권을 갖는다.
이 회장은 ‘신상필벌론 信賞必罰論’ 대신 ‘신상필상론 信賞必賞論’을 이렇게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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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훌륭한 말을 가르치는 특급 조련사는 채찍을 사용하지 않는다. 삼성도 잘하는 사람에게 상을 주지만, 못한다고 벌을 주지는 않겠다. 잘하는 사람이 더 잘 할 수 있도록 해주기만 하면 된다.”
이건희 회장은 전자산업의 성패가 속도에 달려 있는 만큼, 권한의 하부 위임이 과감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여겼다. 그는 “자율경영은 사장에서 사원에 이르기까지 각자가 스스로 할 일을 찾아서 권한을 갖고 소신껏 추진하며 결과에 대해서도 책임지는 경영 자세를 의미한다”며 자신에게 집중된 권한을 비서실, 계열사로 분산시켰다.
최근 이 회장의 출근 경영을 놓고서 “자율경영을 접은 것이 아닌가”라는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이 있지만 출근 경영과 자율경영은 상반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게 삼성 측의 설명이다. 신태균 삼성인력개발원 부원장은 “출근 경영은 위기의식의 발로로 조직의 ‘메기’가 되겠다는 메시지입니다. 회장님이 출근한다고 해서 눈치를 보는 임직원들은 회장님의 철학을 잘못 이해한 것”이라고 말했다.
8. 삼성의 밀레니엄 경영
역사는 위기를 두려워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돌이켜 보면 모든 위기가 그랬다. 미국은 1930년대 대공황을 겪으면서 세계 최강국으로 탈바꿈했다. 독일은 2차 대전 패배의 아픔을 딛고 1950년대 연평균 7%의 고도성장을 구현하며 유럽 최고의 공업국가로 발돋움했다. 새로운 질서는 늘 희생과 고통을 자양분으로 태동한다.
다사다난했던 세기말이 지나자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밀레니엄의 시작에 들떴다. 신질서의 코드는 ‘디지털’이었다. 전자산업의 패러다임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을 것 같던 일본과의 격차를 한꺼번에 줄일 수 있었던 비밀의 코드가 열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삼성이 있었다.
■ 디지털경영 시대를 열다
이건희 회장은 2000년 신년사를 통해 21세기를 선도해 나갈 전략이자 경영방침으로 디지털 경영을 선언했다. 당시 삼성전자 사령탑을 맡고 있던 윤종용 전 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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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 시대에서 산업 후발주자인 한국 기업들은 늘 추종자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진 기술과 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선진국으로부터 사양산업을 인수하고 기술을 이전 받아 모방하는 전략을 쓸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디지털 분야는 아니었습니다. 한국이나 일본, 유럽 모두 동일한 출발 선상이었습니다.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도 거의 없어 노력 여하에 따라서는 디지털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어요. 게다가 삼성전자는 디지털 시대의 총아인 반도체 분야의 선도 기술을 갖고 있었습니다.”
반도제 기술의 발전은 사회 전반의 변화를 주도하는 강력한 원천이 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한 IT 인프라의 급속한 확산과 인터넷 열풍은 농업혁명, 산업혁명에 이어 인류 역사상 제3의 변혁기인 정보 혁명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특히 인터넷은 디지털 혁명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과거 신기술 도입 이후 이용자수가 5,000만 명이 되는 데 걸린 시간이 라디오는 38년, TV는 13년 이었던 것에 비해 인터넷은 5년에 불과했다. 인터넷을 통해 정보가 실시간으로 확산되고 개인의 개성과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무한대로 확대되어 소수의 전유물이었던 전문 기술과 지식의 공유가 가능해졌다.
■ 신수종 사업 발아
이 회장은 2000년 4월과 11월에도 연이어 디지털 사업 분야 사장단 회의를 열어, 앞으로 전게될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경쟁체제 아래서 생존 · 발전하기 위한 전력을 심도 있게 논의했다. 디지털사업의 일류화 추진은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맞물리면서 2002년 메모리 반도체와 휴대폰, TFT-LCD 사업 등에서 사상 최대의 경영 성과를 일궈 내는 바탕이 되었다. 동시에 반도체-휴대폰-TV-디스플레이로 이어지는 ‘황금의 사각편대’를 구축하는 토대가 되었다.
사실 이와 같은 사업 구도는 외환위기가 일어나기 전인 1997년 봄에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힌 상태였다. 삼성전자는 당시 사업구조를 씨앗사업-묘목사업-과수사업으로 구분해 경영자원을 전략적으로 배분해 나가기로 했다. 5~10년 후에 결실을 맺을 수 있는 사업인 씨앗사업은 자금과 인력을 과감히 투자해 기초를 튼튼히 다져야 할 이동통신 시스템, 네트워킹, 시스템LSI 등이었다. 묘목사업은 향후 거대 과수로 성장할 사업으로 남보다 먼저 기회를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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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해야 할 디지털TV, PDA, TFT-LCD 등이었으며 과수사업에는 기존의 강점을 더욱 강화해 확고부동한 일류로 만들어야 할 대형 컬러 TV, 모니터, 노트북 PC, 휴대폰, 메모리 반도체 등이 선정되었다.
예기치 못했던 외환위기가 이러한 신성장 전략을 다소 지연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내부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삼성은 새로운 세기를 맞아 오랫동안 눌려 있던 용수철처럼 힘차게 튀어 올랐다.
모두가 변화를 예감했고 도약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2000년, 삼성은 디지털 코드를 앞세워 그 꿈과 희망을 펼쳐나가기 시작했고 기업 역전의 시대를 준비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제2부 월드베스트를 향하여
1. 질 경영 1호 반도체
pc시대의 개막을 알린 메모리 D램은 1970년 미국 인텔이 처음 개발했다. 이후 10여 년간, 모토로라, 텍사스인스트루먼트, 페어차일드, 마이크론테크놀러지 등이 산업을 주도하다가 1980년대 일본의 NEC, 히타치, 도시바 등으로 패권이 넘어갔다.
이건희 회장이 1974년 경영난으로 파산한 ‘한국반도체’를 인수한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당시 한국반도체는 트랜지스터를 만드는 수준의 회사로, 반도체 사업을 본격화할 만한 역량이 없었다. 하지만 일찍이 일본 전자업체들의 반도체 사업 확대를 눈여겨봐 왔던 이 회장에게 한국반도체 파산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다. 이 회장은 반도체를 주식회사, 원자력과 함께 인류의 3대 발명품으로 꼽으면서 반도체가 미래의 산업, 사회, 생활 전 분야에 걸쳐 필수요소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건희 회장은 사재를 털어 한극반도제 지분 절반을 인수했다. 동양방송 이사로 재직하고 있을 때였다.
■ IBM을 배워라
미국과 일본의 전자업계는 삼성의 한국반도체 인수를 놓고 “걸음마도 못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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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아이가 하늘을 날려고 한다”며 비아냥거렸다. 게다가 기술보호주의가 대두되면서 미국과 일본은 반도체 기술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이 자국의 반도체 기술을 빼내갔다며 한국에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이건희 회장은 일본으로 날아가 기술자들을 직접 만났다. 호텔로 불러서 ‘룸서비스’를 시켜놓고 밤새도록 토론했다. 반도체 엔지니어를 찾아 미국 실리콘밸리를 드나들던 시기도 이즈음이었다.
이 회장은 반도체 사업과 관련해 경영진에게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반도체 사업은 기술과 시간의 싸움입니다. 그러나 미국이나 일본 어느 회사도 우리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개인적으로 기술자를 만나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거의 매주 해외에 나가 반도체 전문가들을 만나 조금씩 배웠고, 주말에는 그들을 우리 공장으로 모셔와 현장에서 우리 기술자들을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기술이 어느 정도 확보되자 선대회장께서 1983년 반도체 사업 진출을 공식 선언했습니다. 내 이름을 걸고 조그맣게 시작한 반도체 사업이 10년 만에 삼성의 사업으로 인정받은 겁니다.”
1987년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 회장에게 반도체는 사활을 걸고 도전해 반드시 성공시켜야 할 사업으로 다가왔다. 1981년 기흥 사업장 부지를 마련할 때부터 그는 직접 정부를 찾아가 사업 설명을 할 정도로 애착을 쏟았다. 회장 취임 후 첫 외국 출장지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반도체 연구소를 택할 정도였다.
그는 특히 한국인의 우수한 두뇌와 근면성, 청결한 생활 습관 등이 반도체의 특성과 잘 맞아떨어진다고 보았다. 젓가락 문화권이어서 손재주가 좋고, 주거 자체가 신발을 벗고 생활하는 등 청결을 중시하는 한국의 문화를 반도체와 결부시킨 것이다.
삼성전자 사사에 기록된 홍종만 사장의 말이다.
“당시 회장님의 주문은 집요했습니다. ‘무조건 IBM을 분석하라. IBM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연구해 보라. 반도체 시장의 판세를 거머쥐고 있는 IBM을 읽으면 반도체 사업의 맥을 짚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이었어요. 대단한 열정이고 집념이었습니다.”
■ 포커게임, 2등은 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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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회장은 “투자시기가 6개월만 늦어도 몇 천억 원의 이익을 날려버리는 것이 반도체 사업이다. 선행 기업만이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업종의 특성상 2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반도체 사업을 ‘2등이 가장 돈을 많이 잃는’ 포커게임에도 곧잘 비유했다. 1990년대 이후 한국과 일본 반도체 업계의 흥망이 엇갈린 것도 타이밍 때문이었다. 권오현 삼성전자 대표이사 부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삼성전자가 1992년 처음으로 D램 1위에 올랐지만 일본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펀더멘털이 강하고 원천기술도 대단했거든요. 하지만 우리가 일본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바로 투자의 타이밍이었습니다. 삼성은 불황 때 다가올 호황국면을 내다보고 과감하게 투자를 늘렸습니다. 반면 일본 업체들은 호황일 때 투자에 나서 제품을 양산할 때 쯤 불황을 맞는 ‘엇박자’를 계속 연출했습니다. 8인치, 12인치 전환이 대표적이었지요. 삼성이 선도적으로 치고 나가면 6개월에서 1년 정도 있다가 쫓아왔어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선발주자인 삼성이 시장 대부분의 수익을 거둬간 후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나고 보면 누구나 그 타이밍을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지요.”
◉ 삼성반도체 신화창조의 분수령이 된 사건 : 8인치 웨이퍼를 적용한 16메 가 D램의 양산라인 건설
- 당시 세계 표준은 6인치였고 8인치 웨이퍼는 6인치보다 생산성은 1.8배 높지만 투자규모가 6인치의 서너 배에 달함
- 6인치 위주의 일본을 따라 잡으려면 8인치 국면 전환이 필요함
- 1993년 6월, 8인치 양산라인 준공 : 세계 최대 D램 생산라인
- 그 결과는 1994~1995년 연속 기록적인 수익으로 연결
- 1992년 8월 세계 최초 64메가 D램 개발. 1994년 6월 세계 최초 256메 가 D램 개발 : 미국, 일본의 경쟁사보다 1년 앞선 기술
- 1996년 10월 꿈의 반도체 1기가 D램 최초 개발
1기가 D램은 어른 엄지 손톱만한 크기의 칩에 신문지 8,000장, 단행본 320권, 정지 화상 400장, 음성 정보 16시간에 해당하는 정보를 저장할 수 있는 대용량 메모리 반도체였다.
삼성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반도체 시장에 깊은 불황이 닥쳤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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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투자를 멈추지 않았다. 2000년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세계 PC시장이 다시 뜰 것으로 내다봤기 때문이다.
■ 합작 제의를 거절하다
2000년을 전후한 시기의 특징은 디지털화의 급진전이었다. 삼성은 디지털 시대의 도래가 메모리 산업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제공할 것으로 내다보고 기존 D램 중심의 사업구조를 전면 재편하기로 했다.
이 회장은 1990년대 중반부터 삼성전자 경영진들에게 D램 분야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는 사업구조에서 탈피해 품목을 다각화해야 하며 특히 시스템LSI에 적극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2000년 이후 삼성의 반도체 사업 전략은 ‘투트랙 Two Track’으로 진행되었다. 메모리 분야에서 D램 의존도를 줄이면서 낸드플래시 등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시스템LSI는 씨앗을 뿌린다는 전략이었다.
삼성 낸드플래시 사업의 분수령은 2000년 초에 찾아왔다. 일본 T사가 삼성에 두 가지 제안을 해온 것이다. 자사의 D램 부문을 인수해 달라는 것과 낸드플래시 분야에서 합작을 하자는 제안이었다. 반도체 경기 침체로 장기 불황을 겪고 있는 T사가 구조조정의 파트너로 삼성을 선택한 것이다. 삼성으로서는 격세지감이었다.
그러나 이 회장은 T사의 두 가지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했다. 그는 T사 제안의 배경을 간파하고 있었다. 세계 1위 낸드플래시 업체였던 T사는 불황을 맞아 삼성의 현금 유동성을 활용하는 동시에 강력한 잠재 경쟁자를 우산 속에 가둬 놓아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삼성은 T사의 울타리로 들어가 안정적인 2위를 유지하느냐, 독자적으로 시장을 개척하면서 T사와 경쟁할 것이냐를 놓고 선택의 기로에 섰다.
이 회장은 2001년 8월 오쿠라 호텔 인근 자쿠로 식당으로 삼성전자 사장단을 불렀다. 그리고 한참 동안 회의가 진행되었다. 이건희 회장은 황창규 당시 반도체 사업부장의 의견을 물었다. “충분히 우리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간단히 결론이 났다.
이 같은 결정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전략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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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증명됐다. 삼성은 그해 가을, 세계 최고 집적도를 가진 1기가 낸드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성공하면서 이듬해 낸드플래시 세계 1위에 올랐다.
삼성의 낸드플래시점유율은 2000년 26%에서 2002년 44%로 급등한 반면 T사는 2000년 45%에서 2002년 26%로 떨어졌다. 낸드플래시 시장 장악은 몇 년 뒤에 만개하는 모바일 시장에서 삼성의 대약진을 이끌었다. 전 세계에 확산된 휴대폰의 핵심 칩이 낸드플래시였기 때문이다.
■ 반도체는 양심산업
이 회장은 반도체 업을 ‘양심산업’이라고 규정했다. 반도체 생산은 300~400가지 공정을 거쳐야 하는데 생산에 참여한 어느 한 사람이라도 부정한 마음을 가지거나 실수를 하게 되면 대형 사고로 이어진다. 게다가 공정상의 문제점은 일정 기간이 지나지 않는 한 쉽게 발견되지 않고 누가 잘못했는지 밝혀내기도 어려우며 불량품은 전량 폐기해야 하는 특성이 있다.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오너의 결단과 반도체 기술에 대한 안목, 임직원들의 헌신을 바탕으로 비약적 발전을 이루었다. 2012년 메모리와 시스템LSI를 통틀어 34조원의 매출을 올려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의 10%를 첫 돌파 했다. 세계 메모리 반도체 업계에 엄청난 불황이 몰아 닥쳤던 그해 유일하게 적자를 내지 않은 곳도 삼성이었다.
삼성의 반도체 사업은 성공의 고비 고비마다 신경영 정신이 녹아 있다는 점에서 ‘질 경영 1호’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 복합화가 경쟁력이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운영하는 경기도 용인 ‘노블 카운티’는 주거·의료·여가·문화·스포츠 시설이 결합된 선진형 실버타운으로, 이건희 회장의 복합화 철학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곳이다.
이 회장은 1994년 실버타운 건설 보고를 받는 자리에서 회색빛의 고립된 노인들만 있는 생활공간이 아닌, 어린이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모든 세대가 어우러져 함께 생활하는 생동감 넘치는 공간으로 만들어 지역사회에도 개방해야 한다는 주문이었다.
복합화는 이 회장 경영 철학의 한 축이다. 단지의 복합화, 빌딩의 복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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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의 복합화, 인재의 복합화, 제품의 복합화, 공장의 복합화 등 이 회장은 틈나는 대로 복합화를 주문했다. 평소 즐겨 강조하는 입체적 사고 또한 어떤 면에서는 ‘사고의 복합화’를 의미하고 있다. 이 회장의 복합화는 전략의 수준을 넘어 일종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회장의 복합화 철학을 제대로 구현할 화룡점정은 ‘도곡동 프로젝트’였지만 IMF를 맞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복합화의 효과를 “빌딩을 옆으로만 넓히지 말고 위로 높이자. 좁은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해야 한다. 한 곳에 모든 임직원이 40초 만에 모일 수 있다. 이게 바로 경쟁력이다. 물류비용이 줄고 경영스피드가 제고된다. 교통체증도 없어진다. 이게 바로 복합화”라고 설명했다.
마침 서울시가 2만 평이 넘는 체비지를 매각하기로 했다. 이 회장은 무조건 낙찰을 받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생명 등 계열사들은 평당 2,700만 원에 총 22,714평을 6,226억 원에 매입했다. 당시로는 매우 높은 가격이었다. 초고층 사옥을 짓기 위해 조감도가 마무리 되었다. 당시 미국 시어스타워가 443m, 말레이시아 Klcc가 446m 였으니, 111층 450m의 도곡동 사옥은 세계 최고층의 설계였다. 그러나 IMF로 인해 이 프로젝트는 수포로 돌아갔다.
이건희 회장은 이때 “아까운 자식 한 명 잃었다”며 극도로 아쉬운 심정을 표현했다. 삼성계열사들은 이 땅을 나대지로 매각하려다가 이건희 회장에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주상복합 건물로 지어서 분양하라는 아이디어는 그래서 나왔다.
비록 초고층 빌딩의 꿈은 무산되었지만, 그렇게 들어선 도곡동 타워팰리스는 주상복합이라는 새로운 주거문화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삼성 사업장이나 제도 시스템에는 복합화 철학이 곳곳에 배어 있으며 이는 삼성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경쟁력 가운데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2. 휴대폰 세계 1위, 갤럭시의 위업
2013년 3월 13일, 미국 뉴욕의 라디오시티 뮤직홀. 3,000여 명의 청중들이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가운데 삼성의 전략병기 갤럭시 S4가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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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삼성의 뉴욕 발표회는 희대의 라이벌인 애플의 안방에서 진행되었다는 점에서 전 세계 언론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두 회사는 2011년 이후 갤럭시와 아이폰 시리즈를 통해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스마트폰 전쟁을 벌여왔다.
애플의 절대 우세로 출발했던 각축전은 삼성의 사력을 다한 추격과 지속적 제품 혁신이 맞물리면서, 2012년을 기점으로 승부의 저울추가 완전히 반대로 기우는 양상을 보였다. 2013년 4월 이후
- 갤럭시 S4 : 공개 열흘 만에 주문량만 1,000만 대를 넘어서고 누적 판매량이 1억 대 가까이 될 것으로 예측
- 갤럭시 S3 : 출시 50여일 만에 1,000만대가 팔렸고 지금까지 누적 판매량은 4,100만 대
- 갤럭시 S2의 누적 판매량은 4,000만 대. 갤럭시 S는 2,500만 대
■ 뼛속까지 바꾸라
삼성과 애플의 양강구도 이전 휴대폰 업계의 패자 노키아, 노키아는 2000년대 초 시장 점유율 40%, 영업이익률 20%의 막강한 기업이었다. 핀란드의 목재 회사였던 노키아를 삼성이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2003년 7월 이 회장은 삼성전자 사장단을 이끌고 노키아를 방문하여 부품 공급, 기술경쟁력의 원천, 협력사와의 공존 철학, 핀란드의 기업문화 등을 살피고 돌아왔다.
2003년 11월 이 회장은 전자 사장단 회의에서 “뼛속까지 바꾸라”고 주문했다.
“세계 일등이 되려면 근육을 바꾸고 걸음걸이 자세도 바꿔야 합니다. 조직도 완전히 바꿔야 합니다. 디자인 기술, 조직 등 무든 것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먼저 스스로를 재정비하고 나서 도전해야 할 것입니다. 더욱 대담하게 부품을 개발하고 적극적으로 투자해 주세요.”
부분적 변화로는 영원히 3등, 잘하면 2등까지는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완전히 새롭게 바꾸지 않으면 1등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 였다. 삼성의 휴대폰 1등 달성 전략은 이렇게 가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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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전과 응전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경쟁사들과의 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삼성은 애가 탔다. 노키아는 철옹성 같았다. 유럽 시장은 특히 그랬다.
기회는 엉뚱한 곳에서 찾아왔다. 바로 애플의 스마트폰인 아이폰의 돌풍이었다. 애플은 모바일 혁명에 불을 붙이며 피처폰 시대의 절대 강자였던 노키아의 아성을 허물어 나갔다. 2007년 6월, 애플이 출시한 아이폰은 순식간에 전 세계 모바일 시장을 장악해 나갔다.
삼성전자 무선사업부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에 휩싸였다. 노키아가 무너진다고 결코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노키아의 점유율이 하락하는 만큼 삼성이 점유율도 곤두박질쳤다. 대내외 환경도 급속히 악화됐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건희 회장은 삼성특검 사태의 여파로 2008년 4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였다. 안팎의 악재로 삼성이 우왕좌왕 하는 사이를 틈타 애플은 삼성의 안방까지 쳐들어 왔다. 2009년 11월 아이폰의 한국 상륙은 태풍 그 자체였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이회장의 경영복귀는 필연이었다. 2010년 3월 24일, 그의 복귀일성은 비장했다.
“글로벌 일류 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우리 삼성도 어찌될지 모른다. 10년 안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 다시 시작하자.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앞만 보고 가자.”
이 회장의 복귀로 삼성 특유의 기동전이 시작되었다. 삼성은 주력 스마트폰 운영체제OS를 구글 안드로이드로 전환키로 결정했다. 애플에 맞서 독자 모바일 생태계 구축을 꿈꾸던 구글과 손을 잡자. 삼성의 하드웨어 기술력은 무서운 뒷심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2010년 5월, 삼성전자의 첫 스마트폰 갤럭시 S가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갤럭시 S는 개발인력을 총동원해 불과 6개월 만에 출시된 제품이었다. 통상 전략폰 개발에 1년 ~ 1년 6개월 정도 소요되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신제품을 내놓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제품명의 S는 속도Speed, 화면 screen, 얇기 slim를 지향한다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었다. 휴대폰 사업을 총괄하는 신종균 삼성전자 사장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삼성이 갤럭시 S를 6개월 만에 개발할 수 있었던 것은 2000년대부터 선진사를 따라잡기 위해 구축해 놓은 인프라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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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치들이 없었다면 아마 삼성도 애플의 태풍에 휩쓸려 갔을 것입니다.”
■ “기죽지 마라”
이 시기에 이건희 회장은 스마트폰 대응이 늦었다는 이유로 무선사업부를 질책하기보다는 용기와 자신감을 북돋우고 나섰다. “공포심 가질 필요 없다. 기죽지 마라.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다”는 격려였다.
갤럭시 S는 출 시 7개월 만에 전 세계에서 1,000만대가 팔렸다. 삼성전자의 첫 ‘텐밀리언셀러 스마트폰’이었다. 2년간 총 판매량은 2,000만 대에 달했다. 세계는 삼성의 저력에 또 한 번 놀랐다.
2010년 2분기 스마트폰 시장에서 5%의 점유율로, 애플 13,5%에 크게 뒤쳐졌던 삼성은 4분기에는 점유율 격차를 5.5%로 줄이더니 2011년 2분기에는 1% 포인트로 격차를 더 줄였다. 갤럭시 S2가 본격 시판에 들어간 3분기에 삼성은 마침내 세계 스마트폰 1위에 올랐다. 판매량은 경쟁사에 비해 무려 1,000만대 이상 많았다.
돌이켜보면 2011년 4월은 이건희 회장의 출근경영과 갤럭시 S2 출시, 애플의 느닷없는 특허소송이 맞물린 시점이었다. 글로벌 시장의 패권을 놓고 숙명의 일전이 불가피하다고 내다본 결정이었다.
이후 휴대폰 시장의 승자는 삼성전자였다.
■ 승패는 소프트웨어와 사람에 달려 있다
삼성전자가 단기간에 ‘글로벌 톱클래스’의 스마트폰 제조회사로 떠오른 또 다른 요인은 ‘세계 각국의 다양한 규제를 통과할 수 있는 현지화 제품’을 만들어 내는 능력이었다. 삼성전자는 핵심 부품인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부터 메모리반도체, 디스플레이, 배터리 등 스마트 폰에 들어가는 주요 부품들을 자체적으로 설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경쟁사들이 일 년에 한두 개 모델을 내놓는 반면 삼성은 다양한 크기와 디자인의 제품을 여러 나라에 동시에 공급한다.
이 시기에 삼성전자가 올린 개가는 또 있다. 스티브 잡스는 2007년 아이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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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아무도 펜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삼성전자는 보란 듯이 S펜을 탑재한 갤럭시 노트를 성공시켰다. 2012년 9월에 나온 갤럭시 노트 2는 출시 37일 만에 300만 대를 판매하는 기록을 세웠다. 지금까지 없던 시장을 삼성이 만들어 낸 것이다. 경쟁사가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5인치대 스마트폰’도 삼성전자가 만들어낸 시장으로 볼 수 있다. 5인치를 넘으면 손에 잡기 불편하다는 고정관념을 일거에 깨뜨렸다.
이 회장의 지시로 1995년 3월 구미 사업장에서 단행된 불량제품 화형식은 혁신의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글로벌 톱을 향한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이 없었더라면 새로운 기회를 포착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신종균 사장은 휴대폰 사업을 향한 이 회장의 열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노키아가 세계 정상이었을 때 회장님이 한 이야기는 ‘인구 600만 명의 핀란드도 하는 데 우리라고 못할 이유가 있느냐’ 였습니다. 훗날 아이폰 돌풍이 불었을 때는 ‘겁먹지 마라.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한편으로는 두렵지만 한편으로는 힘이 났습니다.
삼성전자는 2012년 사상 최초로 휴대폰 세계 1위를 달성했지만 이 빛나는 성과를 축하하는 어떤 파티도 열지 않았다. 애플이 여전히 우위에 있는 태블릿PC, 스마트폰 운영체제의 종속 가능성 중국 업체들의 거센 추격 등 지금껏 일궈 놓은 성공을 위협할 만한 요인들은 도처에 깔려 있다.
어쩌면 삼성의 축하 파티는 영원히 없을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선도기업이라도 글로벌 경쟁 속에서는 결코 안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이건희 회장이, 그리고 삼성이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 오륜마크 달고 훨훨
이건희 회장이 1993년 신경영 여정 중 주목되는 도시 중 하나는 스위스 로잔이다. 그해 6월 이 회장은 프랑크푸르트를 떠나 로잔으로 향했다. 로잔은 IOC 본부를 비롯해 올림픽 박물관 등 올림픽 관련 시설들이 집중되어 있는 올림픽의 도시이다. 이 회장은 수행 임원들에게 로잔의 올림픽 인프라를 견학하도록 했으며 사마란치 당시 IOC위원장도 만났다.
이 회장이 로잔을 방문한 배경은 이듬해 드러났다. 1994년 그는 “삼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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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가치 제고를 위해 올림픽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며 2000년 쯤에는 삼성이 올림픽 스폰서가 될 수 있도록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올림픽 마케팅에 대한 이 회장의 관심은 집요하여, 1995년 초에는 더욱 구체적 지시를 내렸다. “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삼성 브랜드를 알리는 방안을 마련하라.” 이에 따라 삼성은 애틀란타 한복판에 삼성 홍보관인 ‘삼성 96 엑스포’를 개관했다. 이곳에서 미국, 일본, 러시아 등 세계 14개국이 참가해 문화와 민속음식, 토속상품을 전시하고 교류했다.
현지 언론은 “96삼성 엑스포가 소비자들에게 올림픽 이미지를 심어 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삼성은 1,000만 달러를 투자해 모토로라나 파나소닉이 4,000만 달러의 정식 올림픽 스폰서 비용을 내고 얻은 효과와 비슷한 효과를 얻었다”고 평했다. 이 회장도 개인적으로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IOC위원으로 피선되는 영예를 안았다. 그러나 안팎의 호평에도 이 회장은 만족하지 않았다.
1997년 5월 7일, 이건희 회장과 사마란치 IOC 위원장은 신라호텔에서 1998년 나가노올림픽과 2000년 시드니올림픽에서 삼성전자가 무선통신 분야 공식 스폰서가 된다는 내용의 조인식을 체결했다.
삼성의 올림픽스폰서 등장은 글로벌 시장에서 삼성 브랜드의 위상을 높이는 변곡점 역할을 했다. 계약 이후 삼성의 브랜드 가치는 무려 5배, 판매량은 40배가 넘는 초고속 성장신화를 일궈냈다.
특히 시드니 올림픽의 마케팅은 대성공이었다. 삼성은 시드니올림픽 경기장 주변에 대형 시설물을 설치하고 각종 행사를 통해 광고, 홍보활동을 집중적으로 벌였다. 메인 스타디움이 있는 올림픽 파크에서 삼성 홍보관을 개관했다. 이곳에서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은 삼성의 첨단 제품을 직접 만져보고 사용하는 기회를 가졌다. 삼성 홍보관은 100만 명이 넘는 방문객이 찾아오는 올림픽기간 동안 인기 만점이었다. 삼성은 시드니 올림픽에 휴대폰 등 총 25,000대의 통신제품을 공급해 대회 진행의 필수인 통신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했다. ‘뉴욕타임스’는 “올림픽경기장과 선수촌 곳곳에서 울리는 삼성의 휴대폰이 이번 대회를 최초의 무선 올림픽으로 만들었다”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삼성은 2002년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과 2004년 아테네 올림픽,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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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노 동계 올림픽까지 연이어 올림픽 파트너로 참여해 ‘대박’을 터뜨렸다.
삼성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2007년 4월 베이징에서 IOC와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까지 8년간 올림픽 파트너 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을 통해 삼성은 코카콜라 등과 함께 올림픽 파트너 기업으로서 확고한 브랜드파워를 구축하게 되었다.
2014년 2월 15일
- 다음에 제2부 제3장부터 계속됩니다. -
◉ 본문 5쪽의 ‘목계 木鷄’ 에 대한 설명
장자 달생편에 나오는 이야기로 주나라 선왕이 싸움닭을 좋아하여
기성제라는 사람에게 닭의 조련을 부탁함
- 며칠 후 왕이 물으니
“아직 교만하여 자기가 최고인줄 아니 멀었습니다.”
- 또 얼마 후 왕이 물으니
“아직 상대에 쉬이 반응하니 태산 같은 묵직함이 없습니다.”
- 그 뒤에 왕이 또 물으니
“조급함은 버렸으나 너무 공격적이니 눈에 힘을 빼야 합니다.”
- 그리고 상당한 기간이 지나 왕이 물으니
“이제 최고의 싸움닭이 되어 닭이 마치 나무로 만든 것(木鷄)같으니 어 느 닭이든 이 닭을 보면 도망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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