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에서 삶을 배우다

2015. 12. 17. 17:48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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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 삶을 배우다

■ 김종회 지음

0 경남 고성 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 동대학 문학박사

0 현 경희대 교수, 한국 문학 평론가 협회 회장

0 한국 아동문학 연구센터 소장

0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 촌장

0 1988 문학 사상을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0 문학사상, 문학수첩, 21세기 문학, 한국문학평론 등 문예지 편집위원

0 위기의 시대와 문학, 문학과 숲과 나무 등 80여 권의 저서

0 사단법인 일천만 이산가족 재회 추진위원회 사무총장

0 통일문화 연구원 원장 등 역임

0 북한 문학과 해외동포 문학에 깊은 관심

■ 머리말 : 문화의 눈으로 보는 세상

자연은 소중하고 자연스러움은 귀한 것이지만, 자연 상태가 모두 값있는 것은 아니다. 그 상태에서 벗어나 삶을 보다 가치 있고 보람 있게 가꾸어 가는 행위 규범이 곧 문화이다. 문화에는 인위적인 노력이 결부되어 있고, 나아가 사회공동체의 구성원이 이를 계발·보존·계승해야 하는 당위성이 포괄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문화가 정신적 차원의 기능과 역할을 표방한다면 물질적 차원에서 그것을 감당하는 용어는 문명이다. 인류 역사는 결국 이 문화와 문명의 연대기적 발전 과정을 기록한 것과 다르지 않다.

이 책은 내게 세 번째 산문집이다. 여기에 실린 글은 거의 한 달에 한 편씩 쓴 것이다. 이 길지 않은 글들을 쓰기가 날이 갈수록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잘 몰랐는데 그때가 곧 우주와 자연과 인생의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 또는 이치 앞에서 겸손을 배우는 수업 기간이었던 셈이다.

2015 10월 김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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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빛보다 밝은 문필

■ 백년의 사랑

“사람이 어떻게 죽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곧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문제와 같다.”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2000년 9월에 유명을 달리한 필자의 스승 황순원 선생께서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이다. 죽음의 순간은 그 사람이 살아 온 인생 전체를 반영한다. 다가올 죽음을 걱정하기 보다는 남아 있는 삶의 나날에 정성을 다하는 것이 오히려 두려움을 넘어서는 길이 된다는 뜻이다.

말년의 선생께서는 이 땅에서 수(壽)를 다하고 세상을 하직할 때, 가족이나 주위에 폐를 끼치지 않고 갈수 있도록 기도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평생을 해로한 부인 양정길 여사와 함께 서울 사당동에서 살 때, 두 분의 모습은 한 쌍의 단정학(丹頂鶴)처럼 고고 했다.

생전의 선생께서는 아내의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자신의 문학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아울러 그 절반은 아내의 몫이라고 선언하듯 말했다. 데뷔작이라고 일컬어지는 시 <나의 꿈> 이후 시 104편, 단편 104편 중편 1편, 장편 7편에 이르는 황순원 문학의 집적 뒤에는 그 같은 뒷받침이 숨어 있었다.

두 분은 1915년 생 동갑이다. 방년 20세가 되던 1935년 1월, 숭실중학을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 제2고등원으로 유학한 선생과, 나고야 금성여자전문의 학생이던 부인은 일생의 반려자로 출발했다.

평안남도 숙천에서 과수원을 경영하며 만주 봉천에 사과를 수출하기도 한 양석렬의 장녀인 신부는, 평양숭의여학교를 다닐 때 문예반장을 지냈고 선생과는 이때부터 교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잇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문학적 재능과 소양을 가진 이들의 연애결혼이었다.

선생께서 먼저 떠나신 지 14년이 된 지난 9월 5일. 마침내 그 부인도 그렇게 그리워하던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셨다. 향년99세다.

두 분이 함께한 세월 65년, 먼저 간 선생을 기리며 산 세월 14년은 이제 시대사의 갈피 속으로 묻혀질 것이지만, 한 시대의 징검다리를 함께 건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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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의 이야기는 많은 이들에게 ‘백년의 사랑’으로 남아 있다.

두 분 묘역에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이 새겨 있다.

“20세기 격동기의 한국문학에 순수와 절제의 극을 이룬 작가 황순원 선생(1915-2000), 일생을 아름답게 내조한 부인 양정길 여사(1915-2014), 여기 소나기 마을에 함께 잠들다.”

■ 가을의 기도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다형(茶兄) 김현승 시인의 시 <가을의 기도>첫 연이다. 어느덧 가을이 깊었다. 지난해 유명을 달리한 최인호 작가의 표현을 빌면 ‘온통 붉은 축제 같던 여름’이 어느 결에 퇴장하고 만산홍엽과 조락의 계절이 지금 여기에 당도했다. 미상불 이번 가을의 기도는 그 언사 가운데 포함해야 할 절목이 너무도 많다. 한 해가 그 종반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돌아보니, 온 나라에 회오와 탄식이 넘쳐났다.

가을을 기도의 계절로 인식한 김현승은 일제강점 초기 평양에서 목회자의 아들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기를 보내며 미션계열인 숭일소학교를 다녔다. 다시 평양에서 숭실중학교를 다녔으며 20대 초반 약관의 나이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여, 궁핍하고 어두운 시대의 모습을 민족적 성향의 낭만주의와 종교적 세계관에 담았다. 그의 시어들은 깔끔하고 투명하다. 당대의 문인 정지용, 김기림, 이태준 등이 그의 시를 크게 칭찬하면서 일찍부터 문단에 이름이 알려졌다. 해방 이후에는 교직에 적을 두고 지속적으로 시를 썼다.

“가을에는 /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의 기도> 두 번째 연이다. 기독교의 신본주의와 문학의 인본주의를 함께 포괄하여, 온 생애를 일관한 그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갈등 속에서 정갈한 가을 시편을 남긴 시인으로부터 우리가 ‘기도’를 배워야 할 계절이다. 우리 개인을 넘어서 이 나라와 민족을 생각하면, 참으로 기도해야 할 일들이 눈앞에 첩첩하다. 세월이 지나면 우리의 후대가, 그 어려운 시기에 당신의 세대는 나라를 위해 무엇을 염원하고 또 실천했는가를 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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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어서 별이 된 예술가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虎死留皮 人死留名). 어쩌면 일생을 사는 것이 결과가 이름 석 자로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사람은 자신의 행전(行傳)에, 공인은 역사의 기록에 족적을 남긴다. 어떻게 죽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곧 어떻게 살 것이냐 하는 문제와 같다는 인식에 비추어 보면, 이름을 남기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살다보니 그 이름이 크게 남는 형국이 된다.

동양문화권의 정명주의(正名主義)에 투철했던 선비들은 스스로 이름에 때를 묻히지 않으려 부심했다. 그렇게 신명을 다해 노력해도 후세의 사필을 피해가기는 어려웠다. 이처럼 실리보다 명분이 앞서는 전통사회에서는, 생전의 평가가 사후에 반복되는 사례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다층적 감각과 속도를 앞세우는 오늘날에 와서는, 자신의 시대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인물이 다음 시대에 기릴만한 인물로 부상하는 경우란 매우 드물다. 물론 예외가 없지는 않다.

허먼 멜빌은 생전에는 무명에 가까웠으나 사후에 새롭게 평가되어 미국을 대표하는 문인의 반열에 오른 작가이다. 그의 소설 모비딕은 19세기 미국 문학의 르네상스를 이끈 독보적인 성과로 인정받고 있다. 멜빌의 생애는

- 1819 뉴욕의 부유한 무역상 가문에서 출생 - 13세 아버지의 파산으로 학교 중단, 생활전선에 - 20세부터 여객선 선원 2년 후 남태평양 포경선 선원 - <타이피족>등 일련의 해양 모험소설 - <모비딕>을 완성한 것은 32세 때 - 멜빌의 말년은 비참했고, 심장병으로 죽었을 때 그를 문인으로 기억하는 이는 드물었음 - 1919년에야 멜빌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짐

생전에 평가받지 못하기로는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브론테도 뒤지지 않는다. 친언니 샬롯 부론테의 <제인 에어>가 출간과 동시에 호평을 받은 것과는 달리, <폭풍의 언덕>은 도덕성을 훼손하고 난해하다는 혹평을 받았다. 에밀리는 1848년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타계했다. 그녀의 작품은 사후 반세기가 지난 19세기 말이 되어서야 문학적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고 마침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멜빌의 <모비딕>,과 더불어 영문학 3대 비극으로 꼽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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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시인 중에도 사후에 재평가 된 시인이 있다. 바로 김달진 시인이다. 불교 사상에 깊이 심취하여 우주자연을 비고 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삶의 소탈한 깨우침을 노래한 그의 시는 이제 놓쳐서는 안 될 우리 문학사의 한 대목이다.

고흐가 파리에서 보낸 2년, 그는 참으로 비통하게도 캔버스를 구하지 못해 그림 위에 그림을 그렸고 물감의 소모를 걱정해야 했다. 생전에 부와 명예를 모두 누렸던 피카소에 비하면 통분하기까지 한 정황이었다. 하지만 그 궁핍과 고통 속에서 피어난 예술이 이제 널리 세상을 밝히고 있다. 이 또한 살아서 힘겨웠으나 죽어서 위대한 이름을 남긴 하나의 범례이다.

■ 한 작가의 새로운 경계

강태근 작가, 그의 은사이자 필자에게도 그러한 고(故) 황순원 선생께서는 그를 특별히 아꼈다. 역사상 가장 오랜 권위와 전통을 가진 경희대 전국 고교문예 현상공모에서, 그는 황 선생의 선(選)을 받았다. 그에 뒤이어 1968년 문예장학생으로 경희대 국문과에 입학했다. 황 선생의 문하에서 1988년 박사 학위까지 모두 마치고 대학 강단으로 진출 할 때, 황 선생은 정성어린 추천서를 써주었고 심지어는 백지에 도장만 찍어 추천서 문안을 위임하는 신뢰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강 작가는 스승 복이 많은 사람이다.

- 충남 논산 출생- 대전 보문고 - 고교 재학 중 제11화 대한민국 학술문화예술상 수상 - 학위를 마친 후 여러 대학의 소설 창작 및 소설론 강의 - <네 말더듬이의 말더듬>과 <신을 기르는 도시>등 그의 소설 세계는, 인간의 외형과 내면이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고 보고 그 본질의 정체성을 탐색하는 경향임

그가 몸담고 있던 사학 재단과의 갈등 때문에 현장과 거리, 법정에서 투쟁한 오랜 세월이 그의 소설 세계와도 무관하지 않다.

미상불 이 투쟁의 기간을 통하여, 그는 많은 것을 잃거나 포기해야 했고 그만큼 심정적 고통도 극한의 지경에 있었을 것이다. 지난 2012년 선보인 장편소설 <잃은 사람들의 만찬>은 바로 작가 강태근의 가슴 아픈 자전적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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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계기로 강 작가가 자신을 금압했던 오랜 굴레를 벗어던지고, 저 해맑았던 소년 수재(秀才)의 초심을 회복하여 더 유암(柳暗)하고 화명(花明)한 창작의 경계를 열어갔으면 한다.

* 柳暗花明 : 버들은 무성하여 그늘이 짙고 꽃은 활짝 피어 밝고 아름답다.

봄 경치의 아름다움

■ 예술혼의 두 경우

인류가 만든 악기 가운데 가장 장엄하고 위력 있는 것은 파이프오르간으로 알려져 있다. 그 기원은 고대 그리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중세 유럽에서 소규모의 이동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오늘날과 같은 규모와 음향효과는 20세기 들어 맥주 캔 이이디어에서 유래했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숨어 있다.

미국의 젊은 피아니스트 론 세버린은 주류상회 앞을 지나다가, 그 앞에 쌓인 빈 맥주 캔을 보고 눈이 번쩍 뜨였다. 빈 캔들이 줄지어 쌓여 있는 것을 보는 순간,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음악적 영감이 섬광처럼 그의 영혼을 흔들었던 것이다. 그는 곧 가게 주인에게 자신이 빈 캔들을 치워주겠다고 제안했다. 주인은 고맙다며 그렇게 하라고 했다. 당시 세버린은 캘리포니아 롱비치 주립대학 학생으로, 다우니교회의 오르가니스트였다.

세버린은 한 아름씩 캔을 실어 와서 손질하기 시작했다. 위와 아래의 뚜껑을 따내고 소독하고 긴 파이프가 되도록 용접하는 등 그렇게 3년의 세월이 지난 후 파이프 오르간을 만들어 내는 데 성공했다. 인류 역사에 새롭고 웅장한 악기 하나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인간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술이 담겼던 그릇을 고상한 예술의 도구로 만들었다. 같은 물질이라도 쓰기에 따라 그렇게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니, 같은 물을 뱀이 먹으면 독이 되지만 양이 먹으면 젖이 되는 이치와 마찬가지다.

예술가는 때로 자신의 생명과 맞바꾸면서도 이 험난한 길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위대한 예술 작품을 남긴 이들의 삶에는 , 외롭고 힘든 발걸음이 아로새겨져 있다. 베토벤의 선율에서, 고흐의 화폭에서, 두보의 방랑시편에서, 이상의 초현실적 문면에서 그 여러 중좌가 목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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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선 선생

- 모국어를 지킨 재미 작가. 일생을 미국에 머물며 후배 문인들을 문학의 길로 인도, 샌프란시스코 한국문학인협회조직, 창작집 발간, 문학 캠프운영 등

- 2012 경남 하동에서 열리는 이병주 국제문학제의 국제문학상 대상 수상

‘하늘 그물은 성기지만 무엇하나 빠뜨리지 않는다(天網恢恢 疏而不漏)’고 노자는 말했다. 우리도 자기 몫을 뜨겁게 감당한 예술가들처럼 눈앞의 일에 성실을 다한 다음에야 그 세월이 가져다줄 보상의 결과를 기대하며 기다려볼 수 있겠다.

*恢 넓을 회(성글다) 漏 샐 루(새다, 빠뜨리다)

■ 우리 문학의 새로운 길

설 연휴에 김진명 작가의 소설 <고구려>를 읽었다. 여러 소문을 들었으나 큰 기대없이 가벼운 독서로 출발했다. 그런데 첫 권을 마치면서 우선 읽는 자세를 바꿨다. 편안하게 기대어 읽을 수가 없어 정색하고 앉아야 했다. 한때 낙양의 지가(紙價)를 올렸던 작가의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를 두고 정론적 평가 자체를 외면했던 필자로서는, 만만찮은 충격과 함께 작가 및 작품을 괄목상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는 역사소설이 가진 미덕을 발양하여, 협소한 사서의 기록을 바탕으로 자유로운 상상력의 날개를 펼쳤다. 고구려 15대 미천왕 을불과 당대의 재상이었던 창조리를 중심으로 전략과 경륜, 인품과 지혜의 다양다기한 측면을 천착했다. 무엇보다 소설 읽기의 재미와 여운이 길게 남는 교훈을 놓치지 않았다. 때로 무협 소설을 방불케 하는 우연성 또는 극적 구성의 남발, 역사 전체의 성격에 대응하기 어려운 제한적 시각 등이 여전히 잔존한다. 하지만 우리 젊은이들이 삼국지보다 먼저 고구려를 알아야 한다는 작가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을불과 창조리, 주아영, 최비, 단중목걸, 모용외 같이 생동하는 힘과 복합적 의미를 가진 인물들의 형상화가 결코 간략한 기량위에서 산출되었을 리 없다. 작가는 이 작품을 17년 간 준비 했다는데, 미상불 작품의 성장은 곧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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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의 세계관 성숙과 비례할 것이다. 일찍이 드라마 작가 신봉승의 붓끝에서 만고역적 한명회가 한 시대를 풍미한 경세지략가로 변신한 것은, 충실한 사료의 검색과 객관적인 재해석의 노력이 있고서야 가능했다.

그런가 하면 근래의 텔레비전 사극들은, 지나치게 고증의 엄정성을 무시한다. 역사적 사실을 훼손한 채 문학적 상상력만 확대해서는 결코 좋은 작품이 될 수 없다.

역사문학은 역사와 문학이라는 두 중심 줄기의 균형과 조화를 통해 생성되는 혼종성의 예술이다. 사실성에 치우치면 문학적 묘미가 사라지고 상상력에 치우치면 역사적 근거가 취약해진다. 이 양자를 거멀못처럼 잘 결부하면서 이야기 재미를 산출한 이병주나 이문열의 역사 소재들이 참고가 될 수 있겠다. 문학이 독자에게 깨우침과 즐거움을 함께 공여해야 하는 시대에 <고구려>는 하나의 범례를 선사했다. 그런 만큼 다수 독자의 눈길로부터 주목받지 못하는 오늘의 우리문학이 선 자리와 갈 길을 다시 돌아보는 자기 성찰의 계기로 삼았으면 한다.

■ 작가는 작품으로 죽음을 넘는다

봄꽃 향내가 한창 풍성하던 2011년, 평소 가까이 모시던 김용성 선생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허리가 안 좋아 병원에 들어가 계시다기에 수술 날짜가 잡혔다는 말씀인 줄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암 말기 판정을 받으셨다는 대답이었다. 지난해 검진에서 별 문제가 없다고 하더니, 암 말기가 그렇게 느닷없단 말인가.

다시 병원을 찾아간 내게 칠순을 넘겨 백발이 성성한 작가는 세 가지 부탁을 했다. 그동안 수필집을 한 번도 묶은 적이 없는데 모아 놓은 것이 한 권 정도 분량은 될 것이다. 그리고 여러 비평가와 연구자들이 쓴 김용성 연구도 한 권이 될 것이다. 끝으로 1984년 이후 절판된 <한국현대 문학사 탐방>의 재발간이 소원이라는 가슴 아픈 부탁이었다.

무엇보다도 생전에 한권이라도 보여드릴 수 있도록 서둘러야 했다. 그분 아픈 문제는 의논할 틈도 없이 움직여서 속히 가편집된 책을 들고 찾아뵈려던 바로 전날 부음을 들었다. 망연자실 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이름 있는 한 작가가, 그렇게 친숙했던 한 인간이 그렇게 쉽게 유명을 달리할 수 있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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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소와 영결식에서 흘리는 눈물은 산 자를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분을 보내고 기억하는 자의 빈 터에 선 내게 두 가닥의 절실한 깨우침이 남았다. 하나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는 옛말이었다. 대학과 문단의 선배로서 함께 가꾸던 양평 소나기마을의 촌장으로서, 그만한 명성과 인품과 기량을 가진 분의 부재에 나는 한동안 공황상태를 견뎌야 했다.

다른 하나는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역시 고색창연한 옛말이었다. <잃은 자와 찾은 자>, <리빠똥 장군>, <도둑일기>, <기억의 가면>등은 그분이 이 세상에 남긴 빛나는 문학적 업적의 이름들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고 작품으로 사후의 세계를 산다.

일찍이 만해 한용운이 육당 최남선의 집 앞에서 친일의 길로 가버린 벗의 죽음을 통곡했는데, 육당은 집 안에서 그 울음소리를 들어야 했다. 살아 있어도 산 사람이 아니라는, 기막힌 힐난이었다. 작가 이병주는 <그 테러리스트를 위한 만사(輓詞)>라는 소설에서 뜻 있는 테러는 살생이 아니라 이미 죽은 자를 죽이는 살사(殺死)라고 피력했다. 두 경우 모두 삶과 죽음의 경계를 올곧은 정신의 유무에서 찾았다. 작가로서 이 경계를 뛰어 넘는 비결은 오직 다음 세대에도 그 평가가 이어질 작품을 남겼느냐에 있다.

김용성의 <도둑 일기>는 성장소설의 사회학을 보여준 보기 드문 수작이다.

*만사(輓詞) : 죽은 자를 슬퍼하여 지은 글

중국의 방랑시인 두보(杜甫)가, ‘관을 덮고서 일이 정해진다’라고 시의 한 구절로 쓴 것은 생전의 성과가 사후의 명성을 결정한다는 말의 함축이다. 김용성 작가의 스승 황순원 선생도 평상시에 늘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곧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다’ 라고 강조하곤 했다. 죽어도 살 수 있는 길, 그 길은 기실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열려 있다.

■ 박완서, 체험과 치유의 글쓰기

“문인들은 가난하니, 나 죽어서 찾아오는 분들을 잘 대접하고 조의금은 절대 받지마라.” 2011년 1월 22일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작가 박완서 선생이 가족들에게 남긴 말이다. 불혹의 나이에 문단에 나와 꼭 40년간 현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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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쓰고 작품 활동을 마감한 작가, 문학에 친숙한 이에게나 그렇지 않은 이에게나 어머니처럼 누나처럼 정겹고 풋풋한 정감을 남긴 작가.

‘작가에게는 자신의 시대가 유일한 기회이며, 시대는 작가를 위해 만들어지고 작가는 시대를 위해 만들어진다’고 J. P. 사르트르는 말했다. 1931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일제강점기의 곤고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성장기의 시작을 힘겨운 전쟁과 함께했으니, 한 작가를 위해 준비된 시대는 참으로 험난했다. 그런데 그 파란만장한 체험의 날들이 이윽고 한국문학의 돌올(높이 솟아 우뚝함)한 봉우리를 추동하는 힘이 되었으니, 중국 청대의 역사가인 조익의 말 ‘국가불행시인행(國家不幸詩人幸)’은 박완서 선생에게서 유익한 범례를 얻었다.

선생의 문학 세계를 세 분야로 나누면

1. 등단작인 <나목>,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처럼 청소년기 이 래로 혹독하게 겪은 역사적 현실을 소설화 한 것

2.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처럼 산업화 시대 소시민의 허위의식 을 적출한 작품

3. <미망>처럼 근대 이후 개성을 중심으로 한 사대부가와 기층민의 삶을 시 대사적으로 다룬 경우

춘원 이광수가 끊임없이 ‘문사(文士)’로 자처하면서도 마침내 자신에게 부하된 시대의 의미를 감당하지 못했기에 우리는 근대 문학의 아버지를 잃었다. 반면 박완서 선생은 무리한 옥심을 내지 않았고 그렇다고 완만한 걸음걸이로 나태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의 방식으로 시대의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했고 또 동시대인에게 완곡어법의 질문을 던졌다. 이제 우리는 박완서 없이, 다시 말해 근대 이래 역사의 상처를 잔잔한 호소력으로 풀어내는 현장 체험의 이야기꾼 없이 새로운 시대를 맞아야 한다.

선생은 작품세계가 그러했던 것처럼 실제의 생활에서도 정이 많고 온화했던 분이다. 박경리 선생이 타계했을 때 그토록 가슴 아파하며 인생이 무상함을 탄식하던 당신은, 이제 스스로 풍성하던 잎을 다 벗어버린 겨울나무로 돌아갔다. 우리 문학은 그리하여 기릴만한 품성과 빼어난 문학을 함께 갖춘 보기 드문 작가를 잃은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금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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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술적 허구의 힘

1980년대 초반, 아직 정정하시던 60대 후반의 작가 황순원 선생 댁에 제자와 문인들이 세배를 드리러 모였다. 대학원에서 한창 문예이론과 문학비평을 공부하던 필자는 동석한 어느 선배 문인에게 매우 무례한 질문을 던졌다. 이번에 출간된 그 신문 연재 장편은 단편을 확장한 것에, 다른 작품에 비해 문학성이 뒤떨어진 차라리 쓰지 않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기실 모임의 분위기를 밝게 해보자는, 또 매우 가까운 분이라 어리광도 겸한 어투였으나, 지금 생각하면 뒷덜미가 서늘할 만큼 철없는 발언이었다. 동석한 다른 선배 한 분이 정색하고 반박했다. 한 책임 있는 작가가 작품을 쓰면 어떤 경우라도 그 나라의 문학적 성과에 기여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날 필자는 다른 사람의 작품에 대한 비판에는 칭찬보다 더 신중을 기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을 익혔다.

예술을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건강한 비판정신에 근거한 합리적 비난에 귀 기울일 준비를 하는 것이 옳다.

역사소설이 역사가 아니라 소설인 것처럼, 종교예술도 종교가 아닌 예술이어야 제 이름에 값한다. 종교가 맨 얼굴을 내밀고 있으면 예술이 설 자리가 없다. 반면에 예술적 형식이 충일하면 종교는 곳곳에 그 입지를 얻는다. 윌리엄 와일러의 영화 <벤허>는 단 한 번도 예수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면서 그로 인해 오히려 사랑과 은혜의 감각을 한층 증폭시킬 수 있었다. 이 사례는 진정한 예술적 허구가 무엇이며 그것을 현현하는 스토리텔링의 의미와 기능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고 보니, 이 글이 서두에 적은 필자의 설익고 치기 어린 비판을 조용하 웃으며 바라보던 황순원 선생은 소설적 허구의 장인이었다. 말없이 말을 전하던 그 깊은 눈빛, 그날의 깨달음은 두고두고 내 삶에 경종이 되었다.

◉ 문화와 인문학의 뜰

■ 하동과 창원의 문화분권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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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강, 바다가 아름답게 어우러진 곳을 삼포지향(三包之鄕)이라고 부른다. 그 대표적인 고장이 경남 하동이다. 지리산과 섬진강, 다도해가 무슨 장날에 만난 것처럼 얼굴을 한 데 모은 자리인 까닭이다. 그 하동이 2009년 스스로를 ‘문학 수도’라 명명하고 공식적인 선포식 행사를 열었다. 물론 더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행보이다. 해마다 ‘토지문학제’와 ‘이병주국제문학제’를 비롯한 풍성한 문학 행사들이 이곳에서 열린다.

박경리 소설 토지의 무대이자, 이병주의 <지리산>의 배경이며, 김동리의 <역마> 문학비가 서 있는 곳, 시인 정공체와 정호승, 작가 김병총과 수필가 강석호 등이 하동을 출생지로 한다. 그러니 서부 경남의 한적한 고장에서 새롭고도 의욕적인 지자체의 트랜드로 ‘문학 수도’를 내세울 만하다. 단순히 전시성 문화행사로 그치지 아니하고 지역 주민들의 공감대와 자긍심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그 거창한 구호가 전혀 어색하지 않게 들릴 터이다.

재미있는 것은 문화적 전이 현상이 그 인근 지역으로 확산 되었다는 점이다. 경남 창원 역시 2011년 스스로 ‘아동문학수도’라고 선언했다. 창원은 마산과 진해가 통합된 지자체로 이원수의 <고향의 봄>을 모태로 아동문학의 의미와 지역적 비전을 결합하려 시도했다. 그동안 창원에서는 ‘세계아동문학축전’과 ‘창원아동문학상’이 운영되고 있고, ‘세계아동문학대회’도 열렸다.

지역 주민들이 이를 문화적 향유로 감각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문화권 밖에 있는 사람들도 그곳에서 발양되는 교훈과 즐거움을 공유할 수 있도록, 이 다양성의 성과를 거울삼아, 매일 같이 중앙의 중앙이라는 서울 여의도에 모여 싸움박질만 일삼는 ‘고급룸펜’들이 반성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작가 이병주(1921~1992)

- 동경 유학생, 일본군 학병, 언론사 주필, 필화 사건으로 감옥 생활

- 80여 권의 소설 : <관부 연락선>, <산하>, <소설 남로당>등

■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수십 개 문학관 가운데 가장 많은 유료 관람객이 찾아오는 곳은 봉평의 이효석 문학관이었다. 2012년 기준 연간 6만~8만 명이 관람한다고 하니, 대단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대개의 문학관은 하루 수십 명의 방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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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효석 문학관에는 그럴 만한 전제 조건이 있다.

1. 교훈이 될 만한 체험이 동반, 학교에서도 그런 과정을 요구

2. 봉평 주변은 리조트와 콘도미니엄 등 사람이 모일 수 있는 입지

3. 메밀꽃 철에 열리는 ‘이효석 문학제’가 견인차의 역할

그런데 이 놀라운 기록을 넘어서는 새로운 문학관이 수면위로 떠올랐다. 양평의 황순원 문학촌 ‘소나기 마을’이다. 2012년 이 곳의 유료 관람객은 10만 명에 이르렀고, 개관 5년 만에 13만 명을 넘어섰으니 미상불 한국 최고의 숫자이다. 이효석 문학관이 10여년 만에 자리를 잡았는데 소나기 마을은 5년 만에 이와 같은 성과를 거두었다.

물론 여기에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수도권에서의 접근성이 뛰어나다. 서울 외곽에서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어른이 된 사람, 아직 학생으로 있는 청소년들 모두 <소나기>라는 소설을 알고 있다. 특히 어른 세대에게 이 순후하고 서정적이며 깔끔하게 절제된 단편소설은, 어린 시절 첫사랑의 꿈을 동반한 꿈의 근원으로 기억된다.

<소나기>속 딱 한 줄.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간다는 것이었다’는 문장에 의지하여 세워진 이 문학촌은, 그야말로 창의적이고 참신한 아이디어의 산물이었다. 좋은 생각이 생산적인 결과를 약속하는 하나의 범례가 거기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그러한 교훈적 언사가 아닐 터이다. 어느 한 사람이라도 작가의 마을을 찾아 마음의 안식을 얻고 조금이라도 어린 날의 순수를 회복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쉼터가 된다면 그 소중한 가치는 오랫동안 지켜질 것이다.

■ 인문학은 돈이 될 수 있는가

윈스턴 처칠이 세계를 향하여 방송을 하려던 날이었다. 처칠은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택시를 잡은 다음 BBC방송국까지 가자고 했다.

“미안하지만 다른 차를 이용해 주십시오. 저는 오늘 그렇게 멀리 갈 수가 없습니다.” 운전기사가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니 어째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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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칠이 다급하게 말했다.

“보통 때라면 좋습니다만. 한 시간 후에 처칠 경 방송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꼭 들어야 합니다.”

참으로 기분 좋은 대답이었다. 처칠은 얼른 지갑을 열고 1파운드를 주었다. 기사가 얼핏 그 지폐를 보고 말했다.

“에이, 그냥 타세요. 처칠인지 뭔지 보다 돈부터 벌고 봐야겠소.”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돈에 대해 철저하게 무관심했다. 어느 날 그가 미국의 석유재벌 록펠러 재단으로부터 1천 5백 달러짜리 수표를 받았다. 책을 보다가 그 수표를 책갈피에 넣어 두었는데 얼마 후에 보니까 수표는 물론 책도 누가 가져가버렸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돈이 좋긴 좋은 모양이지? 책까지 돈을 보고 따라갔으니…….”

이 두 예화를 통해 우리는 돈을 대하는 정반대의 반응을 나타내는 두 인격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두 사람 가운데 누가 더 행복한가라는 물음에 제기된다면 많은 이들이 후자라고 교과서적인 대답을 할 것이다. 그러나…….

돈의 속성과 운용을 보다 직접적으로 다루는 학문이 경제학이라면 그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인 인문학이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은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지속적으로, 또 동시다발적으로 인문학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기업은 인문학 전공자의 채용을 늘리고 대학은 인문 교양교육을 강화하고 있으며, 심지어 인문학이 대세라는 말까지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어쨌든 세상은 좋은 생각을 금방 내던져버리는 운전기사가 아니라 답답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이인슈타인이 더 소중한 것이다. 만약 그가 돈에 눈을 뜬 사람이었다면, 물리학의 역사를 바꾼 상대성 이론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기대할 만한 점은 그렇게 배금주의의 올무를 벗어난 인문적 삶의 방식이나 창의적 상상력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은 돈을 버는 사람은 ‘태도’가 드리지만 큰 돈을 버는 사람은 ‘생각’이 다르다고 하지 않던가. 인문학, 그것도 제대로 된 인문학은 돈이 되는 숨겨진 길이다.

■ 투사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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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동의 겨울을 밀어내고 마른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새 움이 돋는 봄날이 오고 있다. 지난날의 혹한을 떠올리면 문득 기척도 없이 다가서는 시 한 수.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익히 알려진 성삼문의 옥중시이다. 그는 세조의 권세와 위협에 굴하지 않고 목숨을 던져 절조를 지켰다. 유학의 정명주의를 그 정신으로 확립하고 몸으로 체현한 하나의 전범, 그렇기에 이 시조에는 ‘투사 성삼문’의 면모가 약여하다. 이 시조중의 봉래산은 금강산이다. 다음의 오언절구 한 수를 더 읽어보자.

격고최인명(擊鼓催人命) 북소리 내 목숨을 재촉하는데

서풍일욕사(西風日欲斜) 서녘바람 지는 해가 기울어 가네

황천무객점(黃泉無客店) 황천으로 가는 길에 주막 하나 없다는데

금야숙수가(今夜宿誰家) 오늘 밤은 어디서 잠을 이룰고

이는 성삼문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던 순간에 남긴 절명사(絶命詞) 또는 임사부절명시(臨死賦絶命詩)라 부르는 한시의 명편이다.

그대여, 여기서 잠시 생각에 잠겨보라. 이 이름 있는 한시 가운데서 앞서의 시조에서 보았던 ‘투사 성삼문’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는 어느 결에 사라지고, 이 처연하고 숨막히는 감회에 넘치는 시의 문면에는 ‘시인 성삼문’만 남아 있을 뿐이다.

바로 이 지점, 이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인 성삼문이 있고서야 투사 성삼문이 가능하리라는 인문적 사고와 정신주의의 개가(凱歌) 말이다. 우주와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명료한 결론에 도달했다면, 삶의 태도와 행위는 이미 결정된 바와 마찬가지다. 거의 모든 경우 기능과 방법은 사고와 인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시인 성삼문의 유교적 세계관은 어느 순간 급작스럽게 만들어진 것은 아니며, 그것이 갖는 자기 체계의 지속성 아래에서 투사 성삼문은 그 부분집합에 해당한다. 곧 이 경우의 시인은 대개 투사일 수 있으되. 투사가 모두 시인이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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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시 한 번 돌이켜본다. 내 속에, 우리 속에, 숨은 보화처럼 잠복해 있어야 할 ‘참한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 모두가 ‘열혈의 투사’처럼 서슬이 시퍼런 몸짓으로 일관하는 이 세상은 대체 어디로 갈 것인가.

이러한 삶의 역학구조를 인식하지 못하면 너 나 없이 오만해진다. 좀 더 알면 질문하고 더 많이 알면 기도한다고 했던가. 우리 속에, 우리 사회 가운데 어딘가 피폐한 영혼으로 숨어 있는 ‘시인’을 깨우기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싶은 오늘이다.

■ 다시 인문학의 길을 묻다

1970년 40세의 늦깎이로 등단하여 데뷔작 <나목>을 비롯한 많은 작품을 남긴 사람. 뼈아픈 전란의 경험과 아들을 먼저 보내는 참척을 당하는 등 온갖 간난신고 가운데서도 인생의 말년인 80세까지 소설을 썼다. 우리 모두가 아끼고 사랑했던 작가 박완서 선생의 이야기다.

거친 삶의 체험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고, 설혹 쓴다 해도 누구나 소설을 통해 결이 고운 인간애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박완서 선생의 품성이기에 가능했던 대목이 있다. 그 체험의 신산함에 비추어 볼 때, 아마도 선생이 소설을 쓰지 않았더라면 우울증이나 강박신경증을 벗어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언제나 해맑은 미소가 대언하는 소녀같은 마음으로, 선생은 큰 문학상을 받거나 괴외의 수입이 생길 때마다 이를 사회단체에 기부하곤 했다.

별세한 후에는 고인의 유지로 유산 13억 원을 모교에 기부했다. 모교에서는 ‘박완서 기금 연구 펠로우’를 만들어 국내 대학의 모든 신진 인문학 연구자들에게 지원을 개방하기로 했다. 매년 1명을 선정, 연 3천만 원의 연구비를 주기로 한 것은 문학상을 만들어 상금을 주는 것보다 훨씬 더 뜻이 깊어 보인다. 국내에 문학상은 세계적 수준으로 많으나, 인문학 지원은 그에 훨씬 못 미치기 때문이다.

모든 학문이 다 그러하지만, 인문학은 지식의 축적과 정보의 소통에 의존하는 분야이다. 특히 앞으로의 세대에 있어서는 정확하고 순발력 있는 정보의 확보가 생명력을 강화하는 관건이 될 터이다. 인문학의 응용에 있어서도, 사람들을 가르치기만 하던 수직적 관계로부터 사람들과 함께 공감하고 즐거워하는 수평적 관계로 바꿔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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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상아탑이라 불리는 대학이 국내외 언론사들의 물리적 순위 평가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교육과 실천의 방안을 찾아나가는 것이 중요한 시기이다. 오래되어 익숙한 자기방어적 인문학이 아니라, 사회 현실과 융합하고 통섭하며 전방위적 문화 소통이 가능한 인문학으로 눈을 돌려야 할 때다. 위기의 인문학을 창의적인 인문학으로, 고사 지경에 내몰려 거리의 부랑아가 될 수도 있는 인문학을 인류 미래의 선도자로 끌어 올리는 일이다.

장구한 역사를 가진 인문주의 운동의 핵심은 언제나 ‘인간’이었고, 이는 동양 문화권에서도 마찬가지다. 화향(花香) 백리, 주향(酒香) 천리, 인향(人香)만리라고 하지 않던가. 박완서 선생이 자기 생애의 교훈과 남긴 유산을 쾌척하면서 새롭게 살려내기를 요청한, 인간이 살아 있는 새로운 문화연구로서의 인문학도 바로 그 연장선상에 있다.

■ 목후이관들에 대한 반역

* 목후이관(沐猴而冠) : 목욕한 원숭이가 관을 쓰다. 교양 없는 어리석은 자 를 비웃는 말 -侯 원숭이 후

문학은 늘 사소하고 무언가 모자라며, 수시로 갈팡질팡하거나 넌지시 도매금으로 넘어가려 할 때가 많다. 세상사 모든 데에 정확한 금을 놓아 셈하기를 원하는 이에게, 문학은 허황되고 못 믿을 품성을 지닌 자의 전유물이다. 그런데 어찌하겠는가. 그 불확실성의 자식인 문학에 명운을 걸고 문학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일생을 투척하는 철부지들이 목전에 즐비한 사태를 어찌하겠는가 말이다.

뿐만 아니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 들어보면 그 문학의 눈먼 주장이 세상살이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각박하게 보낸 어려운 날들의 교훈이 은연중에 가슴을 압박할수록, 그다지 틀린 언사가 아니라는 속살거림이 자분자분하다. 그래서 문득 그간의 이로(理路) 정연한 쟁론을 던져 버리고 문학 쪽에 손을 드는 이들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 연유로 문학은 봄날처럼 젊은 날의 꿈이기보다는, 쓸쓸한 가을빛의 조명 아래 더욱 그 열매가 잘 영그는 운명적 존재 양식에 입각해 있다. 그렇게 아프고 슬프고 외로운, 그러나 끝까지 판도라의 상자 맨 밑바닥에 남은 소망처럼 꺼지지 않는 불꽃이 곧 문학의 다른 이름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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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대를 넘어서는 시

한 시인의 시집이 발간된 지 열흘 만에 교보문고 온라인 집계에서 종합 베스트셀러 2위에 올랐다. 문학 분야만의 집계도 아니고 또 시집이 특별히 주목받기도 어려운 시대의 일이다. 류시화의 제3시집 “나의 상처는 돌 너의 상처는 꽃>이 그 화제의 대상이다. 기실 그의 제1시집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나 제2시집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도 모두 판매부수가 1백만 부를 가볍게 넘긴,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은 시집들이었다.

문단에 나온 지 32년 만에 겨우 세 번째 시집을 내는 과작(寡作 :적게 지음)의 시인이, 이렇게 주목을 받는 현상은 대체 무엇을 뜻할까? 매달 수십 권의 시집이 묶여 나오는 시대에, 유독 그가 자신의 시집 출간에 인색한 이유는 또 무엇일까?

류시화는 시인이자 번역가이다. 시집은 세 권이지만 그가 번역한 외서는 1백 권을 훨씬 넘는다.

류시화는 자신의 시 한 편을 완성하기까지 수백 번을 외우며 고친다. 시가 써진다고 다 시로서 살려두지 않으며, 모양을 갖추었다고 다 시집에 싣지 않는다. 그러니 자연히 과작일 수밖에. 그는 이번 시집에 실린 56편을 위해, 이미 수백 편의 시를 버린 잔인(?)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불필요한 곳에 시간을 쓰지 않는다. 언론이나 문예지 인터뷰를 하지 않는 습관도, 그것이 글을 쓰는 일의 본질과 별반 상관이 없다는 생각에서일 것이다.

문학평론가로서 필자가 본 류시화의 시는 인식의 넓이와 깊이가 세계문학사에 기록된 명시들의 반열에 비추어 미흡하지 않다. 쉬우면서도 심오한 사상성을 갖춘 시는 결코 흔하지 않으며 하루아침에 가능하지도 않은 것이다. 그동안 우리의 시들은 이 양자를 함께 수용하는 데 힘겨웠다. 한국에서 노벨 문학상 수상이 가능하자면 바로 이렇게 시대를 넘어선 류시화의 경우가 해당되지 않을까. 바람에 날리는 헛된 이름이 아니라 작품의 수준이 앞서고, 그것이 글로벌 시대의 보편성과 소통의 기능을 갖춘 글쓰기의 성과 말이다.

■ 고성 ‘동화나무의 숲’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 <내 가슴은 뛰누나 My heart lifts up.)에는,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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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어린이들만이 간직하고 있는 동심의 순수성을 어른들은 이미 잃어버렸고, 이제는 그것이 어른들의 삶에 근원적 모범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H. F. 아미엘도 “어린이의 존재는 이 땅에서 가장 빛나는 혜택이며 이들을 통해서만 지상에서 천국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동심이 마음의 고향인 것은, 젊은이가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과 같이 인간의 세대교체에 숨어 있는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런데 그 비밀에 매우 아름답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형상을 부여한 숲의 나라가 있다. 대전~통영 고속도로를 타고 남녘 바다 가까이 남하하다가 고성 나들목으로 나가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동시·동화나무의 숲’이란 자연 공원이 있다. 주소로는 경남 고성군 대가야면이고 그 면적은 모두 5만 2800여 제곱미터(16,000평)에 이른다.

이 숲에 서 있는 수많은 나무 하나하나가 아동문학가 누구누구의 것이라는 이름표를 달기 시작한 것이다. 작가의 이름, 작품 및 발표 지면을 함께 새긴 자연석이 길을 따라 바라보는 방향의 나무 발치에 놓였다. 지금까지 43명의 작가가 이 숲의 주인으로 참예했고 해마다 18명씩 늘어날 예정인데, 해가 가고 세월이 바뀌면 제 이름을 가진 한국의 모든 아동문학가들은 이 산에 불려와 숲을 지켜야 할 형국이다. 국내의 곳곳에 많은 문학관이나 문학 테마파크가 있으나, 이처럼 참신한 발상과 마주치기는 정말 처음이다.

숲이 자리한 고성은 지금까지 세 차례의 공룡 세계엑스포를 성공적으로 치른 고장이다. 공룡세계엑스포는 방문객의 숫자나 행사의 내실에 있어 국책사업으로 시행한 여수엑스포를 훨씬 능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공룡’예산이 112억인 데에 비해 ‘여수’는 그 200배인 2조 1천억 원이라고 하니 놀라운 따름이다. 이 공룡 행사를 유례없는 성공으로 밀어올린 바탕에 바로 우리 어린이들의 동심이 숨어있다.

어린이를 귀하게 알고 그 마음을 가치 있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없다면, 세상의 삶이 얼마나 각박할 지 알 수가 없다.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끌어안는 문학도 그 출발점을 거기에 두어야 마땅하다. 세상살이가 어렵고 팍팍할수록 순수의 원형을 비추는 거울로서 동심을 되새길 수 있다면, 우리도 누구나 각기 마음에 가꾼 동화나무 숲의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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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微)에 신(神)이 있느니라

글을 시작하면서 이런 우스갯소리를 먼저 해도 될지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 시대를 ‘3포 시대’라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때의 3포는 세 가지를 포기한다는 의미의 ‘三抛’이다. 젊은이들이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풍조에 쉽사리 동화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와는 다른, 매우 서정적이고 기분 좋은 개념을 가진 ‘3포’가 있다. 산과 강과 바다가 함께 인접해 있어서 물산이 풍부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고장을 ‘3포지향’이라 한다. 이때는 세 가지를 모두 갖추었다는 의미의 ‘三抱’이다. 명산 지리산, 명강 섬진강, 명해 다도해를 함께 끌어안고 있는 경남 하동이 그 대표적인 지역에 해당한다. 여기에는 먹거리, 볼거리, 체험거리가 풍성하여 사시사철 사람들이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

지자체 하동군은 스스로의 향리를 ‘문학 수도’라 명명하고 2009년 10월 그 선포식을 가졌다. 한반도 남부지방의 작은 도시가 ‘수도’라는 호명을 사용하는 것은 얼핏 무모하고 우스워 보인다. 그런데 실제 내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럴만한 연유와 자격이 없지 않다. 예로부터 많은 선비와 시인묵객들이 지리산 자락 수려한 하동의 산수경관에 의지하여 이름난 문장과 글씨를 남겼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무오사회 때 유학의 정명주의의 표본으로 남은 탁영자 김일손 선생도 그 한 사례에 해당한다. 이 어른은 필자의 직계선조이다.

현대 문학에 있어서는 김동리, 이병주, 김병종, 정공채, 정호승 같은 걸출한 문인들이 하동을 출신지로 하고 있다. 영남과 호남의 물산이 서로 만나 교류하던 유서 깊은 화개장터에는 김동리의 소설 <역마>를 기리는 표지석의 기록이 있다. 화개장터가 곧 소설이 무대인 까닭에서이다. 섬진강을 넘어가면 전라도 땅인 강변이다. 그 산곡 입구 아담한 자리에 판을 벌인 장터는, 지금도 많은 여행자들의 발길을 유인하는 명물 저자로 생동한다.

이병주는 하동이 낳은 불세출의 작가이다.

- 1921년 하동군 북천면 출생, 일본 메이지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끌려 감

- 진주 해인대 교수, 부산 국제신보 주필 겸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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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후 필화사건으로 복역

- 40대 초반 늦깎이로 문단에 나감, 80여 권에 이르는 소설 집필

<관부 연락선>, <산하>, <지리산>, <그해 5월> 등

- 이병주문학 학술세미나, 이병주 국제문학제, 이병주 국제문학상 등의 행사

이와 함께 문학수도 하동을 쌍끌이 그물망처럼 견인하는 또 하나의 문학축제는 악양면 ‘최참판댁’ 토지문학제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박경리의 문학세계이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기에 이곳에서 열리는 토지문학제는 경향 각지에서 수많은 문인들의 이목을 모으고 실지로 발걸음을 옮겨 이 문학의 고장을 찾도록 유혹한다. 그리고 그 흥왕한 잔치 마당의 한복판에 이 축제의 프로그램을 이끌고 나가는 탈속한 형색의 한 남자가 있다. 그 이름은 최영욱, 삼포지향 하동의 시인이다.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은 크고 화려한 데에 있지 않고, 작고 소박하지만 참되고 소중한 데에 있다. 작가 이병주가 그의 세태소설 <행복어사전>에서 ‘미(微)에 신(神)이 있느니라’ 라고 적었던 이유는, 이 작고 소중한 것이야말로 삶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라는 생각에서였다. 인류 역사는 산맥처럼 기록된 창대한 사건들이 의해 지배되었을 법하지만, 실제로는 그 산맥을 높이 융기시킨 수많은 골짜기들에 의해서 모양과 태깔을 이루었다. 대해와 장강도 그에 이르는 수백 개 산곡의 시냇물 줄기들이 없으면 마른 바닥밖에 남을 게 없을 터이다.

■ 다시 감수성의 혁명을

춥다. 이 추운 겨울날 생각의 꼬리에 붙어 다니는 시 한 편.

“동지(冬至)ㅅ 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버혀 내여 / 춘풍(春風) 니불 아래 서리서러 너헛다가 / 어론 님 오신 날 밤이여든 구뷔구뷔 펴리라.”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조집 ‘청구영언’에 수록되어 있는 황진이의 시조다. 연모의 정과 기발한 착상이 어우러져 빼어난 표현의 묘미를 얻었다. 어떻게 겨울밤의 한 허리는 베어낼 요량을 했을까.

겨울 지나 봄이 오고 새 학기가 시작되면, 필자는 새롭게 만난 강의실의 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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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들에게 창밖에 무엇이 보이느냐고 묻는다. 하늘, 나무, 건물, 사람들 …… 거기에 내가 원하는 대답은 없다. 아니, 거기 마른 나뭇가지에 파릇파릇 새움을 돋게 하는 연초록 봄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단 말인가. 어느새 우리는 회색 도시 그늘에서 기계화된 일상의 부품으로 전락하여, 자유로운 상상력의 날개나 예민한 감수성의 촉수를 잃어버렸다.

그런 점에서 수백 년 전의 황진이는, 오늘날의 메마른 심성과 즉물적 사고방식에 침윤한 후대들에게 효력 있는 교사이다.

일찍이 헤르만 헤세는 <지성과 사랑>에서 이성과 감성의 조화를 탐색했고, 발자크는 감수성이 강한 자가 사리분별이 깊다 할 수 없다고 탈사실성으로의 치우침을 경계했다. 그러나 헐벗은 겨울나무에서 울울창창 푸른 잎을 꿈꾸는 일탈의 상상력이 없이는, 어떤 지식이나 제도도 고착과 퇴행의 관성을 벗어나기 어렵다. 새로운 시대정신, 새로운 세대가 반응하는 공감대는 이성적 논리에 있지 않고 감성적 체현에 있다.

세계 대전에서 영국을 구한 처칠의 기질과 그 힘의 원천을 논거할 때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자유분방한 상상력이다. 그의 아이디어로 현대 전쟁 양식의 면모를 일신한 탱크는, 1918년 연합군으로 하여금 서부전선의 교착상황을 타개할 수 있게 했다. 그는 히틀러의 힘을 제대로 평가하고 영국의 재무장이 필요하다고 호소한 최초의 정치가였다. 그의 선견지명은 풍성한 감수성에서 말미암았고, 그는 기이하게도 정치가로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다시 겨울 추위로 돌아가 보자. ‘어린 왕자’가 불시착한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 허약한 입성으로도 매서운 동장군을 이길 수 있는 건 곧 봄이 오리라는 예단의 확신 때문이다. 그래서 셀리는 시 <서풍부>에서 ‘계절의 나팔소리 오 바람이여,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았으리’라고 노래했다. 카뮈는 수필 <여름>에서 ‘이 겨울 한복판에서 결국 나의 가슴속에 불굴의 여름이 있음을 안다’고 선언했다.

눈물이 증발하고 가슴이 삭막한 오늘의 세태를 치유할 힘은 먼 곳에 있지 않고 힘겨운 자리에 있지도 않다. 마음의 빛깔을 바꾸면 지옥도 천국이 되는 명료한 이치, 곧 각자의 내부에서 새로운 감수성의 변화와 혁명을 도모할 때이다. 그렇게 자신이 선 자리를 훈훈하게 데움으로써 그 온기로 곁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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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 손을 녹일 수 있다면, 이는 동지섣달 긴 추위의 한 허리를 값있게 베어내는 일이 되지 않을까.

억압의 시대를 불우한 환경에서 살았던 한 여성 시인은, 그 외형적 조건을 압도하는 정신주의의 개가를 시적 감성으로 종결했다. 글쎄 이 짧은 추종의 글이 그 흉내라도 낼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 우리 안의 깊은 지혜

■ 행운은 준비된 사람에게 온다

김영삼 정부 때 주한 미국 대사를 지낸 제임스 레이니는 학자요 정치가요 목사였다. 1947년부터 3년간 미국 정보장교로 서울에서 근무했고, 1950년대 말에는 연세대 교수를 지냈다. 1977년, 그가 조지아 주애틀랜타의 메모리 대학교 교수로 있을 때의 일이다. 건강을 위하여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하던 그는 길가의 공원 벤치에 쓸쓸하게 앉아 있는 한 노인을 만났다. 이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가까워져서 2년 여 동안 친근한 말벗이 되었고, 서로의 개인사를 모르는 채 인간적인 신뢰를 쌓았다.

어느 날 출근길에 노인이 보이지 않자 레이니는 그 집을 방문했고, 노인이 바로 전 날 세상을 떠난 것을 알았다. 장례식장을 찾아가서야 비로소 노인이 다국적 기업 코카콜라의 창업자 우드러프(Robert Woodruff)회장이었을 알게 되었다. 한 사람이 그에게 노인의 유서를 전했다. 놀라운 유언이 거기 담겨 있었다.

“당신은 2년이 넘도록 내 집 앞을 지나다니며 나의 말벗이 되어준 친구였소. 우리 집 뜰의 잔디를 깎아주고 커피도 나누어 마셨던 나의 친구 레이니에게 25억 달러와 ‘코카콜라’ 주식 5%를 유산으로 남깁니다.”

사양만 할 수 없었던 레이니는, 무려 4조원에 이르는 그 거금을 모두 에모리 대학교의 발전기금으로 출연했으며, 그 자신도 이 대학의 총장을 지내면서 끝까지 헌신했다. 미국 대학사상 역대 최고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에모리 대학은 급성장하여 남부의 명문이 되었다. 16년간 총장으로서의 직무를 잘 수행한 그의 이름을 따서 이 대학의 대학원은 ‘레이니 대학원’으로 명명 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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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는 총장직을 마친 1993년부터 4년간 주한 미국대사로 임명되었고, 한국을 가장 잘 이해하고 사랑한 대사로 기억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레이니의 행운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기회가 그것을 만드는 사람에게 오는 것처럼, 참된 행운은 스스로 예비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 그 행운을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에게 온다. 언론에 자주 보도되는 소식이지만, 대책 없이 큰 복권에 당첨되었다가 마침내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의 사례가 이를 잘 말해준다. 행운과 축복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꿈이다. 하지만 평소의 '마음가짐'을 통해 받을 준비를 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가난한 무명 시절 교회 창고에 살면서 생쥐를 벗 삼아 미키마우스를 발굴한 월트 디즈니, 온갖 실패와 좌절을 딛고 상상의 세계 가운데에서 해리포터를 탄생시킨 조앤 롤링은, 모두 현실의 어려움을 미래의 소망으로 가꾸는 ‘마음가짐’을 가졌다.

곧 송년의 계절이다. 해가 가기 전에 우리에게 무슨 행운이 없을까 하고 기대한다면 그에 앞서 평상시에 받을 그릇부터 먼저 준비해야 옳겠다.

■ 대팻날을 가는 시간

필자의 스승 고 황순원 작가는 생전에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대패질하는 시간보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이 더 길수도 있다." 대팻날을 가는 시간은 대패질을 하는 시간에 대한 준비이며 그 실전을 위한 휴식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필자의 선배 전상국 작가는 대학 4학년 때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여 문단에 이름을 걸었으나, 졸업 후 강원도 홍천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10년 간 작품을 쓰지 않았다. 다시 문단에 복귀하여 6·25 소재의 소설로 일약 빛나는 문명을 얻었는데, 그 시기에 그는 지난 10년을 '소비의 세월'이라 불렀다. 그러나 더 세월이지나 원숙한 중진 작가의 반열에 오른 이후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그 10년의 호명을 바꾸었다. '준엄한 수업기간 10년' 그렇다. 당장은 그와 같이 쉬는 날들의 효용성을 체득하지 못했으나 더 많은 삶의 경험과 더불어 보니 쉬는 일이 그냥 버려진 시간이 아니었던 터이다.

필자가 포항 해병사단에서 군 복무를 할 때 부대 내 휴게실을 새로 꾸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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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를 부여받았다. 그중에서도 정면 벽면에 어떤 구호를 내걸 것인가가 중심 화두였다. 우리는 해병대의 진취적 기상과 휴게실 본질적 기능을 조합하여 이렇게 정했다. "오늘의 휴식, 내일의 전투력." 지금 생각해보면 휴식이 전투력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은 어리바리한 사병들로서는 썩 잘된 아이디어였고, 그래서 그런지 그 콘셉트로 완성된 휴게실은 부대 내에서 큰 칭찬을 받았다.

일본의 혼다 기업 창업자 혼다 쇼이치로는 "휴식은 대나무에 비유하자면 마디에 해당한다"고 했다. 마디를 맺어가며 성장해야 키 큰 대나무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기업도 중간 중간에 쉬는 구간을 가져야 강하고 곧게 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의식주 자체가 어렵던 옛날에는 허리띠를 졸라매며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나. 지금은 잘 노는 사람이 성공한다는 전혀 다른 조어(造語)가 일반화 되어 있다.

더 나아가서는 일하는 곳 '일터'와 살아가는 곳 '삶터'와 노는 곳 '놀터'가 함께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있고 이 세 공간이 상호 지지 기반을 형성하여 시너지 효과를 창출할 때 바람직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유태인의 노동정신은 "열심히 일하라"가 아니라 "우선 잘 쉬어라. 신바람나게 놀아라. 그리고 일하라"라고 한다.

톨스토이의 소설 중에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이 있다. 어느 농부가 동이 튼 후 해질 때까지 하루 동안 발로 밟고 표식을 해 둔 땅을 모두 주겠다는 약속. 그러나 해지기 전까지 출발지점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모두 무효라는 규칙을 함께 받았다. 결과적으로 농부는 그날 출발선으로 돌아오기는 했으나 기진맥진해 죽었다.

그에게는 쉼표가 없었다. 그 쉼표는 욕심을 버릴 때에만 보이는 신비한 문자인지도 모른다.

찰스 디킨스가 쓴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 영감이 그로 인해 지옥과 천국을 오간 대표적인 캐릭터이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은 욕심을 버린 자리의 휴식, 그 쉼표가 우리의 삶에서 선사할 수 있는 최상의 복원력을 말한다.

■ 생의 마지막 5분 앞에 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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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공학 석사 전공으로 대학원을 수석 졸업한 젊은이가, 직장 생활 5년 만에 열정을 되찾기 위해 산행을 계획한다. 2003년 5월, 미국 유타 주 블루존캐니언. 홀로 등반에 나선 젊은이는 떨어진 바위에 오른팔이 끼이고 만다. 꼼짝할 수 없는 그에게 남은 것은 로프와 작은 등산용 칼 하나, 그리고 500밀리리터짜리 물 한 병뿐이다. 아무도 오지 않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는 희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사랑하는 사람들과 지나온 날들을 떠올린다.

그 끔찍한 고통을 캠코더 기록으로 남기고 삶의 욕망을 놓아버리기도 하다가 마침내 팔을 잘라 탈출 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 결심의 순간까지 127시간이 걸렸다. 무딘 손칼로 썩어가는 오른팔을 자르는 일은, 그것 자체로 초인적인 용기였다. 4시간에 걸친 극한의 고통 끝에 탈출에 성공한 그가, 온 몸이 피로 얼룩진 모습으로 여행 중이던 한 가족 앞에 나타나 구원을 요청한다. 그는 사막을 횡단해 병원에 옮겨졌으며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이 사건은 CNN을 통해 미국 전역에 알려졌고 언론 보도와 다쿠멘터리 제작이 줄을 이었다.

젊은이의 이름은 애런 랠스턴, 이 감동적인 실화는 그가 직접 촬영한 영상들과 함께 책으로 출간 되었다. 동시에 대니 보일 감독이 영화로 만들어 화제가 되었는데 그 제목이 <127시간>이다.

이 실화의 주인공은 사고 전에 세웠던 등반 목표를 위해 지금도 산을 오르고 있다. 콜로라도에 있는 4,200미터 이상 59개 산을 겨울에 단독 등반한다는 것이다.

생명이 경각에 있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보여주기로는 도스토예프스키의 ‘5분간’을 앞서는 사례가 없다. 이 러시아 대문호가 28세의 젊은 나이였을 때, 반정부 운동인 페드라세프스키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총살이 집행되기로 예정된 12월 중순 혹한의 날에, 그는 함께 처형될 다fms 죄수들과 함께 페테르부르크 세묘노프 광장에 준비된 형장으로 끌려 나왔다.

마지막으로 그에게 5분이 남았다. 이 시간을 무엇에 쓸까. 그 적나라한 마음의 무늬가 그의 소설 <백치>에 기록되어 있다.

<백치>는 그 최후의 5분간을 이렇게 기록했다. “이제 이 세상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은 5분뿐이다. 2분은 동지들과 결별하는데, 다음 2분은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의 자신을 위해, 그리고 최후의 1분은 세상을 마지막으로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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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기 위해 주변을 주위를 돌아보는 데 쓰기로 했다.”

그런대 참으로 극적으로, 사형 직전에 황제의 특사가 감형장을 가지고 나타나 손을 높이 들고 흰 손수건을 흔들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목숨을 건진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의 무이쉬킨 공작을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이러한 고통, 이러한 공포, 인간을 이렇게 취급하는 것은 위법이다.” 그 후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을 버틴 대문호는, 이 시기의 체험을 고스란히 그의 문학에 담아냈다. ‘사랑으로서 사랑하라’는 주제, ‘아름다움의 비극’으로 불리는 <백치>는 <죄와 벌>이후 1868년 작품이다.

■ 말 속에 얼굴이 있고 마음이 있고 갈 길이 있다

올해로 62주년을 맞은 ‘한국전쟁’의 원래 이름은 ‘6·25 동란’이다. 그런데 지금은 대다수가 한국전쟁이란 용어를 자연스럽게 쓰고 있다. 역사 기술에 있어 ‘전(戰)’과 ‘난(亂)’은 매우 다르다. 전자는 정통성이 있는 국가나 집단사이의 무력충돌에, 후자는 한쪽이 그렇지 않을 때 사용한다. 그래서 청일전쟁은 ‘전’이고 이시애의 난은 ‘난’이다.

6·25 동란이 발발했을 때, 유엔이 인정한 한반도의 합법적인 정부는 남한이었다. 북한의 불법 남침에 의해 시작된 동족상잔은 엄연히 동란이 맞고 오랫동안 그렇게 통용되었다. 한국전쟁이란 표현이 일반화 된 데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해외의 영어 표기 ‘Korean War’의 번역이 역수입되어 세력을 얻은 한편, 시대의 변화에 따라 북한을 하나의 국가체제로 수긍하는 인식의 확산이 병행되었다.

언어는 연역적인 것이 아니라 귀납적인 것이다. 문법이나 어법을 미리 정해 놓고 거기에 언중(言衆)을 복속시킬 수 없다. 그 시대를 살아가는 언중의 말이 변하고 그것이 다수의 공통어가 되면, 할 수 없이 문법을 고쳐야 한다. 국가에서 한글 맞춤법이나 표준어 규정을 주기적으로 개정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말은 그 주인의 정신세계를 비추는 거울이다. 말이 올곧고 정확하면 그 사람 또한 그러하다. 우리 선조들은 사람을 판단하는데 있어 ‘신언서판(身言書判)’이란 기준을 사용했는데 이 네 글자의 모든 영역에 말이 결부되고 연동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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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 잠깐 말을 섞더라도 상대방이 어떤 종류의 어휘와 어떤 수준의 표현법을 사용하는가를 보면 금방 그 사람됨을 알 수 있다. 면접시험에서 피면접자에게 계속 말을 시키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내기 위해서이다.

그런 만큼 말에는 교양과 품위가 있어야 한다. 겉으로 꾸민 교양이 아니라. 그 사람됨으로 인하여 속에서부터 배어나오는 교양이 품격 있는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함부로 ‘저희 나라’라고 하거나 남자를 두고 ‘재원(才媛)’이라고 하는 이에게 신뢰를 건네기는 어렵다. 지금도 계속되는 일본 정치 지도자들의 망언은, 그 속에 진실된 인간과 역사관이 없다는 증빙이다. 말 속에 얼굴이 있고 갈 길이 있다. 말은 세상을 향해 공개하는 자신의 평점이요 이력서다.

* ‘저희’는 ‘우리’의 낮춤말이다.

민족이나 국가를 대상으로는 겸양어를 쓸 수가 없다. 왜냐하면 어느 민족이 더 우수하고, 어느 국가가 더 열등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부 연예인 혹은 정치가들이 함부로 ‘저희 나라’라고 말하는 것은 나라와 민족을 망신시키는 부적절한 언행이다.

■ 희망은 공짜다

자기도 모르는 자기 암시가 때로는 강력한 작용으로 몸에 영향을 미친다. 어떤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구경하다가 목이 말라 폭포의 물을 맛있게 마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돌아서는 순간 포이즌(poison)이라는 팻말이 눈에 들어왔는데, 독을 마셨다는 생각에 갑자기 창자가 녹아내리는 듯한 아픔에 급히 병원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진찰한 의사가 껄껄 웃으며 ‘그 팻말은 프랑스어로 낚시금지(poisson X )입니다’ 라고 하자. 그렇게 심하던 배의 통증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얘기다.

아주 당연하다고 인식하고 있는 상식이나 그에 대한 믿음은 마음을 넘어 몸까지 지배한다. 이러한 위약(僞藥)효과, 곧 플라시보(Placebo effect) 효과라 부른다. 약효가 전혀 없는 거짓 약을 진짜 약으로 속여 환자에게 복용하도록 했을 때 병세가 호전 되는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그리스 신화의 조각가 피그말리온(pygmalion)은 자신이 제작한 아름다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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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상에 갈라테이아란 이름을 붙이고 그 여인상을 진신으로 사랑하게 된다. 그는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에게 조각상과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게 해달라고 빌었다. 여신은 그의 진정성에 감동하여 조각상을 여인으로 만들어 주었다. 반드시 그렇게 되리라 믿고 그것을 밀고 나가면 능률이 오르거나 결과가 좋아지는 현상을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부르는 유래다.

이에 관해하버드 대학 로버트 로젠타 교수가 1968년에 행한 현장실험이 있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초등학교에서 무작위로 20% 정도의 학생을 뽑아 우수한 학생들이라고 담임교사에게 주지 시켰다. 8개월 후 측정을 해보니 이들이 점수가 다른 학생들보다 상승한 실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명단에 있는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기대와 격려가 그 원인이었다.

희망은 공짜다. 희망은 예정된 물질 외에 과외의 몫을 요구하지 않는다. 희망을 품게 하는 데는 돈이 들지 않는다. 플라시보 효과든 피그말리온 효과든 긍정적 희망이 가득한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 현재(present)는 선물(present)이다

필자와 친분이 있는 어느 시인이야기다. 그의 아들이 미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쓴 에세이의 제목이 ‘현재의 힘(Power of Now)’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글의 문면이 고등학생의 생각으로는 매우 사려깊고 진중했다. 글은 시인 아버지와 오랜 교유가 있었던 법정 스님과의 대화에 대한 기록이었다. 아이는 이렇게 물었다.

“스님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입니까?”

스님이니, 그 대답은 불(佛), 법(法), 승(僧) 같은 3보(三寶)쪽에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스님의 답변은 전혀 딴판이었다.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는 바로 너다.” 아이는 다시 물었다. “아니 어떻게 스님께 제가 가장 귀한 존재인가요?” 설법과 문필에 두루 통하여 이미 세상에 이름을 널리 알린 스님은, 아이에게 차근차근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었다. 지금 이 순간. 우주의 삼라만상 가운데 나는 너에게 집중하고 있으며 지금 내게 너보다 더 중한 것은 없다는 말이었다. 글을 쓴 아이는 미국 아이비리그의 명문 프린스턴 대학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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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 극작가 소포클래스 : “내가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어간 이들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다.”

-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 : “진정한 생활은 현재 뿐이다.”

-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 : “현재에서 미래가 태어난다.”

-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성으로 손꼽히는 대통령 영부인 엘리노어 루즈벨트의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다. “어제는 히스토리이고 내일은 미스테리이며, 오늘은 프레젠트이다.”

더글러스 태프트 전 코카콜라 회장이 어느 대학 졸업식에서 연설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하고 그러기에 우리는 현재(Present)를 선물(Present)이라 한다고 했다.

현재는 우리 삶의 금과옥조다. 현재를 도외시하고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과거의 추억에만 사로잡혀 있어서도 안 되고 미래의 꿈에만 의지해도 안 된다. 각자의 인생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이 존귀한 만큼, 각자에게 냉엄하고 공평하게 주어져 있는 현재를 잘 활용하는 지혜를 가꾸어야 옳다.

다산 어록에도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가버린 것을 좇을 수 없고 장차 올 것을 기약하지 못한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이다.” 그것은 시간관념이 깨어 있는 자의 즐거움을 일컫는다. 우리 생애를 두루 통하여 선물로 주어진 현재를 선하게 관리하는 그 즐거움 말이다.

■ 금 간 항아리

어떤 사람이 양 쪽에 항아리를 매달리도록 만든 지게를 지고 물을 날랐다. 그 중 왼쪽 항아리는 금이 가 있었다. 우물에서 물을 가득 채워 출발하지만 집에 돌아오면 그 항아리 물은 늘 반밖에 납지 않았다. 왼쪽 항아리가 주인에게 미안해서 “나를 버리고 새것으로 쓰세요.”

그러자 주인이 금간 항아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도 네가 금이 간 것을 안단다. 하지만 너를 바꾸지 않을 거야. 그동안 우리가 지나온 우물에서 집까지의 길 양쪽을 보아라. 오른쪽 길섶은 아무 생명도 황무하지만 왼쪽 길 섶에는 아름다운 꽃과 풀이 무성하게 자라지 않았니? 비록 너는 금이 갔지만 너로 인하여 많은 생명이 아름다움을 얻었구나.” 이 우화는 완벽한 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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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요구하고 실제적 효율을 앞세우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 매우 예리한 경종을 울려준다.

세상이 삭막하게 되는 것은 너무 완벽한 사람들 때문이다. 일찍이 영국 수상 처칠은 국회에서 완벽한 연설을 한 어느 초선의원에게, “다음부터는 좀 더듬거리게나”라고 충고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은 행복의 조건으로 다섯 가지를 들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다. 생활에 조금 부족한 재물, 칭찬에 조금 못 미치는 용모, 절반 밖에 알아주지 않는 명예, 한 사람을 이기고 두 사람에게 지는 체력, 그리고 청중의 절반만 박수치는 연설 실력이 그것이었다.

15세기의 성군 세종은, 왕세자로서 조선조 역사상 가장 짧은 제도권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인 태종은 세자 책봉 52일 만에 왕위를 물려주었고. 이 짧은 기간이 통치력의 규격화를 막고 세종의 창의성을 한껏 발양했다.

반면에 연산군은 가장 오랜 세자 교육을 받았으나 그 장기간의 보람이 전혀 없었다.

스펙이 모자라기로 하면, 우리가 ‘성웅’이라 부르는 이순신 장군 만한 이가 드물다. 역적의 가문, 첫 과거에 낙방하고 32세의 늦은 나이에 급제, 14년 동안 변방 오지의 말단 수비 장교, 상관들과의 불화로 불이익과 파면, 고질적인 위장병과 전염병의 고통이 그의 것이었다. 뿐만 아니다.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한 후 47세에야 제독이 되고, 스스로 농지를 갈아 군자금을 만들었으며, 임금의 의심으로 공을 빼앗기고 옥살이를 했다. 빈손으로 돌아온 전장에서 12척의 낡은 배로 133척의 적선을 맞았으며, 스무 살의 아들을 적의 칼날에 잃고 마지막 전투에서 죽음 앞에 섰다.

그러나 이순신 장군은 그 모든 모자라는 것을 차고 넘치는 것으로 이끌었다. 오히려 모자랐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던 기적 같은 일들이었다.

■ 창의력이 희망이다

1974년 7월 어느 일요일, 섭씨 40도가 넘는 더위가 모래 먼지와 함께 사람을 괴롭히는 미국 텍사스의 조그만 시골 마을 콜맨에서의 일이다. 사위인 제리가 딸 베스와 함께 ‘여름손님’으로 방문했는데, 무기력하게 모여 있는 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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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함을 견디다 못해 장인이 ‘애벌린에 다녀올까’라고 제안했다. 콜맨에서 1백 킬로나 떨어진 곳, 식당도 별로 좋은 데도 없고 에어컨이 시원찮은 차로 흙먼지 속을 헤치고 가야 하는데……. 그러나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4명의 가족은 살인적인 더위 속에 3시간이나 사막 길을 달려 애벌린에 도착하여, 시설이 시원찮은 식당에서 맛없는 음식을 먹었으며, 다시 3시간 동안 아무런 의욕도 없이 황폐한 길을 되짚어 기진맥진한 채 콜맨으로 돌아왔다. 정말 애벌린에 가고 싶어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 말도 없이 둘러앉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한 장인의 제안을, 모두 서로를 배려한다고 생각하고 수용했던 것뿐이었다. 이들은 마음속의 말을 아끼고 별로 가치도 없는 타성을 따라 휴일을 함께 망쳤다.

이 이야기는 미국의 저명한 컨설턴트이자 조지워싱턴대학 교수였던 제리 하비 박사가, 자신의 저서 <애벌린 패러독스>에서 창의력을 배제한 지나친 배려나 인정주의가 공동체에 끼치는 해악. 곧 합의 도출의 모순 사례로 적시한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와 같은 경험의 기억을 한두 가지씩 갖고 있다. 한국 사회처럼 혈연, 지연, 학연으로 묶인 공동체에서는 피해가기 어려운 애벌린 패러독스 함정이 도처에 널려있는 형국이 된다.

세상 사람들의 대다수가 분별없이 편의와 향락의 저잣거리를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그처럼 무책임하고 경박한 자리에 있지 않다. 활자매체와 문자문화가 퇴색하고 전자매체와 영상문화가 시대의 길목을 점령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여전히 지식의 근본에 대한 목마름과 삶의 진실한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을 깨어있다. 그러한 정신이 자기갱신을 거듭하면서 세상의 미래를 밝히는 저력은 곧 창의적인 사고와 개방된 세계관으로부터 온다.

우리의 삶은 큰 부피의 모양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기실 작고 소박한 삶터에 더 소중한 진정성이 숨어 있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대의 거시적 물결을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눈을 밝히고 꿈을 키우는 경각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별다른 부존자원도 없이 남북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사람만이 자산인 나라가 시대를 앞서가는 창의력이 없이 버틸 수는 없다. 하나의 생각, 한 권의 책, 한 인물과의 만남에서 얻을 수 있는 정신은 누구에게나 판도라의 상자에 끝까지 남은 희망이 될 수 있다.

2015. 12. 12

* 다음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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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에서 삶을 배우다 (2)

■ 김종회 지음

◉ 함께 나누는 손길로

■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반대말은

영국의 거부였던 피츠제럴드의 이야기다. 그는 하나뿐인 아들이 열 살을 갓 넘겼을 때 아내를 잃고, 정성을 다해 아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그 아들 또한 병을 앓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혼자 남은 그는 거장들의 예술 작품을 수집하며 가족을 잃은 슬픔을 잊으려 애썼다. 세월이 흘러 피츠제럴드 자신도 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마지막 순간에 유언장을 쓰고 거기에 자신의 재산을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를 밝혀 두었다.

유언장에 의하면 그의 모든 소장품은 경매에 내놓게 되어 있었다. 그 값어치는 수백만 파운드에 달했고 분량에 있어서나 가치에 있어서나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경매시작 전에 참가자가 관람할 수 있도록 전시 되었는데, 그때부터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전시 작품 가운데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보잘것없는 그림 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지방의 어느 무명 화가가 피츠제럴드의 요절한 아들을 그린 것으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이 그림이 맨 먼저 경매에 나왔으나 아무도 입찰하려 하지 않았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다음, 뒷자리에 초라한 모습의 한 노인이 손을 들고 조용히 말했다. “제가 그 그림을 사면 안 될까요?” 경쟁자가 아무도 없었으므로 그림은 자신이 가진 많지 않은 돈 전부를 건 그 노인에게 낙찰되었다. 노인은 피츠제럴드의 아들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하인이었다. 첫 경매가 끝나는 순간, 유언의 집행을 맡은 변호사가 다음 진행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큰 소리로 유언장을 읽었다. “누구든지 내 아들 그림을 사는 사람이 모든 소장품을 가진다. 이 그림을 선택한다면 그는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니. 모든 것을 가질 충분한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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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럴드의 예화는 우리 삶에 많은 것을 시사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생의 진실한 가치가 어디에 있으며 그것이 보람을 갖도록 안배한 지혜가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보여준다. 세월이 흘러 지금 흥왕한 것들이 빛을 바랠 즈음이면, 겉보기에 좋은 호의가 아니라 작고 소박하지만 진실한 항상심이 제값을 내기 마련이다.

‘견디기 힘든 고통’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의 반대말이다. 견디기 힘들지만 견뎌야 하고 그러한 마음가짐일 때 견딜 수 있다는 뜻이다. 세상의 곳곳에 ‘그렇기 때문에’가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현실적 어려움을 정신적 승리로 딛고 일어서는 길이다.

■ 7인의 저항시인

일제 강점기의 그 암울하던 시기, 우리말과 글조차 빼앗겼던 시절에, 우리 민족은 나라를 되찾는 날이 올 수 없을 것 같은 절망과 좌절을 거쳤다. 하지만 그 불모의 때에도 언제 올지 모르는 광복을 염원하며 빛나는 문필을 남겼던 저항 시인들이 있었다. 이육사, 윤동주, 심훈, 한용운, 이상화, 김광섭. 더 있을까? 없다. 하도 답답하니 ‘항일 저항시인 7인집’에 김소월을 넣기도 한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가 곧 친일을 의미하던 날에, 생명의 안위를 걸고 회생의 꿈을 노래한 이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그 시대의 삶과 문학을 소중히 할 수 있었다.

그렇다 이들의 슬프고 아픈 자기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민족적 자존심을 누리며 살고 있는 것이다.

■ 선을 쌓은 곳에 경사스러운 결과가 있다.

아주 오래전 어느 추운 겨울날, 영국 런던 다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노인이 바이올린을 켜며 행인들에게 구걸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한 외국 사람이 지나가다 이 광경을 바라보더니 그 노인이 너무 초라하고 불쌍하게 여겨졌는지 가만히 다가가서 바이올린을 좀 만져보자고 했다. 노인은 그렇잖아도 손이 시렸던 차라 잘됐다 싶어서 그 낡은 바이올린을 그에게 건네주었다. 연주자가 바뀐 바이올린이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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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새 연주자는 구슬픈 가락으로 시작하여 경쾌한 곡조의 노래를 계속해서 바이올린의 현에 실었다. 차갑게 얼어붙은 하늘 아래 아름다운 선율이 퍼져 나가면서, 행인들이 발걸음을 멈췄고 자연스럽게 둥그런 관람석을 이루게 되었다. 그 자리가 런던 한복판이긴 했지만, 귀가 열린 사람들이 뜻밖에 많았다.

노인의 모자에 한 푼 두 푼 던지던 동전이 수북이 넘치게 되었고, 마침내 사람들이 운집하여 발 디딜 틈도 없게 되었다. 1파운드짜리 금화를 던지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한동안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말과 함께 누군가 목청을 높이기 시작했다. “파가니니다! 파가니니!” 그 외국인은 이탈리아에서 온 당대 바이올린의 거장 니콜로 파가니니(1784~1840)였던 것이다.

세계의 정상에 선 음악의 기량을 아끼지 아니하고 추운 길거리의 불쌍한 노인을 돕기 위해 거리의 악사를 자원했던 파가니니에게서 우리는 그의 음악적 천재보다 더 고귀하고 감동적인 인품의 향기를 보게 된다. 조그마한 명예나 지식, 외형만 화려한 권세나 재물을 갖고서도 현대판 귀족으로 행세하려는 사람들이 넘치는 완악한 세상이다. 주변의 춥고 굶주리고 억눌리고 낙망한 이들을 위해, 따뜻하게 내밀 도움의 손길이 우리 안에 있을까.

파가니니가 보여준 조력자의 퍼포먼스, 그 드라미틱한 재능 기부는 그가 살았던 19세기 중반까지의 모범사례에 해당한다.

선한 도움은 그것이 어떤 모양이건 사람을 즐겁게 하고 멀리 떨어진 자리까지 밝게 한다. 선을 쌓는 곳에 반드시 경사스러운 결과가 있다는 옛말은 저 옛날의 파가니니에게, 그리고 오늘의 선량한 기업들에게 꼭 같이 적용되지 않겠는가. 산이 깊을수록 골이 깊듯이, 올해 연말 혹한의 계절 앞에서 따뜻한 메세나의 정신이 더욱 소중해 보인다.

*메세나 : 기업이 문화·예술 활동에 후원과 자금을 지원하는 일

■ 생명을 살린 아름다운 손길

여름 햇빛을 받아 산은 자줏빛으로 물들고 물이 맑은 고장 경기도 양평, 그곳 서종면의 황순원문학촌 소나기 마을에 강연이 있던 날의 일이다. 정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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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지난 시간에 북한강변을 따라 승용차로 들어가던 중이었다. 강의 지류길가에 경찰차가 서 있고 두 사람의 경관이 막 물에서 사람을 건져내고 있었다. 필자와 운전자 두 사람은 얼른 달려 내려가 함께 거들었고, 두 경관은 15분에 이르도록 비지땀을 흘리며 익사 직전의 할머니에게 심폐소생술 처치를 했다. 그 현장을 곁에서 모두 지켜보기로는, 정말 눈물겨운 싸움이었다., 자기 가족인들 저보다 더 열렬할 수 있을까.

생사의 기로에서 이미 고개를 넘어갔던 할머니가 마침내 다시 숨을 토하는 것을 보고 자리를 떠났으나, 그 두 경관의 희생적 사명감은 너무도 감동적으로 가슴에 남았다. 강연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파출소에 들려 그들의 이름을 물어보았다. 손용호 경위, 류섭영 경사, 두 분 모두 40대 장년의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경찰관이었다. 필자는 양평경찰서로 전화를 걸어, 그 ‘영웅적’ 현장 참관기를 자세히 알려 주었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우리나라가 건강하고 경찰이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싶어 두 손을 번쩍 들고 만세라도 부를 심정이었다.

야간 순찰차량 경광등을 껐다 켰다하는 점등 간격을 조절함으로써 범죄를 줄인 파출소 경찰관들의 창의적 미담이 신문에 실린 일도 있었다. 박봉에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주야 없이 애쓰는 대다수의 경찰과 일부 문제 경찰을 혼동해서는 안 될 일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통해, 어디에나 국민의 눈과 귀가 있음을 강조하고 청렴하게 살 것과 본연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고 사심 없이 업무를 처리하라고 가르쳤다. 그런가 하면 비슷한 시기의 실학자 순암 안정복도 충청도 목천현으로 부임하면서,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정부패를 없애고 그 살림살이를 나아지게 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 관리였다. 그는 백성들이 부담하는 부당한 비용을 없애기 위해 ‘방역전’이라는 재원을 마련하는 등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고, 검소하고 겸손한 처신으로 모범을 보였다.

사마천의 <사기>에 목후이관(沐猴而冠)이란 말이 있다. 목욕을 한 원숭이가 관을 쓴다는 뜻인데, 의관은 아름다우나 그 내면의 마음은 사람의 것이 못 된다는 비유이다. 이는 한생(韓生)이 초나라 항우(項羽)를 조롱한 말로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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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풀이를 듣고 격분한 항우가 한생을 끓는 기름 가마에 던져 삶아 죽이고 만다. 세태가 험악할수록 관 쓴 원숭이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횡행하는 터에 무더운 여름날 한 줄기 청량한 소나기 같은 생명구조의 복무 수행에 현장 목격자가 된 복을 누렸다.

■ 감동이 있는 삶

독일의 화가이며 조각가인 알브레히트 뒤러는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 초반에 걸쳐 활동했다. 그는 소묘 9백점, 목판화 350점 등 많은 작품을 남겼고 훌륭한 작품도 많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손꼽히는 대표작은 뉘른베르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기도하는 손’이란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눈물겨운 우정과 신뢰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숨어 있다.

그림 공부에 뜻을 두고 있었으나 너무 가난해서 공부를 할 수 없었던 뒤러는, 비슷한 처지에 있는 한 친구와 약속을 했다. 한 쪽이 그림을 배우는 동안 다른 한 쪽은 노동을 해서 학비를 부담하기로 했던 것이다. 뒤러가 먼저 공부를 시작했고,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되자 이제는 친구를 공부시키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갔다. 친구는 하루 일을 마치고 기도 중이었다.

그의 기도는 이러했다. “하나님, 저는 심한 노동으로 손이 굳어 그림을 그릴 수 없습니다. 하오니 하나님, 내 친구 뒤러만은 화가로 성공하게 해 주십시오.” 뒤러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연필을 꺼내 친구의 기도하는 손을 스케치했다. 이것이 불후의 명작 ‘기도하는 손’이다. 친구를 위한 사랑의 나눔, 그리고 그것을 참된 눈으로 바라본 고마움의 힘이 이 이름난 작품을 있게 한 것이다.

우리의 삶이 아름다운 건 이와 같은 인간적 유대로 묶여 있을 때다. 이러한 삶의 감동을 경험한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국계 미국인으로 세계은행 총재가 된 김용 전 다트머스대 총장은, 단순히 상류사회에 진입한 신분으로 인하여 국제기구의 중책을 맡은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인류사회의 질병을 퇴치하고 경제적 불균형을 개선하며 허약한 지역과 나라를 도우려는 이상이 있었고 그 뒤에는 그것을 키워준 어머니의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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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 있었다. “어머니는 늘 위대한 것에 도전하라고 하셨지요. 그래서 나의 꿈은 마틴 루터 킹처럼 세상의 불평등을 없애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에게 어머니의 가르침은 곧 가장 큰 사랑과 감동의 다른 이름이었다.

인간이 가질 수 있는 희생과 감사와 신뢰를 한 마디로 축약하면 아마 ‘사랑’일 것이다. 빅토르 위고는 시 <가을의 나뭇잎>에서 ‘사랑하는 것은 전부를 믿는 것이다’라고 했다.

감동이 있는 삶의 아름다움은 우리 모두가 꿈꾸어야 할 일생의 과제이다. 정녕 우리에게 감동적인 세상살이의 체험이 있는지, 또 어떻게 그것을 가꾸어나가야 할지를 깊은 사색으로 탐구해 보았으면 한다.

■ 공룡과 빗물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만든 공룡 영화 <쥬라기 공원>은, 할리우드 역사상 최단 기간에 가장 높은 수익을 올린 작품이다. 이 영화는 개봉 9일만에 무려 1억 달러의 흥행 수입을 돌파했다. 스필버그의 시도가 새로웠던 것은, 과학적 논리와 더불어 공룡을 되살려 내고 그 사건을 현대적 삶의 구체성과 결합했다는 데 있다.

동시에 자연의 순리를 역행한 인간의 탐욕이 걷잡을 수 없는 재앙을 초래한 하나의 사례로서도 교훈이 된다. 공룡영화는 20세기 초에 시작되어 2000년 월트 디즈니의 디지털 애니메이션 <다이소너>에 이르기까지, 컴퓨터 그래픽등 제작 기술의 현란한 발달과 함께 지속적인 주목을 받아왔다. 그리고 그 저변에는 인간 또는 자연과의 관계가 숨은 주제로 깔려 있었다.

- 공룡이 멸망한 이유 : 1)성경 창세기의 홍수설 2) 소행성 충돌설 3) 거대 한 몸을 지속적으로 건사할 환경조건의 부재

한반도에 공룡이 서식한 증거는 화석이나 발자국 등으로 거의 전국에서 보고되고 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공룡의 역사가 우리와 무관한 외국의 이야기로만 받아들여졌을 만큼 그 발견과 연구의 역사는 일천하다. 그런데 그 많은 지역 가운데 이를 집중적인 테마파크로 개발하고 ‘공룡세계엑스포’를 개최하는 지자체는 경상남도 고성군이다.

고성의 ‘경남고성공룡세계엑스포’는 매우 인상 깊은 캐치 프레이즈를 내걸고 있다. ‘과거를 역사공간으로, 현재를 환경공간으로, 미래를 문화공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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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명하고 각기의 공간에 역사적 지식, 생명환경의 보존, 문화산업의 개발이라는 슬로건을 내 걸었다. 여기서 필자가 값있게 생각하는 것은 생태, 생명환경 문제에 대한 그 지역의 진보적 인식이다.

고성은 이 공룡엑스포에 ‘빗물’이라는 자연의 개념을 도입하고 축제의 표어도 ‘하늘이 내린 빗물, 공룡을 깨우다’로 정했다. 세계적인 불 부족 사태는 자연수의 부족 때문이 아니며, 자연이 선사하는 강우를 제대로 보전 · 활용하지 못해서 일어나는 결과임을 환기하고 있다. 그리하여 공룡동산과 빗물 체험관을 병렬하고 이것이 자연스럽게 생명환경농업 체험과 연계되도록 했다. 지역 축제에 시대의 화두이자 우리 농촌의 실상을 결부한, 참신한 기획으로 보인다.

■ 편작의 마음을 가진 리더

중국 전국시대의 전설적인 명의 편작(扁鵲)은 발해군 막읍 사람으로 성은 진(秦)이고 이름은 월인(越人)이다. 장상군(長桑君)에게 의학을 배우고 구전과 의서를 받아, 괵나라 태자를 죽음에서 살리는 등 숱한 기적을 이루었다 그의 사적은 BC 7세기부터 3세기까지 미치고 있다. 지금껏 전해오는, 인간의 수명을 훨씬 넘는 기간에 걸친 기록은 여러 명의의 일화가 편작에게 흡수되어 생긴 현상으로 풀이된다.

편작이 위나라 문왕과 나눈 대화는 <갈관지>라는 책에 실려 있는데,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삼형제가 모두 의사인 편작에게 문왕은 누가 가장 훌륭한 의사인가를 물었다. 편작은 큰형님이 가장 뛰어나고 그 다음이 둘째 형님이며 자신은 가장 아래라고 대답했다. 죽은 사람도 살려낸다는 편작의 의술이 삼형제 가운데 가장 아래라니, 의아해진 왕이 재차 그 이유를, 그리고 편작만이 명의로 알려진 이유를 물었다.

큰형님은 환자가 아픔을 느끼기 전에 얼굴빛을 보고 장차 있을 병의 원인을 제거해 주고, 둘째 형님은 환자의 병세가 미미할 때 미리 치료하여 큰 병을 막아주는데, 자신은 병이 커지고 고통으로 신음할 때에야 병을 알고 치료해 준다는 것이 편작의 말이었다. 사람들은 중병에 맥을 짚어 약을 먹이고 살을 도려내어 낫게 하는 행위를 보면서 자신의 병을 고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그로써 명의로 소문이 났다는 고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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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작의 이 범상치 않은 답변에는, 단순히 그가 겸손한 사람이라는 일반적인 평가만 잠복해 있지 않다. 훌륭한 사람이 모두 유명하지 않으며, 역으로 유명한 사람이 모두 훌륭하지도 않다는 엄연한 진실을 편작의 겸손한 품성에 기대어 공감하게 한다.

다시 편작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보자. 당대의 유명한 관상쟁이를 찾아간 젊은 편작은 재상이 되고 싶다고 했으나 불가, 의생이 되고 싶다고 했으나 여전히 불가의 관상 판정을 받았다. 편작은 그 자리에 쓰러져 서럽게 울었다. 재상과 의생의 신분은 천양지차인데 그렇게 우는 이유가 무엇인지 관상쟁이가 궁금해 했다. 재상이 되어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위해 일 할 수 없다면, 의생이라도 되어 많은 사람을 구제하려 했다는 것이 편작의 대성통곡 이유였다.

사연을 듣자마자 관상쟁이는 화급히 일어나 편작에게 큰절을 했다. 동시에 젊은이는 나중에 틀림없이 어진 재상이 되거나 아니면 큰 의원이 될 것이라고 단언했다. 얼떨떨해 하는 편작에게 관상쟁이는 사람을 판별하는 외상(外相), 색상(色相), 심상(心相)의 세 기준을 들려주었다. 외상이나 색상으로는 불가하나 심상을 보니 납득하겠다는 뜻이었다. 편작은 이미 그 마음의 상으로 큰 의원이었다.

심상을 제대로 보려면 삼 년을 함께 살며 지켜보아야 한다는 옛말도 있다. 심상은 마음의 모양이나 진실됨을 투시하는 혜안과 그에 버금가는 내면의 값진 품성이 조응할 때 각인되는 상호 소통의 결과이다. 인도의 성자 마하리쉬는 귀한 과일 얻기를 원하거든, 즐거이 뿌리에 물을 뿌리라고 했다. 사람 사는 세상의 모든 가치 또한 그 뿌리에서 말미암은 터, 근본을 소중히 하는 사회, 이를 실현할 기회가 다가오고 있다.

■ 농어촌에 희망을 주는 문학이 가능할까

한국마사회에서 세운 농어촌 희망재단이 제1회 농어촌희망문학상을 시작하면서 필자가 책임을 맡고 있는 한국문학평론가 협회가 이 상의 주관을 맡아 작품의 심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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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어촌에 희망을 주는 문학이 가능할까? 걱정하면서 시작한 이 문학상은 접수된 작품의 심사를 진행하면서 점차 가능하다는 쪽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시 621명, 소설 274명의 놀랄만한 응모 숫자도 숫자려니와, 그 속에 담긴 주제들은 참으로 다양다기하게 우리 농어촌의 절박한 문제들을 담아내고 있었다.

한국에는 너무도 많은 문학상이 있다. 통계에 따르면 종류로 1백 개를 넘고, 상금도 1억 원, 5천만 원, 3천만 원에 이르고 있다. 외국에서는 없는 문학상의 인플레라고 할 형편인데, 이를 굳이 나쁘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상의 고유성이나 가치가 희석되는 것은 사실이다. 더구나 대다수의 문학상이 문학사에 업적을 남긴 시인이나 작가의 이름을 걸고 시행하는 것이며, 농어촌희망문학상처럼 그야말로 공공의 이익을 표제로 내세운 문학상은 매우 드물다.

문학작품의 궁극적 완성은, 그것이 독자에게 수용되어 일정한 반응을 유발하는 데까지라고 알고 있다. 이 문학상이 목표하는 바도 그와 같다 할 것이다.

농어촌 지역 스스로의 자기 개발도 더 없이 중요하다. 고성은 디지털 카메라와 시 쓰기를 결합한 ‘디카시’의 발원지요, 근자 아동문학인들에 의해 ‘동시 · 동화나무의 숲’이 들어선 새로운 문학의 고장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애써 찾아내기만 하면 농어촌 사랑과 그 희망을 말하는 문학의 길은, 외롭지도 않고 멀리 있지도 않은 생활 속의 실천요강인 셈이다. 이 좋은 생각들이 물꼬를 트고 방향을 찾아서 농어촌은 물론 각박하기 비할 데 없는 도시인들의 가슴을 함께 적시는 청량한 물길이 되었으면 한다.

◉ 그대 나라 사랑 함은

■ 신조선 책략

30대 재미교포 여성이 독도 명칭을 지켜냈다. 우리 정부나 주미 대사관도 엄두를 내지 못했던 일이다. 김하나 북미 동아시아도서관협의회(CEAL) 한국분과위원회 회장. 그는 2008년 7월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독도의 명칭을 ‘리앙쿠르 바위섬’으로 바꾸는 회의가 무산되는 데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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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쿠르는 1849년 무인도였던 독도를 발견한 프랑스 포경선의 이름이며, 거기에는 한국령 독도를 중립적인 분쟁지역으로 몰고 가려는 일본의 책략이 숨어있었다.

김 씨는 캐나다 토론토대 동아시아 도서관 한국학 책임자였다. 만약 미국 의회도서관 자로분류에서 독도라는 주제어가 사라지면, 상위 분류어인 ‘한국의 섬들’에서 ‘일본의 섬들’로 대체되는 것이었다. 시인인 김 씨의 어머니 권천학 씨는 ‘행동하지 않으면 매국노’라는 격려로 그 딸을 명칭 변경 저지의 일선에 서게 했다. 필자는 이 기릴 만한 사실을 당시 한 일간지 지면에 칼럼으로 썼다.

사무라이와 닌자의 나라 일본은, 오랫동안 치밀하게 온 세계를 무대로 독도 도발을 계속하고 있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면 왜 세종대왕 때 이종무가 정벌한 쓰시마를 잘 관리하지 못했던가. 그리고 일본 패망 직후 이승만 대통령이 언급했던 쓰시마 반환요구를 지속적으로 제기하지 못했던가 하는 안타까움이 엄습해 온다. 지리상으로도 한국에 훨씬 가깝고 풍수지리적으로도 한반도의 오른발에 해당하는 부속도서라는데 말이다.

근래 일본의 아베 신조 정권은 마치 우리에서 뛰쳐나온 맹수처럼 조금의 좌고우면도 없이 침략자 근성을 발산하고 있다. 독도와 동해에 대한 영토 침범의 야욕을 드러내는 것은 물론,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일본군 위안부 망언, 평화헌법 개정 시도 등, 과거사의 죄악에 대한 반성의지가 조금도 없어 보인다.

과거 일제 만행을 생각한다면 일본인은 지금 한국 거리를 마음 놓고 걸어 다닐 수도 없어야 한다. 사정은 중국이나 동남아 각국 등도 마찬가지다. 시대가 변하고 선린 우호의 국제관계를 우선할 때 잊기 어려운 과거를 용서로 치환하는 것이 미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일본은 지금 후안무치하게도 이 상식적인 도덕률을 역행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의 갈등은 단순히 두 나라 사이에 국한된 쟁점이 아니다. 그런 만큼 일본을 제어할 국제적 연대에 더욱 유의해야 옳다.

■ 멀리 가려거든 함께, 곡선으로

지방 행사에 참석하느라 국내선 아침 첫 비행기를 탔다. 동행에 정부의 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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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와 국회의원을 지낸 분이 있어 몇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일찍 출세를 하고 요직을 두루 거친 분이라 그 시각과 경륜에 남다른 장점이 많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와 인식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만했으면 유연하고 아량이 넘치기를 봄바람같이 해도 될 텐데 싶었다.

중국 현대사의 인물 중에 낮은 마음의 겸손으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저우언라이(周恩來)다. 1946년 공산당 중앙위원들이 옌안에서 충칭으로 이동하는 항공기에서 갑작스러운 비상사태를 맞았다. 날개에 결빙이 생겨 위험할지도 모르니, 모두 낙하산을 매라는 기장의 안내방송이 나왔다. 모두 낙하산을 매었지만, 한 소녀가 자기 것을 찾지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저우언라이는 가만히 자기 낙하산을 벗어 소녀에게 주었고 항공기는 사고 없이 무사히 착륙했다.

중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 푸이를 따뜻하게 돌보아준 일을 비롯, 그가 남긴 겸양과 배려의 일화는 너무도 많다. 바늘은 주머니 속에 있어도 삐져 나온다(囊中之錐)고 했던가. 그의 사람됨은 ‘죽의 장막’을 넘어서 온 인민과 세계에 권력자의 모범으로 알려졌다. 그는 마오쩌둥(毛澤東) 아래의 2인자였으나 마오의 심기를 다치지 않는 지혜를 발휘했고, 그런 연유로 자리를 오래 지켰다.

중요한 것은 그가 처세의 달인이었다는 게 아니라, 그의 내면에 올곧고 온정어린 심성이 넘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인류 역사에 존경받는 위인들은 한결 같이 그 이름의 무게에 비해 삶의 방식이 따뜻하고 소박했다. 그들의 언행은 조촐한 가운데서 품격이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공동체를 위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속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빨리 가려거든 혼자 가라.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가라. 빨리 가려거든 직선으로 가라. 멀리 가려거든 곡선으로 가라.”

■ 하얼빈 역전의 안중근 의사

필자가 1980년대 후반부터 중국을 드나들면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지역이 흑룡강성 하얼빈이었다.

1909년 의거 당시의 하얼빈역은 초라한 시골 역사의 모습이었겠지만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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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인구 1천만 명의 크게 번화한 도회에 역을 통한 이동 인구도 사람에 밀려 다녀야 할 만큼 많았다. 여러 차례 검문을 거쳐 간신히 현장을 찾았다. 그것도 마침 그 자리 가까운 곳의 경비원 한 사람이 위치를 알고 손짓을 해 주었기에 가능했다. 아무 것도 없었다. 간략한 입간판은 고사하고 흔한 안내글 한 줄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플랫폼 바닥에 입힌 삼각형 타일이 저격자의 위치와 저격 방향을, 그로부터 5미터 정도의 거리에 사각형 타일이 표적이 섰던 위치를 암시하고 있었다. 참으로 허망했다.

안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여 그 자리에서 처단한 날짜는 10월 26일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화 개혁인 명치유신 때 권좌에 오른 인물로, 조선 합병을 책임진 천황특파 전권대사였다. 그는 고종을 위협하고 대신들을 협박하여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한 주역이다. 그런 인물을 처단한 것은 세계 각국에 대한제국의 존재와 민족적 항일의지를 천명한 쾌거였다.

이토는 합병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하얼빈을 찾아온 참이었다. 안 의사는 저격 후 자수를 했고, 자신은 대한 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전쟁을 수행한 것이니 만국공법, 곧 국제법에 따라 전시 포로로 처리할 것을 요구했다. 1910년 2월 14일 중국 여순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끝까지 의연한 자세를 허물지 않았다. 이토를 두고 명성황후 시해와 고종황제 폐위 등 15가지 죄상을 주장한 것도 놀라운 기개가 아닐 수 없었다.

국내에 안중근숭모회나 안중근기념사업회 등이 결성 되어 활동하고 있고, 북한에서는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공연과 영화화도 이루어졌다. 하얼빈역의 유적지화와 기림을 위해서 북한과 협력하는 방안을 찾아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올해 2월 14일에는 제발, 상술이 앞선 밸런타인데이의 헛바람에 묻히지 않고 안 의사의 사형 선고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 답은 역사 속에 있다

필자가 한국문단에 문학평론가로 각 얼굴을 내밀던 무렵의 일이다.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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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복거일이란 작가가 <비명을 찾아서>라는 장편소설을 발표했다. 일제강점기의 식민통치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가정하고, 소설의 주인공이 잃어버린 조국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기발한 이야기였다. 참으로 재미있는 것은, 그 소설 속에 또 하나의 가상세계를 설정하고 이 가상은 실제 역사의 현실과 일치하도록 역사의 현실과 일치하도록 꾸민 서사전략이었다. 이로써 작가는 가상과 현실의 여러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이야기 방식을 ‘대체역사’라 한다. ‘아틀란티스 대륙이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았더라면’이나 ‘미국의 남북전쟁에서 남군이 이겼더라면’과 같은 가정은 이미 서구에서 소설로 시도되었고 한국에서도 ‘대한제국 일본 침략사’와 같은 소설의 시도가 있었다. 대체역사의 이야기 방식은 타산지석 또는 반면교사의 역사적 교훈을 염두에 둔다. 소설을 쓰거나 읽는 우리들에게도 그러하다. 이 방식을 곱씹어보면 세상살이에 역지사지의 미덕을 발양할 수 있다.

제 18대 대통령 선거의 열기가 한창 뜨겁던 지난 11월, 드라마 작가 신봉승 씨가 기상천외한 책 한 권을 상재했다. <세종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가 그 제목이었다. 조선 왕조 500년 동안 모두 27명의 임금과 그 임금을 보좌한 6백 내지 7백여 명의 고위 공직자가 있었는데, 이들을 현대 한국의 현실 정치 한가운데로 불러낸 상황 설정이다. 그리하여 세종에게 대통령직을 주고, 명현으로 이름 높은 선비들을 각기 행정부의 수장으로 임명한 것이다.

- 국무총리는 황희가 아니라, 선조, 광해군, 인조의 3대에 영의정을 지낸 오리 이원익

- 기획 재정부에 퇴계 이황, 행정안전부에 율곡 이이, 문화체육관광부에 연암 박지원, 지식경제부에 다산 정약용, 외교 통상부에 개화승려 이동인, 통일부에는 화친파 지천 최명길이 이름을 올렸다.

- 특임장관 백사 이항복, 검찰총장 정암 조광조, 감사원장 남명 조식 등

30여년의 세월을 두고 조선 왕조의 역사를 연구하고 10년이 가깝도록, <조선왕조실록>을 통독했으며 그 5백 년 전체를 조명하는 대하장편TV드라마 <조선왕조 오백 년>의 집필자이기에 가능한 인사 실험이다. 저자는 이 가상 정부 인물들의 공통점을 두고, 모두 왕의 잘못에 대해 목숨을 걸고 직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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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던 올곧은 선비정신의 소유자라고 덧붙였다.

한 문필가가 역사의 기록과 그 기록에 담긴 선현들이 행장을 바탕으로 보여준 이 드림팀의 조각(組閣)은, 박근혜 정부의 인사 향방에 유익한 본보기가 될 만하다.

어느 민족이든 과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는 발전이 없지만, 과거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할 때는 미래가 없다. 세종은 한글 창제를 제외하고도 다른 임금들이 필적하기 어려운 많은 업적을 남긴 왕이다. 더욱이 어질고 능력이 뛰어난 산하들을 오래 거느렸으며, 정책의 시행에 앞서 늘 백성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등재된 수만 명의 인물 가운데 그만한 리더십을 찾기는 어렵다. 민주화 시대의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지도자의 근본은 세종에게서 배워야 한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은, 역대 정부에서 언제나 겉치레의 다짐이 되고 말았다. 정부는 그 전철을 되풀이하여 밟지 말고 새롭고도 옳은 길, 그야말로 진정한 ‘시대교체’의 길을 가기 바란다. 모범답안은 이미 역사 가운데에 있다.

■ 대선후보자의 본질을 보자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살았던 이탈리아의 작곡자이자 바이올린의 거장 안토니오 비발디의 이야기다. 그가 세계 최고의 명품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로 연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콘서트홀은 대만원을 이루었다. 연주가 시작되면서 청중들은 앞을 다투어 찬사를 내 놓았다. ‘명품 악기니까 저렇게 기막힌 소리가 나는구나.’ 늘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갑자기 비발디가 연주를 멈추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들어 바닥에 내리쳤다. 악기는 산산조각이 나고 청중들은 놀라 기함을 했다.

그 경악과 동요가 가라앉기 전에 진행자가 앞으로 나왔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 바이올린은 스트라디바리우스가 아닙니다. 비발디 선생은 훌륭한 음악이란 악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님을 보여드리려 한 것입니다.’ 청중들은 홀이 떠나갈 듯한 박수로 그 놀라운 사태에 응답했다. 가히 협주곡의 아버지 비발디였다. 사진기가 좋아서 사진이 훌륭하다면 사진작가는 어디로 갈까. 재료나 그릇이 좋아서 음식이 훌륭하다면 일류 셰프는 또 어디로 갈까. 문제는 겉으로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속에 숨은 본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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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미인이 대명사는 클레오파트라이다. 프랑스 철학자 파스칼이 <팡세>에서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아졌더라면 지구의 표면이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쓴 것은, 이집트 제국의 마지막 여왕으로서 로마의 역사적 인물들에 미친 영향력을 말한다.

실제로 클레오파트라는 그렇게 대단한 미인이 아니었다고 한다. 2001년 런던 브리티시박물관에서 열린 ‘클레오파트라 특별전’의 기록을 보면, 150Cm의 작은 키에 통통한 몸매와 매부리코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집트 고대사의 종막을 감당했던 여왕이 무슨 수로 카이사르와 안토니우스의 마음을 사로잡고 그들의 자식을 생산했으며 후대에까지 미인의 이름을 떨치게 되었을까. 그 답은 외형의 용모보다 풍부한 교양과 뛰어난 화술, 곧 지성적 매력에 있었다. 거기에다가 음성이 무척 감미로웠고 외국어에도 능통했다고 전한다.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그리스어, 라틴어, 히브리어, 아랍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학자의 수준에 도달했고, 어려서부터 이집트 왕실 도서관에서 책을 탐독하여 어떤 권력자와도 막힘없이 대화할 수 있는 현명한 여자였다는 것이다.

동양의 절세미인 양귀비는 원래 현종의 아들 수왕의 비였으나 현종이 가로챘다. 초상화를 통해 볼 수 있는 양귀비는 풍성한 몸매의 소유나이나 키가 작고 쌍꺼풀이 없는 눈을 하고 있다. 하지만 춤과 음악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고 총명한 언행을 보였다고 하니, 역시 당대의 군주를 매혹한 힘은 따로 있었던 셈이다. 중국의 4대 미인으로 통하는 서시, 초선, 왕소군도 모두 자기만의 매력을 따로 가졌던 여인들이다.

조선조 제21대 왕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 김씨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66세에 이른 왕의 배필로 간택되었다. 후궁 가운데 장희빈을 중전 자리에 앉혔다가 온갖 곡절을 다 치른 아버지 숙종의 유언을 따라, 영조는 후궁이 아닌 양반집 규수 가운데서 왕비를 직접 선발했다. 50세의 나이 차이를 넘어 영조가 정순왕후를 선택한 것은, 지혜로운 답변 때문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은 물이나 산이 아니라 인심이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목화”라고 대답하는 어린 처녀는, 할아버지 나이 뻘의 영조를 감탄하게 했다.

그렇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현상이 아니라 본질 가운데 숨어 있다. 무엇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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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도 바꿀 수 없는, 세월이 가도 바뀌지 않는 근본적 가치를 가진 이야말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다.

■ 대통령의 유머

1912년 미국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고 있을 때,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선거본부는 매우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선거 팸플릿 300만 부에 저작권자의 허락을 받지 않은 인물 사진이 실린 것이다. 시세대로 하자면 300만 달러 이상을 물어주어야 할 판이었다. 선거본부장은 숙고 끝에 저작권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당신을 전국에 알릴 수 있도록 당신 사진을 우리가 팸플릿에 실어주면 얼마를 낼 용의가 있는가?’

그 편지에 이런 답장이 왔다. ‘기회를 줘서 고맙다. 250달러 내겠다.’ 기막힌 반전이었다. 300만 달러짜리 손해를 250달러의 이익으로 뒤집은 셈이다.

1984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73세의 로널드 레이건과 그의 측근들은 ‘대통령이 되기에 너무 늙었다’는 대중적 인식을 극복하는 것이 선거전의 가장 큰 과제라고 판단했다. 경쟁자인 월터 먼데일 후보가 줄곧 레이건의 고령을 문제 삼고 나섰다. 이 과제가 반전의 계기가 된 것은 두 후보의 TV 토론에서 였다.

먼데일이 먼저 이렇게 물었다. ‘대통령의 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레이건이 전혀 엉뚱한 답변으로 맞받았다. ‘나는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먼데일이 어이가 없어 ‘그게 무슨 뜻입니까?’라고 다시 묻자. 레이건은 이렇게 응수했다. ‘당신이 너무 젊고 경험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정치적인 목적에 이용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모든 청중은 박장대소하며 웃었고 먼데일도 결국 따라 웃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나이 얘기를 꺼내지 못했다.

미국 대통령들의 일화를 살펴보던 중이니 거기에 하나를 더 보태기로 하자 한국 식탁의 김치처럼 서양 식탁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브로콜리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의 얘기이다.

부시 대통령이 어느 날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면서 자기 음식에 브로콜리를 넣지 말라고 부탁했다. 이 일은 곧 입소문을 타고 널리 퍼졌다. ‘부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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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로콜리를 싫어한다.’는 풍문과 더불어 브로콜리의 판매량이 급감했다. 애꿎은 피해를 본 부로콜리 농장주들이 모여서 대책을 논의하고 놀라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미국 농민들은 거친 항의나 데모 대신에 한 통의 편지와 함께 대형 화물차에 가득 실은 브로콜리를 백악관에 선사했다.

‘대통령님! 미국 사람들이 즐겨먹는 영양분 많은 채소입니다. 지금까지의 생각을 바꾸어 즐겨 드시면 고맙겠습니다.’ 이 사건이 다시 언론에 크게 보도될 때, 부시는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나는 그때 브로콜리를 너무 많이 먹어 잠시 쉬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은 화를 복으로 바꾸었다. 엄청난 홍보 효과와 더불어 급기야 브로콜리는 외국 수출의 효자 품목이 되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감동이 살아 있는 유머는 물리적 계산이나 이성적 판단을 넘어서는 기적을 창출한다.

■ 주머니 속의 바늘

안동의 의성 김씨는, 임진왜란 시기의 학봉 김성일을 중시조로 하는 누대에 걸친 명문이다. 일제 강점의 말기, 그 양반집 자손으로 당대의 파락호 또는 난봉꾼 소리를 듣던 인물이 있었다. 밤낮 없이 노름판을 전전하며 전혀 가솔을 돌보지 않았고 배운 자로서는 물론 인간으로서의 위신도 지키지 않았다. 파락호란 별명을 얻기로는 조선조 말의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대표 격에 해당하는데, 그 정황은 유주현의 역사소설 <대원군>에 매우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는 의성 김씨 김용환은, 정도가 흥성군보다 훨씬 더했다. 종갓집을 남의 손에 넘기고 수백 년 동안 집안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 평도 팔았다. 그 전답의 현재 시가는 2백억 원에 이른다. 보다 못한 문중 자손들이 십시일반 돈을 걷어 팔아먹은 전답들을 다시 종가에 되사 주었으나 그는 탈선의 행각을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시집간 무남독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집에 가서 장롱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도 노름판으로 가져갔다. 딸은 하는 수 없이 친정 큰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울면서 시댁으로 돌아갔다.

김용환은 해방 이듬해 이순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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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에, 경천동지할 만한 사실이 밝혀졌다. 그는 강골의 선비였지 인격 파탄자가 아니었으며, 허황한 세월을 보낸 것이 아니라 일제의 이목을 속이고 숨어 활약한 독립 운동가였던 것이다. 노름판에서 돈을 따면 좋고, 잃으면 미리 잠복중이던 수하들로 하여금 판돈을 강탈하게 하는 수법을 썼다. 노름 밑천으로 집과 전답을 판 돈도 모두 갈 곳이 있었다. 서슬이 시퍼런 일제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가족에게도 철저하게 함구 하였고 온갖 불명예를 뒤집어썼으며, 그렇게 모은 재산은 모두 만주 독립군의 군자금으로 넘어갔다.

학봉 종가의 13대 종손으로 선친과 형제들이 줄줄이 의병장 출신인 가문에서 특별 감시의 주목을 피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나, 그 자신과 가족의 고통을 후대의 안온한 자리에서 필설로 형용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임종할 때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로 돈을 보낸 사실을 밝혀도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지만 그는 허락하지 않았다. 선비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대답이었다.

그의 외동딸, 눈물의 장롱을 가져갔던 김후옹 여사는 1995년에 이르러서야 아버지의 독립운동 공로가 인정된 건국훈장을 추서받았다.

한 인간의 삶 속에 잠복해 있는 실체적 진실이란 이렇게 모질고 무서운 것이다.

■ 두 여자의 아이 다툼

서구 문화권에서 지혜의 대명사는 이스라엘 왕 솔로몬이다. 성경 열왕기상 3장에 기록되어 있는, 두 여자가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자식이라 다투는 사건의 재판은 너무도 유명하다. 이 쟁론에 대해 솔로몬은 칼을 가져오게 하여 아이를 둘로 나누라고 하고, 아이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주장을 철회하는 여자를 생모로 판정한다. 인류문화사는 이 지혜로운 처결을 일러 ‘솔로몬의 재판’이라 부른다.

중국에도 이와 꼭 같은 이야기가 있다. 원나라 때 이잠부(李潛夫)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는 희곡 <회란기 灰闌記>가 그것이다. 서양에 명판관 솔로몬이 있다면 동양에는 송나라 시기의 명판관 포청천이 있는데, 이 희곡에는 바로 그 포 씨가 등장한다. 마 씨 집안의 첩이 아들을 낳았는데, 이를 질투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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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부인이 남편을 독살하고 첩에게 뒤집어씌운 끝에 남편의 재산을 상속 받기 위해 그 아이를 자기가 낳았다고 우긴다.

포청천은 땅바닥에 석회로 동그라미를 그린 다음 아이를 그 안에 세우고 두 여자에게 팔을 잡아당기게 한다. 정실부인은 사력을 다해 아이를 끌었으나 첩은 아이가 아파하자 손을 놓아버리고 만다. 판관은 첩이 진짜 어머니란 판결을 내린다. 이 장면은 명나라에 이르러 원나라 희곡을 모은 <원곡선 元曲選>의 삽화에도 나온다.

솔로몬의 재판이나 포청천의 재판이 모두 친어머니를 분별하는 데 목표를 두고 그 증명을 생모로서의 모성 본능에서 찾았다. 자신의 몸으로 낳은 생명에 대한 희생적 사랑은 사람이거나 동물이거나를 막론하고 다를 바가 없다. 황순원의 단편소설 <피>에서는, 새끼 다람쥐를 이용하여 어미 다람쥐를 잡는 인간의 교활한 지혜를 매우 비판적으로 그린다.

■ 주춧돌을 놓는 행복

문예장학생으로 대학에 입학한 한 시골 출신 학생이 시 쓰기에 빠져 낙제를 했다. 2학년으로 진급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되어 더 이상 학교를 다니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러나 그의 시 쓰기는 크게 성과가 있어 그해 겨울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을 했다. 그로서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한 형국이었지만, 학교를 그만두면 창작을 계속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고심 끝에 그는 대학 총장실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어디 대학의 구중심처가 그렇게 쉽게 개방될 리 있을까. 가까스로 비서실을 통과하여 총장을 만났다. 참으로 초라한 몰골에 제대로 상황을 설명조차 못하는 어린 학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총장은, 정문 입구에 신춘문예 당선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노라고,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노라고 짧고 흔쾌하게 말했다. 단 한 마디도 왜 그렇게 학점 관리를 잘못했느냐고 묻지 않았고, 인생을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교훈적인 말도 없었다.

다만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인간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어렵게 스스로도 흡족치 못한 답변을 마치고 나온 그는, 세월이 지나 이름 있는 시인이요 번역가이며 가장 전파력이 강한 출판 편집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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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인도의 평원을 방랑하며 라즈니쉬에 영향을 받기도 하면서 독특한 자기 세계를 개척한 명상가가 되었다. 불문곡직 찾아온 그를 맞아 삶의 근본에 대한 화두를 던졌던 그분은 2012년, 향년 91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두 권의 시집 모두가 판매량 1백만 권을 넘기고 그에 준하는 번역서가 허다한 시인 류시화의 실화이다. 그의 총장은 경희대학교 설립자 조영식 박사였다.

한 위대한 시인의 탄생에는 사람 만들기의 본질에 대한 믿음과 그것을 투시하는 혜안이 잠복해 있었다. 문화예술의 생성이란 이처럼 예측하기 어려운 결과에 미리 준비된 원인 행위를 투자하는 것이어서 때로는 상식의 잣대로 잴 수 없는 과정이 개재된다.

2010년 필자는, 류시화 시인을 포함한 7명의 대중문화 분야별 ‘영웅’이야기를 기록한 <대중문화의 영웅신화>란 책을 상재했다.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눈물겨운 경로를 따라 오늘의 영광에 이르렀으나, 각기의 고비에는 모두 유사한 조영식 총장이 있었다. 새해에는 우리 사회 또는 여력이 닿는 우리 각자가 그렇게 사람과 예술을 함께 키우는, 그 소중한 기초를 다지는 행복한 자리에 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인식의 경계를 넘어

■ 해외에서 모국어로 글쓰기

이 글을 쓰고 있는 이곳은 미국 캘리포니아 실리콘밸리의 중심도시 산호세이다. 샌프란시스코 한국문학인협회 여름문학캠프의 강연을 위해 이곳에 왔고, 지금 캠프 일정이 진행 중이다

이곳 문인 모임의 중심에는 이 지역의 원로 소설가 신예선 선생이 있다. 매달 모여서 독서토론회를 갖고 여름마다 문학캠프를 여는가 하면 함께 문예지를 발간하기도 한다. 각각의 문인들은 수시로 모국 문단에 작품을 발표하거나 창작집을 묶어낸다.

한국문학으로서는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텃밭이다. 이와같이 그 값어치가 문전옥답에 못지않은 텃밭은 세계 곳곳에 널려 있다. 동포 200만을 헤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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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미국의 LA, 뉴욕, 시카고, 워싱턴과 캐나다 등지에서 모국어로 창작되는 미주 한인문학, 1백만 명의 한민족 거주민을 배경으로 한 일본의 조선인 문학, 동북 3성 2백만 명의 동족을 비탕에 둔 중국의 조선족 문학, 그리고 5~6세대까지 이어져 50만 명의 동포사회를 형성한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문학이 그 사례들이다. 이러한 해외동포 문학에 대한 관심과 연구도 증진되어, 이들과 북한 문학을 함께 연구하는 국제한인문학회 같은 학회가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그 이중 언어, 이중문화의 땅에서 우리말로 시를 쓰고 소설을 쓰는 데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그처럼 척박한 환경 속에서 개간한 삶의 경로에 대한 진솔한 자기토로가 필요하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모국어로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 타자의 나라에서 삶을 시작하는 2,3세대 후세들에게 민족적 뿌리의식을 심어주는 일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한민족 문화권 문학은 이 글로벌 시대에 민족정체성을 되찾고 또 공고히 하는데 효력 있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남북한 문화교류의 교착 상황을 풀어나가기 위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그렇게 확장된 민족성의 울타리 안에서 ‘문학 6자회담’도 가능하고 ‘한민족 문학사’의 기술도 시도될 수 있다. 8만 리 태평양의 시퍼런 물길을 건너는 데 항공기로는 10여 시간이 걸리지만, 문학작품을 이메일로 보내는 데는 1초면 된다. 저마다의 상처를 안고 그것을 문학으로 풀어내는 이곳 이역(異域)의 문인들을 대하면서, 우리 문학의 새로운 영역과 가능성을 그 현장에서 실감한다.

■ 문학의 경계인들, 분단과 전쟁을 딛고 서다

멀리 머리에 구름을 두르고 있는 천산산맥이 바라다 보이는 도시, 이국 땅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티, 옛 소련 시절부터 현지 고려인들의 한글 교육과 전통문화 보급에 힘써온 원로 시인 양원식 씨가 자신의 집 앞에서 괴한의 피습을 받아 비명에 숨졌다. 향년 74세, 2006년 5월의 일이다.

시인은 알마티에서 한국판을 발행하는 <고려일보>주필을 지냈다. 1923년 연해주에서 <선봉>이란 이름으로 창간되어 <레닌기치>란 이름을 거쳐 오늘에 이른 <고려일보>는 그때까지 시인의 일터였다. 그가 활동하고 있던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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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필자는 시인의 안내로 <고려일보>를 방문한 적이 있다. 후리후리한 키에 따뜻한 정감이 남달랐던 그는, 그러나 역사의 물결에 휩쓸린 영원한 경계인이었다.

그가 쓴 시에 조국은 세 개, 즉 조선과 카자흐스탄과 러시아라고 기록되어 있다. 북한 출신으로 한국전쟁 중에 모스크바 영화학교로 유학했을 만큼 촉망받는 인재였던 그는, 당시 동료 학생들과 함께 평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망명자의 길을 걸었다. 그의 재능은 청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고려인 시인의 표본으로 남았으나, 원인도 습격자도 밝혀지지 않은 채 비운의 생애를 마감했다.

북한이 버린 천재 작곡가 또는 ‘카자흐스탄의 윤이상’이란 호칭을 가진 정추는, 월북하여 평양 음대 교수를 지냈으며 모스크바 유학 중 다시 소련으로 망명했다. 세계 3대 음악원 중 하나인 러시아 차이코프스키 음악대학에서 최초로 졸업 작품 만점을 을 받았고, 소련의 세계 최초 우주비행 성공 기념행사에서 자신의 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2010년 알마티에서 만난 그는 여러 차례 살해당할 위험을 넘겼다고 술회했다. 남북한 모두에서 외면당한 이 불우한 작곡가는 2013년 6월, 90세를 일기로 카자흐스탄 음악계의 거장으로 타계했다.

그 외에도 알마티에는 정상진(필명 정률), 한진, 리진, 연성용, 라브렌티 송등 그 지역에서 소중하게 인정받는 문인들이 많다.

소련국적 고려인들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작가는 <캔타우로스 마을>, <다람쥐>등을 쓴 아니톨리 김, <해바라기 꽃잎 바람에 날리다>의 작가 미하일 박 등이 있다.

필자는 6자 회담이라는 정치적 이슈가 등장하기 이전부터 남북한 문학 그리고, 네 지역의 디아스포라 문학 즉 재 중앙아시아 고려인 문학, 재 중국 조선족 문학, 재일 조선인 문학, 재미 한인문학 등을 합하여 ‘2+4 시스템’으로 불러왔다. 이 길은 남북한 문학, 더 넓게는 한민족 디아스포라 문학의 교류와 연대를 바라보는 새 통로이며, 정치나 국토의 통합에 우선하는 문화 통합의 추동력이 될 수 있다.

* 디아스포라 : 흩어진 사람들, 유태인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전 세계에 흩어 진 한민족을 지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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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엘불리’의 교훈

세계 최고의 식당으로 명성을 날려온 스페인의 레스토랑 ‘엘불리(El Buli)’가 2011년 휴업을 시작했다. 휴업은 2014년까지 이어지고, 그 이후로는 비영리 음식재단으로 변신했다. 스페인 카탈루냐 해변의 로지스 휴양지에 자리하고 있는 이 식당은, 외식업계의 권위 있는 영국 잡지 <더 레스토랑>으로부터 다섯 차례에 걸쳐 세계 최고의 식당에 선정되었다. 또한 8백여 명의 각국 주방장과 음식평론가가 참가한 ‘2009 산 펠레그리노 세계 베스트 레스토랑 50’에서도 4년 연속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한 바 있다.

1961년에 문을 연 이 식당이 50년이 넘어 새삼 그 이름을 날린 비결은 주방장에게 있다. 수석 셰프 페란 아드리아가 과학적 원리를 요리에 접목시킨 ‘분자 요리’를 선보이면서 단연 요리계의 샛별로 떠오른 것이다. 식당의 공동대표이자 주방의 책임을 맡은 그는, 식당을 매년 4월부터 10월까지만 운영하였으며 점심시간에는 문을 닫고 저녁에만 하루 최대 50명의 예약을 받았다. 한 끼 식사가 40가지 요리로 구성된 코스 메뉴의 가격은 한화로 38만원에 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간 2백만 명이 예약을 대기하고 있어 결국 추첨을 통해 손님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식당을 거쳐 간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 요리가 음식이 아닌 예술이라고 상찬했다.

그런데 정말로 놀랍고 중요한 사실은, 이와 같은 엘불리의 세속적 평가가 아니다. 10여 년이 넘도록 세게 최상급의 수준을 유지해 온 배면에는, 남모르는 독특한 비밀이 잠복해 있다. 식당이 쉬는 11월부터 3월까지 5개월 동안, 아드라이는 세계 각국을 떠돌며 요리에 대해 생각하고 연구하고 실험하면서 창의적 휴식 기간을 보낸다는 것이다. 그의 마법 같은 요리는 이 휴식의 쉼터, 놀터들을 바탕으로 다음번 일터를 예비하는 지혜로움에서 생성된 것이었다. 그는 ‘엘불리가 폐업하는 것이 아니라 변모하는 것’이라면서, 자신이 그 휴식의 창의성 때문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말을 남겼다.

막강한 전력을 자랑하는 나폴레옹의 기마대가 한 전투에서 패한 일이 있었다. 그 원인을 철저하게 조사해 보았더니 실로 어처구니없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패전할 수밖에 없는 직접적인 동기는 기병대대의 도착이 늦어 작전에 차질을 초래한 때문이었으나 그 대대가 늦어진 것은 소속 중대 하나가 늦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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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때문이었고, 그 중대가 늦어진 것은 소속 소대 하나가 늦어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소대가 늦어진 까닭은 한 분대장이 탄 말의 발굽에서 작은 못 하나가 빠진, 참으로 사소한 사건 때문이었다. 말발굽 편자 관리를 맡은 병사가 작은 못 하나를 소홀히 함으로써 부대 전체로 하여금 패전에 이르는 쓴 잔을 마시게 한 것이었다.

휴식은 바로 이 못 하나를 보살피는 일에서부터 궁극의 승전보에 이르는 길의 시발점에 해당한다.

■ 건전한 상식이 재난을 이긴다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 출신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1957년 44세의 최연소 나이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수상작은 익히 알려진 <이방인>. 이 작품은 한낱 성격 파탄자의 이야기로 끝날 소설을 부조리 철학의 문학적 서사로 격상시킨다. 역시 카뮈가 쓴 전염병 재난 소설 <패스트>는, 1940년대 알제리의 오랑 시(市)를 배경으로 페스트, 곧 흑사병의 공포와 일상적인 삶의 와해를 실감나기 그리고 있다.

소설의 중심인물은 의사 리유, 그가 사는 도시에서 갑자기 수많은 쥐들이 죽기 시작하더니 전염병이 창궐하고 인간에 대한 신의 징벌이라는 말까지 떠돈다. 한 사회의 변혁이 외형적 강압에 의해 진행 되는 동안, 여러 유형의 인간 군상이 출현한다. 상황논리만 앞세우는 무능력한 시의 질병관리본부장 리처드, 신의 천형을 내세워 회개를 선동하는 신부 파늘루, 사회적 재난을 기회로 온갖 부도덕한 짓을 감행하는 범죄자 코타르 등이 소설의 등장인물이다.

오늘날 메르스 재난을 겪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캐릭터들이다. 소설의 결미는 전염병이 잦아들고 평온을 되찾으면서, 이들 행위의 공과가 명백히 밝혀지는 데까지 이른다. 소설 속에 공익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의사 리유가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헌신을 다하는 파수꾼들의 손길이 있다. 소설 속에 무책임한 변명이나 선동으로 일관하는 인물과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파렴치한이 있는 것처럼, 우리 사회에도 그렇게 부정적인 세력이 함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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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역사를 바꾼 전염병의 역사는, 그 발단과 결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전체적으로 통용되는 하나의 원리가 있다. 13세기의 한센병, 14세기의 흑사병, 15세기의 매독, 18세기의 천연두, 19세기의 결핵 등이 모두 당대의 사회의식을 바꾸고 시민의식의 성숙을 요구했다. 달리 말하면 올바른 의식의 정립을 통해 병의 재난에 대항해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한다.

나폴레옹의 여러 전쟁에 종군한 앙투안 장 그로라는 화가가 있다. 종군 화가인 만큼 전장(戰場)을 주로 그렸고, 전장의 나폴레옹을 젊고 낭만적인 모습으로 묘사했다. 그의 그림 중에 <자파의 페스트 격리소를 방문한 나폴레옹>이란 작품이 있다. 그림은 나폴레옹이 상체를 벗고 있는 환자에게 손을 내밀어 위로하는 장면을 담았다. 그 뒤의 부관은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있다. 여기서 나폴레옹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병사를 돌보는 영웅적 지휘관이다.

이 그림은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 걸려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나폴레옹은, 전염병에 걸린 병사들에게 스스로 독약을 먹고 죽으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어쩌면 이처럼 표리부동한 삶의 방식이 결국 황제에서 범죄자로 추락하는 그의 비극적 운명을 재촉하지 않았을까.

■ 균형 있는 삶이 아름답다

2011년 11월, 경희대학교에서 주최하는 해외동포문학상 시상식 행사를 위해 미국 뉴욕을 다녀왔다. 모두 5백 편이 넘는 미주 동포들이 작품이 접수되고 소정의 심사과정을 거친 다음 현지에 가서 시상을 하는 제도로, 그때 제4회에 이르렀다. 대상수상자의 이름은 권금성, 캐나다 토론토에 거주하는 동포 문인이었다.

그런데 출국하기 직전, 잘 모르는 분으로부터 이메일 한 통이 날아왔다. 자신의 이름은 권천학이고 이번 문학상의 대상수상자이며, 2년 전 서울신문의 칼럼 ‘문화마당’에서 필자가 그의 딸에 관련된 글을 쓰면서 이름을 거론한 적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 이름은 생각나지 않았으나 딸 감하나의 경우는 기억이 생생했다. 북미동아시아도서관협의회 한국분과위원회 회장이며, 미국 의회도서관이 독도의 이름을 ‘리앙쿠르 바위섬’으로 바꾸는 회의를 저지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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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칼럼을 찾아서 읽어보니, 딸에게 ‘행동하지 않으면 매국노’라고 가르친 어머니의 이름이 권천학이었고 그때 나이가 62세였다. 권씨는 혹시 문학상 공모에 본명으로 응모했을 때 행사를 주관하는 필자가 부담을 느낄까봐 설악산 바위 봉우리의 이름인 권금성을 필명으로 썼다고 했다. 딸을 올곧게 가르쳐서 정부로서도 어려운 나라사랑의 모범을 보이게 한 것도 그렇거니와, 굳이 이름을 숨기고 몰래 작품을 보낸 그 마음 씀새가 사뭇 감동적이었다.

권씨는 뉴욕의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날이 마침 딸 김하나 씨가 둘째 아이를 출산하는 날인 까닭에서였다. 그러나 이 사연을 전해들은 시상식장은 감탄의 소리와 박수의 열기로 넘쳤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필자는, 한 사람의 균형 있는 교양과 건전한 상식이 스스로를 귀하게 하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촉발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너도 나도 한쪽으로 치우쳐서 균형을 잃기 쉬운 시대에, 충직한 양심이 살아 있음을 보는 일이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일찍이 공자가 가르쳤던 중용의 도리는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삶의 자세를 말한다. 그것이 정신 수양과 덕의 실천 방법이라는 데 유가의 뜻이 있다. - 끝 -

2015. 1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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