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8. 13. 09:40ㆍ독서후기
백 세 일 기 (2)
- 매일 잠들기 전 써 내려간 충만한 삶의 순간들 -
■ 김형석 지음
3부. 사랑은 언제나 아름다운 마음으로 남는다
■ 그래도 2분의 양심은 있군
지난 화요일 아침부터 바쁘게 지냈다. 조찬 모임 강연을 위해 수원 상공회의소에 다녀왔다. 아침 6시에 집을 나섰다가 10시가 되어 돌아왔다. 저녁에는 내가 10여 년 동안 지켜온 화요모임이 있었다. 저녁 7시부터 90분 정도 강의와 대화를 나누다가 늦은 시간에 귀가한다.
사실 그날은 내 생일이었다. 만 99세를 채우고 100세가 시작된 날이다. 쉬면서 가족과 함께하고 싶었는데 뜻대로 되지 못했다. 오래전부터 내 생일이 있는 한 달은 봉사의 달로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난 것도 감사하나, 많은 사람의 도움과 사랑을 받아 오늘에 이르게 됐으니 그 정성에 보답할 수 있기를 원했다.
금년 4월에는 24회의 강연을 하기로 되어 있고 5편의 글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보내야 한다. 남는 시간을 나와 가족에게 할당하고 보니까 생일 잔치는 생각해볼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100세를 기념하는 모든 행사는 명년으로 미루었다.
안병욱과 김태길 선생, 두 친구가 살아 있을 때는 생일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세상을 떠나니까 생일은 사라지고 기일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생일은 삶의 기간과 함께 끝나는 것일까, 기일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내 모친의 경우도 그렇다 생일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세상 떠난 날이 생생히 떠오르곤 한다.
그런데 더 긴 세월이 지나면 사회와 역사적으로 존경 받을 만한 사람들은 생일과 기일을 함께 기억해 준다. 그들의 고마움 마음과 남겨준 업적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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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생일을 지니고 살다가 기일을 남기는 사람도 의미 있는 생애를 살았겠지만, 두 날 다 많은 사람이 오래도록 기억해 주는 사람은 감사와 존경의 대상이 되는 것 같다.
■ 오래 산다는 것이 축복인가
지난해에 들은 얘기가 생각난다. 서울에 사는 50대 남자가 어려서부터 아버지 친구이면서 자기를 사랑해 주던 노인에게 세배를 드리러 수원까지 갔다. 복장을 가다듬고 예의를 갖춰 공손히 엎드려 큰절을 드리면서 말했다. “백수(白壽) 하시기 바랍니다!” 이전 같으면 반기면서 덕담도 하고 먼저 세상을 떠난 아버지 얘기도 하셨는데,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밖으로 나와 친구인 아들에게 그 얘기를 했다. 아들이 “뭐? 백수하시라고 그랬어? 명년이면 백수가 되셔. 1년만 더 사시라고 했구먼…”이라면서 걱정 했다.
그 말을 들은 친구가 큰일 났다 싶어 다시 들어갔다. “세배 다시 드리겠슴니다. 만수무강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그제야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멀리서 왔는데 놀다가게, 명년에 또 오게나”하면서 반기더라는 얘기다.
나 같은 사람은 더욱 처신이 곤란해진다. 나이를 자랑할 수도 없고 후배나 젊은이들에게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은 얼마나 오래 사는 것이 좋으냐고 누가 물으면 “일할 수 있고 다름 사람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때까지”라고 말한다.
■ 나 말고 다른 이에게 갚아라
여러 해 전에 내가 지방 강연을 갔을 때다. 한 30대 남성이 찾아와 뜻밖의 인사를 했다. 내가 학비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하게 생각한 내가 “장학금을 준 일이 없을 텐대요”라고 반문했다.
그의 얘기가 나를 약간 놀라게 했다. 자기가 고생하고 있을 때 의사 B가 장학금을 주면서 “이 돈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고 내가 대학에 다닐 때 김형석 선생이 도와준 것이다. 너에게 주는 것은 김 선생을 대신해 주는 것이니까 너도 이 다음에 사정이 허락하면 이 돈을 가난한 학생에게 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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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 젊은이의 인사를 받으면서 그 말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80여 년 전 중학생 때부터 나를 사랑해 준 마우리 선교사가 떠올랐다. 가난하게 고생하던 나를 여러 차례 도와주면서 마우리 선교사는 말했다. “이것은 예수께서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 갚는 것이 아니니까 네게 가난한 제자가 생기면 예수님을 대신해 주면 된다.”
그 사랑이 여럿을 거쳐 젊은이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아름다운 마음으로 남는다.
■ 피보다 진한 사랑
어디서 강연을 하면서 “여러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아시지요. 부자간이나 형제 사이는 혈연관계입니다. 한 번 인연이 맺어지면 죽을 때까지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큰 피로 맺어진 하나의 민족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더라도 공동체 운명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호소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다. 그 뜻을 강조하기 위해 “젊은 여러분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도 싸우거나 이혼을 하면 그 후 부터는 남남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피는 물과 다르다는 예로부터의 가르침이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 강연을 들은 사람이 그날 강연 내용을 부인에게 알려주면서 그것이 남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까지 과장했던 모양이다. 그 얘기를 들은 부인이 “그래 우리는 헤어지기만 하면 그뿐이지요? 몇 십년의 애정은 아무것도 아니고요”라고 따져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물었더니 “그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거든요”라면서 멎쩍어 했다.
내가 “그렇게 쉽게 사과하면 되나, 나 같으면 ‘당신은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모르는구먼’하고 응수 했겠다 했더니, 그는 ”아차, 그걸 내가 몰랐구나“라면서 아쉬워했다.
■ 고등학생 때 연애해보셨어요?
지난 봄, 강원도 양구의 한 모임에 참석했다. 이야기를 해 주기 위해서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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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예상과 달리 청중은 고등학생이 대부분이었다. 강원도에 하나밖에 없는 외국어학교의 우수하고 장래성 잇는 젊은이들이었다.
인생의 길을 100리길이라고 생각해보자. 학교교육은 초등학교가 10리, 중학교 까지가 20리 고등학교를 끝내면 30리가 된다. 대학에 안가거나 못가는 사람은 30리 기차를 타고 와 내리는 것과 같다.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은 10리를 기차로 더 가는 것으로 생각하자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은 70리가 남아 있고 대학을 마쳤다고 해도 60리는 누구나 걸어가야 한다.
선진국에서는 의무교육이 고등학교 까지다. 유럽에서는 대학교육도 무상이다. 국가 지도자 양성은 정부가 책임진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많은 고교 졸업생이 대학에 가지 않는다. 일찍 사회로 나가 취직하고 결혼해 저마다 행복갖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대학을 마치고 전문직으로 일하는 고생을 바라지 않는다. 대학교육은 소수만 선택한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교육이 인간교육의 전부라고 생각한다. 고교 출신은 평생 나는 대학에도 못 갔다는 열등의식을 갖기도 한다. 대학출신은 대학까지 다녔으니까 내 교육은 끝났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나머지 70리와 60리를 포기한다. 그 길을 자력으로 걷는 과정의 책임이 더 중하다는 게 문제다.
나와 오랜 친분을 유지한 김수학은 초등학교 출신이면서 대구시장, 경북도지사, 국세청장, 토지개발공사 사장을 지냈고 새마을 본부에서 중책을 맡기도 했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는 진주여고 출신이다. 이들은 90리와 70리를 혼자 걸어간 지도자들이다. 강연에서는 학생들에게 주어진 100리 길을 자신과 사회를 위해 최선을 다해 가라고 당부했다.
한 여학생이 “교수님도 고등학교 때 연애해 보셨어요?”한다. 내가 윤동주 시인과 함께 공부한 100세 교수라고 소개했을 때는 손뼉 치면서 함성 질렀던 학생들이 지금은 나를 ‘좀 나이 많은 친구’로 보는 것 같았다. 덪분에 젊어진 기분이다. 그래서 선생은 한평생 학생들을 떠날 수 없다.
■ 양심의 전과자로 만들지 말라
내 큰아들이 초등학교 졸업반일 때였다. 나는 그 애를 대광중학교로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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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싶었다. 그런데 그해에 대광중학교는 제2차로 입학시험을 보게 되었다. 아내가 담임선생을 찾아가 상의했다. 담임선생님은 성적순으로 1등부터 11등까지는 입학 경쟁이 가장 심한 경기중학교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면서 11등인 내 아들도 보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반에서 결국 경기중학교에 합격한 사람은 1등과 우리 애뿐이었다. 내 아내가 잘 아는 다른 학부모를 만나 그 얘기를 했더니 “그 애는 ‘어머니 점수’가 없으니 자기 실력이었을 겁니다”라는 것이다. 아내는 학교에 찾아간 적이 없다. 어머니들 치맛바람이나 욕심이 애들을 불행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내 선배인 C교수는 아들에게 연세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자기가 어느 교수의 아들이라는 말은 절대 안하기로 약속을 받은 일이 있다. 당시에는 대학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다른 교수들이 어느 교수의 자녀라는 것을 쉬 알고 지내던 때였다. C교수는 아들이 사사로운 대우를 받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다. 나도 아들딸이 연세대학교를 다녔다. C교수와 같이 두 애에게 아버지가 누구라는 것은 말하지 않도록 했다.
수능 시험을 끝내고 나니까 자녀들을 데리고 입학 설명회에 참석하는 어머니를 많이 본다. 나와 내 아내는 그런 모임에 가본 적이 없다. 요즘 입시제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모르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면 이미 성년이다. 자신의 앞길은 위한 선택과 책임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도록 뒤에서 도와야 한다.
■ 크리스마스이브에 지난 100년을 돌아보다
나는 열네 살 때 인생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건강과 가난 때문이다. 언제 죽음이 찾아올지도 모르고 가난 때문에 중학교에 진학할 길도 닫혀 있는 듯 했다. 그러나 꿈을 갖고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다른 사람과 같은 건강을 주시고 중학교에도 가게 해주시면 제가 건강한 동안은 하느님의 일을 하겠습니다’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냈다.
기독교 학교인 숭실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때였다. 나는 김창준, 윤인구 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내가 앞으로 믿고 살아갈 신앙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철이 들면서 도산 안창호의 마지막 설교를 들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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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선배인 고당 조만식의 생애를 보면서 신앙은 내 인생의 사명임을 깨달았다. 신앙은 교회를 위한 교리가 아니고 인생 모두의 진리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대학에서는 좁은 영역의 교회 신학보다는 인간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의 철학을 공부했다. 무신론자들의 철학책을 읽으면서 인간은 누구나 진리와 인간애를 포기해서는 안 되며, 인간의 철학적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기독교 신앙에 있다는 사싷을 체험할 수 있었다.
돌이켜 보면 내 인생은 예수의 가르침으로 시작해 그리스도인의 생애로 끝나고 있다. 열네 살 때 한 기도가 지금까지 이어져 건강이 허락되는 동안은 하느님이 일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이다.
■ 인생의 3단계
춘천 한림대학교에서 한 ․ 일 관계 친선교류를 도모하는 한 ․ 일 포럼이 있었다. 내가 한 ․ 일 관계를 가장 오래 체험했다고 해서 한국측 기조강연을 맡았다. 강연장에 들어갔더니 현수막에 ‘백세 철학자 김형석’이라고 쓰여 있었다. 일본 회원도 150여 명이나 오는데 좀 쑥스러웠다. 요사이는 나이를 팔아먹고 사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내 강연이 들을 내용은 별로여도 100세나 되었으니까 얼마나 늙었나 보러 오라는 광고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람은 얼마나 오래 사는 것이 좋을지 다시 음미해 보았다.
내가 존경하는 한 철학 교수는 흑판을 향해서 30년, 흑판을 등지고 30년 살았더니 인생이 끝났다고 고백했다. 학생으로 30년 교수로 30년을 보냈더니 늙어서 가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때는 나이도 60이면 회갑이 되고 5년 후에 정년을 맞으면 생산적인 인생은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60을 넘기고 나니까 강의다운 강의도 하고 학문에 대한 의욕이 솟았다. 그래서 학교교육은 끝났으나 사회 교육은 이제부터라고 생각했다.
앞으로의 인생은 교육을 위한 30년, 직장에서 일하는 30년, 사회인으로 열매를 맺어 남기는 30년으로 보아도 좋다는 사실을 나는 체험했다.
내가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은 남는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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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번째 생일을 맞는 마음
기다리지는 않았는데, 새해가 성큼 다가왔다. 나에게 새해가 온다는 것은 인생의 석양이 다가온다는 신호다. 과거가 길어질수록 미래가 짧아지기 때문이다.
그래도 지난 1년 동안 바쁘게 많은 일을 했다. 강연의 횟수를 헤아려보았다. 모두 183회, 이틀에 한 번씩강연을 한 셈이다. 집필도 1년 내내 계속했 다. 조선일보 주말섹션 ‘아무튼, 주말’에 매주 글을 보냈고. 동아일보에도 한 달에 한 번씩 칼럼을 송고했다. 합하면 60여 편이 된다. 저서도 몇 권 출판했다. 지금까지 내가 주관한 세 가지 일 가운데 두 가지는 2019년에 끝을 냈다. 먼저 성경 연구 모임을 마감했다. 수십 년 동안 계속했고, 최근에 1,000회를 넘긴 모임이다.
13년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계속해 오던 화요 모임도 연말에 종강했다. 이제는 강원도 양구에서 열리는 인문학 강의 하나가 남았을 뿐이다. 그 책임은 한 해 더 이어갈 예정이다.
요사이는 30분 동안은 선채로 강연을 한다. 그 이상이 되면 앉아서 90분 까지는 계속할 수 있다. 경청해주는 자세에 감사할 뿐이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2020년 말까지는 지팡이를 짚지 않고 다녔으면 좋겠다.
금년으로 만 100세를 넘긴다. 무엇인가 더 새로운 정신적 열매를 남기고 싶은 심정이다. 문제는 내가 얼마나 더 많은 이웃과 사회를 사랑하는가에 있는 것 같다. 더 오래 우리 곁에 있어달라는 인사를 받을 때마다 그래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여러분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서.
■ 세뱃돈과 용돈
교육자는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는 일을 한다. 열매는 사회가 거둔다. 100세를 헤아리게 되니까,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내가 찾아보는 때가 있다. 제자들이 성공해서 나보다 훌륭하게 되었을 때가 그렇다. 지난해 가을, 제자와 함께 인촌상을 받았을 때는 정말로 자랑스러웠다. 그런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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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는 내 제자가 사회적인 공로상을 받게 되었다. 저녁 시간이었으나 식장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곧 시작할 시간에 들어섰는데 수상자 자리에 앉아 있던 제자가 찾아와 내 코트를 받아 걸어주면서 안내해 주었다. 주빈은 제자였다. 상을 받은 그가 답사를 했다. 본래 말이 적고 앞장서기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오늘까지 살아오면서도 그러했으니 앞으로도 은사이신 김 교수님의 뜻을 기리면서 살게 될 것이라고 답사를 했다. 나에게는 그 마음이 분에 넘치는 고마움이었다.
시상식을 마칠 때 제자는 내 옆까지 왔다. 귀에 가까이 얼굴을 대면서 “선생님 제 얘기가 들리세요?”라고 묻더니 “제가 선생님 코트에 봉투를 하나 넣었는데요. 용돈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허물 마시고 써주세요”라면서 돌아갔다.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좀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코트 주머니에는 두툼한 봉투가 들어 있었다.
■ H형 당신이 그립습니다.
90을 넘기면서 가장 힘든 것은 늙는다는 생각이 아니다. 찾아드는 고독감이다. ‘나 혼자 남겨두고 다 떠나가는구나’하는 공허감이다. 자녀도 다 제 갈 길을 찾아가야 한다. 친구들도 소식 없이 떠나버린다.
얼마 전에는 옛날 동창들 가운데 누가 남아 있나 생각해 보았다. 국내에는 한 사람도 없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던 C목사의 얘기는 들리지 앉는다. 브라질로 이민 간 H 형이 최근 세상을 떠난 것 같다는 소식뿐이다.
H 형은 해방 직후 내가 고향에서 중학교 책임자로 있을 때 함께 수고해준 친구 중 한 사람이다. 후에 서울로 와 교수로 있다가 정부의 차관직을 맡고 있었다.
그 친구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에 빠져 공부를 하지 못했다. 일류대학 입시에 낙방을 했다. 이류대학으로 가느냐 재수를 하느냐 기로에 서게 되었다, 결국 H 형이 택한 길은 우리와 좀 달랐다. ‘다른 친구들은 대학에서 4년 공부로 끝내겠지만 나는 이류 대학이라도 좋으니까 10년은 열심히 공부하자. 10년 후에 누가 성공하는지 경쟁해 보자’는 결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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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차관으로 있을 때다. 지금은 일류대학을 나온 이들이 내 밑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웃었다. 나도 H 형의 선택이 옳았다고 인정했다. 열성이 있는 친구였다.
■ 마지막이 될 주례를 마치고
추석을 앞 둔 토요일 강원도 양구에서 내 생애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결혼식 주례를 맡았다. 신혼부부에게 “결혼은 가정의 출발이기는 하나 완성은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이다. 최소한 두 자녀는 훌륭하게 교육해서 사회에 봉사하는 모범적이고 영광스러운 가정이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옛날일이 떠올라 혼자 웃었다. 서울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낸 고황경 박사가 대한 어머니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가족계획 운동을 주도하던 때였다. 1970년대에 고황경 박사는 전국을 다니며 ‘둘만 낳아 잘 키우자’고 강연하곤 했다. 한 번은 나더러 다른 내용 강연으로 협조해 달라는 청을 했다. 도와드려야 하겠기에 동행한 때였다.
그런데 한 강연에서 누군가 뒷자리에 앉아 강연차례를 기다리는 나를 가리키면서 “김 교수님은 애들이 몇이세요?”하고 ane는 것이다. 나는 대답하기 난처했다. 아들 둘, 딸 넷이라고 해야겠는데 그렇게 되면 고박사의 강연이 무색해진다. 그래서 아들은 둘을 키우고 있다고 반 거짓말을 했다.
그 다음부터는 고박사와 동행하기를 거절했다.
몇 해 전 추석에는 미국에 있는 애들도 모여서 모친과 아내가 잠들어 있는 산소에 갔다. 간단히 예배를 마친 뒤 지난 이야기를 했다. 내용은 이랬다.
“엄마와 내가 너희 여섯을 키울 때는 좁은 집이 넘칠 것 같았다. 하나씩 미국, 독일로 유학을 떠나니까 집이 빈 둥지 같아지더라. 연세대학교에서 2년을 보낸 막내를 마지막으로 미국으로 떠나보내고 나니까. 엄마가 집에 들어오기가 힘들었던 모양이더라. 나보고 ‘먼저 가세요. 나는 혼자 어디 가서 마음 놓고 울다 갈게요’라면서 들어오지 않더라. 갈 곳도 없었겠지. 교회에 가서 실컷 울고 왔겠지. 와서는 ‘이제는 행복했던 시절이 다 끝난 것 같아요. 여섯을 키울 때가 제일 즐겁고 감사했는데…’라고 하더라. 뜻밖에 차분한 목소리였다. 내가 ‘당신은 나보다 더 사랑이 넘치는 고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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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으니’라고 했다.”사랑이 있는 고생이 가장 행복한 인생이다.
■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미안하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 대표적 구름사진 작가인 김종호 씨가 구름사진 작품 5점을 차에 실어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책으로 된 사진첩은 먼저 받아 보았고 그 중에서 내가 고른 사진들은 다시 대작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 중 3점은 강원도 양구의 기념관으로 보냈다.
서재에 있는 책상과 그 옆에 있는 서랍 달린 장은 가까이 살던 사람이 이사가면서 버린 것을 도우미 아주머니가 밤중에 날라 온 중고품이다. 옆방에 있는 4층짜리 책장도 어디선가 주워온 것이다. 하도 물건이 없으니까 아주머니가 내가 없을 때 옮겨오곤 했다. “고맙기는 한데 누가 보았겠다”고 하면 “제가 그런 실수야 하겠어요?” 하면서 창피할 것도 없다는 자세였다.
침대가 있는 방의 걸상은 6 ․ 25 전쟁 후에 처남이 미군 부대에서 얻어다 준 것이다. 벌써 60년이나 지난 골동품이다. 지금 수고해주는 도우미는 그런 과거를 모른다. 그런데 지난달에는 누군가가 이사 가면서 대문 앞에 내 놓은 것이라면서 또 옮겨 왔다.
20여 년간 내 서재에서 책상으로 쓴 널판은 양구로 보냈는데 어울리는 곳이 없어 복도에 밀려나 있었다. 마치 나에게 “아저씨 나는 어디로 가지요? 다시 서울로 가면 안 되나요?”하고 묻는 듯 싶었다. 20여 년 동안 정들었는데.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좋은 책상과 가구는 장만할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나같이 한 약복을 30년 씩 입거나 구두 한 켤레로 2년을 보낸다면 양복점 사람이나 신발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죄송스럽기도 하다. 많이 받으면서 적게 주는 사람은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이다. 10년만 더 살 수 있다면 한번 멋지게 살아보는 건 어떨까.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 간디와 톨스토이가 남겨준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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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중학생 때, 간디를 존경했고 톨스토이의 작품을 애독했다. 한때는 간디에 관한 내 글이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의 정신세계를 찾아보고 싶어 두 차례 인도를 방문했다. 간디는 말년에 종교 때문에 분열되는 인도의 통합을 위해 힌두교 제전에 참석하러 가는 길 위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 젊은이가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고 축복해 주기를 원했다. 그의 머리 위에 손은 얹었을 때 젊은이가 총격을 저질렀다. 간디는 한 평생 진실을 위해 거짓과 싸웠고, 폭력이 사라지고 사랑이 넘치는 사회를 위해 생애를 바쳤다. 몇 해 전에는 그의 동상이 영국의 국회의사당 앞뜰에 세워졌다. 영국의 정치지도자들보다도 인도와 인류의 존경을 받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톨스토이는 세상을 떠나기 얼마 전 아무도 모르게 정처 없이 집을 나섰다. 기차를 타고 가다가 한 시골 역에서 내려 역장실로 들어가 추위를 피하고 싶었다. 화덕불을 쪼이면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싶었는데…”라는 말을 남겼다. 그는 당시의 귀족들이 꿈꾸는 법관이 되고 싶었다. 성경을 읽으면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고 작가의 길을 택했다. 많은 재산과 농토를 소유한 삶을 부끄럽게 후회하면서 살았다.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찾아 정신적 순례의 길을 택했다.
긴 세월이 지난 오늘 그들이 남겨준 교훈은 무엇이었는가. 먼 길을 떠나는 사람들은 많은 짐을 갖지 않는다. 높은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무거운 것들은 산 아래 남겨두는 법이다. 정신적 가치와 인격의 숭고함을 위해서는 소유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 소유는 베풀어 주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 즐기기 위해서 갖는 것이 아니다.
■ 100세, 나의 비결
1962년 봄, 나는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73세인 파울 틸리히 교수의 종강식에 참석했다. 그 뒤에 그는 5년 계약직으로 재임용되었다. 78세까지 강의 하는 것이다. 23년 후에 내가 연세대학교에서 종강식을 가졌다. 후배들의 진출을 고려했고, 한 대학의 교수로 남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대학 정규 강의를 끝내기로 했다. 사회교육에 전념하며 대학 특수 과정 강의는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독서 운동을 비롯한 시민사회 단체에 도움을 주기도 했으나 개인적으로 하는 자유로운 봉사가 더 효과적이라는 경험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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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가 끝나면서 반성해 보았으나 내가 정신적으로 늙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90이 될 때까지는 그 정신적 위상을 지켜보자는 의욕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내 사상이 일을 만들고, 일이 지적 수준을 계속 유지해 주었다.
그러는 동안에 90을 맞게 되었다. 두 가지 변화가 찾아왔다. 함께 일하던 김태길, 안병욱 교수가 활동 무대에서 떠나갔다. 곧 내 차례가 될 것이라는 허전함이 엄습해왔다. 정신력에는 변함이 없고, 창의적이지는 못해도 그 위상은 유지할 수 있는데 신체적 여건이 뒤따르지 못했다.
90 고개를 넘었다. 나 혼자 남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제부터는 내가 나를 가꾸고 키워가자는 다짐을 했다. 정신적 기능과 일을 하는 것이 있어서는 모르겠는데 신체적인 늙음은 계속됐다. 정신과 육체 사이의 간격이 넓어지는 느낌이었다.
‘너 늙어봤냐, 난 젊어봤다’는 노래가 있듯이 ‘너 100세까지 살아봤냐, 난 100세까지 경험했다’는 생각을 해본다.
30대까지는 건전한 교육을 받는 기간이다. 60대 중반까지는 직장과 더불어 일하는 기간이다. 60대 중반부터 90까지는 열매를 맺어 사회에 혜택을 주는 더 소중한 기간이다. 누구나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라고 믿는다.
4부 더불어 산 것은 행복을 남겼다
■ 고마운 사람들, 아름다운 세상
커피를 마시면서 과거에 느끼지 못했던 생각을 더듬어 봤다. 한평생을 살아오는 동안에 수많은 사람의 도움과 사랑을 받았다. 하루도 빼 놓을 수 없는 음식도 그렇다. 어느 것 하나도 내가 만든 것이 없다. 오늘 마시는 이 커피도 에티오피아 농민들의 작품이다. 식당에 가서 원산지 표시를 보면 배트남이나 노르웨이에서 수입해 들어온 해산물이 있다. 우리 농산물도 수많은 사람의 정성과 사랑으로 내게 주어진 것이다. 내 몸에 걸치고 있는 옷과 신발도 바다 건너 먼 외국에서 만들어 보내준 소재들이다.
내 학문과 지식의 배경에는 2,000년에 걸친 선학(先學)들이 있었고 직접 가르쳐 준 스승들과 동학들이 있었다. 사랑을 나눈 제자들이 없었다면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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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나도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식과 학문만이 아니다. 내 존재 자체가 사랑이 있는 삶의 한 부분이다. 그 많은 사람의 도움이 없었다면 현재의 내 삶은 유지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내 인생 부두가 사랑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그대신 나는 무엇을 했는가. 가르치는 일 한 가지가 전부였다. 지난 99년을 이웃들의 도움과 사랑으로 살아왔는데 나는 한 가지 밖에 못했다. 그 한 책임을 잘 감당 했다고 해서 고마운 마음과 뜻을 전해 온다.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세상인가. 다시 한 번 옛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감사한 마음으로 여러분을 섬기고 싶다. 많은 사람을 사랑해야 겠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니까 이웃과 사회를 위해 베푼 사랑은 남아서 역사의 공간을 채워준다. 가장 소중한 것은 마음의 문을 열고 감사의 뜻을 나누며 사랑을 베푸는 일이다 더 늦기 전에 해야 할 인생의 행복한 의무이다.
■ 안창호 선생의 마지막 강연
내가 열일곱 살 때 일이다. 도산이 병 치료를 받기 위해 가석방 되었다. 선생이 평양 서남쪽에 있는 대보산 산장에 머물고 있을 때 20리 쯤 떨어져 있는 우리 고향 송산리를 방문하였다. 우리 마을에는 덴마크의 농민학교를 모방해 설립한 학교가 있었고 주변 마을에서 신도 200여 명이 오는 교회도 있었다. 그해 초가을이었다. 도산이 찾아와 내 삼촌 집에 머물면서 토요일에는 마을유지들에게 강연을 했고 이튿날에는 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신사참배 문제로 1년간 평양 숭실학교를 쉬면서 고향에서 우울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날 행사가 도산의 마지막 강연과 설교가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선생은 얼마 후에 다시 수감되었고 이듬해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다.
도산의 말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라 사랑과 인재 교욱이었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 간곡한 호소였다. 도산은 웅변가였다고 하지만 민족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은 더 컸다. 웅변이라기 보다는 기도하는 열정이었다.
올해는 3 ․ 1운동 100주년이다 얼마 전에 나는 사흘 동안 충남의 아산,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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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부여 지방을 다녀본 일이 있다. 서울에 올라와 도산공원에 들렀다. 도산 동상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리고 기도했다.
“선생님 마음 편히 쉬십시오. 지금은 독립했고 국민 모두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좀 더 세월이 지나면 국민 대부분이 선생님이나 저보다 더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 세상을 앓던 사람, 조만식 선생
아침에 신문을 읽다가 문득 고당 조만식 선생이 생각났다. 며칠 전 모교인 숭실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보고 온 고당의 사진 표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고당을 애모한 어느 시인은 그를 머리에 붕대를 감고 세상을 앓던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고당의 세상은 곧 나라였다.
서울에서 고당의 사모님께 들은 얘기가 기억에 떠오른다. 김일성은 정권을 차지했으나 북한 국민의 정신적 지지는 받지 못했다. 반대로 고당의 뜻은 모두가 따르는 실정이었다. 그렇다고 고당을 제거할 수는 없으니까 평양 도심에 있는 고려 호텔에 그를 연금시켰다. 외출을 금지하고 면회조차 가로막았다. 사모님에게만 한 달에 두 차례쯤 한 시간씩 면화를 허락하곤 했다.
한 번은 면회 온 아내에게 “다음 번 면회가 마지막이 될테니까, 각오하고 한 번만 더 오라”고 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느냐?” 고 묻는 아내에게 고당은“세상이 계속 변하고 있는데 언제나 지금 같을 수는 없으니까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가 마지막 면회를 갔을 때였다. 고당은 근엄한 자세로 나는 여기에서 인생을 마무리하게 될 것 같으니까, 아들을 데리고 빨리 38선을 넘어가라고 했다. 자유가 없는 이 땅에 남아 있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며 그는 서랍에서 커다란 흰봉투를 꺼내 주었다. 아내가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가서 보면 안다고 말할 뿐이었다.
집에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머리카락이었다. 당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넣은 것이었다.. 아내는 놀라기는 했으나 그 뜻을 짐작 할 수 있었다.후일에 내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장례를 치러야 하겠고, 빈 관으로 장례 절차를 밟을 수 없으니까 갖고 가라는 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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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당은 나의 중학교 선배이기도 했으나 우리 모두의 지도자이면서 스승이었다. 자기를 믿고 따르는 많은 국민을 북에 남겨두고 탈북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당은 20대가 되면서 기독교 신앙을 가졌고 그리스도 정신으로 조국을 위해 산 선각자였다.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우리는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 국가와 민족인가 아니면 정권인가. 고당이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다.
■ 김성수와 하지 장군
인촌 김성수가 들려준 이야기다.
해방 후 미군정 때였다. 존 리드 하지 장군이 국정을 위임받았다. 그런데 그는 군인이었기 때문에 정치 경력은 없었고, 당시 우리 정치계는 심한난맥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정당 대표자들과 사회지도자들은 저마다 군정청을 찾아가 하지 장군에게 진언도 하고 지지를 받고 싶어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하지 장군은 확고한 주견 없이 때와 사건에 따라 발언하곤 했다. A 에게는 이런 말을 하고 B 에게는 다른 얘기를 하는 식이었다.
그 사실을 배후에서 누구보다도 잘 감지한 인촌이 장덕수를 통역인 삼아 함께 방문했다. 하지에게 단 둘이 얘기를 하고 싶다며 측근 비서들을 방에서 나가게 했다. 그리고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우정 어린 당부를 했다.
그 다음에는 다시 만나거나 얘기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몇 달 후 어떻게 알았는지 인촌 생일에 기대하지 않은 축하카드가 왔다. 하지가 보낸 것이었다. 서양인에게는 카드를 주고 받는 일이 깊은 우정을 표시하는 관습니다. 그래서 인촌도 고마운 마음을 갖고 하지를 대해왔다는 회고담을 들은 일이 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국가와 민족을 먼저 생각하는 정치가가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인촌은 자신보다 유능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있으면 뒤로 물러나 그 사람을 추대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장덕수나 송진우는 모두 인촌의 후원으로 정치적 지도력을 발휘한 인물이다. 해방 직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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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이승만 정부 수립에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후에는 이박사와 뜻을 달리했지만 말이다.
■ 김수환 추기경의 사진을 보며
사진들 가운데 내가 일본의 조치대학교에 다닐 때의 것도 있었다. 한국 유학생들이 모여 찍은 1940년대의 사진이다. 앞줄에 앉아 있는 학생들 가운데 왼쪽 끝자리를 차지한 이가 김수환 추기경이고 오른쪽 끝에 내가 앉아 있다. 추기경은 나보다 2년 후배였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하고 보람있는 대학생활을 계속하지 못했다. 태평양전쟁 후반기에 들어서면서는 일본 대학생들이 징집되어 전선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일본 군부는 한국 대학생들도 지원병이라는 명목으로 군에 입대시키라는 지령을 내렸다. 우리는 경찰의 압력을 받았기에 강제 징병을 모면할 길이 없었다. 나와 김수환도 그때 헤어지고는 긴 세월을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다.
추기경은 해방 후에 사제가 되기를 결심하고 독일로 가 철학과 신학을 계속했다. 그는 학자의 길 보다는 사제의 소명을 받아들였다.
그는 바티칸의 주목을 받는 추기경이 되었다. 천주교 개혁의 큰 사명을 체감했던 것이다. 가장 연소한 추기경이었으나 교회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이지 사회가 교회를 위해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혁신적 사명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천주교와 한국 사회에 잊을 수 없는 정신적 공헌을 했다.
지금 나는 김 추기경의 선종 전 사진을 보면서 생각한다. 추기경의 인품이 100점이라면 나는 몇 점쯤일까. 80점만 되었으면 좋겠다.
■ 선배들에게 세배를 드릴 때가 좋았다
내가 어렸을 때는 설날에서 대보름까지는 연휴로 보내곤 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어려서 맞이하던 설날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 설은 1년에 한 번 세뱃돈을 버는 날이었다. 돈을 줄 만한 집을 빼놓지 않고 찾아다니면 수입이 적지 않았다. 그 돈을 주머니에 넣어 꼭 쥐고 잠들곤 했다.
그 후에는 몇십 년 동안 즐거운 설날은 별로 없었다. 돈도 생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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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배를 드리는 기회도 사라져 갔다. 그러다가 30대 중반이 되면서 다시 한번 세배를 드리는 기회가 찾아왔다. 연세대학교에 부임했을 때였다. 신년이 되면 30대 후배 교수들이 모여 선배 교수 댁을 찾아다니면서 세배했다. 백낙준, 정석해, 최현배, 장지연, 김윤경 교수 들이다.
정석해 철학과 교수 댁에 갔을 때였다. 함께 갔던 이군철 영문과 교수가 일부러 큰 소리로 “영감님들이 죽지도 않고 오래 살아 계셔서 우리가 세배 드리느라 고생한다니까”라고 말했다. 듣고 있던 정 교수는 “미안하외다. 10년만 더 찾아오세요”라면서 웃었다. 방문을 열면서 이 교수가 “세배는 드리지만 언제나 귤하고 떡국밖에 없지요?” 하며 어리광을 부렸다. 한잔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애교다 그러고는 들고 간 와인병을 꺼냈다. 엎드려 절하는 사람이나 받는 이 모두가 정중한 세배를 나눴다. 그 다음 차례는 가까운 곳에 사는 김윤경 교수 댁이다.
선생들은 “새해에 좋은 계획이라도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것도 한 사람씩 보시면서 정성을 담은 표정이었다.
내 차례가 되었다. 새해부터는 대외활동은 좀 줄이고 강의를 비롯한 학업에만 열중하고 싶다고 했다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고 떠나오는 시간이 되었다. 대문밖까지 따라나온 선생님이 “김 교수님 나 좀 보았으면 좋겠다”고 따로 불렀다. 다 떠난 후에 “김교수 말씀 잘 들었는데요. 그렇게 하지 마세요 학교 일은 물론 중하지요. 그러나 사회가 원하는 대외활동은 그분들이 진심으로 원하는 요청입니다. 다른 시간은 줄이더라도 사회에서 원하는 것은 거절하지 마세요. 일제 강점기를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애국적인 봉사입니다.”라고 간곡히 타이르는 것이다. 나는 선배교수의 간청어린 충고를 저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한 대학 밖 시회 활동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 개구리들의 교향곡
이틀 동안 계속되던 비가 그친 날 늦은 저녁에 서대문자연사박물관 맞은편 숲속으로 들어섰다. 작은 연못이 둘 있는데 그곳이 개구리들의 서식지다. 사면이 조용해지기를 10여분 동안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맞은편 숲속의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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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가 울어대니까 양쪽과 뒤 습지에서도 화답하듯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10여 마리가 목청을 돋우어 소리를 지른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고향에서 해마다 들어오던 개구리 소리를 연상했다.
로맹 롤랑 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젊은 음악도가 작곡가가 되려고 열중하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찾아와 가장 위대한 교향곡을 들려주겠다면서 강가의 들판으로 이끌고 갔다. 그곳에서 하늘이 진동할 듯이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가 들린다. 아무리 위대한 음악가라 해도 저렇게 천지를 경탄케하는 음악을 창조해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는 귀띔해준다. 그 젊은이가 훗날 제9심포니를 작곡하는 주인공으로 성장한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어려서 초여름마다 들었던 개구리들의 울음을 연상했다. 수천수만 마리의 합창이라 불러도 좋고 교향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긴 세월을 지나면서 나는 어렸을 때 심취했던 개구리 교향곡을 듣지 못했다. 고향과 더불어 사라진 옛 꿈이 되어 버렸다.
나는 내 삶을 일깨워준 개구리교향곡을 한 번 더 들어보고 싶다. 그 자연의 하모니 속에는 비참과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생명의 강렬함이 있었던 것이다.
■ 독일 교환학생은 왜 울었을가
오래전이다 우리 집에 고등학교 2학년인 한 독일 여학생이 외서 1년 동안지낸 일이 있었다. 기독교 기관의 교환학생으로 왔었다. 내가 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우리 부부를 아빠 엄마라 부르라고 했다.
집에 온 다음 날 연이가 아내에게 “엄마, 1년 동안 내가 할 일은 무어야?”라고 물었다. 아내는 얼마 후에 얘기해 줄 테니까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 애는 집에서 한 가지 가사를 맡아서 해왔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나는 연이에게“한 달에 네가 쓸 용돈으로 2,000원씩을 줄 테다. 학비나 책값은 따로 주겠고…”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애는 정말 구두쇠였다. 신촌 우리집에서 서대문까지 버스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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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까워 꼭 걸어가곤 했다. 한 번은 나와 같이 버스를 탔다. 차장에게 내가 10원을 주었다. 두 사람 요금이다. 차장이 그 돈을 받고 지나갔다. 연이가 5원을 꺼내면서 자기 버스비를 갚으려고 했다. 내가 “네 돈은 넣어두어라. 오늘은 아버지가 내주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형제들도 다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좋아서 5원을 도로 지감에 넣는다. 마치 오늘은 5원을 벌었다는 표정이다. 아내에게 연이가 저렇게 절약해서 무엇에 쓰는지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그 애는 사직공원 옆에 있는 아동병원을 찾아가곤 했다. 그곳에 입원했다가 돌아가는 어린이들은 여러 고아원에서 와 치료를 받는 불쌍한 아이들이었다. 연이가 토요일 오후마다 그 병원을 찾아가 아이들과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하면서 놀다가 오곤 했다. 그 일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용돈을 줄이고 절약했던 것이다.
1년이 가까워지는 어떤 토요일 오후였다. 내가 집에 들어왔더니 아무도 없는 자기방에서 연이가 혼자 슬프게 울고 있었다. 내가 방문을 두드리면서 “1년 동안 있다가 떠나게 되니까 섭섭하지?” 라면서 위로해 주었다. 연이가 말했다 “아빠, 나 오늘 아동병원에 마지막으로 다녀왔어요 다음 화요일에 독일로 떠나기 때문에 다시 못 오겠다고 했더니 애들이 다 울었어요. 나도 울었어요. 집에까지 울면서 왔어요.”참았던 울음이 터졌는지 흐느끼면서 울었다.
나도 마음이 아팠다. ‘저 애들은 교육다운 교육을 받았구나’ 라고 마음속에 부러운 마음에 숙연함을 느꼈다.
■ 말없이 건넨 선물
오래전 일기를 읽다가 한동안 잊고 지내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큰아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독일에서 온 교수 부부가 아버지를 잠시 뵙고 인사드리고 싶어 하는데 시간이 어떠시냐‘는 전화였다. 남편은 독일인이고 부인은 한국 사람인데 대구 K 대학교에 초빙교수로 와 있었다. 연세대학교 영빈관을 겸한 알렌관에서 그들을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 교수는 박정희 정부 때 서독 정부의 요청으로 근로자로 갔던 간호보조원 중의 하나였다. 서독에서 임기를 마친 동료들은 대부분 귀국했으나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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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곳에 남아 학업을 계속하기로 했다. 많은 어려움을 치르면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학위 논문이 통과되면서 대학에서 강의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 장년이 되고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 그동안 한국을 방문할 기회를 한번도 갖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정년을 전후해 대구에 와 머물렀고 임기를 끝내면서 나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다. 특별한 이유나 용건은 없었다. 자기네들이 20대에 독일에 있을 때 내가 쓴 수필집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읽으면서 향수를 달랠 길이 없어 눈물을 많이 흘렸다는 회고였다. 독일이 제2의 고향이 되기는 했으나 세월이 지날수록 한국 생각이 간절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말없이 선물을 건네주었다. 독일에서 가져온 가벼운 목도리와 넥타이라고 햇다. 내가 “감사하지만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다”고 했더니 미소를 지으면서 “누군가에게 드리고 싶었는데 선생님 생각이 남아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용무가 끝났다는 듯이 남편과 함께 현관 앞에서 작별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선물을 열어봤더니 고급스러운 독일제 명품이었다.
왜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선물을 남겼을까. 한국에서 자라 40여 년을 외국에 머물면서 쌓인 향수였을 것이다.
■ 오래 살기를 잘했다
지난 목요일 오후였다. 원고를 정리하다가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 같아 뒷산을 거닐었다. 오래된 습관이다. 지난밤까지 내린 비 때문일까 산과 숲 전체에 생기가 남치고 있었다 언덕 위를 지나면서 나무의자에 앉아 쉬곤 한다.
오늘은 나이 들어 보이는 신사가 먼저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나가려고 하는데 그 노인이 일어서면서 “선생님, 이렇게 오르내리는 산길인데 힘들지 않으세요?”라며 인사를 했다. 신과대학을 은퇴한 M 교수였다. M 교수와 나는 70년간 사제관계를 이어온 사이다. 중앙중고등학교 때 담임을 했던 제자였고, 연세대학교에서도 내 강의를 들었다. M 교수가 학위를 받은 후에는 나와 함께 교수 생활을 했다. 그런 과거였기 때문에 지금도 흠 없이 지내면서도 남달리 예의를 갖추고 지내는 제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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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교수가 “선생님 제 제자의 제자가 벌써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는 가정으로 따지면 증조할아버지 격의 스승이십니다”라면서 좋아했다.
듣고보니 맞는 말이다. 부자 관계는 30년 전후가 대를 잇기 마련인데, 사제 관계는 20여 년이면 뒤를 계승할 수 있다.그러니까 나는 가정에서는 증손자까지 있는 셈이지만 대학에서는 4대를 이어온 고조부 스승이기도 하다.
제자와 헤어져 혼자 산책을 하면서 옛날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M 교수는 나보다 키가 작은 편이다. 그 옆자리에는 외무장관 이었던 변영태의 아들 변혜수 군이 앉아 있었다. 변 군은 내 뒤를 이어 철학을 전공했다. 후에는 미국 뉴욕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중앙중고등학교 학생 때는 선생님을 대하면서 철학자가 근사하게 보여 철학을 공부했는데 교수가 되어 나 자신을보니까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라면서 웃었다. M 교수가 내 신앙을 계승했다면 변 교수는 철학을 이어준 고마운 제자이다.
혈통을 밝히는 DNA 검사를 하듯이 스승과 제자의 정신과 인간적 인과를 밝히는 검사법이 개발된다면 교육게 4대에 걸친 내 직간접적인 제자의 수는 엄청날 것이다. 뉴질랜드 인구보다 더 많을지 모른다. 교육자가 되기를 잘했다. 오래 살기도 잘한 것 같다.
■ 이 양반들은 왜 박수를 안 치는가
지난 화요일에는 충청도 좀 외진 곳으로 강연을 갔다. 넓은 강당에 350명 정도가 모인 모양이다. 80분 가까이 계속되는 강연이어서 때로는 예화를 소개하거나 약간 웃기는 얘기도 했다. 피곤과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다.
그런데 뜻밖에도 청중은 아무런 표정을 안보이고 웃지도 않았다. 다른 곳의 강연에서는 내가 따라 웃어야 할 정도로 웃음이 터져 나오곤 했다. 충청도에서 슬픈 얘기에 안경 밑으로 흐르는 눈물을 닦는 사람은 있어도, 그저 조용하기나 했다.
강연을 끝내고 강단에서 내려올 때도 박수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에 남지 않았다. 며칠 전 서울의 한 교회에 갔을 때는 온 교인이 일어서서 예배실 밖으로 나올 때까지 손뼉을 치기도 했다. 나 혼자 생각해 보았다. 아마 내 강연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 같다는 후회기 남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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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같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던 회사 책임자에게 “제 강연이 도움이 되었습니까?” 물었다. 그는 “예, 참 좋았습니다. 한 번 더 모셨으면 좋겠다는 얘기가 많았습니다”라고 했다. 그 사람도 열심히 강연 내용을 메모하던 것으로 미루어 강연에 불만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휴게실에서 차를 마시는데 내가 잘 아는 두 사람도 동석했다. 멀리 떨어진 도시까지 강연을 들으러 온 것이다. 내 강연의 열성 팬이다. 친분도 있고 해서 “오늘 내 강연이 좋았어요?”하고 물었다. 한 사람은 “눈물을 참았는데요”라고 했다. 다른 사람도 “지금까지 와는 다른 말씀으로 감동을 주셨습니다” 라고 인정해 주었다. 내가 웃으면서 “그런데 왜 박수를 안 쳤어요?” 했더니 “우리 충청도 사람들은 박수를 잘 치지 않습니다.”하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박수를 치던 것 같은데”라고 물었더니 “그거야 서울이니까”라고 답했다.
대한민국은 작은 나라다. 그래도 큰 나라 못지않게 지역 기질이 다양해서 사는 재미가 크다.
■ 젊은이들을 보면 뜨거워진다
나는 지금도 강연을 맍이 하는 편이다. 금년에는 8월 중순까지 150회가 넘었다. 강연을 끝내고 나면 세 가지 반응이 있다.
먼저 소수는 강연 내용을 마땅치 않게 생각한다. 정치적 편견이나 고정관념을 갖는 사람들과 종교적 선입견을 넘어서지 못하는 이들이다. 그러나 스님들 중 많은 사람이 내 책의 독자이고 신부님들 중에서도 성당의 강사로 나를 초청하는 경우가 있다. 개신교 보수 신앙을 강조하는 지도자들은 나와 거리가 있다. 그런 이들은 정치나 신앙이 각자의 선택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는다. 나 자신도 나와 같은 정치관이나 신앙이 최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선택과 개선을 위한 견해 중 하나로 받아주면 된다.
또 한 가지 자주 듣는 얘기가 있다. “명 강연을 해주셧습니다”라는 칭찬이다. 청중이 많이 모여 만족하다는 뜻이다 관례적으로 행사를 진행해 온 사람들이나 정부 계통의 후원을 받아 강연회를 주관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행사의 성공을 도와 주었다는 인사이다.
어떤 사람은 “얼마나 늙으셨나 보러 왔는데 좋았습니다”라고 말한다. 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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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에 들었기 때문에 올까말까 하다가 참석했다는 자세이다. 나에게도 반가운 손님이 된다. 학생 때나 옛날에 한두 차례 내 강연을 들은 사람들이다. 어떤 때는 강연을 주관한 간부들이 자신들은 듣지 않고 있다가 시간 초과를 걱정하며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강연 내용보다 행사가 더 중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내 강연을 듣는 사람들에게는 단 한번 뿐인 기회일 수 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말을 남길 수 있다면 그보다 소중한 일은 없을 것이다.
■ 맺음말
내가 백수를 맞이하는 해 3월이었다. <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편집부에서 ‘김형석의 100세 일기’라는 칼럼을 연재 했으면 좋겠다는 청탁이 왔다.
나는 우리 사회를 불행과 고통으로 끌어들인 문제의 핵심은 아주 평범한 ‘공동체 의식’을 상실했거나 포기한데 있다고 본다. 솔직히 말하면 더불어 살 줄 모르는 사회를 만들었다는 뜻이다.
대화의 가치와 필요성을 모르는 사람들이 투쟁해서 승자가 되면 성공했다고 자부하는 사고방식이다. 그 정도가 심해지면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 편가르기를 예사로이 여긴다. 집단적 투쟁이 사회적 정의의 길이라고 착각한다. 화합과 협력의 모범을 보여주는 지도자가 사라지고 있다. 그 결과는 사회적 고통과 파국이 된다.
최근에는 세대 간의 간격과 갈등까지 합세하는 현상이다. 청년의 ‘지성을 갖춘 용기’는 소중하다. 장년의 ‘가치관이 있는 신념’은 필수적이다. 노년의 ‘경험에서 얻은 지혜’도 있어야 한다. 이 3세대가 공존할 때 우리는 행복해지며 사회는 안정된 성장을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지도자들은 젊은 세대를 정치적 수단으로 삼으며 늘어나는 노인세대는 소외당하는 세태(世態)로 변하고 있다. 그 결과는 우리 모두의 불행이며 사회적 퇴락을 자초할 뿐이다.
2020년 4월에 - 김형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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