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 (2)

2020. 6. 9. 18:08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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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 (2)

■ 이어령 지음

◉ 4. 삼신고개

생명의 손도장을 찍은 여신

■ 첫째 꼬부랑길 - 삼신 할미의 은가위

01 ‘어머니는 바다’ ‘내 안의 물고기’같은 앞 고개에서 들은 이야기들은 모두가 태어나기 전 태 안에서 일어난 일이다. 하지만 바깥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숨소리부터 달라진다. 머리카락, 눈 색깔 얼굴의 피부색까지 동과 서가 다르다. 무엇보다 엉덩이에 난 시퍼런 몽고반점이 그랬다. 의학자들은 그게 피부의 색소를 만드는 멜라닌 세포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한국인에게는 너무 많고 서양 사람들에게는 너무 적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렸을 때 들은 꼬부랑 할머니의 옛날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면 명쾌한 해답을 들을 수 있다. 그건 삼신할머니에게 볼기맞은 멍 자국이었다는 게다. 그걸 알면 벌써 우리는 남과 다른 한국인으로 태어난 사정을 알게 된다.

02 우리는 한동안 엄마 배 속에서 아무 탈 없이 잘 지냈다. 모든 게 탯줄 하나로 이어진 세상, 그 편하고 정든 곳을 어찌 쉽게 떠날 수 있었겠는가.

혼자서 머뭇거리는데 별안간 ‘어서 나가라’고 삼신할머니가 볼기를 친 게다. 그제야 정신없이 좁은 산도로 나가 귀가 빠질 때까지 힘을 쓴다. 이렇게 해서 우리 탄생의 자리는 한 시인의 표현대로 ‘찬란한 슬픔’의 플랫폼이 된다.

03 그게 끝이 아니다. 아직도 엉덩이가 얼얼한데 다시 또 삼신 할머니가 나타난다. 손에는 은가위와 명주실 다발을 쥔 제주도 삼승할망 본풀리에 나오는 모습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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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결코 무서워할 일이 아니다. 옥황상제의 명을 받고 우리를 도우려고 내려온 명진국의 착한 따님이시라는 게다. 원래는 심술 사나운 동해 용왕의 공주가 맡아 하던 일인데, 새로운 삼신이 나타나자 싸움이 벌어진다. 결국 그 길로 둘은 하늘로 올라가 심판을 받는다. 옥황상제는 꽃나무를 하나씩 심은 은대야를 주고 누가 더 많은 꽃을 피우는지 겨루게 한다.

04 처음에는 용왕 딸의 나무에 더 많은 꽃이 피었지만 얼마 안가서 꽃들은 시들어 버린다. 한편 명진국 딸의 나무는 싱싱하게 자라 4만 5,600개의 가지가 뻗고 가지마다 33송이의 꽃이 핀다. 이를 본 옥황상제는 용왕 딸에게 “이제부터 너는 저승 할머니가 되어 죽은 아이들을 돌보라”하고 명진국 딸에게는 “세상에 내려가 아기 낳는 일을 계속 맡아보라” 명한다. 그때 명주실 세 묶음과 은가위를 내리면서 “명주실로는 탯줄을 묶고 은가위로는 탯줄을 끊어 아기 배꼽을 만들어주라”고 생명의 출산과 양육을 맡긴다.

05 명진국을 한자 아닌 토박이말로 하면 ‘명이 긴 나라’라고 읽힌다. 삼신할머니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삼신을 한자의 삼신(三神)으로 알고 환인, 환웅, 환검(단군) 세 국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알아 왔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거다. 일찍이 이능화 선생이 <조선무속고>에서 지적한 것처럼 ‘삼’은 ‘三 ’이 아니라 ‘태(胎)’를 뜻하는 우리 고유의 말이라고 밝힌바 있다. 맞는 말이다. 요즈음 말로도 탯줄을 자르는 것을 ‘삼 가른다’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삼신을 ‘三神’이라고 해온 것은 ‘생각’을 ‘生覺’으로 ‘사랑’을 ‘思郞’으로 써온 한자 중독증의 현상으로 볼 수 있다.

06 삼신의 뜻을 토박이말로 바꿔놓으면 꼬부랑 고개의 꼬부랑 할머니가 된다. 꼬부랑 지팡이가 은 지팡이가 되고 은 가위 은 대야로 변한다. 삼신할머니의 모습은 어마어마한 사당이나 큰 사찰에 가야 만날 수 있는 그런 신과는 다르다. 은지팡이 은 가위라고 해도 그 은(銀 )은 사치스러운 장식물이 아니라 덕을 막는 산구의 하나인 게다. 따로 모시는 집도 없다. 그냥 ‘삼신 단지’ ‘삼신 주머니’ 속에 들어가 안방 시렁위에 얹혀산다. 하지만 집안에 태기만 돌면 제일 먼저 달려오는 맞춤형 가정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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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해산을 시키고도 삼신상에 차려 놓은 것은 기껏 막사발의 산밥, 미역국 한 그릇 정도다. 그러고 보니 신들의 세상에도 막사발 같은 막신이 있었던 거다. 호칭부터가 ‘삼신할머니’에서, ‘삼신할미’‘삼신할매’로 부르다가 제주도에 오면 아예 ‘삼승할망’이다. 친숙하다 못해 만만하기까지 하다.

07 <삼국사기> <삼국유사>같은 역사책 어디에도 삼신할미를 상세히 언급한 사료는 없다. “그럼에도 ‘삼신할미’가 우리민족에게서 차지하는 위치는 흔히 요즘하는 말로 울트라 슈퍼할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할머니 중에서 가장 으뜸 할머니로 자리매김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삼신할미가 마치 “우리들의 친할머니처럼 느껴지는 것은 우리 몸에 밴 민족고유의 모태적인 자식 사랑의 신앙심 때문”이라는 풀이도 ‘한국인 이야기’의 핵심을 찌르는 평이다. 거기에 금상첨화로 ‘삼’에 대한 어원 풀이도 새롭다.

08 삼신할머니의 ‘삼’이 ‘살다’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은 그동안 많이 지적되어 왔다. 고인이 된 국어학자 이남덕 교수를 비롯하여 최근 소장 학자의 논문까지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그 ‘삼’을 ‘삶’과 연관지어 ‘삶신 할머니’라고 한 것은 한 걸음 더 나간 생각이다. ‘삶’이라는 글자에는 ‘사람’이 들어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삶’속에 ‘삼신할머니’가 들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이다. 그 말이 맞다면 한자의 생(生)보다 우리 한글이 훨씬 돋보인다. 생은 풀이 돋아나는 형상을 본 뜬 것이라고 하는데 한글의 ‘삶’자에는 삼신할머니의 이야기가 들어 있으니 말이다.

09~10 장단이 제대로 맞는다. 삼신할머니를 현대말로 옮기면 ‘생명의 여신’이다. TV N에서 삼신할머니가 등장하는 장면은 16회 중 아홉 차례나 된다. 삼신할머니로 나온 배우 잉엘(김자현)은 첫 회에는 예상대로 꼬부랑 할머니로 등장한다. 그런데 채소할미라고까지 불리던 삼신할머니가 2회에서는 갑자기 붉은 립스틱에 새빨간 옷을 입은 생기발랄한 젊은 여성으로 나타난다. 놀랄 일이 아니다. 원래 옛날 민담이나 민요에서도 삼신할머니는 삼신 아가씨로 불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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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일본의 옛이야기를 모은 <고지기>에는 발에 채이도록 많은 신이 등장한다. ‘야오요로스노 가미’라는 말은 문자 그대로 읽으면 800만의 신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삼신할머니 같은 존재는 여신이든 남신이든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보기 힘들다.

일본에는 미즈코(낙태, 유산, 사산한 아이)의 죽은 혼령을 지켜주는 신들만이 눈길을 끈다. 미즈코 공양의 풍습은 그 역사가 깊다. 에도 시대의 농촌에서는 식구를 덜기 위해서 태어난 애를 그 자리에서 죽이는 ‘마비키(밭일 때 식물을 솎아내는 것) 가 횡행했다. 비명에 간 그 애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절간에 공양했다.

12 중국에도 삼신할머니와 비슷한 송자보살 이야기(태아의 볼기를 쳐 세상밖으로 보내는 것)가 있다. 하지만 어디에도 죽은 애가 아니라 아이에게 생명을 주고 기르는 삼신할머니 같은 생명신은 없다.

13 제주도 본굿에 나오는 삼승할망은 한 손에는 ‘은지팡이를 짚고 구덕삼승, 걸레삼승, 업게삼승까지 거느리고 다닌다. 여기에서 구덕은 광주리를 뜻하는 것으로 요람구실을 하는 것이고, 걸레는 기저귀, 업게는 아이를 업는 것을 것을 가리킨다. 태어난 아이를 요람에 눕히고 기저귀를 채우고 등에 업어 길러 정말 우리를 길러주신 할머니의 손길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삼승할망은 힘없고 가난한 시골 아낙네들의 입에서 입으로 떠돌아 다니던 막 이야기 속에서 전해 내려온 막신이다. 유불선 어느 한 주류를 이어온 주신이아니라 여러 것을 섞어 걸러낸 투박한 막걸리 같은 신이다.

그게 산이든 바위든 막사발에 정화수 떠놓고 치성을 드리면 훨훨 날아와 마디 굵은 손을 덥석 잡아주는 시골뜨기 잡신의 하나였든 게다.

14 “앉아서 천리보고 / 서서 구만리 보시는 / 삼신할머니가 / 섭섭한 일이 있더라도 / 무릎 밑에 접어놓고 / 어린 유아를 치들고 받들어서 / 먹고 자고 먹고 놀고 / 아침 이슬에 외 붓듯이 / 더럭더럭 붓게 / 점지하여 주십사 / 명을랑 동방삭의 명을 타고 / 복을랑 석숭(石崇)에 복을 타고 / 남의 눈에 꽃으로 보고 /잎으로 보게 점지 하옵소사”여러 버전이 있지만 그 기도문을 보면 삼신할머니의 캐릭터가 분명히 떠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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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앉아서 천리 서서 구만리를 내다보는 삼신할머니의 예지의 힘, 섭섭한 일도 무릎 밑에 접어두고 돕는 관용의 힘, 아침 이슬에 외가 절로 불어나는 풍요의 힘, 그리고 하늘의 초승달이 점점 둥그렇게 채워져 가는 우주의 힘, 그 모든 힘으로 피어나게 한 한 송이의 꽃 그것도 자기 자신이 아니라, “남의 눈에 꽃으로 보이고 잎으로 보이는 그런 아이의 생명 하나만 점지해 달라”는 것이다. 깊은 생명애가 그 기도의 중심에 있다.

■ 둘째 꼬부랑 길 : 지워진 초원, 몽고반점

01 갈릴레오의 후손들은 태양의 흑점은 알아도 아이의 엉덩이에 난 반점은 모른다. 그래서 유럽이나 미국의 교민들이 이따금 아동학대로 경찰에 고발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02 몽고반점이라고 하면 몽골로이드계 인종에게만 있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니그로이드의 흑인들도 9할대로 나타난다. 다만 검은 피부에 가려 보이지 않을 뿐이다. 우리와 닮은 데가 많다는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당연히 있다. 백인의 경우도 10명에 1명 꼴로 나타난다. 다만 그 색소가 엷을뿐이다.

03 몽고반점은 잘못붙인 이름이다. 위키피디아 영문판을 보면 바로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중남미의 인디오들은 몽고반점이라는 말을 모른다. 멕시코계는 ‘녹색 엉덩이(rabo verde)' 라고 하고 스페인계에서는‘콰테목의 발길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포르투갈과 관련된 종족들은 퍼런 열매 이름을 따서 ‘제니파포’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게 다 남을 욕할 때 막말로 쓰인다는데 공통점이 있다.

04 몽고반점은 서너 살쯤 되면 저절로 사라진다. 몸 어디에도 생기는 것이지만 주로 엉덩이 쪽에 많다. 그래서 몽고반점이라고 하면 ‘애송이’나 ‘미숙아’라는 뜻을 품게 된다.

- 일본 : 몽고반점이라는 말 대신 ‘지한’

- 중국 : 청흔(靑痕)

- 영어권 : 출생마크

전 세계에서 천대 받는 이름이지만 오직 한국이서만 자랑스러운 대접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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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서양 사람들에게 몽고반점이란 무슨 뜻일까? 먼저 떠오르는 것이 황인종의 노란 얼굴일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신체 부위에서 가장 혐오하는 엉덩이일 것이다. 남을 욕할 때 한국 아이들은 주먹으로 쑥떡을 먹이지만 서양애들은 엉덩이를 내밀고 손으로 치면서 ‘내 엉덩이에 입 맞춰라’는 막말을 한다. 한 마디로 서양 사람들에게 몽고반점은 황화의 공포와 멸시의 대상인 게다.

*황화 : 황색인종이 서구세계에 진출하여 백색인종에게 끼치는 침해와 압력

08 1965년 독일 아헨 공대에서 개최된 연주회에서 한국 출신의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이 갑자기 바지를 내린 후 자신의 엉덩이를 관객에게 보여줬다. 당시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공연과 전시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그였지만 정작 그가 관객에게 보여주려고 한 것은 엉덩이 자체가 아니라 몽골로이드계 인종의 특징인 몽고반점이었다.

09 ~ 15 웃음이 자꾸 나오는데 왜 이렇게 슬픈가. 입에 담기도 망측스러운데 왜 이렇게도 아름답고 신성한가. 삼신할머니에게 볼기를 맞고 나온 자국, 그 황당한 막 이야기인데 왜 외국 사람들까지 덩달아 아우성인가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던 순간 권위 있는 영국 맨부커 상 수상 작가 한강의 소설 <몽고반점>이 떠오르게 된 거다. ‘청남대’를 대학이라고 하고, ‘으악새’를 새라고 하고 ‘몽고반점’을 중국집이라고 우기는 세상이라는데도 삼신할머니의 손자국은 여전히 ‘한국인 이야기’의 엉덩이에서 뜨겁다.

16 ~ 18 꽃은 식물의 생식기다. 저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이 동물에게는 생식기와 같은 것이다.

■ 셋째 꼬부랑 길 - 삼가르고 배꼽 떼기

01 우리말에는 아이가 태어나 제 앞가림을 할 때까지 그 성장과정을 보여줄 수 있는 신기한 낱말 하나가 있다. ‘떼다’라는 말이다. 태어나자마자 탯줄을 가르고 배꼽을 뗀다. 다음에는 젖을 떼고 똥오줌을 가리게 되면 기저귀를 뗀다. 그리고 기어다니던 아이가 걸음마를 배워 첫발을 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옛날이라면 천자문을 떼고 요즘이라면 한글을 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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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소 홀로서기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배꼽 떼고, 젖 떼고, 기저귀 떼고, 발 떼고, 천자문 떼지 않으면 평생 ‘떼'쓰는 응석받이로 어른 이 되지 못한다.

02 참으로 절묘하지 않은가? 그 잘난 한자말로 해봐라. 라틴어로 영어로 한 번 해봐라. 세계 어느 나라말로 이렇게 유아기의 성장 과정을 족집게처럼 집어 낼 수 있겠는가. 프로이드가 돌팔이 소리를 감수하며 항문기 단계라는 게 기저귀 뗄 때가 아니겠는가. 게다가 그 떠들썩한 남근기라는 것도 별것 아니다. 기어다닐 때는 가려져 있던 것이 일어서서 발을 뗄 때 본 잠지 이야기가 아닌가. 그야말로 프로이드나 라캉(프랑스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할 것 없이 서양의 정신분석적 발달 이론을 싸잡아 한마디로 말하자면 뗄 때 잘 떼라는 말이 아닌가. 잘못 떼면 정신질환자가 된다는 게 아닌가.

03 ‘뗀다’는 말만이 아니다. 그 말과 함께 따라다니는 ‘가르다’‘가리다’라는 말도 있다. 배꼽을 떼려면 탯줄을 가르지 않으면 안 되고 젖을 떼려면 ‘맘마’와 ‘지지’를 가릴 줄 알아야 한다. 기저귀를 떼려면 ‘쉬쉬’와 ‘끙가’로 똥오줌을 가려야 한다. 발걸음을 떼고 걸으려면 이번에는 안과 밖을 가릴 줄 알아야 하고 마지막으로 천자문이나 한글을 떼려면 글자를 가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자기 앞을 가릴 줄 아는 사람이 된다.

04 참 잊을 뻔 했다. 사실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떼다’라는 말 하나에 운명을 걸었던 말, 애를 ‘뗀다’라는 그 무서운 말 말이다. 만약 낙태를 했더라면 어느 장사가 이 세상에 살아나올 수 있었겠는가.판본에 따라서 다르기는 하나 흥부네 아이는 스물 넷이나 된다. 그래서 <박타령> 가운데에는 흥부 마누라가 애를 떼려고 누에를 먹는 대목이 나온다. 하니잠 누에가 도리어 배 속에서 아이가 되어 세쌍둥이를 낳았다는 익살맞은 이야기다.

05 <1억 5천만 대 1>이라는 주요섭의 소설이 있다. 수정해서 한 아이가 태어나려면 1억 5천만 개의 정자와 경쟁해서 일등을 해야 한다는 뜻이 그 주제다. 그런데 또 한편에는 ‘낙태 전문의’를 다룬 박완서의 소설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이 있다. 거기에는 “그동안 내가 태어나지 못하게 한 아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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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살아난다면 큰 초등학교를 하나 더 만들어야할까”라는 끔찍한 이야기가 나온다.

*최근 대학연구기관에서 분석한 자료

- 낙태 수 : 연평균 50만 명, 포항시나 안양시 같은 도시 하나가 사라짐

- 2018년 출생 신생아 30만 명의 배 가까이 됨

06 배꼽은 잘 떼지 않으면 탯줄 감염으로 생명을 잃는 수도 있다. 독을 식별하고 예방한다는 삼신할머니의 은가위가 필요한 이유다. 그 때문에 옛날 집안에서는 배꼽 꼭지가 떨어지는 것을 아기를 낳는 것만큼 경사롭게 생각했다.

- 규범 있는 가정 : 말라 비틀어진 배꼽 꼭지를 소중하게 백지에 싸서 이름과 날짜를 적어 보존. 그것을 몸에 지니고 있으면 재판에 이긴다거나 전쟁에서 총알을 피할 수 있다는 속설.

- 왕가에서는 태실을 만들어 영구보존

 

07 많은 포유동물들도 탯줄이 있지만 출생한 뒤에는 그냥 없어진다. 탯줄은 말라서 떨어지고 배꼽은 남지 않는다.

배꼽은 사람마다 얼굴이 다르듯이 제가끔 다른 모양과 표정을 하고 있어 풀리지 않는 여러 가지 수수께끼를 남기고 있다.

08 “아담에게도 배꼽이 있었을까?” 하는 문제가 화가들을 괴롭혔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셨으니 배꼽이 있을 리 없다. 교황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던 미켈란젤로도 시스티나 성당의 천정화를 그릴 때 마지막까지 망설였던 것이 바로 아담의 배꼽이었던 것이다.

09 ~ 10 어머니의 미소에는 사랑만이 아니라 슬픔과 아픔의 눈물이 존재한다. 이 세상에 나와 탯줄을 끊는 그 아픔 말이다.

아이를 만나는 순간이 곧 아이를 떠나보내는 순간이다. 물린 젖을 떼고 채웠던 기저귀를 떼고 혼자 걸을 수 있도록 발걸음을 떼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아이들은 걸어서 나간다. 내 품 안에서 밖으로 한 발씩 멀어져간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배꼽은 어머니의 미소이자 눈물 자국의 얼룩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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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웃프다’는 복합감정을 글로 보여준 것이 김승희 시인의 배꼽 연작시이다. “어머니와 나, 나와 아이들 사이에는 육체의 끈인 탯줄이라는 것이 있었고 그 탯줄은 단절의 표상이기도 하고 연결의 표상이기도 하다”라고 말이다. 그래서 “배꼽은 우리가 어머니의 탯줄로부터 떨어져 나와 고아가 되어 이 세상에 던져져 나왔다는 분리의 표상이며 이 험한 세상에서 혼자 살아남아야 한다는 실존주의적인 ‘던져짐’의 표상”이라고 선언한다.

12 “그대여 어둠의 태 속에서 영문 모르고 튀어나와 정처없이 죄를 짓고 죽어가는 그대여, 그대여”라고 부른 배꼽은 어둡고 덧없는 생일날의 ‘흉터’다. 그리고 그것은 어머니로부터 분리된 ‘고아들의 패찰’이요 ‘육체의 이삭’이다. 배꼽은 모태를 향해 가는 삿대 없는 작은 쪽배다.

13 인터넷에서 캐낸 한국인 이야기다. IMF의 환란 때 떠돌던 유머인 것 같다. 경제난으로 일가족이 고층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한 사람도 떨어져 죽은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아버지는 기러기 아빠였고, 어머니는 바람난 주부에 딸은 날라리였다. 거기에 큰 아들은 제비족이고 둘째 아들은 비행소년, 막내는 덜 떨어진 아이였다는 이야기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러한 우스갯소리를 듣고 웃지 않을 사람이 없겠지만 외국인은 아니다. 유머감각이 없어서가 아니라 아무리 번역을 해도 ‘기러기 아빠’나 ‘제비족’그리고 ‘바람 난다’ 같은 독특한 한국어의 속어를 이해하지 못할 거다. 더구나 ‘날라리’나 ‘비행(非行)’과 ‘비행(飛行)’의 동음이의어는 번역조차 불가능하다

14 ~ 15 ‘배꼽’은 눈, 코, 입, 귀와 함께 한자가 침입하지 못한 중요한 신체어 가운데 하나다. 원래 ‘배꼽’이라는 말은 배의 복판에 있다고 해서 ‘뱃복’이라고 불렀다. 세월이 흐르면서 복의 ‘ㅂ’과 ‘ㄱ'의 소리가 뒤집히는 음운도치현상이 일어나 배꼽이 된 것이다.

■ 넷째 꼬부랑길 - ‘맘마’‘지지’와 젖떼기

01 배꼽을 떼면 다음에는 젖을 뗄 차례다. 탯줄이 끊긴 아이는 광대무변한 우주 공간을 표류하는 우주인처럼 된다. 하지만 다시 어머니의 젖꼭지를 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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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모선에 도킹한다. 자궁이 유방이 되고 탯줄은 젖줄이 된다. 그래서 유방은 밖으로 나온 제2의 자궁이요. 젖줄은 제2의 탯줄인 게다. 누가 생각했는지 젖가슴에 ‘방’자를 붙인 것은 참으로 절묘한 발상이다.

그래 그것은 비록 자궁만은 못해도 갓난아기에는 둘도 없는 생존의 방인게다. 자궁이 아니라도 양수가 없어도 유방이 그것을 대신 한다. 모유가 양수의 역할을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02 아기는 뱃속에서부터 손가락을 빤다. 태어난 뒤에도 왼손을 빠는 아이는 왼손잡이가 되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젖을 빠는 준비를 했다는 뜻이다. 갓난아기들은 모든 힘이 입술로 모인다. 엄마의 젖꼭지를 찾는 것도 눈이 아니라 냄새로 한다. 촉감을 비롯한 온 감각기관이 입술로 집중된다. 모자의 소통까지 입술로 한다. 아기가 처음 젖을 물면 엄마의 가슴은 저릴 정도의 강력한 자극을 받는다. 아기가 처음 젖을 불면 엄마의 가슴은 저릴 정도의 강력한 자극을 받는다. 그 흡인력이 얼마나 센지 50센티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물을 빨아올릴 정도의 힘이라고 한다.

03 옛날 시골에서 애가 젖을 안 물면 남편이나 누군가가 대신 빨다주어야 한다는 것이 거짓이 아니었던 게다. 포유병을 물려주면 젖을 쉽게 빨 수 있어 엄마 젖을 멀리하는 것을 보아도 짐작된다. 심할 경우에는 아예 빠는 본성까지 잃을 수도 있다. 이런 현상을 ‘모자 상호성’이라고 한다. 영양을 주고 받는 단순한 관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정신적 유대감을 형성한다. 아이가 젖을 빨 때 엄마의 뇌에서 나오는 호르몬이 바로 ‘사랑의 묘약’ ‘옥시토신’이다.

04 젖을 빠는 아이와 젖을 물리는 어머니 사이에 상상을 초월한 상호반응

이 일어난다. 이때 타이밍을 놓치면 모성애가 생기지 않는다. 한국말로 하자면 정이 안 간다. 심하면 애에게 폭력을 쓰고 학대하는 비정한 어머니가 되고 만다. 그래서 모성애는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출산 후에 아이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주장이 생겨난다. 옛날에 우리 조상들이 애를 낳고 삼칠일(21일) 동안을 중시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다.

05 배냇웃음의 경우도 그렇다. 2주쯤 된 갓난아기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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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만, 현대의 의학계에서는 웃음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단지 안면의 신경 근육이 반사적으로 움직여 웃는 표정처럼 보일 뿐, 마음이 있어 웃는 ‘사회적 웃음’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우연한 반사 작용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우리가 그것을 ‘배냇웃음’이라고 부르듯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선천적인 힘에서 나온 웃음이었던 게다. 그러니 이 풍진 속세에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배냇웃음인데 이길 장사 있겠는가. 그냥 ‘뿅간다’ ‘뒤집어진다’는 비속어로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초월적 힘이다.

06 갓난아기들은 배 속에 든 태아가 아닌데도 우리는 왜 그것을 ‘배냇웃음’ ‘배냇짓’이라고 부르는가. 심지어 갓난아이에게 입히는 옷인데도 왜 ‘배내옷’이라고 하는가.

07 던디 대학교 에메스너지 의 연구팀들은 웃음만이 아니라 아이를 안아주는 촉감, 아기 몸에서 나는 미묘한 냄새 그리고 그 미소를 대하는 시각적 반응 등에서 모자의 상호 반응과 모성애가 발생한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아냈다. 갓난아기들은 얼마 동안 배내에서 가지고 나온 천부의 힘으로 모성애를 자극하고 유발하여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는 것이다.

08 태어날 때 지니고 나온 배냇짓이 무엇인지 미국의 심리학자 케네스 케이는 이런 이야기를 한다. 아기가 젖을 빨 때 3초 동안 멈췄다가 다시 빠는 행위에 주목했다. 그렇게 멈추는 동작은 가볍게 흔들어 달라는 사인이라고 한다. 포유류 가운데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동작인 게다. 젖을 빨다가 멈추면 엄마는 자연히 흔들어주게 된다. 다시 젖을 빨기 시작하면 엄마는 흔들어 주는 것을 멈춘다. 빨고 멈추고 하는 아이의 장단에 흔들다 보면 엄마는 어느 새 인간 요람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

09 모자 상호 반응은 태명 고개에서 본 것처럼 ‘한국인 이야기’의 탄생을 푸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다. <태교신기>가 그랬고 규장각 초계문신 서유구가 편찬했다는 방대한 <임원경제십육지>가 그렇다. 단편적으로나마 소개한 글들을 보면 “산모의 젖이 적게 나고 과하게 나는 것, 또는 묽고 진한 차이가 생기는 것은 모두가 산모의 희비애노 애증원투 같은 감정에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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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된 것이라 했다. 그래서 옛날 유모를 고를 때 그 성격이나 사람됨을 까다롭게 살폈던 이유가 젖 속에 심지(心志)가 들어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0 보통 아이가 젖을 먹는 기간은 2~3년이다. 다른 짐승에 비해 늦둥이다. 쥐는 20일이면 성숙해 생식할 수 있고, 돼지는 1년 정도면 끝난다. 그런데 인간과 닮은 데가 많은 침팬지는 젖떼는 데 4~5년이 걸린다. 그때까지 매일 어미의 젖을 빤다. 그 뒤에도 불안하면 달려와 젖꼭지에 매달린다. 젖을 떼지 못하는 것은 정신적인 욕망이 더 비중이 크다.

11 젖을 뗀다는 것은 어머니와 연결되어 있던 제2의 탯줄을 끊는 것을 의미한다. 젖먹이가 모자 소통의 시작이었다면 젖을 떼는 것은 곧 모자 소통의 단절이다.

12 옛날 한국의 어머니들은 젖꼭지에 금계랍 같은 쓴 약을 발라 아이 젖을 뗐다. 어머니도 젖먹이도 그 쓴맛만큼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통해 먹을 것과 먹어서는 안 될 것을 가리는 학습을 한다. 쓴 것이 아니라 단물을 먹여 아이 젖을 떼는 일본의 경우와 비교하면 그 차이가 무엇인지 분명해진다. 단 맛을 본 아이는 꿀먹은 벙어리라는 말처럼 아무 말없이 지금껏 빨던 젖을 일거에 헌신짝 버리듯 외면하고 단물 빨려고 달려간다. 거기에는 어떤 아픔이나 쓴맛 단맛을 분별하는 ‘가르기’ ‘가리기’의 학습과정이란 것도 없다.

13 꿀이 아니다. 한국의 젖떼기는 모자 상호성의 소통 방법인 ‘맘마와 지지’로 한다. 그것은 말을 모르는 아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옹알이에 가까운 배냇말이다. ‘맘마’는 이가 나기 이전에도 갓난아기가 낼 수 있는 입술소리(口脣音)인데 비해서 ‘지지’는 이가 나야 비로소 발음할 수 있는 잇소리(齒音)다. 그래서 뭔지 모르지만 소리만 듣고서도 ‘맘마’는 긍정적으로 모성적이고 ‘지지’는 부정적인 것으로 부성적이다.

14~16 이유식이 없었던 옛날 아이들은 이가 나기 전 딱딱한 음식을 제대로 씹지 못한다. 이럴 때 할머니는 음식을 대신 씹어서 아이에게 먹인다. 당연히 ‘맘마’다. 그러나 며느리 눈으로 보면 따질 것 없이 명백한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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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맘마’와 ‘지지’를 놓고 고부간의 갈등이 생긴다. 그런데 충격적인 일은 그러한 갈등이 아니라, 최신 의학 연구가 뜻밖에도 할머니의 손을 들어준다. 어른들의 침은 아기들에게 병균을 옮기기 보다는 항체를 만들어 면역력을 높여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에서다.

17 남녀 키스의 효험을 이미 옛날 우리 할머니들은 손자 사랑을 위해 실천했다는 이야기다. 요즘에 들어와서 육아 기술만은 서구의 과학기술이 아니라 아프리카인의 오래된 육아법에서 배우고 따르라는 소리가 부쩍 높아지고 있다. 물론 선진국 전문가들의 주장인데, 그들은 남방의 아프리카나 북방의 이누이트족 갓난아이들은 좀처럼 우는 법이 없다는 연구도 곁들여 발표하였다. 그만큼 갓난아이들은 문명보다 자연에 가까운 생명체라는 것이다.

■ 다섯째 꼬부랑길 - ‘쉬쉬’와 ‘응가’와 기저귀 떼기

01 아기들은 태내에서부터 소리를 가릴 줄 안다. 모차르트의 음악소리를 들으면 편안해 하고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면 불안해 한다는 것은 널리 퍼진 이야기다. 갓난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목소리와 냄새를 안다. 아직 20센티미터 눈앞밖에 볼 줄 모르는 아기가 용케 엄마와 다른 사람의 얼굴을 구별할 줄 안다. 애가 낯 가린다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갓난아기들의 배냇힘은 상상을 초월하는 슈퍼파워다. 그런데도 똥오줌만은 제대로 가릴 줄 모른다.

02 갓난이들은 하루 20번 이상 오줌을 싼다. 30번 하는 경우도 있다. 하루에 4~6번 소변을 보는 성인에 비하면 그 차이가 엄청나다. 그래서 삼줄(탯줄)을 가르자마자 벌거숭이 맨 몸이 제일먼저 문명의 인공물과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기저귀라는 천이다. 양 가랑이에 족쇄처럼 채워진 기저귀를 떼려면 역시 ‘맘마’와 ‘지지’로 젖떼는 것과 같은 방식을 써야 한다. 오래전부터 내려온 ‘쉬쉬’와 ‘응가’말을 써서 똥오줌을 가리도록 한다.

03 정해진 규율이나 법이 아니다. ‘쉬쉬’하는 소리로 오줌을 누게 하고 ‘응가’ ‘끙가’로 똥을 누게 한다. 아이들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통해서 자연스레 소통하는 방식의 대화형이다. 이를테면 판소리의 추임새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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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원초적인 말인 게다. 그 말의 힘은 대단하다. 젖을 빨던 아이가 음식을 씹는 아이로 성장하고 오줌 싸고 똥 싸던 아이가 오줌 누고 똥 누는 아이로 바뀐다. 이렇게 똥오줌을‘가리게’ 되면 가랑이 사이에 족쇄처럼 채워졌던 기저귀를 떼게 된다.

04 쉬쉬와 응가와 끙가 같은 절묘한 소리의 패턴을 분석해 보면 태명과 상통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쉬쉬’는 잇소리다. 간지러운 잇몸에서 막 이가 나려고 하는 바로 그 치음이다. ‘응가’는 응애하고 태어날 때 숨쉬던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고 ‘끙가’는 그보다 더 힘을 줘야하는 쌍기역의 소리다. 이렇게 그 미세한 차이가 젖먹이 똥싸개 아이에게 전달되면, 이제는 자의로 배변할 수 있는 힘이 생겨난다.

05 반대로 싸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방임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누다’와 ‘싸다’는 생리적 배설만이 아니라 모든 감정이나 행동에서 그대로 확대된다.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감정을 싸는 것이며, 돈을 함부로 낭비하고 다니는 사람은 돈을 싸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오줌 싸게란 말에는 자기 앞가림을 못하는 기저귀찬 미숙아란 뜻이 포함되어 있다.

키를 쓰고 동네를 돌며 소금 받으러 다니던 기억은 없는가. 부끄러워 말하지는 않았지만 오줌싸게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요 위에 세계지도를 그려놓고 빛나는 아침을 맞이해야 하는 그 부끄럽고 참담했던 느낌 우리가 태어나 최초로 겪었던 원초적 형벌이다.

06~08 우리나라에서는 오줌을 싼 아이에게 벌주기 위해 키를 씌우고 동네를 돌게 했다. 이웃집 아주머니는 오줌싸개의 손을 끌고 가 부엌 앞에다 세워두고 소금 한 중발을 퍼온다. 물도 한 바가지 그리고는 부지깽이를 쥐고 나와 키를 쓴 오줌싸개에게 물을 뿌리며 ‘닭이 밤에 오줌싸지 사람이 싸냐?’라고 말하면 오줌싸개 아이는 키만 쓴 채 겨우 집으로 달려온다.

“닭이 밤에 오줌을 싸지 사람이 싸냐.”싸는 것은 본능으로 사는 짐승의 상태다. 사람이 되려면 배설의 본능을 참고 견디고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가리다’라는 말로 아이를 기르는 한국인의 집단 지성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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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이 이야기에서 오줌싸개에게 주는 벌은 가족과 마을이 함께 짜고 가르치는 연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징벌인데도 웃음이 나오고 지나고 나면 그 부끄러움도 망신도 정겨운 추억이 된다. 회초리의 맷자국도 없다. 멍석말이 같은 무서운 형벌도 아니다.

10~11 ‘오줌싸개’의 벌은 ‘한국인 이야기’에서 진화한다. 그것은 윤동주 시인의 상상력에 의한 처방인 게다. 그는 말한다. 그 오줌을 싼 곳은 슬프고 아름다운 잃어버린 내 조국의 땅이라고...

“빨래줄에 걸어 논 / 요에다 그린지도 / 지난밤 내 동생 / 오줌 싸 그린지도 // 꿈에 가 본 엄마계신 / 별나라지돈가? /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 만주 땅 지돈가?”

◉ 5 기저귀 고개 - 하나의 천이 만들어 낸 두 문명

■ 첫째 꼬부랑 길 - 기저귀를 모르는 한국인

01 다섯 번째로 넘어야 할 고개는 기저귀고개다. 기저귀라는 말만 보고 우습게 볼지 모르지만 어쩌면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고개가 될지 모른다. 반드시 ‘기저귀학’을 배워야만 넘어갈 수 있는 고개이기 때문이다. “빨랫줄이 아니면 세탁기 속에서 돌아가야 할 기저귀가 무슨 학문씩이나”하고 코웃음 칠지 모른다. 요즘같이 한 번만 쓰고 버리는 기저귀라면 쓰레기통도 외면한다. 하지만 농담이 아니다. 우리가 몰랐을 뿐 구글 검색창에‘기저귀학(diaperology)’라고 쳐보라. 0.26초 만에 약 1,610개의 항목이 뜰 것이다.

그중에는 <국화와 칼>로 유명한 루스 베네딕트와 그녀의 아바타 같은 문화 인류학자 마거릿 리드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종언’으로 충격을 준 다니엘 벨과 생성 문법으로 세계적 스타가 된 촘스키의 이름이 꼬리를 물고 나타날 게다.

02 흔히 ‘요람에서 무덤까지’라고 하지만 뭣도 모르고 하는 소리다. 기저귀를 차는 것이 요람보다 먼저이고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 입는 것이 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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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사람들의 일생을 종교적으로 보면 ‘흙에서 흙으로’이고 사회복지적으로 보면 ‘요람에서 무덤까지’이다. 하지만 자연 생물학적인 시각에서 보면 ‘자궁에서 무덤까지’이다. 하지만 스토리텔링으로 하자면 사람의 일생은 테어날 때의 기저귀천에서 시작하여 수의의 천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03~04 ‘기저귀’학은 고사하고 기저귀라는 말조차 우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연세대학교 홍윤표 교수의 다음과 같은 글을 읽어보면 낯뜨거워질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 같다. ‘기저귀’란 “어린아이의 똥오줌을 받아내기 위하여 다리 사이에 채우는 천”을 말한다. 그러나 얼마 전에 어느 젊은 연예인의 말을 듣고 ‘기저귀’의 뜻이 바뀌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연예인은 부모가 가출하여 고아 아닌 고아가 된 손자들을 혼자 키우는 할머니 댁을 방문하고나서 “기저귀는 보이지 않고 헝겊으로 만든 천만 빨랫줄에 많이 널려 있는 것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1회용 기저귀만을 기‘저귀로’ 알았다는 증거다.

05 홍 교수의 지적대로 그 어원만 알았어도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말은 하지 않았을 껏 같다. 왜냐하면 기저귀라는 우리 토박이말이 본시 빨랫줄에 걸어 놓았던 바로 그 헝겊(천)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게다. 언어학자의 도움이 없더라도 ‘기저귀’는 옷깃이러고 할 때 그 ‘깃(깆)’에 송아지나 강아지 할 때의 작은 것을 가리키는 접미사 접미사 ‘아기’의‘어기’가 합쳐서 된 말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기저귀란 말이 생기기 전에는 ‘삿깃’이라고 했는데 ‘삿’은 ‘사타구니’요 ‘깃’은 이미 말한 대로 헝겊 천이다. 한자로 쓰면 막 바로 요포(尿布)인 게다. 그리고 그 깃(짖)은 ‘어린이의 옷’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06 다행히 16세기 초에 나온 우리 어학사 연구의 귀중한 문헌인 <번역박통사>라는 책이 있다. 중국 사람의 생활 풍습과 제도 등을 문답체로 편찬한 한문본을 우리말로 옮긴 것으로 그 가운데는 갓 낳은 아이의 똥 오줌을 어떻게 건사했는지 자세한 기록이 나온다.

“갓 낳은 아기를 씻기고 머리를 깎고, 아기를 달구지(흔들차_)에 넣고 수레를 사다가 밑에 지즐(왕골자리)을 깔고, 또 전조(보료) 깔고, 위에 두어 깃(어린이 옷같은 얇은 천)깔고 아기를 누이고 아기 옷을 덮고 보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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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옷을 동이는 끈)로 동이고, 오줌을 받을 바가지를 그 구멍 바로 밑에 놓고 분지(똥 받을 그릇)를 밑에 놓고 아기 울거든 흔들차를 흔들면 문득 울음을 그치니라.”

07 “이 기록을 보면 오줌을 받을 바가지를 아기의 잠지 아래에 놓는다고 하였으니 ‘기저귀’는 없었던 것 같다. ‘삿깃’이 18세기에 보이는 것을 보면 늦어도 18세기부터 ‘기저귀’의 기능을 가진 천이 있었고, ‘기저귀’란 단어는 19세기에 생겨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또 “이러한 사실이 밝혀졌다고 해서 과연 ‘기저귀’를 1회용 기저귀로 인식하는 현대인들의 생각과는 다르다.”

08 사실 마음만 먹으면 <번역박통사>의 그 한 대목만으로도 얼마든지 한중일 비교 문화의 ‘기저귀학’이 가능할 것 같다. 아니 이미 그런 글을 실학파 박지원등이 남겼다. 중국과 달리 한국에는 아이를 요람에 넣어 흔들어 키우고 그 수레 밑에 구멍을 뚫어 똥오줌을 받는 분지같은 바가지도 사용한 적이 없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밝히고 있다. 일본만 해도 17세기 에도 시대에 중국의 요차처럼 ‘에지코’라는 나무통에 넣어 아이를 길렀다. 아이 엉덩이에 맟춘 구멍 뚫린 요를 깔아준 것이나 그 구멍 아래 똥오줌을 받아 흡수할 수 있는 화산재나 짚을 깔아준 것까지 비슷하다. 확대하면 서양의 크레들(요람) 문화도 통하는 것이다.

09 요람은 아이보다 기르는 사람이 편하도록 만든 장치다. 애를 떼놓고 부모가 편하게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똥오줌까지 자동적으로 처리될 수 있다면, 곁에 두고 지켜볼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규태의 칼럼에서도 지적했듯이, 제주도 지역을 제외하면 한국은 요람 문화권에서 벗어난 거의 유일한 만족이라고 할 수 있다.

요람이 분리형 육아문화의 상장이라면 애를 업어서 기르는 포대기는 밀착형 육아문화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애를 업고는 바다에 들어가 물질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제주도만이 아이를 구덕에 넣어 기르는 걸 봐도 짐작이 간다.

10~13 1회용 기저귀를 사용하기 전 일본 사람들이 아이 기저귀 채우는 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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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이 화제가 된 적이 잇다. 아기의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꽉 조여 맨다는 이야기다. 소아과의 1인자라고 할 수 있는 다카바시 자신이 그런 말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기저귀만이 아니다. 아이를 업을 때에도 마찬가지로 꼭 졸라맨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일본인들은 적어도 세 곳은 조여매야 힘이 나는 민족이라고 스스로 말해왔다. 마리에는 하치마키(머리띠), 어깨에는 다스키(흘러 내리지 않게 어깨에 걸치는 끈), 가랑이에는 훈도시를 조여야 정신이 난다는 거다.

14 한국인이 머리띠를 두르는 경우는 골치가 아플 때다. 일제 강점하의 영향으로 우리도 이제는 머리띠 어깨띠까지 두르고 데모를 하지만 가랑이 사이에 차는 일본의 훈도시만은 오직 그들만의 것이다.

15 한국을 ‘푸는 문화’라고 한다면 일본의 문화는 단연 ‘조이는 문화’다. 교통안전 표지판만 봐도 비교가 된다. 한국은 안전벨트를 ‘매라’고 하는데 일본의 경우는 ‘조여라’라고 한다.

벨트뿐인가. 마음도 ‘시메루’다. 우리는 마음을 단단히 먹지 마음을 조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16~17 모든 의식주생활 문화에 나타나는 기저귀 밈은 한국의 푸는 문화와 일본의 조이는 문화의 차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일본인이 싸우려 할 때는 이미 말한 그대로 세 군데를 졸라매야 하지만 한국인은 반대로 웃통부터 벗는다. 일본의 지카다비는 발에 꼭 들어맞게 한치의 치수도 에누리가 없는 신이다. 하지만 한국의 짚신, 고무신은 어떤가 좌우의 구분도 없고 웬만하면 누가 신어도 될 만큼 느슨해 여유만만하다. 같은 무로 담근 것인데도 일본의 단무지 다꾸앙은 그야말로 국물도 없다.

18 입시지옥은 일본이나 한국이나 매한가지인데 시험치러 가는 아이에게 하는 말은 그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다. 일본은 ‘정신 바짝 차리라’는 뜻으로 ‘간밧떼’ ‘키오츠게테’라고 하는데, 한국의 부모들은 ‘마음 푹 놓으라’고 한다. 일본의 힘은 긴장과 집중으로 조이는 데서 나오고, 한국의 힘은 푸는데서 나온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다. 기저귀의 어원은 앞에서 이미 ‘작은 헝겊 천’이라는 뜻에서 온 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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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둘째 꼬부랑길 : 냉전의 깃발, 서양기저귀

01 ‘기저귀학’이라는 용어가 학계에 처음 선보인 것은 2차 세계대전 직후, 한국 같으면 해방되고 독립만세를 외치던 때의 일이다. 다 큰 어른들도 그것도 내로라하는 점잖은 학자들이 기저귀를 놓고 벌인 싸움판인 게다. 그것도 UN 회의장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상상이 가겠는가. 소련은 사사건건 미국을 향해 ‘NO NO’의 공격과 거부권을 행사한다. 일본에 승전한 미국 앞에 또 다른 적수가 나타난 게다. ‘그레이트 러시아’라는 것도 알고 보면 유럽의 후진 나라로 껄끄럽기는 일본과 다를 바 없다.

성격도 행동하는 것도 어느 하나 샅바를 잡기 힘들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러시아는 ‘철의 장막’이요 ‘크렘린’이라는 말이 난무하게 된다. 바로 그때 러시아인의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등장한 키워드가 기저귀요 기저귀학이었던 게다.

02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국 정부는 루스 베네딕트에게 일본인을 알기 위한 프로젝트를 의뢰한다. 그 결과물이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국화와 칼>이다. 대전이 끝난 뒤에야 완성되었지만 세상에 던진 파문은 컸다.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그 표제어인 '국화와 칼'의 모순에 쏠려 있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일본인의 육아법을 분석한 12장째의 권말 부분에 있다. 젖먹이는 방식에서 아이의 대소변을 가리는 훈련까지 서양 사람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육아 풍습을 세밀하게 분석한 대목이다. 개인의 퍼스낼리티와 국가의 문화 패턴은 어린애를 돌보는 양식에 따라 결정된다는 문화인류학의 새로운 접근법이었던 게다.

03 미국의 마가릿 미드팀은 육아법을 통한 필드워크로 뉴기니의 부족간 특성을 밝혀낸 연구로 학계에 데뷔했다. 아이를 소쿠리에 담아 떼어놓고 기르는 '문두구머'족은 남녀 모두 호전적이고 사나운데 비해 애를 직접 안아주고 업어 키우는 '아라페시'족은 그와 반대로 유순하고 평화적이라는 그와 반대로 유순하고 평화적이라는 그 학설은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퍼진 이야기다. 그리고 그녀의 연구팀에 합류한 제프리 고러는 엄격한 토일렛 트레이닝과 시스켓(버릇들이기)교육을 통해서 일본 문화를 연구해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의 일등 공신 노릇을 한 영국 사회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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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6 러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갓난아이가 태어나면 즉시 발끝에서 목까지 온몸을 붕대 같은 천으로 칭칭 동여맨다. 그 모양이 마치 누에고치나 이집트의 미라와 다를 게 없다. 사타구니에 헝겊을 대거나 일회용 기저귀를 채우는 그런 기저귀와는 비교조차 어렵다.

왜 그렇게 아이를 천으로 감아 숨도 못 쉬게 묶어두느냐고 물으면 "이런 혹한에 아이를 따뜻하게 하는 방법이 또 어디 있겠느냐?" "아기가 손으로 얼굴을 긁지 못하게 해야한다." "감정의 희생양이 되지 않게 하려면 태어나면서부터 몸을 꽁꽁 동여매어 마음을 억제하게 만들어야 한다." 등 그 이유도 백가지다.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애를 묶어두지 않으면 어른들이 일터에 나갈 수 없어서라는 거다. 특히 가난한 러시아의 농가에서는 애를 혼자 집에 놔두고 밖에 나가 일을 해야만 했다.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놓고 광주리에 넣어두어도 쥐나 다른 짐승의 공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천장에 매달아 놓는 경우도 많았던 모양이다.

07~08 톨스토이가 육성으로 들려주는 러시아의 기저귀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한다.

"그게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다. 나는 묶여 있었다. 손발을 자유롭게 움직이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소리 지르고 운다. 괴로워서 울음을 멈추려해도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곁에 누군가가 있다. 주위의 모든 게 어두워서 잘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두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들은 내 울음소리에 놀라고 걱정하는 눈치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원하는대로 풀어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더 큰 소리로 울 수밖에 없다.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묶여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말이다. 모든 기억은 확실치 않다. 하지만 이것이 내가 가장 강하게 경험한 첫 느낌이었던 것 만은 분명하다.

09 러시아의 기저귀이야기는 한국의 그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생각해봐라. 갓난아이가 관 속의 미라처럼 팔다리를 묶여 온종일 방치되었다면 ㅍ어떠했을까. 왜 아이를 그렇게 꽁꽁 묶어야 했는지 잠깐 설명이 나오지만 그건 빈부 관계나 신분에 관계없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러시아의 풍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엄마 아빠가 뭔지도 모르는 갓난애가 러시아식 기저귀에 미라처럼 묶여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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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를 외치며 악을 쓰며 우는 모습에서 우리는 유엔 회의장에서 구두를 벗어들고 책상을 두드리며 화를 내던 후르쇼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0 문제는 스와들링의 전통이 러시아에 뒤늦게 남아 있었던 것이지 그것은 수천 년 전부터 서양 전역에 전해오던 관습이라는 사실이다. 스와들링이란 "갓난아기를 단단히 싸매어 팔다리의 움직임을 제한하는 행위"를 말한다. 스와들링의 원문은 '천 조각으로 감싼다'는 의미다.

우리의 기저귀나 강보, 포대기처럼 '채우다, 입히다, 싸다'등이 해당되지 않는다. 스와들링은 '감다, 매다, 두르다, 묶다'에 해당한다. 스와들링의 사전적 의미는 '자유를 억압하다. 속박하다'의 뜻도 있다.

11 서양 기저귀의 역사는 크레타 섬에서 출토된 조각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무려 4,500여 년 전, 신전에 바친 어린 아기의 모습이다. 조각 속 아기는 미라와 다를 바 없이 온 몸을 천으로 꽁꽁 말아 손발마저 칭칭 묶어 놓았다. 15세기 이탈리아의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만테냐의 작품 <성전에 봉헌한 예수>속 아기 예수 역시 스와들링을 한 모습이다. 어떠한 경우라도 애를 묶는 일이 없었던 우리에게는 그야말로 문화충격이 아닐 수 없다.

12 현재 우리가 손쉽게 볼 수 있는 것으로 스와들링이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성경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예수 탄생의 장면은 "첫 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라는 '누가복음의 구절이다. 가장 권위 있는 킹 제임스 성경에는 '강보' 대신 '스와들링'이라고 되어 있다.

13 다시 성경을 보자 에스겔서 16장 4절은 "네가 난 것을 말하건대 네가 날 때에 네 배꼽 줄을 자르지 아니 하였고, 너를 물로 씻어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였고, 네게 소금을 뿌리지 아니하였고 너를 강보로 싸지도 아니하였나니"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너는 예루살렘을 말한다. 예루살렘을 마치 태어났을 때 스와들링을 하지 않은 아이로 묘사해 버림받았음을 은유한다. 이 구절을 다시 음미하면 당시 아기가 태어나면 탯줄을 자르고, 정결하게 씻고, 소금을 뿌리고, 긴 천으로 둘러 감싸던 풍습이 있었음을 엿보게 된다.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스와들링은 기저귀의 쓰임새가 그러하듯이 갓 태어난 아기를 '보호'하는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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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이 있다. 신생아들을 천으로 감싸 추위로부터 보호하고, 감염을 막는 것이다. 그리고 구약성서 에스겔서의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축하나는 상징적 의미도 함축한다. 또 전통적으로 스와들링을 해온 유대인의 오랜 관습을 살피면 종교적 기능도 있다. 그들은 사탄이 둥근 원을 두려워한다고 믿어왔다.

15 스와들링은 결코 유대의 풍습만이 아니었다. 2,000년 전 로마의 정치인 세네카는 스와들링에 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부모는 아직 유약한 정신을 가진 아기들에게 약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을 견뎌내도록 강요한다. 그들은 울고 발버둥치려 하지만, 아직 미성숙한 그들의 몸이 곧게 자라지 않고 굽을까봐 단단히 천으로 묶어둬야 한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겁을 줘서라도 뜻을 이뤄야 한다는 폭압적 부모론이다. 적어도 세네카의 말 속에 아기의 인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16 세네카는 "아기들의 몸이 곧게 자라지 않고 굽을까 봐" 단단히 스와들링 한다고 했다. 도무지 우리의 상식으로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인간관과 문명관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다. 유럽인이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천으로 전신을 스와들링했던 것은 몸이 굳기 전에 아이가 두 발로 직립하는 인간으로 교정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인간은 짐승처럼 네 발로 기어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다. 탯줄을 끊자마자 네 발 짐승과는 전혀 다른, 인위적으로 묶고 조여서, 서서 걷는 모습을 만드는 것이 스와들링의 또 다른 기능이 있다.

17 서양에서 요즘도 아기를 손발을 묶어 칭칭 동여매는 이유는 바로 ‘아기교정’때문이란다. 문자 그대로 꼿꼿이 아기 몸을 고정시키는 거다. 치아 교정하듯이 아직 굳지 않은 아기를 틀에 넣어 맞추는 것이다. 이것은 이상적인 신체를 가진 인간을 추구하는 서구 사회의 독특한 육아 방식이다.

어둑한 밤하늘에 초승달이 자라듯이, 어머니의 태내에서 자라온 그 몸을 ‘미라’처럼 완전히 똘똘 말고 손발을 묶어서 어느 짐승과도 다른 직립된 인간으로 만들려고 했던 거다.

18 <아동의 탄생>을 써서 한국 독자에게도 큰 충격을 던졌던 필립 아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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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가 한 말이 생각난다. “근대 이전 유럽에서 어린아이가 차지하는 사회적 지위는 제3의 신분과 같다.” 실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린아이들을 “말이나 소와 다름없다”고 보았다. 세네카에 따르면 “아이는 아버지를 부를 때 ‘주인님’이라는 말을 썼다고 한다.”“아버지와 아이의 거리도 굉장히 멀었다”고도 했다. 그 시절 여성과 어린아이는 ‘시민’의 범주에 들 수 없었다.

19 우리에게도 우화 시로 낯익은 라퐁덴은 아이를 일러 “잔혹화고 조리 없는 작은 생물들”이라고 불렀으며 동물보다도 이성이 결여된 존재로 여겨 경멸했다.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어린이의 천진무구함을 예찬하는 낭만주의 작가들 조차도 실제 생활이나 행동에서 자기 아이들에 대해 애정이 없고 양육에 무관심 하는 등 고전주의 작가들과 별 다를 게 없다는 점이다. 루소는 자기 자녀 다섯을 모두 고아원에 버렸다.

20 감리고 창시자 존 웨슬리의 어머니인 수잔나 웨슬리의 <아이를 키우는 조언> (1732)에는, 육아에 대한 그녀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아이가 한 살이 되기 전에 채찍의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작은 소리로 우는 법을 익히도록 해야 해요. 그렇게 되면 저 귀 따가운 아기 울음소리가 집안에 울리지 않지요. 우리 가족은 마치 아이가 있어도 없는 듯이 조용하기 지낼 수 있답니다”라며 아주 자랑스럽게 말한다.

21 스와들링으로 묶여 있던 아이들은 어떻게 배설을 했겠는가. 깁스하듯 반년에서 1년 동안 묶어두었다고 하는데 오늘날의 기저귀처럼 배변할 때마다 매번 천을 풀고 씻겨주고 새로 갈아줄 수 있었을 것인가. 이것이 결정적인 대목이다. 스와들링 하는 데 한두 시간 걸렸기 때문에 자주 갈아주지도 않는다. 당시의 의료지식으로 보아 그들은 길면 수 주일까지 배설물을 씻어주지 않았다. 소변은 약이 된다고 믿어 오물이 묻은 천 역시 물로 씻는 것이 아니라 햇볕에 말려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갓난 아이들은 배설의 자유를 엄격하게 박탈 당했는데 억압과 스와들링 천을 풀었을 때의 해방감, 그 사이를 오갔을 아이의 트라우마야말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보다 심각한 ‘스와들링 콤플렉스’라고 명명해야 옳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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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최초로 스와들링의 문제점을 제기한 사람은 16세기 승뒤스 외과의사인 펠릭스라고 한다. 그 뒤 17세기가 되면 영국의 의사들과 철학자 존 로크, 윌리엄 카도간, 장자크 루소 같은 인문학자들이었다. 특히 루소는 <에밀>을 통해 스와들링의 풍습을 맹렬히 공격했다.

23 루소는 스와들링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어머니들은 자녀를 직접 돌보기를 꺼린 탓에 보수를 목적으로 하는 다른 여성에게 아이를 맡겨야 했다. 그렇게 고용된 유모들은 아이에게 낯선 엄마가 된다. 그들은 수고를 덜 방법만을 모색한다. 스와들링 하지 않은 아기는 잠시도 눈을 떼는 일 없이 계속 지켜봐야 하지만, 스와들링 한 아기의 경우 구석에 던져진 채 울음소리가 무시되곤 한다.”이들 인문학자들의 비판은 아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문명의 문제였다.

■ 셋째 꼬부랑길 - 기저귀 없는 세상

01 부르는 언어가 다르고 믿는 종교가 다르고, 감고 두르는 방법이 저마다 다르더라도 유럽의 스와들링 풍습만은 어디를 가나 똑같았다. 공간적으로 모두 스와들링 문화권에 속하는 유럽권 지역이다. 멀리 4,500년 전 고대로부터 17세기 이후 스와들링에 관한 비판이 이뤄지기 이전까지 스와들링은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모두가 공유하는 육아방식이었다.

02 아프리카나 동남아 지역에는 기저귀란 말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와들링의 경우처럼 당연한 의문이 생긴다. 아이의 배설물은 어떻게 처리되는가. 아프리카인들도 우리처럼 업어 키운다는데 아이들이 싸는 똥오줌이 업고 있는 어머니의 옷에 묻어날 게 아닌가. 하지만 이상스럽게도 아프리카의 시골 지방에서는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아기가 오줌을 싸기전에 미리 그 기색을 알아채고 재빨리 밖으로 누게 하는 것이다.

03 따지고 보면 신기한 일도 아니다. 스와들링 문명권에서 살아온 사람과는 달리 아이들을 살피는 관찰력, 직관력이 훨씬 발달해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한다. 아프리카만이 아니라 기저귀 없이 애를 키우는 지역에서는 공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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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인 현상일 것이다. 인도네시아에서만 해도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배설할 기미만 보이면 전광석화처럼 놀라운 타이밍으로 똥오줌을 받아 씻어낸다고 하지 않던가. 젖은 기저귀가 아니라 변화하는 아이의 표정을 읽는 것이다. 확실히 기저귀가 없는 지역에서는 일방적 의존이나 지배가 아닌 모자 상호성이 이루어진다. 인터넷 용어로 하자면 쌍방향의 상호작용인 게다.

태내에서부터 기저귀를 차고 나오는 아이는 없다. 기저귀는 아이가 아니라 어른의 편의를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기저귀 의존증이 심한 선진국의 아이들일수록 기저귀 때는 시기가 4~5세 까지 걸리는 기현상이 벌어진다.

04 일회용 기저귀를 발명했던 미국 사회에서는 지금 ‘기저귀 없는 육아법’인 EC 운동이 각광을 받는다. 배설물을 뜻하는 영어의 ‘Elimination’과 소통을 의미하는 ‘Communication’의 두 문자에서 딴 약자로 ‘배설소통’ 을 가리키는 의료 용어인 게다. ‘기저귀학’보다 더 신기한 용어지만 가까운 일본만 해도 ‘기저귀 없는 육아연구소’가 설립되어 있어 그 홈페이지를 방문할 수 있다. 한마디로 기저귀 없이 아이를 키우는 아프리카의 어머니에게 배우자는 것으로, 그것이 여러면에서 효과적이라는 게다. 기저귀 없는 육아법은 애고 어른이고 인위적인 기저귀 의존증에서 벗어나 배설의 본능을 자연의 힘에 내맡기는 방법인 게다.

05 그 기본은 “아기에게 기분 좋은 배설을 시켜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과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배설 소통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아이가 배설할 기미를 보이면 얼른 채웠던 기저귀를 풀어줘 밖에다 오줌과 똥을 누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태명으로 태담을 하던 한국 특유의 배냇말(옹알이)의 소통력으로 오줌을 눌 때는 ‘쉬쉬’ 똥을 눌 때는 ‘응가’‘끙가’로 분별을 유도한다. 판소리의 추임새 같은 장단으로 애가 저절로 터득하여 ‘싸는 단계’에서 ‘누는 단계’로 발전 한다.

06~07 스와들링 지역과 정반대의 극에 있는 것이 기저귀 없는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지역이다. 스와들링으로 동서양을 가르는 육아 문화 지도를 그려낼 수 있다. 그 안에서 한국은 단연 돋보인다.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태중의 아기를 위한 배내옷을 짓고 입히는, 어느 곳에서도 흉내내지 못한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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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옷 문화를 갖고 있는 거다. 천 하나가 시공을 초월한다. 이건 아주 드문 일이다.

여성이 아이를 낳는 일이 모든 생명체와 다르지 않듯이, 엄마의 태중에서 아기가 열 달 동안 자라는 것 역시 4,500년 전과 다를 바 없다. 그런데 문명의 차이를 서구에서는 아직도 모르는 것 b같다.

08 사람들의 일생을 종교적으로 보면, ‘흙에서 흙으로’다. 사회복지적으로 보면 ‘요람에서 무덤까지’이며 자연생물학적으로 살피면 ‘자궁에서 무덤까지’다. 그리고 우리의 탄생 이야기를 쓰는 나의 입장에서 문화 문명적으로 보면 사람의 일생은 ‘천에서 천으로’다. 인간의 일생이야말로 ‘기저귀에서 수의’까지 즉 ‘천에서 천으로’다.

◉ 어부바 고개 - 업고 업히는 세상이야기

■ 첫째 꼬부랑 길 - 스와들과 배내옷

01 한국인을 보자 옛날 엄마들은 아기가 태어나면 꼭 안아주고 젖을 물렸다. 아기가 엄마의 심장 박동 소리를 듣고 안심하도록 해 주었다. 서구처럼 아이가 숨도 못 쉬게 목에서 발끝까지 칭칭 동여매는 스와들링을 우리나라에서는 눈을 씻고서도 찾아볼 수 없다. 우리에게는 갓 태어난 어린 아기에게 편안한 배매옷을 입히는 거다. 배내옷은 미리 만들어 두었다.

02 우리의 배내옷은 신생아가 맨 처음 입는 옷이다. 깃과 섶을 달지 않고 솔기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신생아의 목에 거친 것이 닿거나 등에 솔기가 배기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 옷고름 대신 길게 실 끈을 달아 아기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다.

- 삿된 기운의 침범을 막기 위해 염색한 천을 사용하지 않았다.

- 명주나 무명 같은 흰색 옷감으로 겨울에는 누비로, 봄 가을에는 얇은 누 비나 겹으로 만들었다.

- 한여름에는 풀기를 뺀 모시를 사용하기도 했다.

- 스와들링과 달리 넉넉하게 만들어져 아기가 자유롭게 움직이며 활동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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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배내옷은 이처럼 기능적인 면만 배려한 것이 아니다. 배내옷은 집안에서 건강하게 장수하신 어르신이 입던 옷으로 짓는 것이 특징이다. 유아 사망률이 높던 시절, 갓 태어난 아기가 장수하신 어르신의 옷을 입음으로써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소망했던 풍속이다. 또한 입던 옷으로 지은 배내옷은 새옷과 달리 부드러운 질감이라서 신생아에게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더러는 수의를 만들고 남은 천으로 배내옷을 지었다고 한다. 미리 만들어 두면 장수 한다는 믿음으로 수의를 만들고, 남은 천으로 각 태어난 아기의 배내옷을 만든 기저에는 역시 무병장수에 대한 기원을 함께했을 것이다. 세상에 처음 나온 아기가 죽음을 위해 만든 수의 천으로 생애 첫 옷을 입는다. 생과 사가 하나가 되는 일이다.

04 새 생명이 입었던 배내옷은 ‘운수 좋은 옷’으로 인식 되었다. 그래서 빨지 않고 두었다가 과거 시험이나 전쟁에 나갈 때 겉옷의 등판속에 꿰매어 입을 정도였다. 행운을 가져다주는 상징물이었던 것이다. 또한 소중히 입었으며 아무리 낡아도 함부로 다루지 않았다고 한다. 배내옷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아이가 존중받는 큰 인물이 될 수도, 쓸모없는 천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 왕의 배내옷, 사대부의 배내옷은 오늘날 까지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 현대에도 배내옷은 아기 탄생을 기리는 가정에서 가장 먼저 챙겨놓는 신 생아 용품이기도 하다.

05 한국인은 아기를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하나의 소중한 생명체, 독립된 인격체로 보았다. 갓 태어난 아기를 절대 말구유나 요람에 내려놓지 않았다. 엄마가 안아주고 젖을 물렸다. 아기들이 깜짝 놀라 경기를 일으키면 끌어 안아줬다. 반면에 서양 사람들은 아이들을 낳자마자 꽁꽁 묶어서 요람이나 아기 침대에 따로 키운다.

물질하던 제주도를 제외하면 아무리 바빠도 아이를 구덕(바구니)에 넣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 우리의 전통적인 어머니였다. 업는 문화는 몸 전체로 소통한다. 앞가슴과 등 뒤의 밀착은 단순한 소통이 아니라 합일이다 ‘몰아일체’의 문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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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 한국인이 달라지고 있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이를 조이지 않고 넉넉하게 기르던 전통적인 배내옷 문화를 지녀온 한국인들이다. 그 틈새로 서구의 스와들링 제품이 상륙했다. 그뿐만 아니다. 인기 높은 ‘신생아 출산 선물’로 자리 잡았다. 물론 현대의 스와들링은 한국화된 속싸개의 일종이다. 이름조차 ‘스와들’로 불리며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다.

08 제품마다 공통적으로 아기의 ‘모로반사를 잡아주고’ ‘아기의 안정감’을 위해 꼭 필요한 제품이라고 강조한다. 저마다 10달 동안 엄마 자궁 속에 있는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면서, 낯선 환경에 적응해 가는 스트레스를 덜어줄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한다.

그런데 스와들 제품을 사용했더니 ‘정말 좋더라’는 반응 대신 ‘안 하는 것 보다 낫다’는 반응이다.

09 스와들, 바운서, 치발기, 닥터링 튜브, 맘보 수영장……유모차, 보행기, 카시트 정도는 저도 잘 알고 있답니다. 그러나 앞서 열거한 놈들은 그 이름조차도 생소합니다. 참 많기도 하네요. 요즘 어린아이 키우는 분들은 이런게 뭔지 다 아시겠지요.

10 그러고 보니 제가 자랄 때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광목을 길게 잘라 아이를 둘러업고 아이 엉덩이를 고정해서 허리에 질끈 묶으면 다 통했으니까요. 그걸 ‘띠’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벨트’라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한글을 영어로 바꾼 건데 대단히 유식한 것처럼 불리는 건 뭔 착각일까요. 띠 하나 질끔 동여업고 다니면서 논일이며 밭일이며를 거침없이 해내던 우리 어머니 세대가 참 위대해 보입니다.

옛날 아이들을 서넛씩 키우면서도 우렁각시차람 살림살이를 하던 그 슬기는 뭣이었을까. 아이 키우는 것도 도구나 기기에 의존하게 되면 편안한 게 아니라 오히려 애 기르는 일이 서툴러 일손이 더 많아진다. 뒤에 나오는 어부바 문화에서 애 기르기 슈퍼우먼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옛날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 떠오르게 될 것이다.

11 “광목의 용도가 다양했다는 거, 아세요? 뒤로 묶으면 포대기가 되는 겁니다. 아이를 앞으로 해서 묶으면 안는 띠가 됩니다. 또 이놈을 이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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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과 저쪽 벽에 못을 단단히 박고 양쪽 가를 못에 고정하면 그네가 됩니다. 어린아이를 재울 때 참 유용했죠. 실은 그네 태우다 떨어져 다치는 경우도 왕왕 있었습니다. 아이가 땅바닥에서 자면 살포시 배위에 띠를 접어서 얹어줍니다. 그러면 이불이 되는 거죠.”

12 “딸내미는 요즘 서준이 용품 사 들이는 재미가 쏠쏠한 모양입니다. ‘swaddle’이군요. ‘아기를 포대기 등으로 단단히 씨다’는 뜻이네요. 잠잘 때 입혀서 재우더군요. ‘더운데 왜 답답하게 아이를 그 안에 넣느냐’는 내 물음에 딸 아이가 퉁명하게 대답해요. 이거 입혀 재우면 놀라지 않아요. ‘경기(驚氣)가 어쩌구저쩌구…’하면서 말입니다. 손을 스와들 속으로 쏙 집어넣으면 크게 움직여지지 않으니 팔놀림 때문에 놀라는 아이들에겐 제격이네요. 답답한 게 좀 안쓰럽지만.

 

13 “답답한 게 좀 안쓰럽지만”이라는 마지막 짧은 말 속에서 우리는 한국의 전통 육아와 서구식 현대 육아의 틈 사이에서 생긴 문화갈등의 현상을 느낄 수 있다. 무엇보다 우리는 수천 년간 악명 높았던 유럽 문명의 스와들링 문화의 흔적을 직관적으로 느낀 한 할아버지의 무심하게 남긴 한마디“답답하고 안쓰러운 마음”에 주목해야 한다.

스와들 속의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헐렁한 배내옷이나 이불 위에서 자유롭게 뒹굴던 옛날의 자신의 얼굴을 떠올릴 것이다. 비록 개량되었다고 하지만 <루소>의 에밀이서 통렬하기 비판했던, 그리고 톨스토이가 유년 시절을 회고하면서 외쳤던 유아 속박의 상징인 스와들이 한국에 와서 부활하는 점이 안쓰럽다.

14~16 한국인만의 독특한, 안고 업어 키우는 밀착형 육아의 시킨십 문화가 서구로 옮아가 버렸다. 대신 이제는 한국인이 서양의 스와들과 분리형 육아로 나간다. 그래서 외국인에게 정반대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있으니 밤과 낮이 바뀌고, 땅과 하늘이 뒤집어지는 듯한 현실이다. 이젠 서구에서조차 낯설어하는 육아법이 21세기 한국의 육아 방식이 되었다. 그렇다고 긴 세월이어져온 문화 유전자 ala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꼬부랑 할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잠들던 한국인들이 아닌가. 깊은 동굴에서 갑자기 밖으로 나오면 눈이 부셔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처럼 문화적 유전자 망막이 터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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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불과하다. 그 어떤 육아교육 방식이 선호되고, 그 어떤 육아 관련 제품이 유행처럼 번지더라도, 한국인은 한국인답게 문화원형에 새로운 것을 접목하면서, 한국인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 둘째 꼬부랑 길 - 포대기는 한류다

01 “‘소낙비는 내리고요. 허리띠는 풀렸고요. 업은 애기 보채구요. 광우리는 이었구요. 소코팽이 놓치구요, 논의 뚝은 터지구요, 치마폭은 밟하구요, 시어머니 부르구요, 똥오줌은 마렵구요…….’ 어떤 날 보채는 아기 포대기로 업고 요리갔다 저리갔다 얼러대는데 문득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영락없는 이 노래의 엄마꼴이다.”하성란 작가의 소설 <그 여름의 수사>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02 안을 때도 포대기로 안아주고, 업을 때도 포대기로 업을 수 있다. 안겨도 업혀도 품는 문화고, 포대기를 둘러 등으로 업으면 어부바가 된다. 포대기 하나로 깔고 덮고 안고 업는다. 포대기 천은 끈까지 달려있어 그야말로 원소스 멀티 유스의 융통성 있는 디자인으로 되어 있다. 도둑이 들어올 때는 ‘쓰고’와서 나갈 때는 ‘싸’가지고 나가는 보자기 문화의 연장이다.

03 요즘 해외 엄마들 사이에 유행하는 육아법이 있다는데, 바로 한국의 포대기를 활용한 ‘포대기 육아법’이다. 불편하고 보기에 예쁘지 않다는 이유로 한국 엄마들한테 외면당한 한국의 ‘포대기’가 서양 엄마들 사이에서 각광받고 있다는 것이다.

04 <한국 전통 육아법 포대기 ; 세계를 매료시키다>라는 제목으로 올라온 어느 기자의 글이다. 그 어떤 미디어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한국의 ‘포대기’가 젊은 세대의 한국 엄마들 사이에 인기를 끌며 세계적으로 ‘포대기 한류 바람’을 일으켰다. 포대기를 판매하는 쇼핑몰이 생겨나고 직접 만들어 파는 사람들도 있다. 포대기 매는 법이나 포대기 활용법에 대한 사진을 찍어 자신의 불로그에 올리는 사례도 볼 수 있다. 영문 표기는 포대기의 한국 발음을 그대로 옮긴 ‘podaegi'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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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그냥 재미삼아 지나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포대기에 싸인 아기가 울거나 칭얼거리는 비율이 유모차에 탄 아기보다 51% 정도 낮게 나타났다.”는 소아학과 연구 결과도 나와 있다.

06 그 중에서도 내 무릎을 치게 하는 것이 있다. 미국 소아과 학회의 전문가들을 비롯해 한국의 포대기 육아법 예찬론자들이 하나 같이 말하는 바로 ‘엄마와의 상호작용’이다. 다시 말해 “엄마가 아이를 등에 업은채 단순히 자기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엄마가 아기를 인식하면서 일하는 동안 아이 또한 엄마와 상호작용을 한다”는 대목이다. “엄마와 아기의 상호작용” 내가 줄곧 주장해온 바로 그 핵심을 말하고 있지 않는가.

07 지금까지 우리는 기르는 어머니나 어른들 입장에서만 아이 문제를 다루었다. 일방통행의 사랑이요, 주입식 교육이다. 아기는 그냥 수동적으로 스펀지처럼 사랑을 흡수하고 받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미 언급한대로 아기에게서 풍기는 그 묘한 냄새를 맡고, 엔젤 스마일이라는 신비한 아기의 미소를 본 사람이라면 금세 매료되고 만다. 산모는 물론이고 누구라도 애정의 샘물이 솟는다.

08 이제‘포대기’는 육아법을 넘어 법고창신의 문화론에 이르게 된다. 한국의 문화 유전자와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포대기’를 훌륭한 학문의 차원으로까지 끌어올린 한국의 엄마들, ‘포대기’를 사용하는 여러 나라 부모들의 모습이 담긴 사진, 포대기 매는법이 담긴 영상을 유튜브에 올려 한류 바람을 일으킨 엄마들의 모습에서 새로운 한국인 이야기의 싱싱한 미래를 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요즘 유행하는 ‘오래된 미래’가 아닌가.

09 다음 이야기는 내가 호미로 인터넷 숲에서 숨겨진 산삼처럼 찾아낸 이야기이다.

“첫째 아기를 낳았을 때는 포대기는 촌스럽다는 생각이 강했다. 포대기는 시대에 뒤처지는 것 같고, 나도 예쁜 아기띠에 아이를 안고 폼나게 걷고 싶었다. 그런데 첫째를 쩔쩔 매며 키운 뒤 나는 나중에야 포대기의 진면목을 알게 되었다. 서양인들이 ‘애착 육아’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엄마의 품 같은 포대기에 열광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족 이모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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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키우면서 포대기로 업는 법을 제대로 배웠다. 포대기가 아기를 업기에 훨씬 편하고 어깨와 허리도 덜 아프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다. 아이도 훨씬 안정감 있게 엄마 등에 기댔다.”

10~13 ‘품다’라는 말. 닭이 병아리를 품는다. 왕을 사모하는 여인의 이야기를 담은 사극 제목으로 ‘해를 품다’는 말까지 등장했다.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한 말, 태내의 말을 잊고 나는 줄곤 영어로 된 학술어 ‘inclusive’를 사용했다. 번역하면 ‘포함’이라는 말이 되기 때문에 어색해서 영어 그대로 쓴 것이다. 포함의 반대말은 뭘까. ‘exclusive’는 ‘배제하다’이다. ‘품다’의 반대말은 언뜻 생각나지 않는다.

14 한국의 옛날 어머니들은 포대기 하나로 아이를 가슴에 품고 등으로 업는다. 아기들은 낯선 세상 밖으로 나와도 이 포대기의 한국 특유의 ‘품는 문화’와 ‘업는 문화’안에서 양수와 다름없는 따스한 환경 속에서 지낸다. 아무리 깽깽대던 아이도 가슴에 안고 등에 업으면 금새 잠잠해지고 거짓말처럼 잠이 든다는 게다.

15 ‘전후의 일본은 어부바를 잃어버렸다. 그 훌륭한 전통적인 육아방식을 버리고 미국의 육아법을 따랐다. 그 보담이 지금 폭력과 비행으로 나타나기 시작하고 있다. 이 현실은 앞으로도 더욱 커져서 일본의 발전에도 큰 위기를 가져올 수 있다.

■ 셋째 꼬부랑길 - 어깨 너머로 본 세상

01-02 한국은 물론이고 스와들링을 하는 유럽지역을 제외하면 세계 각지에 ‘업는 문화’가 없는 곳은 거의 없다. 중국에서도 아프리카에서도 북극권 이누이트족에 이르기까지 방법은 조금씩 달라도 모두 아이를 업어 키운다.

그런데 서양 문화가 글로벌 스탠더드의 위치를 점하면서 서양의 요람형 분리의 육아방식을 따르게 되었고 업는 문화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한국, 일본의 경우 어린애를 업고 나온 어머니가 있다면 구경감이다. 거꾸로 동아시아에서 업는 문화가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고 업는 문화가 생겨난다는 것은 오히려 서양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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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북극권에 거주하는 이누이트족은 특이한 생활문화로 서양 연구기들의 많은 관심을 끌어왔다. 그중에 최근 왜 이누이트족의 아이들은 울지 않는가 하는 별난 연구를 한 것도 있다. 미국 아이들에 비해 이누이트족의 아기들은 거의 우는 법이 없어 그 원인을 조사한 결과 업어 기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 것이다.

어머니의 등에 업힌 아이는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간 것처럼 포근한 느낌에 싸이게 된다. 모태의 양수 속에 싸여 있을 때와 다름없이 순환기를 비롯하여 비뇨기나 면역계, 신경계, 호흡기관 그리고 소화기관까지도 모두 자극을 받아 매우 편안한 상태가 된다.

04 등에 업힌 아이는 모태에 있었을 때와 가장 가까운 느낌을 받기 때문에 울 필요가 없다는 거다. 짐승들이 애를 낳자마자 혀로 아기의 전신을 깨끗이 핥는 것도 모자의 일체감을 주기 위한 일종의 스킨십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 글은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나오는 글이다.

“아기는 한두 달이 지나 목을 조금씩 가눌 수 있으면 어머니의 등에 업힌다. 이중으로 된 띠로 아이의 겨드랑 밑과 엉덩이를 받친 다음 어머니의 어깨를 거쳐 허리 앞에서 띠를 묶는 것이다. 집안의 손위 남자 아이나 여자 아기를 업기도 하는데, 그들은 놀 때도 아기를 업은 채 뛰어 다니기도 한다. 특히 농가나 가난한 집에서는 큰 아이한테 아기를 돌보는 일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일본의 아기는 사람들이 어울려 생활하기 때문에 빨리 영리해지고 표정도 풍부하다. 또한 자기를 업고 있는 손위 아이들이 노는 걸 보며, 당사자처럼 즐기는 듯한 모습도 보인다”고 적었다.

05~07 기저귀 고개에서 이야기한 대로 서양 사람들은 아이를 낳자마자 요람이나 아기 침대로 떼내어 따로 키운다. 이동할 때도 유모차에 태워 끌고 다닌다. 모자 분리형이기 때문에 모자간에 스킨쉽이 부족하다. 대신 아이들은 일찍부터 독립된 인격체로 성장하게 된다. 업은 사람의 뒤통수만 보는 문화가 아니라 눈과 눈을 서로 마주 보는 대면 문화다. 문제는 업는 문화는 스킨십만으로 평가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아이를 업으면 두 손이 자유로워져 부엌일 바깥일을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다. ‘업은 아이 3년 찾는다’는 속담이 생길 정도로 업은 것차 모르는 일체감이다. 포대기가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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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람이요. 유모차기에 아기들은 어머니와 떨어질 걱정 없이 온종일 업혀 다닌다.

08~09 엄마가 보는 것을 아이가 본다. 같은 시선이다. 굴러가는 유모차의 바퀴가 아니다. 어머니의 한 걸음 한 걸음의 보행이 어렸을 적 태내에서 기억했던 심장소리의 리듬과 어울린다. 등에 업혀 어머니가 듣는 것을 듣고 보는 것을 본다. 낯선 냄새와 소음과 제대로 통합되지 않은 풍경의 조각이 하늘과 땅 사이로 펼쳐진다. 닭이나 개나 말을 업을 수 있는가? 업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살아있는 인간뿐이다.l

10 ‘어깨너머로 배운다’ 는 말이 있다. 학교에서 교과서를 펴들고 본격적으로 배우는 것과는 다르다. 보고 들은 경험으로 배운다. 체험을 통해 세상을 익혀가는 것이다. 어깨너머 세상은 ‘먹고 먹히는 생존경쟁의 원리’를 ‘업고 업히는 상생 원리’로 바꿔 놓는다. 한국의 어머니들도 서양 사람들처럼 아이들을 ‘베이비 슬링’으로 묶어 매달고 다니는 세상이지만, 업는 문화는 한국인의 의식 속에 그대로 따라 다닌다. 영화나 텔레비전에서는 그 흔한 키스신보다 업어주는 연기를 최고의 애정표현으로 꼽는다.

11 업히는 사람만 기분 좋은 게 아니다. 업어주는 사람도 좋다. 단순한 노역에 고통스러워하는 게 아니라 기쁨을 맛본다. 정말 사랑하고 정을 표현할 때 우리는 상대를 업어주고 싶어한다. 업어준다는 것은 애정의 표현이며 상호작용인 것이다.

12 춘향전에서 첫날밤 몽룡은 춘향을 업고 사랑가를 부른다. “이애 춘향아 이리와 업히거라”하고 몽룡이 묻자 춘향이 부끄러워하니 “부끄럽기는 무엇이 부끄러워. 이왕에 다 아는 바니 어서 업히어라.”재촉한 뒤, 업힌 춘향에게 묻는다. “네가 내 등에 업히니까 마음이 어떠하냐?”“엄청나게(한껏나게) 좋소이다.” “좋냐?”“좋아요.” “나도 좋다.”이렇듯 이도령은 춘향이를 업어줌으로써 깊은 사랑의 마음을 보여주고 춘향 또한 이도령에게 부끄러운 듯 업히어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한다.

13 국민 소설이 되어버린 <메밀꽃 필 무렵의 라스트신을 보라. 단 한 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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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으로 얻은 동이의 등에 업혀 냇물을 건너는 허생원의 그 행복절정의 장면 말이다. “동이는 물속에서 어른을 헤깝게 업을 수 있었다. 젖었다고는 하여도 여윈몸이라 장정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 ‘이렇게까지 해서 안 됐네. 내 오늘은 정신이 빠진 모양이야.’ ‘염려하실 것 없어요.’

“동이의 탐탁한 등허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 더 업혔으면 하였다.”

14 이도령이나 동이의 마음이 업히는 춘향이나 허생원과 상호 작용을 하는 거다. 업는 사람과 업히는 사람의 관계가 일방적이지 않다. ‘갑’과 ‘을'의 관계가 아니다. 정이 오고 가는 인간적인 관계다. 업는 사람도 힘든 줄 모르고, 업히는 사람 또한 업어준 사람의 따스한 체온을 가슴으로 느끼는 거다.

15 동이가 허생원을 업듯 어부바 문화에서 자란 아이들은 성장하면 나이들어 거동이 불편해진 부모를 등에 업는다.

전설처럼 돌아다니는 일본의 사야가 장군 이야기가 있다. 그는 인진왜란 때 선봉장이 되어 남원으로 쳐들어온다. 그런데 왜군의 칼을 피해 쫓겨가는 와중에도 조선인들이 등에 하나씩 뭔가를 업고 뛰는 게다. 먹을 쌀 보리자루가 아니라 늙으신 어머니 아버지였다. 이것을 본 사야가 장군은 “야만한 국가가 문화의 나라를 쳤구나.”했단다. 후일 그는 한국으로 귀화해 김해 김씨 집안의 김충선이 되었다. 확실한 전거는 없지만 비록 전설일지라도 업는 문화가 한국의 효를 상징한다는 뜻에서는 변함이 없다.

16~17 ‘업는다’는 것은 무엇이며 ‘업힌다’는 것은 무엇인가. 약자가 강자를 업는 것은 어부바 문화가 아니다. 가마꾼이 가마 탄 사람을 메는 관계도 아니다. 그것은 이해관계에 불과하다. 업혀서 미안하고 업어서 힘겨운 관계가 아니라는 거다. 갑과 을의 관계에서어부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부바 문화의 원형은 모자 관계에서 생겨났다.

그것은 어른이 아이를 업어주는 관계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업어주는 거다 엄마가 아이를 업고 장성한 자녀가 연로한 부모를 업는다. 이는 생명에 대한 배려이자 상대에 대한 사랑이다. 업어서 좋고 업혀서 좋다. 아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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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는 건 보릿자루를 메고 다니는 것과는 다르다 보릿자루는 그저 무거운 짐일 뿐이다. 어부바 문화에는 사랑과 정이 서로 오간다. 지배와 의존이 아니라 사랑과 애정 속에 업고 업히는 관계 이것이 상생이다. 수렵 채집 시절부터 우리의 어부바 문화는 상생관계였다.

2020. 5.30

* 다음에 제3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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