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

2020. 6. 9. 18:05독서후기

반응형

한국인 이야기, 너 어디에서 왔니

■ 이어령 지음

0 1934 충남 온양 출생

0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문학박사, 문학 평론가, 이화여대 석좌교수

0 동아시아 문화도시 조직위원회 위원장

0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 조직위원장,

0 조선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경향신문 등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

- 월간 <문학사상> 주간

0 서울올림픽 개폐회식과 식전 문화행사 주도

0 대전 엑스포 문화행사 주도

0 문화부 장관

0 동경대 객원연구원, 1989 일본 국제 일본문화연구소 객원교수

0 저서

흙속에 저 바람 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디지로그, 젊음의 탄생

지성에서 영성으로, 빵만으로는 살 수 없다. 생명이 자본이다.

가위 • 바위 • 보 • 문명론, 보자기 인문학, 언어로 세운 집

지의 최전선 외

◉ 이야기 속으로

■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고개를 넘는 이야기

아라비아에는 아라비아의 밤이 있고 아라비아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천 하루 밤 동안 왕을 위해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입니다. 왕이 더 이상 듣기를 원하지 않으면 셰에라자드의 목은 사라집니다. 이야기가 곧 목숨입니다. 이야기가 끊기면 목숨도 끊깁니다.

한국에는 한국의 밤이 있고 밤마다 이어지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이는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조릅니다. 할머니는 어젯밤에 했던 똑같은 이야기를

- 1 -

되풀이 합니다.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넘다가 꼬부랑 강아지를 만나…….

정말 이상한 이야기가 아닙니까. 왜 모두 꼬부라져 있는지, 가도 가도 꼬부랑이라는 말만 되풀이 되는데, 왜 같은 이야기를 매일 밤 조르다 잠들었는지 모릅니다. 옛날 옛적으로 시작하는 그 많은 이야기는 모두 다 잊혔는데, 꼬부랑 할머니의 이야기만은 아직도 남아 요즘 아이들이 부르는 노랫소리에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신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렇다 할 줄거리도 없고 신바람 나는 대목도 눈물 나는 장면도 없습니다. 그저 꼬부라지기만 하면 됩니다. 무엇이든 꼬부랑이라는 말만 붙으면 다 좋습니다.

왜 모두가 꼬부랑일까요. 하지만 이렇게 묻는 우리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옛날 할머니들은 누구나 다 꼬부랑 할머니들이었고, 짚고 다니던 지팡이도 모두 꼬부라져 있었습니다. 외갓집으로 가는 논두렁길이나 나무하러 가는 산길이나 모두가 다 그랬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생각이 납니다. ‘너와 나’를 ‘너랑 나랑’이라고 불렀던 시절 말입니다. 그러면 ‘랑’자의 부드러운 소리를 타고 꼬부랑 할머니, 꼬부랑 고갯길이 보입니다. 한국 사람들이 잘 부르는 아리랑 고갯길도 틀림없이 그런 고개였을 것입니다. ‘이응’으로 끝나는 콧소리, 아름다운 세음절의 낱말, 아리고 쓰린 아픔에도 ‘랑’자 하나만 붙으면‘아리랑 쓰리랑’이 됩니다. 그 구슬프면서도 신명나는 노랫가락을 타고 한국인이 살아온 온갖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세상이 변했다고 합니다. 어느새 꼬부랑 할머니를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동네 뒤안길에서 장터로 가던 마찻길도 모두 바로 난 자동찻길로 바뀌었습니다. 잠자다 깨어보니 철길이 생기고 한눈팔다 돌아보니 어느새 꼬부랑 고개 밑으로 굴이 뚫린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라는 겁니다. 바위 고개 꼬부랑 언덕을 혼자 넘으며 눈물짓는 이야기는 지금도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골백번 변해도 한국인에게는 꼬부랑 고개, 아리랑 고개, 같은 이야

기의 피가 가슴 속에 흐르는 이유입니다. 천 하루 밤을 지새우던 아라비아

-= 2 -

의 밤과 그 많던 이야기는 언젠가 끝이 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꼬부랑 할머니의 열두 고개는 끝이 없습니다. 밤마다 이불을 펴고 덮어주듯이 아이들의 잠자리에서 끝없이 되풀이될 것입니다. 그것은 망각이며 시작입니다.

아니 아무 이유도 묻지 맙시다. 이야기를 듣다 잠든 아이도 깨우지 맙시다.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게 되면 자신이 어렸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이제는 아이들에게 들려주려고 합니다. 천년만년 이어온 생명줄처럼 이야기줄도 그렇게 이어져 왔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인생 일장춘몽이 아닙니다. 인생 일장 한 토막 이야기인 거지요. 산속에서 길을 읽고 헤메다가 선녀와 신선을 만나 돌아온 나무꾼처럼 믿든 말든 이 세상에서는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옛날이야기를 남기고 가는 거지요. 이것이 지금부터 내가 들려줄 ‘한국인 이야기’ 꼬부랑 열두 고개입니다.

1. 태명고개

생명의 문을 여는 암호

■ 첫째 꼬부랑길 - 쑥쑥이 말문을 열다

01 <젊음의 탄생> 북 콘서트가 끝나자 책을 든 청중이 사인을 받으려고 줄을 선다. 거의 기계적으로 이름들을 쓰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쑥쑥이라고 써주세요” 라고 한다. 별난 이름이다 싶어 고개를 들자 “제 아이에게 주려고요”라고 한다.

나는 그 여성의 배가 불러 있는 것을 알았고 그 옆에 곧 아기 아빠가 될 젊은이가 참나무처럼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쑥쑥이는 태명(胎名)이었던 게다.

02 태명, 호적부나 족보에 오를 일도 아니니 마음 내키는 대로 지어도 뭐랄 사람이 없다. 그래서 요즘 젊은 부부사이에서는 태명이 한창이란다.

무럭무럭 자라라고 “무럭이”, 튼튼하게 크라고 “튼튼이”, 같은 복(福)자라도 옛날처럼 복순이, 복동이가 아니고 “행복이”요, “축복이” 이다.

- 3 -

03 요즘은 태명도 많이 진화했다. 태동이 하도 심하대서 “뒹굴이”, 엄마 뱃속에 캥거루처럼 들어가 있대서 “거루”, 초음파 사진을 보니 점 하나 찍혀 있다 해서 “점탱이”……. 팝콘처럼 톡톡 튀는 태명이다. 한자의 틀에서 벗어난 새 한국인이 소리 없이 엄마 배속에서 자라고 있다.

04 처음에는 신기해서 웃었지만 나중에는 눈이 축축해진다. 요즘 젊은이들 말로 안습(眼濕 눈이 축축하다)이다. 나와 함께 자란 옛날 아이들 이름이 떠오른 탓이다. 머리에는 기계총이 나고 부황난 얼굴에는 으레 버짐이 번져있다. 태명은 고사하고 본명조차 제대로 된 게 없었다. 쇠똥이, 개똥이 ……. 무엄하게도 고종황제의 아명도 “개똥이”였다…….

05 무조건 사내아이라면 귀하게 여겼던 남존여비 사회에서도 멀쩡한 사내애에게 여자애 이름을 달아주는 일도 있다. 액션배우 이소룡의 어릴 때 이름이 계집애 이름인 ‘소봉황’이었던 것도 그래서다. 그런데 어쩌자고 우리는 여자애 이름에 ‘똥례’라는 천한 이름을 붙였단 말인가.

06 똥례보다도 더 섭섭한 이름이 바로 ‘섭섭이’다. 아들이 아니라서 섭섭하다는 노골적인 푸념이다.

- 언년이(언짢은 년), 삼순이 까지 참다가 끝내 ‘끝순이’ ‘말순이’라고 붙인 이름

- 터키의 여자애 이름 ‘예테르’는 ‘이제 딸은 충분해’라는 뜻이고 ‘손궐’은 ‘마지막 장미’라는 뜻

07 욕이든 저주든 그래도 ‘간난이’라는 이름보다는 낫다.

- ‘간난이’는 이름이 아닌 ‘갓 낳은 아이’라는 보통명사임

08 ‘바둑이’는 개의 고유한 이름이 아니다. 멍멍이, 누렁이, 검둥이도 모두 다 그렇다. 그렇다면 ‘개똥이’ ‘소똥이’도 보통명사다.

09 ‘섭섭이’ ‘언년이’ ‘간난이’ ‘점박이’도 모두 보통명사에 ‘이’를 붙여 고유명사 반열에 오른 이름들이다. ‘개똥이’ ‘쇠똥이’같은 사내 이름도 다를 바 없다.

- 4 -

그렇다면 ‘쑥쑥이’ ‘튼튼이’ ‘사랑이’란 태명 역시 다를 게 없지 않은가? 그러나 요즘의 태명은 같은 뿌리에 핀 야생화 이지만 우리 토박이말로 이름 짓던 풍습이 용케도 새천년 문명 속으로 들어와 태명으로 환생한 게다.

10 ‘마당쇠’의 마당은 ‘맏이’가 변한 것이며 뜻도 ‘맏이, 으뜸, 우두머리’라는 풀이다. 그리고 ‘쇠’는 주로 사람이름에 사용하는 접미사와 같은 것이며, 본래는 ‘소/so’로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던 거다. 그 증거로 ‘을파소 乙巴素’‘추발소 鄒勃素’처럼 한자로 소리를 옮긴 삼국 시대의 옛 토박이 이름을 보면 지금 우리가 즐겨 쓰는 철수, 영수, 창수 같은 이름도 실은 순수 우리말 ‘소/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11 한자말로 ‘노인 老人’이라고 하면 점잖은 말이요, 높임말이지만 우리 토박이말로 ‘늙은이’라고 하면 막말이요 낮춤말이 된다. 우리말을 애용한다고 ‘자녀 子女’를 ‘새끼’ 라고 하면 금시 뺨맞는다.

계집이라는 말도 처음엔 막말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15세기 때 출간된 <두시언해>를 보면 ‘노처(老妻)’란 말이 어엿이 ‘늙은 계집’으로 번역되어 있다. 흥선 대원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을 때 궁으로 보낸 서찰 겉봉에는 ‘마누라젼’이라고 씌여 있다. 마누라는 지체높은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를 때 사용하는 말로 며느리 명성황후를 지칭한 말이라고 한다.

12 한자가 들어오기 전에는 당연히 우리말로 이름을 지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이명으로 불구내(弗矩內)라는 기록이 보인다. 주석에서도 ‘광명이세’로 밝혀져 있듯이 “빛으로 세상을 밝힌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박혁거세를 토박이말로 환원하면 ‘불구내’는 ‘밝누리’가 아니면 ‘밝아누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혁거세를 한자의 뜻으로 풀어보면 밝을 혁(赫) 누리세(世)로 그 뜻이 부합한다. 그러니까 혁거세는 원래 이름의 ‘훈차’요, 불구내는 그 이름의 발음을 적은 ‘음차’라고 보면 된다.

13 우리 고유명이 오늘과 같은 한자명으로 바뀌게 된 것은 통일신라 시대 경덕왕 때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 5 -

세종(世宗)의 명을 받아 김수온이 편찬한 <사리영응기>에는 정7품과 종8품 관리 47명의 토박이 이름이 ‘韓실구디’ ‘朴타내’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한자로 된 성만 빼면 마딘, 도티, 매뇌, 가리대, 수새, 쇳디, 랑관 등으로 낯설고 허접한 이름들이다.

더러는 강아지 이름을 연상케하는 ‘검둥이’ ‘흰둥이’에 ‘덜히’ ‘막동’‘똥구디’란 이름까지 보이고 ‘곰쇠’‘북쇠’‘망쇠’‘모리쇠’‘강쇠’같은 내 어렸을 때 들은 마당쇠와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옹알이처럼 올미, 오미디, 우루미, 어리딩처럼 ‘이응’자로 시작하는 이름도 많아서 아련한 그리움마저 느끼게 한다.

14 마른 강바닥 밑으로 스며 흐르는 물줄기처럼 끊일 듯 말 듯 우리 토박이 문화의 생명줄은 그렇게 우리 가슴의 심층부에서 이어져 왔다. 개똥이와 쑥쑥이라는 이름이 내 머릿속에서 부딪치는 순간 천둥번개가 쳤다. ‘안습’이 ‘안광’으로 변하면서 천덕꾸러기로 퇴박맞던 막이름이 섬광처럼 눈앞을 스쳐간다. ‘섭섭이’기 ‘기쁨이’가 되고 ‘똥례’가 자랑이 되는 역전의 드라마가 실제로 한류 드라마 속에서 실현된 것이다. 촌스럽고 천한 이름으로 우습게 알았던 ‘또순이’ ‘간난이’ ‘삼순이’같은 이름은 모두가 TV드라마의 타이틀로 급기야 그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한국의 안방에서 아시아로 세계로 한류 열풍의 주역이 된 거다.

그래서 ‘막’자 붙은 말치고 한류바람 타지 않은 것이 없다. 달리는 관광버스에서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추던 허드레 ‘막춤’이 싸이의 <강남 스타일>이 되어 유튜브에서 34억 7,000만 뷰가량을 기록하고 BTS의 토박이노랫말이 전 세계의 아미(남의 마음에 들려고 비위를 맞추면서 알랑거림) 를 홀릴 줄 어림짐작이나 했겠는가.

15 역풍이다. 토박이말이 한자로 옮겨지던 옛날과 달리 이제는 한자식 이름도 토박이말로 옮겨진다. AI 알파고와 대전을 벌여 전 세계에 바둑 한류의 정점을 찍은 이세돌(李世乭)역시 그 이름에 돌쇠의 ‘돌 乭’자가 들어 있다. 그 바람에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과 글자 하나 차이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만천하에 알리게 된다.

‘이세돌’을 순토박이말로 읽어봐라. ‘이’는 지시대명사로, ‘세’는

- 6 -

수사의 3을 뜻하는 말로 완전히 한자를 탈구축한다. 실제로 이세돌은 셋째 아들이고 바둑돌인 게다.

16 대중 문화만이 아니다. 한국 문단에 돌풍을 일으켰던 방영웅 작가의 데뷔작 분례기(糞禮記)가 그렇다. 분례기는 비록 분(糞)자가 들어 있어도 한자이기 때문에 냄새가 지워진다. 거기에 예기(禮記)는 사서삼경 가운데 들어 있는 경전으로 두 손 모아 받들어 모셔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분은 ‘똥’이 되고 ‘예기’는 ‘얘기’로 이야기의 음차다. 한자말로 보는 것과 토박이말로 보는 것에 따라 극과 극의 대조를 이룬다. 실제로 그 소설의 여주인공인 똥례는 이름 그대로 뒷간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똥은 더러운 것인데도 막문화의 민속에서는 정반대의 이미지로 반전된다. 똥꿈을 꾸면 재수가 좋고 돈이 생긴다고 한다. 이름에 ‘똥’자가 들어가면 무병장수를 한다고도 믿는다. 꽃상여가 결혼식 꽃가마가 되고, 천하고 속된 사랑이야기가 성스럽고 순수한 생명 이야기로 역전된다.

17 <분례기>는 미술계로 번져 정진아의 <분예기 糞藝記>시리즈로 이어진다. 예(禮)를 예(藝)로 바꿔놓은 심상치 않은 이 전시 제목은 ‘똥 예술에 관한 기록 혹은 진술’이 되는 것으로 자신의 예술에 대한 생각을 잘 드러낸 것이라는 평을 받는다.

그 평문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분예기>시리즈가 웃음과 해학에 바탕을 둔 우리 선조의 생각과 맞닿아 있다고 한 부분이다. 이 전위적인 예술을 우리 막 문화와 연결지은 것이다.

18 똥이 예술품으로 전시되면 “금기의 위반을 통한 관습의 전복”이 되는 것처럼 이미 우리는 천명/태명의 전복 효과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똥과 황금은 천한 것과 귀한 것의 양극적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그 누런색과 덩어리의 현태가 ‘반대의 일치’라는 역설 속에서 통합된다. 추가 미가 되고 속이 성으로 전도되는 효과가 바로 막 문화, 막 이름이요 만인의 눈총을 받지만 불패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막말’의 특성이다.

치매에 걸린 사람이 마지막까지 잊어버리지 않는 말이 욕과 같은 막말이라 한다. 뇌에 저장되는 영역부터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누구나 욕을 욕하고 막말을 기피한다. 그런데 어째서 욕쟁이 할머니의 설렁탕 집에는 그 많은 사람이 장사진을 이루는가.

- 7 -

19 <젊음의 탄생> 발간 기념식을 마치고 사인회를 가졌는데, 어느 임산부가 뱃속의 아기에게 사인을 해 달라는 것이다. 책에 사인을 하는 순간 배 안에 있는 ‘쑥쑥이’가 말문을 연 게다. 그 바람에 나는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배 속의 아이에게 책 서명을 한 저술가가 되었다.

그것은 오로지 태명 한류를 일으킨 한국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다. 그 덕분에 ‘쑥쑥이’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한국인 이야기’의 선두 주자가 되었고, 나는 지금까지 어디에서고 들을 수 없는 태안에서 시작하는 한국인 이야기를 쓰게 된 거다.

20 반갑다. ‘쑥쑥이’눈부시다.‘기쁨이’별처럼 반짝이는 배내 아이의 이름들을 부르면 먼 하늘 아득한 곳에서 응답한다. 우주선 캡슐 같은 웅크리고 앉아 있는 아이들이, 그래 ET처럼 머리통과 눈망울만 큰 녀석들이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들, 생각만 해도 기막히다. ‘개똥이’ ‘쇠똥이’ ‘간난이’‘똥례’도 당당하고 황홀했을 원초적인 그 생명 공간, 모태의 세계를 향해 청진기처럼 귀를 대면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폭포수 같은 소리 미세한 혈관을 타고 힘차게 흐르는 배내 아이의 이야기가 들린다.

■ 둘째 꼬부랑 길 - 태명 또 하나의 한류

01 굶는 건 참아도 궁금한 건 못 참는다. 배냇이름, 태명은 한국에만 있는 문명풍습일까? 다른 나라에는 과연 태명이라는 게 없을까. 옛날 같으면 농사짓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머슴방에 가야하고 글 짓는 이야기를 들으려면 사랑방에 가여 한다. 부엌찬방에서는 며느리 이야기를, 안방에 가면 시어머니 이야기를,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이야기는 할머니 방에 가야 듣는다. 그렇다면 오늘의 젊은이들 태명 이야기를 들으려면 어느‘방’에 가야하나? 그래 그것 역시도 PC방이요, 인터넷 채팅방, 카톡방이 아닌가. 망설일 것 있나. 태명의 궁금증을 풀려면 인터넷 방으로 들어가야 한다.

02 검색창에 ‘태명’을 친다. 놀랍다. ‘쑥쑥이 이야기’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온다. 한국은 기본, 지구 곳곳의 태명이야기가 무더기로 나온다. 어엿한 학술논문도 있고, 각종 통계자료까지 있다. 무엇보다 놀란 것은 태명이 한국인들이 만들어 낸 진짜 오리지널 한류라는 뉴스들이다. 놀랍다.

- 8 -

03 나는 한 때 “손가락으로 검색하지 말고 머리로 사색하라”고 젊은이들을 향해 큰소리친 적 있지만 이제는 거꾸로다. “사색하려면 검색하라”다. 외국에 사는 한 한국인 여성이 내가 태명에 대해 생각하지도 못한 이야기들로 나의 뇌를 발화시켰으니 말이다.

‘영국 품절녀’라는 이름으로 올라온 글이다. ‘품절녀’라는 말이 낯설기는 하지만, 흘러간 옛말로 하면 ‘재영주부’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과연 원하던 대로 그 글의 첫 대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04 임신한 사실을 주변에 알리자 만나는 한국 사람마다 태명이 뭐냐고 묻는단다. 그런데 영국 사람이 다른 외국인들한테는 한 번도 그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게다. 그래서 태명 스트레스를 받던 이 ‘영국 품절녀’는 이렇게 푸념한다. “그 정도로 우리는 임신을 하면 꼭 태명을 지어야 당연하다고 여기나 봅니다.”

05 한국인들은 보통 출산 전까지는 아이 이름을 정하지 않기에 태명으로 부른다. 심지어 출산 후에도 태명을 그대로 쓰는 일까지 있다.

배 안의 아기를 위해 태교(태담)까지 했던 한국인은 아무래도 태아에 대한 관심도가 유별나 태명에도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정확하다.

06 초음파 촬영으로 태내의 아이를 직접 보게 된 최근에 들어서야 서양 사람들도 우리처럼 태아에 관심이 높아졌다. 다만 그게 한국의 쑥쑥이, 튼튼이 같은 독창적 이름이아니라 ‘Yoda'나 'Tiger'같은 자기가 좋아하는 캐릭터 이름이거나 아니면 초음파 검사 때 본 영상에서 따온 'Monster, 사람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 'Jelly bean, 풋내기' 'Chickpea, 병아리콩 ' 같은 것들이라는 이야기다.

07 최근 유행하는 영국식 태명을 꼼꼼하게 조사하여 소개한 리스트를 보면서 나는 확신의 미소를 짓는다. 모두가 ‘멍멍이’보다도 못한 멍청한 이름인 거다. 기껏 머리를 굴렸다는 것이 라스베이거스에서의 행운을 기다린다고 ‘베이거스’나 ‘잭팟, 포커에서 계속 태우는 돈, 거액의 상금’이다.

그것은 한국에서 이미 연예인 하나가 태명으로 쓴 지 오래고, 지금은 ‘대박이’라는 토박이말로 진화했다. 이제는 배내 아이도 ‘쑥쑥이’니 “씩씩

- 9 -

이‘니 된소리를 반복하는 토종 이름의 단계까지 온 것이다.

 

08 ‘Bip 2.0’ - Bip 는 'Baby in Progress' 즉 성장 중‘이라는 뜻

2.0은 몸무게 이다.

09 흥미롭게 글을 읽다가 ‘브이 V’자를 그려본다. 태명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품절녀가 드디어 ‘까롱이’라는 멋지고 독창적인 태명을 얻었다는 것이다. ‘까롱이’라면 유럽에서도 통하고 한국에서도 통하는 글로벌 시대의 모범 답안이다.

- 까롱이 : 프랑스 파리를 여행하던 중 ‘마카롱’을 생전 처음 먹어본 신랑이 그 모양과 맛이 너무 귀엽고 달달해서 생각해낸 이름

10, 11, 12 일본에는 태명이 없다. 그들은 ‘한국인’들은 왜 태명을 짓나. 얼마 사용하지 않고 버려야 할 걸 왜 짓나, 정력 낭비다 라고 시비를 거는 좁쌀들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태명을 한류로 인식하고 부러워 하고 있다.

13 한국인과 결혼한 일본인 아내가 태명에 대해 쓴 글이 감동적이다. “내 아기의 이름을 ‘꼬물이’라고 결정했다. 그 뜻을 간단히 말하면, 작은 것이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의태어로 엄마의 뱃속에서 꼬물꼬물 귀엽게 자라는 모양을 나타낸 말이라고 한다. 배 속 아이에 딱 맞는 이름 같다. 이것은 순수한 한국말이라 한자로 는 쓸 수 없다.” 맞다. 핵심을 찌른 말이다. 한국의 태명은 순수한 한국말 그중에서도 풍부한 의성어를 통해서 지은 것이 많다. 여전히 한자의 작명법에 의존하는 일본인 처지에서 보면 부러워 할 만도 하다.

“꼬물이, 이 울림은 소녀에게도 소년에게도 괜찮은 이름 같다. 순수 한국어는 소리가 정말 아름답고 멋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명을 본명으로까지 쓰고 싶다는 생각까지 해본다. 그러나 꼬물이는 한자로는 표기할 수 없으니 일본에 입국할 때 곤란할 것 같다.” 꼬물이 엄마의 글은 이렇게 문화 방벽의 걱정으로 끝을 맺는다.

- 10 -

14 이젠 중국이다. 구글이 아니라 바이두의 검색창으로 들어가 ‘태명 胎名 ’이라고 친다. 왜 ‘배냇말’이라고 하지 않고 ‘태명’이라고 하나. 그동안 품었던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다. 한자어로 해야 인터넷 상에서 일본과 중국 블로거들의 글을 헌팅할 수 있지 않은가? 토박이말을 쓰면서도 한자어도 배격하지 않는 한국인의 비빔밥 융합 문화를 다시 한 번 실감한다.

중국은 이름의 나라다. 본명에 소명(아명), 자(子)와 아호(雅號)에 사후의 휘명(諱名), 시호(諡號)까지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다양한 명명법이 있다 그렇지만 과문의 탓인가. 수천 년 역사 속에서 태명을 사용했다는 풍습은 찾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태명에 대한 글들은 한결같이 그것이 한류문화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것을 딱 꼬집어서 말한 몇몇 불로거의 글도 찾을 수 있다.

15 한국의 스타 김희선은 태내 아이에게 ‘잭팟’이라는 이름을 붙여준 적이 있다. 태명을 ‘잭팟’이라고 지은 한류 배우를 보고 부러워한 글이다. 역시 예측대로 연예가에서부터 퍼지기 시작한 태명이 한류 드라마를 통해서 중국에 퍼진 경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다 그야말로 한국의 태명이 중국에서 잭팟, 대박 난 거다.

* 잭팟(jack pot) : 도박이나 복권 따위에서 계속해서 돈을 걸거나 당첨자 가 없어 쌓인 거액의 돈

16 작은 일 같지만 우리는 천 년 이상을 중국식 성명 풍습을 따라 왔다. 외자 성에 두자 이름을 기본으로 한 것도 그렇고 항렬을 따라 수대에 걸친 가족명이 결정되는 것도 똑같다. 앞에서 본 대로 ‘돌’자가 아니었더라면 이세돌을 이세민의 형제로, 중국인으로 오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역전되어 오늘의 젊은 중국인들은 한국인을 따라 태명을 짓기 시작했다는 사실.

태명의 종주국 한국의 다양하고 깜찍한 태명과는 달리 ‘옐로우 콩’이니 ‘피카추’니 하는 외국의 유행어를 그대로 딴 것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역시 태아와 소통하는 데 있어서 뜻글자인 한자보다는 의성어를 활용한 한글의 소리글이 우세할 수밖에 없다.

17 인터넷 답사로 태명이 한류의 하나요, 그 왕국임을 알게 된다. 2017년

- 11 -

임산부 커뮤니티에서 설문 조사를 한 결과를 보면 98%가 태명을 지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태명을 짓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응답한 것이다. 한국에서는 태명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가 되었다는 거다. 그리고 그게 한국만이 아니라 K-POP, 드라마와 같은 한류문화 현상을 타고 지구의 새 풍습으로 번져 간다. 출산이나 산아, 육아의 문제가 현대 문명의 중대한 지표로 부상하면서 태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 추세가 그것을 뒷받침한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오히려 우리가 그것을 잘 몰랐던 거다. 태명이 한류 현상의 하나라는 것을, 드라마나 K-POP 보다도 더 중대한 의미를 지녔다는 뜻을 그리고 그동안 빛을 보지 못한 한국 토박이 막문화의 생명 공감이라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18 약초는 신선들이 사는 깊은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잡스러운 길가 잡초 우거진 곳에 있다. 요즘 항암제로 주목받고 있다는 개똥쑥 풀처럼 우리가 밟고 다니는 길가의 허접스러운 풀숲에 있다는 거다.

태명이 뭐길래? 이러한 질문에 대해서 어떤 고명한 비평가나 문화 비평가도 답한 것을 듣지 못했다. 그런 질문에 관심을 보인 어떤 정치가나 경제인의 이름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이름조차 확실하지 않은 어느 불로그에서 그에 대한 중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태명을 짓는 이유는 아직 세상에 나오기 전 아기지만 아이에게 좀 더 특별함을 주고 싶고,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하기 위함이고, 태명을 지어주는 것이 아기와 엄마의 유대 관계를 증대하여 소통”하기 위한 방법이라고.

19 잡초에서 약초를 캘 수는 있어도 그것을 분석하고 검증하려면 역시 대학 연구실로 가봐야 한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벌써 태명에 관한 연구 논문과 조사가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 논문 제목이나 요약문에는 태명을 한국말 그대로 ‘Tae-myeong'이라고 표기 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김치를‘Kimchi'로 태권도를 ‘Taekwondo'라고 표기하고 방탄소년단을 우리소리 그대로 BTS라고 로마자화한 것과 같다. 그게 한국 고유의 문화요, 세계에 발신하는 한류문화라는 증거다.

■ 샛길, 성을 중시하는 아시아, 이름을 중시하는 유럽

한중일 성명

- 12 -

한국인과 중국인은 이름보다 성을 중시한다. 그래서 지신의 성명을 쓸 때 서양 사람과는 반대로 성을 맨 앞에 내세운다. 반기문씨가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그의 명함 영문 표기는 ‘Ban Ki-moon'이었다. 그러나 유엔사무국 직원들은 ’Mr. Ban'으로 불러 달라는 공문을 보내야 했다는 뒷 이야기도 있다.

한국과 중국은 성이 많지 않다. 한국은 세계에서 성이 가장 적은 수에 속하고 중국 역시 전체 인구의 85% 안팎이 100개 이하의 성씨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이씨, 왕씨, 장씨는 중국을 대표하는 3대 성씨다. 이들 성씨는 각기 수천만 명에 달해 웬만한 나라 인구를 능가한다. 이에 비해서 일본은 같은 한자 문화권으로 한자로 성명을 표기하지만 성에 대한 의식은 희박하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30만 종의 성씨가 있다.

일본은 상속자가 없어도 데릴사위나 남을 들여서 가업을 잇고 가업이 바뀌어 분가하면 사회관계에 따라서 성과 이름을 바꾼다. 마치 회사 이름을 바꾸듯 가문의 이름을 바꾼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신분이 달라질 때마다 성을 개칭했다.

- 그의 처음 성명은 기노시타 도키지로 였다. 그 뒤에 하시바 히데요시, 출세하여 권력을 잡은 뒤에는 후지와라 히데요시,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바뀌었다.

혈연관계냐 사회관계냐의 한중일 성명 시스템의 특성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이 여자가 출가할 경우이다. 한국인은 이름은 없어도 성은 분명히 챙겨 결혼해서 출가외인이 되어도 성은 그대로다. 그러나 일본, 그리고 유렵에서는 결혼할 경우 남편 성을 따른다. 일본 사람이 이렇게 물은 적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여자가 결혼해도 성을 바꾸지 않는다는데, 그러면 어떻게 누구의 아내라는 것을 알지요?”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 적이 있다. “일본에서는 결혼하면 남편의 성을 따른다는데, 누구의 딸인 줄 어떻게 알지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씨를 가진 나라는 미국이다. 약 100만 종의 성씨가 있다. 핀란드가 약 6만 종, 영국이 약 1만 5,000종, 이에 비해 한국의 성은 300여 종으로 가장 적다. 그만큼 한국은 혈연과 가계를 중시해 온 철저한 유교문화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 13 -

■ 셋째 꼬부랑 길 : 이름으로 영혼을 춤추게 하라

01 “기해년 첫둥이는 ‘빛나는 별’, 태명 ‘우성’ 2.93Kg의 건강한 여아…0시 0분 1초에 서울서 태어나”<동아일보>에 실린 새해 첫 뉴스다. “태명 우성에는 영화배우 정우성에 대한 산모의 팬심이 담겨 있다. 또 우씨 집안을 빛낼 별이 되라는 뜻도 담겨 있다고 한다.

태어나자 마자 각광을 받은 주인공의 태명에 대한 흥미 있는 설명도 살려 있다. 독자들은 과연 이 기사를 읽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하다.

02 태명은 연예계에서 시작하여 이제는 한국인이면 일상의 현상으로 시민권을 얻었다. 신문 기사만이 아니다. 학계에서는 벌써 그 역사를 따지는 연구까지 하고 있다. 태명에 관한 최초의 학술논문으로 알려진 강희숙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처음 태명이 등장한 것은 2001년에서 2007년 사이로 추정된다.

내가 새천년 행사에서 즈문둥이의 울음소리를 들려준 것처럼 태명이야말로 앞으로 올 21세기 ‘생명의 시대’의 예고이기 때문이다.

03 지금까지 전 인류 역사로 봐도 없던 태명을 왜 한국 땅에서 짓기 시작했나. 각종 학술 조사의 설문에 나타난 응답들을 보면 “이름을 불러주면 아기가 정서적으로 안정될 것 같아서”“머리가 좋아진다고 해서”등 다양하고 재미있는 대답을 얻을 수 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육아 지침서를 보니 배 속의 아기도 (말을)알아 듣는다고 하는데, 아기와 많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태명을 지어주고 싶었다”라고 한 대답이다.

그 귀결점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배 속에서 자라는 아이와 대화하고 소통하고 싶다’는 모자 상호성의 욕망이요 그 흐름이다.

태명으로 인해 처음으로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이승도 저승도 아닌 ‘그승’의 세계와 소통하기 시작한다.

04 임산부와 태아의 관계는 일방통행적 관심이요 배려인 거다. 그러나 배내 아이에게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놀랍게도 그 관계가 쌍방향으로 변하고 육아의 신개념으로 떠오른 ‘모자 상호작용’이 실현된다. 종래의 태교에서 태담(胎談), 태통(胎通)으로 바뀐다는 것이다.

- 14 -

05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아름다운 시 한 구절이 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많은 사람이 애송하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다. 여기에서 그의 이름은 ‘태명’으로 바꾸고 ‘그 꽃’을 자신의 배 안에 있는 태아의 생명이라고 생각해 보자. 시의 표현 그대로 태명을 짓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태(胎)안의 생명에게 태명을 지어 불러주면 그 순간 꽃과 같은 존재가 된다.

06 그래서 아이도 엄마도 이름 짓기 전과 그 존재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의 ‘모자 상호’의 절실한 소원이 이루어진다.

생명이든 사물이든 이름을 붙여주는 순간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존재들이 시인의 그 말대로 “밝음 속으로 나타나 춤”을 출 것이다.

07 김춘수의 <꽃>과 정반대되는 이름 이야기가 김소월의 <초혼>이다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요. 내가 부르다 죽을 이름, 그것은 태어나게 될 생명의 이름이 아니라 죽은 자를 향한 ‘영혼의 기호’라는 뜻이다. 밝음이 아니라 어둠 속에 묻히는 이름. 그 기호는 그 혼을 새긴 인장과 그 이야기를 담은 블랙박스가 된다.

한국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가 평소에 입던 옷을 들고 지붕위에 올라가 죽은 자의 이름을 불렀다. 옷에서 이름이 빠져나간 혼을 행해 가지 말라고, 돌아오라고 북녘 하늘을 향해 그 이름을 외친다. 슬프고 아름다운 ‘초혼제’란 다름 아닌 ‘초명제’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이름은 ‘저승’과의 소통인 게다.

08 김춘수의 <꽃>이 탄생의 이름이고 김소월의 <초혼>이 죽음의 혼을 나타내는 이름이라면 윤동주의 <별 헤는 밤>에 나오는 이름은 생과 죽음을 넘어서는 부활의 이름이다. “무엇인지 그리워 /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우에 / 내 이름자를 써보고 / 흙으로 덮어”버린다고 노래하기 때문이다.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 무덤 우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

- 15 -

듯이 /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우에도 /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라고 생각한다. 이름을 그리움의 언덕에 묻어둔, 존재감을 상실한 시인, 그러나 시인은 가을과 겨울이 지나면 다시 봄이 올 것을 굳게 믿는다. 봄이 오면 새 생명이 돋아나듯 자랑처럼 풀이무성하리라 예견한다.

윤동주에게 이름은 ‘부활의 씨앗’이었던 게다.

09 - 10 성경 주해를 보면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 당시의 목자들은 양 하나하나에 이름을 지어주고 한 마리씩 불러 초원으로 인도한 모양이다. 이미 그것은 양떼가 아니라 한 마리 한 마리가 존재하는 양들인 게다.

그것을 모르면 왜 예수님이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놓아두고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선다고 했는지 영원히 그 이유를 모를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3~5절)

11 양과 함께 생활하고 돌보던 옛날의 양치기는 양 한 마리 한 마리의 특성을 알아보고 구별할 줄 안다. 귀에 반점이 있다든지 발끝이 검다거나 ‘음메’하고 우는 소리로 제각기 소리의 높낮이를 안다. 그 대상에 관심과 애정을 갖게 되면 보이지 않던 특성이 눈에 띄고 식별할 수 없던 작은 차이가 귀에 들린다. 그래서 가축에 이름을 지어주는 순간 그것은 생명과 영혼을 함께 나누는 반려자가 된다.

12 가축이라 해도 그것은 우리와 함께 있는 이 장소, 이 시간 속에 존재한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다. 그러나 태중의 아이는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이 세상(이승)’과 ‘저세상(저승)’ 무명 사이에 있는 우리와 다른 ‘그 세상(그승)’에서 사는 존재다. 그런 태아와 대화하고 소통하려면 이 세상 기준이나 가치에 얽매여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기억할 수도, 상상할 수도 없는 이승도 저승도 아닌 그 세상의 그승, 그래도 우리의 어디엔가 남아 있을 생명기억을 더듬으며 지어낸 태명들, 그래서 약속이나 한 듯이 지금껏 어느 이름에도 없는 태명 특유의 양식이 태어나게 된다. 옹알이처럼 의성어를 바탕으로 한 우리나라의 토박이말 이름짓기 말이다.

- 16 -

샛길 부리지 못하는 이름, 기휘

0 일본과 서구의 이름 유래

일본은 원래 평민에게는 성이 없었으며 이른바 명치유신 때에 성을 갖도록 법령을 만들어 성을 급조해 대개는 농부들의 밭의 위치에 따라 밭이 가운데 있으면 다자가, 아래에 있으며 시모다, 위에 있으면 ‘우에다’로 되어 있다. 그렇지 않으면 관원들이 멋대로 지어서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는데 같은 성을 쓰거나 등등.....

영어권에서 가장 많은 성은 ‘스미스’이다. 서구인의 이름은 직업에서 유래한 이름이 중심을 이룬다. ‘스미스’는 대장장이이며. ‘테일러’는 양복장이, '뮐러‘는 방앗간의 일꾼을 의미한다.

0 피휘

서양 문화와 한국과 중국의 한자, 유교 문화권의 차이를 이름의 관습을 통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절대로 아버지나 선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그것이 유명한 기휘라고 부르는 오랜 전통인 것이다. 이를 기휘(忌諱)나 피휘(避諱)라고 했다. 이름 부르기를 꺼리고 피한다는 뜻이다ㅑ. 산 자의 이름은 함자(銜字)라고 하지만 죽은 자의 이름은 휘(諱)라 하지 않던가.

두보는 시를 짓는 평생동안 ‘한가로울 한(閑)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의 부친 이름이 두한(杜閑)이었기 때문이다. 임어당은 <생활의 발견>에서 한가로움을 사랑하는 것이 중국인의 기질이라고 했지만, 시성 두보의 시에 이 글자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충격이다, 위대한 시인도 기휘풍습은 이기지 못한 것이다. 사마천도 그의 부친 이름이 사마담(司馬談)이었기 때문에 인명이나 지명에 그 한자만 나오면 모두 피휘해 표기한다. 기휘학을 모르면 사기를 온전히 읽을 수 없는 것은 그러한 이유다.

관세음보살과 관음보살의 차이는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을 피휘해 세자를 생략하고 그냥 ‘관음(觀音)’이라 불렀던 것이다. 일본의 역사도시 교토(京都)는 본래 왕이 머무르는 수도를 상징하는 보통명사로 ‘게이시(京師)라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중국 서진의 세종 사마사(司馬師)의 이름인 사

- 17 -

(師)자를 피휘하면서 교토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우리 선조도 마찬가지였다. 언덕 구(丘)자를 쓰던 대구(大丘)의 지명이 ‘땅이름 구(邱)자로 바뀐 것은 구(丘)자가 공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초명은 서홍(瑞鴻)이고 자는 계호(季浩)였다가 뒤에 경호(景浩)로 바뀌었고 호는 퇴계 외에도 지산(芝山), 도옹(陶翁) 퇴도(退陶)청량산인(淸涼山人)등이 있으며 시호는 문순(文純)이다.

많은 호를 사용한 대표적 인물로는 추사(秋史)김정희를 들 수 있다. 그의 호는 무려 200여 개가 넘는다. 널리 알려진 추사(秋史)와 완당(阮堂)외에도 만년에 봉은사에 머물 때에는 노융(老融)이라는 아호를 썼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쓰던 호는 과천에 사는 농부라는 의미의 과농(果農)이었다.

■ 넷째 꼬부랑길 : 이야기로 시작하는 생명

01 태명에 관한 2013년 통계자료를 보면‘사랑이’가 톱이다. 그 다음으로는 ‘튼튼이’ ‘축복이’‘행복이’‘기쁨이’ 순이다. 그런데 2016년에 보면 1위였던 ‘사랑이’가 8위로 떨어지고 ‘비비’ ‘꼬곰이’ ‘꼬북’‘꿈틀이’등으로 뚜렷한 변화를 보인다. 이런 태명의 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직감적으로 오는 게 있다.

02 2012년을 기준으로 한국에서 가장 긴 이름은 ‘박하늘별님구름햇님보다 사랑스러우리’로 17자나 된다. 지금은 성을 제외하고 이름이 5자를 넘지 넘지 못하게 법이 개정되었다.

일본 사람이름에 ‘무(武)’나 ‘맹(猛)’자가 많은 것을 보면 역시 무사계급이 지배해온 일본 사회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 그에 비해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문자가 많이 들어 있는 한국인의 이름은 선비들이 중심이 된 유교문화의 거울인 게다.

03 복 ‘복’자, 그 흔한 돌배기 아이들 복건이나 숟가락, 밥그릇에도 금박 은박으로 찍혀 있던 그 ‘복(福)’자 말이다. 천 년 가까이 목을 매달고 지내온 복에 대한 꿈, 그런데 지금 ‘복동이’ ‘복순이’같은 옛 이름들은 오늘날의 태명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 18 -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 복이란 게 무엇인지 잘 모른다. 본 적도 만져본 적도 없다. 설령 알아듣는다 해도 배내 아이들이 이 세상에 나와 꿈꾸고 생각하는 ‘복’이란 우리의 그것과는 아주 다른 것일수도 있다.

04 지금까지 태명이 구호나 기도 같은 것이었다면 최신의 흐름은 스토리텔링이다. 태명 속에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토토’라는 태명, 그것은 주말 부부가 토요일이 만나 아기를 갖게 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토토’니 ‘토이’니 하는 짧은 태명 속에는 토요일이 오기를 고대하던 주말 부부들의 사랑이야기와 애환이 숨어 있다. 춘향이 시절에는 태몽 이야기로 아이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오늘에는 태몽이 아닌 태명으로 한 인간의 이야기가 운을 뗀다.

05 맘톡 육아발언대에 443명의 젊은 엄마와 아빠들이 남긴 태명이야기를 들어보면, 철쭉 산행을 하고 지은 ‘쭈기’ 목요일에 갖게 된 아이라서 ‘목화’말복쯤이 출산 예정이라서 ‘말복이’ 7월 윤달이 해산달이고 그 성이 윤씨여서 ‘윤달이’임신 테스트를 하고 신랑한테 알리는 날 눈이 와서 ‘첫눈’ 눈 오는 날 첫째가 생겨서 ‘눈송이’, 등 태명마다 속삭이는 이야기가 있다.

06 그 중에서 내 눈을 끌고 가슴을 친 이야기가 ‘까꿍이’라는 태명이다. “절박유산으로 아기를 보냈는데 큰애가 배에다가 ‘까꿍 까꿍~’했어요. 동생은 이제 좋은 곳으로 갔다고 설명해 주니 ‘아냐 있어, 까꿍 까꿍’해 주더러구요 근데 얼마 안 있어 자궁 상태를 보러 갔더니 진짜 작은 생명이 이쁘게 집을 지어 놨더라고요.”까꿍이 배 속 아이의 엄마가 털어 놓은 아름답고 깜찍한 기적의 이야기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진 가장 짧은 소설은 헤밍위이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기 신발 팝니다. 신어본 적은 없어요.>로 불과 여섯 단어밖에 안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어떤가‘까꿍이’이야기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짧고 짠한 소설이 아니겠는가.

07 더 중요한 것은 그 주제일 것이다. ‘까~’하고 손바닥으로 눈을 가리면 깜깜해지면서 눈앞에 있던 모든 게 사라진다. 그 무엇보다도 어머니가

- 19 -

보이지 않는다. 불안하고 겁난다. 순간의 죽음인 게다. 그러나 ‘꿍’하고 손을 떼면 아! 어머니가 거기 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온다. 걱정했던 것이 일순 개운해지고 웃음이 터진다. 예외 없이 ‘까꿍’을 하는 어린애들은 눈물 섞인 묘한 웃음을 터뜨린다. ‘까꿍이’ 태명 속의 아이가 그랬다. 동생이 먼 나라로 갔다고 했을 때, 아이는 배속의 동생이 사라진 것을 그냥 받아들이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스스로 죽음을 부르고 그 죽음을 생명으로 돌아오게 한다. ‘까꿍’을 하면 보이지 않던 어머니의 얼굴이 보인다. 외출했던 엄마가 어느새 돌아와 자기 앞에 앉아 있다. 태어나지도 못하고 죽은 동생도 ‘까꿍’을 하면 그렇게 온다.

08 까꿍이가 ‘한국인 이야기’의 이야깃거리를 나에게 준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때처럼 까꿍 동작을 해본다. 얼굴을 가렸던 손바닥을 떼면 지금까지 내 눈 앞에서 사라졌던 모든 것들, 차츰 부재와 망각 속에 멀어지던 한국 사람이, 조선 사람의 얼굴이 거기 있다.

09 프로이트가 어느 날 외손자 에른스트가 타래를 던지고 노는 것을 보고 큰 발견을 했다고 하던 것이 결국 까꿍 놀이의 연장이라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실타래를 멀리 던지고는 ‘포르트(Fort 없다)’하고 가까이 끌어오고는 ‘다(Da 있다)’라고 외친다. 그런 놀이를 끝없이 반복하는 아이를 보고 프로이트는 그 실타래가 그 애의 어머니를 나타내는 상징물로 인식한다. ‘포르트-다, Fort-Da)’는 결국 까꿍과 같다.

10 까꿍 놀이가 까꿍이의 태명이 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은 지금까지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이야깃거리로 새롭게 다가온다는 게다.

이야기가 태명을 낳고 태명이 이야기를 낳는 한류에서 우리는 호모 나랑스 곧 새로운 시대의 징후를 들을 수 있다.

11 로마인들은 이름이 좋은 사람부터 전쟁터에 보냈으며, 시저 역시 이름을 보고 부하를 발탁하였다는 말도 있다. 아무런 전공(戰功)도 없는 스키피오라는 범부(凡夫)가 일약 지휘관의 영광을 차지한 것은 그 이름이 시저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과도한 이념과 무거운 가치를 씌워 이름을 종교적

- 20 -

부적처럼 붙여 놓으면, 결국은 족쇄를 채우는 것과 다름없는 구속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라는 국민교육헌장을 생각해 보면 이미 태어나기 전에 나의 탄생의 의미와 목표가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풀이하자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 위배되는 행위를 한다면 출생 자체를 거부당하는 것과 같다.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아이들이 배안에서부터 일장기를 두르고 황국신민으로 태어났고, 히틀러 시대의 아이들은 하겐크로이츠의 완장을 차고 독일 땅에 태어났던 것이다.

*하겐크로이츠 : 절에서 쓰는 만(卍)자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문양으로 나치스의 대표적 상징, 아리안 족의 인종주의와 우월주의를 상징

12-13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마지막 정신의 단계로 보여준 것은 막 태어난 유아의 모습이다. 아이에게는 어떤 의미에서도 목표에서도 자유롭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만이 존재한다.

니체의 말 그대로 “아이들은 천진무구함 그 자체이고 망각이자 하나의 시작이며 하나의 유희이고,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이며 태초의 운동이며 신선한 긍정이다.” 이들 아이들의 목에 어찌 어른들의 그 때 묻은 이념이나 가치와 그 운동의 무거운 맷돌을 걸려 하겠는가?

14 ‘쑥쑥이’에서 ‘까꿍이’까지 배 안에 아이들 이름을 몰랐더라면 내 한국인 이야기는 반쪽 날 뻔했다. <태교신기>에서 이른 말대로 “무릇 태(胎)란 천지의 시발점이고 음양의 근원이며, 조화의 풀무이고 만물의 시초다. 태초의 음양이 어우러져 아직 혼돈 속에 있을 때, 오묘한 기운을 발휘하여 은밀하게 돕는 공이 사람에게 있다”는 말 그대로 우리 생명의 기점은 이 세상에 태어난 뒤부터가 아니라 어머니의 자궁 태내에 있을 때부터 라는 것을 배우게 된 거다.

15 샛길

언제부터 태명이 시작되었나

태명은 태아가 태어나기 전, 태중이 있을 때 부르는 이름이다. 그래서 배냇이름이라고도 한다. 태명에 관한 최초의 논문으로 알려진 조선대 강희숙

- 21 -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태명이 2001~2007년 사이에 새로운 유행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일간지 검색에서 태명에 관한 가장 첫 기록은 2003년에 등장한다. 강원도 춘천의 한 산부인과 산모 교실 동기생 부부 5쌍의 인터뷰 기사에 ‘씩씩이’를 태명으로 부르는 사연이 실려 있다. 그해 배우 김호진 김지호 부부의 인터뷰에서는 태몽에 등장한 송아지와 돼지 때문에 태아에게 ‘아지’라는 태명을 지어줬다고 한다. 2005년이 되면 연예인들의 2세 태명에 관한 기사가 늘고 있다.

2. 배내고개

어머니의 몸 안에 바다가 있었네

■ 첫째 꼬부랑길

나는 한 살에 태어났다.

01 나는 기억할 수 없다. 태어났을 때의 그 첫 장면을 알지 못한다.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읽고 한숨지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태어나자마자 맨 처음 본 것이 60촉짜리 전구 두 개였다는 거다. 뻔한 허구인 줄 알면서도 그 출생 장면의 묘사가 너무 실감나서 그저 감탄을 한다. 하지만 그 전깃불을 보면서 “빛이 있으라 하니 빛이 있었고……”라는 성경의 구절이 마치 조명기구 메이커인 오스람사의 광고문 처럼 떠올랐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그냥 손을 들 수밖에 없다.

어두운 자궁 속에서 빠져나와 최초로 본 전등불이 우주가 탄생하던 날의 그 신비한 빛과 교차된다.‘성’과 ‘속’이 한데 어울려 절묘한 현장감을 일으킨다.

02 일본의 유명 작가 미시마 유키오 도 지지 않는다. 세계에 알려진 만큼 이름값을 한다. 그의 소설 <가면의 고백>에서 자신이 태어나던 날의 출생 광경을 세밀하게 묘사하니 말이다. 자신을 씻겨주는 대야 한 쪽으로 한 줄기 빛이 쏟아지고, 그 빛을 따라 반짝이는 잔물결이 끝없이 파동친다. 상상이 아니다. 작가 자신이 그런 광경을 보고 기억했다고 주장한다. 죽을 때도

- 22 -

할복자살하여 중격을 주더니 태어날 때의 이야기도 예사롭지 않다. 동과 서가 다르지만, 소설가의 상상력은 다르지 않다. 어두운 태내에서 세상 밖으로 나올 때 우리가 맨 처음 본 것은 틀림없이 ‘빛’과 ‘물’이었을 테니까. 그게 허구 속에 담긴 진실이라는 거다.

03 그들 작가에게 한국의 아랫목을 만만하게 내 줄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나는 한 살 때 태어났다.”라고 한 장용학의 소설 <요한시집>이 있기 때문이다. 불과 열 자도 안 되는 짧은 문장이지만 외국어로 직역했다고 가정해보라.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0살 때 태어난 귄터 그라스가 감히 60촉짜리 전구 두 알 가지고는 한 살 때 태어났다는 장용학과 맞설 수 없다는 거다. 일찍이 개화기부터 한국과 같은 ‘세는 나이’를 버리고 서양사람 뒤를 따라간 일본인도 예외가 아니다. 태안에서부터 한 살 먹고 나오는 한국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도 “나는 한 살 때 태어났다”라고 천연덕스럽게 이야기하는 소설 속의 한 대목을 읽어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요즘 아이들이라면 영락없이 ‘ㅋㅋㅋㅋ’모음 없는 웃음표를 찍었을 거다.

04 “나는 한 살 때 났다. 나자마자 한 살이고, 이름이 지어진 것은 닷새 후였으니 이 며칠 동안이 나의 오직 하나인 고향인지도 모른다. 셰계는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가령 이 며칠 사이에 죽었더라면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되었을 것이다.

05 태몽과 태교로 애를 잉태할 때부터 한 인생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 서양과 다른 동아시아인들의 출생문화다. 김만중은 그 유명한 <구운몽>에서 자신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자세히 말한다.

일본도 중국도 이제는 서양식 연령 계산법을 따르게 되었지만 어째서 유독 한국만이 그 옛 전통을 버리지 않고 있는지. 전위적인 작가의 현대 소설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방법으로 쓰이는지 이미 첫 고개를 넘을 때 들었던 태명 이야기를 다시 떠올리면 그 이유가 확실해질 것 같다.

06~07 비합리적인 연령 계산법이라고 비웃음을 당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0살부터 나이를 세는 서양 사람들이다. <양철북>에서는 창세기 성경

- 23 -

구절까지 외우고 나온 갓난애지만, 실제 서구 사회에서는 배내 아이를 사람으로 여기지 않은 것 않은 것 같다. 그것은 1년 가까이 어머니 배 안에서 열심히 자연의 섭리와 보호 속에서 살아온 태아의 생명을 무시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걸핏하면 과학이요 합리성이요 따지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제 나이조차 헤아릴 줄 모른다는 말인가.

08 초음파 촬영으로 태아의 성장 과정과 거동을 알게 되면서 데카르트 후

예들의 생명관 자체가 달라진다. 좁쌀만 한 심장이 생겨 움직이면서 19주

째만 되어도 벌써 태아의 손에는 평생 변하지 않는 지문이 생기고 손금이

잡힌다. 배 속에서 왼손가락을 빨던 아이는 왼손잡이가 되는 일이 많다거나

태내에서부터 이미 성인병을 달고 나온다거나 하는 상상을 초월한 데이비드

바커의 책을 일다보면 “세살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은 “태아가 사람

모양을 다 갖추는 것이 4개월째로 되어 있다. 배내 버릇 백 살까지 간다”

로 고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나는 “한 살 때에 났다”고

한 한국 작가의 소설에도 ‘좋아요’의 공감 표시를 꾹꾹 눌러줘야 할 것이

다.

09 한국인은 초음파 과학기술이 나오기 수백 년 전부터 배내 아이를 환히 들여다 본 것 같다. 판소리 <심청가>이야기다. 앞 못 보는 심봉사는 태어난 아이가 아들인지 딸인지 몰라서 손으로 한참을 더듬다가 겨우 알았다고 했지만 그 애가 열 달 동안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서 자랐는지 비디오를 찍듯이 훤히 노래한다. 그것이 “사십 후에 낳은 자식, 한 달 두 달 이슬 맺고……” 중중모리 신가락으로 읊어대는 배내 아이와 그 출산 대목이다. 첫 대목부터 우리의 귀와 마음을 끄는 것은 “이슬을 맺는다”라고 한 그 노랫말이다. 정자 난자가 착상을 한다는 오늘날의 생리학 용어보다 얼마나 촉촉하고 정감 어린 시적 표현인가.

10 판소리 가락에 맞춰 배내 아이가 초승달처럼 점점 만월이 되어가는 광

경이 보인다. 석 달에는 그 이슬에 피가 어리고, 넉 달에는 사람의 형태가

생가는 과정을 낱낱이 고한다. 이건 노래가 아니라 과학인게다. 넉 달 만에

사람 모양(人形)이라고 했는데, 태내를 스캔한 산의학에 에서도 태아가 사

람 모양을 모두 갖추는 것이 4개월째로 되어 있다.

- 24 -

판소리 가락이 공연한 말장난이 아니다. 직접 그 가사를 들어보라.

“사십 후에 낳은 자식, 한 달 두 달 이슬 맺어, 석 달에 피어리고, 넉

달에 인형 삼켜 ……”

11 다섯 달에는 간장, 심장, 비장, 폐장, 신장 등의 오포가, 여섯 달에는 담, 위, 대장, 소장, 삼초, 방광 등의 육점이 생겨난다고 읊어대는 소리를 놓치지 말고 조심해서 들어보자. 다섯 달의 다섯은 한자로 오(五)이다 그래서 오의 운을 맞춰서 오포가 되고 여섯 달은 육(六)이니 ‘육점’이라고 한 거다. 일곱 달 칠규 열려 여덟 달 사만팔천 털이 나고 아홉 달에 구규 열려, 열 달에 찬김 받아 금강문, 하달문 고이 열려 순산하니 삼신님 넓으신 덕택, 백골난망 잊으리까.

12 칠 개월에는 얼굴에 있는 눈, 코, 입, 귀의 7개 구멍 인 칠규가 열리고 9개월이 되면 칠규에 요도와 항문까지 더해진 구규가 열리고 열 달째는 금강문, 하달문, 뼈문, 살문의 모든 자궁문이 열리면서 아이가 태어난다.

열 달에는 자궁 문이 모두 열린다는 것에서 그 운 맞춤의 소리 가락은 절정을 이룬다.

13 일곱 수부터 모두가 ‘ㅇ'의 열림 모음으로 시작하는 한국말의 이 신비성, 그러다가 정말 ‘열’에서 ‘열리’는 자궁 문소리의 노랫말이 아니라 실제로 그 운을 맞춰서 한국의 배내 아이는 ‘옹애’하고 태어나지 않는가. 과학의 정밀성보다 판소리 가락(시)의 치밀성이 훨씬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한다. 과학적 관점으로 봐도 태아들은 일곱 달부터 듣고 느끼고 기억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감각이 열리고 뇌가 발달한다. 이때 태명을 계속 불러주거나 같은 음악을 되풀이해 들려주면 태어난 뒤에도 갖난 아이들은 그것을 기억하고 반응을 보인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14 심청이가 태내에서 어떻게 자랐는지 어떻게 그 안에서 열 달을 지냈는지 그 놀라운 배내의 생명을 우리 조상들은 훤히 들여다보았던 것이다.

태아 의학이나 최신 출산기술, 주산기학의 발달로 태내의 많은 신비가 풀리면서 나이는 배내 때부터 계산하는 것이 합리적이요 과학적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시작한다. 교황청에서도 낙태문제를 논하는 자리에서 공식 선언

- 25 -

했다. “인간의 생명은 출생할 때부터가 아니라 태내에서 생겨나는 그 시초부터” 라고.

15 작은 차이가 아니다. 이것이 0살 때 태어나는 서양인 이야기와 장용학 작가처럼 한 살 때 태어났다는 ‘한국인 이야기’를 가르는 중대한 분기점이다. 최첨단 초음파 기술이라 할지라도 앞 못 보는 심봉사를 따르지 못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모태의 생명 공간을 들여다보는 것은 사람 눈의 수정체도, 카메라의 렌즈도 아니라는 것, 그것은 오직 생명의 예지를 지닌 ‘마음의 눈’‘영혼의 눈’이라는 점이다.

■ 둘째 꼬부랑길

어머니의 바다 이야기

01 아버지는 하늘, 땅은 어머니라 했다. 그래서 지모신(地母神)이라는 말도

생겼다. 하지만 신화가 아니라 실제로 만물의 생명을 낳은 것은 땅이 아니

라 바다다.

02 시인들은 바다에서 어머니를 본다. 바다가 생명의 어머니라는 것은 화석

이 아니라 말과 글자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한자의 바다 해(海)자는 어머니를 뜻하는 모(母)자가 들어 있고, 어머니를 ‘mater’ 바다를 ‘mare’라고 부르는 라틴말의 어원이 그렇다. 프랑스 말로는 아예 어머니와 바다라는 말이 철자만 조금 다를 뿐 소리는 구분없이 ‘라메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 건너갔을지도 모르는 일본어의 ‘海(우미)’는 애를 낳는 것을 뜻하는 ‘産(우미)와 같은 어원에서 유래되었으리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03 인당수 바닷물에 빠졌다가 다시 태어나는 심청이 이야기에서 바다는 곧 모태의 상징이다. 갈라리아의 바닷물에 떨어진 인조인간 호문클루스가 생명의 기원으로 돌아가는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와도 상통한다.

여러 말 늘어놓을 것 없이 장 콕토의 단시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닷소리를 그리워한다> 하나면 족하다. 시인이 아니라도 사람의 귀를 보면 꼭 바다에서 나온 소라 껍데기를 닮아 바다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 26 -

04 과학자들도 같은 소리를 한다. 36억 년 전 생명을 처음 탄생시킨 원시의 바다를 생각할 필요 없이 어머니의 태 안에 있었을 때의 양수를 조시해 보면 알 수 있다. 양수와 바닷물이 함유한 미네랄 성분 비율의 순위가 거의 같다는 것이다. 태아들은 양수라는 바닷물 속에서 헤엄치며 자라는 것이나 다를 게 없다. 실제로 수정된지 1~2개월 뒤부터 태아들은 물고기처럼 폐호흡이 아니라 양수 속에서 아가미 호흡을 하고 지낸다.

05 나는 그곳에 있었다. 태고의 바다, 어머니의 양수 속은 어둡지만 참으로 고요하고 아늑했을 것이다. 하루에 1밀리씩 자란다는 수정란의 플랑크톤 같은 미생물에서 아가미와 지느러미가 달린 물고기 모양으로 변해간다. 지구 생물의 진화과정으로 본다면 10억 년의 세월이 지나간 셈이다.

06 지금까지 내가 읽은 어떤 서사시도 이렇게 스케일이 크고 환상적인 변화를 보여준 적이 없다. 고생물학자들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머니의 바다(양수)속에서 20억년, 더 올라가면 38억년을 기나긴 생물의 계통발생 과정을 단 10개월 만에 치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의 의사요 생물학자였던 에른스트 헤겔은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는 천기누설 같은 이론을 내 놓았다. 쉽게 말해 난자 세포 하나가 분열하여 인간의 보습으로 태어나기까지 단 10개월 남짓한 시간에 인류 수십억년의 진화과정을 그대로 반복 재현한다는 것이다.

07 신화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동굴 속의 곰이었지만 생물학적 관점으로 보면 바다에 떠 있는 작은 미생물이었다. 과학의 이야기 속에서 나는 한국인이기 전에 먼저 인간이었고, 인간이기 전에 원숭이와 도룡뇽, 그리고 바다의 불고기였다. 인어공주의 동화보다도 더 환상적인 <내 안의 물고기>라는 과학도서도 있다.

08 태아들도 꿈을 꾼다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는 그때 무슨 꿈을 꾸었을까, 지상의 꿈과는 분명 다른 꿈이었을 거다. 프로이트 같은 정신분석으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순수한 꿈, 초록색 바다의 꿈, 아니면 그냥 하얀 꿈이었을지 모른다. 축제의 불꽃처럼 일시에 생물들이 터져 나온 캄브리아기의 바다 꿈이었을까. 그보다도 먼 우주 대 폭발의 하늘 꿈이었을까. 혹은

- 27 -

포악한 포식자들에게 쫓기던 피카이아가 땅으로 올라와 등뼈를 꼿꼿이 세우고 두 발로 일어서던 호모 에렉투스의 장한 꿈이었을까. 이따금 저녁 퇴근 길, 횡단보도에서 우두커니 신호등을 기다리다가 어머니의 바다를 생각한다. 그리고 더 이상 쫓기는 피카이아가 아니라, 구부러지는 나의 등뼈를 다시 곧추세우는 꿈을 꾼다.

■ 셋째 꼬부랑길

화이트 하트, 초음파의 발견

01 갈릴레오는 망원경을 개발하여 지구에서 5,000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목성 같은 천체를 관측했다. 그런데 바로 눈앞에 있는 인체의 자궁 속 태아의 생명을 관찰할 수 있게 된 것은 그 뒤 400년이나 지난 뒤의 일이다. 글래스고대학교 산부인과 의사였던 이안 도널드 박사가 개발한 초음파 의료기 덕분이다. 그나마도 인간이 아니라 어두운 동굴 속에서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박쥐의 지혜를 빌린 결과물이다.

그것도 88서울올림픽을 개최하던 무렵이니 그리 멀 옛날이야기가 아니다. 그건 의학이 아니라 생명의 출발점을 묻는 철학의 문제요, 역사의 문제요, 종교의 문제인 게다.

02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 아니 아름다운 우리의 옛말대로 하자면 어머니의 몸 안에 생명의 이슬이 맺히고 난 다음 3주 만이면 7밀리미터 정도 자라 배내 아이에게 심장이 생겨난다. 그리고 조금 지나면 깨알만 한 심장이 움직이기 시작한단다. 이때부터 초음파 모니터의 액정 위로 작동하는 심장이 하얗게 보인다. 그래서 의학자들은 그것을 하얀심장, ‘화이트 하트’라고 부른다.

03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죽을 때까지 멈추지 않는 것이 심장이다. 얼마 전까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던 한 생명이 어둠 속에서 하얀빛을 발하며 고동치는 점 하나가 바로 우리의 ‘쑥쑥이’요, ‘꼬물이’다. 평생 품고 살아갈 생명의 고동, 지금 막 시작한 ‘한국인 이야기’한 편의 아름다운 운율인 게다. 아득하고 먼 시간의 저켠, 벽 너머에서 자신의 존재를 발신하는 생명의 모스부호 신호인 게다. ‘엄마-- 나 여기 있어요---.

- 28 -

04 누구나 아이를 잉태하면 불안해지고 겁도 난다. 출산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신감을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심장보다 배나 빨리 뛰는 그 작은 하얀 점을 접하고 나면, 지금까지 생각과 느낌이 달라진다. 용기가 나고 사랑이 생긴다. 모든 생명체 안에 잠재해 있는 생명애가 나타난다는 이야기다. 임신한 연예인이 인터뷰 도중 “나는……”이라고 말하려다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참 내가 아니지요 이제 우리라고 해야겠군요.”라고 대답하더라는 감동적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나’에서 ‘우리’로 말을 바꾸게 한 그 움찔한 순간 그녀의 손에는 한 번도 연기해 보지 못한 새로운 시나리오 대본과 무대가 펼쳐진다. 눈도 코도 없는 단지 움직이는 점 하나가 자신을 낳게 될 세상의 어머니들을 강하고 슬기롭게 만들어 준 게다.

05 태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느끼고 듣고, 심지어 자기주장까지 한다는 거다. ‘생명을 지닌 어엿한 한 인간이다.’라는 사실에서 한 발 더 나아가면 ‘태아는 모두 천재다’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태내 때부터 나이를 계산하는 한국의 연령 계산법이 옳다는 것도, 오래전부터 태교를 하고 태명을 짓는 한국인의 혜안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06 중절 시 태아의 모습을 초음파로 보여준 장면에는 수술기기가 자궁 안으로 들어오면 이 침입자에 놀란 태아가 구석으로 피하는 예민한 반응을 보인다. 어두운 자궁 벽에서 외치는 소리 없는 절규 뭉크의 <절규>같은 그림 그대로의 모습이라고 한다.

07-09 “태아의 모습이 선명한 사진으로 제공되면서 태아를 그저 감상적으로만 느껴야 했던 옛날과는 전혀 다른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10 배내 아이에게만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머니의 배 속에서 느낀 것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평생 트라우마로 남아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간단한 실험을 해도 알 수 있다고 한다. 태내에서 들었던 소리다. 태아는 10개월 동안 어머니의 심장 박동 소리를 북소리 연주처럼 들으며 살았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각자 좋은 대로 메트로놈 박자를 설정 하라고 하면, 대개는 1분당 50~90의 템포에 맞춰 놓는다고 한다. 인간의 평균 심박수와 일치하는 숫자인 게다.

- 29 -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이들이 그네 타기를 좋아 하는 것은 자궁 체험, 심장 리듬 속에서 자라난 경험과 관계가 있다는 거다. 유아용 흔들의자나 흔들 침대, 흔들목마가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칭얼대는 아이를 안고 좌우로 흔들어주면 아이가 좋아하고 편안해 하는 것도 태내에서 살던 생명 기억이 남아 있는 탓이다.

11 대부분의 엄마가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 왼쪽으로 안고 젖을 먹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 라고 한다. 태어나면서 아이가 우는 것은 갑자기 어머니의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인생 최초로 공포와 불안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왼쪽 젖을 먹이는 것은 젖만이 아니라 아이에게 어머니의 심장 소리를 들려주려는 무의식적 행위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12 예전 우리나라에는 왼쪽 가슴이 오른쪽 가슴보다 큰 여성이 아이를 잘 키운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이게 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터득한 우리 선조들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모유는 엄마가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인지력과 면역력에 도움이 되기 때문만이 아니다. 문명의 젖병이 줄 수 없는 생명의 기억이 전달되고, 젖병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생명의 연결이 어머니의 품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넷째 꼬부랑길

태동, 발의 반란

인간이 발명한 운동 중 제일 먼저 시작한 게 뭐냐. 온갖 추측과 농담이 나돌지만 그 원조는 축구일 것이라는 의견이 가장 설득력이 있다. 이유는 뭔가, 인간이면 누구나 제일 먼저 시작한 운동이 태내에서 한 발길질, 태동이라는 게다. 양수 안에 있으니 폐는 아직 닫혀 있고 눈, 코, 입은 어둠 속에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손은 어떤가, 가끔 손가락으로 입을 빨 때나 필요한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다. 웅크린 자세에서 유일하게 움직이며 태내에서 운동하는 것이 다름 아닌 발이다.

02 요즘 임산부에 대한 태교는 음식 가리고 말 가리는 수준의 것이 아니

- 30 -

다. 배 안의 아이와 어떻게 소통하느냐의 자궁 대화가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말이 통하지 않는 아이와 의사를 주고받는 것은 쉽지 않는 일이다. 유일한 방법이 태동이 있을 때라고 한다. 배내에서 아이가 발을 차면 “아기가 배를 차네”라고 말을 걸면서, 자신의 배 어딘가를 가볍게 두드려 주라고 한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배속의 아기는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가 신호를 보낸 곳을 향해 힘차게 발을 찬다는 거다.

03 그래서 생각나는 게 있다. 2002년 서울에서 열렸던 월드컵의 기억 말이다. ‘붉은 악마’티셔츠를 입은 수십만 군중이 한 목소리로 ‘대~한민국’을 환호하고 특이한 신가락 장단에 맞춰 ‘짝짝~짝 짝~짝’손뼉을 두드린다. 그 심상치 않은 열기에 전 세계가 놀라고 우리 자신도 놀랐다.

04 이런 월드컵 열풍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태내에서 발을 구르던 태동의 힘, 그 태초의 생명기억이 터져 나온 탓이라고 밖에는 달리 풀이할 수 없을 것 같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축구는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나 반문화적인 야성의 열풍을 일으킨다. 발로 차는 운동경기라서 그렇다는 거다. 그렇다 유독 축구만이 손을 사용하면 핸들링 반칙이 적용되는 운동이다.

05 설명한 대로 원초적 생명력이 지배하던 태동의 주력은 발이요 발차기다. 그러나 바깥세상으로 나와 탯줄이 끊기고 문명 세계로 나오는 순간 발과 다리는 머리와 손에게 주도권을 빼앗긴다. 머리 깎인 삼손처럼 무력해진다. 발과 다리는 서서 걸음마를 시작할 때까지 1년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 문명사회에서 맨발은 천한 것이요 부끄러움이다. 금기 억압의 대상이다. 하지만 손이 기술 문명 사회를 상징한다면 발은 곧 태동의 원초적인 생명력을 상징한다.

06 한류의 원조로 세계에 퍼지게 된 태권도야말로 발차기를 중심으로 창안된 운동이다. 택견의 크고 화려한 발차기 기술을 태권도에 적극적으로 접목하면서 한국 고유의 태권도가 발차기 중심의 무술로 발전하고 태권도 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 31 -

07 한자로 써봐라 일본의 가라테(空手)에도 중국의 권법에도 손 수(手)기 들어간다. 손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글자다. 태권도만 발과 관계된 ‘밟을 태跆’가 들어간다. 욕심을 부려 그 ‘跆’를 ‘아이 밸 태胎’로 읽어도 된다. 이제 짐작이 간다. 발로 차는 축구가 있기 전에 우리에게는 의미심장한 태권과 태내 발차기가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서구에서 태교나 태아기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20세게 후반 유전학의 발전과 함께였지만 한국은 정조 때 나온 본격 태교 전문서 <태교신기>만 보더라도 그보다 100~200년이 앞선다.

08 한국인의 특성이 발에 있다는 것은 억측이 아니다. 정조 때 북학파의 대가 이규경은 <동인선주변증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은 달음박질을 잘한다. 멀리까지 갈 수 있는 그 속력이 준마를 능가할 만하다”고 했다.

09 홍대용의 <연행잡기>에도 똑같이 “고사에 조선동자는 달음박질을 좋아한다”고 말하였다. “나는 동자들이 달음박질을 좋아하는 것이 천성인가 하고 마음으로 이상하게 여겼다. 나중에 중국의 아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비록 장난을 하고 놀면서도 우리나라 아이들처럼 달음박질을 하는 아이들이 절대 없었다”고 하였다.

10 걷고 뛰는 두 발의 힘이 오늘의 인간과 그 문화 문명을 만들어 냈다고 하면 비웃음을 살지 모른다. 하지만 누구도 부정 못 하는 것은 물건을 만들고 다루는 기술은 손에서 나왔을지 모르지만,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그 행동의 힘은 발과 다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가정이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면서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문명 문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손으로 쥐고 잡는 능력 때문에 짐승과 다른 인간이 되었다고 한다면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긴팔 원숭이 같은 유인원이 먼저 인간으로 진화했어야 옳았다. 수상 생활을 하던 원숭이들은 사지가 모두 손이었기 때문이다.

11 그런데 진화생물학자들의 통설은 아프리카의 기상 변화로 더 이상 수상생활을 하지 못하게 된 일부 원숭이들이 사바나에서 육상 생활을 하면서 오

- 32 -

늘의 인류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설을 받아들이려면, 육상생활을 하며 네 손 가운데 아래 두 손이 다리로 다리가 된 원숭이가 인간의 조상이 되었으리라는 가설에 동의해야 한다. 실제로 사람을 가장 많이 닮은 침팬지나 고릴라도 하루에 기껏 걸어야 3킬로미터 밖에 벗어나지 못한다. 채집시대의 원인류는 30Km 이상을 걸었다는 것이다. 손이 아니다. 이동성을 가능케 한 그 발과 다리가 오늘의 인간과 그 문화 문명을 만들어낸 주역이었던 것이다.

12 나사렛에서 예루살렘까지 걸어간 예수와 룸비니에서 갠지스강 중류까지 걸어간 석가의 걸음에서 종교 문화가 태어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당을 거닐던 걸음에서 소요학파의 철학이 생겨나지 않았는가. 도시의 유보자(遊步者)는 발터 벤야민의 문학을, 황톳길의 유랑은 김삿갓의 즉흥시를 만들어 낸다. 순례자들을 보라. 길을 걷는 것이 곧 구도인 게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한 길. 도교의 도(道), 길을 걷는 다리가 종교와 통한다.

손은 도구를 만들어 낼 수 있으나 걷고 움직이고 이야기를 만들어 내지는 못한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힘은 손이 아니라 걸어다니는 발이다.

13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열두 고개를 넘어가는 ‘한국인 이야기’그 원형 역시 걷는 것이 아닌가. 국민 소설이 된 <메밀꽃 필 무렵>의 이야기도 한 마디로 축약하면 ‘걷다’다. 그 첫 장면을 읽어보자. "얼둑배기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은 기어코 동업의 조선달에게 낚아보았다. ‘그만 거둘까?’‘잘 생각했네 봉평장에서 한번이나 흐뭇하게 사본 일 있을까. 내일 대화장에서나 한몫 벌어야 겠네.’ ‘오늘 밤은 밤을 새서 걸어야 될 걸?’ ‘달이 뜨렸다?’

14 장판에 앉아서 무명필과 주단을 팔던 허생원은 몰골도 기색도 초라하다. 힘이 없다. 하지만 달이 뜨고 길을 걸으며 성처녀와의 사랑 이야기를 하는 허생원은 생기에 넘치는 딴 사람이 된다. 장돌림꾼이 아니라 이야기꾼이 된다. 꼬부랑 산길을 걸어가며 ‘난 거꾸러질 때까지 이 길 걷고 저 달 볼 테야“ 라고 말하는 허생원에겐 걷는 게 곧 삶이고 이야기이고 달이 숨을 쉰다는 그 생명력이다.

- 33 -

태 안에서 힘차게 발길질 하는 배내 아이의 태동에서 우리는 한국인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발의 반란을 본다. 걷는 인간에서 타는 인간으로 바뀌어 간 현대 문명에 대한 발의 외침이다. 자동차 운전대에서 손만 움직이고 걷기를 멈춘 오늘의 인류에게 ‘한국인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다.

 

◉ 3. 출산 고개 - 이 황홀한 고통

■ 첫째 꼬부랑 길 - 어머니와 미역국

01 태어나자마자 아이들은 왜 큰 소리로 우는가. “바보들만 사는 덩그란 무대위로 나왔기 때문이다.”라는 게 셰익스피어의 풀이다. <리어왕> 4막 6장에 나오는 유명한 대사다. 역시 극장에서 뼈가 굵은 대문호다운 상상력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태아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기 위해 양수를 내 뱉는 호흡 연습을 하고 배 속에서부터 발길질하며 걸음마 다리운동까지 한다. 이렇게 제 살 궁리를 다 하고 난 다음에야 죽음을 각오하고 출생의 모험길에 나선다. 깜깜한 암흑 속에서도 빠져나갈 좁은 산도를 용케찾아 그 방향으로 머리를 튼다.

02 오히려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은 산모 쪽이다. 배 속에 든 아이가 사인을 보내 진통을 시작해야 겨우 분만할 때가 온 것을 눈치 챈다. 그래서 옛날에는 밭을 매다가 애를 낳고, 요즘에는 구급차 안에서 해산하는 산모들이 생겨난다. 사주팔자는 타고 난다고 하지만 그 운명의 날을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배 안의 태아 자신이다. 오히려 분하고 억울해서 우는 아이들은 셰익스피어의 시대가 아니라 머리통을 강철 집게(겸자)에 잡혀 억지로 끌려 나온 요즘아이들이다. 혹은 제왕절개 수술로 영문도 모른 채 밖으로 떨어진 21세기의 신생아들인 게다.

03 나라에 따라서 태어나는 아이의 울음소리도 달리 표현된다. 한국 사람은 ‘응애!’ 중국 사람은 ‘구아구아’ 그리고 일본 사람은 ‘오갸-’라고 한다 하지만 생물학자의 귀에는 다 독같이 들린다.

- 34 -

울음소리가 아니라 일종의 호흡작용으로 듣기 때문이다. 과학에 의하면 우리는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물고기처럼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밖으로 나오자 마자 폐호흡으로 숨을 바꿔 쉬어야 한다는 게다. 폐벽이 갑작스레 열리면서 바깥 공기가 일제히 안으로 들어온다. 그때 들이마시는 호흡소리가 바로 그 요란한 산성의 울음소리다. 최초의 그 들숨이 생을 마칠 때 내 뱉는 마지막 날숨으로 이어진다. 일생이 한 호흡인 것을 생각하면 여전히 우리 귀에는 예사롭지 않은 울음소리로 들린다.

04 양수가 터지는 탄생의 순간, 모태 속 행복의 바다, 평화의 바다는 사라진다. 어머니의 심장 박동을 파도 소리로 들었던 태생기의 추억은 끊긴다.

노자의 말대로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는 갓난아기의 울음소리야말로 3억 5천 만 년 전, 육지로 올라온 고생물들의 태초의 숨소리를 닮은 것이 아니겠는가.

 

05~06 나의 생일날은 내가 선택한 가장 성스러운 날이며, 그것은 바다를 떠나 육지로 상륙한 고난의 기념일이다. 나는 그날 육지를 향해 단신 포복하면서 숨이 막힐 때까지 앞으로 전진한다. 엄청난 고통의 터널 끝에 빛이 보이기 시작한다. 물에서 뭍으로 올라오는 순간 막혔던 숨통이 뚫리는 소리가 난다. 그건 수심 10여 미터의 바다속에서 막판까지 숨을 참던 해녀가 물위로 올라와 숨을 들이마시는 휘파람 같은 그 ‘숨비소리’다.

07 “진통이 끝난 어머니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내 첫 울음소리의 호흡을 들었으며 다음에 태어날 아이들의 바다를 준비하기 위하여 가장 청정한 해역에서 딴 미역국을 부지런히 들고 계셨다.” 여기서 부터는 이능화의 <조선여속고>속 산모와 미역국의 광경이 펼쳐진다.

산모가 첫 국밥을 먹기 전에 방의 남서쪽을 깨끗이 치운 뒤 쌀밥과 미역국 세 그릇씩 삼신상을 차려 바친다. 그리고는 마치 음복을 하듯 상위에 차려놓았던 밥과 국을 산모가 깨끗이 모두 먹는다. 이렇게 세이레(21일) 동안 반드시 미역국을 먹는 것은 신성한 종교적 의식과 조금도 다를 게 없다. 아이를 낳고 먹는 미역을 해산미역이라 하여 값을 깎거나 외상해도 안 된다. 미역을 사 들고 올 때도 그것을 꺾어 들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러한 금기를 깨면 산모가 난산한다는 거다. 산모가 아이를 낳고 미역국을 먹는 것

- 35 -

은 단순한 산후조리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인 이야기’에서만 들을 수 있는 차별화된 출생관이요 인생관이요 자연관이다.

08 시험 삼아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에게 불어보면 안다. “당신 낳고 어머니가 미역국을 드셨습니까?” 그러면 그들은 멍한 표정을 짓는다. 애를 낳으면 반드시 미역국을 먹는 풍습이 그들에게는 없다는 얘기다.

“사람도 아닌 저런 녀석을 낳아 놓고도 미역국을 먹었느냐”는 말이 욕이요 막말이라는 것을 모르면 한국인이 아닌 게다. 한국인의마음과 그 이야기의 바탕에는 바다와 채집 문화의 귀중한 자연과 생명 자원이 남아 있다는 반증이다.

09 산모가 미역국을 먹는다는 것은 그만큼 자연이 준 삶의 지혜를 지녔다는 뜻이다. 바다를 한 번도 구경한 적이 없는 산골 여자라 해도 아기를 낳으면, 반드시 바다에서만 나는 해초와 미역을 먹는다. Em거운 미역국을 먹으며 뜨거운 바다, 생명의 바다를 자궁속에 채운다.

10 “고려 사람들은 고래가 새끼를 낳은 뒤 미역을 뜯어 먹어 산후의 상처를 낫게하는 것을 보고 산모에게 미역을 먹인다.” 당나라 서견의 <초학기>에 나오는 구절이다. 고려 때부터 미역을 먹었다는 증거다.

11 명나라의 <본초강목>에는 “신라 미역, 고려 미역이 안팎 종기를 낫게 하는 신비한 약제로 사용된 적이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현대의 과학자들도 산모가 미역국을 먹는 것의 효용을 증명했다. 출산 후 상처를 아물게 할 뿐만 아니라 몸 안의 피를 맑게 해 주는 효험이 있다고 한다. 거기에 자궁 수축과 지혈까지 도와주고, 출산 시에 유혈한 산모에게 피를 공급한다. 그뿐만 아니라 갑상선 호르몬을 보충해주는 역할까지 한다는 거다. 그래서 미역국 먹는 풍습이 삼국시대부터 오늘까지 천 년을 이어져 내려온 셈이다.

12 신기하지 않은가. 이미 우리는 ‘어머니의 바다’라는 걸 알고 있다. 그리고 바다는 우리를 태어나게 한 ‘자연의 자궁’이라는 것도 알았다.

마누라만 빼놓고 다 바꾸라는 개혁의 구호도 미역국 앞에서는 무색하다. 끝내는 마누라까지 다 바꿔버린 급진적 ‘시대정신’앞에서도 애 낳고 생일

- 36 -

날 미역국 먹는 탄생 이야기만은 시퍼렇게 눈을 뜬다. 먼 데 갈 것도 없다. 가끔 나는 온 식구와 함께 집 근처 미역국 집에서 식사를 한다. 산후 선약(産後仙藥)이라고 쓴 큰 메뉴판 아래에서 말이다.

13 외국의 어떤 천재적인 시인이라 할지라도 산모와 바다와 미역을 결합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진 못한다. 귀빠진 생일날 마다 미역국을 천 년 이상 먹어온, 한국인만이 그 이야기를 안다.

■ 둘째 꼬부랑길 - 산고의 의미, 호모 파티엔스

01 “인간은 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애를 낳지 못하는 지구상 유일한 동물”이다. 물론 출산을 돕는 코끼리 같은 동물이 없는 건 어니다. 새끼라도 덩치가 커서 누군가 받아주지 않으면 맨 땅에 떨어져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늙은 코끼리들이 산모를 둘러싸고 상아로 아이를 받아준다. 그렇다고 분만을 직접 돕는 것은 아니다. 그 코끼리들은 산파라고 부를 수는 없다. 인간은 직립보행을 하는 바람에 골반은 자꾸 작아지고 머리통은 반대로 커졌다. 원숭이나 북극곰처럼 네 발로 다니는 짐승들은 넓은 산도 덕분에 2분 만이면 분만이 끝나는데 인간은 하루, 길면 며칠씩 산통을 겪어야 한다.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산도에 갇힌 아기를 제때 꺼내지 못하면 산모와 아이 모두 숨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일찍부터 난산에 대비하여 애를 끌어내는 겸자와 살벌한 강철의 출산 도구가 발달했다.

02 “왜 울며 태어났는가”가 산모로 옮기면 “왜 분만할 때 진통을 하는가”로 바뀐다. 애가 울어야 폐가 열리듯이 산모가 진통의 소리를 외쳐야 경구부, 산도가 열리는 것이다. 만약 경구부가 아무 때고 열리면 자궁 한의 애기가 빠져나와 유산한다. 그 이치를 잘 아는 우리 조상님들은 그것을 금강문이라고 불렀다.

굳게 닫힌 금강문을 열자면 초인적인 힘이 들 것이다. 지상을 초월하는 최고의 고통을 통해서만 하늘이 채운 그 자물쇠는 풀릴 수 있다.

03 출산의 고통이 얼마나 큰가. 성경책을 열어보면 된다. 선악과를 범한 죄로 남자에게는 밭을 가는 노동의 고통을, 여자는 애를 낳는 고통을 내렸

- 37 -

다고 한다. 실재로 분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실감나게 표현한 말이 있다. “콧구멍으로 수박이 튀어 나오는 것 같은 아픔” 혹은 “피가 날 때까지 양 손가락으로 입을 양쪽으로 찢는 아픔”이라는 표현이다.

04~06 그런데 건강한 젊은이들도 감당 못하는 그 지독한 산고를 어떻게 옛날 여성들은 혼자서 참고 아이를 낳을 수 있었겠는가. 미스터리다. 하지만 알고 보면 놀랄 일이 아니다. 자연 분만에는 오늘의 의료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한다. 한국이라면 삼신할머니의 힘 말이다. 가령 양수는 태내의 아이를 기르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만, 분만 시에는 터져서 윤활유 역할을 한다. 좁은 산도를 미끄럽게 해서 아이가 쉽게 나오도록 돕는 것이다. 이같은 신기한 일이 분만시에 분비되는 호르몬의 화학 작용에서도 드러난다.

07~09 출산시의 호르몬 작용이 시설 분만으로 옮겨오면 자연과 현대 의료기술이 엇박자를 내는 괴상한 러브스토리가 생겨난다. 출산 직후 산모들에겐 사랑에 빠졌을 때와 같은 ‘엔도르핀 하이’현상이 일어난다. 산고의 고통을 잊고 태어난 아이에게 줄 사랑의 선물인 게다 그런데 눈치 없이 산모로부터 태어난 애를 바로 떼어놓는 바람에 황홀한 러너스 하이의 황홀경에 빠진 산모의 엔도르핀 효과가 곁에 있는 엉뚱한 남자 의사에게 쏠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응애!’하고 태어날 때 아이의 척 울음소리에서 이미 자연과 문명 충돌의 새로운 갈등의 무대가 열린다.

10 왜 생명을 낳는 기쁜 일에 자연은, 하나님은 그토록 잔인하리만큼 고통을 주었는가. 그것을 알려면 고치에서 빠져나오는 호랑나비의 탄생을 보면 된다. 웬일인지 고치에 뚫린 구멍은 아주 좁다. 그 좁은 구멍으로 빠져 나오려면 엄청난 고통이 따른다. 어쩌자고 자연은 이렇게도 잔인한 짓을 하는가. 보다 못한 사람이 그 구멍을 조금 더 크게 뚫어주면 나비는 쉽게, 아주 편하게 나온다. 그런데 그게 고마워할 일이 아니다. 딱하게도 그 나비의 나래는 젖은 채로 나와 날지 못하고 죽는다. 좁은 구멍을 빠져나와야만 끈적끈적한 고치속의 이물질을 모두 빨아내어 나래를 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좁은 구멍을 통해 나오는 고통은 죽음이 아니라 새 생명을 주고 자유의 날개를 주는 필요한 장치였던 셈이다.

- 38 -

11 무엇이든 탄생에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어둠의 터널이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이것이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인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무통분만과 제왕절개 수술을 통해 넓은 문으로 들어가려고만 애써왔다. 고치 구멍을 크게 뚫어주는 것과 같은 일을 해 온 것이 과학기술이요 문명이었던 게다.

그것이 어떤 수술이 됐든지 간에 산모는 응급 환자로 취급된다. 분만실이 가정집에서 병원으로 옮겨지면서 애를 낳는 것이 병이요 치유대상이 된다. 아이를 낳는 주권이 집에서 병원으로 산모에서 의사로 바뀐다.

■ 셋째 꼬부랑 길 - 왜 귀빠진 날인가?

01 생일날을 귀빠진 날이라고 말하는 우리 토박이말, 지구상에서 자기가 태어난 날을 귀빠진 날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하다. 서양은 물론이고 문화가 비슷한 일본에도 중국에도 없는 말이다.

출산의 막바지는 머리 양 쪽에 나 있는 귀가 마지막 걸림돌이다. 그것이 빠지는 절정의 순간 출생의 드라마는 대단원에 이른다.

02 귀가 빠지는 순간 고통의 꼭짓점에서 아이도 어머니도 다 같이 풀려난다. 고통이 클수록 해방감과 쾌감도 커진다. 고통이 환희로 죽음이 생명으로 바뀐다. 탄생의 의미를 이렇게 몇 마디 말로 생생하게 기록한 것은 출생의 아픔과 기쁨으로 생일을 맞이하는 한국인의 지혜요 철학이다.

“나는 한 살 때 태어났다” 는 말은 귀빠지기 이전에 어머니의 바다에서 살았다는 것을 확증하는 말이다.

03 출산과 분만은 이제 여성이 걸머진 양육의 문제나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가정과 사회, 그리고 의학 분야의 문제만은 아니다. 인류의 총체적인 문화 문명의 문제로 떠오른 지 오래다. 그래서 나는 <출산 ,그 놀라운 역사>를 읽다가 그 가운데 한국의 출산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1995년 해방 50주년 특집으로 꾸민 한국인의 삶의 변화를 기획한 어느 신문 기사였다.

04 “5남매를 모두 집에서 낳았어요. 5~6일씩 진통하면서 고생 끝에 낳았

- 39 -

지만 ‘애 낳는 일’을 부끄럽게 여겨 첫 애를 낳을 때는 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해, 건넌방에 있던 시숙이 아이가 태어난 줄도 몰랐던 일이 잊혀지지 않지요. 애 낳는다고 소리소리 지르는 요즘 사람들 이야기를 들으면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싶어요.”

이 짤막한 산모의 증언은 “세상 참 많이 변했다 싶다”는 마지막 말에 방점이 찍혀 있다. 얼마 전만 해도 애 낳는 일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것과 한국 여성의 초인적인 참을성 그리고 무통 분만이 아니라 무성 분만을 한 한국 특유의 출산 이야기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05 나는 지금 나물캐던 채집 시대에 태어나 농경시대와 산업시대를 단숨에 건너 뛰어 최첨단 정보 시대의 문명을 살고 있다. 200자 원고지의 칸을 채우던 사람이 노트북 컴퓨터를 옆구리에 끼고 다니며 디지로그와 AI에 대한 글을 쓴다. 그런데도 그보다 더 빠른 속도로 뽕밭이 바다가 되는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 바로 애를 낳는 출산 문화다. 경부 고속도로가 뚫려 자동차를 타고 시속 100킬로미터의 스피드로 달리던 197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한국 산모의 75.1%가 자기집에서 분만 했다는 사실을 어떤 지식인들도 인지하지 못했다. 그것도 거의 반수가 의사나 조산부의 도움 없이 나 홀로 숨죽이며 출산했다고 한다. 도움을 받는다 해도 조산부와 시어머니, 친정 어머니가 반반이었다는 통계다.

06 ~ 08 육신을 태우는 그 고통이 영혼을 정화하고 새로운 생명을 빚어내는 과정은 “하얀 도자기를 빚어내기 위하여 불가마 속에 천하무비의 큰 불을 지피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여인들은 출산의 고통으로 소신공양을 하는 등신불이 되기도 하고, 도요에서 잘 구워진 백자 항아리가 되기도 한다.

남성들이 도저히 알 수도 느낄 수도 없는 것이 여인들의 산고이며 “만다라의 꽃잎으로 자비의 세례로 변하는 그 축복”의 비밀인 것이다.

09 그래서 여인들이 울부짖는 그 막다른 소리들은 범패보다 더 아름답고 그보다도 더 진한 막다른 관처럼 하얀 방을 메운다. “오뇌와 비원의 처절한 촉수들이 찢어지는 살점을 쥐고 흔드는 그 산고”를 통해 여인은 여인으로 태어난 업보에서 벗어나 니르바나의 세계로 들어간다.

- 40 -

■ 넷째 꼬부랑길 - 나를 지켜준 시간의 네 기둥

01 아사다 마오는 그 사주 때문에 김연아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글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두 선수는 모두 경오 년 백말띠이고 달수는 갑신과 을유 이다. 태어난 날은 계유와 계사로 20일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 계(癸)의 천건이 들어 있다. 그 결과 김연아는 갑(甲) 목을 손과 발로 쓰고, 마오는 을(乙)목을 손과 발로 쓰는 것으로 언제나 뒤쳐질 수밖에 없다는 풀이다.

02 더 이상 사주풀이를 들으려 하지 말자. 김연아가 이긴 것은 사주팔자를 잘 타고 나서라는 말밖에는 되지 않으니 말이다. 궁금한 것은 그 인터넷 기사 검색이 순위에 오르고 조회수가 수만 건에 이른다는 데 있다. 하기야 좋다는 사주팔자 받아놓고 제왕절개로 아이를 낳는 세상이니 할 말 없다.

03 하지만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지금도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처럼 여전히 결혼할 때 사주단자를 보내지 않는가. 신랑 친구 둘이 함을 지고 신부댁 앞에서 함 사라고 외치는 젊은이들이 통과의례처럼 되어 있지 않는가. 우리의 출생을 사주로 적고 따지는 풍습은 은반에서 펼치는 김연아의 피겨스케이트 못지않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사주는 사실 점치는 것과는 별개다. 시간을 측정하고 표시하는 방법으로 태양력이나 음력보다도 더 정교한 시간 측정법인 게다.

04 출생의 시간을 해의 운행으로 표시하면 양력 생일이 되고, 달의 운행으로 치면 음력이 된다. 그러나 해와 달의 시간 말고 또 하나의 시간이 별의 시간이다. 나의 생명 그리고 출생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동서 할 것 없이 해와 달이 아니라 별이다. 서양의 점성술이 그렇고 동양의 사주가 그렇다.

우리의 사주팔자를 보여주는 별은 목성이다. 그런데 이 별은 태양이나 달과는 정반대로 서쪽 하늘에서 떠서 동쪽 하늘로 진다. 만약에 목성에 맞춰서 시간을 계산하면 양력이나 음력하고는 거꾸로 돌아가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운행을 바꾼 가상의 별 하나를 만들어 태세라고 불렀다.

05 와! 대단하다. 아이들 같으면 손뼉을 칠 것이다. 목성과 정반대로 운행하는 별 하나를 창조했다니 갈릴레오를 누른다. 그는 있는 별을 찾아냈지만

- 41 -

우리는 없는 별을 만들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그 태세가 공전허여 제자리로 돌아오는 위치를 12시간을 만들어 짐승 하나씩을 배치한 것이 우리가 띠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쥐, 소, 호랑이, 토끼……우리 나이의 열두 친구다.

06 한국인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는 가상의 별 태세가 만들어 내는 네 기둥 여덞 글자의 사주팔자에서 만들어진다. 점이나 친다고 우습게 생각하지 마라. ‘새천년 맞이 자정행사’를 이끌었을 때 광화문에 몰린 인파는 예상보다 4배 많은 30만 명이 넘게 모여들었다. 그리고 띠별로 시민들이 모이도록 분산시켰다. 각 띠를 대표하는 인물을 내세워 열두 무대를 만들었다. 세종대왕은 소띠, 이순신장군은 뱀띠, 광개토대왕은 돼지띠, 개혁군주 정조는 원숭이 띠. 퇴계 선생은 닭띠 등이다.

07 띠보다 더 평등한 구분법이 어디 있겠는가. 12지는 태어나면서 부여받은. 평생 변치 않는 자기 정체성을 만들어 준다. 지연, 학연, 혈연을 뛰어넘어 평화와 화해의 메시지까지 담았다. 아무리 원수지간이라도 띠동갑일 수는 있지 않은가. 몇백 년 전의 위인이 나와 같은 띠동갑이라는 점에서 동질감을 느낄 수도 있다. 중국 사람이나 일본 사람들도 같은 띠를 쓴다. 12지에는 차별이 없다.

내가 2000년에 태어난 아이들을 ‘즈믄둥이’라고 부른 것도 새천년을 맞이하는 사람들에게 이런 메시지가 전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08~10 아무리 낡은 <주역>이나 <당사주책>이라도 살아있는 신이라고 했던 일본의 천황보다 내 띠인 닭이 먼저다. 거기에는 카이저의 절대권력도 틈입할 수 없는 하늘과 땅의 우주, 자연의 시간이 있다. 아무리 소화 8년 황국신민으로 포장하려 해도 나는 태양보다 먼저 어둠 속에서 빛을 토하는 닭, 계유생 닭띠로 이 땅에 태어났다.

11~12 유럽에서는 중세 때부터 이미 생년월일을 개인의 신분을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여겨왔다고 한다. 주소는 바뀌어도 생년월일은 일생동안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 역사학자 필립 아리에스는 언젠가는 생년월일 숫자를 시민 전체가 등록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했다. 기뻐해야 할지 서러워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 예언이 이루어진 곳이 바로 한

- 42 -

국 땅이다. 사주팔자를 시만 빼고 숫자로 고치면 우리가 무덤까지 갖고 갈 주민등록 번호의 앞자리 여섯 숫자가 된다. 사주팔자가 아니라 오늘의 한국인은 ‘삼주 육자’ 속에 갇혀 산다.

2020. 5. 5

*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 43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