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2)

2021. 3. 23. 09:41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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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알만한 진실이라도(2)

■ 박완서 에세이

◎ Part 4. 사랑의 행로

■ 민들레꽃을 선물 받은 날

딸네가 가까이 살아서 외손자를 자주 보게 된다. 매일 봐도 즐거운 것은 매일 달라지기 때문이다. 두 돌이 막 지난 녀석은 요즘 말을 배우느라 한창이다. 일전에는 녀석이 “선물 선물, 민들레 민들레”하면서 들어오더니 나에게 민들레꽃 한 송이를 주었다. 녀석의 ‘민들레’란 발음은 독특해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아주 작은 민들레였다. 나는 그걸 내 옷 단추 구멍에다 꽂았다.

손자는 내가 민들레꽃을 단추 구멍에 꽂은 것만 갖고는 흡족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낑낑대더니 그걸 빼서 자꾸만 내 코에다 갖다 댔다. 냄새를 맡으란 소리 같았다. 녀석이 꽃을 보고 좋아할 때마다 가까이 데리고 가 냄새를 맡게 해 주었더니 그걸 나에게 다시 갚으려는 것 같았다.

민들레꽃은 워낙 냄새가 없는 것인지, 그 꽃이 빈약해서인지 아무 냄새도 안 났다. 그래도 나는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황홀한 시늉을 했다. 녀석도 나와 이마를 부딪히며 달려들어 같이 꿀 내음을 맡으려고 했다.

손자와 함께 맡는 민들레꽃 내음은 참으로 좋았다. 그 조그만 게 피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뿌리를 내린 흙의 저 깊은 속살의 꿋꿋함과 그 조그만 것까지 골고루 사랑한 봄바람의 어질고 부드러운 마음까지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외손자로부터 조그만 민들레꽃을 선물 받은 날 창밖의 봄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햇빛은 반짝이고 공기는 감미로웠고 수양버들은 신선한 녹색으로 푸르러 더할 나위 없이 유연한 몸짓으로 살랑거렸다.

녀석도 기억할까? 만 두 살적의 어느 황홀한 봄날을. 그의 볼과 머리털에 머물렀던 할미의 눈길을.

손자야, 너는 애써 그것을 기억할 필요는 없으리라. 흔히 외손자를 귀여워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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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니 방아깨비를 귀여워하란 말들을 한다. 아무리 귀여워해봤자 남이란 소리도 되겠고, 혹은 사랑에 비해 돌아올 보답이 없음을 말함이기도 하리라.

그럼 보답이란 뭘까? 살았을 적의 봉양이나 방문일까 죽은 후의 봉제사일까.

나는 이런 보답의 기대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외손자 사랑이 좋다.

손자야, 너는 이 할미가 너에게 쏟은 정성과 사랑을 갚아야 할 은공으로 새겨둘 필요가 없다. 어느 화창한 봄날 어떤 늙은 여자와 함께 단추만한 민들레꽃 내음을 맡은 있을 기억하고 있을 필요도 없다. 그건 아주 하찮은 일이다.

나는 손자에게 쏟는 나의 사랑과 정성이 갚아야 될 은공으로 기억되기 보다는 아름다운 정서로 남아 있길 바랄뿐이다. 나 또한 사랑했을 뿐 손톱만큼도 책임을 느끼지 않았으므로.

■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평범하게 키우고 있다. 공개해서 남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애 기르기의 비결 같은 것도 전연 아는 바 없다. 그저 따뜻이 먹이고 입히고, 밤늦도록 과중한 숙제와 씨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숙제를 좀 덜 해 가고 대신 선생님께 매를 맞는 게 어떻겠느냐고 심히 비교육적이고 주책없는 권고를 하기도 한다.

일전에 친구한테서 지독한 소리를 들었다.

“너 같이 애들을 막 키워서야 무슨 낯으로 애들한테 큰소리를 치겠니? 그 흔한 과외공부 하나 시켜봤니? 딸이 넷씩이나 있는데 피아노나 무용이나 미술공부 같은 걸 따로 시켜봤니?”

아이들의 책가방은 무겁다. 그러나 단순히 책가방의 무게만으로 한창 나이의 아이들의 어깨가 그렇게 축 처진 것일까? 부모들의 지나친 사랑, 지나친 극성이 책가방의 몇 배의 무게로 아이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거나 아닐지. “내가 너한테 어떤 정성을 들였다구. 아마 들인 돈만도 네 몸무게의 몇 배는

될 거다. 그런데 학교를 떨어져 엄마의 평생소원을 저버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장가 들자마자 네 계집만 알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이런 큰 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의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는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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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마음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아이들은 예쁘다. 특히 내 애들은, 아이들에게도 과도한 욕심을 안 내고 바라볼수록 예쁘다.

제일 예쁜 건 아이들다운 애다. 그 다음은 공부는 잘하지만 약은 애는 싫다. 차라리 우직하길 바란다. 활발한 건 좋지만 되바리진 애 또한 싫다. 특히 교육은 따로 못 시켰지만 애들이 자라면서 자연히 음악·미술·문학 같은 걸 이해하고 거기 깊은 애정을 가져 주었으면 한다.

■ 할머니와 베보자기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는 일제강점기여서 그랬는지 초등학교 4학년부터 수학여행은 어디로 간다는 게 정해져 있었다. 4학년 때는 인천, 5학년 때는 수원, 6학년 때는 개성이었다. 6학년이 되었을 때, 내가 개성으로 수학여행을 간다는 게 조금도 가슴 설레는 일이 될 수 없었다. 그렇다고 결석을 하자니 고향이니까 가기 싫다는 이유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나를 더욱 우울하게 한 건 할머니가 마중을 나오실까봐였다.

6학년이 되기 전부터 할머니는 개성으로 완서가 수학여행 오면 떡 해 가지고 역까지 마중 나오실 것을 벼르고 계시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학여행 날짜가 정해지자 어머니가 할머니께 편지까지 올렸으니 마중 나오실 건 틀림없었다.

개성역에 내리자 아이들은 왁자지껄 신기한 듯 주위의 풍경을 구경하느라 두리번거렸지만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보고 있었다. 할머니가 나를 찾다 못 찾으시고 돌아가시길 바랐다.

고만고만한 200여 명의 아이들 중에서 식구의 얼굴을 찾아내기란 영악한 도시 사람도 어려운 일인데 할머니는 개성서 20리나 떨어진 두메의 촌부였다.

내가 모르는 척하면 십중팔구는 못 찾고 헛걸음을 하실 거라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불어서 우리들을 모았다. 우리는 개성역 광장에 네 줄로 정열했다. 그때도 나는 앞에선 아이들의 뒤통수만 보고 한눈 한 번 안 팔았다.

이때였다. 어디서 “완서야, 완서야”하고 부르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가슴이 울렁거리고 얼굴이 홍당무가 됐다. 그러나 마음 모질게 먹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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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 않았다. 학교에 입학하고부터 곧 이름은 일본말로 고쳐 부를 때라 ‘완서’가 내 이름이라고 선뜻 알 만한 아이가 없었다. 더군다나 선생님은 일본 사람이었다. 나는 어서어서 선생님이 우리를 이끌고 어디론지 가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우리가 떠나기 전에 할머니는 마침내 내 이름을 일본말로 부르시는 것이었다.

“보꾸엔쇼야, 보꾸엔쇼야.”

그것은 아마 할머니가 입에 담으신 최초의 일본말이자 마지막 일본말이었으리라. 그러니 그 발음이 오죽했겠는가.

어린 마음에도 할머니가 부르시는 소리는 목놓아 울고 싶도록 슬프게 들렸다. 아무도 할머니의 괴상한 발음이 내 이름이란 걸 알아듣기 전에 나는 슬픔과 미움과 사랑이 뒤죽박죽된 견딜 수 없이 절박한 마음으로 할머니한테로 뛰어갔다.

할머니는 베보자기에 싼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계셨다. 뻣뻣하게 풀 먹인 당목 치마저고리를 입고 계셨다.

나는 할머니의 촌스러움이 창피해서 할머니 하고 같이 땅 속으로 꺼질 수 있는 거라면 당장 꺼져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눈치도 없이 나를 안고 “아이고 내 새끼. 차멀미를 했나? 얼굴이 왜 이렇게 축 갔을꼬” 하시면서 볼을 비벼대셨다. 그리고는 어느 틈에 우리 주위에 삥 둘러선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베보자기에 싼 떡을 끄르셨다. 베보자기 속엔 세 개의 보따리가 따로따로 들어있었다.

할머니는 그 중 하나를 끌러 송편을 내 입에 넣어 주려고 하셨다. 나는 꼭 다문 입을 닷 발이나 내밀고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걸로 일이 끝난 건 아니었다. 할머니는 세 개의 보따리를 다시 베보자기에 싸서 나에게 주시면서 한 보따리는 선생님 드리고, 한 보따리는 아이들하고 나눠 먹고, 한 보따리는 서울 가지고 가서 식구들하고 먹으라고 신신당부 하셨다.

우리 행렬은 곧 움직이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당신 걸음이 예전 같잖아서 우리를 끝까지 못 따라다니는 것을 한탄하시면서 그 자리에서 나를 놓아주셨다. 그러나 베 보자기에 싼 것은 별수 없이 내 차지가 되었다. 그때 나는 그게 무거워서 할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베보자기와 할머니의 당목 치마가 그렇게 창피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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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우울한 수학여행이었다. 나는 그 베보자기에 싼 송편을 선생님에게는 물론 친구들에게도 나누어주지 않고 그냥 끌고 다니다가 집까지 끌고 왔다.

깔끔하고 냉랭한 일본인 여선생에게 베보자기에 싼 조선 떡을 준다는 건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친구들한테도 그냥 무조건 창피하기만 했다.

할머니는 그 전날 아마 밤잠을 못 주무시고 송편을 빚으셨을 테고, 새벽에 쪄서 정갈한 베보자기에 싸서 이고 아침나절 20리 길을 걸으셨으리라.

이제 와서 회한이 가슴에 사무친들 무엇하리오. 그분이 돌아가신지 벌써 30년을 넘어 헤아린다.

나는 요새 남들이 거의 안 쓰는 베보자기를 여러모로 애용하고 있다.

■ 달구경

달 밝은 밤 손자를 데리고 고수부지에 나갔었다. 가족 동반으로 많은 사람들이 강가에서 가을밤을 즐기고 있었다. 산책, 달음질, 공놀이 등 가벼운 운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돗자리를 깔아 놓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가스버너에 고기를 구우면서 저녁 식사를 하는 가족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도시락을 싸 가지고 와서 먹는 건 몰라도 고기 굽고 찌개 끓이는 건 삼갔으면 싶은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우리가 겨우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한 식사에서 식도락을 즐길 수 있을 만큼 풍요로워진 게 사실이라면 고기 냄새는 부엌과 식당에서만 맡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산과 계곡, 강가에서까지 산바람 강바람 대신 고기 냄새를 쐬어야 한다는 건 풍요롭기는커녕 궁상스러워 보였다.

날이 어두워지면서 다리 위를 밝히는 가로등 불빛이 강물에 투영되어 아름다운 불기둥처럼 흐느적대고, 다리 위를 달리는 차들이 앞뒤로 내 쏘는 불빛은 화려한 빛의 강물이 되어 쏜살같이 흐르는 게 볼만했다. 어느 틈에 둥근 달이 멀리 아파트 단지 옥상에서 둥실 떠올랐건만 인공의 불에 눈이 팔려 아무도 달구경을 하는 건 같진 않았다.

나는 손자에게라도 달구경을 시켜주고 싶어 몇 번이나 달을 가리키며 달, 달, 하면서 녀석의 관심을 끌려 했지만 흘끗 한 번 쳐다보고는 내 몸을 빠져나가 제 마음대로 풀밭을 달음질하며 딴 아이들을 따라 덩달아 깍깍 환성을 지르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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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그건 또 그것대로 보기 좋았기 때문에 나도 달구경 대신 아이들 구경에 팔려 있는데, 손자가 나한테 뛰어오더니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 왜 달이 나만 따라다녀?”

나는 대답대신 녀석을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내 가슴으로 녀석의 건강한 가슴의 고동을 느꼈다. 그때 나는 녀석의 할미가 아니라 녀석의 친구였다. 녀석은 아마 뛰어 다니면서 흘긋흘긋 달을 쳐다본 모양이다. 나의 달에 대한 최초의 기억도 달이 나만 따라다닌다는 놀라움에서부터 비롯된다.

어릴 적, 해 질 무렵까지 읍내에 가신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안 돌아오시면 조금씩 조금씩 마중을 나간다는 게 동구 밖까지 이를 적이 있었다. 날이 어둑어둑 저무는 데도 기다리는 어른은 안 오시고 별안간 무서운 생각이 들어 동네를 향해 달음질 칠 때 물빛 하늘에 달이 떠 있어 나를 따라오면 그렇게 위안이 될 수가 없었다. 저 달은 내가 천천히 걸으면 천천히 따라오고 달음박질치면 같이 뛰고 일부러 걸음을 멈추면 저도 느티나무 가지에 결렸건 동산위에 떴건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다.

그날 밤 손자의 말은, 동심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걸 확인시켜주었지만 그 달구경을 녀석이 얼마나 오래 기억할지는 의문이다. 달보다 휘황한 게 너무 많은 밤이었다.

■ 사랑의 입김

외손자가 요새 한창 말을 배우기 시작하고 있다. ‘짹짹’ 멍멍‘ ’야옹‘ 등 의성어 먼저 하더니 ’물‘ ’콩‘ ’강‘ 등 외자 소리도 곧잘 한다. 요전엔 마루에서 뛰다가 의자 모서리에 이마를 부딪혔다. 울상을 하고 나에게 와서 얼굴을 들이대면서 ’약, 약‘한다. 무릎이 까졌을 때 약을 발라준 생각이 나나보다. 나는 부딪친 자리를 쓱쓱 비벼만 주고 약은 안 발라도 되겠다고 일러주었다.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물러가지 않고 계속 뭔가를 요구하는데, 이번엔 ’약‘소리 대신 입을 오므리고 ’호오, 호오‘ 하는 것이었다. 다치거나 물것에게 물린 자리에 약을 발라줄 때 하는 것이다. 그걸 해달라는 것 같았다. 나도 웃으며 녀석의 얼굴을 끌어당겨 이마에 정성껏 ’호오‘를 해주었다. 녀석은 눈까지 스르르 감으면서 그렇게 마음 놓이고 느긋한 표정을 지을 수가 없었다. 나도 웃음이 절로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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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릴 적도 마찬가지였다. 꽤 클 때 까지도 할머니와 어머니의 입김에 의지했던 것 같다.

할머니나 어머니의 따뜻한 입김에 상처를 내 맡겼을 때, 어린 마음을 푸근히 충족시켜주던 평화로움은 이 나이가 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잊혀지지 않을뿐더러 나도 모르게 내 손자에게 같은 짓을 반복했었고, 손자도 그것을 좋아하는 것 같다.

‘호오, 호오’어린 마음에 할머니나 어머니의 입김이 와 닿기는 비단 다쳐서 아파할 때만이 아니었다. 화롯불에 파묻어 말랑말랑 익힌 감자나 밤을 꺼내 껍질을 벗겨 주시면서 ‘호오, 호오’ 입김을 불어 알맞게 식혀주셨고 끓는 국이나 찌개도 그렇게 식혀주셨다. 먹고 싶은 걸 참느라 침을 꼴깍 삼키면서 그분들의 입을 지켜보면 서 어린 마음속엔 그분들에 대한 신뢰감이 싹텄었다.

어찌 상처나 뜨거운 먹을 것에만 그분들의 입김이 서렸었을까? 그분들의 입김은 온 집안에 서렸었다. 간혹 어머니가 집에 안 계시면 그것을 대문간에 들어서자마자 알아맞힐 수가 있었다. 집안 전체가 썰렁했다.

어린 날, 내가 누렸던 평화를 생각할 때마다 어린 날의 커다란 상처로부터 일용할 양식, 필요한 물건, 입고 다니던 입성, 그리고 식구들 사이, 집 안 속 가득히 고루 스며있던 어머니의 입김, 그 따스한 숨결이 어제인 듯 되살아난다. 그것을 빼놓은 평화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내 자식들이나 내 손자들이 훗날 그들의 어린 날을 어떻게 기억할지 문득 궁금하고 한편 조심스러워진다. 나보다는 내 자식들이, 내 자식들보다는 내 손자들이 따뜻한 입김의 덕을 덜 보고 자라는 게 아닌가 싶다. 그건 부모의 허물만도 아닌 것이,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구태여 입김을 거칠 필요 없이 대량으로 생산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법까지도 매스컴이나 그 밖의 정보를 통해 대량으로 전달되기 때문에 집집마다 대대로 물려 오는 입김이 서린 가풍마저 소멸해 가고 있다.

아이들은 어머니의 입김이 서리지 않은 음식을 먹고도 배부르고, 어머니의 입김이 서리지 않은 옷을 입고도 등이 따뜻하고 예쁘다.

다쳐서 피 났을 때 입김보다는 충분한 소독과 적당한 약이 더 좋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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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 있는 부모님들에 의해 잘 다스려지는 가정일수록 입김이 희박해지는 게 아쉽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사랑이 없는 곳에 평화가 있다는 건 억지 밖에 안 되리라. 숨결이 없는 곳에 생명이 있다면 억지인 것처럼.

■ 내 기억의 창고

여행이나 소풍을 갈 때 카메라를 안 가지고 다닌 지는 아마도 10년도 더 될 것이다. 찍는 것이 시들해지면서 사진을 분류해 앨범에 붙이는 일도 안 하게 되었다.

동년배의 친구한테 들은 얘긴데, 근래에 사진을 몽땅 불태웠더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고 했다. 찍기도 좋아하고 찍히기도 좋아하던 친구였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는 게 그 친구의 입버릇이었는지라 그 친구의 결단이 장난이 아니라 비장하게 들렸다.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예사롭지 않은 결단을 내린 계기를 듣고 보니 여간 쓸쓸한 일이 아니었다. 칠순에 자식들이 유렵여행을 보내줘서 기쁘게 다녀오면서 생전에 그런 먼 여행을 다시는 할 것 같지 않아서 사진을 원 없이 많이 찍었다고 했다. 그걸 집에 풀어놓고 하나하나 설명을 해도 아무도 귓등으로 도 안 듣는 것 같더라는 것이었다.

그래도 자기가 죽고 난 뒤에 자식들이 당황할 것만은 안 하고 싶어 영정사진으로 쓸 만한 거 몇 장은 남겼다니 참으로 못 말릴 내리사랑이 아닌가.

나는 아직 그렇게까지 내 자식들을 시험할 기회는 못 가졌지만 사진이 하도 흔하다보니 잘나왔거나 기념 될 만한 내사진도 한 번 보면 그만이지 다시 보며 신통해 할 일이 별로 없는데 어떻게 자식들이 귀하게 여겨주길 바라겠는가. 그렇게 사진들을 대단치 않게 여기면서도 내 사후에 내 사진들이 자식들에게 부담이 되거나 구박받을 것을 생각하면 딴 유물이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 보다 훨씬 마음이 짠하니 언짢다. 그래서 내 손으로 없앨 것은 없애고 남길 것은 남겨서 일목요연하게 분류를 해 놓아야지 하고 벼르기만 하다가 며칠 전 큰 마음먹고 그 일에 착수했고 꼬박 이틀이나 걸려서 대강 정리를 하게 되었다.

그중에도 지금은 다 커버린 손자들의 어린 모습을 보는 것은 이 따분한 일에 뜻밖의 즐거움이 되었다.

내 기억의 창고도 정리 안 한 사진 더미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건 뒤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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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죽이고 어둠 속에 방치되어 있고 나라는 촉수가 닿지 않으면 영원히 무의미한 것들이다. 그 중에는 나 자신도 판독 불가능한 것이 있지만 나라는 촉수가 닿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어두운 기억도 세월이 연마한 고통에는 광채가 따르는 법이다. 또한 행복의 절정처럼 빛나는 순간도 그걸 예비한 건 불길한 운명이었다는 게 빤히 보여서 소스라치게 되는 것도 묵은 사진첩을 이르집기 두려운 까닭이다.

*이르집다 : 여러 겹의 껍질을 뜯어내다.

당시에는 안 보이던 사물의 이중성과 명암, 비의(秘意)가 드러나는 것이야말로 묵은 사진첩을 뒤지다가 느닷없이 맞닥뜨리게 되는 공포이자 전율이다. 나라는 촉수는 바로 현실이라는 시점이 아닐까. 이미 지나간 영상을 불러내서 상상력의 입김을 불어넣고 남의 관심까지 끌고 싶은 기억에의 애착이야말로 나의 글쓰기의 원동력이자 한계 같은 것이 아닐까, 요즈음 문득 문득 생각한다.

■ 새해 소망

또 한 살 먹는구나. 설이 심란하다가도 몰라보게 자랐을 손자들 조카들 세배 받을 생각을 하면 슬며시 웃음이 난다. 어렸을 적에 늙은 사람을 보면 저렇게 늙어서도 사는 재미가 있을까 의심했었는데 사는 재미란 죽는 날까지도 있게 마련인가보다.

키가 우쩍 자랐을 손자녀를 보는 것도 대견하지만 1년 내내 못 보던 친척 조카, 고손, 증손들의 나이를 물어보고 덕담을 늘어놓는 것도 설의 빼놓을 수 없는 낙이다.

젊은 애들을 데리고 말장난만 해도 즐겁다. 학교가 뭔지, 워낙 교육열이 센 민족이라선지 아이들을 보면 우선 학교 인사가 앞선다. 각급 학교로 진학하지 않으면 진급을 하게 되는 아이들한테 성적도 묻고 앞으로의 포부도 묻곤 한다. 젊다는 것만으로 다 예쁘고 잘 생겨 보이지만 공부를 잘하는 것으로 알려진 아이는 더 예뻐 보여 그 부모에게까지 치하를 하게 된다.

그러고 나면 학교 걱정이 이미 끝난 처녀총각이 남게 된다. 올해는 결혼해야지. 애인은 있구? 이렇게 묻다보면 내가 생각해도 걱정도 팔자다 싶다. 요새 청소년과 젊은이들의 문제를 입시와 결혼으로 간단하게 요약해 버리려는 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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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세대의 사고방식과 상상력의 빈곤에 문득 혐오감 같은 걸 느끼게 된다. 우리가 이럴 때야 당하는 젊은이는 얼마나 진저리가 날까 싶기도 하다.

우리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 시어머니는 설날에 아이들 키를 재시는 게 큰 낙이셨다. 때때옷을 차려입은 아이들을 엄숙한 얼굴로 하나하나 불러 기둥 앞에 세우시곤 막대기 같은 걸로 정수리를 가볍게 누르고 송곳으로 기둥에다 금을 그으셨다. 그러고는 작년 이맘때 낸 금과 대보면서 아이구 한 뼘은 자랐네 또는 한 치는 자랐구나 하셨다.

밥은 잘 안 먹고 주전부리만 하더니, 여봐라, 닷 분도 못 자랐잖냐? 하고 야단을 치시기도 했다. 할머니한테 이런 야단을 맞은 아이는 그날 떡국부터 많이 먹어야 했고 주전부리 할 때마다 눈치를 봐야 했다.

20년을 넘어 산 한옥을 팔고 이사할 때는 막내까지 대학에 들어가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였으니 설에 키를 재는 향사가 필요 없어진 지도 오래였다. 그러나 우리 식구는 다 같이 그 무수한 눈금이 새겨진 기둥과의 결별을 아쉬워하고 기둥만 살짝 빼갈 수 없을까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올해부터 나도 세배 오는 손자들 키나 재볼까, 해마다 키를 재보고 잘 먹고 무병해서 키가 많이 자란 놈을 칭찬해 주는 할머니가 성적부터 묻고 안달을 하는 할머니보다 훨씬 귀여울 것 같다. 젊은이가 들으면 어느새 망령이 났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왕이면 귀엽게 늙고 싶은 게 새해 소망이다.

◎ Part 5 환하고도 슬픈 얼굴

■ 성차별을 주제로 한 자서전

내가 태어나서 일곱 살까지 살던 시골집은 뒷간이 집 옆을 지나는 개울 건너에 있었다. ‘뒷간과 사돈집은 멀수록 좋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킨 셈이었다. 물론 며느리들도 당시로서는 꽤나 먼 고장인 서울, 파주, 공주 등지에서 맞아들였다.

할아버지께서 그 먼 뒷간에 갔다 오시다가 넘어지신 게 그저 실수가 아니라 중풍이어서 별안간 집안이 발칵 뒤집혔던 게 어릴 적의 가장 큰 사건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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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 앞서 아버지가 급환으로 돌아가셨지만 세 살 적 일이어서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급환은 전해지는 증세로 봐서 맹장염이 분명한데 벽촌이라 침 맞고 푸닥거리하다가 달구지로 읍내로 싣고 갔을 때는 이미 때가 늦어 허망하게 돌아가셨다고 한다.

맏며느리이자 서울 며느리인 어머니는 그게 철천지한이 되어 자식만은 어떻게 하든 서울에서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시부모님들의 허락도 없이 오빠를 데리고 서울로 가신 후였다. 촌살림을 주관해야 하는 종부로서 대단한 용기였지만 당시의 어른들로서는 용서할 수 없이 괘씸한 방자요 부덕이었다.

할아버지가 중풍으로 왼쪽을 못 쓰시게 되시어 사랑방에만 계시게 된 후부터 집안이 우울해졌다. 나는 저녁때면 우두커니 동구 밖을 바라보며 사랑에 계신 할아버지의 흰 두루마기 자락을 청승맞게 기다리곤 했다.

정정하실 때의 할아버지는 타관에서 돌아오실 때마다 사탕 봉지를 빠뜨린 적이 없으셨다. 아버지 밑으로 두 숙부님이 다 결혼해서 한집에 살고 있었지만 그때까지 아이가 없어 나는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고, 사탕봉지는 내 차지였다.

출입을 못하게 된 할아버지는 매일 큰 소리로 역정만 내시더니 사랑에다 서당을 차리셨다. 인근 동네의 머슴아들이 꽤 많이 모여들어 서당은 성황을 이루었다.

하루는 할아버지께서 나를 사랑을 불러들이시더니 천자문을 내주시었다. 나도 서당의 학생이 된 것이었다. 서당에서 유일한 계집애였을 뿐 아니라 가장 어렸다. 나는 달달달 외는 것은 선수여서 그중에서 뛰어났다. 할아버지는 매우 만족해 하셨고, 머슴아들은 엄한 스승의 손녀인 나에게 아부를 일삼았기 때문에 나도 한껏 교만해졌다.

천자문을 떼고 책걸이로 떡까지 해 먹은 지 며칠 안 되어서 서울 가신 어머니가 처음으로 돌아오셨다. 서울에서 지지리 고생이나 하다가 잔뜩 주눅이 들어서 돌아오길 기대한 어머니는 고생한 티는 완연했지만 주눅은 들지 않고 너무도 당당했다. 어머니와 어른들 사이에선 가끔은 큰소리까지 오갔다. 어머니는 나까지 서울로 데려다 공부를 시키겠다는 것이었고 어른들은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이 처음엔 숫제 상대도 안하려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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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환장을 해도 단단히 했구나, 계집앨 서울까지 데려다 공부를 시키겠다고? 너 뭘 해서 돈을 그렇게 많이 벌었냐? 아서라 아서! 동네에 우세스러운 소문날까 겁난다.” 이렇게 막말로 나오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어머니의 결심이 얼마나 확고부동하다는 걸 시위라도 하려는 듯이 어느 날 내 머리를 빗겨 주시는 척하다가 싹둑 잘라 단발머리를 만들어 버렸다. 그때까지도 나는 어머니를 따라 서울로 가고 싶기도 하고 말고 싶기도 했었는데 머리가 그 모양이 되고 보니 서울로 갈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체념하게 되었다. 그 머리는 흉하기도 했지만 뒤가 허전해서 나는 집안에서 꼼짝을 못했다. 물론 서당에도 못 나왔다.

드디어 어느 날 어머니와 나는 할아버지께 하직 인사를 드리러 사랑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꼴도 보기 싫다. 어서가거라.”씹어 뱉듯이 말씀하시고는 쌈지에서 오십 전짜리 동전 하나를 꺼내 내 앞에 던지셨다. 데구르르 구르는 보오얀 은전을 엎드려 주우면서 맛본 이상한 슬픔은 지금까지 도 잊히지 않는다. 그건 어쩌면 재롱부리는 시절과 하직하는 슬픔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서울역에 내려서 가장 반가웠던 건 모든 아이들이 다 나처럼 뒤통수에도 얼굴이 달린 것 같은 머리를 하고 있는 거였다. 그렇지만 내가보기에도 나의 시골뜨기 티는 너무도 완연해서 나는 잔뜩 주눅이 들었다. 또 어머니가 세 들어 살고 있는 현저동 꼭대기의 허술한 초가집 문간방도 나에게 큰 실망을 주었다.

어머니는 그 문간방에서 바느질품을 파면서 근근이 살고 계셨다.

“넌 서울에서 학교 다니고 공부 많이 해서 신여성이 돼야한다. 그게 엄마의 소원이란다.”

그때 어머니는 온종일 남의 삯바느질을 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 곁에서 헝겊을 가지고 쏙닥거리기도 하고 홈질 감침질의 흉내를 내기도 했다.

내가 그걸 점점 잘하게 되자 공부를 잘해서 신여성이 될 생각은 안 하고 바느질을 왜 배우려드느냐고 별안간 벌컥 화를 내시면서 내 소일거리를 몽땅 빼앗아 가셨다.

그 후 어머니는 나에게 한글을 가르치셨다. 지금이니까 한글이지 그때 어머니는 그걸 언문이라고 하셨고 그 글이 얼마나 배우기 쉬울뿐더러 대수롭지 않다는 걸 이렇게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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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문은 세종대왕이라는 아주 어지신 임금이 뒷간에서 뒤를 보시다가 문설주를 보고 생각해 내신 글씨란다. 새로 만드는 데도 똥 누는 시간밖에 안 걸린 쉬운 글이니까 누구든지 하룻밤에 깨친단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준비로 한글 말고도 일본 가나도 배웠다. 어머니는 가나를 어디서 익혔는지 그걸 가르쳐 주실 때는 한결 으스대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가나를 읽고 쓰는 걸 단박 배웠지만 한글을 익히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느 날, 나는 대문 밖 땅바닥에서 석필장난을 하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어머니를 졸라 어렵게 동전 한 닢을 얻어 가지면 곧장 구멍가게로 가서 석필을 사곤 했다.

석필은 연필처럼 깎을 필요도 없고 부러지지도 않아 연필보다 편하고 신기했으며 종이가 따로 필요 없어 경제적이기도 했다. 나는 온 종일 석필로 ‘히사시까미’하고 핸드백 들고 뾰족구두 신은 여자를 그리고 또 그렸다.

그것은 당시의 신여성 상이었고 내가 이왕 서울에 온 이상 어떻게 하든 도달해야 할 최고의 이상이었다.

그때 어디서 허약하고 더럽고 못생긴 사내아이가 나타나 비실비실 웃으면서 내 그림을 보는 것까지는 참아 주었는데, 그녀석이 무슨 생각에선지 바지를 꺼내리고 내 그림 위에 오줌을 갈기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화가 났지만 그녀석이 겁나진 않았다. 그 녀석은 동네에서 가장 만만한 비실이였다. 늘 같은 또래들한테 얻어맞고 놀림받고 징징 울기 잘하는 울보였다. 내가 먼저 그 녀석한테 욕을 했다. 그 녀석은 성기를 들먹이는 쌍소리로 대꾸했다.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온몸으로 그 사내아이한테로 덤벼들어 때리고 할퀴었다. 녀석은 울기부터하면서 엄마를 부르면서 집으로 들어갔다.

녀석의 엄마는 자기 아들을 때린 게 계집애인걸 알자 당장 험악한 얼굴이 되어 펄쩍 뛰기 시작했다.

“이 지지리 못난 새끼야, 얻어맞다 얻어맞다 이젠 계집애 한테까지 얻어맞고 꼴 조오타. 계집애한테 얻어맞으려면 진작 죽어라, 죽어.”

이런 악담을 폭포수처럼 퍼붓고도 분에 못 이겨 나한테로 덤벼들더니 내 양손을 붙들어다가 뒤로 꼼짝 못하게 결박을 짓고 아들한테 어서 나를 때리라고 명령했다. 그동안 누가 일렀는지 우리 어머니가 나오셔서 나는 그 무서운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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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결박으로부터 놓여날 수 있었지만 어머니의 태도는 더욱 나를 당혹스럽게 했다. 어머니만은 잘잘못을 가려주실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엄마한테 공손하게 사과먼저 하시고 나를 호되게 나무라시는 것이었다.

여자라는 게 모든 잘잘못 이전의 더 큰 잘못이 된다는 걸 나는 이해할 수도 참을 수도 없었다. 저지른 잘못이 아닌 태어난 잘못에 나는 도저히 승복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딸에게 건 최고의 기대인 신여성은 당시로선 가장 팔자 사나운 여자들이었다. 그러면서도 딸이 팔자 사나울까 봐 두려워했던 어머니의 모순은 지금 생각해도 우습고 슬프다.

우습지만 않고 슬프기까지 한 것은 그 후 반백년이 흐르고 세상이 많이 변해 신여성이란 말뜻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고, 해방된 여성이란 말조차 진부하게 들릴만큼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오늘날, 내가 내 딸에게 우리 어머니가 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모순을 가끔은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나의 어머니의 딸에 대한 모순된 생각은 매우 비슷하다. 그렇지만 나의 어머니와 내가 딸을 기르는 가르침에 있어서 똑같은 헛수고를 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자신의 삶을 통해 체험한 여자이기에 감수해야 햇던 온갖 억울한 차별대우를 딸에게만은 물려주지 않으려는 어머니들의 진지한 노력과 간절한 소망에 의해 여성들의 지위가 더디지만 조금씩이라도 나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그중에서도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무도 용훼(容喙 : 어떤 일 따위에 간섭하여 말참견을 함)를 불허하는 완벽한 정의를 하나 가지고 있고 싶어서 조바심 한 적이 있다. 그 시기는 내가 소설을 쓰고 나서 훨씬 후였으니까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소설이 뭔지도 모르고 소설부터 썼다는 걸 숨길 수가 없게 된다.

소설이 뭔지도 모르고 소설부터 쓰고 본 주제에 내가 소설가라는 게 그렇게 소중하고 대견스러웠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소설가 중에서 뛰어난 소설가야 물론 우러러 보이고 부럽기도 하지만 소설가 외에 딴 직업이나 신분을 부러워해 본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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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에 대한 엄숙한 정의를 하나 얻어 가지고 싶어 조바심할 무렵 비로소 나는 남들은 소설에 대해 뭐라고 말했는가에 대해 솔깃하니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난해한 문학론 같은 것도 열심히 읽기 시작했는데 이것도 저것도 옳은 소리 같았다. 하다못해 소설은 이런 거여야 한다, 아니다 저런 거여야 한다고 싸우는 소리에도 흥미진진하게 귀를 기울였다. 지조 없게도 양쪽이 다 옳은 소리 같았다. 그리고 곧 그런 일에 싫증이 나고 말았다. 소설에 엄숙한 정의를 내리지 못해 조바심하던 시기는 그렇게 지나갔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어머니는 잠깐만 어쩔 줄을 모르고 우두망찰을 하셨을 뿐, 곧 달덩이처럼 환하고도 슬픈 얼굴이 되시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로 나의 아픔을 달래려 드셨다.

어머니가 당신의 이야기의 효능에 그만큼 자신이 있었다기보다는 그것밖에 가진 게 없었기 때문에 딸의 거의 모든 상처에 그것을 만병통치약처럼 드리댈 수밖에 없었지 않나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도 어머니는 때때로 낮은 한숨을 쉬시면서 이렇게 조바심하셨다. ‘이야기를 너무 받치면 가난하다는데…….’

내가 아직도 소설을 위한 권위 있고 엄숙한 정의를 못 얻어가진 것도 ‘소설은 이야기다’라는 소박한 생각이 뿌리 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뛰어난 이야기꾼이고 싶다. 남이야 소설에도 효능이 있다는 걸 의심하건 비웃건 나는 나의 이야기에 옛날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이야기에 거셨던 것 같은 효능의 꿈을 꾸겠다. .

■ 중년 여인의 허기증

나는 내가 작가가 되겠다는 오랜 갈망과 수업 끝에 등단하게 되었는지, 등단이라는 걸 하고 나서 작가가 되기로 작정했는지 그걸 잘 모르겠다. 그런 낌새란 누구에게나 그렇게 모호한 건지 내 경우만 그런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아무튼 어느 날 나는 갑자기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1970년 봄 어느 날 단골 미장원에 가서 내 차례를 기다리며 뒤적이던 <여성동아>에서 여류 장편소설 모집이란 공고를 보고 갑자기 가슴이 두근대며 소설을 쓰고 싶어졌던 것이다. 이것이 <여성동아> 와의 인연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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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모 마감까지는 3개월 남짓 남아 있었다. 나는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40에 처음 해보는 이 일에 대해 가족들에게 심한 부끄러움을 탔다 그래서 철저하게 몰래 하기로 작정했다. 가족들 몰래 그 일을 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평생 처음 나만의 일을 가졌다는 것과, 가족들에게 비밀을 가졌다는 것으로 매일매일 아슬아슬하리만큼 긴장했고, 행복했고, 그리고 고단했다.

나는 그것ㅇ르 쓰면서 혹시 당선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연 하려들지 않았다. 7월 15일이 마감이어서, 7월 달로 접어들면서는 하루 꼬박 40장씩 쓰는 중노동을 했고 그래서 그런지 그해 7월처럼 뜨거웠던 여름은 다시 없었던 것 같다.

식구들을 위해 장을 보고 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일, 매일매일 집 안 구석구석을 쓸고 닦아 쾌적하고 정갈한 생활환경을 만드는 일, 아이들 공부 돌보고 가끔 학교 출입을 하는 일, 뜨개질, 옷 만들기, 소위 살림이라 불리는 이런 일들을 나는 잘했고, 또 좋아했지만 아무리 죽자꾸나 이런 일을 해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허한 구석을 나는 내 내부에 갖고 있다는 걸 자각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9월 초순 당선통지를 받았다. 의외였다. 당선이 의외가 아니라 너무 일러서 의외였다. 잡지 사정을 모르는 나는 11월호에 발표되니까 10월달쯤이나 알 수 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굉장히 기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도 좋아서 날뛰길래 뭐가 그렇게 좋으냐니까 둘째 아이든가 셋째 아이든가. 가정환경 조사서에 엄마 직업을 ‘무’가 아니라 ‘작가’라고 쓸 생각을 하면 막 신이 난다고 했다. 나는 그 애의 말에 깔깔대고 웃었지만 속으론 뜨끔했다.

시상식은 10월 초순에 있었다. 나는 왠지 그 시상식이라는 게 싫었다. 돈이나 주면 됐지 시상식은 뭣하러 하는지 모르겠다고 나는 누구에게나 함부로 투덜거렸다. 시상식엔 동창들이 몇 왔다. 그래서 쑥스러운 대로 꽃다발이라는 것도 받고 사진도 찍고 점심도 먹었다.

나는 핸드백에서 방금 탄 50만 원짜리의 보증수표를 꺼내 친구들한테 회람을 돌리면서, 너희들은 50만 원을 만들려면 2년이나 3년 죽자꾸나 하고 계를 부어야 되지만 나는 이것을 얼마나 쉽게, 그야말로 누워서 떡 먹기로 만든 줄 아느냐고 막 으스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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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나오고 나서 거의 매일 독자로서의 편지라는 걸 받았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리고 외국에서 오는 것도 꽤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해하고, 활자의 위력이 바로 이런 거로구나 하고 감탄도 했다. 별의별 편지가 다 있었다. 나를 무슨 위대한 작가인줄로 착각하고 있는 시골 소녀의 동경이 가득 담긴 간지러운 편지가 있는가 하면, 가정부인의 고마운 격려의 편지도 있었고 상금을 나눠 먹자는 협박 섞인 편지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내 작품을 읽고 내가 그 작품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듣고 보내오는 편지는 거의 없었다. 나는 많은 편지 속에서 허망감을 짓씹었다. 그리고 글을 쓴다는 일이 얼마나 고독한 직업인가를 알 것 같았다.

이 글 처음에서도 언급했지만 내가 하나의 작품을 이룩한 게 작가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이나 준엄한 각오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중년으로 잡어든 여자의 일종의 허기증에서였던 것이다.

이제부터라도 문학이라는 고통스럽고 고독한 작업에 모든 것을 걸어보느냐, 아니면 다시 일상의 안일에 깊숙이 함몰할 것인가를 놓고 나는 고민을 되풀이 했다. 그리고 나 자신의 작가로서의 창조적 능력에 대해서도 회의를 거듭했다.

우선 자신의 능력을 시험할 겸, 개발도 할 겸, 하나 둘 습작을 시작했다. 지독하게 열심히 했다. 밤잠을 설치고, 입맛을 놓치고 남의 좋은 글을 읽고 샘을 내고, 발표의 가망도 없는 글을 썼다. 차차 글 쓰는 어려움에 눈 떴다. 자연히 쉽게 쓴 글이 쉽게 당선된 데서 비롯된 내심의 은밀한 오만도 숨이 죽었다.

자랑할 거라곤 지금도 습작기처럼 열심히라는 것밖에 없다. 잡문 하나를 쓰더라도, 허튼소리 안하길, 정직하길, 조그만 진실이라도,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진실을 말하길, 매질하듯 다짐하며 쓰고 있지만, 열심히라는 것만으로 재능 부족을 은폐하지는 못할 것 같다.

작가가 될까 말까 하던 그때의 고민은 아직도 끝나지 않은 채다.

■ 나의 문학과 고향의 의미

내가 태어난 곳은 개성에서 1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박적골이란 벽촌이다. 20호도 채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고 거의가 자작농이어서 다들 그만그만하게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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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들은 농사를 지었고, 여자들은 길쌈을 했다. 집집마다 물레와 베틀이 있어, 직접 생산한 누에고치와 면화와 삼에서 뽑아낸 실로 따뜻한 옷감과 서늘한 옷감을 짜냈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소도시 개성까지 나가서 농산물과 바꿔 오는 주된 물건은 농기구, 신발, 물감 등이었다. 명절이나 혼사를 앞두고 색색가지 고운 물감을 들여 널어놓은 옷감의 팔락임은 어린 가슴을 축제의 예감으로 울렁거리게 했다. 여덟 살이 될 때까지 그 마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고, 비슷한 생활양식과 인심이 통하는 조선이라는 나라 외에 딴 나라가 있다는 것도 풍문을 통해서였다.

 

우리나라의 30년대라면, 먼저 서양의 과학문명을 성공적으로 수용한 이웃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난 뒤여서 외세와 외래문명에 적잖이 부대낄 때였건만 내 고향의 500년이 한결같은 생활양식에 미친 영향은 미미했다.

자식교육 또한 아들은 서당에 보내 한문을 배우게 하고, 딸은 집안에서 한글을 배우게 하는 게 전통적 방법이었다. 설사 문자 교육을 못 시키더라도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으론, 어른을 공경하고, 동기간과 이웃 간에 화목하고, 남녀가 함부로 섞이지 않고 고독한 사람과 가난한 이를 측은히 여겨 보살펴야 한다는 유교적인 사람노릇을 으뜸으로 쳤다.

그러나 10리 밖 면 소재지에 신학문을 가르치는 소학교가 처음으로 들어섰다는 소문은 모두 스스로 만족하여 의심할 나위가 없었던 마을 공동체의 교육관에 심각한 분열을 가져왔다. 신식학교에서는 일본말을 가르친다는데 그까짓 일본말을 내 자식에게는 배우게 할 수 없다는 의견과, 나라를 잃은 건 우리가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니 일본말을 통해서라도 문명화돼야 한다는 의견은 서로 팽팽히 대립했다. 그러나 어른들의 이런 갈등은 어디까지나 아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 딸은 애초부터 포함되지도 않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당신이 우겨서 면 소재지의 소학교나마 가까스로 졸업시킨 오빠와 아직 취학 전의 나를 데리고 무작정 상경을 했다. 내 나이 여덟 살 적이었다. 그보다 앞서 우리 남매는 아버지를 별안간 여의었고,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과부가 돼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운명으로 승복하지를 못했다. 그때 도시엔 이미 흔했던 신식병원 양의한테 보일 수만 있었어도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죽을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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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다고 판단한 어머니는 시골의 무지에 진저리를 쳤고 자식들만은 어떻게든지 도회지에서 키워야겠다고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어머니는 종갓집 맏며느리였기 때문에 과부가 됐다고는 하나 가만히만 있으면 충분히 보호받을 수가 있었다. 반면 보장받을 지위를 박찼을 때 돌아 온 어른들의 진노와 동네와 문중의 비난과 억측은 차마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으나 어머니는 굽히지 않았다. 우리 세 식구는 초라한 몰골로 누구의 전송도 못 받고 도망치듯 고향을 등졌다.

서울에서의 우리 세 식구의 생활은 당연히 곤궁하고 비참했다. 처음 정착한 곳이 변두리의 빈민굴이었는데 불결할 뿐 아니라 우리가 그때까지 사람 노릇의 근본으로 친 유교적인 인륜 도덕이 예전에 실종된 동네였다.

그때 어머니로부터 제일 많이들은 잔소리는 동네 아이들하고 놀지 말란 소리였다. “아아, 정말이지 끔찍한 바닥 상것들이다.” 어머니가 동네 사람들을 평하는 탄식의 소리는 늘 이러했다. 그리고 우리가 고향에선 얼마나 점잖은 집안의 귀한 자손이라는 걸 우리에게 주입시키고자 했다.

나는 극성스러운 어머니에 의해 우리 동네 산을 하나 넘어야 하는 먼 거리의 소학교로 보내졌다. 주위 환경이 수려하고 서울 토박이 중산층 동네를 낀 학교였다.

주거지를 속여 가면서까지 좋은 학교에 집어넣은 어머니의 극성은 딸이 공부 못하는 걸 참지 못했다. 방학을 하면 자식의 우등상장을 앞세우고 여봐란 듯이 고향에 돌아가는 게 어머니의 소원이었다. 어머니의 금의환향을 위해 나는 끊임없이 닦달질을 당했고 학년이 오르면서 별수 없이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됐다.

그렇다고 시골뜨기 의식에서까지 놓여난 건 아니었다. 난 늘 외톨이였고 아이들의 끼리끼리에서 항상 몇 걸음 비켜나 있었다.

그 후 어머니의 소원대로 나는 좋은 상급학교로 진학하고 오빠는 좋은 데 취직해서 빈촌을 면하고 버젓하게 살게 되었고, 고향으로부터도 못된 며느리 대신 잘난 며느리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다.

가끔 나는 나를 토박이 서울 사람과 확연히 다르게 느낄 적이 있다. 내 성격 중 좋은 점이 있다면 그건 거의 나의 촌스러움에 근거하고 있다는 걸 자각할 때이다. 그리하여 고향은 어머니에게뿐 아니라 나에게도 자존심의 근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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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주고 있다. 그렇듯 내 고향은 아직도 나에게 살아있는 모순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내가 고향에 감사하고 싶은 것은, 훗날 내가 글을 쓰게 된 것이 나의 시골뜨기 근성에 힘입은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교적인 모임뿐만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내는 여러 갈래의 우호적 또는 적대적, 정열적 혹은 타산적 관계의 와중으로 끼어들지 못하고 조금 비켜나 있고 싶어 한 것이다.

비켜나 있음의 쓸쓸함과,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사람 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거리를 가장 잘 보이게끔 팽팽하게 조절할 때의 긴장감은 곧 나만이 보고 느낀 걸 표현해보고 싶은 욕구로 이어졌다. 그런 욕구를 충족시키고 나면 인간관계에서 비실비실 비켜나 있음이 촌스러울 뿐 아니라 떳떳지 못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자격지심이 조금 위로 받을 수 있다는 것도 글 쓰는 보람이다.

그러나 한편 고향은 나에게 멍에요 또한 상처였다. 어머니 때문이었다. 장수하신 어머니는 내겐 따라다니는 고향이었다. 개성근교인 개풍군 땅은 남북이 무력으로 대결한 6·25 전까지는 서울에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삼팔선 이남 지역이었다. 그러나 휴전 협정 후 새로 그어진 휴전선에 의해 갈 수 없는 땅이 되고 말았다.

어머니는 나에게 살아 있는 고향이자 마냥 피흘리는 상처였다. 말년에는 죽어서라도 고향땅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을 되풀이해서 나를 지치게 했다. 그러나 어머니 역시 이중의 고향을 가지고 있었다. 그 점에서 우리는 닮은 모녀였다.

어머니는 90세의 장수를 누리고 돌아가셨지만 그리던 고향땅을 생전에 밟지 못하셨고 물론 고향땅에 묻히시지도 못했다. 이렇게 철천지한을 풀어보지 못하고 죽은 이가 어찌 어머니뿐이랴.

작가의 눈엔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성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한테 미움받은 악인한테서도 연민할 반한 인간성을 발굴해낼 수 있고, 만인이 추앙하여 마지않는 성인한테서도 인간적인 약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게 작가의 눈이다. 그리하여 악인과 성인, 빈자와 부자를 층하하지 않고 동시에 얼싸 안을 수 있는 게 문학의 특권이자 자부심이다. 작가의 이런 보는 눈은 인간 개개인에게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나 제도를 보는 데도 결코 달라질 순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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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 6 이왕이면 해피엔드

■ 잃어버린 여행가방

설 연휴동안 받아만 놓고 미처 읽지 못한 문예지를 뒤적이다가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산문 중에서 매우 이색적인 경매 이야기를 보고 혼자서 웃은 일이 있다. 미국이나 유럽 쪽에서는 온갖 것을 다 경매에 부쳐서 잊혀진 사건에 대한 호기심을 유발하기도 하고 엉뚱한 사람이 이익을 보는가 하면 이미 죽은 사람의 비밀이 만천하에 드러나기도 한다. 고인이 된 지 오래인 왕년의 스타의 연애편지나 착용하던 신발, 속옷 등속이 고가로 팔렸다는 해외 토픽을 접하면 그걸 그렇게 비싸게 사서 어디에 쓰려는 걸까 공연한 걱정이 되기도 하고, 생전에 알려진 것과 전혀 다른 면이 드러난 편지가 공개되는 걸 보면 세속의 호기심은 저승길까지 마다 않고 쫓아다니는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매년 1월이면 독일의 루프트한자 항공사에서 여행객들이 분실하고 찾아가지 않은 여행 가방을 공개적으로 경매에 부친다고 한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는 게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굉장한 귀중품이 들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주인을 찾을 수 없는 가방은 작은 단서도 없을뿐더러 잃어버린 주인이 애착과 성의까지 없다는 증거니까 귀중품이 들어 있으리라는 기대는 안 해도 된다. 그러나 마약이나 무기 혹은 시체 같은 게 들어 있을 가능성은 주인 있는 가방보다 높다고도 볼 수 있다. 하여 경매하기 전에 경찰이 미리 개봉하고 그런 위험물이 들어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다음 다시 밀봉을 한 후 무게만을 공개하고 경매에 부친다고 한다. 그러나 일단 자기 앞으로 낙찰이 되면 가방은 즉시 관중들 앞에서 개봉되어 그 내용물이 만천하에 공개된다. 낙찰자나 구경꾼이나 같이 낄낄 대며 즐거워하는 광경이 눈에 선하다.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고 싶은 숨은 욕망은 국적이나 개인의 인격 차에 상관없이 공통된 것인가 보다.

나도 여행 가방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내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한 해였으니까 지금으로부터 22년 전이다. 2주일 정도의 비교적 긴 여행이었고, 유럽의 몇 나라를 돌고 귀국길에는 인도를 거쳐서 오게 돼 있었다. 처음 나가본 해외 여행인 데다가 인도가 마지막으로 들른 나라였기 때문에 그동안 짐이 배로 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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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 허름한 보조가방을 둘이나 새로 사야했다. 그중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것은 역시 집 떠나 있는 동안 갈아입을 옷이랑 내복 등속을 넣어간 큰 여행가방이었다. 보조가방 한 개와 내 짐 중에서 메인이라고 볼 수 있는 그 큰 가방을 인도 뉴델리 공항에서 다른 문인들과 함께 단체로 부쳤는데 김포공항에 내리니 내 큰 가방하나만 빠져 있었다.

다행히 선물이 든 가방 두 개는 무사해서 처음 외국나간 엄마를 기다린 가족들을 크게 실망시키지는 않았지만, 나는 오랫동안 잃어버린 큰 가방 때문에 가슴앓이를 했다.

그 안에는 때 묻은 속옷 말고 더 창피한 것도 들어 있었다. 파리에 들렀을 때 슈퍼에서 봉지에 든 인스턴트커피를 잔뜩 사서는 옷 사이에 끼워 넣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선 커피가 비싼 귀물이었다. 외국 갔다 오는 사람이 커피 한 봉지만 선물로 주어도 고맙고 반갑고 그랬기 때문에 나도 친지들에게 그걸 선물할 작정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궁상스런 선물인가. 나의 큰 여행 가방 안에는 1980년대 내 나라의 궁핍과 나의 나태가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나의 최후의 집은 내 인생의 마지막 여행 가방이 아닐까. 내가 끼고 살던 물건들은 남 보기에는 하찮은 것들이다. 구식의 낡은 생활필수품 아니면 왜 이런 것들을 끼고 살았는지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나만의 추억이 어린 물건들이다. 나에게만 중요했던 것은, 나의 소멸과 동시에 남은 가족들에게 처치 곤란한 짐만 될 것이다. 될 수 있으면 단순 소박하게 사느라 애썼지만 내가 남길 내 인생의 남루한 여행가방을 생각하면 내 자식들의 입장이 되어 골머리가 아파진다.

그러나 내가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이 육신이란 여행가방 안에 깃들었던 내 영혼을, 절대로 기만한 수 없는 엄정한 시선, 숨을 곳 없는 밝음 앞에 드러내는 순간이 아닐까.

■ 시간은 신이었을까

감기에 걸려 외출을 삼가고 있던 중 교외로 바람이나 쐬러 가자는 k교수의 유혹에 솔깃해진 것은 아마도 감기가 어느 정도 물러갔다는 징조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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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시를 바라보는 시간에 집을 떠났으니 바람을 쐬러 가자는 말 속에는 점심도 같이 하자는 뜻이 포함돼 있음직했다.

k교수는 처음부터 목적한데가 있는 듯 나한테 어디로 갈까 의논 같은 것도 하지 않고 곧장 달렸다. 차가 능내리에서 마재(馬峴) 마을로 꺾일 때 비로소 나는 가슴이 좀 울렁거렸다. 그 마을에는 정약용 생가와 기념관 등 의미 있는 볼거리도 많고 경치도 좋아, 괜찮은 음식점도 몇 군데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툭하면 바람을 쐬러 다니던 데였다. 여름만 되면 남편은 그 동네 단골 음식점에서 장어구이와 쏘가리 매운탕을 먹는 걸 즐겼다. 남편이 나를 앞서 저세상으로 간지 금년이 20년째가 된다.

그 집은 뜰이 넓은 조선 기와집이고 주인아주머니는 쪽을 진 구식 부인이었다. 남편은 노부인이 직접 만들었다는 밑반찬을 고루 맛보면서 다 맛있다고 칭찬을 하고 남은 건 싸 달라고까지 했다. 그리고 흐르는 강가에서 바람을 쐬면서 어린 손자가 뛰노는 모습과 젊은 아들과 사위가 강물에 물수재비를 뜨는 걸 구경했다.

그 후 며칠 안 있다 남편은 이 세상을 떴다. 남편이 세상을 뜨고 나서 1년도 채 안됐을 때, 내가 혼자된 슬픔을 잘 극복하지 못하고 힘들게 사는 걸 보다 못한 어떤 친구가 나를 위로한답시고 그 집에 데려간 적이 있다.

그날 장어를 먹을 생각은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 굽는 냄새도 싫었다. 친구의 호의를 무시할 수 없어 조금 먹는 시늉만 했는데도 토할 것 같은 걸 참느라 진땀을 흘렸고 결국은 얹힌 게 오래갔다.

그리고 20년 동안 가지 않던 동네로 k 교수가 접어들었고 정확하게 그 기와집으로 가는 게 아닌가. k교수에게 그 집에 얽힌 옛날 얘기를 한 적도 없으니 순전히 우연의 일치였다. 쪽진 아주머니는 보이지 않았고, 마당의 후박나무와 은행나무는 몰라보게 큰 거목이 되어 있었다. 음식점과 찻집도 많아져서 예전 같지 않았지만 강바람만은 예전 그대로 상쾌했다. k 교수는 내 의견은 묻지도 않고 이 집은 장어구이와 쏘가리탕이 일품이라고 그걸 시켰다. 나는 혹시 그걸 먹을 수 없으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그 두 가지가 차례로 나오자 건강한 식욕을 느꼈고, 그 옛날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달게 먹었다. 그리고 남편을 떠나보낸 고통이 순하게 치유된 자신을 느꼈다.

시간이 나를 치유해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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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神)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 내 식의 귀향

친정 쪽은 휴전선 이북이고, 시댁 쪽은 대대로 서울에서도 사대문 안을 벗어나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걸 은근히 으스대는 서울 토박이라 명절이 돼도 돌아갈 곳이 마땅치 않다.

금년엔 좀 덜했지만 추석 때마다 전국의 도로란 도로가 엄청나게 정체하는 광경을 텔레비전으로 보면서 ‘돌아갈 곳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마음으로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아이들한테까지 그것으로 생색을 내곤 했다. 마치 집 없는 거지가 남의 집 불타는 걸 고소하게구경하면서 제 자식들에게 “너희들은 집이 없어 불 날 걱정 안 해도 좋으니 얼마나 좋으냐, 다 애비 덕인 줄 알아라” 했다는 옛날 이야기 속의 거지 아범처럼 말이다.

이제 많이 살아 친·인척간에 제일 연장자가 됐으니 가만히 앉아서 자식들이나 손자들을 맞을 입장이 됐다고 해도, 도리를 못다 한 것 같은 아쉬움이 어찌 없겠는가. 아니, 그건 도리가 아니라 그리움일 것이다. 저 지는 잎들이 어찌 섭리만으로 저리도 황홀하고 표표하게 몸을 날릴 수 있겠는가.

이 세상에 섬길 어른이 없어졌다는 건 이승에서 가장 처량해진 나이이다

추석 성묘를 올 해는 두 번 다녀왔다. 한 번은 벌초를 겸해 대가족을 이끌고 다녀왔고, 며칠 있다 왠지 혼자 가고 싶었지만 차 없이 갈 수 없는 곳이라 운전자만 데리고 갔다. 남편과 아들이 잠들어 있는 천주교 공원묘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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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혼자 오고 싶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들이 먼저간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갈 때마다 가슴이 에이는 듯 아프던 데가 이상하게 정답게 느껴지면서 깊은 위안을 받았다.

10여 년 전 고 정주영 회장이 소 떼를 몰고 최초로 휴전선을 넘어 고향을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그 역사적인 장관에 크게 감동했지만 될 수 있으면 흥분하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쓴 적이 있다.

정 회장은 정 회장답게 고향에 갔지만 나는 내식으로 고향에 가고 싶다. 완행열차를 타고 개성역에 내리고 싶다. 나 홀로 고개를 넘고, 넓은 벌을 쉬엄쉬엄 걷다가 운수 좋으면 지나가는 달구지라도 얻어 타고 싶다.

아무의 환영도, 주목도 받지 않고 초라하지도 유난스럽지도 않게 표표히 동구 밖을 들어서고 싶다. 계절은 어느 계절이어도 상관없지만 일몰 무렵이었으면 참 좋겠다.

내 주름살의 깊은 골짜기로 산산함 대신 우수가 흐르고, 달라지고 퇴락한 사물들을 잔인하게 드러내던 광채가 사라지면서 사물들과 부드럽게 화해하는 시간, 나도 내 인생의 허무와 다소곳이 화해하고 싶다.

내 기억 속의 모든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렸다 해도 어느 조촐한 툇마루, 깨끗하게 늙은 노인의 얼굴에서 내 어릴 적 동무들의 이름을 되살려 낼 수 있으면 나는 족하리라.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낸 세상은 연륜으로도, 머리로도, 사랑으로도, 상식으로도 이해 못할 것 천지였다.

■ 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된다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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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서 심각하게 그리고 매일매일 지속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5년 전 어들을 앞세우고 나서부터이다. 그전까지는 사람은 다 죽으니까 나도 언젠가는 죽겠지 하는 이상으로 죽음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나는 안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적도 있었다. 어렸을 때 나도 설마 늙을까 싶었던 것과 비슷한 삶에 대한 일종의 응석이었다.

★ 아들의 죽음

아들을 잃자 따라죽고 싶었다. 정말 살고 싶지 않았고, 죽을 방법도 도처에 널려 있었다. 아파트에 사니까 베란다에서 뛰어내리기만 해도 실패 없이 죽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무서워서 못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생명에 대한 애착이 손톱만큼도 없는 게 확실하건만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용기인지 팔자인지, 죽는 게 무섭다는 것과 생명에 대한 애착하고는 어떻게 다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큼 모질지 못하다는 걸 깨달은 다음에 내가 절실하게 바란 건 슬픔을 참지 못해 서서히 저절로 죽어지는 거였다. 그것만은 가망이 있었다.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어 기력이 쇠진하고 마음속에 아무런 뜻이 없으니 곧 죽게 되겠거니 속으로 묘한 희열을 느끼면서 기다렸다.

그러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석 달도 안 된 어느 날 느닷없이 밥 짓는 냄새가 구수하게 코에 닿았다. 살 의옥이 없이 어떻게 식욕이 생겨날 수가 있는지, 나는 짐승 같은 나의 육체에 모멸감을 느꼈지만 결국은 식욕에 굴복하고 말았다.

신은 각자가 질 수 있는 것 이상의 고통은 결코 주지 않는다는 말은 역시 맞는 말이었다. 아직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말이다. 죽지 못해 사는 게 아니라, 먹을 거 다 먹고, 새 옷도 사 입고, 남은 자식들의 작은 효도에 웃고, 조금만 섭섭하게 굴어도 삐치면서, 하고 싶은 소리 다하고, 꽃 피면 즐겁고, 손자들보면 대견하니 사람 할 짓은 다 하고 살고 있지 않은가? 때때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나를 남처럼 바라보며 처연해지곤 한다.

★ 잠자듯, 소풍에서 돌아오듯

그러나 아직도 죽음은 나에게 희망이다. 그 못할 노릇을 겪고 나서 한참 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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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특히 아침나절이 고통스러웠다. 하루를 살아낼 일이 아득하여 숨이 찼다. 그러나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는 하루를 살아낸 만큼 내 아들과 가까워졌다는 생각 때문에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

가장 무서운 것은 안 죽는 것이다. 너무 안 죽고 오래 살아 혈육이나 친구 중 자기보다 젊은 사람이 죽는 걸 보아야 하는, 순서가 바뀐 죽음처럼 무서운 건 없다. 한 번 겪어보아 그 고통이 얼마나 무섭다는 걸 알기 때문에 오래 살면 행여 또 그런 일을 당할까봐 그래서 어서죽고 싶은 것이다.

만약 인간이 안 죽게 창조 됐다고 가정하면 생명의 존엄성은 물론 인간으로 하여금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모든 창조적인 노력도 필요가 없게 된다. 자식을 창조할 필요도 없다면 사랑의 기쁨인들 있었으랴. 추(醜)가 없으면 미(美)도 없듯이, 슬픔이 있으니까 기쁨이 있듯이, 죽음이 없다면 우리가 어찌 살았다 할 것인가.

때로는 나에게 죽음도 희망이 되는 것은 희망이 없이는 살아 있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그때가 가을이었으면

노염이 복더위보다 기승스럽다. 어서 찬바람이 났으면 싶다가도 연탄 생각을 하면 우울해진다. 나는 오늘 우리 연탄광에 남아 있는 연탄을 아이들과 함께 세어보았다. 구구셈과 덧셈을 어렵게 해서 계산해 낸 재고량은 345장, 앞으로 자그만치 1,655장을 더 확보해야 겨울을 날 수 있다. 낮아진 열량을 생각한다면 2,000장쯤 더 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연탄장수 아저씨하고 어떻게 잘 통해 놓으면, 그만한 연탄을 확보해 놓을 수 있을까. 내가 가을과 함께 골몰하는 생각은 고작 이런 구질구질한 생각이다.

소설이나 영화 같은 데는 자주 불치의 병에 걸린 주인공이 나온다. 의사와 가족만 알고 주인공은 자기의 시한부 인생을 전연 눈치채지 못한다. 가족들은 주인공을 감쪽같이 속이면서 남은 몇 달은 어떡하든 더 행복하게 해주려고 갖은 애를 쓴다. 이 대목이 바로 눈물을 노리는 대목이다. 그러나 나는 이 대목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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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너무 늙기 전에 그런 병에 걸려 죽고 싶지만 이왕이면 내 생명이 몇 달 남았다는 선고를 나 혼자서 내가 직접 듣고 싶다. 가족들에겐 알리지 않겠다. 가족이 먼저 알고 나를 속이게 하고 싶지도 않다. 마지막으로 그 소중한 몇 달을 가족들의 기만과 동정이라는 최악의 대우 속에서 보내고 싶진 않다.

나는 내 생명의 몇 달을 철없고 앳된 시절의 감동과 사랑으로 장식하고 싶다. 아름다운 것에 이해관계 없는 순수한 찬탄을 보내고 싶다. 그렇다고 아름다운 것을 찾아 여기저기 허둥대며 돌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한꺼번에 많은 아름다운 것을 봐두려고 생각하면 그건 이미 탐욕이다. 탐욕은 추하다.

내 둘레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계절의 변화, 내 창(窓)이 허락해 주는 한조각의 하늘, 한 폭의 저녁놀, 먼 산 빛, 이런 것들을 순수한 기쁨으로 바라보며 영혼 깊숙이 새겨두고 싶다. 그리고 남편을 사랑하고 싶다.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어오는 사람으로서도 아니고, 아이들의 아버지로서도 아니고, 그냥 남자로서 사랑하고 싶다. 태초의 남녀 같은 사랑을 나누고 싶다.

이런 찬란한 시간이 과연 내 생애에서 허락될까. 허락된다면 그때는 언제쯤일까. 10년 후쯤이 될까, 20년 후쯤이 될까, 몇 년 후라도 좋으니 그때가 가을이었으면 싶다. 가을과 함께 곱게 쇠진하고 싶다.

 

2021.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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