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4. 26. 10:26ㆍ독서후기
행복한 무소유
- 법정스님 무소유에서 깨달은 행복과 자유 -
■ 벽록(檗綠) 정찬주 지음
0 1953 전남 보성 생.
0 동국대 국문과졸, 국어교사, 샘터사 편집자로 법정 스님 책을 만들기 시작
0 1983 한국문학 신인상 등단
0 2002 전남 화순 계당산 자락에 산방 이불재를 짓고 집필에 전념 중
0 장편소설
<산은 산, 물은 물> <소설 무소유> <다산의 사랑>
<이순신의 7년> <천강에 비친 달> 등
0 산문집
<암자로 가는 길> <그대만의 꽃을 피워라> <자기를 속이지 말라>
<선방 가는 길> < 정찬주의 다인기행>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법정 스님의 뒷모습> <바보 상자>등
0 행원 문학상, 동국 문학상, 화쟁 문학상, 류주현 문학상 등
■ 작가의 말 : 스승의 ‘무소유’를 명상한 마지막 산문
꽃샘추위가 오시는 봄을 질투하고 있다. 뜬금없는 흰 눈이 나붓나붓 흩날린다. 문을 살포시 열어보니 청매 꽃잎이 오들오들 떠는 듯하다. 매화가 피기 시작하면 개구리들이 잠에서 깨어나 개굴개굴 화답의 노래를 부를 텐데 꽃샘추위로 산중은 또다시 적막하다. 그러나 봄은 여기저기서 속살을 드러내어 들키고 있다. 산방 앞 개울물 소리도 돌돌돌 여물어졌다. 살얼음이 다 녹았다. 목련의 꽃눈들도 갓난아기 손톱만큼 부풀어 있다.
이번에 펴내는 산문집 <행복한 무소유>는 법정스님 11주기 즈음에 발간돼 재가제자의 도리를 내 몫만큼 한 느낌이 들어 기쁘고 홀가분하다.
내 산방 이불재(耳佛齋)를 찾는 손님들은 차담을 나누면서 대부분 ‘무소유’가 무엇이냐고 묻곤 했다. 재가제자이니 답을 줄 것이라고 짐작했던 듯하다.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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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한 무소유>는 그 물음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이 아닐까 싶다. 나는 한마디로 “소유는 나눔이다”라고 답하곤 했다. 법정 스님께서는 출판사로부터 받은 산문집의 평생 인세를 고달픈 학생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정작 당신의 통장 잔고는 늘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 무소유>의 표지에 다음과 같은 잠언을 지어 넣기로 했다.
무소유가 지향하는 것은 나눔의 세상이다.
나눔은 자비와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다.
자비와 사랑은 인간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사립문 밖의 개울로 나가보니 겨우내 덮여 있던 살얼음이 다 녹고 없다. 저수지로 흘러드는 개울물이 명랑하게 봄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독자 여러분의 가정에도 봄날 햇살이 비치어 신산한 그림자가 걷히기를 두 손 모아 빈다. 우리 모두 코로나 바이러스가 사라진 거리를 예전과 같이 자유롭게 활보하기를 발원해본다. 걸림 없이 걷는 걸음걸이가 이토록 인간적이고 본질적이며 거룩한 동작인지를 깊이 깨닫는 요즘이다,
2021 초봄, 이불재에서 정찬주
나도 없는데 하물며 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도 공(空)하고 내 것도 공하다는 도리를 알아야지.
그것을 말하기 위해 무소유란 말을 만들어 낸 것뿐이오.
- 법정 -
◎ 1부 무소유는 나눔이다
■ 소유는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내 차실 수반에는 부레옥잠이 겨울을 나고 있다. 원래 고향이 아니라서 향수병을 앓듯 잎 끝이 마르기도 했지만 잘 견뎌주고 있다. 겨울이 지나가면 마당에 있는 돌확으로 내보낼 생명이다. 차를 마시다가 부레옥잠을 보면 마음이 촉촉해진다. 법정스님은 강원도 산중 오두막에서 고구마를 키우며 파란 싹을 보시고 좋아하셨지만, 나는 보랏빛 꽃이 신비스러운 부레옥잠을 보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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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무소유를 지향하는 삶은 갈증이 날 때 바닷물을 마시면 더 마셔야 하듯 주식은 더 많이, 아파트는 더 큰 평수를 원하게 된다. 그런 감정을 갈애(渴愛)라고 한다. 갈애의 특성은 사람을 원하는 것에 계속 매달리게 한다. 정신적 여유를 빼앗아버린다.
그렇다. 욕망과 집착 때문에 괴로워진다면 소유는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무소유를 지향했던 법정스님이 아기 주먹만 한 고구마에 따뜻한 마음을 쏟았던 것이 차라리 행복한 마음이다. 소소한 것에 따듯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니까. 이를 ‘행복한 무소유’라고나 할까.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작은 생명에 사랑을 주고 교감한다면 그것도 오롯한 행복이다. 누가 탐내지도 않는다.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행복이다. 스님의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작년 봄 거사님 한 분이 보리수 묘목을 보내주시어 화분에 심었다. 인도 부다가야에서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뤘던 그 보리수의 현손(玄孫)이다. 열대성 식물이라 지난 가을에 차실로 들였다.
녀석은 다른 나무와 달리 24시간 산소를 내뿜는다고 한다. 이제는 내 차실에서 공기 청정기 역할까지 해주고 있다.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을 주니 메아리가 있다. 나의 보살핌에- 대한 응답인 셈이다. 아무리 가진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소한 생명에 주의를 기울이고 마음을 줄 데가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행복한 사람이다.
■ ‘나라고 고집하는 나’를 무소유하라
달라이 라마께서 유럽을 방문했을 때 서양 신부가 자비가 무엇이냐고 묻자 ‘친절’이라고 답변하신 적이 있다. 서양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설명하기 위해 그렇게 답변하시지 않았을까 싶다. 실용주의에 길들여진 서양 사람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친절 같은 단어를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자비의 의미는 친절이란 뜻보다도 훨씬 깊고 넓을 터다. 차라리 친절에 가까운 말은 하심(下心) 이지 않을까. 하심이란 나를 상대보다 낮게 내려놓는다는 겸손의 의미가 있다. ‘나라고 고집하는 나(我相)’를 버리고 상대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는 뜻도 된다. 이런 마음과 태도 속에서 참된 친절이 우러나올 수 있다. 나를 비우는 마음자리에 자비도, 친절도, 하심도 배려도 샘물처럼 솟구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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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도 “자비의 구체적인 표현이 친절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덧붙여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사랑하다’는 매우 아름다운 말이다. ‘사랑하다’ 다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사는 이웃과 남을 ‘돕다’이다. 자신에 대한 염려에 앞서 남을 염려하는 마음 쪽으로 마음을 돌릴 때, 인간은 비로소 성숙해진다. 자기밖에 모른다면 아직 진정한 인간이 아니다.
스님은 농담 삼아 가장 나쁜 절은 ‘불친절’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느 절에 취재를 갔을 때다. 젊은 스님에게 절의 역사에 대해서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가 실망한 기억이 있다. 젊은 스님이 마지못해 몇 마디 대답하고 나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인데 무얼 그리 묻느냐고 퉁명스럽게 정색했던 것이다. 우리 모두 친절해야 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시대가 우리에게 던진 화두는 친절과 하심, 자비와 배려 등으로 지구촌이 연대하라는 경고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리 모두 쉽게 종식되지 않는 비극을 맞이하고 있지만 얻은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 누구나 무소유로 끝나는 인생
코로나 바이러스가 나기 전이다. 메모를 보니, 나는 지지난해 10월 12일 인도에서 돌아왔다. 인도는 30도 이상의 날씨인데 국내는 벼 수확이 끝나가고 가을 산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었다.
나는 부처님께서 진리에 의지하고 자신에게 의지해 정진하라고 유언하신 쿠시나가라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바이샬리에 계시던 부처님이 쿠시나가라로 가서 열반하신 까닭은 그곳이 전생의 고향이었기 때문이라고 나름대로 짐작도 해 보았다. 부처님도 귀소본능이 있으시지 않았을까 싶었다.
부처님 8대 성지 중에서 첫 번째를 꼽으라고 한다면 누구라도 단연 열반지 쿠시나가라와 탄생지 룸비니가 아닐까 싶다. 쉽게 물러서지 않는 고집스러운 그곳의 짙은 안개도 어느새 그리워진다. 부처님이 보았던 2,500여 년 전의 안개나 내가 본 안개는 몇천 년을 하루같이 여여(如如)하게 자기 자리에 머물고 있다.
수의에는 살아있는 사람의 옷과 달리 주머니가 없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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手去),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금언이 실감난다. 누구나 예외 없이 무소유로 시작해 무소유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우리는 소유가 파도치는 바다에서 살았거나 살고 있거나 살아갈 실존임이 분명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설하셨을 터였다.
법정스님 다비식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스님의 법체를 운구하는 모습이었다. 상여 없이 대나무 들것 위에 스님의 법체는 달랑 가사 한 장 덮여 있었다. 송광사에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은 너무도 초라하게 보내드리는 것 같아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은 스님의 유언이었다. 다비 후 사리도 수습하지 못하게 했다. 무소유를 지향한 삶에 흔적을 남겨 허물을 얹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 역시 무소유로 아름답게 사신 스님의 삶에 티끌을 얹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무소유는 순백의 눈처럼 아름답고 거룩한 것이니까, 그래서 나는 스승인 법정스님의 일대기 <소설 무소유>표지에 ‘삶과 죽음마저 무소유하다’라는 문구를 넣도록 편집자에게 부탁했다.
샘터사 직장 선배였던 정호승 시인은 스님이 남긴 말씀과 그림이 스님의 사리라고 말한다. “스님의 말씀은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있다.” 는 정호승 시인의 영혼을 적신 법정 스님의 글에 눈을 주어보자.
‘내일은 없다. 지금 이 순간을 열심히 살아라.’
‘지금이 바로? 그때다.’
‘오지 않는 미래를 오늘에 가불해 와서 걱정하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정호승 선배는 천주교 신자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불교를 좋아하는 시인이다.
■ 소유보다 거룩한 무소유
길상사가 개원하는 날이었다. 조계종 총무원장 스님이 오시고, 덕 높은 여러 스님들이 오셨다. 길상사의 개원을 격려하는 축사가 끝나고 고급요정 대원각을 아무 조건 없이 시주하여 길상사를 개원케 한 김영한 여사가 단에 올랐다. 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감동하여 애독자가 된 분이었다. 한복을 소박하게 차려입은 여사의 체구는 작았다. 여사는 대중 앞에서 말하는 것이 서투른 듯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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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의 입에서 불교를 모른다고 하는 말이 아름답게 들렸다. 전율이 등을 타고 흘렀다.
“저는 배운 것이 많지 않고 죄가 많아서 아무 드릴 말이 없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년에 귀한 인연으로 제가 일군 이 터에 절이 들어서고 마음속에 부처님을 모시게 되어 한없이 기쁩니다.
제 소원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었던 저 팔각정에 종을 달아 힘껏 쳐보는 것입니다.
여사의 말은 단 네 마디였다. ‘나는 죄가 많다. 나는 불교를 모른다. 나는 부처님을 모시게 돼 기쁘다. 나는 힘껏 종을 치고 싶다.’경내를 가득 메운 수천 명의 가슴을 적셨던 여사의 겸손한 자기 고백과 간절한 소망이었다. 그때 법정 스님께서는 여사의 목에 염주를 걸어주셨다. 그리고 ‘길상화’란 법명을 내리셨다. 그뿐이었다.
길상사가 개원한 뒤 어느 날, 일간지 한 기자가 여사에게 “1천억 원대의 재산을 기부한 것이 아깝지 않습니까?” 라고 묻자 그녀는 “재산은 그 사람 백석(白石) 의 시 한 줄만도 못합니다.”라고 대답했다.
개원 법회날부터 2년 뒤, 여산은 길상사를 찾아와 “나 죽으면 화장해서 눈 내리는 날 경내에 뿌려주세요.”라고 유언하고는 다음 날 눈을 감았다며 당시 주지였던 청학스님이 내게 얘기한 적이 있는데 지금도 생생하다.
청학스님은 여사의 소원대로 팔각정에 종을 달아 범종각으로 만들었고, 눈이 내린 날 여사의 유언대로 뼛가루를 경내 뜰에 뿌려주었다.
길상화 보살이야말로 한 번 주어진 인생을 무소유의 행복을 얻음으로써 참으로 자기답게 살고 자기답게 죽은 분이 아닐까 싶다.
■ 무소유는 영혼의 해방구
법정 스님이 입적하시고 스님을 생각할 때마다 허허롭기 그지없었다.
살아 계실 때 스님께서 겨울 내의를 보내주셔서 돌아가신 아버지께 드린 일이 있다. 아마도 스님께서는 내의를 여러 벌 선물 받아 불필요한 것들을 정리하셨을 것이다. 스님은 무엇이든 하나만 소유하셨다. “차를 즐겨 마시기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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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 다기를 좋아하지요. 그런데 누가 선물해서 다기 세트가 두 벌이 됐어요. 두 벌이 되다 보니 한 벌을 가지고 있을 때보다 살뜰함과 고마움이 사라져요. 그래서 선물한 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다기 세트 한 벌은 다른 이에게 주어버렸지요.”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것만 소유함으로써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홀가분해지는 것이 ‘무소유’의 요지였다. 그런데 스님이 입적하시고 나자. 스님의 산문집 <무소유>가 경매에 나와 놀랄 만한 액수로 거래됐다. 창원에 사는 사촌동생도 그 책을 구할 수 없겠느냐고 내게 전화를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씁쓸하다.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담긴 <무소유>가 소유의 대상이 되었으니까. 사람들은 왜 <무소유>를 소유하고 싶어 안달했던 것일까. 가지고 싶어 하는 것과 읽고 싶어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러한 심리상태는 무엇일까. 스님은 현대인들의 소유지향적인 마음이 <무소유>에서 위안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스님은 ‘베푼다’는 말보다 ‘나눈다’는 말을 즐겨 쓰셨다. 베푼다는 것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주는 행위이고, 나눈다는 것은 잠시 맡아 지닌 것을 되돌려주는 행위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말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르다. 베풂은 상하관계이고. 나눔은 수평관계이다. 그리고 돌려준다는 것은 상하나 수평이 아닌 인연을 따르는 행위다. 상하 수평을 뛰어넘는 우주적 관계라고나 할까.
■ 무소유는 나눔이다
법정 스님은 일찍부터 당신 방식대로 ‘나눔’을 아무도 모르게 하셨다. 그게 스님이 원했던 흔적 없는 나눔이었다. 나눔이 없는 무소유는 허망한 주장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불필요한 소유를 경계하면서 나눔의 삶을 이루라는 것이 법정 스님의 무소유가 아니었을까.
불일암 시절이니 1975년의 일이다. 인세 수입이 생긴 스님께서 맨 먼저 남모르게 한 나눔은 고학생에게 학비를 대납하는 일이었다. 한번은 스님께서 불일암 여신도가 운영하는 ‘베토벤 음악감상실’에 간 적이 있었다. 스님은 그곳에서 한 학생의 딱한 처지를 듣고 불일암으로 돌아와서 그 학생뿐만 아니라 학생 몇 명을 추천받아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해주었다. 스님은 학생의 얼굴도 마주치지 않게 송금하거나 약속한 장소에 돈을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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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학생에게 학비를 대준 배경은 아마도 당신 학창시절의 고단했던 생활에서 연유하지 않았나 싶다.
해남 우수영보통학교를 졸업한 스님께서는 중학교 때부터 목포로 유학을 갔다. 스님께서 네 살 때 아버지가 폐병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에 작은 아버지가 학비를 대주었다. 그러나 어느 해인가는 작은 아버지가 학비를 제때 보내주지 못한 일도 있었다. 우수영 선창에서 배표를 끊는 직업을 가졌던 작은 아버지도 친자식을 어렵게 가르치는 곤궁한 형편이었다. 고등학교 때는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비를 보태기도 했다. 학비와 생활비는 대학교를 중퇴할 때까지 내내 스님을 괴롭혔다.
그러고 보면 스님은 자신의 고통스러웠던 경험을 오히려 ‘나눔’으로 승화시키며 철저하게 무소유의 삶을 사셨다. 통장 잔고는 늘 강진의 다산 유배지나, 추사 유배지가 있는 제주도로 가는 여행경비 정도였다. 입적하기 전에 제자들의 강권으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는 정작 밀린 병원비를 내지 못할 정도로 궁했다. 평생의 인세 수입을 학비가 없어 고통받는 고학생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다.
■ 버림으로서 무소유 실천하기
서울의 한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고 산방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6개월 후에는 CT촬영까지 하자고 의사가 권유한다. 내 인생도 계절로 치자면 이미 가을에 들어섰다. 문득 아는 것이 모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안다는 것은 그것 밖의 것은 모르기 때문이다. 지식인들의 오만을 느낄 때마다 그런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나도 예외는 아니다.
추수가 끝난 김제평야 너머로 지는 해를 바라보니 지식인의 허상이 열차의 차창에 어린다. 바로 나의 초상이다. 세상을 영원히 밝힐 것 같은 저 석양도 시나브로 빛을 잃어가고 있다. 눈을 찌르는 지식의 화려한 빛살보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지혜의 자애로운 달빛에 마음이 더 간다.
법정 스님은 절대로 베푼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본래 ‘내 것’이란 없다는 통찰에서였다. 베푼다는 것은 내 소유물을 누군가에게 주는 행위라고 말씀하셨다. 대신, 스님은 나눈다는 말씀을 자주했다. 나눈다는 것은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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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잠시 맡아 지닌 것을 누군가에게 돌려준다는 행위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내 글에서 여러 번 밝혔지만 스님은 공(空)이란 철학적 입장에서 ‘내’가 없는데 하물며‘ 내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 ‘무소유관’을 말씀하셨다.
스님은 유별나게 집착하는 것은 없었지만 그래도 글로 남긴 완상용 식물은 더러 있었다. 30대 중반쯤 봉은사 시절에는 난초를 키웠고, 40대 불일암 시절에는 후박나무와 파초, 매화나무를 뜰에 심었다. 또 스님이 말년을 보낸 강원도 수류산방 시절에는 자작나무를 좋아해서 묘목을 산방 초입에 식목했다. 수류산방 가는 길목에 껍질이 희끗희끗한 나무들이 자작나무였다. 그런데 이 자작나무가 스님의 천식을 악화시켰다고 하니 참으로 한스럽다. 천식이 깊어진 스님께서 삼성병원에 입원해서야 의사들이 밝혀낸 사실인데 스님에게는 자작나무 알레르기가 있었던 것이다.
수필 <무소유>는 스님이 39세 때 쓰신 글이다. 강한 햇볕에 내 놓았던 난초가 시들시들해 있자 잘 보살피지 못한 자신을 자책하며 더 나아가 집착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내용인데, 결국 스님은 난초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겠다고 결심한다. 난초를 친구에게 주어버린 것이다.
이후 스님은 군더더기를 버리면서 무소유를 실천했다. 스님은 어디를 가건 무집착의 마음으로 일관되게 사셨다. 불필요한 것은 버리고 버렸다.
스님께서 내게 하신 말씀이다.
“나는 원고를 쓰다 보니 만년필을 좋아해요. 누가 선물해 두 개를 갖게 된 적이 있어요. 그러다보니 한 개를 사용하던 때의 살뜰함이 사라져요. 만년필 하나가지고 글을 쓰지 두 개를 가지고 쓰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선물한 사람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만년필 한 개를 다른 사람에게 주어버렸어요. 그러고 나니 만년필에 대한 고마움이 다시 들어요. 무소유란 그런 겁니다. 군더더기를 갖지 않아야 살뜰함도 생기고 고마움도 더합니다.”
■ 무소유로 행복을 얻은 암바팔리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고 행복을 누린 여인이 있다. 부처님이 살았던 당시의 여인 암바팔리는 자신의 거대한 망고동산을 부처님에게 보시한 뒤 출가 해 제행무상(諸行無常)의 깨달음을 사무치게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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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법정 스님에게 1천억 원대의 재산을 기부한 김영한 여사를 연상 시킨다. 암바팔리가 춤과 노래에 뛰어났다는데 김영한 여사도 여창가곡과 궁중무의 명인이었다고 한다. 암바팔리는 웨샬리에서 살았다. 상업도시 웨샬리 릿차비족 사람들은 장사와 무역으로 축제하여 풍족하게 생활했다. 정치도 요즘의 민주주의와 흡사했다. 한 사람의 왕이 다스리는 다른 도시와 달리 공화제에 가까운 합의제를 채택하여 자유를 구가했다. 부처님도 이런 웨샬리를 사랑하여 자주 들렀고, 열반 3개월 전에도 머물렀다. 웨샬리에 있는 아쇼카 석주는 현재 남아있는 것들 중에 가장 완벽한데 석주 상단에 조각한 사자는 부처님 열반지인 쿠시나가라를 향하고 있어 상징하는 바가 크다.
<암바팔리>
- 암바팔리라는 말의 뜻 : (아기 때 망고동산에) 버려진 아이.
- 미모가 두드러짐,
- 부자들이 그녀에게 청혼 했으나 거절하고 여성 로비스트 생활
- 큰 부자가 됨
- 그 무렵 부처님이 마을 근처에 왔다는 말을 듣고 암바팔리는 부처님을 친견
- 그 후 출가하여 게송을 남김
* 게송 : 불덕을 찬미하고 교리를 서술한 시구
<그녀의 게송 일부>
내 머리카락은 검은데다 윤기가 흐르고 끝이 부드러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늙어서 마(麻) 껍질처럼 딱딱해 졌습니다.
진리를 말하시는 분(부처님)의 말씀은 모두 옳습니다.
내 젖가슴은 옛날에는 둥근 데다 균형이 잡히고 위로 향했습니다.
지금은 물을 넣지 않은 가죽주머니처럼 쭈구러들어 아래로 처졌습니다.
진리를 말하는 분의 이야기는 모두 옳습니다.
이후 암바팔리는 부처님의 권유로 부처님의 권유로 출가해 수행자가 되었다.
■ 무소유로 자유를 얻은 방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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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방거사로 알지만 당나라 형주(衡州) 형양 사람인 그의 본래 이름은 방온(龐蘊)이다. 아버지는 형양 태수를 지냈으며 많은 재산을 방거사에게 물려주었다. 방거사는 8세기 후반에서 9세기 초에 걸쳐 살다 간 인물인데, 형양 남쪽으로 가서 개인 암자를 짓고 스스로 불법을 닦았다. 그러다가 개인 암자는 오공암(悟空庵)으로, 자기 저택은 능인사(能仁寺)로 만들어 기증했다. 이후 석두선사를 만나 비로소 선미(禪味), 선의 맛을 얻었다.
방거사는 수많은 돈꿰미와 값어치 있는 가보를 배에 싣고 바다로 나가 미련 없이 몽땅 버렸다. <방거사 어록>에는 동정호(洞庭湖)에 버렸다고 나온다.
전 재산을 바다에 버리기 전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까도 고민해보았지만, 자신에게 ‘원수’가 된 재산을 남에게 떠넘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바다에 버리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어쨌든 자신의 전 재산을 바다에 버린 그는 가족을 이끌고 산중으로 들어가 조릿대로 대조리를 만들어 장에 내다팔아 연명했다.
바다에 수많은 돈꿰미와 가보를 다 던져버리고 청승맞게 죽기(竹器)를 만들어 생계를 꾸려가는 그의 기행(奇行)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방거사는 어느 날 마조 선사를 찾아가 물었다.
“모든 존재, 만법(萬法)과 관계없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온갖 존재와 다투지 않는, 즉 갈등하지 않는 자유인은 어떤 사람인가를 묻는 질문이었다. 그러자 마조선사가 말했다.
“내가 서강(西江)의 물을 한 입에 다 마셔버린다면 그때 자네에게 알려주겠네.”
더욱 더 절실해지라는 마조선사의 말에 방거사는 크게 발심했다. 마조선사의 문하에서 2년간 머물렀는데, 마침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대자유인이 되었다. 이후 그는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다.
세상 사람들은 돈을 좋아하지만
나는 순간의 고요를 즐긴다.
돈은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고요 속에 본래의 내 모습이 드러난다.
또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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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이 없는 것이 진정한 보시오.
어리석음 없는 것이 진정한 좌선
성내지 않음이 진정한 지계(持戒)요
잡념 없음이 진정한 구도다.
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을 추구하지도 않는다.
인연따라 거리낌 없이 사니
모두가 함께 반야선(般若船)을 탄다.
방거사는 천하의 선승들 못지않게 주체적인 인생을 살았다.
■ 무소유의 근본은 공(空)이다
나는 법정 스님께서 무소유를 말씀하실 때 두 가지 버전이 있다는 것을 일찍부터 알았다. 하나는 보통 사람들을 상대로 쉽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때는 이렇게 설하신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궁색한 빈털터리가 되는 것이 무소유가 아니다. 무소유란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무소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할 때 보다 홀가분한 삶을 이룰 수가 있다. 선택한 맑은 가난은 넘치는 부유보다 값지고 고귀하다. 소극적인 생활 태도가 아니라 지혜로운 삶의 선택이다.”
그런데 법정스님은 수행자나 나 같은 재가 제자를 만났을 때는 이렇게 설하신다. 내가 직접 들은 말씀을 그대로 옮겨본다.
“나도 없는데 하물며 내 것이 어디 있겠는가. 나도 공(空)하고 내 것도 공(空)하다는 도리를 알아야지. 그것을 말하기 위해 무소유란 말을 만들어 낸 것뿐이오.”
예를 들자면 이렇다. 우리 눈앞에 사과가 한 개 있다고 치자. 그런데 사과라는 단어를 100 퍼센트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다. 맞혔다고 해도 순간적인 답일 뿐이다 사과는 시간이 지나면 썩었다가 사라져 버리니까. 그런 모습을 다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깊이 통찰해보면 사과가 있다고 착각할 뿐이지 없는 것과 다름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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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반야심경>에서는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고 말한다. 색(사과, 현상)이 곧 공(본질)이라는 것이다. 다만 공성(空性)의 존재는 감지할 수 있다. 사과의 맛은 시간의 흐름과 상관없이 영원히 시고 달기 때문이다.
이제야 보통 사람들도 법정스님이 “나도 없는데 하물며 내 것이 있겠는가. 나도 공하고 내 것도 공하다”라고 하신 말씀을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니 무엇에도 집착할 것이 없다는 말씀이다.
소나무는 타면서 송진 향이 좋고 화력이 세다. 그러나 재가 적은 탓에 불씨가 곧 죽어버린다. 참나무는 그 반대다. 특별한 향이 없고 화력이 미지근하다. 그러나 재를 많이 남겨 불씨가 새벽까지 살아 있어서 불을 피우는 수고를 덜어준다. 그래서 나무 이름이 ‘나무다운 나무’ ‘참나무’일까?
또한 무슨 나무든 결국 재로 사라진다. 나무가 색(色)이라면 재는 바람에 흩어져 버리는 공(空)이다. 화목 난로를 때면서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이라는 반야심경(般若心經)의 가르침을 덤으로 깨닫는다.
그뿐만 아니라 나무는 자기 것을 주장하지 않고 아낌없이 자기를 다 내 준다. 살아서는 싱그러운 산소와 시원한 그늘, 푸르른 아름다움을 주고, 죽어서는 근사한 재목과 땔감, 화목 난로 속에서는 따뜻한 온기로 승화한다. 자기 것을 다 내어주는 무소유 속에 살다가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자비와 사랑의 화신 같다.
◎ 2부 소소한 무소유 삶
★ 목련꽃 향기는 숨지 않는다
■ 꽃들아 수고 많았다
입춘이 다가오고 있다. 매화 꽃망울이 부풀고 개구리들이 개굴개굴 봄을 부르고 있다. 겨우내 닫혀 있던 굴 같은 산중이 이제야 열린다고 해서 개굴개굴(開窟開窟) 노래하나 보다. 아니면 개구리 떼가 겨울잠 자던 땅속의 굴이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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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열린다는 노래일 수도 있겠고, 아무렴 때마침 봄비가 연못의 수련처럼 동그
란 파문을 그리며 개구리 노랫소리에 화답하고 있다. ‘좋지요, 좋지요.’하고 메아리 같이 응답하고 있다.
햇볕이 드는 양지에는 동백꽃이 몇 송이 피어 있었다. 동백꽃을 보니 법정 스님이 생각난다. 스님께서 병상에 누워계실 때 금강스님이 경내의 동백꽃과 매화꽃을 꺾어 인편에 보낸 적이 있는데, 스님께서 동백꽃과 매화꽃을 한동안 바라보더니 중얼거리셨다.
“꽃들아, 내가 내려가 남녘의 너희들을 보아야 하는데 올라오느라고 수고 많았다.”
스님을 위로하기 위해 보낸 꽃들에 오히려 사과하는 스님의 마음이야말로 부처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 봄노래 부르는 휘파람새
입춘이 지난 지 엿새 만에 휘파람새 소리를 듣는다. 꼭두새벽에 어둔 숲에서 봄을 알리는 철새이다. 꽃샘추위 탓인지 아직은 소리에 힘이 붙어 있지 않은 것 같다. 날이 포근하면 연달아 ‘후이 후이’하고 허공에 음표를 그리듯 노래하는 휘파람새이다. 너무 반가워서 갑자기 아내를 깨워서 함께 듣는다.
아내에게 주는 자그마한 선물이다. 나 혼자만 듣고 말았다면 아내는 속으로 서운했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 마니아인 아내는 청각이 예민해서 산중의 새소리를 좋아한다. 특히 꾀꼬리 노랫소리를 들으면 한없이 행복해진다고 말한다. 꾀꼬리가 네 가지 버전으로 노래한다는 사실도 아내를 통해서 들었다. ‘홀딱 벗고, 홀딱 벗고’를 반복하는 듯한 검은등뻐꾸기 소리는 나도 아는데, 아내는 꾀꼬리의 네 가지 소리를 안다고 하니 남다른 음감(音感)이다.
■ 통일 아리랑을 부르리
얼어붙은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가 며칠 지났다. 그렇다면 마당 연못가에 심은 홍매, 백매, 청매의 꽃이 피지 않았을까 싶어 나가보니 예감한대로다. 대동강 강물에 화답하듯 매화나무 꽃봉오리들이 문을 열고 있다.
김소월의 영변 약산 진달래꽃, 내 산방의 진달래꽃 피는 날에 남북도 서로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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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간절한 마음들이 오고 가야 하지 않을까. 스승인 법정 스님께서는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우리나라 꽃은 무궁화가 아니라 진달래꽃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북향집인 상방 이불재 상량문에 ‘백두산 천지 향해 이불재를 앉히다’라고 썼는데, 삼짇날 제비가 날아와 노래하듯 백두산과 이불재의 신령들이 목 놓아 <통일 아리랑>을 부르기를 갈망해 본다.
■ 목련꽃 부처
누구라도 미소 짓는 순간에는 부처가 된다고 했다. 그렇다면 꽃이야말로 부처의 어머니이다. 꽃을 보면 닫힌 마음이 저절로 열린다. 무장 해제 상태가 된다. 무아(無我)가 된 나와 꽃은 순식간에 하나가 되어 버린다.
이불재 뜰에 피는 목련꽃 향기는 숨는 법이 없다.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드러낸다. 가히 목련꽃 부처라 할 만하다. 바람이 센 산중이라서 더디게 피었지만 그 위의(威儀)는 당당하다.
내 산방 허공에 나무연꽃(木蓮)이 주렁주렁 피어나고 있다. 풍성하게 존재하는 이 봄날의 축복이다. 세상은 여전히 혼탁하고 잔혹해서 눈물겹도록 순결한 꽃이다.
■ 산중의 봄은 환하다
연못가에 벚꽃이 만개했다. 눈이 환해진다. 만개한 벚꽃이 산중의 어둠을 계곡 밑으로 몰아내고 있는 듯하다. 밝은 기운이 계곡물에 실려 저 아래 세상까지 흘러갔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마당가 돌담 사이로 피어나는 진달래꽃이 붉다 이때가 새들에게는 춘궁기인가? 개똥지빠귀가 진달래 꽃봉오리를 따 먹다가 내게 들키고는 부리나케 도망친다.
■ 꽃이 세월을 부른 것일까?
마당가 바위 틈새에 처음 심을 때는 어린 영산홍이었지만 지금은 키가 1미터가 넘는다. 세월이 꽃을 모셔온 갈까? 꽃이 세월을 불러온 걸까? 문득 무심히 상념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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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주인이라면 봄에도, 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문득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귀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 양 잠 못 들어 하노라’는 이조년의 시조<다정가(多情家)>가 생각난다. 이 시인의 다정(多情)은 아름다운 집착이 아닐까도 싶다. 그러나 나는 그냥 무심코 봄꽃을 바라볼 뿐이다.
◎ 작은 것들이 사랑스럽다
■ 민들레가 꽃밭을 선사하다
해마다 호미 들고 잡초를 쫓아다니다가
두 해 전부터 잡초도 더불어 생명이려니
그대로 두었더니 민들레 꽃밭이 됐구나.
꽃을 꽃인 줄 모르고 살았던 이 누구인가.
민들레꽃만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 흰 냉이꽃, 보랏빛 제비꽃도 “저 여기 있어요!”라고 깜찍하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비는 흐느끼는 듯한 가랑비
별은 희미하고 작은 것
꽃은 자세를 낮추어야 보이는 큰개불알꽃, 할미꽃
작은 것들만 눈길이 간다.
산중에 있는 듯 없는 듯 사는 나와 동질감이 들어서일까? 나이 들어서인지 작은 것들이 사랑스럽다.
■ 접시꽃 플라워로드
사립문 앞 돌탑은 점심을 하고난 오후 시간에
졸릴 때마다 개울에서 주워온 돌멩이로 쌓은 것이고,
접시꽃은 작년 봄에 자주 가는 식당에서 씨앗을
한줌 구해와 뿌렸는데 2년 만에 꽃을 피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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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시꽃은 몇 년 전에 오아시스 도시 둔황에서 보았는데,
그때 나는 접시꽃도 실크로드 산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둔황에 핀 접시꽃이 이제 내 산방 앞길에도 있으니
앞으로는 플라워로드(Flower Load)란 말도 생길법하다.
■ 자연이 노래하는 인생찬가
산중의 물소리 바람소리야말로 자연이 부르는 ‘인생찬가’가 아닐까.
헛된 시비분별로 지친 영혼을 맑고 투명하게 씻어주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은 뻐꾸기 소리를 엄마의 ‘영원한 모음(母音)’ 이라고 하셨고 <어린왕자>의 목소리는 ‘영원한 영혼의 모음’이라고도 말씀하셨다.
나는 꾀꼬리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사랑의 기쁨’이라고 느끼곤 한다. 두 마리가 숲 속에서 ‘호호(好好) 호이호’ 노래하는 듯해서다.
★ 쓸데없는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 은하수가 흐르는 소리
초가을 한밤중에 깨어나 은하수가 흐르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별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이야기를 남한테 전하려면
그것에 필요한 말이 우리 안에서 먼저 자라나야 한다.
<임제선사>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그가 서 있는 자리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리라.‘
<조주선사>
봄에는 꽃들이 피고 가을에는 달빛이 밝다.
여름에는 산들바람이 불고 겨울에는 흰 눈이 내린다.
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이것이 바로 우리 세상의 좋은 시절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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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산방의 달을 휴대폰으로 촬영해서 아우에게 보내주자, 귤 농사를 짓는 농부시인 아우가 성산포 달을 답례로 보내온 적이 있다. 그때 아우가 하는 말, 성산포 달빛은 소금기가 배어 간간하다.
■ 적막해도 외롭지 않다.
몸살 기운이 있어 아궁이에 장작불을 들이고 잤다. 밤새 내리는 가을비 소리에 노루잠에서 깨어났다. 날이 좀 더 밝아지기를 기다렸다가 화분을 내놓았다. 목말라하던 화초들이 비를 맞으며 좋아한다. 나는 화초들의 그 소리를 마음으로 듣는다. 화초들의 생기가 가슴에 전해지는 것이다. 어떤 날은 푸나무와 중얼중얼 대화할 때도 있다. 유무정물(有無情物)의 무엇이건 나와 연결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그러니 나는 산중 생활이 적막해도 외롭지 않다. 외롭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 낙엽도 뜻이 있어 구른다
<반야심경>의 불구부정(不垢不淨)이란 말이 문득 떠오른다. 인간의 기준일 뿐 자연은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는 말이다. 인간이 자연을 더럽힐 뿐이다. 며칠째 사립문 안팎의 낙엽 무더기를 바라만 보고 있다. 낙엽도 뜻이 있어 그 자리에 있거나 바람에 구르겠거니 하는 생각 때문이다. 누가 나보고 게으르다고 핀잔을 주어도 할 말은 없다.
★ 흰 눈 같은 고요 속으로
■ 차꽃을 보며 사색하다
된서리 내리는 초가을이다. 서리에 약한 오동잎은 벌써 지고 있다. 이때 피는 꽃이 있다. 마당가 소나무 밑에서 개화하는 우윳빛 차나무 꽃이다. 찬바람이 불수록 더욱 도드라지는 노란 산국(山菊) 못지않게 향기가 은은하다. 물맛으로 치자면 계곡물처럼 달짝지근하다.
그런데 차꽃은 질 때도 능소화처럼 미련 없이 통째로 떨어진다. 풀잎 끝에 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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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 영롱한 이슬이 떨어지는 것과 흡사하다. 온몸으로 살았으니 온몸으로 지는가보다. 차꽃의 개화가 절절하다면 차꽃의 낙화는 비장하다. 차꽃은 삶도 죽음도 여여하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생사일여(生死一如)라고 하는 모양이다.
■ 풍찬노숙한 부처님
이불재 마당 반석에 계신 부처님, 뒤뜰이 계신 지장보살님도 내리는 눈을 맞으며 설중삼매에 드신 것 같다. 무엇이든 피하지 않고 시비하지 않으며 받아들이는 것이 부처님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간밤 폭설 속에서 풍찬노숙한 부처님과 지장보살님이 의연하다. 이를 불보살의 위의라고 할 것이다. 부처님은 천주교 신자인 남동생이 어느 조각가로부터 선물 받았다가 산방으로 보냈고, 지장보살님은 절골 정씨 할머니가 외지에 사는 아들이 울타리 밑에 두고 갔는데, 밤중 할머니의 꿈속에서 호랑이가 나타나더니 여기 지장보살님은 저위 산중에 사는 소설가 집에 있어야 한다고 점지해주더라는 것.
■ 하루를 순간순간 온전하게
눈이 와서 그런가? 내가 사는 이불재가 <세한도> 속에 나오는 단출한 산방 같은 느낌이다. 불일암 법정스님의 ‘빠삐용 의자’를 본떠 만든 내 ‘무소유 의자’도 밤새 안녕하다. 대나무비로 쓸어서 그런가? 스산한 산방 이불재가 개결하다. 올 손님은 없지만 아침에 마당을 세 번을 쓸었다. 혹시 돌아가신 아버지의 혼령이 나를 찾아온다면 ‘깨어 있군!’하고 미소 지으실지 모르겠다. 문득 환하게 미소 짓는 아버지의 생전 모습이 떠오른다. 까마귀가 내 생각을 알아차렸는지 까악까악 소리치며 날아간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느닷없이 전화가 온다. 멀리서 귀한 손님 몇 분이 오신단다. 스님을 포함해서 세분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님들이 산방에 들이 닥친다.
허술한 내 살림살이가 숨김없이 드러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화목 난로가 온기를 내뿜으며 손님을 맞이한다. 손님이 내 서재까지 들어와 책상위의 컴퓨터 자판기를 보더니 “얼마나 오래 됐는지 자판 글자들이 안 보이네요. ”하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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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웃는다. 그런 뒤 나에게 봉투 하나를 슬그머니 내 미신다.
스님이 가신 뒤, 가만히 생각해보니 맑고 작은 물줄기 같은 흐름이 하나 읽힌다. 마당을 쓴 일이나, 까마귀가 소리친 일이나, 스님께서 내 낡은 컴퓨터를 처음으로 본 일이 ‘우연’이 아닌 것이다. 이미 인연 맺은 관계 속에서 오늘에야 나타난 ‘필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를 순간순간 온전하게 티 없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자각이 사무친다.
◎ 성찰
★ 가는 사람 잡지 않는다
■ 미워하고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불교를 받아들인 뒤 가장 큰 변화가 있다면 극단적으로 남을 미워하거나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내는 나의 그런 점을 많이 걱정한다. 사람들은 천차만별이니 조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나에게 가져갈 것이 뭐가 있느냐. 가져갈 것이 있다면 가져가라고 해라. 그것도 선업(善業)이 아니냐 하고 웃고 만다.
요즘 사람들의 특질 중 하나는 너무 미워하고, 너무 사랑하는 것 같다.
미워할 때는 상대를 죽도록 미워한다. 사랑할 때는 멀미가 날 정도로 사랑한다. 이게 온전한 사람의 정신이고 태도인가? 특히 진리의 길에 들어선 수행자의 경우에는 더 그렇다.
증오와 편애는 인간다운 길이 아닌 것 같다. 법정 스님은 한때 불일암 초입에 팻말을 세웠는데,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 하늘이 입을 열겠지
새벽 4시. 다행이다. 화목 난로에 잉걸불이 남아 있다. 이럴 때는 장작 몇 개만 넣어줘도 스스로 알아서 탄다. 장작을 가지러 뒤뜰 창문을 여니 툇마루까지 눈이 쌓였다. 어느 산중 수행자는 달빛에 비친 툇마루의 눈가루를 보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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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빛나는 보석이여! 이를 낭만적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수행자의 반어법이다. 거쳐할 오두막이라도 있고 부처의 가르침을 만났으니 감사하다는 뜻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어젯밤에 보일러가 갑자기 고장 나서 수돗물이 얼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지만, 그래도 산방은 내게 몇 시간의 단잠을 허락해 주었던 것이다.
■ 좋은 글이란?
독자가 어떤 글이 좋은 글인지 물을 때가 많다. 좋은 글은 눈 밖에 있지 않고 눈 안에 들어온다. 눈 밖에서 읽히는 글은 겉절이 건건이와 같다. 건건이는 쌈박하지만 입안에 도는 개미(開眉)는 없다. 눈이 읽고 나면 곧장 머릿속에서 사라져버린다. 맛있는 음식은 오래 씹듯 좋은 글은 오래 씹힌다. 좋은 글을 음미하면 마음은 더 없이 충만해진다.
* 개미(開眉) : 걸러 놓은 술에 뜬 밥알, 눈살을 펴다(근심을 풀고 안심함)
* 건건이 : 변변찮은 반찬
언젠가 북콘서트 할 때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
그때 박수를 받았던 내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좋은 책은 깊이 읽을수록 감동이 배가 되지만 부실한 책은 다시 읽어보면 감동이 반감됩니다.”
■ 꼭두새벽에 달리는 기차이듯
나는 꼭두새벽이 좋다. 눈을 뜬 얼마 동안은 현실의 내가 무장해제 된 것 같은 무아의 시간이 흐른다. 소설 작업의 실마리는 주로 이 같은 꼭두새벽에 풀린다. 실마리가 풀리면 마치 레일을 깔아놓은 듯 소설은 하루 종일 저절로 써진다. 레일 위를 기차가 달리듯, 낮에 손님이 오면 기차가 간이역에서 쉬듯 차를 마시고 정담을 나누기도 한다. 그래도 집필 작업에는 지장이 없다. 간이역에서 잠시 쉬었다가 종착역을 알고 가는 기차처럼.
오늘은 꼭두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점심은 아내가 라면을 내 놓아 맛있게, 더 정확하게 말하면 빨리 간단하게 먹었다. 산해진미가 부러우랴. 가끔은 라면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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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릇이면 족하다. 어쩌다가 서울에 간 나는 통유리 안이 훤히 보이는 고급식당 앞은 되도록 빨리 지나친다. 식탁에서 게걸스럽게 먹는 그 동물적인 모습과 음식을 되새김하듯 하염없이 먹는 그 여유(?)를 봐줄 인내심과 아량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 우리 모두 손해보고 살자
■ 순수한 첫 마음으로
우리가 누구의 일을 할 때 혹은 도울 때, 고승들이 깨달았을 때의 마음으로 하면 그것이 곧 순수한 공덕이 될 것이다. 내 일을 다 하고, 내 몫을 챙겨두고, 내 지위를 이용해서 하는 일은 엄밀한 의미에서 선업(善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양나라 무제가 달마대사를 만났을 때 묻는다.
“나는 수많은 절을 짓고 수많은 스님들에게 공양을 했소. 내 공덕은 얼마나 되오?”
달마대사가 대답한다.
“아무런 공덕이 없습니다!”
무제가 임금의 자리에서 신하들에게 지시해서 한 일이므로 그렇다. 임금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 것이다. 임금의 자리를 내려놓고, 임금이란 권력이 사라진 뒤, 자신을 희생하면서 천신만고 끝에 그런 일을 했다면 공덕이 됐을 것이다. 순수한 첫 마음으로 하는 행동 그것이 바로 선(禪)인 것이다. 선심초심(禪心初心) 이란 선가의 말도 있잖은가.
어느 해인가 정초에 나는 가족들 앞에서 “올해는 모두 손해보고 살자. 그러면 시비 갈등하는 마음이 녹아버린다.”라고 말한바 있다.
■ 늙는다는 것
나는 나이들어 가끔 동화를 쓴다. 지난 12월 24일 부산으로 가서 안국선원 선원장 수불스님과 신도회장 무량심 보살님을 뵙고 차담을 했다.
그때 들은 얘기로 성인 동화 한 편을 또 썼다. 러시아 대문호 톨스토이가 왜 말년에 동화를 썼는지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동화란 인생철학을 담아내기에 수월한 장르인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인생 지혜의 두께가 더 두꺼워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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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선은 맹독이다
꼭두새벽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화목난로를 피운 뒤, 미지근하게 데워진 지하수 한 모금을 마신다. 물이 식도를 내려가는 동안 잠자던 세포가 깨어나는 느낌이다. 밋밋한 물 한 잔이 뱃속으로 들어가면서 나를 깨우는 것이다.
가장 질리지 않는 맛은 물맛이다. 물에 어떤 첨가물이 들어가면 입맛을 돋울 지는 몰라도 그만큼 본래의 물맛에서 멀어진 줄 알아야한다.
독선(獨善)이란 단어는 맹독(猛毒)이 들어 있는 독버섯처럼 아름답기까지 하다. 좋을 선(善)자가 들어 있어 유혹한다. 그런데 문제는 혼자(獨) 도취하는 데 있다. 스스로 공명정대한 줄 착각한다. 사람은 술로만 취하는 것이 아니다. 이데올로기, 편견, 욕망도 사람을 취하게 한다. 이성을 마비시킨다. 부처님의 중도(中道)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유가의 중용으로 극단을 삼가는 지도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싶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해서다.
법정스님이 봉은사 시절에 함석헌 선생을 모시고 반독재 투쟁을 하신 이유도 정치지도자의 독선을 막기 위해서였다. 스님은 수행자가 증오심을 가져서는 안 되지만 불이 났으니 잠시 소방수 역할을 했다고 고백하신 적이 있다.
■ 우리가 보지 못한 진실을 보고 말한 성자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지진이나 해일처럼 큰 충격과 변화를 준 성자들은 우리가 보지 않은 것을 본 각자(覺者)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존재 속에서 공(空)을 처음으로 본 이는 고타마 붓다이다.
우리들은 현실존재들의 색(色 현상)만 보고 살아왔던 것이다.
현실존재 속에서 처음으로 부활을 보여준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우리들은 현실존재들의 죽음만 보고 슬퍼하며 살아왔던 갓이다. 현실 속에서 하늘의 도를 처음으로 말한 이는 공자이다.
★ 자신을 사랑해야 남도 사랑한다
■ 집이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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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이란 욕망인가? 내 경우도 집의 평수가 풍선처럼 점점 커져왔던 것 같다. 결혼해서 13평 개봉동 주공아파트 전세를 살았다. 첫딸 둘째딸이 태어날 무렵에는 단독주택으로 이사했다. 15평 안팎이었지만 아이들이 뛰어 놀 수 있는 골목이 있어 좋았다. 이후 아이들이 크자 23평 아파트를 분양받아 갔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를 다니게 되자 아이들에게 방을 내어준 나는 거실에서 집필을 했다. 이제는 서재를 갖는 것이 꿈이 되었다. 할 수 없이 42평 아파트로 이사를 해서 내 서재를 따로 마련했다.
이후 마흔 아홉에 나는 남도 산중에 18평 산방을 지어 낙향했다. 18평 산방을 지을 때 면사무소 직원은 아무런 투자가치가 없는 곳에 집을 짓는다며 나를 기인으로 보기도 했다. 나는 집을 소유하기 위해서가 아닌, 내 영혼과 몸이 존재하기 위해서 지었기에 매우 만족했다. 산중 생활이 때론 불편했지만 그런 불편함도 내가 선택한 것이므로 견딜 만했다. 무엇보다 서울에서 잃어버렸던 외로움을 되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 외로우니까 자연과 더 가까워졌다. 산중의 자연이 스승이 되고 친구가 되었다.
그런데 아내가 합류하면서 산방에 부엌 8평이 더해졌다. 아내는 부엌으로 쓰면서 독서 공간으로도 이용했다. 손님들이 찾아오자 5평 별채 사랑방도 지었다. 산방 역시 성장 호르몬에 의해 자라나는 집처럼 점점 덩치가 커졌다.
■ 용서란 조건이 없다
용서, 사면… 용서란 조건 없이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용서했다는 생각마저 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너무 종교적인가? 그렇다면 종교처럼 현실적인 것이 또 어디 있겠는가. 종교에서 하는 말과 현실에서 하는 말이 서로 다르다는 것인가. 향나무는 자신을 찍는 도끼날에 향을 묻히는데! 자신이 향나무인지, 도끼인지 스스로 한 번쯤 물어보는 것은 어떨까. 글을 쓰다가 막막해져 마당가 연못을 한 바퀴 도는 동안에 용서, 사면이란 단어가 순간적으로 나에게도 화두가 될 줄이야. 세상은 여전히 시비가 넘쳐나고, 또 그것으로 생업이듯 먹고 살고, 혼란스러움이 미세먼지처럼 덮고 있다.
■ 이제는 외조를 할 때
잠자는 아내의 모습을 보면 짠하다. 4백여 년 전 아내 집안의 이조판서 박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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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중시조께서 나의 15대조인 돈재 정여해 할아버지 일대기인 행장을 썼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였던 할아버지는 사헌부 지평을 제수 받았지만 출사하지 않은 도학자였다. 어느 날 새벽에 15대조 할아버지 문집을 보다가 발견한 사실이다. 인연이란 이토록 심연처럼 깊고 골짜기 같이 그윽한 것인가!
올해 최고의 내 목표는 아내의 건강을 되찾는 일이다. 아내는 지난해 8월부터 고관절에 이상이 생겨 처음에는 잘 걷지도 못하다가 차츰 나아져서 지금은 산책을 함께 할 정도가 되었다.
요즘 나는 행복하다. 아내의 잔소리가 점점 사랑스럽게 들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 남을 사랑하려면
세상 사람들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리며 일과를 시작한다. 갑자기 한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그 단상을 붙잡아 본다.
자신을 사랑하거나 사랑하려고 하는 사람은 남도 사랑한다.
자신을 미워하거나 미워하려고 하는 사람은 남도 미워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어렵지, 타인을 미워하는 것은 쉽다.
★ 하루가 최후의 날이듯
■ 집착은 자신을 가둬버린다
옳든 틀리든, 기쁘든 슬프든, 행복하든 불행하든 무엇에 시비, 집착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 혹은 무리에 가둬버리는 자폐로 가는 길이다. <반야심경>의 공(空)이란 그것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행위나 태도를 보이지 말라는 가르침은 아니다. 집착 없이 생각하고 살피라는 것이다. 원효스님은 이를 정사찰(正思察), 혹은 삼매(三昧)라고 했다. 삼매는 단순히 집중이나 몰입이 아니라 깨어 있음이다. 노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했다. 무위자연이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연에 맡기라는 뜻이 아니다. 살고 죽는 일을 작위적으로 하지 않는 자연을 닮으라는 것이다. 공과 무위자연은 마침내 한 지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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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동의어라고 생각한다. 동쪽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와 같이 솟구친 영감이다.
■ 유목민인가, 농사꾼인가?
가을장마가 져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중이다. 더불어 뜬금없지만 삶의 방식을 생각해 보고 있다. 미련하게 한 곳에 붙박이로 사는 농사꾼 스타일이 있고, 먹이(풀)를 찾아서 끝없이 옮겨 다니는 유목민 스타일이 있는 것 같다. 물론 두 스타일이 혼재된 경우도 있겠고, 경쟁을 좋아하지 않고 민첩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은 비록 천수답일지언정 농사꾼 스타일로 사는 게 성정에 맞는 것 같다. 심신을 쉬게 한 채 아랫목에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 하늘이 부른다면
나는 내 나이를 생각할 때마다 가끔 ‘하늘이 부르면 가야할 나이’라고 여기곤 한다. 대학시절 ‘지도’라는 문학동인 활동을 했던 친구 중에 벌써 두 명이 유명(幽冥)을 달리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은 대구 옆의 경산에서 서울로 유학 온 강기수라는 시를 습작했던 동인인데, 감성이 아주 예민한 문학청년이었다. 부친이 사과밭을 경작했는데 그의 시 속에는 달빛과 사과 꽃이 자주 등장했다. 달이 뜬 사과밭의 묘사는 몽환적이고 서정적이었다. 시 낭송회를 하면 경상도 발음을 하여 나를 웃겼던 친구였다. 이를테면 날이 ‘쌀쌀하다’를 ‘살살하다’로, 달이 ‘뜨다’를 ‘떠다’로 낭송했던 것이다. 그런 지금 생각하면 그 발음이 시작(時作)의 시적 상황을 더 적확하게 낭송한 말이었다는 자각이 든다. 미당 서정주 선생의 전라도 향토 언어가 오리혀 시를 살려주고 있듯이.
또 한 사람은 고등학교 때 이미 시인으로 데뷔한 박주관이라는 동인이다. 그의 시 풍경은 반듯한 전원주택처럼 모던했던 현실을 묘사하고 비판하는 시어들이 상징적이고 지적이었다. 그 친구는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신문사 기자를 하다가 동료 시인들에게 순수한 시 정신을 의심받은 적이 있다.
두 사람이 교통사고와 암으로 생사를 달리한 지금, 그들의 시 혹은 시적 열정을 생각한다는 것이 사뭇 허망하게 느껴진다. 두 사람의 시가 실제였는지 환(幻)이었는지 그 경계가 아침 안개처럼 모호하게 다가온다. 어설픈 글을 썼다가는 훗날 그들을 만났을 때 혼이 날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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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나무 뿌리가 뻗어가듯 오직 쓸 뿐
■ 친구란 나를 완성시켜주는 사람
먼 길을 갈 적에는 좋은 도반(道伴)과 동행하여 자주자주 눈과 귀를 맑게 하고, 머무를 때도 반드시 도반을 가려 때때로 아직 듣지 못한 것을 들어야 한다. 그러므로 속서(俗書)에도 이르기를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고 나를 완성시켜준 사람은 벗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착한 사람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마치 안개와 이슬 속을 가는 것 같아서, 비록 당장에 옷이 젖지는 않아도 점점 촉촉하게 적셔진다.
■ 대나무 뿌리는 멈춤이 없다
산중 농부의 말인데 대나무 뿌리는 컴컴한 땅속에서 수백 미터까지 뻗어간다고 한다. 한 뼘 한 뼘 자라서 수백 미터에 이른다고 하니 놀랍다. 말 그대로 대나무 뿌리의 끈질긴 지구전이다. 우후죽순(雨後竹筍)이라는 말이 있듯 봄날의 죽순은 속도전을 펴는데, 대나무 뿌리는 계절과 상관없이 사시사철 미세하게 움직인다. 바위가 있으면 돌아가고 도랑이 나타나면 땅 속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오고, 상황이 녹록지 않으면 잔뿌리를 내어 성장 시기를 살피는 등 수십 년에 걸쳐 수백 미터를 간다고 하니 경이롭기까지 하다.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 라는 인간의 속담이 무색할 정도다.
다른 일은 몰라도 나 역시 글을 쓸 때는 좌고우면하지 않는 버릇이 있다. 졸작이 됐든 수작이 됐든 대나무 뿌리가 뻗어가듯 오직 쓸 뿐이다. 후배들에게도 글을 쓰지 않는 동안에는 전(前)자를 붙이라고 충고한다. 내가 볼 때는 전 시인, 전 소설가인 것이다.
■ 호랑이에게 물릴 사람
사랑채 무염산방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펴놓고 등을 지지고 있으니 부러울 게 없다. 혼탁한 세상에 동문서답 같은 말이 되겠지만. 어린 시절 많이 들었던 어른들의 꾸지람 중에 가장 무서운 말은 “호랭이 물어갈 놈!”이었다. 요즘도 호랑이가 물어 가면 좋을 사람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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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된 서리는 나무를 성장 시킨다
■ 만남이 인생길을 좌우 한다
계당산은 내가 은거하듯 살고 있는 화순군과 보성군을 경계 짓는 꽤 높은 산이다. 내게는 무엇보다도 인생을 사유하게 하는 산이다. 계당산 허공의 빗방울은 화순군에서 불어가는 바람을 만나면 보성강으로 갔다가 섬진강이 된다. 반대로 그 빗방울이 보성군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만나면 화순의 지석강을 흐르다가 영산강에 섞인다. 어느 바람과 인연을 맺는가에 따라 빗방울의 운명이 갈린다는 것이다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길이 크건 작건 달라진다.
심혼에 불을 당겨주는 스승이나 좋은 친구 덕분에 인생길이 바뀌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단비와 같은 인복(人福)이 없었다면 내 삶에 꽃이 피기는커녕 흑풍(黑風)이 부는 사막처럼 무미건조하지 않았을까 싶다.
■ 시련은 생명을 거듭나게 한다.
내 산방인 이불재는 지금 가을의 끄트머리에 와 있다. 난 초가을 보다 늦가을을 좋아한다. 사람들은 머잖아 찬바람이 불 것이라고 걱정하지만 오히려 나는 찬바람을 기다리고 있다. 찬바람이 이마를 치고 가면 더없이 상쾌해지곤 한다. 내 몸이 개운하게 헹구어지는 느낌이 들어서다.
찬바람이 산중을 점령하면 활엽수들은 너나없이 나목으로 변하고 새벽녘 들판에는 수은 빛깔의 된서리가 내린다. 된서리는 나무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시련을 통해 나무를 성장시킨다. 나뭇잎이 떨어지게 하고 수액을 뿌리로 내려가게 하여 ‘봄날의 부활’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생명을 거듭나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시련이 없는 사람에게는 영혼의 성장호르몬도 정지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몸과 키의 세포에만 성장호르몬이 있는 게 아니라 영혼에도 있는 듯하다.
■ 북향집에 사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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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산방은 햇볕이 잘 들지 않는 북향집이다. 계곡 아래에 있는 천년고찰을 날마다 내려다보는 것이 무례할 것 같아서 옹색하게 북향으로 앉혀버린 것이다. 법정스님께서 가정방문을 오시어 왜 북향집을 지었냐고 물으셔서 “아래 천년고찰을 내려다보기가 무례할 것 같아서 북향을 돌렸습니다.”라고 하자 “잘했어요. 밑을 내려다보고 지었으면 쌍봉사 경비초소지 뭐.”하시며 웃으셨다. 그런데 북향집이 내게 주는 행운도 있다. 절 옆의 도로에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음이 내 산방 앞쪽으로 지나쳐 버린다. 그래서 북향인 내 산방은 산중 선방처럼 조용하다. 이러한 고요야 말로 글 쓰는 작가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 비록 몸은 산중에 있어도
이른바 ‘자연인’ 이야기가 눈에 많이 띈다. 유튜브를 보면 여기저기 떠다닌다. 그런데 산중으로 들어가 산다고 모두 자연인일까? 산중에 살면서도 도시 생활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유사자연인(類似自然人)이 대부분이다. 술을 마신다거나, 낚시하며 살생을 즐긴다거나, 작은 생명에게 칼질을 서슴없이 한다거나 등등이다. 몸은 청산에 있지만 마음은 저잣거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반대로 몸은 비록 저잣거리에[ 있지만 마음은 청산을 품고 사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자연인이 아닐까.
나는 20년 전에 남도 산중으로 들어온 이후 술, 담배는 전생의 일처럼 멀어져 버렸다. 또한 저절로 완전한 채식주의자가 됐다. 고기를 먹으면 몸에 두드러기가 날 정도로 고통스럽게 변해버린 것이다.
*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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