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마지막 수업(2)

2022. 4. 13. 15:30독서후기

반응형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2)

-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

■ 김지수 지음

◎ 6. 손잡이 달린 인간, 손잡이가 없는 인간

- 이 컵을 보게. 컵은 컵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달려봐. 관계가 생기잖아.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는 거지. 그러면 손잡이는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

■ ‘케이스 바이 케이스’에 진실이 있다.

정육점의 고기를 볼 때마다 ‘우리는 모두 미래의 시체’라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이 생각난다. 우리는 모두 앞으로 시신이 될 사람들이다. 삶의 끝이 아닌 삶의 한 가운데에서 죽음을 그려본다.

펜데믹이 장기화 하면서 뉴스 화면은 유럽과 미국 곳곳에 늘어선 시신 트럭과 시체 안치소, 널브러진 관을 보여주었다. 장의사들은 비명을 질렀다. 장례 절차조차 사치였다.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는 어른, 이어령 선생을 만나면 거짓 희망이 아닌 정직한 미래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겨울이 오면 봄이 온다는 단순한 사실조차 얼마나 큰 힘이 되는가. 가죽 슬리퍼를 신은 단정한 어른이 문을 열어주었다.

“선생님, 요즘엔 ‘희망을 버려야 살 길이 보인다’고 해요. 정신이 번쩍 듭니다.”

“코비드의 d자가 disease 잖나. 이미 병이 된 거야. 때 되면 앓는 인플루엔자처럼, 그냥 함께 살아가는 거라네. 백신도 인간이 개발한 화학 치료제가 아니야. 인체에서 생긴 면역체를 가지고 만드는 거지.”

“바이러스 회오리가 아래부터 위까지 전 지구를 골고루 흔들어 놓으니 새롭게 전복된 시야가 생기는 것도 같습니다. 지구 생명체 전체에 시련이어도 언젠가는 겪고 넘어가야 할 과정이라는 데 동의해요.”

- 1 -

“인류가 늘 그렇게 살아왔어. 세계대전, 페스트, 에이즈, 사스… 인류는 끝없는 재앙 속에서 진화해 왔네. 지금은 21세기니까 그에 걸맞은 글로벌 시련이 온거야.

코로나 바이러스도 결국 인구 조절이라잖나. 고령화로 늘어난 노인 인구 조절이라고, 그런데 거기서 또 놀라운 신비가 있어.”

“어떤 신비를요?”

“이런 재앙이 끝나면 인구가 확 올라간다는 거야.”

“생명의 욕구가 그만큼 힘이 센 거죠.”

“그렇지. 아까 동기화처럼 전쟁, 역병 이후엔 생명이 꽃을 피워. 자연의 역사, 지구의 역사, 우주 역사의 큰 드라마가 우연만은 아닌 것 같아, 우연이라면 로또복권 천만 번 당첨되는 것과 같은 확률의 우연이지. 과학자들은 모든 걸 우연이라고 해. 생명도 진화도 우연이라고. 모르면 다 우연인가? 허허. 빅 데이터를 보면 우연이란 없어.”

“외국 논문을 보면 모든 게 아주 작고 시시콜콜한 데서 시작해. 구체적이지. 반면 우리나라 논문은 <8•15 해방과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이런 식이야. 안타까운 일이네.

한국 유학생들이 유학 가서 지적받는 게 뭔 줄 아나? 문제를 구체화하지 않고 일반화 한다는 거야. 한국인들은 공통적으로 거대담론을 좋아해. 나도 그런 특성이 있다는 걸 부정하지 않아. 하지만 나는 아주 작고 사소하고 구체적인 이야기에서 시작해. 추상적인 이야기는 질색이거든.”

“생활 속을 파고드는 이야기를 좋아하시죠. 문화부 장관 시절에도 가장 잘 한 일이 ‘노변’을 ‘갓길’로 만든 거라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생활 언어에서 일반 언어로 나아가는 게 순서야. ‘효도해라’ ‘정의를 실천해라’이런 큰 일반론을 주장하는 건 공허해.”

■ 나는 타인의 아픔을 모른다

“주기도문에 나오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의 바로 그런 상황들… 딜레마죠. 살다 보면 수렁에 빠진 것 같은 그런 문제 상황이 생깁니다.”

“그럴수록 정신 차리고 봐야 해. 코로나 시절에는 더욱 그런 문제들이 많이 발생해. 한 사람을 구할 것인가. 아홉 사람을 구할 것인가. 마스크는 굉장히 여

- 2 -

러 가지 함의를 갖고 있다네. 마스크는 처음엔 내가 살기 위해서 썼지? 지금은 어떤가? 나를 위해서도 쓰지만 남에게 안 옮기려고 써.”

“사회적 매너와 자율성 사이에서 내적 아우성이 있어요. 저만 해도 야외에서는 마스크를 좀 안 하고 싶은데, 잠깐 내려갔다가도 저 멀리서 사람 오는 게 보이면 화들짝 놀라서 다시 쓰게 되더라고요.”

“스웨덴은 일절 관여를 안 해. 국가에서 통제하지 않지. 쓰든 말든 알아서 해라. 그러니까 다 쓰고 지켜. 교통법규도 그래. 법규를 없애면 오히려 법규를 지켜.”

“선생님은 자율성에 대한 믿음이 있으신거죠?”

“자율성이 아니라 생명의 주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러네.”

■ 손잡이 달린 인간, 손잡이가 없는 인간

“성경에도 인간의 못남과 부도덕함이 바닥까지 다 드러나 있잖아요. 다윗 왕은 전쟁터에 나간 부하의 아내를 탐했고, 유다도 며느리인 다말과 합방했다고 기록되어 있지요. 비루함과 위대함이 다 한 몸에서 나왔다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기록자들, 작가나 예술가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야. 도덕자나 지식자가 아니라네. 감추고 싶은 인간의 욕망, 속마음을 광장으로 끌어내 노출시키는 사람들이지. 거울로 비춰주는 거야. 보통 사람은 비참한 자기 얼굴을 안 보려고 해. 흐린 거울이나 깨진 거울로 보지. 직면할 용기가 없으니까. 예술가만이 일그러진 자기 얼굴을 똑바로 봐.

왜 주사 맞을 때 고개 안 돌리고 똑바로 쳐다보는 사람있지? 독한 사람이잖아. 바늘 들어가는 거 보는 사람. 심지어 그 장면과 느낌을 묘사하는 사람…그런 사람이 예술가가 돼. 지독한 인간들이지.”

“자기 삶이 사소하면 사소한 대로 비루하면 비루한 대로. 정직하게 기록하는 인간들이야말로 담대한 사람들이죠. 일본 문단이 부러운 게. 그런 사소설 분야가 잘 발달 돼 있어요.” “특히 무라카미 하루키가 잘하더구만.”

“이데올로기 사회도 이데올로기 소설도 나는 나쁘다고 생각해.”

“내, 개개의 인간을 커다란 이불로 다 덮어버리니까요. 요즘엔 이데올로기 소설은 거의 찾아볼 수 없어요.”

- 3 -

“아무렴. 자네와 얘기하는 것도 커다란 이불을 하나하나 들추는 작업이야. 바깥에 있는 덮개. 내부에 있는 덮개, 다 까야 진실이 드러나. 예술가라면 그동안 사회가 덮어왔던 것들을 까발려야지. 한 꺼풀 한 꺼풀. 죽음이라는 게 뭔가. 산다는 게 뭔가. 친구가 뭔가. 사회가 뭔가….

자네도 짐작하겠지만, 나는 그동안 집단주의, 국가주의를 경멸해왔네. 바글바글한 데는 끼고 싶지 않아서 해수욕장도 안 갔어. 사람들 잔뜩 있는 곳에서 군중의 한 사람으로 끼어 있는 게 싫었다네.”

“무리 속에 숨어서 안전하게 살고 싶은 생각이 한 번도 없으셨어요?”

“(단호하게)싫어. 보들레르도 그랬잖아. ‘주여, 내가 저들과 똑같은 숫자의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쓰게 하소서.’”

“인간이면 언어를 가졌고, 지문을 가졌어. 그게 바로 only one이야. 무리 중의 ‘그놈이 그놈’이 아니라 유일한 한 놈이라는 거지. 그렇게 내가 유일한 존재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남을 사랑하고 끌어안고 눈물도 흘릴 줄 아는 거야. 내가 없는데 어떻게 우리가 있어? 그런데 ‘나 없는 우리?’ 아니 될 말씀이야. 큰일 날 소리지. 그래서 내가 사이를 강조했잖아. 나와 너 사이. 그 사이에 나도 있고 너도 있다는 거지. 자네와 나 사이에 interview가 있는 것처럼.”

“갈수록 inter가 중요하죠.”

“앞으로 점점 더 interface(조화시키다. 연결하다) 접속장치가 중요해.”

시인이 따로 있고 철학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상에서 우리는 이미 다 시인이고 철학자라고 스승은 목소리를 높였다. 밥숟가락으로 밥을 먹듯, 언어를 사용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예술이고 철학이라고.

“요리사만 요리하나? 집에 오면 다 요리하잖아.”

듣고 보니 그러했다.

◎ 7. 파 뿌리의 지옥, 파 뿌리의 천국

“끝까지 이기적일 것 같은 사람도 타인을 위해 파뿌리 하나 정도는 나눠준다네. 그 정도의 양심은 꺼지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거든.”

기자로서 나의 생활은 선생님을 만나는 일과 묘하게 영향을 주고 받으며 돌

- 4 -

아갔다. 내가 의문을 가지고 쓴 칼럼에 스승의 의견을 듣는 일은 즐겁기도 동시에 두렵기도 했다.

그 만남은 공적인 일도 사적인 일도 아닌 채로, 매일 남루해지는 나를 일으켜 세웠다. 선생은 휘파람 불 듯 무심하게 ‘내가 죽거든 책을 내게’라고 말해서 나를 놀라게 하곤 했다. 때로는 비바람이 분 뒤 젖은 낙엽위로 그날이 왔고. 때로는 축복처럼 눈이 내린 후의 아침이기도 했다.

■ 어쩌면 우리는 모두 파 뿌리

“제가 어제 ‘부탁’에 대한 칼럼을 썼어요. 성공한 사람 중에는 도움을 받기만 하는 ‘테이커(taker)’ 보다 도움을 주는 사람 ‘기버(giver)’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거절이 겁나 부탁을 두려워하지만, 실험해 보면 많은 사람들이 타인에게 도움을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죠. 사회적으로 묻힐 수 있는 자원을 캐내어 유통시킨다는 차원에서, 부탁이 매우 역동적인 행위라는 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게 마스크와 똑같은 얘기라네. 마스크는 나를 위해 쓰지만 남을 위해서도 쓰잖아. 부탁도 그래. 나를 위해 하는 거지만, 그게 남에게도 유익하거든, 나는 남에게 부탁할 수도 부탁받을 수도 있어. 그걸 알기에 도와주는 거야. 반대로 남한테 부탁 안 하는 사람은 남의 부탁도 잘 들어주지 않아.”

“맞습니다. 빈자들은 늘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기에 이웃의 부탁을 선선하개 들어주는 한편. 부자들은 타인의 도움이 필요 없기 때문에 이웃을 신뢰하지도 부탁을 들어주지도 않는다고, 데이비드(David) 데스티노(Desteno)`라는 사회심리학자가 그러더군요.”

“사람들이 다 자기만 아는 것 같잖아? 실제로는 안 그래. 길가는 데 어린애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잖아? 그러면 백이면 백, 다 뛰어들어서 그 어린애부터 꺼내. 버스가 진흙탕에 빠져 헛바퀴 돌리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람이 차에서 내려서 함께 민다고. 그래서 그 유명한 소설 도스트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파 뿌리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심오한 이야기지.

살면서 선행을 베푼 적 없는 인색한 노파가 지옥에 갔어. 지옥불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데 수호천사가 그 노인을 가엽게 보고 하나님께 간청을 하지. ‘생전

- 5 -

에 노파가 거지에게 파 한 뿌리를 준 적이 있으니 선처해 달라’고.

하나님은 그 노파가 파 한 뿌리를 붙잡고 천국으로 오는 것을 허락해. 노파가 신이 나서 파 뿌리를 붙잡고 지옥불을 빠져나오려는데, 그것을 본 다른 놈들도 ‘살려달라’고 그 파 뿌리에 우루루 아귀처럼 달라붙는 거야.

노파가 달라붙는 손길을 밀쳐내며 소리쳤지.

‘이거 내 파 뿌리야!’ 그 순간, 후드득 파 뿌리는 끊어지고 모두 지옥불에 떨어졌다네.” 스스로 파 뿌리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조차 모르는 인간의 이기심에 뼈가 저렸다.

“어쨌든 파 뿌리 하나의 선행이라도 구제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네요.”

러시아 대문호 도스토예스키는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막내 아들 알료사를 통해 많은 걸 이야기 하네. 알료사는 수사가 되려 했지만. 자신이 존경하는 신부가 죽고 그 몸이 썩자 창녀를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지.

‘내가 수사가 되기는 틀렸다. 고결한 성인도 저렇게 되는데 나는 이미 죄인이니 다 글러먹었다.’

그때 창녀가 알료사에게 해준 이야기가 파 뿌리 이야기라네.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 유대인 수용소에서 경험한 이야기 <죽음의 수용소>에서도 그러잖아. 지옥 같은 수용소에서 서로 살려고 악다구니를 쓸 줄 알았던 거야. 극한상황이 오면 악마의 본성이 살아날 거라고.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한 풍경이 펼쳐졌어. 못된 깡패가 남을 위해 봉사하고,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은 나치 장교 중에도 인간적인 사람이 있어. 배신하는 놈은 평소 믿었던 사람이야. 극한에 몰리지 않으면 인간은 모르는 거라네.”

“앞서 말씀하신 자연계, 법계, 기호계의 구분처럼 대상을 사고할 때도 인지와 행위와 판단의 영역으로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맞아, 철학자 칸트가 바로 그 세 가지 영역을 질서 있게 정리했어. 진실(眞)은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루고, 선악(善)의 윤리 문제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고 아름다움(美 )에 관한 것은 <판단이성비판>에서 다뤘지. 그게 모여서 서양의 세 가지 기준인 진선미(眞善美)가 된 거라네.

 

■ 구구단은 무조건 외울 수밖에 없어

- 6 -

”따지고 보면 윤리학을 죽인 게 심리학이야. ‘내가 악해서 저 사람을 죽인 게 아니야. 스트레스를 받아서 그런 거야.’ 이렇게 분석하거든 심리는 윤리적인 게 아니니까. 바닥으로 파고 들어가면 그 바탕에는 유물론적인 사고가 있어. 호르몬, 전두엽… 뇌과학으로 풀면 인간은 뇌의 전달물질에 따라 조종당하는 거야. 호르몬에 따라 흥분되고 스트레스 받고 우울해지고….

“과학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걸 인정 안 해. 과학의 눈으로 보면 인간이라는 표준은 가짜야. 인간을 기준으로 하면 제멋대로가 되거든. 사람은 몹시 제멋대로야. 어디로 튈지 모르지. 개는 훌륭하고. 벼룩은 나쁘고, 까마귀는 흉악하고, 꽃은 아름다워! 그런 저마다의 개별젹인 주관이 과학의 시야에서는 이물질이야. 인간을 없애야 과학이 선명해져. 그게 수학이라네. 수학은 인간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거든. 그래서 구구단은 무조건 외울 수밖에 없는 거야. 그래서 한국에서도 통하고 영국에서도 통하고 달라나에서도 통해. 수리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실제 경험과 상관없어. 어쩌면 신에 가까운 거지. 그런데 말이지….”

스승의 말 끝에 맑은 기운이 돌았다.

“그런데요?”

“문화예술은 그렇지 않아.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간다네. 동물을 이야기해도 인간이 돼. <이솝우화>처럼 과학과 예술이 대립하는 이유는 분명해 과학은 모든 것을 ‘비인간’으로 가정하고 예술은 모든 것을 ‘인간’으로 상상하기 때문이라네. 물론 예술 중에서도 추상예술이 있지. 그런데 그 또한 인간 경험을 바탕으로 한 거야. 인간의 시각 경험으로 미술이 청각 경험으로 음악이, 언어 경험으로 문학이 탄생한다네. 인간의 경험, 그 자체는 추상이 될 수 없거든.”

출발 지점은 달라도 과학과 예술은 또 끝없이 서로를 탐색하지 않나 싶어요. 많은 과학자들이 기하학적인 현대 추상미술을 좋아하고 작곡가들은 수학을 바탕으로 현대음악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 밤사이 내린 첫눈, 눈부신 쿠데타

간간이 여름날의 소나무처럼 질문 없는 답이 숨통을 틔웠다.

“어제 첫눈이 내렸잖아,”

- 7 -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더니 밤에 눈이 와서 새하얗게 깔린거야. 그때 첫마디가 뭐야?”

“와! 눈 왔다!”

“손님이 온 것처럼‘눈이 왔다’고 해. 어릴 때 생각이 났어. 추워서 이불을 쓴 채로 창문 쪽으로 가서는 창호지 문구멍을 뚫어서 바깥을 보는 거야 밤사이 내린 눈, 뜰에 장독대에 수북이 쌓인 눈을 보면, 너무 좋은 거야. 눈 내린 게 왜 그렇게 기쁠까?

낮에 내린 눈보다 밤사이 내려 아침에 보는 눈은 왜 그리 더 반가울까? 눈부시지. 맑지. 해는 비치는데 은빛으로 온 세상을 덮어버렸어.”

“눈이

새하얗게 와서

눈이

새물새물하오.

윤동주 시인의 시 중에 제가 아끼는 시예요.”

“(환하게 웃으며)경이롭지.”

“밤사이 내린 눈은 왜 그렇게 경이로울까요.?”

“변화잖아. 하룻밤 사이에 돌연 풍경이 바뀌어 버린거야. 우리가 외국 갔을 때왜 가슴이 뛰지? 비행기 타고 몇 시간을 날아왔더니 다른 세상이 된 거야. 하루하루 똑같던 날들에서, 갑자기 커튼콜 하듯 커튼이 내려왔다 싹 올라가니까 장면이 바뀌어버린 거야.

그런데 일상에서 유일하게 겪을 수 있는 게 간밤에 내린 눈이라네. 잠 자는 사이 세상이 바뀐 거지. 보통 쿠데타가 밤에 일어나잖아. 자고 일어났더니 탱크가 한강을 넘어 세상이 싹 달라진거야. 밤에 내린 첫눈이 그래. 쿠데타야. 오래 있어 봐. 눈 녹으면 지옥이지. 곧 사라지니까 그만큼 좋은 거야. 아름다운 쿠데타.”

“맞습니다. 아름다운 쿠데타네요.”

“어제 보던 지붕. 어제 보던 길거리. 어제 보던 논밭이 하얀 바다처럼 변했을 때 세상이 얼마나 찬란한가. 눈뜨면 달라진 세상 그런 경이로움을 문학에서는

- 8 -

‘낯설게 하기’라고 하네. 그런면에서 눈과 비는 느낌이 아주 달라. 비는 소리가 나잖아 밤새 비내리면 들창에 사납게 들이치거든. 비에는 경이가 없어. 그런데 눈은? 고요하지. 고요한데 힘이 세.

그거 아나? 서양 사람은 눈을 소리로 표현하라고 하면 빗자루로 쓰는 소리를 내. 한국 사람은 함박눈이 펑펑 내린다고 하거든, 소리가 없어도 ‘펑펑’이라고 표현하는 거야. 얼마나 낭만적인가.”

“봄 여름 가을 겨울… 진달래가 피고 단풍이 지고 눈이 내리는 것 외에 아무런 변화가 없는 시골에서 나는 자랐네. 자연의 변화가 가장 큰 볼거리였지. 죽음을 앞둔 요즘은 꽃이 피고 단풍이 들고 눈이 내리면…더욱 어릴 적 환희에 가득 찬다네. 요즘 사람들은 어떤가. 바깥 창문보다 텔레비전 창문을 더 많이보고 살잖아. 이젠 인터넷 윈도우 열면 클릭 한 번으로 디지털 별세계가 쏟아져 들어와. 그래서 어제 오랜만에 밤사이 내린 눈이 더 별스럽게 좋았던 거야.”

“(활짝 웃으며) 울 수 있는 사람만이 웃을 수 있다네. 짐승 중에는 웃는 짐승이 없어. 가끔 나무늘보가 스마일 배지처럼 웃는 표정을 짓지. 정말 웃을지도 몰라. 늘보가 나무에서 바삐 돌아다니는 인간을 내려다보면 얼마나 웃기겠어. 하루에 몇 센티미터 움직이는 놈이고 그 안에 모든 세계를 안고 있는 놈인데, 똥 눌 때만 내려오거든 똥 누기를 기다리다가 거기서 새끼 낳는 놈들도 있어. 너무 재미있지. 그래서 말이지. 웃음이라고 하는 것은….”

“눈물은 한 방울인데. 웃음은 계량이 안 되나요?”

“눈물 한방울이 모나리자의 미소 같은 거야. 머금은 거잖아.”

“미소, 폭소, 농담, 유머…가르치면서도 선생님은 웃음을 적재적소에 꽂아 넣으셨다. 뇌 속에서 기발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얼굴에 웃음부터 번지셨다.”

“허허. 나는 센티멘털한 글을 많이 썼어. 그 안에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지. ‘웃프다’는 말 참 기가 막혀. 눈물 흘릴 줄 아는 사람이 웃음도 있다네.

길 지나가는 사람 관찰해봐. 혼자 지나가는 사람은 웃지 않아. 다 심각하게 가지 혼자 지나가면서 웃는 놈은 ‘미쳤다’고 다 쳐다보잖아. 그런데 두 사람 이상이면 다 웃고 지나가. 짝지어 가는 사람들 얼굴엔 다 미소가 있어. 관찰해보라고. 웃음은 사회적인 제스처야. 그런데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유머는

- 9 -

미학이야. 아이러니, 패러독스로서의 웃음.

어기여차, 할 때 ‘어기’에는 힘을 주고 ‘여차’에는 힘을 빼거든 ‘여’에서 쉬는 거지. 웃음의 역할이 그렇다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나오는 어릿광대 같은 거야. 그래서 사는 게 다 희비극이야.”

“목적이 있으면 걷는 게 되고 목적이 없으면 춤이 되는 거라네. 걷는 것은 산문이고 춤추는 것은 시지. 인생을 춤으로 보면 자족할 수 있어. 목적이 자기 안에 있거든. 일상이 수단이 아니고 일상이 목적이 되는 것. 그게 춤이라네. 그런 의미에서 글을 쓰고 사는 것이 바로 나에게는 춤이 된다네.”

“지금 이 순간의 불꽃인거죠. 선생님과의 대화가 저는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라스트 덴스…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라는 황홀에 취해, 나는 대놓고 ‘웃픈’얼굴이 되어버렸다.

◎ 8. 죽음의 자리는 낭떠라지가 아니라 고향

-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의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 이익을 내려면 관심 있는 것에서 시작하라

‘내 고향은 달동네. 너무 비루해서 반짝이는 거라곤 별빛밖에는 없지.’

가난과 결핍을 들키지 않으려고 어린 시절부터 시늉이 체질화된 삶을 살던 나는, 그 시늉이 삶을 집어 삼키기 직전에, 버블낀 청담동을 떠나 잉크냄새 진동하는 광화문에 정착했다.

내 인생의 거품경제 시절은 지나갔지만, 한동안 나의 환경을 지배했던 ‘럭셔리’가 무엇인지, 스승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선생님 럭셔리한 삶이 무엇일까요?”

“럭셔리한 삶… 나는 소유로 럭셔리를 판단하지 않아. 가장 부유한 삶은 이야기가 있는 삶이라네. ‘스토리텔링을 얼마나 갖고 있느냐’ 가 그 사람의 럭셔리지.”

“값비싼 물건은 아니고요?”

“(놀라며) 아니야. 똑같은 시간을 살아도 이야깃거리가 없는 사람은 산 게 아

- 10 -

니야. 스토리텔링이 럭셔리한 인생을 만들어. ‘세일해서 싸게 산 다이아몬드와 척 아이 낳았을 때 남편이 선물해 준 루비반지 중 어느 것이 더 럭셔리한가? 남들이 보기엔 철 지난 구식 스카프라도, 어머니기 물려준 것은 귀하잖아. 하나뿐이니까. 우리는 겉으로 번쩍거리는 걸 럭셔리하다고 착각하지만. 내면의 빛은 그렇게 번쩍거리지 않아. 거꾸로 빛을 감추고 있지. 스토리텔링에는 광택이 없다네. 하지만 그 자체가 고유한 금광이지.”

“그런데 그렇게 보면 선생님이야말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럭셔리한 인생을 사셨네요. 88년 인생 전체가 스토리텔링으로 넘쳐나지 않습니까? 게다가 사후에도 이어질 이야기를 지금하고 계시니 ….”

“(미소 지으며) 내 육체의 DNA는 자식들에게 생물학적으로 이어지겠지. 자네가 말한 대로 내 이야기의 DNA는 … 책의 저작권이 70년이니, 내가 죽어도 70년은 더 살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는 항상 대화 속에서 만들어지나요?”

“<플라톤의 대화편>을 보게. 위대한 철학이 왜 대화에서 나왔겠나. 대화는 변증법으로 함께 생각을 낳는 거야. 부부가 함께 어린아이를 낳듯이, 혼자서는 못 낳아. 지식을 함께 낳는 것. 그게 대화라네. 내가 혼자 써도 그 과정은 모두 대화야. 내 안에 주체와 객체를 만들어서 끝없이 묻고 대답하는 거지. 자문자답이야. 그래서 모든 생각의 과정은 다이얼로그(작중 인물들이 주고 받는 이야기)일세. 과거엔 나 혼자서 생각하고. 나 혼자서 다 만들어 낸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닌 한 커트의 프레임

* 프레임 : 뼈대의 구조, 틀, 액자, 테두리

“어떤 대화였습니까?”

“그것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였네. 내가 그랬지. 죽음은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얘야 밥 먹어라‘하는 것과 같은 거라고 웃겨주려고 한 이야기였는데, 농담 속에 진실을 말해버렸어. 죽음이라는 게 거창한 것 같지? 아니야. 내가 신나게 글 쓰고 있는데 불쑥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 11 -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들어오라는 명령이지. 어릴 때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잖아. 이제 그만 놀고 생명으로 오라는 부름이야…그렇게 보면 죽음이 또 하나의 생명이지. 어머니 곁, 원래 있던 모태로의 귀환이니까.”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잖아. 탄생의 그 자리로 가는 거라네. 그래서 내가 일관되게 얘기하는 것은 죽음은 어둠의 골짜기가 아니라는 거야. 까마귀 소리나 깜깜한 어둠이나 세계의 끝, 어스름 황혼이 아니지.”

“눈부시게 환한 대낮이지요.”

“5월에 핀 장미처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대낮이지. 장미밭 한복판에. 생의 가장 화려한 한가운데. 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야. 고향이지.”

“젊었을 때는 관심이 최우선이었어. 사오십대 되니 관찰을 알겠더군. 늙어지니 관계가 남아. 관계가 생기려면 여러 대상에 한꺼번에 기웃거리면 안 돼. 데이트하는 곳에 가봐. 열 명 있어도 한 명만 보이잖아. 그 한 명만 관찰하는 거잖아. 사진 찍을 때 전체 풍경이 잡혀도 내 눈이 가는 한 곳에 초점 맞추듯이, 어차피 우리는 전체를 찍을 수 없어.”

인생은 파노라마가 아니야. 한 커트 프레임이야. 한 커트 한 커트 소중한 장면을 연결해 보니 파노라마처럼 보이는 거지. 한 커트의 프레임에서 관찰이 이뤄지고 관계가 이뤄져. 찍지 못한 것. 버렸던 것들이 나중에 다시 연결돼서 돌아오기도 해.“

평생 혼자 걸을 줄 알았는데 지팡이의 도움을 받고, 부축해 주는 이가 나타나더라고. 그렇다고 몰락하고 완전히 의존하는 사람이 됐을까? 아냐. 반만 의존하잖아. 업혀가는 게 아니니까. 마지막 업혀가는 건 죽음이지. 완전한 의존은 내가 존재하지 않는 거야. 그렇게 나라는 사람이 없어지는 과정에서 ‘상호성’을 느끼고 있다네. 지팡이에 무게를 실으면서 중얼거리는 거야.

‘완전히 독자적인 힘이라는 게 없구나!’”

■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겨울이 깊어갈수록 그의 몸은 메마른 나무처럼 수척해졌고, 점점 식욕을 잃어갔다. 함께 앉은 점심 식탁에서 빈 수저를 달그락거리는 시간이 길어졌다. 나

- 12 -

는 괜스레 장난이 치고 싶어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이제 사랑과 연애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요? 젊은 날의 이어령은 어떻게 사랑 했나요?”

“나는 연애를 제대로 못했어. 관찰하는 사람이 어떻게 연애를 제대로 했겠나. 관찰하면 연애 못해. 콩깎지가 씌워서 훅 빠져들어야 연애를 하지.

대학 다닐 때 사랑할 뻔한 여자친구가 하나 있었어. 그런데 운 나쁘게 전차를 같이 탄 거야. 둘이 꽤 가깝게 동그란 손잡이를 쥐고 가다가 전차가 확 서는 거야. 순간 균형을 잃고 자세가 흐트러지면서 그 여학생의 꿈틀하는 움직임 그리고 그 표정…. 그렇게 그와는 끝이 났어.”

“‘아!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김광섭의 시구처럼, 시간이 지나면 다시 못본다는 마음에 더 애절해지는거죠.” “한 번 밖에 못 만난다. 그건 상대가 여자든 남자든, 가슴이 저며오는 거야. 지금 이 순간은, 오늘 하루는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지. 그때 내 앞에 연필 한 자루도 바삐 걸어가는 행인 한 사람도 새롭게 보이는 거야. 마치 사형수가 보듯 세상을 보는 거지.” 사형수라는 말에 마음이 아렸다.

“죽음을 앞둔 마음으로 ….”

“도스트옙스키가 사형 5분 전에 쓴 글 봐. 사형수한테는 쓰레기도 아름답게 보인다네. 다시는 못 보는 거니까. 날아다니는 새, 늘 보는 새가 뭐가 신기해? 다시는 못 본다. 저 새를 다시는 못 본다… 내 집 앞마당에 부는 바람이 모공 하나하나까지 스쳐간다네. 내가 곧 죽는다고 생각하면 코끝의 바람 한 줄기도 허투루 마실 수 없는 거라네. 그래서 사형수는 다 착하게 죽는 거야. 마지막이니까.

나는 사람들이 책 읽는 이유가 두 가지라고 생각하네. 내가 모르는 걸 발견하려고 읽는 사람이 있고, 내가 아는 걸 확인하려고 읽는 사람이 있어. 대부분은 확인하려고 읽는 거야.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이 사람도 이렇게 생각하다니 , 안심해도 되겠어.’

‘이게 진리지? 내 생각이 맞았네.’

그런데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생각이 아니야. 상기하는 거지. 이미 알던 것을 깨워서 흔드는 거지. 책이라는 건 그렇게 흔들어 주는 역할을 해. 머리를 진동 시키는 거지.

- 13 -

◎ 9. 바보의 쓸모

‘너 존재했어?’

‘너 답게 존재했어?’

‘너 만의 이야기로 존재했어?’

■ 탕자, 돌아오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사랑은 얼마나 새로운 사랑인가요?“

”(눈을 빛내며) 성경은 참 새로워. 정말 새로워.“

”성경의 어떤 면이 그렇게 새롭다는 거지요?“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거든, 성경처럼 우리의 상식을 통째로 뒤집는 책은 없어.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양을 찾아가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나. 그런데 생각해보면 기가 막힌 얘기야. 자식 키워본 사람은 알지. 성한 자식보다 학교도 안 다니고 말썽 피운 놈이 더 눈에 밟히거든. 그게 사랑이잖아. 회사에서는 무능한 놈 해고하면 돼. 그런데 어머니는 자식을 못 바꿔. 다른 애하고 바꿀 수 있어? 못 바꾸잖아. 그게 한 마리 양을 버리지 못하는 예수님 얘기야. 숫자로 따질 수 없다는 거지.

“이보게. 성경의 ‘탕자’ 이야기를 생각해 보게나. 자기한테 효도하는 큰 아들 놔두고, 집 떠났던 작은 아들이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오니 반가워하잖아. 탕지이기 때문에, 그 한 마리 양이 아흔아홉 마리보다 뛰어날 거라는 생각은 왜 못하나?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제자리에서 풀이나 뜯어 먹었지. 그런데 호기심 많은 한 놈은 늑대가 오나 안 오나 살피고, 저 멀리 낯선 꽃향기도 맡으면서 지 멋대로 놀다가 길잃은 거잖아. 저 홀로 낯선 세상과 대면하는 놈이야. 탁월한 놈이지. 떼로 몰려다니는 것들, 그 아흔아홉 마리는 제 눈앞의 풀만 뜯어 먹었지. 목자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닌 거야. 존재했어?”

“길 잃은 양은 자기 자신을 보았고 지평선을 보았네. 목자의 엉덩이만 쫓아다닌 게 아니라, 멀리 떨어져 목자를 바라본 거지. 그러다 길을 잃어버린거야. 남의 뒤통수만 쫓아다니면서 길 잃지 않은 사람과 혼자 길을 찾다 헤매본 사람 중 누가 진짜 자기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겠나. 길 잃은 양은 그런 존재라네.”

- 14 -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가 생각납니다.”

“앙드레 지드가 서른여덟 살에 쓴 단편이 <탕자, 돌아오다>라네. 그걸 읽으면서 나는 눈물을 흘렸어. 집 돌아온 아들이 아버지에게 차마 못 한 말을 어머니에게 고백하지.

‘나는 아버지가 잡아주는 기름진 양보다. 가시밭길 헤매다 굶주림 속에 따먹은 썩은 아가베 열매가 더 달았어요’라고.

앙드레 지드의 이런 경지를 모르면 문학을 못 하네.”

“계단 헛딛지 마라. 쓰러져. 발밑 조심해. 쓰러지면 돌아오지 못해.’ 지드는 <탕자 돌아오다>를 쓰고 기독교인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네. 나는 생각이 달라. 이 정도의 성경을 읽을 줄 모르면 예수님을 뭐하러 믿나? 예수 자체가 바보 예수잖아. 보통 사람의 눈에는 예수가 바보가 아니고 뭐겠나. 바보니까 그렇게 죽지. 누가 그렇게 죽어. 그런데 예수의 바보스러움, 앙드리지드의 이 바보스러움, 스티브 잡스가 ‘스테이 플리시’라고 할 때의 그 바보스러움을 자네는 깨달아야 하네.”

■ 바보로 살아라.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경계하라

내가 문화부 장관을 하던 시절, 정원식 총리시절이었고, 곧 개각이 단행될 예정이었어. 예술학교 만들고 그만두려고 교육계 반대를 무릅쓰고 개각 직전에 안건을 올렸지. 마지막 국무회의에서 나한테 딱 5분을 줬지. 그게 한예총 탄생 5분의 비사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물었지.

“동자부 장관! 당신이 그랬지요? 문화부에만 학교를 만드는 특권을 주는 게 말이 되냐고? 좋아요. 당신이 어린애를 낳았는데 그 애가 기저귀 찬 채로 ‘여기 파라’하면 석유가 나오고, ‘저기파라’ 그러면 가스가 나오고. 그런 애가 있어요? 있다면 에너지 학교 만드세요.”

그랬더니 사람들이 ‘와’하고 웃어.

농림부 장관! 당신이 어린애 낳았는데 여섯 살도 안 된 애가 하루에 열 명이 심어야 할 모를 혼자 심으면 농림학교 만드세요. 그런데 문화영역에서는 네 살짜리 모차르트와 피카소가 나와서 ‘아버지, 그게 틀렸어요’하고 가르쳐요. 이런 천재들을 보통 애들처럼 길러서 대학 입학시키자고요? 그 사이 애는 다 망가져요.

- 15 -

천재가 있으면 특별 교육을 시켜야 해요. 특권이 아니에요. 오히려 불쌍한 애들이지.

그게 예술가예요. 예술가들은 그 재능 빼면 세상 못살아요. 아무 것도 못해서 범죄자 돼요. 그러니 자비를 베풀라는 말이에요. 학교 만들어 주는 것이 자비예요.

그 얘기 듣고 사람들이 ‘와’웃고 잠시 침묵했어. 총리가 그럼, 통과된 걸로 알겠습니다. 하고 땅땅땅 때린거야. 그 순간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생겨났다네. 한예종 아이들이 세계적인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오면 내가 그래.

“너희들이 five minute kids. 5분 동안 태어난 아이들이야.”

“신의 눈곱, 신의 귀지를 몸에 붙이고 태어난 아이들이군요!”

“그래서 바보야. 쓸모를 따지는 인간 세상에서는 바보지.”

“알바트로스 라는 새가 있다네.”

“날개가 일이 미터되는 큰 새 말이지요?”

“그래, 알바트로스는 하늘을 날 때는 눈부시지만, 날개가 커서 땅에 내려오면 중심을 못 잡고 기우뚱거려. 사람이 와도 도망 못 가고 쉽게 잡혀서 바보새 라고 한다네.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알바트로스가 땅에 내려오면 바보가 되는 거야. 그게 예술가야. 날아다니는 사람은 걷지 못해. 예술가들은 나는 사람들이야. 시인 보들레르처럼, 이상처럼. 그들은 알바트로스에서 자기를 본 사람들이지. 지상에서 호랑이처럼 늑대처럼 이빨 있고 발톱 있고 잘 뛰는 놈이라면 예술가가 되겠나. 알바트로스니까 예술 하는거야.”

“예술에 한정시키지 않더라도,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세요?”

“타고나. 모든 아이들이 다 타고나. 천재로 태어나서 둔재로 성장할 뿐이지. 하나님이 주신 것을 훼손하지 않고 그대로 갖고 사는 사람들이 천재라네. 그 재능을 어머니가 줬겠어? 아버지가 줬겠어? 학교 선생님이 줬겠어? 하늘이 준 거지. 태아는 하늘이 준 재능으로 엄마 뱃속에서 10개월을 살아. 그리고 태어날 시간은 스스로 정해서 나온다네. 제왕절개 수술을 하지 않는 한 그래. 아이는 스스로 태어나는 거야. 엄마의 의지로 낳은 게 아니야. 아이가 아이의 의지로 나온 거지.”

“요즘엔 생각도 좌우로 진영 나눠서 정해주더구만. ‘저건 좌니까 빨갱이! 저

- 16 -

건 우니까 꼴통.’ 자판기 비슷해.”

“정의냐, 불의냐도 진영에 따라 답을 내죠.”

“(혀를 차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세. 지금 내가 자네와 이 정도 대화를 하는 것도 내가 자판기가 아니기 때문이라네. 답이 정해져 있으면 대화해서 뭘 하겠나?”

“절대로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을 주의하게나. 큰일 나. 목숨을 내건 사람들이거든.”

“신념이 위험한가요?”

“위험해. 신념처럼 위험한 게 어디 있나?”

“왜 위험하죠?”

“육탄 테러하는 자들이 다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라네. 나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팔백만 명 유태인을 죽였어. 관점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인간사인데. ‘예스’와 ‘노우’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거든. 메이비(maybe)를 허용해야 하네. 메이비가 가장 아름답다고 포크너가 그랬잖아. 메이비 덕분에 ‘메이비’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

‘인생은 나그네길’이라고 사람은 경유지, 반환지가 있을지언정 목표는 없네. 평생을 모험하고 방황하는 거지. 길 위에서 계속 새 인생이 일어나는 거야. 원래 길의 본질이 그래. 끝이 없어. 이어지고 펼쳐질 뿐.”

■ 꿈은 이루는 게 아니라 지속하는 것

“길 위의 인생은 안식이 없지 않습니까? 신념은 거짓 안식일지언정 비빌 언덕이라도 되는데 말입니다.”

“신념에 기대 사는 건 시간 낭비라네. 말 그대로 거짓이야. 신념 속에 빠져 거짓 휴식을 취하지 말고, 변화무쌍한 진짜 세계로 나와야 하네.”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집에 안주하면 안 되나요?”

“프로세스! 집이 아니라 길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나. 나는 멈추지 않았네. 집에 정주하지 않고 끝없이 방황하고 떠돌아다녔어. 꿈이라고 하는 것은 꿈 자체에 있는 것이라네. 역설적이지만, 꿈이 이루어지면 꿈에서 깨어나는 일밖에는 남지 않아. 그래서 돈키호테는 미쳐서 살았고 깨어나서 죽었다고 하잖나. 상식적 사고로는 이해가 안 되는 헛소리일 수도 있어, 하하.”

- 17 -

남의 신념대로 살지 마라

방황하라

길잃은 양이 돼라

 

‘구하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다.’의 성경 구절을 실현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길을 잃어야 한다는 선생의 말은 깊고도 깊어 호흡을 가다듬어야 했다. 그것은 용기의 과제이기도 했고, 믿음의 문제이기도 했다.

길을 잃어도 영영 미아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 거친 길에서 내 손으로 따먹는 열매, 그 열매에서 맛보는 목자의 은혜와 마침내 성숙한 탕자로 돌아올 집이 있다는 안식까지.

“나는 계몽도 영광도 멀리하네. 그저 내가 좋아서 할 뿐이지. 88올림픽 개폐막의 행사만 해도 사람들은 날더러 ‘애국하셨습니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네. 누가 날더러 맘껏 놀라고 그 넓은 운동장을 주고 전 세계인을 관객으로 몰아주겠나. 결코 국가를 위해 국민을 위해 한 일이 아니야. 너무 즐거워서 돈 한 푼 받지 않고 신나게 일한 거지.”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일 그 자체의 즐거움에 빠지셨군요. 그 즐거움의 결과가 애국이 된 거고요. 신기합니다. 나를 위한 놀이가 남을 위한 일이 되는, 그 순수한 자기 몰두의 사이클이!”

“강화도에 화문석이 유명하잖아, 꽃 화자에 무늬 문자를 써 화문석(花紋席)이거든 그런데 나는 무늬가 있는 것보다 없는 게 더 좋아서, 그걸 달라고 했지. 그런데 그 무문석이 더 비싸다는 거야. 그래서 따졌네.

‘이보시오. 어째서 손도 덜 가고 단순한 이 무문석이 더 비쌉니까?’

‘모르는 소리 마세요. 화문석은 무늬를 넣으니 짜는 재미가 있지요. 무문석은 민짜라 짜는 사람이 지루해서 훨씬 힘듭니다.’

그 소리를 듣고 내가 무릎을 쳤어.”

“인생도 그렇다네. 세상을 생존하기 위해서 살면 고역이야. 의식주만 위해서 노동하고 산다면 평생이 고된 인생이지만, 고생까지도 자기만의 무늬를 만든다고 생각하며 즐겁게 해내면, 가난해도 행복한 거라네.”

- 18 -

■ 성실한 노예의 딜레마

“내 인생이 무문석이 될지 화문석이 될지….”

“그 차이가 뭔 줄 아나? 리빙과 라이프야. 의식주와 진선미지. 월급 더 많이 받고, 자식이 좋은 학교 가고… 이게 목적이 되면 그건 리빙이야. 진선미에서 오는 기쁨이 없지. 그러니까 돈을 더 벌지 몰라도 인생이 내내 고된 거야. 진선미를 아는 사람은 밥을 굶어도 웃는다네.

공자가 그러지 않나.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는 식사를 잊어 버린다고. 자는 걸 잊고 먹는 걸 잊어, 의식주를 다 잊어버리는 거지. 그게 진선미의 세계고,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다움’의 세계야.”

“착실한 노예가 있었어. 시키는 대로 해도 되니 이 노예는 행복했네. 하루 지나면 해 뜨고 밥 먹고 열심히 일하고. 생각할 필요가 없으니 ‘이 세상에 이렇게 편한 삶이 다 있나’ 좋아했지.

어느 날 주인이 말했네.

‘큰 감자는 오른쪽 구덩이에 넣고 작은 감자는 왼쪽 구덩이에 넣어라.’

그 노예는 해가 떨어지도록 들에서 돌아오지 못했네. 엉엉 울고 있었어. 주인이 물었겠지.

‘성실한 네가 왜 이런 쉬운 일을 못하고 울고 있느나.’

‘주인님 감자를 잡을 때마다 이걸 큰 감자로 넣을지 작은 감자로 넣을지. 도무지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너무 힘이 들어요. 앞으로 저에게 이런 일은 시키지 마세요.’

무슨 뜻인지 알겠나? ‘정해진 대로 살면’ 그게 정말 행복일까. 아니야 가짜 행복이네.

올림픽 때 내가 운동장에서 무엇을 보여줬나? 여섯 살 짜리 한 아이가 자기 혼자 굴렁쇠를 굴리는 모습을 보여줬잖아. 굴렁쇠를 굴리면서 파란 잔디 위를 지나가잖아, 그게 노동인가? 놀이지. 이해할 수 있겠지. 내가 억만금을 줘도 단체로 흔들면서 신념을 전시하는 매스게임하고 그 놀이를 바꾸겠나?”

“자네 무문석 짤래? 화문석 짤래?”

순식간에 화살이 내게로 왔다.

- 19 -

“이 대화가 노동이 될래? 예술이 될래? 그게 자네에게 달려있네. 책 나와보면 알겠지. 자네가 노동 한 건지 예술 한 건지. 쫄지 마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말을 나눴어. 내년 3월이면 나는 이 세상에 없을 거야. 그때 책을 내라고. 살아 있을 때는 내지 마, 살아 있을 때 내면 내가 멋쩍잖아.”

◎ 10. 고통에 대해서 듣고 싶나?

“인간이 함께 사는 게 그렇게 힘든 거라네.

개인이 혼자 있는 것도 그렇게 힘든 거라네.”

■ 나는 물독인가 두레박인가 돌멩이인가

“정상에 머무르지 않는 진짜 이유가….”

“갈증이 사라질까 두려워서야. 내겐 갈증이 필요하다네. 나는 그것을 두레박 같은 갈증이라고 불러. 두레박은 물을 푸면 비워야 해. 그래서 영원히 물을 풀 수 있어. 독은 차면 그만이잖아. 채우는 게 목적이니까. 반면 두레박은 물의 갈증을 만들지.”

“그게 두레박의 속성이지. 영원히 채울 수 없다는 것, 나는 사람들 지나가는 거 보면 딱 감이 와!”

‘저 사람은 두레박이구나! 저 사람은 물독이구나!’

물독들은 제 인생을 남만큼 물로 채우겠다고 아웅다웅하며 살아. 반면 두레박들은 눈이 반짝반짝해. 좀 까칠하고 불만도 많고 빨리 걷지. 딱 두레박이야. 두레박들은 원하는 거 줘도 금방 딴 거 할 사람들이야. 붙들려고 하면 떠나버려. 지적 보헤미안인 거라. 내가 늘 말하는 우물 파는 사람들이라네.

“나에게 행복은 완벽한 글 하나를 쓰는 거야. 그런데 그게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계속 쓰는 것이고.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글은 실패한 글이라네. 지금까지 완성된 성인들 중에 글을 쓴 사람은 없어. 예수님이 글을 썼나? 공자가 글을 썼나? 다 그 제자가 쓴 거지. 역설적으로 말하면 쓰여진 글은 완성되지 못한 글이야. 성경도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인간이 쓴 글이고, 세상의 모든 경전, 문자로 쓰여진 것은 결국 완성되지 못한 그림자의 흔적일 뿐이네. 나 또한 완성할 수 없으니 행복에 닿을 수 없어. 그저 끝없이 쓰

- 20 -

는 것이 행복인 동시에 갈증이고 쾌락이고 고통이야. 어찌 보면 고통이 목적이 돼버린 셈이지.”

■ 비극 속에서만 보이는 영혼의 움직임

“유럽과 미국의 역사를 보게. <마농 레스코>라는 소설에도 나오지만 유럽에서 창녀, 깡패, 죄수들을 전부 배에 태워 미국으로 쓸어 보내잖아. 그렇게 해서 남은 사람들로 살아가면 그게 건전한 사회인가? 아니라네. 반면 미국은 그런 쓰레기 취급받던 인간들이 함께 모여 성장해 간 거야. 상처와 활을 동시에 가졌기 때문에 구대륙이 아닌 신대륙에서 새로운 종교, 정치, 문화가 끓어오를 수 있었던 거야.

알 카포네가 있는 미국이 된 거라고. 지금도 대낮에 총질하고 민주주의 왕국이라고 하면서 하면서도 암살 당한 대통령이 대체 몇 명인가 말이야. 그러나 그게- 미국의 힘이고 희망이라네. 일사불란하게 투표하고 통제하는 사회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 미국 보고 엉망이라고 하는데 괜한 걱정이야. 그 ‘엉망진창’이 어마어마한 힘이라네.”

“가족도 마찬가지야. 집안에 깡패 같은 놈이 하나 있고 탕자 같은 놈이 하나 있어야 정이 두터워지지. 전부 모범생만 있으면 효자도 안 나와, 전부 효자인데 무슨 효자야. 불효자가 있으니 효자도 있는 거지.”

상처와 함께 있는 것. 그게 인간의 모습이고 가족의 모습이고 나라의 모습이라고 그는 피를 토하듯 말을 토했다.

■ 인간은 지우개 달린 연필

“화제를 좀 바꿔볼까요? 요즘엔 잠자리에서 어떤 꿈을 꾸세요?”

“동양 사람에게 꿈은 깨야하는 것이고 이룰 수 없는 헛된 것이고 악몽이지. 서양은 달콤해. 드림이잖아. 무지개를 좇아서 식민지를 만들고 나노 테크놀로지를 만들고 로봇을 만들었지. 전부 꿈이 이끈 거야. 나는 두 가지 꿈을 다 꾸네. 깨어나는 꿈도 있고 목마름의 꿈도 있어. 목마름의 꿈은 계속 꿔. 이뤄지면 또 꾸지.”

“인간이 갖은 재앙을 겪고 코로나를 겪고, 독재 밑에서 고생하고, 유대인을

- 21 -

수백만 명을 죽였어도 우리가 그런 한 사람 덕분에 인간이라는 말을 쓰는 거라네. 인간이 저지른 죄악을 보면 정말 사표를 쓰고 ‘인간 안 할래’ 하고 싶지만 아직도 내가 사람의 이름표를 달고 사는 건 <뷰티풀 마인드>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 덕분이야.”

“비겁하고 잔인한 존재이면서도 놀라울 만큼 경이로운 피조물이 또 인간이지요.”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아. 인간은 어쩌면 지우개 달린 연필이야.”

“지우개 달린 연필이라니요?”

“연필은 기억하고 남기기 위해 있고, 지우개는 흔적을 지우기 위해 있잖아. 그런데 그게 어떻게 한 몸이 되어 지우개 달린 연필로 탄생했을까? 알고 보니 지우개 달린 연필은 한 형제가 낸 특허품이야. 그림 그리던 형이 밤낮 지우개를 잃어버려서 동생에게 찾아오라고 시키거든. 동생이 그러지 말고 지우개를 연필에 달아서 쓰자고 해. 그게 대박 나서 돈을 엄청 벌었어.

그런데 지우는 기능과 쓰는 기능을 한 몸뚱이에 달아놓은 그게 우리 인생이잖아. 비참함과 아름다움이 함께 있고 망각과 추억이 함께 있으니 말일세.”

■ 인간은 천사로 죽을까 악마로 죽을까

“선생님 인생에는 굴렁쇠 소년이 계속 나타나는군요. 바퀴, 눈물, 햇빛, 정적의 이미지로. 어머니는 어떤가요? 어머니는 절대 지우개로 지울 수 없는 기억이잖아요.”

“그럼. 나는 특히 어머니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더 선명하지. 나는 늦게까지 어머니 젖을 먹어서 그게 흉이었어. 그래서 어머니 하면 항상 밥으로 남아. 바깥에서 놀면 ‘밥 먹어라’하고 부르던 어머니 도시락 싸주던 어머니.”

“10대 때 돌아가셨죠? 한창 어머니 정성이 많이 들어갈 때인데요.”

“(쓸쓸하게) 그렇다네.”

어머니는 나한테 그래. 지금도 기쁜 일이 생기면 홍수환이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하듯이 속으로 중얼거리는 거야,

‘엄마, 나 이거 해냈어.’

‘엄마 나 이 책 나왔어.’

어머니는 절대로 내 기억 속에서 돌아가시는 법이 없었어.

여든여덟 살이 되어서도 어머니가 그토록 그리운 것은 어머니는 선생에게 밥

- 22 -

이었고 책이었기 때문이리라. 돌상에서 책을 잡은 것을 두고두고 자랑삼에 얘기 했다는 어머니.

“한국 어머니들의 모정이 더 애틋한 것 같습니다.”

프랑스 교육철학의 기틀을 세운 장 자크 루소도 어머니의 사랑을 몰랐던 사람 아닌가. 당시 유럽에서는 양자 제도가 있어서. 가족들은 애들을 다 시골에서 돈 줘서 키워왔어. 똥 오줌은 농부들이 다 받아내고 애는 다 커야 데려왔어. 일본도 사도꼬라는 게 있어서 애들을 시골에서 키우거든. 그러고 보면 우리나라 사람이 자식 사랑이 유별난 거지. 요즘 애 안 낳겠다는 것도 너무 잘 키우고 싶어서 그런 거잖아.

 

이즈음 선생님의 이야기 톤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뭐랄까. 첫 라스트 인터뷰 때의 감상적인 톤에서 나와 더 넓고 단단해져 있었다.

죽어가는 이어령보다. 죽어가는 이어령을 바라보는 이어령이 더 자주 등장햇다. 나 또한 그 모습이 더 이상 놀랍지 않았고, 그가 비탄에 빠지기보다 어린아이처럼 승리에 찬 미소를 짓는 걸 보는 게 즐거웠다. 스승의 지혜로운 분신술은 내겐 황홀경이었다.

“예전에는 바깥에 비도 추적추적 오고 내가 한참 슬펐을 때 대화를 나눴지. 지금은 반은 개구쟁이 어린애로 바뀌었어. 그때는 촌스러울 정도로 진지했지. 지금은 그것조차 물리치고 드라이해 졌어. 웃고. 웃기고.”

 

- 다음에 3부가 이어집니다. -

 

2022. 4. 12.

- 23 -

 

 

반응형

'독서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거시기 머시기  (0) 2022.05.11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3)  (0) 2022.04.25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0) 2022.04.13
인생의 답은 내 안에 있다 (3)  (0) 2022.03.24
인생의 답은 내 안에 있다 (2)  (0) 2022.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