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1. 9. 17:45ㆍ독서후기
크리스마스는 왜?
- 마크 포사이스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백과사전 -
■ 마크 포사이스(Mark Forsyth)
0 작가. 언론인이자 편집인, 1977년 런던 출생
0 언어에 대한 무한한 열정과 방대한 지식의 소유자
0 지금까지 누구도 의문을 품지 않았던 크리스마스의 수상한 풍습 그리고,
그 뿌리를 파헤침
0 걸어 다니는 어원사전 : 영어 단어의 어원 및 흘러온 위대한 문장들의 비밀 을 파헤친 <문장의 맛> 등을 펴냄
■ 오수원 번역
0 서강대 영어 영문과 졸, 동 대학원 석사
0 전문 번역가 활동 : <문장의 맛>, <걸어 다니는 표현 사전>, <빨강머리 앤 전집>, <처음 읽는 바다 세계사>, <100가지 동물로 읽는 세계사> 등 다수
◎ 머리말
‘어리석고 바보 같고 위대하고 거대한’ 크리스마스의 진실
머릿속에 그림을 하나 떠올려보라. 어떤 남자가 죽은 나무 옆에 앉아있다. 밖은 아니고 실내다. 남자는 왕관을 쓰고 있다. 천장에는 웬 기생식물이 덩그러니 걸려 있다. 성폭행을 승인하는 나뭇가지다. (크리스마스에 걸어두는 겨우살이를 말한다) 남자는 10세기 중부 유럽의 살인 희생자에 관한 노래를 혼자 흥얼거리는 중이다. 16세기 핀란드의 가락을 사용해 만든 노래다. 그 전에 남자는 집에 있는 자식들에게 가택침입에 관해 말해두었다.
객관적으로 볼 때 크리스마스란 분명 미친 짓거리라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정신 나간 짓, 머리가 돌아버리지 않고서야 아무도 하지 않을 짓들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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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백화점에 얽힌 기막힌 이야기가 있다. 일본인들이 크리스마스라는 서양의 명절을 모르던 시절의 이야기다. 이 백화점의 소유주는 서양에서 크리스마스 시즌에 사람들이 흥청망청 쇼핑한다는 풍습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고 그 풍습의 도쿄에도 도입하고 싶었다. 회장은 조사차 직원 몇 사람을 출장 보냈고,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자 십자가에 못 박힌 거대 산타클로스가 중앙 쇼윈도를 장식했다.
다른 나라의 터무니없는 크리스마스 관행을 두고 웃다가 웃음을 그친 후 우리는 또 언제 그랬느냐는 듯 크리스마스트리 꼭대기에 요정을 붙이고 난롯가에는 양말을 걸어 놓는다.
왜? 왜 우리는 이렇게 희한한 짓들을 벌이는 걸까? 도대체 왜 우리는 해마다 몇 주 동안 정신 줄을 풀어서 못에다 곱게 걸어놓은 다음 세척의 배를 보았네(영국인들이 즐겨 부르는 크리스마스 캐럴. 세 척의 배가 12세기 동방박사의 유해를 쾰른의 성당으로 옮겨온 일을 가리킨다는 설도 있고, 사막의 낙타를 가리킨다는 설도 있다.)라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광기의 바다로 곤두박질치는 것일까? 이 광기 자체도 기이하지만, 더 신기한 점은 우리가 그걸 이상하다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풍습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묻는 사람은 없다.
크리스마스 풍습은 죄다 이교도 전통이다. 상당히 많은 부분이 그렇다는 말이다. 크리스마스에 우리가 벌이는 일들은 모조리 수천 년 전 기독교 이전의 것이라는 주장인데, 그 근거는 대개 다음과 같은 노선을 따른다. ‘산타클로스에게는 턱수염이 있다. 오딘(북유럽 신화 최고의 신)도 턱수염이 있었다. 그러니 산타클로스는 오딘이다. 또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왕인 길가메시도 턱수염이 있었다.
또 하나의 주장은 크리스마스 풍습은 모조리 빅토리아 시대에서 유래한 전통이라는 것이다. 축제 전체는 찰스 디킨스와 코카콜라 회사의 발명품이고, 이들이 자기네가 개발한 청량음료와 길고 긴 소설을 팔아먹으려 축제를 이용했다는 것이다. 이 답이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런 가설을 말하는 사람은 무지하게 냉소적이고 똑똑하다는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 유래에 대한 두 가지 가설에 모두 속하는 좋은 사례는 겨우살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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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식물 아래 서서 입맞춤을 하는 풍습이다. 우선, 이 입맞춤 풍습이 이교도 전통에서 왔다는 설명을 살펴보자. 꽤 괜찮은 책 여러 권을 보면 이 입맞춤 전통이 발드르(북유럽 신화의 빛의 신, 정의의 신, 오딘의 둘째 아들)의 죽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발드르는 겨우살이로 만든 화살에 맞아 죽었다. 발드르의 어머니, 이름도 참 안쓰러운 프리그(성관계를 뜻하는 속어)는 비통함에 울부짖었고 어머니의 눈물은 하얀색 겨우살이 열매가 되었다. 아들의 시신을 불이 잘 붙는 긴 배에 실어 화장하면서 프리그 여신은 이 자그마한 풀로 고통받는 사람이 다시는 생기면 안 된다며, 이제부터는 그 풀 아래서 사람을 죽이지 말고 대신 입을 맞춰야 한다고 엄숙히 선언했다.
겨우살이 아래서 입맞춤을 하는 풍습은 워싱턴 어빙이라는 찰스 디킨스의 친구가 1819년에 만든 것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어빙은 미국 작가로 미국 독자들을 위해 <옛 크리스마스 Old Christmas>라는 책을 썼다. 영국의 어느 시골집에 머무는 동안 관찰했던 근사한 옛날 크리스마스 전통에 관해 쓴 에세이집이다. 이 책에서 어빙은 겨우살이 아래서 입맞춤하는 전통에 관해 이야기한다.
<옛 크리스마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처음엔 미국에서, 그 후에는 이야기의 배경격인 영국에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어빙의 책은 크리스마스가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다루는 표준서가 되었고, 바로 그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표준서가 되었다. 대서양 양편에 자리 잡은 영국과 미국의 시민들은 워싱턴의 <옛 크리스마스>를 진짜 크리스마스,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전통 그대로의 크리스마스에 대한 매뉴얼로 읽었고, 책에 나오는 풍습을 자기 집에서 그대로 모방했다.
이제부터 나올 내용은 천사나 신비주의자 들의 진실과는 아무 상관도 없다. 앞으로 펼쳐질 이야기는 무엇이 어떻게 언제 벌어졌는지에 관한 내용들이다. 왜 우리는 어마어마한 양의 육류를 먹어대며 크리스마스를 축하할까? 게다가 도대체 왜 이 모든 걸 12월 25일에 하는 걸까?
◎ 1장 크리스마스는 왜 하필 12월 25일일까?
옛날 옛적에는 크리스마스 같은 게 없었다. 세월이 지나 베들레헴이라는 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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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수가 태어났다. 그 후에도 크리스마스 따윈 없었다. 수백 년 동안.
초기 기독교인들의 달력은 아주 단출했다. 우리 주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부활절이 있었고, 그 후론 기쁨에 찬 축하 행사가 50일 동안 이어졌다. 기쁨에 찬 행사라고 해봐야 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이었지만, 로마인들의 기독교 박해로 사자 밥이 되는 것 이외에 이들에게 할 일이 많지 않았다는 뜻이다. 부활절 시기는 조금씩 바뀐다. 부활절은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혔던 유월절과 같은 시기에 기념해야 하고, 유월절은 춘분 직후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 유월절 : 유대인들이 이집트 노예 생활에서 탈출한 날, 당시 유대인들은 흠 없는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이집트 전역에서 일어났던 살해의 재앙을 피했고, 신약에서는 유월절이 예수가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을 하고 십자가형으로 희생이 된 날이기도 하므로 매우 중요한 것으로 간주.
기독교인들이 사자들에게 던져질 때마다(투석형이나 십자가형) 나머지 신도들은 그 날짜를 기록했고 해마다 그 죽음을 기렸다. 이날을 ‘디에스 나탈리스’라고 불렀는데, ‘생일’이라는 의미였다. 순교자는 그날 죽지만 또 그날 천국에서 다시 태어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일이 점차 쌓이면서 교회력은 다소 슬프고 애절한 달력이 되었다.
그렇지만 크리스마스는 없었다.
중요한 이유를 하나 들자면 이렇다. 마태오복음서, 마르코복음서, 루카복음서, 요한복음서 어디에서도 예수가 태어난 날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날짜에 관한 희미한 단서라도 제공하는 것은 루카복음서뿐이다. 루카복음서에는 양치기들이 그날 밤, 양을 돌보았다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양치기들이 양을 돌봐야 하는 것은 3월에서 11월까지, 하지만 그 역시 다소 애매모호하다.
그리고 야고보원초복음서(2세기 중반)에는 마리아가 베들레헴으로 가는 도중 산통을 겪고 동굴에서 출산했다는 기록이 있다. 요셉은 마리아가 분만하는 중 동굴 밖에서 하릴없이 서성거리다가 예수가 태어나던 순간, 좀 우스꽝스런 현상을 목격한다.
“내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하늘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늘의 기둥(북극성)을 바라보았더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었고, 하늘을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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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 모두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땅을 굽어보았더니 여물통이 놓여 있었고, 일하는 사람들은 거기에 기대 있었다. 그들의 손은 여물통에 들어가 있었다. 먹고 있던 사람들은 먹지 않았으며, 일어나고 있던 사람들은 그 모습 그대로 구부정하게 굳어 있었고, 뭔가 말을 꺼내려던 사람들은 미처 말을 내뱉지 못했다. 모든 사람의 얼굴이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양이 걷다가 멈추고 가만히 있는 것을 봤다. 양치기는 양을 채찍질하려 팔을 들어 올렸지만, 들어 올린 팔은 공중에서 그대로 굳어 있었다.”
다시 말해 예수가 태어나던 시각, 세상이 멈췄다. 예수는 시간 밖에서, 시간을 초월해서 태어났다는 뜻이다.
요컨대, 신약성서 그 어디에도 예수가 언제 태어났는지 말하는 내용은 없다. 예수의 탄생은 워낙 신비로운 사건이라서, 인간의 시간 밖에서 일어난 일이 틀림없다는 관념까지 존재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생일을 축하하지 않았다. 이들은 죽은 날만 기념했다. 생일 축하란 원래 이교도들이나 하는 짓이므로, 생일 따위를 축일로 정해서 지내는 것은 이교도들이나 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성경에 언급된 생일은 이집트 파라오의 생일이었다. 게다가 파라오는 제빵 시종장의 목을 매달아 자기 생일을 축하한다.
■ 계산자 등장하다
서기 200년경부터 사람들이 예수의 생일을 궁금해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좀 놀랍다. 하지만 신비가 달리 신비겠는가. 예수의 생일이 아무리 궁금해도 알 수는 없었다. 사람들에게 예수의 생일을 알아낼 증거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있는 것이라고는 루카복음서에 실린 세부 사항 정도였는데, 그 조차도 눈치챘던 사람이 거의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이들은 이 증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열의라는 걸 알 만큼 현명했다.
고대인들은 자신의 신앙에 끼워 맞추기 위해서라면 숫자 정도는 얼마든지 조정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고대인들은 모두 춘분을 기준으로 예수가 봄에 태어났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4월 2일이라는 사람도 있고, 4월 19일이라는 사람도 있다. 3월 25일이라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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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요한 것은 크리스마스가 늘 3월 25일이거나 그 직후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3월 25일에 세상에 온 그리스도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아홉 달이나 더 기다렸다가 태어난 것일까?
이 질문은 당연히 빤히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어른에게 물어보라 뭐 아니면 정말 교회력에서 3월 25일을 찾아보라. 성수태 고지절이라고 되어 있을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 잉태를 미카엘 천사에게 들은 날이다. (예수 잉태후 아홉 달 만에 예수를 낳은 것이니 그 정도 답은 알고 있어야 한다.
※ 당시에는 춘분이 3월 25일, 동지가 12월 25일이었다.
서기 32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고 예수는 3월 25일에 잉태된 것으로 판결했다. 그에 따라 크리스마스도 춘분에서부터 정확히 9개월 후인 동짓날이 되어야 했다.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가 된 최초의 언급은 354년의 <연대기>에 등장하며, 그 이후로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로 굳어졌다. 아마 <연대기>가 나오기 몇십 년 동안에도 크리스마스는 동지 즈음이었을 것이다. <연대기>는 지금껏 살아남아 기록을 전해주는 최초의 책일 뿐이다. 예수가 하루 중 정확히 어느 시각쯤에 태어났는지까지 계산해 낼 수 있다. 구역 성서를 샅샅이 뒤지면 된다. 자, 이제 구약의 지혜서 18장 14절만 읽으면 간단하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천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
한밤중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크리스마스에는 자정 미사를 본다. 참으로 깔끔하다. 예수는 일 년 중 가장 밤이 긴 날, 한밤중에 태어났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가엾은 계산자, 그분조차도 이 정도면 흡족해했을 것이다.
■ 농신제, 무적의 태양신과 초하루
로마인들은 명절, 축제, 휴일을 즐겼다. 이 행사들을 다 정확히 세기는 힘들지만, 3세기 무렵에는 1년에 대략 200건의 행사가 있었다. 성경을 바탕으로 조금은 자의적으로 계산해서 성스러운 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에 집어넣으려 해도, 그 날짜 부근에는 이미 시끌벅적한 축일들이 잔뜩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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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12월 25일로 안착시킬 때 당면했던 커다란 문제는 무적의 태양 축제였다. 로마인들은 태양을 솔 인빅투스(무적의 태양신)라고 부르면서 축제를 지냈는데, 공교롭게도 이 축제 행사가 동지에 맞춰 거행되었다.
태양 숭배는 당시 로마제국에서 중요한 행사였고, 태양 숭배자들은 12월 25일을 그들의 축일로 이미 못박아 놓고 있었다.
게다가 농신제(農神祭)라는 축제도 있었다. 농신제는 사실 12월 17일에서 23일까지 이어지는 질펀한 술판이었다.
마지막으로 1월 초하루도 있었다. 원래 초하루란 그저 한 달의 첫날이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로마인들은 정월 초하루에는 꽤 요란을 떨며 서로에게 선물을 주곤 했다.
기독교인들은 최선을 다해 두 축일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들은 12월 25일에 태양을 숭배하지만, 기독교인들은 태양을 만든 분을 숭배한다며 이교도들을 조롱했다. 성 암브로시우스도 비슷한 맥락에서 “그리스도는 우리의 새로운 태양이시니”라고 말했다.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성인과 주교가 크리스마스를 밀어붙여 기념일로 정착시키기 위해 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이다.
서기 386년이 되자 이미 크리스마스는 ‘모든 축제의 어머니’라고 불릴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나치안츠의 성 그레고리우스라는 인물은 벌써 이즈음부터 지금은 오래되어 익숙해진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크리스마스가 “과도하게 들뜬 분위기가 되어, 사람들은 한껏 먹고 마시며 춤추고, 문에 화환을 걸어놓고 난리다” 라며 영적인 의미가 충만한 본래의 취지를 살려야 한다고 훈계한 것이다.
사실 이 책의 모든 장마다. 지루할 정도로 꽤 되풀이되며 튀어나오는 요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성경을 아무리 뒤져도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라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 둘째, 크리스마스는 늘, 그러니까 내 말은… 적어도 서기 386년부터 시작해서 1,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그 참뜻을 잃은 축제로 욕을 먹고 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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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장 크리스마스트리
크리스마스트리는 ‘이건 분명 빅토리아 시대의 전통일 거야’, 혹은 ‘이건 필시 이교도 풍습일걸’, 하고 사람들이 즐겨 말하는 전형적인 사례 중 하나다. 하지만 둘 다 정말 완전히 틀린 이야기다.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 북유럽 이교도들이 나무를 숭배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들의 숭배는 오크나무에 국한되어 있었고, 이들은 축제 한 번에 그치지 않고 일 년 내내 오크나무를 숭배했으며, 집 안이 아니라 집 밖에서 숭배했다. 세상에는 나무가 수도 없이 많은 데 크리스마스트리가 특별한 이유는, 한겨울에 온갖 크리스마스용 방울이랑 장식품을 주렁주렁 달고 집 한가운데 떡하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이유에 대한 설명은 깜짝 놀랄만큼 간단하다. 천지창조로 돌아가기만 하면 끝이다.
위대한 천지창조 이야기의 흥을 깨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잠시 접어두자면.
대충 240세대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면 까마득한 선조로 아담과 이브라는 인간들이 있었다.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아담은 속죄만 하면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완벽하게 속죄할 자신도 있었다. 함께 강으로 가서 40일 밤낮을 강물 속에 버티고 서 있으면 하느님이 이들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이었다. 그래서 아담은 유프라테스강, 이브는 티그리스강으로 갔다.
악마는 둘이 묵 속에서 버틴지 39일째 되는 날 천사로 변장한 다음 오랜 벗 이브를 찾아갔다. 악마는 하느님이 자신을 보냈으며 속죄는 이미 끝났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이브는 물에서 뛰쳐나와 수건으로 온몸을 박박 닦고는, 아담에게 희소식을 전하러 갔다 아담은 상황을 딱 알아차렸다. 이제 인간은 끝이었다. 인류는 영원히 원죄를 벗어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중세인들은 아담과 이브를 우리보다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다. 심지어 그들은 아담과 이브를 성인으로 숭상까지 했다. 아담과 이브는 공식적으로 시성을 받은 성인은 아니었지만, 이들의 이름이 붙어 있는 날도 있었다. 그날이 언제인지 아는가?
답을 말하기 전에 아담과 이브가 중세인들에게 중요한 존재였던 이유부터 설명하겠다. 중세인들은 동정녀 마리아를 사랑했다. 별로 놀랍지 않다.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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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마리아를 사랑하니까. 하지만 동정녀 마리아에 대한 사랑이 워낙 크다 보니, 마리아가 예수 탄생에서는 엄청나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데 비해 탄생 이후엔 아들을 보는 장면 속에 이따금씩 툭툭 등장하는 것 말고는 완전히 사라지다시피 하는 게 중세인들의 마음에 거슬렸다.
중세인들의 이러한 동정녀 숭배야말로 크리스마스를 축하하는 커다란 이유다. 크리스마스야말로 마리아가 중요한 날, 거의 유일한 날이기 때문이다.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아담을 출산함으로써 골치 아픈 문제를 보조리 해결해 주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볼 때, 아담(과 이브)은 인간에게 저주를 가져왔지만, 예수(와 마리아)는 인간을 구원했다는 점이 매우 중요하다. 성 바오로는 이 문제를 즐겨 언급한다.
아담은 이브에 의해 타락했고 그리스도는 12월 25일 마리아를 통해 세상에 태어났다. 전자의 사건이 없었으면, 후자의 사건도 없었다. 그리스도의 탄생은 아담의 타락에 대한 응답인 셈이다. 이제 짐작했겠지만 그래서 아담과 이브의 이름을 딴 날은 12월 24일이다.
중세 기독교인들이 좋아했던 또 한 가지는 연극이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읽고 쓸 줄 몰랐기 때문에 연극은 굉장한 오락거리였다. 그들은 특히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만든 연극이나 아담과 이브의 전기 같은 책들을 바탕으로 만든 연극을 좋아했다.
연극은 대체로 아담과 이브,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에덴동산에서의 추방, 강물에서의 속죄를 다뤘다. 이러한 연극을 콕 집어 ‘낙원연극’이라 불렀다. 배우들은 어떤 모습으로 무대에 등장했을까? 먼저 실망을 안길 수도 있는 소식부터 전하겠다. 아담과 이브는 홀딱 벗지 않았다. 성경은 분명 이들이 사과를 먹기 전까지는 나체로 지냈다고 주장하는데도 말이다.
둘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다음에도 여전히 옷을 입었다. 다만 좀 더 남루한 옷이었다. 나머지 무대 지문으로는 어떤 게 있었을까?
에덴동산을 배경으로 한 연극의 무대 설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나무였다. 사과가 주렁주렁 열린 나무가 필요했다. <아담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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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무대 지시사항에는 그 나무의 형태와 목적을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교활한 본성을 나타내도록 만든 뱀이 금단의 나무를 오른다. 이브는 뱀의 조언을 귀가 솔깃해서 듣는다. 그런 다음 이브는 사과를 따서 아담에게 내민다. 과일이 주렁주렁 열린 나무는 낙원 연극의 핵심요소다. 그리고 낙원 연극은 계속 살아남았다. 프랑스 북부 전역과 독일 북서지방에서 대단한 인기였다.
연극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실내에서 공연되었다. 마을 사람 모두가 구경했고, 무대에는 사과와 리본으로 장식된 나무가 하나 있었다. 하지만 이 연극은 오로지 오베우페에서만 살아남았다. 독일의 낙원 연극들은 종교개혁을 거치며 거의 모두 사라졌다. 하지만 나무만큼은 살아남았다.
기록에 남아있는 최초의 크리스마스트리는 1419년 프라이브르크 성령의 병원에 설치된 것으로, 사과, 웨이퍼 과자, 생강과자, 반짝이가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크리스마스트리에 대한 언급은 여기저기 흩어진 기록에서 드문드문 찾아볼 수 있지만, 남아 있는 기록은 주로 금지와 관련된 내용이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 소유의 숲에 있는 멀쩡한 나무를 베어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 영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트리
영국 최초의 크리스마스 트리는 완전히 미스터리다. 이 트리는 악마가 산산이 부숴버렸다고 한다. 최소한 이야기는 그렇다. 실상은 알 수 없다. 어쨌든 이 트리는 1598년에 쓰인 존 스토우의 <런던의 역사>에 느닷없이 등장한다.
1444년 2월 1일 밤, 천둥과 번개가 함께 휘몰아치는 폭풍이 런던을 강타했다. 세인트폴 대성당 첨탑에 불이 붙었지만, 많은 노력 끝에 불은 꺼졌다. 다음날 성촉절(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기념하는 축제일로 촛불 행렬이 이어진다고 해서 캔들마스라고 불린다) 아침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도록 콘힐의 리든 홀 한가운데 고정시켜 놓은 홀름 나무와 아이비로 장식한 나무가 악령에 의해 뽑혀 쓰러졌다.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몇백 년 동안 독일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물건이었다. 독일인이 외국으로 나가면 가장 그리워했던 것이 집 다음으로 집 안에 있는 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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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는 얘기가 있을 정도였다. 크리스마스트리에 촛불을 장식했다는 최초의 언급도 1708년 오를레앙공작의 독일인 아내가 남긴 것이다. 크리스마스트리를 영국에 도입한 것도 독일의 가장 유명한 이민자, 다시 말해 독일 왕족이었다. 조지 3세의 아내는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웠다. 그녀의 이름은 메클렌브르크-슈트렐리츠의 샤를로테였다. 이름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녀는 독일인이었다. 빅토리아 여왕도 어릴 적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독일인과 결혼하여 크리스마스트리가 더 많아졌다. 1848년<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에 왕실 사진이 한 장 실렸다. 왕실 가족이 크리스마스트리 주위에 모여 있는 사진이다. 당시 나무는 독일보다 영국에서 훨씬 컸다.
◎ 3장 강림절
강림절의 시작은 12월 1일이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알고 있다. 하지만 틀렸다. 최소한 7년 중 6년은 그렇지 않다. 강림절은 성 안드레아의 날(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인 성 안드레아를 기념하는 날), 11월 30일에서 가장 가까운 일요일에 시작되는데, 그날이 꼭 12월 1일이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12월 1일이 아닐 때가 훨씬 더 많다. `100년 전에는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지만,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이 잘 모른다. 이유는 독일의 게르하르트 랑이라는 인물 때문이다.
1908년 랑은 최초로 강림절 달력을 대량으로 인쇄해 세상에 내놓았다. 이전까지 이런 달력은 모두 자식을 아끼는 주부들이 만들었다. 랑은 자신의 어머니가 만든 달력을 신문에 냈을 뿐만 아니라, 널리 알려진 것을 계기로 강림정 달력을 처음으로 대량 생산했다. 뭐니 뭐니 해도 대량생산에서 중요한 것은 표준화다. 강림절이 성 안드레아의 날을 기준으로 가장 가까운 일요일에 시작하도록 달력을 만들었다면, 해마다 새로운 달력을 만들어야 했을 테고 전해에 남은 재고를 팔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1920년대부터 랑은 그냥 눈 꾹 감고, 강림절의 시작을 12월 1일을 못 박아 인쇄해 버렸다. 그 이후 우리들은 대부분 12월 1일부터 강림절을 지내고 있다.
또 거의 누구나 강림절은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것을 기념하는 기간,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탄생을 고대하는 기간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틀렸다. 최소한 절반은 틀렸다. ‘강림’은 주로 그리스도의 탄생보다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라는 즐거운 사건을 기념하는 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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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
크리스마스 카드는 크리스마스 풍습 중에서도 틀림없이 가장 성가시다. 모든 책임은 단 한 사람에게 있다. 헨리 콜 경이라는 인물이다. 콜은 살면서 좋은 일도 좀 했다. 영국에 1페니 우편제도를 도입하여 우표 한 장만으로 영국 내 어디든 편지가 도착할 수 있게 한 공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4년 후, 그는 존 켈코드 호슬리라는 화가에게 최초의 크리스마스 카드 제작을 의뢰함으로써 기껏 세운 공을 망쳐버렸다.
원래 크리스마스 카드는 당시 돈으로 무려 1실링이나 하는 사치품이었다. 육체노동자들이 하루 꼬박 일해야 버는 돈이 1실링이었다. 카드를 흑백으로 인쇄한 다음 일일이 손으로 색을 입혀야 하는 수작업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콜이 만든 최초의 카드는 1,000장도 채 팔리지 않았다. 하지만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고 있었다. 인쇄기술이 발전 했던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간 계급에 속한 사람이면 누구나 크리스마스 카드를 바라게 되었고, 심지어 가난하고 멸시받는 노동자들에게도 받는 게 당연한 물건이 되었다. 1870년대 1/2페니 우편제도가 도입되면서 크리스마스카드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제 카드를 써서 주고받는 귀찮고 성가신 일을 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어버렸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크리스마스 카드는 지나치게 세속적이 되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라는 최초의 사랑스러운 이미지는 사라지고, 인간의 옷을 차려입은 동물, 갑자기 살아나 움직이는 크리스마스 푸딩, 무시무시한 눈사람, 개구리 등이 있었다. 빅토리아 시대의 크리스마스카드를 보고 있으면 당시 사이코패스 신사들의 더러운 무의식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가장 기괴한 것은 벌거벗은 여자들이었다. 이 지경까지 된 데에는 아마 밸런타인데이 카드가 연루되어있는 듯하다. 밸런타인데이 카드는 크리스마스카드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에 장사꾼들이 재고로 남은 그 카드를 크리스마스에 팔아치우기 위해 유통시켰을 수 있었다.
◎ 4장 크리스마스 캐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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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 캐럴 예배는 1880년 잉글랜드의 트루로라는 곳에서 에드워드 화이트 벤슨이라는 인물이 발명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크리스마스이브만 되면 트루로 주민 누구나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만취하곤 했다. 당시 교구 주교였던 벤슨은 여기에 넌더리가 나서 술집이 아닌 교회로 사람들을 유인할 방법을 궁리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새로운 방식의 예배를 고안해내야 했다.
벤슨은 훗날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고 그의 가족은 모조리 글쓰기에 강렬한 열의가 있었다. 주교의 아내에겐 39명에 달하는 레즈비언(여성 동성애자) 연인이 있었다. 벤슨의 아들은 게이(남성 동성애자) 시인, 게이 소설가였고 그의 딸은 레즈비언으로 이집트 학자였다.
놀랍게도 벤슨에게 손주라곤 하나도 없었다.
크리스마스 캐럴이 예배에서 불리기 전, 캐럴은 교회가 아니라 술집에서 부르던 노래였다. 당시 캐럴은 민요였고 원래 민속춤에서 유래했다. 크리스마스 캐럴 중 크리스마스에 어울리지 않게 이상한 노래가 많은 것도 다 이런 이유 때문이다.
※ 캐럴 :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추는 춤’이라는 의미
18~19 세기가 되면서 민속학자들은 이러한 노래들을 수집하여 다듬기 시작했다. 게다가 새로운 노래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노래들도 그다지 일관성이 없었고, 시간이 지나며 버전들이 계속 변해 다른 버전들이 생겨났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캐럴들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구석이 있다. 캐럴은 죄다 마찬가지다. <구유안에>, <오 베들레헴 작은 마을>, <동방박사들>은 모두 미국에서 만들어진 캐럴이지만 웬일인지 이 노래들에는 시간을 초월하는 영국적인 느낌이 있다. <선한 왕 벤체슬라우스>와 <딩동 즐겁게 높이>, <징글벨>은 노래 가사 어디에서도 크리스마스가 언급되지 않지만 크리스마스를 떠올린다. 사실 미국 노래인 <징글벨>은 원래 추수 감사제용 노래였다. 캐럴 예배는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 동정녀 마리아 자궁을 혐오하는 대신 예수가 동정녀에게 잉태되었으며 직접 창조된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비롯한 중요한 기독교의 진리들에 관해 노래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한때는 아리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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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이라는 파가 있어, 예수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하느님이 직접 창조하신 피조물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 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여전히 아주 조심해야 한다.
캐럴 예배에서 부르는 캐럴들은 완전히 다른 기원과 갈래의 노래들을 함께 엮어 만든 신기하고도 아름다운 조합이다. 성경 봉독도 마찬가지다.
■ 성경
성경이라는 책은 하느님이 존재하는지의 여부에 대한 최종적인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믿을 만한 참고서를 여러 권 뒤져보고, 사전도 열심히 찾아봤지만, 어디서도 명확한 답을 찾지 못했다.
옛날 옛적, 나사렛의 예수라는 분이 계셨다. 이분은 서기 33년경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 진실한 역사학자들은 누구나 이 사실에 동의한다. 최초로 발견된 기독교인의 글은 성 바오로가 40년대와 50년대에 쓴 편지들이다. 하지만 성 바로는 동정녀의 출산이나 예수의 탄생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다.
최초의 복음서는 마르코복음이다. 60년대의 후반기에 쓰였다. 하지만 마르코 복음은 예수가 성인이 된 때부터 시작된다. 예수의 탄생이나 동정녀 마리아의 출산 이야기는 언급되지 않는다.
마지막 복음은 요한복음으로 서기 100년 혹은 그보다 조금 후에 쓰였다. 요한복음에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중에 거하시니”라는 아름다운 도입부를 통해 탄생에 대해 모호하게, 간접적으로 언급한 부분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다. 요한계시록은 서기 95년에 쓰였고, 정말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갈피를 못 잡게 만드는 책이다. 역시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탄생 이야기가 담긴 책은 단 두 권뿐이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인데, 아마 80년대 혹은 90년대 즈음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루카복음부터 시작해보자.
요셉과 마리아는 나사렛에 살고 있었는데, 마리아가 성령에 의해 잉태했다. 마침 인구조사가 있어서 이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야만 했다. 베들레헴에 도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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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니 묵을 방이 없었다. 그래서 마리아는 마구간에서 출산하고, 구유에 아기 예수를 눕혀 놓는다. 들판에서 양을 치던 목자들은 천사를 보는데, 천사는 그들에게 마구간으로 가라고 말한다. 마구간에 간 그들은 대단히 놀란다. 이게 크리스마스 이야기다.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는 이야기다.
이제 마테오복음을 살펴보자
마리아와 요셉은 베들레헴에 살고 있다. 번듯한 집이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한다. 그리고 출산한다. 그때 몇몇 박사가 동방에[서 온다. 그런데 마테오는 동방박사가 몇 명이었는지는 단 한 번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복음서에 이들이 황금, 유황, 몰약이라는 세 가지 선물을 가져 왔다고 언급되었기에, 사람들은 동방박사가 세 명이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동방박사는 예루살렘에 들러 헤롯 대왕에게 메시아가 어디서 태어났느냐고 묻는다. 헤롯은 그들에게 베들레헴을 살펴보고 돌아와서 보고하라고 명한다. 동방박사는 베들레헴으로 가서 그 집을 찾아 선물을 전달한다. 하지만 꿈에서 헤롯에게 보고하지 말라는 경고를 듣고 보고를 생략한다. 헤롯은 화가 나서 베들레헴의 모든 아이를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마리아와 요셉은 꿈에서 경고를 받고 이집트로 도망간다. 그들은 유대 지역으로 돌아오고 싶었지만, 베들레헴은 아직 대단히 위험했으므로 대신 나사렛으로 이사했다.
이것이 두 가지 버전의 예수 탄생 이야기다. 마태오 복음에는 구유도 마구간도, 인구조사도, 목자도 없다. 루카복음에는 별도 없고, 동방박사도 없고, 몰약도 없고, 이집트 탈출도 없다. 두 복음서 사이의 차이를 기억하려면 루카복음을 가난한 자의 복음이라 생각하면 된다. 양을 치는 목동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 5장 산타클로스의 생애
산타클로스는 아마 별 의심할 여지 없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1,800살 먹은 튀르기예 사람이다. 나이와 유명세 면에서 그의 명성에 필적할 사람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그는 서기 270년, 혹은 그 즈음에 파타라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니콜라스라는 이름의 이 꼬마 녀석은 태어난 순간부터 누가 보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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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도 참 별난 아이였다. 당시 사제들은 수요일과 금요일마다 단식을 해야 했는데, 이 신생아 니콜라스도 수요일과 금요일엔 모유 수유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니콜라스에 관한 최초의 전기는 그가 죽고 400년이 지나서야 쓰였고, 그 정확성을 의심하는 학자도 많다는 사실부터 짚고 넘어가야겠다.
니콜라스는 외아들이어서, 부모가 돌아가시자 전 재산을 상속받았다. 여자와 술과 극장을 싫어했던 그는 부자들의 최후의 안식처인 자선에 돈을 모조리 쓰기로 했다. 그 유명한 이야기가 탄생한 것은 바로 여기서부터다. 모든 전설의 시작이자, 역사의 굴뚝에서 명성의 벽난로까지 이어지는 유명한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아름답고 감동적이며 코끝을 찡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니콜라스의 이웃 중에는 유명해진 지 얼마 안 된 귀한 가문 출신의 남자가 있었다. 그의 집은 니콜라스의 집 바로 옆이었다. 그런데 악마의 모략과 질투로 인해 그 이웃은 지독한 빈곤에 쪼들려 먹을 것조차 없는 신세가 되었다. 그에게는 세 딸이 있었는데, 모두 맵시 있고 아름다웠다.
이웃은 자신과 가족이 먹고살기 위해 이 딸들을 사창가에 팔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니콜라스는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이러한 불의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이웃에게 딸들의 지참금으로 쓸 돈을 주기로 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이웃집 문을 쾅쾅 두드려 옜다 하고 돈을 전달하기보다는 한밤중에 창문 틈으로 돈을 넣어주는 쪽을 선택했다. 사흘째 되던 날 밤 이웃은 현장에서 니콜라스를 잡았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자신이 돈을 줬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이웃집 남자는 신성한 맹세를 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이야기를 알고 있으니 참 신기할 노릇이다.
니콜라스는 여러 기적을 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0 그는 선원 세 명을 익사 위기에서 구해주었다. (그래서 선원들의 수호신)
0 억울하게 기소당한 병사 셋을 구했다.
0 냉혹한 도살자로부터 소년 세 명을 살려냈다.
0 그는 모든 일을 3이라는 숫자에 맞춰하기를 좋아했다. 왜 그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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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스 성인은 죽은 후에까지 환상적인 냄새를 풍겼다고 한다. 실제로 어떤 액체가 그의 관에서 흘러나왔고, 그걸 얻어보겠다고 수백 마일 순례길을 나서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가 사망한 날은 343년 12월 6일이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날이 니콜라스 성인의 축일이다.
중세까지 니콜라스는 성경에서 언급되지 않은 성인 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성인이었다. 니콜라스 성인의 이름을 딴 교회가 잉글랜드에만 800곳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온갖 것들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실질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그는 아이들의 성인, 회개한 도둑들의 성인, 선원들의 성인, 바지선을 모는 사람들의 성인, 구두닦이의 성인, 포목상의 성인, 약사의 성인, 식료품상의 성인, 말을 돌보는 사람의 성인, 법률가의 성인, 연인들의 성인, 기름 상인들의 성인, 고아들의 성인, 상인들의 성인, 살인자들의 성인이었다. 모두 합쳐 100개도 넘는 전문직, 여덟 개 나라,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도시의 성인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무덤에도 모여들었다. 1087년에는 이탈리아 선원의 한 무리가 그의 무덤에서 시신을 탈취해 이탈리아로 달아났다. 이들은 성 니콜라스의 시신을 이탈리아 남부 바리로 옮겼다. 선원들은 미라가 셀주크 튀르크인들에게 함락되면서 성 니콜라스의 시신이 위험해졌기 때문에 시신을 옮겼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시신을 옮긴 진짜 이유는 관광 산업 때문이었다. 성인의 시신이 묻힌 곳이면 어디나 그 성인을 가까이서 보기 위해 수도 없이 몰려드는 순례자로 북적였기 때문이다. 바리 사람들은 성 니콜라스의 유골을 보관할 지하 무덤을 크게 지었다. 교황이 직접 나서 성 니콜라스를 거기에 묻고 축성했다. 그런 다음 그 위에 교회를 지었다. 오늘날까지 니콜라스는 거기에 묻혀있다.
성 니콜라스 숭배는 멈추지 않고 계속 퍼져 나갔다. 그에 관한 연극도 여러 편 제작되어 그의 축일에 공연되었다. 연극에서 그는 무고한 사람들을 석방하고, 십자군 전쟁에 기여한다. 물론 시대착오다.
* 십자군 전쟁(1095~1291)은 니콜라스가 죽고(365년 12월 6일) 난 한참 뒤의 일이다.
네덜란드에서는 성 니콜라스를 ‘신타 클라스’라고 썼다. 종교개혁이 일어나면서 네덜란드는 개신교 국가가 되었다. 개신교와 청교도는 가톨릭교회가 하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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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숭배해야 할 시간에 성인들이나 숭배하고 있다는 이유로 성인들을 마뜩잖게 생각했다. 이를 ‘성인공포증’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뉴욕의 산타클로스
미국은 크리스마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입각해서 세워진 나라다. 종교의 자유, 식민지 시대의 이상주의, 자유, 개척 등의 비현실적이고 터무니없는 여러 이야기와 이론들을 수없이 들어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뜬구름 잡는 이야기들은 죄다 플리머스의 바위(1620년 필그림이 상륙했던 바위)에 발을 디뎠던 냉정하고 엄격한 필그림 파더스(북아메리카 식민지 시대, 뉴 잉글랜드 최초의 영국 식민지 매사추세츠 주에 정착한 사람들. 미국인 선조)와 관련된 냉엄하고 가혹한 사실을 무시하고 있었다. 이 필그림들은 청교도였고 청교도들은 크리스마스를 혐오했다.
이 청교도들은 1620년 새로운 식민지에서 처음 맞은 크리스마스를 그냥 집이나 지으며 보냈다.
하지만 이듬해 미국인들은 크리스마스를 기념했다. 다소 약하게 기념하긴 했지만 말이다. 12월 초에 ‘포천’이라는 이름의 배를 타고 새로운 정착민들이 도착했는데, 그들은 종교적으로 청교도들보다는 좀 더 관용적인 태도를 갖고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자 그들은 플리머스 식민지 총독인 윌리엄 브래드피드에게 성일(聖日)에는 일하지 않겠다고 했다. 총독은 처음에는 그들의 요청을 거부했지만, 결국에는 하는 수 없이 크리스마스룰 휴일로 하는데 동의했다. 최초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에 왔던 필그림들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들판에 나가 일했지만, 저녁때 집에 돌아오니 신규 이민자들은 스툴볼을 하며 즐겁게 놀고 있었다. 그것도 공공연히 말이다.
하지만 새로운 필그림들이 계속 도착했고, 그들은 굳이 25일 가지 축하 행사를 기다리려 들지도 않았다. 1633년 메릴랜드에 도착했던 ‘아크(A가)’라는 배는 미국으로 오는 항해 중에 크리스마스를 맞게 된다. 사람들은 술에 만취했고 “10여 명이 죽었다.”
일부 주에서는 크리스마스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다가, 영국 당국의 압력을 받아 해제되었다가, 다시 금지되고, 다시 반쯤 금지되었다가 풀리고 하는 일이 반복해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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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이니 미국에서 산타클로스의 인기가 급증했던 이유가 사실은 영국에 대한 반감과 미국에 대한 애국심 때문이라는 사실은 다소 의외의 결과로 보일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러한 반전이 일어난 이유는 미국 독립전쟁 동안 산타가 미국인들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 풍자작가
워싱턴 어빙은 미국혁명이 끝나던 주에 태어났다. 그의 이름이 워싱턴이 된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는 뉴욕의 부유한 집안의 출신으로 코미디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는 야구팀, 여성용 속옷, 배트맨, 산타클로스의 등장에 이바지했다.
우선 배트맨에서 시작해보자. 먼 옛날 영국 노팅엄셔 들판에 염소가 몇 마리 있었다. 그래서 이 들판은 염소 농장, 고대 영어로는 갓-햄(Gat-Ham)이라 불렀다. 몇 세대가 지나며 이 이름은 고담(Gotham)으로 굳어졌다.
고담 사람들은 외부인의 방해 없이 자기들끼리만 살고 싶다는 이유로, 터무니없는 미친 짓을 벌이는 듯 보임으로써 외부인의 접근을 차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유야 뭐가 되든 ‘고담’은 멍청함을 가리키는 낱말이 되었고 ‘고담 사람들’은 바보들을 가리키는 말로 굳어졌다.
이제 시간의 테이프를 몇백 년쯤 훅 미래로 돌려 워싱턴 어빙이 살던 뉴욕으로 가보자. 어빙은 몇몇 친구들과 <셀머건디>라는 잡지를 창간했는데 이 책의 유일한 목적은 뉴요커 조롱이었다. 이 잡지 17호에서 어빙은 처음으로 뉴욕을 고담시라고 부른다. 그러면서 고담시가 배트맨 만화와 영화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전통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듬해 어빙은 뉴욕 사람들을 조롱하기 위해 더 거창하고 멋진 계획을 세운다. 뉴욕 역사를 패러디하는 책을 써서 핀타드가 설립한 뉴욕 역사 협회를 놀려먹기로 작심한 것이다.
어빙은 패러디 역사책 <뉴욕의 역사, 세계의 시작부터 네덜란드 왕조의 종말
까지>를 무척 빨리 썼다. 하지만 출간계획은 상세한 부분까지 세세하게 챙겼
다. 우선 그는 디트리히 니커보커라는 어떤 나이 지긋한 네덜란드인이 호텔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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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알리는 전단을 뉴욕 여기저기에 붙였다. 자신은 호텔
주인으로 위장했다. 그는 니커보커가 호텔 요금도 내지 않고 사라졌으며, 남겨
놓은 것이라고는 엄청난 분량의 원고밖에 없다는 신문 광고도 냈다.
니커보커가 돌아와 호텔 요금을 내지 않는다면, 하는 수 없이 그 원고를 출
간해서 요금을 충당하겠다는 말도 했다. 물론 니커보커라는 인물은 실제로 존
재한 적이 없다.
사실 그 책은 네덜란드 사람들이 뉴욕을 세웠다는 사실과 성 니콜라스가 중
요하다는 내용이 전부였다.
<뉴욕의 역사> 어디에나 성 니콜라스가 등장하는데, 등장할 때마다 목적은
핀타트(뉴욕역사협회 설립자)를 조롱하는 것이었다.
뉴욕의 역사는 출간되자마자 현대의 고전으로 자리잡았다. 당시 젊은 나라였
던 미국은 아직 그럴듯하게 내세울 만한 자국 문학이란 게 많지 않았다.
로런스 스턴(영국 풍자작가)이나 조너선 스위프트(영국 작가, 성직자, 정치 평
론가)에 필적하는 일급 풍자작가로서 어빙은 미국 문학을 바라는 동시대인
들의 욕구를 충족시켰다. 책은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 어빙은 유명해졌다.
이 책으로 인해 니커보커라는 이름은 누욕과 동의어가 되었다. 지금도 뉴욕의
NBA 농구팀 뉴욕 닉스가 팀의 이름을 니커보커에서 따서 쓰고 있을 정도다.
핀타드는 성 니콜라스 캠페인을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전 국민이 아직 그
를 조롱하며 즐거워하는 가운데 핀타드는 선물의 성인 성 니콜라스에게 찬사
를 보내는 시를 담은 팸플릿을 제작해 뿌렸다. 팸플릿 위쪽에는 엄격해 보이는
주교의 그림이 있었는데, 그 옆으로 벽난로에 목이 긴 신발 두 짝이 걸려 있
는 모습이 보였다. 네델란드의 전통에는 거의 언제나 이런 신발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그림 속 신발은 출 늘어져서 마치 긴 양말처럼 보였다.
이 시점에서 어빙은 풍자의 고삐를 다시 조이기로 작정했다. 일찍이 <뉴욕의
역사>를 써서 핀타드를 조롱했고, 조롱을 담은 그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런데도 아직 핀타드는 태도를 굽히지 않았던 것이다. 어빙은 풍자를 배가했
다. <뉴욕의 역사> 수정판을 출간한 것이다. 새로 낸 책에서 그는 산타클로스
에 관해 더욱 우스꽝스러운 주장을 펼쳤다.
여전히 괴짜 역사가를 가장하고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덧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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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이 아직 네델란드의 식민지였던 시절, 성 니콜라스의 날 밤 벽난로에 양말
을 걸어두는 그 경건한 의식이 시작되었고, 이 의식은 여전히 우리의 유서 깊
은 가족들 사이에서 신성한 의무로 경건하게 준수되고 있다. 그 양말은 아침마
다 기적처럼 선물로 가득 차 있었다. 선한 성 니콜라스는 특히 어린이들에게
선물을 많이 주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이 크리스마스 양말을 최초로 언급한 부분이다. 사실은 농담이다. 물
론 존 핀타드를 조롱하기 위해 쓴 구절이었다. 다음 구절을 더 보자.
“그리고 현자 올로프(Oloffe, 17세기 네델란드의 철학자, 신학자, 시인)는 꿈
을 꾸었다. 오, 놀랍지 않은가! 성 니콜라스가 해마다 어린이들에게 줄 선물을
실은 마차를 타고 나무 위로 날아오고 있었다.”
위의 대목이 산타의 수송 수단을 최초로 언급한 부분이다. 이 역시 농담이다.
존 핀타드를 놀리는 짖궂은 농담.
“…요즘과 같은 물질 만능주의와 타락의 시대에 그분은 우리에게 당신의 빛나
는 얼굴을 비추시지 않으며 우리를 찾아와 주시지도 않는다. 일년에 단 하룻밤
만 예외다. 그때 그분은 족장 후손들의 굴뚝으로 덜거덕거리며 내려와 부모들
이 타락했다는 표시로 아이들에게만 선물을 나눠주신다.”
위의 대목은 산타가 굴뚝으로 내려온다는 아이디어를 최초로 언급한 부분이다.
존 피타드를 조롱하기 위한 구절, 이런 대목들은 결코, 한 번도, 단 한 번도
진지한 의도로 쓰인 적이 없다. 그러나 이 조롱은 즉시 진지하게 받아들여졌
다.
뉴욕 사람들은 <뉴욕의 역사> 초판 못지않게 재판도 즐겨 읽었다. 그 이후로
뉴욕에서 산타클로스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굴뚝을 통해 집으로 내려와 벽난로
에 걸어놓은 양말에 선물을 넣어두곤 했다. 여기 참으로 아름다운 역설이 있
다. 이 전쟁에서 결국 승리를 거둔 사람은 어빙이 아니라 핀타드였던 것이다.
자신을 풍자의 대상으로 삼든 말든 태평스럽게 캠페인을 지속했던 핀타드는
결국 산타클로스를 뉴요커들의 마음 한가운데 심는 데 성공했다. 어빙은 조롱
하고 또 조롱했다. 하지만 어느 사이엔가 그의 조롱은 더는 조롱이 아니라 아
이들에게 들려주는 진실이 되어버렸다.
산타클로스 이야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가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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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날짜는 아직 12월 5일 성 니콜라스 축일 이브였고, 그의 마차를 끄는 동물
은 순록이 아닌 말이었기 때문이다.
산타가 어떻게 순록을 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네델란드 사람들은 언
제나 신타 클라스(산타클로스)가 스페인에 살았다(그리고 지금도 살고 있다)고
믿었다. 핀타드는 자식들에게 산타클로스는 네덜란드 사람으로, 해마다 배를
타고 대서양을 건넌다고 말했다. 핀타드 역시 동시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
로 북극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북극발견은 10세기, 그러나 과학적으로 알
려진 것은 1926년 아문센의 탐험 이후)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건 산타가 뉴욕에서 순록을 얻었다는 것이 전부다.
1821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간행되던 <어린이의 친구>라는 잡지에 익명의
시 한편이 실렸다.
기쁨에 가득 찬 산타클로스 할아버지가
꽁꽁 언 밤에 순록을 몰고
굴뚝을 넘고 눈길을 달려
해마다 너에게 선물을 가져다 주네
갑자기 웬 순록? 도대체 왜 그랬을까? 뉴욕에 순록이라곤 없다. 뉴욕 근처
어디에도 순록은 없다. 순록은 북유럽에서도 저 위쪽에서만 서식하는, 잘 알
려지지도 않은 동물이다. 하지만 저렇게 순록을 언급하는 시가 버젓이 등장하
고 삽화까지 그려지면서, 산타는 자신이 썰매를 끌고 으스대며 달리는 순록(루
돌프를 의미한다)까지 갖게 되었다. 마차가 아니라 썰매다.
이렇게 해서 산타의 수송 수단이 확정되었다. 하지만 날짜가 아직 틀렸다. 산
타는 아직 성 니콜라스 축일 이브인 12월 5일에 선물을 날랐다. 대체 언제부
터 산타는 크리스마스 전날에 도착하기 시작했을까? 이 질문에 답하려면 <크
리스마스 전날 밤>이라는 시를 살펴봐야 한다.
■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라는 시의 제목이 처음부터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
었던 것은 아니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이라는 문구는 그저 이 시의 첫 행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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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이었다. 원래 시의 정식 제목은 <성 니콜라스의 방문>이다. 시를 지은 인물
은 클레멘트 클라크 무어로 역시 뉴욕 역사 협회 회원이었다.
무어에게는 뉴욕 외곽의 시골에 첼시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영지가 있었다. 뉴
욕이 팽창하면서 첼시는 개발 예정지가 되었고, 무어는 첼시라 불리는 시의 일
부 구역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 개발로 그는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를 정도로 많
은 돈을 벌었다. 그래서 신학 대학을 하나 세운 다음, 스스로 교수가 되었다.
그리고 고대 히브리어에 대한 방대한 사전을 집필하고, 시를 쓰고 발표도 많이
했다.
그러나 그의 시 가운데 절판되지 않고 남아 있는 유일한 시는 1822년 두 딸
을 위해 쓴 동요로 현대적인 산타의 원형이 제시된 작품이다.
한 가정의 아버지가 크리스마스이브에 막 잠자리에 들려다가 밖에서 나는 소
리를 듣고 창밖을 보니, 어떤 사람이 작은 순록 여덟 마리가 끄는 작은 썰매를
타고 날아와 집 앞에 당도하고 있었다는 내용이다.
나는 그 순간에 성 니콜라스임을 알아보았어.
그의 준마(순록들을 가리킨다)들은 독수리보다 훨씬 빠르게 날아왔고,
니콜라스는 휘파람을 불고 고함치며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댔지
“달려! 대셔! 달려! 댄셔! 서둘러! 프랜서와 빅센!
오! 좀 더 달려봐! 코멧! 달려 큐피트! 전속력으로! 돈더와 불릿젠!”
이렇게 해서 순록 여덟 마리의 이름이 최초로 등장했다. 신학교수가 순록들의
이름을 무에서 창조한 것이다. 성 니콜라스는 굴뚝을 타고 집으로 내려온다.
그는 쾌활해 보이는 요정으로, 배불뚝이에 함빡 웃음을 지으며 파이프 담배를
피운다. 어딘가 어빙의 산타와 닮은 데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체중 문제가
있다. 이제부터 양말은 벽난로 옆에 둔다. 핀타드가 콕 집어서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곤 양말마다 선물을 가득 채우고, 홱 몸을 돌렸다.
그러곤 손가락을 코 옆에 댄 다음
고개를 끄덕이며 굴뚝을 타고 올랐다.”
손가락을 코 옆에 댄다는 디테일은 무어가 아니라 워싱턴 어빙의 <뉴욕의 역
사>에서 가져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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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어는 내용에 변형을 가했다. 우선 그는 날짜를 크리스마스이브로 바
꿨다. 그리고 산타를 아주 친절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때까지 산타에겐 양면
이 존재했다. 착한 아이들에게는 선물을 가져다주었지만, 나쁜 아이들에게는
두들겨 팰 회초리를 가져다주는 인물이었다. 이번에는 그렇지 않았다.
썰매를 몰고 사라지기 전에 성 니콜라스가 큰 소리로 외치는 소릴 들었어-
“여러분 모두, 즐거운 크리스마스, 모두 잘 자요.”
회초리도 나쁜 아이도 더는 없었다. 1822년, 산타클로스는 모두가 즐겁고 행
복한 크리스마스르 보내야 하는 것으로 설정했다.
■ 산타클로스의 집은 어디일까?
아주 오랫동안 산타클로스의 주소지를 확신하는 사람은 전혀 없어 보였다. 스
페인에서 살았던 적도 있고, 네덜란드에서도, 독일에서도 살았다. 보통 산타클
로스는 이런저런 도시의 이름 없는 거리, 이름 없는 집에서 거주했다. 그러다
1869년 그는 마침내 북극으로 이사를 했다. 드디어 쉴만한 장소를 찾게 된 순
록들에게는 몹시 안심되는 조치였을 것이다.
산타클로스의 이사는 조지 웹스터라는 사람이 쓴 <산타클로스와 그의 선물>
이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지루한 시에 등장한다. 시는 끔직하지만, 시가 묘사
하는 광경만큼은 훌륭하다. 아동용 도서에서는 어차피 그림이 중요하니까.
웹스터의 이사 관련 아이디어가 바로 유행했던 것은 아니다. 1875년까지도
소설가 마크 트웨인은 딸에게 산타가 달에 있는 성 니콜라스의 궁전에 살고
있다고 말해줬으니까.
산타에게 영구적인 주소가 필요했던 건 본인이나 순록뿐 아니라 우편제도 때
문이었다. 이때 즈음 어린이들이 산타클로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는데, 편
지를 보내려면 주소가 필요했다. 얼마 되지 않아도 모두들 그 주소가 북극이라
는 데서 생각의 일치를 보았다.
그랬다가 모두가 의심에 빠졌다. 성 니콜라스의 시신이 관광 산업을 촉진하기
위해 옮겨졌듯이, 오늘날에도 그린란드, 핀란드, 미국 뉴욕주 노스폴, 알래스카
주 노스폴 모두 산타클로스의 진짜 집의 지위를 두고 경합을 벌이고 있다.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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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리 관광 산업 덕분이다. 나는 이 도시 중 가본 곳이 한 곳도 없지만 핀란드
의 노바니에미 라는 곳 만큼은 가보고 싶다.
그곳에선 산타 체험 행사의 일환으로 순록 고기를 먹을 수 있다.
■ 산타가 산타를 잡아먹다
어느 날 미국의 산타클로스가 잉글랜드에 와서 파더 크리스마스(Father
Christmas)를 잡아먹었다. 좀 괴상한 이야기로 들리겠지만, 파더 크리스마스
는 산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는 데 유념해야 한다. 최소한 산타에게 잡아
먹히기 전까지는 그랬다.
파더 크리스마스는 잉글랜드 사람이었다. 그는 14세기 후반 찬송가에 처음
언급 되었고, 그 후엔 여기저기서 툭툭 튀어나오곤 했다 하지만 파다 크리스마
스는 순록이 없었고, 사람들이 밤에 양말을 잘 걸어두고 있는지 살펴본답시고
몰래 집안에 들어오는 법도 없었다. 그는 그저 크리스마스 시즌을 의인화한
상징일 뿐이었다.
추운 날씨를 잭 프로스트라 하고, 미국을 엉클 샘이라 부르며, 죽음을 사신(死
神)이라 의인화해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파더 크리스마스도 그저 우화적인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크리스마스를 상징했다. 따라서 잉글랜드 사람들
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그를 묘사했다.
파더 크리스마스가 자신을 착한 개신교도라고 강하게 말하는 이유는 크리스마
스라는 건 죄다 가톨릭 구교도의 헛소리라는 오랜 거부감이 존재했기 때문이
다. 실제로 청교도 혁명에 성공한 청교도들은 잉글랜드에서 크리스마스를 아예
금지시켜 버렸다.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동시에 풍자 팸플릿을 만들어 금
지 조치에 저항했다.
이런 팸플릿들에는 대단히 간단명료한 제목뿐 아니라 그레고리 크리스마스라
는 인물에 관한 묘사도 담겨 있다. 이러한 묘사는 이후 크리스마스를 그리는
표준이 되었다. 그레고리 크리스마스는 흰수염을 단 노인으로, 살집도 있고,
유쾌하다. 심지어 그를 섹시하다고 묘사하는 대목도 있다.
미국의 산타클로스가 잉글랜드에 당도한 것은 1860년대 쯤이었다. 그러곤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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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 가련한 그레고리 C(Christmas의 C)를 잡아 먹었다. 산타는 미국의 수
출품이었다. 책과 이야기와 그림 형태를 띤 온갖 크리스마스 전통도 덤으로 따
라왔다. 참 희한하게도, 내 생각에는 산타야말로 미국이 수출한 최초의 위대한
문화상품이다. 재즈, 할리우드, 로큰롤, 치즈버거를 200년 안에 모두 경험한
요즘, 우리는 미국이 전 세계 문화 패권을 장악한 국가라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다. 하지만 19세기 세계 문화를 좌지우지하던 나라는 영국이었다. 산타가 역
습을 가해올 때까지는 그랬다.
19세기 소설가 찰스 디킨스에게는 딸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1840년
대 어릴 적에 크리스마스이브가 올 때마다 장난감 가게에 가서 소소한 물건을
고를 수 있었던 일을 회고했다. 하지만 새해 전날 집에 선물이 산처럼 쌓여 있
어도 자정이 되어야만 풀어 볼 수 있었다. 그런데 1860년대쯤이면 모든 게 바
뀐다. 산타는 이제 잉글랜드의 집집마다 찾아왔고 그날은 미국에서와 마찬가지
로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불쌍하고 늙은 파더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되었냐고? 글쎄, 잉글랜드인들은
그의 이름을 보존하긴 헸다. 하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 코카콜라
여기서 잠깐 살펴보고 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차림의 산타,
빨갛고 하얀 옷을 차려입은 산타클로스는 코카콜라 때문에 생겨났다는 이야
기다. 이 이야기는 사실이 아니다. 간단한 이야기다. 미국 청량음료 제조사의
광고만 대충 훑어보더라도 산타에게 빨갛고 하얀 복장을 착용하도록 한 게 코
카콜라가 아니라는 사실은 뻔히 알 수 있다. 화이트 록 진저에일은 코카콜라가
산타를 이용하기 10년 전인 1923년에 시작된 켐페인에서 이미 오늘날과 똑같
이 빨갛고 하얀 옷차림의 산타를 제시했다. 하지만 산타가 그런 옷을 입은 건
그보다도 훨씬 오래전부터다.
뉴욕 역사 협회에서 1837년 의뢰해 그린 그림에서도 산타가 흰색 모피 장식
이 달린 빨간 옷을 입고 있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논란의 여지없다.
■ 루돌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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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는 눈덩이 커지듯 커진다. 세월이 갈수록 산타에 관한 이야기가 풍성해진
다는 말이다. 작가들은 누가 되었든 산타의 삶에 어떤 세부 사항이건 마음대로
보탤 수 있었다. 남은 내용도 있고 사라진 내용도 있다. 1850년 루이자 메이
올컷(미국 작가)은 한 단편 소설에서 산타의 요정들에 관한 이야기를 썼는데,
이 내용은 남아 있다.
시카고에 있었던 몽고메리 워드 백화점에서는 크리스마스 판촉 활동으로 고
객이 물건을 살 때마다 색칠용 그림책을 무료로 나눠줬다. 백화점은 늘 이 그
림책을 외주 제작했다. 그러다가 1939년에는 자체 제작을 결정하고, 한 카피
라이터에게 스토리를 짜오라고 지시했다.
카피라이터의 이름은 로버트 L. 메이였다. 그는 크리스마스와 동물을 어떻게
든 연관시켜 이야기를 짜보라는 지시를 받았다. 메이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에
신경을 쓴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유대인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지 않는다) 그는 일을 시작했고 시의 형식으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이 부분에서 설명이 좀 필요할 것 같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의
노래만 알고 있는데 사실 그가 쓴 시와 노래는 다소 차이가 있다.
이야기의 소재는 루돌프다. 평범한 꼬마 순록이지만 북극에 살고 있지는 않
다. 루돌프가 사는 곳은 평범한 순록 마을이다. 하지만 루돌프는 다른 꼬마 순
록들 사이에서 인기가 하나도 없다. 루돌프의 코가 반짝반짝 빛나는 까닭이다.
그 때문에 루돌프는 몹시 슬프지만,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고 산타가 자기
한테 선물을 주리라 생각하면 기운을 낸다.
그런데 산타에게 문제가 생겼다. 하필 그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안개가 짙게
끼었던 것이었다. 산타는 길을 헤맸고, 그러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도무지 하룻밤 만에 선물을 다 나눠주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평범한
순록 마을에 사는 어느 꼬마의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침대에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루돌프의 방이었다. 그는 루돌프를 깨워서 안개등의 역
할을 맡아줄 수 없겠느냐고 부탁했다. 루돌프는 승낙했다. 이렇듯 새로 찾아낸
조명의 도움을 받아 산타는 해 뜰 녘까지 선물을 나눠주는 과제를 간신히 마
칠 수 있었다. 루돌프가 순록 마을로 다시 돌아왔을 때 마을에 있던 순록들은
분명히 보았다. 순록 세계의 수퍼스타인 다른 순록 여덟마리와 왕따인 루돌프
가 땅에 사뿐히 내려앉는 모습을 말이다. 모두들 깊은 인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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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 책은 발간 즉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6년
이 지난 후 메이의 처남이 이 내용을 기반으로 노래를 썼다. 그 이후로 산타의
썰매는 아홉 마리 순록이 끌게 되었다.
하지만 루돌프가 다른 순록들에게 왜 따돌림을 당했는지 설명하는 좀 그럴
듯하고 과학적인 이론이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루돌프는 성전환
순록이다. 최초의 그림을 보면 크리스마스의 루돌프에겐 뿔이 달려있다. 그런
데 수컷 순록은 겨울철에 뿔이 빠진다. 그러니 크리스마스에 뿔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데 몽고메리 워드 백화점의 색칠용 그림책에 처음 그려졌을 때부터
루둘프는 뿔을 다 갖고 있었다. 루돌프는 자기 이름과 달리 암놈이 된 것이다.
202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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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왜? (2)
- 마크 포사이스의 특별한 크리스마스 백과사전 -
■ 마크 포사이스 지음, 오수원 번역
◎ 6장 크리스마스 만찬
크리스마스는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먹어 치우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위대한 신비를 경축하는 날이다.
크리스마스에 고기를 먹어치우는 행위는 서로 꽤 어울린다. 원래 ‘육화’를 의미하는 ‘incarnation’과 ‘육식’을 의미하는 ‘carnivore’는 어원적으로 거의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두 ‘살’을 의미하는 라틴어 낱말 ‘carnis’에서 왔다. incarnation은 ‘살 안으로’라는 뜻이고 ‘살을 먹는다’라는 뜻이 있는 낱말이다.
먼 옛날에는 사람들 누구나 농사를 지었다. 여름철에는 해가 비칠 동안 건초를 만들었다. 수확 철이 되면 씨 뿌렸던 것들을 수확했다. 그리고 11월까지 들판에서 가축을 쳤다. 이때부터 가축을 먹일 풀이 충분히 자라지 않았으므로 가축을 헛간으로 끌고가 건초를 먹였다. 모든 가축이 이런 호사를 누릴 수는 없었다. 건초가 귀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11월 중순이 되면 겨우내 건초를 먹여 살릴 동물과 오늘 당장 죽일 동물을 결정해야 했다.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핼러윈(Halloween)의 유래는 이렇다.
“핼러윈이 되면 도살할 때가 닥치고 그때부터 농부들의 잔치가 시작된다.”
겨울이 다가오면 농부가 할 일이라곤 그리 많지 않다. 곡물은 저장고에 두었고, 가축들은 헛간에 있다. 자, 이제 겨울을 어떻게 보낼까? 사냥은 가능하다. 주변에는 아직도 새가 널려 있다. 게다가 옛날 사람들은 오늘날보다 새를 훨씬 더 먹었다. 종달새, 도요새, 물떼새 등의 조류는 흔한 먹거리였다. 박싱 데이(Boxing Day, 크리스마스 다음 날, 12월 26일)에는 굴뚝새를 사냥하는 풍습이 있었던 적도 있다. 영국인들이 절대로 사냥하지 않는 새는 울새밖에 없다. 울새를 죽이면 불운이 찾아온다고들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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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그렇고 울새의 가슴이 붉은색을 띠는 이유는 이렇다(과학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마리아가 추운 마구간에서 예수를 낳던 중 몸을 덜덜 떨고 있는데 그나마 간신히 피워놓았던 작은 불꽃마저 꺼져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우리 상냥한 울새가 마리아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날아와서는 불 위를 맴맴 돌며 꺼져가는 불꽃을 살려내고 아기 예수를 따듯하게 해줬다. 그러는 과정에서 울새는 가슴을 데었고 그때 빨개진 가슴이 오늘날까지 빨갛게 남아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뭐 어디까지나 얘기니까.
12월은 조류 대학살의 시기였다. 1747년부터는 고기로 만든 러시아 인형(마트료시카)처럼, 커다란 칠면조 안에 거위를 가득 채우고, 거위엔 닭을 가득 채우고, 닭엔 비둘기를, 비둘기에는 자고새를 가득 채워 넣는 음식을 만드는 요리법이 있었다. 물론 크리스마스 요리다.
자 이제 역사로 다시 돌아가 생각해보자. 크리스마스 시즌이고 여러분은 옛날 농부다. 저장고는 고기로 가득 차 있고, 할 일도 별로 없다. 채식주의자에겐 악몽이다. 고기는 일 년 중 대부분의 시기에 사치스러운 음식이었지만 지금 이 시즌만큼은 흔해 빠졌다. 17세기에 나온 <뛰어난 요리사>라는 책이 있다. 크리스마스 만찬으로 내놓아야 하는 음식들을 분명히 밝혀 놓았다.
돼지머리 삶아 누른 편육, 양 골수 끓인 국, 큰 샐러드, 거세한 수탉 수프, 소스에 끓인 송아지 가슴살, 삶은 자고새, 소 등심 로스트, 다진 고기와 과일로 만든 파이, 안초비(멸칫과 생선)소스와 함께 제공되는 양고기 다리 살, 송아지 내장으로 만든 요리, 백조구이, 사슴고기 파이, 배에 푸딩을 넣은 염소, 스테이크 파이, 사슴고기 허벅살 로스트, 정향을 넣은 칠면조구이, 얇은 페이스트리 반죽에 담은 닭고기, 기러기구이, 커스터드(달걀 노른자, 우유 등을 넣어만든 디저트)
이 정도가 첫 번째 코스였다. 두 번째 코스는 메추라기, 여섯 마리의 길들인 비둘기(길들인 고기 맛은 정말 다를까?), 세 마리의 칠면조, 그리고 견과류.....
건포도는 고기와 달리 사치품이었으므로 잘난 척하는 이들이나 찾는 음식이었다. 이런 음식 중 일부는 실제로 부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특히 십자군 전쟁 때 그랬다. 당시엔 부유한 사람들이 성지를 되찾는답시고 중동까지 가서 싸우며 우스꽝스러운 동지중해 음식 취향을 습득해서 돌아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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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은 크리스마스 시즌만큼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집을 개방했고 이들을 위해 급조한 고기 가득한 환상적인 음식을 대접했다. 아마 이때 먹는 식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한 해를 통틀어 가장 잘 먹는 한 끼였을 것이다.
제임스 1세는 귀족들에게 크리스마스 때 런던에 머무는 걸 금지했을 정도다. 귀족들을 할 수 없이 지방에 있는 영지로 돌아가서 주민들에게 근사한 축제를 베풀어야 했다. 귀족과 지역 주민 사이의 사회적 결속이 이 행사에 달려 있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들도 한 해 중 이 시기를 매우 즐겼고 와세일링과 가이징을 하면서 동네를 돌아다녔다. 와세일링이란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양동이에 술을 가득 채우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가이징도 비슷하지만 가면을 쓴다는 점만 다르다. 가이징은 사실‘가장하기(disguising)’의 줄임말이었다.
‘guizer’는 런던 사투리 ‘놈(geezer)’이라는 낱말의 기원이다. 사과나무를 때리는 풍습도 있었는데, 왜 이런 풍습이 있었는지 이유는 모른다. 어쨌든 이 풍습은 대체로 ‘트릭 또는 트릿(핼러윈에 아이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사탕이나 간식을 얻는 풍습)’과 유사하다.
일단 대단히 재미있었고, 한 해 중 유일하게 마을 사람들이 귀족과 동등하게 즐길 수 있는 놀이였다. 심지어 귀족과 평민이 역할을 서로 바꾸기도 했다. 귀족들은 일종의 사회자 격으로 장난꾸러기 영주를 선출했다. 평민 중에서 뽑힌 이 사회자는 크리스마스기 진행되는 12일 동안 일어나는 모든 일을 책임졌다. 그는 귀족들과 그들의 하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할지 명령하거나 지시할 수 있었고, 재미있는 장난으로 놀려먹기도 하고, 귀족이 자신을 위해 춤추게 만들 수도 있었다. 물론 현명한 장난꾸러기 영주는 어떤 편이 자기에게 유리한지 알고 있어서, 권력자들이 불쾌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장난을 쳤다.
튜더 왕조 시대 (1485~1603, 헨리 7세에서 엘리자베스 1세까지, 영국이 강력한 유럽 열강으로 등장,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완수)의 크리스마스는 기본적으로 12일 동안 계속되는 커다란 규모의 파티로, 가난한 사람들이 배불리 잘 먹고, 농부는 영주 흉내를 내고, 모든 사람은 반쯤은 사이코패스처럼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새들을 상대로 선전을 벌이듯, 미친 듯이 새를 잡아먹었던 행사였다. 그 이후 청교도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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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교도는 크리스마스를 금지했다. 1644년 이들은 크리스마스는 기념해도 좋지만, 어떤 음식도 먹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크리스마스가 다른 날과 같은 평일이라고 주장하며 더 강하게 밀어붙여서 국회의원들에게는 크리스마스에 회의도 열게 했다. 1647년에는 크리스마스가 속죄의 날이 되어야 한다고 선포했고, 1652년에는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모든 걸 금지했다.
사람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리건 크리스마스 금지는 다수 국민의 지지를 얻기가 힘들었다. 폭동을 일으킨 주요 세력은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에겐 한 해 한 번 영주의 집에서 먹는 한 끼의 만찬이 무엇보다 소중했기 때문이다. 결코, 제임스 1세(청교도 박해)는 옳았고 찰스 1세(청교도에 굴복)는 틀렸다. 크리스마스는 이후 8년간 공식적으로 불법이었다.
크리스마스는 거의 10년 동안 금지되었다가 1660년 왕정복고와 더불어 부활했다. 살아남긴 했지만 이미 내상을 크게 입은 후였다.
튜더 왕조 시대의 풍성했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져서, 그 이후의 역사가들은 고대 잉글랜드의 크리스마스 풍습을 좋았던 옛날로 기억했다.
크리스마스는 이제 기운을 잃고 절뚝거렸다. 18세기 초반엔 잠깐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하지만 어느 날 모든 사람이 갑자기 농장을 버리고 도시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산업혁명과 찰스 디킨스가 태어났고, 크리스마스는 죽었다.
시즌도 아닌데 일찌감치 세워진 크리스마스트리가 언짢고, 상점에서 들리는 노래라곤 머라이어 캐리의 <올 아이 원트 포 크리스마스 이즈 유>밖에 없어 지겹고, 주위엔 온통 아이들과 성난 어른들로 가득한 상황에 짜증난 스쿠루지 영감이라면 19세기 초반은 정말 만족스러운 시대였을 것이다. 1790년에서 1835년까지 45년 중 20년간 영국의 <더 타임스>에서는 크리스마스라는 말을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전혀. 아예. 제로.
구조적인 문제였다. 이제는 사람들이 들판이 아닌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고, 공장은 12월 25일에도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잘 돌아갔다. 게으른 농부들의 시대는 이미 사라져 버렸다.
이제 모든 사람이 도시에 살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무언가 중요한 걸 잃었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빅토리아 시대 잉글랜드는 세계를 얻었지만, 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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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뿌리는 잃었다는 생각에 빠져 있었다. 즐거움에 넘치던 자작농은, 귀족 영주는, 그 옛날 물건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크리스마스는 어디로 갔는가? 1836년 찰스 디킨스는 이렇게 썼다.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크리스마스가 자기한테는 옛날과 다르다고 말한다.” 사실이 그랬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자리에 앉아 머리를 짜내다 결국 결론을 내렸다. 크리스마스는 항상 마을 공동체 주변에 있었지만, 이제 그들에게는 마을 공동체라는 게 없으니, 지금부터 크리스마스의 중심은 집, 가정, 벽난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되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크리스마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 모두가 집에 모여 함께 둘러앉아서 훌륭한 고기를 나눠 먹는 게 바로 크리스마스다. 가난하면 소고기를 먹으면 되고, 중간계급이라면 거위를 먹고, 넉넉하다면 칠면조를 먹으면 될 일이다.
드디어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럴>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때가 온 것 같다. 우선 이 소설은 내가 이제껏 이야기했던 내용을 잘 요약하고 있다.
1. 스크루지는 도시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사람을 대변한다. 그러한 까닭에 그 가 실제로 어떤 일을 하는지 언급되지 않는다. 여러분은 그를 빈민 지역 임대주 또는 사채업자라고 생각할 수 있다.
2. 시작 부분에서 스크루지는 밥 크래칫에게 하루 휴가를 줘야 해서 ‘매년 12 월 25일마다 주머니에서 돈을 털리는 셈’이라고 불평한다. 옛날 크리스마 스에서 느낄 수 있던 과거 시골의 한갓진 모습과 달리, 도시 노동자들은 일 년 내내 바쁘게 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12일간의 여유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3. 그때 과거의 크리스마스 유령이 나타나 스크루지를 시골에서 보낸 어린 시 절로 데리고 간다. 스크루지는 시골이라는 과거와 도시라는 현재를 함께 가 지고 있는 전형적인 빅토리아 사람이기 때문이다.
4. 스크루지가 아직 젊은이였을 때의 페지윅 파티로 시간을 거슬러 가보면, 지 금과는 달리 크리스마스가 무척 재미있는 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현재의 크리스마스 유령이 스크루지에게 가난한 밥 크래칫이 거위를 먹을 계획임을 보여준다. 그는 또 스크루지에게 모든 훌륭한 크리스마스는 집안 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라는 것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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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스크루지가 삶의 태도를 바꾸면서, 그는 가장 먼저 밥 크래칫에게 칠면조를 사준다. 칠면조는 거위보다 훨씬 맛있고 비싸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크리스마스 선물도 없고, 크리스마스 트리도 없고, 산타클로스도 없다. 배경이 1843년 잉글랜드이다 보니, 아직 이런 것들이 대중화되지 않았던 시기와 장소였기 때문이다.
1840년대 크리스마스 크래커가 들어오면서 웃을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던 크리스마스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 크래커는 처음엔 그저 신기한 종류의 사탕이었다. 그런데 이 사탕은 포장되어 있었다. 이것만 해도 그 지루한 시절엔 대단한 발명이라 할 수 있었다. 이 포장은 한 프랑스인이 발명했는데, 좀 예쁘긴 하지만,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다. 어쨌든 그는 사탕 포장지에 미약한 폭발물을 부착해서 두 사람이 양쪽 끝을 잡고 끌어당기면 작은 폭발이 일어나도록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크래커 봉봉이라 불리던 이 상품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41년이었고, 발명은 1847년에 되었다.
사실 봉봉 크래커는 이전에는 크리스마스 코사크(러시아 군인들과 총에서 딴 이름)라는 이름으로 불렸지만, 몇 년 후 대표적인 크리스마스 크래커로 자리잡으며 이름도 크리스마스 크래커가 되었다. 어쨌든 스미스는 신기한 사탕을 크리스마스와 처음으로 연관시킨 사람이다. 그리고 그는 사탕 포장지가 기막히기만 하다면, 사탕 따위는 없어도 된다는 걸 처음으로 깨달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의 아들 월터는 포장 안에 종이 왕관을 집어넣자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회사는 성장하고, 또 성장했다. 톰 스미스 크래커는 오늘날까지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크래커 제조사로 남아 있다.
많은 기묘한 것들이 크래커 안에 들어있다.
◎ 7장 박싱 데이
옛날 옛적, 크리스마스 박스라는 게 있었다. 크리스마스 박스에는 마치 돼지 저금통처럼 작고 긴 구멍이 뚫려 있어서 그 구멍으로 동전을 넣을 수 있었다. 이 박스는 교회에서 보관했는데, 역시 돼지 저금통처럼, 아무 때나 마음대로 열 수는 없었고, 완전히 부숴야만 속에 있는 걸 꺼낼 수 있었다. 박스를 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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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파괴하는 일은 크리스마스 때 이뤄졌으므로 크리스마스 박스라는 이름이 붙었다.
크리스마스 풍습이 다 그렇듯이 이 박스 역시 세속화 과정을 겪었다. 이 박스가 처음으로 언급된 곳은 도박장이었다. 도박장에서 고객들은 도박장을 관리하는 직원에게 팁을 남겼고 팁이 든 박스는 크리스마스에 부수도록 했다. 다른 곳들도 도박장의 선례를 따르기 시작했다. 얼마 안 가서 모든 주택마다 하인들을 위한 크리스마스 박스가 생겼다.
공짜 돈이 생기는 방법이라면 누구나 눈독을 들이듯이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박스라는 아이디어를 적극 수용했다. 하지만 하인이 아니면서, 우리에게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여러분에게 어떤 식으로든 서비스를 제공하는(대장장이, 목수, 배관공, 전기공, 미용사 등등의) 상인들은 자신을 고객의 하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은 크리스마스 박스를 원하는 게 아니라 두둑한 팁을 원한다. 도제(스승에게 직업에 필요한 지식이나 기능을 배우는 사람, 급여 없음)라면 이 풍습에 관심이 있었을 것이다. 18세기 중반 이미 이러한 관행은 돈이 꽤 많이 드는 관습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존 필딩 경은 그의 책에서 “도제들은 이 돈을 창녀에게 쓰기 바쁘며, 창녀들은 그 대가로 도제들에게 매독과 죽음을 선사했다”고 썼다. 도제들은 매년 크리스마스가 지난 첫 번째 주일마다 찾아왔다. 이 중에서 교구 정비원이 특히 끈덕지게 팁을 요구했던 것 같다. 교구 경비원이란 교구에서 돈을 받는 일종의 경찰이었다.
■ 쇠퇴와 몰락
요즘 크리스마스는 끝나는 시점이 정확하지 않다. 예전에는 달랐다. 크리스마스는 12일 동안 내내 흥청망청 먹고 마시다가 12야(12일째 되는 날 밤)에 커다란 잔치와 연극(세익스피어의 희극 이름이 <십이야>였을 것이다)으로 정점을 찍으며 마무리 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박싱 데이(크리스마스 다음날인 12월 26일)는 그저 새해 첫날 전 보내야 하는 불가사의한 일주일의 전주곡에 불과하다. 이 일주일 동안 오늘이 며칠인지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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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는 ‘이제 끝’하고 끝나는 게 아니라 조금씩 사라져 간다. 거실에서 크리스마스트리 역할을 했던 죽은 나무가 조금씩 장소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고, 크리스마스 장식 방울이 좀 유치해 보이고, 크리스마스 노래가 싸구려로 들리는 순간이 온다. 축제가 좀 지나쳤다는 생각에 겸연쩍어진다.
열두 번째 밤(1월 6일, 주현절) 전에는 모든 장식을 싸서 집어넣어야 한다. 방에 있던 장식은 다 떼고, 크리스마스트리도 집 밖 도로에 내놓아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가야 한다. 당연하면서도 적절한 말이다. 원래 크리스마스는 희한하게도 ‘가라, 그리스도여’라는 의미였다.
사람들은 늘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와, 그것이 어떻게 상실되고, 잊히고, 오해받았는지 이야기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의 어원을 따지면 그 의미는 진짜 ‘가라, 그리스도여’다. 어원이란 그 말의 진정한 의미를 가리키는 것이므로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임에 틀림없다.
초기 기독교에 따르면 종교에는 네 가지 수준이 있다. 첫 번째 수준은 이교도 수준이다. 이교도가 된다는 건 나쁜 일이다. 탐욕과 방탕에 빠진다는 의미다. 탐욕과 방탕은 악이다. 따라서 이교도는 교회에 들어갈 수 없다.
두 번째 수준은 질문하는 사람 혹은 청중의 수준이다. 청중은 적어도 한 번은 기독교인에게 예수에 대해 묻고 관심을 표명한 사람이다.
세 번째 수준은, 시간이 지나면 청중은 이제 지쳐서 자신의 이름을 기독교식으로 바꾸고 고행을 시작하거나 포기하고 지침을 따르겠다고 한다. 이 순간에 그는 입문자가 된다. 이제는 미사에 올 수 있지만, 아직 전반부에만 들어올 수 있다.
마지막으로 두 해 동안의 교육, 그리고 부도덕한 짓도 악행도 재미도 전혀 없는 삶을 통과해야만 입문자는 세례를 받을 수 있다. 이때부터 그는 성찬을 받을 수 있고, 신자들의 퇴장 때까지 미사에 참여할 수 있다. 미사가 끝날 때까지 미사에 참여할 수 있다. 미사가 끝날 때까지 교회에 머물수 있다는 뜻이다.
사실 고대 영어에서는 미사(Mass)를 ‘보내기’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고대 기독교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치유하는 자’라는 뜻의 ‘Healer-Sending’으로 불렀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참 다정하고 멋진 이름이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고대 영어 대신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지닌 그리스어의 그리스도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여기서 나가 get out here’라는 의미의 라틴어 ‘missa’를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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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대목에서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치유자보다는 특권을 받은 자로 해석 한 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하는 듯 보인다.
◎ 에필로그 : 그래도 크리스마스는 계속된다
“행복하고 근사한 크리스마스, 우리를 어린 시절의 환상으로 다시 데려다 주는 시절” - 찰스 디킨스의 <픽윅 클럽 여행기>에서
혹시 독자 여러분은 영국인인 내가 왜 다른 나라의 크리스마스에 관해서는 아무 언급도 하지 않았는지 의아해할 수도 있다. 물론 아주 기묘하면서도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풍습을 가진 나라들이 많다. 가령 아이슬란드에는, 영국식으로 말하면 파더 크리스마스, 미국식으로 말하면 산타클로스가 무려 열세 명이나 있다.
아이슬란드에서는 산타클로스보다 율라드라는 열세 명의 트롤이 더 유명하다 대개 못된 짓을 하거나 장난을 치는 민담 속 괴물에서 유래하여 변형된 존재들이다. 이들은 창문으로 엿보는 자에서 소시지 도둑에 이르기까지 기막힌 아이슬란드풍 이름을 갖고 있다. 실제로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는 문제라면 단연코 아이슬란드의 시스템이 우리 시스템보다 낫다.
아이슬란드에서는 크리스마스까지 포함해서 13일 내내 선물을 주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부모는 착하게 굴지 않으면 선물을 주지 않겠다고 정도의 규칙을 내내 따르기만 해도 아이를 야단쳐가며 괴롭히는 사디스트 신세를 면할 수 있다. 더 정확히 말해 말을 듣지 않는 아이는 선물 대신 썩은 감자를 받는다. 물론 착하게 굴면 다음 날엔 선물을 받는다. 그 결과 14일간 가정에는 평화와 축복이 깃든다.
우리는 뭔가 특별한 걸 잊고 있는 듯하다. 크리스마스도 그 특별한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수많은 전통이 사라지고, 새로운 전통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섰다. 완벽한 크리스마스는 어리;ls 시절에 누린 크리스마스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다. 해마다 열리는 크리스마스 잔치엔 늘 뭔가 빠져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 만찬이 빠진 식탁의 빈 자리는 옛날 누군가가 않았던 자리이리라. 그리고 언젠가는 내가 앉았던 자리도 비어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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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만물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마치 톱으로 조금씩 썰어내듯 아주 조금씩 사라져 간다.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받을 수 있는 온갖 것들이지만, 어른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상실해버린 온갖 것들이다.
2024. 1.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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