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물

2010. 1. 25. 19:04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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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내 인생을 바꾼 - 

          선              물


■ 윤영무 지음

0 56년 충남 부여 생, 건국대

0 82 MBC 보도국, 사회부, 경제부 등 기자 

0 97 한국방송대상 기자상

0 98 한국 언론 대상

0 현재 MBC 심의 평가부 심의위원

0 ‘대한민국에서 장남으로 살아가기’ 등 다수


■ 들어가는 말


0 이 세상에서 돈 보다 더 중요한 선물이 있다면 저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    합니다. 부모한테 자식은 하늘이 준 선물입니다. 자식이 건강하게 크고 잘    되면 그처럼 기쁜 선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자식과 골프는 자기 마음대로    안 된다는 말도 있지만, 정말 돈 가지고도 안 되는 게 자식일 겁니다. 그    러니 자식이 잘 되는 것은 부모가 가장 가슴조리며 기다리는 최고의 선물    이 아닐 수 없지요. 모든 부모들은 억만금 보다 자식 잘 되는 선물을 받기    원합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선물은 돈이 아니라 사람    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어디 자식뿐일까요?

  

0 첫사랑 여자가 여러 날에 걸쳐 손뜨개질로 정성껏 만든 털옷을 주면 남자    는 눈물 납니다. 여자들은 남자 친구가 만들어 직접 걸어준 토끼풀 팔찌나    목걸이에 감동하지요.

   그런 것들은 정말 백만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사람의 선물이니까요. 사    람의 마음이 담긴 선물은 가장 오랫동안 기억에 남습니다. 아무리 애타는    사랑도 세 달만 지나면 다 잊혀지고, 눈에 씌운 콩깍지도 벗겨나간다고 합    니다. 따라서 선물도 잊혀지게 마련이지만 돈 보다 귀한 ‘사람의 선물’은     평생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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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저는 지금 당장 다른 사람한테 줄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내 마음이 나의     선물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상상해 봅니다. 가장 친한 친구    나 선후배들에게서 ‘너는 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큰 선물이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저는 이 세상에서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사    람은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테니까요.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따라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선물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제 마음이 가는 곳    에 제 몸을 주다보니까 저는 결혼이란 선물을 얻어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가장 큰 선물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0 가을의 감나무에 감이 많이 달린 것을 보신 적 있나요? 저는 그런 감나무    의 결실을 보면 마음이 풍성해 집니다. 왜냐하면 감을 따지 않고도 풍요로    운 자연의 선물을 눈으로 받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렇게 길거리의 감나무    를 나 자신에게 보라며 선물로 줍니다. 보면 볼수록 먹지 않아도 먹은 것    과 같이 배가 부릅니다.


■ 고등어


0 고향 인근에 고등어 장사하는 남자가 있었는데 생활력이 강하고 성실하여    서울에서 사업에 크게 성공하였다. 그는 자신의 성공이 옛날 고향에서 고    등어 장사할 때 많이 팔아 준 고향 사람들 덕분이라 생각하고 매년 명절    이나 휴가 때 고향 내려갈 일이 있을 때마다 동네 주민들에게 고등어를     나누어 주기 시작했다.

 

0 그의 고등어 선물은 20년이나 계속되었다. 이태 전 그는 장기간의 해외     출장으로 한동안 고향에 가보지 못했고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고향 사람    들의 걱정하는 전화가 빗발쳤다. 그동안 전화 연락이 안 되어 사업에 실패    했다는 등 이상한 말도 들리고 걱정을 많이 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그가 고향에 내려가지 못하게 되면 고향사람들이 먼저 전화를 걸    어 안부를 묻게 된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모든 일을 자기 사업인 양 걱정해주는 마음이 얼마나 감    사하고 따뜻한지 고향 사랑이 새록새록 솟아난다는 그다. 고향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시작했던 고등어 선물은 결국, 그 자신에게 엄청난 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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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감으로 되돌아 왔다. 그의 뒤에는 그가 잘 되기를 기원하는 고향사람들    이 든든히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 김 100톳


0 부여에서 자란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서울로 유학을 하게 되었다.     고향을 떠나기 전 동네 아주머니 한 분이 나를 불러 저녁 밥상을 차려 주    셨다. 당시로서는 진수성찬인 쌀밥에 갈치구이..... 그 일이 있은 지 마흔이    넘도록 까맣게 잊고 지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머니의 부고장이 날아왔다. 초등학교 동창들이 이참    에 얼굴이라도 한 번 보자며 소식을 전해온 것이었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제야 아주머니가 차려주셨던 저녁 밥상이 가슴 저미도록 감사히    다가왔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무 큰 실수를 저질렀지만    이미 늦어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주머니께 감사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나는 고향 분들에게 1년에 한 번 만이라도 선물을 보내기로 마음을    먹었다.

   

0 설을 앞두고 나는 김 100톳을 사서 고향에 보냈다. 그리고 해마다 설이면    같은 선물을 했다. 처음에는 이놈이 정치에 뜻이 있나보다 하고 달갑지 않    게 생각하던 동네 사람들도 이제는 나의 진심을 알게 되었고, 내가 TV에    나오는 걸 보면 간혹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기도 한다. 또 고향에 다녀올    때마다 밭두렁에 달려 있던 큼직한 호박을 뚝 따서 차에 실어 주시거나     맛이나 보라면서 이런저런 푸성귀나 곡식을 갖다 주곤 하신다. 꼭 먹어야    맛인가. 이 훈훈한 마음이면 충분히 하늘을 날고도 남겠다.


■ 제주 보리쌀


0 ‘선물’ 하면 꼭 생각나는 것이 명절이다. 즐거운 날에 서로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최근에는 그 수위가 좀 과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명절 선물은 오히려 간소하게 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내 생    각이다. 설이나 추석에는 어느 집이나 먹을 게 많다. 그렇지 않아도 먹을    것 천진데 또 먹을 것을 사다 줘봤자 환영받지 못할 수도 있다. 그저 양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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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켤레 싸 들고 가 빈손만 면하면 인사치레로는 충분하지 않을까.

  

0 명절 선물은 가급적 검소하게 하고 평소에 성의를 표하는 것이 기억에 오    래 남는다. 선물이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정말 필요한 것을 해주면 받는    기쁨이 더 크다. 여기에 진심이 담기면 더욱 값지다.

   한 사람이 제주도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는 제주도의 어느 방송국에서    카메라맨으로 일하는 친구를 만났다.

   “제주도를 대표할 만한 선물이 뭐가 있나?”

   “보리쌀이 좋지 않을까? 게다가 그 어르신 당뇨가 있다며?”

   “그래서 선물하기도 쉽지가 않아. 그런데 제주 보리쌀이 당뇨에 좋다는     얘기야?”

    “그래 제주도는 바람이 하도 불어서 보리알이 여물기도 전에 바람이 그    냥 흔들어 대니 보리쌀이 들깨만 하지. 씨눈에 겨우 알맹이가 붙어 있는     정도로 알이 작아. 하지만 그만큼 야무지다네. 거센 바람에 버티다보니 눈    에 보이지 않게 영양가가 높아져서 당뇨 환자에겐 그만이라고 하던걸.”

 

0 친구의 말을 듣고 제주 보리쌀 반가마니를 사서 서울에 도착한 그는 보리    쌀에 얽힌 이야기와 함께 어르신께 당뇨에 특히 좋다니 드셔 보시라고 했    다. 

   “자네 정말 대단허이. 이렇게 마음이 듬뿍 담긴 선물은 내 생전 처음 받    아보네. 내 오늘부로 자네를 아들로 삼고 싶네.” 

   보리쌀 반가마니 덕분에 그는 정말 어르신의 아들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 어르신은 누군가에게 그를 소개할 때면 언제나 그가 제주에서 직접 짊    어지고 온 보리쌀 이야기를 자랑삼아 꺼내곤 하셨다. 그 보리쌀 선물 하나    만으로도 그의 마음 씀씀이와 사람됨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생강


0 한 번은 제주 보리쌀을 선물했던 어르신의 사모님이 그를 불러 물었다.

   “자네 시골에서 자랐다니 생강 잎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겠네?”

   “갑자기 생강은 왜요?”

   “아니 별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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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죄송합니다. 저도 아직 잎을 본 적이 없어서...”

   그는 곧바로 시장에 가서 물으니 강원도 철원의 농장에서 가져 온다고     했다. 그는 다시 철원으로 생강 밭을 찾아갔다. 그의 눈앞에는 난생 처음    보는 생강 밭이 푸르게 펼쳐져 있었다. 생강은 댓잎처럼 생긴 푸른 잎을     달고 동양란 크기로 자라고 있었다. 그는 주인에게 부탁해 생강 몇 뿌리를    뽑아 신문지로 싸 들고 서울로 왔다.

   “보세요, 사모님. 사모님께 드리려고 철원에서 직접 가져온 생강입니다.     대나무 같기도 하고 동양란 같기도 하고 참 예쁘죠? 제가 화단에 심어 놓    겠습니다.”   

   “세상에..... 생강이 이렇게 생겼구나.”


0 그 뒤로도 그는 누가 무엇을 부탁하건 시장에서 구입할 수 있는 것이라도    항상 현지에 직접 가서 구해다 줬다. 그렇게 살다 보니 그의 곁에는 항상    그의 편이 되어 주고 위로를 전하는 친구들이 가득했다. 그 어르신 댁에서    도 그를 두고 보리쌀을 제주도에서 사온 녀석, 생강을 철원에 가서 뽑아온    녀석이라며 한 식구처럼 여겼다.

 

■ 토종닭


0 누군가가 전화를 걸어 그대에게 뭔가 재미난 일이 없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대는 성공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대에게서 획기적인 것이 나오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 그대에게 가면 뭔가 재미난 일이 있을까 싶    어 ‘당신 오늘 뭐해?’하는 전화를 하는 것이다. 성공하는 사람은 실제로 늘    뭔가를 기획해 상대방에게 깜짝 선물을 하곤 한다. 나는 거기에 도달하려    면 멀었지만, 가끔 그런 전화를 받는다. 언젠가 시골집에 내려가서 글을     쓰고 있는데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요즘 뭐하냐? 뭐 재미있는 일 없어?”

   그의 목소리에는 내가 뭔가 새로운 이벤트를 만들어줬으면 하는 기대가    가득했다. 나는 살짝 장난기가 동했다.

    “그래? 잠깐 내려올래? 내가 토종닭을 키우는데, 너 내려오면 무공해 토    종닭 한 마리 잡아주마, 요즘 이런 선물이 어디 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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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내가 토종닭을 키운다는 건 완전 거짓말이다. 하지만 이참에 이 시골에서    친구를 만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가.

   그는 결국 시골로 내려왔다. 그래서 나는 토종닭 집에 부탁해 그에게 토    종닭 잡는 것을 보여주고 맛있는 토종닭 요리를 먹여줬다. 내 이벤트를 눈    치 챘는지 그가 한 마디 툭 던졌다.

   “야! 요즘에 시골 토종닭이 어디 있냐? 이거 정말 네가 기른 거 맞아?”

   “네가 지금 보고 있잖아. 아침에 갖다 맡긴 거라니깐. 털색이 불그스름한    게 영락없지 않냐? 달걀 낳는 레그혼은 흰색이잖아. 이 다리 단단하게 생    긴 것 좀 봐. 날마다 벌레를 잡아먹고 다녀서 이런 거야. 일단 먹고 맛으    로 평가하라구.”

   그는 결국 내 이벤트에 고개를 끄덕였다.


■ 어리굴젓


0 뜻밖의 선물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에게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어 준다. 하지만 그런 선물은 진심이 아니면 못하는 것이다. 선물은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선물을 하고 싶으면 시장이 아    니라 밭에까지 가서라도 직접 사다 주는 정성이 필요하다. 시기적으로도     명절보다는 평소에 전혀 뜻밖의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    런 선물에 대한 감동은 평생을 두고 여운이 남으며 두고두고 이야깃거리    가 된다.

 

0 동생이 사업상 골프 접대를 하는 일이 잦다고 해서 내가 평소에 선물을     하는 노하우를 한 수 전수했다.

   “넌 사업상 지방에 가는 일이 많잖아? 그때마다 그 지방의 특산품을 사    오는 거야. 가격도 1만 원을 안 넘게, 5천 원에서 1만 원선으로 여러 개     준비해. 예를 들어 서산엘 갔다면 어리굴젓이 좋겠지.”

   동생은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실제로 골프 접대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아요. 그런 작은 선물로     되겠어요?”

    “골프 접대를 하는 목적이 뭐야? 네 사업에 조금이라도 이익이 될까 해    서 아냐? 5천 원짜리 어리굴젓 같은 작은 선물로도 사업에 도움이 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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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지 않겠니? 선물은 돈의 크기가 아니야. 아마 어리굴젓이 골프 접대보다    생산성이 높을 테니 한번 시도나 해봐.”


0 동생은 형의 말을 듣고 그대로 실천에 옮겼다. 몇 달 뒤 동생에게서 전화    가 왔다.

   “형이 시키는 대로 했더니 제법 큰 영업이 3건이나 성사됐어요. 형, 고마    워요.”

 

■ 감자


0 몇 해 전 지방 출장을 갔던 친구가 우연히 하얀 꽃이 핀 감자밭을 보게     되었다. 마침 주인 할아버지가 감자밭을 정성스레 가꾸고 있었다. 그는 갑    자기 좋은 생각이 나서 말했다.

   “할아버지 이 감자밭 중 한 다섯 이랑 정도만 저에게 파실 수 있나요?”

   “그래요? 농사가 잘 됐는지 캐보지 않고도 괜찮겠어요?”

   “네 할아버지 정성만 봐도....”

   그는 한 이랑에 1만 원씩 5만원에 다섯 이랑을 사고 나중에 캐봐서 더     나오면 그만큼 더 드리기로 하고 감자밭을 샀다. 노인은 덤으로 한 이랑을    더 주고 계산을 마쳤다.

 

0 얼마 후 이 친구는 거래처 사장에게 선물할 일이 생겨서 얼마 전에 사 둔    감자밭을 선물하기로 했다.

   “제가요 시골에 감자를 심어놨는데 캐다 드시겠어요? 마침 모레가 감자    가 가장 맛있다는 하지잖아요. 맛도 제법 들었고 완전 무공해 감자니까 그    냥 캐다 드세요. 감자밭 주변 풍광도 빼어나 온 가족이 나들이 삼아 한번    바람 쐬고 오시면 딱 안성마춤일 거예요.”

   “그래 그럼 한번 구경삼아 가봐야겠구먼.”


0 며칠 후 주말에 그는 가족과 함께 오래간만에 시골의 감자밭으로 가 알뜰    하게 한 이랑을 캤다. 튼실한 감자가 너무나 먹음직스러웠다. 이때 뒷짐을    지고 구경하고 있던 감자밭 주인 할아버지가 지나가는 투로 말했다.

   “허, 그 양반 참 대단한 사람이야. 그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내려와 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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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을 돌보길래  누구한테 줄려고 그토록 정성을 쏟나 했더니 바로 선생     가족들이었구먼!”

   

   며칠 뒤 그의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감자 너무 잘 먹을게요. 어쩜 이렇게 실하고 맛이 좋아요? 감자도 감자    지만 저이와 애들이 저처럼 기뻐하는 모습은 처음 봤어요. 정말 고마워      요.”

   물론 거래처 사장도 친구한테 전화를 해 감사를 표시했다.

   “정말 고맙네. 그 많고 많은 선물 중에 세상에 감자를 이랑 째 받아보는     건 처음이네 나라면 과일궤짝이나 갈비궤짝은 줄지언정 정성들여 힘들게     가꾼 감자밭을 다른 사람에게 선뜻 주지는 못할 것 같네. 정말 귀중한 선     물, 두고두고 잊지 않겠네!”


■ 주유소 화장지


0 주유소에 들를 때마다 서비스로 받은 화장지를 모아두었다가 영웅이 된     사람이 있다. 바로 나다. 나는 차가 없지만 회사 차나 아내의 차를 얻어     타고 주유소를 갈 때마다 받아 온 화장지를 하나둘 모아 두었다. 화장지를    한 줄로 쭈욱 쌓아올리면 내 허리 높이만큼 올라왔다. 나는 그것을 끈으로    꽁꽁 묶어 아내의 차 트렁크에 싣고 휴가를 떠날 참이었다. 아내는 그렇게    많은 화장지를 가져가서 어디에 쓰려고 하냐며 투덜댔다.

   “가져가도 적당히 가져가야지, 화장지 장사할 거예요?”

   “다 생각이 있어서 그래, 그냥 싣고 가자.”

   내가 그렇게 많은 화장지를 가지고 가는 데는 숨은 이유가 있다. 내가 아    는 사람이 시골에 다녀오다가 국도변 휴게실로 볼일을 보러 갔는데, 화장    지가 없다며 사람들이 아우성이더라는 것이다. 그는 자기 차에 쌓아두었던    화장지를 되는 대로 들고 와서 화장실 문 밑으로 하나씩 밀어 넣어 주었    다. 그 순간 화장실 여기저기서 야유와 욕설이 흘러나왔다.

   “야! 화장지를 미리미리 놔둬야지, 이제야 넣어주면 어떡해!”

   시키지도 않은 좋은 일에 애쓰고 욕까지 먹은 그는 화장실 입구 쪽에 서    서 조용히 순서를 기다렸다. 볼일을 보고 나온 손님들은 화장지 사건을 본    격적으로 따지려 들다 그를 보고 뒤로 움찔 했다. 그 역시 손님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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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눈에 알아본 것이었다. 그들은 서둘러 태도를 바꾸어 허리를 숙였다.

   “아, 정말 죄송합니다. 휴지를 넣어주신 분이군요. 정말 고맙습니다.”

   사람들에게 빙 둘러싸인 그는 ‘죽일 놈’에서 어느 새 영웅으로 변해 있었    다.


0 나는 화장지를 트렁크에 실으며 그를 생각했다. 오늘은 마침 시골로 가는    길이라서 외진 산골 휴게소의 화장실에 갔더니 화장지가 없는 것이었다.

   이때다! 나는 자동차로 달려가 트렁크에서 휴지를 꺼내들고 화장실로 뛰    어왔다.

   “안에 화장지 있어요? 없으면 드릴까요?”

   여기저기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칸칸이 문을 두드리며 문 밑으로 화장지    를 하나씩 넣어주었다. 다들 급한 김에 볼일을 보고 일어서려다 뒤처리할    화장지가 없어 난감해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 얼마나 당황스러운 사건    인가! 나는 이 작지만 중대한 사건을 내가 해결해 줬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기뻤다. 나는 빈칸 문 위에도 화장지를 하나씩 걸쳐두고 나왔다. 잠시 후    안에 있던 사람들 중 하나가 겸연쩍게 다가와 인사를 했다.

   “오늘 주신 화장지는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었습니다. 그렇게    귀한 선물은 처음 받아봤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는 정말 행복해 했다. 그 화장지들은 공짜로 얻어온 것이었지만 화장실    에서 여러 사람을 감동시켰다. 휴지를 모아 두었다가 꼭 필요한 데 갖다     놓으려던 내 생각은 옳았던 것이다.


노란우산


0 주룩주룩 비가 내리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시골의 부동산 사무실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그는 누군가 우산을 쓰고 논둑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    게 되었다. 진한 노란색 우산이었다. 사무실과 논둑길의 거리가 제법 멀었    고 벼가 허리 높이까지 자라 있어서 우산을 든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    았다. 노란 우산만이 푸르른 논 사이에서 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벼이삭 사이로 노란색 코스모스 하나가 하늘거리고 있는 것 같    은 착각이 일 만큼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아, 우산이 저렇게 예쁠 수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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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전에 느껴보지 못한 감회에 젖었다. 그 ‘우산꽃’에 충격과 감동을 받    은 그는 다음 날 아침 일찍 인근 재래시장에 나가 우산가게를 찾았다. 우    산 가게라고 해봤자 시골 잡화점이었다. 

   그는 그날 아침 시장에 있던 100여 개의 어린이 우산을 전부 다 샀다.     노란색과 주황색, 빨간색으로 화려한 우산들, 그는 그것들을 펴서 사무실    앞에다 쭉 늘어놓았다. 또 몇 개는 쭉 펴서 사무실 앞 유리창에 걸어 놓았    다. 사무실은 금세 코스모스로 둘러싸인 듯 화사해졌다.

   그 광경을 보고 동네 아이들이 다가왔다. 그는 아이들에게 우산을 하나씩    선물했다. 또 사무실을 찾아온 고객들에게 기념으로 하나씩 주기도 했다.    그는 부동산 중개 사무실을 하고 있었기에 사무실을 찾는 낮선 손님들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어느 대기업의 회장이 그곳을 지나가다 그 진기한    광경에 마음이 끌려 사무실로 들어섰다.

   “왜 비도 안 오는데 우산을 펼쳐 놓았어요?”

   “그냥 예뻐서요. 동네 아이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기도 하고요.... ”

   “그럼 그냥 주면 될 걸, 왜 펼쳐서 늘어놓았나요?”

   “제 눈에는 우산이 꽃으로 보여서 그렇습니다. 언젠가 비가 오는 날, 저    기 논 가운데서 누군가가 이런 우산을 쓰고 일을 하고 있는데, 그 모습이    제 눈에는 마치 논둑길에 코스모스 꽃이 활짝 핀 것처럼 보였지요.”

   화장은 그제야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정말 마음이 고우신 분이군요.”

   회장은 수행원과 뭔가 얘기하더니 그에게 공장부지 하나 알아봐 달라고    했다. 마침내 그는 대기업 회장을 고객으로 만들고 많은 중개료 수입을 올    리게 되었다.


0 며칠 뒤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날 아침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저는 이 동네 초등학교 교장입니다. 아침에 비가 와서 운동장을 내다보    니 우리학교 운동장이 꽃밭으로 변해 있더군요. 아이들이 색색의 우산을     쓰고 등교를 하는데, 마치 꽃이 활짝 핀 것 같았지요. 30년 넘게 교직생활    을 해왔지만 이런 풍경은 본 적이 없어요. 어찌된 일인가 싶어 아이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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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어보았더니 선생님이 우산을 하나씩 나눠주셨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감    사 인사라도 드리려고 전화 드렸어요.”


■ 치킨집 우산


0 우산으로 복을 얻은 사람이 또 있다. 그는 서울의 한 아파트 단지 앞에 자    리 잡은 작은 치킨집 주인이다. IMF 때 명예퇴직을 한 뒤 재산을 정리해    가게를 차린 것이다. 장사 경험은 없었지만 열심히 하면 잘 될 것이라는     의욕만은 충천했다. 하지만 광고지를 돌리고 손님을 기다렸지만 생각처럼    장사가 안 되었다. 치킨집은 배달이 중요한데, 좀체 전화가 안 울리는 것    이었다.

  

0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소낙비가 쏟아졌다. 마침 하교시간이라 많은 아이    들이 가방을 머리 위에 대고 빗속을 달려가고 있었다. 망연히 창밖을 바라    보던 그는 갑자기 아이들에게 우산을 씌워 바래다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그는 서둘러 가게에 있던 우산 몇 개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달려가는 아이들을 붙잡고 치킨집 주인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우산을 건네    고 또 몇몇은 직접 우산을 씌워 집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갑작스런 생각에    시도한 일이었지만 이 일은 왠지 그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

   며칠 뒤, 우산을 씌워 바래다주었던 아이중 하나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아저씨, 저번에 우산을 씌워주셨던 108동 수연인데요, 치킨 한 마리 배    달해 주세요.” 

   뜻밖의 전화에 그는 깜짝 놀랐다. 아이들이 비 맞는 게 안타까워 우산을    씌워준 것뿐인데, 이 일이 주문으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전단지도 별 소용    없던 치킨집 홍보가 우산 몇 개 덕분에 저절로 되고 있었다.

  

0 우산뿐만이 아니었다. 노인들이 짐을 들고 지나가면 달려 나가 들어다 주    는 이도 바로 그였다. 마음씨 따뜻한 치킨집에 대한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치킨 생각이 나면 언제나 그 집으로 전화를 했    다. 우산에 대한 따뜻한 기억 때문인지 비가 오는 날이면 주문이 더욱 몰    려들었다. 치킨집은  6개월 만에 매출이 5배나 늘었을 만큼 성황을 이루    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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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우산


0 일본에 갔을 때의 일이다.

   어느 지하철역에 내렸는데 마침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망설이고 서 있는데, 사람들이 입구에 비치된 우산을 하나씩 쓰고 떠나는    것이었다. 마치 맡겨두었던 우산을 찾아가기라도 하듯 자연스러운 모습이    었다. 지하철 회사에서 서비스를 하는 것인가 싶어 알아보니, 역 근처에     사는 노인들이 버려진 우산들을 수거해 고친다음 비 오는 날이면 지하철    역 입구에 놓아둔다는 것이었다. 우산이 없는 승객들에게 베푸는 순수한     마음에서였다. 우산 비치대에는 ‘사용 뒤 꼭 반납해 주세요.’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이 일은 벌써 몇 년째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나로서는 충격    이었다.

  

0 한 때 서울 여의도역에도 우산 비치대가 있었다. 하지만 그 이벤트는 몇     번 안 가 끝나고 말았다. 사람들이 쓰고 나간 우산들이 거의 회수되지 않    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일본 지하철역 우산 선물은 벌써 몇 년째 비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반복되고 있다니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했    다. 일본 노인들이 나를 위해 준비해 둔 낡은 우산은 지급도 잊을 수 없는    선물로 기억되고 있다.

  

0 퇴근하는 남편을 마중 나온 아내의 우산, 연인을 바래다주던 우산속의 데    이트.... 그 순간 느껴지는 짜릿한 감정은 직접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    다. 그 순간 우산은 사랑의 메신저요, 하늘이 내리는 가장 훌륭한 선물이    다.

  

■ 배추 3000포기


0 그해 배추 농사는 풍년이었다. 하지만 즐거운 일만도 아니었다. 배추 값이    폭락한 것이다. 농부들은 배추 값보다 뽑는 비용이 더 든다면서 차라리 밭    을 갈아 엎어버리고 말겠다며 한숨들을 내쉬었다. 배추 한 포기에 100원    이 채 안 되는 상황이다 보니 농부들의 근심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부동산 일 때문에 이 시골 마을을 찾았던 그는 배추가 너무 아깝고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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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이 안타까워 일단 2마지기의 배추를 샀다. 배추 1포기에 100원씩 주고    3,000포기 정도를 산 그는 도시에 사는 지인들을 불러 배추를 가져가라고    했다. 또 자기도 일부 싣고 와서 사무실을 방문하는 고객들에게 김장용 배    추라면서 20포기씩 나눠줬다.

  

0 몇 달 뒤, 낯선 노신사 한 분이 그의 부동산 사무실을 방문했다. 넓은 땅    을 살만한 게 없느냐는 것이었다. 낯선 사람이 갑자기 찾아와서 넓은 땅을    사겠다니 너무 뜻밖이었다. 하지만 손님은 이미 그를 알고 찾아왔다는 듯    한 태도였다.

   “죄송하지만 제 사무실을 어떻게 아셨어요?”

   그제야 손님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얼마 전에 한 친구의 집에 들렀는데 그 친구가 시골에서 배추를 공짜로    싣고 왔다며 김장 담을 만큼 가져가라고 했어요.”

  “그런데 김치를 먹을 때마다 도대체 누가 배추를 공짜로 나눠줬는지 너무    궁금했지요. 요즘에도 그런 사람이 있나 싶어서요. 그래서 친구에게 물어    서 찾아오게 된 겁니다. 마침 부동산 사무실을 하신다기에 땅도 좀 상담을    하고 싶었고....”

   “잘 오셨습니다. 선생님께 직접 배추를 드린 사람은 친구분이신데 이렇게    저를 찾아와 주시다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0 배추를 선물하며 무엇을 바란 건 아니었는데 그 배추를 매개로 예상치 못    한 고객이 생겼다. 다음 해에 그는 아예 배추를 예약 재배했다.


■ 닭다리 케밥


0 서울올림픽 직전, 호메이니의 이란 혁명 10주년 기념식에 유럽의 기자들    과 함께 초대를 받아 취재를 간 적이 있었다. 당시 이란은 이라크와 전쟁    중이었다. 기자단은 안내자에게 이끌려 이라크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곳이    나 국경지대를 방문해야 했다.

   우리 취재팀은 유전시설을 촬영하다가 테이프를 빼앗긴 일까지 있었다.     또 출국심사 때는 달러를 가지고 나가는지를 검사받기 위해 옷을 거의 다    벗어야했던 불쾌한 경험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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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그러나 이란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들은 우리를 안내했던 이란 정부의 공    보실 직원에 의해 깨끗이 상쇄되었다. 그는 테헤란대학 영문과를 나온 재    원이었는데, 라프산자니 국회의장의 연설이나 대통령과의 인터뷰 안내를     맡았다. 그는 다른 외국 기자들의 제치고 나를 질문자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내가 만든 엉터리 영문 질문지를 영문법에 맞게 깔끔히 고쳐주기도    했다. 검은 구fp나룻과 턱수염이 멋있게 자란 그는 취재 일정 중에 우리를    자기 집에 초대해 저녁식사를 대접했다.

   식사는 안남미를 기름에 튀겨 만든 케밥에 닭다리 튀김을 얹은 이란식     식사였다. 그다지 훌륭한 식사는 아니었지만 전쟁 중에 손님을 초대해 마    련해 준 음식치고는 훌륭했다. 그때 먹었던 케밥을 내가 지금도 잊지 못하    는 것은 바로 그의 마음이 전해지는 저녁식사였기 때문일 것이다.

  

0 우리는 그 뒤로도 한 번 더 귀한 식사 선물을 받은 적이 있다. 이란 남부    시골마을 취재를 갔는데 그 마을 이장이 우리를 초대해 주었다. 그가 내     놓은 음식도 닭다리를 얹은 케밥이었다. 전쟁으로 물자가 귀하던 당시 이    란에서는 최고의 식사가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식사라고는 달랑 케밥과 배    춧잎 같은 야채가 전부였지만, 나는 그때 먹었던 식사 덕분에 이란을 사랑    하게 되었다. 이장의 집은 허름했지만 정이 가득 넘쳐나고 있었기 때문이    다. 지금도 그의 집에서 먹었던 케밥의 훈훈한 냄새가 기억에 남아 있다.

      

■ 어머니의 편지

 

0 몇 년 전, 나는 중국으로 연수를 다녀온 일이 있다.

   그때 어머니는 내게 제법 두툼한 봉투 하나를 건네며 꼭 중국에 가서 열    어보라고 몇 번이나 당부를 했다. 나는 봉투 속이 못내 궁금했지만 어머니    의 당부를 어길 수 없어 한참을 기다린 끝에 중국행 비행기 안에서 열어    보았다. 봉투 안에는 단정하게 정돈된 만 원권 지폐 백 장과 한 장의 편지    가 들어 있었다.

  

   애비에게

   네가 중국으로 연수를 떠난다니 늦은 나이에 얼마나 힘이 들까 걱정이     앞선다. 가장이고 장남인 네가 집을 비우는 심정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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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거든 여기 걱정은 말고 열심히 공부해서 큰일을 하는 데 밑거름이 되    도록해라. 집안일일랑은 모두 잊어버리고 오로지 너의 할 일에 최선을 다    해줬으면 좋겠다. 

   봉투에 넣은 돈은 네가 준 용돈을 모아서 산 오피스텔에서 나온 임대료    에서 떼어둔 것이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네가 번 것이나 마찬가지인 돈이    니 요긴하게 쓰도록 해라.

   나는 네가 자랑스럽다. 몸 건강히 잘 다녀오너라.

   - 엄마가 씀 -


0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가슴이 뭉클했다. 격한 감정과 회한이 목구멍으    로 복받쳐 올라 한 참을 흐느껴 울었다. 나는 이 편지를 고이 접어 지갑     속에 넣었다. 이 편지는 지금도 내 지갑 한 쪽에 보관되어 있다. 지금까지    내가 받은 선물 가운데 그 어떤 선물도 어머니의 짧은 편지 한 장처럼 감    동적인 것은 없었기 때문이다.

  

■ 남편의 편지


0 환갑을 넘기고도 아직 자기 분야에서 일을 하는 분이 1년간 전문대학 강    의를 맡게 되었다. 강의료로 받은 돈은 80만 원. 어찌 보면 큰돈이고 어찌    보면 적은 돈이었다. 그는 그 돈을 선물로 받은 셈치고 쌈짓돈 20만 원을    보태 100만 원짜리 수표로 바꿨다. 그는 수표와 간단한 편지를 봉투에 담    아 결혼기념일 외식 때 아내에게 주었다. 뜻밖의 봉투를 받아든 아내는 쑥    스러운 듯 봉투를 열었다.

   수표를 확인한 아내는 깜짝 놀랐다. 얼핏 보고서는 그냥 수푠가 보다 했    는데, 자세히 보니 동그라미가 하나 더 있는 게 아닌가. 봉투 안에는 편지    도 있었다. 아내는 편지를 도로 봉투에 집어넣더니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    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랑하는 아내에게

   당신은 지금까지 줄곧 나와 가족들을 위해서만 돈을 써왔소.

   이 돈은 내 강의료로 받은 돈이니 반드시 당신만을 위해 써주시오.

   그동안 고생하였소.

   - 사랑하는 남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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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분 쯤 지났을까. 자리에 돌아온 아내는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남편의    짧은 편지 속의 사랑이 아내의 가슴 깊이까지 전해져 감동을 만들었던 것    이다.

   돈은 좋은 선물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쓰기 나름인 것이다. 돈    을 건넬 때는 건네는 마음을 글로 표현해서 전하면 그 뜻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돈을 준비한 사람의 마음이 진정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 선생님의 공책


0 어느 시인이 기억하는 선물 중에 인상적인 것이 있다. 그는 초등학교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가난한 시골 살림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헌신적으    로 아들을 교육했고 언젠가 아들이 대성하리란 믿음을 간직하고 계시던     분이었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에게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학교 공부    도 시들하고 친구들도 전혀 위로가 안 되었다.

 

0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그를 불렀다. 선생님은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으    시더니 아무 말 없이 공책을 한 무더기 내밀었다. 그렇게 깨끗한 공책은     아무나 살 수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는 기분이 너무 좋았다. 한두 권도 아    니고, 그렇게나 많은 공책은 한꺼번에 본 적도 없었다. 그는 두 번에 걸쳐    공책을 집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그 많은 공책을 앞에 두고 있자니 마땅히    쓸 것이 없었다. 학교에서 공부할 때만 쓰자면 몇 년을 써야 할 분량이었    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동시 쓰기였다. 그렇게 생각나는 대로 쓰고 또 쓰    다 보니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게 되고 또 신이 나서 쓰다 보니 시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꺼번에 많은 공책을 선물한 선생님의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그 선    물 안에서 어머니 대신 마음을 채울 ‘시’를 찾아낸 것이다.

  

■ 북한강 조기


0 오래전의 이야기다. 어느 날 북한강 인근을 지나는데 강가에 자리한 어느    집 처마에 조기가 쭉 걸려 있었다. 바다에서 잡히는 고기가 강가 집에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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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려 있는 것을 보니 재미있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잠깐 차를 세웠다.     궁금한 것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나는 그 집에 들어섰다.    주인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서로 말이 통해 아예 하룻밤     묵게 되었다.

 

0 사연인즉슨 이랬다. 그 집 며느리는 서해안의 한 어촌에서 시집을 왔다.     사돈어른은 낯선 곳으로 시집을 간 딸이 걱정이 되었다.

   “우리 딸은 유난히 조기를 좋아하는데, 조기가 안 나는 강촌 마을로 시집    을 갔으니 걱정입니다. 강촌 마을에는 붕어나 잉어밖에 더 있겠습니까. 우    리 아이는 그런 생선을 먹어본 적이 없으니 강촌 마을에 적응하려면 시간    이 좀 걸릴 겁니다.”

 

0 그래서 딸도 먹이고 사위도 먹일 겸 조기를 선물로 보내온 것이었다. 그     런데 마음이 안 놓였던지 조기를 보내도 너무 많이 보내와 처마에 쭉 널    어  놓고 끼니때마다 빼서 구워먹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날 저녁에 나도     통통한 조기 한 마리 얻어먹었는데 아버지의 정성이 담겨 있어서 그런지    유난히 맛있었다.

 

0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바로 그 사돈어른이 내일모래 이곳에 오기    로 했다며 곰국을 끓이고 있었다. 혼자 사는 사돈어른이 지병으로 입원을    했다 퇴원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공기 좋은 곳에서 딸내미 얼굴이나     보며 요양을 하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그는 이틀 뒤에야 당도할 손님을 위    해 미리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돈지간에 이렇게 형제처럼 서    로를 위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절로 따뜻해졌다. 지금도 나는 조기를 먹을    때면 북한강가 어느 처마에 묶여 매달려 있던 조기들이 가끔 생각난다.

 

■ 윤영무의 발품경제


0 경북 영천의 어느 마을에서 열리는 전원생활박람회를 취재한 적이 있다.     박람회라는 게 어떤 테마건 실내에서 열리는 것이 보통인데, 이번 박람회    는 시골 산골짜기 야외에서 하는 것이고 전원생활을 체험한 사람들의 모    임인 ‘전원생활운동본부’에서 주최한 것이 특이해 직접 현장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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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쉽게도 방송은 박람회가 끝난 뒤에서야, 그것도 새벽 1시 20분경에 나    갔지만 다음 날 그곳에 어떻게 가느냐는 시청자의 문의가 이어졌다.


0 또 한번은 시골에 가서 ‘은퇴자의 나무’라는 블루베리 농장을 취재해 방송    한 적이 있다. 블루베리는 영하 30도를 견뎌내는 식물로 난방비가 들지     않고 병충해에 강해 농약도 필요 없는 천연식품을 양산해 낸다. 심은 지 7    년이 되면 블루베리 열매가 달리는데 1Kg에 5만 원을 받을 수 있으니 제    법 괜찮은 농사였다. 그래서 블루베리는 은퇴 3년 전에 심어 은퇴 3년 뒤    부터 돈을 버는, 그야말로 은퇴자에게 적격인 과수라고 소개했었다. 이 기    사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 블루베리 농장은 문의 전화를 받    느라 하루 종일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0 나는 블루베리를 선물하지 않았지만 블루베리 나무에 대한 좋은 정보를     시청자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이 정보라는 선물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청자들 때문에 나는 방송을 그만 둘 수가 없다. 내가 새벽에 방송되는 ‘    윤영무의 발품경제’를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바로 이처럼 좋은 생활    정보를 시청자에게 선물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또 나이가 들고 방송 경력이 길어질수록 시청자에게 정말 필요한 정보,     즉 선물이 되는 정보가 어떤 것인지 조금씩 알게 되는 것 같다. 시청자들    에게 더 좋은 선물을 하기 위해서라면 언제까지고 현장에서 뛰고 싶다는    각오를 되새기곤 한다. 

  

■ 칭찬 한마디


0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선물로 치면 이 세상의 모든 것, 선물 아닌 것이    없다. 그러므로 선물은 광대무변해 끝이 없다. 그렇다면 이 넓디넓은 선물    의 정보를 어떻게 찾아다닐까? 해답은 아주 단순하다. 그것은 자기가 알고    체험한 것을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말 속에 담겨 있는 정보는 상    대방에게 전해져 도움이 되고 선물이 된다.

   그러다 보면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게 된다. 내가 선물한 정보가 내게 되    돌아오는 선물인 셈이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늘 새롭고 신선한 경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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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나 기분 좋은 이야기를 해주면 나를 좋아하고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 요즘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선물의 하나가 정보이기 때    문이다.


0 정보를 남에게 주는 선물로 여기는 사람은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도 다르    다. 그들의 말에는 격려가 들어가고 희망이 붙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말로 건네는 선물로는 칭찬만한 것이 없다. 칭찬의 효과는 상상을 초월한    다.

   칭찬은 꼭 잘하는 일을 추어주는 것만은 아니다. 그 사람의 장점을 알리    고 노력을 높이 사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칭찬이 된다. 또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감사히 여기고 듣기 좋은 말을 해 주는 것도 좋은 칭찬이 된다. 또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한마디 말도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칭찬이요 선물이 된다.

   “힘들지? 요즘은 나도 너무 힘들다. 그렇지만 조금만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거야. 우리 늘 좋은 생각만 하자.”

   이런 말 한마디가 상대를 힘나게 하고 나를 힘나게 하는 것이다.


■ 배려


0 일본 사람들의 친절은 세계적으로 소문이 자자하다. 물론 그 ‘포커페이스’    뒤에 숨겨진 진실을 두고 위선을 운운하는 이들이 많긴 하지만 ‘친절’ 하    면 일본을 떠올릴 만큼 막강한 경쟁력으로 자리 잡은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들은 당장 돈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라면 자기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친절하게 대한다. 또 웬만한 일에서는 면전에서 얼굴을 찡그리거나 대놓고    거절하는 법이 없다. 대화를 할 때도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하는 법이 없    다. ‘어쩔지 모르겠다.’ ‘어려울 수도 있다.’ ‘그건 좀....’ 이라는 말들은 정    도가 가장 높은 수위의 거절이다.

   사실 외국인들에게는 이만한 선물이 없다. 낯선 외국에서는 누군가 나에    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받게 마련이다.


0 세계 어느 나라 사람이건 일본에 다녀오면 그들의 친절에 감동했다고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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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다. 그들은 길을 하나 물어도 지도를 펴놓고 설명해주거나 직접 대려다    줄 만큼 친절을 베푼다. 이것이 바로 일본을 움직이는 힘이다.


0 반면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에서도 무뚝뚝한 편에 속한다. 외국인들은    한국 공항에 내리면 ‘한국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하는 생각을 한다    고 한다. 눈이 마주쳐도 누구 하나 웃어주는 사람이 없고 길이라도 물을라    치면 급히 손사래를 치며 내빼버리기 때문이다.

   크게 돈이나 시간이 들어가는 일이 아니라면 조금씩 웃고 베풀며 지내는    것이 좋을 듯하다. 나보다 훨씬 똑똑하고 아는 것 많은 사람이 딱 하나,     그 지역 지리만 몰라 나에게 허리를 굽히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자. 잘난     척하거나 뻣뻣하게 굴지 말고 먼저 웃으며 다가가 말 한 마디 해주는 친    절이야말로 가장 쉬운 선물이다.

  

■밥 한 끼

0 “야! 밥이나 한 끼 먹자.”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이 말을 하고 또 실천해 보라. 내가 밥을 먹자고     했으므로 밥값은 당연히 내가 낸다. 그게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상대방에    게 밥을 한 끼 대접하는 이벤트는 뜻밖의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사람을 만날 때는 밥을 못 먹어서 만나는 것은 아니다. 밥을 먹으    면서 이런저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다. 음식을 먹는 일은 즐거    운 일이다. 이렇게 즐거운 일을 함께 하며 한참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    누다 보면 좋은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평범한 대화 속에서 예상치     못했던 좋은 생각을 만나는 경우는 아주 흔하다. 어느 순간 ‘아! 그거다!’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다.

 

0 항상 누군가에게 밥을 살 수 있는 자세, 특히 이벤트를 만들어 작으나마     선물을 해야겠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그것 자체가 이미 좋은 선물    이다. 밥이 아니라면 차라도 한 잔 마시자고 해보자. 상대가 나에게 시간    을 내준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가 훌륭한 선물을 받는 것이다. 바쁜 시간    을 내 주는 것 자체가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다른 사람의 시간은 내게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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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 귀한 선물이다.

   없는 시간이지만 시간을 만들어 친구한테 밥도 사고 커피도 한 잔 사야    나중에 그것이 나에게 시원한 물 한잔이 되어 돌아온다.

 

■ 3년 치 세숫비누


0 갓 이사한 집을 방문할 때면 나는 언제나 세숫비누를 선물한다. 이사한 집    에는 보통 세제를 사들고 가는데, 세제는 빨래를 할 때 쓰는 것이고 세숫    비누는 얼굴과 몸을 닦는 데 쓰는 것이다.

   나는 조금이라도 고급스러운 것을 해주고 싶다. 또 세숫비누를 선물 받은    집 식구들은 손을 씻고 세수를 할 때마다 내 생각을 할 것이다. 그들이 나    를 느끼며 손을 씻는다고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또 손을 깨끗이 씻는 것은 얼마나 중요하고 즐거운 일인가. 여기에 재미    를 더하는 이벤트는 바로 비누를 되도록 많이 사 주는 것이다. 언젠가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네가 사다 준 세숫비누를 3년째 쓰고 있다.”

   세숫비누는 비누거품처럼 집안이 잘 일어나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항    상 마음을 깨끗하게 씻고 살아가라는 상징이기도 하다. 


■ 안부전화 한 통


0 원만한 대인관계란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경조사나 개업식, 생일     같은 특별한 날을 일일이 챙기고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    주려면 시간이며 비용, 신경 쓰는 일이 감당이 안 될 정도다. 하지만 생각    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쉬운 일이 되기도 한다. 내가 생각하는 처세법은 의    외로 쉬운 것이다. 챙겨주는 행동반경을 ‘아무 것도 아닌 날’, 즉 평소에     상대방을 기억하게 하는 쪽으로 넓혀가는 것이다.

  

0 내가 지금 서울에서 천안으로 가고 있다고 하자. 가는 도중에, 그러니까     서울에서 천안 사이에 친인척이든 친구이든 아는 사람이 살고 있다면 전    화를 걸어 준다.

   “나야, 내가 지금 천안으로 가고 있는데, 너희 집 근처를 지나가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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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냥 지나가기에 서운해서 너한테 안부전화를 한번 해봤다. 어르신들 다     건강하시고? 사업도 잘 되지?”

   이렇게 하면 상대방은 뜻밖의 전화에 반갑기도 하고, 자기를 기억하고 일    부러 전화해서 챙겨준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그래 반갑다. 야! 너도 건강하지? 그런데 웬일로 천안에 가는 거야?”

   “응 갑자기 출장이 잡혔네. 누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야.”

   “아, 그래? 내가 그 분을 좀 아는데, 전화라도 한번 넣어줄까?”

   “아냐, 그럴 것 없어, 다 약속이 되어 있는데 뭘.”

   “그런데 지금 어디야?”

   “ 막 민속촌 앞을 지나고 있어. 하지만 얼굴 보기는 힘들 것 같아. 다음    에 한번 보자고.”  

   상대방은 실망스럽지만 마지못해 전화를 끊는다. 하지만 상대방은 이 일    을 통해 자기 집 앞을 그냥 스쳐가지 않는 사람을 오래 기억하고 훗날을    기약한다.  


■ 머플러

 

0 선물은 전 인류의 공통적인 마음이며 무엇인가를 베풀고 싶은 측은지심이    다. 외국에서는 자기가 쓰던 물건을 선물로 주는 것이 미덕이다. ‘내가 쓰    던 모자다. 너 가져라.’ 라는 것이 보통이다.

   한번은 미국에서 어떤 남자가 쓰던 머플러를 선물로 받은 일이 있다. 어    느 해 겨울, 일 때문에 뉴욕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평범한 호텔에 방을    잡고 일찍 자리에 들었는데 도통 잠이 오질 않는 것이었다. 결국 바람이라    도 쐬는 게 낫겠다 싶어 로비로 내려왔다. 시각은 새벽 한시쯤 되어 있었    다.


0  그런데 로비에 내려와 보니 뜻밖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20여 명의 남    자들이 둘러 앉아 회의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시간에 회의를 한다는     것 자체가 매우 생경한 일이어서 자꾸 시선이 갔다. 마침 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 하나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내 옆자리로 자리를 옮겨 앉아    주스를 마셨다. 들어보니, 이들은 미국 내 유대인들로 호텔이 가장 한가하    고 저렴한 시간인 밤 12시부터 새벽 2시 사이에 호텔을 빌려 회의를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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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있었던 것이다. 근검한 생활이 보편화되어 있는 그들의 문화에 나는 정신    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모임만 있다 하면 요란하고 복잡한 저녁식사를 하고 보란 듯이 조찬회를    여는 우리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왠지 민망한 마음이 든 나는    괜스레 그의 머플러를 가리키며 머플러가 아주 멋있다며 웃었다. 그 사람    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말했다.

   “괜찮아 보이면 내가 하던 것이지만 당신에게 선물로 줄게요.”

   나는 극구 사양했지만 그는 똑 같은 게 하나 더 있다며 머플러를 풀어     건넸다. 한 새벽에 낯선 사람에게 머플러를 선물로 받고 보니 기분이 참     묘했다. 한밤중에 모여서 회의를 하던 풍경과 낯선 내게 머플러를 풀어 주    던 그의 느긋한 미소는 내 머릿속에 각인되어 미국이란 나라를 다시 생각    하게 했다.

  

■ 선물은 인류 최초의 문화 활동


0 선물(膳物)의 선(膳)자는 원래 착할 선(善에) 달 월(月), 즉 고기 육(肉)자    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글자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자면 선물이란 곧 ‘좋은    고기’가 된다. 어쩌면 달밤에 착한 마음으로 물건을 주는 것일지도 모르겠    다. 하여간 선물은 인류와 더불어 시작된 것이라고 하니 당연히 농축수산    물을 주고받았을 것임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선물은 인류    가 누린 최초의 문화 활동이었다.


0 원시 부족간의 전쟁을 피하기 위한 선물이 오고갔는데, 예를 들자면 이렇    다. 소금이 나지 않는 동네에 살고 있던 부족은 소금을 얻기 위해 소금이    흔한 동네에 쳐들어가서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싸움을 하면 그    대가가 너무 컸기 때문에 묘안을 궁리하다가 찾아낸 방법이 물물교환이었    다. 시간이 흐르고 경험이 반복되면서 물물교환의 형태는 좀 더 세련되게    발전했다. 인심도 쓰면서 실리도 챙기는 형태, 즉 선물로 변형된 것이다.     이전처럼 서로 물건을 들고 나가 맞바꿔 오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서 때에    맞춰 보내면 저쪽에서도 알아서 보내오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에게 필요한    선물이 교환됨으로써 사람들은 싸우지 않고도 필요한 물건을 조달할 수     있게 되었고 부족 간에는 평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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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조선의 외교도 명나라에 사절을 보내 선물을 전하는 조공무역이 기본 이    었다. 조공이란 알고 보면 사대외교가 아니라 실리를 챙기는 경제외교였던    셈이다. 조선 초기, 명나라는 3년에 한 번의 조공을 원했지만 조선은 1년    에 세 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했다.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조공이란 것이    조선이 명나라에 일방적으로 선물을 갖다 바치는 것이었다면 명나라에서    는 왜 3년에 한 번을 요구했으며 조선은 왜 1년에 세 번을 주장했던 것일    까. 누구나 손해 보는 행동은 하지 않으려 한다는 전제하에 다시 생각해     보면 선물이 자주 오갈수록 무언가 주고받는 이익이 뒤따랐음을 알 수 있    다. 즉 되도록 적게 하자고 주장하는 쪽은 아무래도 선물 교환이 잦을수록    손해 볼 확률이 높기에 횟수를 줄이자고 했을 것이다. 조공의 원칙은 조공    을 바치면 하사품이 있다. 이 하사품이란 것은 큰 나라가 작은 나라에 내    리는 것으로 하사품이 조공품보다 많아야 한다는 암묵의 약속이 있다.

  

0 이렇게 선물은 인류의 역사와 더불어 변화, 발전하며 중요한 문화가 되었    다. 인류 사회가 존재하는 한 부족과 부족 사이, 국가와 국가 사이, 어느     시대, 어느 종족을 막론하고 선물은 지속될 것이다.


■ 덤


0 사전은 덤을 ‘물건을 거래할 때 지 값어치 외에 조금 더 얹어 주는 것’이    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전적 의미를 벗어나서 생각해 보면 덤은 장사를 잘    해 보려고 더 주는 것이고, 이윤을 덜 남기고 같이 나눠 먹겠으니 서로 친    해지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덤은 서로 주고받는 선물이나 뇌물과    는 성격을 달리한다. 덤을 주는 사람이 받는 사람으로부터 어떤 답례를 기    대하고 이루어지는 상행위는 아닌 것이다. 그저 상대방과 친해지고 싶고     단골이 되라는, 같이 나눠먹고 같이 살아가자는 인간의 심연에 자리하고     있는 생존의지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0 덤이 없는 삶은 생각만 해도 삭막하다. 정찰제인 백화점에서조차 식료품     코너에는 시식 코너가 있고 저울에서 내린 뒤 한 줌 더 넣어 주는 덤이     살아 있다. 재래시장은 당연하다. 남는 것 없다고 손을 내 저으면서도 물    건 값을 깎아주고 깎은 값에도 덤을 얹어준다. 그렇게 되면 사는 사람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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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건을 두 배로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 맛에 재래시장에 다니는 어머니들도 많다. 정가 보다 싸게 산 것도 즐    거운데 덤으로 물건까지 얹어 받으니 기쁘지 않을 수 있는가. 가끔은 인생    을 정가대로 산다면 참으로 재미가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 선물 아닌 것이 없다.


0 가족을 위해 주부가 준비하는 밥상은 일상의 선물이다. 생일날 특별히 미    역국을 끓이는 것은 생일선물이요. 한여름 복날 뙤약볕 아래서 준비하는     삼계탕은 주부가 가족이나 남편을 위해 준비하는 선물이다. 세상을 오래     살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은 만나기만 하면 꼭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세 끼 밥은 잘 챙겨 주고?”

   “부부 관계는 좋고?”

   “사업은 잘 되고?”

   나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모두 “예!”라고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인생에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훌륭한 선물    을 선사받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나이가 들다보니까 아내가 차려주는 세    끼 밥을 제대로 얻어먹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사업상 혹은 약속 때문에     아내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는 횟수가 점점 줄어든다. 온 가족이 다 함께     하는 식사야말로 집안의 큰 일 아니면 성사되기가 힘들다.

    

0 평생 아내로부터 세 끼 밥상을 받을 수 있는 남편은 훌륭한 사람이다. 그    는 평소에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의 사랑을 쟁취한 능력 있는 남자임에 분    명하다. 주부들은  가족들에게 선물을 하기 위해 늘 시장을 보고 경제활동    을 한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남편은 열심히 일을 해서 돈을 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부부관계도 사업도, 선물이 아닌 것이 없다. 사업이 잘 되    는 것도 행운이라기보다는 노력의 대가로 하늘이 준 선물인 것이다.

   이 같은 일상의 선물로 인해 백화점이나 대형 할인점, 재래시장에서 소비    유통이 이루어지고 제조업체들의 생산이 지속된다. 이루 열거할 수 없는     지상의 모든 상품은 판매와 이익이라는 목적으로 생산되지만, 이를 소비하    는 사람들은 선물이란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은 결코 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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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다못해 배추나 무를 사더라도 단순히 생존의 밥상을 위해 구입하는 것    이 아니라 가족이나 손님이 먹을 것이라고 하며 선물로써의 가치가 있는    것을 고르려 한다는 뜻이다.

  

0 우리의 생활과 서로 주고받는 마음, 서로 주고받는 물건, 어느 하나 선물    아닌 것이 없음을 되새길 때 우리는 보다 감사하며 윤택한 생활을 영위하    게 된다. 선물은 그렇게 우리에게 줄 기쁨을 감춘 채 우리가 그 손을 잡아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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