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2. 25. 18:14ㆍ독서후기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 법정 스님 법문집
여름은 덥고 겨울은 춥다.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없다. 일즉일체 다즉일 (一卽一切 多卽一). 하나가 곧 모두이고 모두가 곧 하나이다...... 첫 번째 법문집 일기일회(一期一會)에 이어 두 번째 법문집을 펴 낸다.
2009 가을 덕인. 덕현. 덕진. 류시화
■ 부처님 옷자락을 붙잡아도
- 2009. 5. 2. 부처님 오신 날 -
0 초기 경전에는 후기에 결집된 대승경전(석가모니 사후 대승운동이 일어나 면서 편찬된 경전)과 달리 불타 석가모니의 인간적인 면모들이 자세히 기 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인 여시어경(如是語經 : 이와같이 말씀하 셨다.)에 다음과 같은 법문이 실려 있습니다. 원문에는 ‘어떤 비구’라고 되 어 있지만 여기서는 이해하기 쉽게 ‘어떤 사람’으로 바꿨습니다.
“어떤 사람이 내 가사 자락을 붙들고 내 발자취를 그림자처럼 따른다 할 지라도, 만약 그가 욕망을 품고 조그마한 일에 화를 내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 있다면, 그는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고 나 또한 그에게서 멀 리 떨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는 법을 보지 못하고 법을 보지 못하는 이는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법이란 추상적인 용어이지만 부처님이 평소에 가르쳐 주신 교훈 또는 교법을 말함)
0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일입니다. 집안 살림도 제쳐 놓은 채 절이나 교회에 자주 다니는 신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절이나 교회 에 전혀 다니지 않는 사람보다도 마음 씀이 훨씬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절에 와서 부처님 법문을 듣고 가르침을 이해했다면 그대로 일상의 삶에 서 실천해야 하는데, 불필요한 말들을 이리저리 옮기는 사람들이 절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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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든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신도뿐 아니라 수행하는 스님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0 경전은 계속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내게서 천 리 밖에 떨어져 있을지라도, 만약 그가 욕망 때문에 격정을 품지 않고 화를 내는 일도 없으며 그릇된 소견에 빠져 있 지 않고 도심(道心)이 견고해서 부지런히 정진하고 있다면 그는 바로 내 곁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나 또한 그의 곁에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 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법을 보는 자이고 법을 보는 자는 곧 나를 보는 자이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말해, 나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과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늘 함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스승 제자 간이든 연인 간이든 혹은 부부간이 든, 한 집 한 도량에 산다 할지라도 뜻이 같지 않으면 그 거리는 십만 팔 천 리 입니다. 뜻이 같아야 한 가정을 이루고 한 공동체를 이루고 한 도량 을 이룹니다.
0 죽은 가르침은 과거 완료형입니다. 이미 과거로 끝난 것입니다. 그러나 살 아 있는 가르침은 늘 지금 여기에서 현재 진행하고 있습니다. “법을 보는 이는 나를 보고, 나를 보는 이는 곧 법을 본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과 나는 늘 함께한다.”
우리가 깨어 있다면, 나날의 삶 속에서 진리의 가르침을 그대로 수지독송 (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읽고 외움) 하고 있다면, 그 가르침이 몸과 마 음에 배어 있다면, 부처님과 우리 자신은 시공간을 뛰어 넘어 늘 함께하고 있습니다.
■ 소욕지족 소병소뇌 (少欲知足 少病少惱)
- 2007. 8. 27. 여름안거 해제 -
0 해인사에 계시던 자운 스님은 율사(계율에 정통한 승려)이기 때문에 제 비 구계의 계사(계를 주는 스승)이시기도 합니다. 언젠가 한 번은 제가 드린 문안 편지에 여덟 글자의 한자로 된 짤막한 답장을 보내 주셨습니다.
“소욕지족 소병소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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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은 것으로써 넉넉할 줄 알며, 적게 앓고 적게 걱정하라.’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면 늘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이 여덟 글자의 짤막한 편지글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촉이 두꺼운 만년필로 또 박 또박 박아 써서 보내 주신 편지의 사연입니다. 진정한 가르침에는 많 은 말이 필요치 않습니다. 이 짧은 편지가 수시로 저 자신을 깨우쳐 줍니 다.
0 미래는 현재의 연속입니다. 내일은 오늘의 연장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식으로 사는가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우리들 삶의 태도에 의 해 미래는 지금보다 나빠질 수도 있고 좋아질 수도 있습니다. 이런 때 일 수록 생태윤리가 절실히 요구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머니인 이 지구의 건강을 위해 자식 된 도리를 깨닫고 실천할 때입니다. 윤리는 말보 다 실천에 그 의미가 있습니다. 모든 것은 순간순간의 사소한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0 날마다 지구촌에서 하루에 3만 5천 명의 어린이들이 굶어 죽어 가고 있습 니다. 이것은 유엔식량기구의 통계 수치입니다. 5,6년 전 통계이기 때문에 요즘은 더 늘어났을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날마다 3만 5천 명의 어린이들이 먹지 못해 죽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앞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하게 살 것입니다. 이 점은 제가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음식을 너무 많이 버리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본에 가서 느낀 것인데, 일본이 잘 사는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들 은 음식을 전혀 버리지 않습니다. 음식에 대한 고마움을 절실히 느끼고 있 습니다. 음식뿐 아니라 자원을 아끼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습니다. 불교의 영향일 것입니다. 똑같은 불교를 믿으면서도 한국의 불교도들은 절과 가정 집 할 것 없이 너무 많이 버립니다.
날마다 4만 명에 가까운 어린이들이 먹지 못해 죽어 가고 있습니다. 또 세계 전역에서 10억 명의 사람들이 하루 1달러, 우리 돈 천 원으로 하루 를 살아갑니다. 이것이 이 지구별의 현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무엇을 갖고자 할 때 갖지 못한 사람들의 처지를 배려해야 합니다.
아쉬움과 궁핍을 모르면 고마움을 모르기 때문에 불행해집니다. 돈이나 재물이 인간의 할 일을 대신하게 되면 그곳에는 인간이 존재할 필요가 없 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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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 지구상에서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우리 후손들까지도 살아 있으려면, 현재의 생활 방식을 바꿔야 합니다. 보다 겸손한 태도로 지구 환경을 생각 하면서 적은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맑은 가난의 미덕을 하루하루 실천해 야 합니다. 덜 쓰고 덜 버려야 합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넘치 고 있습니다.
0 삶의 질은 결코 물질적인 풍요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어떤 여건 아래서도 우리가 잠들지 않고 깨어 있다면 삶의 질은 얼마든지 향상될 수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가 살고 있는가. 또 우리만 살고 말 것이 아니라 우리 후 손들까지도 어떻게 하면 잘 살게 할 수 있을 것인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받아쓰고 있는 것은 우리 조상대에 허 물지 않고 가꾸어 온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 마음속 금강 보좌에 앉으라.
- 2006. 12. 5. 겨울안거 결제 -
0 젊었을 때는 하루 이틀 밤을 새워도 별 지장이 없었는데, 세월이 축적되니 생각대로 되지 않습니다. 나이 들면 나서지 말고 조용히 있으라는 가르침 입니다. 여기저기 나다니지 말고 다음 생을 명상하라는 것입니다.
몸에 병이 있거나 집안에 근심 걱정이 있을 때 그것을 부정적으로 생각 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삶의 긍정적인 전환점을 만들 수 있어야 합 니다. 몸에 병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살아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육체적인 괴로움과 취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기죽어 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통해 질병이 나한테 오게 된 까닭을 생각해 보고, 자기 삶을 어떻게 펼쳐 나갈 것인가를 명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런 사람은 없겠지만 만일 사람이 전혀 앓지 않고 언제까지나 건강하고 365일 아무 이상이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삶의 무게와 인생의 뒤 뜰 같은 것, 생의 그늘 같은 것을 전혀 모를 것입니다. 그에게는 혼의 깊 이가 없습니다. 그리고 앓을 때는 적당히 앓아야 합니다. 죽을병이 아닌 한 앓을 만큼 앓고 나면 털고 일어나십시오. 죽게 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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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리가 이 몸을 버리고 가는 것만이 죽는 것은 아닙니다. 한 생각이 일어 나면 살았다가 그 생각의 사라짐과 함께 죽고, 다음 생각으로 다시 살아 납니다. 따라서 순간순간 깨어 있어서 다른 망상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로워지려면 먼저 죽어야 합니다. 과거로부터, ‘나’ 의 모든 생 각으로부터 기꺼이 죽을 수 있어야 자유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무상하며 변화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만이 불변의 진리입니다. 현상들은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다시 일어났 다가 사라집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무상(無常)’이라 부릅니다. 항상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존재의 본성입니다.
0 몸이 아플 때 ‘이건 아니야.’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무엇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몸아 나아져 갈 때 “그래 이거야.”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살아 있는 한 조만간 또다시 아플 일이 있을 것입니다. 등이 결리고 허리가 쑤실 것입니다. 행복에 매달리지 말고. 불행을 피하려 고 하지 마십시오. 다만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십시오. 행복은 행복이고 불 행은 불행일 뿐입니다. 그것에 좋고 나쁨을 대입할 때 고통과 불만족이 시 작됩니다. 그것은 나쁜 습관입니다. 그것들에 얽매이지 말고 다만 지켜 보 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고통과 불만족을 느낍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 가는 사람들도 조금만 내면을 들추면 고통과 불만족에 찬 하소연을 늘어 놓습니다.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그들은 원인이 상대방에 있고 세상에 있 다고 하지만 실상은 ‘모든 것은 변화한다. 어떤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란 사실을 마음 깊이 받아들이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상함의 진리에 대한 자각은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이제 어떤 짐도 지고 있을 이유가 없습 니다.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0 유마거사는
- “중생이 아프기 때문에 나도 아프다. 중생의 아픔이 나으면 내 병도 나을 것이다. 보살의 병은 오로지 자비심에서 생겨나기 때문이다.”
- 광엄동자(光嚴童子)가 한적한 장소에서 정진하고 싶어서 유마거사에게 묻 습니다.
“거사님 어디에 갔다가 오시는 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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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도량에서 오는 길입니다.”
“그 도량은 어디에 있습니까?”
“직심시도량(直心是道場). 곧은 마음이 도량이지요. 그곳에는 거짓이 없기 때문입니다.
곧은 마음.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마음. 정직한 마음. 분별과 집착을 떠난 마음이 곧 도량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도량을 밖에 있는 어떤 특정한 장 소로 착각하지 말라는 소식입니다.
0 임제(臨濟) 스님은 말합니다.
“시끄러움을 피해 따로 고요를 찾는 것은 외도(外道)의 짓이다.”
육조 혜능(慧能) 스님도 이렇게 가르칩니다.
“걷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 언제나 곧은 마음으로 하라.”
‘유마경’은 말합니다.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가 깨끗하다.”
0 지금도 북인도 보드가야의 대탑 앞에 가면 대리석으로 만든 연꽃무늬의 금강보좌(金剛寶座)라는 자리가 있습니다. 부처님이 그곳에 앉아서 성불했 다고 전해지는데, 그 당시 실제로 금강보좌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기록 에 의하면 단지 풀을 깔고 앉아서 명상했습니다. 이 풀은 그 위에서 부처 님이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해서 후에 길상초라고 불리게 됩니다. 단지 그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후대에 대리석으로 조각해 금강보좌를 만들어 놓은 것뿐입니다.
금강보좌란 무엇입니까? 다이아몬드로 만든 자리, 무엇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단단한 보석과 같은 자리 라는 뜻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죽어도 좋으니 깨닫기 전에는 절대로 이 자리를 떠나지 않으리라.’ 라는 결심 자 체가 금강과 같은 보좌를 이룬 것입니다.
금강보좌는 인도 보드가야의 보리수나무 아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 마다의 마음속에 각자의 금강보좌가 있어야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굳은 의지와 집념, 금강석으로 된 자신만의 보좌가 있어야 합니다. 밖에서 찾지 마십시오. 마음 밖에서 따로 찾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곧은 마음으로 부 지런히 꾸준히, 그리고 침묵 속에 정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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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한 것 없으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
- 2006. 8. 8. 여름안거 해제 -
0 이번 장마를 겪으면서 저는 문득 인간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들 인간관계가 이 장맛비처럼 매우 끈덕지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면 얼마나 지겹고 넌더리가 날 것인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끈덕지게 달라 붙거나 집요하게 치근대거나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 렇게 하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입히고 원한을 사게 됩니다.
우리말에 ‘어지간히 해 두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앞서 살다 간 선 인들이 가르친 처세법이고 삶의 지혜입니다. 극성스럽게 끝까지 물고 늘어 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집적거려도 상대방이 동요하지 않는다면 끝까지 물 고 늘어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생각을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흔히 ‘열 번 찍어서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런 말에 속지 마 십시오. 저는 늘 장작을 패기 때문에 이 말의 실체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 경험에 의하면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중심이 확실 하게 잡힌 꿋꿋한 나무들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0 ‘어지간히 해 두라.’는 이 말은. 극한적인 투쟁을 피하라는 지혜의 가르침 입니다. 누사분규가 일어날 때마다 지나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물론 당사자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하겠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는 저토록 극성스럽게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할까 하는 느낌이 들 때가 있습 니다. ‘어지간히 해 두라.’는 가르침은 삶에서 균형을 잃지 말라는 오래된 지혜입니다.
0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한때입니다. 항구적으로 지 속되는 일은 없습니다. 무상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때라는 소리입니 다. 좋은 일이든 언짢은 일이든 궂은일이든 모든 것은 한때라고 생각하십 시오.
그러면 극복할 수 있는 의지가 생깁니다. 그런 일이 영원히 지속된다면 누가 견딜 수 있겠습니까? 한때이기 때문에 우리가 뛰어 넘을 수 있는 용 기와 기량이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아 있기 때문에 더위도 느낄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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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는 더위도 추위도 다가설 수 없습니다. 살아 있다는 것은 더위와 추위 뿐 아니라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든 즐거움이든, 더위든 추위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살 아 있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집 안에 어려운 일이 있거나 혹은 남한테 말 못 할 사정이 있을 때, 거기에만 매달리지 마십시오. 모든 것은 한때라고 생각하십시오. 곧 지나갈 한때라 고. 내가 전생에 지은 업의 메아리라고 생각하십시오.
■ 봄날의 행복론 (1)
- 2006. 4. 6. 봄 정기법회 -
0 꽃을 보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가 좋아합니다. 꽃을 보고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꽃을 보고 좋아하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에 꽃다 운 요소가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무심히 자연의 아름다 움을 바라보는 일은 즐겁습니다. 새삼스럽게 삶에 대한 고마움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살아 있기 때문에 꽃의 아름다움도 누릴 수가 있 습니다. 그렇지만 무엇엔가 쫓기는 사람들은 이런 아름다움을 받아들일 여 유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꽃을 보고 다 아름다워 하는데 무엇엔가 쫓 기는 사람들은 꽃이 피는지 지는지. 새 잎이 돋아나는지 시드는지 관심 밖 입니다. 사람은 무엇에 쫓겨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자주적인 삶이 아닙니다.
세상일에 휘말려서 우리 둘레에 꽃이 피는 이 가슴 벅찬 사실을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놀라운 신비입니다. 우주가 지니고 있 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활짝 열어 보이고 있습니다. ‘대지는 꽃으로 웃 는다.’ 는 시구도 있습니다. 꽃의 피어남을 통해서 인간사도 생각해야 합니 다. 내가 지니고 있는 가장 아름답고 맑은 요소를 얼마만큼 꽃피우고 있는 가? 얼마만큼 열어 보이고 있는가? 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의 삶의 모습도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0 현대의 우리는 늘 시간에 쫓겨 살아갑니다. 시간이란 무엇입니까?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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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들어 놓은 선 같은 것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특히 공동생활에는 물리적인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물리적인 시간과 심리 적인 시간은 성질이 다릅니다. 불안과 두려움은 심리적인 시간에 의해서 부추김을 당합니다. 물리적인 시간과는 상관없이 혼자 가만히 있는데 불 안해 하고 두려워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심리적인 시간을 감당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사람은 심리적인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합니다.
물리적인 시간은 타의적이고 외부적인 것입니다. 심리적인 시간은 자주적 입니다. 흔히 ‘인간성이 소멸되어 간다. 인간의 감성이 사라져 간다.’라고 말하는데 자연과의 교감이 단절되면 우리 자신도 모르게 감성이 녹슬고 인간성이 메말라 갑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미라가 됩니다.
0 우리가 다 같이 바라는 행복은 온갖 생각을 내려놓고 세상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시간을 갖는 데서 움이 틉니다. 복잡한 생각, 미운 생각, 고운 생각 다 부려 놓고 그저 무심히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을 가 져야 합니다. 그래야 그 안에서 행복의 싹이 틉니다. 진정한 행복은 이다 음에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0 아름다운 세상은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곁에 있습니다. 우리 가 볼 줄 몰라서 가까이하지 않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세상을 놓치고 있 습니다. 자연은 이렇게 마음껏 꽃을 피우는데, 과연 자연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거듭거듭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사물을 가까이 하면 그 사물을 닮게 됩니다. 산에서 사는 사람은 산 을 닮고, 강가에서 살면 강을 닮습니다. 꽃을 가까이 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꽃 같은 삶이 됩니다. 이것이 우주의 조화입니다. 꽃이란 무엇입니 까? 자연의 가장 아름다운 얼굴입니다.
‘법구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마음의 변덕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지 말라.
항상 마음을 잘 다스려서
부드럽고 순하고 고요함을 지니도록 하라.
마음이 하늘도 만들고 사람도 만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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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도 만들고 천국도 만든다.
항상 마음의 주인이 되도록 노력하라.
0 행복은 오로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습 니다. 누가 내 감정을 다스립니까? 스스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임제 선사 어록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그가 서 있는 자 리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리라.”
0 우리는 미래에 이것저것 일을 다 마치고 시골에 내려가 집을 한 채 지어 그때부터 행복하게 살겠다는 설계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정한 행복은 다음에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닙니다.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존재하는 것입 니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 잠시라도 행복을 누렸던 그때는 한 순간이었습니다. 미래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을 삶의 목표로 삼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놓치고 있습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다른 시절, 다른 때가 우리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언제 어 디서든 바로 그 순간에 행복을 만들고 누릴 수 있는 것이지 어느 특정 기 회 특정한 시간에 행복을 이룰 수 있다고 착각해선 안 됩니다.
0 행복은 요구하고 추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 의 선물입니다. 행복은 우리가 요구하고 추구한다고 해서 달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추구하거나 요구하게 되면 행복은 우리를 비껴갑니다.
15세기 인도의 영적인 시인 까비르의 시를 한 편 읽겠습니다. 류시화 시 인의 번역입니다.
나는 저 황홀한 피리 소리를 듣고 있다.
그러나 모른다. 누구의 피리인지는.
여기 등불 하나 환히 밝혀 있다.
심지도 기름도 없이.
물 위에 수초 한 포기가 피어난다.
밑바닥에 뿌리내림도 없이.
한 송이 꽃이 피어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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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개의 꽃이 함께 피어난다.
달새의 머리는 온통 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비의 새는 오로지
다음 번 비가 언제쯤 내릴까 하는 것.
그대가 온 생애를 바쳐서.
찾고 찾아야 할 그것은 무엇인가.
■ 지금 출가를 꿈꾸는 그대에게
- 2003. 10. 5. 불교문화 강좌 -
0 저는 요사이 무척 바빴습니다. 제 얼굴을 보면 아시겠지만 추승구족(秋僧 九足). 가을 중은 다리가 아홉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가을이 되 면 산에 사는 사람들은 이것저것 월동준비를 하느라 분주하게 뛰어다녀야 합니다. 더구나 그간 비가 많이 내려 도랑 팬 곳, 오두막으로 올라오는 오 솔길 무너진 곳 등 혼자서 보수하느라 많이 바빴습니다.
0 출가는 집을 나온다는 뜻입니다.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집착과 타성의 집에 서 훨훨 떨치고 나오는 것을 출가라고 합니다.
가출과 출가는 다릅니다. 출가는 자기 의지와 선택에 따라서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가지고 삶의 궤도를 수정하기 위해 나오는 것이고, 가출은 여러 가 지로 상황이 좋지 않아 마지못해 집을 떠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가출과 출가는 자기 삶의 궤도를 수정하려는 행위입니다. 삶이란 이런 게 아닌데 하고 회의를 거듭하다가 떨치고 나오는 것입니다.
0 일상의 삶 속에서도 소용돌이나 늪에 갇혀 허우적거릴 것이 아니라 거기 에서 헤쳐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 다. 삶의 환경이 여러 가지로 다르므로 한결같을 수는 없겠지만, 자신의 삶에 만족할 수 없어서 보다 자기다운, 보다 꽃다운, 보다 인간다운 삶은 없을까 찾게 되는 것이 바로 출가 정신입니다.
0 저는 생각할수록 불가사의하고 도저히 해답을 찾을 수 없는 일이 하나 있 습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또는 그 이전부터도 중 모집한다는 광고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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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는 신학대학이 있어서 신부 나 목사 될 사람을 공고하고 모집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 계 어느 나라에도 스님들을 모집해서 양성하는 곳은 없습니다. 다 제 발로 걸어 들어옵니다. 참으로 신비한 일입니다. 과거에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 럴 것입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어디서 부르는 것도 아닌데, 어느 순간 불쑥 마음 이 일어나 집을 나와 산으로 들어가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본인 외에는 그 원인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 였습니다. 마치 때가 되어 익은 열매가 떨어지듯, 어느 날 한 생각이 일어나 자연스럽게 출가하 게 되었습니다. 물론 전생을 따지면 여러 사연이 있겠지만 모두가 그렇습 니다. 누가 부르는 것도 아니고 기다리는 것도 아닌데, 저마다 삶을 훌훌 털고 떠나옵니다. 그것이 출가입니다.
0 모든 수도자가 처음 집을 나올 때 갖는 그 절실한 생각, 그 물리칠 수 없 는 의지를 출가 정신 혹은 구도 정신이라고 부릅니다. 서산(西山休靜) 대 사의 선가귀감(禪家龜鑑)에 보면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편함과 한가함을 구해서가 아니고,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 을 구해서도 아니다. 생과 사의 괴로움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고, 끝없는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이것이 출가 정신입니다. 이 각오 이 정신을 늘 지녀야 합니다. 출가란 모든 집착과 얽힘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이것은 수행자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닙니다. 진정한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 누구에게나 이 출가정신이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 다면 삶을 변화시켜야 하고 낡은 타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잘못된 업에 서 벗어나 새로운 업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0 “모든 욕망에는 근심이 따르는데, 출가는 평안하고 조용하다.” 집을 뛰쳐 나왔다는 것은 집착과 욕망의 집으로부터 벗어 나왔음을 의미합니다. 단순 히 어떤 주거 공간, 어떤 지역에 있는 왕국, 그런 곳이 아니고 집착과 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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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의 집에서 떠나온 것입니다. 집에서 나온 사람은 무주택자입니다. 수행 자는 본래 자기 집이 없습니다. 자기 집이 있거나 개인의 재산이 있다면 수행자일 수가 없습니다. 본디 그렇습니다. 집착할 집이 없고 욕심 부릴 집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뇌가 없습니다.
0 부처님은 기원정사에 머물 때 제자들에게 말 합니다
“ 진실로 아무것도 갖지 않은 사람은 행복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것 도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자 보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여기 저기에 얽매여 그 얼마나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가를!”
0 늘 깨어 있는 것이 출가 정신이라면 물질의 더미에서 깨어나는 것 역시 출가입니다. 우리를 가두고 있는 비좁은 소유의 방에서 벗어나는 것이 곧 진정한 출가입니다. 출가 수행자는 소유의 자로 재었을 때 가진 것이 없을 수록 부지입니다.
“욕망에는 근심이 따르는데 출가는 편안하고 조용하다.”
왕자 싯다르타는 집착과 욕망의 집을 떠납니다. 집이 없는 사람은 가장 자유롭습니다. 하늘을 지붕 삼고 땅을 잠자리 삼아. 어디에도 집착할 것 이 없기 때문입니다. 집착할 집이 없고 욕심 부릴 집이 없습니다. 출가란 그런 것입니다.
태국 출신의 고승 아잔 차 스님은 말합니다.
“조금 내려놓으면 조금 평화로워질 것이다. 많이 내려놓으면 많이 평화로 워질 것이다. 완전히 내려놓으면 완전한 평화와 자유를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세상과의 싸움은 끝날 것이다.”
그래서 출가를 이욕(離慾:욕망으로부터 결별함) 또는 출진(出塵:먼지의 세 상으로부터 떠남)이라 부릅니다.
0 출가는 일회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결코 일회적으로 끝날 수가 없는 것이 출가입니다. 매번 일어나는 모든 집착으로부터 거듭거듭 떠나야하기 때문 입니다. 출가란 끝이 없는 탈출이며 수행이란 일종의 장애물경주와 같습니 다. 궁극의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길 위의 사람으로 남아 있으면서 “나는 왜 출가 했는가? 무엇을 위해 출가 했는가?”를 끊임없이 되묻는 것 이 참된 출가자의 정신입니다. 그 물음만이 출가자를 깨어 있게 할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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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그는 더 이상 출가자가 아닙니다.
하늘을 나는 새가 날갯짓을 멈추면 추락하는 것과 같습니다. 칼날이 무뎌 지면 칼로서의 기능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칼이 칼일 수 있는 것은 그 날 이 날카롭게 서 있을 때 한해서입니다.
0 출가는 떠남이 아니라 돌아옴입니다. 진정한 나에게로, 그동안 잊혔던 본 래의 나로 돌아오는 길입니다. 출가는 소음과 잡다한 얽힘에서 벗어나 침 묵의 세계로 들어섭니다. 말이 안으로 여물도록 인내함으로써 우리 안의 질서를 찾습니다. 중심을 바로 세워 진정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만 가려내 는 그런 눈뜸입니다.
출가는 나를 찾아 나섭니다.
출가는 안정된 삶을 뛰어넘어 충만한 삶에 이르려는 것입니다.
출가는 문명의 도구들을 뒤로하고 자연으로 다가갑니다.
출가는 스스로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양식을 선택합니다.
출가자는 욕망에 따라 살지 않고 필요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는 안으로 부유한 사람입니다.
출가는 경제 논리가 아니라 진리를 삶의 원리로 삼습니다.
출가는 무엇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에 이르는 길입니다.
출가는 고통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고통이 있습니다. 하나는 더 많은 고통으로 인도하는 고통이고 하나는 고통의 끝으로 인도하는 고통 입니다.
■ 봄날의 행복론(2)
- 2003. 4. 20. 봄 정기 법회 -
0 봄이 오면 나무와 화목들이 꽃을 피우고 잎을 펼치는데, 과연 우리들 자신 은 새봄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가? 온통 화장세계(華藏世界)입니다. 꽃으 로 장식된 자연을 불교 경전에서는 화장세계 또는 화장찰해(華藏刹海)라고 부릅니다. ‘찰’이란 산스크리트어를 그대로 음역한 말인데 세계라는 뜻입니 다. 연화장(蓮華藏)도 꽃으로 된 세상이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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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오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행복에 어떤 기준이 있는 것은 아 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각기 다른 환경과 상황 속에서 살기 때문 에, 어떤 기준을 갖고 행복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행복은 주관적 가치입니다. 나 자신에게는 행복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행복하 지 않은 일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의 기준이 무엇인가?’ 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각자 자신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헤아려 보십시오. 행복은 문을 두드리면서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안에서 우러나오고 스며 나오는 것입니다. 꽃향기처럼 은은하게 스며 나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0 자연계의 꽃이나 잎은 그렇다 치고, 인간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랑과 신의에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을 이웃과 나누는 일입니다. 사랑이란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마음 을 이웃과 나누는 일이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요소입니다. 또한 신의란 무 엇입니까? 자기가 하는 말대로 사는 일입니다. 자기 말에 책임지는 것입니 다. 예전에는 문서가 따로 없었습니다. 말이 곧 믿음이었습니다. 그런데 문 자가 나오고 문서가 생기면서 위조, 사기, 횡령 같은 것이 생기지 않았습 니까?
0 ‘법구경’에 보면 ‘진정한 행복의 장’이 있습니다.
원한을 품은 사람 속에 있으면서도
원한을 버리고 즐겁게 살자.
고뇌하는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고뇌에서 벗어나 즐겁게 살자.
탐욕스런 사람들 속에 있으면서도
탐욕에서 벗어나 즐겁게 살자.
원한과 고뇌, 탐욕, 이것들은 우리의 부정적인 측면입니다. 그것에 물들지 말고 즐겁게 살자는 것입니다. 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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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는 원한을 낳고
패하는 자는 괴로워 신음한다.
마음의 고요를 얻은 사람은
승리와 패배를 버리고 즐겁게 산다.
0 누구나 하루 24시간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맞이하고 받아 들이고, 보내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의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그 시간을 창조적으로 활용하고, 이웃에게 덕을 나누어 주며 사는 인생이 있는가 하 면, 멀쩡한 육신을 가지고도 무가치하게 하루하루 인생을 낭비하며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적지 않습니다.
분명히 새겨들으십시오. 사람이 불행한 것은 이미 지나가 버린 묵은 생각 에 갇혀 있기 때문입니다. 억울하고 분한 원망의 생각에 갇혀서 두고두고 스스로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가슴에 멍이 들고 가시가 돋치게 됩니다.
0 자연은 늘 새로운 모습입니다. 작년의 풍경과 올해의 풍경은 다릅니다. 어 제와 오늘이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항상 굳어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불행을 만듭니다. 한 생각 크게 돌이켜서 따뜻하고 향기로운 본래의 가슴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묵은 수렁에 갇혀서 자기 자신을 순간순간 무가치한 일로 죽이지 마십시 오. 자기 자신을 살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루하루의 삶이 꽃처럼 새롭게 피어납니다.
■ 때로 높은 봉우리 위에, 때로 깊은 바다 밑에
- 2003. 2. 16. 겨울안거 해제 -
0 저는 요즘 가끔씩 제 몸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을 갖습니다. 초기 경전에서 는 몸을 허망하고, 아지랑이 같고, 물거품 같은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말합 니다. 사람들이 몸에 너무 집착해 그 몸이 전부라고 여겼기 때문에, 그런 가르침을 남긴 것입니다.
몸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자리에서 만날 수 있겠습니까? 몸이 허망 하고 물거품 같은 것만은 결코 아닙니다. 몸이란 무엇입니까? 흔히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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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화, 풍 네 가지로 화합된 물건이다. 고깃덩어리다.” 하고 말 합니다. 그래서 몸을 어떤 의미에서는 매우 천하게 여기는 경향도 없지 않습니다.
물론 몸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여러 가지 물질적인 것이 화합되어 이루 어진 한때의 유기체이지만, 몸은 단지 그렇게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 나의 법당일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곧 부처라면 이 몸은 부처가 거처하는 법당일 수 있습니다. 법당이라고 생각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이 몸을 함부 로 다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저마다 자기 부처가 있기 때문에 자기 몸이 부처를 안고 있는 법당이기 때문에 그 법당을 늘 청정하게 지키고 가꾸어 야 합니다.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저의 낡은 법당을 지켜보면서 저는 요즘 세월의 무게라든가 삶의 뒤뜰 같은 것을 가끔 헤아리게 됩니다. 이런 일은 주로 한밤중에 일어납니다. 저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습니다. 늙는다는 것은 병을 동반합니다. 자연스 러운 일입니다. 老, 病의 끝은 몸을 바꾸는 일입니다. 전에는 약이 생기면 노스님들께 드리고 제가 먹지 않았는데, 요즘은 제가 필요해서 가끔 구해 다 먹곤 합니다. 그것이 늙는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0 대매법상(大梅法常)이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신라 때 스님들이 당나라로 이분을 찾아가서 제자가 되기도 했고 한국불교에도 영향을 끼친 분입니다. 매화가 많이 피는 대매산에 살아서 대매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10대에 출가, 온갖 경과 논에 통달하여 강의할 정도였지만 ‘아직 활자화 되지 않 은 나 자신의 경전을 읽어야 되겠구나.’ 생각하고 마조(馬祖) 스님을 찾아 갑니다. 법상과 마조의 문답입니다.
“부처란 무엇입니까?”
“마음이 곧 부처다. (卽心卽佛)”
“어떻게 지녀야 합니까?”
“그대 스스로 잘 보호해 가지라.”
이 법문을 듣고 법상은 마조를 떠나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마음에 드는 산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 이후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 산이 대매산 입니다. 마음이 곧 부처인 줄 확신한 그는 더 묻고 배울 것이 없었 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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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법상 스님은 산중에서 잣나무 열매를 따 먹고, 연못에서 자라는 연잎으로 옷을 해 입었습니다. 좌선할 때는 여덟 치(24Cm)의 쇠로 만든 탑을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졸지 않기 위해서...... 법상 스님의 여덟 치 철탑은 지금도 그 도량의 창고에 보존되어 있다고 합니다.
0 한 젊은 스님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법상 스님을 발견하고 묻습니다.
“스님께서 이 산에 들어와 사신지 몇 해나 되었습니까?”
“둘레의 산 빛이 푸르렀다가 누레지는 것을 보았을 뿐이네.”
수행자는 과거나 미래에 살지 않고, 오로지 현재를 최대한으로 살고자 하 기에 기나긴 세월에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그러자 젊은 스님은 나갈 길을 묻습니다.
“산을 내려가려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흐름을 따라 가거라.”
법상 스님의 대답입니다. 시냇물을 따라가면 마침내 마을을 찾을 수가 있 다는 것입니다.
0 법상 스님은 88세에 세상을 하직할 때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남깁니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 (來莫可拒 往莫可追)”
이 말이 지금까지 승가에 전해 내려옵니다. 사람을 피해 숨어 살던 그가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열매는 제대로 익어야 열매의 구실을 할 수 있습 니다. 익기 전에는 열매일 수가 없습니다. 수행자는 때로 높은 봉우리 위 에 우뚝 설 수 있어야 하고, 또 때로는 깊은 바다 밑에 잠겨야 합니다. 바 로 이 비밀이 법상 스님의 그런 생애의 소식과도 이어집니다.
■ 빚지고 사는 삶인가, 빚 갚고 사는 삶인가.
- 2002. 12. 15 길상사 창건 5주년 -
시주(施主)의 은혜 속에 사는 사람들은 그때그때 시은(施恩 : 시주의 은혜) 의 무게를 생각해야 합니다. 옛날에는 노스님들이 많이 계셔서 시주의 은 혜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있었는데 요즘은 무뎌져서 그런 이야기가 없습 니다. 세상에 공것이란 없습니다. 시주가 절에 공양을 올리고 보시하는 것 은, 그 공양과 보시를 받아서 자신들이 못하는 일을 대신해서 세상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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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달라는 뜻입니다. 공양과 보시를 받고도 그 보답으로써 종교적인 활동 을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은 빚이 됩니다. 그 빚은 은행 빚 보다 훨씬 가혹 합니다.
우리가 은행에서 빌렸든 개인에게 빌렸든, 부채가 없다고 해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과연 내가 빚지지 않고 내 삶을 하루하루 잘 살아가고 있는 가? 늘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수행자만이 아닙니다.
0 9세기 초 당나라 때 조주 스님의 은사이신 남전(南泉) 스님은 늘 입버릇 처럼 “나는 죽어서 소가 될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죽은 후에 중은 축생계로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축생이 되지 않으면 빚 갚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말입니다.
우리가 한 평생을 살아가면서 빚질 노릇을 했는지, 빚 갚을 일을 했는지. 시시로 자기 점검을 해야 합니다. 남의 신세를 졌으면 어떤 수단을 써서 라도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0 진리는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습니다. 오늘날 한국 불교는 부유한 자 권력 있는 자를 더 우대하는 종교가 되어버렸습니다. 돈 많고 이름 있고 권력 가진 사람들만이 주지실에서 차 한 잔 얻어 마실 수 있습니다. 큰 절일수 록 더 심한 현상입니다. 세속의 논리와 가치관이 수행자들의 청정도량까지 물들여 버린 것입니다. 돈을 많이 내는 사람이 우대받는 곳이 절이라면 어 떻게 그곳을 진리 추구의 장소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 세속화되고 더 타락하기 전에 수행자들이 본래의 출가정신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전에는 수행을 난행, 고행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그런 단어조차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절제된 아름다움, 그것은 수행자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편하고 안락한 것은 수행이 아닙니다. 난행, 고행이 수행입니다.
0 제가 좋아하는 일본의 도겐(道元) 선사가 있습니다. 이분의 구도의 서 ‘정 법안장(正法眼藏)’을 읽으면 정신이 번쩍 납니다. 그분의 어록에 이런 구절 이 나옵니다.
“진리를 배우는 사람은 먼저 가난해야 한다. 가진 것이 많으면 반드시 그 뜻을 잃는다. 진정한 수행자는 한 벌의 가사와 바리때 외에는 아무 것도 갖지 않는다. 거처에 집착하지 않고 옷에 마음 쓰지 않기 때문에 오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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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에만 전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정진하는 사람은 저마다 그 분수에 따라 이익을 얻는다. 왜냐하면 가난한 것이 진리에 가깝기 때문이다. 또 진리를 배운 사람은 뒷날을 기약하고 그때 가서 수행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다만 오늘 이때를 헛되이 보내지 않고 하루하루 그때그때 부지런히 전진해야 한다. 세월은 결코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중노릇은 하루살이입니다. 그날그날을 사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지금 바 로 이 자리에서, 현재와 현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삽니다. 내일이 없습니다. 늘 지금입니다. 이것이 바로 구도자의 정신입니다. 구도자에게는 지금이 있을 뿐입니다.
■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다.
- 2002. 11. 19. 겨울안거 결제 -
0 순간순간 살아가면서 물음을 지녀야 합니다.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지, 과 연 생을 후회 없이 보내고 있는지 물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중노릇이라는 것이 모양과 장소만 다르다 뿐이지 여느 사람과 비슷합니다. 누구에게나 하루 24시간이 주어 지고 밤과 낮, 사계절이 있고, 그 안에서 각자 삶의 의지를 가지고 살아 갑니다. 산중에서 살든, 마을에서 살든, 사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 주어진 순간과 기간들을 어떻게 사는가가 삶의 질과 행복의 정도를 결정합니다.
0 불교 수행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지혜의 길이고, 또 하나는 자비의 길입니다. 지혜는 자기 형성의 길이며, 자비는 이웃에 대한 따뜻한 보살핌의 길입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결여되면 그것은 불교도 아니고 종 교도 아닙니다. 모든 종교에는 그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자기 형성의 길이 있고, 또 이웃을 보살펴 주는 역할이 있습니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 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 (上求菩提 下化衆生)’는 가르침은 그 의 미에서 나온 말입니다.
0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할 일은 무엇인가? 그 깨달음을 나누는 일입니다. 바른길을 알았다면 그 바른길을 가르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본마 음에는 지혜와 자비의 요소가 함께 갖추어져 있습니다. 지혜와 자비는 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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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진정으로 지혜를 체험했다면 그것이 자비로 전환되 어야 합니다. 전환이라고 표현했지만 실제로는 지혜와 자비는 둘이 아닙니 다. 우리의 본성이 활짝 꽃피어 나니까 그 안에 본래 갖추어져 있는 지혜 의 요소, 자비의 요소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0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이룬 뒤, 부처님은 앉아서 제자들을 맞이하지 않 고 몸소 찾아 나섭니다. 이것이 대자대비입니다. 이 대자대비가 없으면, 그 것은 종교가 아닙니다. 종교와 일반 사상이 다른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종교는 곧 자비의 실천입니다. 스스로 찾아 나서서 행한 부처님의 설법에 의해서 불교가 시작됩니다. 말씀과 대화에 의해서. 만일 부처님의 설법이 없었고 가르침이 없었다면 불교라는 것은 세상에 존재되지 않았을 것입니 다. 길은 걸어가라고 열려 있고, 가르침은 다른 존재들과 나누어 가지라고 설해졌습니다.
0 달마 스님에게 제자 혜가(慧可)가 묻습니다.
“진리를 깨닫고자 하면 어떤 수행을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습니까?”
달마 스님이 답합니다.
“마음을 살피는 이 한 가지 일이 모든 행동을 다 거두어들인다. (觀心一 法 總攝諸行) 세상에서 이 수행이 가장 간단하고 중요하다.”
혜가가 다시 묻습니다.
“어째서 마음을 살피는 법이 모든 행동을 거두어들인다고 하십니까?”
달마 스님의 답입니다.
“마음이란 모든 것(萬法)의 근본이므로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에서 일어 난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달으면 만 가지 행을 다 갖추는 것이다. 이를테 면 여기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다고 하자. 그 나무의 가지와 잎과 열매는 모두 뿌리가 그 근원이다. 나무를 가꾸는 사람은 뿌리를 북돋을 것이고 나 무를 베고자 하는 사람은 그 뿌리를 베어야 할 것이다. 수행하는 사람도 그와 같아서 마음을 알고 도를 닦으면 많은 공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이 룰 것이다. 그러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수행한다면 부질없이 헛된 공만 들 이는 것이 된다.”
0 달마 스님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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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든 현상이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마 음 밖에 따로 구할 도가 있다면 옳지 않다.”
마음에는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맑은 마음’과 ‘물든 마음’이 그것입 니다. 맑은 마음은 우리 본래의 마음이고 물든 마음은 번뇌로 가려진 마 음, 분별로 얼룩진 마음입니다. 그래서 진리와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고 자 한다면 밖으로는 복잡한 얽힘을 쉬고 안으로는 마음을 비우라고 한 것 입니다.
■ 한 평생 몇 번이나 둥근달을 볼까?
- 2002. 10. 21. 뉴욕 불광사 초청법회 -
0 여기 올 때 문단속 잘 하고 오셨습니까? 저도 산중에 있다가 시내에 나올 때면 오두막에 쇠를 채웁니다. 쇠를 채울 때마다 영 마음에 걸립니다. 중 이 잃어버릴 것이 뭐가 있어서 쇠까지 채워야 하는지, 쇠를 채우고 돌아설 때마다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것은 하나의 습관입니다. 세상에 대한 불신 입니다.
50여 년 전, 제가 처음 절에 들어 왔을 때는 절 법당에 쇠를 채우는 일 이 전혀 없었습니다. 개인 방에도 그럴 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후로 인심이 나빠지고 도둑이 절에 와서 탱화나 불상을 훔쳐가는 일이 잦아져 서 법당 문을 잠그게 되었습니다. 저도 처음 불일암을 짓고 살 때는 쇠를 채우지 않았습니다. 쇠 채울 줄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무례한 사람들이 들 어와서 헤집는 바람에 쇠를 채우게 되었습니다.
0 만장회도(漫藏誨盜)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단속을 잘하지 않는 것은 도둑 에게 도둑질을 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문단속을 하지 않 는 것이 오히려 허물이 된다는 뜻입니다. 눈에 띄면 공연히 마음을 일으키 기 때문에 방지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으로 단속해야 할 것은 문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입니 다. 아무리 문단속을 하더라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뚫고 지나갈 수 있 습니다. 한 생각 문득 일어나는 데서 온갖 시비와 갈등과 생과 사가 벌어 집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한 평의 땅뙈기에 울타리를 치고 ‘이것은 내 것이다.’하고 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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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부터 그의 불행이 시작된다.”
0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우리 가 무엇인가를 꾸미는 것, 그것은 아름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무엇인 가를 갖게 된다는 것은 그것이 물질이든, 집이든, 혹은 가구든, 명예든. 그 만큼 거기에 얽매이게 됨을 뜻합니다.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거기에 얽매 입니다. 소유의 대상으로부터 소유를 당하는 것입니다.
0 옛글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꽃이 피고 지기 또 한 해, 한평생 몇 번이나 둥근 달을 볼까?”
봄에는 꽃이 피고 또 집니다. 한 해 한 해 꽃이 피고, 피었다가 또 집니 다. 보름마다 둥근달이 떠오르지만, 우리가 둥근달을 늘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살고 있습니다.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야 합니다. 이 행운을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합니다.
0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합니다. 이것이 동양의 지혜입니다. 배부른 돼지 에게는 삶의 가치가 없습니다. 아쉬움과 궁핍을 모르면 사람은 불행해 집 니다. 아쉬움과 부족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고마움을 알게 됩니다. 아쉬움과 부족함을 모르면 고마움을 알 길이 없습니다. 돈이나 재물이 인 간이 할 일을 대신할 때. 인간은 스스로 존재 가치를 잃게 됩니다. 사람을 부자로 만드는 것은 돈이나 물건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에 달린 것임을 거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절제의 미덕을 배우려면 무엇보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롭게 사 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면서도 거기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 자유를 배우지 못한다면 그의 삶은 영원히 빈 껍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0 불교에서는 남에게 베푸는 것이 가장 으뜸가는 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바라 밀이란 ‘도달 한다’는 뜻입니다. 남이란 누구인가? 타인이 아닙니다. 크게 보면 또 다른 나입니다. 남이란 내 분신입니다. 나와 무연한 타인이 아닙 니다. 열린 마음으로 보면 모두가 하나이고, 겹겹으로 닫힌 마음으로 보면 모두가 타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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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그러나 정작 얼굴의 실 체인 자기 내면의 얼굴은 들여다볼 줄 모릅니다. 거울에 나타나는 것은 그 림자에 불과합니다. 거죽의 얼굴을 보지 말고 자기 내면의 얼굴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내 인생을 순간순간 어떻게 맞이하고 있는가? 나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를 어떻게 소모하고 있는가? 오늘 만난 이웃 을 내가 어떻게 대했는가? 늘 되살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시간의 잔고에는 늙음과 젊 음이 따로 없습니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가 없습니다. 그 러므로 순간순간을 헛되이 보내지 마십시오. 하루하루 충만한 삶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스스로 자기 삶을 다져야 합니다.
■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멈춘다면
- 2002. 10. 20. 10월 정기법회 -
0 붉은색만 단풍이 아닙니다. 자연은 여러 가지 색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초 록색과 갈색, 개울의 돌과 바위, 산봉우리, 안개, 전나무 소나무 등이 적당 히 조화를 이루어야 아름답습니다. 붉은색만 단풍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단풍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면 잘못 본 것입니다. 가을 산에는 붉은 잎만 있는 것이 아니라 노란색과 갈색 잎도 있고, 바람과 바위도 있고, 비가 오 다 개면 바위에 돋아난 이끼도 파랗게 살아납니다.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 루어야 아름다운 것이지, 어느 한 빛깔만으로 아름다움을 이루는 것이 아 닙니다.
0 아름다움이란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이지만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서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흥에 따라서 다릅니다. 아름다운 것 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기쁨을 주고 편안함을 줍니다. 그 대신 추하고 거친 것은 불쾌감을 줍니다.
아름다움은 결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안에서 배어 나와야 합니 다. 교양이나 행동, 말씨, 마음 씀씀이가 배어 나와야 아름답지, 밖에서 꾸 민다고 해서 결코 아름다운 것이 아닙니다. 아름다운 것은 적당히 가려져 있어야 합니다. 멋이란 가려진 아름다움입니다. 세련된 기품은 가려진 것 입니다. 꽃에서 향기가 배어 나오듯 그렇게 배어 나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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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사실 아름답고 추한 것은 보는 사람의 분별입니다. 분별을 떠나서 있는 그 대로 무심히 본다면 다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자 신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누구나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 문에 자기 자신답게 잘 살고 있으면, 자신이 지닌 아름다운 요소가 꽃피어 납니다.
‘무량수경’에 보면 법장비구(法藏比丘)라는 수행자가 48가지 원을 세워서 아미타불이 되는 과정이 있습니다. 본래 부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한 평범한 사람이 원을 세워서 부처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그 48가지 원 중에 4번째 원이 바로 “이 세상에 아름답고 추한 것이 있는 한 나는 절대 로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무유호추원(無有好醜願)’입니다.
0 삼조 승찬(僧璨)대사의 신심명(信心銘) 맨 첫머리에 이런 법문이 나옵니다.
도에 이르는 길은 어렵지 않다. 지도무난 至道無難
오로지 머뭇거리는 것을 쉬라. 유혐간택 唯嫌揀擇
미워하고 사랑하는 마음만 멈춘다면. 단막증애 但莫憎愛
앞뒤가 툭툭 트여서 어디에도 거리낄 것이 없다. 통연명백 洞然明白
0 인간의 가장 큰 병은 자신을 기준으로 삼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미움이 싹 트고, 전쟁이 일어나고, 무차별적인 환경 파괴가 일어납니다. 나를 기준으 로 하기 때문에 원망이 생겨나고, 나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욕망의 좌절 이 찾아옵니다. 나의 기준이 모든 번뇌의 원인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이 그토록 강조한 ‘무아(無我)’란 바로 자신을 기준으로 삼지 말라 는 것입니다. 나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나’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멈춘다면 ‘바르 고 완전하게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진리를 발 견하는 길입니다.
0 ‘법구경’에서 부처님은 설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지 말라.
미운 사람과도 만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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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커다란 불행
사랑도 미움도 없는 사람은 얽매임이 없다.
■ 하루를 기도로 열고 기도로 닫으라.
- 2002. 8. 23. 여름안거 해제 -
0 지난 안거 결젯날 제가 몇 가지 당부를 했습니다. 먼저 각자 원을 세우라 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원을 세워야 합니다. 원이 없으면 사는 일 자체가 개운치 않습니다. 또 원이 없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일정한 원을 세우면 그 원을 이루기 위해, 원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정진합니다.
0 제가 12년 간 해인사에 있는 동안 총무스님인 영암 스님의 영향을 받아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습관을 들였습니다. 그렇게 정진을 했습니다. 그때 의 정진이 제가 중노릇하는 데 큰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이 없었 다면 대충 쉽게 지냈을 텐데, 장경각에서 아침저녁 기도한 공덕으로 여러 가지로 중노릇하는 데 크게 벗어나지 않고 제 길을 걸어왔다는 생각이 듭 니다.
0 불교의식 가운데 한문으로 된 참회의 구절이 있는데 번역을 해 보면 이렇 습니다.
“제가 어리석은 탓으로 무량겁을 두고 한량없는 허물을 지어 왔습니다. 이제 뉘우쳐 참회하오니 다시는 허물을 짓지 않고 언제까지나 깨달음을 추구하고 자비를 실천하게 하소서.”
기도에는 목소리가 아니라 간절한 마음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진심이 담 기지 않은 소원은 울림이 없습니다. 무엇이든 진심으로 하면 천지신명까지 도 감동하게 됩니다. 기도에는 어떤 요구보다도 간절한 마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몸에 음식이 필요하듯이 영혼에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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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또 기도의 장소를 가리지 마십시오. 고요하고 맑고 청정한 도량이면 어디 서나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번거롭고 분주한 곳에서는 오히려 집중이 되 지 않습니다. 이름난 기도 장소에 가 보십시오. 사람이 지나치게 많아 엉 덩이에 대고 절해야 하고 부처님한테 절할 여백이 없습니다. 서쪽에만 극 락 세계가 있으라는 법은 없습니다. 흰 구름이 걷히면 어디나 청산입니다.
0 우리가 참선하고 기도하는 것은 어지러운 세상을 살면서 늘 깨어 있고 마 음에 평안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마하트마 간디의 어록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루를 여는 아침의 열쇠이고,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의 빗장이 다.”
0 잘 아시겠지만 부처님의 마지막 가르침이 있습니다. 팔십 평생 살다가 이 세상에서 인연이 다해서 떠나갈 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씀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단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것은 덧없다.(諸行無常)”
덧없다는 것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모든 것이 한때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우주의 실상입니다.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은 죽 음입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한시도,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모 든 것은 움직입니다.
이것을 한편으로 보면 허망하고 덧없다고 말하는데, 꼭 부정적인 말은 아 닙니다. 그 변화 속에서, 무상함 속에서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늘 깨어 있으라는 소리입니다.
세상이 너무 험난하기 때문에, 깨어 있지 않으면 제 길을 갈 수가 없습니 다. 깨어 있기 위해서 기도하고, 참선하고, 나눔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살 아 있는 사람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다.
- 2002. 6. 16. 6월 정기법회 -
0 경전과 스승들의 어록마다 “밖에서 찾지 말라.”라고 말합니다. 자기 안에 서 찾으라는 뜻입니다. 선종 역사에서 널리 알려진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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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좌선을 하고 있는 한 제자 앞에 스승이 와서 묻습니다.
“무엇을 하고 있는가?”
“좌선을 하고 있습니다.” “좌선을 해서 무엇하게?”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이튿날 스승은 좌선을 하고 있는 제자 앞에서 벽돌을 바위에 대고 가는 행동을 합니다. 제자는 이상한 생각에 스승에게 묻습니다.
“스승님 벽돌을 갈아서 무엇하시게요?”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아니 벽돌을 갈아서 거울을 만들다니요?”
“그렇다면 그대는 앉아만 있으면 부처가 될 줄 아는가?”
앉아서 깨달음을 기다리는 것을 ‘대오선(待悟禪)’이라고 합니다. 마치 낚 시꾼이 낚싯줄을 강물에 드리워 고기가 물기를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대오선은 선이 아닙니다. 스승의 이 말에 제자는 정신이 번쩍 듭니다. 제 자는 매우 절박하게 묻습니다.
“스승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스승이 답합니다.
“ 소의 수레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구레를 몰아야 하나, 소를 몰아야 하 나? 진정한 선은 앉거나 눕는 데 있지 않으며, 부처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아니다.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어서 취하고 버릴 것이 없는 것이 선이 다.”
이 말에 제자는 크게 깨닫습니다. 스승의 이름은 남악 회양(南岳懷讓) 선사로, 육조 혜능의 제자입니다. 그리고 제자는 마조도일(馬祖道一)입니 다. 이 마조도일 선사 밑에서 수많은 선승들이 배출됩니다. 백장, 황벽, 임 제 할 것 없이 모두 그의 계통입니다.
0 좌선을 해서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좌선 그대로가 부처의 경지입니다. 그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닌 순수한 기도 자체가 부처와 보살의 행위입니다.
0 약산 스님 이야기입니다. 스님의 본래 법명은 유엄(惟儼)인데 작약산(芍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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山)밑에 50년을 살았기 때문에 줄여서 약산이라고 부릅니다. 그 무렵 지방 관이던 이고(李翶)라는 사람이 좌천되어 이 고장에 왔는데 약산 스님의 명 성을 듣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스님은 본체만체했습니다. 이고는 기분이 상해 스님에게 들으라고 넌지시 말합니다.
“막상 와서 모니 천 리 밖 소문보다 대단치도 않구나.”
이때 약산 스님은 얼굴을 들고 말합니다.
“그대는 어째서 귀만 소중히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기는가!”
이고는 비로소 스님께 절하고 겸손하게 묻습니다. 이고는 뛰어난 학자였 습니다.
“어떤 것이 도입니까?”
스님은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은 옆에 있는 병을 가리키면서 말합니다.
“구름은 하늘에 있고 물은 병 속에 있다. (雲在靑天 水在甁)”
이 일을 계기로 이고는 스님의 속가 제자가 되어 훗날 약산 스님의 어록 과 행적을 기록합니다.
0 절에 와서 법회에 참여하는 것은 그런 길을 찾기 위한 것이지, 절 안에 무 슨 도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내 일상 안에. 내가 부딪히는 인간관계에 바 로 도가 있고 진리가 있고 불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찾지 말 라는 것입니다.
■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지 말라.
- 2002. 5. 19. 부처님 오신 날 -
0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모든 생명은 폭력을 두려워한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이런 도리를 자기 몸에 견주어 남을 죽이거나 죽게 하지 말라.”
0 보살계 제1계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산목숨을 죽이지 말라. 살아 있는 것을 스스로 죽이거나, 남을 시켜 죽 이거나, 수단을 써서 죽이거나, 칭찬하여 죽게 하거나, 죽이는 것을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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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해서는 안 된다. 즉 죽이는 인연과 죽이는 방법과 죽이는 업으로 살 아 있는 것을 죽여서는 안 된다. 불자는 항상 자비스런 마음과 겸손한 마 음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해야 한다.
0 사람이든 미물이든 모든 존재 안에 깃든 불성, 신성. 하느님의 씨앗을 인 식하는 것이 종교의 근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의 이름으로 역사 속 에서 너무 많은 살상을 저질러 왔습니다. 인간 중심의 종교는 다른 생명체 들을 착취하고 무시하는 것을 당연히 여깁니다. 또한 자기중심의 종교는 타 종교에 속한 이들을 이단과 사탄으로 낙인찍고 제거되어야 할 대상으 로 여깁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종교마다 사랑을 말하고 자비를 내세 웁니다. 그런데 어째서 종교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죽입니까?
0 불교에서 말하는 생명은 사람뿐이 아닙니다. 일체중생입니다. 서양의 종교 와 동양의 종교가 크게 다른 점은 이것입니다. 서양은 인간중심입니다. 모 든 생물은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종속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양의 사상은 생명은 다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모든 생 명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많은 생명 가운데 하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기준이 아니라 생명이 기준입니다. 이것은 수평적인 자비이고 서양 은 인간 본위의 수직적인 사랑입니다. 오만한 인간들이 저지른 결과가 오 늘날과 같은 혼란을 초래한 것입니다.
0 아프리카의 성자로 불리는 슈바이처 박사는 다음의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나무에서 잎사귀 하나라도 의미 없이는 따지 않는다. 한 포기의 풀 꽃도 꺾지 않는다. 벌레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여름밤 램프 밑에서 일을 할 때 많은 날벌레들이 날개가 타서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보다는 차라리 창문을 닫고 무더운 공기를 호흡한다.”
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 우리가 생존을 위해서 부득이 논밭에서 잡초를 뽑는 것은 윤리적으로 잘못이 없지만,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길가에 있는 아무 리 보잘것없는 잡초일지라도 함부로 뜯어서 생명을 해치는 일은 윤리적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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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죄가 된다.”
0 영국의 극작가 버나드 쇼는 채식만 하는 사람이었는데 기자가 그에게 “왜 당신은 채식만 합니까?” 하고 묻자 “왜 짐승의 시체를 내가 먹어야 합니 까?” 하고 답했습니다.
0 부자 되기는 쉽습니다. 쓰지 않고 잔뜩 모으면 부자가 됩니다. 이 시대에 는 가난해지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투철한 자기 삶의 철학이 있지 않고 는 가난해지기 어렵습니다. 특히 스님들이 그렇습니다. 실직될 일도 없고, 밥 굶을 일도 없고, 자식 때문에 속 썩을 일도 없고, 얼마나 홀가분 합니 까?
■ 한 사람은 모두를 모두는 한 사람을
- 2002. 2. 17. 2월 정기법회 -
0 사람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적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다고 해 서 혼자일 수는 없습니다. 각자 개별적인 환경에 있으면서도 사람은 사회 적인 존재입니다. 저는 늘 그것을 의식합니다. 외떨어져 살면서도 다 얽혀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서로 의지해야 사람이 됩니다. 서로 기대고 받쳐주고 있습니다. 인간이란 말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 다.
0 제가 좋아하는 영어 문장에 “One for All, All for one."이란 말이 있습니 다. 한 사람은 모두를 위하고,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의미로 ‘화엄경’ 법성게에 ‘일즉일체 다즉일 (一卽一切 多卽一)’이란 말이 있습니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라는 가르침입니다. 한 사람 은 모두를 위하고, 모두는 한 사람을 위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진정한 깨달음이고 진리의 세계입니다.
0 중생이 없으면 부처도 보살도 없습니다. 중생이 없으면 부처와 보살은 할 일이 없습니다. 할 일이 없으면 존재의 의미가 없습니다. 이웃은 내 복을 일구는 밭입니다. 귀찮은 존재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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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는 이웃뿐 아니라 그것이 바위가 되었든, 새가 되었든, 짐승이 되었 든 우리가 만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만남의 의미를 뜻있게 지 니려면 보다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처럼 냉혹하고 비정한 세태에 우리가 사람의 자리를 잃지 않고 지키 려면. 만나는 대상마다 보다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야 합니다. 저는 새벽 예불 끝에, 제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늘 다짐을 합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보다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하겠습니다.”
스스로 그렇게 다짐하면 마음밭에 씨가 뿌려져서 자발적으로 그렇게 될 수가 있습니다.
■ 길에서 검객을 만나거든 너의 검을 보여주고
- 2001. 12. 16. 길상사 창건 4주년 -
0 미국의 유명한 환경 운동가인 존 로빈슨은 지난 9ㆍ11 테러 사태를 두고 이런 글을 썼습니다.
“대략 6천 명의 사람들이 테러 공격으로 사망했다. 그러나 그날 이들만 죽은 것이 아니다. 3만 5천 명의 아이들이 세계 전역에서 굶어 죽었다. 그 비슷한 숫자의 아이들이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죽었다. 오늘도 3만 5천 명의 아이들이 굶어 죽는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친 부를 축적한다면, 이웃으로 부터 원한과 증오를 삽니다. 개인이 쓸 수 있는 재물은 한정되어 있습니 다. 이것은 세상의 원리입니다.
0 9세기 당나라 때 목주 진존숙 스님
- 황벽 스님의 제자로 임제 스님을 발굴
- 임제의 그릇됨을 본 목주는 스승인 황벽에게 보내어 어떤 것이 진리인지 를 물으라고 함
- 임제가 황벽을 찾아가 물으니 다짜고짜 몽둥이로 때려서 더 물을 수가 없 었음, 그것도 세 차례나....
- 임제는 목주에게 이 절은 인연이 아니니 떠나겠다고 하자 그러면 갈 때 황벽 스님에게 하직 인사나 하고 가라고 함
- 황벽 선사는 임제를 대우 스님에게 소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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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제가 대우 스님에게 갔더니 대우 스님이 묻습니다.
“어디서 왔느냐?”
“황벽 스님에게서 왔습니다.”
“거기서 무슨 법문을 들었느냐?”
“어떤 것이 참 진리인가 물을 때마다 몽둥이로 때려서 이곳으로 왔습니 다.”
“황벽이 그렇게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는데 네가 그 뜻을 몰랐구나.”
이 말에 임제 스님은 크게 깨닫습니다.
0 그리하여 대우 스님은 “너의 스승은 황벽이니 다시 황벽에게 가라.”고 임 제 스님에게 말합니다. 이 임제 스님을 알아본 분이 목주 스님이었습니다. ‘전등록’에도 목주 스님의 어록이 실려 있습니다.
길에서 검객을 만나거든 너의 검을 보여 주고
그가 시인이 아니거든 너의 시를 보이지 말라.
여우는 사자의 무리에 들 수 없고
등불은 해와 달의 광명에 견줄 수 없다.
0 목주 스님은 고향인 목주 개원사 주지로 있었는데
- 고향에 늙으신 어머니가 계셔서 봉양하려고 개원사를 떠나지 않았고
낮에는 사중 일을 보고 밤에는 짚신을 삼아서 곡식과 바꾸어 어머니 봉양
-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도 밤잠을 줄여 짚신을 삼아서 새벽이 되면 남 몰 래 큰길가 나무에 걸어 두고 길손들이 신고 가게 함
그래서 스님의 별명이 진포혜(陳蒲鞋)입니다. 포혜는 왕골로 만든 신발이 라는 뜻입니다. 옛날 큰스님들은 이렇듯 남모르게 나누어 갖는 일을 했습 니다.
0 최근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요즘 연말이라 자선냄비가 있지 않습니까? 그 런데 그 자선냄비 옆으로 한 스님이 와서 곁에다 시주함을 놓고 종일 목 탁을 치더랍니다. 자선냄비 사람들은 말은 못하고 영 불쾌하게 여겼습니 다. 그런데 해가 질 무렵, 스님이 주섬주섬 정리를 하는가 싶더니 자기 시 주함에서 돈을 모두 꺼내어 자선냄비에 넣어두고 가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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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구경’에 이런 법문이 있습니다.
착한 일은 서둘러 행하고
나쁜 일에 마음을 멀리하라.
착한 일을 하는데 게으르면
그의 마음은 벌써 나쁜 일을 즐기고 있다.
누가 만일 착한 일을 했다면
항상 그 일을 되풀이하라.
그 일을 즐겁게 여기라.
착한 일을 쌓는 일은 즐거움이다.
선한 일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
방울물이 고여서 항아리를 채우나니
조금씩 쌓인 선이 큰 선을 이룬다.
0 나누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곳에 있지 않을 수도 있고, 내 마음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 에 무슨 일이든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합니다.
■ 물은 낮은 데로 흘러 세상을 적신다.
- 2001. 6. 17. 6월 정기법회 -
0 우리 몸은 물을 마시지 않으면 하루를 버티기 어렵습니다. 물은 생명에 필 요한 절대적인 요소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날이 가문 계절에 물의 음덕에 대해서 같이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0 노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 이 세상에 물보다 부드럽고 겸손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딱딱한 것, 사 나운 것에 떨어질 때는 물보다 더 센 것은 없다.”
이와 같이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깁니다. 또 물방울이 모여서 댐을 이룹 니다. 댐을 이루어 동력을 만듭니다. 이 오묘한 도리를 알아야 합니다. 이 것은 모성적인 저력입니다. 어머니들이 약한 것 같지만 얼마나 강합니까? 어머니들은 이 땅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을 잉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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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시간도 흐르는 강물과 같습니다. 전에도 우리는 이와 같이 모였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지금 어디로 갔는가? 또한 그때 그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
까?
지금의 우리는 그때의 우리가 아닙니다. 새로운 우리들입니다. 겉모습은 저나 여러분이나 비슷하지만 두 달 전의 우리가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입 니다. 지금의 우리입니다. 강물은 항상 흐르고 있지만 언제나 그곳에 있습 니다. 항상 그곳에 있기에 어느 때나 같은 물이지만 순간마다 새로운 물입 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일도 날마다 그날이 그날이고 같은 시간 같지만 늘 새로운 날입니다. 하루하루를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0 요즘은 볼 수 없지만, 옛날 오래된 절에 가 보면 부엌으로 들어가는 문 양 쪽에 호랑이와 용을 그려 놓았습니다. 그런 그림이 없는 절에선 한자로 호 (虎) 자와 용(龍) 자를 써 놓았습니다. 이것은 산중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나무라 하더라도 함부로 낭비하면 호랑이가 화를 내고, 또 흘러가는 물이 지만 귀한 줄 모르고 함부로 쓰면 용이 화를 낸다는 의미입니다.
0 노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
물의 훌륭한 덕은 만물을 이롭게 하는 것입니다. 흐르면서도 다투지 않습 니다. 그릇 생긴 대로 다 채워 줍니다. 웅덩이가 있으면 채워주고, 더러운 곳이 있으면 다 씻어 줍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고,(水善利萬物而不爭) 사람 들이 싫어하는 곳에 머문다.(處衆人之所惡) 그러므로 물은 도에 가깝다.(故 幾於道)”
0 부처님은 가끔 이런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여러 강물이 바다에 이르면 본래의 이름을 잊어버리고 다만 한 가지 맛 이 된다.”
‘화엄경’에도 같은 비유가 나옵니다. 물은 더러운 곳이 있으면 다 씻어 줍 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세속에 있을 때는 저마다 사회적인 지위와 신분, 그 성씨나 이름을 달리 했지만 내 곁에 출가하여 수행자가 되면 모두가 같은 수행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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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일불제자(一佛弟子), 모두 진리의 형제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인 연으로 이 도량에 모여 있지만 다 부처님 인연으로 모여든 것입니다. 출가 자든 재가자든 일불제자입니다. 한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법의 형 제들입니다.
0 경전에 ‘팔공덕수(八功德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덟 가지 공덕을 갖추고 있는 물을 뜻합니다. 뛰어난 특성과 효험을 가진 물, 또 극락정토의 연못 에 가득한 물입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팔공덕수는 달고, 차고 부드럽고, 가 볍고, 맑고, 냄새가 없고, 마실 때 목구멍을 상하게 하지 않고, 마시고 나 서도 뒤탈이 없는 물이라고 나옵니다.
0 차를 즐겨 마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육우는 차의 성인으로 1,200년 전에 실존했던 사람입니다. 차에 대한 문헌인 ‘다경(茶經)을 썼고, 물론 그 전부 터 차 마시는 풍습은 있었지만 육우에 의해서 차가 세계화되었으며, 세상 에 널리 전파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그래서 육우를 가리켜 차의 성인이니, 다신(茶神)이니 하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계경이라는 사람이 지방장관 발령을 받아 부임하다가 우연히 양자강 유역에서 육우를 만납니다. 이계경은 마침 물 좋기로 이름난 양자강에서 육우를 만났으니 두 가지 좋은 인연이라며 차 한 잔을 하자고 청합니다. 그리하여 시중들던 군사에게 근처에 있는 남령의 물을 떠 오라고 시킵니 다. 이윽고 물이 도착하자 육우는 표주박으로 물을 떠올리면서 “강물은 강 물인데 남령의 물이 아니라 강기슭의 물이로군.” 그리고 반쯤 물을 따른 후 남은 물을 맛보더니 “이제야 남령의 물이로군.”하고 구별했다고 합니 다.
군사가 강물 깊숙히 있는 남령의 물을 길어 오다가 배가 흔들려서 절반 이나 엎질러 버렸습니다. 꾸중이 두려워 강기슭의 물을 채웠습니다. 병사 는 엎드려 사죄합니다. 육우의 감별력은 그만큼 까다롭다는 것입니다. 차 맛은 물맛이 좌우합니다.
0 요즘 가뭄이 90년 만의 가뭄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나라에서는 홍수가 나서 집과 가재도구가 떠내려가고 전답이 매몰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아마 도 이런 현상은 갈수록 심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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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이 그러한 결과를 불러들이기 때문입니다. 지구 기온이 계속 올라가고 있습니다.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댐에 물이 얼마밖에 남지 않았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런 뉴스를 접하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 다. 나 자신의 저수량은 과연 얼마나 남아 있는가? 내게 주어진 시간의 잔 고, 내 저수량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 스스로 묻게 됩니다. 각자 자신의 저수량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하루가 지나가면 우리 목숨에서 그 하루가 지나갑니다. 명심하십시 오. 오늘 하루가 줄어듭니다. 물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아껴 써야 하듯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무한한 시간이 아닙니다. 한정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유용하게 쓸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 지나가면 흐르는 강물처럼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삶입 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들이 가뭄에 비를 애타게 기다리는 기 우제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영혼에는 나이가 없다.
- 2001. 5. 8. 여름안거 결제 -
0 강원도는 지금 진달래가 한 장입니다. 또 요즘 제가 게을러져서 마당의 풀 을 안 뽑았더니 풀밭에서는 민들레가 찬란하게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강 원도의 진달래는 남쪽에서 보는 진달래 빛깔과는 다릅니다. 무척 곱고 짙 습니다. 아마 기온 차가 심해서일 것입니다. 지난겨울에 내가 사는 곳은 영하 25도까지 내려갔습니다. 그런 추위를 겪고 핀 꽃이기 때문에 그토록 빛깔이 고운 것 같습니다. 남쪽에서는 볼 수 없는 선명하고 짙은 자줏빛입 니다. 민들레도 매우 건강하게 황금빛으로 피고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집안 형편이 좋아서 편하게 산 사람은 마음의 꽃 을 피워도 향기가 깊지 않습니다. 그러나 힘든 역경 속에서 온갖 시련을 딛고 일어선 이들의 마음의 꽃은 무척 선명합니다. 무엇이든 유심히 살펴 보면 우리들 마음 그대로가 다 법문입니다. 절에 와서 듣는 이런 법문들은 시시한 소리에 불과합니다. 우주 자체가 우리에게 끝없이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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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마음 닦는 사람들은 적어도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야 합니다. 그날의 해를 맞이해야 합니다. 이것은 무척 중요한 일입니다. 부처님도 샛별이 뜨는 것 을 보고 마음의 눈이 활짝 열립니다. 본래의 자유로 완전히 돌아온 것입니 다. 모든 명상가들이 공통적으로 말합니다. 명상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어둠과 밝음이 교차되는 새벽이라고. 그것은 일찍 일어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우주의 신비입니다. 그때가 우리 정신이 가장 투명해지는 시간입 니다. 종교적인 체험을 가장 많이 하는 시간입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간 단히 할 일을 하고 창을 향해 앉아 있을 때, 어둠과 밝음이 교차하는 그 시간 머리가 가장 맑아집니다. 의식이 투명해지고 아무런 잡념도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 시간들을 더러 가져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삶을 더 자주 적으로 살 수 있습니다.
0 저는 혼자 살지만 이 시간을 한 번도 건너 뛴 적이 없습니다. 새벽에 일어 나 제가 사는 거처의 작은 불상 앞에서 예불을 올리고 잠시 좌선을 한 뒤 홀로 차 한 잔을 우려 마시는 그 시간이 없었다면 삶이 더없이 건조해지 고 중심 없이 세파에 흔들렸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만의 내적 공간 안에서 침묵을 마주하고 앉는 시간 을 가져야 합니다. 새벽별이 뜨는 그 시간이면 더욱 투명하고 순수한 존재 의 방에 앉을 수가 있습니다.
0 분발하고 서원하는 일을 통해서 사람은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육신 의 나이에 구애되지 않고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나이에는 세 월이 붙지만 영혼에는 세월이 없습니다. 영혼에는 나이가 없습니다. 세월 이 붙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네가 이제 70, 80 이어서 죽 을 때가 다 되었는데 무얼 시작하겠는가?’ 하고 낙담하는 사람이 있는데, 영혼에는 나이가 없습니다. 지금 시작한다 하더라도 내생을 위한 준비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익히는 업이 내생에까지 연장됩니다. 내생에 가서 새롭게 익히려면 어렵습니다. 또 내생에 진리는 만날지 못 만날지 알 수 없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일이라면 육신의 나이에 붙잡히지 말고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결과가 저절로 꽃피고 열매 맺게 됩 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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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게으름은 최대의 악덕입니다. 게으르면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법구경’에서는 게으름을 쇠에 나는 녹에 비유합니다. 심성을 강철에 비유 하고 게으름을 녹에 비유합니다. 쇠를 침식하는 것이 녹입니다. 아무리 강 철이라도 녹이 슬기 시작하면 그것은 쇠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합니다. 우 리의 심성과 영성, 불성이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 하더라도 게으르면 다 매 몰되어서 인간 구실을 할 수가 없습니다. 녹은 어디서 나오는가. 우리의 한 생각에서 나옵니다.
■ 문명의 소도구로 전락하지 말라.
- 2001. 2. 18 2월 정기 법회 -
0 제가 책에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한 언론사의 편집인이 호화로운 카리브 해 휴가에서 돌아온 후 친구한테 이런 자랑을 하더랍니다.
“지금까지 내가 원했던 사치를 며칠 동안 누렸네.”
카리브 해의 휴가지에서 자기가 지금껏 원했던 모든 사치를 정말로 누렸 다고 자랑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럼 그 사치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곳은 텔 레비전도 라디오도 신문도 컴퓨터도 전혀 없는 그런 곳이었다고 합니다. 날마다 정보를 다루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언론사 편집 책임자라면 정보를 주무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진짜 사치스러운 휴가를 보냈다면서 이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순수한 천국이란 정보가 전혀 없는 곳이다.”
매우 상장적인 말입니다. 정보화에 찌들어 가는 혹은 시들어 가는 현대인 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명언입니다.
0 정보화 사회의 정보는 우리가 먹는 음식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먹으면 건강이 어떻게 됩니까? 지나치게 많은 칼로리와 지방 을 섭취한 데서 오는 질병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과도한 정보도 그렇습 니다. 지나친 정보의 해독제로서 전문가들은 몇 가지를 권장하고 있습니 다.
- 첫째 : 텔레비전 보는 시간을 줄이라.
☞ 삶의 속도, 가정의 평화, 혹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어떤 궁리, 사색,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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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들을 TV에 빼앗겨버렸다.
☞ TFA(워싱턴에 본부를 둔 단체로 70년 4월 22일부터 지구의 날 운영)의 구호 : “텔레비전을 끄고 인생을 켜세요.”
왜냐하면 TV에서 얻는 정보나 지식이 적은 것은 아니지만 훨씬 많은 시 간과 창의력을 송두리째 TV에 바치고 있기 때문
- 둘째 : 부스러기 뉴스를 피하라.
왜 정치꾼의 싸움과 횡령 같은 뉴스에 내 맑은 영혼을 내던지는가?
- 셋째 : 때로는 핸드폰을 놓아두고 다니라.
그것 없이도 잘 살았는데..... 그 도구가 얼마나 나를 구속하는가.
- 넷째 : 광고에 저항해야 합니다.
0 토인비 박사는 언젠가 일본 학자와 대담한 ‘대화’라는 책에서
“현대 문명의 위기는 기술문명이 토끼처럼 뛰어 가는데 비해서 정신문명 이 거북 걸음으로 그 뒤를 쫒고 있다는 데 있다.” 고 지적했습니다. 새겨 들어야 할 말입니다.
0 ‘법구경’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
“시시한 쾌락을 버림으로써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다면 보다 큰 기쁨을 위해서 시시한 쾌락을 기꺼이 버리라. 남에게 고통을 줌으로써 자신의 즐 거움을 삼는 자는 원한의 사슬에 얽매여 벗어날 기약이 없다. 해야 할 일 을 소홀히 여기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면서 오만과 방종에 빠진 사람에 게 번뇌는 점점 늘어만 간다. 항상 이 몸의 실상을 생각하여 그 덧없음을 잘 알고 해서는 안 될 일은 하지 말고 해야 할 일만을 꾸준히 하라. 생각 이 깊고 조심성 있는 사람에게서 번뇌는 점점 사라져 간다.”
■ 허술하게 이은 지붕에 비가 새듯이
- 2001. 1. 19. 일요 가족 법회 -
0 오늘은 ‘법구경’에 실린 몇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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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문은 법에 이르고 법으로 통하는 문, 진리의 세계로 가는 문입니다. 그 러한 모임이 법회입니다.
진실을 거짓이라 생각하고
거짓을 진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이 잘못된 생각 때문에 끝내 진리에 이를 수 없다.
진실을 진실로 알고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 아닌 줄 아는 사람은
그 바른 생각 때문에 마침내 진리에 이를 수 있다.
0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에 보면 네 가지 고귀한 진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사성제(四聖諦)’라고 합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그 괴로움의 소 멸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 이것을 네 가지 성스런 진리라고 합니 다.
그럼 괴로움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소멸하는 것입니다. 괴로움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서 소멸되기도 합니다. 그럼 소 멸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팔정도(八正道)입니다 팔정도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인데 그 첫 번째가 정견(正見)입니다. 바른 견해입니다. 바른 견해 라는 것은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는 것입니다.
0 임제 선사는 ‘진정한 견해(眞正見解)’를 말했습니다. 진정견해는 일체의 사 물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입니다. 스님은 선을 공부하는 학인들에게 무엇 보다도 진정견해를 가지라고 말합니다.
“만약 참으로 도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세간의 허물을 찾을 것이 아니라 진정견해를 구하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 진정견해에 통달하여 두루 밝게 되어야 비로소 쉴 수 있는 것이다.”
임제록은 진정견해를 가지려면 ‘밖에서 찾지 말라.’고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미 완전한 자신을 두고 밖에서 또 찾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임제 스님의 가르침입니다.
0 ‘바른 견해’는 나무의 뿌리와 같고, 집의 주춧돌과 같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계는 물론이고 보이지 않는 세계까지 바르게 보는 것이 신앙생활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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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둘째치고 눈에 보이 는 것까지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바른 견해는 현상에 머물지 않습니다. 현상이 일어나는 원인을 먼저 보고 그것에서 해답을 찾습니다.
0 오늘 우리가 읽을 ‘법구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허술하게 이은 지붕에 비가 새듯이
수행이 덜 된 마음에는 욕망의 손길이 뻗치기 쉽다.
잘 덮은 지붕에 비가 새지 않듯이
수행이 잘 된 마음에는 욕망이 스며들 틈이 없다.
수행이 잘되고 덜 되었다고 하는데, 그럼 수행이란 무엇인가? 닦는 행입 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행하는 것, 사는 일입니다. 우리가 하루하루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입 니다. 수행이 꼭 어디 가서 참선하고 경전보고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 일상생활 자체가 행을 닦는 일이고 또 그것이 닦는 행입니다.
0 허술하게 이은 지붕에서 비가 샙니다. 마음 단속이 허술하면 늘 바깥 것에 팔립니다. 남이 좋은 집에 살고 있으면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남이 고급차 타면 부러워합니다. 안으로 가꾸는 것이 없기 때문 에 한눈팔아서 그런 것입니다. 안으로 가꾸면 남이 무엇을 하든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기 삶의 몫이 있습니다. 그 몫을 스스로 챙기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그것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마치 튼튼하게 이어진 지붕처럼 어떤 비바람에도 끄떡없습니다.
악한 짓을 한 사람은 이 세상과 저세상에서 근심한다.
자기 행실이 더러운 걸 보고
그는 슬퍼하고 괴로워한다.
착한 일을 한 사람은 이 세상과 저세상에서 기뻐한다.
자기 행동의 떳떳함을 보고
그는 기뻐하고 즐거워한다.
아무리 경전을 많이 외울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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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실천하지 않는 방탕한 사람은
남의 소만 세고 있는 소몰이꾼일 뿐.
참된 수행자의 대열에 들 수 없다.
경전을 조금밖에 외울 수 없더라도
진리대로 실천하고
욕망과 분노의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바른 지혜와 해탈을 얻고
이 세상과 저세상에서 매이지 않는 사람은
진실한 수행자의 대열에 들 수 있다.
■ 영혼을 깨우는 벗을 찾으라.
- 2002. 12. 17. 길상사 창건 4주년 -
0 흔히 말하기를 출가 수행자는 세 가지를 갖추어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고 합니다. 가르침을 주는 스승, 함께 수행하는 벗, 수행하는 장소가 그것 입니다.
세상 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과 생활환경과 친구를 잘 만나야만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온전히 살 수가 있습니다. 친구 잘못 만나서 신세 망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 스승 잘못 두었다가 엉뚱한 길로 빠진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생활환경이 맞지 않아서 온갖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0 참다운 스승은 말로써 가르치지 않습니다. 대학에서는 말로 가르치지만 참 다운 스승은 말로써 가르치지 않습니다. 일상적인 행동으로 몸소 그렇게 보여 줍니다. 일상적인 삶으로써 열어 보입니다. 제자는 그 곁에서 항상 새롭게 배우면서 깨닫습니다.
또 제대로 수행을 하려면 도량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잇습니다. 세상 을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생활환경이 갖추어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수행할 수 있는 주위 환경을 문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입산 출가하는 이 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세속적인 얽힘에서 벗어나 청정하고 조용한 곳에 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 부모 형제를 여의고 산으로 들어가는 것입니 다. 그들이 가족과 세상을 등지고 산으로 들어가는 것은, 보다 큰 가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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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큰 세상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0 기도할 절을 찾아서 여기저기 다녀 본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자연환경 못 지 않게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자질도 중요한 요소입니다. 도량은 단순한 공간이 아닙니다. 살아 있고 생동하는 환경이어야 합니다.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살아 있어야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도량은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밖에서 찾지 마십시오. 똑 같은 집 이지만 어진 사람이 살면 그 집이 빛납니다. 마음에 달린 것입니다. 그 공 간에서 어떤 사람이 사는가가 문제입니다.
0 도반이 지혜로우면 함께 지혜를 얻고, 도반이 어리석으면 더불어 어리석어 집니다. ‘법구경’에도 이런 법문이 나옵니다.
“차라리 혼자 갈 일이지, 어리석은 자와 길벗이 되지 말라.”
부처님은 ‘숫타니파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처럼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진흙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좋은 친구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함께 진리를 논하고 진리의 길을 걸을 도반을 만나기란 드문 일입니다.
0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나쁜 친구’에 대 해서 다음과 같이 열거합니다.
1. 일상적인 생활 태도가 음울하고 불쾌한 사람
2. 탐구하는 노력이 없는, 책 한 권 안 읽는, 육신은 살아 있으면서도 정신 은 죽어 있는 사람
3. 생각과 대화가 보잘것없는 사람
4. 듣는 사람은 생각지도 않고 끝도 없이 지껄이는 사람
5. 자기 견해로 생각하지 않고 남의 의견에 휩쓸리는 사람
0 경전에서는 좋은 친구를 선우(善友)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선지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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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합니다.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만이 아니라 착한 벗을 선지식이라 부릅 니다.
선우, 나를 속속들이 잘 알고, 나를 받아 주고, 세상에선 다 내치더라도 나를 이해해 주는 마음의 벗입니다. 좋은 친구라는 것은 나를 속속들이 알 아서 받아 주고 이해해 주는 그런 마음의 벗입니다. 또 나에게 보리심과 자비심을 발하게 하고 그때그때 깨우침을 주는 사람, 그가 좋은 벗입니다.
0 좋은 친구란 내 모자람을 채워 주는 존재입니다. 온전한 사람이 어디 있습 니까? 다 부족합니다. 그것을 내 친구가 채워줍니다. 좋은 부부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어떤 단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 주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내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입니다.
■ 나무 위에 사는 선승의 가르침
- 2000. 11. 19. 뉴욕 불광사 초청법회 -
0 오늘은 도림(道林) 선사를 소개 합니다.
- 중국 항주 지역에서 활동
- 젊어서는 큰 절에서 수행하다가 말년에는 진망산 산중에서 잘 생긴 소나 무가지에 올라가 삶
그래서 그 지방에서는 선사에게 새 조(鳥)자에 보금자리 과(窠)자를 써서 조과화상, 또는 까치 작(鵲)자에 집 소(巢)자를 써서 작소화상이라는 별명 을 붙임
- 어느 날 그 지방에 새로 부임한 자사(도지사 격)가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 아와 그 모습을 보고 묻습니다.
“스님은 어째서 그토록 위태로운 곳에 계십니까?”
“내가 앉아 있는 자리는 든든한 반석과 같소. 나보다는 그대의 자리가 위태롭기 짝이 없소.”
“나는 이와같이 땅에 발을 딛고 있고 이 지방의 자사로서 모든 것이 내 지배하에 있습니다. 이런 처지인데 어째서 내자리가 위태롭다고 하십니 까?”
나무위에 앉아 있는 스님의 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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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이 고을의 산천초목을 억누르는 위력이 있고 그 지위가 높다 할지 라도, 언제 어떤 일이 그대의 신상에 일어날지 알 수 없소. 게다가 지금 그대의 마음은 마치 섶에 불이 붙은 것처럼 타오르고 있지 않소? 이것을 위태롭다 하지 않고 무어라 하겠소?”
- 관료의 신분이라는 것이 임금의 한 마디면 하루아침에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정한 것임을 깨달은 자사는 다시 묻습니다.
“어떤 것이 불교입니까?”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 두루 행하시오.”
“그거야 삼척동자라도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말로서는 세 살 먹은 어란 아이도 다 알아 듣는 소리지만 경륜과 학식 이 풍부한 팔십 노인이라도 행하기는 어렵소.”
- 이상은 도림선사와 당대의 민중시인 백거이(白居易)와의 대화입니다.
0 불교에서는 무학(無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배움이 없고 무식하다 는 소리가 아닙니다. 많은 것을 배웠으면서도 배움에 걸리지 않고 구애되 지 않는 그런 경지입니다. 다시 말하면 많이 알고 있으면서도 아는 것으로 부터 자유로워진 상태입니다.
적게 알면서도 많이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가 진정 아는 사람입니다. 자비니 사랑이니 하는 말은 지극히 추상적인 용어입니다. 우리는 만나는 대상에게 한결같이 친절해야 합니다. 밝은 표정과 따뜻한 말씨로써 친절하 게 대하는 것이 사랑이고 자비입니다. 이것이 모든 신앙인들의 화두가 되 어야 합니다.
단순한 학문이나 맹목적 수행으로는 종교적 현실을 움직일 힘이 나오지 않습니다. ‘묘호인(妙好人)’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이론은 전혀 모르지만 마음이 지극한 신앙인으로, 어떻게 하든지 이웃을 위해서 헌신하 려는 노력을 지닌 사람을 말합니다. ‘묘호’는 흰 연꽃에서 나온 말로, 연꽃 처럼 늘 맑고 향기롭게 둘레를 비추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0 제가 30년 전에 읽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 문학작품이 있습니다. 알베르 까뮈의 ‘전락’ 이라는 소설인데. 주인공 이름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습니 다. 클레망스라는 이름의 전직 변호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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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그 사람이 퇴근을 하고 센 강의 다리를 건너서 자기 집으로 갑 니다. 겨울날인데 다리를 막 지나가는 순간 다리 난간에서 웬 여인이 비명 을 지르며 강물로 투신을 합니다. 그 현장을 자기 귀로 듣고 목격했는데도 클레망스는 춥고 귀찮아서 모른 체하고 지나갑니다. 그때부터 이 주인공 남자의 의식 속에서 계속해서 그 여인이 비명을 지르며 강물로 뛰어드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그 주인공이 전락하고 만다는 내 용입니다. 그가 어떻게든 구원의 손길을 뻗었다면 그 여인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인만 죽은 것이 아니라 날마다 비명 소리를 들으 면서 그 자신도 죽어갑니다.
스스로를 정신적 범죄자라고 말하는 클레망스는 자신의 명성과 덕행이 얼마나 기만적이었는가를 깨닫지만 때는 이미 늦습니다.
0 1959년 티베트에서 팔십이 넘은 노스님이 중국의 침략을 피해 히말라야 를 넘어 인도로 옵니다. 그때 기자들이 깜짝 놀랍니다. 저런 노인이 아무 장비도 없이 어떻게 히말라야를 넘어왔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노 스님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그 나이에 그토록 험준한 히말라야를 아무 장비도 없이 맨 몸으 로 넘어 올 수 있었습니까?”
그 노스님은 뚜렷한 목표가 있었습니다.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어떻게 하 든지 히말라야를 넘어 인도 땅으로 가야겠다고 염원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이와 같습니다. 순간순간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삽니다. 또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문제는 어디를 향해 서 걸음을 내 딛는가에 있습니다. 각자 나에게 그렇게 뚜렷한 삶의 목표가 있는지 거듭거듭 물어 보십시오.
■ 미국에 와서 아메리카 인디언을 말하다.
- 2000. 11. 17. 뉴욕 불광사 초청법회 -
0 가을을 흔히 수확의 계절, 혹은 결실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일찍이 뿌리고 가꾼 자만이 거둘 수 있습니다. 수확의 계절에, 여기 오신 분들은 무엇을 수확하십니까? 수확할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뿌리고 가꾸 지 않은 사람은 가을이 와도 거두어들일 것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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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같은 수확이나 결실의 표현은 어디까지나 인간 본위입니다. 자 연의 입장에서는 거두는 일이 아니고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여름날 뜨거 운 햇볕아래서 가꾼 이삭과 열매와 잎과 뿌리를 전부 나누어 줍니다. 자연 이 돈을 받거나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 열매를 곁에서 거든 사람 들이 받는 것이지, 자연 자체는 아무 대가 없이 그냥 나누어 줄 뿐입니다.
이와 같은 자연의 은덕을 노자는 다음과 같은 시로서 표현했습니다.
하늘과 땅은 만물을 생성하고 양육하지만
자신의 소유로 삼지 않고
스스로 이룬 바 있어도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지 않으며
온갖 것을 길러 주었으면서도
아무 것도 거느리지 않는다.
이것을 일러 현묘한 덕(玄德)이라 한다.
이와 같은 자연의 덕을 자연과 더불어 사는 우리는 배울 수 있어야 합니 다. 그래서 자연을 위대한 교사라고 일컫습니다.
0 북인도 라다크 지방은 인도에서는 인구가 가장 적은 해발 3천 미터가 넘 는 오지입니다. 티베트에 가깝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티베트 문화를 수용하 고 있는 지역으로 1970년대 말부터 서구인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라다크 사람들을 통해서 인류의 미래를 위한 메시지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가 쓴 ‘오래된 미래’라는 책도 나왔습니다.
서방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한 라다크 노인이 말합니다.
“나는 바깥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식탁과 의자와 카펫을 갖고 편안하게 산다고 들었다. 쌀과 설탕 등 행복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고 있다고 들 었다. 나는 보리떡과 죽 밖에는 먹을 것이 없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다. 나 는 이가 다 빠져서 많이 먹을 수도 없다. 당신들은 좋은 옷을 입었지만 보 다시피 내 옷은 다 헤진 누더기다. 그런데도 바깥세상에는 많은 불행이 있 다고 나는 들었다.”
기자가 노인에게 현대인들이 불행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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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노인은 이렇게 답합니다.
“아마도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 좋은 옷과 가구와 재산들이 지나치게 많 기 때문에, 거기에 마음을 빼앗겨 기도하고 배우면서 차분히 자신을 되돌 아볼 시간이 없을 것이오.”
노인은 불행의 원인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저도 이 글을 읽고 움찔했습니 다.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메시지입니다. 물질에 혼을 다 빼앗겼다는 것입 니다. 그래서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불행한 것은 가진 재산이 당신들에게 주는 것보다 빼앗는 것 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소.”
0 일찍이 이 땅에서 살다가 지금은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 아메리카 인디언 의 문화는, 그 본질이 지극히 영적이고 정신적입니다. 현대인들의 문화와 문명이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인디언들의 정신세계는 본질적으로 영적이었습니다.
왜 인디언들의 사상이 오늘날 새삼스럽게 주목받고 있는가?
인디언들은 누군가에게 선물을 줄 때 전혀 생색내지 않고 상대방의 눈에 띄는 곳에 말없이 놓아두고 간다고 합니다. 무슨 뜻을 달거나 이유를 붙여 서 선물을 전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불교적인 표현을 빌리면 ‘무주상보 시(無住相布施)’입니다. 베푼다는 생각 없이 베푸는 것입니다.
그들은 또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나이 든 노인, 홀로된 부인과 고아들 을 누구보다도 먼저 돌보는 것이 부족의 전통입니다. 주거지와 야영지를 옮길 때는 일손이 모자란 사람들의 천막부터 먼저 옮겨 세워 줍니다. 물고 기를 잡거나 사냥을 하더라도 먹을 만큼만 최소한으로 제한합니다. 왜냐하 면 자기들뿐 아니라 자손들까지도 먹어야 하고, 같이 살아야 하기 때문입 니다. 그런데 우리는 씨를 말리지 않습니까? 그리고 살생하기 전에 반드시 “미안하다. 내가 부득이 너를 먹어야 하기 때문에 사냥을 한다. 양해해 달 라.” 라고 이야기를 한 뒤 사냥을 합니다. 그리고 사냥을 한 후에는 큼지 막한 고깃덩어리를 가장 필요로 하는 집 문 앞에 슬쩍 놓아두고 갑니다.
인디언들에게는 열두 가지 계율이 있는데, 그중 아홉 번째 계율에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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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이 나옵니다.
“큰 부를 얻으려고 탐욕을 부리지 말라. 부족 중에 궁핍한 사람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지나친 부를 소유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불명예스러운 일이다.”
인디언들은 많은 재산이 쌓이면 어떤 행사를 통하여 다 나누어 주는 부 족 간의 질서가 있습니다. 또 마지막 열두 번째 계율에서 이렇게 말합니 다.
“그대의 인생을 사랑하고 완성하라. 그대 삶의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라. 지금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라. 그리고 그대의 이웃에게 많이 봉사하기 를 힘쓰라.”
이것이 이 사람들의 계율입니다. 생활 규범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미개인이고 야만인일 수 있습니까? 백인들의 우월의식, 또 미 대륙에 침입 한 선교사들의 독선에 의해서 비롯된 오해입니다. 인디언들 자신은 더없이 선량하고 자연친화적이며, 가장 건강하고 조화로운 삶을 살았던 부족입니 다.
0 헐리우드에서 만든 서부 영화들은 인디언들의 실체를 그런 식으로 왜곡했 습니다. 모든 영화가 인디언들은 머리 가죽이나 벗기는 미개하고 잔인한 종족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침략자인 자신들을 합리화하기 위해 인디언 들을 미개한 야만인으로 몰아세운 것입니다. 사실 머리 가죽은 잔혹한 유 럽인들이 벗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소위 인종청소라는 말은 백인 사회에서 나온 말입니다. 동양에서는 그런 말 자체가 없습니다. 기독교 문명에서 나온 표현입니다. 백인들의 우월주 의에서 나온 말입니다. 유럽에서 넘어와서 남의 땅을 점령한 것으로 모자 라 원주민에게 온갖 박해를 가해 인종청소를 한 것입니다.
미 대륙에서 평화롭게 살던 인디언들이야말로 감각적이고 표피적인 물질 문명에 오염되지 않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순수한 원주민들입니다. 여기 서 원주민이라는 것은 때 묻지 않은, 바로 그 터전의 온전한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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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인류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디언들은 원래 몽고 계통이라고 합니 다. 제가 미국에서 느낀 것인데, 한번은 인디언 촌에서 자고 아침에 식당 으로 아침을 먹으러 갔습니다. 그런데 식당 종업원 아주머니를 보고 그만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 사람과 너무도 흡사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기들 의 엉덩이에 있는 몽고반점이 인디언 아기들에게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언어도 몽고어에서 파생된 것 같은 유사한 말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근감이 느껴졌습니다.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인디언 기도문’ 한 편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제목은 ‘위대한 가족에게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밤과 낮을 쉬지 않고 항해하는 어머니 지구에게
다른 별에는 없는 온갖 거름을 지닌
부드러움을 지닌 흙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해를 향하고 서서 빛을 변화시키는 잎사귀들과
머리카락처럼 섬세한 뿌리를 지닌 식물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들은 비바람 속에 묵묵히 서서
작은 열매들을 매달고 물결처럼 춤을 춥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하늘을 쏘는 칼새와
새벽에 말없는 올빼미의 날개를 지탱해 주는
공기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우리 노래의 호흡이 되어 주고
맑은 정신을 가져다주는 바람에게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우리의 형제자매인 야생동물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자연의 비밀과
자유와 여러 갈등을 보여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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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젖을 우리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들은 스스로 완전하며 용감하고 늘 깨어 있습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물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구름과 호수와 강과 얼음산에게
우리 모두의 몸을 지나 소금의 바다로 흘러갑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눈부신 빛으로 나무둥치들과 안개를 통과해
곰과 뱀들이 잠자는 동굴을 덥혀 주고
우리를 잠에서 깨어나게 하는 해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수억의 별들, 아니 그것보다 더 많은 별들을 담고
모든 힘과 생각을 초월해 있으면서도
또한 우리 안에 있기도 한 위대한 하늘
할아버지인 우주 공간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되게 하소서.
0 쇼니족 추장 테쿰세는 이렇게 충고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아침 햇빛에 감사하라. 당신이 가진 생명과 힘에 대 해, 당신이 먹는 음식, 생활의 즐거움에 감사하라. 만일 당신이 감사해야 할 아무런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 잘못이다.”
나눔은 고마움에서 비롯됩니다. 나눔은 곧 고마움의 표시입니다. ‘금강경’ 에서는 “상(相)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다.”라고 곳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좋은 일을 했다는 생각, 언제 누구를 도와주었다는 생각이 있으면 순 수한 나누어 가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 듯이 그저 자신이 하는 일에 무심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생각의 자취를 불교 용어로 ‘상(相)’이라고 합니다.
서산 스님은 ‘선가귀감’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가 와서 달라고 하거든 분수에 따라서 나누어 주라. 한 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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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엾이 여김이 참 보시이다.”
또 대승경전 가운데 ‘화엄경’의 논리를 빌리면 이렇습니다. 누가 와서 나 눔을 청할 때 이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내 복을 쌓는 밭이고 선지식이다. 내가 일부러 찾아 나서지도 않 았는데, 나에게 복과 덕을 쌓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주고 있구나.”
다시 말해, 내 인간적인 기량과 그릇을 키워 주기 위해 나한테 찾아온 선지식이라는 것입니다.
■ 큰 연못과 작은 연못
- 2000. 11. 10. 겨울안거 결제 -
0 스님들이 많고 적거나. 신도 수의 많고 적음으로 크고 작은 절을 따지는 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스님들이 많고 신도 가 넘쳐 나도 거기 진리 추구가 없고, 발심하는 사람이 없다면. 그 곳은 큰 절이 아닙니다. 땅덩이가 넓고 인구가 많다고 해서 큰 나라입니까? 강 대국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큰 절은 좋은 것입니다. 또한 규모가 작아서가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절. 시시한 절을 작은 절이라고 합니다. 도량 안에서 바른 진리 추구가 행 해지고 있는지, 또 신도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통해 서 큰 절이 될 수도 있고 초라한 절이 될 수도 있습니다.
0 조주 스님이 살던 조주 지방의 관음사는 무척 가난한 절이었습니다. 건물 도 두 채 밖에 없었습니다. 또 약산 큰스님이 계셨던 그 문하에도 스님들 이 열 사람을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분양 지방에 선소 선사라는 분도 큰 스님인데, 이 분도 대중이 겨우 7, 8명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선종 의 역사에는 이 스님들의 절을 총림, 매우 큰 절이라고 찬사를 보냅니다. 가난하고, 대중이 적고, 신도들도 몇 사람 드나들지 않는 절임에도 불구하 고 역사적으로 볼 때는 큰 절이라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사는 한 사람 한 사람이 밝은 수행자였고, 저마다 한 몫을 했기에 역사적으로 큰 절로 평가 받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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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을 만한 제자가 누구인가.
- 2000. 4. 16. 정기법회 -
0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는 53선지식을 차례차례 찾아 구도의 길에 나섭니다. 처음에는 문수보살을 만납니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에게 선재동자가 묻습니다.
“어떻게 해야 보살행을 배우고, 보살도를 닦으며, 보살행을 성취할 수 있 습니까?”
선재동자의 이 물음에 문수보살이 가르쳐 줍니다.
“모든 것을 아는 지혜를 성취하려면 반드시 선지식을 찾아야 한다.”
바른 스승을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바른 지도 자를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당부합니다.
“선지식을 찾는 일에 지치거나 게으르지 말고 또 만족한 마음을 내지 말 며 그 가르침을 그대로 순종하고, 미묘한 방편에 허물을 보지 말라.”
스승을 찾는 일에 게으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재동자는 그렇게 53 선지식을 두루 만납니다. 이것은 한 생애의 과정 입니다. 53 선지식을 보면, 남자가 33명이고 여자가 20명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는 몇 백 선지식이 모여 있습니다. 괜한 소리가 아닙니다. 선재동자가 만난 53 선지식만 선지식이 아닙니다. 우리가 청정한 본래 자 기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어느 누구에게나 선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선지식을 특별하고 비범한 존재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진정한 삶을 살고 있다면 그 빛을 이웃에게 전하기 마련입니다. 선지식을 멀리서 찾지 마십 시오. 어린아이에게서도 배울 수 있습니다.
0 선재동자는 쉰한 번째로 미륵보살을 만납니다. 그동안 50 선지식을 만나 면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습니까? 미륵보살은 그동안의 구도 행각을 칭 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문수보살이 그대의 선지식이니 다시 그에게 가거라.”
처음 만났던 문수보살한테 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재동자는 문수보살 을 만나러 갑니다. 문수보살은 선재동자를 보자 이렇게 말합니다.
“착하다 선남자여, 만약 믿음의 뿌리가 약했더라면 여기에 이르지 못했 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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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재동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전적으로 신뢰하였기 때문에 원만히 진리 추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신뢰가 공덕의 어머니임을 다시 상기 하기 바랍니다.
■ 지금이 바로 그때
- 1999. 12. 12. 길상사 창건 2주년 -
0 21세기가 되었든 또 무슨 세기가 되었든 그 시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이렇게 살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를 따라가지 말고 미래를 기대하지 말라.
한 번 지나간 것은 이미 버려진 것.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다만 현재의 일을 자세히 살펴.
잘 알고 익히라.
누가 내일의 죽음을 알 수 있으랴.
아함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지나가 버린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대해서 미리 불안해하거나 가불해 쓰지 말 라는 것입니다.
0 관무량수경의 ‘16관법’에 해 뜨는 것을 보는 관점, 즉 ‘일상관해를 생각하 는 관(日想觀)’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수고스럽게 뉴질랜드나 동해안에 갈 것 없이 방 안에 앉아서 자기 마음속에 떠오르는 해를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람이 부나, 비가 오나, 구름이 끼나, 아무 상관없는 해입니다.
마음속에 떠오르는 해를 보는 것, 그것이 진짜 해돋이입니다. 그렇지만 허공에 떠오르는 해, 그것은 구름이 끼거나 비가 오면 보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데 굳이 밖을 향해서 찾지 말라는 것입니다. 해 보러, 달 보러 덩달아서 휩쓸리는 것은 현대인들의 허약한 일면입니다.
0 영광 불법사에서 출가해 호남 일대에서 살던 학명(鶴鳴) 선사의 어록 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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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 세월에 대해서 이렇게 읊은 구절이 있습니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 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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