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2. 10. 19:44ㆍ독서후기
인 연
- 최인호 에세이 -
■ 최인호
0 45년 서울생. 고 2때인 1963 신춘문예 당선
0 타인의 방, 별들의 고향, 잃어버린 왕국, 길 없는 길, 상도, 해신, 유림 등
0 현대문학상, 이상 문학상, 가톨릭문상, 불교문학상 등
■ 머리글
0 독일의 작가 F. 밀러는 ‘독일인의 사랑’에서 말했다.
‘인간이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별이 하늘에서 빛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별들은 저마다 신(神)에 의해서 규정된 궤도를 따라 서로 만나고 또 헤어 져야만 하는 존재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무모한 짓이든가, 그렇지 않으 면 세상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다.’
0 밀러의 말처럼 우리 모두는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이다. 이 별들이 서로 만 나고 헤어지며 소멸하는 것은 신의 섭리에 의한 것이다. 이 신의 섭리를 우리는 ‘인연’이라고 부른다.
이 인연이 소중한 것은 반짝이기 때문이다. 나는 너의 빛을 받고 너는 나 의 빛을 받아서 되쏠 수 있을 때 별들은 비로소 반짝이는 존재가 되는 것.
인생의 밤하늘에서 인연의 빛을 밝혀 나를 반짝이게 해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삼라와 만상에게 고맙고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 내 영혼에게 가만히 가자고 속삭이는 순간
0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라는 시를 쓴 영국의 시인 존 던은 이별에 대 하여 이렇게 노래했다.
점잖은 사람들은 점잖게 숨지며
그들의 영혼에게 그만 가자고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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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을 지켜보고 있던 슬픈 어린 벗들이 숨이 졌다 아니다 말을 하고 있 을 때
그처럼 우리도 조용히 사라지세나.
눈물의 홍수나 한숨의 폭포도 없이
사람들에게 사랑을 알린다는 것은
이별의 기쁨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0 존 던의 시처럼 이제 나도 조용히 헤어지는 데 익숙해질 나이가 되었다. 죽음이 이별이 아니라는 사실을 배울 때가 되었으며, 수많은 이별 연습을 통해 나 자신도 존 던의 시처럼 내 영혼에게 조용히 “이제 그만 떠납시 다.”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지혜와 경륜을 배울 때가 된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인생이란 수많은 이별 연습을 통해, 이별이 헤어짐도 사라짐 도 아닌 또 다른 만남의 시작임을 배워나가는 훈련장일지도 모른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영혼에게 가만히 가자고 속삭이는 순간이 오기 마 련이다.
■ 지금은 간신히 인연의 무렵
0 나는 인연에 대해 서툴게 배우고 서툴게 익숙해지는 사람인가 보다. 어린 시절부터 어떠한 인연에 대해서건 단 한 번도 능숙하게 행동해본 적이 없 는 것 같다. 사람과의 인연이건, 풍경과의 인연이건, 사물이나 시간과의 인 연이건 내게 인연을 마주하고 상대하는 일은 서툴고 어리숙하게만 느껴진 다.
어릴 때부터 나는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해질 무렵 집집마다 엄마들이 “그만 놀고 들어와라.”하고 소리 지를 때도 나는 같이 놀던 아이들과 헤어지기 싫어서 땅거미가 내리고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캄 캄해져서야 겨우 집으로 돌아가고는 했다.
고등학교 때는 같이 하교하던 친구와 헤어지기 싫어 우리 집과는 반대 방향인 친구의 집 쪽으로 몇 정거장이나 더 걸어갔다 오곤 했고, 영화관에 서는 영화가 제발 끝나지 않기를 기다리고 책을 읽을 때도 끝 부분에 가 면 아쉬워 아예 책장을 덮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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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무엇과 헤어지기를 싫어하는 내 성격은 물질에 이르러서도 그렇다. 신던 구두를 잘 버리지 못하고 새 옷보다는 헌옷에 익숙하고 수십 년 쓰던 TV 와 가전제품, 15년 된 가죽 소파, 낡은 자동차까지......
내가 이처럼 고물 자동차를 고집하고, 낡은 소파를 고집하는 것은 알뜰히 절약하거나 소박한 것을 좋아하는 미덕 때문이 아니다. 나하고 깊이 정들 었던 것은 사람은 물론, 물건과도 헤어지기 싫어서 그런 것이다. 내가 낡 은 소파를 버리고 새 소파를 사면 그 소파는 나와 인연이 끊어지는 것이 다. 그렇게 되면 그 소파 위에서 잠들거나 누워 쉬던 그 기억들까지 함께 완전히 사라져버리지 않을 것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와의 결혼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연애를 할 무렵 나는 아내를 너무 사랑했다. 만나면 좋았지만 헤어지는 고통이 너무 싫었다. 내일 또 만날 수 있었지만, 내일은 내일이고 지금은 지금이었다.
0 그러나 아내와 언제까지 함께 살고 싶어 결혼 했지만 그것이 과연 영원한 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닳을 때까지 아내와 영원히 함께 살 수는 없지 않 은가. 언젠가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정해진 운명의 순서에 따라 죽 음이 우리를 갈라놓지 않을 것인가.
요즘은 살면서 점점 이별의 순간을 맞이해야 하는 일이 많이 발생한다. 지금까지는 사람과의 만남이 많아 플러스 인생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사람 과의 헤어짐이 많아 마이너스 인생이 되어버린 듯싶다.
0 나는 아직도 수많은 인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의 구속이 좋은 가 보다고.
그리고 지금은 간신히 인연의 무렵이라는 생각을 해보곤 하는 것이다.
■ 풍경을 새로 보는 시절
0 나는 요즘 풍경을 새로 보는 법을 배우고 있다. 사람이 자연에서 태어나서 처음에는 언어를 배우고 관계를 배우고 그 다음에 다시 자연을 배우듯이, 나는 요즘 자연을 배우는 중이다. 무엇보다 풍경 속의 풍경, 그걸 바라볼 수 있는 작가의 눈에서 나오는 발성은 새로운 자연을 탄생시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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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느 해 가을날이었다. 아내와 내가 원수처럼 싸워서 거의 닷새 동안 말도 않고 지낼 무렵이었다.
이제 그만 화해해야지, 하고 마음을 굳힐 무렵 아내가 어느 날 창문을 열 더니 내게 “저 나무 좀 봐요.”하고 무심코 손가락을 세웠다. 자기도 싸움 중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었는지 무심코 말을 뱉었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 이라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 말문은 터지고 화해는 시작된 셈이었다.
아내가 가리킨 손끝에는 노오란 열매들이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아, 저것이 무엇일까.
그처럼 바쁜 일상사라 해도 간혹 마당에 나가서 바람도 쐬곤 하였는데 여름 내내 나는 그 나뭇가지에 맺혔던 작은 씨 열매들을, 찬란했던 여름의 햇살 속에서 익어가고 커가던 열매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아아, 저 열매가 무엇일까,
열매들은 큰 것은 어른 주먹만 하고 작은 것은 어린애 손만 했다. 여름에 무성했던 잎들이 가을에 떨어져 그 속에 매달려 있던 열매들을 밖으로 내 밀어 선을 보인 것일까. 저토록 크기까지 저토록 익기까지 어째서 저 열매 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던 것일까.
“저게 뭐야?”
“저것도 몰라요?”
“저게 뭔데?”
“모과예요.”
“모과? 모과가 뭐야?”
나는 열매 맺는 나무라면 사과나 감, 배와 같은 과일 나무만을 연상하고 있었다.
“모과라면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잖아.”
“저것은 먹을 수 있는 과일이 아니라 냄새를 맡는 과일이에요. 물론 먹기 도하고 엷게 썰어서 차도 끓여 먹을 수 있어요.”
나는 나뭇가지에 매달린 열매에 코를 대어 보았다. 무식한 눈으로 보아도 실하게 열린 모과들이 나뭇가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탄탄하게 익고 정결하게 자란 열매들의 빛깔은 절정의 노란 빛깔로 물들 어 있었다. 그뿐이랴. 그 냄새야말로 일품이었다. 인공적인 향수 냄새. 자 극적이고 강렬한 냄새에 익숙해져 있는 내 오염된 코에도 그 냄새는 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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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자연의 향기 그대로였다. 그 냄새는 뽐내지 않고 겸손하고 수수했으 며 무엇보다 은은했다.
0 지난여름 내내 바로 내 집. 내 집 마당 굴뚝 옆에서 자라고 있던 그 향기 로운 모과나무의 열매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 열매는 내가 모르고 있었 음에도 침묵 속에서 성장하고, 묵상 속에서 열매 맺어 어느 날 내 곁에 기 적으로 나타났다. 내가 겨울 내내 그것을 보지 못했다면 그 열매는 스스로 낙과하여 침묵 속에 썩어갔을 것이다.
0 기쁨과 행복은 그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는 것에 있다. 하느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 마음의 뜨락 어딘가에 나무를 심고, 그 나무에 향기 좋은 모과가 자라도록 물 주어 기르고 있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더 큰 모과나무 를, 눈 먼 사람과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는 더 많은 열매를... 그 나무를 보 라. 보지 않고 발견치 않으면 우리는 그 향기를 맡지 못하고 비통과 비탄 속에 신음하고 있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절망하고 언제까지나 적의에 가득 차서....
모과나무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나는 그 나무 가까이 갔지만 그것을 발견치 못했다. 보지 않으면 그것은 무(無) 그 자체였다. 보지 않으면 모과나무는 없고, 그 향기는 더더욱 없 다. 쓸데없는 욕망에 눈이 어두웠으므로 나무를 보았으되 나무로 보지 않 고 하나의 형상으로만 보았다. 내가 보았으므로, 그리고 느꼈으므로 그 열 매는 모과로 내 곁에 왔으며, 그 향기는 내 곁으로 풍겨온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곁 곳곳에, 삶의 기쁨은 그곳에 있다. 우리는 눈이 멀어 그것을 보지 못하고 썩은 악취에만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 인연의 무게
0 일찍이 크리스토 폴이라는 성자는 힘이 장사였는데 강을 건너는 나그네들 을 업어주는 일로 먹고살았다. 그는 자신이 지은 죄가 많아 꼭 그리스도를 만나 속죄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리스도를 만나는 인연이 주어진다면 자 신이 어떤 죄도 남기지 않고 천국에 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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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강변에 자란 버드나무 밑에서 낮잠에 들어 있을 때 한 소년이 다가와 그를 깨웠다. 그는 자신을 깨운 소년을 업고 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물살이 거센 강 중앙쯤에 이르렀을 때 그 조그만 소년이 천근의 바위 무게로 자기를 내리 누르는 것을 느꼈다.
누구냐고 묻자 그 소년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네가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던 그리스도다. 네가 나를 업고 가는 인생의 강은 앞으로도 이처럼 고되고 힘들 것이다.”
0 우리가 진정 만나고 싶어 하는 그 인연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바로 그건 우리가 지금 시간의 강을 건너며 우리의 어깨에 지고 가는 사람들의 무게 가 아닐까. 우리는 늘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 자신의 인생에 결정적인 전환이 되어 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우 리 인생의 인연들을 숱하게 만나 왔는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가 그 사람이 우리 생에 정말 중요한 인연이란 걸 모르고 지나쳐왔을 뿐.
생에 크고 작은 인연이란 따로 없다. 우리가 얼마나 크고 작게 느끼는가 에 모든 인연은 그 무게와 질감, 부피와 색채가 변할 것이다. 운명이 그러 하듯 인연 또한 우리들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 아닐까?
■ 어머니의 화장
0 노년에 이르러 어머니는 화장을 하기 시작하셨다. 누이와 동생이 살고 있 는 미국에 여행을 갔다 오신 이후로 생긴 변화였다. 그곳의 여자들은 이러 고 다닌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어머니는 매일 아침 곱게 화장을 하셨다. 굽이 높은 구두에 호려한 색감의 원피스를 입고 입술에는 연한 립스틱을 발랐으며 손톱에는 매니큐어까지 칠하셨다.
그 후로 어머니는 나이를 여쭈어 보면 버럭 성질을 부리기 시작하셨다. 왜 자꾸 나이를 묻느냐고 힐난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대답 하셨다.
“이제 열아홉이다. 어쩔래?”
혹은 심기가 많이 불편하실 때는 우울한 눈빛으로 말씀하셨다.
“일흔 살이다. 왜 어머니가 빨리 죽기를 바라는 거냐?”
어머니는 나이 일흔 살에 들어서야 자신이 여자란 걸 깨달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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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어렸을 때 나는 어머니가 항상 화장을 하고 다니길 바랐다. 어머니는 키가 작고 촌스러웠으며 여성스럽지 못했다. 어린 시절 나는 우리 어머니가 아 름다운 여성이었으면 하는 꿈을 얼마나 많이 꾸었던가. 다른 아이들의 세 련된 어머니들을 볼 때마다 나는 아름답지 못한 부인을 둔 남자의 못난 질투심에 빠져 괴로워했다. 그래서 선생님이 어머니를 모셔오라고 하면 늘 거짓말을 하곤 했다. 지금 강릉 외갓집에 가셨습니다. 돌아오시려면 며칠 을 걸리실 텐데요. 우리 어머니의 친정은 서울이었다. 강릉엔 어머니의 친 척이라곤 단 한 명도 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를 그렇게 멀리 보 내놓고 나서야 안심을 할 수 있었다. 나는 촌스러운 어머니가 부끄러웠다.
0 어린 시절 나는 어머니가 화장을 하지 않아 부끄러웠지만, 나이가 들고 나 선 늙은 어머니가 매일 아침 화장을 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어머니는 우리 못난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젊은 날의 아름다움을 헌납하셨다. 화장은 젊 을 때 하는 것이지만, 젊은 시절 화장을 할 수 없었던 어머니는 다 늙어서 야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 어머니도 여성으로 살아가려 했던 것일까?
나는 오래전,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화장을 하던 날들을 떠올린다. 어 머니는 여성으로 태어나 어머니로 살다가 여성으로 돌아가셨다. 다시 어머 니를 볼 수 있다면 어머니 얼굴에 고운 분을 발라드리고 싶다. 메이크업 기술을 배워서 늙은 어머니 얼굴을 화장해드리고 싶다.
■ 우리가 슬픔을 쪼개어 나눠 가질 수 있다면
0 오래 전 미국에 체류하던 당시 알게 된 한 중년 남자가 내게 전해 준 이 야기다.
아주 오래전이었습니다. 사업도 시원치 않고 모든 것이 신통치 않아 매우 우울할 때였지요. 한국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습니다. 내 자리는 마침 창 옆자리여서 숱한 구름과 구름 사이로 태평양의 바다가 힐끗힐끗 엿보이곤 했지요.
내가 망연히 창 너머로 구름과 바다를 보고 있으려니 내 옆자리에서 한 미국 사람이 창밖을 좀 볼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리 를 바꿔 주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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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오십 살쯤 되었을까. 백발이 성성한 그 미국 사람은 내게 고맙다고 인 사를 한 후 창가에 앉아서 햇빛을 받아 빛나는 구름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우리는 자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세계 일주를 끝내고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넉 달 전 두 아이와 아내를 데리고 고 속도로를 달리다가 그만 사고가 나서 두 아이와 아내를 한꺼번에 잃어버 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져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세계 일주를 한 후 그만 자살을 하리라 작정을 하고 여행을 떠난 것이라고 말을 하더 군요. 그런데 여행 막바지에 그 사람은 인도에 들르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인도에서 무척이나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며 가슴 뭉클한 감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 저 사람들은 빵 한 조각을 얻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고 있는데 나는 거기에 비하면 얼마나 행복한가. 그래 여생을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고 산다면 그것이 바로 주님의 뜻일 것이다.’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답니다. 그 사람은 내게 이야기 했지요.
“절망은 없습니다. 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보세요. 저 구름 사이 로 빛나는 바다를 보세요. 내 가족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영원히 살 아 있습니다.”
이봐요, 최 형. 나는 가장 고통스러울 때면 그때 만났던 그 사람의 말을 생각합니다. 그 사람의 눈에서 빛나던 환희와 그 눈가에 맺혔던 눈물을 생 각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그 사람만큼이나 고통스럽겠소? 그렇소, 최 형. 그 사람처럼 우리에게 절망은 없소이다. 감사의 마음은 고 통을 이기는 최선의 것이니까요. 우리가 생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그 사실 은 얼마나 축복받고 감사할 것인가요?
■ 우리 이웃들의 천사
0 어느 날 천사가 한 마을에 찾아왔다. 천사는 초라하고 헐벗은 걸인의 모습 으로 마을의 집집마다 문을 두들기며 돌아다녔다. 사람들은 저마다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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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한 걸인이 문 앞을 서성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문을 꼭꼭 걸어 잠그기에 바빴다. 천사는 그 마을에서 갈 곳이 없었다. 다만 한 가난한 소 녀만이 걸인이 된 천사의 방문을 받아들였으며, 천사에게 따뜻한 밥과 국 물을 대접해 주었다. 천사는 그날 밤 그 소녀의 집을 축복하고 다시 길을 떠났다.
천사는 내내 걸인의 모습으로 우리가 사는 마을을 서성이며 돌아 다니고 있다. 천사는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도와주어야 할 우리 이웃들의 헐벗 은 얼굴에, 우리에게 도움을 전해주는 고마운 이들의 손길에 천사는 깃들 어 있는지도 모른다.
0 우리는 흔히 천사를 날개가 달린 성스러운 모습으로 표현하고 악마를 눈 이 충혈되고 두 개의 뿔을 가진 흉측한 모습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실제의 천사는 그런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천사가 실제로 날개를 가진 거룩한 모습으로 나타난다면 모든 사람이 그를 알아보고 그를 기꺼이 맞 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악마가 혀를 날름거리는 흉측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면 우리는 악마에게 속지 않고 그를 먼저 피해버릴 것이다.
모든 천사들도 평범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모든 악마들도 평범한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예수가 다시 태어난다면 아마도 그는 내 곁에 살 고 있는 아저씨의 모습으로 태어날 것이며 부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러므로 모든 천사들은 우리 주변에 있다. 바로 우리 이웃들의 얼굴에, 함 께 부대끼며 이 복잡한 속세 지옥을 견디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어깨 위에 천사는 언제든지 그 날개를 접고 쉬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 리가 조금 마음을 열어 우리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보이 지 않는 날개를 지닌 천사가 될 것이다.
■ 한 독자와의 만남
0 얼마 전에 한 독자와의 이런 만남이 있었다. 평소 내 글을 좋아하는 독자 로서 그는 직접 자신의 손으로 내가 쓴 글의 한 페이지를 내게 건네주는 것이었다. 나는 천천히 그가 떨리는 손으로 건네준 종이 위에 쓰여 있는 내가 쓴 글의 한 부분을 읽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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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 허공에 뱉은 말 한마디도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법은 없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는 아무리 가벼운 죄라 할지라도 그대로 소멸되어버리는 법이 없 습니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은 그대로 씨앗이 되어, 민들레꽃이 되어 날아갑니다. 나쁜 생각과 나쁜 행동들은 나쁜 결과를 맺고 악의 꽃을 피웁 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생각과 좋은 행동들은 그대로 사라지는 법이 없이 샘을 이루고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생명의 바다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생각은 행동을 낳고 행동은 습관을 낳고 습관은 성격을 낳으 며 성격은 운명을 낳습니다. 우리가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 저 우리의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0 나는 솔직히 부끄러웠다. 내가 쓴 보잘것없는 글의 한 부분을 정성껏 스카 치테이프로 감싸고, 외로울 때마다 태평양의 바닷가에서 그 글을 읽으며 힘과 용기를 얻는다는 그의 말이 놀랍고 감동적이었지만 그러나 나는 정 말 부끄러웠다. 내 글이 과연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랴. 내가 쓴 글의 내용처럼 내가 쓴 글도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이 민들레꽃씨처럼 그 먼 태평양을 날아와 이곳 외 딴 마우이 섬에서 꽃으로 핀 것이다. 그리하여 그 글을 읽는 진정호씨에게 는 태평양의 바다가 생명의 바다로 변해버린 것이다. 그것은 이미 작가인 내 몫이 아니다. 그것은 독자인 그의 몫인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작가라는 것이 행복했으며 작가로 태어난 것에 대해 하 느님께 감사했다. 나는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을 잊지 못한다. 그들도 나를 잊지 못할 것이다. 내가 그들을 찾아가 위로해준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를 찾아와 위로해주었으므로.
■ 어머니의 유전자
0 우리는 잊었지만 어머니들은 잊지 못하는 과거가 있다. 우리는 그 시절의 몸짓을 버릴 수 있어도 어머니들의 몸속에선 결코 사라지지 않는 몸짓이 있다. 그걸 나는 억척스러움의 유전자라고 부른다. 가난 속에서 자식들을 키워오는 동안 어머니의 몸속에서 형성된 유전자, 십 년이 지나도, 무려 백 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그 억척스러운 생의 유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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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돌아가신 어머니의 칠순 잔치 때 있었던 일이다. 어머니의 생신은 8월 10 일이었다. 다들 제몫을 하며 살아가고 있던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의 고희 연만큼은 거창하게 해 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남편 복은 없지만 자식 복은 있다는 소리를 듣게 해 드리고 싶었던 것이다.
0 형과 나는 며칠간 의논했지만 정작 어머니는 아주 검소한 잔치를 하고 싶 다고 하셔서 별수 없이 간단한 잔치를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친척 중에도 오직 어머니의 친동생이자 화가이신 외삼촌 내외만 부르기로 하고, 장소는 시내 J호텔 요식부의 한 방을 예약해 두었다.
어머니의 칠순 잔치가 한창 무르익어갈 무렵 갑자기 내 옆에 앉으신 어 머니가 주섬주섬 핸드백 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셨다. 무언가 유심히 보니 비닐 봉지였다.
“뭐예요?”
내가 묻자 어머니는 소녀처럼 호호호 입을 가리고 웃으셨다.
“남은 게 아까워서 그런다. 여기다 남은 것 싸다가 집의 개라도 주려고 그런다.”
어머니는 탁자위에 남은 음식들을 미리 준비했던 비닐봉지에 주섬주섬 넣기 시작하셨다.
“빨리 먹지 않으면 보이들이 접시째 들고 나가지 않데.”
나는 난처해서 어머니를 쏘아 보았다. 이러다가 종업원이라도 들어오면 어쩔 것인가. 모처럼 이 신성한 파티 의식이 마구잡이 동네잔치로 전락되 어버릴 것이 아니겠는가.
“거참, 왜 그러세요? 왜 그렇게 주책 부리시는 거예요?”
내가 소리를 높이자 어머니는 내 목소리를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러나 마음은 급하고 비닐봉지에 남은 음식은 잘 들어가지 않고 손은 떨리고 그 러시더니 마침내 그 아까운 새 입성에 음식 국물을 조금 흘리셨다.
“아까워라”
혼잣말로 어머니는 치마에 묻은 국물을 냅킨으로 닦으시며 중얼거리셨다.
“옷 버리고 말았네, 호호. 참내 난 도둑질은 못하겠어. 손이 떨리고 맘이 떨려서.”
그렇게 어머니는 천진하게 웃으며 계속 음식을 담으셨다. 주름진 얼굴 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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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에 곱게 분을 바르시고, 새로 맞추신 한복으로 벌겋게 물드는 음식 국물 에도 아랑곳없이 음식 하나하나를 젓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검은 비닐 봉지에 담으셨다.
0 오랜 옛날 우리는 가난했다. 가난해서 끼니를 굶고 거르는 날도 많았다. 우리가 한 끼를 굶으면 어머니는 두 끼를 굶어야 했으며, 우리가 한 끼를 먹으면 어머니는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표정을 짓던 시절이 정말 있었다.
나는 벌써 오래전에 그 시절을 망각했는데 어머니는 여전히 잊지 못하고 계셨구나.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고 그렇게 숱한 세월이 흘렀어도 어머 니의 몸속엔 여전히 그 시절의 억척스럽던 유전자가 흐르고 있는지도 모 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고통스러운 세월을 수많은 자식들을 치 마품에 안고 견뎌낼 수 있었으랴. 그러므로 저 억척스럽고 남부끄러운 주 책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짓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 성이라는 주책인 것이다.
“어머니 더 많이 담으세요.”
■ 생명을 그리는 붓
0 1982년 10월 10일을 기해 성인(聖人)이 되신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는 1941년 8월 14일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탈옥을 한 유태인 때문에 죄없는 수형자 열 명을 굶겨 죽이는 아사감방(餓死監房)으로 가게 된, 아 내와 아이를 가진 가조프니체크 대신 굶어 죽은 20세기의 성인이다.
0 그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결코 자신에게 신뢰를 주지 마십시오. 내 몸에 유혹과 시련을 더하여 원 죄 없으신 성모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꼭 승리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 다. 성모님 없이 생활하는 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느껴질 때마다 성모 님을 열렬히 사랑하십시오. 모든 수단이 무력하다는 것이 느껴질 때마다 성모님을 열렬히 사랑하십시오. 모든 수단이 무력하다는 것을 알고 절망적 인 시선을 느끼며 어떤 일도 부적당하다고 느껴질 때 원죄 없으신 성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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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이 오물통 같은 가엾은 나의 잔해를 집어 올려주셨습니다. 성모님은 어 떤 자리에도 설 수 없는 나를 잡으시어 신의 영광을 넓히기 위해서 사용 해 주셨습니다. 조잡스런 붓을 가지고 명화를 그리는 대 화가를 상상해 보 십시오. 성모님은 화가이시고 붓은 나 자신입니다;. 성모님은 우리를 들어 생명이란 그림을 그리십니다. ㆍ
0 우리는 모두 그 누군가의 붓이 되어 세상에 그 어떤 그림을 그리며 살아 가고 있는 건 아닐까? 인연이란 내가 그 사람에게로 다가가 그 무언가가 되어주는 일이다. 막시밀리안 꼴베 신부는 성모 마리아를 만나 그분의 붓 이 되어 수많은 생명을 살려냈으며, 히틀러는 그 어떤 전쟁의 광기를 만 나 수많은 생명을 죽이는 무기가 되었다.
우리는 지금 누군가의 붓인가, 아니면 무기인가? 우리는 지금 타인의 삶 에 아름다운 색채를 그려주고 있는가, 아니면 타인의 삶을 파괴하고 있는 가?
■ 적막도 받아 들여야 할 인연이다.
0 적막이란 가슴에 새 소리가 쌓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것도 안 들리는데 가슴에 새 소리가 쌓이다니ㆍㆍ, 처음에 나는 이 말이 뜻하는 바를 잘 해독하지 못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그 말의 질감이 선연 떠오를 때가 있다. 아마도 적막이라는 단어에 담긴 의미 가 사전적 정의보다는 체험적 정의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요즘 우리 집은 적막강산이다. 완전히 침묵 속의 수도원인 것이다. 나는 새삼 적막함을 느끼는 나이가 되었다는 사실이 슬프지만 때로는 이 적막 을 받아들이는 자신을 겸허하게 바라보는 데 시간을 쓰고 있다는 사실 또 한 소중히 여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일이 하나 있었다. 집에 잠시 놀러왔던 손자가 떠나가고 나서 우리 부부에게 찾아 온 적막이 그것 이다.
0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하지만 아니다. 어린아이의 울음소리는 우리를 기쁘게 한다. 어린아이의 칭얼거리는 소리는 생명의 소 리이며, 어린아이에게서 맡을 수 있는 그 향긋한 냄새는 천국에서 갓 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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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온 화원(花園)의 꽃향기다. 어린아이를 안을 때 느끼는 그 포근함은 우리를 창조한 하느님의 품을 연상케 하는 대리만족이며, 어린아이의 그 천진스런 눈망울과 표정은 분명히 존재하나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천 사들의 천상의 언어로 대화하는 천상의 표정인 것이다.
0 시중에 ‘손자가 올 때에는 반갑지만 막상 갈 때는 더더욱 반갑다’는 우스 갯말이 돌아다니듯 손주를 봐주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 것임을 실제로 겪 어 보니 알 정도였다. 솔직히 아내는 손자를 돌보느라고 허리가 휘고, 얼 굴에 주름살이 생길 정도로 피로가 쌓였다. 그래서 막상 간다고 하니 더더 욱 반갑기도 하련만은 아내는 오히려 찔끔찔끔 울고 다닌다.
0 스위스에서 태어난 프랑스계의 문학자이자 철학자였던 H.F. 아미엘은 병 약한 몸으로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는데, 그에 따른 고독을 위로하는 유일 한 수단으로 그는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 작업이 그의 생애의 대 사업 으로 발전되어 사후에 1만 7천 페이지에 달하는 ‘아미엘의 일기’가 출판되 자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세계문학사상 불후의 명작이 되 었는데, 아미엘은 비록 독신 생활로 한 명의 아이도 두지 못했으나 날카로 운 통찰력으로 자신의 일기에 ‘어린아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 다.
‘어린아이의 존재는 이 땅 위에서 가장 빛나는 혜택이다. 죄악에 물들지 않은 어린아이의 생명체는 한없이 고귀한 것이다. 우리는 어린아이들을 사 랑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린아이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행 복을 느낄 수 있다. 어린아이를 통해서만 우리는 이 지상에서 천국의 그림 자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생활은 고스란히 하늘나라에 속 한다.’
아미엘이 꿰뚫어 본 그대로 ‘어린아이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 지상에서 천 국의 그림자를 엿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린아이는 천국과 지상을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0 어쨌든 우리 집은 요즘 적막강산이다. 대 침묵 속의 수도원이다. 손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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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고 놀던 장난감 공과 곰 인형 하나가 거실에 굴러다니고 있는데, 그것을 때마다 손자의 모습이 눈에 밟힌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표현 과 ‘눈에 밟힌다’는 옛 선조들의 표현이 이렇게 날카로울 수 없음을 새삼 스럽게 느끼는 요즘이다.
■ 우리가 아는 것은 불완전하지만
0 바오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불완전하지만
완전한 것이 오면 불완전한 것은 사라집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때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를 완전하게 알 것입니다.
■사랑 노래에 사랑은 없다.
0 어느 날은 말짱한 정신으로 노래방 소파에 깊이 몸을 파묻은 채 곰곰이 사람들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이 있다. 그때 내 관심을 집중시켰던 건 평소에 자주 들어왔던 지인들의 노랫소리가 아니라, 그들이 부르는 노 래의 가사들이었다. 하나같이 모든 가사가 사랑 타령이었던 것이다.
백이면 백, 노래의 가사가 모조리 ‘사랑’을 담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말이 들어가지 않으면 노랫말이 될 수 없는 결격사유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좀 의아스런 점을 발견했다. 사랑을 노래하는 가사가
모두 이별과 헤어짐을 노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에서부터 ‘우리는 너무 쉽게 헤어졌’으며 ‘갈 테면 가라지 그까짓 거 미련 때문에’ ‘내 곁에 있어 줘’, ‘너마저 떠나면’ ‘비틀거릴 내가 안길 곳 은 어디에’, ‘아! 끝도 없는 사랑의 미로여’ 등등 모든 가사의 내용이 하나 같이 사람들이 만나서 사랑하고 헤어지는, 사랑의 이별을 노래하고 있는 게 아닌가. 사랑에 이별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라는 듯이. 거의 강요하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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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모든 노래 가사가 사랑의 아름다운 이별을 말하고 있었다.
0 그러나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헤어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헤어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해도 어떻게 하나같이 모든 노 래 가사에 나오는 사랑들이 이별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인가. 죽음이 두 사람을 가른다고 해도 영혼만은 떨어지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사랑 아닌가? 그러므로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별이란 단어는 없을 것이다.
사랑이란 끝도 시작도 없는 미로가 아니다. 사랑이란 단순하며 정직해서 미로는커녕 그 흔한 지름길도 없으며, 아주 멀리 돌아가야 하는 우회로도 없다. 사랑이란 ‘내’ 가 ‘너’에게로 가는 가장 단순하고 아름다운 길에 다 름 아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구불구불 꺾인 곡선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이르고 나면 그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직선으로 보 일 것이다.
사랑이 언제까지나 끝도 시작도 없는 미로라면 이는 사랑을 가장한 함정 에 불과한 것이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내 곁에 있어달라고 애원하 지 않아도 지겹도록 두 사람은 함께 있을 것이다. 고개를 들어요, 그리고 날 봐요, 라고 애원하지 않아도 사랑하는 이들은 언제나 서로의 얼굴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는다.
0 얼마 전 보았던 한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에게 이런 말을 하고 떠났다.
“나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떠나는 거예요.”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이 말을 부정한다. 진정 사랑한다면 서로 지지고 볶고 싸우더라도 일생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이 아무리 지리멸렬한 일상 속에서 남루해진다 할지라도 끝끝내 사랑하는 이 의 곁에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가장 소박하고 인간적인 사랑 이 아니겠는가.
0 숱한 사랑 노래의 가사들처럼, 우리에게 아름다운 사랑이 이별을 겪고 난 후에 슬픈 추억처럼 떠오르는 사랑뿐이라면 우리 인간들의 인연이란 얼마 나 하찮고 쓸쓸한 것인가. 세상의 모든 노래들이 사랑보다 사랑의 아픔을 더 아름답게 노래한다면 그건 더 이상 진실한 사랑 노래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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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정작 우리가 노래방에서 부르는 사랑 노래엔 사랑이 없다. 사랑 은 지금 당신 곁에서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의 얼굴 속에 있다. 그 사람의 환한 미소 속에 있다.
■ 겸손은 겸손이 없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말이다.
0 자연은 위대하다. 자연의 그 위대함은 있는 모습 그대로에서 나온다. 자연 은 인간과는 달리 아무것도 꾸미지 않는다. 있는 것을 없는 체 없는 것을 있는 체, 추한 것을 아름답게 치장하거나 위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 습으로 보여준다. 때가 되면 싹이 트고 때가 되면 잎이 자라고 때가 되면 꽃이 핀다. 굳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려고 없는 향기를 추하게 풍기지도 않고 색깔을 천박하게 바꾸지도 않는다. 자연은 겸손하게 자신의 모습을 수긍한다. 자연의 위대함은 그 소박한 겸손함에서 나온다.
0 겸손과 청빈의 대명사였던 성 프란체스코는 죽음에 임박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형제여, 하느님을 향한 나의 의지는 이제 겨우 시작일세.”
일생을 하느님을 위해 살고서도 죽음에 이르러 겨우 하느님을 향하게 되 었다고 말한 프란체스코. 그와 같은 겸손이 프란체스코를 세기의 성자로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진실한 겸손이 가장 위대한 생을 낳는다. 그러 나 과연 무엇이 겸손인가. 어떻게 해야 겸손해 질 수 있는 것인가?
나는 오늘 문득 가을에 들어 낙엽이 지는 나무 한 그루를 바라보다 겸손 에 대한 희미한 배움 한 가지를 얻었다. 어쩌면 겸손이란 자연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남보다 자기를 낮추는 것은 결코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위선이다. 남을 자기보다 못하다 고 여기면서 자신을 낮추어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것은 마치 한 표를 얻 기 위해서 허리를 굽실거리는 정치꾼과 같은 것이다. 남을 섬긴다는 것도 결코 겸손이 아니다. 우리에게 섬겨야 할 대상이 어디 있으며 우리가 섬김 을 받아야 할 만큼의 자격이 있는 것일까.
겸손이란 자연처럼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숨김없이 보여주는 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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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알면 아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자기 모습을 과장하거나 꾸미지 않고 미화시키거나 변명하지도 않는 모습을 나무처럼,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모습 이야말로 겸손이 아닐까.
‘아는 것을 안다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이 아는 것이다.’
공자가 말한 이 구절처럼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모습이야말로 겸손의 길 일 것이다.
0 겸손은 겸손이 없는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단어다. 우리 모두 낮은 자리로 돌아가 사랑이라는 작은 몸짓 하나를 배울 수 있다면 세상엔 겸손이란 단 어 또한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있는 그대로 우리 자신을 보 여주는 일이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유일한 길이 될 터이다.
■ 형제란 서로 닮아가는 정신의 노력이다.
0 “우리가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면 아무도 우리를 일으켜주지 않는다.”
오래전 형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중학교 2학년이었던 형은 내게는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존재였다. 형은 당시 어린 나이에도 가족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그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온갖 궂은일을 마 다하지 않았다. 형은 가난한 가장이었으며, 누구보다 다정한 친구이자, 또 때로는 무섭고 엄한 선생님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거리에서 형을 마주친 적이 있다. 어디로 가 고 있던 중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시 명문대에 들어간 형은 가 정교사로 일을 하며 가족의 생활비를 벌고 있었는데 나를 보자 손목을 잡 고 제과점으로 들어가 빵을 사주었다. 오랜만에 크림빵과 단팥빵을 먹느라 정신이 없던 내게 형은, 우리는 너무나 가난해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건 우리 자신의 노력밖에는 없다는 말을 했다. 우리가 스스로 일어서지 않으 면 아무도 우리를 일으켜주지 않을 것이라고. 형이 그날 제과점에서 해준 그 한마디가 내 인생을 지금까지 이끌어준 힘이었다고 나는 고백한다.
0 우리는 비록 아버지에게서 살아생전에 훈계와 엄격한 도덕을 배워나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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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못했지만 우리 스스로 새로운 가풍을 만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잠 재적인 유산으로 절대적인 절망상태와 절대적인 타락의 계기에서도 용케 도 그것을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었다. 그것은 오직 형이 보여준 모범과 형이 행동으로 보여주었던 영향 때문이라 나는 믿는다.
0 나는 무엇이든 형의 물건을 물려받아 썼다. 형과 나는 같은 고등학교 출신 이었으므로 형이 입던 교복은 으레 내 차지였으며 심지어 양말과 팬티까 지 물려받아 입었다. 동생도 같은 학교 출신이었지만 형이 입던 옷은 나를 거쳐 동생에게까지 이어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형에게서 일단 내게로 물려지면 이미 너무 낡아버려서 넝마로 변했기 때문이었다. 옷뿐만이 아니 라 나는 형으로부터 교과서, 영어사전, 책가방 등 거의 모든 것을 물려 받 아 썼다. 그리고 형으로부터 나는 치열한 인내와 과감하고 굽히지 않는 의 지를 물려받았다. 내가 형의 손때 탄 물건을 물려받는 동안, 형이 쓰던 참 고서에 묻어 있는 지문이 모르는 새 내 손바닥의 무늬 속으로 스며들어온 것처럼 은연중 나는 형이 쓰던 낡은 물건에 배어 있는 형의 뜨거운 정신 을 물려받았는지도 모른다.
0 오래전 내가 정식으로 작가로 등단하던 그 겨울 밤 형은 내 이름 석 자가 박힌 ‘조선일보’ 게시판 앞에서 혼자 소리를 치며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모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고 묻자 형은 게시판을 가리키며 내 동생의 사진이 났으니 같이 축하해 달라고 권 유했다는 것이다.
습작시절 내가 쓴 글은 모두 형이 부분 부분 고쳐주었으며 그 고쳐주는 작업에 의해 나는 문장을 배웠고 그리고 작가로 성장했다. 형은 내가 비로 소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을 아버지의 심정으로 기뻐했을 것이다. 길고 지 난했던 어린 시절의 가난을 벗어나 이제 사회에 첫발을 내 딛으려는 동생 의 몸부림이 형은 애처로우면서도 대견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0 형은 내게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형은 정말 아버지를 닮았다. 나 역시 아버지의 핏줄을 받았으니 아버지와 형을 동시에 닮았을 것이다. 우리가 서로 같은 피를 이어받고 태어났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서로를 닮아간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우리 몸속에 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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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는 피가 우리의 얼굴만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와 용기를, 험난한 생의 굴곡에서 몸을 다시 일으키는 우리의 도전과 용기를 서로의 정신과 정신 으로 연결해 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몸에서 흐르는 피가 우리의 정신 에서 같이 흐르고 있을 것이다. 형제란 서로 닮은 얼굴이 아니라, 서로 닮 아가는 정신의 노력이다.
■ ‘우선순위’라는 말의 진정성
0 우스개 이야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엄마와 아내와 자식이 동시에 물에 빠지면 누구부터 건져내겠느냐는 것이 질문인데, 서양 사람들은 제일 먼저 아내를 건져내고 두 번째로 자식을, 세 번째로 엄마를 구해 낸다는 것이 다. 아내가 있으면 자식은 얼마든지 새로 낳을 수 있다는 것이 서양의 가 치관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 동양에서는 엄마를 제일 먼저 구해내고 그 다 음엔 자식을,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내를 구해냄으로써 동양의 가치관인 효 를 가장 중요시 한다.
0 나는 고민 끝에 우선 내 아이들을 지웠다. 자식들이 물론 소중하지만 그들 에게는 그들 나름의 인생이 있으므로 내가 이래라저래라 할 대상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내일의 집에 사는 미래의 영혼들인 것이다.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부모인가, 아내인가. 내게 있어서 가장 고마 운사람 1순위는 과연 누구인가.
그때 문득 떠오르는 생각 하나는 1980년대 말 아내와 더불어 일본에 갔 을 때의 추억이었다. 그때 나는 ‘잃어버린 왕국’이라는 TV다큐멘터리 작업 을 진행하고 있었고 아내는 구경삼아 우리 취재팀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우리는 오사카의 번화가 뒷골목에 있는 허름한 호텔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촬영을 마치고 오니 아내는 방에 없고 탁자 위에 다음과 같은 메모지가 놓여 있었다.
‘백화점 구경하고 늦기 전에 돌아올게요.’
그러나 늦기 전에 돌아온다던 아내는 해질 무렵까지 오지 않았다. 나는 공연히 불안한 생각이 들어 호텔을 나와 큰 길을 오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아내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점 하나가 내 눈을 강하게 자석처럼 잡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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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기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 점을 바라보았다. 아내였다. 아내는 울긋불긋 한 네온 속에서 천천히 호텔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손에는 종이 백을 들고 있었고 오랜 백화점 구경에 지친 듯이 발을 질질 끌고 있었다. 나는 반가워서 뛰어가려 하다가 발을 멈추고 그냥 아내의 모습을 훔쳐보기로 하였다. 아내는 지쳐서 몇 발자국 걷다가는 거리의 쇼윈도 안을 들여다 보 고, 그리고 또다시 생각난 듯 걷고 있었다.
저 여인이 내 아내일까 하고 나는 순간적으로 생각했다. 저 여인은 도대 체 누구인가. 저 여인이 내 아내란 말인가. 그때 나는 김광섭 시인의 시를 떠 올렸다.
저렇게 많은 별들 중에 별 하나가 나를 내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너를 생각하면 문득 떠오르는 꽃 한 송이
나는 꽃잎에 숨어서 기다리리.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나비와 꽃송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의 이 아름다운 시처럼 저 어두운 거리에 서 있는 여인은 저 광대 한 우주, 무한의 공간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 중에서 내가 쳐다본 별 하나 인 것이다. 저 여인은 내가 쳐다보았으므로 밤하늘에 떠 있는 별에서 내게 로 다가와 내 아내가 되었다. 또한 저 여인을 바라보고 있는 나는 그 수많 은 사람들 중에서 그 별빛을 받아들인 단 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하여 아 내와 나는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가 되었고 언젠가는 나비와 꽃송이가 되어 다시 만날 절대적인 사람들인 것이다.
0 그날 나는 서슴지 않고 아내를 내게 있어 고마운 사람의 1순위로 결정했 다. 돌아가신 부모님에게는 죄송하지만 나를 만나기 위해서 억겁의 세월을 거쳐 온 아내와, 또한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 그 억겁의 세월을 거쳐 온 나. 김광섭의 시처럼 언젠가는 나비와 꽃송이 되어 다시 만날 아내는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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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1순위, 아니다 1순위도 부족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0순위로 결정한다고 해도 나는 후회하지 않을 것 같은 확신을 느꼈다. 십 수 년이 지난 이즈음에도 이 같은 순위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다.
■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
0 나는 원래 편지를 안 쓰는 편이 아니었는데 점점 나이가 들수록 편지 쓰 기를 못하고 있다. 편지 쓰기가 싫어지는 것이 아니라 뭐든 펜을 들어 원 고지를 메워 먹고 산지가 오래되어가는 탓인지 꼭 필요하지 않으면 펜을 들기가 몸서리치도록 싫어졌기 때문이었다.
마치 임신부가 먹을 것을 보면 입덧하듯 나는 원고지만 보면 입덧을 한 다. 늘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뱃속에 간직하고 있는 임신부처럼 나는 늘 누에고치에서 실을 뽑듯 글을 뽑아내고 있으니 원고지라면 신물이 난다.
그런데 어느 가을 적적한 시간, 낙엽 진 창가에 앉아서 물끄러미 뜨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문득문득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보낼 곳도 없고 받아 줄 사람도 없지만 홀로 떨어져 앉아 쿨룩쿨룩 기침을 하면서 편지를 쓰고 싶어졌다.
0 문득 아내가 느닷없이 내게 한 무더기의 편지를 꺼내 밀었다. 대충 보아도 수십 통이 넘는 많은 양의 편지였다. 모두 낡고 오래된 편지였다. 봉투는 누렇게 변색되어 있었으며 우표는 까마득히 먼 옛날의 소인이 찍혀 있었 다.
“이게 뭐야?”
나는 어리둥절해서 아내를 쳐다보았다.
“뭐긴 뭐예요 편지지지.”
“누가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데?”
“겉봉을 보면 알 게 아니에요.”
나는 봉투의 겉봉을 보았다.
그것은 내가 아내에게 보낸 편지였다. 말하자면 결혼하기 전 아내와 내가 연애할 때, 내가 아내에게 써 보냈던 편지였던 것이다. 물론 아내와 나는 사오 년이 넘도록 연애를 했다. 같은 대학 캠퍼스에서 만나 오 년이 넘도 록 연애를 하다가 결혼을 했으니 그동안 수많은 편지가 오갔을 것이다.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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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 나는 단지 문학청년이었고, 사랑하는 한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 하여 나는 마치 무슨 신춘문예의 작품에 응모하는 것보다도 더 열심히 진 지하게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서 편지를 썼을 것이다.
0 한 번 읽어보라고 아내가 넌지시 내게 명령했다.
“골치 아파, 관두라구.”
나는 좀 겸연쩍었으므로 이맛살을 찌푸리고 편지들을 밀쳐내었는데 아내 가 말했다.
“재미있어요. 읽어보라구요. 읽기 싫으면 이 편지 하나만이라도 읽어보세 요. 이게 무슨 편지인고 하니 당신이 내게 맨 처음으로 보낸 편지라구요.”
아내가 내민 편지는 산업은행 원고지에 쓴 것이었다. 당시 형님이 산업은 행에 근무하고 있었고, 나는 형님의 은행 원고지를 사용하고 있었다.
편지는 1966년 9월 4일의 것이었다. 그것이 내가 아내에게 쓴 연애편지 의 시초였다.
황정숙 씨
놀라셨으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어이없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아 침 8시부터 길거리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소낙비를 만나고 비를 제법 근 사한 포즈로 맞아가며 누가 봐주는 것도 아닌데 그럴듯한 걸음걸이로 걸 어가다가 문득 황정숙 씨가 생각나기에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물론 내가 새삼스레 편지를 쓰고 무어라고 두서없는 소리를 운운한다는 것은 곤란하고도 틀려먹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황정숙씨도 아시 다시피 우리는 우연이라면 너무하다 할 정도로 2년 6개월 동안 학교에서 보았으며, 뒷동산에서도 얘기를 나누었으며, 거리에서 만나면 눈웃음도 나 누는, 언젠가는 다방에서 쓴 커피 한 잔에 수상(?)한 얘기까지 나눈, 친구 라면 약간 무리고, 애인이라면 터무니없을 정도로 낯간지러운(정숙씨 입장 에서 볼 때) 사이인 것입니다.
이런 제가 이번 10월 4일 낮, 자랑스런 군 입대를 앞둔 애국적인 거사에 앞서, 그동안 제가 공연히 불만스런 봄닭처럼 괴롭힌 전과에 대해 사과도 할 겸 황정숙 씨에게 인사도 드릴 겸 한번 뵈었으면 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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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편지를 읽어가다 말고 나는 그만 낯이 간질간질하고 쑥스러워서 그만 헷 헤헤헤헤헤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뭐가 우스워요?”
아내가 정색을 하고 물었다.
“이 편지가 내가 당신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였나?”
“그래요.”
“그래서 당신이 이 편지에 반했단 말이지.”
“당신이 쓴 편지처럼 재미있는 편지는 없었다우.”
“헷헤헤. 이봐 이건 순 공갈이야.”
“다시 읽어보슈. 재미있을 테니까.”
아내는 마저 편지를 읽으라고 내게 눈짓을 했다. 그러난 나는 그 편지를 차곡차곡 밀어두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잘 간직해 둬. 이다음에 읽을 테니까.”
■ 내 생애 단 한 번뿐인 결혼이라는 기적
0 세상에 낯선 두 남녀가 만나 서로를 사랑하는 일은 기적이다. 겨울에는 눈 내리는 일처럼. 저녁이 찾아오면 빛이 잠드는 일처럼 두 남녀가 서로를 사 랑하는 일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오래된 가구의 모서리에서 죽은 나무의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리는 일처럼, 우리가 기대할 수 없는 슬픔의 벼랑에서 어느 날 문득 구원받는 일처럼 내가 누 군가를 사랑하게 되고 또 누군가로부터 동시에 사랑받게 되는 일은 참으 로 신이 허락한 기적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이토록 넓은 세상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 중에 나는 당신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또한 나를 사랑한다. 사랑하는 남녀의 인연이란 그래서 눈부시게 두렵고 아름다운 기적이다.
0 내가 결혼을 한 건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을 해서 학교를 다시 다니던 무 렵이었다. 당시 나는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에 빠져 있던 3학년이 었고, 교수를 찾아다니며 학점이나 구걸하던 가난한 대학생이었다. 누군가 의 남편이 되기에는, 그리고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기에는 경제적으로나 정 신적으로 아무것도 준비된 것이 없던 때였다.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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란 주머니에 든 몇 푼의 술값과 어머니 집에서 다른 형제들과 쪼그려 자 던 단칸방의 작은 구석과 먼지 쌓인 책 몇 권, 러닝셔츠 두 벌과 무명 팬 티 세벌, 그리고 형이 물려준 낡고 초라한 신사복 한 벌이 전부였다. 그러니 무슨 결혼을 한단 말인가? 하지만 당시 아내는 극구 결혼을 주장 했고 나는 덜컥 승낙을 하고 말았다.
0 내가 그토록 막막했던 상황에서도, 현재의 아내를 놓치지 않고 결혼을 했 던 것은 나의 아내가 남달리 예쁘다거나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몸매 를 가지고 있다거나 하다못해 지참금이 두둑해서 어쩌면 처가 덕이나 좀 볼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당시 나는 이 넓은 세상에서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가 나를 동시에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적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이 소박한 기적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일이 내가 내 삶을 사랑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솔직히 매도 먼저 맞는 편이 낫다고 어차피 결혼할 것이라면 지금 해버린다고 해서 나 쁠 것은 없지 않은가.
어쨌든 식구들에게 알려야 했으므로 어느 날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여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나는 지나가는 말로 은근 슬쩍 결혼 얘기를 꺼냈다. 마치 저녁을 먹으며 오늘은 국물이 좀 싱겁네. 라고 무심결에 말하는 것처 럼. 그러나 그 흘리듯 먼진 말을 식구들의 귀는 놓치지 않았다. 어머니부 터 시작해서 큰형과 막내 동생까지 귀를 레이더처럼 쫑긋 세우고 일제히 내 얼굴을 돌아보았다.
“너, 미쳤냐?”
어머니가 틀니를 오물대면서 하신 첫 말씀이었다.
“너 돌았니?”
이건 엇비슷한 형을 말씀.
“형, 어디 불편한 것 아니오?”
이건 되바라진 동생의 한 말씀.
“아닙니다.”
갑자기 쏟아진 사람들의 관심에 당황해서 엉겁결에 대답한 나는 밥을 마 구 퍼먹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한편으로 식구들의 황당하다는 표정이 아니꼬워서 짐짓 당당한 목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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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치지 않았소. 멀쩡하오.”
“상대는 누구냐?”
어머니가 미친 소리이긴 하지만 자식 입에서 아닌 밤중에 홍두깨 격으로 나온 말이지만 물었다.
“그건 그렇고 니 색싯감얼굴이라도 봐야 할 게 아니냐?”
마침내 어머니께서 살짝 양보를 하듯 말씀하셨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세 라 잽싸게 대답했다.
“좋습니다. 내일 데리고 오겠습니다.”
다음날 나는 애인에게 조만간 식구들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자고 말했다.
약속된 날이 되자 그녀는 미장원에 간다 어쩐다 수선을 떨기 시작하더니 어머니가 좋아하는 중국과자까지 사 들고 최씨 집안의 문턱을 넘어섰다.
“자! 인사드려. 어머니 며느리 왔습니다. 둘째 며느리 왔어요.”
나는 기세 좋게 소리를 빽빽 지르며 안으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그녀가 제법 공손하게 고등학교 가정시간에 배운 대로 인사를 드리자 방 안에 심상찮은 공기가 마구 술렁이기 시작했다. 막상 어머니도 당황했는지 시집간 누이에게 전화를 건다. 음식을 마련한다 어쩌는 둥 소란을 떠셨다. 형과 동생과 형수는 동물원의 원숭이 보는 식으로 아내에게 다가와 꼼꼼 한 시선으로 다양한 각도에서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0 그녀가 다녀간 후. 어머니는 점잖고 인자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그 애가 너 같은 바보를 어떻게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더라. 니가 돈 이 있냐? 철없는 불한당 같은 녀석을.”
나는 쑥스러운 마음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정말 살 자신 있냐?”
어머니는 진지한 목소리로 물으셨다. 나는 짐짓 이를 악물고 진지하게 대 답했다.
“예, 잘 살 자신이 있습니다.”
“그래, 사실 나도 그 에가 마음에 들었단다. 여간 마음에 든 게 아니었 어.”
“아니, 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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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같이 나는 어머니의 말에 비죽 눈물이 나올 뻔했다. 나는 떨리는 목 소리로, 그러나 힘껏 어머니의 다리를 주무르며 대답했다.
“예, 정말 잘 살아보겠습니다.”
나의 손바닥에 어머니의 여리고 가는 핏줄이 느껴졌다. 아마도 나는 저 핏줄로부터 태어났으리라. 그리고 어머니의 핏줄은 할머니로부터, 또 할머 니는 증조할머니로부터, 거듭거듭 올라가 나는 그 어떤 핏줄의 시원으로부 터 전해진 생명이었으리라. 그리고 내가 아내와 결혼하면 내 핏줄로부터 또 다른 생명이 먼 미래로부터 흘러갈 것이다. 이것이 기적이 아니라면 다 른 무엇이 기적이랴. 이토록 넓은 세상에, 이토록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리 두 사람이 만나 이루는 소박한 기적, 그건 사랑이 생명을 낳고 긴 핏 줄 속에서 이어져가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강물이다. 우리 몸속의 핏줄은 먼 과거로부터 다시 먼 미래로 흘러가는 강의 섬세한 지류 들일 것이다. 수많은 세상 사람들 중에 서로가 서로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두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한 가족을 이루는 일, 결혼이란 세상이 우리에게 허락한 아슬아슬한 선물이다. 우리가 지금 만나 한 핏줄이 되어 살아가고 있다는 일은.
■ 가난한 우리들의 유년, 신혼기
0 우리는 싸구려 예식장에서 결혼했다. 결혼 예물부터 피로연 음식, 신랑과 신부의 예복까지 모두가 싸구려였다. 생에서 신혼기란, 사랑하는 두 남녀 의 어린 시절이다. 두 사람이 만나 한 몸이 되고, 또 다른 사람이 되어 보 내는 유년기다. 아내와 나. 우리 둘의 유년은 가난하고 소박하며 즐거웠다. 우리는 철없는 젊은 부부였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생에 감사했다. 우리에게 주어진 작은 전세방에 감사했고, 하루하루 굶지 않고 밥을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무엇보다 둘이 한 이불에서 잠을 잘 수 있다는 사실에 감 사했다.
0 우리의 전세방은 십오만 원이었다. 당시 십오만 원이면 적은 돈이 아니었 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전세방은 그리 많지 않았다. 우리는 간신히 목욕탕 위층에 자리한 요상한 전셋집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방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요지경 세상을 압축해 놓은 듯한 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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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같은 방이었다.
사방 벽으로부터 들려오는 서라운드 입체소음은 파리가 날아다니는 미세 한 소음까지 들릴 정도였고 방 아래층은 여탕인 까닭에 하루 종일 축축한 물기와 오만가지 잡다한 소리가 끊이지 않고 바닥으로부터 스멀스멀 올라 오는 것이었다.
물 끼얹는 소리, 엄마 찾는 아기 울음소리, 더운물 더 달라는 할머니 소 리, 아줌마들의 한담소리, 빨래하는 소리, 소리, 소리….
그야말로 목욕탕위에 난데없이 들어 선 외양간 같은, 세상에 둘도 없 는 공중에 뜬 높고 가난하고 쓸쓸한 방에서 우리들 생의 유년기는 시작 되었다.
거기서 우리는 1970년 12월부터 1972년 봄까지 살았다.
한 번은 목욕탕 옥상의 물탱크가 터져 난데없는 물난리를 겪기도 했지만 우리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 물난리로 우리의 신혼 방이 온통 물에 젖어 그나마 몇 가지 안 되는 살림살이와 책들이 둥둥 물에 떠다니던 날 이상 하게도 그때부터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는 서로의 얼굴을 바 라보며 밖으로 나왔다.
봄비가 여리게 공기 속을 떠다니고 있었다. 빗소리는 마치 누군가 한밤중 에 소리죽여 연습하는 피아노 소리처럼 들렸다. 누군가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 축축한 피아노의 건반을 눌러 연주하는, 우리 신혼의 가난하고 소 박한 멜로디가 들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삶의 지리멸렬한 구렁텅이 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우리가 서로의 체온에 몸을 묻고 함께 걸어갈 수 있다면 누군가 우리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때 로는 빗소리에 섞여, 그리고 때로는 바람소리에도 실려 그 누군가가 우리 를 위로하기 위해 연주하는 피아노 소곡은 들려올 것이다.
나는 아내의 손목을 잡고 약수터를 향해 걸어갔다. 우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울지도 않았다. 다만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우리는 빗속 데이트를 즐겼다. 아내 손목에 떠 있는 한 점 여린 열기가 내 손바닥의 손금들 속으 로 흘러 들어와 작은 반딧불처럼 오래 몸속을 떠돌았다.
생각해보면 우리 신혼은 지지리 궁상맞고 고달팠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웠 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경험들 때문이 아니라, 돈을 주고도 살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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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서로를 향한 사랑과 믿음 때문에, 낭만이라고 하기엔 초라하고, 초라하 다고 하기엔 너무 눈부시고 쓸쓸해서 아름다웠던 우리들의 신혼을, 나는 내가 당신과 함께 보낸 유년기라 부르고 싶다.
■ 나는 아름다운 팔불출
0 젊은 시절엔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마누라 자랑, 자식자랑 그만하고 다니라는. 생각해보니 내 젊은 시절에 참으로 마누라 자랑, 자식 자랑을 많이 하고 다녔던 것 같다. 작고한 문학 평론가 김현은 술자리에서 종종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특유의 프랑캔슈타인 웃음을 지으면서.
“야, 폼 잡지 마라. 은근히 마누라 자랑, 아이 자랑, 행복해서 죽겠다는 폼 잡지 마라.”
행복해서 죽겠다는 폼을 많이 잡으면서 사는 동안 반대로 아내에게서 “당신은 위선자예요. 당신이 쓴 글을 보면 천하에 애처가인줄 사람들은 알겠지만 교묘히 자기선전이나 하고 있으니. 엉터리, 사기꾼, 위선자 ……” 등등, 아내는 바가지를 긁을 때면 그렇게 토라진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0 오래전 한 화장품 잡지에서 화보 촬영을 하는데 우리 가족을 찍은 적이 있었다. 그때 화보의 제목이 아마도 행복한 부부상이었던 것으로 기억된 다. 그날 우리 부부는 마구마구 행복해서 죽겠다는 표정을 연출하고 집으 로 돌아와 3차 세계대전을 벌였다. 한바탕 집안이 떠나가라 부부싸움을 했 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참으로 위선자. 따뜻한 가족애를 짐짓 선전 하고 다니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은 위선자인가? 하지만 내게도 변명의 여지는 있으니 세상에 부부싸움 안 하는 부부란 없고, 세상에 위기와 불화 가 없는 가정이란 없을 것이다. 내가 아내, 자식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겪 은 숱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밖에 나가면 아내 자랑 자식 자랑을 늘어놓는 것은, 세상에 정말 나를 걱정하고 나의 편을 들어주고 싸워줄 사람들은 아 마 가족밖에 없다는 것을, 또 내게 영원한 우군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나의 가족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0 가족은 하나의 나라와 같다. 누군가 가족에게 불만이 있다고 밖에 나가서 그 불만을 미주알고주일 털어놓는다면 그건 나라의 기밀을 다른 나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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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누설하는 것과도 같다고 생각한다. 가족의 문제는 가족 안에서 서로 이해와 사랑으로 끝끝내 극복해야 할 문제가 아닌가.
이혼 반보 직전의 위기를 겪으면서도 밖에서는 아내 험담을 늘어놓지 않 는 것이 위선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그건 도리어 이혼 반보 직전의 위기 를 극복하는 슬기로운 지혜일지도 모른다.
0 나는 어찌 보면 심각한 팔불출이다. 어디를 가든, 무슨 글을 쓰든, 아내 자랑, 자식 자랑을 늘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족 사랑에 팔불출이 란 없다. 가족은 나의 영원한 동지이자 우군이자 나의 어깨뼈이며, 나의 척추와 내 머리에서 자라나는 검은 머리카락이자 나의 눈동자, 내 몸을 이 루는 그 모든 기관이기 때문이다. 한 쪽 다리가 때로 아프다고 그 다리를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 몸이 살아가다 보면 아플 때도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함께 살아가다 보면 서로를 마음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할 때도 있 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우리 가족 자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름다운 팔불출이 될 것이다.
■ 우리는 어디로부터 왔는가?
0 오래전 봄날, 정원에 앉아 있다가 장미나무 그늘 아래에서 무엇인가 팔짝 팔짝 뛰어 깜짝 놀라 살펴보니 아주 작은 청개구리 한 마리였다. 이 도시 의 정원에 청개구리 새끼라니. 깜짝 놀라서 눈을 비비고 개구리를 다시 보 니 벌써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어 내가 잘못 보았던가 까마득히 잊어버리 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초여름 잔디를 깎다가 뭔가 팔짝팔짝 뛰면서 영산홍 나뭇가 지 사이로 숨어버리는 물건이 있어 재빨리 뛰어 달려가 바라보니 어린아 이 주먹만 한 개구리 한 마리였다. 개구리는 그늘진 나무숲 사이에 가만히 앉아 있었으므로 나는 비로소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지난봄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던 그 청개구리가 자라서 어른 개구리가 되 었는가. 살펴보았더니 청개구리는 아니고 그냥 평범한 흑갈색 개구리였다. 도대체 이 개구리 한 마리가 어디서 찾아왔는가. 나는 신기해서 한참을 쳐 다 보았다. 우리 정원 잔디밭에 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다는 소문은 여 기 저기 퍼져서 아내가 어느 날 내게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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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정원에 개구리가 있어요, 여보.”
아들 녀석도 어느 날 잔디밭에 나갔다가 맨발로 뛰어와서 소리쳐 말했다.
“개구리다, 개구리! 우리 집에 개구리 한 마리가 살고 있다!”
맨발로 뛰어 오는 아들 녀석의 기쁜 표정은 마치 우리 집 정원에서 유전 이 발견되었다는 기쁨보다 훨씬 강렬한 것이었다.
아들의 표현대로 우리 집 마당에 개구리 한 마리가 숨어 살고 있었다. 그 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이 도시의 한 복판 정원 속에서 어떻게 잉태되 고 어떻게 태어났을까.
0 정원에서 살고 있는 것은 개구리뿐만이 아니다. 한 낮에 잔디밭을 걸어가 면 이따금 풀 사이에서 날개를 접고 잠자던 나방들이 놀라서 푸드득 날아 오르곤 하는데, 이 나방들을 먹기 위해서 하루에도 수백 마리가 넘는 참새 들이 날아오곤 했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으레 새벽이면 떼 지어 지저귀는 참새 떼의 울음소리에 눈을 뜨곤 했다.
0 이 황량한 도시의 어느 곳에서 저렇게 많은 새들이 알로 태어나고, 부화하 고, 새끼가 되어 자라나, 저렇게 날아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사이좋게 먹이 를 나눠먹고 있음일까. 아침마다 날아오는 새들이 고마워서 나는 일간 나 무로 만든 새집을 하나 사다가 나뭇가지 위에 걸어줄 생각을 했다.
0 1384년에 태어나 1481년에 죽은 일본의 선승 이뀨는 일본 왕실의 피를 받은 왕자였지만 왕비의 질투로 궁에서 물러나 20세에 승려가 되었다. 26 세에 까마귀 울음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던 그는 평생 일본 최고의 선 시(禪詩)들을 150여 편 남겼는데 그의 시 중에 다음과 같은 절창이 있다.
벚나무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그 속엔 벚꽃이 없네.
그러나 보라, 봄이 되면
얼마나 많은 벚꽃이 피는가.
0 이뀨의 시처럼 감나무의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감은 보이지 않고 대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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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 가지를 부러뜨려 봐도 대추는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제 가을이 오면 감나무에는 감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대추나무에는 대추 가 주저리주저리 열릴 것이다.
그들을 위해 내가 따로 할 일은 없다. 그저 내버려 두면 그 뿐인 것이다. 태양은 제가 알아서 알맞게 온도를 재어 열매를 숙성시킬 것이며, 때맞춰 내리는 빗물은 저희들끼리 알아서 그들의 갈증을 채워주고 메마른 나무의 뿌리를 적셔줄 것이다.
모과나무에서는 노오란 모과들이 알알이 열매를 맺어 향기를 피울 것이 고 나무 그늘 속에 숨어 살던 개구리가 만약 우리 집 식구들의 희망사항 처럼 죽지 않고 그때까지 살아 있다면 아마도 우리 집 땅속을 파고 들어 가 그 속에서 기나긴 겨울잠을 잘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흙 한 줌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니 아아, 흙이란 얼마나 신비 한 것인가. 이뀨의 시처럼, 그대 나아가 뜨락의 흙 한줌을 떠서 가만히 들 여다 보라. 그 흙 한줌 속에서 나무가 자라고, 꽃이 피어나고, 풀이 우거지 고, 개구리가 태어난다.
그 흙 한줌 속에서 감이 열리고, 대추가 매달린다. 우리의 육체도 그 흙 한줌에서 비롯되어 태어난 것이니, 아아, 우리는 누구인가. 그리고 어디로 부터 와서 어디로 가고 있음인가.
■ 사랑은 모든 병을 이기는 힘이 아니라, 어떤 병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위안이다.
0 현대의 성자라고 불리는 다미안 신부는 벨기에 사람으로 스물네 살의 젊 은 나이에 하와이에서 신부로 서품되었던 성직자이다.
그는 하와이 정부가 몰로카이라는 섬에 나환자를 위한 정착촌을 세우자 서른세 살의 나이에 자원하여 들어가 12년 동안 나환자들을 돌보다가 자 신도 마흔다섯 살의 나이에 문둥병 환자가 되어버린다. 그리하여 4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가 문둥이들 속에서 문둥병 환자로 죽었으므로 ‘문둥이 성 자’로까지 불리고 있다.
문둥병은 손톱이 빠지고 코가 뭉개지며 턱살이 흘러내리는 등 사람이
점점 사람의 형상을 잃어가며 죽는 병이다. 어릴 적 우리는 문둥병에 걸린
사람들을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물로 알았으며, 그들이 어린아이의 심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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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산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두려워했다. 하지만 다미안 신부는 스스로
그들의 세계로 들어가 그들과 똑 같은 병을 앓다가 죽었다. 자신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 그들이 앓고 있는 치명적인 병마저 받
아 들였던 다미안 신부.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아름다운 문둥병
하나 앓고 있었던 건 아닐까. 사랑하는 일은 서로 닮아가는 것이다. 그것
이 치명적인 나병이라 할지라도.
0 진정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
리가 모두 같은 병을 앓게 된다면 세상에 정녕 무섭고 혐오스런 병이란
없을 것이다. 사랑은 모든 병을 이기는 힘이 아니라, 어떤 병도 두려워하
지 않게 되는 위안이다.
■ 직업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0 나는 직업을 가진 모든 사람들이 훌륭하고 거룩하다고 생각한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이 세상의 모든 직업에는 절대로 귀천이 없다.
직업은 그 사람의 생계 수단이고 방법일 뿐, 그 인간의 가치를 재는 척도
는 아니다. 자기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고 거룩하다.
그 많은 직업 중에서 나는 특히 두 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을 더 존경한
다. 그 하나는 아들을 교육시키는 선생님이고, 또 하나는 종교의 사제직
을 맡고 있는 성직자들이다. 교직자들 중에서도 우열이 있어서는 안 되겠
지만 나는 대학 교수들보다 고등학교 선생님들을, 고등학교 선생님보다는
초등학교 선생님들을 더 존경하고 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사람을 씨앗에 비교한다면, 인간의 대지 속에 밭을 갈아 씨앗을 뿌리고 파
종하는 가장 원초적인 작업을 하는 농부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대학교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인성을 가르쳐주느니보다는 다 큰 나무에
비료를 주듯, 지식을 보다 풍부하게 해 주는 정원사라면, 초등학교 선생
님들은 대지 속에서 돌을 고르고, 밭을 갈고, 잡초를 뽑아내듯 아직 발아
되지 않은 인간에게 인성을 가르쳐 주는 농부이기 때문이다.
0 또한 나는 스님이나 목사님, 신부님 같은 사제들을 존경한다. 그들이 오염
되었다, 타락했다 하고 비판을 하지만 나는 그들이 우리의 영혼을 대신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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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우리의 죄를 함께 빌어 용서를 바라는 그 모습에
늘 감사해 하고 고마워하고 있다.
우리가 간혹 어떤 목사님들더러 타락했다 하는 것은 그들에게서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와 다름없는 탐욕과 이기심과 욕망을 가졌음을 발견해내려
는 교묘한 복수심 때문일 것이다. 스님이나 목사님이 어째서 우리와 다른
사람일 것인가. 나는 그들도 우리와 다름없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다. 그
들은 우리와 다른 별종의 인간이 아니라 우리와 마찬가지로 갖고 싶고, 이
기고 싶고 유명해지고 싶기도 하고 편해지고 싶기도 하고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다만 우리와 다른 것은 그분들은 선택 받았으
므로 끊임없이 그러한 인간적인 약점과 모순을 스스로 아파하고 번민하고
괴로워하고, 어떻게 해서든 베어내고 고치려고 노력하고 끊임없이 깨어 있
는 자각으로 스스로를 무장하고 학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돼지처럼 먹고 마시고 쾌락에 신음하고 있을 때 그들은 자신의
조그만 거짓말, 조그만 욕망을 부끄러워하고 슬퍼하고 미안해하고 고통스
러워하고 창피해하는 환자들인 것이다. 나는 그래서 사제들이 좋다. 술을
고래처럼 마시는 신부님들도 좋고, 고기를 먹는 스님들도 나보다는 훨씬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건 직업은 최선을 다하는 자의 몫
이고 수많은 이름으로 불리는 직업은 모두 고귀한 것이다.
■ 눈 내린 하얀 백지와의 인연
0 글을 써서 밥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등단의 추억이 있다. 난 그걸
눈 내린 백지와의 인연이라고 부르고 싶다. 등단이란 건 아름답지만 막막
한 백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계단과도 같다. 이제 겨우 한 계단을 오르면
눈앞에 펼쳐져 있는 건 어떤 성취나 만족감이 아니라 그저 끝없이 펼쳐져
있는 눈 덮인 하얀 들판을 보는 막막함뿐이다. 이제부터 내가 상상력의 힘
으로 무성한 언어의 나무를 부지런히 심어가야 할 들판. 앞으로 내 작품들
로 빼곡히 이뤄나가야 할 백지의 숲, 나는 1967년 군대 시절 처음으로 그
백지의 숲을 보았다.
0 내 작품이 처음으로 신문에 실린 건 사실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다.
아마 1958년 1월쯤의 일일 것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문화란에 ‘어린이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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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라 하여 초등학교 학생들의 동시나 동요 같은 것을 실어 주는 작문교실
이 있었다. 뽑힌 동요가 실리면 그 뒤에 짤막한 담당기자의 작품 평까지
실렸는데 당시 초등학교 다니는 꼬마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고정란이었다.
그 무렵 내 짝으로 아버지가 동아일보에 다니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아이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자기 아버지가 바로 그 작문교실을 담당하
고 있으니 내가 동요 하나 지어 자기에게 주면 아버지에게 보여서 신문에
실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수업시간에 다음과 같은 동요를 지
었다.
화 롯 가
오순도순 화롯가에 손이 모였네.
우락부락 험상궂은 우리 형님 손
매끈하고 백설 같은 우리 누나 손
장난쟁이 동생 손은 까만 손이요
올망졸망 화롯가에 손이 모였네.
놀다말고 한몫 끼운 동생 손이랑
험상궂고 보기 싫은 손님 손까지
모두모두 모여 있네 옹기 화롯가.
완성된 동요를 그 친구에게 넘겨주고 나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뒤 바로 그 ‘어린이 차지’에 내 동요가 실린 것이다. 아마도
동아일보 축쇄판을 뒤지면 6학년 3반 최인호라고 내 이름이 분명히 명기
된 동요가 신문에 실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동시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발표한 문학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0 서울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3년 한국일보에 ‘벽구멍으로’ 란 단편소설이
입선되었을 때도 나를 정식 작가로 인정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심사위원은 황순원 선생님과 안수길 선생님이었는데 두 분은 ‘신선한
문장이 돋보인다.’라는 심사평을 해 주었지만 막상 시상식에 고등학교 2학
년생이 나타나자 ‘속았구나’ 하는 표정들이었다.
상금은 당선작이 1만 원이었고 가작은 3,300원이었다. 그때 한국일보 문
화부엔 손기상씨가 문학 담당으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더니 한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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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담배만 푹푹 피워댔다.
0 1966년 입대하기 전 응모한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되었
다. 그해 12월 24일 밤이었다. 우리는 눈이 내리는 연병장에서 벌거벗고
기합을 받고 있었다. 알 철모를 쓰고 기합을 받고 있었는데 싸락눈이 내
등에 송곳처럼 내리 꽂히고 있었다. 멀리서 밤 열차가 역마처럼 울며 달리
고 있었다.
돌연 부대장이 연단에 서더니 “오늘의 기합은 이만 중지! 그 이유는 훈련
병중에 한 사람이 고등고시(?)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라는 해괴망측한 소
리를 했다. 처음에 고등고시라고 해서 내 얘기를 하는 것인 줄 몰랐다. 부
대장이 이름을 호명하고서야 난 내가 드디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는 걸
알았다. 벗은 등에 내리는 함박눈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벌거벗은 채 부대장에게 이끌려 디젤 기름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장교 숙소에서 한 장의 전보를 받았다.
‘당선 축하 조선일보’
0 그날 밤 나는 동기가 준 담배 한 개비를 들고 캄캄한 밤의 연병장으로 나
갔다. 연병장에 온통 눈이 내려 쌓여 있었다. 눈의 신성한 꽃밭, 발자국 하
나 찍혀 있지 않은 순백의 처녀림이었다. 그것은 내가 써야 할 원고지의
무수한 공백들처럼 보였다. 그것은 내가 앞으로 수없이 메워야 할 백지처
럼 보였다. 아마도 나는 저 백지의 숲이 두려워 눈물을 흘렸던 건 아닐까?
나는 담배를 피워 물며 눈을 부릅뜨고 눈부신 백야의 연병장을 노려보았
다. 내가 홀로 걸어가야 할 눈 내린 들판을, 내가 쓰지 않으면 아무도 대
신 써주지 않을 텅 빈 백지의 숲을.
■ 아름답게 남겨지는 언어, 유언
0 나는 아버지의 유서를 당신이 돌아가시고 난 지 근 25년 만에 받아 보았
다. 아버지는 1955년 3월 19일에 돌아가셨다. 당시 나는 열 살이었고 유
서가 뭔지도 모르던 나이였다. 아버지가 그 유서를 쓴 건 돌아가시기 1년
전, 그러니깐 단기 4287년 4월 19일 날짜로 쓰인 유서였다.
내가 아버지의 유서를 받아 보았던 무렵 나는 골치 아픈 소송 사건에 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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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려 하루하루 진을 빼는 법정 싸움에 지처가고 있었다. 만약 패소를 하게
되면 하루아침에 알거지로 거리에 나앉을 판이었으니 그야말로 내 인생의
큰 위기를 맞았던 때였다. 법정에 출두하기 위해 햇살이 쏟아지는 거리를
걷다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곤 했다.
0 어느 날 어머니께서 나를 자리에 부르시고 누런 갱지 봉투를 내미셨다. 그
러곤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유서다.”
아버지의 유서. 난데없이 25년 만에 받아보는 아버지의 유서. 어머니의
말씀은 참으로 섬뜩했다.
“돌아가신 지 5년 뒤에야 발견되었다. 그걸 내가 이제껏 간직하고 있었
어. 한 번 읽어보렴.”
나는 떨리는 손으로 봉투 속에서 갱지를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혈압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아신 아버님은 가족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홀로 작성해 두신 것 같았다. 변호사이셨던 아버지는 자신이 돌아가
시고 난 뒤 남아 있는 우리들의 장래가 걱정스러우셨던지, 조목조목 돌아
가신 후에라도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자신이 맡았던 사건에 대해 설명해
두고 계셨다.
………
三 . 대동제염 관계 사건
주식의 할당은 아직 불분명이나 연 이십만 원 정도의 수입은 있을 것임.
이것으로 어린것들의 학비, 생활비는 대부분 나올 것임.
………
유서 중에 유독 내 눈길을 끌었던 구절은 그 구절뿐이었다. 자신의 죽음
을 앞두고 어린것들의 장래를 걱정하던 변호사로서의 아버지의 초췌한 모
습이 머리에 떠올랐다. 법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도대체 그들의 아들들에
게 물려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는가.
0 꼭 유서 때문만은 아니었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작은 누이 대학
들어갈 때, 난 비가 엄청 오는 날 니 형의 손을 잡고 대동제염의 허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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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만나러 갔었단다.
어머니는 울먹이며 내게 말하셨다.
“차마 하기 어려운 말을 하기 위해서였지 ……. 등록금 좀 보태 달라고
갔었지. 그랬더니 비에 젖은 너와 니 형을 보더니 그 사람은 이렇게 말하
더구나.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요. 우리가 도와줄 만한 이유는 하나도 없
습니다.“
0 벌써 20년도 훨씬 전의 일이다. 아버지의 유서는 아무런 효용 가치가 없
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우리에게 남긴 유산이란 휴지조각과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참으로 위
대한 유언을 남기시고 떠나셨다. 그건 그 유언에 적힌 대로 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이 세상에 남겨진 가족들에게 물려줄 것이 단 하
나라도 있다면 전해 주고 가고 싶은 아버지의 절절한 사랑이 바로 그 유
언에 적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인생에 처음으로 겪어보는 법정 분쟁에 시달리던 무렵 아버지의
유언장을 받았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로 25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누런
갱지에 적힌 아버지의 유언이 내게로 전해져 온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이
25년이란 세월에도 전혀 퇴색되지 않고 그대로 내 가슴으로 전해져 지금
도 여전히 그 유언은 가슴 속에서 뛰고 있다.
나는 자식들에게 어떤 유언을 남겨야 할 것인가. 그건 무슨 무슨 돈을 어
떻게 나누어 준다는 사실 이전에 내가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
를 전해줘야 하는 일이 될 것이다. 오랜 세월 그들의 가슴에서 잊히지 않
을 아름다운 언어로 남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유언의 진정한 의미다.
■ 열매가 있는 꽃
0 꽃들은 모두 마법에 걸린 입술들이다. 꽃들은 잎을 오므려 바람결에 언어
를 실어 날려 보내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 꽃의 마
법을 풀기 위해선 우린 김춘수의 시 ‘꽃’처럼 그들의 이름을 가만히 불러
주어야 한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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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는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의미가 되고 싶다.
꽃의 이름을 부르는 일은, 길가에 피는 소박한 꽃들처럼 길 위의 행인이
되어 꽃들을 찾아 떠나거나, 혹은 꽃들이 핀 정원에 쪼그려 앉아 바람에
잎을 나부끼는 한 마리 꽃송이가 되는 일이다. 꽃을 사랑하기 위해 우리도
꽃이 되어가는 동안 꽃은 마술에 걸린 자신의 봉인을 스스로 깨고 우리에
게 말을 걸어 올 것이다.
0 매번 새삼 느끼지만 아내는 꽃의 언어를 들을 수 있는 사람이다. 언젠가
전라남도를 여행하다가 완도의 한 콩밭에서 아내는 넋을 잃고 한 꽃송이
앞에 오래 쪼그려 앉아 있었다. 화려하지도 않고 검소하면서도 은은한 빛
깔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그 꽃을 아내는 완두콩 꽃이라고 말해 주었
다. 세상에 완두콩 꽃도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바닷가로 길게
뻗은 언덕 위에 푸른빛으로 물들어 있던 무수한 꽃송이들, 그러니 저 많은
꽃들이 다 지면 이 바닷가 언덕에 수많은 완두콩들이 자라날 것이다. 상상
만해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변이의 풍경이었다. 언덕을 메운 꽃들과
언덕에서 무수히 자라날 완두콩들.
아내는 여행을 할 때면 길옆에 피어 있는 엉겅퀴나 오랑캐꽃 같은 하찮
은 풀꽃들에 매우 감탄하면서 예쁘다고 말하곤 했었는데, 때문에 강원도
정선으로 기는 고갯마루 턱에 피어 있던 엉겅퀴를 뿌리째 모종삽으로 떠
다 집 안 뜨락에 심었다. 그 엉겅퀴가 그해를 넘겨 그 다음 해에도 숙성하
게 자라더니 금세 보랏빛 꽃을 피웠다. 아내는 완두콩 앞에서도 도저히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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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뗄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완두콩 꽃을 모종삽으로 떠서 훔쳐올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아내는 완두콩 씨앗을 구해 와서 바
로 뜨락 한 구석에 그득 심었다.
0 아이들이 어릴 때 뛰놀던 작은 그네 터를 걷어치우고 그 빈터에 아내는
고추, 토마토, 가지와 딸기를 잔뜩 심고 이랑을 만들어 거름도 주었다. 어
느 날 아침에 뜨락에 가서 보았더니 놀랍게도 딸기가 흙 위에서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수줍은 여학생의 교복위에 매달린 배지와 같은 흰 꽃들
이 무르익은 딸기 위에 맺혀 있다 그것은 흰 딸기 꽃들이었다.
0 나는 아침마다 마당에 나가본다. 아침 이슬을 흠뻑들 맞고 고맙게도 꽃들
과 풀들은 간밤에도 무사하게 자라나 있었다. 한련화도 안녕하신가. 채송
화도 안녕하신가, 출석을 불러 보면 꽃들은 기운차게 “예예~~예예”대답한
다. 아침 조회는 즐겁고 명랑하다. 어느 집 아이 하나 아프지 않고 무사히
도 꽃의 교실에 나와들 주었구나. 감기가 걸렸는데도 집에서 쉬지 않고 무
리해서 나와 주었던 나팔꽃은 오늘 아침엔 말짱하다. 감기 기운이 가셨는
지 건강하게 주먹 나팔로 대답한다.
“나, 여기 있어요. 선생님”
아침 조회를 설 때마다 나는 왠지 완두콩밭과 딸기 꽃들에게 애정이 가
곤 한다.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전에는 화려하게 차려 입은 꽃들이 훨씬
귀여워서 자연 눈이 자주 가고, 일으켜 노래도 시켜보곤 했었는데 요즈음
엔 수수한 옷차림도 수줍어 손가락을 입에 빨고 있는 완두콩 꽃과 딸기
꽃들이 훨씬 더 귀엽다.
0 그렇다 장미는 장미로만 잎이 지고 만다. 그 화려하고 오만한 꽃만 지면
그뿐이다. 그러나 딸기 꽃은 수줍고 초라하나 시들면 붉은 딸기를 잉태하
고, 완두콩 꽃이 수수한 수녀들의 재복과도 같으나 결국엔 완두콩을 우리
에게 선물로 주지 아니하는가. 가지꽃이 시들면 그 자리에 보랏빛 가지가
매어 달린다.
완두콩 꽃과 딸기 꽃은 수수해서 눈에 띄지는 않으나 때가지나 꽃의 영
광이 시들고 나면 우리에게 그 열매를 제공하고 있다. 그렇다 열매를 맺는
꽃들은 그 어떤 꽃이든 겸손하고 수수하다. 아아, 저 완두콩을 닮을 수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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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면 내가, 내가, 우리집 가족들이, 내 이웃들이, 모든 사람들이 장미를
닮으려 하지 아니하고 하찮은 완두콩 꽃을 닮을 수 있다면.
0 열매가 오기 전에 꽃들이 먼저 온다. 그리고 꽃들이 우리에게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꽃이 되어 꽃들을 찾아가야 한다. 우리가 모르고 지나치는 수
많은 길 위에서 꽃들은 우리와의 인연을 기다리며 한 송이 꽃잎들로 피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가 그 꽃들의 이름을 불러주고 우리가 그 꽃들
의 언어에 귀를 기울인다면 그들이 어떻게 한 생을 피고 지어 살다가 한
알의 열매로 영글어 자라는지를. 그 자연의 신비와 우수를 우리에게 들려
줄 것이다.
■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의 육체 속에서 살고 있다.
0 지금 세상의 어디에선가 누군가 울고 있다.
지금 까닭 없이 울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다.
지금 세상의 어디에선가 누군가 웃고 있다.
지금 까닭 없이 웃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웃고 있다.
지금 세상의 어디에선가 누군가 걷고 있다.
지금 정처 없이 걷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위해 걷고 있다.
지금 세상의 어디에선가 누군가 죽고 있다.
지금 까닭 없이 죽고 있는 그 사람은 나를 쳐다보고 있다.
릴케는 ‘엄숙한 시간’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지금 이 세상 어디에
선가 울고 있는 사람은 나를 위해 울고 있다고, 지금 죽고 있는 사람은 죽
어 가면서 내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다고, 우리는 모두 저마다 세상의 한
구석에서 홀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정녕 혼자가 아니라고 릴케는 말
한다.
0 우리가 한 끼 배부르게 막을 때 이 세상 어디에선가는 여섯 명의 사람들
이 굶게 된다고 한다. 우리가 여우 목도리 하나를 사서 옷장에 넣을 때 어
쩌면 우리는 수십 마리 여우의 목숨을 옷장에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가 다이아몬드 반지 하나에 연연할 때 아프리카에선 얼마나 많은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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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혹한 노동에 쓰러져가고 있는가. 사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육체 속에
서 함께 살고 있다. 인간이라는 육체 속에서,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무관
심이라는 기나긴 마취에서 깨어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내 몸의
절실한 고통으로 느낄 수 있으리라.
0 나는 수도사들을 존경한다. 자신의 몸을 허물어 타인의 고통을 대신 느끼
는 자들을 나는 존경한다. 어두운 성당의 제단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오랫동
안 사람들의 고통을 위해 기도하는 신부님들과 서울역 지하보도에서 하루
도 쉬지 않고 노숙자들의 위해 따뜻한 밥과 국물을 나눠주는 목사님들을
존경한다. 그들은 우리가 모두 같은 고통의 핏줄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을, 타인의 고통이 자신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가진 것을 버리고, 스스로 낮은 곳으로 내려가며, 스
스로의 몸을 헐벗게 하는 일로 다른 사람들의 눈물과 고통에 연연할 수
있다면 이 슬프고 고통스런 세상에서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닐 것이다. 우
리는 모두 같은 몸을 지니고 있다. 당신이 지구 반대편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을 때 또 다른 지구의 반대편에서 그 누군가가 당신을 위하여 울고 있
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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