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2)

2014. 10. 14. 15:42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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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2)

 

 - 정호승의 새벽편지 -

 

■ 정호승 지음 제3부

 

■ 당시니 없으면 내가 없습니다

가을은 찾아왔지만 지난여름 태풍을 잊을 수 없다. 새벽에 느닷없이 창을 뒤흔들던 태풍은 순식간에 수많은 나무를 쓰러뜨렸다. 아침에 일어나 아파트 마당에 나가 보니 10여 그루의 소나무가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져 있었다. 대부분 30미터가 넘는 키 큰 소나무로 어떤 녀석은 허리가 두 동강 난 처참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나는 쓰러진 소나무를 바라보며 결국 올 게 오고 만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파트 소나무는 한 때 야생의 소나무였지만 지금은 시시때때로 영양가 높은 비료를 공급 받으니 생존을 위해 스스로 뿌리를 뻗어나갈 필요가 없다. 서 있는 자리 아래가 바로 지하주차장이어서 땅속 깊이 뿌리를 뻗고 싶어도 뻗어 나갈 수가 없다. 지하주차장 위에 깔린 흙더미에 얕게 뿌리를 내리고 조경사의 과보호를 받으며 의존적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삶을 사는 그들이 늘 안타깝고 위태로워 보였는데 그만 지난여름 태풍에 쓰러지고 말았다. 미국 서남부 지역엔 밑동의 지름이 10미터인 데다 키가 90미터 이상 똑바로 자라면서도 뿌리가 2,3미터밖에 되지 않는 레드우드라는 삼나무가 있다. 이 고목은 체구에 비해 뿌리가 연약하지만 낙뢰에 불타는 일은 있어도 태풍에 쓰러지는 일은 거의 없다. 뿌리가 땅 밑으로 깊게 뻗진 못하지만 옆으로 25미터 이상 뻗어 한 뿌리에 여러 그루의 나무가 자라기 때문이다. 지상에서는 각자 한 그루 나무이지만 땅 밑에서는 한 뿌리에 연결돼 공동체를 이루며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강진 다산초당 가는 산길엔 소나무 뿌리가 마치 혈맥처럼 길 위로 울퉁불 - 1 - 퉁 뻗어 나온 ‘뿌리의 길’이 있다. 그들은 뿌리가 서로 뒤엉킨 채 한 몸을 이루고 있어 산길을 오르는 수많은 사람이 밟아도 아파하거나 태풍에 쓰러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 같다. 이처럼 한 그루 나무가 생존을 유지하기 위해서 뿌리를 깊게 뻗어 내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나무의 뿌리와 한 몸이 되어 공동체를 이루는 것도 또한 중요하다. 우리도 지상에서는 각자 한 그루의 나무로 서 있지만 그 뿌리는 사회와 국가라는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 그러나 우리가 이루는 공동체는 레드우드나 다산초당 가는 산길의 소나무처럼 서로 이해하고 공존하는 공동체라기보다 이해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서로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공동체다. 나는 나로서 존재하지만 궁극적으로 나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있음으로써 나는 비로소 존재한다. 일찍이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행복이 있다면 서로를 이해하며 사랑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이는 결국 당신이 없으면 내가 행복해질 수 없다는 뜻이다. 인도 출신 예수회 신부 앤서니 드 멜로가 쓴 우화 중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남자가 연인의 집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 연인이 “누구냐?”고 물었다. 남자가 “나야, 나”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여자는 “돌아가라, 이 집은 너와 나를 들여 놓는 집니 아니다”고 하면서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남자는 그곳을 떠나 광야로 가서 몇 달 동안 연인의 말을 곰곰 생각했다. 그러고는 다시 돌아와 문을 두드렸다. 연인이 다시 “누구냐?”고 물었다. 이번에는 “너야, 너”라고 말했다. 그러자 금방 문이 열렸다. 우리는 이렇게 나이면서도 동시에 너다. 당신이 없으면 내가 없고, 내가 없으면 당신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라는 존재 속에 포함된 ‘너’라는 존재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갈등과 분열의 폭을 증폭시킨다.

 

■ 유월의 무논을 바라보며 기차를 타고 유월의 차창 밖을 바라본다. 모내기를 끝낸 무논의 풍경이 아 - 2 - 름답다. 이제 막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어린 벼들이 연초록 옷을 입고 고요하다. 푸른 산 한 자락과 비스듬히 기울어진 전봇대의 그림자가 무논에 어린다. 어느 농부가 부지런히 타고 왔다가 논둑에 세워둔 자전거 한 대도 물속에 제 그림자를 드리운다. 백로 한 마리 무논에 무심히 외발로 서 있는 모습은 이름다움의 극치를 이룬다. 모내기를 끝낸 저 푸른 유월의 풍경 때문에 우리나라는 아름답다. 온갖 자기주장과 시위와 위선과 기만이 날뛰어도 무논은 말없이 아름다울 뿐이다. 물론 무논의 아름다움 속에는 모내기라는 노동의 고단한 과정이 숨어 있다. 그러나 무논은 인간의 노동이 그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담담히 자연의 풍경으로 보여준다. 나는 무논의 아름다움도 무논을 일군 노동의 수고도 생각하지 않고 살아왔다. 못자리를 잡고 볍씨를 뿌려 키우고 모내기하는 농부의 땀과 정성을 통해 내가 매일 먹는 쌀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 잊고 살아왔다. 쌀이 필요할 때마다 돈을 내고 사먹었을 뿐이다. 그동안 쌀을 살 때마다 내 눈에는 늘 상표와 가격표만 보였다. 값을 지불했다는 이유만으로 농사의 고유한 가치마저 산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모든 가치를 내 것인 양 착각해 왔다. 저 무논의 아름다움 속에 예비되어 있는 것은 고통이다. 어린 벼들은 곧 가뭄과 태풍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계속 햇볕만 내리 쪼이면 벼들은 곧 가뭄의 고통을 당할 것이고, 강한 비바람이 몰아치면 곧 태풍의 고통에 시달릴 것이다. 그러나 벼들에게 그런 고통은 당연하다. 고난 없이 자라는 벼들은 없다. 가뭄에 목마르지 않는 벼가 없고, 태풍에 쓰러지지 않는 벼가 없다. 가뭄으로 쩍쩍 갈라진 논바닥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벼 포기도, 태풍에 쓰러져 있다가도 포기끼리 묶어주면 서로 기대어 일어나는 벼 포기도 실은 당신과 나를 닮았다. 그런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면 벼들은 잘 여문 이삭을 매달고 겸허한 자세로 고개 숙일 수 없다. 쓰러진 벼 포기를 일으켜 세우듯 쓰러진 인생도 일으켜 세워야 고개 숙인 이삭 같은 열매를 맺는다. 무논의 벼는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하지 않는가. 내가 누구를 사랑할 때도 무논을 향해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농부의 발소리와 같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도 그렇지 못한 채 밥을 먹는다. 밥 한 알 속에 들어 있는 - 3 - 햇빛과 달빛과 별빛의 기운을 먹고 새로운 생명의 기운을 얻는다. 쌀 한 톨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구부정한 논길이 보인다. 해질녘 어깨에 삽을 걸치고 돌아가는 농부가 보인다. 쌀 한 톨 앞에 무릎을 꿇고 늦게나마 감사의 기도를 올린다. 부모님은 내가 어릴 때 “사람은 밥값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제발 밥값 좀 하라”고 나무라기도 하셨다. 나는 이제야 밥값을 하며 오늘을 살고 있는지 내게 물어 본다.

 

 ■ 소나기가 내려야 무지개가 뜬다

소설가 황순원 선생의 대표작 ‘소나기’를 읽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지 않을까. 중학교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게재되는 작품이기 때문에 젊은 세대라면 아마 없을 듯하다. 나도 얼마 전 경기도 양평에 있는 ‘황순원문학촌 소나기 마을’을 다녀온 뒤 문학촌의 전체적 분위기가 ‘소나기’에 나오는 분위기와 흡사해 문고본으로 나온 ‘소나기’를 다시 꺼내 읽어 보았다. 한 소년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가 여름 농촌 풍경을 배경으로 이루어져 있어 나도 문득 내 어린 소년시절로 되돌아가는 듯했다. 개울가, 물장난, 조약돌, 징검다리, 텃논, 가을걷이, 허수아비, 새끼줄, 참새, 원두막, 참외, 수박, 들국화, 도라지꽃, 산마루, 송아지, 먹장구름, 소나기, 초가집, 비안개……. ‘소나기’를 읽고 난 뒤 이런 낱말들이 오래도록 내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이 낱말들로 인해 한동안 내 어릴 적 고향 동네에 사는 듯한 행복한 심사에 젖을 수 있었다. 지금 도시에서 자란 이들은 이런 낱말을 구체적인 자기 경험을 통해 이해하기 어렵지만 어느 정도 나이든 이들은 농촌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그리운 시공간을 이런 낱말에서 끄집어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 비가 오지 않는 하늘은 없다. 비가 오지 않으면 무지개는 뜨지 않는다. 소나기가 내려야 무지개가 뜬다. 무지개가 뜨지 않으면 하늘은 아름답지 않다. 소나기가 지나간 뒤에 해는 더욱 빛난다. 따라서 무지개는 소나기의 다른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지개만 보고 소나기는 보지 못한다. 소나기가 왔기 때문에 무지개가 떴다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왜 내 인생에 불행의 소나기, 고통의 소나기가 퍼붓느냐고 원망한다. - 4 - 소나기는 온다 하더라도 하루 종일 오는 것은 아니다. 오다가 반드시 그치기 때문에 소나기다. 소나기가 하루 종일 오면 그것은 이미 소나기가 아니다. 소나기가 며칠 계속되면 그건 이미 장마다. 또 소나기는 그쳤다고 해서 다시 오지 않는 게 아니다. 여름이 오면 또 퍼붓는다. 내 인생의 소나기, 그것이 비록 고통의 소나기라 할지라도 피할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 않는 게 좋다. 달라이 라마는 “아무리 해결책을 발견할 수 없는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그 고통에 맞서는 편이 더 낫다”고 말한다. 결국 고통은 들이 닥치기 때문에 “그동안 회피하고 있었다면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을 때 견디기 힘든 정신적 불안과 충격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가면서 마주칠 고통을 미리 예상하고 있으면 그것에 익숙해짐으로써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나면 마음이 훨씬 평화롭다”고 한다. 결국 고통은 수용하느냐 마느냐의 자기 선택에서 생겨난 갈등의 문제다. 지금 내게 고통의 문제가 있다면 나의 판단과 선택에 따라 스스로 고통을 만들기도 하고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거나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선택적 태도에 기인된다.

 

■ 풀잎은 태풍에 쓰러지지 않는다

태풍이 몰아치는 거리를 걸었다. 상반신을 잔뜩 구부린 채 태풍 속을 걸으며 간간이 거리의 나무들을 쳐다보았다. 나무들은 온몸을 뒤흔들며 몸부림을 쳤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한쪽으로 계속 기울어지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태풍을 견뎌내는 자세가 의연해 보였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는 수백 년 된 왕소나무가 뿌리를 드러내고 쓰러진 사진이 실려 있었다. 그 나무뿐 아니라 전곡 곳곳에 태풍에 쓰러진 나무가 수없이 많았다. 왜 어떤 나무는 태풍을 견뎌내고 어떤 나무는 태풍에 쓰러지고 말았을까. 태풍이 지나간 거리를 걷다 보면 지상으로 뿌리를 드러낸 채 쓰러져 있는 왕벚나무나 플라타너스들은 대부분 키가 큰 나무들이다. 바로 그 옆에 있는 키 작은 쥐똥나무나 풀잎들은 언제 태풍이 불어왔느냐는 듯 쓰러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 오랜 세월을 견디며 살아온 아름드리 거목들이 태풍을 잘 견딜 - 5 - 수 있을 것 같은데 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들이 두려워하지 않고 꼿꼿하게 태풍과 맞서 싸우기 때문이다. 태풍에 대한 그들의 당당한 태도는 높이 평가할 수 있지만, 그 죽음의 결과는 너무나 처참하다. 만약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유연하게 자신을 낮출 수 있었다면 쓰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연약함보다는 거목으로서의 강인함을 먼저 생각하고 태풍과 싸워 이기려 고 노력했다. 태풍에는 자신을 낮추고 굽힐 줄 아는 나무만이 살아남는다. 보란듯이 자신을 과시하는 나무는 쓰러진다. 그것은 겸손하지 못한 거목의 오만함으로 비칠 수도 있다. 한 그루 거목이 머리를 풀고 하늘을 뒤흔들면서 스스로 태풍이 되었다고 여길 수는 있지만 태풍처럼 강한 존재가 될 수는 없다. 풀잎은 보라, 풀잎은 태풍에 쓰러지지 않는다. 행여 쓰러진 풀잎이 있다 하더라도 태풍이 지나간 뒤에는 대부분 스스로 일어나 하늘을 본다. 그러나 나무는 한 번 쓰러지면 누가 일으켜 세우지 않는 한 스스로 일어나지 못한다. 사람이든 나무든 직선보다 곡선의 삶의 자세나 형태가 더 아름답다. 새들은 곧은 직선의 나무보다 굽은 곡선의 나무에 더 많이 날아와 앉는다. 함박눈도 곧은 나뭇가지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쌓인다. 그늘도 곧은 나무보다 굽은 나무에 더 많이 만들어져, 굽은 나무의 그늘에 더 많은 사람이 찾아와 편히 쉰다. 사람도 직선의 사람보다 곡선의 사람의 품 안에 더 많이 안긴다. 직선보다 곡선의 나무나 사람이 고통의 무게를 견딜 줄 아는 넉넉하고 따듯한 삶의 자세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태풍은 기다리지 않아도 온다. 태풍이 지나간 마을과 들녘엔 파괴의 망연함만 고요하다. 그렇지만 태풍을 미워하고 증오할 수는 없다. 태풍은 자연계의 한 현상으로 오직 자기 본연의 삶을 살 뿐이다. 태풍이 몰아치지 않으면 고여 있던 생태계는 새로운 활력의 숨을 쉬지 못한다. 태풍의 본성은 인간과 자연의 삶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회복하고 순환시켜 다시 회생시키는데 있다. 태풍은 현재의 자기를 바로보고 겸손하라고 불어온다. 고통과 절망이라는 인생의 태풍이 불어올 때 삶의 자세를 더욱 낮추라고 불어온다. 나는 남들과 달리 작고 연약한 인간으로 만들어진 데 대해 불만이 많았다. 절대자를 원망 - 6 - 하고 등을 돌린 일도 있었다. 그러나 풀잎처럼 자기를 더욱 낮춤으로써 인생의 태풍을 견뎌내라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니 오직 감사할 따름이다.

 

■ 나무 그늘에게 감사!

나는 인간이라는 한 그루의 나무다. 나에게도 플라타너스와 느티나무의 그늘처럼 인간이라는 나무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아무리 뙤약볕이 내리쬐어도 내 그늘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그동안 드러내지 않으려고 전전긍긍함으로써 내 그늘의 의미와 가치를 도외시해 온 탓이다. 지금까지 내 삶의 그늘을 휴식과 위안의 그늘 ,나눔과 화해의 그늘로 인식하기보다 고통과 절망의 그늘, 시련과 상처의 그늘로만 인식해 온 잘못이 크다. 내가 내 그늘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데 누가 내 그늘을 찾아와 쉴 수 있을까. 인생의 그늘은 순간적으로 형성되는 게 아니다. 오랜 인고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남한테 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나 자신이 가장 편히 쉴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내게 그늘이 없다면 나 자신조차 쉴 곳이 없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통의 그늘이라 할지라도 감추지 말고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나무가 겨울이라는 혹독한 고통의 시간을 견뎌내고 여름에 그늘을 드러내듯이 나 또한 절망이라는 세월을 견뎌낸 자세로 그늘을 드러내야 한다. 그래야만 나무 그늘에 앉아 내가 편히 쉬듯이 다른 사람이 내 삶의 그늘에 앉아 편히 쉴 수 있다. 물론 우리의 삶은 그늘과 햇빛이라는 양면성 속에 존재한다. 햇빛이 있어야 그늘이 있고 그늘이 있어야 햇빛이 있다. 그늘과 햇빛은 동질의 존재다. 그런데도 나는 줄곧 햇빛만을 갈구했다. 햇빛이란 내가 소망하는 일이 모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계속 햇빛만 원한다면 내 인생이라는 대지는 황폐한 사막이 되고 만다. ‘항상 날씨가 좋으면 곧 사막이 되어버린다’는 스페인 속담은 바로 나를 두고 하는 말이다. 때로는 고통의 비바람이라 할지라도 불어와야 하고 절망의 눈보라라 할지라도 몰아쳐야 한다. 그래야 인생의 대지에서 자란 나무가 숲을 이루고 그 - 7 - 숲의 그늘에 앉아 새들과 함께 내가 쉬었다 갈 수 있다. 계속 햇빛만을 원한다면 그것은 사람의 그늘을 소멸시켜 버리는 죽음의 햇빛을 원하는 일이다. 누구든 그늘 없는 삶은 없다. 부자에게도 그늘이 있고 빈자에게도 그늘이 있다. 다만 그 그늘을 어떻게 여기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부자는 그 그늘을 겸손과 나눔의 그늘로 만들면 좋고, 빈자는 부처님 말씀대로 스스로 만족함으로써 부자가 될 수 있는 자족과 감사의 그늘로 만들면 좋다. ■ 갈릴래아 호수를 거닐며 지난여름 이스라엘 갈릴래아 호수에 가 보았다. 우리나라 산정호수 정도 되겠거니 하고 생각했는데 멀리 수평선이 보일 정도로 망망한 바다 같았다. 예수 시대의 작은 고깃배라도 오갈 줄 알았으나 모터보트를 타고 호수 한가운데로 질주하거나 파도를 가르며 윈드서핑을 하는 휴양객들이 있는 현대화된 호수였다. 나는 2천여 년 전 예수의 제자인 베드로가 예수한테 수위권(首位權)을 받았다는 ‘베드로 수위권 성당’ 아래 호숫가를 천천히 거닐었다. 갈대가 우거진 호수는 뜨거운 햇살 아래 은빛물결을 빛내며 고요했다. 바위에 앉아 양말을 벗고 발을 담그자 물은 따스했다. 피라미 같은 물고기들이 내 발 밑에서 부산히 움직였다. 문득 이런 갈릴래아 호수가에서 예수를 만났을 가난한 어부 베드로의 모습이 떠올랐다. 밤새 물고기 한 마리잡지 못한 베드로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라”고 한 예수의 말을 따르자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다’는 성서의 이야기도 떠올랐다. 만일 베드로가 예수의 말을 무시하고 깊은 데에 그물을 던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호수 구석구석을 다 아는 갈릴래아 최고의 어부인 내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져도 못 잡았는데 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니!’하고 못마땅하게 여겼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 어부로서 그는 그날 참으로 애탔을 것이다. 힘이 빠지고 마음이 상해 다시 그물을 던져보라는 예수의 말에 화를 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그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을 것이고, 예수의 제자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하는 예수의 말을 그대로 따랐다. - 8 - 나는 갈릴래아의 푸른 물결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베드로의 이 점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까지 예수가 베드로에게 한 말씀이 내게 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것은 그 ‘깊은 데’의 의미를 내 인생에 이익이 되도록 이해하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시가 잘 써지지 않거나 창조성이 요구되는 어떤 일이 지지부진할 때 ‘깊은 데로 그물을 던져라. 그래야 큰 고기를 잡지’하고 늘 ‘큰 것’이라는 내 외형적 이익을 생각해 왔다. 인생을 시작하는 젊은이들에게도 늘 그런 말을 잊지 않았다. “젊을 때는 인생의 꿈과 목표를 크게 잡아라. 처음부터 깊은 데에 그물을 던져라. 고래가 바닷가에 살지 않듯이 큰 물고기는 얕은 데에 살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인생의 목표는 ‘큰 것’이어야 하고 그것을 잡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깊은 데’에 그물을 던져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인생의 외형적 크기와 물질적 성공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가 말한 그 ‘깊은 데’란 인생의 외형적 목표와 그 규모에 대한 것이 아닐 것이다. 인생의 내면적 깊이, 깊은 사랑과 정의가 있는 영혼의 깊이를 의미할 것이다. 인생은 상대적 넓이도 중요하지만 절대적 깊이도 중요하다. 인생은 바다이면서도 우물과 같다. 예수는 베드로를 물고기를 낚는 물질의 어부에서 사람을 낚는 영혼의 어부로 전환시켰다. 물고기가 많이 잡히기만을 바라는 평범한 어부로 하여금 깊은 데에 그물을 던지게 함으로써 인간을 낚을 수 있는 진리의 어부가 되게 했다. 이것은 베드로의 삶의 내면이 더 깊어짐으로써 그 인생의 깊이 또한 더 깊어진 것을 의미한다.

 

■ 사진을 찍으려면 천 번을 찍어라

성철 스님이 지내시던 해인사 백련암 손님방에서 하룻밤 잔 적이 있다. 스님이 입적하시기 10여 년 전 일이다. 당시 잡지사 기자로 일하던 나는 스님께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허락하시지 않았다. 그 대신 서면 질문을 하면 서면으로 답변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래서 그날 밤 나는 무슨 질문을 할까 곰곰 생각하면서 가야산 백련암에서 하룻밤 묵게 되었다. - 9 - 하안거 해제 전날인 백련암의 여름밤은 깊고 고요했다. 밤하늘엔 보름달이 두둥실 떠올라 있었고 어둠속에서도 잘 들리는 풀벌레 울음도 깊고 청명했다. 아침 공양을 하고나자 스님은 언제 해인사로 내려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둘러 해인사로 내려갔다. 이미 대웅전엔 많은 스님들과 불자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나는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앉아 대웅전 높은 단상에 올라 주장자를 손에 쥐고 하안거 해제 설법을 하시는 스님을 바라보았다. 스님은 마치 엷은 미소를 띤 호랑이처럼 보였다. 스님은 설법을 마치자마자 지체없이 바로 백련암으로 향했다. 나는 사진기자와 함께 부지런히 스님 뒤를 따라갔다. 스님은 청년처럼 훠이훠이 빠른 걸음으로 산을 올라가셨다. 감히 말씀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래도 뒤처지지 않고 스님 뒤를 따라가 세상 사람들을 위해 한 말씀 해주시기를 청했다. 스님께서는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나. 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 알 건데”하시고는 빙그레 웃기만 하셨다. 그리고는 호랑이 한 마리가 그려진, 백련암 방향을 가리키는 나무 표지판이 나오자 그 앞 바위에 앉아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포즈를 취해 주셨다. 사진 기자가 이때다 싶어 연방 셔터를 눌렀다. 그때였다. 스님께서 “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노. 필름이 안 아깝나”하고 물으셨다. 사진 기자가 사진을 찍는 데 여념이 없어 스님의 질문에 얼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나서서 “좋은 사진을 찍으려면 많이 찍어야 합니다. 벌써 필름을 다섯 통도 더 썼습니다” 하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스님께서는 “그래, 그러면 천 번을 찍어라”하고 말씀하셨다. ‘아이쿠 천 번이나!’ 나는 그때 ‘어떻게 천 번을 찍으라고 하시나, 스님께서 농담도 잘 하신다’고 생각했다. 그날 우리는 스님 사진을 참 많이 찍었다. 스님이 벗어놓은 검정 고무신과 누더기 승복, 스님이 잡수시는 소박한 무염식 밥상을 찍기도 했다. 그 뒤 “사진을 찍으려면 천 번을 찍어라”라고 하신 스님의 말씀이 내 인생의 화두가 되었다. 그 말씀이 무슨 뜻일까. 생각할수록 어려웠다. 그래도 그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어느 날 문득 ‘무슨 일을 하든 최선을 다해 노력하라’는 뜻이라고 쉽게 생각했다. - 10 - 당시 스님께서는 어린아이들은 조건 없이 만나주셨지만 일반인이나 신도들은 부처님께 먼저 삼천배를 하지 않으면 만나주지 않으셨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삼천배를 하면서 그만큼 ‘먼저 부처님을 만나고 자기 자신을 만나라’는 뜻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한 말씀 해 달라고 했을 때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 다 안다”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스님께서 늘 ‘자기 자신을 바로보라’고 하신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나는 그동안 남을 들여다보는 일은 수없이 많았어도 나 자신을 들여다 본 일은 거의 없었다. 들여다볼 기회가 있어도 일부러 외면해 왔다. 이제 비로소 나를 들여다본다. 들여다볼수록 고개를 들 수가 없다. “사진을 찍으려면 천 번을 찍어라.” 스님의 이 말씀만 들여온다. “시를 쓰려면 천 번을 써라.” “누굴 사랑하려면 천 번을 사랑해라.”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말씀이다. 무슨 일을 하든 천 번을 할 정도로 열심히 노력하면 결국은 이루어진다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공보다 노력이다.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우리의 삶이며 노력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 목적을 버려야 목적에 다다른다

어떤 목적을 향해 나아갈 때 그 목적을 자꾸 생각하면 조급해지고 힘들어진다. 의욕이 앞서 자칫 과욕을 불러올 수 있다. 과욕은 목적으로 가는 길을 힘들게 만든다. 등산을 할 때 왜 위를 올려다보며 걷지 말라고 하는 것일까. 정상에 오른다고 생각하면 산을 오르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어서 산에 올라가야지’하는 급한 마음을 가지면 그 순간부터 산행이 힘들어진다. 목적보다 과정이 중요하다. 산길에 핀 꽃들과 등 굽은 소나무의 아름다운 곡선을 바라보기도 하고 멀리 산 아래 보이는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쉬기도 해야 등산이 즐겁다. 산의 정상을 어른다는 목적만 생각하면 그 순간부터 산행의 즐거움은 반감되고 힘들게 된다. 인생의 어떤 목적도 처음부터 출발하자마자 바로 그 목적에 다다를 수 없다. 한 걸음 한 걸음 산 밑바닥을 딛고 올라가야 비로소 산 정상에 다다르듯 인생의 목적이라는 정상도 마찬가지다. - 11 - 그러나 대부분 과정보다 결과를 더 중요시한다. 과정도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이는 결과가 좋지 않을 때 건네는 위로의 한 방편일 때가 많다. 결과가 중요할수록 결괴에 매달리지 않아야 한다. 결과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과정에서 성실과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그 결과가 좋아진다. 누구나 성공을 바라지만 성공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성공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성공을 목적으로 삼으면 인생이 공허해진다. 성공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인간으로서의 소중한 임무를 다하기 위한 하나의 디딤돌일 뿐이다.

 

■ 견딤이 쓰임을 결정한다.

일본 호류사(法隆寺)에는 절 앞에 소나무 숲길이 길게 형성돼 있다. 대부분 오랜 시간의 나이테를 지닌 건강하고 잘생긴 소나무들로 보는 것만으로도 청정한 느낌이 든다. 호류사 안마당에도 윗부분이 뚝 잘린, 수령 몇백 년은 된 소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데 그 기품이 여간 예사롭지 않다. 내가 한참 동안 그 소나무를 쳐다보고 있자 일행 한 분이 호류사는 천 년 된 나무로 지었다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이 절을 1,400여 년 동안이나 대대로 지켜온 ‘궁목수’ 가문이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천 년 이상 갈 수 있는 절이나 궁궐을 짓는 목수를 ‘궁목수’라고 하는데, 니시오카 가문이 바로 그런 가문이라고 한다. 이 가문에서는 “천 년 이상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으려면 천 년 된 노송을 써야 한다. 그리고 그런 나무로 건물을 짓는다면 모름지기 천 년은 갈 수 있는 건물을 지어야 궁목수로서 그 나무에게 면목이 서는 일이다”라고 후손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나는 이 가문의 가르침이 시라는 집을 짓는 언어의 목수인 내게도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좋은 시의 집을 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인간과 사물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체험이라는 나무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오랜 세월 동안 온갖 고통과 시련을 견뎌온 나무라야 한다. 만일 그런 나무가 없다면 단 한 줄의 시도 쓸 수 없게 된다. 누구나 견딘다는 것은 힘든 일이다. 견디고 견디다가 구부러지고 뒤틀어진 - 12 - 나무가 되기 십상이다. 그런데 궁목수 가문에서는 그런 나무도 적재적소에 사용했다고 한다. 심하게 구부러지고 뒤틀린 나무라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고 그 나무의 성질을 잘 이용해 알맞은 용처에 썼다고 한다. 심지어 남쪽 벽에 쓸 나무는 산의 남쪽에서 자란 나무를 쓰고, 서쪽 벽에 쓸 나무는 산의 서쪽에서 자란 나무를 썼다고 한다. 그렇다 내가 만일 똑바로 자라지 못하고 뒤틀린 나무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하더라도 나름대로 쓰일 데가 있다. “나 같은 놈이 어디 쓰일 데가 있겠어!”하는 생각이 든다면 이 궁목수 가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용무늬가 아름다운 우리나라 전통가구 전주장(全州欌)만 해도 용목이라는 나무를 사용한다. 그런데 그런 나무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오랜 세월 병 때문에 몸의 일부가 옹이 지고 뒤틀린 나무가 그렇게 용무늬로 나타난 것이다. 목공예 소목장(小木匠)들은 구하기도 어렵고 부르는 게 값인 그런 나무의 무늬를 최고로 친다. 지금 나의 고통과 상처도 그런 용목이 되기 위한 것이다. 가장 잘 견디는 것이 가장 잘 쓰이므로 용목처럼 견딤으로써 인생의 아름다운 무늬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고통이라도 받아들이고 견딜 수 있는 인내의 힘을 키우지 않으면 안 된다. 니시오카 궁목수 가문에서는 천 년 노송으로 집을 짓고 나면 언젠가는 후대에서 사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반드시 다시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천 년을 내다보며 집을 짓고 천 년을 내다보며 나무를 심은 것이다. ■ 부모는 활이고 자식은 화살이다 아들이 군에서 제대하고 복학 준비를 할 때였다. 복학 신청을 하려면 무엇보다도 등록금을 내야 하는데 아들은 등록금 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왜 등록금을 내야 한다는 말을 안 하니?” 아들은 학교 회계팀에 전화해 보고는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복학이 된다고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군에 입대하기 전에 이미 등록금을 내고 입대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였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이 입대 휴학을 하려고 하자 학교 측에서 그 학기 등록금을 미리 내야 한다고 해서 냈다가 되돌려 받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 13 - 아들이 입대한 뒤 되돌려 받았기 때문에 아들은 그런 사실을 미처 모르고 있었다. “아니다. 되돌려 받은 게 분명하다. 등록금을 내야 한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한순간 내 마음이 흔들렸다. 학교 측에서 내라고 하지도 않는데 이대로 내지 말고 그냥 지나가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지워버렸다. 아버지인 내가 부정한 모습을 보이면 아들이 앞으로 부정을 긍정화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들에게 분명한 태도로 말했다. “이건 담당자의 실수다. 남의 실수를 악이용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내 아들인 네가 복학해서 다시 공부를 하는데 아버지인 내가 그런 잘못을 저지를 수는 없다. 항상 올바른 태도를 지니고 사는 게 중요하다.” 나는 아들에게 담당자를 찾아가 확인하게 하고 다시 등록금을 납부하도록 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찔하다. 당연한 결정이지만 얼마나 잘한 일인지 참 다행이다 싶을 때가 있다. 만일 그런 사실을 숨긴 채 등록금을 내지 않고 복학하게 했다면 아들 앞에 두고두고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부모는 활이고 자식은 화살이라고 했다. 화살이 과녁에 명중하기 위해서는 활이 정확도와 성공도가 결정적 역할을 한다. 안정된 자세에서 정확한 방향을 향해 활을 쏘았다 하더라도 그 순간 활이 흔들리면 화살이 제대로 날아갈 리 없다. 부모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활이 되어야 한다. 부모의 삶의 태도는 곧 자식의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다.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아들에게 “너라면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 것이냐”고 물어보자 아들이 “당연히 등록금을 내야지요”하고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화살은 활이 많이 휘면 휠수록 멀리 날아간다. 멀리 날아간 화살일수록 역으로 그 화살을 날려 보낸 활은 많이 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의 허리가 휘면 휠수록 자식은 그만큼 멀리 날아간다. 활은 휘어질수록 고통이 심하지만 오직 화살을 멀리 날려 보내기 위해 그 고통을 참고 견딘다. 실제로 늙은 부모의 육체는 등이 활처럼 굽어진다. 그동안 화살인 자식을 위해 끊임없이 노동하며 활의 역할을 다해왔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신을 위해 활처럼 깊게 휘어지는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자식도 그만 자기 자식의 활이 되고 만다. - 14 -

 

■ 박항률 그림을 사랑하는 까닭

 

* 박항률 : 이 책의 삽화 화가 - 1974 서울대 미술대학 회화과. 1982 홍익대 대학원 - 서울, 뉴욕, 런던, 볼티모어, 후쿠오카 등지에서 26번의 개인전 - 현재 세종대 회화과 교수 - 저서로는 시집 ‘비공간의 삶’ ‘그리울 때 너를 그린다’ ‘오후의 명상’ ‘그림 의 그림자’등이 있다.

 

때때로 박항률 그림속의 인물이 되고 싶다. 그의 그림 속에 있는 인물을 볼 때마다 혹시 내가 저 그림 속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가 그만 내가 그의 그림 속에 고요히 앉아 있다고 생각돼 적이 행복할 때가 있다. 어느 봄날의 가장 아름다운 날, 꽃들이 만발한 산속에서 꽃바구니를 무릎위에 얹어 놓고 엷은 미소를 띠고 있는 그림 속 소녀의 모습은 어쩌면 내 전생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그는 꽃의 특성을 섬세하게 살려가며 그린다기보다 꽃의 이미지만 그린다. 그래서 그의 화폭에서 피어난 꽃들은 모두 은유의 꽃이다. 아름답지만 고통스러운 우리 인생의 고통의 꽃이자 상처의 꽃이다. 그동안 치유되지 않았던 내 인생의 상처가 그의 화폭에서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 듯하다. 인간의 머리 위에 앉아 있는 새는 바로 내 영혼의 구체적 모습이다. 만일 내 영혼의 모습이 날카로운 돌멩이이거나 구겨진 지폐라면 그 얼마나 부끄러운가. 내 영혼이 한 마리 새가 되기 위해서는 오늘의 내 삶이 맑고 순결해야 하나 그렇지 못해서 그의 그림 앞에서 늘 내 심장은 멎는다. 박항률에게 새는 인간 영혼의 존재다. 그는 “사람과 가장 가깝고 친근한 새이기 때문에” 참새와 비둘기를 많이 그린다. 박항률이 새를 그리게 된 것은 대학생부터다. 처음에는 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을 많이 그렸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새의 세계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구절에서 대학생 박항률은 ‘참 나’를 찾아가는 구도적 자기 탐구의식이 발로되었다. 알을 깨고 나온 새의 모습이 바로 자신의 내면의 모습이라는 인식은 지금도 그의 그림에서 주조를 이룬다. - 15 - 박항률은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새를 많이 그린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림으로 드러내고 싶은 자기 내면의 존재를 새를 통해 많이 드러낸다는 말이다. “꽃과 새는 내 인생의 동행자이자 동반자의 의미를 지닌다”는 그의 말 또한 자연적 존재야말로 인간이 동반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 존재라는 의미다. 그래서일까. 그의 새는 항상 인물이나 사물의 끝에 앉아 있다. 인물의 머리 위나 손가락 끝에, 또는 나뭇가지 끝에 앉아 있는 새를 그린다. 심지어 한 마리 나비나 잠자리조차 대금이나 풀잎의 끝에 앉아 있게 한다. 왜 그럴까. 그러한 가장자리의 세계, 끝의 세계, 그 절정의 세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는 지상과 천상의 세계를 이어주는 “솟대 끝에 앉아 있는 새의 이미지를 빌려온 것”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인간 고독의 극단을 의미하는 절대고독의 세계라고 말하고 싶다. 박항률은 인물을 그리되 여러 사람을 그리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 군상(群像)은 등장하지 않는다. 그의 화폭에는 항상 단 하나의 인물만 등장한다. 그의 그림 속의 ‘고요한 동적(動的) 인물’에서 나는 외로움보다 고독을 느낀다. 그의 인물은 항상 고독한 명상적 존재다. 고독은 상대적이고 사회적 의미를 지니는 외로움과 달리 절대적이고 존재적 의미를 지닌다. 절대자와 인간이 나라는 존재 사이에서 느껴지는 마음의 부분, 그런 절대 고독의 모습이 그림 속 인물의 모습이다. 오늘은 “사람은 때때로 홀로 있을 줄 알아야 한다”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그의 그림 속 인물을 통해 묵상해 본다. 절대 고독의 영역에 있을 수 있는 자만이 진정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또 남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성찰해 본다.

 

■ 내 마음의 정자 섬호정

우리나라 산의 능선은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의 형태다. 고속버스나 기차를 타고 가다가 차창 밖으로 바라본 산의 능선은 마치 젊은 여인의 풍만한 젖가슴을 떠올리게 한다. 어느 초등학생이 ‘산은 여름 산 / 여름산은 엄마의 초록빛 브래지어’라고 쓴 동시를 읽은 적이 있는데, 아이의 눈에도 엄마의 젖가슴으로 느껴질 만큼 우리나라 산은 부드럽고 아름답다. 더구나 산봉우리 - 16 - 나 산기슭에 조그마한 정자가 숨은 듯 고즈넉이 놓여 있으면 그 아름다움은 더해진다. 도시의 산이든 시골의 산이든 우리나라 산의 아름다움은 정자에 의해 완성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에 정자가 없으면 왠지 허전하고 뭔가 소중한 것을 잃은 듯하다. 산이 어머니라면 정자는 언제나 어머니 품에 안겨 쉬고 싶은 자식인지도 모른다. 내 마음속에는 그런 정자가 하나 있다. 힘들고 지쳐 혼자 쉬고 싶어도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을 때 나는 내 마음속의 정자를 찾아간다. 그 정자의 이름은 섬호정(贍湖亭), 섬호정은 경남 하동에 있지만 언제나 내 마음 속에도 있다. 섬호정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잊을 수 없는 유년의 공간을 지니고 있다. 나에겐 멀리 섬진강이 내려다보이는 섬호정이 바로 그곳이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걷던 하동 송림이나 아버지랑 옷을 벗고 멱을 감던 섬진강 백사장은 그립다 못해 아리다. 하동의 남향받이 언덕 집에서 나를 낳았을 무렵, 아버지는 하동 상업은행에 근무하셨는데 여름이면 섬진강으로 피서를 가시곤 했다. 넓은 천막 안에 웃통을 벗은 어른들이 빙 둘러 앉아 수박을 먹던 모습과 반바지 차림으로 아버지가 흰 모래밭에 혼자 앉아 한없이 강물을 바라보던 모습은 영 잊히지 않는다. 어릴 때 나는 늘 섬호정에 가서 놀았다. 어른이 된 뒤 나는 섬호정에 한번 가보고 싶었다. 섬호정에 올라 섬진강 철교위로 지나가는 기차를 한 번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었다. 철교 건너편에 있는 섬진강 다리 위로 보일 듯 말 듯 느릿느릿 걸어가던 사람들도 다시 보고 싶었고, 아버지가 천막을 쳐놓고 놀게 했던 섬진강 백사장을 다시 뛰어 다니고 싶었다. 설탕 절인 산딸기를 먹기 위해 매일 아침마다 할아버지 가게에 신문을 갖다드리며 오갔던 골목길도 다시 걷고 싶었다. 기회는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저절로 찾아왔다. 내 나이 막 마흔이 되었을 때 직장일로 해남 대흥사에 출장을 갔다가 뜻밖에 시간이 하루가 남았다. 이때다 싶어 상경하는 길에 망설임 없이 하동에 들렀다. 길을 묻고 물어 골 깊은 청대숲을 지나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가자 2층 누각인 섬호정이 섬진강이 한눈에 다 내려다보이는 곳에 내 기억대로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17 - 가슴이 두근거렸다. 30여 년이나 기다리고 사모하던 여인을 그제야 만난 심사가 바로 이런 것이었을까. 하동포구 80리에 물새가 울고 하동포구 80리에 달이 뜹니다 섬호정 댓돌 위에 시를 쓰는 사람은 어느 고향 떠나온 풍류랑인고 마침 섬호정 앞에 어머니가 늘 불러주시던 노래가 새겨진 노래비가 있어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읽어보았다. ‘섬호정 댓돌 위에 시를 쓰는 사람’은 혹시 내가 아닐까. ‘풍류랑(風流郞)’이란 풍치가 멋스러운 젊은 남자를 일컫는데 혹시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가슴은 더욱 두근거렸다. “맴맴맴 메에에…….” 강기슭을 거슬러 오는 섬진강 물결소리 사이로 간간이 매미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의 온갖 잡소리를 다 들어온 내 귀가 한순간 맑고 청량해졌다. 바람은 또 그 얼마나 맛이 있는지…….

 

 ■ 당신은 생가가 있으십니까?

나는 생가가 있는 세대에 속한다. 이 말은 달리하면 요즘 세대는 생가가 없는 세대라는 말이기도 하다. 요즘 태어나는 아이들은 생가가 없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병원에서 태어난다. 이웃의 도움을 받거나 산파를 불러 집에서 태어나던 예전 사람들과는 퍽 대조적이다. 내 아이들만 해도 종합병원에서 태어났다. 그들에게도 생가란 없는 셈이다. 굳이 말한다면 병원 신생아실이 생가다. 아들과 한강대교를 지나면서 말한 적이 있다. “저기 저 63빌딩 옆에 있는 여의도 성모 병원이 네 생가”라고. 말은 그렇게 했지만 과연 종합병원 신생아실을 생가라고 할 수 있을 까 그곳은 말 그대로 신생아 분만실일 뿐이다 .그곳은 의학적 획일성이 존재할 뿐 인간적 자연성은 결여돼 있다. 신과 자연의 부드러운 손길보다는 문명과 과학의 차가운 손길이 돋보일 뿐이다. 인간의 출생에는 적정온도가 유지되는 분만실의 손길보다는 높은 산맥을 넘어온 따뜻한 바람이나 나뭇가지에 켜켜이 쌓인 함박눈이나 따스한 봄볕 같은 자연의 손길이 더 필요하다. - 18 - 다행히 나에게는 생가가 있다. 지금도 허물어지지 않고 불타지 않고 온전히 보존돼 있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 나의 삶이 달라질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생가가 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왠지 고요하고 아늑한 기쁨을 준다. 그것은 언제든지 다시 태어나 인생의 출발점에 다시 살 수 있다는 그런 뜻밖의 기쁨일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머니한테 경남 하동에 있는 생가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으면서 자랐다. “호승이 니는 하동 읍내에 있는 은행관사에서 났다. 하동에서 경치가 제일 좋은 집이다. 큰 감나무도 있고 치자나무도 있고, 무화과나무, 백일홍도 있는 집인데, 언덕바지에 있어서 하동 읍내가 다 내려다보였다. 니 낳고 몇 달 만에 6·25 난리가 나, 니 업고 피난 다니느라고 정말 죽을 고생 많이 했다.” 어머니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나는 늘 그 집에 가보고 싶었다. 그런 기회는 왔다. 어느 해 여름이었다. 그리운 곳은 그리워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늙으신 아버지를 앞세우고 구례를 지나 섬진강 하구에 있는 하동을 찾았다. 아버지는 하동 읍내에 들어서자 대로변에 있는 어느 약국부터 먼저 찾았다. 그곳엔 내가 태어날 때 나를 받아냈다는 산파 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아이고, 이게 누군고 보자. 얘가 은행집 둘째아들이가? 내 손으로 받아 냈는데 이렇게 컸나?” 할머니는 반색을 했다. 마치 죽은 자식이 살아 돌아온 듯 반가워하는 모습이었다. 나도 어떤 인연의 끈 같은 것이 끈끈하게 느껴져 마치 외할머니라도 만난 듯했다. 생가는 약국 뒷골목에서 언덕 쪽으로 10여분 쯤 걸어 올라간 곳에 있었다. “아마 이집이지 싶다. 계단을 보니까 이 집이 맞다. 어디 한 번 올라가보자.” 아버지의 기억은 정확했다. 서둘러 돌계단을 오른 아버지는 당신의 젊은 날이 되살아나는 듯 잠시 하늘 끝을 바라보았다. 남향받이 일본식 목조 단층집인 그 집에는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었다. 넓은 뜰에는 무릎까지 자란 풀들이 무성했다. 아기 주먹만 한 연초록빛 감들이 떨어져 나뒹굴었으며 우물은 말라 있었다. 아버지와 나는 방문을 못질 해놓아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지만 이리저리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 19 - “그래 바로 이 방이다. 이 방에서 니가 났다. 이 방 마루에서 니 업고 피난갔다. 이 밑을 파서 쌀독을 묻어 놓았다.” 떨리는 아버지 목소리에 내 가슴도 뛰었다. 내가 태어난 집에 내가 성인이 되어 늙으신 아버지와 함께 찾아왔다는 사실이 나를 감동시켰다. 그 뒤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 그 집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원형은 그대로 보존돼 있으나 여기저기 손본 데가 많았다. 벽에 노란 페인트가 칠해져 있어서 고즈넉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어떤 나이 든 여인이 짙은 화장을 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반가웠다. 그날 서울로 돌아오면서 저 생가를 모태로 삼아 이제 나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집이 될 수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 한가위는 어머니다

한가위는 길고 무더운 여름의 끝자락에 찾아온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 올 때쯤이면 한가위라는 명절을 맞아 서로의 기쁨을 나누게 된다. 만일 한가위가 없다면 여름에 지친 내 몸과 마음은 참으로 고단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한가위 없이 가을과 겨울을 맞는다면 나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해 병든 아이와 같게 될 것이다. 한가위는 어머니다. 한가위는 늘 어머니의 마음을 지니고 찾아온다. 인간의 어머니가 자연이라면 한가위는 그 어머니의 마음이자 품속이다. 지난 여름 내내 힘들게 일한 나를 다정하게 껴안아 주는 모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를 비록 자연인 어머니를 사랑하지 않고 파괴와 오염을 일삼았지만 나를 한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땅과 햇볕과 바람을 통하여 풍요로운 새 생명의 먹거리를 제공하고 “지난 여름 참으로 힘들었으니 편히 쉬어라”하고 토닥토닥 내 어깨를 두드리며 기쁨과 휴식의 시간을 제공한다. 나아가 그 휴식의 시간을 통하여 결실의 의미 또한 깨닫게 한다. 결실을 통하여 감사를 느끼고, 감사에서 오는 기쁨을 가족과 함께 나누게 한다. 한가위에 노모와 함께 송편을 빚는 일은 한 해의 가장 큰 기쁨이다. 노모와 다정히 무릎을 맞대고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맛있는 음식을 장만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직 그때뿐이다. 아직도 어머니가 살아 계시니까 가능한 일이므로 송편을 빚는 일이 갈수록 더 소중하게 여겨진다. - 20 -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부터 송편을 만드실 때 꼭 우리 형제들을 불러 앉혀 놓고 같이 만들자고 하셨다. 나는 송편을 아주 작게 잘 만든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한테 배운 솜씨다. 나도 이제 송편을 빚을 때 아이들을 불러 다 함께 빚는다. 아이들이 어머니를 중심으로 빙 둘러 앉아 장난을 쳐가며 송편 빚는 모습을 보면 내 가슴이 한가위 보름달처럼 기쁨으로 차오른다. 한가위는 이런 기쁨의 시간이다. 결국 이런 시간은 가족과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고 조상과의 종적 관계를 확인하고 기리는 시간으로 이어진다. 햅쌀로 지은 밥이나 송편을 조상의 차례상에 먼저 차리는 것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오늘의 내 존재를 부모와 조상의 은덕으로 생각하고 감사를 드리는 일은 내 삶의 가장 소중한 가치다. 한가위는 내 삶의 반성과 성찰을 위한 시간이다. 자연인 어머니가 주신 곡식을 내 육체가 배불리 먹고 마시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기 위한 시간이다. 한가위를 맞아 나는 올해도 이기로 가득찬 내 내면을 위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 본다. 내 인생에게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내 영혼에게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 깨닫고 고백하는 깊은 성찰과 기도의 시간을 가져본다. 한가위 보름달은 초승달과 반달이라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뎌왔다. 나도 저 달을 통해 보름달이 되기까지의 인내와 기다림을 잊지 말아야 한다. 보름달과 같은 눈을 지니고 나와 이 시대의 가난한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한다. 한가위 달이 이토록 둥근 것은 원만한 내면을 지닌 인간이 되라는 뜻이다. 한가위 둥근달이 이토록 밝은 것은 어두운 나를 밝히고 가난한 이웃 더한 환히 밝히라는 뜻이다. ■ 서울도 고향이다 서울은 내 고향이 아니다. 나는 경남 하동에서 태어나 줄곧 대구에서 자랐다. 그래서 누가 고향 이야기를 하면 대구가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요즘은 서울이 고향처럼 느껴진다. 너무 오랫동안 서울에서 산 탓이다. 고향 대구에서 산 날보다 서울에서 산 날들이 훨씬 더 많아 몸담고 사는 곳이 고향이라는 말이 더욱 절감된다. 고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서울로 올라와 벌써 나이 예순이 넘었으니 어쩌면 서울을 고향으로 여길 때도 된 듯싶다. - 21 - 한 때는 서울을 떠나 고향 대구에서 살기를 꿈꾸었다. 어쩌다가 고향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있어 보이고 인정 또한 훈훈했다. 서울의 종로나 광화문 거리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한테서 훅 느껴지는 냉기 같은 게 고향 친구들한테서는 느껴지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서로 차가운 얼굴로 못 본 척하는 이들이 사는 곳이 서울이라면,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서로 따뜻하게 말을 나누며 사는 이들이 바로 고향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나이 마흔이 넘기 전에 고향 대구에 가서 살 꿈을 꾸었다. 그 꿈은 이룰 수 없었다. 직장을 옮기는 것도 문제였지만 이미 서울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가족들을 데리고 쉽게 서울을 떠날 수가 없었다. 어머니가 계신 곳이 고향이라면 내 어머니 또한 대구를 떠나 서울에 사셨다. 사실 나는 40년 넘게 서울에 살면서도 서울이 고향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서울은 늘 나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나 또한 서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늘 자기 집이 없어 철따라 이사 다니는 가난한 가장의 심정이거나, 전장에 나가 적들과 싸우다가 잠시 바람 부는 들판에 앉아 쉬고 있는 한 병사의 막막한 심정일 뿐이었다. 서울을 고향처럼 느끼게 된 지금도 실은 서울이 두렵고 무섭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이 삭막한 서울에서도 고향에서나 느낄 수 있는 작은 기쁨을 하나 둘 발견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침 출근길에 교회 십자가 철탑위에 있는 까치집을 보았을 때 왠지 가슴속이 환히 밝아왔다. 그 후로 나는 더욱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서울에는 사람만 사는 게 아니었다. 새들도 살았다. 서울에는 고층 빌딩만 있는 게 아니었다. 나무나 풀도 꽃도 있었다. 그날 이후로 보도블록 틈새에 피어난 한 송이 민들레만 보아도 감격했다. 민들레 주변으로 기어 다니는 개미를 보아도 느티나무 둥치에 붙어 있는 매미 허물을 보아도, 한강을 날아오르는 청둥오리 떼를 보아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동안 나는 서울에 사는 사람들의 냉혹함과 사막화된 도시의 삭막함만 보고 꽃과 새들을 보지 못한 것이다. 빌딩의 화려하고 천박한 불빛만 보고 빌딩과 빌딩 사이의 밤하늘로 떠오른 초승달을 바라보지 못한 것이다. 그만큼 내 삶에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 22 - 요즘 나는 서울의 사람들보다는 서울의 풀과 꽃을 보려고 노력한다. 고층빌딩의 눈부신 간판보다 빌딩 사이로 슬며시 얼굴을 내민 달을 보려고 노력한다. 길을 걸을 때는 천천히 걸으면서 감나무가 있는 이웃집 담도 슬쩍 넘겨다본다. 가을하늘 위로 펼쳐진 구름도 신기롭고 좀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던 북한산 인수봉도 눈에 들어온다. 그래서일까. 이제 봄이 올 때마다 아파트 앞마당에 피는 산수유도 바라볼 줄 안다. 서울도 고향이다. 서울은 스스로 자연을 찾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고향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 얼굴을 볼 때마다 서울이 아름답게 느껴지고, 그 아름다움이 내 어릴 때 고향의 산과 들에서 느꼈던 아름다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이제 서울을 훌쩍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도 기차가 한간 철교 위를 달릴 때쯤이면 오히려 어머니의 품에 안긴 듯 마음이 편안해 진다. 제 4 부 ■ 내 인생의 스승 운주사 석불들 겨울 운주사를 다녀왔다. 새해에 내 인생의 스승을 찾아뵙고 엎드려 절을 올리고 싶어서였다. 누군가에게 엎드려 절을 올린다는 것은 진정 나를 찾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므로 연초에 그런 시간을 갖고 싶었다. 그러나 선뜻 누구를 찾아뵙긴 어려웠다. 찾아뵙고 싶은 분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나셔서 그 대신 운주사 석불들을 찾아뵙고 절을 올렸다. 그동안 몇 번 운주사를 찾아갔지만 눈 내린 겨울 운주사를 찾은 건 처음이었다. 석불들은 찬바람에 말없이 눈을 감고 고요히 서 있거나 앉아 있었다. 어떤 석불은 눈이 채 녹지 않아 머리에 흰 고깔을 쓰고 있는 것 같았고, 칠성바위 위쪽에 계신 와불은 가슴께에 눈이 좀 남아 있어 마치 흰 누비이불을 덮고 있는 것 같았다. 석불들은 내가 절을 올리자 두 팔을 벌리고 나를 꼭 껴안아 주었다. 어릴 때 엄마 품에 안겼을 때처럼 아늑하고 포근했다. 지난 한 해 동안 고통과 상처로 얼어붙었던 내 가슴이 이내 따스해졌다. 다시 한 해를 살아갈 힘과 용기가 솟았다. 운주사를 가면 다들 마음이 편하다고 한다. 나도 그렇다. 마치 부모형제를 찾아뵌 것 같다. - 23 - 그런데 그들을 가만히 쳐다보고 있으면 하나같이 못 생겨서 오히려 더 반가운 생각이 든다. 그들은 대부분 코가 길고 이마 쪽으로 눈이 올라붙은 비대칭 얼굴인데다 거의 다 뭉개졌다. 오랜 세월 만신창이가 된 탓인지 아목구비를 제대로 갖춘 이를 찾아보기 힘들다. 평소 내가 참 못생겼다고 생각되는데 이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싹 달아난다. 그래서 그들을 볼 때마다 부처님을 자주 뵙는다기보다 골목에서 마주친 이웃을 만난다는 생각이 들어 더욱 정이 간다. 운주사 석불 중에 눈을 뜨고 있는 이를 찾긴 힘들다. 다들 눈을 감고 있다. 눈을 감고 양 손을 무릎 아래로 손바닥이 보이게 내려놓고 있는 자세는 무엇 하나 소유하지 않고자 하는, 나보다 남을 더 생각하는 염원이 담긴 자세다. 눈을 감으면 비로소 남이 보인다. 내가 보인다 하더라도 남을 위한 존재인 내가 보인다. 그동안 나는 나를 위해 항상 눈을 뜨고 살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는 다 나를 위한 존재였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이기적인 삶인가. 지난여름엔 매미가 너무 시끄럽게 운다고도 싫어하지 않았는가. 매미는 자신의 삶을 열심히 사는 것인데 나는 매미만큼이라도 열심히 산 적이 있었던가. 20여 년 전 운주사를 처음 찾았을 때 와불을 찾아가는 산길 처마바위 밑에 있는 한 석불을 보고 나는 그만 숨이 딱 멎는 듯했다. 마모될 대로 마모된 얼굴로 눈을 감을 채 바라보며 모든 것을 버린 듯 고요히 앉아 있는 석불의 모습에 울컥 울음이 치솟았다. 고통의 절정에서도 고요와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석불의 모습에서 아마 내가 지향해야 할 삶의 자세를 발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날 나는 오랫동안 그 석불 앞에 울며 서 있었다. 그러자 석불이 고요하고 낮은 소리로 내게 말했다. “울지 마라. 괜찮다, 나를 봐라.” “……” “손은 빈손으로, 눈은 감고 영원을 향해, 그렇게 살아라.” 그날 이후 운주사 석불들은 초라한 내 인생의 스승이 돼주었다. - 24 -

 

■ 삶은 이기는 게 아니라 견디는 것이다

나뭇잎들이 떨어진 창밖에 유난히 한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그 나무는 지난봄 온몸의 가지를 절단 당한 나무다. 나무가 시야를 가리고 집 안을 어둡게 한다고 아파트 저층 주민들이 항의한 탓이다. 그래서 봄에 가지치기를 할 때 가지만 자른 게 아니라 아예 윗동을 싹둑 잘라버렸다. 마치 커다란 말뚝 하나를 땅에 박아 놓은 것처럼 만들어 버렸다. 오랫동안 그 나무를 잊고 지냈다. 내 삶에만 골몰한 나머지 사지가 절단된 나무의 삶에는 무관했다. 처음엔 그 나무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어떻게 저렇게 잘라버릴 수가 있는가, 너무 인간 위주다. 나무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어떻게 인간을 소중히 여길 수 있는가’하고 안타까워했으나 곧 잊고 말았다. 그런데 오늘 그 나무가 의연한 자세로 겨울을 기다리며 묵묵히 나를 바라본다. 나무는 싹둑 잘린 윗동 주변에 그래도 몇 개의 새 가지를 뻗어 잎을 달고 있고, 그 아래 몸통 몇 군데에도 가지를 길게 내뻗고 있다. 그는 그렇게 새로운 가지를 뻗기까지, 봄과 여름을 지내고 겨울을 기다리는 이 순간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얼마나 인간이 원망스러웠을까. 사람들은 나무를 함부로 대한다. 나무가 없는 도시는 죽음의 도시임에도 하찮은 소비재처럼 여긴다. 몇 해 전 한 여고에서는 개교 100주년 기념으로 교문 확장 공사를 하면서 30년 넘게 거목으로 자란 플라타너스 몇 그루를 잘라버렸다. 교문이 더 넓게 확장됨으로써 진입로에 있던 나무 몇 그루가 희생당한 것이다. 언젠가 호주 시드니에 있는 친지 집에 며칠간 머물 때였다. 나무가 울타리처럼 집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고 몹시 부러워하자 친지는 오히려 나무를 탓하는 말을 했다. 집이 좁아 증축공사를 하려고 하는데 시에서 나무 때문에 허가를 내주지 않는다는 거였다. 마당 한 쪽에 있는 나무의 뿌리가 증축할 위치에 닿아 있어 허가를 내주면 결국 나무에 손상을 주게 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 얼마나 인간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난 자연중심적 사고의 실천인가. 시드니 도심에 있는 ‘하이드파크’에는 나무들이 울창해 원시림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듯하다. 그곳을 산책하는 시민들은 아름다운 나무들 때문에 아름답고 평화스러워 보인다. 이는 자연이 중심이 되는 도시가 결국 인간을 위하는 도시가 된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다. - 25 - 내가 사는 아파트 정문 입구엔 수령이 100년 정도 된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밑동 주위로 석축을 쌓아 나름대로 보호하고 있으나 한 번은 연말이 되자 나무 온몸에 형형색색의 꼬마전구를 친친 감아 놓았다. 밤이 되면 꼬마전구가 화려한 불빛을 내뿜었다. 그런데 연말이 지나고 봄이 되어도 나무에 감아 놓은 꼬마전구를 제거하지 않았다. 5월이 되어 신록의 나뭇잎이 돋아나도 누구 하나 관심조차 가지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아파트 관리실에 전화를 해 잎이 무성해지기 전에 빨리 제거해야 한다고 해도 철거비용만 몇백만 원이 든다며 차일피일 했다. 하는 수 없이 구청의 해당부서에 민원성 항의 전화를 하자 그제야 제거되었다. 만일 누가 우리 몸에 전깃줄을 친친 감아 놓고 풀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올해도 연말연시를 맞아 거리의 나무들은 작은 전구가 달린 전깃줄에 온몸을 친친 감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밤마다 형형색색의 현란한 불빛에 잠 못 이루고 고통스러워 할 것이다. 인간은 나무에게 그런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한다. 나무를 인간처럼 소중히 여겨야 한다. 인간은 나무 없이 살지 못한다. 다시 창밖의 나무를 바라본다. 나무는 여전히 말뚝 같은 몸매를 하고 미소를 머금은 채 나를 바라본다. 인생에 어떤 고통이 있다면 사지가 절단됐던 저 나무처럼 오늘을 견뎌야 한다. 그 나무에서 새로 뻗어 나온 고통의 가지는 바로 인내와 희망의 가지다. 만일 그 나무가 지난 봄날의 고통을 견디지 못했다면 겨울의 고통 또한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겨울을 견뎌내지 못하면 봄도 오지 않는다. 우리에게 해마다 봄이 오는 까닭은 겨울을 견뎌내는 그런 인내의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 슬픔 속에 성지(聖地)가 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께서는 2005년에 이해인 수녀와 월간 ‘샘터’에서 송년 대담을 하실 때 슬픔에 대해 이런 말씀을 하셨다. “슬픔이란 거, 그게 참 묘한 데가 있어요. 슬픔의 항아리란 늘 비어 있다가도 어느 순간 갑자기 넘치도록 채워지더라고요. 병으로 남편을 잃고 넉 달 만에 사고로 아들을 잃었으니까요 그때가 1988년이었는데, 내가 겪고 있는 슬픔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게 견딤의 연속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죠. 기다려 - 26 - 주는 것도 결국은 슬픔을 나누는 방식인 것 같아요. 슬픔은 절대로 극복할 수 없어요. 이길 수도 없어요. 어떻게 극복하고 어떻게 이겨요? 눈물을 흘리면 이길 수 있어요? 그건 극복이 아니죠. 극복이란 말은 강요의 성격을 띠니까요. 그것은 슬픔에 잠긴 사람을 더 힘들게 하는 거예요. 극복하기 위해서는 그 기억을 잊어야 하는데, 내가 그 기억을 잊어버리면 우리 애는 이 세상에 안 태어난 것과 마찬가질 수 있잖아요. 기억을 지우고, 극복하는 일은 참 잔인한 일이에요.” ‘슬픔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는 박완서 선생의 말씀을 나는 한 시도 잊은 적이 없다.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오스카 와일드는 ‘슬픔 속에 성지(聖地)’가 있다고 했다. 1895년에 그는 ‘막중한 풍기문란’인 동성애 사건으로 노동금고형에 처해져 2년간 감옥생활을 했는데 그때 쓴 ‘옥중기’에 그런 말을 남겼다. 그 말은 오스카 와일드가 감옥에 갇힌 자신의 슬픔을 깊이 성찰한 말이다. 인간의 슬픔을 가장 높은 경지에까지 끌어올린 말로서 인간은 슬픔을 통해서 비로소 성스러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슬픔을 통해 영혼이 가난해지고, 가장 가난한 곳에서 더욱 겸손해지고 아름다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은 오스카 와일드의 말에 박완서 선생의 말씀을 덧붙여서 ‘슬픔의 견딤 속에 성지가 있다.’ ‘슬픔의 견딤을 통해야만 인간은 성스러워질 수 있다’고 조금 수정해 본다. 슬픔을 견딘다는 것은 내 영혼의 등불을 켜기 위해 꼭 필요한 기름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인내는 인간 정신의 숨겨진 보배‘라고 했는가. 나치 수용소에서 발견된 낙서 중에는 이런 낙서가 있다고 한다. “하루하루가 아무리 힘들고 끔찍해도 나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 아닌 내일 슬퍼하겠다.” 내일 슬퍼하기 위해서는 오늘의 슬픔을 견뎌야 한다. 견디지 않으면 성지에 다다를 수 없으므로 슬픔은 우리에게 견딤을 요구한다. 슬픔은 내 인생을 견디게 하고 아름답게 하기 위한 필요조건이다.

 

■ 다시 첫눈을 기다리며

 - 27 - 다시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기온이 뚝 떨어져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종종걸음을 치다가도 첫눈을 기다리며 하늘을 바라본다. 첫눈은 내가 기다리기 때문에 온다. 첫눈 오는 날 만나자는 약속 때문에 온다. 젊은 시절부터 나는 얼마나 첫눈을 기다리며 살아왔던가.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얼마나 기다리며 살아왔던가. 이제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한 사람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가고 더러는 연락조차 두절돼 만날 수가 없지만 겨울이 오면 그날의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둘 다시 떠오른다. 침엽수는 겨울이 되어도 잎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 때문에 폭설이 내리면 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만다. 그러나 활엽수는 그렇지 않다. 겨울을 맞이하면서 나뭇가지마다 잎을 다 떨어뜨려 쌓인 눈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낸다. 이제 내 인생의 계절에도 겨울이 오고 있다. 겨울이 깊어가기 전에 한 그루 활엽수처럼 내 과욕의 나뭇잎을 다 떨어뜨려야 한다. 그럼으로써 어떠한 폭설도 묵묵히 견딜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침엽수처럼 그대로 잎을 달고 있으면 눈의 무게에 내 인생의 나뭇가지가 부러져 큰 고통 속으로 빠져들게 될 것이다. 요즘은 눈이 와도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다. 아침에 일어나 “와! 눈이다”하고 탄성을 지르던 예전과 달리 교통대란부터 먼저 생각한다. 눈사람도 만들지 않는다. 우리 아파트엔 아이들을 둔 젊은 부부가 많이 사는데도 엄마와 아이가 눈사람을 함께 만드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눈싸움을 하며 웃음을 터뜨리는 젊은 부부의 모습 또한 보지 못했다. 눈이 내리면 세상이 따뜻해지는데도 그런 사람이 없음으로써 그만큼 세상이 삭막하고 싸늘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내 가슴속에는 어릴 때 내가 만든 눈사람이 녹지 않고 그대로 살아 있다. 내가 힘들 때마다 그 눈사람이 내게 친구처럼 말을 걸고 위로해 준다. 첫눈이 오지 않는 겨울은 불행하다. 그러나 첫눈이 오지 않는 겨울은 없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올해는 좀 푸짐하게 내렸으면 좋겠다. 첫눈이 함박눈으로 내려 우리 시대의 모든 갈등의 지붕을 새하얗게 덮어 모두 하나 되게 했으면 좋겠다. 갈 곳 없는 노숙인의 추운 발길 위에, 리어카를 끌며 폐지 줍는 노인의 구부정한 가슴속에 더 많이 내렸으면 좋겠다. - 28 - ■ 실패를 기념하라 성공은 굳이 자기 자신이 간직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실패는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기억하고 간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패를 기념하는 날이 있어야 한다. ‘경영의 신’으로 칭송받는 일본의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한 번 넘어졌을 때 원인을 깨닫지 못하면 일곱 번 넘어져도 마찬가지다. 가능하면 한 번만으로 원인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실패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실패를 거듭한다면 그 원인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실패를 기념할 줄 알아야 한다. 실패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견디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실패를 기념한다는 것은 실패의 원인을 깨닫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며, 그런 시간을 통해서만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기념하지 않는 실패는 실패가 아니다. 실패는 기념함으로써 비로소 성공의 싹을 틔운다. 인생이라는 학교에서는 성공보다 실패가 교사다. 나는 인생이라는 학교에서 실패라는 교사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그런 학생이 되고 싶다.

 

 ■ 무엇을 위하여 종은 울리나

종은 외로운 존재다. 종각에 외롭게 매달려 누군가가 자기를 힘껏 때려 주기만을 기다린다. 누가 강하게 때려주어야만 종은 제 존재의 소리를 낼 수 있다. 종은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온 몸에 아무리 상처가 깊어가도 누가 종메로 힘껏 때려주기만을 기다린다. 만일 때려주기를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 종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종이 아니다. 아무도 치지 않는 종은 이미 종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다. 서울 종로 보신각종도 1년 내내 누군가가 자기를 힘껏 때려주기만을 기다린다. 지금의 보신각종은 1986년에 새로 만든 종이다. 원래 있던 종은 금이 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그때 그 종을 만든 종장이께서는 “금이 가고 깨어진 종을 종메로 치면 깨어진 소리가 나지만 완전히 깨어진 종의 파편을 - 29 - 치면 맑은 소리가 난다”는 수필을 한 편 썼다. 나는 그 글을 읽고 큰 감동의 받아 내가 버린 과거라는 고통의 피편들을 다시 주워 모았다. 산산조각 난 내 인생이라는 종의 파편 하나하나마다 맑은 종소리가 난다는 사실은 내 인생의 고통을 소중하게 여기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법정 스님께서는 “종이 깨어져 종소리가 찢어져도 종이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아무리 깨어진 종이라도 종소리를 울리는 한 종이라는 말씀이다. 내가 아무리 못나도 못난 그대로 나 자신이라는 뜻이다. 스님께서는 또 “종소리에는 종을 치는 사람의 염원이 담겨 있느냐 안 담겨 있느냐가 문제”이며, “종 치는 사람의 염원이 담겨 있다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에게 전달된다”고도 하셨다. 나도 인간이라는 하나의 종이다. 누군가가 나를 때려주어야만 내 존재의 소리를 낼 수 있다. 내 삶에 고통이 존재하는 것은 바로 내 존재의 맑은 종소리를 내기 위해서다. 종은 누가 자기를 힘껏 때려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지금까지 견딜 수 없는 고통에 아파하는 것도 내가 하나의 종으로서 아름다운 종소리를 내기 위함이다. 나도 이제 그 타종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해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종메로 거칠고 강하게 친다 해도 머리 숙여 감사해야 한다. 우리 조상들은 종 밑에 항아리를 묻었다. 지금도 영주 부석사와 남해 금산 보리암에 가보면 범종 밑에 항아리가 묻혀있다. 그 항아리는 제 몸을 통과하는 고통의 종소리를 맑고 아름답게 여과시키는 음관의 역할을 한다. 내가 이 시대의 종이 되지 못한다면 종 밑에 묻힌 항아리와 같은 존재라도 되어야 한다. 우울한 이 시대의 종소리를 맑게 변화시키는 음관의 역할이라도 해야 한다. 올 한 해 당신은 외로웠는가. 올 한 해 당신은 인생이라는 종루에 매달려 무엇을 기다렸는가. 보신각종처럼 아니면 어느 산사의 범종처럼 당신은 누가 때려주기를 기다리는 그런 숭고한 기다림의 자세를 지녀 보았는가. 내가 하나의 종이라면 내 외로움의 고통은 당연하다. 산사에 고통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지 않으면 산사가 아름답지 않듯이 내 인생에 고통의 종소리가 울리지 않으면 내 인생은 아름답지 않다. 무엇을 위하여 나의 종은 울리는가. - 30 -

 

■ 지는 꽃은 또 피지만 꺾인 꽃은 다시 피지 못한다

-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는 아들에게 부모를 떠나 스스로의 인생길을 떠나는 후민에게 축하의 잔을 건넨다. 축하한다! 나도 기쁘다. 자식은 부모를 떠나야 비로소 자신의 인생을 살 수 있는데 이제 네 인생이 바로 그런 시점이다. 러시아어 전공자로서 러시아 현지에 취업되었다는 것은 그동안 네 노력의 대가다. 나는 늘 ‘목표를 세우면 목표가 나를 이끈다’고 말해 왔는데 그 말이 너를 통해 실증된 셈이다. 네가 ‘러시아어’라는 목표를 세웠기 때문에 그 목표가 지금의 너를 이끌어 준 것이다. 이제 앞으로도 너의 또 다른 목표가 너를 이끌어줄 것이다. ‘배는 항구에 정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항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만일 배가 항구에 머무르고만 있다면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 그러니까 너는 지금 인간이라는 너의 배를 인생이라는 너의 바다를 향해 막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물론 바다는 잔잔하기도 하지만 거칠기도 하다. 때로는 폭풍도 몰아친다. 그렇지만 일단 항구를 떠나 바다로 나아간 배는 그 폭풍을 견디고 항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배를 위해 폭풍이 멈춰주지 않기 때문이다. 배는 오직 그 폭풍을 참고 견디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너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다 어떠한 고통이라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한상 참을 ‘인(忍)’자를 가슴에 새겨라. ‘지는 꽃은 또 피지만 꺾인 꽃은 다시피지 못한다’고 한다. 젊은이가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면 아무리 어렵더라도 뜻을 굳게 가지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현대’의 창업주 정주영 회장은 “다른 사람이 다른 일에 노력할 때 나는 돈 버는 일에 온 힘을 다해 노력했기 때문에 오늘의 ‘현대’를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피겨의 여왕’ 김연아 선수도 “한 동작을 익히기 위해 만 번을 연습한다”고 하니 오늘의 그녀를 이룬 건 노력의 결과이지 우연의 결과는 아니다. 시인인 나도 마찬가지다. 시는 타고난 재능에 의해서 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시도 노력에 이해 쓰는 것이다. 나도 한 편의 시를 완성하기 위해 수없 - 31 - 이 고쳐 쓴다. 한 작품당 평균 서른 번 내지 마흔 번 이상은 고쳐 쓴다. 어떤 작품은 10년이 걸려 완성한 것도 있다. 조지훈 시인은 ‘승무(僧舞)’를 쓸 때 3년이나 절을 찾아다니면서 직접 승무를 보고 썼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시인으로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시를 쓰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뿐이다. 너는 힘들겠지만 어떤 인간관계에서든 두 사람이 동시에 화를 내지 않도록 해라. 그래야 잠들기 전에 화를 가슴에 품지 않게 된다. 성서에 보면 ‘해가 질 때까지 분을 품지 말라’ 는 말씀이 있다. 잠들기 전에 가슴에 분노를 품고 잠들면 너의 하루가 평화스러워질 수 없다. 모든 인간관계는 먼저 주는 데서부터 시작되고 주지 않으면 받지 못한다. 다른 사람에게 너의 이익을 구할 생각은 애초부터 하지마라. 상대방이 네게 뭘 주든 안 주든 네가 줄 것만을 생각해라 미움을 선택하면 관계는 더 악화된다. 사랑을 선택하면 너의 하루하루가 즐겁고 기뻐질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중요하다. 생존의 필수조건이다. 돈의 가치는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사랑이다. 돈의 가치에 사랑의 가치가 부여되어야만 돈의 가치는 형성된다. 무엇보다도 건강에 유의하여라. 사람은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다 잃는다. 너는 특히 러시아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므로 매사 건강에 해가 되는 것은 취하지 않도록 해라.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는 늘 내게 ‘일 조심, 사람 조심, 몸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도 할아버지의 이 당부를 네게 전한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당부할 것이 있다. 늘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아라. 내가 오늘 가진 것을 감사하지 않으면 불행해질 수 있다.

 

■ 용서의 계절은 언제나 오고 있다.

청주여자교도소에서 시 낭송회를 가진 적이 있다. 수형자들에게 책의 향기를 불어넣기 위해 교도소에서 열린 시 낭송회였다. 낭독 순서가 끝나고 질문 시간이 되자 한 수형자가 “어떻게 하면 남을 용서할 수 있느냐”고 내게 질문했다. 순간 당황스러웠다. 나 자신도 남을 용서 - 32 - 하지 못해 평생을 전전긍긍하는데 내가 제대로 답을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곧 용서야말로 그들의 가장 절박한 내면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내가 아니더라도 그 누구에겐가 그런 질문을 하고 싶었음이 분명해 보였다. 나는 일단 질문을 받았으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수형생활을 하는 그들의 입장을 먼저 생각해서 “용서하지 못한다고 해서 너무 자신을 미워하거나 증오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먼저 용서하려고 결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 결심이 유지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이 발견되더라도 그 또한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 다음은 신의 영역이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미움과 증오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송봉모 신부님이 쓴 책 ‘상처와 용서’에서 읽은 부분을 바탕으로 한 대답이었다. 수형자들은 진지하게 듣고만 있었다. 그들은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용서하지 못하는 과정 속에서 치솟는 분노가 결과적으로 범죄행위에까지 이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감옥에 갇힌 자가 되어 육체도 고통받지만 영혼 또한 고통받고 있을 것이다. 용서의 문제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이 어찌 그들뿐일까 나 또한 마찬가지다. 육체는 교도소에 갇혀 있지만 영혼은 용서의 교도소에 갇혀 사는 수형자다. 한 해가 저물 때마다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이 새해까지 이어지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해 보지만 매번 실패하고 만다. 그래서 용서는 누구에게나 인생의 가장 큰 화두다. 어느 새 한 해가 다 지나가고 달력은 12월은 가리킨다. 계절 중에 용서의 계절이 있다면 바로 12월이다. 겨울이 되어 나무가 잎을 다 떨어뜨리는 것은 용서하기 위하며 자신의 알몸을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다. 나무들이 지난 계절 내내 미움과 증오의 나뭇잎을 매달아 놓았다면 12월의 나무들은 그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알몸으로 용서의 자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나무들은 용서의 자세로 겨울을 보내기 때문에 이듬해 봄이 오면 다시 새움을 틔운다. 나도 그런 나무의 자세를 닮아야만 인생에 새해가 오고 봄이 올 수 있다. - 33 -

 

■ 다산초당에서 만난 ‘뿌리의 길’ 진보와 보수의 갈등이 깊은 이 시대를 생각할 때마다 전남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을 생각한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산길을 떠올린다. 조선시대의 실학자이자 정치가였던 다산 선생이 강진 유배 생활 중에 ‘목민심서’ 등 불후의 명저를 저술한 다산초당도 중요하지만 다산초당으로 가는 산길 또한 그 의미가 특별하기 때문이다. 다산 초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귤동 마을 입구에서 대나무와 두충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숲길을 지나 다시 소나무 산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한다. 20여 년 전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 나는 그 산길에 들어서자마자 걸음이 딱 멈추었다. 수백 년 된 굵은 소나무 뿌리가 지상을 뻗어 나와 서로 뒤엉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장엄했다. 마치 무슨 거대한 ‘식물성 파충류’들이 이리저리 꿈틀꿈틀 산길을 기어가는 듯했다. 길 위로 툭툭 튀어나온 그 고목의 뿌리를 선뜻 밟고 올라갈 수 없어 수백 미터나 되는 그 길을 한참동안 올려다보았다. 200여 년 전, 정치가로서의 꿈과 좌절을 가슴에 품고 수없이 그 뿌리를 딛고 오르내렸을 다산 선생의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 학문적 이상을 정치개혁과 사회변혁을 통해 이루고자 했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유배된 다산 선생은 지상으로 뿌리가 드러난 유배의 산길을 걸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초당으로 가는 이 산길에 반드시 땅속으로 뻗어나가야 할 뿌리가 굳이 지상으로 구불구불 힘차게 뻗어 나온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라의 뿌리는 백성이고, 정치의 뿌리도 국민이며, 사랑의 뿌리 또한 서로 껴안고 하나가 되는 데에 있다고 생각하신 게 아닐까. “이 길은 뿌리의 길이야.” 나는 그때 그 길을 ‘뿌리의 길’ 이라고 명명했다. 하늘과 구름과 별이 보이는, 지상으로 당당하게 뿌리가 뻗어 있는 그 길이 다산 선생의 애민정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산 선생이 그 뿌리의 길을 통해 국가든 개인이든 우리 삶의 어디에서든 근본과 본질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무언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뿌리의 길은 뿌리를 밟지 않고 오르기는 힘들다. 뿌리를 밟지 않으려고 해 - 34 - 도 어디 발 디딜 데가 마땅치 않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뿌리를 밟고 올라갔는지 뿌리마다 수많은 상처가 나 있다. 어떤 뿌리는 상처의 껍질마저 벗겨져 반질반질하다. 뿌리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에 밟힐 때마다 그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겠는가. 그러나 뿌리는 묵묵히 아픔을 견디고 자신을 힘껏 밟고 올라가는 이들의 밑받침이 되어준다. 이는 다산 선생의 시대적 희생과 상처를 의미하는 것으로 뿌리마다 다산 선생의 인고의 눈물이 매달려 있다. 다산 선생에게 유배라는 고통과 시련의 세월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는 선생이 남기신 600여 권의 저서를 통해 백성이 근본이 되는 실사구시의 사상적 유산을 접할 수 없을 것이다. 뿌리가 지상으로 솟아나오면 나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길의 나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뿌리를 계단처럼 힘껏 밟고 올라갔어도 살아남아 있다. 그것은 지상의 뿌리들이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함께 공동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합일의 자세와 그 정신의 힘이 그들을 살아남게 한 것이다. 함께 화합을 이룸으로써 나무의 생명을 유지하고 산길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이룬 점, 그것이 다산 초당으로 가는 뿌리의 길의 의미다. 나무뿌리는 혼자 있으면 거칠 데 없이 뻗어 나가느라 직선이 되기 쉽지만, 함께 있으면 다른 뿌리와 어울리기 위해 자연히 곡선의 아름다움을 지닌다. 실제로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의 뿌리를 부분적으로 보면 이리저리 나눠지고 갈라져 어지러울 정도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움이 그지없다. 나는 이 아름다움처럼 우리 시대도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창출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뿌리의 길의 아름다움 앞에서 합일 된 정신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본다.

 

■ 집에서 무슨 신문 보세요

 “집에서 무슨 신문 보세요?” 요즘 이런 질문을 자주 받는다. 초면인데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다. 처음엔 무심코 대답하다가 이제는 그냥 씩 웃고 만다. 아니면 경제지나 스포츠신문을 본다고 말한다. - 35 -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무척 곤혹스럽다. 질문한 상대방과 내가 서로 다른 성향의 신문을 보고 있다고 확인되면 대화가 갑자기 끊기거나 전체 분위기가 서먹해진다. 서로 친해지려고 만났다가 오히려 관계가 악화되는 지뢰를 만난 셈이다. 구독하는 신문을 사람의 사회적 정치적 성향을 파악하는 잣대로 삼기 때문이다. 예전에 지금처럼 그렇지는 않았다. 누가 무슨 신문을 보든 그것이 인간관계 형성에까지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그러나 내 개인적 경험에 불과한 일이라 하더라도 요즘 유독 그렇다. 그만큼 이념적으로 편가르기가 더 심해진 시대를 살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것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데가 바로 인터넷이라는 광장이다. 그 광장에서 익명과 은닉의 우산을 쓰고 서로 갖은 공격을 일삼는다. 정보화 시대라는 미명하에 우리는 이미 인격과 국격이 담보 잡힌 시대를 살아간다. 내 의견과 다르면 다 나의 적이 되는 시대를 살아야 한다면 그런 시대를 사는 국민은 무척 불행하다. 우리는 그런 불행의 시대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단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라고 한다. 어쩌면 단 하나의 신문만 탐독하는 사람도 ‘가장 무서운 사람’축에 들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집에서 구독하지 않는 신문도 인터넷을 동해 얼마든지 읽어볼 수 있다. 신문이 하나의 사안을 놓고 극명하게 다른 시각에서 보도하고 논평할 때 이 시대의 저울처럼 균형감각을 잃지 않으려면 독자인 나 자신이 현명해져야 한다. 미국 전 상원의원인 패트릭 모이니헌이 말한 대로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구나 ‘자기의 의견’을 가질 수 있지만 ‘자기만의 사실’을 가지지 않기 위해서는 더욱 그렇다. 새가 좌우 날개로 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안다. 그런데도 우리사회의 새는 편향된 한쪽 날개만으로 날아가길 원한다. 나와 이념적 성향이 다르다고 해서, 나와 다른 신문을 본다고 해서 상대방을 폄하하거나 불인정해서는 안 된다. 얼굴이 다 다르듯 우리는 생각이나 이념이 다 다르다. 만일 똑같다면 그게 바로 복제인간이다. 남을 인정해 주지 않는 사회는 복제된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러한 사회를 이루는 데 있어서는 선진화된 바보가 되고 싶은지 모른다. 얼마 전 김천 직지사 대웅전에 들러 부처님께 삼배했다. 절을 하고 나오자 - 36 - 누가 나보고 “종교가 가톨릭 아니냐”고 묻는다. 왜 가톨릭 신자가 부처님께 절을 하느냐,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내게 그건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수가 내 인생의 스승이라면 부처님 또한 마찬가지다. 내 문학의 스승을 만나도 엎드려 절을 올리는데, 내 인생의 스승인 부처님 앞에 절을 올리고 예를 갖추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김수환 추기경과 법정 스님만 해도 명동성당과 길상사를 오가며 강론과 법문을 하지 않았는가. 그분들은 우리에게 서로 싸워 벽이 되지 말고 사이좋게 강물처럼 함께 흘러가라고 몸소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왜 이렇게 나누어지고 갈라져서 내 편, 네 편을 따지는가. 두 사람이 똑같은 걸 보면서도 그것을 서로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왜 인정하지 않는가. 전북 익산시 장중 마을에 있는 한 그루 은행나무를 생각해 본다. 수령 300년이 된 이 나무 중간 부분에는 대나무 10여 그루와 30년 된 보리수나무가 담쟁이와 함께 무성하게 자란다. 봄부터 가을까지 이들이 형형색색 한데 한 몸이 되어 어울린 모습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우리도 이들처럼 대한민국이라는 나무 안에서 한 몸을 이루며 아름답게 살아가야 한다. ■ 평균적 가치관만 있는 게 아니다 한 남자가 물동이 두 개를 물지게에 지고 물을 날랐다. 오른쪽 물동이는 집에 도착해도 물이 가득 차 있었지만 왼쪽 물동이는 금이 가 물이 새는 바람에 물이 반도 차 있지 않았다. 그래도 남자는 늘 물이 새는 물동이로 물을 날랐다. 이를 보다 못한 마을 어른이 하루는 남자에게 점잖게 충고했다. “이보게, 자넨 어째 물이 새는 물동이로 물을 긷는가. 이제 그만 그 물동이는 버릴 때가 되었네.” 남자가 웃으면서 마을 어른께 대답했다. “아닙니다. 이 물동이는 물이 새지만 아주 소중합니다. 저길 한번 보십시오. 제가 물지게를 지고 온 길 왼쪽엔 항상 꽃과 풀들이 자라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기 오른쪽 땅은 먼지가 폴폴 일고 꽃 한 송이 피어 있지 않습니다. 비록 물동이가 금이 가 물이 새지만, 그 물이 메마른 땅을 적셔 풀꽃을 자라게 하니 어찌 버릴 수 있겠습니까.” - 37 - 이는 물 긷는 물동이가 물이 새면 더는 쓸모가 없으므로 버려야 한다는 평균적 가치관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만의 가치관을 지니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내 인생의 물동이도 금이 간 물동이다. 세상이라는 우물가에 가서 물을 가득 긷고 집에 와보면 언제 물이 샜는지 물동이에 물이 반도 차 있지 않다. 애써 금간 곳을 때우고 물을 길어도 그때뿐이다. 그래도 나는 내 물동이를 버리지 않는다. 물이 뚝뚝 샌다 할지라도 어디 좋은 데 쓰일 데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우화의 물동이처럼 언젠가는 세상의 마른 길가에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 축 처진 어깨에 힘이 솟는다. 이 시대를 사는 한 시인으로서 내가 평균적 가치관에 의존해서 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인은 늘 조금 외롭다 할지라도 평균적 가치관에 저항하는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을 지녀야 한다. 요절한 왼손잡이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는 “왼손이 심장과 가까우니 악수는 왼손으로 하자”고 말했다. 악수는 오른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되지만 왼손으로 해도 그 가치가 손상되지 않는다. 평균적 가치관이 세상을 유지시킬 수는 있지만 변화시키기는 어렵다. 물새는 물동이가 세상에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다.

 

■ 바람이 강하게 불어올 때가 연 날리기에 가장 좋은 때다

 ‘바람이 강하게 불 때야말로 연을 날리기에 가장 좋은 때다’라는 말이 있다. 일본 파나소닉의 창업주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한 말이다. 열한 살 때 점원 생활을 시작해 파나소닉을 설립하고 세계적 기업으로 키워낸 그는 “절체절명의 위기에서도 반드시 길은 있다. 제대로 연을 날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강한 바람이 불어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1929년 세계적인 대공황으로 위기에 처하자 그는 직원들의 근무 시간을 반나절로 줄이고 매주 이틀을 휴무로 정해서 생산량을 절반으로 감축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영자가 흔히 하는 방법은 임금 삭감과 정리해고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경기는 언젠가 반드시 좋아진다”고 하면서 직원들을 독려하고 월급을 전액 지급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그러자 직원들 역시 전심전력을 다해 오전에는 생산에 집중하고 오후에는 제품 판매에 나섰다. 덕분에 회사는 두 달여 만에 정상화되었으며 경쟁업체를 따돌릴 수 있었 - 38 - 다. 대공황의 위기가 회사를 한 단계 더 성장시키는 기회가 된 것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이 말은 연날리기뿐 아니라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내 인생에 고통의 바람이 강하게 분다고 해서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바람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떤 기회로 삼아 내 인생의 연을 잘 날릴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두려움은 내 인생을 파괴시킨다. 내가 두려워하고 절망했기 때문에 희망이 안 보이는 것이다. 하늘이 있기 때문에 구름이 잇는 것이지 구름이 있기 때문에 하늘이 있는 것은 아니다. 흔히 무슨 일을 하더라도 “때를 놓치지 말라”고 한다. 그때그때 그 일을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기가 있는데 그 적기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좀 힘들고 견디기 어렵다고 해서 그것을 피하려 들지 않는 게 좋다. 피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만일 연이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이 아프다고 해서 바람을 피하려고 든다면 어찌 하늘 높이 자신을 띄울 수 있겠는가. 연은 하늘 높이 자신을 띄우기 위해 바람이라는 고통을 받아들이고 견디지 않으면 안 된다. 바람은 연의 본질적 대상이자 숙명인 것이다. 바람이 없으면 내 인생이라는 연을 날릴 수 없다. 내 인생이라는 연을 날리기 위해서는 강한 고통의 바람이 필요하다. 연을 제대로 날리기 위해서는 바람이 강하게 불어와 주어야 한다. 지금도 내 손엔 어릴 때 연을 날리며 강한 바람과 맞서던 연줄의 팽팽한 기운이 다시 솟는다.

 

■ 새해의 눈길을 걸으며 새해의 햇살이 눈부시다.

우리는 또 시간을 매듭지어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라는 새로운 시간을 얻게 되었다. 누구나 골고루 차별 없이 1년이라는 시간의 선물을 받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정녕 이 순간이야말로 낡음과 더러움을 버리고 다시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찬란한 순간이다.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은 새로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고, 새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것이다. ‘쥬라기공원’등의 영화를 만든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때 그는 기자회견을 하면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은 어떤 새로운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늘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합니다.” - 39 - 스필버그 감독처럼 ‘오늘 내게 무슨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하면 그 하루가 알찬 하루가 되듯이 ‘올 한 해 내게 무슨일이 기다리고 있을까’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면 그 새해가 알찬 새해가 될 수 있다. 문밖을 나와 천천히 새해의 눈길을 걷는다. 눈길 위로 두 사람이 걸어간 발자국이 나 있다. 발자국이 나란히 일정한 폭으로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서로 사랑하는 사람의 발자국이다. 조용히 그 발자국을 따라가 본다. 빌자국끼리 중간중간에 잠시 포개져 있는 부분이 보인다.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선 채로 잠시 서로 껴안고 키스를 나누면서 생긴 발자국이다. 새해에는 눈길을 걸어가는 우리의 발자국이 그렇게 중간중간에 많이 포개져 있게 되기를 바란다. 만일 우리가 서로 미워한다면 싸움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히게 되어 새해의 눈길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을 것이다. 어느 농부가 해마다 정원 한구석에 잡초처럼 피어나는 민들레 때문에 골치가 아프다고 했다. 그러자 한 현자가 “어떻게 하면 민들레를 뽑아버릴까 하고 생각하지 말고 어떻게 하면 민들레를 사랑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라”고 말했다. 우리에게는 미움도 분노도, 그리하여 고통에 이르는 것도 삶의 한 부분이다. 그것은 버리고 싶다고 해서 곧장 버려지는 게 아니다. 버리고 싶어도 버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진정한 사랑을 깨닫기 위해서는 미움과 분노도 필요하다고 그 가치를 받아들이는 슬기가 요구된다. 그 슬기는 내 마음 속에 사랑이 가득 들어 있어야 가능하다. 내 마음 속에 미움과 증오가 가득 차 있으면 아무리 어여쁜 꽃도 보기 싫고 미워지기 마련이다. 새해라는 시간은 신의 거룩한 선물이다. 이 선물을 얼마나 거룩하게 여기고 쓰는가는 우리 각자의 몫이다. 밑동이 잘린 나무의 그루터기에서도 새싹이 돋듯이 인생은 언제나 어디에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제비가 지난해에 지었던 집에 둥지를 틀지 않고 반드시 그 옆에 새 집을 지어 둥지를 틀듯이 인생도 언제 어디서나 새로운 둥지를 틀 수 있다. 그게 인생의 묘미다. 그래서 새해는 또다시 우리에게 찾아왔다. - 끝 - 2014. 9. 16 - 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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