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랄라

2014. 11. 11. 09:26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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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말랄라
               - I am Malala -

* 말랄라 유사프자이, 퍼트리샤 매코믹 지음. 박찬원 옮김 

■ 말랄라 유사프자이

0 그의 고향 스와트가 탈레반의 공격을 받고 교육받을 권리가 위협 당하자    겨우 열 살의 나이로 여성 교육운동을 시작
0 굴 마카이라는 필명으로 BBC 웹사이트에 탈레반 치하의 삶에 대한 글을    연재하고 뉴욕타임스 다큐멘터리에 출연
0 2012년 10월 탈레반의 위협을 받던 그는 학교에서 집으로 가던 길에 총    격을 받음, 어렵사리 목숨을 건졌고 그 후 계속해서 교육운동을 해 나감
0 2011 국제 아동 인권 평화상 후보 - 파키스탄 평화상 수상
0 2013 사하로프 인권상 수상 및 국제 엠네스티 양심대사상 등
0 현재 영국 버밍엄에 살고 있으며 말랄라 펀드를 통해 교육운동을 계속
0 2014 최연소 노벨 평화상

■ 퍼트리샤 매코믹    

0 미국의 권위 있는 문학상 ‘내셔널 북 어워드’ 최종 후보에 두 번 오름 
0 청소년 소설 ‘컷’ ‘솔드’ ‘네이버 폴 다운’ 등 

■ 프롤로그

 눈을 감으면 내 방이 보인다. 정돈되지 않은 침대 위 아무렇게나 젖혀 놓은 내 푹신한 이불도, 그날 나는 시험에 늦지 않기 위해 급하게 서둘렀다. 책상위 시간표가 2012년 10월 9일자에 펼쳐져 있다. 그리고 우리학교 교복인 흰색 샬와르와 파란색 카미즈가 옷걸이에 걸린 채 나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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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네 아이들이 우리 집 뒷골목에서 크리켓을 하는 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시장의 왁자지껄한 소리도, 귀를 기울이면 옆집 사는 내 친구 사피나가 내게 비밀 이야기를 하려고 똑똑똑 벽을 두드리는 소리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밥 끓는 구수한 냄새가 난다. 남동생들이 리모컨을 서로 차지하려고 싸우는 소리도 들린다.  TV 화면은 레슬링 프로그램 ‘WWW 스맥다운’과 만화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곧 내 애칭을 부르는 아버지의 굵고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자니.”
 자니, 페르시아어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요즘 학교는 잘 굴러가니?”
 아버지가 학교생활에 대해 묻고 있었다. 내가 다니는 쿠샬 학교는 아버지 설립한 학교이다. 아버지가 그렇게 물을 때면 나는 늘 그 질문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 대답하곤 했다.
 “아바(파슈토어로 아버지를 다정하게 부르는 말). 학교는 굴러가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서 있는 거죠!” 잘 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는 그렇게 표현했다.         
 그날 아침, 나는 파키스탄의 우리 집을 나섰고, 학교가 끝나는 대로 곧 돌아와 다시 이불 밑으로 들어갈 생각이었지만, 지금 이렇게 멀고 먼 곳에 와 있다.
 사람들은 지금 내가 고향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너무 위험하다고 한다. 결코 돌아가지 못할 거라 말하는 이들도 있다.

 감았던 눈을 뜨면 나는 새 침실에 있다. 영국의 버밍엄이라는 축축하고 추운도시 견고한 벽돌집 안에 있는 방이다. 이 집에서는 수도꼭지만 틀면 원하는 대로 더운물, 찬물이 나온다. 원목 바닥 위에 커다란 가구들과 커다란 TV도 있다.       
 그때 아버지가 현관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고, 아버지의 목소리가 집 안을 울린다.
 “자니! 오늘 학교는 어땠니?”
 이젠 말장난을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아버지가 운영하고 내가 다니던 학교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그리고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내 대답이 들리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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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묻어난다. 왜냐하면 불과 얼마 전 나는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 단지 내가 학교에 갈 권리에 대해 당당히 얘기했다는 이유로.

 지극히 평범한 날이었다. 나는 열다섯 살. 9학년이었다. 전날 밤 시험공부를 하느라 매우 늦게 까지 깨어 있었다.
 새벽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지만 나는 잠에서 깨지 못했다. 근처 사원에서 아침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나는 이불 아래로 더 파고 들었다. 아버지가 와서 나를 깨우는 소리도 못 들은 척했다.
 그때 어머니가 들어와 부드럽게 내 어깨를 흔들었다.
 “일어나렴, 피쇼.”
 피쇼는 파슈토어로 고양이라는 뜻이다.
 “7시 30분이다. 이러다 지각하겠다.” 
그날은 파키스탄 역사 시험이 있었다.
 학교까지는 금방이었다. 강을 따라 난 도로를 달리면 오 분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나는 제 시간에 도착했고, 시험 보는 날은 여느 때처럼 그렇게 지나갔다.

 시험을 잘 봤다는 것을 자신한 그때 모니바와 나는 수다를 떨기 시작했고, 학교버스가 도착하자 우리는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평소처럼 모니바와 다른 여학생들은 교문을 나가기 전에 스카프로 얼굴과 머리를 가린 후 기다리고 있던 버스에 올라탔다. 
 여학생 스무 명과 선생님 두 사람은 버스 안에 세 줄로 놓인 긴 의자에 나란히 붙어 앉았다. 덥고 끈끈한 날이었고 차 옆면에는 유리창 대신 누렇게 바랜 비닐이 펄럭이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밍고라의 혼잡한 거리를 덜컹거리며 달렸다.

모니바와 나는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친구가 많았지만 모니바는 그 중에서도 정말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였고, 모니바에게는 무슨 이야기든 다 했다. 그날 우리는 이번 학기에 누가 가장 성적이 좋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그때 아이들 중 누군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서 나머지 아이들도 모두 함께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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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리틀자이언츠 과자 공장을 지나 우리 집에서 불과 삼분밖에 떨어지지 않은 도로에 접어들었을 때 버스가 속도를 줄이며 멈춰 섰다. 밖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했다.
 “오늘 너무 조용하네. 사람들이 다들 어디 있는 거지?”
 내가 모니바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흰색 옷을 입은 남자 두 사람이 우리 버스 앞으로 걸어왔다.
 “이거 쿠샬 학교 버스요?”
 그중 한 남자가 물었다. 기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학교 이름이 버스 옆면에 검은 글씨로 크게 쓰여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남자가 버스 뒤편으로 와서 우리가 앉아 있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말랄라가 누구냐?”
 그가 물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몇몇 아이가 내 쪽을 쳐다보았다. 그가 총을 올려 나를 겨냥했다. 아이들 몇 명이 비명을 질렀고 나는 모니바의 손을 꼭 잡았다.
 말랄라가 누구냐고?
 내가 말랄라이고, 이것이 나의 이야기다.

 제1부 탈fp반이 오기 전

■ 새처럼 자유롭게

 내 이름은 말랄라다. 평범한 소녀지만 내게는 특별한 재주가 있다.
 나는 이중관절이어서 자유롭게 손가락과 발가락을 뒤로 꺾을 수 있다. (내가 관절을 꺾을 때 사람들이 당황해 하는 것을 보면 재미있다.) 나는 나보다 나이가 두 배 많은 사람과 팔씨름을 해도 이길 수 있다.

나는 화장과 장신구에 별로 관심이 없다. 여자다운 편은 아니다. 그래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색깔을 분홍색이고, 예전엔 거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머리 모양을 이리저리 바꾸어 보곤 했었다. 더 어렸을 때는 피부를 하얗게 만들려고 꿀과 장미수, 물소 젖을 발라 보기도 했다. (물소 젖을 얼굴에 바르면 지독한 냄새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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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파슈툰 사람이다. 파슈툰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지역에 퍼져 사는 자부심 강한 부족이다. 아버지 지아우딘과 어머니 토르 페카이는 산간 마을 출신이지만 결혼 후 파키스탄 북서쪽에 위치한 스와트 계곡의 가장  큰 도시인 밍고라에 정착했고, 이곳에서 내가 태어났다. 스와트는 아름다운 고장으로 이름났으며, 높은 산과 초록이 우거진 언덕, 수정처럼 맑은 강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온다.
 내 이름은 용기 있는 행동으로 파슈툰 남성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킨 파슈툰의 위대한 젊은 여자 영웅 ‘말랄라이’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전쟁을, 싸움을 믿지 않는다. 두 살 터울 남동생 쿠샬이 지독하게 나를 괴롭혀도 내 쪽에서는 동생과 싸우려하지 않는다. 다만 뉴턴이 말했듯 모든 일에는 작용과 반작용의 힘이 작용하기에 쿠샬이 내게 싸움을 걸면 받아주기는 한다. 막내 동생 아탈은 쿠샬보다는 덜 성가셨다.

 사피나는 내가 여덟 살 때부터 함께 논 친구였다. 나보다 두 살 어렸지만 우리는 아주 친했다. 그런데 한 번은 사피나가 너무 심하게 군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내게 사 준 분홍색 플라스틱 장난감 휴대전화가 있었는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물건이자 유일한 장난감이었던 그 전화기가 없어졌다.
 그날 오후 사피나의 집에 갔더니 사피나가 그 전화기와 똑 같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사피나는 그 전화기가 자기 것이며 시장에서 샀다고 말했다. 그날 나는 사피나의 귀걸이를 몰래 가져오고, 그 다음날은 목걸이를 몰래 가져왔다. 며칠 뒤 어머니에게 그 사실이 밝혀지고 물건들을 모두 돌려주었다.

나는 우리 파슈툰의 삶을 지배하는 규범인 파슈툰왈리를 생각했다. 이 규범에는 바달이란 것이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모욕을 받았으면 모욕으로, 죽임을 당했으면 죽임으로, 반드시 되갚아야 한다는 복수의 전통이다. 그래서 나도 똑 같은 행동으로 복수를 했던 것이다. 그런데 훨씬 씁쓸한 기분이었다. 나는 다시는 바달을 따르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나는 사피나와 사피나의 부모님에게 사과했다. 나는 사피나도 내게 사과를 하고 내 전화기를 돌려주길 바랐지만 사피나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새로운 맹세를 지키는 일이 아주 어렵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나는 그 일을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사피나와 나는 곧 다시 친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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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기억하는 한 우리 집은 늘 이웃, 친척, 아버지의 친구 등 사람들로 북적였다. 우리 부모님의 고향인 산간 지역이나 인근 도시에서 끊임없이 사촌들이 밀려들었다. 우리가 처음 살았던 조그만 집에서 이사를 해서 마침내 ‘내 방’을 갖게 된 후에도 나 혼자 그 방을 쓴 날은 드물었다. 바닥에서 늘 사촌 누군가가 잠을 잤다. 손님을 잘 접대하는 것이 파슈툰왈리에서 가장 중요한 규범이었기 때문이다. 파슈툰 사람은 항상 손님을 위해 문을 열어 두어야 한다.
 우리 어머니와 여자들은 집 뒤편 베란다에 모여 음식을 하며 웃고 새 옷과 보석, 이웃 다른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고, 아버지와 남자들은 사랑방에 앉아 차를 마시며 정치 이야기를 했다.
 나는 종종 아이들의 놀이에서 빠져나와 여자들의 공간을 살금살금 지나 남자들이 모인 곳으로 가곤했다. 내게는 그곳이 신나고 중요한 뭔가가 일어나는 곳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 뭔가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지만, 나는 묵직한 남자들의 세계에 이끌렸다. 나는 아버지 발치에 앉아 그들이 나누는 대화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남자들이 정치 이야기 하는 것을 듣는 일이 좋았다. 그 가운데 앉아, 스와트 계곡 저 너머 커다란 세상에 관한 얘기에 흠뻑 빠져드는 것이 좋았다.

 여자들은 거의 매일 ‘푸르다(여성이 집안에서 남성과 격리되어 지내거나, 외출할 때 스카프나 베일을 쓰는 일)’를 지키며 살았다. 우리 어머니를 포함해 어떤 이들은 나카브라고 하는 길게 드리운 스카프로 얼굴을 가렸고, 어떤 사람들은 부르카라고 하는 치렁치렁한 옷을 입어 머리와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눈마저 드러내지 않았다. 심지어 검은 장갑과 양말을 신어 피부가 전혀 보이지 않도록 하는 여자들도 있었다. 아내는 남편과 나란히 걷지 못하고 몇 발짝 뒤에서 따라가야 했다. 여자가 남자와 마주쳤을 때는 시선을 아래로 낮추도록 강요당했다. 함께 놀던 친구들이 사춘기가 되자마자 베일 뒤로 사라지는 것 역시 보아 왔다.

 얼굴과 몸을 가리고 사는 일은 불공평하게, 그리고 불편하게 보였다. 어릴 때부터 나는 부모님에게 다른 여자아이들은 어떻게 하고 살든 나는 결코 그런 식으로 얼굴을 가리지 않을 것이라 말하곤 했다.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고 전통적인 사람이어서 내 말에 충격을 받았다. 친척들은 내가 매우 대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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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말했고, 당돌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게 바라는 대로 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해 주었다.
 “말랄라는 새처럼 자유롭게 살 거야.”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아버지의 말에도 불구하고 나와 사피나가 더 나이를 먹으면 남자 형제들을 위해 음식을 하고 청소를 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의사는 될 수가 있었다. 여자 환자를 돌볼 여자 의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변호사나 기술자, 패션 디자이너, 예술가, 우리가 꿈꾸는 어떤 다른 것들은 될 수 없었다. 우리는 남자 친척이 동행하지 않으면 집 밖으로도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나는 남동생들이 연을 날리기 위해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며 내가 실제로 어디까지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그때도 내가 아버지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소중한 자식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파키스탄의 딸들에겐 매우 드문 일이었다.

 파키스탄에서는 아들이 태어나면 축하할 일로 여긴다. 하늘에 대고 축포를 쏜다. 아기 침대에 선물들이 쌓이고 아들의 이름을 족보에 올린다. 그러나 딸이 태어나면 그 집에는 축하 손님이 찾아오지 않으며, 딸을 낳은 여인은 오직 친정어머니의 위로만을 받을 뿐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관습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우리 가문 족보에서 남자들 이름 사이에 파란색 잉크로 적힌 내 이름을 보았다. 여자 이름이 족보에 오른 것은 300년 만에 처음이었다.
나는 다른 면에서도 보통 여자아이들과 비교하면 운이 좋았다. 아버지가 학교를 운영했기 때문이다. 칠판과 분필 외에는 별것 없는 소박한 학교였고 냄새 나는 강 바로 옆에 있었지만 내게는 낙원과도 같은 곳이었다.
 드디어 내가 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정말이지 뛸 듯이 기뻤다. 나는 학교에서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는 나의 세상 전부였고, 나의 세상 전부는 학교였다.

■ 꿈

 매년 봄과 가을, 큰 이드(선지자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스마엘을 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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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치려 했던 마음을 기념하는 날)와 작은 이드(라마단 금식 기간의 마지막 날) 축제 기간 동안 우리 가족은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 중 하나인 샹글라를 방문했다. 샹글라는 우리 부모님이 자라난 산간 마을이다. 친척들에게 줄 선물들을 가득 들고서 밍고라 버스 정류터미널로 갔다. 우리는 선물을 버스 지붕위에 실었다. 거기엔 밀가루 부대, 담요, 트렁크 등의 짐들이 높다랗게 쌓여 있었다. 짐을 실은 우리는 버스 안에 비좁게 끼어 앉아 바퀴 자국이 깊게 팬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네 시간의 여정을 시작했다. 스와트 강을 따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굽이굽이 가야 하는 도로였다.

 샹글라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매우 가난했고, 그곳엔 병원이나 상점 같은 현대적인 시설도 없었다. 그럼에도 친척들은 늘 우리가 도착하면 크게 잔치를 열어 주곤 했다.  내가 겨우 일고여덟 살이었을 때도 친척들은 나를 아는 것 많은 도시 아이로 여겼고, 내 사촌들은 내가 맨발로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자기들처럼 집에서 만든 옷이 아닌 시장에서 산 기성복을  입었다고 놀리곤 했다. 말투에도 도시의 억양이 있었고 도시의 속어를 썼기 때문에 그들은 내가 현대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이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페샤와르나 이슬라마바드 같은 진짜 도시 사람들은 완전히 정반대로 나를 촌뜨기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샹글라에 있는 동안은 시골 소녀의 생활을 했다.
      
 산간 지방에서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제대로 된 상점도, 대학도, 병원도, 여자 의사도, 정부에서 제공하는 깨끗한 물과 전기도 없었다. 많은 남자들은 마을을 떠나 멀고 먼 타지로 나가 도로 공사 현장이나 광산에서 일하며 고향으로 돈을 보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한 남자들도 있었다.
 시골의 여자들 역시 집 밖으로 나갈 때는 얼굴을 가려야 했고, 가까운 친척이 아닌 남자와는  만나서도, 말을 해서도 안 되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여자는 아무도 없었다.
 내  사촌들 대부분을 포함해 시골 마을에 사는 소녀들은 거의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딸은 아예 가족의 소중한 일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아버지들도 있었다. 딸들은 어린 나이부터 시집을 가 남편 가족과 살 것이기 때문이다.  “왜 계집애를 학교에 보내? 집에서 살림만 할 건데.”
남자들은 그렇게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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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겐 절대 말대답을 해서는 안 되었다. 우리 문화에서는 연장자가 설사 틀렸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존경을 표해야 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들을 그렇게 푸대접하는 것일까?
 아버지에게 묻자 아버지는 탈레반이 장악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여자들이 더 힘든 삶을 살고 있다고 말했다.
 부르카를 착용해야 하고, 큰 소리로 웃어서도 안 되고 메니큐어를 칠해도 안 되고 남자를 동반하지 않고 혼자 다니면 매를 맞거나 감옥에 가야 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몸을 떨었고, 내가 여자들도 학교에 갈 수 있는 파키스탄에 살고 있다는 사실에 신께 감사드렸다.  내가 탈레반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게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네 자유를 지켜주마. 말랄라. 꿈을 계속 키워 나가렴.”

■ 마술 연필

 내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아버지 학교의 학생은 800명이 넘었고, 캠퍼스도 초등학교 하나와 남자고등학교, 여자고등학교 셋으로 늘어나 있었다.
 마침내 우리가족은 경제적 여유가 생겨 TV를 살 수 있었다. 나는 마술 연필을 가지고 싶단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사피나와 내가 방과 후에 보던 ‘샤카라카 붐 붐’이라는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산주라는 소년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산주가 마술 연필로 그리면 모든 것이 진짜가 되었다. 배가 고플 때 카레 한 그릇을 그리면 진짜 카레가 나타났고, 위험에 처했을 때는 경찰관을 그렸다. 산주는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보호하는 어린 영웅이었다.
 밤이면 나는 기도를 했다.
 “신이시여, 제게 산주의 마술 연필을 주세요. 아무에게도 얘기하지 않겠습니다. 그냥 제 서랍에 넣어주세요. 그 연필로 모두를 행복하게 하게 하겠습니다.” 기도를 마치면 얼른 서랍을 열어보곤 했지만 연필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느 날 오후 남동생들이 집에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내게 감자 껍질과 계란 껍데기를 버리고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우리 집에서 한 블록 정도 떨어진 쓰레기장, 파리와 쥐, 지독한 냄새, 산처럼 쌓인 쓰레기, 그 쓰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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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미 속에 내 또래 여자 아이가 있었다. 머리카락은 마구 엉겨 붙어 있었고 피부는 붉은 발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이는 쓰레기통을 뒤져 깡통과 병들을 한 무더기씩 따로 쌓고 있었다. 
 그날 아버지가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쓰레기장에서 본 아이들 이야기를 하면서 아버지를 이끌고 그들을 보러 갔다. 아버지가 저 아이들이 쓰레기장을 뒤져 찾은 것을 다만 몇 루피에라도 팔아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고 말했다. 만일 저 아이들이 학교에 간다면 가족들이 굶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집으로 걸어오며 나는 아버지 뺨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보았다.

 나는 신에게 편지를 썼다.
 ‘신이시여, 쓰레기 더미에서 일하도록 내몰린 아이들이 있다는 것을 아세요?’ 나는 쓰는 것을 멈췄다. 신이 모르실 리가 없지!
 그 전까지 나는 마술 연필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 믿었지만, 그날 나는 마술 연필이 아닌 나 자신이 뭔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땐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내가 그 쓰레기장의 아이들을 돕고 싶어 했던 것처럼 우리 어머니도 많은 사람들을 돕고 싶어 했다. 어머니는 빵 껍질을 그릇에 담아 부엌 창가에 내놓기 시작했다. 밥과 닭고기도 한 냄비 더 만들어 함께 놓아두었다. 빵은 새들을 위한 것이었고. 음식은 이웃의 가난한 가족을 위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말했다.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가진 모든 것을 나누었다. 심지어 집도 나누었다. 사정이 딱하게 된 일곱 식구 한 가족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들에게서 월세를 받기로 했었지만 받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아버지는 학교수익을 별로 못 내고 있었지만 100명이 넘는 가난한 아이들을 무료로 받아주었다. 아버지는 더 많은 무료 학생들을 받을 수 있는 형편이 되기를 바랐다. 한편 어머니는 매일 몇몇 여학생들을 불러 아침식사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  신의 경고

 어느 가을날, 내가 아직 초등학교에 다니던 때였다. 갑자기 책상들이 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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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진이다!”
 우리는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고, 좁은 문으로 몰려 나가다 넘어지는 아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어미 닭 주위에 몰려드는 병아리들처럼 안전과 위안을 찾아 선생님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우는 여자아이들도 있었다.
우리는 지진이 자주 일어나는 지역에 살고 있었지만 이번엔 다르게 느껴졌다.
 첫 번째 지진이 있고 몇 분 지나지 않아 두 번째 강한 지진이 또 일자 학생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도착하니 어머니가 마당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머리위에 지붕이 없는 마당이 가장 안전한 곳이라 느꼈던 것이다. 코란 구절을 외우고 있는 어머니 얼굴에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여진은 계속되었고 해 질 녘이 지나도 멈추지 않았다.
 2005년 10월 8일의 지진은 역사상 가장 최악의 지진 중 하나였다. 리히터 규모 7.6으로 멀리 아프가니스탄의 카불과 인도의 델리에서도 느낄 수 있었던 강진이었다. 여진이 한 달 동안  계속되었다. 우리가 살던 도시 밍고라는 큰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샹글라를 포함해 파키스탄 북부 지역은 폐허가 되었다.

 정부는 도움을 주려고 애썼고 인근 아프가니스탄에 병력과 헬기가 있었던미국도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원봉사자와 의료 지원은 TNSM(이슬람 율법 강화운동) 같은 무장단체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많은 고아들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운영하는 마드리사(이슬람 율법을 가르치는 학교)에 가서 살게 되었다.  TNSM의 물라(성직자 또는 사원의 지도자)들은 지진이 신의 경고였다고 설교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을 고치지 않으면, 즉 이슬람 율법을 실천하지 않으면 더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 말했다.
 이 지진 후 나라 전체가 오랫동안 큰 충격에 빠져 있었다. 우리는 너무나 지치고 허약한 상태였다. 나쁜 의도를 품은 이들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해 원하는 것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 첫 번째 직접적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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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일 아침 내 친구들이 교문을 지나 학교로 들어갈 때면, 길 건너에서 한 남자가 우리를 노려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 남자가 동네 원로 여섯 명과 함께 우리 집으로 찾아왔다. 내가 대문을 열었다. 그는 자신이 무프티(이슬람 율법 해석의 권위자)라고 주장하며 우리 학교에 문제가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나를 다른 방으로 보냈지만 이 작은 집에서 무프티와 원로들이 하는 말을 나는 한 마디도 빠짐없이 들을 수 있었다.
 “나는 훌륭한 이슬람교도를 대표해서 말하고 있소. 우리는 모두 당신네 여자고등학교가 신성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하오. 학교 문을 닫아야 할 것이오. 십 대 여자 아이들은 학교에 가서는 안 되고 반드시 푸르다를 지켜야 하오.”
 우리는 알고 있었지만 그 무프티가 모르고 있었던 것은 그의 조카딸도 비밀리에 아버지 학교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무프티는 여학생들이 남자들과 같은 교문으로 학교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불평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타협점을 제시했다. 나이가 찬 여학생들은 다른 문으로 출입하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무프티가 물러섰고, 그들은 떠났다. 하지만 그들이 떠나고 대문이 닫혔음에도 나는 배 속에 단단한 매듭이 지어진 것만 같은 불편함을 느꼈다. 

 비록 내가 어리긴 했으나 그가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신성한 코란을 공부했고, 우리 부모님은 방과 후에 나를 마드라사로 보내 종교 공부를 시켰다.
 내게 있어 마드라사는 오직 종교 교육을 받기 위한 장소였다. 다른 공부는 모두 쿠샬 학교에서 배웠다. 하지만 많은 아이들에게 마드라사는 배움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그들은 수학도 과학도 문학도 전혀 배우지 않았다. 유일하게 배우는 것이 아랍어였는데 그것은 코란을 읽기 위해서였다. 단어의 의미는 알지 못한 채 외워 낭송하는 법만 배웠다. 나는 이 차이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무프티가 우리 집을 다녀간 후에야 알 수 있었다.

 쿠샬 학교 안에서 우리는 지식의 날개를 달고 날았다. 여자가 남자 동행 없이는 외출도 할 수 없는 나라에서 우리는 책이라는 세계 안에서 멀리 나아가, 널리 볼 수 있었다. 많은 여자들이 시장에서 가격표도 볼 수 없는 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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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우리는 곱셈을 배웠다. 십대가 되는 순간 머리를 가리고 어린 시절 놀이 친구였던 남자 아이들에게 자신을 숨겨야 하는 곳에서 우리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달렸다.            
 우리는 교육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알지 못했다. 단지 평화로운 가운데서 배울 기회를 가지길 원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럴 수 있었다. 쿠샬 학교 담 밖에서는 세상이 미쳐가고 있었지만 학교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일 수 있었다.

 초등학교 때 거의 매 학년 전교 일등을 해서 학년 말에 트로피를 받았다는 것은 나의 커다란 자부심이었다. 나는 늘 최상위권이었고, 또 교장의 딸이기도 해서 어떤 아이들은 그 두 사실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를 특별대우 하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아버지에게도 커다란 자부심이었다. 그리고 내가 아홉 살 때 한 아이가 새로 전학을 오면서 그것은 사실로 증명되었다.
 그 아이의 이름은 말카 에 누르였다. 똑똑했고 의지가 굳은 아이였지만 처음에 나는 그 아이가 나만큼 명석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해 방학을 하던 날 시상식이 있었고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 아이가 일등이었고 나는 이등이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위로했다.
 “이등을 하는 것도 좋은 일이란다. 이길 때가 있으면 질 때도 있다는 것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승자가 되는 법뿐 아니라  훌륭한 패자가 되는 법도 배워야 한다.

제2부 곁에 드리운 그림자

■ 라디오 물라

 어느 날 저녁 밍고라의 한 친척 집에 있던 나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이상한 흐느낌을 들었다. 하루 종일 음식을 한 여자들이 설거지를 다 마친 후 라디오 주변에 모여 앉아 있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설거지를 안 하려고 요령을 피우고 있던 나는 그 기이한 울음소리에 멈칫했다. 얼핏 듣기에 예배를 인도하는 어느 이맘(예배를 드리는 성직자)이 경건한 생활을 하는 조언을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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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배를 끊으시오. 매일 기도를 하시오.”
 라디오를 듣던 여자들이 그렇지, 하면서 중얼거렸고, 그 가운데는 우리 어머니도 있었다.
 라디오 속 진행자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음악을 그만 들으시오. 영화도 보러 가지 마시오. 춤도 추지 마시오. 다 그만 하시오. 그러지 않으면 신께서 우리 모두를 벌하기 위해 또다시 지진을 내릴 것이오.”
 그러자 몇몇 여자들이 울기 시작했다. 지난해 일어난 지진의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자식과 남편을 먼저 보내고 여전히 슬픔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지진은 과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지질학적 현상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싶었다. 거기 있던 여자들 중 많은 사람들은 전혀 교육을 받지 못하고 그저 종교 지도자의 명령을 따르라는 말을 들으며 자랐기에 라디오를 듣고 겁에 질려 있었던 것이다.
 물라 FM이라는 방송 이름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라디오 물라’라고 불렀다.

 들어도 좋은 것은 자신의 라디오방송뿐이라고 했다. 그는 남자는 머리와 턱수염을 길게 길러야 하며 그것이 ‘혁신적’패션이라 했다. 그리고 여성은 항상 푸르다를 지켜 집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급한 일이 있을 때만 외출할 수 있으며, 그때도 반드시 부르카를 입어야 하고 남자 친척과 동행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추종자들은 아름답게 들리는 시를 외치고 다녔다. 하지만 실상 그 시는 여자들이 학교에 가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였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그를 비판했다.
 “라디오 물라가 누구든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순 없다. 소위 물라라는 자가 허튼소리를 하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어.”
 아버지가 옳았다. 아버지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라디오 뒤의 남자에 대해 조사를 했다.
 “이 자는 고등학교 중퇴자로군! 그리고 어떤 종교적 자격도 갖고 있지 않아! 이런 자가 무지를 퍼뜨리고 있다니.”
 라디오 목소리의 주인공은 TNSM의 지도자 중 한 명인 마울라나 파즐울라였다. 그의 추종자들이 지진 후 많은 사람들을 도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는 그 충격과 상처를 이용해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입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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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점점 자라면서 남자들이 토론하고 있을 때 눈에 띄지 않게 그 자리에 있는 것이 힘들어졌다. 그래서 나는 차를 내 가는 일을 하곤 했다.
 그 당시에 대화의 주제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라디오 물라와 바로 국경 너머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싸움이었다. 9·11 테러가 일어났을 때 나는 겨우 네 살이었지만 오사마 빈 라덴의 이름을 들으면서 자랐다.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나 9·11과 오사마 빈 라덴을 알고 있었다. 그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그 테러를 계획했다고 하며, 미국과 미국의 동맹들은 그를 찾기 위해, 그리고 그를 보호하고 있던 알카에다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부를 물리치기 위해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친구들은 파즐울라가 아무리 인기가 있어도, 설사 그가 파키스탄의 탈레반과 깊이 연계되어 있다 하더라도 걱정하기엔 너무 멀리 있다고 믿었다.
 파즐울라는 처음에는 서서히 움직였지만, 지진이 일어난 후 이년 동안 그는 정말로 긴 그림자를 던졌다. 나는 자라고 있었고 생전 처음으로 내 눈 앞에서 우리의 세상이 변하고 있음을, 그것도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신이시여,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세요. 비록 작고 어린 소녀지만 작은 일이라도 맡기실 게 있지 않을까요?”
 어느 날 잠에서 깬 나는 계획 하나가 떠올랐다. 학교에 가면 파즐울라 얘기 따위는 다 무시하고 친구들에게 인도 TV의 코미디 프로그램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런 얘기가 별로라면 크리켓이나 귀찮게 하는 남동생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 말고도 할 이야깃거리는 얼마든 지 있었다.
 그러나 학교에 도착했을 때 친구들은 모두 한 모퉁이에 모여 가장 최근의, 바로 어젯밤 파즐울라의 설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가 여학교를 하람이라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우리의 평화로운 성역을 코란이 금지한 것이라 단정해 버린 것이다.
 당시 그는 라디오 뒤에서 목소리로만 존재했다. 그래서 그때 우리는 미처 알지 못했다. 다가올 미래에 그가 여학교를 없애기 위해 훨씬 더 엄청난 일을 저지를 것이라는 걸.

■ 스와트의 탈레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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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디오 물라는 자신이 반 이슬람적이고 서구적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비난하고 반대하기 시작했다.
 또 그는 그 불법 라디오 방송을 통해 부모들에게 자녀의 소아마비 예방 접종을 거부하라고 부추겼다. 이런 의학적 행위는 서구 국가들이 이슬람 어린이들을 해치기 위해 꾸민 계책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는 의료 제도에 개입하고 여학교를 반대하는 일 이외에도 이발사들을 협박하여 서양식으로 머리를 자르지 못하도록 했고 음반 상점들을 파괴했다. 그는 보석과 돈을 기부하라고 설득하여 그렇게 모금한 돈으로 폭탄을 만들고 무장 세력을 훈련시켰다. 우리는 파즐울라의 추종 세력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머리와 수염을 길게 기르고 검은 터번을 썼으며 흰색 샬와르 카미즈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총을 들고 위협적인  태도로 거리를 걷고 있었다.
 공포의 검은 구름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경찰이 파즐울라를 저지하려 했지만 그의 세력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
 내 열 번째 생일 즈음 여러 날 계속된 정부군의 공격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자 파즐울라는 정부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정부는 귀찮은 파리 대하듯 그를 무시했다. 그리고 그에게 억눌려 고통 받는 우리 스와트 사람들도 무시했다. 우리는 정부에 분노했고 우리 삶을 파괴하려는 테러리스트에 분노했다.
 아버지는 우리도 그를 무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는 흔들림 없이 충실한 생활을 해야 한다.”
 곧 파즐울라가 TTP(파키스탄의 탈레반)와 손을 잡고 여성들이 공공장소에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파즐울라는 남성들이  이 명령에 따라 가족을 엄격하게 통제하지 못하면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여섯 달 만에 밍고라의 거리는 기이하게도 여자가 없는 곳이 되었다. 여자들은 시장 보러 나가는 일조차 두려워하게 되었다. 발리우드 영화와 어린이 영화를 팔던 DVD 가게는 아예 문을 닫았다. 프즐울라는 영화와 TV를 보는 일이 죄악이라 말했다. 영화나 TV를 통해 여자들은 외간 남자들을 보게 되고 남자들은 다른 여자들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금지된 일이기 때문이라 했다.
 파즐울라와 그의 추종자들의 위협 아래서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살아갔다. 그들은 TV와 DVD, CD를 마을 광장으로 가지고 갔고 라디오 물라의 부하들은 거기에 불을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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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어떻게 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광적인 인물이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는가? 그리고 왜 아무도 그에게 맞서려 하지 않는 것인가?  
 그런 일을 겪는 중에도 쿠샬 학교는 평소처럼 운영되었다. 우리 학년 친구들 몇 명이 학교를 그만 두긴 했지만 남은 우리들은 학교 다니는 일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교 담장만 넘어가면, 밍고라는 점점 감옥 같은 곳으로 변하고 있었다.  ‘여성 출입 금지’라고 쓰인 현수막들이 시장 입구에 걸렸다. 모든 음반 상점과 전자제품 가게들이 문을 닫았다. 파즐울라는 심지어 카롬이라는 오래된 어린이 게임도 금지 시켰다. 카롬은 나무판 위에 패를 놓고 쳐내는 게임이었다.
 그는 라디오에서 여학생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00양은 학교를 그만 두었습니다. 분명 천국에 갈 것입니다. 00양도 학교를 떠났습니다. 부모님께 축하드립니다.”
 이렇게 되자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 갈 때 혼자 다녀서는 안 된다고 고집했다. 교복을 입은 내 모습을 탈레반이 볼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매일 학교의 아이들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매일 밤마다 파즐울라는 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은 신실한 이슬람교도가 아니며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파즐울라는 그의 포고령을 강제로 집행하기 위해 지역 법정을 설치했고, 그의 부하들은 이제 경찰이나 공무원, 그에게 불복종하는 사람들에게 태형을 내리거나 죽이기까지 했다. 그린 광장에서 태형이 집행되는 날 수백 명이 모여 곤장 한 때를 때릴 때마다 “알라후 아크바르!” 즉 ‘신은 위대하다!’고 외쳤다. 때로는 파즐울라가 검은 말을 타고 현장에 나타나기도 한다고 사람들이 말했다.
 파즐울라의 ‘재판’이라는 것은 주로 늦은 밤에 열렸다. 사람들은 집에 있다가도 끌려 나와 죽임을 당하곤 했고, 시신은 다음 날 아침 그린 광장에 버려져 있었다. 시신 위에 핀으로 쪽지가 꽂혀 있을 때도 종종 있었다. ‘스파이와 신앙심이 없는 자는 이렇게 된다.’ 혹은 ‘오전 11시 까지 이 시체를 건드리지 마라. 이 말을 거역하는 자는 다음 순서가 된다.
 머지않아 사람들은 그린 광장을 피바다 광장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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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밤 나는 우리 부모님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었다.   
 나는 일어나 무슨 일인지 물었다. 아버지는 어느 모임에 가서 탈레반을 비판하는 연설을 할 것이라 말했다. 그리고 이슬라마바드로 가서 정부가 자국민을 보호하지 않는 것을 비판할 예정이라고. 평범한 교장 선생님인 우리 아버지가 이 나라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위험한 두 세력에 맞서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 곁에서 아버지를 지지하고 있었다.
 다fms 파슈툰 여자였다면 남편 소매를 붙잡고 울며불며 매달렸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파슈툰 남자였다면 그런 아내를 무시했을 것이다. 애초에 그런 이야기를 아내와 의논하는 사람이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다른 어른들과는 달랐다. 아버지는 매와 같아서 다른 사람들이 가려 하지 않는 곳으로 대담하게 날아가고자 했다. 그리고 우리 어머니는 의지가 아주 굳은 사람이었다.

 어느 날 학교 교문에 아버지 앞으로 쓴 편지 한 장이 테이프로 붙여져 있었다. ‘선생, 당신이 운영하고 있는 학교는 서구적이며 불경스러운 것이다 당신은 여자를 가르치고 있으며 이슬람답지 못한 교복을 입히고 있다. 이를 중단하지 않으면 큰 문제가 될 것이며 당신의 아이들이 당신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울게 될 것이다.’     
 ‘이슬람의 페다이(아랍 무장 게릴라 조직)’ 라는 서명이 있었다.
 탈레반이 아버지를 협박한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두려워졌다.

■ 아무도 안전하지 않다

 아버지는 다음 날 신문에 편지를 기고하여 그 탈레반에게 답했다.
 ‘제발 우리학교 학생들을 해치지 마시오. 당신들이 믿고 있는 신은 우리 아이들이 매일 기도를 올리는 신과 같은 신이기 때문이오. 당신들이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절대 학생들은 헤치지 말아주시오.’
 아버지가 편지에 이름을 쓰지 않았음에도 신문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우리 학교 주소가 실렸다.
 그날 밤 집 전화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아버지 친구들은 그렇게 나서서 목소리를 내 준 것을 고마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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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네가 괴어 있는 물에 첫 돌을 던진 거야. 이제 다른 많은 사람들도 용기를 내어 맞서고 소리를 높일 걸세.”
 그러나 그렇게 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그전에도 아버지는 늘 바쁜 사람이었다. 무샤이라, 즉 시 낭송회에 참석했고, 학교에 늦게까지 일했으며, 이웃들 간의 분쟁해결을 도왔다.
 그 사건 이후 아버지는 한 가지 결정을 내렸다. 셔츠와 바지로 되어 있던 쿠샬 학교의 남학생 교복을 전통적인 샬와르 카미즈로 바꾼 것이다. 서구식이라고 낙인찍힌 옷을 입고 있으면 학생들이 안전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2007년 10월, 우리에게 희망을 준 사건이 있었다.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최초의 여성 총리였던 그가 그해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영국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그는 내가 두 살 때부터 망명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왔다. 여성으로서 베나지르 부토는 나와 같은 소녀들에게 우상이었다. 그리고 테러리스트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유일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그가 돌아오면 위험하다는 것은 모두 가 다 알고 있었기에 그의 안전을 기원했다.
 그로부터 머지않아, 두 달 정도 지난 후 베나지르 부토는 사망했다. 이 모든 것도 TV를 통해 바로 내 눈 앞에서 일어난 것처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극단주의와 무장 세력을 국민의 힘으로 물리쳐야 합니다.”
베나지르 부토가 방탄차의 선루프 위로 몸을 내밀고 서서 지지자들에게 손을 흔들며 말했다. 총소리와 폭발음이 들렸다 그리고 그가 차 안으로 쓰러지는 장면을 보았다.
 여성을 죽이는 일은 파슈툰왈리(일종의 불문법)에서 금지한 일이었다. 우리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파키스탄에서는 아무도 안전하지 않았다. 여성들도 안전하지 않아 자기 마을 거리를 혼자 걸을 수 없었다. 남성들도 안전하지 않아 온갖 사소한 일로 태형을 받았다. 아이들도 안전하지 않아 쓰레기 더미에서 일해야 했다.
 그날 내 마음에서 작은 목소리 하나가 내게 속삭였다.
 ‘네가 가서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지 그러니? 싸워서 파키스탄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지 그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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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그즈음 뉴스 채널인 돈, 키베르 뉴스와 인터뷰를 했었다.
 여성들의 교육받을 기회에 대한 내용이었고, 좀 떨기는 했지만 인터뷰를 잘 마쳤으며, 인터뷰가 마음에 들었다.
 식구들이 울고 있는 가운데 나는 비밀스런 약속을 했다.
 ‘나는 우리나라의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을 계속해 나갈 거야.’
 나는 그때 겨우 열 살이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길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 하늘에서 떨어지는 사탕

 2007년 가을 어느 날, 교실에 앉아 있던 우리는 밖에서 나는 엄청난 굉음을 들었다. 학생들과 선생님들까지 모두 운동장으로 달려 나가 하늘을 보았다. 거대한 군용 헬리콥터 한 무리가 하늘을 검게 뒤덮고 있었다.
 그러다 탁, 하며 발치에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탁! 탁! 탁! 우리는 소리를 질렀고, 그러고 나서 환호했다. 그것은 토피 사탕이었다. 군인들이 우리에게 사탕을 던진 것이다. 우리는 큰 소리로 웃으며 토피 사탕을 잡기 위해 뛰어 다녔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렸다. 파즐울라로부터 스와트를 구출하기 위해 정부군이 온 것이다. 우리는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고 깡충깡충 뛰었다. 하늘에서 사탕이 떨어졌고, 스와트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곧 어딜 가나 군인들을 볼 수 있었다.

 하룻밤 만에 파즐울라의 부하들이 마치 눈이 녹듯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멀리 간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불과 몇 킬로미터 이동했을 뿐이며 밍고라는 여전히 긴장과 공포의 도시였다.
 어느 날 저녁, 사원 꼭대기 스피커에서 소리가 들렸다. 군에서 통행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그날 밤, 환한 흰색 빛 한 줄기가 하늘을 가로지르며 번득였고 마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듯 순간적으로 방이 환해졌다. 쿵! 땅이 뒤흔들렸다.
 다음날 아침, 거리에 퍼진 소문에 의하면 탈레반이 스와트를 장악할 것이라 했다. 군의 공격은 무력했다.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만 명의 군인이 더 파견되었고, 싸움은 밤이나 낮이나 할 것 없이 일 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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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폭탄 공격에 익숙해져 갔다.
 나는 내 기도가 하늘로 떠올라 신께 다가가는 광경을 그려 보았다. 어쨌든 아침마다 우리는 별 탈 없이 무사한 상태로 깨어났다. 다른 사람의 운명에 대해선 잘 알지 못하지만, 나는 모두의 평화를 기원했다. 특히 스와트의 평화를.     
 어느 날 마침내 내 기도가 응답을 받았다. 정부군이 완전히 승리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탈레반을 몰아냈고, 멀리 쫓진 못했다 하더라도 몸을 숨기게는 만들었던 것이다.

■ 2008년, 테러리즘의 두려움

 폭탄이 터지고 사람이 죽어 갔음에도 어떤 식으로든 일상은 계속되었다. 학교는 전쟁의 한가운데서 도시를 뒤덮은 광기를 피할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폭탄과 통행금지(밤은 물론 낮에도 불시에) 사이에서 학교에 가는 일이 늘 가능하지는 않았다. 학교에 가도 머리 위를 나는 헬리콥터 소음에 아무 것도 들을 수 없었고 그런 날엔 수업을 일찍 끝내고 집으로 가야했다. 하지만 학교가 열려 있는 한 나는 학교에 갔고,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선생님들에게서 배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친구들과 나는 이제 상급학교로 진학했고, 우리의 우정 어린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선생님의 칭찬을 들을 때마다, 여자는 약하고 요리와 청소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사회에서 나도 ‘능력’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선생님이 위대한 지도자와 과학자들도 모두 한 때는 어린이였다는 이야기를 하면, 어쩌면 우리도 앞으로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여자를 학교에 보내는 것이 낭비라고 ale는 나라에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꿈을 믿도록 도와주는 사람은 바로 선생님이었다.
 나는 상급학교에서도 훌륭한 선생님을 만났다. 마리암 교장 선생님이었다.
 그 당시 우리의 화제는 대부분 정부군과 탈레반이었다. 군대와 무장 세력 사이에 끼여 있는 상태에서 학교와 집을 오가는 일은 늘 긴장되고 무서웠기에 일단 집으로 들어와 안전해지면 나는 그저 쉬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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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는 TV도 나오지 않았다. 파즐울라의 부하들이 모든 케이블을 다 끊어버렸다. 그들은 TV가 하람이라고 주장했다. 여자들이 연애를 하고 머리도 가리지 않는 서구 세계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공영 정부채널 외에는 남은 것이 없었고 우리는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었다.

어느 날 파즐울라와 부하들이 마타에 있는 여학교를 폭파했다. 파괴한 학교는 초등학교였다. 어린 아이들이 읽고 쓰고 셈하는 것을 배우는 학교였다. 밤이었지만 그것은 잔인한 행위였다. 도대체 왜? 그 학교가 탈레반에게는 그렇게 위협적인 존재란 말인가? 나는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파즐울라는 매일 새로운 대상을 골라 공격했다. 상점, 도로, 다리, 학교, 대부분은 밍고라 외곽이었지만 점점 범위를 좁혀 오고 있었다. 점점 더 가까이.
 며칠 후 탈레반의 공격이 또 일어났다. 지난번 공격에서 희생당한 사람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있었다. 조문객들이 모였을 때 자살 폭탄 테러범이 폭탄을 터뜨렸다. 50명이 넘는 사람이 죽었고, 그 가운데는 모니바의 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테러리즘은 전쟁과는 달랐다. 군인들끼리 전투를 벌이는 전쟁과는 달리 테러리즘은 모든 사람을 조이는 공포였다. 다음 날 또 어떤 끔찍한 일이 일어날지 몰라 두려움 속에 잠드는 일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를 걸으면서도 누구를 신뢰해야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 적은 사방에 있었고 어제는 가게, 오늘은 주택, 다음 날엔 다리나 학교, 어느 곳도 누구도 안전하지 않았다.

 밤이 되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어둠이 떨어지면 우리는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에도 화들짝 놀랐고, 그림자 하나에도 겁을 먹었다. 파즐울라 부하들이 공격을 하는 때는, 특히 학교를 파괴하는 시간은 밤이었다. 그래서 아침마다 나는 쿠샬 학교로 가는 모퉁이를 돌기 전 눈을 감고 기도를 했고, 혹시라도 밤새 폐허로 변하지 않았을까 걱정하며 두려움 속에 눈을 떴다. 테러리즘이 주는 공포란 그런 것이다.
 2008년 한 해 동안 탈레반은 200여 개의 학교를 폭파시켰다. 자살 폭탄 테러와 표적 살인은 늘상 일어나는 일이었다. 음반 상점들이 문을 닫았고, 라마단 기간 동안 밍고라에는 전기도 가스도 없었다. 피즐울라의 부하들이 전력망과 가스관을 폭파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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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 나의 목소리를 찾아서

■ 의견을 말할 기회

 밤이든 낮이든 아버지의 용기는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협박 편지를 받아도, 친구들에게서 주의하라는 조언을 들어도 전혀 굴하지 않았다. 학교들에 폭탄 테러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아버지는 앞장서서 그들을 비판했다. 심지어 아직 연기가 가시지 않은 현장으로 달려가기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슬라마바드와 페샤와르를 오가며 정부의 도움을 요청했고 탈레반을 비난하는 연설을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가족들의 안전을 염려했다.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마리암 선생님과 아버지는 우리에게 에세이와 연설문을 쓰도록 했다. 우리는 글을 통해 탈레반이 여학교를 파괴하고 있는 것에 대한, 그리고 학교가 우리에게 얼마나 의미 있는 곳인가에 대한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직접 쓴 글을 발표하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비록 많지 않은 숫자의 상급학교 여학생들이 모이는 집회였지만 우리는 그것을 평화의 집회라 불렀다.
 집회가 있던 날 한 파슈토어 TV 방송국 사람들이 우리 학교에 왔다. 우리는 놀라우면서도 신이 났다.
 쿠샬 학교는 민주적이었기 때문에 모든 여학생이 말할 기회를 가졌다. 상급생이 먼저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겁에 질려 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던 친구들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배움을 사랑하는지 말했다.

 모니바의 차례가 되었다.
 “파슈툰은 종교를 사랑하는 부족입니다. 그런데 탈레반 때문에 온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릅니다.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산, 우리의 나무, 우리의 꽃, 우리 계곡에 있는 모든 것이 평화를 상징합니다.”
 모니바의 연설이 끝나고 내 차례가 되었다.
 “지금은 석기시대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시절로 퇴보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우리 여학생들은 점점 더 많은 권리를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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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배우기를 계속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꿈입니다.”
   
■ 굴 마카이의 일기
*굴 마카이 : 말랄라가 BBC에 글을 연재할 때 쓴 가명으로 수레국화라는 뜻
             파슈툰 민담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

 “1월 15일 이후 여자는, 나이를 불문하고 모두 학교에 가서는 안 된다. 이를 지키지 않을 시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지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부모와 교장은 응당 책임을 지게 될 것이다.”
 2008년 12월 말 라디오 물라가 방송한 내용이다. 처음에는 그저 정신 나간 포고문 중 하나려니 생각했다. 지금은 21세기가 아닌가! 어떻게 한 사람이 5만 명이 넘는 여학생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둘씩 아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았다. 아이들의 아버지가 등교를 금지시켰다. 아이 들의 오빠가 길을 막았다. 며칠이 지나자 스물 일곱 명이던 우리 학년은 열 명으로 줄었다. 나는 슬픔과 좌절을 느꼈지만 한편으론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문화에서 여자들은 가족 내 남자들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아버지와 오빠와 삼촌들도 모두 그 아이들의 안전을 염려해서 한 행동이었다. 그래도 우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여자아이들을 학교에 못 가도록 막는 가족들이 파즐울라에게 굴복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그래서 나 자신이 그런 패배감에 빠져드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나는 신께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학교에 갈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여기도록 도와주세요. 그리고 더 오래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싸울 용기를 주세요.”

 저녁마다 나는 학교에 가지 못하면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하나 생각했다. 우리 학교 여학생 중에는 파즐울라의 포고령이 있기 전에 결혼을 하고 학교를 그만 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열두 살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게 그렇게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 자신이 무엇을 하며 살아야할지는 막막했다. 내 남은 평생을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집 안에서 TV도 보지 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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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책도 읽지 못하고 살아야 한다면 어떻게 공부를 끝마치고 의사가 된단 말인가? 그때는 의사가 되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꿈이었다.
 2009년 1월 우리는 생애에서가장 암울한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아침마다 학교에 온 아이들은 그 전날 밤 누군가 죽었다고 이야기를 하곤 했다. 

 어느 오후 아버지가 전화하는 내용을 들었다.
 “선생님들 모두 거절했네. 다들 아주 두려워하고 있어. 하지만 내가 최선을 다해 보겠네.”
 영국의 영향력 있는 방송국인 BBC에서 일하는 아버지의 친구가 탈레반 치하에서의 일상을 글로 써 줄 사람을 찾아달라고 했던 것이다. 교사든 학생이든 좋았고, 그 글은 우르드어로 된 BBC 웹 사이트에 연재할 예정이었다. 선생님들은 모두 거절했고, 마리암 교장선생님의 여동생이자 상급반 학생인 아예사가 글을 쓰겠다고 했다. 다음 날 아예사의 아버지가 학교로 찾아왔다. 그는 딸이 글 쓰는 일을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난 안돼요?”
 나는 겨우 열한 살이었다. BBC가 나처럼 어린 아이가 아닌 더 나이 많은 사람을 원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희망적이면서도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는 자신의 의견을 밝히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파키스탄 지역 언론에 인터뷰를 하는 것과 이 일은 성격이 달랐다. BBC가 아닌가. 파키스탄 외부 사람들이 읽을지도 모를 글이었다. 아버지는 먼저 어머니에게 이 이야기를 하러 갔다.
 그런데 어머니가 찬성해 주었다. 어머니는 코란 구절로 답을 대신했다.
 “거짓은 사라져야 하고 진실이 앞으로 나서야 한다.”
 나는 전에 한 번도 일기를 써본 일이 없어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고, 그래서 BBC 특파원이 나를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특파원은 내게 가명을 사용할 것을 권했다. 나는 이름을 바꾸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나의 안전을 염려했다. 그는 내게 ‘굴 마카이’라는 가명을 주었다. 수레국화라는 뜻으로 파슈툰 민담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다.
 나의 첫 번째 일기는 2009년 1월 3일에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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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은 ‘나는 두렵다’였다. 도시 외곽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전투의 소음 속에서 공부를 하고 밤에 잠을 자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썼다. 그리고 매일 아침 걸어서 학교를 갈 때마다 탈레반이 나를 따라오고 있지는 않은지 뒤를 돌아보곤 한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내 방이라는 사적인 공간에서 가명으로 글을 쓰고 있었지만, 인터넷 덕분에 온 세상 사람들이 스와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관해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신께서 마술 연필을 바라던 나의 소원을 마침내 이뤄주신 것만 같았다.
 다음 글에서는 학교가 얼마나 소중한 내 생활의 중심인지 그리고 내가 교복을 입고 ald고라 거리를 걷는 일이 얼마나 자랑스러워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익명의 파키스탄 여학생의 일기는 벌써 많은 사람들에게 화제였다. 심지어 어떤 여학생은 그 일기를 프린트하여 우리 아버지께 보여주기도 했다.

 BBC의 특파원은 다음 일기에서 스와트의 뉴스를 더 많이 전해 줄 것을 부탁했다. 나는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살인에 대해 써 달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그것이 뉴스인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매일 그 일을 겪는 내게는 더 이상 뉴스가 아니었다.
 그런데 굴 마카이의 진짜 정체를 추측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모니바였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모니바가 내게 말했다.
 “인터넷에서 일기를 읽었어, 그런데 그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 같더라. 우리 학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 같더라고. 그건 너지? 그렇지?”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고, 모니바에겐 더욱 더 그랬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모니바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심하게 화를 냈다. 그렇다고 그가 내 비밀을 발설할 아이는 아니었다.
 정작 비밀을 밝힌 것은 우리 아버지였다. 물론 실수였다.
 어쨌든 4월이 되면서 비밀리에 일기를 쓰던 굴 마카이의 시절은 끝이 난다.
 그러나 그 일기는 제 몫을 해냈다. 이제 많은 기자들이 파키스탄에서 여학교를 폐쇄시키려는 파즐울라의 계획을 주시하기 시작했고, 그 중에는 ‘뉴욕 타임스’의 기자도 있었다.

■ 수업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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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인터뷰를 시작한 이후로 밍고라 사람들이 내게 다가와 좋은 일을 했다고 말해 주곤 했다. 하지만 어머니 친구 중에는 내가 TV에 얼굴을 드러내는 일에 대해 분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나를 제대로 키우지 못하는 어머니는 지옥에 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친구들의 비판에도, 나를 지지해 주었다.
 내 친구들 중에도 왜 내가 세상 사람들에게 얼굴을 보여주는지 묻는 아이들이 있었다. 나는 말했다.
 “파즐울라 부하들이 마스크를 쓰잖아. 그건 그 사람들이 범죄자이기 때문이야. 하지만 난 숨길 게 아무것도 없고, 잘못한 일도 전혀 없어.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위해 목소리를 내는 것이 난 자랑스러워. 그리고 나의 정체성을 보이는 일 역시 자랑스럽고.”
 5만 명이 넘는 여학생을 학교에서 쫓아내려는 미치광이가 있는데 사람들이 신경 쓰는 것이 고작 내가 베일을 써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의 문제라니! 거기다 내 동생은 자신이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학교에 안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난 가끔 세상이 죄다 뒤죽박죽이 된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공식으로 학교가 문을 닫기 이틀 전 아버지는 페샤와르로 가서 ‘뉴욕타임스’에서 온 비디오 저널리스트를 만났는데 나도 아버지와 동행했다. 그들은 학교가 문을 닫는 마지막 날 하루 동안 카메라를 들고 아버지를 따라 다닐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 만남이 끝나갈 무렵 그들 중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네가 고향이나 학교로 돌아갈 수 없는 날이 온다면 무엇을 하고 싶니?”
 나는 고집이 세고 낙천적인 아이였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는 만일,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고 나는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바로 그때 그들이 다큐멘터리의 초점을 내개 맞춰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학교가 문을 닫던 그날 아침, 비디오카메라를 든 기자 두 사람이 우리 집으로 왔다.
 
 촬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나를 막을 수 없어요. 나는 내가 받아야 할 교육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기자를 향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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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소는 집이든, 학교든, 어느 곳이든 괜찮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호소하는 우리의 바람입니다. 우리 학교를 구해 주세요. 우리 스와트를. 우리 파키스탄을 구해 주세요.”
 아버지가 나를 바라보며 자랑스러움과 안쓰러움이 뒤섞인 편치 않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은 내가 한 이야기들을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아주 멀리 떨어진 세상 저편에 사는 사람들도, 바로 이곳 탈레반 근거지인 스와트에 사는 사람들도.
 그러고 나서, 나는 친구들과 함께 교문으로 들어갔고, 카메라는 마치 우리가 장례식에라도 가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모습을 다 기록했다. 우리의 꿈이 죽어가고 있었다. 마지막 날 모두 학교에서 꼭 보자고 약속했지만 학생들 삼분의 이는 학교에 오지 못했다.

 그렇게 마지막 날이 흘러가고 있었고 선생님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평소처럼 행동하려 애썼다. 겨울방학 후에 다시 만날 것처럼 방학 숙제를 내주는 선생님들도 있었다. 마침내 마지막 종이 울렸고, 마리암 교장 선생님이 이번 학기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러나 다른 학기와는 달리 다음 학기 시작 날짜를 발표하지 않았다. 친구들과 나는 운동장에 서서 서로를 안아 주었고 너무 슬퍼 떠날 수가 없었다.
 집으로 온 나는 울고 또 울었다. 어머니도 울었다. 그때 집에 도착한 아버지가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자니. 넌 곧 학교에 다시 가게 될 거다.”
 하지만 아버지 역시 걱정하고 있었다. 겨울방학이 지나면 남학교는 문을 열게 되겠지만 여학교 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 비밀학교

 아버지는 내가 영어 공부를 계속하길 바랐다. 그래서 이슬라마바드의 한 기자가 준 DVD를 보라고 내게 권했다. ‘어글리 베티’라는 TV 드라마였다.
 나는 베티가 좋았다. 이에 커다란 교정기를 낀, 마음도 커다란 소녀였다. 나는 베티와 그 친구들이 베일로 얼굴도 가리지 않고 동행하는 남자도 없이 자유롭게 뉴욕의 거리를 걷는 모습을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내가 가장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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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부분은 베티의 아버지가 베티를 위해 음식을 하는 장면이었다. 딸이 아버지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딸을 위해서 음식을 하기도 하는구나!
 그 드라마에서 여성들의 치맛단은 너무나 짧았고, 목선도 너무 파여 있었다. 나는 미국에 옷감이 모자란 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었다.
 커다란 안경과 금속 교정기를 낀 소녀의 이야기가 담긴 이 작은 디스크가 불법이란 것이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가. 그리고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집안에 갇혀 지내며 어글리 베티와 그 친구들이 자유롭게 뉴욕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보는 일은 또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그렇게 시간이 가는 동안에도 나는 굴 마카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웹사이트에 이름을 올렸다. 모든 여학교들이 문을 닫은 지 나흘 후, 파즐울라의 부하들은 학교 다섯 곳을 더 파괴했다. 나는 이렇게 썼다.
 ‘나는 몹시 놀랐다. 이 학교들은 이미 문을 닫은 곳이다. 그런데 왜 그 학교들이 파괴되어야 하는가?’
 스와트 사람들은 계속해서 라디오 물라가 선고하는 태형을 구경하러 갔고, 배움을 원하는 여학생들은 감옥으로 변해버린 집 안에 갇히게 되었다.
 그 암울하고 답답하던 시절, 탈레반과 정부 사이에 비밀 회담이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고 나서 불쑥 파즐울라가 여자 초등학교에 대한 폐쇄령을 해제했다. 어린 여자 아이들은 학교에 가도 좋다는 것이었지만 열 살이 넘는 여자아이들은 집에 있어야 한다고, 푸르다를 지켜야 한다고 했다.

 나는 열한 살이었지만 그렇다고 학교에 가지 않을 내가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누가 봐도 열 살로 보이는 외모였다.
 마리암 선생님은 상급학교 여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이 새로운 포고령을 거스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학교 문을 열겠다는 내용이었다. ‘단, 교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을 것,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을 평범한 샬와르 카미즈를 착용하기 바란다.’ 그래서 다음 날 나는 평상복을 입고 책을 숄 아래 숨긴 채 머리를 꼿꼿이 들고 집을 나섰다. 이른바 비밀학교 였다.
 학교에 갔다. 마리암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로서는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며 그 자리에 선 것이었다. 우리 같은 어린 소녀들은 야단을 맞는 정도로 끝날지도 모르지만, 성인인 선생님은 태형에 처해지거나 혹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 비밀 학교는 우리의 침묵의 시위다.” 선생님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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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일까

 2월의 어느 아침, 우리는 총소리에 잠을 깼다. 총소리에 여러 번 잠을 깨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밍고라 사람들이 평화협정을 축하하기 위해 하늘을 향해 축포를 쏘고 있었다. 탈레반이 싸움을 멈춘다면 정부도 탈레반이 주장하는 샤리아 율법의 시행에 동의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샤리아 율법이란 생활의 모든 측면, 즉 토지 분쟁에서부터 개인의 위생에 이르기까지 모두 포함하는 이슬람 율법이다. 사람들은 평화협정을 비판했지만 나는 다시 학교에 갈 수 있어 기뻤다.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탈레반이 여학교 문제에도 합의를 했다는 점이었다. 이제 열 살이 넘은 여학생들도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작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학교를 오갈 때 거리에서는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좋아, 그렇게라도 갈 수만 있다면.

 학교가 문을 닫은 기간에도 나는 계속해서 여성의 교육권에 대해 인터뷰를 했고, 아버지와 함께 집회며 모임에 참가해 힘이 닿는 한 멀리까지 우리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TV 채널인 Geo TV에서 이 평화협정에 대해 인터뷰할 여학생을 원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어느 날 밤 호텔의 옥상에서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진행자는 이 평화협정이 여학생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내가 그 평화협정에 찬성하는지 물었다.
 나는 이미 그 협정에 실망하고 있었기에 사실대로 말했다.
 “지금 상황이 더욱 나빠지고 있어 몹시 슬픕니다. 우리는 평화를 기대했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어린 세대가 교육을 받을 수 없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결코 밝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정부는 반드시 조치를 취하고 우리를 도와야만 합니다.” 

 나는 덧붙였다.
 “나는 어느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게 필요한 교육을 받을 것입니다. 설사 바닥에 앉아 배워야 한다 하더라도 나는 교육을 받을 것이고 그렇게 되도록 할 것입니다.”       
 인터뷰 후 아버지의 친구 한 사람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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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랄라가 몇 살이지?”
 아버지가 열한 살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몹시 놀라워했다.
 “이 아인 피카제나이로군.”     
 그가 말했다. 나이에 비해 현명한 아이라는 뜻이었다.

 샤리아 율법 실행 후 탈레반은 더욱 더 대담해졌다. 이제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군인인 것처럼 대놓고 총과 곤봉을 들고 밍고라 거리를 순찰했다. 그들은 경찰들을 죽여 시신을 도로변에 버렸다. 그들은 립스틱을 사러 온 여자 손님들을 남자 동행 없이 가에 안으로 들였다고 가게 주인을 폭행했다. 그리고 시장에 나온 여자들을 위협했다. 우리 어머니도 위협을 당했다. 우리는 기만을 당한 것이었다.

 포격도 곧 다시 시작되었다. 우리가 서로를 감싸 안은 채 식당에서 몸을 숙이고 있을 때 떠오른 의문이 있었다. 도대체 이것이 무슨 평화란 말인가?
 ‘뉴욕타임스’의 다큐멘터리가 방송되었고 스와트의 여학생들이 처한 역경에 지금보다 더 많은 관심이 모아졌다. 전 세계 사람들이 지지와 성원의 메시지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나는 언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할 수 있는 지 깨달았다. 미국의 스탠퍼드 대학에 재학 중인 열아홉 살 파키스탄 여대생 한 사람이 우리에게 연락을 해왔다. 시자 샤히드라는 이름의 그는 결국 우리의 교육 운동에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된다. 우리는 처음으로 우리의 이야기가 파키스탄 국경을 넘어 세상에 알려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4월 20일, 탈레반 조직을 거느린 TNSM의 지도자이자 파즐울라의 장인인 수피 무함마드가 연설을 하기 위해 밍고라로 왔다. 그 집회에는 탈레반들이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지나갔고, 무려 4만 명이 넘는 군중들이 모여들었다.
 그 연설에서 수피 무함마드가 그의 추종자들에게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말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는 오히려 민주주의를 비이슬람적이라 비난하며 계속 싸우라고 부추겼다.
  “탈레반은 스와트를 제멋대로 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 이슬라마바드로 진출하려 하고 있다.”
 수퍼 무함마드의 추종자들 중에서도 이 집회의 결과를 불만스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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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후 탈레반은 스와트 남쪽 도시 부네르로 들어갔다.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불과 100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어서 이제 수도도 안전할 수 없었다. 정부군은 반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밍고라는 완전히 중간에 끼인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 난민

 “파슈툰 사람은 결코 제멋대로 자기 땅을 떠나서는 안 된다. 가난을 멀리하거나 사랑을 찾을 때만 자신의 땅을 떠나는 법이다.”
 잘 알려진 파슈툰 이행시 ‘타파’의 하나로 우리 할머니가 내게 가르쳐 준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시를 쓴 시인이 결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이유로, 탈레반이라는 무력에 강제로 내몰려 이 땅을 떠나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옥상에 서서 산을, 우리가 크리켓을 하던 골목길을, 곧 꽃이 필 살구나무를 바라보았다. 다시는 고향을 보지 못 할 경우를 생각해 하나하나 모두 기억에 담았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무얼 가지고 갈지 생각했다. 사피나네 차를 타고 가기로 되어 있었기에 짐을 넉넉히 실을 수 없었다. 나는 우선 책, 공책 등 책가방을 먼저 꾸렸다. 마지막으로 상장과 트로피들을 보며 작별인사를 했다.

 어머니가 내 책가방은 놓고 가야 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나는 학교를 사랑했고, 내가 가장 아끼는 것은 책이었다. 우리는 어쨌든 어린이들이었고 전쟁이 다가오고 있어도 어린이들은 어린이다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법이다.
 나는 내 책과 책가방을 가장 안전하게 보이는 손님방에 숨기고 책을 보호해 달라며 코란 구절을 외웠다. 그러고 나서 가족이 모두 모여 집에서 작별 인사를 했다. 우리는 기도를 하며 사랑하는 집을 신의 가호에 맡겼다.
 거리는 엄청나게 많은 차들이 몰려 혼잡했다.
그들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저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만 알 뿐이었다. 200만 명이 고향을 등지고 있었다. 파슈툰 역사상 가장 큰 민족의 대이동이었다.

 평소라면 몇 시간이면 되었을 거리가 이틀이 걸렸다. 더구나 차가 없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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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피나 가족과 함께 가다가 갈림길에서 우리를 내려놓고 그들은 목적지로 가버렸다.
 버스조차 없는 여정의 마지막 약 25Km는  짐을 짊어지고 홍수에 끊어진 위험한 도로를 걸어야 했다. 어둠이 내리고 있었고 곧 통행금지 시간이었다. 우리가 샹글라로 들어가는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던 군인 장교 한사람이 우리를 막았다.
 “통행금지요. 아무도 여길 지나갈 수 없소.”
 “우리는 IDP(국내 난민)예요. 가족이 살고 있는 마을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를 보내주려 하지 않았다.
 우리가 애원을 하고, 할머니가 울기 시작하자 마침내 그가 우리를 통과 시켜주었다. 남은 몇 Km는 완전한 어둠 속에서 두려움이 등골을 타고 내리는 오싹함을 느끼며 걸어야 했다.
 우리는 혹 군인들의 트럭이 지나가다가 우리를 테러리스트로 오인하고 쏘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우리가 비틀거리며 샹글라에 도착하자 친척들은 크게 놀랐다. 탈레반들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다시 돌아올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어쩌자고 이리로 왔어요?”
 그들이 물었다. 국내 난민에겐 안전한 곳이 없었다.         
              
 산간 마을에서 라디오는 생명줄이었고, 우리는 늘 라디오를 들었다. 5월 어느 날 정부군이 밍고라에서 그곳 탈레반과의 전면전을 위해 낙하산 부대를 보낸다고 발표했다. 나흘 동안 밍고라 시가지 전역에서 전투가 계속 되었다. 누가 이기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막바지에는 거리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마침내 정부군은 탈레반이 도주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군에서 파즐울라의 근거지를 파괴했고 공항을 점령했다고 했다. 4주가 지나자 정부군은 도시를 탈환했다고 말했다. 우리가 피난 가 있는 동안 아버지는 페샤와르에서 동료 세 사람과 함께 호스텔의 방 한 칸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들은 언론과 지역관리들에게 그간 스와트에서 일어난 일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다 2주 정도의 시간이 더 지난 후 아버지가 우리에게 페샤와르로 오라는 연락을 보냈다. 마침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우리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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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는 중대한 소식을 전해왔다. 미국의 특별대사 리처드 홀브룩이 회의를 개최하는데 우리를 초대했다는 것이다.
 파키스탄 전역에서 전쟁에 휩쓸린 부족의 사회활동가 스무 명이 모인 회의였다. 나는 홀브룩 대사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대사가 나를 보며 물었다.
 “몇 살이지?”
 “열두 살입니다.”
 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말했다.
 “존경하는 대사님, 우리 소녀들도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곳엔 이미 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고 우리는 파키스탄 사람들을 돕기 위해 많은 일을 하고 있단다. 수십억 달러의 경제 지원도 약속했고, 전기와 가스공급을 위해 파키스탄 정부와 함께 일하고 있지. 그런데 파키스탄에는 정말 다양한 문제들이 있구나.”
 그의 웃음 속에는 여성교육은 파키스탄이 직면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 중에 여성교육은 우선순위가 저 아래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는 듯했다.

 이슬라마바드에서 우리는 기자회견을 열고 스와트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이야기를 했다. 그렇게 이슬라마바드일정을 마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밍고라는 여전히 전쟁의 포화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탈레반은 물러나 스와트 산간지역에 머물고 있었다. 우리는 아보타바드의 방송국 소유 게스트하우스에서 지내라는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더 반가운 것은 모니바 역시 아보타바드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내 생일 이 다가왔다. 나는 하루 종일 생일 축하를 기다렸지만 그 혼란스러운 시기에 내 생일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집으로

 3개월 동안 이곳저곳 떠돌며 때론 친척들과, 때론 낯선 사람들과 생활하던 우리는 마침내 집으로 향했다. 우리가 차를 타고 산길을 내려갈 때 저 멀리 스와트 강이 보였고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처참하게 변한 밍고라를 보며 우리 모두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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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디를 보아도 폐허가 된 건물들과 쌓인 장해들, 불에 탄 자동차와 깨진 창문들뿐이었다. 굳게 닫혔던 철제 셔텨들도 난폭하게 열려 있었고 부서진 쇼윈도 너머로 텅 빈 진열장들이 보였다. 건물이란 건물은 모두 총탄으로 얽은 자국처럼 여기저기 패어 있었다.
 여전히 전장처럼 느껴졌다. 군인들이 옥상에 있는 기관총 진지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그들의 총구는 거리를 향하고 있었다. 정부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도 안전하다고 발표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너무 두려운 나머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버스 터미널은 평소라면 화려한 색깔의 버스들과 수백 명의 승객들로 북적여야 했지만 완전히 버려진 채였고, 갈라진 도로 사이에는 잡초들이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그러나 탈레반은 보이지 않았다.

 우리 집이 있는 골목의 모퉁이를 돌며 우리는 최악의 경우에 대한 마음의 준비를 했다. 아버지 가 대문을 여는 순간 우리는 모두 숨을 죽였다. 처음 눈에 띈  것은 정글로 변해버린 마당이었다. 나는 내 책들을 숨겨 놓았던 손님방으로 달려갔다. 책은 무사히 그 자리에 잘 있었다. 나는 감사의 기도를 올린 후 책장을 넘겼다.
 나는 행복에 겨워 울다가 문득 학교에 생각이 미쳤다. 아직 우리 학교가 온전한 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누군가 여기 있었군.”
 교문을 밀고 들어서며 아버지가 말했다. 학교 건너편 건물들은 미사일을 맞아 부서졌지만 기적적으로 학교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
 교실의 벽마다 반 탈레반 구호들이 쓰여 있었고, 교실 바닥에는 탄피들이 뒹굴고 있었다. 화이트보드에 누군가 ‘아미 진바다드!’라고 휘갈겨 놓았다. ‘군이여, 영원하라.’라는 뜻이었다. 그걸로 이곳에 머물던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각 교실들의 피해 상황을 살펴본 후 아버지와 나는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정부군이 아버지에게 남긴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편지에는 탈레반이 파키스탄 땅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스와트 사람들 때문이라는 비난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군인들의 소중한 목숨을 잃었고, 이것은 당신들의 무지함 탓이다. 파키스탄 군대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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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아버지는 말했다.                  
 “우리 스와트 사람들은 처음에는 탈레반의 유혹에 넘어갔고, 그러다 탈레반에 죽임을 당했고, 이제는 탈레반이 받아야 할 비난까지 받는군!”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 소박한 소원과 이상한 평화

 마침내 스와트에 평화가 찾아왔다. 정부군은 그대로 주둔했지만 상점들은 다시 문을 열었고 여자들은 자유로이 시장통을 걸어 다녔다. 그리고 나는 말카 에 누르를 이기고 일등을 했다. 아주 커다란 희망을 품을 수 있게 된 나는 집 마당에 망고 씨를 심었다. 정부가 약속한 화해나 재건과 마찬가지로 망고 열매가 열릴 때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은 밍고라의 희망찬 미래가 언제까지나 지속되기를 바라는 나름의 의식이었다.              
 열세 살이 될 무렵 나의 가장 큰 고민은 키가 더 이상 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전에는 내가 우리 학년에서 가장 컸지만 이제는 가장 작은 축에 속했다. 그래서 나는 매일 밤 알라신에게 키가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매우 많은 집회에서 연설을 하곤 했는데 내 키가 너무 작아서 권위 있는 모습을 보이기가 쉽지 않다고 느꼈다. 때로는 사람들의 주의를 끄는 일도 힘이 들었다.

 2010년 초, 우리 학교는 ‘스와트 지역 어린이 의회’에  참가해 달라는 초대를 받았다. 자선 기관 유니세프와 고아들을 위한 크팔코르(우리 집이란 뜻)재단에서 주최하는 행사였다. 스와트 지역 전체에서 60명의 학생들이 의회 의원으로 뽑혔다.
 그 어린이 의회는 일 년 동안 거의 매달 열렸고 우리는 아홉 개의 결의안을 통과 시켰다. 우리는 어린이 노동 착취 종식을 결의했다 우리는 또 장애 어린이와 노숙 어린이들의 교육, 탈레반이 의해 파괴된 모든 학교의 재건을 요구했다. 일단 의결된 결의안들은 담당 공무원에게 보내졌고 그 중 일부는 실행에 옮겨진 것도 있었다. 우리의 이야기가 전달되고 있었고, 우리가 변화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참으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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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년 여름에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폭우가 내렸고, 그 장맛비로 인한 홍수는 스와트 계곡의 모든 것을 다 휩쓸고 지나가 버렸다. 파키스탄 전역에서 2000명 이상이 익사했고, 수백만이 집을 잃었으며 7000여개의 학교가 파괴되었다.
 우리 집은 그래도 좀 지대가 높은 곳에 있어 물에 잠기지 않았지만 학교는 강가에 있었기 때문에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2011년 초까지 탈레반은 학교 두 곳을 더 파괴했다. 아버지의 친구인 대학 부총장 한분이 반 탈레반 운동을 했다고 살해되었다.
 그해 5월, 9·11 테러의 총지휘자였던 오사마 빈 라덴이 아보타바드 은신처에서 죽음을 맞았다. 파키스탄 사관학교에서 지척인 거리였다.
 그즈음 익명의 편지 한 통이 아버지 앞으로 전달되었다.
 ‘당신은 성직자의 아들임에도 배교자처럼 행동하고 있다. 당신은 모범적인 이슬람교도가 아니다. 우리를 비난하고 다니는 당신은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우리 무자헤딘 이슬람전사들은 당신이 이 세상 어디를 가든 당신을 찾아낼 것이다.
 탈레반은 애초에 이곳을 떠나지 않았던 것 같았다.   

■ 마침내 좋은 소식

 2011년 10월 어느 날 아버지가 이메일 한 통을 내게 보여 주었다. 내가 국제아동인권평화상 후보 다섯 명 중 한 사람으로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아동 권익 단체인 키즈라이츠에서 수여하는 상이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주교 데즈먼드 투투가 나를 추천했다고 했다. 대주교는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운, 아버지의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때 또 다른 이메일이 왔다. 라호르에서 열리는 교육 관련 행사에서 연설을 해 달라는 초대장이었다. 그곳 펀자브주의 주지사가 새로운 학교 네트워크를 시작하고 있었다. 펀자브 주의 모든 학교 어린이들에게 노트북 컴퓨터를 지급하고, 시험에서 우수한 상을 받은 학생들에게 상금을 준다고 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내게도 여성교육운동에 대한 격려로 상을 수여할 예정이라 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 샬와르 카미즈를 입고 그 행사에 참석했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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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내 친구들이 어떻게 탈레반의 포고령을 무시하고 비밀리에 계속 학교를 다녔는지 이야기했다. 나는 세상 모든 곳의 어린이들이 자신들이 받고 있는 교육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교육권을 박탈당한 수백만 어린이의 고통을 직접 체험해 보아 잘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나는 청중들에게 말했다.   
 “그러나 스와트의 소녀들은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지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았던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교실로 뛰어 들어오더니 내가 또 다른 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파키스탄 정부에서 최초의 평화상을 내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도 많은 기자들이 우리 학교로 찾아와 그날 학교는 완전히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상식이 있는 날까지 조금도 키가 더 자라지 않았지만 나는 당당하게 보이자고 마음먹었다. 총리가 내게 상을 수여했을 때 나는 요구사항을 적은 목록을 총리에게 전달했다. 파즐울라가 파괴한 학교들을 재건하고 스와트에 여자대학교를 건립해 달라는 건의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평화상은 해마다 수상자를 찾아 수여할 것이며 나의 활동을 기려 ‘말랄라 상’으로 명명한다는 발표가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기자들이 나를 인터뷰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교실에 들어갔을 때 나를 맞은 것은 기자가 아닌 케이크를 가운데 놓고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이었다. 친구들이 돈을 모아 케이크를 샀던 것이다. 하얀 케이크 위에 초콜릿으로 ‘성공이여 영원하라!’라고 쓰여 있었다.

                         2014. 11. 5 

                  * 다음에 제4부, 5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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