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랄라 (2)

2014. 11. 13. 12:33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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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랄라 (2)
                    - I am Malala -

■ 말랄라 유사프자이, 퍼트리샤 매코맥 지음, 박찬원 옮김

제4부 테러의 목표가 되다

■ 죽음의 위협

 2012년 초 어느 날, 우리 가족은 Geo TV에 출연하기 위해 카라치로 갔다. 알래스카에 살고 있던 파키스탄 기자 한 사람이 우리를 만나러 왔다. 그는 ‘뉴욕타임스’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나를 만나고 싶었다고 했다. 그가 아버지를 한쪽 옆으로 데리고 가더니 뭔가를 이야기 했다.
 나는 기자의 눈에 눈물이 고인 것을 보았다 .그와 아버지가 컴퓨터로 향했다. 두 사람 모두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들이 화면을 급히 닫아 버렸다. 잠시 후 아버지의 전화가 울렸다.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서 받았고 다시 들어왔을 때는 몹시 창백한 얼굴이었다.
 “뭐예요? 저에게 얘기 안 한 것 있지요?”

 내가 물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나를 어른처럼 동등하게 대했지만 이번 만은 나와 이야기를 나눌 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이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쉰 다음 컴퓨터 화면을 열었다.
 아버지가 구글에 내 이름을 쳤다. 탈레반의 글이 있었다.
 ‘말랄라 유사프자이는 죽어야 마땅하다.’
 거기 그렇게 쓰여 있었다. 나를 죽이겠다는 협박이었다. 나는 언젠가 이런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결국 그 순간이 왔다.
 나는 다시 한 번 화면에 뜬 메시지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컴퓨터 화면을 닫고 다시는 그 글을 보지 않았다. 최악의 일이 일어났다. 내가 탈레반의 테러 목표가 되어 있었다.
 나는 차분했는지 모르나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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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존심 강한 두려움을 모르는 파슈툰의 아버지가 그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이전의 아버지는 늘 말하곤 했었다.
 “날 죽이겠다면 죽이라고 해라. 나는 신념을 위해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탈레반이 그들의 분노의 화살을 아이에게 돌릴 것이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바, 우리 목숨보다 다 위대한 무언가를 믿는다면 설사 우리가 죽는다고 할지라도 그 목소리는 널리 퍼져 나갈 거라고 한 사람이 바로 아버지예요. 우리는 멈출 수가 없어요.”
 아버지는 알았다고,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만일 탈레반이 나를 죽이러 온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 지 생각해 보았다.
 “말랄라, 그냥 그 사람에게 네 진심을 말해. 네가 원하는 것은 교육이라고. 네 자신을 위한 교육. 그의 누이들, 그의 딸들을 위한 교육. 그를 위한 교육이라고”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고 나서 나는 말할 것이다.
 “이제 당신 마음대로 하세요.”

■ 봄의 약속

 봄이 되면서 계곡은 따뜻해지기 시작했고 포플러나무들이 활짝 꽃망울을 터뜨렸다. 그리고 교육운동이 일으킨 아주 작은 기적이 바로 우리 집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머니가 글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다.
 아버지와 내가 스와트 전역을 다니며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어머니는 쿠샬학교의 울파트 선생님과 공부를 시작했다. 선생님이 시간이 날 때면 어머니가 공책과 연필을 들고 선생님을 찾아갔고, 점차 이상하고 구불구불한 선들이 어머니 앞에 의미 있는 문자로 변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우르드어를 읽을 수 있게 되었고 영어도 배우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나만큼이나 공부를 좋아했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너무나 오랫동안 배움의 기회를 박탈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저녁이면 어머니와 나는 차를 마시며 숙제를 함께 했다. 파슈툰 여자 두 세대가 행복하게 책 앞에 함께 앉은 것이다.  한편 나는 많은 곳을 다니느라 학교 공부를 조금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 학기에는 말카 에 누르가 일등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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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소풍을 갔다. 파즐울라가 장악하고 있던 시절에는 여자들이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모든 소풍이 취소됐었다. 마침내 우리가 그렇게 좋아했던 봄 소풍이 다시 돌아온 것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그 유명한 화이트 팰리스로 갔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그 건축물은 너무나도 신비로워 지상의 것이 아니라 마치 구름처럼 하늘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친구들과 나는 감탄하며 방과 정원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초록의 깊은 숲 속에서 뛰어다니며 놀았다. 그리고 수정처럼 맑은 폭포에서 모두 함께 사진을 찍었다.

 다음 날 아침, 한 남자가 복사한 편지 한 통을 들고 우리 집으로 왔다. 그 편지글 읽는 아버지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친애하는 이슬람 형제들이여, 여기 쿠샬이라는 학교가 있다. 이곳은 천박함과 음란함의 중심이어서, 여학생들을 데리고 여기저기 소풍을 가기도 한다. 가라, 가서 화이트 팰리스의 관리인에게 물어보라. 그가 여학생들이 한 행동을 말해 줄 것이며 …….’
 아버지는 편지를 내려 놓았다.
 “서명도 없는 익명의 편지야.”
 우리는 충격 속에 앉아 있었다. 소풍을 갔을 때 우리는 적절하지 않은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알고 보니 그 편지는 온 동네에 뿌려졌고 학교 근처 사원 벽에도 붙었던 것이다.
 누군가 우리 소풍을 염탐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학교에 대한 거짓말을 퍼뜨리느라 참으로 온갖 수고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탈레반은 이곳에서 물러났을지 모르지만 그들의 잘못된 믿음은 여전히 굳건함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 불길함

 그해 여름 나는 열다섯 살이 되었다. 그 나이면 결혼하는 여자 아이들이 많았다. 그리고 남자 아이들도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학교를 떠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복이 많은 아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한, 그리고 평화가, 비록 불완전한 평화일지라도 지속되는 동안 학교에 계속 다닐 수 있을 것이다. 폭탄이 터지는 일은 일 년에 두세 번 정도로 줄었고 탈레반의 살육 현장을 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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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없이 그린 광장을 지나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진정한 평화는 추억에 불과할 것 같았다. 아니 희망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열다섯 살 생일 이 내게 하나의 전환점 같이 느껴졌다. 나는 이미 성인 대접을 받고 있었다. 우리 사회에서는 열네 살이면 이미 성인이 된다. 나의 미래에 대해 검토하고 숙고해야 할 시간이었다. 정치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정치인들이 오직 입으로만 약속을 하는 일들을 나는 직접 실행에 옮길 것이다. 우선 교육문제, 특히 여성교육부터 시작할 것이다.
 나는 많은 상을 받았고 너무 과분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내가 과연 그럴 자격이 있을까 생각했다. 아직도 너무나 많은 어린이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내가 시상식이며 축하 행사를 즐기고 있어도 되는 걸까?
 나는 아버지에게 상금으로 받은 돈의 일부를 다른 사람을 돕는데 쓰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교육재단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학교에서 스물 한 명의 여학생과 함께 모임을 조직했고, 우리는 스와트의 모든 여학생들이 교육받을 수 있도록 도울 방법을 의논했다.

 8월 초, 아버지는 끔찍한 소식을 들었다. 아버지의 가까운 친구인 자히드 칸이 공격을 당했다. 우리 아버지처럼 그도 반 탈레반 운동을 하는 사람이었다.
 “우리 둘 다 탈레반 공격 명단에 있었소.”
 마침내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털어 놓았다.
 탈레반이 물러났다고 했지만 스와트에는 여전히 폭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해 가을 이상한 일들이 자꾸 일어났다. 낯선 사람들이 집으로 와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친구들과 가족들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아버지는 그들이 정보부 사람들이라고 했다. 때로 그들은 학교로 와 염탐하듯 기웃거리기도 했다. 선생님들도 불안해했고, 나 역시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꿈에서 남자들이 내 얼굴에 염산을 뿌렸다. 남자들이 뒤로 몰래 다가오는 꿈도 있었다. 때로 우리 집 앞 골목 모퉁이를 돌아갈 때 뒤에서 울리는 발걸음 소리를 들은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내가 지나갈 때 어떤 형체들이 어두운 그림자로 변하는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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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범한 어느 날

 10월 둘째 화요일은 다른 날과 똑 같이 시작됐다. 나는 늦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늦잠을 잤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물리 시험에서 실망스러운 성적을 얻었기 때문에 말카 에 누르에게서 일등을 되찾아 오기 위해선 이번 시험에서 만점을 받아야 했다. 그것은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했다.
 나는 허겁지겁 달걀 프라이 조금과 차파티를 차와 함께 먹은 후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고 늦지 않게 학교 버스를 탈 수 있었다.

 내 삶의 모든 것이 다 순조로운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는 글 읽기를 배우고 있었고, 나는 내가 사랑하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모니바와도 다시 친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나는 말카 에 누르를 신경  쓰지 말고 그저 내 공부를 열심히 하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신께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시험 시간 몇 분 전 마지막으로 공부를 하며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그날 시험이 끝나고 나는 시험을 아주 잘 봤다고 자신했다. 모니바가 학교에 남아서 놀다가 두 번째 버스를 타자고 했다. 우리는 더 오래 수다를 떨기 위해 그렇게 하곤 했다.
 버스가 말 출발하려고 할 때 아탈이 뛰어왔다. 아탈은 버스 뒤 꼬리판 위로 뛰어 올랐다. 이것은 아탈의 새로운 장난으로, 집까지 버스 꼬리 판에 매달려 가려는 것이다. 위험한 일이었고 버스 기사는 그런 행동에 넌더리를 내고 있었다.
 “안에 타라, 아탈.” 기사가 말했다. 하지만 아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탈이 여자들과 같이 앉느니 차라리 걸어가겠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꼬리판에서 뛰어 내렸고 발끈 화를 내며 달려가 버렸다.

 우리는 평소처럼 육군 검문소에서 큰 길을 벗어났고 테러리스트 수배 포스터를 지나갔다.
 리틀자이언트 과자 공장을 막 지났을 때 이상하게도 주변이 아주 조용해졌고 버스가 속도를 줄이다가 멈춰 섰다. 나는 젊은 남자 한 사람이 우리를 막아 세운 것도, 버스 기사에게 이 버스가 쿠샬 학교 버스인지 물어본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또 다른 남자가 버스의 후미로 뛰어올라 우리가 앉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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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으로 몸을 기울였던 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그가 질문을 던진 것도 듣지 못했다.
 “말랄라가 누구냐?”
 그리고 나는 탕, 탕, 탕, 세 발의 총소리도 듣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기억하는 것은 다음날 치를 시험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검게 물들었다.

 제5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다

■버밍어밍란 곳

 10월 16일 내가 깨어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 모두 눈이 네 개, 코가 두 개 입이 두 개인 것처럼 보였다. 눈을 깜박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모든 것이 겹쳐 보였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제가 죽지 않았군요.’ 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러나 내가 어디에 있는지,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높은 침대 위에 누워 있었고, 삐삐, 윙윙, 낮은 소리를 내는 복잡한 기계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때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아 여긴 병원이구나.
 머리에 스카프를 쓴 마음 좋아 보이는 여자가 내 곁에 있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은 레한나이며 이슬람 사제라고 말했다. 그가 우르드어로 기도를 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 즉시 편안함과 안전함을 느끼며 위안을 얻었다. 마음을 달래주는 아름다운 코란의 구절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눈을 감았고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초록색 방에 있었다. 창문은 없었지만 아주 환하고 밝은 방이었다. 그 상냥한 이슬람 사제는 이미 가고  없었고. 그 자리에 의사와 간호사가 있었다 .

 나는 말을 하려 했지만 할 수 없었고, 그래서 손으로 글자를 써보려 했다. 의사가 알파벳 보드를 가져 왔고 나는 손으로 알파벳을 하나씩 가리켰다. 내가 처음 만든 단어는 ‘아버지’였고 그 다음은 ‘나라’였다.
 간호사와 의사가 들어오고 나가고 했다. 아무도,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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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그들은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대답으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흔들었다. 그들은 내가 이름을 알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왼손을 움직일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많은 것을 물었지만 내 질문에는 답을 해주지 않았다.
 모든 것이 너무 힘들었다. 쏟아지는 질문들, 심한 두통, 아버지에 대한 걱정, 눈을 감아도 어둡지 않았고 마치 태양이 내 눈꺼풀 아래에서 빛나고 있는 것처럼 온통 환한 빛이었다. 나는 아득하게 정신을 잃었다 깨어났다 했다. 그러나 잠을 잤다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깨어 있는 순간만이 길게 이어졌으며 머리에는 아픔과 질문들이 가득 찼다 사라졌다 했다. 

 한 사람이 병실로 들어와 피오나 레이놀즈 박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마치 우리가 오랜 친구 사이인 것처럼 말을 걸었다. 그는 내게 초록색 곰 인형과(나는 곰 인형에 어울리지 않는 색깔이라 생각했다) 분홍색 공책 한 권을 건넸다. 내가 쓴 단어는 ‘고맙습니다’ 였다. 그 다음 나는 이렇게 썼다.
 ‘왜 우리 아버지가 없나요?’ 
‘ 우리 아버지는 돈이 없어요. 병원비는 어떻게 하죠?’            
그가 말했다.
 “네 아버지는 안전하게 파키스탄에 계셔. 그리고 병원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단다.”

■ 문제와 해결

 병원에서 지낸 처음 며칠 동안 나는 꿈과 생시를 오락가락했다. 내가 총에 맞았다고 생각은 했지만 확신할 수는 없었다. 꿈이었을까. 아니면 진짜 기억일까? 나는 단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이중으로 겹쳐 보였고 잘 들리지도 않았으며 왼팔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왼쪽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그러다 나는 내 초록색 곰 인형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대신 그 자리에 하얀색 곰 인형이 있었다. 첫날부터 내 곁을 지키고 있었던 그 초록색 곰 인형에게 나는 특별한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 인형이 내게 의지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공책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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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록색 곰 인형은 어디에 있나요?’
 아무도 내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 하얀 곰 인형이 첫날부터 줄곧 내 곁에 있었다고 말했다. 불빛과 초록색 벽이 곰 인형에 초록색을 반사시켰는지도 모르겠지만 애초에 곰 인형의 색깔은 하얀색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병실의 환한 불빛은 마치 뜨거운 흰색 단검처럼 내 눈을 찔러 댔다. 특히 감겨지지 않는 왼쪽 눈이 아팠다. ‘제발 불을 꺼 주세요.’ 나는 공책에 애원했다.
 간호사들은 최선을 다해 방을 어둡게 해주었고, 통증에서 벗어난 나는 다시 아버지 걱정으로 돌아갔다.

 매일 다른 의사나 간호사가 내 방으로 와서 이불을 갈아주고 내 시력을 확인했다. 그때마다 나는 공책을 건네며 아버지에 대한 질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모두 걱정하지 말라는 말만 할 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또 하나 내 걱정은 병원비였다.
 그래서 의사에게 물었다.
 ‘병원비는 누가 내나요? 우리는 돈이 없거든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병원비는 너희 나라 정부에서 낼 거다.”
 그 후로 그 의사는 나를 볼 때면 늘 미소를 지었다.

 피어나 박사가 내 병실로 와서 신문 오린 것 하나를 건넸다. 그것은 우리 아버지가 파키스탄 육군참모총장 옆에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었다. 아버지는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 사람 뒤 배경에 아탈도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내게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났지만 나는 살아 있고, 이제 아버지도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다 사진 뒤쪽에 동생 가까이 앉아 있는 숄을 쓴 사람에게 눈길이 갔다. 나는 그 발을 알아보았다. 어머니의 발이었다.
‘우리 어머니예요!’
 피오나 박사에게 그렇게 썼다. 그날 밤 나는 더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이상한 꿈을 많이 꾸었다.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채 침대에 누워 있는 꿈도 있었고, 총에 맞는 꿈도 있었다. 폭탄이 터지기도 했다. 잠에서 깨어난 나는 초록 곰 인형을 찾았지만 거기 있는 것은 늘 하얀 곰 인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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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오후, 내게 우르드어로 말을 했던 의사 자비드 카야니 박사가 그의 휴대전화를 가지고 들어왔다.
 “부모님에게 전화를 하자꾸나.”
 그가 사무적인 말투로 말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울지 말아야 한다.”
 그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몇 번의 신호음이 들린 후 아버지의 친숙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자니?” 아버지가 말했다.
 “잘 있니, 나의 자니?”
 나는 목에 관을 꽂고 있어서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굴에 감각이 둔했기 때문에 미소를 지을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마음으로 미소를 지었고, 아버지도 그 미소를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곧 가마.” 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그만 쉬어라. 이틀 후면 우리가 도착할 거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크고 밝았다. 어쩌면 너무 밝았다. 그때야 나는 깨달았다. 아버지 역시 울지 말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 수많은 질문

 나는 분홍색 공책에 새 메모를 썼다. ‘거울’
 그 메모를 본 간호사가 하얀색 작은 거울을 가져왔고,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긴 머리카락 절반이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왼쪽 눈썹에는 꿰맨 바늘자국들이 있었다. 아주 커다란 시퍼랗고 누런 멍이 왼쪽 눈가에 남아 있었다. 내 얼굴은 퉁퉁 부어 거의 멜런 크기였다. 게다가 왼쪽 입가가 아래로 축 처져 있었다.
 이 일그러진 얼굴의 불쌍한 말랄라는 도대체 누구인가? 도대체 말랄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나는 혼란스러웠지만 화가 나진 않았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다.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내 머리카락이 조금이네요. 어떻게 됐나요 이런 일이 내게?’
 나는 그렇게 썼다. 피오나 박사는 늘 하던 말을 했다.
 “나쁜 일이 일어났지만 이제 넌 안전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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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총에 맞았나요?’ 
 피오나 박사가 부드럽게 내 손목을 잡으며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 나서 아주 천천히, 그리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는 총에 맞았단다. 버스에서,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지.”
 그들이 한 짓이군. 나는 생각했다. 탈레반이 하겠다고 했던 일을 정말로 실행한 것이다. 나는 분노했다. 그들이 나를 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내가 그들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는 것 때문이었다. 이제 그들은 내가 해야 했던 말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
 “다른 여학생 두 명도 다쳤고.”
 피오나 박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둘 다 괜찮단다. 샤지아와 카이나트란다.”

 피오나 박사는 총알이 내 왼쪽 눈 옆 관자놀이를 뚫고 들어가 46Cm 가량을 이동한 후 왼쪽 어깨에 박혔다고 말했다. 하마터면 그 총알에 눈을 잃을 수도 있었고 뇌를 다칠 수도 있었다고 말했다.
 “네가 살아 있는 것은 기적이란다.”
 나는 슬프지 않았다. 무섭지도 않았다. 그저 생각했다. ‘내가 어떤 모습이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나는 살아 있잖아. 정말 감사한 일이야.’
 나는 피오나 박사를 쳐다보았다. 그는 내 앞에 휴지 상자를 놓아 주었다. 내가 울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예전의 말랄라였다면 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한 경험을 하고 나면 거울에 비친 이상한 얼굴은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나는 그저 총알이 입힌 상처에  대해 더 알고 싶었을 뿐이다.
 나는 피오나 박사에게 너무나도 많은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한 가지만 물었다.
 ‘언제 집에 갈 수 있나요?’ 

■ 시간 보내기

 하루는 또 다른 피오나가 내 병실로 왔다. 그의 이름은 피오나 알렉산더였고, 병원의 홍보실 책임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스와트에서는 병원에 홍보실이 있는 걸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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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내 사진을 찍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이건 정말로 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도대체 누가 왜 나같이 생긴 아이의 사진을 원한단 말인가? 
 나는 사진 찍는 일에 동의하며 두 가지를 부탁했다. 머리를 가릴 수 있게 숄을 달라는 것, 그리고 오른쪽 모습을 찍어 달라는 것이었다. 내 왼쪽 얼굴은 촬영에 전혀 협조적이지 않을 테니까.
 병원에 있을 때 가장 힘든 점은 심심하다는 것이다. 나는 가족을 기다리며 병실의 시계를 바라보고 지냈다. 시곗바늘이 돌아가는 것을 보며 내가 정말로 살아 있구나, 느낄 수 있었고, 가족이 도착할 시간이 일 분, 일 분 줄어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

 평생 처음으로 나는 일찍 일어나고 있었다. 아침이면 나는 7시를 기다렸다. 아침 7시가 되면 병원 원무과의 이마와 어린이병원 간호사들 같은 친구들이 내 병실로 와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눈이 잘 보이게 되었을 때 그들은 DVD 플레이어와 DVD를 가지고 왔다. 며칠 동안 그들은 TV를 틀어 주었다. 나는 BBC를 잠깐 보았는데 미국 선거에 버럭 오바마 후보가 보였다.
 아직도 가끔 이중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이젠 시력이 훨씬 좋아졌다. 나는 여러 DVD 중에서 슈렉을 골랐다 너무 재미있었다. 간호사가 왼쪽 눈을 면으로 된 가리개로 덮어 주었다. 그러지 겹쳐 보이는 현상이 많이 좋아졌다. 한편 왼쪽 귀에서는 계속 피가 나왔고 머리도 계속 욱신거렸다. 하지만 나는 초록색 거인과 말하는 당나귀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부모님이 영국에 도착할 날을 기다렸다.
 닷새째 되는 날, 목에서 가는 관을 제거했고 나는 목소리를 되찾았다. 그즈음 내 배에서 뭔가 이상한 게 만져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게 뭐예요?” 나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네 머리뼈 조각이란다.” 간호사가 대답했다.

 피오나 박사가 와서 설명해 주었다. 총알이 관자놀이에 맞았을 때 뼈가 골절이 되면서 뼛조각들이 뇌 내벽으로 들어갔고, 그로 인한 쇼크 때문에 뇌가 부었다고 했다. 그래서 파키스탄에서 의사들이 뇌가 확장할 공간을 만들어 주기 위해 머리뼈 일부를 제거 했었고, 잘라 낸 뼈를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내 배의 피부 아랫부분에 넣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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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나는 사경을 헤맸다. 그래서 의사들은 혼수상태인 나를 비행기에 태워 더 나은 치료를 위해 영국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나중에 아랍에미리트에서 의료장비와 의료팀이 완비된 비행기를 제공해 주었고 피오나 박사도 함께 타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피오나 박사와  자비드 박사는 파키스탄 의사들에게 더 좋은 시설을 갖춘 병원으로 나를 옮기지 않으면 내가 살기 힘들 것이라고 말했고, 파키스탄 의사들은 내가 그들과 떠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었다. 피오나 박사와 자비드 박사는 거의 2주 동안 내 곁을 지켰다. 그러니 내가 깨어났을 때 아주 오랫동안 알던 사람처럼 나를 대한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혼수상태로 있었다. 그러니까 내 인생의 일주일을 잃었다. 내가 생전 처음으로 파키스탄을 떠난 것이 내 생명을 구하기 위한 비행기 여행이었던 것이다.
 세상은 계속 돌아가고 있었지만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놓치고 지나간 것이 또 뭐가 있는지 궁금했다.   

 ■ 이제 우리 모두 여기에

 목에 꽂혀 있던 관이 제거되고 난 후 나는 다시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이번에는 내가 실제로 말을 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틀 후면 내 곁으로 올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틀에 그 이틀이 더 지났다.
 다비드 박사가 파키스탄으로 세 번째 전화를 걸었다. 아버지는 가족 전부 곧 도착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하루만 더 기다리라고.
 “제 책가방도 가져다주세요. 곧 시험기간이잖아요.”                    
 내가 부탁했다. 나는 머지않아 고향으로 돌아갈 거라고, 그리고 다시 일등을 차지하기 위해 친구들과 경쟁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음 날은 병원에 온 지 열흘이 되는 날이었고. 나는 중환자실에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이번에는 창문이 있는 방이었다.

 나는 버밍엄이 내가 TV에서 봤던 도시들과 비슷하리라 기대했었다. 뉴욕처럼 높은 빌딩과 많은 차들, 거리엔 양복 입은 남자들, 그 남자들과 나란히 걷는 여자들, 그러나 창밖으로 보이는 것이라곤 오래된 찻주전자 색깔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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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려 잿빛이 된 하늘뿐이었다. 창문 아래 거리에는 집들이 있었다. 다 똑같이 생긴 깨끗한 집들이 차분하고 질서 있게 배열된 모습이었다. 나는 모든 집들이 다 똑같이 생긴 나라는 상상하지 못했었다. 태양이 없는 것 같은 나라도. 산은 어디 있지? 폭포는?         
 그날 오후 자비드 박사가 지금 부모님이 오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외치면서 집을 달려 나와 학교로 향했던 그날로부터 열엿새 만이었다. 그동안 나는 네 군데 병원(밍고라, 페샤와르, 라왈핀디, 버밍엄)을 거쳤고 수천 Km를 이동했다.
 나는 훌륭한 의사와 간호사들, 병원 직원들을 만났다. 그리고 나는 단 한 번도 울지 않았다. 간호사들이 머리에서 철심을 뽑았을 때도, 내 살에 주삿바늘을 꽂았을 때도, 불빛이 단검처럼 내 눈을 찔렀을 때도 나는 울지 않았다. 
 하지만 문이 열리고 낯익은 목소리가 자니, 피쇼, 하고 부르자. 그리고 그들이 내게로 달려와 나를 안아도 될까 겁을 내며 내 손에 입을 맞추자 나는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울고, 또 울고, 한 참을 울었다. 아, 참 많이도 울었다.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나는 내 말썽꾸러기 동생들이 너무나 반가웠다. 마침내 우리 가족은 우리 생에서 가장 무서웠던 시간들을 보내고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나는 부모님이 너무나 늙고 피곤해 보여 깜짝 놀랐다. 파키스탄에서부터 긴 비행에 지친 탓도 있었겠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었다. 흰머리와 주름이 보였다. 예전에도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렇게 큰 시련을 겪으며 갑자기 늙은 것일까?
 나는 내 얼굴 절반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왼쪽 눈은 불룩하게 튀어나와 있었고, 머리카락은 절반이 없는 상태였다. 목소리는 되찾았지만 아직 나는 세 살짜리 아기처럼 간단한 문장밖에 구사하지 못했다.  
 “아바, 그 사람들 누구였어요?”
 내가 물었다. 아버지는 내가 무엇을 묻는지 이해했다. 나는 내게 이런 짓을 한 사람이 알고 싶었던 것이다.
 “자니, 그런 질문은 하지마라. 이제 다 괜찮다. 우리 모두 여기 함께 있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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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그리고 아버지는 내가 어떤지, 두통은 사라졌는지 물었다. 아버지가 화제를 돌리려 했고 나는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
 어느 날 나와 둘 만 있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았다.
 “자니,”
 “그들은 나를 죽이겠다고 수도 없이 협박했었다. 네가 총탄을 대신 맞은 거야. 내가 맞았어야 할 총탄을……. 살다 보면 기쁜 일도 있고 고통스러운 일도 있기 마련이야. 넌 모든 고통을 한꺼번에 겪었으니 나머지 네 인생은 기쁜 일로만 가득할 게다.”

 때로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여기 있는 나는 한 때 카메라 앞에 서서 전 세계를 향해 이야기 하던 아이였다. 그런데 이렇게 다치고 나니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사랑하는 한 사람을 위한 말 몇 마디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난 고통스럽지 않아요. 아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아버지도 고통스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하지만 나는 일그러진 입으로 미소를 지으며 “아바”라고만 말하고 말았다. 아버지도 눈물이 그득한 눈으로 미소를 지어주었다. 우리에게는 말이 필요 없었다. 우리는 이 병실로 오기까지 모든 여정의 한 걸음 한 걸음을 함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모든 발걸음을 함께할 것이다.
 그런데 나를 부축해서 화장실로 가던 어머니가 나를 보며 “네 얼굴이 괜찮아질까?” 걱정했다.
 나는 의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려주었다. 나는 앞으로도 수술을 여러 번 더 받아야 하고 물리치료도 몇 달 더 받아야 한다고. 그 과정에서 내 얼굴도 차츰 나아질 거라고. 하지만 결코 예전과 같아지진 않을 거라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오면 생각이 바뀌기 마련이라고. 눈을 깜박일 수 없어도. 미소를 지을 수 없어도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나, 말랄라였다.
 “내 얼굴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신은 내게 새로운 인생을 주셨어요.”
 내 회복은 알라신이 내린 축복이었고, 나를 아끼고 나를 위해 기도해준 모든 사람의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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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의 빈 곳 채우기

 며칠 동안 부모님은 내가 총을 맞았던 날로부터 우리가 다시 만난 열엿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의 빈 곳을 채워주었다.
 내가 들은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학교 버스 기사 우스만 바이 잔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은 순간 곧장 버스를 스와트 중앙병원으로 몰았다. 버스 안의 아이들은 비명을 지르며 울었고 나는 모니바의 무릎 위에 쓰러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는 사립학교연맹 회의에서 연설 중이었고 연설을 마치자마자 그 소식을 듣고 황급히 병원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나는 머리에 붕대를 감고 들것에 누워 있었다고 했다. 눈은 감은 채였고 머리카락은 마구 흐트러져 있었다.
 곧 군에서 내 사건을 맡았고 나는 헬리콥터를 타고 페샤와르 병원으로 이동했다.

 총격이 있은 후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파키스탄의 TV 채널들은 기도와 시와 함께 내 모습을 화면에 내보내기 시작했다.
 페샤와르 국군 통합병원의 검진 결과 총알은 아직 내 몸에 박혀 있었고, 총알이 뇌 아주 가까이 지나갔다. 뇌가 부어오르고 있었으며, 뇌가 확장될 공간을 만들기 위해 머리뼈 일부를 잘라내야 한다고 했다. 주나이드 대령은 네 시간에 걸친 수술을 단행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면서 상태가 악화되었다. 내가 죽을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버지는 내 장례식 준비를 하기도 했었다.
 마침 군 자문위원으로 라왈핀디에 와 있던 영국인 의사 피오나 박사와 자비드 박사, 그들이 내 생명의 은인이었다.
 그들은 말했다. 내가 페샤와르에 계속 머물렀다면 뇌손상을 입었거나 죽었을 거라고 했다. 그곳 치료 수준이 우려할 만한 정도였고, 그래서 감염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다.

피오나 박사는 내가 해외로 나가 최고 수준의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자비드 박사가 있는 버밍엄의 퀸엘리자베스 병원으로 나를 보내기로 결정되었다. 나는 48시간 내에, 아무리 늦어도 72시간 내에 이송되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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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다. 어머니와 동생들은 여권도 필요한 서류도 없었고, 군에서는 아버지 혼자라도 나와 함께 영국으로 갈 것을 권했다.
 아버지는 매우 난처한 상황에 놓였다. 아버지가 나와 함께 간다면 아내와 어린 아들들을 탈레반의 공격을 당할 위험에 두고 떠나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는 자비드 박사에게 말했다.
 “이제 말랄라는 신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나는 나머지 가족을 지켜야 합니다.”  
 자비드 박사는 나를 잘 돌보겠다고 아버지를 안심 시켰다. 
 
 그즈음 탈레반은 성명서를 내고 그들이 나를 쏜 것을 인정했다. 그들은 내 교육운동이 ‘세속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두 명의 스와트 지역 남자가 나와 나의 통학 길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고, 국군 검문소 근처에서 나는 쏜 것은 그들이 어디서든 장소를 가리지 않고 공격을 감행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머리에 총을 쏴서 살해하는 것은 그들의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그날 버스에서 함께 총을 맞은 샤지아와 카이나트도 역시 회복 중이었다. 카이나트는 총알이 팔을 스치고 지나갔고, 샤지아는 손바닥과 왼쪽 쇄골에 총을 맞았다.

 나를 방문하려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았다. 기자들, 유명인들, 그리고 정치인들도, 하지만 병원에서는 내가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회복할 수 있도록 그들을 모두 돌려보냈다.
 하루는 파키스탄에서 높은 장관 한 사람이 와서 아버지에게 나를 쏜 사람을 찾기 위해 전국을 다 뒤졌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것이 빈말임을 알았지만 참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정부는 베나지르 부토를 죽인 사람도 아직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총격 사건이 있은 후 감옥에 갇힌 유일한 사람은 우리 버스 기사였다. 군에서는 버스 기사를  풀어주지 않는 이유를, 총 쏜 사람을 찾으면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어떻게 총 쏜 사람이 아닌 우리 버스 기사를 체포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 미친 짓이었다.

 드디어 TV 뉴스를 보게 된 나는 파즐울라의 대변인이 나를 ‘쏠 수밖에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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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던’ 이유를 말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탈레반을 비판하는 연설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내게 경고를 했지만 내가 멈추지 않았다고 그들은 언론에서 말했다.
 내가 저지른 또 다른 범죄는? 교육과 평화를 대변했다는 것이다. 그들 방식으로 말하자면, 내가 서구 교육을 찬양했고, 서구 교육은 이슬람 정신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탈레반은  나를 죽이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파즐울라가 말했다.
 “이 일이 교훈이 될 것이다.”
 거짓과 진실이 맞서면 언제나 진실이 승리하기 마련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걸어온 길을 밝혀준 이슬람교의 믿음이었다. 탈레반은 나를 침묵시키기 위해 나를 쏘았지만, 오히려 이제 전 세계가 내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 세계 곳곳에서 도착한 메시지

 피오나 알렉산더가 카드가 가득 담긴 가방을 가지고 왔다. 그날은 이드 울아자, 즉 큰 이드(선지자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스마일을 신에게 바치려 했던 마음을 기념하는 날) 였다. 파키스탄에 있을 때 우리 가족 모두 샹글라에 가던 그 축제의 날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참 친절도 하지. 이드라고 친구들이 내게 카드를 보냈구나. 그런데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지?’
 그때 나는 카드에 찍힌 소인 날짜를 보았다. 10월 16일, 10월 17일. 내가 총에 맞은 직후부터 며칠 전 날짜들까지 다양했다. 카드들은 이드 축제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전 세계에서 나의 쾌유를 비는 마음을 담아 보낸 카드들이었다.

 피오나가 내 앞으로 온 편지가 8000통이 넘는다고 말했다.
 소포도 있었다. 초콜릿 박스들이었다. 그리고 온갖 크기의 곰인형들도 많았다. 그중에서 가장 귀한 선물은 베나지르 부토의 자녀들이 보내온 것이었다. 상자 안에는 평소 베나지르 부토 총리가 머리에 썼던 스카프 두 장이 들어 있었다.
 정부 지도자, 외교관, 연예계 스타 들에게서 온 메시지도 있었다. 셀레나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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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즈가 트위터에 내 이야기를 썼고, 비욘세는 페이스북에 내 쾌유를 빌었다. 마돈나는 내게 노래를 헌정하기도 했다. 앤젤리나 졸리의 메시지까지 있었다. 너무나 신나는 일이었고, 엄청난 일이었으며, 아직 뇌가 제대로 기능을 하지 않아서인지 혼란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피오나 박사와 자비드 박사. 그리고 파키스탄과 영국의 모든 훌륭한 의사와 간호사가 나를 구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모든 사람들의 기도와 지지가 내 생명을 구한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병실에 혼자 누워 외로움을 느끼고 있는 동안, 가족 걱정을 하고 병원비 걱정을 하고 있는 동안, 온 세계에서 사람들은 나를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 좋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날

 나는 총알에 절단된 안면신경을 복원하는 수술을 받았다. 거의 여덟 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그리고 복잡한 수술이었다. 우선 외이도에서 반흔조직과 뼛조각을 제거했다. 그러고 나자 고막이 망가진 것이 드러났다. 어쩐지 소리가 잘 안 들리더라니! 그다음 의사들은 손상된 신경부분들을 제거하고 다시 연결하는 아주 섬세한 과정을 수행했다.
 넉 달이 지난 후에야 나는 비로소 미소를 짓고 윙크도 할 수 있었다. 부모님은 내가 미소를 짓고 윙크를 할 그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물론 내 얼굴이지만 그 얼굴이 돌아온 것에 가장 기뻐할 사람은 부모님이라 생각했다.

 총격이 있은 지 거의 한 달쯤 되었을 즈음 우리 가족은 버밍엄의 한 고층 아파트에서 지내며 매일 나를 보러 왔었다. 생활이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나는 마침내 다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즈의 마법사’를 아주 열심히 읽었다. 영국의 전 총리이자 유엔교육특사인 고든 부라운이 내기 준 선물이었다. 나는 도로시의 정신과 자세가 좋았다. 집으로 돌아가려 애쓰는 와중에도 걸음을 멈추고 도움이 필요한 소심한 사자와 녹슨 양철 나무꾼을 도와주었다. 내가 이 이야기에서 배운 것은, 삶에는 언제나 수많은 난관들이 있기 마련이지만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계속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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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과 기억도 다시 돌아오기 시작했다. 피오나 박사가 예전에 주었던 분홍색 공책에 내가 썼던 질문들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대부분은 철자가 틀렸고 문법도 맞지 않았다. 아직도 몇몇 친구들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고, 총격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억이 없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좋아지고 있는지 모두에게 보여 주기 위해 노력했다.
 12월이 되었을 때 마침내 나는 두 달에 가까운 병원 생활에서 처음으로 외출을 허락받았다. 고향 스와트 계곡의 푸른 산을 그리워하는 나를 위해 원무과 직원인 이마가 버밍엄 식물원에 다녀 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식물원에 다녀 온지 이틀 후 나는 처음으로 가족이 아닌 방문객을 만났다. 파키스탄의 대통령이자 베나지르 부토 총리의 남편이었던 아시프 자르다리였다. 병원은 언론이 몰려들 것 때문에 염려를 많이 했지만 중요한 손님이었다. 자르다리 대통령이 나의 모든 의료 비용을 파키스탄 정부에서 부담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언론을 피해 이루어졌다. 나는 커다란 보라색 파카로 몸을 감싸고 직원 전용 출구로 몰래 빠져나와 차를 타고서 구름처럼 몰려 있던 기자와 사진 기자들 바로 옆을 지나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스파이 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 같았다.

 대통령은 딸 아시파와 함께 왔다. 그들은 내게 꽃다발을 주었고 아시파는 내게 전통적인 카슈미르 숄을 선물했다. 대통령은 내 머리에 한 손을 올렸다. 우리나라에서 그것은 존경의 표현이었다. 아버지는 대통령이 머리뼈가 없는 부분을 만지지나 않을까 해서 좀 움찔했지만 괜찮았다.
 대통령은 아버지가 버밍엄에서 일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파키스탄의 교육 담당관 일을 하게 될 거라 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다 괜찮을 것이니 나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건강을 회복하는 일에 집중해 달라고 했다.
 그는 후에 내가 ‘놀라운 소녀이며 파키스탄의 자랑’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가 내가 아주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나를 존중해 주었다.
 아주 근사한 하루 였다. 병원비며 우리 가족이 머물 곳에 대한 걱정 모두가 사라졌다.
 아, 그러나 슬픈 날이기도 했다. 우리가 오랫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리라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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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적

 마침내 나는 퇴원을 했고 행복하게 2013년을 시작했다.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지내는 일이 참 좋았다. 비록 밍고라의 우리 집이 아니라 엘리베이트가 있는  고층 아파트였지만, 우리의 그 소박한 옛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라도 다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버밍엄의 상쾌한 공기 속으로 산책을 나갔다. 내 기운을 회복하기 위한 외출이었지만 나는 금방 피곤해졌다.
 카페에서는 남자와 여자들이 함께 섞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와트에서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옷가게에는 살갗을 너무 많이 드러내는  옷들이 많았다. 우리는 버밍엄 여자들이 그런 옷을 입고도 추위에 얼어붙지 않는 것을 신기해했다. 이곳 여자들은 한겨울에도 아주 짧은 반바지를 입고 맨살의 다리를 내놓고 하이힐을 신고 다녔다.  

 나는 고향이 지독하게 그리웠다. 학교 친구들이 그리웠고, 산과 폭포, 아름다운 스와트 강과 초록의 평야가 그리웠다. 심지어 지저분하고 번잡스러운 밍고라의 거리도 그리웠다. 그랬기에 파키스탄사람들 중에 내게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몸시 힘들었다. 어떤 사람들은 내가 서구의 앞잡이이며 리차드 홀브룩과 ‘어울려 다녔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내가 타락한 이슬람교도라고 했고, 심지어 우리가 해외에서 호화롭게 살고 싶어 아버지가 계책을 부려 나를 쏘았다고도 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스카이프로 모니바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이번에는 싸우지 않았다. 모니바는 내가 몹시 보고 싶다고, 다른 어떤 아이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고 말했다. 또 모니바는 샤지아와 카이나트가 회복되어 다시 학교에 나오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나는 곧 걸을 수 있었고, 말할 수 있었고, 읽을 수 있었고 기억도 돌아왔다. 그러나 나는 잘 들을 수가 없었다. 귀 안에서 울림이 계속되었다. 의사들은 내 배 속에 보관하고 있던 머리뼈 조각을 다시 제자리에 넣을 경우 감염이 생길 것도 염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또 수술이 결정되었고, 세 가지 수술이 한꺼번에 이루어졌다. 이번에 의사들이 집도한 수술은 티타늄 두개성형술이었다. 내 머리에 티타늄 판을 넣는다는 것을 의학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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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혹시 내가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양철 나무꾼처럼 되는 것은 아닐까 궁금했다. 그리고 지난번에 내 얼굴 신경을 복원했던 의사가 이번에는 귀 뒤에 인공달팽이관이라고 불리는 작은 전자 음향송신기를 심었다. 의사는 나중에 귀 바깥에 수신기를 끼울 것이라고 말했다. 머리뼈 조각도 배 속에서 제거되었다. 큰 수술이었지만 나는 빠르게 회복했고 닷새 만에 집에 돌아왔다. 나중에 나는 정말 특별한 선물을 받았다. 비닐에 싼 내 머리뼈였다. 나는 그것을 내 방에 두고 손님들이 오면 보여주곤 한다.

 몇 주 후, 귀 뒤에 수신기를 꽂자 아주 작은 삐,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두 로봇 소리처럼 들렸지만 청각은 곧 점점 좋아졌다.   
 청력이 돌아온 것은 정말 기적이었다.
 탈레반은 학교 버스에 타고 있던 여학생 세 명에게 근거리에서 총탄 세 발을 발사 했지만, 우리 셋 중 누구도 죽이지 못했다.
 한 사람이 나를 침묵시키려 했다. 그러자 수백만의 사람이 일어나 이야기를 했다. 그것 역시 기적이었다.

■ 이 새로운 곳

 우리는 버밍엄에 정착했다. 우리는 이제 병실 밖으로 내다보이던 그 가로수가 늘어선 거리의 단정한 벽돌집에서 살고 있다. 아름다운 집이었다. 잘 정돈되어 있었고, 평온했고, 조용했다. 너무 조용했다.
 한편 우리는 조금씩 이 새로운 곳에 적응해 나갔다. 아버지는 직장에 출근할 때 멋진 트위드 재킷을 입고 가죽구두를 신었다. 어머니는 식기세척기를 사용했다. 쿠샬은 엑스박스와 사랑에 빠졌고, 아탈은 초콜릿 스프레드인 누텔라를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병원에 가서 규칙적으로 물리치료를 받으며 얼굴 근육 움직이는 법을 배우고 있다. 그리고 더 많은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그 수술들에 대해선 생각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어느 날 밤 우리 가족은 버밍엄 시내로 산책을 나갔다. 나는 이 도시의 다양한 사람들에 감탄하고 있었다. 모두가 다 똑같아 보이는 밍고라와는 달리 이곳에는 온갖 사람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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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재미있는 나라다. 어떤 여자아이들은 자유롭게 몸을 가리고, 어떤 아이들은 자유롭게 몸을 드러낸다.
 이곳 학교에는 프로젝터와 컴퓨터가 있고, 비디오와 와이파이가 있다. 음악, 미술, 컴퓨터 시간도 있고 심지어 요리 시간도 있다. 선생님과 칠판뿐이던 파키스탄 학교에서 온 내게는 좀 충격적이었다. 때로는 고향으로 돌아가 컴퓨터가 없는 소박한 교실에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내 옛 친구들이 이런 근사한 테크놀로지와 이런 특별한 과목의 수업들을 보면 얼마나 좋아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가끔 나는 이곳 학생들이 누리는 이런 훌륭한 것들을 나의 옛 친구들은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 슬프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친구들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슬프게 느껴졌다. 지금 그들에겐 서로가 곁에 있지 않은가. 

 내 생활은 몹시 바빠졌다. 책을 쓰고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되고, 연설을 하고, 여러 사람을 만나고, 미디어 캠페인을 하며 인도주의적 일에도 참여하고 있다. 나는 너무도 많은 흥미로운 일을 하고, 흥미로운 곳도 방문하지만, 그렇게 많은 여행을 하면서 학교 공부를 따라가고 시험을 치는 일이 쉽지가 않다. 나도 사람이기에 때로는 지친다. 어떨 때는 소파에 앉아 ‘마인드 유어 랭귀지’를 보거나 스카이프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고 싶다.
 처음에는 내가 이 아이들과 과연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나는 그들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들을 보았고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이 자나면서 그들에겐 내가 상상할 수 없는 경험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알게 된 사실은 우리에겐 다른 점보다는 동통점이 더 많다는 것이고 매일 서로에게서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일 나는 조금씩 예전의 평범한 말랄라, 교실 안의 그냥 한 소녀가 되어 가고 있음을 느낀다.

■ 우리 모두가 아는 한 가지

 쿠샬 학교는 지금도 그 자리에 있고, 그 교문으로 매일 학생들도 지나다니지만 아버지는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대신 아버지는 여성교육에 대한 콘퍼런스에 참석해 스와트에서 했던 것처럼 평화를 위해 연설하고 있다. 예전과는 달리 사람들이 나 때문에 아버지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이 아버지에겐 좀 낯선 일일 것이다. 아버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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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랄라는 예전에 제 딸로 불리었습니다. 그런데 이젠 제가 말랄라의 아버지로 불린다는 것이 자랑스럽습니다.”
 우리가 파키스탄으로 돌아가는 것은 안전하지 않다고 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고향이 무척 그립던 어느 날 우리는 파키스탄을 우리에게 데려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와 친지들이 우리를 방문하러 왔다. 샤지아와 카이나트 둘 다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영국으로 왔고, 방학과 휴일에는 우리 집에 와서 지내게 된 것이다.
 어머니는 손님으로 집 안이 북적대고 식탁에 의자들이 늘어가자 훨씬 행복해 했다. 그리고 더 행복해지기 위해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려는 의지도 더 커졌다. 어머니는 다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숄로 얼굴을 가리지 않고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고, 사진 찍히는 일도 허락했다.

한편 아버지는 집에서 새로운 일을 하기 시작했다. 최근 내가 아버지를 놀린 일이 있었다. 아버지와 내가 여성 인권에 대해 연설을 하러 다니는 동안 정작 집에서는 어머니 혼자 요리와 청소를 다하고 있다고. 이제 아버지도 아침마다 식사를 준비한다. 늘 같은 메뉴다. 달걀프라이. 아버지의 요리는 사랑으로 가득하지만 그다지 맛이 있지는 않다.
 아버지는 과거에도 용감한 일들을 시도한 적이 있었다. 수중에 동전 한 닢 없이 학교를 세웠고, 여성인권과  여성 교육을 위해 앞장섰고, 탈레반에 항거했다.
 이제 나의 용감하고 자부심 강한 파슈툰 아버지는 냄비와 팬을 든다.

■ 기념일

총격이 있은 지 일 년이 되자 많은 기자들이 나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왔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너와 네 가족들은 고국을 떠나야 했고, 넌 두려움 속에서 살아야 하는구나. 넌 이미 너무 많은 시련을 겪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식으로 생각한다. 나는 볼 수 있다! 나는 들을 수 있다! 나는 말할 수 있다. 나는 학교에 다닐 수 있고, 동생들과 싸울 수도 있다! 내 인생에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신이 바라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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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때로 기자들은 동생들이 편안하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며 내가 어린이 인권운동을 하느라 정작 내 어린 시절을 빼앗긴 것은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그럼 나는 기자들에게 열한 살에 결혼을 해야 하는 소녀들을 생각해 보라고 말한다. 아니면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쓰리기 더미를 뒤지는 어린 소년들을, 혹은 총탄과 폭탄에 희생된 어린이들을 생각해 보라고. 그들이야말로 어린 시절을 빼앗긴 아이들이라고.

나는 이 세상을 하나의 가족으로 생각한다. 가족 중 한 사람이 힘들게 살고 있다면 우리 모두 협력하여 도와야 한다. 사람들이 나를 지원하겠노라 했을 때 그들은 실은 여성 교육을 지원하겠다고 말한 것이다. 그래서 탈레반은 나를 쏘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쏠 수 있는 것은 한낱 육체에 불과하다. 그들은 내 꿈을 쏠 수 없고, 내 믿음을 죽일 수 없다. 그들은 모든 소년 소녀가 학교에 다니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교육운동은 멈추게 할 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기도했고, 신께서 나를 살려주셨다. 내가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 나는 사람을 돕는 일에 나의 인생을 바칠 것이다.

■ 에필로그,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소녀

 열여섯 번째 생일에 나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선물을 받았다. 유엔에서 연설을 해 달라는 초대를 받은 것이다.  그해 나는 두 번 뉴욕에 갔었는데 연설이 그 첫 번째 방문이었다. 400여명이 참석할 예정이었고, 그중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전 영국 총리였던 고든 브라운 같은 세계 각국의 고위관리들, 그리고 나와 같은 평범한 어린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불과 얼마 전 파키스탄에서 두려움에 떨며 우울하게 보냈던 생일과는 천지 차이였다.
 우리 가족이 모두 뉴욕으로 갔다. 브로드웨이에서 뮤지컬 ‘애니’를 보았고, 호텔에서 지냈는데 그곳에선 은쟁반에 피자를 담아 방으로 가져다 주었다. 나는 조용해서 졸리다시피 한 버밍엄과 달리 북적대는 뉴욕이 좋았다. 그리고 ‘어글리 베티’ 때문인지 이 도시가 나의 오랜 친구인 것처럼 느껴졌다. 파키스탄에서는 미국은 음울하고 신이 존재하지 않은 곳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상당히 친절했다. 나는 어서 모니바에게 이곳 얘기를 하고 싶었다. 뉴욕은 아주 좋은 곳이지만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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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본 어떤 도시보다 더 시끄럽고 사람이 많은 곳이라고. 차들은 쉴 새 없이 빵빵거리고 사람들은 여기저기 바쁘게 걸어 다니고 있다고. 카라치가 아주 발달되면 바로 이런 모습일 거라고!

 두 번째 뉴욕 여행에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났다. 존 스튜어트라는 사람은 나를 그의 TV 쇼에 초대했고 우리는 나의 첫 책과 말랄라 펀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내 교육운동을 매우 진지하게 생각했지만, 우스꽝스런 표정을 지으며 나를 입양해도 되겠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나는 실제 ‘어글리 베티’의 주인공 배우 아메리카 페라라도 만났는데 몹시 아름다웠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그의 가족도 만났다. 나는 그에게 경의를 표했지만. 미국이 무인 비행기로 파키스탄을 공격한 일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나쁜 사람 한 사람을 죽일 때 죄 없는 사람들도 죽게 되며 그러면 테러리즘도 더 퍼지게 된다고. 나는 또 그에게 미국이 무기와 전쟁에 쓰는 돈을 줄이고 교육에 더 많은 돈을 쓴다면 세상이 훨씬 더 잘시 좋은 곳이 될 거라고도 말했다.  

 신이 내게 목소리를 주셨으니 설사 미국의 대통령과 맞서는 의견이라 할지라도 그 목소리를 사용해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유엔 연설이 있던 날 나는 정말 기뻤다.
 나는 놀라운 경험을 했고, 놀라운 사람들을 만났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였다. 큰 소리를 내며 관절 꺾는 것을 좋아하고 그림을 그려 설명하기를 좋아하는 한 소녀였다. 파스타를 싫어하고 컵케이크를 좋아하며 늘 어머니가 해 준 밥을 좋아하는 소녀, 밤늦게까지 앉아 물리 시험공부를 하는 소녀, 제일 친한 친구가 화가 났을까 걱정하는 소녀, 다른 소녀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그런 소녀였다.          
 그런 내가 유엔에서 연설하는 일이 정마 일어나다니! 정말이지 나의 세계가 크게 변한 것이다.
 나는 그날 아침 천천히 옷을 입었다. 내가 좋아하는 분홍색 샬와르와 카미즈를 입고 베나지르 부토 총리의 스카프 중 하나를 머리에 썼다. 연설문을 쓸 때 나는 유엔 대표만을 위한 연설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 내 말에서 용기를 얻고 자신의 권리를 위해 일어설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연설문을 작성했다. 나는 내가 ‘탈레반의 총을 맞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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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가 아닌 ‘교육을 위해 싸운 소녀’로 지식을 무기로 삼아 평화를 위해 일어선 소녀로 기억되기 원한다.
 나는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한 가지를 기억해 주십시오.
 말랄라의 날은 저를 위한 날이 아닙니다. 오늘은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목소리를 높인 모든 여성, 모든 소년, 모든 소녀들을 위한 날입니다. 수많은 인권운동가들과 사회운동가들이 인권뿐만 아니라 교육과 평화, 그리고 평등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그중 수천 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테러리스트에게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 명의 부상자들이 여전히 고통받고 있습니다. 저는 그 중 한 사람일 뿐입니다. 저는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한 소녀로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저는 오늘, 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말하고자 합니다. 소리칠 수 있어서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의 뜻을 전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이려 합니다. 평화롭게 살 권리, 존엄성을 지킬 수 있는 권리, 평등한 기회를 보장받을 권리, 교육받을 권리를 위해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말하려 합니다.

 2012년 10월 9일, 탈레반은 제 왼쪽 이마에 총을 쏘았습니다. 제 친구들까지 총에 맞았습니다. 그들은 총탄이 우리를 침묵하게 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습니다. 수천 수만의 목소리가 침묵을 뚫고 터져 나왔습니다. 테러리스트들은 우리의 목표를 바꾸고 열정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내 인생에서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변한 게 있다면 나약함과 두려움과 절망이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나는 여전히 말랄라입니다. 같은 열정, 같은 희망, 같은 꿈을 가진 말랄라입니다. 한 명의 어린이가, 한 명의 선생님이, 한 권의 책이, 한 자루의 펜이 이 세상을 바꿀 수 있습니다.

 박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자리에 앉았고, 그때 내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쿠샬 학교의 빈 의자들을 향해 선생님 흉내를 내던 꼬마 말랄라에서 내가 참으로 길고 긴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구나 하는 것이었다. 화장실 거울을 보며 연설하던 아이가, 신의 은총으로 이제 수백만의 사람들 앞에서 진짜 연설을 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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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젠가 키를 더 크게 해 달라고 신께 빌었던 적이 있었다. 나는 신이 내 기도에 응답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은 나를 하늘만큼 큰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모든 가정, 모든 거리, 모든 나라에 평화가 있기를, 이것이 나의 꿈이다. 세상 모든 소년 소녀가 교육받기를, 학교 의자에 앉아 나의 모든 친구들과 함께 책을 읽을 수 있기를, 이것이 나의 권리다. 모든 인간에게서 진정한 행복의 미소를 볼 수 있기를, 이것이 나의 소망이다.
 내 이름은 말랄라다. 나의 세상은 변했지만 나는 변하지 않았다.

                         2014. 11.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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