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이어령(2)

2014. 12. 12. 14:26독서후기

반응형

 

 

 읽고 싶은 이어령(2) 
                 - 이 땅의 모든 지성에게 -

■ 이어령 지음

◈ 친절 무용론

 열차는 서서히 서울역 플랫폼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애들을 업으랴, 짐을 들랴, 수선을 피우면서 하차할 준비를 하는데 앞자리에 앉았던 학생 차림의 젊은 청년 하나가 짐을 들어 주겠다고 선뜻 나서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트렁크는 무거웠다. 안 사람이 그것을 들고 쩔쩔매는 것이 딱했던 모양이다.
 "저는 짐이 없으니까 밖에 나갈 때까지 들어다드리지요."
 청년은 트렁크를 빼앗다시피 들고 간다.
 아내와 나는 몇 번인가 사양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사양이 아니라 거절을 한 셈이다. 우리는 그 청년의 친절을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짐을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다는 말이 도리어 수상쩍다. '소위 이것이 승객들의 짐을 날치기 해가는 도둑놈의 패거리인 모양이구나!'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피서지에서 돌아오는 길이라 그 트렁크에는 자질구레한 용품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신경이 자꾸 쓰인다. 의혹의 수분 간이 흐른 다음에 이윽고 우리는 개찰구를 나왔다.
 "자 트렁크 주세요."
 너무 긴장한 나머지 고맙다는 인사도 나오지 않는다. 나나 아내나 날치기로 단정하고 하는 말투다. 그런데도 그 청년은 “괜찮습니다. 택시 타는 데까지 갖다드리지요”하고 여전히 트렁크를 놓지 않는다. 그때 참지 못한 아내가 트렁크를 가로채면서 노골적으로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 없어요. 이젠 됐어요. 피차가 괴로우니까요!”
 피차란 말에 청년은 섬짓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리고 쓰디쓴 미소를 지으면서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그 눈매는 실망과 분노와 그리고 슬프기까지 한 빛을 띠고 있었다.

                                - 1 -
 “선생님 저는 학생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얼굴을 여러 번 뵌 일이 있습니다. 이 선생님이시죠?”
 그는 말할 틈도 주지 않고 어둠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택시가 네온 빛을 누비고 서울 시가를 달리고 있었을 때 나는 그 안에서 갑자기 구역질 같은 것을 느꼈다. 서울이 싫어졌다. 산다는 것이, 트렁크 같은 것이, 사람들이 모두 싫어졌다.
 ‘학생, 친절은 옛날에 죽어버린 거야. 호의도 선의도 옛날에 죽어버린 거야. 너무 슬퍼하지 말게. 순진한 시대가 가버린 것일세.’
 나는 언제라도 그 학생을 만나면 꼭 한 마디 이야기해주고 싶다. 어디엔가 친절이 남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친절을 받아들일 만한 마음은 아무 곳에도 없는 것이다.
 이제 대가 없는 친절이란 의심과 경계를 살 뿐이다. 도리어 불안과 공포를 준다. 무상(無償)의 시대는 지나가고 만 것이다. 남에게 친절하지 않은 것이 도리어 친절이라는 세상인 것을 그날 밤에 그 학생도 알았을 것이다.

◈ 햇살을 씹어라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한 살을 더 먹는다고 한다. ‘먹는다’는 표현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많은 암시를 읽을 수 있다.
 희랍신화에 의하면 시간을 뜻하는 크로노스가 자기의 자식들을 잡아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은 그리고 모든 생물은 시간 속에서 멸해 간다. 생명 없는 물체까지도 시간 속에서는 그 빛과 형태를 잃고 무너져가는 것이다. 아무리 단단한 무쇠도 시간의 그 날카로운 송곳니를 이겨낼 수 없다. 그러니까 모든 것은 시간 앞에서 먹히고 만다.
 그런데 한국인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인간은 시간에 먹히는 존재가 아니라 거꾸로 시간을 먹는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나이를 먹는다’고 표현한 것이 아니겠는가.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시간 속에 먹혀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시간을 적극적으로 내 생명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이 슬픔이든 고통이든 늙음이든 한 사발의 떡국처럼 먹어버릴 때, 이미 그것은 내 신선한 혈관 속의 한 핏방울이 된다.


                             - 2 -
◈ 왼손잡이와 독탕

이효석의 대표작 ‘메밀꽃 필 무렵’은 우리 근대문학의 대표작이다. 그런데 그 작품 속에서도 많은 평론가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부분은 바로 다음과 같은 마지막 구절이다.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득신이 같이 눈이 어둡던 허 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동이’가 왼손잡이라는 데에서 그가 허 생원의 아들임에 틀림없을 것이라고 암시한 대목이다. 왜냐하면 허생원 역시 왼손잡이였기 때문이다.
 어쩌다가 허 생원은 메밀꽃이 핀 달밤 물방앗간에서 처녀와 사랑을 맺었던 것이다. 그게 마지막이었지만 수십 년 후 우연히 같은 장돌뱅이로 한 패가 된 ‘동이’란 청년을 만나 이야기를 듣게 되자 허 생원은 아무래도 그가 그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기 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로 그 동이가 채찍 잡는 것을 보니 ‘왼손잡이’ …… 결국 그는 허 생원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 더 따지고 보면 그것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난센스다. 이유는 간단하다. 왼손잡이는 유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작가의 실증정신

 ‘왼손잡이’가 유전이냐 아니냐 하는 생리학을 가지고 명작을 깎아내리자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초점은 어째서 이효석과 같은 대표적인 작가가 그런 글을 쓰는 데에 있어서 ‘왼손잡이’가 과연 유전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검토도 해보지 않고 의심도 없이 그냥 단정을 내렸는가 하는 태도다. 그리고 또 많은 평론가들은 평론가들대로 일말의 회의도 없이 ‘좌수 유전’을 그대로 프리 패스시켰느냐 하는 점이다.

■ 목욕탕과 거북이

 목욕탕엘 가보면 서울 시내에는 모던 스타일의 고급 독탕이 많이 생겨났는

                                 - 3 -
데 그 밑바닥은 대개가 유선형으로 굴곡이 져 있다. 편안히 누워 있을 수 있게 설계한 것이다.
 그러나 막상 누워보면 조금도 편하지가 않다. 어깨는 오므라지고 허리는 들떠 아프다. 다리를 뻗어봐도 부자연스럽다. 그야말로 허 생원식이다.

 거북이란 놈은  동물 중에서도 가장 느림보지만 겉만 보면 스포츠카처럼 유선형으로 되어 있다. 그 잔등이의 포물선은 어느 짐승보다도 초속도로 달리기에 알맞다. 독탕의 밑바닥 곡선도 꼭 거북이의 그 잔등이와 다를 것이 없다. 누우면 아주 편할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관념에서 나온 선이지 체험적인 선은 못된다.
 독탕 바닥만이 관념적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사회 전체가, 모든 가구 전체가 ‘그럴 것이다’는 기분만의 가설 밑에서 움직여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기에 밤낮 현실을 다루는 정치가들까지도 이념이 어떻고 명분이 어떻고 하는 관념적 논쟁만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실증정신이 생리화되고 생활화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 사회는 합리적인 것이 지배할 수 있는 사회가 될 것이다.

◈ 나들이옷의 비극 

 서양 사람들은 ‘나들이(피크닉)’를 다닐 때면 의레 활동하기 쉬운 간편한 옷을 입고 나간다. 말하자면 연회복과는 달리 값싼 옷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는 피크닉이나 꽃구경을 가는 데에도 으레 성장을 한다. 입고 있는 옷 가운데 최고의 것을 골라 걸친다. 아이들로부터 할아버지에 이르기까지 패션쇼를 하는 기분이다.
 어째서 꽃구경이나 야유(野遊)를 하는 데까지도 남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모처럼 휴식을 취하러 놀러온 것인데도 성장한 옷을 버리지 않으려고 조바심을 태우는 꼴은 아무래도 불합리한 일이다.
 으레 밖에 나가려면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는 그 사고방식 속에서 우리는 체면에 살고 체면에 죽었던 슬픈 습속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나들이옷을 찾는 습관이 사라질 때 비로소 우리는 생활을 생활답게 즐길 수 있게 될 것이다. 의상뿐이겠는가? 체면이라는 망령 때문에 자기 생활을

                             - 4 -
구속하고 지내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 좀 더 자기에게 충실한 삶을 누려야 겠다.
 일요일의 거리가 ‘연회의 거리’처럼 되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나들이 옷’의 개념을 불살라 버리는 데에 용감한 생활인이 되기를 바란다.

◈ 그리움의 변형

 소월은 “선 채로 이 자리에서 돌이 되어도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라고 했고, 청마는 “님을 따르지 못하는 외침이 바위되어 남는다”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모든 그리움이 돌이 되고 바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그리움들은 안개처럼 피어오르다가, 한나절 햇살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그리움은 바위가 되어 망부석처럼 어느 벼랑 바닷가에 우뚝 서기도 하고, 정반대로 안개나 바람이나 목소리가 되어 형체도 없이 허공을 떠돌아다니기도 한다. 당신의 그리움은 어떤 것인가. 한곳이 굳어버려 시간도 이끼로 남는 천년의 바위인가. 그렇지 않으면 낡은 문짝을 아프게 흔들어대는 바람인가. 산도 마을도 앞으로 갈 길도 가로막고, 모든 얼굴을 지워버리는 답답한 안개인가.
 시인이여, 당신은 가르쳐 줘야 한다. 그리움을 모르는 당신의 이웃들에게, 그리움의 변형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한다. 어째서 그리움은 바위가 되기도 하고 바람이 되기도 하는가를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또 이야기해야 한다.

◈ 군자 언어의 도난

 이상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어법을 가만히 분석해보라. 좋은 말일수록 실제는 나쁜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우선 ‘가족적’이란 말부터 따져보자. 삭막한 세상에 ‘가족적’이란 말처럼 정다운 것은 없다. 타인들끼리 형이요, 아우요, 어머니요, 아들이라면 그보다 더 따뜻하고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잘못이 있어도, 서운한 일이 있어도 한 울타리 안에서 한 핏줄기를 나눈 가족끼리는 모든 것이 애정의 이름으로 용서된다.

                              - 5 -
 그러나 우리는 이 가족적이란 말을 항상 경계해야만 된다. 만약 사장이 신입 사원을 모아 놓고 “자! 우리 한 번 가족적으로 일해 봅시다”라고 되풀이해서 연설했다면  월급을 많이 탈 기대는 갖지 않는 것이 좋다.
 ‘가족적’이라고 하면 ‘월급’만 가지고 일 할 것이 아니라 ‘자기 집 일처럼 정을 갖고 일하라’는 뜻이다 말하자면 공리나 이해를 초월한 ‘가족적’인 애정이 월급을 적게 주고 일을 부려먹자는 구호로 이용되고 있는 경우다.
 그런데 ‘가족적’이란 말보다 더 위험한 것이 ‘동지적’이란 뜻이다. 동지란 문자 그대로 이념의 뜻을 같이한 사람이다. 그러기에 자기 이념을 위해 뜻을 같이한 사람끼리는 오직 대가 없는 상부상조가 있을 뿐이다.
 누가 일을 같이 하자고 할 때 ‘동지적’이란 말이 나오거든 아예 대가를 받을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말아야 한다. “가족적으로 일하자”라고 하는 것은 ‘돈을 적게 준다’는 뜻이며 “동지적으로 일하자”는 것은 ‘돈을 숫제 안 준다’는 은어(隱語)인 셈이다.  

 그런데 애국적은 어떤가! ‘돈을 적게 준다’는 것도 아니고 ‘돈을 안 준다’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거꾸로 돈을 내라는 이야기다.
 굶는 애국, 자기희생을 강요하는 애국! 과거 식민지 시대에 정말 우리는 그러한 애국을 해왔다. 그 전통이 이제는 좀 좋지 못한 데에까지 이용되어 사복을 채우는 데에도 ‘애국적인 견지’에서 하시는 분들이 많아졌다. ‘가족적’, ‘동지적’, ‘애국적’ …… 뜻이 점점 아름답고 넓어질수록 실은 희생의 요구도 그만큼 커진다. 
 조심하라. 간악하고 욕심 많은 사람일수록 군자의 언어를 훔쳐 쓴다는 것을 조심하라. 도난당한 성인군자의 언어를…….

◈ 한국인은 잔인한가

‘높다·낮다’, ‘빠르다·느리다’, ‘무겁다·가볍다’, 이러한 말들은 모두가 상대적이다. 그리고 보는 사람의 주관에 의해 결정되는 말이다. 화살은 빠른 것으로 되어 있지만 총탄에 비하면 거북이처럼 느린 것이다. 강물은 도랑물보다 깊지만 바다에 비하면 접시물처럼 얕다. 더구나 처음부터 정감적인 범주에 속하는 언어들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한국인은 잔인한가?’

                                - 6 -
 우리는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답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잔인하다는 성품 역시 상대적이고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가능한 것이 있다면, 이따금 한국인은 잔인하다고 말하는 유럽인 자신과 한국인을 비교하는 방법이다.
 우선 신화구조를 대비해보자. 신화는 한 집단적인 체험을 나타내는 감정과 사고의 원형이기 때문에 가장 편리한 비교의 척도가 되는 것이다. 유럽 문화와 그 신화의 샘물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 신화를 보면 우주의 시원부터가 잔인한 피로 물들여져 있다. 대지의 여신 ‘게(Ge)’는 아들과 합세하여 그 남편인 ‘우라노스(하늘)’를 죽인다. 그것도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낫으로 우라노스의 남근을 잘라버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 남근에서 흘러내린 피가 바다에 떨어져 여러 신들이 탄생하게 된다. 남편과 아버지를 죽이는 모반, 그 살육의 피에서 탄생되는 새로운 생명들, 이것이 유럽인들이 생각한 역사요, 혁명의 열정이었다.

■ 신화를 통해본 잔인성

 한국의 신화는 그와 정반대다. 아버지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고 아우를 죽이는 살육이 아니라, 결혼으로부터 이 세상의 역사가 시작된다.
 단군 신화는 하늘과 땅이 만나고, 환웅과 웅녀가 짝을 맺는 데서부터 나라와 역사가 탄생되는 이야기다. ‘삼국유사’의 건국신화는 피의 싸움에 의한 것이 아니라 거의 모두가 영웅 추대형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설화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설화에는 복수 이야기가 적다.

 1) 일본의 설화는 모모타로, 잇슨보시처럼 침략형의 복수담으로 되어 있지만 한국의 설화는 해와 달처럼 간악한 호랑이에게 쫓기는 도피형 설화다. 춘향전, 사씨남정기에서도 복수는 없다.

2) 식생활의 구조 : 성품과 식생활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서양인들은 주식이 육류다. 채식주의자들인 한국인의 식탁에 오르는 숟가락을 서양인들의 포크와 나이프에 비교해 보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표범의 발톱이요, 늑대의 이빨이다.               
서양인들은 생식 또는 화식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먹는 것은 대부분 발효식

                               - 7 -
이다. 뜸을 들여서 먹고 삭혀서 먹는 한국인의 식생활은 참고 견디고 순응하는 성품을 주었지만, 화식과 생식은 그들에게 파괴와 공격적인 잔인성을 준 것이다. 

■ 주택 구조를 통해 본 잔인성

 마지막으로 주택 구조를 보자. 주택 구조는 정신구조를 시각화 한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의 주택은 중세 때부터 성벽과 지하실 위에 세웠다. 어두운 지하실의 비밀, 온갖 잔인한 음모는 이 볕이 안 드는 음침한 지하실에서 벌어졌고 포의 소설처럼 사람을 죽여 그 벽 속에 묻어둔다. 모든 집에 지하실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모든 집에서 사설감옥을 설치해 두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한국의 주택에는 지하실이란 게 없다. 그 대신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장독대와 헛간이 있었을 뿐이다.

 일본 건축 구조만 해도 장지만 열면 언제나 칼싸움을 할 수 있는 도장이 될 수 있게 되어 있다. 뜰에는 자갈을 깔아 침입자의 발자국 소리가 울리도록 고안되어 있다. 죽이고 죽는 긴장, 무사 문화의 잔인한 살육 속에서 생겨난 주택구조다.
 일상 주택에서 쓰는 농구를 봐도 서양 농구의 낫은 안에서 밖으로 치는 형편이다. 날이 바깥으로 서 있다. 공격용 무기다. 그러나 한국의 연장은 호미나 낫이나 모두 자기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쓰도록 되어 있다. 자기를 찌를 위험은 있어도 남을 치기엔 불편하다.

■ 유순한 한국인의 성품

 이러한 문화 구조를 가진 자들이 한국인을 잔인하다고 하는 것은 성서의 말대로 ‘자신의 눈 속에 박힌 들보’를 보지 못하는 발언이다. 결론은 무엇인가? 한국인의 본래적 성품은 평화롭고 유순했다. 모질지 못해 사슴처럼 쫓겨 다녔다. 그러나 서구 문화가 들어오고 근대화하면서부터  한국인을 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더구나 이성보다 정감이 강한 국민이었기에 서구 문화에 오염되는 피해도 더욱 컸다.

                            - 8 -
 서구인들은 휴전선의 도끼 사건에서 한국인의 민족성이 아니라 바로 자신들의 문화권에서 싹튼 마르크시즘이 어떻게 다른 숲에서 살고 있던 유순한 사슴들까지 무서운 늑대로 바꾸었는가를 보아야 할 것이다.  

◈ 한국말의 묘미

 춘한(春寒)을 ‘꽃샘’이라고 한다.
 피어나는 꽃과 움트는 잎을 샘내 ‘추위’가 심술을 부린다는 뜻. 애교 있는 말이다. 이솝의 우화처럼 의인화한 계절의 심정도 재밌고, 춘한의 뉘앙스도 잘 살린 말이라 실감이 있다.
 계절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 사회에도 ‘꽃샘’과 같은 것이 있다. 아름답게 피어나는 꽃이나 새로 움트는 그 새싹을 도리어 시기하고 짓밟으려는 못된 풍습이 그렇다. 심술 사나운 사람들의 마음이다. “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우리 속담도 바로 그 ‘꽃샘’, ‘잎샘’과 통하는 말이다.

 콜럼버스가 미 대륙을 발견했을 때 일부 사람들은 그의 공적을 깎아내리기 바빴다. 그래서 그 유명한 ‘콜럼버스의 달걀’이라는 일화가 생겨난 것이다.
 베토벤의 ‘운명’이 연주되었을 때 청중은 열광적인 박수를 쳤지만 음악 평론가들은 그것을 ‘미치광이들의 소동’이라고 냉소하였다.
 죽음의 항해에서 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나 귀머거리가 된 역경 속에서도 대작을 남긴 베토벤이나 그것은 모두 추위를 이겨내고 움트는 꽃이요, 잎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샘내는 꽃샘, 잎샘이 있었던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의 경우가 특히 심했던 것 같다. 카르타고인들은 패장을 십자가에 매달았지만 우리는 승장을 감옥에 넣었다. 이순신의 승공(勝功)을 꽃샘한 원균 일파의 모략 때문이었다.

■ ‘적’이라는 말고리

 사실 ‘적(的)’이라는 말꼬리부터 말썽이다. ‘적’자는 현대 문명이 낳은 거룩한 사생아이며 그만한 이유로 약간은 기형적인 놈이다. 이 ‘적’은 아무 말에나 붙어 다니면서 모든 의미를 모호하게 만들어 놓는다.
 사람들은 아무 데나 이 편리한 ‘적’자의 연막을 쳐서 자기의 ‘유식’을 보존

                             - 9 -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적’이란 한자의 원 뜻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달리 영어의 ‘tic’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of’와 같이 소유의 뜻을 나타내는 말이었다. 이 낯선 손님을 대접(번역)하기 위해서 명치유신 이후의 어느 일본 재사(才士, 구리야가와 하쿠손)가 ‘적’이란 한자를 갖다 댄 모양이다. 그것이 이제는 서양의 ‘tic’보다도 월등한 세력을 가지고 범람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적’으로 이야기 하는 인텔리들에게서 이 말을 빼면 남는 말이 별로 없을 정도다.          
 한번은 동네 반장이 찾아와서 희대의 웅변으로 설교를 하고 간 일이 있다. “우리 반원이 인간적으로 친밀적으로 생활하려면 안면적으로 알아야 한다. 그래서 협조적인 정신을 발휘해서 모든 것을 타협적으로 상의적으로 해나가면 모든 일이 능률적으로 되니까 일이 유감적으로 되지 않는다.”

■ 인간적

 우리가 애용하고 있는 말 가운데 ‘인간적’이라는 것이 있다. 좀 거북한 일이 생기면 누구나 다 이 인간적이란 말에 매력을 느끼는 모양이다.
 “인간적으로 봐서 한 번만 용서해주쇼.”
 “인간적으로 해결합시다.”
 구걸하는 사람이나 구걸 받는 사람이나 인간적이란 말을 ‘교섭 위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인간적이란 말이 정반대의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인간적으로 봐달라”라든가 “인간적으로 해결하자”는 그 말 뒤에는 잘못된 일을 적당히 덮어 달라든가 “규칙대로라면 안 되지만 푼돈이나 주면 용서해 줄 수 있다”는 아주 망측한 뜻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적’이란 말은 악을 허용해 주고 법률을 파괴하고도 모든 것을 적당히 처리한다는 부패어로 변했다. 선을 향한 동정이 아니라 악을 위한 동정, 의를 생각하는 인정이 아니라 불의 에 대한 인정, 이렇게 인간적이란 미덕은 타락해 갔다.        
인간적, 어느새 이 말은 ‘당위적 인간’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부재의 말로 전락해 버렸다. “인간적 너무나도 인간적”, 이렇게 한탄한 니체는 역시 천재였나보다.

■ 운명적
                               - 10 -
 운명이란 말이 있다. 타고난 천명……좋든 궂든 운명의 여신이 정해 놓은 길 - 이것을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렇다면 어느 한 사람이 영화 영달의 길에 오르는 것도 운명이요. 혹은 기구한 생의 험로에서 전전긍긍하는 것도 운명이다. 그런데 운명이라 하면 행복한 것보다는 언제나 불행한 것을 연상하게 되는 일이 많은 것 같다. 운명이란 말은 요즈음 와서 더욱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하게 되었다.

 원칙적인 뜻대로 하자면 불운도 운명이요, 행운도 운명인데, 전자만을 우독 운명적인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그만큼 인간들이 에고이스틱하다는 것을 방증한다. ‘잘 되면 자기 덕, 못 되면 조상 탓’이라는 그 속담처럼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운명적’이란 말은 자기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은근한 변명의 말이 된 것이다.
 ‘운명을 극복한다’라고 할 때의 운명은 불행과 동의어며 ‘운명을 기다린다’고 할 때의 운명은 죽음과 동의어가 된다. 이래서 운명이란 말은 인간의 실패, 그 실패의 책임전가를 대신하는 기괴한 말이 되고 만 것이다. 

■ 변명

 ‘변명’이란 말은 분명히 사전에 적힌 뜻과는 다른 뉘앙스로 사용되고 있다. 즉 사전에는 ‘시비를 가려 밝힘’, ‘죄가 없음을 밝힘’, ‘잘못이 아닌 점을 따져서 밝힘’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일상적으로 이 말이 쓰일 때 그것은 조금도 나쁜 뜻을 가지고 잇지 않으면서도 아주 좋지 않은 인상을 준다.
 누구도 어떤 오해를 풀려할 때 사전 뜻 그대로 “나는 지금부터 해명을 하겠습니다”라고는 하지 않는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변명이 아니라 그 일은 이렇게 된 것입니다…….”
 결국 변명은 문자 그대로 ‘밝여 말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거짓말을 해서 자기 입장을 합리화 한다는 뜻’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처녀가 애를 배도 항 말이 있다’ 라든가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식의 이미지(?)를 내포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오해를 당했을 때, 자기 잘못이 없었을 때 - 있는 사실대로 자기 실정을 밝히는 것은 무엇이라고 해야 옳을까? 아주 곤란하게 된 것이다.               
                                 - 11 -  
◈ 한국어로 본 한국인
 
■ 단음절인 몸에 관계되는 낱말

 우리나라의 단어들은 1박자 아니면 2박자로 모두가 짧고 간편하다. “긴 단어는 야만의 지표다”라는 예스페르젠의 정의만 가지고 본다면 우리는 단연 이웃에 있는 일본보다는 영·미인들보다는 문화민족(?)이다.
 가령 인체어를 생각해보자 몸에 관계된 낱말들은 모두 단음절로 되어 있다. 몸, 눈, 코, 귀, 입, 목, 배, 젖, 손, 팔, 이…물론 두 음절짜리가 있지만 그것은 머리, 다리, 허리처럼 규칙적인 꼬리를 가지고 있고 손가락, 발가락, 배꼽 등은 손, 발, 배에서 파생한 말이니 그것 역시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나라 말이든 인체어를 나열해 보면 한국어와는 전연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단어의 음절 수도 제각기 길고 짧아 일정한 통일성도 대응관계도 없다. 손발이 제각기 놀고, hand와 finger 처럼 손과 손가락은 닮지도 않았다.
 우리말의 머리, 다리, 팔과  발의 경우에서 보듯 서로 대응성을 가지고 있는 예는 어느 나라 말에서도  찾아보기 힘들 것 같다.        

■ ‘가지’와 ‘아기’
 “송아지 송아지 얼룩송아지. 엄마 소도 얼룩소 엄마 닮았네…….”
 그런데 이 동요에 나오는 ‘송아지’와 ‘아기’는 그 말에 있어서 동류(同類)라는 사실이다. ‘송아지, 망아지, 강아지’의 ‘아지’는 ‘아기’란 말과 같은 말이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아지’, ‘아기’는 ‘가지’와 통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 말에서 ‘ㄱ’과 ‘ㅇ’은 서로 넘나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송아지는 ‘소가지’가 되고 망아지는 ‘말가지’가 된다. 옛 선조들은 동물이 새끼를 낳아 그 핏줄이 갈라지는 것을 나무 등걸에서 새로운 가지들이 뻗어나가는 것과 동일시했던 모양이다.

 뿌리-줄기-가지. 이것이 우리 역사며 핏줄의 분화다. 한국인은 음식만 채식을 한 것이 아니라, 집만 나무로 지은 것이 아니라, 그 사고까지도 식물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12 -
 나무(植物)와 인간(動物)의 결합은 우리나라에만 국한 것은 아니지만 말 속에 이렇게 직접 얽혀 있는 예는 그리 흔치 않다. 나무는 생명의 조화를 나타내는 극치다. 뿌리는 땅을 향해 하강하고 가지는 하늘을 향해 상승한다. 뿌리는 불을 찾고 가지는 빛을 구한다.
 ‘하늘과 땅’ ‘상승과 하강’이, ‘불(太陽)과 물’이 말하자면 온갖 반대어가 나무에서만은 갈등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며 하나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들의 ‘아기’를 원래 뜻대로 ‘가지’로만 생각한다 해도 우리의 사회는 훨씬 더 밝아질 수 있다. 젊은 세대의 가지가 뿌리처럼 똑같이 뻗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누가 한탄할 것인가. 

■ 아픔

한국어는 아픔의 말이다.
 단테도 셰익스피어도 아픈 것에 관한 한 한국인만큼 속시원하게 표현해 본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기껏해야 “골치가 아프다”, “배가 아프다”등이다. 그러나 우리는 정도와 그 증상에 따라 아픔도 가지가지다.
 술을 먹고 아침에 일어난다. 그때의 두통은 ‘멍’하게 아프다. 경우에 따라 ‘띵’하기도 하고 골치가 ‘쑤시다’ 못해 ‘욱신욱신 쑤신다’고도 한다.
 외국에서 10년을 살고 학위를 두 개나 받은 한 분은 배가 쌀쌀 아픈 것을 의사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다. 배가 쓰리거나 느글거렸다면 더욱 혼났을 것이다.  
 삭신이 쑤신다는 말을 외국어로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 ‘노곤하고, 녹작지근’한 것이 다르고 또 사지가 ‘나른하고 뻐근한 것’이 다르다. ‘아리고 쓰라린 것’이 다른 우리말을 외국어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

 우리는 왜 이렇게도 고통의 말이 발달했을가. 왜 이렇게도 아픔에 대해 민감했을까. 다른 민족보다도 고통을 많이 겪어 왔기 때문인가? 그만큼 병을 많이 앓았기 때문인가? 사실 한국처럼 약방이 많고 약 광고가 많은 나라도 그리 흔치 않은 걸 보면 그런데 이유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는 한국어의 특성이 논리보다는 감성이나 정감 쪽으로 발달해 왔기 때문이다. 논리보다는 매사를 기분으로 해결하려 들기 때문이다. 그만큼 시적(詩的)인 국민이기도 하다. 그래서 폐가 아프거나 심장이 아프거나

                                - 13 -
그냥 통틀어 그 병은 ‘가슴앓이’지만 그 아픔을 표현하는 말은 실로 천 가닥 만 가닥이다. 약보다도 고통의 말이 더 발달하고 풍족한 민족, 이런 글을 쓰다 보니 정말 가슴이 ‘뻐근’해진다.

■ 서리와 성에

 우리나라 말의 미분화 현상을 비웃는 사람들은 으레 “머리 깎는다”는 말을 즐겨 그 예로 든다. 영어의 경우 머리(head)와 머리카락(hair)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다. 그래서 머리카락을 자르지 머리를 자른다고는 하지 않는다. 우리의 경우 미장원이나 이발소에서 머리를 자른다. 머리를 자르고도 이렇게 시퍼렇게 살아있는걸 보면 놀랍다. 이러한 표현은 모두가 미분화적인 우리나라 말과 어법에서 생겨난 혼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엄격하고 과학적인 영어를 그대로 신봉하는 경우를 보자. 요즈음 떠들썩한 신개발 냉장고의 광고문을 보면 “서리가 없습니다”라는 선전문이 있다. 틀림없이 ‘No Frost’의 ‘과학적인 영어’를 그대로 믿고 따 온 것이다.
그런데 냉장고에 서리가 없다니. 그것은 꼭 방 안에 ‘눈’이 없다는 말처럼 해괴하다. 왜냐하면 ‘미분화적이라는 한국어’지만 적어도 ‘서리’와 ‘성에’쯤은 구분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서리는 마당이나 들판에 내리는 것이고, 유리창이나 냉장고에 수증기가 결빙하는 것은 ‘성에’인 것이다.

 서리와 성에를 분간 못하는 영·미인들은 모, 벼, 쌀, 쌀밥도 통틀어 그냥 ‘rice’라고 한다. 영어 사용권 국민들은 쌀을 주식으로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언어는 저마다 생활의 특성에 따라서 분화, 미분화가 결정되는 것이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분화된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머리를 깎는다”고 말했다 해서 이발소가 기요틴의 형장으로 오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에를 서리라 하고 논에 있는 벼를 쌀이라 한다면 그것은 혼란이요, 비극일 수밖에 없다.

■ 두서너 개

 누군가 양말을 사고 있다. 점원은 “몇 켤레 드릴까요?” 라고 묻는다. 손님

                              - 14 -
은 “한 두서너 켤레만 주세요”라고 대답한다. 점원은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는 기색 없이 몇 켤레의 양말을 내 놓는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좀 더 따지고 보면 점쟁이들의 거래방식처럼 신기한 일이다.
 두서너 개라는 이 신비한 숫자는 결코 컴퓨터로 잴 수 없는 말이다. 한국인만이 이해하고 또 생활하고 있는 이심전심의 숫자요 말인 것이다. 그 증거로 외국 백화점에 가서 양말을 “원투스리포”만 달라고 했다가는 정신병원으로 이송되거나 장난을 치는 줄 알고 욕깨나 먹을 것이다.

 ‘두서너 개’라는 말 속에는 숫자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은 한국인의 마음이 숨어 있다. 정말 사랑이나 인생은 언제나 컴퓨터가 무력해지는 ‘두서너 개’의 수치, 어렴풋한 그 안개 속에서 자라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두서너 개’란 말은 에밀레의 종소리처럼 여담이 있는 한국적 숫자요, 그 마음이다.

■ 살다와 죽다

 ‘ㄹ’음이 붙은 말은 거의 모두 유동하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서 물과 구름은 흘러가고 바퀴는 돌아가고 굴러간다. 의태어나 의성어를 보면 더욱 분명하다. 바람이 부는 곳은 ‘솔솔’, ‘살랑살랑’이고 물이 흘러가는 것은 ‘좔좔’, ‘찰랑찰랑’이다.
 그런데 반대로 무엇이 정지되어 있는 것이나 운동이 멈추는 것에는 ‘ㄱ’음이 붙어 있다. ‘꺾이고, 막히고’ 부딪치는 것들은 에누리 없이 폐쇄음으로 끝난다. “딱” 멈춰 선다고 하고 “꽉” 막혔다고 그리고 “떡” 버티고 선다고 말한다. 그래서 만약에 ‘ㄹ’음과 ‘ㄱ’음을 섞어 쓰면 굴러가다 멈췄다, 멈췄다 굴러가는 불규칙 운동을 나타내게 된다. “솔방울이 떽 떼굴 굴러간다”에서, “떽”할 때에는 솔방울이 굴러서 멈춰 선 상태요. “떼굴”할 때엔, 다시 굴러가는 상태가 된다.       
 이러한 ‘ㄹ’과 ‘ㄱ’의 대응을 대표하는 말이 ‘살다’와 ‘죽다’라는 말이다. ‘살다’는 생명이 계속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요, 바퀴처럼 굴러가고 돌아가는 것이지만, ‘죽는다’는 것은 그 목숨이 막히고 꺾이어버리는 것이다.

 한국인은 유난히 “죽겠다”는 말을 잘 쓴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많다. 직장에

                               - 15 -
서 돌아오자마자 첫 마디가 대게는 피곤해서 죽겠다이다. 좋아도 죽겠다 하고 슬퍼도 죽겠다 한다. “우스워 죽겠고, 재미있어 죽겠다”라고 말하는 것이 한국인이다. 심지어 죽는 것은 생물만이 아니다. 시계도 죽고, 불도 죽고, 맛도 죽는다.

■ 그냥

 우리는 ‘그냥’이란 말을 애용한다. 그냥 길을 지나가다 들렀다든지, 그냥 만나고 싶었다든지 매사의 행동에 그냥이란 말을 붙여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논리적으로 보면 말이 안 된다. 무슨 이유와 동기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길을 걷고, 방문을 하고, 보고 듣고 먹고 하는 것이다.
 그냥이란 말은 이유와 동기를 거세하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일일이 이유와 동기를 찾고 따져가며 살아가는 서양 사람들과는 달리 반대로 어떤 생활과 행동에서 뚜렷한 목적과 이유를 부정하려는 마음이 강하다고 할 것이다.
 빵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듯이 인간은 이유와 필연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때로는 모든 계산과 이유에서 벗어나 그냥 살줄도 알아야 한다.

■ 참살구와 개살구

 개살구 맛은 시고 떫다. 그래서 사람들은 참살구를 찾는다. 겉보기에는 같은 살구지만 영 맛이 다르다. 살구만이 아니다. 우리 주변에는 ‘개’와 ‘참’이 구별되는 말들이 겨간 많지 않다. ‘참’은 진짜를, ‘개’는 사이비를 나타내는 접두어 구실을 한다.
 ‘개’는 한자의 ‘가(假)’에서 온 말인 것 같은데 ‘참’은 순수한 우리나라 말이다. 한자로는 ‘진(眞)’이 되어 때로는 참달래가 진달래로 불리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보통 진짜를 나타낼 때에는 순수한 우리말의 참자를 붙이고 가짜나 사이비엔 한자에서 온 가(假)를 쓰는 걸 보면 역시 좋은 것을 나타낼 때에는 제 말이라야 하는가 보다.
- 참기름은 먹는 기름, 개기름은 얼굴에서 흐르는 쓸모없는 기름
- 떡 맛이 안 나면 개떡, 산에서 나는 나리꽃은 크고 탐스러워 참나리지만     울타리에 핀 개나리꽃은 그만 못하다.

                              - 16 -
- 붓글씨 쓸 때 첨가해서 칠하는 것을  ‘개칠’한다고 하고 유리로 박은 의안    (義眼)은 ‘개눈’이 된다.
- 개새끼. 개자식의 원래 어원은 ‘개(犬)’가 아니라 ‘가(假)’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개새끼는 강아지라고 부르니까 말이다.
- 가짜만 우글거리는 것이 바로 ‘개떡같은 세상’이요, 개판이기에 참기름이     란 말도 모자라 ‘진짜 참기름’이라고 써붙여야 한다.
- 내가 쓰는 이 글도 ‘개글’이 아니기를.....

■ 빼닫이

0 문(門)
- 영어 : EXIT 출구,  ENTRANCE 입구 -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독립적으    로 인식
- 우리말 : 출입구
0 영어의 엘리베이터는 높이 올라가는 것
- 우리말의 승강기는 올라가고 내려가는 것 
0 책상서랍 : 영어로는 Drawer 빼는 것, 우리말로는 빼고 닫는 빼닫이

0 우리말에는 모순되는 개념을 하나로 묶어 놓은 말이 많다.
- 열고 닫는 여닫이, 밀고 닫는 미닫이, 드나드는 들날날락, 오르고 내리는 오르락 내리락, 오락가락, 보일락 말락, 하는 둥 마는 둥, 먹는 둥 마는 둥 그리고 시원섭섭까지          

 서양은 아리스토텔레스부터 흑이면 흑 백이면 백이라는 배중율(背中律)에 의존해 왔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렇게 한 쪽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빼닫이란 말에서 보듯이 우리의 슬기는 인생을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닌 오락가락하는 양면성으로 바라본 데 있는지도 모른다.

■ 글과 긁다

 어학자의 연구를 보면 ‘글’은 ‘긁다’와 그 뿌리가 같은 말이라고 한다. 글을 쓰는 것도 일종의 긁는 행위와 같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겨난 것 같다. 결국

                               - 17 -
어원적으로 볼 때 글은 긁는 것을 의미한다. 조금도 억지가 아니다. 오늘날에도 문인들이 원고를 쓰는 것을 ‘긁는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알 만한 일이다.
 ‘그림’이란 말도 그 어원은 글이나 긁다와 같은 뜻이다. 글씨를 긁으면 글이 되고 모양을 긁으면 그림이 된다.
 ‘그리움’이나 ‘그리다’란 말 역시 예외가 아니다.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나 모습을 긁는 것이 그리움이다. 그러니까 그리움이란 말은 종이가 아니라 마음속에 쓴 글이요 그림인 셈이다.     
 옛날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에 나오는 시 한 구절이 우리에게 그것을 증명해 준다. “마음의 붓으로 그린 부처 앞에……”라는 아름다운 시구가 그것이다. 그리움은 마음의 붓으로 그린 그림이요, 글이다.

 우리가 글을 쓸 때, 그것을 긁는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부인들이 바가지를 긁듯이 문사(文士)도 문자로써 긁는다. 가려운 데를 긁어주어야 한다. 부정이나 불의를 박박 긁어야 글은 시원한 것이 된다.
 그리고 또 글은 그리움을 나타내야 한다. 현재에 없는 것을 찾는 것이 그리움이다. 사라진 과거거나 앞으로 올 미래…… 언제나 ‘그리운 것’과 ‘그리는 것(憧憬)’은 눈앞에 부재하는 것이다.  
 글은 바로 그 부재의 것을 현존케 하는 힘이다. 글은 긁는 것이며 문자로 쓴 그림이며 과거의 그리움과 미래를 그리는 행위다.

■ 나나의 비극

 “차나 한 잔 합시다.”
 “영화나 구경 갑시다.”
 “바둑이나 한 판 둘까?”
 “집에나 들어가서 잠이나 자자.”
 끝없이 ‘나’가 폭발한다. 어째서 그런 습관이  생겨나게 되었을까?
 그냥 ‘나’자를 빼고 “차를 마십시다”, “바둑을 둡시다”라고 말하지 않고 왜 꼭 말끝마다 ‘나’자를 붙여야 시원한가?
 별 뜻 없이 무심히 말하는 소리지만, 그것을 분석해보면 우리 잠재의식 속에 그만큼 생활의 불만이 가득히 괴어 있다는 증좌다.

                             - 18 -
 결국 “……나”란 말은 소극적인 긍정, 마지못해 하는 행동, 그리고 꿩 아니면 닭이라는 식의 사고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따지고 보면 말끝마다 ‘나’를 연발하는 것은 욕구 불만을 향해 쏘아 붙이는 기총사격의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기비하나 자기의 경멸이 사라질 때 ‘나’자의 관용사도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지게꾼이 “품팔이나 하면서 지낸다”고 하고 농부들이 “땅이나 파면서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자기 직업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자를 붙여 말하는 것이다.
 순간순간 주어진 일을 불사르려는 열정, 티끌과 먼지라도 사랑하려는 의지, 이러한 능동적인 행동으로 인생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나나’의 비극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100%의 노력, 100%의 자의(自意)를 다 바치는 사람은 ‘나’자를 쓰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만이 보람 있는 생활을 할 수 있다. 우리의 말투에서 ‘나나’의 관습어가 가시는 날, 우리에겐 정말 충족된 생을 살 수 있는 그날이 올 것이다.

■ ‘어쨌든’이란 말

 우리 생활에서 유난히 많이 등장하는 어휘의 하나가 ‘어쨌든’이라는 부사다.
 “어쨌든 좋지 않다”, “어쨌든 해야 되겠다”……무엇인가를 부정하든 긍정하든 우리는 무엇을 강조할 때 ‘어쨌든’이란 말을 흔히 쓴다. 영어에도 물론 ‘anyway’나 ‘anyhow’란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처럼 상습적으로 또 경우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렇게 자주 튀어나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어쨌든이란 말을 천 년 전부터 듣고 있었고 지금도 또 그것을 듣고 있다. 만약 같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어려서는 부모로부터 “어쨌든 강가에는 가지마라”, “어쨌든 그 애와는 놀지 마라”, “어쨌든 학교에 가야 한다.”, “어쨌든 부모 말을 어겨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듣고 자라왔을 것이다.
 이러한 말은 ‘왜?’라는 지성의 싹을 짓밟았다.
 ‘왜 안 되는가?’, ‘왜 그래야만 되는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하고 또 그것을 구명해 내려는 지적 활동은 어쨌든

                               - 19 - 
그래야만 하고 어쨌든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그 덫의 부사에 감금된다. 즉 그 부사가 우리의 동사(動詞)를 옭아매놓았다.
 학교에서는 또 선생님들의 “어쨌든”이란 말 속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질문의 자유보다 어쨌든 해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

■ 지성은 퀴즈를 풀듯이

 한국의 교육은 ‘어쨌든’의 일방통행이다. 선생은 학생 앞에서 언제나 ‘절대적으로 옳은 존재’이고 질문을 한다는 것은 그 지엄한 권위를 건드리는 것으로 일종의 터부다.
 지성을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지성은 퀴즈를 풀듯이 사물의 수수께끼, 생의 질서, 자신의 행동을 따져가는 일이다. ‘왜?’라는 질문을 따는 힘, 그 열쇠, 그것이 지성의 기능이다. 지성을 갈러낸다는 학교에서마저 우리는 ‘어쨌든’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난 것이다.
 그래서 높은 자의 말은 항상 옳고 낮은 자의 말은  항상 부당하다. 이들 사이에 가로 놓여 있는 유일한 가교가 있다면 ‘어쨌든’이란 맹목의 단어일 뿐이다. 

■ 어쨌든 의 판정승

 위정자와 대중과의 관계, 관과 민의 관계도 그렇다. 백성의 주장을 그들은 곤봉의 언어인 ‘어쨌든’으로 눌러왔다.
 “어쨌든 시국이”, “어쨌든 현실이”, “어쨌든 나라 형편이”……그들이 우리에게 들려준 것 모두가 이유나 조건이나 논리의 설득이 아니라 억압과 폭력의 언어다.
 윤리, 문화, 정치, 경제 모든 것이 어쨌든 의 판정승으로 돌아간다. 이런 한국의 풍토 속에서 지성은 꽃필 수가 없는 것이다. 지성은 있어도 무익한 존재, 녹슬어버린 열쇠나 개발의 편자가 되고 만다.

 추상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 대체 어쨌든과 싸워 지성의 숨구멍이 트이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1. 우리는 결론을 서두르지 말자. 지름길이 아니라도 좋다. 지성의 훈련은 바로 그 과정의 모색에 있다.
                              - 20 -
2. ‘어쨌든’ 대신에 ‘왜’라는 말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행동하기 이전에, 복종하기 이전에, 동의하기 이전에 ‘왜’를 생각하자.

3. 폭력을 거절할 줄 아는 용기야말로 어쨌든을 꺾고 지성이 승리하는, 지성이 지배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지성이 잠들어 있는 곳에 폭력과 어둠이 온다.    

■ 감성과 지성

 꿀벌은 아무리 역사가 바뀌어도 육각형의 집밖에는 만들지 못하지만, 인간은 낡은 집을 부수고 새로운 형태의 집을 지을 수 있는 유일한 짐승이다. 신이 준 특권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 ‘나’ 자신부터 지성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발성법을 터득해야 할 것이 아닌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과정의 모색-회의-판단과 그리고 행동’의 단계를 갖추지 못한 채, 우리는 낡은 윤리나 고정관념의 울안에 갇혀 살아왔다.
 어쨌든 의 목책을 부수고 내가 나의 사고에 의해서 생명의 열매를 딸 수 있는 초원으로 나가야 할 시각이 왔다는 것이다.
 끝으로 어쨌든 이란 말을 한 번만 더 쓸 수 있는 낡은 특권을 나에게 허용해 주기 바란다.
 즉 ‘어쨌든 앞으로는 어쨌든이란 말을 쓰지 말자’고…….

Part  3.  명상(瞑想)
            시간이 빚은 공간       

◈ 파리의 우울

 제네바에서 에어프랑스로 오를리 비행장에 내렸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내가 혼자라는 고독을 느꼈다. 어차피 어디를 가나 이국이다. 그런 것쯤은 한국을 떠날 때 이미 각오를 했던 터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파리 비행장에 내리자마자 유독 고독을 느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직절적(直截的 딱 잘라서)으로 이야기하자면 비행기에서 내린 여객들이 ‘목

                               - 21 -
자 없는 양 떼처럼’ 접객자 없이 혼자 공항을 빠져 나갈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다. 안내자도 없이 에스컬레이터로 이층으로 올라가고... ‘소티에르(Sortire 나가다)’라는 화살표를 따라 출구로 나가고... 셀프서비스로 짐을 찾아 공항 밖으로 밀려 나오고 .... 그때의 그 의지할 길 없던 막막한 심경은 흡사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 크루소와 다름이 없었다.
 나는 정말 놀라게 한 것은 어쩌다 보니 여권도 트렁크도 심사를 받지 않은 채 공항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밀입국자가 된 것이다. 웬일인지 여권과 휴대품을 보자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짧은 기일이었지만 파리를 호흡하고 그들의 생활을 이해함에 따라서 점점 정이 들기 시작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프랑스 공항 부주의 로 내가 본의 아닌 밀입국자의 고통을 받았던 것은 아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정당한 절차를 다 밟고 있었던 것이다. 제네바에서 출국할 때 자동적으로 프랑스 입국 수속이 완료되었던 것이다. 제네바 공항에는 프랑스의 관리가 파견되어 있었다.
 그래서 손님은 이중으로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되고, 공항에선 공항대로 번잡하지 않아서 좋다. 프랑스 관리들의 그 합리적이고 기지 있는 일처리가 도리어 한국의 나그네를 놀라게 한 것 뿐이다. 관리란 덮어놓고 까다롭고 귀찮게만 구는 존재라는 내 편견이 잘못되었다. 불친절하다는 것도 실은 친절의 개념이 다른 것뿐이다.  ‘타인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바로 그들의 친절이다.

◈ 풀이의 형이상학

 내가 파리에 있었을 무렵,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전 기리고 지성인들이 모이는 카페 어디를 가든지 데탕트라는 유행어가 한창이었다. 데탕트는 동서 냉전이 가시고 ‘화해’를 뜻하는 정치적인 용어다. 그러니까 이 말을 의역하면 긴장 완화라는 뜻이 된다.
 서양 사람들은 이제 와서야 어텐션(긴장)에서 데탕트(화해)가 인간의 살 길임을 알고 그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것 같다.
 그러나 한국인은 이제 와서가 아니라 옛날부터, 아주 옛날부터 데탕트의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데탕트를 우리식으로 말하면 ‘푸는 것’이니까.

                               - 22 -
 우리는 남들의 싸움을 말릴 때 “서로 풀어버려라”라고 한다. 이때 풀어버리란 말은 가슴에 맺혀 있는 사감 또는 억울한 일을 물로 씻듯이 잊어버리라는 뜻이다.     

 서양 사람들은 어떤 분쟁이 일어났을 때, 그것을 계산하고 밝힘으로써 합리적인 해결로 매듭지으려 한다. 그러니까 오히려 그들은 싸움을 다지는 것으로 해결 짓는다. 그것이 재판이요. 토의다. 긴장은 고조되고 눈빛은 더욱더 시뻘게진다.
 여기에 비해서 잘잘못을 따지거나 손익을 계산하지 않고 그냥 백지로 돌려버리는 것은 한국인이 분쟁을 해결하는 풀이의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풀이는 논리가 아닌 것이다. 풀이는 재판이 아니다. 그것을 뛰어 넘는 관용이요, 망각이요, 용서다.
 우리는 풀이를 중시한 국민이었다. 무엇이든 풀게 한다. 억울한 것도 풀고, 분한 것도 풀고 그릇된 것도 풀어버리려 한다. 그것이 바로 화풀이요, 분풀이요, 원풀이였다. 원한을 푸는 것, 거기에서 모든 철학과 생활방식의 문화가 생겨난다. 서구의 문화가 긴장의 문화라면 한국의 문화는 해소의 문화다. 살풀이, 푸닥거리도 풀어주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신흠(申欽)이 쓴 시조 한 수를 읽어보자.
 
 노래 삼긴 사람 시름도 하도 할사
 일러 다 못 일러 불러나 풀었던가.
 진실로 풀릴 것이면 나도 불러보리라.

 노래를 부르는 것, 시를 쓰는 것, 춤을 추는 것, 그 모든 것을 시름을 풀기 위한 것으로 보았다. 말로 다 풀지 못한 것을 예술의 형식으로 풀려고 한 것이다.
 시름풀이, 그것이 한국인의 예술이었음을 이 시조에서 우리는 분명히 밝혀 낼 수가 있다. 심지어 한국인은 심심한 것까지도 풀어버린다. 그래서 노는 것을 심심풀이라고 하지 않는가.
 한국인은 풀이의 천재들이다. 풀어버리는 능력이 있는 한 어떤 비극이나 어떤 고통도 한국인의 가슴을 찢지 못한다. 아무리 무서운 독을 퍼 먹여도 해

                                - 23 -
독제가 있으면 겁날 게 없다. 보라, 긴 우리의 역사에 수많은 독을 먹었지만 우리는 이렇게 흥겨운 표정으로 살고 있지 않는가!
 한국인에겐 너나할 것 없이 조금씩 무당 기질이 있다. 아무 것도 아닌 일에도 신이 잘 오른다. 상춘 시즌이 되면 어디서나 볼 수 있듯 사람들은 길거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 부르고, 야단법석을 떤다. 근심이 태산 같고 먹을 것도 없으면서, 문 밖에만 나가면 구박을 받는데도 어디서 저 해일 같은 신명이 솟아오르는 것일까!   

 한국인의 욕은 비뚤어진 한국적 풀이 문화의 가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욕만큼 다양하고 푸짐하고 걸쭉한 것도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욕을 분석해보면 분야별로 고루고루 발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엄격한 가족주의의 억압을 풀기 위해 생겨난 욕이 바로 어미 아비를 들먹거리는 욕들이라면, 경제적인 억압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빌어먹을 놈, 거지같은 놈 등등의 욕이라 할 수 있다. 성적 억압을 풀기 위한 그 욕들은 일일이 여기에 열거하지 않아도 우리 자신이 잘 알 것이다. 부조리한 사회 그리고 정치적인 억압을 푸는 욕은 개새끼 등등이다.
 풀이 문화의 원동력인  신바람과 흥겨움은 생명의 근원적인 율동에서 나온 힘이다. 서구 문화는 이것을 죽이고 그 사화산 위에 문명의 궁전을 세웠기 때문에, 번영은 있어도 기쁨은 없고 정복은 있어도 행복이 없는 죽은 문화로 전락하고 있다. 그러나 그 가락에서 신명이 우러나오는 한국문화는 비록 가난해도, 억압을 받아도, 분수처럼 솟구치는 영혼의 진동이 있다.
 다만 정치가 어깨춤을 죽이고 이 국민을 다스리려 했기 때문에, 다만 기업가가 가락을 죽이고 고용인을 부리려 했기 때문에, 다만 아버지가 아들을, 선생이 학생을, 남편이 아내의 신바람을 죽이고 이끌려고 했기 때문에 이 국민은 그 엄청난 창조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오늘날은 문명의 긴장과 그 억압을 풀 수 있는 자가 승자가 된다는 것을……. 긴장을 풀지 못하는 자가 패자가 되고, 풀이 문화가 큰소리치는 때가 왔다는 것이다. 서구문화에는 이 전통이 없지만 우리에겐 수천 년의 뿌리 깊은 역사가 있다. 지금까지는 우리의 풀이문화가 겨우 욕이나 하고 춤이나 추고 푸닥거리나 하는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발전되어 왔지만 이제는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데로 신명과 흥겨운 창조의 원동력을 승화시켜야 한다.
                              - 24 -
◈ 음식물로 본 동서 문화

 프랑스 요리하고 하면 누구나 세계에서 첫손을 꼽는다. 그러나 나는 파리에 있을 때, 그 맛있다는 프랑스 요리를 앞에 놓고도 항상 굶주리는 쓰라림을 겪었다.
 문화와 식성만큼 밀접한 것이 없다. 보들레르의 시가 아무리 훌륭해도 때로는 소월의 시 구절만큼 실감이 나지 않는 것처럼, 달팽이 요리나 세계적으로 이름난 굴요리가 김치 한 조각만 못할 때가 많다. 언어가 그렇듯이 음식 역시 세 살 때부터 먹어보지 않은 것은 제 맛을 못 느끼는 법이다.

■ 여러 나라 음식물은 민족성만큼 각기 특색이 있다

 나라마다 음식의 특성이 있다. 그래서 일본요리는 눈으로 먹고, 인도 요리는 손으로 먹으며(촉감), 프랑스 요리는 혀로, 이탈리아 요리는 배로 먹는다는 유머도 있는 것이다.
 사실 일본 음식이 시각형이라는 것은 무지개 색깔 같은 물감을 들인 가마보코(어묵)나 초밥 같은 것을 보면 알 것이다. 지글지글 끓는 비프스테이크 덩어리를 아무렇게나 접시 위에 놓고 칼질하는 서양 요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아름답다. 그래서 일본 음식을 보면 먹는 음식이라기보다 색종이를 오려놓은 장식품 같다.

 인도 사람들은 아무리 귀족이라도 음식을 손가락으로 집어 먹는다. 그것을 보고 야만인이라고 섣불리 단정한다면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쪽이 무식한 야만인이 된다. 그들은 음식물을 먹을 때의 그 기묘한 촉감으로 식욕을 돋우기 때문이다.     
 이 촉감적인 것이 일본의 음식에 있어서의 색감 이상으로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음식은 결코 미각 하나만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하고 보드라운 온갖 촉감의 세계를 인도인들은 손가락으로 맛보는 것이다.

■ 교양의 유무와 식탁 매너의 차이는 관계가 없다

                              - 25 -
 대체로 감각과 음식물의 상관관계를 놓고 볼 때 유럽 음식들은 미개하기 짝이 없다. 왜냐하면 음식을 단순히 미각 일변도로 즐기려 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요리가 그렇게 이름난 것이지만, 오직 혓바닥의 맛일 뿐 시각이나 촉각, 그리고 후각 같은 다른 감각은 전연 고려되어 있지 않다. 특히 청각에 있어서는 철저하게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인도인들이 손가락으로 음식을 집어먹는 것을 보고 야만인이라고 비웃듯이, 한국인들이 어쩌다 점잖은 파티 석상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훌쩍거리고 수프를 마시다가는 서양 사람들로부터 야만인 대우를 받기가 일쑤다. 이를테면 미각의 즐거움을 위해서 청각의 세계를 철저하게 제거해버리는 것이 서양친구들의 식사 예법이요, 음식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신하건데, 그것은 결코 교양 유무의 문제가 아니다. 서양 친구들이 젓가락질을 못했다 해서, 또는 장판방에서 다리를 뻗고 앉아 밥을 먹었다 해서 교양 없는 친구라고 몰아세울 수 있겠는가? 식사법이 다른 것뿐이다. 
아니다. 정말 한국식으로 먹으려면 소리를 내야만 밥맛이 난다. 서양 친구들과는 달리 미각만을 위해서 청각을 거세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미각에 청각을 조화시킴으로써 식사의 쾌감을 배가(倍加)시킨다는 점에서, 우리 쪽이 단연 자연스러운 것이다.
 콩나물국이나 된장국은 훌쩍거리고 마셔야 먹은 것 같다. 그 소리를 떼 놓는다면 먹은 것 같지 않을 것이다.            
  
■ 일본인은 시각으로, 인도인은 촉각으로
   프랑스인은 미각으로, 한국인은 온몸으로 먹는다.

 우리는 국을 마실 때, 결코 초상집의 상객이나 위궤양 환자처럼 혹은 도둑놈처럼 애써 소리를 죽이려고 전전긍긍하지 않는다. 이 세상에 먹는 것 이상으로  자연스럽고 자유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한국인은 시각, 청각, 그리고 촉각, 후각까지 오관으로 즉, 온몸으로 식사를 한다. 심지어 땀까지 뻘뻘 흘리면서 먹는 것이 한국 음식의 특징이다.
 거짓말이 아니다. 입 전체로 뿌듯하게 쌈을 싸 먹는 한국인의 식사 광경을 보라. 맨손으로 쌈을 쌀 때에는 인도식 촉감이 있고, 야채와 양념은 일본식 색감이 있다. 미각은 통째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뿌듯한 양감, 목구멍 전체

                                - 26 -
로 먹는다는 표현이 알맞다. 이런 한국인이 수프를 먹을 때 어떻게 그 요란한 폭풍우 소리를 내지 않겠는가.       

 단순한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한국의 문화는 감각의 총화에 그 특성이 있다. 시각, 청각, 후각, 촉각, 미각이 따로 따로 해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교향곡처럼 앙상블을 이루고 있는 곳에 총체적인 생의 이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밥을 먹는 데 있어서도 온몸으로, 즉 오관의 조화를 살린다.    
- 시각 : 신선로가 지니는 색채와 볼륨, 큰상 차릴 때 괴어놓은 국화무늬와 용모양, 가지각색으로 오려놓은 가오리와 다양한 기하학적 무늬들, 실고추의 섬세함 그리고, 정성스런 양념들…….
- 후각 : 양념의 종류가 한국만큼 풍부한 요리는 없다.
- 청각은 이미 말한 바 있고 촉각이나 열 감각에 있어서도 한국 음식을 제쳐놓고 타국의 예를 들기 힘들다.

■ 인간의 생은 어려서부터 먹는 일에서 시작된다

 서양 친구들이 밥을 먹는 것을 보면, 골프를 치듯이 코스를 따라서 식사를 진행하는 것이며, 차례를 기다려서 그 차례대로 음식을 먹는다. 적어도 한국인은 그런 식으로는 식사를 하지 않는다. 수프로부터 디저트에 이르기까지 몽땅 한 상에 차려 놓고 제가끔 자기 식성대로 자유로이 선택해서 먹는다. 그야말로 민주적이며 공식적인 식사법이다.
 음식을 시간의 순서대로 분할해 놓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한 상에 동시적으로 차려져 있어 먹는 사람도 제가끔 순서에 관계없이  때로는 김치, 때로는 산적, 때로는 국, 마음 내키는 대로 선후 결정 없이 음식을 든다. 시작과 끝이 없다. 국은 처음에도 있고 끝에도 있다. 상추쌈 역시 처음에도 있고 끝에도 있다.

 누가 대체 한국인을 수동적인 국민이라 했는가! 타율적인 민족이라 했는가! 음식도 개성대로 그 순서를 바꿔 먹지 못하는 서양 친구들이 자유가 어떻고 개성이 어떻고 떠들어댄다는 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다. 그들은 식사도 논문을 쓰듯이 서론이 있고 본론이 있고 결론이 있다. 수프는 서론에 해당하는

                               - 27 -
음식이요, 메인 디시는 본론, 그리고 디저트는 결론에 해당한다. 이것이 서양인들이 자랑하는 논리적 과정이라는 것이며 합리주의라는 것이며 변증법적 전개라는 것이다.                    

■ 한국인은 천 년이 하루요,
   하루가 천 년인 무시간적 공간에 산다

 한국인은 세상을 그렇게 논리적으로 살지 않는다. 인생이란 서론도 본론도 결론도 없다는 것, 인위적인 서열로써 분할하고 전개하고 매듭짓는 인생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생의 식탁에 한꺼번에 차려놓아진 것, 그것이 진짜 생이라는 음식이다. 공시성, 총체성, 시간의 순서가 아니라 공간을 채우는 동시적감각, 이것이 한국인의 의식구조기도 하다. 그러기에 서구인의 문화는 역사주의적 시간의 과정을 따라 전개되어 왔지만, 한국인들은 천 년이 하루요, 하루가 천 년인 무시간적인 공간구조 속에서 생을 영위해 왔다.

■ 빵과 밥

성서에 보면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는 없다’는 유명한 잠언이 나온다. 여기서 무슨 종교적 진리를 따지자는 게 아니다. 너무나 유명한 교훈인데 비하여 우리나라 말로 번역하기에는 참으로 까다롭다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신통하게도 선교사들이 주동이 되어 번역한 옛날 성서를 펼쳐보면 ‘빵’이 ‘떡’으로 되어 있다. 과연 서양의 빵은 한국의 떡과 비슷하게 생겼다. 형태만으로 볼 때 빵을 떡이라고 의역한 것은 지당하고 지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 뜻을 살펴보면 엉뚱하기 짝이 없는 오역이다.
 한국인은 떡만 먹고는 절대로 살아갈 수 없다. 떡은 간식을 될지언정 주식은 못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떡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일이다’라는 성서의 명구를 우리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들으면 ‘별 싱거운 말도 다 있다’라고 코웃음을 칠 일이다. 그러니까 빵을 떡으로 번역해 놓으면 그 뜻은 마치 아침에 해가 뜨고 저녁에 해가 진다는 말처럼 싱겁게 되어 버린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빵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그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부빛이 하얀 서양 사람들을 상대로 한 말이다. 그렇다고 빵을 밥이라고 의역해

                              - 28 -
놓고 만족한 표정을 지을 수 있을 것인가? 같은 주식이기는 하나 빵과 밥의 개념은 엄청나게 다르다.
파리에서 길거리를 지나다 보면, 바게트를 사든 신사 숙녀들이 마치 깃대를 들듯 어깨에 메고 지나는 광경을 볼 수도 있다. 아니, 그냥 들고만 다니는 것이 아니라 숫제 길거리에서 빵을 먹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
 한 번 생각해보라 우리나라 길거리에서 밥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거지가 아닌 다음에야 길거리에서 밥을 먹거나 깡통에 밥을 담아 들고 다니는 사람이란 상상할 수가 없다.

 이것이 같은 주식이지만 빵과 밥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밥만은 자기 집에서 짓는다. 이것이 동양의, 특히 한국의 가족주의를 쉽게 무너뜨리지 않는 요인이 된 것이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정겨운 말이 있듯이 식생활의 가장 기본이 되는 밥맛은 서로 사고파는 상품이 될 수가 없다.
 한솥밥을 먹는다는 것, 뜨거운 밥을 먹는다는 것, 그것도 매일 같이 되풀이해서 먹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을, 아내와 남편을, 그리고 형과 아우를 묶어두는 핏줄의 확인이다.

 만약에 서양 사람들처럼 밥 대신 빵을 주식으로 했다면, 그래서 빵 가게에서 구워낼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나는 파리에서 손수 자취를 했었다. 전기밥솥을 사다가 혼자 밥을 지어서는 혼자 먹는다. 그때마다 눈에는 눈물이 서렸었다. 식구가 생각이 났다. 절대로 감상이 아니다. 밥을 풀 때 그리고 밥그릇을 옮길 때 내가 홀로라는 것을 실감했다. 내가 프랑스에 태어나 빵을 먹고 자란 사람이라면, 그래서 경우가 바뀌어 한국에 와 빵 가게에서 빵을 사다 먹었다면, 아마도 내 눈에 눈물이 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밥을 먹고 자란 한국인들은 아무리 근대화가 돼도 가족을 떠나 살기가 그만큼 힘이 드는 법이다. 끈적끈적한 그 밥풀만큼이나 빵과는 달리 밥은 서로의 체온을 묻어 다니게끔 한다.

 이에 비해서 서양의 음식엔 빵처럼 국물이 없는 마른 음식이 많다. 전투하기에 편하며 뛰어다니면서도 먹을 수 있다. 음식 하나만 봐도 서양 친구들의 호전성을 넉넉히 엿볼 수 있다.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식민지를 개척했던

                              - 29 -
그들, 우리 같았으면 밥을 지어먹고 김치, 깍두기를 담아 먹느라고 그야말로 십 리도 못가서 발병이 났었으리라.
 빵의 문화는 개인주의 문화이며, 정복의 문화이며, 활동의 문화이며, 상업의 문화다. 빵이 있는 곳에 전쟁이 있었고, 개척이 있었다. 그리고 자유로운 분리와 집을 떠나서 고향을 떠나서 행동할 수 있는 사회성이 있었다.
 밥의 문화는 한솥의 문화다. 지붕 안에 고정되어 있고, 정적이며, 집을 떠나서는 살기 어려운 귀향자의 문화이다. 떠돌아다닐 수 없는 문화다. 정말 인간은 빵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다. 하지만 한국인은 밥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밥에는 단순히 배만 채우는 물질만이 아니라 김처럼 정이 서려있고 사랑이 배어 있는 것이다.

◈ 빗속에서 파리와의 고별

 파리를 떠나던 날 밤비가 왔다. 6월인데도 늦가을 날씨 같았다. 대륙성 기후의 탓일 게다. 그러기에 비만 오면 언제나 만추의 그 썰렁한 비창감이 떠돈다. 더구나 낯선 이방의 도시라 해도 떠날 때가 되면 서운하다. 포석 위에, 가로등에, 발코니와 난간과 그리고 가로수의 이파리에 차가운 빗방울이 뿌려지고 있다.
 한국의 빗소리를 황진이가 뜯는 거문고 소리에 비한다면, 파리의 빗소리는 춘희(春姬)의 기침소리 같다고 할까……. 기분만 그런 것이 아니다. 빗소리는 풍토의 악기와도 같아서 나라에 따라 그 톤과 정취가 다르다.

 오동(梧桐)에 듣는 빗발 무심히 듣건마는
 내 시름하니 잎잎이 수성(愁聲)이로다
 이후야 잎 넓은 나무를 심을 줄이 있으랴

 한국의 빗소리는 옛날 황진이가 시름으로 듣던 그 소리처럼 서글픈 데가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국의 빗소리는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갈래다.
 마당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장독대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다르고, 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와 낙숫물 소리가 또한 다르다. 따끈한 온돌방에 앉아 비 내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코러스처럼 여러 갈레로 울리는 우성(雨聲)이 폐부를 적신다.
                              - 30 -
 그러나 파리의 빗소리는 단조롭다. 한 곡조다. 우선 그 건물에는 우리와 같은 처마란 것이 없으니 낙숫물 소리가 없다. 목조 건물이 없고, 모든 것이 콘크리트와 돌로 포장되어 있어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획일적이다. 그것은 나무나 흙의 소리가 아니라 광석질의 음향이다. 우리의 비가 탁하고 다양한 혼성 합창이라면 그쪽 비는 투명한 독창 소프라노 소리로 온다.

 거리에 비가 내리듯
 내 마음에도 비가 온다

 베를렌의 시 그대로 파리의 거리에, 돌바닥 위의 그 거리와 지붕에 내린다. 생활이 다르면 우상마저도 다르다. 그러기에 파리의 우경(雨景)은 귀로 듣는 것보다 눈으로 보는 것이 좋다.
 원래 파리는 귀보다는 눈을 위한 도시다. 시각의 즐거움을 주는 도시다. 프랑스인 역시 예술적인 천재라고들 하지만 음악 보다는 미술적인 기질이 승하다. 미술을 비롯하여 문학, 무용 할 것 없이 프랑스는 세계 제일의 천재들을 낳았다. 그러나 웬일인지 음악 분야에 있어선 별로 귀가 번쩍 띄는 이름이 없다. 독일의 악성(樂聖)들과 비교해볼 때 더욱 그런 것이다.
 샹송을 ‘음치의 노래’라고 규정한 것도 일리 있는 말이다. 샹송은 샹송대로의 맛이 있긴 있다. 그래도 그게 말인지 노래인지 실상 그 가락은 애매하기 짝이 없다. 프랑스 사람들이 음치이기 때문에 그런 노래가 생겨났다는 농담에는 어느 정도 진담도 섞여 있는 듯하다.

◈ 빛이 있는 유럽의 입구

 희랍은 거기 있었다. 눈부신 일광 속에 새파란 에게 해의 빛깔 속에, 아테네는 거기 그렇게 있었다.
 역사가 오랜 고도에는 고본상(古本商)의 냄새 같은 것이 있다 로마가 그렇고 런던이 그렇고 파리도 그런 것이다. 그러나 아테네는 기원전 15세기의 미케네 문명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구 문명의 요람지 이지만 여전히 밝고 건강한 색채가 있다. 리카베토스의 바위 산을 온통 대리석처럼 비추고 있는 저 태양은 분명히 신화 그대로 아폴로의 금마차인 것이다.
 ‘태양이란 단지 타오르는 바위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라고 말했던 이오니

                               - 31 -
아의 한 과학자는 그 때문에 아테네 사람들로부터 추방되고 말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뭇 사람들이 태양에 엎드려 제사를 지내던 시절, 홀로 태양을 암괴(巖塊)라고 갈파했던 그 선각자(아낙사고라스)의 천재성과 용기를 나는 존경한다.                              
 그러나 지금 아테네의 태양을 가리키며 나에게 그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단연코 나도 페리클레스처럼 그를 추방하고 멀 것이다.
 태양은 어디서나 빛난다. 다만 아테네의 창공에서 빛나는 저 5월의 태양만큼 신화적일 수는 없다. 1년을 통해 비가 내리는 날은 겨우 20일도 되지 않는다는 희랍, 그 속에서 자란 도시에 어둠이 있을 리가 없다. 대리석 건축물이 많은 아테네의 시가는 햇빛 그대로 백색이었다.
 그러나 알파니 시그마니 하는 희랍문자는 옛날의 기하학 교과서를 연상하게 한다. 내가 아는 희랍어의 가난한 전 재산 속에는 불길하게도 ‘바바로이’란 것이 있다. 아테네 사람들이 이방인을 경멸해서 부르는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말로 하면 ‘오랑캐’란 뜻과 통한다. 더구나 ‘바바로이’의 원 뜻은 ‘더러운 말로 지껄이는 놈들’이란 것으로 영어의 ‘바바리언(야만인)’의 선조격인 단어다.  

 희랍은 가난한 나라다. 유럽의 여러나라 가운데 국민소득이 제일 낮은 나라다. 또 우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사는 깊지만 오랫동안 이민족인 터키의 압제를 받아 오다가 겨우 독립을 얻은 나라다. 공산 게릴라에 시달렸고 정치적인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은 우리와 달리 그렇게 이지러진 데가 없고 어두운 구석이 없는가!
 페르시아 대왕이 희랍 정벌을 하려고 했을 대 그 부하 데라파라토스가 한 말이 기억난다.
 ‘과연 희랍과 가난은 언제나 변함없는 동거인이다. 그러나 희랍인들은 그 속에서도 지혜와 강력한 법률에 의해서 얻어진 능력을 가진 민족인 것이다.’

◈ 함께 살아가는 땅

 한 20여 년 전에 영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토마스 하디가 태어난 도체스터라는 조그만 마을에 간 적이 있다. 토마스 하디 문학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

                                - 32 -
해 하디 기념관이 있는 그 마을에 도착해서 식당에 들어가니, 한 테이블에 태극기가 꽂혀 있었다.
 관광객도 잘 가지 않는 영국의 외진 마을에서 우리의 태극기를 대하자 가슴이 뭉클함을 느끼고 그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런데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좋아하는 사람과 실망하는 편으로 나뉘어 일제히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나는 웬일인가 싶어 아주 당황했다. 그래서 알아봤더니 그 마을 사람들이 이 식당에 꽂힌 태극기를 보고 내기를 한 것이었다. 저 깃발은 아프리카 신생국일 것이다. 아니다 동양의 어느 나라일 것이다. 즉 흑인 표와 황인 표로 나뉜 것이다. 그래서 내가 나타나자 아프리카에 건 사람들은 실망했고, 동양에 건 사람들은 좋아서 손뼉을 친 것이다.

 그 중에 한 사람이 나에게 다가와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한국이라고 대답했다. 마침 그 사람은 한국동란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한국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했다.         
 태극기를 들여다보던 그가 빨간 쪽이 노스코리아고 파란 것이 남쪽, 그것을 가르는 선이 바로 휴전선인가 하고 물었다. 그때 나는 그 사람에게 “어째서 똑같은 도형을 놓고 당신은 두 개가 나뉘어졌다고 생각하고, 나는 두 개의 다른 것이 합쳐진 것으로 보는가”라고 말했다.
 우리가 알다시피 서양 사람들은 분리하길 좋아한다. 대립시키고 지배하는 분리 정책을 써왔다. 그래서 내가 좀 심한 소리를 했다.

 우리나라의 국토가 분단된 것도 당신네 서양 사람들의 사고방식인 그 분리주의에 의해서 분할 된 거다. 당신네들의 역사는 쪼개는 데서부터 시작했다. 쪼개고 쪼개서 마지막에 뭤을 쪼갰느냐? 원자핵을 쪼갰고 수소를 쪼갰고, 이런 것이 바로 원폭이다. 당신네들의 힘은 분열, 핵분열 같은 분열에서 나온 힘이다.
 그런데 동양 사람들은, 특히 한국 사람들은 옛날부터 서로 화합하고 조화하고 합치는 융합사상 속에서 살아왔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태극기를 보더라도 우리는 천지가 합쳐져 하나의 태극, 동그란 원으로 통일된 완성된 도형을 그린 것인데. 그들은 그것을 남북 반단(半斷)의 도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 33 -
똑같은 그림을 놓고서도 보는 시각이 다르다. 한자로 임금 왕(王) 자를 써보면 가로로 세 줄을 그어놓고 그 세 개를 하나의 선으로 이었다, 옆의 세 줄은 하늘 ,땅, 인간으로서 이것을 이어서 융합시켜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왕이라는 것은 하늘, 땅, 인간이 서로 분열된 것을 이어주는 사람, 군대 용어로 말하면 연락 장교에 지나지 않는다.
 가령 언어 같은 것을 보더라도 서양 사람들은 분리 위주로 사고했고, 우리는 조화, 융합 위주로 생각했다는 것이 잘 드러난다.

 예를 들어서 책상 서랍을 영어로 드로어(drawer)라고 하는 데 이것은 바깥으로 끌어내는 것 즉 풀 아웃(full out)이다. 서양인들은 반대되는 개념을 한보자기에 쌀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빼닫이 처럼.
또 서양말에는 여자, 남자란 말은 있어도 사람이란 말은 없다, 영어에선 남자는 맨(men), 여자는 우먼(woman), 합치면 우리처럼 사람이란 제3의 말이 나와야 하는데 사람에는 또다시 맨(man)이 되어버린다.
 또 밤, 낮은 나이트(night), 데이(day)이다. 우리말에서 밤, 낮을 합쳐 하루라고 하는데, 서양 말에는 그것이 없다.
 이렇게 따져보면 한둘이 아닌데, 이와 같이 서양 사람들은 끝없이 대립개념을 앞세웠고, 우리는 대립되는 것을 한 보자기에 싸가지고 하나로 종합하고 융합하려고 하는 흐름으로 생활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별의 언어     

 우리 조상들은 어떤 천체 망원경으로도 발견할 수 없는 별 하나를 만들어냈다. 태세(太歲)라는 별이다. 사전을  찾아보면 목성의 다른 이름이라고 풀이되어 있지만, 사실은 그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돌아가는 가상의 별이다.
 목성은 12년을 주기로 태양을 한 바퀴씩 돌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나이를 헤아리는 데는 없어서는 안 될 별이다. 하지만 그 별은 서쪽에서 떠서 동쪽으로 지고 있어서 본래의 궤도를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지 않으면 나이를 거꾸로 먹게 된다.
 그래서 해와 달처럼 뜨는 또 하나의 목성을 만들어 낸 것이 태세고, 그 별이 1년마다 한 칸씩 열두 칸을 지나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 바로 12시이다. 우리가 쥐띠니 소띠니 하는 것은 태세가 지나는 하늘의 칸막이 위에 붙여진 이름들인 것이다.
                              - 34 -
 60년 동안 땅만 보고 살아오는 동안에도 그리고 매일 밤 깊이 잠들어 있는 나의 머리맡에서도, 태세는 아주 조용히 그리고 어김없이 닭에서 원숭이의 열 두 구획의 하늘 자리를 옮겨 다닌 것이다.
 태세의 별을 만들어 냈던 것처럼 시인이란, 창조적 상상력을 가진 예술가들이란, 별의 관측자로서가 아니라 별을 만드는 자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윤동주가 바로 그런 시인이었다. 그의 서시(序詩)를 자세히 읽어보면 아주 짧은 그 텍스트 안에 세 개의 다른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첫 번째 연에 나오는 것은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 했다’로 과거형이고, 다음 연은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로 다짐과 바램을 나타낸 미래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마지막 행은 독립 연으로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로 현재형이다.

 과거형으로 된 시행들은 부끄러움이니 괴로움이니 하는 부정적 감정들을 서술하고 있는 데 비해서, 미래의 시간을 나타내는 시구들은 ‘……노래해야지’ ‘갈아가야겠다’로 외적인 행동을 나타내는 희망의 말로 구성되어 있다.
 윤동주에 있어 과거란 참회로 다가서는 내면의 시간이요, 미래란 다짐으로 맞이하는 행동의 시간인 것이다. 그러나 이 과거와 미래 사이에 솟대처럼 외롭게 서 있는 현재의 시간에는 나의 감정도 행동도 아무 것도 더 이상 서술되어 있지 않는 묘사로 되어 있다. 단지 거기에 스치는 별이 있을 뿐이다.
 윤동주가 만든 이 별은 ‘오늘밤에도’ 라는 그 ‘도’의 조사가 암시하고 있듯이 무한히 계속되는 오늘, 영원히 지속되는 밤인 것이다. 과거도 미래도 이 시인의 텍스트 안에서는 오늘밤으로 응축되고 별로 결정(結晶)되어 나타난다.              
 윤동주의 텍스트를 과거형이나 미래형에 속하는 텍스트만으로 읽으면, 그는 시인이라기보다는 독립운동가요 훌륭한 크리스천이다.
 그러나 윤동주가 우리 앞에서 여전히 시인으로 기억되는 것은 그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순교한 것만이 아니라 바람에 스치는 별을, 끝없이 지속하는 ‘오늘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환해야 보이지만 별은 어두워야 잘 보인다. 밤의 시대에 태어난 우리는 ‘별의 언어’, 역설의 언어를 만날 수밖에 없다. 별의 관측자가 아니라 별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밤’에도 글을 쓴다.  - 끝 -
                                                       2014. 12.  2.
                               - 35 -     


 

반응형

'독서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금 말씨(2)   (0) 2014.12.30
천금 말씨  (0) 2014.12.15
읽고 싶은 이어령  (0) 2014.12.01
나는 말랄라 (2)  (0) 2014.11.13
나는 말랄라   (0) 2014.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