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싶은 이어령

2014. 12. 1. 14:41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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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고 싶은 이어령
                    - 이 땅의 모든 지성에게 -

■ 이어령

0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 문학 평론가, 언론인, 소설가, 시인, 에세이스     트, 전 문화부 장관
0 24세, 한국일보 신춘문예 ‘우상의 파괴’ 당선
0 여러 신문의 논설위원
0 88올림픽 ‘굴렁쇠 소년’ 퍼포먼스로 세계인의 찬사
0 20대에 쓴 ‘흙속에 저 바람 속에’는 7개국어로 번역, 당대 최고의 베스트    셀러이자 스테디셀러   
0 50대에 쓴 ‘축소 지향의 일본인’은 일본인도 인정한 일본 문명 분석서
0 저서 : 흙속에 저 바람속에, 축소 지향의 일본인, 지성에서 영성으로, 생명    이 자본이다. 저항의 문학, 젊음의 탄생 등
0 현재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 중앙일보 상임고문, 한·중·일 비교문화 연구소    이사장

◈ 벽돌은 뚜렷한 한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벽을 쌓기 위해 거기 그렇게 있는 것이다. 용도가 분명하고 기능이 뚜렷한 것이기 때문에 그 투명한 의미 앞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주저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연 속의 돌멩이는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돌멩이를 들어서 못을 박는 망치로 사용할 수도 있고, 혹은 다윗처럼 그것을 던져 적을 쓰러뜨리는 무기로 사용할 수도 있다. 우리는 돌멩이를 주워 화단에 올려놓을 수도 있고 김장독을 눌러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은 결코 하나의 의미와 목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스스로 욕망을 갖고 긑없이 그 용도를 변경하고 어떤 의미를 향해서 끝없이 움직이고 있는 돌멩이다.

■ 머릿글 :   고맙다, 인호야

인호가 세상을 떠났다. 나쁜 녀석, 영정 앞에 향불을 피우며 욕을 했다. 내 가슴에 그렇게 큰 구멍 하나 뚫어 놓고 가버렸다. 세상을 떠나기 서너 달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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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중의 몸인데도 인호가 내 집을 찾아왔다. 문병을 가야할 사람은 나인데 ……. 멋쩍게 야윈 손을 잡고 그동안 무심히 지내온 것을 후회했다. 그런데 그와 동행한 사람이 꽃다발과 함께 인쇄물 하나를 나에게 건넸다. 그것이 바로 ‘읽고 싶은 이어령’ 내 글모음 책이었다. 이제야 인호와 약속한 그 글 빚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호가 갔다. 나에게 묵은 글 빚 하나를 던져 놓고 아주 갔다. 아니다. 글 빚이 아니라 나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 간 것이다 그동안 많은 책을 냈지만 그것은 모두 내 의지로 낸 것인데 이 책만은 그렇지가 않다. 인호가 없었다면 그가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아마도 이 세상에 영원히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읽고 싶은 이어령… 인호가 나에게 그런 말 한마디 남기고 갔는가 생각하니 정말 나는 글밖에 그에게 준 것이 없다. 내가 인호의 글을 좋아했고 인호가 내 글을 좋아했다. 신춘문예 심사를 맡았을 때 처음으로 그의 글을 읽었다. ‘견습환자’라는  단편이었고 나는 두 말하지 않고 그 작품에 점을 찍었다. 그와는 띠 동갑이었지만 그렇게 그의 글벗이 되었다. 그의 글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인호와 동시대에 살고 있는 행운과 놀라움을 맛보았다.

 인호야. 너와 약속한 신작은 아니지만 네가 바라던 그 출판사에서 이제야 책 한 권이 나왔단다. 네가 엮어 나에게 가져왔던 그 원고를 매정하게 거절했던 그때의 일을 용서해주기 바란다.
 고맙다, 인호야.
 이 한마디 말로 이 책 서문을 대신한다.

■ 프롤로그     최초의 악수와도 같은 편지

 여행……말하자면 취리히는....
 작년 5월 어느 날, 나는 이렇게 시작하는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런 독백도 쓰여 있었습니다.
 
 어느 외국 시인이 지은 한 토막의 글귀가 생각난다.
 ‘월·화·수·목·금·토·일 또다시 월·화·수·목·금·토·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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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런 의미 없는 말들이 한 주일을 만들고 한 달과 한해와 그리고 나의 생애보다도 더 길고 긴 시간들을 만들어 낼 것이다. 어제는 금요일이었지만 눈부신 그 광채의 돌은 어느 시간 사이에서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오늘은 토요일이지만 역시 흙은 아무 데도 없다. 아파트의 타일벽과 유리창과 시멘트의 계단과…….
결국은 반복되는 그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욕망이 오늘도 내 배낭끈을 졸라매게 한다.
 여행… 떠난다는 것. 돌아오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고 출발한다는 것. 그리고 자유, 공기와도 같은 자유, 조건 없는 자유, 손톱만큼의 자유라도 그것을 위해서라면 나는 배낭과 함께 언제라도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다음 글은 판독할 수 없게 지워지고 뭉게지다가 그 글이 끝난 여백 위에 깨알만한 작을 글씨가 씌어 있었는데, 그것이 진짜 편지였던 것입니다.

선생님, 미안합니다. 실종신고서라도 좋고 유언장이라 해도 좋은 이 글을 누구에겐가 전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평소에 알고 있었던 사람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외워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나에게는 아는 사람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만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생각해 낸 것이 선생님의 이름이었지요. 떠나기 전에 아마 나에게도 한 사람 쯤 독자를 갖는 허영이 필요했나 봅니다.

‘독자’란 말 옆에는 친절하게 방점이 찍혀져 있으면서도, 날짜나 발신인의 이름이나 그리고 주소 같은 것은 물론 아무 데에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필적이나 글 내용으로 미루어 봐서 편지를 보낸 사람은 시를 몹시 좋아하는 문학청년 같았고, 등산을 좋아하거나  그렇잖으면 방랑벽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방안에 틀어박혀 외국의 그림엽서나 모으고 앉아 있는 대학생 같기도 했습니다.
 처음에 무심히 읽고 치워버린 편지였지만 웬일인지 시간이 흐를수록 작은 가시처럼 내 손톱 밑에서 아픔으로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중  략>
 그 뒤 나는 일본으로 건너가 남의 땅에서 한국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온통 모두가 그 젊은이처럼 떠도는 사람으로 생각되었고, 기둥이 튼튼한 집에서 잘 살아가고 있는 내 부러운 친구들까지도 배낭을 짊어진 사람으로 느껴졌던 것입니다. 물론 그 속에는 내 자신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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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구나 수천수백의 그 떠도는 사람들은 주소도 이름도 없기 때문에 “괜찮다! 괜찮다!” 이야기 할 것이 있어도 편지를 띄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떠도는 자의 우편번호를 생각해야만 했습니다. 시인 윤동주처럼 ‘육조 방 남의 나라’에서 ‘시대처럼 아침’을 기다리면서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같은 편지를 써보기로 한 것입니다.

part  1.  독법(讀法)
          시간 속에 숨은 미래

◈ 미래를 읽는 법

 추위가 조금씩 풀리고 있다. 한 겨울 추위 같아서는 다시 봄이 올 것 같지 않던 것이 어느 새 흰 눈이 덮였던 자리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다. 이 계절의 순환을 믿고 있기 때문에 개구리는 땅속에서 동면을 하고, 화초는 구근 속에서 찬바람을 견딘다.
 그러나 인간은 계절의 순환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벌레와 식물이 아니다. 우리는 인간들의 손으로 스스로 만들어 내는 계절, 말하자면 문화와 역사의 또 다른 시간의 순환 속에서도 살아가고 있다. 코트를 입고 벗는 것만으로는 적응해 갈 수 없고, 또 달력을 넘기는 것만으로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인공의 계절이라는 것이 있다.

■ 역사의 리딩 인디케이터를 찾아라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이상하게 생각한 것이 ‘입춘’이라는 절기였다. 입춘은 문자 그대로 봄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입춘치고 춥지 않은 날이란 거의 없었다. 일 년 중에 제일 추운 날이 실은 입춘 무렵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인가?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그런 추위 속에서도 봄의 입김을 느끼고, 그 소리를 예측하는 슬기를 지니고 있었다.
 잔설 속에서 봄나물을 캐는 것처럼 다가오는 역사와 문명을 예견하고 행동 했더라면 우리는 아마 지금 달나라쯤에 가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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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양에서 만들어진 시계가 들어왔을 때
- 중국 : 황제의 장난감
- 한국 귀신이 붙은 것이라 하여 굿을 벌임
- 일본 : 화시계(和時計)라 하여 새로운 시계를 만들어 사용

 중국이나 한국이 일본에 비해 근대화가 늦어지고, 그 때문에 그들로부터 침략을 받게 되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 시간을 받아들이는 태도의 비교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자연의 계절은 분초를 다투는 것이 아니다. 별자리나 은하수의 흐름으로도 넉넉히 짐작하고 적응해 나갈 수가 있다. 그러나 역사나 문화의 시간은 초침 속에서 움직여가고 있으며 그 경쟁과 예시 속에서 발전되어 가는 것이다.

- 시계가 없었을 때, 일본인들은 유곽에서 기생과 노는 데에도 시간제를 도입했다. 선향(線香)이 한 가락씩 탈 때마다 화대를 계산했다. 오늘날 화대(花代)라는 말은 선향을 ‘꽃’으로 불렀던 데서 유래한다.    
- 코리안 타임 : 시계에 맞춰 사는 것을 각박한 것으로 여김, 그래서 ‘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간들 어떠리!’의 경지에서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좋든 궂든 자연의 계절이 아니라 인공의 계절인 역사의 리딩 인디케이터(leading indicator, 선행지표)를 빨리 찾아내지 않고는 누구도 살아남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도시 속에서 수시로 변해 가는 저 군중 속에서 앞으로 올 시대의 ‘봄나물’을 캐내는 바구니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계절이 온 것이다.

■ 효율성과 유효성

 앞으로 올 시대를 읽지 못하면 공룡처럼 멸망한다. 사람들은 곧잘 대표적인 예로 볼딩 로코모티브사(社)를 드는 경우가 많다. 이 회사는 20세기 초 증기기관차를 만들어 세계 첫손 꼽히는 영광을 누렸다. 그러나 디젤이나 전기기관차가 등장하고 있는데도 증기기관차에만 매달려 있다가 결국은 수중기와 함께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디젤이나 전기기관차도 자동차나 비행기의 도전으로 사양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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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고속도로와 고속전철의 발달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     
 기차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 아니다. 시대의 변천을 가장 민감하게 드러내는 교통수단의 예 하나를 보더라도 자연의 계절처럼 인간의 문명에도 새잎이 단풍져 떨어졌다가 다시 또 새싹이 피어나는 사계의 순환성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미래를 읽는 방법은 효율성만이 아니라 유효성을 따져봐야 하고, 그 유효성을 알기 위해서는 오동잎 하나 지는 것을 보고 천하의 가을을 알아내는 시인적인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정치가도 기업인도 그리고 과학자라 할지라도 앞으로의 승부는 창조적인 상상력에 달려 있다. 상상력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반대의 것을 결합하는 능력이다.

순환하는 것들은 직선운동과는 다르다. 역사는 직선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계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셀리의 시구처럼 겨울의 추위가 거꾸로 봄의 따스함을 불러들이는 역할을 한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이 있다’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비합리적인 속담이 아니라, 역사의 순환을 정확히 짚어낸 슬기다.
 영원한 승자가 없듯이 영원한 패자도 없다. 가위는 보자기를 이기고 주먹은 가위를 이긴다. 그러나 그 주먹은 거꾸로 가위에 진 보자기에게 진다. 가위바위보에는 순환성이 있을 뿐 절대 지배라는 것이 없다. 오는 계절을 미리 알고 노래한 시적 상상력을 기르면 우리는 미래의 의미를 읽는 미래학자가 될 것이다.

◈ 사랑과 고통의 의미

 크리스마스카드 대신 요즘은 편지를 쓴다. 빨간 색종이를 오려 붙인 것 같은 신비한 겨울 꽃 포인세티아가 실은 꽃이 아니라 이파리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 크리스마스카드에 대한 환상이 깨져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는 빨강 망토에 방울 달린 털모자를 쓴 산타클로스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실제로 산타클로스가 있다 해도 한국의 굴뚝으로는 들어 올 수 없다는 것도 그리고 산타 할아버지가 원래는 도둑의 수호신이었다든가, 예수님의 고향엔 눈이 내리지 않는다든가, 그래서 별처럼 하얀 눈이 빛나는 전나무라든가, 사슴이라든가 썰매하고는 인연이 먼 사막이라든가 ……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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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카드의 그림은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든 아니든, 그리고 과학적인 지식이 있든 없든 우리는 마지막 깨지지 않는 크리스마스의 환영을 분명히 간직하고 있다.
 대체 마지막 남은 그 환영은 무엇인가?
 그 대답은 지극히 평범하고 진부한 것이어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남루한 말 속에 있다. 그것은 사랑이다. 어려서부터 마음을 죄며 기다리던 것들 - 은방울 소리, 함박눈, 썰매, 삼각형의 전나무 가지ㅡ 커다란 별과 칠면조, 그런 환상 속에 깊이 잠재해 있던 것은 바로 그 사랑이었던 것이다.

■ 사랑이란 말의 정의

 새삼스러운 일이라고 화내지 마시라. ‘사랑’이란 말은 너무나도 때가 묻어 있어 이제는 유행가 가사로도 쓰일 수 없는 단어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한번쯤은 그 뜻을 새롭게 새겨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에리히 프롬도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라이크’(좋아하는 것)와 ‘러브(사랑하는 것)을 혼동하고 있다. 누구나 그것을 다 같은 말로 알고 있고 또 라이크를 러브로 착각하고 있는 데 현재의 비극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라이크와 러브의 뜻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기 위해서 당신은 초등학교 때의 국어시간처럼 간단한 단문 하나를 지어보면 될 것이다. 고양이는 쥐를 라이크(좋아) 한다. 잡아먹으면 맛이 있으니까. 그런데 라이크란 말 대신 러브를 넣어보라. ‘고양이는 쥐를 러브(사랑)한다’는 괴상한 말이 되어버릴 것이다.

 좋아한다는 것은 물질적인 이익을 얻었을 때의 기쁨이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것처럼 광산업자들은 산에서 금을 캐낼 수 있기 때문에 산을 좋아한다. 그들은 산을 사랑하지는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 산의 옆구리를 뚫는다. 그러나 등산가는 산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산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땀을 흘리며, 갖은 고생과 위험을, 때로는 생명까지 걸고 산에 오른다. 광산가는 산을 ‘라이크’ 하는 자들이요. 등산가는 산을 ‘러브’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이 좋아하는 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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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에 사랑은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볼 수 있는 별처럼 아픔을 통해서만 서로 만져볼 수 있는 지고의 희열인 것이다.

■ 야위어 가는 사람과 못 자국의 상징

 그러고 보니 언젠가 경주에서 외국 관광객들이 하던 말이 생각난다. 한국의 불상은 파란 눈으로 보아도 여전히 아름다움과 자비를 나타낸 ‘기적을 돌’로 비칠 것인가? 나는 호기심을 품고 그들의 말을 몰래 엿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아니다. 무엄하게도 말이다. 금발의 한 여인은 부처님의 엉덩이 쪽을 손가락질 하면서 킬킬거리고 웃는 것이다. 그러고는 “투 패트! (야! 너무 살쪘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만 보아온 그 관광객들 눈에는 분명 부처님은 살이 쩌 있다. 엘 그레코의 그림에서 보듯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상에서 보듯이 그분은 뒤틀린 철사처럼 야위어 있다.
 피를 흘리고 있다. 아파하고 슬퍼한다. 왜냐하면 그는 ‘사랑’하고 있는 까닭이다. ‘사랑’은 자비와도 또 다른 것이다. 자비는 연민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랑은 연민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고통 속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희열만이 아니라 위험과 비탄과 어려움에 휩싸이게 된다. 그것은 편안함보다는 ’야윈‘ 모습으로 상징되는 세계이다. 거듭 말한다. 나는 기독교인이 아니다. 세례를 받은 적도 없고, 교회에서 연봇돈을 바친 적도 없다. 그러나 나는 예수님의 모습만은 분명히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분에게는 원죄의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 전체가 초상집이었던 것이다.                      

 현대인들은 편한 잠을 자기 위해서는, 불행한 이웃들을 향해서 모른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어두운 감방이나 병실에 있는 사람들의 그 얼굴을 모른다고 한다. 공장에서, 탄광에서, 바닷속 밑바닥에서 일하다가 지쳐버린 사람들을 향해서 눈을 감는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부정하고 또 부정한다.  
 이 시대의 아픔을 보면서도 슬퍼하지 않고 아파하지 않는 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당신마저 코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사랑의 의미를 가르쳐 준 그분이 이따금 예고 없이 나타나는 까닭이다. 당신의 머리맡에 나타나 야위신 손을 내밀 때, 당신은 도마처럼 그분의 아픈 못 자국을 만져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당신은 깨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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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앗의 이론

 이 지구 위에는 25만 종에 이르는 고등식물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중에서 인간이 식용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겨우 100종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영양가가 별로 없다고 해서, 맛이 없다고 해서, 그리고 독성이 있다고 해서 그냥 내버려둔 식물 가운데는 그 품종을 개량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값진 식량이 될 수 있는 식물이 많다는 것이다.
 품종 개량까지 가지 않더라도 식성을 바꾸기만 하면 금세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이 우리 주변에는 얼마든지 널려 있다.
- 감자 : 근세에 들어와서 먹기 시작
- 씀바귀, 쑥, 고사리, 냉이, 김, 미역 같은 것도 서양인들은 먹을 줄 모름.  

■ 버려진 씨앗을 찾아서

 인류를 멸망시키는 것은 핵폭탄이 아니라 기아의 폭탄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구는 하나인데 그 위에 살고 있는 인간은 나날이 팽창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혹심한 식량난이 닥쳐올 것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슬픈 산술이다.
 그래서 지금 강대국들은 핵 경쟁만이 아니라 ‘씨앗’ 경쟁에 있어서도 치열하다. 야채, 곡물, 과실의 품종 개발을 위해서는 씨앗을 수집하는 것이 절대적인 까닭이다. 미국은 100년 전부터 세계의 모든 작물의 씨앗을 모으기 시작하여 이제는 야생종을 포함하여 46만 종에 달하는 종자를 보존하고 있다고 한다. 여기에 비해 소련은 60년간 걸려서 30만 종의 씨앗을 수집해 놓고 있다는 것이다.

- 가솔린 : 초기에는 석유만이 등유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가솔린을 버리는 연구에 골몰, 그 후 가솔린 엔진이 개발되면서 상황이 반전
- 컴퓨터 시대 : 쓸모없던 반도체가 일약 스타의 자리에

 씨앗은 당장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슬기로운 농부는 씨앗을 먹지 않는다. 씨앗은 간직하는 것이고, 개량하는 것이고, 내일을 위해 뿌리는  것이다. 눈앞에 있는 것을 거두어들이기 위해서 낫부터 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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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씨를 보존하거나, 그것을 뿌리는 자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민족은, 그리고 문화는 바로 씨앗과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20만 종의 식물 가운데 인간이 먹을 수 있는 것은 100종도 안 되는 것처럼, 우리는 민족이 가지고 있는 힘을 그 100분의 1, 1000분의 1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하는 숲에서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맛이 없다고 해서, 그리고 독성이 있다고 해서 그냥 버려둔 식물 가운데는 그 씨앗을 잘 가꾸고 기르기만 하면 얼마든지 풍요한 식량으로 바꿀 수 있는 것들이 많은 것처럼, 우리는 버려진 우리 문화의 씨앗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엄살’문화의 명암

 ‘우는 아이 젖 준다’는 속담을 낳은 한국 사회에서는 ‘엄살’이 통하지 않는 경우라 해도 그것 때문에 오히려 상대방으로부터 심한 역습을 당하는 일은 아주 드물다.
 옛날 우리 선비들의 편지글을 보면, 첫줄부터가 심한 엄살로 시작되는 일이 많다. 자기 자신을 으레 ‘초야에 병들어 늙어가는 몸’이라고 표현하는 상투어가 그것이다. 초야나, 병이나, 늙음이나 다 같다. 그것은 자기가 상대방의 경쟁 상대가 되지 않는 약자임을 선언하는 백기전술이다. 그래야만 상대방에서도 안심하고 도움을 주는 것이다. 남자답지 못한 비굴한 처세인 것처럼 보인다. 엄살로 살아가려는 것은 패배주의자의 철학이요, 구걸자의 논리라고 볼 수도 있다. 엄살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국제 경쟁에서 낙오되고 식민지의 역사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관점을 한 번 바꿔 생각해보자.
 짐승들이 흰 이빨과 발톱만을 가지고 살아가는 아프리카의 밀림 속에서는 ‘엄살’이란 것이 없다. 사자에게 눈물로 호소하여 목숨을 건진 생쥐 이야기는 이솝우화에서나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표범이 사슴을 덮칠 때, 사슴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여린 목을 내미는 엄살이 아니라, 한 발짝이라도 빨리 뛸 수 있는 주력뿐이다.
 엄살이 통하지 않는 사회란 바로 이 동물의 사회, 밀림의 비정한 사회를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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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살은 측은의 정을 전제로 한 전략이니만큼 상대방이 짐승이나 목석같은 사람일 때는 아무 소용도 없는 전술이다. 엄살을 부리고 엄살을 받아주는 것은 서로가 상대를 정이 있는 ‘인간’으로 믿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엄살이 통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사회의 인간관계가 깊은 정을 기층으로 해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숲에서 늑대를 만났을 때 엄살을 부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인간의 이상사회는 엄살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엄살이 큰 힘으로 통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취될 수 있다는 역설도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 현대사회와 ‘공갈’

 ‘엄살’과 정반대 되는 것이 ‘공갈’이다. 속된 말로 겁을 주는 일이다. 남에게 약점을 드러내 동정을 얻어내는 방법과는 달리, 위협은 자기의 힘을 과시하여 상대편의 동의를 강요하는 전술이다. 그리고 엄살이 애정을 전제로 한 교섭 방법이라면 공갈은 힘을 바탕으로 한 현실주의적 공략법이다.
- 여성의 복식(服飾) : ‘엄살의 미학’을 도입,
                      섬세하고 부드럽고, 작고 앙증맞은  
- 남성의 복식(服飾) : 갑옷을 닮음, 넥타이로 목을 감추고, 단추를 잔뜩 잠그고 어깨를 높고 넓게 하는 등 공갈을 전제로 함... 
                 
 ‘엄살의 사회’였던 우리나라에서는 남성의 복식이라 하더라도 목을 드러내 놓는 것이었다. 지금도 한복을 입어보면 유난히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이 그 목이다. 그리고 바지라 할 수 있는 아랫도리에 까지도 솜을 두어 입었지만 어깨를 넓히고 힘주기 위해 그곳에만 더 많 솜을 넣거나 심지를 넣어 부풀어 보이게 하지는 않았다. 우리의 한복은 남성 것이라 해도 결코 공격적인 상징성을 담고 있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성처럼 금시 터질 것 같은 긴 옷고름을 드리우고 다닌 것은 ‘엄살’ 쪽이지 ‘겁주는 쪽’은 아닌 것 같다.
 몇 년 전만 해도 버스나 공공장소에서 껌이나 연필을 들고 사달라고 조르는 구걸 상인들은 ‘엄살방법’을 썼다. 그러나 요즘엔 그런 비극의 주인공 들은 찾아볼  수 없다.
 요즘엔 그 엄살이 공갈로 바뀌었다. ‘전과 몇 범’으로 시작되어 ‘방금 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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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에서 나왔다’는 대사로, 어디서 비수가 번뜩이고 있는 것 같은 협박의 수사학이요, 제스처다.    
 ‘엄살’로 살아가는 사회는 결코 행복한 사회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공갈’로 살아가는 사회는 더욱 불행한 사회인 것이다.

■ ‘덤의 심리학’과 사회학

 ‘엄살’과 마찬가지로 ‘덤’이라는 말도 썩 좋은 뜻으로 쓰이진 않는다. 그러나 이 말도 한국인의 상거래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토착어의 하나다.
 옛날에는 누구나 다 같은 경험을 했겠지만, 그것은 엿을 살 때였다. 엿장수는 으레 가위 소리를 울리고 마을 골목에 나타난다. 조금은 청승맞기도 한 가위 소리에 동네 아이들은 마음이 들떠 코 묻은 돈을 꺼내들고 엿목판으로 달려온다. 그런데 그 엿을 사  먹는 재미는 엿 맛 자체보다는 ‘덤’을 받는 그 재미요, 맛이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빈병이든 넝마든, 10원짜리 동전이든 엿장수는 눈대중으로 엿을 끌 같은 쇠붙이로 잘라낸다 그러나 거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옛다”하고 엿을 건네주어도 아이는 그냥 제자리에 있다. 저울로 달아 파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엿장수 맘대로 잘라준 것이지만 아이는 말이 없어도 ‘덤’을 기다린다. 엿장수는 엿목판에서 다시 엿을 떼어낸다. “옛다. 덤 받아라!” 그러고서야 아이는  싱긋이 웃고 입 안에 엿을 쑤셔 넣는다.

 덤 받는 것이 생리화한 아이들은 어른이 되고 사회에 나가도 여전히 그 ‘덤’의 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여기서 이른바 ‘고봉’ 문화란 것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되나 말은 엄격한 도량형기다. 양을 정확하게 재기 위해서 만든 것인데도 옛날 한국 사람들이 되질을 하고 말질을 하는 것을 보면 으레 고봉으로 담았던 것이다. 눈금 하나를 따지는 상인의 풍속에서도 한국의 되질, 말질은 넉넉한 고봉이 아니면 거래가 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덤을 주고 받는 것이 우리의 상거래였던 것이다.

 남녀의 사랑도, 친구의 우정도, 이웃과 이웃의 만남도 그것은 저울을 사이에 둔 상가의 거래가 되고 있다. 그 싸늘한 거래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째서 우리 선조들은 사고파는 거래까지도 덤을 주고받는 여운을 가지려 했는지 짐작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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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질을 깎아 하지 않고 고봉으로 담았던 것은 물질 위에, 상거래 위에 정을 담아 주었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 냉엄한 상술 속에도 덤을 통해 정을 나누는 인간주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덤은 물질의 탐욕이 아니라 오히려 ‘물질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인정주의의 산물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러니까 ‘덤’이란 말 옆에는 인정적 여운을 나타나내는 말, ‘섭섭한 것’, ‘아쉬운 것’, ‘서운한 것’의 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로봇이 할 수 없는 인간능력

 지금까지 존경을 받았고 또 이상적으로 생각해 온 인간형(특히 서구 사회에 있어서)은 컴퓨터와 로봇 같은 기능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계가 대신하는 시대가 오면, 정반대로 이제는 컴퓨터와 로봇이 할 수 없는 일, 그것들로는 대신할 수 없는 특성이  중요한 대두될 것은 빤한 일이다.
 ‘합리적 인간’이 지금까지 줄곧 인간의 아랫목을 차지해 왔지만, 합리적으로 치면 기계 쪽이 그보다 월등하다. 기계가 갖고 있지 않은 것, 컴퓨터가 계산해 낼 수 없고 로봇이 대신해줄 수 없는 것은 ‘정(情)’이다.
 ‘엄살’이니 ‘덤’이니 하는 말로 부정되어 왔던 한국인의 인간관계, 인정을 중시한 그 인간가치가 21세기에 이르면 가장 소중한 것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기억력보다는 창의력을 가진 사람, 신바람 같은 생의 활력을 지닌 사람이 존경을 받는 시대가 올 것이다. 기능으로 사람을 평가하던 메카니즘의 문화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다.

 앞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것은 공리적인 기능만이 아니라, ‘춤’과 ‘음악’처럼 생을 표현하는 즐거움과 그 엑스터시(ecstasy, 감정이 고조되어 자기 자신을 잊고 도취상태가 되는 현상)의 힘이다. 작은 예로 ‘엄살’과 ‘덤’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우리가 지금까지 버려두었던 것 - 지금까지 부정적인 것으로 내버려두었던 민족의 한 씨앗들 그 가운데에는 내일의 풍요한 자산이 깃들어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을 가꾸고 개량하고 응용하면, 잡초라고 버려두었던 식물에서 맛있는 과일을 딸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피와 살을 가꾸는 식량을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단순한 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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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론이 아니라, 컴퓨터와 로봇이 대신할 수 없는 인간의 신명과 그 인정이 인간의 가치로 존경받게 될 날이 반드시 오리라고 믿는다.
 ‘똑똑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 ‘잘난 사람’ 들에 눌려 지냈던 사람들이, 무엇이 참된 인간의 삶인가를 가르쳐주는 시대가 올 것이다.

◈ 일과 놀이의 문화

 나는 비행기를 탈 때마다 그 신속성보다는 오히려 그 공간성에 대해 놀라게 된다. 비행기 속을 둘러보면 한 구석도 무용한 공간이라고는 없다. 천장은 선반으로 이용되고, 의자 밑은 구명대를 넣어두는 수납고로, 의자의 등은 식탁이 되고 팔걸이는 담배 재떨이와 라디오의 다이얼이 달려 있는 다목적 테이블이 된다. 최소의 공간에 최대의 기능을 담고 있는 비행기의 공간이야말로 인간 공학의 빛나는 승리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비행기의 화장실을 보면 우주선과 같은 캡슐 문화의 본보기다. 비행기 속의 공간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의 내일을 점칠 수 있는 상징적인 공간인 것이다.

■ 놀이의 공간이 희생된 불모의 공간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숨바꼭질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 공간에는 숨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옛날의 시골집과 같은 어수룩한 공간, 장독대라든가 뒤꼍이나 헛간이라든가 마루 밑이나 다락 구석이라든가 하는 방치된 공간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무용하게 버려진 공간, 그리고 의외성을 지닌 비합리의 공간이 있을 때만이 그곳에서 아이들이 숨을 곳을 발견할 수 있고 숨바꼭질 놀이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무용한 공간에서 무용한 사물과 만나는 것, 거기서 진짜 놀이가 생겨난다. 누웠다가 일어나는 자리, 밥 먹는 자리, 옷을 벗고 입고 양치질을 하고 공부를 하는 그 생활의 자리, 그런 일상의 자리로부터 자기의 몸을 감출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을 찾아낸다는 것은 신대륙을 찾아 떠나는 콜럼부스의 놀라운 힘과도 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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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아무것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빈 공간이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키는 더 자라날 수 있고, 두 다리는 커질 수 있는 것이다.
 아파트만이 그것을 상실해 간다는 것은 아니다. 도시 전체가, 세계 전체가 그 놀이의 공간을 상실하고 있다. 길을 보라 옛날의 길은 그 자체가 일종의 놀이 공간이라 할 수 있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 유연한 곡선을 그려가며 꾸불꾸불 뻗어가고 있는 길은 직선적인 기능을 거부한 놀이의 공간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고속도로는 기능주의의 길이다. 도로 표지판에는 속도 표시와 거리를 나타내는 숫자만이 적혀 있다. 오로지 목표만을 향해서 최단거리로 달려가라고 외친다. 기능주의 외에는 일체의 다른 목적이 허락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고속도로는 넓은 길이지만, 그것은 시골이 오솔길보다도 더 좁은 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인다!”라고 소리치면서 놀던 아이들의 숨바꼭질의 노랫소리가 사라져가고 있다. 집 안에서, 도시에서, 모든 문화의 책갈피 속에서 숨바꼭질의 노랫소리가 들려오지 않는 이 문명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점보제트기의 갭슐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 현대산업문명에의 새로운 도전

 하루가 밤과 낮으로 갈라져 있듯이, 인간의 행동은 ‘일’과 ‘놀이’로 대립되어 있다. ‘일’은 채찍을 들고 시켜도 잘 하지 않는 타율적인 행동이고, ‘놀이’는 담을 쌓아놓고 막아도 누구나 열을 올리게 되는 자율적인 행위다. 그러나 옛날에는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이 그렇게 분명한 구별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흑인 노예들은 목화를 따면서, 무거운 수레를 끌면서도 노래를 불렀다. 우리의 옛 조상들도 모내기, 타작 등의 일터에서 노래를 불렀다. 민요들은 대부분 이렇게 일터에서 생겨난  것이다. 아무리 고되고 지루한 ‘일’이라 해도, 옛날에는 그렇게 ‘일’과 ‘노래’가 공존했던 것이다. ‘노래’는 ‘놀다’와 같은 어간(語幹)을 가지고 있는 말이므로 노래하면서 ‘일’한다는 것은  곧 ‘놀면서 일한다’는 뜻이기도 한 것이다. ‘노는 것’과 ‘일하는 것’은 대립개념이라기보다는 상보적인 관계의 것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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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경시대의 사람들이 일을 한다는 것은 하늘과 땅과 사람의 세 힘을 협화시키는 크나큰 합창이었던 것이다. 수동적인 일이 아니다. 농사를 짓는 것은 마치 신이 우주를 창조하는 것과 닮은 데가 있다. 한 톨의 곡식 속에는 작은 우주가 잠들어 있는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옛날부터 농사를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이라고 불렀고, 고대의 인도인들은 우주를 농사일과도 같은 ‘리라’라고 불렀던 것이다. ‘리라’라는 말은 창조자의 놀이를 뜻하는 것으로 창조자에게 있어서는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현대인의 괴로운 하루는 일과 놀이가 극단적인 대립을 이루고 갈라선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일터에서 노래가 사라지면서부터 일에 대한 애정과 기쁨도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았다. 기계는 확실히 인간의 노동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지만, 그 마음을 기쁘게 해주지는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일에서 분리된 ‘놀이’역시도 진정한 삶의 기쁨을 주지는 못한다. 현대인에겐 단지 ‘일하는 공장’과 ‘노는 공장(오락장)’만이 허락돼 있을 뿐이다.

 유목 전통이 강한 서양인들은 양에서 털을 뽑아냈고, 농경 전통이 짙은 동양인들은 목화에서 털을 뽑아냈다. 동물과 식물의 차이는 있어도 그것은 다 같이 살아 있는 생명으로부터 얻어지는 재산들이었다. 그것들은 자라나는 과정이 있고, 피고 지는 생명의 리듬이 있기에 과정이라는 것과 애정이라는 것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동양이고 서양이고 죽은 무기물에서 합성 섬유의 ‘털’을 뽑아낸다. 목장이나 농장에서가 아니라 공장에서 말이다. 거기에는 이미 생명의 리듬이나 과정이 없기 때문에 노래가 생겨날 수가 없다. ‘놀이’의 요소는 티끌만큼도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농장까지도 공장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집단농장이라는 것이다. 획일적인 농사일에는 농사를 짓는 그 기쁨이나 애정이 소멸되어 버리기 때문에 생산성이 저하되고 만다. 소련은 전 농토가 집단 농장으로 되어 있고 1% 정도만이 사경(私耕) 농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곡물 전 생산량의 30%가 이 1%의 사경농에서 생겨난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농산물은 공산품과는 달리 ‘애정을 가진 노동’, ‘놀이를 지닌 작업’에서만 가능하다는 증거다. ‘일’과 ‘놀이’를 하나가 되게 하는 것, 그 간극을 좁혀 가는 것, 이것이 현대산업문명에의 새로운 도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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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돌문화 속의 개성

 하늘이 만든 것에는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굽이쳐 흐르는 강의 곡선이 그렇고 솟구쳐 오른 산봉우리의 능선이 그렇다. 수천 번 수만 번 쳐다봐도 하늘의 구름 모양은 제각기 다르다.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 하나를 놓고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이 세상에는  그 많은 돌이 있어도 하나같이 그 형태와 빛깔은 다르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돌은 그렇지 않다. 일정한 틀 속에서 찍혀 나오는 벽돌들은 수천수만 개라 할지라도 그 모양과 규격이 하나같이 똑같다. ‘문명의 돌’은 ‘자연의 돌’과는 정반대로 규격이 맞지 않으면 그 존재의 의미를 박탈당하고 만다. 말하자면 ‘불량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 하나밖에 없는  존재의 돌

 그것은 얼마나 극단적인 대립의 세계인가? 당신이 만약 길거리에서 똑같이 생긴 쌍둥이를 만나게 되면 놀라워할 것이다.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자연은 그리고 생명적인 것들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정상적인 것이므로 오히려 똑같은 것을 보면 기이하고 불안한 느낌이 들게 되는 것이다.
 자기의 진정한 이름은 호적부에 등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남과 다른 얼굴, 남과 구별되는 목소리 남과 대조되는 개성과 그 영혼 속에 길이길이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수십억의 인간 가운데 나의 진정한 이름은 하나뿐인 것이고, 그것은 지문 같은 유일한 생명의 무늬에 의해서 호명될 수 있는 것이다.
- 범인들은 자신의 존재를 지우기 위해, 변장하고 지문을 남기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성문(聲紋), 타액 등에도 자신의 부호가 찍혀져 있다.
- 산소용접기 같은 도구로 철판을 자르는 작업에서도 장인의 개성이 나타나고, 필적에도 흔적이 남는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얼굴이며 그 영혼이다. 그러므로 범죄의 어두운 세계와는 달리 그 하나뿐인 영혼을 대담하게 고백하고 증명하고 자기 존재를 그 밝은 우주를 향해 열어 보이는 창조의 행위가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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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예술의 세계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범죄자는 자기 지문을 말소하려고 고민하는 자요, 예술가는 자기 지문을 드러내려고 애쓰는 자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지문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죽을 때까지 바뀌지 않는다.     

 ‘문명의 돌’ 벽돌로 담을 쌓는 이 시대는 지문의 이미지 하나만을 놓고 보더라도 ‘창조자의 세계’ 보다는 ‘범죄자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같은 규격, 같은 색채, 같은 형태를 요구하는 벽돌문화, 천 개 만 개가 있어도 결국은 하나의 돌로 요약되고 마는 벽돌문화, 벽돌을 쌓는데 있어서는 조금이라도 치수가 다르거나 형태가 다른 벽돌이 섞이게 되면 그 전체의 질서가 파괴되고 만다. 이 ‘문명의 돌’로 이룩된 세계에서 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곧 ‘세계의 범죄자’로서 살아간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다.

■ 붓은 어떻게 죽어갔는가

 옛날 사람들은 붓으로 글씨를 썼다. 그 보드라운 모필 끝에서 묵향과 함께 하나씩 태어나는 글씨들은 작은 풀잎, 작은 꽃잎과도 같다. 잘 쓴 글씨든 못 쓴 글씨든 붓으로 쓴 글씨에서는 생명의 흐름을 읽을 수가 있다. 그것은 글씨를 쓰고 있는 사람의 지문이나 다를 것이 없다. 붓은 끝이 부드럽기 때문에 쓰는 사람의 영혼을, 의지를 그리고 그 생명적인 리듬을 글씨의 한 획마다 옮겨 놓을 수가 있는 것이다.

 붓글씨와 가장 대극적인 글씨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벽돌처럼 찍혀 나오는 글씨, 기하학적인 직선과 일정한 규격을 갖춘 그 인쇄활자일 것이다. 사람의 손과 얼굴이 자취를 감추어버린 글씨다. 더 이상 거기에서는 ‘쓴다’는 의미를 찾아낼 수가 없다. 죽어버린 글씨다.
 ‘쓰는 행위’가 ‘찍는 행위’로 바뀌는 데서 활자문명은 시작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서도(書道)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그러나 그 ‘쓴다’는 행위가 한 순간 속에 자신의 모든 생명을 쏟아 붓는 것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추사(秋史)의 서론을 보아도 그렇다. ‘글씨는 붓에서 이루어지고 붓은 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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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으로 움직여지고 손가락은 손목으로 움직여지고, 팔뚝, 어깨, 몸통 등 ……’ 그러니까 추사는 온몸으로, 온 영혼으로 붓을 잡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한 나무가 이파리와 꽃을 피우기 위해서 대지에 그 뿌리를 튼튼히 박고 있는 것처럼, 추사의 글씨 속에서 피어나는 그 이파리와 꽃잎은 손끝이 아니라 땅을 디디고 있는 발가락의 뿌리로부터 솟아난 것이다.

 볼펜은 본래 ‘볼 포인트 펜’이라고 불렸다. 약 100년 전 미국의 라우드가 발명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오늘날처럼 널리 보급된 것은 헝가리의 신문기자 비로가 그것을 개혁하고 난(1941) 2차 대전 후 부터의 일이라고 한다. 볼펜으로 글씨를 써 보라. 그리고 붓글씨와 비교해 보라. 펜촉 대신 작고 둥근 볼이 저절로 굴러가면서 미끄러지듯이 쓰이는 볼펜 - 오직 빨리 쓸 수 있다는 기능밖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잇지 않는 볼펜 - 정확하게 말해서 그것은 ‘쓴다’기 보다는 ‘굴린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지 모른다. 볼펜은 생명의 불량도체(不良導體)인 것이다. 붓이 펜이 되고 연필이 되고 그것이 볼펜으로 바뀌어 갔다는 것은 사회의 문화가 벽돌장으로 화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 의미하는 것이다.

 이제는 볼펜도 사라져 갈 것이다. 전자 타이프라이터가, 컴퓨터의 워드프로세스가 추사의 공간을 메울 것이다. 글씨는 단지 의미만을 쌓아가는 벽돌장 같은 기능만 가지고 있으면 된다. 복사 시대의 문화 속에서 글씨를 쓴다는 것은 벽돌을 쌓는 일과 근본적으로 다를 것이 없다. 글씨가 담고 있는 의미공간에 생명의 달무리 같은 것, 인격의 아지랑이 같은 것을 느끼던 시대는 붓의 문화와 함께 종언해 버린 것이다.

■ 도구적 존재와 사물적 존재

 벽돌은 뚜렷한 한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벽을 쌓기 위해서 거기 그렇게 있는 것이다. 용도가 분명하고 기능이 뚜렷한 것이기 때문에 그 투명한 의미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주저하거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자연 속의 돌멩이는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돌멩이를 들어서 못을 박는 망치로 사용할 수도 있고, 혹은 다윗처럼 그것을 던져 적을 쓰러뜨리는 무기로 사용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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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은 여전히 하나의 돌일 뿐이다. 그것이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일 수 있다는 자체가 돌에게는 정해진 하나의 기능과 목적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나의 의미로 설명될 수 없기에 돌멩이는 도구보다 자유롭고 완전한 것이다.
 도구는, 그리고 모든 기계는 오직 한 가지 일만을 하기 위해서 거기 그렇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돌멩이를 주워 화단에 올려놓을 수도 있고, 김장독을 눌러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돌멩이의 의미는 영도(零度)다.

 기능을 요구하는 시대의 인간은 온전한 인격적인 존재로서 대접받는 것이 아니라 어떤 하나의 목적과 그것을 달성하는 기능에 의해서 등급이 매겨진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공장에 가거나 회사로 출근하면 도구적 존재, 이를테면 한 장의 벽돌이 되고 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터에서 벗어나면 술을 마시거나 유흥장을 기웃거리거나 어두운 골목길에서 서성대고 있다. 자신의 자아와 만나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도구처럼 일할 때에는 어느 한 구석에 숨어 있던 내가 오후 6시나 7시가 되면 흰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 짐승처럼 숨쉬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우주에 단 하나밖에 없는 ‘나’, 타자에 의해서는 절대로 대체 불가능한 ‘나’, 피를 나눈 형제로도 마음을 함께하는 연인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나의 그 영혼, 그것을 주체할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구로서의 ‘나’를 그대로 연장 시켜가려고 하는 것이다.

자아가 돌아오는 시간을 오락이나 마취로 그냥 죽여버리지 말라. 벽돌 문화 익명의 사회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회복하는 길은 붓글씨를 쓰듯이 그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활자글씨는 단지 의미를 운반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지만, 서도의 글씨는 의미만을 적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자신의 독자적인 생과 그 존재의 또 다른 의미를 각인시켜 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우주의 유일자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장작 하나를 패도 그 도끼 소리에 자신의 영혼을 담은 음악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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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젓가락 문화

 부끄러운 이야기를 좀 쓸까 한다.
 나는 50년 가까이 매일같이 그것도 거의 하루에 세 번씩 식사를 해 왔는데도 아직 젓가락질이 서툴다. 더욱 창피한 것은 내 젓가락질이 매우 어설프고 변칙적인 것이라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냈다는 점이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언젠가 미국을 여행하던 중 어느 작은 도시의 중국 식당에서 여섯 살 자리 아들에게 젓가락질을 가르치는 미국인 가족을 만났을 때이다.
 그때 내가, 그러니까 젓가락 문화권에서 온 구세주가 나타난 셈이 되었다. 그들은 염치 불구하고 나에게 젓가락을 내놓고 시범을 보여 달라고 했다.
 난생 처음 서양 요리를 먹게 되었을 때 포크와 나이프를 쥐고 죄 지은 사람처럼 주눅이 들어 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제야 앙갚음을 할 때가 왔구나! 나는 의기양양하게 젓가락을 들고 시범을 보이려고 했지만, 그 순간 내 젓가락질이 본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서양에서 발견한 젓가락의 의미

 웃지 마시기를, 변명이 아니라 나는 막내로 태어난 특권 때문에 엄격한 유교가정이었으면서도, 오랫동안 응석받이로 자랐다. 그 때문에 어른들은 잘못 놀리는 내 젓가락질을 끝내 바로잡아주질 못했던 것이다. 잘못 잡은 젓가락질이 버릇이 되고 굳어버린 채로 나이를 먹었기 때문에, 막내둥이가 아니라도 이제는 그것을 바로잡아 줄 사람조차도 없게 된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만날 때마다 그들은 한국에 대해서, 동양에 대해서 묻는다. 그러나 그에 대한 내 대답은 바로 내 젓가락질처럼 어설프다. 동양 사람도 서양 사람도 아닌 어중간한 회색의 문명인이다. 죽어라 하고 머리를 싸매고 평생을 배워온 것이 서양공부다. 그래서 그들이 젓가락질을 가르쳐달라고 할 때 당황했듯이 그들의 질문을 받고 얼굴을 붉혔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요즈음 초등학교 아이들 가운데는 젓가락질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수가 8할이 넘는다고 한다. 그 아이들은 내가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모두가 막내둥이로 자라고 있는 까닭이다. 그리고 부모들은  그 응석을 그대로 받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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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기 때문이다. 어디 젓가락질뿐인가? 위에서 내려오는 문화의 전통은 부모에 의해서 아이들에게 전수되는 법ㅂ이다.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몸에 베어버린다. 말하자면 젓가락질과도 같은 것이다. 태어난 아이들이 어머니의 젖을 빠는 것은 본능이지만  젓가락질은 배우는 문화요 교육이다. 그런데 젓가락질을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늘어간다는 것은 그만큼 전통의 뿌리가 약해져 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것은 젓가락을 바로 잡아주는 어른이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어른이 없는 집안이요. 어른이 없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곧 규범이 사라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 발톱의 문화와 부리의 문화                 

 젓가락에는 동양문화의 상징이, 포크에는 서양문화의 특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개화기의 한국인이 포크로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쇠스랑으로 밥을 먹는 놈들이라고 비웃었다.
 롤랑 바르트는 서양 사람들이 사용하는 포크가 본질적으로는 동물의 ‘발톱’과 다름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포크와 나이프는 고기를 찢기 위해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에는 커다란 고깃덩어리가 직접 식탁에 오른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에게 있어서 먹는다는 것은 ‘찢어발긴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을 때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동양인의 젓가락은 무엇일까? 그것은 결코 찢기 위해 있는 것은 아니다. 젓가락질은 ‘찢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쪼는’ 것이다. 그래서 롤랑 바르트는 동양인이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 새가 모이를 쪼아 먹는 것 같다고 말했던 것이다. 젓가락은 그러니까, 새에 있어서의 ‘부리’와 같은 존재라는 이야기다.
 젓가락 문화권의 음식들, 한국, 중국, 일본의 요리는 제각기 모두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젓가락으로 집어 먹을 수 있는 작은 ‘덩어리’들로 되어 잇다는 점이다.

포크 문화는 그만큼 공격적인 데가 있고 젓가락 문화는 또 그만큼 수동적인 데가 있는 것 같다. 우리의 음식은 무엇이든 한 입에 들어갈 수 있도록 미리 잘게 쪼개져 있다. 젓가락으로 집을 수 있는 양, 그것이 입 안에 넣을 수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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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가장 이상적인 양이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숟가락이나 젓가락은 음식의 양을 다는 저울이기도 하다.
 만약에 경우 서양의 요리사가 친절을 다해서 손님이 먹기 좋도록 비프스테이크를 미리 잘게 썰어왔다고 가정하자. 손님들은 자기의 특권이라도 침해당한 것처럼 화를 낼 것이다. 입 안에 넣는 크기는 남이 정해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정하는 것, 자기가 선택한다는 것, 그것이 서구의 자아이기도 하다. 그것이 서구의 ‘자유정신’이기도 하다.
 젓가락 문화권에 있어서는 개인이란 것이 그렇게 확실한 울타리를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타자와 조금씩 얽혀 있어서 어디까지가 ‘나’이고 어디까지가 ‘너’인지 그 관계가 불확실하다.
 이 얽키고설키는 타자와의 관계는 싸늘한 자아가 아니라 따뜻한 ‘정’으로 뭉친 문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한국인이 술자리에서 무엇인가를 주문할 때 보면 맥주는 으레 ‘한 두어서너 병’ 안주는 ‘알아서’가져 오라고 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한 두어 서넛’은 ‘하나 둘 셋 넷’의 준말이니 그 숫자의 폭이 이만 저만 큰 것이 아니다. 자기가 막을 것을, 이를테면 가장 원초적인 식사의 선택권을 ‘타자’에게 내맡기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 업는 것과 포옹하는 것

 우리는 애를 업어 기른다. 업고 업히는 이 인간관계는 성장한 뒤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업어준다는 것은 내가 남을 완전히 떠맡는다는 것이고 업힌다는 것은 남에게 완전히 내맡긴다는 것이다. 이 ‘업고 업히는 관계’에 의해서 얽히고설킨 것이 젓가락 문화권의 인간관계라고 할 수 있다.
 효(孝)를 뜻하는 한자를 자세히 뜯어보라. 그것은 아들(子)이 늙으신(老)어버이를 업고 있는 형상을 나타낸 상형(象形)이다. 그러니까 가르칠 교(敎) 역시 남을 업는 법, 효도하는 법을 가르친다는 데서 생겨난 글자인 것이다. 서양  사람들의 풍습에는 ‘업고 업히는 것’이 없다. 그들의 인간관계는 포옹속에 상징된다.

 문학작품 ‘메밀꽃 필 무렵’이 바로 업어주는 문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동이가 허생원을 자기 아버지인 줄 모르면서 등에 업고 냇물을 건너는 그 아름다운 장면 말이다. 허생원은 냇물에 빠져 옷이 흠뻑 젖었기 때문에 거의 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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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을 대는 것처럼 동이의 따듯한 체온을 느낀다.
 춘향전을 봐도 이도령과 춘향의 만남은 포옹이 아니라 ‘업어주기’ 놀이로부터 시작되고 있지 않은가? 김유정의 ‘만부방’에도 형이 아우를 업고 가는 장면이 보인다. 
같은 젓가락 문화권에 있는 일본문학에서도 ‘업는 장면’은 감동적인 정경으로 자주 등장한다. 이시가와 다꾸보꾸라는 시인은 ‘내 장난삼아 어머니를 업다가, 그 가벼우신 몸에 세 발짝도 떼지 못하였노라!’라는 단시를 읊은 적이 있다.

 포옹의 문화는 상대방의 몸무게를 느낄 수가 없다. 수평적인 인간관계이기 때문이다. 포옹은 누가 누구를 일방적으로 끌어안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대등하게 접촉해서 결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업는 문화는 업고 업히는 수직적인 관계이므로 주는 쪽과 받는 쪽의 상하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결합이다. 어려서는 어머니에게 업혔고, 커서는 어머니를 업는다. 우리는 사람을 보면 우선 내가 업어주어야 할 사람인가. 혹은 내가 업혀야 될 사람인가를 가늠한다.

■ 종합의 시대와 총체적 문화

 포크와 나이프는 찢기 위해서 있다. 쇠고기의 덩어리를 찢고 들판과 강물과 숲을 찢는다. 성과 성은, 도시와 도시를 그리고 마음을 찢어 분할한다. 이제는 하늘의 별을 찢는다. 포크를 든 손이 우주를 향해 있는 시대 - 은하수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칼질을 한다. 벌써 그것은 생활 속으로 들어오고 있다. 있지도 않은 화성인을 가정해 놓고 우주전쟁의 영화와 만화를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옛날에는 별들이 지상의 생명과 결합되어 있어 사람이 죽으면 하늘의 별로 사라진다고 했다. 그러나 별 하나 나 하나의 노래가 아니라 ‘스타워즈’의 노래가 흘러나온다.
 과장된 표현이라고 비웃지 말라. 서양문화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된 현대문명은 한 덩어리였던 자연과 인간의 영혼을 잘게잘게 찢는 데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해도  좋은 것이다. 가족이 찢기어 핵가족이 되고, 원자가 찢기어 핵무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번쩍이는 이 거대한 포크와 나이프 대신 두 젓가락, 그것도 은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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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라 나무로 깎아 만든 젓가락을 생각해보라. 젓가락은 한 개만으로는 아무 구실도 못한다. 짝을 이루었을 때만이 제 몫을 한다.

 젓가락 문화는 갈라서 있는 것,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짝지어주는 문화다.
 부/자라든가, 부/부라든가, 형/제라든가, 그리고 주/객이라든가. 그래서 우리 주변에서는 한 쌍의 관계를 하나의 낱말로 나타내는 것들이 많지 않은가?
 포크와 나이프는 찢는 데는 편리하나 자잘한 덩어리를 뭉쳐서 집는 데는 불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젓가락은 찢기에는 거북해도 자잘한 것을 함께 합쳐서 집는 데는 여간 편리한 것이 아니다.
 근대의 자아라는 것은 너와 나를 쪼개는 데서부터 싹튼 것이지만 앞으로 올 시대는 외로운 자아가 타자와 융합하는 실존적 고통위에서 열리게 될 것이다.

 분석의 끝에는 종합이 온다. 지금까지는 분석의 시대였고, 찢는 힘의 문화였지만, 이제는 그것을 하나로 뭉쳐가는 종합의 시대가 올 것이다. 총체적 문화가 싹트고 있다.
 우습지 않은가? 우리는 그동안 서구문명을 몸에 익혀왔기 때문에 의자에 앉아 먹으나 방바닥에 앉아서 먹으나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서양 사람들을 맨바닥의 상에 앉혀 놓으면 진땀을 흘린다.
 종합의 시대, 정말 세계가 한 마을이 되어버리는 그 글로벌 피플의 가능성은 우리 쪽에 더 많은 것이다. 포크와 나이프를 버리라는 시대착오자의 넋두리가 아니라, 우리의 손에, 분명히 그것도 정식으로 젓가락이 들려 있을 때 포크와 나이프의 의미도 도한 그 존재 이유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내 것을 알고 가르치는 것이 남의 것을 몰아내고, 담을 쌓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찢는 문화’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동양과 서양의 문화까지도 찢지 않고 행복한 짝을 만들어 완성시키는 것, 그것이 젓가락 문화의 마지막 장에 있는 과제일는지도 모른다.

◈ 우리를 지켜주는 집

가부장제가 여권 신장에 방해가 된다고 보기보다 그것을 장점을 어떻게 살려나가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주위에선 남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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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이 잘못 인식되어 집안에 주인이 사라져 버리는 경향이 많다. 나는 가부장제를 무작정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가정에는 누구인가 그 집단을 이끌어가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민주적인 의견이라 할지라도 가족들의 의사를 통합하고 그 가족을 이끌어갈 수 있다. 무조건 가부장제가 나쁜 것이니까 남자들의 독재로부터 벗어나자 하는 데는 좀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가부장이 아니라 가모장(家母長), 곧 모계사회 모권사회로 돌아가도 좋다는 것이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가족의 장이 아닌 무정부 상태가 되었을 때가 문제인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다 학교에서 어머니 이름을 써내라 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써낸 어머니의 이름이 박성녀, 김성녀 이성녀 였다. 선생님이 “야, 어떻게 너희들 어머니 이름이 전부 성녀냐?” 했었는데, 사실 성녀는 이름이 아니었다. 박성녀는 박씨 성을 가진 여자라는 박성녀(朴姓女)인 것이지 이름이 아니다. 여자들은 이름이 없어도 아무개 딸, 아무개 어머니, 아무개 부인으로 호칭되었다. 사실 여자들은 이름이 있어도 제대로 불릴 기회가 없었다.

 요즘은 남자들이 오히려 가정에서 기가 죽은 것 같다. 남자들은 전쟁을 치르고 회사에 가면 사장한테 야단맞고 버스타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한다. 어디 가서 남자들이 큰 소리 한 번 쳐보겠는가. 그러니까 집에 와서 모처럼 한 번 어린애들 앞에서 뻐겨보는 것인데, 내 생각에는 사실 가정이 올바로 되려면 남자들의 숫기를 되찾아야 한다. 남자가 남자 됨을 다시 깨우쳐야 된다. 그래야 가정이란 소집단에 중심축이 생긴다.
 그런데 요즘은 어린애들 앞에서 어머니들이 ‘아무개 아버지는 어떻다는데 당신은 왜 요모양이요’하는 식으로 면박을 주기 일쑤다. 그렇게 되면 어렸을 때부터 아이들이 아버지 알기를 우습게 알게 된다.
 옛날에 아이들 야단칠 때면 “너 아버지한테 일러준다”그랬는데 지금은 “너 엄마 오면 혼나!”한다 이래 가지고는 아이들이 성장해서 우리 아버지처럼 되겠다 하는 꿈을 가질 수가 없게 된다.

 세 살 이전부터 어린애들한테 되는 것과 안 되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그것을 소홀히 했을 때 아이들이 커서 사회에 나와 적응을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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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이다. 사회는 질서 속에서 이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권을 신장하는 것이 남자의 기를 죽이고, 가부장제가 몰락하고, 아버지 부재의 가족을 만드는 것이라면 여성을 위해서도, 어머니를 위해서도 불행한 일이다.       

 부권이 약화되고 아무리 과학기술이 발달했어도, 그리고 시험관 아이가 태어날 수는 있어도, 남자와 여자가 아무리 평등해진다고 해도 아이를 분만하는 기능을 남자가 대신해 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성구분의 마지막 의미는 무엇일까? 아이 앞에서 아버지가 어머니 구실을 대신할 수 없고 어머니가 아버지 구실을 대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같은 어머니, 어머니 같은 아버지가 있음으로써 점점 우리의 가정이 그 질과 성격에서 달라지고 있다는 것은, 한번 쯤 생각하고 짚고 넘어가야 할 우리의 숙제가 아닌가 생각한다.

◈ 달빛의 문화

 내가 어렸을 때엔 명절 때 세배를 다니면 반드시 배탈이 났다. 윗집에서 먹었는데 아랫집에서 또 먹으라고 준다.
 ‘저 사람이 이씨네 박씨네 다 돌아왔을 테니 배가 부를거야. 그러니 우리 집에서는 그냥 보내야지.’
 이치를 따지자면 그러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데도, 세배만 가면 어느 집에서나 떡국을 내놓고 먹으라고 한다.
 그런데 권하는 사람도 문제가 있지만 받는 쪽도 “아, 배가 불러 절대로 못 먹겠습니다”하고 딱 잘라 거절하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저렇게 권하는데 내가 안 먹으면 얼마나 섭섭하겠는가’ 해서 배가 잔뜩 부른데도 또 먹는다. 그러니 배탈이 안 날 수 있겠는가?
 여기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내가 어렸을 때 아는 집에 놀러가 신을 벗고 방에 들어갔다가 나오려고 하면 신발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이 정이 넘쳐나기 때문에 상대방이 바쁜지 시간이 많은지 따지지 않고 되도록 오래 붙들어 대접을 해야 했다. 사양하고 간대도 붙잡아두자, 그러기 위해서는 신발을 감추자, 그래서 신발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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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사람들은 남의 집을 방문했을 때 신발을 벗고 올라서서는 나갈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지금도 일본에 가 보면 한국 사람이 왔는지 안 왔는지 현관의 신발만 보아도 알 수 있다고 한다. 다른 신발은 전부 나가는 방향으로 놓여 있는데, 들어간 채로 벗어 놓은 신발이 있다면 그것은 한국 사람의 것이기 때문이다.
 흔히 정이란 등덩굴처럼 한 번 얽히기 시작하면 풀 수가 없다. 한 번 정이 얼크러지면 잘한 건지 못한 건지, 줄게 있는 건지 받을 게 있는 건지 속수무책이 되어 현대적인 합리주의 속에서 살아가자면 힘이 든다.
 우리 아이들은 너무 많은 정 속에서 컸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서양 아이들은 정이 메마른 불모지대에서 컸다고 볼 수 있다. 서양에선 어린애를 키우는 데 반드시 취침 시간이 있어서, 꼭 그 시간에 자야만 한다. 어린애도 제 방이 따로 있어서 ‘잠잘 시간이다’하면 아무리 텔레비전에서 재미난 걸 해도, 그날 집안에 무슨 파티가 있어도, 어린애는 혼자서 제 방에 들어가서 자야 한다. 아이가 아무리 떼를 쓰고 울어도 부모는 매정하게 아이를 방에 넣고 문을 닫는다.

 그들의 육아방법인 어렸을 때부터 자는 시간, 되는 것과 안 되는 것, 규율과 질서를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것이 좋아보였다. ‘저렇게 키우니까 서양 사람들은 가혹한 현실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거로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들이 아프리카 식민지를 어떻게 개척했는가? 거기에 지금과 같은 호텔이 있었는가? 먹을 것이 있었는가? 그 사막지대에 가서 식민지를 개척하자면 그들 나름대로 비정한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되었을 것이다.
 정에 겨워서 고향을  찾다가는 어떻게 대서양을 건너서 미국을 개척했겠는가. 어렸을 때부터 훈련을 시키고 또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즘에는 우리도 합리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매정한 사회가 되어야 한다. 좋고 나쁜 걸 분명히 하고 끊을 것은 매섭게 끊어야 한다. 옛날처럼 정에 질질 끌려가지 말고 한 번 살아보자 하고들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옛날에는 정에 홍수 져서 손해를 보았지만 지금처럼 기능적인 합리주의 사회, 도시 사회를 건설하다 보니까 감정도 세계 수준이 되어서 오히려 그 이상으로  정에 메말랐다는 이야기다. 세계가 지금처럼 기능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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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변도로 되어가는 경쟁사회에서는 오히려 과거보다는 더 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반대로 한국의 정의 문화는 지금부터라는 역설적인  결론을 내릴 수 있다.    
 
◈ 시작과 끝이 있는 삶

■ 시작과 종말의 의미

 모든 길의 끝에는 바다가 있듯이, 모든 시간의 끝에는 죽음의 종말이 있는 것이다. 하루의 끝이든, 계절의 끝이든, 그리고 한 해의 끝이든, 그것들은 모였다 흩어지는 우리들의 작은 죽음들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언젠가 읽은 기억이 있는 후기 구조주의자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들은 흔히 시작을 원인으로 생각하고 끝을 그 결과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은 그것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끝’은 언제나 시작하는 그 순간 속에 있다는 주장이다. 
 대수로운 이야기가 아닌 것 같지만 되씹어볼수록 많은 의미를 찾아내게 될 것이다. 원래 ‘시작’이라는 말은 ‘끝’이라는 의미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겠는가? 끝이 없다면 시작이란 말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누구라도 끝이라는 생각 없이 시작이란 말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여러분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이따금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있는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 늙어지면 못노나니…….’라는 우리의 유흥가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그것이 퇴폐적인 노래라고 생각한다. 젊어서 힘껏 일해도 시원찮을 나이에 놀라고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을 면하지 못했다고 도덕적 실증주의자들이 많다. 그러나 문자 그대로 풀이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집트인이 ‘관’을 갖다 놓고 술을 마신 것처럼 이 노래 역시 술자리에서 흥을 돋우기 위한 효과음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거꾸로 현대인은 ‘생’의 의미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문에 세상은 메말라지고 그 죄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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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어둠을 더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종말감 속에서 시작하는 사람, 죽음 속에서 시작하는 사람, 죽음 속에서 삶을 느끼는 사람만이 생이 완전함을 지닐 수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 종말 속에 시작이 있는 우주의 리듬

 종말 속에 시작이 있고, 시작 속에 그 종말이 있다는 것을 단순한 말장난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수사학의 문제가 아니라 차라리 식물학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는지도 모른다. 계절의 순환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그 식물들이기 때문이다.
 식물들의 세계에 있어서는 종말과 시작이 고리쇠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낙엽이 진다는 말은 곧 새잎이 돋는다는 것과 같은 뜻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윤동주는 나뭇잎이 떨어진 자리마다 봄의 새싹들의 눈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노래 불렀던 것이다.

 열매들은 꽃의 진정한 죽음들이다. 아무리 향기로운 과일도 끝내는 썩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동그란 죽음 속에는, 모든 그 과일 속에는 내일의 생명인 씨앗이 박혀 있질 않은가. 그렇다. 부패의 죽음 속에는  언제나 새로운 생명의 세계가 준비되어 잇는 것이다.
 모든 종교는 과일 속에 파묻혀 있는 씨처럼 죽음 속에 내세의 새 생명이 있다고 믿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던 셈이다. 반드시 식물이 아니라도 종말 속에 시작이 있다는 순환과 재생의 논리를 인간들은 먼 옛날부터 발견했고 또 몸에 익혀왔던 것이다.
 그리고 추운 겨울의 눈발 속에서 따뜻한 아지랑이의 씨앗들을 보았던 것이다. 밤의 끝에 새벽의 빛이 있고 겨울의 끝에 봄의 새싹들이 있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던 것이다.
 바다의 조수와 하늘이 별자리에 이르기까지 이 순환의 법칙과 질서가 이르지 않는 곳은 없다. 그리스의 한 철인이 우주의 실체를 ‘리듬’이라고 말한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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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발견(發見)
            사소함 속에 숨은 거인

◈ 독서 무용론

 만약 길을 걷다가 이삿짐을 나르는 광경이 눈에 띄거든 유심히 관찰해주기를 바란다. 책이 많은 이삿짐일수록 대개 남루하고 초라하며 가난한 것이다.
 그 흔한 호마이카 장롱이나 자개장 같은 것도 구경하기가 힘들다. 부러진 상다리와 때 묻은 봇짐들은 호화판 장정의 금박 문자로 하여 한층 더 슬프게 보일 것이다.
 이와 반대로 피아노와 텔레비전과 냉장고 그리고 골프채가 실려가는 호화로운 이삿짐을 본 일이 있는가? 거기에선 책 같은 것은 좀처럼 구경하기 힘들다 만약 책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규격이 같은 서너 가지의 전집류에 지나지 않는다. 책이라고 하기보다는 이미 그것은  어항이나 인형과 같은 장식품의 품목에 끼여야 할 것들이다. 책이란 이제 ‘가난의 증서’와 같은 것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독서주간 세미나에 나와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나는 밤을 새워가며 ‘독서의 효용성’이라는 제법 장중한 일문을 초하였다. 애초의 계획은 ‘등화가친지절(燈火可親之節)’이니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니 하는 등록필증이 붙은 동서고금의 금언들을 모아 청중들 앞에 펼쳐 놓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막상 S도서관의 강연회장이 들어서는 순간  나는 가난한 이삿짐에 실려 가는 책들이 연상 되었다.

 어째서, 책을 사랑하고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탐구하려는 사람들은 늘 이렇게 가난해야만 하는가.
 맨발로 뛰는 야만인들이 언제나 교양 있는 친구보다는 앞장서가는 이런 사회에서는 되도록 독서를 안 한 친구가, 아니 독서를 해도 안 한 채 하는 친구가 용트림을 하는 영광을 차지한다. 이들에게 독서를 권장한다는 것은 잔인에 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만 연단에 오르자마자 준비해온 미문(美文)의 원고를 밀어 놓고 즉흥 연설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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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분, 밖에는 ‘책 속에 길이 있다’는 표어가 있습니다만 그 길이 무슨 길인줄 아십니까? 야만인들이 활개를 치는 이 사회에서는 책 속에 있는 길은 곧 가난의 길이요, 눈물의 길이요, 굴욕의 길이요, 패배의 길입니다.  책을 안 읽어야 도리어 잘 살 수 있는 이런 현실 속에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책을 읽으라고 도저히…도저히 권장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날 내 세미나는 형편없는 실패였다.

◈ ‘멋’과 ‘스타일’

 우리나라 말 가운데 ‘멋’처럼 다양하고 그리고 광범위하게 쓰이는 말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가끔 ‘멋’이란 말을 놓고 식자 간에 논쟁이 벌어지는 일이 많다. 그야말로 ‘멋적은’일이다.
 사람들은 ‘멋’을 서구의 ‘스타일’이란 말과 곧잘 비교한다. 사전적인 뜻을 보아도 ‘멋’은 세련되고 풍채 있는 몸매, 혹은 말쑥하고 풍치 있는 맛으로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멋’과 ‘스타일’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정반대의 성격이 드러난다는 것을 알 수있다.
 ‘스타일’은 격식화된 일정한 법칙, 그리고 특정한 양식과 질서를 의미한다.
 원래 ‘스타일’이라는 말이 철필로 무엇을 새긴다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그러니까 ‘스타일’이란 혼돈되어 잇는 것을 어떤 틀 속에 통일화 하는 것처럼, 산만하고 무질서한 것에 어떤 법칙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 스타일이 없다 : 통일성, 일정한 법칙, 특정한 격식과 경향이 없음
- 스타일라이즈 : 인습화 하다. 규격에 맞추다. 어떤 유파, 체제, 유행 등

■ 격식에서 벗어난 미

 그러나 ‘멋’은 그와는 판이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오히려 일정한 격식, 특정한 경향, 그리고 일반적인 질서와 그 규칙을 깨뜨리게 될 때 ‘멋’이 생긴다.
 ‘멋적다’, ‘멋없다’ 등의 말을 생각해 보라. ‘멋없다’는 것은 ‘싱겁다’는 뜻이며, ‘싱겁다’는 것은 규격이나 인습을 그대로 되풀이 하는 무미건조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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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자를 삐딱하게 쓰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멋 부린다고 한다. 단추를 다 잠그지 않고 하나 쯤 풀어 놓으면 멋이 있다고 한다. 규칙에서 어긋나고 통일적인 양식을 슬쩍 무시해 버릴 때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멋지다’고 한다. 멋은 무엇인가 격식에서 벗어나고 틀에 박힌 질서를 깨뜨리는 데에 있는 것이다.
 고지식한 사람을 보고 ‘멋없는 놈’이라 하고 지나치게 빈틈이 없는 것을 보고는 ‘멋대가리 없다’고 한다. 그러므로 도리어 스타일에서 벗어난 파격성에서 ‘멋’이 우러난다고 할 수 있다.
 백가지 말보다도 ‘멋대로’ 란 말이 그것을 입증한다. 우리는 방종하게 노는 것을 보고 ‘멋대로 논다’고 한다. ‘내 멋대로 한다’란 말은 구속 없는 자유의 행위를 가리킨다.           

■ 멋과 자율성

 “천안 삼거리 흥! 능수나 버들은 흥! 제멋에 겨워서 척 늘어졌구나 흥!”
 이 민요에서 ‘제멋에 겹다’는 것은 ‘제 흥’을 뜻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율적인 감정의 발로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멋’은 이렇게 ‘스타일’ 과는 달리 구속이 아니라 자유를, 통제가 아니라 해방을, 그리고 타율이 아니라 자율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는 ‘멋’속에서 미를 찾으려고 하고 ‘멋’ 속에서 인생을 살려고 했다.
 그것을 보면 사실 우리는 개성과 자유의식을 존중하는 민족이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자유의식을 갖고 싶어 하면서도 부자연스러운 사회 예의나 유교적인 고식성 밑에서 그것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해석해야 될 것이다.

■ 법칙의 미와 변칙의 미

 규칙에 사로잡히고 격식에만 얽매여 있을 때 ‘멋’은 생겨나지 않는다. 차라리 그것은 ‘스타일’이라기보다 고정된 ‘스타일’을 파괴하는 순간에서 맛볼 수 있는 생의 진미라고 말할 수 있다. 형식의 가면에 은폐되어 있고, 규칙의 사슬에 얽매여 있는 생을 거부하고, 그리하여 그 안에 감추어진 사물의 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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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자유로운 맛을 추구하는 것 - 그것이 바로 ‘멋’의 참뜻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서구인은 자유에서 법칙(구속 : 拘束)을, 개체에서 전체를, 그리고 혼돈 속에서 어떤 격식을 쟁취해 내려 했다면, 우리는 정 반대로 법칙에서 자유를, 그리고 격식에서 어떤 혼돈을 희구하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우리가 ‘멋’을 찾는다는 것은 한국인의 그러한 미의식과 자유 의식을 찾는 길이다. 
 ‘멋대로 하라’가 ‘방종하라’는 말로 쓰이고 있는 것이 또한 한국적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 귀의 문화와 눈의 문화

 우리나라 말 가운데 가장 발달한 것이 의성, 의태어다. 시각적 언어보다 청각적 언어가 풍부하다는 이야기다. 우리는 하늘도 ‘푸르다’고 하고 나무도 ‘푸르다’고 한다. 청색과 녹색을 구별해서 쓰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청각에 대한 것은 거의 외국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세분화되어 있다.
- 숨소리 : 색색, 콜콜, 쿨쿨 서양인은 어른 아이 구별 없이 그저 ‘Z’자로 나             타낼 뿐
- 종소리 : 서양인은 기껏해야 ‘딩동’ 정도. 우리는 ‘다’자 전부를 의성화하고             ‘땡그렁’ ‘댕그렁 등 여운까지 표현
- 사물의 이름도 우리는 청각적 이미지 사용 : 맴맴운다고 매미, 개굴개굴      운다고 개구리, 딱따구리, 부엉이, 뻐꾸기, 뜸부기, 꾀꼬리, 쓰르라미 등
- 음 자체가 사물의 이름이 된 것 : 징
- 그 외 : 제트기를 쌕쌕이, 통통배, 똑딱배 등 

■ 눈은 로고스 귀는 파토스

 영어로“나는 안다”고 할 때 “Yes, I see.(본다)”라고 하는 것을 보아도 그들은 주로 시각의 면에서 인생을 이해해 간 사람들이지만, “말 잘 들어라”, “말 안 듣는다”, “말귀가 어둡다”라고 말하는 우리는 ‘보는 것’이아니라 ‘듣는 것’에서 사물을 이해해가려고 하는 것 같다. 우리는 귀 없는 기계를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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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 “말을 잘 듣는다”, “안 듣는다”라고 한다. 그렇다면 대체 ‘보는 것’과 ‘듣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ㅇ 박홍종 교수는 ‘본다는 것과 듣는다는 것’이라는 논문에서    
- 눈의 문화는 지성적이고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며 능동적인 것
- 귀의 문화는 정적이고 감성적이고 직감적인 것이며 수동적인 것  

ㅇ 미국의 시인 A 매클리시는 ‘도시의 몰락’이라는 글에서
- 눈은 리얼리스트다. 눈은 먼저 다음의 것을 보고 그것을 서로 연결시키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한다. (…) 귀는 시인이다. 귀는 믿는다. 창조한다.
 눈의 문화는 과학적인 문화며, 귀의 문화는 시적인 문화이다.

■ 수학이 없는 문화

 사실 그런 것 같다. 한국에는 논리가 없다고 한다. 수학(과학)이 없다고 한다. 그 대신 감정이, 직관이, 흐느끼는 영혼이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시각예술인  미술을 보아도 색채나 형태감 보다는 저 거문고 소리 같은 귀의 리듬 즉 선이 발달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행동은 언제나 싸늘하고 합리적인 이론 위에 기초를 둔 것이 아니라 은은하고 정겨운 감정 속에 그 힘의 근원을 두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눈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보지 않으면 그만이고 보려는 의지가 없으면 그것으로 끝난다. 그러나 귀는 모든 것을 그냥 받아들인다.
 이 수동성이 때로는 몰비판적인 비극의 씨앗이 되었으나, 그러나 한편으로 영혼을 정화하고 감정의 깊이를 닦는 슬기를 낳기도 한다.

◈ 유난스러운 백성

 우리나라 말 가운데는 참으로 재미있는 것이 많다. ‘유난스럽다’는 말도 그 한 예다. 무어라고 꼬집어서 한 마디로 표시할 수 없는 말이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상식에서 벗어난 극단적 행위를 뜻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한결같지 않은 것, 보통과 다른 것, 변덕스러운 것, 혹은 조화를 상실한 것 등등의 경우에 쓰인다. 우리 주위를 보면 유난스러운 일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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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이 날’ ‘어버이 날’등 무슨 ‘날’자가 붙은 날은 유난스러운 일이 벌어지다가, 그 날이 지나면 언제 그랬느냐다.  
 그중에서도 특히 유난스러운 것은 요즈음 유행되고 있는 각종 문화제다. 보통 때는 ‘문화’의 ‘문(文 )’에도 관심이 없던 사람들이 무슨 문화제를 하면 세상에 ‘문화’가 둘 도 없는 것처럼 받들고 있다. 더구나 재미있는 일은 여기서 복고적인 취미까지 붙어 현재의 문화는 선반 위에 올려놓고 ‘과거의 문화’만을 떠받드는 일이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제에 법석을 떨던 사람들도 바로 이 시각의 ‘오늘의 문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학·예술원은 있어도 기능마저 발휘하지 못하고 있으며 문화인은 있어도 그 광장은 제공되지 않고 있다.
 미술가는 작품을 진열할 공간이 없고, 문인들은 원고를 팔 시장이 없다.
 빈사상태의 오늘이 문화는 제쳐놓고 신라 문화에 제사만 지내고 있는 이 현실을 보고 있으면 그냥 ‘유난스럽다’는 감상뿐이다.

 애국심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에서 애국심이라고 하면, 으레 정치적인 것을 뜻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자기희생적’인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영어(囹圄)의 생활, 망명 생활을 몇 해나 했느냐’ 하는 것이 애국심의 비중을 다는 저울인 것이다.
 애국심이란 그렇게 결사적이어야 하는가? 한 줌의 흙, 한 그루의 초목을 가꾸는 것도 애국심일 수 있고 한 가락의 민요를 다듬고 사라지는 문화제를 잘 보살피는 일도 훌륭한 애국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는 논개나 유관순처럼 목숨을 바쳐 애국한 사람은 많아도 일상적으로 담담하게 나라를 돌본 평범한 애국자는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프랑스에 가면 모든 문화제가 자발적인 국민의 사랑 속에서 잘 보존되어 있다고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다. 바르비종 마을에 가면 밀레의 그 유명한 만종과 이삭줍기를 그린 보리밭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한다.
 밀레의 생가나 아틀리에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몽파르나스 묘지에 있는 모파상이나 폴 부르제의 무덤에는 생화가 그칠 날이 없고, 대독 항쟁으로 쓰러져 죽은 전사자들의 모뉴망(오래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공공적인 건조물)은 곳곳에 남아 시민들이 사랑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심지어 화장품 이름이나 상점의 간판 이름가지도 유명한 예술가나 역사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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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을 회상시키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조국을 사랑하고 조국의 정신적인 문화를 아끼고 있는 그들의 따뜻한 양식을 도처에서 맛볼 수가 있다.
 걸핏하면 혈서를 쓰면서도 허물어져가는 고적엔 예사로 돌을 던지는 우리의 애국심은 어딘가 병적인 데가 없지 않다. 이것 역시 유난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 드롭스와 스태미나

 옛날 같으면 눈깔사탕, 그리고 요즘이라면 좀 근대화 된 것으로 드롭스 - 그러한 과자 하나를 먹는 데에도 민족성이란 것이 작용한다. 기회가 있으면 직접 실험해보는 것도 좋다. 서양 친구를 초대해 드롭스를 먹여보면 분명 우리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애나 어른이나 우리는 드롭스를 입 안에 넣고 몇 번 빨다가는 금시 아드득아드득 깨물어 먹는다. 그런데 서양 친구들은 대체로 우리처럼 드롭스를 깨물어 먹지 않고 녹여 먹는다. 그것을 입 안에 넣고 저절로 다 녹아 없어질 때까지 지그시 빨아먹는 것이다.
 드롭스를 먹는 시간만 가지고 따져볼 때 우리는 서양 사람보다 단연 속도가 빠른 선진 국민이다.
 깨물어 먹든 녹여 먹든 어느 쪽이 좋다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드롭스를 먹는 방식을 통해서 그 기질의 차이를 따져볼 수는 있다. 그만큼 우리는 조급하다. 눈깔사탕 하나 입 안에 넣고 녹일 만한 참을성이 없다. 우선 감질이 나고 우선 갑갑하고 우선 싫증이 나서 사탕 녹기를 참고 기다릴 수 없는 것이다.
 작은 문제 같지만 드롭스를 깨물어 먹는 우리와 그것을 녹여 먹는 그네들은 벌써 지구력이 다르다. ‘스포츠’식 유행어로 말해서 ‘스태미나’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독서와 스태미나

 드롭스에서 그칠 일은 아니다. 고본상(古本商)에서 책을 뒤지다가 느끼는 것 역시 지구력의 문제이다. 무슨 고본이건 가만히 들여다보면 10페이지 이
상 손때가 묻어 있는 책이 드물다. 즉 서문이나 제1장 제1절만은 붉은 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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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열심히 언더라인을 쳐 놓은 것이 많은데 제2장째만 접어들어도 소식이 없다. 깨끗한 신간 그대로다. ‘앞장은 고본, 뒷장은 신간’인 셈이다. 독서법도 이렇게 눈깔사탕을 먹는 식이다. 진득하게 앉아 책 한 권을 독파해낼 만한 지구력이 모자란 탓이다.
 책을 읽는 것이 그 모양이니 쓰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우리나라에 ‘전쟁과 평화’나 ‘장 크리스토프’같은 대작이 없다는 것도 결국 작가의 스태미나 문제다.
 피카소는 나이 일흔을 넘어 스무 살의 신부를 맞이했다. 노망해서가 아니라 그만한 정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다. 일흔을 넘긴 피카소가 ‘허니문’을 떠난다는 것과 예술은 결코 무관한 것 같지 않다. 그만한 스태미나가 있었기에 그런 걸작들을 남겨 놓은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외국의 걸작품들은 환갑을 지나서 이루어진 것들이 많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여든 살의 산물이며 빅토르 위고의 ‘제 미제라블’은 예순 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쉰일곱 살 때 착수한 것들이다.
 결혼식에 주례나 서고 혹은 신간 서평이나 작품집 서문을 쓰는 것으로 여생의 낙을 삼고 있는 우리의 노대가와는 참으로 대조적인 일이다. (한국의 작가들은 대개 데뷔작이 대표작처럼 되어 있다. 소위 조로현상이 많다. 오십이 넘어 대작을 남기는 일이란 드물다. 문학뿐만 아니라 사회의 모든 분야에 걸쳐 이 조로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정신도 육체도 다 같이 스태미나가 부족하다. 한국의 현대 문명은 ‘구론산’문명이 아닌가? 어디를 가나 피로회복제라는 구론산을 먹기에 바쁘다. 경부선 열차를 타보라. 꾸벅꾸벅 조는 사람이 아니면 청승맞게 구론산 병을 열심히 빨고 있는 사람들뿐이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올 때에도 우리는 누구나 가방을 던지며 하는 소리가 “아이구, 죽겠다”이다.
 한국인에게 필요한 것은 지구력을 기르는 일이다.
 정력부족…… 모든 것이 바로 이 점에 얽혀 있는 것이다. 정치도 학문도 스포츠도 가정생활도 그리고 그 모든 근대화도 오늘의 우리문제는 우선 정력과 지구력부터 기르는 데에 있지 않는가 싶다.    
* ‘빨리 빨리’ 문화란 말이 유행하고 있는 오늘의 문화를 이미 60년대에 예견한 글이다.(편집자 주)
            - 다음에 제2부 중간부터 제3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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