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0. 30. 11:21ㆍ독서후기
산수화 뒤에서
■ 견일영 수필집
0 경북 선산 생, 경북대사대 국어교육과, 동 대학원 국어교육과
0 경북고등학교 교장 역임
0 한국문인협회 회원
0 수필집 ‘보랏빛 수국이 피던 날’, ‘아름다운 영혼’외
0 장편소설 ‘탁영금
■ 책머리에
사람의 한 평생을 표현한 말이 생로병사(生老病死)다. 이 여정 속에는 하늘이 내려준 어떤 의미가 분명히 담겨 있을 것만 같다.
나는 어릴 때부터 삶에 대한 의문을 가지고 스스로 묻고 대답하곤 했다. 나이 들면서 인생에 대한 의문은 더 깊어지고 그 대답은 철학에서보다 문학에서 더 많이 얻었다. 그러나 확실하게 믿음이 가는 정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수필에 이 문제를 떠올리곤 했지만 언제나 모래 위에 물을 부은 것처럼 뚜렷이 남은 것이 없었다. 수필 한 편에 기껏 몇 마디지만 인생을 함축해서 그 의미를 담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을 다시 보면 별 의미 없는 생의 넋두리에 지나지 않았다.
실망의 연속이었다. 결국 인생을 정확하게 정의 짓고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뜬 인생은 분수가 정해져 있으니 배고프고 배부름을 어찌 마음대로 피할 수 있으리오.’ 두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시로 읊어 탄식했다. 나는 살아가면서 인생의 허무와 불가사의를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나는 오래 끄는 지병을 고쳐보려고 서울의 큰 병원을 찾았다. 거기서 우연히 19년째 나와 똑같은 백혈병을 잃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나는 그가 오래 살았다는 데 놀랐지만 그보다 인생의 다양한 모습을 발견하고 나도 앞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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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을 더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에 모처럼 환하게 웃었다.
인생을 괴로워하는 분들에게 동병상련으로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문학 속에서 함께 웃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2013 가을에 견일영
1. 돌다리걸
■ 돌다리걸
뜬 구름을 따라 타관에서 방황하다가 인생 끝물에 허한 가슴을 안고 고향 땅을 찾는다. 어린 시절, 날만 새면 뛰어놀던 돌다리걸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우리들의 작은 무대였던 돌다리걸은 복개 콘크리트 밑에 갇혀 들여다 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여린 새순처럼 자라던 꽃부리 같은 꿈도, 밤하늘의 총총한 별 같은 동무들의 이름도 이 속에 다 묻혔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동네 입구를 가로 흐르는 도랑 위에 큰 돌 여러 개를 얹어 다리를 놓았다. 이곳을 돌다리걸이라 했다. 그때 동네 사람들은 ‘걸’이란 접미사를 홰나무걸, 다리걸, 동산걸이라 불러 어떤 곳의 지점을 이름하여 불렀다. 어린 우리들은 마구 지껄이는 소리로 ‘돌달껄’이라 했다. 그 다리 밑에서 가재를 잡으며 팡기, 씨돌이, 조환이들과 다투고, 웃고, 물싸움을 하다가 날이 저물면 붉은 노을을 적시며 집으로 돌아갔다.
동네 모든 전달 사항은 이 돌다리 위에서 알렸다.
“내일 아침, 수군푸(삽) 들고 부역 나오이소오오.”
목청 좋은 심 서방이 늦은 밤에 소리를 지르면 동네 끝가지 들렸다. 난청 지역은 그 부근까지 가서 같은 소리를 반복하기도 했다. 그러면 정확한 시간도 알리지 않았는데 동네 사람들은 대충 같은 시간에 돌다리걸에 모였다. 그때 시계가 있는 집은 몇 집 되지 않았고, 그런 집은 부역 대상도 되지 않았다.
밤이면 나이 든 사람들이 여기 모인다. 신문도 없고, 라디오도 없어 여기서 세상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입심 좋은 사람의 논설도 들을 수가 있다. 그 사람의 별칭이 빈호사(변호사)였는데, 나는 그것이 사람 이름인 줄 알았다. 어쩌다 외지의 친척이 다녀가거나, 볼 일이 있어 멀리 다녀 온 사람은 이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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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뉴스의 중심에 선다. 이 소문은 신문보다 더 빨리 전파되어 온 동네가 다 알게 된다.
여름이면 덥고 모기가 많아, 설렁 설렁 바람이 부는 이 돌다리걸에 와서 아예 자리를 깔고 눕는다. 우리는 저녁만 먹으면 여기에 모여 뒷골 개울에 목욕하러도 가고 남의 밭에 들어가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따 먹었다. 주인에게 혼이 나기도 했지만 주재소(경찰 지소)에 붙들려 간 아이는 아무도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가재를 잡던 이 개울이 복개 되면서 돌다리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위로 큰 길이 났다. 육중한 콘크리트가 물장구를 치며 재잘거리던 옛 이야기까지 몽땅 덮어버렸다. 그 큰 길 밑에는 못살았지만 인정스런 이름이 있었고, 가재를 잡으며 희희낙락하던 웃음이 있었는데 이제 영영 그것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훗날 어느 시인이 나타나 복개 시멘트를 걷어내고 옛 이야기를 되찾아낼지 기적같은 끔을 그려본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돌다리걸의 추억, 그것도 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 아닐 수 없다.
■ 아직 길은 멀었는가
참 많이도 걸었다. 평생을 걸어온 거리를 따지면 지구를 몇 바퀴 돌았는지 모른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었을 때, 가을 소풍을 금오산까지 간다고 했다. 선산에서 구미까지 40리, 구미 시내에서 금오산 폭포까지 10리, 합하여 왕복 100리 길을 걷게 되었다. 신발은 대부분 끈 달린 나막신이었는데 가다가 끈이 떨어지면 맨 발로 걸었다. 자갈이 깔리지 않은 신작로 갓길을 하염없이 걷는데 햇볕은 사정없이 맨머리를 내려 쬐었다. 그래도 낙오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 뒤 학도호국단의 행군, 논산 훈련소의 구보, 그리고 철의 삼각지대 김화에서 보병으로 제대했다.
인생은 나그네요, 나그네는 정처 없이 걷는다. 어느 나그네 부자(父子)가 오래 걷다가 너무 지루하여 아들이 물었다.
“아버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지금 지나는 곳은 어딥니까?”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단다. 다만 우리가 오기로 한 그곳에 제가끔 와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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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세월이 흘렀다. 태평양 전쟁 때도 걷고, 6·25 전쟁 때도 걸었다. 전쟁이 끝났는데 휴전선 최북단 오성산 밑에서 또 걸었다. 먹고 살기 위해 걷다가 이제는 건강을 위해서 걷는다. 밤이면 도인처럼 방안에서 인생을 걷는다. 정처 없이 걷다가 되돌아보면 지나온 길을 또 다시 걷고 있다. 대부분 후회의 길이고, 아쉬움은 낙엽으로 뚝뚝 떨어진다. 그래도 혼자 걷는다. 이제는 같이 걸을 사람도 없다.
다른 사람들은 다리가 아프다고 물리치료다 약물치료다 하면서 울상을 짓고 있는데 아직도 걷는데 아무 지장이 없다는 것은 남보다 더 많이 걸어라는 팔자인지 모르겠다. 예방의학으로 걷기는 만병통치라고 한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운동은 조깅이 아니라 바로 걷는 운동이란다.
나는 혼잣말로 묻는다.
“걷고 걸어, 나는 어디로 갑니까?” 나도 모르는 사람이 대답한다.
“걷다가 지칠 땐 먼발치에 뜬 작은 해를 보아라. 이정표는 없다. 다리가 멎을 때까지 가거라. 해가 질 때 너의 긴 그림자와 만나는 곳이 너의 집이란다.” 아직도 길은 멀었는가. 날이 새면 또 걸어야 한다. 걸음을 멈추는 날이 내가 집에 도착하는 날이 아니겠는가.
■ 아픈 사람들
나는 병과 함께 살고 있다. 그것을 조금도 숨기고 싶지 않다. 함께 이야기할 때나 식사를 할 때, 혹시 불쾌하게 생각하거나 전염을 염려할까봐 내가 먼저 고백한다.
“나는 저항력이 부족한 백혈병 환잡니다. 당신들의 균이 나에게 옮지 않도록 주의해 주세요. 나에게는 남을 전염시키는 균이 없습니다. 이상한 바이러스가내 백혈을 괴롭혔지만 그 바이러스도 없어졌습니다. 다만 그 후유증으로 수시로 전신에 통증을 느끼고 있을 뿐입니다.”
때로는 구체적으로 설명까지 해준다. 병은 자랑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이 치료에 도움을 줄 때도 있고, 심리적 안정에 힘이 될 때도 있다.
나는 가난한 시골에 살면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병원이라고는 딱 한 번 가봤다. 아프기야 수없이 아팠지만 농산물 외에는 현금이 없으니 병원에 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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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만 새면, 들이나 산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자주 엎어지고 무릎을 깼다. 피가 나면 모래를 뿌려 피를 말렸다. 어느 날 거기 균이 들어갔는지 고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무릎 위에 커다랗게 덮인 큰 딱지 밑으로 고름이 줄줄 새어나왔다. 내가 너무 아파 하는 것을 본 삼촌이 병원으로 데리고 갔다. 의사는 핀셋으로 무릎 위의 큰 딱지를 그냥 잡아당겨 제거한다. 얼마나 아프던지 죽는 줄 알았다. 그리고 머큐로크롬을 듬뿍 바르고는 끝이다.
통증은 모든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죽는 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고, 감사 기도를 올리는 사람도 있다. 아무리 엄살을 부려도 병을 완전히 낫게 하는 재주는 없다. 고민을 들어주고 고개를 끄덕여주는 어른에게 속지 말고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아픈 것이 정상이고 누구나 다 아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그 아픔 속에서도 자신의 뚜렷한 목표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다리에 힘을 주고 팔을 크게 흔들면 병을 잊게 된다. 낫지는 않아도 잊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다.
나는 백혈병을 7년 동안 재발까지 하는 아픔 속에 수필집도 내고 장편 소설도 썼다. 그리고 연달아 청탁해 오는 원고를 거의 거르지 않고 다 소화했다. 아픔을 아픔으로 치유했다고 하면 과장이 될까. 그것이 병원에서 얻는 안도감보다 더 큰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미처 몰랐다. 꿈 너머에도 꿈이 있다. 기쁨 속에서도 새로운 기쁨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아픔의 동굴을 지나면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완전한 세상을 다 보지는 못하더라도 좀 더 많은 것을 보았다는 희열은 고통의 터널을 지나봐야 안다.
아프니까 청춘이 아니라 인생은 평생 아픔과 함께 산다. 그것은 성장통이 아니라 평생의 자극이요, 교훈이요, 인내요, 낭떠러지에서 깨닫는 지혜다. 인생은 생로병사, 평생 병과 싸우는 과정이다. 병을 이겨내고 영생하는 사람은 없다. 병과 함께 할 수 있는 인내와 지혜만 필요하다.
지난날은 다 아름다운가. 어릴 때 아팠던 기억, 그때 불렀던 동요가 새롭다.
다쳐서 다쳐서 아픕니다
누나가 업어도 아픕니다
엄마가 업어도 아픕니다
울어도 울어도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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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간제 생명
젊은 시절, 내가 가르쳤던 제자가 오랜만에 찾아왔다. 기간제 교사를 희망했다. 여러 학교에 연락하여 빈자리가 있을 때마다 그곳에서 근무하게 했다. 기간 이 다 되어 가면 내가 더 조바심이 나서 미리 자리를 알아보곤 했다. 그런 생활을 몇 년을 반복했다.
수십 년 전, 그가 남녀 공학인 시골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남학생을 제치고 늘 수석을 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인기도 좋았다. 교육대학에 진학하여 교사가 되었다는 것까지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40대에 접어 든 그가 새삼스레 왜 기간제 교사를 해야 하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혹시 그의 마음에 상처를 줄 것 같아 가정 형편을 물어볼 수가 없었다. 만날 때마다 묵은 역사책 보듯 옛날 학교 이야기만 했다.
내가 백혈병을 앓게 된 지 5년이 지났다. 꿈 같은 세월이었다. 반년 만에 완치가 되고,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은 기적이었다. 나는 하나님께 그리고 가족과 모든 주위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나는 이 기간, 재생의 기쁨으로 무엇인가 값진 일을 해 보고 싶었다.
수필집을 냈다. 인생에 대한 감동을 절실하게 표현하고 싶었다. 서문에 그 느낌을 썼다.
- 영혼은 아름답고 소중하다. 모든 것은 떠나지만 영혼은 남는다. 이제 간이역에 잠시 머무르다 곧 떠나야 할 짧은 시간에 철로가에 핀 작은 들꽃을 본다. 지난 날 보잘 것 없던 그 작은 꽃이 지금은 왜 그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걸까. 모든 것은 떠날 때 아름답게 보이고 또 그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글을 쓰면서 나는 울었다. 내가 사선(死線)을 넘고, 기간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데 대한 감동과 그 감동이 글이 되어 오래 이 세상에 남게 된다는 데 대한 감격이었다.
이 감동의 열기가 아직 식지도 않았는데, 정확히 5년 만에 백혈병이 되살아 났다. 재발 치료는 처음 발병했을 때보다 더 힘든다고 했다. 항암 치료를 계속 6번이나 했는데 병이 나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검사 결과 이상이 없으니 치료를 중단하자고 한다. 그래서 매일 먹는 약을 주는데 그 약은 비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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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진통제였다. 결국 내 병은 완전히 낫지 않는다는 뜻이 아닌가. 평생 진통제를 먹고 아픔만 겨우 참고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불안한 마음만 밀려들었다.
제자는 기간제 교사를 반복하다가 소식이 뚝 끊어졌다.
몇 년이 지났다. 우연히 들려오는 소식에, 대구 지하철 화재 사고 때 세상을 떴다고 했다.
진료 날짜가 되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약간 포기한 듯한 말로 “이 병은 완전히 낫지 않습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해석했다.
- 언제 죽을지 모른다. 그러니 너무 서둘지 마라.-
아마 기간제 생명은 정확하게 기간을 채우고 죽는 것이 아니라 기간 중에 어느 날 간이역 울타리에 핀 야생화처럼 시들고 마는가 보다. 선고(先考)께서도 진료 예정 날짜를 많이 남겨 놓고, 처방 받은 약도 많아 남았는데 세상을 떠나지 않았던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별로 품위도 없는 이 말에 깊은 철학적 의미를 찾아본다. 산다는 것보다 더 위대한 철학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다시 기원한다. 이번 기간을 다 채우고 다시 생존의 기간을 지정받고 싶다고.
■ 봄의 저주
봄이 무슨 약속이나 한 듯이 찾아왔다. 행복의 면사포를 덮어쓰고, 조금의 수줍음도 없이 남녘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누구도 그를 의심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대문마다 입춘대길(立春大吉)이라 써 붙여 놓고 그를 환영한다. 겨우내 얼었던 내 마음도 봄의 향기와 화사한 웃음에 취해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다.
어릴 때 그렇게 기다려지고 좋던 봄이 이제는 실망만 안겨 주는 낯선 손님으로 변했다. 봄이 행복을 가져온다고 믿는 것은 휴전선의 봄이 영원한 평화를 가져다준다고 믿는 것과 같다. 그 아름답던 봄이 나의 가슴에 상처만 남겨 놓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간 적이 한두 번이던가. 그것도 떠날 때는 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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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연도 없이 여름의 무더위만 듬뿍 안겨 놓고 사라졌다.
언제부터 우리는 봄을 희망의 대명사로 받들어 왔던가. 실망만 안겨 놓고 훌쩍 떠나는 그 야속한 봄을, 그래도 원망하고 저주하기에는 마음이 아리다. 오히려 겨울이 오면 봄이 기다려지고, 나목에 싹을 틔워 줄 새 손을 어떻게 맞이할까 준비를 해 왔다. 어쩌면 딸이 친정에 와서 닥치는 대로 싸 가지고 가도 사흘만 지나면 또 보고 싶고 기다려지는 것과 같다.
봄은 아무 죄가 없다. 꽃도 피우고 날씨도 따뜻하게 해주고, 아지랑이를 피워 가슴을 부풀려주기도 한다. 분명 희망이요, 무지개 같은 아름다운 이상이다. 내 생일 이 3월인데 그날이 오면 언제나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다. 그러나 그날이 지나면 봄바람이 먼지만 일구고 어디론가 떠나간 듯 서운한 생각만 든다. 살아가면서 내 힘이 부칠 때는 나약한 봄에 태어났음을 핑계로 삼고, 변명의 구실로 삼는다.
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봄을 저주했다. 재생이 없는 인간의 허무를 봄에게 덮어씌웠다. ‘호지에 무화초하니 춘래불사춘(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이라는 슬픈 시로 흉노 땅에 잡혀간 여인을 애달프게 노래한 시인도 봄에다가 여인의 슬픈 운명을 덮어씌우고 있다.
겨울 혹한은 봄을 기다리도록 부추기고, 여름 혹서는 지나간 봄을 그리워하게 한다. 봄은 고운 옷을 차려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났지만 기껏 들판이나 산비탈에 씀바귀나 작은 쑥만 얼마쯤 선물로 주고, 겨우내 다 먹고 떨어진 양식은 조금도 걱정해 주지 않는다. 춘궁기(春窮期)라는 어려운 기간을 만들어 놓고 굶어 죽는 사람을 못 본 체한다.
또 봄이 왔다. 아름다운 꽃들이 수를 놓는다. 그들이 이제 쇠잔한 내 목숨을 얼마만큼 더 연장해 줄 수 있겠는가. 회춘(回春)은 말뿐이다. 내가 이 세상을 훌쩍 떠나도 봄은 아무 죄가 없다. 그러나 나는 내 영혼을 흩뜨려 놓은 봄을 저주한다.
■ 기다리는 시간
평생 나는 무엇인가를 기다리며 살아왔다. 누구나 다 그렇게 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가장 지루한 시간으로 기다렸던 것은 군대 생활에서 제대하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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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였다. 한 달을 남겨 두고 주머니 달력에 날짜를 하나하나 지워나가는 그 시간, 끝에 날짜까지 가는데 몇 년이나 걸리는 것 같았다. 다음에 지루하게 느꼈던 시간은 샛바람이 불던 날, 고기를 기다리는 낚시찌가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았을 때였다. 지루했던 시간 이 그뿐이겠는가. 내가 뜻한 대로 되지 않을 때 그 시간은 무척 괴롭고 힘들고 지루했다.
누구나 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언제나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며 살았다. 나는 그 기다리는 마음속에 속임수가 들어 있는 줄을 몰랐다. 그것은 조바심으로 빨리 시간이 가고 오기를 기다리는 가운데 죽음의 시간도 재촉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혈액 암에 걸린 적이 있다. 백혈병이라 해야 더 실감이 난다. 완치 됐다 했다. 재발했다. 약물치료, 항암치료, 진통제 복용 등을 반복했다. 여러 가지 증세를 보이며 계속 아프다. 여기서 더 기다려야 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생각하기도 싫은 어떤 기다림이 거기 숨어 있다고 생각하면 허무한 느낌이 가슴을 메운다.
9시 뉴스를 기다린다. 무슨 다른 세상이 전개될 것만 같은 부푼 기대를 하고 TV를 주시한다. 그러나 그 뒤끝은 개운하지를 않다. 거짓과 허무와 불안한 미래의 그림자만 남겨 놓고, 책임질 사람은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결국 내가 기다리고 있는 시간은 실망만 잔뜩 남겨놓은 채 끝을 맺고 만다.
옛날 미국 선교사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때, 한국인에게 똑 같은 일을 반복해서 시켜본 일화가 있다. 급료는 넉넉히 주면서 우물을 파게하고, 또 그것은 다시 되묻게 했다. 그리고 또 그 일을 반복해서 시켰다. 그 일을 자꾸 되풀이 하자 일꾼들은 더 일을 못하겠다고 반발했다. 그것은 시간의 문제다. 지루한 시간, 기다림이 없는 시간은 싫은 것이다. 사랑하는 애인도 매일 똑같은 시간에 만나서 똑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면 그 사랑이 얼마나 오래 가겠는가.
내가 기다리는 것은 새로운 것을 기다린다. 내 아들의 키가 더 크고 성격이 밝아져 가는 모습, 멋진 삶을 추구하는 친구의 새로운 뉴스, 새로 뽑힌 지도자가 밝은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찬 취임식, 이런 것들을 즐기며 우리는 다가올 시간을 푸른 꿈으로 색칠해 본다.
이제 기다리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 귀중한 시간을 아주 소중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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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하게 사용해야 할 것 같다. 이별의 슬픔이 크다고 만남의 기쁨을 잊을 수야 있겠는가. 기다리자. 기다려야 한다. 절대자가 정해 놓은 결과에 신경을 쓰지 말고, 꿈꾸듯이 기다려보자. 그것은 아주 흔하게 쓰는 세월이라는 말에 지나지 않지만 사물의 변화를 인식하기 위한 시간이라는 이름의 진정한 의미를 내 가슴에 꼭꼭 담아보자.
■ 모래 위에 쓴 글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가 쓴 모래 위의 글을 지우고 그것에 무상과 허무를 느끼고 있다. 그 모래 위의 글은 덧없는 인생의 대명사가 되어 내 가슴의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도 모래 위에 글을 계속 쓰고 있다. 그 글은 내가 지우지 않아도 저절로 지워져 없어진다. 다행히 하얀 모래밭으로 환원해 감으로 해서 내가 낙오되지 않은 것 같은 위안을 받는다.
내가 대학을 졸업했을 때 첫 발령지를 바닷가 포항으로 희망했다.
바다! 젊은 시절 얼마나 가슴 벅찬 이름이었던가. 그때 내 그 꿈은 굉장히 밝고, 원대하고, 희망에 차 있었다. 그것은 무슨 정치나 경제와 관련된 타산적인 욕망이 아니라 낭만적 삶의 화려한 이상으로 내 가슴을 더 높이 솟구쳐 풍선으로 띄우는 것이었다.
나는 매일 저녁 바닷가로 나갔다. 밤안개, 파도소리, 멀리 밤하늘과 맞닿은 수평선을 보고 있으면 신비한 세계의 움직임을 보게 된다. 산은 정지되어 궁금한 것을 만져도 보고, 자세히 들여다볼 수도 있지만 바다는 언제나 움직이고 또 가까이 가 볼 수도 없는 신비한 곳이었다.
언제나 멀리서 보기만 해야 하고, 변덕이 심한 날씨와 풍우는 나를 자꾸 긴장하게 했다. 잠시도 멈추어 서지 않고 밀려왔다가 또 밀려가는 물결, 그것을 옛날 최남선 시인은 ‘처얼썩 처얼썩 척 쏴아아’라고 표현했다. 나는 더 자주 바다를 찾게 되었다.
모래 위에 글씨를 썼다. 아주 짧은 단어들을 썼다. 언제나 그것을 지우지 않고 그냥 떠났다. 그때 무슨 단어를 썼는지 한 자도 생각이 나지 않지만 원대한 희망을 상형문자로 만들었을 것 같다.
그때는 사랑하는 대상도, 직장에 대한 큰 기대도 그리고 칭기즈칸 같은 야욕도 없었고, 아직 젊은 청춘의 낭만적 열기만 차서 모래 위의 글은 하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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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나 바다의 파도소리와 어울렸을 것이다. 그 추억은 좀체 지워지지 않고 지금도 가장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젊음이라는 보석을 모래 속에 박아 놓은 것인가.
<중략>
밤마다 초저녁이면 울릉도로 떠나는 여객선의 뱃고동 소리가 울려 왔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뱃고동은 떠나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의 가슴을 울렸다. 항해사는 남을 울리는 것을 재미로 삼는지 꼭 목메는 소리를 잘 내었다.
“뚜우우 두뚜…….”
이제는 내 머릿속에 모래를 담아두고 아무렇게나 글을 쓴다. 무슨 도인이나 되는 것처럼 없을 무(無)자를 수없이 썼다. 지나고 보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지 않은가. 정말 아무 것도 없다. 거기다가 허(虛)자를 더 보탠다. 인생의 본체는 형상이 없어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는 노자(老子)의 허무(虛無)를 떠올린다.
■ 귀여운 것은 애를 먹인다
송아지가 팔려 가던 날 나는 울었다. 결국 귀여운 것은 나를 슬프게 했다. 작은 아버지와 소장수 사이에 무슨 흥정이 끝나더니 새끼줄로 송아지 목을 매어 바로 끌고 나간다. 송아지도 처음에는 울음소리를 섞어 몇 번 반항을 하다가 이내 순순히 따라간다. 어미 소는 사흘을 죽도 먹지 않고 송아지가 떠난 곳을 향해 긴 울음소리만 토해냈다.
“엄매에, 엄매에….”
함흥차사로 저항하던 이 태조도 이 소리를 듣고 신하들을 더 죽이지 못했다고 하지 않던가. 그 슬픈 울음소리는 온 집안을 우울하게 했다.
사흘이 지나자 암소도 죽을 먹기 시작하고, 더 울지도 않는다. 모든 것은 떠난다는 솔로몬의 명언이 여기서도 통한다.
귀여운 것은 애를 먹이다가 결국 나를 슬프게 해놓고 어디론가 떠나갔다.
■ 새까만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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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세월에 그을린 내 얼굴을 본다. 주름에 박혀 있는 지난날의 발자취가 초라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빛바랜 시간들이 힘없이 되풀이 된다.
욕심인가, 한 번도 내 얼굴이 잘나 보인 적이 없는 것은. 언제나 시험을 보는 두려움으로 남의 앞에 서지만 그 숱한 고비들을 턱걸이로 넘어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선도 보고, 면접도 보고, 여인들 앞에 서보기도 했지만 신은 그때마다 눈을 감아주었다.
얼굴은 천태만상으로 똑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어떤 모델을 닮으려 하지 말고, 그 마음을 닮으라고 했다. 남과 똑 같은 얼굴을 흉내 낼 수는 없지만 최소한 마음은 닮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 얼굴이 못나도 그것을 버릴 수 없는 것은 내가 불쌍해서이다. 우물 안에 비친 자신의 미운 얼굴을 떠나지 못하는 어느 시인처럼 나 자신을 버리기엔 너무 억울해서 훌쩍 떠나질 못한다.
나도 돌 때는 얼굴이 뽀얗고 예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모습을 나는 보지 못했다. 돌 사진도 없다. 그러나 초등학교 다닐 때의 새까만 얼굴은 기억한다. 꼴망태를 메고 산으로 들로 다니던, 그때 내 얼굴 모습이란, 빡빡 깎은 머리에 얼굴과 온 몸이 새까맣게 타 있었다.
그날도 꼴망태를 메고 신작로 자갈길을 맨발로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 멀리선 온 듯한 여인과 내 또래의 아이가 예쁜 옷을 입고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아이가 내 망태를 가리키며
“엄마 저게 뭐야?” 하고 서울말로 묻는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너무 모욕감을 느껴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었다.
어느 날이고 들판에서 살다시피 하였으니 영판 빼박은 흑인 얼굴이었으리라. 내가 입은 남루한 옷, 얼기설기 엮은 꼴망태, 새까만 얼굴, 짐승처럼 맨발로 자갈길을 걷는 모습이 서울에서 자란 어느 부잣집 아이에겐 얼마나 신기해 보였겠는가. 그날 이후 서울에서 왔다고 하면누구든 곱게 보이질 안했다.
나는 지금도 TV에서 가끔 아프리카 빈민국의 새까만 소년들의 얼굴이 비치면 그때 내 모습이 떠오른다.
신병은 새까맣다. 고참병이 신병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새까만 놈’이다.
훈련 기간 중 날만 새면 야외에서 고된 훈련을 계속하니 그을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신기하게도 훈련을 마치고 부대 배체를 받고 나면 이내 얼굴이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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옇게 된다. 얼굴색은 계급만큼 희게 되니 하위 계급자 앞에 붙는 말이 으레 “새까만”이 될 수밖에 없다. 나는 이 수식어를 떼어보지도 못하고 제대를 했다.
아, 그래도 새까만 얼굴에는 젊음이 있고, 희망이 거기 있었다. 가식도 없고 어영도 없었다. 그 새까만 얼굴 속에서 반들거리는 눈동자는 생기가 있었고 진취적 기상이 번득였다. 세월은 이 윤기 나는 검은색은 돈과 명예로 덮어 씌워 희멀건 얼굴로 만들었다. 세상은 가면을 쓴 흰 얼굴을 숭배하고, 흰죽처럼 되기 위해서 처절한 불꽃 싸움을 한다.
돈이나 권력, 명예는 까만 얼굴을 희게 한다. 그것은 가면이지만 현실이다. 영혼을 보고 높은 자리에 올리는 것이 아니고 얼굴을 보고 높이 떠받든다. 뜬 인생에 분수가 정해져 있으니 아무리 발버둥 친다고 그 값이 올라가겠는가마는 욕심은 부귀영화를 갈망한다. 아무 희망도 없는 그 희멀건 얼굴을 희구한다.
다시 거울을 본다. 나는 그 새까만 시절을 잊고 살았다. 하얀 얼굴 치장에 여념이 없어 새까만 얼굴을 완전히 잊었다. 의기 발랄했던 그 새까만 얼굴은 어디로 갔는가. 공허한 추억으로 재생을 가져오지 않는 잔인함 4월처럼 이름만 얹어 놓은 지난날의 가면을 벗겨 본다. 새까만 얼굴이 보일 듯 말 듯 하다가 이내 사라지고 맥 빠진 얼굴이 겨우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단한 세월에 탈색된 내 얼굴이 새까만 초상으로 떠오른다.
2. 세한도(歲寒圖)
■ 세한도(歲寒圖)
추사(秋史)의 세한도에 그려져 있는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을 밀어내고 그 안에 들어간다. 내가 살던 집이 거기 있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꼭 내 모습을 하고 서 있다.
북위 38도 선을 훌쩍 넘어 휴전선 최북단에 자리한 김화(金化) 육단리에서 영하 22도의 추위 속에 M1 소총만 의지했던 초병은 세한도 속의 송백처럼 까칠하게 살아남았다. 그때 설한 북풍은 밖에서 나 혼자 울게 했고, 막사 안의 병사들을 동면하는 곰처럼 만들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뀌었는데 용하게 그 송백은 아직 살아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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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 속에 묵직하게 자리 잡은 글귀 ‘한 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의 절개를 알 수 있다.’는 내가 지금가지 살아남는 데 아무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명언 성구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많은 폭풍우가 지나가도 몇 그루의 나무는 살아남는 것처럼 그저 내가 용하게 목숨을 부지해 남아 있게 된 것뿐이다. 한가한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도 세한삼우(歲寒三友)라 하여 소나무, 대나무, 매화나무를 불러들여 술잔을 기울였지만, 진정한 내 벗은 청솔가지로 군불을 지피고 아랫목 이불에 발을 밀어 넣는 것뿐이었다.
■ 산수화(山水畵) 뒤에서
산수화를 보면 어느 것이나 내 고향 같은 느낌이 든다. 나지막한 오두막집이 보이면 우리 집과 닮은 데가 있는가 찾아본다. 귀소 본능인가. 고향에 대한 향수는 어쩔 수 없는가 보다.
내가 산수화에 호기심을 갖게 된 데는 자연에 대한 고상한 취미가 아니라 그 뒤에 숨어 있으면 세상의 온갖 두려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선고(先考)께서도 산을 은신처로 삼으셨던지 호를 요산(樂山)이라 했다 염량세태에 실망할 때마다 귀거래사를 읊으며 고향 시골로 내려가려고 하셨다. 그러나 한 번도 고향에서 며칠이라도 유하시는 걸 보지 못했고, 산속에 들어가 산수 속에 자적하시지도 않았다. 결국 산수화 뒤에 숨어 세속을 따가운 눈을 가리기만 하셨던 것이다.
나의 호도 솔뫼다. 산을 방패로 내가 욕심이 없고, 자연친화적이고, 늘 푸른 꿈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현수막만 내걸고 고향에 내려가 농사지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부끄럽게도 타인의 시선을 산수화에 묶어 놓고 나는 그 뒤에 숨어 안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몇 해 전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된 정선(鄭敾)의 금강전도(金剛全圖)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를 볼 기회가 있었다.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라 했다. 정선의 그림은 사물을 단순하게 실경(實景)으로 재현하지 않고, 회화적 구성을 통해 경관에서 받은 정취를 감동적으로 구현하고자 했다. 미학적 안목이나 이론에 궁한 나는 그 그림의 참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금강산의 사실적 모습과는 거리감이 있지만 나는 그 그림 속에서 금강산의 진면목이 숨어 있는 것 같아서 오래 그 그림을 눈여겨봤다.
나는 내 몸을 산수화로 감싸고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모습을 남들이 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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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금강전도처럼 잘 이해하지 못하고, 난해한 경지로 높여 주었으면 하는 허욕을 부려본다.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실경 산수화 뒤에 숨어서 자연에 순명하는 것이 훨씬 마음 편할 것 같다.
내가 젊었을 때는 내 모습이나 남의 모습을 볼 때, 있는 그대로 실경만 보았다. 나이 드니 진경에 눈을 뜨게 되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깊은 속뜻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다. 진경(眞景)은 안 보이는 곳을 표출해 내는 것이고, 보통 사람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형상화한 회화(繪畵)라고 본다. 불국사 아래 영지(影池)에는 석가탑이 비치지 않았다. 아사녀는 물속에 비친 유영탑을 보고 뛰어들었다. 그의 가슴에 비친 탑은 진경이었고, 그래서 그는 단순한 익사자가 되지 않고 사랑의 화신이 된 것이다.
심리학자 중에는 자기 능력이나 태도나 주장을 가급적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려는 심리적 콤플렉스를 요나 콤플렉스라고 한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처세술이 늘어났다. 상황에 따라 카멜레온이 되어 위장술을 쓰게 되었다.
나는 아마 태어날 때부터 요나 콤플렉스에 빠져 있었는지 모른다. 내가 아무 욕심 없이 고향에 가서 산수나 즐기겠다고 하는데 누가 나를 욕하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다시스로 도망하려던 요나처럼 바다에 빠지고, 큰 물고기에 먹혀 결국 용서를 빌어야 할 지 모른다.
내가 숨어 살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 산수화 뒤다. 그러나 가엽게도 내 이상과는 달리 고향에는 내 몸 하나를 지탱할 방 한 칸도 없다. 귀원전거(歸園田居)하는 꿈도 내 머릿속에서 잠자고 있다. 어차피 나는 오류와 동거하고 있지 않은가. 아직도 나는 언젠가 전원에 돌아가 의고(擬古 옛날 풍을 모방함)시나 지으며 살아가고 싶다.
불쌍하게도 나는 이런 도피 심리, 공포 심리, 우유부단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언제 산수화 뒤에서 과감하게 뛰쳐나와 자유롭게 이 세상을 활보할 수 있겠는가.
■ 요산(樂山)
선고(先考)의 호가 요산(樂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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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오르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요산이다. 산에 나무를 하러 다니신 일도, 산과 관련 있는 직업에 종사하신 일도 없다. 더구나 산을 아주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신 적도 없다. 그런데 왜 호를 요산이라 자칭하셨을까?
선고께서 호를 요산이라 정하신 것은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仁者樂山)는 뜻이 좋아 따오신 것 같다.평소 하시는 말씀의 내면에는 사람은 어질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언제나 담겨 있었다.
인자(仁者)의 사랑은 넓고 깊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이는 마치 산이 만물을 포섭하여 성장시키는 것과 같다. 그러면서 산은 영겁의 침묵을 머금고 태연히 움직이지 않는다.
아버지는 이렇게 폭 넓은 뜻을 다 가지고 싶어 하셨던 것 같다.
설날 아침에는 며느리와 손자들에게 세뱃돈 대신 책을 한 권씩 나누어 주셨다. 표지를 재끼면 하얀 간지에 책 받는 이의 이름과 새해 연도를 간지(干支)로 표기하고 그 밑에 요산이라고 아버지 호를 쓰셨다.
그리고 호 밑에 낙관을 하셨다. 설날 아침에 나누어 주는 이 책 선물은 KBS 아침마당에 큰 며느리가 출연하여 ‘대물림’이라는 이름으로 최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 호를 무척 좋아 하시고 그 속에 담긴 의미가 당신을 대변하는 것처럼 만족해 하셨다.
요산이란 호를 가진 사람은 많다. 그러나 요수(樂水)란 호를 가진 사람은 보지 못했다. 슬기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知者樂水)고 했는데 슬기로운 사람을 왜 싫어했을까. 슬기로움을 싫어한 것이 아니라 물은 수시로 요동하고 변하니까(知者動) 그것을 꺼린 것 같다.
귀거래사는 전원으로 돌아가겠다고 노래했고, 우리는 생을 마감할 때 자연으로 돌아가기를 희망한다. 선조들은 싫던 좋던 모두 산으로 갔다. 바다로 산 사람은 문무대왕뿐이다.
논어에 나오는 요산요수(樂山樂水)는 산과 물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知)와 인(仁)에 대한 성격적 차이를 비교한 것이다. 인(仁)과 산은 정신적으로 생명이 길고, 시종일관하는 휴머니스트라고 본 것이다.
산은 물과 같이 소리를 내지 않고, 까불지 않는다. 유연 자약한 태도로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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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히 침묵을 지키며 만물에 사랑을 베풀 따름이다. 나는 이 경지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산에 가면 건강이 좋아지리라는 타산으로 산행을 한다. 등산 장비에 신경을 쓰고 어느 산에 갔다 온 것을 큰 자랑으로 삼는다. 나에게는 요산의 의미가 너무 멀기만 하다.
나는 유명한 에베레스트 원정 대원 말로리의 말을 흉내 내며 혼자 웃는다.
“왜 산을 좋아하는가?”
“거기 인(仁)이 있으니까.”
■ 모래 시계
소동파가 젊었을 때, 한간(韓幹 말 그림으로 유명한 당나라 시대의 화가)의 목마도를 보고 시를 지어 “한간이 그린 그림은 진짜 말 같다.”고 했다. 만년에 다시 이 그림을 대하고는 “이제 보니 말보다 금빛 안장이 먼저 눈에 띄네. 말의 본성은 뛰는 것인데….”
가난할 때는 말이 바로 보였는데 벼슬이 높아지고 넉넉해지니 보이는 시각이 달라졌다. 그 뒤 그는 솔직하게 말했다. “기름기 도는 말보다는 생생한 풀을 뜯는 말이라야 말다운 것인데.” 그로부터 근 천 년이 지났는데 그의 자성하는 소리가 들린다.
젊었을 때 나는 아주 예쁜 처녀와 사랑에 빠졌다. 첫사랑이었다. 내 눈에는 그의 인물이나 행동에서 아름답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하숙집에서 눈만 뜨면 제일 먼저 그의 모습이 떠올랐고, 시간만 나면 만나고 싶었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그와 영원히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허락하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예쁜 그의 모습은 가끔 꿈에 나타나 나를 울렸다.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고도 세월은 더 흘렀다. 그런데도 꿈속의 그의 모습은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리움만 더했다.
어느 날, 참으로 우연히 멀리 있는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의 모습은 지난(至難)한 세월에 찌들어 꿈 속의 모습은 간곳이 없고, 그의 영혼도 각박한 세태에 물들어 티 한 점 찾아볼 수 없던 순정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실망의 먹구름이 내 가슴을 덮었다. 그렇게 아름답던 꿈이 운무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얼마 후 그것은 나의 눈이 염량세태에 물들어, 그의 본성을 바로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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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도 나를 보고 얼마나 실망했겠는가. 나는 그것도 헤아리지 못하고 나 자신에 대해서만 무지했다.
금빛 안장도, 사랑했던 사람도 세월이 흐르면 다 사라진다. 모두가 제행무상(諸行無常)이요 제법무아(諸法無我)가 아닌가. 모든 것은 변하고 실체가 없거늘, 영원히 불변하며 실체가 있다고 착각한다. 고뇌는 이러한 집착에서 생긴다.
시간은 모래시계 속에서 천천히 흘러내린다. 지나고 보면 빈 공간만 남는데 거기에 집착하여 얼마나 깊은 고뇌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던가. 빨리 달아나는 시간을 잡으려고 헛수고를 하고, 부정확한 실험에서 위험한 순간을 수없이 넘기고, 옳은 판단을 얻지 못하여 어렵게 방황한다.
시간이란 노련한 청소부처럼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픔도 기쁨도 다 쓸어가 버린다. 영겁의 시간 속에 다 묻어버린다. 시계 속의 모래는 잘록한 유리병 허리를 간신히 빠져 밑으로 흘러내린다. 그 모래는 세월이란 이름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린다. 모래는 자신이 시간이 되는 줄도 모르고, 세월은 모래와는 아무 상관없이 끝없이 흘러가기만 한다.
목을 벨 것 같던 나의 자성도 이 모래 속에 묻고, 나는 오늘 새로 뜨는 햇살을 받으며 천연덕스럽게 어디론가 또 가고 있다.
■ 귀향사(歸鄕辭)
돌아가련다 돌아가련다, 빈손으로 돌아가련다. 타관에서 방황하던 탕자가 어머니 젖가슴 같은 고향으로 돌아가련다. 올데갈데없이 누항(陋巷)에 떠돌다 빈 가슴으로 돌아가는 고향, 반겨줄 사람도 목 놓아 울어 줄 사람도 없는 뒷산 오리나무 숲속으로 돌아가련다.
고향을 떠나온 지 얼마만인가. 영도 철도 모르던 어린 추억만 남겨 두고 황홀한 무지개를 따라 홀홀히 떠났었지. 겁도 없이 영욕에만 눈이 멀고, 재물에만 마음을 빼앗겨 고향마저 잊고 지난 지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던고. 이제 남은 것이라곤 곧 사라질 몸뚱이 하나뿐인데 무슨 염치로 옛 둥지를 찾아 가겠다고 하는가.
까마귀는 옛 언덕에 울고, 잡풀은 시들어 둑 밑에 누웠는데 석양도 힘이 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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져 어둠에 묻힌다. 벌레들도 무섬을 타는가, 겁먹은 소리로 마구 울어댄다. 황무지 같은 고향, 그래도 정은 아직 남아 타향에 떠돌던 탕아를 거리낌 없이 맞아들여 주는구나.
고향! 내가 자란 곳인데 그곳은 왜 그리 슬픈 모습을 하고, 가끔 내 머리를 회색빛으로 물들이고 있는가. 고향은 다 옛 고향이고, 사랑도 다 옛 사랑인데 그렇게 소중한 고향이 왜 먼발치에서 희멀건 잿빛을 하고 서 있는가.
간장을 끊던 두견새도 고향에서 울었고, 상여꾼의 만가도 고향에서 청승을 떨었다. 열흘 장마에 앞방천이 터지고 할아버지가 모래에 묻힌 논바닥에서 땅을 치며 통곡했던 곳, 이제는 그 위로 무심한 차들이 마구 달린다.
고향은 언제나 시름으로 날이 저물었고, 산같이 밀린 일거리는 새벽잠을 두들겨 깨웠다. 시베리아 농노처럼 한 마디 말도 없이 일에만 찌든 동네 사람들은 세월의 강물에 거저 떠내려가기만 했다. 어쩌다 찾아가는 나를 본 삼촌은 새까만 얼굴에 주름진 미소만 띄우고 꺼칠한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유언 같은 것도 없이 운명을 순순히 따라 선산에 묻히고 그의 봉분 위에는 띄엄띄엄 잔디가 엉성하게 덮여 있다.
죽을 때는 여우도 고개를 돌려보는 고향, 어차피 되돌아가야 하는 고향이 아닌가. 어머니 젖가슴 같은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자.
누항에 떠돌다 빈 가슴으로 돌아가는 고향, 반겨줄 사람도 목 놓아 울어줄 사람도 없는 뒷산 오리나무 숲속으로 돌아가자.
■ 꿈으로 흐르는 3월의 강
얼마 전, 옛날에 나와 함께 근무했던 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문학지에서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게 되었단다. 그는 40여 년 전의 목소리로 그동안 서울로 올라와 살면서 이제 할머니가 되었다고 엄살을 떤다. 그는 느닷없이 그와 한 방에서 같이 하숙했던 여인의 안부를 묻는다. 그 물음 속에는 내가 그를 무척 좋아했는데 지금도 무슨 내왕이나 있는가 싶어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증이 솟아오른다. 몇 년을 함께 근무했던 그 여인은 어느 날 나를 조심스레 사무실 밖으로 불러내더니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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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제가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망치로 얻어맞은 듯 얼떨결에 황급히 대답했다.
“예예… 축하합니다.”
나는 닭 쫓던 개가 되어 한동안 실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그날부터 의도적으로 그의 소식을 외면했다.
40여 년이 지났다. 서울에서 걸려온 전화가 부질없이 내 마음을 충동질 한다. 대학 동창회 명부를 뒤졌다 그는 과가 다른 1년 후배였다. 근 3천 페이지나 되는 두꺼운 명부 속에서 그의 이름을 간신히 찾아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그의 주소와 전화번호 난을 보았다. 아니 그 자리에 ‘작고’라는 두 글자가 비목으로 박혀 있지 않은가.
그의 젊은 시절, 모두가 탐을 내던 그의 우아한 얼굴이 백골이 되다니. 전화를 한 서울의 그 친구가 더 놀란다.
조금 있으니 서울서 전화가 다시 걸려왔다. 그가 알아보니 8선녀보다 더 예뻤던 그가 딸만 다섯을 낳고 회갑 전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단다. 꿈 같은 젊은 시절의 추억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와 아무 연관성도 없는 백호(白湖) 임제(林悌)의 시가 떠오른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을 어디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부끄럽게도 잔을 잡을 만큼 깊은 인연이 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이미 허무한 봄의 영상이 낡은 흑백영화로 변하여 어디 흔적이나 남아 있는가. 이제 그의 영상은 너무 낡아 스크린에는 비가 줄줄 새고 있다.
옛날 아름답게 모자이크된 그의 얼굴은 긴 세월의 풍우에 모두 떨어져 흩어지고 말았다. 봄을 누가 아름답다 했는가. 60고개도 넘지 못한 그 여인은 붐을 얼마나 저주했겠는가. 그는 3월에 혼인을 하고 3월에 전근을 가면서 헤어졌다. 그리고 영영 소식이 끊어졌다. 우연히도 반세기가 지난 입춘 날에 그의 허무한 소식을 들었다.
3월의 강은 꿈 같이 흐른다. 일도창해하면 다시 돌아오지 못할 한 바가지 물로 그냥 흘러 흘러가고 있다. 그것은 모두가 한낱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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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그 꿈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욕망도 고뇌도 다 휩쓸어 꿈같은 3월이 강으로 흐르고 있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 말이 무겁게 내 가슴을 짓누른다.
■ 황혼
할아버지라는 이름은 늦은 밤에 떠나는 막차에 붙여진 이름, 어느 산모퉁이 외진 곳에 혼자 피어있는 들꽃의 이름, 떠내려가고, 잊혀지고, 고독으로 사라지는 대명사가 되었다. 사열 한 번 받아보지 못한 퇴역 장성처럼 경륜도 명예도 뒤로하고 멀리 서럽게 사라져 가고 있다.
차라리 이름을 반납하고 강원도 외딴 절에 가서 공양주가 되고 싶다. 그래도 거기에는 솔바람이 하얀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가고, 산새들은 누구에게도 차별하지 않는 소리를 지르며 심심하지 않게 주변을 맴돌아 주지 않겠는가. 세월을 탕진하고 바둑 대전의 초읽기에 몰려 자신의 종말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
촉박한 시간을 외면하고 죽림칠현처럼 느긋하게 행동하는 나의 속내를 남이 알까봐 두렵다. 가장 강했던 아버지라는 이름의 자리를 물려주고, 할아버지 자리로 올라서면서 나는 갑자기 외롭고 낯선 존재가 되고 말았다.
젊었을 때는 나이를 잊고 살았다. 그때는 나이를 물으면 내 나이보다 불려서 말하곤 했다. 꽃다운 나이보다 더 원숙해 보이고 더 노련해 보이고 싶었다.
그때 젊은 나이는 어떤 것에도 겁나지 않는 방패도 되었고, 창도 되었다. 취직을 해도 되고 사랑을 해도 되고, 어느 학교에나 입학을 해도 되었다. 유학을 가도 되고, 군에 지원을 해도 되고, 비행사, 운동가, 문학가, 어디에 도전해도 누가 뭐라지 않았다.
그때 그 젊은 나이는 희망이요, 용기요, 재산이었다. 돈보다 더 소중한 젊음이 훌쩍 지나가자 황혼은 귀신처럼 달려와 내 나이를 재촉하고 있다.
아버지라는 권위적인 이름에 우쭐할 때도 있었지만 곳곳에서 그 나이가 그물에 걸렸다. 어떤 일이든 처음 시작하기가 두려웠다. 주어진 일을 계속하면서 궤도에서 탈선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다가 어느새 세월의 밥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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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할아버지가 되었다. 그것은 피동적으로 내가 그 이름 속에 갇히게 된 것이다. 비로소 인생이 무엇인가를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안경을 끼고 안경을 찾고, 인생을 살면서 인생을 찾게 되었다. 갑자기 고독해지고 황혼의 씁쓰레한 기운이 온 전신을 휩싸고 만다.
할아버지라는 이름은 종점의 대명사가 아니고 금자탑 위에 돌을 하나 더 쌓아 보탠 값진 역사가 아닌가. 많은 시간이 그 탑 위에 축적되고 그 시간들은 영광의 색깔로 빛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을 흠모하고 가치 있게 여기려는 사람은 드물다.
이제는 모든 것을 잊고 남은 날을 헤아리지 말자. 지난날을 되새기지도 말고 후회 같은 것은 아예 생각지도 말자.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다 죽는다. 그리고 모든 것은 허무하게 떠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할아버지도 결국 죽는다. 그러나 사라질 뿐 아름다운 추억은 오래 남을 것이다.
■ 이발소 그림
지금 회갑을 지난 나이쯤 되면 이발소 그림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는 이발도 오래 하고 정성들여 했다. 머리를 깎고, 목 뒤까지 면도하고, 머리 비듬 긁어주고, 세발하고, 고대하고, 기름 바르고, 또 귀지까지 파내 주었다. 그 종목만 열거해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
그러나 그때 이발소 건물이나 시설은 아주 열악했다. 의자에 앉아 정면을 보면 거울은 아주 작아 머리 모양만 볼 수 있었다. 그때는 큰 거울을 만드는 기술도 부족했지만 워낙 비싸니까 집안에 걸어 놓는 거울보다 조금 더 큰 거울이 걸려 있었다. 자연히 그 위에 걸려 있는 큰 그림이 이발소의 분위기를 좌우하게 했다.
주로 산수화가 그려져 있었다. 산, 초가집, 그 앞으로 강이 흐르고 강 주변에는 나무가 우거져 있었다. 어떤 그림은 돛단배가 조그맣게 강 위에 떠 있고, 가끔 목동이 소를 타고 가는 그림도 볼 수 있었다. 이 그림들의 특징은 아주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것과 한번 이발소에 걸리면 그 그림이 바뀌는 것을 보기 전에 단골손님들이 어디론가 먼저 떠난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발하는 긴 시간 동안은 이 그림을 봐야 하고, 그 그림은 세월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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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례하여 정이 들고 내 머릿속에는 그 모습이 고향만큼 잊을 수가 없게 마음 깊이 각인되었다.
내가 중년이 되자 이발소 그림이 바뀌었다. 밀레의 만종(晩鐘)이 걸렸다. 어디선가 ‘만종’과 ‘이삭줍기’를 대량으로 복사하여 돌린 것 같다. 나는 6·25를 겪으면서 영어 수학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으니 미술, 음악, 체육 시간은 뒤로 밀려 호국단 훈련 시간으로 대체 되었다. 워낙 배운 게 없어서 ‘만종’의 기도하는 부부 옆의 소쿠리에는 감자가 담겨 있는 것으로 알았다. 내 나이 늘그막에 농부의 경건한 감사 기도를 담은 그림으로 여겼던 만종의 새로운 비밀을 알게 되었다. 감자 상자로만 알았던 그 통 속에는 가난 속에 불쌍하게 죽은 어린아이의 관이 숨겨 있다는 것이었다. 너무 비통하게 여겨지면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농부의 참담한 비애를 더 깊게 느끼게 되었다.
미술가들은 구상성이 두드러진 그림은 이발소 그림이니, 인테리어용이니 하며 아예 배운 자의 독선을 함부로 내뱉곤 했다. 백화점에 진열된 비싼 그림이나 리어카에 늘어놓고 파는 헐한 그림도 그 가치는 그 장소에 합당한 철학과 분위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이발소에 피카소그림이 어울리겠는가. 겸제 정선의 ‘금강내산전도(金剛內山全圖)’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예술은 그리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일에 맡는 옷이 편리하고 마음에 든다. 달구지에 안락의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걸터앉아 가는 것이 제격이다.
이제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 나에게 누가 훔쳐갈 만큼 큰 가치를 지닌 그림도 없다. 그냥 소박하면서도 가식이 없는 사실적 이발소 그림이 좋다. 그리고 값없는 청풍과 임자 없는 구름처럼 떠돌다가 이발소 그림처럼 소박한 기억을 남기고 떠나고 싶다.
■ 동병상련(同病相憐)
‘죽음은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 새로운 결단에 도움을 준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안 되는 말을 스티브 잡스가 남겼다. 그러나 죽음 앞에 서 본 사람은 그 말의 의미가 새로운 발명을 위한 연구자의 배수진임을 안다. 죽음 자체는 잡스의 돌격적 행동 지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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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필연적 인간생애의 끝이며 전부일 뿐이다. 가장 확실한 것은 죽는다는 것이고, 가장 불확실한 것은 언제 죽느냐 하는 것이다.
나는 암의 후유증으로 매일 통증에 시달리고 있다. 병원에서는 진통제만 준다. 센트룸도 주지만 그것은 누구나 먹고 있는 아주 흔한 영양제일 뿐이다. 암이 재발하여 6개월간 항암치료를 받은 끝에 바이러스도 사라지고, 다른 부위에도 이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계속 아프다.
통증이 조금 심하면 습관처럼 죽음을 생각한다. 죽음 앞에는 온갖 생각이 다 동원되고, 결국 낭떠러지에서 낡은 줄에 매달려 있는 비굴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일본의 어느 유명한 스님을 생각해 본다. 그가 죽기 전, 제자들이 모여 앉아 그 큰스님에게서 무슨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대승은 애절하게 말했다.
“나는 죽기 싫다. 정말 죽기 싫다.”
그도 남들처럼 죽었다. 죽음 앞에서 누구나 비굴해지는 것이 진솔한 죽음의 참모습이다.
나는 죽음에 대하여 초연하게, 아주 어엿하게 그리고 명언을 남기고 죽는 위인들을 의심한다. 그것은 남의 눈과 귀를 속이는 위선이 아닌가 싶기 때문이다. 필연적 자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자연현상인데 거기 무슨 현학적 정의와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우리는 누구나 보균자다. 우리의 일생은 이 균과의 싸움이고, 그와 공존하는 지혜를 터득하는 교육장이다. 이 싸움에서 영원한 승자는 없다. 이 병균과 동거하면서 언제나 젊게, 즐겁게, 가치 있게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원칙을 얌전하게 따르는 자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자정이 지나 닭이 홰를 치며 길게 울음을 터뜨리면 귀신도 제 집으로 돌아간다. 언젠가는 생의 종말이 온다. 이때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울어줄 상련자(相憐者)가 있다면 얼마나 큰 위안이 되겠는가.
세상에 무균자는 없다. 꿀처럼 단맛만 보유한 자도 없다. 괴롭고 험한 세상에서 동병상련으로 서로 위로하고 격려한다면 또 다른 행복을 새롭게 창조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제 떠나야 하는 가을 단풍잎도 한데 모여 서로 비비대며 가을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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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바라기의 기도
■ 해바라기의 기도
누가 인생을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라 했던가. 생경하고, 낯설고, 춥고, 고독하고 잠은 오지 않고, 바람 소리만 쌩쌩 나는 낯선 여인숙, 이 짧은 하룻밤도 너무 고달파 닭이 울 때까지 뜬 눈으로 새운다.
이때 나를 도와줄 사람 하나 없음을 한탄하며 자신이 이 세상한 구석에 홀로 서 있다는 데 놀란다.
하는 일마다 설상가상으로 잘못되어 가기만 하는 머피의 법칙을 누구나 당한다. 편지를 부치고 나면 기가 막힌 문구가 떠오르고, 급한 행사에 가려고 미용실에 가면 꼭 사람이 밀려 있고, 흔들리는 이는 꼭 노는 날 아침부터 아프기 시작한다. 라디오를 틀면 제일 좋아하는 노래의 마지막 부분이 나오고, 오랜만에 동네 목욕탕에 가면 꼭 정기 휴일이다. 집에 가는 길에 먹으려고 사 넣은 초콜릿은 언제나 쇼핑백의 맨 밑바닥에 깔려 있다.
날을 받아놓고 보면 비가 올까봐 조바심한다. 소풍 날, 운동회 날, 입학식 날 비가 오면 얼마나 우울할까. 그리고는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생각해 본다. 성질이 사나운 사람은 꼭 누구 때문인가를 따진다. 그 학교 교장은 일마다 머피의 법칙에 걸리고, 원성은 혼자 뒤집어쓴다. 하나님은 나만 시험의 구렁텅이에서 구해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한다.
소설가 박완서님은 세상의 빛이 되라는 말씀을 따르기가 어렵다며 주님의 빛을 따르는 해바라기가 되겠다고 했다. 빛이 되자면 자신의 몸을 태워야 하는 데 그것이 어렵고 자신이 없어 “그 대신 제 언행이 주님의 빛을 기리며, 부지런히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가 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했다. 그는 힘든 세상을 피해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문학적 애교를 지니고 있었다.
세상은 참으로 힘들다. 그래서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할 때가 많다. 낯선 여인숙의 하룻밤도 지겹게 느껴진다. 하나님은 나만을 외면하고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인숙에는 외로운 사람들이 모인다. 정처 없는 길손들이 모인다. 그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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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기도가 필요하다. 나는 마음의 평안을 간구하지만 하나님의 손길은 멀기만 하다.
나는 기도한다.
주여! 천 년도 수유(須臾, 말미를 받음)같은 이 짧은 여인숙의 하룻밤을 주님의 능력으로 평안케 하여 주시옵고, 머피의 법칙 속에서 헤매고 있어도 남을 원망하지 않고 칭송하게 하여 주옵시며, 언제나 어린애 같은 해바라기가 되어 하나님만 바라보며 영생의 기쁨을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 하나님과의 약속
나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나의 아픈 곳을 낫게 해주면 교회에 열심히 다니면서 남을 위하여 좋은 일을 성심으로 하겠다고 기도했다. 그때는 배를 30센티미터나 째고, 담낭을 몽땅 들어내는 큰 수술이었다. 수술이 잘 끝나고 다시 생기를 찾자 이내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렸다.
나는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한다. 그러나 그것을 지키고 실행한 것은 별로 기억에 없다.
약속 뒤에는 핑계가 많다. 지키지 못할 야속을 해서 우선 그 자리를 모면해 놓고 그 뒤에 핑계로 그 약속을 정당화 한다. 아주 소중하게 맺은 언약을 이행하지 못할 때는 거창하게 ‘운명’이라는 용어로 방패를 만들고 그 위기를 모면한다.
약속은 유치하게 할 때가 많다. 가장 천진하게 위장을 하고 어린애 같은 소리를 한다. 가장 순진한 체 성경에 나오는 말씀까지 인용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아무리 회개를 해도, 용서받지 못할 이 식언들이 세월의 긴 시간 속에서 아무 탈 없이 지나갈 수 있는 걸 보면 하나님은 무척 관대하다.
‘귀거래사’를 부른 도연명도 당초 자신에게 한 약속이 농촌으로 가자고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귀영화, 높은 벼슬을 꿈꾸었을 터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으니 귀거래사로 체면을 가다듬고 고향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소설가 김훈은 “나는 정의로운 자들의 세상과 작별하였다.”고 비통해 하며 초야로 돌아갔다. 그는 자신의 절박한 오류들과 더불어 혼자 살아가기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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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거기서 ‘칼의 노래’를 썼다. 나도 차라리 멀리 어디론가 떠나가 이 죗값들을 벗어버리고 싶다.
고등학교 시절 악대부에서 함께 나팔을 불던 세 벗은 늙어서도 서로 만나 함께 연주해 보자고 굳게 약속했지만 삶에 찌들어 그 언약을 지키지 못했다. 트럼펫은 서울에, 테너 색소폰은 제천에 알토 색소폰 나는 경산에 아직도 살아 있지만 한 번도 함께 만나질 못했다. 첫눈 올 때 만나자던 첫 사랑의 맹세는 둔탁한 세월의 소리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새마을 교육장에서 며칠 밤을 지새우며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죽을 때까지 서로 연락하자던 그 공무원들은 반년을 넘기지 못하고 소식을 끊었다. 새로운 사조는 그것마저 비웃고, 그때 그 이야기들을 부끄러운 전설로 만들었다.
몇 년 전 다시 큰 병을 얻었다. 살아남기 힘든 백혈병이라 했다. 이제는 하나님께 살려 달라는 기도도 어떤 약속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전에 큰 병을 낫게 해준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염치가 없었다. 그래도 살려 주시리라는 기대감마저 떨칠 수는 없었다. 아내는 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기도했다.
그 무서운 병이 기적처럼 나았다. 진심으로 감사 기도를 했지만, 그 은혜 속에 담겨진 무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이제는 아예 철면피가 되어 부끄럼도 없이 기도한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을 배신한 적이 없습니다. 게을러서 그랬습니다. 게으른 것이 무슨 죄가 됩니까. 용서하시고 혹시 세 번째 큰 병이 나더라도 꼭 살려주시옵소서. 이번에는 꼭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 섣달의 기도
섣달, 내 생애의 한 토막이 되는 이 무거운 시간에 지난 일 년을 되돌아보며 참회의 대상들만 남아 있다. 잃은 것보다 이룬 것이 더 많고 버린 것보다 거두어들인 것이 더 많다고 자부하지만 나목으로 서서 찬바람을 형벌로 맞는 이 시간, 나의 위선과 탐욕과 불의와 인색함이 적나라하게 노출되고 만다.
나는 이 섣달을 남은 달력 한 장을 떼고 새해를 맞이해도 지난해의 회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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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 새해 달력에 달라붙어 나를 괴롭힐 것만 같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 받을 것이라고 하셨으니 이 말씀으로 내 마음이 진정되기를 기원한다.
주여! 진실로 이 섣달의 그믐밤이 지나고 새해 밝은 햇살이 온 누리를 비칠 때 검고 더러운 것을 벗고 하얗게, 새하얗게 다시 태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섣달의 해는 너무 짧고 어둠은 쉽게 장막을 친다. 새해에는 정말 새로운 인간이 되고자 기도하지만 검은 너울을 벗을 시간은 너무 짧다.
새해 아침의 밝은 빛을 말없이 보내주시고 사랑으로 감싸 주시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얼마나 천방지축 허세를 부리며 잘난 체 했던가.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쇠퇴기에 접어들어 자조에 빠져 있다.
새해의 햇빛을 받아도 더 자랄 수 없고, 청량한 바람을 맞아도 더 싱싱해 질 수 없는 황혼, 섣달의 무상함을 그대로 받아야만 하는가. 그래도 거추장스런 옷들을 다 벗어버리고 내년 봄에는 새싹으로 다시 돋아나고 싶다. 아름다운 영혼으로 다시 살아나고 싶다.
주여, 얼음 위의 팽이처럼 채찍으로 거두어 주시고,
긴긴 겨울 나목에게 후려치는 모진 칼바람으로 저를 뉘우치게 하소서.
저의 고독한 회개를 받아주시어, 이 섣달의 참담한 고통을 벗고 찬란한 봄날에 이르게 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캄캄한 폭우 뒤에 일어서는 오색 무지개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 함께 비를 맞는 사람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나는 한 때 비를 같이 맞겠다고 장애아들이 공부하는 특수학교 근무를 희망했다. 그곳은 고아들 중에서 지체부자유나 정신지체 아이들만 모아 놓은 작은 학교다. 장애아들만 모아 놓은 사회시설에서 독자적인 교육을 감당할 수 없으니 교육청에서 그곳에다가 조그만 학교를 하나 만들어 놓았다.
가슴으로 사랑하고, 몸으로 그들과 함께 생활하겠다는 무지개 같은 꿈을 안고 들어갔는데 금세 시련이 나를 덮쳤다. 남들이 나를 보는 시선은 아주 차가웠고 내가 무슨 부정을 저질러 좌천되었다고 보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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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경사스러운 자리에는 나를 초대하지 않았다. 장애아들과 생활하는 내가 축복을 받을 자리에 나타나면 부정을 타게 된다고 생각했다. 내 몸은 온통 전염병 보균자처럼 되었고, 나의 영상은 스쳐만 가도 재수가 없는 그림자가 되었다.
에로스에서 아가페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나는 장애아들과 생활하면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장애아들은 자신이 조금도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신이나 육체의 불편한 모습은 숨기지도 않고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지도 않는다. 더구나 비관하거나 좌절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건강하고 부유한 자가 오히려 더 불행해하고 비관한다. 인간은 끊임없이 만족하지 못하는 존재로 진화되었는가. 이 세상의 원초적 공통점은 모든 것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이나 넉넉한 사람이나 자신의 주머니를 채워도 채워도 항상 부족해 한다. 가난한 사람들보다 부자들이 채워지지 않는 주머니에 더 실망하고 있다.
3월 초, 교실은 냉기로 가득 찼다. 장애아 5,6명이 한 반으로 된 교실 한 칸은 추위를 더 느끼게 했다. 나는 이들을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다. 모든 교실 바닥에 카펫을 깔았다. 아동들이 몇 명 되지 않으니 한 장식씩이면 족했다. 시설에서 안고 온 전신마비아를 거기에 눕히고 담요로 덮어주었다.
먹을 것을 가져 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 세상은 착한 사람이 더 많고, 함께 비를 맞으려는 사람도 불어났다. 신기하게도 성하지 못한 사람들의 세계에서 아름다운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되었다. 세상은 엄한 법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니고, 할머니 손 같은 자비로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배우 엄앵란 씨가 빵을 한 차 싣고 찾아왔다. 아이들은 빵보다 사인받기를 더 좋아했다. 자신의 몸도 주체도 못하면서 유명한 배우의 사인은 꼭 받아보고 싶었던가 보다. 그는 전 교실을 일일이 돌면서 아이들을 안아주고 다독여 주었다. 아이들은 공책에 쓰인 사인을 들고 법석을 떨었다. 그날은 모두기 행복했다.
나는 큰 바위만 소중하게 여기고 조약돌은 등한시했다 거품 같은 허영에 온 마음을 쏟았다. 물고기 눈처럼 코밑만 보고 멀리 보지를 못했다. 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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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인데,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더 확실하게 보려면 뜨거운 마음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문구멍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마음을 활짝 열고 작은 소망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행복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내가 장애아들과 함께 비를 맞고 있을 때, 행복은 무지개 같은 오색 옷을 입고 우리를 찾아왔다.
■ 청도역의 외갓집
청도 기차역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기다리다보면 언제나 약간의 시간이 남아 돈다. 천천히 대합실에 들어서면 그 안에 아담한 방으로 꾸며진 대합실이 또 하나 있다. 옛날 2등 차표를 소지한 승객만이 들어가는 특실 같은 느낌이 들어 조금 주뼛거리다가 안으로 들어가면 꼭 다방 같은 기분이 들어 참 좋다.
편안하게 의자에 앉았다가, 벽을 둘러보면 이호우 시조시인의 시가 첫눈에 들어 온다. 첫 수를 읽고 다음 수에 접어드는데 벌써 가슴이 달아오른다.
원두막에 달이 오면 노래도 불러보고
벌레 우는 밤은 추억도 되새기며
외롬이 싸주는 정에 담뿍 취해도 보자오.
대구에서 두 역밖에 떨어지지 않은 이 시골 역은 그 분위기가 먼 곳에 와 있는 듯 외로운 느낌마저 들게 한다. 아예 역원도 지켜서 있지 않은 개찰구를 나가면 오른 쪽으로 시골 농촌에서만 볼 수 있는 농기구가 진열되어 있다. 이름을 ‘청도역 전통 생활문화관’이라 했다. 쟁기, 달구지, 물레, 호미, 괭이 등이 열거되어 있다. 전시장을 지나면 그곳에는 그림 같은 ‘외갓집’이 나를 맞이한다. 안채, 사랑채, 헛간까지 다 있는데 방문은 열려 있다. 꼭 옛날의 외갓집과 모양이나 크기가 너무 빼닮아 외할머니를 찾아 두리번거리게 한다. 거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새마을호 객차도 한 량 전시되어 있지만 거기는 가보고 싶지 않다. 외갓집에 내 혼이 몽땅 팔렸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다 세 살부터 부모와 떨어져 할아버지 양위분 슬하에서 자라게 되었다. 자연히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게 되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500미터
쯤 떨어진 곳에 외할머니 댁이 있어 위안이 되었다. 날만 새면 나는 연봉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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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갓집에 가서 외할머니를 만나는 것이 일과처럼 되었다.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막내딸이었고,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아들 둘도 미성으로 세상을 떠났다. 딸 둘도 출가시키고 나니 혼자가 된 외할머니는 막내딸에게 온 정성을 쏟아 부었다.
열여덟 살에 시집을 보낼 때는 사위에게 집 한 채와 논 세마지기를 사주었다. 어린 나이에 고시 합격으로 철도국에 다니는 사위가 너무 자랑스러워 외할머니는 입버릇처럼 ‘조선 천지에 둘도 없는 사위’라고 자랑했다.
내가 할아버지 집에 와 있을 때, 외할머니는 외손녀는 많았으나 외손자는
나뿐이었다. 당신은 나를 장손처럼 소중하게 생각하며 애지중지 했다. 더구
나 세 살부터 어미와 떨어져 있는 내가 무척 불쌍하게 여겨져 나에게 온갖
정성을 다 쏟았다. 내가 외할머니 댁에 가면 화롯불 위에는 된장이 보글보글
끓고 있었고, 아랫목 이불 밑에는 놋그릇 하나가 뚜껑을 뒤집어 쓴 채 묻혀
있었다. 그 안에는 하얀 쌀밥이 가득 담겨 있었다.
할아버지 댁은 작은 아버지 두 분과 나까지 합쳐 다섯 식구가 살았다. 무척
가난하여 외할머니가 사 준 집에서 세마지기 논농사를 지어 근근이 호구를
지탱했다. 언제나 보리밥 아니면 호박죽이나 국수로 연명했다. 그런 생활을
하다가 외할머니 댁에만 가면 내 앞에 내어 놓는 하얀 쌀밥과 고기까지 넣
어 빡빡하게 끓인 된장을 마주하게 되니 나는 걸귀가 들린 듯 정신없이 먹
어댔다. 할머니는 막내딸을 보는 듯 불쌍한 내 모습을 뚫어지게 보고 계셨
지만 나는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체 막는 데만 정신이 팔렸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이제 기억에 남는 것도 별반 없는데 외갓집만은 그때
모습이 하나도 손상되지 않고 또렷이 남아 있다. 그런데 아! 청도역에서 70
여 년 전의 외할머니 댁을 만나게 되다니, 너무 감격스러웠다. 다시 방안을
들여다본다. 외할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10년을 외할머니 사랑 속에서 자라다가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사범
학교에 입학시켜야 된다는 핑계로 아버지는 나를 빼앗듯이 데리고 갔다. 떠
나던 날 외할머니는 동구 밖까지 따라 오면서 울음을 그치질 못했다.
내가 고향을 떠나고 얼마 진지 않아 외할머니는 세상을 하직했다. 나는 멀
리서 임종도 못하고 울음으로 외할머니를 그리워 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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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청도역을 출발한다. 나는 차창 너머로 멀어지는 외갓집에서 눈을 떼
지 못한다. 이제 보이지 않는 외갓집, 빈 차창에 입김을 불고 이호우님의 시
조 마지막 수를 손가락으로 그려 본다.
넓은 하늘 아래 목숨은 푸른 것이요
가슴에 이끼를 가꾸긴 피가 진하지 않으오
사랑이 해처럼 밝은 곳 임이여 나와 가자오.
■ 소인 없는 편지
3월에 웬 눈이 그렇게 많이 옵니까? 사흘이 멀다 하고 궂은 날이 계속되더
니 기어이 오십 몇 년 만에 가장 많은 눈이라며 신문·방송을 뒤흔들어 놓았
습니다. 그러고도 날씨는 자주 변덕을 부리더니 3월 11일, 짙은 안개에 실은
슬픈 소식이 전해왔습니다.
법정 스님이 입적한 것입니다. 작년 2월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 하시고,
5월에는 장영희 교수가 떠나고, 이해인 수녀는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암으
로 투병중이라는데, 법정 스님이 눈 오는 3월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모두 자식도 없고, 돈도 없지만 영원히 간직할 좋은 글을 남기신 분들인데
저 세상에서 왜 자꾸 데려가는지 모르겠습니다.
욕심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집착하는 마음이라 했는데, 자식도 재산도
없이 무소유만 남기고 새벽에 지는 달빛처럼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무주상보
시(無住相布施), 누구에게 좋은 일 했는지조차 그것을 자신의 마음속에 담아
두지 않으려 했으니 그 삶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G님!
당신은 오래 전부터 그분들의 글 속에서 인간의 내면세계를 발견하고, 당신
의 외로움을 위로받았다고 했지요. 글을 쓰면서 그분들의 깊고 따뜻한 가슴
을 사랑했지요. 글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으려 했고, 그것을 실현해 보려
고 애를 쓰던 당신의 모습이 선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미워하는 것보
다 더 힘든다고 하면서, 회자정리(會者定離)를 예고했습니다. 아예 헤어질 것
을 전제하고 만난 것 같습니다.
당신은 인간적인 고통과 아픔을 글 속에 담고, 그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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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과 무한으로 연결되는가를 보여주려고 무척 고심했습니다. 파고 또 파
도 고뇌를 씻어줄 샘물이 나오질 않자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어디론가 떠
나고 싶다고 했지요. 당신은 제행무상(諸行無常)에서 헤어나지 못함을 무척
괴로워했고, 일체개고(日切皆苦)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한탄했습니다.
G님.
6년 전 3월, 내가 백혈병으로 입원하기 전날, 당신과의 마지막 통화에서 평
생 잊을 수 없는 말을 내 가슴에 새겼습니다. 내가 입원하면 다시 보기가 힘
들 것 같다고 하자, 당신은 아무 말도 못하다가 모기소리 만하게 “잊지 마세
요. 제가 언제까지나 선생님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향내를 맡고, 그 말을 기억하는 동안 나는 죽
지 않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가을이 되자, 낙엽처럼 당신의 소식은 끊어지고, 예쁜 모습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는 이 슬픔으로, 정호승의 시 같이 선암사 해우소 앞에
가서 실컷 울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인생에서 여러 번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하여 단 한 번도 술 한 잔 사 주지 않았음을 서운해 했습니
다.
이것은 원망이 아니고 흐트러지는 내 마음을 추스르는 몸부림이었는지 모
르겠습니다. 정말 살아 있다는 건 아프고도 아름다운 것이었습니다. 죽지
않으려고 몸부림칠 만한 가치가 있는 세상이지만, 사랑을 영원히 간직하지
못하는 무상(無常)을 원망합니다.
G님.
나는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당신이 눈 덮인 어느 산야 양지바른 곳에서 이
름 모를 야생화로 다시 피어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내가 병원에
서 살아나와, 당신에게 거수경례로 생환 신고를 하던 그 모습으로 다시 만나
고 싶습니다.
■ 출구(出口)
뒤돌아보면 나는 언제나 그 먼 길을 혼자 걸어왔다. 고독은 숙명인가. 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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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영원히 함께 해주는 사람도 없고, 홀로 겪어야 하는 고뇌를 피해갈 수도
없다. 왜 인생을 어렵게 산술 문제로 만들어 억지로 풀려고 하는가. 인생은
그저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것이 아닌가.
이와 반대로 불행은 홀로 오지 않는다. 엎친 데 덮쳐 슬픔을 가중시킨다.
역사는 불행했던 일들을 모아 놓은 발자국이고, 고독의 몸부림을 단막으로
연출한 소인극이다.
정의나 행운은 언제나 뒷전에 밀려나 있고, 불의와 불행이 활개를 치며 설
쳐댄다. 어쩌다 불의가 한 눈을 파는 사이 정의는 수줍게 제 모습을 드러내
다가 희미하게 밝아오는 아침 햇살에도 별처럼 사라지고 만다.
우리는 언제나 불안한 시간을 헤쳐 나가야 하는 운명을 뒤집어쓰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고독을 두려워하고 있다. 어렵고 힘들 때 누군가 나와 동행해
주기를 기대하지만 그런 행운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누구나 원한다. 동행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도 받고 싶고, 위로도 받고 싶
고, 함께 울고 웃으며 오래오래 살고 싶다. 그것은 한낱 기도속의 소망에 지
나지 않지만 신을 믿는 사람은 영원히 그가 함께 해 주리라 믿는다. 사랑하
는 사람도, 친구도, 자식도 함께 떠날 수는 없다. 고독을 이겨내고, 외로움을
참으며, 혼자 살아가는 지혜와 힘을 간직하는 수밖에 없다.
나도 혼자 왔다가 혼자 간다. 어디서 왔는지, 어디로 가는지 전연 모른다.
분명한 것은 혼자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과 절대적 고독을 떨쳐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외경과 연민은 고독에서 출발하고, 고독의 종착역에서는 누구나
혼자밖에 통과할 수 없는 출구가 기다리고 있다.
■ 옛 노래
옛 노래는 언제 들어도 좋다. 비록 유행가로 흘러가고 있지만 지난날 우리
가 살아왔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어 정이 깊이 들었다. 지금 유행하는 노
래는 너무 어렵다. 가사가 무슨 말인지, 박자는 불규칙하고 옆에서 도와주는
무용수의 낯선 율동은 내 정신을 빼놓는다. 오랫동안 정착된 우리 정서와는
잘 맞지 않는다.
젊은이들 보기에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는 양반 칼싸움하는 것 같아 싫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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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양이다. 양반들은 비록 적이라도 단번에 죽이지 않고, 여차여차해서 너를
죽인다고 장황하게 설명을 하고, 그 말에 승복하지 않을 때는 칼 솜씨만 보
여주고 다시 설득을 한다. 그리고 잘못을 뉘우치면 살려준다.
젊은이들은 펜싱 같은 칼싸움이라야 직성이 풀린다. 거기 어떤 명분을 붙이
면 잔소리가 된다. 속도감과 긴장감이 있고, 군소리가 없다. 결국 그 싸움
은 피를 봐야 끝이 난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연말이면 나는 꼭 연하장을 보낸다. 나부다 나이 많은 어른, 그리고 신세를
진 사람들에게 꼭 연하장을 써서 보낸다. 그런데 나에게 오는 연하장은 핸드
폰속에서 문자로 고개만 까딱하고 만다. 불쾌하지만 어쩔 수 없다.
현 세대는 소셜네트워크로 방안에서 컴퓨터 마우스 하나로 정보를 얻고, 보
내고 한다. 가상의 현실에서 새로운 사회를 이루어 나간다. 내가 보기에는
방안에서 혼자 싸우는 구들장군 같지만 오늘날 사회는 그것으로 인해 정치,
사회가 뒤집어지기도 한다. 결국 노래도 급하게, 군소리 없이 문자 메시지
같이 민첩해야 살아남는 것 같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 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 어린 낙화암의 그늘 속에서
불러보자, 삼천 궁녀를.
옛 노래는 가사가 좋다. 희로애락과 인생이 그대로 담겨 있다. 추억이 있고
애수가 있다. 천 년 전 슬픈 역사가 옛 노래로 되살아나고, 그것은 한 맺힌
우리의 가슴을 처연한 감상에 젖게 한다.
그런데 젊은이들은 옛 노래를 업신여긴다.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까지 골동
품 취급을 한다. 그들은 쏜살같은 세월이 찬란한 오늘을 이내 내일로 넘기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내일이 없는 오늘은 없다. 어제가 없는 오늘도 없다. 오늘 불렀던 노래가
내일이 되면 옛 노래가 되고, 내일 불려 질 노래도 오늘 벌써 옛 노래로 변
하고 있다. 오늘은 어제를 폄하하고, 내일은 오늘을 업신여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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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팝이 뜬다. 세시봉은 옛날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시 인기를 얻지만 젊은이
들이 열광하지는 않는다. K팝을 열광하는 영국에 가서 ‘백마강’을 부른다면
누가 들으려고 하겠는가. 세월은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 내고, 오늘 불렀던
노래는 어제의 노래로 밀려난다.
4. 운명의 함수
■ 운명의 함수
내가 운명에 대해여 가장 큰 감동을 받은 때가 중학생 시절, 음악 시간이었
다. 선생님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에 대하여 설명을 하면서 첫 음으
로 나오는 ‘따따따따아’ 하는 비장한 소리는 운명이 이렇게 문을 두드리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 나는 운명이 무척 무섭게 느껴지면서 평생 그에게 한
번도 도전장을 던져보지 못했다.
선생님은 그 곡의 정식 이름이 베토벤의 ‘C단조 교향곡’이라는 것도, 그 곡
속에는 젊은 베토벤의 도전, 거센 숨결, 갈등, 좌절과 그 좌절을 딛고 성숙된
자아로 발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엮여져 있다는 것도, 또 고뇌를 통한 자아
확립의 의지와 그 성취에의 기쁨을 그대로 나타냈다는 설명도 해주지 않았
다. ‘따따따다아’도 피아노나 음향기로 들려준 것이 아니라 입으로 불러주면
서 겁을 주었다.
그날 이후, 운명이 나를 짓누르는 무게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지금도 운명이 느닷없이 ‘따따따다아’하고 달려들 것만 같아서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그 속에 담겨 있는 운명의 함수는 나의 행동과 보이지 않는
운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나는 행동에 조심
을 하고, 그의 눈에 벗어나지 않도록 신경을 쓴다. 그래서 항상 저만치 운명
과 거리를 두고, 그가 내 가까이 오는 것을 피하고 있다.
운명의 함수는 아무도 모른다. 평소 내가 쏟은 정성이 그 함수에 아무 영향
을 주지 못한 것 같다. 함수 방정식은 정확하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변수
X에게 정성을 쏟아도 함수 Y가 꼼짝도 하지 않는 불합리한 관계가 종종 일
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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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공한 사람들의 겉모습만 보고 부러워하거나 질투를 한다. 그러면
서 내 운명과 비교하고 공평하지 못한 부분을 탓한다. 운명은 각기 다른 함
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가 없다. 성공한 사람은 성공하기 까
지 얼마나 어렵고, 힘들고, 불행했던가를 강조한다. 그 노력이 함수에 영향을
주었다고 굳게 믿는다.
그것은 오로지 남보다 백 배 천 배 더 노력했다는 의미다. 그러나 우둔한
사람들은 그 함수에는 관심이 없고, 그의 고생과 나의 고생의 무게만 비
교하고, 거기에 대한 대가의 차이가 불공평하다고 따진다.
운명의 함수 관계를 가장 명확하게 단정 지어 놓은 것이 ‘명심보감’ 첫머리
의 계선편(繼善篇)이다. ‘착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하늘이 복으로써 이
에 보답하고, 착하지 못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재앙으로써 이에 보답한
다.(僞善者 天報之以福 爲不善者 天報之以禍)’
그래서 나는 어렵고 힘든 일이 내 앞에 닥쳐오면 선한 행동으로써 그 불행
을 예방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다진다.
어느 시인이 믿을 수 없는 운명에 대해서 처연하게 노래했다.
산은
찾아가는 사람에게 열리고
운명도 그러하리라 나는 믿는다.
눈물 몇 줌 흘린다고
당신께
세상이 안겨 오리라 믿었는가…….
그저 그리움만 태운다고
당신 가슴에 꽃이 피던가, 어디?
운명은 제멋대로 가고, 나는 그 풍랑에 휩쓸려 지금까지 떠내려가고 있다.
평생 운명을 피해 조심조심 다녔지만 알 수 없는 함수를 지닌 운명의 꽃은
나를 위하여 한 번도 활짝 웃어주지 않았다.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것들
살아가다보면 깊은 산 속에 유배당한 것처럼 암담해질 때가 있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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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에도 달이 있고 산이 있고, 맑은 물이 있다는 것을 발견할 때 한 줄
기 위안을 얻는다.
우리는 가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외딴 언덕 아래 문짝 하나만 달린 통나
무집을 본다. 그 안에서 겨우 목숨만 부지하며 간신히 살아가는 등 굽은 노
인을 발견할 때 누구나 연민의 정을 느낀다. 우리는 그를 사랑해야 한다.
사람들은 높은 데만 쳐다보고 거기에서 내려지는 은총을 기다린다. 그는 아
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감이 저절로 떨어져 입속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린다.
그것은 고뇌만을 안겨주고 시간만 멀리 달아나게 한다.
너무 낮은 곳에 서서 더 내려갈 곳조차 없는 무연고자가 제 분수대로 살아
가려는 초심을 칭송하며 사랑해야 한다.
나물 몇 점을 앞에 놓고 행인의 관심을 기다리는 야윈 여인을 사랑해야 한
다. 그는 오직 나물 뜯는 일밖에 모르고, 수요자도 파악하지 못한 채 저자에
종일 앉아 세월만 헤아리고 있다. 이제 더 가난해질 아무 것도 없는 그를
진정으로 사랑해야 한다.
좁은 방에 샘물처럼 가득 찬 시설 아동들의 눈망울을 사랑해야 한다. 여느
집 아이들보다 굶주리고 남루하고 찌든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눈망울만은
하나님이 주신 모습 그대로가 아닌가. 그들은 신이 잠시 눈을 감고 있을 때
태어나 버려진 아이들이다.
젊은 지아비를 잃고 넋이 빠져 통곡하는 여인, 다닥다닥 비좁게 서있는 판
자촌에서 철없이 노는 아이들, 집도 절도 없이 기차역 출입구 옆에서 노숙하
고 있는 젊은이, 번화가 계단에서 동전 바구니를 앞에 두고 엎드려 있는 어
린 소년, 입에 풀칠이라도 하겠다고 궂은일에 묻혀 잠시 아이도 잊은 어미,
그의 등에 업힌 아이는 고개를 뒤로 떨구고 잠들어 있다. 우리는 이 사람들
을 사랑해야 한다.
여름 무도회에서 뭇 사람의 시선을 모았던 그 새파란 옷을 가을바람에 빼
앗기고 앙상한 뼈대만 남은 나목들, 겨울바람에 우는 소리를 내어도 누구하
나 따뜻한 마음을 보내주는 이가 없다. 오갈 데 없이 헐벗고 굶주린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혹시 내 사주에도 나목의 비운이 잠복해 있는지 누가 알겠는
가.
때로는 우리의 삶이 너무 보잘 것 없어 절망마저 잊고 사는 모습들, 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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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을 위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가진 것이 행복
의 일부이거든 조금씩 나누어 주자 하나님은 원래 공평하게 배분했는데 인
간들이 그 질서를 흩어버리고 분쟁의 실마리를 만들었다. 거기다 위선자들은
좋은 구호만 남발하면서 불쌍한 사람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지 않는가.
사랑해야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사랑해야지. 거창한 철학적 이론은 저
만치 밀어두고 죽어가는 것들 까지도 사랑해야 한다.
■ 신 끄는 소리
비가 지척지척 오는 날, 천을산 아래 요사채에 앉아 예리성을 기다린다. 빗
소린지 예리성인지, 번연히 알면서 마음이 흔들린다. 혹시 신 끄는 소리를
놀칠세라 방문을 열어 놓고 문간을 내다본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예 예리
성을 찾는다.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확실하지 않은가. 조급한 생각이 욕
심으로 뭉쳐 탁류를 일으킨다.
설월(雪月)이 만창(滿窓)한데 바람아 부지마라
예리성(曳履聲) 아닌 줄을 판연히 알건마는
그립고 아쉬운 적이면 행여 긘가 하노라
그리움이 아우성을 치며 비를 안고 지붕을 두드린다. 욕심으로 찬 영혼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지도 않고 집착으로 가슴 속에 고인다. 천지에 무수한 물
방울들의 함성이 들려오는데 그리운 이는 어디서 방황하고 있는가.
지금은 아파트가 생활공간이 된 시대, 예리성은 격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지친 몸으로 현관문 앞에 서면 반가운 얼굴을 기대하
게 된다.
“띵똥!”
“누구세요?”
“나요.”
“문 열렸으니 들어오세요.”
전자식 자동문이 찰각 열리고 아내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약간은 서운하
지만 편리성을 앞세우는 현실 앞에서 억지로 마음을 눅이며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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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리한 남자는 들리지 않는 소리도 듣는다.
사랑하는 여인의 가슴에 담긴 연정의 소리를 듣고, 이른 봄 매화가 피는 소
리를 듣는다. 석양낙조에 수구초심을 듣는 고향의 부모님 목소리는 너무 슬
프다.
그뿐이랴, 한 번도 보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 부처님의 법문도 듣는
다. 그리고 나이 들면 자신의 소리도 듣게 되고, 가을밤 사박사박 달빛 밟는
소리도 들을 줄 알게 된다. 그러나 슬프게도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줄 아는
나이가 되면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인생은 그에게 드리워진 낙조까지 거
두어 간다.
듣는 것은 말하는 것보다 중요하다. 벙어리는 구강(口腔)장애자가 아니고
청각장애자다.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은 말 할 줄도 모른다. 자기 말만 하고
남의 말은 아예 들으려 하지 않는 자는 청각장애자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로
인해 항상 시끄럽다. 이런 소음이 듣기 싫고 그 사람들의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 TV를 끈다.
우리들 귀에, 그리운 사람의 신 끄는 소리 같이 예쁜 소리만 들려온다면 세
상은 얼마나 아름답고 편안하게 느껴지겠는가.
■ 낮은음자리표
학교 악대부에 들어가면 처음에는 저음부에 배정한다. 저음부의 소리는 고
음부에서 나오는 멜로디만큼 남의 귀에 잘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처
음 악대부에 들어가니 트롬본을 준다. 1년이 지나 겨우 알토 색소폰을 배정
받았다. 결국 낮은음자리표 권내에서 맴돌다가 졸업했다.
낮은음자리표는 바(F)음자리표라고도 한다.
낮은음자리표 안에 있는 낮은 음은 피아노에서는 왼손으로 제자리 소리를
내지만 사람 목소리로는 제 소리를 다 내지 못한다. 한 옥타브를 올려서 부
를 수밖에 없다.
우리의 중심 소리, 멜로디는 높은음자리표 안에 있다. 높은 자리, 높은 이
익, 높은 소리, 높은 산, 사람은 높은 것을 선호하고 그것을 으뜸으로 여긴
다. 악대가 지나가면 트럼펫 부는 사람이 가장 주목을 받는다. 바리톤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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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바를 유심히 보는 사람은 없다. 연주회 때도 낮은 음의 파트는 변두리에
위치하여 관객의 시선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 높은 빌딩, 높은 무덤의 이름은 초등학교 학생도
대개 알고 있다. 그러나 가장 낮은 해저, 가장 낮은 건물, 가장 낮은 곳의 무
덤은 잘 알지 못한다. 해발 8848m의 에베레스트 산은 다 알아도, 수심 1만
1034m의 태평양 마리아나 해구의 비티아즈 해연은 잘 모른다.
우리는 높은 것만 보고, 높은 곳만 찾고, 높은 값에만 관심을 쏟는다.
나의 평생은 대부분 낮은음자리표가 박힌 악보 안에서만 살아왔다. 멜로디
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베이스 화음의 일부를 맡아, 낮은 곳에서만 맴돌았
다. 무대에서는 장군을 호위하는 병졸 A,B,C로 한 마디의 대사도 배정받지
못했다. 군중들이 가는 대로 열심히 따라 가고, 낮은음이 한 몫을 맡아 거기
에 충실하려고만 했다.
살다보니 트럼펫으로 멜로디를 이끌던 연주자가 제일 많이 얻어맞는 것을
본다. 낮은음자리표 자리에 있던 병졸은 하나쯤 빠져도 별 문제가 없다. 내
가 없어도 별 표가 나지 않는 곳에서 평생을 살다보니, 안전하고 평안한 삶
에 젖어 높은 곳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다. 오히려 높은 곳이 두렵다.
오케스트라의 장엄한 연주를 듣는다. 멜로디에만 관심을 두거나 고음에 집
착하는 사람은 없다. 전체화음, 때때로 두각을 내는 여러 종류의 악기음 그
리고 그 화음 속에서 장단을 이끄는 지휘자의 모습을 보면서 통합과 조화의
웅장한 교향곡을 즐긴다.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악기를 잡고 있던 내가 그 오
케스트라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데 실낱같은 가치를 찾아본다.
■ 고독의 위안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고독한 존재다. 가장 가까운 부모와도
헤어져야 하고, 사랑하는 사람과도 헤어져야 한다. 우리는 고독이라는 열차
를 타고 행선지도 모르는 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고독은 많은 사람과 떨어져
있어 외로운 것이 아니고, 내 속의 나와 현실 속의 나 사이의 소통이 끊어진
상태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는 모임이 13개나 된다. 매주 만나는 모임,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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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에 한 번 만나는 모임, 옛 직장 모임, 등산모임 등 색깔도 다양하다. 달
력에는 모임 일자 밑에 만나는 시간과 장소가 빽빽이 적혀 있다. 달력을 들
여다 보면 외로워할 시간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외롭다. 그 고독, 외로움이 바쁜 내 모임 사이로 연신 찾아
든다. 고독의 신이 나를 괴롭히는가. 내가 외로움을 즐기는가.
퇴직을 하고 한동안 증심사라는 절에 들어가 외부와 단절된 시간을 가져보
기도 했다. 글 쓰는 시간을 최대한 확보해 보려 했지만 외로움이 불편을 낳
고, 그것은 왁자지껄한 저자판으로 나를 끌고 나왔다. 글이 더 잘 쓰여지지
도 않았다. 기발한 시상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다만 외로움 속에서 내 마음
만 쥐어짜는 고통만 따랐다. 고립된 그 생활은 고진감래(苦盡甘來)도 아니고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도 아니었다. 고독은 고독을 낳고, 고독을 위한
고독의 시간이 더 많아졌다. 고독은 생산성을 오히려 떨어뜨렸다.
나를 감싸고 있는 이 고독으로 불행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은 없다. 어려움
부닥쳤을 때 고독이 나를 위로할 때가 많다. 옆에서 부추기거나 실속 없는
위로가 더 귀찮고 고통스러웠다.
돈이 많아야, 명예가 높아야, 대중이 나를 에워싸야 행복하다고 생각하다가
영광 뒤에 찾아오는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인간의 모
든 불행은 고독할 줄 모르는 데서 오는 것 같다.
사람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이다.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다.
루소는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 것 보다 훨
씬 힘들다.”고 했다. 결국 사람들 사이에서 엄습해 오는 고독을 이겨내기가
더 힘 드는 것 같다.
내 방은 귀신이 나오는 방이다.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고, 온 방안에 책과
자료들을 늘어놓고, 청소도 잘 하지 않으니 아내가 지은 방 이름이다. 나는
여기가 참 좋다. 내 혼자만의 생각, 공상, 연상, 상상을 마음대로 하면서 하
룻밤에 기와집을 열두 채도 더 짓는다.
고독의 철학은 돈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에게 관심이나 호감
을 가지지 않는 것이다. 자유는 여기서 잉태한다. 이 자유가 나를 호위하고
때로는 희열을 안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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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격리된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여유,
능력, 재미를 말한다. 인생은 고해다. 나는 지금도 고독을 통해 그 고해에서
위로를 받고 있다.
■ 나의 취미
취미라고 하면 적어도 상당 기간 반쯤 미쳐서 하는 짓이라고 정의해야 될
것 같다. 정신없이 미쳐서 하는 짓은 어린 시절이나 청년 시절에 거의 집중
된다. 늙으면 취미를 즐기기에 앞서 자신의 몸을 건사하기에도 급급하기 때
문이다.
내가 학창시절에는 당구에 미친 적이 있지만 그것이 몇 년 반짝하다가 말
았다. 그 후 청년으로 혈기가 왕성하던 시절, 낚시에 미쳤다. 벽에 박힌 못이
낚시 찌로 보였다.
장년이 되자 등산에 빠졌다. 전국에 이름이 있다는 산은 다 찾아다녔다. 직
장 산악부를 맡아 앞장서 보기도 했다. 수확을 기대하는 낚시보다 승부에 마
음을 잡히는 테니스보다 등산은 훨씬 마음을 여유롭게 하고, 건강에도 아주
좋았다. 나이 많아질수록 좋은 취미가 될 수 있었다.
차츰 늙어지면서 수십 년을 함께 다니던 동호인들이 ‘산절로’라는 이름으로
매주 산을 즐기게 되었다. 아예 마음을 절로절로 오르내리게 하여 편안하게
산행을 즐길 줄 알게 되었다. 마음을 중시하다보니 자연히 문학인이 많아졌
다. 아내는 묻는다.
“산에는 뭐 하러 갑니까?”
“산이 있으니까!”
나는 큰 산악인처럼 대답한다. 아내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본다. 나는 그 말
과 관련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말로리는 1921년 제1차 에베레스트 원정에 참가한 이래 2차, 3차 원정에
도 참가했다. 1924년 제3차 원정에서 제6캠프를 출발한 뒤 정상을 200m
앞두고 행방불명이 되었다가 75년이 지난 1999년에 시신이 발견되었다.
제1차 원정대는 세상이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1922년 제2차
원정 실패 소식이 전해지면서 세상은 세계 최고봉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원정 대원들은 에베레스트 등반 실패담을 증언하는 강연
회에 초대받기에 바쁜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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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리가 맡았던 미국 필라델피아 강연에서도 많은 관중이 모였고 모두 경
청했다. 그런데 강연을 마치고 막 연단을 내려설 때, 청중 가운데 한 부인이
질문했다.
“왜 그토록 당신은 에베레스트에 오르려고 하죠?”
당돌하고 천진스런 질문이어서 말로리는 잠시 머뭇했다. 방금 청중으로부터
박수로 환영받은 연설이었는데 그 여인은 전연 연설을 듣지 않고 물은 것으
로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말로리는 짜증스런 마음에서 불쑥 한 마디 했
다.
“Because it is there. 거기 산이 있으니까.”
이 불성실한 답변이 오늘날 많은 산악인들이 즐겨 쓰는 말이 되었다. 산을
찾는 이유로, 산에 대한 무한한 애정의 표시로 인용되었다. 산의 진수를 한
마디로 말해 주는 불후의 명언이 되었다.
인생은 오류와 섞여 산다. 그것이 범죄가 아니면 더 재미있고, 살아가는 의
미를 보태기도 해 준다.
‘십자성’이란 별은 없다. 다만 별 4개가 십자를 이루고 있는 십자성좌가 있
을뿐이다. 그래도 십자성이란 이름으로 노래도 부르고 시도 쓴다. 그것이
더 재미있고 마음을 신비한 구석으로 몰고 간다.
취미는 정답을 구하는 수학이 되어도 재미없고, 딱딱한 질서 속에 정렬해
있는 병사가 되어도 재미가 없다.
산절로 수절로, 절로절로 하고 싶은 대로 아무 부담 없이 하는 취미 생
활이 좋은 것이다.
■ 별이 빛나는 밤
별과 관련된 시로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라는 윤동주 시의 한 구절만큼
가슴을 정겹게, 아름답게 그리고 경건하게 한 글은 없다.
그림으로는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The stary night’을 으뜸으로 치는 사
람이 많은데 상징적으로 그린 그 그림은 너무 어려워 쉽게 이해가 되질 않
는다. 그는 밤하늘과 별을 소재로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 나는 이발소 그림
수준 밖에 되지 않아 그 그림 속에 담긴 깊은 뜻을 잘 모르겠다.
시인이나 화가나 자기가 가장 사랑했던 어떤 대상에 대해 그들이 품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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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열정을 표현했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 진수를 맛보지 못하면 안타
까운 일이다.
어쩌다 캄캄한 밤하늘 위에 꽃처럼 수놓인 별들을 볼 때는 언제나 ‘별을 노
래하는 마음으로 천진하게 하늘을 쳐다본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수도
없이 별을 보아 왔지만 학교도 들어가기 전 어린 나이에 전등도 없는 초가
집 마당 멍석 위에 누워 쳐다본 캄캄한 밤의 별들은 정말 아름다웠다. 그때
느낀 신비함, 경이로움 그리고 가슴조이며 들었던 전설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지금도 그때 경외했던 별에 대하여 함부로 생성과정이나 그 별의 역
할 등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무척 불경스럽게 생각한다. 우주는 1000억개의
은하가 있고, 각 은하마다 1000억 개의 별이 있다고 한다. 별을 모두 합하
면 100조 개가 넘는다.
이상하게도 우리가 사는 지구는 그 별에 들지 못한다. 지구는 행성이고 행
성은 별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먼지찌꺼기가 뭉쳐져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러므로 결국 지구는 별 찌꺼기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다른 행성보다 푸른색
을 띠었으므로 초록별이라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별이 아닌 초록 행성일 뿐
이다.
여름 밤, 멍석 위에서 어른들이 이야기하던 그 내용들은 상상의 날갯짓에
지나지 않았지만 내 가슴 속에는 아름다운 전설로 자리 잡고 있다. 견우와
직녀, 북두칠성, 샛별, 은하수 등 수많은 별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고, 이
야기 내용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 달랐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어린 내 가슴
에 살아 있는 꿈으로 평생을 지키고 있다.
이야기를 듣는 중에도 하늘에서는 심심찮게 별똥이 떨어져 내렸다. 어떤 것
은 밝은 빛의 줄기를 뒷산에까지 이어 떨어졌다. 당장 올라가면 별똥을 주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어떤 이는 별똥을 주워 먹어봤다고 너스레를 떤다. 맛
이 어떠냐고 물으면 그냥 쫄깃쫄깃하다고만 대답했다. 그러나 그것을 더 물
어보는 사람도 없고 따지는 사람도 없다. 이렇게 여름밤은 서산으로 넘어간
다. 그리고 나도 아름다운 꿈을 안고 멍석 위에서 그냥 잠이 든다.
태양과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 쯤 된다. 태양의 수명이 반쯤 남았다고 한
다. 지구의 운명도 태양과 함께 해야 한다. 별이 죽어갈 때면 갑자기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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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풀어 내부가 폭발하고, 밝기가 더 크게 변하면서 대폭발을 하고 죽는다고
한다. 이때 생기는 먼지가 흩어져 새로 생기는 별의 재료가 된단다.
그렇게 멀리 있는 별들이 우리 이웃보다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
유에서인가? 별들은 언제 보아도 똑 같은 위치에서 똑 같은 모양으로 어두
울수록 더 밝게 반짝인다. 그 별들 속에 내 별이 꼭 하나 있을 것만 같고,
먼 훗날 나와 함께 해줄 것만 같다. 영원히 나를 지켜주고 사랑해 주리라고
믿는다.
아, 그리고 그 많은 별들 어느 하나도 한 점 부끄럼 없는 모습을 하고 있
다. 따로따로 떨어진 별들이 고독해 보이지만 한데 어울려 반짝일 때 그것은
장관을 이루고, 우리에게 크고 아름다운 꿈을 키워주고 있다.
우주 속의 모든 것은 죽는다. 별이 빛나는 이 슬픈 밤에 무슨 말을 해야 위
안이 되겠는가.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 겨울 요사체
증심사(證心寺) 담 자락에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던 날, 나는 다시 그 절
입구에 있는 요사채에 들어갔다. 십년 전 내가 시주한 절 안내판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제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내가 오래 떠나 있었던 자리가 무척
허전해 보였지만 그때 내가 쓰던 방은 옛 고향집 같다.
방은 허술하고 문풍지는 바랬지만 한때 주인이었던 내 방에 들어서니 낯선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다만 달라진 것은 그 방이 많이 낡았고 나도 많
이 늙었다는 것이다.
산속 시간은 천천히 지나가는데, 벌써 12월, 세월은 빠르게 달아난다. 여기
들어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산길에는 구절초가 하얗게 가을 을
재촉하더니 이내 겨울로 접어들었다.
그동안 나는 이 절 안에서 무엇을 했던가. 벌써 반 년 가까이 지났는데 벗
어 던지고 싶던 번뇌는 아직도 꼼짝 않고 내 머리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있다. 모든 것을 벗어버리겠다고 방문을 닫아걸고 좁은 방안에 혼자 앉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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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지만 잡념은 문틈 사이로 자꾸만 기어들어온다. 부족한 살림의 헌 신짝도
들어오고, 신기루 같은 헛된 꿈도 다시 살아나 찾아오고, 보고 싶은 얼굴이
살포시 웃으며 나타나기도 한다.
잡상(雜想)을 잠재우는 방법은 없는가.
모든 것을 잊고 아무 소리도 듣지 않으려고 이 요사채에 들어왔는데, 신심
이 부족하여 자꾸 무엇을 기다리게 된다. 무슨 소리든 좋다. 이 허전한 마음
을 채워줄 수만 있다면 목탁소리든 범종 소리든 아무 소리라도 좋다.
네 발 달린 온갖 짐승을 제도하려는 법고(法鼓) 소리, 날아다니는 날짐승과
모든 곤충을 안락하게 하려는 운판(雲版) 소리, 물속에 사는 생물들을 구원
하려는 목어(木魚) 소리, 지옥의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범종(梵鐘) 소리, 다
좋다.
그러나 번뇌를 제압하고 진심을 절로 드러나게 하는 법음(法音)은 너무 멀
리서 들리고 그 소리는 내 가슴까지 파고들지 않는다. 나는 자비의 대상이
아닌가 보다. 언제쯤 내 마음에 일고 있는 잡상들을 지울 수 있겠는가.
이 추운 겨울 , 나는 따뜻한 봄을 맞이하기 위해서 내 죄를 다 털어내놓지
않으면 안 된다. 이불의 먼지를 털 듯 긴 막대기로 두들겨 패야 한다. 겨울
의 모진 바람으로 나를 후려쳐 응보로써 속죄케 해야 한다. 긴긴 겨울, 굴
속에 나를 가두어 동면으로 이 죄인의 행동을 잠재우고, 꽁꽁 언 손발이 다
시는 탁류에 담기지 못하게 제압해야 한다. 겨울 요사채 안에서 자신을 숨기
는 비굴한 인간이 아니라 그 안에서 속죄하고 다시 태어나는 인간이 되게
해야 한다. 그리하면 폭풍우 뒤에 떠오르는 무지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짧은 겨울 해가 서산을 넘고, 저녁 예불 소리가 들린다. 목청껏 소리치고
싶은 만용을 잠재우고, 조용히 참 조용히 아름다운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기
를 기원한다.
5. 감천강
■ 감천강
내가 어릴 때, 감천강은 내 고향 선산면과 타향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었다.
일 년에 몇 번 할아버지를 찾아오시는 아버지와 강둑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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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멀리 갈라놓는 금이 되기도 했다.
석양이 놀을 깔고 강바닥 흰 모래 위에 붉은 색을 드리우면 나는 강둑에 서
서 긴 다리 위로 지나가는 버스를 하염없이 바라보곤 했다. 목탄 냄새를 풍
기며 천천히 지나가는 버스 안에 혹시 어머니가 타고 있는가 싶어 그 버스
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뽀얀 먼지를 뒤집어 쓴 신작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망태를 메고 방천에서 꼴을 뜯고 있으면 어디선가 외로움이 밀려와 강물을
따라 끝없이 흘러갔다. 할아버지의 영이 무서워 감히 나를 데려가겠다는 말
도 끄집어내지 못한 부모님은 해질 무렵 고향 쪽을 보고 있으면 어둠살 속
에 내 얼굴이 희미하게 나타나곤 했다고 한다.
“네가 세 살 들던 길로 여기 데려왔다.”
수없이 들은 할머니의 이 말씀은 열두 살 되던 여름 방학 때 끝이 났다.
새로 개교하게 된 사범학교에 넣기 위해 안동으로 데려가지 않으면 안 된다
는 명분이 들어맞은 것이다. 할아버지는 묵묵부답으로 허락을 대신했고, 할
머니는 10년을 품에 안고 살았던 정을 떼지 못하여 대성통곡을 했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세월이 여섯 번을 곤두박질치고, 소태 같은 세월 속
에 숱한 추억들이 맥없이 감천강물에 떠내려가는데 하얀 모래톱 속에서 자
질구레한 이야기들이 싹을 틔우며 되살아난다.
누가 말했던가. 나의 모든 작품은 유년 시절의 추억으로부터 시작된다고. 이제 늙은 고목이 된 내 기억 속에 가장 선명하게 되살아나는 추억은 언제나 어린 시절이었다.
지금도 그 긴 다리를 천천히 넘어오는 버스 속에는 어머니의 그림자가 남아 있는 것만 같다. 그리고 할아버지 앞에서 나를 한 번도 안아주지 못했던 어머니의 한이 하얀 모래 위에 아지랑이로 피어오르는 것만 같다. 이제는 자유로운 저 세상에서 마음껏 소리 질러 내 이름을 불러보아도 좋으련만.
나를 부르는 그 소리가 모기 소리만큼 가냘프게 작은 파장을 일으키며 귓전을 때린다.
“영아~!”
강물도 무상(無常)한가. 오늘도 욕망을 실은 버스가 다리 위를 지나고, 강물은 제행(諸行)을 쓸어 담고 유유히 흘러간다. 나는 지금 먼 타향에서 슬픈 감천강을 그리며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장승처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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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화상
참 어정쩡하게 살았다.
아주 똑똑하질 못하거든 아예 바보가 될 일이지 물에 물 탄 듯 왜 그렇게 희미하게 살아 왔는가.
뭐 하나 똑 부러지게 해 놓은 것도 없이 언제나 빚으로 살아왔다. 인생의 지각생, 남의 뒤를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아내는 나보고 평생 뒷북만 치며 살아간다고 한다. 나의 행동은 모두 어리석게 보이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의 하루하루는 별로 의미 있게 산 것 같지가 않다.
운문선사가 대중에게 물었다.
“지나간 과거는 묻지 않을 터이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일러 보라.” 대중이 대답이 없자 운문선사가 스스로 답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날마다 좋은 날이다.”
매일매일이 시들한 날이 아니라 날마다 새롭고 좋은 날이라는 뜻이다. 하루는 24시간, 1,440분, 86,400초다. 이 짧은 순간들을 의미 있게, 적극적으로 살아야 하는데 나는 정말 어정쩡하게 살아왔다. 이 좋은 날들을 찡찡거리며 살아왔고, 그늘 안에 숨어서 남의 탓만 했다.
성공한 사람은 자신의 함량보다 더 큰 일에 도전한다. 나는 나의 함량을 헤아리기 전에 어정쩡한 자세로 기회를 놓치고 만다. 자연히 후회가 많아진다. 어떤 상황에 부딪치면 고뇌만 깊어지고 해결은 못한다. 언제나 나의 선택이 과감하지 못하니 항상 쩨쩨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안전하고 편안한 쪽으로만 마음을 기울이면 큰일을 이루기는 힘들지 않겠는가. 참으로 심약하다.
초기불교 아비담마에서는 외부의 신호가 한 번 접수되었을 때 마음은 그 신호를 대상으로 열일곱 번이나 일어났다가 사라진다고 한다. 순간에 일어나는 이 변덕을 잘 잡아 쥐어야 순행을 하게 된다.
나에게 이런 기회가 얼마나 많이 찾아왔다가 지나갔겠는가. 참 어정쩡하게 살았다. 돌격하지 않고 고지를 점령할 수 있겠는가. 나는 육탄전에는 아예 자신이 없다. 평생 싸워서 이겨 본 적이 없다. 구들장군처럼 집안에서만 이긴다. 이제는 그마저도 승자의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패자는 슬프다.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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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할 말은 있어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 하고 위로를 한다. 그것은 약자의 소리다. 지는 것은 지는 것이고 이기는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닌가.
나의 계절은 언제나 겨울 한가운데 있다. 북풍이 후려치는 겨울 산속에서 혼자 서 있는 나무다. 영하의 냉동 속에서 떨고 있다. 고독을 즐기며 신기루 같은 꿈을 잡으려고 허우적대기만 한다.
내 얼굴은 흐르는 냇가에 비춰진 그림자요. 그것은 흐르는 속도만큼 어지럽게 흔들린다. 밀려 떠내려가는 내 그림자가 가엾어 보인다. 나는 지금도 남을 용서하는 강자가 되지 못하고 용서 받는 약자의 모습으로 하염없이 떠내려가기만 한다.
이제 더 용서 받고 구원 받을 기도도 끊어지고, 겨울 나목처럼 찬바람으로 벌을 받고 서 있는 어정쩡한 내가 되어 물그림자로 흔들리고 있다.
■ 영혼의 무게
내 영혼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
100킬로그램이나 되는 인간이라도 얼마 되지 않는 영혼이 빠져나가면 그 육체는 나무 둥치보다 못해진다.
미국의 어느 병원에서 실험한 결과 임종 직전의 몸무게와 임종 후의 몸무게가 평균 1온스 차이가 났다고 한다. 즉 영혼의 무게는 1온스(28.354g)정도하는 것이다. 스웨덴의 어느 연구팀은 정밀 컴퓨터 제어장치로 실험해 보았더니 임종 때 사람의 체중 변동은 21.26214g이었다 고 한다.
이 작은 영혼이 사람을 움직이고, 세계 역사를 다시 쓰게 하고 우주에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즐거울 때 느끼는 마음의 무게와 괴로울 때 느끼는 마음의 무게는 틀린다. 기분이 좋지 않을수록 마음이 무겁다. 저울로 달아보면 차이가 나겠는가. 마음의 무게 즉 중심(重心)을 잃으면 쓰러진다고 한다. 오뚝이의 밑 무게가 넘어져도 그를 바로 일으키는, 그런 마음의 무게가 우리를 확실하게 지탱해야 할 것 같다.
나는 혼자 앉아 묵상을 할 때가 좋다. 그럴 때 나는 내 영혼의 무게를 느끼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줄 것도 받을 것도 없어 좋다. 그러나 아내는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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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이 부족하다고 핀잔을 준다. 영혼의 무게가 가볍다는 뜻이다. 영혼의 자유를 갈망하는 내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나 공허한 빈터가 있어 허전하다. 내 영혼은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침대에 눕혀져 그 테두리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유를 그리며 외계로 탈출하면 곧 병균이 내 영혼을 파고들어 고뇌의 늪에 빠뜨린다. 중심(重心)이 없으면 영혼의 자유도 누릴 수가 없는가 보다.
아마도 내가 죽으면 임종 직전이나 직후나 몸무게가 같을 것 같다. 아무 공덕이 없으니 무슨 무게라고 할 만한 건덕지가 있겠는가.
그러나 가벼운 내 영혼의 문을 활짝 열어놓고 허허한 그 자리를 채워줄 영성을 경건히 맞이하고 싶다.
■ 몸 그리고 눈
우리는 몸 관리가 일상화 된 시대에 살고 있다. 더욱 젊고 건강한 몸, 날씬한 몸, 섹시한 몸을 목표로 온갖 방법과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모든 시간과 금전을 투자해서 끊임없이 연구하고 수련을 해 자신을 표현하는 대표적 수단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이와는 좀 다르게 4년 마다 개최되는 올림픽이나, 매년 열리는 전국체전은 몸으로 서로 다투어 싸우는 제전이다. 건강이나 장수를 위한 몸의 단련이 아니고, 오직 승리만을 위한 경쟁일 뿐이다.
아름다운 리듬체조 선수의 발을 보라. 얼마나 혹사당하고 학대했던지 피멍이 들고, 모양은 정이 떨어질 정도로 망쳐 놓았다. 체전은 아름답게 몸을 가꾸고 건실하게 몸을 키우는 제전이 아니고, 오직 승리를 위하여 몸을 압박하고 잔인하게 혹사하는 치열한 싸움터가 되었다. 나는 선수도 아니고 경기에 참여할 만한 운동 기능도 없다. 그러나 우리 대구시에 전국 체전이 열린다고 하면 우선 반갑고 좋다. 대회 몇 년 전부터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고, 눈에 잘 띄는 곳은 새로운 모양으로 단장한다. 다리마다 난간을 아름다운 꽃으로 장식하여 지나가는 사람들을 기쁘게 한다.
아주 오래전, 박정희 대통령이 통치하던 시절, 대구에서 전국체전이 열렸다. 대통령도 임석하는 큰 잔치니 준비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 준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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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도 제일 어려운 것이 카드섹션이었다. 매년 도별로 경쟁을 하다 보니 카드로 대통령 얼굴을 그려내고, 동영상까지 연출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사람 얼굴, 그것도 대통령이 바로 보는 맞은편 스타디움에 그의 얼굴을 사진처럼 표현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림으로 그리기도 힘 드는데 카드를 합쳐 그 얼굴을 나타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는가.
당시 이 일을 담당하게 된 K장학관은 죽을 맛이었다. 한창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을 동원하여, 큰 카드 몇 장을 들고 종일 각본대로 움직이게 하고 있으니 우선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그것은 독재, 전제 체제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개회식 전날 총연습 날이었다. 시장은 물론 대통령 경호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대통령을 맞이할 준비와 행사 내용이 적절한지 다각도로 점검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카드섹션에서 문제가 생겼다. 대통령 영상이 연출되었는데 한 학생의 실수로 대통령의 한쪽 눈동자를 멀게 했다. 그 학생이 카드 종류를 잘못 든 것이다. 담당 K장학관은 사색이 되었다. 얼굴의 다른 부분인 귀나, 턱이나, 머리 쪽에 약간의 실수가 있었다면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았을 터인데 하필 검은 눈동자에 흰 카드를 들었으니 어떤 모양이 되었겠는가.
그것은 담당자의 고의적 의도나 불순한 생각으로 각하를 폄하하려는 의도로 비춰질 수도 있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모든 요원들이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아 소름이 끼쳤다.
“아, 사람 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이 눈이구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렇지! 서로 사랑할 때도 눈만 보면 상대방의 애정을 확인할 수 있고, 서부활극의 결투도 서로의 눈싸움이 아닌가.
그날 카드섹션의 눈알 자리에 앉은 학생은 교체되고, 몇 번의 반복 연습으로 예행연습은 무사히 끝났다.
다음날 개회식 때, 박대통령은 자신의 얼굴이 선명하게 나타난 카드섹션에 매우 만족해했다. 스탠드에 그려진 그의 당당한 영상은 살아 있는 모습 같았고, 전 국민이 보는 이 모습이 자신의 위상을 더욱 높여주는 것 같아 매우 흡족해 했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토끼 용왕에게 갔다 온 그 장학관은 교육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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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매년 전국 체전만 열리면 사회체육과장을 못살게 닦달했다. 모든 종목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지 않으면 혼을 냈다. 훈련 기간에도 각 학교를 순회하며 열심히 선수들을 독려했다.
그는 상당히 과학적으로 전국 기록과 선수들의 기록을 대조하며 독려했다. 물론 건강, 안전, 예산까지 두루 관심을 가지고 지원책도 강구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눈에 관심을 가지거나 눈을 조심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간 때문에 용궁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산토끼는 산 속에 되돌아와서 간에 대한 걱정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전국체전에서는 몸 잔치를 크게 벌이며 서로의 기량을 자랑한다. 승부에 너무 집착하여 불상사도 일어난다. 잔인한 승부보다 파인플레이로 보는 사람을 기쁘게 하고, 서로의 우정을 다지는 정다운 잔치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우리 몸을 가장 귀하게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삼화령(三花嶺)
경주 금오산(金鰲山)의 한줄기 능선, 삼화령 위에 서서 천 년 전을 넘어다 본다. 긴 세월은 이 고개 위에 섰던 생의사(生義寺)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하고, 지금은 생의바위가 그 위치를 겨우 짐작케 하고 있다.
이 고개에 올라 경주 시내를 내려다보면 기와지붕들 위로 신라 천 년이 그림처럼 떠오르고, 이미 전설로 변한 옛 이야기들이 신기루처럼 피어오른다. 그 천 년의 그림은 언제 보아도 화면이 웅장하고, 화려하고, 생동감이 넘친다. 삼화령에 오를 때마다 느껴지는 서라벌의 장엄하고 당당한 위풍은 로마의 유적처럼 자랑스런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곤 했다.
지나고 보면 천 년도 눈 깜짝할 사인가. 거기 담긴 영혼이 아직도 살아 내 가슴을 흔든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신라 경덕왕 24년 3월 3일(重三日), 왕이 귀정문(歸正門)위에 올라 신하들에게 거리에 나가 위의(威儀)를 갖춘 스님 한 분을 모셔오라 했다. 신하들이 고승을 모셔왔으니, 바로 화랑이요 승려인 충담사(忠談師)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고 누각 위로 그를 영접했다.
왕이 충담에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노래가 그 뜻이 매우 높다하니 나를 위하여 안민가(安民歌)를 지어줄 수 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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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君)은 아비요
신(臣)은 사랑스런 어미시라
민(民)을 즐거운 아해로 여기시니
민이 은애(恩愛)를 알지로다.
(중략)
君답게, 臣답게, 民답게 할지면
나라는 태평 하리이다.
충담사가 ‘안민가’를 지어 왕에게 바치니 왕이 아름다이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고자 했다. 충담사는 굳이 사양하고 표연히 떠나니 영승다운 겸양이요. 화랑다운 기상이었다.
국태민안의 요체는 바로 각자가 분수를 지키고 직분을 성실히 이행하는 데 있다. 이것이 천 년을 지켜온 신라의 강줄기 같은 정신이 아니겠는가.
안민가는 일견 군과 신과 민이 각기 소임을 다할 때 국가가 태평해진다는 의미가 주된 내용으로 되어 있는 듯하나, 이 노래의 구조는 엄밀히 민본주의(民本主義) 사상을 줄기로 하고 있다. 나라가 태평하지 못하면 그 요인이 전부 왕에게 있음을 간접 화법으로 말하고 있다.
백성으로 하여금 왕의 사랑을 알도록 하고, 백성이 스스로 국가의 고마움을 인식해야 한다는 이 노래는 백성이 주체가 되어 있다. 백성이 사랑을 알고, 백성이 국가의 존재를 인식하게 하자면, 왕이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어린 백성을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면적 의미와 내면적 의미와의 대척적 표현과 긴밀한 구성은 그 뜻이 매우 깊다는 찬사를 받게 된다.
지금은 말만 많다. 행동과 실천은 그 말을 따라가지를 못한다. 분수를 지키고 직분에 자신을 던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언어의 향연으로 애국을 위장하고 자기 이익만 추구하고 있다.
만약 천 년 뒤에 누가 경주 남산(금오산)에 올라, 지금의 지도자들이 국태민안을 위하여 얼마나 자기 분수를 지켰는가를 물어본다면 과연 어떤 답이 나오겠는가.
2014.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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