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품격

2017. 8. 22. 11:50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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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품격

- 말과 사람과 품격에 대한 생각들 -

■ 이기주 지음

<언품>을 비롯한 두 권의 책과 각종 매체에 기고한 글을 날줄 삼고 그간 삶을 겪으면서 깨달은 것을 씨줄 삼아 이 책을 엮었습니다.

한권의 책은 수십만 개의 활자로 이루어진 숲인지도 모릅니다. <말의 품격>이라는 숲은 단숨에 내달리기보다, 이른 아침에 고즈넉한 공원을 산책하듯이 찬찬히 거닐었으면 합니다.

*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품격이 드러난다. 나만의 체취, 내가 지닌 고유한 인향은 내가 구사하는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

■ 서문 : 말은 나름의 귀소본능을 지닌다

몇 해 전 할아버지를 하늘로 떠나보냈다.

마지막 날, 며칠째 굳게 닫혔던 입술 사이로 “손…”이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할아버지가 이승에서 남긴 마지막 말이었는데, 갑자기 툭 튀어나온 단어가 아니라 할아버지의 몸과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쟁여진 단어처럼 느껴졌다.

병원에서 일하는 지인으로부터 훗날 나는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힘겨운 싸움을 벌이던 환자가 숨을 거둘 때 “손”이라고 발음하는 경우가 꽤 있다고 했다 입을 벌릴 기력조차 남지 않은 생명의 마지막 순간에 한 번 더 가족의 체온을 느끼고 싶어 “손 잡아줘…”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이다.

사람은 홀로 떨어진 섬과 같은 존재다. 사람이라는 각기 다른 섬을 이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말이라는 교각(交角)이다. 말 덕분에 우리는 외롭지 않다.

모든 힘은 밖으로 향하는 동시에 안으로도 작용하는 법이다. 언어의 힘도 예외가 아니다. 말과 문장이 지닌 예리함을 통제하지 못해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이 비일비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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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말이 나름의 귀소 본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언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태어난 곳으로 되돌아가려는 무의식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다. 사람의 입에서 태어난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냥 흩어지지 않는다. 돌고 돌아 어느새 말을 내뱉은 사람의 귀와 몸으로 다시 스며든다. 그렇다면 말을 잘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말은 쉼게 분석하거나 함부로 답을 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다만 나는 글을 쓰고 다양한 부류의 사람을 만나면서 사람마다 인품이 있듯이 말에도언품(言品)이 있음을 깨닫는다.

사물은 형체가 굽으면 그림자가 굽고 형체가 곧으면 그림자도 바르다. 말도 매한가지다. 말은 마음을 담아낸다 말은 마음의 소리다. 수준이나 등급을 의미하는 한자 품(品)의 구조가 흥미롭다. 입 구(口) 세 개가 모여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품격이 드러난다. 아무리 현란한 어휘와 화술로 말의 외피를 둘러봤자 소용없다. 나만의 체취, 내가 지닌 고유한 인향(人香)은 분명 내가 구사하는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자기의 생각과 마음을 읽는 행위일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나’를 읽는 것이다. <말의 품격>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스스로 자신의 말과 세계관에 대해 끝없이 질문을 떠올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 당신의 말이 누군가에게 한 송이 꽃이 되기를 - 이기주

◉ 1강(一講) 이청득심(以聽得心)

- 들어야 마음을 얻는다.

“삶의 지혜는 종종 듣는 데서 비롯되고 삶의 후회는 대개 말하는 데서 비롯된다.”

■ 존중

- 잘 말하기 위해선 잘 들어야 한다.

천하의 명장 항우가 유방에게 패배한 이유가 뭘까? 혹자들은 “인덕이 부족해서”라고 입을 모은다. 항우가 재주와 힘은 유방보다 뛰어났지만 우호적인 인적 네트워크가 부족해서 천하를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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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듯한 분석이다. 위세와 사나움만 앞세우는 맹장은 사람을 잠시 끌어 올 수 있으나 제 품으로 사람을 끌어들일 수는 없다. 힘으로 상대를 짓누를 수는 있지만 상대의 마음속에 들어앉을 수는 없다. 항우가 대업을 이뤄내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삼국지 연의>에서 천하의 덕장(德將)으로 묘사된 유비 역시 그러한 유형으로 볼 수 있다. 덕장이 있는 곳에 사람이 몰리는 법이다. 유비는 자신의 덕을 깃발삼아 훌륭한 인재를 불러들였고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다. 제갈량을 초빙하는 과정에서는 세 번이나 찾아가 고개를 굽히며 도움을 청했다. 겸손과 굽힘과 협업을 통해 난세를 해결한 유비의 세(勢)는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유비의 진정한 무기는 칼이 아니라 덕이었다.

21세기의 버전 덕장을 꼽으라면 누가 있을까? 상당수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꼽는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 전문가들은 오바마 특유의 포용력과 친화력을 그가 지닌 가장 큰 장점으로 꼽는다.

오바마가 이민 개혁법 통과를 촉구하던 연설을 하던 때였다. 단상 뒤편에 이민자 400여 명이 연설을 듣기 위해 기립해 있었다. 오바마 대통령이 막 연설을 시작하려는데 동양인 청년 한 명이 뛰쳐나와 날카로운 구호를 내던졌다. “이민자 추방 중단! 중단!”

청년의 예리한 구호가 대통령 연설의 한가운데를 갈라놓았다. 급기야 건장한 경호원이 청년을 끌어내기 위해 다가갔다. 경호원이 손을 좌우로 내저으며 청년 입을 틀어막으려고 했다.

“정부는 추방을 멈춰라! 멈춰라!”

청년과 경호원 사이에 다소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때 오바마가 청년을 가리키며 말했다.

“괜찮아요. 청년을 여기에 그냥 있게 해줍시다. 나는 저 청년이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는 마음을 존중합니다.”

오바마가 말을 이어갔다.

“다만 이민 정책처럼 복잡한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설득과 설명 그리고 서로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오바마의 품격있는 대처는 언론에서 화제가 됐다. 한 신문은 “상대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상대의 발언권을 존중하는 태도야말로 오바마가 지닌 리더십의 원천이다”라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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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법한 꼬마가 송아지처럼 눈을 껌벅껌벅하며 아빠에게 물었다.

“아빠, 학교에서 배운 단어가 있는데 뜻을 잘 모르겠어. 존중이 뭐야. 그리고 진심이라는 낱말의 의미가 뭐야?”

40대 후반쯤 돼 보이는 남자는 곧장 답하지 않고 약간 뜸을 들였다.

“음, 그러니까 존중은 상대방을 향해 귀를 열어놓는 거야. 그리고 진심은 말이지, 핑계를 대지 않는 거란다. 핑계를….”

옛말에 이청득심(以聽得心)이라 했다. 귀를 기울이면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일리가 있다.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은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바깥쪽이 아닌 안쪽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상대가 스스로 손잡이를 돌려 마음의 문을 열고 나올 수 있도록, 상대를 배려하고 존중해야 한다. 그런 뒤에야 마음을 얻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잘 말하기 위해서는 우선 잘 들어야만 한다. 상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그가 말할 권리를 존중하고 귀를 기울여야 상대의 마음을 열어젖히는 열쇠를 손에 거머쥘 수 있다.

이는 의사소통 과정뿐만 아니라 인생이라는 광활한 무대에서도 적잖이 도움이 되는 자세이기도 하다. 삶의 지혜는 종종 듣는 데서 비롯되고 삶의 후회는 대게 말하는 데서 비롯된다.

■ 경청

- 상대는 당신의 입이 아니라 귀를 원한다.

“나는 병사들과 자주 어울려 술을 마셨다.” 난중일기<亂中日記>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를 쓴 사람이 누구인가. 한 생애를 온전히 전쟁에 바쳐 자신을 불사른 이순신 장군이다. 자연스레 궁금증이 피어오른다. 구국의 영웅이 일반 병사들과 대작(對酌)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는 조선 시대 상류층에서 유행하던 문화적 경향을 들여다봐야 한다. 당시 지식인의 일상은 서재에서 시작해서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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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마무리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당대 지식인들에게 서재는 또 하나의 세계였다. 충무공도 서재가 있었다. 이순신 장군은 한산도에 머무는 동안 ‘운주당(運籌堂)’이라는 개인 집무실 겸 독서 공간을 이용했다.

본래 ‘운주’는 산가지(점치는 도구)를 움직인다는 뜻인데, 당시 군인들 사이에서는 전장에 나가기 전에 전략을 마련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난중일기>에는 유독 ‘화(話), 의(議), 론(論)’등의 한자가 자주 등장한다. 즉 이순신 장군은 참모진들과 자주 대화하고 의논하였으며 토론도 즐겨 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운주당은 매일 밤 건물의 불이 꺼지지 않았다. 요즘으로 치면 24시간 운영하는 복합 문화공간인 셈인데 출입이 자유로왔으므로 중간급 간부는 물론이고 계급이 낮은 졸병들도 자주 드나들었다.

1591년 전라좌수사로 여수에 도착한 이순신은 곧 전쟁 대비에 착수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눈에 보이는 적은 칼을 휘둘러 상대할 수 있었으나 해안의 물결과 지형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정보는 완벽하게 숙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후 이순신 장군은 해당 지역에서 태어난 병사는 물론 종종 민간인까지 운주당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들이 건네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촛대바위 근처 해상은 물길이 세고 암초도 많습니다.”(병사)

“그런가? 잘못 들어서면 큰일 나겠군.” (이순신 장군)

“그렇습니다. 뱃사람 여럿 집어 삼켰습니다.” (주민) 운주당을 그득하게 채운 병사들과 주민의 이야기들이 이순신 장군의 귀로 스며들었다.

이순신 장군은 물결의 무늬를 헤아렸고, 파도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바다의 깊이와 암초의 위치를 해도에 기록했다.

손무는 <손자병법> ‘허실(虛實)’ 편에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두 가지 요인을 언급했다. ‘승지현(勝之形)’과 ‘제승지형(制勝之形)’이다.

승지형은 겉으로 드러나는 형세다. 무기 체계와 부대의 규모 같은 것을 일컫는다. 제승지형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운이다. 지휘관의 전술과 부대의 사기 군사정보, 준비 태세 들이 여기에 속는데 경우에 따라서는 승지형 보다 전쟁에 더 큰 영향을 미친다. 이순신 장군은 제승지형에 능한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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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전투에서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왜선을 물리쳐 세계 해전사에 길이 남은 것도 어찌보면 경청의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한자를 파자해서 살펴보면 경청(傾聽)의 의미가 더 잘 와 닿는다. ‘경(傾)’은 사람(人)을 향해 머리가 기울어지는 것을 나타내는 한자로, 상대방 앞으로 다가가 관심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청(聽)을 풀이하면 더 심오한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귀 이(耳), 임금 왕(王), 열 십(十), 눈 목(目), 마음 심(心)으로 ’임금처럼 진득하게 귀를 기울이면서 눈을 크게 뜨고 사람을 바라보면 상대의 마음마저 얻을 수 있다‘는 의미로 풀이 된다.

경청은 듣는 일 가운데 가장 품격있고 고차원적인 행위다. 경청은 수동적 듣기가 아니라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인 다음 적절하게 반응하는 ‘적극적 듣기’ 이다.

소통 면에서 이순신 장군의 품격과 정반대 행보를 보인 인물이 있다. 이순신의 뒤를 이어서 삼도 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다. 원균은 부임하자마자 운주단 주변에 대나무 울타리를 둘러 참모들을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개방적 공간을 단숨에 폐쇄적 공간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1597년 7월 칠천해전에서 왜군의 교란 작전에 말려 괴멸되었고. 원균은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오늘 날 우리 사회도 남의 말을 들어주는 데 인색한 게 사실이다. 경청은 안중에도 없다. 말의 총량이 듣는 총량보다 적으면 다들 불안해 한다. 말을 많이 해야 타인에게 인정받을 거라는 믿음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말을 적게 하면 공연히 손해 보는 것 같은 박탈감에 시달린다.

일부 뇌공학 전문가들은 경청이 어려운 이유를 인간의 고등한 뇌 메카니즘에서 찾기도 한다. 언어권 마다 다소 차이가 있지만, 사람들은 1분 동안 대략 200단어까지 말할 수 있다.

반면 우리 뇌는 그보다 4배나 많은 800단어 정도를 받아들인다. 뇌 능력을 4분의 1만 사용해도 상대의 말을 충분히 해석할 수 있으므로 굳이 타인의 말을 경청할 자체를 못 느낀다는 얘기다.

이 책의 낱장을 넘기면서 곰곰 생각해 봤으면 한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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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으로 들어본 적이 있는지, 누군가의 작은 목소리를 귀가 아닌 가슴에서 크게 증폭시켜 헤아려본 적이 있는지, 누군가와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만한 ‘자신만의 운주당’이 있는지….

소중한 사람의 마음에 가 닿으려는 진심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가슴 한구석에 작은 운주당을 세워 봤으면 한다. 지금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은 당신의 입이 아니라 어쩌면 당신의 귀를 원하는지도 모른다.

■ 공감

- 당신의 아픔은 곧 내 아픔

10여 년 전 사극 <다모>가 인기를 끌었다. 내 눈가와 귓가에서 희미하게 가물거리는 장면이 있다.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의 상처를 치료하면서 덤덤한 목소리로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고 말한다.

브라운관 너머에서 드라마를 들여다보던 시청자 중 상당수가 이 대목에서 탄성을 질렀다. 남자 주인공의 입을 떠나 여자주인공의 마음으로 들이 닥친 이 짧은 문장에 상대를 향한 애타는 마음이 구구절절하게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공감이고 소통이 아닐까.

공감은 한국인 특유의 ‘정(情)’과 유사한 감정의 무늬를 지닌다.

동정과 공감은 우리 마음속에서 전혀 다른 맥락의 생성과정을 거친다.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감정이 마음속에 흐르는 것을 공감이라면, 남의 딱한 처지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연민이 마음 한구석에 고이면 동정이라는 웅덩이가 된다.

웅덩이는 흐르지 않고 정체돼 있으며 깊지 않다. 동정도 매한가지다. 누군가를 가엽게 여기는 감정에는 자칫 본인의 형편이 상대방 보다는 낫다는 얄팍한 판단이 스며들 수 있다. 그럴 경우 동정은 상대의 아픔을 달래기는커녕 곪을 대로 곪은 상처에 소금을 끼얹는 것밖에 안 된다.

공감은 연민이나 측은지심보다 ‘인(仁)’과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仁)은 사람인(人)에 두 이(二)를 더해 만든 한자다. 여기에는 단순히 ‘마음 씀씀이가 야박하지 않고 인자하다’는 뜻만 있는 게 아니다. ‘천지 만물을 한 몸으로 여기는 마음가짐 혹은 그러한 행위’까지 내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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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仁)의 반대는 불인(不仁)이다. <본초강목>과 <동의보감>등 동양 의학 서적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종종 등장한다.

“신체 일부가 마비되면 불인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타인과 정서적으로도 마음이 통하지 아니한다.” 사람은 몸과 마음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으면 자신의 고통은 물론이고 상대방의 아픔과 속사정을 짐작하거나 공감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한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의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에 참관하면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했다.

예루살렘 전범 재판정에 선 아이히만은 “의무를 준수했고 명령에 따랐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그의 변명에는 죄의식은커녕 고민의 흔적조차 묻어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한나 이렌트는 거악(巨惡)을 창안하는 것은 히틀러 같은 악인이지만, 거악과 손을 잡거나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인지 모른다. 그러면서 일갈했다.

“악이란 뿔 달린 악마처럼 별스럽고 괴이한 존재가 아닙니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 반응

- 대화의 물 길을 돌리는 행동

일출을 보기 위해 가족과 함께 경기도에 있는 행주산성을 찾았다. 밤사이 차가운 공기가 구름을 완전히 몰아내지 못했는지 해가 수줍게 고개를 내민채 구름 사이를 산책하듯 거닐고 있었다. 붉은 해가 구름을 빠져 나와 새벽빛이 땅에 내려않기까지 많은 시간이 흘렀다.

거기 모인 사람들을 상대로 갖가지 방한용품을 판매하려는 상인들도 무수히 몰려들었다. 무릎 담요를 집어 든 상인이 재킷을 맞춰 입은 한 쌍의 젊은 연인에게 말을 걸었다.

“담요 사세요. 따뜻해요.” 연인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상인은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듯 담요 끝단을 잡고 필사적으로 펄럭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쌉니다. 정말 싸요. 최고급 원단 입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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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바로 옆에서 담요를 팔고 있던 다른 상인이 가볍게 한마디 건넸다.

“둘이 참 잘 어울려요,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요.”

“참 그런데 둘이 사귄지는 얼마나 됐어요?” 여자가 대꾸했다.

“이제 100일째랍니다. 기념도 할 겸해서 오늘 해돋이 보러 왔어요.“

“깨소금이 쏟아질 때네요, 아무튼 정상에 오르면 기온이 뚝 떨어져요. 여자 친구가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요.”

그러나 남자가 전광석화같이 담요를 챙겨갔다.

상인은 단순히 물건을 팔려고 애쓴 게 아니다. 고객이 사도록 만든 셈이다.

영국의 진화심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로빈 던바 교수는 인간의 의사소통 과정과 침팬지의 털 손질에 유사점이 있다고 분석한다.

침팬지들은 서로 털을 고르고 만져주는 ‘그루밍’ 동작을 통해 친밀함을 유지한다. 침팬지 사회에서 그루밍은 소일거리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행위다. 집단에서 따돌림 당하거나 쫓겨나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틈만 나면 그루밍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 일부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언어가 이러한 그루밍에서 출발했다고 주장한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을 누일 곳이 필요하다. 몸이 아니라 마음을 누일 곳이.

물론 그 공간은 물리적인 장소뿐만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될 수 있다. 우리가 가슴에 품고 있는 고민을 종종 타인에게 털어 놓는 것도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인지 모른다. 고민을 해결하려는 목적보다는 마음을 쉬게 하려는 목적으로 말이다.

적당히 따뜻한 말을 접할 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떠올린다. ‘하나의 상처와 다른 상처가 포개지거나 맞닿을 때 우리가 지닌 상처의 모서리는 조금씩 닳아서 마모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상처의 모서리가 둥글게 다듬어지면 그 위에서 희망이라는 새순이 돋아나는 건지도 몰라.’

사람과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는 굽이쳐 흐르는 강물과 같다. 상대가 건네는 말에 맞장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대화의 물길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 협상

- 극단 사이에서 절충점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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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겪었던 일이다. 겨울이었다. 그해 겨울은 투명하고도 길었다. 바람은 날카로웠다. 창문을 조금만 열어도 칼바람이 달려들었다.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앞자리에 앉은 한 학생이 창문을 열어젖혔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찬바람이 정면으로 들이닥쳐 얼굴을 때렸다. 누군가 청년을 노려보며 말했다.

“저 실례합니다. 창문 좀 닫으면 안 될까요?”

“추우세요? 공기가 탁한 것 같은데요. 환기를 좀 시키는 게 어때요?”

“환기요? 여기 학생들 대부분이 오돌오돌 떨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래도 찬 공기를 좀 불러들이는 게….”

소모적인 대화가 오갈 듯한 찰나였다. 냉기로 몸을 휘감으려는 청년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다.

창가 자리에서 책을 읽던 나는 괜한 감정싸움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다. 그래서 모두가 이득은 보지 못하더라도, 누구 하나 손해를 보지 않을 제안을 건네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손으로 창문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이쪽 창문 말고 저쪽 창문을 여는 게 어떨까요?”

“네? 음, 그러죠 어차피 바람만 들어오면 되니까요.”

사실 삶 자체가 크고 작은 협상의 연속이다. 좋든 싫든 우리는 직장과 가정에서 연봉과 메뉴선택, 리모컨 쟁탈권 등을 놓고 누군가와 협상 테이블에 마주 앉아야 한다.

<손자병법> ‘모공’편에서는 ‘싸우지 않고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이 최상의 전략’임을 강조하고 있다. 손무가 강조한 상책 가운데 하나가 협상이 아닐까 싶다.

극단 사이에서 절충의 지점을 찾는 일은 중국 노나라 때 학자 자사(子思)가 주창한 중용(中庸)과 맥이 닿아 있다. 여기서 중(中)은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도리에 맞는 상태를 일컫는다. 용(庸)은 보편적이면서 변하지 않는 성질이다. 그러므로 중용은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양극단 사이에서 절충하는 자세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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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은 한쪽이 이득을 보면 반대편이 무조건 손해를 보는 제로섬zero-sum게임이 아니라 이해 당사자 모두가 실리를 챙기는 포지티브 섬positive-sum

게임에 가깝다.

바다를 떠다니는 배도 중용의 힘으로 파도를 밀쳐내고 물살 위에서 버티는 게 아닐까 싶다. 대개 선박은 출항 전 배 밑부분에 평형수(平衡水)를 집어 넣는다. 파도를 만나 배가 한 쪽으로 기울면 가만히 있던 평형수는 이동해서 선박의 무게 중심을 잡는다. 평형수가 제 위치를 절충(중용)하는 덕분에 배가 뒤집히지 않고 순항 할 수 있는 것이다.

■ 겸상

- 함께 온기를 나누는 자리

국내 한 언론사 기자가 세계적 협상 전문가인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교수를 만난 자리에서 물었다.

“교수님 대한민국은 남과 북으로 분단된 나라입니다. 남북의 당국자가 만나 협상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어떤 점에 신경을 써야 할까요?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의 대답은 기자가 예상한 답변의 범주를 벗어났다.

“글쎄요, 협상 실무자들이 점심을 자주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석사와 박사 위에 ‘밥사’라는 학위가 존재한다는 우스개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직이나 단체에서 동료를 위해 기꺼이 밥 한 끼 사는 사람은 마음 씀씀이가 좋은 사람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때로는 상식과 지식보다 밥을 먹는 행위인 회식(會食)이 더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물론 여기에서 회식은 비생산적이고 획일적인 단합 대회가 아니라 함께 밥을 먹으며 온기를 나누는 행위 자체를 의미할 것이다.

신문 정치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 중에 ‘식사 정치’라는 말이 있다. 정치인의 식사는 단순히 배고픔을 채우는 음식 섭취 행위가 아니다. 그들에게 식사는 나름의 정치적 목적과 의미를 겨냥해 힘껏 쏘아 올리는 날카로운 화살과 같다. “모든 정치는 밥상에서 시작된다”는 말이 나도는 배경이기도 하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도 정치적 고비마다 비장의 보검을 꺼내듯 ‘식사 정치’ 카드를 뽑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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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와 그것을 전하는 장소는 밥과 밥공기의 관계와 유사하다. 밥맛을 결정하는 것은 밥을 구성하는 쌀과 물만이 아니다. 어떤 용기에 밥을 담느냐가 중요하다. 빛을 낼 정도로 반짝반짝 빛나는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느냐, 은은한 백색 바탕에 꽃무늬가 새겨진 그릇에 담느냐에 따라 밥맛이 달라진다. 그릇도 분명 맛을 낸다.

메시지도 이와 비슷하다. 메시지의 내용 못지않게 그것을 표현하는 공간과 시간적 배경 또한 메시지의 전달력과 설득력을 좌우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특히 겸상(兼床)은 관계의 문을 여는 중요한 관문이다. 식탁을 마주하고 반찬을 권하거나 집어 건네면서 우리는 일상의 고단함을 공유하고 상대방의 온기를 느낀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서로에 대한 경계심을 허물어뜨린다.

식사 자리는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이 혼재하는 공간이자 시간이다. 인생의 중대사 상당수가 식탁 위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결혼을 앞둔 양가의 사람들이 상견례도 한식집에서 하고 기업과 개인은 밥먹는 자리에서 화해를 모색 하거나 갈등을 조정한다. 타인과의 공감대를 확보할 수 있는 시간, 복잡한 인간관계의 윤활유 역할을 하는 자리가 바로 식사인 것이다.

우리는 식사 자리에서 무수히 많은 것을 입에 욱여넣으며 살아간다. 밥만 먹는 게 아니다. 커피도 먹고 술도 먹고, 욕도 먹고 어느 새 나이도 먹는다.

그러므로 ‘먹다’라는 동사와 가장 가까운 말은 ‘살다’일 것이며, 자식이 밥을 먹었는지 궁금하다는 건 잘살고 있는지 궁금하다는 의미일 것이다.

우리 부모들이 시도 때도 없이 자식에게 전화를 걸어 “밥 먹었냐?”하고 물어보는 것도 이런 배경이 작용하는 게 아닐까 싶다.

김지하 시인은 <밥은 하늘입니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갈라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언젠가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하며 전화를 끊은 상대가 있다면 당장 전화기를 들어 다시 약속을 잡아 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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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의 품격

-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은 대게 침묵 속에 자리하고 있다.

■ 침묵

- 때로는 말도 쉼이 필요하다.

“나는 크리스티나가 상상한 것처럼 민주주의가 발전했으며 합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011년 1월 12일, 총기 사건이 발생한 미국 애리조나 주 남동부의 투산 지역에서 버럭 오바마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식이 욜렸다. 이날 행사에서는 미국 대통령의 대중 연설 역사상 가장 낯선 광경이 펼쳐졌다. 총기 사건의 희생자중 한 명인 크리스티나의 이름을 언급하던 오바마 대통령이 갑자기 연설을 멈춰버린 것이었다. 사람들이 수런거리기 시작했다.

“뭐가 잘못된 거지? 연단에 놓인 프롬프터에 문제가 생긴 건가.”

째깍째깍,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오바마는 말없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호흡과 호흡 사이에서 비통함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슬픔의 덩어리 같은 것이 밖으로 새어나오는 듯했다.

오바마의 시선이 허공에 닿았다. 그는 닿을 수 없는, 아득히 먼 공간을 쳐다보는 듯했다. 오바마는 눈물을 참으려는 듯 두 눈을 연신 깜박였다. 복바치는 슬픔을 억누르며 감정을 추스르느라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오바마의 어깻죽지가 흔들렸다.

51초의 정적이 흐른 뒤 오바마는 어금니를 굳게 깨물었다. 그리고 다시 연설을 이어나갔다. 그의 음성은 무거웠다. 무거웠으므로 공중에서 낮게 깔리며 천천히 추모객의 가슴을 향해 퍼져 나갔다.

말 그대로 ‘51초 무언(無言)의 연설’이었다.

이날 오바마 대통령의 연설은 미국 국민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아로새겼다. 당시 미국 언론은 오바마 대통령이 보여준 이례적인 모습과 언품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오바마의 연설이 이렇듯 찬사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오바마는 말을 잘하기 위해 애쓰기보다 특정한 지점에서 말을 거두어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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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위해 애썼다고, 나는 생각한다. 침묵의 가치와 하중(荷重)을 충분히 알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침묵의 가치는 늘 칭송돼왔다. 종교학자 프레드리히 폰 휘겔은 자신의 질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대한 것 앞에서 침묵해야 한다. 침묵의 내면에서 말을 키워라 말로만 하는 토론은 왜곡만을 가져다 줄 것이다.”라고 말했고 조선시대의 문인 화가 김유근은 “말하지 않아도 뜻을 전할 수 있으니 침묵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나 자신을 돌아보건대, 침묵하면 세상에서 화를 면할 수 있음을 알겠다”는 글을 남겼다.

한때 유럽을 호령했던 나폴레옹에게 침묵은 일종의 병기였다. 나폴레옹은 고향인 코르시카 지역 사투리가 입에 밴 인물이다.

그는 병사들 앞에서 연설하기 위해 연단에 오를 때마다 뜸을 들이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연단에 올라서도 곧바로 말을 질러대지 않았다. 10여 초 정도 매의 눈으로 전방을 노려보곤 했는데 그때마다 병사들은 나폴레옹의 위엄에 압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침묵을 거쳐 태어난 정제된 언어 덕분에 나폴레옹은 자신의 카리스마와 존재감을 극대화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침묵이라는 ‘비언어 대화’의 힘은 세다. 침묵은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의 가치를 함축하고 있으며, 종종 사람들에게 백 마디 말보다 더 무겁고 깊게 받아들여진다.

말이 많으면 화를 면치 못한다. 근심이 많아진다. 반대로 ‘과언무환(寡言無患)이라는 말처럼 상대에게 상처가 될 말을 줄이면 근심도 줄어든다. 서양 경구에도 웅변은 은(銀) 침묵은 금(金)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선인들의 생각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았던 모양이다

휴가를 의미하는 영어단어 바캉스(vacance)는 ‘텅 비어 있다’는 라틴어 바카티오(vacatio)에서 유래했다. 바캉스는 무작정 노는 게 아니라 비워내는 일이며, 진정한 쉼은 우리의 어깨를 짓누르는 무언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숙성되지 못한 말은, 오히려 침묵만 못하다.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은 대게 말이 아닌 침묵 속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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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결

- 말의 분량에 얽매일 필요가 없다.

2012년 9월 11일 오전, 미국 NBC TV<엘렌 드제너러스 쑈>에 가수 싸이가 등장했다. 싸이는 함께 출연한 유명 팝가수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프로그램 진행자 엘렌 드제너러스 에 맞춰 말춤 추는 법을 가르쳐줬다. 춤 동작을 따라 하던 엘렌이 대뜸 브리트니의 굽 높은 신발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요, 하이힐을 신고 이 춤을 따라 해도 괜찮은 가요?”

“그럼요 이 춤을 출 때는 의상은 고급스럽게 입어야 하고 춤은 싼 티 나게 춰야 해요.”

간결함과 재치라는 터널을 통과한 싸이의 언어가 입술을 비집고 나오자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졌다.

“그렇지!”

“좋아! 좋아!” 분위기가 한창 달아 올랐다.

싸이가 구사한 문장을 단문(短文)으로 분리하면 “의상은 고급스럽게”라는 말과 “춤은 싼티나게”라는 문장으로 쪼갤 수 있다.

싸이의 말씨에 주목할 만하다. 평소 방송을 통해 본 싸이는 겉으로 풍기는 모습과 달리 말이 많은 연예인이 아니다. 다른 이들에 비해 말의 총량이 적다. 말이 재치와 나름의 깊이가 있는 데다 언어의 총량이 적으므로 언력(言力 말의 힘) 또한 세다.

또한 그는 말을 장황하게 열거하지 않는다. 복문보다 단문으로 자기 생각을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한마디로 ‘단단 익선(短端益善 짧으면 짧을 수록 좋다) 어법’이라고 할 만하다.

인간의 집중력에는 한계가 있다. 일부 언어학자는 성인의 최대 집중력이 18분이라고 주장한다. 18분 넘게 일방적으로 대화가 전개되면 아무리 좋은 얘기일지라도 참을성 있게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마크 트웨인이 “설교가 20분을 넘으면 죄인도 구원받기를 포기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더 큰 문제는 하염없이 말을 늘어 놓다보면 절대 해서는 안 될 말을 거르지 못해 결국 화를 자초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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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 시대의 재상 풍도(馮道)는 <설시 舌詩>에서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라고 했다. “입은 재앙을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베는 칼”이니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이다.

풍도는 정치적 혼란기인 당나라 말부터 5대 10국 시대까지 다섯 왕조 동안 11명의 임금을 섬기며 벼슬을 했다. 풍도의 말을 가볍게 흘려버릴 수만은 없다.

■ 긍정

- 말은 종종 현실과 공명한다

윌 스미스 주연의 영화 <행복을 찾아서>는 의료기기 판매상인 크리스 가드너가 파산을 당히면서 시작된다. 하루아침에 자동차를 압류당하고 살던 집에서 쫓겨난 그는 영혼마저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빈집을 바라본다. 지갑을 열어 보니 남아 있는 돈은 21달러 33센트 뿐. 그러나 그는 내일에 대한 희망만은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노숙자(homeless)일 뿐이지 희망이 없는(hopeless) 건 어니야.”

그러던 중 크리스 가드너는 우연한 기회에 회사의 인턴 면접에 응시하게 된다. 드디어 면접일,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 그를 바라보는 면접관의 얼굴에 황당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아뿔사! 노숙자 보호소를 전전한 탓에 제대로 차려 입지 못한 모습 그대로 면접장에 뛰어든 것이다.

“이봐,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세.”

“네 말씀하십시오.”

“만약 자네가 면접관이라면 와이셔츠도 입지 않은 차림으로 면접장에 나타난 응시자에게 뭐라고 할 텐가?”

“그야, 간단하지요. ‘그 녀석이 와이셔츠는 입지 않았지만 속옷만큼은 멋진 걸 걸치고 왔어‘ 라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의 긍정의 언어는 면접관의 귀와 마음을 운동장 삼아 쏜살같이 내달렸다. 아무 것도 내 세울 것이 없었던 그가 말 한 마디로 취업에 성공한 것이다.

그는 아들과 함께 노숙자 보호소와 공중 화장실을 전전하며 주식 중개인이 되기 위한 꿈을 키워나간다. 그리고 훗날 자신의 이름을 딴 ‘크리스 가드너 홀딩스 인터내셔널’의 최고 경영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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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인 생각이 모두 걸러진 말, 비관론과 염세주의로 똘똘 뭉쳐진 언어만 내 뱉는 사람은 사회관계망 속에서 고립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네트워크지수(NQ. Network Quotient)라는 개념이 있다. 현대 사회에서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는 능력을 나타내기 때문에 ‘공존지수 共存指數)라고 부르기도 한다.

NQ는 IQ와는 달리 긍정적인 말을 자주하고 친화력이 뛰어난 이들은 상대적으로 높다. 이같은 사실은 <논어> ‘자로편’에 나오는 일화를 떠올리게 한다. 공자가 섭공(葉公)이라 부르는 초나라의 심제량(沈諸梁)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심제량은 병법에 능한 군사 전문가이자 정치가였다.

심제량이 물었다.

“선생님, 백성을 한데 모이게 하려면 어떻게 정치를 해야 합니까? 어떤 기술이 필요합니까?” 공자는 딱 한마디 말을 남긴 채 홀연히 길을 떠났다.

“근자열 원자래(近者悅 遠者來)라네.”

“가까이 있는 사람을 기쁘게 하면 멀리 있는 사람도 모여들게 마련”이라는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인간의 입술은 그가 마지막으로 발음한 단어의 형태를 보존한다는 말이있다. 내 입술에 내 말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무섭고 서늘한 얘기다.

종종 가슴에 손을 얹고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 말과 글과 숨결이 지나간 흔적을, 그리고 솔직함과 무례함을 구분하지 못한 채 사는 건 아닌지를, 말이라는 악기를 아름답게 연주하지 않고 오로지 뾰족한 무기로만 사용하는 것은 아닌지를…….

■ 둔감

- 천천히 반응해야 속도를 따라잡는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치료한 어느 환자의 이야기다.

오스트리아에 한 소녀가 살았다. 미신을 신봉한 그녀의 할머니는 “넌 아들로 태어났어야 해. 넌 잘못 태어난 존재야. 스무 살이 되기 전에 목숨을 잃을지도 몰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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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생각했으나, 할머니의 이 말은 소녀의 무의식 속에 눌러앉아 깊이 뿌리내렸다. 어른이 되면서 소녀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온 몸이 찢어질 듯 아프다”고 고통을 호소했지만 병원에서는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며칠 뒤 그녀는 프로이트를 찾았다. 프로이트는 말했다.

“의료진의 판단이 옳다면 당신의 몸 상태는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단지 어릴 적 당신의 마음을 휘감은 할머니의 부정적인 말과 표현 때문에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타인이 지은 표현 때문에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게 된 겁니다. 타인이 지은 말의 감옥에 갇혀선 안 됩니다. 이제 그곳을 벗어나세요.”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칼에 베인 상처는 바로 아물지만 말에 베인 상처는 평생 아물지 않는다’는 말은 진리에 가깝다.

소설 실낙원의 저자로 잘 알려진 와타나베 준이치는 이런 고민에 휩싸인 이들에게 “둔감력(鈍感力)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와타나베 준이치는 둔한 감정과 감각이라는 뜻의 ‘둔감’에 힘력(力)를 붙인 둔감력이 삶의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둔감력은 좌절감을 극복하는 마음의 근력 또는 힘을 의미하는 ‘회복 탄력성’같은 단어와 어감이 묘하게 겹쳐진다.

타인의 말에 쉽게 낙담하지 않고 가벼운 질책에 좌절하지 않으며 자신이 고수하는 신념과 철학을 바탕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힘, 그렇게 삶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바로 둔감력이다.

장자(莊子)의 달생(達生)편을 보면 ‘목계(木鷄)’ 그러니까 나무 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닭싸움에 심취한 왕이 닭 조련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용맹한 닭을 조련 시켜서 내게 보여주게.”

몇 달 뒤 조련사는 한가롭게 마당을 노니는 닭을 바라보며 말했다.

“바로 이 닭이 폐하께서 찾던 천하무적의 닭입니다.”

왕은 몇 번씩 눈을 씻고 닭을 바라봤다. 조련사가 가리킨 닭은 겉모습이 형편 없었다.

왕은 헛기침을 크게 하며 따지듯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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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험 여보게, 내가 보기에는 그냥 거뭇한 나무토막 같군! 저런 닭이 어찌 천하무적일 수가 있나?”

“겉으로 보기에는 하잘것없지만 나름의 장점이 있는 닭입니다. 저 닭은 아무리 덩치가 큰 닭이 덤벼도 허점을 보이거나 미동을 하지 않습니다. 쉽게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공격하던 닭은 제풀에 지쳐 슬그머니 꼬리를 내립니다. 싸움자체를 하지 않고도 상대를 제압해 버리는 셈이지요.”

상대를 먼저 공격하지 않고 편안하게 해 주는 사람의 말은 물을 닮았다.

천천히 흐르면서 메마른 대화에 습기를 공급하고 뜨거운 감정을 식혀준다. 언행과 행실에 수기(水氣)가 깃들었다고 할까. 그런 언어는 내 귀로 쉽게 흘러들어오고, 그런 행동은 내 망막에 또렷하게 새겨진다.

무릇 칼은 칼집에 있을 때 위엄이 있다. 무작정 꺼내 들면 칼의 위력은 줄어든다. 칼의 크기와 날키로움이 뻔히 드러나는 탓이다.

아마 말도 그러할 것이다. 적절한 둔감력을 바탕으로 유연하게 휘두를 때 말의 품격은 더해지며 언력은 배가 된다.

■ 시선

- 관점의 중심을 기울이는 일

집 근처에서 이채로운 광경을 목격했다.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아이가 초저녁에 스파이더 맨 복장으로 골목을 활보하고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캐릭터 코스프레였다.

꼬마는 선홍색 바탕에 검정 줄무늬가 새겨진 쫄쫄이를 입고는 스파이더맨이 거미줄을 발사하는 장면을 그대로 흉내 냈다.

내가 어릴 적에 보자기를 망토처럼 두르고 장독대에서 뛰어내리며 열정적으로 “슈퍼맨!”을 외치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는 아이 엄마의 말씨에 주목했다. 저녁 먹을 시간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여전히 놀이의 삼매경에 빠져 있었고. 좁은 골목길은 어둑살이 내리고 있었다.

이때 상당수 부모는 “그만 놀아, 어서 들어와!” 같은 직선적 명령형 문장을 내던지거나. “배 안 고프니? 저녁 먹지 않을래?” 식의 곡선을 닮은 청유형 문장을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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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이의 엄마는 전혀 다른 유형의 문장을 동원했다. 그녀는 아이보다 더 우렁찬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스파이더 맨, 무턱대고 거미줄을 쏘면 부상자가 발생할 수도 있어. 인명 피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해 그럼 임무를 마친 뒤 무사히 귀환하도록!”

아이가 화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곧 귀환하겠습니다. 오버!”

순간 무릎을 쳤다. 역지사지의 정신을 완벽하게 응용한 사례가 아닌가.

‘역지사지(易地思之)’

말 그대로 입장을 한 번 바꿔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역지사지는 본래 <맹자 孟子> <이루 離婁>편에 나오는 ‘역지즉개연 易地則皆然’이라는 표현에서 비롯된 말이다. “내가 만약 당신과 같은 그러한 처지였으면 나 역시 그랬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역지사지가 소통을 위한 전제 조건임은 틀림없지만, 말처럼 쉽지만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주변을 보면 겉으로는 “역지사지”를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상대를 억지로 사지(死地)로 내몰기 위해 정력을 다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에게 역지사지는 음흉한 속마음을 가리기 위한 허울 좋은 가림막일 뿐이다.

역지사지를 실천하려면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잠시 벗어나 상대방이 처한 공간과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서 조금 다른 시선으로 문제를 바라봐야 한다. 기존의 관점을 내던져 ‘관점전환’을 시도해야 한다.

그래야 육안(肉眼)이 아니라 심안(心眼)을 부릅뜰 수 있다. 수치로 개량화할 수 없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새로운 시선과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관점을 기울이면, 전혀 다름 풍경이 눈에 들어올지 모른다. 아니, 그때 비로소 못 보던 것을 볼 수 있을지 모른다.

■ 뒷말

- 내 말은 다시 내게 돌아온다.

블로그나 SNS에 달리는 댓글을 읽다가 화들짝 놀랄 때가 있다. 난 모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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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악플을 일삼는 사람들의 손끝에서 태어난 문장이 길을 잃고 정처없이 허공을 맴돌 때마다 적잖이 슬퍼진다.

상대의 단점만을 발견하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 내면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인지 모른다. 슬픈 일이다. 남을 칭찬할 줄 모르면서 칭찬만 받으려 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면서 존중만 받으려 하고 남을 사랑할 줄 모르면서 사랑만 받으려 하는 건 얼마나 애처로운 일인가.

남을 헐뜯는 말은 “특별히 너한테만 털어놓는 건데” 혹은 “웬만하면 내가 이런 얘기 안 하는데”하는 말과 함께 세상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런 험담이 영원히 죽지 않는 불멸의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이다.

뒷담화는 명멸하지 않는다.

세월에 풍화되지 않는다.

모든 힘은 밖으로 향하는 동시에 안으로도 작용하는 법이다. 말의 힘도 그렇다. 말과 문장이 지닌 무게와 힘을 통제하지 못해 자신을 망가뜨리거나 하루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지는 이들이 허다하다.

나는 인간의 말이 나름의 귀소 본능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언어는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헤엄쳐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려는 무의식적인 본능을 지니고 있다.

사람의 입에서 태어난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그냥 흩어지지 않는다. 돌고 돌아 어느 새 말을 내뱉은 사람의 귀와 몸으로 되돌아 온다.

일본의 심리학자 시부야 쇼조에 따르면, 타인을 깎아 내리는 언행을 서슴지 않는 사람은 칭찬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말을 의미하는 한자 ‘언 言’에는 묘한 뜻이 숨어 있다. ‘두 二’번 생각한 다음에 천천히 ‘입 口’을 열어야 비로소 ‘말 言’이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에게 품격이 있듯 말에는 나름의 품격이 있다. 그게 바로 ‘언품 言品’ 이다.

2017.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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