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8. 26. 18:23ㆍ독서후기
말의 품격(2)
- 말과 사람의 품격에 대한 생각들 -
■ 이기주 지음
◉ 언위심성(言爲心聲)
- 말은 마음의 소리다.
- 사람이 지닌 고유한 향기는 사람의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
■ 인향(人香)
- 사람의 향기
몇 해 전 여름이었다. 사무실 근처에 있는 아담한 카페를 찾았다. 40대 초반 쯤 돼 보이는 남자가 직원에게 커피를 주문했다. 직원은 친절하게 응대했다.
“고객님, 차가운 커피로 드릴까요? 뜨거운 커피로 드릴까요?”
남자의 반응은 상식적이지 않았다. 아니 비문명적이었다. 남자가 토해 낸 명사와 동사,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조사와 어미에는 타인을 향한 적의와 공격본능이 빽빽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 사람아, 당연히 아이스커피지. 당신 같으면 이 더운 날 땀 뻘뻘 흘리면서 징글맞게 뜨거운 커피 마시겠어? 확, 그냥!”
남자의 말은 일종의 갑언(甲言)이다. 손님은 왕이기 때문에 갑으로 군림해도 된다는 그릇된 인식이 잔뜩 묻어나는 폭언에 가까운 지저분한 언어, 직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사내가 만약 프랑스의 한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한다면 한 잔 값으로 얼마를 치러야 할까?
1만 원 이상을 내어야 한다. 커피 한 잔 치고는 지나치게 비싼 가격인데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그 카페에서는 예의 없는 고객에게 돈을 더 받기 때문이다. 다음은 카페에 걸려 있는 메뉴판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커피 - 7 유로
커피주세요 - 4.25 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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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커피 한 잔 주세요 - 1.40 유로
좀 매정하기는 하지만 기발한 가격표 아닌가. 고객이 커피를 부문할 때 구사하는 말의 품격에 따라 음료의 가격을 차등 적용하는 것이다.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문인 성대중(成大中)이 당대의 풍속을 엮은 잡록집인 <청성잡기 靑城雜記>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내부족자 기사번 심무주자 기사황 內不足者 其辭煩 心無主者 其辭荒)”
“내면의 수양이 부족한 자는 말이 번잡하며 마음에 주관이 없는 자는 말이 거칠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격과 수준을 의미하는 한자 ‘품 品’의 구조를 뜯어보면 흥미롭다. 입 ‘구 口’가 세 개 모여 이루어졌음을 할 수 있다.
말이 쌓이고 쌓여 한 사람의 품성이 된다는 뜻이다. 그 사람의 체취, 사람
이 지닌 교유한 ‘인향 人香’은 분명 그 사람이 구사하는 말에서 뿜어져 나온
다. 언어처럼 극단을 오가는 것도 드물다. 내 말은 누군가에게, 꽃이 될 수도 있으나 반대로 창이 될 수도 있다.
말은 한 사람 입에서 나오지만 천 사람의 귀로 들어간다. 그리고 끝내 만 사람의 입으로 옮겨진다.
■ 언행
- 말과 행동 사이의 간극
믿음을 의미하는 한자 ‘신 信’에는 깊고 오묘한 뜻이 담겨 있다. 모름지기 사람 人 은 자신이 한 ‘말 言’을 지켜야 ‘신뢰 信’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과 신뢰,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민할 기회가 있었다. 2001년 9월 11일 TV를 통해 뉴욕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건물이 무너지는 장면이 전 세계로 생중계됐다.
루돌프 줄리아니 뉴욕 시장의 모습도 화면에 어른거렸다. 당시 줄리아니 시장은 암 투병 중이었지만 사고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현장으로 달려와 구조 작업을 지휘하고 있었다. 구조대원이 줄리아니 시장 앞을 가로막으며 숨을 할떡거렸다.
“더는 들어가면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어서 안전한 곳으로 피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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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보고 물러나라고요? 괜찮아요. 일단 사람들을 북쪽으로 대피 시켜요! 북쪽 길부터 뚫어요!”
며칠 후 줄리아니 시장은 희뿌연 콘크리트 먼지를 뒤집어쓴 채 연단에 올랐다.
“뉴욕은 내일도 이 자리에 있을 겁니다. 테러가 우리를 멈추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사고 수습 과정에서 줄리아니가 보여준 리더십에 뉴욕 시민들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뉴욕은 줄리아니를 신뢰했다. 경악과 분노, 비탄과 슬픔을 딛고 뉴욕이 부활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더의 말은 곧고 매서운 직선인 동시에 부드러운 곡선과 같아야 한다. 때로는 능수능란하게 휘둘러서 도려낼 것을 도려내야 하고 때로는 부드럽게 친친 둘러 감아서 껴안을 대상을 껴안아야 한다.
아비규환을 방불케하는 재난 상황이라면 리더는 위기의 본질을 꿰뚫고 흐트러짐 없는 말로 신속하게 명령을 내려야 한다.
말과 행동의 관계는 오묘하다. 둘은 따로 분리될 수 없다. 행동은 말을 증명하는 수단이며 말은 행동과 부합할 때 비로소 온기를 얻는다.
언행이 일치할 때 사람의 말과 행동은 강인한 생명력을 얻는다. 상대방 마음에 더 넓게, 더 깊숙이 번진다.
공자는 일찍이 언행일치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공자는 <논어> 위정(爲政)편에서 “선행기언이후종지 先行其言而後從之”라고 했다.
행동을 옮겼다면 말이 꼭 뒤따라야 한다는 뜻이다. 말과 행동의 괴리가 없어야 함을 강조한 셈이다.
이는 도산 안창호의 ‘무실역행 務實力行’ 사상과도 의미가 부합한다. ‘무실’은 참되게 힘쓰자는 뜻이고 ‘역행’은 뒤로 미루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자는 의미다. 이 역시 실행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흡사 유명 스포츠 브랜드의 광고 문구 “just do it!"을 연상케 한다.
음식을 조리하면서 어울리는 양념을 적당히 가미하면 맛은 배가 되지만, 양념 양을 조절하지 못하거나 엉뚱한 양념을 치기라도 하면 음식 고유의 맛과 풍미가 사라진다. 요리를 망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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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면서 한 번쯤은 고민해야 한다. 사람들 앞에 펼쳐놓은 요리(言)와 애써 뿌린 양념(행동)의 궁합이 잘 들어맞는지, 음식 맛을 훼손하고 있지는 않은지….
입 밖으로 꺼낸 말과 실제 행동 사이의 거리가 이 세상 그 어떤 거리보다 아득하게 멀지는 않은지….
■ 본질
- 쉽게 섞이거나 사라지지 않는 것
알곡과 쭉정이는 겉모양이 비슷해서 평소에는 쉽게 구분하기 어렵지만, 추수철에 선선한 가을바람이 들판을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면 알곡과 쭉정이의 명암이 엇갈린다.
이처럼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은 잠시 한데 뒤엉켜 지낼 수는 있으나, 언젠가는 서로 떨어지게 마련이다.
사람과 말의 본질도 매일반이다. 아무리 화려하게 포장하고 감추려해도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성질은 언젠가 드러나고 만다.
본성과 본질, 진심 같은 것은 다fms 것과 잘 뒤섞이지 않는다. 쉽게 으깨어지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진실한 것은 세월의 풍화와 침식을 견뎌 낸다.
이러한 진리를 그대로 스크린에 옮긴 영화가 있다. 톰 후퍼 감독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킹스 스피치>다.
영화에는 심하게 말을 더듬는 왕 조지 6세가 등장한다. 어릴적부터 말을 더듬은 조지 6세는 왕위를 물려받은 후에도 대중 앞에만 서면 지독한 긴장감에 사로잡혀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때는 바야흐로 히틀러가 유럽을 전쟁의 광풍으로 몰아넣던 시기, 조지 6세는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선포를 앞두고 라디오 연설에 나선다.
대국민 담화를 위해서다 언어학자 라이오넬 로그 박사를 찾아간 왕에게 그는 이렇게 조지 6세를 다독이며 당부 한다.
“차분히 친구에게 말하듯 하세요.”
로그 박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한명의 친구에게 진실하게 말할 수 있다면, 그 마음으로 수천만 대중에게도 진심을 전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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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의 조언 덕분인지, 조지 6세는 침착하게 연설을 마무리 한다. 화술과 화법이 아닌 참된 마음이 담긴 왕의 목소리는 전파를 타고 영국 전역으로 퍼져 국민의 귀로 흘러들어간다. 조지 6세의 음성은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묶는 강력한 끈이 된다.
공자는 <논어> ‘위령공 衛靈公’ 편을 통해 “사달이이의 辭達而已矣”라고 강조했다. “말과 문장은 뜻을 전달할 수 있으면 충분하다”는 뜻이다.
무작정 현란하게 말하는 데만 몰두하다보면 정작 말 속에 담아야 할 본질적인 내용을 놓칠 수 있다는 얘기다.
영황<킹스 스피치>로 돌아가 이야기를 마무리 하려 한다. 영화는 동시대를 살았던 두 인물의 언품을 극명하게 대비한다. 한 명은 파시즘의 핏빛 광기로 독일을 어둡게 물들인 아돌프 히틀러, 다른 한 명은 앞서 소개한 말더듬이 왕 조지 6세다.
두 사람의 어법은 극과 극이다. 히틀러는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말의 성찬을 쏟아내는 다변(多辯)과 달변의 소유자다. 반면 조지 6세는 세련되지는 않지만 진심을 담아서 말할 줄 아는 인물이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누가 더 뛰어난 언사를 구시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타인을 향해 생각을 표현하고 감정을 전달하는 행위는 만인이 고민하는 숙제다. 그 과정에서 혹자는 상대의 의표를 찔러야 한다는 부담을 떨지 못하고, 혹자는 누군가의 화법과 말투를 무작정 따라 하다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말에 비법은 없다. 평범한 방법만 존재할 뿐이다. 그저 소중한 사람과 나눈 대화를 차분히 복기(復棋)하고 자신의 말이 그려낸 궤적을 틈틈이 점검하는 것, 그리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화법을 찾고 꾸준히 언품을 가다듬는 수밖에 없다.
■ 표현
- 언어의 무늬와 결을 다채롭게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 재래시장을 자주 갔다. 시장 입구에 발을 들여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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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 좌판 곳곳에서 과장법과 대구법이 뒤섞인 말들이 쉴 새 없이 날아들어 내 귀에서 와글거렸다. “남는 게 없어. 여름에는 괜찮은데 겨울에는 적자야.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이야.”
지금 생각해 보면 상인들의 외침 속에 과장과 대조, 기쁨과 해학만 담겨 있었던 건 아닌 듯하다. 그들의 언어에는 삶의 비애와 고뇌가 일정부분 투영돼 있었을 것이다.
그때 그 시절, 시장통에서 상인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던 것 같다. 그들의 음성은 내 귓속으로 깊이 스며들어 몸과 마음을 간질였다. 아마도 그들이 내 뱉는 표현 속에, 내일에 대한 희망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리라.
‘언어를 표현하는 방법’ 하면 으레 레토릭(rhetoric 수사학)을 떠올리는 이가 많다. 수사학(修辭學) 또는 수사로 번역하는 레토릭은 고대 그리스 시대 때 기원했고, 대중에게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비유와 강조 등의 수사적 기법을 활용한다.
여러 가지 레토릭을 동원해 문장을 다채롭게 표현하는 능력에 관한 한 중국인을 따라잡을 민족은 없다. 오죽하면 “중국 사람은 붓만 들면 바늘을 대들보로 만들 수 있다”는 말이 존재하겠는가.
당나리 시선(詩仙) 이백(李白)의 시는 비약의 기교가 넘실거린다. 이백은 추포가(秋浦歌)에서 “흰 머리털이 3000장 길이로 자랐다(백발삼천장)”며 근심을 토로했고, <장진주 將進酒>에서는 “술을 마시려면 300잔은 마셔야지”라고 호탕히게 노래했다. 대륙의 풍모가 느껴진다.
과장법하면 <삼국지연의>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장판교 싸움을 보자 장비는 좁다란 다리위에서 눈을 부릅뜨고 장팔사모를 움켜쥔 채로 조조의 군대를 향해 엄포를 놓는다. 그는 우레와 같은 고함으로 조조의 100만 대군을 물리친다는 얘기다.
수사법은 오늘날 일상에서도 빛을 발한다. 평범한 대화를 풍요롭게 한다. 여럿이 있을 때 대화를 주도적으로 끌어나가는 사람을 유심히 보면, 적절한 수사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해 마치 그림을 그리듯 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벨기에 루뱅 가톨릭 대학의 뤼크 드 브라방데르 교수의 이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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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법이야말로 타인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고 자기가 어필할 수 있는 가장 창의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뇌는 복잡한 현상을 접하면 그걸 쉽게 이해하기 위해 익숙한 틀에 넣어 단순화합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새로운 틀을 제시하면 거기에 흥미를 갖게 됩니다. 관심을 보이는 것이죠. 수사법이나 모순어법 등이 그러한 틀이 될 수 있습니다.”
■ 관계
- 만드는 것이 아니라 쌓는 것
언어가 생명력을 가지려면 그 의미에 어울리는 크기와 무게를 가져야 하고 온당한 과정을 거쳐 상대방에게 전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말과 글이 상대방의 눈과 귀에 달라붙어 제구실을 한다. 다음은 지인의 연애담이다.
군대를 전역하고 복학을 준비하던 친구 J는 어느 날 지하철 2호선 안에서 이상형에 가까운 여인과 마주쳤다. J는 용기를 내어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겸연쩍었던 J는 앞이마를 긁적이며 말했다.
“실례합니다. 어느 역에서 내리세요?”
그녀는 매의 눈으로 J를 쏘아보면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네? 누구시죠? 왜 그러시죠?”
J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 저기 좀 보세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강의 절반이 두꺼운 얼음으로 덥혀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다 녹았네요. 달력을 보니 오늘이 절기상 입춘이더군요. 참, 조선 시대에는 겨울철에 한강의 얼음을 떠서 동빙고와 서빙고에 보관했다고 해요.”
“정말요?”
“그럼요. 국가 제사용 얼음을 저장한 곳이 동빙고랍니다. 서빙고에는 주로 왕실과 고위 관료들이 쓸 얼음을 저장했죠.”
“아 그랬군요.”
“그나저나 오늘 날씨 참 좋죠? 지하철을 타고 잠실 철교를 지날 때마다 느끼는 건데요. 맑은 날도 흐린 날도 한강 주변은 늘 나름의 운치가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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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는 말을 이어갔다.
“참 이 이야기만 하고 전 내릴게요. 사실 그동안 2호선을 타고 오가면서 당신을 아홉 번 봤어요. 아홉 번만 봤으며 말을 걸지 않으려 했는데 오늘까지 정확히 열 번째 만남이군요. 묘한 인연이 아닐까 싶어서요 제게 1분만 시간을 내주시겠어요?”
“정말인가요? 그럼 1분만….”
나는 J가 대화를 전개한 과정을 해부하려 한다. 그는 풍경과 날씨에 대한 감상처럼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이야깃거리를 동원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는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스몰토크 small talk에 해당한다. 스몰 토크는 “날씨가 정말 좋죠?” 처럼 일상의 대화속에서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화젯거리다.
낯선 사람과 말을 섞고 관계를 맺는 단계에서 우리는 매번 스몰 토크라는 징검다리를 놓아야 한다. 달리 말해, 스몰 토크는 모든 인간관계의 시작이다.
목적의식이 뚜렷한 화젯거리는 빅 토크 big talk 로 분류된다. 말 그대로 큼직한 말이다. 상대에게 협조를 구하거나 구체적인 행동 변화를 요구할 때 우리는 빅 토크를 활용한다. 빅 토크는 듣는 이의 마음속에서 크고 무겁게 받아들여진다. 우리가 대화 도중에 꼭 전달하고 싶어 하는 핵심 메시지와 의중이 그 안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을 의미하는 단어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의 라틴어 어원은 ‘커뮤니카레(communicare)이다. ’교환하다‘, ’공유하다‘ 등의 뜻이 담겨 있다. 말은 혼자 할 수 있지만 소통은 혼자 할 수 없다. 소통은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이며 화자와 청자가 공히 교감할 수 있는 지점을 찾을 때 가능하다.
인생은 작은 오해와 인연을 맺거나 풀어가는 일이라는 말이 있다.
다만 인생이라는 강은 단번에 건너 뛸 수 없다. 사귐도 그렇다. 크고 작은 돌을 내려놓고 그것을 하나씩 밟아가며 이쪽에서 저쪽으로 차근차근 건너가야 한다.
삶과 사람 앞에서 디딜 곳이 없다고 조급할 이유가 없다. 어차피 인생과 관계는, 만드는 것이 아니라 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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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음
- 뾰족하고 시끄러운 소리
웃으면 복이 온다고 한다. 그래서 우린 일상의 대화에서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시답잖은 농담을 남발한다. 상대의 웃음보를 자극하려 든다.
그러나 농담이야 말로 과유불급이다. 입술을 떠난 농지거리가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거나 상대를 불편하게 한다면, 언젠가 그 농(弄)은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나를 옭아메고 만다.
몇 해 전 방송인 강호동씨는 수상 소감을 밝히는 자리에서 “웃기는 사람이 되어야지, 우스운 사람이 돼어서는 안된다”며 자신의 유머 철학을 밝혔다.
<메너의 역사>라는 책으로 유명한 독일의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인간이 선의로 하는 언행에 매너라는 요소가 결핍되어 있으면 상대에게 ‘비문명적인 행위’로 인식될 수 있다. 매너는 문명화다”라고 이야기한 바 있다.
오래전 무더운 여름이었다. 신인 작가였던 나는 출간 후 책을 알리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출판사에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설렘은 아쉬움으로 변했고 마음 한구석이 곪아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고 힘없이 걸어 들어왔다. 어머니는 거실에 털썩 주저앉더니 가방에서 대여섯 권의 책을 꺼냈다.
“물어물어 서점 몇 곳을 돌았어. 네 책을 좀 사 왔다.”
녹초가 된 어머니를 보자마자 화가 치솟았다. 나도 모르게 어머니 앞에서 뽀족한 말을 내질렀다.
“몇 권 사봤자 보탬이 안 되니까 앞으로 이러지 마세요. 몸도 안 좋으시잖아요.”
“아, 그래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잖니…”
나는 어머니의 말 한 마디가 높다란 언덕에서 떨어진 돌덩이처럼 느껴졌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덕무는 <사소절 士小節>에서 성인이 알아둬야 할 행실과 언어생활에 대해 소상하게 적었다.
“경솔하고 천박한 말이 입에서 튀어나오려고 하면 재빨리 마음을 짓눌러야 한다. 그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거친 말을 내뱉고 나면 다른 사람에게 모욕을 당하고 해로움이 따르게 될텐데 어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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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는 고막을 두드리며 몸으로 스며든다. 하지만 소음은 고막을 찌른다.
소음이 들쑤시면, 사람은 귀를 틀어막는다. 소음은 스며들지 않고 금세 소멸한다. 가끔은 내 입술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가 말 그대로 소리인지, 소음인지 찬찬히 되짚어 봄직하다.
◉ 대언담담(大言炎炎) * 炎 - 아름다울 담, 불꽃 염, 불탈 염
- 큰 말은 힘이 있다.
-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우주를 얻는 것과 같다.
■ 전환
- 지는 법을 알아야 이기는 법을 안다
“당신 멋져!”
몇 해 전 송년회 자리에서 접한 건배사다. 여기에는 이중적 의미가 있다. “당신이 멋있다”는 겉 뜻을 벗겨내면 “당당하게, 신나게 살고, 멋지게 져주자”는 속뜻이 드러난다.
술잔을 들어 올리면서 앞의 두 어절을 발음할 때는 별 감흥이 없었으나 마지막 어절인 “멋지게 져주자”를 외치는 순간에는 어딘지 모르게 속이 뜨끔했다. 사과할 줄 모르고 지는 데 익숙하지 않은 작금의 세태를 노골적으로 풍자하는 것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누구나 주변 사람과 갈등을 겪게 마련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우리가 발 딛고 있는 세상을 구성하는 존재는 ‘나’와 ‘우호적인 타인’과 ‘비우호적인 타인’, 이렇게 셋뿐이다.
승부의 각축장에는 이기는 자가 있으면 지는 사람이 있다. 무언가를 겨루는 일은 필연적으로 갈등과 앙금을 남긴다.
율곡 이이는 <성학집요 聖學輯要> ‘위정 爲政’ 편에서 국가 경영을 창업 (創業)과 수성(守成), 경장(更張)의 세 가지 단계로 구분 했다.
창업은 초심자가 관통해야 하는 필수과정이다.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자가 겪는 관문이다. 수성은 지키는 행위다. 현재 상황을 있는 그대로 잘 관리하기만 하면 된다. 당연히 승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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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장은 도전자, 승자, 패자 모두가 추구해야 하는 일이다. 경장은 전환이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묵은 제도를 새롭게 개혁하고 확장하는 일이다.
유연하게 혹은 탄력적으로 사태의 흐름을 바꾸는 일이다. 현악기 연주자가 연주를 앞두고 곡과 악기의 상태에 따라 줄을 팽팽하게 고쳐 매는 것도 일종의 경장이다.
그런 면에서 경장은 실패를 겪은 사람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행위다. 현재 상황을 반전 시킬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특히 사과(謝過)가 그렇다.
용기에 바탕을 둔 진솔한 뉘우침이야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유일한 해결책이며 이해 당사자들이 갈등과 불신을 해소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의사소통 도구라는 것이 그의 논리다. 일리가 있다. 사과는 갈등과 갈등 사이에 유연함을 스며들게 한다. 사과는 틀어진 관계를 복원하는 기제(機制)로 작용한다.
지는 법을 아는 사람이야말로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지는 행위는 소멸도 끝도 아니다. 의미 있게 패배한다면 그건 곧 또 다른 시작이 될 수 있다. 상대를 향해 고개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인정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멋지게 져줄 필요가 있다. 그렇게 접어든 길은 죽은 길이 아니다. 종국에는 그것이 가장 현명하게 사는 길이다.
■ 지적
- 따뜻함에서 태어나는 차가운 말
영국의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일화다. 어느 날 쇼는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좋아하지만 로댕의 작품이라면 무턱대고 혹평하는 미술 애호가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쇼는 데생 작품 한 점을 손에 쥐고 흔들며 “제가 최근 손에 넣은 로댕의 그림입니다” 라고 말했다.
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애호가들은 그림의 흠을 들추어 헐뜯기 시작했다. 험담과 험담이 허공에서 맞부딪쳐 험담의 아우성을 만들어내며 휘돌았다. 어지럽고 어수선했다. 그러자 쇼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험담의 한복판을 겨냥해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그 문장이 한데 뒤엉켜 있는 험담들을 순식간에 흩어지게 하였다. 쇼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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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 미안해요. 제가 그림을 착각했네요. 이 그림은 로댕의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작품입니다.”
쇼의 집에 초대받은 이들처럼 스스로 쌓은 편견의 감옥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본인의 머리와 마음속에 있는 것만을 유일한 정답으로 간주하고 나머지는 무조건 오답으로 치부하는 경우다.
편견의 감옥이 높고 넓을수록 남을 가르치려 하거나 상대의 생각을 교정하려 든다. 이미 정해져 있는 사실과 진실을 본인이 쥐락펴락할 수 있다고 믿는다. 상대의 입장과 편견의 감옥 바깥쪽에 있으므로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존심이라는 급소가 있다. 더욱이 일반 성인은 자신이 남보다 열등하지는 않다 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존재 가치와 능력이 평균치를 웃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일컬어 ‘자기 고양 오류’라고도 한다.
그 때문에 몸담은 조직이나 구성원들 앞에서 부당한 지적과 모욕을 당하면 자존심이 몇 곱절 더 상하게 마련이다.
고려 때 문신 추적(秋適)이 금언과 명구를 모아 엮은 <명심보감 明心寶鑑>의 글귀가 떠오른다. 그 책의 ‘언어’편을 펼치면 말의 본질과 관련해 “이인지언 난여면서 상인지어 이여형극, 일언반구 중치천금 일어상인 통여도할 利人之言 煖如綿絮 傷人之語 利如荊棘 一言半句 重値千金 一語傷人 痛如刀割” 이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온다.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말은 솜처럼 따뜻하지만 사람을 상하게 하는 말은 가시처럼 날카롭다. 한 마디 말의 무게는 천금과 같으며 한마디 말이 사람을 다치게 하면 그 아픔은 칼로 베이는 것과 같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 교수는<피로 사회>라는 책을 통해 “시대마다 그 시대의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21세기를 지배하는 질병은 생물학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질환이다.”라고 말했다.
난 그의 주장을 빌려, 지금 우리 사회를 ‘지적(指摘)’ 과잉의 시대라고 부르고 싶다.
타인의 허물을 콕 집어서 가리키는 지적의 말은 자칫 독설로 변질할 수도 있다. 독설(毒舌)은 글자 그대로 혀(舌)에서 나오는 독(毒)이다. 피가 되고 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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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되는 독도 있지만, 대개 몸과 마음을 망치고 독을 흩뿌린 사람의 혀마저 망친다.
착한 독설, 건설적인 지적을 하려면 말 자체는 차갑더라도, 말하는 순간 가슴의 온도만큼은 따뜻해야 한다.
비판(批判_)의 한자를 들여다보면 비평할 비 批 는 손수(手)변에 견줄 비(比)가 합쳐진 글자다. 사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며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게 제대로 된 비판이다.
누군가를 손가락질 하는 순간 상대를 가리키는 손가락은 검지뿐이다. 나머지 세 손가락은 ‘나’를 향한다. 세 손가락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검지를 들어야 한다. 타인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내가 떳떳한지 족히 세 번은 따져봐야 한다.
■ 질문
- 본질과 진실을 물어보는 일
인간관계에 능한 사람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궁예의 관심법(觀心法)을 터득하기라도 한 것처럼 타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재주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마천이 쓴 <사기 史記>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반청지위총 내시지위명 反聽之謂聰 內視之謂明.” “들은 것을 거듭하여 되새기면 가히 귀가 총명하다고 할 수 있고, 마음의 눈으로 보면 가히 눈이 밝다고 한 만하다”는 가르침이다.
질문 質問에서 질 質 은 ‘진실’, ‘바탕‘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질문은 ’상대에게 사물과 현상의 본질과 진실을 물어 본다‘는 뜻이다.
말은 본디 침묵을 통해 깊어지는 것이지만 때로는 침묵을 깨고 상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진심은 무엇인지를 질문을 통해 알아내야 한다. 그것이 질문의 본질이다.
언젠가 TV에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임동창 씨가 운영하는 대안 학교에 대한 소식을 접했다. 학생들은 문제아가 아니라, 세상살이에 적응하는 데 남보다 조금 더 시간이 필요해 보이는 아이들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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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 분위기는 독특했다. 아이들은 교실에 앉아있기 보다 텃밭을 가꾸거나 자연과 호흡하는 법을 배우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임동창 작곡가가 아이들을 대하는 모습도 내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수업시간에 두 학생이 사소한 일로 다툼질 했다. 그런데 임 작곡가는 아이들을 따끔하게 혼내지도 그렇다고 억지로 화해를 종용하지도 않았다.
그저 두 학생을 지그시 바라보며 “네 기분은 어때?” “친구는 어떤 기분일 것 같아?” “지금 어떻게 하고 싶어?” 라는 식으로 덤덤하게 질문했다. 그는 대화의 적재적소에 질문을 심어, 그 지점에서 솔직한 대답이 싹트기를 기대하는 듯했다.
그러자 세상을 향해 마음을 굳게 닫아버린 것 같던 아이들이 하나둘 속마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전에 다니던 학교에서는 제가 잘못하면 무조건 회초리를 맞았어요. 이유를 묻지 않았어요. 그래서 제 감정과 생각을 털어 놓기도 싫었어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저를, 제 마음을 존중해주는 것 같아요.”
임 작곡가의 입에서 나온 말과 아이들의 귀로 스며든 말에는 낙차가 없었다.
사람이 마음에는 저마다의 강이 흐른다고 생각한다. 어떤 말이 우리의 귀로 들어오는 순간 말은 마음의 강물에 실려 감정의 밑바닥까지 떠내려 온다.
마음속에서 명령과 질문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른다. 명령이 한쪽 생각을 다른 한쪽에 흘려보내는 ‘치우침의 언어’라면, 질문은 한쪽의 생각이 다른 쪽에 번지고 스며드는 ‘물듦의 언어’다.
질문 형식의 대화는 청자(聽者)로 하여금 존중 받는 느낌이 들게 한다. 때에 따라 듣는 이의 자발적 참여를 끌어내기도 한다.
‘가르친다’는 뜻의 영어 단어 ‘educate’는 ‘밖으로 끌어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부모나 교사가 일방적으로 생각을 주입하는 게 아니라 잠재적 능력을 발현하도록 밖에서 돕는 게 진짜 가르침이다.
■ 앞날
- 과거와 미래는 한곳에서 숨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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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8일 마이클 히긴스 아일랜드 대통령이 영국을 국빈 방문했다. 이날 오전 런던 외곽에 있는 윈저 성(城)에서는 하긴스 대통령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참석한 가운데 만찬 연회가 열렸다. 분위기는 차분하다 못해 냉랭했다
아일랜드와 영국 간 역사는 피의 보복으로 점철돼 있다. 700년 동안 영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일랜드는 독립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끈질기게 무장 투쟁을 벌였다. 영국의 대응은 차갑고도 무자비했다. 아일랜드 공화국군 IRA와 영국군의 유혈 충돌로 두 나라에서 무수히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갈등의 틈새를 메우려는 시도는 충돌의 횟수 못지않게 빈번했다. 양국 정상들은 화해를 위해 손을 맞잡곤 했다. 그때마다 과거가 발목을 잡았다.
연회장의 공기는 무겁게 내려앉았다. 무엇으로도 그 핏빛 엄숙함을 부스러뜨릴 수 없어 보였다.
정적을 깬 건 엘리지베스 여왕이었다. 여왕이 건배사를 하기 위해 샴페인 잔을 들어 올렸다. 여왕의 언어는 잔에 담긴 샴페인처럼 꾸밈이 없었다.
“여러분 앞으로도 우리는 과거를 기억할 겁니다. 어쩌면 영원히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더는 과거가 미래를 망치도록 놔두지 말아야 합니다. 미래가 과거에 얽매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이제 미래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후대에 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선물입니다.”
옛말에 “대언大言은 담담하다” 고 했다. ‘담담’은 물의 흐름 따위가 그윽하고 평온한 상태를 나타낸다. 힘 있고 웅장한 것을 가리킨다. 옳다 큰 말은 분명 힘이 있다. 반면 소언小言은 수다스럽다. 가볍고 약하다.
히긴스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답했다.
“두 국가가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고 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걸어가야 합니다. 그 길은 영속적이며 창조적인 호해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히긴스 대통령이 착석하자 만찬장 한 쪽에서 낯선 음악이 흘러나왔다. IRA 전사들이 부르던 아일랜드 민요<몰리 말론 Molly Malone>이 울려 퍼졌다. 아일랜드 민족의 한이 담긴 음악이 연회장 구석구석을 처연하게 물들였다.
이날 이후 양국은 역사의 한 장을 접고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로 합의했다. 미래를 위해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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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대화를 나눌 때도 마라토너처럼 페이스를 조절 하는 이들이 있다. 처음부터 전속력으로 내달려 오버 페이스하지 않고, 다음 코스를 내다보듯 남보다 긴 호흡으로 말하는 사람들, 귿이 명명하면 ‘마라톤 말씨’의 소유자라고 할까. 앞서 언급한 엘리자베스 여왕이 대표적이다.
<명심보감>에서는 “욕지미래 선찰이연 慾知未來 先察已然”이라했다. “미래를 알고 싶으면 먼저 지난 일을 돌아봐야 한다”는 말이다.
맞다. 천년의 지혜임이 틀림없다. 미래의 교훈은 과거에서 얻을 수 있다. 과거라는 둥지에서 미래라는 알이 부화한다. 무엇보다 과거에 대한 성찰은 문명사회의 요건이다.
과거는 벽이 되기도 하고 길이 되기도 한다.
■ 연결
-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는 노력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연출한 <링컨 Lincoln>은 노예 해방을 이끈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의 인간적 면모를 고스란히 담아낸 영화이다.
영화 속에서 링컨은 탁월한 승부사로, 동시에 정치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정적과 타협하는 협상가로 그려진다. 다만 영화가 채 전하지 못하는 링컨의 면모가 있으니 바로 통합과 포용의 정신이다.
링컨은 남북전쟁 와중에 에드윈 스탠튼이라는 인물을 지금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전쟁 장관에 앉혔다. 사람들은 의아해하며 수군거렸다.
스탠튼은 사사건건 링컨의 정치적 행보를 비난한 앙숙이었다. 일리노이 주에서 거물 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 스탠튼은 링컨을 향해 “캔터키 촌뜨기”, “덩치 큰 긴팔원숭이”라고 모욕했다.
과거의 기억에서 길을 헤매며 버둥거리던 스탠튼은 링컨을 대면하는 자리에서 날을 세웠다.
“도대체 왜 내게 전쟁장관이라는 요직을 맡기는 겁니까? 조롱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링컨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흠, 사실 나도 처음에는 당신이 싫었어요. 하지만 싫기 때문에 당신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법정에서 열정적으로 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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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는데요. 당신만큼 공적인 의무감이 투철한 사람은 보지 못했어요. 그 정도 책임감과 투쟁력이라면 전쟁장관으로 제격이 아닐까 싶어요. 어때요? 나와 함께 나라를 위해 싸워보지 않겠소?”
스탠튼은 얼굴이 화끈 거렸다. 링컨을 비하하고 옹졸하게 대했던 지난날이 영사기 필름처럼 스르륵 스쳐 지나갔다. 링컨의 제안은 엄청난 무게로 스탠튼의 어깨와 가슴을 짓눌렀다.
이후 스탠튼은 링컨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참모가 됐다. 1865년 4월 링컨이 암살당해 생을 마감했을 때 가장 서럽게 운 이도 다름 아닌 스탠튼이었다. 스탠튼은 “가장 완벽한 지도자가 쓰러졌다. 이제 그는 역사가 됐다”며 가슴으로 비통의 눈물을 흘렸다.
포용(包容)은 감싸는 것이다. 동사 ‘포용하다’를 사전에서 찾으면 ‘남을 너그럽게 감싸주거나 받아들이다’라고 나온다. ‘감싸다’ 혹은 ‘덮어주다’ 정도로 순화할 수 있는 낱말이다.
사마천이 쓴 <사기> ‘계명우기 鷄鳴遇記’ 편에는 네 가지 사귐의 유형이 나온다.
첫째는 의리를 지키며 서로의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친구 ‘외우 畏友’,
둘째는 친밀한 마음을 나누며 서로의 어려움을 도와주는 친구 ‘밀우 密友’
셋째는 즐거운 일을 나누면서 함께 어울리는 친구 ‘일우 昵友’
넷째는 이익만 좇다가 나쁜 일이 생기면 책임을 떠넘기는 친구 ‘적우 賊友’
링컨과 스탠튼의 관계는 밀우와 외우의 중간쯤 되지 않았을까 싶다. 우리가 밥벌이를 위해 내몰리는 이 세상에는 위 네가지 친구가 적당히 뒤섞여 있을 테지만 말이다.
■ 광장
- 이분법의 울타리를 뛰어 넘자.
2013년 3월 13일 노르스름한 햇살이 사위어가는 늦은 오후, 로마 바티칸의 성베드로 대성당, 저무는 태양이 저녁 어스름에 자리를 내어줄 무렵 발코니를 덮었던 선홍색 커튼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새로 전출된 프란치스코 교황이 하얀 가운에 은빛 띠를 두르고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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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흩뿌려 번들거리는 광장에는 교황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듣기 위해 기대와 설렘으로 밤을 지새운 인파가 그득했다. 그들은 교황의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커튼을 열어젖힌 프란치스코 교황은 광장을 향해 손을 흔들어 답례했다. 제 266대 교황의 입을 통해 우리가 처음 들을 수 있었던 건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평범한 인사말이었다.
“좋은 저녁입니다. Buona Sera!"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가장 많이 붙는 수식어는 ‘파격’이다 교황은 기존의 관행 앞에서 움츠러들지 않았다. 선출된 직후부터 관습을 허물어 뜨렸고 허례허식을 뛰어넘었다. 다른 교황들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신선한 횡보를 이어갔다.
고위 성직자의 전통적 복장인 모제타(짧은 망토)를 걸치지 않았고, 리무진 대신 중고 소형차를 타고 이동했다. 자신의 77번째 생일에는 거리와 공원에서 한뎃잠을 자는 이들을 초대해 아침 식사를 대접했다.
교황이 지닌 인품의 가장 큰 특징은 이분법적 시각에서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교황은 기자회견이나 대중 연설 자리에서 특정한 편을 가르거나 등급을 매기지 않는다. 좋은 나라와 나쁜 나라, 선과 악, 동과 서를 구분하는 법이 없다.
이러한 말씨와 세계관은 흥미롭게도 공자가 <논어> ‘위정 爲政’편에서 언급한 군자의 덕목과 동일한 사상의 궤적을 그린다.
일찍이 공자는 “군자주이불비 소인비이부주 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고 강조한 바 있다.
“군자는 여러 사람과 어울리면서도 무리를 짓지 아니하고, 소인은 무리를 지어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는 의미다.
프란치스코 교황처럼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불편부당한 언행은 자기를 둘러싼 유무형의 울타리를 뛰어 넘을 때 가능하다.
타자에 대한 개방적인 시각은 교황이 남긴 몇몇 이론에 진하게 배어 있다. 언론과 가진 첫 공식 인터뷰에서는 “이혼과 낙태 문제에 대한 교회의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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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장은 변치 않았지만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위로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의 역할입니다”라고 했다.
한 무신론자와의 통화에서는 “신의 자비는 한계가 없습니다.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자신의 양심을 따르면 됩니다”라며 감싸 안았다.
중국 송나라 때 고서(古書) <통감절요 通鑑節要>에 “해납백천 유용내대 海納百川 有容乃大”라는 글귀가 있다.
직역하면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들이고 이 때문에(바다는) 더욱 커진다”는 뜻이다.
이른 봄에 골목이나 처마 맡을 지나다 보면 희끄무레한 잔설이 쌓여 있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자연의 섭리가 그렇다.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곳에서 얼음이 저절로 녹을 리 없다. 빛을 쫴야 겨우내 언 땅이 풀린다.
사람의 감정도 매한가지가 아닐까 싶다. 따스한 햇볕 아래 서 있을 때 삶의 비애와 슬픔을 말려버릴 수 있다 그때 비로소 시들한 마음이 부풀어 오르고. 꽁꽁 얼어붙은 가슴도 녹아내린다.
봄 기운이 바람에 실려 온다 싶으면 컴컴한 곳에 눌러 앉아 있지 말고 몸을 움직여야 한다. 몸을 솟구쳐서 울타리를 벗어나야 한다. 삶의 바깥쪽에서 서성이지 말고 삶의 한복판으로 걸어가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그런 것처럼 광장으로 볕이 드는 곳으로, 삶의 온기가 있는 곳으로…….
2018. 8.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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