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온도

2017. 9. 22. 11:16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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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온도

■ 이기주 지음

0 서울 경제신문 전직 기자

0 한때 청와대 대통령 스피치 라이터

0 작가 겸 컨설턴트

0 저서

- 여전히 글쓰기가 두려운 당신에게, 언품, 언어의 온도, 말의 품격 등

* 컨설턴트(consultant) : 기업의 창설 운영, 관리 따위에 대한 평가나 조언, 권고 따위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

■ 서문 : 몇 도 쯤 될까요. 당신의 언어 온도는

섬세한 것은 대개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예민합니다.

우리말이 대표적입니다. 한글은 점 하나, 조사 하나로 문장의 결이 달라집니다. 친구를 앞에 두고 “넌 얼굴도 예뻐”하려다가 “넌 얼굴만 예뻐”라고 말하는 순간,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됩니다.

언어에는 나름의 온도가 있습니다. 따뜻함과 차가움의 정도가 저마다 다릅니다. 온기 있는 언어는 슬픔을 감싸 안아줍니다. 세상살이에 지칠 때 어떤 이는 친구와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고민을 털어내고, 어떤 이는 책을 읽으며 작가가 건네는 문장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언어에는 감정이 잔뜩 실리기 마련입니다. 말하는 사람은 시원할지 몰라도 듣는 사람은 정서적 화상을 입을 수 있습니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표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의 마음을 돌려 세우기는커녕 꽁꽁 얼어붙게 합니다.

무심결에 내뱉은 말 한마디 때문에 소중한 사람이 곁을 떠났다면 ‘말 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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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너무 뜨거웠던 게 아닐까요. 한두 줄 문장 때문에 누군가 당신을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았다면 ‘글 온도’가 너무 차갑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 봄비 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 이기주

◉ 말(言), 마음에 새기는 것

■ 더 아픈 사람

언젠가 홍대입구역에서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맞은편 좌석에 앉아 있는 할머니와 손자가 눈에 들어왔는데 자세히 보니 꼬마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할머니 손에는 약봉지가 들려 있었다. 병원에 다녀오는 듯했다.

할머니가 손자 이마에 손을 올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아직 열이 있네. 저녁 먹고 약 먹자.”

손자는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며 대꾸했다.

“네 그럴게요. 그런데 할머니는 내가 아픈 걸 어찌 그리 잘 알아요?”

순간, 나는 할머니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답의 유형을 몇 가지 예상해 보았다. 그런데 내 어설픈 예상은 철저하게 빗나갔다. 할머니는 손자의 헝클어진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의 끔찍함을.

그래서 다른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자신이 겪은 것과 비슷한 상처가 보이면 남보다 재빨리 알아챈다. 상처가 남긴 흉터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그리고 아파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아프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어린 손자에게 할머니가 알려주려고 한 것도 이런 이치가 아니었을까?

■ 말도 의술(醫術)이 될 수 있을까

몇 해 전 일이다. 일산에 있는 병원에서 어머니가 수술을 받았다. 진료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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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다른 병원과 별 차이가 없었는데 의료진이 환자를 부르는 호칭이 다소 낯설게 느껴졌다. 나이 지긋한 의사가 회진차 병실에 들어왔는데 그는 팔순을 훌쩍 넘긴 환자를 대할 때도 “환자” 혹은 “어르신‘이라 부르지 않았다. ”박 원사님“ ”김 여사님“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소박한 의문이 뭉게구름처럼 솟아올랐다. 음, 이유가 뭘까. 왜 저렇게 부르는 걸까.

어머니가 퇴원하는 날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내가 “환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않으시던데요?”라고 묻자 그는 “그게 궁금하셨어요?”하고 되물었다. 의사는 별걸 다 물어본다는 투로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환자에서 ‘환(患)’이 아플 환이잖아요. 자꾸 환자라고 하면 더 아파요.”

“아….”

“게다가 ‘할머니’ ‘할아버지’같은 호칭은 싫어하는 분도 많아요. 그래서 은퇴 전 직함을 불러드리죠. 병원에서는 사람의 말 한마디가 의술(醫術)이 될 수 있어요.”

■ 사랑은 변명하지 않는다

좌우봉원(左右逢源)이라는 말이 있다. 좌우, 그러니까 주변에서 맞닥뜨리는 사물과 현상을 잘 헤아리면 근원과 만나게 된다는 뜻이다. 일상의 모든 것이 공부의 원천이라는 의미로도 풀이 된다.

얼마 전 5호선 공덕역에서 생각지도 않은 깨달음을 얻었다. 사소한 장면 하나가 내 마음에 훅 하고 들어왔다.

경로석에 앉은 노부부의 모습이었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할머니 옆에서 휴대폰으로 뉴스를 보고 있었는데 제법 시끄러웠다. 아르신은 뉴스 한 꼭지가 끝날 때마다 “어허”, “이런”등의 추임새를 격렬하게 넣었다. 앵커의 멘트와 어르신의 목소리가 객차를 점령하다시피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가 할아버지의 손등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말했다.

“여보 사람들 많으니까 이어폰 끼고 보세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아, 맞다. 알았어요. 당신 말 들을게요”라고 대답했다.

흔히들 말한다. 상대가 원하는 걸 잘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작은 사랑일지도 모른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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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본질은 그렇다. 사랑은 함부로 변명하지 않는다. 사랑은 순간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이리저리 돌려 말하거나 방패막이가 될 만한 부차적인 이유를 내세우지 않는다. 사랑은, 핑계를 댈 시간에 둘 사이를 가로막는 문턱을 넘어가며 서로에게 향한다.

■ 틈 그리고 튼튼함

어느 작은 사찰에 들어간 적이 있다. 마당 가운데 석탑 하나가 기품을 뽐내

며 당당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난 탑 주위를 빙빙 돌며 ‘몇 살 쯤 됐을까?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혼자 조용히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찰나, 등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얼마나 됐을 것 같나?” 주지 스님인 듯했다.

“이곳에 있는 석물(石物)은 수백 년 이상 된 것들이 대부분이야. 참, 이런 탑을 만들 땐 묘한 틈을 줘야 해.”

“네? 틈이라고 하셨나요?”

“그래. 탑이 너무 빽빽하거나 오밀조밀하면 비바람을 견디지 못하고 폭삭 내려 앉아. 어디 탑만 그렇겠나. 뭐든 틈이 있어야 튼튼한 법이지.”

이야기를 듣자마자 그동안 내 삶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던 감정과 관계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돌이켜보니 지나치게 완벽을 기하는 과정에서 중심을 잃고 넘어지게 만든 대상이 수없이 많았던 것 같다.

틈은 중요하다. 어쩌면 채우고 메우는 일보다 더 중요한지 모르겠다. 다만 틈을 만드는 일이 어렵게 느껴지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매한가지다.

■ 말의 무덤, 언총(言塚)

필요 이상으로 말이 많아지는 이른바 다언증(多言症)이 도질 때면 경북 예천군에 있는 언총(言塚)이라는 ‘말 무덤’을 떠올리곤 한다. 달리는 말(馬)이 아니라 임에서 나오는 말(言)을 파묻는 고분이다.

언총은 한마디로 침묵의 상징이다.

마을이 흉흉한 일에 휩싸일 때마다 여러 문중 사람이 언총에 모여, “기분 나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으로 시작하는 쓸데없는 말과 ”그쪽 걱정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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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얘기인데요…“처럼 이웃을 함부로 비난하는 말을 한데 모아 구덩이에 파묻었다. 말 장례를 치른 셈인데, 그러면 신기하게도 다툼질과 언쟁이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나는 가끔은 내 언어의 총량(總量)에 관해 고민한다. 그리고 다언(多言)이 실언(失言)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지 않으려 한다.

그리고 종종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물어본다. 말 무덤에 묻어야 할 말을, 소중한 사람의 가슴에 묻으며 사는 건 아닌지.

■ 그냥 한 번 걸어봤다

버스 안에서 일흔 쯤 돼 보이는 어르신이 휴대전화를 매만지며 ‘휴~‘하고 한숨을 크게 내 쉬는 모습을 보았다.

10분 쯤 지났을까. 어르신은 조심스레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우연히 통화내용을 들었는데 시집간 딸에게 전화를 거는 듯 했다.

“아비다. 잘 지내? 한 번 걸어봤다.”

대개 자식과 멀리 떨어져 사는 부모는 “한 번 걸었다”는 인사말로 통화를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왜 그러는 걸까. 정말 일상이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서, 그냥 무의식적으로 아무 이유 없이 통화 버튼을 눌러 보는 것일까. 심심해서?

그럴 리 없다. 정상적인 부모가 자식에게 취하는 모든 행동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냥 걸었다는 말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고 표현의 온도는 자못 따뜻하다. 그 말 속에는 ‘안 본 지 오래됐구나. 이번 주말에 집에 들러주렴“ ”보고 싶구나. 사랑한다.“같은 뜻이 오롯이 남아 있기 마련이다.

거리에서 혹은 그냥 카페에서 “그냥…”으로 시작하는 문장이 청아하게 들려올 때가 많다. 퇴근길에 부모는 “그냥 걸었다”는 말로 자식에게 전화를 걸고 연인들은 서로 “그냥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라며 사랑을 전한다.

“그냥”이란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후자의 의미로 “그냥”이라고 입을 여는 순간 ‘그냥’은 정말이지 ‘그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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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히 당신을 염려하오

몇 해 전 봄을 알리는 비가 지나간 스산한 저녁이었다. 일을 보고 차를 몰아 자유로에 진입했다. 어지럽게 널린 파편 사이로 찌그러진 승용차 몇 대가 보였다. 추돌사고가 발행한 듯했다.

맨 앞 차량에서 허리가 조금 굽은 어르신이 걸어 나와 서는 다른 차량 운전자와 잠깐 얘기를 나눈 뒤 곧장 조수석으로 달려갔다. 승용차의 파손 상태는 살피지도 않았다.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각인된 건 그 다음 장면이다. 어르신이 내린 차량의 뒷좌석에서 작은 체구의 할머니가 몸을 웅크린 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잠시 뒤 어르신은 문을 열어젖힌 후 두 팔을 벌려 할머니를 살포시 안았다.

그 모습은 마치 “세월이 흘렀지만 난 여전히 당신을 염려하오”라고 온몸으로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짜 사랑과 가짜 사랑을 가르는 기준은 뭐지?”

순간, 나의 눈앞에 교통사고 현장에서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껴안던 모습이 무성영화의 한 장면처럼 흐릿하게 펼쳐졌다. 난 무릎을 탁 쳤다. 그래 할아버지가 그랬듯, 상대를 자신의 일부로 여길 수 있는지 여부가, 진실한 사랑과 유사(類似) 사랑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지도 몰라.

■ 당신은 5월을 닮았군요

일 년 열두 달 중에서 난 계절의 여왕으로 불리는 5월을 가장 좋아한다. 5월의 속성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자라다’가 아닐까 싶다.

5월을 뜻하는 메이(May)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풍요와 증식(增殖)의 여신 마이아(Maia)에서 왔다. 5월이 되면 모든 게 쑥쑥 자란다. 들판의 곡식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하고 사람의 감정도 충만해진다.

몇 해 전 5월. 한 여인을 향해 내 안에 숨어 있던 수줍은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난 은밀하게, 섬세하게 감정을 전달하고 싶었다. 표현을 고르고 고른 끝에 “사랑해요” “좋아해요”같은 말 대신 “당신 정말이지 5월을 닮았군요”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고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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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감정은 은유(隱喩)와 무척 닮았다. 사랑이 싹트면,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도 ‘내 마음은 호수요’ 식의 은유적 문장을 습관적으로 동원해 연정을 드러내곤 한다. 마음이라는 종이 위에 시적인 표현이 시도 때도 없이 자라기 때문이다. 몇몇 작가들도 이야기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메타포(metaphor)로 시작된다, 라고.

* 메타포 : 간접적이며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말

■ 목적지 없이 떠나는 여행

후배 녀석이 7년 넘게 사귄 여자와 실컷 싸우고 헤어졌다. 녀석은 그녀를 잊어야겠다는 핑계를 대며 지인들과 술을 마셨다.

중요한 건 평소 문학이나 드라마와는 담을 쌓고 사는 녀석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 나왔다는 거다.

“선재, 우린 목적지 없이 여행길에 올랐던 것 같아요. 목적지 없이….”

녀석의 표현이 그랬다. 사랑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종착지를 정하지 않은 채 무작정 둘 만의 여행을 떠났으니, 어디선가 깊은 미궁으로 빠져들었고 결국 길을 잃었노라고. 그러면서 녀석은 “괜찮아요. 곧 잊을 테죠…”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뱉으며 전두엽이 잘려나간 사람처럼 흐리멍덩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전두엽 : 사람의 생각, 감정, 행동을 조절하고 통제하는 역할 담당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뜬금없이 류시화 시인의 ‘나무의 시’에 나오는 짤막한 구절을 들려줬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무에 대한 시를 쓰려면 먼저 눈을 감고 나무가 되어야지. 너의 전 생애가 나무처럼 흔들려야지….”

난 후배를 택시에 욱여넣다시피 한 다음 심야버스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옆좌석에서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키득대고 있었다. 그들을 슬쩍 바라보다가 사랑의 생성과 소멸에 대해 생각했다.

우린 사랑에 이끌리게 되면 황량한 사막에서 야자수라도 발견한 것처럼 앞뒤 가리지 않고 다가선다. 그 나무를, 상대방을 알고 싶은 마음에 부리나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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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간다. 그러나 둘만의 극적인 여행이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순간 서늘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내 발걸음은 ‘네‘가 아닌 ’나‘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이 역시 사랑의 씁쓸한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처음에 ‘너’를 알고 싶어 시작되지만 결국 ‘나’를 알게 되는 것, 어쩌면 그게 사랑인지도 모른다.

■ 부재(不在)의 존재(存在)

나는 나이가 들수록 유독 맛보고 싶은 음식이 있다. 대학 시절 학교쪽문에서 호호 불어가며 먹던 칼제비(칼국수 와 수제비를 섞은 국수)의 푸짐함이 그립고 “이거 다 비워야 키 큰다”며 할머니가 만들어 준 콩국수의 맛도 잊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그런 음식 곁엔 특정한 사람과 특정한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다.

음식을 맛보며 과거를 떠올린다는 건, 그 음식 자체가 그리운 게 아니라 함께 먹었던 사람과 분위기를 그리워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리운 맛은, 그리운 기억을 호출한다.

현실에서도 부재(不在)의 존재(存在)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경우를 더러 경험하게 된다. 몇 해 전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친구 녀석이 최근 술자리에서 음식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며칠 뒤 식구들이 모여서 외식을 했어. 그런데 식당에서 밑반찬으로 멸치볶음이 나온 거야. 그걸 보자마자 너 나 할 것 없이 일제히 눈물을 쏟았어.”

“그랬구나…. 그, 그런데 왜?“

“아버지가 생전에 멸치볶음을 정말 좋아하셨거든.”

“어….”

■ 길가의 꽃

오래전 기억이다. 점심을 먹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길에 직장 동료가 회사 앞 화단에 핀 꽃을 가리키며 말했다.

“예쁜데, 우리 조금만 꺾어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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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꽃을 낚아채려는 순간 경비 아저씨가 끼어 들었다.

“아니 뭣들 하는 건가? 꽃을 왜 꺾어?”

“사무실 책상위에 올려놓고 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한 송이만 꺾어갈게요.”

“그냥 지나가며 보도록 하게.”

“네? 왜요?”

“이 꽃은 여기 이 화단에 피어 있어서 예쁜 건지도 몰라. 주변 풍경이 없다면 꽃의 아름다움이 반감될 걸세. 그러니 꺾지 말게. 책상 위에 올려 놓는 꽃은 지금 보는 꽃과 다를 거야.”

■ 진짜 사과는 아프다

“한기주 씨! 미안할 때는 미안하다고 말하세요. 자존심 세우면서 사과하는 방법은 없어요.” - 드라마 ‘파리의 연인’ 중에서

기자 시절 사소한 다툼으로 불편하게 지내던 선배가 있었다. 토라지기 전에는 꽤 돈독한 사이였지만, 자존심 탓인지 먼저 잘못을 시인하려 들지 않았다. 나도, 그 선배도.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기자실에서 마주친 선배는 빨간 사과 한 알을 건네주고는 도망치듯 사라졌다.

나는 벌겋게 달아오른 선배의 얼굴과 사과의 색깔이 꽤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그러고는 입을 삐쭉 내밀며 잠시 사과를 바라봤다. 먹을까 말까 고민하다 사각사각 한 입 베어 먹었다. 상큼한 향기가 입안 가득 퍼졌다.

사과를 먹고 헤아려봤다. 선배는 왜 뜬금없이 사과를 건넨 것일까? 아차, 선배의 메시지는 단순했던 것 같다. 그는 사과(apology)를 하고 싶었던 거다. 다만, 쑥스럽다는 이유로 그냥 사과(apple)를 내 밀었을 뿐.

매장 안에서 아이가 정신없이 뛰어 다니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갑자기 들이닥친 아이 때문에 20대 초반 쯤 되어 보이는 남자 고객이 커피를 쏟고 말았다.

아이 어머니는 ‘안 다쳤네?’ 하는 눈빛으로 사내를 대충 흘겨보더니 사과 한 마디 없이 자리를 뜨려했다. 사내는 “저기요 공공장소에서는 뛰지 않게 하셔야죠!” 소용없었다. 사내의 항의가 그녀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듯 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되레 더 큰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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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요? 원래 착한 아이란 말야. 당신도 아이 낳아봐!” 흠 뭐라고 할까. 그녀는 목소리만 크면 이긴다는 사회적 통념을 실제로 증명하기 위해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들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을 바라보며 한 때 국민 예능 프로였던 ‘가족오락관’을 생각했다. 특정 출연자가 헤드폰을 쓴채 다른 출연자의 입만 보고 단어를 알아맞히는 ‘고요 속의 외침’이라는 코너를, 사내와 아이 어머니가 충실하게 재연하는 것처럼 보였다.

염치는 본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뜻한다. 염치가 없는 사람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낮잡아 우린 '얌체‘라고 부른다.

물론 사과는 어렵다. 하늘의 별따기만큼 어렵다. 노래도 있다. 엘튼 존이 목놓아 불렀다.

“미안하다는 말은 세상에서 가장 하기 힘든 말인 것 같아.(sorry seems to be the hardest word.)"

사과가 뭘까. 도대체 그게 뭐기에 나이가 들수록 어렵게 느껴지는 걸까. 우린 왜 “미안해”라는 말을 먼저 꺼내는 사람을 승자가 아닌 패자로 간주하는 걸까. 사과를 뜻하는 단어 ‘apology’는 ‘그릇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말’이라는 뜻이 담겨 있는 그리스어 이다.

사과의 한자를 살펴보면 그 뜻이 더욱 분명해진다. 사과의 사(謝)에는 본래 ‘면하다’ 혹은 ‘끝내다’ 라는 의미가 있다. 과(過)는 지난 과오다. 지난 일을 끝내고 사태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행위가 바로 사과인 것이다.

사과의 질을 떨어뜨리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하지만’이다. ‘~하지만’에는 ‘내 책임만 있는 게 아니라 네 책임도 있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런 사과는 어쩔 수 없이 하는 사과, 책임회피를 위한 변명으로 변질되고 만다.

미안함을 의미하는 ‘sorry'는 ’아픈‘ ’상처‘라는 뜻을 지닌 ’sore‘에서 유래했다. 그래서일까. 진실 어린 사과에는 ’널 아프게 해서 나도 아파‘라는 뉘앙스가 스며 있는 듯하다. 진짜 사과는 아픈 것이다.

■ 가짜와 진짜를 구별하는 법

사이비(似而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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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기는 하지만 가짜인 것을 의미한다. 물건으로 치면 정교한 모조품이다. 사이비는 진짜와 비슷하다. 그래서 때로는 진짜와 구별하기 어렵고 때로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기도 하다.

하지만 사이비의 생명은 짧다. 유통기한이 그리 길지 않다. 진실한 것이 아니기에 언젠가는 그 실체가 탄로나고 만다. 물건이 그렇고 사람이 그렇고, 감정도 그렇다.

오래전, 경제부 기자 시절 시중은행의 위폐 감별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빠른 손놀림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슈퍼노트(초정밀 위조 달러)를 감별해 내는 ‘가짜 돈 전문가’였다.

“요즘 육안으로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정교한 위폐가 많다고 하던데요?”

“네, 그럴수록 진짜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해요. 가짜를 걸러내려면 진짜를 잘 알아야죠.”

“그렇군요. 그래도 가짜를 보면 뭔가 감이 온다거나 그런 게 있나요?”

“너무 화려하면 일단 수상한 지폐로 분류합니다. 위폐는 진짜처럼 보이기 위해 꾸민 흔적이 역력해요” 어딘지 부자연스럽죠. 가짜는 필요 이상으로 화려합니다. 진짜는 안 그래요. 억지로 꾸밀 필요가 없으니까요.“

■ 우주만 한 사연

허름한 동네 미용실에서 사람 손때가 켜켜이 쌓여 광택까지 흐르던 여성 잡지 한 권을 집어 들었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우화 비슷한 사연을 읽었다.

여하튼 이야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덜컹거리는 기차 안. 창밖을 응시하던 중년 사내가 돌연 “여보, 들판은 초록빛이네!”라고 외쳤다. 남편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맞아요. 제대로 봤네요. 여보!”

사내는 흥에 겨운 듯 말을 이었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장면 하나하나가 사내의 눈에는 새로운 것처럼 보이는 듯 했다.

“와, 태양은 불덩어리 같고 구름은 하얗고, 하늘은 파랗고….”

승객들은 사내의 행동이 수상하다는 투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오지랖 넓

은 승객 하나가 슬쩍 다가오더니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아내에게 말을 건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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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아주머니, 남편 좀 병원에 데려가요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네요.”

아내는 사람들의 이 같은 시선과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 남편은 어린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었어요. 최근에 각막을 기증받아 이식 수술을 받았고 오늘 퇴원하는 길이랍니다. 이 세상 모든 풍경이, 풀 한 포기가, 햇살 한 줌이 남편에겐 경이로움 그자체일 겁니다.

대지에 발을 붙이고 사는 사람치고 사연 없는 이가 없다. 다만 그런 사정과 까닭을 너그럽게 들어줄 사람이 많지 않은 게 현실인 듯하다.

■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사람들

온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려서 마음마저 축 가라앉은 날이었다. 예닐곱 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아버지와 함께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비오는 날. 어린 자녀와 부모가 우산을 맞잡은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면, 부모라는 존재의 역할과 숙명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자녀가 어린 경우 웬만한 부모는 아들딸이 비 맞지 않도록 우산을 자식 쪽으로 가져간다. 그러면 아이는 부모를 올려다보며 묻는다.

“아빠 옷 졌었어?”

“아니….”

거짓말이다. 부모의 한쪽 어깨는 이미 흠뻑 젖어있다.

자식이 세상 풍파를 겪을수록 빗줄기는 굵어지고 축축한 옷은 납처럼 무거워진다. 그러는 사이 부모는 우산 밖으로 밀려난다. 조금씩 조금씩, 어쩔 수 없이.

■ 헤아림 위에 피는 위로라는 꽃

동사 알다(知)가 명사 알(卵)에서 파생했다고 한다. ‘아는 행위’는 사물과 현상의 외피뿐만 아니라 내부까지 진득하게 헤아리는 걸 의미한다.

이를 사람에 대입해 봤으면 한다. 우린 늘 누군가를 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한두 번 대화를 나누거나 우연히 겸상한 뒤 “그 친구 말이야”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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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알지”라는 식으로 쉽게 내 뱉는다.

하지만 제한된 정보로는 그 사람의 진면목은 물론 바닥도 알 수 없는 법이다. 상대의 웃음 뒤 감추어진 상처를 감지할 때, 상대가 좋아하는 것 뿐 아니라 싫어하는 것까지 헤아릴 때 “그 사람 좀 안다”고 겨우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위로는 헤아림이라는 땅 위에 피는 꽃이다.’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 내가 아닌 우리를 위한 결혼

몇 해 전, 늦장가를 간 선배가 있다. 선배는 깐깐한 남자였다. 최고의 신부감을 찾기 위해 최고의 결혼정보업체에 가입했고 주말마다 최고급 호텔에서 선을 봤다. 하지만 상대의 장점보다 단점부터 들추는 버릇 때문인지 조건에 맞는 상대를 만나지는 못했다.

덕분에 어느 동네에 어떤 호텔이 있는지, 어느 호텔 커피숍의 전망이 좋은지 같은 잡다한 지식만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선배가 짝 찾기 모험을 멈추려 하던 찰나, 즉 짚신도 짝이 있는데 짝이 없는 나는 짚신만도 못한 게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경력직으로 회사를 옮겼고 그곳에서 동료 여직원을 보자마자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선 감정에 빠져 들었다.

사내 연애를 시작한 그는 반년 만에 결혼에 이르렀다. 이직을 통해 일터와 신붓감을 모두 얻었으니, 화투에서 말하는 일타쌍피를 몸소 실천한 셈이다. 결혼식 직후 선배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소회를 밝혔다. 그의 발언에서 나는 약간의 허세와 오글거림과 순수함과 나름의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 마모의 흔적

어느 포근한 봄날이었다. 집 근처에 있는 타이어 전문점에 들렀다. 2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엔지니어가 반갑게 인사했다. 청년의 이마와 콧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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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실례합니다. 여쭈어 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타이어 보면 어떤 생각 드시나요?”

“그러니까, 타이어가 운전자랑 닮았다거나 뭐 그런….”

“아, 그럼요. 전 타이어만 봐도 운전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요.”

“원래 타이어의 정식 명칭은 러버 휠(rubber wheel) 이었다고 해요. 고무바퀴라는 뜻이죠.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들 ‘타이어’라고 불러요. 왜일까요. 자동차 부품 중 가장 피곤한(tired)게 타이어라는 거죠.”

“그런데 운전하면서 자동차의 발에 해당하는 타이어를 참 피곤하게 만드는, 피곤한 운전자가 많아요. 운전에 ‘3급’이라는 게 있어요. 급출발, 급가속, 급정지인데요. 이걸 밥 먹듯이 하는 운전자들은 성격이 삐딱하고 과격한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그들이 끌고 온 차량을 살펴보면 아니나 다를까 타이어 상태가 엉망이라니까요.”

청년의 증언처럼, 성격은 사소한 데서 드러나는 법이다. 그건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고 즉흥적으로 변조할 수도 없다. 이러한 이치는 우리네 일상뿐만 아니라 사물의 본질과 삼라만상에 꽤 깊이 관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 여행을 직업으로 삼은 녀석

여행은 인간의 본능이다.

어디론가 떠나려는 욕망은 우리 유전자 안에 각인 돼 있으며 인류 문명사는 이동이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박한 현실 탓에 여행에 대한 욕구를 억누른 채 살아갈 뿐.

삶의 터전을 잠시 떠나는 건 여러모로 의미가 있다. 여행자는 낯선 길에서 걸음을 뗄 때마다 새로운 사람과 풍경을 만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나’를 마주하기도 하고 운전할 때 백미러를 통해 지나온 길을 살피듯이 삶의 궤적을 슬며시 되짚어 볼 수도 있다.

돌연히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대학 4학년 때다. 동아리 방에 모인 졸업반 학생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각자 업(業)으로 삼고 싶은 직업을 늘어놓았다.

종종 언론에서 발표하는 대학생 취업 선호도 분포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한 녀석은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지그시 바라보다 “난 여행을 직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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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거야”라며 조금 생뚱맞은 대답을 내놓았다. 우린 녀석의 계획을 듣고는 “하하, 그래. 네 맘대로 해. 대신 여행지에서 엽서나 보내”하고 껄껄대며 웃었다.

몇 년 뒤 친구와 어렵사리 연락이 닿았다. 돈이 모이면 휙 하고 파리로, 프라하로 떠난다고 했다. 그곳의;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다고 했다.

다들 꿈을 잃어버렸다고 자조하기 분주한 세상이지만, 그 친구만큼은 본인이 내 뱉은 말을 실행에 옮기며 살아가고 있는 듯 했다. 녀석은 말했다.

“기주야,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 오는 꿈을 꾸었던 것 같아….”

■ 노력을 강요하는 폭력

일 때문에 연락하는 사람 증에, 종종 내 노력에 등급을 매기려는 이들이 있다. 그런 관심은 정말이지 부담스럽다. 상대가 부담스러워하는 관심은 폭력에 가깝고 상대에게 노력을 강요하는 건 착취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한다.

■ 분주함의 갈래

뉴스를 봤다. 지나친 교육열 때문에 아이들의 삶의 질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얘기였다. 학원에 다니느라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 귀가하는 초등학교 학생에게 기자가 마이크를 들이 댔다. ‘부모님과 대화할 시간은 있어요?“

아직 어른들의 보살핌이 필요해 보이는 꼬마 아이는 뻔히 알면서 왜 물어보는 거죠. 하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당돌하게 대꾸했다.

“대화요? 그럴 시간이 없죠. 저도 바쁘고 부모님도 바빠요.”

하긴 한창 뛰어 놀 아이들은 학원에 가느라 바쁘고 학원비를 마련해야 하는 부모는 부모대로 바쁜 게 현실이니 당연히 그럴 성 싶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에 얽매이고 또 지배당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다. 특히 난 제한 시간이 정해져 있는 일(원고마감)을 처리할 때면 그 시간에 쫓기는 기분이 든다. 시간과 추격전을 벌이다가 막다른 길에서 붙잡히는 느낌이 들면 스스로가 참 못마땅하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분주함에도 갈래가 있는 듯하다. 일을 하는 과정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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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을 찾기 위해 분주한 경우가 있고 핑계를 찾다보니 분주한 때도 있다. 오늘 하루, 난 어떤 색깔의 분주함 때문에 “바쁘다”는 말을 쏟아냈을까.

■ 희극과 비극

기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었다. 앞자리에 앉은 사내가 주변 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의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사네는 통화 상대에게 잔뜩 화가 난 듯했다. 한 시간 가까이 열과 성을 다해 말을 이어갔다.

“그 친구는 남을 배려할 줄 몰라!”

뭐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사내는 통화 막바지에 폭발적인 고음을 자랑하는 가수가 샤우팅을 하듯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난 말이지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지 않는 사람이야. 난 말이지 똑같은 말을 되풀이 하지 않는 사람이야!”

난 이 문장이 왜 이리 웃기던지, 웃음을 참느라 혼이 났다. 희극적 요소가 다분하지 않은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지 않아”라는 말을 되풀이하다니.

찰리 채플린이 그랬던가. 세상사는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그 말이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 자신에게 어울리는 길

단편 소설의 거장으로 꼽히는 안톤 체호프가 쓴 희곡 중에 ‘벚꽃 동산’이라는 작품이 있다. 19세기 러시아 봉건 귀족 사회가 붕괴 하고 신흥 부르주아가 부상하는 과정을 날카롭고 처연하게 그린 작품이다.

몰락한 지주 라네프스카야는 호화로운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가족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남은 거라곤 곧 경매에 붙여질 벚꽃 동산 뿐이다. 하필 왜 벚꽃 동산일까. 안톤 체호프는 어떤 이유에서 벚꽃 동산을 희곡의 무대로 삼은 것일까. 내 생각은 이렇다 한껏 흐드러지게 피다가 일순간 꽃비를 흩뿌리며 사라지는 벚꽃이, 짧디 짧은 우리네 인생과 닮았기 때문이 아닐는지. 라네푸스카야는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영지를 떠난다. 벚꽃 나무가 잘려나가는 소리를 뒤로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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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그런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원래 그런 거라니까!”

학창시절은 물론이고 졸업 후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는 말이다. 신통한 문장이다. 마법의 지팡이 같은 이 한마디가 모든 상황을 단번에 정리한다. 상대가 아무리 얼토당토않은 궤변을 쏟아내도 웬만해선 토를 달 수 없다. “그게 아닌 것 같은데요?”하고 의의를 제기하는 순간 자칫 엉뚱하고 삐딱한 사람으로 인식되거나. 항명 파동을 일으킨 장본인으로 낙인 찍힐 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그렇다”는 표현에 익숙한 우리는 질문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원래 그러니까”를 남발하는 문화와, 경험과 준칙을 강조하는 화법에는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전제가 깔리기 마련이고 그런 심리는 다른 해석과 호기심을 원천 차단한다. 이는 최근 ‘답정너’라는 신조어로 진화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는 뭐 그런 논리다.

질문하는 법을 잃어버린 이들에게 선택지는 크게 두 가지인 듯하다.

순응 아니면 체념이다. 특히 체념은 슬픈 단어다. 국어사전에 실린 체념(諦念)의 정의는 이렇다.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하는 것.’

조난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건 식량 부족도 체력 저하도 아닙니다. 조난자는 희망을 내려놓는 순간 무너집니다. 체념은 삶에 대한 의지까지 꺾습니다.

옳음과 그름의 기준은 시시각각 변한다. 정답은 없다. d니 모두가 정답이 될 수 있고 모두가 오답 될 수도 있다. 복잡한 사실과 다양한 해석만 존재할 뿐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세상에 ‘원래 그러한 것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삶도 사람도 그리 단순할 리 없다.

사람은 누구나 가슴속 낙원을 품고 살아간다. 우리는 그것을 꿈이라고 부른다. 낙원에 도달하려면 일단 떠나야 한다. 어떻게? 호기심이라는 배에 올라 스스로 물음을 던지고 자신만의 길을 찾는 수밖에.

호기심이 싹틀 때 “원래 그렇다”는 말로 억누르지 않았으면 한다. 삶의 진보는 대게 사소한 질문에서 비롯된다.

■ 한 해의 마지막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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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력을 뜻하는 영어 단어 'calendar'의 어원은 라틴어 칼렌다리움(calendarium)이다. ‘회계장부’ ‘빚 독촉’정도의 의미가 있다.

고대 로마에선 채무자가 매월 초하루에 이자를 갚았다고 한다. 갚아야 할 빚이 많은 사람은 회계장부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새로운 달을 맞이할 때마다 뭔가에 쫓기는 듯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을 것이다.

해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면 어느 선배가 술자리에서 남긴 말이 떠오른다. 일종의 말장난 같기도 했지만, 그가 얼큰하게 취해 뇌까린 문장이 며칠이나 귓가에 감돌았다.

“기주야. 인생 말이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어찌보면 간단해. 산타클로스를 믿다가, 결국에는 본인이 산타 할아버지가 되는 거야 그게 인생이야.”

■ 더 주지 못해 미안해

지난겨울 주말이었다. 밀린 업무로 정신이 없었다. 창밖을 내다봤더니 밤새 내린 눈이 얼어붙으면서 전국의 도로가 태릉 아이스링크 비슷하게 변해 있었다. 추위도 기승을 부렸다. 두꺼운 옷을 껴입어도 칼바람에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그날 오후, 어머니가 급한 볼일이 생겨 외출하셨는데 날이 저물도록 돌아오지 않으셨다. 안 되겠다 싶어 무작정 차를 몰고 길을 나섰다. 전화기를 들었다. “지금 어디에 계세요?”

버스정류장에서 추위에 떨고 있는 어머니와 연락이 닿았다. 잠시 뒤 꽁꽁 얼어붙은 몸을 이끌고 어머니가 힘겹게 차에 오르면서 작은 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구나. 기주야.”

부모는 참 그렇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려주고, 자신의 꿈을 덜어 자식의 꿈을 불려주고, 밖에서 자신을 희생해가며 돈을 벌어다 주고 그렇게 늘 줬는데도 자식이 커서 뭔가 해드리려 하면 매번 “미안하다”고 말한다.

나는 어머니가 흘린 말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차디찬 빙판길에 ‘미안’이란 단어를 내동댕이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날 난 자동차 히터를 더 크게 트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미안하다”는 말이 시끄러운 히터 소리에 묻혀버리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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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

비가 올 듯 말 듯 우중충한 새벽, 일산 국립암센터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번은 40대 후반쯤 돼 보이는 여성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여기, 서울역 가는 1200번 버스 서요?”

양쪽 손에는 오랫동안 병원에서 지낸 듯한 흔적이 보였다. 옷가지와 이불 보따리가 잔뜩 들려 있었다.

“저도 1200번 탑니다. 오면 알려드릴게요.”

마침 버스가 도착했고 그녀와 나는 나란히 올라탔다. 몇 분쯤 지났을까. 그녀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병상에 있는 남편에게서 걸려온 전화인 게 분명했다.

그녀는 꽤 긴 통화를 마치면서 뭔가를 고백하듯 말했다.

“그래요 . 당신이 곁에 있어 참 다행인 것 같아요. 나도 당신 덕분에 버티고 있네요.”

나는 이 말을 듣고 괜스레 가슴이 울렁거렸다. 한편으론 의문도 들었다. 아니, 환자의 보호자가 환자 덕분에 버틴다니, 무슨 말인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번쩍하고 머리를 스치는 글귀가 있었다.

애지욕기생(愛之欲其生), ‘사랑은, 사람을 살아가게끔 한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생각에 휩싸였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애지욕기생’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게 아닐까. 닥친 현실은 녹록하지 않지만 남편을 향한 애틋한 사랑을 동력으로 삼아 주어진 삶을 버티고, 아니 이겨내고 있는 게 아닐까.

“당신이 있어 참 다행입니다”라고 속삭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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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文), 지지 않는 꽃

■ 긁다, 글, 그리움

‘글’이 동사 ‘긁다’에서 파생했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글쓰기는 긁고 새기는 행위와 무관하지 않다. 글은 여백 위에만 남겨지는 게 아니다. 머리와 가슴에도 새겨진다.

마음 깊숙이 꽂힌 글귀는 지워지지 않는 꽃이다. 우린 그 꽃을 바라보며 위안을 얻는다. 때론 단출한 문장 한 줄이 상처를 보듬고 삶의 허기를 달래기도 한다.

글쓰기는 그림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공통분모는 ‘그리움’이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종이 위에 긁어 새기면 글이 되고, 그러한 심경을 선과 색으로 화폭에 옮기면 그림이 되는지도 모른다.

■ 누군가에겐 전부인 사람

어느 기업에서 글쓰기 강의를 마치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벽면에 붙어 있는 메모판에 짧은 문장이 쓰여 있었는데, 찬찬히 읽어 내려가다 마지막 문장에서 시선이 멈췄다. 뜨끔했다. 평평한 길을 걷다가 돌연 가파른 절벽을 만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해 주세요.

이곳을 청소해 주시는 분들,

누군가에겐 전부인 사람들입니다.“

■ 사랑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사랑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여기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어떤 학자는 사랑이 살다(활 活)의 명사형일 것으로 추측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항ㄹ 사(思)와 헤아림(量)을 의미하는 한자 양(량)을 조합한 ‘사량’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가장 선호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랑을 하면 상대에 대한 생각을 감히 떨칠 수 없다. 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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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모든 것을 탐험하려 든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 상대는 하나의 세계, 하나의 우주, 하나의 시대이므로….

어제는 노트북을 켜고 ‘사람’을 입력하려다가 실수로 ‘삶’을 쳤다. 그러고 보니, ‘사람’에서 슬며시 받침을 바꾸면 ‘사랑’이 되고 ‘사람’에서 은밀하게 모음을 빼면 ‘삶’이 된다.

몇몇 언어학자는 사람, 사랑, 삶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본류(本流)를 만나게 된다고 주장한다. 세 단어 모두 하나의 어원에서 파생했다는 것이다. 세 단어가 닮아서일까. 사랑에 메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도, 사랑이 끼어들지 않는 삶도 없는 듯하다.

삶의 본질에 대해 우린 다양한 해석을 내놓거나 음미하기를 좋아한다. 헤밍웨이는 “인간은 파괴될 수 있으나 패배하진 않는다”고 했고 어느 작가는 “작은 인연과 오해를 풀기 위해 사는 것이 인생‘이라고 읊조렸다. ”우린 다른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영화 대사도 한 번쯤 되새길 만하다.

나는 어렵게 말하기보다 ‘사람’ ‘사랑’ ‘삶’ 이 세 단어의 유사성을 토대로 말하고 싶다.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

■ 어머니를 심는 중

평소 알고 지내는 지인이 급작스럽게 모친상을 당했다. 뒤늦게 전해 들었다. 자식에게 어머니는 씨앗 같은 존재다. 어머니는 생명의 근원이다. 대지에 사는 모든 생명체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나 어머니의 돌봄을 받는다.

문인수 시인의 ‘하관’이란 사가 있다. 시인은 어머니의 시신을 모신 관이 흙에 닿는 순간을 바라보며 ‘묻는다’는 동사를 쓰지 않고 ‘심는다’고 표현한다. 어머니를 심는다고.

“이제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피어나지 마세요.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

■ 눈물은 눈에만 있는 게 아니다

서재를 정리하다 너덜너덜한 노트를 발견했다. 어머니의 일기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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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엔 자식을 향한 부모의 마음이 빽빽한 문장으로 새겨져 있었다. 최근 부쩍 쇠약해진 어머니를 생각하니 눈물이 날 것 같아 황급히 덮어 버렸다.

눈물은 눈에만 있는 게 아닌 듯하다.

눈물은 기억에도 있고, 또 마음에도 있다.

■ 대체할 수 없는 존재

찬바람이 불던 늦가을, 편의점에서 물건을 고르는 데 40대 초반쯤 돼 보이는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사내가 낡은 모자로 작업복에 묻은 흙을 팔팔 털어낼 때마다 뿌연 먼지가 일었다. 힘겨운 하루를 보낸 듯 했다.

그는 편의점 직원이 만들어 매대에 내놓은 즉석과자를 집어 들었다. 점퍼에서 꼬깃꼬깃한 지폐를 꺼내 계산을 마친 사내는 우툴두툴하고 커다란 손으로 과자를 받아들더니 점퍼 안으로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점원이 그 모습을 조금 의아하게 바라봤다. 사내가 머쓱해 하며 입을 열었다.

“하하, 애들 주려고요. 과자가 식으면 안 되잖아요.”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터벅터벅 편의점을 걸어 나갔다.

별안간 김종식 시인의 ‘완전무장’이란 시가 내 뇌리를 뜨겁게 달구었다.

“낙타는 전생부터 지 죽음을 알아차렸다는 / 두 개의 무덤을 지고 다닌다 / 고통조차 육신의 일부라는 듯 / 육신의 정상에 / 고통의 비곗살을 지고 다닌다.”

그러고 보면 퇴근길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아버지들의 뒷모습은 사막 한가운데에 서 있는 낙타를 닮았다. 홀로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들은 어딘지 모르게 어깨가 축 늘어져 있다. 위에서 눌리고 밑에서 치이는 조직 생활에서 제 한 몸 추스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일까. 반복적인 하루를 보내며 간신히 버티는 날이 수두룩하게 때문일까.

■ 대체할 수 없는 문장

“글은 엉덩이 힘으로 쓰는 것이다.”

작가나 기자처럼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약간의 허세가 섞여 있기는 하지만 충분히 일리가 있는 말이다. 타고난 천품으로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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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상당수 작가는 시간과 드잡이를 해가며 ‘머릿속 모니터’에 쓰고 또 지우기를 거듭한다. 단어를 고르고, 고치고, 꿰매는 일을 되풀이한다. 체 경험하지 않았거나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문장으로 이야기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 덜어낼 것도 보탤 것도 없는 적확한 문장을 쓰고야 말겠다는 다짐이 지면에 스며들 때까지 펜을 들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작가는 벼랑끝까지 가 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혹은 벼랑 근처까지 갔다가 자신만의 깨달음을 안고 돌아오는 사람이거나.

엉덩이력(力)과 필력(筆力)은 비례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종일 앉아 있다 보면, 다른 문장으로 대체될 수 없는 단 하나의 문장이 떠오르기도 한다.

한 줄 한 줄 문장을 정제하고 고치다가 ‘아, 이거다’ 싶은 본능이 꿈틀 거릴 때, ‘더 나은 글이 될 것 같은데‘ 하는 느낌이 손의 근육과 신경망을 타고 머리와 가슴으로 전해져 올 때 나는 작가로서 커다란 희열을 느낀다.

꽃도 그렇지 않나. 화려하게 만개한 순간보다 적당히 반 쯤 피었을 때가 훨씬 더 아름다운 경우가 있다. 절정보다 더 아름다운 건 절정으로 치닫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송나라 때 시인 소옹은 이러한 이치를 멋들어지게 노래했다.

“좋은 술 마시고 은근히 취한 뒤 예쁜 꽃을 보노라. 반 쯤 피었을 때.”

■ 라이팅은 리라이팅

새벽 2시, 일간지 기자로 근무하는 후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외국물 좀 먹은 후배가 영어 단어를 섞어가며 대뜸 물었다.

“글쓰기, 그러니까 라이링(라이팅)이 도대체 뭐죠?”

후배의 발음에서 빠다 냄새가 강하게 풍겼고 전화가 너머로 풍겨오는 그의 목소리에선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 기자직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소 글쓰기에 대한 고민을 누구보다 심도있게 하는 편이지만 후배가 원하는 정말 그럴듯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게다가 새벽 2시였다. 나는 얼떨결에 둘러댔다.

“라이팅? 글쓰기? 글은 고칠수록 빛이 나는 법이지. 라이팅은 한마디로 리라이팅(Writing is rewriting)이라고 볼 수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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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편의 글을 완성하는 일은 고치는 행위의 연속이 뿐이다. 문장을 작성하고 마침표를 찍는다고 해서 괜찮은 글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날 리 없다.

■ 행복한 사전

미우라 시온의 소설 <배를 엮다>를 원작으로 한 영화 ‘행복한 사전’을 봤다. 겐부쇼보라는 대형 출판사에는 사전 편집부가 별도로 있다.

대도해(大渡海) 즉 ‘큰 바다를 건너다’라고 이름 붙인 사전을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매달린다.

밤낮 없는 편집 작업에 몇몇 직원이 지쳐갈 즈음, 출판사의 편집 주간이 낮은 목소리로 읊조린다.

“단어의 바다는 끝없이 넓어요. 사전은 그 너른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배입니다. 인간은 사전이라는 배로 바다를 건너고 자신의 마음을 적확히 표현해 줄 말을 찾습니다. 그것은 유일한 단어를 발견하는 기적입니다. 누군가와 연결되기를 바라며 광대한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에게 바치는 사전, 그것이 바로 ‘대도해’입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다들 자기만의 배에 오르게 된다. 가끔은 항로에서 벗어나 낯선 섬에 정박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끊임없이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간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신만의 바다를 건너기 위해서.

나는 글을 쓰고 책을 펴내는 과정이 곧 삶의 바다를 건너는 일이라 생각한다. 일상에서 건져 올린 희망과 절망을 씨줄과 날줄 삼아 정갈한 문장을 만들고, 문장을 붙이고 떼고 하면서 튼튼한 문단을 구성하고, 또 문단을 쌓아서 한 편의 글을 축조하고, 나아가 한 권이 책을 얻기 위해 바지런히 노를 젓는다. 누구에게나 바다가 있다.

■ 모두 숲으로 돌아갔다.

달포 전쯤 친한 친구 녀석이 오밤중에 문자를 보내왔다.

‘모두가 숲으로 돌아갔다. 기주야!’

밤새 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문장에 담긴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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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고 보니, 친구가 단어를 혼동해 저지른 단순 실수였다. 회사 사정으로 밀린 업무를 처리하느라 오래전부터 계획했던 가족 여행을 미루게 되었다는 것. 그래서 안타까운 심경을 표현하기 위해 ‘모두 수포’로 돌아갔다고 문자를 보내려다가 그만 ‘모두 숲으로 돌아갔다!“고 오기를 한 것이다.

난 전후 맥락을 파악한 뒤 “너 혹시 발암물질을 바람물질로 일취월장을 일치얼짱으로 저는 건 아니지?” 하고 농담을 섞어 핀잔을 줬다.

한글은 점 하나, 조사 하나로 단어와 문장의 결이 달라진다.

한글 자모 24개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가 이론적으로 1만 개가 넘는다. 정교하다고 해야 하나, 언어학적으로 활용성이 크다고 해야 하나.

영국의 언어학자 제프리 셈슨은 “한글이야말로 인류가 만든 가장 위대한 지적 유산 가운데 하나”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한글이 세밀함은 무시한 채 머릿속에 맴도는 문장을 무턱대고 입 밖으로 끄집어내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친구를 앞에 두고 “넌 정말이지 외모도 예뻐!”라고 칭찬을 하려다 실수로 “넌 정말이지 외모만 예뻐!” 라고 말해버리면 친구 간에 의만 상한다.

한글은 아름답다. 그리고 섬세하다

단 섬세한 것은 예민하다.

■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사내는 늘 분주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느라 가족을 챙기지 못했다. 사내의 일에 방해가 될까봐 아내는 아이를 업고 엄동설한에 골목을 서성였다.

사내는 명성을 얻은 후에도 항상 글을 썼고 책만 읽었다. 동시대를 사는 많은 이들에게 고언(苦言)을 들려주었다. 하지만 그사이 가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헤아리지 못하였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 지성으로 꼽히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이야기다. 이 교수는 한때 일에만 정신이 팔린 아버지였다고 고백한다. 어린 딸이 잠자리에 들 때 그 흔한 굿나잇 키스조차 건네지 않았다고 한다.

세월이 흘렀다. 암에 걸린 딸은 아버지보다 일찍 세상을 등지게 된다. 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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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지난날을 자책하고 눈물을 참아가며 딸에게 우편번호 없는 편지를 보낸다.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라는 책을 통해서….

서점을 배회하던 어느 날 이 책을 집어 들어 그 자리에서 끝까지 읽었다. 페이지를 넘기다가 나는 아래 구절에서 시선을 멈추고 숨을 가다듬었다.

“딱 한 번이라도 좋다.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이 그때의 옛날로 돌아가자. 나는 펜을 내려놓고, 읽다 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편다. 너는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긴다. 내 키만큼 천장에 다다를 만큼 널 높이 들어 올리고 졸음이 온 너의 눈, 상기된 너의 뺨 위에 굿나잇 키스를 하는 거다.”

■ 프로와 아마추어의 차이

“왜 그래? 아마추어 같이!”

신입사원 시절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봤을 법한 말이다. 나 역시 일 처리과정에서 사소한 실수를 저지르거나, 회식자리에서 상급자의 술잔보다 내 잔을 더 높이 들어 “건배!”를 외쳤다가 이런 빈정거림을 들었던 것 겉다.

그때마다 나는 역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그럼 선배는 프로인가요?”

도대체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가 뭘까?

‘프로’는 프로패셔널(professional 전문가)의 준말로, 그 어원적 뿌리는 ‘선언하는 고백’이란 뜻의 라틴어 프로페시오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들 앞에서 “난 전문가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수 있어야, 그리고 그에 따른 실력과 책임감을 겸비해야 비로소 프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아마추어’는 라틴어 아마토르(amator)에서 유래했다. ‘애호가’ ‘좋아서 하는 사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취미삼아 소일거리로 일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마추어는 어떤 일이나 과정에서 재미와 즐거움 같은 요소가 사라지면 더는 하지 않는다. 아마추어의 입장에선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아마추어는 무조건 내공을 갈고 닦아 프로로 거듭나야 할까? 흠, 그럴 리 없다. 살다보면 프로처럼 일해야 하는 순간이 있고 아마추어처럼 즐기면 그만인 때도 있다. 프로가 되는 것보다, 프로처럼 달려들지 아마추어처럼 즐길지를 구분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다. 프로가 되는 노력은 그 다음 단계에서 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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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꽤 중요한 이야기다. 프로처럼 처리해야 하는 일을 아마추어처럼 하면 욕을 먹기 쉽고, 아마추어처럼, 즐겨야 하는 일에 프로처럼 목숨을 걸다가는 정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 시간의 공백 메우기

‘기다림’이란 낱말과 함께 황지우 시인의 시구가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 너였다가 /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 너를 기다리는 동안‘ 中

기다림은 무엇인가. 어쩌면 기다림은 / 희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기다린다는 것은 마음속에 어떤 바램과 기대를 품은 채 덤덤하게 혹은 바지런히 무언가를 준비하는 일이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릴 때, 만남과 결과를 기다리는 순간에도 우린 가슴 설레는 상상에 빠지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쩌면 구체적인 대상이나 특정한 상대를 능동적으로 기다린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기다림은 그런 것이다. 몸은 가만히 있더라도 마음만큼은 미래를 향해 뜀박질하는 일.

그렇게 희망이라는 재료를 통해 시간의 공백을 하나하나 메워나가는 과정이 기다림이다. 그리고 때론 그 공백을 채워야만 오는 게 있다.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것이 있다.

- 끝 -

2017. 9.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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