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22. 11:18ㆍ독서후기
+ 언어의 온도(2)
■ 이기주 지음
■ 무지개다리
몽골에선 개가 죽으면 꼬리를 자르고 땅에 묻는다. 다음 생애에는 인간으로 태어나라는 거다. 다만 강아지로선 사람으로 환생하는 게 복일까 재앙일까.
아, 나는 잘 모르겠다.
반려견이나 반려묘(고양이)를 기르는 사람들은 동물이 삶을 마감하면 그냥 죽었다고 하지 않고 무지개다리를 건넜다고 표현한다.
무지개는 <용비어천가> 등에서 ‘므지게’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는 물(水)의 옛말인 ‘믈’과 '문(門)을 뜻하는 ‘지게’가 합쳐진 단어다. 말 그대로 ‘물로 만들어진 문’이다.
설화나 동화에선 무지개를 천궁(天弓)이라 부르기도 한다. 하늘에 걸린 둥근 활이라는 뜻인데, 대개는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가교를 상징한다.
■ 자세히 보면 다른 게 보여
운전을 하며 강변 북로를 지나고 있었다. 앞서가던 차들이 갑자기 비상등을 켰다. 사고가 난 듯했다.
운전자들을 액셀과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았다. 형형색색의 차들은 일정한 리듬을 타며 군무를 추듯, 가고 서기를 반복했다. 이 와중에 획일적인 박자에 몸을 맡기기 싫다는 듯 성미가 급한 일부 운전자는 자신만의 리듬으로 쉴 새 없이 경적을 울렸다.
앞차 꽁무니만 주시하며 핸들을 잡고 있던 나는 환기도 시킬 겸 조수석 창문을 슬며시 열었다. 후덥지근한 열기가 빠져나가자 바통터치를 하듯 상쾌한 바람이 창을 비집고 들어왔다. 나는 바람에 이끌려 오른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파란 하늘은 어느새 붉은 빛으로 물들어 있었고 가을의 햇살을 머금은 강줄기가 보석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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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든 자세히 보면 다른 게 보이는 것 같다.
강물만 해도 그렇다. 버스를 타고 달리다 새카만 한강을 한참 바라보면 알게 된다. 강위를 떠다니는 게 물만은 아니라는 것을, 바람이 흐르고 있고, 햇살도 내려앉아 있다는 것을.
‘달팽이 별’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있다. 달팽이처럼 촉각에만 의지해 느린 걸음으로 세상을 사는 남편과 척추장애를 앓는 아내의 사랑 이야기다. 영화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린 가장 귀한 것을 보기 위해 잠시 눈을 감고 있습니다. 가장 값진 것을 듣기 위해 잠시 귀를 닫고 있습니다.”
진짜 소중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다.
가끔은 되살펴야 하는지 모른다. 소란스러운 것에만 집착하느라 모든 걸 삐딱하게 바라보느라 정작 가치 있는 풍경을 바라보지 못한 채 사는 건 아닌지. 가슴을 쿵 내려앉게 만드는 그 무엇을 발견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눈을 가린 채 살아가는 것은 아닌지.
■ 지옥은 희망이 없는 곳
유머(humor)와 개그(gag)는 조금 결이 다른 개념이다. 개그는 상대방을 웃기기 위해 끼워 놓는 즉흥적인 대사나 우스개를 뜻한다. 웃기는 게 유일한 목적이다.
유머는 그렇지 않다. 익살과 해학과 삶의 희로애락이 적절히 뒤범벅된 익살스러운 농담을 의미한다. 유머 앞에서 우리가 왁자지껄 웃어젖히다가도 어느 순간 씁쓸한 눈물을 쏙 빼는 이유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유머의 어원도 흥미롭다. 유머는 라틴어 우메레(umere)에서 유래했다. 물속에서 움직이는 유연한 성질을 지닌 물체를 지칭한다. 그래서일까. 적당한 유머는 삶의 경직성을 유연성으로 전환하고 획일성을 창의성으로 바꿔 놓기도 한다.
유머의 개념을 좀 더 확장할 수도 있다. 프랑스의 가톨릭 사제이자 고 생물학자인 테야르 드 샤르뎅은 “유머는 남을 웃기는 기술이나 농담만을 의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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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않는다. 유머는 한 사람의 세계관의 문제다.” 라는 멋진 말을 남겼다.
우리의 삶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 같은 수수께끼와 자주 직면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런 문제를 단숨에 풀 수 있는 마법의 지팡이도, 효율적인 삶을 위한 마땅한 기술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에게 주어지는 과제와 과정에 충실히 임하는 수밖에 없다.
단테의 <신곡> 지옥편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지옥문 입구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 들어오는 그대여. 모든 희망을 버릴지어다!”
독사가 우글거리고 불길이 치솟는 곳만 지옥일 리 없다. 희망이 없는 곳, 그곳이 진짜 지옥이다.
■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 이재무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中
슬픔은 떨칠 수 없는 그림자다. 목숨을 다해 벗어나려 애써보지만 마음대로 될 리가 없다. 그저 슬픔의 유효기간이 저마다 다를 뿐, 누군가에게는 잠깐 머물러 있고 누군가에게는 꽤 오래 달라붙어 괴롭힌다.
시인의 말처럼 우린 종종 슬픔에 무릎을 꿇는다. 그런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잠시 고개를 조아려 내 슬픔을, 내 감정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과정일 터다. 그러니 섣불리, 설고 어설프게 슬픔을 극복할 필요는 없다. 겨우 그것 때문에 슬퍼하느냐고, 고작 그런 일로 좌절하느냐고 누군가 흔들더라도, 너무 쉽게 슬픔의 길목에서 벗어나지 말자.
차라리 슬퍼할 수 있을 때 마음에 흡족하도록 고뇌하고 울고 떠들고 노여워하자. 슬픔이라는 흐릿한 거울은 기쁨이라는 투명한 유리보다 ‘나’를 솔직하게 비춰준다. 때론 그걸 응시해봄 직하다.
‘나를 아는 건’ 가치 있는 일이다. 나를 제대로 알아야 세상을 균형 잡힌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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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볼 수 있고 내 상처를 알아야 남의 상처도 보듬을 수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사랑이라는 것도 나를, 내 감정을 섬세하게 느끼는 데서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사내가 바다로 뛰어드는 이유
‘57세 일본 남성 다카마쓰 야스오는 최근 스킨 스쿠버 자격증을 땄다. 그 이유는…’
며칠 전 신문을 넘기다 국제면에서 잠시 멈칫했다. 환갑이 내일 모래인 사내가 한겨울에 차디찬 바다로 뛰어들고 있다는 기사가 내 눈길을 붙잡았다.
사내는 3년이 다 되도록 행방불명인 아내를 찾기 위해 잠수 관련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했다. 사연이 절절했다.
다카마쓰의 아내 유코는 일본 미야기 현 근처에 있는 은행 직원이었다. 2011년 3월 11일 마을에 거대한 쓰나미가 덮쳤다. 유코를 비롯한 은행 직원 대부분이 실종됐다. 나중에 발견된 그녀의 휴대전화에는 남편에게 보내지 못한 문자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여기 쓰나미가 엄청나요. 집에 가고 싶어요. 여보.”
그는 아내의 주검이라도 찾고 싶었다. 지역 해상보안청의 도움을 받아 다른 은행 직원의 시체가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수색활동을 펼쳤지만 유코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직접 바다에 들어가기로 했다. 잠수부 자격증을 따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는 1년 넘게 준비한 끝에 자격증을 취득했다.
환갑을 앞둔 그는 오늘도 자맥질 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바닷속 어딘가에 있을 아내를 기필코 찾아 집으로 데려 오겠노라고.
영화나 동화 속 사랑은 기적을 만들어 내지만, 현실의 사랑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사랑은 만병통치약이 될 수 없다. 사랑은 때때로 무기력하다. 사랑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는커녕 오히려 사랑 때문에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다만 사랑은 동전의 양면 같은 성격을 지닌다. 우리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들이밀기도 하지만, 그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리는 것 역시 사랑이라는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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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동아줄임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를 망가뜨리지 않는 사랑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사랑의 가치를 부정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 빵을 먹는 관계
난 빵을 좋아한다.
오죽하면 초등학고 그림일기에 “나는 커서 빵집 딸과 결혼하고 말테야”라는 문장을 적었을까. 단, “빵을 굽는 제빵사가 될 테야”라고 적지 않은 걸 보면, 누군가가 만들어 주는 빵을 그저 편하게 먹고만 싶었던 것 같다.
지금도 난 빵을 좋아한다. 빵집에서 약속을 잡을 때도 잦다. 오늘도 업무차 만난 지인과 빵을 몇 조각 나눠 먹었다.
회사를 뜻하는 단어 컴퍼니(company)는 ‘함께(com), 빵을(pany)’‘이라는 의미가 결합한 꼴이다.
제대로 된 해석은 음식을 권하면서 끼니를 해결하고 일상의 고단함과 온기를 공유하는 사이, 어떤 면에서는 식구(食口) 같은 단어와도 맥을 같이 한다.
언젠가 철학자 강신주 박사가 방송에 출연해 말했다. 그는 “한 끼를 해치워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먹는 음식은 식사가 아니라 사료에 가깝습니다.”라며 식사와 사료의 개념 차이를 설명했다.
■ 활자 중독
국어사전에서 ‘중독’을 찾으면 무언가를 지나치게 복용한 결과 그것 없이는 견디지 못하는 상태, 어떤 사상이나 사물에 젖어버려 정상적으로 상황을 판단할 수 없는 상태라고 기술돼 있다.
중독 나쁜 거 맞다. 중독(中毒)은 독(毒)이다. 지나치면 목숨까지 위태롭게 만든다는 독, 그래서 다들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무언가에 취하지 않으면, 무언가에 홀리지 않으면 별 재미가 없는 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때론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애착을 갖고 무언가에 깊이 있게 파고 들 때 팍팍한 삶을 견딜 수 있다.
누군가 “그럼, 이기주 작가는 어떤 것에 중독돼 있어요?” 하고 물을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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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겠다. 난 주저하지 않고 “활자”라고 답할 것이다.
‘활자 중독자’가 된 계기가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청계천 근처 골목을 걷다가 퀴퀴한 종이 냄새에 이끌려 직은 헌책방에 들어갔다. 동굴처럼 어둑어둑한 책방,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한줄기 빛이 책 꾸러미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순간 헌책들이 내게 말을 걸어왔던 것 같다. “어서 와, 마음껏 펼쳐 읽으렴.” 그때 난 세월과 함께 퇴적된 책 냄새를 맡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런저런 책을 뒤적였다. 활자에 탐닉하기 시작하면서 틈이 날 때마다 헌책방 골목을 기웃거렸다. 골목으로, 매번 더 깊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중독은 더 깊은 중독으로 고칠 수밖에 없는 법. 대학에 입학해서는 헌책방 보다 북 카페에 자주 드나들었다.
세월이 흘렀다. 아직 활자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글을 쓰고 책을 만들며 살아가고 있다. 책을 펴낸 다음 서점을 찾아 책이 머무는 장소를 답사하고 책의 운명을 가늠하는 일은 일종의 순례행위가 돼 버렸다.
여전히 난 활자의 힘을 믿는다.
활자의 집합체인 책을 끌어안은 채 단어와 문장을 더듬거리며 살아가는, 사람이란 존재에 대한 믿음이 여전하기 때문이다.
■ 침식과 퇴적
불현 듯 ‘볕뉘’라는 순우리말이 떠오른다. 작은 틈을 통해 비치는 햇볕이란 뜻이다. 해가 산이나 지평선 너머로 차츰 넘어가는 모양을 가리키는 부사로 ‘뉘엿뉘엿’이 있는데,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늘진 곳에 비치는 조그마한 햇볕의 기운은, 햇살보다 웬지 볕뉘라는 낱말이 잘 어울리는 듯하다.
세삼 오래전 기억이 새롭다. 작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국어사전 위에 켜켜이 쌓인 먼지를 걷어내는 일이었다.
그 후 몇 권의 책을 펴내고, 생각과 감정을 문장으로 표현하기 위해 낱말을 매만지고 결합하면서, 우리말 사전을 뒤적이는 일이 부쩍 늘었다. 언론인 시절에는 단어의 유래와 어원을 일일이 찾아 공부하고 되씹지는 못했던 것 같다. 늘 분초를 다투며 시간과 싸워야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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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은 ‘퇴적’과 ‘침식’을 동시에 당한다.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지식이 있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깎이고 떨어져 나가는 지식도 많다. 공부는 끝이 없다는 뻔한 말이 새삼 무겁게 다가오는 경우도 많다 여전히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특히 그렇다.
그나저나, ‘불현듯’이란 말이 ‘불을 켠 듯’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이 역시 흥미롭기만 하다.
■ 글 앞에서 쩔쩔맬 때면 나는
책 쓰기는 문장을 정제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 머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 깊은 밤 방 안에 홀로 있을 때 느낀 상념, 점심을 먹고 커피를 들이키며 중얼거린 말에서 가치 없는 표현을 걸러낸 다음 중요한 고갱이를 문장으로 옮기고, 다시 발효와 숙성을 거쳐 조심스레 종이 위에 활자로 펼쳐놓는 일이 글쓰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촘촘한 채를 써서 찌꺼기를 걸러내듯 문장의 불순물을 추려내는 작업이 유독 잘 되는 날이 가끔 있다. 그런 날이면 몸을 가득 채운 문장이 가슴의 둑을 터트려 홍수가 날 것만 같아서 머리에 맴도는 단어를 마구 쏟아내야 한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늘 그런 것은 아니다. 어쩌다가 그렇다는 얘기다.
오늘은 홍수는커녕 비 한 방울 오지 않았다. 머리털을 쥐어뜯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봤지만 참신한 단어와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니터가 날 째려보는 것 같았다. 오전 내내 들숨과 날숨보다 한숨을 더 많이 토해낸 것 같다.
라디오를 틀었다. 데뷔 초 “담다디 담다디 담다디담~”을 신나게 외치며 ‘꺽따리 춤’ 을 선보였던 이상은의 사뭇 진지한 노래 ’언젠가는‘이 흘러나왔다.
“젊은 날에 젊음을 모르고 /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 우린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하는 대목에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린 무언가 정면으로 마주할 때 오히려 그 가치를 알아채지 못하곤 한다. 글쓰기가 그렇고 사랑이 그렇고 일도 그렇다. 때로는 조금 떨어져서 바라봐야 하는지도 모른다. 한 발 뒤로 물러나, 조금은 다른 각도로 소중한 것일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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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만큼 중요한 마무리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학창 시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을 읽다가 이 문장에서 멈칫하고 말았다. 검푸른 밤하늘에 흐드러진 달빛, 하얀 메밀꽃이 하늘거리는 광경을 어찌 이리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까, 감탄했다.
난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교과서 귀퉁이를 곱게 접었다. 쉬는 시간마다 수시로 펼쳐 보며 누가 듣거나 말거나 나지막한 목소리로 낭독하곤 했다.
<메밀꽃 필 무렵>의 주인공 허 생원은 물방앗간 처녀와의 하룻밤을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한 채 살아가는 장돌뱅이다.
그는 우연히 동행하게 된 젊은 장돌뱅이 동이가 자신과 같은 왼손잡이라는 사실을 알고 제 아들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허 생원은 “동이가 내 아들이다”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저 “걸음도 해깝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로 소설을 끝맺을 뿐이다. 동이를 제 아들로 직감하는 허 생원의 심리가 마지막 문장에서 은근 슬쩍 묻어나는 느낌이다.
모든 글은 시작만큼 마무리가 중요하다. 가슴 깊숙한 곳에 촘촘히 박힌 마지막 한 줄이 글의 주제를 바꿔놓기도 하고 결말의 수준에 따라 ‘글맛’이 달라지기도 한다.
거뭇한 키보드에서 손가락을 떼는 순간뿐 아니라 사람을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에서도 유종의 미는 중요하다. 모든 사귐은 하나의 여정(旅程)이다.
시작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끝을 알리는 것도 중요하다, 아니 때론 훨씬 더 중요하다 당사자에게 알려지는 것과 당사자에게 알리는 건 큰 차이가 있다. 시작만큼 중요한 게 마무리다. 그게 무엇이든 간에.
■ 모자가 산책을 나선 까닭
퇴근길마다 마주치는 모자(母子)가 있었다. 아들은 40대 중반쯤 돼 보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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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백발이 성성해서 나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아들은 항상 목발을 짚고 엉덩이를 뒤로 쑥 뺀 채 엉거주춤 한 자세로 걸었다. 혼자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듯했다. 자세히 보니 작은 체구의 어머니가 뒤를 따라가며 아들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들이 넘어질라치면 어르신은 황급히 일으켜 세웠다. 모자는 그런 동작을 되풀이 했다. 산책이라고 하기엔 그 모습이 너무 힘겨워 보였다.
시간이 흘렀다. 구름이 잔뜩 몰려들어 당장에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았는데, 그날도 사내는 아파트 단지 내 산책로에서 입을 꾹 다문 채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고 있었다. 한손엔 목발 대신 얇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그런데 전과 다른 모습이 눈에 띄었다. 사내의 옆을 지키던 어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며칠 뒤 경비 아저씨로부터 모자의 사연을 전해 들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한 뒤 몸이 불편한 아들을 홀로 키우며 삯바느질로 생계를 이어가던 어르신은 청천 벽력같은 소식을 들었다. 심한 복통에 시달리다 병원을 찾았다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남은 날이 길어야 1년입니다”라는 시한부 통고 앞에서도 노모는 무너지지 않았다.
늙은 어머니는 그날 이후 틈나는 대로 산책을 나서기 시작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공원을 거닐었다. 다리가 불편한 아들과 함께.
아들을 억지로 끌고 나선 이유는 무엇일까? 어머니라는 존재 없이 혼자 바깥 생활을 해야 하는 아들에게, 어떻게든 두 발로 서서 삶을 헤쳐가게끔 걷기 연습을 시킨 것이다. 이는 다리가 불편한 아들을 위해 어르신이 해 줄 수 있었던 최선의 그리고 마지막 선물이었으리라.
위기에 처할 때 시금치를 한 입 베어 물고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 뽀빠이처럼,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몸과 삶이 부스러지는 순간까지도 자식을 돕는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내어준다.
요즘도 사내는 홀로 걷는 연습을 하는 것 같다. 엊그제 퇴근길에도 사내를 보았다. 걸어가는 품새는 불안했다. 하지만 사내의 시선만큼은 침착하고 경건했다. 그의 눈빛에선, 어머니가 곁에 없지만 난 끝까지 가야 한다. 라는 결기 같은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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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도 둥지의 재료
흐린 가을이었다.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을 꼭꼭 눌러 담아 하늘에 편지를 쓰고 싶은 그런 날이었다.
운전 중에 신호를 기다리다 작은 새 한 마리가 미루나무 꼭대기에 둥지를 짓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였다. 휙 하고 한 자락 바람이 불었다. 미루나무가 여러 갈래로 흔들리자, 녀석이 애써 쌓아 올린 나뭇가지에서 서너 개 가지가 떨어져 나와 땅바닥으로 곤두박질 했다.
궁금했다. 녀석은 왜 하필 이런 날 집을 짓는 걸까. 날씨도 좋지 않은데….
집에 돌아와 조류 관련 서적을 뒤적였다. 일부 조류는 비바람이 부는 날을 일부러 골라 둥지를 짓는다고 했다. 바보 같아서가 아니다. 악천후에도 견딜 수 있는 튼실한 집을 짓기 위해서다.
■ 이세돌이 증명하다
어제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바둑 대결을 시청했다. 전문가들은 현존 최강 프로기사 중 한 명인 이 구단이 누워서 떡 먹기 식으로 이길 것으로 봤지만 그런 예상은 첫판부터 빗나갔다.
네 번째 대국이 시작될 무렵에는 다들 체념할 준비가 돼 있었다. 인류의 반격을 예상한 사람은 드물었다.
당사자인 이세돌은 달랐다. 덤덤하게 자신의 패배 원인을 분석했고 은밀하게 알파고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결국 기막힌 묘수로 값진 1승을 따냈다.
“한 판을 이겼는데 이렇게 축하받은 건 처음”이라고 말하는 이세돌 9단은 기쁨을 숨기지 못했고 바둑 해설위원들은 벅찬 심정을 숨기지 못했다.
“지금까지 본 수(手)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수입니다. 그런데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이상한 건가요? 사실 없는 수라고 봐야죠. 프로에서는 아예 시도하지 않는 수입니다. 아, 정말 온몸에 소름이 돋아요.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채널을 돌려 뉴스를 틀었다. 언론은 이세돌 구단이 인류의 위대함을 증명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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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마지막 전사가 알파고를 물리쳤습니다. 인간의 창의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증명했습니다.”
내가 만약 취재 기자였다면 조금 다르게 기사를 작성했을 것 같다.
“이 구단은 오늘 아주 중요한 삶의 이치를 증명했습니다. 지는 법을 알아야, 이기는 법도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 당신의 추억을 찾아드린 날
“전에 손수건을 놓고 가셨죠? 챙겨 놨어요!”
언젠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손수건을 미용실에서 우연히 되찾았다. 추억이 깃든 손수건을 건네받으면서 나는 오랜만에 꺼낸 코트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발견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피식 웃으며 미용실을 나섰다.
오래전 기억 한 토막이 스쳐 지나간다. 어머니는 가슴 한구석에 단짝 친구 한 명을 안고 살았다.
종종 친구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 놓으며 “더 늙기 전에 꼭 한 번 보고 싶구나”하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친구 분을 찾는 과정이 그리 녹록하지는 않았다.
회사에 겨우 월차를 내고 일산에서 대전으로 향했다. 주민센터에 도착해 친구분의 주소를 문의 했더니 “제3자가 주민 등록을 열거하는 것은 주민등록법에 의해 제한됩니다.”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이전 주소와 출신 학교에 의지해 아파트 관리실을 전전했다. 꼬박 7시간의 사투 끝에 최종 주소를 손에 넣었다.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 , 운전석 옆 자리에 앉은 어머니께 물었다.
“어머니 설레세요? 친구분 만나면 이름 부르실 거죠?”
잠시 뒤 충남 예산에 있는 허름한 다방에 도착했다. 최백호의 노래에 나오는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이었다. 주차를 하려는 찰나 찻집 입구에 중년 여성이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한 투피스 정장에 도트 무늬 리본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는데 살랑대는 봄바람에 약간 큰 스카프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때였다. 자동차 시동을 끄기도 전에 어머니가 느닷없이 외쳤다.
“영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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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를 옮겨 식사하는 동안에는 기억 저편에 있던 옛 시절이 떠올랐는지 어머니와 친구분은 내내 눈물을 훔쳤다. 2시간 넘게 추억의 보따리를 풀어 보이며 지난 세월의 기쁨을 기쁨과 슬픔을 공유했고, 서로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읽으며 그간 겪었을 희로애락을 헤아리는 듯했다.
우린 새로운 걸 손에 넣기 위해 부단히 애쓰며 살아간다.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을 무작정 부여잡기 위해 애쓸 때보다, ‘한 때 곁에 머문 것’의 가치를 재평가하고 그것을 되찾을 때 우린 더 큰 보람을 느끼고 오랜 기간 삶의 풍요를 만끽한다. 인생의 목적을 다시금 확인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때 난 50대 중년 여성이 아니라 친구를 만나 수줍어 하는 10대 소녀 두 명을 보았던 것 같다.
■ 사랑은 종종 뒤에서 걷는다
신촌 거리를 느릿느릿 걸어가는 노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젊은이들 보다 확연히 느린 속도로 걷고 있었는데 두 분이 한 발 한 발 내 딛는 걸음새가 꽤 묘하게 보였다.
난 유심히 지켜봤다. 키가 큰 할아버지는, 키가 작은 할머니가 두 걸음 정도 내 딛는 모습을 확인한 뒤 찬찬히 한 걸음 내디뎠다. 다리를 저는 할머니를 위해 미묘한 타이밍으로 보조를 맞추는 듯했다.
노부부의 모습에 가슴 한 쪽이 아릿해졌다. 별안간 나는 이런 생각에 휩싸였다. 상대보다 앞서 걸으며 손목을 끌어당기는 사랑도 가치가 있지만, 한 발 한 발 보조를 맞춰가며 뒤에서 따라가는 사랑이야말로 애틋하기 그지없다고. 아름답다고.
그래, 어떤 사랑은 한 발짝 뒤에서 상대를 염려한다.
사랑은 종종 뒤에서 걷는다.
■ 분노를 대하는 방법
분노는 인간의 보편적 감정인지 모른다. 살다보면 누구나 상대방을 죽일 듯이 물어뜯고 싶은 순간이 있고 그런 검정을 제어하지 못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는 경우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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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火)를 참지 못해 크나큰 화(禍)를 당하기도 한다.
극지에 사는 이누이트(에스키모)들은 분노를 현명하게 다스린다. 아니, 놓아준다. 그들은 화기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언제까지? 분노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고 충분히 멀리 왔다 싶으면 그 자리에 긴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고 온다. 미움, 원망, 서러움으로 얽히고설킨,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뜨거운 감정을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이다.
격한 감정이 나를 망가트리지 않도록 마음속에 작은 문 하나쯤 열어 놓고 살아야 겠다. 분노가 스스로 들락날락하도록, 내게서 쉬이 달아날 수 있도록.
■ 동그라미가 되고 싶었던 세모
옛날 옛적에 세모와 동그라미가 살았습니다.
둘은 언덕에서 구르는 시합을 자주 했는데
동그라미가 세모보다 늘 빨리 내려갔습니다.
세모는 동그라미가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달라지기로 했습니다.
동그라미를 이기기 위해
언덕에서 끊임없이 구르고 또 굴렀습니다.
어느 새 세모의 모서리는 둥글게 다듬어 졌습니다.
이제 동그라미와 비슷한 빠르기로
언덕길을 내려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구를 때 보이던
언덕 주변 풍경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었고
구르는 일을 쉽게 멈출 수도 없었습니다.
세모는 열심히 구른 시간이 아까웠습니다.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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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겉모습이 거의 동그라미로 변해버렸기 때문에
두 번 다시 세모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 지지향, 종이의 고향
엊그제 파주 출판 도시에 있는 배본사에 들렸다. 배본(配本)은 말 그대로 책을 배달한다는 뜻이다. 출판사에서 제작한 도서는 배본사가 관리하는 창고에 머물다 세상으로 나아간다.
모든 책이 독자의 부름을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책은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곧장 서점으로 배송되지만 평생을 음습한 창고 구석에 갇혀 지내다 생을 마감하는 비운의 책도 많다.
일전에 지지향에 며칠 묵은 적이 있다. 방마다‘박완서의 방’ ‘김훈의 방’같은 식으로 작가의 명패가 붙어 있었다.
몇 해 전 이곳에 ‘지혜의 숲’이라는 대형 서가(書家)가 들어섰다. 한글 자모를 본뜬 책꽂이에 수십만 권의 책이 빼곡하게 꽂혀 있는데 사람 손이 닿는 곳은 겨우 네 칸 남짓이다 나머지는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는 전시용 도서에 불과하다.
이를 두고 다양한 의견과 해석이 나온다. “출판단지에서 꼭 가봐야 할 명소”라고 치켜세우는 이도 있지만 혹자는 “종이의 고향이 아니라 종이의 무덤이 됐다”고 폄훼하기도 한다.
한가로이 지혜의 숲을 거닐다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하여간 음악도, 그림도, 글도, 심지어 공간도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어려운 건지 모른다.
비우는 행위는 뭔가를 덜어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움은 자신을 내려놓은 것이며 자기 자리를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것이다.
여백이 있는 공간을 만들면 신기하게도 그 빈 공간을 다른 무언가가 채우기 마련이다. 반대로 무언가를 가득 채우려 하다가 아무것도 채우지 못하는 경우를 나는 정말이지 수도 없이 목격했다.
■ 감정은 움직이는 거야
감정은 연출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시청률과 바꿀 수 없고 돈으로도 구매할 수 없다. 감정은 비매품(非賣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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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감정도 돈으로 살 수 있다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그건 진짜 사는 게 아닐 것이다. 가짜 감정을 잠깐 대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대여는 반환을 전제로 한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하듯 반드시 돌려줘야 한다.
감정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이모션(emotion)의 어원은 라틴어 모베레(movere)이다. ‘움직인다’는 뜻이다. 감정은 멈추어 있지 않고 자세와 자리를 바꿔가며 매 순간 분주하게 움직인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말한다. 이별 또한 사랑의 전개 과정이라고, 사랑이 기승전결(起承轉結)을 거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고.
어쩌면 우린 사랑이 한결같을 거란 믿음에서 벗어나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쇠퇴와 소멸을 감지할 때 지난 사랑의 생채기를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할 수 있고, 새롭게 다가온 사랑 앞에서 용기를 낼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 제주도가 알려준 것들
지난겨울 제주도에 볼일이 있었다. 출발하기 하루 전 소지품을 꾸렸다. 여행을 앞두고 짐을 챙길 때 중요한 건 ‘챙기기’가 아니라 ‘버리기’가 아닐까 싶다.
어떤 물건을 가방에 담느냐 보다 무엇을 두고 가느냐가 여행의 성패에 훨씨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쓸데없는 걸 가방에 구겨 넣으면 나중에 대가를 혹독하게 치러야 한다. 필요 이상으로 무거운 짐이 여행의 질을 떨어뜨리기 마련이다.
일정을 모두 마친 다음 날 오후, 공항으로 이동하던 길이었다. 찔끔 흩날리는 수준이었던 눈발이 점차 굵어지면서 도로에 수북이 쌓여가고 있었다.
부리나케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제주 전역에 폭설이 쏟아졌습니다. 하늘길과 바닷길이 모두 막혔습니다. 7년 만에 한파주의보가…’라는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시선을 멈추었다. 읽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는 본능적으로 공항을 빠져 나왔다. 그나마 재빠르게 움직인 덕분인지 전망 좋은 호텔에 묵게 됐다.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것처럼 눈발이 내려앉은 자리에 또 다른 눈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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쏟아지고 있었다. 중학교 한문 수업 시간에 설상가상(雪上加霜)이란 사자성어를 아이들에게 알려줄 때 이 광경을 보여주면 효과만점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주차된 자들도 죄다 눈 속에 파묻혔다. 멀리서 보면 자동차인지, 생크림 케이크 위에 얹어진 네모난 화이트 초콜릿 조각인지 도무지 분간하기 어려었다.
다음 날 아침, 바람에 실려 오는 바다 내음이 코를 간질이는 바람에 잠이 깼다. 거리로 나섰다. 눈발이 점점 가늘어 지고 있었다.
묘했다. 본디 스산한 계절인데 제주의 겨울은 그렇지 않은 듯 했다. 자칫 쓸쓸할 수도 있는 너른 여백을, 돌과 물과 나무와 바람이 적절히 메워주고 있었다.
제주도의 겨울은 황량하지도 쓸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포근한 느낌이었다. 제주의 산(山) 역시 그렇다. 제주도 곳곳에 솟아 있는 산은 산세가 가파르지 않고 유순하다. 거만하지가 않다. 사람으로 비유하면 인자한 어머니가 두 팔을 벌려 자식을 안아주는 모습이다.
모르긴 몰라도 저 산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더 완만해질 것이 분명하다. 비바람과 풍화작용을 거치면서 더 부드러운 곡선이 될 것이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우리네 어머니들의 허리가 자연스레 하늘보다 땅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종종 공백(空白)이란 게 필요하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에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니 가끔은 멈춰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힘겨울수록, 누군가에게 얹혀가는 삶이 버거울수록 우린 더욱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 여행의 목적
밀도 있는 여행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사랑은 변하지만 사랑했던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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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旅行).
가슴에 불을 지피는 단어다. 일상의 버거움 때문에 자주 시도하지 못할 뿐이다. 여행의 사전적 의미는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에 가는 행위를 일컫는다.
“참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 마르셀 프루스트
“여행은 도시와 시간을 이어주는 일이다. 그러나 내게 가장 아름답고 철학적인 여행은 그렇게 머무는 사이에 생겨나는 틈이다. - 폴 발레리
이들의 이야기처럼, 우린 목적지에 닿을 때보다 지나치는 길목에서 더 소중한 것을 얻곤 한다. 어쩌면 여행의 궁극적인 목적은 ‘도착’이 아니라 ‘과정’인지 모른다.
어디 여행뿐이랴. 인간의 감정이 그렇고 관계가 그러한 듯하다. 돌이켜보면 나를 누군가에게 데려간 것도, 언제나 도착이 아닌 과정이었다. 스침과 흩어짐이 날 그 사람에게 안내했던 것 같다.
여행과 방황, 둘 다 ‘떠나는 일‘이란 점에서는 닮았다. 그러나 두 행위의 시작만 비슷할 뿐 마지막은 큰 차이가 있다. 여행을 의미하는 단어 ’tour'는 ‘순회하다’ ‘돌다’라는 뜻의 라틴어 ‘tornus'에서 유래했다. 흐르는 것은 흘러 흘러 제자리로 돌아오는 속성을 지닌다. 여행길에 오른 사람은 언젠가는 출발지로 되돌아온다. 돌아갈 곳이 없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방황인지도 모른다.
행여 여행길에서 하염없이 방황하고 있다 해도 낙담할 이유는 없다. 방황이 끝날 무렵 새로운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훗날 그 방황은 꽤 소중한 여행으로 기억될 테니까.
■ 선을 긋는 일
뉴스를 보았다. 한 아파트 주민들이 자기네 아파트와 임대 아파트 사이에 담을 설치했고, 결국 임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단지를 빙 돌아서 등교하고 있다고 했다. 텔레비전 채널을 돌렸다. 씁쓸한 생각이 밀려들었다. 왜 자꾸 나누고 구획(區劃)하려는 걸까. 인류의 불행 중 상당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을 긋는 행위에서 비롯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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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위한 질문
우린 어떤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무언가 시도하지 않았거나 스스로 솔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 깊은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그러니 가끔은 한 번도 던져보지 않은 물음을 스스로 내던지는 방식으로 내면의 민낯을 살펴야 한다. ‘나’를 향한 질문이 매번 삶의 해법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삶의 후회를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살다보니 그런 듯하다.
■ 여러 유형의 기억들
국립세종도서관에서 인문학 강좌를 마치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강연을 위해 몇 차례 오간 길인데도 어딘지 낯설게 느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과 도서관 주변 풍광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런 느낌은 미시감(未視感)이다. 여러 번 경험한 적이 있는 일을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느끼거나 그렇게 착각하는 것을 일컫는다. 기시감(旣視感)의 반대 개념이다.
기억의 속성은 머리가 둘 달린 야누스처럼 이중적이다. 진한 기억은 가깝고 흐릿한 기억은 멀다.
십 년 전 일이 오늘 일처럼 또렷할 때가 있고 아무리 손을 뻗어 잡으려 해도 도저히 움켜쥘 수 없는 신기루 같은 기억도 있다. 가까운 기억과 먼 기억의 사이에서 추억은 그렇게 줄달음친다.
단 사랑에 대한 기억은 조금 복잡한 성격을 띤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추억은 캠코더로 찍은 동영상이 아니라 뒤죽박죽 뒤섞인 폴로라이드 사진에 가깝다. 상처 뒤에 잠복해 있던 낱장의 사진 같은 기억이 제 멋대로 튀어나와 아픈 가슴을 콕콕 후벼 파기 마련이다.
옛사랑의 기억이 미치는 정서적 자장(磁場)은 생각보다 넓다. 게다가 잊을만하면 날아드는 스팸 문자처럼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주장한다. 인생을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선 기억력이 중요하지만 사랑의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망각력(忘却力)이 필요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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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상처란 것이 이별의 아픔을 정면으로 맞으며 몸부림친 흔적인데 어찌 쉽게 지울 수 있겠는가.
그런 기억은 옷에 묻은 얼룩을 세척제로 지워내듯 말끔히 씻어 낼 수는 없다. 아니,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해질 뿐이다,
■ 어른이 된다는 것
학창시절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의 사전적 의미도 제대로 몰랐지만 마냥 되고 싶었다. 그래서 어른 흉내도 내 봤다.
그러던 어느 날, 어른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날 ‘어른’으로 인정해 줬다.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살폈다. 전보다 찬찬히 걷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불현듯 궁금증이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어른이 뭐지?’
사실 어른이 되는 자체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어른으로 자라야 한다는 발상은, ‘어른인 사람이 어른 아닌 사람보다 무조건 우월한 존재’라는 조금은 헐거운 논리를 바탕에 깔고 있다.
어른이 꼭 될 필요는 없다. 제대로 된 어른은 “나 어른이야!”하며 어른 대접을 해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냥 어른답게, 그답게, 그녀답게 행동할 뿐이다.
‘어른’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진짜 내’가 되는 것이 아닐까?
■ 나이를 결정하는 요소
“나이를 결정하는 건 세월일까, 생각일까?”
“늙는다는 건 죽음에 아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하는가?”
이처럼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질문이 가슴 한구석에서 살금살금 고개를 들 때가 있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그렇다. 이럴 때는 똑 부러지는 정답을 얻기 위해 애쓰기보다 정답에 가까운 것을 직접 찾아 나서는 게 오히려 현명한 방법일 수 있다.
‘나이 듦’에 관해 생각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문장이 가장 먼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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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랐는데, 그건 광고 카피라이터가 만들어 낸 카피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나이의 한계는 엄연히 존재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시간과 세월만으로 나이가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이를 좌우하는 뜨거운 용광로가 있다고 치자. 거기에는 건강이나 신체적 상태가 가장 먼저 들어갈 테지만, 인간의 감정과 생각, 상상력, 그리고 두려움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함을 뿌리치는 모험심 같은 요소들도 뒤섞이기 마련이다.
단순히 ‘젊음‘을 잃으면 “늙음’이 될까?
삶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에 불과할까?
글쎄다. 어떤 이는 ‘늙은 젊은이’로 불리고 또 어떤 사람은 ‘젊은 노인’으로 불리는 걸 보면 ‘늙음=나이 듦’이라는 등식이 꼭 성립하는 건 아니다.
늙음은 무엇인가 하는 이 만만치 않은 질문에 여전히 나는 답을 못하겠다. 다만 ‘낡음’이 ‘늙음’의 동의어라는 주장에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 여행을 이끄는 사람
리더의 어원을 한 번 들여다봐야겠다. 리더의 유래와 관련해 몇 가지 설이 있다. 우선 리더에는 전장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선봉에 나가 싸우는 사람, 먼지를 먼저 뒤집어쓰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그래서 중세 유럽에선 리더를 ‘외로움’ ‘인내’같은 단어와 동의어로 여겼다고 한다.
다른 의견도 있다. 단순히 일행보다 앞장서서 길을 걷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여행하는 사람을 위해 장애물을 허물고 개척하는 지도자, 즉 ‘여행을 이끄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라는 것이다.
난 이 견해가 참 마음에 든다. 내 머릿속에 있는 이상적인 리더의 모습은 함께 여행하는 일행을 절대로 버리지 않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는 자칭 타칭 리더로 불리는 이들이 넘쳐난다. 그러나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을 끝까지 책임지고 권한과 책임사이에서 심도 있게 방황하는 리더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뭐랄까. 다들 리드(lead)를 하겠다고 목소리만 높인다고 할까. 그들이 이 글을 리드(read)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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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
몇 해 전 태풍이 북상하면서 폭우가 쏟아지던 날이었다.
그날 난 집 근처에서 가로수치고 굵기가 가느다란 나무 한 그루가 격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았다. 녀석은 일렁이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왼쪽으로 휘어졌다 오른쪽으로 치우쳤다하면서 반복적인 움직임을 이어가고 있었다.
반면 허리가 굵고 덩치가 큰 나무들은 비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꼿꼿하게 버티고 있었다.
다음 날 초대형 태풍이 휩쓸고 지나가 자리에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다. 거리에는 콘크리트 조각과 유리 파편과 함께 뿌리째 뽑힌 나무들이 치열한 전투에서 고지를 점령당한 패잔병처럼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내가 보았던 가느다란 나무는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바람에 긁힌 듯한 자국이 보였지만, 녀석은 꽤 당당해 보였다. 뿌리는 흙을 굳건히 움켜쥐고 있었고, 몸에서 떨어져 나간 줄기와 이파리도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은 뭐랄까. 전생에 벼슬은 하지 않았지만 초야에서 수양에 힘쓴 선비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발길을 돌렸다.
순간 녀석이 속삭이는 듯한 소리로 내기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그 목소리가 소곤소곤 귀에 감겼다.
“여보게, ‘부드러움’에는, ‘강함’에 없는 것이 있다네. 그건 다름 아닌 생명일세. 생명과 가까운 게 부드러움이고 죽음과 가까운 게 딱딱함일세, 살아 있는 것들은 죄다 부드러운 법이지.”
■ 이름을 부르는 일
얼마 전 사무실 근처에 있는 카페를 찾았다. 한 남성이 욕신(辱神)으로 빙의를 했는지 동물 명칭과 숫자 등을 창의적으로 조합해서 친구의 이름을 격하게 부르짖고 있었다. 그는 아무런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그리 하찮은 일이 아니다. 이름을 뜻하는 한자명(名)은 저녁 석(夕) 밑에 입구(口)를 받친 구조다.
이를 글자 그대로 풀어보자. 저녁에 입을 벌리다? 나쁘지 않지만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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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夕)이 되면 온종일 먹이를 확보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던 아이들의 귀에 인기척이 들려온다. 순간 부모가 이구동성으로 아이들의 이름을 외친다.
00아, ▷▷야 먹을 것 구해왔다.
캄캄한 밤, 어둠 속에서 자식의 안위를 확인하기 위해 부모가 목놓아 외치는 것이 바로 이름이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행위는 상대방의 편안함과 위태함을,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다.
가족이나 친구의 이름을 말할 때 욕지거리를 섞어 부르고 있다면, 그런 표현이 혀에 착착 달라붙는다면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이름을 부르는 일은 숭고하다.
숭고하지 않은 이름은 없다.
■ 가능성의 동의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가능성’을 찾으면 앞으로 실현될 수 있는 성질이나 정도라고 나온다. 사전적 의미가 그렇다. 하지만 실현성, 현실성, 가망성 따위는 철저하게 계산된 통계나 명료한 숫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가능성은 때론 단순한 확률이 아니라, 믿느냐 안 믿느냐의 문제일 수도 있다.
중학교 때 사소한 잘못으로 교무실에 불려간 적이 있다. “선생님이 너 1층으로 오시래”라는 친구 녀석의 잘못된 높임법을 듣자마자 뭔가 일이 잘못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지만 나는 별 수 없이 내려갔다.
난 교무실에 들어가는 순간 이를 악물었다. 제자에 대한 사랑의 구타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섭기로 소문난 학생부 선생님은 혼을 내기는커녕 이면지 한 장을 꺼내더니 “여기에 네 장점을 써 보자”라며 당시엔 듣기 어려웠던 청유형 문장을 구사했다.
칭찬과 지적이 적절히 혼재돤 면담이 끝날 무렵, 선생님은 “너처럼 가능성이 있는 녀석이 그러면 안 된다”하셨다.
난 가능성이란 낱말이 참 듣기 좋았다. 내게 그 표현은 “아직 널 믿는다”는 말로 들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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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하게 교무실을 나서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떠올렸다. 사람 보는 ‘눈’이란 건 상대의 단점을 들추는 능력이 아니라 장점을 발견하려는 능력이라는 것과, 가능성이란 단어가 종종 믿음의 동이어로 쓰인다는 것을. ·
■ 계절의 틈새
‘봄비는 일비, 여름비는 잠비'라는 말이 있다. 봄에 비가 오면 들에 나가서 할 일이 많으므로 ’일비' 여름에 비가 오면 낮잠을 자기 좋아서 ‘잠비’라는 것.
어제는 봄과 여름을 연결하는 연하게 흩뿌려지는 비가 왔다. 난 이 비를 ‘연비(연한 비 혹은 연결하는 비)’라고 부르고 싶다. 이런 비는 사람 마음에도 내린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서로의 문턱을 낮추게 한다. 그런 비라면 흠뻑 맞아도 좋다.
연비가 가늘게 내린 뒤 봄이 모습을 보이며 슬금슬금 도망치고 있다. 봄이 수명을 다하는 사이 저 멀리서 여름이 손을 흔들고 있다. 당장에라도 계절이 여왕이 초록빛 커튼을 열고 걸어 나올 것만 같다.
이처럼 하나의 계절이 가고 또 다른 계절이 다가올 때, 계절의 틈이 벌어질 때 사람들은 각자의 방편으로 소박한 행사를 치르곤 한다. 어떤 이는 장롱에 묵혀둔 옷을 꺼내 말끔히 손질하거나 새롭게 수선한다.
다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계절의 틈새를 건너가며,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낀다. 참 나는 계절이 변화하는 미묘한 시기에 수분크림이나 계절에 어울리는 양산을 어머니 화장대 위에 은밀하게 올려놓는 편이다.
■ 계절이 보내온 편지
살다보면 지극히 작은 변화와 사소한 사건에서 소박한 교훈을 얻는 경우가 많다. 어제 일을 마치고 아파트 진입로의 화단을 따라 걷고 있었다. 나무에서 떨어진 꽃잎이 발에 밟혔다. 길바닥에 나뒹군 지 꽤 됐는지 바싹 말라 있었다. 손에 닿으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꽃처럼 겸손한 것도 없다. 제 삶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목을 꺾어 땅으로 투신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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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뭐라고 해야 하나. 은퇴를 저울질하던 연극배우가 마지막 무대에 올라서 방백(傍白)을 통해 삶을 반추하고 속마음을 표현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제가 물러나야 할 때인 것 같아요. 다른 꽃과 나무가 자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주려 해요. 아무튼 전 최선을 다했습니다.”
■ 몸이 말을 걸었다
한동안 <언어의 온도> 원고 작성에 매달렸더니 결국 몸에 탈이 났다. 식은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온 몸이 찌뿌드드했다.
새벽 1시쯤 침대에 누웠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모로 누웠다가 똑바로 누웠다가 하면서 밤새워 뒤척였다. 순간 몸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그동안 쌓인 불만과 짜증을 쏟아내며 칭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이봐요 이 작가. 내가 참을 만큼 참았어. 눈도 손도 두뇌도 정말 피곤하단 말이야. 이제 좀 쉬게 해줘요. 당신도 나도, 알파고가 아니란 말일세!”
뜨끔했다. 긴 문장에 쉼표가 필요하듯 우리 몸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잊고 산 것인가 싶었다. 내 몸에. 특히 소우주로 불리는 내 뇌에 미안했다. 그래서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래, 앞으로 그러지 않을게. 네가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을게. 꼭 감지할 게.”
베개를 베고 자시를 고쳐 누우면서 이번 주말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일’을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살다보면 싸워야 할 대상이 차고 넘치는데 굳이 ‘나’를 향해 칼끝을 겨눌 필요가 있을까 싶다. 자신과의 싸움보다 자신과 잘 지내는 게 훨씬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 화향(花香)백리 인향(人香)만리
꽃은 향기로 말한다. 봄꽃은 진한 향기를 폴폴 내뿜으며 벌과 나비와 상춘객을 유혹한다. 향기의 매력은 퍼짐에 있다. 향기로운 꽃 내음은 바람에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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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 백리까지 퍼져 나간다. 그래서 화향백리라고 한다.
다만 꽃향기가 아무리 진하다고 한들 그윽한 사람 향기에 비할 순 없다. 깊이 있는 사람은 묵직한 향기를 남긴다.
가까이 있을 때는 모른다. 향기의 주인이 곁을 떠날 즈음 그 사람만의 향기 인향(人香)이 밀려온다. 사람 향기는 그리움과 같아서 만 리를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 인향만리(人香萬里)라 한다.
■ 관찰은 곧 관심
몇 해 전, 친한 선배가 부친을 하늘로 떠나보냈다. 평소 그는 아버지와 말을 섞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는 것도 어색해 집에서 식사 할 때면 고개를 푹 숙인 채 서둘러 밥을 먹고 자리를 떴다.
그러던 어느 날 선배는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이동하는 길에 아버지의 눈빛을 떠올리려 했으나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중환자실에 누워있던 아버지를 향해 “제발 일어나세요. 저 좀 보세요”라고 절규하듯 외쳤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내 눈을 감았다. 부자는 두 번 다시 서로의 눈빛을 확인할 수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시선을 나눌 수 있다는 것. 참으로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대를 자세히 응시하는 행위는 우리 삶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관찰 = 관심”이라는 등식이 성립하기도 한다.
사람은 관심이 부족하면 상대를 쳐다보지 않는다. 궁금할 이유가 없으므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외면하는 것이다. “당신을 보고 싶지 않아요”라는 말은, “그쪽에 관심이 없어요” 혹은 “뜨겁던 마음이 어느 순간 시들해졌어요. 아니 차가워졌어요”라는 말과 동일하게 쓰이곤 한다.
■ 타인의 불행
인간은 얄팍한 면이 있어서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으로 종종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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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런 감정은 안도감이지 행복이 아니다.
얼마 못가 증발하고 만다.
■ 아름다운 걸 아름답다 느낄 때
몇 해 전, 꽃 축제에 다녀왔다. 표를 예매하면서 기대했다. 듣도 보도 못한 꽃을 구경할 수 있겠지? 화려한 꽃과 그 빛깔에서 눈을 뗄 수 없을 테지?
기대는 금세 실망으로 바뀌었다. 실제 가 보니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절로 떠올랐다. 동네 꽃집이나 식물원에서 익히 봐왔던 꽃이 가득했다.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내 감각의 촉수가 퇴화한 건가 싶었다. 게다가 우리나라에 꽃 좋아하는 사람이 이리 많았나 싶을 정도로 꽃보다 사람 머릿수가 더 많았다. 꽃을 음미하며 미소를 짓기는커녕 미간만 찌푸린 채 집으로 돌아왔다.
몇 달 뒤 출근길이었다. 햇빛에 반짝이는 노란 점 하나가 보였다. 정체가 궁금했다. 자세히 보니 이름 모를 들꽃이 가지 끝에 아슬아슬 매달린 채 바람이 스칠 때마다 이리저리 나부끼고 있었다.
난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굽혔다. 꽃과 눈을 맞추고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았다. 정면에서 볼 때는 분명 둥근 점 같았는데 다른 각도로 관찰하니 샛노란 꽃잎이 여러 장 붙어 있었다.
한복을 입은 예닐곱의 무희들이 부채를 흔들며 원모양의 대열을 이룬 채 자태를 뽐내는 것처럼 보였다. 조금 과장하면, 꽃 한 송이가 내 가슴에 들어와 정중동(靜中動)의 요소가 잘 어우러진 한 편의 춤사위를 펼친 셈이다. 묘한 뿌듯함이 찾아들었다.
문득 꽃 축제를 찾았을 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돋아났다. 그때는 왜 눈에 띄게 예쁜 꽃을 발견하지 못한 걸까. 곰곰 따져봤다. 아차, 꽃 축제에 아름다운 꽃이 없었을 리 없다. 그런 꽃을 알아채고 음미하려는 내 여유와 의지가 없었던 건지 모른다.
아뿔싸! 볼 준비가 안 돼 있는데. 느낄 여유가 없는데.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낀다는 말인가. 공연히 축제의 수준 탓만 했다는 생각에, 돌연 얼굴이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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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 그 짧은 문장이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운 것처럼 느껴졌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았다. 그래서 난 입을 벌려 또박또박 발음했다.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느낄 때 우린 행복하다. ”
- 끝 -
2017.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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