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9. 22. 11:14ㆍ독서후기
고운 마음 꽃이 되고 고운 말은 빛이 되고
- 내일을 밝히는 오늘의 고운 말 연습 -
■ 이해인 지음
0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 수녀, 시인
0 시집
민들레 영토,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시간의 얼굴, 작은 기도,
작은 위로, 작은 기쁨, 희망은 깨어 있네, 엄마 등
0 산문집
두레박, 꽃삽, 사랑할 땐 별이 되고,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꽃이 지고나면 잎이 보이듯이 등
0 번역서
마더 데레사의 아름다운 선물, 우리가족 최고의 식사 등 십여 권
■ 여는 글
오늘도 ‘고운 말 쓰기 학교’의 수련생으로
‘호수에 돌을 던지면 파문이 일듯이 말의 파장이 운명을 결정짓는다.’
‘오늘은 어제 사용한 말의 결실이고 내일은 오늘 사용한 말의 열매이다.’
제가 수첩에 적어 놓은 이 말을 오늘 다시 읽어봅니다.
‘실제로 우리의 말은 참되고, 우리의 침묵은 사랑으로 가득하고 칭찬은 꾸밈이 없으며, 책망은 상대방의 감정을 다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어떤 일을 하든지 우리는 항상 공동 선익에 유념한다.’
우리 수녀회 회헌(會憲)이 있는 말을 되새김할 적마다 꼭 수도자가 아니라도 우리의 말이 공동 선익에 기여하려면 항상 노력하고 깨어 있어야 함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날마다 말을 하고 사는 우리는 말 덕분에 많은 보람과 기쁨도 느끼지만 말 때문에 아파하고 슬퍼할 때도 많습니다.
아침에 잠을 깨우는 새 소리를 들으며 저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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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궁금해지곤 합니다. 정원을 산책하다 하얀 나비들이 제 앞으로 날아오면 그들에게 무슨 말이라도 건네고 싶어집니다. 계절마다 다양하게 피어나는 고운 꽃들을 볼 때에는 꽃처럼 고운 마음으로 고운 말을 찾아 건네는 고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갈망을 새롭게 피워 올립니다.
2017년 여름 부산 광안리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이해인
◉ 1장 살리고 자라게 하는 생명의 말
- 일상에서 지금부터
■ 고운 말 쓰기에도 연습이 필요해요
우리는 매일 많은 말을 듣고 또 하고 삽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말의 양과 질도 매우 다양하지요. 대개 좋은 관계도, 나쁜 관계도 말에서 비롯될 때가 많습니다.
엄격한 관상(觀想) 수도회인 트라피스트 수도자들은 오직 침묵과 기도의 삶에 몰입하기 위해 꼭 필요한 말은 수화(手話)로 한다고 합니다. 말을 안 하는 만큼 말로써 죄를 지을 확률도 줄어들겠구나 하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늘 가까이 대하는 가족, 친구, 이웃끼리도 서로 편하게 여겨서인지 주고 받는 말 때문에 깊은 오해와 상처를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초면에 말을 잘못해서 좀처럼 좋은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지요. 인간관계 속에서 말을 잘하기가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설프게 위로하려다 오히려 상처를 주기보다는 아예 입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하는 말도 종종 듣지만 이는 너무 소극적인 태도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글을 배우고, 피아노를 배우고, 뜨개질을 배우듯이 삶의 질을 높여주는 좋은 말을 배우는 데도 많은 연구와 노력과 연습이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요? 평소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우리말을 공부하고, 남의 말을 열심히 듣고, 좋은 책을 통해 좋은 말을 배우며 실제로 잘 활용하려 애쓴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매일의 언어생활이 더 아름답고 깊이 있게 변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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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이 향기로우려면 우리의 삶 또한 향기로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상생활 속에서 끝없이 노력하는 언어의 수행자가 되어야 하겠지요.
<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 >
매일 우리가 하는 말은 / 역겨운 냄새가 아닌 / 향기로운 말로/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게 하소서 / 우리의 모든 말들이 / 이웃의 가슴에 꽂히는 / 기쁨의 꽃이 되고 평화의 노래가 되어 / 세상이 조금씩 더 밝아지게 하소서 /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리 없는 / 험담과 헛된 소문을 실어 나르지 않는 / 깨끗한 마음으로 / 깨끗한 말을 하게 하소서.
나보다 먼저 /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는 / 사랑의 마음으로 / 사랑의 말을 하게 하시고/ 남의 나쁜 점 보다는 / 좋은 점을 먼저 보는 / 긍정적인 마음으로 긍정적인 말을 하게 하소서.
매일 정성껏 물을 주어 / 한 포기의 난초를 가꾸듯 / 침묵과 기도의 샘에서 길어 올린 / 지혜의 맑은 물로 / 우리의 말씨를 가다듬게 하소서 / 겸손의 그윽한 향기 그 안에 스며들게 하소서
■ 사람을 키우는 좋은 말
어쩌다 외출해서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노라면 듣기에 민망할 정도로 다른 이의 인격을 깎아 내리거나 무시하는 부정적인 말들이 많아 안타깝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아도 무책임하게 남을 헐뜯거나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절제 없이 떠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요즘은 영어 조기교육의 열기로 심지어 아기들까지 고운 우리말을 익히기도 전에 영어로 이야기하는 걸 보면서 미래의 우리말 지킴이를 잃어버리는 것 같아 안타깝고 걱정스럽습니다. 언어야말로 습관으로 길들여지는 것이기에 어려서부터 고운 말, 바른 말을 익혀 두지 않으면 바로잡기가 매우 힘들기 때문입니다.
매일 많은 사람을 만나는 삶 속에서 언어에 대한 반성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듯합니다. 수도자라는 신분을 낯설어 하는 이들과 거리를 좁히려고 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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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먼저 말을 많이 하다 보니 종종 확실한 근거도 없는 모호한 말, 재미는 있지만 의미 없는 말, 독단적이고 편협한 말을 서슴없이 내 뱉고는 저 스스로 놀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아주 사소한 표현이라도 이왕이면 밝고 긍정적으로 하려고 애씁니다.
싫다. 지겹다는 말을 자꾸 되풀이하면 실제로 지겨운 삶이 될 수도 있습니다. 먼저 말이라도 그 반대의 표현을 골라서 연습하다 보면 그 좋은 말이 우리를 키워 주는 걸 경험하게 된다고 감히 경륜 쌓인 교사처럼 친지들에게 알려주곤 합니다.
나의 잘못이나 허물을 지적받았을 때도 변명을 앞세우기보다는 일단 고맙다. 죄송하다는 말부터 먼저 하고 나면 마음이 자유롭고 떳떳해지는 승리감을 맛보게 된다는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관 속에 들어가도 막말은 말라.”
“말이 고마우면 비지 사러 갔다가 두부 사 온다.”
언어의 집을 짓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날마다 새로운 노력을 거듭해야 하겠지요. 이 힘들지만 아름다운 노력의 여정에 여러분도 함께해 주실 거지요?
■ 먼저 인간적인 위로를 건네세요
제게는 몸의 아픔과 마음의 아픔에 대한 명상과 묵상을 많이 한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생각들을 정리해 <눈물의 만남>이란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몸이 아플 때 / 흘린 눈물과
마음이 아플 때 / 흘린 눈물이
어느 새 / 사이 좋은 친구가 되었네
몸의 아픔은 나를 / 겸손으로 초대하고
맘의 아픔은 나를 / 고독으로 초대하였지
아픔과 슬픔을 / 내치지 않고 / 정겹게 길들일수록
나의 행복도 / 조금씩 웃음소리를 냈지
내가 수술을 해본 적이 없을 때에도 ‘마치 수술한 환자가 회복실에서 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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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처음 세상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으로 감사한 생활을 하자’고 글로는 썼지요. 하지만 제가 그런 입장이 됐을 때, 그 감동과 놀라움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수술 후 아무 것도 못 먹던 저는 수녀원으로 돌아 온 이후 미음부터 시작해 조금씩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보호자 수녀님이 제게 포도를 딱 한 알 주셨습니다. 그 포도 한 알의 황홀함은 저에게는 지구만큼 큰 것이었지요. ‘어머나, 세상에 포도라는 것이 있었지. 어쩌면 이렇게 달콤할 수 있을까.’
병상에 있는 동안 사람들이 툭툭 던지는 말을 들으면서 제가 건강할 때 사람들에게 다니면서 했던 말들에 대해서도 많이 돌아보았습니다. 좋은 말이라고 생각해 다른 사람한테 강요하고 잔소리 했던 것들이 참 많은 경우에 관념적이고 추상적이고, 너무 형식적이었다는 반성도 했습니다.
저는 평생을 기도하고자 수녀원에 온, 말하자면 봉헌자임에도 불구하고 몸이 너무 아플 때는 사람들이 문병을 와서 계속 기도만 하는 것에도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그때 제게 누구보다 인간적인 위로를 건네셨던 분은 바로 옆방에 입원해 계시던 김수환 추기경님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을 귀찮게 해드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피해 다녔지요. 그런데 제가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들은 추기경님이 오히려 먼저 만나고 싶다는 기별을 보내오셨습니다. 영광스러운 마음으로 그분의 방에 갔을 때, 추기경님이 저한테 물으셨습니다.
“수녀도 그럼 항암이라는 걸 하나?”
제가 “항암만 합니까, 방사선도 하는데”하고 대답했더니 추기경님은 무언가 가만히 생각하시는 듯 했습니다. 저는 추기경님이 주님을 위해서 고통을 참아라. 그런 말씀을 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추기경님은 이렇게 딱 한 마디 하셨습니다.
“그래? 대단하다. 수녀.”
그 한 마디 인간적인 위로가 제게는 큰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한마디 속에 모든 종교적인 의미와 가르침이 담겨 있었습니다. 덕이 깊은 사람일수록 그처럼 인간적인 말을 하는 것임을 그날 깨달았습니다.
9·11 테러로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에게 가장 상처가 된 것은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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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고 합니다. 사고로 자식을 앞세운 부모의 마음을 너무나 쉽게 종교적인 말로 위로했을 때 무척 마음이 상했다고 합니다. 좋은 말이라고 해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위로에도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게 합니다.
■ 화가 나도 극단적인 표현은 삼가기
여러분께 가장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 말 습관 중 하나는 ‘아무리 화가 나도 막말은 하지말자’는 것입니다.
뚜껑 열린다. 미치겠다. 환장하겠다. 꼭지가 돈다. 혈압 오른다. 돌아버리겠다. 졸도 하겠다. 까무러치겠다 …….
화가 난다. 성이 난다고 말해도 될 것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런 자극적이고 강한 표현은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말은 아니겠지요.
한번은 수녀님들과 소모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서 화가 나서 하는 말 중에서 으뜸으로 선정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 분은 누군가를 욕하고 싶을 때, 힘들고 화가 날 때 “보통 일이 아니에요”,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라는 말로 다 정리를 한다고 합니다.
영화배우 안성기 씨는 인품이 좋고 후배들을 잘 챙기는 것으로 소문난, 그야말로 ‘국민배우’라는 호칭이 어울리는 사람이지요. 안성기 씨는 체질적으로 화를 낸다거나 누구를 저주한다거나 부정적인 표현을 못한다고 합니다.
한 기자가 물어 봤다고 합니다. 화가 나서 하는 표현이 하나 정도는 있지 않느냐고 말이지요. 그에 대한 안성기 씨의 답변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너무나 미운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딱 한 마디 한다고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것이 그가 최악의 상황에서 퍼부을 수 있는 가장 거친 말이라고 합니다.
“보통일이 아니에요.”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여러분도 화가 날 때 이 두 가지 표현을 활용해 보시면 어떨까 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중에 과격한 표현들을 정리해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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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 때린다. 해골이 복잡하다. 라는 표현은 그냥 “머리가 복잡하다”로
- 쫙 뻗었다. 는 말은 “너무 힘들다. 피곤하다 파김치가 됐다”등으로
- 웃기네. 미치고 팔짝 뛰겠다. 딱 질색이야 라는 표현은 “못마땅 하다” 정도의 순한 말로 바꾸어 보는 것이 좋겠다.
한 신부님이 운전을 하며 너무 막말 상스러운 말을 쓰게 되자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메모지 한 장을 준비했습니다. 1,2,3 번호를 쓰고 평소 잘하는 욕을 써서 붙였다고요. 그리고 얄미운 대상이 지나갈 때마다 욕을 하는 대신 번호를 말했더니 무척 편리하더래요.
“저 아저씨는 … 이그 1번이야. 저 아줌마는 2번 아니야?”
그렇게 해서라도 지나치게 막말 하는 것을 줄여보려고 노력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 비교해서 말할 땐 한 번 더 생각하기
명절이면 그동안 자주 보지 못했던 가족 친척들이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 정겹고 귀한 자리가 자칫 바늘방석이 될 수도 있지요. 무심히 던진 말 한마디 특히 비교하는 말에 마음 상하는 일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싶은 고운 말 습관은 ‘비교하는 말을 해야 할 때는 한 번 더 신중하게 생각하고 표현하자’는 것입니다.
누가 더 예쁘다. 누가 더 똑똑하다. 누가 더 잘났다…. 그런데 저는 은연 중에 쓰는 이런 비교급의 표현, 편애하는 말을 삼가려고 노력합니다. 가끔 누군가 “수녀님은 어떤 계절을 좋아하세요? 봄이 좋으세요. 가을이 좋으세요?” 하고 물어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럼 계절한테도 왠지 미안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봄은 꽃이 많아서 좋고, 가을은 단풍이 아름다워서 좋아요.”
누군가 자꾸 비교급 표현으로 질문하면 “글쎄? 어떤 게 더 나을까? 누가 더 예쁜 걸까?”하는 식으로 잠시 뜸을 들이는 시간을 갖는 것이 어떨까요. 비교하는 말을 할 때에는 잠시 멈추어 숨을 고르고 긴장하면서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말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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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의 빛 >
쓰면 쓸수록 정드는 오래된 말 / 닦을수록 빛을 내며 자라는 / 고운 우리말
“사랑합니다”라는 말은 / 억지 부리지 않아도
하늘에 절로 피는 노을 빛 / 나를 내어주려고 / 내가 타오르는 빛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 언제나 부담 없는 / 푸르른 소나무 빛
나를 키우려고 / 내가 싱그러워지는 빛
“용서하세요”라는 말은 / 부끄러워 스러지는 / 겸허한 반딧불 빛
나를 비우려고 / 내가 작아지는 빛
■ 사람이든 물건이든 비하하지 마세요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는 장난감도, 꽃이나 나무, 강아지도 내 말을 알아듣는다고 생각했지요. 어른이 되어서도 그와 같은 동심을 지니고 세상을 바라보면 삶이 더욱 아름다워지지 않을까요.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예의를 갖추어 말하는 습관을 익히고, 사람이든 사물이든,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함부로 비하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새끼’, ‘놈’, ‘자식’이라는 말을 쓰는 경우가 많지요. 정 그런 표현을 하고 싶다면 ‘나쁜 사람’, ‘몹쓸 사람’ 정도로 바꾸어 보는 게 어떨가요.
‘제까짓 게 뭐라고!‘ 라는 말 대신 ’아휴, 다들 왜 그 모양인지‘ 정도로 바꾸어 보고, ’구제불능 아니야?‘ 대신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것 같네‘ 라든가 ’어떻게 도와주면 좋을지!‘ 정도로 좀 더 순한 표현을 찾아보면 좋을 듯 합니다.
‘저 사람 정서불안 아니야?’, ‘’미쳤어‘라고 말하고 싶을 때는 ’어디가 좀 아픈 사람 같지 않아?‘ 정도로 말해 보면 어떨까요. 아무리 문제가 많은 사람이라 해도 인격을 깎아 내리는 표현을 함부로 해선 안 될 것입니다.
집에서도 세탁기나 냉장고가 고장 나면 꼭 ‘놈’자를 붙이곤 하지요. ‘이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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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기는…, 이놈의 냉장고는…’ 라고요. 놈 자를 빼도 충분히 표현이 될 텐데 말이지요.
TV 드라마를 보다가도 ‘이 드라마는 질질 끌고 재미가 없네’라고 해도 충분한 것을 ‘이 드라마는 재밋대가리 하나 없네’라 말하기도 하는데, 이런 경우 ‘대가리’라는 말을 꼭 써야 할까요.
작은 언어 습관 하나하나가 내 삶을 밝게도 만들고 어둡게도 만든다는 사실을 한 번 명심하면 좋겠습니다.
■ 배려가 있는 농담이나 유머가 좋아요
꽃향기 가득한 길을 산책하며 종종 꽃들의 내밀한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가 있습니다. 오늘은 내게 장미 한 송이가 ‘내 Qy족한 가시들이 남에게 큰 아픔이 되지 않게 하시고, 우리를 위한 고뇌 속에 성숙하는 기쁨을 안게 하소서’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반짝이는 보석이 될 수도, 장미의 가시가 될 수도 있는 농담이나 유머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농담이나 유머는 우리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즐거움을 더해 주며 무미한 일상에 다채로운 맛을 더하는 양념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안 하느니만 못할 때도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들끼리 농담이나 유머를 주고받다가 마음이 상하는 경우가 있지요. 한쪽에서 화를 내면 ‘농담도 못하나?’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지만 농담이야말로 생각 없이 함부로 해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눈이 단춧구멍만 하고’, ‘입은 하마 같이 크고’, ‘얼굴은 말상’이라고 말하거나 ‘다른 것은 잘 모르지만 맛있는 것 하나는 귀신같이 잘도 알아요’라고 표현하는 것 등. 누군가에 대해 평소 못마땅하게 여기던 점을 농담을 구실삼아 슬쩍 가시로 끼워 넣어 말하는 것 역시 비겁한 일일 것입니다.
제대로 된 농담이나 유머는 언제 들어도 즐겁고 보편타당성이 있고, 남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며, 뒤끝이 찜찜하지 않고 오히려 향기로운 여운을 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농담이나 유머는 적당하게, 시기적절하게, 그리고 다정하게 해야 한다는 말도 더불어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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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어느 기자가 고 김수환 추기경님께 이런 농담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 결혼을 하셨으면 2세의 얼굴이 추기경님처럼 못생길 게 뻔하니 결혼 안 하시기를 정말 잘 한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들은 추기경님은 유쾌하게 웃으며 ‘나도 그리 생각한다네“하고 말씀하셨다지요. 이분의 재치 유머를 본받고 싶습니다.
우리 수녀님들이 제게 “그리 작은 손으로 무슨 설거지를 하겠다고? 시나 쓰시지”하면 “시나 쓰는 건 어디 그리 쉬운가요? 그래도 병을 닦을 땐 이 손이 병 속에 쏙 들어가 얼마나 편리한데요” 정도로 웃으며 대꾸하지요.
■ 흉을 보더라도 표현만은 순하게
사람이 모이는 자리에 가면 어쩔 수 없이 동료의 흉을 보거나 연예인이나 정치인의 흉을 보는 일이 생기곤 하지요. 흉을 보지 않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우리는 불완전한 인간이기에 은연중에 남을 험담하거나 비판하게 됩니다. 그럴 땐 비록 흉을 보더라도 가능한 한 고운 말로 순화시켜 보는 것이 어떨까요.
예를 들어 직장 상사를 욕하는 자리에서 ‘성격이 독종이야’, ‘지랄맞다’, ‘그 사람 때문에 죽을 맛이야’등 지나치게 강한 표현이나 나쁜 말로 치달을 때는 똑같이 그 말을 받아서 하는 게 아니라 말을 좀 더 순화시켜서 ‘우리와는 다른 강한 면이 있으시지요’, ‘워낙 특이한 면이 있으시지요’ 등으로 바꿔 보세요.
또한 ‘그렇지만 그게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닐 거예요’, ‘사장님의 결정 사항이 마음에 안 들지만 우리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겠지요’ 하며 중재하는 말을 해 봅시다. (가끔씩 살짝!)
누군가 “내가 이 말을 안 하려고 했는데…”하고 운을 띄우면 우리는 “나쁜 말이면 하지마”라고 말리기보다는 “무슨 일인데? 알아야 도움을 주지”하며 오히려 호기심으로 부추기기 쉽지요.
흉보는 자리에서 현명하게 처신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요. 실제로 닥치면 용기가 없어지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신경이 쓰여, 내가 생각하는 대로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더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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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은, 옷을 입을 때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하는 것처럼 첫 대화를 좋은 말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모임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서도 그리울 수 있는 모임이 되어야 좋겠지요. 남의 험담을 한다거나 떠돌아다니는 소문이나 스캔들 얘기만 하다가 헤어지면 뒤끝이 향기롭지 못하고 씁쓸한 여운이 마음의 평화를 깨뜨릴 것입니다.
나부터 지금부터 여기부터!
■ 언제나 때에 맞는 말을 하는 지혜
‘경우에 닿는 말은 은쟁반에 담긴 황금 사과다. (…) 말을 현명하게 하는 사람들은 지혜를 쌓아 훌륭한 격언들을 비처럼 뿌려 놓는다.‘
‘실언하기 보다는 길에서 넘어지는 편이 낫다. 불쾌하게 구는 자는 때에 맞지 않은 이야기를 즐긴다.’
근래에 읽은 구약성서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며 언어생활의 중요성을 새롭게 묵상해 봅니다. 축하할 만한 일이 생긴 사람들에게 ‘땡 잡았네요’라고 말하기보다는‘ ’좋으시겠어요‘, ’복도 많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 훨씬 듣기에 좋지요.
멋진 상황이나 풍경에 대한 감탄사가 필요할 때 ‘뽕간다’, ‘죽인다’는 표현보다는 ‘정말 반하겠어요’, ‘환상 자체라니까요’, ‘뭐라고 표현을 할 수가 없네요‘라고 말해 보세요.
어떤 사람이 우울하거나 의기소침해 있어 위로가 필요할 때엔 ‘신경 끄세요!’라고 말하기 보다는 ‘안심하세요’, ‘걱정 마세요’, ‘마음 놓으세요’, ‘잘 되도록 기도할게요’라고 말해 봅시다.
한번은 제 어머니가 위독하셨을 때 병원에 문병 온 도우미 할머니가 큰 소리로 “아이고 할머니 이제 집에 가시긴 다 틀렸네!”라고 해서 제가 화를 낸 일이 있습니다.
우리에겐 잔칫집에 갈 일도 많지만 초상집에 갈 일 역시 많이 생깁니다. 문상을 가서는 말을 아끼는 것이 미덕이지만 그래도 의례적인 인사나마 안 할 수가 없지요.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저도 기도하겠습니다’ 정도가 무난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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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런 사고로 가족을 잃고 참담해 하는 유족들에게는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뭐라고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떤 종교적이고 교훈적인 말보다 더 위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 고운 말 >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지요 / 언어가 그리 많아도 /
잘 골라 써야만 보석이 됩니다
오늘 우리도 고운 말로 / 새롭게 하루를 시작해요 / 녹차가 우려내는 은은한 향기로 / 다른 이를 감싸고 / 따뜻하게 배려하는 말
하나의 노래 같고 / 웃음같이 밝은 말 / 서로 먼저 찾아서 건네보아요 / 잔디밭에서 찾은 네 잎 클로버 한 장 건네주듯이
‘마음은 그게 아닌데 말이 그만……’/ 하는 변명을 자주 하지 않도록 / 조금만 깨어 있으면 됩니다 / 조금만 더 노력하면 / 고운 말 하는 지혜가 따라옵니다.
삶에 지친 시간들 / 상처받은 마음들 / 고운 말로 치유하는 우리가 되면
세상 또한 조금씩 고운 빛으로 물들겠지요
고운 말은 세상에서 / 가장 좋은 선물이지요
■ 긍정적인 맞장구를 치자
진정 사랑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란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사람일 것입니다. 상대방의 말을 귀담아 듣고 맞장구를 쳐주는 것은 우리의 아름다운 의무 가운데 하나이지요. 고운 말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애덕을 가지고 상대방의 말에 맞장구를 쳐주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이쪽에서 한창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상대방이 건성으로 듣거나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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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메시지를 확인하는 데만 정신이 팔려있는 것을 보면 슬프고 서운한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합니다. 또한 내가 무슨 말을 열심히 하는데도 상대방이 아무런 대꾸 없이 침묵으로 일관하면 그 것 역시 맥이 빠지고 무안한 일이지요. 종종 저를 찾아오는 어머니들은 무슨 말을 해도 가족들이 응대를 안 해주어 삶이 재미없다고 하소연하곤 합니다.
맞장구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알겠어요’. '그렇군요’하고 말하는 동의형 맞장구,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런 참 어이가 없었겠네요’하고 말하는 공감형 맞장구, ‘네, 한마디로 이란 말씀이군요’로 이어지는 정리형 맞장구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직도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요? 그걸 말이라고 해요?‘, ’한심하기 짝이 없네요‘등 대화마다 흥을 깨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 부정적인 맞장구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의 말에 추임새를 넣어 주고 적절하게 맞장구를 치는 것도 우리의 삶을 한결 윤택하고 활력 있게 만드는 ‘관계의 기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속담에도 있듯이, 듣기 좋은 말은 아직도 무료이며 세금도 없는데 따스한 격려의 말 한마디에 너무 인색하게 굴 필요는 없겠지요. 이왕이면 상대를 격려하고 기쁘게 해주는 사랑의 맞장구에 대한 연습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 귀 기울이는 사랑
제가 진행하는 수업 중에 학생들에게 ‘누가 자신의 말을 제일 잘 들어 주는가’란 주제로 설문지를 돌린 일이 있는데 대부분은 가족, 친구, 애인을 들었으나 꽤 많은 학생이 ‘나 자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나 아닌 남이 내 말을 온전하게 들어 주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보여 주는 듯합니다. 또 잘 듣는 일을 방해하는 요인으로는 미움, 무관심, 편견, 선입견, 고정관념, 고집, 교만, 우월감, 자만심, 집중력 부족, 산만함, 나만의 생각에 빠져 듦, 텔레비전 등을 적어 냈습니다.
매일의 삶에서도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건성으로 들어서 약속이 어긋나거나 예기치 않은 오해가 생기곤 합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암으로 고생하던 어느 사제가 병상에서 저의 방문을 원해 약속을 했다가 바쁜 일을 핑계로 취소한 적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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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루던 중 그가 이미 세상을 떠난 사실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후회했으나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기회는 지상에서 다시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늘 ‘마지막 인사를 하듯이’ 간절하고 애틋하게 이어간다면 말도 더욱 가려서 하게 되고 자세 또한 좀 더 진지하고 정성스러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의 사소한 문제들도 유심히 귀 기울여 듣고 자신의 일처럼 염려하는 당신의 모습에 마음이 따뜻해지곤 했습니다. 해결의 길에선 아직 멀리 있어도 제 말을 잘 들어 준 것만으로도 이미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온 몸과 마음을 집중해서 제 말을 들어 주는 당신의 모습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했습니다. 중간에 끼어들고 싶은 적이 없지 않았을 텐데도 저의 말을 하나도 가로막지 않고 끝까지 들어 준 당신의 인내에 감동하면서 저도 그리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판단은 보류하고 먼저 들어 주는 사랑의 중요성을 다시 배웠습니다.
잘 듣는 것은 마음의 문을 여는 것. 기다리고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 편견을 버린 자유임을 배웠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말을 많이 하고 주제넘게 남을 가르치려고 한 저의 잘못이 떠올라 부끄러웠습니다.
< 듣 기 >
귀로 듣고 / 몸으로 듣고 /마음으로 듣고/
전인적인 들음만이 / 사랑입니다.
모든 불행은 / 듣지 않음에서 시작됨을 / 모르지 않으면서
잘 듣지 않고 / 말만 많이 하는 / 비극의 주인공이 / 바로 나였네요
아침에 일어나면 /나에게 외칩니다
들어라 / 들어라 / 들어라
하루의 문을 닫는 한밤중에 나에게 외칩니다.
들었니? 들었니? 들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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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분 좋은 상징어를 자주자주
아침에 일어나면 어떤 음식을 만들까. 무슨 옷을 입을까 궁리하듯이 우리의 언어생활에도 나름의 계획과 디자인이 필요합니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 라는 말이 있듯이.아무리 좋은 말의 구슬이 널려 있어도 우리가 그것을 잘 엮어서 쓸 때에만 빛이 나겠지요.
일상에서 말을 많이 할 때에도 이왕이면 ‘기분 좋은 상징 언어’들을 자주사용하면 어떨까요. 매순간 그럴 필요는 없겠지만 어쩌다 사용하는 시적이고 상징적인 언어들은 사람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기분 좋게 합니다.
늘 마음씀씀이가 어질고 너그러운 사람에게 그냥 ‘맘씨가 좋으세요‘, ’호인이세요‘, 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렇게 맘씨가 비단결 같으세요‘, ’바다를 닮은 마음이세요‘ 하고 말을 건넸을 때 상대방이 더 기뻐하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목소리가 맑고 아름다운 이에게 ‘마치 노래를 듣는 것 같아요’, 음성이 예술입니다‘라고 말해보고, 얼굴이 아름다운 여성에게는 단순히 ’미인이세요‘하기
보다는 장미 한 송이를 보는 것 같아요’ 라고 해봅니다. 박학다식한 이에겐 ‘모르는 게 하나도 없으시네요’ 하기보다 ‘마치 움직이는 백과사전 옆에 서 있는 느낌이에요’라고 표현해 봅니다.
우리 수녀원 암 투병 환자들의 작은 모임을 ‘찔레꽃’이라고 이름 지은 후로 서로를 지칭할 때 자연스럽게 ‘찔레꽃 수녀’라고 부르니 그냥 ‘암 환자’라고 하는 것보다는 기분이 좋습니다.
사전 속에 묻혀 있는 상징 언어들을 일상의 삶으로 끌어내어 사용해 주기를, 그 낱말들 역시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여러분의 가슴에, 노트에, 일기장에 푸른 하늘을 닮은 표현들을 많이 채원 넣으세요. 그리고 시인이 된 마음으로 사랑과 희망이 담긴 뜻 깊은 언어들을 어려분의 가족, 친구, 이웃에게 건네 보시기 바랍니다.
■ 편지를 써요
기온이 떨어져 마음마저 춥게 느껴지는 겨울, 어느 수녀는 부산 광안리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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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가에 나가 가출 소녀들을 데려다 보살피는 일을 하고, 어느 수녀는 무료 급식소에서 열심히 밥을 지어 .노숙자들을 대접하며, 또 어느 수녀는 지체장애인 맞벌이 부부의 자녀와 무의탁 노인들을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이웃 사랑에 헌신하는 그들의 모습이 존경스럽습니다.
저는 그렇게 큰일은 못하지만 시간 나는 대로 부지런히 편지 쓰는 일을 통해 작지만 소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하고자 합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전화보다는 편지나 엽서로 감사, 위로, 축하의 표현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습니다. 불쑥 전화로 급히 말하는 것 보다는 애송시라도 적어 마음을 전하는 것이 훨씬 더 따뜻하고 정감 있게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전화는 상대와 시간이 맞지 않으면 허탕을 치기도 하니 아예 편지로 대신하면 여유있고 편합니다.
저는 우리 수녀원 마당 옛 유치원 자리에 자그마한 ‘편지글방’을 하나 차려놓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보내오는 사연들을 분류해 짧게라도 답을 해주려고 애씁니다. 제게 편지는 수도원과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을 해주고 자칫 좁아지기 쉬운 경험의 폭과 시야를 넓혀 주는 창문이 되어 줍니다.
< 편지 쓰기 >
나는 악기를 다루듯이 / 편지를 씁니다
어떤 사람에겐 / 피아노나 풍금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어떤 사람에겐 / 첼로나 비이올린의 언어로 이야기 하고
또 어떤 사람에겐 / 가야금이나 거문고의 언어로 이야기 하죠
글에도 음악이 흘러 아름답습니다. / 받는 이들은 행복하답니다
■ 오늘의 고운 말 연습
수도원 밖에서 특강 요청이 오면 저는 곧잘 언어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러다가 가끔 우리가 하는 곱지 못한 말들을 그대로 흉내내면 듣는 이들이 모두 큰 소리로 웃으며 재미있어 합니다.
일상의 언어는 습관에 따라 형성되기에 아예 처음부터 잘 길들이고 가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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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으면 바로잡기가 점점 힘들어 집니다. 말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속으로 미리 연습하고 말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0 어떤 사람이 이야기 할 때는 - ‘그러셨어요?’ ‘ 오, 그랬군요!’ ‘세상에!’ ‘저런’하고 맞장구치기
0 칭찬을 들을 땐 - ‘감사합니다’ ‘다 염려해 주신 덕분이지요.’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영광입니다.’
0 충고하는 말을 들을 땐 -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유의하겠습니다’
‘하기 어려운 말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0 누가 틀린 정보를 고집할 적에는 - ‘혹시 착각한 것 아닐까요?’
‘저는 그게 아닌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0 자리에 없는 이를 험담하는 경우 - ‘우리가 못마땅해 하는 점이 그 사람 의 전부는 아니잖아요.’ ‘ 그 사람에겐 또 다른 좋은 면이 있잖아요’
0 예기치 않은 상황에 맞닥뜨리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 ‘환장한다’, ‘죽겠다’. ‘돌아가시겠다’. ‘기절하겠다’. ‘화딱지 난다’. ‘신경질 난다’. ‘열 받는다’. ‘혈압 오른다’. ‘뿔따구 난다’ 등등의 말을 삼가고. ‘더 이상 못 참겠네요’. ‘큰일이에요’. ‘보통 일이 아니에요’. ‘너무 심하단 말이에요’ 라는 표현으로 푸념하면서 마음을 진정 시킨다.
0 갑작스런 사별의 슬픔에 잠긴 사람들에게는 - ‘무어라 드릴 말씀이 없네 요’, ‘하느님도 무심하시지’, ‘어쩌다 이런 일이……’ 등 슬픈 사람의 입장 을 충분히 헤아리기
0 다른 사람의 인격을 비하하는 표현이나 점잖지 못한 표현 삼가기
0 친한 사이라고 외모의 어떤 부분을 구체적으로 지적해서 말하지 않기
0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싫다’ ‘좋다’는 표현을 성급히 쓰지 않기
0 처음 보는 사람에게 호기심 가득한 질문을 한꺼번에 퍼붓지 않기, 자기가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차차 아시게 되겠지요’ 정도로 웃어넘기기
0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 ‘내가 무얼 하는지 아무도 모를 거야’ 등 자신 의 수고를 은근히 광고하는 일 삼가기
0 ‘내가’ 대신 ‘제가’로, 젊은 사람에게도 존칭어 쓰기
0 하루의 일이 잘 안 풀려 속상해 할 때도 ‘재수없다’보다는 ‘오늘은 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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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한 날이네요’ 정도로. ‘기분이 더럽다’, ‘지겨워’ 보다는 ‘마음이 안 좋아 요’ 좀 언짢은 느낌이에요‘등으로 자제하기
0 ‘출입 절대 엄금’ 보다는 ‘출입을 삼가 주세요’
0 ‘꽃다발 사절’ 대신 ‘꽃은 마음으로 대신해 주세요’등으로
<‘고운 말 쓰기’> 5행시
고 - 운 말을 골라 써야 고상한 사람 되지요
운 - 치 있는 우리말을 꾸준히 써 나가노라면
말 - 의 향기 널리 퍼져 세상은 꽃밭 되지요
쓰 - 지 말죠. 속어 비어 극단적 부정적인 말
기 - 품 있는 사랑의 말 다 함께 갈고 닦아요!
◉ 비우고 씻기는 신앙의 말
- 말이 씨앗이 되는 마음
■ 밝은 마음 밝은 말씨
겨울의 주일 오후, 제 자그마한 방에서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밝은 햇빛을 온 몸에 받고 앉아 있으면 행복합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어둡고 그늘진 지하의 방에 머물다가 얼마 전부터 햇볕이 잘 드는 방으로 옮겨 오니 제 마음까지도 밝고 따스해지는 듯 기쁩니다. 전에는 그저 무심히 받아온 한 줌의 햇볕, 한 줄기의 햇살도 예사롭지 않은 큰 축복으로 여겨집니다.
한 줄기 따스한 햇살이 어둠을 밝혀주고 추위를 녹여주듯이. 한 마디의 따스한 말이 마음의 스산한 어둠을 밝혀주고 고독의 추위를 녹여준다는 사실을 오늘도 새롭게 기억하면서, 또 한 번의 새해가 내미는 하얀 종이 위에 ‘밝은 마음, 밝은 말씨’라고 적어봅니다.
상대가 비록 마음에 안 드는 말로 자신을 성가시게 할 때조차도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적당히 맞장구치며 성실한 인내를 다하는 이들을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자기 자신의 기분보다는 오히려 상대방의 기분을 먼저 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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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이 느껴지는 말씨, 이기심과는 거리가 먼 인정 가득한 말씨는 우리에게 언제나 감동을 줍니다.
겉으론 긍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가시가 숨어 있거나 교묘한 위선의 그늘이 느껴지는 이중적이고 복잡한 말이 아닌 단순하고 투명한 말씨 뒤끝이 없는 깨끗한 말씨를 듣고 싶습니다. 어린이처럼 맑고 밝은 마음, 고운 마음을 지니고 살고자 노력하면 매일 쓰는 말씨 또한 조금씩 더 맑고 밝고 고와지리라 믿습니다.
늘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친지들에게 자그만 선물이라도 보내고 싶어 두리번거리는 제게 유리창을 뚫고 들어온 한 줄기 햇살이 가만히 속삭여 줍니다.
‘친절한 말 한마디가 값진 선물보다 더 낫지 않느냐?’ (집회서 18:17)
■ 푸념과 한탄의 말을 줄여 보세요
“사는 게 별거 있나요.” 사람들이 무심코 쓰는 말 중에 제가 참 싫어하는 표현입니다. 심지어는 “죽지 못해 살지요”,“딱 죽고 싶은 심정이에요”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다음과 같은 푸념을 끝없이 늘어놓기도 하지요. 다 소용없다. 내가 어쩌다 누구 때문에 이리되었나. 내가 수고하는 건 아무도 모른다. 김이 샜다. 난 찬밥이야…….
이처럼 애써 선한 일을 다해 놓고도 그 향기가 싹 달아나게 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정 푸념을 하고 싶다면, 그 푸념을 다른 사람이 아닌 나에게로 돌리는 게 어떨까요. 감사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감사가 잘 안 된다든가, 마음처럼 기도가 잘 안 된다든가, 사는 게 통 재미가 없는데 아마도 내 탓인 것 같다든가…. 그렇게 자신의 탓으로 돌리고 남을 탓하는 일은 삼갔으면 좋겠습니다.
바꾸어 말해보기.
습관적인 푸념이 나오려고 할 때는 ‘오늘은 바람이 불지요?’ ‘참 포근한 날씨지요?’ 얼른 날씨 이야기로 주제를 바꾸는 것도 좋을 듯 해요.
나 중심적인 한탄의 표현이 나오려고 할 때는 ‘어쩌면 그렇게 기억력이 좋으세요?’ ‘남을 배려하는 따뜻함과 섬세함이 돋보이세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장점을 찾아 말해주다 보면 금세 분위기가 밝아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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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의 말을 쏟아 놓고 싶을 때는 ‘당연한 것을 감사하는 법부터 배워야겠어요’ ‘감사하면 할수록 더 감사할 게 많아지는 것이 바로 감사의 기적이겠지요?’ 내 마음의 서랍에 저장했다 잠시 잊고 있던 감사의 표현을 불러오면 슬그머니 불평이 사라질 테지요.
■ 나를 기쁘게 하는 것들
새해나 새봄을 맞으면 ‘행복하세요!’, ‘기쁘고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좋은 일만 가득하시기를!‘하는 덕담을 수도 없이 듣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아직 내 심장이 뛰고 있고 숨을 쉬는 것에 대하여 새롭게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기도 시간에 기억할 사람이 많은 것도 새롭게 기뻐하고, 식탁에서는 소박한 상차림이지만 하루 세 끼 굶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은혜를 또 새롭게 기뻐합니다.
마음에 드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자기 마음에 안 들고, 성격도 안 맞고, 하는 일마다 못마땅하게 생각되는 어떤 사람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노력을 해서 그것이 사랑으로 변할 수 있다면 참으로 아름다운 승리가 아닐까요? 저는 이제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때로는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을 진정으로 환대하고 받아들일 때 서로 막혀 있던 통로가 트이고, 조그만 사랑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음을……. 그리고 이 기쁨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음을…….
며칠 전 모처럼 높은 산에 올라갔습니다. 사람들이 함부로 쓰레기를 버리는 자리에 주의사항 두 개가 붙어 있는데, 한 곳에는 “열 사람이 줍기보다 한 사람이 안 버리기!” 라고 쓰여 있고, 또 한 곳에는 “마음의 찌꺼기만 버리고 가십시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어느 절에는 “아니 온 듯 다녀가시옵소서!”라고 적혀 있다더니…. 단순히 ‘쓰레기를 버리지 마시오!’ ‘엄벌에 처함!’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얼마나 정겹고 따뜻한 표현인가요.
‘좋은 말, 긍정적인 말, 밝은 말을 더 많이 하고 사는 하루하루가 되길 기도합니다. 입만 열면 다른 이를 비방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입만 열면 다른 이의 좋은 점을 말하며 비난보다는 격려의 말을 하고, 누가 험담을 할라치면 오히려 덮어주거나 변명해 주려고 애쓰는 이들도 있습니다.
“한마디의 친절한 말은 의기소침한 사람들에게 격려를 준다. 그리고 잔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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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무덤에 가는 날까지 흐느껴 울게 만든다.”
- 플톤 쉰 주교의 어록 중에서
“실없이 칭찬하면 말이 무게를 잃는다. 근거 없이 비방하면 비난이 내게로 온다. 지위가 높은 사람의 한 마디는 아랫사람의 인생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 좋은 말도 가려서 하고, 충고도 살펴서 하라. 무심코 던진 한 마디가 비수가 되어 박힌다. 뜻 없이 한 행동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말과 행동이 사려 깊지 못해 원망을 사고 재앙을 부른다.” -다산 정약용의 어록 중에서
■ 고마움 새롭히기
작은 일에도 항상 고마워하는 이들을 만나면 제 마음도 밝고, 따스하고 흐
뭇해 집니다. 그러나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고, 고마움 보다는 불평과 비난의 말이 습관적으로 먼저 튀어 나오는 사람들을 대하면 제 마음도 답답하고 우울해 집니다. 감사할 줄 아는 이들의 표정은 따뜻하고 부드럽지만 감사할 줄 모르는 이들의 표정은 오만하고 차갑고 뻣뻣합니다.
매일 반복되는 하루 일과 속에서 무심히 잊고 지냈거나 극히 당연하다고만 생각하던 것들의 고마움을 새롭게 되새겨 보면 우리의 삶이 좀 더 활기차고 풍요로워지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 일상에서 ‘고마움 새롭게 하기’운동을 기꺼이 실천해 보면 좋겠습니다.
1. 내게 고맙게 한 사람들과 상황을 더 자주 새롭게 하기
2. 나의 이웃에겐 늘 고마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힘쓰기
3.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 더 많이 사용하기
‘고마움 새롭히기’를 꾸준히 실천하다 보면 어느 새 불평과 원망도 줄어들고 고마움만 가득한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일본의 이무라 가즈키요가 <종이학>이란 책에 남긴 < 당연한 일 >이란 제목의 시를 다시 읽어봅니다.
왜 모두 기뻐하지 않을까 / 당연하다는 사실들
아버지가 계시고 어머니가 계시다 / 손이 둘이고 다리가 둘
가고 싶은 곳을 자기 발로가고 / 손을 뻗어 무엇이든 잡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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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가 들린다 / 목소리가 나온다 /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아무도 당연한 사실들을 기뻐하지 않아 /
‘당연한 걸’ 하며 웃어버린다
세 끼를 먹는다 / 밤이 되면 편히 잠들 수 있고 그래서 아침이 오고
바람을 실컷 들이마실 수 있고 / 웃다가 울다가 고함치다가 뛰어다니다가
그렇게 할 수 있는 모두가 당연한 일 /
그렇게 멋진 걸 아무도 기뻐할 줄 모른다
고마움을 아는 이는 그것을 잃어버린 사람들 뿐 / 왜 그렇지 당연한 일
■ 감탄사가 그립다
얼마 전 서울에서 부산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하도 아름다워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초록빛 산과 들, 고요한 강도 아름다웠지만 하늘에 펼쳐진 저녁노을이 장관이어서 저는 속으로 탄성을 질렀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벌떡 일어나 “여러분 저기 저 노을 좀 보세요. 사라지기 전에 어서요!”하고 큰 소리로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지요.
제 어머니는 매우 과묵한 편이었지만 감탄사의 여왕이기도 하셨습니다. 한 번은 제가 시장에서 산 꽃무늬 여름 이불 하나 선물하니 “원 세상에! 이렇게 예쁜 이불도 다 있네. 잠이 저절로 올 것 같다!”며 기뻐하셨지요. 50여년 만에 찾은 제 어린 시절의 소꿉동무와 전화 연결을 시켜드렸을 때는 “정말 반갑네! 하도 오랜만이라 마치 죽음에서 부활한 사람을 만난 느낌이 다 드는구나”하셨습니다.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제가 한창 재롱부리던 아기 적엔 하도 “좋다. 좋다” 손뼉을 치며 즐거워해서 집에 오는 손님들이 “넌 만날 무에 그리 좋으냐?”며 ‘좋다’라는 별명을 붙인 그 아기를 서로 먼저 안아 주려고들 했다고 합니다.
< 듣고 싶은 감탄사 >
“어쩌면!” / “세상에!” / “난 대복(大福)을 받았어!”
사소한 일들에도 / 감동을 잘하시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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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잔잔한 / 감탄사가 듣고 싶어요
이제는 어머니 대신 / 제가 날마다 / 감탄사를 늘리며 / 살아야 할까 봅니다
■ 내 마음의 보물찾기
믿음은 겸손을 전제로 합니다. 믿음은 기다릴 줄 압니다. 믿음은 얄팍한 계산이 아니고 깊이 있는 신뢰입니다. 네가 믿는 대로 될 것이다“하신 주님, 오늘 하루도 당신을 믿습니다. 어제보다 더 진실한 마음으로, 어제보다 더
깊이 튼튼한 뿌리를 내리리라는 확신으로 당신을 믿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제 삶의 중심으로 새롭게 선택합니다.
소금에 대한 묵상은 해도 끝이 없고 할 적마다 새롭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한다면 조금씩 조금씩 진짜 소금이 될 테지요? 어떤 행동을 할 때, 이기심을 조금 빼어버려도 하얗게 맛좋은 소금이 될 것입니다. 한 툴의 진짜 소금이 되기 위해 아플 때도 있지만, 그래도 즐겁습니다.
환하고 둥근 보름달이 마음에도 걸렸습니다. 보름달처럼 흠 없게, 둥글게, 부드럽게, 유순한 말과 행동으로 이웃에게 다가가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욕심과 이기심으로 일그러지지 않게 도와주십시오, 남을 판단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겸허한 자유인의 덕목입니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당신을 깊이 사랑할 수 있기를! 늘 사랑이 낳아주는 맑고 순한 마음을 잃지 않기를! 아침에 일어나서 거울을 보고 “내가 어제보다는 좀 더 순해진 것 같아. 좀 더 아름다워진 것 같아”라고 빙그레 웃으면서 말할 수 있기를! 선한 갈망, 고운 갈망을 심어주신 나의 님이시여, 오늘도 찬미 받으소서!
■ 복스러운 사람이 되게 하소서
우리가 서로 주고받는 많은 인사말 중에서도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은 가장 정겹고도 포근한 말이라 생각합니다. 이 말을 설날이 아닌 날에도 자주 주고 받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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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부터 저는 복(福)이라는 글자가 금박으로 찍힌 저고리의 끝동이나 옷고름, 은이나 자개로 복을 새겨 넣은 밥그릇이나 젓가락, 복주머니 등을 보면 괜스레 즐거워지고 행복이 바로 곁에 머무는 듯 설레곤 했습니다.
어쩌다 누가 자기에게 예기치 않은 선한 일, 좋은 일을 하면 그 고마운 마음을 “복 받으세요”라고 표현하는 것도 매우 인상적이어서 나도 어른이 되면 꼭 그렇게 해야겠다고 결심한 적이 많습니다.
장수, 재물, 자손, 풍년, 나라의 안녕과 질서, 부부간의 해로. 우애, 화목, 기
쁨, 평화, 사랑, 좋은 만남 등등 그 무엇을 복으로 여기든지 간에 복은 그 자체가 이미 생명 지향적인 것이란 생각이 듭니다. 좋은 것, 아름다운 것, 선한 것, 잘 갖추어 진 것을 지니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인간의 솔직한 꿈이며 희망이라 여겨집니다.
어느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더라도 인간은 예로부터 어떤 신령한 힘에 의지하여 기도하며 마음으로 복을 빌어 왔습니다. 이런 마음을 ‘기복신앙’이라 하여 무조건 비난하기보다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인간이 자기보다 더 높고, 위대하고, 능력 있다고 생각하는 누군가에게 가장 겸허하고 진실되게 복을 비는 것 자체는 곧 자기의 유한성을 인식한다는 뜻이 되며 매우 아름답고 따뜻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요행을 바라거나 안일하게 복을 구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일상의 삶 안에서 꾸준히 복을 짓는 덕스러운 나날을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아름다운 의무라고 여겨집니다. 결국은 덕스러운 삶이 복스러운 삶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면서, 우리 각자가 잠시라도 이웃이 편히 쉬어 갈 수 있는 작은 ‘복덕방’의 역할을 하면 어떨까 기대해 봅니다.
■ 작은 마음의 표현들
며칠 전 오랜만에 바닷가에 나갔다가 모래 속 깊이 묻혀 있는 아주 작은 조가비들을 주워 왔고, 오늘은 솔숲 길을 산책하다 깨끗한 모양의 솔방울과 도토리들을 주워왔습니다. 저는 이것들을 한동안 소식이 뜸했지만 마음으로 가까운 어린 시절의 벗에게 편지와 함께 보내려고 상자에 담아 두었습니다.
요즘처럼 좋은 물건들이 넘쳐나고, 돈만 주면 못 사는 것이 없을 만큼 풍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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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운 시대일수록 상점에서 흔히 살 수 있는 물건보다는 주는 이의 정성과 따스한 마음이 담긴 요란하지 않은 선물이 오히려 더 반갑고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아주 작은 쪽지하나라도 때로는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음을 여러 차례 경험하게 됩니다.
휴대전화 문자나 이메일 사용자가 대부분인 요즘엔 친필 편지를 받아보는 것도 그리 쉽지 않은 듯합니다. 저도 가끔은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할 때 있지가만 그럴 때라도 꼭 친필로 쓸 여백만은 남겨 두곤 합니다. 기계로 찍어낸
글씨와 비록 악필 일지라도 손으로 직접 쓴 글씨를 받아볼 때의 느낌은 크게 다르기 때문이지요.
기회 있을 때마다 저는 벗과 친지들에게 건강할 동안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지만 의미 있는 사랑과 기쁨의 표현을 부지런히 하고 사는 소박한 부자가 되자며 강조하곤 합니다. 생전엔 거의 발표되지 않았다가 사후에 출판된 에밀리 디킨슨(Emily Dickinson)의 1,700여 편이나 되는 제목 없는 시들은 그가 생일이나 기념일을 맞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보낸 카드나 편지글 들을 정리한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도 가족, 친지, 이웃에게 적어 보낼 좋은 생각과 좋은 글귀들을 많이 모아 둘 수 있는, 그래서 열기만 하면 언제라도 작은 보물섬이 되어 줄 수 있는 아름다운 문집 한 권을 준비하면 어떨까요?
■ 자신을 표현할 땐 겸손하게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해 후회스러운 일이 백 가지 중 하나라면 하지 말았어야 할 발을 해버려 후회스러운 일은 백가지 중 아흔아홉이다’라고 한 톨스토이의 말을 더 자주 기억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더욱이 자신을 표현할 때는 잘난 체하지 않는 겸손함으로 더 신중하게 말해야 하겠습니다.
설령 자랑할 거리가 있더라도 스스로 잘난 체하는 발언을 하는 것은 공석에서든 사석에서든 듣는 이를 불편하게 합니다. 덕이 높고 인품이 훌륭하지만 정작 자신은 늘 ‘부족한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이의 말을 들을 때, 운동경기에서 승리의 영광을 개인이 아닌 팀에게 돌리는 선수의 말을 들을 때는 절로 흐뭇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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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자랑하고 싶으면 ‘제가 자랑 좀 해도 될까요?’ 한다든지 ‘제가 자랑할 일이 좀 있는데 들어 주시겠어요?’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어쩌다 본의 아니게 자기 자랑이 좀 지나치다 싶으면 ‘아이고 내가 또 내 얘기만 했네’, ‘내가 또 내 자랑만 했네’ 하고 바로잡는 것도 좋습니다.
■ 잘 준비된 말을
어느 새 글을 쓰는 사람으로 알려지게 된 저는 늘 ‘글빚’을 지고 살게 되었
습니다.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든 아니든 간에 시나 산문 등을 하나의 작품으로 탄생시키기까지는 남모르는 아픔과 인내, 아낌없는 정성과 노력이 필요하지요. 저 역시 글을 쓰며 마음에 드는 적절한 표현을 찾기 위해 수없이 종이를 버리며 잠을 설친 때도 많았고, 옆 사람이 눈치를 챌 만큼 끙끙 몸살을 앓기도 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이렇듯 힘든 과정을 거칠 때마다 제 언어생활을 한 번씩 되돌아보게 됩니다. 말을 할 때도 글을 쓸 때만큼 심사숙고 하고 이것저것 미리 헤아려 분별 있는 말을 하고자 애쓴다면 성급하고 충동적인 말로 다른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 글은 오래오래 종이에 남는 것이고, 말은 그냥 사라지는 것쯤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한마디의 말 또한 듣는 이의 마음속에 오랫동안 간직될 수 있는 것임을 헤아린다면 말할 때 역시 신중을 기해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의 펜 끝에서 나온 글은 그 사람 특유의 개성을 드러내는 작품이 되듯이,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말 또한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 하나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면 결코 함부로 말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미리 준비하고 말하라. 경청하는 자가 많을 것이다. 네가 듣기를 좋아하면 배우는 게 많고, 귀를 기울일 줄 알면 현자(賢者)가 되리라‘는 성서의 말씀을 다시 새겨들으며 저 역시 말뿐 아니라 모든 면에 잘 준비된 현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 유혹에서 지켜주소서 >
저의 매일은 자질구레한 유혹에서의 / 탈출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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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을 내고 싶은 유혹에서 / 변명하고 싶은 유혹에서
부탁을 거절하고 싶은 유혹에서 / 말을 해야 할 때 말하기 싫은 유혹에서
저를 지켜주소서
■ 외로움을 사랑하자
어느 친지의 장례식에서 오랫동안 암으로 고생한 젊은 아내와 사별하고 깊
은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남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아무리 서로 사랑하는 사이일지라도 죽음의 여정은 혼자 떠날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죽을 때도 혼자인 인간의 실존적인 고독, 외로움, 쓸쓸함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너무 쉽게 외로움을 타거나 이를 견뎌내기 어려워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몸과 마음이 몹시 지치고 아플 때, 깊은 밤 홀로 깨어 문득 죽음을 의식할 때, 가까운 가족, 친지조차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도 내 말을 정성껏 들어 주는 이가 없다고 느낄 때, 도달해야 할 목표는 아직도 멀고 다른 이와 비교해서 내 능력과 재능이 처진다고 생각될 때, 다른 이의 행동이 너무 이기적으로 느껴질 때 우리는 슬픔이 깔린 외로움을 맛보지만 이를 피해 멀리 도망치기 보다는 오히려 그대로 받아들이고 대면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새 옷, 새 구두, 새 만년필도 편안한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한참을 길들여야 하듯이 처음에 낯설었던 외로움도 나와 친숙해지면 더 이상 외로움이 아닐 수 있습니다.
외로움에 매여 사는 노예가 되지 않고 외로움을 스스로 다스리는 자유를 누릴 때 우리는 깊은 명상과 사색, 창조적인 작업을 할 수 있고, 감상적인 자기 연민에서 빠져나와 이웃에게도 눈을 돌리고 봉사할 수 있는 기쁨과 여유를 찾게 될 것입니다.
< 어떤 결심 >
마음이 많이 아플 때 /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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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 사랑할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고요히 나 자신만 / 들여다보기로 했다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만치서 행복이 / 웃으며 걸어왔다.
■ 내가 행복해지는 습관
수도원에서는 1년에 두 번 사순과 대림 시기에 올해 어디를 도울까 함께 나눔의 대상을 정합니다. 수도원의 식사가 세속적인 기준에서 보면 부실하겠지만, 거기서도 줄일 것을 정합니다. 예를 들어 점심, 저녁 두 번 과일이 나왔다면 점심에는 먹지 않는 다든지 해서, 40일간 그 금액을 모아 이웃을 돕는 훈련을 합니다. 이렇게 자진해서 사랑의 행동을 하다 보니 이제 그냥 돈을 기부하면 굉장히 허전하게 느껴집니다. 절제와 희생, 극기가 들어가야 애긍의 행위가 더 빛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게 애착하는 경향이 있는데 혈연 지연을 넘어서 모르는 이웃도 기꺼이 도와줄 수 있는 넓은 마음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날그날 내 도움이 필요한 주변 사람에게 생색 내지 않으면서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면 우리는 더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 천사 놀이 >
지상에 살고 있는 우리가 / 서로가 조금씩 위해주고
용서하며 사랑하는 순간은 / 날개가 없어도 천사가 되는 것임을
나날이 새롭게 배웁니다
다른 이를 위로하고 웃게 만들려면 / 내가 더 많이 울어야 하는 것이라고 다른 이의 짐을 가볍고 자유롭게 해 주려면
내가 더 많이 구속 되고 무거울 수 있는 / 용기를 감당하는 것이라고
내 안의 천사가 일러줍니다.
◉ 3장 흰 구름 수녀의 고운 말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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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3장에 실린 글은 일기의 특성을 고려하여 주어( 나, 저)와 술어(~습니다. ~다)를 통일하지 않고 원문의 표현을 그대로 살렸습니다.
■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냉이꽃, 제비꽃, 민들레꽃, 봄까치꽃, 미나이아재비꽃 …. 얼굴이 아주 작은 꽃들일수록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작으니까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지도 모르지요. 보일락 말락 한 가장 작은 꽃 한 송이도 꽃술, 꽃잎, 꽃받침, 잎사귀 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못해 신비롭습니다. 꽃이 많은 집에서 꽃을 볼 수 있는 밝은 눈, 맑은 마음을 지난 것에 새롭게 감사하는 나의 봄이여. 오늘은 유리창을 닦고, 연노란색 커튼을 새로 달고 새 소리에 맞추어 시를 읽으며 봄맞이를 했습니다.
좋은 냄새든, 역겨운 냄새든 사람들도 그 인품만큼의 향기를 풍깁니다. 많은 말이나 요란한 소리 없이 고요한 향기로 말을 건네 오는 꽃처럼 살 수 있다면, 이웃에게도 무거운 짐이 아닌 가벼운 향기를 전하며 한 세상을 아름답게 마무리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 꽃멀미 >
사람들을 너무 많이 만나면 / 말에 취해서 멀미가 나고
꽃들을 너무 많이 대하면 / 향기에 취해서 멀미가 나지
살아 있는 것은 아픈 것 / 아름다운 것은 어지러운 것
너무 많아도 싫지 않은 꽃을 / 보면서 나는 더운 사람들을
사랑하기 시작하지
사람들에게도 꽃처럼 향기가 / 있다는 걸 새롭게 배우기 시작하지
■ 함께 사랑해요, 우리
나는 ‘우리’라는 말을 참 좋아해요. 우리 동네, 우리나라,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친구, 우리 밥상, 우리 공동체……라는 말을 들으면 금방 마음이 순하고 따뜻해집니다. 사람들이 간혹 ‘우리 남편’, ‘우리 그이’, ‘우리 집사람’이라 표현하는 것 역시 얼마나 정겨운지요! 우리라고 하면서도 내 것임을 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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낼 수 있는 그 은근한 표현은 우리말의 특이한 매력인 듯합니다.
수녀원에 처음 왔을 때 어떤 물건을 사용하든지 나의 것도 우리 것이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무척 인상 깊고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나라는 표현보다는 우리라는 표현이 참 편하고 정신적 물질적 소유에서 자유로워지는 데도 도움을 줍니다.
이번 크리스마스에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선물할까, 궁리하며 크리스마스까
지 기다리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서 감사를 발견하며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 친지에게 전하는 가장 좋은 크리스마스 선물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미루지 않는 지혜, 해야 할 용서를 미루지 않는 용기를 날마다 새롭게 지닐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요. 우리. 함께 사랑해요. 우리.
■ 기차를 타요
부산에 살고 있는 나는 경부선 열차를 자주 이용하는 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손님들을 목적지까지 모시고 갈 기관사 ㅇㅇㅇ입니다. 안전하고 편안한 여행이 되시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하는 목소리도, “여러분, 우리 기차는 곧 목적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잊으신 물건이 없는지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하는 안내 방속도 정겹게 들립니다.
‘우리’라는 단어의 여운이 문득 모국에 대한 그리움을 자아내는 그 순간을 사랑합니다.
기차를 타면 우리나라의 사계절을 뚜렷이 보고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난 누가 뭐래도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가 제일 좋아.”
혼자서 중얼거리며 창밖을 보면 산과들이 “그래 그래”하고 웃으며 손을 흔드는 것 같습니다.
기차를 타면 생각할 시간이 많아서 좋습니다. 그리고 혼자만의 ‘생각 여행’을 떠나보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며 메모를 하고 그동안 마음 깊이 담아 두기만 했던 시상을 불러내어 종이에 옮겨 적는 여유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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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타면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을 만나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배울 수 있어 좋습니다.
처음엔 옆자리의 사람에게 말을 먼저 건네기가 어색하고 힘들었으나, 요즘은 “어디까지 가세요?”하고 늘 내가 먼저 말을 건네곤 합니다. “사실은 어려워서 어쩌나 했는데, 먼저 말을 건네시니 편해요. 커피 한잔 드시겠어요?”하는 이웃의 모습은 예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정답게 여겨집니다.
기차를 타면 욕심을 버린 작은 순례자의 마음이 됩니다.
“안녕히 가세요!” “잘 다녀오세요!”하는 인사말을 자연스럽게 주고 받는 곳. 우리의 삶은 만남과 이별의 연속임을 더욱 실감나게 하는 곳. 기적 소리를 울리며 달리는 기차와 함께 내 마음도 끝없이 달려가는 시간. 여행이 주는 한 줌의 쓸쓸함을 즐겁게 맛 들이는 시간. 작은 순례자인 나는 내 마음을 향해 나직이 속삭여 봅니다.
‘마음이여, 좀 더 단순하고 가벼워져라.’
‘마음이여, 좀 더 겸손하고 자유로워져라.’
‘인생이라는 기차 안에서 완전히 내리기 전에 먼저 용서하고 화해하는 연습을 부지런히 하여라.’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고 어느 시인은 말했지요. 사랑을 하고 싶으면 기차를 타라고 나는 말해야겠어요. 혼자만의 기차 여행도 아름답지만, 가까운 벗이 옆에 있는 여정 또한 즐거울 테지요.
< 기차를 타요 >
우리 함께 /기차를 타요 //
도시락 대신 / 사랑하나 싸들고 //
나란히 앉아 / 창밖을 바라보며 //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 이어서 길어지는
또 하나의 기차가 되어 / 먼 길을 가요
■ 보물이 되는 어록
“진정한 사랑은 막연한 감상이나 맹목적인 열정이 아니라 인간 존재 전부를 포괄하는 내면의 태도다. 사랑은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고통받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통을 받는 능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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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이 가진 가치 중 하나는 바로 이기적이지 않는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을 만나서 우정의 즐거움을 맛보고 함께 조용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2005년 4월 전 세계인이 애도하는 가운데 하늘나라로 떠나신 요한 바오로 2세의 어록을 읽으며 잠시 그리움에 젖는다.
그해 2월에는 우리 수녀원 객실의 ‘미소천사’’로 불리던 분다 수녀님이 임
종하셨다. 며칠 전 그분이 남긴 어록을 읽으니 밝고 단순한 모습과 정겨운 웃음이 되살아나는 듯 마음이 따뜻해진다.
“너무 존경만 많이 하면 서로 멀어져, 사랑하고 좋아해야지.”
“날더러 커피를 맛있게 탄다는 데… 같은 물건을 가지고도 다르게 만드는 것이 바로 정인가 봐.”
그 즈음, 내게 예고 없이 배달된 낡은 노트 한 권이 문득 생각나 다시 펼쳐보았다.
어린 시절 내게 정신적인 영향을 준 어느 언니에게 예비수녀 시절(1966년) 내가 선물로 보냈던 ‘구름의 고향’이란 제목의 편지 노트를, 그 언니는 나를 좋아한다는 어느 후배에게 맡겼다고 들은 일이 있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모두 화가가 되었고, 나하고는 사로 연락도 뜸하였다. 그 후 이 일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는데 거의 40년이 다 된 어느 날 이 노트가 내게 우편으로 배달이 되었으니 어찌나 감회가 깊던지!
‘누구나 성덕을 닦는 비례대로 타인에게 사도직이 되는 것입니다’라는 어느 사제의 강론을 적어 놓기도 하고, 시가 되려다 만 생각, 독후감, 기도의 지향들을 메모해 두기도 하였다.
“매일매일 변화 없고 단조로운 생활의 연속인데도 어쩌면 이렇게 늘 새롭고 즐거울까요. 하늘과 바다와 나무와 벗하여 저는 늘 여왕보다도 더한 한 아름의 행복을 안고 이 커다란 사랑의 연못에서 헤엄치겠습니다.. 때론 맘이 괴롭고 손이 시려도 웃으며 참을 줄 알아야겠죠.”
비록 내가 쓴 글이지만 갓 스무 살 먹은 앳된 예비수녀의 풋사과 향내 나는 마음들이 지금의 나에게 자극을 준다. 세월과 함께 때가 묻고 무디어진 내게 좀 더 순결하고 아름다워지라고 재촉하는 것만 같다. 선물이 선물로 돌아와 기쁨이 된 체험! 이 기쁨을 내 기도의 보물 상자에 넣어 두고 종종 충전의 자료로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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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기로운 말
요즘은 여기저기서 웰빙(well-being)이란 단어를 퍽도 많이 사용합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웰빙을 ‘참살이’라고 뜻풀이한 것도 마음에 듭니다. 진정 참되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도 요즘은 도가 지나쳐서 맘에 안 드는 자신의 이목구비를 고치는 일조차 망설임 없이 쉽게 하는 세상입니다.
거리에 나가면 사람들이 다 말끔하고 세련되어 보이는데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듣기 거북할 정도로 밉고 험해서 실망스럽고 슬플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우리 사회에 선과 아름다움과 평화를 가져올 가장 시급한 실천 덕목은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리는 사랑의 언어이고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웰빙이 아닐까 싶습니다.
악취가 아닌 향기로운 여운을 남기는 말, 상처가 아닌 치유의 역할을 하는 말, 미움이 사라지고 화해와 용서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사랑의 말을 하는 우리가 되도록 새롭게 노력하는 매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 바람, 구름, 햇살, 바다, 모든 자연에 대해 고운 말을 하면 고운 말로 메아리가 돌아오는 이 기쁨! 요즘 나는 식탁에서도 자주 자연에 대한 이야길 먼저 꺼내곤 합니다. 여러분도 날마다 한두 번씩 자연에 대해 감탄하는 표현을 해보세요.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요즘 한창 인기를 누리고 있는 미녀 영화배우가 그 모습만큼이나 고운 언어로 내게 말을 건네옵니다. 그의 문자 메시지는 늘 ‘부족한 제가…’, ‘부끄러운 제가…’로 시작하여 상대에 대한 격려와 감사로 끝을 맺습니다.
여러분도 칭찬을 들을수록 ‘부족한 저입니다’. ‘덕분입니다’하며 살짝 자신을 낮추어 말할 수 있는 여유를 지녀보세요. 그 겸허함의 향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우정을 더욱 돈독하게 이어 줄 것입니다.
■ 참으로 잘 익은 글을 위해 - 글쓰기 도움말
갈수록 글을 쓰는 일이 어렵다는 걸 절감하는 나이기에 누가 도움말을 부탁해도 설명할 수가 없었는데, 오늘은 내 경험을 바탕으로 부분적으로나마 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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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 이야기하니 읽는 이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면 좋겠습니다.
0 글감 모아 두기
- 글의 소재가 될 만한 것들을 모아두는 자기만의 바구니 만들기
- 자연을 관찰한 것, 만남에서 오는 느낌, 기도나 명상에서 건져 올린 내용 등 무엇이라도 좋으니 부지런히 적어두었다가 필요할 때 꺼내 쓰기
0 방향설정
- 제목 정하기, 내용 전개를 위한 구상, 진실과 개성이 드러나도록 방향 설정. 욕심을 부리거나 흉내내지 말고
0 초고 만들기
- 자신이 잘 모르거나 뜻이 분명치 않은 단어의 뜻을 분명하게 확인
- 도감, 사전 등 활용
0 중복된 표현이나 안 써도 돨 외래어는 없는지
0 문장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제대로 사용
0 맞춤법, 띄어쓰기, 문장 부호등 확인
0 인용은 꼭 필요한 것인지 심사숙고하고, 출처 밝히기 - “어느 책에서 읽 었던가?” “누군가 말했는데……”하며 대충 얼버무리는 표현은 금물
0 글을 쓸 때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좋은 글귀만 뽑아다 짜깁기 하는 방 법은 옳지 않음,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음
0 시는 너무 설명적이 되지 않도록 간결하게 절제된 상징 언어 사용에 노력
0 타인에 대한 언급은 신중
0 중간 점검
- 초고를 쓰고 잠시 다른 곳에 두었다가 여유 있게 시간을 두고 손질
0 마무리
- 객관성, 내용상, 표현상의 부족함은 없는지 마지막 손질
- 내 능력에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확신이 들면 마무리
■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시간 - 편지 쓰기 도움말
바쁜 일상에서 좀체 여유가 없어 글을 쓸 시간이 없거나, 일부러 짬을 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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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나마 편지를 쓰는 일이 번거롭게 생각되더라도, 편지를 쓰는 일은 우리가 직접 마음을 나누는 사랑의 행위임을 편지를 쓰면서 다시 알게 됩니다.
생전에 편지와 일기에 담긴 깊은 영성으로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었던 사제 헨리 나웬의 글을 다시 읽어 봅니다.
‘오늘 나는, 내가 편지를 쓰고 기도를 바친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기분이 든다. 서로 주고받는 우리의 사랑은 지극히 구체적이며 활력을 불어넣는다. 편지를 생각하고 ,편지를 보낸 이들을 생각하고, 그리고 편지를 받는 이들을 생각하며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편지쓰기가 지니는 장점은 우정을 한결 실감나게 만들고 돈독하게 다져 준다는 데 있다. 처음엔 상당히 부담스럽게 생각되기도 했지만 이제는 편안히 즐기는 시간이 되었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일을 중단하는 기분이 들 정도다.’
현각 스님이 엮은 숭산 스님의 서한 모음집 <오직 모를 뿐>을 읽으면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숭산 큰스님은 당신을 따르는 많은 이들을 일일이 만날 수가 없었으므로 편지로나마 정성을 다한다고 하셨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전 세계를 무대로 봉사했던 인도의 성녀 마더 데레사 또한 어느 날은 따로 시간을 내어 편지 쓰기에 정성을 다하고 많은 경우엔 친필로 쓴다고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편지를 쓰더러도 요즘은 종이 대신 전자 편지를 많이 쓰고, 평소에 하고 싶은 말도 전화로 해버리니 우체국에 가도 예정보다 한산한 편입니다. 지난봄에는 우리 동네 우체국장의 이름으로 나에게 까지 감사의 축전과 기념품이 배달되는 걸 보고 사람들이 정말 편지를 쓰지 않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한 해를 정리하고 돌아보는 12월엔 우리 모두 미루어 둔 편지를 쓰기 위해 즐겁고 바쁘게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12월만이라도 전자 편지 아닌 종이 편지에 나름대로 정성을 담아 벗들에게 보내며 사랑과 우정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면 좋겠습니다. 아주 간단한 말이라도 차가운 인쇄 글씨 아닌 따스한 친필로 적어서 사랑과 기도와 고마움의 마음을 전한다면 우리 서로에게 좋은 선물이 되리라 믿습니다. 편지를 쓰고 받고 기다리는 삶은 얼마나 겸손하고 따뜻하고 아름다운 예술일까요. 또 한 해를 보내며 나의 편지쓰기 소임은 살아 있는 한 이어져야 할 ‘사랑의 일’임을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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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체국 가는 길 >
세상은 / 편지로 이어지는 / 길이 아닐까
그리운 얼굴들이 / 하나하나 / 미루나무로 줄지어 서고
사랑의 말들이 / 백일홍 꽃밭으로 펼쳐지는 길
설레임 때문에 /봉해지지 않는 /한 통의 편지가 되어 / 내가 뛰어가는 길
세상의 모든 슬픔 / 모든 기쁨을 / 다 끌어안을 수 있을까 /
작은 발로는 갈 수가 없어 / 넓은 날개를 달고 / 사랑을 나르는 /
편지 천사가 / 되고 싶네, 나는
■ 시와 함께 걷는 길 - 시 쓰기 도움말
내게 있어 시는 무엇인가?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우는 종소리 같고, 아침을 알리며 미소 짓는 한 송이 나팔꽃 같다. 시를 빚어내는 일은 늘 행복하지만 그만큼의 아픔을 수반한다. 마음 안에 잉태되었던 어떤 시상이 제 모습을 갖추고 한 편의 시로 탄생하기 위해서는 참으로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파를 다듬듯이 / 시를 만지다가 잠이 들었다 / 흙을 털고 뿌리를 도려내고 / 껍질을 벗기며 / 희디흰 알몸이 나올 때까지 / 눈을 감아도 피할 수 없었다 / 마약처럼 매운 냄새 코를 찌르고 / 잠든 머리맡에 / 꿈결 같이 놓인 시 한 단
황경식 시인의 시 <파를 다듬듯이>는 읽는 순간부터 마음에 와 닿았다. 이미지의 신선함, 문체의 간결함이 돋보이는 시를 읽으며 내 코를 찌르는 파 냄새, 마음을 아리게 하는 시 냄새.
누구나 시인이 되고 싶다는 가을, 그래서 가을엔 유난히 시인 지망생의 편지가 내게도 많이 날아드는 것일까. 시인의 꿈을 키우는 것은 좋지만 너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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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하게 시집부터 내고 싶어 하는 것, 써 보낸 시가 대개는 시가 아닌 산문에 더 가까우며 맞춤법이 많이 틀린 것 등은 적이 실망이 되고, 걱정이 된다. 그들을 위한 도움말을 생각하다가 우선 나 자신을 위해서도 몇 가지 실천 사항을 정리해 본다.
1. 쓰기 전에 먼저 오래오래 그리고 깊이 생각할 것
2. 다른 이들의 좋은 글을 많이 읽고 새겨 읽을 것
3. 우리말 공부를 충실히 할 것( 사물에 대해 묘사할 때는 백과사전이나 도 감을 보고 묘사를 바르게 할 수 있도록 힘쓸 것)
4. 떠오른 생각들은 일단 메모한 다음 두고두고 발전시켜 나갈 것
5. 늘 진실하고 겸허한 태도로 글을 쓰며 다른 이의 평가도 받아들이되 너무 매이지는 말 것
6. 어떤 글에서든 다른 이에 대한 섣부른 판단이나 어설픈 추측은 피할 것
“수녀님의 삶 자체가 한 편의 시지요?”하며 내게 악수를 청했던 어느 먼 나라 독자의 말처럼 나도 나의 삶 전체를 시가 되게 하고 싶다. 삶의 열매가 시이게, 시의 열매가 삶이게 하고 싶다. 윤동주 시인의 시에서처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라고 고백할 수 있는 예민함으로 깨어 있는 시인, 그러면서도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 겠다’며 자신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하고 아름다운 시인이 되고 싶다.
‘시는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감정만은 아니다. 시는 참으로 경험인 것이다. 시는 언제까지나 끈기 있게 기다리지 않고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작은 소망 >
내가 죽기 전 / 한 톨의 소금 같은 시를 써서
누군가의 마음을 / 하얗게 만들 수 있을까
한 톨의 시가 세상을 / 다 구원하진 못해도
사나운 눈길을 순하게 만드는 / 작은 기도는 될 수 있겠지
힘들 때 잠시 웃음을 찾는 / 작은 위로는 될 수 있겠지
이렇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 나는 행복하여
맛있는 소금 한 톨 찾는 중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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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흰구름 단상
비 온 뒤의 하늘. 하늘 위의 흰 구름, 구름이 아름다운 날은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다른 곳으로 잠시 시선을 둔 사이 어느 새 모양이 바뀌는 구름, 어린 시절, 그리했던 것처럼 잔디밭에 누워 흰 구름을 실컷 바라볼 수 있으면 좋겠다.
구름에 대한 노래, 구름에 대한 시, 구름에 대한 그림을 모으며 나는 구름이 좋아 수녀 이름도 구름(cloud)으로 하지 않았던가. 시인 헤세(Hesse)와 셸리(Shelley)의 ‘구름’, 성서에도 자주 나오는 구름의 상징성을 논문으로 쓰고 싶던 나의 갈망도 이젠 구름 속에 숨고 말았다. 푸른 하늘 위에 점점이 떠 있는 흰 구름처럼 내 안에 떠다니는 구름 같은 생각들을 종종 종이 위에 적어 둔다. 그래서 ‘흰 구름 단상’이라 붙여 놓고 내 생각들을 그려 넣으면 이것이 후에는 시와 수필의 소재가 되고 편지도 된다.
나이 들수록 새로운 사귐, 새로운 만남이 혹시 사랑으로 오더라도 왠지 두렵다. 누가 이것을 케케묵은 생각이라 비웃어도 어쩔 수 없다. 항아리 속의 오래된 장맛처럼, 낡은 일기장에 얹힌 세월의 향기처럼, 편안하고 담담하고 낯설지 않은 것이 나를 기쁘게 한다. 새 구두를 며칠 신다가도 이내 낡은 구두를 다시 찾아 신게 되고 어쩌다 식탁에서 자리가 모자라서 두리번거리다가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벗들을 얼른 찾아가게 된다.
‘시는 나와 같은 바보가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건 하느님 뿐’이라고 노래한 조이스 킬머의 <나무들>이라는 시가 어느 때보다도 생각나는 날이다. 사소한 일로 마음에 부대끼고 갈등 속에 있다가도 창밖의 나무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 진다. ‘뭘 그걸 가지고 그래?’하며 빙그레 웃는 것도 같고……. 나무의 모습을 닮은 성자들의 모습도 떠오르고.
오늘도 나는 내가 제일 싫어하는 표현, ‘신경질 난다’는 말을 혼잣말로 여러 번 하며 나 스스로 놀랐다. 갈수록 인내심도 없고 너그러움 보다는 옹졸함이, 이타심 보다는 이기심이 더 크게 자리를 잡아가니 큰일이다. 아무리 상황이 안 좋더라도 결코 막말을 해서는 안 되는데……, 용서, 관용, 인내, 이런 것들이 나이 들수록 더욱 어려워진다면 나는 분명 잘못 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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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경험한 작은 사랑이 세상에 나가 큰 사랑으로 넓어지는 것을 보고 싶었다. 그것이 결국은 내 사랑의 완성이 된다는 사실도 깨달았다’는 구절이 가장 기억에 남던 양귀자 님의 소설 <천년의 사랑>을 여행 중에 읽었다. 소설가들의 상상력은 항상 놀랍기만 하다.
나는 오늘 < 하관 > 이란 시 한편을 썼다.
삶의 의무를 다 끝낸 / 겸허한 마침표 하나가
네모난 상자에 누워 / 천천히 땅 밑으로 내려가네
이승에서 못다 한 이야기 / 못다 한 사랑 대신하라 이르며
영원히 눈 감은 우리 가운데의 한 사람
흙을 뿌리며 꽃을 던지며 / 울음을 삼키는 남은 이들 곁에
바람은 침묵하고 새들은 조용하네 / 더 깊이, 더 낮게 홀로 내려가야 하는
고독한 작별인사
흙빛의 차디찬 침묵 사이로 / 언뜻 스쳐 가는 우리 모두의 죽음
한평생 기도하며 살았기에 / 눈물도 성수(聖水)처럼 맑을 수 있던
노수녀(老修女)의 마지막 미소가 / 우리 가슴속에 하얀 구름으로 떠오르네
■ 사랑의 말은
누군가를 처음으로 사랑하기 시작할 땐 차고 넘치도록 많은 말을 하지만, 연륜과 깊이를 더해 갈수록 말은 차츰 줄어들고 조금은 물러나서 고독을 즐길 줄도 아는 하나의 섬이 된다. 인간끼리의 사랑뿐 아니라 신과의 사랑도 마찬가지임을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섬이 되더라도 가슴엔 늘 출렁거리는 파도가 멈추지 않기를 바란다. 메마름과 무감각을 초연한 것이나 거룩한 것으로 착각하며 살게 될까봐 두렵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가뭄을 경계해야 하리라.
아침엔 조금이나마 반가운 비, 참으로 오랜만에 맡아 보는 하늘 물 냄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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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팎으로 물이 귀한 세상에 살고 있는 요즘이다. 메마른 세상에 물이 귀하니 사람들 마음 안에도 사랑의 물이 고이질 못하고 인정과 연민이 줄어드는 것인가? 연일 보도되는 사랑 없음의 사건들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때로 마음이 아닌 머리로만 살고 있는 것 같은 나 자신과 이웃을 발견하는 일도 슬프다.
편지나 대화에서 ‘사랑하는 00에게’라고 표현하는 것조차 쉽지 않을 때가 있다. 듣기엔 아름답고 포근한 느낌을 주지만 실상 이 말엔 얼마나 큰 책임의 무게가 따르는가? 어머니의 내리사랑, 언니의 내리사랑이 지극함을 체험할 때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내리사랑을 더욱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수도원 안에서 내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할 대상이 날로 많아지지만 난 내리사랑은커녕 동료들과의 마주 사랑도 잘 못하고 있으니 언제 한번 제대로 사랑의 명수가 되는 기쁨을 누려볼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진정 자유로운 사람은 마음을 넓혀가는 사랑 안에서 남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과 언짢은 일로 서먹한 사이가 되어 누구도 선뜻 다가가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 때 먼저 용기를 내어 지난 일을 잊고 마주 웃을 수 있다면 그가 곧 승리자이고, 둘 사이에 막혔던 벽을 용서와 화해로 허물어뜨리는 큰 기쁨을 맛볼 수 있으리라. 이것이야말로 ‘여러분 안에 소금을 간직하고 서로 평화롭게 지내시오’하는 복음을 실천하는 길이다. 누구에게도 꽁한 마음을 품지 않도록 관용의 소금을 늘 지니고 살아야 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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