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아들에게 (2)

2017. 10. 26. 11:43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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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아들에게 (2)

■ 김별아 지음

◉ 무조건 적인 사랑의 이름

■ 받은 만큼 줄 수 있는 사랑

또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구나.

계획된 일정대로라면 이번 주에는 지난 주 시작한 사격에 이어 수류탄 훈련을 하겠네. 개인 화기와 소형 폭탄을 다루는 일인 만큼 긴장과 집중이 꼭 필요한 시간일 것 같아. 교관님들이 잘 지도하시고 다들 주의하고 조심하겠지만 너도 각별히 신경 써서 무사히 훈련 마치길 엄마는 간절히 빌 뿐이다.

아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쓸 때면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아. 그래서 엄마에겐 커다란 기쁨이자 위안이지만, 언제부터인가 마음 한구석에 아주 조그만, 그렇지만 분명한 가시 같은 게 따끔거리곤 해.

왠지 미안한 느낌, 그래서 불편한 느낌.

도대체 누구에게 왜 그런지 엄마의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니 두 가지 때문이더구나.

먼저 하나는 너처럼 매일 편지 쓰는 엄마를 갖지 못한 친구들에 대한 거야.

엄마가 바쁘거나 편지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라면 할 수 없지만, 돌아가셨거나 떨어져 살거나 어쨌든 엄마가 없는 경우 의도치 않았더라도 상처를 주지나 않을까 하는 것.

세상의 기준으로 결핍과 충족을 재단하는 것 자체가 오만일 수 있지만 분명 엄마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만만치 않으니까 말이야. 그런데 타인의 상처를 헤아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게 섣부른 동정을 하지 않는 일일지도 몰라. 난 그렇게 생각해. 엄마라면 일단 낳아주고 길러준 생물학적 엄마부터 떠올리지만 엄마라는 이름은 그것에 한정 지을 수 없는 훨씬 크고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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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두에게는 엄마가 필요해. 무조건 적 사랑의 이름이야. 마지막까지 나를 용서하고 기다려주는 사람의 이름이야.

그러니까 엄마는 엄마일 수도 있고, 아빠일 수도 있고, 할머니이거나 할아버지거나 삼촌이거나 선생님일 수도 있고, 목사님이나 스님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옆집 아주머니 아저씨일 수도 있지.

한 세대 전만해도 부모님 앞에서 아들딸을 안아보지도 못했다는 사람들이 꽤 있었어. 그건 유교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바로 효친(孝親)이니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보다 제 자식을 사랑하는 게 우선되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지.

<소학>에 나오는 맹자의 세속소위불효자오(世俗所謂不孝子五), 즉 세속에서 말하는 아른바 다섯 가지 불효 중에 세 번째가 바로 이 대목이란다.

‘호화재사처자(好貨財私妻子)하며 불고부모지양(不顧父母之養)이라.’

돈을 많이 벌어서 풍족하게 살면서도 자기 부모를 모른 체하고, 처자식에게는 돈을 아끼지 않고 쓰면서도 부모에게는 인색하게 군다면 그것 역시 큰 불효라고.

그런데 더 재미있는 건 말이야. 유교에서 자식보다 부모를 먼저 챙기라고 강조하며 윤리의 못을 쾅쾅 박았던 명분은 이런 거였어, 자식에 대한 애정은 부모에 대한 효심보다 본능의 정도가 훨씬 강하기 때문에, 앞의 것은 억제 시켜도 되지만 뒤의 것은 촉진 시켜야만 겨우 가치가 실현된다는 거야. 한마디로 말하면 내리사랑이 본능이니 강제라도 치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은, 엄마가 네게 쏟는 정성과 사랑은 결국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서 받은 것들의 물림이라는 거야. 내가 받은 만큼 네게 줄 수 있지. 내가 받았으니 네게 줄 수밖에 없지.

오늘은 기왕 문자를 쓴 김에 마지막 인사도 그리 전할 게.

노나라 재상 맹무백이 공자에게 효에 관해 물었어. 공자의 대답인즉 ‘부모유기질지우(父母唯其嫉之憂)’라. 부모는 오직 자식이 병들까 근심한다는 뜻.

아프지 마라. 다치지 마라. 반드시 명심, 명심하길. (7월 25일)

■ 다가올 미래를 기대하며

무더위에 오늘도 훈련 잘 받았니? 일기 예보로 확인한 임실의 최고 기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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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도! 더워서 여름이고 추워서 겨울이겠지만 올여름은 유난히 더위가 극성이니 아들의 고생이 크구나.

그래도 내일이면 중복이고 8월 7일이면 벌써 입추란다. 견디며 기다린 만큼 새로운 계절이 가까워진다.

가을에 자대 배치 받고, 이등병으로 겨울을 나서, 봄이 오면 팔자가 피기 시작한다는 7월 군번의 행복한 미래를 믿으며, 힘내라, 힘내자 혜준!

지난 주 화생방 훈련을 마치고 나서 쓴 네 번째 편지를 받았단다. ‘생각보다는 덜 힘들었고 생각보다 훨씬 더 빨리 모든 게 끝났다’는 표현에서 후련함과 함께 자신감이 느껴지는구나.

긴장한 탓에 약간은 버벅거렸지만 정화통을 쓸 때 생활관 전우가 도와줘서 다시 살아났다거나 16생활관 단체로 PX 이용권을 따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혼자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라도 함께하기에 이겨나갈 수 있는 것 같아.

가장 두려워하고 걱정했던 초반의 고비를 넘기고 나니 각개 전투가 진흙탕 놀이 같고 사격도 사격장 나들이가 될 것만 같다고……. 부디 그 패기를 훈련이 끝날 때까지 간직하길!

집에서 양말 한 짝 제 손으로 빨아본 적이 없는 아들이 매일 손빨래를 하고 있다는 대목에선 저절로 웃음이 터졌어, 엄마가 너무 온실 속의 화초로 키운 게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조금 서투르긴 하겠지만 스스로 앞가림을 하는 모습이 대견하기 이를 데 없구나.

제대한 다음에도 이런 독립심과 생활력이 유지되었으면 좋으련만, 앞서 경험한 엄마들의 증언으로는 제대하고 사흘만 지나면 다시 21개월 전의 내 아들로 다시 돌아온다는데……. 배신당할 때 배신당할지라도 지금은 아들을 믿어볼래!

‘생각보다 훨씬 더’ 군 생활을 잘하는 아들을 보면서 다행스럽고 자랑스러운 한편 얼마간의 반성도 된다. 지금까지 엄마의 마음속에 태산처럼 쌓여 있던 걱정이 어쩌면 아들을 믿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었지 않았나 하는 것.

대안 교육에서는 부모들에게 항상 아이들을 믿어라. 믿는 만큼 성장한다고 강조하지만 기실 엄마는 믿는 척만 했을 뿐 은밀히 불신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물론 그조차 너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 염려였다는 것 분명하지만.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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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야 비로소 아들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믿어주기를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군인누리 전역일 계산기’라는 재미있는 앱이 있어서 휴대폰에 깔았는데 그걸로 확인하니 오늘로 혜준이 내 아들이 된지 7,180일째 되는 날이란다. 그리고 네가 내 품으로 돌아올 날은 ……흐흠. 앞으로 며칠이 남았다고 알려줬는지는 너에게 알려주지 않으련다.(차마 알려 줄 수가 없다.)

그때까지 우리 존재 파이팅! (7월 26일)

■ 늙어 간다는 것

오늘은 중복, 식단을 확인해 보니 아들은 점심에 전복 삼계탕을 먹겠구나.

그래서 엄마도 운동 다녀오는 길에 굴다리 시장에서 닭 한 마리를 샀어. 마늘이랑 대추 많이 넣고 푹 끓여서 울 아들이랑 마주 앉아 먹는 듯 맛있게 먹어야지. 생각하면서 전복은 너무 비싸서 못 샀지만 대신 냉동실에 보관된 할머니가 보내주신 강릉 문어를 넣으면 딱 좋겠더라. 삼계탕에는 전복 말고도 낙지, 문어, 해삼 등 다양한 해산물이 어울린다네.

그렇게 집에 돌아오는 데 굴다리 올라오는 계단참에 종이박스를 쌓은 수레를 끌고 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이 보이네.

시장 한복판에서 욕을 먹고 삿대질을 당하면서까지 이악스레 폐지를 줍던 할머니의 얼굴은 뜻밖에 너무 얌전하고 평범하더라.

할머니의 지난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어떤 기쁨과 어떤 슬픔을 맛봤을까? 지금 그리고 앞으로 남아 있는 삶이란 어떤 의미일까?

생로병사의 순환과정에서 누구도 자유롭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원히 젊을 것처럼, 늙고 병들고 죽지 않을 것처럼 착각하고 살지. 어쩌면 푸시킨의 시구처럼 ‘삶이 그대를 속이기’ 전에 스스로를 속이며 사는지도 몰라.

엄마는 어제 신용카드를 잃어버렸어. 재빨리 분실신고를 해서 손해야 입지 않았지만 재발급이며 자동이체며 귀찮게 되었지.

지난번에도 용인에 다녀오려고 집을 나섰는데 알면서 또 실수를 했지. 아무 생각 없이 강남역이라고 적힌 것만 보고 노선도 확인하지 않은 채 버스를 잡아 탄 거야. 그런데 이 차가 빙글빙글 돌고 돌아가는 차라서 약속 시간에 30분이나 늦고 말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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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이상하기도 하지. 엄마도 하지 말아야 할 실수를 거듭하는 스스로가 한심할 때가 참 많아. 건망증이야 워낙에 있었지만 어떤 일에 대한 반응 속도가 부쩍 느려지고 동작도 굼떠졌지. 엄마도 나름 예민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이전보다 둔감해졌다는 사실을 예민하게 알아챘지.

난 잠시 눈을 붙인 줄만 알았는데 벌써 늙어 있었고

넌 항상 어린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벌써 어른이 다되었고.

할아버지가 네게 전해주신 양희은의 노래 <엄마가 딸에게>의 가사처럼 엄마도 비로소 그 갈림길에 서 있나 봐. 아직은 늙었다고 말하기 만망하지만 더 이상 젊었다고 우길 수 없는.

오랜만에 중사님이 올려주신 훈련 사진에 아들들이 개인 화기 기록사격을 하고 있네. 이번 주까지 소총과 수류탄 훈련을 끝내고 다음 주부터 각개 전투를 실시한다니, 덥고 짜증나더라도 좀 더 침착하고 신중하게 인내심을 발휘해. 무사히 훈련을 마치길 밀어. 가운 내라, 아들! (7월27일)

■ 엄마 손을 놓지 않던 어린아이

지난번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볼일이 있어 나갔는데, 물론 터미널이라서 그랬겠지만 온 사방에 군인들이 득시글거리는 거야. 갑자기 휴가와 외박이 넘쳐서 병사들이 부대 밖으로 풀려나온 건 아닐 테고. 엄마의 눈이 기가 막히게 군복 입은 청년들을 골라내고 있었던 거지.

훈련병 엄마에게는 말마따나 병장이 오대 장성 중 하나로 보이고, 권력의 최고봉이라는 꺾인 상병, 일명 상꺾은 태산같이 우러러 보이고, 일만 하는 일병이라지만 부럽기가 이를 데 없고, 포상인지 신병 휴가인지 모르지만 작대기 하나 달고 나온 이병조차 반갑고 애틋하네.

지하철 안에서도, 인구가 그리 많지 않은 이 작은 동네에서도 어쩌면 군복은 그리도 눈에 잘 띄는지 몰라. 병사를 발견하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누가 보면 이상한 아줌마라고 할 정도로 뚫어져라 쳐다보곤 해.

엄마는 그 병사들을 통해 아직 보지도 만져보지도 못한 아들의 군복과 베레모와 전투화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던 거야. 그러다 보면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새카맣게 탄 그 얼굴에 누군가의 얼굴이 겹치면서 울컥하고 말지. 아들아, 보고 싶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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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남은 훈련들이 집중력을 요하는 것들이라 생활관 내에서도 군기(軍氣)를 잡을 필요가 있을 거야. 긴장감을 유지하되 그 긴장에 사로잡히지는 않도록 마인드 컨트롤을 잘하렴.

경험자들 얘기로는 훈련소에서 몇 번이나 집에 가는 꿈을 꾸곤 하는데, 집에 도착해서 현관문만 열면 잠이 깨어버리는 바람에 마음이 아팠다더라.

그런데 너는 11년 전으로 돌아가 엄마와 함께 캐나다 밴쿠버 땅을 밟는 꿈을 꿨다니 꿈속에서 둘이 버스를 타고 환율을 계산하면서 여기 버스 요금은 왜 이리 비싸냐며 달리다 깼다는 대목을 읽고 그만 코끝이 찡해지고 말았네.

잊을 수 없지. 그때 넌 한시라도 엄마의 손을 놓칠까봐 꼭 잡고 있었던 어린아이였고, 낯선 땅, 낯선 언어, 낯선 얼굴과 눈빛의 사람들 속에서 우리는 잠시도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어쩌면 지금과 비슷한 상황과 감정이 네게 그 시간을 상기시켰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우리가 잘해낸 것처럼 지금도 넌 잘해낼 거야. 엄마는 아들을 믿어. 사랑해 혜준! (7월 28일)

◉ 네게 바라는 단 한가지

■ 네 스스로 사랑을 일구는 일

아들에겐 시간이 더디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매일 일기 쓰듯이 편지를 쓰다 보니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가는구나.

최소한 네가 훈련소에 있는 동안은 하루에 한 통씩 꼬박꼬박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물론 아들에게 엄마의 애정과 걱정을 전달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었지만, 또 하나의 숨겨진 이유가 있었지. 여자 친구 한 번 사귀어보지 못하고 군에 간 내 아들이 ‘곰신’(남자 친구를 군대에 보낸 여자)을 가진 동기들 사이에서 헐벗은 맨발(?)로 서 있는 게 안타까워서였어.

어쩌다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쓰는 일이 벅차다고 느껴질 때면 인터넷 카페 3소대 게시판에서 네 동기생들 몇몇의 근황을 확인해 봐. 그 친구들의 ‘곰신’은 하루에도 몇 통씩 위문편지이자 연애편지이자 그야말로 일기 같은 편지를 쓰지. 보고 싶다는 투정도 예쁘고, 나중에 휴가 나오면 무엇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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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하자는 계획도 예쁘고, 알콩달콩 청춘의 핑크빛은 마냥 곱기만 하구나!

그런데 여자 친구를 가진 아들을 군에 보낸 엄마들은 나름대로 고충이 있나봐.

부모들 사이에서 ‘통신보약’이라고 불리는 포상전화 순위에서 번번이 밀리고, 훈련소 수료식에 가서도 부모는 아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아들은 여자 친구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희비극이 벌어지곤 한다는구나.

면회는 물론 휴가를 나와서도 여자 친구하고만 붙어 다니고, 가족들은 찬밥신세니 차라리 여자 친구 없이 군대에 가는 것이 효자일지도 모른다는 게 선배 엄마들의 이야기지.

게다가 ‘일말 상초의 법칙’이라고 해서 일등병 말에서 상등병 초에 부대마다 넘쳐나는 이별의 물결에서 열외인 것도 다행이란다.

그래도 ‘곰신’이 군 생활에 주는 힘과 위로를 엄마가 대신할 수는 없겠지.

내 아들에게도 언젠가 연인이 생기겠지. 생겨야만 하지. 청춘에게 사랑은 의무라고 할 만해.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 선택이 아니라 꼭 해야만 하는 의무인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청춘이기 때문.

돈이 없어 연애도 결혼도 아이를 낳는 일까지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삼포세대’에게 사랑이란 그림의 떡이라고, 아니 하지 않고 싶어서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생기는 걸 어떻게 하냐고 항변하는 ‘초식남’과 ‘건어물녀’와 ‘철벽남녀’에게도 예외는 없지.

물론 사랑이 마냥 꽃길이요 꿈길은 아니야. 사랑은 때로 위험하고, 치명적인 손해를 입히고, 청춘의 한 때를 낭비하게 만들지.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 열심히 사랑해야 해.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해.

조금 무겁게 얘기 하자면 사랑은 분리된 자아. 독립된 존재를 요구하기 때문이야. 낯선 상대를 바라보며 설레는 것은 네가 더 이상 엄마의 품 안에서 보호받는 어린 아이가 아니라는 증거지.

또한 사랑은 사람에 대해 가장 깊고 자세히 배울 수 있는 수업이기도 하지. 사랑하는 동안 넌 어떤 한 사람의 마음을 얻고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이 세계를 정복하고 통치하는 일 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배우게 될 거야.

거의 모든 사람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는 사랑 때문에 후회해. 괜히 사랑해서 위험에 빠지고, 손해를 보고, 생을 낭비했다는 것을 후회하는 게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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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사랑하지 못했음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음을 후회하지.

엄마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여기서 끝. 이제부터는 아들이 아닌 성숙한 남자로서 네 스스로 네 사랑을 일구는 일만 남았지. 물론 그때까지는, 엄마가 기꺼이 네 맨발의 청춘의 벗이 되어줄게. (7월 16일)

■ 인생은 수정 계단이 아니지만

아들아, 내 말 좀 들어보렴 / 내 인생은 수정으로 만든 계단이 아니었다. /

거기엔 압정도 널려 있고 / 나무 가시들과 / 부러진 널빤지 조각들, /

카펫이 깔리지 않은 곳도 많은 / 맨바닥이었단다. / 그렇지만 쉬지 않고 / 열심히 올라왔다. / 층계참에 다다르면 / 모퉁이 돌아가며 /

때로는 불도 없이 깜깜한 / 어둠 속을 갔다. /

그러니 얘야, 절대 돌아서지 말아라. / 사는 게 좀 어렵다고 /

층계에 주저앉지 말아라. / 여기서 넘어지지 말아라. /

얘야, 난 지금도 가고 있단다. / 아직도 올라가고 있단다. /

내 인생은 수정으로 만든 계단이 아니었는데도.

- 랭스턴 휴즈(Langston Hughes), <어머니가 아들에게> 전문

‘할렘(뉴욕 북부의 인구 밀집지역 흑인 거주 상업지역)의 셰익스피어’라는 별명을 가진 미국 작가 랭스턴 휴즈의 시를 읽는다.

그는 남성 작가이기에 이 시의 화자라기보다 화자인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아들 입장이라고 할 수 있겠지. 아니, 랭스턴의 엄마 캐리는 아버지가 떠난 집안의 가장으로 생계를 꾸리기에 바빠 아이를 외할머니에게 맡겼으니 시 속의 엄마는 실질적으로 랭스턴을 기른 매리 할머니라고 할 수도 있겠구나.

전생의 인연설을 믿는 이가 말하길 엄마와 딸이 전생에 친구였다면 엄마와 아들은 전생의 연인이었다네. 오래된 이론이지만 프로이트의 성 심리학에서는 3세에서 5세까지의 남근기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이성 부모에 대한 성적 접촉 욕구나 동성 부모에 대한 경쟁의식을 갖는다고 설명하고.

가끔은 지나치게 ‘상남자’로 커버린 아들이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게 속상해 딸을 가졌으면 좋았을 거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투덜대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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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지만 그게 원망이나 후회가 될 수는 없어. 영화제목처럼 너는 내 운명,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하나뿐인 내 아가니까.

자신의 삶을 잃으면 누군가의 삶에 반드시 의지하게 되어 있어. 널 사랑하는 만큼 엄마는 네게 짐이 되고 싶지 않단다. 엄마 또한 수정 계단을 오르는 삶을 살지 못했지만 적어도 내 두 발로 단단히 버텨 서서 한 칸 한 칸 올라왔으니.

사랑하는 내 아들, 너 역시 뒤돌아서지 마라. 주저앉지 마라. 내일부터 각개 전투와 행군, 불덩이처럼 달아오른 땅을 기고 밟고 달리게 되겠구나.

부디 스스로를 믿고 스스로를 돌보며 이 불의 터널을 무사히 통과하길. 엄마는 간절히 바란다. (7월 31일)

■ 종합 각개 전투 훈련

드디어 열흘이다. 꼬박 열흘만 지나면 아들의 얼굴을 볼 수 있다! 많이 탔을까? 말랐을까? 살이 쪘을까? 편지에서처럼 엄마를 ‘어머니’라고 부를까?

그토록 행복한 만남을 가지려면 이번 주도 잘 보내야겠지. 아마도 이번 주 훈련이 고비이자 정점일 듯하구나.

<훈련병의 품격>을 몇 번씩 확인해 보았어, 아마 4주차인 오늘부터 네가 할 숙영지 훈련과 종합 각개훈련이 동시에 진행되지 않을까 싶어.

생활관에서 벗어나 야외 취침을 하는 숙영지는 산속이라서 잠자리가 추워 고생하는 일이 많다는데, 삼복더위에 훈련을 받으니 그거 하나는 걱정이 덜되는구나. 그래, 모든 일이 좋기만 한 것도 아니고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란다. 호사다마와 새옹지마가 다른 듯 같은 뜻일 게야.

종합 각개 훈련은 훈련병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훈련 중 하나라는데, 어떤 신령한 존재의 옷자락에라도 매달려 빌어야겠다.

철조망과 배수관과 외나무다리 따위의 장애물도, 낮은 포복과 응용포복과 뒤로 누워 포복의 쓰라림도, 고지를 향해 “돌격 앞으로!”를 외치며 45도 산비탈을 달려 오르는 숨 가쁨도 거뜬히 이겨낼 수 있도록, 부디 아들의 몸과 마음에 힘을 주십사!

언제까지고 엄마가 보호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제는 연날리기하듯 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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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 바람에 날려 보내야 할 때가 왔다는 것 알면서도. 이토록 어리석게 품 안의 기억에 붙매여 사는 구나.

아들은 엄마의 소유물이 아니지. 분명 가장 귀한 보물이지만 나만의 것일 수 없지. 머리로 알면서도 가슴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바로 엄마의 모순이구나

혜준, 기운 내라. 조금만 참고 힘을 내서 고비를 넘자! 조금만 더!(8월 1일)

■ 다정이 지나치면 병이 되듯이

오늘도…… 더웠지? 많이 힘들었니?

어제 네 편지를 받고 속이 상해서 잠 못 들고 뒤척거리다가 새벽녘에야 잠깐 눈을 붙였단다. 잠결에도 무더위에 시달리는 아들 걱정, 매도 빨리 맞는 편이 낫다고 입대 시기를 서둘렀던 데 대한 후회, 밑도 끝도 없는 분노와 슬픔에 시달렸네.

그 와중에 유일한 위안은 이제 수료식 날까지 아홉 밤밖에 남지 않았다는 고야. 시간은 가고 이 찌는 듯한 더위도 시간을 따라 사라질 테지. 시간은 우리 편이야!

게다가 선배 엄마들의 말씀으로 그날은 세상에 태어난 후로 가장 효자가 된 아들을 만나게 된다니, 그 전무후무한 순간이 너무도 기다려지는구나.

평생 효도는 세 살까지 다 한다는 세간의 말처럼 어린 날의 너는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사랑옵았지. 아니 이후로도 넌 엄마와 애착관계가 좋고 다른 형제도 없어서 사춘기가 올 때까지는 미운 짓이라곤 별로 한 적이 없어.

*사랑옵다 : 사랑하고 싶도록 귀여운 데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우리가 사이좋은 모자라 해도 영원히 네가 내 아가로 품 안의 자식일 수는 없었지. 너는 성장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알에서 깨어 나오는 성장통을 겪어야 했으니까.

사춘기에 접어들어 자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한 넌 엄마에게도 문득문득 낯설었어.

잔소리나 꾸지람도 더 이상 고분고분 듣지 않았지. 네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걸어 잠그고. 때로는 주먹을 불끈 쥐고 눈을 홉뜬 채 엄마에 맞서 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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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했지. 상황이 악화되었을 때는 엄마가 얼마나 약한지, 자기가 얼마나 강한지도 모르는 아들과 몸싸움까지 벌였지.

잔소리가 엄마의 숙명이라면, 배신은 자식의 숙명이지. 자식은 부모에게 영원한 숙제일 수밖에 없고, 부모는 자식에게 영원한 허들일 수밖에 없지. 노력은 했지만, 나로서는 정말 애를 썼지만, 엄마도 항상 좋은 엄마는 아니었다는 걸 알아.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라는 시조 구절처럼 실패의 원인은 명확했지. 그 또한 사랑 때문, 다정이 지나치면 병이 되듯이 너무 사랑한 죄로 너에게 욕심을 부렸어.

이 험한 세상을 살아나가기 위해서는 강해져야만 하는 데 내 자식은 너무도 약해보였어. 그래서 다그쳤어.

엄마도 너를 낳아 길러보니 비로소 알겠더라.

잘난 부모든 못난 부모든,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자식은 마지막 욕망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 욕망이 배반했을 때 모든 희망의 밫이 꺼지는 것만 같고, 가슴이 찢어지고, 불길 같은 분노가 치솟는다는 것을, 마지막 욕망은 인간을 천상까지 끌어 올렸다 밑바닥까지 떨어뜨리고, 그 밑바닥을 낱낱이 펼쳐 보이게 만들지. 인간은 그다지도 약하고 어리석은 존재야.

그래도 다행이야. 강한 엄마에게 눌려 기를 못 펴서 완전히 마마보이거나 찌질이가 될 수도 있었는데 맞부딪혀 싸울 만큼 충분히 강한 (그리고 적당히 못된) 아들이 되어줘서. 엄마가 할 말은 언제나 이것뿐이야. 고마워, 미안해, 그리고 사랑해. (8월 2일)

■ 아름다운 남자, 진짜 남자로 살아가기를

엄마가 언젠가 말했지. 네가 느끼는 기쁨과 슬픔의 감정을 나보다 더 깊고 무겁게 느끼는 사람이 바로 엄마라고. 네가 원하던 무언가를 이뤄내고 기뻐할 때 엄마는 네가 어떤 성취를 했을 때보다 기뻤어. 네가 실의에 빠졌을 때, 괴로워하고 외로워할 때, 엄마는 모조리 내색할 순 없었지만 오랫동안 더 아프게 앓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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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피와 살과 뼈를 덜어 나온 분신이자 내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은 존재였으니.

엄마는 네 첫 번째 사람, 그리고 너는 엄마의 마지막 사람.

네가 세상에 태어나 처음만난 사람이 엄마이듯, 너는 엄마가 세상을 떠날 때 마지막으로 만날 사람일 테지(그랬으면 좋겠네).

그런 인연의 신비에 대해 불교 설화인 <삼세인과경(三世因 果經)>에서는 이렇게 말하더구나.

‘금생에 부모와 함께 사는 사람은 전생에 고독한 사람을 잘 모신 공덕이요. 금생에 자손을 잘 둔 사람은 전생에 갇힌 새나 짐승을 살려준 공덕이라고.’

이 말이 현세를 누리고 있는 복록을 과시하거나 박복함은 책망하라는 뜻은 아니지. 인연에 만족한다면 이번 생의 행운에 감사하고 만족하지 못한다면 다음 생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닦으라는 뜻일 게야. 고독을 돌보고 미물까지도 연민으로 살피기를.

공감과 소통, 역지사지와 화이부동(和而不同), 누구나 쓰지만 누구도 쉽게 실행하기 어려운 말을 다시 곱씹으며. 엄마는 내 아들이 아름다운 남자, 진짜 남자로 살길 바란다.(8월 3일)

◉ 더운 하늘 아래 마지막 행군

■ 마지막 훈련까지 마치다

아마도 무더위 때문에 훈련 일정이나 상황이 얼마간 조정되었나 보다. 낮에 진행하기에 무리인 행군과 각개 전투도 야간에 진행하는 걸로 융통성을 발휘하고 야간 훈련이라도 쉽지만은 않았겠지만 자외선에 한 두 시간 노출되면 화상까지 입는 요즘 날씨에 적어도 열사병이나 탈진 실신 같은 피해는 입지 않겠지.

오늘 서울 최고 기온은 무려 36도! 체온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더위에 근심이 태산이었는데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다행스럽고. 얼마나 기쁘던지!

입영식 때 부사단장님께서 부모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교육하고 따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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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육으로 잘 보살필 테니 걱정 말라 하시더니 그 약속을 지켜주신 모양이다. 또 한 번 눈물이 찔끔 나오더구나.

다음 주 초쯤 마지막으로 행군 행군을 할 줄 알고 넋을 놓고 있다가 갑자기 끝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좀 멍하긴 하네. 그때쯤 우리가 함께 했던 백두대간 종주의 추억을 되새기며 응원 메시지를 보내야지 생각하고 있었거든.

2010년 3월 13일부터 2011년 10월 22일까지, 네가 중학교 2~3학년이었던 시기, 우리는 이우학교 백두대간 6기 종주팀의 일원으로 지리산 천왕봉에서 강원도 진부령까지 백두대간 남한 구간을 완주했지. 총 산행 횟수 39회, 1박 2일 산행 7회를 포함한 46일 동안 산을 탔던 거야. 총 산행 거리는 632킬로미터의 마루금과 구간 외 진입로와 탈출로 118킬로미터를 포함한 약 750킬로미터. 하루 평균 16,3킬로미터를 걸었지.

훈련소에서 하는 행군은 20킬로미터라지? 야간이라서 조금은 더 지루했을지도 있겠다. 백두대간을 탈 때 여름이면 우리도 더위를 피해 새벽 3시부터 산행을 시작했으니 아주 낯선 일은 아니었을 거야. 물론 20킬로미터가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넌 한계령에서 대청봉을 거쳐 공룡 능선을 넘어 설악동까지 무려 23킬로미터의 설악산 구간을 15시간 동안 주파한 적도 있잖니?

기억나니? 처음에는 두려웠고, 언제나 힘겨웠고, 시시때때로 괴로웠지만 그래도 너와 나는 종주를 함께한 100여 명의 팀원 중 유일하게 ‘개근 완주한’ 4명 중의 2명이었지. 무려 백두대간을 완주하기 전까지‘평지형 인간’이었던 엄마가 산에 대한 공포를 떨쳐낸 것도 큰일이었지만, 어린 아이 같았던 네가 건강한 소년으로 몸과 마음이 쑥 자라난 것도 대단한 일이었어. 정말 우리 멋진 한 페이지였지!

어쩌면 지혜로운 중사님은 엄마에게 뒤따라가는 길의 즐거움을 다시금 상기 시켜 주시려 했는지도 몰라. 네 두 다리로 뚜벅뚜벅, 네 온 몸으로 밀어 헤치며 지나간 길을 엄마는 흐뭇하게 바라보네.

훈련 일정이 모두 끝났으니 이제 수료식 준비만 남은거지? 좀 진부한 관용구지만 부디 유종의 미를 거두길. 엄마는 정말 네가 사랑스럽고 자랑스럽다.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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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늦게 도착한 성적표

뜨겁고 뜨거운 날. 그래도 이번 주 일정이 오늘로 끝나면 다음 주에 드디어 널 만날 수 있구나! 한 달이 한없이 더디고도 문득 빠르게 낯선 시간처럼 지났다. 훈련소에서 보내는 마지막 주말이니 앞으로 뿔뿔이 흩어져 다시 볼 기약 없는 생활관 동기들과 좋은 시간 가지렴, 그야말로 동고동락, 힘든 와중에도 즐거웠던 일들이 그들과 함께였기에 가능하지 않았겠니?

네가 보낸 일곱 번째 편지와 함께 2학년 2학기 성적표가 도착했단다.

본격적으로 전공에 진입해 처음으로 치른 시험이었으니 만족스럽든 불만족스럽든 앞으로 네 진로를 고민하는 데 잣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앞으로 적어도 2년 4개월 동안은 시험 볼 일이 없겠다고, 즐거운지 허탈한 지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으로 말하던 네 모습이 떠오르는구나.

성적이 좋든 나쁘든 누구나 시험 앞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지. 이른바 명문 학군으로 소문난 어느 동네는 중고등학교 시험 기간이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차 안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엄마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더라. 아이들과 한 바탕 싸웠거나 싸우지 않으려고 집을 빠져나온 엄마들이 식구들 밥을 챙겨야 하니 멀리로도 못가고 운전석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거야. 그야말로 웃픈(웃기고도 슬픈)도시 괴담이지.

그런데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끝날 줄 알았던 시험과 성적에 대한 압박이 대학에서도 그대로 이어지니, 이게 웬일인지?

네 동문 선배이기도 한 엄마는 27년 만에 완전히 달라진 대학의 풍경에 꽤 많이 놀랐어. 학점과 아무런 상관없는 인생을 산 나의 개인적 경험일 뿐인지도 모르지만, 우리 때는 친구들끼리 학점 이야기를 심각하게 주고받거나 학점 때문에 진로까지 바꾼다는 건 상상할 수 없었거든.

모두들 학점 때문에 전전긍긍하더구나 더구나 로스쿨, 의전, 대학원, 교환학생, 유학, 취업 전부에 학점은 고고익선(高高翊善 )이라 높으면 높을수록 좋다니, 엄연한 상대평가와 제한된 제수강 규칙 속에서 한순간도 긴장을 늦추지 못한 채 무한 경쟁하는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갈 아들을 생각하면 고민이 점점 커져. 빌딩을 물려줄 수도 없고 기업이 있는 것도 아닌데 아들에게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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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어떻게 살라고 조언할 수 있을까? 궁리궁리한 끝에 엄마가 내린 결론은 하나야.

넌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렴.

네 방식대로, 네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아가렴.

여전히 그게 무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면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한 구절을 조언 삼아 좀 더 진지하게 고민해보렴.

누구든지 한 가지의 능력은 가지고 있다. 그 하나의 능력은 오직 그만의 것이다.

그것을 일찌감치 깨닫고 충분히 살려 성공하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한 가지 능력 즉 자신의 본심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자신의 힘만으로 그 능력을 찾아내는 사람도 있고, 세상의 반응을 살피며 자신의 본성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모색하는 사람도 있다. 틀림없는 사실은 어떠한 경우라도 주눅 들지 않고 씩씩하고 과감하게 그리고 꾸준히 도전해 나가면 언젠가는 자신만이 가진 한 가지 능력을 반드시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성적표 한 장에 너무 말이 길었구나. 언제나 그랬듯이 엄마는 네가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공부의 즐거움을 아는 게 더 기쁘다. 물론 잿밥에 대한 욕심을 숨길 수는 없겠지만 종교 활동을 다양하게 하며 새로운 철학과 문화를 접한다거나 그 고된 훈련 중에 진중 문고에서 세 번째 책을 빌렸다는 소식에 아주 흐뭇했단다. 나이를 얼마나 먹든 어떤 직업을 갖든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고 설렘으로 가슴이 뛰는 삶이야말로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일 거야.

어쨌거나 하나만 잊지 마. 엄마는 오직 네가 행복하기만을 바라. 그게 전부야.( 8월 5일)

■ 어머니들에게 자식이란

마지막 주말 토요일엔 무얼 했니? 오늘도 수료식 준비를 했을까? 종합 평가는 안 끝났으려나?

엄마가 하나하나 붙여 놓은 번호로 이 편지는 34번인데. 지금껏 서른 네 통의 편지를 아들은 무엇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엄마의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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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네게 힘이 되었는지. 네 고단함을 조금이라도 위로할 수 있었는지. 때때로 거칠고 험한 세상에서 글이라는 게, 문학이라는 게 너무 무기력하다고 느끼는 엄마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구나.

엄마가 요리 레시피를 주로 얻는 인터넷 사이트 자유 게시판에 언젠가 이런 글이 올라왔어.

“어머니들에게 자식이란?”

거기 댓글들이 공감도 가고 아프기도 하고 찡하기도 해서 인상적인 몇 가지를 갈무리해 두었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이 세상에 내놨단 이유로 그냥 미안한 존재.

기쁨도 주고 고통도 주지만, 나하고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람.

영원한 짝사랑의 존재.

“사랑하는 것은 / 사랑을 받느니 보다 / 행복하나니라”는 청마 유치환의 시처럼 사랑할 수 있기에 행복하더라.

세상에 첫 눈을 뜬 그 여린 핏덩이는 내 몸을 빌렸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전능한 존재처럼 의지하고 있었던 걸! 두렵고 벅찼지만 내가 아니라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었어. 그렇다고 믿었지. 비록 그것이 엄마만의 짝사랑에 불과할지언정 그래서 눈곱만큼의 의심도 없는 사랑을 줄 수 있었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었지. 너로 인해 언제 어디서도 맛보지 못했던 행복을 느꼈어. 너를 보면 저절로 웃음이 나오고 떠올리기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졌어. 아무리 힘든 일을 해도 너를 위해서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고, 해내야만 했지.

하지만 기쁨만큼이나 고통이, 사랑만큼이나 미움도 깊어서 우린 때로 애증의 감정에 시달리기도 했어.

그렇게 20년이 흘렀어. 일장춘몽(一場春夢) 설니홍조(雪泥鴻爪) 눈 위의 기러기 발톱자국, 눈 녹은 후 사라지는 자국, 인생은 흔적도 없이 사라짐을 일컫는 망). 고색창연한 옛말로만 들었더니 정말 한 바탕 봄꿈처럼, 눈 위에 난 기러기 발자국처럼 거짓말 같은 시간이 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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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삶이 너무 가혹했다고 생각했던 적도 있었고 무료하고 무의미하다 느껴질 때도 있었지만, 아플 수 없었어. 쓰러질 수 없었어. 나는 엄마니까. 널 끝까지 지켜야 할 엄마니까.

아들이 훈련소에서 읽을 마지막 편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좀 비장해졌네. 오글거려도 참아주렴. 사실 일상 속에서 언제나 이런 생각을 곱씹으며 살지는 않지. 잔소리와 불퉁거림으로 밖에 표현할 수 없었던 엄마와 아들의 사랑을 엄마가 세상의 다른 엄마들을 대신해서 나열해 보았어.

그러고 보니 말로는 차마 할 수 없는 걸 그나마 글로는 표현할 수 있구나. 그것 참 다행이네. (8월 6일)

◉ 수료식을 마치고

■ 건강하지 않은 특식

259번 훈련병으로 불릴 날도 사흘밖에 안 남았다. 사흘 후면 훈련병 딱지를 떼고 노래(이등병 편지)의 주인공인, 풀 한 포기 친구 얼굴 모든 것이 새로운 바로 그 이병이 되겠네.

넌 다행히 감기는 걸리지 않았다고 했지만 앞으로 후반기 교육까지 받으려면 체력을 잘 관리해야 해. 어떤 아들은 신병 교육대에서 긴장하고 무리했던지 자대 배치를 받은 후 병이 나서 국군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더라. 규칙적인 생활이야 잘 하고 있을 테고 적절한 운동도 하지 않을 수 없을 테니 잘 먹고 잘 자며 스스로의 일상을 돌보는 일에만 충실하면 될 것 같아.

하나같이 소중한 아들들. 다시 엄마 품에 돌아올 때까지 부디 아프지 말길.

어제 오후엔 종교 활동 다녀오는 길에 충경마트에 들렸니? 나름대로 훈련소 최고참(?)이라고 PX를 이용할 기회를 얻은 모양이더구나. 14시 56분에 3080원, 15시 05분에 3200원 국군복지단 이름으로 결재된 내용이 대체 뭘까 싶어서 한참동안 문자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네.

무슨 간식거리를 사먹었나? 뭔가 필요한 물건이 있었나? 며칠 전엔 600원을 결재했더니. 혹시 아이스크림이라도 하나 사 먹을 기회를 얻었나?

나라사랑 카드가 결제될 때마다 엄마 전화로 승인 문자가 오도록 신청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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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고 이렇게나마 함께 있는 기분을 느끼며 미소 짓는단다. 6백원짜리, 3천 원짜리 귀한 행복이야.

내 아들 어려서부터 장난감 가게에서 새것을 사달라고 떼 한 번 쓰지 않고, 슈퍼마켓에서 간식거리를 살 때도 유통기한이 임박한 할인 상품이나 가격을 따져 세일 상품을 고르던 알뜰한 아들, 학교를 다닐 때도 용돈이 부족하냐고 물으면 언제나 남아 있다고, 필요하면 얘기한다 했지만 한 번도 더 달라고 조른 적 없는 네가 한편으론 대견하고 한편으론 안쓰러웠지. 글쓰기 노동으로 밥을 먹고 사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서 스스로 일찍 철이 들어버린 것 같아 엄마로서는 왠지 미안하기도 했고.

오늘부터 아들은 수료식을 준비하느라 군가 부르고 팔다리 각 맞추고 입장했다 퇴장했다 분주하고 바쁘겠지. 엄마도 수료식 준비 삼아 짐을 싸기 시작했단다.

부대 밖으로 나오는 면회 외출 시간은 4시간에서 4시간 반 남짓? 그래도 그 사이에 더위에 지친 아들의 입맛을 돋워줄 맛난 음식을 먹이고 싶어서 군필자들에게 조언을 구했단다. 그랬더니 그 형님들이 이렇게 답해주더구나.

“자극적이고 불균형하고 기름진 음식이면 다 좋아요!”

“음식보다 무조건 시원한 탄산음료가 마시고 싶었어요. 훈련소 기간 땐 식중독 걸린다고 끓인 물만 마실 수 있었거든요. 더운 여름에 너무 힘들어서 진짜 콜라를 영혼과도 바꿀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이 말로 유추하건데, 그동안 끓인 물만 안전하게 먹었고, 자극 없이 영양소가 고루 갖춰진 담백한 음식을 먹었으렷다! 어떤 엄마에게 아들을 입대 시켰을 때의 심정을 물었더니 훈련 기간에 인스턴트 음식을 못먹는 게 좋더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더니 그 말이 사실은 사실이었던가 보다.

내 아들, 내가 지금까지 먹여 키운 아들을 살뜰하게 돌봐 먹여주신 모든 분들께 고마운 마음뿐이다. 보시 중에서도 남에게 밥을 차려 먹이는 식보시가 제일이라지 않더냐!

삶을 지탱하는 먹거리가 있는 곳에 먹이고픈 사랑이 있고. 더 못 먹인 서운함이 있고, 끝없는 허기가 있고, 공복의 먹먹함이 있구나. 그동안 건강한 밥을 꼬박꼬박 먹었으니 엄마는 네가 좋아할 만한 불건강한 밥을 특식으로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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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련다. 끓여 식힌 물이 안전한 건 분명하지만 때로 탄산음료의 톡 쏘는 자극도 필요할지니. 코끝을 찡긋 거리는 널 보고 싶다. 아들아! (8월 8일)

■ 1퍼센트의 아이들

오늘은 칠월 칠석, 수능 D-100일, 그리고 아들 만나기 이틀 전날이다!

임실읍에서도 견우와 직녀가 만났으려나? 과천의 견우와 직녀는 지금 막 만나는 중인가 보다. 들끓던 하늘이 불현듯 어두워지더니 반가운 비님이 내리기 시작하네. 어, 오랜만에 만난 견우와 직녀의 애정 표현이 너무 격렬한 건가? 갑자기 폭우가 쏟아진다.

엄마는 새벽 5시에 일어나 6시 반 지하철을 타고 종로에 가서 7시 50분부터 1시간 동안 조찬 강연을 했단다.

오늘 강연한 K사는 평균 연봉이 한국 1위로 이른바 ‘꿈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회사인데, 사원들이 한여름에도 하얀 긴팔 외이셔츠를 입고 목 끝까지 단추를 모조리 채운 모습이 인상적이더구나.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얼마나 많은 낯선 세계들이 존재하는가? 빈부와 귀천, 행불행을 뛰어넘어 그 속에서 누군가는 오늘도 자기 앞의 생,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기 위해 분투하고 있겠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더 많이 잡아먹는다고도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벌레가 새에게 더 많이 잡아먹힌다고도 하지만. 어쨌거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하루가 엄청나게 긴 것만은 사실이구나.

본격적으로 가방을 꾸리기 시작했어. 내일 낮 1시 45분에 수원역에서 무궁화호를 타고 임실역으로 곧장 갈 거야.

수료식에 가족이 오지 못하는 훈련병은 부대에서 미리 파악해서 훈련소 안에서 삼겹살 파티를 하거나 따로 밖으로 데리고 나가 설렁탕 같은 걸 사 먹이고 돌아온다지만 가족이 오지 못하는 그 1프로의 아들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구나. 가족 아니고는 절대 보증서도 못 쓴다니 어쩔 방법이 없으나 그 친구들을 생각하면 우리의 그리움과 만남의 행복조차 미안하게 느껴지네.

부디 세상의 아이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두가 골고루 사랑받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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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면 좋겠다. 그것이 부질없는 헛꿈일지라도, 내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을 연민하네. 부디 제발.

아들아, 엄마 이제 간다! (8월 9일)

■ 35일 만에 다시 탄 무궁화호

너를 남겨두고 돌아오며 탔던 무궁화호를 35일 만에 다시 탔다. 그때는 상행선, 이번엔 하행선, 좌석에 앉아 노트북을 펴 들고 그동안 썼던 서른 일곱 통의 편지를 훑어보노라니 기묘한 기분이 드네,

실로 20년 만에 처음이지, 아들이 엄마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홀로 모든 걸 꾸려가는 일이. 기숙사에 있어도 외국으로 여행을 가도 우리는 거의 매일 연락을 하며 일상을 나눴고, 엄마는 충실한 조력자로서(현실에선 폭풍 잔소리꾼) 네 곁을 지켰으니까.

너는 또 다른 의미에서 그랬을 테지만 처음에 엄마는 거의 패닉 상태나 다름없었지. 뭔가 해야 할 것 같은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리움과 안타까움만큼이나 두려움과 무력감이 컸지.

지금은 35일 전과 얼마간 다르구나. 그동안 매일 너를 향해 편지를 쓰며. 네게서 여덟 통의 편지를 받으며, 우리는 비로소 따로 또 같이 적절한 거리에서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것 같아.

너무 오랫동안 너무 가까이에 다붙어 있어서 서로에게 너무 많이 요구하고 의존하고 기대하기에 실망했었나 봐. 믿었지만. 믿는다고 말을 했지만, 어쩌면 엄마의 믿음 보다 훨씬 더 새로운 생활에 잘 적응하며 스스로 난관을 헤쳐 나가는 아들을 보면서 엄마는 숨겨두었던 일말의 의심을 반성했지. 이제야말로 연줄을 길고 느슨하게 풀어 아들을 하늘로 훨훨 날려 보낼 때가 온 것 같구나.

엄마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성애는 본능이라기보다 습성 같아. 낳은 정 보다는 기른 정이 성의 분별을 넘어선 모성을 일깨우는 것 같아.

희생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당위에 등 떠밀려 누군가를 (혹은 이미지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희생하고 헌신할 수밖에 없는 지난하고 혹독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발아하는, 잿더미 속에서 움트는 새싹처럼 더욱 굳세고 끈질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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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은 짐이면서 힘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지만, 짐이었다기보다 힘이었던 순간이 훨씬 많았지.

너와 함께 무궁한 추억을. 이번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가져갈 추억을 만들 수 있어서 감사했단다.

혜준, 엄마는 네 엄마여서 정말 행복해.

사랑은 흐르는 거야. 위에서 아래로, 받은 것에서 주는 걸로, 마음이 고이고 넘치는 대로 엄마는 네게 아무 것도 돌려받지 않아도 좋아. 물론 받으면 고맙기야 하겠지만 그걸 내가 준 보상이라고 생각지는 않을래. 엄마도 엄마가 좋아서 준 것이니 너도 네가 주고픈 만큼만 주면 돼.

5주 동안 힘들었지만 모두 지나고 나니 지나온 산이지. 우리가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깨우친 바대로, 넘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막막하고 오르는 동안은 힘들지만 넘어온 다음은 아름답지. 지나온 산이기에 비로소 아름답지.

그 힘으로 다음 봉우리도 오를 수 있을 거야. 20 개월이라는 만만치 않은 시간의 산줄기도 굽이굽이 해쳐 나갈 수 있을 거야.

아들, 부디 너 자신을 믿고 자중자애하길!

2016년의 역사적이고 기록적이고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가장 뜨거운 여름을 가장 뜨겁게 보낸 아들의 수료식이 바로 내일!

오늘 밤은 부대와 지척인 숙소에서 잘 테니 아들과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별을 보겠구나. 앞으로 19시간 후면 아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35일 전과는 또 다른 빛깔의 눈물이 목울대에 차오른다.

만나면 꼭 안아줘야지. 까맣게 탄 뺨을 많이 쓸어줘야지. 어깨도 팔다리도 주물러줘야지. 시간아. 빨리 가라! (8월 10일)

■ 259번 서혜준 훈련병의 엄마입니다.

말 그대로 꿈같은 하루였구나. 그 아련한 꿈 속에서 나는 너를 만났고, 다시 헤어졌네.

과연 시작과 끝, 만남과 이별은 하나인 걸까? 수료식이 종료됨과 동시에 후반기 교육이 시작되고, 38일 만에 만난 아들과 부둥켜안자마자 금세 돌아서 손을 흔들며 멀어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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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친구, 대한 육군, 정예신병!”

사흘 꼬박 연습했다는 일사불란한 대오로 아들들이 행사장에 들어섰어. 물론 사전에 병력 배치도를 안내 받긴 했지만 245개의 새카만 머리통들, 그동안 더욱 새카맣게 타버린 얼굴들 사이에서 엄마는 너무 빨리 너를 발견해냈지.

국민의례와, 성적이 우수한 훈련병들에 대한 시상과 한국전쟁 참전 용사 할아버지가 태극기와 견장을 수여하는 의식이 끝나고 훈련병 대표가 소감을 발표한 뒤 드디어 엄마가 네 앞에 섰네.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들들 앞에서 애태우던 엄마들을 대표해 소감문을 발표하기 위해.

“안녕하세요 저는 3중대 3소대 259번 서혜준 훈련병의 엄마입니다.“

유달리 뜨거운 여름이었습니다. 연일 폭염주의보와 폭염경보가 내리는 가운데, 하필 이 더위에 아들을 입대시키고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엄마는 타는 하늘만 원망하고 또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갔습니다. 고통의 순간도 환희의 순간도, 시간을 따라 모두 지나갑니다. 다들 애 많이 쓰셨습니다. 5주 전 이 자리에서 헤어졌던 아들들을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어서 얼마나 고맙고, 기쁘고, 다행스러운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시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새로운 싸움이 시작됩니다. 군대는 일반 사회와 다른 특수한 조직이기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을 테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아들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부디 스스로를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겨야 자신이 하는 일과 자기와 함께 하는 전우들을 귀하게 여길 줄 알고, 자기도 남들로부터 귀한 대접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잊지 마세요. 가족들이 언제나 아들들을 기억하며 응원하고 있습니다. 사랑의 힘으로 진정한 강자. 진짜 사나이가 되어 주십시오!

그동안 열과 성을 다해 돌봐주신 35사단 지휘관들에 대한 감사 인사까지 마치고 엄마는 고개를 들었지.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앉아서야 비로소 너를 보았어, 아들도 엄마를 쳐다보고 있네. 멀리서 서로 바라보며 눈으로 말하지, 말로 다할 수 없는 수많은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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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군의 북이 둥둥 울리고 아들들의 경례를 받은 후에야 견장을 수여하기 위해 단상 아래로 뛰어 내려갔어.

아이고 내 새끼!

달려가 내 새끼를 들입다 부둥켜안았지. 더듬더듬 얼굴을 만져보고, 조금 여윈 듯하나 더욱 단단하진 팔다리를 쓸어보았어.

내 피, 내 뼈, 내 살을 나누어 만든 또다른 나, 그러나 나보다 더 아프고 애틋한 나!

나는 너를 깊이 아는 단 한 사람, 너보다 더 빨리 기뻐하고 더 오래 슬퍼하는 마지막 사람, 하지만 우리는 언제까지고 함께일 수는 없는 사이야. 만나면 헤어져야 하기 때문. 그리고 엄마도 언젠가는 너를 떠나야 하고, 언제까지고 어린아이일 수 없는 너를 인정해야하기 때문이야.

4시간 30분의 면회 외출은 너무도 짧았지. 지금껏 엄마가 경험한 시간 중에 가장 빨리 흐른 4시간 30분 같아.

오후 4시 20분 위병소 앞에서 아들과 다시 헤어져야 할 시간, 그래도 엄마에게 힘차게 손을 흔들고 생활관 동기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부대로 들어가는 아들을 보니 주책없게 또 비집고 나오려던 눈물이 쑥 들어가네.

“잘 할게요. 나 잘할 수 있어요.”

기시감처럼 느껴지는 다짐, 그러나 그때보다 단단해진 약속.

후반기 교육을 받기 위해 내일 입소할 제2수송교육단이 있는 경산의 오늘 최고 기온이 39,5도, 미친 듯한 혹서일지언정 넌 잘 이겨낼 거야. 너 그리고 너를 사랑하는 엄마의 믿음처럼.

* 기시감 :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일이나 처음 본 인물 등이 언젠가 경험하였거나 본 듯이 느껴지는 현상

(8월 10일, 신병교육대대 수료식을 마치고)

■ 에필로그

때로 모성이라는 새로운 욕망이 엄마의 이기심을 부추겨 흔들릴지라도.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탈출을 모의하고픈 욕구에 시달릴지라도. 나는 네가 있기에 이 세상을 견디며 살아간다. 지금 나는 네게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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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엄마가 아무리 좋은 음식과 옷과 갖가지 장난감으로 너를 감싼다 하더라도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줄 것인가는 엄마의 욕심을 벗어난 일이리라. 너는 저 넓고 거친 세상을 향해 나아갈 사람이다. 너는 내 것이 아니다.

언젠가 네가 우유병을 떼고 기저귀를 벗고 혼자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친구를 원하고 너만의 은밀한 비밀들을 간직할 즈음 엄마를 미련 없이 버려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기꺼이 너를 위해 버림받고 싶다.

혜준, 내 아들아!

- 끝 -

2017. 1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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