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살 아들에게

2017. 10. 13. 15:10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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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아들에게

- 소설가 엄마가 아들에게 보내는 마흔 한 통의 따뜻한 편지 -

■ 김별아 지음

0 1969 강릉 생, 연세대 국문학과 졸

0 1993 실천문학 등단 <닫힌 문밖의 바람 소리>

0 2005 <미실>로 제1회 세계문학상

0 내 마음의 포르노 그라피, 개인적 체험, 축구전쟁 등으로 호평

0 역사소설

영영이별 영이별, 논개, 백범, 열애, 가미가제 독고다이, 채홍, 불의 꽃, 어우동, 사랑으로 죽다. 개정판 미실, 탄실 등

0 산문집

톨스토이처럼 죽고 싶다. 가족 판타지, 죽도록 사랑해도 괜찮아

삶은 홀수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괜찮다, 우리는 꽃필 수 있다. 등

■ 프롤로그 : 21개월의 새로운 삶

2016년 7월 5일은 너뿐만 아니라 엄마에게도 잊을 수 없는 날이지. 분단된 한반도에서 태어난 남아로서 언젠가 감당해야 할 일이었지만, 마땅히 예상했던 일임에도 놀랐지. 준비하고 기다렸음에도 당황하고 말았지. 막상 입영 통지서를 받아 드는 순간 철렁 내려앉던 가슴을, 복잡 미묘한 그 감정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조금은 여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기말고사가 끝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아 당장 입대라니, 임박한 시간이 너무 낯설어 엄마는 먹먹했단다.

입대를 앞두고 동네 미용실을 함께 찾았지. 염색과 파마로 멋을 부렸던 머리카락이 말려나가고 까까머리의 낯선 모습이 되었을 때, 바로 그곳에서 배냇머리를 깎았던 스무 해 전의 기억이 물밀 들어 엄마는 또다시 울컥 했단다. 엄마의 기억에 아들은 여전히 뱃속에서 자란 얇고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휘날리던 아가 같기만 한데 이제 바야흐로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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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삶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구나!

아들아! 엄마는 널 기억하고 기다리는 마지막 사람이란다.

엄마가 아니더라도 넌 너 자신으로 분명히 존재하지. 걱정마라. 넌 잊히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단다. 아니, 잠시 잊힐지언정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존재란다.

강건해라! 엄마도 너와 함께 새로운 21개월의 삶을 꿋꿋이 살아낼게.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

- 엄마가

◉ 숨 쉬는 순간마다 네가 그립다

■ 입소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상행선 무궁화호 차창 밖으로 서울이 가까워질수록 굵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너에게 편지를 쓴다. 바야흐로 장마의 절정이구나.

말 그대로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 며칠 전 남부 지방을 강타한 장마전선이 북상한 것이라니, 너는 적어도 한동안은 이만큼 사나운 빗줄기엔 시달리지 않겠지. 더위가 한창인 7월에 아들을 입대시키는 엄마의 마음이 그런 사소한 사실에나마 위안을 받는구나.

검고 무거운 구름.

구름 사이를 똟고 비치던 햇살.

해님에게 메롱 혀라도 내미는 듯 깔짝거리며 흩뿌리던 여우비. 섬진강변 낯선 그곳의 오늘 날씨는 참으로 변덕스러웠어. 가뜩이나 어수선한 마음이 접었다 폈다를 반복해야 하는 우산 같았지.

네가 내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내가 알 수 없는 경험을 한다는 사실이 처음에는 공포였어. 군(軍)이라는 이름과 의무 복무라는 사실이 주는 압박과 부담이 절대 무시할 만큼 만만치 않았거든. 여전히 휴전 상태인, 실제로 잠시 전쟁을 멈추었을 뿐인 한반도에서 아들을 낳아 기르는 엄마라면 아마도 다들 비슷한 마음이리라 생각해.

맹세코 엄마는 가능하기만 하다면 기꺼이 아들의 의무를 대신했을 거야.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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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세상의 의무정도가 아니라 사랑하는 아내를 따라 스스로 지하 세계에 간 그리스 신화 속의 오르페우스처럼 지옥까지도 대신 갈 수 있어야 하지만 그럴 수 없기에 내가 아무리 사랑한대도 네게는 독립된 성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너만의 몫이 있기에 나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지.

그래서 비록 직접 체험을 하지 못하더라도 간접 체험이나마 하고자 지금껏 자원해서 강연을 다녔어. 육군, 공군, 해군, 해병대, 특전사, 부사관학교 등 전국의 군부대를 골고루 방문했지. 주로 문학과 역사, 혹은 진로 상담 따위로 장병들을 만났지만 사실 엄마는 그들을 가르친 것보다 그들을 통해 배운 게 더 많아.

오늘 신병교육대대 입소식에서 수백 개의 까까머리들 중 하나가 되어 서 있는 너를 보니 새삼스레 머릿속이 하얘지는 느낌이었어. 정말 그 순간이 오고야 말았구나!

우천 때문에 입소식이 강당에서 치러진댔어. 정문에서 강당까지 셔틀버스를 타고 갈 때부터 엄마는 가슴속에 자욱한 무엇이 문득문득 치밀어 먹먹하고 막막했지. 옆자리에 앉은 네 손을 꼭 움켜잡고 말없이 발만 동동 굴렀어.

“엄마 오늘 울 거야?”

“글쎄, 아무래도 눈물이 날 것 같은데?”

“우는 건 할 수 없대도 오열까진 하지 마!”

네가 농담처럼 건넨 한마디 때문에 엄마는 울음을 터뜨리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악물었어.

언제 우리가 잡았던 손을 놓았는지 몰라, 어느 새 넌 불려나가고 엄마 혼자 동그마니 남았어. 그래도 2백여 개의 새카만 머리통 사이에서 내 아들의 머리통이 확연히 구별되는 게 신기해. 어느 새 나는 사막동물 미어켓처럼 목을 길게 뺀 채 너만 바라보고 있었어.

할머니는 그게 핏줄이 끄는 거래. 그보다는 동그랗고 예쁜 머리통을 만들기 위해 목을 가누지 못하는 갓난아기를 이리저리 돌려 누이며 애썼던 사람이 바로 엄마였기 때문일 거야. 입영식은 간결하고 신속하게 진행됐어.

“군 생활은 여러분에게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인간관계와 인내, 희생정신을 체득할 수 있도록 해줄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진짜 사나이로 다시 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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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나서 부모님과 친구들 앞에 당당히 섭시다!”

“신병 부모님, 가족친지 여러분! 아들을 맡기고 돌아가실 때 심려가 크실 것을 압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부대에서는 부모의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교육하고 따뜻한 훈육으로 잘 보살피겠습니다. 5주 후에는 이 자리에서 더욱 건강하고 의젓한 모습으로 다시 뵐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부사단장님 말씀이 유일하게 믿고픈 약속이자 위로가 되는구나. 그 말씀 그대로 지켜지길 엄마는 간절하게 기대하고 기도해.

“끝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지금까지 잘 키워주시고 국방의 의무를 다 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부모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결국엔 울컥, 참아왔던 눈물이 치솟고 말았네. 무엇이라고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기 때문이야.

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 마지막 인사를 하러 다가온 너를 힘껏 껴안고 토닥이는 것밖에. 따로 할 말이 너무 많으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지.

(7월 5일)

■ 세상은 변함없이 굴러간다

밤새 뒤척거리다가 새벽녘 선잠이 들었지. 그리고 기억나지 않는 꿈에 시달리다가 문득 헤떠(자다가 놀라다) 깨어났어. 기상나팔도 울리지 않았는데 정확히 아침 여섯시더구나. 엄마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어.

“혜준 잘 잤니?”

누군가는 첫날 아침 눈을 뜨고 천장을 바라보는 순간 이곳이 자기 방이 아니라 훈련소라는 사실을 깨닫고 가슴이 철렁했다던데, 엄마는 궁금하구나. 너는 잠을 설치지 않고 잘 잤는지. 삼시 세끼를 제대로 소화시키고 있는지. 잘 자고, 잘 먹고, 낯선 환경에 적응하기까지의 조건은 어쩌면 이리도 단순하고 명료한지, 엄마가 가장 먼저 걱정하고 가장 염려하는 것 또한 그 두 가지 뿐이란다.

잘 먹고 잘 자는 일이야말로 간단한 게 아니지. 어떤 거룩한 뜻과 명분만큼이나 중요한 일상이 잘 먹고 잘 자는 일로부터 시작되니 말이야. 조선 세종대왕 때의 명장 김종서는 함경도에 침범한 여진족을 몰아내고 6진을 개척할 때 북방 변경에서 고생하는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는 일로부터 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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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였지. 철학자 니체는 잠을 잘 자는 것이야말로 일종의 ‘능력’이라면서 “낮에 열 번, 그대는 자신을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적당히 피곤해지며 영혼은 그에 마취된다”고 했지.

네가 떠나 있어도 세상은 변함없이 굴러간다. SNS속 네 친구들의 일상도 무엇 하나 달라질 게 없지. 엄마도 그래보려 애썼어. 아들 없이 맞이한 첫날, 평소와 달리 지내면 더 우울할까 봐 꾸역꾸역 일상을 꾸려나갔단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달라진 게 있었어. 엄마의 몸이 마치 커다란 눈물주머니가 되어버린 듯 아무 곳에서나 아무 것도 아닌 일에 눈물이 툭 떨어지는 거야.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을 영위했지만 이십 년 전 ‘엄마’라는 이름을 얻은 후로 내 일상에서 너를 빼버릴 방도는 아무래도 없었으니까

네 것과 같이 데우면 1분 30초 동안 돌려야 하는 전자 레인지를 50초로 설정을 하고 채소 즙을 데울 때, 네가 어버이 날 선물로 사준 커피메이커로 커피를 내릴 때, 운동을 하러 가는 길에 동네 공원에서 유모차를 끌고 가는 젊은 엄마를 보았을 때, 심지어는 체육관에사 흘러나오는 시끄러운 댄스 음악에도 울컥 뜨거운 물기가 치밀어 오르곤 했단다.

내 아들은 패션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엄마가 사 주는 대로 걸치고 다녔지. 그런 네가 마지막으로 입었던 엄마의 옷은 곧 소포로 보내오겠지. 선배 엄마들의 말로는 그때 가장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는데, 엄마도 과연 그럴까?

인생은 TV 드라마가 아니야. 평범한 삶엔 대단한 사건이나 줄거리가 없는 편이 나아. 드라마만큼 재미나고 극적이지 않을지라도 우리에겐 일상이 있으니까. 일상만큼 힘이 센 것은 없으니까.

아들아 부디 잘 먹고 자고 일상에 충실하렴. 숨 쉬는 순간순간 네가 그립다. (7월 6일)

■ 동병상련의 위로

혜준아!

지금은 불러도 메아리 없는 이름이구나. 너는 아직 엄마가 쓰는 편지를 받아 볼 수 없으니 말이야. 입소 때 들은 얘기로는 일요일 쯤 1차 주소가 나오고 다음 주 화요일에야 신체검사가 모두 끝나 최종 주소를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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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그때까지는 일기를 쓰듯 혼잣말을 하듯 매일을 기록하는 것이 전부로구나.

너를 군에 보내고 엄마는 3개의 인터넷 카페에 가입했어. ‘군인아들부모님카페(군화모), ’운전병 부모들의 모임‘ 그리고 ’충경 새내기 부대.‘ 35사단 신병 교육대 카페인 ’충경 새내기 부대’에는 아직 네가 속한 기수 방이 만들어지지 않아서 이 게시판 저 게시판을 기웃거리고만 있지.

누군가는 요즘 부모들은 극성이라 학교에서도 모자라 군대에서도 치맛바람을 일으킨다고 지청구를 하더구나. 유난 떤다. 과잉보호다 흉을 보기도 하고, 군에서 너무 부모들 눈치 보는 게 아니냐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고 말이야.

하지만 낯선 곳에 자식을 보내 놓고 노심초사하는 건 부모의 본능일 뿐이고, 그 애면글면 하는 마음을 헤아려 어루만지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고맙고 다행한 일이겠니?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과 규율이 흐트러지는 건 다른 문제야. 자식을 군에 보낸 부모들의 자발적 모임인 인터넷 카페는 현대의 비손(민속 신앙에서 두 손을 비비면서 병이 낫거나 소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비는일)이나 마찬가지지.

아들을 입대시키고 겪는 복잡하고 어지러운 마음의 요동을 그것을 겪지 않은 사람들과 나누기는 쉽지 않아. 비단 이 문제만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리석어서 자신이 겪지 않은 일은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지. 경험이 가장 큰 스승이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 걸 거야. 게다가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는 말은 있지만 냉혹한 현실 세계에서는 기쁨을 나누려면 질투로 돌아오고 슬픔을 나누려면 약점이 되어버리기 십상이지.

부모들의 인터넷 커뮤니티가 생각보다 방대해서 엄마도 아직 탐방을 끝내지 못했단다. 2006년에 만들어져서 10년차 카페가 된 군화모는 회원이 18,000명 이상이고, 20010 년에 만들어진 운전병 부모들의 모임도 회원이 15,000명 이상이나 되니 말이야. 카페에는 갖가지 정보가 있어. 입소할 때와, 면회 갈 때, 혹한기 훈련 때의 준비물을 비롯해서 장병들의 생활 복지 제도, 군인 철도 이용법, 군에서 아플 때 대처법 등과 군에 아들을 보낸 부모를 상대로 한 보이스 피싱 피해 사례까지…. 아, 하절기에는 기상 시간이 6시가 아니라 5시 30분으로 앞당겨진다는 사실도 거기서 알았지. 그야말로 경험을 통해서 방대한 정보를 축적해 낸 ‘집단 지성’의 현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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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맛바람’이라는 말은 자기 자식만 생각하는 일그러진 이기적 애정을 비꼬는 말이지. 하지만 새카만 얼굴에 군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생면부지의 청년에게 빵과 음료수를 사 안기고, 훈련소 수료식 때 찾아오는 가족이 없는 ‘아이’를 대신 거둘 방법은 없느냐고 묻는 엄마들이 극성이면 얼마나 극성이고 유난스러우면 얼마나 유난스럽겠니? 그런 극성과 유난이라면 엄마도 얼마든지, 누구보다 열심히 부리고 싶어.

혜준아!

엄마는 영원한 네 편이야. 세상의 어떤 싸움에서도 네게 원군(援軍)이 있음을 잊지 마렴. 사랑하는 만큼, 엄마도 더 강해질게. (7월 7일)

■ 울보가 되어버린 엄마

외로움에 길들여진 아이는 울지 않아. 엄마가 지금껏 그래왔거든. 나는 남들보다 눈물이 없는 편이라고, 그렇게 믿었어. 어지간히 억울하거나 분하지 않으면 울지 않았지. 아무리 슬픈 소설을 잃고 영화를 보아도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처럼 부숭부숭한 눈을 비볐어.

그런데 너와 헤어지고 나서 엄마는 갑자기 울보가 되어버렸어. 오히려 입소식을 하던 날이나 그 며칠 후까지는 아무렇지 않았지. 아무렇지 않아서 내심 당황스럽기도 했어. 한데 이게 웬일일까? 서서히 시간이 지나 비로소 너의 부재가 확연해지는 순간부터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새기 시작했어.

네가 까까머리에 썼던 모자를 봐.

입영식 하던 날 네가 썼던 우산을 펼쳐봐.

군 정지 신청을 해서 끊긴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네가 먹다 남기고 간 음료수를 한 모금 마셔봐.

네 머리에 맞춤하던 모자는 헐렁하고,

우산은 이제 물기 없이 말랐고.

휴대폰은 먹통이고,

음료수는 김이 빠졌네.

엄마의 사랑과 연인의 사랑을 비교한 노래 하나가 생각나는구나. 언젠가 엄마가 네게도 들려준 적이 있는 이야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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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청년이 사랑에 빠졌다네. 그런데 여자는 청년에게 사랑의 징표로 어머니의 심장을 가져올 것을 요구했지.

터무니없게도 심장을 자기 개에게 먹이로 주겠다며, 그래야 그 밤에 청년과 데이트를 하겠다고 약속했지.

사랑에 눈이 먼 청년은 집으로 달려가 어머니를 죽이고 심장을 도려냈어.

그리고 연인을 만날 기쁨에 넘쳐 미친 듯이 달려갔지. 눈에 보이는 게 없어 흉악한 일까지 저지른 그가 발밑의 돌부리를 미처 보았을 리 없지.

쿵, 청년은 길바닥에 철퍼덕 넘어졌어. 데굴데굴, 그 바람에 손에 쥐었던 심장이 저만치 굴러갔지. 그때 붉은 피를 뚝뚝 흘리던 어머니의 심장이 다급하게 외쳤어.

“사랑하는 아들아, 다치지 않았니?”

프랑스의 시인 장 리슈팽이 쓴 소설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심장>이라는 노래의 내용이란다. <어머니의 심장>은 모성애에 대한 세상에서 가장 가슴 아픈 이야기로 알려져 있어.

이 엽기 스토리에서 가장 괴이하고 놀라운 건 살인을 부추기는 연인이라기보다 살해를 당하면서까지 자식을 미워하지 못하는 어머니의 마음이지. 그 사랑이야말로 본능이면서 본능을 뛰어넘는 일이거든.

우리 모자가 보통의 엄마 아들 관계와 좀 다른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네가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국을 떠나 캐나다로 가면서 엄미와 너는 둘 만의 가족을 만들었지.

세상의 기준과 남들의 시선에 아랑곳없이 우리는 함께 가족을 지키며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겉보기야 아무리 씩씩해도 너는 남모를 상처를 받았을 테고 엄마는 그런 너를 지키기 위해 더욱 필사적으로 세파를 헤쳐 나갔어.

우리는 서로에게 많이 의지했고. 네가 엄마에게 의지한 만큼 엄마도 네게 많이 기댔단다. 네가 있어서 덜 외롭고 덜 힘겨웠고, 네가 있어서 더 기운차고 더 행복했지. 어쩌면 엄마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엄마와 아들의 관계를 넘어선 친구이자 전우(戰友)였어.

지금까지의 싸움에서 엄마를 엄호해줘서 고마워, 지금까지는 엄마가 지원사격을 했지만 언젠가는 아들, 네가 엄마의 든든한 뒷배가 되어주겠지. 그래서 엄마는 더 이상 외로워도 외롭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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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플 때는 달콤하거나 매운 걸 먹고 싶더라. 오늘 나온 간식은 아이스크림이었지? 엄마도 뱃살이 찌는 위험을 무릅쓰고 네가 남기고 간 아이스크림을 먹어야겠다. 보고 싶다 내 아들! (7월 8일)

■ 고요한 집, 적막한 세상

입소 후 맞이하는 첫 주말이구나. 주말이면 교육이나 훈련을 쉬는지 어떤 활동을 하는지 궁금해 하던 차에 몇 해 전 국방 TV에 방영되었던 <훈련병의 품격>이라는 짧은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걸 발견했어. 꼭 알고 싶었던 내용이라 어찌나 반갑던지 전체 30편중에 연달아 10편 넘게 보았단다.

입소식 이후 신체검사, 예방접종, 인적성 검사, 전투복 착용과 총기 지급 과정을 거쳐 오늘은 교육을 받는 중이겠구나. 선배 엄마들이 말하길 아이에게나 엄마에게나 훈련소에 있는 시간이 가장 천천히 흐른다더니 정말이었네. 이제 겨우 닷새가 흘렀을 뿐인데 입소식장에서 헤어져 언덕을 올라가던 네 뒷모습이 아슴아슴하다.

소문 내지 않아도 우리 동네 사람들은 다 알거야.

“저 13층 아들 녀석이 드디어 군대에 간 모양이로구나!”

이른 아침과 저녁 9시 이후의 시간을 빼고 틈날 때마다 피아노 반주에 노래를 불러 젖히던 네가 없으니 동네가 다 조용할 수밖에.

“아이고 시끄러워 죽겠다! 제발 노래 좀 그만 부를 수 없니?”

민폐를 줄여보고자 임시방편으로 베란다 문과 방문까지 전부 닫고 노래를 부르면 소음 공해에 시달리는 건 비자발적 청중, 엄마뿐이었지. 음악을 특별히 즐기지 않을뿐더러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상태에서 작업해야 하는 엄마로서는 네 유난한 취미에 고약한 꾸중으로 반응 할 수밖에 없었어. 그러나 네가 없는 우리 집, 우리 아파트, 우리 동네는 얼마나 고요한지!

하루도 빠짐없이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던 아들이 없으니 세상이 너무 적막하구나. 그저 네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네가 꾸는 꿈과 바라는 세상을 상상해. 노랫말만큼이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내 아들이 부디 뜨거운 계절을 잘 견디고 더 깊게 무르익어 돌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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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은 숙명

■ 인터넷 카페 ‘충경 새내기 부대’

오, 드디어!

‘충경 새내기 부대’ 카페에 기다리고 기다리던 생활관 편성표와 사진이 올라왔구나. 볼일이 있어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게시물을 확인하고 얼마나 기뻤던지 사진 속의 네가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엄마는 거의 날듯이 뛰어왔어!

아들아 고맙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건강해 보여서, 이제 네게 이 편지가 닿을 거라는 생각만으로 엄마는 너무도 행복하구나.

더위를 많이 타는 네가 고생할 걸 생각하니 1학기가 끝나자마자 허송세월하지 않고 빨리 입대하는 편이 낫다고 서둘렀던 게 조금 후회스럽기도 하구나. 그런데 여름이 아니라 겨울이었다면 또 추위에 고생할 일을 걱정했을 거야. 키가 닿지 않는 포도나무 아래서 입맛을 다시며 “저 포도는 맛없는 신 포도일거야!”라고 되뇌는 우화 속의 여우처럼 그래도 추위보다는 더위가 낫다고 스스로를 달래본다.

엄마는 오늘 낮에 입대하기 하루 전 너와 함께 백팔 배를 했던 동네 사찰 ‘보광사’에 들렀어. 예불이 끝난 오후라 절은 그야말로 절간 같고 백중 기도를 하는 몇몇 신도들만 남아 있더구나. 대웅전의 부처님 앞에서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했어. 엄마의 기도는 오직 한 가지뿐이야. 너와 함께 절을 하며 바쳤던 소원. 부디 아들이 무사 무탈하게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보살펴 달라고 빌고 빌었지.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그리 종교적인 사람이 아니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독실한 무신론자’라고 말하곤 하지만 너와 마찬가지로 절에 가서는 절을 하고 교회와 성당에 가서는 기도를 하니 무신론자로서도 독실하지 못한 건 매한가지지.

다만 엄마는 종교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는 모든 신앙의 간절함을 존중해. 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으로서의 무력감을 부처든 하느님이든 하나님이든 알라든 어떤 절대자에게 의탁하려는 시도는 자연스러운 본능이기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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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팔 배를 하고 팍팍한 다리를 쉬며 대웅전 한 구석에서 경(經)을 읽었어. 그중에서 엄마가 네게도 읽어보라 권했던 <보왕삼매론>의 글귀가 돌올하니 눈에 들어오는구나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고 하셨느니라.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써 세상을 살아가라’고 하셨느니라.

남이 네 뜻대로 순종해주기를 바라지 말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해주면 마음이 교만해지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내 뜻에 맞지 않는 사람들로써 원림(園林)을 삼으라’고 하셨느니라.

너도 지금 그리고 앞으로 절실하게 느끼겠지만, 군 생활이 힘들다는 건 훈련이나 임무가 어렵고 힘들다기보다 집단생활을 통해 사람과 부딪히는 게 힘들다는 뜻일 게야. 그건 비단 군대만이 아니라 모든 조직에서 마찬가지로 작용하는 논리지.

신교대나 수송교육대나 자대 배치를 받은 후에나 네 마음에 들지 않는 동기, 선임, 후임이 분명히 있을 거야. 그들을 무작정 피하거나 그들에게 네 마음에 들기를 강요해서는 안 되겠지. <보왕삼매론>에서 말하는 원림, 정원의 나무들이란 결국 반면교사(反面敎師), 부정적인 면을 통해서 깨달음이나 가르침을 주는 스승이니까.

낯선 환경에 적응하느라 아직은 ‘난 누군가, 여기가 어딘가?’의 수준에 머물러 있겠지만 청춘의 빛나는 시절에 한 페이지를 차지할 군이야말로 ‘난 누군가, 여기가 어딘가!’를 깊게 고민할 수 있는, 너 자신에게 가장 진지하게 몰두할 공간이기도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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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걱정은 훈련 일정을 따라

훈련이야 계획대로 받겠지만 날씨가 너무 더워서 고생이 크겠구나. 서울엔 폭염주의보가 몇 번이고 내렸는데, 재난문자를 받을 때마다 엄마는 내 정수리에 내리쬐는 땡볕보다 멀리 임실의 뙤약볕을 생각해.

내 아들은 얼마나 더울까? 훈련장의 뜨거운 흙과 철모 밑으로 흘러내리는 비지땀과 온 몸을 휘감을 끈끈한 먼지를 생각하면 아무리 더워도 엄마는 에어컨을 켜지 못하겠어. 얼음을 씹으며 부채를 부치는 것도 미안해. 쉬이 못하겠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가끔씩 눈물도 섞어 흘리며, 엄마는 온종일 너를 걱정한단다.

걱정이야말로 엄마의 숙명이지.

엄마들은 밥만큼이나 중요한 걱정을 하기 위해 태어났는지도 몰라. 자식을 입대시킨 엄마들의 커뮤니티도 결국 혼자 하는 걱정을 함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과 진배없으니, 엄마들의 걱정 목록은 다양하다 못해 기발하기까지 해.

1. 훈련소에서는 긴장해서 며칠 동안 변도 못 본다는 걱정

2. 입대 직전 친구들과 술을 퍼마셨으니 신체검사 이상이 나올까 걱정

3. 게임 등으로 낮밤을 바꿔 살더니 기상이나 제대로 할까 걱정

4, 제 손으로 제방 청소도 안 해본 녀석이 관물대 정리를 잘하려나 걱정

5. 버섯, 미역, 해산물 등 가리는 음식이 많은데 배나 곯지 않을까 걱정

6. 군대에서는 축구 잘하는 게 최고라는 데 운동 신경이 둔해서 걱정

7. 군복 바느질도 해야 한다는데 곰손이라 걱정

8. 민첩하지도 못한 놈이 분대장을 맡았다니 걱정

9. 각개 전투 하는 날 흙투성이 될까 걱정

10. 너무 뚱뚱해서, 말라서, 키가 커서, 왜소해서 걱정

11. 더워도, 추워도, 비가 와도, 눈이 와도 걱정

걱정걱정 하는 엄마를 보고 누군가는 노파심이라고, 그러면 아들이 나약해진다고 나무랐어. 정말 그런가? 움찔 멈추고 고민을 했지. 행여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월권을 행사해 이들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인터넷 카페에 올라온 엄마들의 걱정이야말로 울타리라고, 울타리가 되어 우리 아들들을 지켜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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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먹이 아이에게는 몸을 떼지 말 것.

어린아이에게는 몸은 떼되 손은 떼지 말 것.

소년에게서는 손은 떼되 눈은 떼지 말 것.

청년에게서는 눈은 떼되 마음을 떼지 말 것.

지금 낯선 벌판에서 홀로 바람에 맞선 널 시시각각 확인할 순 없어도, 엄마의 걱정이 마음의 울타리가 되어 아들을 지켜줄 거야. (7월 11일)

■ 그러게 말입니다

어젯밤 비가 온 뒤로 아침 기온이 좀 떨어졌네. 임실 날씨를 보니 온종일 흐리고 비 예보던데 신병들은 오늘 어떤 일정을 소화할지 궁금하구나.

“부모님은 왜 우리를 사랑하실까요?” 언젠가 초등학고 ‘슬기로운 생활’ 시험문제에 어떤 어린이가 쓴 답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었지. 그 깜찍하고도 능청스런 친구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이렇게 답을 썼더구나.

“그러게 말입니다.”

엄마가 네게 이 ‘유머’를 보여준 후로 우리도 가끔 이런 문답을 하곤 했지.

“엄마는 왜 혜준을 사랑하실까요?”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낄낄거리며 주고받던 이야기가 곱씹을수록 단순한 우스갯 소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왜 나는 너를, 엄마는 아들을, 이토록 세상의 어느 사랑과도 비교할 수 없는 깊고 진한 빛깔로 사랑하는 걸까?

네가 갓난아기였을 때 기저귀에 평소와 다른 색이나 질감의 변이 묻으면 엄마는 냄새를 맡아보고 손으로 문질러 이물질이 들어 있지 않은지를 확인하다 못해 찍어서 맛까지 보지 않았겠니? 동물로서 동물적 본능을 한껏 발휘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제정신으로 똥을 찍어먹을 수 있을까?

때로는 사랑을 ‘교환’ 개념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어. 네가 주니까 내가 주고, 내가 주니까 네가 주는 거라고 심지어는 부모 중에서 아마도 반절쯤은 농담이겠지만, 자식에게 ‘투자’하는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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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에는 ‘얼마만큼’ 이라는 양적인 요소가 포함될 수밖에 없어. 부모에게서 받지 못했기에 돌려줄 것도 없다고, 자식이 아무 것도 해주지 않으니 주지도 않겠다고 한다면 그건 상거래겠지. 상거래엔 상도덕이 필요할 뿐. 사랑은 아니야.

엄마는 너를 사랑해.

까닭을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어떤 사랑도 쉬이 믿지 못했던 ‘사랑’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회의적이었던 내게 진정한 사랑을 가르쳐 준 사람이 너였기 때문이야. 눈곱만큼의 의심도 없이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 유행가 가사처럼 신파조의 연극대사처럼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고 맹세할 수 있지.

네가 머리가 컸다고 고분고분 말을 안 들어도, 바짝바짝 속을 썩여도, 엄마가 해준 게 뭐냐고 바락바락 대들어도, 네가 내게 사랑이 아니라면 다른 어떤 무엇일 수도 없으니.

혜준 고마워! 내가 너를 사랑하게 해줘서.

설령 그게 짝사랑에 불과할지라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사랑하게 해줘서.(7월 12일)

■ 까까머리 아들들

인터넷 카페 ‘충경 새내기 부대’에 아들의 이름을 확인해보니 전에 없던 조 이름이 새로 만들어 졌구나. 일기당천(一騎當千)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내 아들의 일주(日柱)가 경오(庚午), 흰말(馬)이니 기막히게 잘 어울리는 조 이름이구나!

‘다시 천고의 뒤에 /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는 이육사의 시 <광야>의 한 구절도 떠오르고 말이야.

앞으로 행군 등 조별로 움직이는 활동이 많을 텐데, 부디 조원들과 협력해서 훈련 잘 받기 바란다.

그러고 보니 네가 신병교육대에 입소한 지 꼬박 일주일이 지났네.

까마득한 시간이 흐른 것만 같은데 일주일밖에 안 지났다니!

손 흔들며 헤어진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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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심정은 둘 중 어느 쪽인지 궁금하구나. 엄마는 전자에 조금 더 가깝지만 후자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 국방부 시계는 명품이라 땅 속 깊이 묻어 놓아도 고장 나지 않고 일 분 일 초 어김없이 간다지만 낯선 그곳에서 겪는 새로운 시간들은 어떤 마음이냐에 따라 그 속도가 다르게 느껴질 게야.

‘이 또한 지나가리라! (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

유대교의 경전 주석서인 <미드리쉬>에 나오는 ‘다윗 왕의 반지> 일화에서 현자 솔로몬이 세공사에게 가르쳐 준, 전쟁에서 승리를 거뒀을 때 오만하지 않고 패배를 겪었을 때 좌절하지 않도록 하는 글귀가 바로 이거였지.

이 경구는 미국의 링컨 대통령과 김연아 선수의 좌우명 이면서, 엄마가 중학생이던 너와 함께 백두대간 남한 구간 632킬로미터를 종주하고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하고 말이야.

즐거운 시간은 언제 그만큼 지났는지 알아채지 못할 만큼 빠르게 흐르고, 힘겨운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흘러서 아무리 거듭해 들여다보아도 시계의 분침과 초침조차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만 같지.

그러나 아무리 놓치고 싶지 않은 순간도, 벗어나고 도망차고 싶은 순간도, 결국엔 지나가서 과거의 일이 되어버리니까.

우리가 2년 동안 백두대간을 종주하면서 깨달은 법칙중의 하나가 험산과 악산을 가릴 것 없이 “그 순간을 지나가면 쉬운 코스더라!”였으니.

(7월 13일)

■ 네가 있어 참 고맙다

엄마는 운동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오랜만에 슈퍼마켓에 들렀는데 매장을 한 바퀴 돌고 결국 빈손으로 나오고 말았어. 네가 없으니 우유도 요쿠르트도 과자나 아이스크림도 살 일이 없구나

말마따나 ‘생계형 전업 작가’로 살면서 사치품은 물론 실용품도 절제해 소비하는 편이었지만 아들을 먹이는 것에 만큼은 조금도 아끼고 싶지 않았어. 정말로 속담이 틀리지 않았지. 내 논에 물 들어가는 모습은 본적이 없어서 얼마나 좋을지 몰라도,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걸 보는 일처럼 보기 좋은 건 분명코 없었으니 말이야.

하루 동안 품을 팔아 돈벌이를 해서 돌아올 때, 몸은 비록 고단해도 아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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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음식을 사 들고 귀가 할 때면 걸음이 나는 듯 가벼웠지. 그게 꼭 귀하고 비싼 음식이 아니었대도 맛있게 먹어주는 네가 있어서 엄마는 너무도 행복했어. 넌 언제나 엄마에게 받기만 한다고 미안해하지만 사실은 그리도 많은 행복의 기회를 엄마에게 주었던 것을 …….

너는 내가 모르는 세상인 거야!

네 몸은 내가 낳아 먹이고 키웠지만, 너는 이미 네가 만든 새로운 세상에서 사는 거야 !

지금 그곳에서 네가 겪고 있는 모든 일들 또한 엄마가 알 수 없는 것이지.

그래서 두렵지만, 그래서 대견스러워.

부디 엄마에게 낯설고 새로운 세상을 더 많이 펼쳐 보여주길.

아들아 내가 있어서 고맙다. (7월 14일)

◉ 너에게서 온 편지

■ 눈물 상자 ‘장정 소포’

외출하는 길에 우편함에 보내는 사람의 이름이 낯익은 편지 한 통이 꽂혀 있는 걸 발견했다. 신병 교육을 위한 의견서, 설문지와 함께 네가 보낸 첫 번째 편지였지.

“어머님께‘

네가 나를 이런 호칭으로 부른 적이 있었나? 주말에 다 함께 ‘효도 편지’를 작성하는 시간에 편지를 쓰려니 절로 어깨에 힘이 실렸나보다. 펼쳐보니 깨알 같은 글자가 한 장 가득이구나 어라, 편지 뒷면까지도 빽빽하게 썼네. 반갑고 왠지 벅찬 마음에 읽으면서 가느라 지하철하나를 눈앞에서 놓쳤네. 그래도 급할 게 없어. 입가엔 벙긋한 미소뿐이야. 울 아들이 이렇게 엄마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걸. 열 번도 넘게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집은 여전히 그립고, 어머니도 그립고, 어머니와 감사하게도 함께 할 수 있었던 시간이 그립습니다. 그런데, 그리움 속에서도 새로운 환경이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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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네가 그립고 또 그립단다. 그래도 엄마는 자신에게 주어진 현실을 이해하고 상황을 스스로 헤쳐나가는 아들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품 안에서 다칠세라 고이고이 아껴 길렀던 내 아기가 이렇게 조금씩 남자가, 어른이 되어가고 있구나!

그리고 마침내 오늘 아침, 우체국에서 보내온 알림톡을 확인하고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알았지. 인터넷 카페 ‘군화모’에서 아들을 군대에 보낸 선배 부모들이 ‘눈물상자’라는 별칭으로 부르던 ‘장정 소포!’

오후 2시가 조금 넘어 드디어 초인종이 울렸어. 현관문을 여니 기사님이 상자 하나를 건네주시는데, 기분 탓인지 “택배 왔습니다”는 아저씨의 목소리가 왠지 조심스럽고 엄마를 안쓰럽게 여기는 듯하더구나.

아들을 어루만지듯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어.

상자를 여는 순간 혹시나 필요할까 싶어 챙겼던 여름 점퍼가 보였어. 그리고 엄마의 기억 속에 지금도 선명한 그날 네가 입었던 하얀 줄무늬 티셔츠와 반바지. 속옷과 샌들이 줄줄이 나왔어.

이상하더라.

의외로 장정 소포를 받으면 눈물깨나 흘릴 줄 알았는데 반가운 편지에 웃었다는 엄마 같은 엄마들이 꽤 많네. 무엇보다 아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확인과 믿음이 있으니까.

“시간은 그럼에도 흐릅니다. 당당하게, 당당하게 훈련 받겠습니다.”

네 편지의 마지막 한 줄이 엄마에게 얼마나 큰 힘과 위로가 되는지 넌 알까? 아들만큼이나 당당하게, 당당하게 엄마도 엄마의 일상을 꾸려나갈게. 사랑한다. 내 아들아. (7월 15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어제 중사님이 인터넷 카페 게시판에 올려주신 생활관 단체사진에서 군복을 입은 아들 모습을 처음 보았단다. 옷은 낯선데 익살맞은 표정을 보니 내 아들이 맞구나. 입을 앙증맞게 오므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그 표정이 갓난아기 때부터 네 트레이드 마크지. 엄마의 마음속에는 그 천진한 표정을 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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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조금씩 커가던 아들의 모습이 차곡차곡 쌓여 있어.

‘작가 언니’들의 단톡방에 엄마가 어제 장정 소포를 받았다는 말을 했더니 다들 울었냐고 물어보시네. 눈물보다는 웃음이 나왔다고 솔직하게 고백했지.

다른 아들들은 평소와 달리 가지런히 옷을 잘 접어 보내서 엄마들을 울린다는데 내 아들은 변함없이 대충 처박아서 보냈으니, 아아, 늘 푸른 소나무처럼 꿋꿋하여라 내 아들이여……!

잘난 아들의 나라의 아들

돈 잘 버는 아들은 장모의 아들

백수건달 아들은 영원한 내 아들

언젠가 세간을 떠돌던 우스갯소리가 문득 떠올랐어. 남의 아들 이야기면 웃겠는데 내 아들 이야기니 웃을 수만은 없네. 구부러진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을 현대판으로 변형하면 이렇겠지.

주부들을 포함한 여성들이 주로 찾는 인터넷 게시판에 “당신은 가장 아끼는 게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이 올라온 적이 있어. 부모님, 남편, 자식 등 가족이라는 대답이 절대다수였고 자존심과 시간, 자기가 스스로 개척해 온 인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대답도 있었지. 그런데 그 중에서 엄마에게 가장 인상적인 대답이 두 개 있었단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고 힘들게만 하는 자식새끼요.”

“약하고 싸가지 없는 자식새끼요.”

짧은 문장의 한 글자 한 글자에 이를 악물고 쓴 흔적이 느껴져. 그 ‘자식새끼’는 얼마나 엄마를 힘들게 했을까. 얼마나 속을 썩였을까?

자식을 저렇게 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는 엄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욕심일까, 기대일까? 집착일까, 사랑일까?

그리 큰 것을 바란 건 아닌 것 같은데 자식은 그조차 못하겠다고 버티지. 엄마는 이 험한 세상에서 제 힘으로 살아나갈 최소의 방도를 마련해줘야 할

것 같아 전전긍긍하는데 자식은 아무런 생각 없이 툴툴 거리기만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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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는, 더 큰 문제는 그래도 사랑한다는 거야.

남들이 돌이라 해도 내겐 보석이고,

남들이 낙동강 오리알이라고 해도 내겐 황금알일 수밖에 없으니.

아들아, 네가 영원한 엄마의 보물이라는 걸 잊지 말고, 부디 너 자신을 귀하게 여기렴. 주말 잘 보내거라. 사랑한다. (7월 16일)

■ 붉은 여왕의 법칙

세상은 네가 없는데도 시치미를 뚝 뗀 채로 그렇게 돌아가고 있어. 이런 사실을 깨달을 때, 가끔씩 확인할 때, 내 가슴에는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스쳐가겠지.

어쩌면 20대 초반의 청춘에게 군대라는 공간이 더 힘겹게 느껴지는 건 고립감 혹은 단절감 때문일 거야. 이렇게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데 홀로 정체된 시간 속에 내던져진 느낌, 마치 <겨울나라의 엘리스>에 나오는 ‘붉은 여왕의 법칙’처럼 주위의 모두가 너무 빨리 달리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해 달려야만 겨우 제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 듯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 거지. 그 트랙을 이탈한 상태에서 함께 달리지 못하니 자꾸만 뒤로 밀려 나가는 듯한 열패감이 들고.

하지만 아들아, 언젠가 엄마가 런던 올림픽을 6개월 여 앞둔 태릉선수촌의 역도 대표팀을 취재한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지? 자기 체중의 4~5배에 가까운 바벨을 하루에만 4만 킬로그램 이상 들고 내리는 선수들에게 엄마가 진부하고도 어리석은 질문을 던졌단다.

“꿈이 뭐예요?”

그러자 그때 꼭 네 나이쯤이던 선수 하나가 담담하게 대답했어. 자기는 꿈이 없다고. 어리둥절한 엄마에게 그 선수는 다시 말했어. ‘미래의 꿈’이란 건 없다고, 다만 바벨의 무게를 조금씩 늘려서 목표를 하나하나 이루어가는 것뿐이라고.

그의 꿈은 먼 곳에 있지 않았지. 6개원 후의 올림픽에도, 당장 며칠 후의 평가전에도 없었어. 그저 발치에 선명하게 놓여 있을 뿐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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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보 엄마의 육아일기

다시 월요일, 신검 후 귀가자들이 모두 떠나고 정식으로 맞는 2주차의 첫날이구나 전화도 못하고 피엑스나 사지방(사이버지식정보방)도 못가고 흡연자들의 경우엔 담배도 못 피우지만 다들 지나고 나면 훈련소 때가 제일 재밌었다……는 선배의 이야기를 엄마가 전해줬지? 훈련병들은 절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테지만 모두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니 혜준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현재에 충실하렴. 거듭 말하지만 삶은 미래에 있는 것도 아니고 과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지금 여기에 있으니까.

네게 매일 편지를 쓰면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궁리하다 보니 네가 어릴 때 찍었던 사진과 비디오, 그리고 아가인 너를 기르며 엄마가 썼던 육아일기를 자주 들춰보게 되네. 그때 엄마는 참 젊고 미숙했구나. 그래도 처음 얻은 엄마라는 이름을 감당해 보려고 애면글면 기를 썼구나.

그 많은 사연들 중에서 네가 태어나 처음 감기에 걸려 아팠던 날의 기록은 지금 읽어도 마음이 아릿하다.

“지난 금요일 아침부터 혜준이의 뒷골이 따뜻한 듯해 체온계로 재어보니 38도를 조금 넘는다. 얼른 천리안 인터넷에 들어가 열 감기에 대한 모든 글들을 갈무리하고 옷을 벗겨 찬물 목욕 두 번,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어대고, 그래도 모질게 마음먹고 찬물 수건을 대고 해열제를 먹이고 겨우 잡았다. 서둘러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고 약을 타왔다.

온 종일 팔이 아픈 줄도 모르고 식은땀을 흘리며 자고 있는 아이를 끌어안고 있었다. 말마따나 차라리 내가 아픈 게 낫겠다.“

지금까지 20년을 통틀어 대단히 좋은 엄마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애를 썼구나. 그걸 알아달라든가 보상을 해달라는 건 아니야. 다만 네가 그만큼의 정성과 사랑으로 고이 키운 소중한 아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달라는 것, 그 정성과 사랑의 힘으로 엄마가 없는 어느 곳에서도 굳세고 씩씩하라는 것뿐!

혜준아, 언제라도 눈 감으면 그 모습 그대로인 내 아가야! 부디 이번 주도 조심조심, 무사히 훈련하렴. (7월 18일)

■ 눈물범벅 화생방 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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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과 관절에 좋지 않은 습관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머리맡을 더듬어 휴대폰을 찾지. 가장 먼저 확인하는 건 오늘의 날씨. 임실읍의 최고 기온은 31도, 과천보다는 1도 낮지만 그야말로 불볕더위로구나.

다시 몸을 빙글 돌려 모로 누워서는 다음 카페 ‘충경 새내기 부대’로 들어가 3중대 게시판을 확인하지. 오늘은 아침부터 ‘3중대 아드님 훈련 모습’게시판에 새 글이 떴다는 신호가 깜박거려서 부지런한 중사님이 또 뭘 올리셨는지 궁금해하며 들어갔어. 그러다가 벌떡, 불침이라도 맞은 듯 일어나 앉았지.

“현재 화생방 훈련 모습 동영상이 3중대 1소대 게시판에 있으니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이고, 혜준 내 새끼……!

한 며칠 괜찮아졌나 싶더니 엄마의 눈에 절로 눈물이 괴고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오는구나. 이럴 때는 아는 게 병이라고 공연히 나무위키에서 화생방 훈련, 그 중에서도 훈련의 ‘꽃’이라는 가스 실습에 대한 항목을 찾아 읽었나보다.

하긴 화생방 훈련 그 자체가 엄마가 상상하지도 못할 공포는 아니야. 엄마가 꼭 네 나이였을 때 겪었던 시대의 장면들은 가스실처럼 뿌옇고 매케하지. 하다못해 우리에겐 9초 안에 착용하면 안전한 방독면도 없었고, 1분만 버티면 무사히 빠져 나갈 수 있다는 약속도 없었지. 그저 미친 듯이 콧물을 흘리며 낯선 거리를 헤매고 다녔어.

이른바 386이라고 불린 우리 세대가 지금 와서 탐욕과 독선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게 참 놀라워. 풍요로운 호황기에 자유와 낭만을 만끽하고 형편없는 학점으로도 좋은 직장에 척척 합격했다고, 데모하고 돌아다닌 걸 대단한 경력인양 포장해 스스로가 내린 훈장을 목에 걸고 정계에 입문했다고, 자식 세대의 미래를 담보로 축재한 부모 세대에게 비난의 날을 세우기도 하더구나.

그래 우리 세대 또한 어김없이 꼰대가 되었구나! 이토록 가차 없는 세월의 장난 앞에서는 다시 프랑스의 작가 폴 부르제(Paul Bourget)의 말을 떠 올릴 수밖에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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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살아온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친절한 중사님이 올려주신 사진에는 무사히 훈련을 마친 아들들이 줄지어 가스실에서 나오고 있네. 들어 갈 때는 마치 지옥으로 끌려 들어가는 듯한 표정이더니만 나올 때는 하나같이 새로운 삶을 얻은 환희의 표정이야. 여유 있게 거수경례를 붙이는 훈련병도 있고 조교님들이 박지로 부어주시는 물에 얼굴을 헹구며 활짝 웃는 훈련병도 있구나.

방독면 속에서는 땀범벅 눈물범벅이었겠지만 일단 벗고 나서 시원하지? 세상의 모든 공기가 상쾌하고 달콤하지?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운 내 아들. 고생했어, 잘했어! (7월 19일)

◉ 그곳에서의 새로운 질서

■ 팔천 겁의 인연

‘국방 FM',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 오전 9시에서 11시까지 방송하는 <오늘도 좋은 날>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아들은 군 복무 중‘이라는 수요일 코너를 새로 만들었는데 그 첫 시간에 초대되어 다녀온 거야.

네가 입소하던 날, 그리고 훈련소에서 찍은 사진이 처음으로 인터넷 카페에 올라왔던 날 쓴 편지 두 통을 편집해서 낭독했어.

네가 보내온 효도 편지의 대목도 잠깐 소개했는데, 진행자와 작가가 네 편지를 보고 엄마와 아들의 관계가 남다른 것 같다며 부러워했어. 아무런 비밀이나 거리낌이 없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관계라는 게 느껴진다고. 그 말이 엄마에게는 무엇보다 큰 칭찬같이 들리네.

방송 중에 엄마가 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 아들이 좋아하는 노래 한 곡씩을 틀어 줬는데, 엄마의 신청곡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아들이 ‘덕질’하던 (물론 이젠 ‘탈덕’했다고 주장하지만) 걸 그룹 트와이스의 CHEER UP!

* 덕질 : 어떤 분야를 열성적으로 좋아하여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파고 드는 일

오는 길에 출판사 문학 팀장 P씨를 만났는데 그가 회사를 그만 뒀다는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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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난 5년 동안 엄마 책을 만들어 주신 분인데 함께 식사를 하고 헤어졌어.

조금은 우울해져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는 데 우편함에 낯익은 글씨가 적힌 흰 봉투 하나가 꽂혀 있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내 아들의 두 번째 편지! 네가 내게 띄운 <CHEER UP>의 수신호 같구나.

그런데 편지를 뜯어서 막 읽으려는 찰나, 별안간 장수군청의 문화체육 담당자에게서 영화 제작 예정인 소설 <논개>와 관련해서 연락이 왔어. 흔히들 진주의 기생으로 알고 있지만 소설의 주인공인 주논개는 장수 지방의 몰락한 양반가의 여식으로 자신의 사랑과 약속을 지키는 강건한 여성이지. 이야기 중에 무심코 아들이 전북 임실의 신교대에서 훈련 중이라고 밝혔더니 담당자분이 놀라며 막 웃으시는 거야. 그 분이 살고 계신 곳이 바로 35사단에서 15분 거리라고!

하루의 끝에 인연이라는 말을 생각해. 만났다 헤어지는 일이 우연 같지만 어쩌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때로 얼기설기하게 때로 chacha하게 얽혀 있는지도 몰라.

■ 부디 자중 자애하기를

오늘은 대서(大暑), 그야말로 큰 더위의 날이구나.

오늘부터 개인 화기 교육과 사격 훈련이 다음 주까지 진행된다니, 뜨거운 무기를 들고 익은 흙 위를 구를 아들을 생각하면 애가 타네. 너는 난시가 심해서 시력 교정한 안경을 쓰고도 영점 사격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그것도 마음이 쓰이고 말이야.

듣기로 삭격 훈련의 별칭이 PRI 라더라. 피나고(P), 알 배기고(R), 이 갈리는(I) 그 고된 과정을 부디 집중해서 안전하게 마치길 엄마는 빌고 또 빌 뿐이다.

하루하루가 황소걸음으로 간다. 느릿느릿, 하지만 우보천리(牛步千里)라, 우직한 소걸음이 천리를 가듯 분명히 흐르고 있다. 그런데 혜준, 엊그제 받은 두 번째 편지에서 넌 시간이 점점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라고 썼지. 조금은 의외였어. 그렇게 일찍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걸까? 엄마가 지난 편지에 쓴 대로 즐거운 시간은 빠르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지는 반면 힘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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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 시간은 아주 천천히 흐르기 마련인데 말이야.

“저도 모르게. 참 이상하게도. 여기 생활에 참 원활히도 적응하고 있습니다.”

아들, 너는 그곳에서 잘 생활하고 있구나. 그것도 너 자신이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워낙 군에 대한 이런저런 말이 많고 다녀온 사람들의 경험담도 천차만별이라, 겪기도 전에 먼저 긴장과 공포를 품게 되지. 하지만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렇듯 막상 닥치면 어떻게든 헤쳐 나갈 방편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야.

자대 배치를 받고 다시 새로운 환경에 처하면 훈련소와는 또 다른 힘듦이 생길지 모르지만, 일단은 첫 번째 시험지에 원활하게 적응 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고 대견스러워.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은 남을 모욕하거나 학대하거나 해코지하지 않기 마련이야. 내 아들 하나의 안위를 떠나 부디 세상의 아들들이 스스로 귀하고 높아졌으면 좋겠다.

세상에 의미 없는 일, 의미 없는 경험, 의미 없는 만남이란 없어. 이럴 때 의미는 ‘가치’라는 말과도 바꿔 쓸 수 있겠지. 아무리 의미가 없어 보여도. 의미를 잊고 매몰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마저 삶의 가치는 훼손될 수 없으니까. 부디 자중 자애하기를! (7월 22일)

■ 편지에 정성을 싣던 시절

드디어 세 번째 편지를 받았다. 두 번째가 좀 많이 늦었고, 이번엔 일주일 만에 왔네.

얼마 전까지 하루에도 수 차례문자며 전화며 인터넷 메신저를 주고받다가 갑자기 그 모두가 끊기니, 적막하구나. 하물며 작년 한 해 기숙사에 있을 때에도 매일 아침저녁 안부 인사를 나누고 주말마다 꼬박꼬박 집에 다녀갔는데.

이렇게 멀리서, 이렇게 오래 오래, 이렇게 소식이 끊긴 채 떨어져 지내는 건 엄마와 네가 태(胎)로 이어진 이래 21년 만에 처음이구나.

맞아, 옛날엔 이랬을 거야.

네게서 온 편지를 몇 번씩이나 거듭해 읽다가 문득 생각했어. 다들 이랬겠지. 며칠이나 걸려 이렇게 받은 편지를 읽고 또 읽으며 안타까워하고 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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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했겠지. 그때는 휴대폰도 이메일도 하다못해 이젠 골동품이 되어버린 삐삐나 유선전화마저 없었으니 말이야.

그러던 차에 가회동의 ‘북촌 박물관’에서 ‘간찰(簡札), 조선의 삶 이야기’ 전시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광화문에 ‘장예원 터’ 표석을 취재하러 나간 김에 겸사겸사 들렀어.

참고로 말하면 장예원은 조선 시대에 노비에 관련된 사무를 관장하던 관청인데, 임진왜란 때 선조가 한양을 버리고 도망간 뒤 노비들이 장예원에 보관된 노비 문서를 불태우려다가 경복궁꺼지 홀라당 태운 대화제의 발화점이기도 하지. 지금은 프렌차이즈 커피숍 앞 녹지에 달랑 자그만 표석 하나로 흔적이 남아 있지만.

작은 전시관에 소박한 내용이라서인지 휴일임에도 다른 관람객이 전혀 없어서 엄마 혼자 3천 원 입장료에 전시실을 독차지하고 20여 편의 간찰들을 찬찬히 둘러보았어.

‘간찰’은 대나무와 나뭇조각에 쓴 조선 시대의 편지를 가리키는 말이야. 나중에는 종이나 비단에 쓴 것까지 포함해서 말하게 되었지. 오늘 본 전시물들은 그중에서도 언간인데, 언문 그러니까 한글로 쓰인 편지를 가리켜. 간찰의 특징은 여성과 남성, 혹은 여성과 여성이 주고받았다는 것인데 어느 한 편이 반드시 여성이라는 사실이 특이해.

어머니가 아들에게, 아버지가 딸에게, 조카가 이모에게, 시조부가 손자며느리에게, 고모가 조카에게, 여동생이 오빠에게, 출가한 딸이 친정 어머니에게 ……. 한글 초서체로 쓰인지라 내용을 알아보긴 쉽지 않지만 도록에 설명된 대로 다들 소소한 일상의 편지들이야.

조선세대 그들의 편지 내용도 지금 엄마와 네가 주고받는 것들과 전혀 다를 바 없지.

어디라도 아플까 봐 걱정하고, 괜찮다고 안심시키고, 지난 편지를 받았다고 기뻐하고, 소식을 몰라 궁금해 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다니 안타까워하고, 볼 수 없어서 그리워하는…….

유일한 장거리 통신 수단이 편지뿐이었던 조선 사람들은 편자에 정성을 실었지. 마음을 온통 쏟았지. 그래서 지인이 사는 곳 부근으로 가는 인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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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으면 별일 없어도 반드시 편지를 쓰고 전했다네.

아무 때나 전화할 수 있고 문자와 메시지를 보낼 수 있고 심지어 화상통화까지 할 수 있는 작금에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그만큼이나 더 빨리, 정확히, 많이 전달하고 있는 것일까?

보는 듯 잊히지 아니하고, 눈에 가물가물 보이는 듯 섭섭합니다.

어느 때나 볼 지 몹시 슬프고 섭섭합니다.

1838년 무술년에 이(李)라는 어느 여인이 띄운 마음이 백칠십여 년 후의 마음과 다를 바 하나 없네. 오래 기다려 전하고 전해 받는 마음이 더 귀하게 느껴지는구나. (7월 23일)

■ 훈련소에서의 독서

벌써 그곳에서 세 번째로 맞는 일요일이구나.

입소식 날로부터 20일째, 수료식까지는 앞으로 18일이 남았으니 바야흐로 절반이 꺾인 셈!

물론 20일 이라는 시간이 아주 짧은 건 아니야. 그렇다고 또 엄청나게 긴 것도 아니지

하지만 예상컨대 너는 문득문득 20일 전의 너 자신이 까마득하게 느껴질 거야. 너무나 다른 환경 속에서 낯선 친구들과 너무도 다른 일과를 보내다보면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겠지.

그런 기분을 느낄 때, 아마도 고독하겠지, 늘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사람들과 함께 함께 움직이고 있음에도 뿌리칠 수 없는 고독, 세상으로부터 단절되고 소외되었다는 생각에 우울할지도 몰라. 바깥 세계와 분리되어 고립된 느낌, 세상으로부터 잊히거나 세상을 잊어가는 듯한 막막함이지.

그래서 엄마는 네가 훈련소에서 그 바쁜 와중에 1박 2일간 대여되고 매번 갱신해야 되는 번거로운 과정을 감수하면서까지 책을 빌려 읽고 있다고 했을 때 정말 다행스럽고 기뻤어.

처음으로 빌린 책은 <정글 만리>, 그리고 두 번째는 <피로사회>라고 했던가? 녀석아, 그 책들 다 우리 집에 있었단다. 엄마가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읽으라고 잔소리를 해도 눈썹하나 까딱하지 않더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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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일찍이 작가 아들은 당연히(!)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으리라는 편견에 넌덕스런 유머로 대응하곤 했지.

“책은 가장 많이 읽지 못했지만 책 제목은 가장 많이 읽었죠!”

군 생활 중에 책을 많이 읽고 싶다는 건 정말 고무적인 일이야. 앞으로 운전병으로 수송 업무를 수행하다 보면 자연히 대기 시간이 많이 생길 테니 부디 지금껏 제목만 보고 스쳐 지나갔던 책들을 마음껏 읽고 오길.

꿈이 없다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할 지, 뭘하고 싶은지 모르겠다고 토로하는 청춘들에게 엄마는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일로 두 가지를 권해.

책읽기 그리고 운동.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하는 것만으로도 청춘의 준비는 충분하다고 생각해. 기초가 튼튼하다면 그 위에 언제라도, 어떤 집이라도 지을 수 있지.

아들에게 어떤 책을 권해줄까. 자대 배치되면 뭘 보내줄까 즐거운 고민을 해봐.

입대하다가 중단한 <임꺽정>부터 읽고, 삼국지 연의, 토지, 태백산맥 등

그리고 달과 6펜스, 수레바퀴아래서, 대위의 딸, 아Q 정전, 금각사 등등

고전으로 논어, 맹자, 니체의 모든 책과, 스피노자의 에티카,

그리고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 난중일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등

세상에는 좋은 책들이 너무나 많아, 엄마가 권하거나 추천서 목록으로 제시된 것들이 아니더라도 네가 책을 읽다보면 스스로 독서의 길을 찾게 될 거야. 엄마의 가슴이 다 두근두근 하는구나!

천상천하 유아독존 ! 그건 본래 오만이 아니라 자존의 말이야. 너 자신을 지켜라. 너 자신을 놓치지 마라.

귀하고 높은 아들, 스스로를 잘 보살피길! (7월 24일)

2017.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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