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의 뒷모습(2)

2018. 7. 2. 13:46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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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의 뒷모습(2)

- 뒷 모습이 참모습이다 -

■ 정찬주 지음

2부 법정 스님처럼

■ 이불재(耳佛齋) 겨울

* 이불재 : 화순 쌍봉사 인근에 있는 소설가 무염 정찬주의 산방

행운을 부르는 행동을 두고 발복(發福)한다고 한다.

반대로 복을 까먹는 행동을 두고 복감(福減)한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발복과 복감의 갈림길에 서 있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입을 닫고 있어도 소용없는 일이다.

허튼 생각 하나만 해도 그것은 복감이다.

그러니 인생이란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연통과 소통

나의 기상 시간은 새벽 3시 반 전후다. 산자락 아래 절에서 도량식을 하는 목탁 소리가 들리기 전이다. 캄캄한 밤에 일어나 가장먼저 하는 일은 난로에 불쏘시개를 찾아 넣고 불을 지피는 일이다. 요즘 불쏘시개는 작년에 고추 줄기를 지지했던 대나무 토막들이다. 마른 대나무들은 연기가 나지 않을뿐더러 의외로 화력이 좋다. 산중 생활 17년째, 겨울철 난롯불 지피기는 하루의 첫쪽이다.

겨울철 산중 생활의 첫째 덕목은 진부한 표현이지만 유비무환이다. 준비를 잘하면 생고생하지 않는다는 만고의 진리가 아닐까 싶다. 초기 불경인 <숫다니파타>에 목동이 우기를 맞이하여 부처에게 ‘제 움막은 이엉을 덮었으니 신이여, 비를 뿌리려거든 비를 뿌리소서’라 말한 구절도 새삼 절절하게 떠오

른다. 이순신 장군이 육지가 아닌 강 초입에서 사변을 막아야 한다고 한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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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변(江口待變) 이란 방비계책도 같은 의미가 아니겠는가.

며칠 전 꼭두새벽이었다. 난로에 불쏘시개와 화목을 넣고 불을 지피는데 연기만 풀풀 났다. 전기 흡출기를 돌려 겨우 불을 살렸지만 이번에는 연통이 열을 받아 발갛게 달아올랐다. 나는 놀라서 일단 난로의 잔불부터 꺾다. 연재 원고 집필도 뒤로 미루었다. 뼛속을 찌르는 것 같은 한겨울의 매운 맛을 실감했다. 아침에 지인 두 사람을 급히 불러 연통 청소를 하면서야 그 원인을 알았다. 석탄처럼 고체화된 검댕이에 불이 붙어 연통이 달궈진 것이었다. 입동 무렵 전후로 미리 연통을 청소했어야 했는데 방관했다가 영하의 날씨에 벌벌 떨었던 셈이다. 검댕이 연통 속에 차츰 쌓여 연기기 빠져나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화재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야 깨달았다. 연통은 연기와 검댕을 밖으로 내보내는 소통의 통로인 것이다. 불통(不通)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아찔하게 실감한 순간이었다. 추위에 떨었던 것은 물론이고 내 산방마저 태워버릴 뻔했으니 말이다.

■ 무소유 길

지난 금요일에 목포를 다녀왔다. 목포시 주관의 북콘서트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북 콘서트의 주제는 ‘임진왜란과 목포의 고하도였다.’ 나는 강연시간 대부분을 정유재란 때 조선수군을 재건했던 고하도의 역사적 사실과 가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고하도의 역사가 사실이라 하면 판옥선 40척을 건조하고 군량미 2만 석과 수군의 숫자를 배 이상으로 확보한 것이 노량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었고, 내가 생각하는 가치란 고하도만의 임진왜란 역사를 관광 자원으로 만든다면 성장 동력으로서 목포가 도약하는 데 활로가 되자 않겠느냐는 나름의 판단이었다.

북 콘서트 강연 서두에 나는 법정 스님의 목포 인연도 소개했다. 목포를 오가면서 몇 달 전 목포시 공무원에게 ‘무소유 길’ 조성을 제안해 둔 바 있었으므로 북 콘서트 행사장에 온 공무원과 목포 시민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다. 시민들 중에서 특히 문화해설사분들이 눈을 반짝거렸다.

법1정 스님이 청소년기에 목포에서 살았다는 것은 대부분 모르는 듯했다.

“목포는 저와도 좀 인연이 있습니다. 저의 스승이신 법정 스님께서 청소년

시절을 목포에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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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스님은 해방이 되자 해남 우수영에서 목포로 올라와 정광중학교, 목포상고, 한국 전쟁 후 목포에 교정을 두었던 전남대 상대에 다니다가 1954년에 출가 하셨다.

스님은 <목포의 눈물>을 휘파람으로 멋지게 불기도 했고 깐깐한 성철 스님께서 <목포의 눈물>을 좋아하신다는 것을 알고 친근감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한 적도 있다.

나는 담당 공무원에게 몇 번이나 전남대 상대가 있던 구 제일여고에서 정광중학교 자리였던 오거리문화센터, 그리고 스님이 불심을 키웠던 유달산 정혜원까지의 거리를 ‘무소유 길’로 이름 붙여 전 국민에게 감동을 주었던 스님의 무소유 정신을 되새겨보는 시민운동을 벌이자고 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 정신을 수행자에게는 ‘나도 없는데 하물며 내 것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을 상대로는 ‘무소유란 아무 것도 갖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군더더기를 없애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 얼마 뒤 목포시 담당 공무원으로부터 목포시 문화유산위원회에서 ‘무소유의 길’을 목포시문화유산으로 가결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 살얼음판 위에 선 인생

산중 농부들은 내 산방인 이불재 일대를 바람단지라고 부른다. 바람이 많은 곳이니 추위도 이르다. 아래 절 연못보다 이불재 연못에 얼음이 더 빨리 언다. 겨울이 되면 평지인 광주보다 4도 정도 낮은 곳이다. 올 들어 처음으로 마당의 돌확에 살얼음이 끼어 있다. 살얼음을 보고 있으려니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살얼음판 걷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내 생각이지만 우리의 모든 행동은 두 가지로 나뉜다. 행운을 부르는 행동과 불행을 부르는 행동, 오직 두 가지뿐이다. 행운도 아니고 불행도 아닌 중간은 없다. 0.001퍼센트만큼이라도 한 쪽으로 쏠린다.

불가에서는 행운을 부르는 행동을 두고 발복(發福)한다고 한다. 행운이 꽃처럼 피어난다는 뜻이다. 반대로 복을 까먹는 행동을 두고 복감(福減)한다고 한다. 복을 더는 행동이니 불행을 자초하는 셈이다 지금 이 순간도 나는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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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과 복감의 갈림길에 서 있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 입을 닫고 있어도 소용없는 일이다. 허튼 생각 하나만 해도 그것은 복감이다. 그러니 인생이란 살얼음판 위에 서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사립문과 고드름

부산시 사상구에 거주하는 문화탐방팀 1백여 명이 내 산방을 다녀갔다. 폭설이 내린 뒤끝이라 눈길이 걱정 됐지만 버스로 온다고 해서 조금은 안심할 수 있었다. 내 산방에서 5리 일대의 응달은 한 번 눈이 내리면 며칠 동안 위험한 빙판길이 되기 때문이었다. 사상구에서 온 문화탐방팀원들은 계절마다 전국을 답사하는 모양인데, 이 또한 우리 선조들의 멋이었던 풍류가 아닐까 싶다. 걸림 없는 바람의 흐름처럼 뜻 맞는 사람끼리 가고 싶은 명산명소를 찾아다니는 답사도 우리의 문화전통인 것이다. 문화탐방팀 손님들이 내 산방을 보고 가장 흥미를 느낀 것은 사립문이었다. 사람들은 사립문 앞에서 기념사진부터 찍었다. 어린 시절에 보았던 대나무 문을 떠올리는 듯 했다.

추억을 되새기게 해 주는 것은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그 자체로 가치가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3년마다 썩은 대나무와 지지대를 바꾸어 왔지만 아직까지도 사립문을 떼지 않고 있다.

어느 날엔가 사립문에 느티나무로 만든 ‘집필중’이란 작은 피객패(避客牌)가 걸렸다. 글 쓰는 이의 산방이니 무례하게 방문하지 말라는 뜻의 나무패였다. 하긴 나도 오전 중에는 밀린 청탁원고를 해결해야 하니 웬만하면 손님을 받지 않는 편이다.

부산에서 온 문화탐방팀 손님들에게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 또 하나는 추녀 끝에 매달린 고드름이었다. 나 역시 땅꼬마 시절에 냇가 버들강아지 잔가지 밑에 달린 수정 고드름을 마치 얼음과자인 양 따먹은 기억이 있다. 내 산방이 북향집이기 때문에 고드름이 잘 열리는 것 같다. 햇볕이 잘 드는 남향집에서는 고드름이 금세 녹아버린다고 한다. 법정 스님께서 살아생전에 내 산방에 오셔서 “왜 북향집을 지었소?”라고 물으신 적이 있다. 고찰이 내려다 보이는 서향집을 짓지 않고 앞산이 첩첩한 북향집을 지었으니 의아하셨으리라. 상량문에도 나는 ‘백두산 천지를 향해 이불재를 앉히다’라고 북향집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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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 고찰을 내려다보고 사는 게 무례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랬습니다. 아래 절 풍경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에 피했습니다.”

“잘했소. 절이 보이게끔 지었으면 절을 지키는 경비초소가 될 뻔했어요.”

내가 솔직히 이렇게 고백하자 스님도 내 의도에 동조해 주셨다.

소유와 집착은 사랑이 아니다. 나는 바닷가에 통유리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의 취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나라면 5분 10분 걸어야만 바다가 보이는 그런 곳에 오두막집을 마련할 것 같다. 바다를 옆에 두고 사는 부산의 문화탐방팀 손님들이 모두가 내 말에 공감했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이제 내 산방의 겨울철 특산물이 있다면 추녀 끝에 매달린 동장군의 긴 칼 같은 고드름이 하나 더 추가되지 않을까 싶다.

■ 산중의 바깥식구들

내가 사는 산중의 농부들은 새나 곤충, 산짐승을 바깥식구라고 부른다. 바깥식구들이 가장 고생하는 시기는 겨울의 끝자락인 해동머리다. 이때가 되면 산새들의 먹이인 떫은 명감나무 붉은 열매마저 산자락에서 보기 힘들어진다. 밤나무 우듬지에 구멍을 뚫고 살던 날다람쥐는 아예 이사를 가고 없다. 산방 옆 밤나무 숲에 뒹굴던 밤톨들이 진작 떨어지고 없기 때문이다. 사람 못지않게 봄을 기다리는 생명이 있다면 아마도 바깥식구들일 터이다.

엊그제처럼 영하 10도 이하로 수은주가 떨어지면 산새 중에서 가장 작고 가벼운 딱새가 어김없이 먼저 반응한다. 혹한을 피해서 처마 밑에 난 환기통을 통해 거실로 들어온다. 딱새는 무단 침입이 미안한지 전등갓에 앉아 눈을 깜박거리며 개인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언제나 나를 경계하는 고라니는 먹이를 찾아 산방 앞산자락까지 내려와 운다. 사람이나 산짐승이나 추우면 배가 더 고픈 법이다.

며칠만지나면 만나게 될 바깥식구가 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살면서 얻은 경험칙인데 매화꽃이 필 무렵이면 개구리들이 여기저기서 합창을 시작한다. 개구리의 첫 소리가 얼마나 청아한지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매화나무가 개구리의 간절한 첫소리에 감응하여 화답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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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봉오리를 터뜨리는 것은 아닐까?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뒤, 비로소 깨어나 목을 튼 소리여서인지 절절하고 귀하게 들린다. 분을 이기지 못하고 막말을 해대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개구리의 첫소리다. 한마디를 하더라도 내면에서 깊이 삭혀야만 듣는 이가 마음으로 공감하는 법이다.

■ 한뿌리의 이파리들

내가 사는 산중은 새들이 계절을 알려준다. 해마다 찾아오는 철새가 무슨 달인지 알려준다. 그런데 이삼 년 전부터는 철새들의 출현이 들쑥날쑥 제멋대로이다. 휘파람새는 대개 2월 중하순 밤에 나타나 후이후이 하고 우는데 올해는 며칠 전 꼭두새벽에야 녀석의 소리를 들었다. 하도 반가워 자는 아내를 깨워 함께 들었다. 삼짇날 무렵에 날아오는 제비도 아직 소식이 없다. 산방 앞뒤 처마에 있는 제비 집은 비어 있을 뿐이다. 철새들이 계절감각을 잃어버린 까닭은 지구 온난화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때맞춰 출현한 철새는 노랑할미새다. 녀석은 무뚝뚝한 나보다는 아내가 더 좋은지 아내의 도예공방 처마에 둥지를 짓고 산다. 겨울잠을 자러 사라졌던 박쥐도 다시 나타났다. 가을까지 산방 안에서 사는 식구같은 존재다. 박쥐의 끼니는 모기와 파리들이다. 박쥐가 위엄을 보이자 파리들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손님들에게 늘 자랑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박쥐 덕분에 살충제를 사용해 본 적이 없다.

오늘따라 동백꽃 낙화가 선혈이 응고 된 것처럼 검붉다. 문득 ‘그대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라는 불가의 금언이 떠오른다.

어느 시민단체에서 ‘생명생존 선언문’의 초안을 써 달라고 부탁했다. 초인이 첫머리다.

“세상의 모든 생명은 한 뿌리입니다. 나와 이웃은 한 뿌리의 이파리들입니다. 한 이파리가 불행하면 다른 이파리도 불행하게 됩니다. 이것이 내가 행복해야 할 이유입니다. 따라서 나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내 생명을 지켜야 할 무한 책임이 있습니다. (……)” 이후 어떻게 수정 보완됐는지 모르겠다.

지옥이 저승에 있는 줄 알았는데 나이 들고 보니 그게 아니다. 자기 생을 반납하는 이들마다 절박한 사정이 있겠지만 위로의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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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새를 돌본 일이 있다. 산새는 솜털처럼 가벼웠다. 사람도 산새처럼 가벼위진다면 미망과 욕심을 내려놓는다면 바람처럼 걸림 없이 살 수 있을 텐데. 비바람에 피어난 봄꽃이 오늘은 비바람에 지고 있다.

■ 낙향한 작가의 예의

폭설이 내리면 산방 부근의 산길은 어김없이 끊긴다. 아침체조를 하는 셈치고 산방으로 오는 언덕길 한 쪽의 눈만 치우는데도 온 몸에 땀이 줄줄 흐른다. 과격한 아침체조는 더 이상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눈삽으로 적설의 무게를 경험해보니 그렇다. 힘을 무리하게 받은 오른쪽 무릎이 시큰 거린다. 만류해도 오겠다는 손님이 있어 언덕길이라도 터준 대가다.

그젯밤부터 오늘 새벽까지 비가 내려 응달의 눈까지 녹아 지금은 이른 봄 날씨처럼 포근하다 겨울비가 제설작업을 말끔하게 마친 셈이다. 성에 차지는 않지만 가뭄도 어느 정도 해갈되지 않았나 싶다. 산방 마당의 연못에도 제법 빗물이 고여 있다. 놀랍게도 마당가에는 푸른 싹들이 점점이 돋아 있다.

요즘 나는 대서소 직원처럼 고향 사람들이 요청하는 글을 거절하지 못하고 대행하는 경우가 많다. 탄광에서 희생한 광부들을 기리는 ‘위령비문’, 화순 읍내 공원의 조형물에 새겨질 ‘화순과 다산이야기’ 천년 고찰 쌍봉사에 세워진 ‘시판(詩板)’ 임진왜란 때의 ‘거금도 해전 승전탑 비문’ 등 고향에 뼈를 묻으려고 낙향한 작가로서 최소한의 기부이자 예의라고 생각해서 고료를 창구하지 않고 있다.

■ 이불재 봄

농부들은 동창이 훤해질 무렵까지 잠자던 나와 달리

새벽부터 다랑논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호미 한자루를 사와 방 벽에 걸어 두고

‘지금 나는 무엇을 하나?’라며 스스로 묻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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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텃밭의 호된 가르침

보름 전에 마당가 연못이 바닥을 드러내 물을 댔다. 그러자 겨울잠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이 어김없이 연못으로 모여 들었다. 알을 낳기 위해서다. 산방 부근에 사는 개구리들의 출생지는 아마도 마당가 연못이 아닐까 싶다. 연못에는 벌써 개구리 알들이 듬성듬성 무리지어 있다. 물이 나오는 소나무 홈통은 젊은 김목수가 선물한 수제품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그 농부 덕에 나는 착한 값을 치르고 텃밭을 장만했다. 그늘진 밭 윗부분은 차밭을 조성했고 밭이랑 끝에는 매화나무와 뽕나무, 블루베리 몇 그루를 심었다. 또 밭두둑에는 고구마와 고추 농사를 1년마다 번갈아 지어 자급자족 했으니 얼치기 농사꾼으로서는 최고의 텃밭인 셈이다.

다산 정약용이 강진 유배생활을 하면서 왜 굳이 텃밭을 일구고 땀을 흘렸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다신은 거처를 초당으로 옮기면서 텃밭을 하나 갖고 싶어 했다. 실학자 다운 계산도 있었겠지만 농사지으면서 자연의 섭리와 농부의 수고를 알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물론 다산은 선비의 책무를 다하고자 부지런히 강학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 결과 초당의 제자가 열여덟 명이나 되었다.

조광조가 능주로 유배 와서 사약을 받은 뒤 처음으로 묻힌 곳이 있다. 내 산방에서 1Km쯤 떨어진 서원터 마을이다. 옛날에는 조대감골로 불렸다고 한다. 그곳에 사는 80대인 구씨 농부도 나에게는 고마운 분이다. 내가 산방으로 오르는 길이 가파르고 구불구불하여 구 노인 밭을 사서 길을 넓혀야만 리어카라도 다닐 수 있었다. 구 노인은 선뜻 자신의 밭에서 길이 될 부분만 팔겠다고 허락했다. 결국 나는 길을 내야하는 밭 전부를 샀다.

그때를 생각하면 미소가 지어진다. 오늘따라 구 노인의 안부가 자못 궁금하다. 연못에 햇빛이 비쳐드는지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이른 봄에 듣는 개구리 울음소리는 곡진(曲盡 정성이 지극하다)하고 청아하다. 한겨울 내내 참았다가 터뜨리는 소리이니 절절할 수밖에 없으리라.

■ 소나무를 심은 뜻은

사립문 앞에 소나무 다섯 그루를 심었다. 나는 흐뭇하여 밤에도 달빛에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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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 다섯 그루 소나무를 바라보곤 했다. 마치 <세한도>에 나오는 추사 김정희가 그린 소나무 같기도 했다. 당나라 문인 유유주(柳柳州)는 그의 괴송서(怪松序)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나무는 바위틈에 나서 천 길이나 높이 솟아 그 곧은 속대와 거센 가지와 굳센 뿌리를 가지고 능히 추위를 물리치고 엄동을 넘긴다. 그러므로 뜻있는 군자는 소나무를 법도로 삼는다.

소나무를 선물한 P사장의 한마디는 내게 흥미를 더하게 했다. “저는 나무와 대화를 합니다.”그 한마디에 나는 ‘나무와 무슨 대화를 한단 말인가’하고 궁금해 견딜 수 없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조경사업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는 1978년 법대에 입학했다가 어느 정치인의 사건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밀항하여 동경의 한 농장에서 숨어 지냈던 것이 조경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수배가 해제되어 서울로 돌아와 조경에 뛰어들었다.

내가 일본에서 무슨 조경을 배웠느냐고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일본 조경과 우리나라 조경은 전혀 다르기 때문에 배울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무를 일부러 부러뜨리고 꺾어 분재를 만드는 그들의 방식이 마음에 와 닿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은 자연석만 해도 많이 쌓아서 조경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옛 선비들은 바위를 가져 오더라도 나무아래 몸 하나 쉴 수 있는 한두 개 정도만 놓았습니다. 강한자가 약자를 누르는 것 같은 힘을 과시하는 조경은 우리나라 조경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조경업자들이 일본을 따라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하면서 그는 우리나라 묘지문화에 대해서도 개탄했다.

언젠가 내가 새로 짓게 될 집의 정원에 대해 그에게 자문해 보니 대답은 명쾌했다. 정원을 일본식으로 집 앞에 만들지 말고 우리나라 방식대로 후원을 만들라고 해했다. 집 앞마당에 굳이 나무를 심는다면 왼쪽에 소나무 세 그루 오늘쪽에 감나무 한 그루, 측면에 매화나무 대여섯 그루를 심은 뒤 마당은 잔디로 포장하지 말고 마사를 깔고 아침마다 비로 쓸라고 했다. 빗자루 흔적이 선명한 마당에 물이 좀 뿌려진 풍경이야말로 조선의 진짜 마당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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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앗은 진퇴를 안다

산중에 살다 보니 날씨에 민감해진 것 같다. 아침에는 바람이 불지 않다가도 오후가 되면 샛바람이나 마파람이 옷깃을 파고든다. 그래도 부드럽고 축축한 봄바람은 곧 봄비가 올 것이니 농사일을 준비하라는 신호이기도 하다. 농부들은 다랑논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있다. 농부들의 쟁기질을 볼 때마다 금언 하나가 늘 떠오른다. ‘쟁기를 잡았으면 뒤돌아보지 말라’는 금언이다. 운전대 잡은 사람이 뒤를 보면서 앞으로 갈 수는 없을 터이다.

이미 고인이 된 농부 황 씨는 내게 여러 가지 추억을 남겨준 분이다. 나보다 예닐곱 살 위인 황 씨는 생면부지의 나를 ‘동상(동생)!’이라고 불렀다. 나는 황 씨 집 앞으로 난 산 길을 지날 때마다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황 씨는 일하다가도 달려와 나를 자기 집으로 끌고 가서 툇마루에 앉혔다. 그는 여느 농사꾼과 달리 꽃과 술을 좋아했던 것 같다.

술로 명을 재촉한 사람은 있어도 꽃으로 병이 깊어진 사람은 없을 것이다. 황 씨 역시 술병이 들어 칠십을 갓 넘긴 나이임에도 하늘이 데려갔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 중에 잊히지 않는 것이 있다. 농사에 얽힌 속담들이다.

‘제비와 스님은 올 때는 알지만 갈 때는 모른다.’

절골 마을에 터를 잡고 산 그가 제비와 스님들의 행동방식을 눈여겨보고 지은 말이다. 삼짇날 무렵에 오는 제비나 절에 오는 낯선 스님은 금세 눈에 띈다. 그러나 제비는 중양절(중구, 음 9월9일) 전후로 홀연히 사라지고, 스님은 예고 없이 절을 떠나버리곤 한다. 제비와 스님 모두가 몰종적(沒蹤迹)의 눈부신 경지다.

요즘 산방 안팎으로 나무들의 개화가 한창이다. 매화는 이미 낙화한지 며칠 됐고, 진달래꽃과 목련꽃이 만개해 불을 켜놓은 듯 산방 둘레가 환하다. 특히 사립문 밖의 자두나무 꽃이 팝콘처럼 일제히 터지기 시작했고 태산목 밑의 명자나무 꽃망울도 안간힘을 쓰고 있다. 꽃은 답답한 마음을 가시게 하는 치유력이 있다. 나로 인해 우울해 하는 아내의 마음을 풀어주는 것도 꽃일 때가 많다.

‘여보, 이리 와 봐요. 자두 꽃이 피었소.’ 이렇게 말을 걸면 마지 못한 척 나와서 꽃을 보며 웃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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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는 농사일하기 좋은 청명(淸明)이었다. 텃밭에 무슨 농사를 지을까 다급하게 궁리했다. 텃밭은 이미 흙을 뒤집어 두둑을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아내는 도예공방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밭두둑에 도라지 씨앗을 뿌리자고 거들었다. 별처럼 피어나는 도라지꽃을 보고 싶은 것이 아내의 속셈이었다. 나는 아내와 다르게 요량하면서 맞장구쳤다. 기관지는 물론 뇌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미세먼지로부터 내 몸을 지켜야겠다는 생각으로 도라지를 떠올렸던 갓이다. 아내가 낭만적이라면 나는 실용적인 생각을 한 셈이다. 산중에서는 병원이 원거리에 있으므로 민간요법 이라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 잡초와 약초

작년부터는 잡초들이 약초가 된다는 것도 알았다. 망초는 위염, 장염, 설사를 다스리고 질경이는 해열 거담이뇨를 돕고, 민들레는 천식, 신경통, 변비, 간염에 효험이 있는 약초라고 한다. 그러니까 쓸모 있는 어린 생명들이 나의 편견과 주관에 의해서 잡초로 불리며 홀대를 받았던 셈이다.

올 봄부터 나는 마당에서 자라는 잔디와 잡초를 차별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그것들이 웃자랄 경우에만 사람 이발하듯 예초기를 이용해 손봐주기로 했다. 그러자 뜻밖에 하나 둘 변화가 생겼다. 특히 위채 마당은 민들레가 삼삼오오 뿌리내리더니 아예 노란 민들레꽃밭으로 변했다. 이제는 민들레 꽃들이 다 지고 꽃대만 쑥 올라와 하안 솜사탕 같은 홀씨를 달고 잇다.

오늘은 저 민들레들이 생전의 박완서 선생을 생각나게 한다. 수년 전에 내 산방을 찾아와 하얀 민들레꽃 무리를 보시고는 서울의 당신 집에 심겠다고 캐 가신 적이 있다. 그날 선생의 모습은 영락없는 사춘기 소녀였다.

박완서 선생은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란 산문집을 내게 선물로 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산방 마당에서 한 때 구박 받았던 잡초들에게 사랑의 박수를 쳐주라는 당부인 것도 같다.

■ 차를 마시면 흥하리

어제 차나들이를 다녀왔다. 차나들이란 단어는 국어사전에 없지만 내가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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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써온 말이다, 봄나들이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해마다 곡우 무렵에 차나들이를 했는데 올해는 부처님 오신 날을 택일했으니 많이 늦은 셈이다. 신록과 녹음이 어우러진 산길은 벌써 초여름이 짱짱하게 들어서려는 느낌이었다. 순천 다보원에 이르자 제다는 이미 끝났고 차방을 조용했다. 주인인 다목(茶目) 유수용 선생과 부인이 나를 맞이했다. 하루 전만 해도 제자들이 작설차를 만드느라고 붐볐다는데 파장이었다.

때마침 내 산방에서 가까운 보성에서는 ‘다향대축제’가 열리고 있다. 이왕 차나들이가 늦어졌으니 이삼 일 후쯤 축제현장에 가서 보성차를 음미할 계획이다. 보성차의 역사는 깊다. 조선시대에는 갈평과 웅점에 차를 만들어 진상하는 다소(茶所)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때는 육조의 관원들이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차 마시는 시간인 다시(茶時)와 관청마다 차방인 다시청(茶時廳)이 있었던 것이다.

맑은 정신으로 일하자는 취지에서 다시를 두었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이 같은 다시를 복원한다면 추락을 멈추지 않는 나라의 격이 조금이라도 올라가지 않을까? 허백련 화백은 ‘차를 많이 마시면 나라가 흥한다’고 했고, 초의 선사는 구도의 길을 묻는 젊은 승려에게 ‘차를 마시면서 어찌 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 하는가!’라고 꾸짖기도 했다. 여기서의 도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나를 행복하게 하는 지혜’이다. 그러니 차를 마신다는 것은 음다흥국(飮茶興國)의 길이고 내가 행복해지는 일이 아닐까 싶다.

■ 이불재 여름

요즘 나는 슈바이처 박사가 한 얘기에 동감하고 있다.

‘나는 나무 잎사귀 하나라도 의미 없이 함부로 뜯지 않는다.

한줄기의 들꽃도 꺾지 않는다.

벌레도 밟지 않도록 조심한다.

여름밤 등불 밑에서 일할 때, 날벌레들이 날개가 타서 책상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기 보다는, 차라리 창문을 닫고 무더운 공기를 호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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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요한 아침식사

아내와 나는 이른 아침에 서둘러 산방을 나선다. 대원사 아실암에서 보성문인협회 회원 몇 분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7시 10분이지만, 먼저 도착하여 대원사 경내를 산책하고 싶어서이다.

대원사 가는 왕벚나무 길로 들어선다. 벚꽃이 만개한 왕벚나무 길은 상춘객들이 명소이다. 지척에 살고 있지만 몇 해 전에 와본 뒤 처음이다. 그날 인해(人海)에 떠밀려 벚꽃을 완상하지 못하고 사람구경만 하고 말았다. 지금 왕벚나무 길에 나무 그림자가 물무늬처럼 일렁이고 있다. 아침 해와 왕벚나무 가 만나 호젓한 길에 나무 그림자를 그려 놓았다. 벚꽃만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다. 나무 그림자들이 신비롭고 그윽하다.

대원사 아실암 뜰에는 벌써 아침 식탁이 차려져 있다. 대원사 회주 현장 스님이 찰밥과 아욱국, 부추간장을 내 놓았고 후식으로 딸기와 군고구마가 올라온 단출한 식탁이다. 보성문인협회 회장인 이남섭 시인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만남인데 낙향해서 처음으로 경험해보는 산사의 고요한 아침식사다. 히말라야 동쪽의 나라 부탄에 갔을 때 어떤 분이 내게 “부탄의 고요를 가지고 가십시오”라고 권유했던 말이 떠오른다. 아실암 뜰의 식탁에도 고요가 함께 하고 있는 듯하다. 선(禪)이란 거창한 것도, 관념적인 것도, 선객들의 전유물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글자 그대로 고요한 자리가 바로 선이 아닐까 싶다.

마침 대원사 티벳박물관에서는 ‘어린 왕자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일행은 현장 스님의 안내로 대원사 티벳박물관 지하 전시실로 내려간다.

전시실 입구에는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법정 스님의 편지가 소개되어 있다. 편지를 보면 법정 스님이 어린 왕자의 목소리를 어째서 ‘영혼의 모음’이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벽면에는 <어린 왕자>에 나오는 인상적인 구절들이 화두처럼 적혀 있다.

‘미래에 관한 한 그대의 할 일은 예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어딘가 샘물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야.’

너무 오래 전이 읽었기 때문에 기억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마치 누군가가 옆에서 두런두런 얘기해주는 것 같다. 동화의 구절들이 가지고 있는 내재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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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리라. 산문의 내재율이란 심장 박동 같은 것이 아닐까? 영혼을 일깨우는 율동이 아닐까? 그렇다. <어린 왕자>는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철학적인 장시(長詩)라는 생각이 든다. 60대 중반이 넘어서야 실감하는 발견이니 한참 늦은 셈이다. 산방으로 돌아오는 길의 나무 그림자가,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건네는 양 홀연히 입을 연다.

‘내 비밀을 알려줄게.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보는 거야.’ 눈 속의 눈으로 보니 나무 그림자에도 벚꽃이 피고 지는 듯하다.

■ 칡덩굴의 탐욕

아침나절부터 매미가 운다. 유난히 자지러지게 울기에 마당으로 나가본다. 방문 바로 앞의 소나무에 붙어 울고 있다. 한 뿌리에서 여섯 가지가 나와 자라고 있으므로 내가 육바라밀송이라고 명명한 소나무다. 그런데 매미는 왜 온몸으로 울까? 수년 동안 유충으로 땅속에 있다가 성충이 되어 땅 밖에서 사는 것이 매미의 일생이라고 배운바 있다. 소음이라고 느낄 만큼 시끄럽게 우는 매미이긴 하지만 시한부 삶이라고 생각하니 애처롭다. 또 달리 생각해보면 대견하기도 하다 찰나 같은 짧은 생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남김없이 전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알 수 없는 피부병으로 힘들었는데 이제는 살 것 같다.

풋고추를 따러 끼니때마다 풀이 무성한 고추밭을 드나들었다. 산방 앞 산자락에 이식한 배롱나무를 친친 감고 올라가는 칡덩굴을 보고는 맨손으로 제거 작업을 했던 것이다.

나무를 옥죄는 칡덩굴을 보고서도 외면할 사람이 어디 있을까! 칡덩굴에 붙들린 나무는 시들시들 고사해버린다. 칡덩굴에게 공존 공생이라는 것은 없다. 남이야 죽든지 말든지 나만 살지는 식이다. 장맛비가 그친 사이에 산자락을 가보니 또 다른 칡덩굴이 올 봄에 심은 수양벚나무에 기어오르고 있다. 수양벚나무가 숨이 막힌다고 아우성치는 것 같다. 풀독이 오르더라도 또다시 산자락으로 올라가 칡덩굴을 쳐내야겠다. 그러고 보니 상생에 반하는 악행이 산자락에만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 1004 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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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로 가기 위해 간단하게 점심을 먹는다. 소록도는 한센인과 성직자, 의사와 간호사, 자원봉사자들이 살고 있는 섬이다.‘작은 사슴 섬’인 소록도는 내 상방과 지척에 있으니 그분들이야말로 이웃사촌인 셈이다. 한센인에게 43년간 봉사하고 오스트리아로 떠난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렉 두 분은 이 지상에 잠시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 싶다. 20대 후반의 꽃다운 나이에 자원봉사자 간호사로 와서 70세가 넘어 떠날 때 두 분이 남긴 말은 단 한 마디였다. ‘헤어지는 아픔을 줄까 봐 말없이 떠납니다.’

제작년 가을 오스트리아 ‘코닉 추기경 하우스’로 강연하러 갔을 때 나를 초청한 분에게 마리안느와 마가렛을 뵈려고 하니 주선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러나 알프스 산 밑의 인스부르크 섬에 사시는 두 분과 연락이 닿았음에도 만남은 무산되고 말았다. 마가렛은 치매 치료중이었고, 마리안느는 나서기를 꺼려했기 때문이었다.

두 분은 수녀가 아니므로 수녀원 생활을 하지 못한 채 친척의 도움을 받고 있는 것 같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는데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런데 가믐 끝에 내리는 단비처럼 희소식이 들렸다. 고흥군에서 두 분에게 매월 1004달러씩 노후생활 안정자금을 지원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소록대교를 건넌 뒤 주차장을 지나자마자 왼편 언덕 위에 두 분이 살았던 단층 벽돌집이 보인다. 과묵한 낙락장송들이 묵상중이다. 소록도 본당 신도이자 ‘마리안느, 마가렛 사택’ 관리자인 서(徐) 스텔라님이 현관문을 열어준다. 신발장 위에 두분께서 바닷가를 산책하며 주워온 소라고둥, 조개껍질, 조약돌 들이 있다. 작은 거실은 외국인이 사용했던 공간이라고 믿기지 않는다.

벽에는 매화나무가 그려진 한국화와 ‘일소일소 일노일노(一笑一少 一怒一老)’ 라고 쓴 액자가 걸려 있다. 두 분이 남기고 간 카세트와 테이프 속에는 국악 명상음악도 들어 있었다.

두 분의 침실은 각각 세 평 정도다. 마리안느 방의 유리창으로는 낙락장송이 보이고, 마가렛의 창호에는 ‘하심(下心)과 사랑’이란 글씨가 붙어 있다. 이곳을 왕래하던 천등산 금탑사 비구니 스님이 써준 글씨라고 한다.

두 분이 살았던 집은 현재 헌신과 봉사의 삶을 기려 등록문화재 제660호로 지정돼 있고, ‘마리안느 마가렛 사택’이라는 패가 붙어 있다. 나는 이곳을 ‘천사의 집’이라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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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울 때는 더위 속으로

비가 2주 남짓 이삼 일이 멀다하고 내리기를 반복하고 나니 내 산방 마당은 풀밭으로 변해 버렸다. 텃밭으로 난 길도 개망초의 천국이다. 개망초 꽃을 감상한다는 것은 한가한 소리다. 할 수 없이 나는 이십여리 밖에 사는 김 농부를 전화로 부르고 말았다.

김농부와 나는 서로 좋아하고 존경하는 사이다. 나는 김 농부를 언제나 ‘김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소설가인 나보다 더 입담이 좋고 유머감각이 뛰어난 농부다.

김농부가 믿거나 말거나 장어와 미꾸라지 이야기를 한다. 장어나 미꾸라지가 미끄러운 까닭은 진흙 속에 살기 때문이다. 진훍을 뚫고 다니려면 미끄러워 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내가 맞장구를 치면 김 농부는 자신의 경험담을 더 들려준다. ‘새 머리'가 나쁜 줄 아는데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한다. 새들에게 먹이가 부족한 시기는 불볕이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인 모양이다. 김 농부가 어치나 물까치가 고추 속의 씨까지 파먹는 것을 보고 허수아비를 만들어 세웠더니, 새들이 허수아비 머리에 앉아서 어느 고추가 익었는지 살펴본 뒤 고추씨를 파 먹더란다.

“새 머리라고 욕하는 사람이 있는디 새들을 무시하는 말이그만요. 꿩 새끼도 영리해요. 상수리 잎사귀를 물고 도망가다가 그것으로 자기 몸을 숨기드랑께요.”

내가 풋고추들 틈에서 붉은 고추 몇 개를 땄다고 자랑했더니, 이번에는 김 농부가 맞장구를 친다. 요즘 날씨처럼 30도가 넘어야만 고추가 약이 올라 매워진다고 한다. 고추는 불볕더위와 맞서면서 비로소 고추다워진다는 것이다. 김 농부의 무료강의를 듣다가 나는 문득 중국의 동산선사가 남긴 일화를 떠올렸는데, 그런 내가 생뚱맞게 여겨져 웃고 만다. 어느 날 젊은 승려가 선사를 차아와 물었다.

“덥고 추울 때는 어찌해야 합니까?”

“더울 때는 더위 속으로, 추울 때는 추위 속으로 들어가라.”

더위를 피할 것인지, 더위와 맞설 것인지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태도와 몫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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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된 공생이란

내가 풋풋한 시절에 입산 출가하지 못한 까닭은 만성적으로 열뇌(熱惱 극심한 마음의 괴로움)가 많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대학시절에 송광사 방장이셨던 구산 노스님을 친견하러 갔을 때, 노스님께서 내게 출가하여 깨쳐보라고 강권하셨지만 내 머리 속은 온갖 잡년이 들끓었다. 지금도 나는 종교심이나 자비심이 넘치는 사람인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산중에서 10년 넘게 살다보니 미물들에 대한 애정이랄까, 외롭다 보니 마음이 좀 너그러워졌을 뿐이다. 내가 사는 이 산중은 나만 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미물들과 더불어 공생하는 터전이라는 사실을 절감한 것이다.

서울에서 살 때를 되돌아보면 마치 견성성불을 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때는 내 중심으로 하늘과 땅의 산 것들을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그 모든 것들이 나와 함께 살아가는 공동운명체라는 자각이 든다. 이러한 자각도 나를 눈뜨게 하고 변화시킨 체험중에 하나이다. 아무리 하찮은 미물이라 하더라도 살려고 하는 의지는 나와 마찬가지로 절실할 수밖에 없고, 그러기에 생명의 가치는 동등한 것이다.

요즘 나는 슈바이처 박사가 다음과 같은 얘기를 왜 했는지 동감하고 있다.

‘나는 나무 잎사귀 하나라도 의미 없이 함부로 뜯지 않는다. 한 줄기의 들꽃도 꺾지 않는다. 벌레도 밟지 않도록 조심한다. 여름밤 등불 밑에서 일할 때, 날벌레들이 날개가 타서 책상위에 떨어지는 것을 보기 보다는, 차라리 창문을 닫고 무더운 공기를 호흡한다.

내 산방에 와서 하룻밤 머물다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는 사람들에게 자연에 대해서 일부러 많은 얘기를 해준다. 어제 왔다 간 후배 부부에게는 어미꾀꼬리가 새끼꾀꼬리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얘기를 해주었다. 어미꾀꼬리 노랫소리는 기교가 넘쳐 구성지다. 트로트 가수 이미자 씨처럼 물 흐르듯 음을 자연스럽게 굴리고 꺾는 노랫소리다. 새끼꾀꼬리는 어미가 가르치는 발성연습을 한두 번에 따라하지 못하고 날마다 반복하고 있다.

처음에 나는 어미가 새끼 꾀꼬리를 가르치는 소리를 잘 구분하니 못했는데 이웃 농부가 알려주어 무릎을 쳤다. 아내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꾀꼬리 노랫소리를 듣는 것이 산중 생활 중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꾀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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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 이야기를 듣던 후배 부부의 감동에 젖은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삼국유사>에 나올법한 얘기가 아니냐며 꾀꼬리 얘기에 열을 올렸다.

■ 외로움이 힘이다

7월 들어 산중을 떠나 일박을 한 곳은 제주도뿐이다. 원하는 시간의 비행기표는 이미 매진이다. 할 수 없이 배편을 알아본 뒤 완도항으로 나왔다. 그나마 배편으로라도 제주도에 갈 수 있게 된 것은 조헌영 박사 덕분이다. 조 박사가 새벽같이 내 산방으로 승용차를 가지고 와 완도까지 운전해 준 것이다.

왈종 미술관은 이왈종 화백이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부어 개관한 미술관이다. 제주도에서 관립 사립 할 것 없이 드물게 흑자를 내는 미술관 중의 하나라고 한다. 내가 제주도로 가는 까닭은 왈종 미술관에서 전시하는 내 조카이자 미국인인 김미리 특별전 <바람과 돌과 해녀, 제주도 풍경들>을 보기 위해서다. 조카는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대학을 졸업한 이른바 전업 작가이다. 인터넷으로 우리나라 풍속화가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을 접하고는 매료되너 한국행을 결심했다고 한다.

왈종 미술관에 들러 서양화와 한국화가 섞인 듯한 이색적인 조카의 그림을 감상한 뒤 우리 일행은 바닷가로 나가 조카의 그림 속에 있던 바다를 실제로 마주쳐본다. 때마침 파도가 엄청난 에너지로 몰려온다. 방파제 위로 물보라가 분수처럼 솟구친다. 산중에 살던 사람으로서 가슴이 뻥 뚫리고, 돌진하는 파도의 기운이 온몸에 충전되는 것 같다. 숙소로 돌아와 휴식을 취하고 나서 이왈종 화백이 초대한 식사자리로 간다. 호텔의 기름진 음식보다는 일가를 이룬 이 화백의 진솔한 이야기 맛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제주에 처음 왔을 때 화실에서 열다섯 시간씩 작업했어요. 성직자들은 신도라도 있으니까 찾아오는 사람이라도 있잖아요. 나는 철저하게 혼자였고 외로웠어요. 화실에서 파리가 비상하는 것을 보고 외로움을 달랬지요. 나는 지금도 외로웠을 때 친구인 파리를 잡지 않아요.”

나 역시 산중생활의 가치를, 도시에서 잃어버렸던 외로움을 되찾은 것에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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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다. 외롭기 때문에 글 쓰는 양이 배로 늘어났고 자연의 미물들과 더 가까워졌으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외로움이 힘이 된다는 사실을 모른 채 두려워하는 것 같다.

■ 달을 구경하다

아직 주위가 컴컴한 새벽 5시다. 서산위에 보름달이 떠 있다.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던 별들도 또록또록 반짝이고 있다. 한가위가 하루 지났지만 달은 여전히 둥글다. 올해는 가을장마 탓에 보름달을 쳐다보지 못할 뻔했는데 참으로 다행이다. 달구경을 더 하고 싶어 손전등을 켜들고 아래 절까지 산책하고 돌아왔다.

우리말에 ‘돌아가시다’라는 낱말이 있다. ‘돌아가시다’는 ‘윤회하다’의 우리 말이다. 그러고 보면 죽음은 인생의 종착역이 아니라 간이역이 분명하다. 스님의 입적 무렵에 이르러 속가의 인척이 찾아와 ‘이제 스님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하는냐’고 묻자 스님께선 ‘불일암이나 길상사로 오라’고 하셨다. 실제로 불일암 우물이나 채마밭에는 스님의 그림자가 어른대는 것만 같다.

갑자기 어린 강아지 새끼들이 낑낑 대는 소리가 난다. 열이틀 전에 낳은 검둥이 새끼들이 어미에게 젖을 달라고 보채는 소리다.

어미 검둥이의 이름은 지장이다. 불가의 지장보살에서 힌트를 얻어 지은 이름인데, 세상의 모든 생명에게 자비를 베푸는 보살이 라는 그 의미를 떠올려보니, 작명을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검둥이는 헌신의 화신이다. 나의 수고란 고작 하루에 한두 번 밥을 주는 것뿐인데, 녀석은 종일 충직하게 내 산방을 지키면서 나를 볼 때마다 꼬리를 흔들며 반긴다. 개는 꼬리로 감정을 드러낸다고 한다.

여명에 드러난 검둥이 가족이 새삼 행복하게 보인다. 무슨 인연을 지어 내 산방에서 구물거리는지 어린 생명들이 신비롭다. 모든 생명은 살아 있는 그대로가 축복인데 오직 인간만이 생사를 구분지어 웃고 우는 어리석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서산을 다시 보니 어느 새 달이 지고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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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불재 가을

고개를 숙인 벼들의 향기는 코를 자극하는 꽃향기와 달리

은근한 매력이 있다.

향가로울 향(香)자는 벼화(禾)자에 날일(日)자의 조합이다.

가을 햇살에 익어 가는 벼들의 향기야말로

1년 농사를 지은 농부들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이다.

■ 도자기의 환골탈태

내 산방 옆에는 황토로 만든 아내의 가마가 있다. 불이 들어가는 봉통과 봉이 너구리굴처럼 생겼다고 해서 속칭 너구리가마라고 부른다. 봉이 일곱 개 정도면 용가마라고 하는데 안타깝게도 어느 지방에서나 차츰 사라지고 있다. 아내의 가마는 경주에서 도자기 공방을 운영하는 임병철 장인이 옹기도공 한 명을 내 산방으로 데리고 와서 보름동안 숙식하며 지은 것이다. 임 장인은 어린 시절에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괴산의 한 도자기 공방으로 들어갔다가 평생의 업을 얻게 됐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고백을 솜씨로 증명했다. 장인의 경지란 평생을 업으로 해야만 겨우 얻어지는 것이 아닐까? 줄자 하나 없이 눈썰미로 보름 만에 세 칸짜리 가마를 뚝딱 지어냈던 것이다.

가마에 유약을 바른 도자기를 넣고 불을 땔 때는 무엇보다 택일을 잘해야 한다. 비가 오지 않는 날이어야 하고 바람이 불지 않아야 한다. 습하거나 바람이 짓궂으면 불의 온도가 잘 올라가지 않는다. 이는 하늘이 도와줘야 하는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가마 안에 들어가는 기물은 형태적으로 온전해야 하고 장작은 2년 이상 마른 상태여야 한다. 날씨만 좋다고 도자기가 잘 구워져 나오는 것은 아니다. 불 때는 사람의 실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가마 안의 고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불을 넣고 빼는 능력이 기본인 것이다. 자동차 운전은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초보 딱지를 떼지만 가마의 불 때기는 다르다. 변인(變因)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무박 2일 동안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불을 때는데 그 중에서 불을 조절하는 사람을 불대장이라고 부른다. 아내 가마의 불대장은 내 산방에서 20분 거리에 사는 다헌도예 박 대표다.

가마 안에 들어간 기물은 다 살아 나오지는 않는다. 20~30% 정도의 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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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 찢어지거나 일그러지지 않고 나온다. 이를 불의 심판이라고 하는데 요변(窯變)에 의해 신비로운 보석 같은 빛깔의 기물도 더러 생긴다.

그러나 그런 귀한 도자기의 출현은 결코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다. 버려지는 수많은 기물 가운데서 불이 선물한 행운이기 때문이다.

■ 모든 생명의 가치는 같다

산중 농부들은 멧돼지에게 적의를 품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한 해의 고구마 농사를 망쳤는데도 “큰 것만 먹고 작은 것은 남겼그만요”하며 곧 잊어버린다. 울타리 밖의 주인이라 하여 산짐승의 기득권을 은근히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 속에 살다보면 엽기적으로 생긴 지네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하게 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소멸하므로 이것도 소멸한다는 연기의 도리가 시나브로 체화되기 때문이다. 하찮은 미물이라 하더라도 생명의 가치가 똑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부산 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에서는 너구리 한 쌍을 만났다. 나는 들에서 산으로 돌아가는 너구리를 발견하고는 녀석들이 통과하도록 속도를 줄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한 마리가 돌아서더니 들 쪽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나는 속도를 더 늦추며 너구리가 길을 통과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옆자리에 앉은 아내에게 우스갯소리를 할 만큼 여유도 있었다.

“길을 지나가다가 부부 싸움을 했나보다. 그러니까 한 마리는 산으로 가고, 또 한 마리는 들로 가는 거야.”

운전을 잘하여 너구리가 피해를 보지 않았다는 생각에 나는 아내와 함께 동화를 썼다. 너구리 한 쌍이 준 상상력을 발휘하여 즐겁게 운전하면서 산방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나중에, 뒤따라오던 부산 식구들은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고 입을 모았다. 앞서가던 내 차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자, 추돌사고를 일으킬 뻔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이중 추돌이 아니라 부산 식구들이 탄 승용차 뒤에서 오던 차와도 부딪칠 뻔했다며 내 운전 솜씨를 타박했다.

그래서 나는 나와 친해진 농부들이 즐겨 쓰는 속담 같은 말을 두어 가지 들려주어 그들을 위로했다. 힘 좀 쓰는 사람에게 모여드는 약삭빠른 이들을 ‘물 묻은 바가지에 깨붙이듯 한다’하고 신혼 재미에 푹 빠져 있는 사람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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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칼로 귀를 베어가도 모른다’고 하고 무엇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모습을 ‘쇠발 떨듯한다’라고 소개하자 모두가 “아 그렇구나”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사전에 있는 속담이 아니라 농부들의 삶 속에 살아 있는 싱싱한 말이기 때문이었다.

■ 은목서 향기에 가을이 깊어지네

중국 호남성과 강서성에 소재한 선종 고찰을 십여 군데 다녀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안국선원 선원장 수불 스님과 신도들의 순례에 동참한 선(禪) 여행이었다. 만리향(萬里香)이라고도 불리는 은목서 향기에 취한 여정이었는데 내 산방 뜰에도 등황색 꽃이 만발하여 그 이름처럼 그윽한 향기가 만리를 따라온 듯하다.

나흘 전이니까 지난 토요일이다. 나는 중국 여행의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내 산방에 들른 손님들을 맞이했다. 손님 중에는 해군 사관학교 생도도 있었다. 그 생도는 한 달 전에 이미 이메일로 질문 요지를 보내와 방문을 허락받은 풋풋한 24세의 청년이었다. 진해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오느라고 오후 5시 쯤 느지막이 찾아왔다.

나는 생도에게 생(生)이란 ‘파도치는 바다’이니 거친 바다를 건너려면 결코 바다를 피해서는 안 되며 무슨 일에 직면했을 때 내면을 성찰하는 데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내면을 관조하다보면 풍랑의 바다를 건널 수 있는 지혜로운 자아가 발현되고 나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임제 선사의 말을 밀려 ‘서 있는 자리마다 주인공이 되고 진리의 땅이 되게 하라’는 말로 대신했다. 무엇이 되기보다는 어떻게 잘 사느냐가 중요한데, 목적에 집착하지 않고 순간순간 온몸으로 사는 무위진인(無位眞人)을 외친 임제선사의 말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생도는 의문이 풀렸다며 감개무량한 얼굴로 일어섰고, 나는 캄캄한 밤에 30리 밖의 간이역까지 그를 보내 주었다. 마침 순천가는 막차가 있었던 것이다.

■ 고갯길이 인생길이다

나는 하루에 차를 몇십 잔씩 마신다. 손님과 날씨에 따라 발효차, 녹차,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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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 등 차 종류가 달라진다. 햇살이 쨍한 날은 녹차, 손님이 초보일때는 발효차, 날씨가 쌀쌀해지면 보이차를 마시는 것이다. 최근에 북인도 라다크를 다녀왔는데 고산병의 후유증을 차와 물로 다스리고 있다.

라(La)는 고개, 다크(dakh)는 땅이라고 한다. 라 다크 라는 단어가 왠지 인생길과 동의어 같다.

며칠간 비실거리다가 이제야 겨우 일어나 산책하고 있다.

며칠 동안 산책하지 못했는데 추수가 끝난 산중 다랑논들이 어느 새 텅비어 있다. 벼들이 누렇게 익은 다랑논들의 아름다움을 더 감상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무위자연의 황금계단을 보는 듯 스스로 행복해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개 숙인 벼들의 향기는 코를 자극하는 꽃향기와 달리 은근한 매력이 있었다. 나는 향기로울 향(香)자가 벼 화(禾)자에 날일(日)자의 조합이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탄성을 질렀다. 가을 햇살에 익어가는 벼들의 향기야말로 1년 농사지은 농부들에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선물이었다.

라다크의 중심도시 레(Leh)에 도착했을 때는, 해발 3,520미터의 고산 병 때문에 10분 간격으로 물을 홀짝홀짝 마셨다. 극도로 건조한 기후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일행 중 네 명은 병원으로 실려 갔다. 저혈압으로 고생해 온 사람들이었다. 나는 고혈압 환자였기 때문인지 그런대로 견뎠다. 물론 목욕하지 말 것, 식사는 적기 할 것, 보행은 천천히 할 것 등의 수칙을 잘 지키면서 다녔다.

그럼에도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강력하게 원했던 판공초로 향하는 것을 포기할 순 없었다. 판공초는 인도판과 아시아판이 부딪칠 때 히말라야 산맥과 함께 솟구쳐 오른 해발 4,350 미터에 위치한, 길이가 154Km나 되는 거대한 소금호수였다.

판공초를 가려면 해발 5,360 미터의 창리를 넘어야 하는 데 만년설이 쌓인 그곳을 지나가면서 몸과 의식이 분리되는 듯했다. 갑자기 두통과 멀미증세가 나타났다. 가지고 간 비상약을 이것저것 먹으면서 겨우 버텼다.

그럼에도 하늘호수 판공초가 눈앞에 나타나자 나는 감격에 겨운 나머지 엎드려 오체투지라도 하고 싶었다. 신성(神聖) 그 자체라고나 할까? 고개가 숙여지고 내가 얼마나 가벼운 실존인지 겸손이 절로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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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요즘은 아침 햇살이 산을 넘어오는 오전 9시쯤에 산방을 니선다. 산책길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바람에 뒹구는 낙엽이다. 밤새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음악이 있다면 그것은 낙엽이 뒹구는 소리일 것이다. 아무리 좋은 명곡이라도 여러 번 들으면 귀가 지치지만 파도 소리와 흡사한 낙엽이 구르는 소리는 들을수록 귀를 더 기울이게 만든다.

그런데 이제는 그 낙엽 뒹구는 소리가 내 가슴을 한없이 어둡고 무겁게 한다. 뜰에 떨어져 있는 낙엽만 봐도 다시 만날 수 없는 사람의 발자국처럼 나를 허전하게 만든다.

지금 나를 우울하게 하고 있는 지인은 유명을 달리한 화가다. 어느 미술 평론가는 그를 천재화가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젊은 나이의 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바로 서울로 올라갔다. 후배인 그 화가는 내가 샘터사에 다닐 때 그에게 삽화를 청탁 하는 등 그에게 도움을 주는 처지였다.

몇 년이 지난 뒤 그는 만학도로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미술대학으로 유학을 갔다. 한동안 소식이 없더니 어느 날 헐레벌떡 나를 찾아왔다. 사연인즉 러시아로 돌아가야 하는 데 비행기 표 살 돈이 없다는 거였다. 비행기 표 살 돈이 없다는 것은 당장 생활비도 여의치 않다는 말로 들렸다. 나는 두말없이 내 월급 가운데 3분의 2정도를 가불하여 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는 이후 유학을 마치고는 나를 찾아왔다.

그는 지금은 돌아가시고 안 계신 부친 사진을 보고 초상화를 그려 주었고, 몇 년 뒤에는 어머니의 초상화까지 그려주는 의리를 보였다.

서울에 도착하여 서둘러 병원으로 문상을 갔다. 이제 겨우 중학교 3학년인 그의 외아들을 보자마자 영정 속의 그가 야속했다.

친동생 같았던 이호중 화백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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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부 법정 스님과 나

■ 스님,고맙습니다

스님은 팟죽을 좋아하셨다. 병상에 누워 계실 때도, 어느 날 문득 팥과 밀로 쑨 팥죽을 찾으셨다. 스님께서 특별한 맛에 집착했다기 보다는 팥죽의 추억을 회상하셨으리라고 짐작된다. 쌍계사 탑전에서 은사 효봉 스님을 시봉하실 때 겨울 구례장을 보러나가 허기를 달래셨던 Em거운 팥죽, 아니면 불일암에서 정진하실 때 순천장으로 버스를 타고 나가 드셨던 팥죽이 그리우셨으리라.

스님이 병상에 계실 때 시봉했던 상좌들의 얘기 중에 가슴을 치는 얘기가 하나 있다. 죽음을 며칠 남겨두지 않은 극한 상황에서도,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고행상 같은 모습으로 병상에서 홀로 조석예불을 하셨다고 한다. 아는 것보다 행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말도 있듯, 정진을 멈추지 않는 여여한 모습으로 보임으로써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준 스님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수행자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스님은 유독 나에게 출가 전의 이런저런 얘기를 들려주시지 않았나 싶다. 지금 돌이켜보면, 당신의 삶에 알게 모르게 영향을 끼친 일화들을 잊지 못하고 무슨 계기가 있을 때마다 회상하시곤 했던 것 같다. 보통학교(초등학교) 1학년 늦가을에 마을 상회에서 할머니가 스님의 생일선물로 옷 한 벌을 사주시고서 추첨 경품을 받게 되어 스님이 경품을 뽑았는데, 갖고 싶었던 사발시계대신 원고뭉치를 받았다는 이야기, 목포상고를 다니면서 야간에 잉크냄새가 코를 찌르는 인쇄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이야기를 하시면서 스님은 ‘글을 쓰는 것이 내 운명이었던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중학교 때는 고향 우수영으로 내려가 선착장에서 작은 아버지의 생업인 여객선 배표 파는 일을 도왔다는 얘기, 납부금이 제때 올라오지 않아 우수영으로 달려가 운 적이 있다는 얘기도 들려주셨다.

물론 스님께서 당신의 어린 시절 얘기를 전부 들려주신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수행자이기 이전에 한 실존인간으로서 고독의 그늘이자 우수의 뿌리가 스님에게도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스님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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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때 선친께서 폐질환으로 돌아가신 뒤부터 겪었을 아버지 부재의식이나 고등학교 3학년 때 발발한 한국전쟁은 스님에게 깊은 내상(內傷)을 입혔던 것 같다. 동족상잔의 전쟁 중에 어머니가 늦둥이 여동생을 임신하여 집에 돌아오자,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스님은 방문을 걸어 잠그고 사흘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작은 아버지가 방문을 부수고 스님을 불러내 야단을 쳤는데, 그때 스님이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화는 스님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사촌동생에게 들었다.

스님은 ‘맑고 향기롭게‘ 모임이 만들어지기 전에는 강연을 다니시지 않았으나 가끔 예외가 있었다. 어머니들의 모임이라든가, 어머니들을 위한 행사에는 가능한 한 거절하지 않고 참석하셨다. 더불어 여성이나 어머니를 위한 잡지 같은 데서 청탁을 해 오면 뿌리치지 않고 집필에 응하셨다. 그 이유가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어쩌면 스님의 내면 깊숙이 어머니와 어린 동생에 대한 참회의식이 자리 잡고 있지 않았을까?

내가 스님의 제자가 된 때는 수행자로서 황금기라고 여겨지는 스님의 불일암 시절이다. 어느 해 단오 전날에 불일암에 가서 하룻밤 자고 난 뒤 스님으로부터 삼귀오계(三歸五戒)와 무염이란 법명을 받았다. 스님께 삼배를 하고 나자, 내 인생의 좌우명 같이 여겨지는 ‘세상에 살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내려주셨던 것이다.

며칠 전에 어느 원로 문인이 스님을 가리켜 ‘선(禪)과는 거리가 먼 분이다’라고 평가하는 것을 보고 나는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분이 말하는 선이, 선방의 울타리에 갇혀 화두를 들고 ‘이뭣고?’에 집중하는 것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경허선사 같은 거리낌 없는 무애행을 가리키는지 내가 정확히 헤아릴 길은 없지만, 모름지기 선이란 자기 개성을 활짝 꽃피우는, 그래서 자기만의 향기를 드러내는 일이 아니겠는가! 스님은 언제나 자기다움을 강조하셨다. 매화는 매화가 되어야지, 장미꽃이 되어선 안 된다고 하셨다. 자기 개성을 활짝 꽃피우는 사람이 되어야지, 남을 닮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다.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스님이야말로 소유의 감옥에 갇힌 중생들에게 무소유의 할을 하고 방망이를 휘두른, 스님 식대로 사신 선승이 아닐까 싶다.

스님은 중국에서 건너온 ‘조사들의 화두(공안)’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으셨다. 삶에 활력을 불어 넣는 활구(活句)가 아니라 사구(死句)로 보시는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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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스님의 일상 속에서 순간순간 마주치는 대상으로부터 화두를 찾는 것이 분명했다.

스님은 강원도 오두막에 계시면서 ‘맑고 향기롭게’운동을 더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김영한 보살의 시주를 받아 길상사를 창건하셨다. 스님은 길상사를 자신의 재산으로 등기하지 않고 송광사 말사로 하여 평생의 지표로 삼아온 무소유의 삶을 견지하셨다. 스스로 약속하신 대로입적하시기 전까지 단 하룻밤도 길상사에서 머문 적이 없었다. 스님의 소유가 아니라는 상징이자 스님 스스로 길상사의 방 하나 소유하지 않겠다는 다짐이었다. 길상사 극락전에서 법문하기 위해 오시는 날에도 차를 마시기 위해 주지실 방을 잠시 들르셨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더러 스님을 수필 쓰는 문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스님에게 글은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님께서 하루에 한두 시간 글 쓰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수행자로써 정진했다는 것을 모릅니다. 관념적이고 맹목적인 선을 거부하시고 선방 울타리를 벗어나 ‘내 손발이 상좌’라며 홀로 수행하셨다는 것을 모릅니다. 저는 스님이야말로 한국의 수행자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말없이 보여준 분이라고 믿습니다. 스님께서 보여주신 맑은 모습 속에 한국 불교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스님.

저는 스님의 부끄러운 제자입니다. 다만, 스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을 보여 스님의 가시는 발걸음이 가볍도록 발원하겠습니다. 그것이 스님을 떠나보내는 제자들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40대에 미리 써 놓았던 유서 한 대목을 읽으며 기도 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생에서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 모국어를 더 사랑하고 출가 사문이 되어 못다 한 일들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스님! 가시는 발걸음 부디 가벼우소서. <화엄경>의 선재동자도 만나시고, 어린 왕자가 사는 별나라에 가시어 원(願)을 이루소서. 한반도에 다시 오시어 못다 한 일들, 이루소서. 정찬주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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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신문사 문화부에 추도사 원고를 보내고 난 사흘 뒤였을 것이다. 송광사 다비장에서 편백나무 향기 같은 맑고 향기로운 법향을 남긴 채 스님의 육신은 마침내 시간과 공간을 버렸고, 나는 산방으로 돌아와 사립문을 닫아 걸고 스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소설 무소유> 집필에 들어갔다.

불일암을 다시 찾아간 날 수선화 향기가 은은한 이른 아침이었다.

이른 아침인데도 한 부부가 불일암으로 올라와 툇마루에 앉아 있었다. 스님이 생각나 서울에서 내려왔다는 60대로 보이는 부부였다. 뚱뚱한 남자는 다리가 불편한데도 불일암까지 올라와 스님의 흔적을 찾느라고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거사님, 저기 뜰에 법정스님이 산책하고 계시네요. 잘 보시면 보일 겁니다.”

입적하시기 전 외가 사촌 누님이 병상을 찾아와 이제 어디서 만날 거냐고 묻자, 스님은 불일암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스님의 원력이 깃든 그 말씀을 지금도 믿고 있다. 스님의 숨결이 스민 불일암 경내에 핀 꽃 한 송이의 향기도 믿는자의 몫이 아닐까 싶다. 스님이 졸참나무로 만든 ‘빠삐용 의자’도 보인다. 스님이 영화 <빠삐용>을 보고 이름지어주신 의자이다. 빠삐용이 절해고도에 갇힌 것은 인생을 낭비한 죄였다. 나는 주춤주춤 다가가 눈길을 줬을 뿐 감히 스님이 남긴 의자에 앉지 못했다.

문득 후회되는 일 하나가 가슴에 사무친다. 병이 깊어져 몹시 수척해진 스님께서 블일암 달을 보고 내려가라 하셨는데 내가 밤눈이 어두운 탓에 해 떨어지기 전에 산방으로 돌아오고 만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밤눈뿐만 아니라 마음눈도 어두운 나다. 그날이 불일암에서 스님을 마지막으로 뵙는 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스님 뵙고 싶습니다.

- 끝 -

- 2018. 7.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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