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16. 15:55ㆍ독서후기
한 때 소중했던 것들(2)
■ 이기주 지음
■ 취향은 영혼의 풍향계
몇 해 전 대학 선배의 부친상 소식을 듣고 상갓집을 찾았다. 선배는 가슴팍을 치며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사연 없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나는 선배와 아버지 사이에 그간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새벽 무렵, 눈물이 고갈된 선배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음식을 영정사진 앞에 올려놓고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어. 그런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더라…….”
선배는 사춘기 때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진 뒤부터 마음의 담을 쌓았고 그 너머를 살피지 않았다. 담과 담 사이로 매번 침묵이 흘렀다. 침묵은 더 깊고 어두운 침묵을 이끌어 냈다. 그러다보니 서로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헤아릴 수 없었고, 당연히 음식에 대한 기호도 몰랐다는 것, 선배가 세월 속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다 꺼내 놓았을 때 나는 아무 대꾸를 하지 않은 채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쭙잖은 위로로 선배의 마음을 감싸주긴 싫었다. 감싸질 리도 없었다.
창밖에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빗소리와 선배의 흐느낌이 밤새 뒤섞였는데, 내 귀로는 두 소리의 차이를 명확하게 분별할 수가 없었다.
취향은 저마다 다르다. 더욱이 그것은 단기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세월이 녹아서 사람의 마음과 몸에 스미는 것이다.
취향은 ‘영혼의 풍향계’이자 인간 그 자체이다. 타인의 취향을 알아가는 것은 한 개인을 알아가는 것이며, 그 과정에서 취향을 존중하는 자세야말로 사랑을 표현하는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는 광고 문구에 불과하다. 사랑한다면 묻고 답해가면서 서로의 취향과 기호를 헤아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랑한다면, 상대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라면 우리는 더욱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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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만과 편견
오만이라는 빗장으로 잠겨진 마음의 문은 세상에서 가장 열기 어려운 문이다. 어떤 열쇠를 꽂아도 그 문은 절대 열리지 않는다. 또한 편견이라는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 지은 마음의 집은 세상에서 가장 좁고도 날카로운 집이다. 사람 한 명 겨우 다리를 뻗을 수 있는 그곳엔 아무것도 들여 놓을 수 없다. 몸을 조금만 뒤척여도 집 곳곳에 달린 칼날에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그곳에 집주인은 그 누구도 초대할 수 없다. 오만과 편견의 집은 언젠가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집이 된다.
■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
봄기운이 이완과 수축을 반복하며 갈팡질팡한다. 달력을 보니 오늘은 절기상 청명이다. 맑을 청(淸), 밝을 명(明), 본래 하늘이 맑고 밝아지는 시기인데, 하늘을 올려보다가 ‘청’을 도로 삼킨다. 미세먼지가 달려들어 코와 허파로 들이닥칠 기세다. 하늘을 가득 메운 미세먼지도 문제지만 마음에 스며드는 먼지야말로 골칫덩이다.
마음에 먼지가 끼는 순간, 온 세상이 뿌옇게 보인다. 마음이 가려지면 눈도 가려진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사람과 사물을 응시하지 못하고 타자의 장점은 애써 무시한 채 단점을 찾느라 혈안이 되기도 한다.
남의 흠결만을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내’ 삶이 아니라 ‘남’의 삶을 좇으며 시간의 바깥쪽에서 겉돌면서 평생 제 삶을 허비하기 때문이다.
타인이 쓴 책을 평가하는 데는 말을 아끼지만, 내 책에 대한 타인의 평가에는 가급적 귀를 기울이려 한다. 사람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같은 책을 읽어도 책에 대한 느낌은 제각기 다를 수밖에 없다.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종종 내 책에 대한 리뷰를 찾아보곤 한다. 혹평을 남긴 독자의 불로그를 방문해 “아, 그렇게 받아들이셨군요. 요 다음에 기회가 되면 너른 시선으로 찬찬히 음미해주셨으면 합니다. 책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댓글을 적는 날도 있다. 하지만 어쩌다 내 가족과 독자를 비하하는 문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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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벅된 리뷰를 발견하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나았을 법한 일이 있다.
그저 세월이라는 망각의 강물에 떠내려가도록 방치해야 하는 일들이.
나는 언젠가 술자리에서 꽤 의미 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평소 알고 지내는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병원을 찾는 사람의 심리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의자 요법’이라는 걸 동원한다고 했다.
“의자요법이라고요? 그게 뭐죠?”
“간단해요. ‘나를 칭찬하는 의자’ ‘나를 비난하는 의자’, 이렇게 두 개의 의자를 준비한 뒤 번갈아 앉아보게 합니다. 그런 다음 무대에 오른 연극배우처럼 방백(傍白)을 하게끔 유도합니다.”
“방백이라…….”
“일기장에 적을 만한 내밀한 이야기를 중얼거리듯 내뱉게 하는 거죠. 이때 어떤 사람은 ‘비난 의자’에선 많은 말을 쏟아내는 반면 ‘칭찬 의자’에 앉으면 입도 뻥긋하지 못합니다. 그런 자신을 스스로 자책하면서 주르륵 눈물을 흘리는 경우도 있어요. 문제는 그들 중 일부가 꽤 공격적인 방식으로 분노를 밖으로 쏟아낸다는 겁니다.
타인의 성과를 깎아 내리거나 비난하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기도 하죠. 왜냐고요? 그래야 덜 불안하거든요.“
“아, 사람의 공격성이라는 게 노여움이나 분노뿐만이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장막을 찢고 나온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일정부분 그렇다고 생각해요. 어떤 공격성은, 내면을 향하던 분노가 외부로 향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여기 계신 여러분은 칭찬 의자에 앉아 자신을 마음껏 칭찬할 수 있나요? 스스로에게 어떤 말을 들려주시겠어요? 한 번 생각해보세요.”
■ 그릇
세상에는 자기 그릇만큼만 겨우 담아낼 수 있는 있는 것이 있다. 라는 말은 참으로 온당하다. 아무리 많은 물을 길어서 ‘나’라는 그릇에 갖다 부어도 도무지 양이 늘어나지 않는 것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당최 채워지지 않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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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에겐 지식일 수 있을 테고 누군가에겐 지혜일 수도 있을 텐데, 만약 그것이 사랑이라면 그건 정말 슬픈 일이다.
■ 진실에 가까운 말
서점을 배회하다가 천양희 시인의 시집을 우연히 집어들었다.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이라는 시가 있는 페이지를 읽다가 잠시 눈을 감았다. 서걱거리는 시집의 낱장을 어루만지며 한참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시를 재구성하면 이런 이야기다
어느 날 남편의 실직 소식을 전해들은 여인이 휴- 하고 한숨을 내쉰다. 고개를 숙인 엄마의 슬픈 낯빛이 낯설었는지 다섯 살짜리 딸이 느닷없이 묻는다.
“엄마 지금 고뇌하는 거야?”
고뇌라는 말에 놀란 여인이 되묻는다.
“뭐라고? 고뇌가 뭔데? 단어의 뜻을 알아>”
잠시 뒤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아픈 문장이 꽃잎 같은 아이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응, 알아, 고뇌는 말이지, 마음이 깨어지는 거야.”
별것도 아닌데 가슴을 저릿하게 만드는 말이 있다. 평범한 얘기 같은데 마음을 사정없이 후벼 파는 말이 있다. 표현이 뾰족해서가 아닐 것이다. 말에 담긴 속뜻이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렇다 진실은 사람의 마음을 어루만지기도 하지만, 마음속을 싹 도려내거나 요란하게 들쑤셔놓기도 한다.
진실을 감당할 준비가 늘 되어 있는 사람은 없다.
세상에서 가장 예리한 언어는 더러운 욕설이나 큰소리로 내지르는 말이 아 니다.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쉽게 말해주지 않는 진실에 가까운 말, 사실이나 이치에 어긋남이 없는 말이 가장 날카로운 언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 보건데.
가장 진실한 말과 문장에 내 마음은 가장 깊게 베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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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꼭 가야만 하는 길
통찰(洞察)은 관찰력으로 사물을 꿰뚫어 본다는 듯이다. 한자 통(洞)에는 ‘밝다’ ‘명백하다’라는 뜻 외에도 ‘공허 한’ ‘텅 빈’등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동굴을 뜻하기도 하는데 그땐 ‘동’으로 읽는다.
이는 의미 있는 통찰을 얻으려면 컴컴한 동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가 있다. 여기서 ‘동굴’은 물리적인 공간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세상의 시끄러움과 번잡함에서 벗어나 스스로 나아가 행하는 자발적인 자기소외 혹은 자발적인 고립의 상태까지 아우르는 의미가 있다.
이 같은 이유로 나는 집필 기간에는 술 약속을 거의 잡지 않는다. 글을 쓰고 책을 엮는 과정에서 홀로 생각하고 문장을 매만지는 시간을 확보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삶이 힘겹고 마음이 지치는 날 술잔에 쏟아 붓는 건 술만이 아닐 것이다. 근심과 절망, 욕심과 상처 따위가 한데 녹아들어 술잔에 담기기 마련이다. 그렇게 쓰디쓴 술을 한 잔 들이켜면 목에서 한바탕 눈보라가 몰아친다.
마음이 힘든 날 술을 마시면 술집의 공기를 타고 번지는 비릿한 안주 냄새는 물론 취한 말과 말들이 부딪치며 빚어내는 소음에도 물구하고, 취하기는커녕 오히려 정신이 바짝 든다.
‘인생엔 취(醉)해야 취(取)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은데 취(取)하고 나면 끝내 취(醉)하게 되는 것도 많구나.’
앞에서 오는 돌을 맞으면 ‘운명’이고, 뒤에서 오는 돌을 맞으면 ‘숙명’이라는 말이 있다. 산다는 것은 그렇게 예측이 불가능한 것이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가슴에 사연 하나 품은 채 삶의 무게를 견디다보면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여러 갈래의 길을 걸어야 한다.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인 길을 걷기도 한다. 절대 가선 안 되는 길로 접어들 때도 있고 꼭 가야만 하는 길 앞에서 걸음을 옮기기 못하고 머뭇거리기도 한다.
여기서 ‘꼭 가야만 하는 길’은 본성의 길이다. 본성의 길이란 사람이 본디부터 가진 성질과 기질이라는 돌들이 깔린 길로 어쩔 수 없이 이끌려 빨려 들어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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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자사는 중용(中庸)에서 “내려준 것을 본성이라 하고,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고 했다.
■ 당신을 향하여 기울어 질 때
추분이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시기다. 한쪽이 차오르면 다른 한쪽은 가라앉는 게 자연의 순리다. 이제 여름은 가을에 자리를 내어줄 것이고 가을의 표정은 낮보다 밤 쪽으로 기울어질 것이다.
나는 ‘기울다’라는 동사가 참 마음에 든다. 감정과 생각이 균형을 잃고 어느 한 쪽으로 비스듬하게 낮아지거나 비뚤어질 때 ‘기울어졌다’라는 말을 우린 즐겨 사용한다.
기울어지는 일은 위태롭지만 좋은 것이다. 감정이나 생각이 특정한 쪽으로 쏠리면 관심이 생겨나고, 진득하게 관심을 기울이면 상대와 대상이 특별해 보이기 시작한다. 적어도 난 그랬던 것 같다. 겉으론 평범해 보이지만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절절함이 배어 있는 것이 많다.
특별함은 사건과 사람에 의해 번쩍하고 솟구치는 것만도 아니다. 아파트 화단에 예쁘게 핀 꽃을 넋을 잃고 바라볼 때, 꽃이 진 자리를 슬며시 쳐다볼 때. ‘쓸모 없음’이 ‘쓸모 있음’의 배경이 될 때, 불행한 일이 적은 것이 행복임을 깨달을 때, 인생을 바꾸는 일보다 일상을 정돈하는 일이 가치 있다고 느낄 때, 누군가 곁을 떠나간 뒤 그 빈자리에 새로운 관계의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낄 때, 삶은 우리에게 특별함이라는 선물을 선사한다.
■ 슬픔과 기쁨의 물결
‘죄송(罪悚)’이라는 말은 죄스러울 정도로 송구하다는 뜻이다.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의 인터뷰를 보면 “우선 국민 여러분께 죄송합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눈물에 젖어서 축 늘어진 선수들이 “죄송해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텔레비전 너머로 바라볼 때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젓곤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소진해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인 선수의 입에서 왜 그런 표현이 삐져나와야 하나. 혹시 우리 사회가 그들에게 그런 말을 내뱉도록 강요한 것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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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데 우리가 일조한 적은 없었나?
스포츠도 그렇고 인생도 그렇고 소위 금메달이라 부를 만한 탁월한 성과를 획득하는 일은 평생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한 사건이다. 그런 탁월한 결과와 수준에 도달하려면 실력뿐 아니라 운까지 따라주어야 한다. 커다란 결과가 꼭 커다란 행복을 담보하는 것도 아니다.
구절양장처럼 휘어진 삶의 여정을 걷다보면 슬픔과 기쁨은 부지불식간에 서로 섞여드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슬픔이 기쁨 속으로 곧게 퍼져나가기도 하고 기쁨이 슬픔을 빠르게 빨아들이기도 한다.
슬픔과 기쁨의 물결은 비가 그치면 해가 뜨고 겨울이 가면 봄이 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밀려오고 또 밀려나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 대갚음
누군가에게 당한 상처를 그대로 대갚음하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정작 복수의 칼을 휘두르는 순간, 날카로운 질문 하나가 가슴을 후려친다.
‘내가 당한 것을 상대에게 똑같이 되돌려주는 방법은 세상에 없는 게 아닐까?’
■ 침묵과 말 사이
영어 단어 ‘silent(침묵을 지키는)’는 ‘listen(귀 기울이다)’과 배열이 다를 뿐 철자가 동일하다.
타인의 말을 잘 듣기 위해선 입을 닫고 침묵할 줄 알아야 한다. 말 잘하기 위해선 상대의 가슴에서 드밀고 올라오는 것들을 경청할 줄 알아야 한다.
어쩌면 침묵은 말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말이 너무 크고 무거워서 모든 소리를 삼켜버린 상태가 아닐는지.
단언컨대 침묵은 여백의 다른 이름이다.
우린 여백으로 말을 하고, 여백으로 그림을 그리고, 여백으로 글을 쓴다.
말은 침묵을 통해 깊어진다.
말은 침묵 다음에 생겨나는 세계다.
문제는 침묵과 말 사이에 여러 걸림돌이 잠복해 있다는 사실이다. 몇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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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꼽으면 첫째, 인간관계라는 게 녹록하지 않은 탓에 매번 침묵만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어떤 침묵은 방관자적 침묵 혹은 냉소적 침묵으로 비치기 마련이다. 그런 침묵은 대인관계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둘째, 인간관계에서 무조건 솔직하고 투명한 자세가 늘 좋은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살다보면 속내를 다 털어 놓아야 신뢰가 쌓이는 경우가 있지만, 반대로 덜 얘기해야 유지되는 관계도 부지기수이다.
우린 그저 ‘다’와 ‘덜’사이에서, 그 경계를 배회하며 살아갈 뿐이다. 말과 침묵 사이에서 우린 모두 정처 없는 존재들이다.
■ 가을에 가을하다
오늘은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다는 상강(霜降)인데, 아침부터 가을비가 내렸다. 시내에서 일정을 마치고 일산으로 이동하는 길에 불쑥 핸들을 꺾어 행주산성 쪽으로 향했다. 안 가본 길로 들어서니 못 보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길에 붙들려 있다가 길가에 차를 대고 슬며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귀가 더 활짝 열려 평소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려오곤 한다.
그래서인지, 늦가을 비에 스산하게 젖은 가로수 길을 지나는데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잎이 서로 부대끼며 일으키는 미묘한 소리가. 누군가 여름 동안 나무 사이에 숨겨 놓았던 바람을 한꺼번에 풀어놓자, 봉인에서 해제된 바람이 이파리 사이를 비집고 나오며 줄기와 나무를 마구 흔드는 것 같았다.
상강을 지나면 기온이 뚝 떨어진다. 가로수에 필사적으로 매달려 있던 이파리는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한 잎 두 잎 길바닥에 내려앉는다. 옷깃을 여미고 잔뜩 웅크린 채 거리를 걸으면 붉은 잎이 떨어진 자리에 눈길이 머문다.
흙으로 돌아가려는 낙엽이 발끝에 닿을 때마다 땅에서 바스락 소리가 솟아난다. 이를 보고 느끼는 우리의 마음은 가을보다 더 붉게 물들어간다.
가을이라는 단어 자체는 그리 슬픈 말이 아니다. 명사 ‘가을’엔 추수와 가을걷이의 의미가 담겨 있다. ‘가을 하다’라는 동사도 존재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이를 검색하면, 벼나 보리 따위의 농작물을 ‘거두어들이다’라고 나온다.
그러니 가을은 경치를 즐기기만 하는 계절이 아니라 여름내 여문 곡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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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두어들이면서 겨울에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가을엔 우리의 몸과 마음을 휘감았다가 더 이상 만질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만남과 스침도 이번이 마지막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면 도무지 그립지 않은 것이 없다.
■ 늧
‘늧’이라는 단어가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은 일의 근원, 빌미 등을 나타내는 말인데 ‘이번 일은 늧이 좋은 것 같지 않다’ ‘늧이 사납다’ 등의 용례로 쓰인다. 조짐이나 예감에 비해 훨씬 부정적이 의미가 녹아 있다. 그런데 난 이 단어를 접할 때마다 이상하게도 거무칙칙한 ‘늪’이 연상된다.
전에 어느 후배가 말하길, “제가 최근에 어떤 여자를 알게 됐어요. 그런데 요즘 취업 준비하느라 경황도 없고 해서 마음을 주지 않으려 애쓰고 있어요”라고 했다. 난 내 애정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정말 아무 생각 없이 대꾸했는데 후배는 흠칫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렇구나 좋아하지 않으려 애쓴다는 건 이미 좋아하고 있다는 거지? 이미 늪에 빠진 것 같은데.”
“네? 그, 그게…….”
◉ 3부 떠나보내다
■ 더 애타게 그리워했기에
늦은 밤이었던 것 같다. 서강대학교 근처에서 이십대 초반 즘 돼 보이는 남녀가 손을 맞잡고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면서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어색함과 애틋함이 동시에 감돌았다.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 하나로 포개져 너울거리는 둘의 그림자에는 그리움의 흔적이 비쳤다.
‘아, 싸워서 한동안 연락을 하지 않다가 다시 만난 걸까? 지금 화해하려는 건가?“
그들의 뒷모습을 먼발치에서 바라보다가 궁금증 하나가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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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누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밀었을까?’
순간 다음과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어느 쪽이 먼저 만나자는 말을 했을까? 모르긴 몰라도 더 그리워한 사람이겠지. 닿을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사람을 향하여 몸과 마음을 뻗어가며 밤을 지새운 사람일 테지, 매일매일 깊고도 긴 울음을 토해가면서…….’
■ 춤과 멈춤
춤을 뜻하는 영어 단어 ‘dance'는 ’tanha'라는 산스크리트어(고대 인도어)에서 유래했다. 이를 ‘탄하’로 읽곤 하는데 여기엔 ‘생명의 욕구’ ‘삶의 기대’ 같은 뜻이 녹아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린 삶의 한가운데서 살아 있음을 느낄 때 끓어오르는 흥을 느끼고 몸과 마음을 흔들어대며 각자의 방식으로 춤을 추는 것이다.
반대로 살맛이 안 나고 흥이 사라지면 우린 모든 동작을 중단한다. 춤을 멈춰버린다.
■ 라라랜드 그리고 윤회
윤회는 한자로 바퀴 윤(輪)과 돌 회(廻)를 쓴다. 수레바퀴가 끊임없이 회전하듯 다른 세상에서 생사를 거듭한다는 뜻인데, 이를 일부 종교학자는 ‘함께 흘러가는 관계’정도로 해석해서 영어로 옮길 때 ‘Flow Together'로 적기도 한다.
숱한 만남과 이별 속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영원을 기약하는 인연만이 윤회가 아니라, 누군가와 부단히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함께 삶이 흘러간다면 윤회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랑은 인간에 의해 정의될 수 없는 유일한 단어인지 모른다.
사랑은 그냥 사랑이 아닐까.
“사랑이 어떠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보다 “어떠한 것도 사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편이 차라리 온당하지 않을까.
그 누구도 사랑을 함부로 규정할 수 없다. 사랑에 대해 “이미 충분히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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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사랑을 제대로 모르고 명확히 말할 수 없는 탓에 우린 평생 사랑을 찾아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게 아닐는지….
다만 나는 사랑, 하면 산책을 떠올리곤 한다. 남이 만들어 놓은 멋들어진 산책로를 편하게 걷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만들어 낸 풍경 속을 느릿느릿 걸어 들어가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일을 생각한다.
■ 인연 혹은 악연
나는 사람과 인연에 대해 생각했다. 세상 모든 관계는 인연의 결과인지 모른다. 살아가면서 우린 수많은 인연을 맺고 또 반대로 풀어야 한다. 다만 어떤 인연은 쉽게 종결되지 아니한다. 마지막 순간, 쉽게 되돌아서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을 마주한 채 뒷걸음질해야 겨우 멀어질 수 있는 인연이 엄연히 존재한다.
불교에서는 사람의 인연을 겁(劫)이라는 단위로 설명한다.
1겁은 1천년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커다란 바위에 구멍을 내는 데 걸리는 장구한 시간이다.
겁의 인연설에 따르면, 현세에서 모르는 사람끼리 옷깃 한 번 스치려면 전생에서 수백 겁이 쌓여야 한다. 그리고 하루 동안 길을 동행하려면 2천 겁, 한 민족으로 태어나려면 4천겁, 한 마을에서 태어나려면 5천 겁, 부부의 연을 맺으려면 7천 겁이 전생에 누적되어야 한다.
■ 기억의 후각
마음이 허물어질 때마다 바다를 찾는다. 바다라는 거대한 거울에 날 비춰보곤 하는데 그때마다 세상에서 더렵혀진 마음이 씻김을 받는 것 같다. 고인 물이 흐르는 물을 만나 깨끗이 정화되는 느낌마저 든다.
갑자기 밤바다가 보고 싶어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차와 버스를 번갈아 타고 이동하면서 붉게 물들어가는 서녘 하늘을 바라봤다. 이동의 과정은 기억의 산파임이 틀림없다.
창밖을 보고 있자니, 잠복해 있던 추억 속 장면들이 불쑥불쑥 떠올라 칼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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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예리하게 가슴을 베고 지나갔다.
해가 질 무렵 여수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었다. 대낮의 햇살이 종적을 감추자 어둠이 밀려왔다. 창문을 비스듬히 젖혀 달빛을 불러들였다. 바람결에 창문이 덜컥였다. 염분을 담뿍 먹은 바닷바람이 달을 밀어내는 모습과 파도가 일렁이는 광경을 내려다보면서 나는 한 때 소중했던 사람과 보냈던 시간을 떠올렸다.
그녀와 나는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볼 때가 많았다. 서로 어깨에 기댈 때 느껴지는 기척을 감지하고, 서로의 말이 아닌 침묵을 헤아리면서 하늘과 강과 바다를 응시하는 순간이 잦았다.
언젠가 한번은 한강 둔치에서 바람이 그려내는 물결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흐릿한 서울의 하늘빛을 고스란히 머금은 거무스름한 한강 위로 5월의 햇살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가 노크하듯 말했다.
“강이나 바다를 남보다 오래 바라보는 사람은 떠나보내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래.”
난 그녀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슬쩍 웃어보였다.
추억은 한 사람이 아니라 반드시 두 사람의 시간이 보태어질 때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그리고 사랑은 상대방이 달빛을 따뜻하게 여기는지 그렇다면 난 어떠한지를 헤아리는데서 시작한다는 것을…….
문득 지난날을 되짚었다.
어느 날 파도처럼 불쑥 내게 밀리는 것은,
마음 안에서 퇴적과 침식 작용을 일으킨 뒤
어느 날 홀연히 떠나가곤 했다.
소중한 사람이나 존재는
우리 곁을 떠날 때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소중한 무언가를 내게 남겨둔 채 떠나거나
내게서 소중한 무언가를 떼어내 가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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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사람의 기억 이라는 것이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라, 세월의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가다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은밀한 어딘가에서 촘촘한 그물망에 걸려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지난 감정과 먼 시간 속으로 사라져간 사람이 마음속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건, 그 망(網)에 걸려 있던 입자들이 물살에 떠내려가지 않기 위해, 다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게 아닐는지.
몇몇 학설에 의하면 연어는 태어난 곳의 냄새를 기억한다고 한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후각에 의지해 고향으로 되돌아와 알을 낳는다는 것이다. 어쩌면 인간의 기억이야말로 그렇지 않을까. 모든 기억엔 연어처럼 후각 능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쉽게 잊을 수 있는 사랑은 없다. 그저 높다란 빌딩이 밤하늘에 떠 있는 달을 가려버리는 것처럼, 하나의 사랑이 다른 사랑을 덮으면서 서서히 옛 사랑을 잠식해 가는 것일 뿐, 세월이라는 파도에 마모되면서 기억의 두께가 엷어지는 것일 뿐이다. 무겁디무거운 미련을 한 움큼 쥔 채 누군가를 기억에서 덜어내는 일이 아프고도 더딜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애써 지켜야 하는 것이라면
11월의 끝자락이다. 창틈으로 스며드는 공기에 싸늘함과 쓸쓸함이 가득하다. 가을과 겨울이 교차하는 시기인 11월이 사라질라치면, 현관문을 열고 배웅이라도 나가야 할 것만 같다.
11월은 측은하다. 너무 빨리 달아난다. 마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어떤 이들은 11월을 가리켜 ‘계절의 환승역’이라고 말한다. 일리가 있다. 이 시기를 통과할 즈음 우린 가을이라는 열차에서 내릴 채비를 한다.
며칠 전엔 푹신하게 밟히는 낙엽을 따라 걷다가 집 근처 꽃집을 찾아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고요한 향기를 뿜으며 꽃들이 먼저 말을 걸어왔고. 이내 꽃집 주인이 “오늘은 어떤 꽃을 드릴까요?”하고 말을 걸었다. 나는 “찬찬히 둘러볼게요”하고는 작은 꽃집을 어슬렁거리기 시작했다.
꽃을 구경하던 중년 여성이 꽃집 주인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꽃은 예쁜데, 줄기에 뭔 가시가 이렇게 잔뜩 달렸어요? 가시로 꽃을 감싼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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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꽃에는 대개 가시가 있잖아요. 그리고 가시가 처음부터 가시였던 것도 아니고요.”
“네? 가시가, 가시가 아니라니?”
“사막에서 주로 자라는 식물들, 특히 선인장의 가시는 본래 가시가 아니라
이파리였어요. 사막에서 수분이 빠져 나가는 것을 최소화하기 위해 잎이 변
하거나 퇴화하면서 Qy족한 가시가 된 거죠.”
"그렇구나 그럼 오늘은 적당히 가시가 돋아 있는 꽃으로 주세요. 장미도 좋아요.“
■ 호칭을 빼앗길 때
내가 새롭게 알아가는 사람보다, 나를 알게 되는 낯선 사람이 훨씬 빠른 속도로 늘어나는 요즘이다. 그래서 이름 뒤에 ‘작가’가 덧붙여진 ‘이기주 작가’라는 호칭을 날이 갈수록 자주 듣고 있다.
다만 한편으론 사회적, 직업적 맥락으로 호명하지 않고 그냥 “기주야”라고 부르면서 나를 있는 그대로 지켜봐 주는 사람의 비율이 줄어드는 것 같아서 아쉬운 생각도 든다.
호칭이라는 게 참 묘하다. 호칭은 관계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거나 관계가 멀어질 때에도 우린 자연스럽게 호칭의 변화를 겪게 된다.
사랑의 생성 과정에서 호칭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움트면 기존의 호칭은 밖으로 밀려나고 새로운 호칭이 유유히 걸어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생겨난 새롭고도 특별한 호칭은 서로의 마음 구석을 환하게 비추고 마음과 마음 사이에 다리를 놓는다. 정서적 울타리를 친다고 할까. 호칭이라는 나뭇가지를 엮어 두른 울타리 안에서 서로를 안고 또 그렇게 앓기도 하면서 함께 뛰놀고 노래하다보면 사랑은 더욱 단단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라지지 않는 감정은 없는 법이다. 그리고 사랑이 죽는 순간, 대개 호칭도 따라 죽는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어머니는 ‘여보’라는 호칭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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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당시만 해도 어딘지 모르게 달착지근한 여보라는 단어가 입안에서 빙빙 돌기만 할 뿐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어머니는 날 낳고 부터는 ‘기주 아빠’라고 아버지를 부르기 시작했지만 9년 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그마저도 부를 수 없게 되었다며 아쉬워하곤 하셨다.
“그때 말이야, 쑥스러워도 ‘당신’이라고 자주 불러줬어야 하는 건데….”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버리는 일은
한때 내게 속해 있던 것이
아득한 곳으로 떨어져 나가는 일과 같다.
마음의 일부가 찢어지는데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누군가 내게 이별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정확히는 잘 모르겠지만 호칭이 소멸되는 일인 것 같아요”하고 답하겠다. 서로의 입술에서 서로의 이름이 지워지는 순간 우린 누군가와 헤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덧없이 속절없이, 어찌할 수 없이.
■ 이분법의 감옥
고성장 시대에 우리의 정신을 달궜던 ‘하면 된다’라는 구호는 ‘되면 한다’로 대체된 지 오래다. 이제 성공은 우리 사회에서 극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과실이다. 때때로 성공에 대한 강박감은 내적인 성장과 정신적 성장을 가로막기도 한다.
어쩌면 우린 나이를 먹고 세상을 살아갈수록 스스로 지어올린 감옥에 갇히는 존재인지 모른다. 편견의 감옥, 자기혐오의 감옥, 두려움의 감옥처럼 그 유형도 다양할 것이다.
그중 가장 경비가 삼업해서 탈출하기 어려운 감옥은 ‘세상의 모든 것은 희거나 검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간주하는 이분법의 감옥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일도양단하듯 두 쪽으로 정확히 가를 수 있는 것이 몇이나 되겠는가. 아마 손에 꼽을 정도로 드물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그런 것이 있다손 치더라도, 서로 다른 양쪽의 경계는 아주 밀접하게 맞닿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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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법은 삶의 관점을 제한한다. “이 친구는 안 좋은 사람인데, 저 친구는 나쁜 사람이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일수록 타인의 다양한 면을 바라보지 못한다. 또한 삶의 상태를 불행과 행복이라는 잣대로만 판단할수록 삶에서 자신만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기 마련이다.
■ 그리운 것의 속성
새로운 것은 그립지가 않다.
그리운 것은 대개 낡은 것들이다.
혹은 이미 오래전에 내 곁을 떠난 것들이다.
■ 꽃이 지는 속도로 잊을 순 없기에
평안북도 정주 태생의 시인 백석을 가리켜 어떤 이들은 ‘우리 문학의 북극성 겉은 존재’라고 입을 모은다. 백석이 남긴 작품은 그리 많지 않지만, 생생한 북방의 언어로 민족 정서를 토속적이면서도 세련되게 표현한 그의 시들은 지금도 밤하늘의 북극성처럼 드높은 곳에서 반짝이며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당대 최고의 모던 보이로 통했던 백석의 삶은 굴곡진 현대사의 축소판이다. 1930년 19세의 나이로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등단한 백석은 일본 유학을 다녀와서 기자와 교사로 일하다 돌연 만주로 유랑을 떠났다.
백석이 스쳐간 사람과 사랑은, 그의 시에 오롯이 스며들었다. 특히 백석과 자야의 인연은 워낙 널리 알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다. 이십대 중반 쯤 백석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김진향이라는 기생을 만나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그녀에게 이백의 시 <자야오가 子夜吳歌)에서 따온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준다. <자야오가>는 전장으로 떠난 낭군의 무사귀환을 바라는 여인의 애달픈 노래, 그래서 였을까, 집안의 반대로 부부의 연을 맺지 못한 백석과 자야는 전쟁 후 남과 북으로 갈린 두 나라에서 서로를 그리워만 하다가 끝내 재회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한다.
자야의 백석을 향한 그리움의 무늬는 해를 거듭할수록 진하게 각인 됐던 것 같다.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면 자야는 음식을 아예 입에 대지 않고 곡기를 끊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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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자야는 사업으로 번 천억 원대의 재산을 시주해 지금의 길상사를 건립하게 했다. 내 놓은 돈이 아깝지 않느냐는 질문이 그녀를 향해 날아들 때마다 단호하면서도 처연한 얼굴로 답했다.
“그 돈은 백석의 시 한 줄만도 못합니다.”
어떤 이는 이별이 사랑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랑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별이 사랑과 삶을 흘러가게 한다는 것. 반은 맞다. 장기적으로 보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백석과 자야처럼 속수무책으로 이별의 아픔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공감을 얻기 어려운 이야기다. 아름답기만 한 이별은 없다. 모든 이별은 눈물을 거느린다. 우린 사라지는 대상을 끝내 잡지 못할 때 굵은 울음을 토해낸다. 눈물로써 이별을 애도한다.
한 사람을 행해 줄달음치던 감정은 샘물과 같아서, 그 사람이 사라지거나 사랑이 소멸해도 곧장 죽지 않는다. 이별의 순간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사람처럼 사랑의 끄트머리에 필사적으로 매달린다.
때론 가슴 안쪽에서 어디로 빠져나가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린다. 그러다 길을 잃고 버둥거리거나 눈물을 찔끔 거린다. 뚫고 나가고 싶어서, 사랑하던 사람을 향하던 관성이 남아 있어서…….
문득 상상한다. 만약 사랑에 의해 들려주고 싶어할까. 어쩌면 우리 귀에 손을 모으고 이런 문장을 읊조릴지도 모르겠다.
“글쎄요 사랑은 변하지만 사랑했던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죠. 그래서 우린 세월이 지나도 과거의 사랑을 더듬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참,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꽃이 피는 속도로 시작된 사랑이라고 해서, 꽃이 지는 속도로 잊을 수는 없다고 봐요. 우린 너무 빨리 잊는 것 같아요, 너무 황급하게.”
■ 어둠을 매만지는 일
우린 때때로 ‘많은 것’에 절망하면서도
‘어떤 것’에는 희망을 걸먼서 살아간다.
희망은 분명 삶을 지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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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게 하는 힘이야말로
희망의 원형질이다.
다만 앞날에 대한 기대와 설렘만이 희망을 구성하는 재료가 아닐거란 생각이 든다. 희망은 때론 과거에서 온다. 내 과거가 헛되지 않았다는 믿음이 마음 한 구석에 꿈틀거릴 때 희망의 싹이 자라기 시작한다.
끄트머리라는 단어에는 끝이 되는 부분이라는 뜻 말고도 일의 실마리.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가끔은 과거의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생각과 감정의 속살을 직시하고 자신만의 답을 찾거나, 답이 없음을 깨닫고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삶의 실마리를 찾아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어떤 희망은, 양지와 시작과 미래가 아니라 음지와 끝과 과거에서 생겨난다.
어느 산악인의 얘기다.
에베레스트를 등정할 때 자정부터 오르기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낮에 기온이 올라서 눈이 한꺼번에 녹아내리거나 하면 눈사태를 겪을 확률이 밤보다 높아지거든요. 거봉(巨峰)을 오르기 위해 밝은 대낮보다 어둠아 짙게 깔린 밤에 더 많이 걸었던 것 같아요. 매번 어둠을 건너갔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어두운 터널 속에서 자기만의 빛을 발견하고 그것을 향해 걸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빛을 발견하려면 빛만 응시해선 안 되지 않나 싶다.
때론 어둠 속을 걸으면서 손끝으로 어둠을 매만져야 한다. 어둠을 가로지를 때 허공으로 흩어지는 어둠의 파편들을 한데 끌어 모아, 현미경 들여다보듯 어둠의 성질을 치밀하게 알아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우린 빛으로 향하는 출구를 발견할 수 있다. 어둠을 직시할 때만 우린 빛을 움켜쥘 수 있다.
■ 부모는 자식 대신 울어주는 사람
동서양을 막론하고 봄이라는 단어에 탄생과 탄력의 의미가 담겨 있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봄을 뜻하는 한자 ‘춘(春)’은 햇살을 받아내는 나무에서 새순이 움트는 모습이다. 영어 단어 ‘스프링(spring)'은 돌 틈에서 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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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이 콸콸 솟아나는 옹달샘에서 비롯된 단어다. 이 역시 흥미롭다.
다만 세상사가 그렇듯,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는 법이다. 어떤 이들에게 봄은 겨울보다 쓰고 아픈 계절이리라. 겨울엔 상처와 슬픔을 추위와 어둠 속에 감춰둘 수 있으나 봄에는 어림도 없다. 봄볕과 봄바람 앞에 그것들을 온전히 꺼내 놓아야 한다. 감출 수 없으므로 더 아프기 마련이다.
오래전 어느 봄날, 내 어머니의 마음도 그랬던 모양이다. 내가 막 사춘기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집에 돌아온 어느 날, 안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안을 들여다봤다. 일찍 남편을 잃고 두 아이를 키우면서 한 순간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어머니의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엇다.
나는 “엄마 무슨 일이 있어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나는 벽에 기댄 채 숨어서 어머니를 지켜보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나 눈물은 전염된다고 했던가 잠시 뒤 나 역시 덩달아 울음을 터트렸고, 내가 우는 모습을 본 어머니는 더 굵은 눈물을 떨어트렸다.
날 부둥켜안은 어머니는 당신의 입을 틀어박아가며 소리내지 않고 울었다. 소리 없는 눈물이 어머니의 눈과 입과 목덜미를 타고 몸 전체로 격하게 번져 나갔다.
어머니가 울고 그걸 지켜본 내가 따라 우는 일은 그 후로도 몇 차례 반복됐다. 어머니의 눈물이 내 전부를 적실 때마다 나는 부모가 쏟아내는 울음의 배경과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부모는 자식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 아닐까. 더 정확히 얘기하면, 부모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을 위해서 남몰래 우는 사람이 아닐까.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내 마음의 바닥에 내리꽂힐 때마다 깨달을 수 있었다. 누군가를 진실로 사랑한다면 상대의 미소만이 아니라 눈물까지 살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 우리가 알아볼게요
요양원에 계신 할머니를 뵙고 왔다. 몇 해 전부터 치매를 앓고 있는 할머니는 해가 갈수록 사람을 잘 몰라보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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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기억력과 정신이 비교적 봄 햇살처럼 맑았던 어느 날, 자식들과 손주들을 둘러보며 할머니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내가 너희를 영영 몰라보면 어쩌지? ”
내 마음의 뼈에 실금이 가는 것 같았다.병실엔 어둡고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다들 입을 닫고 있었다. 그때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친척 동생이 해맑게 웃으며 할머니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괜찮아요. 우리가 할머니를 알아보면 되잖아요. 우리가 알아볼게요.”
■ 거울
영어로 거울을 듯하는 ‘미러(mirror)’눈 어원적으로 ‘보다’ ‘놀라다’ ‘당황하다’ 등의 의미를 지닌다. 하긴 옛날에는 구리나 돌을 매끄럽게 갈아서 거울을 만들었을 텐데,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신기해하는 것을 넘어 화들짝 놀라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어떤 사실을 그대로 드러낸다’ 할 때도 거울이라는 명사를 비유적으로 끌어다 쓰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우린 시시때때로 거울에 빨려 들어갈 듯 그것을 노려보면서 각자의 내면을 관찰 한다.
옷매무세를 가다듬고 몸을 치장하기 위해서만 거울을 보는 건 아니다. 스스로 마음의 바닥을 웅시하고 싶을 때, 얼굴에 남아 있는 비극을 떨어버리고 스스로를 응원하고 싶을 때 얼굴에 남아 있는 희극을 골라내서는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을 때, 우린 거울 속에 웅크리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본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웃으면서 쳐다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 아무이 자기애가 철철 넘쳐흐르는 사람도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품는 경우가 있다. 실패와 실수, 죄책감과 수치심 따위로 얼굴을 덕지덕지 분칠한 낯선 사람이 거울 속에서 매의 눈으로 노려보는 날이면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하는 물음이 우리 안에서 올라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무릇 사람이란,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누군가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만 삶을 견딜 수 있는 존재가 아니던가 특히 ‘용서라는 비좁은 의자’에 남이 아닌 나와 함께 앉을 때 우리의 마음은 비로소 안온한 상태로 접어든다. 마음이 쉼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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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음
살아가는 일은 울음을 터트리는 일과 닮았다. 울음은 의도하지 않은 순간, 불쑥 솟구친다. 멈추고 싶다고 해서 쉽게 멈출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살아가는’ 혹은 ‘살아내는’ 일도 그러하다. 삶이라는 실타래는 속절없음이라는 가느다란 실로 구불구불 뭉쳐있다. 인생도 눈물도 그렇게 속수무책인 것이다.
속수무책인 것은 대개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뻗어 나가기 마련이다. 난마(亂麻)처럼 얽히고설킨 인생이라는 실뭉치 앞에서 우리가 어쩔 수 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므로 인생길에서 마주치는 슬픔은 억누르고 참아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가끔은 실컷 토해내고 자연스레 범람시켜서 햇살과 바람에 말려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훗날 눈물과 슬픔보다 더 소중한 것으로 내 안을 채울 수도 있을 테고.
■ 이별은 멀리 떨어져 서로의 별이 되는 것
‘떠나보내다’라는 동사만큼 애통한 단어도 없다.
어느 한철 소중했던 대상을 시간이라는 강물에 띄워 다른 곳으로 놓아주어야 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마음 한 구석이 저릿하기 마련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 슬픔과 허전함의 농도를 조금 묽게 만드는 것뿐이다. 살아가는 일은, 어떤 면에서 희미하게 사라지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와 나를 둘러싼 사람과 감정과 관계는 때가 되면 시간 속으로 가뭇없이 사라진다. 언젠가는 밤하늘의 별빛처럼 가물거리다가 서서히 흐릿해진다.
그 사라짐 속에서 우린 온갖 이별을 경험한다.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작별이든 , 사귐을 끊고 흩어지는 헤어짐이든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이별을 겪는다.
이별은 좀체 학습되지 않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이별이다. 다만 이별은 헤어져 영원히 잊히는 게 아니라, 닿을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 빛나는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별’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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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점묘화
점은 크기가 없고 위치만 있는 도형이다.
점은 가장 작은 도형이 될 수 있다.
점은 가장 큰 도형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살아간다는 것은
선과 면이 아닌 점을 한 점 한 점 찍어가면서
자신만의 점묘화를 그리는 건지도 모른다.
특히 다시, 라는 점으로
생의 화폭을 진하게 가득 물들이는 것이야말로
삶의 본질이 아닐는지.
■ 잘 떠나보내기
달력을 올려다보았다.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시점이다. 이제 곧 일 년이라는 시간이 추억으로 쌓이거나 영원히 스쳐지나갈 것이다.
무언가를 다른 곳으로 떠나보낸다는 일은 필연적으로 후회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삶에 대한 회한과 아쉬움을 세월이라는 강물에 떠내려 보내는 일도 예외가 아니다. 현재가 과거가 되는 순간 온 마음에 후회가 번진다.
후회는 실체가 없는 것이라 서둘러 사라지는 법도 없다.
후회의 핵심은 허무(虛無)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빈 상태다.
허무가 과거에 달라붙어 기억을 빨아먹으며 기생하면 우리 안에서 후회가 치밀고,
허무가 세월에 풍화되지 않은 채 미래를 뭉개버리면 누구나 절망에 잠긴다.
후회와 회한 따위가 가슴을 헤집고 돌아다닐 때 ‘아, 타임머신 같은 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후회스러운 일을 바로 잡을 텐데……’하는 상상에 빠져 들기도 한다. 미끄러지듯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과거의 상황을 바꾸는 상상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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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명백히 늦었음을 절감할 때가 많다. 세월 속으로 저무는 것들을 아무 저항 없이 넋 놓고 바라봐야 하는 순간이 있기 마련이다. 어느 방송인의 어록처럼, 늦었다는 생각이 들면 정말 늦은 건지도 모른다.
다만 세월이라는 강물 위로 소중한 것이 떠내려 갈 때 애써 손을 뻗어 움켜쥐려 하기보다, 강물이 그것들을 잘 실어나르도록 그냥 내버려둬야 한다.
한때는 나도 세월이 강물에 보폭을 맞춰 비슷한 속도로 달릴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다 언젠가는 강물을 추월해, 물위에서 부유하며 반짝이는 것들을 붙잡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오산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절감하게 된다. 시간은 늘 새로운 물결을 몰고 온다는 것을, 인생의 하류로 쓸려 내려가는 것들은 갈수록 늘어가지만 내 뜀박질은 점점 느려지고 있음을, 그리고 무언가를 마음에 담아 온전히 간직하려면 온전히 떠나보낼 줄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 글을 닫으며
마음에 햇살이 어른거리지 않으면 언제나 겨울
시옷으로 시작되는 단어 중에 아름다운 말이 많다. ‘사랑’이 그렇고 ‘숨결’이 그렇고 ‘숲’이 그렇다. 특히 난 “숲”하고 발음하는 순간, 숲을 걷는 상상에 잠기곤 한다. 마음이 편안해 진다.
‘숲’에선 바람 소리가 들린다. 거기엔 나무의 이파리와 이파리가 부대끼는 소리가 농밀하게 서려 있다.
청각은 인간의 오감 가운데 가장 먼저 완성되고 가장 마지막에 닫히는 감각이라고 한다. 인간을 가장 오래 지배하는 감각이 청각이기 때문일까. 나무로 우거진 숲길을 거닐면 귀로 스며든 소리가 눈과 코와 신체의 여러 기관을 일깨워 흔드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숲은 시각과 청각과 촉각 등 오감을 총동원해서 건너가야 하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책이라는 숲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한 권의 책은 수십만 개의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글자의 숲’이다. 양팔을 휘저으며 쏜살같이 내달리기보다 고즈넉한 공원을 산책하듯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야. 행간과 여백에 담긴 작가의 숨결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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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삶을 부대끼고 미끄러지면서 생각의 결과 감정의 무늬를 문장으로 새기는 일이다.
밝고 따뜻한 양지만 기웃거려서는 삶의 자국을 온전히 기록할 수 없다. 서늘한 음지로 들어가 내면의 수런거림에 귀 기울여야 한다. 때론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를 더듬어야 하고 가끔은 하기 싫은 상처의 문을 열어젖혀야 한다. 그래야 삶이 녹아든 문장이 여백 위에 층층이 쌓인다.
비옥한 땅에는 잎이 무성한 나무를 심고
숲이 끝나는 길에는 붉은 동백꽃을 꽂아두고
사람 발길이 잘 닿지 않는 곳에는
맑은 계곡물로 연못을 만들어서 연꽃을 피워 띄우고
빗방울이 연 잎에 또닥또닥 떨어지는 소리가
온 숲에 울려 퍼지도록 해야 겠다.
누군가는 그 숲에서 길을 잃고 헤맸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그곳에서 겨울을 견뎠으면 좋겠다. 누군가는 후드득 지는 동백꽃 앞에서 시린 기억을 불러내 울음을 토해냈으면 좋겠다.
이 책을 읽는 동안만큼은 마음이 덜 아팠으면 좋겠다. 책의 낱장을 넘기면서 상처의 낱장도 넘길 수 있기를, 책을 집어든 순간만큼은 슬픔을 말려버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하여 당신의 눈물이 빠져나간 자리에
햇볕이 스며들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마음에 햇살이 어른거리지 않으면
우린 언제나 겨울이다.
- 당신이 봄을 마주하고 걷기바라며. 이기주
2018. 8. 16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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