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 수필

2018. 9. 17. 15:12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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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 다운 우리 수필

■ 이태동 역음

0 1939년 청도 출생, 대구에서 성장

0 경대 사대부중,부고. 한국 외국어대 영어과

0 육군 중위 예편

0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원 영문과, 서울대 영문과 박사학위

0 하버드대 초빙연구원, 스탠퍼드, 듀크대 교환교수

0 서강대 영문과 교수 (1972~2004), 현재 서강대 명예교수

0 1976 문학사상의 평단에 등단 : 이어령 교수 추천

* 평단 : 문학 평론

0 평론집

- 부조리와 인간의식, 한국 문학의 이상과 현실, 현실과 문학적 상상력,

나목의 꿈, 한국 현대사의 실체

0 다수의 번역서

0 수필집

- 살아 있는 날의 축복, 마음의 섬, 밤비 오는 소리,

0 신문 칼럼집 2권

■ 책을 펴내며

마셜 맥루한이 “미디어가 메시지”라고 말한 이래 영상 매체가 활자 매체를 누르고 물질만능의 소비사회가 정신적인 가치를 무너뜨리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러한 사회변화는 수세기에 걸쳐서 인류의 정신문화를 지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해 온 문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쳐 위기상황으로 몰아가고 있다. 수필문학도 이러한 위기에서 결코 예외일수가 없다.

문학사적으로 볼 때, 수필은 그렇게 화려하지는 못했지만, 어떤 의미에서 다른 장르보다 정직하고 우아하며 격조가 높은 장르이다.

우리의 경우 신문학(新文學)이 시작된 이래 적지 않은 문인들이 훌륭한 수필을 남겼고 지금도 써오고 있다. 그들에 의하면, 우리 수필은 다른 문학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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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더 개성적이며, 심경적(心境的)이며 경험적일 뿐만 아니라, 붓 가는 대로 자유롭게 쓰는 품격있는 선비의 글이다. 그래서 우리 수필계의 거목(巨木)인 피천득은 수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수필은 청자(靑磁) 연적(硯滴)이다. 수필은 난(蘭)이요, 학(鶴)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 속으로 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 수필은 가로수 늘어진 페이브먼트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길은 깨끗하고 사람이 적게 다니는 주택가에 있다. 수필은 청춘의 글은 아니요, 서른 다섯 살 중년 고개를 넘어선 사람의 글이요. 정열이나 심오한 지성을 내포한 문학이 아니요. 그저 수필가가 쓴 단순한 글이다. 수필은 흥미를 주지만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빛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락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溫雅優美)하다.

그런데 그의 지적대로 수필이 “청자의 연적”처럼 높고 결곡한(얼굴 생김새나 마음씨가 깨끗하고 여무져서 빈틈이 없음) 운치를 가지려면, 끊임없는 독서와 사색을 통해서 미숙한 감성을 지성으로 표백해야 한다.

그러나 산업사회 이후, 특히 여가 시간이 많은 최근에 와서 글을 쓰고자 하는 사람들마저 수필을 글쓰기 쉬운 장르라고 생각하고 가볍게 여기는 경향마저 없지 않다. 물론 이것은 아직 자격이 부족한 사람들이 수필가로 등단해서 글을 너무나 쉽게 써 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유명 수필가, 소설가, 문학평론가, 시인 등의 글을 골고루 실었다. 이를 통해서 아름다운 수필이 어디로 가고 있고, 또 어떻게 쓰여져야만 하는 가를 의미 깊게 제시하고 있다. - 이태동

■ 수필과 그림 - 김태길

한 편의 수필을 쓰는 일과 한 폭의 그림을 그리는 일 사이에 근본적인 유사점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그림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분수를 모르는 망발이 될지 모른다고 염려하면서도, 나는 어쩐지 수필과 그림 사이에 공통된 바탕이 있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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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 그림 사이에 근본적이 유사점이 있다고 가정할 때 수필에 대해서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의문이 풀릴 것 같다는 생각 때문에 아마 나는 이 비유를 고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화가가 선과 색채를 써서 대상의 모습을 그리듯이, 수필가는 산문 형식의 글로 대상의 모습을 그린다. 서투른 화가들은 대상의 겉모습을 그리기에 급급하고 높은 경지에 이른 화가들만이 대상의 깊은 속을 그리듯이 수필을 쓰는 사람들도 그 수준에 따라서 그들이 그리는 대상의 층이 얕기도 하고 깊기도 하다.

근래에는 마음의 세계를 대상으로 삼는 화가들도 많다고 들었으나, 전통적으로 화가들이 주로 그린 것은 바깥 세계에 속하는 대상이 아니었을까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수필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수필가들도 바깥 세계에서 대상을 찾는 경우가 없지 않으나, 그보다는 마음의 세계를 그리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수필’의 모든 특색을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우나 그 중요한 것들의 윤곽을 밝힐 수는 있을 것이다. 첫째로, 꾸며낸 이야기를 줄거리로 삼는 소설이나 희곡과는 달리, 수필은 본래 어떤 현실을 그리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둘째로 운율적(韻律的) 표현 방식에 의존하는 시와는 달리, 수필은 산문의 표현 양식을 빌려서 체험 또는 마음의 세계를 묘사한다. 셋째로 독자의 이해력에 호소하여 진리를 밝히는 것을 첫째 목적으로 삼는 논문과는 달리, 수필은 의식 또는 무의식중에 아름다움의 창조를 꾀하여 운연중 독자의 미감(美感)에 호소하는 일면을 가졌다.

더러 예외가 있을지 모르나, 대개의 수필은 필자 자신의 체험 또는 사색에 바탕을 두고 있다. 수필의 본질을 자아(自我)의 탐구와 표현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수필은 필자 자신의 내면세계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졌다. 많은 경우에 수필은 필자의 자화상으로서의 성격을 가졌다.

그림다운 그림을 그리자면 우선 기본기부터 익혀야 하듯이, 수필을 쓰기 위해서도 첫째로 기본기의 바탕부터 닦아야 한다. 서양화를 위한 기본기의 첫째가 데생이라면 수필을 위한 기본기의 으뜸은 문장력이다. 화가가 대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묘사할 수 있는 표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듯이, 수필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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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心象)에 떠오른 것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는 문장력을 갖추어야 한다.

대상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리자면 우선 관찰이 세밀하고 정확해야 한다. 봄 하늘에는 아지랑이가 끼게 마련이고 가을의 들판에는 허수아비가 서 있게 마련이라는 따위의 상투적 고정관념을 가지고 붓대를 움직인다면 화가도 수필가도 십중팔구 실패할 것이다. 특히 개성을 생명으로 삼는 수필에 있어서는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한 새로운 것 또는 새로운 측면으로 시선을 돌려야 하며, 새로운 것 또는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자면 관찰이 세밀하고 정확해야 한다.

버릴 것은 버리고 강조할 것은 강조하는 선택이 필요하다 함은 수필이라는 것이 저절로 되기보다는 만들어지는 무엇임을 의미한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수필이라고 흔히 말하지만, 그것도 역시 필자의 주관을 따라서 만들어지는 일면을 가졌다. 그러나 그 꾸밈이 지나쳐서 부자연스러울 지경에 이르면 실패작을 면하기 어렵다.

여기 아름다운 대상이 있고 그 대상을 탁월한 솜씨로 그린다면 좋은 그림이 생길 것임에 틀림이 없다. 수필의 경우에도 훌륭한 대상을 탁월한 문장력으로 묘사할 때 좋은 글이 생기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수필에 있어서 표현의 대상이 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필자 자신이다. 수필가도 자연의 이야기를 그리고 세상이야기를 전하기도 하지만, 국외자로서 바깥 세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그 대상 속에 깊숙이 뛰어 듦으로써 결국은 자기 자신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결과가 되곤 한다. 수필을 통하여 표현되는 세상이 궁극적으로 필자 자신이라는 사실은 탁월한 인품을 가진 사람이 탁월한 수필을 쓰기에 유리한 위치에 선다는 뜻을 함축한다.

탁월한 인품이 탁월한 수필을 위한 바탕이기는 하나, 필자가 자기 자신의 인품이 탁월함을 나타내려고 의도적으로 붓을 돌릴 때 그 글은 반드시 실패하게 마련이다. 제가 잘 났다는 것을 과시하고자 하는 순간 그 사람의 인품은 추하게 보인다. 인간이기에 누구나 갖게 마련인 한계나 결함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자신의 한계와 결함에서 오는 고민을 남의 일처럼 담담하게 그렸을 때, 독자들은 도리어 그 필자의 인품에 대해서 공감을 느낀다. 보통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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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보통 사람으로서 정직한 것도 탁월한 인품의 한 특색이며, 수필을 쓰기 위해서 반드시 성현 군자가 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품이 탁월한 것만으로 좋은 수필이 생기지는 않는다. 탁월한 인품을 탁월한 솜씨로 형상화 했을 때 좋은 수필이 탄생한다. 머리에 떠오른 생각들을 아름답게 형상화 하는 솜씨 가운데는 구상력(構想力)과 문장력(文章力)이 포함되거니와, 형식의 틀에 얽매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수필에서는 문장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문장은 첫째로 , 글은 그 뜻이 독자에게 잘 전달되어야 한다. 뜻의 전달이 잘 되지 않는 문장은 원칙적으로 좋은 문장이 아니다. 둘째로 독자의 미적 심금(美的 心琴)에 와 닿는 문장은 좋은 문장이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미문’은 그리 좋은 문장이 아니다. 여운이 깊고 함축성이 많은 수필이 좋은 수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함축성을 위해서는 문장이 간결해야 한다. 군소리가 끼어들면 글이 죽는다.

제1부 사색

■ 수필

피천득 , 서울대 명예교수. 수필가

수필의 재료는 생활 경험, 자연관찰, 또는 사회 현상에 대한 새로운 발견, 무엇이나 다 좋을 것이다. 드 제재(題材)가 무엇이든지 간에 쓰는 이의 독특한 개성과 그때의 무드에 따라 ‘누에의 입에서 나오는 액(液)이 고치를 만들듯이’ 수필은 써지는 것이다.

수필은 독백(獨白)이다. 소설가나 극작가는 때로 여러 가지 성격을 가져보아야 된다. 셰익스피어는 햄릿도 되고 플로니우스 노릇도 한다. 그러나 수필가 램은 언제나 찰스 램 이면 되는 것이다. 수필은 그 쓰는 사람을 가장 솔직히 나타내는 문학 형식이다. 그러므로 수필은 독자에게 친밀감을 주며 친구에게서 받은 편지와도 같은 것이다.

덕수궁 박물관에 청자연적이 하나 있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 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이 균형 속에 있는 거슬리지 않는 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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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破格)이 수필인가 한다.

이 마음의 여유가 없어 수필을 못 쓰는 것은 슬픈 일이다.

■ 나무

이양하 전 서울대 교수. 수필가

나무는 덕을 지녔다. 나무는 주어진 분수에 만족할 줄을 안다. 나무로 태어난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왜 여기 놓이고 저기 놓이지 않았는가를 말하지 아니한다. 등성이에 서면 햇살이 따사로울까. 골짜기에 내려서면 물이 좋을까 하여, 새로운 자리를 엿보는 일도 없다. 물과 흙과 태양의 아들로, 물과 흙과 태양이 주는 대로 받고, 득박(得薄)과 불만족을 말하지 아니한다. 이웃 친구의 처지에 눈떠보는 일도 없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스스로 족하고, 진달래는 진달래대로 스스로 족하다.

나무는 고독하다. 나무는 모든 고독을 안다. 안개에 잠긴 아침의 고독을 알고, 구름에 덮인 저녁의 고독을 안다. 부슬비 내리는 가을 저녁의 고독도 알고, 함박눈 펄펄 널리는 겨울 아침의 고독도 안다. 나무는 파리 옴쭉 않는 한여름 대낮의 고독도 알고, 별 얼고 돌 우는 동짓날 한 밤의 고독도 안다. 그러면서도 나무는 어디까지든지 고독에 견디고 고독을 이기고, 고독을 즐긴다.

나무에 아주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있고 바람이 있고, 새가 있다. 달은 때를 어기지 아니하고 찾고, 고독한 여름밤을 같이 지내고 가는, 의리 있고 다정한 친구다. 웃을 뿐 말이 없으나 이심전심(以心傳心) 의사가 잘 소통되고 아주 비위에 맞는 친구다.

나무는 친구끼리 서로 즐긴다느니 보다는 제각기 하늘이 준 힘을 다하여 널리 가지를 펴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더 힘을 쓴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항상 감사하고 찬송하고 묵도 하는 것으로 일삼는다. 그러기에, 나무는 언제나 하늘을 향하여 손을 쳐들고 있다. 온갖 나무 잎이 우거진 숲을 찾는 사람이, 거룩한 전당에 들어선 것처럼 엄숙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절로 옷깃을 여미고, 우렁찬 찬가에 귀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도 여기 있다.

나무는 훌륭한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요, 고독의 철인(哲人)이요, 안분지족(安分知足)의 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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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소위 윤회설(輪回說)이 참말이라면, 나는 죽어서 나무가 되고 싶다. '무슨 나무가 될까?‘ 이미 나무를 뜻하였으니, 진달래가 될까 소나무가 될까는 가리지 않으련다.

■ 권태

이상 작가

1.

어서 차라리 어둬버리기나 했으면 좋겠는데 - 벽촌의 여름날은 지리해서 죽겠을 만치 길다.

동에 팔봉산(八峰山), 곡선은 왜 저리도 굴곡이 없이 단조로운고? 서를 보아도 벌판, 남을 보아도 벌판, 북을 보아도 벌판. 아 - 이 벌판은 어쩌라고 이렇게 한없이 늘어 놓였을꼬? 어쩌자고 저렇게까지 똑같이 초록색 하나로 되어먹었노?

농가가 가운데 길 하나를 두고 좌우로 한 10여 호씩 있다. 휘청거린 소나무 기둥, 흙을 주물러 바른 벽, 강낭대로 둘러싼 울타리, 울타리를 덮은 호박넝쿨, 모두가 그게 그것같이 똑같다.

어제 보던 댑싸리나무, 오늘도 보는 김 서방, 내일도 보아야 할 신둥이 검둥이. 해는 백도(百度) 가까운 볕을 지붕에도 벌판에도 뽕나무에도 암탉 꼬랑지에도 나려쪼인다. 아침이나 저녁 녘이나 뜨거워서 견딜수가 없는 염서(炎署)의 계속이다.

나는 최서방의 조카를 깨워가지고 장기를 한판 벌이기로 한다. 최서방의 조카로서는 그러니까 나와 장기 두는 것 그것부터 권태(倦怠)다. 밤낮 두어야 마찬가질 바에는 안 두는 것이 차라리 나았지 - 그러나 안 두면 또 무엇을 하나? 둘밖에 없다.

지는 것도 권태어늘 이기는 것이 어찌 권태 아닐 수 있으랴? 열 번 두어서 열 번 내리 이기는 장난이란 열 번 지는 이상으로 싱거운 장난이다. 나는 참 싱거워서 견딜 수 없다.

한 번쯤 져주리라. 나는 한참 생각하는 체하다가 슬그머니 위험한 자리에 장기 조각을 갖다 놓는다. 최서방의 조카는 하품을 쓱 한 번 하더니 이윽고 둔다는 것이 딴 청이다. 으레 질것이니까 골치 아프게 수를 보고 어쩌고 하기도 싫다는 사상(思想)이리라. 아무렇게나 생각나는 대로 장기를 갖다 놓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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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그저 얼른얼른 끝을 내어 져줄 만큼 져 주면 이 상승장군은 압도적 권태를 이기지 못해 제물에 가버리겠지 하는 사상이리라. 가고 나면 또 낮잠이나 잘 작정이리라

나는 부득이 또 이긴다. 이제 그만 두잔다. 물론 그만 두는 수밖에 없다.

2.

나는 개울가로 간다. 가물로 하여 너무나 빈약한 물이 소리 없이 흐른다. 뼈처럼 앙상한 물줄기가 왜 소리를 치지 않나? 너무 더웁다. 나뭇잎들이 축 늘어져서 허덕허덕하도록 더웁다. 이렇게 더우니 시냇물인들 서늘한 소리를 내어보는 재간도 없으리라.

나는 그 물가에 앉는다. 앉아서 자 - 무슨 제목으로 나는 사색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본다. 그러나 물론 아무런 제목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생각 말기로 하자. 그저 한량없이 넓은 초록색 벌판, 지평선, 아무리 변화하여 보았댔자 결국 치열(稚劣 어릴 치, 못할 렬. 수준이 낮다 등)한 곡예(曲藝)의 역을 벗어나지 않는 구름, 이런 것을 건너다본다.

지구 표면적의 백분의 99가 이 공포의 초록색이리라. 그렇다면 지구야말로 너무나 단조 무미한 채색이다. 도회에는 초록이 드물다. 나는 처음 여기 표착하였을 때 이 신선한 초록빛에 놀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닷새가 못 되어서 일망무제의 초록색은 조물주의 몰취미와 신경의 조잡성으로 말미암은 무미 건조한 지구의 여백인 것을 발견하고 다시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쩔 적정으로 저렇게 퍼러냐. 하루 온종일 저 푸른 빛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오직 그 푸른 것에 백치와 같이 만족하면서 푸른 채로 있다.

3.

댑싸리나무도 축 늘어졌다. 물은 흐르면서 가끔 웅뎅이를 만나면 썩는다.

내가 앉아 있는 데는 그런 웅뎅이가 있다. 내 앞에서 물은 조용히 썩는다.

낮 닭 우는 소리가 무던히 한가롭다. 어제도 울던 낮 닭이 오늘도 또 울었다는 외에 흥미도 없다.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다. 다만 우연히 귀에 들려왔으니 그저 들었달 뿐이다.

닭은 그래도 새벽, 낮으로 울기나 한다. 그러나 이 동리의 개들은 짖지를 않는다. 그러면 모두 벙어리 개들인가. 아니다. 그 증거로는 그 동리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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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 내가 돌팔매질을 하면서 위협하면 10리나 달아나면서 나를 돌아다보고 짖는다.

그들은 짖을 일이 없다. 여인(旅人)은 이곳에 오지 않는다. 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국도 연변에 있지 않는 이 촌락을 그들은 지나갈 일도 없다. 가끔 이웃 마을의 김 서방이 온다 그러나 그는 여기 최 서방과 똑같은 복장과 피부색과 사투리를 가졌으니 개들이 짖어 무엇하랴. 이 빈촌에는 빈한한 새악시들을 위하여 훔친 바 비녀나 반지를 가만히 놓고 가지 않으면 안되리라. 도적에게는 이 마을은 도적의 도심(盜心)을 도적맞기 쉬운 위험한 지대리라.

그러니 실로 개들이 무엇을 보고 짖으랴.

슬픈 일이다. 짖을 줄 모르는 벙어리 개, 지킬 줄 모르는 게으름뱅이 개, 이 비보 개들은 복날 개장국을 끓여 먹기 위하여 촌민의 희생이 된다. 그러나 불쌍한 개들은 음력도 모르니 복(伏)날은 몇 날이나 남았나 알 길이 없다.

4.

소의 뿔은 벌써 소의 무기는 아니다. 소의 뿔은 오직 안경의 재료일 따름이다. 소는 사람에게 얻어맞기로 위주니까 소에게는 무기가 필요 없다. 소의 뿔은 오직 동물학자를 위한 표지(標識)이다. 야우(野牛)시대에는 이것으로 적을 공격한 일도 있습니다. - 하는 마치 폐병(廢兵)의 가슴에 달린 훈장처럼 그 추억성이 애상적이다.

암소의 뿔은 그것보다 더 한층 겸허하다. 이 애상적인 뿔이 나를 받을 리 없으니 나는 마음놓고 그 곁 풀밭에 누워도 좋다. 나는 누워서 위선 소를 본다.

소는 식욕의 즐거움조차 냉대할 수 있는 지상 최대의 권태자다. 얼마나 권태에 지질렀길래 이미 위에 들어간 식물을 다시 게워 그 시금털털한 반소화물(半消化物)의 미각을 역설적으로 향락하는 체해 보임이리오?

소의 체구가 크면 클수록 그의 권태도 크고 슬프다. 나는 소 앞에 누워 내 세균(細菌) 같이 사소한 고독을 겸손해 하면서 나도 사색의 반추는 가능할는지 몰래 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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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순의 수용

박경리 소설가

초(楚)나라의 무기 상인이 “이 창은 어떠한 방패도 뚫을 수 있으며 이 방패는 어떠한 창도 막을 수 있다”고 했는데 그 말에서 연유한 것이 모순(矛盾)이다. 모순은 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될 때 상대방을 공박하는 용어로서 매우 생광스럽게 쓰이지만 어쨌든 강한 부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논리의 한계에 대해서 간과하고 있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할 일이며, 따라서 모순의 양면성도 당연히 추구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논리적이다 할 것 같으면 아시다시피 생각을 조리있게 언어로써 표현하는 것을 이르는데 기실 언어 그 자체에는 항상 미진하고 애매하다는 약점이 도사리고 있다. 미진하다는 것은 근원적으로 인간들은 자기 자신 속에 갇혀 있다 할 수도 있고 논리의 허약함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버선목이라 뒤집어 보이겠느냐.’ 하면서 옛날 우리들 할머니, 어머니들이 갇힌 진실을 절묘하게 비유한 바 있지만 결국 인간은, 또한 생명의 일체는 공동체인 동시에 영원한 개체로서 고독하며 모순에 가득찬 존재인 것을 부인 못한다.

창조란 무엇일까. 말할 것도 없이 새로운 것을 태어나게 하는 일이며 그것은 풍요하게, 자유롭게 생각하는 생명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다. 창조는 어디서 어떻게 이뤄지는 걸까. 암중모색에서, 보이지 않는 곳, 확실치 않은 것을 향한 추구와 탐험에서 새로움은 싹트는 것이며 이미 되어진 곳, 즉 틀 속에서는 복제품만이 가능해진다.

모순은 균형이며 긴장이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데서 가능했으며 존재의 조건인 동시에 연속성과 삶에 대한 인식이기도 하다 만일 모순이 없어진다면 논리는 완성될 것이며 언어도 피안에 도달하겠고 절대적인 것이 그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지만 완성은 끝이며 정지이며 소멸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의상에서 잠시 살펴볼 것 같으면 흰색의 숭상을 들 수 있다. 흰색은 투명한 상태에 가장 가깝게 접근한 색이며 투명을 보다 뚜렷이 지향해가는 것에는 갓이 있다. 투명하다는 것이 가벼움을 말할 수 있고 가벼움은 비상을 연상시키며 그 경계선이 희미하다. 넓은 치마, 옷고름, 갓끈, 그런 것들도 날리는 특성이 있고 날린다는 것은 역시 가벼움과 투명으로 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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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비어있는 것으로도 볼 수 있으며 비어 있는 것에는 채울 수 있고 채우고 채우며 들락거리는 융통을 뜻하고 그것은 전혀 틀을 형성하지 않는 우주 지향이라 해석할 수는 없을까.

우리들 그림에 나타나는 곡선의 선호도 그렇다. 직선의 단절감을 피하고 곡선으로 포용하려는 기미를 느낄 수 있다. 그림의 여백에는 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며 종소리의 긴 여음 뒤에 오는 정적은 소리의 이어짐을 느끼게 하고, 있는 듯 없는 듯 모두가 희미한 상태, 경계가 없는 상태,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도 그것은 희미하다. 죽었다. 없어졌다가 아닌 돌아갔다 떠나갔다. 그것은 단절이 아니며 이어짐이다. 모순을 수용하는 것이다. 잘라내지 않고 토막 내지 않은 데서 오는 우주적 일체감 그것은 무한한 흐름이다.

인류에게는 일찍이 신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이 창출한 관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것은 신이 그 모순 자체이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논리로 신을 죽이든 살리든 전혀 상관없는 일이며 무의미한 짓이다. 그러나 나는 신을 만들고 부수는 만행을 기억한다. 그것은 엄청난 생명을 작살낸 만행이기도 했다.

20세기를 질러온 나는, 신국(神國)이다. 현인신이다. 확고부동한 절대자 하며 터무니없는 짓을 만들어 놓고 일본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을 학살했는가. 신병(神兵)이라는 이름을 걸고 성전(聖戰)이라는 기치 아래 그칠 줄 모르는 탐욕의 배를 채우던 것을 똑똑히 기억한다.

해방 후에도 절대라는 명제 하에. 이념이 그 얼마나 무시무시한 쌍방간의 대립, 살육의 도구가 되었던가를 기억한다. 일본의 경우는 모순이든 논리적이든, 그 어느 것이든 간에 실리를 위한 방편이었겠으나 우리의 경우는 일종의 환상이었다. 불멸의 이론도 없거니와 현인신도 있을 수 없다. 그 없는 것을 위해 있었던 것은 오직 수난뿐이었다. 세계 도처에서 아직도 그 같은 허상을 위한 수난은 계속되고 있다.

독자가 포크너에게 헤밍웨이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성공한 작가이며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전에 없는 말을 쓸 용기가 없는 사람이다. 나와 토마스 울프는 성공할지도 모르겠고 성공 안 할지도, 그것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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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물건들 - 낚시질 놀이에서 얻은 외짝 장화의 의미

이어령 이대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거리를 지나가다 이따금 이삿짐을 나르는 광경을 보면 슬픈 생각이 든다. 거리를 누비고 지나가는 가구들의 인상은 생활에 시달린 늙은 아버지의 얼굴 같다. 아무리 부잣집이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피로한 생이 묻어 있다.

공허하게 빛나는 장롱의 거울이라든가 칠이 벗겨진 상다리라든가, 색종이로 바른 궤짝과 자질구레한 생활용품들, 그것들은 왜 그렇게 초라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이 사랑해야 할 생활인 것이다.

이상스럽게도 가구는 낡아질수록 사람을 닮아간다. 사물은 뜻이 없는 물질이지만 사람과 함께 오랫동안 살면서 손때가 묻게 되면 생명감을 풍기게 된다.

가구상이나 잡화상에 진열된 주인 없는 물건들은 비정적이다. 그것들은 죽은 물체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이 지니고 있는 생소한 감각에서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본다.

그러나 인간의 체취가 밴 물건들은 물질세계의 얼어붙은 정적으로부터 조금씩 빠져나오게 된다. 고물상의 의자는 물체가 아니라 늙은 창녀의 추억과 같은 것이며, 쓰레기터에 내던져진 부서진 완구는 방황하는 미아(迷兒)의 모습이다. 그것들은 결코 무리와 무관할 수 없다. 사물은 침묵하는 언어며 우리들 생의 한 부분이다.

고물들은 버려지지만 살아 있다. 퇴색해갈수록 살아 있다. 신흥도시의 빌딩가보다도 1천여 년 전 폐허의 유적지에서는 하나의 돌, 하나의 기왓장에도 피가 흐르고 있다. 단순한 감정이입(感情移入)만은 아닐 것이다.

혼자 심심하면 나는 가끔 낚시질을 했다. 강가에 가서 고기를 잡는 그런 낚시질이 아니다. 그것은 참으로 기이한 놀이였다. 긴 대나무 끝에 철사를 구부려서 장롱밑과 가구와 가구의 틈바귀, 그리고 마루청 밑에 버려진 물건들을 끌어내는 일이다. 말하자면 잃어버린 물건,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생활 속에서 아주 잠적해버린 그 사물을 낚시질하는 장난이었던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그것은 ‘솔로몬의 동굴’과 같은 것이었다. 얼굴을 방바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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깔고 가구가 놓인 밑바닥 같은 데를 들여다본다. 처음엔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좀 흐르면 어둠 속에 눈이 익어 어렴풋이 무엇인가 사물의 윤곽들이 떠오른다.

그러나 대나무로 그것을 끄집어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너무 힘을 주면 그것들은 더 깊숙이 안으로 굴러들어가게 된다.

호흡을 죽이고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당겨야 한다. 물건과 대나무가 부딪치는 촉감과 매캐한 냄새, 그리고 곰팡내 같은 것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 시켰다.

먼지와 어둠에서 졸고 있던 물건이 이윽고 밝음 속으로 나와 그 정체를 드러낼 때 기쁨은 절정에 달한다. 물론 보석 같은 것은 아니다.

내 ‘솔로몬의 동굴’에서 찾아낸 물건들은 사이다 병마개나 단추나 안약병이나 녹슨 호루라기 그리고 언젠가 잃어버렸던 셀룰로이드 삼각자, 지우개, 연필 토막, 나뭇조각……같은 것들이다. 그래도 내 마음은 언제나 흡족했다.

대체 이것들은 어떻게 하다 이 속으로 숨어버리게 되었을까? 그 중에서도 아주 낯익은 것들 그리고 찾고 있었던 물건들이 나오게 되면, 나는 가벼운 흥분에 취해서 소리치기도 했다.

“아! 이게 여기 있었구나.”

그것은 내 생활에서 떨어져 나간 운석(隕石)들이다. 깨지고 마멸하고 껍데기만 남아 있는 물건들이었으나 그래도 나는 실망하는 적이 없었다.

* 운석(隕石) : 유성이 대기중에서 다 타지 아니하고 땅위로 떨어지는 것

* 운석(雲石) : 중국 원난 지방에서 나는 옥돌

그날도 나는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가장 어둡고 지저분한 마루 밑을 탐색하는 일이었다. 마루청에 배를 깔고 머리를 숙여 마루 밑을 들여다 보면서 물건을 끄집어내야 했기 때문에 유난히 힘이 들었다.

마루 밑은 깜깜했다. 어디서 흘러 들어오는 광선이었는지 한 줄기 가느다란 햇살이 어둠속을 찌르고 있었다. 그때 나는 가느다란 그 광선 줄기가 머무는 곳에 ‘빨간 것’이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긴 대나무가 닿을락말락한 곳이었다. 대청마루 끝에 박쥐처럼 매달려서 허리까지 뻗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빨간 물체를 끌어내는 데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거꾸로 매달려서 손을 놀리고 있었기 때문에 현기증이 났다. 더구나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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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편이어서 앞으로 쉽게 당겨지지 않았다. 참을성이 있어야만 했다.

그렇게 해서 꺼낸 물건은 빨간 고무장화 한 짝이었다. 나는 그 고무장화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소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선물로 받은 장화였다.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나는 그 고무장화를 신고 돌아다녔다. 고무가 구겨지는 가벼운 장화 소리가 좋았다.

“아! 내 장화!”

가슴이 미어지듯이 반가웠다. 나는 그 장화 한 짝을 잃어버리고 돌아왔던 그날을 생각하면서 소리쳤다.

도랑물에서 놀고 있었을 때 한 짝 장화가 벗겨진 것이다. 곧 잡으려고 했지만 그것은 아래로 자꾸 내려갔던 것이다. 결국은 나까지 물에 빠지고 말았다.

그날 나는 정말 엿 사 먹을 생각 때문에 그 나머지 한 짝을 가지고 들어 온 것은 아니었다. 쓸모없는 장화였지만 그냥 갖고 싶었다. 짝 잃은 장화를 한 쪽에만 신고 돌아오던 그날처럼 지금도 그냥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어두운 그늘 속에서 퇴색하고 있는 물건들은……그것은 무엇이었을까. 먼지처럼 묻어 있는 매캐한 냄새는……. 그리고 무엇이었을까? 낡은 사진첩에서 먼 옛날 죽어버린 사람들의 얼굴을 찾아냈을 때 같은 그 서글픈 놀라움은……아!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수챗구멍과 같이 역겹고, 폐가(廢家)처럼 적적하고, 시효 넘은 증서와도 같고, 헤어진 모닝 코트 자락에서 떨어진 나프탈렌 같고, 추녀 밑에서 녹슬어 가는 풍경(風磬)같고 삭아서 끊어진 구두끈 같고 입김이 새어버리는 낡은 호루라기 소리 같은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사라져 버리는 사물들에의 감각은, 폐품의 퇴적같은 생활은, 그 애수(哀愁)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낚시질 놀이’를 언제부터 그만두었는지, 그리고 그 외짝 고무장화가 그 후에 어떻게 되었는지 지금 나는 기억할 수가 없다.

그러나 거리를 지나가다 이삿짐을 끌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으레 나는 그 삭아버린 빨간 고무장화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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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박이문 미국 시몬스 대학 명예교수

뱃길, 철길, 고속도로, 산길, 들길 이 모든 길들은 그냥 자연 현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을 뜻하는 인간의 언어다. 언어는 인간만의 속성이다. 그러기에 인간만의 세계에 길이 있고 길이 있는 곳에 인간이 탄생한다.

길은 부름이다. 길이란 언어는 부름을 뜻한다. 언덕너머 마을이 산길로 나를 부른다. 가로수 그늘진 신작로가 도시로 나를 부른다. 기적 소리가 저녁 하늘을 흔드는 나루터에서 혹은 시골 역에서 나는 이국의 부름을 듣는다. 그래서 길의 부름은 희망이기도 하며, 기다림이기도 하다.

눈앞에 곧장 뻗은 고속도로가 산을 뚫고 들을 지나 아득한 지평선으로 넘

어 간다. 푸른 골짜기를 꼬불꼬불 도는 하얀 길이 내 발 밑에 깔려 있다. 그것은 내 마음에 희망을 불어 넣고 내 발에 활기를 주는 손짓이다. 나는 그 손짓을 따라 앞으로 가야겠다는 즐거운 유혹에 빠진다.

희망과 그리움, 떠남과 돌아옴의 길은 어떤 관계를 전제로 한다. 길은 희망이라는 미래와 그리움이라는 과거, 미지의 사람과 정든 사람들, 사물과 인간간의 관계를 이어준다. 이런 관계에서 미래와 과거, 나와 남, 정착과 개척, 휴식과 움직임, 인간과 자연의 만남의 열매가 영글어간다.

길은 과거에 고착함을 부정하는 동시에, 미래에만 들떠 있음을 경고한다. 길을 떠나 나는 이웃을 만나고, 길을 따라온 이웃이 나를 만난다. 길 끝에 휴식할 곳이 있지만, 다시 길을 찾아 어디론가 움직여야 한다. 길은, 인간이 자연현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인간과 자연의 경계선을 전달하는 크나큰 표지이지만, 그 표지는 인간과 자연의 새로운 관계, 새로운 만남을 나타낸다.

이런 만남에서 과거가 미래로 이어져 역사가 이루어지고, 내가 남들에게로 연결되어, 고독한 실존적 존재로서의 나는 사회라는 광장의 인간으로 재발견된다. 그리고 이런 만남을 통해서 인간은 자연 더 나아가 우주로 해방된다. 이리하여 길이 만남이라면, 만남은 곧 열림이다.

화초기 잘 꾸며진 정원 길에서 삶의 재미를 느끼며, 시골 샘터로 가는 들꽃무리 진 길에서 소박하나 알뜰하고 따뜻함을 감각한다, 산과 들을 일직선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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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뚫은 고속도로에서 인간의 승리감을 느낀다면, 들로 산골짜기로 꼬부라지는 철로에서 삶의 끈기를 맛본다. 봄꽃 필 무렵, 산을 넘은 길은 마치 미소와도 같이 밝다. 이처럼 길들이 삶의 긍정적 밝은 면을 채색한 화폭일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또 고통과 슬픔이라는 삶의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한여름 뙤약볕에 소를 몰고 읍내로 가는 길은 너무나도 멀고, 일을 마치고 무거운 지게를 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농부에게 그가 가야하는 험한 산골짜기 저녁 길은 너무나도 고달픈 언덕길이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일을 찾아가는 젊은이들에게는 그가 밟고 가야 할 신작로가 너무도 거칠고 불안하다. 그리하여 가지가지 길들은 그것대로 삶의 희노애락, 희망과 좌절, 활기와 실의의 각양각색과 삶의 자국을 남긴다.

한 사회에 따라, 한 문화에 따라 그리고 한 시대에 따라 길은 애절한 노래일수도 있고, 서정시가 될 수도 있고 서사시가 될 수도 있다. 로마로 통하는 돌길이나 미국 대륙을 그물처럼 누비고 있는 고속도로에서 크나큰 서사시를 읽을 수 있다면, 미루나무 그늘진 한국의 논길 혹은 산 너머 이웃마을로 통하는 산길에서 따뜻한 서정시를 들을 수 있다. 산천을 누비며 굼을 꾸는 듯한 마을들을 이어놓은 한국의 옛 길들에서 우리는 극히 인간적인 것을 느낀다. 철도와 아스팔트가 깔리고 플라타너스 그늘진 한국의 신작로도 아직 인간적인 호흡을 담고 있다. 그러나 바쁘고 부산한 고속도로, 큰 도시의 실꾸러미처럼 엉킨 길에서 우리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박자로 맞출 수 없는 비인간화된 형태의 삶을 체험한다. 그렇다면 인간적 체온이 풍기는 길을 잃어갈 때, 우리는 인간을 잃게 될는지도 모른다.

■ 흔들리지 않는 전체

박완서 소설가

베트남까지 포함해도 일주일이 채 안 되는 짧은 여행이었는데 인천공항에 내리니까 한국은 겨울이라는 게 잘 믿기지가 않았다. 열대에서 입고 있던 옷 위에다가 긴팔 윗도리 하나만 더 걸치고도 별로 추위를 못 느낄 정도로 날씨가 포근한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차가 긴 강변북로를 벗어나 구리 쪽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전지한 가로수가 나타났다. 평소 무자비할 정도로 뭉턱뭉턱 전지한 가로수를 꼴 보기 싫어했는데 하나같이 박수근이 그린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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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이 거기 나와 서 있는 것처럼 반갑고 정겨웠다. 전지한 가로수들이 그렇게 잘 생겼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우리 마당의 나무들은 하나도 전지를 안해주었다. 다들 제멋대로 자라고 있다. 작은 소나무 두 그루만 빼면 텅 빈 것처럼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마당이다. 마당을 바라보는 맛에 실내를 꾸미는 일엔 전혀 신경을 안 쓰고 사는지라 겨울에 손님이 오면 자랑할 게 없어서 곤란해지곤 한다. 그래서 일년 중 가장 볼 게 없을 때 오셔서 어쩌나, 괜한 군소리를 하면서 저 나무는 살구나무, 저 나무는 라일락, 저 나무는 자두나무, 저 나무는 앵두나무 하고 앙상한 나무들의 과거의 영화나 부풀려 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볼품없다고 생각한 나목들이 안 본 지 며칠이나 된다고 어찌나 의젓하고 아름다워 보이는지 저거야말로 나무의 진면목이구나 싶은 짜릿한 감동을 맛보았다. 잎과 꽃과 열매까지 포함해야 나무의 전체가 되는 줄 알았다. 이제 보니 그것들을 다 떨구고 맨몸으로 서 있는 나목이야말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는 게 바로 저런 게 아닐까 싶게 거침없이 당당하고 늠름해 보였다. 나무의 맨몸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꽃이나 잎은 한낱 가식이나 방편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부질없게 여겨졌다. 사람도 만일 일생 쓰고 살던 위선이나 허위를 떨어버릴 수 있다면 무엇이 남을까. 남는 것이 과연 있기나 할까.

잎을 다 떨군 우리 마당의 살구나무는 하늘 향해 쭉쭉 뻗은 가장귀들이 미동도 안한다. 저 나무가 하루도 같은 날이 없이 변화무쌍하던 그 나무일까. 만개 했을 때는 온 동네를 바람나게 할 것처럼 향기롭고 화려하던 꽃, 누런 살구를 한가마도 더 떨구던 그 다산성, 미풍에도 오묘하게 살랑이던 무성하고 예민한 잎새들, 느릿느릿 물들다가 우수수 서글픈 소리를 내며 서둘러지던 낙엽, 그런 것들이 과연 저 나무가 한 짓이었을까. 믿기지 않으니 혹시 저 나무가 꾼 꿈이 아니었을까. 살구나무 옆에 올망졸망한 작은 나무들도 흔들림이 없긴 마찬가지다. 한때는 제각기 영화로웠던 나무들이다. 한 때의 영화는 속절없이 가버렸고, 속절없이 가버린 것은 나의 군더더기일 뿐 전체는 아니라고 주장이라도 하듯 마지막 남은 전체는 한 점 흐트러짐도 흔들림도 없다. 나무를 닮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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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소유

법정 스님, 수필가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마하트마 간디가 1931년 9월 런던에서 열린 제2차 원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던 도중 마르세이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보이면서 한 말이다. K. 크리팔라니가 역은 <간디 어록>을 읽다가 이 구절을 보고 나는 몹시 부끄러웠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 많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지금의 내 분수로는 그렇다.

우리는 필요에 의해서 물건을 갖게 되지만, 때로는 그 물건 때문에 적잖이 마음 쓰이게 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혀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나는 지난해 여름까지 난초 두 분을 정성스레, 정말 정성을 다해 길렀었다. 3년 전 거처를 지금의 다래헌(茶來軒)으로 옮겨 왔을 때 어떤 스님이 우리 방으로 보내 준 것이다. 혼자 사는 거처라 살아 있는 생물이라고는 나하고 그애들뿐이었다. 그애들을 위해 하이포넥스인가 하는 비료를 구해 오기도 했었다. 여름철이면 서늘한 그늘을 찾아 자리를 옮겨주어야 했고, 겨울에는 그애들을 위해 실내 온도를 내리곤 했다.

이런 정성을 일찍이 부모에게 바쳤더라면 아마 효자 소리를 듣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렇듯 애지중지 가꾼 보람으로 이른 봄이면 은은한 향기와 함께 연둣빛 꽃을 피워 나를 설레게 했고, 잎은 초승달처럼 항시 청정했었다. 우리 다래헌을 찾아온 사람마다 싱싱한 난초를 보고 한결같이 좋아라 했다.

지난해 여름 장마가 갠 어느 날 봉선사로 운허노사(耘虛老師)를 뵈러 간 일이 있었다. 한낮이 되자 장마에 갇혔던 햇볕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고 앞 개울물 소리에 어울려 숲속에서는 매미들이 있는 대로 목청을 돋구었다. - 18 -

아차! 이때서야 문득 생각이 난 것이다. 난초를 뜰에 내놓은 채 온 것이다. 모처럼 보인 찬란한 햇볕이 돌연 원망스러워졌다. 뜨거운 햇볕에 늘어져 있을 난초잎이 눈에 아른거려 더 지체할 수 없었다. 허둥지둥 그 길로 돌아왔다. 아니나 다를까, 잎은 축 늘어져 있었다. 안타까워하며 샘물을 길어다 축여주고 했더니 겨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어딘지 생생한 기운이 빠져 나간 것 같았다.

나는 이때 온 몸으로 그리고 마음속으로 절절하게 느끼게 되었다. 집착이 괴로움인 것을 그렇다 나는 난초에게 너무 집념한 것이다.

며칠 후, 난초처럼 말이 없는 친구가 놀러 왔기에 선뜻 그의 품에 분을 안겨 주었다. 비로소 나는 얽매임에서 벗어난 것이다. 날아갈 듯한 홀가분한 해방감. 3년 가까이 함께 지낸 ‘유정(有情)’을 떠나보냈는데도 서운하고 하전함 보다 홀가분한 마음이 앞섰다.

이때부터 나는 하루 한 가지씩 버려야겠다고 스스로 다짐을 했다. 난을 통해 무소유(無所有)의 의미 같은 걸 터득하게 됐다고나 할까.

간디는 이런 말도 하고 있다.

“내게는 소유가 범죄처럼 생각된다…….”

그가 무엇인가를 갖는다면 같은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가질 수 있을 때 한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므로 자기 소유에 대해서 범죄처럼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크게 버리는 사람만이 크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물건으로 인해 마음을 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씀이다. 아무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의 또 다른 의미이다.

■ 회전문

염정임 수필가

거리에 나가보면 모든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기 위해 걸어도 될 거리를 자동차를 타고 가도, 계단을 두고도 에스컬레이터를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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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위하여 그렇게 바쁘게 서두르는지…….

나는 워낙 상황에 대한 판단이 느리고 운동 신경이 둔하다보니 빠르게 움직이는 기계 종류는 모두 경계하는 대상이 되고 말았다.

백화점에 설치되어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에도 언제나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이다. 마음속으로 ‘하나, 둘, 셋’을 세면서 발 놓을 자리를 눈여겨 보았다가 단숨에 발을 딛고 올라서면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온다. 그 톱니바퀴 같은 계단들 틈새로 발이 빠져들지 않는 행운을 무한히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나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요즈음 대부분의 빌딩 입구에 설치된 회전 유리문 앞에서이다. 옆에 보통 출입문을 두고도 왜 굳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문이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혹시 드나드는 어린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수긍이 가겠지만…….

어쩌다가 큰 건물에 들어갈 때, 나는 회전문 앞에서 항상 긴장을 느낀다. 마치 어릴 때 친구들과 줄넘기를 하면서 그 회전하는 반원 속에 뛰어들 때처럼, 어린 시절 그 정확한 투신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망설임과 결단을 반복했던가. 때로는 비장한 각오 끝에 두 눈을 꼭 감은 채 뛰어들곤 하지 않았던가?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호흡을 잘 가다듬고 단숨에 들어서야 한다. 그건 상당한 민첩을 요구했다.

회전문 앞에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나의 몸을 용납하는 공간이 미처 내 앞에 오기 전에 미리 그곳을 향하여 전진해야 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회전문에 일단 들어서면 자신의 의지와는 괸계없이 문의 속도에 발걸음을 맞추게 되어 있다. 직립 인간으로서 두 팔을 흔들며 유유히 걷는 자유를 점시 동안이나마 유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마치 무성영화 시대의 찰리 채플린처럼, 또는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성처럼 발걸음을 짧게 놓아야 무사히 회전문을 빠져 나올 수 있다. 따라서 군자다운 체면과 요조숙녀로서의 품위를 지키기에 회전문은 합당치가 않은 것이다.

아무래도 회전문이 자리해야 할 곳은 고층 건물의 입구가 아니라 연극이나 쇼의 무대위가 아닌가 싶다. 회전문이야말로 마술사의 소도구로 쓰임직하지 않은가! 들어갈 때에는 젊은 아가씨가 들어가서 나올 때에는 허리 굽은 할머니가 되어 나온다든지, 호랑이가 들어가서 고양이가 되어 나온다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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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나에게 부딪쳐 오는 일들 앞에서도 회전문 앞에서처럼 망설이고 뒤로 미룰 때가 많다. ‘이번에는 꼭’ 하면서도 유리문이 몇 개나 빙빙 돌며 지나가기를 기다린다. 정작 들어서고 보면 벌써 몇 바퀴 돌고 난 뒤가 된다. ‘아차’ 했을 때에는 한 발이 늦어 있음을 발견한다.

모든 일이 너무 정신없이 빨리 돌아간다.

때로는 살아간다는 것이, 정지하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빙글빙글 도는 유리문 앞에서처럼 현기증과 당혹감을 줄 때도 많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회전문에 떼밀리듯이 이 세상에서 밀려나 버릴 때가 오지 않겠는가? 자동차를 타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그렇게 바쁘게 서두르지 않아도 그때는 어김없이 찾아오리라.

회전문 앞에 설 때,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는 공간에 대한 불확실성을 첨예하게 느끼곤 한다.

■ 욕망의 두 얼굴

주연아 수필가

욕망은 야누스와 같이 앞뒤가 다른 두 개의 얼굴을 지니고 있다. 욕망이 아장아장 두 발로 땅위를 걸어갈 때 우리는 그것을 미덕이라 부른다. 일상에 필요한 긴장감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동기 부여를 위해, 우리는 성취욕 또는 야망이라 일컫는 적당한 욕망을 수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욕망이 무럭무럭 자라나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아오르기 시작하면 그것의 이름은 탐욕으로 바뀌고, 마침내 그 날개가 꺾이어 땅 밑으로 추락할 때 그 얼굴은 파멸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 파멸은 죽음과 등을 맞대고 있다. 이렇듯 욕망이 잘못된 자아 분열을 할 때 그것은 마치 하이드로 탈바꿈한 지킬 박사처럼 우리를 위협하고 결국은 자멸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는 것이리라.

내 욕망도 처음엔 깃털처럼 가볍고 조약돌처럼 조그마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어느 틈에 알라딘의 램프 속 거인처럼 몇 십 배의 부피로 팽창하여 거대한 아귀를 벌리고 나를 삼키려 마구 달려드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나는 돌연 하이드로 변신하여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하이에나의 눈빛을 하고, 온 몸의 가시털을 곤두세워 자신을 방어하는 고슴도치의 형상을 지니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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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리고 또 내 심장을 쉴 새 없이 먹이를 탐하는 돼지의 심장과 맞바꾸어, 하루에도 몇 번씩 죽음을 경험하기도 한다. 어느덧 나는 명예를 좇고 부를 좇는, 도시라는 정글 속의 한 마리 사나운 동물의 영혼이 되어 결코 잡을 수 없는 허망한 신기루를 향해 끝없이 달리고 또 달리는 것이다.

메멘토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그것은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욕망의 본질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 하나의 계단을 오르면 또 다른 계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것은 하늘을 향한 뾰족한 첨탑의 계단, 그런데도 우리는 결코 실재하지 않은 그곳을 끊임없이 오르고 오르며 웃고 또 울지 않는가.

이렇듯 오묘한 두 얼굴을 지닌 너, 욕망의 황금분할은 어떠한가. 욕망을 저울에 달아 미덕과 탐욕이 평형을 이룰 때 우리는 무기력과 부도덕에서 해방되어 평온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그 균형이 깨어질 때 우리는 그것의 노예가 되고 말아, 마침내 우리의 영혼을 악마에게 저당 잡히게 되는 것이다.

이제야 나는 알겠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바라보며 ‘묘지’와 ‘극락’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음을. 그것들은 바로 그 곳, 내 마음 가는 곳에 더불어 존재하고 있음을. 이 가을에 나는 비로소 철이 들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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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부 자연

■ 청추수제 (淸秋數題)

이희승 전 서울대 교수, 수필가

* 가을을 대표하는 몇 가지 소재를 선택하여 각각의 느낌을 피력한 글

0 벌레

낮에는 아직도 90 몇 도(섭씨 32도 정도)의 더위가, 가만히 앉아 있는 사람의 숨을 턱턱 막는다. 그런데 어느 틈엔지 제일선에 나선 가을의 전령사가 전등 빛을 따라와서 그 서늘한 목소리로 노염에 지친 심신을 식혀주고 있다. 그들은 여치요, 베짱이요, 그리고 귀뚜라미 들이다.

물론, 이 전령사들의 전초역을 맡아가지고 훨씬 먼저 온 것으로 매미, 쓰르라미가 있지마는 그들은 소란한 대낮에, 우거진 녹음 속에서 폭양에 항거하면서 부르는 외침이라, 듣는 사람에게 ‘가을이다’ 하는 기분을 부어주기에는 아직 부족한 무엇이 있었다. 그렇더니 이 저녁에 들리는, 정밀(靜謐 : 고요하고 편안함) 속에 전진하여 오는 소리야 말로, ‘인제 확실한 가을이로구나!’ 하는 영추송(迎秋頌 : 가을맞이 글)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 나오게 한다.

0 달

전등을 끄고 자리에 누우니 영창이 유난히 환하다. 가느다란 벌레 소리들이 창밖에 가득 차 흐른다.

‘아!’하는 사이에 나는 내 그림자의 발목을 디디고, 퇴(방과 마당 사이에 있는 좁은 마루) 아래 마당 가운데 섰다. 쳐다보아도 쳐다보아도 눈도 부시지 않은 수정덩이가, 도시의 무수한 전등과 네온사인에 나 보아란듯이 달려 있다.

저 달이 생긴 뒤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어루만지고 주무르고 꼬집고 하였을까? 원망인들 오죽 쌓였을라고, 그의 얼굴은 따뜻한 듯 서늘한 듯, 쌀쌀 하면서도 다정도 하다.

성결(聖潔)한, 숭고한, 존엄한 그의 위력에 나는 다시 내 자리로 쫓겨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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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슬

이슬은 가을 예술의 주옥편이다. 하기야 여름엔들 이슬이 없으랴? 그러나 청랑(晴朗) 그대로의 이슬은, 청랑 그대로의 가을이라야 더욱 청랑하다.

삽상(시원한 바람소리)한 가을 아침에 풀잎마다 꿰어진 이슬방울들의 영롱도 표현할 말이 막히거니와, 달빛에 젖고 벌레 노래에 엮어진, 그 청신한 진주 떨기야말로 보는 이의 눈을 부시게 할 뿐이다.

0 창공

옥(玉)에도 티가 있다는데, 가을 하늘에는 얼하나 없구나! 뉘 솜씨로 물들인 깁(누에고치에서 뽑은 명주실, 바탕을 조금 거칠게 짠 비단)일러나? 남이랄까. 코발트랄까. 푸른 물이 뚝뚝 듣는 듯하구나!

내 언제부터 호수(湖水)를 사랑하고, 바다를 그리워하고, 대양(大洋)을 동경하였던가. 내 심장은 저 창공에 조그마한 조각배가 되어, 한없는 항해를 계속하여 마지않는, 알뜰한 향연을 이 철마다 누리곤 한다.

0 독서

‘서중 자유 천종록(書中自有千鐘祿)’ 이란, 실리주의에 밝은 중국 사람에게 있을 법한 설법이렷다. 그러나 ‘속대 발광 욕대규(束帶發狂欲大叫)’란 형용(形容)이 한 푼의 에누리도 없는 삼복(三伏) 더위에, 만종록(萬鍾祿 : 매우 많은 녹봉)이 당장 무릎 위에 떨어진다기로서니, 독서삼매에 들어갈 그런 목석연한 사람이 있을라고. 지나친 변설인지는 모르나, 그러기에 나는 60일 휴가 동안 제법 독서 줄이나 하였다고 장담할 뱃심을 가지지 못하였다.

먼 산이 불려 나온 듯이 다가서더니, 아침저녁으로 제법 산들산들한 맛이 베적삼 소매 속으로 기어든다. 벌레가, 달이, 이슬이, 창공이 유난스럽게 바빠할 때, 이 무딘 마음에도 먼지 앉은 책상 사이로 기어가는 부지런이 부풀어 오름을 금할 수 없다.

* 속대 발광 욕대규 : 찌는 듯한 무더위에 관을 쓰고 허리에는 띠를 매고 점잖게 예복을 갖추고 앉았노라니 더위를 참다못해 미칠 것만 같아서 큰소리로 부르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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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설부

김진섭 수필가

말하기조차 어리석은 일이나 도회인으로서 비를 싫어하는 사람은 많을지 몰라도, 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눈을 즐겨하는 것은 비단 개와 어린이들뿐만이 아닐 것이요. 겨울에 눈이 내리면 온 세상이 일제히 고요한 환호성을 소리 높이 지르는 듯한 느낌이 난다.

눈 오는 날에 나는 일찍이 무기력하고 우울한 통행인을 거리에서 보지 못하였으니, 부드러운 설편(雪片)이 생활에 지친 우리의 굳은 얼굴을 어루만지고 간질일 때. 우리는 어찌된 연유인지, 부지중 온화하게 된 마음과 인간다운 색채를 띤 눈을 가지고 이웃 사람들에게 경쾌한 목례를 보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나는 겨울을 사랑한다. 겨울의 모진 바람 속에 태고(太古)의 음향을 찾아 듣기를 나는 좋아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어라 해도 겨울이 겨울다운 서정시는 백설, 이것이 정숙히 읊조리는 것이다.

만일에 이 삭연(索然)한 삼동이 불행히도 백설을 가질 수 없다면, 우리의 작은 위안은 더욱이나 그 양을 줄이고야 말 것이니, 가령 우리가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추위를 참고 열고 싶지 않은 창을 가만히 밀고 밖을 한번 내다보면, 이것이 무어랴 백설애애(白雪皚皚)한 세계가 눈앞에 전개 되어 있을 때, 그때 우리가 마음에 느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말할 수 없는 환희 속에 우리가 느끼는 감상은 물론 우리가 간밤에 고운 눈이 이같이 내려서 쌓이는 것도 모르고 이 아름다운 밤을 헛되이 자버렸다는 것에 대한 후회의 정이요. 그래서 가령 우리는 어젯밤에 잘 적엔 인생의 무의미에 대해서 최후의 단안을 내린바 있었다 하더라도, 적설(積雪)을 조망하는 이 순간에 만은 생의 고요한 유열(愉悅)과 가슴의 가벼운 경악을 아울러 맛볼지니, 소리없이 온 눈이 소리없이 곧 가버리지 않고 마치 그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인 거나 같이 순결하고 반가운 모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또 순화시켜주기 위해서 아직도 얼마 사이까지는 남아 있어 준다는 것은, 흡사 우리의 애인이 우리를 가만히 몰래 습격함으로 의해서 우리의 경탄과 우리의 열락(悅樂)을 더한층 고조하려는 그것과도 같다고나 할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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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지상의 모든 아름다운 것은 슬픈 일이나 얼마나 단명(短命)하며 또 얼마나 없어지기 쉬운가! 그것은 말하자면 기적같이 와서는 행복같이 달아나버리는 것이다.

■ 낙엽을 태우면서

이효석 소설가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 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언만, 낙엽은 어느새 날아 떨어져서, 또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세상의 사람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 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의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얕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가득히 자욱해진다. 낙엽 타는 냄새 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이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릿속에 떠올린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시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자리를 깊게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 죽어버린 꿈의 시체를 - 땅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없이 손수 목욕물을 긷고 혼자 불을 지피게 되는 것도 물론 이런 감격에서부터이다. 호스로 목욕통에 물을 대는 것도 즐겁거니와, 고생스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조그만 아궁이에 나무를 태우는 것도 기쁘다. 어두컴컴한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꽃을 어린아이의 감동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은, 그 무슨 신성하고 신령스런 물건 같다. 얼굴을 붉게 태우면서 긴장된 자세로 웅크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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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내 꼴은 흡사 그 귀중한 선물을 프로메테우스에게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에게서 막 받았을 때의, 그 태곳적 원시의 그것과 같을는지 모른다.

나는 새삼스럽게 마음속으로 불의 덕을 찬미하면서 신화 속 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 좀 있으면 목욕실에는 자욱하게 김이 오른다. 안개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겼다는 듯이 동화의 감정으로 마음을 장식하면서 목욕물 속에 전신을 깊숙이 잠글 때,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지상 천국은 별다른 곳이 아니다. 늘 들어가는 집안의 목욕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람은 물에서 나서 결국 물속에서 천국을 구하는 것이 아닐까?

■ 오월

피천득

오월은 금방 찬물로 새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여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스물한 살이 나였던 오월, 불현듯 밤차를 타고 피서지에 간 일이 있다. 해변가에 엎어져 있는 보트, 덧문이 닫혀 있는 별장들, 그러나 시월같이 쓸쓸하지 않았다. 가까이 보이는 섬들이 생생한 색이었다.

득료애정통고(得了愛情痛苦)

실료애정통고(失了愛情痛苦)

* 사랑은 해도 고통스럽고 잃어도 고통스럽다.

당송 8대가 중의 한 사람인 구양순의 말

젊어서 죽은 중국 시인의 이 글귀를 모래위에 써놓고 나는 죽지 않고 돌아왔다. 산록을 바라다보면 나는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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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 생명과 영혼의 율동으로서의 멋

박경리

한이라든가 신바람 같은 것은 우리민족 고유의 정서라 할 수 있고, 멋 또한 독특한 우리민족의 정서다. 그것은 다 같이 추상적인 것으로서 복합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으며 의의가 응축되어 있는 언어, 즉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한계를 느끼는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느낌의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선 멋이라 했을 때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다. 알다시피 <삼국유사>는 불교적 색채가 짙은 사서(史書)지만 한편 우리민족의 정신사라 할 수 있으며 알게 모르게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들 의식 속의 큰 흐름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삼국유사> 속에는 여러 인물들의 행위나 개성이 기술돼 있다. 그 개성들은 멋으로 나타나는 데 그 중의 하나로 처용(處容)을 들 수 있겠다 노래로 아름다운 자기 아내를 범한 역신을 뉘우치게 한 처용의 감정 처리는 실로 놀라운 정신미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그것은 인간이 도달한 높은 경지의 정신적 균형으로서의 멋이다.

그리고 또 하나, 소를 몰고 가던 노인이 벼랑에 핀 꽃을 탐내는 수로부인(水路夫人)을 위해 꽃을 꺾어 바치면서 <헌화가>를 불렀다는 얘기가 있다.

서양에서는 소위 기사도의 전범(典範)으로 돼 있는 것이지만 말에서 내리려는 여왕을 위해 물 고인 땅바닥에 방토를 벗어까는 기사, 그 정경을 눈앞에 떠올릴 때 우선 젊음을, 그리고 용맹과 사랑(헌신)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것은 현세적 혹은 세속적인 것이라 할 수도 있으며 정열과 욕망을 수반하는 것으로도 보여진다.

헌화가의 경우와는 대조적이다. 젊음을 초월하고 욕망도 다 털어버리고 속세를 떠난 노인의 <헌화가>가 보여주는 정신적 세계는 잡다한 것을 다 생략하고 가장 원천적인 것, 균형으로서의 자연 그 자체와도 같은 순수하고 높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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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지를 느낄 수 있다. 욕망을 다 걸러내버린 담백한 자연이 모든 생명에게 베푸는, 그러나 그것은 희생이나 친절의 개념과 연민, 자비라고나 할까. 희생이라는 일방적 부담이나 친절이라는 다분히 냉담하게 유리된 감정과는 다르게 무사(無私)하며 있는 모습 그대로 정직하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천의무봉(天衣無縫)의 상태가 최고의 멋의 경지가 아닐는지.

* 天衣無縫 : 선녀들의 옷은 꿰맨 자국이 없다. 시나 문장이 자연스럽게 잘 된 것을 비유하는 말

멋은 자연스러운 것, 자연스러운 것은 생명 그 자체며 정신이나 행동거지에서도 자연스러울 때 멋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어떤 물체나 조형예술도 자연스러울 때 멋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멋은 균형이며, 균형은 존재하게 하는 것이며, 예술가가 작품 제작에 임해 균형을 추구하는 것은 결국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다. 멋이나 신바람과 한, 이 세 가지 말은 일본어에서는 찾기가 어렵다.

우리민족의 문화는 멋으로 집약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직선은 생경하다. 그러나 곡선은 유연하다. 그리고 흐름이다. 우리의 산천이 그러하고 우리의 구조물, 의복 할 것 없이 일체의 생활용품에도 곡선을 선호한 흔적이 역력하다.

심지어 버선의 코까지, 외씨 버선발이라는 그야말로 간드러진 표현도 바로 곡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명은 율동감이다. 흔들리며 배어 나오는 영혼의 율동이기도 한 것이다. 살아 있는 것은 존중돼야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며 결코 물질 그 자체는 아닌 것이다.

■ 그 수평선

김남조 숙대명예교수, 시인

오늘 보고 싶은 건 하늘까지 맞닿은 수평선이다.

하늘이 바다요 바다가 하늘이라 할 만큼 둘은 한 가지 색조에 풀어져 시야의 끝머리에 가로누워 있으리라. 그 꿈속 같은 광경을 능히 현실인 듯이 상상해 낸다. 한 필의 연이은 비단 피륙처럼 머리 위 공중에서 아슴푸레한 저편까지 포물선을 그으며 높이 멀리 이어져 있을 그 수평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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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도 굶주림이 있어서 오랫동안 못본 것에게 목마름을 탄다. 언제쯤 수평선을 봤던가 싶게 그 기억에 떠올리기조차 어려운 지경에서 나는 오늘 불현듯 치받는 충동에 겨워 간절히 바다 생각에 집중한다.

삶의 영광이여!

언제나 생각하는 일이지만 우리의 주변엔 아름다운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종교와 자연과 예술만 하더라도 이제는 제약이 없고 특권자도 없으며, 원하는 이가 원하는 만큼을 누려도 좋은 전적인 허용만이 있을 뿐이다.

바다에 가서 먼 수평선을 바라보면 오늘도 역시 그 수평선은 유순한 양떼들처럼 드러누워 느리고 유장한 심호흡을 하고 있으리니 그 맥동 가히 손에잡히는 듯하다. 거기에 선 사람의 지친 몸도 커다런 요람 속에서처럼 포근히 쉬게 될 것임을, 찬찬히 흔들어주는 손길로써 온갖 긴장과 피로를 먼저 치유해줄 것이리라.

바다와 하늘은 서로가 서로에게 거울 같은 것일까? 산울림 같은 것일까? 육지에는 하늘의 모습이 비치지 않는데 물위에 언제나 선명히 피어오르는 하늘의 그림자가 있다. 작은 호수거나 허리처럼 가늘고 긴 실개천이나 심지어는 두메의 우물속에도 하늘은 고요히 내려 잠기어 그림자를 지운다.

석양 머리엔 화선지처럼 선주황의 염료가 번지고 서서히 은자(銀紫)로 바

뀌었다가 다시 수묵색으로 갈아입은 빛깔들의 층계, 밤이 되면 순금빛 불티

를 뿌리는 억천만 개의 별들까지 고스란히 물위에 얹히는 그 놀라움이라니!

비단실 스치듯이 미풍이 지날 때도 섬세히 그 모습을 비추는가 싶은, 그토록 영롱한 명경(明鏡), 바다여! 바다여!

하늘의 거울로 생겼는가.

하늘의 산울림으로 생겼는가.

바다여.

한없이 넓은 바다, 깊은 바다, 먼 바다, 영원한 바다, 어쩌면 신의 모상(模像)일 것도 같은 바다.

내 오늘 보고 싶은 건 하늘까지 맞닿은 수평선이다. 바람도 아닌 것이 안개도 아닌 것이 한 겹 입혀져서 꿈속처럼 아득한 그 수평선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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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은 새를 위하여

- 박완서

밖을 내다보기 위해 , 혹은 빛을 끌어들이기 위해 인간들은 집에 창을 낸다. 나도 집 앞 개울 건너 밤나무 숲을 바라보기 위해 큰 창을 냈다. 창살도 없는 통유리창 때문에 저만치 있는 밤나무 숲이 마치 우리 집 마당처럼 보였다. 유리창은 이렇게 경치를 빌려보는 대 편리한 것인 줄만 알았지 유리창을 통해 경치가 집 안으로 들어올 수도 있다는 건 미처 몰랐다.

새벽에 눈을 뜬 지 채 5분도 안되어서였다. ‘딱’하는 생나무 부라지는 소리와 함께 맹렬한 속도로 날아온 새가 유리창에 부딪히면서 땅으로 떨어졌다.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며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목뼈가 부러져 즉사한 새가 창밖에 널브러져 있었다. 부부였을까. 한 마리도 아닌 두 마리였다. 무슨 새인지 이름은 알 수 없었다. 크기는 참새보다는 비둘기에 가까웠지만 깃털은 참새와 비슷했다.

작년에도 유리창에 부딪혀 새가 즉사한 불상사가 두 번이나 있었기 때문에 새가 왜 그런 실수를 하는지 알고 있다. 밖에서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면 앞산이 그대로 비쳐보인다. 낮에는 안의 사물들과 겹쳐 보이지만 해뜨기 전 어둑신한 새벽녘이면 유리 속은 더 어둡기 때문에 도리어 그 안에 비친 앞산은 실물보다 훨씬 깊고 신비한 심산유곡처럼 보이는 것이다. 새가 속은 것이다.

촌구석에서 태어나 내가 처음으로 문명과 충돌한 것도 유리창을 통해서였다. 어머니에 의해 서울로 끌려오다시피 하다가 경유한 소도시 개성에서 나는 처음으로 유리창이라는 걸 보았다. 석양을 반사한 유리창은 화염을 내뿜는 것 같았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엄마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그전부터 나에게 유리와 불의 이미지는 따로가 아니었다. 오빠가 읍내 소학교에 다닐 때 학교에서 받아온 학용품 중 화경(火鏡)이 내가 난생처음 본 유리였다. 하필이면 그 볼록한 유리의 쓸모가 불을 만드는 거라니 화경을 통해 까만 종이 위에 햇빛을 모으면 연기가 모락모락 나면서 타들어가 구멍이 생겼다. 그걸 가지고 어른 몰래 장난을 치다가 짚더미에 불이 옮겨 붙어 집을 태울 뻔 한 일이 있었다. 그 무섭고 불길한 물건으로 온통 창을 싸바른 기차를 타고 도시로 온 게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과 영이별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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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물머리

유경환 시인, 아동문학가

사람들은 이곳을 두물머리라고 부른다. 한자로 표기되면서 양수리(兩水里)가 된 것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두물머리라 일컫는다. 두물머리, 입 속으로 가만히 뇌어보면, 얼마나 정이 가는 말인지 느낄 수 있다.

그토록 오래 문서마다 양수리로 기록되어 왔어도, 두물머리는 시들지 않고 살아 우리말의 혼을 전해준다. 끈질기고 무서운 힘이기도 하다.

두물머리를 시원스럽게 볼 수 있는 곳은, 물가가 아닌 산 중턱이다. 가까운 운길산, 남양주 운길산에 이르는 산길에 올라보면, 눈앞에 두물머리가 좌악 펼쳐진다. 두 물줄기를 만나는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교통체증에 걸리지 않는다면 서울에서불과 한 시간, 그래 주말은 피하고 날씨가 고우면 오늘처럼 주중에 온다. 주위엔 볼거리가 여러 곳에 있다. 다산선생의 유적지, 차 맛을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수종사, 연꽃이 볼 만한 세미원, 또 종합영화촬영소도 있다.

만나면 만날수록 큰 하나가 되는 것이 물이다. 두 물줄기가 만나 큰 흐름이 되는 모습을 내려다보노라면, ‘물이 사는 방법이 저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만나고 만나서 줄기가 커지고 흐름이 느려지는 것, 이렇게 불어난 쪽으로 바다에 이르는 흐름이 되는 것.

바다에 이르면 엄청난 힘을 지닌 승천이 가능해진다. 물의 승천이야말로 새롭게 다시 사는 실제 방법이다. 만약 큰 하나가 되지 못하고 갈라지게 되면, 지천이나 웅덩이로 빠져들어 말라버리게 된다. 이것은 물의 실종이거나 죽음인 것이다.

두 물이 만나서 하나의 물이 되는 것은 글자로 표기할 때 ‘한’은 참으로 크고 넓다는 뜻을 지닌다. 두 물줄기가 서로 껴안듯 만나, 비로소 한강이 된다. 운길산 산길에서 내려다보면 이 모든 것을 실감하게 된다.

하나가 다른 하나를 만나서 새로운 하나를 만들지 못하면, 그 끝간데까지 외로울 수밖에 없다. 외롭지 않을 수 없는 이치가 거기에 잠재해 있다. 다른 하나를 선택하기 위한 기다림, 선택을 결정하기까지, 채워지지 아니하는 목마름이 자리잡기에, 외로울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원래 거기 자리잡고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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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완성을 기다리는 바람인 것이다.

이 외로움을 견디면서 참아내느라 스스로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때로는 뒤를 돌아보게 된다. 여기 반성과 성찰의 기회가 오며, 명상도 따르게 마련이다. 명상은 해답을 찾는 노력의 사색이다.

물은 개체(個體)라는 것을 만들지 않는다. 스스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기에, 큰 하나를 만들 수 있다. 개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새로운 하나에로의 융합이 가능하다.

개체를 허용치 않으므로 큰 하나일 수 있다는 사실, 이는 큰 하나가 되기 위한 순명일 수도 있다. 다른 목숨들이 못 따를 뜻을 물이 지니고 있음을 이렇게 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이 지닌 인품의 향기처럼, 두물머리에서부터 물은 유연한 흐름을 지닌다. 여기 비끼는 햇살이 비치니 흐름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두물머리는 그 어느 곳보다 아름답다. 보기에 아름다운 것보다 깊이 지니고 있는 뜻이 아름답다.

낮에는 꽃이 앉고 밤에는 별들이 앉는 숲이 아름답다고 여겼는데 오늘 보니 두물머리는 그 이상이다. 조용한 물고기들 삶터에 날이 저물자, 하늘의 별이 있는 대로 다 내려와 쉼터가 된다. 만나서 깊어진 편안한 흐름, 이 흐름이 그 위의 모든 것 다 받아 안을 수 있는 넉넉한 품까지 여니, 이런 수용이 얼마나 황홀한지, 어느 시인이 이를 다 전해줄 수 있을까 묻고 싶다.

■ 이 청정의 가을에

김초혜 시인

눈물처럼 슬픈 가을이 온다. 바람으로 먼저 오는 가을, 그리하여 우리의 살갗을 스치며 영혼을 춥게 하고 마침내 우리를 허무라는 지향 없는 방황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가을은 하늘에서 온다. 그리하여 우리의 눈을 맑게 하고, 영혼을 슬프게 울리고, 고독이라는 끝 모를 시간 앞에 우리를 무릎 꿇게 한다.

달이 밝은 가을밤 창가에 서면 목까지 차오르는 그리움, 그 그리움은 근원을 모르는 슬픔이다. 글쎄, 그것이 가을의 얼굴인가. 가을의 손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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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람이 있어 이 가을의 막연한 그리움과 적막함과 서글픔의 정서를 분석하고 자세히 해명한다면 그건 또 얼마나 무의미한 일일까. 무엇 때문이라고 그 명료함이 설명된다고 하여도 가을이 주는 막막한 우울과 그리움의 사색이 치유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가을은 태고로부터 그런 계절이며, 자연으로부터 태어남을 받은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그 정서의 회오리 속에서 살아온 것이 아니랴. 가을이 없었다면 인간에게 철학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가을의 슬프고 애달픈 정서는 감상으로서가 아니고 우리들에게 많은 일깨움을 주기도 한다. 더러는 머무는 것보다 떠날 때 맞추어 떠나는 것이 더 아름답다는 교훈을 주기도 하고 기쁨과 슬픔을 수월하게 견뎌낼 수 있는 지혜를 주기도 한다.

아이는 아이대로, 소녀는 소녀대로, 어른은 어른대로 가을에서 느끼는 감정의 빛깔은 같지만 그 내용이 조금씩 차이가 있을 뿐일 것이다.

달밝은 가을밤 우리는 잠들지 못한다. 그 가을밤에 쉽게 잠들지 못하는 영혼은 곱고 착한 영혼이다. 가을 달을 지키며 가슴 저려 하고, 애달픈 그리움으로 가슴 적시는 영혼은 지순하고 순결한 영혼이다.

그건 부끄러움이 아니며, 가식이 아니며, 철없음이 아니며, 위선은 더구나 아니다. 왜냐하면 그 행위가 누구에게 보이고자 함이 아니고 오로지 자기 혼자 느끼고 표현되는 것이어서다. 가을밤을 쉽게 잠드는 사람의 영혼은 이미 아름다움을 잃은 영혼이다. 어쩌면 인간으로서 느껴야 할 삶의 아픔이나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가엾은 영혼이다. 가을밤엔 일찍 잠들지 말자.

가을은 우리로 하여금 종교적 자세를 갖게 하는 계절이다. 범속하고 악한 것이 허망하고 덧없는 것이라고 일깨워주기도 하고 어리석은 이들을 모두 용서해주라는 맑음을 선사하기도 하는 계절이다.

가을 밤, 창문을 열어 놓고 잠언록이라도 펼칠 일이다.

가을을 깊이 앓는 일은 순결한 일이며 고결한 일이다. 그 밀도만큼 자신의 삶이 정화되고 맑아진다는 것을 체득하는 길이다.

가을은 거두어들이는 계절이다. 자연은 그 혜택을 베풀면서 인간들이 지나치게 탐욕하거나 자만할지 몰라 그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진한 허무감을 느끼게 하는 정서를 함께 보내준 것이리라

- 다음에 3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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