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소중했던 것들

2018. 8. 8. 14:30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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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소중했던 것들

■ 이기주 산문집

0 성균관 대학 졸업

0 서울경제신문 전직 기자

0 작가 겸 컨설턴트. 2018 교보문고 북 멘토

0 저서 : 여전히 글쓰기가 두려운 당신에게. 언품.

언어의 온도. 말의 품격 등

■ 책을 건네며

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멀리 떠나기 전에

-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쩌면 그 꽃이 영원히 피어 있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자주 드나들었다. 병원은 지상에서 가장 엄숙한 도서관이다. 그곳에서 나는 낯선 이들의 사연을 접하며 미처 몰랐던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고 종종 삶을 돌아보곤 했다.

한 번은 어머니와 같은 병원에 입원한 어르신을 유심히 지켜본 적이 있다. 거듭된 항암 치료에도 병세가 호전되지 않던 할아버지는 의료진과 간병인에게 끊임없이 통증을 호소했다. 눈가에는 늘 핏빛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할아버지는 하나밖에 없는 딸 앞에서만큼은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딸이 다녀간 어느 날, 병실에 있던 누군가가 물었다.

“왜 따님한테는 아프다는 얘기를 하지 않으세요? 창피해서 그러세요?”

할아버지는 눈물을 억누르면서 나지막이 속삭이듯이 말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냐. 자꾸 아프다고 하면 안 좋은 기억만 안겨줄 것 같아서 이 악물고 참는 거야. 좋은 모습은 못 보여주더라도 힘들어하는 모습만 보여주고 갈 순 없잖아…….”

어르신은 극심한 통증으로 정신이 흐려질 만도 하건만, 자식에게 아픈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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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보여주기 싫었던 모양이다. 부끄러워서가 아니다. 딸이 겪게 될 슬픔의 무게와 크기를 줄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은 반드시 사랑을 남긴다. 가장 큰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한 때 내 일부였기 때문이며, 나는 한 때 그 사람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무릇 가장 소중한 것이 가장 먼 곳으로 떠나간다. 그러므로 서로가 세월이라는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기 전에, 모든 추억이 까마득해지기 전에,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들을 부단히 읽고 헤아려야 한다.

- 이 책의 행간을 거니는 동안 당신의 마음을 누일 수 있기를 바라며.

- 이기주

◉ 1부 추스르다

세월 앞에서 우린 속절없고 삶은 그 누구에게도 관대하지 않다.

다만 내 아픔을 들여다 봐 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꽤 짙고 어두운 슬픔을 견딜 수 있다.

■ 크게 그리고 천천히 자라다오

세월이 흐를수록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것이 늘어만 간다. 많은 말들이 가슴의 언저리에서 들끓다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다.

다만 내 목구멍에서 소멸된 말은 훗날 여백 위에서 소박한 문장으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어쩌면 나는 말을 아껴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살다보면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들어찰 때가 있다. 내 삶의 중요한 무언가를 길거리에 내팽개친 채 경주마처럼 앞만 보며 질주하는 기분이 든다고 할까? 그때마다 나는 눈을 감고 숨을 들이마신 뒤 몇 초간 버틴다. 그러면서 내가 의도적으로 버린 것이 무엇인지. 실수로 빠트린 것은 없는지 되짚어보곤 한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2학년 무렵 겨울이었다. “따르릉따르릉.”새벽녘에 전화벨 소리가 차가운 침묵을 깨트렸다.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어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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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는 무표정한 얼굴로 전화기의 꼬불꼬불한 연결선을 매만졌다.

통화를 마친 어머니는 잠이 덜 깬 실눈을 뜨고 있던 나를 갑자기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고는 억지로 외투를 입혔다.

집을 나섰다. 안개와 눈으로 뒤덮인 골목을 걸었다. 겨울바람이 얼굴과 머리카락을 매정하게 때리고 달아났는데, 난 자꾸만 발이 눈밭에 빠져 몸의 중심을 잡기가 힘들었다. 어머니 손에 이끌려 골목을 빠져 나오면서 물었다.

“엄마, 아빠 보러 병원에 가는 거야?”

걸음을 멈추고 숨을 고른 어머니는 눈 밖으로 터져나오는 눈물을 도로 집어넣기 위해 애쓰는 듯했다. 표정에서 한 시대가 사라진 것 같았다. 어머니의 목소리에는 울음기가 배어 있었다.

“기주야, 넌 크게 자라야 한다. 다만 천천히, 제발 천천히 자라다오. 알았지?”

크게 자라야 한다는 말은 쉽게 알아들었으나 천천히 자랐으면 한다는 말은 당최 무슨 뜻인지 코흘리개 꼬마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평소와 다른 어머니의 행동이 어딘지 모르게 어색하게 느껴져 연신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어머니가 내 뱉은 말의 속뜻을 헤아리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사춘기를 겪으면서나는 자연스레 깨달을 수 있었다. 남편을 황망하게 떠나보낸 어머니로선, 아들만큼은 아무 탈없이 당신 곁에 오래 머물러주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눈물을 억누르며 “천천히”라는 말을 되풀이한 게 아닐는지.

내 안에서 감히 밀쳐내거나 지워낼 수 없었던 “크게 그리고 천천히 자라다오.”라는 그 문장은 어느새 나를 버티게 하는 문장이 되었다. 그리고 가끔은 내 마음속 그늘을 환하게 비추었으며, 때론 내 상처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누구나 있다.

가슴 깊이 파고들어 지지 않는 꽃이 된 문장이.

상처를 보듬고 삶의 허기를 달래주는 그 무엇이.

우리는 그런 굵직한 기둥 같은 것을 가슴 깊이 꽂아 넣은 채, 누군가의 곁에서 삶을 버티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중한 사람 옆에 최대한 크게 그리고 오래 머물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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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실어 나르는 것

주말에 어머니와 함께 마트에서 장을 보고 돌아올 때마다 집 근처 화훼단지를 찾는다. 꽃을 구경하면서 화초 키우는 요령을 어깨너머로 배우기도 한다. 한번은 어머니가 꽃 집 주인에게 질문을 건넸다.

“이거, 제가 전에 가져간 건데요. 볕이 잘 드는 곳에 두면서 물도 적당히 주고 있거든요. 그런데 여태 한 번도 꽃이 피지 않았어요. 영양제라도 줘야 할까요?”

꽃집 주인은 입꼬리를 올리며 느긋한 미소를 지었다.

“볕도 좋지만 바람이 잘 드는 곳에서 키우세요. 식물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빛과 수분이 제일 중요하긴 하지만 꽃을 피우기 위해 바람이 필요한 녀석도 있답니다. 때론 바람이 불어야 해요, 바람이.”

바람이라…….

하긴 식물은 잘 모르겠으나 돌이켜보면 비와 햇살과 바람이 적당히 어우러지던 순간. 망울만 맺혀있던 인생이 꽃봉오리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분명 바람이 실어 나르는 것이 있다. 태양과 비와 구름이 아닌 바람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그 무엇이.

■ 내가 네 편이 되어 줄 테니

오래전 추석이었다. 유치원에 다니던 조카 녀석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삼촌, 궁금한 게 있어요. 언제 어른이 되는지 궁금해요.”

조카의 질문이 겨냥한 과녁이 단순히 ‘어른’이라는 낱말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지만, 식사 자리에서 반주를 한 탓인지 난 어찌어찌하다가 동심을 무참히 파괴하는 견해를 내놓고 말았다.

“어른 그게 되고 싶어? 굳이 될 필요는 없는데…….”

조카 앞에서 얼토당토않은 조언을 내던진 내 혀를 목구멍 쪽으로 잡아당기면서 문득 돌이켜봤다. 나는 학교와 직장에서 어떤 목표를 달성할 때보다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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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려 날카로운 삶의 문턱에 걸려 버둥거릴 때, 내가 걸어온 길을 힐끔힐끔 돌아보곤 했다.

늘 그랬다. 행복과 기쁨은 인생의 절반만 가르쳐줬다. 인생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고르게 알려준 스승은 언제나 슬픔과 좌절이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무리 열심히 달려도 도달할 수 없는 세계가 있음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마다, ‘과연 나답게 산다는 게 무엇인가?’ ‘어떻게 이 조직에서 나를 지켜내야 하는가?’ 따위의 삶에 그나마 보탬이 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던 것 같다.

나는 삶의 갈림길에서 매번 갈피를 못 잡고 배회하면서 끝 모를 수렁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때마다 날 건져 올리고 내개 길을 알려준 사람은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눈물은 내 방황을 멈추게 했다. 어머니는 철석같이 자식을 믿어주었다.

“기주야, 많이 힘들구나. 말 안 해도 알아.”

“…….”

“그래도 이것만은 알아줬으면 좋겠다. 다름 사람은 몰라도 난 널 믿는단다. 그러니 너도 널 믿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왈칵 솟아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고개를 내밀었다.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현실을 둘러보면서 가까스로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그러면서 다시 삶과 세상에 대해 물음을 던지기 시작했고, 타인에게 휘둘리지 않겠노라고 결심하곤 했다.

세월 앞에서 우린 속절없고, 삶은 그 누구에게도 관대하지 않다. 다만 내 아픔을 들여다봐주는 사람이 있다면 우린 꽤 짙고 어두운 슬픔을 견딜 수 있다.

“모두가 널 외면해도 나는 무조건 네 편이 되어줄게” 하면서 네 마음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다면.

■ 사랑이 보이네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 어느 노부부가 마련한 저녁상의 맛에 빠져 있을 때였다. 노부부가 서로를 바라보면서 주고받는 일상적인 이야기가 내 눈과 귀를 텔레비전 앞으로 끌어당겼다. 아흔을 넘긴 할아버지는 결혼 생활을 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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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는 대목에서,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있는 할머니를 은은한 눈빛으로 잇달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사랑이 보여. 사랑이…….”

사랑이 보인다? 이 얼마나 포근하고 수수하고 근사한 사랑 고백인가. 사랑의 근본을 생각하게 만드는 문장임이 틀림없다.

사랑은 본디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 속에서 눈에 띄는 특정한 상대를 육안으로 분간해 서로의 물리적 거리를 좁히고, 평소 잘 사용하지 않는 심안(心眼)을 크게 뜨고 서로의 내면을 살펴가며 심리적 거리를 좁힐 때 사랑은 움트기 시작한다.

사랑은 상대방을 알아보는 데서 출발한다.

서로를 향해 빠져드는 순간

깊은 슬픔, 깊은 바다, 깊은 눈빛, 깊은 관계, 그리고 싶은 사랑….

어쩌면 우린 풍덩하고 빠져들 수 있는 것에만 ‘깊다’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종의 깊이가 있는 공간을 향해서만 우린 몸을 내던질 수 있다. 그곳으로 뛰어들 수 있다.

사랑이야말로 그렇다. 사랑과 어울리는 동사가 무수히 많을 테지만, 가장 자연스럽게 짝을 이루는 단어는 뭐니뭐니해도 ‘빠지다’가 나일까 싶다. 우리는 사랑을 맺는다고 하거나 사랑을 결탁한다고 하지 않는다. 심장과 심장이 맞부딪혀 일어나는 감정의 공명을 느끼는 순간 우리는 낭랑한 목소리로 외친다.

“있잖아. 나 그 사람과 사랑에 빠졌나봐!”

사랑에 빠질 때 우린 두 손을 맞잡고 서로를 감싸안으며 함께 들어간다. 그 순간 눈앞에 낯선 풍경이 펼쳐지기 마련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낯선 풍경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이렇게 난생처음 맞닥뜨린 풍경 속으로 용기를 내 걸어 들어가는 것이 사랑의 본질임이 틀림없다.

단 빠질 수 있다는 것은 빠져나올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이라는 세계에서 빠져나와야 할 땐, 함께 빠져 들 때와는 달리 홀로 힘겹게 그곳을 벗어나야 한다. 조금 다르게 얘기하면, 사랑이라는 집의 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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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때는 두 사람이 문고리를 맞잡고 들어가야 하지만 밖으로 나올 때는 각자 문고리를 돌리며 따로따로 걸어 나와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은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의 것이 될 수 있지만, 이별만큼은 오직 한 사람의 것이 된다. 모든 이별을 개별적이다.

어찌됐든 우린 사랑의 탄생과 소멸을 감히 제어할 수 가 없다. 사랑이라는 세계 안에서 우리 모두가 평등하다. 모두 정처 없는 존재들이다.

■ 누구나 두 번째 인생을 겪는다

대전에 있는 K문고에 볼일이 있었다. 대전 복합터미널에 도착해 택시를 잡으려는데, 중년 남성과 아이가 신호등이 없는 황단보도를 달팽이처럼 느릿느릿 걸어가고 있었다. 몇몇 운전자는 경적을 울려댔으나 그들의 걸음은 좀채 빨라지지 않았다. 빠르게 걸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맞은편에서 택시를 기다리면서 부자 관계인 듯한 두 사람을 다시 눈여겨봤다. 남자는 체구가 꽤 컸는데 걸음걸이가 불편한 듯 했다. 앞으로 발을 내디딜 때마다 몸이 한 쪽으로 기울여 졌다. 그때마다 남자가 착용한 의족이 펑퍼짐한 양복바지로 가려졌다가 드러났다를 반복했다.

열 살 남짓 돼 보이는 소년은 얼굴이 가무잡잡했고 남자 옆에서 지팡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작은 어깨로 자신의 두 배는 넘을 법한 체중을 버티어내면서 의연하게 황단보도를, 아니 세상을 건너가고 있었다.

택시에 오르면서 나는 소년의 눈빛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묵직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라고 할까. ‘아저씨, 전 이미 세상을 다 알아버렸어요’하는 눈빛이었다.

순간 나는 소년이 감내해야 하는 삶의 두께를 짐작해 보았다. 소년이 머리에 우주를 이고 살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약속이 있던 터라 택시에 몸을 억지로 욱여넣었다. 이동하는 내내 소년의 무겁고도 맑은 눈빛이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부모와 자식처럼 미묘한 관계도 없는 것 같다. 난 평소 어머니와 사소한 대화를 자주 나누는 편이다. 일상의 이야기를 밀도 있게 주고받다보면 어머니의 마음속을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어머니의 마음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여전히 어머니는 고운 옷을 입고 싶어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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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마음 한 구석에 내가 모르는 소박한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끊임없이 되풀이 하는 게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가 아닐까 싶다.

그렇게 서로를 저버리지 않고 복잡다단한 관계를 이어가다보면, 각자의 역할이 묘하게 겹쳐지거나 역전되는 때가 있다. 돌봄을 받기만 하던 자식이 부모를 돌봐야 하고, 자식을 보살피던 부모가 어느새 자식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시기가 반드시 찾아온다.

어쩌면 바로 그 순간, 부모와 자식 모두 다시 태어나는지도 모른다. 이제껏 한 번도 겪은 적 없는 두 번째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기 위하여…….

■ 욕나무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은 가장 튼실하게 자란 나무를 골라 해마다 ‘욕나무로 정한다. 마을 입구에는 욕에 관한 규율이 걸려 있다.

“사람 앞에선 절대 욕을 해선 안 된다. 정 하고 싶으면 욕나무에 대고 해야 한다!”

욕 나무 앞은 욕을 토해내는 사람들로 늘 북적인다. 욕 나무의 수명은 턱없이 짧다. 멀쩡한 나무도 욕 나무로 지정되면 비쩍 마른다.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드러난다. 지그시 눈을 감고 사람들이 욕을 받아낸 나무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고사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욕 나무를 새로 정한다.

■ 적당한 두려움에 관하여

김애란 작가의 소설을 읽다가 ‘지가 좋아하지 않는 인간하고도 잘 지내는 게 어른이지’ 라는 부분에서 멈칫했다. 문장에 밑줄을 그었고 내 마음엔 도 굵게 밑줄을 그었다. 문들 까마득하게 잊고 지내던 옛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해 상처를 주고 받으며 번민했던 날들이.

살다보면. 특히 조직생활을 하다보면 업무가 아니라 사람 때문에 힘겹고 두려운 순간이 있다. 밥벌이를 위해 부대껴야 하는 사람과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그리 녹록하지 않은 탓이다.

몇 해 전 기억이다. 오랜만에 학창시절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여 술잔을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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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였다. 시답잖은 일상의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거나하게 취한 누군가가 뜬금없는 질문을 내던졌다. 질문이라기보다 자신에게 가하는 질책 혹은 징벌 같기도 했다.

“혹시, 혼자 울 때 없냐? 가족들 몰래 우는 날 없어? 난 회사에서 삶에 치이고 일에 지치는 날에는 집에 와서 방문을 걸고 혼자 펑펑 울어, 사람도 일도 죄다 두려워. 무엇 하나 이겨낼 자신이 없다. 그저 퇴근하기 위해 출근하는 로봇이 된 것 같기도 해…….”

친구의 하소연이 끝나자마자 다들 침묵 속으로 빠져들었다. 녀석이 술김에 뇌까린 “혼자 펑펑 울어”라는 문장이 허공을 맴돌다가 동석한 친구들의 가슴에 내리꽂힌 것 같았다.

‘두려움은 꼭 극복해야 하는 대상인가?’ '학교와 직장에서 날 함부로 판단하고 규정했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나는 스스로 쌓아 올린 두려움과 타인의 평가에 갇힌 적 없었나?' 같은 물음들이 내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나는 틈만 나면 이 물음들을 속속들이 파고들어 곰곰 따져봤지만, 딱 이거다 싶은 답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그즈음 나는 사소하지만 꽤 중요한 질문을 받았다. 어느 날 식사 자리에서 "전 글쓰기가 두렵고 힘들던데요. 당신은 왜 쓰는지 물어봐도 될까요?"라는 의문문이 내 가슴을 향해 달려들었다.

"저 역시 글을 쓰는 일이 두렵고 힘들 때가 있어요. 그때마다 반대의 상황을 가정하곤 합니다. 만약 글을 쓰지 않고 살아간다면 어떨까? 아마 전 하루도 못 버틸 겁니다."

"네? 왜요?"

"제 경우엔 글을 쓸 때 수반되는 고통보다 글을 쓰지 않을 때 생기는 고통이 훨씬 크고 무겁거든요. 언젠가부터 전 큰 고통을 버리고 작은 고통을 취하며 사는 것 같아요. 글 쓰면서 사는 삶을."

혹시 미국 작가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딕>을 읽어 보셨나요? 거기보면 스타벅이라는 일등항해사가 등장하잖아요."

소설 속에서 스타벅은 고래잡이배를 오래 탄 선원이고 비교적 이상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이런 말을 해요. '나는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를 배에 태우지 않아'라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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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스타벅의 말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으면 오히려 탈이 날 수도 있다는 의미인가요?"

"예 그렇게 볼 수 있죠 뱃일 뿐 아니라 어떤 일이든 약간의 두려움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적당한 두려움'이라고 할까요."

■ 우리가 첫눈을 기다리는 이유

갈수록 심해지는 기상이변에도 불구하고, 매년 첫눈은 도둑처럼 몰래 내려와 사람들의 가슴을 적신다. 그리고 누군가는 "첫눈이다! 첫눈!"하면서 어김없이 호들갑을 떤다.

이쯤에서 객쩍은 질문을 던져본다. 우린 왜 첫눈을 기다리는 걸까? 다 큰 어른들이 첫눈을 밟아가며, 마치 그것을 난생 처음 본 강아지처럼 뛰어 다니는 이유는 뭘까?

나는 기상학자나 물리학자가 아니므로 과학적인 분석은 차치하고 조금 낭만적으로 접근할까 한다. 어쩌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첫눈'을 보자마자 오래전 어느 날 '첫눈'에 반했던 사람의 얼굴이 불현듯 되살아나는 것은 아닐까. 뜻은 다르지만 발음이 같은 단어 때문에 기억에 혼선이 빚어지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순식간에 추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건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마음과 심리가 모이고 모여서 해마다 첫눈을 재촉하는 게 아닐까 싶다. 누군가 "흠, 뇌공학적인 근거가 부족한 추론입니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접근한 게 아닙니까?"라고 묻는다면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지만, 이런 기계적인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 이 말 만큼은 꼭 전하고 싶다.

"글쎄요. 그래도 첫눈에는 분명 추억과 연정이 스며있지 않을까요?"

■ 사랑을 표현하고 상처를 감지하는 일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산타클로스와 콤비를 이루며 선물을 배달하는 루돌프 사슴은 실은 인생 역전의 아이콘이다. 빨간 코 때문에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하던 외톨이 루돌프는 산타의 썰매를 끌게 되면서 놀림의 대상에서 사랑받는 순록으로 환골탈태한다. 이는 못생겨서 따돌림을 당하던 새끼 오리가 어느 날 갑자기 제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면서 백조로 거듭난다는 안데르센의 동화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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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코 루돌프의 정체에 대해선 소문이 무성하다. 사실은 사슴이 아니라 순록이라는 설이 있고 산타의 존재를 의심하는 아이들을 설득하기 위해 어느 종교학자가 그럴싸하게 만들어 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일각에선 미국의 한 카피라이터가 루돌프의 정체성을 구체화했다는 주장도 제기한다. 1930년대 말 미국 시카고의 한 통신판매회사에 근무하던 카피라이터 로버트 메이는 암 선고를 받고 투병중이던 아내의 미소를 되찾아주고 싶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수줍음 많았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루돌프라는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이를 소재로 아내에게 산타와 루돌프가 등장하는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려주었다.

그러니까 루돌프의 탄생 배경에는 아내를 향한 한 남자의 마음이, 사랑이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언어적 상상력이 루돌프를 낳은 셈이다.

한때 '우리'라는 증상을 함께 앓았던 사람이 있었다. 난 종종 "우리의 미래를 위한 거야"라고 말하며.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보다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시간이 지난 뒤 겨우 깨달았다. 내가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행했던 많은 것들이 실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었음을.

■ 가장 소중힌 발음

이름 명(名)은 저녁 석(夕)과 입구(口)가 합쳐진 형태다.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밤에 부모가 자식을 찾기 위해 입을 벌려 애타게 소리 내는 것이 이름이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생을 마감하는 순간, 있는 힘을 다해 자식의 이름을 부르는 부모가 더러 있다고 한다.

사람은 가장 소중한 것의 이름을 가장 자주 발음하면서 살아간다. 자신의 마음이 상대의 마음에 닿기를 바라면서.

■ 마음에 박힌 못을 빼 내는 일

사람은 누구나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 우린 상처를 받으면 그것을 회피하거나 극복하려 든다. 후자의 경우 상처를 덮기보다 그 원인을 파헤쳐 그 연원을 밝히려 든다. 상처가 어디에서 시작됐는지 뿌리를 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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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상처를 대면하는 순간, 누군가가 가슴에 찔러넣은 뾰족한 못 그러니까 상처의 원인에 해당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타인에게 당한 모욕과 배신을 떠올리며 몸서리친다.

시퍼런 못을 가까스로 뽑아내면 깊게 헤쳐파진 빈자리를 더듬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다른 걸 채워넣거나 살이 다시 차오르는 것을 느끼면서 우린 꾸역꾸역 살아간다.

상처와 관련해 인간은 이중적인 심리가 있다. 우리 마음의 흠집과 상처를 꼭꼭 감추려 하면서도, 한편으론 누군가그것을 알아채주었으면 한다.

■ 남을 완벽히 이해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므로

파주 출판도시 근처 카페에서 노트북에 코를 박고 키보드를 두드리던 중에 앞 테이블에서 주고받는 노부부의 대화를 우연히 들었다. 할아버지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며 말했다. 자식과 다툰 듯 했다.

“내 자식이지만 난 그놈을 이해할 수 없어!"

“여보 한 이불 덮고 수십 년 살았지만 나도 가끔은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자식이니까 얘기를 좀더 해봐요. 말을 들어봐요.”

“…….”

“이해하려고 노력은 해봐야죠. 이해는 못하더라도 서로에게 위로가 될지도 모르잖아요.”

노부부의 대화를 엿듣다가 나는 노트북에서 손을 내려놨다. 가슴 한편이 허물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엔 무수한 허공과 우주가 존재한다.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저 우린 타인과 충돌하고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서로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관계가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달을 뿐이다.

사람의 실상은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과 반대인 경우도 많은 것 같다. 요컨대 남보다 쉽게 잘 웃는 사람은 남보다 많이 울어본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평소 별일이 아닌데도 남보다 희맑게 미소 짓는 사람은 남모를 아픔에 베갯잇 적셔가며 꺼이꺼이 울어본 사람일 수 있다. 한데 뭉쳐져 있는 타인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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쁨과 슬픔을 우리가 어느 한 쪽만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것뿐이다.

사람은 함부로 단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린 평생 남과 나를 알아가야 한다. 남을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알아가려는 나름의 시도는 해봐야 한다. 사랑한다면 상대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 그 과정에서 운이 좋으면 상대의 눈에 담긴 풍경을 들여다보는 순간, 위로라는 꽃을 피워낼지도 모른다.

“우린 낯선 사람을 한두 번 만나서 대화를 주고받고는 ‘이 사람 참 뼛속까지 차가운 사람이네’하고 쉽게 판단하곤 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닐 수도 있거든. 만약 누군가가 한없이 차갑게 느껴진다면 다음 셋 중에 한 가지에 해당하는 탓인지도 몰라. 첫째, 그 사람이 정말 얼음처럼 차가운 사람이다. 둘째, 그 사람의 따뜻함을 알아챌 수 있는 여유가 내 마음의 밑바닥에 흐르지 않는다. 셋째, 그 사람이 지닌 따뜻함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오롯이 향하고 있다. 이 셋 중 하나일 테지. 아니면 셋 모두에 해당하거나!”

■ 자전거 타는 법과 인생의 차이

순수와 열정, 청춘과 젊음처럼 뜨겁고도 투명한 단어들은 ‘나이듦’의 의미를 새삼 돌아보게 한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시간의 풍화를 견디는 일이다. 스스로 터득한 방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견디는 일이다.

삶이라는 비바람 속에서 한때 내 일부였던 것들의 몸에서 떨어져 나와 수분을 잃고 가루가 돼 흩날리는 광경을 덤덤하게 바라보면서. 우린 그렇게 나이라는 것을 먹는다. 어린 시절엔 나이 먹는 일이 자전거 타는 법과 엇비슷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몇 번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멍이 들더라도 부지런히 삶의 페달을 밟으면,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살면서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배운 교훈이 쉽게 잊히지 않듯이, 자전거 타는 법도 한 번 배우고 나면 쉽게 잊히지 않는다.

둥근 자전거 바퀴가 땅에 닿아 돌아가기 시작하면 정겨운 바람이 운전자의 곁을 스치고 달아난다. 운전자가 페달을 더 힘껏 밟으며 바람의 결을 느끼는 순간, 길과 사람은 어느새 하나가 된다. 그래서 소설가 김훈은 자신의 자전거를 풍륜(風輪)이라 칭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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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에 물들어가면서 자전거와 인생에 대한 내 생각은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도서관 자전거 거치대에 수개월째 방치된 자전거가 눈이 들어왔다. 난 안장에 뿌옇게 내려앉은 먼지를 털어내고 페달을 밟아봤다.

도서관을 한 바퀴 돌고 자전거 안장에서 내려오기 위해 엉덩이를 떼면서, 나는 서늘한 진리를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그래 자전거 타는 건 정말 쉽지. 자전거는 시행착오와 신체적 고통을 어느 정도 감수하면 쉽게 배울 수 있잖아. 하지만 먹고 사는 일은 다르지. 아무리 많은 학습을 하고 수없이 넘어져도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 투성이잖아!’

자전거 타는 일은 우리 삶의 번민과 슬픔을 가슴에 적당히 절여둔 채 살아온 날들을 추진력 삼아 꾸역꾸역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닐까.

각자의 리듬으로

끊임없이 삶의 페달을 밟아가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무너져내리지 않기 위해.

■ 선택과 이유

인생에서 뭔가 선택한다는 것은 몇 가지 선택지 가운데 하나를 골라 뽑는 행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진정한 선택은 선택하지 않는 것에 한 점 미련을 두지 않고 내가 선택한 것에 최대한 집중하는 일련의 과정이 아닐까 싶다. 선택은 삶의 여백에 한 번 찍고 마는 점(點)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으로 힘을 주어 긋는 선(線)에 가깝다.

■ 다른 사람의 정원에 핀 꽃

우린 사람의 절정을 꽃에 비유하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화려한 꽃을 피워내거나 아름다운 꽃을 발견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다만 욕심이 앞선 나머지 제 정원에서 꽃을 키워낼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의 정원을 염탐하거나 기웃거리면서 손쉽게 꽃을 손에 넣으려 하는 경우도 있다. 정원을 가꾸는 과정과 즐거움을 아예 건너뛰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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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남의 정원에서 자란 꽃을 꺾어서 내 책상 위에 올려놓기 전에.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져야 마땅하다.

‘다른 사람의 정원에 핀 꽃이 과연 내 꽃이 될 수 있을까?’

이 같은 질문의 답을 찾는 과정에서 ‘꽃’이라는 낱말의 속살을 들여다 볼 필요도 있다. 몇몇 언어학자는 꽃의 옛말이 '곶'이라고 주장한다. 곶은 본래바다 쪽으로 길게 튀어나온 땅을 가리키는 말인데 어원상으로 보면 '돌출'의 뜻이 녹아있다.

즉, 식물의 몸통에서 솟아나서 외ㅐ부로 튀어나온 부위가 훗날 꽃이 된다는 것, 꼬ㅛㅊ은 밖에서 안으로 비집고 들어와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식물의 내부로부터 외부로 힘껏 솟아오르는 것이 꽃의 본질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화사해도 남의 마당에 피어난 꽃은 내 꽃이 될 수 없다. 내 꽃은 내 안에서 밖으로 돋아난다.

■ 욕심

욕심은 불기가 남아 있는 숯과 같아서 움켜쥐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모든 것을 앗아가버린다.

■ 사람 마음엔 나무가 자란다

영화 <트럼보>는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미국에선 진보적 성향의 인사 상당수가 공산주의자로 몰려 국외로 추방되거나 옥고를 치렀다.

1947년에 발족한 반미활동 조사위원회는 공산주의자를 색출하겠다며 청문회를 열어 배우와 감독은 물론 시나리오 작가들을 향해 질문을 퍼부었다.

청문회에 끌려나온 스타 시나리오 작가 달튼 트럼보(브라이언 크랜스턴)은 위원회 질문이 개인의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에 위반된다며 구체적인 증언을 거부한다. 묵비권을 행사한 것이다.

트럼보는 의회를 모독한 죄로 1년간 복역하고 출소 후에는 일거리를 얻지 못한다. 호구지책이 막막해진 그는 B급 영화를 만드는 제작자 프랭크 킹(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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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맨)을 찾아가 시나리오를 헐값에 넘긴다.

이후 11개의 가명을 번갈아 사용하며 글을 써내려간 트럼보는 동료 작가의 이름을 빌려 발표한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작가 스스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다. 평범한 일상에서 글감을 찾기 위해선 자신을 둘러싼 외부적 요인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이리저리 걸음을 옮겨야 하지만, 제 삶의 흔적을 온전히 기록하기 위해선 자신의 내면을 향해 걸어 들어가야 한다. 내 안에 들어찬 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문장을 다듬다보면, 사람의 마음에는 각자의 신념을 닮은 나무가 한 그루씩 자라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마음속 깊은 곳, 은밀한 어딘가에서 자라고 있을 터다. 꽃이 돋아나거나 묵은 잎이 떨어지기도 하고, 뾰족한 못이 박히거나 빠지기도 하는 나무가…….

달튼 트럼보는 시대의 광풍에 휘청일지언정 마음속 나무를 가꾸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다. 부당한 권력에 맞서 개인의 소신을 지켜냈고 타자기를 끌어안고 살아가면서 삶의 희망을 키워냈다. 어쩌면 트럼보는 우리에게 이런 얘기를 들려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속에 나무 한 그루씩 심고 가꿔 나가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둠이 밀려오고 바람에 흔들리고 빗물에 젖더라도 나무 가꾸는 일을 포기해선 안 됩니다. 혹시 압니까. 각자의 나무를 보듬고 그것이 잘려나가지 않도록 살피다보면. 인생의 어느 봄날 저 멀리서 아름다운 새 한 마리 날아들지도 모르죠."

■ 핑거 테스트

"식물에 물을 주기 전에 핑거 테스트(finger test)를 꼭합니다. 흙을 읽고 느껴야 하거든요."

화초를 키우거나 정원을 가꾸는 이들이 종종 들려주는 말이다. 눈으로만 대충 흙을 살펴보고 어림짐작으로 물을 주면 너무 많이 주거나 적게 줄 수 있으므로, 식물의 뿌리를 움켜쥐고 있는 토양의 상태를 손가락으로 직접 매만져 검사해야 한다는 얘기다.

책을 출간한 뒤 서점을 찾는 일도 내겐 일종의 핑거 테스트다. 흙이 식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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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를 지탱하듯, 서점의 책을 떠받치는 반석의 역할을 한다. 농사짓듯 책을 정성껏 지으려면 가급적 자주 서점을 방문해야 하는데, 실제로 2016년 중순에 <언어의 온도>를 출간하고 나서는 전국에 있는 K문고와 Y문고 등을 모두 탐방했다.

비단 화초를 키우고 책을 알리는 과정에서만 핑거 테스트가 필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세상이라는 드넓은 터전이야말로 바지런히 손을 뻗어 어루만져야 하는 대상이 아닐까 생각한다.

꽃과 나무와 농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 라는 새삼 무겁게 다가온다.

무언가 키워내고 싶은 것이 있다면, 거리를 유지한 채 겉돌거나 헤매기보다 먼저 다가가서 쓰다듬을 필요가 있는 듯하다. 그것이 내 손길을 타도록 말이다.

■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은

정말 시간이 필요한 게 아니라

이유가 필요하다는 말인지도 모른다.

■ 눈물의 효용

눈물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고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다. 글쎄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살다보면 눈앞이 눈물로 가려져야 비로소 보이는 고통과 슬픔이 있다. 눈동자에 눈물이 괼 때 겨우 들여다 볼 수 있는 실상이 있다.

그리고 어떤 눈물은 우리를 웅크리게 하는 게 아니라 조금씩 자라게 한다. 그런 눈물은 어떻게든 한 방향으로 사람을 길러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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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건네주다

우리는 시간을 공유하는 사람하고만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특히 사랑은, 내 시간을 상대방에게

기꺼이 건네주는 일이다.

■ 사랑은 내 시간을 건네주는 일

어머니가 주무시는 안방에서 콜록콜록 기침소리가 내 방으로 건너왔다. 새벽이었다. 난 고양이 걸음으로 조심스레 방으로 다가갔다. 어머니가 이불을 걷어찬 채 주무시고 계셨다.

이불을 덮어드리기 전에 잔뜩 웅크려진 어머니의 등과 어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와락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어머니의 몸을 당당하게 떠받치던 곧은 직선은 어디로 날아가 버린 거지? 세월이라는 바람에 풍화된 것인가?

다음날 병원 예약을 잡았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이를 헤아리게 될 때마다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 자식으로서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그저 쓰디쓴 문장을 가슴에 밀어 넣으며 읊조리는 수밖에 없다.

“당신이 펼쳐놓은 그늘 속에서 난 비를 피하며 자랐습니다. 그런데 내게 쉴 곳을 내어주신 당신의 얼굴엔 왜 마르지 않는 강물이 흐르는 건가요. 당신의 눈엔 왜 비를 머금은 구름이 늘 떠 있는 건가요.”

하지만 눈물겹다고 해서 마냥 슬퍼하며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눈물이 내 마음을 휩쓸고 가버린 어느 날, 나는 어렴풋이 깨달았다. 자식의 방황을 멈추게 하는 것은 부모의 눈물이며, 부모의 눈물을 그치게 하는 것은 자식의 웃음이라는 사실을. 이는 분명하다. 부모의 울음은 자식의 삶을, 자식의 웃음은 부모의 삶을 환기 시킨다.

병원에서 볼일을 마치고 차에 시동을 걸 때마다 나는 어머니를 향하여 웃어 보이면서 “오늘은 뭐 먹고 싶으세요?”하고 묻곤 한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일종의 추임새처럼 꼭 이 말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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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 시간을 너무 많이 뺏는 것 같구나…….”

이럴 때마다 머릿속에 몇 가지 물음표가 새겨진다.

“부모와 함께 병원에 다녀오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면, 나는 제대로 된 자식인가? 만약 그런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닐까?

내 시간과 상대의 시간을 씨줄과 날줄로 촘촘히 엮어낼 때 사랑이라는 옷감이 완성된다. 한때 “사랑 한다”고 속삭이던 사람과 함께 있는 시간이 한없이 불편하다면 그 사람과 1초의 시간도 나눌 수 없다면, 이유는 단 하나다. 사랑이 식었거나 지금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공유하는 사람하고만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특히 사랑은, 내 시간을 상대방에게 기꺼이 건네주는 일이다.

■ 우리 모두는 수집가

작가는 문장을 모으고 화가는 이미지를 모은다. 어디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그림 그리는 사람만 그러할까. 가령, 세탁소 주인은 옷을 세탁하는 게 아니라 세탁물에 대한 이치와 옷에 깃든 의미까지 모으는 사람일 것이다.

전에 살던 동네에는 30년 넘게 세탁소를 운영한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어느 날 내게 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낡은 옷 곳곳에는 주인의 삶이 묻어 있다.”

바지와 치마의 윗부분 한 쪽에 허름한 자국이 있으면, 거의 매일 크로스백을 메고 다니거나 짐을 자주 운반하는 사람일 확률이 높다고 한다.

한 여름에 두꺼운 점퍼를 수선하러 오는 경우도 있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어시장이나 냉동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들에게 점퍼는 추위뿐 아니라 삶을 견디게 해주는 갑옷일 테니 더 특별히 신경써서 세탁 혹은 수선을 한다고, 할아버지는 말했다.

우리는 모두 이런저런 사물과 사물의 이면을 찾아 모으는 수집가임이 틀림없다. 저마다 애지중지 여기는 대상과 모으려는 목적만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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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운이 아니라 기분으로

서점을 그럴듯하게 일컫는 표현이 꽤 많은데, 나는 그 중에서 ‘영혼을 파는 가게’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서점에는 단순히 책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서점 하나에는 그곳에 꽂혀 있는 책만큼이나 다양한 사연이 담겨 있다.

한 권의 책이 잉크와 종이로만 이뤄진 게 아니라 작가와 편집자와 출판 디자이너와 서점 직원의 노력이 배어 있듯, 하나의 서점에는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이 쌓여 있고 우리가 갈구하는 것들이 무수하게 숨어 있다.

혹자는 서점을 일컬어 서림(書林)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책으로 이뤄진 숲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그럴까. 내 삶이 현실의 칼날에 가차없이 베이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서점을 찾는다. 서점으로 빨려들어가 작가들이 펼쳐놓은 활자의 숲을 걷다보면, 내 어깨를 짓누르는 무언가를 내려놓거나 반대로 삶에 요긴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품게 된다.

조금 과장하면, 난 1년 365일 가운데 300일 정도 서점에서 시간을 보낸다. 서점을 어슬렁거리며 신간과 구간을 마음껏 펼쳐보고 책을 한 권 구매한 다음 구석진 곳이 자리를 잡고 활자를 읽는다.

더욱이 난 집필실이나 작업공간이 따로 없다. 집에선 다락방에서 글을 쓰되. 밖에선 서점과 사점 근처에 있는 카페를 돌아다니며 원고를 작성하고 업무를 처리한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고갱이를 서점에서 얻어 오는 날도 있다. 삶의 본질과 이치 같은 것을 굳이 멀고 특별한 곳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고 본다.

한번은 서울 반포에 있는 서점에서 독자를 만났다.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고 자기를 소개한 어르신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실례합니다. 이기주 작가님 맞죠? 책 잘 읽었어요. 정말 서점을 방황하시네요?”

“하하 네 그럼요.”

“작가님 만나면 꼭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있었어요. 제가 약국을 운영한지 30년 가까이 됩니다. 매일 다양한 사람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약을 지어주는데요. 조제한 약을 건널 때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음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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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사람은 기운으로 사는 게 아니라 기분으로 살아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린 의기소침한 누군가에게 ‘기운 좀 내’라고 말하지만, 정작 삶을 이끄는 것은 기운이 아니라 기분이 아닐까 싶어요.”

어르신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나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석제 작가는 소설집 <믜리도 괴리도 업시>에서 “인간은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의 산물이고 사랑을 연료로 작동하는 사랑의 기계이다”라고 했다. 이 표현을 빌리자면 이런 얘기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기분이 나쁘면 기운을 낼 수 없는, 기분의 산물이고 기분을 연료로 하는 기분의 기계이다.

* 믜리 : 의리

괴리 : 서로 어그러져 동떨어짐

■ 밤마다 서성이는 그림자들

차를 몰고 귀가할 때면 지하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사거리에서 비보호 좌회전을 해야 한다. 신호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 습관적으로 고개를 돌려 단지 입구쪽을 관찰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자녀와 배우자의 귀가를 기다리면서 정문 근처를 서성이는 이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그림자 위로 달빛마저 쏟아지는 모습을 보노라면 각박한 현실에 잔뜩 오그라들었던 몸과 마음이 부챗살 펴지듯 활짝 부풀어오르는 기분이 든다. 그때마다 생각한다.

밤늦게 소중한 사람을 기다리는 이들이 어둠을 향해 내뿜는 온기가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는 게 아닐까. 저들은 달에서 빛을 끌어와 사랑하는 사람에게 힘껏 던져주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니 삶이 팍팍하고 쓸쓸할수록 푸르스름한 달빛 아래에서 하염없이 서성이는 그림자를 떠올려봄 직하다. 칠흑같은 어둠속으로 한 줌 온기를 던져주는 사람의 얼굴을 우린 기억해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나를 버티게 하는 사람은 내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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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모의 마음에서 눈덩이처럼 굴려지는 것

가로수가 붉게 물들어가고 철 이른 낙엽 하나둘 발등에 떨어진다. 무심한 가을바람이 뺨을 스칠때마다 지난 날 곁을 맴돌다 떠나간 사람과 사랑이 기억 저편에서 가물거린다.

가을이 짙어질수록 우리는 곁에 있는 사람과 일상이 건네주는 하찮은 것들의 소중함을 감사히 여기게 된다. 선선한 바람에 마음 한 편이 허물어질수록 곁에 있는 대상을 돌보는 것이야말로 우리 안의 허전함을 채우는 방법일 거란 믿음이 몸과 마음에 빈틈없이 들어찬다.

몇 해 전 가을부터 어머니께 매달 용돈을 드린다.

그리 많은 금액을 입금하지 않더라도 언제나 ‘이렇게 많이 넣었니?’ 하고 답문을 보내오신다.

지난해 가을에는 “편히 쓰셨으면 해요”라는 말과 함께 아예 체크카드를 만들어 드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일주일이 넘도록 카드를 한 번도 안 쓰시는 게 아닌가. 장롱카드가 될 듯하여 넌지시 여쭈어보았더니 어머니는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씀을 되풀이했다.

“내가 너한테 용돈 줄 수 있을 때가 참 좋았는데, 지금은 일방적으로 받기만 하니까 미안하잖아. 미안해서 그래…….”

세월이라는 도도한 강물 앞에서 나는 가까스로 깨닫는다. 자식이 건네드리는 모든 것이 부모의 마음에서 매번 크게 불어난다는 사실을 말이다.

용돈이든 문자든, 자식으로부터 건네받는 모든 것은 부모 마음에 스며들기만 하면 언덕에서 눈덩이가 굴려지듯이 몇 곱절로 불어난다.

특히 자식이 내뱉는 언어는 그냥 사라지는 법이 없다. 자식의 말과 글은 허공으로 흩어졌다가 부모의 귀에 모여든다. 그렇게 모여진 것은 뒷산을 흐르는 냇물이 마을을 가로질러 큰 강으로 흘러가듯, 부모의 마음으로 죄다 흘러들어가서 부모의 삶과 한데 비벼진다. 부모는 그 덩어리를 기억 속 어딘가에 고이 간직한 채 꾸역꾸역 살아가는 사람이다.

2018. 8. 7

* 다음에 2부가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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