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22. 19:42ㆍ독서후기
소 확 행 小確幸 (2)
-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
■ 배연국 지음
Chapter 3. 다른 태양을 찾아간들
■ 천 번은 찍어라 -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한다
성철 스님은 한 번 마음먹은 일은 목숨을 걸고 정진했다. 정호승 시인이 잡지사 기자 시절에 겪었던 일이다. 시인은 성철 스님을 인터뷰하기 위해 해인사 백련암으로 갔다. 함께 간 사진기자가 바위에 앉은 스님을 보고 연거푸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왜 그렇게 사진을 많이 찍노. 필름이 안 아깝나?”
스님의 물음에 정 시인이 “좋은 사진 얻으려면 많이 찍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님은 “그러면 천 번을 찍어라!” 하고 말했다.
나비 박사 석주명은 나비에 관한 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샘플을 분석한 학자이다. 그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논문 한 줄을 쓰려고 나비 3만 마리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나비에게 우리 고유의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 나비에게 붙은 예쁜 한글 이름은 모두 그의 정성 덕분이다. 그의 육신은 오래 전에 우리 곁을 떠나갔지만 영혼은 아직도 우리 가슴에 날갯짓 한다.
나는 정성의 힘을 믿는다. 정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동하는 법. 무슨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환경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정성이 부족하지 않은지 먼저 살펴야 한다. 그것이 정성을 다하는 자세이다. 지상의 생명체는 모두가 정성의 덩어리이다. 매일 대하는 쌀밥에도 숱한 이들의 땀과 손길이 배어 있다. 쌀 한 톨을 얻기 위해 농부는 일곱 근 흘린다고 하지 않는가. 쌀을 뜻하는 한자 미(米)에는 십十 자에 팔八 자가 두 개 들어 있다. 사람 손이 88번 가야 쌀이 된다는 의미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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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 배터리가 나갔네 -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충전하라
해외여행을 다녀오느라 오랫동안 집을 비웠더니 차에 문제가 생겼다. 급히 어디를 가려고 시동을 걸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배터리가 방전된 것이었다. 보험사에 긴급 출동 서비스를 요청해 결국 새것으로 교체했다. 보험사 직원의 말로는 요즘 흔히 있는 일이라고 한다.
비단 차의 배터리뿐일까. 사람은 태어날 땐 새것이지만 나이가 들면 신체 곳곳에 문제가 발생한다. 자주 고치고 수리해야 한다. 우리 영혼도 그렇다. 새로운 에너지로 충전하지 않으면 결국 방전되고 만다. 육신에 밥을 먹이듯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충전해야 한다.
거친 바다로 출항하는 선박은 밑바닥에 '평형수'라는 물을 채운다. 평형수는 외부의 조류나 파도에 의해 배가 심하게 흔들릴 때 복원력을 발휘해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이것을 충분히 채운 배는 외부의 충격으로 선체가 기울어도 원래 상태를 제빨리 회복한다. 반대로 부족하면 중심을 읽고 끔찍한 재앙을 맞게 된다.
인생은 종종 항해에 비유된다. 그 항해에 가끔 험난한 조류와 파도를 만날 것이다. 가족 중에 사고를 당하거나 사업을 하다 부도를 맞는 일도 생길 것이다. 그런 일로 내 인생의 배가 전복되지 않으려면 평형수를 가득 채워야 한다.
꿈, 희망, 사랑, 감사, 믿음, 긍정, 나눔 ……. 이것만 충분히 채우고 있으면 고난이 닥치더라도 삶을 추스를 수 있을 것이다.
■ 왜 보다 어떻게 -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이 착한 사람에게 고난의 짐을 지운 것은 그가 미워서가 아니다. 그 사람이 능히 무거운 짐을 감당할 힘을 지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자기 영혼조차 추스르지 못하는 약골에게는 절대 무거운 짐을 맡기지 않는다.
여기 소 두 마리가 있다. 한 마리는 힘이 세고 다른 한 마리는 약하다 당신이 주인이라면 어느 소에 달구지를 끌게 하겠는가? 마찬가지로 사람이 지는 짐의 크기는 각자의 능력만큼 부여된다. 신께서 예수에게 인류 구원의 막중한 책임을 맡기신 것도 그런 이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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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어질 인仁'은 사람이 등에 두 개의 짐을 진 형상이라고 한다. 어진 사람이란 남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그의 짐까지 지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니 나에게 부여된 삶의 짐이 무겁다고 푸념하지 마라. 타인의 짐까지 대신 지고 있는 '어진 사람'이라는 증거이니까.
이제 당신이 스스로를 향해 질문을 던질 시간이다.
"자, 일이 벌어졌으니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인생마사 (人生馬死)
- 인생의 강을 건너는 지혜는 자신을 낮춤에 있다.
새해를 앞두고 친척 한 분이 글 선물을 보내왔다. 꾸러미를 풀었더니 위기에 대처하는 소와 말의 습성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소와 말이 저수지에 빠지면 둘 다 헤엄쳐 바깥으로 나온다고 한다. 수영 실력은 발놀림이 능숙한 말이 월등하다. 소보다 거의 두 배나 빠른 속도로 헤엄을 친다.
그러나 홍수가 나서 강물에 빠지면 사정이 달라진다. 소는 살아서 나오지만 말은 익사한다. 그 까닭은 이렇다. 말은 자신의 수영 실력만 믿고 물살을 거슬러 헤엄치려 한다. 한동안 버둥대다 결국 힘이 빠져 죽고 만다.
반대로 소는 물살을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그냥 물살을 등에 지고 떠내려가면서 조금씩 바깥으로 헤엄친다. 그렇게 2~3Km 쯤 내려가다 강기슭에 발이 닿으면 엉금엉금 기어 나온다. 우생마사(牛生馬死)의 지혜이다.
어떤 선교사가 아프리카에 기독교를 전파하러 갔다가 오히려 큰 가르침을 배웠다고 한다. 그곳 원주민들과 함께 강을 건너다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보개 되었다. 원주민들은 저마다 돌을 머리에 이거나 가슴에 안고 있었다. 선교사에게도 묵직한 돌 하나를 주더라는 것이다.
'미련한 사람 같으니라구! 그냥 건너면 될 일이지, 뭐하러 무거운 돌을 들고 가나?'
선교사는 마지못해 돌을 받긴 했으나 이런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강의 중간쯤에 이르고야 그 연유를 깨달았다. 거센 물살에 휩쓸리지 않도록 사람들이 각자 돌을 드는 것이라고.
우리내 인생의 강은 눈에 보이는 강보다 훨씬 넓고 물살도 세다. 급류로 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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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지 않으려면 각자 무거운 돌을 하나씩 가슴에 안아야 한다. 돌의 이름은 인내라고 하고 겸손이라고도 한다.
인생의 강을 건너는 지혜는 자기를 낮추는 것에 있다. 겸손이 사람을 살리고 교만은 말을 죽게 한다. 인생마사(人生馬死)이다.
■ 디오게네스의 청어 - 마음의 평화는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옛날 임금이 가장 평화로운 그림을 그린 화가에게 상을 내리겠다고 공표했다. 많은 화가들이 응모한 끝에 최종 후보작 두 편이 왕에게 올려졌다.
한 작품은 잔잔한 호수를 그린 것이었다. 호수 주변에 삐죽이 솟은 산과 파란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이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신하들은 당연히 이 그림이 뽑힐 것으로 생각했지만 왕은 다른 그림을 뽑았다.
최우수작은 바위투성이의 민둥산을 배경으로 어두운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그림이었다. 산 계곡에 폭포가 거품을 일으키며 떨어지고 있었고 하늘에선 번개가 쳤다. 평화로운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폭포 옆 바위틈에는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림을 살피던 왕은 그 속에서 어미 새가 둥지에 앉아 알을 품는 모습을 보고 무릎을 쳤다.
“바로 저거야!”
그렇다. 평화란 소음이 전혀 없는 절대적인 고요를 의미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적막일 뿐이다. 걱정이나 소음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폭포수가 쏟아지는 엄청난 굉음 속에서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바로 평화이다.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마음의 평정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청어 한 마리를 끈에 매달아 마을에 끌고 돌아다녀 보거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에게 조롱과 야유를 퍼부을 것이다.”
제자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람들이 야유를 보내면 마음이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스승이 말을 이었다.
“마음의 평정을 향한 첫걸음은 ‘남이 나를 어떻게 볼까’하는 생각을 떨쳐버리는 것이네.”
미국 정신과 의사 조지 윌튼은 자신이 상담한 환자들의 걱정거리를 분석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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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 ‘걱정의 40%는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과거에 대한 것이고, 22%는 아주 사소한 것들로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일에 대한 것이고 4%는 사람의 힘으로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머지 4%만이 사람이 바꿀 수 있는 일에 대한 것이다. ’평소 우리들이 하는 걱정의 96%가 부질없는 걱정이라는 얘기이다.
■ 아모르 파티 - 네 운명을 사랑하라
라틴어에 아모르 파티(Amor fati)라는 말이 있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들을 사랑하고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아모르 파티는 ‘초인(超人)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의 핵심사상이다. 초인은 초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무한한 힘을 발휘하면서 자기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일컫는다. 네가 네 삶의 주인이 되어 운명을 헤쳐가라는 것이 니체릐 주문이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에서 폭풍 같은 사자후를 토해낸다.
“사람이 왜 태어났는지 아직 정답은 없다. 하지만 태어난 존재라면 죽기전까지 열심히 살아야 후회가 없다. 누구에게든 똑같은 시간과 순간이 주어지만 그걸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는 온전히 자신의 몫이다.”
니체는 말한다.
“가장 훌륭하고 가장 알찬 결실을 남긴 사람들의 삶을 찬찬히 뜯어보면서 그대 자신에게 악천후와 폭풍을 견디지 못하는 나무들이 장래의 거목으로 훌쩍 자랄 수 있는지 한번 물어보라. 불운과 외부의 저항, 어떤 종류의 혐오, 질투, 완고함, 불신, 잔혹, 탐욕, 이런 것들을 경험하지 않고는 어떤 위대한 미덕의 성장도 좀처럼 이룰 수 없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과 행복을 바란다. 그러나 100% 완벽한 성공, 100% 순결한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성공에는 실패가 도사리고 있고, 행복에는 불행의 불순물들이 혼재되어 있다. 불행과 실패를 한 번도 맛보지 않고서 행복과 성공이 단맛을 즐기는 법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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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은 불가항력의 존재가 아니다. 팔(8)자를 옆으로 누이면 무한대를 의미하는 기호 ∞ 가 된다. 만약 가혹한 팔자가 당신 앞을 가로막는다면 그것을 때려눕혀라. 그러면 당신에게 무한대의가능성이 열릴 것이다.
■ 다른 태양을 찾아간들 - 가방은 채우되 마음은 비우라
옛날 그리스 아테네에도 여행마니아들이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에게 말했다.
“여행을 다녀왔지만 나아진 것이 별로 없습니다.”
“여행하는 동안 줄곧 자기를 데리고 다닌 것이지!”
여행을 갔다 온 후에도 자기 아집의 굴레를 벗지 못한 사람들을 꼬집는 철학자의 일침이었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수트는 “진정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라고 했다.
여행은 세상을 발견하기 위한 수행이자 타인의 삶을 통해 자기 인생을 돌아보는 여정이다.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문화를 접함으로써 신선한 감동과 충격을 자기 안으로 끌어 들이는 것이다.
삶의 문제는 피한다고 없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무거운 짐들을 조금씩 내려놓을 때 비로소 가벼워질 수 있다.
세상의 비경을 보기 위해 굳이 먼 길을 떠날 필요는 없다. 나의 마음만 바꾸면 세상이 모두 별천지일 테니. 그래도 마음을 비우지 못하는 사람들을 향해 시인 호라티우스가 쓴소리를 던진다.
“ 다른 태양을 찾아간들 무슨 소용인가? 여기에서 멀리 떠나도 자기 자신을 떠날 수 없는 것을.”
■ 오십구비(五十九非) - 지혜는 자신의 지를 아는 것이다
사람은 실수투성이다. 왜 안 그렇겠는가.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체로 태어났으니. 세상에 나와서 혼자 걸음을 떼는 데에만 족히 1년은 걸린다. 만약 ‘나
는 실수가 없고 완전하다‘ 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발전을 거부하는 사람이다 과거의 수준에서 발육이 멈춘 성장지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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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즉양편에 ‘행년육십 이륙십화 (行年六十 而六十化)’ 란 말이 나온다. 위나라 현인 거백옥이 나이 예순이 되고 보니 생각하는 것이나 사물을 대하고 살아가는 태도가 60번 바뀌더라는 것이다.
맹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자신을 돌아보면서 “오십구비(五十九非)라고 했다. 나이 예순이 되어 삶을 회고 하였더니 59세까지 잘못되었더라는 것이다.
내가 옳다고 고집할수록 내 고집을 고칠 기회는 줄어들 것이다. 나이가 서른이라면 二十九非 , 마흔이라면 三十九非라는 심정으로 자신의 허물을 고쳐나가야 한다.
지식은 많이 아는 것이지만 지혜는 자신의 무지를 아는 것이다. 지식은 스마트폰 버튼만 누르면 온갖 것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하지만 그런 잡다한 지식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다.
■ 삶의 고릴라 - 마음으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미국하버드 대학교 심리학과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흰 옷을 입은 사람 셋과 검은 옷을 입은 사람 셋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그 이전에 흰 옷 입은 사람들이 농구공을 몇 번 패스하는지 세라고 미리 요청한 상태였다. 물론 대부분이 패스 횟수를 정확히 알아맞혔다. 실험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참가자들에게는 두 번째 질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혹시 동영상에서 고릴라를 못보셨나요?”
이 동영상에는 고릴라 분장을 한 사람이 농구공을 패스하는 사람들 가운데를 지나가는 장면이 들어 있었다. 실험 참가자의 절반 가량은 고릴라를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무려 9초 동안 고릴라가 가슴을 두드리며 카메라 바로 앞에 와서 얼굴을 들이밀고 사라졌는데도.
그것은 흰 옷 입은 사람이 공을 패스하는 것에 신경을 쓰느라 그 외의 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자 우리가 세상을 보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런 현상을 ‘무주의(無主義)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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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고 부른다. 사람들이 자기가 보려는 것에만 주의를 기울이느라 예상치 못한 사물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현상이다.
<대학>에선 이를 가리켜 ‘심부재언 시이불견 心不在焉 視而不見)’이라고 한다. ‘마음에 있지 않으면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는 뜻이다. 마음이 콩밭에 있으면 보아도 건성으로 보게 되고, 무엇을 듣더라도 참된 의미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연암 박지원은 “눈이란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라 마음이 시키는 대로 본다”고 말한다. 다음은 연암의 <눈먼 장님의 이야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세 살 때부터 시력을 잃은 장님이 40년 만에 눈을 뜨게 되었다. 어느 날 그 사람이 외출을 했다가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렸다. 장님이었을 때는 온 신경을 집중해 길을 찾았으나 눈을 뜨고 나니 온갖 현란한 사물에 현혹된 탓에 길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길바닥에 앉아 울자 지나가던 선비가 말했다.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우리가 눈으로 보았다고 해서 모두 진실일 수는 없다. 하물면 직접 보지 않은 것들을 진실이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마음으로 보아야 제대로 보인다. 마음의 눈을 뜨지 않으면 우리도 장님이 될 것이다.
■ 야채인간이 되셨으니
- 진정 위대한 것은 잊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다.
“커피숍에 갔다가 아메리카노라는 말이 생각나지 않아 ‘아프리카노 한 잔 주세요라고 했대. 아들이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사람에게 병문안 갔는데 식물이란 단어가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대. 갑자기 점심때 먹은 야채가 떠올라 이렇게 말했다는 거예요. 아드님께서 야채인간이 되셔서 얼마나 마음 아프시겠습니까?”
예전에 휴대폰을 집에 두고 출근한 적이 있었다. 아내에게 연락하려는데 도무지 휴대폰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다. 평소 아내에게 전화할 때 단축번호를 꾹 눌러서 사용하느라 전화번호를 기억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정말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수첩에 적힌 처형의 휴대폰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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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 “집사람 전화번호를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 민망함이란.
미국 작가 앨버트 하버드는 “뛰어난 기억력은 멋지다. 하지만 진정으로 위대한 것은 잊어버릴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말했다.
기억력의 감소는 ‘적자생존(적어야 생존할 수 있다)’으로 얼마든지 대처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머릿속을 채우는 덕이 아니라 삶의 노폐물로 가득 찬 뇌의 저장고를 비우는 것이다. 사람들은 “마음이 무겁다.”고 하소연한다.. 그것은 쓸데없는 걱정거리들을 머리와 마음속에 수북이 쌓아 놓고 있기 때문이다.
연잎은 잎사귀에 빗방울이 떨어지면 또르르 말아 끊임없이 비워낸다.
■ 인디언 광대 - 불편함의 근원은 모두 나에게서 비롯된다.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에는 특별한 광대가 있다. 그의 역할은 다른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화를 돋우는 일이다. 매일 아침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오늘은 부족 구성원들에게 무엇으로 골탕을 먹일까’를 고민한다.
부족의 축제인 태양 춤 축제가 열리면 광대의 역할은 단연 돋보인다. 춤꾼들은 나흘 동안 땡볕 아래에서 먹지 않고 계속 춤을 춘다. 춤꾼들이 기진맥진한 상태에 이르면 드디어 광대들이 등장한다. 춤꾼들을 조롱하고 관중에게 물총을 쏘면서 분탕질을 해댄다.
왜 광대들이 신성한 의식을 훼방 놓는 걸까? 그 까닭은 이렇다. 사람의 믿음은 외부의 유혹에 쉽게 흔들린다. 그래서 원래의 믿음을 잃지 않도록 광대들이 부족의 구성원들에게 계속 혼란이나 자극을 주는 것이다. 광대들은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어 그들 스스로 분노를 참고 통제하는 법을 익히게 한다. 인디언은 광대들을 삶에서 꼭 밀요한 존재로 여긴다. 그들을 '성스러운 광대'라고 부르며 존경한다.
살면서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은 어디든 존재한다. 하지만 불편한 관계를 끝까지 추적해보면 대개는 자신에게로 귀착된다. 타인이나 사물을 대하는 나의 태도가 근본 문제이기 때문이다. 쉽진 않겠지만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으면 '내 의지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는 광대가 나타나셨군!'하고 생각을 바꿔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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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언 축제에서 광대가 등장하지 않은 날이 있었다. 그날 춤꾼들은 더위를 먹고 쓰러져 병원에 실려 가는 소동이 벌어졌다. 춤꾼들을 자극하는 광대가 없다 보니 긴장이 풀어져 생긴 일이라고 한다.
누가 알겠는가. 지금 당신을 골탕 먹이는 사람이 삶의 복사열에 당신이 쓰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잡아주는 존재인지.
■ 3%의 양심 - 양심은 우리 영혼의 방부제이다.
우리가 버린 온갖 오물들은 바다로 흘러든다. 그런데도 바닷물은 썩지 않는다. 그 까닭은 바디의 조류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플랑크톤이 오염물질을 먹어치우기 때문이란다. 가장 큰 요인은 소금 덕분이다.
바다의 염분 농도는 3% 정도이다. 겨우 3%가 나머지 97%의 물을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영혼의 건강을 지켜주는 '소금'이 있다. 바로 양심이다.
인간을 창조한 신께서는 인간의 행동을 일일이 지켜보고 관여할 수 없다. 그래서 신의 대신자로 양심을 세워두었다.
칸트는 철학의 중심에 인간의 양심을 세웠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이런 글을 새겼다.
'나에게 항상 새롭고 무한한 경탄과 존경심을 일으키는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의 도덕률이다.'
돈과 권력에 찌든 세상일지라도 마음속에 양심이 별처럼 반짝인 다는 사실 역시 바뀌지 않는다. 그 3%의 양심이 우리 영혼에 방부제 역할을 한다.
■ 페르시아의 흠 - 사랑을 하려면 불완전한 그대로 사랑하라
남편은 왜 저런 행동을 할까? 아내는 왜 잔소리만 늘어놓을까? 왜 동료는 미운 짓만 골라서 하지? 이런 푸념을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나 내가 불평을 쏟아내도 상대방은 잘 바뀌지 않는다. 나의 힘으로 타인을 변화시키려는 시도는 대체로 성공하기 어렵다.
스스로 돌아보라. 나의 습관 하나 고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타인의 충고
를 듣고 내가 얼마나 개과천선했는지. 인간은 누구나 고집불통이다. 사람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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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오클랜드 대학교 슈리너 히라 교수가 애인이 있는 160명에게 두 개의 질문을 던졌다.
"내가 달라지려고 노력해야 합니까?"
"상대방이 달라지려고 노력해야 합니까?"
히라 교수는 그 후 이들 커플의 변화를 오랫동안 관찰 했다. 그 결과 "상대방이 달라져야 한다"고 했던 커플들은 관계가 개선되지 않거나 도리어 악화되었다. 상대방을 바꾸려는 시도가 변화를 이끌기는커녕 반발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이다. 반면 "내가 달라져야 한다고 응답한 커플들의 경우 대체로 관계가 좋아졌다.
페르시아 카펫을 만드는 장인들은 멋진 카펫을 완성하면 가게 앞에 그것을 깔아 놓고 행인들이 밟고 지나가게 한다. 밟을수록 선명한 색상이 드러나기 때문이란다. 진짜 고수들은 완성된 카펫에 일부러 작은 흠집을 낸다. 그것을 '페르시아의 흠'이라고 한다.
아마존의 어떤 인디언 부족은 모두 구슬목걸이를 차고 다닌다. 그런데 40여개의 구슬 중에서 유독 하나가 깨어져 있다 상처 없는 구슬 가운데 상처 입은 구슬 하나를 끼워 목걸이를 완성한 것이다. 인디언들은 그 깨진 구슬을 '영혼의 구슬' 이라고 부른다.
사람들은 무결점의 인간이 되기를 원한다. 그것은 인간의 자만이다. 하늘 높이 올라가려다 죽은 이카로스의 자만이고, 높은 탑으로 하늘이 권위에 도전했던 바빌론 사람들의 교만이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고 완벽 속에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마존 부족의 가르침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인간은 원래 불완전한 존재이다. 상대를 완전체로 만든 후 사랑하려면 아마 백년이 걸려도 어려울 것이다. 사랑을 하려면 불완전한 그대로 사랑하라. 그 편이 훨씬 쉽고 인간적이다.
■ 내가 서 있는 자리 - 갈등이나 이견도 시각차에서 비롯된다
입장(立場)이란 '내가 서 있는(立) 자리(場)'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를 중심에 놓고 생각한다. 나를 기준으로 상하를 나누고 좌우로 구별한다.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을 경우 내 입장에서 보면 상대가 오른쪽에 있을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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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왼쪽에 위치하게 마련이다.
사람간의 갈등이나 이견도 이런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경험, 지식, 환경 등에 의거해서 대상을 해석하고 판단한다. 타인과의 갈등을 줄이려면 이러한 차이를 서로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자신의 관점만 옳다고 고집하면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내로남불'의 성향은 누구에게나 있다.
*내로남불 : 내가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 남이 할 때는 비난하던 행위 를 자신이 할 때는 합리화하는 행위
미국에서 일반인 1천 명에게 유명 인사들의 명단을 보여준 뒤 "이 사람이 죽은 후 천당에 갈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 결과
- 테레사 수녀 79% , 마이클 조던 65%, 다이에너 왕세자비 60%
그러나 "당신은 죽은 후 천당에 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느냐?"에 대한 응답은 "87%가 예스"라고 대답했다.
인디언들은 "내가 상대방의 모카신을 신고 1마일을 걷기 전에는 상대방을 판단하지 마라."고 가르친다. 모카는 한 장의 가죽으로 만든 인디언의 구두이다. 남의 모카신을 신고 다니면 자기 발에 맞지 않아 물집이 잡힐 것이다. 그런 고통을 감수하고 그의 처지에서 생각해야 타인에 대한 이해가 가능하다.
나의 판단을 잠시 접고 상대의 처지를 떠올려보라. '오해의 문'이 닫히고 '이해의 문'이 열릴 것이다.
■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나
- 본대로 생각하는 대로 자신의 세계를 만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몇 개일까? 무슨 뚱딴지같은 질문이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하나이고 우주도 분명 하나이니까. 그런 과학적 사실을 부인하진 않는다.
질문의 방향은 객관적인 세계가 아니라 주관식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재료로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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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각자 고유의 정신세계를 만들어 간다. 70억 인류에게는 70억 개의 세계가 존재하는 셈이다. <화엄경>은 이렇게 역설한다.
"마음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같아서 능히 모든 세상을 다 그리네. 만물이 모두 이 마음에서 생겨나니 만들지 못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신비주의 작가 제임스 앨런은 "당신이 대하는 세계는 당신 자신의 반영이다."라고 말했다. 각자 자기가 본대로, 생각하는 대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간다는 뜻이다.
길을 걷다 민들레꽃 한 송이를 보았다고 치자. 농부는 따스한 봄날 논두렁 위에 핀 고운 자태를 연상할 것이고 정원사는 푸른 잔디밭에 뿌리를 내린 잡초쯤으로 여길지 모른다. 뿌리의 쓴 맛을 떠올린 주부는 눈살을 찌푸릴 것이고 시인은 아스팔트 틈새에서 꽃을 피운 질긴 생명력에 찬사를 보내리라. 이렇게 민들레 하나를 놓고도 사람마다 각자 느낌이 다르다. 이런 식으로 평생에 걸쳐 자기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사람은 누에가 자기 입에서 실을 뽑아 고치를 짓듯이 평소의 생각과 말로 자신의 집을 짓는다. 양지를 추구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으로 '감사의 집'을 짓는다. 음지를 좇는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원망의 집'을 만든다. 감사의 집에는 새 소리, 바람소리, 파란 하늘이 있지만 원망의 집에는 찢어지는 소음으로 요란할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의 주위에 어두운 일로 가득하다면 부정적인 생각과 언어가 홍수를 이룬 결과라고 보면 된다. '헬 조선'이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정말 지옥 같은 일만 벌어질 것이다. 그자신이 평소 지옥의 재료들을 그러모았기 때문이다.
* 헬 조선 “지옥을 의미하는 헬(hell)과 우리나라를 결함하여 만든 말로 살기 어려운 한국 사회를 부정적으로 일컫는 말
할아버지 추장의 일화는 우리가 어떻게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 알려준다. 추장이 손자에게 말했다.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는 두 마리의 늑대가 싸우고 있단다. 분노. 슬픔, 탐욕의 늑대와 사랑, 소망, 인내의 늑대 말이다.”
“할아버지,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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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손자가 묻자 추장이 대답했다.
“그야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지.”
정말 우리는 어떤 늑대에게 먹이를 주고 있나?
Chapter 4. 모든 날이 좋았다.
■ 사랑하라 죽는 날까지 - 사랑은 그대들만의 특권이다
결혼식에 하객들이 주례의 말씀을 기억하는 일은 드물다. 그런데 심금을 울리는 주례사 하나가 내 기억의 창고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감동의 주례사를 해주신 그분은 그날 주례가 처음이라고 했다. 주례는 결혼식을 앞두고 신랑 신부를 따로 만나 숙제를 내주었다. 서로에게 손 편지를 쓰라고. 그러고는 편지를 액자로 만들어 결혼식장에서 신랑과 신부에게 선물로 주었다. 주례는 액자에 든 편지의 한 대목을 하객들에게 들려주었다.
“우리가 살다보면 설렘은 없을지 몰라.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약속할게. 네가 기쁠 때 내가 기쁘고 네가 아플 때 나도 아플거라는 걸.(신랑)”
“처음 오빠와 만났던 날을 기억하고 있어.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을 약속할 게.(신부)”
주례는 신랑 신부의 편지에서 약속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약속이 있기에 인내할 수 있고 약속이 있기에 성숙할 수 있다.”면서 사랑의 약속을 끝까지 지킨 미국 로버스튼 맥퀄킨 대학 총장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맥퀄킨은 1949년 뮤리엘과 화촉을 밝혔다. 컬럼비아 국제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하던 어느 날, 아내 뮤리엘이 치매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모든 기억을 상실한 아내는 남편이 없으면 극심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 모습을 지켜본 남편은 1990년 중대 결심을 하게 된다. 22년간 수행하던 대학 총장직을 내던진 것이다. 교직원과 주위 사람들이 만류하자. “나는 아내를 돌보는 것이 대학 총장직을 수행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어서 “저는 결혼식에서 약속했어요.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항상 지켜주겠다고. 저는 약속을 지키는 남자가 되려합니다. 아내는 저를 위해 40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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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오늘이 있도록 희생했기에 이제 제가 아내를 위해 40년을 돌보아도 빚진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아내를 돌보는 것이 의무가 아니라 특권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아내를 깊이 사랑합니다.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 즐겁습니다. 아내를 돌보는 것은 큰 영광입니다.“
맥퀄킨의 이야기는 <서약을 지킨 사랑>이라는 에세이로도 출간되었다.
사랑하라 죽는 날까지!
두 사람이 사랑의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것은 그대들만의 특권이다.
■ 얼마나 멋진 세상인가 - 인생엔 공짜가 없다
인생엔 공짜가 없다. 감미로운 세상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고난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고진감래이다. ‘재즈계의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흑인 음악가 루이 암스트롱의 삶이 그러했다. 그의 "What a Wonderful World" 가사를 기억하는가.
푸른 나무와 빨간 장미 본다네.
당신과 나를 위해 피었다네.
그리고 조용히 생각하네.
이 얼마나 멋진 세상인지.
가슴 밑바닥에서 끌어 올리는 그의 탁성은 언제 들어도 일품아다.
*그의 생애
- 어둡고 칙칙한 매춘굴에서 자람,
- 생부는 날품팔이 노동자, 어머니는 15살의 미혼모
- 아버지는 아들이 걸음마를 하기도 전에 다른 여자와 눈이 맞아 집을 나감
- 어머니의 매춘으로 생계유지
- 어린 암스트롱은 폐품을 팔아 가계를 도움
- 13세 때 의부와 권총을 공중에 쏘아대는 장난을 치다가 소년원에 들어감 - 소년원의 밴드 마스터에게서 처음으로 음악교육을 받음
- 그의 별명은 새치모(Satchmo), '입이 큰 녀석(satch mouth)'이란 뜻의 영 어 속어, 트럼펫을 잘 불기 위해 입술을 찢었기 때문에 얻은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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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트롱이 말년에 폐암으로 눕게 되자 소련 시인 예브게니 옙투셴코는 “천사 가브리엘이여, 루이 암스트롱에게 트럼펫을 내려주소서!”라는 시를 헌사했다.
■ 돈보다 꽃 - 꽃에는 희망이 있다
인간이 꽃을 사랑한 지는 꽤나 연원이 깊다. 족히 수십만 년은 거슬러 올라간다. 이라크 북부 샤니다르 동굴에 있는 네안데르탈인 무덤을 발굴했더니 꽃가루가 발견됐을 정도이다. 그 꽃은 동굴 주변에선 피지 않는 꽃이라고 한다. 먼 곳에서 꽃을 꺾어 와서 죽은 자의 무덤 위에 뿌렸다는 얘기가 된다.
꽃은 인간이 원시동굴에서 벗어나 찬란한 문명을 꽃피운 정신적 기반이다. 꽃에는 희망이 있다. 꽃을 사랑하는 사람은 희망의 힘으로 칠흑같은 어둠을 이겨낸다. 패전의 아픔을 딛고 일어선 독일 민족이 그러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은 잿더미로 화했다. 한 사회학자가 조수와 함께 지하실에 사는 어느 독일 가정을 방문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교수가 조수에게 물었다.
“저들이 재건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조수는 어려울 것 같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조수는 반드시 일어설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이었다. 조수가 까닭을 묻자 교수가 말했다.
"어두운 지하실 탁자 위에 생화가 꽂힌 꽃병이 있는 것을 보고 알았네. 국가적 재난을 당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꽃 한 송이를 피우는 민족이라면 틀림없이 나라를 일으켜 세울 것이네. 아직도 희망을 믿고 있다는 뜻이거든!“
조수는 폭격으로 부서진 잿더미를 보았지만 교수는 꽃의 희망을 본 것이다. 희망만 있다면 미래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으니까.
돈은 물질을 풍요롭게 하지만 꽃은 영혼을 풍성하게 만든다. 돈보다 꽃이다. 꽃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 그런 넉넉한 영혼이 그리운 세상이다.
■ 암스트롱이 달에서 본 것 - 자연은 신의 증거물이다
자연은 인간에게 무한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아무 조건 없이 공짜로 온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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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택을 제공하지만 그 고마움을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다. 마치 당연히 받아야 하는 권리를 가진 것처럼 행동한다.
항상 내 곁에 있으면 그것의 소중함을 알기 어렵다. 막상 사라지고 나면 그제야 그 빈자리를 깨닫게 된다. 멀리 집을 떠난 뒤 가정의 온기를 절실히 느끼는 것처럼,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에게 기자가 물었다.
“달에 가서 무엇을 보고 오셨나요?”
“제가 사는 지구가 참 아름답다는 것을 보고 왔습니다.”
놀랍지 않은가. 달에서 감탄한 것은 달의 경치가 아니라 지구 풍광이었다는 사실이. 지구의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 암스트롱처럼 지구 바깥으로 떠나야 할까. 그럴 필요가 없다. 세상을 보는 ‘나의 안경’만 바꾸면 되니까. 빨간 색안경을 끼고 보면 세상은 빨갛게, 파란색 안경으로 보면 세상은 파랗게 변할 것이다. 고운 눈으로 대하면 세상은 예쁜 꽃과 새소리로 넘칠 것이다.
하와이 사람들은 만나거나 헤어질 때 "알로하(aloha)!"라고 인사한다. ‘나는 지금 신의 눈앞에 있습니다’라는 의미이다. 나와 당신, 그리고 저꽃과 바닷가 조약돌조차도 신이 창조한 신성한 존재라는 것이다.
신이 없다고 다그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나의 말은 이것이다.
“나는 신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본 어떤 것도 신 아닌 것이 없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신의 은총이 존재한다. 지금 나는 신의 눈 앞에 있다.
■ 행복은 밥 잘 먹는 것 - 행복은 손에 닿는 곳에 있다.
고명한 종교 지도자가 그 자리에 모인 제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희들, 사람이 평생 밥을 몇 그릇 먹고 사는지 아느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사람이 백 살까지 하루 세 끼를 빠뜨리지 않는다고 해도 10만 팔천 그릇밖에 못 먹어. 단명한 사람은 3만 그릇도 못 먹고 가지, 가난한 사람은 먹고 싶어도 못 먹어서 입이 달지. 부자는 먹을거리가 풍족한 대신 입이 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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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행복은 별 거 아니야. 밥 맛있게 먹고 일 열심히 하는 거야.”
행복은 소소한 일상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 것은 세상이나 환경 탓이 아니다.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일에 눈독을 들이는 자신이 책임이다. 불행의 9할은 내 탓이다.
“인간은 자신이 행복하려고 스스로 결심하는 만큼만 행복할 수 있다.”
숱한 고난을 딛고 위대한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에이브러햄 링컨의 경구이다.
■ 수면제를 먹을 시간
- 행복은 오손도손 종이를 접는 시간에 있다.
늘 불면증에 시달리는 남편이 있었다. 수면제가 없이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날 거실 쇼파에서 TV를 보다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렇게 달콤한 잠에 빠지기는 처음이었다. 마침 거실에서 나온 아내가 남편을 보고는 흔들어 깨웠다.
“여보 수면제 먹을 시간이야! 그냥 자면 어떡해?”
벌떡 일어난 남편.
“아 참 깜빡했군.”
남편은 그제야 허겁지겁 수면제를 먹더란다.
성공은 행복이란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적 가치에 불과하다. 행복을 위해 성공이 필요하지, 성공을 위해 행복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데 사람들의 실제 행동을 보면 정반대인 경우가 많다. 성공을 위해 행복을 희생하는 사람이 즐비하다. 마치 성공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등산을 했던 경험을 떠 올려보라. 정상에서 머무는 시간은 정말 짧다. 산에 오르는 이들은 훨씬 많은 시간을 등산로에서 보내야 한다.
행복은 정상이 아니라 그곳을 오가는 여정에 있다. 졸졸 거리는 시냇물. 길옆에 핀 들꽃, 나무 위에서 읊조리는 산새 소리, 성공의 정상이 주지 못하는 행복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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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이 번호표
-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라 불평이다.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행복의 번호포를 뽑은 사람과 불행의 번호표를 뽑아 들고 있는 사람, 전자는 자기 손에 든 것을 보는 사람이고 후자는 남이 손에 든 것을 보는 사람이다. 전자는 가진 것에 감사하는 사람이고 후자는 갖지 못한 것에 불평하는 사람이다. 전자는 만족의 미소가 입가에 머물지만 후자는 불만의 주름살이 눈가에 남는다.
행복의 반대말은 불행이 아니다. 불평이다. 불평의 어머니는 비교이다. 남이 가진 것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자기 삶에 투덜대는 불평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삶에 감사함을 느끼기 보다는 불만족한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얼굴이나 몸매 등 외모에 열등감을 많이 느끼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못 생긴 사람이 아니라 연예인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 산다고 한다. 그러면서 기준은 자기보다 남에게 맞추는 경향이 있다. 남과 비교해 자신의 행복을 끊임없이 저울질 한다.
프랑스 귀족 라로슈프코는 자신의 <잠언집>에서 이렇게 적었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 행복을 누리기보다는 남에게 행복해 보이기를 바란다. 남에게 행복해 보인다는 소리를 들으려 애쓰지만 않아도 만족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남이 행복하게 봐주기를 바라는 그 허영심 때문에 진정한 행복을 놓치는 사람이 정말 많다.”
당신이 지금 행복하지 않다면 세상 탓도, 남편이나 아내 탓도 아니다. 엉뚱한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당신 책임이 가장 크다.
■ 모든 날이 좋았다 - 좋은 일을 생각하면 좋은 일이 생긴다
TV 드라마 ‘도깨비’에 이런 말이 나온다. 주인공 공유의 명대사이다.
“너와 함께한 시간이 모두 눈부셨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날이 적당해서 모든 날이 좋았다.”
연인의 가슴을 울리는 이 밀어는 삶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된다.
옛날 중국의 운문 선사가 제자들에게 물었다.
“이미 지나간 15일 이전의 일은 너희에게 묻지 않겠다. 앞으로 맞을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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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대하여 한 마디 일러 보거라.”
아무도 대답하는 제자가 없자 선사가 말했다.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일일시호일은 ‘날마다 좋은 날’이란 뜻이다. 좋은 날은 좋은 마음에서 나온다.
언제나 좋은 날을 맞이하기 위해선 긍정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밝은 쪽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지금 있는 곳이 비록 어두운 터널 안이라도 터널 바깥의 태양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한다.
행복은 꼭 기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고난이 닥쳐도 그것에서 교훈이나 감사함을 얻는다면 그는 이미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이에게 세상은 늘 일일시호일이다.
행복(幸福)의 행(幸)은 좌우를 바꿔도 상하를 뒤집어도 幸이다 내 마음만 긍정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행복감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수험생들은 대개 시험 보는 날 아침엔 죽을 먹지 않는다.
죽을 쑬지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란다. 어떤 학생은 반대로 죽을 먹고 시험장에 간다. 식은 죽 먹듯이 시험을 보겠다는 의도에서다. 매사 생각하기 나름이다.
계단에서 넘어진 자는 계단을 집고 일어나는 법이다. 넘어진 자에게 계단의 모서리는 걸림돌이지만 일어서는 자에게는 더 높이 올라가는 디딤돌이 된다.
■ 복불오년(福不五年)
- 지금 당신이 행복해야 할 이유는 백만 가지도 넘는다
거액 복권에 당첨되는 순간 행복감은 하늘 높이 치솟을 것이다. 아쉽게도 그런 행복감은 결코 오래가지 않는다. 얼마쯤 지나 행복감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5년 후면 복권당첨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다고 한다. 권불십년(權不十年)이 아니라 복불(福不五年)이다. 세상의 권세보다 더 짧은 게 복권의 기쁨이다.
동화작가 정채봉은 이런 글을 남겼다. ‘오늘 내가 나 자신을 가장 슬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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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일들이 뭐가 있을까’하고 돌아봤더니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고 한다.
꽃밭을 그냥 지나쳐 버린 일
새소리에 무심하게 응대하지 않은 일
밤하늘의 별들을 헤아리지 못한 일…….
삶이 어렵다고 불행의 핑곗거리를 찾지 마라. 지금 당신이 행복해야 할 이유는 100만 가지도 넘으니까. 길섶의 씀바귀가 노란 꽃을 내밀 때, 이른 아침 가게의 커피향이 코끝을 간질일 때, 갓난아기가 해맑은 미소를 지을 때 행복의 파문이 가슴으로 밀려오지 않는가. 신께서 당신이 행복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주셨다. 당신이 할 일은 오로지 신의 은총에 감사하고 누리는 것뿐!
니체가 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는 이런 글이 실려있다.
‘행복을 위해서는 얼마나 작은 것으로도 충분한가! 정확히 말해 최소한의 것, 가장 부드러운 것, 가장 가벼운 것, 도마뱀의 살랑거리는 소리, 하나의 숨소리, 하나의 날갯짓. 하나의 눈짓……. 작은 것들이 행복을 이루고 있다. 침묵하라.’
행복은 감탄사이다. 일찍이 부처는 “감탄하는 것이 공덕 중 제일이라!” 했다. 세상 바깥에 천만 송이 철쭉이 피어 있은들 내가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하면 무슨 소용인가.
■ 꽃처럼 과일처럼
- 얼굴이 꽃처럼 활짝 핀 사람에게 행운이 나비처럼 날아든다
마트의 제일 앞쪽에 과일을 배치하는 가장 큰 이유는 과일이 색상 때문이다. 과일이 지닌 화사한 색상과 먹음직한 빛깔을 보면 입안에 군침이 돈다. 기분이 좋아지고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마음속에서 물건을 구매하려는 쇼핑 충동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또 다른 이유는 과일이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기 때문이다.
봄에 딸기, 가을에 홍시, 식으로 배치하면 소비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봄옷이나 가을 옷을 장만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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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마트에선 입구에 꽃을 주로 배치한다. 단순히 꽃만 팔려는 전략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꽃의 밝은 색은 인간을 더 활동적으로 행동하도록 자극한다. 국내 마트의 과일처럼 사람들을 안으로 끌어들여 구매 행위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한 마케팅 전략인 셈이다.
사람들은 “왜 나에게 행운이 오지 않나?”라고 푸념한다. 한탄과 푸념은 상황을 호전시켜주지 않는다. 되레 일을 꼬이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행운의 여신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은 불평꾼들이니까. 정말 행운을 원한다면 자신의 얼굴표정부터 살필 일이다. 혹시 행운을 걷어차는 울상을 짓고 있진 않는지.
잊지 마라. 얼굴이 꽃처럼 활짝 핀 사람에게는 행운이 나비처럼 날아든다는 사실을.
■ 친정도 음악이 된다
- 목소리는 사람이 연주하는 최고의 악기이다
목소리는 사람이 연주하는 최고의 악기이다. 우리가 말을 할 때에는 몸속 400개의 근육이 동원된다. 1초에 100번 이상의 성대 진동이 신체 내부와 공명을 일으켜 고유의 음성을 만들어 낸다. 이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소리를 내느냐에 따라 음악도 되고 소음도 되는 것이다.
달라이라마는 누가 종교에 관해 묻자 “나의 종교는 바로 친절이다.”라고 말했다. 친절을 사랑의 실천이자 종교적 수행으로 여긴 것이다. 그는 “모든 종교의 목적은 바깥에 큰 사원을 짓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가슴 속에 선한 마음과 친절의 사원을 짓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당신은 지금 어떤 사원을 마음에 짓고 있는가.
“행복이란 누가 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찾는 것” - 도스토옙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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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미라서 고마웠네 - 자식 사랑은 바다보다 넓고 깊다
죽음을 앞둔 어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온 영혼으로 사랑하는 자식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고는 펜을 들어 간절한 심정을 또박또박 글로 옮겼다.
“자네들이 내 자식이었음이 고마웠네. 자네들이 나를 돌보아줌이 고마웠네.”
늙은 어미는 자신의 병치레를 돌봐준 자식들에게 가장 먼저 고마움을 표했다.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채 장성한 자식들과의 옛 추억을 하나하나 마음으로 불러냈다.
“자네들이 세상에 태어나 나를 어미라 불러주고, 젖물려 배부르면 나를 바라본 눈길에 참 행복했다네. 지아비 잃어 세상 무너져, 험한 세상 속을 버틸 수 있게 해줌도 자네들이었네.”
일찍 남편을 암으로 떠나보내고 35년 동안 수절을 해왔지만 가슴에는 한 점의 섭섭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의 임종을 지켜준 자식들에게 고마움을 전할 뿐이었다.
“병들어 하느님 부르실 때, 곱게 갈 수 있게 곁에 지켜줘서 참말로 고맙네. 자네들이 있어서 잘 살았고, 자네들이 있어서 열심히 살았네.”
어미는 맏딸과 세 아들을 일일이 부르며 위로의 말을 건넨 뒤 ‘고맙다. 사랑한다. 그리고 다음에 만나자. 2017년 엄마가’라며 글을 맺었다. 이승의 인연을 내생으로 이어가길 소망한 것이다.
이 글은 광주에서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78세 나모 할머니의 유서에 담긴 내용이다.
민물에 사는 우렁이는 자신의 살을 먹여 새끼를 기른다. 새끼는 어미 우렁이의 살을 파먹고 자란다. 어미에게는 지독한 아픔도 사랑이었다. 어느 덧 새끼가 클 무렵이면 어미는 살이 다 없어지고 껍질만 남아 물위에 둥둥 뜬다. 빈껍데기로 변한 어미의 육신은 흐르는 물살에 말없이 떠내려 간다.
2018년 11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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