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12. 10:20ㆍ독서후기
글의 품격
■ 이기주 지음
0 성균관대졸, 2018 교보문고 북 멘토 외
0 말을 아껴 글을 쓴다.
쓸모를 다해 버려지거나 사라져 가는 것에 대해 쓴다.
엿보고 엿들은 것을 쓰기 좋아한다. 책과 사람을 평가하기보다 음미한다.
0 저서 : 언어의 온도. 말의 품격. 한때 소중했던 것들 외
- 글과 삶은 어느 순간 하나로 포개진다.
때론 내가 글을 쓰는 게 아니라 글이 나를 쓰는 게 아닐까. -
■ 서문 : 삶에서 글이 태어나고 글은 삶을 어루만진다.
얼마 전 요양 병원에 계신 할머니를 뵙고 왔다. 할머니는 치매를 앓고 계신다. 지금은 증세가 심해져 사람을 못 알아보지만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거 있잖아.” “누구시더라”하고 더듬거리며 사물과 사람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하는 정도였다.
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던 날, 할머니는 먼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아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억이 녹아서 흘러내리는 것 같아.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아서 말을 하지 못하겠어. 머릿속에 안개가 자욱해…….”
“치매 초기엔 기억력이 감퇴하고 언어 능력이 저하되기 시작해요 그래서 대화를 나눌 때 고유명사 대신 대명사를 사용하는 비율이 급격히 높아지죠. 치매라는 병은 환자의 기억 속에서 가족과 주변 사람의 이름을 가장 먼저 지워버립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에서 내 이름이 지워지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다.
세월은 우리를 에워싼 모든 것을 허물어뜨린다. 삶의 유한성 앞에서 인간은 늘 무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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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는 일은 서서히 사라지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먼저 사라지느냐. 나를 둘러싼 사람과 관계가 먼저 사라지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소중한 사람과의 이별은 그리움을 낳는다. 그리움은 대개 시간의 물살에 깎여 차츰 동그래지고 쪼그라들지만, 일부는 살아남아 가슴속을 제멋대로 돌아다닌다.
세상살이를 하면서 마음에 새겨지는 온갖 감정의 무늬가 우리의 손끝을 뚫고 나와 문장으로 태어난다. 그렇다. 삶에서 글이 솟아난다. 어쩌면 우리는 저마다 삶을 연필처럼 움켜쥐고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
나는 문장을 쓰고 매만지는 과정에서 말에 언품(言品)이 있듯 글에는 문격(文格)이 있음을 깨닫는다. 사전을 찾아보면 ‘격(格)’은 주위 환경이나 형편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분수나 품위다. 세상 모든 것에는 나름의 격이 있다. 격은 혼자서 인위적으로 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삶의 흐름과 관계 속에서 자연스레 다듬어지는 것이다.
문장도 매한가지다. 품격 있는 문장은 제 깊이와 크기를 함부로 뽐내지 않는다. 그저 흐르는 세월에 실려 글을 읽는 사람의 삶 속으로 퍼져 나가거나 돌고 돌아 글을 쓴 사람의 삶으로 다시 배어들면서 스스로 깊어지고 또 넓어진다.
깊이 있는 문장은 스스로 그윽한 문향(文香)을 풍긴다. 그 향기는 쉬이 흩어지지 않는다. 책을 덮는 순간 눈앞의 활자는 사라지지만 은은한 문장의 향기는 독자의 머리와 가슴으로 스며들어 그곳에서 나름의 생을 이어간다. 지친 어깨를 토닥이고 상처를 어루만지는 꽃으로 피어난다.
한 권의 책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하나지만 밖으로 나오는 문은 여럿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 안에 다양한 샛길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글의 품격>을 가로지르는 무수한 ‘활자의 길’을 각자의 리듬으로 자유롭게 거닐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길 위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느낄지는 오로지 당신의 몫이다.
당신의 글이 누군가에게 한 송이 꽃이 되기를. - 이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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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講 좌우봉원(左右逢源)
- 일상의 모든 것이 배움의 원천이다.
“삶은 내 곁을 맴도는 대상들과 오해와 인연을 맺거나 풀어가는 일이다.”
1. 마음 : 생각과 감정이 싹트는 곳
어머니가 수술대에 누웠다 다행히 예후(병의 치료 경과)가 좋았다. 항암 치료까지 무사히 마친 어머니는 퇴원을 앞두고 있었다.
난 무심결에 병실 밖을 내다봤다. 겨울이 그린 밑그림 위에 봄이 채색되고 있었다. 땅에서 솟아난 꽃들이 하늘의 뒤덮을 자세로 자라나 사방으로 하늘거렸다. 지상의 온갖 생명이 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봄’은 ‘볕’, ‘보다’ 같은 단어와 어원적으로 밀접하다.
봄이 오면 볕이 본격적으로 지상에 내리쬐기 시작하고 그즈음 우린 새싹이 돋아나는 현상을 눈으로 바라봄으로써 계절의 변화를 실감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머니는 침대에 앉아 창밖만 바라볼 뿐 말이 없었다. 한 시간 쯤 지났을까. 어머니는 겨우 입술을 움직여 병실의 침묵을 깨트렸다.
“기주야, 이번 봄은 다른 봄들보다 아름답구나."
난 아무 대꾸를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읊조린 문장이 너무 크고 무겁게 느껴졌다. 나 역시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봄이 아름답다'는 감탄은 수없이 했고 다채롭게 표현도 했다. 감히 '과거의 봄'과 '현재의 봄'을 비교하거나 대조한 적이 없을 뿐이다. 평소 나는 '좌우봉원'이리는 말을 가슴에 품고 문장을 매만진다. 이는 "주변에서 맞닥뜨리는 사물과 현상을 헤아리면 근원과 만나게 된다."는 뜻인데, 일상의 모든 것이 배움의 원천이라는 의미로도 풀이할 수 있다.
어머니가 토해낸 짧은 문장은 내 귓속에서 쉴 새 없이 맴돌았다. 어머니는 왜 그런 문장을 읊조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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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수첩을 놓지 못하고 어루만지던 나는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어머니가 창밖을 보며 느꼈을 심정을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삶 쪽으로 가까스로 넘어온 어머니로선, 퇴원하는 날 마주한 봄이 수십 년간 스쳐간 그것들에 비해 각별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어쩌면 영영 불 수 없었을 봄날의 풍경이….
평소 사인회나 독자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어떻게 하면 글쓰기 내공을 비약적으로 기를 수 있나요?" 같은 질문이 귓속으로 스며들 때가 있다. 그때마다 대답을 망설인다. 왜냐하면 글쓰기는 수학이나 물리학과는 달리 올바른 공식이나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럼 글쓰기에 대한 질문은 쓸데없는 것인가? 헛것인가? 그럴 리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물음은 뚜렷한 답이 없는 물음이 아닐까 싶다.
글쓰기에 대해 궁구하는 일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 삶에 보탬이 됐으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는다.
나는 글쓰기에 대한 질문에 휩싸일 때마다 몇 초간 숨을 들이마신 뒤 슬며시 입을 연다.
"글 쓰는 것보다 잘 느끼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마음을 들여다보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글을 쓰는 일은 마음의 상태를 살피고 기록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음의 정체는 뭘까. 어떻게 작동하고 어떻게 멈추는 걸까. 아니, 멈추는 순간이 있기는 할까. 아니면 감정과 기분으로 물들어 있을까?
맹자는 인간의 마음을 '대체(大體)'라고 했다. 마음은 인간의 사유의 바탕인 동시에 도덕적 능력을 지닌 커다란 몸에 가깝다는 것.
반면 일부 뇌공학자는 '마음=뇌의 작용'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고 주장한다. 마음이 뇌 신경세포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뇌가 작동하는 방식에 따라 마음도 빚어진다는 논리다 그럴듯한 얘기다.
하지만 뇌과학과 진화생물학 등 인간을 이해하는 학문의 지평이 넓어졌음에도 과학은 여전히 뇌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그로 인해 감정이 어떻게 변모하는지는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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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인간의 마음이 강가에 뒹구는 조약돌 같다고 생각한다. 낮 동안 햇살에 달궈진 조약돌은 저녁 어스름이 내려도 따뜻함을 유지한다.
마음도 매한가지가 아닐는지. 아무리 현실이 팍팍해도, 무언가에 혹은 누군가에 의해 슬며시 데워진 마음은 한동안 온기를 지닌다. 이때 냉기가 감돌던 마음이 데워지는 과정에서 나름의 온도차가 발생하는데, 그러면 세상살이에 쪼그라들었던 마음도 한껏 부풀어 오른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이 따뜻해질 때 생겨나는 휘황한 힘으로 삶을 이어가는 게 아닐까. 곁에서 마음의 온기를 전해주는 사람들 덕분에 우리가 세월을 버틸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생각할 '사(思)'자의 구조를 생각해 보자. 밭 전(田)과 마음 심(心_이 합쳐진 형태인데 혹자는 이를 '마음의 밭'으로 해석한다. 마음이라는 땅에서 생각이 농작물처럼 자란다는 얘기다.
돌이켜보면 나를 둘러싼 주변의 풍경과 사람과 자연이 오감을 거쳐 가슴으로 흘러 들어오던 순간, 내 안에선 글을 쓰고 싶은 욕망이 꿈틀거렸다. 그때마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듯 나를 탐구했다.
참신한 생각이 떠오르면 길을 가다가도 멈춰서서 재빨리 낚아챘다.
언덕에서 작은 눈덩이를 굴리면 점성이 생겨 커다랗게 변하는 것처럼 메모장에 저장한 표현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르고 붙이면서 문장을 도출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마음은 한없이 원초적이고 예민하다. 거기엔 삶의 희로애락이 촘촘히 각인된다. 밝은 무늬만 새겨질리 없다. 슬픔과 좌절처럼 어두운 문양까지 고르게 새겨진다.
그러므로 삶을 온전히 글로 옮기려면, 마음에 울려 퍼지는 희망과 환희뿐 아니라 함께 터져 나오는 통곡과 절규를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상대의 미소만이 아니라 눈물까지 살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2. 처음
- 설렘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순간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봐.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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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말로 유명한 프랑스 미식가. 브리야 사바랭은 <미식 예찬>에서 이런 문장을 남겼다.
“짐승은 먹이를 삼키고, 인간은 음식을 먹는다.”
나는 흡입하듯 삼키지 않고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음미하며 음식을 먹는다.
학교를 졸업하고 우여곡절 끝에 취업해서 첫 출근을 하던 날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어머니의 새벽잠을 깨우기 싫었던 나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현관을 나서며 재킷 주머니에 손수건이 있는지 확인했다. 꾹꾹 눌러 접은 종이가 손에 잡혔다. 하얗고 빳빳한 편지지 한가운데에 짧은 문장이 조각배처럼 떠 있었는데, 읽자마자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동안 애썼다. 기주야. 그리고 고맙구나.”
처음이라는 장벽 앞에서 설렘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며 걸음을 떼지 못할 때마다, 내 몸과 마음을 쓰다듬은 건 세계적인 석학의 조언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이 건네준 따뜻하고 단출한 문장이었다. 이날도 그랬다. 어머니가 몰래 넣어 둔 편지 한 장에 내 마음은 멈칫했다. 읽을수록 향기가 풍겨 나오는 문장에 난 진종일 붙들려야 했다.
첫 인상은 짧은 시간에 머리와 마음에 새겨지는 찰나의 느낌이다. 일반적으로 낯선 타인에 대한 첫인상을 호감과 비호감으로 분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1분 남짓이라고 한다. 첫인상은 순식간에 생겨나지만 생명력만큼은 끈질기다. 부정적으로 형성된 첫 인상을 긍정적인 인상으로 바꾸려면 40시간 이상이 필요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사람의 첫인상이 대인 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듯, 첫 문장은 증기를 뿜으며 달리는 기관차처럼 문단을 이끌어 나가는 견인력을 발휘한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에는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는 간결하고 강렬한 첫 문장이 박혀 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의 도입 부분에 200번 넘게 수정한 문장을 깃발처럼 꽂고 영토를 확장하듯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작은 배를 타고 혼자 고기를 잡는 노인이며, 84일이 지나도록 한 마리도 낚지 못했다.” 망망대해에서 홀로 낚싯줄을 드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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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산티아고처럼, 헤밍웨이는 1952년 슬럼프와 세간의 혹평을 밀쳐내고 <노인과 바다>를 내 놓았다.
헤밍웨이뿐 아니라 모든 작가는 독자의 가슴에 가 닿는 도입부를 쓰기 위해 펜촉을 겨냥한다. 첫 문장은 말 그대로 작가와 독자가 처음으로 대면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40년 넘게 프랑스 문학을 번역해 온 김화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번역 후기 모음집인 <김화영의 번역 수첩>에서 “나는 늘 글의 첫 문장을 시작하는 것이 두렵다”고 했다. 평생 문장을 다듬고 매만진 노학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더욱 무게를 갖는다.
한정된 지면과 화면을 알뜰히 사용하는 기자들은 정원사가 가지치기하는 것처럼, 취재로 얻은 방대한 텍스트에서 불필요한 내용을 잘라내고 사건의 본질에 해당하는 고갱이를 뽑아 기사의 리드(lead), 즉 첫 번째 문장을 작성한다.
압축형 : 글의 핵심을 한두 줄로 요약해 서두에 제시하는 것
질문형 :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질문형 문장
인용형 : 등장 인물의 증언과 고백을 활용해 생동감을 높임
언론인 출신 작가인 조지 오웰의 첫 문장 하나를 톺아보자. 그의 대표작 <1984>는 아래와 같이 시작되면서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다.
‘시계가 열세 번 울렸다.’ 또는 ‘괘종시계가 13시를 알렸다’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이 문장을 들여다보면 조지 오웰의 노림수를 짐작할 수 있다.
“괘종시계가 무려 열세 번이나 울릴 정도로 비정상적이고 암울한 세상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일개 부품처럼 취급당한다. 전지전능한 ‘빅 부라더’가 텔레스크린 너머로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한다.
오래된 기억 한 토막을 보태련다. 시간에 쫓기지 않는 직업이 어디 있겠냐마는 한때 취재 기자로 일하던 시절 다양한 부처를 출입하며 분주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날따라 온갖 업무가 내게 떠밀려왔다.
막막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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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하다’고 할 때 ‘막’의 한자가 사막 막(漠)이기 때문일까. 작열하는 태양 아래 짐을 지고 황량한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가 된 기분이었다.
째깍째깍, 마감 시간이 목을 죄어 올수록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갔다. ‘도대체 어떤 문장으로 시작하지,’
나도 모르게 노트북에 고개를 처박고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토해냈다. 그러지 한 선배가 캔 커피에 너그러운 미소를 얹어서 건네며 말했다. 비유하자면
“기주야 괜찮아? 취재 다 했다면서.”
“그게 첫 문장이 안 떠올라서요.”
“그래? 그럼 두 번째 문장부터 쓰면 되잖아. 기운 없을 땐 억지로 힘내지 마. 가끔 힘 빼도 괜찮아…….”
이 농담 같기도 하고 진담 같기도 한 당부가 어찌나 크게 다가오던지…. 순간 “힘 빼”라는 짧은 문장이 날 살포시 안아주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난 첫 문장에 대한 부담감을 잠시 내려놓고 기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첫 문장에 대한 두려움은 있는 힘을 다해 싸우거나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적당히 품고 지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글쓰기의 일부로 여기면서 말이다.
3. 도장 : 깨달음이 솟아나는 장소가 있는가.
“어떤 이유로 기자를 그만두고 작가의 길로 접어들었나요?”
얼마 전 식사 자리에서 이런 질문이 날아들었다. 몇 마디 대답으로 한 사람이 지나온 삶의 여정을 설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지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 또한 온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이 싫어서 기자를 그만 둔 것은 아닙니다. 비유하자면, 좀 더 자유롭게 헤엄치고 싶었다고 할까요. 기자 시절에는 기록을 재기 위해 오로지 자유형 영법으로만 실내 수영장 레인을 왕복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작가는 수영장이 아니라 바다에서 팔과 다리를 자유롭게 휘저으며 헤엄치는 사람이죠. 게다가 다른 사람과 속도를 겨룰 필요도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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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대표적인 프리랜서 직업이다. 우리나라에선 프리랜서! 영미권에서는 프리랜스! 이는 얼핏 세련된 단어 같지만 서늘한 단어이기도 하다.
중세 시대 유럽의 영주는 어떤 단체에도 소속되지 않은 자유로운(free) 용병과 계약을 맺는 경우가 많았다. 전쟁이 나면 용병은 긴 창(lancer)을 들고 나타나 영주 대신 싸웠다. 지금은 프리랜서가 자유 계약직 종사자를 일컫는 말이지만 과거엔 '대신 피를 흘리며 싸우는 용병', '쓸 만한 창을 소유한 병사' 정도의 뜻으로 사용했다.
중세의 용병과 프리랜서 작가의 숙명은 묘하게 닮았다.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창을 휘두르는 것이 용병의 임무인 것처럼, 프리랜서로 일하는 작가는 책상에 앉아 생각과 감정을 소모하며 자판을 두드린다.
지난 날 예리한 창과 튼튼한 방패를 지닌 용병이 전장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이 높았듯이, 자기만의 리듬을 잃지 않고 적당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작가만이 꾸준히 책을 펴낼 수 있다.
단련 없이는 병장기의 날이 서지 않는 법, 나는 매일 '나만의 도장'에서 나를 둘러싼 현실에 촉수를 드리우며 글감을 찾거나 문장을 담금질 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도장(道場)' 이란 단어는 본래 '도장수(道場樹)'의 줄임말이다. 도장수는 키가 30미터 정도의 거대한 활엽수인데 과거에는 보리수로 불렸다. 이 나무 밑에서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도장은 개인이 심신을 단련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 됐다.
본디 작가는 글의 소재와 문장을 모으는 사람이다.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정작 손을 뻗어서 잡아 본 적 없는 글감을, 실제로 종이에 써본 적 없는 글귀를 낚아채 자신만의 저장고에 차곡차곡 넣어둬야 한다. 집필 과정에서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도록 말이다.
맨부커 살과 노벨 문학상을 모두 맏은 소설가 네이딘 고디머는 "감옥에서도 글을 쓸 수 있으므로 작가에게 풍경은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난 아직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인지 발품을 필아야만 글감을 찾는 편이다. 덧없이 흘러가는 구름이든 바람결에 춤을 추는 나뭇잎이든 내 눈동자를 담아야 직성이 풀린다.
로맨스 드라마에 자주 나오는 대사 중 "좋은 구두는 당신을 좋은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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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다 준다"는 문장이 있다. 이는 필시 구두 회사가 간접 광고를 할 때 슬쩍 집어넣은 대사가 분명해 보이는데, 어쨌든 이를 작가의 입장에서 조금 비틀어도 충분히 말이 될 거라고 본다.
"좋은 공간은 작가를 좋은 문장으로 데려다 준다."
머릿속에서 빠져나온 문장이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지 않고 차분히 쌓이는 곳, 일상에서 얻은 깨달음과 아이디어가 솟아나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을 가르며 사방으로 쭉쭉 뻗어나가는 곳 말이다.
"배부르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다"는 말이 너무 당연하게 느껴질 때, 그러니까 나태와 게으름이 내 안에서 꿈틀거릴 때도 나는 서점을 찾는다. 책이 빼곡이 꽂혀 있는 서가에는 책뿐만 아니라 세월이 꽂혀 있다. 책으 쓴 저자와 편집자와 출판 디자이너와 서점 직원의 시간과 눈물이 뒤엉켜 있는 '세월의 덩어리'앞에서 오만과 교만은 자취를 감춘다.
서가는 늘 나를 겸허 하게 만든다.
취재 기자들 사이에선 "아이스크림은 녹기 전에 먹어야 한다"는 말이 회자한다. 세 살짜리도 알법한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글감의 속성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말이기도 하다.
어떤 소재는 너무 오래 묵혀두면 쓸모를 잃고 기억 밖으로 사라진다. 그것이 증발하기 전에 집필, 즉 붓을 잡고 시간을 들여 구체적인 문장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아이스크림처럼 스르르 녹아버리기 전에.
창작의 기운이 샘솟는 장소는 작가마다 다른 듯하다.
- <로마의 휴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은 돌탄 트럼보는 욕실에서 술과 커피를 마셔가며 시나리오를 썼다.
- 은둔자의 삶을 산 에밀리 디킨슨은 말년에 거의 외출하지 않고 2층 창문으로 세상을 내다보며 시를 적었다.
- 수상록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뉴는 서른일곱의 나이에 공직에서 물러나 자신의 영지에 있는 '차타델레'라는 원형 탑에 틀어 박혔다.
- 내가 노트북에 코를 박을 정도로 몰입하면서 문장을 가다듬는 곳은 우리 집 다락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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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관찰 : 글감을 찾고 본질을 찾아내는 과정
관찰의 중요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늘 강조돼왔다. 한자 ‘볼 견(見)’은 ‘사람 인(人)’위에 ‘눈 목(目)’지를 올려놓은 구조다.
무슨 뜻일까? 인간의 눈은 얼추 비슷하다. ‘사람이 가장 많은 정보를 습득하는 창구는 눈이다’혹은 ‘삼라만상을 관찰하는 것은 인간 행위의 근간을 근간이다’ 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미국 예일대 의과대학에선 “명의(名醫)가 되려면 명화(名畵)를 감상해야 한다”는 말이 회자한다. 이 대학의 어원 브레이버먼 교수는 미술 교육을 받은 학생이 그렇지 않은 학생에 비해 환자를 진단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연구 결과를 내 놓은 바 있다. 그림 감상 수업을 통해 관찰력이 높아지면서 환자의 상태를 종합적으로 진단하는 능력도 향상됐다는 설명이다.
글쓰기에서도 관찰의 과정은 생각의 폭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된다. 주변 사물과 현상을 섬세하게 살피는 사람일수록 일상에서 글감을 수월하게 건져 올린다.
<뉴로맨서>, <카운트 제로>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소설가 윌리엄 깁슨은 “미래는 이미 윌 곁에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을 뿐이다.”라고 했다. 나는 이 문장을 접할 때마다 “그래 글쓰기의 재료도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지. 단지 널리 퍼져 있지 않은 뿐이야”하고 되뇌면서 내가 미처 알아채지 못한 글거리가 주변에 널브러져 있지는 않은지 사방을 두리번거린다.
내게 글감은 관찰의 산물이다.
내가 책에 담은 내용 중 상당수는 책상 앞에서 ‘번쩍 하고 솟아난 게 아니라 관찰이라는 그물을 당기는 과정에서 함께 건져 올린 것들이다. 삶이라는 마르지 않은 바다를 찬찬히 들여다봄으로써 찰나에서 본질을, 하찮은 것에서 소중한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삶은 내 곁을 맴도는 대상들과 오해와 인연을 맺거나 풀어가는 일이다. 다만 내가 <한 때 소중했던 것들>에서 적은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그 꽃이 영원히 피어있지 않기 때문이다.”는 문장처럼 늘 곁에 머물러줄 것 같은 이들도 언젠가는 세월의 칼날에 인연이 끊어지면 아득한 곳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러면 오해를 풀 수 있는 기회도 허공으로 흩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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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자기만의 글쓰기 세계를 구축한 시인과 작가들은 주변과 타인을 응시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프랑스 문단에서 천재로 불리던 아르튀르 랭보가 남긴 “시인은 견자(見者)가 되어야 한다”는 문장을 곱씹어 볼 만하다.
‘견자(見者)는 말 그대로 ’보는 사람‘이다.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상황의 본체를 꿰뚫어보는 투시자이며,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현상 너머의 본질을 케네는 관찰자인 동시에,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대를 미리 내다보는 선견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충무공 이순신이야말로 탁월한 선견자이자 성실한 관찰자였다. 그는 전투를 치르면서 겪은 다양한 일과 전장에서 품은 고뇌뿐 아니라 그날그날의 기상상태까지 <난중일기>에 자세하게 적었다.
적당히 내리는 비는 우(雨), 종일 내라는 비는 우우(雨雨), 가랑비는 새우(細雨), 이슬비는 소우(小雨), 안개비는 연우(煙雨), 소나기는 취우(驟雨), 장시간 하염없이 내리는 비는 음우(陰雨), 거센 바람을 동반한 비는 대풍우(大風雨) 라고 했다.
이순신 장군이 세계 해전사에 남을 여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배경에는, 뛰어난 리더십과 사즉생(死則生)의 결의뿐 아니라 날씨의 변화 등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분석한 견자로서의 자취가 깃들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인간(人間)은 사람인(人)과 사이간(間)이 합해진 글자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쉽게 메울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5. 기억 : 누구나 과거를 되씹으며 살아간다.
‘삶’은 동사 ‘살다’의 어간에 명사형 어미 ‘-ㅁ'을 붙여서 만든 명사다. 그저 들숨과 날숨을 번갈아 쉬면서 생명을 유지하는 상태가 아니라 의미와 의지를 갖고 영위해나가는 동적인 과정이 삶이다.
단, 삶은 유한하다는 불변의 진리 앞에 인간은 무력한 존재다. 비관적인 시각으로 보면, 삶은 죽음으로 향하는 여정이다. 살아가는 일은 서서히 사라지는 일이기도 하다. 내가 먼저 사라지느냐. 나를 둘러싼 사람과 관계가 먼저 사라지느냐 하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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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짐과 헤어짐은 그리움을 낳는다. 이별은 곧바로, 결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물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물로 애도하거나 마음속 은밀한 곳에 ‘기억의 서랍’을 만들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과거에 대한 향수는 기억의 맨 위 칸에,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미련과 끝내 전하지 못한 마음은 가운데 칸에, 하늘로 떠나보낸 부모와 자식을 향한 애틋함은 제일 아래 칸에 꾹꾹 눌러 담으면서 말이다.
그런 면에서 ‘기억’과 어울리는 동사는 ‘잊다’가 아니라 ‘접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잊히는 기억이 있지만, 사랑과 이별로 얼룩진 기억만큼은 종이학처럼 곱게 접힌 채 마음속 한 구석에 보관되니 말이다.
줄리언 반스의 소설을 읽다가 “회한(remorse) 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한 번 더 깨무는 행위를 뜻한다”는 문장에서 한참 머문 적이 있다.
우린 종종 지난날을 후회하며 탄식한다. 회한에 젖고 또 젖으면 입술을 깨물고 눈물을 삼킨다. 회한이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과거를 되씹으며 살아간다.
회한의 마음이 한탄과 후회에 그치지 않고 성찰과 통찰로 이어지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필설(筆舌)양면에 걸쳐 유려하고 품격 있는 언어를 구사한 윈스턴 처칠의 회고록이 좋은 예다. 뛰어난 연설가이자 통찰력 있는 문필가였던 그는 전후 6년 간 집필한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회고록은 지나간 일을 돌이켜 생각하며 적은 글이다. 그래서 저자의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기억은 얼마든지 거짓을 진실로 포장할 수 있다. 기억 때문에 기록이 무시되거나 조작되기도 한다. 따라서 본인에rps 관대하지만 반대 세력엔 편협한 잣대를 들이대는 회고록이 태어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러나 처칠의 회고록에는 승자의 우쭐함이 배어 있지 않다. 처칠은 춘풍추상(春風秋霜)의 마음가짐으로 펜을 들었다. 이는 명나라의 문인 홍자성이 쓴 <채근담>에 나오는 “대인춘풍 지기추상(待人春風 持己秋霜)”에서 나온 말로 “남을 대할 때는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야 하고 자신을 대할 때는 가을 서리처럼 엄격해야 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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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6권에 이르는 <제2차 세계대전>에는 처칠이 전장의 한복판에서 건져 올린 통찰과 인류사의 재앙을 막지 못했다는 회한이 품격 있는 문장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문명과 전쟁, 인류에 대한 그의 성찰은 루스벨트미국 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처칠은 다시는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선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문장을 마치 후대에 남기는 이정표처럼 세워놓았다.
“어느 날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제2차 세계대전을 어떻게 불러야 하는지 의견을 물었다. 나는 즉시 불필요했던 전쟁(The Unnecessary war)이라고 답했다.”
인간은 기억이라는 감옥에 갇힌 수인(囚人)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감히 기억 밖으로 도망칠 수 없다. 한마디로 “행행본처 지지발처(行行本處 至至發處)”다. 간다간다 해도 본래 그 자리, 왔다 갔다 해도 겨우 출발한 자리다.
어차피 평생 기억 속을 헤매야 한다면, 난 이미 기억에 배어 있거나 언젠가 기억으로 전환될 삶의 희로애락을 몽땅 책으로 옮기고 싶다.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기억은 문장을 이끌어내는 글쓰기의 원천이 된다. 게다가 기억이라는 잉크는 흘러넘칠 순 있어도 마르지는 않는다.
내가 쓴 책은 내 기억의 집합체이며, 내 문장은 내 기억을 실어 나르는 배다. 그 배에 실린 기억이 독자라는 육지에 닿아서 ‘내가 겪은 아픔을 이기주 작가도 겼었구나. 비슷한 슬픔의 무게를 견뎠구나’하는 공감으로 거듭난다면 작가로서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글쓰기는 비슷한 아픔을 지닌 사람에게 문장을 건네며 말을 걸어보는 일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혹시 당신도 그랬나요?”“한때 눈물을 다 써버릴 정도로 아팠던 기억이 있었나요?”라고 말이다.
6. 존중 : 소중한 사람에게 말을 건네듯
어머니를 모시고 한 동안 국립암센터를 드나들었다. 어머니와 나는 지하층에 있는 MRI 촬영실로 내려가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였다 장작개비처럼 얇은 팔에 링거를 꽂은 남자가 놀이 공원이라도 온 것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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럼 해맑은 웃음을 퍼트리며 곁을 지나갔다.
"휠체어 초보입니다. 하하."
"엘리베이터 주변을 맴도는 부부의 "초보입니다" 라는 말이 내 귀로 흘러들어왔다. 그 말은 단순히 길을 비켜달라는 요구가 아니라 무거운 마음으로 병원을 찾은 사람들을 향해 '방해해서 미안하지만 좀 자나갈게요'하고 양해를 구하는 것처럼 들렸다.
세상사는 관계 속에서 흘러간다.
사람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
사람의 품을 벗어 날 수 없다.
사람은 오직 사람을 통해서만
사람 너머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
불교의 연기법(緣起法)도 비슷한 맥락이다. 불교에선 만물이 상호 의존적으로 이어져 있다고 본다. 얼핏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수많은 존재는 직접적인 원인인 인(因)과 간접적 원인인 연(緣)의 과정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고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이다.
고개가 끄덕여진다. 타인이라는 객체가 존재하지 않으면 '나'라는 주체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남이 있으므로 내가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기에 남이 있는 것이다.
'존중'을 뜻하는 영어 단어 'respect'는 '반복'을 나타내는 re와 '보다'의 의 의미가 녹아 있는 spect로 쪼개진다.
존중받고 싶다면 당연히 배려할 줄 알아야 한다. 존중은 배려를 통해 구체화 된다. 배려의 한자는 짝 배(配), 생각할 려(慮)다. 관계를 맺는 상대방을 염려하는 것이 배려의 본질이다.
작가는 정신적 혹은 물리적 의미로서 '곁'을 잠시 내어주는 존재인 독자의 입장을 헤아려야 한다. 자신의 책이 누구에게 어떻게 읽히는 지 한 번쯤은 고민해봐야 한다.
18세기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였던 새뮤얼 존슨은 "작가의 매력적인 능력 가운데 하나는 새로운 것을 친숙하게 만드는 것" 이라고 했다.
어떤 면에서 작가는 독자가 채 경험하지 않은 낯선 상황과 장면을 지면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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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끌어와 친숙하게 펼쳐놓는 사람이다. 독자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의 형태로 말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독자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글은 어떤 글인가?
질문에 답하기 위해 글쓰기를 요리에 비유해보자. 작가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료를 손질하고 조리해서 그릇에 담아내는 요리사라면, 독자는 한 권의 책을 단품 요리처럼 맛보는 손님이라 할 수 있다.
이때 독자를 대접하기 위해 사용하는 그릇은 문장이다.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나 떠올린 생각은 문장이라는 그릇에 담겨 독자에게 전해진다.
독자 앞에 그릇을 내놓는 순간이 분수령이다. 같은 요리라도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요리처럼 보인다. 그릇이 달라지면 요리의 맛과 분위기도 미묘하게 달라진다.
한글은 섬세하다. 섬세한 건 예민하다. 점하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뜻이 돌변한다. '남'이라는 글자에서 점 하나를 지우면 '님'이 되고 '님'에 점 하나만 찍으면 도로 '남'이 된다.
예민한 건 날달걀을 쥐듯 조심스레 다뤄야 한다. 내 글을 읽는 사람을 존중한다면 어문 규정이 고루하다고 한탄하기 전에 그것에 맞춰 문장을 매만지고 있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옥의 질은 빛깔만이 아니라 종종 티가 좌우한다. 옥을 고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티를 제거하는 일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형식에 얽매여선 곤란하지만 형식을 가다듬을 줄은 알아야 한다.
현학적인 어휘로만 높다랗게 울타리를 쌓은 글은 자칫 작가만 이해하는 폐쇄적인 글, '갇힌 글'이 되기 쉽다는 점이다. 독자를 배려하지 않는 글은 고결한 글이 아니라 고독한 글이다. 소통은커녕 고립만 자초한다. 지업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쉬운 표현'과 '심오한 표현' '형식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이라는 모순적 요소들 사이를 거닐며 나름의 균형점을 찾아내야 한다. 글의 품격은 문장의 '깊이'뿐 아니라 문장의 '개방성'에서 비롯된다.
좋은 글이란 과연 어떤 글일까? 아니, 좋은 글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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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므로 질문을 바꿔보자. 나는 독자를 배려하고 존중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글을 쓰면서 작가로 살아가고 있는가?
7. 욕심 : 손잡이가 없는 칼
흔히 말하길 "돈과 권력은 바닷물과 같아서 마시면 마실수록 갈증을 일으킨다"고 한다. 욕심이라는 밑 빠진 독에 아무리 많은 물을 길어다 부어봤자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한자 욕(慾)을 쪼개보면 욕심의 본질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골짜기 곡(谷), 하품 흠(欠), 마음 심(心)으로 이루어진 형태다.
본래 '흠'은 갑골문에서 입을 크게 벌리는 모습을 나타냈는데 훗날 의미가 확장되면서 '마시다' '노래하다'같은 뜻을 지니게 됐다. 깊은 골짜기처럼 입을 크게 벌려 끊임없이 목구멍에 집어넣으려는 마음이 바로 욕심니다.
삶이라는 무대에서 욕심과 낙관주의의 경계는 참으로 모호하다. 살다보면 능력 밖 일인 줄 알면서도 욕심을 내려놓지 않고 '운이 좋으면 좋은 결과가 나오겠지' 하는 허황한 낙관론에 빠지는 경우가 있다. 상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되 희망을 잃지 않는 태도야말로 진정한 낙관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무자비한 욕심이든 무상한 욕심이든 대개 욕심에는 질투와 분노와 회한 같은 복잡다단한 감정이 녹아있다. 그래서 어떤 욕심은 차갑고도 예리하다. 싸늘한 음기를 지녔다고나 할까.
욕심과 칼은 여러모로 닮았다.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데다 날카로움의 끝에 한(恨)이 서려있다. 우린 다들 가슴에 욕심이라는 칼을 한 자루씩 품고 살아간다. 때론 커다란 칼을 휘두르듯 욕심껏 일을 밀어붙여야 하는 순간도 찾아온다. 야심이 무기가 될 때가 있고 욕망 덕분에 황홀한 꿈을 꿀 때도 있다.
다만 욕심은 도신(刀身 칼의 몸체)만 있고 손잡이가 없는 칼과 같다. 욕심을 움켜쥐고 상대방을 찌르려면 내 손바닥에 상처가 생기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글쓰기에서 지나친 욕심은 모든 화(禍)의 근원으로 작용한다. 머릿속에 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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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생각을 문장으로 전환하는 것이 글쓰기의 근간인데, 무조건 잘 써서 독자의 시선을 단숨에 사로잡겠다는 과욕이 앞서다 보면 자칫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과욕과 부담감이 깃든 문장에는 불필요한 문장성분과 별다른 역할을 하지 않으면서 본용언 뒤에 붙는 보조용언 따위가 잡동사니처럼 달라붙는다.
그러면 문장은 쓸데없이 길어지고 문단은 풍선처럼 팽창한다. 멀쩡한 문장도 문법에 맞지 않는 비문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독자는 단어마다 군더더기가 붙어 진득거리는 문장을 곱씹느라 전체 맥락을 놓치게 된다.
김훈의 소설에는 “나는 보았으므로 안다”같은 간명한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눈과 귀로 확인할 수 있는 내용만을 촘촘하게 서술한다.
다른 작가와 저명한 학자의 문장을 무리하게 인용하거나 활용하지 않는다. 그저 사실과 사실을 잇는 느낌으로 쓴다.
노자는 도덕경(道德經)에서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라고 했다. 후대의 수많은 사람이 이 문장에 다양한 방식으로 주석을 달고 해설했는데 여러 견해를 종합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통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다.”라는 문장으로 수렴할 것이다. 역설 중의 역설이다.
여기서 잠깐. 노자가 강조한 ‘무위(無爲)’는 정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할까?
노자가 말한 ‘무위’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무행(無行)이 아니라 억지로 꾸미거나 힘을 가하지 앉는 것, 나아가 사물의 본성과 사안의 규율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일을 도모하는 순행(順行)에 가깝다.
중국 북송 때 신선의 경지에 이른 바둑고수가 열가지 교훈을 남겼다고 한다. 이름하여 위기십결(圍棋十訣)이다.
십결 중 첫 번째는 승리를 탐하면 이길 수 없다는 ‘부득탐승(不得貪勝)이다. 승부에서 이길 생각 자체를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이기는 것에만 집착해서 욕심만 앞서면 평정심을 잃어 무리수를 두게 되고, 결국 제대로 된 바둑을 둘 수 없다는 뜻이다. gis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주는 가르침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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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되짚어본다. 나 역시 한 권의 책에 무조건 먾은 이야기를 담으려 애쓴 적이 있었다. 목심이라는 칼로 내 문장에 화려한 무늬를 새겨 넣어야 많은 독자가 읽어줄 것 같았다.
글쓰기에 대한 과욕은 늘 지평선 같았다.
걷다보면 그 끝에 쉽게 닿을 수 있을 것 같았으나 가도 가도 매 번 도착할 수가 없었다.
욕심은 경직으로 이어졌다. 어깨에 힘이 들어갈수록 단락은 빽빽해졌고 문장은 딱딱해졌으며 글의 품격은 곤두박질 했다.
프랑스의 수필가 도미니크 로로는 <심플하게 산다>라는 책에서 “우리는 공간을 채우느라 공간을 잃는다”라고 했다. 어디 공간뿐이랴. 우린 종종 문장을 채우느라 문장을 잃는다. 욕심이라는 손잡이 없는 칼을 필사적으로 허공에 내두르면서.
2강 본립도생(本 立 道 生 )
-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
1. 습관(習慣)
- 내면의 리듬
나는 오전에는 가급적 원고를 쓰지 않으려 한다. 그저 집과 서점과 거리에서 생각과 문장을 끌어 모으면서 엄벙하게 시간을 흘려보내는 편이다.
작가의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글을 쓰는 시간이 아니라, 글을 쓰지 않는 시간’이 아닐까 생각한다.
책상을 마주하고 있을 때보다 책상을 벗어날 때 얻는 아이디어가 실제 집필과정에서 훨씬 유용하게 활용되는 것 같다. 문장을 작성하지 않는 시간에 어떤 생각을 하고, 글쓰기에 필요한 재료를 어떻게 수집하느냐에 따라 최종적으로 책에 새겨지는 문장의 밀도와 깊이가 달라진다고 할까.
나는 초저녁의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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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아침과 오후는 생각을 축적하는 시간이고 어두워질 무렵은 문장을 분출하는 시간이다. 나는 저녁 하늘이 붉게 물들기 시작하면 그제야 원고 작업에 돌입한다. 이것이 나만의 리듬이라면 리듬이다. 본래 음악용어인 '리듬(rhythm'은 ‘율동’ 혹은 ‘절주(節奏)’로 번역하곤 하는데, 단어의 본류를 거슬러 올라가면 ‘움직이다’, ‘흐르다’라는 뜻을 지닌 그리스어 ‘리트모스(rhythmos)’와 만나게 된다.
그러므로 고유한 리듬을 타며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건, 세월의 흐름 속에서 자기만의 방식과 박자로 적절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이 지닌 내면의 리듬은 습관의 형태로 표출된다. 습관은 특정 행위를 되풀이하면서 저절로 익힌 행동 방식이다. <습관의 힘>의 저자 찰스 두하그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에서 취하는 행동의 40%가 습관에 의해 결정된다.
운동선수들이 경기에서 초조한 마음을 추스르는 ‘루틴(routine)'도 일종의 규칙적인 습관이다. 야구 선수들이 정해진 패턴과 횟수로 헬멧을 고쳐 쓰거나 장갑을 매만지며 타석에 들어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육체의 움직임에 자신만의 리듬을 얹음으로서 자신감을 얻고 심리적 안정을 찾는 것이다.
작가들도 그렇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해 집필실로 건너간다. 다섯 시간쯤 글을 쓰고 오후에는 무조건 수영과 달리기를 한다.
김훈 작가의 책상에는 ‘필일오(必日五)’라고 적힌 종이가 큼지막하게 붙어 있다. 날마다 200자 원고지 다섯 장 분량을 쓰고야 말겠다는 작가의 다짐이다.
난 하루키와 김훈 작가처럼 대외적으로 내세울만한 ‘작가적 습관’은 없다. 굳이 하나를 들라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책 귀퉁이와 노트에 낙서하는 버릇이 있다. 의미 있는 낙서를 통해 우연히 의미를 찾는다고 할까.
이때 주로 무선(無線) 노트에 낙서를 끄적이는 편이다. 직선이 반듯하게 그어져 있는 유선 노트에는 왠지 반듯하고 질서 정연한 내용만 적어야 할 것 같아서 웬만하면 낙서에 사용하지 않는다. 본래 낙서란 글자와 그림따위를 아무데나 함부로 쓰는 행위가 아니던가.
습관에 관해 쓰다보니, 새삼 오래전 기억이 새롭다. 전에 살던 아파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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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쩡한 승강기를 마다하고 유독 계단만 이용하는 어르신이 있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어르신은 매번 난간을 잡고 절뚝거리면서 계단을 오르내렸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어르신은 매번 난간을 잡고 절뚝거리면서 계단을 오르내렸다.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이 안쓰러워 슬쩍 말을 걸어본 적도 있다.
“어르신 제가 승강기를 좀 잡아드릴까요?”
“승강기? 괜찮아. 몸져눕지 않는 한 걸어서 올라가고 싶어. 계단 오르는 게 내 일이야….”
한 걸음.
다시 한 걸음.
발을 바꿀 때마다 난간을 잡은 어깨는 들썩였고 몸을 지탱하는 손은 파르르 떨렸다. 다만 어르신은 한숨을 쉬거나 “내팔자야…”같은 탄식을 내 뱉지는 않았다.
의아했던 건 어르신의 표정이다. 걸음은 위태위태했으나 낯빛은 어둡지 않았다. 그저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으며 계단 위쪽을 응시할 뿐이었다.
산다는 것은 반복의 연속이다. 도돌이표처럼 거듭되는 일상을, 그리고 시작과 끝이 정해져 있는 일을 부단히 되풀이 하면서 우린 세월 속을 헤맨다.
그러고 보면 글쓰기는 인생을 닮았다. 지난한 반복의 과정을 견딜 때 글과 삶은 깊어지고 단단해지니 말이다.
중국 송나라 때 문인 구양수는 글 잘 짓는 방법으로 ‘삼다(三多)’를 꼽았다.
그 유명한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다.
이를 두고 “누구나 알고 있는 얘기잖아, 글쓰기 하수나 실천하는 거 아냐?”라는 식으로 콧방귀를 뀌면 곤란하다.
무릇 하수(下手)는 기본에 해당하는 그 ‘뻔함’의 가치를 아예 모르는 사람이라면, 중수(中手)는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이고 상수(上手)는 뻔한 것을 이미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그 너머의 세계로 훨훨 날아간 사람이다. 누구나 알고 있는 뻔하고 당연한 것을 잘 해내는 일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논어(論語) 학이(學而)편에 “본립도생(本立道生)”이라는 글귀가 실려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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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기본이 바로서면 나아갈 길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는 것이다.
‘터’를 의미하는 한자 기(基)에 주춧돌 초(礎)를 합하면 ‘기초(基礎)’가 된다.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터전을 단단하게 다져 주춧돌을 놓을 때 기초와 근본이 만들어지고 그 위에 나만의 집을 세울 수 있다.
글쓰기의 노하우는 기술보다 습관에 가깝다.
때론 내가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습관이 글을 쓰는 건지 모른다. 습관이 스스로 미끄러지고 번지면서 내 삶의 여백을 진하게 물들이는지도 모를 일이다.
2. 개성
- 문장을 날아 오르게 하는 날개
조선시대에는 제주도를 원악도(遠惡島)로 부르곤 했다. 한양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유배지였기 때문이다. 중죄를 지은 자들이 평생 갇혀 지낸 섬이, 세월이 흘러 천혜의 경관을 자랑하는 관광 명소가 됐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몇 해 전 겨울이었다. 추사 김정희가 유배생활을 한 서귀포시 대정읍에 가족과 함께 다녀왔다. 날씨가 흐리고 으스스했다. 옷깃을 여미며 마을 곳곳에 퍼져 있는 추사의 흔적을 되짚었다.
길을 걷다 보니, 빨래가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옷가지를 바라보며 어머니가 말했다. “빨래가 슬프게 춤을 추는구나.” 순간 내 입술에서도 무심결에 짧은 문장이 튀어 나왔다.
“네, 집마다 그리움이 흔들리는 것 같아요.”
모르긴 몰라도 실연의 아픔을 겪은 경우라면 “하늘에 그리움이 걸려 있다”는 문장을 연상할 수 있을 테고, 동물과 사물을 의인화해서 표현하기 좋아하는 사람은 “빨래들이 사납게 으르릉거리네”라는 문장을 적을 테고, 격무에 시달리다 몸과 마음의 쉼을 얻기 위해 연차를 내고 제주도를 방문 했다면 “빨래가 자유롭게 펄럭인다”는 문장을 떠올릴지 모르겠다.
- 하늘에 그리움이 걸려있다.
- 빨래들이 사납게 으르렁거린다.
- 빨래가 자유롭게 펄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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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문장 가운데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인가? 어리석은 질문이다.
사람은 똑같은 풍경 앞에서 저마다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감정을 느낀다.
우린 진실이라는 커다란 거울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을 각자 유리한 입장에서 바라본 뒤 “내가 진실을 알고 있어”라고 힘주어 말하곤 한다. 깨지기 전 온전한 상태의 거울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으면서 말이다.
어쩌면 인간은 제각기 다른 위치에서 다른 눈(眼)을 치켜뜨며 생을 살아가는지 모른다.
주관은 빛의 굴절과 분산을 일으키는 프리즘처럼 고유한 각도로 세상을 받아들이는 주체적 견해다. 주관이 스며든 글에는 각자의 개성이 묻어난다.
예컨대 극도의 단문으로 밀어붙이는 정유정의 흡인력 있는 서사, 고요하면서도 때론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한강의 문장, 강건하고 비장미 가득한 김훈의 문체는 독자를 책에 몰입하게 만든다.
글쓰기는 개성이라는 노를 저어 첫 문장에서 마지막 문장 사이의 바다를 건너가는 일이다. 개성이 부족한 작가는 지면과 화면이라는 망망대해에서 표류할 수밖에 없다.
유튜브에서 2분 남짓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내용은 이렇다. 유럽의 어느 광장, 한 사내가 “나는 시각장애인입니다. 도와주세요”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동냥을 한다. 행인들 반응이 신통치 않다. 동냥 그릇은 텅텅 비어 있다.
잠시 뒤 검은 선글라스를 쓴 여인이 다가와 문장을 수정하고 사라진다. 반전이 일어난다. 앞 다퉈 지갑을 여는 게 아닌가. 팻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다. “아름다운 날입니다. 하지만 난 볼 수가 없네요.”
두 문장의 무늬와 온도는 사뭇 다르다.
알면 알수록 점점 모르는 게 많아지는 영역이 있다. 글쓰기야 말로 퇴적과 침식 작용을 동시에 당한다. 바지런히 쓰다 보면 글쓰기의 내공은 퇴적물처럼 쌓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자신의 수준이 남보다 뛰어나다는 착각에 사로잡혀 글쓰기를 우습게 여기는 순간, 오랜 세월 쌓은 문격(文格)은 허무하게 무너지고 어렵게 다진 내공은 오만의 물살에 깎여 떨어져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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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작가나 기자처럼 글을 짓는 일을 업으로 하는 이들은 “갈수록 글쓰기가 어렵다”고 토로하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여기서 “어렵다”는 말은 정말 어렵다는 뜻이라기보다 점점 글을 쓰는 일 자체가 엄숙하고 무섭게 다가온다는 의미일 테지만 말이다.
천재는 무력한 감정이나 열패감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천재는 시간의 벽을 허물고 시작과 끝을 넘나드는 존재, 한 마디로 과정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은 시간과 드잡이를 하는 수밖에 없다. ‘엉덩이력과 필력은 비례 한다’는 믿음을 가슴에 품고 문장을 매만지는 데 낮과 밤을 바쳐야만 한다. 정신분석가 카를 구tm타프 융은 인간이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개성화’라 정의 했다. 개성의 반대는 몰개성화일까? 글쓰기에선 스스로 개성을 의심하고 억누르는 것이야말로 개성화의 반대가 아닐까 싶다. 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 개성화를 실현하려면 자신이 건너온 세월을 신뢰해야 한다. 지나온 제 삶을 부정하면서 개성 있는 문장을 구사하는 사람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인생의 모든 걸 녹일 수 있는 세월이라는 용매(溶媒)에 각자 취향과 가치관과 경험을 풀어 넣고 휘휘 저어서 특유의 빛깔과 용액을 얻게 되면, 우린 그걸 개성이라고 부른다.
누군가 날 붙잡고 “믿음, 솝망, 사랑 중에 제일이 무엇이죠?”하고 물으면 난 1초의 망설임도 없이“작가라면 당연히 믿음이죠”라고 답할 것이다.
짧지 않은 무명 시절동안 내가 펜을 들고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내 문장에 깃든 개성에 대한 믿음을 한 순간도 잃지 않았기 때문이다.
3. 문체
- 비수를 꺼내야 하나 입술을 실룩거리며 선생님의 시선을 외면했다. 공책을 받기위해 검을 휘둘러야 하나
초등학교 때 기억이다. 일주일에 한 번 꼴로 학교에 그림일기장을 제출했다. 선생님은 가장 잘 쓴 아이를 칠판 앞으로 불러내 직접 일기를 읽어보라고 했다. 그리고 부상으로 공책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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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월요일 아침이었다. 그림 일기장을 교탁위에 올려놓았다. 수업이 끝
난 후 선생님은 “이번에는 기주가 쓴 일기를 뽑았다. 하지만 낭독은 생략하자꾸나.”
낭독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 내심 서운했던 나는 공책을 받기 위해 고무실로 내려가서도 선생님 앞에서 말없이 눈을 내리깔았다.
“……”
“기주야, 일기 잘 읽었다. 참, 기주가 겪은 일을 모르는 친구가 많을 것 같아서 읽지 말자고 한 거야…”
“네…”
오래 전 일이라 내 기억 속에서 문장이 깎이거나 보태졌을지 모르지만, 그때 난 아버지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내고 느낀 허전함을 일기장에 덤덤히 채워 넣었던 것 같다.
“엄마는 아빠가 쓰던 물건을 보자기에 싸서 장롱에 밀어 넣었다. 이제 우리집엔 낮에도 밤에도 아빠가 없다. 아빠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책을 읽다 궁금한 게 생겨도 물어볼 사람이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부터는 궁금증이 머리에서 꿈틀거리면 홀로 다락방에 올라가 도감과 사전을 뒤적여야 했다. 아니면 종일 질문을 품고 있다가 해질 무렵 일을 마치고 귀가하는 어머니 앞에서 풀어놓거나.
한번은 수업 시간에 “비수(匕首)처럼 꽂혔다”는 말을 난생 처음 접하고는 평소처럼 사전을 펼쳤다.
비수는 칼집과 칼자루의 크기가 거의 같은 단검이다. 길이가 30cm정도에 불과해 근접전에서 재빨리 꺼내 들 수 있다. 쉽게 사용할 수 있어서 암기(暗器)속한다.
비수는 문장으로 치면 단문(短文)이다. 단문은 메시지를 명료하고 속도감 있게 드러낼 때 효과적이다. 잘 쓴 단문은 비수처럼 날카롭다.
길이가 긴 장문(長文)은 검에 비유할 만하다. 검은 비수에 비해 날을 다양한 각도로 사용한다. 찌르고 베는 것 뿐 아니라 뻗어서 끊고 뚫을 수도 있다.
적의 심장에 비수를 꽂듯 단문을 능란하게 사용한 작가는 여럿이지만 군계
일학은 단연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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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들은 그의 간결하고 힘 있는 문체를 가리켜 하드보일드(hard - -boiled)'라고 칭했다.
이는 원래 뜨거운 물에 달걀을 푹 삶는 조리법에서 나온 말로 19세기 초까지만 해도 ‘도박판에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을 지녔으니, 이후 미국 문학계에서 변용 과정을 거치면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일컫는 용어로 뜻이 굳어졌다.
헤밍웨이와 동시대 작가인 윌리엄 포크너의 웅장하고 호흡이 긴 글을 즐겨 읽는 한 지인이 조롱기를 섞어 내기를 걸었다.
“이봐, 헤밍웨이. 혹시 여섯 단어만으로 소설을 완성할 수 있겠나? 그럼 내가 자네의 필력을 인정하겠네!”
헤밍웨이는 그 자리에서 여섯 단어짜리 문장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내기를 제안한 사람은 이를 읽고는 더 이상 그를 조롱하지 않았다고 한다.
For sale : Baby shose. Never worn.
우리말로 번역하면 “팝니다. 한 번도 신은 적 없는 아기 신발입니다”정도의 뜻이다.
흔하디흔한 문구 같지만 문장 너머에 슬픈 이야기 한 토막이 버티고 있는 느낌이다. 신발을 내다 팔기로 한 사람은 무슨 일을 겪었을까? 잠시 상상해 봤으면 한다. 아이의 신발을 한 번도 신겨보지 못한 채 사고로 갓난아기를 잃고 실의에 빠진 부모일까…. 아니면….
위 문장은 여섯 단어에 불과하지만 독자의 머릿속에 물음표와 느낌표를 남기기에 충분하다.
무조건 짧고 간결한 문장이 능사는 아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단문으로 글을 엮든 비유와 꾸밈말을 섞어가며 복잡한 중문과 복문을 이어 붙이든 그건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어떤 문체가 좋고 어떤 문체가 나쁘다고 딱 잘라 우열을 가릴 수 없다. 아니, 가려서도 안 된다.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름다운 글은 대개 정확한 글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정확한’의 뜻은 ‘바르고 확실한’이라는 사전적 의미를 훌쩍 뛰어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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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나가는 과정에서작가가 내리는 무수한 판단과 선택,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등이 텅 빈 여백에 점(點)처럼 찍히고 그어질 때 문장마다 고유한 개성이 입혀진다. 그때 비로소 작가의 문체가 솟아난다.
2019. 8.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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