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9. 12. 10:21ㆍ독서후기
글의 품격(2)
■ 이기주 지음
2강 본립도생(本立道生)
-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
4. 제목 : 독자가 가장 먼저 읽는 글
일어날 기(起), 두루 주(周), ‘두루두루 일어나라’는 뜻에서 할아버지께서 지어주신 내 이름이다.
평소 말수가 적었던 할아버지는 몸이 쇠약해져 병원에 입원해서도 좀처럼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새근새근하는 숨소리를 내며 종일 누워만 계셨는데, 그 모습은 마치 다른 세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 스스로 문을 잠근 채 잠이 든 사람처럼 보였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헤매는 동안 할아버지는 손을 뻗어 마지막으로 가족의 온기를 느끼고 싶었으리라. 다만 “이리오렴 기주야”하고 발음할 가력이 부족했던 탓에 “손…”이라고 속삭이듯 말씀하신 게 아닐까 싶다.
이름은 숭고하다. 숭고하지 않은 이름은 없다. 그러므로 이름을 부르는 일만큼이나 이름을 짓는 일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어쩌면 사람 이름뿐 아니라 글의 이름인 제목을 구상할 때도 정성을 쏟아야 하는지 모른다. 한 자 한 자 진심과 눈물을 잉크 삼아 써 내려간 글이 독자의 마음에 가 닿기 바란다면 말이다.
제목은 ‘작품이나 강연에서 그것을 대표하거나 내용을 보이기 위하여 붙이는 이름’이란 사전적 의미를 갖는다. 적절한 설명 같지만 개념이 확 와 닿지는 않는다.
제목, 하면 나는 출입문의 손잡이를 떠올리곤 한다. 건물에 들어가려면 문에 달린 손잡이를 잡아당기거나 돌려서 출입문을 열어 젖혀야 한다. 건물과 사람 간에 이뤄지는 최초의 물리적 접촉은 손잡이에서 일어난다. 손잡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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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과 사람을 연결한다. 제목의 역할도 비슷하다.
어떤 독자는 제목만 보고 페이지를 넘길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제목은 독자가 가장 먼저 읽는 글이다.
미국의 출판인 앙드레 버나드는 “제목은 책의 눈동자”라고 했다. 제목을 정하는 일이야말로 글쓰기의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한 편의 글이 용의 몸통이라면 재목은 용의 눈이다. 몸통을 아무리 잘 그려도 눈을 그려 넣지 않으면 죽은 그림이 되고 만다.
한때 ‘정의’열풍을 일으킨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미국에서 정의(justice)라는 다소 밋밋한 제목으로 출간됐으나 국내 출판사가 책을 들여오는 과정에서 의문형 제목으로 다듬은 것이다.
켄 블랜차드의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의 원제는 <고래야 잘했다>이다. 책 제목에 얽힌 사연은 차고 넘친다. 제인 오스틴이 애초에 ‘첫인상’이란 이름으로 탈고한 소설은 편집 과정을 거치면서 그 유명한 <오만과 편견>으로 제목을 갈아입었다.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는 광화문에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하마터면 ‘광화문 그 사내’로 출간될 뻔했다는 후문이다.
장 폴 샤르트르는 <문학이란 무엇인가>에서 문학의 언어를‘사물의 언어’와 ‘도구의 언어’로 나눴다.
- 사물의 언어 : 충동적으로 일어나는 투명하고 순수한 언어, 시의 언어
- 도구의 언어 :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독자 앞에 드러내기 위해 언어를 도 구로 삼는 경우, 산문의 언어
서점을 배회하다보면 기발한 제목으로 독자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책이 종종 눈에 띈다. 그러나 “표지라는 바다에서 제목이 목적성을 잃고 표류해선 안 된다. 제목에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책이 제시하는 방향이 잘 내포되어야 한다.
제목은 억지스러운 조어(造語)에 매달릴 땐 잘 떠오르지 않다가 뭔가에 홀린 듯이 덜컥 움켜 쥘 때가 많은 것 같다. 칠레 시인 파블로 네루다의 ‘어느 날 시가 내게로 왔다’는 문장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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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너무 많은 정보를 욱여넣어서 독자가 본문을 상상할 기회를 아예 박탈하거나, 너무 두루뭉술한 제목을 내세워서 어떤 내용인지 전혀 짐작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또한 활제의 반대인 사제(死題)에 해당한다. 글을 죽이는 제목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절제의 미덕을 강조하며 “광이불요(光而不燿)”라는 글을 남겼다. 빛나되 번쩍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제목은 너무 번쩍거릴 정도로 빛을 뿜지 않아야 한다. 적당히 빛을 비춰 독자가 책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5. 주제 : 때론 글을 떠받치는 기둥이 필요하다
한 남자가 노를 저어 강을 건너고 있었다. 느닷없이 배 한척이 다가와 충돌할 뻔했다. 배가 기우뚱 하자 남자는 화가 났다.
“야 이 나쁜 놈아!”하고 외치려는 찰나 배 안쪽을 들여다보니 아무도 없는 게 아닌가.
“뭐야 빈 배잖아.”
남자는 욕을 목구멍으로 도로 집어넣었다.
그는 다시 노를 저어 물길을 텄다. 이때 다른 배가 나타나 또 충돌할 뻔했다. 이번에는 사공 한 명이 타고 있었다. 남자는 벌컥 화를 내며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나쁜 놈아, 뱃길을 똑바로 읽고 다녀!”
<장자(莊子)>에 나오는 ‘빈 배’이야기를 재구성 한 것이다. 남자는 빈 배 앞에선 입을 다물었으나 사공이 타고 있는 배와 부딪칠 뻔하자 냅다 소리를 질었다. 장자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이는 수학이나 물리학 문제가 아니므로 정답을 구하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 해석은 자유다. 혹자는 대인관계에 대한 우화로 받아들일 테고 혹자는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볼지도 모르겠다.
주제는 예술 작품에서 창작자가 나타내고자 하는 기본 사상이다. 글쓰기에선 글 속에 담겨 있는 글쓴이의 중심 생각이 주제다. 주제는 작가와 독자를 이어주는 길을 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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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사에 입사해 직무 교육을 받던 때가 떠오른다. 수습교육을 담당하던 차장급 기자는 ‘너희도 한 번 당해 봐라’하는 표정을 지으며 대뜸 연습장을 건넸다.
“오늘부터 매일 깜지, 일명 ‘빽빽이’한 장씩 채워서 제출 하도록!”
고참 기자의 기사나 유명 작가의 책을 틈틈이 들여다보고 필사하면서 스스로 글쓰기 연습을 하라는 것.
“다들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네? 그래도 도움이 될 거야. 꾸준히 해봐!”
꾸준히 해본 결과 선배의 말이 맞았다. 글감을 찾고 문장을 엮는 방법을 시나브로 터득할 수 있었다.
이 ‘깜지 훈련’은 굳이 따지면 ‘학 學’보다 ‘습 習’에 가까웠다. 전자는 책을 펼쳐 밑줄을 그어가며 공부하는 일이다. ‘study'와 유사하다. 후자는‘learn'이다. 읽고 쓰는 것 뿐 아니라 특정한 행위를 반복적으로 연습함으로써 방법과 기술을 얻는 일이다.
매일 연습장을 검게 물들이며 글쓰기의 기본을 익혀가던 어느 날이었다. 어렵사리 기사를 써서 마감 전에 첨삭을 받기 위해 선배 기자에게 송고했다. 그런데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선배의 목소리는 답답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뭐야. 이거 일기야? 손으로 쓴 거야, 발로 쓴 거야? 주제가 없잖아!”
화살은 곧게 비행하지 않고 좌우로 흔들리면 날아간다. 시위를 놓는 순간 화살 뒤쪽에 강한 힘이 실리는 데, 이때 무게 중심이 있는 앞부분을 가벼운 뒷부분이 앞서 나가려고 해서 힘의 충돌이 일어나는 탓이다. 이를 ‘궁사의 패러독스’라고 한다.
전통 활의 경우 이 휘청거림을 줄이기 위해 맹금류의 깃털로 만든 ‘깃’을 화살 끝에 꽂는다.
한 편의 글과 이를 지탱하는 주제는 화살과 깃의 관계와 비슷하다. 주제는 글이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한다. 정교하게 다듬은 주제가 글을 단단히 떠받칠 때 펜 끝을 떠난 글쓴이의 의중이 허공을 헤엄쳐 독자의 마음에 무사히 도달한다. 휘청거림 없이 스스로 중심을 잡아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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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결말 : 매듭을 지어 마무리 하다
돌이켜보면 어머니는 수술실에 들어가시기 전에 두렵다거나 더 살고 싶다는 말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살다보면 소중한 사람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일 때가 있다. 그때 우린 마음속에 꼭꼭 숨겨둔 진심어린 말을 필사적으로 건져 올리곤 한다. 왜일까? 내 짐작은 이렇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솟구치면서 마음 안쪽에 달라붙어 있던 진심까지 힘차게 밀어 올리는 게 어닐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지막’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굳이 소리 내 발음하지 않아도 괜히 사람을 울컥하게 만드는 단어다.
삶에 끝이 있듯 글에는 결말(結末)이 있다. 맺을 결(結)은 실사(糸)에 길할 길(吉)이 결합된 상태다. 그래서 결말은 ‘실로 묶다’ ‘실로 매듭을 지어 마무리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잘 매듭지은 결말은 그 문장만의 향기, 곧 문향(文香)을 남긴다.
좋은 결말은 과연 어떤 결말인가? 내 대답은 “글쎄올시다”에 가깝다. “좋은 결말은 이러이러해야 합니다. 마무리는 이런 방법으로 작성하는 게 바람직해요”라고 단언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게다가 나쁜 결말과 좋은 결말을 누가 무슨 기준과 근거로 판별할 수 있단 말인가.
‘훌륭한 마무리를 위한 표준 매뉴얼’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오지랖이 넓은 어느 작가가 그런 지침을 만들어 삼천리 방방곡곡에 배포한다 해도 모든 장르에 통용될 리가 없다.
독서는 작가가 만들어 놓은 ‘활자의 길’을 각자의 리듬으로 산책하는 일이다.
산책로를 걸으며 무엇을 보고 듣고 느낄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다만 애초에 어떤 산책 경로를 구성하고 입구와 출구를 어떻게 꾸밀지는 작가의 선택과 취향에 달려있다.
난 막바지에 이르러 문장을 보태느냐, 아니면 덜어내느냐에 따라 결말의 디자인을 다르게 가져가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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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선호하는 방식은 결말의 표면을 깎아서 벗겨 내거나 호미로 굳은 땅을 긁듯 마지막 단락을 움푹 파내는 방법이다. 막판에 미주알고주알 설명하기보다 문장의 꼬리를 단칼에 잘라버림으로써 글에 적당히 갈라진 틈을 만들어 독자 스스로 자신의 사유와 삶을 재료 삼아 자유롭게 그 매듭을 메우도록 돕는 것이다.
지닌 1992년 미국 대선에선 당시 공화당 후보 조지 H. W. 부시 대통령과 민주당 후보 빌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가 견원지간을 방불케 하는 난타전을 벌였다. ‘진흙탕 싸움’의 승자는 빌 클린턴 이었다.
이듬해 백악관을 떠나면서 부시는 “이걸 읽을 때쯤 이면 당신은 대통령이 돼 있겠죠”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편지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미국 정가에서 패자의 품격을 보여준 사례로 두고두고 언급되는 이 편지에는 전임 대통령으로서 건네는 조언과 당부, 그리고 화해의 손길이 담겨 있었다.
“앞으로 공정하지 않은 비판 때문에 힘든 시기를 겪을 수도 있겠지만 결코 낙담하거나 길을 벗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당신의 성공이 곧 우리나라의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응원하겠습니다.”
삶이 헐려서 무너진 자리에 가장 먼저 들어서는 건, 마지막 순간에 대한 기억이다.
한 권의 책도 마찬가지다. 책을 덮는 순간 활자는 눈앞에서 사라지지만, 마지막페이지를 어루만질 때 떠올린 생각은 허공으로 날아가지 않고 독자의 머릿속에서 한 동안 생을 이어간다. 글의 서두 못지않게 결말에 공을 들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7. 여백 : 가장 본질적인 재료
시인은 수년간 남편 곁에서 병간호에 매달렸다. 남편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병마와 싸웠지만 오랜 투병 생활 끝에 눈을 감았다.
시인이 남편을 하늘로 떠나보낸 지 몇 달 뒤였다. 창밖으로 계절의 변화를 알리는 비가 내렸다. 시인은 두 손으로 빗방울을 받아내며 말했다.
“여보 오늘은 종일 비가 올 것 같아요.”
시인은 뒤를 돌아보았다. 남편의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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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깊이 깨달았다고 한다.
일상의 이야기를 주고받던 사람이 곁을 떠나면
빈자리에 허전함과 서러움이 채워진다는 것을.
시인은 문득 떠올렸다고 한다.
남편의 육신이 무너져 가던 어느 날
자신만 들을 수 있는 소리로 수없이 외쳤다.
“제발 내 곁에 머물러줘요”라는 문장을.
소중한 사람의 빈자리는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이 아니다. 쓰라린 사연이 블랙홀처럼 모든 걸 송두리째 삼켜버린 상태다. 이는 공백이 아닌 여백이다. 공백과 여백은 엄연히 다르다. 공백은 애당초 아무 것도 채워지지 않은 공간이므로 공란과 비슷한 반면, 여백은 곁에 머물던 무언가가 빠져나간 후 채 가시지 않은 여운에 가깝다.
여백은 존재가 아닌 부재(不在)의 결과다. 만나고 헤어져야, 다가왔다가 멀어져야, 소유하던 것을 일어버려야 여백이 닿을 수 있다.
때론 눈물이라는 열쇠로만 우린 ‘여백의 문’을 열수 있다.
피천득 선생의 수필 <인연>은 풍성한 여백이 행간을 메운다. 선생은 유학 시절 아사코라는 여성과 맺은 인연을 회상하며 아스라한 추억에 잠긴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인연>의 마지막 단락에 새겨진 연꽃 같은 문장이다. 읽을수록 묘한 헐거움이 느껴진다. 성기고 거친 것과는 다르다. 여백을 지우게 삼아 불필요한 문장을 지우고 글의 이음매를 일부러 느슨하게 연결한 듯하다.
이쯤에서 괜한 상상을 해본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선생이 아사코를 잊지 못한 나머지 어느 날 갑자기 현해탄을 건너 그녀를 다시 찾아갔다면 수필의 제목은 <인연>이 아니라 ‘재회’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만약 그랬다면 글의 여백은 물론 여운도 적잖이 줄어들지 않았을까 조심스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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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움이 아닌 비움이 여운을 남기는 사례는 날마다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뉴타운 공사의 광고다. 현수막에 박혀 있는 문구는 거의 비슷했다. ‘지하철 역에서 도보로 5분,’ ‘초중고 인접’, ‘합리적인 분양가에 중도금 무이자 혜택까지…….
차를 돌리려는 찰나, 사뭇 다른 분위기의 광고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바람에 나풀거리는 하얀 현수막 한가운데를 짧은 문장이 가로지르고 있었다.
“여보, 우리 마지막 이사는 여기로 합시다.”
‘동양화의 이단아’로 불리는 김호득 수묵화가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연륜이 쌓일수록 여백을 그리는데 힘을 쏟게 된다고 말했다.
“난 공기를 그리는 사람입니다. 예전에는 복잡한 그림을 그리려고 애썼지만, 이젠 여백을 많이 남기면서 단순하게 표현합니다. 고수의 동작은 단순해야 해요. 솜씨를 죽일 줄 아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입니다.”
글도 그림도 힘을 빼고 여백을 만들어야 지면과 화폭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밖으로 밀어내고 본질에 집중 할 수 있다.
어쩌면 글쓰기의 가장 본질적인 재료는 문장이 아니라 여백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는 펜이 아니라 여백을 쥐고 글을 쓰는지 모른다. 빽빽한 활자 사이사이에 삶의 희로애락이 깃든 각자의 공간을 새겨 넣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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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講 두문정수(杜門靜守)
- 밖으로 쏠리지 않고 나를 지킨다 -
“스스로 일으킨 물결에 올라타야 삶의 해답에 다가갈 수 있다.”
1. 산고 : 글쓰기의 감옥에서 느끼는 고통
시인이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삶의 비애와 아픔이 손과 입술을 통해 밖으로 빠져 나오면 누군가에겐 아름다움 음악으로 전해진다.
창작에는 필연적으로 산고(産苦)가 뒤따른다. 시인과 화가와 작가는 풍경과 사물과 현상뿐만이 아니라 자기 내부에서 솟아나는 아픔까지도 창작의 재료로 사용한다. 그렇다 예술은 상처를 원료로 한다.
사람은 기운이 아니라 기분으로 살아가는 존재다. 기운이 나지 않을 땐 억지로 기운을 내기보다 스스로 기분을 챙기면서 마음과 몸을 추스르는 게 현명하다.
기분을 보듬는 방법은 저마다 다를 터. 난 글을 쓰다 기분이 가라앉고 의욕이 생기지 않으면 글의 내용과 어울리는 음악을 책상 위에 흐르게 한다. 단 가사가 없는 음악이어야 한다. 글쓰기의 감옥에 갇힌 채 노랫말이 가득한 음악을 들으면, 가수의 목소리와 내 머릿속에서 갈 길을 잃고 방황하는 문장들이 한데 뒤엉켜 몸싸움을 벌이는 것만 같다. 안 듣느니만 못하다.
물론 음악이 효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그땐 마지막 수단을 동원한다. 노트북을 냅다 팽개치고 산책을 나선다. 잡념으로 뒤엉킨 머릿속을 비우고 생각의 속도를 늦추는 데 산책만큼 좋은 것도 없다.
산책은 외부의 풍경뿐 아니라 내부의 풍경, 즉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상책은 보행을 통해 이뤄진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을 몸에 바르고 뺨을 스치는 바람의 결을 음미하다 보면 평소보다 시간이 더디게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천천히 흘려보내면 내 안과 밖에서 일어나는 것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그러면 어느 새 내면의 소용돌이도 잦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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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시간의 개념을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스(Kairos)로 구분했다. 둘은 흐르는 방향에서 차이가 있다. 크로노스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물리적인 시간이다.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떨어지듯 크로노스는 우리 곁을 자연스럽게 스쳐간다. 탄생에서 죽음으로, 시작에서 끝으로, 과거에서 현재로, 현재에서 미래로 뻗어나간다.
카이로스는 한 개인이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하는 주관적인 시간 개념이다. 시간의 주인인 ‘나’를 향해서만 흐른다.
때로는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크로노스를 확보하고 그 시간 속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특히 거대한 심연 같은 노트북 화면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날이라면….
2. 능동 : 스스로 문장의 물결을 일으키다.
몇 해 전 여름이었다. 집 근처 세탁소에 옷을 맡길 일이 있었다. 아귀가 잘 맞지 않아 삐걱대는 미닫이문을 열고 작은 세탁소에 들어섰다.
주인장 할아버지는 실뭉치를 늘어놓은 선반에 몸을 밀착한 채, 두툼한 마분지에 피아노 그림을 그려 넣은 ‘종이 건반’을 두드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피아노 치세요?”
“최근에 배우기 시작했어. 피아노 배우는 게 꿈이었을 때가 있었거든, 어릴 때 피아노 치는 애들이 참 부러웠어.”
“아니, 피아니스트 말고 그냥 피아노 배우는 게 꿈이었다니까.”
“모퉁이를 돌면 피아노 학원 하나 있잖아. 얼마 전부터 다니고 있는데, 손가락이 건반에 착착 달라붙는 게 얼마나 신이 나는지 몰라.”
어르신은 피아노를 배우면서 느낀 보람과 재미를 들뜬 목소리로 펼쳐 놓기 시작했다. 어르신의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얼굴에 피어난 미소의 꼬리도 점점 길어졌다. 몇 분 뒤 세탁소를 간신히 빠져나온 나는 눈썹위로 손차양을 만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르신의 또렷한 눈동자를 빼닮은 따스하고 맑은 햇살이 정수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졸속(拙速)이 지완(遲緩)을 이긴다.”는 문장이 나온다. “준비가 완벽하지 않아도 머뭇거리기보다 일을 저지르는 편이 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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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뜻으로 유연하게 해석할 수 있다.
글쓰기야말로 몸과 마음을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행위다.
생각과 감정이라는 뇌의 흔적을 활자 형태로 바꾸는 것이 글쓰기의 근간이므로 글의 재료는 다분히 정신적이다.
한국에서 독일로 건너가 명성을 쌓은 한 화가의 인터뷰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다. “예술에 대한 정의를 좀 내려주세요?”하고 기자가 질문을 하자. 현지에서 ‘세상에 없던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불리는 그녀는 이렇게 답
했다.
“흠, 다리가 네 개 달린 책상을 만들면 뭐가 되죠? 그냥 평범한 가구입니다. 그럼 다리가 세 개 달린 책상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면요? 그건 예술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술성은 창작자의 능동성과 주관성이 잘 버무려질 때 생겨납니다.”
예술을 뜻하는 영어 단어 ‘아트(art)’는 ‘법칙에 따른 제작 기술’을 뜻하는 라틴어 ‘아르스(ars)’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지배적인데, 일부에선 팔을 의미하는 단어 ‘arm'에서 파생했다는 가설도 제기한다. 후자의 설에 따른다면 예술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술은 육신과 정신의 팔을 뻗어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능동적으로 읽어내고, 그 세계가 주는 울림을 고유한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모든 활동이다!”
오래 전 일본의 어느 소설가는 “I love you"를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번역하지 않고 ”오늘 달이 참 밝네요“라고 썼고, 어떤 작가는 ”당장 죽어도 좋아“라는 문장으로 옮겼다고 한다. 두 작가 모두 원문에 서로 다른 관점을 부여함으로써 문장을 능동적으로 재해석한 셈이다.
삶의 정답을 이미 알고 있다고 여기는 순간 우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된다. 평생 글을 쓰고 나서 생을 마감할 즈음에야 난 질문에 대한 답을 겨우 내 놓을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답을 찾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만의 답을 구하기 위해 시간의 흐름을 견디고 세상을 헤맬 것이다. 나는 믿는다. 시끄럽고 번잡한 것에 끌려 다니지 않고 스스로 일으킨 삶의 물결에 올라탄다면 언젠가 그 답에 다가설 수 있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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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절문 : 간절히 질문을 던지다
명탐정 셜록 홈스와 그의 조력자 왓슨 박사가 숲에서 야영을 하게 됐다. 해질 무렵 두 사람은 천막을 치고 잠이 들었다. 새벽 2시쯤이었다. 숲속에서 불어온 차가운 바람이 홈스의 목덜미를 훑고 지나갔다. 잠이 깬 홈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왓슨, 어서 눈을 떠보게. 밤하늘을 좀 봐.”
왓슨은 기지개를 켜며 부스스 일어나 대꾸했다.
“뭐? 이 새벽에 뭘 보라는 거야?”
“왔슨, 그러지 말고 어서 대답해보게. 뭐가 보이나?” “흠, 셀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별이 보이는군.”
“좋아 그걸 보고 느끼는 게 없나?”
“음 우주와 인간에 관해 몇가지 물음을 떠올려볼 수 있지, 우주 앞에서 우리는 겸허해야 해. 광활한 우주에 비하면 인간은 티끌만큼이나 부질없고 하찮은 존재지. 참, 기상학적으로 볼 때는 말이지….”
왓슨이 말을 이어나가려 하자 홈스가 말허리를 자르며 소리쳤다.
“이봐, 우리 눈에 별이 보이는 이유를 생각해봐.”
“그야 …. 날씨가 좋아서?”
“아직도 모르겠나. 누가 우리 천막을 훔쳐갔단 말이야. 그래서 별이 보이는 거야!” 오래전에 들은 우스개다.
불필요한 것을 솎아내고 본질에 집중하기 위해 우린 질문을 던진다. 질문(質問)에서 질(質)은 ‘본질’과 ‘성질’을 의미하는데, 도끼(斤 도끼 근)로 조개(貝 조개 패)를 자르거나 나무를 팰 때 아래에 두는 밑받침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따라서 질문은 사물과 현상의 본바탕, 즉 근원을 묻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밀도 있는 질문은 깊고 너른 생각을 끌어내는 마중물 역할을 한다.
‘왜’라는 질문을 머릿속에 떨구는 순간 우리 안의 깊은 곳에 생각의 씨앗이 심어진다. 새롭게 움튼 씨앗이 호기심을 먹고 튼실하게 자라면 사고의 폭과 깊이는 자연스레 확장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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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자장(子張)편에 “절문근사(切問近思)”라는 구절이 나온다. “절실하게 묻고 현실을 직시한다” 또는 깨닫지 못한 것을 간절하게 묻고 가까운 문제부터 생각한다“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원래 그런거지”라는 말로 호기심을 억누르지 않고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사건과 현상 앞에서 간절히 질문을 던지다보면, 정체된 것 같던 인생이 다시 굴러가기도 하고 좀처럼 풀리지 않던 삶의 매듭이 단번에 풀리기도 하지 않나.
그런 면에서 질문은 글쓰기의 훌륭한 연료가 아닌가 싶다. 글을 쓰는 일은 질문을 연료로 해서 작가의 물음표라는 시발역을 출발해 독자라는 종착역에 도착하는 열차인지도 모른다.
질문의 무게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다양한 질문을 어디까지 던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나?’같은 질문은 물론이고 ‘배트맨은 슈퍼맨처럼 날지도 못하는데 왜 기다란 망토를 걸칠까?’‘수퍼맨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바지 위에 속옷을 입고 다닐까?’처럼 다소 엉뚱한 질문을 떠올리며 그 질문의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이런 궁금증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날이면 내가 질문을 품는 게 아니라, 질문들이 자기끼리 시끌벅적하게 토론을 벌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진실이 깃든 질문에는 하나의 우주가 들어 있다. 우주를 건네주면 때때로 우주기 반응한다.
살다보면 답이 없는 질문도 있지만, 질문은 대게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답이 되곤 한다. 질문이 답을 바꾸기도 하고, 하나의 질문 속에서 또 다른 질문이 새롭게 태어나기도 하니 말이다.
질문을 뜻하는 영어단어 ‘Question'의 앞부분 'que’는 시작을 알리는 신호 ‘cue'와 형태가 비슷하다. 이는 우연이 아닐 것이다. 질문이 우리 삶에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기 때문이 아닐까.
간절히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우린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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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오문 : 세상의 더러움에 오염된 문장
멀고먼 옛날 어느 나라에 ‘흑백랑리(黑白狼里)’라는 마을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음속에 늑대 두 마리를 키우며 살았다.
하얀 늑대는 이해와 용서를 먹고 자랐고 검은 늑대는 질투와 분노를 먹잇감으로 삼았다.
늑대들은 새끼일 땐 그럭저럭 잘 지냈으나 몸집이 커비면서 사이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사람의 마음을 독차지하기 위해 검은 늑대가 흰 늑대를 공격하는 일이 잦았다.
흰 늑대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결국 싸움은 한 쪽이 죽어야만 끝이 나곤 했다.
어느 쪽이 이겼을까? 답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더 많이 먹은 늑대가 늘 살아남았다.
북미 인디언 사이에 전해 내려오는 전설을 각색한 이야기다.
우리 마음속에는 어떤 늑대가 살고 있을까? 시기심과 노여움을 먹고 사는 늑대가 으르렁대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 사회의 곳곳에서 분노에 굶주린 늑대들의 울부짖음이 들려올 때가 있다. 정치인은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상대 진영을 향해 증오의 언어를 쏟아내고 언론은 종종 자극적인 기사로 이념과 세대간 갈등을 부추긴다.
인터넷 ‘댓글문화’ 역시 밝은 빛만큼이나 진한 그림자를 드리운다.
2019년 4월 17일 새벽, 경남 진주의 어느 아파트에서 40대 남성이 흉기 난동을 벌여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피해자 중엔 열 살 남짓한 아이도 있었다.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을 읽다가 나는 말문이 막혔다. “내가 사는 아파트가 아니라 다행이네” 처럼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저버린 문장들이 댓글 난 곳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한마디로 세상의 온갖 더러움에 오염된 문장, 오문(汚文)이었다 . 악취가 진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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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호 사회학자가 한국 사회의 어두운 풍경을 들여다본 <모멸감>이라는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우 선플 보다 악플이 네 배가량 많이 달린다. 일본은 그 반대다. 선플이 악플의 네 배, 정도 된다. 튤립의 나라 네델란드는 어떨까. 놀라지 마시라, 선플이 악플보다 무려 아홉 배나 많다.
<동의보감에 기쁨, 분노, 우울함, 슬픔, 놀람, 공포, 생각 등 칠정(七情)이 균형을 잃거나 과해지면 오장육부의 균형이 무너지기 쉽고, 이중 가장 심각하게 몸을 망가뜨리는 것이 분노라고 했다.
몸에 나쁜 것이 안쪽에 스멀스멀 차오르면 밖으로 배출해야 함이 당연지사, 그런데 그 배출구로 악플 만 한 게 없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든 휴대폰을 켜고 댓글을 적은 다음 거기에 분노를 실어서 방류할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동양 문화권에선 이미 오래전부터 댓글과 유사한 형태의 문화가 존재했다. 옛날에는 기록물을 제작할 때 대나무 조각을 끈으로 엮어서 만든 책(冊)에 글자를 새기거나 종이와 비단에 문장을 적은 후 두루마리 형태로 말아서 보관했다. 이 두루마리를 ‘권(卷)’ 또는 ‘권자(卷子)’라고 칭했다. 권자의 뒷부분에는 아무 것도 적지 않은 여백을 뒀다. 글과 그림을 감상한 이들은 이곳에 댓글을 적듯이 비평을 남겼다.
이렇듯 작품 옆에 작품 평을 덧붙이는 글을 일컬어 “발(跋)” 혹은 “제발(題跋)”이라 불렀다. 권자의 소유자가 바뀔 때마다 제발이 늘어나 권자의 길이도 길어졌다.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는 청나라 학자들의 감상평이 10미터 넘게 적혀있다.
작은 초가집 주변에 메마른 소나무와 잣나무가 꼿꼿하게 서 있는 ‘세한도’는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표현한 작품이다.
그림을 건네받은 사람은 추사의 제자이자 역관인 이상적이다. 그는 청나라를 드나들며 책을 구해 유배지에 있는 추사에게 전해주곤 했다. 추사는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자 ‘세한도’를 그려 선물했고, 이상적은 이를 청나라 문인들에게 보여줬다. ’세한도‘에 감탄한 문인들이 그림 옆에 송시(訟詩)와 찬문(贊文)을 적었다. 청의 사법부 관료였던 오찬은 “변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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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의를 배우고 익혀 현인을 본받는다”는 문장으로 추사의 솜씨와 절조를 칭송했다.
청나라 문인들은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예술이 국적을 따지는 건 무의미하다는 것을, 그리고 진정한 비평은 상대를 존중할 때 완성된 다는 것을 말이다.
서로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향해 폭언과 욕설을 내던지면 일시적으로는 분노를 배설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문장을 쏟아낸 마음의 언저리는 곪을 수밖에 없다. 오염 처리 없이 폐수를 방류하는 공장 주변의 땅이 시커멓게 썩어버리듯이 말이다. 슬픈 일이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서부진언(書不盡言)”이라 했다. “글로는 말하고 싶은 것을 다 적을 수 없다”는 것이다. 글은 종종 무력하다. 문장이 닿을 수 없는 세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글쓰기가 지닌 한계와 무게를 알고 글을 적어야 한다.
오늘날 분노를 머금고 우리 손끝에서 태어나 인터넷 공간을 정처없이 표류하는 문장들이 악취를 풍기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 망설임 없이 지나치게 빠른 속도로 글을 토해내기 때문인지 모른다. 세상사에 너무 즉각적으로 반응하면서 글을 휘갈기다보니 문장에 묻어 있는 더러움과 사나움을 미처 털어내지 못하는 것이다.
말수가 적음을 뜻하는 한자 ‘눌(訥)’은 말하는 사람의 안(內)에 말(言)이 머뭇거리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신중하게 말하는 자세를 뜻하기도 한다. 글쓰기에서도 때론 머뭇거림이 필요하다. 쓰고 싶은 욕망을 억눌러 문장에 제동을 걸 줄도 알아야 한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달필(達筆)의 능력이 아니라 눌필(訥筆)의 품격이 아닐까?
5. 성찰 : 내면을 들여다보고 지키는 일
무언가를 새롭게 움켜쥐는 것보다 손에서 놓아버리는 것이 더 어려울 때가 있다. 어느 새 그것이 일상에 스며들어 내 삶의 일부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면 더욱더 그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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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외부로 시선을 고정한 채 문제의 답을 찾을 때가 많다. 하지만 꽃봉오리가 안에서 밖으로 부풀어 올라 한 송이 꽃으로 피어나듯, 어떤 답은 내부에서 자연스레 솟아난다.
시선을 안으로 돌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은 성찰(省察)이다. 성찰은 내면의 세계를 자세히 살피는 일이다. 스스로를 헤아려 본다는 접에서 성찰은 ‘좌정(坐定)’의 성격을 띤다. 앉을 ‘좌(坐)’는 평평한 땅(土)위에 사람(人)과 사람(人)동등하게 마주한 모습을 나타낸 한자다. ‘정(定)’은 정하다. 바로잡다 등의 뜻을 지닌다.
자신을 철저히 대상화하여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잘못 된 것을 올바르게 고치는 것이 좌정이자 성찰이다.
조선이 배출한 최고의 석학 퇴계 이황이야말로 끊임없이 내면을 닦고 수양한 자기 성찰적 인물이었다.
퇴계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으로 추앙받았지만 번번이 벼슬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몰두하길 원했다. 주변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 가운데 수양과 성찰에 도움이 되는 22통을 추려 <자성록(自省錄)>이라는 책을 엮기도 했다.
퇴계가 남긴 유훈에서도 그의 성찰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퇴계는 임종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당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무덤 앞에 커다란 비석을 세우지 말고 내가 지은 묘비명을 적어 넣어라. 또한 나라에서 국장에 준하는 장례인 예장(禮葬)을 치르려 하면 극구 거절하라.”
실제로 퇴계는 죽기 전에 자신의 묘비명을 미리 지어놓았다. 제자들은 유훈을 받들었다. 퇴계가 지은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性城李公之墓)”라는 묘비명을 비석 앞에 간략하게 적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만년에 도산으로 물러나 은거했던 진성 이공의 묘”라는 뜻이다.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로 평가받는 인물의 묘비명치곤 소박하기 그지없다.
퇴계는 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단순한 문장을 남김으로써 품격있게 삶을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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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이수광은 “두문정수(杜門靜守)”라는 글귀를 남긴바 있다. 막을 두, 문 문, 고요할 정, 지킬 수이다.
“문을 닫아걸고 고요하게 지킨다”는 표면적인 뜻 외에 “밖으로 쏠리지 않고 자신을 지키면서 내면을 가다듬는다”라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숨 돌릴 틈 없이 바삐 돌아가는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으려면 성찰을 통해 내면을 살펴가며 스스로 마음을 지키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마음의 중심을 잡을 수 있다.
뭐든 중심을 잃으면 기울어지거나 가라앉기 마련이다. 붕괴되는 건 순식간이다. 특히 사람 마음이 그렇다.
6. 퇴고 : 삶과 글이 그리는 궤적은 곡선이다
어린 시절 큰집 근처에서 노 젓는 배로 저수지를 건넌 적이 있다. 배라고 해봤자 한강에서 유람선을 타본 일밖에 없는 나로서는 생경한 경험이었다.
뱃사공이 몇 명 되지 않는 승객을 태우고 노를 젓기 시작하자 ‘삐거덕’ 소리와 함께 낡은 목선이 수면을 미끄러졌다. 하얀 물보라가 뺨과 옷깃을 적셨다.
늙수그레한 사공은 뱃머리를 보지 않고 허공을 응시하며 노를 저었다. 그 모습이 내겐 이채롭게 보였다. 배가 저수지 중간을 지날 때쯤 난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사공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저씨, 정면을 똑바로 보지 않고 노를 저어도 괜찮아요?”
사공은 한 바탕 크게 웃으며 답했다.
“뭐라고? 하하하. 이 배가 직선으로 움직이는 거라면 똑바로 앞을 봐야 할테지.”
“네? 배는 직선으로 가지 않나요? 물에 떠서 똑바로 가잖아요.”
“그게 꼭 그렇지도 않아. 이런 배는 노를 저을 때마다 옆으로 기우뚱 거리면서 물고기가 헤엄치듯 앞으로 나아간단다.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곡선을 그리면서 배가 움직이는 셈이지. 그러니 건너편 선착장에 도착하려면 뱃길을 계속해서 고치면서 노를 저어야 해. 뭐, 사람이 살아가는 일도 그러할 테고. 이해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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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인생을 고해(苦海)라고 한다. 삶의 바다 곳곳에 무수한 고통이 암초처럼 놓여 있는 탓이다. 고통에 부딪혀 좌초되지 않기 위해 우린 수시로 항로를 변경한다. 애초에 정해진 길은 없다. 그저 끊임없이 길을 고치면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한 편의 글을 써나가는 일도 문장을 고치는 행위의 연속이다. <스튜어트 리틀> <샬롯의 거미줄>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동화작가 앨윈 브룩스 화이트는 “위대한 글쓰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위대한 고쳐쓰기만 있을 뿐이다.”라고 햇다. 틀린 말이 아니다.
퇴고는 글쓰기의 마무리 과정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글을 마주하는 단계인지도 모른다. 퇴고는 단순히 초고라는 들판에 흩어져 있는 오탈자와 띄어쓰기 오류를 색출해서 바로 잡는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퇴고는 나무를 관찰하는 동시에 숲을 조망하는 행위다.
퇴고를 이야기할 때 대개 “글을 고치는 횟수가 관건”이라고 말한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횟수 못지않게 퇴고에 임하는 시기와 자세도 중요하다. 난 초고를 작성한 후 곧바로 퇴고에 돌입하지 않는다. 원고 앞에서 한 걸음 물러나 물리적 시간적 거리를 둔다. 글 안으로 너무 깊숙이 들어와 있으면 글을 냉정하게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초고는 생물과 같아서 자신에게 가해지는 힘과 충격을 거부하는 속성이 있다.
어느 정도 원고를 쓰고 나면 ‘내가 여기까지 해냈구나….’ 하는 성취감이 작가의 마음에 들어차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글의 수정을 가로막는 걸림돌로 작용한다.
초고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자만심과 대견함이라는 리본을 과감히 뜯어버리는 것이야말로 퇴고를 향해 나아가는 첫 단계가 아닐까 한다.
퇴고는 수학으로 치면 덧셈보다 뺄셈에 가깝다. 내용을 보완 한답시고 마구 문장을 쑤셔 넣다 보면 글의 얼개가 어그러질 수도 있다. 장르 문학의 거장 스티븐 킹이 “나는 ‘수정본 = 원본 - 10%’라는 공식에 따라 소설을 쓴다”고 밝힌 것도 비슷한 맥락이 아닐까 싶다.
글쓴이의 감정에 떠밀려 정확성과 객관성이 찬 밥 신세로 전락한 글은,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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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의 입장에선 먼지 낀 거울처럼 흐리터분하고 모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초고를 에워싼 불필요한 포장지, 예컨대 과잉감정 따위를 퇴고 과정에서 벗겨내야 한다. 그래야 연필을 깎아 흑심을 드러내듯, 모호함을 걷어내 글에 담은 메시지를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도 가능하다.
퇴고를 거친 문장이야말로 정갈해야 한다. 우린 지면과 화면의 경계가 희미해진 세상에 살고 있다. 독자는 종이 책을 넘기며 글을 읽기도 하고 컴퓨터와 휴대폰으로 활자를 음미하기도 한다.
퇴고를 통해 가독성뿐만 아니라 ‘눈에 띄는 정도를 의미하는 가시성(可視性)을 확보하는 글이어야만 지면과 화면을 넘나들며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다.
퇴고라는 목적지에 도달하려면 각기 분리된 것 같지만 결국 하나로 귀결되는 무수한 ‘고쳐쓰기의 길’을 묵묵히 걸어야 한다. 곧은 직선이 아닌 둥근 곡선의 궤적을 그리며 구불구불하게 이어져 있는 길을, 그 행로에 어떻게 지나느냐에 따라 글의 품격이 달라진다는 것은 불문가지일 것이다.
7. 지향 : 마음이 향하는 방향
어느 왕국에 아름다운 여인이 살았다.
사내들은 그녀의 마음을 얻으려 애썼다.
노모와 함께 사는 한 남자도 그중 하나였다.
그는 마을 어귀에서 작은 푸줏간을 했다.
여인을 향한 연정은 그의 마음 속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되어 종일 굴러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여인과 마주한 사내는
감춰둔 마음을 내 보였다.
“내 마음을, 내가 지닌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남자가 내게 사랑 고백을 했어요. 다들 진귀한 보물과 희귀한 동물을 가져 왔지만 내 마음은 요동하지 않았습니다. 흠, 정말 특별한 것을 보면 내가 흔들릴지도 모르겠네요.”
“특별한 것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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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당신이 가장 아끼는 사람의 심장을 가져 올 수 있나요?”
“제가 가장 아끼는 사람은 제 어머니인걸요…”
“당신이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릴 수 있다면 나는 다른 남자의 구애를 물리치고 당신의 청혼을 수락할게요.”
눈이 먼 사내는 그날 밤 짐승으로 돌변했다. 어머니가 잠든 사이 심장을 파냈다. 동이 트자마자 어머니의 심장을 들고 여인을 만나러 뛰어가던 그는 그만 돌부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그때였다.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심장에서 울음섞인 어머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아 어디 다쳤느냐? 천천히 가거라 천천히….”
몇 해 전 어느 잡지에서 이 우화를 일자마자 나는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에 나오는 문장을 떠올렸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잡지를 덮고는 가슴에 손을 얹고 눈을 감았다. 내 안에서 물음이 돋아났다. 그동안 나는 부모의 심장을 도려낸 적이 없었나? 자신 있게 아니라고 답할 수 없었다.
바다 해(海)에는 어미 모(母)가 스며 있다. 어머니는 바다를 닮았다. 자식이 감히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어머니의 마음은 깊고도 따뜻하다. 그 품에 안기면 어른도 아이가 된다.
어머니의 마음은 맹목적이다. 자신의 삶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매번 자식을 보듬는다. 심장을 도려내는 아픔을 겪고 억장이 무너지더라도 어머니는 끝내 자식을 용서한다.
제아무리 어둠속에서도 어머니의 사랑은 어둠을 찢고 빛을 향해 나아간다. 나는 내가 쓰는 글이 어머니의 사랑을 닮았으면 좋겠다.
내 손 끝에서 돋아나는 문장이 어둠을 가로질러 빛을 향해 날아가는 새가 되었으면 한다.
그 새가 누군가의 삶을 밝은 쪽으로 안내하기를 바란다.
2019. 9. 11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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