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2)

2019. 8. 28. 12:16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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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만나 사랑하다 (2)

- 인생을 알고 신앙을 선택한 작가 8인의 가톨릭 입문이야기 -

■ 글쓴이 : 오정희, 전옥주, 최인호, 한수산

* 펴냄 : 생활 성서사

◉ 오정희 : 평화를 빕니다

■ 첫영성체로 새로 나는 아이들을 보며

주일 교중 미사가 시작되는 성당 안이 유난히 밝고 환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새 Ep들이 지저귀는 듯 재깔대는 소리들이라니. 화관을 얹은 미사모를 쓰고 흰 드레스를 입은 어린 소녀들과 흰색 셔츠에 감색 반바지 차림의 어린 소년들이 앞자리를 채우고 앉아 있었다.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는 제사 전례는 아름답고 장엄한 교향악과도 같다. 말씀 전례가 끝나고 평화의 인사를 나눈 후 성체를 영하기 전 “한 마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라고 고할 즈음에는 언제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신부님이 제병과 포도주를 들어 올리실 때, 전례의 절정에 이르러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목을 길게 빼어 지켜보는 것은 성체와 성혈로 변화하는 신비를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이다.

미사가 끝난 뒤 아이들은 꽃다발을 들고 상기된 표정으로 기념 촬영을 하는데 그들 못지않게 성장을 한 부모들이 묻는다.

“오늘 기분이 어때?”

그들은 “기뻐요” “좋아요” “좀 이상해요” 라고 단순히 대답한다.

그들의 감정이나 기분이 대답처럼 단순할 리는 없을 것이다. 일상적 생활을 벗어난 특별한 의식,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 세계에 속하게 되었다는 특별한 느낌을 섬세히 표현하거나 스스로 이해하기에는 언어와 마음이 아직 어릴 터일 뿐이리라.

아이들은 오늘, 하느님의 귀한 자녀가 되어 평생 그 뜻에 따라 바르게 살리라고 일기장에 기록할 것이다. 살아가면서 신자가 되거나 어쩌면 불신자, 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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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자가 되기도 하고, 믿음에의 회의와 방황의 늪에 빠지는 고비도 겪게 될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오늘’은 생애의 중요한 이정표와 분기점이 되기도 할 것이고 유년기의 아름다운 장면으로 회상될 것이기도 하고, 더러 신앙이 없는 삶을 살게 되더라도 ‘그런 어린 날이 있었지.’라고 미소롭게 돌아보아지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주 먼먼 훗날, 인생에 지치고 고단할 때, 길을 잃었을 때, 오늘의 이 기억이 따뜻한 위로와 인도의 손길이 되기도 하리라. 50대 중반의 나이에 동갑내기 대모님의 손에 이끌려 세례를 받던 날의 내 모습이 겹쳐진다. 그날 나는, 너무 늦지 않게, 너무 멀리 가기 전에 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일기장에 적었었다.

미사가 끝난 후 차 나눔을 하며 친근한 사람들과 안부를 주고받는 성당 뜰에 햇살이 은총처럼 가득하다.

“이슬 맺히고 종달새 날고 달팽이 기고 주님 계시니 세상 좋아라.”

로버트 부라우닝의 시 구절 위에 갓 피어오르는 새순 같은 아이들의 생애 처음 성체를 받아 모신 기쁨까지……, 여기에서 더한 평화가 있으랴.

나란히 언덕길을 걸어 올라가 산 밑에 자리 잡은 성당의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중요 일과이다.

머리가 허옇게 세어 가는, 초로에 접어든 우리 부부지만 돌아 올 때는 사이좋은 동무 같다. 나는 가끔 이러한 우리들의 모습에 어리둥절해 지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욕심 없이 깨끗하게 잘 늙고 잘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해 왔지만 남편과 함께 손잡고 특정 종교의 신앙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 노년의 그림에는 없었던 것이다. 인생은 이렇게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인가 보다.

■ 믿음 없이 접했던 기독교는

내가 기독교를 처음 접했던 것은 어린이용 성경에 의해서였다. 초등학교 2,3학년 때쯤으로, 우리 집은 기독교와는 무관하였으니 아마 친구에게서 빌린 책이었을 것이다. 책 표지에는 바닷물이 갈라지고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건너가는 모습, 지팡이를 쳐들고 앞장서 무리를 인도하는 모세와 뒤쫓는 이집트 군대들이 그려져 있었다. 구약의 강렬한 이야기들을 뽑아 재구성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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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로 그림이 많이 들어간 책이었다. 에덴을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의 말씀이 새겨진 석판을 들고 내려오는 모세의 모습을 감싼 장엄한 광휘, 금송아지를 만들어 모시고 춤추던 이스라엘 사람들,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제단에 올려놓고 칼을 빼들던 장면, 한밤중 무릅을 꿇고 앉아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소년 사무엘, 때로는 구름 기둥으로, 떨기나무 숲으로, 천둥 번개, 우레와 같은 음성으로 무섭게 표현되어 있던 하느님의 모습 등은 아주 오랫동안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중•고교 시절, 감리교 계통의 기독교 학교에 다녔다. 매주 월요일이면 전교생이 함께 예배를 드렸고 일주일에 한 번 정식 교과 과목으로 성경 시간이 있었다. 언제나 도스트예프스키와 파스칼을 인용하며 열정적인 설교를 하시던 변선환 목사님! 목사님이 파스칼 적 전율이라는 말과 함께 자주 인용하시던 것은 “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려움으로 가득차게 한다.”였다. 가을이면 부흥회에 이어 세례식이 거행되었다.

기독교의 영향이 전혀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내게 우리의 원죄며, 동정녀의 원죄 없으신 잉태며, 부활이며, 천국에의 약속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이미 문학에 뜻을 두었던 터였다. 문학과 종교를 대립적인 것으로 여기던 통념을 받아들였고 어떤 종교에서도 이념에서도 자유로울 것을 강조하는 것이 문학 정신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내가 선택한 작가로서의 삶은 순명이 아닌, 저항과 상처의 응시로서의 삶이었다. 세상의 부조리와 삶의 어려움에는 어떤 신의 뜻이 작용하고 있는가. 다만 우연적으로 던져질 존재일 뿐인 우리가 신에 대한 의무를 가질 필요가 있는가. 끝까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으로 살며 생에 깃든 악의와 불친절함과 부조리함을 파헤치고 고발하겠다는 나의 문학 세계를 그렇게 열어가겠다는 의지가 유치한 대로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겠다. 그 무렵의 사조였단 ‘실존주의’의 영향을 어설프게 받았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절대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편안해진다는 것은 일종의 회피이자 도피이며 쉬운 해법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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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경위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일까?

살아오면서 불교, 개신교, 천주교, 원불교 여호와의 증인 등 각기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로부터 종교에 귀의하라는 권유를 많이 받아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내게 말했다. 거기에는 고단한 삶에의 위로와 구원이, 새로운 기쁨과 행복의 세계가 있다고.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인간인지라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는 별반 다를 게 없지만 죽음에 임하는 태도와 마음은 정반대로 다르다는 말로 곧 다가올 늙음과 죽음을 일깨우기도 했다. 그럴 것이다. 나이 들어갈수록 인간이 아니 나 자신이 얼마나 모순투성이이고 허약하고 부족한 인간인가를, 자신의 힘으로 ‘정말 선하고 바른 ’인간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가를 깨달아 가고 있었지만 특정 종교에 마음이 가닿기보다 일종의 종교 다원주의적 입장으로 기울고 있었다.

사람들은 어떠한 때 어떤 경위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일까. 궁금할 때가 많

았다. 바오로의 고백처럼 언제 ‘내 눈의 비늘이 벗겨지는’ 체험이 찾아오는

것일까. 굳건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보면 절망에 빠졌을 때,

인간의 허약함과 한계를 뼈저리게 느낄 때, 생명의 유한함과 결핍과 고독,

질병, 혹독한 시련 속에서 밝히 비춰주는 빛으로서, 위로자로서, 희망의 약속

으로 예수님을 만났다고 한다. 예수를 믿으며 병이 나았다거나 부자가 되었

다거나 자녀들의 일이 잘 풀렸다거나 하는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응답의 증

거’에는 고개가 갸웃거려졌으나, 고통이 기쁨으로 바뀌었으며 원망이 감사로

바뀌었다거나 긍정과 희망의 마음을 갖게 되었다거나 세상을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 여운이 오래 마음에 남았다.

■ 아들의 세례를 통해 지난 세월을 돌아보며

1998년도 여름, 군에 입대한 아들로부터 느닷없이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는 편지를 받았다. 유스티노, 빛이라는 뜻이라 했다. 초코파이 신자냐는 내 농담에 아들 역시 그런 셈이죠, 라고 받으며 웃었다. 아마도 훈련소 생활이 많이 힘들었나 보다, 라고 생각했지만 뜬금없다는 느낌은 여전했다. 그런 중에도 나는 신앙이 없지만 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지표를 얻고 위안과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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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를 갖게 되었다는 것이 다행스러웠다.

아들은 열심한 신자가 되었다. 군에서 제대한 후에도 성서 모임에서 열심히 공부를 하고 봉사자로서의 생활에도 충실했다.

가끔 아들의 집에 가면 서가에 꽂혀있는 가톨릭 관련 책자들을 들춰보곤 하였다. 무엇이 그에게 이러한 신앙을 갖게 한 것일까 궁금하면서도 부모로서의 당연한 노심초사와 불안이 덜어졌다. 종교로 인한 것이든 이념에 의한 것이든 사랑에 의한 것이든 자기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느끼고 생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었다.

나의 50대는 힘들었다. 고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대학 진학을 위해 집을 떠나자 생물로서의 한 살이, 의무를 무사히 치러냈다는 안도감과 함께 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시작되었다. 가족관계가 생기기 이전, 내가 ‘나’로서만 살게 되었던 결혼 이전의 본래의 ‘나’로 돌아간 듯한 해방감을 느꼈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짧다는 것, 막연한 미래 불안과 방황에 사로잡혀 있었으나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꿈과 희망이 있었던 젊은 시절과는 다른, 닫히고 막힌 시간들에 도전해야 한다는 막막한 심정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평생 나를 괴롭혀 온 것은 자신과의 불화였다. 사춘기 이래로 내 괴로움의 태반은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데 있었다. 열등하고 어리석은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용서하고 인정하는 일이 그리도 힘들었다.

남편이 내게 지나가는 말처럼 성당을 나가지 않겠는가 하고 물었다 짚어보니 꼭 십 년 만에 똑같은 말을 한 것이다. 그 십 년, 그 이전과 다름없이 현실 생활에 안주하며, 아니 나날의 전전긍긍 속에서 성장 없이 소모적으로 살아온 듯한 그 십 년간의 세월이 돌아보아졌다. 또한 별 탈 없이 씩씩하게 살아가는, 그의 표출되지 않는 내면의 고독이나 불안감, 영적 변화에의 갈망도 짚어졌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회복과 치유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 하느님과의 관계위에 지표를 세우고

그즈음 어느 날 밤 꿈을 꾸었다. 캄캄한 동굴 속을 누군가와 함께 더듬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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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 걷고 있었는데 잠시 동굴 밖으로부터 희미한 빛이 비쳐들었다. 입구 쪽으로 다가갈수록 빛은 밝아지고 그 빛 속에서 검은 수단을 입은 신부님이 제단에 촛불을 켜고 있었다. 이상한 꿈이었다. 잠재적 갈망이거나 심각한 불안감이거나, 스스로 분석하며 여러 날 망설이다가 성당의 교리공부 신청을 했다. 자식이 가는 길이라면 지옥이라도 함께 갈 터인즉 그가 그렇게 믿고 사랑한다는 하느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나 보자는 마음도 한편에는 있었다.

“우리가 자신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까닭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모습대로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귀하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존재이다.”

교리 공부 시간에 들은 이 말씀은 내 지난 세월의 괴로움을 가로지르며, 나를 옭아매고 있던 사슬을 끊어 놓았다.

나는 작가이며 ‘죽음이 보이는 안경’을 쓴 초로에 접어든 여성이며 한 남자의 아내와 두 자식의 어머니이며… 등등의 정체성 규정에 가톨릭이라는 조건을 얹기에는 아직 조심스럽다. 엿새 동안 죄짓고 하루 중의 한 순간 회개하는 얼치기 신자, 철저한 세속인이며 늘 부족함에 부끄러워하지만 또한 하느님께서는 그 허약함 때문에 사랑하신다고 믿는 작은 사람일 뿐이다. 수많은 잘못과 어리석음을 되풀이하는 내 고백과 가도를 귀 기울여 들어주시는 분, 나는 내가 믿는 하느님을 그렇게 이해한다.

‘정의’란 신과 인간과의 예절바른 관계라고 한다. 또한 가톨릭에서 규정하는 ‘평화’란 단순히 전쟁과 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중심과 하나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중심은 바로 하느님이며, 사랑과 자비하는 하느님의 마음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사람들이 내게 미사 중에 건네는 ‘평화를 빕니다’ 라는 인사는 본질에의 회복을 바라는 기도가 될 수밖에 없다.

영국의 소설가 윌리엄 서머셋 모옴은 좋은 작가가 되기 위한 제언으로 소설 속 주인공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했다.

“…… 우선 그와 그가 살고 있는 세계와의 관계를 발견해야 하며 다음으로는 그 와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세 번째로는 그와 그 자신과의 관계를 발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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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비단 문학을 지망하는 사람들에게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 누구나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발이 걸리듯 맞서게 되는 물음이 것이다. 나는 이제 그 위에 나와 하느님의 관계라는 것을 얹는다. 그 관계의 정립 없이는 내 모든 것은 모래 위의 집이 될 것이며 지표를 잃는 것이기 때문이다.

■ 오정희 (실비아)

0 1947년 서울 생. 서라벌 예대문예창작과 졸

0 1968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소설 <완구점 여인>이 당선

0 이상 문학상, 동인 문학상, 오영수 문학상, 동서 문학상 등 수상

0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독일의 ‘리베르투르 상’ 수상

0 저서

불의 강, 유년의 뜰, 불꽃놀이. 새.

송이야, 문을 열면 아침이란다. 내 마음의 무늬 등

◉ 전옥주 - 고마워요, 분도 씨

■ 언니의 미사보를 통해 천주교의 신비를 보다

내가 아는 사람가운데 가장 착한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없이 나보다 열 살 위인 우리 언니를 꼽을 것이다. 얘기 속에서나 상상 속에서가 아닌 내 생활 주변 가까이의 실존 인물 가운데 언니보다 착한 사람을 찾으라면 선뜻 생각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나를 가운데로 언니와 동생, 우리 세 자매는 모두가 눈이 큰 편인데 그 중에도 언니의 눈은 유독 컸었다.

눈이 너무 커서 슬퍼 보이기까지 한 언니는 어린 동생이 아파도, 거지가 동냥을 와도 걸핏하면 그 큰 눈에 눈물을 그렁거리곤 해서 어머니는 “착해 빠진 데다 눈물까지 많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지 팔자가 걱정된다.”시며 가끔 우려의 말씀도 하셨다. 맏딸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자신의 의견을 좀체 드러내지도 않고 묵묵히 집안일을 도우며 무엇이든지 동생들에게 양보하던 언니가 스물한 살에 시집가게 되었을 때 집안 구석진 곳에서 훌쩍이다가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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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께 “시집보내지 말고 동생들과 함께 그냥 집에서 살게 해 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혼 2년째 되던 해에 6•25 전쟁이 일어나 형부는 전쟁터로 가게 되어 언니는 시부모님 모시고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 소식이 없는 남편을 기다리며 살림을 꾸려 나갔다. 형부는 행방불명으로 끝내 돌아오지 못했지만 언니는 계속 기다리면서 시집살이를 했고, 일가친척들로부터 효부 또는 보살이라고 불리 정도로 착하게 열심히 살았다.

언니가 다닌 학교가 가톨릭 재단에서 운영하는 효성초등학교였다. 보수적이고 완고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순하고 착한 언니를 학교에 보내기는 해야겠는데 남학생과 함께 뒤섞여 다니는 학교에는 보낼 수 없다하여 몇 년을 미루다가 겨우 효성초등학교가 여학생만 다닌다는 것을 아시고 늦게나마 보내게 된 것이다.

맏딸인 언니는 남학생이 없는 학교에 보냈지만 내가 초등학교 갈 즈음해서는 좀 개화되셨는지 나는 남녀공학에 입학하도록 허락해 주셨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해서 얼마되지 않은 어느 날, 언니가 책갈피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조심스럽게 보여주는데, 그 사진 속의 언니는 친구와 함께 머리에 하얀 보자기를 쓰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천사처럼 보였다. 그 보자기가 성당에서 쓰는 미사보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미사보가 언니를 천사처럼 보이게 한 것 같아 신기해서 한참 동안 사진을 보았다.

“여학생만 다니는 학교가 없어서 천주쟁이 학교에 보내기는 하는데 성당에 나가면 안 된다.”라는 할아버지의 엄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언니가 얼마나 성당에 나가고 싶었으면 미사보를 쓰고 사진을 찍어서 고이 간직하고 있었을까마는 암튼 천주교도 성당도 미사보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던 어린 내가 언니를 천사처럼 보이게 한 미사보를 통해 어떤 신비와 아름다운 미지의 세계인 천주교를 만난 것이다. 이것이 천주교와 나와의 첫 만남이었다.

■ 겉 믿음은 따라가고, 속 믿음은 외면하다

“지금 말이지만 난 수녀님들이 그렇게 좋아 보이고 부러울 수 없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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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는 신자 며느리를 맞으면서 기다렸다는 듯이 성당에 나가고서도 이십여 년이 지나, 일흔 넘어서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때에 이르러서야 내게 말했다. 집안 어른들이 무서워서 성당에 다니고 싶다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미사보를 쓰고 찍은 사진을 소중한 보물처럼 간직하고 꺼내 보던 언니였지만 시집의 종교가 불교여서 결혼과 동시에 시어른이 믿는 종교를 따랐으니 그 사진은 결혼 전에 없애 버렸을 것이고, 나 역시도 그 사진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고 금방 잊어버렸다.

그렇게 꿈결처럼 언뜻 다가왔던 미사보의 존재는 까맣게 잊은 채였고, 성당도 천주교도 우리 집과는 별 인연 없이 그냥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3학년 때 오십대 중반이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처음에는 원인 모르는 병이라 했는데 나중에 겨우 알아낸 것이 간암이었다.

이때 일찍 혼자되어 성당에 열심히 다니시던 큰어머님이 어머니를 설득하여 ‘요왕(사도 요한의 옛말)’이라는 세례명으로 대세를 받게 하셨다.

그리고 묘소도 성당 묘지로 모시는 게 좋다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스럽게 우리 식구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모두 성당에 나가게 되었다. 그때 내가 나간 성당이 대구 계산성당이었댜.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지만 그 당시 계산동 성당 주변은 평화롭고 정겨웠다. 성경이나 교리에 의한 신앙이 아닌, 성당 건물에서 느끼는 성스러움과 평온함, 그리고 미사보를 쓰고 기도하는 여인들의 정숙하고 아름다운 모습 등, 눈에 보이는 것이 좋아 성당에 부지런히 다녔다.

그 당시는 세례 받는 것이 요즈음보다 어려웠다. 세례 받는 것이 너무 까다로워 힘들다고 불평하면 본당 할아버지 신부님께서는 “힘들게 얻은 것이 더 소중한 법이다.” 라고 하시면서 쉽게 세례 받으면 냉담도 쉽게 하게 되어 얼렁뚱땅 세례 받을 생각일랑 아예 하지 말라고 하셨다. 꼬박 일 년을 예비신자 교리를 받아야 하고 출석 성적, 찰고 성적도 좋아야만 세례받을 자격이 주어졌으니 교리 공부를 하다가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이 상당하던 때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서울로 가게 되면서 성당과는 더욱 거리가 생겼다. 함께 자취하는 친구 따라 교회도 가 보고, 구세군 교회도 나가 보고 또 서울 시내에 있는 신흥사와 봉은사 등 유명 사찰을 구경 다니며 불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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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관심을 가지는 등, 종교관이 그야말로 갈팡질팡 중심을 잡지 못했다. 겉보기가 좋아 성당을 오가는 내 신앙은 세례를 통한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바람만 불면 이리저리 휘둘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대구의 우리 집에서는 나보다 다섯 살 아래인 여동생이 앞장서서 어머니와 남동생과 함께 열심히 교리를 배워서 세례를 받아 착실한 신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참으로 다행스러워서 내 마음이 다 가벼워졌다. 그러니 방학이 되어 집에 가면 자연스럽게 가족과 함께 성당에 나갔고, 그동안만이라도 착실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 십계명이 세례의 걸림돌이 되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도 되었으며 직장도 갖게 되었다. 결혼 적령기에도 접어들었다. 작가로서, 예술가로서 여러 가지 꿈도 갖게 되고 생각이 많아졌다. 여동생은 성가대에다 주일학교 선생까지 하고 남동생은 복사를 하고 있으며,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를 하느님께 의지하며 성당에 나가시는 것을 큰 낙으로 삼고 계셨다. 딸 셋 중 가장 제멋대로인 내가 불안해보여서인지 빨리 영세하기를 어머니는 간절히 원하고 계셨다.

그런데 선뜻 세례는 받고 싶지가 않았다. 그럴만한 이유가 내게는 있었다. 그것은 교리 공부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익히고 강조되는 십계명이 걸림돌이 된 것이다. 해석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배우고 또 이해하고 있는 범위 안에서는 나는 도저히 그 계명을 지키며 살아갈 자신이 없어서 ‘십계명을 지키며 살 자신이 없기 때문에 나는 세례를 받지 못하겠다.’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고 어처구니없지만 그때는 절실했다.

어느 때는 아내 있는 스승을 혼자 좋아하며 애태우기도 하고, 성당의 보좌 신부님을 혼자 좋아하는 짝사랑의 불을 피우기도 했다. 이런저런 나 자신과의 싸움과 갈등 속에 고민하고 있는 내가 어떻게 세례를 받을 수 있단 말인가?

본당 노 신부님께서는 어쩌다 나를 만나면 “옥주 조년 뺀댓돌(차돌멩이의 경상도 사투리)처럼 요리조리 빠지면서 영세를 미루는 얄미운 년.”이라며 호통을 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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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욕쟁이 본당 신부님께 꾸중을 들었지만 그 꾸중이 고깝게 들리지 않았으며 시간이 지나면서는 가슴 따스하게 하는 정감어린 사랑으로 남아 있어 문득문득 아름다운 추억으로 살아나곤 했다. 어쨌든 그렇게 세월은 흘러갔고, 사는 곳이 바뀌면서 성당이 달라지긴 해도 여전히 성당에는 다니면서 십계명을 지킬 자신이 없어서 예비 신자로 남아 있었다.

■ 그래도 나는 천주교 신자야

1969년도에 직장을 서울로 옮기고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를 서울로 모셨다. 낯선 서울살이를 하시면서 성당에 나가는 것이 유일한 낙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따라 나도 다시 열심히 성당에 다녔다. 그 기간은 꽤나 길었다. 예비 신자 생활을 오래하게 되면서 왔다갔다지만 교리 공부를 했으니 천주교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고, 몇 군데 새 성당 신축 기금도 냈으며, 어머니의 이름으로지만 내가 번 돈으로 교무금도 꼬박꼬박 내고 주일미사도 빠지지 않고 있으니 누가 뭐래도 나는 천주교 신자였다. 해서 어디 신상명세서에서나 누가 종교가 뭐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천주교 신자다.”라고 대답했다. ‘당당하게’라고 했지만 실은 양심 한쪽에선 주눅 들었다.

어머니와 함께 서울 생활을 한 지 몇 년이 지나서였다. 내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던 그 보좌 신부님이 서울에 출장 오신 김에 어머니를 뵙겠다고 집으로 찾아오셨다. 직장을 조퇴하고 신부님을 기다리는 나의 심정은 터질 것만 같았다. ‘서울에서 신부님을 뵙게 되다니……’ 당초의 내 각본대로라면 ‘기회는 이때다.’하고 이 절호의 찬스를 놓치지 말고 서울 안내를 핑계 삼아서라도 신부님과의 환상적(?)인 데이트 기회를 만들어 한 단계 비련의 장으로 들어서야만 했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너무나 어렵고 조심스럽기만 해서 정중하게 신부님을 맞았다. 어머니와 두 분이서 반가워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시는 걸 보며 내 피큐드의 화살을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 그리고 나는 진정으로 그분이 훌륭한 사제로 큰 신부님이 되시기를 바라면서 버스 정류장까지도 바래다 드리지 못하고 그냥 아파트입구에서 배웅해 드렸다.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와 생각해 보니 가슴 아픈 사랑의 대상은 그 스승도 보좌 신부님도 아닌 내 상상 속의 인물로 설정하면 되는 ‘아무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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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도를 통한 프러포즈를 받다

어머니의 말씀에 따르면 딸 셋 중에 둘은 착하고 순둥이인데 가운데는 고집쟁이에다 깡다구도 세서 골칫덩이라고 하셨다. 어머니 말씀처럼 다른 딸들은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담대한 짓을 나는 가끔 했다. 서라벌 예술대학이 광대학교라고 절대 못 간다고 하는 것을 가출하다시피 상경해서 그 학교엘 갔으며, 서른이 된 노처녀가 시집갈 생각은 않고 직장을 서울로 옮긴다니 말도 안 된다고 하였지만 나는 서울로 가야만 작가 노릇을 제대로 하고 출세도 할 것이라고 내 힘으로 서울 시청에 자리를 마련하고는 갈아입을 옷가지만 챙긴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서울행을 감행하기도 했었다.

경북도청에서 서울시청 대한주택공사 등 공직 생활 십수 년을 하면서, 연극 활동도 틈틈이 하고 작품집도 내며 작가로 연극인으로 나름대로 무척 바쁘게 보냈다. ‘나 자신의 일은 내가 결정하고 내가 처리한다.’고 하면서도 생각에만 머물러 고민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하였고, 진취적이지 못해 간 크게 시작할 때와는 달리 목표 달성에는 턱도 없이 부족해서 어느 순간부터 초조하고 우울했다.

마흔에 접어드니 자신감과 사고에 혼란이 왔다. 무조건 직장을 그만두고 보자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뜻하지 않은 내 사표를 보고 직장 상사가 어이없어했다. 그래도 후임자 구할 때까지 삼 개월은 더 다녀야 한다고 해서 그것은 수용했다. 그 삼 개월을 다니는 동안 마음이 변할 거라는 상관의 기대와 달리 나는 삼 개월이 끝남과 동시에 고집대로 직장을 떠났다. 떠나는 순간까지 애정을 가지고 걱정하는 동료들을 향해 “몇 달 쉬다가 정 심심하면 시집이나 가 볼 생각이다.”고 해서 사람들을 아연 실색케 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서너 달은 아무 것도 안 하고 노는 것이 그렇게 편안하고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글도 잘 써지지 않았고, 극단 일과 소극장 운영도 직장 다닐 때보다 더 경영이 어려워졌다. 정말 바동대며 팽팽하게 잡고 있는 고무줄을 모두 탁 놓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럴 때 만난 사람이 남편 분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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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의 긴 예비 신자가 흘린 눈물

몇 달 후 그의 기도 덕분인지 몰라도 우린 예상 외로 빨리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하고 그는 정말 열심히 성당에 나갔다. 덩달아 나도 열심히 따라 다녔다. 그는 내게 혼배를 하기 위해서 빨리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했지만 망상의 병이 도져서 세례 기피 증세가 다시 나타났다. ‘이제 결혼까지 했으니 괜찮은 남자에게 눈길만 주어도 대죄가 될 테지……?’또 십계명이 걸림돌이 되었다. 남편은 세례를 받은 후에 죄를 지으면 고해성사를 보면 된다고 했지만 신부님 앞에 죄를 고할 생각을 하니 아득했다. 창피할 것도 같고 부끄럽기도 할 것이고, 사람이 살다보면 죄짓지 않고 살 수 없을 텐데 한두 번도 아닐 테고, 또 어쩌면 같은 죄를 반복해야 할 때도 있을 테니 그 난감함이란 ……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명동 상당에서의 기도가 결혼에 별로 관심이 없던 내 마음을 흔들어 한 남자가 가슴에 들어와 버렸기에 유독 추워 보이는 그를 혼자 겨울을 넘기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에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다

남편은 예비신자 교리반에 함께 나가주기도 했고, 통신교리를 신청해서 답을 써 보내게 하는 등 나름대로 노력을 하였다. 그런데 때때로 “세례는 언제 받을 거냐?”고 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조금 있다가~.”하면서 미루었다. 그러기를 몇 년, 통신교리 수료증을 받아 놓고도 번번이 미루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어느 날 “세례 받는 것이 뭐 급한가?” 하고 또 딴전을 피우는 내게 남편이 버럭 화를 내며 “세례를 받는 것도 혼인 신고도 자꾸 미루기만 하니 이상한 여자 아냐?”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난 후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남편은 다시 세례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남편은 출근을 위해 밥상을 차려 놓고 식탁에 앉아 밥을 먹으려는데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어디 숨어 있다가 그렇게 많은 눈물이 흐르는지 걷잡을 수가 없었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여편네가 눈물을 짜고 있다.” 신경질을 내는 남편을 향해서 눈물범벅 콧물범벅 으로 서러워서 엉엉 소리까지 내어서 울면서 악을 쓰듯 말했다.

“왜 나보고 세례 받으라는 말 안 하는 거야?”

너무나 엉뚱한 말에 어처구니없어 잠시 쳐다보던 남편이 그대로 힁허케 밖으로 나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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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화를 내고나간 남편이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나갈 때와는 달리 얼굴에 환한 웃음을 담고 돌아왔다. 어리둥절해서 쳐다보는 내게 “통신교리 수로증 어디 있지?”하는 것이었다.

남편은 집을 나가서 회사로 가지 않고 바로 신부님을 찾아갔던 것이다. 본당 신부님과는 친구의 소개로 우리 부부가 진즉 인사를 드렸고, 주일 미사 때도 자주 뵈어 낯이 익은 터여서 남편으로부터 내 얘기를 들은 신부님께서 수료증을 갖고 오라고 해서 가지러 온 것이라고 했다. 수로증을 내주며 나는 다시 억지를 부리는 한마디를 덧 보탰다.

“오늘 당장 세례받게 해 달라고 해요.”

이틀 후 오전 열한시 암튼 그 긴 예비 신자의 종지부를 찍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렇게 ‘가타리나’라는 세례명을 얻은 것이 성당에 다니기 시작해서 26년째 되던 해 성모 성월이었다.

언젠가 내 신앙 고백을 들은 한 신부님께서 “그 정도면 예비신자 생활 긴 것으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하겠다.”라고 우스개 말씀을 하셨는데, 정말 긴 시간의 갈등에서 얻은 승리의 순간이었다.

■ 알아내지 못한 죄도 용서해 주소서

“당신, 고해성사 보는 것 무섭다고 했으니까 죄짓지 않고 살면 돼.”

세례 받고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겁을 주려고 하는지 놀리기 위해서 하는 말인지 모르지만 이 말을 들으며 나는 지난 날 세례를 받았으면 죄를 짓지 않고 살아야 한다고 억지 부린 오만을 부끄러워 하게 되었다. 오만투성이였다. 이마에 성수를 바르지 않고 원죄를 씻지도 않고 다시 태어난 이름을 받지도 않고 “나는 천주교 신자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그 오만은 너무나 큰 무지에서 온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오만은 계속되어 남편이 미워질 때나 남편의 부아를 돋우고 싶을 때면 “나 성당에 안 갈 거야.” 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곤 했다.

세례를 받고 얼마 동안은 정말 고해성사가 두려워서 죄를 짓지 않고 살아보려고 노력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고 나도 곧 나의 죄를 고하게 되었다. 첫 고해성사를 할 때는 떨리고 말이 잘 나오지 않아 제대로 죄를 고백하지도 못하고 나왔는데도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웃음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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왔다. 그 웃음은 죄를 고백하고 그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는 성사가 있다는 것이 우리 인간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며 마음의 평화를 주는지를 비로소 알게 된 것에서 나온 기쁨의 웃음이었다. 세례를 받은 지 사반세기가 된 지금도 고해성사를 볼 때면 떨려서 말이 잘 나오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죄마저 잊을 때가 있다. 그래서 나는 고해성사를 할 때 좋아하는 말이 있다.

“이 밖에 알아내지 못하는 죄도 모두 용서하여 주십시오.” 하는 말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죄보다 자신이 미처 느끼지도 생각지도 못하는 가운데 지은 죄도 잊어버린 경우가 많다. 그 알아내지 못한 죄까지 사해 주시는 은총, 그래서 고해성사를 하고 나면 마음이 깨끗해지는 것 같고 그 순간만은 나 자신이 착한 사람이 된 듯해서 기쁘고 평화로워진다.

■ 분도에게서 받은 가장 큰 선물

미사 시간은 축복의 시간이다. 성당은 평화의 전당이다. 언제나 성당에 가면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해진다. 가끔은 내 믿음이 부족하고 충실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지 못하고 있음 때문에 주님 앞에 나서기가 부끄러워 숨고 싶을 때도 있지만 나는 천주교 신자로 살아간다는 것을 큰 축복으로 여기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만약 내가 주님을 믿지 않았다면 어쩔 뻔했나?’상상을 하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남편이 미워질 때 ‘성당에 안 나갈까보다.’ 하던 생각은 잠시 시간이 흐를수록 남편으로 해서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가 되어 마음의 평화를 얻었음이라 여겨 남편 분도가 고마워서 그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더욱 깊어져 갔다. 결혼에 대한 기대도 컸고 남편에게 바라는 것도 많았지만 생각과 달리 결혼 생활은 너무나 소박한 삶으로 이어졌다. ‘정말 꿈도 크고 야무졌었는데…….’ 회한에 젖기도 하고 현실적으로 부족한 게 많은 삶을 살면서 갈등도 많았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고 다시 생각해 보니 축복 받은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감사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보니 모든 것에 감사함을 새록새록 느끼게 되었다.

남편이 자신의 부족함으로 아내에게 해 주고 싶은 것 못 해 주고 고생시켜 미안하다고 말할 때면 나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이 한마디로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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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예비 신자로 떠돌던 나를 다잡아 가타리나라는 세례명을 선물했다. 그 선물은 어느 누구도 주지 못한 큰 선물이다. 설사 당신에게 어떤 부족함이 있고 잘못이 있다 해도 나를 온전한 천주교 신자로 만들어 마음의 평화를 얻게 해 준 그 하나만으로도 다 상쇄하고도 남는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받았던 여러 선물 가운데 남편 분도로부터 받은 사랑과 신앙의 선물을 가장 값지고 소중하게 생각하며 나를 가톨릭 신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준 것을 고마워하고 있다.

■ 다시 주님과 분도에게 감사하며

이 글의 원고를 처음 청탁 받았던 2000년 2월, 그때 나는 살얼음 위를 걷는 심정으로 마음 졸이며 오직 한 가지만을 위해 정성을 다하고 있었다. 건강하다고 생각한 남편 분도가 폐암 말기라며 길어야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아 나는 그 사실을 수용할 수가 없어서 ‘두고 보아라. 그 3개월을 넘기고 회복하고 말 것이다.’며 이를 악다물고 안간힘을 썼으며 다행스럽게도 그 3개월의 고비를 지나 회복 기미를 보이던 때였다.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고 생각할 수도 없었다.

내가 원고를 쓰기로 결심한 것은 ‘환자가 기분이 좋으면 회복이 빠르다.’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투병중인 그를 좀 기쁘게 해 줄까하여 궁리해 보았지만 특별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나에게 신앙을 갖게 해 준 그를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사랑하고 있음을 평소에는 제대로 표현하지도 못했는데 이번 기회에 글을 통해 진솔하고 확실하게 고백한다면 조금은 기뻐해 줄 것도 같았다.

수술 후에는 책과 신문도 보려고도 하지 않고, 텔레비전도 보기 싫어하면서 무슨 생각을 그리도 하는지. 내가 우스갯소리로 “철학 좀 그만 하세요.” 부탁을 해도 생각하는 사람의 자세 그대로였다.

그래서 원고를 읽어 줄지도 의문이었다. 그런데 “한번 읽어봐 달라.”고 내 민 원고의 제목이 <고마워요. 분도씨>여서인지 순순히 읽어 주었다. 그러고는 한 마디 “솔직하게 썼군.”했을 뿐 그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이 글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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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얼마나 기쁘게 했는지, 아니면 아무런 기쁨도 주지 못했는지 물어보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이 글을 쓴 내 노력과 바람도 헛되이 이 글을 읽고 난 후 3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하늘나라로 가버렸다.

‘사랑하는 가타리나! 내가 준 선물이 있으니 내가 곁에 없어도 힘들어하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며 항상 기도하고 씩씩하게 아름답게 살다가 와라.’

그가 가고 없는 날들, 정말 신앙이 없었다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미사 시간에는 물론, 길을 가다가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문득문득 분도에 대한 그리움이 차오를 때면 나 가타리나는 ‘가톨릭 신자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며 또 주님께 감사 기도로 나 지신을 추스른다.

■ 전옥주(가타리나)

0 1939년 경남 의령 출생

0 서라벌예대 연극영화과 졸

0 1962년 희곡 <운명을 사랑하라>를 추천 받아 등단

0 희곡 작가로 한국 문학상, 한국희곡 문학상 외

0 저서

낮 공원 산책, 아가야 청산가자. 꿈 지우기. 영혼의 소리.

하나 되기 위하여 우리는. 꽁보리밥과 풀빵 등 다수

◉ 최인호 - 어머니가 가르쳐준 노래

■ 사랑하는 벗이여

사랑하는 벗이여.

저는 오늘 그대에게 최근에 있었던 제 일상생활에 관한 일들을 고백하려 합니다. 저는 두고두고 이 사실을 가슴 속에 묻고 있다가 때가 되면 입을 열어 이 편지를 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이 사실을 가슴에 묻고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제 가슴은 부풀어 오르는 기쁨과 자랑하고 싶은 설렘으로, 수줍은 새색시 같이 눈을 내리 깔고 시치미를 뗄 수만은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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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선 그대에게 편지를 써서 이 사실을 고백하려 합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저는 지난 6월 7일 서울 서초동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제 본명(세례명)은 ‘베드로’. 언제부터인가 세례를 받을 때면 제 본명으로 사용하리라 미리 예비하고 있던 이름이었습니다. 그것은 특별히 ‘베드로’라는 분이 좋아서 혹은 남달리 그분에 관해 각별한 애정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돌아가신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대세(代洗)를 받으실 때 본명으로 삼으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돌아가신 아버님이 베드로 1세 였다면 저는 아버님의 뒤를 이어 베드로 2세가 된 것입니다.

우선 그대는 제 이 고백을 들으시고 무척이나 놀라셨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아아, 그가 마침내 인간으로써 약해졌구나. 아아, 그가 마침내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였구나. 아아, 그가 마침내 나이 마흔을 넘기더니 어쩔 수 없이 하느님을 찾아갔구나.’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벗, 그대는 제가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을 술이 약해 그만 버티지 못하고 집으로 도망쳐버린 공처가로 비유하여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아직 술이 많이 있고 시간도 많이 남아 있는데 말입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아직 제가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겠지만 그대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옳지 않습니다. 저 역시 그대와 똑같이 술에 약해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놀리곤 하였으니까요.

“자아식, 술에 약한 공처가, 조무래기, 겁쟁이 같은 녀석.”

저는 이제 천주교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대가 여전히 이상하게 생각하는 천주교 신자가 되어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고 밥 먹을 때 성호를 긋고, 말할 때마다 걸핏하면 하느님과 예수님과 회개와 부활 같은, 성경의 용어들을 즐겨 말하는 그런 신자가 된 것입니다.

저는 이제 자랑스럽게 그대에게 말합니다. 이는 자랑이 아닙니다. 참으로 슬픈 죄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그대는 제 말을 믿으셔도 좋습니다. 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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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저보다 더 많은 쾌락을 누렸을 리는 없습니다. 이 역시 자랑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알게 됨으로써 죽어버린 제 육체의 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제 말을 믿으셔도 됩니다.

그대가 아무리 유명해도 저보다 많이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릴 리가 없고, 그대가 아무리 건강해도 저보다는 강하지는 못하였다고 자부 합니다. 그러므로 그대와 같이 수많은 죄와 쾌락과 욕망에 불타고 있었던 제 말을 일단 믿으셔도 됩니다.

그러므로 저는 압니다. 사랑하는 벗, 그대가 얼마나 고독하고 슬프고 고통스럽고 쓸쓸한지 제가 그대의 그 고독을 압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저는 이제 그대가 말하는 이른바 ‘예수쟁이’가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우선 그대에게 전해 드리고 싶어서 이 편지를 그대에게 씁니다.

저는 우선 제가 천주교 신자가 되었고, 제 집의 작은 공간에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고상(苦像)과, 보면 볼수록 아름답고 품에 안기고 싶은 마리아상을 모셨으며, 이따금 그 앞에 두 손 모으고 무릎 꿇고 ‘묵주기도’를 바치는 신자가 되었음을 전해드리고 싶어서 이 편지를 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이여.

먼 후일 저는 그대를 위해 아주 긴 편지를 쓰겠습니다. 그때는 이 편지처럼 문안 인사의 편지만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때까지 사랑하는 벗이여.

안녕히 계십시오. 제 편지를 받으신 그대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임하게 되시기를 간구합니다. 최 베드로 올림 <87. 8>

■ 영원하신 어머니여

어머니. 당신을 무어라고 다른 말로 부를 수 없어 그냥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나를 낳아서 기르신 그 인연으로 인하여 당신은 어머니기 되시고 저는 어머니의 아들이 되었나이다.

어머니.

그리운 어머니, 그간 안녕하셨는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도 이제 두 달이 지나 석 달이 다 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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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년 10월 31일이었던가요, KBS팀과 <잃어버린 왕국> 다큐멘터리 취재차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 11월 2일 저녁, 호텔에서 나를 찾는 아내의 전화가 있다고 호텔보이가 말하였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전화를 받자마자 아내가 내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오늘 오후 2시쯤 돌아가셨어요. 놀라지 마세요.”

아내는 나를 위로 하려 하였지만 어머니, 나는 놀라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딘가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멍한 느낌이었습니다.

죽는 것이 무섭구나, 얘야. 어머니는 늘 그것이 걱정이셨지만 인제 보니 육신 떠난 기쁨이 얼마나 크고 좋은 세상이 어머님 앞에 있음에 뒤늦게 놀라우시지요. 어머니.

일본으로 떠나기 이틀 전 어머니를 찾아뵈었을 때 어머니께서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어머니가 내 곁에서 요즈음 늘 함께 주무신다.”

나는 그때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뜻을 압니다. 그리고 외로운 어머니와 말동무해 주시면서 함께 주무셔 주었던 그분이 누군지 잘 압니다.

즉시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니 고맙게도 어머니의 시신이 청담동 성당 영안실에 누워계셨습니다. 어머니의 영전 앞에 이렇게 글씨가 쓰여 있었습니다.

‘성도 손 안나.’

그렇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내 어머니가 아니라 성도 손 안나였습니다. ‘복녀’라는 통속적인 이름으로 이 세상에 오신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 손 안나 라는 이름으로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 가셨습니다. 어머니의 이름 앞에 Tm인 성도(聖徒)란 그 명칭이 너무 좋아서, 나는 슬프면서도 초등학교도 못 나온 내 어머니가 너무나 자랑스러워서 가슴이 벅차서 눈물도 나오지 아니하였나이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기도하지 않으셨습니까.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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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어머니, 어머니는 비록 배운 것이 없어 똑똑하진 못하였고 알지도 못하였지만, 돌아가실 때 ‘성도’의 이름을 얻으셨으니 어머니의 생이야말로 축복받은 삶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시신을 보았나이다. 내가 언제나 좋아하던, 어머니의 작은 키에 어울리지도 않는 두툼한 손을 보았나이다. 제가 어머니의 손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아시지요. 키 150센티미터도 못 되는 어머니의 손은 여자의 손이 아니라 거인의 손이었습니다. 두툼한 빵과 같았나이다. 평생을 자식을 위해서 노동하시던 노동자의 손이셨나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그 흔한 금반지 하나도 끼우지 않으셨던 희생의 손이셨나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그 손톱에 봉숭아물조차 들이지 아니하던 순교의 손이셨나이다.

벌거벗은 어머니의 육체.

팔십 먹은 어머니의 육체. 걷지 못하던 그 다리. 흰 천 사이로 삐죽이 나타나던 두 발……. 그 모습은 평생을 두고 해진 곳을 기우고, 떨어진 곳을 메워 쓰고 낡은 행주와 같은 육신 이셨나이다.

마치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란 소설 첫 부분에 나오는 평생 고기를 낚는 어부로 살아왔던 노인의 배에 걸린 찢어진 돛과 같이 낡고 기우고 해지고 얼룩진 돛대와도 같아 보였나이다. 때로는 풍랑도 만나셨겠지요.

때로는 좌초도 하셨겠지요, 어머니.

그러나 어머니. 참으로 무사히 어머니의 배는 항구에 닿았으며 어머니의 영혼은 태어난 곳으로 가셨나이다.

어머니가 관에 들어가실 때 어머니의 손에 우리 대부 스테파노가 준 묵주를 다신 감아드리고 어머니의 묵주는 제가 대신 가졌나이다.

어머니가 주신 묵주를 들여다보면 마리아 상이 얼마나 많이 닳았는지, 그래서 어머니가 얼마나 기도를 열심히 하셨는지 나는 정말 놀라곤 합니다.

어머니.

어머니의 묵주를 제가 가졌어요.

어머니의 머리맡을 지키던 마리아 상도, 십자고상도 제가 가졌어요.

어머니가 이제 돌아가셨으니 언제나 제가 원할 때 저와 함께 계실 것이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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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겠습니까. 함께 기도를 드릴 때마다 어머니는 늘 이렇게 제게 말씀 하셨지요.

“고맙구나, 애 아빠야.”

성도 손 안나.

이제 당신은 어머니가 아닙니다. 귀양살이 하는 이 생애만큼만 내 어머니가 되셨다가 거룩한 여인이 되어 떠나가신 손 안나님. 당신은 참으로 위대하셨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부르던 그 정다운 이름으로, 당신 품에 안겨 젖을 빨던 어린아이의 어리광으로 부르오니 ‘엄마, 안녕히 가세요. 언젠가는 또다시 만나겠지요.’ 아들 베드로 올림 (88. 2)

■ 자식을 믿으세요

40년 가까이 미국에서 살던 둘째 누이가 우리나라에 돌아와 함께 살고 있는지가 벌써 일 년이 넘는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여의도에서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유학갔던 둘째 누이는 그곳에서 결혼하고 자식들을 세 명씩이나 낳고 완전히 미국 시민이 다 되었다가 우연찮게 매형이 우리나라에 직장을 얻음으로써 재(再)이민하여 같은 서울에서 벌써 일 년 이 상 함께 지내고 있다.

그 누이가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요즈음 들어 가끔 어머니 생각이 난다. 아들딸 셋을 키우는 것도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는데 도대체 어머니가 어떤 가정교육의 방법으로 우리들 여섯을, 남편도 없이 혼자의 몸으로 별로 비뚤어진 아이들 없이 무사히 다 키우셨는지 무슨 비법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간혹 생각해 보곤 한다.”

요즈음 나도 누이처럼 어머니를 떠올릴 때가 많이 있다. 벌써 돌아가신지 2년이 되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립기도 하지만 누이의 말처럼 도대체 어머니가 무슨 방법으로 우리들 여섯을, 훌륭하게는 아니지만 별로 모난데 없이 비뚜로 키우지 않았던 그 비법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 보곤 한다.

세상이 많이 바뀌고 가엾은 내 딸 아이, 가엾은 내 아들 녀석을 보면서 나는 요즈음 매일같이 가슴이 아프다. 남의 자식을 보아도 가슴이 아프고, 자살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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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고등학생 기사를 보면 눈물이 난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죽어야만 우리들이 정신을 차릴 것인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죽어야만 우리들이 정신을 차릴 것인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병들어야 어른들인 우리들이 정신을 차리겠는가.

그럴 때면 나는 벽에 걸린 어머니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둘째 누이의 말처럼 어머니는 어떻게 우리 여섯을 키우셨는가. 초등학교밖네 못 나온 무식한 어머니는 요즘 어머니들처럼 가훈이나 가정교육의 철학도 가지지 못한 그저 그런 어머니였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시고 우리들 여섯 형제를 모두 대학교에 진학시켰다.

며칠 전 아들 녀석이 형편없이 시험을 못보고 등수가 훨씬 떨어진 성적표를 보여주자 나는 화가 나서 아들 녀석을 심하게 꾸짖었다. 내 입에서 나온 꾸중은 누구나의 집에서나 꼭 한 마디씩 나오는 그런 통속적인 꾸중이었을 것이다.

“이 자식아, 이 성적으로는 서울에 있는 대학도 못가고 저 멀리 지방 대학으로 유학을 갈 셈이냐. 정신 차려. 이 친구야.”

그 다음날 수덕사로 여행을 떠났었는데 그 여행길에서 나는 곰곰이 어머니에 대한 옛 기억들을 더듬어 보았다.

어머니께서는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성적표를 보자고 명령하신 적이 없었다. 우리 형제들 모두가 공부를 썩 잘하였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나 책상 속에 들어 있는 어머니의 도장을 우리 마음대로 성적표에 찍을 수 있었다. 몸이 아프면 어머니는 우리에게 학교에 가지 말라고 하였고 우리는 결석계를 우리가 써서 어머니의 도장을 마음대로 찍어서 선생님께 제출하곤 했다.

서울대 경제학과에 들어간 형님이 고등학교 3학년 때 기하인가 하는 수학과목에 20점을 맞은 적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교무실에 불려 다녀와서도 형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쉬엄쉬엄 하거라. 너무 애쓰지는 마라.”

어머니는 그저 중학교 입시를 앞둔 내게 점심마다 더운밥을 해 오실 뿐, 아무런 강요도 채근도 하지 않으셨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 형님은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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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같이 집에서 걸어서 5분이면 닿을 수 있는 형님의 뜨거운 도시락을 날라다 주곤 하였다.

대학교 1학년 때 나는 낙제를 하였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성적표를 받아들고 학점이 평균 미달이었으므로 학적과에 찾아갔더니 사무처 직원이 극히 사무적인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학생은 학점이 미달이어서 1학년을 다시 한 번 더 다녀야 합니다.”

대학교 1학년을 다시 한 번 다녀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가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 비싼 등록금을 내고 다시 한 번 1학년을 다니는 것이 참으로 염치없는 일이라고 느껴졌던 점이었다. 무엇보다 가장 미안하였던 것은 어머니에 대한 염치없음이었다.

그러나 이미 어쩔 수 없는 일, 집으로 맥없이 돌아와 어머니에게 “엄마 나 낙제했어. 대학교 1학년을 한 번 더 다녀야 한데. 미안해.”하고 이실직고하자 어머니는 지금 생각해도 이상하리만치 표정이 담담하셨다. 담담했을 뿐 아니라 소리내어 웃으셨던 것을 나는 지금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내가 낙제해서 1학년을 다시 다니게 되자 어머니는 만나는 친척들에게마다 이렇게 말하며 재미있어 하셨다.

“글쎄 저애가 대학교 1학년 때 낙제를 햇다우, 그래서 1학년을 두 번씩이나 다니고 있다우. 집안 족보에도 없는 자식이 생겼다우. 내 참. 호호호호.”

나는 둘째 누이가 궁금해 하였던, 초등학교밖에 못나온 어머니의 비범한 교육철학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던 것이었다. 그것은 자식에 대한 ‘믿음’이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라는 성경의 말씀처럼 어머니는 그냥 우리들을 믿으셨다.

그 믿음이 우리들을 키운 가정교육의 기본이었던 것이다. 종교에 있어서도 바위와 같은 믿음이 있을 때 순교는 탄생되며 신앙은 열매 맺는다.

그렇다.

두 아이에 대한 내 믿음은 어머니의 믿음을 당해내지 못한다. 자식들에 대한 아내와 나의 불신이 아이들을 괴롭히고 그들을 상처입히고 ldT다.

바라옵건대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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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의 중반 나이에도 철부지인 이 아들에게 ‘믿음’을 가르쳐 주십시오. 두 아이를 믿음 속에서 사랑하고 믿음속에서 이해하고 믿음 속에서 위로할 수 있도록 어머니, 내 곁에 항상 머물면서 다정히 속삭여 주세요. 그리운 어머니. (90. 7 )

■ 최인호(베드로) (1945~2013)

0 서울 생

0 1963년 고2 때 <벽구멍으로>가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0 1967년 군복무시절, 단편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0 현대문학상, 이상 문학상, 가톨릭 문학상, 불교 문학상 등 수상

0 소설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0 저서

타인의 방, 불새, 깊고 푸른 밤, 위대한 유산, 겨울 나그네,

잃어버린 왕국. 길 없는 길, 왕도의 비밀, 사랑아 나는 통곡한다.

해신, 유림, 상도 등.....

◉ 한수산 - 이제와 우리 죽을 때에

■ 부끄러운 내 믿음을 고백하며

문득 그때가 떠오른다. 몇 년 전 미국에서였다. 겨울비 내리던 날이었다. 미국 버클리 대학에 연구 교수로 1년을 머무를 때,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차를 타고 산호세에 있는 한인 성당에 다녀온 적이 있다.

한국인 신부를 모셔와 한국인들만이 모여 미사를 드리는 성당을 미국에서는 흔히 한인 성당이라고 부른다. 미국 와서 처음에는 왜 ‘우리끼리만의 교회’를 만들어야 하는 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이민을 왔거나 혹은 일정기간 미국에 머물다 가는 한국인들의 절박한 필요가 만들어 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얼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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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흩뿌리는 겨울비 속에 산호세 성당으로 향한 것은 미사 후의 특강 때문이었다. 교우들의 신앙에 관한 글을 모아 문집을 내는 산호세 성당의 편집팀이 나에게 미사가 끝난 후에 특강(?)을 부탁했던 것이다.

그곳의 주보 성인은 정하상 바오로 성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나가던 성당은 김대건 성인을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새크라멘토에 있는 성당은 정정혜 엘리사벳을 주보 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미사가 끝나고, 성당안 가득한 교우들에게 ‘나는 왜, 어떻게 가톨릭 신자가 되었는가’를 주제로 내 믿음을 고백하는 이야기를 나눴다.

“저는 제가 이 자리에 설 자격이 있는지, 그것조차 의문인 ‘불구의 신자’입니다. 아니, 신자 아닌 신자, 가톨릭 신앙의 장애자입니다. 저는 세례를 받은 지 10년이 넘는데도 아직 견진성사도 받지 않았고 교적도 없으며 본당도 없는 그런 신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사라고는 미사와 고해성사 밖에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신앙의 문턱도 몰랐던 어린 시절부터 어쩐 일인지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어떤 절대자의 존재를 의심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가톨릭에서 그 절대자, 그분을 찾았을 뿐입니다. 오늘 그분을 찾기 까지의 먼 길을 이야기하려는 것입니다. 미사라는 건 구경도 못해 본 사람이 혼인 성사를 치르며 결혼을 했고, 고난 가득했던 예비 신자 시절의 ‘3수’를 거쳐, 제대가 있는 성소가 아닌 백두산 천지가 내려다 보이는 모래 언덕에서 세례를 받고, 지금 ‘불구의 신자’로 절둑거리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려는 것입니다.”

■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아가며

교우이신 김형영 시인의 시에 <당신을 알고 나서, 내 평생은 지옥이었습니다>라는 내용의 짧은 시가 있다. 이따금 그 시를 떠올릴 때마다 나는 김형영 시인의 그 믿음의 진정성에 탄복하곤 한다.

나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어 즐겁기만 하고 기쁘기만 하다는 사람이 제일 부럽다. 그렇지 않은가.하느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나는 이 지상의 죄밖에는 몰랐을 것이다. 법이나 도덕률이 울타리를 친 그 안에서라면 나는 죄짓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운명처럼, 내가 좋아하는 어느 신부님이 잘 쓰시는 섭리라는 그 말처럼 나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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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고, 그분의 울타리 안에서 그분의 사람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의 내 삶은 한 걸음 한 걸음이, 하루하루가 죄의 나날이 되었다. 하느님 앞에서 내 죄는 켜를 이루고, 색 바랜 믿음은 낡고 헤어져 너덜거린다. 그러니 어떻게 당신을 알고 나서의 내 삶이 기쁘다고 하겠는가. 당신을 알고부터의 내 평생은 지옥이라고 몰래몰래 중얼거릴 수밖에.

결혼식을 앞두고였다. 아내는 자신이 영세를 한 춘천의 소양로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으며 했다. 그때까지 나는 성당이라는 곳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안에 들어가 분 적도 없었는데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쉽게 그렇게 하자고 했다.

아내가 세례성사를 받은 누렇게 색 바랜 증서를 내가 아직도 가지고 잇는데 그 세례기념증서에 보면 ‘다리아’라는 본명으로 17세 되던 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소양로 성당에서 강 디오니시오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결혼을 앞두고 찾아간 소양로 성당에서 신부님은 내게 신자가 될 것인가 물었다. 그때 나는 마치 혁명을 하러 떠나는 사나이처럼 엄숙하게 참한 신자가 될 것을 약속 드렸다. 그러나 나는 그 후 몇 년을 신부님과의 이 약속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이따금 마음의 빚은 남아 있어서였는지 ‘아, 성당에 나가야 하는데…….’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런 시간들이 흘러가는 사이 우리는 딸을 낳았고, 번거로움에 지쳐 있던 서울에서의 생활을 버리고 좀 더 외로워야겠다는 생각, 바다를 생활 속에서 껴안고 싶다는 생각, 그런 것들을 뒤적거리며 세 식구는 제주로 떠났다.

결국은 3년 3개월을 살게 된 제주로의 이주였다.

■ 인간에 대한 사랑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예비자 교리를 시작한 것이 1981년, 제주 중앙성당에서 였다. 주일미사와 함께 십여명의 예비자들이 수요일이면 사제관에 모여 신부님으로부터 교리 공부를 했다. 두 달 남짓 교리 공부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글을 쓰기 위해 혼자 넘어가 있던 서귀포의 한라산 중턱 목장에서 서울의 보안사령부로 압송되었다. ‘한수산 필화사건’ 이라고 이야기 되는 고문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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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며칠간의 고문 끝에 만들어낸, 한글로 써서 내미는 죄목은 국가 원수 모독에 군을 비방함으로써 자행한 이적 행위와 그리고 사회부정시였다.

전기 고문을 받아 가짓빛 보라색으로 타들어 간 몸이 되어 나는 가족에게 돌아갔다. 사랑, 헌신, 자유, 희생……그렇게 표현되는 추상명사는 나에게 사라지고 없었다.

그 고문 과정에서 ‘적나라한 인류의 삶에 교회는 진정으로 적나라하게 있었는가.’ 에서부터 ‘이 인간의 불의에 언제까지 하느님은 침묵하실 겁니까.’ 하는 물음과 맞서야 했다. 거기서 더 교회를 나간다거나 교리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하느님은 나를 부축하지 않으셨다. 힘든 시간들이 흘러갔다.

두 달이 지나서 다시 포구가 내려다보이는 목장의 그 집, 글을 쓰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고문으로 피멍이 든 내 가슴처럼 빈집에는 곰팡이가 뒤덮여 자라고 있었다. 고문의 가장 비열한 점은 그것이 인간성을 파괴시킨다는 데 있다. 사람에게는, 사람이기에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지켜야 하는 것들이 있다. 사랑, 가족, 일, 국가, 자유, 그리고 평화……이것들은 결국 그 무엇도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그래서 우리가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최소한의 사유의 그루터기들이다. 고문은 그것을 인간에게서 빼앗아 간다.

3주에 걸친 입원 생활이 끝나고 퇴원을 했지만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혼자 앉아 있자면 등 뒤에서 누군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은 불안한 정신 상태에 시달리며, 잠들어 있는 다섯 살의 딸아이와 아내를 바라보는 한밤에 느끼던 그 막막함 그리고 분노, 새벽 바닷가를 울부짖으며 헤매고, 젖은 모래 위에 앉아 고깃배가 포구로 들어오는 것을 바라보던 새벽의 그때 그 나에게, 아……예비 신자 교리란 도대체 무엇이었던가. 그것 또한 허위, 그것이었다. 거짓말하지 마. 저쪽도 파들거리며 살아 있는 이 땅 위의 세상살이야.

■ 혼란 속에 세례를 다시 포기하며

그렇게 내 첫 예비신자 시절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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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 회복을 위해 몸부림치지는 않았다. 그저 시간이 흘러가기만을 바랐다. 바닷가를 지나가다가 ‘나도 횟집 하나 차려서 먹고 살아야 하나.’ 생각했고. 비가 내리는 날이면 ‘제주는 비가 많이 오니까 세차장이나 해 볼까.’ 생각했다.

어린 딸아이와 함께 이호해수욕장 옆의 연못으로 가 새우깡을 던져주며 거기서 노닐고 있는 오리들을 보러 가던 일. 한라산 중턱의 천왕사에 올라가 하루를 보내다가 내려오는 길에 밤바다를 바라보던 일, 겨우 그런 것들이 자디잔 기쁨으로 남았다. 그래서 한동안 “아빠 우리 오리보러가요.”라는 딸 아이와 나 사이에 바닷가를 산책하러 가자는 기호가 되었다. 잠든 딸아이를 싣고 한라산을 내려오다가 바라보는 밤바다는 황홀했다. 차를 세우고 서서 불을 밝히고 떠 있는 오징어잡이 배들을 바라보며, 폐허같구나, 창조의 자궁 같구나 생각했었다. 그리고 살고 싶었다. 일어서서 살고 싶었다.

몇 년이 지난 후 어느 날 압구정동 성당을 찾았다. 어둑어둑한 성당 안에서 나는 최석호 신부님을 만나 뵈었고 신부님의 도움을 받아가며 그 주일부터 예비 신자로서 교리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미사후의 교리 공부가 끝나면 초등학생들과 함께 줄을 서서 출석표에 도장을 꼬박꼬박 받아가면서 참 열심이었다.

최석호 신부님을 찾아간 데는 이유가 있었다. 한때 최 신부님이 김수환 신부님을 모시고 명동 성당에서 일하던 때가 있었다.

어떤 약속이나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나에게는 다만 우연이었다. 사제관을 나와 저녁을 함께하고 다시 신부님 방으로 올라갔다가, 신부님 방에 들른 김수환 추기경님과 손을 잡을 기회가 있었는데 모두들 “당신 이제 그 손 며칠 동안 닦으면 안돼.” 하는 이야기를 하며 웃기도 했었다.

그날의 우연한 만남과 깊은 인상이 늘 그분을 떠올리게 했고, 몇 년 후 나를 압구정동 성당으로 그분을 찾아뵈러 가게 했던 것이다. 최 신부님은 주일 미사가 끝나면 바로 그 자리에서 전체 예비신자들을 위한 교리 강좌를 직접 하셨다. 그리고 수요일 저녁에는 성인 예비 신자들만의 교리반이 있었다. 사도신경을 외우던 그때가 떠오른다. 그 무렵 둘째 아이가 태어나 아직 어릴 때였다. 나는 아이를 잠재우며 사도신경을 외웠고, 로사리오를 되풀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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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안고 있는 내 팔, 이 세상에 태어나 내 팔이 한 일은 많으리라. 글도 썼으며, 누군가를 사랑으로 껴안기도 했으며, 돈을 세고, 걸레질도 했을 팔이었다. 꽃을 심기도 하고 때로는 나무를 베어내기도 했으리라. 그러나 어린 자식을 잠재우며 사도 신경을 외우는 일보다 더 거룩한 일을 해 본 기억이 없었다. 하느님께 감사했다. 이런 기쁨과 행복을 베풀어 주시다니. 그 속에서 세례를 받아야 할 날이 하루하루 다가오고 있었다. 이리고 이무렵 이해할 수는 있으나 스스로 납득할 수 없는 변화가 나에게 찾아왔다. 너무나 단순한, 그러나 그 단순함만큼이나 견고해서 쉽게 자유로울 수 없는 혼란이었다.

영세를 하고 세례명을 받으며……이제 하느님을 만난다. 그렇다면 이제까지의 나와 지금부터의 나는 달라야 했다. 그러나 나는 아무것도 달라져 있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내 영혼은 여전했다. 여전히 더럽고 낡고 허물 투성이였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는데 무엇으로 내가 그분 앞에 서겠다는 말인가. 그것을 가졌을 때와 가지지 않았을 때가 아무 차이가 없다면 무억 때문에 신앙이 필요하겠는가.

세례를 받을 날짜가 정해 졌을 때 나는 다시는 미사에도 예비 신자 교리반에도 나가지 않았다. 혼란을 안고 세례를 받을 수는 없지 않은가.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아서요. 제 어디에도 하느님이 와 계시지 않은데요.”그렇게 중얼거라며 영세를 하기로 한 그날 저녁 나는 밖에서 술을 마시며, 갈 길은 먼데 날이 저무는 사람처럼 하느님을 문득문득 생각했다. 끝 모를 저 깊은 연못하나에서 또 다른 저 깊은 연못까지, 그 사이에 내 삶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 가톨릭 3수 단기 과정을 밟으며

그리고 또 몇 년이 흘러갔다. 1989년 가을이었다. 도쿄에 살기 시작한지 1년이 되어 가던 9월 9일 아침 나는 나리타 공항에서 중국행 비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 여행에 동참한 것은 백두산이 아니라 여행 일정 속에 시안(西安)이 들어 있다는 데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시안이라니, 그곳은 실크로드가 시작되는 곳이었고, 진시황의 무덤이 있는 곳이었으며, 양귀비가 노닐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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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이 있고, 3천 년 전의 중국을 알려면 그곳으로 가라는 역사의 이끼 찬연힌 고도가 아닌가.

그러나 그때 나는 모르고 있었다. 백두산도 시안도 아닌 그 무엇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나를 감싸 안아 새롭게 태어나게 할 황금빛 햇살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내가 어찌 알 수 있었으랴. 베이징 공항에 내려서야 비로소 여행을 함께할 분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라자로 마을’의 이경재 신부님, 올리베따노 성베네딕도 수녀회의 김지상 레티치아 원장 수녀님과 양명숙 세레피나 수녀님, 그리고 각각 미국과 캐나다에 이민 가 계시던 신태민 선생님 부부와 유보영 선생님 부부, 그렇게 우리 모두는 아홉이었다. 다들 오래 신앙생활을 해 오신 신자들이었다.

“우리가 며칠 겪어 보면서, 한수산 씨를 세례를 받게 해서 교우를 만들자고 회의를 했어요. 그래서 이제 신부님한테 가서 한수산씨에게 세례를 주라고 압력(?)을 넣으려고 하는데, 혹시 본인이 그럴 의사가 없다거나 혹시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그걸 확인하고 싶어요.”

그때 내가 대답했다.

“저, 가톨릭 3수생입니다.”

독실한 70대 교우 분들의 강압에 못 이기셨던지 신부님은 나를 자신의 침대칸으로 불렀다. 나는 이제까지의 내 불량한 재수의 역사를 말씀드리면서, 무슨 배짱에서인지 “세례를 주신다면 받겠습니다.”하고 대답해 버렸다.

그렇게 해서 나의 ‘가톨릭 3수 단기 과정’은 열차 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장춘에서 옌지로 가는 밤 열차 침대칸 위에서의 기이한 교리 공부는 행복했다. 흔들리는 열차 침대에서 베네딕도 수녀원 원장 수녀님한테 교리를 배운 나는 참 복도 많은 가톨릭 3수생이 아니었을까.

예지로 가는 기차 안에서 시작된 교리 공부는 다시 백두산으로 가는 버스 안으로 이어졌다. 1989년의 백두산 가는 길은 비포장이어서 엉덩이가 깨질 것처럼 차가 들뛰어 이러다가 허리를 다치는 거나 아닌지 걱정tm러울 정도였다. 그 버스 안에서도 레테치아 수녀님은 “자 그럼 또 공부 좀 할래요?” 하며 불량 3수생을 가르치시길 즐거워 하셨다.

이 교리 공부는 중국에서 국내선을 타고 움직이는 비행기 안에서도,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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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로 가는 버스 안에서도 이어졌다. 상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수녀님이 나에게 교회력(敎會曆)에 대해 가르치시면서 노트에 적었던 교리 내용이며 도표를 나는 지금도 아주 귀한 내 믿음의 징검다리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천지가 내려다보이는 중국쪽 백두산 정상에서 얼음같이 차가운 백두산의 물이 내 이마를 태우는 듯 한 감동 속에서 이경재 신부님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 백두산 정상에서 새로 태어나며

이때는 백두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자동차 길의 포장 공사가 막바지를 맞고 있었다. 도로는 엉망이었다. 신부님은 나를 불러 수녀님과 자신이 탄 지프에 옮겨 타게 하시고, 묵주 기도를 드리며 올라가도록 했다. 그때 흔들리는 차안에서 레티치아 수녀님은 수첩을 찢어 성모송을 적어주셨다. 내가 처음으로 불러본 성모송은 백두산 툰드라 지대의 그 어느 이끼에 묻어 있을까.

차를 세우게 하고 수녀님들은 계곡으로 내려가 세례식에 쓸 물을 떠왔다. 날씨는 어찌 그리 푸르던지, 어느 새 준비하셨던 것일까. 신부님은 세례 예절의 긴 과정을 종이에 또박또박 적어서 내게 묻고, 대답하게 했다. 기름을 바르고, 이마에 물을 부어주셨다.

그때 그 물이 어찌나 뜨거웠던지 이마가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때 중국 여행의 모든 안내를 맡았던 창춘의 연구소 직원이 사진을 찍었는데, 사진 속의 내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가. 후에 사진을 보니 나는 잠든 아기처럼 어떤 사진 속의 얼굴 보다도 평화로운 모습으로 눈을 감고 있는 게 아닌가. 그리고 우리 모두는 울었다. 왜 그랬을까. 미사를 드리며 흐느끼기 시작한 우리들은 나중에는 어깨를 들썩이며 눈물을 흘렸다. 부인들은 자신의 얼굴과 남편의 얼굴을 오가며 손수건으로 눈을 닦아 내야 했다. 백두산에서 흘린 기쁨의 눈물들, 가슴 벅차서 부르고 또 부르던 성가들.

마지막으로 푸르게 남빛으로 빛나고 있는 천지를 내려다보고 나는 인사했다. 네 안에서 내가 지금 이토록 따뜻함을 너는 알리라. 재생과 속죄의 비늘을 달고 이제 내려가마. 잘 있어라. 내 삶의 물굽이에 함께해 준 너. 내 뒤에서부터 내 앞으로 흘러가고 있는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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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릿속은 씻은 듯이 가벼우면서도 몸은 탈진한 듯, 관절 마디마디가 끊어진 것같이 기운을 차릴 수 없는 몸으로 나는 백두산을 떠나는 버스에 올랐다. 늦은 오후였다.

길 가에는 드높이 자란 나무들이 도열하듯 늘어서 있었다. 그 검푸른 숲이 끝나고 나자. 희디흰 자작나무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산속의 청정한 햇빛 때문이었을까. 나무는 더 희게 바라보였다. 나는 갑자기 종이처럼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다 용서했다.

어디선가 말이 하나 다가왔다. 어디서 오는가. 다 용서했다. 그 말이 다가와 내 어깨에 내려앉았다. 흰 자작나무들이 점점 더 희게 변하면서 나무의 형태는 사라지고 다만 흰빛의 바다처럼 변해갔다. 다 용서했다. 그 말과 함께 나는 내 어깨에 와 얹히는 손을 느꼈다. 무게와 온기를……그리고 감촉을.

지나간 것들 그것까지도 다 사랑하여라. 아끼어라. 네가 부딪치고 있던 그 많은 것들을 다 용서했으니 이제 그렇게 돌아가면 된다. 내가 너와 함께 있지 않니. 아, 하고 나는 소리 없이 부르짖었다.

■ 때리면 소리가 나는 종이 되겠다고

그리고 밤이 왔다. 백두산을 내려온 버스는 어둠 속을 달렸다. 차 안의 불이 꺼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잠이 들었다. 나와 함께 버스 뒷자리에 앉아 내내 밖을 내다보고 있던 수녀님도 앞자리에서 몸을 꼬부리고 잠이 들어 있었다. 스웨터 차림의 수녀님이 추울 것 같아 나는 가방에서 파카를 꺼내 수녀님께 둘러드리고 뒷자리로 돌아왔다.

추석을 앞 둔 달이 떠올랐다. 드넓은 벌판위에 달빛이 내리고 그 광야의 끝에 하늘과 맞닿은 작은 봉우리들이 바라보였다. 어디에도 불 켜진 집이라든가 사람들이 살고 있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길옆으로는 스러져 가고 있는 마른 풀 더미들이 달빛에 비쳐 넘실거리듯 펼쳐져 있었다.

깍지를 껴 움켜쥐고 있던 손을 풀어 얼굴을 감싸며 나는 여전히 흙먼지가 날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떠오른 달이 이제는 드높이 솟아올라 참혹한 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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낌이 들 정도로 막막하게 대지를 비추고 있었다. 버스가 덜컹거리며 돌덩이 가득한 개울을 건너갔다. 말라붙은 개울 한복판을 겨우 흐르고 있는 물줄기가 달빛을 받아 기름처럼 빛났다. 나는 꿈처럼 중얼거렸다. 언젠가 저를 써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자면 저를 쓰실 수 있도록 되어 있어야 겠지요. 그렇게 살아가면 되겠지요. 그렇지만 그것 또한 당신의 뜻이지요. 이제 그걸 안답니다. 당신의 뜻이라는 걸.

훗날 두고두고 생각했다. 왜 그때 갑자기 ‘쓰임’이라는 말이 그렇게 많이 떠올랐을까. 그것은 말을 바꾸면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 살겠습니다 하는 다른 표현은 아니었을까. 모든 것을 당신께 맡기고, 당신의 사람으로 살겠습니다 하는.

영세를 하고 나서 며칠 동안의 노트에는 ‘당신께서 때리면 소리가 나는 종이 되겠습니다. 당신이 칼이 되어, 베어야 할 때는 쓸 수 있게 날을 세우고 살겠습니다.’ 하는 말들이 적혀 있다. 훗날 누군가의 기도에서 비슷한 말을 읽으며 오묘한 신비 같은 것을 느꼈다. 다들 서로 닮은 말을 껴안고 그렇게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있구나 하는. 말들이 적혀 있다. 훗날 누군가의 기도에서 비슷한 말을 읽으며 오묘한 신비 같은 것을 느꼈다. 다들 서로 닮은 말을 껴안고 그렇게 하느님께로 나아가고 있구나 하는.

■ 그분께서 내 손을 잡고 계심을 느끼며

이 여행에는 그때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나를 제외한 다른 분들은 매일 새벽 신부님 방에 모여 미사를 드리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아침을 먹기 위해 호텔 식당에 서 만나서야 그날의 인사를 나누던 그분들은 비신자인 나만을 빼놓고 이미 미사를 드리고 식당으로 내려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여행이 품고 있던 아주 중요한 의미였다. 이것은 백두산 관광 여행이 아니었다. 백두산이나 시안 여행은 곁가지 였다.

중국이 공산화 되면서 수녀원이 청산되고 한국인 수녀들은 중국을 떠나 한국으로 오게 되지만 이 환란 중에 그곳을 떠나지 않고 남은 수녀님이 한 분 계셨다. 한국 전쟁을 겪으며 수도회는 더 남하하여 부산에 자리를 잡게 되지만 중국 땅에 남아 있는 수녀님과는 연락이 끊겼다. 생사조차 확인 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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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세월 30여 년이 흐른 후 여러 국제기구의 도움을 받아가며 수소문한 끝에 그 수녀님이 아직도 중국에 남아 하느님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확인 되었다. 이 여행길은 바로 그 민들레 홀씨처럼 떨어져 계시던 수녀님을 장상 수녀께서 만나러 오는 길이었던 것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쓸 자리가 또 있을 것 같지 않아 하나 더 적어두려 한다. 이때 동행하셨던 또 한 분의 수녀님은 ‘성 나자로 마을’ 에 파견되어 평생을 나환우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계신 수녀님이셨다. 아침에 인사를 하거나 가방을 내려드리기 위해 방에 들러보면, 도대체 이분들은 이 방을 쓰시긴 쓰신 거야 하는 말이 나오게 아무것도 흐트러진 것이 없었다. 침대 커버가 씌워진 침대는 앉은 흔적조차 없이 정리되어 있었고, 탁자 위의 컵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정갈했다. 수녀님들이 분명 물도 한 모금 안 마시고, 침대에서 주무시지도 않고 바닥에서 잔 게 틀림없어 하고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평생을 그렇게 사셨으리라. 그 하나조차도 감동이었고 가르침이었다.

■ 하느님과의 약속을 따라 길을 떠나며

가톨릭과의 만남이 나에게 준 것은 무엇인가. 그때 내 노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주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기도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이보다 더한 평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주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우리 모두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났음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원죄를 입고 태어나 사랑으로 그것을 보속해 가야 하는 나날, 그 깊은 곳에서 깊은 곳까지가 제가 허락받은 이 땅 위의 나날임을 저는 이제 압니다.”

그리고 이경재 신부님이 계셨다. 모금 활동을 위해 해외 나들이를 하느라 도쿄에 들르실 때면 언제나 나를 불러 주셨다. 때로는 비즈니스 호텔의 좁은 방에서 나 하나를 앉혀 놓고 미사를 드려 주시기도 했고, 수도원에 머무실 때는 그 수도원으로 우리 부부를 불러 미사를 드려 주시던 신부님. 우연히 도쿄의 찻집에 함께 앉아 있다가 오늘이 아내의 생일이라는 말에 슬그머니 일어나 밖으로 나가시더니, 어디 가서 준비 했는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아내에게 선물하던 신부님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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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도쿄에 들르셨다가 여행 가방에서 종이로 싼 십자가를 내게 건네 주시며 말씀 하셨다.

“한수산 씨, 집에 십자가는 있어? 이거 내가 라자로 마을에 걸었던 걸 가져 왔으니 기도 많이 해요.”

그렇게 가슴 뭉클해 하며 받은 십자가가 지금도 내 서재의 한가운데 걸려 있다.

■ 한수산 (요한 크리소스토모)

0 1946년 강원도 인제

0 경희대 영문과

0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사월의 끝> 당선

0 197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해빙기의 아침> 당선

0 유려한 문체가 특징

0 오늘의 작가상, 녹원 문학상, 현대 문학상

0 저서

부초, 먼 그날 같은 오늘, 욕망의 거리, 모래위의 집. 타인의 얼굴.

밤기차.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는다. 까마귀.

꿈꾸는 일에는 늦음이 없다. 사랑을 찾아 먼 길을 떠났다. 외 다수

2019.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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