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7. 2. 16:05ㆍ독서후기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2)
■ 하완 지음
◉ 3부 먹고 사는 게 뭐라고
마음껏 꿈을 펼치는 게 가능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별한 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꿔본다.
■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은 뭘까
나의 첫 직업은 입시 미술 학원 강사였다. 대학을 다닐 때 학비를 벌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는데 대학 졸업 때까지 이어졌다. 당시 나는 굉장히 고집스럽게 ‘내 인생에 대출은 없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당연히 학자금 대출은 받지 않았고, 집에서 대학 등록금을 내줄 형편이 못 됐기에 돈을 벌어야만 했다.
다행히 미술학원 강사 일은 수입이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대학 4년 동안 대출 없이 내 힘으로 학교에 다닐 수 있었다.
강사 일을 하면서 나는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내가 맡은 학원 학생들을 관리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학교보다는 늘 학원 일이 먼저였다. 휴학을 한 번 하고 군대를 다녀 온 후 3학년 쯤 됐을 땐 이미 과에서 나를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전공 수업도 졸업에 필요한 학점만 들었으니 디자인과를 나왔어도 디자인을 잘 모른다. 학교에 다니기 위해 일을 하는데 정작 학교 생활을 잘 못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몇 년간 이어지다보니 나는 강사 일이 정말 싫어졌다.
미술 학원 강사 일이 싫었던 이유는 또 있었다. 학생들을 계속 다그쳐야 하는 일이 나에겐 스트레스였다. 그래서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술학원을 그만뒀다. 미술학원에 남아 계속 그 일을 할 수도 있었지만 싫었다. 다른 일을 하고 싶었다. 더 재미있고 의미 있고 가슴이 뛰는 일 말이다. 그런데 그게 뭔지는 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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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그 지경으로 다녔으니 취업 준비나 미래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을 리 없었다.20대의 대부분을 대학 졸업장 사는 데 써버린 셈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처음부터 배움을 원했던 게 아니라 대학 졸업장을 원했던 것 같다. 한심하게도 나는 그런 인간이었다.
1년 정도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 기간은 점점 길어져 3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버렸다. 나는 그 시간을 내 인생의 ‘공백기’라고 부른다. 무슨 연예인도 아닌데 공백기라니, 그것도 3년씩이나. 나는 3년 동안 돈 한 푼 벌지 않고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일이 뭘지 고민했다. 그래서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았냐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찾지 못했다. 3년의 공백기 동안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찾진 못했지만 몇 가지 깨달은 것이 있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사랑’과 참 많이 닮았다는 것이다.
‘이제부터 진짜 사랑을 찾을 거야.’라며 찾아 나선다고 사랑이 찾아지는 게 아니듯, 진짜 하고 싶은 일도 찾는다고 찾아지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찾는’게 아니라 ‘찾아오는’것이었다.
너무 괴롭지만 않으면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
그게 내가 3년의 긴 터널 끝에 내린 결론이었다. 이 간단한 답을 얻으려고 참 오래도 걸렸다. 미련하게도…….
내 미래는 어두웠고 내가 아무 쓸모도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서울역 노숙자들을 볼 때마다 미래의 내 모습이 아닐까 불안에 떨었다. 급기야 ‘나 하나쯤 없어져도 세상은 아무 문제없이 잘 돌아 가겠지?’라는 위험한 생각도 했다.
그 짓을 3년이나 했다. 그리고 어느 날 지겨워졌다. 고민하고 걱정하는 게 지겨웠다. 지긋지긋해서 더 이상 고민할 수도, 걱정할 수도 없었다. 마치 인간에겐 평생 할 고민과 걱정의 양이 정해져 있는 것처럼, 3년 동안 그것을 다써버린 나는 걱정 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그 무렵 연락이 뜸하던 아는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회사 한 번 다녀볼 생각 없어? 편집 디자인 회사인데, 일은 배워가며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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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 되고 돈은 많이 주지 못하지만 힘들진 않을 거야.”
회사에 다니고 얼마 지나지 않아한 출판사로부터 전화가 왔다.
“저 인터넷에 올리신 그림책 보고 연락드리는데요…….”
그렇게 나는 그림책을 내고 일러스트 일도 시작하게 됐다. 내가 노력해서 된 것들은 아니다. 고맙게도 그냥 운이 그렇게 흘러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공백기는 그렇게 끝났다. 그리고 회사원과 그림 작가의 투잡 생활이 시작됐다. 그 두 가지 일은 나에게 모두 좋은 일이었다.
지금은 회사를 그만 두었다. 두 가지 일을 하면서 이도저도 아닌 것보단 한 가지 일에 집중하자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밥벌이로써의 일도 좋지만 조금 더 재미있는 일을 해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 다시 병이 도진 것이다.
대단하진 않아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나가다 보면 어디로 가야 할지 보이지 않을까? 이런 일은 싫다든지, 이런 쪽으로 더 해 보고 싶다든지, 그럴 때마다 선택하며 나아가면 된다.
이왕이면 뜨거운 사랑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꼭 뜨겁지 않아도 강렬하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각자의 방식대로 사랑(일)하면 되는 거니까.
■ 퇴사는 어려워
관두느냐, 남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아무리 선택을 잘 하는 사람일지라도 퇴사문제 앞에선 햄릿처럼 결정 장애가 온다. 나 역시 한 번에 회사를 관두고 나온 것처럼 보이지만 알게 모르게 오랫동안 고민했다. 역시 퇴사는 쉽지 않다.
사실 웃긴 이야기지만 입시할 순간부터 퇴사 고민은 시작된다. 아무리 좋은 회사라도 마찬가지다. 이쯤 되면 인간은 회사와 잘 안 맞는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안 맞아도 회사에 나간다. 그놈의 돈 때문에 회사에 다니지 않고도 월급만큼의 수입이 생기는 대책이 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당장 사표를 낼 것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 사귀던 연인과 이별하기 전에 반드시 다음 만날 대상을 확실히 해두고서 이별하는 사람, 이쪽이랑 이별하고 바로 이어서 준비해 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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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이랑 연애를 시작한다. 만약 다음 상대가 정해지지 않으면 지금 연인이 싫어 죽겠어도 이별하지 않는다. 이걸 영리하다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비겁하다고 해야 하는지…….
그 어려운 걸 내가 해냈다. 그다지 모험가 스타일도 아닌 내가. 어차피 고민한다고 대책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너무 오래 고민하다 보니 지쳤다고나 할까. 퇴사하지 않고는 끝나지 않을 테니 고민을 끝내기 위해 퇴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대책은 없다.
아직도 내가 잘한 건지 잘못한 건지 모르겠다. 결론을 내기엔 아직 이르다 좀 더 가봐야 알 것 갔다. 몇 년이 흘러 그때 퇴사하지 말 걸 후회 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이미 떠났고 돌아갈 곳은 없다. 이럴 땐 나이가 들어서 좋다. 40대에 취직하는 게 쉽진 않을 테니 어떻게든 이 선택에서 대책을 잘 세우는 수밖에…….
한 가지 분명한 건, 영원히 회사에 다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모두 퇴사를 한다. 나는 좀 빨리 그만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가볍다.
■ 삶의 균형
균형, 한쪽으로 기울거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고른 상태, 나는 이 단어를 좋아한다. 아니, 동경한다. 늘 균형 잡힌 삶을 동경했다. 하지만 균형 잡힌 삶을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회사원의 삶도 그렇겠지만, 프리랜서의 삶도 균형을 잃을 때가 많다.
예전에 어디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동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은 그와 정반대의 사람일 거라고.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동경하는 것이라고. 같은 맥락에서 균형 잡힌 삶을 동경한다는 건 내가 균형 잡힌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의미한다.
사주팔자를 잘 믿지 않지만, 언젠가 내 사주에 불(火)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불로만 가득하다고 했다. 너무 뜨거워서 항상 갈증을 느끼고 자신을 못살게 괴롭히는 거란다. 그 이야기가 묘하게 위로가 됐다. 아, 나의 마음은 이렇게 치우쳤구나. 내가 그토록 괴로웠던 이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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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였을 수도 있겠구나 신기하게도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괴로움이 줄었다. 자신의 치우침을 안다는 건 균형을 잡는 첫걸음이다.
우리의 삶은 시시각각 변하는 파도와 같다. 파도 위에서 넘어지지 않고 균형을 잘 잡으려면 꼿꼿해선 안 된다. 유연해야 한다. 힘을 빼고 이리저리 휘둘릴 각오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파도에 맞춰 무게 중심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쉴 새 없이 옮겨야 넘어지지 않는다. 그 모습을 멀리서 보면 마치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처럼 보여도 자세히 보면 열심히 균형을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지금의 내 삶이 매우 불안해 보일지라도 너무 걱정할 것 없다. 이건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타는 것이니까.
그런데 가만, 이제 슬슬 멈출 때도 됐는데……. 멀미가 날 것 같다. 어떻게 파도가 끝이 없냐. 아휴, 지겨워!
■ 꿈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성공한 연예인들의 에피소드를 듣다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의 부모는 모두 자식이 연예인이 되는 걸 격렬하게 반대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야 워낙 많아서 누구의 부모가 그랬다고 콕 집어 말할 것도 없다. 저 사람은 가수가 안 됐으면 어쩔 뻔했나 싶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가수의 부모도 반대를 했단다. 뭐 호적을 파버리느니 마느니 난리였다지.
연예인으로 성공한 자식을 보며 부모들은 지금 어떤 생각을 할까 궁금해진다. 아마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휴, 그때 우리 애가 말을 안 들어서 정말 다행이야.’
연예인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대한민국에서 꿈을 꾸려거든 먼저 용기와 반항심을 갖춰야 한다. 제일 먼저 부모의 말부터 거슬러야 하니까. 불효자가 되지 않고서는 자신의 꿈을 시도조차 할 수 없다. 꿈을 꾸면 이런 불호령이 떨어진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해!”
공부 빼고는 다 쓸데없는 짓이다. 이런 분의기 속에서 아이들이 꿈을 꿀 수 있을까?
시대가 변했는데 여전히 고육은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낡은 가치관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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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다. ‘꿈’이 아닌 ‘성공’을 가르치는 교육 말이다. 그런데 요즘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꿔 젊은이들에게 꿈을 꾸라고 말한다. 마음껏 꿈을 펼치라고, 마치 한 가지 길밖에 없다는 듯 대기업과 공무원 시험에 매달리지 말고 자신의 꿈을 향해 나아가라고. 맞는 소리임에도 이 말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꿈을 꾸고 이루는 것이 어려운 ‘정답 사회’이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정답이 정해져 있다. 그길로 안 가면 손가락질 받는다.”
애초에 꿈을 꾸지 못하게 한 것도, 꿈을 꾸며 조금만 다른 길로 가려하면 온갖 태클을 거는 것도 어른들이었다.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가 그랬다. 이런 분위기에서 꿈을 꾸라니요? 꿈꾸지 말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왜 꿈이 없냐니요?
마음껏 꿈을 펼치는 게 가능한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진심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특별한 꿈이 없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꿔본다.
■ 일이 뭐길래
내 직업이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아하는 일을 하니 좋겠다”라는 반응을 보인다. 응? 내 의견은 듣지도 않고? 모든 회사원이 자신의 업무를 좋아하는 게 아니듯, 모든 일러스트레이터가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건 어니다.
좋아하기 때문에 지금의 일(직업)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지만,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의 일을 하게 된 사람도 많다. 수입이 좋아서라든지, 안정적이라든지. 그리고 대부분은 어쩌다 보니 지금의 일을 하게 된 경우다. 나도 그렇다.
나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던 시절이 분명 있었다. 그림이 ‘일’이 아니었던 시절 그때는 그림을 좋아했지만 그림으로 먹고 살려는 생각은 딱히 없었다. 그리고 그림이 ‘일’이 되어버린 지금은 그림을 그리는 걸 예전만큼 좋아하지는 않는다. 이거 좀 슬프다. 그래서 누군가는 진짜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지 말라고 충고한다.
어쩌면 우리는 일(직업)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지도 모른다. 먹고 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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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기본이요. 돈도 많이 벌었으면 좋겠고, 자아실현도 하고 재미있으면서 너무 힘들지 않고, 거기다 여가 시간이 보장되고, 존경까지 받는……. 그런 직업은 아무래도 무리겠지? 사실 거기서 한두 가지만 충족돼도 꽤 괜찮은 일이다. 실상은 먹고 사는 기본만 돼도 감지덕지하는 형편이니 말이다. ‘먹고사니즘’앞에선 재미도 자아실현도 왠지 사치처럼 느껴진다. 욕심을 좀 버리면 지금 일에 만족할 수 있을까?
■ 돈 벌기 싫다
영화 <어바웃 어 보이>의 주인공 ‘윌’은 평생 직업을 가져 본 일이 없는 남자다. 그의 아버지가 딱 한 곡의 히트곡(크리스마스 케럴)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저작권료로 일하지 않고도 풍요롭게 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가벼운 연애를 추구하는 윌이 여자를 꼬실 때마다 어려움을 겪는 질문이 하나있다. 그 질문은 바로 “어떤 일을 하시죠?”다. 그는 주저하다가 없다고 말한다.
“전에는 무슨 일을?”
“전에도 일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의 대답을 들은 여자는 흥미를 잃고 자리를 떠난다. 그 전까진 분위기가 좋았는데, 아쉽다.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이렇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한심하고, 바르지 않고, 게으르고, 비열하고, 무능한 이미지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가치가 없어 보인다. 그가 어떤 일을 하는지에 따라 사람이 달라 보이니. 일(직업)은 단순한 돈벌이 수준을 넘어 그 사람을 말해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랫동안 ‘일하기 싫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나는 그냥 일을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돈 때문에 일이 싫어진 거였다. 솔직히 아무 일도 안 하면서 살고 싶진 않다. 만약 돈을 안 벌어도 되는 상황이 와도 일은 하고 싶다. 돈에 대한 부담이 없다면 마음 편하게 지금 내가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지 않을까?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면서.
‘이제야 알았다. 나는 일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돈을 벌기 싫은 거였다.’
그래서 불로소득이 필요하다. 돈 때문에 지금 내가 일을 싫어하긴 싫으니까, 아아, 돈 벌기 싫다. 증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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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뭐 해먹고 살지
버젓이 직업이 있고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이 가게를 차리고 싶어 한다는 건 지금 하는 일이 힘들고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불안해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직장 생활을 해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남의 밑에서 월급 받는 게 참 쉽지가 않다. 한마디로 치사하다. 정녕 돈은 이렇게밖에 벌 수 없는 건가. 좀 더 자존감과 품위를 지키며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고민이 여기까지 이르면 힘들게 들어간 직장이고 나발이고 쌓아온 경력도 다 버리고 ‘내 일’을 하는 게 속 편하겠다는 생각도 무리는 아니다.
늘어난 수명은 또 어떠한가. 맙소사 백세 시대란 다. 은퇴가 멀지 않았는데 퇴직금과 연금만으로 생활하기엔 노후기 너무 길어졌다. 자식들에게 기댈 수 있는 시대도 아니다. 젊을 때 돈을 왕창 벌어 놓거나 늙어서도 돈을 계속 벌어야 한다는 이야기니 지속 가능한 다른 밥벌이를 고민할 수밖에.
그래서 시간만 나면 뭘 하며 먹고 살까 궁리를 한다.
평생직장, 평생직업이 사라진 시대가 왔다. 한 가지 일만으론 긴 시간을 살아내기 힘들다. 새로운 직업을 미리 고민하지 않을 수 없는 시대다. 그래서일까? 요즘 한국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전 국민이 진로 탐색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건 이 모든 고민이 깔때기처럼 장사라는 한 가지 답으로 수렴된다는 점이다. 아마도 장사 외엔 딱히 떠오르는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왜 한국인들은 늘 한 가지 길이 정답인 것처럼 우르르 몰려가는 걸까?
개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엔 너무나 집단적이다. 한 때 은퇴한 중년들이 모두 치킨집을 열었다는 우스갯소리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한국 사회는 다양성이 결여된 정답 사회다.
그림책 <100만 번 산 고양이>의 작가 사노 요코는 암에 걸려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아, 이제 돈을 안 벌어도 되겠구나.’라고 생각하며 안도 했다고 한다. 다양성도 다양성이지만 원래 밥벌이라는 게 지긋지긋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나는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지? 아, 지긋지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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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도해볼 권리
자신의 마음을 따르면 적어도 남을 탓할 일은 없다.
성공해도 실패해도 다 내 책임이다. 그러면 인생이 좀 덜 억울하다. 내 인생이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게 아닐까?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어차피 남에게 책임지라고 따져봤자 소용없는 짓이다. 이건 내 인생이고 지나간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 내가 말하지 않았나. 꿈을 좇으려면 불효자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고.
꿈이 있다는 건 분명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꿈을 향해 간다는 건 혹독한 고통의 길이기도 하다. 그 고통을 다 참아내고 끝까지 가면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사람은 꿈을 이루고 어떤 사람은 꿈을 이루지 못한다. 그리고 현실은 후자의 경우가 훨씬 많다. 가능성도 작고 고통스러운 길이니 차라리 꿈을 꾸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아 부모님들이 반대하는 이유가 이거구나 자식이 너무 힘들까봐 꿈을 이루지 못하고 너무 상심할까봐.
애초에 꿈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꿈이 생겼는데 어찌하랴. 꿈이 생겼다고 꼭 꿈을 좇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떤 고통을 의미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그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것도, 감당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한 번 시도는 해보는 걸 권하고 싶다.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기엔 마음에 오래 남을 것 같다. 우리에겐 시도해볼 권리가 있다. 비록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라고 해도 말이다.
꼭 이뤄져야만 의미 있는 사랑은 아니니까.
■ 빚 없는 삶
“월세 너무 아깝지 않아? 차라리 대출받아서 집을 사. 월세는 그냥 버리는 돈이지만 대출은 갚으면 내 것이 되잖아.”
아아, 또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한두 번 들은 게 아니다. 아마 나를 아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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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사람이라면 내게 한 번씩은 이런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곁에서 보기에 내 경제생활이 답답해 보이는 모양인데, 아무리 그래도 빚을 지라고 권하다니 대신 갚아줄 것도 아니면서…….나는 빚을 지는 게 싫다.
월세가 아깝다고? 물론 적지 않은 돈이다. 가능하면 안 내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있나. 여행을 가면 하루 묵는데도 수십만 원의 호텔비를 내지 않는가. 집을 빌렸으면 당연히 렌털비를 내야 한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뭐 은행은 돈을 공짜로 빌려준답니까? 이자가 있잖아요. 이자는 안 아까워요?
신용카드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자격 요건을 다 갖췄는데 왜 신용카드를 안 만드느냐고 하나 만들어 주겠단다. 나는 체크카드만 쓰니까 필요 없다고 했더니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한다.
왜 이 좋은 혜택들을 가지지 않느냐며, 현명하지 못하다는 말까지 한다. 아아, 또 나를 바보 취급한다. 현명한 거 됐고요. 끊겠습니다.
지금 당장 지불 능력이 없는데 누군가로부터 혹은 내 미래로부터 돈을 빌려 무리해서 무언가를 가지고 싶지 않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자.’ 이게 내 신조다. 현재 내 분수에 맞는 소비를 하겠다는 생각이 그렇게 바보 같은 생각일까? 누군가는 이런 내 생각을 두고 전형적인 ‘서민 마인드’라고 비아냥거린다. 평생 그 모양 그 꼴로 살라며. 맞다. 나는 서민이다. 서민으로 태어났고 앞으로도 서민일 듯 싶다. 대출까지 받아서 서민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대출로 더 나은 생활을 한다는 것은 신분 상승이 아니라 자기기만 아닐까?
■ 유목민
아무래도 안 되겠다. 집에선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다. 집에서 공부나 작업을 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따로 작업실이 있으면 좋으련만 작업실을 가질 만큼의 경제적 여유는 안 되니 어쩔 수 없이 주로 집에서 작업을 하는데, 집중이 안 될 때는 가방에 이것저것 챙겨서 집 앞 스타벅스로 간다.
지금은 디지털 기기의 발전으로 카페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고정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마음에 드는 곳 어디서나 작업을 할 수 있다니 좋은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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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와 와이파이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 이런 걸 두고 ‘디지털 노마드’라 부른다. 디지털 기기와 인터넷의 발전으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을 하는 신(新) 유목민, 그런 의미에서 보면 나 역시 디지털 유목민이라 할 수 있다.
디지털 유목민은 한 곳에 정착할 필요가 없다. 마음만 먹으면 파리, 뉴욕, 하와이…… 여기저기 여행하며 일하는 생활도 가능하다 낭만적이다. 유목의 삶은 자유다.
<전셋집 인테리어>라는 책, 이 책은 내 집이 아닌 전셋집을 꾸미는 것을 낭비라 생각했던 통념에 반해, 1년을 살아도 예쁜 공간에서 사는 사람을 추구하며 원상복구가 가능하고 저렴한 셀프 인테리어를 소개한다.
나는 30년 넘게 서울에서 살다가 독립하여 인천으로 왔다. 서울의 높은 월세를 감당하기 힘들어서였는데, 벌써 4년이 다 되어 간다. 그 사이 여기도 월세가 많이 올라 조금 더 아래쪽 지방으로 내려가야 하나 고민 중이다.
나는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고 있다. 몽골인도 아닌데, 그리고 내 유목은 선택이 아니라 밀려나는 것에 가깝디. 어디까지 밀려나게 될까? 이러다 편리하고 좋은 곳에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만 살고 열악한 곳에는 가난한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 되는 건 아닐까.
디지털의 발전으로 공간에 제약이 없어진 건 축복일까? 양극화를 가속시킬 재앙일까?
생각해 보면 한 곳에 오래 산다는 건 고인 물과 같다. 인간은 불안하면 안정되고 싶고, 안정되면 불안하고 싶어지는 이상한 동물이다. 그래서 익숙한 것으로부터 떠나 불안한 여행을 즐기고 여행에서 돌아와선 “여기저기 다녀봐도 집이 제일 좋다.”라며 안정을 확인한다. 안정될 만하면 자리를 옮기게 되는 이 월세 유목 생활도 분명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라도 위로하면 기분이 좀 나아진다.
얼마 전 디지털 유목민의 천국으로 인도네시아 발리가 주목 받고 있다는 기사를 봤다. 좋은 날씨와 환경 무엇보다 저렴한 생활비 때문에 디지털 유목민들이 모여들고 있단다.
발리라면 기꺼이 밀려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려면 영어부터 배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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겠다. 평생 한국에서 살 줄 알고 영어는 포기했는데, 이래서 영어가 중요하구나. 세계를 떠돌아야 생존 가능한 유목의 시대가 오고 있다. 짐은 가볍게, 마음은 담대하게, 이제 세계가 내 집이다. 와아, 선택이 폭이 넓어진 것 같다. 신난다, 정말.
■ 욜로가 별건가
퇴사하고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도 벌써 1년이 다 되어 간다. 그동안 나는 정말로 열심히 살지 않았다.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았고, 마음 내키는 일만 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돈은 못 벌었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일부러 돈을 벌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냥 일하기 싫었다. 예전 같으면 무리해서 했을 일도 이런저런 핑계로 거절했디.
욜로(YOLO)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인생은 한 번뿐(You only Live once)’이란 뜻으로, 미래 또는 남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라이프 스타일을 일컫는 단어다.
나는 돈 때문에 내가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해왔다. 돈 때문에 회사를 다니고, 돈 때문에 그림을 그리고,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했으니 내 모든 의무는 그놈의 돈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언제나 ‘더 많은 돈' 이라고 생각했다. 더 많은 돈을 벌면 자유로워질 거야. 충분한 돈을 모으기 전엔 자유롭게 살 수 없어.
나는 돈에 얽매여 있었다. 그렇게 평생을 돈을 좇으며 살았는데 그럴수록 돈이 도망가는 기분이었다. 내가 돈 버는 능력이 좀 모자라는 탓도 있겠지만 신기하게도 돈은 벌어도 벌어도 부족했다.
돈 때문에 자유를 계속 미루기만 하다간 한 번도 자유롭지 못한 채 죽게 생겼다는 위기감이 덮쳐왔다. 이봐, 인생은 한 번 뿐이라고!
노동과 시간을 팔아 돈을 좀 벌어야겠다. 가끔은 싫은 그림도 그리고,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기도 하고, 짜증을 참아가며 돈을 벌면 유통기한을 늘릴 수 있다. 지금의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이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매일 출근하라는 것도 아닌데 이 정도도 못하면 나에게 한 마디 해 주고 싶다.
“그냥 나가 죽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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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을 버는 행위는 같지만 그 행위에 임하는 내 마음이 달라졌다. 나는 미래를 위해 돈을 버는 것이 아니다. 현재의 자유를 위해서 돈을 번다. 나는 여전히 돈을 벌어야 하지만 이미 자유롭다.
그렇게 하루하루 이 자유의 기한을 늘려가며 죽을 때까지 자유롭게 사는 것이 목표다.
욜로가 별건가? 현재를 위해 사는 게 욜로라며?
◉ 4부 하마터면 불행할 뻔했다
■ 느려도 괜찮아
식당에 가서 음식을 시켰는데 30분이 지나도록 음식이 나오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주문이 안 들어간 건 아닌가 하고 불안해하고, 음식이 왜 이렇게 늦냐고 항의도 해보고, 죄송하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는 사과를 들었지만 이미 기분은 상했고, 막상 음식이 나와도 기다린 시간이 억울해 맛이 그저 그런 것 같고. 아무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분명 마음속에선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 칠 것이다. 기다리는 건 그다지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런 기다림이 아무렇지 않은 가게가 있다.
안국동에 즐겨 찾던 막걸리 집이 있었는데 거기가 그런 가게였다. 주인 혼자서 음식도 만들고 서빙도 하는 작은 가게였다. 그 가게 메뉴판엔 대충 이런 글이 젓혀 있었다.
“제가 좀 느립니다. 음식이 나올 때까지 오래 기다리셔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음식을 오래 기다리는 것이 싫은 사람이야 그 글을 읽고 바로 나가겠지만 대부분은 단번에 한없이 마음이 너그러워져 흔쾌히 기다리는 것을 택한다. 원래 느리다는데 어쩌겠는가.
앞서 이야기했던 기다림과 사뭇 다른 여유로운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메뉴판에 적힌 한 줄의 글 때문이었다고 확신한다.
평소에 빨리빨리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도 모두의 마음속엔 여유로움과 너그러움이 숨어 있다. 그것을 메뉴의 문장이 꺼내준 것이다.
‘나만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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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한다. 아니, 솔직히 너무 자주 한다. 남들은 모두 자리를 잡고 무언가를 찾고 이루고, 앞으로 달려가는 것 같은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아 우리는 자주 불안하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내가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성공으로 가는 것만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가고자 하는 쪽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때로는 그 변화가 너무 미미해서 내 욕심만큼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 나는 나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느린 사람이다.
남들과 꼭 속도를 맞춰 살아야 하는 걸까? 사람들은 남들과 똑같이 살기 싫다고 말하면서도 왜 똑같이 맞추려고 애를 쓰고, 뒤처지면 불안해하는 걸까? 그리고 설령 뒤처지고 느리다고 한들 그게 큰일일까? 사람은 각자의 속도가 있다. 자신의 속도를 잃어버리고 남들과 맞추려다보면 괴로워진다. 남들과 다르게 천천히 걷는 것만으로도 남들과 전혀 다른 삶이 된다. 개성이다. 오우, 유니크!(unique : 유일한 사람, 특유한, 유래 없는 사람)
혹시 지금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닐까 불안하다면 아마도 뒤처진 게 맞을 거다. 하지만 뒤쫓을 필요는 없다. 자신만의 속도와 길을 찾는 게 더 중요하다. 느린 건 창피한 게 아니다. 인정하자. 우리는 뒤쳐졌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이런 뻔뻔함이 너무 좋다.
이왕 늦은 거 천천히 가면 어떨까? 인생도 더 길어졌는데 빨리가서 뭐하려고 그러나 나 혼자 느릿느릿 가려니 외로워서 그런다. 천천히 가자. 만약 모두가 합심해서 뛰지 않는다면 이 지긋지긋한 경쟁 사회도 달라질지 모른다. 정말이라니까.
■ 안 되는 게 정상
“아, 내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우리는 늘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괴로워한다. 노력을 안 했으면 모를까 나름 열심히 노력도 했건만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 더 괴롭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게 정상이다. 무슨 소리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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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원하고 꿈꾸는 대로 모든 게 다 이루어진다고 생각해보자. 돈이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부자가 되고, 저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누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누가 죽는다? 그런 능력을 두고 우리는 정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건 초능력이다.
우리는 초능력자가 아니다. 원래 세상일은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게 정상이고 그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짐 캐리가 주연한 영화 <부루스>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휴가를 떠난 신을 대신해 전지전능한 능력을 가지게 된 브루스. 사람들의 소원을 일일이 읽기 귀찮았던 부루스는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한다. 모든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지면 모두가 행복하지 않겠냐는 단순한 생각에서 말이다.
그 결과 세상은 하루아침에 혼란에 빠지고 아수라장이 된다. 수십만 명의 사람이 동시에 복권 1등에 당첨되고 1등 당첨금이 고작 17달러인 것에 분노한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켜 도시는 마비가 된다.
그뿐일까? 영화엔 나오지 않았지만 연쇄살인마는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게 도와달라고 기도 했을 테고, 기업 사장은 직원들에게 돈을 조금 주고 일을 더 많이 시킬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을 테고 수많은 수험생은 합격을, 철없는 학생들은 학교에 불이 나서 등교하지 않길 간절히 소망했을 테니 이게 다 이뤄지면 재앙도 이런 재앙이 없다.
이걸 보면 보든 사람의 소원이 이루어질 수도 없지만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번쩍 든다.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그런 일은 없어야 한다.
어쩌면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이룰 수 있는 건 거의 없는 게 인생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삶이 잘못되어 가고 있는 건 아니다. 우리의 삶은 지극히 정상이다. 원하는 대로 다 되지 않는 지금이 정상이다. 괴로워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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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쩌다 이런 어른이 됐습니다만
‘꿈꾸던 대로 되지 않았으니 내 인생은 실패한 걸까?’
누구나 꿈꾸는 모습이 있다. 몇몇 사람은 그 모습을 이루기도 하지만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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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의 사람은 꿈을 이루지 못하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은 ‘꿩’대신 주어진 ‘닭’같은 삶이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더욱 노력했다. 하지만 계속 불행했다. 그랬던 내가 최근 몇 년간은 행복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됐다. 상황이 더 나아져서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부정하며 노력하는 대신 지금의 나를 좋아해주고 인정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삶도 괜찮다는 것을 인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기 시작했다. 겨우 이런 거에 행복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아직 꿈꾸던 모습이 되지 못한 삶을 보며 괴로워하진 않았으면 한다.
기대에 못 미치는 지금의 내 모습도 꽤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꿈을 이뤄야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행복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꿈이 뭐라고, 꿈을 이룬다면 정말 좋겠지만 이루지 못해도 그만이다. ‘에이, 아쉽다’정도로 훌훌 털고 지금 주어진 삶에서 행복을 찾아 누리기에도 짧은 생이다. 꿈꾸던 대로 되지 못했다고 실패한 인생은 아니다. 실패한 인생이란 없다.
내가 내 인생을 사랑하지 않으면 도대체 누가 내 인생을 사랑해 준단 말인가. 꿈꾸던 대로 되지 못했다고 인생이 끝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이 삶을 끌어안고 계속 살아가야 한다. 그러니까 이건 관점의 차이다.
■ 내 삶도 드라마 같으면 좋겠다
어릴 적에 이런 상상을 했다. 지금의 아버지는 친 아버지가 아니고 내 친아버지는 따로 있다. 친 아버지는 어마어마한 재벌인데, 어쩌다 아들인 나를 잃어버리게 됐고 나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수소문해 봤지만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는 상상 말이다. 머지않아 친아버지가 나를 찾게 되면 이 지긋지긋한 가난과도 이별이야. 황당한 상상인걸 알지만 내게도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나길 바라며 헛된 희망을 품었었다. 아무튼.
하지만 스무 살이 되도록 친아버지는 나를 찾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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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찾기가 그리 쉽지는 않은 모양이야. 우리 회장님이 아직도 나를 찾지 못하는 걸 보면…….”
상상의 친아버지는 친구들에게 던지는 실없는 농담거리로 종종 등장할 뿐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나는 친아버지를 잊었다. 40년 가까이 살았는데도 안 찾아오는 걸 보면 이젠 깨끗이 잊고 살아야지 싶다. 아쉽지만 내 인생에 드라마는 없었다. 내 삶은 평범하게 흘러왔다. 놀라운 반전도 없이 그냥 그렇게. 아, 시시하다.
인생을 100으로 본다면 눈에 보이는 행복한 순간들은 몇이나 될까? 즐겁고 흥분되고 설레고 성취하고……. 그런 순간들은 잘해봐야 20정도나 될까? 나머지 80은 대체로 지루하고 반복적이고 별일 없이 시시하기 마련이다.
그렇다 인생의 대부분은 시시하다. 어쩌면 만족스러운 삶이란 인생의 대부분을 이루는 이런 시시한 순간들을 행복하게 보내는 데 있지 않을까? 사소한 것의 가치를 발견하고 시시함을 긍정하는<오구실>이란 드라마처럼, 전혀 드라마틱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녀와 나의 인생도 드라마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면 지금의 내 삶도 조금은 다르게 보일 것 같다.
■ 보통의 자존감
요즘 여기저기서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자주 보인다. 인터넷에서도, TV에서도, 서점에서도 자존감이란 단어가 자꾸 눈이 띄는 걸 보니 아마도 트렌드인 모양이다. 자존감이라…. 단어는 많이 들어봤는데 정확한 뜻을 몰라서 나중에 아는 척이라도 할 요량으로 뜻을 찾아봤다.
자존감은 ‘자아존중감’의 줄임말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마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고 만족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란다. 자존감이 낮을수록 열등감을 쉽게 느끼며 자괴감이 빠지기 쉽다고 한다. 이래서 요즘 자존감이 인기구나 싶다.
지금의 시대는 무한 경쟁사회, 취업난, 흙수저, 외모지상주의, SNS로 대표되는 시대다. 타인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상처받는다. 자존감 회복이 그 어느 시대보다 절실한 시대다.
생각해보면 자존감이라는 건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고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한 포인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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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자신을 과대평가하여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는데. 이 환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커질수록 괴로움이 커진다는 이야기다. 자신이 만든 환상 속의 나는 대단한 사람인데 현실의 나는 초라하고 별 볼 일 없고 인정도 못 받으니 현실의 내 모습을 점점 미워하게 되고 못마땅하여 보기 싫어진다. 너무 보기 싫어지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일어난다.
고백하자면 내가 바로 자신을 과대평가한 대표적인 사람이다. 나는 내가 대단한 사람이며 앞으로 그렇게 될 거라고 굳게 믿었다. 나는 더 의미 있고 생산적인 일을 할 사람이며 남들과 똑같이 아등바등 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나만은 왠지 늙지도 죽지도 않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생각까지 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일은 뭘까’.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뭘까’. ‘인간은 왜 사는가’ 같은 공허한 질문을 수도 없이 반복한 끝에 나는 환상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내가 존재하는 건 그냥 태어났기 때문이고 나만의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리 대단한 인간이 아니고 그냥 평범하거나 조금 못난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가진 것에 비해 욕심을 부렸다는 걸 받아들였다.
나 자신을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자존감이 가장 낮았고, 나 자신이 별 거 아니라고 인정하고 나서야 자존감이 지금의 ‘보통’수준으로 올라온 것이니 인생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나는 내 보통의 자존감에 만족한다.
고로 여전히 자존감을 높이려 노력할 생각은 없다.
낮은 자존감이 문제가 된다면 노력해서 높여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노력이 또 다른 스트레스가 되지 않길 바란다. 그리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이 성공한다고 해서 자존감을 높이려고 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았으면 한다. 자존감은 그런 식으론 절대 높아지지 않을 것이다. 자존감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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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나를 괴롭게 만드는가
스스로를 가장 빨리 불행하게 만드는 방법을 찾고 있다면 ‘비교’를 추천한다. 그건 실패가 없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못 믿겠다면 지금 당장 나보다 예쁜 사람을 떠올려보자. 주변에 아는 사람도 괜찮고 유명한 사람도 괜찮다. 그리고 나서 나의 삶을 가만히 옆에 두고 비교해보자. 아아, 나는 불행하다. 순식간에 불행해졌다. 봐라 비교는 실패가 없다.
그런 이유로 나는 남들과 비교하는 짓을 하지 않으려고 주의를 기울인다. 굳이 사서 불행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내 삶이 남들과 다르다는 데에 불편함을 느끼기 보다는 자부심을 가지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모두의 삶은 유니크(유일한, 특유한) 하다. 세상에 똑같은 삶이란 없다. 물론 비교하지 않는 삶을 실천하는 과정이 단순치만은 않다. 마음을 잘 다스리며 살다가도 갑자기 외부로부터 훅 들어오는 공격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일종의 외부의 적인 셈인데, 그 적의 이름은 엄마 친구 아들 딸, 엄친아다.
“내 친구 자식 중에 너만 결혼을 안 했더라. 넌 대체 언제 결혼하려고 그러니?”
“친구 아들은 대기업에 취직했대. 넌 안 할거야?” “ 그 집 딸은 공부도 잘하는데 얼굴까지 예쁘더라. 성격도 얼마나 싹싹한지 집안일도 잘 돕고, 야! 소파에서 뭘 먹지 말랬지. 다 흘리잖아. TV 그만보고 들어가서 공부나 해! 저건 딸이 아니고 그냥 웬수야, 웬수!”
능력되고, 외모 되고, 거기에 성격까지 좋은 인간들은 우리 주변에도 많지만 엄친아들이 특히 우리를 힘들게 하는 이유는 그들이 바로 부모님 친구의 아들 딸이기 때문이다.
부모님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부모님의 기분을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부모님도 젊은 시절 우리와 똑같이 자신과 또래들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괴로워했을 것이다. 난 왜 쟤처럼 똑똑하지 않지? 난 왜 쟤처럼 돈을 못 벌지? 그렇게 젊은 날들을 다 보내고 나이가 들어선 그 비교의 대상이 자식으로 넘어온 것뿐이다.
인간은 자신이 행복한 이유를 찾기보단 불행한 이유를 찾는 데 평생을 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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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고 있는 것 같다. 이것도 일종의 마조히즘(masochism, 이성으로부터 정신적, 육체적 고통이나 학대를 받음으로써 성적 쾌감을 느끼는 심리상태)일까.
그런데 왜 하필 부모님은 다른 사람도 아닌 ‘친구의 자식’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일까? 부모님의 입에서 “마크 저커버그는 페이스북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더라. 넌 뭐니?”같은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더 잘난 인간들이 있는데 왜 유독 친구 자식들이 부모님을 괴롭게 하는 것일까?
마크 저커버그는 물론 엄청 부럽기는 하지만 우리를 괴롭게 하지는 않는다. 정작 우리를 극심한 질투심에 휩싸이게 만드는 건 바로 나와 동등하거나 나보다 조금 못났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다. 평소 나보다 안 예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엄청 멋진 훈남 애인을 데리고 나왔을 때, 나와 비슷한 고민을 나누던 입사 동기가 집에 갈 때 보니 고급 외제차를 타고 가는 것을 봤을 때 우리는 미칠 것 같은 질투심을 느낀다.
■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가끔 남성 잡지를 읽는다. 일부러 사서 읽는 편은 아니고 카페에 비치되어 있는 것을 읽는 정도다. 패션, 라이프스타일, 여행, 예술, 자동차, 음식, 섹스……. 잡지 속엔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온갖 관심거리가 들어 있다. 읽다보면 시간이 잘 간다. 그런데 흥미롭게 모든 섹션을 읽고 나서 잡지를 덮으면 이상하게 공허하고 씁쓸한 기분이 든다. 잡지를 읽는 내내 마주하게 되는 이런 문구들 때문이다.
“애써 꾸미고 싶지 않은 날, 무심히 걸치기 좋은 블랙 카디건, 120만원”
아아 날 농락하고 있어. 정녕 100만 원이 넘는 카디건을 무심하게 걸칠 수 있단 말인가.
마치 이런 문구들은 “너 같은 사람이 공감하라고 적은 게 아니야.”라고 말을 거는 것 같다. 아, 이 모욕감. 이런 모욕의 글들은 잡지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가볍게 들기 좋은 가방이 500만원, 자동차도 패션처럼 그날의 분위기에 맞게 바꿔 탄다는 자동차 애호가 인터뷰. 시계가 많지만 아버지가 물려주신 롤렉스 시계를 가장 아낀다는 젊은 사업가, 이런 것들을 읽고 난 후엔 너덜너덜 해진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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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잡지의 목적은 읽는 이에게 좌절감을 안겨주는 데 있다. 그리고 그런 좌절감은 고도의 계산된 상술이다. 많은 사람이 명품을 욕망하는 이유는 그것을 쉽게 살 수 없다는 데 있다. 그런 좌절감이 명품의 가치를 높인 다. 좌절은 더욱 그것을 욕망하게 하고 기어이 그것을 산 사람들은 그제야 좌절감에서 벗어난 기쁨을 누린다.
잡지만 그런 좌절을 주는 건 아니다. 요즘은 모든 매체가 나를 좌절시키고 불행하게 만들려고 작정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
세상은 우리가 불행하다고 속인다.
불행하지 않으려면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한다고 속삭이면서.
■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화창한 날이었다. 산책을 하고 있는데 내 앞으로 20대로 보이는 여성 한 무리가 꺄르르 웃으며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그런 그녀들을 지나치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싱그럽구나.’
여자들을 오직 '예쁘다‘와 ’안 예쁘다‘로 구분하던 나의 젊은 시절을 생각하면 그런 표현이 나올 리가 없다. 나이가 드니 같은 걸 보아도 다르게 느껴진다. 나도 싱그러운 시절이 있었다.
사람들을 잃고 나서야 그게 좋았다는 걸 깨닫는다. 나도 싱그러움을 잃어버리니 싱그러운 것들이 좋아졌다. 그래서 최근 집에서 식물을 몇 개 들였다. 지금보다 더 젊을 땐 자연이나 식물에 통 관심이 없었다. 학교에서 수목원으로 소풍이라도 가면 도대체 이런 재미도 없는 곳에 왜 우리를 데려다 놓은 것인지 화부터 냈다. 뭘 보라는 거야!
그런데 지금은 수목원을 좋아한다. 상쾌한 공기며 눈이 시원해지는 듯한 신록이며 볼게 아주 많다. 자주 못가서 아쉬울 뿐이다. 어릴 땐 그 맛을 몰랐다. 이런 걸 보면 나이가 든다는 것도 꽤 멋진 일이다. 나이가 들어야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랄까.
나는 푸르른 자연에서 젊음을 본다. 그리고 젊음을 동경한다. 흔히 젊음을 보면 “좋을 때다”라고 말 하는데 요즘 내가 그 말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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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봄은 지나갔고 여름도 지나갔다. 나는 이제 가을의 입구에 서 있다. 아니 이미 들어섰다. 나의 몸은 생기를 잃고 시들어 가겠지. 바스락, 물기 하나 없는 마른 낙엽이 되어갈 테지. 그리고 추운 겨울을 맞이할 테고 그렇게, 그렇게…….
때때로 자연은 냉혹하다. 어떠한 불평도 통하지 않음으로.
나는 푸르른 초록에서 유한함을 본다. 곧 시들어 사라질 초록이기에 애틋하다. 내가 지나온 계절이기에 아름답다. 젊음이 영원하다면 소중할 이유도 없다.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직접 겪는 지금에서야 뼈저리게 느낀다. 하지만 돌아갈 수도,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나는 젊은 시절이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솔직히 힘들었다. 젊음 그 자체는 좋지만. 다시 그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젊은 날은 뜨겁다. 속에 불이 하나 들어 있는 것처럼, 에너지가 넘치지만 때때로 너무 뜨거워 괴로운 여름은 지랄 맞게 빛나는 계절이다.
■ 잃은 후에 오는 것들
최근 연인과 이별한 친구가 있다. 떠나간 연인을 그리워하며 너무나도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다는 건 하나의 세계를 잃는 거니까 그 고통을 알기에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와, 그럼 이제 다른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거네? 완전 좋겠다.”
그의 표정을 보니 실패다. 아무래도 나는 위로에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이런 걸 친구라고 한 대 얻어맞지 않은 게 다행이다. 내가 친구에게 한 이야기는 반 정도는 웃으라고 한 이야기지만 반 정도는 진심이었다.
그런 인간의 본능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의 관계를 깨뜨리는 바보 같은 짓을 쉽게 저지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칭찬받아 마땅하다. 이런 인내의 화신들!
자, 이별하게 됐다는 건 이제 다른 사람을 마음껏 만나도 된다는 허락이다. 참지 않아도 된다. 이 얼마나 좋은 가. 나도 안다. 이런 말이 별로 위로가 안 된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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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이야기했던 친구는 요즘 그림 그리는 것에 빠져 있다. 원래도 그림을
그렸지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면서 그림 그리는 시간이 더 행복해졌다고
한다. 이별로 생긴 빈자리를 그림으로 채우며 새삼 열정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무언가 잃으면 반드시 무언가를 얻게 되는 게 맞는 모양이다.
그래도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떠나간 그녀를 그리워하며 소주를 마시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빈 곳이 다 채워지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 나머지 빈자리에도 다른 것들이 어서 채워지기를……. 그동안은 그 자리를 그리움으로 채워놓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 기대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 필이 팍 꽂히는 영화가 있다. 알고 보니 그 영화가 평소 좋아하던 감독의 신작이라면 게임 끝이다. 그런 영화는 개봉 날짜를 손꼽으며 기다린다. 얼마나 재미있을지 기대를 잔뜩 품고서 말이다.
개봉 날이 되면 극장으로 달려가 티켓을 끊고 두근두근 한 마음으로 영화를 본다. 또 한 편의 영화가 탄생하는 건가요, 인트로(intro. 음악의 서곡, 또는 서주)부터가 심상치 않다.
영화가 다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한 채 엔딩 크레디트를 멍하니 쳐다본다. 너무 좋아서가 아니라 당혹스러워서다. 딱히 흠잡을 건 없는데 흥이 오르지 않는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일까. 영화가 좀 별로다.
너무 기대하면 반드시 실망하게 되어 잇다. 가끔 기대 이상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랬다. 그래서 웬만하면 기대하지 않고 보려고 한다. 영화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다. 음식을 막을 때도, 소개팅을 할 때도, 책을 읽을 때도, 기대가 크면 실망할 확률이 높다. 그걸 알기에 무언가를 추천해 줄 땐 이런 말을 덧붙인다.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기대가 없는 상태에서라면 같은 것을 봐도 굉장히 만족스럽다. 갑자기 낡고 낡은 그 이야기가 떠오른다. 잔에 반 정도 채워진 물을 보고 어떤 이는 '에걔, 반 밖에 안 남았네.‘ 라고 생각하고, 어떤 이는 ’와, 반이나 채워져 있네.‘라고 생각한다는 이야기. 그 사람이 무엇을 기대했는지에 따라 같은 것도 다르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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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나 대상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고 기다림.
기대란 그런 마음이다. 이미 원하고 바라는 것이 있으니 기대를 한다는 건기준이 생긴다는 것과도 같다.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미치느냐 못미치느냐에 따라 ‘기대 이상’과 ‘기대 이하’가 판가름 난다. 반대로 기대가 없다는 것은 설정해놓은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기대하지 않으면 좋은 일이 생길 확률이 높다. 실제로 좋은 일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기대가 없기에 작은 것에도 즐거워하고 만족한다.
나는 참 기대가 컸던 모양이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인생을 바랐길래 이처럼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생각해보니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바라긴 했다. 기대가 크니 기준이 높고 그러다보니 내 인생 전체가 기대에 못 미쳐서 비쳐버릴 것 같은 기분으로 살았다. 반이나 채워진 인생을 반밖에 없는 인생으로 여기며 불만족 속에서 살아온 것이다.
운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 꿈을 꾸고 더 나아지길 바라는 것은 여전히 좋은 태도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제는 욕심을 버리라는 말의 뜻을 조금은 알 것 같다.
세네카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란 순응하면 등에 업혀가고 반항하면 질질 끌려 끌려간다.”고 뭐야. 그러니까 인생이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냥 받아들이란 이야기야?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엔 그렇게 읽었으니까. 그러나 이건 태도의 문제가 아닐까? 운명을 그저 받아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생을 어떤 태도로 살아갈 것인가 하는 문제 말이다. 똑같은 길을 가도 누군가는 편안하게 가고 누군가는 끌려간다. 즉 같은 인생도 대하는 태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질 거라는 가르침이다.
욕심을 버리라는 이야기는 꿈을 꾸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꿈을 꾸고 이루려고 하되 큰 기대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반드시 이뤄야 한다고 초조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큰 기대 하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꿈을 향해 노력하는 삶 말이다.
기대 없이 인생을 산다는 건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더 나은 삶을 바라는 것부터가 기대한다는 이야기니까. 그럴 땐 이렇게 말해주자.
너무 기대는 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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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욕심이 일어날 때마다 이 말을 주문처럼 외워볼 생각이다. 그래 너무 기대는 하지말자. ‘이 정도는 돼야 한다’는 기준을 만들지 말자. 어떤 기준 없이, 특별히 바라는 것 없이, 즐겁게 살아봐야지. 그러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을까? 어? 의외로 괜찮네, 내 인생!
■ 에필로그 : 삶이 힘들게만 느껴질 때
가죽공예를 몇 개월 배운 적이 있다. 처음에는 가죽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 신기해서 마냥 재미있었는데 시간이 지나 과정이 익숙해지자 귀찮은 점이 한 둘이 아니었다.
‘아, 본드 칠 너무 싫다. 이거 봐 손에 막 묻잖아.’
‘기리메(단면 마감제) 바르는 거 너무 귀찮아.’
‘이거 미싱으로 박으면 1분도 채 안 걸릴 텐데 지금 몇 시간째 손바느질이냐.’
이 시간, 이 돈을 들여서 이걸 만드느니 차라리 사는 게 낫겠어. 사는 게 훨씬 경제적이야.
귀찮은 과정들을 뿅 건너뛰고 짠 하고 바로 결과물이 나오면 좋으련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흥미를 잃어가다 가죽공예를 그만두었다.
얼마 전 친구가 가죽공예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느낀 불만들을 이야기 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그게 진짜 재미있는 건데.’
그의 말은 이랬다. 돈을 주고사면 간편하지만, 직접 만드는 이유는 결과물 뿐 아니라 과정을 즐기려고 하는 거라고, 귀찮을 수도 있는 과정에 집중하며 잡생각 없이 온전히 몰입하는 시간, 답답할 정도로 느리지만 결국은 끝을 맺는 희열이 진정한 재미라는 말이었다.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과정 자체가 목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무언가로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이렇게 가까운데서 현자를 만날 줄이야.
무언가를 하면서 결과를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결과에만 관심이 있었고, 과정은 그 결과를 얻기 위해 견뎌야 하는 인내의 시간 정도로 생각했다. 과정 그 자체로도 충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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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말이다. 그러니 쉽게 지칠 수밖에. 재미없는 걸 계속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내가 부러워했던 사람들은 과정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나는 항상 과정은 건너뛰고 결과를 바로 얻고 싶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과정 없인 결과도 없다.
그리고 결과만을 바라보고 달려가면 과정이 괴롭고 힘들다. 꼭 좋은 결과가 온다는 보장도 없고.
그래서 열심히 갈면 힘들다.
같은 일도 이왕이면 ‘열심히’ 보다는 ‘재밋게’가 낫지 않을까? 생각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삶이 달라질 거라고 말하면 너무 설득력이 떨어지려나?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이 명언은 다 좋은데 이게 문제다. 꼭 누굴 이기고 싶어서 즐기는 건 아니다. 그냥 재미있게 살고 싶은 거다. 누굴 이기는 게 목적이 되는 순간 절대로 즐길 수 없을 걸? 아무튼.
“휴,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2019. 6.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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