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

2019. 6. 25. 10:01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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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다

■ 하완 지음

0 다수의 책에 그림을 그리고, 쓰고….

0 그린 그림책도 한 권 있지만 굳이 밝히지는 않겠다.

0 회사다니며 일러스트레이터(삽화가)로 투잡

0 어느 날 회사를 그만 둠

■ 프롤로그 : 나는 어디로

괴테가 그랬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문즉 궁금해졌다. 나는 어디로 이렇게 열심히 가고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멈춰섰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사표를 낸 후였다. 아차 싶었지만 없던 일로 하기엔 사나이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고, 거기다 사장님은 내 선택을 존중한다며 흔쾌히 나의 퇴사를 반기는 게 아닌가. 응? 이게 아닌데. 나 진짜로 회사 그만둬야 하는 거야?

붙잡으면 못 이기는 척 다시 남을 생각도 있었는데 ….

아아 나는 어쩌자고 이런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일까? 이게 다 괴테 때문이다. 굳이 이유를 하나 더 찾자면 새해가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흔 살을 두 달 앞둔 시점이었고 죽을 날을 받아둔 것처럼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마흔은 웬만한 세상일에는 흔들리지 않는다고 하여 불혹(不惑)이라 부른다는데 도대체 누가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다.

마흔이면 중간 쯤 산 셈이다. 요즘은 백세 시대라지만 비루한 내 몸뚱이를 생각하면 아무래도 백 살 까지는 못 살 것 같고, 이쯤이면 중간이지 싶다. 반환점! 그래서일까? 지나온 날들과 앞으로 남은 날들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이렇게 사는 게 맞나?

그걸 알기 위해선 잠시 멈춰서야 했다. 아니, 솔직히 그건 핑계고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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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뭐하나 싶은 마음이 컸던 것 같다. 아니면 그냥 지쳤는지 모르겠다.

노력해라! (네네, 항상 노력하고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라! (이미 최선인데 여기서 더요?)

인내해라! (평생을 참기만 하며 살았다고요)

살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다. 시키는 대로 살았다. 인내하며,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사는 것이 진리라 생각했고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어째 점점 더 불행해지는 느낌이 드는 건 그야말로 기분 탓일까?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조금만 더 올라가 볼 수도 있다. 계속 열심히 살다 보면 뭔가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지쳤다. 체력도 정신력도 바닥이다. 에라. 더는 못 해 먹겠다. 그렇다 마흔은 한창 비뚫어질 나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결심했다. 이제부터 열심히 살지 않겠다고!

그러니까, 이건 내 인생을 건 실험이다.

이 실험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실험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내 인생이 망하는 거니 독자 여러분은 걱정할 것 없다. 그리고 망하더라도 크게 잃을 것도 없다. 고작해야 다시 열심히 살겠지 뭐. 그러니 편안한 마음으로 이 방황을 즐기기 바란다. 나 역시 그런 마음으로 답도 없는 이 여정을 시작하려 한다.

한 번쯤은 이렇게 살아보고 싶었다. 애쓰지 않고 흘러가는 대로 어디로 흘러가는지 모르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등등!

여행은 시작됐다.

1부 이러려고 열심히 살았나

■ 노력이 우리를 배신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는 이런 정면이 나온다. 태평양 한가운데, 조난당한 한 남자가 튜브를 붙잡고 표류하고 있다. 그 때 저 멀리서 똑같이 튜브를 붙잡은 한 여자가 헤엄쳐 온다. 그들은 나란히 바다위에 떠서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잡담을 나눈다. 밤이 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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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을 나눈 후 여자는 어딘가 있을지 모를 섬을 찾아 헤엄쳐가고, 남자는 그 자리에 남아 맥주를 마신다. 여자는 이틀 낮, 이틀 밤을 헤엄쳐 어딘가의 섬에 도착하고, 남자는 그 자리에 남아 술에 취한 채 구조대에 의해 구조된다. 몇 년 후 이 둘은 어느 고지대에 있는 작은 술집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데, 여자는 굉장히 혼란스러워 한다. 자신은 팔이 빠져라 열심히헤엄쳐서 살았는데, 그 자리에서 아무 것도 하지않은 그 역시 살아 있다니. 여자는 헤엄치며 ‘남자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노라 고백한다. 하지만 남자는 살았다. 열심히 헤엄친 그녀와 똑같이….

20대에 이 부분을 읽었을 땐 ‘무슨 개떡같은 소리야’라고 생각했다.

최근에 다시 읽었을 땐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하루키, 혹시 이런 걸 말하고 싶었던 거야? 우리는 어릴 때부터 정신교육을 받는다.

“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돼.”

“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어.”

“ 노력하지 않고 얻은 성공은 비겁한 거야.”

이런 교육 말이다. 이 말들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세상을 좀 살아보면 알게 된다.

열심히 하지 않고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다 가진(성공하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누구보다 열심히 사는데 점점 빈곤해지는 사람도 있다. 수백 번의 오디션을 본 후에야 배우로 데뷔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친구 오디션에 따라갔다가 쉽게 데뷔하는 사람도 있다.

열심히 노력했다고 반드시 보상 받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열심히 안 했다고 아무런 보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 우리가 믿었던 것과는 다르게 인생은 이처럼 아이러니 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있었는데 구조가 된 남자를 보고

“그건 운이 좋아서 그런 거지. 구조대가 안 올 수도 있었잖아?”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다. 근처에 섬이 없었을 수도 있다 여자도 운이 좋았다.

결과적으로 여자도 남자도 똑같이 운이 좋았는데 여자는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혼란스러워 한다. 자신이 얻은 것은 노력의 보상이라 생각하고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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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얻은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며 괴로워한다.

우리가 지금 괴로운 이유는 우리의 믿음 즉 ‘노력’이 우리를 자주 배신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으니 반드시 ‘이만큼’의 보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괴로움의 시작이다. 보상은 언제나 노력한 양과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다. 노력한 것보다 작게 혹은 더 크게 주어진다. 어쩌면 아예 보상이 없을 수도 있다. 안타깝지만 사실이다.

이처럼 노력은 항상 우리를 배신하기 때문에 노력하면 할수록 자꾸 억울 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소설 속 여자처럼 말이다. 하루키는 억울해하는 우리의 마음을 이상한 방식으로 위로한다.

“원래 인생은 공평하지 않아. 노력으로 다 된다는 말도 거짓말이지. 알겠어? 네 노력이 부족한 탓이 아니라는 이야기야.”

여기엔 어떠한 해답도 없지만 그걸로 충분하다. 나에겐 엄청난 위로가 된다. 이러니 하루키를 좋아할 수밖에.

■ 열심히 살면 지는 거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라는 말이 한 때 유행이었다. ‘부럽다’라는 감정은 자연스럽게 ‘나는 왜 없을까?(안 될까?)라는 한숨으로 이어지고, 그 숨을 다 뱉을 때쯤 우리는 묘한 패배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못 가졌으니 진 거야.’

맞다 부러우면 지는 거다. 그래서 부러워하면 안 된다. ‘졌다’는 느낌처럼 참담한 기분은 없으니, 부러워하지 않으면 패배도 없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사회는 확실히 경쟁 사회다. 이렇게 기어이 승자와 패자를 정해야만 편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살다보니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매번 진다.

나는 이긴 적이 없다. 열심히 살았는데……. 겨우 이 정도야 억울했다. 차라리 열심히 살지 않았더라면 덜 억울했을 텐데……. 계속 지는 느낌이다. 그런데 나는 누구에게 지고 있는 걸까? 고민하는 내게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됐고. 열심히 사니까 그 정도라도 사는 거다.”

■ 열심히 사니까 자꾸 승패를 따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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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6년 차 일러스트레이터다. 6년 동안 그림을 그렸지만,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눈에 띄는 작품도 없는 무명배우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무명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아무래도 수입일 것이다. 무명배우들이 생계를 위해 다른 부업을 하듯 나 역시 부업으로 회사를 다녔다.

그래서 열심히 회사를 다니고 열심히 그림을 그렸다. 긴 백수시절에서 막 탈출할 시점이었던 터라 일을 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했다. 하나도 아니고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다니. 야호! 신난다. 그렇게 열심히 몇 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투잡을 하고 있었고 조금씩 지치기 시작했다..

뭔가 잘못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초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는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몸에 ‘독’이 잔뜩 쌓인 걸까? 분명 형편이 더 나아졌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좀처럼 만족하지 못했다. 그랬다 나는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열심히 달리는데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는, 전쟁에서 진 패배자라고 느끼고 있었다. 지는 기분은 더럽다.

■ 지는 게 싫어서 열심히 살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먹은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회사를 그만 두는 일이었다. 굳이 회사를 그만둘 필요가 있었을까 싶지만 아무래도 회사에 다니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열심히 살게 될 테니까, 아침 일찍 일어나 만원 전철에 몸을 구겨 넣고, 한 시간 넘게 달려 회사에 도착하는 것만으로도 엄청 열심히 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그만뒀다.

나도 모르는 사이 어떤 ‘경주’에 참가했었는데 지금은 그 경주를 기권한 기분이다. 경주에 참여하지 않으니 당연히 승리도 패배도 없다 그런데 궁금한 건 그 경주가 무엇이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 경주의 타이틀은 무엇이었을까?

‘누가 돈을 더 많이 버나’ 대회?

‘누가 먼저 내 집 장만하나’ 대회?

‘누가 먼저 성공하나’ 대회?

도무지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경주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고 무진장 애를 쓰며 열심이었던 모양이다. 그만 두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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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나는 성적을 낼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경주 바깥의 사람이니까. 사람들도 그걸 눈치챘는지 그다지 내 성적표를 궁금해 하지 않는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의 경쟁자가 아닌 것이다. 응? 이거 좋은 거 맞지?

■ 내 열정은 누굴 위해 쓰고 있는 걸까

우리 사회는 열정을 가진 사람을 좋아한다. 열정이라는 건 좋은 거니까. 이름만 들어도 가슴에서 뭔가 뜨끈하게 느껴지는 기분이다.

무언가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심인 사람을 싫어할 이는 없다. 그런데 열정이 ‘있으면 좋은 것’에서 당연히 ‘있어야 하는 것’이 되어가는 현실은 뭔가 좀 불편한 구석이 있다. 모두가 힘을 모아 말한다. 열정을 가져야 한다고 열정 없인 이룰 수 있는 게 없다고, 열정에 관한 명언과 책들, 그리고 죽은 열정도 다시 살려준다는 강연이 넘쳐난다.

세상이 열정을 강요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열정이 안 보이면 불성실하다고 여긴다. 이처럼 열정이 당연한 세상이 되어버렸으니 열정을 가지지 못하면 불리하고 불안하다. 없는 열정을 만들어서라도 가지고 싶어진다. 수많은 ‘열정 콘텐츠’가 주목받는 이유다.

“제 일에 열정이 없어서 걱정이에요”

열정은 스스로 일어나는 것이지 절대 강요로 만들어질 수 없다. 열정은 사랑이다. 그 일을 사랑하는 것에서 열정은 시작된다. 물론 사랑하려고 노력하다보면 사랑이라는 마음이 생길 수도 있지만 별로 권하고 싶지 않다.

정말 좋아서 하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은 돈을 벌기 위해 일한다. 노동의 대가로 돈을 받는 것이다. 거기에 열정까지 요구하는 건 좀 너무하다 싶다. 안 생기는 열정을 억지로 만드는 건 스트레스다.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하던 일을 하면 된다. 언젠가 열정은 저절로 생긴다. 지금 하는 일일 수도 있고, 다른 일일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생기면 그때 열정을 쏟으면 된다.

세상은 우리에게 열정을 가지라고 강요하고 그 열정을 약점 잡아 이용하고 착취한다. 그래서 열정을 함부로 드러내는 건 위험하다. 이런 세상이라면 차라리 열정이 없는 편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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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열정은 좋은 거다 나를 위해 쓰기만 한다면 말이다. 내가 어떤 것에 열정을 쏟고 있다면 그 열정이 나를 위한 것인지 남을 위한 것인지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알기론 열정이라는 것은 그렇게 자주 생기는 것도, 오래 가는 것도 아니다. 열정을 막 쥐어짜 내서도, 아무데나 쏟아서도 인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열정도 닳는다. 함부로 쓰다보면 정말 써야 할 때 쓰지 못하게 된다. 언젠가는 열정을 쏟을 일이 찾아올 테고 그때를 위해서 열정을 아껴야 한다. 그러니까 억지로 열정을 가지려 애쓰지 말자.

■ 마이 웨이

끝이 없다. 나에게 걸맞게 ‘당연히 갖추어야 할 것들이 이렇게 많을 줄이야. 우리 사회엔 ’이 나이‘면 ’이 정도‘는 하고 살아야한다는 ’인생 메뉴얼‘이라는 게 존재한다. 실제로 그걸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모두가 그걸 알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맞춰 살려고 노력한다. 그렇게 살지 않으면 불안하니까. 나만 뒤처지는 것 같으니까.

어릴 때는 그 매뉴얼의 압박이 크지 않았다.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지닌 시기고, 앞으로가 기대되니 지금 당장은 많은 걸 못 가져도 괜찮다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면 세상의 눈은 매정하게 바뀐다. ‘그 나이 먹도록 뭐했니?’라는 식이다. 그러게 저는 뭘 했을까요?

나는 이 나이에 결혼도 안 하고, 월세에 살고, 자동차가 없지만 불편하거나 비참하지 않다. 문제는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본다는 것이다. 정작 나는 괜찮은데 사람들이 나를 불쌍하게, 한심하게 보니 나 좀 비참해지려고 한다. 아니, 확실히 비참하다. 원래는 비참하지 않았는데 왜 타인의 평가에 따라 괜찮았다가 불행했다가 하는 것일까?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도대체 왜 결혼을 안 한다는 거예요?”

아주 오래 전의 일이다. 독신주의인 내게 누군가가 아주 당당하게 그리고 무례하게 물은 적이 있다. 결혼은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왜 안 하냐고, 이해할 수 없다고 묻는데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하고 싶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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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악의 없이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은 것이겠지만 나에겐 폭력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다수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따르지 않는 자에게 행해지는 폭력, 왜 안 따라? 설명해봐.

그동안 남들이 가리키는 것에 큰 의문과 반항을 품고 살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도 않았다. 나는 항상 타인의 시선이 신경쓰였고. 그들 보기에 괜찮은 삶을 살려고 애써왔다. 잘 안 됐지만 말이다. 사실 가능하면 ‘인생 매뉴얼’에 맞춰 살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참 쉽지가 않았다.

내가 이 나이에 정말 부끄러워 해야 할 것은 내 나이에 걸맞은 것들을 소유하지 못한 게 아니라, 나만의 가치나 방향을 가지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 우리의 소원은 부자

‘부자 되세요.’

지금은 덕담으로 흔히 건네는 말이지만, 한국 사람들이 원래부터 이런 인사말을 즐겨 사용했던 건 아니다. 그 광고가 있기 전까진.

때는 2000년대 초, 한 카드회사 광고에 유명 배우가 나와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라고 외쳤다. 광고는 대박이 났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나의 기억에도 선명하다.

“부자 되세요.”는 순식간에 전 국민의 유행어가 됐다. 너도나도 서로에게 “부자 되세요.”라고 인사하며 금방이라도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달콤한 꿈을 꿨다. 그 후에도 비슷한 인사로 “돈 많이 버세요.”나 “대박 나세요.”가 등장했다.

물론 잘 산다는 게 꼭 부자를 의미하진 않는다. 적어도 그 광고 이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그 광고는 다양하고 모호했던 사람들의 목표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오직 하나의 목표를 국민에게 제시했다. 부자, 부자가 돼라. 국민은 단순하고 명쾌한 목표에 열광했다.

IMF이후 대한민국은 돈의 중요성을 그 어느 때보다 뼈저리게 느꼈다. 국가나 회사만 믿고 넋 놓고 있다가는 큰일 난다는 위기의식이 퍼져 나갔다. 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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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은 불안해했다. 때마침 나온 ‘부자가 되자’는 목표는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유일한 길처럼 보였다. 부자는 더는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내 목표이자 우리의 목표였다.

나도 부자가 되고 싶었다. 겉으로는 “나는 부자까진 바라지 않아. 그냥 돈 걱정 안 하고 살 정도로 벌었으면 좋겠어”라고 점잖을 떨었지만 그 말이 결국 부자가 되고 싶다는 말이었다. 결과는 다르게 속으로 부자를 갈망하고 있었다.

가능하면 필요 이상의 많은 돈을 갖고 싶었다. 써도 써도 줄지 않을 돈을. 하지만 나는 부자가 되지 못했다. 나뿐만 아니라 서로 “부자 되세요.”라고 응원해주던 국민 대부분이 부자가 되지 못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 우리 대부분은 왠지 모를 패배감과 자괴감을 느끼며 살아가게 됐다.

처음엔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덕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대 한 편으로 생각하면 “부자 되세요.”는 강요처럼 들린다. “꼭 부자 되세요. 부자가 안 되면 비참해져요. 부자가 제일 좋은 거예요. 다른 것은 별로 가치가 없어요.”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요즘 에세이를 쓰고 있다는 말을 했더니 곧장 이런 질문이 날아왔다. 그거하면 부자되냐?”

흔히 돈은 수단이어야 하지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돈이 목적인 삶을 살아왔다. 부끄럽지만 나도 그 중 하나였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어디있어?”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거 다 할 수 있는데…….”

이런 마음이었다. 그러나 돈은 내게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부자 되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이제껏 애를 써봤는데 아무래도 부자 되기는 글렀다. 나는 여기까지. 날 두고 먼저들 가게.

“이제부터는 부자를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거다.”

포기해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런대 포기하고 나니 아쉬운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마치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될 수 있었던 것처럼…….

그냥 부자가 될 걸 그랬나? 아니다 이제 안 해. 안 한다고.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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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은 하나가 아닌데

나는 불치병에 걸렸었다. 미대 입시를 준비하는 입시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병이 있다. 그 병의 이름은 ‘홍대병’, 다른 대학에 붙어도 홍대다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재수를 하고 떨어지면 또다시 도전하고, 그렇게 일곱 번 무려 7년간 입시생 생활을 할 만큼 무서운 불치병이었다.

어쩌면 그때 멈췄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부모님 몰래 자퇴를 했다. 학교에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다시 입시 준비를 했다. 4수였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나에겐 그곳에 가는 것만이 유일한 희망이었고 다른 길은 없었다.

아, 홍대병에 걸려 7수를 했다던 그 입시생, 거짓이 아니었구나. 바로 나같은 인간이 그런 입시생이 되는 것이었구나. 고작 대학교의 간판을 위해 7년이라는 세월을 보낼 가치가 있을까 싶지만, 그때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눈에 뭔가가 씐 게 분명했다. 시간이 흘러서 다시 겨울이 오고 홍대 입시를 치렀다. 그리고 그해 나는 네 번의 도전 만에 홍대에 합격했다.

이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고 도전해서 꿈을 이룬 성공 스토리쯤으로 읽었다면 한참 잘못 읽은 거다. 이건 잘못된 목표가, 오직 한 길밖에 없다는 믿음이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고생고생해서 홍대에 입학했지만 내 인생은 변하지 않았다. 캠퍼스 낭만이나 배움의 열정은 개뿔, 오직 학비를 벌기위한 노동만이 있을 뿐이었고 대기업들이 스카우트 한다는 소문은 말 그대로 소문이었다. 각자 알아서 자기 살 길 찾느라 바빴다. 그리고 나는 길을 잃었다.

4년째 공무원 시험에 낙방하여 자살을 택한 한 공시생의 소식을 뉴스를 통해 들었다. 어머니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가던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그 청년은 목을 맸다. 얼마나 괴로웠을까?

고작 공무원 시험에 목숨을 버리느냐고, 공무원이 목숨을 걸 만큼 일생일대의 일이냐며 이해가 안 갈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무언가에 집착하기 시작하면 다FMS 것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조금만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면 다른 길들이 있는데, 그때는 그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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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않는다. 오직 하나, 이 길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순간 비극은 시작된다. 길은 절대 하나가 아니다. 그리고 그 길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가보면 그 길이 자신이 원하던 길이 아닌 경우도 많다.

"나는 절대 포기하지 말라“라는 말을 싫어한다. 목숨 빼곤 다 포기해도 좋다고 샐각한다. 나처럼 4년 혹은 그 이상 매달리는 것은 집착이다.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처럼 잔혹한 말은 없다. 그 목표를 절대 포기할 수 없어서 자신의 목숨을 끊다니 이런 비극이 어디 있단 말인가.

세상에는 많은 길이 있다.

어떤 길을 고집한다는 것은 나머지 길은 포기하고 있다는 이야기와 같다.

이미 많은 것을 포기했으니 그것 또한 포기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너무 괴롭거든 포기해라. 포기해도 괜찮다. 길은 절대 하나가 아니니까.

■ 아이 캔 두 잇 (I can do it.)

주식 투자에 열을 올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 일확천금의 꿈을 꿨다. 주식으로 대박나서 하던 일을 다 때려치우는 달콤한 꿈 말이다. 처음에는 주식으로 돈을 조금 벌었다. 곧 기대에 휩싸였고 힘들게 모은 돈을 모조리 주식에 넣었다. 결국 값비싼 수업료를 치른 후 정신을 차렸고, 지금은 주식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주식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기술 중 하나는 바로 ‘손절매’다. 손절매란 주기의 하락으로 손해가 났을 때, 더 큰 손해를 막기 위해 실패를 인정하고 보유한 주식을 팔아버리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투자한 게 얼만데, 아까워서라도 포기할 수 없어.”

본전 생각에 포기하지 못하는 마음을 두고 ‘콩코드 오류’라고 부른다. 1976년 처음 취항한 콩코드는 영국과 프랑스의 합작으로 만든 세계 최초의 초음속 여객기다. 어마어마한 돈, 두 정부의 기술력을 자랑할 요량으로 만든 것이었으나 효율과는 거리가 멀었다. 높은 탑승 비용, 낮은 연비, 잦은 고장으로 최악의 여객기라 불리는 평가를 받았지만 두 정부는 콩코드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자존심 상 실패를 인정할 수 없었고, 지금까지 투자한 돈이 아까워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자, 여론에 밀려 2003년 콩코드 프로젝트는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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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는 비굴한 실패라고 배웠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현명한 삶을 살기 위해선 포기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우리는 ‘인내’나 ‘노력’같은 기술을 이미 수도 없이 익히며 살았지만, 포기하는 기술은 배우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포기하지 말라고 배웠다. 그래서 포기하지 못해 더 큰 걸 잃기도 한다.

현명한 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실패를 인정하는 용기, 노력과 시간이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했더라도 과감히 버릴 줄 아는 용기, 새로운 것에 다시 도전할 수 있는 용기. 현명한 포기는 끝까지 버티다 어쩔 수 없이 하는 체험이나 힘들면 그냥 포기해버리는 의지박약과는 다르다.

타이밍을 놓치면 작은 손해에서 그칠 일이 큰 손해로 이어진다. 무작정 버티고 노력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겐 노력보다 용기가 더 필요한 것 같다. 무모하지만 도전하는 용기 그리고 적절한 시기에 포기할 줄 아는 용기 말이다.

■ 노력의 시대는 갔다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 시대가 됐다. 그냥 노력 말고 ‘노오력’을 해야 한단다. 그런데 ‘노오력’을 하고 ‘노오오력’을 한다고 별로 달라질 것 없는 세상이다. 모두가 노력하는 세상에선 노력이 티가 나지 않는다. 모두가 노력하니 기준만 높아져서 더 힘들어진다. 흡사 트레드밀(러닝머신) 위에서 달리는 기분, 달려도 달려도 제자리인 기분 말이다.

금수저들과는 경쟁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출발선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저만치 앞에 서 있는 사람과 경쟁이라니요? ‘수저 계급론’은 노력이 무상해지는 세상을 살아가는 ‘흙수저’들의 한탄이다.

수저 계급론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열심히 노력하면 달라질 거란 희망, 그 믿음 하나로 버텨온 세월이었다. 노력은 종교였다. 노력은 고마운 것이었고 확실한 효과도 있었다. 노력으로 자신의 타고난 환경을 이겨낸 사람들의 신화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자신을 탓하는 것도 지쳤다. 화가 난다. 더 노오력 하라고? 내가 이 모양인 건 노력을 안했기 때문이라고? 이건 모욕이다. 금수저는 노력해서 금수저가 됐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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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변했는데 그들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읽지 못하고 과거의 가르침만 준다. 어쩌면 그들도 마땅한 대안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나 역시 그렇다. 노력이 잘 안 통하는 것을 느끼면서도 노력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으니 노력을 멈출 수 없다.

좀 과격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노력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실패했다. 그리고 우리는 다음을 준비하지 못했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요즘 젊은이들은 노력하라는 잔소리에는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나부터도 와닿지 않으니 말이다.

■ 득도의 시대

요즘 일본 젊은이들을 일컬어 ‘사토리 세대’라 부른다. 사토리는 ‘깨달음, 득도’라는 뜻인데, 말 그대로 어떤 꿈이나 욕망 없이 현실에 만족하며 득도한 사람처럼 살아간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대한민국의 ‘N포 세대’와 비슷한 개념이지만 사토리 세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들에겐 원래 욕망이 없다고 얘기한다. 그래서 불행하지 않다고,아아, 이들은 과연 살아 있는 부처란 말인가.

일본과 한국의 젊은이들이 ‘득도’하고 ‘포기’하게된 이유는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을 젊은이들 개인의 노력이나 의지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은 정말 무책임하고 손쉬운 해석이다.

사회가 개개인의 모든 인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꿈을 꾸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는 세상, 열심히 일하면 내 집 하나 정도는 마련할 수 있고 가정을 꾸릴 수 있는 세상이라면 어떤 사람이 꿈꾸지 않고 미래를 포기하겠느냐는 말이다. 노력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들의 꿈을 빼앗고 포기하게 만든 건 세상이다.

사토리 세대는 자신의 선택으로 득도의 길로 가게 된 것이 아니다. 선택할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다. 그야말로 ‘뜻밖의 무소유’신세다.

그들은 결코 인생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렇게라도 인생을 살아내고 싶을 뿐이다.

사토리 세대가 생겨난 현실은 안타깝지만 나는 그들을 부정적으로도 긍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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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으로도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살기 힘든 이 시대가 낳은 필연적인 현상이지 좋다 나쁘다 판단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섣불리 그들을 동정하거나 훈계하려 들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치열하게 투쟁하고 있다.

‘득도’나 ‘포기’는 세상을 향한 그들의 자조 섞인 한탄이다. 그들이 자신을 비웃는다고 해서 기성세대가 같이 비웃어선 안 된다.

지금 밖엔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뛸 사람은 뛴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폭풍우가 그치면 더 많은 사람이 뛸 수 있다. 개인들을 닦달해서 폭풍우 속을 뛰게 만들지 말고 폭풍우가 잦아들어 뛰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게 먼저 아닐까?

■ 청춘의 열병

청춘(靑春). 사전에 청춘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10대 후반에서 20대에 걸친 인생의 젊은 나이라고 되어 있다. 요즘은 수명도 늘어났으니 30대 까지는 청춘이라고 봐 주는 것 같지만 40대라면 청춘이라 부르기 민망해진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나는 청춘이 아니다. 내 청춘은 끝났다.

청춘이 끝나서 아쉽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기쁘기도 하다. 그 이유는 청춘의 열병을 심하게 앓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불투명하고 어둡게만 보이던 시절, 그때는 하고 싶은 것과 현실적인 문제 사이에서 갈팡질팡 방법도 모르고, 용기도 없고, 그저 삶에 끌려다니는 기분이었다. 치열하게 고민했지만 자주 화가 났다.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참 많이도 앓았다.

나이가 들면 고민도 덜하고 눈앞이 좀 두렷해질 줄 앓았는데 지금과 똑 같다고? 청춘의 한복판에 서 있는 이가 이 글을 읽는다면 아마 절망할지도 모르겠다. 미안하다 나도 환장하겠다.

몇 년 전, 회사에 다니고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당시 나는 퇴사를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를 두고 고민하고 있었다. 이상과 현실을 저울질하며 몇 날 며칠을 고민한 끝에 3년만 더 꾹 참고 일해보자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회사가 없어졌다. 사장님이 직원들을 불러놓고 회사를 접어야 겠다고 선언했다. 최근 매출도 감소했고 업계 전망도 안 좋고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폐업을 결정했다는 이야기였다. 아아, 내가 했던 고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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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뭐란 말인가? 내 현명한 선택과 3년 계획은 또 뭐고?

우리는 인생을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있다고 믿지만, 한낱 파도에 휩쓸리는 힘없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운명론자는 아니다. 하지만 인생엔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짝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든 것이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생각은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었다. 내가 아무리 이쪽으로 가려고 해도 큰 흐름이 나를 저쪽으로 데리고 가는 일이 더 많다. ‘내가 다른 선택을 했어도 결국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계단의 시작과 끝을 다 보려고 하지마라. 그냥 발을 내딛어라.”

- 마틴 루터 킹

■ 잘 그리고 싶어서

이상하다. 분명 펜을 꽉 쥐고 꿈꾸던 대로 잘 따라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왜 이런 모습이 되어 있는 걸까? 삐뚤삐뚤 내가 꿈꾸던 모습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얼마나 잘 그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 모양이라니. 싹 다 지우고 다시 그릴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래도 이번 생은 글렀나 보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종종 손가락이 아프다. 나는 손가락이 왜 아픈지 알고 있다. 연필을 너무 세게 쥐어서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다보면 손가락에 쥐가 나기도 한다. 연필을 세게 쥐면 더 잘 그려지냐고? 천만의 말씀, 오히려 잘 안 그려진다.

잘 그리는 요령은 손에 힘을 빼는 것이다. 연필이 손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로만 가볍게 쥐고 그려야 더 잘 그려진다. 당연히 처음엔 가볍게 쥐고 시작하지만 점점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건 절대 내 의지가 아니다.

“잘 하고 싶어서. 틀리고 싶지 않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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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마음 때문에 힘이 들어간다는 건 경직된다는 것.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 욕심을 내고 있다는 것, 겁을 먹고 있다는 것이다.

뭐든지 힘이 들어가서 잘 되는 걸 못 봤다. 그림도, 노래도, 운동도 어쩌면 인생도 그럴지 모르겠다.

인생을 막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인생 앞에선 누구나 진지해지기 마련이다. 잘 살고 싶어서 필사적이다. 이를 악물고 두 손을 꽉 쥐니 저절로 힘이 들어간다. 힘을 주고 버티느라 어깨가 단단하게 뭉친다.

우리는 힘을 빼고 살아본 적이 없다.

힘을 빼면 넘어지고, 뒤처질까봐 힘을 뺄 생각을 못했다. 부끄럽지만 겁을 먹었다. 힘을 뺀다는 건 딱딱하지 않다는 것, 유연하다는 것, 자연스럽다는 것, 욕심을 내지 않는다는 것, 겁을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 우리 힘내지 말고 힘을 빼자. 뭉친 근육을 풀어 유연하게 만들자. 쉴 새 없이 날아드는 펀치를 가만히 서서 맞고만 있지 말고 가볍게 피해보자. 하고 싶은 게 있다면 겁내지 말고 한 걸음 내 디뎌 보자. 넘어져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일어나보자.

괜찮아, 자연스러웠어. 그렇게 …….

■ 인생은 수수께끼

흔히 인생을 수수께끼에 비교하곤 한다. 우리 앞에 놓인 알 듯 말 듯 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것이 꼭 수수께끼를 닮았다. 저마다 정답을 찾으려 애를 쓰지만, 풀면 풀수록 더 미궁으로 빠지는 것 같다는 점이 이 수수께끼의 함정이다.

진작 눈치 챈 사람들도 있겠지만. 인생에 정답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심지어 이 문제의 출제자는 처음부터 정답 따위는 만들어 놓지도 않은 듯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해서 수수께끼를 풀고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왜 이런 답도 없는 문제를 내고 풀게 한 걸까?

수수께끼의 본질은 재미에 있다. 그렇다. 재미있자고 던진 문제에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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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죽자고 덤빈 건 아닐까? 답을 찾는 데만 집중하느라 문제를 푸는 재미를 잃어버린 건 아닐까? 수수께끼는 꼭 맞춰야 하는 게 아니다. 틀려도 재미있는 게 수수께끼 아니던가. 그리고 이 수수께끼는 어차피 정답이 없다.

2부 한 번 쯤은 내 마음대로

- 방전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하는 게 아니라, ‘덜’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좀 덜 하고, 노력도 좀 덜 하고 후회도 좀 덜하면 좋겠다.

■ 어른은 좀 놀면 안 되나요.

어른들은 노는 걸 싫어한다.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죄악시 하는 것 같다. 그들은 ‘개미와 베짱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어린 나를 협박했다. 봤지?“ 노는 건 이렇게 나쁜 거야. 나는 겁을 먹었다. 그렇게 무서운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노는 대가가 베짱이처럼 빌어먹고 사는 거라니, 어느 새 노는 것은 무의식에 죄악으로 자리 잡았다.

세월이 흘러 나는 어른 개미가 됐다. 열심히 곡식을 모았지만 그걸로는 집도 하나 살 수 없었고, 간신히 먹고 사는 정도였다. 그래도 빌어먹지는 않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빌어먹을 베짱이, 보고 있나?

어릴 땐 어른들이 못 놀게 해서 못 놀았지만 어른이 되면 조금은 선택권이 있을 줄 알았다. 놀고 싶으면 놀 수 있는 어른이니까. 그러나 어른이 되고 보니 어째 더 못 노는 것 같다. 누가 못 놀게 하는 것도 아닌데 이젠 어른이 된 내가 나 자신을 못 놀게 한다. 확실히 어른들은 노는 걸 싫어한다.

아니다 사실은 어른들도 놀고 싶다. 너무너무 놀고 싶다.

나라고 다르지 않다. 나 역시 놀고 싶었지만 놀아야 할 명분을 찾지 못해 계속 일개미로 살았다. 그러다 명분을 하나 찾았는데 그건 ‘일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돈이 있다면’ 이었다.

그렇다. 그만큼의 돈을 벌면 마음껏 놀아도 된다. 열심히 일 한다. 부지런히 저축한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러 깨닫는다. 티끌은 모아도 티끌이구나. 나는 결국 놀지는 못하겠구나. 노인이 돼서 일하지 못하게 됐을 때야 놀겠구나. 종로에 있는 탑골 공원에 앉아 비둘기 밥이나 주면서……. 아, 재미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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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지금 내 방황의 이유는 모두 놀기 위한 명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나는 그냥 놀고 싶은 거다.

참 대책 없는 어른이다. 여기서 잠깐, 우리 엄마에겐 비밀이다. 내가 놀고 싶어서 회사를 그만 둔 걸 엄마는 모른다. 그냥 회사 사정도 어려워지고, 그림 의뢰가 많아져서 그만 둔 줄 알고 있다. 사실을 알면 분명 등짝 스매싱이 날아올 게 뻔하다.

“대체 언제 철들래? 얼른 취직자리 알아봐!”

나는 일개미에서 베짱이가 됐다. 매일매일 노래를 부르며 산다. 사실 나는 언제나 베짱이가 되고 싶었다. 겁에 질려 개미가 된 것일 뿐, 이젠 겁내지 않는다. 아니, 조금은 겁이 난다. 그래도 베짱이가 좋다.

추운 겨울이 오면 어떡하냐고? 그때가 되면 작곡이라도 해볼까 싶다. 아니면 에세이라도 하나 써볼까? 제목은 ‘하마터면 개미처럼 살 뻔했다’가 좋겠다. 혹시 베스트셀러하도 돼서 놀고먹을 수 있을지.

■ 퇴사의 맛

퇴사는 달콤하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다. 아침 알람 소리에 일어나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끝! 그거면 설명이 끝난다.

월요병? 그게 뭔가요? 먹는 건가요?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다는, 달력에 빨간 날이 며칠이나 되는지 체크하지 않는다. 싸게 나온 항공권을 발견했다고? 날짜를 확인 할 필요 없이 그냥 사면된다. 언제든 떠날 수 있으니까.

싫어도 봐야 했던 그 인간들? 안 봐도 된다, 이제 만나고 싶은 사람들만 만난다. 평일 낮에 돌아다니면 한가해서 좋다. 단 그 시간에 일어날 수 있다면.

하루의 2/3를 자기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다. - 니체

자유의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처음엔 퇴사의 달콤함에 취해 마냥 좋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알게 된다.

“달콤함만으론 살 수 없다는 걸. 자유가 밥 먹여주지는 않는다는 걸,”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달콤했던 자유는 순식간에 맛이 변하고 만다. 불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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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불안의 맛, 그 맛이 느껴지면 뇌에선 괜히 퇴사했다는 후회가 마구 분비된다. 달콤함은 끝났다. 아아, 고작 이 짧은 달콤함을 즐기려 퇴사했던가. 이제 나는 회사의 노예가 아닌 불안의 노예다.

영화 <쇼생크 탈출>엔 ‘브룩스’라는 인물이 나온다. 젊은 시절 감옥에 들어가 50년 이상 장기 복역을 하고 이제는 호호 할아버지가 된 인물이다. 별다른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50년을 모범수로 살아온 브룩스, 그런 그가 동료 의 목에 칼을 들이대고 난동을 부리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의 가석방 소식을 듣게 됐기 때문이다. 브룩스는 자신을 감옥에서 내쫒지 말라고 울부짖는다.

옥에서 나가 자유의 몸이 된다는 데, 그는 전혀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두려워 한다. 출소한 브룩스는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너무도 변해버린 바깥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자살을 택하고 만다. 길들여진다는 건 이렇게나 무섭다.

■ 실연의 아픔

프리랜서. 어딘가로 출근 하지 않아도 되는 삶, 알람 같은 건 맞출 필요도 없고 온종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상사의 눈치를 볼 일도 없는 삶은 얼핏 좋아 보이지만 직접 겪어보면 더 좋다. 물론 돈을 벌어야 하지만, 나처럼 부지런히 그림을 그려 홍보하지 않는 날라리 작가는 의뢰가 별로 없어서 돈 대신 자유로운 시간을 많이 얻는다. 응? 이거 좋은 거 맞나?

자유로운 시간이 많은 건 참 좋은데 문제는 언제나 돈이다.

프리랜서의 삶은 언제나 불안하다. 아마도 이런 불안함 때문에 많은 사람이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는 것이겠지. 나 역시 그랬으니까.

프리랜서가 된 지금은 자유로운 시간이 많다. 그러나 자유로운 시간을 누리기 위해선 비용이 듣다. 내가 자유를 팔아 모아뒀던 돈을 고스란히 다시 자유를 사는데 쓰고 있는 셈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그러고 보면 직장인들이 자신의 자유(시간)를 팔아 번 돈을 열심히 모으는 이유도 나중에 자유롭게 살고 싶어서가 아닌가. 결국 그렇게 힘들게 모은 돈은 다시 자유를 사는 데 쓰이게 될 테니 지금의 내 상황과 크게 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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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아 보인다. 이런 걸 생각하면 인생은 커다란 모순처럼 느껴진다. 이걸 누구에게 따져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처럼 자유로운 시간을 가지면서도 돈도 계속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욕심이다. 운 좋은 누군가는 둘 다 가질 수 있겠지만 나 같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

나는 돈과 자유 중에 자유를 선택했다.

월급을 포기하고 그만큼의 돈을 써가며 매들 자유를 산다. 내가 돈 주고 산 자유니 당당하게 즐기지 못하면 돈이 아깝다. 그러니까 통장 잔액은 그만 확인하고 좀 놀아라! 불안해하지 말고! 정 불안하면 돈을 벌던가.

어쩌면 우리는 정말 원하는 걸 모르고 헛된 것들로 허기를 채우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대낮에 소파에 앉아 멍하니 있다 보면 어느새 날이 어둑해진다. 정말 아무것도 안 했는데 하루가 다 지나가 버린다. 시간은 금이라는데, 예전 같으면 아까워서 뭐라도 했을 시간을 이렇게 막 쓰고 있다. 평생 낭비라는 것을 해 본 적이 없는 내가 마음껏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뭐니 뭐니 해도 낭비는 인생 낭비만한 게 없다.

하루를 온전히 나를 위해 쓴 것 같은 기분, 낭비가 아니라 무언가로 가득 채워지는 기분이다. 무언가를 해야만 의미 있는 시간이 아니다. 때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 더 큰 의미가 있다. 나에겐 그런 시간이 필요했다.

영원히 이렇게 사는 건 좀 문제가 있다. 나 역시 영원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삶을 원하는 건 아니다. 단지 지금은 이러고 싶디. 조금만 더 채워질 때까지. 나는 방전됐던 모양이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해야 했고 하려고 애쓰는 동안 다 써버린 에너지를 이렇게 아무 것도 안 하면서 다시 채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지금 충전중이다.

‘번 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 이란 증상이 있다. 충분한 휴식 없이 너무 일에 몰두하다 보니 정신적 에너지를 다 소진해버려 무기력과 우울, 자기혐오 등에 빠지는 증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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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아웃 상태까진 아닐지라도 우리 대부분은 에너지가 간당간당 하다. 가끔 휴식을 위한 시간이 주어지지만 터무니없이 짧다. 당연히 귀한 휴식이니 함부로 쓸 수가 있나. 제대로 된 계획으로 제대로 된 휴식을 보내기 위해 우리는 또 애쓴다. 쉬는 동안에도 온전히 쉬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은 뇌의 95퍼센트를 과거와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쓴다고 한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우리는 현재를 살지만 현재에 집중하진 못한다. 고작 5퍼센트의 뇌로 현재를 살고 있으니 금방 방전 될 수밖에 없다. 방전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더’하는 게 아니라 ‘덜’하는 게 아닐까? 걱정도 좀 덜하고, 노력도 좀 덜하고, 후회도 좀 덜 하면 좋겠다. 그것이 방전되지 않는 지혜가 아닐까?

그럼, 다시 나는 아무것도 안 하러 가야겠다.

■ 아직 위로는 필요 없습니다

요즘 날 바라보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심상치가 않다. 뭐랄까. 딱히 말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안쓰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든가 같이 밥을 먹거나 카페에 가서도 굳이 자기가 계산하겠다고 떼를 쓴다든가 하는데, 이거 아무래도 위로 같다. 아,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 되어버린 걸까?

“열심히 살지 않겠다.”라는 선언이 사람들에겐 “인생을 포기하겠다”는 말처럼 들린 모양이다.

열심히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세상, 그런 세상은 얼핏 좋아 보이지만 반대로 열심히 사는 걸 강요당해도 찍소리 못하는 세상이라는 얘기가 된다.

나는 인생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잘 살고 싶은 마음에서 열심히 살지 않기로 결심했다.

욕심도 버리지 않았다. 지금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고, 내 집도 있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것들을 얻기 위해 무조건 열심히 살고 싶지는 않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서 그 많은 걸 바란다고? 간절함 없이 얻을 수 있는 건 없어!"

만약 이런 이유로 그것들을 가질 수 없는 거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마음을 포기가 아니라 무심함이라 부르고 싶다. 원하지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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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못해도 괜찮은, 가지면 좋지만 가지는 것이 삶의 목표가 아닌, 욕심이 없지는 않지만 욕심 때문에 괴롭지 않은 그런 마음이고 싶다. 열심히 살지 않는다는 건 일을 안 하거나 돈을 벌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 혼자만의 시간

그것이 나의 첫 사회생활이었다. 학교 말이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는 단체 생활을 해 본 적이 없다. 우리 집은 유치원에 다닐 형편이 못 되었다. 입학되기 전의 기억이 많지는 않지만 주로 혼자 놀았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갑자기 학교라는 곳에 들어가고 단체 생활을 하게 됐다.

시간이 지나 학년이 올라가면서 단체 생활이 좀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인간관계는 어려웠다.

학교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어린 아이의 걸음으로 3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별다른 교통편이 없었기에 걸어 다녔다.

나는 같은 방향끼리 짝을 지어 하교하는 게 싫었다. 같은 방향의 친구들을 따돌리거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혼자 집에 가는 걸 좋아했다. 그 30분이 나 혼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걸으면서 여러 공상을 하다보면 어느 새 집에 도착해 있었다. 어떤 날은 집이 좀 더 멀었으면 하고 바란 적도 있으니 그 시간을 어지간히 좋아한 모양이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도 인간관계는 계속됐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사회…….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조금 익숙해졌나 싶다가도 사람 때문에 참 힘들었다. 어느 새 내 마음엔 격언처럼 한 문장이 자리 잡았다.

사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사람. 혼밥, 혼술, 혼영(혼자 영화보기)……. 뭐든지 혼자 하는 게 유행(?)인 세상이 됐다. 1인 가구의 증가와 개인주의 시대의 도래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는데, 나는 어쩐 일인지 어린 시절의 하굣길이 떠올랐다. 혼자가 편한 사람들,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는 건 아닐까? 당연히 함께하는 것으로 알았던 것들마저 혼자 하고 싶을 만큼…….

눈치보고, 맞춰주고, 참아주고, 손해보고, 비교 당하고…….인간관계는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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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다. 자꾸 내 권리가 뺏기는 것 같고, 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인간관계를 끊을 수 없고 . 에라, 밥이라도 편하게 먹자. 그렇게 혼자를 택한 사람들이 늘고 있다.

혼자 있고 싶은 마음, 결국 이런 마음도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기에 드는 것이다. 무인도에 혼자 있게 된다면 혼자 있고 싶은 마음 따위가 들 리 없다. 자꾸 혼자 있고 싶어진다면 그만큼 인간관계로 힘들다는 이야기다.

혼자 있는 시간은 필요하다. 그 시간은 치유의 시간이다. 인간관계로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해 주는 시간, 그렇기에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술 마시고 얼마든지 혼자 하는 걸 즐겨도 되지 않나 싶다. 단 그러고 나서는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피곤하고 짜증나는 사람들 속으로. 그 사실만 잊지 않으면 된다.

돌아올 집이 없다면 여행이 여행일 수 있을까?

정말 외톨이라면 외로움을 즐길 수 있을까?

혼자만의 사간은 다시 돌아오기 위한 여행이다. 잠시 떨어져 바라볼 줄 아는 지혜다. 정말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서 잠시 떨어져 있을 줄 아는 사람, 혼자 있는 외로움을 잘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혼자 있는 게 편하지만 결국 혼자서 살 수 없다는 걸 아는 사람, 외로움을 충분히 즐기고 나선 다시 사람들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기꺼이 함께 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고 싶다.

■ 넌 나고 난 너야

지금 생각해도 나의 아버지는 이상한 사람이었다. 이미 돌아가시고 없는 사람들 욕되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버지는 확실히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일하러 가는 걸 싫어했다. 초등학교도 제대로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가 그 맨손으로 남쪽 끝 시골에서 기회의 땅 서울로 올라와 구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쓰는 막일, 일명 노가다뿐이었다.

하지만 나의 아버지는 일하러 나가는 걸 지독하게 싫어했다. 가끔 일을 나갔고 대부분은 집에서 빈둥거렸다.

가장이 일을 하지 않으니 집안 형편이 궁색했음은 당연하다. 그래도 다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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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구가 굶을 수는 없는 노릇,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공장에 나가 일을 해서 근근이 먹고 살았다.

부모님은 자주 언성을 높여 싸웠다. 입에 담기 힘든 욕설이 오가고, 집안 물건이 다 부서지고 기어이 피를 본 후에야 싸움은 끝이 났다. 매일 전쟁을 치르면서도 아버지는 꿋꿋이 일하러 나가지 않았고, 어머니는 매번 얻어 맞으면서도 싸움을 피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다. 가끔 뭐가 억울한지 울부짖었고, 종종 집 안 물건을 부쉈고, 자주 부인과 자식들을 두들겨 팼다. 제법 담담한 척 글을 쓰고 있지만, 그 시절 내게 집이란 곧 ‘지옥’이었다.

형과 나의 몸집이 점차 아버지보다 커져 위협이 되기 시작하자 아버지의 폭력은 줄어들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일하러 나갈 생각이 없었다. 폭력으로 존재감을 드러내던 이전과는 달리 투명인간처럼 존재감이 점점 옅어지더니 종국엔 사라져 버렸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참담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아무튼 나는 그런 아버지를 보며 항상 생각했다.

‘절대로 아빠처럼 살지는 않을 거야.’

나의 아버지, 배운 게 없어 다른 일을 할 기회도 방법도 몰라 좌절했을 아버지, 희망이 없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자의 절망과 분노,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던 그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집에 틀어박혀 술을 마시고, 울부짖고, 자신이 가장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때리는 것뿐이었다.

나는 삶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이제야 안다.

나는 어느 덧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세상에 이리저리 치인 나이가 됐다. 내가 아버지를 이해한다고 해서 그가 갑자기 좋은 아버지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

그토록 아버지처럼 살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나는 돌고 돌아 이곳에 와 있다. 어쩌면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나 굴레 같은 게 정말 있는지 모르겠다. 갖은 이유를 붙여 지금 내 게으른 삶을 정당화 하고 있지만, 결국 나는 닮고 싶지 않던 아버지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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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나랑 똑 같은 놈이야.”

아버지의 망령이 내 귓가를 속삭이는 밤, 난 제대로 가고 있는 걸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아무래도 길을 잃을 것 같은 밤이다.

■ 고독한 실패가

‘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것들이 과연 내게도 좋을까?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은 확실히 실패할 확률이 낮다. 뭐랄까, 중간 이상은 한다는 느낌이랄까? 하지만 나에게 딱 맞는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렵다. 오히려 요즘은 남들의 추천으로 택한 것들로 인해 내가 남들과 취향이 아주 다르고, 사람들의 취향이 각양각색 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경우가 많다.

그럼에도 우리는 검색을 한다.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다. 나에게 딱 맞는 것을 찾아 도전하고 위험을 무릅쓰기보단 실패하지 않을 검증된 중간 이상을 택한다. 그렇게 점점 내 생각이나 감각은 중요하지 않게 되어버리고 퇴화하여 어느새 나의 선택을 믿지 못하게 되는 지경에 이른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가 중요하지 않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중요해져 더는 ‘나’의 취향이나 감을 믿지 못하고 선택권을 남에게 넘겨버린 지금의 우리. 고작 식당 하나, 영화 하나를 고르는 데도 실패할까봐 용기를 내지 못한다.

그러니 인생은 오죽할까. 안전하다고 유혹하는 ‘남’들이 목소리를 뒤로하고 ‘나’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선택은 어쩌면 ‘고독한 실패가’의 길이다. 하지만 그 길을 가면 적어도 남들이 하라는 대로 사는 ‘남’의 인생을 살게 되진 않는다.

모두가 한 쪽으로 우르르 몰려갈 때 용기 있게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은 ‘나’의 인생을 살게 된다. 실패해도 좋다. 실패했을 땐 후회하면 그만이다. 어차피 남의 말만 듣고 우르르 몰려갔던 사람들 대부분도 후회하긴 마찬가지다. 안 그런가?

실패를 두려워 말자. 고독한 실패가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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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 묵었다 아이가

그런데 나는 왜 나이가 창피할까?

누구나 나이를 먹고 늙어가는 건데, 그런 것들이 창피하고 부끄러울 이유는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왜 이런 마음이 드는 걸까?

아마도 그 마음의 바탕에는 ‘이 나이 먹도록’이라는 정서가 깔린 것 같다. 이 나이 먹도록 이룬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젊을 때 했던 실수를 계속 반복하고, 후회하고 방황하는 나라서 나이 먹은 걸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고 부끄러워하는 게 아닐까? 사람마다 각자의 속도가 있다고 말하고 다녔는데, 정작 나는 ‘이 나이 먹도록’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바심을 내고 있었나 보다. 나이를 먹을수록 누군가 쫓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나뿐인가?

나이로 인한 조급함을 줄이기 위해 나이를 줄이기로 했다. 주민 등록상의 실제 나이를 줄일 수는 없으니 스스로 어리다고 생각하기로 한 것이다.

나는 주로 인터넷을 통해 그림을 알리고, 글도 쓰고, 일도 주고 받으니 인터넷의 가면 뒤에 숨어 나이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악플을 달거나 사기를 치지 않는다면 가면도 꽤 유용한 도구가 된다.

그럼 우선 나이를 정해야지. 돈은 안 되지만, 재미있는 일에 도전해도 괜찮은 나이는 몇 살일까? 마음 같아선 20대로 해버리고 싶지만 그건 너무 염치가 없고. 그래, 서른두 살이 좋겠다. 아, 진짜 그 나이로 돌아간다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 어쨌든.

우리의 영혼은 늙어가는 육체에 갇혀 있다. 내 영혼이 아무리 자유롭다고 한들 나이 먹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가끔은 나이를 잊어버리는 것이 좋다. 특히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는 말이다.

■ 계획도 목적도 없이

우연한 즐거움으로 가득한 목적 없는 헛걸음, 이런 게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재미가 아닐까?

철저하게 여행 계획을 짜서 해외여행을 갔다가 자기 계획대로 여행이 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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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풀리자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온 사람을 알고 있다. 15분 간격으로 온다는 버스가 한 시간을 기다려도 오지 않고, 길을 잃어 한참을 헤매다 힘들게 도착한 식당은 폐업했고 그런 일들은 여행에서 늘 일어난다. 그런데 그걸 못 견디고 돌아왔다니 안타깝다. 그러고 보면 예기치 못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할 줄 아는 건 얼마나 멋진 일인가?

여행은 계획을 이행하러 떠나는 미션이 아니다. 계획은 그냥 계획일 뿐 그대로 될 리도 없고, 그대로 안 된다고 낙담할 필요도 없다. 언제나 계획은 필요한 것이지만 계획에 얽매이는 것은 의무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챙겨야 하는 준비물은 계획표가 아니라 ‘태평함이 아닐까? 비즈니스도 아니고 놀러 가는 건데 태평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데이트도, 산책도, 여행도 가능하면 인생도. 목적 없이 우아한 헛걸음으로…….

즐거움은 그럴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

■ 내 속은 괜찮은 걸까

어렸을 때 엄마는 가난한 티가 날까 봐 내게 항상 깨끗한 옷을 입혔다. 집에 세탁기도 없었던 시절이었으니 무조건 손빨래였다. 그 힘든 걸 마다 않던 엄마, 자식이 나만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그 수고로움은 말로 하기 힘들다.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그런 수고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티가 났다. 좀 많이…. 내 옷들은 옷 자체가 좀 후줄근했다고 할까. 대부분 누가 입다 준 옷이었다. 사이즈만 맞으면 어울리건 말건 상태가 어떻든 그냥 입었다. 그런 빈티지 한 옷들은 깨끗이 빨아도 티가 났다. 빈티가.

더 근본적인 원인은 내 얼굴에 있었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하지 않나. 세수를 열심히 하는데도 이상하게 꾀죄죄했다. 가난은 좀처럼 감출 수 없는가보다.

개그맨 홍록기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요단강을 몇 번은 건너갔다 와야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을 수 있다.”

나 역시 그 강을 몇 번 건너갔다 왔다. 한 때는 개성을 찾는답시고 튀는 옷만 입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니 패션 테러리스트였다. 사진을 안 남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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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다행이다. 지금 내 패션은 튀지 않는다. 평범하다. 그래도 가난한 티는 나지 않는다고 자평하고 있다.

빨래를 개려고 속옷 하나를 집어들었다. 낡았다. 5년 전 쯤, 여러 장의 속옷을 한꺼번에 샀는데, 그중 하나였다. 그 이후로 속옷을 한 장도 사지 않았다. 내 옷장엔 그보다 더 오래된 속옷들도 있었다. 매일 갈아 입는 속옷이니 세탁기와 옷장을 수도 없이 오갔으리라. 당연히 낡을 수밖에.

알뜰하다고 봐줄 수도 있지만 그건 너무 불공정한 대우였다. 내 소중한 곳(?)을 감싸주는 고마운 팬티에 이렇게 무심했다니, 늘 내 피부와 가장 가까운 최전방에서 수고를 아끼지 않는 팬티였다.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는데, 이렇게 낡을 때까지 두는 게 아니었다.

5년 동안 겉옷을 뻔질나게 사댔으면서…….

나는 겉으로 보이는 것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이었나 보다.

단순히 속옷만의 문제가 아니었나 보다. 내 삶 전체가 이런 식은 아니었을까? 나는 겉모습을 꾸미는 데 많은 돈과 시간을 들이며 살아왔다. 내가 어떻게 보일지 걱정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내면은 자주 들여다보지 않았다. 채워졌는지, 비었는지, 채워졌으면 무엇으로 채워졌는지. 앞으로 무엇을 더 채우고 싶은지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고작 책 몇 권 읽는다고 내면이 채워지는 건 아닐 거다. 그마저도 아까워하지 않았던가. 책 한 권보다 옷 한 벌이 더 유용하다고 생각했다. 반성하오. 반성하오.

내 눈에 보이는 것만 신경 쓰는 사람이 되고 싶진 않다. 속도 괜찮은 사람이고 싶다. 그래야 진짜 멋있는 어른이니까. 속을 자주 들여다봐야지. 그런 의미에서 속옷을 몇 벌 사야겠다. 이건 쇼핑이 아니다. 내면을 위한 아주 중요한 첫걸음이다. 진짜라니까.

2019. 6.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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