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5. 31. 18:48ㆍ독서후기
연필로 쓰기(2)
■ 김훈 지음
■ 오이지를 먹으며
퇴계(退溪)선생은 한 평생 반찬을 세 가지만 놓고 진지를 드셨다는데, 무말랭이, 가지무침, 산나물 같은 것들이었다. 손님이 오시면 이 세 가지 외에 간고등어구이를 내 놓으셨다.
무더위에 잠을 설치고 밥맛이 없을 때, 나는 때때로 그 어른의 진짓상을 생각한다. 퇴계의 진짓상은 정갈하고 삼엄했는데 먹는 즐거움은 그 경건함에 있었다. 그분의 식사는 자연을 인간의 몸으로 받아 들여서 생명의 동력을 얻는 거룩한 행위였다.
여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은 오이지이다. 조개젓도 내가 좋아하는 여름반찬이다. 나는 오이지를 반찬으로 먹을 뿐 아니라 가끔씩 군것질로도 먹는다. 오이지를 먹으면서 나는 퇴계의 여름 밥상과 안동 지방의 맑고 깊은 간장 맛을 생각한다. 퇴계가 오이지를 드셨다는 기록은 없지만, 무말랭이나 가지무침을 즐겨 드셨다고 하니, 오이지도 잘 드셨음직하다. 나는 퇴계가 나처럼 오이지를 좋아하셨으면 좋겠다. 오이지와 무말랭이는 그 경건한 본질은 같지만 치장이 다르다. 오이지는 양념이 없지만, 무말랭이는 양념이 여러 가지다. 무말랭이는 본질이 너무 강해서 양념 없이는 반찬이 되기 어렵다.
나는 무말랭이도 좋아한다. 무말랭이를 씹으면 섬유질의 골수에 배어 있는 가을 햇볕의 맛이 우러난다. 고소하고 보숭보숭하다. 이 햇볕의 맛을 섬유질 안에 저장해서 인간의 입속으로 전해주려면 무밖에는 없다. 오이를 햇볕에 말리면 다 쪼그라들어 먹잘 것이 없을 것이다.
무말랭이를 씹을 때 나는 퇴계의 입속에 퍼지던 햇볕의 맛을 생각한다. 맞배지붕에 홑처마뿐인 도산서당의 그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구도와 툇마루에 걸터앉은 그분의 메마른 기침소리와 노인의 몸냄새를 생각한다. 나는 퇴계의 경학(經學)을 모두 따라 읽을 수 없고 다만 상소문이나 편지, 시문,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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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문, 행장을 읽는 정도이지만, 여름 밥상에서 무말랭이를 씹으면서 성인의 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는 있다. 글을 읽어서는 닿을 수 없고 마른 무쪽을 씹어보고서야 겨우 장님 더듬듯 하고 있으니 나의 아둔함은 너무 심하다.
오이지를 먹을 만하게 담그는 일은 쉽지 않다. 그 까닭은 아무런 양념이나 첨가물 없이 오직 물과 오이만으로 완성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까다로워서 레시피만 보고서는 아무나 할 수 없다. 이 솜씨는 가르쳐서 될 일이 아니고 스스로 수많은 실패를 거듭하면서 깨우쳐야 하는 자득(自得)의 세계이다 자득의 세계는 숨을 곳이 없고 기댈 곳이 없다.
집안마다 입맛과 전래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큰 줄거리는 같다. 오이지는 열흘쯤 지나서 꺼내 먹는데, 오래될수록 새큼한 맛이 강해진다. 이 열흘 남짓동안 오이지 항아리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그 항아리 속의 비밀을 경영하는 것은 아마도, 틀림없이, ‘시간’의 섬세하고 전능한 손길일 것이다. 시간은 우주의 운행과 역사의 흥망성쇄, 중생의 생로병사, 별들의 생성과 소멸 뿐 아니라 김칫독, 된장독, 고추장독, 젓갈독 안의 비밀까지도 두루 관장하면서 ‘있음(being)’에서 ‘됨(becoming)’으로 사물을 전환시키는데, 그 신적(神的)인 작용이 가장 선명하고 육감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단연코 오이지 항아리 안이다. 오이지 항아리 속 전환의 진행방향은 그 놀라운 단순성인데, 어이지는 단순성을 완성해가면서 깊어지고 깊어져서 선명해진다.
오이지 항아리 안을 찾아오는 시간은 경험되지 않은 미래의 시간이다. 지나가버린 시간 위에서는 오이지를 담글 수 없다. 오이지뿐 아니라 노래를 부를 때, 악기를 연주할 때, 그림을 그릴 때, 자전거를 탈 때도 마찬가지다. 오이지는 다가오는 시간의 경이로운 작용을 음식의 맛으로 표현해서 사람의 몸속으로 넣어준다. 오이지는 미래의 시간을 받아들여서 스스로 변하고, 그 변화 속에 지나간 시간을 갈무리한다.
■ 태극기
나는 무자생(戊子生 1948년)으로 올해 70살이 되었다. 나는 이승만이 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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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에 취임하던 해에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 내 영세한 삶은 끊어질 듯 위태로웠고 노동의 날들은 기진맥진하였다. 고속성장의 시대를 지나면서 유구한 전통으로 세습되어온 보편적 절대빈곤에서 벗어났으나, 양극화와 부의 편중에 따른 구조적 빈곤은 광범위하게 토착화되었다. 돌이켜보면, 철거와 급조가 거듭되는 가건물 안에서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지 못하고 엉거주춤 쭈그리고 살아온 느낌이다.
4•19때 나는 중학교 신입생이었는데 서울 성북구 삼선동 성 밑 마을에 살았다. 거리에 놀러나갔다가 성북경찰서 앞거리에서 소속을 알 수 없는 건장한 사내들이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을 각목으로 패는 장면을 나는 보았다. 한 번 후려칠 때마다 한 사람씩 팍, 팍, 팍 깨지면서 쓰러졌다. 피가 길바닥에 흘러서 흙으로 스며들었다. 동네 엄마들이 쓰러진 대학생들을 떠메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상처에 아까징끼(머큐로크롬)를 바르고 이불솜으로 틀어막고 홑청을 찢어서 싸맸다. 내 소년기는 이날의 절망과 무서움에 짓눌려 있었다.
며칠 후에 이기붕 일가가 아들이 쏘는 권총으로 집단 자살을 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자, 대학생들은 대형 태극기를 펼쳐들고 애국가를 부르면서 거리를 행진했다. 나는 그 태극기를 보면서 복받치는 울음을 느꼈다. 아, 우리에게도 나라가 있구나. 우리는 고아가 아니고 난민이 아니로구나. 이 절망과 무서움에서 벗어날 길이 있구나. 아마도 그건 안도감과 반가움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태극기는 순결했고 강렬한 지향성으로 아름다웠지만, 나는 한동안국가권력이 무서워서 학교 갈 때도 경찰서나 파출소, 동사무소 앞을 지나가지 않고 멀리 돌아서 갔다. 이 공포감은 태극기를 향한 내 순수한 복받침과 함께, 이 세계에 대한 내 최초의 인식이다. 이것이 소년의 정치의식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전성시대에 서울 도심지역의 중고 학생들은 대통령이나 외국 원수들이 김포공항을 드나들 때마다 시가지에 동원되어서 태극기를 들고 환영하고 환송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길바닥에 앉아서 대통령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대통령은 좀처럼 지나가지 않았다 겨울에는 길에서 언 도시락을 까먹었다. 오줌이 마려우면 남학생들은 가로수 밑동에 갈겼고 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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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들은 발을 동동 굴렸다. 인솔교사는 몸속에 오줌이 찬 여학생들을 향해 “참아라 참아”라고 말했다.
한나절 쯤 지나면 거리 전체가 긴장감으로 팽팽해지면서 전조등을 켠 노토바이 부대의 칸보이(convoy, 호위)를 받으며 대통령의 세단이 나타났다. 대통령은 보이지 않고 자동차만 보였다. 아이들은 자동차를 향해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통령 만세”를 불렀다. “대한독립만세”라고 부르는 아이들도 있었다. 만세 동원이 거듭되자, 태극기에 대한 내 순수한 감동은 퇴색하기 시작했다. 태극기가 억압과 지배의 장치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 사춘기의 정치의식은 다소 혼란스러웠다.
그 시절의 ‘애국’은 월드컵 때 광장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애국과는 심정적 바탕이 전혀 다른 것이었다. 식민지에서 전쟁으로 이어지는 참혹한 폐허에서 이 애국의 깃발은 기한(飢寒)과 적화(赤化)로부터 살아남으려는 절박한 생존본능으로 펄럭였다. 이 ‘애국’의 비장한 정조는 정치권력의 압제와 비리를 정당화하는 당파성으로 변질 되면서 후세로 전승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기에 장성한 조카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을 데리고 주말마다 촛불집회에 나갔다. 조카는 사진을 찍어서 핸드폰으로 보내왔다. 조카는 나에게 광장 촛불집회에 함께 나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날이 춥고 감기에 걸려서 갈 수 없다”며 거절했고 “아이들 따뜻하게 입혀서 데리고 나가라. 추운데서 너무 오래 있지 말라”고 노인의 헛소리를 덧붙였다. 사실 나는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내 나이 또래의 친구나 선배들도 ‘애국단체’들의 태극기 집회에 나가서 사진을 찍어서 보내왔다. 내 성장기의 가난과 억압을 함께 겪은 친구들이었다. 사진 속에서 그들은 태극기를 어깨에 두르고, 뭐라고 소리치며 걷고 있었다.
그 친구들도 나에게 태극기 집회에 함께 나가자고 제안했다. 나는 또 감기에 걸려서 못 나간다고 말했다 감기란 참 편리한 병이었다.
며칠 후에 나는 혼자서 광장에 나갔다. 나는 촛불집회와 태극기 집회 양쪽을 모두 기웃거렸는데 태극기 쪽을 더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내 소년 시절의 태극기가 내 마음을 그쪽으로 끌어갔던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태극기 집회에 참가한 사람들이 사회경제적인 동질성을 갖는 집단은 아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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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지만, 그들은 사실이나 법리를, 또는 눈앞에 벌어져 있는 객관적 사태를 뛰어 넘을 수 있는 정치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세종로 네거리에서 광화문, 경복궁, 청와대, 그리고 북악산, 북한산 쪽을 바라보는 내 고향 서울의 경관을 사랑한다. 이 경관 속에서 인공의 구조물들은 산하의 리듬에 안겨 있어서 거칠게 돌출하지 않는다. 인간세의 핵심부가 자연의 한가운데 둥지를 틀면서 조화와 질서를 이루는데, 이 질서는 억압적이지 않다. 거듭되는 난세에도 나는 이 경관을 바라보면서 정의롭고 강성한 공화국의 앞날을 생각한다. 이 경관은 음풍농월하는 유산객의 산수가 아니고, 은밀한 향토의 명승지가 아니다. 이 공간은 지속과 생성의 힘이 분출하는 서울의 정치적 공간이다.
■ 할매 말 손자 말
- 영화 <말모이>를 보고
나는 별을 ‘별’이라고 불러야만 별이 별같이 느껴진다. 해, 달, 바람, 바다, 가을, 민들레……도 다 마찬가지다. star는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대상이지만 ‘별’은 내 생애에 개입되어 있는 경험적 실체이다. 별이라는 소리와 글자를 들여다보면, ‘별’은 그야말로 별처럼 어두움 속에서 반작이고 있다. 얼굴은 얼굴이라고 말해야만, 내 마음속에 여러 얼굴들이 떠오른다. face로는 안 된다. ‘바람’은 불어오고 ‘가을’은 바스락거린다. 처용이 노닐던 서라벌 밤하늘에 ‘달’이 떴고, 고려의 유랑민들은 ‘머루’ ‘다래’를 먹고 청산에 살았다 하니 ‘달’ ‘머루’ ‘다래’는 삶의 정한을 쌓아가며 천여 년의 시간을 건너와 미래로 향한다. 별을 별이라고 부를 때, 별은 내 가슴에 박히고 나는 모국어의 자식임을 스스로 안다.
2019년 정초에 영화 <말모이>가 개봉했다. <말모이>의 소재는 역사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다. 영화는 일제 말기인 1940년대에 조국의 말과 글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수난과 성취를 그리고 있다. 조선어학회는 언어학자들의 모임이었지만, 이 영화는 모국어를 지키는 운동을 통해서 보통 사람들의 의식이 각성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1940년대에 일본은 절망적인 전쟁으로 인력과 자원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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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만(在滿) 항일 무역은 힘을 잃었고, 조선의 독립운동은 동력이 고갈되어 있었다. 조선어학회 선인(先人)들은 모국어를 보존함으로써 민족 재생과 부활의 씨앗을 뿌렸는데, 선인들은 암흑과 고난 속에서도 먼 앞날을 내다보고 있었다. 말이 살아 있는 한, 혼 또한 살아 있을 것이었다. 일제는 조선어 사전을 만들려는 선인들의 활동에 치안유지법상의 내란죄를 적용해서 33명을 검거했다. 함흥지방재판소는 판결문에서
- 고유 언어는 민족의식을 양성하는 것이므로 조선어 학회의 사전 편찬은 조선 민족정신을 유지하는 민족 운동의 형태다.
라고 유죄 이유를 밝혔는데 ‘유죄’만 뺀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잡혀간 사람들은 모두 야만적 고문을 당했고, 2년에서 6년의 형을 받고 함흥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이윤재(李允宰 1888~1943), 한징(韓澄 1886~1944) 두 분은 광복을 가까이 앞두고 옥사했다.
이들이 검거될 때 <큰사전> 원고는 모두 증거물로 압수되어 함흥지방 검찰청 창고로 들어갔다. 그 후 상고심 관할이 서울로 넘어가자 이 증거물들은 열차에 실려 서울역으로 운송되는 도중에 광복을 맞았다. <큰사전> 원고는 증거번호가 찍힌 채, 서울역 마루보시(후에 대한통운이 된 철도화물 운송사) 창고에 쌓여 있었다. 조선어 학회 회원들이 서울역을 모두 뒤져서 원고 뭉치를 찾아냈다. 이 원고는 2만 6500자 정도였다. 1947년 <큰사전> 1권이 발간되었다. 6•25때 나머지 원고는 여러 곳으로 흩어졌고, 종전 후에 다시 수습해서 미국 록펠러 재단의 지원을 받아 1957년 10월에 <큰사전>은 모두 6권으로 완간되었다.
<큰사전>은 그 후에 간행된 많은 한글사전의 토대가 되었다. <큰사전>은 서문에서
“이 책이 다만 앞사람의 유산을 찾는 도움이 됨에 그치지 아니하고, 나아가서는 민족문화를 창조하는 활동의 이로운 연장이 되며, 또 그 창조된 문화재를 거두어 들여 앞으로 자꾸 충실해 가는 보배로운 곳집이 되기를 바라마지 아니한다.” 라고 썼다.
1950년 6월 27일 저녁, 인민군이 서울 북쪽까지 쳐들어와서 포탄 터지는 소리가 들릴 때, <큰사전> 편찬위원들은 ‘이살부리다’와 ‘아살부리다’의 차이가 뭐냐를 따지다가 끝을 맺지 못한 채 헤어져서 피난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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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말모이>는 전국의 사투리를 수집해서 그 의미를 따지고 표준말을 정하는 과정에서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는 모습을 이야기의 골격으로 삼고 있는데, <큰사전>을 만든 선인들의 활동과도 일치한다.
가야의 가실왕은 여러 고을의 말이 각각 다르므로 음악 또한 일정하게 할 수 없다면서 악사 우륵에게 12곡을 짓도록 명령했다.
영화 <말모이>에서 여러 지방의 사람들로부터 사투리를 수집하는 장면을 보면서, 나는 대가야의 가실왕과 악사 우륵, 그리고 이제는 점점 사라져가는 여러 고을의 사투리들을 생각했다.
표준어를 언어생활의 중심부에 모시는 정책이 사투리를 박멸하자는 목표를 지향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이제 TV,라디오, 핸드폰, SNS의 급속한 보급으로 사투리는 점점 사라지고 있다. TV나 라디오에서는 종사자들뿐 아니라 출연자들도 모두 깔끔한 표준어로만 말한다. 나는 가실왕 때처럼 여러 고을 사람들이 여러 사투리로 와글와글하는 나라의 말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언어라고 생각한다. 세종대왕은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다른 것을 걱정했지만, 한반도 안에서의 사투리는 중국과 다르듯이 다른 것이 아니다. 단어와 억양이 달라도 서로 이해할 수 있다. 나의 소망은 이루어질 가망이 전혀 없겠지만, 사라져가는 우리 사투리를 사라져가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다. 사투리는 모국어의 하늘에서 빛나는 수많은 별들이다.
경북 칠곡군은 고령의 할매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서 아름다운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할매들은 읽고 쓸 줄 알게 되었고 한글로 자신의 정한과 생애를 기록했다. 칠곡군은 할매들의 시를 모아서 시집을 발간해 오고 있는데, 2018년 11월에 세 번째 시집이 나왔다.
칠곡군 약목면 복성2리 박금분 할매(88세 아포댁)의 시 <할매 말 손자 말>은 사라져 가는 사투리의 마지막 풍경을 보여준다.
서울 아들이 / 약목 말 쓰지 마라칸다 /
할매 말 몬 알아큰는다고 / 약목 말 쓰지 마라카다 /
에헤이 / 나도 너거 말 모리겠다 /
약목 할매캉 서울아들캉 / 서로 모리 이일 우짜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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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곡 동명면 박후불 할매 (77세, 대천댁)는 <한글아 고맙다>라는 시에서 한글을 깨친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한글아 정말 고맙다 / 까만 눈으로 69년 만에 / 눈을 뜨게 해 준 한글아
한이 매친 한글 공부 / 아름다운 이 세상을 만나 /
늦게나마 배우게 되었다 / 한글아 너무 고맙다
세종대왕님 고맙습니다 / 선생님도 정말 고맙습니다
이 두 편의 시는 오래된 언어가 점차 소멸해 가는 마을에서 언어의 소중함이 무엇인지를 선명히 보여주고 있다.
이 영화 <말모이>를 보면서 나는 이 두 편의 시를 생각했다. 가보지 않은 마을들의 산천과 말씨가 내 마음에 떠올랐다. 한국인은 조금만 귀를 기울이면 한국의 어느 사투리라도 다 알아들을 수 있다.
■ 할매는 몸으로 시를 쓴다.
- 칠곡, 곡성, 양양, 순천 할매들의 글을 읽고
여러 해 전에 자전거를 타고 산간마을과 농촌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나는 노인들을 자주 만났다. 마을들은 허물어져가고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빈 집을 행정용어로는 공가(空家)라고 한다. 공가 마당에 맨드라미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고 지붕에 버섯이 박혀 있었다. 마을 골목길에는 시멘트가 굳기 전에 돌아다닌 개의 발자국들이 화석처럼 찍혀 있었다. 발자국들의 방향이 교차했고 크기가 제가끔인 걸로 봐서 마을에 개가 많았던 시절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마을을 노인들이 지키고 있었다. 국토는 아무리 외지고 땅값이 싸더라도 거기에 사람이 살아있고, 생활을 영위할 수 있어야 사람의 마을일 터인데, 이 노인들의 자연수명이 끝나면 국토는 벌레 소리가 가득한 풀밭이 되는가 싶었다. 마을들은 위태로운 마지막처럼 보였다.
나보다 5~10살 정도 연상인 세대에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노인들이 많았다. 남성보다도 여성 노인들의 문맹이 더욱 심했다. 조혼, 육아, 남녀차별, 가사노동, 생산노동, 시집살이처럼 여성의 생애에 유습된 억압이 그 배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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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들은 늙어서도 여전히 생산노동과 가사노동을 감당해 내고 있었다. 산간 농촌의 노인들은 뭐든지 다 조금씩 기르고 있었다. 자투리땅에 콩, 팥, 조, 수수, 무, 배추 고추, 호박, 오이, 마늘, 대파, 양파를 여기저기 조금씩 심어서 길렀고, 닭, 개, 오리, 토끼를 먹였다. 이러니 한 평생 눈코 뜰 새 없다. 이렇게 먹고사는 방식을 행정용어로는 산간형 복합영농이라고 하는데,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이, 오래전부터 그렇게 살아왔다.
지난 수년 동안 전국의 여러 지방자치단체들과 민간인들이 고령의 문맹 할머니들에게 한글을 가르쳐서 아름다운 성과를 거두었다. 할매는 할머니의 사투리라고 국어사전에 쓰여 있는데, 산간 마을에 가보면 ‘할매’는 혈연관계를 나타내기보다는 고령여성 전체에 대한 범칭이거나 애칭처럼 쓰이고 있다.
80살에 가까워서 한글을 깨친 할매들의 글을 모은 시집, 일기들이 책으로 출판되고 있다. 한글을 모르는 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치는 일은 정부가 시행한 노인정책 중에서 가장 성공한 사업으로 보인다.
나는 내 생애에 별 경험이 축적되지 않았을 때 글자를 배웠다. 아마도 조선조의 모든 글 읽는 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산간마을의 할매들은 한 생애의 신산을 모두 겪고 나서 문자를 배웠다. 나는 이 차이가 엄청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잘 설명하지는 못한다.
자라는 것들을 길러서 자라게 하는 일상의 노동에서 할매들은 삶의 고난을 감당해내는 마음의 힘을 키워왔다. 할매들은 생명을 가꾸고 키움으로써 스스로 생명을 긍정했고, 작은 소출을 귀하게 여겼다.
감자 오키로 심어서 / 백키로 캐고 /느무 조와 / 아들 딸 주고 /
느무 절거워 / 우리 아들 손자 / 걱정 없이 살고 하면 /행복하지
김옥교 (칠곡)
아침에 이러나서 밭에 가 보면 / 곷치 피고 파란 잎이 팔랑팔랑하는데
저도 나를 보고 나도 저를 보고 / 얼마나 사랑서럼고 감사한지 몰라요
송문자 (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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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비가 뽀실뽀실 온다 / 뽀시락뽀시락 비가 온 다
끄끕하니 개작지근하다 / 온 들에가 다 떨어진다 / 온 곡식이 다 맞는다 /
곡식이 펄펄 살아난다 / 시원허니 좋다
박점례 (곡성)
할매들은 작물을 통해서 자연과 깊이 공감하고 있다. 감자, 푸성귀, 벼는 소출을 가져다 줄 뿐 아니라 작물들은 할매들의 마음 속에 사랑과 기쁨의 자리를 만들어 준다. 작물이 비를 맞듯이, 할매의 마음에 이슬비가 뽀시락뽀시락 내린다. 할매들의 감수성은 늘 외계와 직거래하고 있다. 할매들의 언어는 몸의 언어이다.
여러 할매들은 어렸을 때부터 극한의 가난을 감당해 왔다. 모두 가난했지만 그 가난은 연대될 수 없었고, 정치화 될 수 없었다. 그 가난은 보편적 가난이었고, 소외된 가난이었으며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가난이었고, 누구나의 가난이었고 각자의 가난이었다.
강원도 양양의 이옥남 할매는 아흔일곱 살인데 일곱 살 때부터 생산노동으로 내몰려 있었다. 이옥남 할매는 지금도 ‘복합영농’으로 농사일을 하고 있고 오일장에 나가서 강낭콩, 쑥, 달래 고들빼기, 고추를 팔아서 용돈을 번다. 십몇 년 전 대구 지하철 화제 사건 때 이옥남 할매는 양양군청에 가서 성금 10만원을 냈다. 오일장 수입을 모두 모은 돈이었다. 그날 이옥남 할머니는 일기장에 썼다.
없이 사느라고 남의 신세만 지고 좋은 일 한번 못해 보고 그게 한이 되어 내가 조금이나마 보냈다.(……)
아이 옷 벗어 논 걸 껴안고 아이 엄마가 그렇게 우니 사는 게 숨이 붙었으니 살지 사는 게 사는 거 같겠나. 텔레비전 보면 맨 속상하기만 하다.
여러 할매들이 가난과 어린 시절의 고난을 글로 써 놓았는데 할매들은 지나간 고난의 힘으로 닥쳐올 고난을 감당하고 고난 속에서 푸성귀를 키우고 자식을 기른다.
사남매 길으면서 병들어 호열자가/들었는데 자식들이 눈에 헛것이 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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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저 나무에 고기가 고기가 달렸습니다. 저 고기 주세요.”
그래서 외상으로 쌀을 사서 죽을 쒀 주었다,(……)
그때 바라는 것은 자식을 배부르게 먹이는 거였다.
유순희 (칠곡)
가수가 되기 위해 서울로 가려고 했는대
내가 못간 이유는 신발이 없어서 였다.
집신을 신고 서울로 갈 수가 업섰다
그래서 가수가 못대다.
나한테 검정 고무신만 있었어도 서울로 가서
이미자처럼 멋진 가수가 대었을 건대 참 아십다
도쌍연 (칠곡)
전갯방살이 좋아보여 / 서울 용산에 나가 / 남의 집 담살이 했지
해너머 가면 집 생각이 났다 / (……) / 어미가 되어 / 죽지 속에 새끼들 여섯을 품고 / 몸땡이 살 보타지게 일만 하고 살았다 / 젊은 청춘들이라고 / 직장 잡아 다 나가고 / 지들 새끼들 키운다고 죽지로 품는단다 /
그래 / 이제 나는 혼자서 / 장태로 들어간다.
조남순 (곡성)
* 전갯방 : 부엌 딸린방
* 담살이 : 남의 집에 가서 얹혀살면서 허드렛일을 하는 것
* 장태 : 닭장
칠곡 할매들의 글에는 6•25 전쟁 때 피난 가던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1950년 8월 초순에 전선은 낙동강까지 밀려내려갔고, 거기서부터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이 시작 되었는데, 낙동강 상류가 고향인 칠곡 할매들은 이때 모두 피난길에 나섰다. 할매들의 피난 체험은 전쟁이 그 거대한 폭력과 사소한 관련도 없는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피난을 갈라고 집을 나온이 / 소와 닭이 울렀다 / 그때 마음이 서럼다
김춘조 (칠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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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들이닥친 피란길은 / 내 11살 보따리가 너무 버거웠다.
대구 화원쪽으로 피란간 우리 가족은 / 몇 날 며칠간 해매다 배가 고파 /
동냥으로 연명하기도 했다 (……) / 다시 돌아간 고향 명포동은
국군과 인민군의 시체로 뒤덮여 / 처참한 동네가 되어 있었다
박필순 (칠곡)
순천 할머니들의 글에는 1948년 여수 순천 10,19 사건의 기억들이 등장한다. 국군, 경찰, 반란군들이 번갈아 마을에 들어와서 아버지, 오빠, 삼촌들을 쏴 죽이는 참상을 할머니들은 소녀 시절에 목격했다.
기막힌 이야기는 한이 없다. 시댁에 가서 농사일 도와주고 돌아왔더니 남편은 동네 술집 여자와 바람이 나 있었고 또 어떤 아버지는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웬 여자를 데리고 와서 엄마랑 셋이서 한 방에서 자고 아침에 밥상을 차려 바치게 했다고 하니, 기막히고 기막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매들의 감성은 가난과 억압에 매몰되지 않는다. 인간과 생활과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몸의 언어로 표현해 낼 때 할매들의 글은 발랄하다.
눈이 사뿐사뿐 오네 / 시아버지 시어머니 어려워서 / 사뿐사뿐 걸어오네
김점순 (곡성)
딸이 가디 차를 세운다 / 야야 와그래 차 세우노 /
엄마 요 앞에 더디 걷는 / 할매 보이 엄마 생각이 나네 /
우리 엄마도 저래 걸어가겠지 싶어서 / 빵빵 거리도 못하고
딸이 그렇게 말하이 / 내 눈에 물이나네
강금연 (칠곡)
깊어가는 밤 / 봄비는 내리네
보스락 바스락 / 창가에 들려오네
옆에는 영감님 / 코고는 소리
내일이면 봄기운이 / 더 풍기겠네
봄나들이 가야겠네. 변정선(칠곡)
나는 할매들의 글을 읽으면서, 고난에 찬 한 시대를 살아낸 여성들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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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아무도 편들어주지 않던 그들의 작은 몸을 생각했다. 할매들은 그 몸을 시대의 밑바닥에 갈면서 살아냈다. 이념은 야만과 억압을 풍속으로 만들어서 개인을 보편적으로, 그리고 개별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할매들의 글은 생활이고 몸이다. 할매들이 한글을 깨쳐서 겪은 일들을 기록함으로써 할매들의 생애는 역사속으로 편입되기 시작했다.
할매의 책들은 단순히 ‘문맹의 할머니들이 80살 무렵에 한글을 깨쳤다’는 식의 뉴스거리가 아니다. 이 책들은 시대와 역사,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해서 근본적인 반성의 자료를 제공한다. 그 자료는 곧 할매들의 생애이다.
■ 이등중사 박재권의 구멍 뚫린 수통
육군 이등중사 박재권은 2018년 10월 24일 허벅지뼈, 갈비뼈, 머리뼈의 조
각이 되어서 돌아왔다. 그의 뼛조각 일부는 지표면 위에 흩어져 있었다. 인
식표가 발견되어서, 이 뼛조각이 육군 2사단 31연대 7중대 이등중사 박재권
임이 밝혀졌다. 박재권은 1953년 7월 10일 강원도 철원군 화살머리고지 전
투에서 전시했다. 22살이었고. 결혼하지 않았다. 국방부는 박재권의 유해와
유품을 수습했다.
박재권의 수통은 총알 여러 발을 맞아서 구멍이 뚫리고 찢어져 있었다. 사입구의 모양과 분포로 봐서 근접거리에서 자동화기로 쏘아 댄 것으로 보인다. 현역병 시절에 내가 쓰던 수통과 M1 소총, 실탄, M1 대검은 죽은 박재권이 쓰던 것과 똑 같았다. 수통에는 손잡이를 접는 수통컵이 딸려 있었고 U.S라고 찍혀 있었다. 산악행군 때나 혹한기 훈련 때는 이 수통에 개울물을 담고 소독약을 풀어서 탄띠에 매달고 다녔다. 귀대할 때 시골 구멍가게에서 소주를 사서 이 수통에 담아가지고 와서 점호 끝나고 몰래 나누어 마시다가 당직 장교에게 들켜서 단체 기합을 받은 기억이 난다. 나는 M 16이나 K2 같은 신형무기는 만져보지도 못했다. M1은 무거웠고 클립에는 실탄이 9발씩 들어 있었는데 장전하기가 수월치 않았다. 1953년에 전사한 박재권의 것과 모두 똑 같았다.
나는 박재권의 죽음을 애국으로도 이념으로도 위로할 수 없다. 다만 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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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으로서 애도할 뿐이다. 박재권과 박재권을 쏘아죽인 ‘적병’은 역사의 발전을 위해 한 목숨을 바친 것인가. 박재권의 구멍 뚫린 수통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난감한 의문과 마주친다. 근본무명(根本無明 모든 번뇌의 근본이 되는 것)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화살머리는 강원도 철원읍에서 서북쪽으로 13 킬로미터쯤 떨어진 산악고지다.
이 일대는 한국전쟁 기간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철의 삼각지에 해당한다. 정전 협정 조인이 임박하자 전투는 고지 쟁탈전으로 전개되었다. 이 땅따먹기 전투는 쌍방이 모두 인명의 손실을 돌보지 않고, 죽음에 죽음을 잇대어가면서 시체를 시체로 덮는 무한 소모전이었고, 각개전투로 고지의 정상을 탈환하는 백병전이었다.
이등중사 박재권은 이 무한 소모전에서 전사했다.
나는 몇 년 전에 육군의 6•25 전사자 유해발굴단을 따라 발굴 현장을 답사한 적이 있었다. 포천 연천 방면의 중부전선 산악고지였다. 65년 전의 교통호와 개인 참호는 산 아래 도로를 감제(瞰制, 내려다보며 제어함)하는 7부 능선을 따라서 이어졌다. 거기서 전사자들의 유해와 유품이 발굴되었다.
어떤 참호에서는 국군의 총기와 인민군의 총기가 함께 발굴되었다. 뼈들은 헝클어져 피아를 구분할 수 없었다. 책임 장교에게 이 참호의 상황을 물어봤더니, 참호 안에서 육박전이 벌어져 국군 병사와 인민군 병사가 서로 쏘고 찌르다가 둘 다 죽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젊어서 죽은 이 참호 속의 백골 앞에서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나는 아무 것도 더 물어보지 못했다.
정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조인되었다. 박재권이 전사한 뒤 17일 만이었다. 신문기자 최병우(崔秉宇 1924~ ?)는 한국 기자로서는 유일하게 이 조인식장을 현장 취재해서 조선일보에 기사를 실었다.
‘기이한 전투의 정지’라는 제목이 붙은 이 르포 기사는 한국 언론의 역사에서 가장 소중한 문장들에 속한다. 최병우의 직관은 사태의 핵심을 찌르고, 그의 감각은 사실에 바탕해 있고, 그의 문장은 차분하다. 그가 전한 판문점 조인식장의 실체는 그후 정전 65년의 세월 속에서 유효했고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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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구대 같이 퍼런 융에 덮인 두 개의 탁자 위에는 유엔기와 인공기가 둥그런 유기에 꽂혀 있었다. 이 두 개의 기 너머로 휴전회담 대표는 2년 이상 두고 총계 천 시간에 가까운 격렬한 논쟁을 거듭하여 온 것이다.
- 조인이 계속되는 동안 유엔 전폭기가 바로 근처 공산군 진지에 쏟고 있는 폭탄의 작렬음이 긴장된 식장의 공기를 흔들었다.
- 해리슨 장군과 남일(南日)은 쉴새없이 펜을 음직인다. 각기 36번 자기 이름을 서명하여야 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의식에 따르는 어떠한 극적 요소도 없고, 강화에서 얘기할 수 있는 화해의 정신도 엿볼 수가 없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정전이지 평화가 아니라는 설명을 잘 알 수 있었다.
-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 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다.
- 내가 지금 앉아 있는 이곳이 우리나라인가 이렇게 의아해한다. 그러나 역시 우리가 살고 죽어야 할 땅은 이곳밖에 없다고 순간적으로 자답하였다.
- 10시 12분 정각 조인작업은 필하였다. 해리슨 장군과 남일은 최후의 서명을 마치자 마치 최후 통첩을 내던지고 퇴장하는 듯이 대표를 데리고 나가버린다.
- 관례적인 합동 기념촬영도 없이 참가자들은 해산하였다.
이 기사를 쓸 때 최병우는 30살이었다. 최병우가 전하는 정전협정 조인식의 분위기는 그 후로 전개될 적대 관계의 세월을 내다보고 있는데, 정전 협정의 합의로 설정된 비무장 지대는 세계에서 가장 험악한 중무장지대가 되었고 뼛조각들은 지금도 산야에 흩어져 있다.
북한군은 2010년 11월 23일 연평도를 포격했다. 이날 연평바다의 썰물은 낮 12시께 간조를 이루었다. 주민들은 오전부터 갯벌에 나가서 굴이나 조개를 캤고, 김장을 담그기도 했다. 여객선 씨플레인호는 2시경 연평도에 도착했다. 인천으로 가려는 주민들은 당섬 선착장에 모여 있었다. 연평도의 학교들은 수업중이었고, 연평 어린이집의 아이들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 섬마을이 어째서 포격을 맞아야 하는가. 포격은 오후 2시 30분 부터 시작되었다.
마을 주민 김종규씨는 연평도에서 자동차 타이어를 정비하는 가게를 경영하고 있었다. 김씨는 1932년생으로 화살머리에서 전사한 박재권 보다 한 살 아래다. 연평도에 포격이 시작되자 김씨는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 김씨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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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대한만국 정부가 준 상장들을 불태웠다. 이 상장을 들고 있다가 북한군이 연평도에 들어오면 살아남지 못하리라는 두려움을 김씨는 늘 지니고 있었다. 연평도 주민들은 24일 새벽 무렵까지 대부분 섬을 떠나서 인천으로 피난했다. 인천에 친지가 없는 사람들은 인스파월드 찜질방에서 머물렀다.
김씨의 부인 유씨는 바탕일을 한다. 바탕일이란 갯벌에서 바지락, 낙지, 굴을 캐는 직업이다. 포탄이 떨어질 때 유씨는 집안에서 김장을 담그고 있었다. 유씨는 김장일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인천으로 피난했다. 유씨는 며칠 후에 연평도로 돌아왔다. 전국에서 기자들이 연평도로 몰려와 있었다. 유씨는 돌아와서 남은 김장일을 끝냈는데 취재온 여기자 2명이 유씨의 김장일을 거들어 주었다.
■ 동부전선에서
- 북한군 병사의 오줌줄기
2018년 10월 26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10차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에서는 2018년 11월 말까지 남북이 각각 GP 11개에서 병력과 장비를 철수하고 건조물들을 파괴하가로 합의 했다. 이같이 이행하고 나서 상호 검증하기로 했다니까, 이번 군사 회담은 믿을 만해 보인다.
GP는 소대 규모 정도의 작은 부대지만 막강한 화력으로 중무장하고 피아가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대치하고 있다. GOP 라인에는
- 귀관은 전장에 있다.
- 적 GP가 가까이 있다.
- 검문에 불응하는 자는 사살하라. 라고 쓰여 있다.
20대 후반의 중위들이 서너 살 아래 병사들을 거느리고 GP를 지휘한다.
GP는 끝없이 출렁거리는 산맥 위에 고립되어서 인접부대가 없다. 멀리서 보면 유럽 중세의 요새처럼 보인다. GP는 후퇴 개념이 없는 사수진지다. 한 번 배치되면 교대하는 부대가 올 때까지 수개월 동안 같은 자리에서 근무 해야 한다.
정전 후 지금까지 DMZ안에는 양측이 모두 220여 개의 GP를 설치했고 여기에 근무하는 양측 병력은 1만 2천여 명 정도로 알려졌다. 이 건조물과 무장병력은 모두 정전협정 위반인데, 정전 협정 준수를 관리하는 유엔군 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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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묵인하고 있다. 그래서 한국군 GP에는 태극기와 유엔기가 동시에 휘날린다. 유엔기를 휘날리는 유엔군 사령부의 실체는 모호하거나 부재한다.
비무장지대에 근무하는 군인들은 경찰이 아님에도 ‘민정경찰’이라는 표식을 달고 있다. 1953년의 정전 협정에 따르면 비무장 자대 안에서의 정찰행위는 민간인 경찰만이 수행하게 되었다. 정전 후 DMZ에 민간 경찰이 배치된 적은 없었고, 군 병력이 ‘민정경찰’이라는 표식을 달고 DMZ에 근무하고 있다. DMZ 안에는 논리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많은데, 전쟁은 본래 논리가 아니라 아수라의 산물이다.
나는 몇 년 전에 군 당국의 허가를 받고 담당 장교의 안내를 받아서 동부전선의 GP와 GOP 부대, 서해안 NLL이 가까운 도서지방과 해안부대를 방문한 적이 있다. 나는 그때의 메모를 줄기로 삼고 기억과 인상을 환기하면서 이 글을 쓴다.
내가 방문한 GP는 궁예도성(태봉도성)을 깔고 앉은 자리였다. 경원선 철도가 제거된 자리는 초목이 모두 베어져 있었고, 제방만 남은 철도부지를 추진철책 이 건너가는데 GP는 추진철책 바로 밑이었다.
GP는 고원위의 외딴섬이었다. 여러 겹의 철조망 안에 콘크리트 요새가 들어섰고, 그 위에 망루가 솟아 있었다. 초겨울의 산악은 스산했다. 메마른 골짜기에서 바람이 버스럭거렸고 크고 작은 새들의 울음소리가 산봉우리 사이를 울렸다.
그 적막 속에서 GP는 삼엄하게 긴장되어 있었다. 병사들은 자동화기로 화력대기하면서 수색로를 엄호했고, GP장 26살 박중위는 허리에는 권총, 방탄조끼 앞섶에는 대검, 망원경, 무전기, 열쇠꾸러미, 그리고 용도를 알 수 없는 장비들을 매달고 이 구석 저 구석을 살피고 있었다.
초급장교 한 명을 똑바로 길러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GP에 오면 알 수 있다. 상급부대 지휘관들이 관심을 보이고, 중위 계급장의 권위를 존중해줘야만 중위들은 GP를 제대로 지휘할 수 있겠다는 것도 GP에 와서 보고 알았다.
GP는 식재료를 보급 받아서 GP 안에서 취사한다. 조리병이 배치되어 있다.
GP의 메뉴는 훌륭했다. 어떤 부대 식당에는 ‘많이 먹고 한 놈 잡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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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 잡고 휴가가자’라는 구호가 붙어 있었다. ‘한 놈’은 나중에 잡더라도 병사들이 우선 많이 먹기를 나는 바랐다.
GOP 상황실에서 상황병은 컴퓨터와 연결된 망원경으로 북한 GP 동태를 기록하고 있다. 북한군의 총안구에 거치된 화기의 종류를 식별하고 북한군 병사의 제설작업, 농구 배구, 양지쪽에서의 휴식, 총검술 훈련이 모두 포착된다. ……‘1월 24일 13시 02분에 적 GP에서 6번 총안구를 개방했다. 환기 목적으로 보인다.’라고 상황병은 기록하고 녹화한다. 나는 GP장의 망원경으로 북한군 GP를 관찰했다. 북한 병사 한 명이 바지춤을 내리고 눈 위에 오줌을 누었다. 오줌 줄기까지 보였다.
눈에서 허연 김이 올랐다. 그의 콧구멍에서도 김이 나왔다.
■ 서부전선에서
- 제대해서 더 멋진 여친을 사귀자
북한군 병사들이 양지쪽에서 모포를 말려서 털고 있었다. 병사 두 명씩 마주 서서 모포의 귀퉁이를 잡고 동작을 맞추어서 먼지를 털어내고 있는데 그 동작은 내 현역병 시절의 모포 털기와 똑 같았다. 모포 말릴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소나기였다. 훈련을 하다가도 하늘에 구름이 끼기 시작하면 서둘러 모포를 걷어들였다. 소나기가 무섭기는 북한군 병사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철조망들을 넘어서 두루미들이 날아온다. 두루미들은 날갯짓을 하지 않고, 고요히 착륙한다. 두루미들은 철원 들판에 흩어져서 빈 논에 떨어진 낱알을 쪼아먹다가 날이 저물면 저수지 물가에 모여서 얼음 위에 한 줄로 서서 잔다. 두루미들은 초병처럼 경계심이 많아서 작은 소리만 들려도 일제히 날아올라서 다fms 곳으로 잠자리를 옮긴다.
병사들은 병영생활의 고충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토의록’을 작성하고 있었다. 해안부대의 한 생활관에서 ‘토의록 몇 페이지를 읽을 수 있었다.
- 제3생활관 일병 000이 코를 심하게 골아서 수면에 방해된다. 잠을 한 번 설치면 다음 근무에 큰 지장이 있으니 소대장은 조치해 달라.
- 생활관의 고참병인 박병장의 손목시게 알람소리가 너무 커서 숙면에 방해된다. 소대장은 조치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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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게 잠처럼 소중한 것은 없다. 근무 마치고 생활관에 들어올 때 조심스럽게 걸어라.
- 우유를 들고 들어오지 마라. 냄새 난다.
또 다른 페이지에서 병사들은 후방에 두고 온 애인을 걱정하고 있었다.
- 변심한 여친을 욕하지 말자. 시야에서 멀어지면 정도 멀어지는 것이다.
- 맞다. 기다리라고 하는 것은 무리다. 우리들 나이에 어찌 기다릴 수가 있겠는가.
- 우리가 여기 와서 고생하는 동안에 여자들은 다른 남자를 만날 기회가 많을 것이다. 이것을 어찌하겠는가.
- 안 보이면 마음은 멀어진다.
- 할 수 없다. 갈 테면 가는 것이다.
아마도 다음 대목이 이 토론의 결론 대목인 듯싶었다.
- 여자 문제로 괴로워하기에는 우리들 청춘이 너무 아깝다. 군대 생활을 충실히 하고 몸 건강하게 제대해서 더 멋진 여친을 사귀어서 배신한 여친에게 보여주자.
이 결론에서 소대장은 ‘토의록’에 다음과 같은 강평을 남겼다.
- 훌륭한 생각이다.
바다에 눈이 내렸고 바람이 불어서 눈보라를 옆으로 쓸어갔다. 바다도 산맥도 섬도 보이지 않았다. 눈보라는 모든 방위감각을 휩쓸어가서 동서남북을 분간할 수 없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그 눈보라 속으로 초병은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저쪽도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눈보라가 이쪽 저쪽을 다 지우고 있었다.
■ 눈을 치우며
나는 한평생 산비탈일망정 단독 주택에서 살았다. 50살 이후에는 평지로 내려왔다. 눈이 오면 새벽에 일어나서 집 마당과 골목의 눈을 치웠고, 아내와 자식들이 몰고 다니는 자동차에 쌓인 눈을 털어냈다. 새벽의 눈 냄새는 싱그러웠고, 찬 공기가 허파에 가득차서 처음 만난 세상에서 숨쉬는 것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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았다. 널빤지로 눈을 밀어내고 삽으로 떠내고 빗자루로 쓸었다. 한 시간 쯤 눈 속에서 일하고 나면 머릿속에 끼어 있던 말의 똥가루가 빠져 나가고, 나의 생명과 삶 사이에 직접성의 관계가 회복된다. 연장을 쥐고 일하는 동작은 인간의 본래 그러한 모습이다.
나는 삽질, 가래질, 곡괭이질을 육군에서 배웠다. 쌓인 눈이 얼어서 적전도로가 마비되면 보급차가 올라올 수 없고, 부대는 고립된다. 그래서 병영은 겨우내 눈과의 전쟁이다. 눈이 오면 잠든 병사를 깨워서 눈을 치우고, 눈이 오고 있는 동안에도 눈을 치운다. 병사들은 도로 연병장의 눈뿐 아니라 탄약고, 대대본부, 내무반의 기중위에 쌓인 눈을 끌어 내리고 두어 시간 작업하고 나면, 중대장의 명령처럼 눈이‘안 온 것’과 비슷해진다. 큰비가 지나가면 배수로와 참호를 보수해야 하는데, 이때 선임하사관들한테 삽과 곡괭이 쓰는 법을 배웠다.
젊은이들은 눈을 좋아해서 눈이 오면 거리로 쏟아져 나온다. 젊은 애인들이 눈 내린 거리에서 키스하고 술집 카페는 청춘남녀들의 활기로 가득찬다.
내가 눈을 기다리는 까닭은, 거리에서 연애하는 젊은이들을 먾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길이 미끄러우면 여자 애인은 남자에게 더 바싹 매달린다. 이런 청춘남녀를 보는 것은 노인의 기쁨이다.
눈이 내리면 나는 오래전에 돌아가신 아버지, 지난여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묻혀 있는 그 공동묘지에 내리는 눈을 생각한다. 공동묘지는 눈을 치우지 않아서 겨우내 쌓인다. 백설이 백골을 덮어서 산도 봉분도 보이지 않는다. 죽음이 지워져서 세상은 다만 하얗고 사람이 세상에 다녀간 자취가 없는데, 이것은 노인의 슬픔이다.
눈이 오면 나는 이런 기쁨과 슬픔 속에서 눈 치울 일을 생각한다. 내리는 눈송이를 바라보면서 젖은 눈인지 마른 눈인지. 적설량은 얼마나 될는지를 가늠한다. 밀판과 삽을 들고 눈을 치울 때, 나는 연장을 쓰는 작업의 행복을 느낀다. 연장은 몸의 연장(延長)이다. 연장은 인간 육체의 기능을 세분화해서 극대화한다. 삽을 쥐고 땅을 파거나 눈을 치울 때 몸은 일 속으로 스미고 일은 몸에 각인된다.
얼마 전 남한산성에 다녀오는 길에 성남 모란시장으로 갔더니 마침 오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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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 있었다. 장마다 돌아다니면서 망치 펜치, 삽 같은 쇠붙이 연장을 파는 장수가 전을 벌이고 있었다. 3인 1조가 되어서 곱사춤, 병신춤, 곰배팔이춤에 만담을 곁들여 손님을 끌어 모아놓고 물건을 팔았다. 행수(行首)쯤 되어 보이는 더벅머리 사내가 마이크를 잡고 연설했다. 젊은이들이 컴퓨터와 스마트폰만을 들여다보고 살아서 도무지 연장을 쓸 줄 모르는 동물로 퇴화 했으며, 살아 있는 몸의 건강한 기능을 상실했고, 인간의 영역이 쪼그라드는 현실을 그는 문명 비평적으로 개탄했다.
그가 핏대를 올려가며 소리 질렀다.
- 아, 니미, 서울 공대를 톱으로 나온 녀석들이 못대가리 하나를 못 박고, 닭 모가지를 못 비틀어. 아, 제미, 로스쿨 톱으로 나온 놈들이 펜치를 못 쥐고 도라이버를 못 돌려, 이게 사람이냐, 오랑우탄이냐. 몸이 다 썩은 놈들이 어떻게 밤일을 해서 새끼를 낳는지. 나는 박수쳤다.
충남 공주시 석장리는 금강 물가에 잇닿은 마을이다. 이 물가 마을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중석기 시대에 이르는 유물이 무더기로 출토 되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석장리 박물관을 지어서(2006년) 유물을 보관하고 있다.
석장리 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테마는 연장인데, 이 연장에는 인간의 생산과 노동, 일상과 미래, 기쁨과 슬픔이 모두 담겨 있고 이 모든 삶의 굴곡은 연장을 통해서 인간의 몸에 연결되고 자연에 새겨진다.
구석기 시대란 250만 년 전부터 1만 년 전까지, 중석기 시대란 1만 년 전부터 8천 년 전쯤까지 라고 학자들은 말하는데,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세월이다. 그때 사람들은 무슨 말을 하며 살았던가가 궁금해서 돌도끼에 귀를 기울여 보니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는데,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주먹 도끼는 구석기-중석기 시대의 가장 위력적이고 또 대표적인 연장이었다. 주먹 도끼는 자루가 출현하기 훨씬 이전의 연장이다. 연장에 자루를 붙이기까지 인간에게는 수만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주먹도끼는 손으로 쥐기 적당한 크기의 돌맹이 앞쪽을 다른 돌맹이로 때려서 날을 만들고, 그 날의 반대 부분을 손잡이로 쓴다.
주먹도끼의 손잡이는 그 도끼로 사냥을 해서 처자식을 벌어먹이던 사내의 손바닥 체온이 남아 있다. 그는 이 손바닥으로 짐승을 때려잡고 아내를 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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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했을 터이다. 주먹도끼의 손잡이는 사람의 손아귀에 닳아져서 반들반들 하다. 나는 석장이 박물관의 주먹도끼를 들여다보면서, 짐승의 머리를 치다가 일격이 빗나가서 짐승이게 먹힌 사내들, 하루 종일 허탕치고서 배고픈 처자식들에게 빈손으로 돌아오는 사네들, 비가 오고 눈이 와서 나가지 못하고 움막집 안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사내들을 생각했다.
<석장리 유적과 한국의 구석기 문화>를 저술한 손보기 교수는 연장을 만드는 구석기 사람들에 대해서
- 그들은 내일을 위해서 생각하고, 내일의 살림을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미래를 내다보는 힘이 앞날을 위한 계획을 세우게 하고 그 세워진 계획을 위하여 연장을 미리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인간이었다. 라고 썼다. 손보기 교수는 또 석장리에서 출토된 구석기 연장의 전개 과정을 분석해서 그 발달의 흐름을 정리했다. 요점만 옮겨 적는다.
구석기 시대가 전개됨에 따라서 연장의 가짓수는 늘어나고 크기는 작아진다. 한 개의 연장이 여러 용도로 쓰이다가 차츰 세분화되어 한 가지 쓰임새만을 갖는다.
연장은 가벼워지고 날은 더 길어지고 날카로워진다. 돌감은 처음에는 가까운 데서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썼으나 점차 먼 곳의 재료를 가져다 썼다.
연장은 다섯 손가락으로 쥐는 것부터 서너 손가락, 두 손가락으로 쥐는 것으로 발전했는데, 작업의 정밀도가 높아지고 인간의 손놀림도 세련되어 갔음을 알 수 있다. 돌연장의 발전은 경량화, 세분화, 첨예화인데, 현대 스마트기기의 전개 방향과 다르지 않다.
나는 여러해 전에 대가야의 고토인 경북 고령군, 경남 합천군 야로면 일대를 답사한 적이 있었다. 대가야는 철기 시대의 첨단 기술 강국이었다.
우륵은 바로 이 시대, 이 자리에서 가야금을 만들었고, 음악을 정비했다. 무기와 악기와 연장이 동시에 같은 자리에서 등장하고 있었다. 인간은 난해하다. 신라의 무기와 대가야의 무기가 부딪쳐서 대가야는 멸망했고, 대가야의 예술가 우륵은 금(琴)을 안고 신라로 투항했다. 신라는 이윽고 망했지만 악기는 망하지 않았다. 무기의 꿈과 악기의 꿈과 연장의 꿈은 다르지 않다. 그 꿈은 세계를 개조하는 것이다. 그러하되 그 작동의 방식과 방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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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지 않다. 야로에서 나는 한없는 무기, 한없는 악기, 한없는 연장을 느꼈다. 대가야의 고토에서 인간의 조건들은 서로 뒤섞이고 있었는데, 모든 것은 대장장이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눈을 치우다가 나는 삽질을 멈추고 수십만 년 전 금강 상류 석장리 마을에 내리는 눈을 생각했다. 눈이 산야를 덮어서 짐승들은 모두 숨어버리고, 강물이 얼어서 물고기도 잡을 수 없는 날, 식구들은 움막집안 화덕 둘레에 모여 있고, 사내들은 먹고살 일을 걱정하며 쏟아지는 눈만을 바라보고 있었을 터인데 그래도 그 움막 안에는 여러 가지 연장이 있었으므로 그 겨울 너머의 풍요를 꿈 꿀 수 있었을 것이다.
석장리 구석기 마을의 청춘 남녀들도 눈이 오면 좋아 했을까? 인간이 눈을 정서화하는 발단과 과정에 대해서 고고학자들은 아무런 학설을 내놓지 않고 있지만, 나는 석장리 구석기 마을의 청춘 남녀들도 눈이 오면 사람의 온도를 그리워했으리라고 믿는다. 믿는다기 보다는 그랬기를 바란다. 그래야 사람의 마을이 성립된다.
삽으로 눈을 치우면서 나는 내가 석장리 사람들의 까마득한 맨 끝자리에 겨우 붙어 있다는 걸 느끼는데, 일을 하다말고 이처럼 딴 생각을 하는 짓을 ‘해찰한다’고 말한다.
◉ 3부 연필은 짧아지고 가루는 쌓인다.
■ 말의 더러움
국회에서 여야 간에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물타기’로 쟁점을 뭉개버리면 여당도 야당도 손해 보지 않는다. 물타기는 쌍방이 죽기 살기로 물어뜯다가 슬그머니 물러 서는 방식으로 전개 된다. 나의 물과 너의 물을 섞음으로써 오염도가 평균화된 물을 공유한다.
너의 오염이 나의 오염을 희석시키는 생수가 되고, 나의 과오는 너의 과오를 덮어주는 이불이 된다. 물타기는 문제를 규명해서 해결하지 않고 쟁점을 일단 물 대 물의 대결로 바꾸어 놓고 물과 물을 섞음으로써 대결구도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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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버린다. 문제는 여전히 현실 속에 남아 있지만, 물타기는 사람들이 문제를 인식하는 능력까지도 뭉갠다.
물타기는 오염된 이 물과 저 물을 섞어서 더 큰 오염수를 만드는데, 이 오염수의 바다에서는 현실의 판단 준거가 몽롱해져서 사람들은 있는 것과 없는 것, 청정과 오염을 구분 할 수 없게 되고, 오염은 생활화된다.
‘물타기’는 대한민국 국회의 연금술이다.
물타기는 법리나 논리, 다수결의 원칙 혹은 국회선진화법 보다도 월등한 충돌 억지능력과 분쟁조정능력을 발휘한다. 물타기로 싸움의 포인트를 흐려 놓으면 그 생대 쪽도 결국은 물을 탈 수밖에 없어서, 물타기는 일단 죽기 살기의 외양으로 시작되지만 결국은 함께 사는 결과로 끝난다.
‘너의 물은 냄새 난다’라고 서로 고함을 질러서 몰아붙이면 죄 있는 자들끼리 돌로 치는 것 같은 형국이 되지만, 아무도 돌에 맞지 않는다. 죄가 있거나 없거나 돌을 던질 수 있고, 죄도 돌도 어디로 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다들 돌을 던지는 시늉만 하고 던지지 않는다.
물타기 판이 벌어지면 신문 방송은 당파성의 나팔로 악악거리고, 대중은 수군거리고 SNS는 와글거린다. 세상의 말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웅성거린다. 이 모든 뒤죽박죽은 ‘정치’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것인데 물타기 하는 쪽은 상대편의 물타기를 ‘정치공세’라고 부른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치’라는 단어를 가장 추악하고 비열한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치공세하지 말라’는 말은 그야말로 정치적이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정치’라는 말을 사용하는 용례를 살펴보면 그들 스스로가 이 단어가 얼마나 더러운지를 체험적으로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정치공세’를 할 때는 흔히 ‘국민’의 이름을 부르면서 국민의 뜻, 국민의 저항, 국민의 분노, 국민의 소망이 공세의 편이라고 하고, 그 상대편도 똑같은 고함을 지른다. 이때 국민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국민’이라는 이 거대한 군집은 살아 있는 실존이 아니고, 일종의 추상명사이다. ‘국민’은 아무도 아니다. 이 허깨비가 상여 행렬의 요령잡이처럼 정치공세의 맨 앞에 끌려와서 ‘국민, 국민’하면서 요령을 흔든다. 오늘의 구정물이 내일의 구정물에 합류되고, 이 구정물의 강가에 말들의 쓰레기는 산처럼 쌓여 썩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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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시대, 스마트 시대의 언(言)의 타락은 화(譁, 쓸데없는 소리를 쏟아냄), 광(誑, 미친 말을 마구 지껄임), 무(誣, 사실이 아닌 말을 꾸며서 남을 해치는 말, 가짜 뉴스), 의 기능을 극대화시킨다. 추종자가 많고 왁왁대는 소리가 크면 가짜 뉴스는 사실을 이긴다. 가짜 뉴스를 향해 ‘너는 가짜뉴스다’라고외치면 둘 다 가짜뉴스가 되는 판이다. 국회뿐 아니라 뉴스와 정보도 서로 물타기를 한다. 말을 섞어서 휘저어 놓으면 웅성거림만 남아서 누항은 언제나 수군거린다.
인류문화의 가장 아름답고 신뢰할 만한 부분은 말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말은 인간이 저지른 대부분의 죄악에 개입했거나 그 죄악 자체다. 이제 말은 소통에 기여하기 보다는 인간 사이의 단절을 완성시키고 있다. 말은 말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말이 병들면 민주주의는 불가능하다. 듣는 자가 있어야 말이 성립되는데, 악악대고 와글 거릴 뿐 듣는 자는 없다. 귀가 뚫렸다고 해서 다 들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국회여, 부디 히어링(hearing)에 힘쓰라.
■ 별아 내 가슴에
- 소설가 박계주(1913~1966)의 장편소설 제목
나는 오래 전에 대가야의 악사 우륵과 가야금에 대한 글을 써보려고 옛 기록을 찾아보았는데 삼국사기에 나오는 몇 줄이 전부였고 우륵의 선율이나 주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었다.
대가야가 신라 화랑 사다함의 군대에게 짓밟혀서 멸망하자 대가야 악사 우륵은 금(琴)을 안고 적국인 신라에 귀순했다. 우륵은 신라 진흥왕 앞에 불려가 금을 연주해서 크게 칭찬을 받았는데 그때 진흥왕은 하림성에 순행해 있었다. 그 무렵 이사부가 지휘하는 신라 군대는 대가야를 무너뜨린 여세를 몰아서 고구려, 백제의 여러 성을 빼앗았다. 신라 군대는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의 성왕을 죽이고 백제 군사 3만을 목 베어서 말 한 마리도 살려 보내지 않았다. 성왕을 죽인 다음해 10월에 진흥왕은 한강 유역까지 군사를 몰아가서 북한산 진관사 뒤 비봉에 올라가서 신라의 강역을 획정하는 비를 세웠으니, 22살 젊은 왕의 위용은 해동에 빛났다. 우륵이 하림성에서 이 젊은 왕을 위해 연주를 베푼 것은 이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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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의 거장 황병기(1936~2018) 선생은 우륵의 하림성 공연을 상상으로 헤아려 가면서 무반주 대금 독주곡 <하림성>을 작곡했다고 한다. 나는 홍종진의 연주로 이 곡을 듣는다.
나는 황병기 선생께 전화를 드려서 내 사정을 말하고 자료를 소개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황선생의 말씀을 지금 그대로 옮기기는 기억이 멀지만 요약하자면 자료는 ‘별’이라는 것이었다. 밤하늘의 별은 우륵이 보았던 바로 그 별이고 또 지금의 별이니까 별은 가장 확실한 자료다.
나는 전율했다. 이것이 예술가로구나! 글자로 된 자료. 남이 만들어 놓은 서물(書物)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게으른 자, 눈먼 자, 눈을 떠도 안 보이는 자의 허송세월이었다.
나는 별의 은총을 빌기로 했다. 서울은 밤마다 불야성이고 먼지가 하늘을 덮어서 별을 볼 수 없으므로 나는 우륵의 고향, 대가야의 고토인 경북 고령의 별을 보러갔다. 겨울이었다. 하늘이 찢어질 듯 팽팽했다. 밤하늘에 별들이 돋아나서, 끝이 없었다. 별들은 어둠의 먼 저쪽에서 천천히 다가왔다. 별들은 돋아났다기보다는 배어 나왔다. 별이 보이지 않던 어둠의 자리를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어둠의 저쪽에서 희미한 빛의 그림자 또는 가루 같은 것이 어른거리다가 점점 다가오면서 뚜렷해졌다. 별들은 다가오고 다가온다.
귀 기울이면,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 음악소리가 별들 사이를 흐르는 것 같았는데, 사람이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홍종진의 <하림성> 대금 선율이 대가야의 옛 무덤에서 새어나와 별들 쪽으로 흘러가는 환청을 나는 느꼈다. 그 환청 속에서 별들은 대금 구멍에서 쏟아져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고, 별과 별 사이를 너울 거렸고, 다시 대금 구멍 속으로 돌아왔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문화재청이 경남 함안군 가야읍 아라가야의 옛 무덤에서 125개의 별을 새긴 덮개돌을 찾아냈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 덮개돌은 길이가 2미터, 너비가 80센티미터, 두께가 25센티미터로 별의 크기에 따라 구멍의 크기와 깊이가 달랐고, 전갈자리, 남두육성(南斗六星) 같은 별자리를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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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니 별자리를 구성하는 별들의 위치가 정확했고, 큰 별, 작은 별이 고루 배치되어 아라가야의 밤하늘이 돌 위에 내려와 있었다. 별들이 빛나는 밤하늘 아래 아라가야 왕은 누워 있다.
이제 서울의 밤하늘에서 별들은 보이지 않는다. 아마 별들은 인간의 시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별을 보지 못하고 자라는 아이들은 불행하다. 아이들은 자신의 불행을 모른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자란다. 아이들아, 별들은 보이지 않을 뿐 사라지지 않는다.
■ 꽃과 노을
밤에 등을 끄고 누워 있으면, 벽에 걸린 그림 속의 색깔들과 마당에 핀 도라지의 흰색, 보라색이 어둠 속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인지를 나는 걱정한다. 어렸을 적에 하던 걱정을 늙어서도 한다. 어둠 속에서 촛불을 켜면, 그림속의 색들은 촛불의 빛에 흐려져서 느리게 다가온다. 색은 빛이 사라지면 사라지고 빛이 닿으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색은 주민등록지가 없다.
이 세상의 모든 꽃들이 저마다의 색과 모양으로 피어나는 비밀에 대하여 인간은 아무것도 모른다. 식물은 제 몸 속을 흐르는 수액을 적합한 재료들을 섞어서 꽃의 색과 향기를 만들어 낸다고 J.H. 파브르(1823~1915)는 <파브르 식물기> 마지막 페이지에 써 놓았다.
물감을 섞어서 없던 색을 만들어 낼 때 화가는 이 흘러가는 색들의 흔들림을 자신의 상상 쪽으로 인도한다. 그는 물감의 작은 양을 아주 조심스럽게 섞어서 색의 가장자리에서부터 다른 색을 끌어낸다. 그의 붓 끝에서 색들은 도라지꽃의 흰색이나 보라색처럼 멀리서 다가와 내려앉는다. 팔레트 위에서 화가의 색이 드러나는 비밀은 저녁 염전에 소금이 내려앉는 모습과 같다. 염부들은 ‘소금이 온다’고 말한다. 화가의 팔레트 위에서 색들은 섞인 물감의 합성이 아니라 이 세상에 지금까지 없었던 전혀 낯설고 새로운 색으로 태어난다. 이때 물감을 섞는 화가의 붓과 나이프는 대장장이로부터 이어받은 것일 테지만 그의 팔레트 위에는 연금술사의 낙원이 펼쳐진다.
물감을 섞는 화가의 팔레트를 들여다보면서 나는 수액과 재료를 섞어서 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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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향기를 만들어 내는 식물의 내면을 생각했다. 내 마음이 식물의 마음으로 건너가서 동물인 나는 식물의 자리를 느낄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생명은 신선했고 시간은 순결했다. 나는 피부에 잎파랑이가 돋아나서 빛과 물을 받아 두 팔을 벌리고 스스로 광합성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몽상을 느꼈다. 파브르는 꽃의 비밀을 말해주지 않고 세상을 떠났지만 나에게는 몽상이 있었으므로 그의 미완성이 섭섭하지는 않았다. 나무는 해마다 늙어가고 해마다 젊어진다. 젊음, 늙음, 삶, 죽음, 과거, 현재처럼 인간의 어휘로 규정되는 시간의 구획이 나무에게는 없다. 나무는 나무의 시간 속에서 산다. 나무는 자연의 시간을 받아들여서 저 자신의 시간으로 바꾸어 놓는다.
아프리카 남쪽의 바오밥 나무는 2천 년 이상을 살아서 밑동에는 동굴이 뚫려도 푸른 잎이 반짝인다. 나무의 시간은 색에 실려서 흘러간다. 신록에서 단풍으로, 단풍에서 낙엽으로, 색은 모든 스펙트럼을 펼치면서 흘러가는데, 이 팔레트에는 이음새가 없고 꿰맨 자리가 없다. 그러므로, 낙엽은 조락(凋落, 식물의 일부분, 즉 꽃이나 잎이 오래 머물지 않고 일찍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낙엽을 시들어 무너지는 애처로운 이파리라고 말하는 것은 인간이 저 자신의 생로병사에 나뭇잎을 끌어들인 언사일 뿐, 나무와는 사소한 관련도 없다. 나무의 시간 속에서, 낙엽은 신생으로 나아가는 흐름이다.
밤의 어둠 속에서 도라지의 흰색과 보라색, 일출과 일몰의 색들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인가. 어렸을 때 하던 걱정을 나는 지금도 한다.
■ 공차기의 행복
웃통을 벗은 뒤 달려간다. 날씨가 얼마나 매서운가는 상관없다. 그러다보면 재수없게, 넘어지는 일도 있을 것이다. 살다보면 개똥밭에 뒹구는 것보더 흉한 일도 많다. 삶이란 축구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월터 스콧
우리 마을, 정발산의 겨울숲은 조용하다. 겨울의 나무들은 멀리 떨어져서 수런거리지 않는다.
개를 데리고 새벽 숲을 달릴 때, 차고 비린 안개 속에서 내 몸의 관능은 활짝 열렸다. 나는 개와 똑같이 땅을 딛고 달리는 운명에 행복했고, 직립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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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하지 않는 개의 네 다리와 그 발바닥의 굳은살을 부러워했다. 내 달리기의 관능은 네발로 땅을 박차는 개의 행복만은 못했다.
새벽안개 속에서 공을 차는 젊은이들은 허연 콧김을 토해냈다. 이따금 그들과 어울려 공을 차며 놀았다. 살아있는 생명의 힘들이 공속에서 부딪치고 뒤섞이면서, 경험되지 않는 새로운 공으로 튕겨져 나갔다. 모든 공은 차이고, 또 차인 모든 궤적들과 더불어 태초의 공이었다. 공을 차면서 나는 생의 신비에 놀랐고 공은 그 신비 속에서 명멸했다.
하늘에 뜬 공은, 해나 달처럼 자연의 일부로 느껴진다. 공이 둥글다는 것은 필연적인 섭리다. 공이 정육면체나 세모뿔이었다면, 공차기는 성립되지 않는다. 공은 둥글어서 만인이 것이고 누구의 것도 아니다.
공들은 살아있는 짐승과도 같다.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운동장에서도 공은 여전히 공의 표정을 지니고 있다.
소나 말에게는 외양간이나 마구간이 있지만, 공의 집이 네트 안은 아닐 것이다. 공은 본래 제집이 없는데, 사람들은 기어이 공을 골 안으로 몰아넣는다.
다리로 공을 찰 때, 팔은 저절로 덩달아 움직인다. 이 ‘저절로’가 완벽한 율동과 곡선을 이루어낸다.
팔은 다리의 움직임과 엇갈리는 동작을 거듭한다. 이 ‘저절로’속에는 직립보행 이전에 네 발로 땅을 기던 시절의 기억이 살아 있다. 인간의 육체위에서 그 추억은 불멸의 등불로 빛난다.
이 행복한 앞발은 수억만 년의 추억을 가로질러와서, 그 추억과 더불어 현재의 시간 속에서 기쁘다.
■ 생명의 막장
물렁하고 아리송한 문장으로 심령술을 전파하는 힐러(healer)들의 책이 압도적인 판매량을 누리는 독서풍토에서 외상외과의사 이국종 교수의 저서 <골든아워>에 모이는 독자들의 호응을 나는 기쁘게 여긴다.
이국종은 중증외상환자 수술방을 ‘막장으로 인식하고 있다. 수술방은 어둡고 긴 복도 끝에 있다. 생업의 현장에서 추락하거나 깔려서 몸이 으깨진 사람들, 사고나 범죄 피해자들, 훈련중에 부상당한 군인들이 막장으로 실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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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다. 헬리콥터는 막장에서 다친 사람들을 싣고 막장으로 날아온다.
막장은 갱도의 맨 끝이다. 한자로는 채벽(採壁)이라고 하는데 곡괭이로 벽을 찍어서 석탄을 캐내는 자리라는 뜻이다. 막장은 생산의 최전방이다. 막장꾼이 곡괭이로 찍어낸 만큼만 갱도 밖으로 나갈 수가 있고, 그가 찍어낸 만큼만 갱도는 전진한다.
난잡한 욕망들의 충돌을 보여주는 TV 드라마나 권모술수와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정치판을 ‘막장’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아무 생산이 없고 생산에 가해지는 근육의 작동이 없으므로, 이것은 결코 막장이 아니다. 이것은 남을 막장으로 밀어넣고 자신은 갱도 밖으로 달아나려는 난장판이다.
이국종의 막장에서 생사는 명멸한다. 이국종은 으깨진 환자의 몸을 칼로 열고, 몸속 장기들의 가장 깊숙한 막장으로 들어간다. 거기서 생명은 기름 떨어진 램프의 희미한 불빛처럼 가물거리고 있는데, 이국종은 그 불씨를 살려내거나 살려내지 못한다. 그는 그 막장에서 생명과 삶과 죽음에 대한 명석한 인식에 도달한다.
“중환지실에 누운 환자가 의식이 없어도 그 몸이 스스로 살고자 애쓰고 있음을 느낄 때 나는 놀랍고도 안쓰러웠다. (1권 328~329쪽)”
라고 그는 썼다. 이 놀라움과 안쓰러움이 그를 막장에 붙잡아 놓는 가장 큰 힘인 듯 보인다.
자동차에 치여서 머리와 내장이 부서진 아이가 이국종의 막장에 실려와서 ‘가망 없는 수술’을 마치고 죽었다. 이국종이 죽은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더니 “열려 있는 아이의 눈동자는 맑았다. 생명이 떠난 후에도 눈빛이 마치 호수처럼 맑아서 나는 시선을 오래 두지 못했다(…) 간호사가 아이의 눈을 덮었으나 아이의 열린 눈동자는 내 눈에 선명하게 남았다.”
(1권 433쪽)
이국종은 병원의 상부조직이나 정부 관료들과 수없이 부딪치면서 적들을 만들어 왔다. 사람들은 ‘막장’을 외면했고 없애지도 못했고, 막장이 있다는 사실을 너무 힘들어 했고, 다만 막장이 조용하기만을 바랐다. 그는 수없이 절망하고 좌절했고 어디까지 가야 하는지를 스스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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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면을 먹으며
맛은 관념이 아니라 관능으로 작동하고 관능은 감각으로써만 소통된다. 맛은 개념이 아니고 기호가 아니고 상징이 아니다. 맛은 인간과 자연의 직거래이다. 맛은 정의가 아니고 불의가 아니다. 인간은 맛을 통해서 자연에 사무치고 저 자신의 육체를 자각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간은 개인이며 또 공동체이다. 음식을 먹을 때, 맛은 혓바닥에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데, 인간의 마음은 맛이 사라져가는 목구멍의 안쪽을 따라간다. 개별적 인간의 목구멍으로 넘어간 맛이 공동체의 정서와 공동체의 독자성을 이룬다.
평양냉면, 함흥냉면, 전주비빔밥, 남원추어탕, 충무김밥, 같은 음식 이름은 개별적 관능에서 공동체의 정서로 넓어져가는 맛의 사회적 역사적 전개이다.
남북 간의 격절과 불임의 세월에도 서울 거리에는 평양냉면과 함흥냉면을 파는 식당들이 서로 ‘원조’의 기원과 육수의 품격을 다투며 장사를 해왔다. 이 식당들은 거의가 을밀대, 모란봉, 부벽루, 대동강, 보통강, 만월대, 능라도, 만포진, 평양집, 개성집, 함흥집, 강계집 같은 북쪽의 지명을 옥호로 삼고 있었다. 냉면 파는 식당들의 이 옥호들은 갈 수 없는 산천에 대한 기억을 환기 시켰고 가본 적 없는 그 산하의 기후와 표정을 ‘맛’으로 끌어당겨 주었다. 갈 수는 없지만 그 이름을 먹을 수는 있었다.
공동 정서의 힘을 확보한 냉면 국물의 힘은 진작부터 정치군사적 장애를 넘어서고 있었다.
냉면은 6•25전쟁 때 내려온 월남피난민들이 부산에서 본격적으로 확산시켰다. 냉면의 확산은 전선 진퇴에 따른 것이었지만, 냉면 국물에는 애초부터 철조망이 없었다. 이것이 냉면의 힘이고 누항의 힘이다.
일제 강점기의 소설가 김남천(金南天)은 평안남도 성천(成川)에서 태어나 평양에서 청소년기를 보냈으니, 나는 냉면에 관한 그의 글을 신뢰한다.
김남천의 글에 따르면 평안도 사람들은 냉면을 ‘국수’라고 불렀다. 메밀로 국수를 뽑아서 냉면으로도 먹고, 온면으로도 먹는다. ‘국수’란 그 둘을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고 보니, 백석의 시에 자주 나오는 ‘국수’는 냉면임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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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천은 1947년 이승엽(李承燁 1905~1953 공산주의 운동가, 6•25 때 서울시 인민위원장, 1953년 처형) 임화(林和 1908~1953) 들과 함께 ‘사회주의 조국 평양으로 월북했다. 그러나 1953년 죽임을 당했다.
김남천의 최후가 총살형이었다면 그는 혁명의 제단에 자신의 한 목숨을 바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이 세계의 모든 권력을 저주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의 마지막 그리움이 냉면이었기를 바란다.
나는 평양냉면을 좋아해서 자전거를 타고 멀리 갈 때 단골 식당에서 냉면 육수를 얻어 물병 서너 개에 담아서 배낭에 넣고 간다. 식초와 겨자를 미리 풀어 넣는다. 냉면 육수는 몸이 스미는 깊이가 냉수보다 훨씬 더 깊게 느껴진다. 냉수보다 갈증이 더 잘 풀리고, 길 위에서 배부르지 않고도 허기를 면할 수 있다.
■ 새들이 왔다.
겨울새의 선발대는 10월 18일 해질 무렵에 한강 하구에 도착했다. 나는 장항습지 쪽에서 바라보았다. 김포쪽으로 해가 지는데 멀리서 다가오는 새들의 비행 대열은 노을 속을 흘러가는 한 줄기 연기처럼 보였다. 비행대열은 종대에서 횡대로, 일렬에서 2열로 길게 너울거리면서 다가 왔다. 흩어지고 모여서 다시 편성되는 질서는 유연했고, 진행의 방향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한강 하구의 겨울새는 쇠기러기와 청둥오리가 대부분이다. 시베리아나 캄차카반도, 유라시아에서 날아오는 철새들이다. 한강에서 겨울을 나고 매년 2월 초에 돌아간다. 착륙한 새떼들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날개를 퍼덕거리다가 다시 날아올라 겨울을 지낼 서식지를 광범위하게 정찰했다.
새들의 가슴에 노을이 닿아서 털이 빛났다. 새들이 끼룩거리니까 하늘과 강물이 살아나는 듯 싶었다. 더 어두워지자 새들은 자러가서 날지 않았다. 시베리아에서 한강까지 오려면 새들은 몇 번 날개를 퍼덕여야 하는가.
금년에 오는 새떼들이 작년에 왔던 그 새떼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나는 그렇기를 바란다. 작년에 왔던 새떼는 또 그 전해에 왔던 새떼이고, 새떼의 한 집단이 수천 년 동안 대를 이어가면서 한강에 찾아오는 것이지 싶다. 그렇다면 이 새떼의 학명은 ‘한강오리’ ‘한강 기러기’가 마땅하다.
일산 신도시는 계획과 설계에 의해 토목과 건축의 힘으로 세워졌고, 짧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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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동안에 급팽창해서 지금은 누구의 고향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운데, 동네 가까이 한강이 흐르고 수만 년 동안 먼 데서 새들이 찾아오니 사람이 마음을 붙이고 살 만한 동네다. 새들이 돌아오면 나는 내가 사는 자리가 먼 대륙, 먼 근원, 먼 시간과 연결되어 있음을 안다.
서울 도심의 한강으로 진출한 쇠기러기와 오리들은 대부분 밤섬이나 노들섬, 선유도에 모여 있다. 새들은 무리지어 사니까, 무리별로 서식지의 구역이 정해져 있을 것 같다.
새들이 어떻게 성수대교와 압구정동과 일산을 기억해서 그 먼 거리를 날아서 찾아오는 것인가. 서울 도심에서 겨울을 지내는 새들이 서울의 먼지와 매연, 자동차 소음, 별이 보이지 않는 서울의 밤하늘, 도심의 불야성에 익숙해져서 해마다 이 자리를 찾아온다면, 이 오리들은 참으로 기특한 서울의 목숨들이다.
■ 고래를 기다리며
도시 앞바다에까지 고래떼가 찾아와서, 울산은 복이 많다. 오랜 세월에 걸친 울산 시민들의 정성과 노력으로 썩었던 태화강이 생명을 되찾아 물고기가 놀고 새들이 모여들고 대숲이 살아났다. 태화강 상류, 반구대 물가의 바위에는 고래 수십마리와 호랑이 표범, 멧돼지 사슴들과 산과 바다에서 사냥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니 울산의 자랑이며 나라의 보물이다. 이 암각화는 어림잡아 칠천 년 전에 이 태화강 물가에서 살던 사람이 제작한 것인데. 7천 년 전의 고래와 지금 울산 앞바다의 고래는 태화강 물줄기로 이어져서, 울산 앞바다에서 뛰는 고래는 바위 속 고래의 후손이다.
나는 울산 앞바다에 펄펄 뛰는 고래떼를 TV로 보았다. 나는 놀라고 또 숨이 막혔다. 나는 속으로 ‘동해 만세!’‘고래만세!’‘울산 바다 만세!’를 불렀다. 새벽바다의 미명은 아직 남아 있는 어둠이면서 새로 찾아오는 밝음이었는데 아침해의 붉은 광선이 바다위로 퍼지고, 고래떼들이 그 붉은 바다에서 솟구치고 또 잠기면서 원양을 건너오고 있었다. 고래는 무슨 신나는 일이 있길래 저처럼 끝없이 솟구치는 것인가.
TV를 보면서 나는 바다로부터 나에게로 건너오는 생명의 힘을 느낀다. 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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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 인간에게 부여하는 힘을 고래가 전해주고 있었다. 고래는 새로운 시간의 바다에서 뛰고 있었다. 나는 잘한 것도 없이 다만 살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큰 상을 받는 느낌이었다. 7천 년 전 바위속의 고래가 지금도 같은 바다에서 뛰고 있다. 암각화가 그려지기 수만 년 전부터 고래는 울산 앞바다에서 뛰었을 테니까 거기는 고래의 나라이며 고래의 고향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물가에서 북향하고 있다. 맑은 여름날 오후 4시나 5시쯤. 해가 기울어서 엷은 광선이 비스듬히 바위를 비출 때 암각화의 모든 점, 선, 면에 빛의 알갱이들이 스며들어서 모든 고래와 호랑이, 표범, 멧돼지, 사슴들이 살아난다.
빛은 7천 년 전 이 동네 사람들의 연장이 쪼고 지나간 자리에서 반짝인다. 광선이 각도를 유지하고 있는 삼사십분 동안 이 바위에서 7천 년 전 고래가 뛰고 호랑이가 짖고 고래잡이 사내들은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간다. 날이 저물고 광선이 기울면 그림은 천천히 지워지고 바위속 마을은 밤을 맞는다.
문자가 없고, 종이가 없고, 그림 재료가 없던 시대에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바위에 기록했고 그들은 스토리텔링할 수 있는 문화 기량을 지니고 있었다.
이 암각화가 제작된 시대부터 약 5천년 쯤 지난 후, 신라 문무왕 13년 6월에 호랑이가 왕도에 들어왔고 그 후에도 호랑이는 번질나게 경주 도심에 어슬렁거렸다. 5마리가 떼로 돌아다닌 적도 있었다.
암각화가 있는 울산 대곡리에서 경주까지는 산줄기로 이어지는 근거리이고 신라시대에는 경주와 울산이 같은 생활권이었다. 49대 헌강왕 때 신라는 가장 영화로운 시절을 누렸는데, 왕은 울산만의 개운포까지 놀러다녔다.
■ 해마다 해가 간다
연말에 소년 시절의 친구들 몇 명이 녹두전 파는 식당에 모여서 송년의 자리를 가졌다. 송년회라고 하지만, 송구(送舊)도 영신(迎新)도 말처럼 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세월의 허망함을 이기지 못해 모여서 술 마시고 시시덕거리는 자리였다. 모인 친구들은 다들 70이 넘은 노인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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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시절에 나는 노는 구역이 광역화되어 있어서, 내 패거리에는 다른 학교 다니는 애들도 있었다. 이날 송년회는 이 패거리의 모임이었다.
이 늙은 친구들은 서너 살 때 6•25를 당해 엄마 등에 업혀서 피난 갔다가 국민소득 80달러 시대에 소년기를 보냈다. 북한 무장공작원의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고, 울진 삼척에 북한군 유격대가 쳐들어와서 산골에서 화전하는 주민들을 학살하고 전방에서 소규모 전투가 빈발하던 시절에 육군에 징집되어서 3년을 복무했다.
크게 출세한 사람은 없지만, 대기업에 말단 사원으로 들어가서 임원까지 승진했거나 지방 소도시에서 통닭가게 서너 개를 벌여 놓았거나, 종합상사 사 해외로 진출하던 시절에 유럽주재원으로 돌아다니면서 한국산 가발, 죽제품, 비닐우산을 팔았거나. 임금이 싸고 환경구조가 허술하고 노조가 없는 먼 나라에 공장을 차려놓고 한 장에 2달러 미만의 티셔츠를 만들어 팔아서 처자식을 건사해온 가장들이었다. 다들 얼굴이 쭈그러들었고 머리털에 먼지가 낀 듯했고, 눈동자에 쏘는 힘이 빠져서 헐렁해 보였다.
- 이제 술도 못 먹네. 앞으로는 모이면 우유로 하지. 사이다로 하든지.
- 술 몇 잔 먹다보니 날이 다 저물었어.
- 늙기가 너무 힘들다. 삭신 108마디가 쑤셔. 한꺼번에 팍 늙어버리면 좋을 텐데, 찔끔찔끔 늙으니까 더 힘들어.
- 난 그래도 사는 게 좋다. 살아 있어야 손홍민이 공차는 것도 보고 녹두전도 먹잖아.
- 맞아 늙기가 힘들어도 사는 게 그래도 좋아. 죽을 날짜를 모르니까 살 수가 있는 거야. 넌 몇년 몇월 며칠에 끝난다. 이렇게 정해져 있다면 죽기보다 살기가 더 무섭지 않겠냐. 모르니까 사는 거야.
2019.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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