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2019. 4. 17. 15:29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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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 냉담한 현실에서 어른살이를 위한 to do list(해야 할 일의 목록) -

■ 김수현 지음

0 미술학원에 다닌 적은 없지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디자인을 전공

0 문과와 디자인 중간쯤 있다가, 지금은 일러스트(삽화 사진 따 위를 통틀어 이르는 말)를 그리고 글을 씀

0 저서 : <100% 스무 살> <안녕 스무 살> <180도>를 펴냄

0 이 책은 현재를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와 응원을 담고 있다.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는 세상살이, 누구도 흉내 내지 않고,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나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전한다. 더 단단하고 밀도 높은 위안과 응원이 김수현의 네 번째 그림 에세이가 당신과 함께 한다.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우리’ 보통의 존재들을 위하여.

■ Prologue

생각해 보면 나는 늘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학창시절, 선생님이 내게 무언가를 시키면 언제나 “왜요?”라고 물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반항을 한다고 여겼는데, 나는 정말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건 내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나는 어른이 되었고 어느 날 문득 나 자신이 초라하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애매한 나이에 애매한 경력과 애매한 실력. 나는 제대로 갖춘 것도 보장된 것도 없는 애매한 사람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애매한 어른으로 자라버렸을까.

나는 학창시절 선생님 말에 이유가 궁금했듯이, 아무 잘못 없는 개인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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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라함을 느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많은 책을 읽었는데, 취미의 책읽기가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읽었다. 나는 왜 초라해 졌는가에 대하여, 나는 왜 부족한가에 대하여, 나는 왜 아무 것도 아닌가에 대하여 그리고 궁금증을 해소해가며 내가 내린 최종적인 결론은, 세상이 나의 존재를 무가치하게 여길지라도 나는 나를 존중하고, 나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도 된다는 거였다.

이 책은 내가 느꼈던 초라함의 이유이자, 나를 초라하게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0 GOAL (목적, 목표)

보통의 존재가 내가 아닌 것을 시기하지 않으며 차가운 시선을 견디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 Part 1. 나의 삶을 존중하며 살아가기 위한

to do list(목표, 목적)

*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의 도구가 되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과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 <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 내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을 것

대학을 갓 졸업했을 무렵, 나는 한 회사에서 인턴을 했다. 내가 처음으로 배정된 팀에서 만난 주임은 나를 하인처럼 대했다고 할까? 갑질이 적당할 듯. 자기 앞에 있는 모니터를 10Cm 옮기는 것도 나를 시켰고. 사소한 실수만 해도 “나 엿 먹여?”라며 면박을 줬다. 사회생활이 처음이었고 모든 게 평가 대상이었던 인턴 신분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이 집단의 가장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호모인턴스 시절을 보냈다.

* 호모인턴스 : 정규직이 되지 못한 채 인턴만 반복하는 취업 준비생

그렇게 인턴십을 마치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잠자리에 드는데 갑자기 그 선배 생각에 분한 마음이 일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건, 그녀가 나에게 한 행동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표정 한 번 구기지 않은 나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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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것이 우리의 잘못은 아니지만 사람의 자존감에 치명상을 끼치는 건, 부당한 대우 자체보다 부당한 대우에 굴복한 자기 자신인 거다.

그러니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은 이에게, 친절하려 애쓰지 말자. 상황을 바꿀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그들에게 비굴해지지는 말자.

저열한 사람들로부터 스스로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에겐 최소한의 저항이 필요하다.

갑질이란, 최소한의 인격적 대우조차 갖추지 않은 천박한 갑과 최소한의 인격적 대우조차 요구하지 않는 무력한 을의 합작품이다.

■ 비참해지려 애쓰지 않을 것

인스타그램(사진, 동영상 기반의 모바일 SNS)이라는 신세계에 입성했을 무렵, 랜덤(임의로, 생각대로의)으로 사진이 보이는 피드(쇼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약간의 과장을 보태 허리까지가 가슴인 엄청난 글래머의 사진을 보았다.

미디어는 너무 쉽게 타인의 삶을 훔쳐볼 수 있게 하고 옛날 같았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이들의 완벽해 보이는 삶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런데 과연 그 호기심은 무료일까? <자신을 무참하게 만드는 법>이란 책에서는 타인의 삶을 훔쳐보며 내 삶과 비교하는 것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 얘기했다.

우리 역시 약간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타인의 삶을 구경하고 그 대가로 비참함을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충족된 호기심으론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그 에너지와 호기심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삶을 돌보는 데 사용해야 한다. 그러니, 타인의 삶에 기꺼이 친구는 되어주되 관객은 되지 말자. 부디 비참해지려 애쓰지 말자.

시기심이 파괴적인 이유는 자신이 가진 것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데 있다.

■ 떳떳한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낄 것

내가 어릴 적에 <성공시대>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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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기를 보여주는 방송이었는데 매주 인물이 바뀌지만 이야기의 서술은 언제나 동일했다. 과거의 비참한 현실과 현재의 성공을 대비시키고 엄청난 노력과 불굴의 의지가 그 간격을 메운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힘든 환경이라도 노력으로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능력과 노력은 성공의 마스터키가 아닌 여러 요인 중의 하나일 뿐이다. 게다가 과거에 그러한 성공 신화가 가능했던 건, 그때는 한국이 고성장 시기였고, 다들 지지리 못 살아서 개인 간 자본의 차이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개인이 계층을 이동할 기회를 찾기 어렵고 공정한 능력주의의 전제조건인 ‘기회의 평등은 지켜지지 않은 채 부모의 자산, 배경, 계층의 이어달리기가 진행 중이다.

그럼에도 <노력=능력=성공>이라는 등식은 <게으름=무능=가난>이라는 등식으로 자동 연산되어서 가난의 이유를 노력이 부족한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차별과 계급을 정당화한다.

무한한 기회가 열려 있는데도 가난한 것은 너의 탓이니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하면 쪽팔리다. 그러니 가난해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도 아닌데 학교엔 노스페이스나 K2 쯤은 입고 가야 가오(폼을 속되게 이르는 말)가 살고, 부녀회에선 비싼 아파트처럼 보이기 위해 아파트 이름을 영어로 바꿔야 한다는 촌극을 벌인다.

세상에는 부끄러워해야 할 부가 있듯이 떳떳한 가난이 있다.

■ 인생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상처받지 않을 것

월급의 2배 짜리 명품 가방만이 낭비가 아니고, 연예인 걱정만이 낭비가 아니다. 우리 삶에서 곧 사라질 존재들에게 마음의 에너지를 쏟는 것 역시 감정의 낭비다. 그만 두면 끝일 회사 상사에게, 어쩌다 마주치는 애정 없는 친척에게, 웃으면서 열 받게 하는 빙그레 쌍년에게, 아닌 척 머리를 굴리는 여우같은 동기에게, 인생에서 아무 것도 아닌 존재들에게 더는 감정을 낭비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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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졸여도, 끙끙거려도, 미워해도 그들은 어차피 인생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 인생에서 숫자를 지울 것

* 인터넷에 떠돌았던 나라별 중산층의 기준이다.

0 영국(옥스포드대에서 제시한 중산층의 조건)

- 페어플레이를 할 것. -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 나만의 독선을 지니지 말 것, -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0 프랑스 (퐁피두 대통령이 ‘삶의 질’에서 정한 중산층의 기준)

- 외국어를 하나 정도 구사하여 폭넓은 세계 경험을 갖출 것

- 한 가지 이상의 스포츠를 즐기거나 하나 이상의 악기를 다룰 것

-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별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 손님을 대접할 것

- 사회 봉사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할 것

-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꾸짖을 수 있을 것

0 대한민국(연봉정보사이트 직장인 대상 설문)

- 부채 없는 아파트 평수 30평 - 월 급여 500만원 이상

- 자동차는 2000CC급 중형차 - 예금액 잔고 1억원 이상

- 1년에 몇 번씩의 해외여행

영국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 기준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 그건 바로 숫자다. 우리는 무엇이든 숫자로 책정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나 자신의 값어치를 매기는 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세워진 숫자의 삶 속에서 개인은 이력서에 쓸 숫자들을 위해 분투하고 집의 평수로 관계에 금을 긋고, 파업이나 집회가 있으면 어떤 가치의 충돌인지가 아니라 얼마의 돈을 손해보고 있는지 헤드라인으로 읽는다. 그야말로 가치는 잊은 채 서로의 값어치만 묻는 숫자의 삶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낮은 값어치가 매겨질까 안절부절 못하고 자신의 위치와 서열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그렇다면 삶의 모든 것을 숫자로 측정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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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큐가 지혜를 측정할 수 없고, 친구의 숫자가 관계의 깊이를 증명할 수 없으며, 집의 평수가 가족의 화목함을 보장할 수 없고, 연봉이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할 수 없다.

진정한 가치는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당신이 우월한 존재가 아닌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삶에서 숫자를 지워야 할 것이다.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가 담을 수 없는 것들에 있다.

■ 누군가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것

SNS를 통해 친해진 정미 씨는 내 전작을 읽은 독자로 사랑스럽고, 따뜻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에겐 사랑꾼 남자 친구가 있는데, 그녀는 종종 남자 친구의 일화를 SNS에 기록했고, 나는 그들이 죽은 연애 세포를 살려내는 사랑스러운 커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작작 좀 하라는 댓글을 남겼다. 다른 사람들 불행한 것은 생각 안 하냐고. 물론 SNS에 지나치게 과시적인 사람이 있다. 하지만 보증하건데 그녀는 결코 그런 타입이 아니었고 자신이 느꼈던 소소한 행복을 기록했을 뿐이다. 그 댓글을 본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잘못은 어디까지나 댓글을 남긴 사람이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 있었다.

우리는 종종 나의 의도를 오독하고, 나에 대해 왜곡하여 비난하는 이들을 만난다. 인터넷 뉴스에 배배꼬인 악플을 남기던 사람들이 SNS로, 일상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떠들기 좋아하는 그들에 대한 대처법

1) 그건 그의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일 뿐 솔로몬이나 프로이트는 아니다.

2) 그것이 당신을 향한 비난이라면 비난의 진실여부를 판단해야 한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고치는 계기로 삼고 상대편 내면의 문제에서 비롯된 다면 그냥 개가 짓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3) 만약 개가 계속 짖으면, 마땅히 그 책임을 물으시라. 죄명은 명예훼손 죄, 아니 소음공해 죄

■ 모욕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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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혐, 개저씨, 기레기, 설명충, 유족충, 맘충, 보슬아치, 한남충 등 수많은 모욕과 혐오를 담은 단어들이 일상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 의미는 우리가 서로를 너무 쉽게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혐오주의의 원인은 주로 중산층 붕괴로 이야기된다. 지위에 불안을 느끼는 이들이 누군가를 내몰아 자신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되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그렇게만 해석하기엔 그 대상이 무차별적이고 광범위하다. 나만 하더라도 대한만국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김치녀로 묶이고 결혼해서 전업주부를 하면 취집충, 아기를 낳으면 맘충, 설명하려 들면 설명충, 진지하면 진지충이 된다.

이러한 일상적 혐오에 대해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 교수는 웬만큼 잘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 공허를 채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타인에 대한 모멸이라 했다. 그러니까 희미해진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열패감을 보상받기 위해 얄팍한 우월감을 맛보기 위해 타인을 모욕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찌질한가.

단언컨대,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 세상에선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남을 모욕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인 이들을 ‘루저’라 부른다.

■ 스스로에게 변명하지 않을 것

젊은 시절 운동권 있었다는 어느 분의 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운동권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 못했다. 그는 그런 저본주의를 혐오했는데. 이렇게 불합리한 구조에선 일할 수 없다고 말하며 언제부턴가는 일자리를 구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마흔을 넘긴 나이까지도 일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모든 생활비는 청소 일을 하는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사람의 논리는 허점투성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사회적 구조를 비난하면서도 자신은 어머니를 착취하고 있으니 말이다. 주변 사람들은 일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그를 이해할 수 없어했고, 그의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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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감형경은 <사람풍경>에서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나 분노가 아니라 무관심이듯, 생의 반대말은 죽음이나 퇴행이 아니라 방어의식이라 이야기 했다. 방어의식은 사람을 영원히 자기 삶 바깥에서 서성이게 한다.

그 역시 오랫동안 삶의 바깥에서 서성이며 맴돌았다. 자신을 초라하게 하는 현실과 마주하며 무력감과 수치심을 감당할 바에는 차라리 동네의 고상한 레지스탕스가 되는 편이 나을 거라 여겼을 수 있고, 부조리한 세상에 상처받는 것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과거에 묶여 인생 전체를 소진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자책과 원망을 소거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투명하게 평가해야 한다.

한심하고 부끄러워할 건 좋은 직장에 다니지 못하는 거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했던 모습은 아닐지라도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지는 걸 견뎌야 할지라도 변명을 덜어낸 진짜 자기 자신과 마주하자.

그리고 그 마주 봄 끝에 가장 중요한 건 다시 시작하는 데 있다.

중요한 건, 자기 내면의 분노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 누구의 삶도 완벽하지 않음을 기억할 것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며 타인의 삶의 무게를 짐작하지만,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 듯, 우리의 눈에 비친 타인의 모습도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상처와 결핍을 가졌으며, 손상되지 않은 삶은 없다.

그렇기에 당신이 알아야 할 분명한 진실은 사실 누구의 삶도 그리 완벽하지는 안다는 것, 때론 그 사실이 위로가 될 것이다.

친구가 갑자기 카톡으로 ‘넌 항상 열심히 사는 것 같아, 늘 자극 받는다’라고 보내왔다. 난 그냥 엎드려서 쇼핑몰 배송 조회를 하고 있었는데.

0 상처의 원근법 : 가까운 것은 커 보이고 멀리 있는 것은 작게 보인다.

내 상처가 가장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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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통의 존재로 충분히 행복할 것

생각해 보면 평범한 어른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지점, 어린 시절 내가 품었던 이상을 떠나보내는 지점, 어른의 사춘기는 그 지점에서 오는 게 아닐까.

물론 그 순간이 슬프고 씁쓸하기는 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환상과 기대감에서 벗어나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꾸리는 것, 어른의 숙제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원하는 건 나의 동창들이 내 소식을 듣고 배가 아파 복통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친척들이 가문의 영광이라며 나를 우러러보는 일도 아니다.

대신 내겐 쓰고 싶은 글이 있고 조금 더 잘해보고 싶은 그림과 디자인 일이 있다. 가족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고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며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다.

어른의 사춘기는 자신의 평범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채울 수 있을 때 종결되는 것이며 우리는 그 순간 진짜 어른이 될 것이다.

■ 나를 평가할 자격을 주지 않을 것

남자든 여자든, 이성의 경제력을 보는 건 나쁜 건 아니다. 나 역시도 분명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먹고 사는 문제를 무시할 수 없는 것과 쉴 새 없이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를 내며 사람의 모든 걸 숫자로 환원시키는 건 좀 다른 문제다.

사는 집을 확인하고 연락이 없었다는 사람, 부모님의 직업을 확인하는 것에 모든 대화를 쏟는 사람, 그런 상대들 앞에서 누군가는 답안지를 제출한 아이처럼 상대가 나에게 대해 내릴 평가에 불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한 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리 불안해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니까 그 사람에겐 내가 자격미달이겠지만 그 사람도 내게 자격미달인

거다. 내게 필요한 건 나와 닮은 단 한 사람일 뿐이지 그들이 아니며, 그들

만 나를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 나를 숫자로 평가 한다면. “놀구 있네. 니들은 어차피 다 탈락이야, 이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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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눅 들 만큼 겸손하지 말 것

책을 내고 난 후, 종종 친구들은 나를 ‘김 작가’라고 불렀다. 하지만 친구들끼리 장난처럼 하는 말일 뿐, 나는 나를 작가라 여기지는 못했다.

작가의 사전적 의미는 글이나 그림 등의 창작자일 뿐임에도, 작가의 자격 앞에선 늘 민망하고 어색했다.

그러다 어느 여행자의 일화를 듣게 되었다. 여행자는 유럽 어느 술집에서 바텐더를 만났는데, 바텐더는 여행자에게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그 말에 여행자가 “당신 이름으로 나온 시집이 있나요?”하고 물었고 바텐더는 “아뇨 시집을 낸 적은 없지만, 시를 쓰기 때문에 시인이죠”라고 답했다.

나는 왜 몇 권의 책을 내고도 작가라 불리는 것을 어색해하고. 다른 누군가는 시집 한 권 없이도 스스로를 당당하게 시인이라 부를 수 있었을까.

개인의 차이도 있겠지만, 그건 문화의 차이가 크다. 그 차이는 공교육에서도 보여진다.

우리는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도록 교육받기보다는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도록 교육을 받았다. 영어에는 대응할 단어조차 없는 ‘눈치’가 한국은 유난히 발달한 것도, 서양인이 보기엔 자기비하에 가까운 겸손도 이런 문화에서 나온다.

그러나 그 가치는 타인의 눈치를 보며 주눅드는 것이 아닌 타인에 대한 존중에 있을 뿐이고 타인의 감정을 염려하느라 정작 자신의 감정은 돌보지 못한다면 그 무엇도 미덕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당신이 지칠 만큼 눈치를 볼 필요도, 주눅 들 만큼 겸손할 필요도 없다.

당신이 가장 존중해야 하는 사람은 언제나 당신 자신이다. 약간의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과 개쌍마이웨이(남의 시선 신경 안 쓰고 내 갈 길을 가련다)정신이 필요하다.

■ 나의 삶을 존중할 권리를 말할 것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자극글귀>라는 것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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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

“1~3등급은 치킨을 시키고, 4~6등급은 치킨을 튀기고, 7~9등급은 치킨을 배달한다.”얼핏 들으면 라임 돋는 위트 잇는 문장이지만, 이 텍스트는 치킨을 배달하는 삶. 공장에서 미싱하는 삶을 공부하지 않은 형벌로 바라보게 하고, 땀 흘리는 노동을 비참한 삶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텍스트 속에는 우리의 노동자에 대한 무시와 차별을 머릿속에 기본 OS로 장착하게 되는 것이다.

* OS - 컴퓨터를 움직이는 기본 소프트웨어

이 문제는 단지 만인이 평등하다는 휴머니티 관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아이들은 공부를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듣고 온갖 자극 글귀를 읽으며 당연히 드라마 속의 커리어 우먼이나 비즈니스맨이 되는 미래만을 그린다. 그러나 현실의 많은 이들이 육체노동자로 살아가며 평범한 직장에서 을의 삶을 마주한다.

미래에 대한 과대망상과 차별의 OS가 평범한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신이 그들과 같다는 걸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 노동자 계급의 연대가 어려운 이유 역시 이 자기 혐오에 있다.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 이규태의 글이다.

“유럽 사람들은 상황이나 사정이 바뀌면 그에 맞추어 자연스레 하향을 한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사정이나 상황이 달라져도 하향은 끝내 하지 않으려 하고. 어쩔 수 없이 하향을 하게 될 때는 처참하고 처절한 심경에 빠진다.”

만약 당신이 끊임없이 불안을 충전하고 있다면 혹은 당신이 꿈꿨던 미래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낀다면 스스로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치킨 배달을 한다 해도 공장에서 미싱을 한다 해도 삶이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일 뿐 그 어떤 삶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열심히 사는 것도 열심히 배우는 것도 마음껏 하시라. 하지만 누구의 삶도 모욕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존중하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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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ART 2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to do list

* to do list : 해야 할 일의 목록

■ 단단한 자존감을 다질 것

*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느니, 차라리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미움 받겠다. - 커트 코베인 (Kurt Cobain) , 가수 -

알랭 드 보통은 어른이 된다는 건 냉담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의 자리를 차지하는 의미라 했다. 살아보니 세상은 동화 같지 않다. 갑질에 분개하는 것이 새삼스러울 만큼 차별은 일상에 만연하고 속물의 조건적 관심에 의연한 척하며 무시하려 해도 마음은 주머니 속에 넣어둔 쿠크다스(잘 부서지는 벨기에 빵 이름)처럼 부서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기준과 평가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키우라고.

그래, 말은 잘 알겠는데. 그게 왜 말처럼 쉽지 않을까?

자존감은 기본적으로 어린 시절의 경험과 부모의 양육방식에 영향을 받는다. 부모의 애착 경험이 부족하거나 학대, 조롱, 방치, 비난을 경험한 경우 자존감 문제에 시달릴 수 있다.

심리학자 너새니얼 브랜든은 건강한 자존심을 위한 두 기둥을 자아 효능감과 자기 존중감이라 이야기 했다. 자아 효능감이란 자신을 돌보며 현실적 문제에 대처할 수 있다는 자기 신뢰이자 자신감이고 자기 존중감은 스스로를 존중하며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다.

세상은 자존감 없이는 점점 버티기 힘든 곳으로 변해 가는데 개인은 자존감을 새우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자존감 문제를 해결하고 이 냉담한 세상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그 첫 번째 축은 사회적 존중이라는 자존감의 토양을 다지는 것이다. 존중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공공재가 된다면, 우리는 존중 받으려 쩔쩔매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존중을 공공재로 만들자. 서로에게 존중의 연료가 되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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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축은 개인 스스로가 자존감에 대해 보다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자존감은 우월감에서 비롯된 우쭐함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아서 얻어지는 일시적인 만족감도 아니다. 자존감의 본질은 자신에 대한 신뢰이자 행복을 누릴만한 사람이라 여기는 자기 존중감이다.

EBS 다큐프라임 <아이의 사생활>에서는 부모의 태도가 자녀의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했다.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에게는 퍼즐 조각이 주어졌는데 과제를 어려워하자 자존감이 낮은 아이의 부모는 대신 해결해 주려 했고. 자존감이 높은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자존감의 재료인 자신에 대한 신뢰와 존중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고 목표를 달성하는 성공 경험이 축적될 때 생겨난다. 그리고 실험에서 보여주듯이 가장 중요한 건 그 주체가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다.

그렇기에 단단한 자존감을 세우기 위한 첫걸음은 분명하다.

‘나답게 살아가는 것.’

* 타인을 통해 자존감을 구하는 건 자기 삶의 통제권을 내던지는 일이다.

■ 나다운 삶을 찾을 것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 “너 답지 않게 왜이래?”라고 말하면 여자 주인공이 도끼눈을 하고 이렇게 대답한다.

“나다운 게 뭔데?”그러게나 말이다.

나답게 살아야 한다는 건 익히 들어 알겠는데, 나다운 게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왜 우리는 나다운 게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까?

과거 우리의 핵심도덕이었던 유교에서 개인은 주변 환경과 관계 속에서 상호의존적인 존재였다. 개인의 정체성은 역할에 따라 결정되었고, 자문과 탐색보다는 주어진 역할의 도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에 맞추는 것을 아름다운 삶이라 여긴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삶의 방식과 철학을 세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부모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사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자신의 신념과 철학은커녕 자신에 대한 윤곽선도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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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내지 못하고 자소서 대신 자소설을 쓰게 된다. 그리고 이 상황을 끝까지 해결하지 못하는 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지독한 의존심에 있다.

어린 시절, “너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어른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아이가 나약하고 열등한 존재임을 각성시켰다. 많은 부모는 아이의 나약함과 열등함을 이유로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을 빼앗았다. <과정>없이 어른이라는 <결과>만 남은 이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을 나리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나이를 먹어서도 멘토를 찾아다닌다.

프리랜서가 된다고 해서 나다운 것이 아니고 특이한 취향을 가졌다고 해서 나 다운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삶을 일구는 것이 나다운 삶이다. 그 시작을 위해선 당신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당신에 대한 글을 써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가치를 실현하며 살고 싶은지, 무엇에 행복해지는 사람인지, 나는 남과 어떻게 다른지<자기 감각>을 찾자.

* 어른들이 이야기 했던 스스로 어린이는 사실 시킨 일을 알아서 하는 어린 이다.

■ 더 이상 삶의 질문을 유예하지 않을 것

혹독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일단 공부하고, 일단 대학에 가고. 일단 좋은 스펙을 다지고, 일단 돈을 번다. 그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봄부터 겨울까지 해야 할 일에 쫓기며 어른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뭔지 모르겠어요.”그런 그들에게 되묻고 싶은 질문은 “좋아서 해 본 일이 있나요?”

오랫동안 하고 싶은 일이 아닌, 해야 하는 일들에 매몰되어 자신의 욕구를 억눌러온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과 자신의 감각을 되찾아야 한다.

이제 유예했던 삶의 질문들에 답해야 할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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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연했던 것에 질문 할 것

나의 어린 시절에도 미덕이 있었는데 바로 근면 성실이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몸이 아프거나 다쳐도 빠짐없이 학교에 가면 개근상을 줬고, 칠판 위에는 ‘근면 성실’이라는 급훈이 쓰인 액자가 걸려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근면 성실을 최고의 미덕으로 배운 건 우리 사회가 제조업 기반의 사회였던 것에 있다. 제조업에서는 창의력이나 개성보다 근면함과 성실함이 가장 필요한 자질이었으니 말이다.

열이 팔팔 끓어도 학교에 나오는 학생은 타의 모범이 되며,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하고, 이슬람 국가에서는 자유연애 한다는 이유로 딸을 죽이는 것이 명예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사회가 선별해서 미덕으로 심은 통념은 때로는 괴담을 미담으로 폭력을 명예로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사회의 미덕과 통념을 불변의 진리로 여기며 살아간다.

얼마 전 고용노동부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에 휴가지에 가서도 바이어와 미팅을 완수한 김 대리의 이야기가 훌륭한 사례로 올라왔다. 휴가 간 직원의 사적 생활을 방해한 회사를 고발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개수작이야.

■ 누구의 기대를 위해서도 살지 않을 것

나는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 대단한 포부나 큰 결단이 있었던 건 아니다. 쓰고 싶은 글이 있었고, 회사를 다니는 문제는 일단 책을 쓰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난 어떻게 중요한 결정을 이리 쉽게 내릴 수 있엇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 보면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의 양육방식 때문이었다. 나는 살면서 부모님의 강요에 부딪친 적이 없었다. 내가 어떤 산택을 내릴 때 의견을 주시긴 했지만 결국은 내 선택대로 할 수 있게 해주셨다. 게다가 중학교 시절까지 공부는 안 하고 만화책만 본 나와 달리 언니는 전교 1,2 등을 하는 우등생이었지만 단 한 번도 언니와 비교 당한 기억이 없다. 그 덕분에 나는 부모님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않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익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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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살아갈 뿐이다. 그 삶이 부모님 기대에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하여 살아가는 건 사랑이 아닌 채무감이자 강박일 뿐,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이 나의 몫이라면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부모님 몫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부모님에게 받은 경제적인 지원에 의한 채무감이라면 살며 최선을 다해 갚으시라. 하숙비를 내야 하숙생이 되는 거다. 하지만 우리 삶까지 저당 잡혀 살지는 말자. 우리가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애써야 할 유일한 존재는 나 자신뿐이다.

■ 나 외엔 무엇도 되지 않을 것

문제는 나이를 먹어서도 우리의 꿈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될 것인가’에 머물러 있을 때 발생한다.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나 이외엔 아무 것도 될 필요가 없어요”이다.

■ 세상의 정답에 굴복하지 않을 것

동네 커피숍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원어민 강사인 캐나다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내게 우리나라에 와서 이상하게 느낀 점을 이야기 했는데 한국 사람들은 Smart Student를 Good student 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봤을 때 공부를 못해도 Good student 일 수 있고, 공부를 잘해도 Good student가 아닐 수 있는데 말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Smart = Good 라는 등식에 그녀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 Smart : 똑똑한, 영리한, 현명한 * Good : 좋은, 훌륭한, 잘

‘잘 산다’는 의미 역시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 ‘잘 산다’고 할 수 있는 요소에는 경제적인 기반 외에도 건강한 신체와 좋은 인간관계, 삶의 철학과 예술을 즐기는 심미안, 일을 통해 느끼는 보람 등 다양한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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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우리에게 잘 사는 것, 즉, 웰빙(Well being)이란 오직 부자인 삶, Rich(부자, 부자의)의 의미로만 이야기 된다.

한 가지 답을 좇는 획일적인 사회의 모습에서 여성은 체지방 17%에 48Kg이어야 하고, 밝고 겸손한 성격이어야 하며,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가야 한다. 높은 기준의 단일화 된 정답을 이야기하며 정답에 대한 병적인 찬사와 오답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그 속에서 졸지에 오답이 된 개인은 혼자 힘으로 그 부적절함을 견뎌야 한다. 그 결과 우리에겐 정답이 된 소수의 오만과 오답이 된 다수의 열패감으로 응축된 병적인 사회가 남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는 과연 가능한 존재인가. 모두가 날씬할 수 없고, 모두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격일 수 없고, 모두가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갈 수는 없다. 아니 모두가 그렇다면 그거야 말로 <은하철도 999>에 나올 법한 비정상적인 행성일 뿐이다.

좋은 학생은 여러 정의가 있고, 잘 사는 것에는 여러 방법이 있으며 우리는 각자의 답을 가질 권리가 있다. 우리는 오답이 아닌, 각기 다른 답이다.

■ 안목을 기를 것

이제 실패를 통해 길러낸 안목과 취향으로 내게 가장 좋은 한 가지를 찾아내자. 삶이란 결국 내게 잘 어울리는 질 좋은 옷 한 벌을 찾는 일이다.

그녀에겐 단발머리가 진실이라는 사실은 그에겐 댄디룩이 잘 어울린다는 사실은 내겐 살구색 블러셔가 잘 맞는다는 사실은 새로운 시도를 통해 발견됐다.

* 획일화된 경험은 스스로를 오해하게 하고, 다양한 경험은 스스로를 이해 하게 한다.

■ 스스로 선택할 것

인생은 B(birth) 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라는 한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가 어떤 선택을 어떻게 하는가는 우리의 인생을 결정한다.

그런데 주위엔 선택을 유난히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중한 것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데 그들은 왜 선택을 내리는 걸 어려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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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완벽한 답을 얻으려는 강박일 수도 있으나 스스로의 판단을 믿는 자기 신뢰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선택을 내리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 답을 내려주기를 기대하거나, 문제가 곪을 때까지 선택을 유예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시간 낭비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너새니얼 브랜든이 말하길, 선택들은 정신 깊은 곳에서 쌓이고 그렇게 쌓인 결과를 자존감이라 부른다고 했다. 삶에서 자신이 내린 선택이 모여 자존감을 이룬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기 신뢰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믿을 때가 아니라 스스로 최선의 결정을 내리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결과까지 책임질 때 얻어진다.

선택과 책임, 자기 신뢰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기에 어느 하나 삐걱거리지 않고 굴러갈 때 우리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의 방식은 자존감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 제갈공명이 옆방에 살지라도 우리의 결정권을 위임해서는 안 된다. 오직 과거라는 당신의 데이터베이스와 실수라는 오답노트 그리고 내면의 나침반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

삶에 완벽한 답안지는 없으나 어떤 답을 내리든 스스로 책임 질 수 있다면 당신의 모든 선택은 정당하다.

■ 개인의 취향을 갖출 것

어떤 이들은 취향에 고하를 나누고 같은 취향을 강요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만 취향의 차이는 우열의 증거가 아니며, 강요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취향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자기 감각에 솔직해져야 한다. 타인의 평가나 시선에 강요받거나 SNS에 인증하기 좋은 것을 쫓아다녀서도 안 된다.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건 자기소개서 ‘취미’란에 적어낼 그럴듯한 취향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개인의 취향일 뿐이다.

삶의 멋과 낭만은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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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나 자신을 대면할 것

그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면들만 ‘나’라고 생각했다. 이기적인 친구를 욕하며 나는 이기적인 면이 없는 완전한 사람처럼 굴었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나의 다른 면들이 드러날 땐 못 본 척 모른 척 지나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면들은 내가 아닌 척 위장했던 거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오만했는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카를 구스타프 융은 개인이 숨기고 싶어하는 성격의 총합을 ‘그림자’라 이야기하며, 누구나 그런 그림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림자는 완전히 제거될 수 없으며 건강한 내면을 갖기 위해서는 그림자와 화해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다.

우리가 보다 건강한 내면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까지 자각하고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니 자신의 싫은 면들도 인정하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만날 때 감춰둔 욕망의 허용치를 둘 수 있고 그 허용치만큼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도 관대해질 수 있다.

외면과 변명을 멈추고 내가 좋아하는 나와 내가 싫어하는 내가 통합된

진짜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오만한 인간이 아닌 인간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 자신이 빛날 수 있는 자리에서 살아갈 것

많은 이들은 재능을 찾으라 하면 예술적이거나 특수한 직업만을 떠올리기도 하고 엄청난 재능만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 생각에 갇히면 자신의 재능과 장점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

재능의 크기는 점점 늘려갈 수 있는 것이고, 그 크기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이 신춘문예에 도전할 필요는 없다. 재능의 크기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능이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재능이란, 어떤 일을 남들보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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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 몇 가지 재능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떤 이에겐 서류를 잘 정리하는 게 재능이고, 어떤 이에겐 모르는 사람과도 즐겁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게 재능이고 어떤 이에겐 눈썰미가 좋은 게 재능이고 어떤 이에겐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게 재능이다. 그러한 재능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쉽게 눈에 띄진 않는다. 그렇기에 자신의 재능과 장점을 발견하기 위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의 재능에 적합한 직업 혹은 자리를 찾아야 한다.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남들보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적어보자. 잘 모르겠다면 인터넷을 통해 다중 지능 검사를 해볼 수도 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

자신의 삶에 그 정도의 관심과 노력조차 기울일 생각이 없다면, 타인은커녕 스스로의 존중도 얻기 어려울 것이다.

* 자본주의의 최대 비극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재능은

무가치해 지는 데 있다.

◉ Part 3 불안에 붙잡히지 않기 위한 to do list

■ 삶이라는 모호함을 견딜 것

* 걱정은 내일의 슬픔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일을 앗아간다.

- 코리 덴 붐 : 네델란드 인, 2차 대전 때 유태인을 숨겨 주었다는 이유로 유태인 수용소에 갇혀 있다가 구사일생, 저서 <주는 나의 피난처>에 나오는 그의 명언임

■ 삶이라는 모호함을 견딜 것

점이라는 건, 홍삼가루가 5% 첨가된 홍삼 캔디처럼 약간의 진실이 함유된 추측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삶에 확신을 얻고 싶어서 점을 본다. 하지만 노스트라다무스가 관 뚜껑을 열고 나온다 해도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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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점쟁이의 내공이 부족해서 혹은 복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삶의 본질이 모호함에 있기 때문이다.

결국 점보는 이유는 다 잘 될 거라는 그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다.

“다 잘 될 거예요.”

점쟁이 대신 믿으시게, 자신의 힘을.

■ 문제를 안고도 살아가는 법을 배울 것

살다보면 원치 않은 일들이 일상 위로 투하될 때가 있다. 그리고 어떤 일들은 딱히 해결책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 과거의 실수가 현재의 잘못을 붙잡는 일. 오랜 시간 돌보며 그때그때 덧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일, 그런 일들이 들이 닥칠 때, 손상된 삶 따위는 내팽개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당신도 그럴 수 있다. 너무 지쳐서, 나 자신이 지긋지긋해서,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런 나 자신을 내팽개치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누구도 내 삶을 대신 봐주지 않는다. 상처가 생겼다는 이유로,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한 내 삶이 홀로 울고 있다면 그건 너무 미안하지 않는가. 그러니 살다가 어떤 불행을 마주한다 해도 충분히 슬퍼하고 괴로워했다면 그 원치 않은 사실과도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익히자.

당신의 고단함이 별 것 아니라서 혹은 다들 그렇게 사니까, 같은 이유가 아니라 당신에겐 가장 애틋한 당신의 삶이기에 잘 살아내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부분까지 염려하며 완벽한 안전을 얻고자 하는 건, 멸균 공간에서 냉장되어 살아가길 바라는 것과 같다. 삶의 안정감은 불확실을 완벽하게 제거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불확실과 맞서며 얻어진다.

■ 자신만의 문제라고 착각하지 말 것

우리는 어릴 때부터 금실 좋고 무한한 사랑을 주는 부모님이 있는 집을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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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적인 가정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완벽한 부모님이 얼마나 될까?

미디어가 보여주는 연출된 모습과 사람들이 겉으로만 보여주는 그럴듯한 모습을 보며 무엇 하나 결핍되지 않은 이상적인 상태가 정상이라 착각한다. 그리고 그 착각의 결과, 보통의 개인은 자신은 부족한 존재라 여기며 내면의 가장 밑바닥에 열등감을 숨겨 놓는다.

프로이트가 규정한 정상의 기준이 약간의 히스테리, 약간의 편집증, 약간의 강박증이듯 정상이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상처, 약간의 결핍, 약간의 부족함을 의미할 테다. 삶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며 우리는 각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소수의 존재들일 뿐.

사실 당신이 어떤 가정환경에서 자랐건, 사실 어떤 문제와 결핍을 가졌건 그 무엇이건 다 정상이다. 사람들은 불행을 꽁꽁 숨겨두기에 모를 뿐 세상에 보편적이지 않은 불행은 없다.

원치 않은 일이 닥쳤을 때, 그것을 불운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해프닝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행복은 이 지점에서 결정된다.

■ 미래에 대한 엉터리 각본을 쓰지 않을 것

일어나지 않을 일을 앞서 걱정하는 건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 땅굴에서 살거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장 쓰지 않을 물건을 대량 구매해 놓는 것과 같다.

삶은 낭비이자 비합리적인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낭비를 줄일 수 있을까. 걱정은 대체로 비합리적이고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에서 촉발된다. 그렇기에 과장된 걱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막장 드라마 급의 개연성을 가진 왜곡된 생각을 바로잡는 것에서 시작된다.

당신의 걱정을 들여다보자. 일어날 확률이 낮은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고 있지는 않은가? 겨우 기침을 단서로 폐병을 염려하고 잇지는 않은가? 그 날조된 미래에 붙잡혀 지금을 망치지 말자.

당신의 괴로움은 당신이 쓴 엉터리 각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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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짜 해결책을 찾을 것

우리는 원시인 혹은 열 살짜리 꼬마가 아님에도, 여전히 마술적 사고에 기댄다. 홍수를 막기 위해 처녀를 제물로 바쳤던 것처럼 전쟁을 피하기 위해 매일 밤 기도를 했던 것처럼, 자신이 통제하기 버거운 일 앞에서 그보다는 쉬운 가짜 해결책을 믿고 안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출금의 압박을 이겨내기 위해 굿을 하기도 하고, 데이트 폭력을 일삼는 남자 친구의 변명을 믿기도 하며, 문제가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데도 모른 척하기도 하고, 행복과는 상관없는 일에 맹목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그러나 가짜 해결책으로 도망칠수록 진짜 해결책에 다가서지 못하고, 본질적으론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으리라 믿고 싶지만, 미뤄놓은 숙제를 잠든 사이에 요정들이 대신해 주지 않듯이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는 문제도 있다.

하지만 진짜 해결책을 위해 발을 내디딜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자유로위질 수 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볼 때 필요한 건 후회가 아닌 평가이고, 앞으로의 길을 내다볼 때 필요한 건 걱정이 아닌 판단이다.

■ 과민해지지 않을 것

불안이란 과거의 부정적이고 공포스러운 경험으로 인해 다시 그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 웬만한 일에는 의연한 어른이 될 것 같지만 부정적인 경험의 누적량도 많아지기 때문에 나이가 먹을수록 불안감도 커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부정적인 경험은 친구의 사고에서 불안감이 전이됐던 것처럼, 간접적으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불안할 일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산다. 미디어 에서는 각종 사건 사고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전강정보 방송을 보면 예방하고 조심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고, 불안한 경제는 삶의 무엇도 보장하지 않는다. 삶들은 날 서 있고, 또라이는 넘쳐나며, 가습기 ‘살균’이 아니라 ‘살인’을 하더라. 이렇게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들은’ 우리는 과민하고 불안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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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다. 그렇기에 이제는 이시형 박사의 <둔하게 삽시다>라는 책 제목처럼 조금 둔해질 필요가 있다.

긴장을 풀고 당신의 머릿속 세계가 아닌 진짜 당신의 세계로 귀환하라. 당신이 실제로 경험한 삶은 당신의 생각보다 평화롭다.

■ 충분히 슬퍼할 것

애도란 마음의 저항 없이 충분히 슬퍼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억지로 외면하거나 억누르고 혹은 자신의 마음을 미처 이해하지 못해 자기 자신에게 슬퍼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충분히 애도를 하지 못했을 때, 우울증이 발생한다고 했다.

감정이란 밖으로 새어나오지 않도록 틀어막는다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실은 씻겨 내리지 못한 채, 우울이라는 웅덩이로 고이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그러니 당신의 심연에게 묻는다. 당신은 무엇과 이별하였는가.

그 어쩔 수 없었던 모든 것들에게 애도를 보낸다.

■ 힘이 들 땐 힘이 든다고 말할 것

나는 힘들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 타입니다. 남에게 힘들다고 말하지 않을뿐더러 스스로도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고 나면 더 힘들 것 같아서 늘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힘이 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감정을 묶어두면 자신에 대한 감각은 무뎌진다.

그 무뎌진 감각은 다른 감정들도 무디게 만들고, 스스로가 한계점에 부딪히는 것도 모른 채, 착취되는 자신을 방치하게 된다.

그러니 인생에 설치해야 할 액티브-X가 너무 많을 때 책임감에 익사할 것 같은 때 집에 돌아온 순간 눈물이 날 때 “나도 이제는 힘들다”고 말하라.

누구도 당신을 지켜줄 수 없고, 견디기 어려운 버거운 희생은 자기 학대일 뿐이다.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괜찮고 조금은 무책임해도 된다. 책임감을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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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며 질식할 때까지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만큼 자기 자신에게 무책임한 일은 없다.

■ 불안하다고 무작정 열심히 하지 말 것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이 어디 있으랴. 스티브 잡스가 타이포그라피를 배워둔 것이 훗날 애플 디자인에 영향을 끼친 게 아니더냐. 하지만 시간은 무한으로 있는 것은 아니고, 자신의 전문적인 영역이 있어야 부수적인 경험도 빛을 보는 거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도태되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살기에, 뭐라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서 뭐라도 하고 거기에서 안도감을 얻는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쓸 수 없는 어설픈 중국어 실력과 어떤 자격도 증명하지 못하는 허술한 자격증과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활동들로는 삶의 무엇도 보장되지 않으며, 그 안도감은 쉽게 증발한다.

원점으로 돌아가자. 당신의 삶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목적을 세우고 방법을 찾자. 당신의 목적을 충분히 의식하고 실천하는 것, 안도감이란 그곳에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지금 이 순간을 충실히 사는 것뿐이다.

* 다음에 후편이 이어집니다.

2019.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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