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2)

2019. 4. 26. 09:57독서후기

반응형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2)

- 냉담한 현실에서 어른 살이를 위한 to do list(해야 할 일 목록) -

■ 김수현 지음

◉ PART 4 함께 살아가기 위한 to do list

■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보일 것

이방인에게는 달동네도 낭만이고, 여행자에겐 빈민촌도 경험이고, 제3자에겐 누군가의 비극도 가십거리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때때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애정 없는 호기심을 멈추지 못한다. 하지만 그게 나의 이야기가 된다면, 우리는 허락할 것인가? 우리에겐 타인의 사생활을 알 권리가 없다.

내 인생이 누군가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이 싫다면 타인의 삶 역시 보호되어야 한다. 타인의 삶은 지켜주지 않은 채, 나의 삶만 배타적 보호구역으로 지정할 수 없는 것이고, 나에 대해서는 잊힐 권리를 주장하며, 타인에 대해서는 알 권리를 주장할 순 없다.

타인의 사생활에 호기심을 접어 두는 곳, 그건 내 삶을 지킬 수 있는 전재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 모든 이에게 이해받으려 애쓰지 않을 것

결혼은? 취업은?, 연애는?, 저축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이 불편하다고 착각한다. 사실은 질문이 불편한 게 아니다. 그 질문 뒤에 나에 대해 내리는 타인의 판단이 불편한 거다. 자신들의 방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나를 잘못된 사람으로 만드는 시선과 판단,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타인에 대해선 심리학자이자, 프로파일러이자, 가장 중립적 비평가로 둔갑하여 너무나 쉽게 판단한다. 우리는 편협한 이들에게 이해받으려 사는 게 아니며, 당신의 삶은 당신의 것이다.

- 1 -

■ 서로의 경계를 지켜줄 것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가 남이야?’라는 (당연히 남인데) 말로 경계를 침범하는 관계에 익숙해졌고, 그 경계를 침범하는 것을 친밀함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그늘을 낱낱이 확인하고 , 경계를 잃는 것만이 좋은 관계는 아니며 . 친구라는 이름으로 경계의 통행권을 요구할 수는 없다. 설사 누군가의 경계가 너무 두텁다 해도, 그걸 타인이 밖에서 깨고 말 것은 아닐뿐더러 개인의 사적 영역을 완전히 헤집는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좋은 관계란,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것이다.

■ 너그러운 개인주의자가 될 것

개인주의는 행복감을 느끼는 데 중요한 문화적 특성으로 개인주의가 강할 수록 소득과는 별개로 사회구성원의 행복감은 높아진다. 반대로 경제 수준이 높다 해도 개인주의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국가는 그에 상응하는 행복감이 따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초집단주의 사회인 한국과 일본이 이러한 경우다.

그렇다면 집단주의의 어떤 면이 개인의 행복을 가로막는 걸까. 집단주의 사회에선 집단의 목표와 화합을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시하며 집단의 존속을 위해 개인을 통제하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꽤 지치는 일인데, 더 큰 문제는 통제의 ‘수단’에 있다.

사회가 개인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개인의 ‘죄책감’을 사용한다면, 집단주의 사회는 주로 ‘수치심’을 사용한다. 죄책감이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라면, 수치심은 타인을 통해 바라본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통제하며, 끊임없이 타인을 의식하도록 요구받는다. 역지사지라는 가르침 속에,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고, 그 결과 “보란 듯이 잘 살겠다” “남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같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다.

우리가 집단주의 사회가 된 이유는 공동 노동이 필요했던 농경사회의 영향

- 2 -

을 받았다는 추론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젠 다 같이 모여서 벼농사를 짓고 살 것도 아니지 않나. 우리에게 미움받을 용기보다 필요한 건 너그러운 개인주의다.

무조건 물 건너 온 서양 것이 좋다는 게 아니라, 지금의 집단주의 문화는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구에 따르면 개인주의는 반사회적 행동에 가까울 거란 통념과는 다르게 친절함과 관대함, 사회적 협동과 연경되어있다.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존중하기에 더욱 따뜻한 관계가 맺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나와 당신이 조금 더 행복하기 위하여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혜자스러움을.

* 혜자스러움

- 김혜자 씨의 성품, 엄마의 넓은 마음과 같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말

■ 일상에서 승패를 나누지 않을 것

우리 삶에 경쟁적 인간관계는 이미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다. 나는 학창 시절에 ‘성적을 올리는 비결’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비결이라는 건 라이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을 떠올리며 공부하라는 것. 그래서 나도 한 친구를 라이벌로 생각하기로 했는데, 얼마가진 못했다.

어차피 전국에 나보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수두룩한데 이 한 명을 이기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받아들이지 않아서 다행이라 쳐도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그 글을 읽고 라이벌을 만들었을까? 우정의 기초와 세상에 대한 신뢰를 다져야 했던 그 시절, 우리는 더 좋은 대학, 더 높은 성적을 위해 경쟁적 대인관계를 독려 받았다.

그런 타인을 신뢰하는 대상이 아닌 경쟁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했고, 우리의 공동체 의식을 말살시키며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훼손시켰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초집단주의 사회임에도 OECD ‘공동체지수’도, 사회적 관계도 모두 꼴찌를 차지했다.

만약 인간관계에서 한 톨이라도 손해를 참을 수 없게 되었다면, 사촌이 부동산을 알아보는 순간부터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면, 쉴 새 없이 승패를 나누고 있다면 나도 모르게 경쟁적인 인간관계에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하

- 3 -

지만 경쟁심은 우리를 녹초로 만들고 긴장하게 할 뿐 경쟁심이 경쟁력을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나 아닌 모두를 경쟁자로 여기며 자신을 달달 볶을 시간에 진짜 나의 일과 나의 세계를 만들어야 한다.

그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다질 때 당신이 가진 힘과 가능성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

어떤 사람이 남편 직업은 무엇인지, 집은 아파트인지, 주택인지, 자가인지 전세인지 물어본 후에 몇 명하고만 연락처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철없는 초등학생도 아닌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 무례하고, 자기 기준에 따라 사람을 선택하는 이들, 문제는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산후 조리원에 가게 되었을 때, 웬지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악순환. 꼴불견인 건 그들인데, 평범한 이들이 주눅 들어 사람들을 경계하느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에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 누구인가?

“그 입 좀 닥치세요”라고 까지는 말 못하더라도 우리, 부끄러워할 필요 없는 일에 부끄러워하지는 말자.

■ 모든 사람과 잘 지내려 욕심 말 것

어딜 가나 친절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때때로 친절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상대가 불편해 하더라도 때론 나의 요구를 이야기해야 하고 거절을 해야 하며, 단호하고 깐깐하게 굴기도 해야 한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라서 나 역시도 종종 고민을 한다. 상대에게 내가 좋은 사람으로 남아도 될 것인가? 나의 불편함의 크기는 용인할 수 있는 정도인가?

그런데 만약 좋은 사람으로 남았을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불편함과 손해가 크다면 기꺼이 깐깐한 사람이 되는 편이 낫다. 계산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자신의 정당한 몫을 지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 4 -

우리는 타인의 몫을 넘보지는 않아야겠지만 자신의 몫은 지켜야 한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과 잘 지낼 수는 없다. 미안하지만 우리의 1순위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다.

■ 생활 기스와 완전 파손을 분류할 것.

- 기스 : 흠의 비표준어

생활 기스는 모든 형태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아무리 좋았던 관계라 해도 흠집이 생길 때가 있고 문제 한 톨, 서운함 한 점 없기는 어려운 일이다. 물론 손상이 크다면 새로운 관계를 찾는 편이 낫다. 하지만 살다 보면 생길 수도 있는 생활 기스 때문에 마음속으로 탈락을 외친다면 남아나는 관계 또한 없을 것이다.

관계 결벽증의 결말은 외로움일 뿐 결국 자기 혼자 손해다.

그렇기에 관계에 흠집이 갔다면 잘 살펴야 한다. 이 흠집은 우정 혹은 사랑이 더는 제 기능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완전 파손인지 아니면 관계의 밀도를 생각하며 너그러움을 발휘해야 하는 생활 기스인지 말이다.

Best friend만을 기대하며, Good friend의 가치를 잊지 말 것

■ 지금의 관계에 최선을 다할 것

우정의 종료는 누구의 삶에나 일어나는 보편적인 일이다. 그러니 떠나간 관계에 대해 스스로를 지나치게 탓하지도, 남겨진 것에 겁먹지도 말자. 대신 지금 내 곁에 잇는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자. 지금의 나와 닮은 새로운 친구를 만나자.

당신이 누군가가 필요하듯이 누군가도 당신을 필요로 하며 완벽하지 않은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간다. 외롭다 해서 진실하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외로움에 괴로움까지 더해질 뿐이다.

■ 그럼에도 누군가와 함께할 것

서은국 박사의 책 <행복의 기원>에서는 사람의 DNA가 생존을 위한 지침서

- 5 -

라는 말이 나온다. DNA에는 우리 조상들의 생존에 대한 매뉴얼이 담겨 있다. 생존에 좋지 않은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이 억제되도록 스트레스 시스템이 작동하고(스트레스의 원리), 생존에 좋은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을 계속하도록 도파민이 팡팡 분비된다(행복의 원리). 그러니까 음식을 먹으면 행복한 건 생존을 위한 DNA 전략인 것이다.

이제는 누가 나를 미워하거나 말거나 세상이 <워킹데드>의 세트장으로 변하지 않는 한 배고픈 순간에는 체크카드가 있고, 위험한 순간에는 경찰이 있으며, 만약의 순간에는 보험사가 있다. 신세계가 펼쳐진 거다. 그러니까 이젠 고독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 워킹데드(Walking dead)

골프 경기에서 친 공이 떨어진 지점에서 굴러가지 않고 멈추는 일

그것은 DNA의 과민 반응일 뿐, 좀 미움 받아도 안 죽는다. 다만 이 기쁜 소식 가운데 한 가지 문제는 이 신세계에 맞추어 우리의 DNA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는 것. 사람에게 인간관계는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기에 인간관계의 금이 갈 때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만큼,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누린다.

이 신세계에 시대착오적일수도 있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누군가와 함께 할 때 가장 행복하다. 이건 문학이 아닌 진화 심리학의 영역이며 감성이 아닌 본능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니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다며 어려운 길로 돌아가지 말고, 많은 사람 중 나와 주파수가 같은 누군가를 발견하라. 상한 음식을 먹고 탈이 났다 해서 식음을 전폐할 필요가 없듯이, 또라이를 만나 힘들었다 해서 모든 관계를 끊어낼 필요는 없다. 중요한건 상한 음식을 골라내는 후각이고, 진심 없는 인간들은 곁에 두지 않는 안목일 뿐이다.

당신에게 어떤 상황이 오든, 당신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우정을 찾아라. 나의 부족함을 비웃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런 믿음이 누군가에게, 믿음이 가는 누군가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안정제이자 행복이라는 추상적인 단어의 유일한 실체일 것이다.

- 6 -

◉ Part 5 더 나은 세상을 위한 to do list

-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 플라톤

■ 때론 재미없는 이야기를 할 것

어느 방송에서 흙수저, 금수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워낙 이슈였던 터라 어딜 가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다. 그중 한 패널이 우리가 식당에 들어갈 때 숟가락을 보고 식당을 고르는 게 아니듯 숟가락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떠먹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니 숟가락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걸 떠먹으라는 이야기 였다. 물론 멋진 비유이고 위로였고, 선한 마음으로 이야기한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흙수저, 금수저에 대한 이야기는 진짜 숟가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본질은 세습 자본주의에 있다. 산업 기반이 새롭게 확장되어 쉽게 기회를 얻을 수 있던 과거에는 비교적 계층 간의 이동이 자유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계층 이동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있다.

부모의 부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진 기회는 소득과 직업의 격차로 이어지며 자본이 세습되는 과정에서 계층은 고착되고 잇다.

그러니까 흙수저, 금수저는 고착화되는 사회 계급의 문제이기에 해결책을 논하려면 세상 진지하더라도 자본의 세습과 기회의 불평등을 어떻게 완화해 갈 것인지 묻고 답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건 투정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아지기 위함이어야 한다.

■ 스스로를 비난하지 말 것

탯줄을 끊는 순간 돈줄이 연결된다는 말처럼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양육비를 쓴다. 치열한 경쟁을 뚫기 위해 높은 교육비도 부담한다. 대학에 가면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내야하고, 자취라도 했다간 집세와 생활비로 매달 몇 십만 원씩 부담해야 한다. 물론 형편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자식들은 사회에 발을 내딛기 전까지 부모에게 엄청난 빚을 지는 것이다.

- 7 -

그런데 문제는 빚을 갚는 게 쉽지 않은 데 있다. 취업이 어렵다. 사회진출이 자꾸 유예된다. 5%만이, 대기업, 공사 등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 대다수의 경우 취업은 해도 월급은 빠듯하다. 그 월급을 가지고 결혼이라도 해서 신혼집을 장만할라치면 은행에 빚을 지거나, 부모에게 또다시 손을 벌려야 한다.

진짜 문제는 높은 양육비와 교육비, 등록금, 주거비 그리고 이를 감당할 질 좋은 일자리의 부족이지 우리들의 일방적인 잘못이 아니다.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빚을 잔뜩 안기는 사회, 그리고 그 빚을 갚을 방법을 내 놓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죄책감과 부채감에 시달린다.

만약 당신도 죄책감과 부채감에 시달려야 했다면 적어도 왜 빚쟁이가 됐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 사실이 빚을 탕감해 주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다.

■ 나의 몫을 외면하지 않을 것

“요즘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 예전엔 이것저것 흥미가 많았었던 것 같은데 나 뭐가 문제일까?”

고민하고 있는 친구에게 해 줄 수 있는 적당한 조언은 무엇일까?

1. 취미를 가져봐. 2. 동호회에 나가봐.

3. 여행을 가봐 4. 정신 상담을 받아봐

이런 조언도 가능하겠지만 문득 친구의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당시에 친구는 야근은 물론 주말 근무가 일상이었다. 거기다 회사 운영의 어려움 때문에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환되었고, 앞으로의 상황도 불투명했다. 그러니까 친구가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장시간의 노동과 고용 불안 때문인 거다.

몸도 많이 지치고 불안했던 친구가, 약간의 짬이 난 시간에 어떤 생산적이고 즐거움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렇기에 어떤 위로도 부적절했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가 3%의 소금 때문이듯, 만약 세상이 어딘가 잘못

- 8 -

되어 있다면 우리 각자의 3% 노력이 부족해서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각자의 몫을 하자.

우리 사회의 유일한 구원자는 외면하지 않는 개인이다.

우리는 시행착오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말자. 우리에게는 성숙한 시민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다.

■ 필요하다면 버틸 것

첫 회사에서 만나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동기는 일 잘하고 성실하고 친절하다. 단, 상사나 사장이 자신을 소모품 대우하는 건 견디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 참으면서 일하지만, 그녀는 사직서를 들이민다. 물론 그녀가 일을 잘하기에 회사는 잡는다.

한번은 사장이 온갖 생색을 내며 성과급 20만 원을 주고는 막상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자 “다시 뺏어버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내가 듣기에도 그 사장은 진상(일이나 사물의 참된 내용이자 형편)이었다. 이게 누굴 빙다리 핫바지(어리석은 놈)로 보나. 하지만 나는 친구에게 아무리 그래도 사직서를 내지 말라고 했다.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회사에 다닐 때, 상사가 나에게 채용 공고에 지원한 사람이 실제 지원자 숫자를 2배나 부풀려서는 “디자이너 지원자 엄청 왔어 ~ 긴장해”라고 말했다.

네 자리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말. 나는 “그럼 제가 나가드릴 테니, 새로 뽑으세요”라고 말했다. 물론 지금보다 어리고, 나를 자를 수 없을 만큼 일을 했기에 가능한 말이었지만, 실상은 나도 그녀와 비슷한 타입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에게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그녀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만 둬야 한다.

밥그릇을 놓고 협박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 외에 비굴함까지 강요하는 상사가 아무리 졸렬하다 해도 겨우 그런 인간들 때문에 삶의 방향을 수정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로 그만 둔다면 그건 자신의 삶에서 그 사람의 영향력을 높이는 일이다. 그럴 만큼 그 사람은 대단한 존재인가

- 9 -

버티는 건 부끄러운 것도 비참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런 인간들보다 자신의 삶이 소중한 것뿐이다.

■ 조바심은 버릴 것

아주대 사회학과의 노명우 교수는 사회는 엄청난 속도로 변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정말 <천천히> 변화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건 고도 비민인 여자가 3개월 동안 지옥의 다이어트로 표준 몸무게가 되었다 해도 꾸준히 관리하지 않으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원리다.

다이어트도, 개인의 삶의 문제도, 사회문제도 한순간에 일어나는 혁명은 없고 변화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변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자질은 지치지 않는 것이다.

■ 잘 싸우는 법을 배울 것

우리 사회는 의견 충돌을 싸움질이라며 질색하고 복종과 순응을 요구했다. 그래서 모난 돌은 정 맞지 않기 위해 무뎌져야 했고, 중간이라도 가기 위해선 가만히 있어야 했고, 며느리는 3년 동안 청각, 언어, 시각 장애인이 되기를 강요받았다.

그 결과, 홧병은 우리사회에서만 존재한다는 ‘한국병’이 되었다. 감정을 억압한 가짜 화합 속에서 개인은 병들고 관계는 곪아간 것이다.

억압이 정신병을 유발한다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억압으로 화합된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문제는 싸움이다. 국론이 나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싸우지 못해 문제의 해결책과 제대로 된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데 있다.

만약 내가 사는 이곳이 좀 더 나은 곳으로 변화하기를 원한다면 단순히 어깃장을 놓는 독선과 싸움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에서 벗어나 해결책을 찾기 위한 싸움의 방법을 체득해야 한다.

비난이 아닌 대안이 필요하며

모욕이 아닌 설득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맨날 싸워서가 아니라, 제대로 싸우지 못함에 있다.

- 10 -

■ 희망의 근거를 만들 것

베트남 전쟁 때 많은 미군이 포로로 붙잡힌 일이 있다. 많은 군인들은 오랜 수용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는데 당시 장군이었던 스톡데일이 증언에 따르면 가장 먼저 죽은 이들은 낙관론자였다고 한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전에는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부활절에는, 또 부활절이 지나면 추수감사절에는 나갈 거라 믿다가, 다시 크리스마스를 맞자, 반복되는 상실감에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그들을 죽게 한 것은 희망이었을까? 나는 희망하지 않는데, 이들은 희망이 아닌 근거 없는 낙관을 품었던 것이고, 그건 사실 현실 회피에 가까웠다.

생존자였던 스톡데일은 현실을 직시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훌륭한 대우를 받는 포로’의 사례로 비디오에 찍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의자로 자신을 내리치고 고의로 자해를 하기도 했고, 부하들의 고립감을 줄이기 위해 자기들끼리만 소통할 수 있는 내부 통신 체계를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 멘탈 갑이었던 그는 7년 반의 포로 생활을 견디고 생존할 수 있었다.

요즘은 희망을 논하는 것이 고문이 되었다. 맞다. 현실감을 잃은 희망은 아편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희망이 없다면 삶을 견딜 수 있을까. 언제나 최후의 진실은 현실의 기반 위에 희망을 품어야 한다는 것.

하루 네 끼를 먹으며 살이 빠지길 기다릴 수 없는 것처럼 희망을 품고 싶다면 방법을 찾아라. 그리고 그 방법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있었다면 그 고단함을 견뎌내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막연한 희망이나 대안 없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근거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진인사 대천명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

희망은 원래 조건부다.

- 11 -

■ 기꺼이 세상에 호의를 베풀 것

나는 모르는 사람을 잘 도와주는 편이다.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내릴 역과 갈아탈 버스, 장례식장의 전화번호까지 찾아 적어주기도 하고, 어떤 여자를 뒤쫓는 수상한 사람들을 보고 여자를 불러 세워서 다른 길로 가게 하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오지라퍼’가 된 것은 배낭여행에서의 기억이 컸다. 핸드폰도 망가지고, 서툰 언어와 낯선 환경 속에서 내가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크고 작은 도움 덕분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약자가 아니다. 길도 잘 알고, 건강하고,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그래서 알지 못할 뿐. 내가 약자가 된 순간 작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그때마다 기꺼이 도움을 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조심성과 신중함이지, 불신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다수의 선의를 믿는다.

다른 누군가에게 세상이 선의를 베풀 만한 곳이라는 확신을 주고 싶고, 내가 어려운 순간, 누군가가 손 내밀어줄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살고 싶다.

■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나 자신이 될 것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행복에 필요한 3가지 요건을 우정, 사색, 자유라고 했다. 자유, 그러니까 내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 어릴 때는 당연하고 쉽게만 느껴졌던 단어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절감하는 건 자유의 일정부분은 돈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공과금을 내기 위해, 친구 결혼식 축의금을 내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매일 아침 일어나 돈을 벌며, 우리의 자유를 지불한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돈의 중요성이 아무리 크다 해도, 돈을 생활 수단의 가치를 넘어, 사람의 척도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돈으로 사람의 높낮이를 측정할 수 없으며, 삶의 성패를 결정할 수도 없다.

갑질 횡포로 전 국민의 공분을 산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과

- 12 -

연 행복할까? 글쎄 내가 아는 한 행복한 사람은 그렇게 정신병자처럼 굴지 않는다.

■ 헝거게임에 참여하지 않을 것

<헝거게임>은 판엠이라는 가상세계에서 벌어지는 SF 영화다. 헝거게임이란 12개 구역에서 각각 조공인 2명을 뽑아서 최후 승자가 나올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게임이다.

지배층인 캐피톨은 조공인들에게 공포심을 심고자 헝거게임을 개최하고 이를 방송을 내 보낸다.

1명의 승자에게 부와 명예를 주는 것으로 23명의 죽음이 정당화 되는 게임, 게임이 시작되면 힘이 있는 무리는 서로 연합을 해서, 힘없고 약한 이부터 제거한다. 그렇게 연합해서 약한 이들을 밀어내면 한동안 안전을 보장 받는다. 그러나 게임은 최후의 한 명만 남기므로 내가 나보다 약한 이를 밀어냈듯이, 나보다 강한 이가 나를 밀어낸다. 이영화는 승자독식경쟁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은유라 할 수 있다.

누군가는 정치의 변화만으로 세상이 나아질 거라고 말한다. 물론 좋은 정치인과 사회의 투명성, 공정성 회복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이를 위해서는 게임의 룰에 대한 성찰과 서로를 내몰지 않는 연대가 동반 되어야 한다.

우리의 안전은 서로를 밀어낼 때가 아니라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줄 때 얻어진다. 그러니 은근한 차별과 밀어내기 경쟁을 중단하자. 이 잔인한 경쟁을 멈추지 않는 한, 다음 차례는 나 자신이 될 것이다.

■ 방황하는 어른이 될 것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는 닐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엄격한 아버지에게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강요를 받으면서 자라온 닐은 우연히 셰익스피어의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의 주연을 맡는다.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발휘하며 어느 때보다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는 닐에게 아버지는 당장 그만두라고 명령하며, 전학을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연극을 하고 싶었던 닐은 아버지의 강요에 반항하려 하지만 닐의 시선에 어머니의 모습

- 13 -

이 들어오자 반항을 포기하고 입을 닫는다.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절박하고 애처로웠던 것이다.

닐의 표정에는 무력감과 절망감이 비친다. 그리고 그날 밤 닐은 아버지의 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주어진 삶은 견딜 수 없고, 자신이 원하는 삶은 도저히 살 수 없을 때 사람은 절망하는 것이다.

김현철 정신과 의사는 헝가리, 일본, 우리나라의 공통점으로 ‘방황이 허락되지 않은 사회’를 이야기 했다. 그리고 이 세 나라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는데 바로 높은 자살 율이다.

우리나라는 자살률 최고, 출산율 최저라는 두 가지 지표를 갖게 되었다. 이 지표의 공통점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마저 포기한다는 것. 그만큼 우리가 이곳을 살 만하다고 여기지 못하는 것이다. 주어진 과업을 빠짐없이 수행했는지를 개인의 평가 기준으로 삼는 사회. 그 안에서 잠깐의 정체라도 있으면 개인은 초조해지고 숨이 막힌다.

지금보다 어려운 시절이 있었고, 우리보다 더 못사는 나라도 있으니 힘들어하는 건 엄살이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경제적 지표의 절대적 어려움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됨에 우리는 날이 서고, 힘겹다.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두려움의 실체는 가난이 아니라, 사회에서 존중받지 못하는 비참함과 고립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이곳을 ‘헬조선’이라 부른다.

* 헬(hell)조선 : 지옥(hell)을 의미하는 hell과 조선의 합성어로 열심히 노력해도 살기 어려운 한국 사회를 부정적으로 이르는 말

많은 이들은 높은 행복도를 보이는 북유럽 국가를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레오 보만스에 따르면 북유럽 국기들의 높은 행복감은 높은 소득이나 복지시스템의 결과가 아니라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반대 지점에 있다. 자유의 박탈, 획일적인 삶의 강요, 타인에 대한 불신 등이다.

서로에 대한 관용과 너그러움이 우리를 불행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우리, 이제 그만 불행하자.

- 14 -

◉ Part 6 좋은 삶,

그리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한 to do list

- 행복은 깊이 느낄 줄 알고 단순하고 자유롭게 생각할 줄 알고 삶에 도전할 줄 알며, 남에게 필요한 삶이 될 줄 아는 능력으로부터 나온다.

- 스톰 제임스

■ 행복을 삶의 목적이라 부르지 않을 것

따지고 보면 문제의 시작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삶의 목표를 행복이라고 규정한 이후로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감정의 유토피아를 삶의 목적이라 믿게 되었다.

그런데 삶의 목적을 행복으로 규정하고 완전무결하게 행복한 삶이 존재하듯 떠들자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실패자가 된 기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울증을 감추기 위해 애쓰고 슬픔은 어떻게 해서든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에 우울함과 슬픔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가끔은 슬퍼도 우울해도 된다. 그 시간이 없다면, 행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물론 우리는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나 역시 당신의 행복을 빈다. 하지만 몇 번 묻는다 해도 삶의 목적은 언제나 삶, 그 자체일 뿐이다.

10번 중에 6~7번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10번 중에 10행복하려 한다면, 그건 강박증이다.

누군가에게 행복하다고 증명하며 사는 것이 가장 불행하게 사는 방법이다.

■ 가볍게 살아갈 것

내 여행은 한 달 일정의 배낭여행이었는데 혼자 하는 여행에 불안했던 나는 짐들을 잔뜩 챙겼다. 책만 세권에 고데기도 두 종류를 챙겼으니, 짐을 쌀 때 미쳤던 게 틀림없다.

두 개의 가방을 낑낑 지고 다녔던 나는 여행이 일주일 남았을 때 완전히 지쳐버렸다. 모든 상황이 지긋지긋했고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 나 자신에게 신물이 났다. 다음 여행지로 가기 위해 공항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가

- 15 -

방을 풀고 필요한 물건만 남긴 뒤 짐 절반은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그렇게 절반의 짐을 버리며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여행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여행 중에 만났던 지인은 1년 반 넘게 여행 중이었는데 그가 가진 짐이라고는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최소한의 짐만 챙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구입했다. 예를 들어 입고 있는 옷이 낡으면 현지 시장에서 구입하는 식이었는데, 그 자체로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삶을 불안하다며 너무 많은 짐을 챙기지만 사실 그렇게 많은 짐이 필요하지 않다. 필요할 때 충당할 수도 있고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쪽이 이득일 수도 있다.

여행 내내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짐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과 삶을 무겁게 만드는 불필요한 욕구와 잘못한 것 없는 부끄러움과 지치게만 하는 과잉된 관계. 이 모든 것에 대한 최후통첩. 그 포기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자유롭게 살고 싶거든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을 멀리하라.” - 톨스토이

■ 삶의 경우의 수를 늘릴 것

피천득은 <장수>라는 글에서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매일 비슷한 패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무수한 가능성과 다양성을 압축해 버리는 일이고,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그러니 주말에는 바다를 보러가고, 퇴근길에는 다른 길로 걸어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이제까지 내가 시도하지 않았던 일들을 감행해 보자.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스스로에게 예측할 수 없는 내가 되어 보는 것.

우리가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은 손에 있는 생명선을 팔목까지 연장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는 일이다.

■ 메마르지 않으려 노력할 것

- 16 -

다니엘 튜더가 한국의 모습을 담아낸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잊은 나라>라는 책 제목처럼 우리는 기적을 이룬 대신, 사소한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감각을 잃은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원에 가고, 나무에 앉은 새를 보고, 가족들과 저녁을 먹는 것을 즐거움이라 여기지 않는다.

감정을 견뎌야 하는 노동과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경쟁 속에서 감정은 메말라갔고, 즐거움은 지루한 일상을 견뎌낸 보상이자 강렬한 자극으로 정의되었다. 이는 감정이 메마른 사이코패스들이 극도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감정이 메마른 이들은 사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없기에 점점 자극적인 즐거움을 찾게 되는 거다. 하지만 자극적인 즐거움이 끝난 일상은 더 무료해지고, 생은 활기를 잃는다.

만약 당신이 삶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다면 삶의 앞마당에 있는 사소한 행복에 예민해지고 살아 있는 삶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

즐거움에 대한 재 정의가 필요하며 가능한 어릴 때부터 돈을 들이지 않고도 즐겁게 할 수 있는 놀이와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건 구질구질하거나 초라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쉽게 행복해지는 일이다.

■ 얻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할 것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많은 준비를 한 결과 높은 연봉을 받으며 증권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1년 후 그는 돌연 회사를 그만 뒀다. 이유는 일에 재미가 없단다. 재미란 과연 무엇일까?

애초에 문제는 그는 어떤 가치에 대해서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것에 있다. 세상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데, 재미도 있고 합리적인 상사가 있으며, 월급과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춘 완벽한 직장은 없다.

대부분의 선택에는 예산과 제한적 선택지가 주어진다. 인생을 쇼핑하듯이 살 수는 없는 거다. 그렇기에 선택에서 ‘무엇을 얻느냐’보다 중요한 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느냐’하는 문제다.

늘 손해를 보는 것만 생각하면 언제나 후회 속에 살아갈 뿐이다. 어떤 것도 감수할 수 없다고 말하는 어리광을 들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 17 -

■ 지나간 과거와 작별할 것

많은 이들은 현재의 문제를 과거에서 진단한다. 내가 자신감이 없던 것은 그 선생님의 차별 때문이었고 내가 자존감이 무른 것은 부모의 양육 방식 때문이었고, 내가 열등감에 시달리는 건 아이들의 괴롭힘 때문이었다고.

거기까진 옳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진단하는 것은 그 과거에 머물러 뒤늦게 보상 받기 위함도 아니고, 자기 연민에 빠져 비운의 공주님 취급을 받기 위함도 아니라, 그 고리를 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세상에는 한심하고 서툴고 정숙하지 못한 인간들이 있고, 우리는 운이 나쁘게도 그들을 만났을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를 보며 되짚어 볼 진실은 촌지를 좋아하던 선생님은 그저 한심한 인간이었을 뿐이고, 나의 부모도 처음부터 부모가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닌 서툰 어른이었을 뿐이고 그 아이들은 철이 없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때의 나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만큼 너무 어렸다는 거다.

더 이상 과거에 붙잡혀 살고 싶지 않다면 과거의 연약했던 나에게 위로를. 미성숙했던 그 모든 존재들에게 작별을 고해야 한다.

■ 인생에 여백과 바보비용을 둘 것

디자인 작업물을 인쇄할 때는 바탕을 실제 사이즈보다 살짝 크게 작업한다. 재단 과정에서 오차가 생길 수 있으니 여백을 주는 거다. 그건 오차와 실수에 대한 관대함이자 안전한 결과를 위한 사람들의 노하우다.

삶도 이와 유사하다. 계획대로 딱 들어맞게 재단되는 삶은 없다. 불필요한 일에 노력을 쏟기도 하고, 한 순간의 실수를 돌리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이기도 하며, 아무리 조심해도 예상치 못한 비용이 들 때가 있다. 인생이 언제나 딱 들어맞을 수도, 효율 적일수도 없다. 그러나 자책하고 후회하기 보다는 실수와 오차를 위한 여백과 바보스러움에 대한 예산을 책정하는 편이 낫다.

- 18 -

이 정도 바보짓은 인생이 있을 수 있다고, 이 정도의 삽질은 어쩌면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인생이 언제나 효율적일 수는 없다고.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 그게 나도 좀 어려웠다고 말이다.

그 오차와 실수에 대한 관대함이 우리를 보다 안전하고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 그래도 당신은 당신을 이해할 것

예전에 성인 진로상담을 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을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소위 천재성을 사람들이 있는데 보통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의 삶이 그리 수월하진 않다고 한다.

그들은 학창시절 성적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사고의 폭이 넓어서 주입식 교육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해서다. 에디슨이 1+1=2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로 가지 못하고 일반적인 직장에서 일을 할 경우, 그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하고 그래서 우울증이나 강박증 약을 복용하며 회사에 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괴로워하는 그들을 향해 주변 사람들은

“남들도 다 원하는 일을 하고 사는 건 아니다.”

“너만 힘든 게 아니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에 자책감과 자괴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어떤 일이 유독 힘들다면 그건 내가 잘못된 사람이어서 내가 엄살을 떠는 사람이라서,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에rps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기성화가 내 발에는 유독 아프게 느껴진다 해도, 그게 발의 잘못은 아닌 거다.

그러니 힘든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자. 그들을 비극으로 이끈 건, 그들조차도 힘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데 있었다.

때론 이해받지 못해 서글플지라도 적어도 자신은 스스로를 이해해야 한다.

- 19 -

■ 나의 행복에 관심을 가질 것

나는 행복 수첩을 만들었다. 그러고는 우울함이 지나가는 순간과 행복을 느끼는 순간을 수첩에 기록했다.

그렇게 수첩에 기록하고 보니, 나라는 사람이 언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고, 우울한 순간도 곧 지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다 말하면서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조차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행복은 어느 날 아침 식탁 위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에서 알아두면 좋은 많은 것들 중 심폐소생술 보다. 이어폰 줄을 꼬이지 않게 하는 법보다 연말 소득공제를 하는 법보다 더 중요한 건 나는 무엇으로 행복한가, 나는 무엇으로 회복하는가, 나는 어느 순간 살아 있음을 느끼는가, 하는 자신의 행복을 다루는 노하우다.

행복하고 싶다면 당신의 행복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 완벽하지 않음을 사랑할 것

이세돌 vs 알파고

아날로그시계 vs 전자시계

손편지 vs 이메일

LP판 vs MP3

우리는 완벽한 것을 동경하고 완벽하지 않은 것을 사랑한다.

■ 어떻게 살 것인지 물을 것

나는 삶에 가장 중요한 것들만을 남기려 노력했는데, 큰 카데고리에서 보자면 일, 인간관계, 즐거움, 정신적•신체적인 건강함이었다. 벌어지지 않은 일에 미리 불안해하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Want)을, 할 수 있겠다(Can)싶으면 했다.(Do)

Want + Can + Do라는 단순한 공식, 대신 열심히.

- 20 -

희미하게 계획했던 밑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것에 성취감과 기쁨을 느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났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나를 짓누르는 관계와는 거리를 뒀고 그들이 내게 함부로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끝나지 않던 질문, 아니 언제나 끝나지 않을 질문, 내 나름의 답을 이야기 하자면 우리 좋은 삶을 살자.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열심히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좋아하는 노래와 좋은 책을 함께하며 날씨가 좋은 날 햇볕을 쬐는 것, 나는 그 일상의 따스함이 좋은 삶의 전부라 생각한다.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라는 책이 있다.

그런데 이 응원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건, 자기 자신이다.

죽는 순간까지 나를 떠나지 않을 존재에게 오늘은 이렇게 말하자.

내가 어떤 사람을 갈든 나는 나 자신을 응원할 것이다.

■ 어른으로 살아갈 것

어린 시절 엄마는 나에게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그래봤자 30대 여자였다. 엄마도 무섭고 힘들고 벅찼겠지만, 누군가를 위해 꾹 참고 어른의 역할을 해냈을 뿐이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었다. 어릴 때는 밥 잘 먹고, 잠 잘 자는 것만으로도 내 역할을 충실히 해낸 거였지만 이제는 그런 일로 누구도 칭찬해 주지 않는다. 그러니 먹고 살기 위해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지겨움이든 불안함이든 견뎌야 한다. 아직 어른이고 싶지 않다 해도 우리의 부모님이 그랬듯 그렇게 어른인 척하며 어른이 된다.

■ 에필로그(Epilogue)

어른이 되어보니 세상은 냉담한 곳이었다. 부조리가 넘쳐났고, 사람들은 불필요할 정도로 서로에게 선을 긋고, 평범한 이들조차 기회가 있으면 차별과 멸시를 즐겼다. 돈을 벌기 위해 감정을 모른척해야 했고 사회의 헐거운

- 21 -

안전망에 늘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나는 이 냉담한 세상에서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으며, 냉담한 누군가로 변해가고 싶지도 않았다.

먹고 사는 일에 대한 불안 외에도, 타인에 대한 불신, 모욕, 경쟁적 인간관계, 차별은 공기 중으로 흩어져서 숨 쉴 때마다 우리에게 스며들었다. 그 결과 우리는 불필요한 일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고, 모욕에 주눅 들어야 했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날을 세우며 경계해야 했다.

그 경계 속에서 아무 문제없는 자신을 탓하느라,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탈진해가는 거다. 나는 책을 통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불신 속에서 고독하고 외롭게 남아 있는 누군가에게 그대는 당당해도 된다는 응원이자 여전히 인간적인 삶을 갈망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신호이고 싶었다.

냉담한 세상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부당함과 모욕과 불안에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그리고 나와 타인을 위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자신의 몫을 해야 한다.

- 2019. 4. 26 -

- 22 -


반응형

'독서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필로 쓰기(2)  (0) 2019.05.31
연필로 쓰기  (0) 2019.05.16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0) 2019.04.17
걱정이 많아서 걱정인 당신에게(2)  (0) 2019.04.03
걱정이 많아서 걱정인 당신에게  (0) 2019.0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