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로 쓰기

2019. 5. 16. 15:30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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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필로 쓰기

김훈 산문집

0 1948 서울 출생

0 2000년까지 여러 직장 전전

0 저서

- 소설 : 강산무진, 칼의 노래, 현의 노래, 공무 도하, 내 젊은 날의 숲 등

- 산문 : 풍경과 상처, 자전거 여행 1, 2. 라면 끓이기 등

■ 알림

나는 여론을 일으키거나 거기에 붙어서 편을 끌어 모으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 나의 글은 다만 글이기를 바랄 뿐. 무 것도 도모하지 않고 당신들의 긍정을 기다리지 않는다.

나는 나의 편견과 편애, 소망과 분노, 슬픔과 기쁨에 당당하려 한다. 나의 이야기가 헐겁고 어수선해도 무방하다.

나는 삶을 구성하는 여러 파편들 스쳐지나가는 것들, 하찮고 사소한 것들, 날마다 부딪치는 것들에 대하여 말하려 한다. 생활의 질감과 사물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일은 어제나 쉽지 않았다.

2019년 봄, 미세먼지를 마시며, 김훈 쓰다.

■ 시작!

연필은 내 밥벌이의 도구다. 글자는 나의 실핏줄이다. 연필을 쥐고 글을 쓸 때 나는 내 연필이 구석기 사내의 주먹도끼. 대장장이의 망치, 뱃사공의 노를 닮기를 바란다.

지우개 가루가 책상 위에 눈처럼 쌓이면 내 하루는 다 지나갔다.

밤에는 글을 쓰지 말자. 밤에는 밤을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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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부, 연필은 나의 삽이다

■ 호수 공원의 산신령

지난여름은 너무 더워서 호수 공원에 나온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인적 없는 공원에 연꽃이 피어서 그윽했다. 수련 꽃은 물위에 내려앉은 별들처럼 보였다. 연꽃은 여기저기 피어 있어도 무리를 짓지 않고 혼자서 피어 있다. 연꽃은 활짝 피어 있어도 소란스럽지 않다. 연꽃은 늘 고요하고 차분하다. 연꽃은 절정에서도 솟구치지 않고 안쪽으로 스민다. 홍련(紅蓮)이나 백련(白蓮)이나 연꽃의 색깔은 이 색에서 저 색으로 흘러가고 있다. 수련의 잎은 수면 위에 붙어서 기름진 빛으로 반짝거리고, 연잎은 꽃과 봉오리에 시립(侍立)한 시녀들 같다. 연꽃의 봉오리는 멀리서부터 가까이 다가오는 기별처럼 기척이 없는데, 그 봉오리가 조금씩 벌어지는 모습은 곤한 잠에서 서서히 깨어나서 이승으로 다가오는 꿈처럼 보인다.

이제 호수공원의 연꽃은 모두 시들었다. 여름에 빛나던 꽃일수록, 가을에는 더 참혹하게 무너진다. 연잎은 누렇게 시들고 걸레처럼 썩어서 물에 떨어지고 줄기는 모두 목이 부러져 꺾인다. 수면에는 연꽃의 잔해로 누런 폐허가 펼쳐진다. 무너지는 결실을 이루니 무너짐과 피어남이 본래 같은 것임을 가을의 호수 공원에서 나는 안다.

매미 울음소리가 사라져서 가을의 공원은 더욱 고요하다. 가끔씩 늦매미들이 우는데, 늦매미 울음은 여름날의 울음처럼 맹렬하거나 집요하지 않다. 매미의 울음은 수매미가 암매미를 부르는 구애의 절규라고 하는데, 저 작은 벌레가 어찌 그런 놀라운 사랑의 마그마를 쓰나미 같은 목청으로 폭발시키는 것인지, 사람보다 낫구나 싶다.

공원 안 동물원의 두루미는 got볕 비치는 자리에 외발로 서서 목을 틀어 머리를 죽지 밑에 파묻고 있다. 아이들이 불러도 두루미는 쳐다보지 않는다. 두루미는 한쪽 다리로 한나절을 서 있으면서도 다리를 바꾸지 않는다. 어떤 때는 흙을 파고 들어앉아서 사람쪽을 외면하고 있다. 두루미는 시베리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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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철새인데, 사람한테 붙잡혀서 갇혀 있다 가끔씩 날개를 펴고 높은 소리로 울면서 철장 안을 날아보는데, 그때 두루미는 가장 불쌍하다.

나는 20년째 일산 신도시에 살고 있다. 50살 때 이사 와서 지금 70살이 되었다. 20년 전에 이사 올 때는 지금의 정발산동에 마을이 없었고, 집은 나의 집을 포함해서 두 채뿐이었다. 고양시는 그 20년 동안에 인구 100만이 넘는 대도시로 커졌다.

20년 전의 어린 나무가 이제는 크게 자라서 잎이 무성하고 그늘을 거느려서 사람과 새를 모은다. 나는 내가 점찍어 놓은 나무들이 자라는 과정을 20년 동안 들여다보았다. 나무는 커졌고 사람들은 사라졌다. 20년 전에 공원에서 장기를 두던 노인들은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 노인들은 이사를 갔거나 세상을 떠났다. 지금은 그 뒤를 잇달아서 늙은, 다른 노인들이 장기를 두고 있다.

장기판 주위에는 여러 노인들이 둘러서서 구경을 하고 있다. 겨울의 눈구덩이 속에서도 노인들은 오리털 외투를 입고 털모자를 쓰고 장기를 둔다. 손을 주머니 속에 넣고 있다가 장기 말을 옮길 때만 뺀다. 호수공원의 장기판은 수준이 높아서 내 실력으로는 끼어들기 어렵지만, 나는 하수들끼리 겨루는 판에서 몇 번 붙어 본 적이 있는데 판판이 깨졌다.

20년 전에는 공원에 개들이 별로 없었는데, 지금은 개들이 많아졌다. 주인을 따라서 공원에 나오는 개들은 덩치나 생김새가 제가끔인데, 다들 잘 손질되어 있고 교양 있어 보인다. 서양 귀부인 같은 개도 있고 동화속의 천사 같은 개들도 잇다. 개들은 잘 교육받아서 함부로 날뛰거나 짖어 대지 않고 먹을 것을 봐도 껄떡 거리지 않는다. 줄이 풀어진 개들도 주인이 부르면 달려와 꿇어앉아서 스스로 사슬을 받는다. 일산 공원에 이 우아한 개들이 늘어나고 관련 업소가 성업중인 현상은 고양시민의 생활 정서가 안정되어 가는 증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 소년 시절에는 개들이 거리에서 자유롭게 흘레붙었다. 동네 악동들의 온갖 신나는 장난질들 중에서 개흘레를 응원하는 놀이는 상위 랭킹에 속하는 즐거움이었다. 학교가 파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개흘레를 만나면,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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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빙 둘러서서 흘레를 응원했다. 개 두 마리가 꽁무니를 마주대고, 운동회 때 줄다리기 하는 것처럼 서로 반대쪽으로 끌고 당겼는데 아이들은 이쪽 개, 저쪽 개 편을 갈라서 박수치며 응원했다. 어른들이 이 남세스러운 꼴을 보다못해 뜨거운 물을 개에게 끼얹으면 개 두 마리는 교미를 해체하고 깨갱거리며 달아났는데 그때 아이들은 배를 잡고 깔깔 거렸다. 이 짓거리는 참으로 신났다.

일산 호수 공원의 개들은 흘레를 붙지 않는다. 나는 이 사태를 매우 괴이하게 생각한다. 흘레를 마음대로 붙지 못하는지, 흘레 할 생각이 아예 없는지, 개 노릇하기도 쓸쓸하고 힘들어 보인다. 사람의 마을에서 사는 개들은 경계심이 거의 없고, 먹이를 다투지 않고, 기아나 죽음과 싸우지 않는다.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는 성정이 개의 본능이 되었고, 이 본능은 유전된다. 개는 개가 아닌 것으로 됨으로써 아파트에서 살 수 있다. 개들은 저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모른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다. 벤치에 앉아 있는 내 앞으로 우아하고 외로운 개들은 지나가고 지나간다. 아무리 품격 높은 개라 하더라도 아무데서나 누가 보건 멀건 똥오줌을 눈다. 이 배뇨 방변은 개들의 마지막 자유처럼 보인다.

도시공원 및 녹지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개똥을 안 치우면 벌금 5만원, 벤치 위에 싼 개오줌을 안 치워도 벌금 5만 원인데, 길바닥에 싼 개오줌은 양에 관계없이 벌금을 내지 않는다.

유치원에 다니는 동네 아이가 공원에서 두 발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다. 나는 벤치에 앉아 있었다. 뒤따르는 자전거들이 많았으므로, 나는 아이를 안아서 길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아이는 무르팍이 깨져서 피가 조금 배어나왔다. 아이는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내는 내 핸드폰으로 아이의 엄마에게 연락해 주었다. 집이 가까워서 엄마는 금세 달려왔다. 젊고 아름다운 엄마였다. 울음을 그쳤던 아이는 엄마를 보자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는 울면서 엄마에게 말했다.

"내가 넘어져서 우는데, 이 산신령 할아버지가 날 구해줬어."

엄마가 깔깔 웃었다. 울음을 그친 아이는 엄마와 함께 돌아가면서 나를 향해 단풍잎 같은 손을 흔들었다. 일산에서 20년을 살고 나니 나는 산신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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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서 남성 노인과 여성 노인들은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여성 노인들은 모여서 주로 수다를 떤다. 여성 노인들은 그룹별로 모이는 장소가 따로 있다. 그들은 생애전체와 눈에 보이는 것 모두를 수다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놀라운 언어 능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무심한 척 그 옆자리에 앉아서, 나중에 혹시 써먹을 수 있겠거니 하면서 그들의 수다를 메모했는데, 지금이 써먹을 때다.

대형병원에서는 70살이 넘은 노인들에게는 대장내시경을 할 때 부작용을 우려해서 수면 검사를 해주지 않는다. 여성 노인들은 수면검사를 해주는 작은 병원에 대한 정보를 서로 주고받는다. 맨정신으로 대장 내시경 검사를 받으려면, 바지를 벗고 항문을 젊은 의사 쪽으로 내밀어야 하고, 꼬챙이가 대장 안으로 들어올 때의 느낌이 너무나 모욕적이라고 한 여성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다른 여성 노인은, 그래도 맨정신으로 받는 편이 안심이지 수면검사했다가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죽지도 않으면 자식들이 얼마나 힘들겠냐고 말했다. 결론은 없었다.

또 다른 여성은 골다공증에 걸려서 몇 년째 고생을 하고 있다면서 골다공증에 걸린 원인이, 소싯적부터 월경 피를 흘렸고, 자식 셋을 젖 먹여기를 때 애들이 먹성이 좋아서 젖꼭지를 깨물어서 놓아주지 않고 사정없이 꿀꺽꿀꺽 빨아 먹었으며, 남편이 속썩여서 눈물을 많이 흘렸기 때문에 몸속과 뼛속의 진액이 다 빠져나가 뼛속이 말라서 버스럭거리고 뼈마디에 윤활유가 말라서 마디마디마다 부딪치고 갈리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여성 노인은 약을 먹어도 아무 효과가 없다면서 병원을 바꾸어야겠으니 용한 데를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러자 또 다른 여성 노인이 대거리를 하는 데, 이제는 월경도 끝났고 젖먹일 아이도 없고 남편도 늙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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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마누라를 속 썩일 힘이 없어졌으니 늙음을 복으로 알고 살아야 한다면서, 약을 먹어야 병이 낫는다면 죽을 놈이 누가 있겠느냐, 어차피 이약 저약 먹어봐야 다 마찬가지니까 병원을 바꿀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늙은 여성들이 젊은이들을 못마땅하게 말할 때는 '요샛것들'이라는 삼인칭 복수대명사를 쓴다. 내가 분석해보니까, '요샛것들'이란 주로 며느리들을 가리키는데, 이 며느리는 자신의 며느리일수도 있고, '요새 며느리들을 싸잡아서 일컫는 말이기도 하다.

며느리라는 집단을 흉볼 때는, 한 명이 말하면 봇물 터지듯이 다들 따라한다.

해마다 추석이 지나면 '요샛것들'이 무슨 명절증후군이라는 걸 앓는다고 신문 방송에서도 하도 떠들어대길래, 전부치고 있는 며느리한테 "너도 그 증후군 있냐?"고 물었더니 배시시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더라고 한 노인이 말했다. 그러자 수다의 봇물이 터지면서 '요샛것들'을 성토했다.

여성 노인들은 아들 편을 들었다가 며느리 편을 들었다가, 며느리를 욕했다가 자랑했다를 반복하면서 끝없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러니 남에 대하여 말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한 생애를 늙히는 일은 쉽지 않다.

젊은 부부들은 어린아이를 태운 유모차를 밀고가고, 늙은 사네는 늙은 아내가 탄 휠체어를 밀고 간다. 20년 전에 지나가던 노인들은 다 지나가고 지금은 딴 사람이 지나간다. 지나가는 것들은 지나가고 지나간다.

호수 공원은 인공의 공원이지만 이제는 숲이 무성하고 그늘이 짙어서 자연의 너그러움을 지니고 있다. 사람들의 지지고 볶는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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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들을 숲이 품고 있다. 노인들은 길에서 멀리 물러나 있고 어린아이들은 두 발로 오뚝 서는 미어캣 앞에 모여 있다. 아이들이 발돋움을 하고 미어캣을 흉내내면 미어캣과 똑같다.

지금, 공원 숲에서는 가을 냄새가 난다. 가을 냄새는 메말라가는 숲에 내리는 햇볕의 냄새다. 김포 쪽 하늘에 노을이 지는 무렵에,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 밥과 똥

시방세계 억조창생과 모든 들짐승 날짐승 길짐승, 바닷속의 물고기와 거북이, 풀 속의 버러지들이 창세기 이래 무시무종(無始無終)하게 내지르는 모든 똥 중에서 최상위 포식자의 똥이 가장 더럽고 구리다. 나는 이 학설을 한 동물학자의 글에서 읽고 충격을 받았다. 이 진리는 구태여 증명할 필요가 없이, 사람에 속하는 자들은 다들 스스로 알 터이다. 이 진리에 접하는 순간, 똥에 대한 나의 모든 기억과 느낌이 되살아나서, 잊어버리기 전에 서둘러 몇자 적는다.

며칠 전 밤에 호수 공원을 산책하다가 개똥을 밟았다. 나는 신발을 벗어서 개똥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똥의 양이 많았고 자루가 굵어서, 덩치가 큰 개의 똥이 분명했다. 물기가 축축하고 끈기가 살아 있었다. 싼지 얼마 안 된 생똥이었다. 이 개똥의 구린내는 사람의 똥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구린내의 계통도 사람의 똥과 같았다. 산과 들과 물속의 온갖 것을 다 집어먹고 내지른 종합적이고 공격적인 구린내였다. 요즘은 개의 지위가 높아져서, 개를 개라고 하면 무식쟁이 취급을 받고 반려견이라고 해야 교양인 대접을 받는다. 개가 되었건, 반려견이 되었건, 개는 상위 포식자가 아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는 야성이 퇴화해서 제 먹이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한다. 반려견은 먹이사슬의 최하위거나. 사슬의 위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물구하고 반려견이 최상위 포식자의 똥을 누는 까닭은 사람이 주는 먹이를 먹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신도시 동네에는 반려견의 먹이를 파는 가게가 성업중인데, 메뉴는 20~30가지다. 사슴앞다리 1만 2천원, 양갈비구이 1만원, 유기농 샐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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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원, 야채고기죽 4천원, 외에도 많다. 개는 인간에게 꼬리를 흔들고 인간에게 인간으로써, 최상위 포식자의 먹이를 먹고 최상위 포식자의 똥을 눈다.

일본인들도 오랫동안 인간의 똥을 거름으로 사용했다. 똥은 비료로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메이지 유신이 한창 전개되던 1878년에 일본 정부가 제정한 ‘분뇨 취급규칙’은 전국의 똥의 가치를 5등급으로 분류해서 값을 매겼다.

다이묘(大名)의 저택에서 나오는 똥이 최상품으로 값이 가장 비쌌고, 공중변소의 똥이 상등품, 일반 가정의 똥은 하등품, 감옥이나 유치장에서 나오는 똥은 최하등품으로 값이 가장 쌌다. 근대적 합리성을 추구하던 메이지 관료들은 똥을 그 효능에 따라 분류하고 값을 차이 나게 매겨서 시장의 원리에 편입시켰다. 먹이 사슬의 섭리는 밥 뿐 아니라 똥 까지도 지배했다. 애덤 스미스가 인류를 구원하는 만고의 진리로 떠받들던 ‘보이지 않는 손’의 실체가 이 사슬이라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일일 테지만, 딱히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없다.

소똥이나 말똥에서는 사람똥이나 개똥처럼 악취가 나지 않는다. 가을볕에 마른 말똥에서는 마른풀의 냄새가 난다. 물론 구린내도 섞여 있지만 이 구린내는 사람똥의 구린내와 달라서 공격성이 없다. 이 구린내는 사람을 찌르듯이 달려들지 않고, 넓게 퍼져서 평화롭다. 소똥냄새는 소의 울음소리와 닮아 있고, 말똥 냄새는 말의 울음소리와 닮아 있다. 소똥, 말똥의 냄새를 맡으면, 평생 말을 안 하고 평생 풀을 먹고 평생노역을 바치는 덩치 큰 짐승의 몸 속의 온도와 습도, 질감과 풍경이 떠오르거나, 전혀 떠오르지 않는데, 거기에 대해서는 쓸 수가 없다. 나는 우선 내가 눈 똥과 내가 겪은 세월 속의 똥에대해서 쓰겠다.

술먹은 다음 날 아침에 머리는 깨지고 속은 뒤집히고 몸속은 쓰레기로 가득찬다. 이런 날의 자기혐오는 화장실 변기에 앉았을 때 완성된다.

뱃속이 끓어서, 똥은 다급한 신호를 보내오고 항문은 통제력을 잃고 저절로 열린다. 이런 똥은 힘을 주어서 짜내지 않아도 새어나온다. 똥은 대장을 가득히 밀고 내려오지 못하고 비실비실 기어 나오는데, 그 굵기는 국숫가락 같다. 국숫가락은 툭툭 끊어진다. 슬픈 똥이다. 간밤에 안주로 집어 먹은 것들이 서로 엉기지 않고, 제가끔 반쯤 삭아서 따로따로 나온다. 소화되지 않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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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 변기 물위에 시커멓게 뜬다. 가늘고 무기력하고 익지 않은 날똥인데, 이 무력한 똥의 악취는 극악무도하고 똥과 더불어 나오는 오줌은 뿌연 구정물 같다. 이런 똥은 평화로운 구린내의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덜 삭은 원료들이 제가끔의 악취를 뿜어낸다. 똥의 모양새는 남루한데 냄새는 맹렬하다. 사나운 냄새가 길길이 날뛰면서 사람을 찌르고 무서운 확산력으로 퍼져나간다. 간밤 술자리에서 줄곧 피워댔던 담배 냄새까지도 똥냄새에 배어 있다. 간밤에 마구 지껄였던 그 공허한 말들의 파편도 덜 썩은 채로 똥 속에 섞여서 나온다. 똥 속의 말의 쓰레기들이 구더기처럼 끓고 있다. 저것이 나로구나. 저것이 내 실존의 엑기스로구나 저것이 내 밥이고 내 술이고 내 몸이고 내 시간이로구나. 저것이 최상위 포식자의 똥인가? 아니다. 저것은 먹이 사슬에서 제외되지 않기 위하여 먹이사슬의 하층부로 스스로 기어들어간 자의 똥이다.

이런 똥을 누는 아침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하였다. 아, 이런 썩어빠진 삶, 반성 없는 생활, 자기연민과 자기증오를 좌충우돌하는 비겁한 마음과 작별하고, 삶의 건강과 경건성을 회복하자고 나는 날뛰는 똥냄새 속에서 맹세했다. 맹세는 비통했고, 작심삼일이었지만 그 맹세에 의해 나는 나 자신을 응시하는 또 다른 나를 확인할 수 있었다.

허준(許浚 1539~1615)은 인간의 똥오줌을 면밀히 관찰하고 분석해서 <동의보감>에 적었다.

모든 똥의 문제는 외부에서 사악한 기운(邪氣)이 몸을 침범했기 때문이라고 허준은 썼다. 인간의 병은 단순히 병리적이고 생리적인 원인뿐 아니라 그의 시대, 직업, 작업환경, 성장지, 거주지, 상종하는 무리, 사회계급, 출신성분 같은 정치사회적 조건에 의해 더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므로, 허준이 말한 ‘사악한 외부의 기운’이란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개념일 터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한 똥의 참상이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그의 저술, <민보의 民堡議>에서 사람의 똥을 전쟁무기로 활용하는 방안을 소상히 밝혔다. <민보의>는 외적의 침입이 잦은 접경지역의 향토방위 전술전략을 연구한 저술이다. 정약용은 접경지역의 요새와 진지에 똥독을 묻어놓고 똥을 모아야만 한다고 말했다. 남녀의 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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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을 따로 하되, 모든 똥을 모아서 물을 섞고 휘저어 놓았다가 이 똥물을 대나무통에 넣어서 적이 다가오면 얼굴에 쏘라고 말했다. 똥물을 바가지로 퍼서 끼얹으면 조준이 정확하지 않고 똥물을 낭비하게 되니까 대나무에 넣어서 쏘라고 정약용은 말했다. 정약용은 이 장치를 분포(糞砲)라고 이름 지었는데, 분포를 쏘는 자는 기름먹인 옷을 입어야 하고 전투가 끝나면 몸을 깨끗이 씻으라고 말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40년 동안을 광야에서 떠돌 때 요르단강 동쪽 아라비아 사막에 이르러 백성들에게 말했다.

- 너희들은 똥을 눌 때 천막 밖에 변소를 만들고 그 속에 누고 흙으로 똥을 덮어라.

하느님의 계율과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분노를 설파하던 모세가 그의 백성들에게 똥 누는 법도 가르치는 걸로 봐서, 수많은 사람이 함께 먹고 자고 이동하는 생활이 수십 년 계속되다보니까 심각한 위생문제가 발생했음을 알 수 있다.

모세의 가르침은 간단하다. 아무데나 누지 말고 한 곳에 눠라! 천막에서 멀리 가서 눠라! 구덩이를 파서 누고 흙으로 덮어라.

그들은 유랑민이었으므로 똥을 모아서 거름이나 무기로 쓸 일은 없었고. 격리해서 흙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의 처리방식이었을 것이다. 모세의 시절에 대지는 똥을 받아들였고 모세의 백성들은 이 순환의 고리에 의해 하느님이 보호하시는 천막을 거룩히 유지할 수가 있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농촌은 절량(絶糧)과 기아로 거덜이 났고 대도시도 다르지 않았으나 그나마 먹고 살 것의 꼬투리라도 찾아서 농어촌 인구는 서울로 모여들었다. 서울의 인구압(人口壓)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산비탈, 하천변, 고수부지, 사유지에 ‘불량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서울은 똥으로 넘쳐났다.

집집마다 똥을 퍼내는 재래식 뒷간을 하나씩 끼고 있었다. 뒷간이 없는 잡도 있었다. 이런 집은 이웃집 뒷간을 한 달에 얼마씩 돈을 주고 이용했고(월똥), 또는 신문지에 똥을 누어서 밤중이 몰래 내다버렸다. 거대도시의 똥을 퍼다 버리는 작업은 서울의 운명이 걸린 대사업이었다. 서울 시청 환경국은 청소1과와 청소2과로 구성되어 있었다. 청소1과는 생활쓰레기 담당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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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2과는 분뇨 담당이었다. 청소2과의 사명은 실로 막중했다. 그것은 시민의 생사, 서울의 존망과 직결된 신성한 사명이었다.

작업을 총괄 지휘하는 청소2과장에는 가장 유능하고 조직 장악력이 강한 엘리트 서기관이 임명 되었다. 그 후에 내가 알게 된 젊은 청소2과장은 이렇게 말했다.

똥은 평등하다. 신분이나 계급을 가리지 않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성인은 하루에 200~300그램의 똥을, 1.2~1.5리터의 오줌을 눈다. 이것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나온다. 이것은 다시 집어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반드시 가져다 버려야 한다. 반드시 나오는 것을 반드시 가져다 버려야 하는데, 이 사태가 수백만 명이 사는 대도시에서 벌어질 때, 어찌 기막힌 일이 아니겠는가. 이 어찌 무섭지 않겠는가.

나의 소년기에 대책 없이 서울로 몰려든 사람들은 밥 세끼와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한편, 매일매일 나오는 똥과 싸웠다. 똥과의 싸움은 밥 먹기 싸움에 못지않았다. 밥이 없는 시절에 똥은 골목마다 넘쳐흘렀다.

똥차는 늘 새벽에 왔다. 행인의 왕래가 없는 시간을 이용했다. 똥차가 오면 동네 집들이 일제히 변소를 푸는 것이 아니고 똥이 가득찬 집만 똥을 푼다. 한집만이라도 똥을 푸면 온 동네가 똥냄새가 퍼지므로 동네는 늘 이집 저집

의 똥냄새에 절어 있었다. 사람들은 똥차를 증오하면서도 똥차를 목 빠지게 기다렸다.

분뇨수거 작업자들은 고난도의 기술과 오랜 경험을 가진 전문직 노무자들이다. 똥지게에 똥을 가득 채우고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면서 똥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아야 한다. 또 뒷간을 밑바닥이 보이도록 끝까지 파내는 사람을 으뜸으로 친다.

이들은 고난도의 기술을 보유한 만큼 심술도 사나웠다. 대접이 시원치 않으면 일부러 똥을 흘리고 가기도 했다. 똥 푸는 요금은 한 지게당 얼마씩 정해진 액수가 있었는데 웃돈을 얹어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남의 집 뒷간에서 똥을 누면 월똥 값을 내야 했다.

내 어렸을 때 친구 병수네 아버지는 야미 똥꾼이었다. 병수는 어머니가 없었다. 병수 아버지가 똥구루마를 끌고 병수기 뒤를 밀었다. 내리막에서 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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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발을 엉버티면서 똥구루마 손잡이를 높이 쳐들어서 속도를 줄였고, 병수는 똥구루마 뒤를 잡아 당겼다.

병수는 학교에서 배울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동네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아카시아꽃과 밤꽃을 먹는 방법 왕개미 똥구멍을 빨아먹는 방법, 산에서 깜부기를 따먹는 방법 같은 것들이었다.

아버지의 똥구루마를 밀면서 산비탈을 오르내려서 그런지 병수는 다리 힘이 셌고 닭쌈을 잘했다.

어느 해 겨울에 병수네 아버지가 내리막에서 사고를 냈다. 똥구루마의 관성속도를 이기지 못해서 길바닥에 쓰러졌다. 병수 아버지는 다쳤고, 골목에 똥이 쏟아졌다. 동네 엄마들이 비명을 질렀고, 쓰러진 병수네 아버지를 몰아부쳤다.

병수는 야미 똥꾼의 아들이었고 학교에 다니지 않았지만 동네 아이들의 대장 노릇을 했다. 리더십이 좋은 아이였다. 우리는 무너진 한양도성의 성곽을 따라다니면서 놀았다. 병수는 놀거리를 찾아내는 데 재능이 뛰어났다. 그때 내가 달리던 성벽길, 시간마다 변하던 저녁노을의 빛깔, 바람과 숲의 냄새, 온갖 벌레들의 놀라운 동작들, 밤이 가고 아침이 오고 또 밤이 오는 시간의 신비, 도마뱀을 잡았을 때의 경이로움, 이런 기억들이 내 유년의 아름다움이다. 병수는 똥과 더불어서 발랄하고 건강했으며 똥에 침몰되지 않았다.

병수네 식구들은 어느 날 조용히 마을을 떠났다. 병수가 며칠째 보이지 않아서 병수네 움막으로 갔더니 아무도 없었고, 움막 앞에 병수 아버지의 똥구루마가 버려져 있었다. 병수 아버지는 또 다른 먹고 살 자리를 찾아서 마을을 떠난 것이었다. 그 후로 지금까지 병수는 소식이 없다. 나는 요즘도 아침의 구린내 속에서 병수를 생각한다. 슬픔인지 기쁨인지 이제 분간할 수 없다.

고대인들은 똥을 심각한 당면 문제로 인식하지 않았고, 적극적인 대처방안을 강구하지 않았다. 인구가 많지 않고 인구압이 낮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고학의 발굴 성과에 따르면 신라 금관총, 황남대총, 백제 무령왕릉과 고분들, 그 밖의 왕족 귀족들의 무덤에 들어갈 때도 숟가락을 들고 들어갔으니 밥의 지엄함을 알 것이다. 백제 무령왕은 평생 산해진미를 먹었을 텐데 그 호화찬란한 무덤으로 들어갈 때도 숟가락은 지녔다고 하니 기막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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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화려한 무덤들에서 요강은 출토되지 않았다. 먹기만 하고 누지는 않는 내세를 동경했던 모양인데, 이것은 이승에서는 어림도 없다. 이승에서는 먹은 것은 반드시 나온다.

대취타 앞세우고 연(輦)위에 올라앉은 임금의 어가행렬이 능행(陵幸) 할 때도 변기를 받든 내시가 지근거리에서 따라갔고, 길라잡이 고함으로 상것들을 꿇어앉히고 지나가는 삼정승의 행차에도 구종잡배들이 변기를 들고 따라갔으며, 사인교 타고 나들이 가는 정경부인이나 꽃가마 타고 시집가는 촌색시의 가마안에도 변기를 들여 놓았다. 임금의 변기를 매화틀이라 하고 여인네들이 길에서 쓰는 변기를 요강이라고 하는데, 이름은 달랐지 같은 것이다.

2012년 통계에 따르면 서울에서 하루에 발생하는 분뇨는 1만 817톤이다. 이 물량은 하루도 예외 없이 매일 발생하고, 정확히 처리해야 한다. 분뇨 발생량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이 분뇨는 60만 여개의 정화조에 모여 있다가 분뇨처리 시설로 간다. 서울의 분뇨는 3개 권역으로 나뉘어서 처리되는데, 서남, 중랑, 난지이다.

나의 것은 난지로 간다. 분뇨처리시설은 거대한 공장이다. 밥은 각자의 몫이 따로따로지만, 똥은 한 곳에 모여 바다를 이룬다. 이 시설이 서울의 생명과 문명과 존립을 보장하고 있다. 여기에 이르러서, 서울의 모든 똥오줌은 물과 건더기(슬러지)로 분류된다. 탱크 밑에 가라앉은 건더기는 말려서 소각되고 위에 뜬 물은 정화작업을 거쳐서 한강으로 간다. 이렇게 해서 서울의 하루하루는 똥오줌을 피해가고, 또 매일매일 쏟아낸다.

■ 늙기와 죽기

0 다가오는구나

나이가 드니까 문상 갈 일이 잦다. 20년 전 쯤에는 아버지뻘 되는 사람들의 빈소에 문상했는데, 10년 전쯤에는 형뻘, 이제는 70살 넘은 내 또래 친구들, 동기생들이 죽어서 부고가 온다, 태어난 순서대로 가는 게 아니고 나중에 난 사람이 먼저 가는 수가 흔히 있어서 가는 데는 차례가 없다. 어쨌거나 다가온다. 친구 부모의 빈소에 갈 때보다 친구 빈소에 갈 때가 더 힘들다. 죽음은 더 절실하고 절박하게 다가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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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빈소에서 여러 죽음을 조문하면서도 나는 죽음의 실체를 깨닫지 못한다. 죽음은 경험되지 않고 전수되지 않는다. 아직 죽지 않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죽음에 개입할 수 없고, 죽은 자들은 죽지 않은 자들에게 죽음을 설명해 줄 수가 없다. 나는 모든 죽은 자들이 남처럼 느껴진다. 오래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도, 염을 받고 관에 드시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범접할 수 없는 타인이라고 느꼈다.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제가 죽었는지 모르고, 제가 모른다는 것도 모르고 산자는 살았기 때문에 죽음을 모른다. 살아서도 모르고 죽어서도 모르니 사람은 대체 무엇을 아는가.

날이 저물고 밤이 오듯이, 구름이 모이고 비가 오듯이 바람이 불고 잎이 지듯이 죽음은 자연현상이라서 슬퍼하거나 두려워할 일이 아니라고 스스로 다짐하지만 그런 보편적 운명의 질서가 개별적 죽음을 위로할 수 없다.

문상 온 친구들이 고스톱 치고 흰소리해대는 것도 그 위로할 수 없는 운명을 외면하려는 몸짓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문상의 자리에서 마구 떠들어대던 친구들의 소란을 나는 미워하지 않는다.

0 가까운 것들은 가까이

늙어서 슬픈 일이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못 견딜 일은 젊어서 저지른 온갖 못난 짓거리와 비루한 삶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 어리석은 짓, 해서는 안 될 것, 함부로 써낸 글, 너무 빨리 움직인 혓바닥, 몽매한 자만심, 무의미한 싸움들, 지겨운 밥벌이, 계속되는 야근과 야만적 중노동…… 이런 기억이 몰고 오는 슬픔은 뉘우침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한(恨)이나 자책일 뿐이다. 그 쓰라림은 때때로 비수처럼 가슴을 찌른다. 아아, 나는 어쩌자고 그랬던가. 그때는 왜 그걸 몰랐던가.

이보다 더 슬픈 일은 그 악업과 몽매를 상쇄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미 없다는 것이다. 나는 절벽과 마주 선다.

너무 늦기는 했지만, 나이를 먹으니까 자신을 옥죄던 자의식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나는 흐리멍덩해지고 또 편안해 진다. 이것은 늙기의 기쁨이다. 늙기는 동사의 세계라기보다는 형용사의 세계이다. 날이 저물어서 빛이 물러서고 시간의 밀도가 엷어지는 저녁 무렵의 자유는 서늘하다. 이 시간들은 내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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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동네, 일산 한강어구의 썰물과도 같다. 이 흐린 시야 속에서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선연히 드러난다. 자의식이 물러서야 세상이 보이는데, 이때 보이는 것은 처음 보는 새로운 것들이 아니라 늘 보던 것들의 새로움이다. 너무 늦었기 때문에 더욱 선명하다. 이것은 ‘본다’가 아니라 ‘보인다’의 세계이다.

나는 말하기보다는 듣는 자가 되고, 읽는 자가 아니라 들여다보는 자가 되려 한다, 나는 읽은 책을 끌어다대며 중언부언하는 자들을 멀리하려 한다. 나는 글자보다는 사람과 사물을 들여다보고, 가까운 것들을 가까이 하려 한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야, 보던 것이 겨우 보인다.

■ 꼰데는 말한다

나는 젊은이의 결혼식에서 주례를 설 만한 인품이 못 된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노릇을 맡은 적이 몇 번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 가정을 차리겠다는 청년들이 부모의 등골을 뽑아서 혼수와 예물을 장만하고 예식장 비용까지 부모가 내야 하는 꼴을 볼 때는 기저귀를 찬 것들이 시집 장가를 가는구나 싶어서 한심했는데, 돈 많고 권세 높은 집 자식일수록 그 한심함의 사이즈가 더욱 컸다. 자식의 결혼 비용을 감당해주는 것이 ‘육아’의 마지막 관문이라고 생각하는 부모들이 대부분이었고, 그걸 못해주면 회한이 되어서 가슴앓이를 했다. 한국 사회의 ‘육아 기간’이 너무 길고 모질어서 견딜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식장에서 나는 흰 장갑을 끼고 재킷 윗주머니에 꽃을 꽂는다. 사회자로부터 고매한 인품을 완성한 신사로 소개 받을 때, 나는 속으로 웃지만 겉으로는 엄숙하다. 주례의 자리에 서면, 신랑 신부가 눈앞에 나란히 서 있다. 젊은 부부를 보면 이 어수선한 예식장의 풍경 속에서도 출발선상의 설렘과 기쁨이 느껴진다. 주례사를 듣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나는 그래도 젊은이들에게 단 한 마디라도 귀담아 들을 만한 얘기를 해주고 싶었다.

오래전에 주례를 맡았을 때는 주례사에서 남편과 아내가 요리를 배워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제 손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왜 소중한가, 그것은 영양가 있고 깨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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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음식을 먹어야 한다는 섭생적 의미도 있지만, 음식을 만드는 과정에서 생활을 사랑하고 현실을 긍정하는 심성이 인격 안에 자리잡게 되는 것이라고 나는 말했다. 재료를 다듬고, 섞고, 불의 온도를 맞추고, 익기를 기다리는 동안 인간도 함께 익어간다. 우리의 선대 어머니들이 전쟁과 가난과 억압 속에서도 그 가난한 음식을 기어코 손수 만들어서 자식을 먹인 마음을 우리가 다소나마 이어받아야 한다고 나는 말했다.

내가 말 주변이 없기도 했지만, 이 주례사에 대한 반응은 시큰둥했거나 매우 비판적이었다. 나는 답답했고 다시는 주례를 서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 후에 또 별 수 없이 주례를 서게 되었는데, 나는 주례사에서 삶의 형식을 존중하고 규볌을 지키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결혼은 두 남녀의 일일 뿐 아니라 사회적이고 풍속적인 것이다. 이것이 사람을 모아놓고 결혼식을 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삶이 요구하는 형식을 존중하라. 삶의 내용은 형식에 담긴다. 형식이 소멸하고 나서도 존재할 수 있는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 주례사 또한 거센 비판을 받았다. 식장에 모인 젊은이들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 ‘구제불능의 꼰대’라고 나를 흉보았다고 한다.

■ 내 마음의 이순신 (1)

역사가 기록이 아니라 풍경과 표정으로 남아 있는 곳이 있는데, 남해 이락사(李落祠)와 남한산성 서문(西門)이 그곳이다.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관음포에서 전사했다. 그가 전사하던 날 7년간의 전쟁은 끝났다. 이락사는 그가 순국 234년 후(순조말년)에 관음포 순국 현장에 세워진 사당이다. 이락사는 이(李)가 떨어진(落)자리의 사당이라는 뜻이다. 주어 한 글자와 동사 한 글자만으로 구성된 이 차가운 문장은 너무도 무정해서 나는 이락사 현판을 볼 때마다 진저리를 친다. 이락은 이 무정한 두 글자로 충(忠 ), 열(烈), 진(盡), 무(武)같은 커다란 문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장엄한 슬픔의 뼈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차가운 문장 속에서 슬픔은 침묵으로 가라앉아 있다. 이락사는 오래된 소나무 숲에 자리잡은 작은 사당이다. 이 숲에는 늘 엄숙하고 비장한 기운이 서려 있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은 큰 소리를 내지 못한다. 이(李)는 여기서 낙(落)하였다. 조명 연합군 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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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와 일본 전체가 맞붙은 1598년 겨울바다였다. 숨을 거둘 때 이(李)는 말했다.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 말라.”

남한산성 서문은 산성의 4개 문 중에서 가장 초라하다. 높이가 낮아서 말을 타고 지나갈 수 없다. 서문은 임금이나 고위관리들이 통행하는 문이 아니고 한강 유역 백성들이 성안을 드나들던 문이었다. 서문 밖은 가파fms 산길이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통곡하는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문을 나왔다. 대열은 눈 덮인 산길을 내려갔다. 인조는 송파 삼전도에서 청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하고 신하가 되었다. 이락(李落) 후 39년 만이었다.

나는 서문에서 삼전도까지 여러 번 걸었는데 쉬엄쉬엄 세 시간쯤 걸렸다. 인조가 내려올 때는 길바닥이 얼어 있었고 대열이 길었으니까 네다섯 시간쯤 걸렸지 싶다. 서문에서 삼전도까지 걸어갈 때 조선 임금의 내면은 어떠했는지를 생각하는 일은 참혹하다. 이 얼음길을 내려가면서 임금은 비로소 아비가 되는 것인데, 이 아비의 아비 되기는 우선 치욕에 몸을 담그고, 견딜 수 없는 것들을 견디는 것이었다.

남한산성 서문의 문루는 후세에 새로지은 건물이지만, 통용문의 밑돌은 투항하러 나가는 임금을 직접 목격했던 그 돌이다. 나는 남한산성에 갈 때마다 이 돌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4월 1일 : 맑음, 감옥문을 나왔다. 남대문 밖 윤간의 종의 집으로 갔다.

이순신은 정유년(1597년) 4월 1일 감옥에서 풀려났다. 이순신은 3월 4일에 투옥되어서 3월 12일에 한 차례 고문을 받고 3월 30일에 또 한차례 고문을 받을 뻔 했으나 2차 고문을 받지 않고 풀려났다. 그가 감옥을 나와서 쓴 첫 번째 문장은 “감옥문을 나왔다”이다. <난중일기>를 읽을 때 이 문장은 벼락처럼 나를 때린다. 이 문장은 남한산성 서문의 밑돌처럼 무수한 표정을 감춘 채 무표정하다.

그는 부지런하고 꼼꼼한 기록자였지만, 매 맞고 백의종군하는 자신의 내면에 관해서는 한 글자도 쓰지 않았고, 술자리에서 부하들에게 일언반구도 말하지 않았다. 쓰지 않고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내면에는 발하여질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들끓고 있었을 터인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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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문을 나왔다”는 이 무서운 단순성은 그의 완강한 침묵을 예고하고 있다.

나는 다만 이순신이 이 침묵의 힘으로 명량에서 이기고 다시 노량에서 이기고, 이긴 자리에서 죽고, 죽어서 자신을 완성하는 것이라고 상정했다.

그가 자신의 내면에 얽매여서 그것을 발설하고 묘사했더라면 그는 12척의 배와 지친 부하들을 이끌고 명량으로 나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아직도 열두 척이 남아 있고 (…) 제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라는 그의 상소문 문장은 “감옥문을 나왔다”의 단순성과 연결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서 사실과 침묵은 나란히 간다. 명량의 12척은 많은 것도 아니고 적은 것도 아니었다. 이 12척은 많으냐 적으냐를 물을 수 있는 숫자가 아니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이 12척은 그가 입각해야할 ‘사실’이었고 그의 장면 현실이었다. 그는 그 12척 위에 자신의 전략과 전술을 세웠다. 그의 용기는 12척의 사실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마음의 힘이다.

“무술년(1598년) 10월 7일 : 맑음, 아침에 송한련이 군량 4되, 겉곡식 1되, 기름 5되, 꿀 3되를 바쳤다. 김태정은 볍쌀 2섬 1말을 바쳤다.”

이 일기는 그가 노량바다에서 전사하기 40여 일 전에 쓴 기록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저렸다. 구국영웅의 마지막 날들이 이처럼 겸허할 수가 잇는가. 그의 많은 군사들에게 군량 4되, 겉곡식 1되가 대체 무슨 보탬이 되겠는가. 김태정은 볍쌀 2섬 1말을 가져왔다고 했는데 이순신은 끝자리 숫자까지 기어이 적어놓았다. 그에게는 1되 1말이 소중했을 것이다. 1말은 많거나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가난, 그의 정직성, 그의 사실성에 나는 눈물겨웠는데 그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군량 4되를 가져온 송한령은 이순신의 군관으로 개전 초기부터 종전까지 이순신을 가까이 모셨다. 그는 전투원이며 또 식량 조달을 위해 어부일까지도 했다. 그가 가져온 군랑미 4되는 늘 내마음을 옥죈다. 남해 이락사에 가면 나는 늘 이순신의 무거운 침묵과 송한련의 4되를 생각한다.

그는 싸우는 7년 동안 123번, 군율로 부하를 처벌했고 그 중 28명은 목을 베어서 사형에 처했다. 그 밖의 죄인은 곤장으로 때리거나 옥에 가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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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부대라고 해서 다들 용맹하고 충직한 자들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모든 조직이 대개 그러하듯이 이순신의 부대에도 별의별 인간들이 다 있었다. 전투 중에 도망가는 자 군량미를 빼돌리는 자, 군사시설과 배의 관리를 소홀히 해서 못 쓰게 만든 자. 백성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고 돌아다니는 자, 술 취해서 개기는(반항하는)자, 건방지고 버르장머리 없는 자, 군대 예절을 지키지 않는 자, 무장을 갖추지 않는 자 등등, 장군의 속을 썩인 자들은 한 둘이 아니었다.

적전 도주, 부녀자 강간, 유언비어 유포, 군량미 절취, 집단 탈영 등은 모두 목 베었다. 이순신은 죄인들의 범죄 사실을 자세히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죄인의 이름을 밝혔고, 곤장 때린 대수를 숫자로 기록했다. 이순신의 치죄는 엄숙하고 신속했다. 죄에는 지체 없고 가차 없이 벌이 따랐다.

이순신은 병졸이나 백성들을 처벌했을 뿐 아니라 군수, 현감 같은 고위직 관리들이나 초급장교들도 군율을 어기거나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붙잡아 와서 곤장을 때렸다. 장흥부사, 낙안군수, 보성군수, 진도군수, 무안군수, 함평 현감, 영암군수, 하동현감, 해남현감 들은 기일 위반, 근무 태만, 명령 불복종 등의 죄목으로 불려 와서 곤장을 맞았다. 하동현감은 90대를 맞았고, 해남 현간은 10대를 맞았다. 그 밖에 만호, 군관 병졸, 종 들도 숱하게 끌려와서 곤장을 맞았다.

부하들을 목 베거나 곤장 때릴 때 이순신은 어떠한 감정도 노출되지 않는다. 목 베었다. 때렸다. 가두었다. 가 전부다. 그는 자비로운 장군이 아니었고 부자비한 장군도 아니었다.

자비나 부자비로 재단할 수 없이, 일이 그렇게 되어질 수밖에 없는 길을 그는 걸어갔다. 나는 이 무정한 문장들을 읽으면서, ‘목 베었다, 때렸다’ 뒤에서 슬픔을 안으로 밀어 넣고 있는 이순신을 느꼈다. 그는 말하지 않고 갈 길을 간다.

그 엄혹한 신분제 사회에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전사하거나 부상당한 ‘천민‘들의 이름을 적어서 임금에게 보내고 원호를 요청했다. 군율을 어긴 자들을 가차없이 목 베고 전사한 노비들의 이름을 적어서 임금님께 올리고 공로를 챙기는 그 양극단을 그는 하나의 마음에 품고 있었다. 노량은 그의 마지막 바다이다. 명량에서 노량으로 나아가는 정유년 겨울에 그의 일기는 때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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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와 눈이 내렸다, 서북풍이 불었다.

- 눈이 내렸다.

- 흐렸다 맑았다 뒤범벅이었다.

처럼 간단한 한 줄이다. 이 한 줄 문장으로 전쟁의 하루를 마감하면서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그는 눈보라치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 내 마음의 이순신 (2)

나는 조선 전쟁사나 이순신의 생애에 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순신이 생애는 내 마음을 크게 흔들었다. 졸작 속설 <칼의 노래> 를 쓰려는 준비 과정에서 임진왜란 당시의 문헌과 기록, 이순신 자신이 남긴 글들을 정밀하게 읽게 되었다. 나는 그 글 속에서 이순신이라는 인격의 내면과 그의 리더십이 작동하는 모습을 복원해 보려한다.

리더십이란 남을 지휘통솔하고 장악하거나 자발적 헌신을 유도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게 하는 지도적 자질을 말한다고 할 것이다. 전쟁에서 리더십이란 고난을 돌파하고 고난을 향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몰아가는 힘일 것이다. 이순신이 감당해야 했던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특징은 대체로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이 전쟁은 한민족이 통일 왕조 수립 이후로 치러야 했던 수많은 민족 방어전의 하나라는 것이다. 이 전쟁은 온 민족의 힘을 합쳐서 국토를 유린하는 압도적인 왜세와 맞서야 했던 총력전이며 전면전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이나 또는 일본 중세의 군사적 패권을 건설하기 위한 내전 성격의 국지전과는 판이한 것이다.

둘째, 이 전쟁은 민족 방어전이라는 절체절명을 걸머진 사활적 싸움이었지만, 그 사명의 막중함에도 불구하고 중앙정부나 지방 정부로부터 아무런 물적 인적 지원이 없었던 전쟁이라는 점이다. 중앙정부는 이순신에게 수군통제사라는 지휘권을 인정해 준 것 뿐이었다. 그리고 이 지휘권은 끊임없는 정치적 감시와 박해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가 투옥되고 백의종군하는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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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이순신의 수군 부대는 계사년 한 해 동안 한산 수영에서 극심한 식량난을 겪는다. 이해에 이순신 휘하 수군 6200여 명 중 10%가 넘는 600여명이 굶어죽었고 나머지 병졸들도 극심한 배고픔과 질병으로 전투에 동원할 수 없게 되었다.(난중일기 계사년 편) 따라서 이순신의 전쟁 경영이란 적을 섬멸하는 전투 지휘뿐 아니라 군수, 병참, 보급, 징모(徵募), 부상자 처리에서부터 전함제작, 화포제작, 탄약 생산, 농경, 제렴, 에 이르는 전쟁의 모든 국면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싸움이었다. 의주로 달아난 피난 조정은 오히려 남해안의 수군진영에 대해 궁중용 소비물품 (종이, 훈련용 총포와 탄약)을 요구해 오는 판이었다.

이순신이 남긴 기록에 의지해서 그의 지도력이 작동하는 모습을 헤아리건대, 그는 우선 이 모든 악조건과 그의 정치적 불운을 모두 사실로 긍정하고 있다. ‘사실’에 정서를 이입시키지 않고, ‘사실’을 오직 ‘사실’로서 수용하는 태도는 그이 리더십에 한 중요한 본질을 이루는 듯하다.

그가 현실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마음의 바탕은 오로지 ‘바다의 사실’에 입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가 잇다. 그는 이 사실에 절망이나 희망 같은 정서적인 요소를 일절 개입시키지 않고 사실을 순결한 사실로서 긍정하고 거기에 입각해서 군대의 진퇴를 결정했다. 임진년 5월에 옥포 싸움과 연이어 벌어진 당포 싸움은 개전 초기의 첫 승전이며 전과도 컸다. 옥포 싸움에서 이순신은 적선 26척을 격파했다. 이때 임금은 이미 서울을 버리고 의주로 가는 피난길에 올라 있었는데, 이순신의 이 첫 승리는 패주하는 조선 관민의 정신적 힘을 버티어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많은 기록들 중 옥포싸움과 당포 싸움의 경과를 보고하는 이순신의 장계는 그 뛰어난 사실성에서 백미를 이룬다. 이 기록에서 이순신은 전투의 과정뿐 아니라 피난민들과 포로들의 참상, 적선의 생김새, 적의 대응 태세, 적의 화포와 장비들의 기능까지도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이순신은 사실을 기록했을 뿐 첨삭을 가하지는 않았다. 그가 받아들이고 긍정했던 ‘사실’들은 압도적으로 열세인 군사력, 물량부족으로 인한 굶주림과 추위, 부하들의 이탈과 명령 불복종, 전쟁을 지원해야 할 행정 관료들의 부패와 무능, 당쟁의 틈바구니에서 짓밟혀야 하는 자신의 정치적 불운과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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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역경이었다. 그리고 그의 지도자 된 자질은 이 절망적인 역경을 희망으로 전환시키는 데 있었다. 전 생애를 통해서 그의 리더십에 가장 강력하고 아름다운 대목은 이 전환의 국면 속에서 작동되었다. 후인이 전황의 내면을 말하는 일은 두렵다.

이순신의 정치적 불운은 수군에 부임하기 이전, 육군 초급 지휘관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나이 마흔다섯 살이던 1590년부터 1591년 사이에 이순신에 대한 인사발령은 극심한 파행을 보인다.

- 고사리진 병마첨절제사에 임명되었으나 사간원의 반대로 무산

- 만포진 수군첨절제사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못한 채 발령 취소

- 진도군수 발령후에도 부임하지 못했고 가리포에도 부임하지 못함

* 이순신의 부임을 반대한 사간원의 끝없는 반대와 파행은 조정대신들의 권 력 투쟁의 산물이었다.

이순신은 정유년 1597년 2월에 한산 통제영에서 체포되었다. 이순신에 대한 혐의는 군공을 날조해서 임금을 기만하고 조정을 능멸했으며 바다에서 가토의 부대를 요격해서 적장의 머리를 바치라는 기동출격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이 혐의는 살아남기 불가능한 죄목이었다.

이순신은 고문을 받았다. 이순신의 몸에 가해진 고문의 내용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난중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출옥 직후 부축하는 사람 없이 걷거나 말을 타고 남해안까지 내려갔다. 이것이 그의 백의종군의 시작이다. 그는 출옥 후 가끔씩 술도 마셨다. 이 일기의 기록으로 보아 이순신에 대한 고문이 그의 몸을 아주 망가뜨려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출옥 후 일기에 오한, 식은 땀, 두통, 소화불량 등 병고에 시달리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보아 고문이 그의 건강을 크게 훼손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일기는 자신에게 가해진 고문과 관직 삭탈, 정치적 음모와 박해 등에 관해서는 일언번구도 기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사후에 여러 사람들이 남긴 글 속에서도 이순신은 자신이 겪은 고통과 치욕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백의종군의 길에 나서기까지도 오직 침묵으로 일관했다.

이순신은 그해 7월에 복권 되어 삼도 수군통제사에 임명되었다. 그 직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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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의 부대가 칠천량 싸움에서 참패했고 이 싸움에서 조선 수군 무력의 거의 전부가 궤멸되었다. 남은 것은 전선 12척과 사기가 꺾여 흩어진 패잔병들뿐이었다. 삼도수군통제사 임명을 받고 임금에게 올린 장계에서 이순신은 말했다.

“신에게는 아직도 12척이 남아 있고, 또 신의 몸이 살아 있는 한 적이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을 고문하고 삭탈관직한 임금을 향해 자신의 정치적 원한을 감춘 채 새로운 싸움의 시작을 알린다. 그가 “신의 몸이 살아 있는 한”이라고 말했을 때 그 한마디는 그 자신의 생명의 내부에 들끓는 전환의 힘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전환의 리더십은 곧이어 닥친 명량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이 승리는 세계 해전 사상 일대 장관이었다.

명량에서 그는 12척의 배를 몰고 나가 적선 350여 척을 부수었다. 적들은 궤멸되었고 살아남은 자들은 도주했다. 이 패전으로 일본 수군은 서해우회전략을 전면 포기했고 전쟁의 국면은 바뀌었다.

이순신은 이 두려움을 죽음에 대한 명백한 인식으로 돌파한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지휘 스타일은 수많은 전투에서 일관되게 작동하고 있다.

최초의 해전인 옥포전투에서도 여러 부하들은 그 해역이 전라도 수군의 관할 구역이 아니고 경상도 수군의 구역이라는 이유로 출전을 머뭇거렸다. 이순신은 여러 부하들의 의견을 오랫동안 듣고 있다가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나라가 위태로운데 어찌 제 구역이만 앉아 있을 것이냐 내가 너희들에게 물어본 까닭은 너희들의 속내를 알아보려고 시험해본 것뿐이다. 우리는 나가서 싸우고 싸우다가 죽는 수밖에 길이 없다. 감히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군율로 목을 베리라. 이분 <행록>중에서

죽음의 현실을 직시하는 바탕 위에서 역설적이게도 삶의 전망을 열어나가는 그의 모습은 부하를 지휘하는 전투 현장에서나 그가 남긴 언행 속에서 자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러한 리더십은 물적인 열세 속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적과 싸우기 위한 단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이다. 그는 늘 사지의 한복판에 처한 자신의 위치를 직시한다. 이러한 현실 인식과 거기에 바탕한 리더십은 “죽으려 하면 반드시 살고, 살려하면 반드시 죽는다.”(명량해전 출동 하루 전날인 1597년 9월 15일 밤에 부하들에게 한 말)라는 말로 선명히 요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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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의 적도 두렵게 할 수가 있다. 이는 모두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은 절대로 살 생각을 하지 말라.

그는 부하들에게 당당히 죽음을 요구하면서 삶의 길은 그 죽음에 대한 인식 속에 있다는 역설을 각인시키고 여기서부터 전투의 동력을 이끌어 낸다. 그가 치러낸 수많은 해전의 승리는 이 전환의 리더십이 가져온 승리였고 명량 싸움은 그 절정이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부하들을 군법으로 처단한 사례들이 잇달아 등장한다. 그 대목은 그가 부하들을 어떻게 다루었나를 보여줌으로써 그의 리더십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도움이 되고 있다. 부하들의 죄를 법으로 처단할 때 그는 신속했고 단호했으며 자기 확신에 가득 찬 태도를 보인다. 그의 리더로서의 법 집행은 자비나 무자비 같은 인간적 정리에 이끌리지 않고 법을 그야말로 객관적 실체로 작동시키는 태도를 보인다. 사법에서 이순신의 리더십은 참여형이라기보다는 독단형에 가깝다. 그는 부하의 범죄 사실에 대해서 법의 실체를 가차 없이 적용했다.

이순신의 지도자 된 덕성은 많은 다양성을 내포한다. 그는 신중한가 하면 과감했고, 자비와 무자비를 일체 떠난 엄중한 냉철함으로 부하들을 대했으며, 어머니와 아들의 죽음에 통곡했지만 부인의 일은 일기에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복합적인 리더십의 중층 구조 속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은 죽음에서 삶으로 전환하는 방향으로 헐벗은 부대를 이끌어 나가고, 또 실제로 이같은 원칙으로 전투를 수행해낸 능력에 있을 것이다. 이 점은 그가 끝끝내 탈 정치적이었고, 자신의 공적에 대해서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았던 보상없는 생애의 모습과 연관이 있다 할 것이다.

탈정치성은 그의 생애에 가장 큰 힘이었고 참혹한 비극이었다. 그는 부패하고 무능한 지방관리들의 이름과 죄상을 낱낱이 적어서 임금에게 고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고, 그러한 고발 행위가 거꾸로 자기 자신에게 미칠 정치적 불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가 투옥되고 고문당하고 백의종군하게 되는 비극도 이 탈정치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쟁이 끝나던 날 죽었다. 그래서 정치는 백의종군 이후에 그의 생애에 더 이상 손을 댈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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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ove is touch,

Love is real.

젊었을 때 나는 동물원에 자주 갔다. 동물들하고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나는 동물들을 좋아했다. 말을 건네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고 나는 생각했는데, 동물 쪽에서 나를 본다면 내 생각은 틀렸기가 십상일 터였다. 그러므로 동물을 향한 나의 갈증은 순전히 짝사랑이고, 동물들에게는 이해받지 못할 나 자신만의 몽상이라 해도 할 수 없다.

호랑이, 사자, 곰, 코끼리, 말 같은 덩치 크고 인상이 강한 동물들의 움직임을 나는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동물들의 동작은 거듭 들여다보아도 늘 처음 보는 것 같았는데, 아마도 해독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책 속에는 없는, 직접적인 놀라움이었다. 이 동물들은 그 어미 아비가 사람에게 붙잡혔기 때문에 동물원 철망 안에서 태어나 한 번도 사막, 초원, 산악을 달려보지 못하고 사람이 주는 먹이를 받아먹다가 철망 안에서 죽어야 할 신세지만, 이것들의 움직임에는 여전히 야생하는 생명의 힘과 표정이 살아 있다. 덩치 큰 동물들이 저쪽으로 돌아서서 걸어갈 때, 이 야생의 표정은 절망으로 보이기도 한다.

나는 그 동물들의 움직임을 들여다보면서 뚜렷하게 빛나는 몸(MOM)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언어나 개념으로 범접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물들은 문명이나 제도, 언어나 관습의 보호를 받지 않고, 앞선 세대로부터 아무런 기록이나 유산을 물려받지 않는다. 동물들은 오직 지 몸뚱이 하나로 제 몸뚱이를 먹여 살리거나 강자의 먹이로 내어주면서 번식과 죽음과 기아와 멸종의 수백만 년을 건너간다. 생명의 전개는 고통이나 기쁨 영광이나 치욕 같은 인간의 언어를 넘어 서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장엄하고, 그들의 생명은 삶과 죽음을 동시에 감당하는 개별적 실존으로서 존엄해 보였다. 그리고 그 종족과 개체들의 몸은 언제나 완벽한 사실성으로 긴장되어 있었고, 그것들의 몸동작에서는 자족(自足)한 생명의 리듬이 흘러 나왔다.

호랑이나 사자가 천천히 걸어갈 때, 앞다리는 안쪽으로 약간 굽어 있고, 어깨와 등판의 근육 전체가 물결치듯 흔들린다. 네 다리가 교차하면서 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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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운동 질서는,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고 달리는 인간의 팔다리 질서와 똑같다.

낙타의 발바닥은 두껍고 넓다. 낙타는 그 발바닥으로 조심스럽게 땅을 디딘다. 낙타는 지그시 땅바닥을 밟는다. 낙타의 종족은 사막의 모래바람 속에서 수만 년 동안 산전수전을 겪는 동안 견딤과 참음의 형질이 유전되어서 갓 태어난 낙타 새끼조차도 늙음의 표정을 지니고 있다. 호랑이나 사자, 원숭이의 어린 새끼들은 저네들끼리 장난치고 까불고 뒹구는데, 낙타의 새끼들은 별로 부산을 떨지 않는다.

말은 어쩌다가 한 번 부르짖을 때를 제외하면, 언제나 침묵에 잠겨 있다. 말의 침묵은 완강하고 불가침하다. 제주도 초원의 말들은 수십 마리가 모여 있어도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다. 모여 있어도 말은 따로따로다. 말들은 적막 속에서 저녁을 맞는다. 말들은 고개를 숙이고 고요히 어둠속으로 지워져 간다. 말들은 가끔씩 서로 마주보며 목을 비빈다. 암수끼리 비비기도 하고 때로는 동성끼리도 비빈다. 동물학자들은 이 행위를 애정표시라고 하는데 학자가 아닌 나도 금방 알 수 있다. 목을 비빌 때 말들은 고요하고, 눈동자는 맑고 깊다.

원숭이는 사람처럼 앞발로 상대를 안고 쓰다듬는다. 몸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동작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다를 바가 없는데, 앞발을 애정 표현의 중요한 도구로 쓰는 걸로 봐서 인간과 원숭이는 분류계통상 친연관계가 확실해 보인다.

인간의 존엄은 인간 스스로에 의해 더럽혀진다. 몸에는 자연과 생명의 경계선이 없다. 모든 몸은 빛나는 몸이다. 모든 몸은 ‘real' 하다

나는 존 레넌의 노래 <러브>를 좋아한다.

Love is touch, touch is love. 이 두 문장이 하나의 짝을 이루면서 love는 real이 된다. touch가 없는 사랑은 real이 없으므로 사랑이 아니라 관념이다. 사랑은 몽상이아니라 현실이며, 사랑은 사랑의 공백을 용납하지 않는다.

Love is real이라는 명제 속에서 영혼과 육신은 본래 하나다.

그리움이나 기다림도 love가 아니라 할 수는 없지만, 부재와 상실은 re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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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미달한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하고 당신을 기다린다고 할 때. 나는 당신의 살아 있는 몸, 당신의 목소리, 당신의 얼굴, 당신의 팔다리가 내 눈앞에 나타나서 당신이 나의 real이 되기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내가 당신을 그리워한다고 말할 때 나는 당신의 real을 그리워 한다는 뜻이다. 그립다는 말은 그리움을 끝내고 싶다는 말이다. 당신이 나의 real 일 때 나는 당신의 real이다.

존 레넌의 노래를 들을 때 나는 억압 없고 갈증 없는 몸을 생각한다.

로댕의<키스>는 몸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의 몸과 영혼을 보여준다. 영혼은 몸에 구현되어 있고, 키스하는 남녀의 몸의 굴곡은 산하(山河)처럼 출렁거린다. 로댕의 ‘키스’를 사진으로 보면서 나는 고대 중국의 천지개벽 신화에 등장하는 거인 반고(盤古)의 죽음을 생각했다. 반고는 혼돈을 도끼로 찍어서 두 조각 냈다. 하늘과 땅, 빛과 어둠이 분리되어서 이 세계는 사람이 살 수 있는 산하가 되었다. 반고가 죽어서 땅에 쓰러졌는데, 쓰러진 육체 굴곡을 따라서 산맥과 들이 펼쳐졌고, 이 거인의 핏줄이 강이 되고 눈물이 바다가 되었다. 세계는 인간의 육체를 따라서 전개되었다.

로댕의 ‘키스’를 보면서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몸위에 펼쳐지는 세계의 환영을 본다.

■ 이승복과 리현수

12월 9일은 반공소년 이승복(1959~1968)의 기일이다. 그 아이가 살았으면 환갑이다. 나는 지난 수년 동안 폐교가 되었거나, 운영중인 초등학교를 찾아다니며 이 가엾은 소년의 시멘트 조형물을 들여다보았다. 여행길에 들렀고, 일삼아 찾아나서기도 했다. 그 소년의 형상은 이념의 이름으로 인간을 학살하는 야만적 폭력의 희생자로, 국시(國是)로 자리 잡은 반공의 표상으로 그리고 생활과 교육의 지표로 반세기 동안 전국 초등학교 운동장에 세워져 있었고, 무서워서 외면하려는 내 마음을 기어이 끌어 당겼다. 이 시멘트 조형물을 찾아가는 내 발길은 서남해역의 여러 섬들과 내륙 산간마을과 대도시 주변의 폐교장에까지 이어졌다.

1970년대 이후 초등학교들은 본관 건물의 현관을 중심으로 그 좌우에 반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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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이승복과 효자 정재수(1964~1974)의 시멘트 조형물을 세워서 충(忠) 효(孝)의 두 기둥으로 삼았고, 그 옆에 서양 여자 아이의 모습을 닮은 독서하는 소녀상을 앉혔다. 학교에 따라서는 충무공이나 세종,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시멘트 조형물로 세워놓기도 했는데 내가 본 바로는 반공소년 이승복과 효자 정재수가 가장 많았다. 이 구도가 지금 60살에 가까운 한국인들의 기억에 남아 있는 유년의 학교이다. 이 조형물들은 초등학교에 아직도 남아 있다.

* 정재수

- 죽을 때 10세, 상주시 화서면 소곡리.

- 1974. 1. 22 이 마을에 33Cm의 눈이 쌓이고, 기온은 영하 20도

- 아버지 정태희와 함께 집에서 12Km 떨어진 큰집으로 설을 쇠러가다가 마루목 고개에서 아버지와 함께 동사. 부자의 주검은 이튿날 아침에 발견되었고 아이의 외투가 아버지의 몸에 덮혀 있었고, 아들은 아버지를 꼭 끌어안고 있었다. 이날 아버지 정태희는 만취상태였다.

- 정재수의 죽음이 매스컴으로 알려지자 죽음의 장소에 기념비가 세워짐

- 이 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고 영화로 만들어 짐

- 이 초등학교는 1993년 3월 폐고 되고 지금은 그 자리에 효자 정재수 기념관이 들어서 있음 .

* 그 후로 이승복의 죽음은 충, 정재수의 죽음은 ‘효’의 아이콘으로…

사진작가이기도 한 초등학교 교사 서영주씨가 2008년에 찍은 사진에 따르면 전북 남원의 두동초등학교 폐교장은 한 진보 정당의 연수원으로 쓰였는데, 그 운동장에 남아 있는 이승복 형상은 전태일 세 글자로 바뀌어 있었다. 폐교장이 팔린 경우에는 이승복의 형상은 폐기되거나 구석으로 치워져 있었다.

1968년 12월 9일에 이승복과 그의 어머니, 7살, 4살 난 두 동생이 무장공비에 의해 살해된 경위는 한국인 이 다들 알고 있다. 울진 삼척 해안으로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이승복 마을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세 가족을 몰살했다. 80살 노인과 젖먹이까지 죽였다. 칼로 찌르고 돌로 찍어서 웅덩이에 끌어다 버렸다. 이승복의 아버지 이승우는 (당시 37세) 이웃집에 갔다가 죽음은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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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했지만 그날의 충격으로 40여 년을 정신질환에 시달리다가 2014년 작고했다.

이승복이 살해당하기 직전에 무장공비를 향해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소리치며 저항했다는 현장 발 기사가 한 일간지에 특종 기사로 보도되었고, 이승복의 항거는 1969년 국정교과서 <바른생활>에 실렸다.

1998년부터 이승복이 절명하기 직전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는 말을 한 것을 부정하는 사람들과, 특종 보도한 언론사 사이에 소송이 벌어져 8년을 끌었다. 법원의 결론은 그 보도가 사실에 근거했다고 판결했다.

* 리현수

- 1950년 가을, 국군과 미군이 38선을 돌파해 북진할 때 황해도 평안도 지역에서 주민들이 많이 희생됨. 특히 황해도 신천읍에서 미군의 공격을 받은 북한군과 주민들의 희생이 많았음, 이때 소년 리현수 군이 반미 저항의 상징으로 받들어지고 있음.

- 그의 모교는 ‘리현수 중학교’로 이름을 바꿈, 북녘판 이승복이다.

■ 아, 100원

네거리에 붉은 신호등이 켜지면, 배달오토바이들은 신호대기 하는 자동차들을 헤집고 정지선 맨 앞에 나와 일렬로 도열한다. 오토바이들은 밥을 배달해주고 밥을 벌어먹는다. 오토바이들은 대도시의 밀림에서 생존의 사투를 벌이며 먹이사슬의 밑바닥을 질주한다. 이 풍경이 도시의 일상이 된지 오래여서 생활은 본래 이러하고, 앞으로도 이러할 것이라는 느낌 이외에는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한다.

배달산업의 시장 규모는 해마다 커져서 이제는 3조 원을 넘었다고 한다. 한국인은 배달의 민족이다. 햄버거, 떡볶이, 피자, 중국음식 뿐 아니라 커피 한잔, 생수한 통, 담배 한 갑까지도 배달망으로 얽혀 있다. 오토바이 라이더들에게 들어보니까, 가장 고난도 기술이 필요한 배달은 중국음식이라고 한다.

음식 배달은 그 지역의 주거환경, 자연환경, 사회경제적 조건들, 날씨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도시 외곽의 고지대 원룸이나 오피스텔이 밀집한 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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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자 1인가구가 많은 지역에서 성업중이다. 축구경기가 있거나 눈비가 오거나 춥거나 더워도 배달 주문은 크게 늘어난다.

배달의 나라 한국의 이 정밀하고 신속한 배달시스템에 외국인들이 다들 놀란다. 남해안에서 갓 잡은 생선이 하루 만에 서울의 가정에까지 배달되고 히말라야 베이스캠프에서도 한국의 생선회를 배달시켜 먹을 수 있다고 한다.

라이더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백인들은 봉사료(팁)를 주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어서 햄버거나 피자를 가져다주면 잔돈을 돌려주는 경우가 많은데, 한국인들은 눈 오는 날 아파트 고층까지 피자 한 개를 가져다주어도 봉사료를 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한다. 룸살롱에서 팁을 듬뿍 주는 사내들은 짜장면 배달 라이더들에게는 봉사료를 주고 있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날씨가 양극화되어서 2018년 여름에는 기온이 40도 가까이 오르더니 11월 말부터는 영하 7~8도 까지 내려갔다 이 양극화 현상은 더욱 심해진다는 장기 전망이 나와 있다. 미세먼지, 초미세먼지, 황사까지 사나흘 돌이로 몰려와서 나는 자전거 타기를 그만 두었다. 날씨가 정서의 매개물이고 심미의 대상이었던 시절은 다 끝난 모양이다. 지난 여름의 더위와 이번 겨울 추위는 불평등이 구조적으로 고착된 사회에서 국가가 더위와 추위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에 관해서 심각한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더위와 추위는 불평등 사회의 최하층부를 강타했고, 쪽방, 옥탑방과 노동현장에서 사람들은 그저 하늘의 자비를 빌면서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2018년 11월 말, 생명안전시민넷(나는 이 시민단체의 공동대표) 후원의 밤 행사에 갔다가 거기서 라이더유니온 결성을 준비하고 있는 박정훈씨를 만났다. 그는 서른네 살의 청년이었다. 그는 알바노조의 위원장으로 일했고, 2년째 맥도날드에서 라이더 일을 하고 있다. 그의 월수입은 150만 원 정도이고 그의 꿈은 베란다가 있는 임대 아파트에서 사는 것이다. 박정훈씨는 더위가 한창 찌던 지난여름 ‘폭염수당 100원’을 요구하는 1인 시위를 벌였다. 그의 시위는 잠깐 언론의 주목을 받기는 했으나 그의 요구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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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훈씨로부터 직고용 라이더와 배달대행 라이더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다. 나로서는 귀한 세상공부를 했다. 직고용은 프랜차이즈 회사의 계약직으로 고용된 근로기준법상의 노동자다. 시간당 최저임금을 받고 배달 1건당 400원을 다 받는다. (회사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눈비가 오면 100원을 추가한다. 폭염에는 100원의 추가 수당이 없다. 헬멧, 보호대 등 최소한의 안전 장구를 회사가 지급하지만 겨울철 방한 용품이나 황사마스크는 지급하지 않는다. 식대를 주지 않거나 햄버거나 피자를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배달대행 라이더들은 고용 계약이 없는 개인 사업자들이다. 고정급 시간급은 없고 1건당 3000원 정도를 받는다. 이 라이더들은 회사로부터 아무것도 지급받지 못한다. 기름값, 수리비, 사고처리비, 안전장구 값을 모두 개인이 부담해야 한다. 노동자이면서 경영자인 셈이다. 배달대행 라이더들은 주 5~6일, 하루 10시간 이상을 뛰어야 한 달에 250만~300만 원 정도를 벌 수있다. 이러니 과속, 역주행, 신호위반, 횡단보도 주행, 끼어들기를 거듭해 가면서 도심의 거리를 헤집고 다닌다.

눈비가 오면 건당 100원을 더 준다는데, 100원을 더 주면 위험한 일을 시켜도 되는 것인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배달의 나라 한국에서 배달은 일상으로 자리잡았지만 국회나 행정부에서 라이더와 배달업의 문제를 깊이 들여다보고 도와준 적은 없다고 박정훈씨는 말했다.

그의 어조는 거칠지만, 그가 말하려하는 바는 거칠지 않다. 도시의 네거리 신호 대기선에서 오토바이들은 홀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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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우개는 나의 망설임이다

■ 떡볶이를 먹으며

나의 소년 시절에 떡볶이는 귀한 음식이었다. 어머니는 설에만 떡볶이를 해 주셨다. 설에 가래떡과 쇠고기로 떡국을 끓여서 차례를 지내고, 남은 재료로 떡볶이를 만들었다. 고기가 귀해서 녹두전을 부칠 때는 돼지비계 한 점을 녹두전 한가운데 보석처럼 박았고, 나의 형제들은 그걸 서로 파먹겠다고 머리

를 부딪치며 덤벼들었다. 떡볶이를 만들 때 어머니는 고기를 늘쿼서 여러 아이들에게 골고루 먹이느라고 가루가 되도록 다졌다.

어머니는 서울 토박이, 깍쟁이 여자였고 서울 사대문안 청계천 북쪽 고향을 자랑으로 여겼다. 어머니는 간장 베이스 떡볶이가 순 서울식이며 대궐에서 임금님이 드시던 음식이라고 늘 자식들에게 자랑했다. 내가 임금님은 맨날 이런 것만 드시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설에서 정월 대보름 사이에, 때때로 떡볶이를 간식으로 먹었다. 끼니와 끼니 사이에 먹는 간식은 행복했다.

책을 들여다보았더니, 간장베이스 떡볶이가 궁중요리라는 어머니의 자랑은 맞는 말이었다. 궁중 떡볶이는 양지머리 고기, 등심, 완자,석이버섯, 표교버섯, 잣, 은행, 대추, 미나리적을 넣어서 볶아 내는데, 이 모든 재료를 간장이 다스린다. 다 익으면 삼색 고명을 얹어서 수놓듯이 꾸민다.

내 가난한 어머니는 이 호화찬란한 재료를 구할 길이 없었지만, 간장 베이스로 맛의 토대를 삼고 극소량의 고기가루를 넣었다는 점에서, 내 어머니의 떡볶이는 경복궁 떡볶이, 창덕궁 떡볶이, 덕수궁 떡볶이, 운현궁 떡볶이의 정통성에 희미하게나마 맥이 닿아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노동으로 밥벌이를 하면서 늘 시간에 쫓겨서 먹고 싶은 것을 찾아 먹기보다는 가까운 식당에 가서 먹었다. 떡볶이는 거의 먹지 않았다.

2018년 연말에 나의 일을 도와주는 후배가 먹자고 해서 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떡볶이를 먹었다. 한 그릇에 5천 원짜리였는데, 간장 베이스가 아니라 고추장 베이스였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되는 고추장에 대파, 기름과 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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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미료를 넣어서 끓여낸 음식이었다. 건더기로는 가래떡뿐 아니라 넓적한 어묵도 들어 있었다.

3년 전 서울 노량진 고시촌에 가봤더니, 가래떡과 오뎅을 넣은 떡볶이를 팔고 있었는데, 그 메뉴의 이름은 ‘떡오(가래떡+오뎅)’였다. 떡오의 값은 식당마다 차이가 있었는데 대체로 3~4천 원 정도였다.

음식을 먹으면 그 재료는 똥이 되어 몸을 빠져나가지만 맛은 사라지지 않고 마음의 지층 맨 밑바닥에 숨어 있다가 불현듯 솟아오른다. 지나간 맛을

지나갔다고 해서 부재(不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지나간 맛이 살아나서, 먹고 싶은 미래의 맛을 감질나게 하고, 지금 이 순간의 맛이 지나간 맛을 일깨워서 나는 지나간 맛과 이 순간의 맛과 다가오는 맛을 구분하지 못한다. 지나간 맛은 결핍이고 지금 이 순간의 맛은 충만이다.

전주비빔밥, 나주곰탕, 충무김밥 들은 동네 이름을 브랜드로 삼아서 오히려 광역화되었지만 떡볶이는 동네 명칭 없이, 본적지 없는 음식으로 전국에 퍼져서 ‘국민 간식’의 지위에 올랐다. 뉴욕이나 파리에도 한국 사람들의 떡볶이가게가 성업중이라고, 먹고 온 사람들한테서 들었다.

경기도 파주의 대형 유통센터 안에 있는 떡볶이 식당에 갔더니 뷔페식이었다. 손님들은 재료와 양념을 입맛대로 가져다가 테이블 위에서 조리해 먹는다. 손님은 주로 젊은 남녀들이었다.

젊은이들이 떡볶이를 간식이라기보다는 점심의 끼니로 먹고 있었는데, 떡볶이에는 끼니의 무게가 빠져 나가서 끼니는 경쾌하다. 젊으나 늙으나, 다들 밥벌이는 힘든 것일테지만 떡볶이를 먹는 낮시간의 밥벌이는 좀 덜 힘들어보였다. 한국의 떡볶이는 군것질을 끼니쪽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끼니를 가볍게 하고 군것질을 무겁게 해서 먹고 사는 일의 긴장을 헐겁게 해준다.

고추장 베이스 떡볶이는 궁중떡볶이를 누항으로 끌어내려 전 국민의 음식, 청소년의 음식으로 정착시켰다. 간장에서 고추장으로의 전환은 삶을 받아들여서 변화시키는 대중의 힘을 보여준다. 그 변화의 방향은 낮게, 넓게, 그리고 맞게, 새롭게이다.

나는 가래떡에 아무런 양념을 하지 않은 채 오븐에 구워서 먹는다. 겉은 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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릇노릇하게 익어서 바삭하고 속은 포근하다. 떡볶이가 아니라 떡구이다. 떡구이는 간장 베이스도 아니고 고추장 베이스도 아니다. 나의 떡구이는 제로 베이스다. 제로 베이스 속에도 어머니의 간장 떡볶이는 어른거린다.

■ 귀향

지난 여름은 징글맞게도 더웠다. 어느 날 갑자기 밤이 가고 아침이 오더니 찬바람이 도적처럼 들이닥쳐서 또 추석이다. TV 속의 미남미녀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사람들은 고향으로 가고 또 간다. TV 속의 추석은 언제나 농가 마당에서 빨간 고추가 익어가고 노인들이 송편을 빚으면서 도시에서 오는 자식들을 기다린다.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아, 당신들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이며 실개천 옛이야기 지줄대는 곳인가. 지방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추석에는 고향에 갈 터인데 TV는 서울 사는 사람들이 고향에 가는 모습만을 거듭 보여준다. TV를 보면 전국은 서울과 비서울로 나뉘는데, 서울은 타향이고 비서울은 고향이다. 내 고향 서울은 만인의 타향이고, 당신들이 사는 자리가 당신들의 타향이라면 사람의 고향은 대체 어디인가?

나는 사대문 안 토박이인데, 20년 전부터 경기도 고양시에 살고 있다. 추석에 나는 내 고향 서울 사대문 안으로 귀향한다. 나의 귀향은 초라하고 적막해서 남에게 이야기할 만한 것이 못된다. 거기에는 뒷동산도 실개천도 없고 송편도 없고 기다리는 사람도 없다.

추석에 내고향 서울은 문득 고요하다. 상점들이 문을 닫고 행인이 끊긴 빈 골목에서 길고양이들이 길바닥에 누워 기지개를 켜면서 하품도 한다.

경복궁, 인왕산, 북악산, 북한산, 삼청동 숲과 한양도성 언저리는 내 고향의 중요한 놀이터였다. 경복궁은 담장이 허술해서 아무데로나 드나들었다. 경복궁 마당에서 나는 또래들과 닭싸움, 말타기, 자치기, 깡통치기를 하며 놀았다. 경무대를 지키는 순경들이 카빈총을 메고 북악산 올라가는 길을 지키고 있었지만, 아이들은 길이 없는 비탈을 따라 그 꼭대기까지 올라가 고함을 질러대서 순경들을 겁주었다.

순경들이 기겁을 하면서 호루라기를 불면서 쫓아왔지만 다람쥐 같은 아이들을 잡을 수는 없었다. 그때 경복궁은 일제 때 헐리고 전쟁 때 그을린 모습 그대로의 폐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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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1592년 4월 30일 새벽,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떠난 직후에 전소되었다. 창덕궁, 창경궁, 종묘도 이때 불타서 무너졌다.(임진왜란) 이 화재는 서울 장안의 ‘간악한 백성들’이 저지른 방화라고 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임금이 버리고 떠난 대궐을 백성들이 몰려가 불지르는 이 방화사건을 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울 때 나는 발밑이 꺼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경복궁은 왼쪽에 종묘, 오른쪽에 사직단을 거느리고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사대문에 배치하면서 도성을 남면한다. 이 구도 속에서 경복궁은 왕조의 관념적 상징이며 현실이 중심이다. 이 핵심부가 적군이 들이닥치기 이전에 성난 백성들의 방화로 잿더미가 되어 되어버린 사태는 국가권력의 정당성과 그 존재 이유에 대해서 무섭고도 근원적인 질문을 제기하고 있었지만 압록강까지 도망갔다가 돌아온 임금과 권귀(權貴)들은 이 잿더미로부터 아무런 영감도 받지 못했다.

경복궁의 폐허는 그후 대원군에 의해 중창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도성의 한복판에 방치되어 있었다. 핵심부가 폐허인 도시가 내 고향의 모습이었고, 여기가 내 유년의 놀이터였다.

영조는 경복궁의 폐허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영조는 여기서 과거를 베풀었고, 친히 모내기를 했고, 왕비를 보내서 누에를 치게 했다. 영조 48년은 1772년으로 임진왜란 이후 세 번째 맞는 임진년이었다. 이해를 기념해서 영조는 경복궁 폐허로 거동해서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을 기리는 명배례를 올렸다. 청(淸)에 사대의 조공을 보내면서 130년 전에 망한 옛 종주국 황제의 혼백을 향해 절을 하는 임금의 내면은 분열적이다. 임금은 청과 명 양쪽을 모두 기웃거렸지만, 제 발밑의 폐허의 의미를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1948년 8월 15일 이승만은 이 자리에 축 처진 현수막을 내걸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취임했고 나는 그해에 이 동네에서 태어났다.

나는 지금 1592년 경복궁 방화, 2008년의 남대문 방화, 2009년 용산참사에서 불을 낸 사람들을 편들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법원이 판결에 시비를 걸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내 고향의 슬픔과 고통을 말하려 한다. 용산참사의 재판과정을 보면서 나는 내 유년시절, 성 밑 마을 판자촌 철거 현장에서 울부짖던 사람들을 생각했다. 불타는 숭례문을 TV에서 보면서 나는 1592년 불길 속에서 갈팡질팡하던 서울 장안 사람들을 생각했다. 나의 이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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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작용은 비논리적이기는 하지만, 이 모든 사태는 국가와 개인, 지배와 피지배, 소유와 박탈, 추방과 저항의 적대관계 속에서 폭발한 참극이었다. 그리고 이 참극의 원형과 뿌리는 모두 내 고향의 한복판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고향에 돌아와서 나는 이 참극의 뿌리들이 발전적으로 해소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그리고 고향으로 가는 당신들에게 묻고 있다.

정지용은 고향을 노래하면서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향수 1927)라

고 노래했고, 몇 년 후에는 “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고향 1932)라고 노래했다.

추석에 내 고향의 뒷골목을 어슬렁거리면, 그 시 두 편이 동시에 떠오른다.

지금 경복궁은 말끔히 단장되어서 동화 속 나라처럼 아기자기하다. 한복을 입은 고운 소녀들이 깔깔대며 사진을 찍고 젊은이들이 여기저기서 키스를 하고 있다.

2019. 5.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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