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024. 3. 21. 15:14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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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철학 수업 -

■ 강용수 지음

0 고려대 철학연구소 연구원

0 고려대 학부와 대학원에서 서양철학 전공으로 석사,

독일 잘츠부르크대학 박사

0 2002년 박사 논문이 세계적으로 저명한 니체 스튜디엔에서 “거대한 과제”라 는 평을 받으며 동양인의 책으로 유일하게 소개됨

0 2014년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으로 기존의 염세적으로 해석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에서 탈피

0 2015년 쇼펜하우어의 철학 상담과 니체의 철학 상담을

<실존주의 철학과 철학 상담>으로 소개

0 2019 <니체의 정의론 연구>로 대한 철학회 최우수 논문상 수상

0 저서 : 니체 작품의 재구성. 니체의 <도덕의 계보> 읽기.

쇼펜하우어가 들려주는 의지 이야기 등

◎ 시작하며

상대적인 삶이 아니라 절대적인 삶을 위하여

- “삶의 지혜는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기술이다.” 쇼펜하우어 -

■ 쇼펜하우어는 누구인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는 1810년 괴팅겐대학교에서 한 학기 동안 의학을 공부하다가 방향을 바꿔 칸트와 플라톤 철학을 공부했다. 쇼펜하우어 철학은 칸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 서양철학뿐만 아니라 동양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됐다.

1822년, 쇼펜하우어는 30대에 독일 베를린대학교에서 강의를 할 기회를 얻는다. 강사 임용을 받은 그는 일부러 당당하게 당대의 최고 철학자인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은 시간에 강의를 개설했다. 하지만 그는 빈 강의실에서 강의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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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하는 참담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1839년 그는 현상 논문 <인간 의지의 자유에 관하여>로 노르웨이 왕립학술원으로부터 수상했다. 1840년 현상 논문 <도덕의 기초에 관하여>로 덴마크 왕립학술원에 지원했지만 그 당시의 철학자인 헤겔, 피히테 등을 비난했다는 이유로 수상하는 데 실패한다. 이 일을 계기로 쇼펜하우어는 학계를 떠나 철학적 은둔의 삶을 선택했다.

쇼펜하우어의 실력이 서서히 알려지고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40대 중반부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론을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을 재구성하여 행복하게 살기 위한 지혜와 처세술을 정리한 수필집 <소품과 부록>이 그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쇼펜하우어는 45세부터 저서와 함께 명성이 높아졌다. 60대에는 본대학교를 포함해 세계의 여러 대학에서 그의 철학을 주제로 강의가 열릴 만큼 명성을 떨쳤다. 1858년 70세 생일에는 전 세계의 축하 편지를 받았다.

노년의 쇼펜하우어는 이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시적으로 표현했다.

“나는 이제 여정의 목적지에 지쳐 서 있다. 지친 머리는 월계관을 쓰고 있기

도 힘들구나. 그래도 내가 했던 일을 기쁘게 돌아보는 것은 누가 뭐라 하든 흔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만약 쇼펜하우어가 자부심이 떨어져 40대에 포기했다면 이후의 인생도 어떻

게 됐을지 모르고, 당연히 행복도 만끽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게 40대는 위

기를 넘은 때이자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 세계 명사들이 사랑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책은 철학자, 과학자, 심리학자, 문학자, 법조인, 음악가, 정치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철학자 가운데 프리드리히 니체, 쇠렌 키르케고르, 비트겐슈타인, 존 듀이, 윌리엄 제임스, 칼 포퍼 등에 영향을 줬다. 특히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이 철학자가 된 계기가 쇼펜하우어 때문이라고 말했다.

니체는 쇼펜하우어를 “모든 희망을 잃고도 진리를 추구”한 사람으로 높이 평가한다. 또한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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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가르친 것은 지나갔으나 그거 살았던 것은 남으리라. 이 사람을 보라. 그는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았노라.”

과학자 가운데는 진화론의 이론가인 찰스 다윈과 상대성 이론가인 아인슈타인에게 영향을 줬다. 심리학자에서는 카를 융, 에두아르트 하르트만에게 이론적인 토대를 제공했다. 음악가에는 바그너가 있다. 1854년 바그너는 쇼펜하우어의 음악 철학을 찬미하며 <니벨룽겐의 반지>를 그에게 보냈다.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야는 문학계다. 셀 수 없이 많은 문학가가 그의 영향을 받았다. 헤르만 헤세, 프란츠 카프카, 도스토옙스키, 에밀 졸라, 오노레 드 발자크, 마르셀 프루스트, 토마스 만 등이 있다. 가장 유명한 두 사람을 꼽으라면 톨스토이와 노벨상을 받은 앙드레 지드가 있다. 또한 정치가 가운데는 책벌레인 아돌프 히틀러도 빼놓을 수 없다.

■ 왜 쇼펜하우어 철학이 필요한가?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인생의 의미를 끊임없이 고민한 철학자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가장 유명한 말이다.

고통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가짜 행복’을 좇는 고통이다. 많은 사람이 출세, 부, 명예를 손에 잡히는 행복으로 여긴다. 그런데 이런 행복은 무게 중심이 자기 안이 아니라 자기 밖에 있다. 그래서 좇을수록 의심이 들고 점점 공허해지며 더 괴로워질 것이다.

다른 하나는 ‘진짜 행복을 좇는 고통이다. 진짜 행복은 허상과 같아서 찾기가 어렵다.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통찰이 필요하며 계속해서 스스로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거듭나야 한다. 무게 중심을 자기 밖에서 안으로 옮겨야 하며 자신이 무너지고 깨지고 부서지기 때문에 괴로울 것이다. 그런데 진짜 행복을 좇으면 우리는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자신을 긍정하는 마음, 타인에게 비굴하지 않고 기죽지 않는 당당함,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 있는 품격이다.

쇼펜하우어는 현시대 마음의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크게 다섯 가지를 알려준다.

첫째, 삶의 지혜다.

“내 철학은 위로를 주지 않는다는 말을 다시 들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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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위로를 주지 않는다. 대신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준다.

둘째, 행복을 자기 밖이 아니라 자기 안에서 찾는 법이다. 있다가 없어지지 않고, 누가 함부로 빼앗을 수 없고, 자신을 희생하면서 얻지 않아도 되는 소중한 것을 알려준다.

셋째, 자신에게 집중하는 방법이다.

불행한 이유는 대부분 타인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결핍되고 공허해서 타인에게 대신 희망을 거는 것이다.

넷째, 허영심을 버리고 자긍심을 가지는 방법이다.

자긍심은 어떤 장점과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는 확고한 믿음에 근거한다. 우리는 자긍심이라는 보석을 찾아야 한다.

다섯째,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의 의미를 깨닫고 현명하게 사는 방법이다. 지나치게 현재만을 살지 않고, 불안과 걱정에 휩싸여 미래를 살지 않는 태도를 알려 준다.

흔히 쇼펜하우어를 자살을 찬미한 염세주의자라고 하지만, 의외로 쇼펜하우어는 낙천적이고 웃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글에는 유머가 묻어난다. 또한 세상의 현실에 밝은 바람이었다. 교양이 없는 부자가 얼마나 따분함에 시달리는지를 본인이 잘 알았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생은 즐기는 것이다.

실제로 쇼펜하우어는 먹고 마시는 것을 즐거워하고 강아지와 산책을 하며 건강을 챙겼으며 클래식을 즐겨 들었다. 무엇보다 독서와 명상, 철학적 사고를 중요하게 여겼다는 점에서 인생의 즐거움을 제대로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를 면면이 살피면서 염세주의 철학자로 알려진 그가 역설적으로 긍정주의자라는 것을 알게 됐다.

1장 마흔, 왜 인생이 괴로운가

- 쇼펜하우어의 진리 -

◎ 01 삶은 전부 의지에 달려 있다

■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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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살려는 의지를 충분히 갖고 있으나 이 의지가 충분히 만족되지 않기 때문에 산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벨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이발사에게 면도를 시키지 않았다. 화재가 날까 봐 2층 방에서는 잠을 자지 않았으며 목숨을 지키기 위해 탄환을 넣은 권총을 침대 옆에 두고 잤다. 그의 나이 43세가 되던 1831년에는 베를린에 콜레라가 퍼지자 프랑크푸르트로 도망가다시피했다.

 

“모든 인생은 고통이다.”

삶의 욕망 자체가 고통이라는 가르침을 불교에서는 ’일체개고(一切皆苦)‘로 표현한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사가 고통의 연속인 이유를 살아남고자 하는 인간 본성의 욕망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을 “삶에 대한 맹목적인 의지”로 보고, 영원히 살려는 맹목적인 욕망이 충족되지 않아서 인간이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밝혔다. 그래서 이란 욕망을 잘 다스릴 때 주체적으로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봤다.

■ 살고자 하는 의지는 인간의 본능이다

삶에는 동전의 양면처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동시에 있다. 잘 살고자 하는 욕구가 타성과 관성이라는 점에서 불행의 원인이 되지만 삶의 원동력이라는 점에서 행복의 조건이기도 하다.

생명력이라는 게 얼마나 강인한지를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식물에 비유한다.

“마른 씨앗은 3,000년 동안 생명력을 유지하다가 마침내 유리한 환경이 생기면 식물로 성장한다.”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계속 운동하려는 작용의 힘처럼 인간은 태어난 이상 이 세상에서 끝까지 남기를 바란다.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으로 하루하루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이 세계의 본질이 합리성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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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통을 깨달아야 인생을 깨닫는다

쇼펜하우어처럼 행복을 위해 우리도 인생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원인이 무엇인지 성찰하고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지혜를 갖출 필요가 있다.

쇼펜하우어의 인생은 40대 중반이 넘어서야 풀리기 시작했다. 쇼펜하우어에게 마흔은 견디기 힘든 고통을 인내하면서 넘어야 할 인생의 위기이자 전환점이었다. 그가 40대에 포기했다면 명성도, 행복도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마흔 이후 행복한 삶을 누리고 싶다면 경험과 지식을 쌓고, 자기 통찰을 거듭해야 한다. 마흔부터 쾌락의 양을 늘려나가기보다는 고통을 줄여나가는 방법이 더 현명해 보인다. 쇼펜하우어는 40대를 견디고 나서부터 70회 생일이 2년 지난 후 1860년 9월 21일 눈을 감을 때까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사후에나 인정받을 줄 알았던 그의 책이 가치를 인정받고 사회적 명성을 얻은 덕분이다. 마흔의 쇼펜하우어가 앞으로 누릴 행복을 전혀 예감하지 못했듯이 우리도 미래를 속단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쇼펜하우어가 노년에 얻은 것은 명성과 부, 사회적인 인정이 아니라 내면의 깨달음, ‘삶의 지혜’였을 것이다.

◎ 02 인간은 욕망하기 때문에 욕망할 이유를 찾는다

■ 욕망

“인간은 무수한 욕망의 덩어리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이런 욕망이 신체와 분리될 수 없다고 했다. 눈은 보려고 하고, 귀는 들으려고 하고, 입은 먹으려고 한다. 이렇듯 신체는 인간의 욕망에 대응한다. 또한 다양한 욕망은 위계가 있다. 가장 낮은 단계의 욕망이 성욕이라면 가장 높은 단계의 욕망이 사유다. 욕망의 덩어리인 인간이 이 양극단의 욕망을 잘 통제하여 균형을 이루는 것이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 인간은 구체적으로 욕망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라 비이성적인 존재라는 점을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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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했다. 인간의 생각하는 능력은 신체의 일부분인 뇌의 기능에 따른 것이고 인간의 정신이나 이성도 한낱 “욕망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욕망은 아무런 이유 없이 생각과 무관하게 생겨나는 경우가 많다. 욕망의 작용이 지성의 작용보다 먼저 일어나서다. 우리가 배고픔을 느끼는 이유는 맛있는 음식을 봤기 때문이 아니다. 먼저 배고픔을 느끼고 그 상태와 느낌을 충족할 대상을 찾는 것이다. 이렇듯 욕망은 외부 대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과 관계없이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 끊임없이 생겨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쇼펜하우어는 욕망과 지성의 관계에 대해 그 당시 헤겔 같은 관념론자들이 인간의 본성을 이성, 정신, 의식으로 규정한 것을 오류라며 비판했다. 대신 의식의 내면에는 무의식적 의지, 집요한 생명력, 욕구의 의지가 우세하게 작용한다고 주장했다.

비유하자면 ‘절름발이(이성)’를 어깨에 메고 가는 힘센 ‘장님(의지)’처럼 의지는 욕구할 이유를 찾아서 욕구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하기 때문에 욕구할 대상을 찾는다

■ 욕망에는 선악이 없다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욕구를 세 가지로 나눴다.

첫 번째, 자연스럽고 꼭 필요한 욕구.

-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욕구. 충족하기 쉽지만 총족되지 않으면 고통을 야기한다.

두 번째, 자연스럽기는 하지만 꼭 필요하지는 않은 욕구

- 성적 충족의 욕구. 이 욕구는 첫 번째 욕구보다 충족하기가 좀 더 힘들다.

세 번째, 자연스럽지도 않고 꼬 필요하지도 않은 욕구.

- 사치, 호사, 부귀영화에 대한 욕구. 이 욕구는 끝이 없고 충족하기 어렵다.

진화론에 따르면 인간의 욕망은 환경에 따라 바뀌었다. 동시에 인간은 구석기 시대부터 살아남기 위한 정보를 몸에 남겨 두었다. 먹고 마시고 하는 인간의 욕망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우리는 실제로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살고 있다. 직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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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돈을 벌고 친구를 만나고 투자를 하는 이유도 기본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함이다. 이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고통을 느끼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행복과 불행을 결정한다. 우리는 신체의 각 부분에 맞는 욕망이 적절히 충족됐을 때 만족할 수 있다. 죽음을 통해 신체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 우리는 의욕과 결핍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욕망은 신체를 통해 ‘삶에 대한 의지’로 나타난다. 우리는 신체를 통해 ‘삶에의 의지’를 내부적으로 느낀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욕망을 잘 다스려야 행복해진다는 입장이다. 특히 인간의 성욕을 지성으로 잘 제어할 때 맹목적인 삶의 의지에 휘둘리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의지의 외적인 자극에서 자유로워야만 행복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욕망을 자각하지 않으면 고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날 것이다.”

◎ 03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왔다 갔다 하는 시계추

■ 과잉

“삶은 진자처럼 고통과 무료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데, 사실 이 두가지가 삶의 궁극적인 요소다.”

쇼펜하우어는 불행의 두 가지 원인으로 고통과 권태를 꼽는다. 가난한 사람은 돈이 없어서 고통에 시달린다면, 돈이 많은 사람은 넘쳐나는 돈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몰라서 삶에 권태를 느낀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설명했다.

“인간의 행복을 가로막는 두 가지 적수가 고통과 무료함인데, 우리의 인생이란 이 두 가지 사이를 오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외적으로는 궁핍과 결핍이 고통을 낳는 반면 안전과 과잉은 무료함을 낳는다. 따라서 하층 계급 사람들은 궁핍의 고통과 끊임없이 싸우는 반면 부유하고 고상한 세계의 사람들은 무료함을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

행복과 불행은 객관적인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변덕스러운 감정에 달려 있다. 없으면 없다고 불평불만하고 많으면 많다고 지겨워하는 것이 인간의 심리다. 결핍은 고통이고 과잉은 무료함이다. 인간에게는 배고픔도 고통이지만 포만감 또한 불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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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망의 최대 만족과 최대 결핍

<행복에 겨워 비틀거리다>의 저자인 하버드대학교 심리학과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2,250명을 대상으로 언제 가장 행복한지 뇌의 상태를 촬영하여 발표했다. 그 결과 뇌가 집중할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 반면 휴식할 때 불행하게 느낀다고 발표했다.

길버트 팀의 발표 결과, 열심히 일에 집중할 때, 운동할 때, 마음에 맞는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때 높은 수치의 행복 호르몬이 나왔다. 반면 휴식을 취하거나 부정적인 생각, 불쾌한 경험을 기억할 때 스트레스 지수가 높아졌다.

욕망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의 인간이 불행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의욕이 너무 쉽게 충족되어 욕망의 대상이 제거되면 인간은 무서우리만큼 공허와 무료감에 빠진다. 고통과 권태라는 양자택일 앞에 놓여있는 인간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욕망의 최대 만족은 권태이고 욕망의 최대 결핍은 고통이다. 그런데 인간의 감정은 왕복운동을 하는 시계추처럼 지속적이지 않고 유동적이다. 따라서 영원한 충족과 행복감은 없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외로운 모태 솔로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을 원하기도 한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과 신선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며 좋아한다. 반대로 이성에게 너무나 인기가 많은 사람의 예를 들어 카사노바 같은 사람도 나름의 고통이 있다. 사람을 만나면 만날수록 무료함과 따분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모태 솔로는 이성과 함께하길 원하지만 바람둥이는 어장 관리에 힘든 생활을 하고 있다.

■ 지나침과 미치지 못함은 같다

“인간이 모든 고뇌와 고통을 지옥으로 보내 버린 천국에는 무료함밖에 남아 있지 않다.”

사람은 꿈을 이루고 성공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꿈을 이루고 성공할수록 권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이를 증명하듯이 크게 성공한 부자들 가운데 인생의 따분함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세상을 떠나는 사람도 있다. “한계 효용 체감의 법칙”이라는 경제학 용어가 있다. 이 법칙은 어떤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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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한 재화나 서비스를 소비함에 따라 느끼는 주관적인 만족도 혹은 필요도가 점차 감소한다는 의미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질리는 것처럼 한계 효용은 반복할수록 점차 줄어든다. 따라서 돈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해도 반드시 액수에 비례하여 행복감이 증가하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부자와 빈자를 두고 이렇게 표현했다.

“곤궁이 민중의 계속적인 재앙이듯이, 무료함은 상류사회의 재앙이다.”

“고통과 무료함은 한쪽이 멀어질수록 다른 쪽이 다가온다”라는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이런 길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야 하는 것이 내면적 풍요와 정신의 풍요다. 풍부한 상상력, 두뇌 활동력이 뛰어난 사람은 전혀 무료함과 따분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정신이 풍요로워질수록 내면의 공허가 들어갈 공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행복한 사람이란, 다른 사람에게 손 벌리지 않을 정도의 재산이 있고 여가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뛰어난 정신력을 지닌 자다. 우리도 행복을 위해서는 물질적인 결핍이 없어야 할 뿐 아니라 권태, 따분함, 지루함을 충분히 견딜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고뇌는 한쪽 원인에서 멀어질수록 다른 쪽의 원인과 가까워진다.

◎ 04 의도적인 배척도 필요하다

■ 결핍

“성취된 소망은 인식된 오류고, 새로운 소망은 아직 인식되지 않은 오류다.”

인간은 “무수한 욕망의 덩어리다”. 매일 새로 생기는 요구에 시달리며 힘겹게 살아간다. 막상 욕망이 충족되면 무덤덤해지면서 새로운 욕망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더더더(more and more)’라는 새로운 욕망은 불충족인 경우도 있지만 충족된 상태에서 기인한 권태감일 수도 있다. 이런 욕망을 쇼펜하우어는 변신의 신 프로테우스에 비유한다. 프로테우스는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변신술을 갖고 있다. 프로테우스가 자신의 모습을 자유롭게 바꾸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도 늘 새로운 것을 찾아 거듭 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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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변화하는 조건에 의존하는 행복은 오래가지 않는다

욕망은 충족하기 어렵지만 막상 충족되면 그 대상에 대해 무관심해지거나 무덤덤해지는 일이 많다. 만족하는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다는 뜻이다. 인간의 동기는 완전한 충족을 원한다. 하지만 갈증이 해소되자마자 동기는 곧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 낸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은 외적인 것에 행복의 가치를 두기 때문에 일어난다. 끊임없이 새로운 사건, 새로운 물건, 새로운 사람 등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자신의 내적인 행복감이 부족하다는 뜻이 된다. 변화하는 대상에서 찾는 행복이란 오래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간의 욕망은 늘 새로운 것을 향해 있다.

■ 긍정적인 호기심과 부정적인 호기심을 구분하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결핍을 인식하고, 그 결핍된 공간을 채웠을 때 안도감을 주기도 한다. 또한 호기심은 자발적인 탐구의 동기를 제공하기도 한다.

로체스터대학교 사회심리학과 교수 에드워드 데시는 “호기심이 새로움과 도전 과제를 찾고,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고 발휘하기 위해 늘 탐구하고 배우려는 인간 고유의 동기도 반영한다.”라고 주장했다.

문제가 되는 것은 호기심은 외부로부터 끊임없는 자극을 추구하는 방식이다. 이런 호기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다양하고 복잡하고 강렬한 경험을 얻기 위해 물리적, 사회적, 금전적 위험을 감수하려는 의지를 보인다. 자극을 추구하는 성향이 있는 사람은 새로운 것에 대한 불안을 완화하기보다 오히려 증폭시키려 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에는 사람의 말초 신경을 자극해 중독으로 이끄는 위험이 따르기도 한다.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라는 영어 속담이 있는데, 뭔가에 지나친 호기심을 보이다가 위험을 겪을 수 있다는 뜻이다.

계속 새로운 것을 찾는 것,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 새로운 사랑을 원하는 것은 행복의 길이 아니다. 밖에서 새로운 것을 찾지 말고 원래 갖고 있던 것의 가치를 되새겨 봐야 된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다. 즉 세상을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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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일관된 시야, 마음가짐, 태도다.

“성공하고 싶다면 원하는 바를 가져라. 행복하고 싶다면 가진 것을 즐겨라.”

◎ 05 욕망은 필연이다

■ 충족

“의욕의 주체는 영원히 애타게 갈망하는 탄탈로스와 같다.”

쇼펜하우어는 욕망이 ‘채울 수 없는 갈증’이라는 점에서 탄탈로스와 비슷하다고 본다.

제우스의 아들 시필로스의 왕 탄탈로스는 신들이 사는 올림포스에 식사 초대를 받았다. 탄탈로스는 신들의 음식인 넥타르와 암브로시아를 훔치다 발각됐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제우스는 탄탈로스를 지옥으로 떨어뜨린다. 물을 마시려고 하면 물이 마르고, 과일을 따 먹으려 하면 가지가 물러나서 그는 영원한 굶주림과 갈증에 시달린다.

인간은 탄탈로스의 운명처럼 목마름을 완벽하게 충족할 수 없기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모든 의욕은 욕구에서, 즉 결핍이나 고뇌에서 생긴다. 이 욕구는 충족되면 끝난다. 그러나 하나의 소망이 성취되더라도 열 개의 소망은 이뤄지지 않고 남는다. 더군다나 욕망은 오래 지속되고, 요구는 끝없이 계속된다.”

■ 두려움과 희망의 근원은 같다

우리 욕망의 만족은 계속 미뤄지고 있다. 우리의 의식이 의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우리가 끊임없는 희망과 두려움으로 여러 충동에 내몰려 있는 한, 우리가 의욕의 주체인 한 우리에게는 결코 지속적인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욕망을 충족해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이 성취보다 더 많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다나이데스 자매의 비극을 언급한다. 다나이데스 자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르고스 왕 다나오스의 50명의 딸로 결혼하고 첫날밤에 각자의 남편을 죽인 죄로 지옥에서 밑 빠진 독에 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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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득 채우는 벌을 받는다. 쇼펜하우어가 “다나이데스 자매가 밑 빠진 독에 채로 끊임없이 물을 퍼 올리는 것”에 비유한 이유는 그 행위에 끝이 없기 때문이다. 즉 욕망을 채우기 위한 행동은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욕망이라는 갈증을 해소하는 방법

◈ 메슬로우 욕구 5단계

1. 생리적 욕구 (의식주, 수면 등) 2. 안전에 대한 욕구

3. 애정과 소속에 대한 욕구 4. 자기존중의 욕구( 명예, 권력, 성취 등)

5. 자아실현의 욕구

쇼펜하우어도 욕망의 단계에 대해 언급했다. 가장 중요한 것이 생존이 가능한 건강이다. 명예와 권력의 욕구는 타인의 마음에 비쳐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허영이라며 비평한다. 자기실현의 욕망은 교육과 고양을 통해 반드시 실현해야 할 최고의 가치로 봤다. 채워도 채워도 충족을 모르고 결핍을 느끼는 대상은 명예, 돈, 권력, 출세, 성공 등 셀 수 없이 많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이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다.

가지면 더 갖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다 쓰지 못하거나 죽을 때까지 다 갖지 못한다. 인간의 욕망이 끝없는 목마름과 같이 영원히 충족할 수 없다면 불행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면 욕망의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다.

풍족하지 않으면 궁핍해서, 풍족하면 권태로워서, 끝없는 욕망을 채우지 못해서 시달리는 것이 인간이다.

◎ 06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고통을 견딘다는 것이다

■ 행복

“하나의 고통은 열의 쾌락에 맞먹는 힘을 가졌다.”

고통의 힘이 쾌락의 힘보다 더 강하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모든 행복과 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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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은 소극적인 성질을 띠는 반면 고통은 적극적인 성질을 띠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은 잘 모르지만 불행은 잘 인지한다. 그래서 부와 명예를 가졌을 때는 그 가치를 모르다가 그것이 사라지면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는다. 건강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건강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고통은 잘 알아차린다.

우리나라에는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라는 속담이 있다. 들어온 사람은 티가 안 나지만 나간 사람의 빈자리는 크다는 뜻이다.

행복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갖고 있을 때는 모르다가 막상 잃게 되면 알게 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행복감에 취하기보다 불행감에 휘둘리는 일이 많다.

■ 당연한 것은 세상에 없다

행복은 꿈이지만 고통은 현실이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은 쾌락의 적극적인 추구가 아니라 고통의 감소 또는 결핍의 지양이라는 소극적인 입장이다. 충치가 생겼을 때는 다른 치아를 관리하기 전에 그 충치부터 치료해야 한다는 뜻이다. 쇼펜하우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살아가는 데 최고의 지혜이자 원칙으로 들었다.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

고통의 원인을 먼저 없애는 것이 쾌락을 찾는 것보다 더 현명하다. 불행의 두 가지 원인인 고통과 권태에 직면할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적극적인 행복을 추구하기보다 소극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낫다.

쾌락과 고통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생각과 관련된다. 사람은 고통에는 매우 민감하면서도 쾌락에 대해서는 당연하게 여긴다. 특히 건강은 더 그렇다.

건강은 모르고 지나가다가 질병을 얻으면 뒤늦게 소중함을 알게 된다. 재물도 잃어봐야 그 가치를 알고, 인간관계도 깨져봐야 그 소중함을 안다. 환상과 같은 향락을 좇지 말고 결핍, 질병, 위험 등 현실의 고통의 원인을 먼저 없애야 된다.

■ 행복에 가까워지는 확실한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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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인생을 결정짓는 진정한 가치는 고통을 잘 견뎌내는 인내력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사람은 역설적으로 덜 불행하게 살 수 있는 용기가 있고, 고통을 그럭저럭 견뎌내면서 하루하루를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 평가하는 기준은 성공, 부, 성취, 출세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겪는 고통의 정도다. 따라서 지금 고통이 없다면 지상에서 가장 큰 행복을 누리는 셈이다.

열 가지의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한 가지의 고통을 피하도록 해야 한다. 소극적인 행복론의 핵심은 고통의 원인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즉 쾌락을 적극적으로 추구할 것이 아니라 고통을 줄여나가는 것이 행복을 위한 길이다.

2장 왜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는가

- 쇼펜하우어의 자신 -

◎ 07 행복과 불행에 대한 관점을 바꿔라

■ 성격

“선량하고 온화하고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사람은 몹시 궁핍한 상황에서도 만족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인색하고 시기심 많고 못된 성격을 가진 사람은 아무리 거대한 부를 쌓아 올려도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타고난 성격이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미 운명이 결정됐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타고난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행복과 불행이 미리 결정되어 인생이 바뀔 수 없다.

■ 기질 속에 나의 길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외모나 체형이 부모를 닮듯이 성격도 부모를 빼닮는다고 봤다. 지성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고, 의지(성격)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는다. 따라서 개인의 성격은 타고난 기질에 좌우된다. 특히 행복을 느끼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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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는 명랑한 마음이나 활기가 결정적이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행복과 불행이 인간이 타고난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타고난 성격과 기질은 불변하며 우리의 행복감과 불행감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했다. 낙천적인 사람은 세상에서 더없는 행복을 누리고, 할머니가 우울증에 걸리고 아버지가 자살한 쇼펜하우어처럼 우울한 사람은 염세주의자가 된다는 관점이다.

■ 고쳐 쓰지 못하면 바꿔 쓸 수 있다

성격이 체형처럼 한 번 정해지면 본성상 쉽게 바뀔 수 없다고 할 때 행복 또한 개인의 타고난 기질에 지나치게 결정된다는 점은 문제가 있다. 이런 성격이 바뀌지 않는다면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행복과 불행에 대한 관점도 바뀌지 않게 된다.

쇼펜하우어도 타고난 성격이 평생 바뀌지 않는다고 전제하면서도 교육 등 노력에 의해서 성격의 후천적인 개선과 변화가 가능하다고 봤다. 우리의 성격을 바꿈으로써, 현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넓힘으로써 세상을 다르고 풍부하게 불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고난 성격을 교육이나 자기 성찰을 통해 바꾸려고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타고난 기질에 의해서만 행복과 불행이 정해진다면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은 바뀔 수 없다는 슬픈 결론에 이른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오랜 성찰을 통해 자신의 성격을 개선할 수 있다.

◎ 08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분별하라

■ 능력

“인간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인간은 성격을 나타내게 된다. 또 그런 후에야 진정 무엇인가를 성취할 수 있다.”

인간이 타고난 성격과 기질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면 행복과 불행은 이미 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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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돼 있다. 쇼펜하우어는 성격이 불변하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지만, 교육으로 제2의 성격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 후천적으로 획득된 성격이다.

쇼펜하우어의 “획득된 성격”의 개념에 따르면 행복은 숙명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여 만들어 가는 것이다.

여기서 교육은 자신의 소질과 가능성을 인식하고 계발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런 후천적인 성격이 타고난 성격보다 행복감을 느끼는데 더 중요하다.

■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

선천적인 성격은 그 자체로 타고나지만 후천적인 성격은 자신의 의욕과 능력을 인식한 후에 나타난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통찰할 수 없다면 타고난 기질과 본능에 지배를 받지만, 세상을 경험하면서 통찰력이 생기면 자신만의 행복의 조건을 찾을 기회를 얻는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자신의 의욕(욕망)과 능력을 일치하는 법을 배우면서 획득된 성격으로 자신의 개성을 완전하게 알게 된다.

인간은 각자 서로 다른 갈망과 능력에서 자기의 소질을 발견한다. 그 소질의 수준은 개성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자신이 실제로 겪어 봐야 뚜렷하게 인식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묘사했다.

“물고기는 물에 있어야, 새는 공중에 있어야, 두더지는 땅속에 있어야 행복하다.”

■ 행복은 지극히 주관적인 선택이다

쇼펜하우어는 가치의 기준을 타인에게서 구하지 말고 자신에게서 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신의 개성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용하고 인격에 부합하는 일에 노력을 경주하는 것이다.

 

평생교육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탐구해 세계와 지신에 대해 알아 가야 한다. 무엇보다 내가 갖고 있는 장점과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알아야만 자신만의 행복의 방향이 비로소 정해진다. 능력과 욕구를 일치시키는 적성에 맞는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다.

행복이란 자신의 개성과 소질에 맞도록 노력함으로써 다다를 수 있는 만족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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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 이를 위해 자신이 성취하고자 하는 것 가운데 자신에게만 적합하고, 자기만이 할 수 있고, 자기에게만 즐거운 것을 알아야 된다. 자신의 성격에 맞는 일을 찾아 올바른 선택을 하는 것이 행복을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다.

◎ 09 행복과 불행을 상상하지 마라

■ 지능

“상상력은 아무 할 일 없이 기껏해야 즐거운 공중누각을 쌓아 올린다.”

우리나라처럼 공부를 중요시하는 나라는 세계에서 드물다. 그런데 머리가 똑똑해 출세하여 성공할 수는 있겠지만, 지능은 행복과 일치하지 않는다.

쇼펜하우어는 지능은 생존을 위한 도구로써 살려는 의지에 봉사하는 보조 역할을 할 뿐이라고 봤다. 지성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좋은 역할을 하지만 그것이 해결되면 작동을 멈춘다. 오히려 행복은 그런 지성이 과도하게 작동하여 생겨나는 상상이나 기억을 제한해야 얻을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지능이 발달한 고등 동물일수록 인식이 분명해지면서 고통이 증가한다고 본다. 따라서 인간 가운데는 천재가 가장 고통을 많이 겪는다.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천재는 단순히 지능이 좋은 사람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천재는 아이큐가 높은 사람이 아니라 창의적이며 독창적인 결과를 낳는 사람이다. 결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소수의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요즘 지능 검사에서 고득점을 받았다고 해서 천재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대체로 지능이 높을수록 사회성이 부족한 경우가 많아서 인간관계에서 흥미를 잘 느끼지 못해 자신만의 관심사에 몰입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고독을 선호하며 친구를 사귀지 않고 비연애 비혼을 택하는 등 인간관계를 최소화하여 자발적 아웃사이더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 기억과 예견은 착각이다

지성과 이성의 역할을 깎아내리는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본질이 원래 비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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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행복에 대해서는 인간의 지성이 잘못된 환상을 많이 만들어 낸다. 인간은 쾌락을 바탕으로 행복이라는 큰 건물을 짓는다. 그것은 인간이 느끼는 대부분의 즐거움과 쾌락의 원천인 환영이다.

<성경 구약> 전도서 제1장 18절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을 잘 대변한다.

“지식을 더하는 자는 근심을 더하느니라.”

죽음 자체보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고뇌의 더 큰 원인이 되듯이 인간이 겪는 고통의 대부분은 상상력, 회상과 예상이라는 지성 활동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지성으로 알 수 있는 부분은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두뇌가 뛰어난 사람이 반드시 행복한 것은 아니다. 인간의 지성은 단지 생존에 기여하는 도구일 뿐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 돌아보지 말고 내다보지 마라

인간은 행복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살아간다. 많은 사람이 고통스러운 현실을 부정하고,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에 대한 기대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많다. 인간의 삶이 동물의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인간의 인식 능력 때문이다.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과 관련한 모든 일에 대한 상상력을 억제해야 한다. 지나친 상상력과 추측, 기억은 불행의 씨앗이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행복을 미래에 두지 말고, 과거의 고통에 너무 집착하면 안 된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무엇보다 공중누각을 쌓아서는 안 된다. 쌓아 올리자마자 한숨을 쉬면서 다시 허물어뜨리면 그 대가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단순히 일어날지도 모르는 재난을 눈앞에 떠올리며 미리 불안해하지 않아야 한다.

작은 것에 만족하는 동물과 달리 인간은 자신만의 상상력을 발휘해 쾌락과 고통을 바탕으로 행복과 불행이라는 커다란 환상의 건물을 지었다. 인간에게는 고통의 양이 쾌락의 양보다 훨씬 늘어나고, 인간은 실제로 죽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로 인해 고통의 양이 특별히 더 증가한다. 이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은 극심한 감정변화, 격정, 동요를 겪어 그 흔적의 지속적인 특징을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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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에 근거한 불행감을 갖지 마라. 우리는 즐거운 생활을 할 때는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다가, 좋지 않은 시기가 닥쳐야 비로소 ‘옛 시절이 돌아왔으면’하고 바란다. 명랑하고 즐거운 시간이 얼마든지 있었지만 언짢은 얼굴을 하고 제대로 즐기지 못한 채 보내 놓고, 우울한 시간이 찾아오면 좋았던 옛날을 헛되이 그리워하며 탄식을 내뱉는 것이다.

‘그때가 좋았는데…, 앞으로 잘 돼야 할 텐데…, 우리는 습관적으로 불행의 씨앗을 뿌린다.’

 

◎ 10 고통의 총량은 변하지 않는다

■ 죽음

“자살이란 비참한 이 세상에서 실제적인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엉터리 구원을 받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최고의 도덕적 목표에 도달하는 것에 배치된다.”

많은 사람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죽음을 생각하기도 한다. 많은 종교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연구했으며 사후 세계를 지옥과 천국으로 나누기도 했다. 현실이 살 만한 가치가 없다면 죽음을 통해서 구원이나 해방을 꿈꿀 수도 있겠지만, 쇼펜하우어는 실패할 것이라고 본다.

죽음을 통해 고통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자살로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삶의 고통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변 사람들에게는 고통이 증가한다. 죽음을 통해 삶의 고통을 완전히 없애려는 시도는 어리석은 짓이다.

■ 나와 상관없이 세상은 잘 돌아간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인 자살이 얼핏 살려는 맹목적인 의지를 꺾는 영웅적인 행동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인 착각일 뿐이다.

개인이 몇 명 사라진다 해도 이 세계를 이루는 의지는 변하지 않고 그대로다.

“마치 무지개를 구성한 하나의 물방울이 아무리 교체되더라도 무지개 자체는 한결같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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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가 비유한 무지개와 물방울은 자연 전체가 한 개체의 죽음에 상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우주를 가득 채운 삶에의 의지는 개인의 죽음에 전혀 타격을 받지 않는다. 자연은 개인이 아니라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무수한 꽃씨를 뿌리고 수천 개의 알을 뿌리면서 애쓴다.

우주 전체로 보면 개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개인은 언제나 희생될 수 있고 운명에 의해서 파멸될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 자연에서 그런 존재인 인간에게 “죽음이란 개체성을 잊어버리는 잠”이다. 이 세상은 인간 개개인의 죽음에 대해서는 무정하다.

■ 죽음은 고통을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다

인간은 죽음보다 죽음에 대한 생각에서 더 고통을 느낀다. 현재를 긍정하는 사람은 삶이 끝이 없기를 기대하지만, 죽음의 공포가 현재를 몰아내 마치 현재가 없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삶에 대한 사랑보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살아간다.

누구나 한 번쯤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한 적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이 고통을 없애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빨리 죽는 것’이라고도 생각했을 수 있다. 태어난 것은 어쩔 수 없지만 자살은 우리가 선택할 수도 있다. 에피쿠로스의 유명한 말대로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존재할 때는 죽음이 존재하지 않으며 죽음이 존재할 때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과 함께 모든 감각과 의식이 끝나기 때문에 죽음에는 쾌락도 고통도 없다. 죽음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자살, 열반, ‘무의지의 평정’을 통해 해탈에 도달하려고 한다. 죽음에 대해 많은 종교와 과학이 설명하려 시도하지만 명확하게 밝혀진 바는 아직 없다. 삶에의 의지를 제약하는 죽음의 공포는 철학의 발단이자 종교의 단초다. 불사에 대한 신앙을 갖는 것은 죽음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한 두려움 때문이다.

불교의 깨달음에 ‘일체개고’가 있다. 인도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쇼펜하우어가 제시한 고통에 대한 해법은 해탈이 아니라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을 지니면서 견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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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모든 인생사는 수난의 역사다

■ 삶에의 의지

“도피가 용기라면 자살을 결심한 사람만큼 용감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수많은 영웅과 현인이 자발적 죽음을 통해 자신의 생을 마감하지 않았던가.” “분별을 할 줄 알고 솔직하다면 인생을 다시 한번 되풀이하기를 바라기보다 완전히 존재하지 않기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인생의 무의미에 대해 고민했던 쇼펜하우어가 남긴 말들이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죽음을 두려워했으며 자살은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 삶의 긍정이라는 삶의 부정

쇼펜하우어는 자살을 삶의 부정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삶의 긍정이라고 본다. 자살은 삶의 의지에 따른 고통을 부정하는 것일 뿐 살려는 의지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삶을 부정하기 어려운 것은 지성이 의지를 부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리 몸의 일부분인 뇌는 인간의 의지가 객관화된 신체 전체를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어떤 방식으로든 정신이 자살을 시도할 때도 우리의 심장은 뛰고, 손은 죽지 않으려고 하며, 죽은 이후 3일은 머리카락이 자라난다. 그만큼 살려는 의지가 너무나 질기고 강한 것이다. 정신은 빨리 죽지만 신체는 그렇게 빨리 죽지 않는다.

자살과 해탈을 포함한 많은 형태의 삶의 부정은 역설적으로 삶의 의지를 긍정하는 현상이다. 자살도 생존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에 따른 고통을 부인하는 것에 불과하다. 삶을 제대로 향유하지 못한 것에 대한 혐오와 후회 때문에 삶의 고통을 느끼기 때문이다. 영원히 살기를 원하면서 신체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만 이런저런 상황이 꼬여 삶에 고통이 생긴다. 자살자는 멋지게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자신이 처한 삶의 조건에 불만족할 뿐이다. 자살자는 그런 삶의 의욕을 멈출 수 없기 때문에 그만 사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분명한 점은 자살은 무지개의 물방을, 바다의 파도처럼 이 세상에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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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자살은 멍청한 짓이다.

쇼펜하우어는 삶에의 의지를 부정함으로써 그 결과인 욕망과 번뇌를 없애려고 했지, 삶 그 자체를 없애려고 한 것은 아니다.

죽음은 삶에 따른 고통을 줄이려고 할 뿐 생존 의지 자체를 제거하는 것은 아니다.

삶의 형식은 끝없는 현재다. 시간은 쉬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강물과 같으며 인간은 그 물결에 휩쓸려 사라지는 존재다. 그 영원한 시간 속에서 인간이 살고 죽는 것은 ‘덧없는 꿈’과 같다. 이런 점에서 세상을 부정하는 자살은 무익하고,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리석은 행위다.

■ 존재하지 않고 행복할 수 없다.

우리나라 자살자의 수가 늘어나고 있다. OECD 국가에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자살의 이유는 다양하다. 삶에 지쳤거나, 불치병에 걸린 경우도 있지만, 어쩌면 더 좋은 삶에 대한 강한 희망이 좌절됐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자살률 세계 1위 국가가 의미하는 바는 그만큼 우리나라에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자살은 세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자신의 삶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죽고 싶다’는 사람은 ‘그만큼 살고 싶다’는 반대되는 마음을 갖고 있다. 자살하는 사람은 그만큼 삶에 대한 희망, 애착, 기대가 컸다고 볼 수 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살려는 의지 자체를 절대로 부정할 수 없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우리 인생의 장면들은 거친 모자이크와 같다. 가까이서 보면 제대로 알아볼 수 없고 멀리서 봐야 그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2024. 3. 3

*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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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 (2)

- 마음의 위기를 다스리는 철학 수업 -

■ 강용수 지음

3장 무엇으로 내면을 채워야 하는가

-쇼펜하우어의 행복 -

◎ 12 행복의 90퍼센트는 건강에 좌우된다

■ 건강

“건강한 거지가 병든 부자보다 더 행복하다.”

요즘 많은 사람이 돈과 건강을 맞바꾼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의 첫 번째 조건으로 건강을 꼽는다. 건강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의 행복은 대부분 건강에 의존한다. 건강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다른 어떤 것도 즐거움이 될 수 없다. 몸이 일단 건강해야 기분도 좋고 웬만한 어려움을 잘 견딜 수 있다. 죽으면 억만금의 돈이라도 소용이 없다 쇼펜하우어는 “건강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라는 고대 로마의 시인 유베날리스가 쓴 시의 한 소절을 옳다고 말한 만큼 건강하게 장수하는 사람이 더 행복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 알려면 오래 살아 봐야 한다.”

■ 건강한 정신력을 위해 그에 맞는 노력을 하라

쇼펜하우어는 어느 고서를 뒤적이다가 “많이 웃는 자는 행복하고, 많이 우는 자는 불행하다”라는 글을 읽었다. 건강한 사람 가운데는 낙천적인 성격이 많다. 그만큼 살면서 스트레스를 덜 받았다는 것인데, 기질상 타고났을 가능성도 있고 후천적으로 성격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웃을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건강은 인간의 주관적인 자산인 ‘고상한 성격’, ‘뛰어난 두뇌’, ‘낙천적인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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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과 ‘명랑한 마음’에 함께 속한다. 이 가운데 우리를 가장 행복하게 하는 요인은 명랑한 마음이다. 그 명랑한 마음은 외적인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 건강이다. 따라서 바깥에서 좋은 것을 찾지 말고 자신의 건강을 지키고 유지하는 데부터 힘을 써야 된다. 그것은 운동으로 만들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명의 본질은 운동”에 있다고 강조하면서 유기체의 전체는 끊임없이 운동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행복은 명랑한 기분에 좌우되는데, 그 기분은 건강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나무도 튼튼하게 자라려면 바람이 필요하다. 인간도 건강하려면 운동이 필요하다.”

“행복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명랑한 마음이다.”

■ 명랑해야 잘 살 수 있다

행복은 젊음, 외모, 부, 명예 등으로 평가하지 말고 얼마나 명랑한지를 확인해 봐야 한다. 마음이 즐거운 사람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명랑한 기분과 긍정적인 생각에 돈이 분명 도움을 주겠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삶에 만족하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다고 해서 불행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건강은 필수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은 사물의 객관적인 모습이 아니라 사물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결과다. 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건강한 사람과 아픈 사람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의 행복이 “90%는 건강에 의해 좌우”된다.

인간의 행복에서 가장 중요한 건강을 다른 일을 위해 희생하는 일은 어리석다. 승진, 명예, 공부 등 건강을 해치면서까지 과로할 이유가 없다. 건강이 있어야 다른 모든 것도 있는 것이다.

명랑하고 쾌활하면 세상의 모든 일이 즐거워진다. 낙천적인 사람은 열 가지 일 가운데 한 가지 일만 이루더라도 기뻐하지만 우울한 사람은 열 가지 일 가운데 아홉 가지 일을 이루더라도 기뻐하지 않는다.

행복해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것이다.

◎ 13 마음의 안정이 없는 행복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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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정심

“생각의 서랍 중에서 한 개를 열 때는 다른 모든 것을 닫아 두어야 한다. 그래야 무겁게 짓누르는 하나의 걱정거리 때문에 현재의 사소한 즐거움을 위축시켜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고,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을 밀어내지도 않으며, 하나의 중요한 일을 걱정하느라 사소한 일들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건강 다음으로 우리 행복에 중요한 요소는 마음의 평정이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익시온이 돌아가는 바퀴에 묶여 있는 것에 비유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익시온은 그리스 남부 라피타이족의 왕으로 관례적인 결혼 선물을 요구한 장인 테이오네우스를 불구덩이에 밀어 죽인 살인자다. 제우스는 그의 살인죄를 사면하고 올림포스 산으로 그를 초대했는데 익시온은 제우스의 아내 헤라 여신에게 반하여 계속 따라다녔다. 제우스는 구름으로 헤라와 똑같이 생긴 여신을 만들어 놓았는데 익시온이 그를 겁탈하고 자신이 헤라를 가졌다고 떠벌리고 다녔다.

이에 분노한 제우스는 익시온을 불타는 수레바퀴에 매달아 영원히 돌아가게 만들었다.

인간은 마치 돌아가는 바퀴에 묶여 있는 익시온처럼 삶의 의지의 지배를 받아 끊임없이 움직인다.

쇼펜하우어가 주장하는 행복은 소극적인 입장에서 ‘마음의 평온’이다. 이것은 스토아학파가 주장한 아파테이아와 같다. 아파테이아는 욕구가 없는 금욕의 경지를 말한다. 정념에서 해방됨으로써 평온에 도달하는 것처럼 쇼펜하우어도 마음의 평온을 통해 행복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 마음의 평정을 찾는 네 가지 방법

첫째 불필요한 인간관계를 정리하라.

타인과 비교하지 말고 질투심을 갖지 말아야 하며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는 일이다.

둘째, 질투를 경계하라.

쇼펜하우어는 세네카의 말을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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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의 것을 남의 것과 비교하지 말고 즐기자. 다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괴로워하는 자는 결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셋째, 큰 희망을 걸지 말라.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우리 삶은 아주 작은 점에 불과하다.”

넷째, 세상에는 거짓이 많다는 것을 알아라.

이 세상에는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가 더 존경받는 일이 많다.

■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과 작별하라

마음의 평온이 행복이라면 마음을 ‘잔잔한 호수’처럼 유지할 필요가 있다. 외부의 자극도 줄여야 되지만 비교되는 감정, 시기심, 질투, 지나친 기대와 희망을 경계할 필요가 있다.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익시온의 수레바퀴가 멈추도록 욕망의 흐름을 잘 제어해야 한다.

 

욕망의 흐름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때론 관심도 없이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익시온의 수레바퀴가 멈추면 에피쿠로스 학파가 말한 완전한 행복의 상태에 이른다. 그것은 감정의 동요나 혼란이 없는 평상심의 상태인 아타락시아이다.

⁕ 아타락시아 :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의거한 쾌락의 획득과 고통의 회피가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

◎ 14 예술 감각을 갖춰라

■ 관조

“음악은 아주 위대하고 대단히 근사한 예술이다.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참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의 고통을 완화하는 방법을 예술에서 찾는다. 그는 베토벤 교향곡을 좋아해서 음악의 형이상학적 가치를 <의지와 표상의 세계>에서 분석하기도 했을 만큼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예술의 미적 관조와 음악에 있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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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 앞에 인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이나 작품을 보거나 좋은 음악을 들으면 고뇌가 가라앉는다는 것을 느낀다. 쇼펜하우어에게 예술의 역할은 단순히 고통을 순간적으로 위로하는 도피처가 아니라 고통의 원인이자 세계의 근원인 의지를 인식하고 느끼게 하는 것이다.

과학이 이 세계를 인과율(법칙)로 설명한다면 예술은 이 세계의 영원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을 플라톤은 이데아라고 부른다. 우리는 대상을 사사로운 관심이 없이, 어떤 목적도 없이, 의욕도 하지 않고 순수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고통스러운 자아에서 벗어나 순수한 마음으로 대상과 하나가 될 때 고통의 세계는 사라진다. 구름에서 번개가 치고, 천둥소리가 폭풍우와 바닷소리를 압도할 때 우리가 느끼는 것을 숭고미라고 부른다. 또는 밤하늘에 별이 총총 떠오를 때 우리가 너무 작게 느껴져서 무로 사라지는 느낌에서 이 세계가 객관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고통은 우리의 마음에서만 느껴지는 것이다. 미적 관조란 이 세상을 아무런 관심 없이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익, 계산 등을 따지면 세상의 아름다움은 사라진다.

■ 음악은 의지를 울린다.

여러 분야 가운데 의지의 고통을 초월하게 하는 예술의 힘이 가장 뚜렷한 것은 음악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음악은 의지의 직접적인 표현이다.”

음악은 회화나 조형 예술과 달리 모방이나 재현이 아니다. 우리가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 감동을 받는 이유는 선율이 우리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이다. 이때 음악은 세계의 깊은 곳에 있는 의지를 직접 우리의 마음에 전달해 준다. 음악이 “의지 자체의 모방”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풍경과 경치를 보거나 예술작품을 감상하거나 클래식을 들으면 노동의 고통에서 벗어나 즐길 수 있다. 특히 음악은 ‘의지의 직접적 표현’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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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우리의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준다. 웅장한 오페라는 독일어 가사를 전혀 몰라도 큰 감동을 준다. 이렇듯 음악에 몰입하고 집중함으로써 고통스러운 현실을 잊을 수 있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와 비슷한 효과다.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을 구분하고, 각각 멜로디와 가사에 비유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포도주의 신을 뜻하면서 동시에 여러 번의 죽음과 재생을 경험한 디오니소스처럼 인간도 술에 취해 삶에 따른 고통을 잊고 다시 거듭나는 경험을 한다. 덧없는 삶의 시간에서 벗어나 고통을 더 넓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예술은 삶의 꽃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쇼펜하우어는 인생이 너무 힘들어 참을 수 없다면 클래식을 들을 것을 권장한다. 오페라는 가사를 이해해야만 되지만 실내악이나 관현악은 그럴 필요가 없다. 클래식은 이 세계가 의지라는 사실을 직접 느끼게 해주는 통로와 같다. 이 세계가 의지라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게 해 주는 예술이다.

 

◎ 15 인생의 무게 중심을 밖에서 안으로 옮겨라

■ 향유

“평생에 걸쳐 매일 매시간 그 자신 자체일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할 게 없다.”

인간은 자신의 타고난 탁월함에 따라 가장 적합한 것을 선택할 수 있다. 인생을 향유하는 방식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재생적 즐거움 : 먹고 마시는 일, 소화, 휴식, 수면 욕구 등

둘째, 육체적 즐거움 : 산책, 달리기 등 각종 운동, 사냥, 전쟁 등

셋째, 정신적 즐거움 : 사유, 독서, 예술, 명상, 철학 등

쇼펜하우어는 세 가지의 즐거움을 모두 알았다. 좋은 음식을 먹었고 건강을 챙겼고 음악을 즐겼다. 그리고 독서와 철학을 누구보다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았다. 그는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어느 하나에 소홀하게 하지 않도록 균형을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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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질을 결정짓는 한 가지

세 가지가 모두 중요하다고 해도 인생을 향유하는 데는 사람마다 무게 중심에 차이가 있다. 자신의 능력에 맞게 행복의 방향이 달라진다. 쇼펜하우어는 세 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평범한 사람 : 무게 중심을 바깥에 두고 만족을 추구한다.

둘째, 정신적인 수준이 보통인 사람 : 실용학문에서 즐거움을 찾기 때문에 무게 중심이 밖과 안에 걸쳐 있다.

셋째, 정신적인 능력이 탁월한 사람 : 가장 고상한 향유 방식을 통해 무게 중심을 완전히 자기 자신 안에 둔다. 사물의 존재와 본질 자체에 관심을 갖고 예술, 문학, 철학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만들어 간다.

인간이 인생을 향유하는 방식, 즐기는 것은 각자의 취향과 능력에 따라 달라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행복은 여가에 있다.”라고 말하고, 소크라테스가 “여가를 인간의 소유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칭송”했는데 행복한 시간은 노동하지 않는 자유시간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한 “행복한 삶이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유능함을 펼칠 수 있는 삶”의 의미는 세 가지 향유방식 가운데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자신의 탁월함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가장 행복한 삶은 철학자의 삶이다.

■ 타인에게 방해받지 마라

무게 중심이 바깥에 있는 사람은 출세, 승진, 명예 부 등을 추구하며 각종 모임 등에 빠져서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무게 중심이 안에 있는 사람은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면서 개인적인 취향에 따라 예술, 시와 문학, 철학 등을 가까이 하게 된다. 이런 정신적인 즐거움은 속물이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줄이고 늘 책을 가까이 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기를 권한다. 기회가 되면 미술 전시회나 연주회를 찾아서 최고의 예술가가 만들어 낸 작품을 감상하며 인생의 고뇌에서 벗어나는 시간도 가지면 좋다. 혼자서 산행을 하며 자신을 만나는 훈련도 해야 한다. 고독은 나의 진정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는 벗이다. 마흔부터 어느 누구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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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방해받지 않는 잔잔함을 스스로 찾도록 해야 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라 ‘그들’로 생각하는 것이 익숙해질 것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

◎ 16 인생은 짧고 시간과 힘은 한정돼 있다

■ 독서

“책을 읽는 시간도 함께 살 수 있다면 책을 사는 것은 좋은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체로 책을 구입하는 것과 그 책의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을 혼동한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을 위한 필수 조건으로 ‘교양’을 꼽았다. 그는 교양을 쌓기위한 독서가 가치 있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행복이 주머니에 무엇이 들어 있냐 하는 것보다는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끝없는 의욕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인생에 대한 지적 관조와 독서를 통한 위대한 사상가와의 대화다. 철학자는 사물을 지적인 대상으로 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에 갇혀 왜곡된 시각으로 본다. 쇼펜하우어는 사유의 힘을 키울 수 있는 방법으로 독서를 권했다.

“먹은 것은 육체가 되고 읽은 것은 정신이 되어 현재의 자신이 된다.”

■ 양서를 읽기 위한 세 가지 조건

* 쇼펜하우어가 권하는 독서법

첫째, 고전을 읽을 것을 권한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가 쓴 작품 읽기

둘째, 중요한 책은 무엇이든 즉시, 두 번 읽는 것이 좋다.

그래야 사물의 맥락을 보다 잘 파악할 수 있다.

“반복은 연구의 어머니다.” - 쇼펜하우어

셋째, 악서를 피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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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가 지칭하는 악서는 단지 돈을 벌기 위해서 쓴 책이다. 많 은 사람들이 글을 써서 돈을 벌려고 한다. 대중은 어리석게도 그런 글을 읽는다.

■ 군주처럼 사유하라

각자의 관심과 필요에 따라 독서를 할 때 많이 읽는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아무리 많은 지식도 숙고한 지식만큼의 가치는 없다. 많은 독서는 독자적인 사고를 하는데 방해가 된다. 많이 읽을수록 자기 스스로 사고하는 힘은 줄어들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표현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남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는 것과 남이 입다 버린 옷을 입는 사람에 불과하다.”

쇼펜하우어는 사유 없는 다독을 경계했다.

“독서란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대신 생각해 주는 것이다.”

독자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은 군주처럼 스스로 직접 판단을 내린다. 그들이 제시하는 의견은 모두 그들 스스로 사고하여 얻은 결과다. 진정으로 독자적인 사유를 하는 사람은 이런 점에서 군주와 같다.

군주가 타인의 명령을 인정하지 않는 것처럼 독자적 사고를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듯 온갖 종류의 권위와 편견에 사로잡혀서는 안 된다. 잘못된 독서는 이런 외부의 권위에 의존하게 만들 수 있다.

지상에서 가장 큰 행복은 자신의 정신에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진정한 사상가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위해 생각한 것만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으로 그 사람이 걸어간 길은 알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길을 걸으며 무엇을 봤는지 알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눈으로 봐야 한다.

◎ 17 문체는 정신의 관상이다

■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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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생각은 많은 경우 깊이가 없고 단순하며 긴 실을 자아내지 못한다.”

사색은 좋은 문장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다. 사색으로 얻은 지식이 진정한 지식이다. 스스로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된다.

글쓰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런 독자적인 사유를 언어로 표현하기 위한 문체다. 쇼펜하우어는 글의 단순함, 소박함, 명료함을 중요하게 여겼다.

글쓰기는 자신의 사유를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글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는 글로써 내용뿐만 아니라 문체도 간결함과 명료함을 갖춰야 된다. 글쓰기를 할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남의 생각을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쓰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애매하고 어렵고 추상적인 글쓰기를 경계하면서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글쓰기를 제안한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글쓰기의 중요한 덕목이다.

■ 글에 필요한 두 가지, 단호함과 확고함

좋은 글쓰기의 원칙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쓰는 것이다. 독자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너무 허세를 부리는 문체를 쓰지 않는다. 문체에 고유한 독자성이 있고 자연스러우며 소박함을 갖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게 글을 쓰는 것처럼 쉬운 것은 없다. 반대로 중요한 사상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표현한 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다.”

단순함이 진리의 특징이자 천재의 특징이다. 반면에 사이비 철학자는 불확실하고, 애매하며, 다의적이고, 장황하고, 둔중하며, 딱딱한 문체로 쓸데없는 말만 늘어놓는다. 멋부린 표현, 난해한 용어, 애매한 암시는 지양하고 단순하고 명료하고 소박하게 말해야 한다. 또한 지나친 장식, 불필요한 수사, 쓸데없는 부연, 과잉 표현을 조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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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가

◎ 18 영원을 위해 사랑한다

■ 본능

“사랑은 수많은 모습을 하고 나타난다. 슬픔과 환희, 고통과 즐거움, 천국과 지옥의 경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과 연애, 그리고 결혼은 인류가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이어진 영원한 관심사다. 사랑 때문에 사람들은 싸우고, 자살을 하기도 하며, 철학자를 결혼의 유혹에 빠트리기도 한다. 이기적인 사람도 사랑에 목을 매고 까다로운 사람도 첫눈에 사랑에 빠지는 일을 보면 사랑은 예측할 수가 없다.

■ 사랑은 영원히 살아 있음을 상징한다

쇼펜하우어에게 남녀의 사랑은 기본적으로 정신적인 사랑이 아니라 육체적인 관계를 염두에 둔다. 실제로 남녀의 사랑은 성적 본능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에 얼핏 성격, 경제력, 학벌 등 개인적인 조건이 중요해 보이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각자는 사랑을 하는 단역 배우고, 그 무대의 각본은 종족 보존이라는 목적으로 쓰였다. 개인은 이런 자연의 의도나 계획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찾는다고 생각한다.

성욕은 인간의 욕망 중에서 가장 크다. 이는 자기 보존의 욕망으로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강렬하게 작용하는 본능이다. 인간이 지닌 욕망 중의 욕망인 셈이다.

플라톤은 “백발의 시기가 되면 그때까지 우리를 끊임없이 괴롭히던 성욕에서 드디어 벗어난다는 점에서 행복하다”라고도 했다. 쇼펜하우어는 성욕이 인간을 경미한 망상에 빠트리며, 성욕이 소멸해야 비로소 완전히 이성을 찾는다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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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인 만족, 흔히 오르가즘이라고 불리는 쾌감은 개인이 한순간 느끼는 즐거움이 아니라 영원히 미래에 죽어 없어질 자신의 삶을 이어가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생식은 삶을 유지하고 시간에 무한한 삶을 보증하는 원리다.”

성욕은 ‘이 세상에서 내가 영원히 사라져 버릴 것’이라는 죽음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이다. 죽음이 없다면 남녀 간의 사랑도 없을지도 모른다. 성행위는 개인의 쾌락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으나 나의 삶이 자식을 통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세상을 영원히 사는 방법은 자손을 남기는 것이기 때문에 성행위는 죽음을 철저히 부정하면서 더욱더 살려고 하는 간절한 의지의 표현이다. 내가 죽어서 사라져 먼지가 되더라도 나의 생명은 이곳에서 영원히 살아남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렇듯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사랑은 달콤한 환상 뒤에 이 세상에 영원히 남으려는 의지가 강하게 작동한다.

우리는 여러 매체를 통해 사랑의 기쁨, 슬픔, 이별, 절망 등을 여러 형태로 접한다. 쇼펜하우어는 그런 달콤한 사랑 뒤에는 종족 보존이라는 자연의 전략이 숨어 있다고 본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이 세상 모든 남녀의 사랑은 아무리 별나라의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성욕이라는 본능을 근거로 한다. 즉 남녀의 사랑은 예외없이 이 본능이 특수화되고 한정되고 개체화된 것일 뿐이다.”

성욕은 영원히 존재하려는 의지의 긍정이다. 이 세계를 삶에의 의지로 본다면, 그 의지가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바로 생식 행위다.

사랑은 영원한 생존에 대한 의지의 발현이다. 우리의 사랑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통해 계속 이어진다. 우리가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인류의 생명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영원한 상징이다.

■ 사랑의 형이상학

쇼펜하우어는 사랑은 성적인 관계를 전제하므로 단순히 쾌락만이 아니고 죽음으로 끊어지는 생명의 의지를 이으려는 노력으로 봤다. 남녀의 성관계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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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의 최초 행위이자 출발점으로 나타난다.

쇼펜하우어의 생각은 우리의 유교적 전통과 비슷하다. 가장 슬픈 일은 내가 죽어서 이 세상에 나의 유전자가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식보다 먼저 죽는 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자식이 자기보다 빨리 죽는 것을 가장 큰 고통으로 여긴다. 자식은 나의 삶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출산율이 세계에서 최저 수준인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사랑의 목적이 생명의 보존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사랑이 죽음을 넘어서기 위한 행위라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생각해 볼 만하다. 우리가 이런 ‘사랑의 형이상학’을 알면 쾌락과 환상에 이끌려 타인을 만나고 헤어짐을 반복하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 19 사랑은 이상향이자 현실이다

■ 연애

“우리의 다른 본능처럼 사랑은 환상의 옷을 입고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사랑은 현실적인 조건이나 미래의 계획을 외면한 환상에 가깝다. 그 환상에 속아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랑이 위대하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연인에 대한 소유욕, 질투심, 증오심 등과 결합하여 사회적 문제를 낳기도 한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우리가 연애에 빠졌을 때 느끼는 모든 행복감정은 모두 환상에 불과하다.

■ 사랑에 빠지면 콩깍지가 씌이는 이유

흔히 눈에 콩깍지가 씌이면 상대에게 없던 매력도 생겨나게 된다. 남자는 자신의 개성과 특질에 잘 적응하는 여자를 바라며, 그런 여자가 나타났을 때 목숨을 바칠 각오로 희생적인 사랑의 전사가 된다. 대부분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사랑에 빠지면서 연애는 ‘자신의 일’이라고 착각을 한다.

모든 연애는 성적인 환상을 통해 이뤄지며, 이런 눈먼 사랑의 바탕에는 남성의 성욕이 자리 잡고 있다. 남녀가 데이트를 할 때 잘 차려입고 거울을 보면서 외모를 고치는 이유는 바로 성 충동에 있다. 인간은 이런 사랑의 묘약에 속아

서 상대방과의 만남을 행복과 만족으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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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 교감이 바탕인 연애는 쇼펜하우어에게 하나의 환상이다. 실제로 사랑의 본질은 ‘생명의 보존’에 있기 때문에 철저히 신체적인 조건을 따진다. 우선 나이를 볼 때 남자는 가임 기간의 여성을 매력이 있다고 느낀다. 남자들에게는 출산이 불가능한 나이가 된 여자는 성적 매력의 대상에서 제외된다. 따라서 미모가 없는 젊은 여성을 본래 타고난 미모의 나이 든 여성보다 더 매력 있게 느낀다. 특히 남자가 큰 엉덩이와 큰 가슴에 집착하는 이유는 풍만한 젖가슴이 유아에게 충분한 영양을 제공할 것이라고 본능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소위 에스라인의 몸매는 현재의 남자와는 관련이 없으며 태어난 아이의 생존과 관련된 조건이다.

사랑에 빠지면 모든 유행가가 자신의 마음을 나타내는 것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늘 변하고 인생은 짧기 때문에 영원한 사랑은 없다. 다만 영원할 것 같은 착각 덕분에 덧없는 인생에 우리는 잠시 웃고 우는 추억의 시간을 함께 한다. 슬픔과 환희, 고통과 즐거움, 천국과 지옥의 경험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 결혼은 공동의 실존이다

■ 결혼

“결혼은 이해할 수 없는 행위들의 반복이다.”

성행위를 끝내고 나서 허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듯이 결혼을 한 후에 속았다는 느낌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것은 성욕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깨닫기 때문이다. 성욕에 눈이 먼 사람들은 미친 듯이 서로를 갈구하지만, 성욕이 “호사스러운 세계의 모든 속임수 중의 정수”라는 것이 곧 밝혀진다. 성욕은 충족되지 않을 때는 많은 것을 기대하게 만든다. 무한하며 엄청난 것을 약속하지만, 실제로 그 결과는 보잘것없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그 욕구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정열은 착각하게 만드는 환상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종의 목적이 달성되면 기만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 사랑과 결혼 그 후를 내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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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사랑은 종족 보존을 위한 자연의 기만이다. 이런 속임수는 아주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인간이 서로 결합하여 사랑하도록 우리의 마음에 심어둔 자연의 계략이자 속임수다. 우리는 자연에 속아서 결혼을 했는데, 곧 이것이 기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고달픈 현실을 마주하며 후회하게 된다. 그래서 몇 수를 내다보는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는다.

니체는 “철학자는 결혼을 하지 않는다” 라면서 독신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그 대가는 혹독하다. 그의 후손이 없다. 만약 결혼 이후의 현실을 알 수 있는 지혜를 가졌다면 니체처럼 혼자 자유로운 정신으로 마음 편하게 살았을 텐데, 그때나 지금이나 홀로 사는 사람의 마지막에는 행복하지 않은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니체의 마지막도 몇 명 남지 않은 친구가 함께했으며 오랜 병간호는 평생 사이가 좋지 않았던 어머니와 누이가 불평 없이 도맡았다. 니체가 이미 정신을 잃을 상태여서 전혀 몰랐지만 힘들 때 도와주는 것은 가족뿐인 것이다.

■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으면 행복에 가까워진다

사랑이라는 환상에 속아 결혼한 사람이 불행하다면, 그런 환상을 미리 알고 혼자 사는 사람은 행복할까? 어차피 둘 다 불행한 것은 마찬가지다. 차이점이라면 어쨌든 결혼을 한 사람은 가족이라는 든든한 울타리가 있지만, 혼자 지내는 사람들은 어쩌면 고독한 죽음이라는 최후를 준비해야 될지 모른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다 알지만, 아기 때 기저귀를 갈면서 부모님의 고충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되고, 아이를 출산해 본 여성은 어머니의 산고를 알게 된다. 그리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사업하면서 고단한 삶을 통해 가족을 부양해아 하는 남자들은 왜 아버지의 어깨가 그렇게 무겁게 느껴졌는지 뒤늦게 알게 된다.

결혼해도 불행하고 결혼하지 않아도 불행하다면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혼을 하면 고생이 끝날 것이라는 판단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어디선가 또 다른 사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과 연애, 결혼에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잠시라도 행복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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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힘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사랑을 얻는 대신 다른 무엇을 잃기도 한다.

◎ 21 인간은 더 완벽해지기 위해 사랑을 한다

■ 조건

“결혼은 자신의 권리는 절반으로 줄이고, 의무는 배로 늘리는 행위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결혼하는 비율이 떨어지고 이혼율이 높아지는 이유는 결혼을 통해 자신의 자유가 줄고 구속이 늘어난다는 생각이 보편화됐기 때문일 것이다. 더구나 자신을 돈 버는 기계쯤으로만 취급받고 가족과 소통하지 못하는 경우 그 갈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사랑에 누구나 진지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자신의 후손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해 느끼는 기쁨이나 고통은 우리가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도 인류의 종족 보존이라는 대전제에서 이뤄진다. 쇼펜하우어는 사랑을 인류 전체의 생존 문제로 바라봤다.

“모든 연애는 인류의 생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다. 이 세상에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 이 순간부터 멸종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이전 세대의 사랑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고, 미래의 세대는 우리의 사랑에 의존하고 있다.”

■ 나와 반대인 사람에게 끌리는 실존적 이유

쇼펜하우어에게 성은 자신의 후손을 만들어 내는 일이라는 사실에 목적이 있다. 우리 생명의 유한성은 후손을 통해 극복될 수 있다. 생명 존속이라는 본능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선행돼야 할 것은 사랑의 진정한 목적을 인식하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사랑을 자신의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미래의 생명을 낳기 위한 행위라고 봤다. 따라서 두 사람이 눈길을 처음 주고받을 때부터 이미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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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의 부모가 되기 위한 본능이 작동한다. 처음 눈길을 주고받을 때부터 이미 새로운 생명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미래에 어떤 아이를 낳을지 무의식적으로 고려하게 된다는 것이다.

■ 사랑을 현실적으로 인정하라

쇼펜하우어의 사랑, 연애, 결혼에는 온통 생식 이야기만 나와서 거부감을 갖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실제로 자연이 인간을 속이는 방법은 고차원적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성애의 형이상학>으로 이름을 붙였다. 만약 처음부터 자연이 인간에게 종족 보존만을 강요했다면 누구나 거부감을 가졌을 것이다. 자연은 인간을 속이기 위해 10대부터 20대까지 최고의 매력을 줬다. 좋은 피부, 건강한 모발, 밝은 목소리 등으로 이성에게 호감을 갖게 만드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하나쯤 매력이 있다. 본인만 모르고 남은 아는 그런 매력이다. 아무것도 없다면 젊음이 매력이었다.

40대가 되면 나의 청춘 자체가 아름다웠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다.

자연은 인간이 눈먼 사랑을 하기를 원하는데, 인간은 너무나 따지려고 든다. 그래서 태어난 아이를 통해 인간을 가족이라는 제도로 구속할 수밖에 없다. 쇼펜하우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조건을 고려해서 이성적으로 선택한 결혼에는 본능에 이끌린 사랑 같은 정열이 없다.” 그러나 “성적인 매력에만 이끌려서 결혼하면 평생 후회와 탄식을 안겨 줄 반려자를 얻을 것이다.”

경제적인 조건을 보는 중매결혼이나 콩깍지에 씌인 연애결혼이나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결혼은 행복을 위한 지름길이 아니며 이혼은 불행의 종지부가 아니다.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의 분비로 유지되는 사랑의 유효기간이 18개월에서 30개월이라는 연구 결과가 있다. 젊을 때 사랑의 감정은 덧없는 것이며 결혼은 현실이라면, 가끔 연애할 때 주고받았던 편지나 문자를 보면서 연에할 때를 기억하는 것도 상대방의 소중함을 다시 확인하는 방법일 것이다.

소중한 것은 시공간을 넘어 이어진다.

◎ 22 당신의 거리를 유지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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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계

“서로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간격을 발견했다. 그것은 바로 정중함과 예의다.”

쇼펜하우어는 단 한 명의 친구도 없이 혼자 지냈다. 가족도 없었고, 조국도 없었다. 오직 애완견 아트만이 곁에 있었다. 쇼펜하우어는 아트만과 산책하는 일이 일상이었다. 이런 쇼펜하우어에 대해 니체는 저서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에서 이렇게 썼다.

“한 명의 친구가 있느냐 또는 한 명의 친구도 없느냐 하는 차이는 무한한 것.”

인간은 혼자 있기를 좋아하면서도 타인과 어울리는 것도 즐긴다. 고독과 사교성은 동전의 양면이다. 쇼펜하우어는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는 힘을 강조했다. 자족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타인으로부터 독립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같은 여러 가지 이유로 타인에 의존하며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하는 나약한 존재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고독의 끝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하려는 욕망이 있다. 쇼펜하우어는 ‘홀로서기’와 ‘함께하는 삶’ 사이의 갈등을 고슴도치의 우화를 통해 풀어낸다.

추운 날씨에 고슴도치들은 얼어 죽지 않으려고 달라붙어 하나가 되지만, 그들의 가시가 서로를 찌르는 것을 느껴 떨어진다. 그러나 추위를 견디지 못해 한 덩어리가 됐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하다 결국 상대방의 가시를 견딜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찾는다. 서로를 따뜻하게 하고 싶어 하지만 서로의 바늘 때문에 접근할 수 없었고 서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체온을 나눴다는 지혜다.

■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마라

사람은 서로 가까울수록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이 많아진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수많은 만남과 헤어짐으로 이어지는데 나도 다른 사람도 마음이 아프지 않도록 마음의 간격을 둘 필요가 있다.

쇼펜하우어의 비유처럼 사회를 이루는 인간은 어떤 이유에서든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가시’를 세운다. 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되면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즉 인간의 본성인 이기심, 시기심, 자존심 등 때문에 서로의 마음에 아픔을 주는 일이 많아진다. 가족, 연인 같은 사랑의 감정으로 맺어진 관계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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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것인가? 고슴도치의 비유처럼 인간은 가깝고 친할수록 상처를 줄 가능성이 높다. 다른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국 타인을 자신의 욕망과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자신이 바라는 모습을 강제하는 것도 폭력이 될 수 있다.

쇼펜하우어의 “상대를 공경하되 거리를 두라”라는 말은 공자가 말한 “경이원지(敬而遠之)”에 더 가깝다. 경이원지 또한 상대를 공경하면서 동시에 거리를 두라는 뜻이다.

■ 함께하기와 거리 두기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모든 사회는 희생을 요구하는데 자신의 생각이 다를수록, 개성이 강할수록 희생이 커진다. 사람을 많이 만날수록, 친구가 많을수록, 좋아하는 사람이 많을수록 접촉 범위가 커지면서 불행을 자초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이 넓어지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는 고사성어와 여기에서 유래한 우리 속담이 있다.

“불견상견절치(不見想見切齒)” “안 보면 보고 싶고 보면 이 갈린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꼭 필요한 약간 냉냉한 거리 두기를 쇼펜하우어는 ‘정중함과 예의’라고 말한다. 거리를 둘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은 비록 따뜻함의 욕망은 충분히 충족되지는 않지만 가시에 찔리는 상황은 피할 수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사회를 ‘불’에 비유했다.

“현명한 사람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불을 쬐지만, 어리석은 자는 불에 손을 집어넣고 화상을 입고는 고독이라는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불이 타고 있다고 탄식한다.”

타인을 통해 얻는 가치는 행복의 본질이 아니다. 쇼펜하우어의 말을 기억하면 좋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혼자 있을 수 없는 데서 생긴다.”

많은 인간관계로 결핍을 채우려고 하지만 인간관계는 자칫 화상을 입을 수 있다. 인간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홀로서기’와 타인과 ‘함께하기’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말을 아껴야 되고 마음에 못을 박는 일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쇼펜하우어가 말했다.

“예의는 현명함에 속하고 무례는 어리석음에 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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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 우화의 예에는 오류가 있다. 실제로 고슴도치는 상대가 찔리지 않도록 가시를 눞인다고 한다. 다른 고슴도치가 가까이 접근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할 줄 알며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서 바늘이 없는 머리를 맞대며 추위를 이겨낸다고 한다.

◎ 23 혼자 있는 법을 익혀라

■ 고독

“인간이 사교적으로 되는 것은 고독을, 고독한 상태의 자기 자신을 견딜 능력이 없어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행복의 조건을 ‘자족’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고독의 중요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쇼펜하우어는 고독과 사교성을 대립하는 것으로 본다. 지적인 능력이 클수록 혼자 지내려는 경향이 강하고 지적 능력이 떨어질수록 어울리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고독은 위대한 사람의 특성이다.

■ 홀로 있는 능력이 생겼을 때 가치 있게 살 수 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며, 나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다. 그럴수록 타인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게 기대할 일도 없고 상처받을 일도 드물다.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굳이 다른 사람과 만나 희생할 필요가 없다.

인간이 다른 사람과 만나는 이유는 고독을 견딜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독한 시간을 생산적으로 잘 활용하지 못하는 무능력, 내면의 공허, 권태감 대문이다. 이럴 때 남과 어울리는 것은 자신의 고독을 혼자 대면하기 두려워 비겁하게 피하는 것이다.

가장 가치있는 삶은 홀로 지낼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있다. 자신으로부터 도망쳐서 결국 되돌아와 만나게 되는 것은 자신의 본래 모습이다. 다른 사람과 어쩔 수 없는 관계를 줄이면 자신만의 자유와 욕구가 회복된다.

■ 온전히 혼자 있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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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인간이 성장하는 과정에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 인간은 홀로 설 수 있을 때 어른으로 더욱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아이가 젖을 떼면서 ‘공포’에서 독립하게 되듯이 고독은 각자의 자연스러운 상태가 된다. 다시 말해 고독은 인간의 본성에 맞는 본래 행복한 상태로 되돌아가게 해준다. 인간의 군집 본능은 자신의 고독에서 느끼는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

많은 사람을 만날수록 다수의 의견에 맞춰 희생하거나 눈치 볼 일이 생겨나고 마음을 툭 털어놓지 못하는 상황이 늘어난다.

오늘날 고독은 ‘솔로’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행복을 바깥에서 찾지 않고 자신의 안에서 얻기 위한 중요 덕목이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만 온전히 그 자신일 수 있다. 그러므로 고독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자유도 사랑하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다.

◎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느껴라

■ 공감

“동정심이야말로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비이기적 특성이며, 이기주의적 개인이 타자를 도우려는 것은 기적 같은 일로 찬사를 받아야 한다.”

쇼펜하우어에게 동정심은 세상 모든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낌으로써 이기심의 벽을 허물어뜨리는 것을 뜻한다.

고통은 다른 사람과 나누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이런 연민, 공감, 동정은 쇼펜하우어가 다른 사람과 교제하는 데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 인간의 양가감정

쇼펜하우어는 도덕적 관점으로 인간의 행위를 네 가지로 구분한다.

첫 번째 동기 : 이기주의

자신의 평안만을 간절히 추구하는 것이며 그 한계가 없다.

두 번째 동기 : 악의

다른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으로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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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동기 : 동정심

자기 자신이 아니라 전적으로 타인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다.

네 번째 동기 : 이름 붙여지지 않은 동기(금욕주의)

행위자 자신의 불행을 욕구한다.

이런 동기 가운데 동정적인 행동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더 큰 관심을 두는 점에서 다른 동기들과 대비된다. 타인의 불행에 대한 동정심은 자신만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를 없애버린다. 연민은 아카페적인 사랑이다. 즉 타인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과 똑같이 여기는 순수하고 비이기적인 인간 본래의 착한 마음씨다. 반면 이기주의나 악의적 행동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욕구한다.

인간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어야 하는 존재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체를 잡아 먹어야 되며 다른 사람을 이겨야만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불운의 사고에 희생당한 사람에 대해 가슴이 먹먹해지는 모순적인 존재다.

■ 사랑하지 않아도 미워하지 말 것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는 경제적인 약자에 대한 사회적인 배려를 강조한다. 그는 초기에는 자유주의 경제학을 강조하면서 시장 경제의 경쟁 원칙을 옹호한 사람인데 나중에 생각이 바뀐 것은 약자에 대한 동정심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실험이 있었다. 신행아실에서 갓 태어난 아이에게 다른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려줬더니 그 아이뿐만 아니라 모든 아기가 함께 울기 시작했다. 정작 자신의 울음소리를 녹음해서 들려주면 반응이 없었다. 이것은 타자에 대한 동정심은 타고나며, 다른 사람에게 쉽게 전이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이런 ‘측은지심’은 살아가는 데 늘 강조됐다.

동정과 연민에 대해 모든 학자가 찬성한 것은 아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팔이 안으로 굽듯이 동정심과 연민이 너무 자의적일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니체는 동정심도 이타심이 아니라 이기심의 표현이라고 비판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그것을 통해 이익을 얻으려는 약자들의 이기심이라는 것이다.

스토아학파의 학자 에픽테토스는 “너의 콧물은 너 자신이 닦아라”라면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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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을 강조했다. 콧물을 흘린 사람의 콧물을 계속 닦아주면 스스로 콧물을 닦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살기 위해서 고통을 함게 나눌 필요가 있다. 실직자, 장애인, 경제적 취약계층, 노인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동시에 역차별과 자립심을 고려해야 한다.

5장 어디에서 행복을 찾아야 하는가

- 쇼펜하우어의 인생 -

◎ 행복한 순간은 너무나 짧다

■ 만족

“행복은 결핍에서 만족으로 ‘빠른 전이’다.”

행복이 짧고 고통이 길게 느껴지는 이유는 행복이 찰나의 짧은 꿈처럼 느껴지는 반면 고통은 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를 증명하듯이 한국인의 일생이 80년이라고 할 때 평생 웃는 시간은 고작 한 달밖에 되지 않는다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하루에 웃는 시간이 90초뿐이다. 반면 걱정하고 근심하는 시간은 하루 3시간으로 조사돼 평생 10년을 걱정하며 사는 것으로 나타났다.

■ 행복은 항상 과거형이다

쇼펜하우어는 행복이란 많은 경우 결핍에서 충족으로 넘어가는 ‘짧은 순간’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결핍은 인간에게 고통이지만 충족에서 과잉으로 넘어가면 권태, 지루함의 감정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행복은 그 사이의 짧은 만족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행복은 멀고 크고 높은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 가까운 곳에 있다.

행복은 결핍이 채워졌을 때 느끼는 주관적인 만족감이다. 쇼펜하우어는 결핍에서 느껴지는 불쾌에서 만족을 느끼는 쾌감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빠른 이행’으로 봤다. 너무나 짧은 순간에 만족이 결정되기 때문에 행복과 불행의 차이는 기대보다 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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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행복이란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쾌락은 단순히 결핍을 제거하고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에 있으므로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성공, 성취, 합격 등 우리가 행복했던 순간을 되돌아보면 너무나 짧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음식을 먹을 때 첫 숟가락, 사람을 처음 만났을 때 설렘, 첫 출근 등등이 우리의 결핍을 채워서 만족으로 넘어가는 단계인데 이때가 가장 행복하다. 행복은 빨리 잊혀진다. 또 다른 결핍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무 큰 행복을 기대해선 안 된다.

■ 자신에게 알맞은 행복이 있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확행’이라는 용어가 꽤 유행한 적이 있다. 소확행은 그의 에세이 <랑게르한스 섬의 오후>에서 쓰인 말로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의 축약이다.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돼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을 뜻한다. 작지만 확실하게 실현할 수 있는 행복이나 그런 행복을 추구하는 삶의 경향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은 작은 만족에서 얻는다. 짧은 행복은 작을 수밖에 없다.

소식이 몸을 건강하게 하고 폭식이 건강을 해치듯이 ‘행복은 소소한 것’에서 찾아야 작고 짧은 행복을 즐길 수 있다. 행복은 늘 빠르게 지나가기 때문이다. 시간이나 젊음, 모든 것은 잠깐 머무르다 떠나가기 때문에 작은 쾌락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 현재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 현재

“오늘이라는 날이 단 한 번 뿐이고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는 것임을 항시

명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에 있다. 뇌과학으로 인간의

뇌가 다른 동물의 뇌보다 훨씬 크다고 밝혀졌는데, 사고력이 높은 만큼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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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많다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즐거움, 그것에 근거한 불행감과 행복감은 동물보다 훨

씬 다양하며 지속력이 강하다. 인간은 고통에 대한 감수성과 지능에 비례하여

동물과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큰 감정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 현재를 살아라

동물은 현재만을 살기 때문에 근심과 불안이 없다. 미래에 대한 걱정이나 과

거의 고통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동물이 인간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 쇼펜하우

어는 이런 장점을 동물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은 죽을 수 있는 상황을 피하려고 할 뿐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하지만, 인

간은 그런 죽음을 늘 염두에 두고 불안해한다. 인간만이 죽음을 대비하여 막연

한 두려움과 지나친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할수록 고통

의 양이 쾌락의 양을 압도하게 된다.

동물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나 기대가 없기 때문에 그것에 따른 행복이나 불

행이 없다. 인간만이 블거운 미래를 예상하고 상상력을 발휘해서 아름다운 환

상에 사로잡힌다.

감각이 무딘 동물이 현재에만 몰입하기 때문에 행복한 반면 상상력으로 만든

미래의 환영에 갇혀 사는 인간은 불행하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에만

충실하야 한다. 쇼펜하우어는 말했다.

“미래가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생각으로 급히 쫓아가는 반면 현재는 거들떠보

지도 즐기지도 않고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현재만이 진실하고 현실적

이고 확실한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늘은 단 한 번뿐’이라는 사실을 되새기며 현재를 의미로 채울 필요

가 있다.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현재 그 자체를 기분 좋게 받아들여 즐길 필

요가 있다는 것이다.

과거와 미래에 빠져있는 사람은 아무런 걱정없이 살아가는 매 순간의 가치를

모르고 지나가는 일이 많다.

쇼펜하우어는 현재의 가치를 강조했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현재만 사는 사

람을 경솔하다고 본다.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한쪽에 치우치지 않게 조절해야 한다는 점이다. 과거에 일어난 일에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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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불만이나 미래에 대한 우려 때문에 현재의 순간을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다. 우리가 인생을 가치있게 즐길 수 있는 시간은 오늘뿐이며 내일

이 오늘의 반복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 하루하루는 하나하나의 인생이다

많은 사람이 1분이 모여 60분이 되고 하루가 쌓여 1년이 된다고 생각하면서

현재는 과거와 미래로 이어지는 과정일 뿐이라고 여긴다. 시간이 마치 무한한

점으로 이뤄진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다 보니 현재에 집중하지 않고 과거의 후

회나 영광에 얽매여 살거나, 나중이 일어날 일을 생각하며 현재의 행복을 미루

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시간이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착각 때문에 생기

는 일이다. 과거와 현재, 미래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단절된 것이다. 우리는

오직 현재만을 살 뿐이다. 과거와 미래는 실재하지 않는데 마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과거는 지나가서 없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아서 없는 것인데, 오늘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 속에서 사는 것은 어리석다.

현재는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순간이다.

스티브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만일 오늘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던 일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져서 만약 노(No)라는 생각이 떠

오르면 그 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루하루를 자신의 마지막 인생으로 생각

한 것은 쇼펜하우어의 명언과 닿아 있다.

“현재를 과거처럼, 현재를 미래처럼 의식한다면 지금 이 순간을 더 가치있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2024.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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