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스승 법정스님

2024. 3. 28. 10:21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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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스승 법정스님

- 맑고 향기로운 법정 큰 스님 이야기 -

■ 정찬주 지음

0 1953 전남 보성 출생, 1983 한국문학 신인상

0 동국대 국문과, 국어교사, 월간 <불교사상> 편집자, 월간 샘터 편집자로

법정 스님의 책을 만들며 스님의 제자가 됨

0 법정 스님으로부터 무염(無染)이라는 법명을 받음

0 전남 화순 계당산 산방 이불재에서 집필에 전념

0 저서 : 성철스님 일대기 <산은 산 물은 물>, <암자로 가는 길> 전 3권,

<소설 무소유>, <이순신의 7년> 전 7권, <천강에 비친달>, <굿바이 붓다>,

<천년 후 돌아가리>, <다산의 사랑>, <선방 가는 길>, <불국 기행> 등 다수

0 행원문학상, 동국문학상, 화쟁문화대상, 류주현 문학상, 유심 작품상, 등

<작가의 말>

우리 모두가 그리운 스승 법정스님

장독대 옹기항아리 소래기 위에 쌓인 눈(雪)의 키가 점점 자라고 있다. 입춘이 지났으니 봄눈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나 쌓이는지 가끔 눈(目)이 간다. 지금 내리고 있는 봄눈은 쌀가루 같은 눈이다. 잘고 얌전하게 내리는 가랑눈이나 가늘고 성글게 내리는 포슬눈과 흡사한데,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소낙눈이나 큰 눈송이들이 흩날리듯 내리는 함박눈과는 다르다. 눈에 띄지 않게 시나브로 오솔길을 지워버리는 눈이 가랑눈이나 가루눈, 포슬눈인 것이다.

이른 봄의 가루눈이 산방 이불재 툇마루에 자꾸 쌓인다. 옛 선사는 수행하던 띳집 툇마루에 쌓인 눈을 보석같다고 말했지만 나는 자꾸 비질을 하고 있다. 얼마나 고독했으면 눈을 보고 보석이라고 했을까? 불가의 스승이신 법정스님께서는 고독할지언정 고립되지 말라고 했는데, 그 말씀의 뜻을 알 것 같다.

이번에 발간하는 산문집 제목은 <마지막 스승 법정스님>이다. 법정 스님은 우리시대, 우리 모두의 스승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왜 마지막 스승이 법정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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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이신가? 나로서는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첫 번째 스승은 사춘기 방황을 멈추게 해주신 분이 있는데 나의 아버지이시다. 두 번째 스승은 대학 시절에 고결한 문학정신을 일깨워주신 동국대 홍기삼 전 총장님이시다.

법정 스님은 내가 샘터사에 입사한 뒤에야 뵀다. 스님의 원고 편집 담당자가 되어 스님을 자주 뵙곤 하였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지 6년 만에 스님으로부터 계첩과 법명을 받고 재가제자가 되었다.

마지막 스승 법정스님에 실은 원고는 주로 신문사나 잡지사의 청탁을 받고 썼던 글들이다. 거기에다 한두 해 전 절판되다시피 한 책에서 가져온 것도 있다. 이번에야말로 스님과의 개인적인 인연과 사연을 가능한 한 모두 모아야겠다는 필요를 느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글들을 한데 묶기로 했던 것이다.

내가 <마지막 스승 법정스님>을 발간하는 이유 중 하나는 누군가의 지친 영혼에게 다가가서 문을 두드리듯 노크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문은 두드리면 열린다고 했다. 종교계마저도 미세먼지로 가득 차 있는 것 같은 오늘, 내가 전하는 법정 스님의 가르침 한 줌이 신산한 삶으로 힘겨운 독자들에게 위로와 응원이 된다면 나로서는 더 바랄 것이 없을 듯하다.

봄눈이 녹으면 머잖아 내 산방 뜰에도 청매 꽃이 필 것이다. 올해 청매 꽃 향기는 겨울 삭풍이 모질었으므로 콧속을 더욱 찌르리라. 황벽선사의 게송 한 구절이 문득 떠오른다.

추위가 한 번 뼈에 사무치지 않으면 <불시일번한철골 不是一番寒徹骨>

어찌 코를 찌르는 매화 향기를 얻을 수 있으리오

<쟁득매화박비향 爭得梅花撲鼻香>

2024. 2월 이불재에서 정찬주 합장

◎ 1부 맑고 향기로운 스님

■ 서른 네 살의 나

1984년 12월에 샘터사에 입사했다. 법정 스님 산문집을 펴내는데 동화작가 정채봉 형이 메인 편집자였고, 나는 스님의 교정을 담당한 서브 편집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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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는 스님의 산문집 <물소리 바람소리> 원고를 모으고 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산문집이 나오기 몇 달 전부터 나는 책 표지에 들어갈 문장을 뽑고 표지화가 선정 작업에 들어갔다. 발간하게 될 <물소리 바람소리> 뒤표지에 들어갈 문장을 점지해 두고 있었는데 정채봉 형이 흔쾌하게 OK 했던 기억이 난다.

물소리 바람 소리에 귀 기울여보라. 그것은 우주의 맥박이고, 세월이 흘러가는 소리이고, 우리가 살 만큼 살다가 갈 곳이 어디인가를 소리 없는 소리로 깨우쳐 줄 것이다.

이끼 낀 기와지붕 위로 열린 푸른 하늘도 한 번쯤 쳐다보라. 산마루에 걸린 구름, 숲속에 서린 안개에 눈을 줘보라. 그리고 시냇가에 가서 맑게 흐르는 시냇물에 발을 담가보라. 차고 부드러운 그 흐름을 통해 더덕더덕 끼어있는 먼지와 번뇌와 망상도 함께 말끔히 씻겨질 것이다. 물소리에 귀를 모을 일이다.

■ 스님 고향이 으디신게라우?

1985년 여름에 스님을 뵌 이후 나는 자주 불일암을 내려갔다. 처음에는 스님의 산문집 편집일로 내려갔지만 나중에는 가족들이 함께 불일암에서 휴일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자 스님의 정갈한 속뜰이 언뜻언뜻 보였다. 스님은 결코 차갑고 까칠하기만 한 분은 아니었다. 체온이 느껴지는 불일암 후박나무처럼 스님의 가슴은 따뜻했고 속정이 많으셨다.

점심공양 때가 되면 스님께서 국수를 삶아 찬 샘물에 담가 맛있는 국수요리를 하셨고, 나는 공양 뒤에 뒤치다꺼리를 하는 설거지 당번을 맡곤 했다. 스님은 국수 한 가닥도 허투루 다루시는 일이 없었다. 찬 샘물에 삶은 국수를 헹구실 때 국수 한 가닥이 바위 밑으로 떨어지자 스님은 수행자로서의 자세를 드러내셨다.

“신도가 수행 잘 하라고 내어준 국수이니 이것도 정재(淨財)가 아닌가.”

작가랍시고 글을 쓸 때 내용이 흡족하지 않다고 원고지를 함부로 찢고 버렸던 나를 뜨끔하게 했다. 국수 한 가닥이 정재, 즉 맑은 물건이듯 원고지도 나에게는 내 소중한 생각을 담아내는 정재였던 것이다.

아무튼 5,6년 동안 스님과 나 사이에는 알게 모르게 신뢰가 쌓였다. 스님의 산문집도 <물소리 바람소리>에 이어 89년에는 <턴 빈 충만>을 편집했다. 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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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에서 오탈자가 사라지자 스님은 몹시 흡족해 하셨다. 이제는 업무 출장이 아니더라도 나는 불일암에 내려가 스님의 차방에서 차를 마시며 다도(茶道)를 익히곤 했다.

스님께서 TV 출연하신 후부터 불일암에 사람들이 밀려든 것은 사실이다. ‘생각 없이 사는 무리’를 스님은 ‘골빈당’이라고 하셨다. 내가 갔을 때도 사람들이 삼삼오오 불일암으로 계속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한 중년 사내가 스님을 보고 말했다.

“스님, 텔레비전에서 봤는디 법정 스님이 아니신게라우?”

“현품 대조해 보려고 오셨군요.”

“지는 해남에서 왔그만요. 스님 고향이 으디신게라우?”

“내 고향이오? 그거 화두네요.”

스님도 태어난 고향은,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대승을 한 울돌목바다 바로 위쪽인 해남 문내면 선두리였다. 그러나 스님은 ‘부모 몸을 빌려 태어나기 이전의 나의 모습은 무엇인가?’(父母未生前 本來面目)를 생각하셨는지 ‘나의 화두’라고 말씀하시며 허허롭게 웃으셨다.

■ 삶의 신호등

1991년 6월 15일에 불일암으로 내려오라는 스님의 편지를 받은 나는 마음속으로 이제는 스님의 제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불일암을 찾았다. 이번에는 회사 일이 아닌 그야말로 내 자신을 위한 걸음걸이였다.

스님도 내가 편집한 인도 여행 산문집 <인도기행>을 발간한 뒤였으므로 하루쯤 불일암에서 쉬어가라고 나를 불렀을 터였다. 불일암에 도착한 나는 스님께 큰절을 한 뒤 작심한 바를 말씀드렸다.

“스님 법명을 받고 싶습니다.”

“지금까지 불자이면서 법명이 없었나요?”

“예, 그럴 기회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밤에 생각해 보고 내일 아침에 주겠소.”

스님은 흔쾌하게 허락하셨다. 아마도 1986년 여름부터 나를 만나 얘기해보고 내 성향을 지켜보았으므로 법명 받을 때가 됐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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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마시다 말고 스님께 어려운 부탁을 드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당돌한 태도였다.

“스님, 법명을 주시되 인생의 좌우명 같은 법명이라면 더 좋겠습니다.”

“거사님 나이가 40대 초반이지?”

“네, 스님.” “패기가 없다면 젊은이가 아니에요. 서울에 올라가서 젊은이들을 보면 삶이 힘든지 벌써부터 어깨가 쳐져있어요. 시들시들하지 말아야 해요. 젊은이답게 생기가 넘치고 풋풋해야 합니다.”

다음날 이른 아침.

나는 위채로 올라가 스님께 정식으로 삼배를 올린 뒤 봉투에 삼귀오계(三歸五戒)와 무염(無染)이라 쓰인 계첩을 받았다. 스님은 나에게 내린 법명의 뜻을 말씀해 주셨다.

“저잣거리에 살면서도 물들지 말라는 뜻에서 무염이란 법명을 지어 보았소.”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진흙탕 속에서 청정한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살라는 말씀이었다.

“살다보면 욕심 때문에 샛길로 빠질 때도 있을 것이오. 그럴 때마다 신호등 같은 계를 생각하면 발걸음이 멈추어질 것이오. 그렇소 계란 삶의 신호등 같은 것이오.”

스님과 함께 문을 열고 불일암 계단을 내려섰다. 아침 햇살이 텃밭에 쏟아지고 있었다.

1991년 6월 16일, 단옷날(음 5월 6일) 아침의 풍경이었다. 나로서는 불자로서 B.C 시대에서 A.D 시대로 넘어가는 분기점에 선 느낌이 들었다.

■ 진리는 번뇌에서 나온다

스님은 1991년 여름에 부처님의 육성이 가장 오롯하게 담긴 초기경전 <숫타니파타>에 나오는 한 구절을 붓으로 썼는데, 나와 이해인 수녀님에게 보냈다. 제가 제자인 나에게는 스님께서 화두 삼아 사색하라고 써서 보낸 것이고, 이해인 수녀님에게는 수녀님의 요청으로 쓴 붓글씨였다. ‘구름수녀님의 청으로 붓장난을 하다’라고 쓰셨기 때문에 밝혀진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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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같은 내용이지만 나와 수녀님에게 보낸 글이 조금 다른데 다음과 같다. 먼저 나에게 주신 글을 보자

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

 

이해인 수녀님에게 보낸 글은 이 글의 끝에 한 행이 더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어째서 이와 같은 차이가 있을까? 그 이유는 결혼해서 살아가는 재가자와 독신으로 수행하는 수도자의 입장을 고려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나 같은 재가자에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말은 이혼하라는 말과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위와 같은 붓글씨를 서울 샘터사에 있는 나에게 편지봉투 안에 넣어서 보내셨는데, 그해 가을에 상경하시어 “세 문장 속에 팔만대장경의 대의(大意)가 다 들어 있다”고 거듭 말씀하셨다.

그러고 보면 팔만대장경의 대의란 무엇에 전도되어 살지 말고 주체적으로 살되 당당하게, 자유롭게, 청정하게 살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스님이야말로 그렇게 사신 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스님하면 ‘무소유’를 먼저 떠올리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바로 무위진인(無位眞人), 참으로 자기답게 사셨던 ‘참사람’이 아니시었나 싶다.

아! ‘흙탕물에 더럽히지 않는 연꽃과 같이’에서 ‘연꽃은 흙탕물에서 핀다’라는 상념이 문득 가슴을 적신다. 그렇다. 흙탕물이 없다면 어떻게 연꽃이 피겠는가. 진리는 번뇌에서 나온다. 진리와 번뇌가 둘이 아닌 불이(不二)의 도리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 송광사 분원 L.A 고려사

“대원각 주인 김영한 보살께서 <무소유>를 읽고 느낀 바가 있어서 나를 찾아 왔습니다. 그의 요정 대원각을 절로 만들었으면 하는 말이 오고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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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님은 당시에는 번거로워서 마음을 내지 않았다. 스님께서 불일암 생활을 마감하고 강원도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 김영한 보살은 다시 스님을 찾아왔다. 나는 스님이 서울 상도동 약수암으로 오셨다는 전화를 받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약수암에는 감색 양복을 입은 한 사람이 보살 옆에 앉아 있었다. 그는 김영한 보살이 대원각을 기부했을 때 보살의 뜻대로 사찰 운영이 잘 되는가를 살피는 감시 역할을 할 사람이었다. 보살이 양복을 입은 사람을 소개하자마자 스님께서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한 마디 툭 던지시고는 일어섰다.

“우리나라에는 고승이 많습니다. 그러니 그분들을 찾아가 보시기 바랍니다.”

조건이 붙은 시주는 받지 않겠다는 스님의 단호한 말씀이었다. 스님께서 일어서시자 모두가 당황했다. 바람처럼 획 사라지는 스님을 붙잡을 틈도 없었다. 그런데 이후 2년이 흘렀다. 보살은 스님 말씀대로 2년 동안 전국의 고승들을 찾아다니고 나서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고승들 가운데 가장 불친절하게 자신을 대했던 법정스님께 대원각을 아무 조건 없이 시주하기로 한 결심이었다.

길상사가 개원하는 날 김영한 보살이 불단 앞으로 나왔다. 키가 작고 가녀린 보살이었지만 결코 작게 보이지 않았다. 불단 앞에 서자 법당의 무게감이 더해졌다.

“저는 배운 것이 많지 않고 죄가 많아 아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불교에 대해서는 더더구나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지만 말년에 귀한 인연으로 제가 일군 터에 절이 들어서고 마음속에 부처를 모시게 돼서 한없이 기쁩니다. 제 소망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었던 저 팔각정에 범종을 달아 힘껏 쳐보는 것입니다.”

■ 조계산 달을 보고 가시오

스님께서 강원도 오두막에 사시면서 천식이 깊어졌을 때도 해제철이 되면 반드시 불일암으로 내려오셨다. 덕(德)자 돌림의 상좌들 공부 살림살이를 점검하시기 위해 그랬다. 한편으로는 재가제자인 나의 산중생활이 궁금하시어 내 산방인 이불재로도 가정방문을 오셨다. 스님께서는 이불재 오실 때마다 늘 ‘가정방문’이라고 하셨다.

그런데 천식이 깊어지신 뒤로는 나를 불일암으로 불렀다. 이 엽서도 불일암으로 오라고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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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서 다음 주 중에 불일(佛日)에 한번 다녀올까 싶은데 그때 인연이 닿으면 한 번 만났으면 합니다.’

고질병이 된 천식 때문인지 만나자는 말씀이 강권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엽서에는 제자를 위한 자비로운 말씀이 들어 있다.

‘혼자서 지내려면 뭣보다도 자기관리가 철저해서 게으르지 않아야 합니다. 살아 있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면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나 역시 암자 같은 이불재에서 혼자 살고 있으므로 게으름을 경계하라는 경책의 말씀이다. 나는 내 집필실 벽에 호미를 걸어놓고 있는데, 그 이유는 새벽같이 논밭으로 나와 일하는 산중농부들을 보면서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자문하기 위해서다. 지금도 내 호미는 내 집필실 벽에 걸려있다.

엽서를 받은 뒤 나는 불일암으로 갔다. 스님은 병색이 완연했다. 상좌들이 위채에서 정진하고 있어서 아래채에서 차담을 했다. 그리고 다시 불일암의 유일한 토굴인 서전(西殿)으로 자리를 옮겼다. 서전 마루에 스님과 마주 앉아서 긴 법문을 들었다. 스님은 조계산자락에 달이 떠오르는 광경을 얘기하셨다.

“무염거사, 조계산 달을 보고 가시오.”

“스님 이불재에도 달이 뜹니다.”

“아 그렇지 거기도 달이 뜨지.”

스님과 함께 조계산 달을 보지 못한 것이 내내 후회스럽다. 이후 길상사 봄 집회 때 신도들과 함께 법문을 들었지만 서전에서 뵌 것이 스님과의 마지막 독대 친견이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서전이라는 편액이 보이는 사진을 볼 때마다 ‘무염거사, 조계산 달을 보고 가시오.’라는 말씀이 귓전을 때린다.

■ 명산에는 좋은 차가 있고

스님께서 책의 추천서를 쓴 예는 아주 드물다. 내가 알기로는 내 경전 소설 <소설 유마경>과 성철 스님의 일대기 장편소설 <산은 산 물은 물>만 추천서를 쓰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이 또한 스님의 각별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재가 제자가 쓴 소설이 독자들에게 사랑받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추천사를 보내주셨을 것이다. <암자로 가는 길>은 스님께서 어느 중앙 일간지 기자와 인터뷰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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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고 있는 책’이라고 소개한 덕분에 그 다음날 출판사로 수백 권의 책이 주문 들어왔다고 들은 바 있다.

나는 엽서를 받고 나서 크게 안도했다. 스님을 괴롭히던 천식의 고통에서 벗어나신 것 같아서다.

그런데 스님께서 입적하실 때까지 사실은 천식이 말끔히 가시지 않았다고 한다. 의사의 소견에 의하면 스님께서는 특이하게도 자작나무 알레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껍질이 허연 자작나무는 스님께서 머무르시는 오두막 수류산방 부근에 유독 많았던 것이다.

한편 내가 보내준 차를 스님께서 혹평을 하시어 죄송했던 기억이 새롭다. 수제차는 차가 모두 같지 않은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가마솥 불이 강하면 구수하기는커녕 탄내가 나고, 불이 약하면 비린내가 나기 때문이다.

‘보내준 차는 잘 공양하였습니다. 그런데 호남지방에서 마실 만한 차로 내세우기는 미진한 듯합니다. 한국 제다에서 나오는 차 중에서 좋은 차가 더러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기호 차이이겠지만 좋은 차는 드러납니다.’

스님께서는 차를 마시고 나서 기분이 홀가분해지면 중국 당나라의 다인(茶人)이었던 노동이 지은 <칠완다가(七椀茶歌)>를 빠르게 읊조리셨다. 스님께서 <일곱 잔의 차 노래>로 의역하셨는데 그대로 옮겨본다.

차 한 잔을 마시니 목과 입을 축여주고

두 잔을 마시니 외롭지 않고

세 잔째엔 가슴이 열리고

네 잔은 가벼운 땀이 나 기분이 상쾌해지고

다섯 잔은 정신이 맑아지고

여섯 잔은 신선과 통하여

일곱 잔엔 옆 겨드랑이에서 맑은 바람이 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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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부 마지막 스승 법정스님

1장 불일암은 법정 스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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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나무와 억새의 전언

불일암으로 가는 들머리다. 직립한 삼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아침 햇살이 어른거리는 삼나무 숲은 사원처럼 경건하고 엄숙하다. 삼나무들이 수행자와 같이 꼿꼿하게 기도하고 있는 모습이다. 무서리에 젖은 칼칼한 잎사귀들이 영혼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침묵의 소리 없는 소리는 ‘귀속의 귀’로 새겨들어야 한다.

삼나무들은 살아 있는 동안 결코 드러눕는 법이 없다. 뿌리는 현실의 땅에, 머리는 광대무변한 허공에 두고 산다. 구도의 길을 홀로 가는 개결한 수행자와 같다.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삼나무를 껴안는다. 나무와 소통하려면 두 팔로 지그시 안아보아야 한다. 삼나무의 맑은 침묵과 풋풋한 기운이 온몸에 전해진다. 비로소 나는 불일암의 들머리에 들어서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삼나무의 숲길은 짧지만 푸른 그늘의 여운은 길다. 산허리에 난 가파른 산길을 오르는 동안에도 합장한 모습의 삼나무들이 눈에 밟힌다. 자꾸 돌아봐진다. 그러나 산길을 타고 한 구비 돌면 또다시 산자락에 숲이 된 삼나무 무리가 나타난다. 광원암과 불일암으로 가는 갈라지는 지점에서다.

문득, 2010년 봄에 입적하신 법정스님 말씀이 저만큼 날아가는 산새처럼 스친다. 스님은 산길을 오르내리며 억새들을 유심히 보았던 것이 분명하다. 이십여 년 전 초여름에 스님을 찾아 왔던 때라고 기억된다. “저 마른 어미 억새를 좀 봐요. 푸른 새끼억새가 다 자랄 때까지 버팀목이 되어 주다가 쓰러져요. 푸른 억새들 사이에서 누렇게 마른 것들이 어미 억새지요.”

■ 사람과 짐승의 차이는 무엇인가?

돌이켜보니 나와 불교와의 인연은 19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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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에 반독재투쟁 시위가 잦을 때였다. 나의 모교 동국대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때 나는 치약, 칫솔 하나, 수건 한 장 든 가방을 달랑 들고 바람처럼 쌍봉사를 찾곤 했다.

그때의 쌍봉사는 내게 일종의 피난처였다. 에라, 모르겠다. 소설 습작이나 하자고 내려갔던 곳이 쌍봉사였다. 쌍봉사는 복잡한 내 영혼은 정화시켜 주었다.

 

나는 소설 습작 대신 낙엽을 쓸고, 법당에 낀 먼지를 닦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준 당시 스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뿐이었다.

절을 떠나기 며칠 전이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그날도 나는 스님이 출타해 버리고 없어 무엇을 할까 궁리하다가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대웅전에 낀 먼지를 좀 더 구석구석 닦아내기로 하였다. 그래서 오른 곳이 3층 목탑 형식인 대웅전의 불단이었다. 연화좌대에 오르고 보니 부처님한테도 먼지가 많이 끼어있었다. 나는 마른걸레로 내 손금과 엇비슷한 부처님 손바닥까지 닦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나는 전율하고 말았다. 부처님이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것은 고교시절 교과서에서 배운 석굴암의 자비로운 미소가 아니라, 내가 도달할 수 없는 높은 차원의 경지였다.

이후부터 나는 불교적인 깨달음을 체험한 것처럼 불평 없이 절 생활을 할 수 있었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송광사 서울 포교당인 법련사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난 구산 방장 스님은 20대 중반의 우리들을 특유의 천진한 미소로 맞아주셨다. 그날 방장 스님께서는 무슨 연유인지 내게만 질문하셨다.

친견이 끝나고 나서도 법련사 현관까지 따라오시며 “출가해서 깨달아보게.” 하고 내 출가를 권유하셨다.

세월이 흘러도 구산 방장 스님의 곡진한 말씀은 잊히지 않았다. 상명사대부여고에서 국어교사로 있을 때 조계종 총무원에서 월간 <불교사상>을 창간한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나는 쌍봉사에 진 빚은 갚는다는 마음으로 학교에 사표를 내고 불교 사상사로 갔다.

■ 물 흐르듯 꽃 피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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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길상사로 찾아가 법문을 들었다.

“직장을 꼭 그만두고 싶은가. ‘다니고 싶은 마음’과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반반이라면 그냥 다니는 것이 좋아요. 그러나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단 1퍼센트라도 더 간절하다면 직장을 떠나시오. 무슨 일을 하다가 절망하였을 때 그 1퍼센트가 극복의 에너지가 될 것이오. 또한 10여 년 직장 생활을 하였다면 이제야말로 자신을 위해 새롭게 변화를 줄 때가 되었어요. 사람도 한 곳에 머물러 타성에 젖기보다는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 좋아요.”

대나무 그림자가 섬돌을 쓸어도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뚫어도 물에는 흔적 하나 없네

죽영소계진부동 竹影掃階塵不動 월천담저수무흔 月穿潭底水無痕

법정스님이 즐겨 읊조리던 남송시대의 선승 야보 도천(冶父 道川)의 시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이는 대나무 그림자처럼 무엇에 집착하지 말고 달빛처럼 자신의 발자국에 연연하지 말고 살라는 가르침이다.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순정하게 살고, 여기서 나누는 삶을 한 몸인 듯 열자. 내일이라는 시간은 미리 손짓하는 헛꽃일 뿐이고, 여기가 아닌 저기라는 공간은 가설무대 같은 것이다.’

■ 나를 만나러 가는 길

불일암은 내게 맑은 거울이다. 불일암으로 가는 것은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나만 고집하는 ‘거짓 나’를 떠나 남을 배려하는 ‘본래의 나’를 돌아보게 한다. 나를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암자가 텅 비어 있어도 좋다. 봄날 아래채 툇마루에 앉아서 목욕소 뒤편에서 꽃비를 뿌리는 산벚나무를 바라보는 것만도 행복하다. 겨울의 들머리에 선 지금은 감나무 가지에 매달린 붉은 감들이 단풍보다 더 곱다.

봉은사 다래헌에 사시던 법정스님이 증오와 갈등으로 허덕이는 도시 생활을 접고 이 산자락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냈던 것도 때마침 활짝 핀 산벚나무 꽃의 순수에 끌려서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산길이 끝나는 곳에 암자가 있게 마련이다. 찬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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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는 자리가 있다. 어디 가파른 산길 끝만 그러하리. 모든 인생길이 그러하지 않을까? 삶의 길이 막혀 눈앞이 캄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생의 기쁨이 사라졌을 때에도 절망스러운 바로 그 자리에 희망이 숨어 있는 법이다. 막다른 길에서도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보면 거기에 또 다란 길과 ’본래의 나‘가 있음이다.

■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스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는 불일암 가는 이유가 하나 더 추가됐다. 불일암 가는 것은 스님을 뵈러 가는 길이다. 스님께서는 입적하시기 전에 병문안 온 속가 누이가 “스님, 이제 어디에 계시겠습니까?” 하고 묻자, 나를 보려거든 불일암이나 길상사로 오라고 했던 것이다. 굳이 환생까지 들먹일 필요가 없으리라. 스님이 남긴 말씀과 무소유한 흔적이 불일암 곳곳에 침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아래채 처마에 걸린 ‘태풍의 대변인’이라고 불리던 풍경은 변함없이 묵언(默言) 중이다. 저 풍경이 ‘태풍의 대변인’으로 임명된 사연을 누가 알까? 어느 해 가을, 나는 스님의 원고 뭉치를 들고 불일암으로 내려갔다. 스님은 나를 보자마자 지난여름 겪었던 태풍 이야기를 하셨다.

툇마루에 두었던 종이박스가 강풍에 날아가며 신문지가 사방에 흩어졌다. 대나무들이 꺾일 듯 우우우 하고 소리를 질렀다. 아래채 수채가 막혀 나갔다가 우산만 날려버리고 돌아왔다. 밤이 돼서는 누전으로 전깃불마저 꺼졌다. 스님은 자연의 위력 앞에 초라한 자신을 실감했다.

나는 스님의 태풍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으로 강한 바람에도 소리를 잘 내지않는 풍경을 하나 물색하기로 했다. 서울로 올라온 나는 며칠 뒤 인사동의 금속 공예방을 찾아가 주인이 손수 망치로 두들겨 만든 방짜 풍경 하나를 주문했다.

그때 스님은 원래부터 위채에 달렸던 ‘미풍의 대변인’ 풍경 대신, 내가 가지고 간 풍경을 바로 다시더니 ‘태풍의 대변인’이라고 명명하셨던 것이다.

위채에 오르니 스님께서 산중을 떠도는 고독을 위해 만드신 듯한 굴참나무 ‘빠삐용 의자’도 그대로 안녕하고, 보살나무라고 불리던 후박나무도 중년의 허리처럼 굵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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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뜰은 평수가 없다

스님은 얼굴과 손발을 씻는 양은 세숫대야도 구분해 사용할 만큼 당신 자신의 질서에는 엄했으나 형편이 어려운 고학생이나 이웃에게는 몰래 눈물을 흘리셨던 것이다. 어려운 학생을 도울 때는 종교를 따지지 않았다. 실제로 스님에게 가장 오랫동안 후원을 받은 학생은 천주교 신자였다. 그 학생이 스님을 찾아와 죄송스럽다고 말했을 때도, 어느 학생이 스님의 책을 읽고 감동하여 개종하겠다고 말했을 때도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봐요, 젊은이, 사람들이 청국장을 좋아하기도 하고 김치찌개를 좋아하기도 하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에요. 천주님의 사랑이나 부처님의 자비는 풀어보면 한보따리 안에 있으니 그대로 영세를 받은 종교를 열심히 믿으세요. 종교를 갖지 않는 사람보다 더 잘살아야 해요. 못하면 믿지 않는 것보다 못하니까. 사람을 갈라놓는 종교는 좋은 종교가 아니지요. 그것은 인간을 위한 종교가 될 수 없지요.”

후박나무 낙엽은 바람에 굴러가면서 사람 발자국 소리를 낸다. 오동나무의 가벼운 낙엽과 다르다. 오동나무의 낙엽은 스산한 소리가 날 뿐이고, 굴참나무 낙엽 떼는 일시에 뒹굴면서 파도소리를 낸다.

중년 부부가 올라와 스님이 굴참나무로 만든 ‘빠삐용 의자’에 서로 교대하면서 앉는다. 그러나 나는 ‘빠삐용 의자’가 법정 스님의 분신 같아서 눈길만 주고 만다.

불일암은 내게 한 권의 시집(詩集)이자 교과서다. 나를 아름답게 담금질하기 때문이다. 암자는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라’고 한다. 집착과 욕심이 과해진 나에게 붉은 경고등을 켜준다. 그러니 불일암 가는 것은 집착과 욕심의 몸무게를 줄이러 가는 길이다. 불일암의 작고 맑은 모습들을 무심코 바라보는 동안 집착과 욕심의 몸무게가 부쩍 줄어 있음을 깨닫는다.

■ 무소유는 나눔이다

법정 스님은 일찍부터 당신 방식대로 ‘나눔’을 아무도 모르게 하셨다. 그게 스님이 원했던 흔적 없는 ‘나눔’이었다. ‘나눔’이 없는 무소유는 허망한 주장에 불과한 것인지 모른다. 법정스님이 진정 바라셨던 뜻은 무소유하면서 나눔의 삶을 이루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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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스님이 무소유의 삶을 사셨던 것은 나눔의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에서였다. 나눔은 스님에게 있어서 자비와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이었으니까, 자비와 사랑은 본래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사람의 길이었으니까.

내가 샘터사에 다닐 때 스님 산문집의 판매 수익은 샘터사 전체 수입의 3분의 1 정도나 되었다. 그러니 산문집의 판매 수익으로 샘터사 직원들이 월급을 받는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었다. 스님께도 그때그때 적잖은 인세를 보내드렸다. 그때 나는 스님께서 어디에 인세를 쓰시는지 관심도 없었다.

이후 출판관계로 스님을 뵌 지 10여 년이 지난 뒤였다. 그러니까 1993년 봄에야 스님께서 인세수입을 어려운 고학생들에게 나누어 주고 계신 것을 알았다. 어느 해 소득세 세금이 너무 많이 나와 세무서에 문의했더니 그동안 지급했던 장학금 영수증을 가져오라고 한다며 난감해하셨다. 정부에서 금융 실명제를 실시하지 않았더라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물론 스님께서 입적한 뒤에는 스님의 학비를 받아 외국 유학을 가고,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이 끝내 함구했을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스님의 통장 잔고는 늘 강진의 다산 유배지나, 추사 유배지가 있는 제주도 가는 여행 경비 정도였다. 입적하기 전에 제자들의 강권으로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는 정작 밀린 입원비를 내지 못할 정도로 궁했다. 평생의 인세 수입을 학비가 없어 고통받는 고학생들에게 다 나누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 스님 그립습니다

스님께서 입적하시기 직전이었다. 정확하게 정오가 조금 지나서였다. 서울의 H 신문사에서 내가 사는 남도 산중으로 전화가 왔다.

“H 신문사 문화부 아무개 기자입니다. 법정스님 추도사를 오늘 오후 5시까지 써 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으므로 긴 호흡으로 진정하고 난 뒤에야 그 기자에게 되물었다.

“스님께서 입적하셨습니까?”

“병원에서 길상사로 차들이 이동하는 걸 보니 곧 입적하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미리 원고를 받아두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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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전화를 받지 않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스님의 제자로서 미리 추도사를 쓴다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입니다.”

오후 1시 51분이 되자 전화벨이 다시 울렸다. 스님께서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아주 사실적으로 전하는 기자의 목소리였다. 눈앞이 막막했지만 의자에서 일어나 서재에 마련된 불단의 부처님께 향을 사르고 합장했다. 그러고서 한참 지나자 스님의 일생이, 내가 알고 있는 스님의 출가 전후의 삶이 언뜻언뜻 머릿속을 스쳤다.

스님의 일생을 두서없이 떠올려본 뒤 나는 추도사를 쓰기 시작했다. 절제할 수 없을 만큼 얼굴이 상기되었지만 형용사를 버리고 뼈와 같은 명사와 동사만으로 다음과 같이 써내려갔다.

눈앞이 막막합니다. 무엇이 바빠 스님께서 좋아하시는 연둣빛 봄날을 마다하시고 가십니까? 영혼의 모음 같다던 뻐꾸기 소리를 더 듣지 않으시고 가십니까. 스님의 속가 외사촌 조카인 현장스님께서 전화를 주셨습니다. 스님을 길상사로 모시고 있으니 상경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장스님도 목이 메고 저도 목이 멨습니다. 잠시 후 스님은 이승의 옷을 벗고 내생의 새 옷을 입으셨습니다.

스님.

찻물 올리고 향을 사르며 스님의 명복을 빕니다. 죽음은 생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의 시작이라는 스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스님께서 ‘온몸으로 살고 온몸으로 죽어라’라는 어느 중국 선사의 말씀을 참 좋아하셨습니다. 스님의 일생이 그러합니다.

스님은 초등학교 때 등대지기가 되겠다는 꿈도 꾸어보고, 청년기에는 인간실존에 대해 괴로워합니다. 동족끼리 피 흘린 한국전쟁은 스님을 더욱 고통스럽게 합니다. 세속은 스님이 살아야 하는 번지수가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출가하여 효봉선사의 제자가 됩니다. 해인사 선방 시절에는 한 아주머니가 장경각의 고려대장경판을 ‘빨래판 같은 것’이라고 말하여 스님은 한글 역경의 중요성을 절감합니다. 이후 강원을 마치고 운허스님을 도와 <불교사전>을 편찬합니다. 그 인연으로 서울에 올라와 봉은사 다래헌에서 사십니다.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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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학>에 <무소유>를 발표하시어 문명을 떨치기도 하고, 장준하, 함석헌 선생 등과 반독재투쟁에도 간여합니다.

인혁당사건은 스님을 몇 달 동안 잠 못 이루게 합니다. 한 무리의 젊은이가 죄없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만행을 보면서 증오심과 적개심을 품습니다. 그러면서도 수행자로서 깊이 자책합니다. 어떤 운동도 인격 형성의 길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스님은 송광사로 내려가 불일암을 짓고 탕 빈 충만의 시절을 보냅니다. 그러나 불일암마저 번다해지자 강원도 산중 오두막으로 정진하시는 한편,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 도량인 길상사를 창건하시어 가난하고 힘든 이들의 의지처가 되게 하였습니다.

스님.

저는 스님의 내면을 조금 보았습니다. 스님께서는 영화 <서편제>를 조조로 보시면서 많은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스님께서는 소년기부터 감내할 수 없을 정도의 고독을 견디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 고독을 거름 삼아 깨달음의 꽃을 피우신 분입니다. 중학교 때 납부금을 내지 못하여 울면서 배를 타고 목포로 갔던 스님, 진도 쌍계사로 수학여행을 가서 절을 떠나기 아쉬워 울었던 스님, 효봉스님을 시봉할 때 고방 호롱불로 <주홍글씨>를 읽다가 야단맞고 유난히 좋아했던 책을 아궁이에 태워버렸던 스님.

사람들은 더러 스님을 수필 쓰는 문인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스님에게 글은 세상과 소통하는 수단이었을 뿐이라고 여깁니다. 세상 사람들은 스님께서 하루에 한두 시간 글 쓰고 나머지 모든 시간을 수행자로서 정진했다는 것을 모릅니다. 관념적이고 맹목적인 선(禪)을 거부하시고 선방 울타리를 벗어나 ‘내 손발이 상좌’라며 홀로 수행하셨다는 것을 모릅니다. 스님이야말로 한국의 수행자가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말없이 보여준 분이라고 믿습니다. 스님께서 보여준 맑은 모습 속에 한국 불교가 다시 태어나는 길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스님.

저는 스님의 부끄러운 제자입니다. 다만, 스님께서 원하시는 제자의 모습을 보여 스님의 가시는 발걸음이 가볍도록 발원하겠습니다. 그것이 스님을 떠나보내는 제자들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스님께서 40대에 미리 써놓았던 유서 한 대목을 읽으며 기도하겠습니다. 스님께서는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 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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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를 더 사랑하고 출가 사문이 되어 못다 한 일들을 하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스님! 가시는 발걸음 부디 가벼우소서. <화엄경>의 선재동자도 만나시고, 어린왕자가 사는 별나라에 가시어 원을 이루소서. 한반도에 다시 오시어 못다 한 일들 이루소서. 정찬주 합장.

 

H신문사 문화부에 추도사 원고를 보내고 난 사흘 뒤였을 것이다. 송광사 다비장에서 편백나무 향기 같은 맑고 향기로운 법향을 남긴 채 스님의 육신은 마침내 시간과 공간을 버렸고, 나는 산방으로 돌아와 사립문을 걸고는 스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소설 무소유> 집필에 들어갔다.

문득 후회되는 일 하나가 가슴에 사무친다. 병이 깊어져 몹시 수척해진 스님께서 불일암 달을 보고 내려가라 하셨는데도 내가 밤눈이 어두운 탓에 해 떨어지기 전에 산방으로 돌아오고 만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밤눈뿐 아니라 마음눈도 어두운 나다. 그날이 불일암에서 스님을 마지막으로 뵙는 날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스님 뵙고 싶슴니다.

◎ 2장 스님의 가정방문

■ 마지막 봄 말씀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도 느끼는 자의 것이라 했다. 법정스님의 수많은 법문 중에 내 가슴을 적신 말씀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돌아가시기 전에 길상사에서 하신 ‘마지막 봄 말씀’이 아닐까 싶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일듯 홀연히 생각나는 말씀이다.

“눈부신 봄날입니다. 다시 만나 다행입니다. 언젠가 내가 이 자리를 비우게 될 것입니다.”

그날 스님은 대중과 이별할 날을 예감한 듯 말씀을 이어가셨다.

나는 무엇보다도 스님의 첫마디에 전율하고 있었다.

‘눈부신 봄날입니다. 다시 만나 다행입니다.’

이보다 명징한 표현이 어디 있을까?

중학교 2학년 때 톨스토이의 <인생독본>을 읽은 적이 있다. 4백 쪽 정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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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으로 그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 구절이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은 지금 이 순간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은 이 순간에 만나는 사람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이 순간 만나는 사람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푸는 일이다.

“길상사에 연등이 너무 많이 걸려있어 꽃과 잎을 볼 수 없습니다. 저마다 독특한 기량을 뽐내는 꽃이 피기에 비로소 봄인 것이지, 봄이라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닙니다.”

법정 스님은 연등이 너무 많이 걸려있으니 꽃과 앞을 볼 수 없다고 이같이 나무라셨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등을 단다고 하더라도 자연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가릴 정도면 한낱 욕심에 지나지 않을 수 있으니 경계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연등 하나라도 더 걸어놓으려 하는 것이 요사이 절의 모습이다. 세상의 어둠을 밝힌다는 연등에도 차등이 있어, 거는 자리에 따라 가격이 다르다. 어딘지 앞뒤가 맞지 않다는 느낌이다.

그날 길상사 법당에서 스님의 마지막 말씀이 된 법문의 요지는 생각의 덧없음이었다.

“봄날은 갑니다. 덧없이 갑니다. 거룩한 침묵을 통해서 듣기 바랍니다.”

봄날이 어떻게 오는지 남의 지식에 의지하지 말고 각자가 봄소식을 느껴보라는 말씀이 아닌가 싶다. 덧없는 생이니 오히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는 반어법의 가르침이다. 스님이 남기신 화두라는 생각이 든다. 꽃피는 봄날이 기다려지는 추운 겨울이다.

■ 스님의 가정방문

마당가 연못에 수련꽃이 피어있던 한여름이었다. 법정스님께서 예고 없이 전화를 주셨다. 내일 내가 산방으로 ‘가정방문 갈 것이니 외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법정스님의 방문은 비록 내가 불가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학창 시절의 가정방문과는 달랐다. 스님은 내가 우린 차를 마시면서 나에게 주로 격려를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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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생활을 하면서 저절로 육식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씀드리자 ‘말할 수 없이 좋은 변화’라고 하셨고, 서울에서 만났을 때보다 내가 훨씬 건강해 보인다고 하시며 ‘사람이 자연에서 멀어지면 병원이 가까워진다’고 덧붙이셨다.

스님이 산방에 남기신 또 하나의 흔적이 있다. 스님께서 주신 내 법명인 ‘무염’을 집어넣어 ‘무염산방’이라고 써주신 현판 글씨이다. 스님은 낙관 찍는 것은 자기 글씨를 자랑하는 것이라며 낙관을 찍어주지 않았다. 다만 방에 걸어 둘 글씨라면 낙관을 찍어주시겠다며 한 점을 더 주셨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스님의 친필 글씨 두 점을 보관하고 있다. 낙관이 없는 현판 글씨를 볼 때마다 자기 규율을 철저하게 지켜갔던 생전의 스님을 대하는 것 같아 어영부영 흐트려지려는 나 자신을 바로잡곤 한다.

사람들은 낙관이 있어야 글씨의 가치를 보장 받는다고 하는데, 나는 그 반대다. 낙관이 없으므로 나에게는 더 보배가 된 것 같다. 내 산방을 찾아오셨던 스님의 가정방문이 오늘따라 사뭇 그립다.

■ 대통령의 초대

어느 해 7월 중순이었다. 갑자기 법정 스님께서 부르셨다. 스님은 나를 보자마자 대뜸 비원에 함께 가자고 하셨다. 마침 밖에 비가 내리고 있어 우산을 챙겨들고 나섰다. 스님과 나는 해설하는 인솔자에게 자율관람을 하게 해 달라고 양해를 구했다. 대신 정해주는 시간까지 나오겠다고 약속했다. 인솔자는 스님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자유 관람을 허락했다. 스님과 나는 일반 관람객들의 무리를 떠나 부용지로 가는 길로 곧장 떠났다.

부용지 한쪽에는 부용정이라는 단아한 정자도 있었다. 아마도 조선시대 왕족들이 부용지의 연꽃을 감상하기 위해 지은 정자인 듯 싶었다. 그러나 부용지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연꽃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독립기념관과 마찬가지로 여기도 관리자가 연꽃을 뽑아내 버렸음이 분명했다.

며칠 뒤 스님께서는 한 일간지에 <연못에 연꽃이 없더라>라는 칼럼을 발표하셨다. 칼럼의 뒷부분만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비원에는 연꽃의 다른 이름인 부용에서 따온 부용정과 부용지가 있지만 연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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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볼 수 없었다. 불교에 대한 박해가 말할 수 없이 심했던 조선왕조 때 심어서 가꾸어 온 꽃이 자유민주주의 체제 아래서 뽑혀 나간 이 연꽃의 수난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꽃에게 물어보라. 꽃이 어떤 종교에 예속된 예속물인가> 불교 경전에서 연꽃을 비유로 드는 것은 어지럽고 흐린 세상에 살면서도 거기 물들지 말라는 뜻에서다. 불교 신자들은 연꽃보다 오히려 백합이나 장미꽃을 더 많이 불전에 공양하고 있는 실정이다. 아, 연못에 연꽃을 볼 수 없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칼럼이 나간 뒤 스님께서 또 서울에 올라오시어 ‘맑고 향기롭게 사무실로 나를 불렀다. 대통령이 공무원을 보내 ’연못에 다시 연꽃을 심도록 조치했다고 전하면서, 스님을 청와대로 초청하려 했지만 사양했다고 말씀하셨다.

스님은 심지어 조계종 총무원도 피해 다니셨다.

나도 나이를 먹으니 당시 스님께서 어째서 그러셨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수행자 집단에도 이른바 권승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처님도, 주변의 무리가 향기롭지 않을 때는 함께하지 말고 차라리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고 하셨다.

■ 스님의 모국어 사랑

법정 스님이 40대에 미리 써놓았던 유서의 한 부분이다. 스님께서는 내생에도 다시 한반도에 태어나 모국어를 더 사랑하고 출가 사문이 되어 못다 한 일들을 하고 싶다는 말씀을 남기셨다. 유서의 일부에 불과하지만 모국어란 살가운 말이 오늘 내 가슴에 꽂힌다.

샘터사에 입사했을 때 편집 주간이었던 분이 “스님의 두 번째 수필집 제목을 입석자로 할 뻔 했어요”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처음에 스님께서 지은 제목인 ‘입석자’를 출판사에서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바꾸어 제시하자, 흔쾌히 받아들이셨다는 것이다. 아마도 이때부터 스님께서 우리말에 대한 관심을 더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후 스님의 책은 실무담당자인 내가 불일암을 오가면서 주로 펴냈다. <텅 빈 충만>, <버리고 떠나기>, <물소리 바람소리>,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 <말과 침묵>,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등등이다. <텅 빈 충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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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가의 용어인 진공묘유를 우리말로 푼 것이다. 참으로 비었는데 묘하게도 가득 차 있음이 진공 묘유의 뜻이다. <버리고 떠나기>라는 제목도 마찬가지다. 구름처럼 물처럼 떠돈다고 하여 수행자를 운수납자라고 하지 않는가. <물소리 바람소리>도 자연의 무정 설법을 편하고 쉬운 우리말로 환치한 것이다. <새들이 떠나간 숲은 적막하다>는 인간의 탐욕으로 인한 자연의 훼손을 경고한 제목이고 다만 잠지 <샘터>의 <산방한담> 꼭지에 연재되었던 원고를 책으로 묶었을 때 스님의 동의 없이 제목을 바꿀 수 없는 경우였기에 그대로 <산방한담>이라는 제목으로 발간했는데, 독자들의 반응이 크게 떨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책 내용은 스님의 다른 산문집과 비교해 봤을 때 별로 차이가 나지 않지만, 제목이 한자로 지어졌기 때문에 독자들이 어려워한 것 같다고 서점 관리 직원은 진단했다.

스님께서 언젠가 내게 말씀하셨다. “무염거사, 박경리 씨가 <토지>에 경상도 사투리를 써서 실감나게 한 것처럼 무염거사도 전라도 사투리로 써봐요.” 그때까지 습관적으로 표준말만 구사하여 집필해온 나에게 스님의 권유는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 주었다. 결국 나는 정약용의 유배 생활을 그린 장편소설 <다산의 사랑>, 영웅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그린 대하소설 <이순신의 7년>에 전라도 사투리는 물론이고 충청도 경상도 사투리를 사용하면서 토속어가 얼마나 힘 있고 정겨운지를 새삼 깨달았다.

■ 무소유를 소유하려는 세상

법정스님이 입적하신 뒤 스님의 흔적이 묻은 물건들을 헤아려보니 꽤 되었다. 인도나 미국에서 띄우신 엽서, 간디 기념관에서 사 오신 원숭이 상, 강원도 오두막 사시면서 ‘천식 때문에 걱정을 끼쳐 죄송합니다’라고 적어 보내신 편지까지, 가장 애틋했던 기억은 스님께서 겨울 내의를 보내주셔서, 살아계실 적 아버지께 드린 일이다. 아마도 내의를 여러 벌 선물 받아 당신의 필요에 넘치는 것들을 정리하셨을 것이다. 스님은 무엇이든 하나만 소유하셨다.

“차를 즐겨 마시기 때문인지 다기를 좋아하지요. 그런데 누가 다기 세트를 또 선물해서 두 벌이 됐어요. 두 벌을 갖고 보니 한 벌 가지고 있을 때보다 살뜰하고 고마움이 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선물한 이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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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세트 한 벌은 다른 이에게 주어 버렸지요.”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것만 소유함으로써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홀가분해지자는 것이 ‘무소유’의 요지였다. 그런데 스님이 입적하시고 나자, 스님의 책 <무소유>가 경매에 나와 놀랄만한 금액으로 거래됐다.

<무소유>를 가지려는 소유의 광풍은 이제 잦아든 것 같다. 돌이켜보면 씁쓸함을 감출 수 없다.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이 담긴 <무소유>가 소유의 대상이 되었으니까. 사람들은 왜 <무소유>를 소유하고 싶어 했던 것일까? 가지고 싶어 하는 것과 읽고 싶어 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그러한 심리상태는 무엇일까? 스님은 현대인들의 소유지향적인 마음이 <무소유>에서 위안을 받았으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스님은 ‘베푼다’는 말보다 ‘나눈다’라는 말을 즐겨 쓰셨다. 베푼다는 것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주는 행위이고, 나눈다는 것은 잠시 맡아 지닌 것을 되돌려주는 행위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말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르다. 베풂은 상하 관계이고, 나눔은 수평관계이다. 그리고 돌려준다는 것은 상하나 수평이 아닌 인연을 따르는 수연행이다. 우주적 관계라고나 할까?

■ 입과 눈과 귀

그리스 여행 중에 있었던 일이다. 아테네 시의 아크로폴리스에 올라가 에레크테이온 신전과 파르테논 신전의 거대한 돌기둥과 조각된 문양들을 보고 탄복하는 데 나는 좀 무덤덤하게 감상했다. 석질이 무른 대리석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석조물처럼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었다. 화순 쌍봉사의 철감선사 부도나 경주 불국사의 다보탑처럼 화강암을 도자기 진흙 주무르듯 했다면 나 역시 감탄했을 것이다.

법정 스님이 인도를 여행하시고 돌아와 내게 선물한 기념품은 세 마리 원숭이 상이었다. 스님께서 뉴델리에 있는 간디 기념관에 들렀을 때 생전의 간디가 애지중지했다는 세 마리 원숭이 상을 보신 모양이었다.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 때문에, 모조품임에도 방문객들에게 인기 있는 기념품이라고 말씀하셨다.

원숭이가 손으로 입을 가린 것은 나쁜 말을 하지 말고, 눈을 가린 것은 나쁜 것을 보지 말고, 귀를 가린 것은 나쁜 소리를 듣지 말라는 뜻이라고 설명하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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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바꿔 말하면 입은 좋은 말을 하라고 있고, 눈은 좋은 대상을 보라고 있으며, 귀는 좋은 소리를 들으라고 있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 여러 사람에게 갈 행복

삼청동 법련사는 법정스님이 서울에 오실 때마다 머무르던 절이었다. 스님은 민폐라며 절대로 신도 집에 머물지 않았다.

어느 날, 스님께서 프랑스 파리에 길상사를 창건하려고 동분서주하실 때였다. 나는 스님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법련사로 갔다. 조그만 방에 스님과 함께 여장부 같은 분위기의 여성이 앉아 있었다. 스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고 계셨다.

“파리에 가보니 절이 하나도 없어요. 유학생도 많고 교포도 제법 되는데 마음을 의지할 절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절을 하나 짓기로 하고 유럽의 수도원을 돌아봤어요.”

스님께서는 불자는 물론이고 종교가 다른 유학생들에게도 개방하여 서로 위로하고 의지하는 절이 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절을 짓는데 경비가 문제였다. 스님은 원고료가 있으니 문제없다고 했으나 경비가 예상을 뛰어넘었다. 듣고 있던 여성분이 말했다.

“제가 절이 완성될 때까지 모든 경비를 희사하겠습니다.”

“말씀은 고맙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짓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십시일반으로 마음을 모아 짓는 것이 더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여러사람들에게 길상사가 내 집 같을 겁니다.”

그때 그 여자분의 청을 들어 주었더라면 훨씬 쉬웠을 텐데 스님은 왜 사양했을까?

불가엔 자작자수(自作自受)란 말이 있다. 행복이란 스스로 지은 만큼 받는다는 말이다. 스님께서는 여러 사람에게 가야 할 행복이 한 사람에게만 가는 것을 경계하셨을지 모른다. 그렇다. 공짜를 좋아하는 세상에서 모름지기 수행자라면 이러한 ‘행복의 문법’까지 가르쳐 주는 것이 바른 도리이지 않겠는가.

 

- 다음에 2부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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