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8. 30. 15:53ㆍ독서후기
허 송 세 월
■ 김훈 산문
0 1948 서울 출생
0 장편소설 :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 하얼빈, 등
0 수상 :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대산문학상, 동리문학상 등
0 산문집 : <연필로 쓰기> <허송 세월> 등
■ 앞에
늙기의 즐거움
핸드폰에 부고(訃告)가 찍히면 죽음은 배달상품처럼 눈앞에 와 있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몇 줄의 정보로 변해 있다. 무한 공간을 날아온 이 정보는 발신과 수신 사이에 시차가 없다. 액정화면 속에서 죽음은 사물화되어 있고 사물화된 만큼 허구로 느껴지지만 죽음은 확실히 배달되어 있고, 조위금을 기다린다는 은행 계좌도 찍혀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의 관성적 질감은 희미한데, 죽은 뒤의 낯섦은 경험하지 않았어도 뚜렷하다.
부고를 받을 때마다 죽음은 이행해야만 할 일상의 과업처럼 느껴진다. 마감을 지켜야 하는 원고 쓰기나 친구 자식들 결혼식이나 며칠 먼저 죽은 친구의 빈소에 흰 돈 봉투를 들고 가서 얼굴을 내밀어야 하는 일처럼 죽음을 루틴으로 여기는 태도는 종교적으로 경건하지 못하지만, 깨닫지 못한 중생의 실무 이행으로 정당하다.
*루틴(routine) : 일상적인, 반복적인, 판에 박힌, 일과
나는 서울 도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청소년 시절에는 인왕산, 북한산, 북악산, 도봉산, 관악산, 낙산에서 놀았다.
중학교 3학년 때, 인왕산 치마바위에서 암벽등반의 기초를 배웠는데, 이 바위가 바로 조선 후기 화가 정선의 유명한 그림인 ‘인왕제색도’에 나오는 그 바위
다. 여름에 장대비가 쏟아지거나, 겨울에 폭설이 내리면 나는 집 안에서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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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다가도 장비를 챙겨 산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제 높은 산에는 오르지 못한다. 북한산 언저리에서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문수봉 같은 높은 봉우리들을 올려다보면서 둘레길을 걷다가 돌아온다. 산꼭대기에서는 세상이 내려다보이고 둘레길에서는 산봉우리가 올려다보인다.
젊었을 때,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세상을 내려다볼 때 나는 세상 속으로 내려가고 싶었고, 산 밑에서 산봉우리를 올려다볼 때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지금은 이쪽저쪽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둘레길을 조금 걷다가 마을버스를 타고 마을로 돌아온다.
오래 쓰던 등산 장비를 후배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나니까 날이 저문 것을 알겠다. 산에 올라가기보다는 산수화를 들여다보는 편이 더 한갓지고, 아끼던 장비도 애착이 가지 않는다. 장비를 받아가는 후배도 나의 늙은이 행세가 민망했는지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장비를 받은 후배는 기어코 나를 와인 바로 끌고 갔다. 나는 와인 두 잔 이상을 마시면 힘들어진다. 이날은 세 잔을 마시고 취했다. 내 취기 속에서 북한산의 봉우리들은 시간과 더불어 흔들리면서 흘러가고 있었다. 그 시간 속에 내가 있거나 없거나 나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다. 거기에 내가 없어도 나는 괜찬다. 이날 나는 모처럼 취했다.
나는 와인을 마시면 몸과 마음이 혼곤해진다. 와인에는 현실과 부딪치는 술맛의 저항감이 없다. 와인의 취기는 계통이 없다.
와인의 취기는 전방위에서 스멀거리면서 피어나서 스미듯이 다가와 내마음을 차지한다.
와인은 현실을 서서히 지우면서 다가온다. 와인의 취기는 비논리적이고 두루뭉술하다. 이 취기는 마음속에 몽롱한 미로를 끝없이 펼쳐 놓는데, 그 미로를 따라가면서 마시다 보면 출구를 찾지 못한다. 와인의 맛은 로멘틱하고, 그 취기의 근본은 목가적이다.
와인은 첫 잔에 입술을 댈 때, 그 몽롱한 입구로 사람을 끌어당기지만 출구를 찾기 어렵다. 와인이 마음속에 펼쳐 놓는 미로를 따라서 멀리 갔다가, 그 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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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다시 거꾸로 거슬러 나오면서 깰 때는 술 깨는 시간조차도 몽롱하고 흐리멍덩하다. 와인의 입구는 로맨틱하지만 출구는 멀고 힘든데, 들어갈 때는 나갈 걱정을 하지 않는다.
막걸리는 생활의 술이다. 막걸리는 술과 밥의 중간쯤 되는 자리에 있다. 막걸리는 술을 밥 쪽으로 끌어당긴다.
막걸리를 마실 때는, 기름진 안주는 필요 없고 풋고추를 된장에 찍어 먹으면 족하다. 막걸리의 텁텁함과 풋고추의 산뜻함이 입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사람은 밥만 먹고는 살 수 없고 술만 마시고도 살 수가 없는데, 막걸리는 그 사이에서 어중간하다. 농부들 틈에 끼어서 풋고추를 안주로 막걸리를 마실 때 나는 오래된 농경사회의 평화를 느낀다.
비논리적이라는 점에서 막걸리와 와인은 같은 계층이지만, 막걸리는 생활적이고 와인은 몽환적이다. 인간에게는 그 양쪽이 모두 필요하다.
소주. 아아! 소주. 한국의 근대사에서 소주가 정신의 역사와 대중 정서에 미친 영향을 사회과학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가공할 소비량에도 불구하고 소주는 아무런 아우라를 갖지 않는다. 소주는 대중의 술이며 현실의 술로서 한 시대의 정서를 감당해 왔지만, 풍미가 없고 오직 지르는 취기만 있다. 소주는 아귀다툼하고 희로애락하고 생로병사하는 아수라(阿修羅)의 술이다. 소주는 인간의 기쁨과 슬픔, 소망과 좌절을 멀리 밀쳐내고 또 가까이 끌어당겨서 해소하고 증폭시키면서 모두 두통으로 바꾸어 놓는다. 소주는 생활의 배설구였고 종말처리장이었는데, 나 역시 거기에 정서를 의탁해서 힘든 날들을 견디어 왔다. 소주는 삶을 기어서 통과하는 중생의 술이다. 나는 소주를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소주의 쓰라린 세속성을 소화해 내기는 어려웠다.
몇 해 전,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 일본 홋카이도에서 사케를 마셨다. 눈이 키보다 높이 쌓였고 산간 마을들은 눈 밑으로 굴을 뚫어서 왕래하고 있었다. 눈굴 속에서 화살표 안내판을 따라갔더니 작은 술집이 있었다. 입구까지 눈이 쌓여서 겨우 문을 밀고 들어갔다. 거기서 사케를 마셨다.
사케는 겨울 술이고 나이 든 사람의 술이다.
내가 즐겨 마신 술은 위스키다. 위스키의 취기는 몇 방울 목구멍으로 넘기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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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면도날로 목구멍을 찢듯이 곧장 내려간다. 그 느낌은 전류와 같다. 위스키를 넘기면,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그 전류의 잔잔한 여파들이 몸속으로 퍼진다. 몸은 이 전류에 저항하면서도 이를 받아들인다.
이 술, 저 술에 대해서 이처럼 수다를 떨고 있지만 지나간 술은 술로서 작동하지 못한다. 지나간 술은 화폭 속의 산과 같다. 몸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들여다볼 수는 있다. 나는 이제 술을 마시지 못한다.
나는 3년 전부터 심혈관 계통의 병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젊은 의사는 술을 ‘한 방울’도 먹으면 안 된다고 나를 겁주었다.
요즘엔 술을 거의 마시지 않는데, 가끔 술 마시던 날들의 어수선한 열정과 들뜸이 그립다. 엉망으로 취한 다음 날 아침의 절망감이 혐오스럽기보다는 안쓰럽다. 저녁에 동네 술집에 모여서 술 마시는 젊은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나는 이 고해(苦海)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다.
술은 멀어져 갔지만, 나는 아직 술을 끊은 것이 아니다. 나는 희망의 힘에 의지해서 살지 않고 이런 미완성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나는 스무 살 무렵부터 예순다섯 살까지 45년간 담배를 피웠다. 하루에 한 갑씩, 어떤 날은 두 갑씩 기를 쓰고 담배를 피웠다. 지금은 담배를 끊은지 10년이 되어오는데, 꿈속에서는 가끔 피운다. 잠들기 전에 오늘 꿈속에서 한 대 피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날도 있다. 담배는 참으로 무서운 습관이다.
고등학교 때 장난삼아 배운 담배를 군대에 가서 본격적으로 피우기 시작했다. 군대에서는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나 피우지 않는 사람이나 구별 없이 사흘에 한 갑씩 나누어 주었다. ‘화랑’이라는 담배였는데 맛이 쓰고 거칠어서 병사들은 ‘독가스’라고 불렀다.
제대하고 글을 쓰는 일로 밥을 벌어먹게 되자 나는 담배에 더욱 빠져들게 되었다. 나의 동료 중에는 담배를 피워야 글이 잘 써진다는 미신을 신봉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이미 담배에 중독된 사람이 담배를 잠시라도 안 피우면 정신이 멍해져서 가나다라를 제대로 쓸 수 없게 된다는 것은 경험으로 보아서 맞는 말이지만, 담배를 피우면 글이 술술 풀린다는 말은 말짱 거짓말이었다. 그러면서도 그 거짓말에 기대어서 마음 편히 담배를 피워 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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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새를 기다리며
■ 일산 호수공원의 설날
코로나 때문에 갈 곳이 없으니까 호수공원에 나오는 사람들이 늘었다. 추운 날에도 패딩 입고 마스크 끼고 나온다. 늙은 사내가 아내를 휠체어에 태우고 나온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걷는다.
가을이 깊어져서 나뭇잎이 떨어지니까 높은 나무 꼭대기에 매달린 까치집이 잘 보인다. 지난여름 태풍 때, 사람이 지은 짐들은 무너졌는데 까치집은 떨어지지 않았다. 까치집은 허술해 보이지만 단단하다. 까치의 건축술은 놀랍다.
고구려 고분 벽화 속의 까치는 사람의 집 처마 끝에 앉아 있다. ‘생활은 영원하다’고 이 까치는 말하고 있다. 그 집 부엌에서는 여인들이 아궁이에 장작불을 때서 국을 끓인다. 까치는 사람 사는 일에 궁금한 것이 많아서 집안을 들여다보는 모양인데, 이 버릇은 고구려 까치나 일산 호수 까치나 다 똑같다. 그러니, 지금 호수공원에서 짖은 까치는 고구려 까치의 후손들이다.
이 겨울에 호수공원 물속에서 노는 청둥오리와 물닭은 러시아의 아무르강이나 바이칼 호수에서 온 겨울 철새들이다. 까치는 집을 짓지만, 철새들은 집을 짓지 않고 물가의 마른 풀속에 들어가서 잔다. 철새들은 무주택자지만 온 천지가 집이라서 집 걱정이 없다. 먼 동네에 와서도 낯설어하지 않는다.
지적 장애가 있는 아들을 몇 년째 데리고 나와서 산책시키는 젊은 어머니는 “아들의 정신이 점점 건강해져서 새와 꽃과 물고기를 보면 좋아서 웃고 소리친다”라고 말하면서 웃었다. 젊은 어머니의 웃음은 맑고 행복했다.
코로나의 재난 속에서도 호수공원의 새해 첫날은 별일이 없었고 모든 일상이 다 갖추어져서 평화로웠다. 새와 물고기와 어린이들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까치가 말을 걸고 어린이들이 지절거리고 개들이 좋아서 뛰고 장애아의 어머니가 행복하게 웃었다.
깊은 겨울이지만, 수양버들의 가지 속에 봄은 이미 와 있었다.
■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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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여든이 가까워졌다. 늙은이들이 너무 많아져서 젊은이들이 제 함 몸 먹고살기도 힘든데 늙은이 뒤치다꺼리할 일을 걱정하고 있다 하니, 지하철 경로석에 앉기도 민망하다. 젊은이들의 걱정을 나 또한 힘들어하고 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면, 소독약 냄새 풍기는 젊은 의사는 나를 ‘어르신’이라고 부르고 더 젊은 간호사는 날 보고 ‘아버님’ 이란다. 나뿐 아니라 늙은이를 보면 닥치는 대로 아버님이다.
검사실 앞 복도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머리 허연 늙은이들이 배꼽을 내놓고 춤추는 걸그룹을 TV로 보고 있다. 대기자가 많으면 김 아버님, 박 아버님이라고 불러댄다. 이런 호칭을 들으면 모욕을 느끼지만, 아프니까 별수 없이 병원에 간다. 내가 젊은 간호사를 “딸아”하고 부르면 나를 미친 늙은이로 볼 것이다. 여기저기서 또래들이 죽었다는 소식이 온다.
남의 집에 저녁 마실 온 듯이 문상 왔던 사람들이 몇 달 후에 영정 속에 들어가서 절을 받고 있다. 내가 미워했던 자들도 죽고 나를 미워했던 자들도 죽어서, 사람은 죽고 없는데 미움의 허깨비가 살아서 돌아다니니 헛되고 헛되다.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가니까 의사가 나에게 앉아 있을 때가 더 아프냐, 서 있을 때가 더 아프냐고 물었다. 나는 앉으면 앉아 있을 때가 더 아프고, 일어서면 서 있을 때가 더 아프다고 말했다. 의사는 웃으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고통은 경험될 뿐 말하여질 수는 없었고 눈금으로 표시할 수도 없었다. 환자의 고통을 계량화하려는 의사의 의도를 이해할 수는 있었지만 고통의 정도를 소고기 무게 달 듯 저울에 올려놓고 얼마라고 말할 수는 없었고 그 고통이 저울 눈금으로 몇 그램이건 간에, 고통을 단위와 개념에 의존해서 소통하려는 중생의 몽매함을 환자가 공유한 것이 그날 진료의 소득이었다.
오래 앉아서 일하지 말고, 술 마시지 말라고 의사는 말했다. 나는 본래 오래 앉아서 일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술 마신 지 오래되면 맨송맨송하다.
의사가 말하기를 늙은이들의 몸에는 보통 대여섯 가지의 만성질환이 자리잡고 있는데, 여러 병증 사이에 경계가 무너지고 뒤섞여서 무슨 병인지 진단하기 어렵다고 했다. 그런 의사의 고충을 나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병이란 본래 개념이나 언어를 이탈하는 증세이므로 병조차도 늙어야 제대로 깊어지는 것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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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 로, 병, 사가 본래 각각 독립된 범주가 아니라 한 덩어리로 뒤엉켜 동시에 굴러가면서 삶의 기본 풍경을 이루는 것이라고 나는 늘 느끼고 있었는데, 노환에 대한 의사의 의학적 소견도 삶에 대한 나의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눈이 쓰리고 눈물이 흐르는데, 눈물을 흘리는 안구는 건조하다. 병원에 가면 눈물 흐르는 눈에 또 인공 눈물을 넣으라고 한다. 눈물에 약물이 합쳐져서 눈물은 넘치는데, 젖은 눈은 메마르다. 어째서 이런지는 나도 모르고 의사도 모른다.
밥을 먹을 때는 입안이 메말라서 밥알이 목에 걸리는데, 잠을 자거나 하품을 할 때는 침이 흘러서 입 밖으로 나온다.
술 마시고 나면 술이 지겨워서 빨리 깨고 싶고, 술 깨면 세상이 너무 환해서 마시고 싶으니, 술이란 무엇인지 술을 마셔도 알 수 없고 안 마셔도 알 수 없는데, 사람들이 어쩌자고 자꾸 마시는가.
늙으니까 혼자서 웃을 수밖에 없는 일들이 많은데, 웃음과 울음의 경계도 무너져 뿌옇다. 웃음이나 울음이나 별 차이가 없는데, 크게 나오지는 않고 바람만 픽 나온다.
내가 사는 동네는 서부 전선에서 가까워서 주말이면 외박 나온 병사들이 하룻밤을 놀다 간다. 외박 기간이 끝나가는 저녁이면 버스정류장에 귀대하는 젊은 병사들과 젊은 애인들이 줄을 짖는다. 젊은 애인들은 끌어안고 키스한다. 귀대 시간이 촉박할수록 키스는 간절해진다. 키가 작은 여자는 발뒤꿈치를 들어 병사의 목을 두 팔로 감고 매달려서 키스한다. 애인들은 입술을 대는 각도를 바꾸어 가며 키스하고 또 한다.
주말이면 나는 버스정류장 앞 술집에 앉아서 이 귀대 키스의 대열을 관찰하는데, 이때 나의 정신은 뿌옇지 않다. 삶이 저토록 빛나므로 나의 마음은 명석하다. 이 동네 먹자골목에는 저녁마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젊은이들이 몰려온다.
젊은이들은 회사를 욕하고 부장을 욕하고 정치권력을 욕하고 용 나온다는 개천을 욕하고 애 낳으라고 몰아대는 꼰대들을 욕한다. 바닥에 침을 뱉고 신발 바닥으로 뭉개고 나서 욕을 계속한다. 소주잔을 부딪치고 손바닥을 부딪친다. 젊은이들은 세상을 욕하다가도 무슨 좋은 일이 있는지 함께 웃어댄다. 웃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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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는 크고 맑아서 식당 안에 가득 찬다.
나처럼 혼자 먹으러 온 사람은 벽 앞으로 설치된 1인용 자리에 앉아야 한다. 젊은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혼밥으로 저녁을 먹을 때, 삶의 기쁨과 슬픔은 영롱하다.
■ 허송세월
나는 오후에 두어 시간쯤 햇볕을 쪼이면서 늘그막의 세월을 보낸다. 해는 내 노년의 상대다. 젊었을 때 나는 몸에 햇볕이 닿아도 이것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했고, 나와 해 사이의 공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의 햇볕은 돌이킬 수 없고 내일의 햇볕은 당길 수 없으니 지금의 햇볕을 쪼일 수밖에 없는데, 햇볕에는 지나감도 없고 다가옴도 없어서 햇볕은 늘 지금 내가 있는 그 자리에 온다. 햇볕은 신생(新生)하는 현재의 빛이고 지금 이 자리의 볕이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쪼이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햇볕을 쪼일 때, 나는 햇볕을 만지고 마시고 햇볕에 내 몸을 부빈다. 햇볕을 쪼일 때, 내 몸의 관능은 우주 공간으로 확장되어서 나는 옷을 모두 벗고 벌거숭이가 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햇볕을 쪼일 때, 나는 내 생명이 천왕성, 명왕성 같은 먼 별들과도 존재를 마주 대하고 있음을 안다. 햇볕을 쪼일 때, 나와 해 사이의 직접성을 훼손하는 장애물은 없고, 내 그림자가 직접성의 증거로 내 밑에 깔린다.
시간(時間)은 시각과 시각 사이의 흐름이며 시각(時刻)은 시간의 흐름 위에서의 한 점이다. 공간은 전후•좌우•상하로 끝없이 펼쳐진 빈자리이다. 라고 사전에 적혀 있다. 9는 6에 3을 더한 것이고 8은 9에서 1을 뺀 것이라고 사전에 적혀 있다.
나는 이러한 언어 작용으로는 대상을 인식할 수 없어서 답답했고, 장님처럼 세상을 더듬었다. 나는 지금 사전을 만든 사람들을 탓하려는 것이 아니고 언어의 세계에서 끝없이 반복되는 동어반복의 저주를 말하려 한다.
일산 호수공원의 저녁 하늘은 강화, 김포 쪽 하늘부터 붉어진다. 갈곳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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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사람도 없는 저녁에 나는 망원경으로 노을의 안쪽을 들여다본다. 노을은 내 몸과 마음속에 가득 찬다. 노을 속에서 수많은 색들이 태어나고 스미고 번진다. 구름의 가장자리에서 태어난 신생의 색들이 위쪽으로 퍼져가면, 태어난 지 오랜 색들은 시간과 더불어 짙어지면서 어둠속으로 스미는데, 노을이 어둠과 합쳐지는 자리에 솔기가 없다.
빛이 사라지면 색은 보이지 않는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 색은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색은 빛을 따라서 사라졌다가 빛이 돌아오면 다시 깨어나는 것인지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내가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까닭은, 내가 눈으로 사물을 볼 수밖에 없고 이미 본 것에 의지해서 보는 중생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빛을 프리즘으로 분산하면 보라에서 빨강에 이르는 스펙트럼 안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색들이 나타나지만, 빛은 이 무한한 색들을 다 끌어안고 아무런 색도 아니다.
깊이 내려앉은 해가 빛과 색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젊은 어머니들이 노는 아이들을 핸드폰으로 불러들이면 나는 집으로 돌아간다. 또 하루가 노을 속으로 사위어 간다.
■ 색의 가벼움
오랫동안 소식이 없던 벗들한테서 소식이 오는데, 죽었다는 소식이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오지 않으니까 소식이 없으면 살아 있는 것이다. 지난달에도 형뻘 되는 벗이 죽어서 장사를 치르느라고 화장장엘 갔었다.
10년쯤 전에는 소각에서 냉각까지 100분 정도 걸렸는데 이제는 50분으로 줄었다고 화장장 홍보 전단에 적혀 있었다. 기술이 크게 진보했고, 죽음을 관리하는 의전 절차도 세련되어졌다.
‘냉각 완료’되면 흰 뼛가루가 줄줄이 컨베이어벨트에 실려서 나오는데 성인 한 사람분이 한 되 반 정도였다.
직원이 뼛가루를 봉투에 담아서 유족들에게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유족들은 미리 준비한 항아리에 뼛가루를 담아서 목에 걸고 돌아갔다. 원통하게 비명횡사한 경우가 아니면 요즘에는 유족들도 별로 울지 않는다. 부모를 따라서 화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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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 온 청소년들은 대기실에 모여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제 입으로 “우리는 호상입니다.”라며 문상객을 맞는 상주도 있었다.
죽으면 말길이 끊어져서 죽은 자는 산 자에게 죽음의 내용을 전할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인지할 수 없다. 인간은 그저 죽을 뿐,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화장장에 다녀온 날 이후로 저녁마다 삶의 무거움과 죽음의 가벼움을 생각했다. 죽음이 저토록 가벼우므로 나는 이 가벼움으로 남은 삶의 하중을 버티어 낼 수 있다. 한 되 반은 인간 육체의 마지막 잔해로서 많지도 적지도 않고, 적당해 보였다. 죽음은 날이 저물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자연 현상으로 애도할 만한 사태가 아니다.
뼛가루를 들여다보니까, 일상생활 하듯이, 세수하고 면도하듯이, 그렇게 가볍게 죽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 들이지 말고 죽자. 건강 보험 축내지 말고 죽자. 주변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가자. 질척거리지 말고 가자. 지저분한 것들을 남기지 말고 가자. 빌려온 것 있으면 다 갚고 가자, 남은 것 있으면 자 주고 가자. 입던 옷 깨끗하게 빨아 입고 가자. 관과 수의는 중저가가 좋겠지. 가면서 사람 불러 모으지 말자. 빈소에서는 고스톱을 금한다고 미리 말해 두자.
가볍게 죽기 위해서는 미리 정리해 놓을 일이 있다. 내 작업실의 서랍과 수납장, 책장을 들여다보았더니 지금까지 지니고 있었던 것의 전부(!)가 쓰레기였다. 이 쓰레기더미 속에서 한 생애가 지나갔다. 똥을 백자 항아리에 담아서 냉장고에 넣어둔 꼴이었다. 나는 매일 조금씩, 이 쓰레기들을 내다 버린다.
유언을 하기는 쑥스럽지만 꼭 해야 한다면 아주 쉽고 일상적인 걸로 하고 싶다. “딸아 잘생긴 놈들 조심해라”, “아들아, 혀를 너무 빨리 놀리지 마라” 정도면 어떨까 싶다.
오래 전에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는 스스로를 ‘광야를 달리는 말(馬)’로 자칭했다.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돌면서 평생을 사셨는데, 돌아가실 때 유언으로 “미안허다”를 남겼다. 한 생애가 네 음절로 선명히 요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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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선생님은 죽음에 임박하자 이런 시문을 남겼다.
“조화를 따라서 사라짐이여
다시 또 무엇을 바라겠는가.”
임종의 자리에서는 “매화 화분에 물 줘라”하고 말씀하셨다고 제자들이 기록했다. 아름답고 격조 높은 유언이지만 생활의 구체성이 모자란다. ‘매화에 물 줘라’라는 유언은 일상의 소중함과 사소한 일의 엄중함을 명심하라는 뜻으로 들린다.
내 친구 김용택 시인의 아버지는 섬진강 상류의 산골 마을에서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돌아가실 때 아들을 불러놓고 유언을 하셨는데 “네 어머니가 방마다 아궁이에 불 때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 부디 연탄보일러를 놓아 드려라”고 말씀하셨다.
나의 아버지, 퇴계 선생님, 김용택 아버지, 이 세분의 유언중에서 김용택 아버지의 유언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김용택 아버지는 참으로 죽음을 벌 것 아닌 것으로, 아침마다 소를 몰고 밭으로 나가듯이 가볍게 받아들이셨다.
죽음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 의술의 목표라면 의술은 백전백패한다. 의술의 목표는 생명이고, 죽음이 아니다. 이국종 국군대전병원장처럼, 깨어진 육체를 맞추고 꿰매서 살려내는 의사가 있어야 하지만, 충분히 다 살고 죽으려는 사람들의 마지막 길을 품위 있게 인도해 주는 의사도 있어야 한다. 죽음은 쓰다듬어서 맞아들여야지, 싸워서 이겨야 할 대상이 아니다.,
가볍게 죽고, 가는 사람을 서늘하게 보내자. 단순히 장례절차에서도 정중한 애도를 실현할 수 있다. 가는 사람도 보내는 사람도, 의술도 모두 가벼움으로 돌아가자. 뼛가루 들여다보면 다 알 수 있다. 이 가벼움으로 삶의 무거움을 버티어 낼 수 있다. 결국은 가볍다.
■ 보내기와 가기
나이를 먹으면서 생활의 무게를 줄여가는 버릇이 생겼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내 아버지, 어머니, 장인, 장모의 산소 관리를 내 자식들에게 물려줄 수는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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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돌아가신 네 분의 산소를 정리해서 유골을 화장하기로 정하고, 우선 장인 산소를 파묘했다.
묻힌 자리의 지질에 따라서 유해가 썩지 않는 경우도 있고, 썩어서 백골만 남아 있는 경우도 있는데, 썩지 않은 유해를 관에 담아 화장장으로 옮기려면 중형차가 필요하고, 잘 썩어서 백골만 남은 유해는 간추려서 나무 상자에 담아 옮길 수 있으므로 소형차로도 족하다고 묘지 관리사무소는 말했다.
사내 세 명이 달려들어서 봉분을 파 내려갔는데, 한 시간도 안 되어서 관이 드러났다. 사내들이 반쯤 썩은 관 뚜껑을 곡괭이로 찍어서 걷어냈다.
뼈는 고요했다. 뼈의 침묵은 완강해서 말을 걸 수 없었다. 유해는 잘 썩어서 백골이 가지런했는데, 백골 위에 그물 같은 망이 걸쳐져 있었다. 이 그물망은 수의에 나일론 섬유가 섞여 있어서 썩지 않고 남은 것이다.
그날 산소 정리를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더 이상 아버지 어머니의 제사나 차례를 모시지 않기로 작정했다. 나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혼백을 땅에 의한 결박, 모든 인연에 대한 결박, 한 솥에 밥 먹은 밥에 의한 결박과 이 세상의 비닐망에 의한 결박에서 풀어드리기로 했다. 이것이 늙은 나의 마지막 예절이고, 어려서는 부모 속 썩이고, 자라서도 변변치 못했던 아들이 부모에게 드리는 가장 좋은 자유의 선물일 것이었다. 아내도 내 뜻에 동의했다. 이로써 내 부모의 혼백은 피조물의 모든 결박을 끊고 무(無)와 공(空)으로 돌아갔다.
어깨가 결리고 눈이 쓰리고 잠이 안 오고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진료비를 계산하고 처방전을 받으려면 복잡한 기계로 여러 가지 숫자와 부호들을 눌러야 하는데, 나는 이걸 할 줄 몰라서 젊은 간호사에게 부탁했다. 간호사는 기계를 작동하면서 사용법을 설명해 주었다. 간호사가 언성을 높여서 말했다.
“들리세요?”
내 귀가 들리느냐는 말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겨우 들리는구만.”
이래서 노화현상은 씁쓸하지만, 병원에 갈 일도 심란하다.
늙으니까, 말하기가 점점 싫어진다. 말을 하더라도 말이 잘 안 나와서 이르고자 하는 바를 마침내 똑바로 펴기 어렵다.
구강의 기능이 퇴화해서 음식을 삼킬 때 식도로 들어가지 않고 기도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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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서 사레들리기를 자주 하고, 혀의 기능이 둔화 되어서 어눌하게 된다고 의사들이 말했다. 이것도 자연현상이라는데, 혀를 빨리 놀리지 않게 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혀가 굼뜨게 되면 말이 멀어지고, 단어 한 개를 끌어오려 해도 단어는 선뜻 따라오지 않아서 단어 하나 모시기 어려운 줄을 저절로 알게 된다.
■ 새 1
- 새가 왔다
5월 10일 맑음
내 방 앞 모과나무 가지에 새가 둥지를 짓고 있다. 모과나무는 잎이 무성해서 밖에서 안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는다. 새 둥지는 나무 밑에서나 내 방 유리창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새는 암수 두 마리인데, 몸길이가 30Cm 쯤 되고 꼬리가 길고 몸통은 포도색이고 날개 가장자리가 여러 색깔로 빛났다.
사진을 찍어서 새를 잘 아는 사람에게 보여 주었더니, 이 새는 까마귓과에 속하는 ‘어치’이며 한반도의 산림에 자리 잡은 대표적인 텃새라고 가르쳐 주었다. 5월에 알을 낳고, 16~17일 동안 품어서 새끼가 태어나면 20일쯤 먹이를 물어다 먹여서 키우고 새끼가 날 수 있게 되면 새들은 각자 흩어진다고 했다.
새는 모과나무 줄기가 벌어진 사이를 터전으로 삼아서 둥지를 지었다. 새는 접착제를 쓰지 않았다. 새의 역학이론은 나무토막들을 서로 어긋나게 맞물려서 그 엉버티는 힘으로 둥지의 안정을 확보하자는 것이 아닌가 싶었는데, 새의 시공 기술은 자연스러워서 이론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새 두 마리는 쉴 새 없이 드나들며 나무토막을 물어 와서 둥지를 엮었다.
5월 13일, 맑음
새는 집짓기를 마쳤다. 새 둥지의 크기는 한 되짜리 주전자 정도였다. 좁아서 두 마리가 함께 들어앉을 수는 없었다. 암놈이 들어앉았고, 수놈이 먹이를 물고 와서 암놈을 먹였다. 알은 보이지 않았지만, 암놈이 알을 품은 것은 확실했다. 내 방에서는 암놈은 머리와 꼬리만 보였다. 수놈은 먹을 것을 게워내서 암놈의 입에 넣어 주었다. 암놈은 하루 종일 들어앉아 있다가 저녁 무렵에 잠깐 나가서 동네를 돌고 다시 둥지로 돌아와 알을 품었다. 수놈은 가까운 나뭇가지에 앉아서 밤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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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자식들은 크게 기뻐했다. 아이들은 이 새를 ‘우리 새’라고 불렀고, 제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우리 새’라는 말에 나는 웃었다. 새는 저 자신일 뿐이고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닐 터인데, 자기 집 마당의 나무에 깃들인 새를 사람은 기어이 ‘우리 새’라고 부른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 새는 ‘우리 새’가 아니다. 라고 말해 주었다. 아이들은 나무 밑에 밥알을 뿌려 주었는데, ‘우리 새’는 먹지 않고 먼 데서 먹이를 구해왔다.
아이들이 더 어렸을 때는 옆집에서 멋있는 소나무를 심으면 우리도 심자고 졸랐다. 꽃과 나무는 원래 정해진 주인이 없는 것이고 쳐다보는 사람이 주인이므로, 구태여 우리 집 마당에 심을 필요는 없고 옆집 나무라도 보고 즐기면 우리 나무나 마찬가지라고 아이들에게 말해 주었는데, 아이들은 내 말을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제집 마당에 들어와 박힌 것에 각별한 인연을 느끼는 것은 인생의 옹졸함이겠지만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5얼 20일, 맑음
수컷은 계속 바쁘다. 어치의 성조(成鳥)는 도토리나 나무 열매를 먹고 새끼는 지렁이나 곤충을 먹는다고 하니, 새끼들이 태어나면 수컷의 수고는 몇 배나 커진다. 수컷은 남의 새끼를 잡아 와서 제 새끼를 먹인다.
알을 품은 암컷은 머리와 꼬리만 보인다. 망원경으로 들여다보면 눈에 졸음기가 있는 것 같다. 암컷은 미동도 하지 않는다. 저 한 없는 집중과 인내와 기다림, 새는 제 몸의 온도로 새끼를 깨워 낸다. 당신들과 나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달걀을 먹었던가.
5월 25일, 비
밤에 비가 내렸다. 아침 최저 기온이 섭씨 15도까지 떨어졌다. 새는 가끔씩 몸을 뒤척이면서 자세를 바꾸었는데, 어둠 속에서 비를 맞으며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새 머리와 꼬리로 빗물이 흘러내린다. 기온이 떨어지고 알이 비에 젖을 때 어미 새의 마음이 어떠한 것인지를 나는 모른다. 알을 품을 때 새는 오직 혼자다. 혼자서 홀로 있음을 견디어 낸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어미 새의 머리는 경건하다.
5월 30일 맑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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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마지막 며칠을 견디고 있다.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서 어미 새 머리가 반짝인다. 새가 알을 품은 지 보름이 되어온다. 이제 알 속에서는 희미한 생명이 형태를 갖추고 있을 터이다. 이 생명은 멀리서 가물거리는 호롱불 같은 데, 그 숨결은 어미 새만이 알고 있다. 새는 서두르지 않는다.
■ 새 2
- 새가 갔다
새의 뒷 이야기를 쓴다.
이 새는 5월 중순부터 알을 품기 시작했으므로 생명의 순리대로라면 6월 초 새끼가 태어날 예정이었다. 5월 하순이나 6월 초 새끼가 태어날 예정이었다. 5월 하순에는 비가 자주 내렸고 일교차가 커서 새벽에 추웠다. 새는 성실하게 둥지를 지켰다.
해마다 5월 초면 정원사를 불러서 웃자란 가지를 자르고 나무를 소독하는데, 알을 품은 새를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고 아내와 아이들이 말려서 올해는 마당 손질을 하지 않았다.
새가 알을 품어서 새끼를 깨워 내고, 아득히 먼 곳에서 호롱불처럼 깜박이는 생명을 가까이 불러와서 형태를 부여해 주듯이, 나는 나의 체온을 불어넣어 가며 단어와 사물들을 품어 본 적이 있었던가. 당신들과 나는 오랫동안 잘못 살아왔다.
6월 중순이 지나도 새끼는 깨어나지 않았다. 새들은 자주 둥지를 비웠고, 날이 어두워지면 돌아왔다. 암컷 수컷이 모두 둥지를 비워놓고 이틀 후에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6월 하순에 새들은 며칠째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사다리를 놓고 나무에 올라가 새 둥지 안을 들여다보았다. 알 두 개가 곯아 있었다. 핏줄이나 작은 머리통 같은 신체의 흔적이 생기다가 말았고, 거기에 파리들이 꼬여 있었다. 부패는 상당히 진행되어 있었다.
죽어 버린 알을 품고서 부화를 기다리던 마지막 날들의 새의 슬픔에 관해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고, 어둠 속에서 들리던 그 부스럭거리는 소리만을 기억할 수 있다. 나는 알 두 개를 꺼내 와서 땅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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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당을 떠난 새가 둥지에서 부스럭거리던 소리는 죽은 후에도 소멸하지 않는 인연을 슬퍼하는 뒤채임일 터였다.
7월 초순의 어느 날, 오후 6시 쯤에 떠나간 새가 다시 모과나무 둥지로 돌아왔다. 열흘만이었다. 죽은 새알 두 개는 며칠 전에 내가 꺼내버렸으므로 둥지는 비어 있었다. 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알은 없다. 새는 두리번거리며 마당의 이쪽 저쪽을 살피더니, 하늘을 쳐다보며 크게 울었다.
새의 울음소리는 토해 내는 듯했고, 높은 음역에서 떨렸다.
사람이 울 때, 소리를 삼키고 눈물만 흘리는 억눌린 울음을 ‘읍(泣)’이라 하고, 소리를 내지르며 슬픔의 형식이 드러나는 울음을 ‘곡(哭)’이라 하고, 눈물도 흘리고 소리도 나는 그 중간쯤을 ‘체(涕)’라고 한다는데, 이날 나의 마당에서 울고 간 새의 울음은 이런 어지러운 말을 모두 떠나서 몸 전체를 공명통으로 삼아 소리를 토해내는 울림(鳴)이었고, 이런 울림은 모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자음이 끼어들 자리는 없었다. 모음은 슬픔의 서사구조를 용해해서 울림으로 울리게 하는데, 이 울림은 슬퍼하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하는 정화기능을 갖는다.
고려의 헐벗은 산야를 떠돌던 사람들은 노래했다.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 - 청산별곡 중에서
새가 갔으므로,
나는 정원사를 불러서 마당을 손질하고 나무를 소독할 예정이다.
■ 다녀온 이야기
나는 지난봄에 몸이 아파서 10일 정도 입원해 있었다. 코로나의 재난으로 의료진은 지쳐 있었고 병실은 여유가 모자랐다.
식사 때가 되면 병원직원이 밥을 가져다주었다. 병원 밥은 찰기가 없었고 국은 멀겠고 반찬은 밍밍했다.
그날 밤 나는 깊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죽은 나를 의식하는 또 다른 내가 있었다. 죽지 않은 자는 죽지 않았기 때문에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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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알 수 없고 죽은 자는 죽었기 때문에 죽음을 알 수 없으므로, 인간은 죽음을 알 수 없고 말할 수 없고 전할 수 없고 설명받을 수 없을 터인데, 그날 밤의 혼수상태 속에서 나는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경험할 수 있었고 죽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죽었음을 알고 있었으니까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었는데, 죽은 쪽에 더 가까웠다.
나는 죽어서 어디론지 갔다. 갔다기보다는 어디엔가 와 있었다.
거기는 겨울이었다. 눈이 내려서 온통 하얬다. 세상은 지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하얬고 인기척이 없어서 적막강산이었고, 오직 나 혼자뿐이었다. 그리고 작은 무덤이 한 개 있었다. 거기가 나의 무덤이었다. 봉분에 눈이 쌓였고 하얀 무덤에 노을이 비쳤다.
나의 육신은 그 무덤 속에 묻혔고 혼백이 무덤 밖으로 나왔다. 혼백은 무덤가에 앉아서 하얀 세상을 두리번거렸다.
나는 어디론지 심판자 앞으로 끌려갔다. 심판자는 보이지 않고 소리만 들렸다. 여기서 나는, 내가 알지 못하는 죄목으로 심판받았다. 나는 처음부터 ‘기소된 자’였다. 여기가 말하자면 ‘저승’인 모양인데, 저승에서도 인간을 다짜고짜로 붙잡아서 심판하는 권위가 인간 위에 군림하고 있었다. 저승 역시 이승 못지 않게 더럽고 억울한 곳이었다. 저승에도 적폐청산과 개혁과 민주화가 필요했다. 저승도 사람 살 곳이 아니다.
신문은 끝도 없이 계속되었다. 개념어뿐 아니라 형용사, 부사, 동사, 접속사로까지 이어졌다. 단어뿐 아니라 문장까지도 유죄의 증거로 불려왔다. ‘소리’ 옆에서 서기인 듯한 자가 신문 내용을 문서로 작성했다. 쌓인 문사는 사람 키만큼 높았다. 그 단어를 사용한 것이 어째서 처벌받아야 할 죄가 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나는 24시간 만에 혼수에서 깨어났다. 흐리고 뿌연 시간이 흘러서 나는 김훈으로 돌아왔다. 나는 목구멍과 콧구멍에 호스를 꽂고 입에 솜을 물고 식은 땀을 흘리며 누워있었다.
내가 쓸 수 있는 말들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는 세상으로 살아서 돌아온 것이 눈물겹게 행복했다. 아내에게 저승에 갔다 온 얘기를 했더니 “죽는 꿈을 꾸면 오래 산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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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아니야. 진짜로 다녀왔어”라고 대답했다.
아내한테 들으니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자마자 몸을 더듬으며 무언가를 찾았다고 한다. 저승에서 심판받을 때, 이승으로 돌아가면 이 심판의 내용을 글로 쓸 작정을 하고 메모를 해두었는데 나는 그 취재 수첩을 찾고 있었다.
아내가 “당신 깨어나자마자 무얼 찾았어요?”라고 물었을 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며칠 후 퇴원했다. 호수공원에 산책 나갔다가 두 다리로 걸음을 걷는 일의 복됨을 알게 되었다. 세상에 땅이 있어서 인간의 걸음을 받아 주었다. 꽃들이 피어 있는데, 창세기 때 핀 꽃을 이제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내 옆에 꽃이 피어 있었구나. 이걸 모르고 먼 데를 헛되이 헤매고 있었구나. 살던 세상으로 돌아오길 잘했구나.
■ 꽃과 과일
일산 호수공원에는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장미꽃이 핀다. 밤중이나 새벽에 공원에 나와 보면 어둠 속에서도 장미가 피어 있다.
인간의 언어가 사물을 온전히 쥐지 못하고 엉거주춤할 때 꽃은 저 자신의 운명을 활짝 드러내면서 망설임 없이 핀다. 장미나 모란처럼 화려한 꽃이나 민들레, 달맞이꽃처럼 수더분한 꽃이나, 피어나는 꽃들은 모두 그 생명의 절정에서 거침없다. 꽃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피는 것이 아니라 저 자신의 운명을 펼쳐 보이려고 핀다. 꽃들의 운명은 언제나 완성되어 있고, 이것이 꽃들이 누리는 자유의 발현이다. 인기척 없는 빈산에서도 꽃은 피고 산에서 피는 꽃은 ‘ 만치 혼자서’ 피어 있다.
꽃은 언어화할 수 있는 어떠한 색깔도 아니다. ‘꽃이 빨갛다, 파랗다, 노랗다’라는 말은 땅에 뿌리박고 피어난 꽃과는 아무 관련도 없다.
식물의 내부에 어떤 추동과 지향성이 작동하고 있어서 꽃들은 그토록 여러 색깔과 형태로 피어나는 것인지 설명할 수 있는 과학의 언어를 인간은 가지고 있지 않다.
튤립은 꽃중에서도 신기하고 난해하다. 튤립은 이 세상의 모든 색들의 스팩트럼으로 피어난다. 튤립 꽃의 형태는 가지런해서, 식물의 조형 의지가 발현된 것처럼 보인다. 키가 작은 그 꽃은 땡에서 20Cm 정도 올라와서 피어난다. 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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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이 마당 가득히 피어나면 땅은 별이 뜬 하늘과 같다. 땅이 볕을 토해 내듯 꽃을 대기 속으로 밀어 올려 피어나게 한다. 사실 이처럼 정돈된 모습을 갖춘 꽃을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대도시의 거리에 심긴 가로수의 생애는 기구하다. 도시의 지하에는 매설물이 많아서 가로수의 뿌리는 땅속으로 깊이 뻗지 못하고 지표 밑으로 어지러이 구부려진다. 도시는 아스팔트와 보도블록으로 덮여 있어서 비가 와도 물은 땅 속으로 스미지 않고 배수관을 따라 빠져나간다.
도시의 가로수는 고해(苦海)에 뿌리박고 있지만, 봄에 벚나무 가로수의 꽃은 찬란하고 잎은 기름지다. 나무에는 불우의 그림자가 없다. 박토에 박힌 가로수의 뿌리는 공원에서 사는 유복한 꽃나무들의 뿌리보다 훨씬 더 강력한 생명의 기능을 갖는다. 가로수의 뿌리들은 대도시 고층 빌딩의 땅 밑에서도 나무를 살리고 꽃 피우는 생명의 물질을 기어코 찾아내고 빨아들여서 꽃에게 보낸다. 나는 보이는 꽃과 보이지 않는 뿌리 사이의 은밀한 교신의 모습을 엿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도 확실히 존재한다. 심지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중에서도 없는 것이 많다.
■ 눈에 힘 빼라
지난주 절에 가서 노스님을 뵈었다. 노스님은 불가의 큰 어른이신데, 주름 많은 얼굴로 웃으실 때는 어린아이 같다. 노스님 방에 소나무 그림이 걸려있다. 그림 속의 소나무는 껍질이 울퉁불퉁하고 옹이가 튀어나왔고 가지들이 이리저리 구부려져 있다. 거친 자리에서 태어나서 힘겹고 힘세게 살아가는 나무다.
노스님은 이 소나무 그림 아래 큰 물동이를 들여놓았다. 동이 속에 물이 가득 차 있다. “웬 물입니까?” 여쭈어 보았더니 “나무가 목말라 보여서 물을 주고 있다”라고 말씀하셨다.
창밖으로, 온 산에 낙엽이 내리고 있었다. 노스님은 새벽마다 젊은 스님들과 함께 낙엽을 쓴다.
며칠 전에는 어둠 속에서 낙엽을 쓰는데, 젊은 스님이 플래시를 켜고 일을 하길래 “불 꺼라, 새벽 어스름이 좋지 않으냐. 불 꺼야 잘 보인다”라고 야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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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한다. 노스님은 이것이 젊은 스님을 아주 크게 혼내 준 사건이라고 말했다.
노스님은 새벽 예불에 목탁을 칠 때마다 목탁 소리에 몸의 모든 세포들이 새롭게 깨어나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노스님은 공부가 깊고 도력이 높으시지만 어려운 불교 이야기는 하지 않으신다. 노스님은 내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눈에 힘을 빼라! 그러고 다니다가 큰일 난다.”라고 말씀하셨다.
■ 시간과 강물
나는 194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두 살 때에 6•25 전쟁이 나서 엄마 등에 업혀 부산으로 피난 갔고, 부산에서 자라서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에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은 잿더미가 되었다. 학교에는 건물이 없어서 미군이 지어준 천막 교실에서 수업했다. 해마다 보릿고개에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관공서 건물에는 ‘기아퇴치’, ‘절량농가 근절’, ‘식량 증산’ 같은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고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여름에 큰비가 와서 한강 물이 불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마포구 망원동 쪽 한강으로 물 구경을 나갔다.
한강은 물이 가득 차서 출렁거리며 흘러가고 있었다. 강은 힘차고 거침없었다. 한참 후에 아버지는 말했다.
“물을 잘 봐라. 흐르는 물을 보면 다시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낀다. 물이 흘러가는구나.”
나는 좀 더 자란 후에야 아버지의 말에 담긴 고통과 희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흐름을 잇대어 가면서 미래로 나아가는 시간의 새로움을 말한 것이었다.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시간이 앞으로 다가오고 있고, 그 시간 위에서 무너진 삶을 재건하고 삶을 쇄신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아버지는 어린 아들에게 말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강물은 미래로 향하는 시간이었다.
별들이 운행하는 우주 공간 속의 시간과 땅 위의 흙을 익혀서 흙 속에 잠들어 있던 태초의 색을 발현시키는 도자기 가마 속의 시간과 몸속에서 몸을 길러내는 포유류의 자궁 속의 시간과 씨앗에서 꽃을 피워 내는 식물들의 시간과 김치를 익히는 김장독 속의 시간이 모두 동일한 질감과 작용을 갖는 것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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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지 못하지만 그 모든 시간들을 인간 언어의 영역으로 끌어넣을 수 없다 하더라도, 저 여러 가지 시간들은 말의 길이 끊어진 절벽 건너편에서 제가끔 아름답다.
안중근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덕순을 만나서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러 가자고 제안했을 때 우덕순은 두말없이 따라왔다. 두 젊은이는 이토를 죽여야 하는 대의를 거대담론을 말하지 않았고, 실탄과 여비는 모자라지 않은지, 성공할 수 있을 것인지, 이토를 쏘고 나서 어디에 몸을 두어야 할 것인지를 말하지 않았다. 뜻은 순식간에 서로에게 스몄다. 이토를 쏘러 가기로 작정한 그다음 날 아침에 두 젊은이는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으로 가서 하얼빈으로 향하는 3등 열차에 몸을 실었다.
소설 <하얼빈>을 쓰면서 나는 이날 아침에 밝아 오는 어둠을 뚫고 달리는 하얼빈행 열차를 생각하면서 행복했다. 내 아버지의 한강이 고통과 시련의 과거를 이끌고 새로운 시간 속으로 흘러가듯이, 안중근의 열차는 약육강식하는 시대의 어둠을 뚫고 하얼빈으로 갔다. 이날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의 아침에 청춘은 아름답고 강력하다. 그들은 서른한 살이었다.
어린이들은 길을 걸어갈 때도 몸이 리듬으로 출렁거린다. 몸속에서 기쁨이 솟구쳐서 아이들은 오른쪽으로 뛰고 왼쪽으로 뛴다. 아이들의 몸속에서 새롭게 빚어지는 시간이 아이들의 몸에 리듬을 실어준다. 호랑이나 사자의 어린것들도 스스로 기뻐하는 몸의 율동을 지니고 태어난다. 그것들은 생명을 가진 몸의 즐거움으로 발랄하고 그 몸들은 신생하는 시간과 더불어 뒹굴면서 논다. 이 장난치는 어린것들의 몸의 리듬을 들여다보는 일은 늙어가는 나의 내밀한 즐거움이다.
■ 태풍전망대에서
태풍전망대는 경기도 연천의 군사분계선에 인접한 산마루다. 이 고지에 올라서면 눈앞에 무진강산(無盡江山)이 펼쳐진다. 여기서는 사람의 눈이 한평생 붙어 있던 자리에서 풀려나서 말(馬)의 눈처럼 얼굴의 양쪽에서 모든 방향을 동시에 볼 수 있고, 모든 방향으로부터의 느낌을 통일된 이미지로 종합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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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봉우리들이 시야 너머까지 잇닿아서 출렁거리고, 임진강이 그 사이를 돌아서 흘러온다. 물의 흐름은 산을 때리거나 깎지 않고, 산의 흐름은 물을 가로막거나 건너가지 않는다. 산과 물은 서로를 범하지 않고,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 주며 제 갈 길을 가는데 제 갈 길을 가면서 더불어 간다.
낙엽 한 개를 보면 천하의 가을을 안다고 옛사람이 말했는데, 이 말은 작은 조짐으로 시류를 예측하는 정치적 언설일 뿐, 가을의 공활(空豁)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말은 오히려 봄에 합당할 터이다. 신록의 생명은 확실하고 자명해서 인간의 생명감과 직통하므로, 나무 한 그루에 새잎이 돋으면 천하의 봄을 알 수 있다.
봄에 태풍전망대에 올랐더니, 먼 산천의 초록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선연했고, 수목의 향기가 시간 속에 녹아들었다. 이런 날에는 나는 이 세상에 더 오래 머물러 있고 싶다.
여름의 산천은 푸르고 힘차다. 여름의 봉우리들은 잎으로 덮이고, 부푼 강물은 산모퉁이를 빠르게 돌아나간다. 멀리서 온 초록이 세력을 부풀려서 천지간에 가득차면, 시간의 밀도는 촘촘해진다. 여름의 시간은 밀물로 밀려와서 공간을 가득 채운다.
지금보다 젊었을 때 나는 태풍전망대에서 소나기를 만나면 나무처럼 두 팔을 치켜들고 비를 맞았다. 짧은 바지와 짧은 티셔츠 차림으로 소나기를 맞으면 빗줄기는 내 맨몸을 직접 때리고, 몸의 구석구석을 흘러내린다. 그때 나는 한 그루의 나무였는데, 지금은 신명이 줄어서 이런 기막힌 놀이를 할 수 없다.
가을에는 잎이 떨어진 나무들 사이가 넓어져서 제가끔 홀로 선다. 가을에는 먼 산들의 능선이 뚜렷하고 새 울음소리가 가깝다. 가을에는 시야가 넓어져서 사라져가는 산천의 뒷모습이 보인다.
봄은 사람에게 다가오지만 가을은 사람으로부터 멀어져서 시계(視界) 너머로 간다. 하늘과 땅 사이가 헐거워지고 수만 낙엽이 흩어져 날리면 천하의 가을을 안다.
이 고지에서 가을에는 시간의 작동이 감지되지 않는다. 시간은 지하 심층부로흘러가고, 땅은 눈으로 덮힌다. 눈이 가득 쌓인 산천이 오히려 비어 보이는 것은 눈이 모든 것의 차별성을 덮어서 오직 하얗고, 얼어붙은 산천에서 시간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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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겨울에 이 고지를 오르면 시간의 속박에서 풀려나는 생명의 느낌은 자유 속의 두려움인데, 자유보다 두려움이 더 크다.
산천은 물리법칙의 지배를 받는 공간이고, 무정하고 불인(不仁)해서 수억만 년이 지나도 그 안에서 인간을 닮은 의미가 발생할 리 없지만, 그러한 산천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서 삶의 기운으로 약동할 수 있게 되는 까닭을 묻는다면 나는 대답하지 못한다.
시공의 무한감에 실려 있던 나의 의식은 이 봉우리들의 이름이 떠오르는 슨간 역사의 땅바닥으로 추락한다. 눈 아래 펼쳐진 이 봉우리들의 이름은 베티고지, 니키고지, 켈리고지, 노리고지, 테시고지, 대머리고지…들이다. 본래 무명의 야산이었는데, 6•25 전쟁 때 미군들이 작전상의 식별 표지용으로 붙여 놓은 이름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산천은 인간의 소유가 아니므로 이름이 없지만, 인간이 지어준 이름을 붙이고 전쟁사에 남게 되는 것은 봉우리들의 불운이다.
‘피가 모여서 강으로 흘렀고, 시체가 쌓여서 산을 이루었다’는 문장은 옛 전쟁 로망에 흔히 나오는 말인데, 6•25전쟁 당시의 산악고지에서 이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1951년 4월에 공산군은 70만 대군을 몰아 춘계공사를 시작했고 연합군은 재반격했다. 휴전협정 조인이 성사될 듯하자, 한 뼘의 땅을 더 차지하려는 고지전이 봉우리마다 전개되었다. 죽음이 죽음을 잇대어 가는 무한 소모전이었다.
1952년 여름부터 겨울까지 이 고지들은 여러 번 주인이 바뀌었고, 싸움은 휴전협정이 조인될 때가지 계속되었다.
태풍 전망대에는 이 싸움에 참전했던 소년 전차병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중학생 신분의 소년 120명이 전차 하사관으로 임관되어 1953년 1월, 이 지역 전투에 투입되었다. 소년 전차병들은 베티고지, 퀸고지에서 싸웠다고 기념비에 적혀있다.
소년병들의 기념비 앞에서는 천주교회에서 세운 성모마리아상이 시산혈해의 봉우리들을 바라보고 있다.
백설이 봉우리들을 덮어서 높낮이를 지우듯이 역사를 백설이나 신록으로 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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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수는 없다. 고지에서 내려오며 나는 이 불완전하고 부자유한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안다.
돌아보니, 고지의 성모 마리아는 여전히 북쪽을 바라보고 있다. 마리아의 눈길이 무력한 것이 아니기를, 나는 마리아께 기도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여 우리가 우리의 불쌍함을 스스로 알게 하소서.”
2024. 8. 11
⁕ 다음에 2부가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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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 송 세 월 (2)
■ 김훈 산문
◎ 2부 글과 밥
■ 여름 편지
책을 읽다가 눈이 흐려져서 공원에 나갔더니 호수에 연꽃이 피었고 여름의 나무들은 힘차다. 작년에 울던 매미들은 겨울에 죽고 새 매미가 우는데, 나고 죽는 일은 흔적이 없었고 소리는 작년과 같았다. 젊은 부부의 어린애는 그늘에 누워서 젖병을 물고 있고 병든 아내의 휠체어를 밀고 온 노인은 아내에게 부채질을 해 주고 물을 먹여주고 입가를 닦아주었다.
호수의 물고기들 중에서 어떤 놈은 내가 물가로 다가가면 나에게로 와서 꼬리 치는데, 아 저 사람 또 왔구나. 하면서 나를 알아보고 오는 그놈이라고 나는 믿는다.
연꽃의 흰 꽃잎에는 새벽빛 푸른 기운이 서려 있어서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연꽃은 반쯤 벌어진 봉우리의 안쪽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거기는 너무 순수하고 은밀해서 시선을 들이대기가 민망했다. 연꽃의 향기는 멀고 은은해서 사람을 찌르지 않고 연꽃의 자태는 아름답지만 사람을 유혹하지 않는다. 넓은 호수에서 연꽃은 등불처럼 피어 있었다.
모든 생명은 본래 스스로 아름답고 스스로 가득 차며 스스로의 빛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이어서, 여름 호수에 연꽃이 피는 자태는 언어로써 범접할 수 없었다.
내 옆의 노부부는 나무 그림자가 길어지고 빛이 엷어질 때까지 말없이 연꽃을 들여다보았다. 늙은 부부는 연꽃을 통역사로 삼아 말 없는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 걷기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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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에 눈 덮인 공원을 달리다가 빙판에 넘어져서 무릎을 다쳤다. 그래서 나는 겨우내 걷지도 뛰지도 못하고 내 어두운 골방에서 도리없이 책을 끼고 뒹군다.
김화영 교수는 2년 전에도 번역서 <예찬> (현대문학, 2000)을 펴냈다. <예찬>도 삶과 몸의 직접성을 위하여 쓰인 글이라는 점에서 <걷기예찬>과 함께 읽히는 책이다. 아마도 <예찬>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을 때 김화영 교수의 마음은 아늑해지는 것 같다. 이 세상이 다 말라비틀어져서 아무런 ‘예찬’할 만한 것이 눈에 띄지 않을 때 김 교수는 시무룩해 보인다.
<걷기예찬>이 예찬하고 있는 것은 우선 걸음을 걸어가는 인간의 몸의 조건이다. 직립보행하는 이 몸은 진화의 수억 년을 통과해 나온 몸이지만 아직도 네 발의 추억을 간직한 몸이다. 당신들 발바닥의 굳은살 속에 그 추억은 살아 있다.
18세기 조선의 지리학자 신경준(申景濬 1712~1781)은 말했다.
“무릇 사람에게는 그침이 있고 행함이 있다. 그침은 집에서 이루어지고 행함은 길에서 이루어진다. 집과 길은 중요함이 같다. 길에는 주인이 없고, 그 길을 가는 사람이 주인이다. - 도로고(道路考) 중에서
신경준은 길과 걷기의 공적 개방성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길은 소통의 통로이고 걷기는 그 행함이다. ”집과 길은 중요함이 같다“는 말은 중요한 말이다. 나의 집에서 너의 집으로 가는 통로가 길이다. 길의 몸과 말의 몸은 다르지 않다. 살아 있는 몸만이 그 통로를 따라 걸어갈 수 있다. 집으로 가는 길과 밖으로 가는 길이 다르지 않다면 우리는 <걷기 예찬> 속의 길을 따라서 타인에게로 갈 수 있을 것인가. 몸은 그 길을 가고 싶다. 길이여, 책 속에서 뛰쳐나와 세상으로 뻗어라.
■ 조사 ‘에’를 읽는다
한국어로 만장을 쓸 때나 한국어로 쓴 문장을 읽을 때 나는 늘 조사(助辭)에 걸려 넘어지거나 머뭇거린다. ‘은, 는, 이, 가, 을, 에…’ 따위의 한국어 조사는 한 음절로, 생김새는 허름하지만 쓰임새는 넓고 깊다. 조사는 단어와 단어 사이의 관계를 매개하고 단어에 지위를 부여해서 단어를 부린다. 한국에서 단어들은 조사에 꿰어짐으로써 문장을 이루고 정돈된 메시지에 도달한다. 조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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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들이지 않으면 한국어 문장을 쓸 수 없고 한국어 문장을 읽을 수 없다.
‘I love you’를 들여다보면 동사(love)가 조사의 매개 없이 목적어(you)를 직접 거느리고 있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다.’에서 조사 ‘는’과 ‘를’을 빼버리고 ‘나, 너 사랑 한다.’로 바꾸어 놓으면 문장의 논리적 구조는 엉성해진다.
나는 한국어로 문장을 쓸 때 주어와 동사의 거리를 되도록 가까이 접근시킨다. 주어와 동사가 바짝 붙으면 문장에 물기가 메말라서 뻣뻣해지지만 문장 속에서 판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선명히 알 수 있고, 문장이 지향하는 바가 뚜렷해진다. 주어와 동사의 거리가 멀면 그 사이의 공간에 한바탕의 세상을 차려놓을 수 있지만 이 공간을 잘 운영하려면 글 쓰는 자의 몸에 조사들이 숨결처럼 붙어 있어야 하고, 동사의 힘이 문장 전체에 고루 뻗쳐 있어야 한다.
문체의 주요 부분은 조사와 다른 단어들 사이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논리적 구조를 조사에 의지하는 언어로 문장을 만드는 일은 벽돌을 한 개씩 쌓으면서 그 사이에 접착제를 쓰는 공법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접착제가 끈기가 모자라거나 지나치거나 용도에 맞지 않으면 건물 전체가 뒤틀린다.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 ‘3‧1 독립선언서’ 첫 문장
이 문장은 완벽하다. 군더더기가 없고 지향점이 선명하다. 주어, 동사, 목적어가 정확한 자리에 배치되어 있고, 주어가 조사를 부려서 문장 전체를 작동시키고 있다. 우리가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를 문장 한 개로 정확히 선언하고 있다.
오등(吾等)은 강력한 주어다. 한국어는 주어가 없거나 주어를 감추어 놓은 문장으로도 서정시를 쓸 수 있고 산문을 쓸 수 있지만, 민족의 독립을 선언하는 문건의 맨 앞자리에 일인칭 군집 명사 ‘오등’을 내세운 이 짧은 문장은 무미건조한 문체의 장관을 이루었다. ‘오등’을 ‘오등이’라고 쓴다면 선언의 힘은 주저앉는다.
‘오등’ 두 글자를 보면서 나는 한국어의 역사에서 주어가 주인의 자리를 당당히 차고 있는 언어의 풍경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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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등’의 문건상의 주체는 민족대표 33인이지만 그 실체는 목적어의 일부로 쓰인 ‘조선인’이다.
‘자(玆)’의 한자 의미는 ‘이제’, ‘여기서’ 또는 ‘이로써’이다. ‘자’는 개념의 영역이 명확하지 않다. 이 한자 한 개에 한국어 조사 ‘에’가 붙어서 ‘자에’를 이루면 ‘자에’는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현장을 말하고, 이 울분과 고통을 독립으로 전환하려는 역사적 계기로서의 시점과 현장을 말한다.
‘3‧1 독립선언서’에서 ‘선언’의 목적어는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이다. ‘임’은 ‘이다’라는 술어의 명사형이다.
■ 형용사와 부사를 생각함
동양 고대의 대가들은 문장의 고삐를 힘주어 당기지 않아도 말을 부릴 수 있었는데, 이것은 흉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말이 저절로 사람을 따라올 리는 없으므로 그 대가들도 힘들인 흔적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고삐를 바짝 쥐기는 했을 터이다.
쓰이기를 원하는 것들과 남에게 말할 만한 가치가 생각하는 것들이 속에서 부글거리는 날에는 더욱 문장의 고삐를 단단히 틀어쥐어야 한다. 이런 날에는 형용사와 부사가 끼어들고, 등장인물의 말투가 들뜨고 단정적 종결의미가 글쓰는 자를 제압하려고 덤벼든다. 글이 잘 나가서 원고 매수가 늘어나고 원고료가 많아지는 날이 위험하다. 이런 날 하루의 일을 마치고 공원에 놀러 나가기 전에 글 속에서 뜬 말들을 골라내고 기름기를 걷어 낼 때에는 남이 볼까 무섭다.
요즘에는 이리저리 주무르다가 버리는 말들이 많아진다. 이런 말들 중에는 거대한 관념어도 있고, 큰 것을 도모했다가 헛발질한 문장도 있지만, 형용사나 부사가 가장 많다. 내 버린 단어들을 다시 주워서 쓰기도 하고 오래 망설이다가 다시 끼워 넣기도 한다. 이런 파행은 오래된 것이지만 나이 들면서 더 심해진다.
형용사가 문장의 술어가 아니라 수식어로 사용되었을 때 사물과 언어 간의 괴리는 더욱 두드러진다. ‘오늘은 춥다’라고 말하면 추움은 어느 정도 객관화되지만, ‘추운 오늘’이라고 말하면 ‘추움’은 말하는 자의 감각의 세계를 드러낼 뿐이고, ‘추위’라고 말하면 양쪽을 모두 추상화해서 개념의 세계로 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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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용사나 부사는 그 단어의 힘이 미치는 범위가 분명하지 않고 문장의 논리적 기능에 기여하는 바가 없어서 사물이나 사유를 의탁하기에는 허약한 품사라는 의구심을 나는 버리지 못한다. 형용사나 부사를 타박하면서 문장에서 쫓아내는 것은 그 단어를 부리는 솜씨가 모자라서 제자리에 들여 앉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 이육사 ‘광야’ 중에서
이육사(李陸史, 1904~1944)는 이 시행에서 ‘이제’, ‘홀로’, ‘여기’라는 부사 3개를 쓰고 있다. 시행 한 줄에 부사가 하나씩 박혀 있다. 이 부사 3개가 시행에 출렁이는 리듬을 부여해서 흐름을 끌고 나간다. 언어의 흐름과 내면의 흐름이 합쳐져서 이 출렁거림은 강력한 돌파력을 갖는다. 부사 3개가 인간의 존재를 약육강식하는 세계의 비극 앞으로 돌이킬 수 없이 바짝 밀어붙인다. 이 문장은 지금, 여기에 처한 실존의 모습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스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 백석 ‘국수’중에서
백석(白石, 1912-1966)의 시에 자주 나오는 ‘국수’는 냉면이다. 백석은 형용사 4개를 잇대어 가면서 냉면의 모양새와 질감을 표현하고 있다. 구태여 분류하자면, ‘슴슴하다’와 ‘부드럽다’는 말은 냉면을 먹는 백석 자신의 식감이고 ‘히스무레’와 ‘수수하다’는 말은 냉면 자체의 시각적 느낌이다. ‘슴슴하다’는 혀의 미각이고 ‘부드럽다’는 입안의 촉각이다. ‘히스무레하다’는 색감이고 ‘수수하다’는 형태다.
4개의 형용사 안에서 인간(백석)과 사물(국수)은 서로 교차하면서 합쳐진다. 이렇게 해서 형용사들은 ‘국수’안에서 서로 스미고 섞인다.
■ 난세의 책 읽기
김득신(金得臣 1604~1684)은 조선 중기 시인이다. 그는 경상 관찰사를 지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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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아치의 아들이다. 어려 시인 묵객들이 그를 당대 최고의 문장으로 꼽았다. 그는 산문보다 시에 주력했다. 그는 여러 시인묵객의 풍류행각과 작문을 수집하고 비평을 덧붙여서 <종남총지 終南叢志>라는 시화집을 남겼다.
<종남총지>는 47명의 짧은 시화(詩話)로 구성되어 있는데, 당대의 시인들이 문장을 겨루어서 자랑하고 비판하는 이야기들이다.
차천로(車天輅 1556~1615)는 김득신 보다 50여 년 앞선 시대의 문신으로 그
의 문명은 조선뿐만 아니라 일본과 명나라에까지 떨쳤다. 그는 서른 살 때
(1586년) 관직에 몸담고 있는 신분으로 남의 과거시험 표문(表文)을 대신 써
주어서 장원급제 시킨 죄가 드러났다. 그의 죄는 사형에 해당할 만했으나 선
조가 그의 재능을 아까워해서 감형했다. 그는 곤장 50대를 맞고 함경도 명천
으로 유배되었다가 3년 후에 사면 복직되었다.
복직된 후에 차천로는 조선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가서 일본에 머무는 동안 4
천 수 이상의 시를 지어서 일본인을 놀라게 했다. 그가 명나라로 보내는 외교
문서를 관장하게 되자 그의 필명은 명나라에까지 떨쳤고, 그는 조선에 오는 명
나라 사신들과 시문을 주고받으며 교유했다. 차천로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
꼽혔다. 김득신이 지은 시화집 <종남총지>에는 차천로의 죽음이 시화로서 기
록되어 있다.
허균(許筠 1569~1618)은 당대의 억압적 현실에 좌충우돌하면서 이단아의 생
애를 살았다. 그는 시대의 질곡과 모순을 깊이 고뇌했고, 가끔씩 퇴폐방탕했
고, 벼슬살이와 유배와 투옥을 거듭했다.
김득신의 <종남총지>에 쓰인 이야기에 따르면 허균은 차천로의 문장과 명성에 대한 경쟁의식으로 괴로워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중국 북경에 가서 성관(星官 별자리를 보고 천문을 관측하는 관리)을 만났더니 ”조선 쪽에 해당하는 별 하나가 빛을 잃었으니 반드시 조선의 큰 문장가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 라고 말했다. 허균은 이 말을 듣고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압록강을 건너와서 차천로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깜작 놀라 정신이 멍해졌다. 이것이 김득신이 전하는 이야기다.
압록강을 건너오자마자 허균은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되었으니 북경 성관의 예언은 틀리지 않았고 그의 죽음으로써 그가 조선 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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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문장가라는 것이 증명 되었다고 말한다면 이것은 성관의 말이 될 것이다. 김득신은 당대 현실의 질곡에 처한 독서가와 문장가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김득신은 조선조에서 책을 가장 많이, 그리고 열심히 읽은 지식인으로 꼽힌다. 여러 선비들이 인정할 뿐 아니라 스스로도 자부하고 있다.
김득신은 <사기>, <한서>, <한유문집> 같은 책들은 손으로 베껴 써 가면서 만여 번을 읽었고 <백이전>은 1억 1만 3천 번을 읽었다. 그는 1억 번을 읽고 나서 서재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고 지었다.
여든 살 되던 해 김득신은 충청도 괴산에서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의 집에 쳐들어온 화적의 칼에 맞아 죽었다.
허균은 책 속의 길과 세상의 길을 이으려다가 죽었고, 김득신은 책 속의 길과 세상의 길을 끊어놓고 죽었고, 차천로는 북경 성관의 ‘인정’을 받으면서 죽었다. 세상의 길과 이어지지 않는다면 책 속에 무슨 길이 있겠는가.
나는 김득신의 책과 화적의 밥 사이를 건너가지 못한다. 나는 밤에는 책을 읽지 않는다.
■ 혼밥, 혼술
한국에는 어느 동네를 가든지 ‘먹자골목’이 있다. ‘먹자골목’은 식당가 밀집 구역이다. 골목 입구에 ‘먹자골목’이라 간판을 붙여 놓고 있으므로, 이 이름은 공식 행정용어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먹자골목’은 배고픈 사람의 허기와 게걸든 사람의 식탐이 느껴져서 ‘식당거리’보다 생기 있는 말이다.
내가 사는 동네의 변두리 뒷골목에도 9천 원 이하의 음식을 파는 ‘먹자골목’이 있다. 이 골목에는 지린내와 비린내가 토착화 되어 있다. 지린내는 밤마다 술 취한 사내들이 내지른 오줌 냄새이고 비린내는 식당들이 내버린 생선 쓰레기가 썩는 냄새다. 이 냄새들은 오랫동안 골목에 스미고 찌들어서 새것의 이물감이 순화되어 있다. 먹자골목 초입에 막 들어섰을 때는 이 냄새가 역겹지만 한 5분 지나면 친숙해진다.
이 골목 식당들 중에서 내가 가끔 가는 가게는 ‘고향’이다.
‘고향’은 24시간 영업한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과 일을 하러 나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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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아침과 저녁에 ‘고향’에서 대중식사를 먹는다. ‘고향’에는 혼밥을 먹는 사람들이 많다. 혼밥 먹는 자리는 벽면을 따라 놓인 좁고 긴 식탁이다. 홀 가운데 4인용 식탁도 몇 개 있지만, 혼밥 먹는 사람은 혼밥 먹는 사람과 합석하기는 꺼려서 혼밥 먹는 자리로 간다. 혼밥 먹는 사람들은 벽 앞에 일렬로 길게 앉아서 벽을 쳐다보며 먹는다.
혼밥 먹는 사내들은 혼술을 마신다. 혼밥에 혼술을 마시는 사내들은 거무튀튀하고 우중충하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저녁에 ‘고향’에서 혼술을 마시는 사내들의 술맛을 나는 안다.
소주는 면도날처럼 목구멍을 찌르며 넘어가고, 몸속의 오지에까지 비애의 고압전류가 흐른다. 그 사내들의 창자에 스미는 김치찌개 국물과 돼지고기 한 점의 맛을 나는 안다.
‘고향’에서 혼밥을 먹을 때 나는 여러 혼밥꾼들과 길게 앉아서 나의 혼밥을 먹지만, 나의 혼술 맛으로 다른 사내들의 혼술 맛을 헤아려 알 수 있고, 여러 혼술들이 이 술맛의 고압전류로 이어져 있음을 안다.
내 소년 시절(1960년대)에는 허름한 식당에 ‘대중식사’라고 써 붙인 간판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대중목욕탕, 대중문학, 대중가요라는 말도 널리 쓰였는데, 지금은 국민, 시민, 인민, 민중처럼 위엄있는 말에 밀려서 사라졌고, 사람을 화물만도 못하게 취급하는 버스나 지하철에는 ‘대중교통’이라는 말이 남아있다.
50여 년 만에 동네 먹자골목 식당에서 ‘대중식사’라는 내 글자와 그 아래 쓰인 차림표의 음식들을 보았을 때 나는 눈이 번쩍 뜨이게 반가웠다.
노동시간과 임금이 싸우는 아귀다툼 속에서, 날 저물면 허기지는 자연현상 속에서, ‘대중’이라는 두 글자는 역동적으로 살아 있었다. ‘대중’과 ‘식사’가 합쳐지면서 혼밥의 사적 경계는 뭉개지고, 혼밥 먹는 식탁은 광장으로 넓어진다.
대중식사의 ‘대중’은 대중가요, 대중문화, 대중목욕탕, 대중교통‘의 ’대중‘보다 더 깊은 울림을 갖는다. 밥을 먹는 행위가 그 밖의 온갖 인간 잡사보다도 더 근원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 주먹도끼
지금보다 좀 더 젊었을 때 나는 연장을 쥐고 몸을 부려서 일하기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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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동네 신축공사장에서 자투리 목재를 주워와서 화분이나 상자를 만들었고, 앞산에서 주워온 나무토막을 엮어서 텃밭에 울타리를 쳤고, 삽으로 땅을 파서 모종을 심었다.
몸과 마음이 언어 속으로 실종되어서 내가 나를 찾으러 나서야 할 지경이 되면 나는 마당에 나가 톱질, 망치질, 삽질을 해서 위기를 모면했다.
못을 박을 때는 나무의 형편을 헤아려야 한다. 나무의 두께와 결을 살펴서 나무가 못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판단해야 하고 거기에 맞는 못을 골라야 한다.
톱으로 나무를 자를 때는 동작을 깔짝거리지 말고 톱날의 전체를 사용해서 천천히 밀고 당겨야 한다. 밀 때보다 당길 때 더 힘을 주어야 일이 수월해진다. 톱질을 할 때는 천천히 하면 빨리 끝난다.
삽으로 땅을 팔 때는 등날을 밟아서 깊이 박아야 한다. 삽질을 할 때는 팔다리뿐 아니라 전신의 힘이 일에 참여한다. 흙을 멀리 던질 때는 허리를 돌려야 쉽다.
연장을 써서 일할 때 흙과 나무와 돌은 나의 몸에 저항하고 나의 몸이 그 저항을 받아들이면서 다시 거기에 저항하는데, 저항과 수용이 연결되면서 나의 몸은 외계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집 떠났던 마음이 제집을 찾아서 몸 속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연장은 내 몸과 사물 사이에서 저항을 매개하고 소통시킨다.
연장은 나와 사물 사이를 매개하지만 인간의 편이다. 연장은 인간의 소망을 몸의 힘으로 바꾸어 사물을 변화시키는 도구다. 연장의 구조와 쓰임새는 인간의 몸에서 출발해서 사물 쪽으로 건너간다.
외계를 바꾸려는 소망의 간절함은 날(刀)로 집중되어 사물에 박힌다. 날은 사물에 닿고 자루는 사람의 몸에 닿고 힘은 작업의 핵심부에 집중된다. ‘몸-자루-날-사물’의 방향으로 작동되는 힘과 그 역방향으로 소급하는 저항을 연장이 매개함으로써 이 세상은 조금씩 모습을 바꾸어 가면서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인간이 관리할 수 있는 영역으로 편입된다.
인간은 수백만 년 동안 주먹도끼를 쥐고 많은 말과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왔다. 돌도끼 속에서 이야기는 들끓지만 들리지는 않는다.
여러 민속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농기구, 건축 장인들의 연장, 어로 작업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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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장들은 모두 구석기 돌 연장 계통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같은 계통 안에서 분화되고 기능화되고 세련되었다. 몸과 사물의 관계를 세분하고 정립하는 것이 이 연장들의 진화원리다. 지금, 연장들은 대부분 삶의 현장에서 밀려나 민속박물관에서 보존 처리되고 있다.
■ 박물관의 똥바가지
국립민속박물관 파주가 지난 2021년 7월 23일 문을 열었다. 파주는 내가 사는 일산에서 가까우니, 나는 잘한 것도 없이 복을 받은 셈이다.
이 박물관의 특징은 개방형 수장고와 민속아카이브다. 개방형 수장고는 지금
까지 박물관의 연구자들만 드나들던 수장고의 깊은 곳까지 일반 관람객들에게 보여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민속유물들이 연도별, 재질별로 분류되어서 유리장 속에 들어 있다. 관람객들은 수장고 안을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면서 구경하는데, 꼼꼼히 들여다보자면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고, 우선은 그 규모의 크기와 내용의 가득 참에 놀란다.
일반 문화재들 중에는 국보로 지정된 유물이 333점인데, 민속문화재 중 국보와 보물은 합쳐서 10여 점뿐이다.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 문화의 관점에서 볼 때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을 ‘국보’로 지정한다고 법에 규정되어 있다. 민속문화재는 “가치가 크거나 유례가 드문 것”이 아니고 흔하고 가깝고 일상적이다.
문화재의 등급을 정할 때 오래된 물건은 상위를 차지하기에 유리하지만 연륜이 절대적 기준은 아니다. 민속 문화재에는 오래된 것이 드물다. 민속박물관에서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쓰던 응원 물품도 민속 문화재로 모셔놓고 있다. 국보는 박물관으로 가지만 ‘생활’은 박물관으로 가지 않는다. 생활은 국보에 미달하면서 국보를 넘어서고, 국보로 지정되기를 소망하지 않는다.
이 유물들은 본래 박물관에 있던 물건이 아니고 생활의 구체적 현장에서 날마다 사람과 함께 지내던 물건들인데, 이 유물들이 본래 처해있던 제자리의 풍경까지 상상하면서 들여다보면 마음은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인다.
항아리에 그려진 까치는 사람의 마을 쪽을 바라보고 있다. 5세기 고구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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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속 벽화에서도 까치는 사람의 집 처마 끝에 앉아 있다. 까치는 사람의 마을에서 산다. 고구려의 까치가 조선의 옹기에 그려져 있고 내 집 마당의 소나무에 와서 짖는다. 까치는 새와 더불어 살아가는 한국인의 일상이다.
고구려 옛 무덤 속의 벽화에는 까치뿐 아니라 씨름, 춤, 음악회, 사냥, 야유회, 나들이, 아궁이, 부엌, 거실, 마차…같은 민속자료들이 그려져 있다.
■ 구멍
가야토기 구멍들은 모두 그릇의 아래쪽, 굽다리에 뚫려 있는데, 이 빈 것이 그 위에 얹히는 실물을 받치고 있다. 가야토기의 질감은 평화롭고 곡면은 유연하다. 이 평화는 바라보아도 알 수 있고 만져보아도 느낄 수 있다. 가야의 가마에서 불은 재료의 형태를 고정시키지만 재료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않는다.
가야토기는 권력자들의 무덤에서도 나오고 백성들이 살던 살림터에서도 나온다. 권력자들의 토기 구멍은 비대칭의 중층구조를 이루며 엄중한 위세를 표현했고 백성들의 토기 구멍은 단순하고 경쾌하다. ‘빔(空)’이 표현해 내는 범위는 내세와 현세, 죽음과 삶을 두루 아우른다. 이 구멍은 수백 년의 시간과 한반도 동남쪽의 넓은 지역에서 한 시대와 문화의 양식으로 자리 잡았다.
나는 이 어두움 구멍을 들여다볼 때마다 인간의 생로병사와 밥벌이하고 싸우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지지고 볶는 일상 속에 자리 잡은 영성을 느낀다. 이 영성은 신비주의나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생활 정서에 가깝다.
가야토기는 신분에 관계없이 두루 쓰였다. 내부가 여러 칸으로 나뉜 접시도 있다. 여러 가지 음식은 한 접시에 차려놓고 먹을 수 있는 그릇이지 싶다.
사람의 먹이는 모두 자연에서 나오기 때문에 그 기본 재료는 시간이 지나도 크게 달라질 수 없고 가야 사람들이 먹었던 나물, 물고기, 곡식, 야채를 지금 여기의 사람들도 먹고 있을 테지만 토기는 닦기가 어렵고 깨지기가 쉬워서 설거지하는 가야 여성들이 수고가 많았을 것이다. 이런 칸막이 반찬 그릇의 굽다리에도 구멍이 뚫려 있다. 가야 여염집 부엌의 접시 구멍을 들여다볼 때 나는 밥벌이와 생로병사의 하중에 찌들지 않은 생활의 청량감을 느낀다.
4세기에서 6세기에 이르는 동안 한반도 남쪽에서 전쟁과 살육은 일상화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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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가야는 약소국으로서 그 세월에 순응했고 저항했고 멸망했다. 옹기를 구워내던 가마 옆 동네에서 가야는 높은 수준의 철제 무기를 만들어서 싸움터 나섰다. 무기를 만드는 대장간과 옹기 가마들이 들어선 마을에서 가야의 악사 우륵은 가야금의 음악을 완성했다. 생활과 전쟁과 음악이 동시에 전개되면서 가야는 멸망했다. 멸망이라기보다는 옹기와 무기와 악기가 역사 속으로 통합되었다. 가야는 문자로 된 역사를 기록하지 않았다. 승자의 역사 속에서 가야의 멸망은 장식적인 파편으로 남아 있다.
대가야 왕조는 신라 진흥왕 때 신라군의 공격을 받고 끝났다. (서기 562)
신라 장군 이사부가 이 전쟁의 총사령관이었고 열다섯 살의 화랑 사다함이 전투현장의 선봉장이었다. 신라 진흥왕의 치세는 날마다 피에 젖었는데, 대가야 정벌은 그 유혈의 절정이었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신라가 가야를 부순 명분을 ‘가야가 반했기 때문’이라고 썼는데, ‘반’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았다.
김부식은 명분이 모호한 이 전쟁의 참상을 쓰지 않았고, 신라의 소년 화랑 사다함의 빛나는 승리와 이 어린 영웅의 탈속적 매력을 소상히 썼다. 사다함은 금강경에 나오는 ‘각자(覺者)’의 등급인데 욕계(欲界)의 유혹을 끊은 성자라는 뜻이다. 화랑 사다함은 이 거룩한 이름으로 전쟁에 앞장섰고 이겨서 큰 상을 받았다.
가야토기에는 그리스 항아리의 서사구조가 없고 그림이 없다. 그 자리에는 구멍이 뚫려 있다. 구멍 안쪽은 멀어 보인다. 거기는 대낮도 아니고 밤중도 아닌 어스름이다. 그 시간의 질감은 초저녁이나 새벽 같아서 밀도가 낮고 헐겁다. 이 구멍으로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를 가야의 옹기장이들은 말하지 않고 죽었지만 나는 이 구멍 안쪽에서 새로운 시간의 싹들이 발아돼 있음을 느낀다.
가야토기의 명품들은 국립 김해박물관이나 경북 고령의 대가야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데, 나는 고령의 대가야박물관에 더 자주 갔었다. 대가야박물관에는 가야토기와 우륵의 가야금이 함께 있고, 지산동 주산 기슭에 들어선 고대국가의 무덤들과 가야 멸망의 비극이 있다. 박물관 뒷산의 능선은 고대의 표정으로 현대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다. 문화재 중에서 옛 토기는 흔한 물건이고 관람객들에게도 별 인기가 없다 사람들은 늘 금관이나 이름 높은 산수화 앞에 몰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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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제비와 비빔밥
먹을 것이 모자라서 어렵던 시절에 내 가난한 어머니는 가끔씩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서 식구들을 먹였다. 어머니는 반죽 덩이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두 손으로 주물렀다. 반죽이 찰지게 엉겼다 싶어도 어머니는 계속해서 주물렀다. 나는 빨리 먹고 싶어서 그만 주무르고 끓이라고 졸랐다. 어머니는 “반죽을 오래 치대야 수제비가 찰지고 국물이 맑다 기다려라”라고 말하고 구슬땀을 흘리며 반죽을 이리저리 뒤집어 가며 주물렀다.
어머니는 애호박을 가늘게 채 쳐서 수제비에 넣고 소금으로 간을 했다. 차지게 반죽된 수제비의 식감은 쫀득쫀득했고 오래 끓여도 풀리지 않아서 국물이 걸쭉하지 않았다. 국물에는 애호박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어머니는 밀가루 반죽으로 수제비뿐 아니라 칼국수나 빵도 만들었다. 빵에는 버터나 설탕, 달걀은 넣지 못하고 대신 밀가루 반죽에 막걸리 지게미를 넣고 하룻밤 재운 후에 시루에 쪘다.
지난 2022년 11월에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백제의 장인들이 흙을 반죽해 여러 가지 생활용구와 조형물을 제작하던 기술을 보여 주는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의 제목은 <백제기술, 흙에 담다>였다. 흙으로 만든 토기, 기와, 벽돌, 항아리, 굴뚝, 벽화, 조각, 인물상 등 수백 점을 볼 수 있었다. 흙을 반죽하고 구워서 만든 옛 물건들을 들여다보다가 그 질감과 표정에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밀가루 반죽이 생각났다. 어머니의 추억이 떠올라서 나는 백제의 옛 물건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 공감은 사람의 마음과 물질 사이의 장벽이 허물어져서 서로 건너가고 건너오는 행복한 경험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옹기장이들은 반죽을 만드는 일을 전체 공정의 기본으로 삼는다. 흙덩이를 잘게 부수어 가루를 만들고 물을 부어서 가라앉히고 흙을 체로 쳐서 불순물을 골라낸 뒤, 흙을 밟아서 이기고 손으로 주물러서 반죽을 만든다. 이때 점질(粘質)의 흙에 사질(砂質 )의 흙을 섞으면 흙의 끈끈한 성질이 완화되어서 그릇은 수더분한 질감을 갖게 되고 숨을 쉴 수 있게 된다. 반죽은 이질적인 흙을 섞고 치대서 융합을 이룬다. 반죽은 무정형의 덩어리에 불과하지만 모든 형상과 용도로 빚어질 가능성을 예비하고 있다. 흙을 반죽할 때, 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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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들은 새롭게 태어나는 흙의 숨결을 손바닥으로 느낀다. 옹기장이의 손바닥을 통해서 물질 속으로 건너간다. 인간의 몸과 마음과 물질이 구획을 허물고 소통한다. 이 행복은 사물을 주무르는 생산자의 기쁨이다. 물질의 형질을 바꾸어서 세계를 개조할 수 있다는 옹기장이의 꿈은 신석기 이후로 지금까지 작동하고 있다. 반죽은 가마의 불 속에서 변환을 이루는데 옹기장이는 이 요변(窯變)의 모든 비밀을 경험할 수 있지만 설명할 수는 없다.
비빔밥을 만들 때, 어머니는 흰 쌀밥에 여러 가지 나물들과 고추장 들기름을 넣고 비볐다. 비빌 때, 어머니는 숟가락을 쓰지 않고 젓가락을 서서 가볍게 비볐다. 제삿날이나 명절날처럼 많은 양을 비빌 때는 주걱을 썼는데, 청동 주걱이 아니라 나무 주걱을 썼다. 나무 주걱은 청동 주걱보다 재료에 가해지는 힘이 약하다. 내가 어머니를 도와서 주걱을 들고 비비면 어머니는 “살살 비벼라. 으깨지 말고 치대지 마라. 반죽을 만드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부여 박물관을 나올 때, 나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말을 비로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비빔밥에는 흰 밥알의 존재가 한 개씩 살아 있어야 하고 여러 가지 나물들의 개별성이 뒤범벅이 되면서 파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어머니의 원칙이었다.
옛 옹기장이들의 손길과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손길이 이러할진대, 이 세상의 모든 갈등과 다툼과 불화와 적대관계를 버무려서 서로 의지하는 세상을 만들어 내야 하는 사람의 손길과 마음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면서 서울로 돌아왔다.
■ 키스를 논함
한용운(韓龍雲, 1879~1944)의 시집 <님의 침묵>(1926)은 서시(序詩)에 해당하는 시 ‘님의 침묵’이 맨 앞에 실려있고 결어에 해당하는 시 ‘사랑의 끝판’이 맨 뒤에 실려있다. 이 두 편의 시는 시집의 앞과 뒤에서 짝을 이루며 서로 손짓해 부르고 있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노래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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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날카로운 첫 키스’는 사라져 버린 과거의 키스가 아니다. 이 키스는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을 만한 위력을 갖는 혁명의 키스이며, 과거와 미래를 아우르는 현재의 키스이다. 그래서 시인은 이렇게 쓸 수 있게 된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키스의 힘은 이별과 재회, 상실과 회복, 고통과 기쁨을 통합해서 새로운 시간과 삶의 국면을 연다. 첫 키스는 날카롭고 강력하다. 이 키스는 현재의 키스이며 미래의 키스이다.
이 시집 맨 뒤에 실린 ‘사랑의 끝판’은 이 키스의 힘이 완성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사랑의 끝판’의 첫 줄은 “네 네 가요, 지금 곧 가요”로 시작되고, 마지막 문장은 “네네 가요, 이제 곧 가요”로 끝난다.
나는 이 짧은 문장을 지극히 사랑한다. 이 아홉 개의 글자 안에서 한국어는 보석처럼 빛난다. 이 여인의 어조는 간절하고 단순함으로써 힘차다. 이 여인은 ‘지금 곧’ 오겠다는 것이다.
이 여인은 무엇을 하러 오겠다는 것인가. 맨 앞에 실린 시 ‘님의 침묵’과 짝을 지어 이 한 줄을 읽으면서 나는 키스를 하러 오겠다는 이 여인의 마음을 짐작했다. 운명의 지침을 바꾸는 혁명의 키스, 천지창조 같은 현재의 키스를 하러, 지금 오겠다는 것이다. 키스에서나 삶에서나 ‘지금 곧’이 중요하다.
금년 봄부터 전국의 거리에 여러 정당들의 정치구호를 적은 현수막이 가득 내걸렸다. 법이 바뀌어서 마음대로 걸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현수막의 내용은 논리나 비유나 문맥이 성립되지 않는 욕지거리, 악다구니, 상소리, 저주, 증오, 과장, 거짓말, 가짜뉴스들이었다.
그것은 치매의 깃발처럼 대도시의 중심부에서 봄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그 현수막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 나라가 돌이킬 수 없이 쓰레기통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현수막 아래서 젊은이들이 키스를 했다. 젊은이들은 건널목에서 키스하고, 신호가 바뀌자 건너갔다. 이 썩어빠진 현수막 아래서 키스하는 젊은이들을 보면서 나는 이 나라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젊은이들이 저렇게 살아서 서로 끌어안고 키스하고 있으니 무언가 새로운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 키스는 미세먼지 자욱한 세종로 네거리 키스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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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증세로 펄럭이는 현수막 아래서의 키스였지만 새롭게 살아나가야 할 날들의 키스였고 한용운의 시에 나오는 ‘이제’와 ‘지금’의 키스였다. 마주 선 두 개의 거울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보이지 않는다. 삶의 쇄신은 ‘이제’와 ‘지금’의 바탕에서만 가능하다. 키스는 관능이고 혁명이다.
■ 새 날개 치는 소리를 들으며
10월 중순께 일산 호수 공원에 겨울 철새가 왔다. 새들은 지난해보다 열흘 쯤 일찍 왔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오는 청둥오리 무리다.
투명한 가을날 저녁에 새들의 비행편대는 파주쪽 하늘에 나타나서 일산으로 날아왔다. 새들의 가슴에 저녁노을이 비쳤다. 새들이 나타날 때, 하늘은 문득 무의미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인간이 해독할 수 없는 친밀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새들의 생명은 파충류의 생명과 섞여 있다. 뱀이 진화해서 새가 되었다고 생물학책에 나와 있다. 새의 종아리에는 지금도 비늘이 남아서, 그 증거가 되고 있다. 얼마나 큰 소망과 그리움이 뱀을 날게하는 것이며 새들을 대룩간 비행으로 몰아내는 것인가를 나는 생물학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생물학 책에는 ‘그리움’은 없고 ‘적응’만 나와 있다. 두 단어는 같은 뜻이 아까가?
대륙을 건너다니는 새들은 모두 그 고단한 종족의 후예들이다. 난생(卵生하는 것들은 인륜이 없고 대륙간을 날아다니지만 짐 보따리가 없다. 새들의 운명은 유전자에 깊이 각인 되어 있다. 새들은 2억 년 전 쥐라기 시조새 화석에서 날아오른다. 새들은 진화와 수억만 년 시간과 공간을 건너와서 한강 하구에 내려 앉는다. 한강 하구에서 새들은 뱀의 추억을 토해내며 끼룩끼룩 운다.
새들은 어디서 죽는가. 나는 해마다 한강 하구 일대를 자전거로 다니면서 모래톱에 앉은 새들을 망원경으로 관찰했다. 나는 새의 주검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새들이 기어코 시베리아로 돌아가서 죽을 까닭도 없어 보였다.
아마도 새들은 대륙을 오고 가는 비행중에 바람속에서 죽고, 가루가 되어서 종족의 운명 속으로 산화하는 것이리라. 새들은 이승의 땅에 육신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가 보다. 그래서 머물지 않고 옮겨 사는 저들의 가혹한 운명은 가벼워 보인다. 나는 요즘엔 철새의 주검 찾기를 단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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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에 오는 새들이 작년이나 재작년에 왔던 새들인지 확실치 않다. 모르겠으나 새들이 해마다 이 마을에 오는 걸로 봐서, 늙은 새들이 바람속에서 죽더라도 새로 태어나는 새들에게 일산 호수공원에 가면 사나운 것들이 없고 먹을 것이 많다는 정보를 주입하는 것이지 싶다. 그렇다면 이 마을에 오는 새들의 집단은 정보와 혈통이 유지되면서 특수한 천연관계를 이루는 무리가 아닐까 싶다. 새들은 고향이 없겠지만 사람이 억지로 새들을 제 마을에 얽어맨다. 새들은 사람을 편애하지 않지만 나는 내 마을의 새들을 편애한다.
◎ 3부 푸르른 날들
■ 청춘 예찬
비글호는 1831년 12월 27일 영국의 데번주 플리머스 항을 떠났다. 비글호는 영국 해군의 범선이다. 비글호는 무게 235톤, 돛대 2개, 대포 10문을 갖춘 소형 군함이다. 승선원은 76명이었다. 이 배의 선장은 26세의 영국 해군 장교 로버트 피츠로이였고 이 배에는 스물두 살의 찰스 다윈이 ‘박물학자’ 자격으로 동승하고 있었다. 이 항해의 군사적 임무는 지구를 일주하면서 위도를 계측하고, 남아메리카의 해안선을 측량하는 작업이었다. 제국주의가 전 세계로 전개되던 시대였다. 군함을 보내서 남의 나라의 해안선을 측량하는 임무는 그 의도가 매우 수상해 보이기는 하지만 다윈과는 관련 없는 일이었다. 이 범선은 대서양을 건너 남미대륙의 남단 마젤란 해협을 통과해서 태평양으로 나왔고, 갈라파고스,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몰디브를 거쳐서 1836년 10월 2일 귀환했다. 4년 10개월 만이었다.
다윈은 배 안에서 아무 직급이나 항해와 관련된 임무가 없었고, 보수도 없었다. 다윈은 피츠로이 선장의 손님 자격이었고 영국 해군은 다윈의 동승을 허락했다.
<종의 기원>에 의해 인간은 수만 년의 백내장을 걷어내고 저 자신의 새로워진 눈으로 시간과 공간과 생명을 불 수 있게 되었다, 새롭게 열린 이 시야는 매우 넓었으나, 수백만 년 동안의 지층에 생명의 증거물들이 촘촘히 박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이 넓은 시야의 이쪽에서 저쪽까지 증거와 사유를 이끌고 건너가기에는 물증이 허술하다는 것을 다윈은 알고 있었다. 다윈은 멸종의 희미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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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붙잡고 그 시간과 공간을 건너갔다. 이 글에서 ‘진화론’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나는 다윈과 피츠로이의 청춘을 말하려 한다.
출항할 때 다윈은 영국의 대문호 존 밀턴(1608~1674)의 <실낙원>과 그가 신뢰하는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1797~1875)의 <지질학 원리>를 지니고 배에 올랐다.
<실락원>의 서사구조는 구약성서의 <창세기>에 바탕하고 있다. 이 대서사시는 하느님이 창조한 낙원에서 죄를 짓고 쫓겨난 아담과 이브가 에덴의 동쪽에서 인간세(人間世)의 기원을 이루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지질학 원리>는 이 지구의 현 형태는 오랜 시간에 걸친 물리적, 화학적 변화의 결과물이라는 학설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 두 권은 화해하기 어렵고, 연결시키기 어려운 대척점을 이루고 있다. 스물두 살의 다윈이 왜 이 책 두 권을 기나긴 항해의 동반자로 선택했는지를 나는 설명할 수 없다.
다윈은 <종의 기원> 서문에서 말했다.
나는 종(種)이라는 것은 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며… 소위 동일한 속(屬)이라고 부르는 집단에 속해 있는 종들은 어떤 다른 종의 직계 자손들이라는 점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다.
이 말은 개별적으로 창조된 생명의 존재를 명백히 부정하고 있다. 다윈은 또 <종의 기원> 결론 편에서 말했다.
“아마도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유기체는 처음으로 생명을 가지게 된 어떤 하나의 원시 형태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닐까 하는 추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생명이 환경에 적응하면서 변하고 변하지 못하는 것들이 멸절된다고 할 때, 그처럼 스스로 변하는 힘의 원천과 기원은 무엇인가를 나는 다윈의 글에서는 읽을 수가 없었다. 다윈은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한계를 잘 알아서, 그 한계를 범하지 않는다.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은 이 경계선 위에서 경이롭다.
그토록 단순한 시작에서부터 가장 아름답고 경이로우며 한계가 없는 형태로 전개되어 왔고 지금도 전개되고 있다는, 생명에 대한 이런 시각에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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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에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스물두 살, 정약전(丁若銓 1758~1816)은 스물여섯 살, 이승훈(李承薰1756~1801)은 스물여덟 살, 이벽(1754~1816)은 서른 살이었다. 이 청년들은 인간세의 인륜도덕과 물리적 시공간의 운동법칙은 범주가 다른 것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에 눈뜨기 시작한 당대의 엘리트 지식인이었고 조선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들이었다. 정약진, 정약용 형제는 이미 생원시에 합격해 있었다. 이벽(李檗)의 누님 이씨 부인은 정씨 집안의 맏아들 정약현과 결혼했다. 이 청년들은 사돈댁을 오가며 학문으로 교류했고 혼맥으로 인연이 되었다.
조선의 19세기는 천주교도를 박멸하는 고문과 학살로 시작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 참극은 성리학의 왕조 조선이 서양 문물과 사상을 퇴치하는 문명 충돌이었고 체제를 수호하는 비상조치였고, 왕조 내부의 권력투쟁이었고, 아직도 도래하지 않은 새로운 세상을 미리 본 사람들의 순교 사태였다.
1784년 4월 15일에 지식인 세 명을 태우고 팔당나루를 떠난 돛단배 쪽으로 이 박해와 살육의 서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배를 타고 가던 중 이벽은 정씨 형제 두 명에게 ‘한 권의 책을 보여주면서, 천주교의 교리를 설명해 주었다. 정약용은 예순한 살이 되어 그날을 회고하면서 말했다.
“천지창조와 시초, 사람과 신, 삶과 죽음의 이치를 듣고 황홀함과 놀라움과 의아심을 이기지 못했는데, 마치 <장자>에 나오는 하늘의 강이 멀고 멀어 끝이 없다는 것과 비슷했다.”
배 안에서 배 안에서 스물두 살 정약용의 마음은 학문에서 신앙으로 문지방에 올라서 있다. 정약용은 멀어서 끝이 안 보이는 저 너머를 바라보고 있다. 정약전은 이날의 일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정약전도 배 안에서 이벽이 보여주는 그 ‘한 권의 책’에 빠져들었고, 이해 겨울에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받고 천주교에 입교했다. 이 ‘한 권의 책’은 젊은 그들의 운명에 깊이 닻을 내리고 있었다.
당쟁의 아수라 속에서 천주교인으로 모함을 받아 환로(宦路)가 험난해지자 정약용은 1797년 임금에게 자명소를 올려서 면직을 요청했다. 이 상소문에서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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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용은 그 ‘한 권의 책’을 읽었고, 한 때는 “마음속으로 좋아해서 사모했고 내용을 거론하며 남에게 자랑했습니다. 라고 자백했다. 정약용은 이 상소문에서 천주교의 고리를 극언으로 비판하고 자신은 천주교를 이미 떠났다고 호소했다. 임금은 정약용의 진정성을 이해했으나 정약용과 젊은 그들은 죽음으로 내몰리는 참화를 피할 수 없었다.
형틀에 묶인 정약용은 천주교인들을 적극적으로 고발했다. 정약용은 이승훈과 조카사위 황사영(黃嗣永 1775~1801), 주문모(周文謨 1752~1801)를 지목했고, 천주교인들을 효과적으로 색출해 낼 수 있는 방안을 포도청에 조언했다. 정약용은 사형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정약전은 이승훈으로부터 세례 받은 후 교회 모임에 여러 번 참가했고 그의 동생인 순교자 정약종(丁若鍾 1760~1801)에게 전도했다. 정약전은 그 후 천주교와 결별했으나 신유박해 때 다시 기소되어 심한 고문을 받고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정약용은 강진에 18년간 유배되었고, 정약전은 유배지 흑산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배지에서 정씨 형제는 내세의 하늘이 아니라 현세의 땅과 인간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아득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형제는 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강진과 흑산의 어부들이 이 편지를 전해 주었다. 두 형제가 자신의 유배지가 더 아름답고 살기 좋은 고장이라고 편지로 다투는 문장들은 아름답다.
흑산의 정약전은, 흑산이 강진보다 더 살기 좋은 고장이므로 약용의 죄가 더가볍다고 해서 강진으로 보내고 자신의 죄가 더 무겁다고 해서 흑산으로 보낸 것은 공정한 처분이 아니라고 말했다.
유배지의 두 형제가 젊은 날 배 위에서 건네받은 그 ‘한 권의 책’을 모두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형제는 하늘의 선한 뜻을 현실의 땅 위에서 이루기에 힘썼다.
정약전은 흑산해역의 물고기들을 관찰해서 <자산어보>를 썼다. 그는 고전이 아니라 물고기를 들여다보고 있다. 그는 섬의 주민들과 어울려서 술 마시며 놀았고, 섬의 여자와 혼인해서 두 아들을 낳았고, 공부방을 차려놓고 어부들의 자식 가르쳤다. 그는 유배지의 현실을 받아들였고, 거기에 동화했고, 그 위에서 희망을 건설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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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 강진에서 정약용은 산천의 자연을 즐겼고, 시대의 타락을 괴로워했고, 청년들을 모아서 가르쳤고, 수많은 저술을 통해서 난세를 수습하는 경륜을 전개했다.
나는 이 ‘열악함’을 아름답게 여긴다. 그리고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여긴다. 두 형제는 국문장에서 있었던 치욕에 관해서는 평생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순교한 친형제 정약종의 죽음과 조카사위 황사영의 죽음에 관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침묵의 내면이 두렵다. 두 형제는 두려웠을 것이다.
황사영의 생애와 죽음은 순결하고 참혹하다. 황사영은 열다섯 살에 진사로 급제해서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왕조의 금지옥엽으로 입신했고 만고역적으로 죽임을 당했다.
황사영은 충북 제천 산골에서 옹기 굽는 마을의 토굴로 숨어들어 가서 북경의 주교에게 보내는 밀서를 썼다(황사영백서). 그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비단 한 폭에 가는 붓으로 13,384자를 썼다. 이 밀서에서 그는 조선조정의 부패와 야만적 신앙 탄압을 고발하고, 서양 여러 나라의 함대와 병력으로 조선을 겁박해서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해 달라고 호소했다. 그의 백서는 당대의 흉흉한 민심으로 웅성거리고 있다.
밀서가 발견되자 조선 조정은 경악했고, 박해는 더욱 가혹하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황사영은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다.
황사영이 처형당한 104년 후에 안중근이 사형당했다. 그 100년 동안 조선은 무너져 갔다.
■ 안중근의 침묵
안중근의 집안은 부친 안태훈의 주도에 따라 발렘 신부에게 세례 받고 입교했다.(1897, 황해도 청계동)
하얼빈역의 거사 후 계속된 신문과 재판의 과정에서 보인 인본인 검찰관과 재판관은 안중근의 ‘살인’을 ‘신앙’에 대한 배반으로 몰고 가서 안중근의 양심상의 정당성을 파괴하려고 집요하게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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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공판(1910, 2. 7)에서 재판장 마나베는 물었다.
마나베 그대는 그날(1909. 10,26) 아침 떠날 때 신에게 기도드렸는가?
안중근 나는 매일 아침 기도 드리고 있다.
마나베 그날 아침에는 이토공을 죽이기 위해 기도드린 것은 아닌가?
안중근 새삼스럽게 기도를 올릴 까닭은 없다.
이 신문에서 재판장 마나베의 전략은 매우 엉성해 보인다. 마나베는 안중근이 ‘살인’의 성공을 위해서 기도했다는 진술을 유도하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진 것인데, 안중근은 ‘나의 기도는 일상적인 것’이라는 취지로 진술해서 마나베의 함정을 가볍게 피해 나간다. 마나베는 법의 이름으로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대화에 개입하려 했지만, 그것은 마나베의 직무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었고, 애초에 될 일이 아니었다.
일본인 검찰관 미조부치는 10회 신문(1909. 12. 22. 관동 도독부 감옥)에서 추궁했다.
미조부치 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일 것이다.
안중근 그렇다.
미조부치 그렇다면 그대는 사람의 도리를 반하는 행위를 한 것이 아닌가?
안중근 성서에도 살인은 죄악이라고 했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생 명을 빼앗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다.
안중근의 논리는 신앙의 길과 세속의 길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이토를 죽인 자신의 행위는 하느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조부치는 신문의 방향을 돌려서 안중근의 가장 아픈 부분을 찔렀다.
미조부치 그대가 믿는 홍 신부(빌렘)가 이번 범행 소식을 듣고 자기가 세례 준 사람중에서 이런 사람이 나온 것은 유감이라면서 한탄했다고 하 는데 그래도 그대는 자신의 행위가 사람의 도리와 종교의 취지에 반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미조부치는 안중근의 신앙적 정당성을 교회의 제도적 가르침과 성직자 우월이라는 현실의 벽 앞으로 몰아붙였다. 미조부치의 신문 기술은 마나베 보다 윗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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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재판을 기록하는 서기는 ”피고인은 묵묵히 답변하지 않았다“라고 조서 말미에 썼다.
안중근에 대한 모든 기록들 중에서 나는 일본 서기 다케우치 가츠모리가 쓴 이 짧고 메마른 이 문장 한 줄을 특별히 좋아했다.
■ 아이들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라 (1)
승용차 유리창에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고 써 붙여 놓았을 때, 이 아기는 누구네 집 아기인가. 이 아기는 승용차 주인의 아기이다. 다른 집 아기는 이 아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문구의 속뜻은 ‘내 자식이 타고 있어요’라는 말이고, 결국 하려는 말은 ‘가까이 오지 말라’일 터이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라고 써 붙인 운전자가 음주운전에 걸려서 끌려가는 꼴도 나는 보았다. 그 차에 아기는 타고 있지 않았고 술 취한 사내 서너 명이 타고 있었다.
며칠 전에 택시를 타고 일산 롯데백화점 사거리에서 신호대기 중이었는데 앞 차 뒷유리창에 “어르신이 타고 있음, 고령운전!”이라고 쓰여 있었다. 차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내 또래의 허연 늙은이가 운전석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어르신’은 운전자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러다가는 “이놈들아 붙지 마라, 꼰데가 간다”, “반려견이 타고 있어요”도 나올 판이다.
아침마다 노란 버스는 동네 아이들 열댓 명을 태우고 어린이집으로 가는데, 이 버스에는 “아동보호”라는 문구가 앞뒤로 적혀있다. 승용차 뒷유리창에 붙은 “아기가 타고 있어요”와 어린이집 노란 버스에 붙은 “아동보호”는 말의 사회적 공감의 영역이 전혀 다르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의 ‘아기’는 사적인 밀실에 갇힌 ‘아기’이지만 “아동보호”의 아동은 이웃의 아이들, 내 자식과 네 자식, 우리 골목의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이 차에서 내릴 때 뒤차들은 조심해 달라고, 그 네 글자는 부탁하고 있다. 어린이집 노란 버스의 “아동보호” 네 글자가 갖는 공적 개방성은, 어린이집 노란 버스가 떠날 때마다 엄마와 아기가 작별해야 하는 슬픔을 위로한다. 사회의 공공성이 개인 보호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나의 동네는 살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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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신 나의 엄마는 찢어지게 가난했지만 오로지 ‘아이고 내 새끼야!’의 심정으로, 맨땅에 몸을 갈면서 나를 길렀다. 내 가난한 엄마뿐 아니라 돈 많고 권세 높은 집 엄마들도 ‘내 새끼 지상주의’는 다들 마찬가지였다. 부잣집이 오히려 더했다. 돈 많고 권세 높은 집 아이들은 천막교실 안에서도 늘 난롯가에 앉았고, 방과 후에 선생들은 그 아이들만 따로 데리고 가르쳤다. ‘아이고 내 새끼야’는 그, 어떤 법률이나 도덕보다 우위였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 썩어빠진 세상의 더러움에 치를 떨었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유전병이나 풍토병과도 같아서 부모들은 눈 가린 경주마처럼 제 자식만을 들여다보았고,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의 관계를 헤아리는 기초적 지성의 시선을 상실했고, 특히 엄마들은 ‘내 새끼’의 늪에 빠져서 스스로 완매(頑昧)한 모성의 노예가 되었다.
도로라는 공적인 공간 위에서 저마다 자신이 중심이라는 착각에 빠진 수많은 밀실들이 달리고 있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의 아기는 아무래도 이 가족주의의 밀실에 갇힌 아기가 아닐는지 나는 걱정하고 있다.
해마다 어린이날이 돌아오면 ‘내 새끼 지상주의’는 거국적으로 폭발해서, ‘아이고 내 새끼야’는 전국에 메아리친다.
지금 내 새끼 지상주의는 이 사회의 민주적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내 새끼 지상주의는 학교와 교사를 괴롭혀서 교육의 근본을 파괴하고 사회 계층간의 적대의식을 고조시킨다. 국회청문회에서 나온 고위직 후보자들은 하나같이 위장 전입의 전과가 있다. 이 위장 전입은 모두 부동산 거래의 이익을 노린 것이거나 ‘내 새끼’를 명문 중고등학교에 보내고 명문 대학에 보내서 기득권을 세습해 주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 위장 전입은, 맹모삼천이나 애끓는 부정(父情)의 프레임 속에서 사면된다.
‘아기가 타고 있어요’는 아기를 보호하자는 취지로서 아름답지만 아기가 스무 살이 넘고 서른 살이 가까워도 ‘아이고 내 새끼야’는 메아리친다.
입대 신체검사를 할 때도 부모가 따라와서 간섭하고, 대학교‧대학원 입시에도 기어이 따라와서 학교 문짝에 엿을 붙여 놓고 하느님께 빌고 부처님께 빌고 조상님께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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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입시 설명회, 취업설명회까지 부모가 따라와서 설치는 나라는 지구상에 한국 밖에 없을 것이다. OECD 나라 중에는 이런 나라가 없다. 서른 살이 다 되어가는 청년들이 가랑이 사이에 기저귀를 차고 옹알이를 하며 어리광을 부리는 꼴인데, 이 모든 청년 소아마비의 풍경에는 ‘아이고 내 새끼야’의 후렴이 붙는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내 새끼’를 앞세운 이 갑질의 전통은 유구하고 밥술이나 먹게 되자 이 갑질은 더욱 권력화되고 일상화되었다. 얼마나 많은 청년들이 ‘내 새끼’의 갑질 앞에서 미끄러지고 넘어졌는가. 끗발 없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서, 그날 그날 힘들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은 이 더러운 세상에 만정이 떨어져서 아기를 낳지 않는다.
남의 자식을 짓밟고 ‘내 새끼’를 밀어붙이는 이 고위층 갑질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저출산 정책에 수십 조를 퍼부어도 그 결과는 모두 헛것이다. 이제 “아기가 타고 있어요”도 점차 사라지고 “힘센 꼰데가 간다”만 남을 판이다.
■ 아이들아,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보아라 (2)
어린이날을 창시한 방정환(方定煥, 1899~1931)은 3세 교주 손병희의 셋째 딸 손용화와 혼인해서 스승의 사위가 되었다. 방정환은 한국 최초의 직업적 사회활동가라고 불릴만하다.
그는 동학의 교통으로부터 이어받은 아동 존중 사상을 사회적으로 실현했다. 그는 ‘젊은이’나 ‘늙은이’와 대등한 ‘어린이’라는 말을 지어내서 통용시켰고, 어린이 운동 조직을 만들었고, 어린이 잡지를 발행했고, 어린이들을 모아놓고 동화와 동요를 구연했다. 그는 시대의 앞날을 열어내는 사상적 선각자였고, 사회운동을 위해 사람을 끌어모아서 작동시킬 줄 아는 현실 속의 활동가였는데, 이 운동의 물적 토대는 천도교의 조직과 자금이었다.
최초의 어린이날 행사는 1923년 5월 1일 천도교회당 앞마당에서 열렸다. 스물네 살의 청년 방정환과 그의 젊은 벗들이 이 행사를 기획하고 지휘했다. 이날 행사는 놀이와 공연이 어우러진 축제로 진행되었고 안국동, 종로를 지나는 가장행렬로 마무리되었다. 이날 행사를 알리는 전단 12만 장이 배포되었다. 당시의 종이와 인쇄 사정으로 봐서 12만 장은 놀라운 물량이었는데, 물량보다 더 역사적인 것은 그 전단의 내용이었다. 그 내용 몇 줄을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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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운동의 기초조건>
• 어린이를 재래의 윤리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그들에게 완전한 인격적 예 우를 허하게 하라.
• 어린이를 재래의 경제적 압박으로부터 해방하여 만 14세 이하의 그들에게 대한 유상 또는 무상의 노동을 폐하게 하라.
<어린 동무들에게>
• 돋는 해와 지는 해를 반드시 보기로 합시다.
• 어른들에게는 물론이고 당신들끼리도 서로 존대하기로 합시다.
<어린이날의 약속>
어린이는 어른보다 더 새로운 사람입니다. 내 아들놈, 내 딸년, 하고 물건처럼 여기지 말고 자기보다 한결 더 새로운 시대의 새 선물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방정환의 이 외침을 들으면 요즘 어린이날이 얼마나 퇴행적인가를 다들 알 수 있다. 지금의 어린이는 어른이 만든 목줄에 묶여 있다. 어린이는 ‘내 새끼’일 뿐이다. 집집마다 ‘아이고 내 새끼야’를 외치는 날은 젊은 방정환이 설계한 어린이날이 아니다. 지금의 어린이날은 ‘내 새끼의 날’이다. 다들 제 새끼만 끌어안고 있으면 이 나라의 모든 어린이들은 ‘남의 자식’이 된다.
■ 말하기의 어려움, 듣기의 괴로움
저는 오늘 아침 이 글을 쓰면서 문득 공자의 생애를 생각했습니다. <논어>는 공자의 일상적 언행에 관련된 목격담과 청취록의 파편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공자는 제자들과 더불어 형이상적 진리나 이데아를 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공과목의 방법론을 말하지 않았고, 해탈한 자의 자유를 과시하지 않았고, 세상 너머의 것을 잡으려는 포즈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지지고 볶는 인간 잡사에 대해서 말했고, 생애의 대부분을 득도하지 못한 세인들과 더불어 지냈습니다.
공자는 이 발가벗은 일상성에 바탕을 두고 언어와 삶이 서로 배반하지 않는 세계를 향한 인간의 소망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습니다. 그의 말본새는 맑고 단순했는데 그의 메시지가 인류사에 울리는 강력하고도 생생한 호소력은 이 단순한 어조에 바탕해 있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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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한국 사회의 문명화를 가로막고 있는 가장 큰 장애물은 소통 불가능한 언어의 창궐입니다. 지금, 언어는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을 완성해 가고 있습니다. 용망과 당파성으로 무장한 입들이 여러 고지에서 진지를 구축하고 무기화된 언어를 발포해서 공유지를 폭격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익집단, 당파집단, 욕망의 집단이 내지르는 비명, 고함, 욕지거리, 악다구니, 저주, 분노, 거짓말이 허공에서 부딪쳐서 아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백색소음의 회오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 소음 속에서는 모든 소리의 주파수가 뒤엉키고 간섭해서 언어의 의미 내용이 파괴되고 개념이 지칭하는 바는 모호해지고, 모든 메시지는 수취인이 불명해져서 이 세상은 파도소리나 TV의 노이즈 현상처럼 해독 불가능한 무의미로 뒤덮여 버립니다. 말을 할수록 인간 사이가 단절되고 소외가 심화되는 사태이고, 정치는 공허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낙원에서 지낼 때 아담과 이브가 ‘동침’을 했는지 여부는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아담과 이브가 에덴의 동쪽으로 추방된 직후에 ‘동침’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동침으로 큰아들 ‘카인’과 둘째 아들 ‘아벨’이 태어났습니다. 인류의 첫 자식들의 출생지는 그 부모의 유배지였습니다.
낙원 추방 이후 하느님과 인간의 첫 대화는 하느님과 카인 사이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짤막한 대화 한 토막은 그 후 인류사에서 전개된 언어의 비극의 원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느님이 아벨을 편애하므로 카인은 아벨을 때려죽였습니다. 하느님은 카인의 소행을 신문했습니다.
하느님 : 네 아우 아벨이 어디에 있느냐?
카인 :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 <창세기> 4장 9절
성서의 문장을 더 읽어보면, 하느님은 카인의 범죄행위를 다 알면서도 묻고 있습니다. 유도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려는 것이겠지요. 카인은 하느님이 다 알면서도 묻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카인은 범행을 시인도 부인도 하지 않습니다. 카인은 ‘나는 모른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때 카인은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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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으로 ‘모른다’는 것이 자신의 진실이기를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낙원에서 추방된 후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이루어진 첫 번째 대화는 인간의 근친살해 범죄에 관한 것이고, 그 언어의 내용은 허위와 회피, 오리발 내밀기, 돌려차기와 뒤통수 때리기, 딴소리하기와 뭉개기로 이루어졌습니다. 카인은 이 모든 묘기를 동시에 보여주었습니다.
아마도 ‘국민’이라는 한국어는 한국 사회의 여러 당파집단들이 신기루를 만들기 위하여 가장 빈번히 동원하는 단어일 것입니다. 정치 슬로건이 언어를 무기화하면 그 언어는 형해화(形骸化)될 수밖에 없는데, ‘국민’이라는 한국어의 가장 불쌍한 피해자는 국민입니다. 여러 당파집단과 이익집단의 언설들이 ‘이것은 국민이 판단할 문제다’, 당신들은 국민적 저항에 부딪칠 것이다. ‘우리는 국민과 더불어 싸우겠다’, ‘우리는 국민의 뜻에 따른다’라고 말할 때 이 언설은 매우 민주주의적인 겉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이 ‘국민’이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국민은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아니면서, 동시에 이 사람이기도 하고 저 사람이기도 하고, 아무도 아닌 시림인 동시에 누구나인 사람입니다.
당파집단의 언설들은 ‘국민’이라는 거대한 군집명사의 모호성과 익명성을 끌어와서 정치적 욕망의 민낯을 가리는 철판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국민의 깃발’이 무수히 나부끼는 광장에서 언어의 뻔뻔스러움은 완성되고 있습니다.
지금, 정치는 정치의 존재 이유를 스스로 부정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른 고소‧고발 사건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고소장, 고발장의 제목을 써 붙인 피켓을 들고 대열을 이루어 검찰청 민원실로 걸어가는 정치인들의 모습을 TV 화면에서 거의 매일 볼 수 있습니다. 이 수많은 고소 고발 사건들이 모두 사법의 작용에 의해서 적법한 판단을 받지는 않는다는 것을 한국인들은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이 스스로 정치라는 단어를 이처럼 비열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사태는 놀랍지만, 이 놀라운 사태가 일상화되어 있어서 아무도 놀라지 않습니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주변 세계를 직접 체험하거나 인식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인간과 세계 사이에는 수많은 매체들이 개입하고 있습니다. 매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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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권력화되었고, 언어의 순수성은 위협받고 있습니다.
■ 뒤에 : 새와 철모
솔거가 황룡사 법당 벽에 소나무를 그리자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다가 벽에 부딪혀서 떨어졌다. <삼국사기 권 48> 김부식은 솔거의 그림 솜씨를 말했고 새들의 운명을 말하지 않았다. 황룡사는 불타서 재가 되었고 새들은 종족을 후세에 전했다.
새들이 경부고속도로 투명 방음벽에 부딪혀서 떨어진다. 머리가 깨진 새들은 수직으로 떨어지고 죽지가 부러진 새들은 퍼덕거리면서 떨어진다. 새들은 왜 죽는지를 모르고, 자신이 죽었는지를 모른다. 저무는 저녁에 그림에 부딪혀 죽고 투명 벽에 부딪혀 죽고 반사 유리에 부딪혀 죽는 새들의 환영이 내 마음속을 날아간다.
나는 그림과 투명 벽을 들이받고 죽는 새들의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애썼다. 나는 본 것에 의지해서 보지 않고, 말하여진 것에 의지해서 말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는 끌고 다니던 말을 버리고 다가오는 말을 맞으려고 애썼다. 나는 이루지 못했고 버리지 못했다. 투명 벽은 자꾸만 내 앞을 가로막았다.
글을 써서 세상에 말을 걸 때 나의 독자는 당신 한 사람뿐이다. 나의 독자는 나의 2인칭 바로 ‘너’ 이다. - 끝 -
2024. 8. 21
- 2024년 초여름에 미세먼지를 마시며 <김훈>은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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