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2)(3)

2014. 7. 29. 15:07독서후기

반응형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2)

 ■ 송복 지음 제2부 아! 조선, 그리고 류성룡의 대설계 Ⅲ. 대설계 1. 자위의 틀 군국기무(軍國機務)는 군사가 국가 정책의 근본이며, 군사가 국가정책의 중심에 놓인다는 의미다. 이것은 유교국가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다. 물론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특정 상황을 제외하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처럼 분단 상황에 처해 있는 나라, 아주 위협적인 적과 대치하고 있는 나라 외에는 ‘군국기무의 정책’을 쓰지 않는다. 적어도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쓸 이유도 없거니와, 무엇보다 국민이 용납하지 않는다. 1) 자위의식조차 없는 문약 속성 유교는 문덕(文德), 즉 문인의 덕망으로 다스린다는 문치주의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 역시 무력으로 다스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과 가르침이 지식인은 물론 백성 교화의 근본이었다. 아무리 글 잘하는 문인이 많고, 곧곧한 선비가 열지어 나라 중심에 있다고 해도 글에만 열중하면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나약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공자는 실천을 강하게 부르짖었다. 조선은 어떠했을까. 문약의 극치를 보여주는 조선은 최소한의 자위(自衛)의식도 없었다. 자위는 나라와 정부의 기본이고, 그 정부의 일을 담당한 사람들의 임무다. 스스로 자신을 가장 안전하게 지키려는 자위의식은 본능이며 생리다. 그러나 문(文)이 중시되고 무(武)가 경시되는 유교의 이념과 윤리가 200년 이상 철저히 지배해 온 조선에는 자위의 생리마저 사라졌다. 자위의식이 어느 누구에게서도 솟아나지 않았고, 조정 내 어느 부서에서도 거론하지 않았다. 전쟁이 나자 명군을 천병이라 부르며 그들에게 보위의 책임을 맡겼다. - 1 -

 

여전히 신하들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국가 안위에 대한 위기의식이 없었다. 자위도 안보도 강 건너 불구경하고 있었다. 2) 오로지 류성룡의 군국기무 군국기무는 오로지 류성룡의 군국기무였다. 국가 안위에 대한 강박은 어느 신하도 류성룡보다 더 클 수 없었고, 그에 대한 절체절명은 어느 신하도 류성룡보다 더 강하게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왜가 물러간다 해도 언제든 다시 쳐들어 올 수 있음을 알았다. 왜가 명군을 얼마든지 제압하고도 남는 강적임을 바로 전쟁의 현장에서 보았고 왜에 못지않게 두려운 존재가 누르하치의 여진족이라는 것도 진작 알아차렸다. 여진족이 머잖아 사납고 격렬하게, 조선으로서는 도저히 당할 수 없는 세찬 힘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앞서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명이 더는 힘이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에 류성룡은 군국기무의 네 가지 방안을 제시한다. 1) 안보 불감증에 대한 경고 2) 정병제(精兵制)실현 3) 포 개발과 포대 설치의 절실성과 긴요성 4) 누르하치 여진족의 발호와 그것이 몰고 올 위기에 대한 대책 이 같은 군국기무는 당시 신하들 중에선 류성룡 외에 따로 찾을 수 없었고, 더구나 그것을 주도할 수 있는 인물은 그를 제하고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국가 안보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류성룡의 군국기무는 골간만 세운 채 끝나버린다. 실현을 아직 멀리 둔 진행과정에서 그는 해임되고 만다. ‘조선공사 3일’이라는 속언처럼, 조선의 정사가 다 그러했듯이 ……. 3) 역사는 자비롭지 않았다 이 군국기무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로부터 300년이 지나서 청일전쟁이 나던 1894년에야 실제의 군국기무로 등장한다. 군국기무처가 바로 그것이다. 군국기무처는 불과 3개월 사이에 의결된 정책 건수가 208건이나 될 정도로 효율성도 아주 높았으나 그해 7월에 시작해서 해를 다 넘기기도 전인 12월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조선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그래도 300년 전에는 강한 왜에 맞서는 은혜로운 명군도 있었고, 불행 중 다행으로 왜는 내부 사정으로 더는 조선에 버티고 있을 수도 없었다. 300년 후는 사정이 달랐다. 명에 버금하는 중원내의 세력은 없었고, 왜 내부 사 - 2-

 

 정에 준하는 정변도 없었다. 즉 조선을 응원해 주던 힘은 없어졌는데, 조선을 침략하던 왜 세력은 더 거세게 다가왔다. 거기에 조선은 군국기무의 의지 도 없었고, 설혹 있다 해도 이미 때가 늦어 있었다. 300년 전 류성룡의 군국기무가 300년 내내 무시되면서, 그가 그토록 치열히 싸웠던 왜에게 마침내 나라를 송두리째 내주고 마는 망국을 자초했다. 그러고도 나라가 남의 손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기이하고도 기이한 일이다. 역사는 자기를 지키지 않는 나라를 절대로 지켜주지 않는다. 역사는 절대로 자비롭지 않았다. 2.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위태롭다 1) 지독한 안보불감증 류성룡은 ‘전쟁을 잊으면 반드시 나라가 위태로워진다(망전필위)’고 생각했다. ‘안보 없이 성세 없다’는 것은 역사의 경험이었고, 군국기무를 담당한 류성룡의 일관된 주장이고 신념이었다. 아무리 태평성세를 누리고, 백성이 편안해도 국가 안보를 더욱더 튼튼히 해야 한다. 성세를 이루면 안보가 쉽게 잊히지만, 안보가 뒤처지면 나라는 반드시 위태로워진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의 존재 이유는 국가안보에 있다. 왜 국민들이 비싼 세금을 내서 국가라는 조직을 유지하고, 정부라는 기구를 운영하는가. 일차적 이유는 국체를 안전하게 보전하는 데 있다. 국가안보가 지켜져야 백성도 안전하고 안정된 삶을 향유한다. 그런데 그 국가안보 담당자들이 백성들의 세금만 갉아 먹고 자기 역할을 잊는다거나, 알아도 수행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군국기무는 병사를 쉼 없이 열심히 훈련시키는 일로 시작된다. 군사훈련이 얼마나 급선무인가는 길 가는 일반 백성도 알지만 정작 그것을 담당하고 있는 수령과 장수들은 모른다. 물론 모를 리가 없다. 오직 마음에 태만함이 가득차서 방일할 뿐이다. 나라 지키는 마음이 해이할 대로 해이해서, 국가 안보를 중대사라고 생각하지 않고, 명령을 내려도 분발해 따르지 않는다. 그저 문서만 갖추고 책임만 때우려 한다. 전쟁 중에도 이러하다면 평시에는 더 물어볼 것도 없다. 망전필위 라는 것 은 벼슬아치들에겐 쇠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다. - 3 -

 

 2) 모든 폐단은 기강불립에서 시작된다 안보만 해이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국가기강이 먼저 무너진 것이 문제다. 1595년 10월 류성룡이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의 순찰사에게 공통으로 내린 공문에 맨 먼저 지적한 것이 기강불립(紀綱不立)이다. 국가기강이 ‘서지 않음’은 곧 ‘무너진 것’이다. 여기서 오늘의 모든 폐단은 시작되었다. 기강이 무너지니 명령계통이 풀어지고 그러니 아무 일도 시행되지 않는다. 일의 실효를 그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는 게 4도 순찰사에 내린 공문의 핵심이다. 무너진 기강은 300년 내내 조선을 어지럽혔다. 관리들이 구습에 묶여 새 길을 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상은 변하고 인심은 시시각각 달라지는데 여전히 낡은 인습을 버리지 못한 채 백성을 지배했다. 더구나 전쟁이 일어나 상전벽해가 되었는데도 관리들은 백성을 돌보지 않고 경시하며 오직 수탈의 대상으로 여기는 행위 양태는 계속되었다. 3) 조급증· 급망증의 비참한 결과 기강을 바로 세우고, 법도를 살리는 것만으로 군국기무가 잘 될 수 있을까. 그 전에 기강과 법도가 해이해진 연유를 먼저 묻지 않으면 안 된다. 관리들이 부정부패와 백성 경시 행태 외에 또 다른 요인은 없었을까. 류성룡은 제3의 요인으로 조급증과 급망증을 꼽았다. 조급증은 참을성 없이 성질이 대단히 급한 것이다. 언제나 ‘빨리빨리’를 외치며 ‘빨리빨리’ 되지 않으면 도저히 견뎌내지 못하는 사회심리적 병증 이다. 급망증은 그냥 기억에서 사라져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의 진행과정에서 관심을 갑자기 다른 데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의 조급성과는 정반대로 일의 성취와는 전혀 관계없이 갑자기 관심을 돌리거나 꺼버림으로써 하던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것으로 이 역시 사회심리적 병증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는 일이란 언제나 급합니다. 어찌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허둥지둥하다가 그만 일을 그릇되게 처리하고 맙니다. 그러다가 그 일이 지나고 나면 금방 해이해집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끝내지 못하고 내버려둡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큰 폐단입니다. 지금 왜적이 우리나라 중심부에아직 있음에도 이러하다면, 만약 명나라 군대가 떠나버린다면 다시 믿을 곳이 없습니다. - 4 -

 

 류성룡은 우리나라 사람이 일하는 모습을 ‘창황실조(倉皇失措)’라 요약했다. 창황실조는 일에 당면해서 허둥대고 당황하다가 일의 두서를 찾지 못하고 일의 조리를 잃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사실 임진왜란이 끝나고(1598), 후금의 정묘호란을 맞는 것은 불과 한 세대(1627)이고, 그 뒤의 병자호란도 9년 뒤(1636)의 일이다. 만일 우리가 지독한 급망증만 가지고 있지 않았더라면, 류성룡의 군국기무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방비 노력도 꾸준히 이어졌을 테고, 훗날 동북아정세도 상당히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류성룡의 군국기무는 류성룡이 현직을 떠나는 그날로 사실상 폐지 되었다. 그로부터 300년 후인 1894년 군국기무처로 재현되는 것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서다. 일본의 강압이 아니었어도 과연 조선은 스스로 국가를 보위하겠다는 각오와 다짐으로 군국기무를 할 수 있었을까.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한국인 특유의 조급증과 급망증이 빚어낸 나라의 패망을 우리는 감히 부정할 수 있을까. 4) 막부를 열다 (1)소인들의 순기능을 이용한 지도자 어떤 상황에서도 나라는 유지되어야 하고, 어떤 조건에서도 국가는 보위되어야 한다. 법도와 기강이 무너져도 나라는 존속되어야 하고, 조급증·급망증이 극심해도 나라는 경영되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은 관리들과 더불어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관리가 구습에 매달린 벼슬아치라 해도, 아무리 벼슬아치가 백성을 지푸라기처럼 가볍게 보는 자라 해도, 그를 버리고 군국기무를 할 수는 없다. 그들이 썩었다고 관직이라는 자리에서 몽땅 내몰 수 있겠는가. 설혹 내보낼 수 있다 해도, 그 다음 새로 들어서는 사람들이 율곡이 ‘만언봉사’에서 말한 대로 구관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보장이 있겠는가. 아무도 이를 보장할 수 없다면 기왕의 관리들을 끊임없이 가르치고 깨우치고 경고하고, 징계하면서 함께 나라를 지켜가는 수밖에 없다. * 서애의 군문등록(軍門謄錄) - 영의정과 4도(황해, 경기, 평안, 함경) 도체찰사 겸직기간 3년(1595-1598) 사이의 모든 공문을 묶은 책 - 5 -

 

- 이책에서 서애는 1년에 100여회, 3일에 1회 공문을 보내어 끊임없이 깨우치고 징계함 류성룡은 쓰는 사람들을 식자(識者)와 소인(小人)으로 분류했다. 식자는 의식이 있는 사람이고, 소인은 의식이 없는 사람이다. 의식이 깨어 있음은 자기를 넘어서 국가를 먼저 생각하는 공공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의식이 깨어 있지 못함은 자기나 자기 가족에 집착해서 그보다 높고 더 큰 세계를보지 못하는 것이다. 류성룡은 ‘의식이 있는 자와 식자는 국사를 말할 수 있어도, 의식이 없는 소인과는 나라 정사를 말할 수 없다’고 자주 말했다. 일의 성공여부가 식자를 요직에 임명하는 데 달려 있음은 명약관화하다. 류성룡은 소인들의 역기능을 최소화하고 순기능 이용을 저변에 놓으면서 ‘막부(幕府)’를 연다. 막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아주 생소한 단어이다. - 일본의 막부 : 왕은 상징이고 군벌이 국가를 장악 - 중국의 막부 : 장군이 군무를 보던 군막 - 선조 27년(1596년) 4도 순찰사에게 보내는 공문에 막부(幕府)라는 말이 처음 등장 이 공문을 내려 보내는 날짜는 1595년 10월 26일이지만, 4도 도체찰사 직무의 교지를 선조로부터 받는 날짜는 그보다 13일 앞선 10월 13일이다. 류성룡은 이 13일 동안 막부를 열 계획을 면밀히 세우지 않았나 추측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의 사무를 체찰하는 임무를 받잡고, 일체의 계획과 경영을 단독으로 맡게 되었다. 이에 병조판서 이덕형을 부체찰사로 삼고, 시강원 보덕 최관과, 시강원 필선 한준겸을 종사관으로 삼아 지금 막부를 연다. 모든 계획을 여기서 세우고 모든 조치를 여기서 취한다. 지금 나라의 형세가 날로 어려워지고 위태로움이 날로 더 심해진다. 남방과 북방의 쟁투가 번갈아 일어나서 그 세력이 진실로 크고 위험하다. 그러나 지금 당장 해야 할 조처가 아무리 많다 해도 중요한 것은 몇 개에 불과하다. ⓵ 구습 폐해와 병통의 개혁 ⓶ 백성을 보호해서 나라의 근본을 튼튼히 ⓷ 군량조처, 병졸 훈련 ⓸ 산성과 못 수축, 험준한 지세에 방수(방어)계획 ⓹병기마련 ⓺ 봉화 단속 - 6 -

 

(2) ‘전쟁의 지휘도 문인이 한다’는 조선의 특수막부 류성룡 막부에는 군인이 없고, 장수의 직접적인 참여가 없다. 장수는 오직 막부를 여는 도체찰사이며 판서인 문관의 지시를 따라야 하고. 그 지시에 따라 전쟁만 치르면 되는 것이다. 전장의 실제 담당자 전투의 실제 지휘자가 그들의 장군이라 해도 실제 전쟁을 계획하고 지휘하는 막부의 핵심에는 들어가지 못한다. 군국기무를 하는데, 전투와는 동떨어진 문사만 있고, 군인은 언제나 제외되는 조선조 오랜 관행이 임진왜란을 치르면서도 그대로 지속되었다. 여기서 류성룡이 도원수 등 실전 장수들과 막부를 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류성룡은 그날로 해임되었을 것이다. 조선조 500년이 완전히 재개조되는 1894년, 군국기무처 설립 때도 군인을 완전히 제외하고 기구를 만드는 그 철저한 ‘인종구습(因踵舊習)’의 행태로 미루어 보더라도 그 같은 결과는 충분히 예측하고도 남음이 있다. 설혹 ‘왜병에게 나라를 내 주는 일이 있어도 무인은 안 된다’가 당시 신하들의 고정관념 이었다. 이순신의 백의종군 전후과정에서 보듯 전장에서 무인의 재량은 전시 평시 분별없이, 심지어 작전상의 것이라 해도 결코 허용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것이 조선조 군국기무의 이념적, 제도적 한계였고, 그 한계는 마침내 나라를 남의 손에 넘겨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전쟁도 군인의 지휘가 아닌 문인 지휘로 한다’는 조선조 그 유별나고 무지스러운 고집에 기인한 것이다. 고집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망집(妄執)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3. 정병을 만들어 나라를 살리자 1) 준비해온 전략가, 류성룡 (1) 율곡과의 차이 류성룡은 단순한 문사도 아니었고, 일반적인 학자도 아니었다. 그는 출중한 문장력을 가졌지만 시문에 남다른 문사가 아니었고, ‘경서’와 ‘사서’를 두루 - 7 -

 

 섭렵해 학문이 아주 깊었지만 이론에 밝기만 한 상아탑의 학자가 아니었다. 그는 현실을 직시하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시무를 알고, 실무에 밝은 현실 정치가였다. 거기에다가 드물게 방법론을 겸비한 지휘자며 전략가였다. 류성룡이 선조에게 올리는 차자니 계사니 서장이니 하는 갖가지 종류의 많은 상소문들도 모두 ‘사실’에 따른 것이었다. 그는 오로지 실재적 문제를 파고들어 바로 잡으려 했다. 또한 임금이 한번 들면 끝까지 읽히도록 문장은 쉽고 유려하고 단순하고 명백하게 썼다. 반면에 류성룡이 감사, 순찰사, 방어사, 수령 등에 내보내는 공문들은 모두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현장의 그들보다 현장을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책상에 앉아서 지시한 것이 아니라 발로 돌아다니며 현장을 눈으로 확인한 뒤 지시했다. 그의 현실 파악은 ‘당위론’이 아니라 ‘존재론’이었다.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되어 있느냐’에서 출발했다. 그것은 현장에 대한 지식과 사실 확인 없이는 불가능 했다. 현대인들은 으레 류성룡의 비범함을 이야기하면, 바다에서의 이순신처럼 그도 육지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느냐고 반문한다. 바다에서의 이순신은 배라도 있었고, 배에 실을 화포라도 있었다. 그러나 육지에는 화살은커녕 변변한 병기 하나 없이 맨손으로 14만 명의 왜병과 싸워야 했다. 명군이 원병으로 왔지만 그들에게 줄 군량은 물론 군마에게 먹일 사료도 턱없이 부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빛나는 승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율곡이 조선을 말하길 “손을 댈 수 없이 하루가 다르게 그대로 썩어 내려 앉는, 마침내 붕괴 하고야 말 집”이라고 했다. 그런 나라를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에 맞서 되살아나게 했다면, 그것도 전쟁의 맞상대를 원정군(왜군)과 원조군(명군)으로 바꾸어, 희생을 최대한 줄이면서 내 나라를 존속 유지케 했다면 그것이 어찌 작은 성공이겠는가. 빛나는 성취라 할 수 없다면 적어도 ‘구국의 대업’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의 성취는 운 좋게 수상과 도체찰사 자리에 앉았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일찍부터 남다른 안목과 식견으로 준비해온 전략가였고,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로 연구하는 전략가였다. (2) 류성룡의 획기적인 군 이원론 - 8 -

 

전략가 류성룡의 진면목은 그의 정병주의(精兵主義)에서 나온다. 정병주의는 소수의 군대를 잘 훈련시키고 무장시켜 대군과 대적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류성룡은 군 경험의 단순한 축적이 아니라 확고한 유가(儒家) 이론에 근거해 ‘정련전일(精練專一)’, 즉 훈련제일주의를 주창했다. 훈련이 강병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의 정련전일 이론은 실제로 병사의 훈련이 잘 되어 있어도 군대가 분열하고 지리멸렬하고, 오합지졸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는 그것은 ‘잘 훈련된 병사’의 탓이 아니라 잘 못 지휘한 ‘지휘관 탓’이라고 설명한다. 모든 전쟁의 승패는 전적으로 지휘관이 좌우한다. 그래서 모든 전쟁은 ‘장군의 전쟁’이다. 병사는 ‘강한 군대냐 약한 군대냐’를 결정하는 반면 장군은 ‘이기는 군대냐 지는 군대냐’를 결정한다. 강한 병사는 강한 군대를 만들지만 강한 군대가 반드시 이기는 군대는 아니다. 그것은 지휘관인 장군에 달렸다. 전략가 류성룡의 군 이론은 이같이 이원론(二元論)이다. 병사와 장군, 그것은 분명히 기능이 전혀 다른 이원성을 지니고 있다. 병사는 ‘훈련’, 장군은 ‘전략’이다. 병사는 강한 훈련으로 강한 군대를 만들고, 장군은 준비된 전략으로 이기는 군대를 만든다. 류성룡의 이 이원성은 드물게 획기적인 군 이론의 전개라 할 수 있다. 2) 대설계 : 기무 10조 류성룡은 일찍이 전쟁에 대비해서 2개의 대설계를 내놓는다. 하나는 임진왜란에 대비해서 임진왜란 1년 전에 만든 기무십조(機務十條)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의 정묘, 병자호란을 예측해서 대비책으로 만든 북변헌책의(北邊獻策議)다 북변헌책의는 그가 떠난 후 그다음 정권(광해군과 인조)에서 반드시 채택하고 시행해야할 방책이었다. 그러나 지독한 급망증으로 대란을 당하는 그날까지 완전히 잊고 있었다. 기무 10조는 글자만으로도 5천 자가 훨씬 넘는다. 드물게 보는 대설계이며, 상소문이다. 뒤의 북변헌책의나 마찬가지로 모두 선조에게 올린 군국기무에 관한 시무책이다. ‘군국기무 10조’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모두 열 가지 조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를 다시 큰 줄기, 대강 중심으로, 각 조목들 하나하나를 보면 그는 확실히 대전략가였다. 문인이라 하기엔 병사(兵事)에 무척 - 9 -

 

밝았고, 설혹 무인이라 해도 평생 그 분야에 전년해온 전문 장군이 아니고는 감히 내세울 수 없는 세부적인 설계다. ⓵ 척후(斥候) 척후는 정군이 동정을 정찰하는 일이다. 적군을 정찰하려면 반드시 정찰하는 군사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척후는 정찰하는 것과 정찰하는 군사를 동시에 지칭한다. 척후는 군대의 눈과 귀다. 그 눈과 귀는 적군과의 거리 200리까지 가서 보고 들어야 한다. 또 전투가 나기 닷새 전에 이미 적의 동정을 다 알고 있어야 한다. 척후는 가능한 그 지방에서 나서 자라, 도로의 멀고 가까움, 산천의 둘러가고 바로 가는 지형을 상세히 아는 자라야 한다. 척후의 이용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후한 상(賞)이다. 후한 상을 내리면 죽음을 각오하는 사람이 나올 뿐 아니라, 적국 사람도 우리 척후가 된다. 주는 상이 없으면 우리나라 사람도 적국의 척후가 된다. 전쟁은 척후로부터 시작된다. 그 시작이 전쟁의 승패를 가름한다. 척후를 제대로 못 쓰면 장님이 애꾸눈 말을 타고, 밤중에 깊은 못에 이르는 것과 같다. 적의 복병이 요해지를 점령해도 모르고, 심지어 적병이 영문에 이르는 것도 알지 못한다면 그 전쟁의 결말은 불문가지다. 그렇기에 류성룡은 대설계에서 ‘군중의 귀와 눈’ 척후를 제1조로 내세운 것이다. ⓶ 장단(長短) 적군과 아군의 장단점을 비교하는 것을 말한다. 불론 비교만으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장점으로 적의 단점을 공격하고, 적의 장점으로 우리의 단점을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아군의 실력을 알고 적군의 실력을 알아야 한다. 필승의 가장 확실한 길은 적을 연구하는데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다. 적이 아무리 강해도 단점은 있다. 우리가 아무리 약해도 장점은 있다. 다행히 우리는 지리(地利)를 갖고 있다. 적의 장점이 펼쳐지기 어려운 험준한 지세가 우리의 이로움이다. 들판에서만 싸우지 않으면 된다. 전쟁은 장단의 역할이다. 장점과 단점을 역으로 이용하는 대설계가 전략이다. 그것이 군국기무의 핵심이다. ⓷ 속오(束伍) 속오는 현대식으로 말하면 군의 조직체계이다. 속오라고 한 것은 글자 그대 - 10 -

 

로 ‘대오(隊伍)를 약속한다’, 즉 대오를 묶는다는 것이다. 예나 이제나 약속의 첫째 의미는 ‘여러 개를 함께 모아서 묶는다’이다. 옛날에는 병사 5인을 하나로 묶어 1오로 하고, 오를 단위로 해서 전군을 묶었다. 곧 조직화 했다는 것이다. ⓸ 명령엄수 명령엄수는 사졸들이 한결같이 대장의 명령을 따라 사력을 다해 그 명령을 이행하는 것이다. 속오에 못지않게 병법의 천언만어는 모두 여기로 귀착된다. 군은 조직체계인 동시에 명령체계이다. 군은 명령으로 살고 명령으로 죽는다. 명령을 내리면 물불 가리지 않고 뛰어들어야 한다. 명령하나로 무(無)에서 유(有)를 만들고, 하나를 백으로도 만든다. 명령이 지켜지려면 먼저 장수의 명령이 분명해야 한다. 명령에 혼선이 있어선 안 된다. 장수의 명령이 불분명해 사졸들이 군령을 어기면 그것은 장수의 죄다. ⓹ 중호(重壕) 중호는 겹해자(垓字)를 설치하는 것을 말한다. 바깥 해자는 평상시의 해자를 본받아서 넓고 깊게 파고, 안쪽의 해자는 넓이는 바깥 정도, 깊이는 1장 정도로 해서 바닥에 마름쇠를 늘어세우도록 한다. ⓺ 설책(設柵) 설책은 군영의 보루가 되는 영책을 세우는 것을 말한다. 이 영책은 흙으로 쌓는 성으로 돌로만 쌓는 성보다는 공력이 적게 들어가지만, 잘 세우면 성만큼 중요한 기능을 한다. ⓻ 수탄(水灘) 수탄은 얕은 여울을 만들어 방어하는 방법을 말하는데, 마름쇠 사용이 으뜸이라고 했다. ⓼ 수성(守成) 수성은 성을 잘 지키는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성을 잘 지키는 나라라 생각했다. 안시성에서 당나라 군사를 물리친 것, 원주성에서 거란을 방어한 것, 귀주성과 자주성에서 몽고를 막았던 것이 대표적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왜적을 만나기만 하면 번번이 패전하여 무너지는 것은 무슨 이 - 11 -

 

유인가. 그것은 왜병이 조총이라는 우수한 무기를 가진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우리나라 성의 구조가 잘못되어서이다. 예부터 이어져온 성의 기본원리에 따라 성을 쌓지 않았기 때문이다. 류성룡은 이를 ‘기무 10조’에서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그 결함과 개선점을 설명하고 있다. ⓽ 질사(迭射) : 화살을 번갈아 쏘는 것을 말한다. 전체적으로 보면 기관총처럼 연이어 나가는 사격방법이다. ⓾ 통론형세(統論形勢) 글자 그대로 형세를 총체적으로 통괄해서 논하는 것이다. 먼저 왜병은 참으로 강한 적이라는 것, 우리의 허실을 낱낱이 알고 있다는 것, 험준한 요해지를 택해 진을 치고 있다는 것으로 요약한다. 사실 왜는 우리가 만났던 적 중에서 가장 강했다. 몽고가 있다고 하지만 무기 체계가 우리와 다르지 않아서 귀주성, 자주성에서와 같이 정면승부를 택해 막아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왜는 전혀 달랐다. 육전에서는 한 번도 정면 승부를 할 수가 없었고, 심지어 원군으로 온 명군도 마찬가지였다. 류성룡은 ‘기무10조’의 마지막 조목으로 ‘낭전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는다. 그의 말처럼 왜를 대적함에 있어 장기 대책을 강구하는 것만이 유일한 살길이었고, 성급히 그들을 몰아내려고 함부로 싸우는 것은 금물이었다. 조선은 장기적으로 시간을 끌면서 싸우는 지구전을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힘을 다해 적의 보급을 저지해야 했다. 첫째, 산성 수축 및 재정비 : 지구전, 방어전을 위한 기반 마련, 식량 비축 둘째, 들판 농작물의 초토작전, 청야작전 셋째, 수군으로 하여금 왜군의 식량 보급로를 원천적으로 차단 확실히 이 ‘기무10조’는 조선군을 명실 공히 강군으로 만드는 대설계이면서 사실상 실전에 사용된 방책이었다. 당시 최강의 적에게 그나마 조선군이 완전히 무너지지 알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류성룡의 대설계가 준비되어 있어서였고, 느리더라도 시의에 거의 맞춰 그 설계가 실현된 덕분이다. 그 어떤 역사자료를 동원해 평가해도, 이를 낮추거나 부정하거나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 12 -

 

 3) 대설계 : 군제개혁 (1) 신군제 대설계에 따른 군제개혁은 무엇보다 정병주의, 정병제를 목표로 했다. 그래서 만든 군제가 훈련도감과 속오군이었다. 두 가지 모두 ‘속오’의 원칙에 따라 조직화하고 기능화했다. 조직화는 사,초,기,대로 군을 편성한 것이고, 기능화는 당시의 전쟁 양식에 맞게 포수,살수,사수 등 삼수로 나눠 병사를 구성하고 훈련시킨 것이다. 훈련도감과 속오군은 각각 중앙 수비와 지방수비로 그 기능을 나눠 담당했다. ⓵ 훈련도감 1594년(선조 27년) 봄에 만듬, 류성룡이 처음부터 훈련도감 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를 맡았다. 그가 올린 상소문에는 이 훈련도감이 대단히 성공적이며, 희망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⓶ 속오군 지방 수비를 위해 만든 속오군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국민개병제를 동원해서 만든 군대다. 국민개병제는 모든 남자는 일정 연령이 되면 군복무의 의무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과 같은 전통사회에서는 일반적으로 양민만 병역의무를 지었다. 양반이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천민 또한 병역의무가 전혀 없었다. 류성룡은 이 제도를 혁파해서 속오군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그가 각 도의 감병사에게 지시하는 공문을 보면 ‘출신, 양반, 서얼, 향리, 공천, 사천 논할 것 없이 장정으로 실제 군사가 될 만한 사람은 모두 뽑아서 사목에 의거해 대오를 편성하고, 가까운 부근의 각 동리에 거처하도록 하라. 그리고 병기를 조치하고 준비해서 모두 새로이 훈련하도록 하라.’ 그러나 신분사회의 벽을 허무는 것보다 더 난관은 농업사회의 생산방식이다. 신분사회의 신분도, 국가나 조정도, 농업생산 방식에 의존해서 존속되고 유지되었기 때문에 이들 모두를 오늘의 정규군처럼 생산과 분리해서 1년 열두 달 폐쇄된 병영에서 먹고 자고 훈련하게 할 수는 없었다. 병농일치제에 따라 평시에는 군포만 내고 집에서 농사짓게 하고, 훈련할 때와 사변이 있을 - 13 -

 

 때만 군역을 치르게 했다. 그 대신 초관(각 군영에 속해 한 초를 거느리던 종9품 무관) 을 중심으로 기에는 기총, 대에는 대총을 각각 지휘관으로 두어 상비군 역할을 수행했다. 이런 면에서 속오군은 정식군으로서는 한계가 있었고, 그 한계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가적 한계였다. 생산력이 말할 수 없이 낮은 나라에서 정식 군대를 양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보여주는 예다. 그렇다 해도 이 속오군이 종래의 군제와 완전히 다른 점은 양반의 자제도, 아직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문무과, 잡과에 급제한 사람도, 지방 향리도, 모두 병역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이는 양반의 입장에선 결코 수용하기 쉽지 않은 대변혁이라 할 수 있다. (2) 정병1만명제 개혁적인 신설군인 훈련도감이나 속오군에서 보듯, 당시 조선군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정병주의, 즉 소수정예제밖에 없었다. ‘강하고 우수한 병사를 기르는 것을 목표로 삼되, 병사를 많이 기르는 것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는 현실적으로 많은 병사를 양성할 수 없는 조선의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지만 전략적 측면에서 보더라도 훨씬 유용하고 효과적이다. 공격보다는 방어가 우선시 되어야 하는 조선의 입장에서 양보다는 질이 훨씬 중요했기 때문이다. 에이 따라 나온 것이 정병1만명제(精兵一萬名制)다. (3) 선봉제 정병주의, 정병제가 병사의 직업화, 전문화 군대를 의미한다면, 선봉제(選鋒制)는 전투에 강한 군대,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내는 군대를 의미한다. ⓵ 선봉 만드는 법 선봉제는 정유재란이 일어나기 전해인 선조 29년(1596) 1월 류성룡이 황해도에 있는 종사관에게 보내는 공문에 처음 나온다. 그의 공문은 선봉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고 언제 가장 효과적으로 쓰는가를 상세히 적고 있다. ‘이른바 선봉은 군사들 중에서 뽑은 가장 날쌔고 용감한 것만을 소중히 여긴다. 이들을 지정된 장수들에게 나누어 배치해서 전마와 갖가지 병기를 갖추어 법(교본)에 따라 조련시킨다. 비단 이들만이 아니라, 각처 의병에 소속되어 싸움에 익숙한 사람이나, 무 - 14 -

 

사 출신들이나, 초시에 합격한 사람이나, 혹은 험준한 준령을 오르내리며 사나운 짐승을 쳐서 잡던 사냥꾼이나 가리지 않고 뽑아서 조련시키면 이들 또한 일당백의 군사가 될 수 있다. 이들은 전투할 때 맨 앞에 서기도 하고, 매복을 설치할 때 복병으로 쓰이기도 하고, 적의 진지를 함락시킬 때 전진 공격병이 되기도 한다. 치열한 전투에 이들이 사용되지 않는 곳은 없다.’ ⓶ 선봉특기 이같이 임진왜란이 나던 바로 다음해부터 류성룡은 정병을 만들고 선봉을 만들기 위해 갖은 노력과 정성을 다 쏟는다. 그해에 류성룡은 영의정으로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경기, 황해, 평안, 함경 4도의 도체찰사를 겸직하고 있었다. 전쟁 수행의 모든 책임이 그에게 집중되다시피 했지만, 그는 조정에 앉아 붓끝으로 지시하지 않고, 현장에 직접 나가 몸소 체득한 현장 감각으로 실천 가능한 방책을 세우며 지시했다. 그리고 현장에서 쌓은 경륜과 통찰력으로 현장의 병사와 장수들을 통솔했다. 그런 류성룡이 병사와 장수들에게 내린 ‘정병, 선봉’에 대한 몇 가지 지시 명령을 특기한다면, 첫째로 용겁불혼(勇怯不混)이다. 용감한 병사와 겁 많은 병사를 서로 섞어 놓지 말라는 것이다. 둘째로 ‘정병, 선봉’에 속하는 병사의 가족들에게는 국가에서 ‘물자를 후하게 제공’해서 생계 걱정을 없게 하는 것이다. 셋째로 오늘날 군사훈련에서도 예외 없이 사용되는 연좌법(連坐法)의 적용이다. 한 오중에서 군사가 정련되지 못하고, 병기가 무디어 못쓰고, 호령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면, 군졸과 오장 모두 함께 죄를 다스리고, 한 오중에서 똑같은 일이 벌어지면 초관과 대장을 아울러 죄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런 연좌법, 다시 말해 조직 내 한 사람이 죄가 있으면 나머지 사람에게도 똑같이 죄를 묻는 치죄방식은 아득한 옛날부터 어디서든 보편적으로 시행해온 방식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한 연대책임을 묻는 정도의 치죄를 넘어 패전할 경우 정병, 선봉을 거느린 장수는 ‘의당 죽어야 한다’는 치죄이다. 그런 강력한 연좌법이 시행될 때 ‘나라 일은 만분의 일이라도 희망을 갖게 될 것’ 이라고 했다. - 15 -

 

제3부 하늘의 도움으로 Ⅰ. 고니시 유키나가의 평양 미스터리 1. 미스터리의 실마리는 어디에서부터 1) 누가 전쟁 당사자인가 1592년 4월 13일에 시작된 임진왜란은 이듬해 초 명군 출병으로 개시된 1월 8일의 평양전투, 1월 27일의 벽제관 전투, 그리고 2월 12일의 행주산성 전투와 6월 29일의 진주성 함락까지 1년 3개월이 채 못 되는 전쟁 기간을 제하면 1597년 2월 21일 정유재란이 일어나기까지의 4년은 소강상태였다. 그렇다면 4년은 ‘어떤 4년’이었는가. 4년 동안 명, 왜 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조선은 또 ‘무엇을’, ‘어떻게’하고 있었는가. 의문을 풀려면 먼저 이 전쟁에서 명, 왜, 조선이 각기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있었는지 살펴봐야 한다. 왜는 침략국으로서 전쟁의 한 축을 이루는 당사국이다. 전쟁기간 내내 왜의 위치는 변함이 없다. 조선은 피침략국이다. 침략을 당한 입장으로 전쟁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당사국이다. 문제는 조선이 실제 전쟁 당사국으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었는가이다. 명은 어떻게 되는가? - 전쟁 당사국인가. 중재국인가. - 전쟁 지원군인가. 구원군인가. - 명이 지원국이라면 조선은 작전권 지휘권을 가진 독립군이다. 구원군이라면 작전권도 지휘권도 없는 ‘예속군’이다. - 조선은 전쟁을 치르면서도 당사국이 되지 못했다. 2) 강화협상 4년의 시간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르는 4년 동안, 피침략국으로서 모든 희생은 강요받으면서 정작 전쟁 당사국으로서 지위는 갖지 못한 조선은 결국 고통스럽고도 굴욕적인 상태에 직면한다. 바로 명과 왜가 손을 잡고 벌인 전쟁중지-강화 추진이다. 조선을 한가운데 놓고 물밑에서 명과 왜가 은밀히 벌였던 그 ‘거래’를 두고 조선은 따져서도 물어서도 안 되었다. - 16 -

 

 심지어 조선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책동이고, 음모이고, 책략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놀음에서 강화 추진과정에 어떤 영향력도 힘도 미칠 수 없던 조선에게 그 강화 기간은 길든 짧든 견뎌내기 어려운 피동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긴 ‘피동의 시간’이 조선을 살렸다. 조선의 긴 피동의 시간, 왜의 허송세월,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 시작되었을까. 시작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그대로 평양에 눌러앉은 데서였다. 전진도 후퇴도 없이 ‘칩거’나 다름없는 평양 주둔이 6개월이나 계속되었다. 그런 고니시 유키나가의 도저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같은 ‘평양 미스터리’가 실은 조선을 살리고, 강화추진에서나 명,왜전투에서 왜의 입지를 완전히 좁히는 주요인이 된다. 2. 왜 그랬을까 1) 유키나가 평양 주둔 6개월의 수수께끼 더 큰 수수께끼는 이 ‘평양의 주둔 미스터리’를 임진왜란을 연구하는 한국, 일본, 중국의 그 어느 학자도 문제로 제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 조선의 ‘선조실록’이나 명의 ‘신종실록’에 고니시 유키나가의 평양 주둔 초기 1개월간의 움직임에 대해서 별다른 논의나 의심하는 바 없이,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류성룡만이 그의 징비록에서 ‘오로지 하느님의 도움으로’라는 말로 의문을 강력히 드러내고 있다. ‘징비록’에서 참으로 의아해하는 것처럼 금산에서 한 달음에 달려온 고니시 유키나가가 어째서 평양에 그대로 멈추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왜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을까. 무엇이 고니시 유키나가로 하여금 평양에 엎드려 쥐죽은 듯이 자취를 감추고 가만히 있게 했을까. 이는 정녕 ‘미스터리’이고 수수께끼 중의 수수께끼다. - 4월 13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남해 금산 상륙 → 5월 2일 서울 입성 (450Km를 20일 만에, 1일 평균 22Km 속도) → 6월 13일 평양 입성 - 평양에서 의주까지 200Km는 10일이면 충분한 거리 경쟁자인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함경도 최북단까지 진격했고, 거기에 임해군 순화군 두 왕자까지 포로로 잡아 엄청난 수훈을 세웠다. 그 점에서도 그의 평양에서의 침묵은 더더욱 이해되지 않는 것이다. - 17 -

 

2) 심유경 강화 추진이 진격을 멈추었다? 명의 심유경이 와서 화의(和議)를 추진한 것도 9월 1일 이후부터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평양 점거 이후 2개월 반이 지나서였다. 심유경의 강화추진이 왜군의 진격을 멈추게 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자아낼 수도 있다. 그러나 강화 추진은 9월 1일 이후부터이고, 그 이전에 왜군이 어째서 평양에 있었는가의 의문은 풀어주지 못한다. 3. ‘역사의 가정’에서 진실을 보다 1) 만일 유키나가가 의주로 쳐들어 왔다면 ‘평양 미스터리’가 이와 다를 수 있을까. 만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의주까지 밀고 올라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틀림없이 선조는 신하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명으로 갔을 것이다. 그럼 조선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역사에서 ‘가정’은 의미가 없다고 아무리 말해도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 하고 역사를 되돌아봄으로써 더 많은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았더라면’의 가정으로 ‘평양미스터리를 주시한다면, 다음의 세 가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1) 조선은 없어졌을 것이다 첫째로 명군이 압록강을 건너 왔을까이다. 명군이 조선을 구원하러 압록강을 건너는 도강작전을 펴고 왜군과 전면전을 펼칠 것인가. 그것은 명백히 전면전을 펼치려는 목적이 조선을 구하려는데 있었는지, 아니면 자국의 방어에 있었는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명은 일찍이 왜의 전투력을 알고 있었다. 30년 전 절강, 복건 등지에서 벌어진 왜와의 싸움을 말할 것도 없고, 소주, 송강, 가정, 태창 등지에서 왜로부터 입은 엄청난 피해의 경험에서였다. 그것은 노략질하는 왜구의 단순한 싸움 실력을 넘어 한 국가의 전쟁 실력이었다. 임진왜란 때도 명이 왜와 정면승부를 걸어 승리한 적은 평양전투 단 한 번뿐이었다. 정유재란 때의 직산(소사) 전투의 승리를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설이 여러 가지다. 1593년 6월 19일에서 29일까지, 임진왜란 최고의 비극적인 전투로 불리는 진주성 싸움 당시 명군은 6만의 성안 사람들이 도륙당 - 18 -

 

 하는 것을 번연히 보면서도 손을 놓고 멀리 피해 있었다. 그만큼 왜군이 두려웠던 것이다. 정유재란 때의 가장 큰 방어지인 남원에서는 명군은 아예 피해버렸고, 울산전투에서는 먼저 공세를 취했음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자 물러가버렸다. 이런 명군이 이미 점령당한 압록강을 건너와 왜군과 싸우며 조선을 구하려 하겠느냐이다. 압록강을 최후의 방어선으로 해서 그 이상 왜가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데 온갖 힘을 쏟을 것은 명확한 가정으로 던져질 수 있다. 그렇다면 조선은 어떻게 될 것인가. (2) 조선은 분할되었을 것이다 둘째로 명군이 압록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하지 않고 압록강을 건너 왔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이다. 이 경우 명군은 평양탈환을 최후 목표로 삼고 더는 ‘조선을 수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평양 탈환을 발판으로 왜와 강화회담을 추진할 것이다. 물론 회담 결과에 따라 대동강, 한강까지 내려올 수도 있지만 그 핵심은 어디까지나 평양을 확보하는 것이다. 즉 평양 이북을 확보하는 범위에서 강화회담을 종결지을 것이다. (3) 중· 일의 완충지 기능만 남을 것이다 셋째로 마침내 조선의 역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이다. 더 적나라하게는 지금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이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압록강까지 진격하고 명이 압록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했을 경우,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임에 틀림없다. 조선이 다시 지구상에 나타나는 것은 아마도 청의 강희제가 즉위하는 1661년 이후가 될 것이고, 그렇다면 조선은 최소한 70년 이상을 ‘원의 고려’처럼 ‘왜의 조선’이 되어 있을 것이다. 2) 유키나가의 아이러니 아이러니하게도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의 둘도 없는 은인이다. 조선의 입장에서 그만큼 ‘쓸모 있는 바보’가 없다. 토요토미 히데요시 입장에선 그만큼 ‘쓸모 없는 바보’도 드물다. 고니시 유키나가 대신 가토 기요마사를 평양으로 진격케 했다면, 틀림없이 의주까지 갔을 것이고, 그랬다면 14만 대군을 다시 모아 재침하는 정유재란은 일으키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히데요시는 생전에 명까지는 못 갔다 해도 조선 하나만은 거머쥐고 죽는 행운을 맛보았을 것이다. - 19 -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의 운명도 달라졌을 것이다. 1598년 11월 18일 이순신의 추격을 피해 간신히 살아남아 일본으로 달아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본 호족들이 천하패권을 놓고 겨룬 세키가하라 전투였다. 이 전투는 자신이 섬기던 히데요시 군과 반대 세력인 도쿠가와 이에야스군의 싸움이었다. 결과는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총대장격인 이시다 미츠나리와 함께 패했으며 그는 마침내 목숨을 잃었다. 만일 그가 평양에 머물지 않고 의주까지 진격했다면, 세키가하라에서 죽음을 맞는 대신 조선 총독으로 남아 있었을 지도 모른다. ‘쓸모 있는 바보’ 유키나가 덕분에 오래 전에 존재하지 않을 나라로 전락했을지 모르는 우리는, 오늘날까지 이렇게 정체성을 가진 어엿한 한 국민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4. 류성룡의 외침 ‘하늘의 도움으로, 하늘의 도움으로’ 류성룡은 그의 징비록에서 ‘하늘의 도움으로, 하늘의 도움으로’라고 수없이 쓰고 있다. 그 중 몇 개만 읽어봐도 오늘의 우리는 하늘의 도움으로 존재한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오호라, 임진의 참화는 참혹하였도다. 20여 일 사이에 3도가 떨어지고 8도가 무너져 임금이 파천을 하셨다. 그러고도 오늘 우리가 있음은 ‘하늘이 도와주어서’이다.” “사신을 잇달아 요동으로 보내서 위급함을 알리고 구원병을 청하였으며, 또 중국에 내부하기를 간청하였다. 그 속에서도 마침내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진실로 ‘하늘의 도움’이며 인력으로 된 것이 아니다.” “걱정하고 걱정하던 군량이 먼 곳에서 참으로 알맞은 때 도착하였습니다. 나는 너무 기뻐 달려가 아룁니다. 이는 바로 ‘하늘이 중흥의 기운’을 우리에게 열어주시는 것이라고.” “적군은 본디 수군과 육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내려오고자 하였던 것인데, 순신의 이 한 번 싸움에 드디어 적군의 한 쪽 세력이 꺾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전라, 충청, 황해도와 평안도, 연해 일대를 보전함으로써 군량을 보급시키고 조정의 호령이 전달되어서 나라의 중흥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 모두 이순신이 한 번 싸움에 이긴 공이었으니, 아아, 이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 20 -

 

 “도성의 함락과 회복, 그리고 히데요시의 죽음, 이 어찌 우연이라고만 하겠는가, ‘하늘의 도움’이 아닐 수 없다.” 불과 400년 전 임진왜란을 생각하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존재하는 것, 면면히 이어져 살아남아 있는 것, 그토록 까마득하게 보이던 중국과 일본을 자신있게 바라보며 경쟁의 반열에 같이 서 있는 것, 그리고 류성룡이 그토록 염원하던 ‘중흥’을 이룩해 경제대국 반열에 오른 것 등 이 어찌 우리의 노력, 우리의 힘만으로 된 것이라 하겠는가. Ⅱ. 강화협상 명은 왜 조선에 출병했는가. 흔히 말하는 대로, 또 역사 교과서에서 적고 있는 대로, 종주국으로서 체면을 세우고 은전을 베풀고, 그리고 그들의 속방이라고 말하는 나라(조선)에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였는가. 당시 명은 오늘날도 더러 보는, 국제적으로 패권의식에 충만해 있었는가. 군사적으로도 강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는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명은 왜 조선에 그 많은 군대를, 그토록 오랫동안(8년), 그 많은 돈(2천만 냥)을 들여 보냈는가. 1. 명은 왜 출병했는가 1) 파산 상태의 명이 왜? 조선에 군대를 보내던 1590년대의 명은 이미 재정적으로 파산상태였다. 1430년대 이후 내륙 아시아 변방에서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 몽고와, 1550년대 이후 동부 몽고에서 대규모 공격군을 통합해 강력한 지도자로 등장한 알탄 칸과 만리장성 안팎에서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느라, 명은 군사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이미 지칠대로 지쳐있었다. 거기에 조선 출병은 이미 바닥까지 드러낸 마지막 자원을 완전히 고갈시키는, 대타격이며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런데 명은 왜 조선에 군대를 보냈는가. 명의 출병이 조선을 위함이 아니고, 종주국으로서의 의무 수행과 패권국으로서의 국제질서 교란자를 응징하기 위함이 아니라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명이 조선에 군대를 보낸 것은 ‘조선’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명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 21 -

 

 명 조정은 왜의 조선 침략이 가도 정명에 원 뜻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있기 7년 전부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고 명도 함께 침략할 것이라는 왜의 동태와 의도를 훗날 조선이 알리기 전에 이미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오직 조선만이 그것을 모르고 황윤길, 김성일 두 사신의 엇갈린 보고서를 둘러싸고 심한 논쟁을 벌렸다. 2) 조선은 명의 최후 방어선 어쨌든 명은 왜의 침략을 미리 파악하고 있었고, 그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조선으로의 군대 파견은 명의 입장에서 자국을 방어하는데 전략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유리했기 때문이다. 남의 나라 영토에서 싸우면 자국의 영토를 훼손하지 않고 자기 나라 백성의 생명과 재산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지 않는다는 전략적 이점이 있었다. 병력의 새로운 보충, 군수물자의 생산증대와 수송도 자국 영토 안에서 싸우는 것보다 영토 밖에서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 명의 조선 출병 목적은 처음부터 명을 방어하는 데 있었다. 왜로부터 북경을 지키려면 요동을 사수해야 하고 명에게 조선은 요동의 울타리이자 최후 방어선이다. 명이 조선을 잃으면 요동의 넓은 벌판에서 왜와 정면으로 싸워야 한다. 그럴 경우 무기체계나 전투력 면에서 명이 왜를 당해내기가 매우 어렵다. 일찍이 왜의 실력을 알았던 명군은 조선을 지키는 것이 상책임을 알았기에 황혼에 이른 명제국의 마지막 힘을 다해 조선으로 출병한 것이다. 2. 명· 왜, 왜 강화하려 했는가 1) 명, 출병 목적을 달성하다 명의 출병 이유는 출병 목적과 일치한다. 조선을 전쟁마당으로 해서 왜로부터 요동을 방어하는 것, 압록강 너머로 더는 왜가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 목적이 달성되었을 경우 명은 어떤 조치를 취하고 무엇을 획책하려 할 것인가. 그 모든 조치들 중에서 가장 우선적인 것, 가장 중요한 것은 왜와 싸우지 않는 것, 전쟁을 중지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지 - 22 -

 

 를 위한 강화를 획책하고 추진하는 것이 될 것이다. -명군은 1592년 12월 30일 4만 5천명의 병사를 동원해 1593년 1월 7일 평양성 전투에서 승리 - 1593. 1. 27 이여송은 한양 바로 북쪽 벽제관 전투에서 대패하고 류성룡이 그렇게 후퇴를 말렸음에도 평양으로 후퇴 - 전쟁에서 이긴 왜군도 한양을 비우고 울산 서생포 등으로 후퇴 명의 의도는 오로지 왜와 강화하는 것이다. 강화협상은 1592. 7. 명군의 1차 원병인 조승훈 군대가 평양전투에서 패배한 후 9월 1일 석성과 송응창이 심유경을 평양의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보내 회담을 열면서 시작되었다. 물론 명군이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후 강화 추진이 본격화 되었다. 명이 이토록 왜와 싸움을 회피하며 강화를 추진하는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명이 그래야만 했던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눠볼 수 있다. (1) 명의 재정고갈 명이 강화 추진에 열심이었던 첫 번째 이유는 재정문제였다. 앞서 말한 대로 명 조정은 이미 파산 상태에 다다라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자원이 바닥을 드러냈다. 명의 그 같은 재정적 결핍은 왜와의 전쟁 때문이라기보다 그 이전 몽고 잔병들과의 오랜 기간의 전쟁과 조정의 부패 때문이었다. (2) 명의 군사약세 둘째는 군사상의 이유다. 군사적으로 명은 다급하고 초조한 상태였고, 왜는 그에 비해 훨씬 여유있고 느긋했다. 그것이 왜의 ‘조선에 대한 야욕’을 한껏 부풀렸다. 당시 송응창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에 파견된 명군의 태반은 약졸이었다. 군사 수효도 왜에 비해 훨씬 적었고, 병기도 대포 하나를 제하고는 우수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평양전투와 벽제관 전투에서 부상병이 7천 명에 이를 정도였다. 그에 비하면 왜는 병기가 날카롭고 병사도 전쟁에 무척 능숙했다. 왜의 바다를 통한 보급품 수송도 명군의 육로 수송보다 비교적 쉽고 원활했고, 손실 병력의 보충도 상대적으로 왜는 쉽게 이루어졌다. - 1592년 7월 명군이 파병한 이래 1598년 전쟁이 끝나기까지 명왜 간에 치른 15번의 전투에서 명이 확실히 이간 전투는 1593년 1월의 평양전투 뿐 - 23 -

 

 임, 명왜간 승패의 판단이 엇갈리는 1597년 9월의 직산전투까지 포함해도 2번 밖에 되지 않음 이런 군사적 열세 내지 전력상의 약세가 명으로 하여금 강화를 추진하게 만들었고, 실제 명군 진영에서도 강화론이 알려지자 우레와 같은 환성이 터져 나왔다는 기록도 있다. 그만큼 명군은 지치고 피폐해 있었고, 염전의식(厭戰意識)이 만연해 있었다. 명군이 왜와의 강화를 열망하는 만큼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친 조선군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송응창은 권율에게 패문을 보내 피하지 않고 왜와 싸워 이긴 것을 오히려 질책했다. 1593년 6월의 가장 참혹했던 진주성에서의 왜병 만행까지도 심유경을 보내 두둔하기까지 했다. 3. 분할시도, 그리고 류성룡의 외로운 싸움 1) 명과 왜 그리고 흥정거리 조선 명이 그토록 강화를 추진하려고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조선에 대한 그들의 의식과 태도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에겐 조선에 대한 우월의식이 저변에 깔려 있었고, 그 의식에서 조선을 얕보는 태도가 형성되었다. 그러한 의식과 태도를 가진 명에게 조선은 도대체 어떤 나라였을까. (1) 조선은 오직 변방의 울타리 조선은 개국이래로 명의 ‘속국’이었다. 조선이 먼저 ‘사대(事大)’를 내걸고 그들 밑으로 들어갔다. 태조 이성계의 선조(先祖)이름이 그들 기록에 잘못 기재되어 있다 해서 200년 동안이나 애걸복걸하며 고쳐달라고 매달린 나라가 조선이었다. 백 번 생각을 달리해도 백 번 이해가 안 되는 나라다. 늘 조선의 우위에 있던 명이 조선을 동격의 선린관계로 생각할 리 만무하다 그들에게 조선은 ‘주권국가’가 아니라 오직 변방의 작은 속방에 불과했다. 그것도 몽고나 여진처럼 다투고 겨룰 군사력을 가진 속국도 아니고, 사라센의 대식국처럼 문화 교류를 할 만큼 배움을 주는 독창성을 내보이는 나라도 못되었다. 그들에게 조선은 오직 변방의 울타리로서의 의미뿐이었고, 왜와의 강화에서 흥정거리 대상일 뿐, 명의 내지(內地)처럼 꼭 지켜야 할 대상은 아니었다. - 24 -

 

 (2) 왜, 빈손으로 물러날 수 없다 강화에는 반드시 ‘주고 받는 것’이 있다. 왜는 빈손으로 물러날 리 없고, 명은 무언가를 주어 물러나게 해야 한다. 하지만 명, 왜의 협상에 오른 흥정거리는 그들의 것이 아닌, 조선의 땅덩어리였다. 왜가 명과의 협상 테이블에서 계속 ‘먹이’를 요구하고 나왔을 때, 명은 그것을 물리칠 힘이 있었는가. ‘돈과 힘’전쟁에서 아미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어진 명이 어떤 흥정으로든 왜가 요구하는 먹이를 내주려 할 것 아닌가. 명에 못지않게 다급하고 고민스럽기는 왜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명과는 다른 측면에서 불안하고 초조했고, 그래서 더욱 빈손으로 물러날 수 없었다. 그 많은 병력을 이끌고 와서 거둔 것 없이 물러났을 때, 최고 권력자 히데요시에게 치명타다. (3) 명· 왜, 조선 땅을 놓고 흥정하다 명과 왜가 조선을 사이에 두고 강화를 시작한 것은 명 측 기록으로는 1592년 9월 1일이고, 일본 측 기록으로는 같은 해 8월 29일이다. 이것은 양측이 쓰는 일력(日曆)의 차이 때문이라 볼 수 있다. 이 날짜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5개월도 채 되지 않는 시간이다. 명 측 등장인물은 심유경이고, 왜 측은 고니시 유키나가이다. 심유경은 임진왜란 내내 명과 조선과 일본을 왔다갔다 한,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인물이었다. ⓵ 류성룡 낌새를 채다 심유경이 명의 병부상서 석성의 지시에만 따라 왜와 강화를 추진했는지, 아니면 명 조정의 지시도 함께 따랐는지는 설이 분분하다. 많은 사람들이 전자라 보고 있지만, 후자라 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심유경이 왜와 강화협상을 하고 있다는 것은 명 조정 전체가 다 아는 사실인데, 어떻게 병부상서만의 지시를 따를 수 있느냐는 반발도 설득력을 갖는다. 하지만 전쟁의 주무부서가 병부이고, 그 담당자가 석성이었음을 유념할 때, 그가 주도해서 강화를 추진한 것만은 틀림없다. - 1592. 7. 17 평양전투 패배 후 9월 1일, 1차 강화협상 시작 - 1593. 4. 8 벽제관 전투 패배 이후, 2차 강화협상 : 여기서 조선 분할을 골자로 하는 화의 7조(1593. 6. 28)가 만들어짐 - 25 -

 

1차 협상 후 명과 왜가 꾸미는 계략을 알아차린 이가 바로 류성룡이다. 1592년 11월, 류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서장에 그 낌새가 여실히 드러나 있다. “신이 심유경의 행동거지를 살펴보건데, 오로지 강화하려는 계책 뿐입니다. 이것이 어찌 심유경 제 스스로 하는 일이겠습니까. 명 조정에서 지시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명은 왜적을 두려워하여 요행으로라도 전쟁을 그치게 하는 일에만 힘쓰고 그 밖의 다른 일은 헤아릴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측에선 만역 이 강화가 이루어지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치하기 어려운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 백 번 천 번 거듭 거듭 다짐해서 아주 상세하고, 치밀하게 대책을 강구하고, 좋은 계책을 자내서 일이 발생하기 전에 잘 도모해야 할 것입니다.” 명이 그렇게 두려움과 패배감에 젖어 강화로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은, 결단코 조선 조정에선 한 사람도 없는 대다. 명이 왜를 두려워한다는 생각 자체가 그야말로 불경(不敬)이라고까지 여겨지던 바로 그 즈음이다. ⓶ 류성룡, 명의 의도를 꿰뚫어 보다 명과 왜가 강화한다면 반드시 ‘흥정’하는 대상이 있다. 어떤 흥정거리를 놓고 협상의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가. 바로 그것을 류성룡이 직감한 것 같다. 왜와 명이 강화를 해서 왜가 순순이 물러나고 명도 철수한다면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데 처치 못할 일이 생긴다는 것은 무엇이며, 수습하기 힘든 낭패스러운 일이 다가온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명과 왜가 오직 우리에게만 쉬쉬하며 벌이는 흥정, 바로 조선을 분할하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같은 달 (1592년 11월), 류성룡이 더 강한 의구심으로 선조에게 올리는 또 다른 서장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심유경은 우리에게 명군이 곧 출정할 테니 마초(馬草) 3백만 다발을 반드시 공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적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공개적으로 말했고, 많은 은화를 가지고 평양의 고니시 유키나가를 만날 계책을 세우고 있다며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런 심유경의 행동거지는 심유경의 계략인 동시에 명 조정의 계략일 것으로 류성룡은 의심하고 주목했던 것이다. 역시 같은 달 같은 서장에서 류성룡은 또 하나의 명백한 결론이나 다름없는 글을 선조에게 올린다. - 26 -

 

 “예로부터 남을 구원하는 측과 구원을 받는 측은 그 뜻하는 바가 서로 같지 않습니다. 명이 왜적을 토벌하려는 것은 명을 위해서입니다. 전쟁을 중지하려는 것도 그렇습니다. 명이 어찌 우리의 절박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 조선을 구원하려고 원병을 보냈지만, 결코 조선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해득실은 구원 받는 쪽이 아니라, 구원하는 쪽의 입장에서 결정한다. 따라서 전쟁 또한 구원하는 쪽에선 그들 자신을 위해 얼마든지 중지할 수 있다. 그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구원받는 나라를 얼마든지 희생시킬 수도 있다. 선조와 조정이 그렇게 의지하고 있는 명 또한 왜와 다름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조선을 가차 없이 쪼개고, 하루아침에 망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류성룡의 강화 저지 싸움 (1) 전투 종용, 그리고 간청 또 간청 1593년 1월 27일 벽제관 전투에서 패한 명군 제독 이여송은 전의를 완전히 상실했다. 그리고 파주에서 동파, 개성 그리고 평양으로 자꾸 물러나려 했다. 이 과정에서 류성룡을 중심으로 한 조선의 몇몇 신하들과, 이여송을 중심으로 한 명군 장수들 간에 벌어지는 다툼(실은 조선의 일방적 간청)은 명의 실질적 의도가 명목상의 의도와 얼마나 다른지 여실히 보여준다. 이여송의 철수하는 속도는 너무 빨랐다. 거기에는 단순히 왜에 대한 두려움만이 아니라 다른 의도가 있었고, 류성룡은 그것을 간파했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명군의 후퇴를 막고 왜와 싸우도록 했다. 1593년 벽제관 전투 다음날, 류성룡은 도원수 김명원, 호조판서 이성중, 명군 접대사 이덕형 등 6명을 이끌고 이여송 군중으로 들어가 물러나지 말고 왜와 싸울 것을 간곡히 권한다. 그러나 명군의 장수들은 벼락같이 성을 내고 통사를 발로 차며, 문 밖으로 쫓아낸다. 그래도 선조는 명군 장수 앞에서 기둥이든 땅이든 머리를 부딪쳐 깨면서 대들 듯 사리를 따져 변론하라고 재촉한다. 의주 행재소에 앉은 선조나 거기서 왕을 모시고 있는 신하들은 평양에서 그렇게 기세 좋게 왜를 몰아낸 명군이 왜 이제 와서 싸우지 않고 자꾸 뒤로 - 27 -

 

 물려나려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리도 없고, 굳이 이유를 캐낼 의지도 정보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오직 류성룡 등 명군 장수들과 접촉하는 우리 측 신하들의 정성이 부족하고 설득력이 모자라서 명군을 더는 부추기지 못하는 탓으로만 생각했다. (2) 강화는 명 조정의 전략 선조의 채근, 조정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명군은 자체 결정에 따라 전쟁도 하고 휴전도 했으며, 진격도 하고 후퇴도 했다. 그것은 아무리 전쟁을 수행하는 제독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분명 그 모든 결정은 더 높고 높은 데서 내리고 있음에도 국왕인 선조나 조정의 신하들은 도무지 알지 못했다. 명의 속내를 아는 사람은 류성룡 뿐이었고,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절망이었다. 왜와 싸우느냐 휴전하느냐, 전쟁이냐 강화냐는 경략 송응창이나 제독 이여송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명 조정이며 병부가 하는 일이었다. 그런 사정을 조선 조정은 알지 못했다. 단지 평양과 벽제관에서 벌였던 겨우 두 차례의 전투로 전쟁을 중지하고, 왜와 강화하려 한다는 것은 조선 조정으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그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이었고, 설혹 그 누군가가 이해를 구한다면 그는 역적이었다. (3) 제독 이여송이란 인물 조선 조정의 명에 대한 무한 믿음과 달리 류성룡은 저간의 사정을 꿰뚫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모든 것을 숙지하고 있었던 류성룡이 전쟁의 현장에서 종용하고 간청할 사람은 황제도 병부상서 석성도 아닌 이여송뿐이었다. 경략 송응창은 거리상으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전장 가까이는 아예 오지 않았다. 이여송은 정말 무례한 장군이었다. ‘만분의 일의 가망’이라도 있을까 해서 대면하는 것이지, 정말 상종할 만한 인격체가 못되었다. 명군 장수들이 조선 국왕과 그 신하들에게 하나같이 오만하고 무례했지만 특히 이여송은 더했다.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그는 내면 세계의 수기(修己)라는 것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일설에 의하면 그의 조부가 평안도 이산(강계)사람으로 알려져 있 - 28 -

 

으나 명확히 밝혀진 바 없고, 그의 출생년도 또한 알려져 있지 않았으니 이여송은 수수께끼가 많은 인물이라 볼 수 있다. 이에 앞서 평양전투에서의 승리는 이여송의 전략적 전술적 승리라며 추켜세워졌지만,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왜군이 1만 5천 명이었는데 비해 명군은 4만 5천 명으로 수적으로 3배나 우세했다. 또한 사로잡아 목 베어 죽인 왜병 수가 엄청나게 많다고 전과를 보고했지만, 그 태반은 조선인으로, 그 수가 1천 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뿐만 아니라 왜병이라고 태우고 물에 빠뜨려 죽인 사람이 1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 역시 모두 조선인이라고 했다. 구원군 장군이, 역으로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을 무참히 살육해서, 적을 죽인 것으로 과장해 공을 세우려 했으니 당시 조선 백성들의 비애가 어느 정도였는지, 지금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4) 명군이 절대 후퇴하면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 이여송도 류성룡에게만은 상당히 예의를 갖춰 대했다. 류성룡의 맑은 인품, 곧고 인내심 강한 성품, 항시 진정성이 드러나는 대화, 온 몸으로 뿜어내는 충성심, 학자로서의 높은 소양 등이 그를 상당 수준에서 감복시켰던 것 같다. 그러나 류성룡이 왜 공격 독촉이 잦을수록 그도 자주 성을 냈고, 무례하게 나오는 경우도 적잖았다. 그 뒤 다른 신하들과는 달리 무례에 은근한 사과를 건넸는데, 무장다운 솔직함은 있었던 것 같다. ⓵ 선왕의 분묘가 모두 경기도에 있다 1593년 2월, 제독 이여송은 평양으로 돌아가 주둔했다. 그러면서 우리 측의 명군 접반사 이덕형에게 일러 ‘조선군은 지금 형세도 외롭고 원군도 없으니, 명군 따라 모두 임진강 이북으로 철수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류성룡은 이여송에게 급히 글을 보내 ‘군사를 절대로 물러서는 안 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자세히 진술한다. - 첫째, 선왕의 분묘를 지키는 일 : 유교 국가의 정신적 근본 - 둘째, 경기 남쪽의 백성들이 명군이 갑자기 물러났다는 말을 듣게 되면 오히려 적군(왜)에게로 귀의하게 될 것 - 셋째, 우리 강토를 한 치도 쉽게 적에게 넘겨줄 수 없다. - 넷째, 우리 장수와 군대는 명군에 의지해 함께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 - 29 -

 

 다. 그런데 명군이 물러나면 우리 군도 모두 흩어져 버릴 것이다. - 다섯째, 명 대군이 물러나면 후방은 모두 빈다. ⓶ 백성은 조선이든 왜든 상관없다 퇴군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하나씩 더 캐어보면, 명군이 평양까지 물러나면 이남의 백성들은 기필코 왜에 붙을 것이 번연하다. 우리 군은 지킬 능력이 없고, 조정은 압록강 가에 가 있고 왕과 신하는 대책도 능력도 없다. 백성이 귀의할 곳은 당장 눈앞에 있는 왜밖에 없다. 백성의 일상은 땅에 붙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고 그 땅을 왜가 차지하고 있다면 왜에 귀의해 그들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불가항력이다. 중화민족이라고 해서 중화민족이 다스리라는 법은 없다. 중화민족을 다스리는 천명은 요(遼), 금(金), 원(元)에게도 넘어갔다. 능력 있고 다스릴 줄 아는 자에게로 천명은 기필코 이동하는 것이다. 그 이동의 속도는 백성들에게 믿음을 잃는 속도와 같이 한다. 조선의 백성이라고 해서 다를 리 없다. 마치 선조가 명에 귀부해서 명의 한 부분으로 살아가려고 했듯이, 백성 또한 얼마든지 왜에 귀부해서 왜의 한 부분으로 살아갈 수 있다. 백성의 입장에선 꼭 ‘조선왕조의 백성’일 이유도 필요도 없다. 이것이 바로 유교의 교리 민심무상(民心無常 백성의 마음은 일정함이 없어 한 곳에 붙어 있지 않는다) 그리고 유혜지회(惟惠之懷 오로지 은혜롭게 정치하고 혜택을 베푸는 사람에게 향한다.)의 가르침이다. 명이 절대로 퇴군해서는 안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백성은 왜를 따르는 게 살길이라면 얼마든지 서로를 이끌고 왜에게 귀부할 수 있다는 게 류성룡의 통찰이며 직관이며 판단이었다. 하지만 왕과 다른 신하들은 그 누구도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다. 오랜 세월 유교의 가르침 속에 살아오면서도 ‘백성의 무서움’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은 세뇌되지 않는다. 세뇌되는 건 오히려 왕과 신하들이다. 그래서 류성룡이 지푸라기 잡듯, 이여송을 붙들고 ‘군사를 물려서는 안 된다고 호소하고 설득하는 것이다. 오직 백성들을 왜로 귀부시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 30 -

 

 ⓷ 군이 흩어져 버린다 명이 퇴군해서는 안 되는 다음 이유로 조선군을 들고 있다. 조선군의 특징에 대해서는 이미 상세히 거론한 바 있다. (녹봉 없는 장수, 무기 없는 병사, 군량 없는 군대, 체계가 확립되지 않은 조직 등) 조선군은 1593년 1월 구원군으로 나온 명군에 의지해서 그들의 보호아래 보조군대로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명군이 임진강을 건너 평양까지 후퇴해 조선이 아닌 자국(명) 방어의 근거지로 삼으면 임진강 이남에 있는 조선군은 어떻게 되는가. 류성룡은 근근히 얽어맨 조선군이 명군의 후퇴와 함께 완전히 풀어져 뿔뿔이 흩어질 것이라 진단했다. 그래서 이여송에게 제발 물러나지 말라고 호소하고, 그 근거를 명확히 제시했다. ⓸ 조선은 분할되고, 요동은 곧바로 위협받는다 명군이 평양으로 물러나면 임진강 이북도 지켜낼 수 없으며, 임진강 이북을 지키지 못하면 명도 직접적으로 위협 받는다. 그럼에도 조선군 또한 마땅히 뒤로 물러나라고 하면 아무리 세고무원의 군대일지라도 그것은 전쟁을 완전히 포기하는 것이다. 군사적으로 역사적으로, 그처럼 어리석고 무능한 결단은 있을 수 없다. 이에 류성룡은 절대로 보전할 수 없다는 ‘역불가보(亦不可保)’를 외친다. 그러나 이여송은 묵묵부답, 류성룡의 퇴병 불가론에 한 마디 대답도 않은 채 침묵했다. ⓹ 이여송의 반응과 수용 제독 이여송은 왜 묵묵부답이었을까. 그가 아무 결단도 내릴 수 없었던 것은, 군의 후퇴든 강화든, 그의 지위에서 결정할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단지 그의 지위에서 할 수 있는 조치는 자기 수하의 대들보 중 한 사람인 왕필적을 개성에 남겨두어 지키도록 한 것이다. 왕필적은 북방계인 이여송과 삼영장(이여백, 장세직, 양원)과는 달리, 절강성에서 온 남방계 3대 장군(낙상지 오유충과 더불어) 중의 한 사람이다. 왕필적은 1593년 12월 이여송이 본국으로 귀환한 후에도 그대로 남아서 유정, 오유충, 등과 더불어 1만 명을 거느리고 경주, 대구, 칠곡 등지에서 왜와 가장 용감히 싸운다. 왜와의 전투를 기피하고 강화 추진에 열을 올렸던 - 31 -

 

이여송이 왕필적으로 하여금 임진강 이남을 지키게 하고, 조선군 철수를 계속 독촉하지 않은 것은 류성룡의 퇴병 불가론을 자기 지위 수준과 한계 안에서 적절히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5) 기패참배를 거부하라 ⓵ 강화 반대에 사용되는 기패 명의 입장에서 조선은 그들의 속국이기는 하나 ‘국’자가 들어 있는 만큼, 종주국과의 국제관계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명과 조선 사이에는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인 국제관계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조선에 있어 명은 나라가 아니라 ‘하늘’이었다. 그래서 명 조정을 천조(天朝)라 불렀다. 명의 사신을 천사(天使)라 부르고, 명의 병사를 천병(天兵)이라 불렀다 감히 명조(明朝), 명사(明使), 명병(明兵)이라 부를 수 없었다. 땅위의 조선이 감히 함부로 부를 수 없는 이름이었다. 인조반정 이후의 숭명 사상은 더 기이하게 변한다. 당시 명과 조선의 기이하고도 기괴한 관계의 상징 중 하나가 황제의 기패였다. - 황제의 기패 : 황제가 내린 기(旗), 군중(軍中)에 명령을 전달하는 기구 - 현장의 최고 지휘관이 사용 - 이 기패에 대한 조선 조정의 의식은 놀라움 그 자체 - 기패를 보고 조선의 신하들은 반드시 머리를 숙이고 경례 - 기패를 내세워 강화를 반대하는 신하 징계 ⓶ 강화를 획책하는 기패를 묵인할 수 없다 명이 기패를 조선에 처음 내보인 것이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류성룡의 글에 가장 생생히 나타난 것은 용산에서 명, 왜가 한창 강화회담을 벌이고 있던 1593년 4월 10일이다. 이때 류성룡은 파주에서 권률과 다음 전투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그날 해가 저물 무렵 명의 유격장군 참장 주홍모와 기패관(기패를 앞세우고 오는 고급관원) 주조원이 300명의 병사와 군악대를 앞세우고 파주에 이르렀다. 류성룡이 종사관 유희서와 이귀 등을 대동하고 가는 곳을 물으니, 육격장군 주홍모가 ‘경성이며 왜 진영’이라 했다. - 32 -

 

 그러더니 기패가 이곳에 도착했으니 배신들은 마땅히 나와서 머리를 숙이고 예를 갖추어 경례하라고 명령했다. 류성룡이 기패에 머리를 숙이는 것은 감히 사양하고 피할 수 없지만, ‘이 기패는 왜 진영으로 가는 기패인데, 우리들이 어찌 머리를 숙일 수 있겠는가. 조선이 왜와 강화를 허락할 이유는 만에 하나도 없다. 그러니 기패라 해도 머리를 숙이고 명령을 받을 수 없다’며 기패참배를 거부했다. 주홍모는 화를 내며 기패참배를 계속 재촉했고, 류성룡은 끝내 거부했다. 물론 류성룡은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올지 알았지만 강화를 획책하고 추진하는 기패를 묵인할 수 없었다. 강화가 조선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패참배 거부가 가져오는 처벌이 아무리 크고 무겁다 해도, 오히려 작고 가볍다. 기패참배를 거부한 류성룡의 용기는 여기에서 나왔다 할 수 있다. ⓷ 조선의 대신이 감히 기패참배를 거부당한 주홍모가 그냥 넘어갈 리가 없다. ‘하찮은 조선의 대신이 감히…’하는 분노가 치솟았고, 그 분노는 앙심으로 바뀌어 그날로 이여송에게 보고되었다. 보고를 받은 이여송은 대로했고, 군율에 의해 죄를 다스리겠다며 류성룡을 제독 군영으로 불러들였다. 기패참배 거부 사건이 있은 지 1주일이 되는 1593. 4. 16일 이었다. 이여송은 불려온 류성룡을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빗속에 반나절이나 세워두었다. 해는 저물어가고 비는 계속 내렸다. 그것이 조산 대신들 중에서 가장 존경한다는 대신에 대한 대접이었다. 또 구원군으로 온 명이라는 나라가 구원 받는 조선을 어떻게 여기는지 보여주는 단편이다. 이여송이 화가 풀렸는지, 마음이 비감이 일어서인지, 한참 후에 나와서 류성룡을 마루로 올라오게 해서 예를 행하고, 기패참배 거부의 연유를 캐물었다. 류성룡은 “기패에 예를 그르친 일은 황공한 일이나, 오직 왜적과 강화하는 일만은, 우리에겐 너무 통절하고 뼈에 사무치는 일입니다. 그러니 왜와의 화친 명령만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고 했다. ⓸ 강화에 방해가 되면 왕도 갈아치우려 한 명 강화는 명의 기본 방침이었고 어떤 일이 있어도 강화해야겠다는 것이 명의 - 33 -

 

기본정책이었다. 그것을 방해하는 조선 관원이 있다면 위아래 가릴 것 없이 처단하겠다는 것이 명의 기본 태도였다. 나중에 강화를 성사시키기 위해 강화에 방해된다 해서 조선 왕(선조)도 갈아치우려 했다. 더구나 조선 정승 하나쯤이야 곤장 정도가 아니라 장살(杖殺)이라 해도 문제 삼을 그들이 아니었다. 왜와의 강화는 이여송 정도의 지위가 아니고, 그보다 훨씬 윗선에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이여송은 하수인에 불과했지만 최고위층인 병부시랑 석성, 경략 송응창 못지 않게 열렬한 강화 지지자였다. 왜와 더불어 화친하고 싶어 했고, 화친이 빨리 성사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만에 하나 화친을 막는 조그마한 기미만 보여도 펄펄 뛰었다. 그는 평소 존경한다던 재상도 강화를 위해서는 얼마든지 안면을 바꾸고 예도 도덕도 내팽개치곤 했다. 그런 연유로 류성룡이 선조에게 하소연 하듯 보고서를 올리고 있다. “제독과 아랫사람들이 이미 강화하기로 작정해서, 오로지 강화에만 주력하고 있습니다. 신(臣)의 방해 때문에 성사되지 못할까, 가는 곳마다 화를 냅니다. 명 장수들의 기상과 행동거지가 지난날과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런 명군과 일을 처리함이란 여간 어렵지 않고 그 어려움은 전에 비해 더욱 심해져갑니다. 3) 강화 내건 명군 횡포 명군이 조선군을 학대하고 무지막지하게 대하기 시작한 것은 1593년 4월 8일 왜와 용산에서 강화회담을 시작하고 나서부터였다. 그 회담 후, 명군은 조선군이 왜를 공격하기만 하면 장군이든 병졸이든 가리지 않고 잡아갔다. 적과 싸움을 기피해서가 아니라 적을 공격하면 반대로 처벌을 당하는 기이한 일이 명군과 조선군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 너희 나라가 무슨 힘이 있느냐 1593년 4월 20일, 왜는 한양에서 완전히 철수해서 남쪽으로 내려갔고, 그 뒤를 이어 명군이 한양에 들어왔다. 이때 류성룡도 명군과 함께 한양에 이르렀다. 한양에 들어온 이여송은 “지금 군사를 내어 왜군을 추격할 것이니 그대 나라의 군마도 함께 추격에 나서고, 한강을 건널 배를 급히 준비해 달라”고 류성룡에게 말했다. - 34 -

 

류성룡은 경기, 충청, 두 수사, 등 관군과 의병이 힘을 합쳐 명군 1만 5천과 함께 뒤를 쫓기로 했다. 그런데 강을 반 조금 지나던 명군이 갑자기 퇴각하기 시작했다. 류성룡이 따져 물으니 명군의 장수마다 대답이 달랐다. ‘제독이 돌아 오란다’, ‘발병이 나서 갈 수 없다’, ‘왜를 추격하지 말라는 명령이 있어 내 뜻대로 할 수 없다’는 등이었다. 그리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 1593. 4. 20일 밤, 명군 정찰병이 권율 장군을 잡아감 : 명을 어기고 강을 건너간 이유를 힐문 - 다음 날 순변사 이번의 선봉장 변양준을 쇠사슬로 묶어 땅바닥에 끌면서 중상을 입힘 - 방어사 고인백도 명군에 핍박을 당하는가 하면 심지어 류성룡의 군관 사평 이충도 왜병을 추격해 사살했다는 이유로 명군에 맞아 중상을 당하는 등 그 사례는 부지기수임 도대체 명군이 아군인지 적군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왜의 추격을 막았고, 뒤처진 왜의 잔병이나 부상병들의 사살을 막았다. 그들의 목적은 오직 왜와의 강화에 있었고, 그 강화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조선군에 갖은 횡포를 가했다. 명군 앞에 조선군은 군이 아니었다. 조선군의 장교도 왜와의 강화에 방해가 된다 싶으면 그들 마음대로 목에다 쇠사슬을 걸고 중상을 입혔다. 엄청난 위압으로 논죄하고, 조선의 장수나 병졸을 가리지 않고 협박했다. 명군의 이런 횡포로 조선군은 왜와 싸울 의지를 잃고 군량마져 떨어져 군사들이 뿔뿔이 흩어져 버렸다. (3) 통곡 말고 달리 할 것이 없나이다 드디어 류성룡도 병을 얻어 운신을 할 수 없게 된다. 그가 앓아눕기 하루 전에 선조에게 올린 글이다. 병을 앓으면서 올린 이 글을 보면 힘없는 조선이 ‘통곡’말고 달리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경략 송응창 등 명군 지휘부에서 강화계책을 정한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이제 그 계책을 말로 서로 다투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명군이 나아가지 않는 것은 차치하고 우리 군사까지 곳곳에서 막아 나아가지 못하게 하니 그 - 35 -

 

원통하고 분통함이 하늘에까지 찹니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적을 토벌하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오직 통곡하고 통곡해서 눈물만 헛되이 흘릴 뿐입니다. 신(臣)은 기혈을 오랫동안 손상시켜, 지난 4월 24일부터 병을 얻었습니다. 증세가 위중해서, 20여 일 동안이나 정신을 잃어 의식을 차리지 못했습니다. (중략) 바라옵건대 조정에서는 조속히 다른 사람을 임명하여 신이하던 임무를 맡아 처리하게 하소서.” Ⅲ. 명, 왜 조선을 나누려 하다 1. 임진왜란은 조선분할전쟁 임진왜란은 왜와 명에겐 ‘조선분할전쟁’ 이었다. 조선 영토를 반으로 갈라 명에 할지(割地)하려 했고, 명은 조선의 북쪽 영토라도 사수해 왜로부터 명을 지키는 울타리로 삼으려 했다. 명과 왜의 조선 분할 시도는 전쟁으로 시작해 협상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끝을 맺었다. 명,왜간 조선분할협상은 수면 아래에서 이루어졌고, 조선 조정은 그 과정에 철저히 배제됐으며 겉으로는 명 조정도 모르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니 명 조정은 모르고 명군 지휘부만 알고 그것도 심유경이 명, 왜 진영을 오가며 협상 내용을 조작했다는 그간의 기록이나 주장들은 사실이 아니다. 심유경이 협상 내용을 상당 정도 거짓으로 포장했다는 것은 사실일지라도, 조선분할을 상부의 지시도 없이 ‘자기 마음대로’ 협상테이블에 올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한양에 집결한 왜의 대군이 명군의 위협이 전혀 없음에도 순순히 한양을 비워주고 남쪽으로 철수한 것, 거기에 조선군이 왜의 후군과 잔병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명군이 끈질기게 막아준 것, 이 모두가 ‘조선분할’의 이면을 알려주는 산물임에 틀림없다. 2. 왜, ‘조선 4도를 내놓아라’ 1) 히데요시의 오랜 계획 : 조선분할 - 36 -

 

 159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에 사신을 보내 조선 8도 중 남쪽 4도를 주면 전쟁을 그치겠다며 조선분할을 요구한다. 이 요구의 이면을 살피려면 히데요시가 왜 조선을 침략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그에 대한 설(說)은 분분하고, 아직도 의견이 일치된 정설은 없다. 설들은 대체적으로 세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히데요시의 공명심과 정복욕이고, 또 하나는 그의 부하들에게 나눠줄 영토의 필요성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 국내에 계속 증강돼온 강력한 무력들을 해외에 방출해서 신흥 세력의 성장을 억제한다는 것이다. 앞의 두 가지는 상당한 근거를 갖지만, 세 번째 설은 수긍하기 어려운 면이 많다. 만일 신흥 세력의 성장을 억제해서 일본 내 통일의 안전을 강화하려 했다면, 그와 경쟁 관계에 있던 여러 세력들, 그 중에서도 가장 강했던 도쿠가와 군을 출전시켜야 했다. 하지만 히데요시는 자기 세력을 내보냈고, 조선 정벌 7년 동안 도쿠가와는 히데요시에 맞서고도 남는 세력을 키웠다. 훗날 결국 그 증강된 힘에 의해 히데요시는 물론 그 부하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가토 기요마사처럼 배신해서 도쿠가와 편에 선 사람을 제외하고……. 그렇다면 히데요시의 침략 이유는 그의 공명심과 정복욕, 그리고 조선할지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명, 왜 1· 2차 회담 심유경이 고니시 유키나가와 벌인 강복산 회담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는 강화 7개조를 내놓았고, 이를 심유경이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이를 명대의 사료를 전문적으로 분석해서 발표한 중국 임진왜란 전문사가 이광도가 밝힌 내용으로 보면 1. 화친 2. 할지 3. 조선 4도를 일본 영토에 속하게 하고 대동강으로 경계를 삼는다. 4. 무역은 종전의 공선(貢船)으로 한다. 라고 되어 있다. 5조 이하는 비밀이라 전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회담의 핵심은 역시 조선분할이다. 여기서 ‘평양미스터리’가 풀린다. ‘정명가도’가 왜의 조선침략의 원뜻이었다면, 명으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이 완전히 열렸을 때 왜는 명으로 나아가야 했다. 하지만 거꾸로 왜는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것을 기회로 강화회담을 벌였다. 이는 애당초의 목적이 조선 분할에 있었음을 분명히 말해준다. 이러한 명, 왜의 ‘조선분할’ 회담이 1차로 열린 평양 강복산 회담에 이어, 다음해 2월 한양 용산 회담으로 이어지고, 왜는 4월 20일 한양에서 완전히 - 37 -

 

철수한다. 철수하는 왜의 뒤를 추격하려는 류성룡의 조선군 동원계획은 명군에 의해 철저히 저지되고, 조선군의 전투 행위 역시 철저히 금지된다. 6월 28일 일본 규슈 나고야에서 있었던 3차 회담은 2차 회담의 연속이고 조선분할과 왜의 한양 철퇴와 명의 평양철수로 이어진다. 3) 히데요시 강화 7개조 3차 회담은 명의 사용재와 심유경, 그리고 왜의 이시다 미츠나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나고야에서 히데요시를 만나고 히데요시는 그 자리에서 가혹한 ‘강화 7개조’를 내세운다. 그 바로 직전인 1593. 6. 19일 왜는 진주성의 공격과 함락 그리고 가장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인 살육전과 약탈을 벌이고 명군은 이를 방관한다. 협상의 유리한 고지 점령을 위해 흔히 있는 기싸움을 벌였다 하기엔 그 결과가 너무나 처참했다. 히데요시의 강화 7개조는 다음과 같다. ⓵ 대명 황제의 현숙한 여(女)를 일본의 후비로 삼는다. ⓶ 감합무역을 복구하며 관선(官船)과 상선(商船)의 왕래가 있어야 한다. ⓷ 대명과 일본의 대신들이 화의를 위해 서로 서약서를 교환한다. ⓸ 조선의 반대를 돌보지 않고 조선 8도를 나누고, 그 중 4도와 수도는 조 선 국왕에게 돌려준다. ⓹ 4도를 돌려주는 대신 조선 왕자와 대신 한두 명을 볼모로 보내야 한다. ⓺ 지난해 생포한 조선의 두 왕자를 돌려보낸다. ⓻ 조선의 대신이 영원히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서약문을 쓴다. 4) ‘강화 7개조’의 두 가지 해석 첫째, 대명 황제의 현숙한 여(女)를 후비로 삼는다는 조항 : 황가의 여자이면 누구나 가능하고 얘부터 중국이 이민족과의 평화를 위해 써 오던 방식 둘째, 감합 무역 : 전통적으로 중국은 주변국으로부터 공물을 받고 그 대가로 회사품(回賜品)을 내리는 형식의 무역으로 주변국이 모두 이익을 보는 무역이었음 셋째, 양국 대신들이 서약서 교환이나 왕자와 대신의 볼모는 다른 모든 지역해서 강화협상 때 행해지던 관례 문제는 네 번째의 ‘조선분할’ 조항이다. - 38 -

 

 ‘조선할지’를 명과 협의하고 명에 그 ‘할지’를 요구하는 것은 조선은 독립국이 아니라 명의 속국이기 때문이고, 따라서 조선의 반대를 돌아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조선으로서는 땅을 칠 노릇이지만, 히데요시 입장에서는 어차피 조선은 독립국이 아닌 명의 종속된 나라이므로, 그 조선의 반은 군사강국인 왜가 가질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다. 5) 강화 과정의 미스터리 ‘강화 7개조’는 명 조정에 보고될 때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위조된다. 소위 말하는 위상표문이라는 것으로 히데요시가 내 놓은 7개 조항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오직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것만 담긴 가짜 국서가 명 조정에 상신된 것이다. 이 가짜 국서는 순전히 고니시 유키나가와 심유경이 짜고 히데요시를 속여 만든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이시다 미츠나리는 제외된 것 같다. 그리고 이 가짜 국서를 유키나가의 심복인 나이토 조안을 히데요시의 강화사로 내세워 그해(1593) 12월 7일 북경에 파견했다. 명 조정에서도 이 가짜 국서를 그대로 믿고, 히데요시를 ‘일본 국왕에 봉한다’는 결정과 함께 명의 책봉사를 일본에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이종성을 정사, 양방형을 부사로, 심유경으로 하여금 이들을 수행토록 했다. - 명의 책봉사가 북경을 떠난 것은 그보다 1년 2개월이 지난 1595년 1월 3일이고 책봉사가 부산에 도착한 것은 1595년 11월 22일이니 2개월이면 될 길을 10개월이걸렸다. - 일본을 건너기 직전 정사 이종성이 야반도주함, 그래서 양방현을 정사, 심유경을 부사로 일본에 건너가 히데요시를 만난 것은 1596년 9월 2일, 부산 도착 9개월 이후였다. 1596년 9월 2일. 오사카 성에서 히데요시와 회견한 명의 책봉사는 ‘봉왕(封王)의 금인(金印)’과 함께 명 황제의 칙서를 히데요시 앞에 내 놓는다. 그 칙서에는 ‘너를 특별히 국왕으로 봉한다’라는 구절 외에는 히데요시의 요구 조건이 완전히 무시된 것이다. 히데요시는 사건의 진상을 곧 알았고, 명, 왜간에 벌여온 4년 여의 협상은 완전히 결렬되고 만다. 교섭 결렬 이후 명의 책봉사들이 귀환하는 데 5개월 등, 4년 여의 교섭 기간 중 회담 시간은 극히 짧았고, 긴 시간을 모두 길에서 보낸 것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다. - 39 -

 

 더 큰 미스터리는 히데요시와 강화 협상이 결렬된 후, 이듬해 1597년 2월 16일 북경으로 돌아온 명 책봉사들이 결렬 진상을 거짓으로 보고하는 것이다. ‘수길(秀吉)이 책봉을 받고 사은하였다’는 사은 표문을 위조해서 조정에 상신하고, 심지어 ‘일본 국왕 풍신수길 상증부물’이라고 쓴 공물까지 바쳤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그들은 사기외교를 하고 허위보고를 했을까. 히데요시가 조선 4도의 분할을 목적으로 14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다시 쳐들어 온(정유재란) 것은 허위 보고서가 명 조정에 올려진 바로 직후인 1597년 2월 21일이었다. 명 책봉사들이 돌아온 지 5일 후이고, 허위보고서를 올린지는 아마 하루나 이틀 정도 경과했을 것이다. 또 하나의 미스터리는 허위 보고서를 낸 정사 양방형은 파직 정도로 벌이 가볍고, 4년 동안 교섭을 이끌어 온 병부상서 석성과 심유경도 왜의 재침이 있고난 5개월 후에야 투옥되거나 참수되는 것이다. 객관적으로 엄청난 기만사건임에도 어떻게 벌책이 그렇게 가볍고, 시일을 끌 수 있었을까. 6) ‘허위보고’ 미스터리가 조선 분할을 막다 그 미스터리를 다시 요약하면 첫째, 4년 이라는 ‘ 협상 시간’ 그것도 협상 테이블이 아닌 ‘길거리’에서... 덕분에 히데요시가 죽도록 시간을 벌어주었다. 둘째, 심유경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일본이 바라는 것은 오직 ‘봉공’만이라는 가짜 협약문을 명 조정에 내 놓음으로써 명 조정은 조선 분할을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조선의 의지와 관계없이 만들어진 그 많은 미스터리들이 모두 적기에 때맞춰 일어나 주었기에 오늘날 우리의 역사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의 우연인가, 필연인가. 류성룡이 자주 말하는 ‘재조지은(再造之恩, 나라를 다시 일으키는 은혜)’은 시간 자체의 미스터리라 할 것이다. 3. 조선을 쪼개고 임금을 바꾸겠다. 1) 명의 또 다른 계획 : 조선분할역치 명, 왜가 ‘조선분할’을 두고 한창 협상을 진행할 즈음, 명은 다른 한편으로 ‘조선직할통치’를 획책하고 있었다. 조선분할 보다는 조금 뒤에 나오는 이 - 40 -

 

 ‘조선직할통치’ 논의는 조선의 입장에선 분할 못지않게 위협적이고, 섬뜩한 것이다. 명이 조선에 관원을 파견해서 직접적으로 조선을 다스리겠다는 계획인데, ‘나라를 쪼개고 임금을 바꾸겠다’는 ‘분할 역치론’보다는 6개월 후에 나와서 전쟁이 끝까지 재기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도 명군이 1600년까지 2년이나 더 조선에 주둔한 것도 실은 이 ‘직할역치론’의 연장이라할 수 있다. 우선 먼저 나온 ‘분할역치론’은 ‘실록’보다 ‘징비록’에 더 자세히 나온다. 아무리 패권국이고 종주국이라 해도, 지금까지 종속국에 대해 행해오던 내정불간섭주의와 독립국 대우를 하루아침에 파기시키는, 그 같은 패권행태를 중국 또한 해 본 일이 없다. 조선 또한 별안간 나라 모양이 완전히 달라지는 기이한 사변을 그 기나긴 역사에서 경험해본 일이 없다. 2) 명의 패권행태 ‘분할역치’는 명의 급사중 위학증이 황제에게 올리는 글에서 시작된다. 급사중이란 벼슬은 6부를 감찰하는 직위로 영향력이 대단히 높은 직위인데 훗날 위학증은 호부상서(재무상)에까지 오른다. 이런 사람이 황제에게 울리는 글에 조선을 비방하는데 그 정도가 지나치다할 정도로 심했다. ‘조선이 왜적을 막지 못해서 벌써부터 명에 근심을 끼치고 있습니다. 그러니 마땅히 조선을 나누어서 2~3개 지역으로 만들고, 왜적을 능히 막아낼 수 있는 사람에게 이를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조치하에 조선을 명의 울타리가 되게 해야 합니다.’ 3) 분할역치의 전말 사실의 전말을 보다 자세히 살펴보면 선조 26년(1593) 10월 선조는 의주에서 한양으로 환궁한다. 전해 4월 말에 떠나서 1년 반 만에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환궁하게 훨씬 전 ‘분할역치’의 시행 여부를 결정하는 사신 사헌을 맞는다. 첫 번째 문제는 이 사헌의 행동이다.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들어 잇지 않지만 ‘선조실록’에는 나와 있는 사신 사헌의 행동은, 조선의 국가로서의 ‘비애’와 명의 상국으로서의 ‘전횡’이 가장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한 장면이다. 거기에는 외교도 없고 예의도 없고, 있다면 종주국의 거만과 무례, 멸시와 위압만 횡행할 뿐이었다. 아무리 속국이라도 임금이 있고, 신하와 정승과 판서가 있다. 나라가 그 같은 지위체계로 짜여져 있다면, 상호 존중해야 할 - 41 -

 

체면이 있고, 지위 가진 사람에게 부여해야 할 위신이 있다. 나라간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필수불가결하며 누구도 무너뜨릴 수 없고 무너뜨려서도 안 된다. 그러나 사헌은 그 모든 것을 무시했다. 그는 선조를 만났을 때, 사헌이 북쪽에 앉아 남면하고, 선조는 남쪽에 앉아 북면하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이는 마치 임금이 신하를 접견하는 듯 했다. 그리고 칙서를 선포했다. 이 칙서 내용을 몇 줄 살피면 ‘주색에 빠지지 말 것이며, 놀음에 미치지 말 것이며, 한쪽 말만 편협하게 듣지 말 것이며, 좋아하는 사람에게만 홀로 일을 맡기지 말라, 이제 짐에게는 임금을 구해줄 책임이 없노라, 존망과 치란의 기틀이 임금에게 있고, 짐에게는 있지 아니 하니, 경계하고 삼갈지어다’. 칙서의 글발 그대로 조선 왕을 꾸짖음이 너무 준엄하고 단호했다. 선포하는 사헌 역시 고집스러울 정도로 여유가 없고 드세었다. 4. 목숨을 건 류성룡의 독립주의 칙서 선포기 끝나고, 사신 사헌으로부터 칙사를 받아든 선조는 그날 저녁 류성룡을 대궐로 불렀다. 그리고 체념하듯 말했다. “이런 일이 있을 것임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일찍 자리를 물러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내일 사신을 보고 선위(禪位) 하려고 한다. 경을 만나는 것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비록 밤이 깊었으나 경과 대면하고 나서 결별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렇게 불렀다." 그러고는 내시에게 술을 가져오게 해 권하면서 다짐하듯 다시 말했다. “이 술로 경과 영결한다. 내일 나는 곧바로 사신 앞에 왕위를 내놓는다. 오직 그것만이 내가 할 일이다.” 선조가 이렇게 나오리라는 것은 류성룡은 알고 있었다. 선조로서는 벌써 두 번째 일이다. 첫 번째는 이보다 앞서 있었던 위학증의 ‘분할역치’를 명 조정의 의견이라 해서 송응창이 윤근수에게 전할 때였다. 그때도 선조는 윤근수가 가져온 위학증의 주본을 류성룡에게 내보이며 말했다. “내가 오래 전부터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임금 자리에서 물러나려고 했는데, 지금 과연 그렇게 되었다.” 분할역치의 시발인 위학증의 주본에 대한 류성룡의 대답은 단호했다. 당황하거나 흔들리거나 걱정 혹은 두려운 빛이 전혀 없었다. 짧으면서 분명히 그 - 42 -

 

리고 일언지하에 마무리 짓듯 말했다. 그리고 주본에 동요되어 왕위를 내놓겠다는 선조의 마음을 되돌리고 진정시켰다. “이것은 이치에 닿지 않는 망령된 소리입니다. 명 조정이 어찌 그런 망녕된 사설에 흔들리겠습니까. 원컨대 의혹되지 마시고, 당연히 우리가 해야 할 일에만 힘씁시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사헌이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왔다. 위학증 주본과 비교되지 않는 칙서의 위력이 선조의 양위를 천근의 무게로 압박해 왔다. 선조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 그러나 류성룡는 달랐다. 그에게 ‘그에게 나라를 나누겠다(분할)’, ‘임금을 바꾸겠다(역치)’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망설이자 망론일 뿐이었다. 조선은 명이 종주국이라 해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은 임진왜란 초기에서부터 그의 의지에 명백히 드러나 있었다. 위학증의 주본이 나왔을 때 선조 앞에 ‘이것은 당치도 않은 망념 같은 소리’라고 잘라 말했듯, 이번의 칙서 또한 속국에 대한 내정불간섭의 경계를 넘어선 망념이라는 치열한 부정성이 그의 내부로부터 치솟아 올랐다. 그것만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렬한 독립의지가 평소 격정을 모르는 그의 폐부를 깊숙이 찌르며 발동했다 할 수 있다. “원컨대 성상께서는 결코 뜻을 요동하지 마십시오. 내일 사신 앞에서 절대로 양위한다는 말을 해서는 아니 됩니다. 신이 감히 죽기를 각오하고 청하옵니다.” 류성룡으로서는 지금 후퇴하면 조선의 독립은 없어진다. 조선이라는 나라도 없어지고 ‘조선 백성’이라는 이름도 사라진다. 땅도 마음대로 가르고. 임금도 마음대로 바꾼다면 조선에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남는 것이 없다면 지금 왜와 싸우는 이유는 무엇이며, 그들의 침략을 그토록 불공대천지 원수로 생각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왜가 앞 뒤 아무런 생각도 없이 함부로 잘난 체하듯이 이웃나라에 대한 예우가 없다면 명 또한 왜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류성룡의 이 같은 내정불간섭의, 속국이지만 독립주의 고수는 그로부터 2세대 후 들어서는 효종~숙종 때의 송시열 정권의 경직된 숭명사상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 - 43 -

 

 5. 유능제강의 리더십으로 조선분할을 막다 1) 류성룡과 유격장군 척금의 필담 그러나 다음 날 선조는 류성룡의 만류를 뿌리치고 기어히 사헌에게 양위서를 제출한다. 선조 스스로 쓴 서첩을 소매 속에서 꺼내어 명 사신에게 직접 전했다. 임금을 바꾸겠다는 명의 역치 시도는 선조가 손수 쓴 양위서를 사신 사헌에게 내놓음으로써 일단 매듭을 짓는 듯했다. 당시 경략 송응창, 제독 이여송 등 초기 지휘부는 모두 본국으로 돌아갔고, 유격장군 척금이 명군의 대표 겸 지휘관으로 있었다. 선조가 명 사신에게 양위하겠다고 쓴 글을 내놓던 바로 그날 저녁, 류성룡은 척금이 임시로 기거하는 우사에서 그와 대좌했다. 좌우에 있는 사람은 물론 통역관마저 물러가게 하고는, 가운데 탁자를 놓고, 그 위에 초 두 자루와 종이, 붓, 벼루를 놓았다. 척금이 붓을 들어 썼다. ‘국왕은 마땅히 전위를 빨리 해야 한다.’ 류성룡이 정색을 하고 붓을 들어, ‘조선 신하로서는 차마 들을 수 없는 일이다. 그대도 만 권의 책을 읽었을 터이다. 어찌 고금의 일을 듣지 못하였는가. 지금 조선은 지극히 위태로운 상태에 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함에 있어 전위 때문에 군신 간, 부자 간 잘못이라도 생긴다면, 이야말로 재앙을 가중시키는 것이다’고 썼다. 글을 읽고 난 척금은 눈을 똑바로 뜨고 오랫동안 류성룡을 응시했다. 그리고는 붓을 들어 류성룡에게 쓴 글 밑에 ‘시시(是是 시시(是是)’를 연속해 썼다. ‘옳다 是, 옳습니다 是, 옳은 말입니다 是, 옳은 생각입니다 是.’ 시(是)를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해 쓴 것은 마침내 자기가 승복하고 동의한다는 적극적인 의사표시이다 역시 척금은 무장이었다. 군소리 없이 간단명료했다. 그는 필담을 나는 종이를 모두 모아 불태우고는 다시는 말이 없었다. 2) 류성룡, 유능제강의 정치력을 발휘하다 문제는 선조의 무저항적 전위 수용이나 고집이 아니라, 사신 사헌이었다. 척금을 설득해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해도, ‘임금을 기어이 바꾸겠다’는 역치의 열쇠는 사헌이 쥐고 있었다. 사헌의 마음을 돌리려는 류성룡의 생각과 그다음 행동은 참으로 기민했다. - 44 -

 

이튿날 류성룡은 재빨리 높고 낮은 조정의 신하들을 모두 모았다. 무엇보다 조정의 일치된 의견과 모습을 사헌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아무리 황제의 칙사라도 조선의 신하가 모두 모여 명 사신을 맞는 건 과한 예우였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난국을 돌파할 길이 없었다. 양위를 막을 수 있는 한, 비상시의 비상수단은 불가피한 것이다. 류성룡은 백관을 인솔하고 사헌 앞에 섰다. 그리고 조선이 오늘날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설파했다. 왜의 전쟁 목적이 정명가도 였다는 것, 조선은 그 길을 순순히 내주지 않았고 명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켰다는 것, 그리고 우리 임금은 지성으로 명을 섬겨 왔다는 것 등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날 밤 명나라 장수 척금은 류성룡에게 ‘사신 사헌의 뜻이 완전히 바뀌었다며 이제 국왕은 염려하지 않아도 돤다’고 했다. 그리고 사헌은 7일 만에 조선을 떠났다. 다행히 류성룡의 빠르고 정확한 판단력과 두려움 없는 강한 결단력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여기서 물러나면 조선은 언제든 명의 자의대로 벼랑끝으로 몰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 명의 무리한 요구에 호락호락 굽힐 수 없다는 강인한 자아의지, 그 의식과 의지가 바로 조선을 조선으로 실재하게 했다. 그 ‘위기의 7일’은 임진왜란 7년의 전쟁기간 중에서도 정점이었고, 류성룡자신의 오랜 정치 생애에서도 극점이었다. 그 정점과 극점에서 그는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운 것이 능히 굳센 것을 이김)의 정치력을 최고의 정치리더(영상)로서 손색없이 발휘했다.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지극히 군센 것을 꺾을 수 있음은 절제되고 정제된 품격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 품격이 높은 감화력으로 표출되어, 오만하기 그지없는 사신 사헌의 마음을 돌려놓았던 것이다. 3) 왜적이 얼레빗이라면 명군은 참빗 사헌은 조선을 떠나기 직전 직접 선조와 류성룡에게 한 마디씩 남겼다. 선조에게는 류성룡에 대해 “류성룡의 남다른 충성심과 독실한 인의(仁義)는 중국의 문무백관과 장수들이 모두 기뻐해서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왕은 참으로 현명한 재상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류성룡에게 말했다. - 45 -

 

 “조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왜적이 해를 끼친 것은 얼레빗과 같고, 명나라 군사가 해를 끼친 것은 참빗과 같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명군은 참빗에 비유한 것은 명군이 조선에 입힌 피해가 그만큼 지독했음을 말한다. 류성룡의 ‘진사록’이나 ‘군문등록’등 다른 기록에서도 침략군인 왜병이 오면 오히려 조선 백성이 모이고, 구원군인 명군이 오면 조선 백성들이 모두 달아난다는 소리가 여러 곳에 나온다. 사헌의 ‘얼레빗과 참빗’에 대해 류성룡은 완곡한 비유로 대답한다. “옛말에 이르기를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는 가시나무가 자란다’, 즉 형극생(荊棘生)이라고 했습니다. 어찌 작은 소란과 침해가 하나도 없을 수가 있겠습니까.” 형극생이란 노자에 나오는 유명한 구절로, 군대가 주둔하는 곳은 어디나 토지가 척박하고 황폐해져서 가시나무 외에는 어떤 나무도 자라지 못한다는 데서 온 말이다. 2014. 7. 24 * 다음에 제4부 ‘끝내 자강하지 못했다’가 이어집니다. - 46 -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3)

 

■ 송복 지음 제4부 끝내 자강하지 못했다. Ⅰ. 또 하나의 싸움, 명의 조선 직할 통치 압박 ‘분할역치’로 정국이 한동안 혼돈상태로 치달았다. 진정되기가 무섭게 ‘조선직할통치론’이 대두 되었다. 물론 명 조정에서 제기한 조선직할은 분할역치처럼 조선 국왕의 무능과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이 직할통치는 앞서의 분할역치 중 분할통치의 다른 한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역치(易置)’허러 왔던 사신 사헌이 그냥 돌아가기는 했지만, 조선으로서는 ‘역치’보다 더 심각하고 거센 압력을 훗날 다시 맞게 된 것이다. 1. 왜 직할통치인가 ‘조선직할통치론’은 명이 조선에 명 관원을 직접 파견해서 직접 통치한다는 것이다. 그 배경은 2개의 복합적 요인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하나는 명이 조선에서 왜와 싸운 이래 내내 고심해온 엄청난 경비부담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부담을 줄이지 못한 책임을 조선 국왕의 부족한 통치력과 실덕으로 전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급한 것은 책임전가보다 군사적, 재정적 부담을 줄이는 것이었고, 이 차원에서 왜와 강화를 주창하는 사람이나 반대하는 사람이나 의견이 일치했다. 양쪽 진영에서 일치된 만큼 조선에 대한 직할통치의 압력도 앞서의 분할 역치보다 훨씬 강하게 작용했다. 직할통치론이 처음 제기된 것은 역치의 임무를 띠고 왔던 사헌이 돌아간 바로 다음해인 1954년 6월이었고, 처음 제기한 사람은 강화반대론자인 요계 총독 손광이었다. - 1 -

 

이를 제의한 손광의 벼슬은 병부시랑, 국방차관급이지만, 요계 총독이라는 자리는 병부상서, 즉 국방장관을 맡을 만큼 중요한 지역의 군무를 총괄하는 영향력 높은 직위였다. 그는 3년 후에도 똑 같은 주장을 펴서 조선이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고 맹비난을 퍼부었다. 그러고 난 뒤 수당(隋唐)시대의 조선, 명 초기의 강한 군사력을 가졌던 시대의 조선을 상기시키면서 통치력을 갖고 근본적인 조치만 취하면 왜와 얼마든지 겨룰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은근히 시사했다. 이런 직할통치론은 1594년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제기되었고, 특히 정유재란이 일어난 이후로는 거론되는 횟수가 그 어느 때보다 잦았다. 이 같은 제의가 그치지 않고 계속 되는 이유는 모든 위기들이 중첩됨에서 였다. 전쟁은 점점 더 거세어지는데, 명의 안위를 위해서 조선을 포기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날로 증가하는 전쟁경비를 계속 감당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으며, 거기에다 이순신을 모함해 감옥에 가두면서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대패하고(1597. 8), 명의 장수 양원이 지키던 남원마저도 왜에 함락되면서 보루 전라도가 완전히 위태로운 상태에 이르렀다. 특히 조선 수군의 칠천량 전투 패전 이후 조선 국왕에 대한 신뢰가 급격히 떨어지면서, 조선을 좀 더 확실하게 장악해서 전쟁에 대비하자는 주장이 전쟁을 맡은 명 관료들 사이에 팽배했고, 그것이 계속 직할통치론을 부추기고 제기시켰던 것이다. 2. 직할통치를 두둔하는 선조 직할통치론은 오늘날로 말하면 ‘식민지 통치’나 대동소이한 것이다. 일제 식민지와 차이가 난다면, 인사권, 조세권 등 정부의 기본 기능은 다 내 놓으면서 오직 왕권만 명맥을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1) 류성룡의 자강론을 반박하는 선조 선조가 직할통치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자, 류성룡은 고려 때의 원나라 사례를 들어 강하게 설득했으나, 선조의 명에 대한 의존심은 날로 늘어났다. 선조의 이런 태도는 류성룡의 명에 대한 독립 자강과 번번이 어긋났다. 류성룡이 명군에 의지하기보다는 힘을 다하여 우리 군을 기르고 훈련해서 동 - 2 -

 

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면, 선조는 으레 반박하고 나섰다. 이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들이 ‘선조실록’의 곳곳에서 헤일 수 없이 나온다. 선조가 처음부터 믿고 의지한 쪽은 조선 백성과 조선군이 아니라, 명이며 명군이었다. ‘불측지인(不測之人)’이라는 말처럼 선조는 조선 백성을 다분히 ‘불측한 사람들’로 보았고, 조선군을 명군이나 왜군에 비해 형편없고 무능력한 존재로 여겼다. 그의 이런 생각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가 무섭게 너무나 당연히 스스로 명에 귀부하겠다는 뜻을 드러내게 했고, 류성룡이 ‘절대 안 된다’고 하자 ‘그럼 내가 갈 곳을 일러주면 요동으로 가지 않겠다’며 명으로 갈 것을 고집 했다. 2) 선조의 철저한 명 의존심 선조의 명 조정과 명군에 대한 철저한 의존심과 태도, 더 나아가 명의 직할통치조차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반응은 첫째로는 조선군에 대한 불신이고, 둘째로는 보선 백성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듬해(1593)부터 명, 왜의 강화협상이 물밑으로 전개되면서 명군 지휘부가 왜와 전쟁을 회피함은 물론 조선군의 작전권까지 장악하고, 조선군의 왜 공격을 전면 저지시켰을 때, 류성룡이 불가하다며 조선군의 독자적 행동을 주장하고 제의하자 명군 지휘부보다 선조가 먼저 더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왔다. 선조의 이런 대명의식과 의존심은 국권보다 왕권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데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고, 그런 의식 그런 심리가 왕권만 지킬 수 있다면 나라의 주권을 포기하는 직할통치는 얼마든지 맏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하게 했음에 틀림없다. 이는 왕자 임해군이 왜의 포로가 되어 있을 때 자기만 풀어준다면 “한강 이남의 땅은 어느 지역을 불문하고 마음대로 내어줄 수 있다”고 한 것이나 같다. 3. 무소부지 막강 권력의 조선 총책 양호 조선직할통치는 명 조정의 논의에만 그치고 실현되지는 않았지만, 실제 시행된 것이나 다름없이, 아니 그 이상으로 명군 지휘부의 조선 내정간섭은 심했다. 특히 정유재란 이후 관여의 폭은 임진왜란 초기와는 비교되지 않게 확대되고 횡포했다. 왕은 지위만 보전할 뿐 실권은 거의 없는 상태였고, 신하 - 3 -

 

 들은 이름만 배신(속국왕의 신하)일 뿐, 실상은 명군 지휘부의 눈치를 살피며 명령을 기다려야 했다. 제도나 기구의 이름만 달랐지, 실제로는 직할통치 그 자체였다. 병권도 주요 행정권도 모두 명에 있었다. 1596년도 거의 끝나갈 무렵 명, 왜 간의 오랜 강화협상이 깨지고, 그 이듬해 2월 왜가 다시 쳐들어오면서(정유재란) 명 또한 병부상서 형개를 총독으로, 요동 포정사 양호를 경리로 마귀를 제독으로, 그리고 양원, 유정, 동일원을 장수로 해서 다시 군대를 이끌고 조선으로 출정했다. 1) 양호의 병권장악과 조선군 조선 총책이 되는 경리 양호의 권력은 과거 조선 총책 경략 송응창의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었다. 그는 항양으로 부임하기가 무섭게 경리아문을 설치하고, 조선군의 병권부터 장악했다. 그리고 국왕 선조와 대등한 위치에서 조선 신하를 접견했다. 그게 아니라도 선조는 그 전부터 명군 지휘관을 접견할 때마다 경략, 제독 등 최고위급을 말할 것도 없고, 소소한 중간 지휘관들에게까지 먼저 절을 했다는 기록이 실록에는 헤일 수 없이 많이 나온다. 일국의 왕이 그러했으니, 그 왕의 신하들을 대하는 명의 태도는 또 어떠했겠는가. 우선 양호의 조선군 병권 장악으로 조선군은 독자적인 작전권을 펼 수가 없었다. 작전권이 없는 상황에선 적절한 때 적절한 장소에서 조선군 단독으로 왜를 충분히 공략할 수 있음에도 공략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생판 알지도 못하는 명군 지휘관의 명령을 따라야 함으로써 전쟁 기간 내내 명군과 엄청난 차별을 겪으며, 학대받고 매맞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거기에다가 조선군이 무슨 공이라도 세우면, 어느 새 명군이 가로챘다. 공이라야 큰 공도 아니고, 유격전이나 작은 전투를 통해 왜의 수급을 몇 개 베는 정도의 공임에도, 으레 명군은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반대로 전투에 질 경우, 명군이 지휘하고도 패전의 책임을 열에 여덟아홉 조선군에게로 돌렸다. 2) 이순신 묶는 양호 병권 이순신도 명군 제독 진린의 통제와 견제를 받아야 했다. 왜를 이순신의 전 - 4 -

 

 략대로 몰아가기도, 전술대로 공격하기도 어렵게 했다. 병권을 쥔 양호가 수군 지휘권을 명군 제독에게 넘기면서, 제독 진린이 이순신 위로 군림했고, 양호와 다름없이 행세했다. 진린이 이순신을 제어한 것이 아니라 명군에게 장악된 병권이 이순신을 묶고 있었던 것이다. 선조는 그 병권을 황송해 하면서 양호에게 넘겼고, 양호는 무소부지(無所不至)로 잡고 휘둘렀다. 3) 선조에게 명령하는 양호 양호의 전횡은 병권의 범위를 넘어 조선 국정에까지 미쳤다. 세자 광해군도 예외일 수 없이 양호의 명령에 따르고, 그의 지시를 받아야 했다. 양호가 국왕을 제치고, 혹은 국왕 위에 서서 세자에게까지 명령을 내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쨌든 세자 광해군은 양호의 명령을 거역할 수 없었고, 결국 최전선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나가야 했다. 국왕 선조라고 다를 것은 없었다. 세자가 남쪽을 내려가던 무렵, 양호는 선조에게도 말했다. “내가 크게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토벌하려고 하니 국왕도 마땅히 함께 가셔야겠소.” 기록에는 양호가 선조에게 ‘같이 가자고 청했다’고 되어 있지만 실은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선조가 양호의 청에 따라 직접 말에 올라 양호와 같이 성 밖으로 나가 부교를 건너가려는데, 갑자기 명나라 병사 하나가 선조가 탄 말에 채찍을 가했다. 별안간 채찍을 맞은 말이 위로 뛰어 오르면서, 선조는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했고, 다행스럽게도 선조가 말고삐를 잘 잡아 위태로운 상황을 모면했다. 더 놀라운 것은 양호가 왕의 말에 채찍을 가한 병졸을 보고도 벌주지 않고, 돌아보고 웃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호는 왕왕 밀첩(비밀서한)을 보내 조선 조정의 인사에 직접 개입하기도 했다. 그리고 절대로 신하들을 믿지 말고 만사를 왕이 직접 주관하라는 소리를 여사로 했고, 심지어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조정 신하들을 선조에게 알리지도 않고 자신의 경리아문에 잡아다가 처벌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4) 두 가지 의혹 이는 조선직할통치란 말만 쓰지 않았을 뿐, 실질적으로 직할통치와 같았다. 조선 조정의 자율권은 훼손 수준을 넘어, 박탈 혹은 상실이나 다름없는 상태였다. - 5 -

 

 (1) 선조는 왜 그토록 양호에게 매달렸는가 선조가 왜 그토록 양호에게 매달렸는지에 대해서는 두 가지 의혹이 있다. 첫 번째 의혹은 선조가 양호의 전횡에도 불구하고 왜 그에 대한신뢰와 애정이 그토록 각별했느냐이다. 이유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선조의 지나친 대명 의존심과 그 심리의 발로인 존명심이다. 이것은 조선 백성과 조선군에 대한 지나친 불신과 맞물려 더욱 커졌고, 적대심으로까지 이어졌다. 이러한 심리 때문에 선조는 양호가 국정에 어떻게 간여하든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조선에 나왔던 명 지휘관이나 장관들 중 그래도 조선을 위해서 상대적으로 나았던 인물이 양호였고, 또 어떤 면에서는 조선 백성의 원성이 자자했던 명군의 폐해를 막기 위해 상대적으로 보다 힘썼던 사람이 양호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 점은 우리 측 기록에도 나와 있으며 연구가들에 의해 누차 인용되기도 한다. · (2) 전쟁이 끝나도 명군은 왜 남는가 두 번째 의혹은 전쟁이 끝나고, 왜가 다시 재침해올 가능성이 전혀 없는데, 어째서 명은 계속 조선에 군을 주둔시키려 했는가이다. 전쟁 후 명이 조선에 주둔시키고자 한 병력은 모두 3만 3천명이었고, 조선 조정에 요구한 주둔 비용은 군량이 연간 30만석, 은(銀)이 월 30만 냥이었다. 당시 조선의 재정 상태로는 파산 선고와 같은 방대한 양이었다. 명은 자의대로 그 많은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고 있다가 2년 후인 1600년 11월 모두 철수했다. 문제는 명은 왜 그렇게 계속 주둔하려 했고, 선조는 또 왜 명군의 철수를 반대했는가이다. 형식상의 이유는 왜의 재침에 대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왜가 절대로 재침할 수 없다는 것은 명 조정도 조선조정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먼저 명은 ‘조선직할통치’라는 야심이 있었다. 또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건주위의 추장 누르하치에 대비해 조선을 배후 공격세력으로 묶어두려는 의도 또한 함께 작용했다. 류성룡의 징비록과 그 속의 자강론은 그렇기에 지금 우리의 심금을 더욱 크게 울린다. 그러나 당시 왕이나 신하들은 전쟁이 끝나면서 모두 잊었고. 그 역사를 300년 후에도 되풀이하게 된다. - 6 -

 

Ⅱ. 양호와 류성룡 1. 탄핵되는 양호 조선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양호와 영의정 류성룡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선조가 자기 군대와 백성은 불신하고 적대시 하는 반면, 양호는 그의 전폭적인 신뢰와 지지를 받으며 조선의 실권자로 군림했다. 그런 양호와의 관계는 류성룡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1) 양호의 류성룡 비방 ‘서애집’에도 나오고 ‘연려실기술’에도 나와 있는 두 사람의 관계는 양호가 먼저 류성룡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서 시작된다. 양호가 처음 조선 총책으로 파견되어 선조 앞에서 한 말은 ‘조선은 마땅히 류성룡 같은 사람으로 보필하게 해야 한다’였다. 양호의 이런 발언으로 미루어 볼 때, 양호 역시 초기에는 명군 지휘부의 이전 총책이나 다른 장군들처럼 류성룡을 존경하고 좋은 재상으로 평가했던 것 같다. 하지만 양호에게 류성룡을 모함하는 온갖 거짓말을 꾸며, 양호와 류성룡 사이를 이간하는 사람이 있었다. ‘서애집’과 ‘연려실기술’에 나와 있는 것을 그대로 인용하면, ‘류성룡이 공(양호)을 얕잡아 보고, 공이 조선을 구제할 재주가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또 더 많은 거짓말을 날조해서는, 심지어 공을 비방하는 글을 경리문관에 써 붙이기까지 했다’고 했다. 양호는 훗날 이 이간하는 말을 그대로 믿고, 근거 없는 말들을 만들어 류성룡을 호되게 비방하고 나섰다. ‘서애집’에 나오는 말을 그대로 옮겨쓰면 ‘류모(류성룡)는 형군문(병부상서, 조선총독 형개의 군문)에서 죄를 얻어 도망가 버렸다. 지금 군량 운반 등의 책임은 전적으로 윤승훈에게 맡겨서 하고 있다’이다. 당시의 이 일을 이항복은 그의 ‘백사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양호가 공(류성룡)을 좋게 여기지 않아서 언어가 자못 불순하기까지 했다. 사람들은 이를 당혹해 하고 위태롭게 생각했다.’ - 7 -

 

 2) 정응태의 양호 탄핵 전쟁이 막바지에 들어서면서 양호의 막강한 권력도 내리막길로 내닫기 시작한다. 조선에 출정한 명군 지휘부의 총책이나 장군, 그리고 관리들은 하나같이 오만하고 지혜롭지 못했다. 조선 사람을 다루는 데도 멸시와 횡포와 잔인함까지 곁들여서 백성으로부터 인심을 전부 잃었고, 왜와의 전쟁에서도 무모하면서 적을 경시해서 언제나 참패했다. 마치 기울어가는 명을 조선에서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듯 했다. (1) 울산전투, 양호의 심각한 패배 조선에서의 양호의 종말은 울산전투가 시발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명군 지휘부 내에 황혼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명, 왜 간의 울산전투는 명, 왜간의 소사 전투와는 달리 류성룡의 기록에 비교적 자세히 나온다. 울산전투는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그해 말, 조명 연합군과 왜군이 벌인 두 차례의 전투다. 임진왜란을 통틀어 최고로 치열했고,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싸움이다. 1597년 12월 12일에서 다음해 1월 14일까지 한 달 이상이나 계속된 전투이다. - 1593년 1월 이여송의 평양전투 이래 가장 많은 병력 투입 : 명군 4만, 조 선군 1만, 계 5만 - 기요마사의 왜군은 1만 - 왜의 지원군이 몰려오면서 양호는 전면 퇴각 명군이 월등히 많은 병력으로 한 달이나 도산성을 공격했지만 왜는 끄덕도 않고 견뎠고, 도리어 명군의 사상자만 무수히 많았다. 조선군도 전에 없이 용감하게 싸워서 진실로 씩씩하고 굳센 병졸이란 평가를 받았지만 성을 무너뜨릴 재간이 없었다. 조선군 지휘자는 도원수 권율과 김응서, 그리고 순찰사 이용순 등이었다. 특히 김응서는 선조의 미움을 사서 백의 종군했는데, 조선에 항복한 왜군 100여명을 거느리고 싸웠다. 울산전투에서 조선군은 재평가를 받을 만큼 용감하게 싸웠지만, 사상자도 그만큼 많이 났다. 1598년 1월 2일 전투 중간에 류성룡이 보낸 보고서에는 사상자가 1,200명에 이르고, 도망자가 4,982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남은 자는 3,813명이라 했다. - 8 -

 

 (2) 양호의 갑작스런 퇴각 류성룡의 이 기록에서 보듯, 양호는 갑자기 군사를 퇴각시켰다. 그리고 자신을 포함해서 다른 장수들도 모두 전투현장에서 완전히 철수해서 한양으로 돌아가 버렸다. 말이 철수이고 회귀이지 도망이나 다름없었다. 양호 스스로 이미 경험한 대로 명은 왜보다 4배 많은 병력을 가지고도 왜를 이겨낼 수 없었다. 이는 1차 울산전투 이래 1598년 9월 준순까지 명, 왜 간 이렇다 할 전투가 없이 소강상태에 있다가 다시 9월 22일에서 25일까지 벌인 2차 울산전투가 명백하게 입증해 준다. 2차 울산전투는 양호가 탄핵받아 소환된 뒤, 양호 대신 병부상서 형개가 맡아 군대를 나눠 배치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모두 참패하고 만다. (3) 양호의 허위보고 문제의 시작은 그 다음이었다. 양호가 명의 과도관(科道官) 병부주사 정응태의 탄핵을 받고 파면된 것이다. 과도관은 감찰직의 일종으로 감찰어사라고도 불렀다. 과도관 정응태의 직위는 경리 양호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낮았지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에게는 탄핵하고 황제에게 직접 보고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경리 양호가 울산전투에서 패전한 것을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이 허위보고 외에도 황제를 속이고 일을 그르친 죄가 20여가지나 됩니다.’ 이것이 정응태의 양호 탄핵의 요지였다. 그런데 양호는 왜 허위보고를 했는가. 더구나 왜와의 싸움에서 패전한 장군이 양호 혼자만이 아님에도(실은 거의 모두였다), 왜 양호만이 탄핵되었는가. 그것은 명군의 전투결과 보고의 특수성 때문이다. 명군 장수들은 어떤 경우에도 황제에게 패했다는 보고를 할 수가 없었다. 패전보고는 바로 자기 목숨을 내 놓는 것이었다. ‘패전한 장수는 참수한다’가 명 조정의 철칙이었다. 3) 류성룡, ‘양호를 변호할 수 없다’ (1) 양호의 탄핵은 명의 내부문제일 뿐 - 9 -

 

사실 조선조정은 양호의 탄핵과 파면에 나설 계제도 아니었고, 명분도 없었다. 오로지 명의 문제였다. 명군 지휘부 내의 문제였고, 명조정 관리들의 문제였다. 그들 문제에 있어 조선은 제3자 였고, 더구나 조선은 ‘소방(小邦)이었다. 어디 감히 작고 힘없는 변방의 소방이 중화의 대국 사람들이 벌이는 문제에 끼어드느냐는 것이 명의 생각이었다. 조선이 그에 끼어들 수도 없었고 끼어들어서도 안 되는, 그럼에도 끼어들면 스스로 화를 자초하는 것이었다. 류성룡은 처음부터 ‘양호사건’에 말려드는 것을 경계했다. 선조와 온 조정이 양호를 변호한다고 나섰을 때, 그는 다른 신하들의 맹렬한 지탄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변호를 거부했다. 그 거부가 국왕 선조의 불쾌감을 쌓았고, 다른 신하들의 맹공을 받아 결국 수상직에서 물러나는 단초가 됐지만 양호사건이 진정되었을 때는 그가 옳았음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선조를 포함해 숭명사상에 젖은 신하들은 내내 그것을 깨닫지 못했고, 심지어 광해군 때에 와서도 양호를 변호하려고 애썼다. 이항복은 ‘백사수기’에서 ‘류성룡에 대한 양호의 오만은 수그러들 줄 몰랐지만, 류성룡은 전혀 내색하거나 개의하지 않았으며 오직 ‘경(敬)으로서 공사에 임한다’는 자세를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지켜 나갔다’고 적고 있다. 선조가 양호를 어떻게 추켜세워도 양호는 역시 대인다운 인격이나 그릇을 지닌 사람은 아니었다. 대군을 총지휘할 만큼 능력도 경륜도 갖지 못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리더십에 문제가 있었다. 그것이 결국 그의 탄핵과 파면을 불러온 주요 이유이기도 했다. (2) 선조는 왜 그렇게 양호를 감쌌는가 정응태에 의해 양호가 20개 조목의 죄로 탄핵되었을 때, 양호의 지지자이기도 했던 동원파 각로(명의 재상을 각로라 부름) 장위까지도 양호가 황제를 속였다 해서 파면하고 소환할 것을 주장했다. 당황한 양호는 자신의 접반사 이덕형을 불러, 탄핵 내용 중5개는 조선과도 관련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조선이 나서 자기를 변호해 달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 5개 조목은 실지로 조선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명군이 잘못한 것을 견강부회로 조선을 끌어들여 연관시키는 것으로, 조선이 나서지 않고는 가만히 있으면 문제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 10 -

 

 그러나 선조는 양호가 파면되는 바로 그달(1598. 7), 도승지 최천건을 진주사로 명 조정에 파견해. 울산 전투의 시말과 양호의 무고함을 아뢰고, 양호가 그대로 조선에 머물러줄 것을 간청했다. 그것이 명 조정에 통할 리 없었다. 울산전투의 실상은 조선보다 명 조정이 더 소상히 알고 있었다. 조선의 변호와는 아랑곳없이, 도리어 양호의 파면은 공고화된다. 다음 달 8월 양호는 소환되어 조선을 떠났고 선조는 그 이별이 슬퍼서 눈물을 흘렸다. 양호가 소환된 후임으로 도어사 만세덕이 부임하며 조선과 명 양국의 국정 혼란을 가중시켰던 사건은 일단락 되었다. 그러나 사건은 전혀 반대로 꼬여만 갔다. 일을 그르쳐 놓은 장본은 첫째로 양호에 대한 선조의 편향된 시각과 잘못된 애정이었고, 둘째로 양호의 실패와 실책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부 조선 신하들의 무지와 무모함 때문이었다. (3) 식별력이 부족한 선조와 조정 양호가 돌아간 바로 그달 8월, 선조는 파면된 양호의 구출에 나섰다. 양호는 정응태에 의해 오로지 모함되었으니, 양호를 변명해야 한다는 일념에서 명으로 다시 진주사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류성룡에게 ‘이 일은 재상들 중에서 文 과 言과 일처리를 훌륭히 해 내는 사람을 가려 보내야 한다’면 간접적으로 류성룡을 지목했고, 사헌부 역시 ‘마땅히 현직 대신을 보내야 한다’며 노골적으로 류성룡을 압박하고 나섰다. 그러나 류성룡은 이를 거부했다. 류성룡은 ‘팔십 노모가 계시어 자청할 수 없다’고 했다. 유교사회는 충과 효를 근간으로 하는데 이 둘을 병행하기 어려울 때는 충으로 하는 치국보다 효로 하는 제가를 우선으로 했다. 류성룡에게 팔십 노모가 계시는 한 임금도 사헌부도 더는 진주사로 명에 갈 것을 강요할 수는 없었다. 2. 정응태의 반격, 그리고 조선의 치욕 1) 선조, 거적 깔고 명 황제 처분 기다리다 양호가 소환되던 바로 그달 8월(1598), 선조는 좌의정 이원익을 진주사로 - 11 -

 

명에 보냈다. 명 황제와 명 조정에 양호의 무고함을 극력 변호해서 양호를 다시 조선으로 나오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응태가 더 빠르고 노회(老獪)했다. 조선이 진주사를 파견했다는 것을 안 정응태는 ‘어디 감히 조선이’라며 조선을 깔보는 본색을 드러냈고, 진주사로 간 이원익을 철저히 무력화시켰다. 이원익은 명 황제의 알현은 차치하고 병부, 과도, 도어사, 심지어 통정사에까지 양호를 변호하는 글을 냈지만 그 어디고 통하지 않았다. 반영은 고사하고 면대하기도 어려웠다. 그 다음 정응태는 본격적으로 조선을 무고하고 탄핵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조선이 양호와 부회뇌동 해서 함께 명나라를 속이고 죄를 숨기고 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조선이 왜적을 끌어들여 요동을 침범하고 탈취해서 조선의 옛 강토를 회복하려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임금들이 감이 조(祖)니 종(宗)이니 하는 칭호를 쓰는 큰 죄를 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세 가지 모두 무고라고 억울함을 호소했지만 사실 조,명 어느 입장에서 보나 모두 무고라 할 수는 없었다. 정응태가 황제에게 올린 탄핵문 속의 언어는 류성룡의 표현으로 ‘어심참(語甚慘, 너무 참담하고 혹독하고 무자비)’했다. 그 정도가 심해 처음엔 비밀에 붙여져 발설할 수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내 선조는 탄핵문에 대해 알게 되었고, 놀라고 두려운 마음에 선조는 그날(1598. 9. 23)부터 정사를 보지 않고 거적을 깔고 명 황제의 처분을 기다렸다. 조선 조정은 너무 취약했고 왕은 겁이 너무 많았다. ‘양호를 변호해야한다’고 그렇게 감싸며 목소리 높이던 주장도 정응태의 일격에 풍비박산이 되었다. 그로부터 선조는 정전(正殿)도 피하고, 조회도 철폐하고, 한 달이 넘도록 정사도 보지 않았다. 임금이 거적을 갈고 앉아 있는데 신하가 어떻게 보료 위에 앉으며 의자 위에 앉을 수 있으랴. 그럼에도 아무도 ‘양호를 변호하려 했는가’하는 자성은 없고, 정응태에게만 이를 갈았다. 기막힌 조정이며 임금이었다. 한 달이 지난 뒤에야 명 조정은 급사 서관란과 감찰어사 진효를 보내 정사를 재개할 것을 선조에게 명령했고, 그때야 비로소 선조는 거적자리에서 정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신하들은 명 황재가 베풀어준 은혜에 황송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역사에 눈뜬 후인들에겐 이는 수난과 치욕의 역사를 상징한다. - 12 -

 

 2) 궁지에 몰린 조선의 변명 양호를 변호하기 위해 진주사를 보낸 것은 큰 실수였다. 양호를 변호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음이었다. 양호를 변호할 수 없다는 류성룡의 생각이 옳았다. 그러나 화살은 이미 날아갔고, 날아간 화살이 남겨놓은 상처는 그냥 둘 수가 없었다. 그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서 우의정 이항복을 정사로, 참지 이정귀를 부사로 명으로 보냈다. 황제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였다. 조선으로서는 다시금 진주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궁지에 몰려 있었다. 어렵사리 진주사가 결정된 후의 과제는 황제에게 올리는 주문(奏文)이었다. 이런 저런 과정을 거쳐 이정귀가 주문을 쓰게 되었다. 주문의 내용에 어떤 것을 담아야 할 것인가를 논의 할 때, 류성룡은 정응태가 지적한 세 가지 문제 중 ‘조와 종’의 칭호만은 빼고 논의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 선조가 명 황제에게 올린 주문은 그 요약만 적어 놓은 것이 1,700자가 넘었다.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3) ‘왜를 섬기지도 높이지도 않았나이다 * 내용 : 왜를 꾀어서 중국을 침범한다는 것. 왜를 불러서 조선의 옛 영 토를 회복하려 한다는 것 - 그간 왜로 부터 받은 각종 침략으로 조선은 왜의 편이 될 수 없다는 것. - 히데요시의 ‘정명가도’ 요청에 대항한 점 등 - 조선은 왜의 앞잡이가 아님을 변명하는 글 4) ‘조(祖)와 종(宗)’의 칭호를 쓴 이 무지망작, 죄 주옵소서 류성룡이 ‘이 문제는 거론하지 않는 것이 옳다’고 한 말을 무시하고 조와 종 칭호에 대해 이보다 더 큰 죄를 지을 수 없다며 용서에 용서를 비는 글로 읽기조차 부끄러운 글 - 내용에는 조종의 칭호가 신라, 고려 때부터 써 오던 구습을 그대로 이어왔으니 잘못되었다는 내용임 5) 자존심을 갖는 것조차 죄스러운 조선 류성룡의 주장대로 조종 칭호만은 주문에 올려놓지 말아야 했다. 주문은 처 - 13 -

 

음부터 왜에 대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덧붙인다면 양호와 결코 부화뇌동한 게 아니라는 것만 강조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쳐 조종 칭호로까지 이어져 구차하기 한량없는 변명을 하고, 마침내는 군주며 신하며 심지어 백성까지도 모두 망령된 자로 만든 것이다. 6) 조선이 그토록 죄스러운 이유 조선의 본심과 조선의 정체성과는 아랑곳없이. ‘오직 무지해서 망령스레이 조니 종이니 하는 칭호를 썼습니다.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선조였다. 이정귀는 그런 선조의 마음을 빠짐없이 주문 속에 잘 담아내기는 했지만, 당시 조선 문사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음에는 틀림없다 호 월사(月沙)로 더 많이 알려진 이정귀는 훗날 (인조 때) 조선 중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때 나이 불혹이었는데, 주문을 쓸 때는 34세로 아직 학문이 성숙하고 문장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그렇다면 40대, 50대 와는 달리 30대의 기골이 팔팔한 젊은이다운 기개는 있어야 했다. 도대체 조선이 무슨 죄를 그토록 많이 저질렀길래 구절구절이 용서를 빌고 또 빌어야 했고, 무슨 은혜를 그렇게 많이 저버렸기에 고개 숙여 호소하고 엎드려 호소하고 눈물 흘리며 읍소해야 했는가. 더 기막힌 것은 주문의 마지막 부분이다. ‘신이 강토를 지켜내지 못하면, 이제 오직 부모의 나라(중국)로 돌아가서 죽기를 바랄 뿐이온데 어찌 감히…….’ 이 주문의 대미는 중국은 부모의 나라이고, 그 부모의 나라로 돌아가 죽고 싶다는 것이다. 기가 막히는 말이다. 7) 선비의 글은 400년 뒤에도 읽는다 선비라면 마땅히 그 자손들이 읽었을 때, 적어도 부끄럽지 않은 글을 써야 한다. ‘기개와 의기, 대의에 준엄한 선비는 못된다 해도 쓸개도, 핏줄도, 생동하는 기운도 없는 그런 글, 더구나 선대의 공적을 왜곡하고 부정하며 자기 역사를 훼손하고 모독함으로써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후대의 질타를 받는 글은 목숨을 내 놓는 일이 있어도 쓰면 안 되는 것이었다. 이정귀는 확실히 그 임금의 그 신하였다. 선조만큼 자아의식이 부족했고, 내나라 의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 14 -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이정귀를 다르게 봤다. 그들은 이정귀의 주문을 절찬하고 뛰어난 문장이라 평했다. 심지어 ‘글 속에 깃든 조선 국왕의 충간의담(忠肝義膽)이 읽는 이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고 까지 격찬하는 관원도 있었다. 충간의담은 글자그대로 충성스러운 마음과, 왜의 불의 앞에 겁내지 않고 열렬히 싸우는 큰 용기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중국 사람인들 그토록 중국 사람의 입맛에 맞게 글을 쓸 수 있었을까. 불행히 주문은 이정귀가 쓴 글이었고, 불행히 이정귀는 중국 사람이 아닌 조선 사람이었다. 400년 후 그가 남긴 글은 후인들의 가슴을 참담히 짓찧는다. Ⅲ. 휘몰아치는 후폭풍 1. 류성룡 물러나다 류성룡이 물러나야 하는 것은 이미 예고된 현실이었다. 그것은 ‘양호변명’의 진주사를 거절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두 조정간 진폭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한 쪽이 새의 날개 바람 정도였다면, 다른 한 쪽은 폭풍우였다. 1) 권력의 틈새를 노리는 황소바람 그 폭풍우가 조선 조정을 몰아치고 있었다. 양호와 정응태가 만든 일파가 조선 조정에서는 만파로 출렁거렸다. 국왕은 정사를 놓고 거적자리에 엎드려 명 황제의 처분을 기다려야 했고, 이에 아랑곳없이 형개의 군문(명군 지휘부)에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군량 독촉을 성화같이 했다. 류성룡은 당시 나라 상황을 그의 상소문에서 폭풍 속의 일엽편주라 했다. 안팎의 시달림에서 안으로는 거적자리에 앉은 국왕을 대신해 대소정사를 처리하고, 밖으로는 형개 군문에 응해서 전황(戰況)을 챙겨야 했으니 진적한 표현이다. 권력은 언제나 틈새에서 일고 한 번 일면 황소바람을 일으키며 땅을 말아오듯 몰아온다. 국왕은 거적자리에 나가 있고, 수상 류성룡은 눈코 뜰 새가 없고, 국왕의 권위는 실추될 대로 실추되고, 류성룡은 한 잎의 배 노 잡는 것도 힘겨운 상태에 있음은 분명 ‘권력의 틈새’였다. 그 틈새로 기둥을 뒤엎을 바람이 질풍노도로 거세게 불어올 수 있었다. 권력을 노리는 자, 언제나 틈 - 15 -

 

새를 노리고, 그 틈새를 남보다 먼저 보는 자, 권좌에 남보다 먼저 앉는다. 권력은 원래 틈새에서 일며 권력자는 본능적으로 그 틈새를 느낀다. 선조가 거적자리로 나가던 다음 날(1598. 9. 24), 지평 이이첨이 류성룡을 거세게 탄핵했다. 정응태 탄핵을 변명하러 가지 않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병조좌랑 윤홍, 승문정자 유숙, 유생 홍봉선, 최희남 그리고 정인홍과 남이공도 합세했다. 이로부터 류성룡이 파직되는 1598. 11. 18까지 조선 조정은 역사에 유례가 드문 기이한 드라마가 전개된다. 근 두 달 동안 조정은 당을 지어 류성룡을 탄핵하는 상소를 쉴새 없이 내고, 류성룡은 물러나겠다는 사직서를 임금에게 쉴 새 없이 올리고, 임금은 류성룡의 사직서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불윤을 쉴새 없이 되풀이하는 그런 고리가 날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2) 들개 이빨같은 탄핵 상소문들 류성룡을 탄핵하는 상소문은 하나같이 언어가 날카롭고 험악했고. 음흉하고 혹독하기까지 했다. 오늘날이었다면 명예훼손에 백 번 걸리고도 남을 어휘들이 남발했다. ‘정응태 탄핵을 자청해서 변명하러 가지 않았다’해서 이를 죄로 모는 것은 차치하고 수상 5년의 치적을 모두 폐해와 악으로 가득한 폐정으로 질타하는 정치쇼가 매일같이 눈 하나 깜짝 않고 연출되고 있었다. 그 연출 속에서 그가 추천하고 발탁한 사람은 모두 치질이나 빠는 무리가 되었다. 이순신도 권율도 고언백도, 오직 성실 하나로 군량 보급에 매진하다 죽은 이성중도 모두 하루아침에 치질을 빠는 연옹지치(吮癰舐痔)로 돌변했다. 거기에 친족을 등용하는 족벌주의자, 전답과 장원을 원근에 가득히 장만해놓은 부정부패의 원흉으로까지 지목했다. 하지만 수년 후 바로 그들 손으로 류성룡을 청백리(淸白吏)에 등재한다. 더 기이한 것은 어떤 음해와 폄하에도 류성룡은 일체 변명하거나 대응하지 않고 사직서만 계속 임금에게 올리고, 임금은 이를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는 과정을 되풀이 했다. 역사상 가장 기이한 2개월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3) 공론은 나라의 기강이자 공직자의 생명 후인들이 꼭 읽어야 하고, 꼭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이 기이한 2개 - 16 -

 

 월 사이에 류성룡이 올린 차사(상소문)이며, 그 속의 글귀들이다. 앞서 본 이정귀의 주문이 당시 공직자들이 제 나라를 어떻게 의식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글이라면, 류성룡의 차사는 공직을 맡은 자, 특히 윗자리에 앉은 자가 어떻게 사고하고 처신해야 하는가를 잘 일러주고 있다. 그 요체는 무사심(無私心)이고 그 무사심이 공직자에게 엄격히 요구되는 것은 400년 전이나 이제나 조금도 차이가 없다. 그것은 시공을 초월한다는 것이 류성룡의 차사를 통해 명백히 입증된다. “국가가 엄청난 변란을 당하는 가운데 신이 맡아 처리해 온 일들이 잘못되어서 여러 신하들의 마음이 분개해 있습니다. 무릇 하루의 조정이 있으면 하루의 기강도 마땅히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조정은 그 하루하루의 기강으로 이어집니다. 공론은 국가의 기강입니다. 대신으로서 자신이 죄를 저질렀다는 공론을 받고도 돌아봄이 없이 평일처럼 태연히 앉아 국사를 본다면 조정이 어떻게 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일엽편주 위에 놓여 있어도 거취에 구차해서는 안 된다는 옛사람들의 말이 진실로 이유가 있나이다.. 아무쪼록 여론을 굽어 살피시어 신의 관직을 체탈해 주시길 엎드려 비나이다.” 공론은 국가의 기강이다. 군주국가라 해서 군주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국가든 국가가 제대로 되려면 기강이 서야 하고, 기강이 서려면 공론에 따라야 한다. 특히 공직자에게 기강은 공론이 생명이다. 공론이 자신의 파직을 원하고 주장한다면 마땅히 그 공론에 따라야 한다. 그것이 공직자의 의무다. 설혹 공론이 오도됐다고 생각돼도 공직자는 그것을 거부할 권리가 없다. 그 권리는 공직에서 물러났을 때만 주어진다. 기강이 무너진 조정은 조정이 아니다. 2. 그러나 ‘아무도 류성룡을 대신할 수 없다’ 류성룡에게는 확실한 결벽증이 있었다. 그것은 정치적 결벽증이었다. 그 결벽증은 정치인으로는 강점보다 약점이었다. 하지만 천부적으로 타고난 것이어서, 약점이 되도 단점이 되도, 어쩔 수 없이 사람을 가리었다. 정인홍, 이 - 17 -

 

이첨, 남이공 등이 가장 날카롭고 참혹한 언어로 모함하고 음해해도, 그는 그저 차사(사직상소)만 올렸을 뿐 대응하지 않았다. 사람을 가리는 그의 결벽증은 대응 상대를 공격자가 아닌 국왕이라는 드높은 차원으로 바꾸고, 뛰어 넘었다. 그 전환 그 초월이 공격자의 분노를 더 가중시켰다. 그래서 그를 탄핵함이 더 치열해졌으나 그는 결벽증으로 참아낼 수 있었다. 그는 분연히 결단을 내렸다. 아예 거주지를 도성 한참 밖으로 옮겨 버렸다. 연보에는 전농리로 거처를 옮겼다고 했다. 그리고 보름 후에는 다시 왕십리로 이사해서는 숨다시피 했다. 거처를 옮긴다는 것은 이제 조정에 나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표시이고, 더는 차사를 올릴 필요도 없이, 이로써 수상직에서 물러났다는 분명한 전갈이었다. 이보다 더 확고한 결단이 없었고, 이보다 더 단호한 행동이 없었다. 선조도 더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 중이었다. 명, 왜군이 아직은 소강 상태에 있다 해도 언제 불붙을지 모르는 대치 상태였다. 아무리 대간들의 탄핵이 치열하다 해도 지금까지 전장에서 정무와 군무를 도맡아 처리해 온 그를 완전히 떠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택한 것이 체임이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직위해제(대기명령)였다. 그러니 임금의 명령에 따라 언젠가는 삼공의 자리 또는 도체찰사로 재기용될 수 있었다. 선조의 고민이 묻어 있었다. 1) 이원익, 아무도 류성룡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류성룡은 체임 아닌 정식 사직을 원하는 차사를 또 올렸다. 그러나 선조는 윤허하지 않았다. 진주사로 북경에서 돌아온 이원익이 류성룡의 체임을 알고 선조에게 간곡히 권했다. ‘오늘날 정승을 택하는데, 누구를 택해도 류성룡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류성룡이야말로 오로지 ‘청개자수 혈성(淸介自守 血誠)’으로 나라를 근심하고 나라를 위해 왔습니다. 그가 퇴임한 마당에 신도 이제 물러가겠습니다.’ 이원익이 말한 청개자수 혈성은 선비는 말할 것도 없고, 관직자에 대한 최고의 찬사이며 최고의 평가다. 청렴은 돈은 물론 자리를 탐하거나 그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고, 개결은 성품이 깨끗하며 자수는 근신이다. 근신은 언행을 늘 삼가고 조심하는 것이며 함부로 말하지 않고, 자기 잘못을 늘 반성하는 것이다. 혈성 곧 지성은 변하지 않는 본마음으로 온 정성을 기울여서 하는 것이다. - 18 -

 

 이원익은 태종의 5대 손으로 왕가의 종친이었다. 성격이 곧아서 공사가 아니면 다른 신하들과 면대하는 것조차 꺼려 조정에서는 늘 외톨이다 시피했다. 누구보다 류성룡이 그의 성실, 그의 슬기와 인격됨, 그리고 조용하고 침착한 성품과 경륜을 높이 평가해서 30년을 하루같이 함께 일했다. 그래서 서로를 너무 잘 알았다. 나이는 류성룡이 5살 위이고, 조정 출사는 류성룡이 2년 앞섰다. 당시 사람들이 이원익과 류성룡을 대비해서 하는 말 중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이원익은 가히 속일 수 있으나 차마 속일 수 없고, 류성룡은 속이려 해보아도 속일 수 없다.’ 이원익은 그만큼 순수하고 진실했다는 것이고, 류성룡은 그만큼 성실하고 명민했다는 것이다. 두 사람은 조선조 500년을 통틀어 다시 그 짝을 찾기 어려운 명재상들이었다. 선조는 군주로서의 국량에 비해 지나치게 인복이 있었다. 그 인복으로 해서 나라가 완전히 결판나는 힘겨운 국난 속에서도 다시 되살아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긴 역사의 눈으로 보면 조선의 복이 아니라 한민족의 복이라 할 수 있다. 그 복이 없었으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을까. 당시의 역사로 돌아가서 보면, 오직 그 복으로만 우리 역사가 보인다. 2) 이항복, 이덕형 ‘류성룡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사람’ 류성룡이 조정에서 가장 아끼던 사람으로 이원익과 함께 이항복, 이덕형이 있었다. 이항복은 류성룡이 도성 밖 전농리로 멀리 나가고, 이어 체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누구보다 먼저 류성룡을 보기 위해 수레를 몰아 전농리로 향했다. 이것은 당시 정치행태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누구든 대신들로부터 탄핵 당하면 거기에 연루될까 두려워서, 사대부들 간에는 탄핵당한 사람에 대한 안부조차 묻지 않았다. 그런 정치적 이기주의, 사회관계적 배타주의가 팽배했었다. 그러나 이항복은 달랐다. 그것도 비변사에 앉아 많은 다른 신하들이 듣고 보는 데서 류성룡을 보러 전농리로 가야겠다고 이졸들을 채근해서 수레를 급히 몰아갔다. 그 소리를 들은 비변사 안팍 관원들 사이에선 역시 이항복은 의리의 사나이라는 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이항복은 류성룡보다 14살 아래였고, 조정 출사도 그만큼 뒤였다. 처음 조정에서의 지위도 자연 현격한 차 - 19 -

 

이가 있었음에도 정치행보에서는 동반자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류성룡을 잘 알았고, 존경했다. 류성룡은 그의 지표였다. 이덕형은 이항복 보다 5살 밑이지만, 두 사람의 호를 딴 ‘오성과 한음’은 ‘수어지교(水魚之交)’에 비유될 정도로 두 사람 관계는 돈독했다. 임진왜란 중 이덕형은 이항복과 달리 전쟁의 현장에서 류성룡과 고락을 함께하다시피 했다. 류성룡과는 부자지간이라 할 만큼(19세 차이)나이도 어렸지만, 이항복과 같은 해(1580) 출사를 해서 40세에 영의정을 지낸 정도였다. 그만큼 이덕형에 대한 류성룡의 신뢰가 깊었고 아낌도 많아 받았다. 류성룡이 따나는 마당에 누구보다 속앓이를 했던 사람이 이들이었고, 이원익의 말대로 ‘아무도 류성룡을 대신할 수 없다’는 데서 정치적 허탈감에 빠지기도 했다. 류성룡이 떠난 뒤 두 사람 모두 영의정의 지위에까지 오르지만, 역시 정치적 불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광해군 시대의 정치 소용돌이 속에서 이항복은 귀양가서 적소에서 죽었고, 이덕형은 광해 권신들의 정치적 핍박에서 술로 지새우다 이항복보다 5년 앞서 죽었다. 그때의 나이 52세 였다. 조정에서나 정치에서 류성룡과 같은 후원자의 유무가 정상적인 지위 유지와 능력 발휘에 얼마나 큰 보호막이자 길라잡이가 되는지 이 오성과 한음을 보면 절실히 실감한다. 3)이순신의 한탄,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 그 사이 이순신은 고금도에 있었다. 고금도는 전남 완도와 조약도 사이에 있는 넓이 43제곱킬로미터의 작은 섬이지만, 이전의 수군 본거지인 한산도에 비하면 3배나 컸다. 원균이 정유년(1957. 7. 15) 칠천도에서 패하여 죽고 한산도 수영 본거지도 폐허가 되면서, 조정에서는 어떻게 할 길이 없어지자 백의종군하는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재기용했다. 이것이 원균이 죽고 일주일 후인 7월 22일이었다. 이순신 역시 폐허가 된 한산도를 빠른 시일내에 복구할 수가 없어서 이듬해 2월 17일 고금도로 수군 본영을 옮긴다. 그리고 3월과 7월 두 차례나 이곳 근해에서 왜 수군을 대파했다. 이미 전해 9월 15일 유명한 명량해전을 치르고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해 놓은 상태였다. 이순신에 의해 조선 수군의 위력이 되살아나면서, 왜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죽었다. 일본 측 자료로는 그해(1598) 8월 18일이라 했다. 그로부터 류성룡이 체임되던 10월과 11월까지, 육지에서의 명, 왜 전쟁과 바다에서의 - 20 -

 

 전쟁은 완전히 서강상태였다. 그사이 이순신은 고금도에서 수군을 재강화하고 본영을 재복구하던 차, 류성룡의 탄핵과 체임소식을 들었다. ‘연보’에서는 그 소식을 듣는 순간 이순신이 실성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크게 탄식하면서, ‘나랏일이 하나같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라고 말했다. 이순신에게 류성룡의 탄핵은 본질을 깨고 본체를 파괴하는 것이었다. 류성룡은 단순히 이순신의 후원자가 아니라 조선 수군의 후원자였다. 그가 조정에서 물러나고 나면 원균과 같은 정치군인이 나타나서 한산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듯이, 이제 막 본모습을 드러내는 고금도 수군 본영을 또 언제 폐허로 만들어 놓을지 알 수 없는 대사건이었다. 이순신이 실성해서 대탄식을 하고, ‘나라가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다니’라며 비명이나 다름없는 소리를 지르는 것은 불을 보듯 번연하다. 그때 이순신이 어떤 결심을 하고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안 돼 벌어진 노량진 대전투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얼마든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그는 그런 선택을 했을까. 원균 같았으면 백 번 다르게 택하고도 남았을 것을, 이순신은 왜 기어이 그것을 택했을까. 3. 같은 날 류성룡은 파직되고 이순신은 죽다 조선의 본격적인 쇠망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 쇠망은 외부가 아니라 조선 내부의 잘못된 선택이 기인한다. 전쟁이 가져다 준 엄청난 파괴와 혼돈이 아니라 전쟁에서 시작된 엄청난 자기부정의 왜곡된 선택이 조선을 침몰시켰다. 그 쇠망과 침몰은 누가 어떤 식으로 그 과정을 추적하든 연원은 임진왜란이다. 1) 자강파, 의명파 자강파는 글자 그대로 스스로 힘을 길러 적과 싸우며 나라도 다시 일으켜 나가자는 것이었고, 의명파는 명에 의존해서 명의 구원을 받아 적과 싸우고 나라도 유지해 나가자는 것이다. 자강파에는 류성룡과 이순신, 그리고 의병들이 있었고, 의명파에는 선조를 필두로 대다수 신하들이 속해 있었다. 임진왜란 중에는 이 두 파가 세력불균형 속에서도 서로 존재를 용납하며 협조해 나갔다. 적을 눈앞에 둔 불가피한 공존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끝남과 - 21 -

 

동시에 자강파는 내몰림을 당하거나 스스로 물러났다. 오직 의명파만 득세해서 공론을 지배하고 언로를 한 곳으로 몰아 추세로 호도했다. 마침내 의명파는 낡은 껍질을 도저히 벗을 수 없을 만큼 굳어지고 단단해진 폐쇄형 ‘숭명파’로 바뀌고 조정은 오로지 그들로 채워졌다. 그 결과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조선은 일로직하 쇠망의 내리막길로 줄달음쳤다. 그 줄달음의 내리막길의 맨 끝에서 숭명파는 사대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사대당과 대립각을 세운 개화당이란 이름의, 먼 옛날에 사라진 자강파의 후신인 듯한 새로운 유형의 한 정파가 나타나지만, 이 또한 ‘3일 천하’도 만들지 못할 만큼 허약했다. 임진왜란은 확실히 조선으로 하여금 많은 것을 일깨우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계기였을 뿐, 자강파가 사라진 이후에는 아무도 임진왜란이 천지개벽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 누구도 조선이 이제 명의 그늘에서 벗어나 새 역사를 창건하고 나라 중흥의 길로 인도되는 대전환의 계기를 임진왜란을 통해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을 각인하지 못했다. 오직 류성룡의 ‘징비록’에서만 그 ‘깨달음’이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징비록’도 두루 읽히는 깨달음의 지침서가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특히 숭명파들의 자강을 일깨우기에는 ‘징비록’은 너무 깊숙히 은거해 있었다. 숭명파들 또한 숭명론자들의 주장 외에는 그 어떤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다. 2) 국권이 아닌 왕권 유지가 전부인 선조 자강파를 무너뜨리고 의명파를 만들고 드디어 숭명파, 숭명사상을 후대에까지 만연시켜서 조선을 본격적으로 쇠망의 길로 들어서게 한 시발은 선조였다. 선조에게는 나라 개념이 없었다. 국권이 아니고 오로지 왕권만 알았다. ‘나라를 바로 세워야겠다’가 아니고 ‘원권을 유지해야겠다’가 그에겐 전부였다. 그리고 왕권을 조선 백성과 조선군이 아닌 명나라와 명군만이 지켜준다고 생각했다. (1) 명군에 비하면 ‘약간 두드러진’ 이순신 전공 선조는 철저히 명에 기대려고만 했다. 심지어 명 황제의 심기를 건드릴까, 거적자리에 꿇어 앉아서까지도 명 황제의 처분을 기다리며 명에 기대었 - 22 -

 

 다. 선조에게는 명군만 군이고 조선군은 군이 아니었다. 명나라 백성만 백성이고 조선백성은 백성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숭명사상의 최대 희생자는 이순신이었다. 오직 명에게만 의지하려는 선조의 눈에 이순신이 바로 보일 리 없고, 그때까지 이순신이 거둔 혁혁한 전공이 ‘혁혁한 전공으로 생각될 리 없었다. 명군이 거둔 전공에 비하면 그저 하찮은 것으로만 여겨질 뿐이었다. 이는 전쟁이 끝난 후 전쟁 공로자의 녹훈을 거론하는 자리에서 나온 선조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 “오늘날 왜적이 평정된 것은 오로지 명군의 덕분이다. 우리 장군과 사졸들은 명군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요행이 적 패잔병들의 머리나 얻었을 뿐이다. 한 번도 우리 장군과 사졸들의 힘으로 적 우두머리 목 하나를 베거나 적진 하나를 함락시킨 일이 없다. 그 가운데 이순신과 원균 두 장수의 바다에서의 무찌름과 권율의 행주에서의 이김이 약간 두드러질 뿐이다.” 이것이 이순신이 죽고 2년 4개월 후(1601. 3. 13)에 있은 이순신 전공에 대한 선조의 평이었다. (2) 유치한 반간계에 넘어간 선조와 조정 정유재란이 터지기 바로 직전 조선 조정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반간계에 넘어가 드디어 이순신을 하옥시킨다. 1597년 1월 27일이었다. 정유재란은 다음 달 21일에 일어났다 한 달도 채 안 되는 사이, 임진왜란 이상의 큰 전쟁이 바다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정말 선조나 조선 조정이 까맣게 모르고 이순신을 하옥시키고 죽이려 했을까. 그럴 정도로 조선 조정은 정보에 어두웠을까, 무지했을까, 아니면 이순신에 대한 선조의 증오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까. 상식적으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조선 조정과 선조의 이순신에 대한 처사였다. 이미 1595년 9월에 오사카 성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앞에서 명, 왜 강화회담은 결렬되었고, 돌아온 조선과 명의 사신들이 히데요시의 대군 동원령을 눈치채고, 새로운 전란을 예고했었다. 대전쟁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조선 조정에서는 고니시 유키나가의 반간계가 통할 수 있었을까. 그 반간계는 삼척동자가 들어도 거짓임을 알 수 있는 수준의 유치하기 이를 데 없는 정보전이었다. - 23 -

 

그 내용은 아주 간단하고 명백했다. 며칠 날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출정한다는 것이고, 그때 이순신이 수군을 동원해서 기요마사를 사로잡으라는 것이었다. 그 정보를 기요마사와 사이가 좋지 않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병상우병사 김응서를 통해 조선 조정에 보냈고, 조선 조정은 이순신에게 엄청난 군사 기밀이라는 딱지를 붙여 그대로 시행하라고 명령했다. 이순신이 그것이 거짓정보임을 모를 리 없었고, 따라서 거짓정보에 농간을 당할 리도 없었다. 그러나 반간계라는 것이 언제나 그렇듯이, 효력은 그 다음에 작용하는 것이었고 그 위력은 조정이 어리석고 무지할수록 컸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즉각 김응서에게 이순신이 말을 듣지 않아 가토 기요마사는 무사히 후계에 도착했고, 조선은 기요마사를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순신의 실기로 놓쳤다고 했다. 그 반간계가 조선 조정을 뒤집었고, 이순신은 ‘군사기밀을 그르쳤다’는 죄목으로 하옥되고, 고문당하고, 참형 직전에까지 이르렀다. 선조는 이순신을 백단(百端)으로 죄목을 얽어매 죽이려고 했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반간계가 기가 막힐 정도로 조선 조정에 통하고 선조를 움직인 것이다. 류성룡이 나서서 선조를 간곡히 설득했다. 류성룡은 왜가 대병을 이끌고 다시 쳐들어온다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정유재란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류성룡의 남다른 예지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전 해에 결렬된 명, 왜 강화회담의 결과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신하들은 ‘명이 있다’는 의존심만으로 왜의 재침을 생각지도 않았고, 생각했다 해도 두려워하거나 걱정하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선조의 심기에 편승해서 이순신을 의법 처치해야 한다고 팔을 걷고 나선 데서 증명된다. 그것이 뒤에도 내내 같은 유형으로 나타나는 의명파의 행위 양태였다. (3) 류성룡, ‘이순신이 아니면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류성룡은 달랐다. 그에게 있어 나라 지킴은 무엇보다 호남을 지키는 것이었다.. 영남이 왜에 장악된 상태에서 호남이 나라지킴의 보루였다. 류성룡은 이미 이순신 수군의 위력을 알고 있었으므로 있는 힘을 다해 선조를 설득했다. 조정을 채운 의명파 신하들은 선조와 다름없이 이순신을 폄하하고, 이순신의 전공을 원균의 그것과 차이 없이 보았다. 문제는 군사와 백성들이었다. 조정 - 24 -

 

에서 대간들이 가토 기요마사를 놓친 이순신을 잡아와서 국문하라고 나서고, 그에 영합해서 조정 내에서 이순신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왔을 때 ‘군사와 백성들은 길을 막고, 이순신의 원통함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이루 헤일 수 없이 많았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순신을 참형까지 몰아가는 것은 그 군사와 백성 들이었다. 선조와 의명파 신하들의 눈엔 이순신은 그 군사와 그 백성과 한통속일 것임에 틀림없고, 그러한 이순신은 위험한 인물로 비쳤을 것임 또한 틀림없다. 이순신을 내치고, 원균을 통제사로 앉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4) 정탁, 겨우 이순신 살려내 마침내 이순신은 참형으로 내몰렸다. 류성룡이 나가 있는 마당에 고립무원의 이순신을 구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만일 나서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선조의 눈엔 역적이나 다름없었다. 이순신의 목숨은 명재경각, 그야말로 아침 아니면 저녁에 걸려 있었다. 그때 나선 사람이 판중추부사 정탁이었다. 정탁은 퇴계문인으로 우의정을 역임했던, 당시 조정에서는 72세로 가장 나이 많은 노재상이었다. 정탁은 조용한 성품에 잘 나서지 않으면서도 경사(經史)는 물론 천문, 지리, 심지어 병가(兵家)에 까지 정통했다. ‘징비록’에는 그때 사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때 오직 판중추부사 정탁만이 나서 말하기를 “이순신은 명장입니다. 죽여서는 아니 됩니다. 군사상 기밀의 이롭고 해로움은 조정 먼 곳에서는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순신이 나가지 않은 것은 반드시 무슨 뜻이 있어서일 것입니다. 바라옵건데,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뒷날의 공을 이루도록 하시옵소서”라고 했다. 조정에서는 한 차례 고문을 가한 후에 사형을 감하고 관직을 삭탈한 채 그대로 군대에 편입하도록 했다.’ 선조가 아무리 임금이라도 40대 였다. 이순신을 용납하는 마음이 아무리 적다 해도 70대 노재상의 간곡한 권유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기막힌 것은 류성룡의 기록대로 ‘오직 정탁’만이 나서서 이순신을 변호하는 것이었다. 울산 전투의 참담한 패장 양호를 변호하는 데는 온 조정이 혈안이 됐었다. 명의 패장은 패장임에도 명장으로 떠받들어지고, 자기 나라의 명장은 명장임에도 패장보다 더 비참했다. 그것이 조선 조정이었다. 선조는 그 조정의 군주였다. - 25 -

 

(5) 이순신,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 조정, 그런 군주에서 이순신이 살아났다는 것은 기적이다. 어쨌든 이순신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맞았고, 그 위대한 마지막 순간을 불멸의 장으로 바다에서 끝마칠 수 있는 행운도 맞았다. 만일 그가 그렇게 끝마치지 않았으면 그 끝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것은 전쟁이 끝난 후 자강파인 의병들이 어떻게 처신했는가에서 잘 알 수 있다. 이순신이 일부러 생을 그렇게 마감한 것인지, 마감된 것인지, 죽은 그는 말이 없어 아무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그는 그의 그런 임금을 원망하거나, 그런 조정을 탓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 어떤 기록에도 찾을 수 없다. 진정한 인간은 하늘도 원망하지 않고 남도 탓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순신은 더 위대하다. 3) 가장 위대한 만남, 류성룡과 이순신 (1) 두 사람의 만남, 조선의 행운 호남을 지키고 나라를 살아남게 한 주도적 역할은 선조의 생각과는 달리 이순신의 수군이었다. 명군의 역할이 있었다면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차원이었다. 그렇게 조선을 보전케 한 이순신의 수군, 왜를 제압해서 명실공이 최고의 수군으로 우뚝 서게 한 이순신을 ‘역사의 이순신’으로 만들고 존재케한 사람은 류성룡이었다. 류성룡과 이순신의 만남은 조선으로서는 숙명적이었다. 류성룡 없는 이순신이 있을 수 없고, 이순신을 생각지 않는 류성룡도 있을 수 없었다. 조선은 바로 이 두 사람의 만남이 있으므로 해서 조선이었다. 두 사람의 만남이야말로 조선으로서는 행운이고 천운이었다. 율곡의 말대로 조선이 비록 나라가 아니었어도 인물은 있었다. 인물이 있어 인물을 알아보았기에 사직은 이민족이 아닌 자기 민족으로 유지되어질 수 있었다. (2) 7단계 뛰어 넘는 기상천외의 발탁 류성룡의 안목은 예리했다. 지인 감각이 뛰어났었다. 그 예리한 안목 뛰어난 인지감으로 이순신을 보았다. 아무도 이순신을 주목하지 않을 때 그는 이 - 26 -

 

순신을 발탁했다. 그때 이순신은 정6품의 정읍현감이었다. 1576년, 만 31세 (1545년 생)의 늦깎이로 무과에 급제해서 이후 10여 년을 함경도 변방의조산만호 등 하위 무관으로 전전하다 역시 최하위 말단직 정읍 현감으로 온 것이 그의 나이 44세인 1589년 이었다. 그런 이순신을 류성룡이 천거해서 정3품 당상관 전라좌수사(수군절도사)로 만들었다. 1591년 2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4개월 전이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류성룡이 이순신을 육군이 아닌 수군 장수로 발탁한 것이다. 다 같이 천거하면서도 문신인 형조정랑 권율은 육군으로 기용했다. 그런데 오직 말 타고 칼 쓰는 육군으로만 경력을 쌓아온 이순신을 전혀 경험이 없는 수군 장수로 발탁한 것이다.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기상천외의 인사였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을까. 만일 이순신을 누구나 생각하는 통상의 방식이나 원칙대로 육군 장수로 발탁했다면 임진왜란은 차치하고, 이순신이 오늘날 우리의 충무공 이순신일 수 있을까. 그것은 아마도 미래의 수전(水戰)에 대한 류성룡 특유의 원려가 있어서일 것이다. 평양에 주둔한 고나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의주까지 쳐들어가지 못한 것, 그리고 명나라 군대가 육로로 쉽게 내원해 올 수 있었던 것, 이 모두 이순신의 수군이 왜를 제압했기 때문이었다. 만일 왜 수군이 서해로 나갈 수 있었다면 수륙이 합세해서 의주까지는 한 달음에 쳐내려갈 수 있었고, 거기에 발해만에 연한 요동의 금주, 해주, 천진까지 왜 수군의 공격을 받았으면 명나라 대군이 육로로 쉽게 진군해 올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번연하다. 이 모두 이순신의 승리가 막아준 것이다. 그러나 선조는 물론, 조정의 다른 신하들까지도 이순신의 수군이 의주에 있는 선조와 조정을 살려내고 명군까지 아무 저항 없이 쉽게 올 수 있게 했다고는 결코 생각지 않았다. 그저 명군이 모든 것을 다 해냈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이순신을 백단(百端,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죄를 얽어 심지어 죽이려고까지 했다. 오로지 류성룡만이 ‘이 모두 이순신의 한 번 승리가 만들어낸 것’이라 외치고, ‘아아, 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라고 외쳤다. (3) ‘아! 이순신’, 류성룡의 절규 - 27 -

 

 ‘징비록’ 1~2권의 열여섯 장 중 여섯 장에 이순신이 등장한다. 어떤 장은 크게 어떤 장은 전부 이순신을 쓰고 있다. 임진왜란은 바다에서는 조, 왜 전쟁이고, 육지에서는 명, 왜 전쟁이었다. 바다에서 이순신은 왜의 대군과 큰 싸움만 11번을 치러 11번 모두 대승을 거둔다. 육지에서 명군은 왜와 15번을 싸워 13번을 대패한다. 한 번의 확실한 승리와, 한 번의 미심쩍은 승리, 그것이 명군의 전적이었다. 대군을 끌고 온 명군의 전적이 거의 전패인데 반해, 언제나 수적 열세로 싸운 이순신의 전적은 전승이었다. ‘징비록’의 절정은 이순신의 최후 장면이다. ‘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고 용모가 단아했다. 사람된 품이 몸을 닦고 언행을 삼가는 선비와 같았으나 몸속에는 담기(膽氣)가 서려 있었다. 자기 한 몸을 잊고 국난을 맞아 목숨을 바친 것은 평소 그같은 수양이 있었기 때문이다.’ ‘순신은 뛰어난 재주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명운이 없어 가지고 있던 재간의 100분의 1도 다 쓰지 못하고 죽었으니 아아, 참으로 아깝다.’ 류성룡의 울부짖음은 마지막 구절 ‘유재무명(有才無命)’서 ‘백불일시이사(百不一施而死)’다. ‘하늘은 어쩌라고 순신에게 그 뛰어난 재주와 능력, 그리고 인격은 주었으면서 생명은 더 주지 않았던가’이다. ‘아아, 아깝고 아깝다.’고 절규하는 것만큼 류성룡과 이순신의 만남은 극적이었고, 이별도 극적이었다. 만남이 역사적이라면, 헤어짐 또한 역사적이었다. 둘의 만남은 조선사의 숙명이었고, 떠남도 조선사의 숙명이었다. 이순신이 노량 앞바다에서 최후를 맞던 날(1598. 11. 18), 류성룡도 영의정에서 파직된다. 전달에 체임되어 한 달 이상 체임 상태로 가다 이순신이 죽던 그날, 드디어 그도 파직되었다. 일치라면 기묘한 일치고, 운명이라면 기이한 운명이었다. 4. 지난 일을 ‘징계’하고 후일을 ‘경계’ 했지만 1) 파직, 그리고 삭탈관직 정인홍, 이이첨 등 당시 북인들의 집요한 탄핵으로 파직, 그리고 삭탈관직(벼슬 했다는 기록을 삭제함)까지 당했으나 2년 후 직첩을 되찾음. - 28 -

 

 2) 권좌에 너무 오래 있었다 류성룡은 조선조 500년에서 드물게 영의정을 오래했다. 만 5년 동안 영의정을 역임했다. 그의 5년은 몸소 전장의 현장에서 치러낸 것이었다. 더욱 영의정이라는 수상직만 수행한 것이 아니라, 정무와 군무에 도체찰사까지 겸직해서 임지왜란 전 기간을 명실공이 전시수상으로서의 임무를 끝까지 맡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탄핵 당하는 실제 이유였던 것이다. * 류성룡의 3대 기록 ⓵ 임금에게 상소문을 가장 많이 낸 것 ⓶ 왕이 ‘불윤’이라는 비답을 가장 많이 내린 일 ⓷ 영의정으로 물러날 때까지, 한 번도 유배되지 않았고, 탄핵은 물러날 때 뿐 3) 32년 관직의 비결은? 1566~1598 만 32년간 대사헌, 대제학, 병조판서,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침 지독한 배제와 닫힘의 정치에서 류성룡이 드물게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이 그로 하여금 드문 기록을 남기는 재상으로 만들어주었을까. 일찍 은퇴한 퇴계 이황, 일찍 죽은 율곡 이이, 일체 나섬이 없는 종친 이원익, 비교적 요절한 이덕형을 제외하면, 류성룡처럼 요직을 두루 거치며 오래 자리에 있으면서도 탄핵받지 않고 유배되지 않은 사람은 없다. 류성룡은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그가 권력을 이념화하거나 가치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후대를 위해 ‘징비록’등을 남기다 류성룡은 파직되던 다음 날 행장을 꾸려 한양을 떠나 노모가 계시는 도심촌을 거쳐, 이듬해 2월 고향 하회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죽는 날(1607. 5. 6)까지 다시는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2년 후인 1600년 12월 말 의인왕후 국상 때도 동대문 밖 길가에서 곡하고는 성안으로 는 들지 않고 그날로 바로 돌아왔다. - 29 -

 

 이 또한 조선조의 일반 관인과 완전히 다른 점이었다. 전반적으로 조선조에서 벼슬을 지낸 관리들은 은퇴라는 것이 없었다. 임금이 부르면 언제나 되돌아갔고 그리고 끝없이 불러주기를 고대했다. 그러나 류성룡은 완전히 돌아갔다. 선조의 몇 차례 소명이 있어도 번번이 사절했다. 임금님의 부르심, 이른바 성은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충훈부에서 화사(畵師)를 보내 초상화를 그리기를 요청했지만, 그 또한 거절했다. 국가에서 나라에 큰 공을 이룬 사람에게 공식적으로 요청하는 초상화까지 거절한 이유는 무엇일가. 물론 사절의 변은 스스로 이렇다 할 공훈이 없다는 거였다. 그러면서 그는 엄청난 기록을 남겼다. 죽기 3년 전(1606. 7), ‘징비록’의 저술을 끝냈다. 그리고 ‘진사록’ ‘군문등록’ ‘근폭집’을 위시한 많은 저술들이 완전 은퇴의 공으로 세상에 나왔다. 한양을 떠나 10년이 채 못 되는 사이 이룩한 이 저술들의 지침은 선대의 전철을 철저히 징계하고 후대의 후환을 철저히 경계시키는 것이었다. 이 많은 저술들의 전체를 하나로 꿰뚫어 뿜어내는 절규는 다름 아닌 자강이었다. ‘남을 믿어서도 안 되고 의뢰해서도 안 된다. 바로 우리가 독립해야 한다’가 이 저술들의 핵이고, 줄기고, 요체였다. 그 자강은 여진족의 발흥을 내다본 데서 더 강조된다. 30년과, 40년 후의 정묘, 병자호란을 예고하고 그 여진족의 강세를 막는 방법, 그 강세에서 지키는 방법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한편, 미래의 청일 전쟁을 예견하고 그 사이에 낀 조선을 걱정했다. 그의 저서는 후인들에게 많은 것을 말해주고, 가르쳐 주었다. 그러나 후인들은 듣지 않았고 읽지 않았다. 그것도 300년 동안이나. 그리고 끝내 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선대의 전철을 경계하고 후대의 후환을 그처럼 경계했지만, 끝내 자강하지 못했다. 류성룡 이후 300년 내내 눈을 떠서 자기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직 보이는 것은 대국뿐이었고, 그 대국의 글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변하는 세월에 얼마나 뒤져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자강의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글 아는 선비(지식인)나 글 모르는 백성이나 눈을 못 떴다는 점에서는 문맹이나 다름없었다. - 30 -

 

 5) 한 편의 시가 말해주는 것 그가 떠나면서 남긴 한 편의 시가 그 문맹을 감지한다. 이 시야말로 그가 남긴 수많은 시 중에서도 대표작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깊게 가슴에 새기고 그 가슴을 늘상 울리게 하는 명시이다. 전원으로 돌아가는 길 삼천리 벼슬살이 나라 깊은 은혜 사십년 도미천에 발 멈추고 바라보네 남산 그 남산 빛 옛모습 그대로이네 -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은 천리다. 그러나 삼천리나 되었다. 그렇게 돌아가기가 어려웠다. 얼마나 가고 싶었으면, 얼마나 돌아가기 힘들었으면 천리가 삼천리가 되었는가. - 벼슬살이 햇수는 30년을 조금 넘기지만, 나에게 준 은혜는 40년을 넘었다. 내가 나라를 위해 한 일은 티끌 같은데 나라는 나에게 태산같은 은혜를 베풀었다. - 이제 모든 것을 떨치고 전원으로 돌아간다. 도미천(양평의 용진 건너)에 이르면 남산을 보는 것도 마지막이다. 남산은 예 그대로인데 감회만 가슴을 적신다. ‘옛 모습 그대로’의 남산의 변함없는 모습, 그것은 바른 눈(정안)이고 바른 잣대(정척)이다. 그 바른 눈, 바른 잣대로 인간을 보고 인간이 만들어 가는 역사를 본다. 인간의 마음은 아침저녁으로 변한다. 그 인간이 펼치는 역사는 - 31 -

 

끝없이 부침한다. 흥망성쇠가 서로 이어간다. 그것을 남산 위의 저소나무, ‘옛 모습 그대로’의 그 변함없는 모습을 응시한다. 조선의 고난은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가. 언젠가 조선은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 시대 그 당시의 쇠잔이 역사에서의 쇠잔은 아니다. 당대와 역사는 다르다. 저 남산은 조선이 다시 중흥하는 것, 다시 부흥하는 것을 볼 것이다. 거기 선 소나무가 언제나 푸르듯. 그 청정함으로 언제나 푸르게 푸르게 응시하듯. 내 나라여 영원하라. 2014. 7. 27 - 32 -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