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2014. 8. 14. 10:10독서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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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

 

- 무문관, 나와 마주 서는 48개의 질문

 

 - ■ 강신주 지음 0 1967 경남 함양 출생 0 연세대 화학공학 학사, 서울대 및 연세대 석사, 연세대 박사 0 2007년부터 문사철 기획위원회 활동

 

 0 사랑과 자유의 철학자 0 저서 : 강신주의 다상담(3권),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강신주의 감정수업, 철학이 필요한 시간 등

 

■ 머리말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른들에게는 어린이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힘,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요. 언제 어른이 될까. 떡국을 한 그릇 더 먹으면 한 살 더 먹을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우리의 조바심을 조롱하듯이, 어른은 별다른 노력이 없이 우리를 찾아왔습니다. 그냥 나이를 먹으니 어른이 되어 버렸고, 주변 사람들도 우리를 어른으로 대접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마침내 알아버렸습니다. 옛날 부모님들도 사실 어른이 아니었다는 슬픈 사실을요. 그렇습니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어른이 되는 건 아닙니다. 자신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힘과 자유가 없다면, 어른이라고 해도 어른일 수 없는 법이니까요.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남의 평가에 연연하지 않아야 어른입니다. 싫은 건 싫다고 하고 좋은 건 좋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어야 어른입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자기 삶을 지킬 수 있는 힘과 자기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면 우리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본질적으로는 어른이 될 수 없음을, 그리고 힘과 자유는 나이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용기를 갖고 싸워 얻어야 하는 것임을. 나이를 먹을수록 진정한 어른이 되기 어렵다는 걸 절감하고 있는 지금, 지금은 깊은 밤입니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인간이 힘과 자유를 가질 수 - 1 - 있다는 걸 긍정합니다. 최소한 저는 그래야 한다고 믿고 있고, 그래서 인간의 힘과 자유를 위해 글을 쓰고 강연을 하는 사람입니다. 지금 저는 대자유를 얻기 위해 분투했던 사람들, 문이 없는 관문을 뚫으려고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우리 시대의 진정한 어른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많은 자극과 격려가 되리라 기대해 봅니다. 죽기 전에 한 번이라도 좋으니, 우리 정말로 진짜 어른이 되어 살아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2014. 5. 30. 깊은 밤

 

■ 프롤로그

 

잠옷을 입고 실내에 있을 수도 없고 실외로 나갈 수도 없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느냐? 1. 방금 잠옷을 입었다면, 그 다음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만드는 질문일 겁니다. 그렇지만 단호하게, 혹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할 겁니다. “침실로 가서 잠을 청할 겁니다.” “거실에서 스탠드를 켜고 책을 잠깐 볼 겁니다.”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볼 겁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한번 깊게 고민해 보세요. ‘도대체 내가 했던 모든 행동 중 오직 나만이 할 수 있었던 행동은 있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도 아니고, 이모도 아니고, 나는 고모도 아닙니다. 그리고 나는 내 아이들이 아닙니다. 나는 바로 나입니다. 그런데 내가 하는 모든 행동, 심지어 모든 생각은 아버지, 어머니, 이모, 고모, 그리고 아이들과 유사합니다. 심지어 같을 때도 너무나 많습니다. 이건 내가 나로서 살아가기 보다는 누군가를 흉내 내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걸 말해 주는 것 아닐까요. 한 번밖에 없는 삶을 살아가면서 이건 너무나 슬프고도 우울한 일이 아닐까요. 베케트(S. B. Beckett, 1906-1989)라는 우리시대 가장 탁월한 작가가 고민했던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로 행동할 수 있을까?’ 베케트에 대한 작은 연구에서 들뢰즈는 흥미로운 문장을 우리에게 던집니다. “구두를 신고, 우리는 머문다. 실내화를 신고 우리는 외출한다.”혀를 끌끌 찰 광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애처로운, 아니 정확히 말해 처절한 벌버둥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 2 - 베케트만 그럴까요? 장자도 그렇고 니체도 그렇고, 김수영도 그렇고, 카프카도 그렇고, 베토벤도 그렇고, 슈베르트도 그렇습니다.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작품들을 통해 그들은 자기만의 삶과 사유를 자랑할 수 있었던 겁니다. 자 이제 다시 물어보도록 하지요. 방금 잠옷을 입었다면, 그 다음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하시겠습니까? 실내가 아니라 실외로 외출을 할 예정이라고요? 할(喝)! 그건 이미 베케트의 주인공들이 했던 행동들이 아닌가요? 2. “잠옷을 입고 실내에 있을 수도 없고 실외로 나갈 수도 없다면, 너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런 난처한 질문을 접한 사람들 중 동아시아 사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화두(話頭)’라는 단어를 떠올릴 겁니다. 상식적인 생각으로는 결코 해결할 길이 없는 딜레마나 역설로 가득 차 있는 물음이 바로 화두입니다. 그렇다면 상식으로 풀길이 없는 화두를 동아시아 사람들은 왜 만들었던 것일까요? 그건 상식을 넘어가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상식을 뜻하는 영어 단어에 주목해 보시오. 커먼 센스(common sense)! ‘공통된 감각’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삼촌이나 이모, 혹은 친구들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바로 커먼 센스, 즉 상식입니다. 상식을 맹목적으로 신뢰하고 살아가고 있다면, 자신만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할 수 없지요. 바로 이겁니다. 화두는 자신만의 삶을 살아 내려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 같은 겁니다. ‘화두’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누구나 불교를 연상했을 겁니다. 식견이 조금 더 있는 사람이라면 선불교(禪佛敎)를 떠올렸을 거고요. 불교의 최종 목적은 불교의 창시자인 싯다르타(BC563? ~ BC483?)의 말씀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데 있지 않고, 싯다르타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 자신도 붓다(buddha ), 즉 부처가 되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와 헤어질 때 스님들은 말하곤 합니다. “성불(成佛) 하세요!” 한 마디로 부처가 되라는 겁니다. 선불교에서 고안한 화두는 바로 부처기 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관문과도 같은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보다 앞서 화두를 뚫었던 선배들의 일화를 숙고하는 것, 혹은 만일 내게도 같은 화두가 주어졌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하는 것, 선불교에서는 이런 수행법을 간화선(看話禪)이라고 부릅니다. 글자 - 3 - 그대로 ‘화두(話)를 보는(看) 참선(禪)’이라는 뜻이지요.

 

- 전등록(傳燈錄) : 도원(道原) 스님이 1004년에 쓴 책 1700여 개의 화두 등장 - 벽암록(碧巖錄) : 설두 중현(雪竇重顯 980-1052) 스님에서부터 제자 원오 극근(圓梧克勤 1063-1135) 스님 등이 100개의 화두만 선별한 화두집. 1주일에 하나씩 통과한다 해도 무려 2년이 소요됨

 

- 무문관(無門關) : 무문 혜개(無門慧開 1183-1260) 스님이 48개의 화두를선별해서 해설한 책 3. 서양에서는 ‘The Gateless Gate’라고 번역되는 ‘무문관’이라는 제목! 이 말만 들어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띵하지 않습니까? ‘문이 없는 관문’이라뇨. 도대체 이게 말이 됩니까. 관문이라고 하면 통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문이 없다면 우리는 통과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무문관은 관문이라는 이야기입니까, 아니면 관문이 아니라는 이야기 입니까? 제목부터가 이미 반드시 뚫어내야 할 일종의 화두, 그것도 최고난도의 화두인 셈입니다. 문을 찾아 통과할 생각을 조금이라도 가진다면 ‘무문관’은 절대로 통과할 수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문이 없다고 했으니 아무리 찾으려 해도 문을 찾을 수 없을 테니까요. 무문관에는 이곳을 통과했던 선배들이라면 예외 없이 반드시 지나가야만 했던 비밀스런 문이 있을 거라는 헛된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영민한 독자라면 이런 헛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애초에 주인으로 살려는 의지가 없다는 것을 직감할 겁니다. 무문관이라는 관문은 묘한 곳입니다. 분명 이곳을 뚫고 지나간 선배들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그들이 통과한 관문에는 하나의 흔적으로서 문들이 만들어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문이 없었다고 해도, 통과를 했다면 문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요. 마치 눈을 밟고 걸으면, 뒤에 발자국이 남는 것처럼 말입니다. ‘무문관’이라는 화두 모음집이 만들어져 지금까지 전해질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 그 문으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자기만의 삶을 살려고 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이나 그가 만든 방법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 4 - 저는 무문관을 ‘무문관답게’, 그러니까 ‘나답게’ 읽으려고 했습니다. 제가 가급적 ‘무문관’에 실려 있는 무문 스님의 해설을 넘겨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무문은 무문이고 강신주는 강신주입니다. 무문의 해설에 친절한 설명을 붙이는 것에 만족하는 것은 선불교의 정신에 맞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무문 스님마저도 혀를 끌끌 찰 일입니다. 그래서 저는 48개의 관문에 무모하게 몸을 던졌습니다. 만신창이로 너덜너덜해졌지만 어쨌든 48개의 관문을 통과 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1,2년의 세월이 후딱 지나간 다음이었습니다.

 

제1부 영웅처럼 거닐며

 

■ 움직이는 건 마음뿐!

 

 어느 날 사찰 깃발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두 스님이 서로 논쟁을 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라고 말하고,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주장했다. 서로의 주장만이 오갈 뿐, 논쟁은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이때 6조 혜능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두 스님은 소스라치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 ‘무문관’ 29칙, ‘비풍비번(非風非幡)’ -

 

1. 당나라 시절 중국 남쪽에는 법성사(法性寺)라는 절이 있었습니다. 달마(達磨 ?-528?)로 시작되어 다섯 번째 홍인(弘忍 601-674)에 이른 선종(禪宗)의 법맥이 사라진지 오래 되었는데, 땅 속에 묻혀있던 수맥이 솟구치듯이 바로 이곳 법성사에서 선종의 법맥이 용솟음친 것입니다. 사라진 6조(六祖), 그러니까 여섯 번째 큰스님 혜능(慧能 638-713)이 화려하게 세상에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선종의 전설에 따르면 전설적인 인물 달마에게서 선종은 시작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불빛을 밝힌 달마는 초조(初祖), 즉 첫 번째 스승으로 불립니다. 달마의 깨달음은 차례로 혜가(慧可 487-593), 승찬(僧璨 ?-606), 도신(道信 580-651), 홍인, 혜능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혜가가 2 - 5 - 조, 승찬이 3조, 도신이 4조 홍인이 5조, 그리고 마지막으로 혜능이 육조라고 불리지요. 돌이켜 보면 15년 전 북중국에 비해 문화적으로 세련되지 않은 남중국 촌놈 출신 혜능이 홍인의 의발(衣鉢)을 받은 사건은 당시 선종 내부에서 커다란 센세이션과 함께 강한 거부반응을 일으켰습니다.

 

 - 당나라 시절 북중국과 남중국의 차이는 도시와 시골의 차이. 그런데 5조 홍인은 글자도 모르는 시골 촌놈, 그것도 자신을 찾아 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혜능에게 의발을 내림, 북중국 출신 스님들의 반발, 그리고 15년 후 * 의발을 내린다는 것은 계승자로 지명 했다는 뜻임 당시 인종(印宗, 627-713) 법사가 ‘열반경’을 강의 하고 있던 법성사에는 수많은 수행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육조의 신분을 감춘 혜능도 끼어들어 그 모임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사찰에 몰아친 강한 바람으로 사찰의 깃발이 펄럭이게 되었습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면서 두 스님이 논쟁을 시작하게 됩니다. 한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주장했지만, 이에 맞서 다른 스님은 “바람이 움직인다” 라고 역습을 가했습니다. 두 스님의 논쟁으로 열반경 강의는 잠시 멈추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의에 참여했던 수행자들이 양편으로 갈려 갑론을박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때 날카로운 칼날에 조용히 잘리는 비단의 미세한 소리처럼 조용한 목소리가 새어 나옵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행자들 속에 숨어 있던 혜능이 드디어 등장하며 모든 논쟁을 종식시킵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 마음이 갔기 때문에, 바람이 움직인다거나 혹은 깃발이 움직인다는 논쟁 자체가 가능한 것 아니냐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2. 그런데 ‘무문관’의 편찬자 무문 혜개는 이 법성사 에피소드를 다음과 같이 논평합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위대한 스승인 혜능의 말마저도 거부하는 무문 스님의 기개가 놀랍기만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마음은 외부에도 쏠릴 수 있다는, 그래서 바람에 깃발이 나부끼는 장면에 - 6 - 사로잡혀 있을 때나 아니면 마음속 상념에 하염없이 빠져들 때, 마음은 활발발(活潑潑)한 활동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보통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집착(執着)이 발생한 셈이지요. 집착을 딱딱하게 얼어붙은 얼음에 비유할 수 있다면, 활발발은 유동하는 물에 비유할 수 있을 겁니다. 둥근 그릇에 담겨 얼어붙은 둥근 얼음은 다른 모양의 그릇에 담을 수가 없습니다. 오직 유동적인 물만이 다양한 그릇에 다양한 모양으로 깃들 수 있는 법이니까요. ‘살아 있다’는 의미의 활(活)이라는 단어와 ‘물방울이 튄다’는 의미의 발(潑)이라는 단어를 결합시켜 만든 ‘활발발’이라는 용어를 선사들이 좋아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얼음처럼 고착된 마음, 집착하고 있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혜능이나 무문이 걱정했던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에 마음이 고착되어 있을 때 혜능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고 당신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의 활동성을 깨우려는 것이지요. 혜능의 말을 듣고 이제 바람이나 깃발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고착되어 있을 때 무문은 “마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깃발과 바람 대신 마음에 고착되어 있는 마음의 활동성을 깨우려는 것입니다. 3. 주변의 어른들은 “마음이 콩 밭에 가 있다”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미 우리는 머리가 아닌 삶에서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겁니다. 마음이란 기본적으로 무엇인가를 지향하는 것이어서, 살아서 팔딱거리며 움직이는 작용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마음이 콩 밭에 가 있다면, 그래서 오매불망 콩밭에만 있다면, 마음은 다른 것을 지향할 여지가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생각해 볼까요? 잃어버린 재산이나 이미 죽어버린 사람에게 집착할 때, 우리는 다른 것에 마음을 둘 여지가 없게 됩니다. 흰 눈이 내리는 아름다운 풍경도,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의 아름다운 선율도, 우리의 관심을 필요로 하는 노숙자의 비참한 삶도 우리의 마음에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이미 우리의 마음이 꽁꽁 얼어붙은 얼음처럼 굳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물고기가 연못 속에서 도약하는 것과 같은 활발발의 역동성을 어떻게 우리 - 7 - 마음에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살아서 펄떡이는 마음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자비의 마음이 생길 수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이제 혜능이 왜 육조라는 감당하기 힘든 스승의 자리에 올랐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홍인이 일자무식으로 알려진 혜능에게 자신의 의발을 물려주면서 그의 깨달음을 인정한 이유도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는지요. 혜능은 그 앞의 조사들과 그 후에 도래할 조사들과 마찬가지로 마음이 역동적인 지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혜능과 같은 깨달음을 지적으로 이해한다고 해도, 실제로 역동적인 마음을 갖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마음속에 혜능의 이야기를 담아두어야만 합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 손님에서 주인으로

 

서암 사언 화상은 매일 자기 자신을 “주인공!”하고 부르고서는 다시 스스로 “예!”하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깨어 있어야 한다! 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된다! 예! 예!”라고 말했다.

 

- 무문관 12칙, 암환주인(巖喚主人) -

 

1. ‘화엄경(華嚴經)’이라는 불교 경전이 있습니다. 대승불교 전통에서 어떻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지, 혹은 깨달음이 무엇인지를 이 경전만큼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표현한 것도 없을 겁니다. 특히 선재동자(善財童子)가 깨달음을 찾아가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던 경전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고은(高銀 1933- )시인은 선재동자의 구도 이야기를 ‘화엄경’이라는 소설로 출간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경전의 내용이 아니라, 경전의 제목입니다. 대승불교에서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를 ‘화엄세계’라고 표현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화엄(華嚴)’은 산스크리트어 ‘간다뷔하(Gandavyoha)’라는 단어를 의역한 말입니다. 여기서 간뷔하라는 말은 온갖 가지가지의 꽃들을 의미하는 ‘간다(Ganda)’와 화려한 수식을 의미하는 ‘뷔하(vyoha)’로 구성 - 8 -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간다’는 꽃을 의미하는 ‘화(華)’로, 그리고 ‘뷔하’가 장관을 의미하는 ‘엄(嚴)’으로 번역되면서 ‘화엄’이라는 말이 탄생한 겁니다. 결국 화엄이란 말은 들판에 잡다하게 피어 있는 수많은 꽃들의 장관을 가리키는 말이 됩니다. * 대승불교가 꿈꾸었던 화엄세계 - 모든 존재들이 자기만의 가능성과 삶을 긍정하며 만개하는 세계 - 자비란 자기만의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연민이다. 향이 옅다고 나쁜 꽃이고 색이 탁하다고 무가치한 꽃이 아니다. - 개나리가 아무리 꾸며도 장미꽃이 될 수 없다. 자기를 부정하는 삶은 비극적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타자가 바라는 모습이 되기 위해 얼마나 자신을 부정해 왔나요? 그만큼 우리는 스스로 행복을 포기해 왔던 것 아닐까요? 그러니 “남에게 속아서는 안 됩니다.” 남이 아무리 선의지를 가지고 조언을 해도, 그 말에 따라 사는 순간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열반(涅槃 nirvana) : 노예가 아니라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 - 서암 사언(瑞巖 師彦 850-910) : 깨달음을 주인으로 삼음. 그래서 그는 주인을 존경하는 뜻으로 ‘공(公)’을 붙여 주인공이라 함 2. 싯다르타가 이 세상을 떠나려고 할 때, 마지막 사자후를 남깁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개나리는 개나리로 만개하고, 히아신스는 히아신스로 만개하고 장미는 장미로 만개할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꽃을 부러워하거나 모방하지 말고, 자기만의 꽃을 피우라고, 다시 말해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외쳤던 것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즉 세상에서 나만이 유일하게 존귀하다는 선언은 싯다르타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 나아가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아직 자신이 존귀하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우리는 안데르센의 동화에 등장하는 미운 오리 새끼일지도 모릅니다. 자신이 백조라는 것을 모르니, 멋진 오리가 되려고 욕망할 수밖에요. 이럴 때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가르침은 너무나 절절하기만 합니다. - 9 - 니체(1844-1900)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나를 버리고 그대들 자신을 찾도록 하라. 그리하여 그대들 모두가 나를 부정하게 된다면, 그때 내가 다시 그대들에게 돌아오리라.” 라고 말합니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선언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서양에서 신이라는 존재는 인간에게 절대적인 모방과 숭배의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모방의 대상이 있는데 어떻게 인간이 그 자신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말을 빌린다면,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그 사다리를 던져 버려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야 유아독존인 나를 찾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3. 주인이 되었다는 것은 단지 내 삶의 주인이 되었다는 것, 달리 말해 내 자신이 가진 잠재성을 활짝 꽃피우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진정한 주인은 타인을 노예로 부리지 않는 법입니다.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사람은 겉으로는 주인처럼 보이지만 사실 노예에 지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아이러니한 일은 타인을 노예로 부리는 사람은 겉보기에는 주인처럼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자기가 부리는 사람의 노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요. 그렇다면 이토록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자기에 대한 것일 수도, 타자에 대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 주인이 되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됩니다. 동시에 누군가를 사랑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마마보이는 신체적으로는 성숙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어머니에게 종속되어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머니로부터 독립된 성숙한 남성이 될 때 까지 마마보이는 누구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은 자신, 자신을 사랑하는 타자 모두에게 비극을 초래할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자기에 대한 것이든 타자에 대한 것이든 사랑은 주인공만이 할 수 있는, 아니 주인공이어야만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아침마다 일어나서 서암 스님이 자신에게 던진 말을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하는 이유가 분명해지지 않았나요? “주인공!” “예!” - 10 -

 

■ 있는 그대로를 보라!

 

송원 화상이 말했다. “힘이 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가?” 또 말했다. “말을 하는 것은 혀끝에 있지 않다.”

 

- 무문관 20칙, ‘대역량인(大力量人)’ -

 

1. 초기에 서양학자들은 불교 사상을 ‘절대적 관념론’이라고 규정하곤 했습니다. 절대적 관념론이란 세상의 모든 것을 절대적인 관념, 그러니까 절대적인 하나의 정신이 만들었다는 주장입니다. - 헤겔(1770-1831)을 중심으로 한 서양 학자들은 불교 사상을 ‘절대적 관념론’이라 주장 불교 사상이 절대적 관념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연수(延壽 904-975)가 편집한 ‘종경록’이라는 책에 등장하는 원효(元曉 617-686)와 의상(義湘 625-702) 스님과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바로 해골 물 이야기입니다. (중 략) 여기서 원효는 크게 깨달아 외쳤다고 합니다. “나는 부처님께서 ‘모든 세상이 단지 나의 마음이고(三界唯心)’ ‘모든 대상들이 단지 나의 의식이다(萬法唯識)’라고 하셨던 것을 들었다 그러기에 아름다움과 추함은 나에게 있지, 실제로 물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겠구나.” 그러니 불교 사상은 절대적 관념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지요. 절대적 관념론은 우리의 가치평가뿐만 아니라 외부의 사물마저도 모두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주장하는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은 동일한 사물임에도 우리가 이러저러하게 마음을 지어내어 일희일비 하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삼계유심’이나 ‘만법유식’, 혹은 ‘일체유심조’라는 말은 바로 이런 사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단지 우리 마음이 내린 가치평가만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널뛰기를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원효도, 의상도 그대로이고 무덤도, 해골도, 해골에 담겨 있던 물도 그대로 아닌가요. 불교에서는 이것을 ‘ 여여(如如)’ 혹은 ‘타타타(tatata)’라고 - 11 - 부릅니다. ‘있는 그대로’라는 듯이지요.

 

2. 생사와 무관하게 독립한다고 생각되는 자아, 즉 불변하는 영원이 자아를 불교에서는 ‘아(我, atman)’라고 부릅니다. 불교는 이런 영원한 자아를 부정합니다., 세상에 영원하거나 불변하는 것은 없으니까요. 아름다운 꽃도 덧없이 바람에 날려 떨어지고, 사랑하는 사람도 허무하게 내 곁을 떠납니다. 영원할 것 같은 젊음도 모래알처럼 우리 손을 빠져 나가버리고, 언제나 품에 안을 수 있을 것 같았던 아이도 어느 사이엔가 훌쩍 커 독립을 준비합니다. 영원한 것, 그리고 불변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불교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것은 인연(因緣)의 마주침에 의해 발생하고 그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기 때문이지요. 가만히 자신이 겪었던 경험을 조심스레 돌아본다면, 이 사실을 거부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바로 이 순간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희론(戱論)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올바른 인식을 희롱하는 논의, 그러니까 있는 그대로의 사태를 보지 못하게 우리의 마음을 왜곡시키는 잘못된 논의라는 뜻이지요. 한마디로 말해 희론은 세상을 왜곡해서 보도록 만드는 색안경과 같은 것이지요. 원효의 깨달음은 바로 이 희론을 자각했다는 데 있습니다. 해골 물은 있는 그대로 있었을 뿐인데, 우리는 함부로 ‘그 물은 매우 달았다’든가 ‘그 물은 더러워서 역겨워’라는 가치평가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가치 평가가 바로 희론입니다. 원효의 이야기에서 최소한 세 가지 마음을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매우 단 물이군’이라고 생각하는 마음, 두 번째는 ‘더러워서 역겨운 물이네’라고 생각하는 마음, 그리고 세 번째로 ‘우리에게 일희일비를 제공하는 가치평가는 모두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야’라고 깨달은 마음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로 구분되지만, 사실 이 세 가지 마음은 우리 모두가 가진 하나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일 뿐입니다. 그래서 원효도 일심(一心)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선불교에서 화두는 깨달은 마음과 미혹된 마음을 구분하는 시금석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마치 색맹 검사와도 같습니다. - 12 - ‘무문관’의 스무 번째 관문에서 송원 숭악(松源崇岳 1132-1202)은 두 가지 화두를 우리에게 던진다. 3. 말을 하면 혀가 움직인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이 경우 우리는 혀를 의식하지는 않습니다. 평상시 혀를 의식하지 않고 우리는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반대로 우리가 혀를 의식할 때는 말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을 때입니다. 이렇게 정리하면 될 것 같습니다. 말을 제대로 하게 되면 우리는 혀의 운동을 의식하지 않고, 반대로 말이 잘못 나왔거나 나온 말이 씹히면 혀를 의식하게 된다고 말입니다. 이제 송원 스님의 첫 번째 화두도 쉽게 이해가 되시는지요. “힘이 센 사람은 무엇 때문에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가?” 공을 찬다고 해 보지요. 제대로 찬다면, 우리는 자신의 다리를 의식하지 않을 겁니다. 반대로 헛발질을 한다거나 혹은 차고 난 뒤 발이 아프다면 우리는 자기의 다리를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다리를 의식한다는 것은 다리가 불편하다는 뜻이니까요. 반대로 힘이 센 사람, 그러니까 대역량인(大力量人)은 그냥 다리를 들고 무엇인가를 세차게 걷어찹니다. 그는 자신의 다리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힘이 센 사람은 자기 다리를 의식하지 않습니다. 그저 무엇인가를 세게 차서 뒤집어 버릴 뿐입니다. 그래서 힘이 센 사람은 자기 다리를 들어 올려야 한다고 의식하지 않는 법입니다. 당연히 힘이 센 사람은 자기 자리를 들어 올릴 수 없는 것이지요. 반대로 자기 다리를 들어 올리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다리가 불편한 사람, 그러니까 힘이 약한 사람일 겁니다.

 

■ 있다는 오만과 없다는 절망

 

 파초 화상이 대중들에게 말했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있다면, 너희에게 주장자를 주겠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

 

- 무문관 44칙, 파초주장(芭蕉拄杖) - - 13 -

 

1. 주장자(拄杖子)를 아시나요. 큰스님들이 길을 걸을 대나 설법을 할 때 들고 계시는 큰 지팡이를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주장자는 불교에서는 깨달은 사람, 즉 ‘불성(佛性)’ 혹은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실현한 사람을 상징하게 된 것입니다. 선불교의 근본 입장은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는 부처가 될 수 있는 잠재성이 존재한다는 거지요. 이런 잠재성을 불교 이론가들은 불성 혹은 본래면목이라고 부릅니다. 파초 스님이 던진 화두는 정말 화두의 품격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언어도단의 이야기이니까요. 하긴 언어의 길이 끊어진 그곳, 바로 거기에 깨달음이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먼저 “너희에게 주장자가 있다면, 너희에게 주장자를 주겠다”라는 말부터 생각해 보지요. 사실 주장자가 있는 사람에게 주장자를 준다는 것부터 황당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파초 스님은 제자들에게 주장자를 주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렇게 생각해 보지요. 만약 제자들이 주장자를 받는다면 이것은 그들에게 주장가가 없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닐까요? 이미 주장자가 있는데 , 주장자를 또 받아서 무엇 하겠습니까? 결국 주장자를 주겠다는 파초 스님의 속내는 제자들에게 ‘지금 너희들에게는 주장자가 없다’는 것을 알려 주는 데 있었던 겁니다. 어쩌면 스님은 속세 사람들을 만날 때 무엇인가 깨달은 척 거들먹거리는 그들의 모습을 풍자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파초 스님은 조롱을 한 것이지요. ‘그렇게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자신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으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거짓된 깨달음을 비판했던 스님의 첫 번째 화두보다 더 어려운 것이 두 번째 화두일 것입니다. “너희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주장자가 없는데, 어떻게 빼앗을 수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게 하는 화두입니다. 과연 정말로 주장자는 없는 것일까요? 진짜 물질적으로 주장자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장자는 없다’는 생각 속에 이미 주장자는 엄연히 있는 것 아닐까요? 바로 이것입니다. 파초 스님은 제자들이 집착하고 있는 주장자를 빼앗고자 하는 것입니다. 주장자는 깨달음을 상징하는 소중한 물건입니다. 그러니 아직 깨닫지 못한 제자들에게 주장자는 오매불망 그리워할 수밖에 없는 갈망의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 무 - 14 - 엇인가에 강하게 집착한다면, 역설적으로 깨달음은 불가능한 것 아닐까요. 제자들의 오만함을 통열하게 조롱한 뒤에, 파초 스님은 주장자라는 관념 자체를 내려놓아야 깨달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하고자 한 것입니다. 2. ‘지갑이 없어’,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애인과 헤어졌어’ 등. 우리는 매번 ‘없음’에 직면하며 당혹감과 비통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것은 물론 우리가 지갑이 주머니에 있었다는 기억을, 살아 계신 어머니의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겁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를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집착의 기원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에게 없어진 것이 소중한 것일수록 그것의 부재가 주는 고통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일 겁니다. 없다는 느낌은 그만큼 그것이 있었을 때 느꼈던 행복을 안타깝게도 더 부각시키는 법이니까요. 더 무서운 것은 없어진 것에 대한 집착이 우리를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사로잡혀 살도록 만든다는 점입니다. 이미 없어진 것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현재를 살아갈 수 없고 당연히 미래도 열릴 수 없는 법입니다. “너희들에게 주장자가 없다면, 너희에게서 주장자를 빼앗을 것이다.” 이제야 제자들에 대한 파초 스님의 하염없는 자비심이 보이십니까. 깨달은 자, 그러니까 부처를 꿈꾸는 마음이 강해지면. 이제 역으로 자신이 아직 깨달은 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절망하기 쉽습니다. 이런 절망이 부처에 더 집착하도록 만들게 될 겁니다. 돈이나 권력과도 같은 세속적인 것이든, 아니면 부처나 불성과 같은 탈속적인 것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집착은 깨달은 자가 가지는 자유와는 무관한 것이니까요. 또한 이렇게 부처에 집착하는 스님에게 어떻게 상처받고 비참한 중생들에 대한 대자대비의 마음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주장자가 있다는 오만도, 그리고 주장자가 없다는 절망도 모두 집착일 뿐입니다. 지금 파초 스님이 주장자로 날려버리려고 했던 것은 바로 무엇인가 있다는 오만과 무엇인가가 없다는 절망이었던 셈입니다. 자! 이제 바로 대답해 보세요. 당신에게는 주장자가 있습니까 아니면 없습니까?

 

■ 두 가지의 반복 사이에서

 

- 15 - 구지 화상은 무엇인가 질문을 받으면 언제나 단지 손가락 하나를 세울 뿐이었다. 뒤에 동자 한 명이 절에 남아 있게 되었다. 외부 손님이 “화상께서는 어떤 불법을 이야기하고 계시나요?”라고 묻자, 동자도 구지 화상을 본떠 손가락을 세웠다. 구지 화상이 이런 사실을 듣고, 동자를 불러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랐다. 동자는 고통으로 울부짖으며 방 밖으로 나가고 있는데, 구지 화상은 동자를 다시 불렀다. 동자가 고개를 돌리자, 바로 그 순간 구지 화상은 손가락을 세웠다. 동자는 갑자기 깨달았다. 구지 화상이 세상을 떠나면서 여러 제자들에게 말했다. “나는 천룡 스님에게서 ‘한 손가락 선’을 얻어 평생 동안 다함이 없이 사용했구나!” 말을 마치자 그는 입적했다.

 

- 무문관 3칙, ‘구지수지(俱胝竪指)’ -

 

1. 불교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도 ‘구지수지’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어 보았을 겁니다. 구지 스님은 손가락 하나를 들어서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사달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사달의 전말을 들은 구지 스님은 동자의 손가락을 잘라 버립니다. 왜 잘랐을까요? 아마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대답할 수 있을 겁니다. 동자는 깨닫지 못했으면서도 깨달은 사람의 흉내를 냈기 때문입니다. 흔히 선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자신의 본래면목을 실현하는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이제 분명해 집니다. 구지 스님의 눈에는 동자의 행동이 본래 면목을 실현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가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 것입니다. 구지 스님이 손가락을 자르니 동자는 얼마나 고통스럽고 놀랐겠습니까? 그래서 동자는 고통과 당혹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님으로부터 몸을 돌려 바로 도망치려고 했던 겁니다. 바로 그 순간 구지 스님이 동자를 부릅니다. 피가 철철 흐르는 손을 부여잡고 문을 나서려다가 동자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립니다. 그러자 구지 스님은 자신의 손가락을 세웁니다. 바로 이 순간 동자는 깨닫게 됩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은 구지 스님이 아닌, 동자의 입장에 서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은 세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 마치 자신이 구지 스님이라도 되는 것처럼 진리마저 흉내 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 16 -

 

2. 진리라도 흉내 내서는 안 된다는 깨달음만이 세 번째 관문의 취지입니다. 장자(莊子) 라는 책에는 ‘한단지보(邯鄲之步)’라는 고사가 하나 등장합니다. 초(楚)나라 사람이 세련되어 보이는 조(趙)나라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다가 조나라 스타일의 걸음걸이도 익히지 못하고 예전 초나라 스타일의 걸음걸이마저 까먹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의 흉내를 내지 않는 것만으로 깨달음에 이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자기만의 차이를 실현할 수 없다면, 우리는 항상 남을 흉내 내는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으니까 말입니다.

 

■ 창조성과 자유

 

남전 화상은 동당과 서당의 수행승들이 고양이를 두고 다투고 있으므로 그 고양이를 잡아들고 말했다. “그대들이여. 무엇인가 한 마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 줄 테지만, 말할 수 없다면 베어버릴 것이다.” 수행승들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남전은 마침내 그 고양이를 베어버렸다. 그날 밤 조주가 외출하고 돌아왔다. 남전은 낮에 있었던 일을 조주에게 이야기했다. 바로 조주는 신발을 벗어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나 남전은 말했다.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

 

- 무문관 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

 

1. 깨달았다는 스님이 고양이를 단칼에 잘라버릴 경천동지할 사건이 발생합니다. 자비를 표방하는 스님이 거침없이 저지른 잔혹한 행위를 보고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겁니다. 일반 신도들도 지키고 있는 불살생(不殺生)의 계율, 그러니까 살아 있는 것을 죽이지 말라는 계율을 남전(南泉 748-834) 스님은 헌신 버리듯이 버린 것이니까 말이다. 도대체 스님이 무슨 이유로 잔혹한 행위를 저지른 것일까요. 자신이 제자들로 품고 있던 수행승들 사이에 벌어진 갈등이 그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동당(東堂)에 거주하던 수행승들과 서당(西堂)에 거주하던 수행승들이 고양이 한 마리를 놓고 다투면서 일이 벌어집니다. 동당이든 서당이든 어느 한 쪽 수행승들이 기르고 있던 고양이의 다리가 - 17 - 반대쪽 수행승들의 실수로 부러졌나 봅니다. 문제는 동당과 서당에 속해 있던 수행승들은 평소에 반목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상호간의 오해와 불신 속에서 수행승들은 자신의 본분을 자기도 모르게 잃어버리게 됩니다. 깨달음과 자비에 대한 염원은 봄눈 녹듯이 사라져 버린 겁니다. 승려의 행색은 하고 있지만, 이제 동당과 서당의 수행승들은 저잣거리의 무지렁이들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진 겁니다. 남전 스님이 스승으로서 이 꼴을 보고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그 순간, 스님은 시퍼런 칼을 들고 다리가 부러진 불쌍한 고양이를 잡아 들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사실 남전 스님이 잡아 든 것은 고양이라기보다는 고양이를 통해 드러난 수행승들의 온갖 의심과 집착이었던 겁니다. 남전 스님은 동당과 서당의 수행승들이 집착하는 마음들을 한 손에 꽉 움켜쥔 셈입니다. 불쌍한 고양이에게 칼을 겨누면서 스님은 고양이의 생사를 제자들에게 맡겨버립니다. “그대들이여 무엇인가 한 마디 말을 할 수만 있다면 고양이를 살려 줄 테지만, 말 할 수 없다면 베어버릴 것이다.”

 

2. 수행승들은 아무런 말도 없었고, 고양이는 두 동강 납니다. 깨달음의 말, 그러니까 깨달은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말 한마디면 고양이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고양이에 사로잡힌 마음으로 수행승들이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수행승들에게 집착을 끊으라는 가르침으로 남전 스님은 고양이를 벤 것입니다. 남전 스님이 외출에서 돌아온 조주(趙州 778-897)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다시 언급한 것도 이런 씁쓰레함이 마음에 남아 있어서인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조주는 신발을 머리에 얹고 밖으로 나가버립니다. 그러자 남전 스님은 고양이의 죽음이 더 안타깝기만 했습니다. 스님의 말대로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조주 스님이 바보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발을 머리에 얹었다는 것은 조주가 집착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상징합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모자는 머리에 얹고 신발은 발에 신는 것을 영원한 진리이자 - 18 - 규칙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까 결코 신발을 머리에 얹거나 모자를 발에 신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주인공이 아니라 습득한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노예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요? 반면 신발을 머리에 얹음으로써 조주는 신발과 모자와 관련된 일종의 통념, 혹은 기존의 생활양식을 경쾌하게 부정해 버립니다. 이런 부정이 가능했던 것은 그가 맹목적으로 답습되는 통념과 양식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일 겁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남전스님이 조주가 깨달았다고 확신했던 이유는 조주의 행동에서 그 자유로움을 보았기 때문입 니다.

 

3. 칸트(1724-1804)의 ‘판단력 비판’은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칸트는 판단력을 ‘규정적 판단력과 반성적 판단력’으로 구분합니다. 모자는 머리에 쓰고 신발은 발에 신어야 한다는 기존의 규칙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 규정적 판단력이라면, 기존의 규칙을 부정하고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 내는 판단이 바로 반성적 판단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규정적 판단력이 규칙을 따르는 생각이라면, 반성적 판단력은 규칙을 창조하는 생각이라고 간단히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당연히 규정적 판단력에 지배되는 사람은 기존 규칙을 따르는 충실한 노예, 혹은 기존 규칙에 집착하고 있는 평범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반면 반성적 판단력을 수행하는 사람은 새로운 규칙을 창조하는 주인, 혹은 깨달음을 얻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제야 죽어 가는 고양이 앞에서 아무 말도 못했던 수행승들과 고양이 사건의 전말을 듣고 신발을 머리에 얹고 방 바깥으로 나간 조주 스님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지 분명해집니다. 수행승들이 규정적 판단력에 지배되고 있었다면, 조주 스님은 바로 반성적 판단력을 상징했던 겁니다. 불교에서 꿈꾸는 깨달음의 이상이 무애(無碍)와 자재(自在)인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서 ‘무애’는 어떤 것에도 막힘(碍 거리낄 애)이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자재’는 스스로 존재한다는 것, 즉 주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결국 깨달음은 우리에게 어디에도 막힘없는 주인공의 자유를, 마침내 새로운 삶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이기 때문이지요. - 19 -

 

 ■ 앵무새 죽이기

 

덕산이 가르침을 청하러 왔을 때 마침 밤이 되자 용담 스님은 말했다. “밤이 깊었으니 그대는 그만 물러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래서 덕산은 인사를 하고 발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바깥이 너무 어두워서 되돌아와서 말했다. “바깥이 깜깜합니다.” 그러자 용담 스님은 종이 등불에 불을 붙여 건네주었다. 덕산이 그것을 받으려고 할 때, 용담스님은 등불을 꺼버렸다. 바로 여기서 덕산은 갑자기 깨닫고 용담 스님에게 절을 했다. 그러자 용담 스님은 물었다. “그대는 어떤 불법의 도리를 보았는가?” 덕산은 “저는 오늘 이후로 천하의 노화상께서 하신 말씀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 중 략 ) 마침내 덕산은 ‘금강경’의 주석서를 법당 앞에 들고 나와 횃불을 들고 말했다. “불교의 모든 심오한 변론들을 남김없이 밝힌다고 해도 허공에 터럭 하나를 날리는 것과 같고, 세상의 모든 진리를 모조리 갈파한다고 해도 물 한 방울을 거대한 계곡에 떨어뜨리는 것과 같다.” 이어 주석서를 불태우고 용담스님을 떠났다.

 

- 무문관 28칙, 구향용담(久響龍潭) -

 

1. 불립문자(不立文字)! ‘문자를 통한 지적인 이해를 표방하지 않는다’는 선언입니다. 이 슬로건만큼 선종의 특징을 잘 보여 주는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하긴 자신의 삶을 당당한 주인공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이 자신의 마음이 아니라 말이나 글에 얽매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일 겁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말이나 글, 즉 문자란 기본적으로 인간이 자신의 속내를 타인에게 전달하는 수단이라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불립문자’라는 선언으로 선사들은 영원한 침묵을 선택했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선사들이 부정하려고 했던 문자는 자신의 문자가 아닌 타인의 문자일 뿐입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타인의 말이나 글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노예의 삶이지 주인의 삶일 수는 없으니까요. - 덕산(德山 782-865) 용담을 만나 문자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중요함을 깨달음, 용담을 만나기 전 그는 ‘불립문자’를 주장하는 선종(禪宗)의 오만함을 깨 부수고 싶었음 - 20 -

 

2. 불행히도 중국 예주로 내려가던 중 어느 노파를 만나면서 덕산 스님의 자신감은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길가에서 어느 노파가 간식을 팔고 있었습니다. 허기가 느껴진 덕산은 노파에게 먹을 것을 요청합니다. 음식을 준비하면서 노파는 덕산에게 지나가는 듯이 물었습니다. “스님 수레 속에는 어떤 책이 있나요?” “금강경 주석서입니다.” 그러자 노파가 다시 물었습니다. “금강경에는 ‘과거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현재의 마음도 잡을 수 없고, 미래의 마음도 잡을 수 없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스님께서는 어느 마음으로 점심을 드시려고 합니까?” 덕산 스님은 노파의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당혹감과 낭패감 때문에, 덕산 스님은 서둘러 말꼬리를 돌리게 됩니다. “이 근처에 어떤 선사가 계십니까?” 노파는 5리쯤 떨어진 곳에 용담 스님이 있다고 대답해 주게 됩니다. 이렇게 무엇에 쫓기듯 덕산 스님은 경황없이 용담 스님을 찾아가게 된 겁니다. ‘금강경’을 달달 외웠을 정도로 덕산 스님은 경전 내용에 정통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이해는 단지 지적인 것에 그쳤을 뿐 자신의 삶에 조금도 적용할 수 없었던 겁니다. - 그날 저녁 용담과 만나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던 덕산은 숙소로 가려고 용담스님의 방에서 나오다가 → 밖이 캄캄해서 다시 들어가 등불을 달라고 합니다 → 등불을 만들어서 덕산에게 주던 용담은 다시 불을 꺼버립니다. 여기서 등불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상징입니다. 우리는 그 등불을 바로 용담 스님이 만들어 주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 등불은 바로 앞서 깨달았던 사람들의 가르침, 그러니까 ‘금강경’과 같은 경전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용담 스님이 등불을 훅 불어 끄자마자 덕산은 깨닫게 됩니다. 그는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요? 덕산의 깨달음을 이해하려면, 등불이 켜지면 등불로 환한 부분과 등불이 미치지 않아 어두운 부분이 구별되어 나타납니다. 반면 등불이 꺼지는 순간 그런 구분은 씻은 듯이 사라질 것입니다.

 

3. 마침내 용담 스님을 통해 덕산은 자신이 왜 노파에게 쩔쩔 맸는지 그 이유 - 21 - 를 깨닫게 됩니다. ‘금강경’에 집착하고 있었기 때문에, 덕산은 노파의 질문에 대응할 수 없었던 겁니다. 다시 말해 모든 것을 ‘금강경’에 입각해 바라보고 생각했기 때문에 덕산은 ‘금강경’이라는 등불이 비추지 못하는 것을 볼 수도, 생각할 수도 없었던 것이지요.

 

■ 카르페 디엠!

 

어느 스님이 “무엇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요?” 라고 묻자, 조주 스님이 대답했다. “뜰 앞의 잣나무!”

 

-무문관 37 칙, 정전 백수(庭前柏樹) -

 

1. 히말라야(Himalaya)를 아시나요? 에베레스트를 정점으로 해발고도 8,000미터가 넘는 수많은 고봉들을 품고 있는 장대한 산맥입니다. 산스클리트어로 생각해 보면 히말라야는 ‘힘(him)’이라는 어근과 ‘알라야(alaya)’라는 어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힘이 눈(雪)을 의미한다면, 알라야는 저장(藏)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인도로 구법 여행을 떠났던 중국 승려들은 히말라야산맥을 한자로 설장산(雪藏山)이라고 표현했던 겁니다. 그러니까 눈을 가득 저장하고 있는 산, 즉 만년설을 가득 폼고 있는 산이라는 뜻이지요. 중관학파(中觀學派)는 모든 것은 불변한다는 극단적 본질주의와, 모든 것은 순간순간 변해서 덧없다는 허무주의의 중도적 입장을 말하는데, 중관학파의 생각에 따르면 벚꽃이 덧없이 진다는 이유로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허무주의적 생각도 집착이고, 벚꽃이 지더라도 벚꽃은 불변하는 영혼처럼 다른 세계에 영원히 살고 있다는 본질주의적인 생각도 집착일 수밖에 없습니다. 유식학파(唯識學派)에 따르면 불변하는 것에 대한 맹신이나 변화하는 것에 대한 절망은 모두 우리 마음이 세상과 자신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겁니다. 이런 유식학파의 사유에서 ‘알라야’라는 개념은 아주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유식학파는 인간의 가장 심층에 있는 의식을 바로 ‘알라야(alaya) 의식’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그가 어떤 곳에서 어떻게 살아왔든지 간에 그 삶의 흔적이 마음 깊은 곳에 그대로 저장되어 있다는 겁니다. - 22 - 유식학파에서 알라야 의식을 중시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심층의식이 ‘나라는 집착’ 그러니까 아집(我執)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하긴 보통 자신에게 지나치게 집착하는 사람은 사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이지 않던가요. 불행한 사고로 손을 잃은 사람이나, 혹은 정치적 사건으로 권력을 잃은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가 손이 있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혹은 권좌에 있었을 때 존경받던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바로 알라야 이식이 작동하는 겁니다. 그는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살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당연히 그는 자신의 과거에 사로잡혀서 자신의 삶에 주어진 것에 ‘있는 그대로’ 대응할 수 없을 겁니다. 유식학파가 알라야 의식을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고 강조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과거에서 자유로울 때에만 우리는 ‘여기 그리고 지금’ 주어진 삶의 주인으로서 당당히 살아낼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2. 유식학파에서는 말합니다. 과거와 단절해야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고, 오직 그 순간 해탈이라는 대자유를 향유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이제 드디어 ‘무문관’의 서른일곱 번째 관문을 통과할 준비가 대충 갖추어진 것 같습니다. 이 관문을 지키고 있는 스님은 바로 조주입니다. 제자 한 명이 스승 조주에게 물어봅니다. “무엇이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인가요?” 여기서 달마는 중국에 선종의 기풍을 가져와 첫 번째 스승, 즉 초조(初祖)로 추앙되는 페르시아 출신의 서역승 보리 달마(菩提達磨)를 가리킵니다. 조주 스님의 제자는 얼마나 야심만만합니까.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을 알면, 이미 스스로 조사가 된 것이니까요. 한 번에 깨달음을 얻겠다는 조바심도 보이는 대목입니다. 그렇지만 조주 스님은 너무나 쿨하게 말합니다. “뜰 앞의 잣나무!” 제자는 잣나무를 자신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뜰 앞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물로 인식하고 있지만 스승에게 잣나무는 자신의 마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는 자신의 마음으로 사물들을 보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고 사물들이 자기 마음과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던 겁니다. 반면 조주스님은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네 마음에 주목해라!’ ‘네 마음이 없다면 사물도 존재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습니다. 지금 ‘뜰 앞의 잣나무!’라고 거듭 말하면서 조주 스님은 살아 있는 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 23 -

 

3. 더 숙고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것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뜰 앞에 펼쳐져 있는 잣나무들이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는 점입니다. 만일 어제 읽던 경전의 내용이나 아침에 제자와 나누었던 대화에 마음이 가 있었다면 조주 스님의 눈에 잣나무들이 들어왔을 리 없을 겁니다. 이 대목이 중요합니다. 조주 스님의 마음은 ‘지금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의 집착에서 벗어나 깨달은 마음, 즉 자유로운 마음이 아닌가요. 불행히도 제자의 눈에는 여전히 잣나무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저 오랫동안 품고 있었던 의문만이 그의 마음을 채우고 있으니까 말입니다. 오히려 제자는 지금 자신의 스승이 선불교 특유의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식’의 대화법을 사용한다고 짜증까지 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조주 스님에게 제자는 “화상께서는 경으로 보여주지 마십시오”라고 투정을 부릴 수 있었던 겁니다. 지금 자신이 듣고 싶은 이야기는 200여 년 전 ‘달마 대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스승은 자꾸 “뜰 앞의 잣나무!”만 외치고 있으니 어찌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제 ‘무문관’의 서른일곱 번째 관문이 생각보다 난해하지 않은 것 같지요? 그렇습니다. 조주 스님의 마음이 지금 바로 여기에 있다면, 제자의 마음은 200여 년 전 달마 대사에게로 가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다시 말해 ‘여여’하게 사태를 보세요. 달마 대사는 단지 제자의 기억 속에만 존재할 뿐 아닌가요. 알라야 의식을 끊어야 합니다. 이것은 과거나 기억에 매몰되어 있는 마음을 극복한다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의 마음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살아 있는 마음일 수 있을 테니까요. 아무리 절실하더라도,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는 자유로운 마음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지금 여기에 살아 있을 때, 그래서 “뜰 앞의 잣나무”가 확연히 드러날 때, 우리 자신이 이미 석가나 미륵처럼 깨달은 사람이 되어 있을 테니 말입니다. 과거의 기억에 매몰되거나 미래의 염려에 사로잡혀 있으면 안 됩니다. 그 순간 잣나무뿐만 아니라 사랑하는 것, 사랑해야만 하는 것들도 우리 눈에 들어올 수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후회나 염려의 마음이 강하면 우리의 마음은 현재에 열릴 수가 없습니다. - 24 - 한 마디로 우리는 현재라는 시제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겁니다. 이 점에서 불교가 지향하는 깨달음은 너무나 단순하다고 할 수 있지요. ‘잃어버린 현재를 찾아서!’ 기억나시나요?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역설했던 이야기 말입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찾아라!”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 자의식이라는 질병 대매가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라고 묻자, 마조 스님은 “마음에 이르면 부처다”라고 말했다.

 

- ‘무문관’ 30칙, 즉심즉불(卽心卽佛)-

 

무아(無我, anatman)! ‘불변하는 실체(我, atman)가 존재하지 않는(無)’ 입장은 아마도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관통하는 근본적인 입장일 겁니다. 사실 산스크리트어의 ‘아트만(atman)’은 정확히는 불변하는 실체나 본질의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물(法無我)에도 아트만이라는 용어를 쓸 수도 있고, 아니면 우리와 같은 인간(人無我)에게도 아트만 이라는 용어를 쓸 수도 있는 겁니다. 법무아의 경우를 살펴볼까요. 눈사람이 영원히 자기 곁에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꼬마가 하룻밤 사이에 눈사람이 허무하게 녹아버렸다면 그 마음이 많이 아팠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눈사람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도, 따라서 불변하지도 않습니다. 모든 사물에게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는 순간 우리는 사물에 대한 해묵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고, 동시에 그만큼 우리의 마음도 고통과 불만족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겁니다. 인무아는 ‘불변하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인생에서 가장 좋은 때, 그러니까 가장 행복할 때의 모습을 진정한 자기의 모습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대한 현자들이 인간을 허영덩어리라고 지적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하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기도 합니다. 가장 불행하고 우울할 때의 모습이 진정한 자기의 모습이라고 믿는 것만큼 불쾌한 일도 없을 테니까요. 허영이든 무엇이든 진정한 자기의 모습, 그러니까 불변하는 자아가 있다고 - 25 - 믿고 그것에 집착하는 순간, 우리에게는 항상 고통과 불만족이라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오는 법입니다. 그렇지만 불교에서는 이런 고통과 불만족이 외부의 불청객이라기보다는 우리가 불러내는 유령과도 같은 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일체유심조, 즉 ‘모든 것이 내 마음이 지어낸 것일 뿐’이라는 가르침도 바로 이런 우리 마음의 메커니즘을 폭로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해탈이란 자아에 대한 집착, 그러니까 해묵은 자의식을 버려서 마침내 마음에 평화와 행복이 깃드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니까요. 2. 무아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 ‘아나트만(anatman)’이라는 글자를 들여다보세요. 이 글자에는 부정을 뜻하는 접두사 ‘안 (an)’, 그리고 불변하는 자아를 뜻하는 ‘아트만(atman)’이 들어 있습니다. 여기서 아트만을 단순한 자아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평생 동안 변하지 않는 자아, 심지어 이 세상을 떠나 육신이 썩어 없어져도 소멸하지 않는 불변하는 자아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싯다르타가 살았던 당시 인도 브라만 사상가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자아를 만들어 그것에 집착하는 것도 우리의 마음이고, 동시에 집착을 끊는 것도 바로 우리 마음입니다.

 

2세기 경 인도 중부에서 활동했던 이론가 마명(馬鳴)이 지었다고 알려진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에서 우리 마음에는 생멸(生滅)의 측면과 아울러 진여(眞如)의 측면도 있다고 강조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집착 때문에 마음이 희로애락으로 널뛰기 하는 것이 생멸의 마음이라면, 집착을 끊어서 마음이 고요한 물처럼 안정된 것이 바로 진여의 마음이라는 겁니다. 결국 생멸의 마음이 자의식을 지배하는 마음이라면, 진여의 마음은 자의식을 극복한 마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무문관’의 서른번째 관문에 등장하는 대매(大梅, 752-839) 스님과 마조(馬祖 709-788) 스님 사이의 선문답도 바로 마음의 이런 측면을 다루고 있습니다. 대매 스님이 부처, 그러니까 진여의 마음을 갖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묻자, 마조 스님은 “마음에 이르면 부처(卽心是佛)”라고 대답합니다.

 

3. 선종에서는 ‘덕산방(德山棒, 棒 : 몽둥이 봉 또는 방)’이니 ‘임제할(臨濟喝, 喝 - 26 - 꾸짖을 갈, 목멜 애)’과 같은 충격 요법이 있었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칠 때 덕산 스님이 ‘몽둥이(棒)’를, 그리고 임제 스님이 ‘고함소리(喝)’를 사용했던 것은 유명한 일입니다. 무엇 때문에 덕산과 임제는 이런 파격을 행했던 것일까요? 제자가 자의식이 강할 때, 그러니까 무엇인가를 고민하면서 내면에 빠져 있을 때, 두 스님은 갑자기 몽둥이를 내려치거나 갑자기 소리를 질러 제자의 마음을 깨우고자 했던 것입니다. 갑작스런 외부의 충격은 일순간이나마 자의식의 활동을 완화시키거나 중지시키기 때문이지요. 바로 이 순간 사라진 것처럼 보이던 무반성적인 의식 그러니까 활발발의 마음이 다시 출현하게 될 것입니다. 무반성적인 의식 상태에서 자의식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무아’의 상태가 시작된 것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해탈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즉심시불! 자의식을 떠나서 마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우리는 나 자신에 사로잡힌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세계에 열려있는 부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바깥으로 나가라!’ 이것이 바로 무아와 해탈을 꿈꾸는 모든 수행자들의 실천적 슬로건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것이야말로 샤르트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의 정신이기도 하다는 점입니다. 실존 이라는 말 자체가 우리 인간이란 ‘밖으로 향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 내재로의 당당한 길

 

어느 스님이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라고 묻자. 운문 스님은 “마른 똥 막대기”라고 말했다.

- 무문관 21칙, ‘운문시궐(雲門屎橛)’ -

 

1. 보통 한국 사회의 종교는 불교와 기독교로 양분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불교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리 없는 평가입니다. 근본적으로 불교는 신과 같은 절대자를 숭배하는 초월 종교와 함께 분류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절대적인 존재로서 신을 숭배하는 초월종교인 기독교와 달리 불교는 내재적 사유체계입니다. 초월이 우리의 삶과 세계를 넘어서는 곳을 지향한다면, 내재는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세계와 그, 속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삶을 긍정하는 입장입니다. 그러니까 내재적 사유에 따르면 우리 자신의 노력에 따라 세계가 극락도 될 수 있고 지옥도 될 수 있는 겁니 - 27 - 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따라 삶 자체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된다는 입장, 이것이 내재적 사유가 기독교와 같은 초월종교와 다른 지점입니다. 간단히 말해 기독교에서는 어떤 노력을 해도 인간이 절대로 신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면, 불교는 노력 여하에 따라 인간이 신처럼 될 수 있다고 말한다는 겁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어떤 노력을 해도 신이나 예수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심판의 대상, 혹은 구원의 대상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인간은 원죄를 가진 죄인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아담과 이브에서 시작된 일종의 연좌제적 사유인 셈이지요. 부모가 죄인이니 자식도 죄인이라는 조금은 유치한 발상입니다. 어쨌든 만약 행복이 있다면, 그것은 사후에 심판을 거쳐야 간신히 허락된다는 겁니다. 사찰을 떠나 집으로 돌아가는 우리를 부고 스님들이 간곡히 기원하던 말이 무엇이던가요. “성불하세요!” 성불! 그렇습니다.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 주인공처럼 당당한 사람, 그래서 모든 것을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바로 이런 사람이 부처니까 말입니다. 우리는 집착으로 고통과 불만족에 시름하는 평범한 사람으로 살 수도 있고, 아니면 모든 집착을 끊은 부처로서 살 수도 있는 겁니다. 2. 우리는 존경하는 사람에게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우리의 고민을 털어 놓고 조언을 구합니다. 그렇지만 이 순간 우리는 속으로 다짐합니다. 언젠가 나도 저분처럼 스스로 삶을 냉철하게 볼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불상에게 예배하는 행위는 이런 의미가 아니면 어떤 가치도 없는 행위입니다. 성불할 때까지 그러니까 자신이 부처가 될 때까지 부처가 되었던 사람들에게 예의를 표하는 겁니다. 그래서인지 사찰에 가면 싯타르타 이외에도 너무나 많은 불상이 있습니다. 그 불상들은 모두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던 사람들을 기리는 것입니다. 미륵이라는 부처도 사실 치열한 노력으로 깨달음에 이른 인도 사람 마이트레야(Maitreya 270?-350?)를 가리키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불교 신도들은 불상에 대한 경배행위를 통해 기독교 신도가 그렇 - 28 - 듯이 마음의 평화를 얻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경배 행위는 일종의 방편(方便, Upaya)입니다. 무문관의 스물한 번째 관문에서 부처가 무엇이냐는 제자의 질문에 운문(雲門, 864-940) 스님의 대답은 차라리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마른 똥 막대기(건시궐 乾屎橛)!” 부처가 더럽고 추한 마른 똥 막대기라니, 운문 스님은 지금 미친 것일까요? 바로 이 대목이 여러분이 통과해야 할 관문입니다. 성스러운 부처에 모욕을 가하는 운문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요. 지금 운문 스님 사찰에 모신 황금 불상, 그러니까 도금한 불상을 염두에 두고 이야기를 한 것 같습니다. 황금만큼 똥색이 나는 것도 없으니까요. “마른 똥 막대기!” 지금 운문 스님은 제자의 숭배 대상을 똥통에 던져 버린 것입니다. 숭배하는 것이 없을 때에만, 제자는 스스로 주인공이 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3. 운문 스님의 우상파괴는 과거의 부처들을 숭배하느라 자신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제자를 깨우려는 사자후였던 셈입니다. “스스로 주인공이 되려고 결심한 놈이 다른 놈을 흉내 낸다니 말이 되는 소리인가!” 지금 운문의 제자는 주인공, 그러니까 주연의 자리를 버리고 조연을 선택하려고 했던 겁니다. 다른 것을 숭배한다는 것은 그것을 주인공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로 그 순간 우리의 삶은 조연의 삶으로 전락하게 될 겁니다. 스물한 번째 관문을 지나다 보니 젊은 시절 어느 사찰에서의 경험이 떠 오릅니다. 당시 패기만만했던 저는 어느 스님에게 말했습니다. “불상에게 경배한다면, 불교가 어떻게 기독교와 달라지겠습니까?” 그러자 노스님은 미소를 띠면서 제게 말했습니다. “불상은 선생님이 되어야 할 모습이니, 경배한다는 것이 무슨 허물이 되겠습니까? 알아서 하십시오.” 한 방 제대로 얻어맞은 셈입니다. 노스님이 살아 계신지 궁금해집니다. 이제 스님께도 제대로 경배하고 싶으니까요. 합장!

 

 ■ 마주침과 헤어짐의 기로

 

 월암 화상이 어느 스님에게 물었다. “해중은 100여개의 바퀴살을 가진 수 - 29 - 레를 만들었지만, 두 바퀴를 들어내고 축을 떼어 버렸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가?”

 

-무문관 8칙, ‘해중조거(奚仲造車)’ -

 

1. 불교에 관심을 가진 분이라면 ‘오온(五蘊)’ 이라는 말을 들어 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오온은 한자 의미 그대로 ‘다섯 가지 덩어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싯다르타가 우리 인간을 분석할 때 사용했던 개념입니다. 싯다르타는 우리 인간이 다섯 가지 덩어리로 구성되어 있는 존재로 보았습니다. 그 다섯 가지는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입니다. 여기서 색은 육체작용, 수는 감각작용, 상은 표상작용, 행은 의지작용, 그리고 마지막으로 식은 판단작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오온설을 제안했던 싯다르타의 속내는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인간에게는 고정불변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인간을 구성한다는 오온에 자아가 포함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온 중 어느 하나라도 사라지게 된다면, 우리의 삶은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자아는 불변하는 것이라기보다 오온이 작동하는 방식과 강도에 따라 요동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영원불변한 아트만과 같은 자아가 존재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인 셈이지요.

 

2. ‘무문관’의 여덟 번째 관문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사람은 월암(月庵 1079-1152) 스님입니다. 관문을 막고 서서 월암 스님은 화두 하나를 던지며 우리에게 겁을 줍니다. 자신이 던진 문제를 풀지 못하면, 여덟 번째 관문을 통과할 수 없다고 우리를 닦달하면서 말입니다. “해중(奚仲)은 100개의 바퀴살을 가진 수레를 만들었지만, 두 바퀴를 들어내고 축을 떼어버렸다. 도대체 그는 무엇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가?” 중국의 전설적인 장인 해중은 수레 제조의 천재였습니다. 현재 좋은 자전거도 바퀴살이 40개를 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퀴살이 100개나 되는 바퀴를 만들었다는 것은 해중이라는 장인이 얼마나 실력이 탁월한지, 그리고 그가 만든 수레가 얼마나 고가의 것인지를 어렵지 않게 짐작하도록 합니다. 그런 고가의 수레를 천연덕스럽게 해중은 해체해 버린 겁니다. 도대체 해중은 무엇 때문에 수레를 해체했던 것일까요? - 30 -

 

3. 해중이 수레를 해체했을 때, 그 고가의 수레는 어디로 갔을까요? 바퀴에 갔을까요? 아니면 축에 갔을까요? 아니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나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세계에 갔을까요? 수레는 아무 데도 가지 않았습니다. 해체되는 순간 수레는 존재하지 않는 겁니다. 불행히도 이런 통찰은 있는 그대로 사태를 보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일 겁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고가의 수레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부수어 버릴 것이라면, 내게 주면 얼마나 좋아!’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해중이 수레를 과감하게 해체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월암 스님은 우리들에게 무아의 가르침을 깨달아 불변하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라고 촉구하고 있었던 겁니다. 고가의 수레는 바퀴나 축을 포함한 다양한 부속품들이 모여서 발생한 표면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수레가 고가이기 때문에, 즉 너무 희귀하고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집착의 대상이 될 수도 있는 법입니다. 월암 스님이 해중이 만든 귀한 수레를 화두의 소재로 삼은 것도 이런 이유에서일 겁니다. 고가의 수레는 우리가 소중하다고 여기는 것들, 그러니까 자아, 생명, 건강, 사랑 등등을 상징할 수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해중의 수레처럼 영원불변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여러 원인과 조건들이 모여 간신히 존재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연히 인연이 끝나면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 이르는 곳마다 편안한 여행

 

동산 스님이 설법하려고 할 때, 운문 스님이 물었다. “최근에 어디에서 왔는가?” 동산은 “사도(査渡)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운문 스님이 “여름에는 어디에 있었는가?” 라고 묻자 동산은 “호남의 보자사(報慈寺)에 있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바로 운문 스님이 “언제 그곳을 떠났는가?” 라고 묻자 동산은 “8월 25일에 떠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운문 스님은 말했다. “세 차례 후려쳐야겠지만 너를 용서하마.” 동산은 다음 날 다시 운문 스님의 처소로 올라와 물었다., “어저께 스님께 서는 세 차례의 몽둥이질을 용서하셨지만 저는 제 잘못이 어디에 있는지 모 - 31 - 르겠습니다.” 그러자 운문 스님이 말했다. “이 밥통아! 강서로 그리고 호남으 로 그런 식으로 돌아다녔던 것이냐!” 이 대목에서 동산은 크게 깨달았다.

 

- ‘무문관’ 15칙, 동산삼돈(洞山三頓) -

 

1. 전등사(傳燈寺)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381년 고구려 소수림왕 (?-384)때 창건되었다고 하는 강화도에 있는 사찰이지요. 그리고 선불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전등록’이라는 책도 있습니다. 중국 송나라 때(1004), 도원이라는 스님이 지은 일종의 선불교 사상사이지요. ‘전등(傳燈)’이라는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이 단어만큼 선불교의 정신을 잘 보여주는 개념도 없기 때문입니다. ‘전등’은 ‘전달한다’는 의미를 가진 ‘전(傳)’이라는 글자와 ‘등불’을 의미하는 ‘등(燈)’이라는 글자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등불을 전달한다는 것입니다. 언어나 문자가 아니라 깨달은 마음을 전달해 주는 것이 선불교의 정신입니다. 결국 이심전심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전등’이라고 할 수 있지요. 무문 스님의 스승, 그 스승의 스승, 또 그 스승의 스승을 쭉 따라 올라가다보면, 우리는 선불교 역사에서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뿜어냈던 스님 한 분을 만나게 됩니다. 바로 임제 스님입니다. 그렇습니다. 무문 스님은 임제의 정신을 잇고 있는 선사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무문관’ 48개의 관문에는 임제 스님을 눈을 씻고 찾아보려고 해도 흔적도 없다는 점입니다. 무슨 이유에서 일까요? 무문 스님은 위대한 스승 임제를 부정했던 것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무문관’을 읽다 보면 사정은 그 반대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임제가 너무나 위대했기에 무문 스님은 무문관이 만들어 놓은 48개 관문 중 어느 하나를 지키는 역할을 부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공자의 말을 빌리자면 “어떻게 닭을 잡는데 소를 잡는 칼을 쓸 수 있겠습니까?”

 

2. 사자처럼 단호하고 맹렬했던 임제 스님의 정신은 지금도 임제록에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임제의 속내를 가장 분명히 보여주는 것은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이라는 그의 사자후가 아닐까 싶습니다. ‘수처작 - 32 - 주 입처개진’이란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 다’는 뜻입니다. 사실 여덟 글자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은 임제의 도전적인 가르침을 요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이건 밖이건 만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바로 죽여 버려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고 친척을 만나면 친척을 죽여라. 그렇게 한다면 비로소 해탈할 수 있을 것이다.”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해탈한다는 것, 그래서 부처가 된다는 것은 일체의 외적인 권위에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 당당한 주인공이 된다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결국 미래를 끊고, 과거를 끊어야 해탈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임제 스님이 말하고자 했던 겁니다. 미래와 과거를 끊었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게 될까요. 당연히 그것은 현재라는 시제일 것입니다. 이제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모든 곳마다 모두 참되다”라고 말한 임제 스님의 속내가 분명해지지 않나요. 무문관의 열다섯 번째 관문에서 운문 스님이 동산(洞山 910-990) 스님에게 몽둥이질을 하려고 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이 밥통아! 강서로 호남으로 그런 식으로 돌아다녔던 것이냐!” 어느 곳에서나 삶의 주인이 된다면, 바로 그것이 해탈이고 성불입니다. 그런데 동산 스님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닌 겁니다. 그러니 불호령을 내릴 수밖에요.

 

3. 여행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가짜 여행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 여행입니다. 눈치가 빠르신 분은 금방 무슨 말인지 금방 짐작하실 겁니다. 가짜 여행은 출발지도 있고 목적지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짜 여행을 하는 사람은 여행 도중에서도 항상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느라 여행 자체를 즐길 수가 없습니다. 서둘러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고 그리고 서둘러 출발지로 되돌아와야만 하니까요. 당연히 여행 도중에서 만나게 되는 코를 유혹하는 수많은 꽃 내음들, 뺨을 애무하는 바람들, 실개천의 속삭임들, 지나가는 마을에서 열리는 로멘틱한 축제조차도 그는 향유할 수 없을 겁니다. 아니,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이런 사건과 사물들을 저주하기까지 할 것입니다. 이런 - 33 - 것들은 모두 목적지에 가는데 장애가 되는 것들이기 때문이지요. 결국 그에게 여행의 주인공은 그 자신이라기보다는 출발지와 도착지라고 해야 할 겁니다. 장자(莊子, BC 369-BC 289?)는 진짜 여행을 ‘소요유(逍遙遊)’라고 표현했던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소요(逍遙)’라는 말은 ‘아무런 목적도 없이 한가하다’는 의미입니다. 장자도 진짜 여행이란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않는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던 셈입니다. 진짜 여행을 하는 사람은 항상 여행 도중에 자유롭게 행동합니다. 멋진 곳이면 며칠이고 머물지만, 그렇지 않은 곳이면 과감하게 떠납니다. 인간의 삶을 여행에 비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의 삶 자체가 바로 여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번 밖에 없는 소중한 삶을 제대로 영위하려면 우리는 기원과 목적, 과거와 미래, 출발지와 목적지에 집착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발지와 목적지를 염두에 두지 않으니, 우리가 내딛는 걸음걸음 마다 자연스럽고 여유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임제 스님의 말처럼 모든 것이 참될 수밖에 없지요. 당연히 만나는 것마다 따뜻한 시선으로 모두 품어 줄 수 있을 겁니다. 반면 목적지로 가느라, 혹은 출발지로 되돌아오느라 분주한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을 돌보고 타인을 돌보는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자비로운 마음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무문관’의 열다섯 번째 관문을 통과하면서 우리의 가슴에 임제의 가르침을 한 글자 한 글자 깊게 아로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수隨, 곳 처處, 될 작作, 주인 주主, 설 입立, 곳 처處, 모두 개皆, 참 진眞.’ 수처작주, 입처개진! - 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모두 참되다. - 2014. 8. 12 * 다음에 제2부가 이어집니다. - 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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