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6. 24. 16:27ㆍ독서후기
보이는 소리 들리는 마음(2)
- 나는 듣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보는 사람입니다 -
■ 노선영 지음
제3부 들리지 않는 귀가 내게 준 선물
◉ 잊을 수 없는 로살리마 수녀님
헬렌 켈러에게 설리반 선생님이 있듯이, 내게는 애화학교 시절에 만난 로살리마 김정화 수녀님이 있다. 로살리마 수녀님은 선생님이 되라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수녀가 되었다. 하지만 선생님에 대한 미련을 버릴 수 없어 기도를 드렸다. 이 세상을 밝혀주는 좋은 선생님이 되게 해달라고.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설립한 애화학교를 방문했다. 수녀님은 소리 없는 세상에서 방황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자 충격을 받고 그길로 ‘로살리마’ 반을 담당하게 되었다.
1995년 봄, 나는 수녀님의 첫 제자가 되었는데 처음 뵈었던 때를 잊을 수 없다. 수녀님은 선한 인상에 동그랗고 커다란 안경을 쓴 모습이었다. 작은 일에도 늘 기뻐하며 호탕하게 웃으셨는데 그 모습이 마치 소녀 같았다.
나는 수녀님을 만나기 전에 의사소통의 고통으로 어둠 속에 있어야 했다.
“수녀님, 사람들은 제가 귀가 안 들리면 아프다고 생각해요. 저는 귀가 아프지 않아요. 다만 제가 아파하는 것은 사람들이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 전 아무래도 들을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니 머리가 나쁜 것 같아요.” 나는 힘없이 수화를 하며 울먹였다.
“선영아, 말이 지능을 나타내지 않아. 사람들에게 너의 감정과 생각을 글로 나타낼 수 있고 몸짓 언어로 너의 생각을 훌륭하게 표현할 수 있단다. 얼굴표정과 눈빛 그리고 침묵은 때론 말보다 더 진하고 강하지. 소통의 방법은 실로 무궁무진하단다.”
나는 이런 소통으로 차츰 닫힌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고 하나씩 배워나갈수록 어둠 속에서 벗어나면서 조금씩 희망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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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수녀님의 교육방법
- 함께 문집 만들기.
- 평택의 성요셉 양로원에 캠프가기 : 청각장애 노인 앞에서 공연과 봉사
- 교실 밖 데이트
- ‘이야기 나무’라는 수화 동화를 지어서 교육 : 운동장 구석의 사과나무 두 그루 / 매년 탐스런 사과가 조랑조랑 / 건물 증축 공사로 뽑혀 나가 한 그루는 재가 되고 / 남은 한 그루는 밑동을 잘라 교실로 가져 옴 / 그 사과 나무는 크리스마스 트리도 되고/ 소원 쪽지를 매다는 소원 나무도 되고 / 좋아하는 책이름도 매달고 / 가을이면 단풍도, 새둥지도, 새알도 품기도 하는 / 그래서 ‘이야기 나무’라 이름 짓고는…….
평생 제자들의 아픔과 고민을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올바른 삶으로 인도해주신 로살리마 수녀님. 만약 어린 시절에 수녀님에게 배운 사랑과 소통이 없었더라면 청각장애인으로서의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로살리마 수녀님은 내가 애화를 떠난 후 교장님이 되셨고, 현재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깊은 신앙심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얼마 전에 친구들과 수녀원에 놀러갔는데, 수녀님이 우리에게 일일이 작은 쪽지를 나눠주셨다. 그 쪽지를 펼쳐보니 아래와 같은 내용이 적혀있었다.
모든 일에 앞서 진정으로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용서해 줍니다. - 베드로 전서 4장 8절
◉ 내 귀가 되어준 소중한 우정
“안녕? 내 이름은 전혜영이야.”
풋풋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 수화동아리 ‘보이는 소리’에서 그녀를 만났다. 앞머리를 내린 갈색 생머리에 깔깔깔 웃는 모습이 사랑스런 친구였다. 선배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던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지만,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선뜻 다가가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저 그녀에게 손을 흔들 뿐 제대로 말을 걸지 못했다. 한 달 동안 수화를 어느 정도 배우고 노래수화를 연습하며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우리는 곧 마음을 터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가까워 질 수 있었다.
처음에는 그녀가 수회를 배우는 이유가 단지 호기심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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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나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수화를 공부했던 거였다. 수화를 통해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아무도 모르는 비밀의 언어로 우정을 쌓을 수 있었다. 그녀는 학창 시절에 줄곧 친구가 없었던 내게 다가온 소중한 우정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수화가 익숙해지고 서로 소통하는 일이 늘자 내게 통역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공강시간이면 종종 내가 듣는 수업에 들어와 수화나 문자 통역을 해주었다. 교수님의 입 모양만으로 수업내용을 파악하기 어려운 나를 배려한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통역으로 수업 내용에 고개를 끄덕이고 이해했다는 듯이 ‘아!’라는 감탄사를 내 뱉을 수 있었다. 그러다 수업 시간이 지루해질 때면 우리는 침묵의 수다를 떨기도 했다. 허공을 가르는 수화는 소리가 없으니 마음 놓고 대화할 수 있었다. 만일 그녀의 통역이 없었더라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아무런 표정도 짓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예쁜 모양의 수화 이름을 지어주고 싶었다. 농사회에서는 이름 대신 그 사람의 습관이나 외모의 특징을 잡아내 수화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름 지화를 그대로 한 자 한 자씩 하면시간이 걸리고 지루하기 때문에 혜영이 앞머리가 예쁘게 내려와 있어, 여자를 뜻하는 새끼손가락을 펴고 검지를 앞머리에 대는 모양의 수화를 만들어 줬다. 그녀는 지금도 내가 만들어준 수화 이름을 쓰는데 볼 때마다 친구로서 무척 자랑스럽다.
■ 농인이 한국영화를 즐기다니
“이 영화 볼래?”
어느 날 영화관에 걸린 ‘코리아’라는 영화 포스터를 짚으며 그녀가 물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1991년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사상 최초로 결성된 남북 탁구 단일팀의 46일간의 뜨거운 도전을 보여준다. 내가 좋아하는 장르지만 순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평소에 자막이 있는 외국 영화는 자주 보았지만 한국영화는 내게 무성영화와 다름없어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영화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어도 선택의 여지 없이 무조건 외국에서 수입된 영화를 봐야했던 것이다.
요즘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배리어 프리(Barrier-free, 시각 장애인을 위한 화면해설과 청각 장애인을 위한 한글자막 등을 제공하는 영화)’영화가 많이 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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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영화를 볼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걸까.’ 서운한 마음에 포스터를 보며 머뭇거리는데 그녀가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그러더니 “걱정 마!” 하고 밝은 표정으로 수화로 이야기 했다. “어떻게?” 놀라는 내게 그녀는 특유의 미소를 보이며 “가보면 알아!”하고 대답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영화관에 입장했는데 그녀가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 놀랐지만,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화에서 갈등이 시작되면 수화는 빨라졌고 과격해졌다. 노래가 흘러나올 때는 수화에 부드러운 리듬이 느껴졌다. 비록 어둠속이었지만, 스크린 빛으로 손가락 움직임이 더욱 반짝였다. 영화의 따스한 스토리와 함께 모든 게 색다른 감동으로 다가왔다.
마침내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쳐다봤다. 임무를 무사히 완수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였다.
“고마워…….”
그녀의 영화에 대한 수화 통역은 그동안 한국 영화를 보면서 겪은 소외감과 고통을 순식간에 날려주었다.
■ 나의 제1호 수화통역사
청각장애는 겉으로 장애가 보이지 않다보니 무임승차 카드를 사용할 때 역무원에게 제지당하는 경우가 많다. 개찰구를 마음 편히 다닐 수가 없을 정도다. 일부 역무원은 내가 청각장애인 행세를 했다고 의심까지 해서 설움을 겪을 때가 많았다. 하루는 혜영이와 지하철역을 가게 되었다. 나는 보란듯이 그녀와 신나게 수화로 대화하면서 개찰구를 통과했다. 그러자 제지하는 역무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녀 덕분에 그동안의 설움이 한순간에 눈 녹듯 사라졌다. 그녀와 함께 다니면 세상에 두려울 게 없었다.
한번은 혜영이와 함께 동대문 시장에서 옷을 고르고 있었는데 돌아보니 혜영이가 점원과 다투고 있었다. 이유는 내가 옷 구경을 하는 동안 판매직원이 내 뒤로 다가와 인사도 건네고 옷을 권유했다고 한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아무 대답도 없었던 나. 무시를 당했다고 오해한 직원은 화가 나서 나를 욕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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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한테 싸가지가 없다고 해서 한마디 해줬지 뭐.”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하며 가게를 나왔다.
살아가면서 의도치 않은 오해를 받는 것도 농인인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런 나를 친구가 지켜줄 때마다 고마움을 느낀다.
대학시절 수화동아리에서 ‘백설공주를 사랑한 난쟁이’라는 공연을 한 적이 있다. 그때 혜영이는 백설공주 역을 맡고 나는 백설공주를 괴롭히는 왕비 역을 맡았는데 공교롭게도 현실 속에서도 그렇다. 내가 듣고 싶은 강의가 있을 때마다 그녀를 불러 무상으로 수화나 문자 통역을 하게 한다. 내가 강의시간 내내 졸아도 그녀는 군말 없이 열심히 해주었다. 그럴 때면 내가 백설공주를 괴롭히는 왕비가 된 기분이 들었다.
“너는 착한 백설공주, 나는 너를 괴롭히는 왕비야. 하하!”
나는 그녀에게 수화로 말했다.
혜영이는 오랫동안 청인 사회에서만 살아와서 수화에 대해 그리고 농인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나를 만난 뒤부터 지금까지 수화가 몸에 배이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그런 노력 끝에 유창한 수화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고, 현재 농인을 위해 수화통역사로 일하며 사회의 소금과 빛이 되어주고 있다. 그녀에게 수화통역사의 꿈을 가지게 된 계기를 물어보았다.
“만약 너를 만나지 못했다면 수화통역사가 되지 못했을 거야. 너와 수화로 대화하면서 소통할 수 있는 기쁨과, 누군가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고 세상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어.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너의 제1호 수화통역사로 받아주겠니? 통역을 요청하면 언제든지 달려갈게.”
이처럼 특별한 우정이 다시 있을까?
◉ 내게 아주 특별한 반려견, 행운이
‘신은 먼저 인간을 만들었다. 그리고 인간의 약함을 보시고 인간에게 개를 내려주셨다.’ 동물학자 알폰스 투스넬의 명언이다. 반려동물은 인간의 약함을 채워주는 소중한 생명이다. 각박해지기 쉬운 사회에서 치유의 존재가 되어줄 뿐만 아니라 인간과의 깊은 교감으로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있다. 동물이야말로 우리의 마음을 말없이 온기로 채워주는 소중한 생명이다.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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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일부 사람들은 동물의 언어를 알아채지 못했고 장난감처럼 선택하며 함부로 대했다. 몇 년 전 충북대 수의예과 동물 한마당 행사에 참가했을 때였다. 우연히 장애인 도우미견을 소개한 팸플릿을 보게 되었는데, 여러 도우미 견이 소개되어 있었다. 신체가 불편한 장애인에게 물건을 가져다주고 스위치 등을 대신 조작해주는 도우미견이 있는가 하면, 시각 장애인의 길을 안내해 주는 도우미견도 있었다. 그리고 청각장애인 도우미견에 대한 소개도 있었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각장애인을 위해 소리의 근원지까지 안내해주는 역할을 하는 도우미견이었다.
청각도우미견은 초인종, 자명종, 팩스, 물주전자, 아기 울음, 화재 경보 등 청각장애인이 일상생활에서 필요로 하는 소리를 듣고 청각장애인과 소리 난 곳을 왔다 갔다 하면서 알려준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청각도우미견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뒤 직장을 다니면서 도우미견을 키울 수 있는 환경을 갖추게 되자 분양을 신청할 수 있었다. 다행히 합격이었다.
평택에 있는 협회를 방문하니 방 안에는 여러 마리의 개들이 모여 있었다. 몸집이 큰 개부터 작은 개까지 ‘멍멍’하면서 짖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송민수입니다. 선영 씨와 도우미견 훈련을 맡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주인이 동물병원에 데려와 성대와 정관수술까지 한꺼번에 시켜 놓고는 오랫동안 찾아가지 않아 유기견이 된 강아지였어요. 결국 안락사를 시키기로 결정했는데, 다른 강아지에 비해 청각이 발달한 것을 알고 바로 한국 장애인도우미견협회로 옮겨졌어요. 이곳에서 ‘행운’이라는 이름을 얻고 새 삶을 찾게 된 강아지는 2년 동안 훈련을 받으며 지내왔답니다.
‘내가 만날 도우미견 이름이 ‘행운’이구나. 행운이가 정말로 내 인생의 행운이 될까?’ 가슴이 설렜다.
나는 일주일 뒤에 있을 첫 훈련을 기약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날 저녁에 ‘개와 나의 10가지 약속’이라는 일본 영화를 보았다. 주인공 아카리의 엄마는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딸에게 ‘삭스’라는 강아지 한 마리를 선물로 보냈다. 그러면서 강아지와 지켜야할 10가지 약속을 편지로 남겼다.
- 제 말을 인내심을 갖고 들어주세요.
- 나를 믿어주세요. 전 항상 당신의 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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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잔뜩 놀아주세요.
- 나에게도 마음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주세요.
- 우리 싸우지 말아요. 마음만 먹으면 내 쪽이 더 강해요.
- 말을 안 들을 때는 이유가 있답니다.
- 당신에게는 학교도 있고 친구도 있죠? 하지만 나에게는 당신 밖에 없어요.
- 내가 나이를 먹어도 잘 대해 주세요. 나는 10년 정도밖에 살지 못해요. 그 러니 함께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겨주세요.
- 그러면 당신과 함께 했던 시간을 잊지 않을게요. 내가 죽을 때 부탁드려 요. 제 옆에 있어주세요.
나는 이 영화를 보고 펑펑 울었다. 그리고 행운이가 우리 집에 온다면 그 약속을 꼭 지키리라 다짐했다.
■ 훈련이 시작되다
드디어 행운이와의 첫 훈련 날이었다. 훈련사가 데려간 곳은 침대와 책상이 있는 작은 방처럼 꾸며져 잇는 곳이었다. 나는 훈련사의 지시로 방안에 있는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훈련사가 문 앞에서 몇 분 대기하다가 자명종 기구를 눌렀다. ‘딸깍! 따르릉~.’ 그러자 내 옆에 잠자고 잇던 행운이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 같았다. 곧이어 귀를 쫑긋하더니 내게 달려와 앞발로 내 몸을 긁고, 자명종과 나를 왔다 갔다 하며 깨워주었다. 따뜻한 입김과 움직임에 눈을 떴더니 행운이가 내 몸 위에 올라서서 정말 기가 막히지 않느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행운이와 나는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침대에서 일어나니 어서 다른 지시를 내려달라는 듯한 표정으로 빠르게 꼬리를 흔들었다. 내가 엄지손가락을 흔들며 “어디?”라고 묻자, 행운이는 초인종 소리가 나는 쪽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걸어갔다. 그러자 훈련사가 문을 열었다.
“잘했어.”
훈련사가 칭찬하면서 행운이에게 소시지 조각을 주었다. 행운이는 기분이 아주 좋아보였다. 나는 행운이를 힘껏 안아 올리며 마음속으로 속삭였다.
‘넌 정말 좋은 강아지야. 행운아, 사랑한다.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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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기적과 같은 하루였다. 지금도 그때의 경이로움을 잊을 수가 없다.
그 다음 번에는 두 번째 단계인 지시어를 익히는 훈련을 했다. 지시어는 모두 수화를 해야 했는데 놀랍게도 행운이는 수화를 볼 줄 알았다.
“잘 했을 때, 즉시 먹이를 주도록 하세요. 타이밍이 중요해요.”
훈련사가 말했다. 나는 행운이에게 먹이를 잡고 손바닥을 보였다. 그러자 행운이가 윗몸을 일으켜서 앞발로 하이파이브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미소를 지었다.
어느 덧 행운이가 우리 가족이 된지도 몇 년이 지났다. 그동안 행운이와 나는 서로 신뢰와 존중으로 호흡을 맞춰왔다. 행운이는 아주 활동적이어서 껌을 물고 마당에 있는 나무 주변을 뱅뱅 돌며 뛰어 다니곤 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웃기고 귀여운지 볼 때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행운이는 애견 차원을 넘어 나의 귀가 되어주는 생명 같은 존재이다. 이 사랑스러운 갈색 푸들 강아지는 내게 자유를 주었고 내 삶을 크게 바꿔놓았다. 행운이는 정말로 내 인생의 ‘행운’ 그 자체였다. 행운이가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오늘 밤도 나는 행운이를 믿고 단잠에 빠져들 것이다. 자명종 소리에 행운이가 나를 깨우기 전까지는.
◉ 가족, 그 따뜻한 이름
■ 세상에서 가장 고운 이름, 엄마
“역경을 사랑할 줄 알고 많은 추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란다.”
엄마는 책상머리에 가만히 앉아서 공부만 하는 것보다 현장 체험을 통해 실천적인 삶을 살도록 유도했다. 엄마는 언니와 내가 장애로 움츠러들지 않도록 특별히 신경 썼다. 그래서 주말이면 우리를 데리고 등산에 나섰는데, 반드시 산 정상까지 올라가도록 해서 성취감을 맛보게 했다. 산뿐만 아니라 체험만 된다면 어디든지 다녀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에도 많이 다녔다. 그 영향으로 나는 지금도 여행이며 강연 등을 찾아다니며 내공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수영과 태권도, 서예, 피아노 등도 배우게 해서 체력과 집중력 등을 기를 수 있게 했다. 이런 훈련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감을 갖는데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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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가장 큰 교육은 몸소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엄마는 학교 성적에 크게 연연하지 않아서 성적표를 받아보고 혼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너도 최선을 다했고 노력했으니 아주 잘한 거야.”
엄마의 자기주도적인 교육과 긍정적인 마인드는 내가 무언가에 도전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지 않게 해주었다. 귀가 들리지 않아도 사회의 유일한 구성원으로 당당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엄마의 힘이었다.
유난히 지치고 힘들었던 어느 날, 나는 엄마한테 ‘귀가 들리지 않으니까 사람들과 대화하기 너무 힘들어’라고 문자를 보냈다. 몇 분 뒤 엄마에게 답문자가 날아왔다.
“하늘만큼 땅만큼 사랑하는 딸! 엄마는 항상 그런 생각을 했어, 내 귀를 떼어서 언니와 너에게 하나씩 나눠주고 싶다고, 엄마는 들리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까지 들어온 소리를 너희들에게 들려줄 수만 있다면.”
사랑이 절절하게 담긴 엄마의 문자를 읽고 나는 그만 펑펑 울고 말았다.
세상에서 가장 고운 이름 ‘엄마’. 엄마는 내게 모든 면에서 이상적이고 완벽한 여인이었다.
“내가 엄마 딸이라서 참으로 고맙습니다.”
■ 내 삶의 등대, 아버지
유년 시절. 아버지는 나를 볼 때마다 번쩍 들어 올려 수염이 삐죽 나온 뺨으로 내 얼굴을 비비곤 했다. 이 까슬까슬한 느낌은 아버지가 내게 자주 사용하는 의사소통이었다.
아버지는 언니와 내가 청각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도 재빨리 현실을 인정하셨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내가 엄마한테 야단이라도 맞을라치면 중간에 가로막고 서서 엄마가 섭섭함을 느낄 정도로 대립하곤 하셨다.
아버지는 참 따뜻한 분이었지만 사춘기 때는 힘들기도 했다. 엄마는 언니와 나를 특수학교인 애화학교에 보내려고 서울로 이사를 왔다. 그런데 당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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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는 직장이 지방에 있어 함께 오지 못하고 기러기 아빠 신세가 되고 말았다. 떨어져 보내는 시간이 많아서였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아버지와의 소통이 어려워졌다. 사춘기가 되면서 생긴 고민들을 조금씩 이야기해 보았지만 아버지는 내 말소리에 적응을 못하는 것 같았다. 엄마의 통역 없이 대화를 나누기가 힘들었다. 그러면서 나도, 아버지도 쓸쓸히 침묵을 지킬 때가 많았다. 아버지도 힘들었는지 가끔 소주잔을 옆에 두고 우리에게 편지를 쓰곤 하셨다.
나는 안다. 아버지가 왜 그토록 열심히 일에 매달리셨는지,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청각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날부터 이를 악물고 살아왔다. 우리 뒷바라지를 위해 한시도 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느 햇살 좋은 날 아침, 오랜만에 아빠와 함께 드리이브를 했다. 강변에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바람에 일렁이고 있었다.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아버지에게 물었다.
“아빠, 행복해요?”
아빠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행복하지! 우리 선영이가 있어서 행복해.”
나는 들길에 난 잡초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말했다.
‘두 딸을 지키기 위해 당신의 꿈을 포기한 채 늘 고군분투하셨던 아버지! 잡초처럼 숱한 고난을 뚫고 살아오신 아버지! 아버지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아버지예요. 아버지의 따스한 사랑이 등대처럼 제 삶을 환하게 비추어주었어요. 아버지 사랑해요.’
그날 우리 부녀는 들길을 달리는 내내 행복하게 웃었다.
■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보디가드, 언니
나는 언니라는 존재를 세 살이 되어서야 알았다. 언니가 특수교육을 받느라 엄마가 따라다니는 동안 나는 유아교육을 전공한 막내 이모한테 맡겨졌던 것이다. 언니와 내가 처음 만난 것은 1990년 잠깐 동안 살았던 방학동 집에서였다. 놀랍게도 나와 언니는 그 첫 만남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날 이후 언니와 나는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다.
소꿉놀이, 둘이서 타는 그네놀이, 공기놀이, 몰래 불량식품 사먹기, 테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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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 슈퍼마리오 같은 게임 즐기기, 그리고 언니와 함께 동네친구들과 노는 것도 재미있었다. 우리 둘 다 ‘가위바위보’나 ‘쌀보리’, ‘쎄쎄쎄’ 같이 손을 많이 쓰는 게임을 더 좋아했다.
언니는 어린 시절 가장 친한 친구이자 보디가드이기도 했다. 일반 초등학교 시절, 친구의 괴롭힘에 울면서 언니를 찾아간 적이 많았다. 그러면 언니는 친구들을 이끌고 교실로 찾아왔다.
“누가 내 동생을 괴롭힌 거야? 당장 나와!”
그때 언니는 정말 멋진 영웅처럼 보였다.
나는 항상 언니가 수업이 끝날 때까지 교실 앞에서 기다리곤 했다.
우리 사이에는 이야기 못할 주제란 없었다. 비밀 아지트에 숨어 수화로 이야기하는 시간도 참으로 행복했다.
청각 장애가 있다 보면 명절 때마다 친지들이 모이는 자리가 외롭기 마련이다. 그럴 때에도 의지할 수 있는 사람, 바로 나의 언니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하고 좋은지 모른다.
어느 날 언니가 문득 궁금해져서 전화를 걸어본 적이 있다. 정적 속에 하염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선영아, 뭐라고 했어? 언니는 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네.’ 언니와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큰데 그럴 수가 없는 게 속상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울면서 ‘언니, 나도 그래’하고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우리는 다시 웃을 수 있었다. 몇 년 뒤 핸드폰에 영상통화 기능이 나왔기 때문이다. 언니와 나는 굉장한 희소식이라며 기뻐했다. 그 후로 저녁마다 매일 영상통화로 신나게 수화를 하면서 수다를 떨었다. 가끔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다가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영상 통화는 언니와 내게 큰 선물이었다.
언니는 내가 아는 청각장애 여성 중에 가장 똑똑하고 강인한 여성이다. 언니는 조용히 자기 일을 하면서도 청각장애에 대한 차별만큼은 참지 않고 소신있게 발언했다. 들리지 않는다는 핑계로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끔찍하게 싫어했다.
언니는 다재다능했는데 자신의 몸으로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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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특히 한국무용을 사랑했다. 춤출 때는 말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안도감과 해방감을 주는 것이었다. 언니는 춤을 통해서 침묵과 정적의 세계를 딛고 내면의 울분을 열정으로 표출하여 예술로 승화시킬 줄 알았다. 언니의 한국무용은 근사했다.
언니는 동양화에도 소질이 있어 내가 봐도 대단한 수준의 그림을 선보이곤 했다. 언니와 나는 청각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정말 많은 추억을 만들었다. 그런 추억을 두고두고 공유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 축복이다. 힘든 세월을 함께 이겨내서 그런지 다른 자매들보다 더 많은 소통을 하며 애틋한 자매애를 나눌 수 있었다.
제4부 세상을 바꾸는 시간
◉ 세계 지식포럼 이야기
요즘은 다양한 주제로 강연이 많이 열려 일반인들도 쉽게 지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나처럼 듣지 못하는 농인은 소외당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수화나 문자통역을 요청해도 거절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냉담한 현실은 나를 자꾸만 현실에 안주하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범죄자 맥머피는 교도소 생활보다 자유롭고 편할 것 같아 일부러 미친 사람 노릇을 하여 정신병원으로 오게 된다. 그러나 정신병원은 치료라는 이름으로 온갖 통제와 억압이 자행되는 또 하나의 감옥이었다. 맥머피는 권력에 복종하고 하루하루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환자들을 일깨워 탈출을 시도한다. 그의 저항과 투쟁은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이 났지만, 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어 결국 세상 밖으로 나가는 데 주춧돌이 되었다.
영화는 현실에 안주하려던 나를 일으켜 세웠다. 나는 다시 용기를 내 여러 가지 시도를 해볼 수 있었다. ‘세계지식포럼’도 그 시도 중의 하나였다.
0 세계 지식포럼
-매일경제 주관, 세계적 석학과 기업가, 국제기구 대표 등이 참가하는 지식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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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10월부터 교수, 공무원 등 기득권층에 30% 할인
장애인에게는 혜택이 없었으나 2012년 본인의 주도로 50% 할인 및 처음으로 수화를 사용하게 함
■ 인상 깊었던 기조연설
사흘간 서울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제13회 세계지식포럼의 주제는 ‘위대한 도약, 글로벌 위기에 대한 새로운 해법, 리더십, 윤리성, 창의력 그리고 행복’이었다.
포럼 첫날, 아이비리그 대학 총장을 거쳐 아시아 최초로 세계은행 총재에 오른 김용 총재가 기조연설을 하며 포문을 열었다. 김용 총재는 ‘지식이 번영을 창조한다’는 주제로 “후진국을 구할 수 있는 무기는 바로 지식”이라고 강조했다. 김 총재를 보면서 한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열악하게 살고 있는 청각장애인들에게 지식을 전달하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두 번째 기조연설을 맡은 콘돌리자 라이스 전 미국 국무장관은 ‘도약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 1950년대, 흑인이라는 이유로 많은 차별을 당함
- 고등학교 진학 전까지는 단 한 명의 백인 친구도 없었음
‘아웃라이어’등을 쓴 세계적 베스트셀러 저자 말콤 글래드웰은 ‘약자의 연설’이라는 주제로 세 번째 기조연설을 했다.
그는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인 골리앗이 아니라 소년 다윗과 같은 약자라는 역설이다. 모두가 1,2등이 되려고 경쟁하지만 혁신하는 3등이 최고의 성공을 거두는 예가 많다며 사고의 틀을 깰 것을 주문했다.
약자의 역설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한 말콤 글래드웰의 설명에 이 사회의 약자일 수밖에 없는 장애여성도 세상을 뒤집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 행복을 질문하다
하버드 대학에서 인기강좌 1위를 10년씩이나 기록하며 행복학 강의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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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 아처 교수. ‘행복의 특권’ 저자이기도 한 그는 긍정심리학의 대가로 “성공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 행복해서 성공한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숀 아처는 매일 운동하듯이 주위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는 습관을 통해 ‘행복 트레이닝’을 하라고 조언했다.
나는 손을 들고 당당하게 질문했다.
“저처럼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것이 행복이라고 할 수 있나요?”
수화통역사가 내 질문을 통역하자 토론장이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때 숀 아처 교수가 일어나서 대답했다.
“지인이 장애인올림픽 출전 준비를 하다가 걸을 수 있는 수술을 받게 될 기회가 있었지만 경기에 나가기 위해 수술을 미뤘습니다. 당장이라도 휠체어를 떠나 걷고 싶었겠지만 경기를 택했듯이, 행복은 장애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상황에서 만들어 지는 것입니다.”
토론이 끝나자 박수가 쏟아져 나왔고 많은 외국인과 참가자들이 내게 다가와 ‘아주 좋은 질문’이었다며 포옹을 건넸다. 이 일은 다음 날 아침 신문에 기사화되기도 했다.
■ 남과 달라서 얻은 ‘특별한 행복’
세계지식포럼 특별행사로 열린 ‘제5회 우먼 리더스 포럼’에서는 베스트셀러 저자 루디 시몬이 ‘행복한 여성의 성공’에 대해 연설했다.
포럼에서 유일하게 장애여성 연사로 초청된 그녀는 ‘아스퍼거 증후군’을 갖고 있다. 자폐증과 비슷한 이 증후군은 사회적인 관계형성이 어렵고 흥미와 활동이 제한되어 있어 사회생활이 지장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학창 시절에 왕따를 당하며 고교를 중퇴했다. 빵을 훔쳐 교도소를 가기도 했으며 성폭행을 당하고 이혼도 경험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을 신뢰하기 위해 자폐증의 긍정적인 면을 세상에 알리기로 결심, 엄청난 집중력으로 ‘아스퍼걸’을 집필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네덜란드, 일본, 프랑스 등 세계 여러 나라에도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이 자폐증에 대해 이해하게 되었고 심지어 장애 법까지 바뀌었다. 나는 루디 시몬의 연설을 보고 수화통역사를 통해 질문했다.
“장애여성으로 살아가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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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유리창을 깨트리세요. 자신의 장애뿐만 아니라 숨기고 싶은 과거에 대해 정직하고 솔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도울 때 가장 행복합니다. 인정받을 수 있고 유용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루디 시몬은 이렇게 대답한 뒤 “자기 인권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인권이 중요합니다. 누구나 가질 권리를 위해 행동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얼마 전에 데프미디어(농인영상제작단)의 단장이자 농인 영화감독인 박재현 감독이 제작한 ‘농인의 눈으로’라는 다큐멘터리를 본 일이 있다. 이 영화는 200년 간의 미국 농인의 삶을 보여주었는데 마지막 대사가 인상깊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읽으세요. 책과 지식을 모두 읽고 토론하세요. 지식은 아는 힘이고 성공으로 가는 자동차입니다. 지식은 보편적인 힘입니다.”
◉ 닉 부이치치를 만나다
“선영아, 어서와봐.”
어느 날 엄마가 나를 텔레비전 앞으로 불렀다. 그때 텔레비전 화면에는 팔과 다리가 없는 한 외국인이 웃으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작은 몸이었지만 누구보다 당당한 모습이어서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그 사람이 바로 전 세계를 누비며 희망을 전도하는 ‘닉 부이치치’다. 닉은 ‘바다표범 손발증’이라고 불리는 해표지증으로 태어날 때부터 팔과 다리가 없었다.
어머니가 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까지 4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그 뒤부터는 큰 사랑으로 품어주며 무엇이든 스스로 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그 영향으로 닉은 팔과 다리가 없어도 각종 스포츠를 즐기고 악기도 연주하고 글도 쓰게 되었다. 지금은 전 세계를 돌며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강연자이자, 미국의 장애인 비영리단체 ‘사지 없는 사람’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앞좌석에서 닉의 모습을 자세히 보면서 수화나 문자통역으로 강연을 볼 수 있었는데 닉이 불행하다는 생각이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닉은 당당했고 자신만의 신념을 갖고 있었다. 자신의 장애를 드러낸다는 것은 영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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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 같아 부끄럽기도 하다 한국사회에서는 특히 더할 것이다. 하지만 닉처럼 자신만의 신념이 있다면 장애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한 가치는 외모가 아닌 내면에 있습니다. 가장 큰 힘은 사랑입니다.”
“세상의 꽃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불완전하며 모양이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모든 꽃이 아름답습니다. 불행하게도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아직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닉은 마지막으로 한국정부에 당부했다.
“한국정부는 장애인과 소통하고 공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장애인들을 사회에 보내세요. 그리고 비장애인이 자기 지역에 있는 장애인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들어주세요. 그렇게 하면 사회가 조금씩 성장하는 걸 볼 수 있습니다.”
◉ 내 인생에 경종을 울린 사건
2013년 6월, 북포럼 톡스의 무대에 서기 전까지 나는 청인들 앞에서 강연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학창시절에도 선생님이 발표를 시킬 때가 가장 두려웠다. 남들과 다른 발성으로 비웃음을 사는 것도 싫었고, 내가 하는 수화를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북포럼 톡스의 고우성 PD의 제안으로 내 안의 유리창을 깨트릴 수 있었다. 그리고 북포럼에서 유일하게 수화를 알고 있는 김영서 PD가 없었다면 아마 용기를 내기 힘들었을 것이다.
드디어 톡스를 촬영하는 날, 나는 청인과 농인이 섞인 방청석을 향해 수화와 구화로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저의 이름은 노선영입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들리지 않는 고통을 다른 에너지에 쏟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장애를 동정의 대상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틀을 깨고 싶습니다.
저는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음으로 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 저는 청각장애를 가졌지만 아름다운 언어인 수화를 할 수 있고 소리 없는 상태에서 내면의 소리를 좀 더 잘 들을 수 있습니다.
장애를 열정으로 승화시키고 싶습니다. 책은 누군가에게 읽히는 평범한 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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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혼’과 같습니다. 그것은 평범한 혼이 아니라 장애에서 오는 결핍을 채우기 위한 절박함이 담긴 혼이었습니다.
들리지 않는 고통을 누구나 불행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저는 불행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어떻게 이겨내느냐에 따라 오히려 행복이 될 수 있습니다.”
톡스가 끝난 후,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호평이 쏟아졌다.
■ 재능 기부가 이어지다
북포럼 톡스를 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점은 자신의 한계를 깨트리고 다가갔을 때, 진정성은 통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선한 영향력까지 퍼지게 했다. 그것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커피콘텐츠연구회 대표인 권성진씨가 나의 강연에 큰 감동을 받고 농인들에게 커피교육 재능 기부를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나는 마침 서대문농아인 복지관에서 멘토링 활동을 하고 있어 복지관의 커리큘럼으로 ‘즐거운 커피 생활’을 함께 만들게 되었다. 커피 지식을 공유하는 나눔을 통하여 긍정 에너지를 곳곳에 널리 퍼뜨리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고자 하는 의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자 평소 커피를 배우고 싶었지만 기회가 없어 못 배운 농인, 바리스타 지원에 탈락해서 다시 공부하고자 하는 농인, 카페를 차리고 싶은 농인, 커피로 치유하고 싶은 농인 등이 모여 들었다.
커피의 어원은 아랍어인 ‘카파(caffa)’에서 나온 것으로 ‘힘’을 뜻한다. 그윽한 원두 향 속에 숨은 각성효과처럼 권성진 씨가 보여준 선한 영향력은 나를 각성시키고 많은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었다.
■ 선한 영향력
나는 농인의 북포럼을 운영하면서 하나의 작은 움직임이 나비효과처럼 점점 더 큰 변화를 일으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여러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도움을 주겠다며 속속 모여든 것이다.
- 수화 통역사들의 통역
- 외국 농인들이 참가한 국제 수화통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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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포럼 내 수화강좌 개설
- 쉐어 타이핑 서비스(속기사가 PC로 타이핑 하면 스마트 폰 앱을 통해 실시간 자막이 전달되는 서비스) 지원
북포럼을 통해 폭넓은 지식을 공유하면서 변화를 느낀 농인들이 많겠지만 청인들도 수화라는 언어와 농문화를 접하면서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제 지식나눔공동체는 지식뿐만 아니라 다양성까지 나누게 되었다. 자신과 다른 언어와 문화의 벽을 허물고 다양성을 인정한다면 ‘내 것’, ‘네 것’이 사라지고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가 되지 않을까?
나는 작은 실천으로 시작된 것이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다. 선한 영향력은 작은 용기만 있으면 가능하다는 것. 스스로의 한계에 도전할수록 영향력의 반경도 더 커질 수 있다는 것. 이것을 잊지 않고 앞으로 진정한 ‘선영’이 되고 싶다.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 말이다.
◉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는 CBS에서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으로, 시민이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시민강좌 형식으로 진행된다. 다양한 영역의 강사들이 무대에 서서 청중을 향해 강연하는 것으로, 세계적인 강연회인 테드(TED)와 비슷하다.
2013년 12월 12일, 세바시가 서울시교육청과 공동기획한 청각장애인 특집정기 강연회 ‘당신의 심장 소리가 들립니다’가 열리는 날이었다. 국내 최초로 청각장애인 특집을 기획하고 실제로 실행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는 강연회였다. 평소와는 달리 목소리 대신 긴 침묵과 손짓이 2시간 30분간 강연장을 채우게 되리라.
그날 나는 용감하게 내 이야기를 꺼내기로 결심했다. 수화통역을 통해 내가 성장해 온 시절을 하나하나 꺼내던 나는 갑자기 눈물이 터졌다. 그동안 장애 여성으로서 더욱 강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꾹꾹 눌러 두었던 상처가 터져 나온 것이었다. 껍질을 찢고 나를 꺼내니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재구성해서 진정성 있는 자세로 대중들 앞에 고백하기로 했다.
보통 강연과 다르게 수많은 연습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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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앞에는 수화, 음성통역사, 속기사 4명 그리고 시간을 재는 15분 시계. 프리젠테이션 화면 그리고 커다란 속기 스크린이 설치되어 잇었다. 무대위에 올라선 나는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노선영입니다”하고 수화로 인사를 한 뒤 강연을 시작했다.
청각장애인으로 태어나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고백하는 동안 코끝이 찡해지면서 목소리가 점점 떨렸다. 감정이 눈물로 번지면 다음 대사를 까먹을 수도 있기 때문에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끝내 눈물이 고이고 말았다. 대장정에 도전했을 때, 엄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설움이 북받쳤기 때문이다. 모두 내게 몰입해 숙연한 분위기였고 곳곳에 눈물을 닦는 분도 있었다. 나는 청중들과 온전히 감정을 공유하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지나온 시련들을 솔직하게 말한 뒤, 마지막으로 “도전하는 열정에 장애는 없다! 앞으로 저는 들리지 않는 결핍을 에너지로 바꿔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도전할 것입니다”하고 강연을 마쳤다.
강연이 끝난 뒤, 나는 많은 분들과 일일이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내게 감동을 받고 용기를 얻었으며 엄마의 헌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14년 1월 20일, 영어 자막까지 제작한 세바시 영상이 세상에 알려졌다. 처음에 내 영상을 확인하자마자 온몸을 부르르 떨며 울고 또 울었다. 두려움을 이겨내고 용감하게 수화로 모든 이야기를 쏟아붓는 내 모습을 보자니 신기하고 놀라웠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내 인생과 영혼이 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이 영상을 보고 진심으로 감동했다는 메시지를 많이 받았는데, 그 중 기억에 남는 메시지는 한 청인이 소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며 고맙다는 것이었다. 들린다고, 말할 수 있다고 해서 저절로 소통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나는 ‘말’이 소통의 절대조건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눈빛’, ‘마음’, ‘몸짓’으로 하는 소통이 아닐까? 나는 이 세 가지의 진심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하나의 기적을 가지고 올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날의 15분은 강연자도 관객도 모두 청각장애인이었던 ‘말’이 필요 없는 감동의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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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 농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 수화는 언어다
1900년대 초, 사람들은 무성영화 속에서 보디랭귀지로 하나의 예술을 보여준 찰리 채플린에 열광했다. 대사를 말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해하며 웃고 공감한 것이다. 농인 역시 무성세계 속에서 오랫동안 시각 중심의 언어인 수화를 사용하며 살아왔다. 그런데도 길거리에서 수화를 하는 사람을 보면 외계인 쳐다보듯 힐끔거리는 게 다반사다. 수화통역사는 텔레비전 한쪽 구석에 동그랗게 처리되어 등장하는 사람일 뿐이다. 왜 수화라는 언어는 차별받고 있을까?
1880년 이태리 밀라노에서 개최된 농아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구화주의를 결의한 이후 농교육 현장에서 차츰 수화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수화가 농아의 구어와 언어기술의 발달을 저해하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 수많은 농인이 수화를 쓴다는 이유로 차별과 핍박을 받았다.
사람들은 청각장애인이 말을 잘하면 일반사회에 빨리 흡수되어 성공의 문이 열린다고 믿었다. 그러나 구화는 어떤 식으로든 청각장애인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장애를 최대한 숨기고 비장애인과 부대끼며 살아야 하는 구화인은 삶의 피로를 호소했다. 시간이 갈수록 입 모양을 읽기 힘들어 했으며 더욱 위축되어 비장애인 세계에 완벽하게 편입하지 못했다. 청각장애 공동체로부터도 멀어져서 청각장애에 대한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농인들 중 일부는 변화무쌍한 자기 표현력과 분명한 뜻을 알게 하는 수화라는 새로운 세계를 접하며 소통 방식과 지식 습득에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면서 농인의 모국어라 할 수 있는 수화로 회귀하는 일이 늘게 되었다.
수화와 농인에 대한 인식이 개방적인 외국에서는 농인이 동등한 권리를 얻을 수 있도록 제도적인 지원을 많이 한다. 농인 국회의원, 의사, 변호사, 약사로 활동할 수 있게 해서 농사회에 도움이 되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뿐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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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수화를 예술적인 관점으로 보고 수화 시인뿐 아니라 코미디언, 배우로 활동하며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게 한다.
일반학교 외국어 선택과목에도 수화교육을 넣거나 기관 교육을 통해 청인 역시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수화를 배우며 사회적으로 소통하는 것을 의미 있는 일로 생각한다.
한국 사회는 오랫동안 농사회가 소외되었으며 수화를 언어로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수화를 언어로 인정받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면서 현재 ‘수화언어 및 농문화 기본법’이 논의되고 있다.
‘수화언어 및 농문화 기본법’이 제정된다면, 사회적 소수자인 농인에게 농문화 향유권을 돌려줄 수 있고 수화통역 서비스도 개선되며 수화 사용권과 수화로 교육받을 권리를 받을 수 있다. 또한 곳곳에 장애 이해 교육이 활성화되어 농인 후배들이 내 아픔의 역사를 되풀이 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 농인의 삶
시 · 청각 복합장애인이었던 미국 여류작가 헬렌 켈러는 ‘보지 못하는 것은 사물과의 단절을 의미하나, 듣지 못하는 것은 사람과의 단절의 의미한다’라고 말했다. 이렇듯 농인은 사람과의 심각한 소통의 단절을 겪게 된다. 하루 종일 들을 수 있는 사람들 틈에 있으면 외로움의 무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게 때문에 농인끼리 수화가 잘 보이는 밝은 곳에 모여 같은 언어로 이야기를 나눈다는 것은 그들에게 생명을 지탱해주는 따뜻한 온기와 다를 바 없다. 오죽하면 한번 모였다 하면 가게 문이 닫힐 때까지 수화로 수다를 떨까. 농인의 문화 중 특징적인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농인이 시각 중심의 수화에 집중할 때는 아무리 소리를 쳐도 응답하지 않는다. 흩어진 농인들의 관심을 모으고 싶을 때는 방법이 딱 하나 있다. 바로 불을 꺼버리는 것이다. 깜깜한 곳에서 모든 농인은 수화를 멈추게 된다.
둘째, 농인은 청인과 달리 상대방의 표정으로 기분을 파악한다. 그래서 만약 웃음기 없는 얼굴로 “안녕 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면 불안해 할 것이다. 청인은 목소리 억양을 듣고 상대방이 어떤 기분인지 알아챌 수 있지만 농인은 얼굴에서 읽어내기 때문이다.
셋째, 농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거나 둥글게 모여 대화하는 것을 선호한다. 수화가 잘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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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비장애인 위주로 짜여진 시스템으로 인한 불편
- 전화를 통한 본인 확인도 직접 방문해야 한다.
- 모든 창구에서는 계속 번호판을 주시해야 한다.
- 안내를 받을 때는 필담으로 하는데 그것을 귀찮아하는 안내인을 만나면 곤란
- 택배 기사 전화를 못 받아 물건을 분실한 사례
- 회의 때의 핸드폰 소리 때문에 난감
요즘은 정보기술 시대이다 보니 청각장애인의 삶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바로 한국정보화진흥원의 ‘통신중계 서비스’다. 통신 중계는 청각장애인의 전화를 수화나 채팅 문자로 중계해주는 서비스로, 각종 문의를 할 때나 구직 활동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유럽 선진국이나 미국은 1980년대에 시작했지만 한국은 2005년이 되어서야 첫발을 내디뎠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영화나 드라마 등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한글자막을 제작해 무료로 배포해주는 데프무비나 공이자막 같은 곳도 생겼다. 365일 밤늦은 시간까지 수고해주시는 중계사, 농인의 귀가 되어주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심히 자판을 치는 ‘아름다운 손가락’들의 존재는 농인들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연극이나 뮤지컬을 수화와 자막으로 볼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고 있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이제 텔레비전에도 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이 삽입되고, 인터넷으로 얼마든지 정보를 접할 수 있으며, 수화통역을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하는 곳이 늘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기술이 발달하고 제도적인 장치가 마련되어도 직접 수화로 대화하며 함께 지내고픈 이들의 갈증을 완전히 해소해 주지는 못했다.
청각장애인은 같은 장애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수화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 그리고 구화를 사용하는 청각장애인으로 나눠져 있다.
자라온 환경이나 청력 상태에 따라 소통의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고나 질병으로 인해 청력을 잃은 경우 이미 말을 배웠기 때문에 수화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이렇게 다양한 의사소통 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화와 문자통역 서비스가 모두 제공되는 환경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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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언어는 어떤 형태이든 차별이 없고 제한이 없으며 창의적이고 무궁무진한 것이다. 편견 없이 각자 다른 언어를 이해하며 흡수하고 배우는 과정에서 자유로워지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더욱 가까워지지 않을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수화라는 언어를 배움으로써 소통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될 거라 생각한다. 그리고 청각장애가 의사소통에 장애가 되지 않는 날이 오길 소망한다.
나는 가끔 글을 쓸 때, 무심코 ‘듣다’라고 쓸 때가 있다. 하지만 농인은 ‘못 듣는 사람이 아니라 잘 보는 사람’이다. 그래서 ‘듣다’라는 글을 쓸 때 마음이 불편해진다. 듣지 못하는 농인이 어떻게 들었다는 말을 쓸 수 있는 걸까? 그래서 수정했다. ‘나는 잘 보았다’라고.
◉ 세계의 농인을 만나다
“수화는 전 세계적으로 다 같지 않나요?”
농인으로 살아가다 보니 사람들에게 많이 받는 질문이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나라 수화 ‘검정색’은 한 손으로 검은 머리를 쓰다듬는 표현으로 뜻을 나타내는데, 머리 색깔이 다른 서양인은 수화가 다릅니다.”
그러면 곧바로 이해한다. 전 세계 농인의 교류를 위한 수화도 있는데, 바로 국제수화다. 1951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세계농아인연맹 총회에서 국제수화의 필요성을 진지하게 논의했다. 그리고 1975년이 되어서야 수화연합위원회에서 국제수화 표준화 체계를 발표했다. 그 후로 스포츠, 캠프, 총회와 같은 큰 행사가 열릴 때마다 국적 불문하고 ‘손, 제스처, 표정’을 포함한 국제수화로 소통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대만, 브라질, 터키, 스웨덴, 케냐, 우크라이나, 미국 등 세계 각지에서 많은 농인들이 한국을 방문했다. 나는 그들에게 국제수화로 가이드 통역을 해주며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들었다. 전 세계에서 온 농인들의 특이한 점은 다른 문화를 재빠르게 배운다는 점이다. 비록 얼굴, 국가, 수화도 다르지만 ‘농인’은 같다. 정체성도 닮아 있기에 우리는 금세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다. 농인이라는 공통점이 우리를 끈끈하게 묶을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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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얀마에서 온 보보
2013년 8월, 우리인재원에서 I'm Deaf.(나는 농인이다)라는 주제로 ‘아시아태평양 농청년 캠프’를 개최하였다. 한국농아인협회와 경기 고양시 지원으로 열린 이 캠프는 농청년의 농 정체성 확립과 역량강화, 농인권, 복지향상 등에 목적을 두고 진행되었다. 지난 1999년 말레이시아를 시작으로 뉴질랜드, 일본, 인도네시아, 마카오 등에서 개최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최초로 열린 것이었다.
0 미얀마 농청년 보보와의 대화
- 미얀마는 보청기 지원이 열악, 그러나 교육에 대한 열망이 강함
- 보보로부터 미얀마 수화 그림책 및 수화CD자료를 선물로 받음
- 이를 계기로 미얀마 수화를 배우기로 결심
■ 브라질에서 온 프랑시스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 살고 있는 청년 프랑시스코가 서울역 앞에서 ‘수화는 언어다’라고 적힌 피킷을 들고 가두 홍보 하는 것을 보고 그와 인연을 맺음
수화를 언어로 인정받은 브라질 사회에서 성장한 그는 천성이 밝았다. 그는 눈과 눈썹, 머리의 기울기, 입술이라는 수화의 문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마치 즉석 연극을 하는 듯 사람을 들었다 놨다 했다. 광화문에 모인 한국 농인 친구들은 그에게 완전히 매료되었다.
나는 그를 광화문 광장에 있는 세종이야기 전시관으로 자리를 옮겨 한글에 대해 국제 수화로 설명을 해주었는데, 문득 외국인이 보는 한글이 어떤지 궁금해졌다.
“프랑시스코, 여기 한글을 보니 어떤 느낌이 들어?”
그는 놀라움이 가득한 표정과 함께 수화로 대답했다.
“한글은 정말 굉장해! 과학적인 문자가 이렇게 탄생했다는 것이 놀라워!”
나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우리가 자랑스러운 한글을 배우듯이, 수화도 동등한 언어로 당당하게 배울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고. 그래서 외국 농인에게 한국 수화도 이 사회에서 언어로 존중받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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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터키에서 온 발락 남매
발락 남매는 한국의 종교문화를 배우고 싶어 했다. 그래서 영락농인교회와 원심회를 가이드하는 데 동참하기로 했다.
우리는 먼저 영락농인교회로 갔다. 이 교회는 외국 농인이 찾아와서 감탄하고 갈 정도로 세계에서 제일 큰 농인 교회로 알려져 있다.
그곳에는 음악이 전혀 없었다. 교회에서는 농인 목사가 수화로 설교를 하고 성가대는 수화로 찬송가를 불렀으며 교회 사람들은 수화로 기도문을 외웠다.
다음으로 우리는 원심회를 방문하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조계사의 원심회는 ‘원은 둥글어서 어디서나 통한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원처럼 하나의 마음이다. 서로에게 힘이 되면 정체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라는 뜻을 담아 설립되었다. 조계사 근처에 있는 원심회에 도착하니 한 여성이 불교 수화로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불교수화를 전파하기 위해 녹화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자비로웠다. 조계사를 나오자 발락 남매가 국제수화로 말했다.
“하루 만에 분위기가 다른 종교를 경험하면서 새로운 느낌을 얻어서 좋았어.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한국 종교가 농인과 어울리고자 노력하는 모습이었어.”
나는 전 세계에서 온 농인들과 함께 어울리며 다양한 문화가 깃든 각 나라의 수화와 국제 수화를 배울 수 있었다. 국제수화는 내가 더 넓은 세상을 만날 수 있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이를 계기로 나는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격언을 온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 농인이 청인에게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하는 세상!’
서울 시청에서 열린 서울장애인축제 현장. 나는 프리허그(Free-Hug)를 위해 피켓을 들고 서 있었다. 다양한 연령대, 장애인, 비장애인, 외국인까지 나를 포옹하고 지나갔다. 그들 하나하나가 소중한 사람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 Free-Hug : 프리허그라는 피켓을 들고 자신에게 포옹을 요청해 오는 불특정 사람을 안아주는 행위. 현대인의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고 평화로운 가정과 사회를 이루려는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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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살아가면서 청인 문화에 맞추기 위해, 한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내가 소리에 예민하지 않다 보니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줄 때, 얼마나 미안한지 모른다. 길을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지 못할 때도 미안한 마음이었다. 그런데 청인은 농인의 미안함을 헤아리지 못하고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것을 종종 느꼈다.
농인은 청인이 수화를 몰라도 화를 내지 않지만, 청인은 농인의 음성을 조금이라도 알아듣지 못하면 무식하다고 화를 냈다. 그들을 보면 오물거리는 입술과 붉으락푸르락하는 얼굴뿐이었다.
그런데 소리가 있는 청인의 세계는 과연 행복하기만 할까? 청인은 차 소음, 기계 소음, 층간 소음 등 끊임없는 소음을 들어야 하니 마음이 야위어갈 것 같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깜짝깜짝 놀랄 만한 소리가 우리 주변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외부의 소리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 안 들어도, 몰라도 되는 말이 사람을 괴롭히기도 한다. 너무 많은 소음에 시달린 귀는 이제 소리다운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정상인 사람은 없다. 모두가 비정상이다. 세상은 내게 귀를 정상을 돌려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정상’의 기준은 없으며 언제나 완성되어 있지 않다고 본다. 그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배려해 나갈 뿐이다.
나는 남성이 될 수 없고 청인이 될 수도 없다. 그러나 나는 오늘 눈이 멀게 될지도 모르며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편견을 버리고 진실을 보았으면 좋겠다. 비록 농인이 불완전하게 느껴지겠지만, 농인은 자신만의 존재를 느낄 수 있고 수화 역시 자연스러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소통의 핵심은 말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마음이 통할 때 소통이 되기 때문이다. 수화든, 또는 다른 언어든 눈을 맞추고 표정을 보면서 해야 비로소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농인과 청인이 서로 소통하고 언어적 차별이 없는 세상을 꿈꾼다.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들이 외국어처럼 수화를 하나라도 배워서 언젠가 농인을 만나면 정답게 인사를 건넸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서로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열띤 대화를 나누는 이상적인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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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망한다. 우리는 앞으로 더 좋은 세상을 만드는 꿈을 향해 걸어 나가야 한다.
- 에필로그 - 아름다운 내일을 꿈꾸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그곳 어딘가에 우물이 숨어 있어서 그래.”
어린 왕자가 말했다. 나는 갑자기 모래의 그 갑작스런 번쩍거림을 이해하게 되었다.
(……)
“그래.” 나는 어린 왕자에게 말했다. “집이건 별이건 사막이건, 그것들을 아름답게 하는 건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지.”
- ‘어린 왕자’ 중에서 -
그렇습니다. 집이건 별이건 사막이건 그리고 사람이건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것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훨씬 중요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청각장애를 가졌다고 행복이 없는 게 아니라 청인에 비해 조금 더 깊은 곳에 숨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저는 행복을 찾아 외부의 소리가 아닌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에 따라 실천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어린 시절의 저는 ‘듣지 못하고 말도 못하니 아무 것도 못하는 인간’이라고 취급받거나 동정어린 시선을 받아야 했습니다. 장애로 인해 따돌림을 받으며 처절한 소외감을 느꼈고 가혹한 시련과 끔찍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지요. 열등감으로 점철된 세월이었습니다. 하지만 청각장애인의 삶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장애’라는 한계가 오히려 ‘열정’을 가져다주는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으면서 감사와 긍정의 삶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자유를 찾아갈 권리가 있습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운 자는 바로 자신의 결핍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저는 결핍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정한 자기다움을 찾고 나다운 문화와 언어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래서일까, 청각장애를 비로소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고 농인으로 더욱 당당해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세상 위의 사랑과 지식 그리고 언어에 제한이 없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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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념은 더 넓은 지평 속에서 편견을 버리고 배우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게 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의 저에게 진정한 배움터가 될 것입니다.
농인이든 청인이든 여전히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는 분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이 도전한다면 언젠가는 자신의 삶이 보석처럼 빛나게 될 것입니다. 그 도전의 길을 이 책이 함께 한다면 더없이 좋겠습니다.
오늘도 저는 마음으로 듣고 가슴으로 대답할 수 있습니다.
희망을 향해 날아가는 나비가 되는 그날까지.
- 끝 -
2014. 6.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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